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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엔총회
    202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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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세계 우편전산망구축」새 전기/만국우편연합 서울총회 성격과 과제

    ◎체신서비스 획기적 개선책 중점논의/「도착국 배달요율」 조정 최대쟁점 부각 우리나라가 1900년에 국제기구로는 처음 가입한 만국우편연합(UPU)은 5년마다 총회를 열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총회가 개최되기는 지난 69년 도쿄(16차)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다. UPU는 1874년 설립된 국제기구로 국가간 우편물 중계의 보장과 요금표준화,세계 단일우편영역 형성,국가간 우편분쟁조정 등이 목적이며 현재 1백89개국이 가입돼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89년 제20차 워싱턴총회에서 실질적 정책결정기관인 집행이사국으로 선출됐고 총회유치를 만장일치로 승인받았다. 특히 이번 서울총회는 급변하는 우편환경에 대응,우편물의 전달과정을 컴퓨터로 확인할 수 있는 범세계우편전산망 구축을 통해 우편서비스의 획기적인 개선책을 논의하는 등 UPU사상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서울총회에서 우선 해결돼야 하는 문제는 「도착국료」의 개선이다.도착국료란 국제통상우편물을 주고받을 때 발송국이 배달국에 지불하는 우편배달 보상금을 말한다. 이 문제는 그동안 우편물 발송량이 많은 선진국과 배달량이 많은 개발도상국 사이에 큰 논쟁거리였다.즉 선진국에서는 배달요율 인하를,개도국은 인상을 요구해 서울총회에서 원만한 조정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서울총회에서는 이밖에 오는 12월 임기가 만료되는 보토드바로스사무총장(69·브라질)의 후임을 선출하게 된다.현재 사무총장 후보로는 레비집행이사회의장(미국)과 아스칸도니 UPU사무차장(스페인)이 등록,각국 대표단을 상대로 득표활동을 벌이고 있다. ◎48개국 장관급이상 참석… 유엔총회 “방불”/9개국어 동시통역… 관광수입 96억 전망/막오른 「서울총회」 이모저모 ○…22일 개막된 UPU서울총회는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유엔산하 국제전문기구 회의인데다 참가자도 1백70여개국 2천여명에 달해 유엔총회를 방불케했다. ○…이번 총회의 공식어는 불어.이를 위해 한국외국어대 부설통역번역센터요원 23명이 동원되고있으며 총회기간중 이들에게 지불되는 경비만도 모두 9천여만원에 이른다.한편 UPU사무국에서도 40여명의 통역요원을 데려와 회의 진행상황을 불어,영어,독일어,스페인어,일본어,중국어,포르투갈어,아랍어,러시아어 등 9개국어로 동시 통역해줌으로써 언어소통을 지원하고 있다. ○…이번 총회에는 차관급 이상 각료만도 96명이 참석.이 가운데 아르메니아와 베베이도스는 부수상급,일본·체코·인도 등 46개국은 우정장관,호주·러시아 등 21개국은 차관급이 참석했으며 미국·영국·스웨덴 등 27개국은 체신공사 사장급들을 대거 파견,국제대회로서의 비중을 알려주고 있다. ○…UPU서울총회 사무국(국장 이교용)은 각국 대표단의 경호를 위해 행사장 주변과 공항,숙소 등에 정사복 경찰 5백여명을 배치했으며 총회장에는 30여명의 무장경찰이 3교대로 근무하는 등 경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또 서울시와 한국전력 등으로부터도 지원을 받아 각종 안전사고에 대비중이다. ○…이번 총회개최로 우리나라가 벌어들일 관광수입등은 모두 96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총회사무국의 한 관계자는 『총회예산이 70억원인데 기념우표 판매액만 74억원이 넘어 체신부로서는 4억원이흑자』라며 『또 대표단이 거의 매일 리셉션을 열기 때문에 호텔 등의 수입도 엄청날 것』이라고 기대. ○윤장관 만찬 주재 ○…윤동윤체신부장관은 이날 하오7시30분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UPU대표단을 위한 개회만찬을 주재. 윤장관은 만찬사에서 『시작이 반이듯 서울대회가 성공적 시작임을 확신한다』며 『서울총회가 세계 우편발전과 21세기 인류평화에 기여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인사. 만찬에 이어 펼쳐진 공연에서는 화관무와 부채춤·장고춤·농악 등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개,참석자의 흥을 한껏 돋우기도. 만찬에는 보토드바로스 UPU사무총장을 비롯,권령수총회의장,장경우국회체신과학위원장,민주당 김충현의원,아스칸도니 UPU사무차장등 1천5백여명의 각국 대표단이 참석했다.
  • 국내외학자연구로 본 남북단정수립 과정

    ◎“평양 45년말 실질적 공산정권 수립”/「5도인민위」 조직 등 남측보다 3년 더 빨라/“「서울단정」 출발로 분단고착 ” 주장 허구 입증 대한민국 정부는 민족과 국토가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난지 만 3년째 되는 날인 1948년 8월15일 출범했다.비록 해방된 민족의 염원인 「통일 조국」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대한민국의 수립은 민주사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심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 일각에는 「대한민국이 38선 이남에 세워진 단독정부」라는 이유로 그 의의를 평가절하하는 시각이 남아 있는데다 급진세력은 『남한에서 단정이 출범함으로써 분단이 고착됐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분단의 책임을 대한민국의 출범에 떠넘기는 이같은 주장이 어느정도 타당성을 갖는지 학계의 연구성과를 통해 알아본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관한 역사적 평가를 위해서는 당시 남한지역을 통치하던 미 군정과 정치주도 세력이 통일정부를 이룩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단정을 강행했는지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 신용하·김학준·진덕규교수등 국내 학자와 미국의 스칼라피노(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이정식씨(펜실베이니아대 교수)등 국내외 학자 대부분이 한반도 남쪽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 학자의 입장은 ▲광복이후의 정국이 남쪽과 북쪽간에 크게 달랐고 ▲남쪽에서는 새로 탄생할 국가의 주도권을 놓고 좌·우의 정파가 극한대립하고 있었던 반면 ▲이북에서는 소련주둔군의 지원아래 공산세력이 「실질적인」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특히 북한지역에서의 공산통치는 현실적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남한지역은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면서 나름대로의 일정표에 따라 민의를 수렴한 정치단체가 등장하기를 기다리는 실정이었다.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으로 남북을 통괄할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가신청한 정당·단체가 4백25개에 이른 예에서 보듯 당시의 남한 정국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이에는 46년 9월의 「9월총파업」,10월의 「대구폭동」등 광복이후 잇따라 발생한 좌익의 준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반해 이북에서는 45년 8월16일 「함경남도 인민위원회」결성을 시작으로 연내에 황해도·평안남북도·함경남북도등 5개 도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완료했다.또 46년 2월에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는등 급속히 통치조직을 확립해 나갔다.이 과정에서 소련식 소비에트정권 수립에 반대하는 기독교·지주·지식계층등의 반대파를 일사불란하게 숙청했음은 물론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저서로 유명한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마저도 자신의 책에서 『북한에서는 45년 말에 이미 실질적인 정권이 들어섰다』고 인정하는 정도이다.그는 「단정 수립은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려는 미국의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는 학파의 대표격 학자이다. 따라서 당시 남북 제 정당·사회단체의 논의에 따른 통일정부 수립은 불가능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은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유엔에 넘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유엔총회는 「남북한 전지역에서 자유총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구성」할 것을 결의했지만 당초 한반도문제의 유엔상정 자체를 거부했던 소련은 유엔감시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결국 남한의 단독선거를 가져왔다. 대한민국은 48년 5월10일의 총선거,7월17일의 헌법 공포를 거쳐 8월15일 출범했다. 이에 북한은 기다렸다는듯 8월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치르고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이로써 45년 미·소 양군의 진주로 시작된 영토분단은 48년 체제분단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앞서 ▲47년 2월의 「조선인민군 창설」 ▲48년 4월의 「헌법 채택」등 발빠르게 정부수립을 위한 준비를 다져왔다.막상 정부수립 일자만 한달여 늦었을 뿐 단독정부를 준비하고 이룩한 과정은 남쪽보다 북쪽이 훨씬 빨랐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단정의 분단책임론」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하는 대목이다.
  • 대만,“유엔 옵서버자격 수락”/외교부 “재가입 노력 계속”

    ◎갈리총장 “신청하면 허용”… 중국은 “저지” 【타이베이 DPA AP 연합】 대만은 유엔에서의 옵서버 자격을 받아들이되 유엔회원국자격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만 외교부가 23일 밝혔다. 렁 조­쉐이 외교부대변인은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유엔사무총장이 대만이 옵서버지위 신청을 허용했다는 언론보도와 관련,이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대만은 과거 동·서독 그리고 남·북한처럼 본토인 중국과 유엔 동시가입을 원하고 있으나 이러한 안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측에 의해 거부되고 있다. 차이나 타임스 데일리지는 샌프란시스코발 기사를 통해 갈리 사무총장이 대만의 옵서버 자격 신청을 허용했고 유엔이 이 신청에 대해 논의를 벌이고 있다는 에드워드 럭 유엔협회(UNA)국장의 말을 인용,보도했다. 중국 외교부는 이와관련,성명을 통해 대만의 유엔 재가입 노력 결정에 대해 극도의 분노를 느낀다고 말하고 대만측의 그러한 노력을 강력히 저지할 것임을 시사했다. 중미·아프리카·카리브해 연안 12개국은 지난 15일 대만의 유엔 재가입문제를 오는 9월 유엔총회에서 논의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안을 유엔에 제출했다. 대만은 지난 71년 중국이 유엔에 가입하면서 유엔 회원자격을 박탈당했다.
  • 김일성 못이룬 꿈 3개/일 아사히신문 보도를 보면

    ◎①미국과 수교후 클린턴과 회담 희망/②김영삼대통령과 남북한 정상회담/③단군묘 개천절에 전세계 공개계획 북한주석 김일성은 김영삼대통령과 무릎을 맞대고 남북문제를 논의하고 미국을 방문하고 싶었으나 그의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아시히(조일)신문이 17일 보도했다.다음은 아사히신문이 지난 4월 김주석을 만난 재미한국계 저널리스트 문명자씨의 말을 인용,보도한 내용이다. ▲미·북한 국교정상화 김일성은 핵문제와 관련,미국이 경수로에로의 전환지원을 약속했다고 지적하며 진실된 말투로 『미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소식통에 의하면 북한핵문제가 해결되면 미·북한 국교정상화에 따라 클린턴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열릴 계획이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실제로 미국을 방문하지 않을 경우에도 핵문제 진전에 따라 올해나 내년 가을 유엔총회에서 김이 평양으로부터의 위성중계로 연설하는 방안도 추진됐었다. ▲남북대화 그는 「1국가2정부」의 연방통일방안과 관련,『사회주의체제를 남한에 강요할 생각은 없다.체제문제는 후손들이 결정할 문제다』라며 『통일이 되면 오스트리아나 스위스같이 중립적 독립국가를 만들면 자자손손 번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남북간의 오해와 의심을 풀기 위해 김영삼대통령과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단군묘 평양근교에서 발견됐다고 하는 「단군묘」와 관련해 그는 『독일과 미국제의 기구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5천11년 된 해골이라고 분석되어 단군의 유골이라는 결론이 나왔다』고 설명하고 『단군의 부인묘도 발견됐다』고 말했다. 북한이 신화적인 단국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정통성」과 「북한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 묘가 복원된 후 10월3일 개천절에 전세계에 공개한다고 말하며 기념행사를 즐기고 싶은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죽었다.
  • 군고위간부 잇단 충성맹세/김일성사망 충격 벗어가는 북표정

    ◎김정일,당·정간부 대동 다시 빈소찾아 ○…김정일은 13일 당정 간부들을 대동하고 금수산의사당에 안치된 김일성영구를 다시 찾아 애도를 표시했다고 북한관영 중앙통신이 14일 보도. 이 자리에는 군장병들과 각계각층 주민들도 함께 했으며 김정일은 『가장 비통한 심정을 안고 김일성의 영전에 묵상하고 수령의 영구를 돌아보았다』고 이 통신은 전했다. 중앙통신은 또 당시 「조의장」은 엄숙한 분위기에 휩싸였으며 참가자들은 김정일의 영도를 충성으로 받들어 주체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완성할 불타는 결의를 다졌다고 소개. ○…김일성사망을 조문하기 위한 조총련대표단이 12일 항공편으로 평양에 도착. 조총련 본부와 지부 대표들,산하 사업체 간부들로 구성된 이 대표단은 이날 당비서 김용순을 비롯한 북한 관리들의 영접을 받았다고 북한 방송들은 전했다. 특히 북한 방송들은 일본 출발시 책임부의장 허종만이 인솔했던 이 대표단의 평양도착 소식을 전하면서 대표단 단장이 북한에 장기 체류중인 조총련의장 한덕수임을 강조해 눈길.○…북한 중앙방송은 13일 핵문제로 그동안 갈등을 빚었던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의 김일성 사망 관련 동향을 관심있게 보도. 이 방송은 김일성 사망과 관련한 지난 11일의 유엔총회 의장대변인 성명을 소개한데 이어 유엔경제사회이사회의 애도 표시,세계기상기구 총국장의 조의표명 등 관련 움직임을 상세히 보도. ○…지난해 3월 북송된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노인이 12일 김일성의 빈소를 찾아 오열했다고 중앙방송이 13일 보도. 이인모는 이자리에서 『앞으로 40년은 더 살수 있을 것이라고 하더니 이게 웬말입니까』라고 울부짖으며 조의록 말미에는 「당신의 전사 이인모」라고 밝혔다고. ○…북한은 13일 김일성 사망에 즈음하여 러시아 정계·사회계 인사들과 러시아주재 각국 외교사절이 지난 11일 모스크바주재 북한대사관을 조의방문했다고 뒤늦게 보도. 북한의 이러한 보도태도는 러시아가 북한이 옐친대통령의 조전발송 사실과 내용을 보도하지 않은데 대해 불만을 표시한 직후 나온 것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김일성 사망에 애도를 표시하기위해 국제태권도연맹총재 최홍희를 비롯한 재미동포 3명이 13일 평양에 도착했다고 북한중앙방송이 보도. 최홍희는 이날 평양비행장에서 당비서 김용순 및 북한태권도위원회 위원장 차병옥의 영접을 받았으며 재미교포 김진경,문명자(여기자)등도 각각 조문차 평양에 도착했는데 이들은 모두 친북성향의 재미교포들이다. ○…북한군고위간부들이 김일성사망 엿새째를 접어들면서 잇따라 김정일에게 충성을 맹세. 북한 해군사령관 김일철(대장)이 14일 김일성사망 「반향」에서 군부고위인사로서는 처음으로 김정일에게 충성과 효성을 맹세한데 이어 노동당 중앙위원 겸 군대장인 이하일도 이날 「반향」을 통해 군최고사령관인 김정일에 대한 충성과 한께 사회주의위업의 계승완성을 다짐한 것으로 평양방송이 이날 보도. ○…부트로스 갈리 유엔사무 총장이 지난 12일 유엔주재 북한대표부를 찾아 김일성의 사망에 조의를 표시했다고 중앙방송이 14일 보도. 갈리 총장은 김일성 초상화앞에서 애도를 표시하고 조의록에 서명.
  • 내년 유엔50돌 총회/기념연설 긍정검토/김 대통령,의장과 요담

    김영삼대통령은 13일 인사날리 유엔총회의장과 소렌슨 유엔사무차장을 접견했다. 김대통령은 내년에 열리는 유엔창설 50주년 기념총회에서 연설을 해달라는 인사날리의장의 요청에 대해 가능한한 가서 연설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이어 스테픈 마틴 호주하원의장을 접견했다.이자리에서 마틴의장은 김대통령의 호주방문을 요청했다.
  • 83년 이후 「서열 2위」… 당·정·군 장악

    ◎73년 김영주축출… 공적활동 전면등장/반대세력 반발불구 통치권확보 성공/성격 독선적·일부선 “통 크다”… 영화·연극에 큰 관심,직접 제작도 김정일이 사망한 북한주석 김일성에 대한 장례위원 가운데 서열 1위로 발표됨으로써 차기 권력승계작업이 일단은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공산정권의 전례로 비추어 볼 때 숨진 최고지도자의 장례위원장을 맡은 인사가 예외 없이 차기 통치권을 맡아 왔기 때문이다. 이날 그에 대해 북한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이 혁명의 계승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김정일은 20여년동안 끈질기게 권력승계 작업을 해온 결과 지난 83년 공식서열 2위에 오른 뒤부터 김일성 사망 직전까지 김일성에 이어 2인자의 위치를 굳혀왔다.군최고 사령관,원수,국방위원장,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중앙군사위원등 그의 맡아온 직책이 이를 입증한다.이복동생 김평일과의 불화설등 반대세력과의 권력투쟁설이 끊임없이 나돌기도 했지만 통치권 장악에 거의 성공한 것으로 관측돼 왔다. ○92년부터 승계완료그는 당·정·군등 북한내 3대 기본권력구조 가운데 형식적인 통수권은 국방위원장직으로 군에 대해서만 갖고 있다.그러나 김일성이 국가주석으로 정을,당 총비서로 당을 이끌어 오면서 형식적인 통수권자였지만 김정일은 사실상 이들 기관도 통치해 왔다는 것이 북한전문가의 대체적인 의견이다.이들 전문가들은 이미 권력승계작업은 지난 92년 김일성의 80회 생일부터 이 문제가 거론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완료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영남외교부장은 같은해 9월 제47차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에 들렀다가 우리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김정일이 사실상 북한의 통치자라고 밝혔었다.앞서 같은해 4월1일 김일성생일행사의 하나로 개최됐던 주체사상토론회에서 김정일이 「당·국가·군대의 수위」로 지칭되고,김부자의 생일을 전후해 오진우인민무력부장,이종옥부주석,연형묵정무원총리등 당시의 당·정·군 간부들이 김정일에 대한 대를 이은 충성을 다짐하기도 했다.이때부터 김일성은 점차 일선에서 물러나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했다.김정일은 지난 92년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원수와 8명의 차솔진급자에게 계급장을 달아 줘 군통수권에 대한 첫 공식행사를 가짐으로써 이를 대내외에 천명했다.이어 지난해 4월에는 군 최고통수권자인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됐으며 3개월뒤 장성 99명에 대한 승진인사를 단행,혁명1세대를 퇴진시킴으로써 군을 완전 장악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각된 것은 지난 73년.사상·기술·문화 3대혁명소조운동과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의 실무지도자로 공적활동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같은해 9월 삼촌 김영주를 밀어내고 조직·사상담당 비서로,74년 2월 노동당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추대됐다.그는 74년 2월 노동당 제5기 8차 전원대회에서 후계자로 결정됐으나 70년대까지만 해도 「당중앙」으로 모호하게 불려졌다.그러나 80년대부터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표현되기 시작했다.83년 4월이후 오진우인민무력부장을 제치고 당서열 제2위로 부상하면서 명실상부한 후계자의 위치를 굳혔다. 85년 4월에는 「당·국가수위」로 지칭됐다.85년 7월 북한언론으로부터 「김정일시대」라는 용어가 등장하고,91년에는 인민경제대학총장 김국훈이 김정일을 「미래의 위대한 수령」으로 후계구도를 공식적으로 가시화했다.이어 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된뒤 92년 4월20일 원수칭호,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5차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으로써 군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실권자로 등장했다. ○원래 이름은 「정일」 김정일은 김일성과 그의 첫부인인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난 2남1녀중 장남으로 지난 41년 2월16일생이고,원래 이름도 정일이라고 한다.그러나 뒤늦게 그를 우상화하는 편법으로 정일로 바꿨고 2년뒤 그의 출생연도도 1년 낮췄다는 설도 있다.82년은 이른바 「조선의 어머니」인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출생 90돌이자 김일성의 70돌이며,김일성이 창건했다는 조선인민혁명군의 50돌이었는데 그의 이름도 이에 맞춰 변조했다는 것이다.그의 이복동생 평일,성일에서 보듯 원래 항렬이 일자였다는 것이다. 어릴때 이름이 「슈라」인 것으로 미루어 출생지는 옛 소련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구체적인 지명은 사마르칸트,오케얀 스카야,하바로프스크등으로 엇갈린다.그러나 그를 우상화하는 과정에서 「백두미령」에서 출생해 『혁명의 준엄한 시련을 체험하면서 성장했다』고 미화됐다.북한은 이를 위해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을 할 때 백두산의 한 귀틀집에서 『백두산의 정기를 한몸에 받고 태어났다』는 이른바 「백두산정기설」을 뒷받침하는 각종 흔적들을 조작하기 시작했다.백두산의 「정일봉」,김정일의 탄생을 칭송하는 이른바 「구호나무」등이 그 흔적이다. ○3세대 평양 들어와 김정일은 세살때 광복과 함께 부모를 따라 소련함정을 타고 평양에 처음 들어왔다.43년 소련에서 태어난 남동생 「유라」(소련명)가 있었으나 2년뒤 김일성 관저 연못에 빠져 죽었다.7살때인 49년 9월 생모 김정숙이 출산중 사망하면서 여동생 김경희(46년생)와 함께 김일성의 외6촌동생 강연실에 의해 키워졌다.그의 성격은 생모와 사별후 난폭해지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성격은 괄괄하고 과격하며 독선적이나 통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김일성앞에서도호주머니에 손을 넣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그는 아버지가 너무 바빠 홀로 어린시절을 보내온 것을 자주 불평했다고 한다.66년 홍일천과 연애결혼해 딸 하나를 낳고 69년 이혼한 뒤 73년 김혜숙과 재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은 평양의 남산유치원을 나와 49년 간부 자녀들이 다니던 남산 제 4인민학교를 다녔으며 57년 8월 평양제1중학교,60년 8월 평양 제1고급중학교,64년 김일성대학 정치경제학과를 각각 졸업한뒤 노동당에 입당했다.70년 당 문화예술부장,71년 선전선동부 부장으로 진출하면서 영화촬영및 연극공연작업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온 것으로 전해진다.「피바다」「한 자위대원의 운명」「꽃파는 처녀」등 주요 영화와 가극을 직접 제작하는등 일년에 1백50∼2백편의 영화를 만들어 올만큼 북한영화계의 최고권위자로 꼽힌다.이같은 영화에 대한 애정때문에 신상옥씨 부부를 납치한 것이 깊숙이 베일에 가려져 있던 정체가 상세히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연표◁ △1941.2.16 소련 사마르칸트 출생(북한측,백두산 출생주장) △1953.2 만경대혁명학원(인민반)수학 △1960.8 남산고급중학교 졸업 △1964.3 김일성대학교 졸업(정치경제학과) △1964 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 △1971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1973.11 노동당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1974.2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1974.2 「후계자」로 결정(노동당 제5기 8차전원회의) △1980.10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6차 당대회) △1980.10 노동당 비서국 비서 △1980.10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90.5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12.24 인민군 최고사령관(노동당 제6기 19차 전원 회의) △1992.4.20 원솔 칭호 △1993.4 국방위원회 위원장(최고인민회의 9기 5차회의)
  • 남북정상회담 추진 경과/81년1월 전전대통령 첫 공식제의

    ◎김대통령,93년 2월 취임사서 표명/김일성,90년 방북대표에 처음 언급 남북한정상회담이 우리측에 의해 공식제의된 것은 81년1월 당시 전두환대통령에 의해서다.그러나 그에 앞서서도 막후에서 정상회담을 실현시키려는 노력은 있었다. 이승만대통령이 이끌던 자유당정권은 「북진통일」이 국시였다.남북정상회담은 상상조차 못하는 분위기일 수밖에 없었다.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남북대화의 기운이 일었지만 정상회담 개최논의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이어 등장한 박정희대통령의 「5·16정부」는 처음 반공을 강력히 내세우다 보니 정상회담추진이 어려웠다.72년에 들어서야 남북조절위가 열렸고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특사 사이에 남북정상회담논의가 비공개로 있은 것으로 알려진다.박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공개적인 운을 뗀 것은 집권말기인 79년1월이었다.그는 연두회견에서 『남북한당국이 어떤 시기·장소·수준이든 조건없이 만나자』고 제안했다.남북정상회담까지를 염두에 둔 것이긴 했지만 직접표현에는 신중을 기했다. 전두환대통령은 80년 정권을 잡자마자 정상회담개최에 집념을 보이기 시작했다.81년1월 국정연설에서 「남북한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을 제안,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의사를 밝혔다.전대통령은 거의 매년 8·15 경축사등을 통해 북한이 회담에 응할 것을 촉구했다. 북방외교를 가장 큰 목표로 내건 노태우대통령은 전대통령보다 남북정상회담에 더 열심이었다.노대통령은 88년8월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용어를 쓰며 김일성주석과 만날 뜻을 피력했다.또 88년10월 유엔연설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때 의제까지도 소상히 밝혔다. 김영삼대통령은 최초의 「문민정부」답게 남북정상회담에 접근하고 있다.김대통령은 지난해 2월 취임사에서부터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획기적 전제아래 정상회담을 제안했다.올해 들어서도 취임 1주년회견에서 남북한정상회담의 조기개최의지를 천명했다. 「5공」과 「6공」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정통성 확보의 가장 효율적 수단으로생각한 듯 비밀협상을 통해 회담을 성사시키려고 노력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5공」 때는 장세동안기부장,「6공」 때는 박철언청와대특보가 나서 북한의 고위당국자와 해외에서의 만남 혹은 상호방문등으로 깊숙한 논의를 진전시킨 것으로 전해진다.북한에 대한 대대적 경협이 정상회담개최의 대가로 제시되었다.그러나 이러한 당시 정부의 노력은 북한측의 기만적 태도로 번번이 무산되곤 했다. 북한은 해방직후부터 최고당국자의 만남을 거론해왔다.하지만 그것은 모든 정당·사회단체대표들의 회담으로 우리 내부를 교란시키려는 통일전선전략의 일환이었다.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 가끔 정상회담의사를 비췄으나 무게가 실리지 않은 듯했다.지난 90년에는 평양을 방문한 남북고위급회담 우리 대표에게 정상회담의사를 밝혀 기대를 부풀게 했으나 역시 구두선으로 끝났다. □남북한 정상회담 관련 일지 ▲81년1월12일=전두환대통령,남북한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제의(국정연설) ▲81년6월5일=전대통령,남북한당국최고책임자간 직접회담제의(평통정책자문회의 개회사) ▲81년7월1일=북한금일성주석,우리측 제의 거부 ▲88년2월25일=노태우대통령,김일성과 대화용의 표명(대통령취임사) ▲88년8월15일=노대통령,김일성과 회담제의(8·15경축사) ▲88년10월18일=노대통령,평양방문 회담용의표명(유엔총회연설) ▲93년2월25일=김영삼대통령,김일성과 회담용의표명(대통령취임사) ▲93년5월25일=북한 강성산총리,특사교환통한 정상회담논의제의(대남전통문) ▲94년2월25일=김대통령,핵문제관계없이 남북정상회담 추진의사천명(취임1주년회견) ▲94년6월16∼17일=김일성,남북정상회담 수락의사표명 ▲94년6월18일=김대통령,김일성주석 제의 즉각수락
  • 제12차 전직정부수반회의 참관기/김학준

    ◎“북한 핵 갖게 해선 안된다” 한목소리 지난 7일부터 10일까지 독일 드레스덴에서 열린 제12차 전직정부수반회의(IAC)에는 영국의 캘러헌 전총리,서독의 슈미트 전총리,일본의 후쿠다 전총리,캐나다의 트뤼도 전총리,호주의 프레이저 전총리,네덜란드의 반아트 전총리,브라질의 사니르 전대통령,잠비아의 라운다 전대통령,코스타리카의 아리아스 전대통령,그리고 한국의 노태우전대통령 등 20여명의 전직 국가원수 또는 정부수반이 참석했다.또 미국의 키신저 전국무장관,미국의 맥나마라 전국방장관,중국의 황화 전외무장관,러시아의 브루텐스 전대통령보좌관 등 10여명의 전직 장관급 인사들이 특별객원으로 참석했다. 이 회의는 세가지 의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오늘날 세계정세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평가」,「새로운 세계적·지역적 국제기구들이 수행해야 할 역할」,「옛 공산권에 있어서 중앙통제경제의 시장경제로의 전환에 따른 문제점들의 해결방안」등이 그것이었다. 이 회의의 특별객원으로 노전대통령을 수행했던 필자에게 이 회의는 하나의작은 유엔총회처럼 비쳤다.지난날 일정한 시기에 각각 자기나라의 국정을 책임맡았던 세계적 정치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을 깊이있게 토론하는 가운데 해법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 회의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등장한 것은 북한의 핵문제였다.제1차 본회의가 열리자마자 의장인 슈미트 전서독총리는 『북한의 핵개발은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세계전체에 대해 큰 위협을 주는 심각한 사태』라고 선언한 뒤 노전대통령의 의견을 물었다. 노전대통령은 북한이 핵개발에 집착하는 동기와 북한 핵개발의 현황을 설명한 뒤 대처방안을 제시했다.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외교적 승인과 경제적 협력을 얻어내기 위한 협상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외교카드론」,그리고 북한이 자신의 체제유지에 대한 위기감에서 생존의 보존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생명보험론」등.외교계와 학계에서 제시되고 있는 다각적인 해석들을 모두 짚어본 뒤 『결국 현재의 시점에서는 국제공조체제를 강화하는 가운데 북한에 대해 단계적인 제재조처를 포함한 강력한 대응을 보여야 한다』고 매듭지었다. 캘러헌 전영국총리가 전적인 공감을 나타냈다.그는 김일성이 북한주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함과 아울러 대한민국에 대한 「공갈적 협상」을 시도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분석한 뒤,그렇기 때문에 김일성은 핵무기 개발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그는 자신이 가진 정보로는 북한이 아무리 늦게 잡아도 내년 후반기까지는 핵무기를 손에 넣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서방세계의 강경한 공동보조가 긴요하다고 주장했다. 트뤼도 전캐나다총리는 반론을 제시했다.강대국들이 갖고 있는 핵무기에 대해서는 왜 말을 하지 않고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서만 흥분하느냐는 취지였다. 이에대해 참석자들의 거의 모두가 반론을 폈다.우선 사르니 전브라질대통령은 김일성체제의 「악마적 성격」을 지적했다.김일성은 히틀러나 다름이 없는 광신적 교조주의자이며 자신이 위급해지면 핵무기도 쓸위인이기 때문에 북한의 핵개발은 반드시 저지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키신저 전미국무장관도 김일성에 대한 강경대응론을 제시했다.베트남협상에 직접 참가했던 자신의 경험담도 섞어가면서 그는 공산주의자와의 대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의 과시」라고 역설했다.『이쪽에서 뭔가 약하게 보이는 자세를 취하면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을 무자비하게 활용한다』고 경고한 그는 북한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를 반드시 실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황화 전중국외무장관은 중국정부의 공식입장에 맞게 제재반대론을 폈다.김일성의 특이성격과 북한체제의 타성에 비춰볼 때,제재를 가하면 반드시 무리하게 대응할 위험성이 따르게 되므로 계속해서 대화를 통해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프레이저 전호주총리는 남북한과 미­중의 4자회담안을 제시했다.특히 미국과 중국 두 나라가 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 북한에게 줄 것은 주고 핵개발은 포기시키도록 설득하는 길을 찾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결론은 북한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단계적으로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났다.회의 마지막날 발표된 공동성명은 바로 그 결론을 제4항으로 채택했다. 북한 핵 문제는 이 회의의 두번째 의제인 「새로운 세계적·지역적 기구들의 미래 역할」에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노전대통령은 아시아에서 군비경쟁이 치열해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특히 북한 핵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핵 확산의 위험성을 방지하기 위해 아시아에서도 유럽안보협력회의와 같은 회의의 소집을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그 전초 단계로 자신이 지난 88년 유엔총회에서 제의했던 남북한 및 미­중­러­일의 6자 회담을 적절한 시기에 개최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연설해 공감을 얻었다.
  • 핵 안전협정의 사찰의무 지켜야/IAEA탈퇴와 NPT탈퇴의 차이

    ◎핵금조약 가입국 지위엔 영향없어/핵안전협정따라 사찰 계속 받아야 북한이 13일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바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IAEA의 탈퇴는 IAEA헌장의 당사국자격을 상실하는 것이지 NPT당사국으로서의 지위에는 영향이 없다.북한이 NPT 조약당사국으로 남아있는 한 핵안전협정은 유효하므로 북한이 IAEA를 탈퇴한다 해도 IAEA와 북한간의 핵안전협정은 계속 유효하다는 얘기이다. IAEA는 핵안전협정을 근거로 개별국의 동향을 기술적으로 감시,통제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찰활동이다.따라서 북한은 NPT의 탈퇴를 선언하지 않는 한 IAEA의 사찰근거라고 할 수 있는 핵안전협정에 따라 계속 사찰을 받아야 한다. 현재 IAEA회원국이 아니면서 NPT당사국인 나라는 모두 55개국으로 이가운데 핵안전협정을 체결하고 국제적인 통제에 따르고 있는 나라는 23개국에 이른다. IAEA와 NPT는 또 「핵의 군사적 전용방지」라는 목적은 일치하지만 그 설립배경이 다소 달라 현재 북한의 입장을 고려할 때 IAEA를 탈퇴하는 것과 NPT를 탈퇴하는 것은 그 의미와 파장에 있어 차이가 크다. 57년 유엔총회직속으로 창설된 IAEA는 창립당시 핵확산 금지보다는 핵의 평화적 이용에 비중을 둬왔다.우리나라는 설립당시 가입한 반면 북한은 74년 가입했다. 60년대 후반 약소국이 핵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자 미국과 소련 등 핵보유국이 더이상의 핵보유를 막아보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NPT.70년3월 발효된 NPT에 우리는 75년,북한은 85년 가입했으며 중국과 프랑스가 지난 92년 뒤늦게 가입했다.이 NPT를 유지시키는 기본협정이 핵안전 협정이다.다시말해 핵안전협정은 IAEA와 NPT를 연결시켜주는 「행동강령」이나 다름없다. NPT회원국은 이 안전협정에 따라 체결후 자국내의 모든 핵시설과 핵물질등 핵현황에 대해 「최초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IAEA가 보고된 내용을 임시 또는 정기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이 사찰이다. 따라서 IAEA를 탈퇴하더라도 핵사찰의 여지는 계속 있지만 NPT를 탈퇴할 경우 이는 핵안전협정을 준수하지 않고 적극적으로는 핵무기를 제조하겠다는 의미라는데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북한외교부 성명 요약 최근 국제원자력기구(IAEA)서기국은 미국의 대조선 압살정책에 추종하여 우리 공화국의 존엄과 자주권을 엄중히 침해하는 행위를 감행하였다. 지난 10일 IAEA 이사회는 핵문제를 걸고 우리의 군사대상들을 개방할 것을 요구하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기구협조를 중단한다는 천만부당한 결의를 채택하였다.이것은 명백히 우리에 대한 제재이며 본질에 있어서 유엔제재의 전주곡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특수지위하에서도 핵활동의 투명성을 보여주기 위한 모든 선의적인 노력을 다 기울여왔다.그러나 우리가 사찰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에 대한 압력과 복잡성은 더욱 증대되고 있으며 우리 공화국의 안전과 자주권은 시시각각으로 위협을 당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도달하게 된 결론은 기구의 불공정한 테두리 안에 얽매어 있을수록 우리에 대한 압력은 더해지고 우리의 평화적 핵활동도 그만큼 장애만 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인민은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유린당하면서까지 굴욕을 감수하는 그런 인민이 아니다.이번에 IAEA서기국이 이른바 제재의 위협으로 우리에게 전면사찰을 강요한 것은 자주성을 생명으로 여기고 있는 우리 인민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이다.우리에게 그 어떤 압력이나 제재가 가해질수록 우리의 의지는 더욱 강해질 것이며 평화적 핵활동은 그만큼 더 자유로워지게 될 것이다. 조선외교부는 다음과 같이 대응하기로 하였다는 것을 천명한다. 첫째,국제원자력기구로부터 즉시탈퇴한다.지금까지 우리 문제와 관련하여 취해진 기구의 모든 부당한 결의들을 무효로 인정하며 우리는 금후 기구의 그 어떤 규정이나 결정에도 구속되지 않을 것이다.우리는 기구가 없이도 자립적인 핵동력공업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으며 핵활동분야에서 국제적 협조를 확대시켜나갈 수 있다. 둘째,우리의 특수지위하에서 받아오던 담보의 연속성 보장을 위한 사찰을 더 이상 지금처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선언한다.우리가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는가,완전히 탈퇴하는가가 판가름날 때까지 그 어떤 부당한 사찰도 절대로 허용될 수 없다.이로부터 기구사찰원들도 우리나라에서 더이상 할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셋째,유엔제재는 곧 우리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한다는 입장을 강력히 재확인한다.제재와 대화는 양립될 수 없다.적대세력의 제재조치의 확대에 자위적 조치의 확대로 대응하는 것은 우리의 불가피한 선택이다. 우리의 이와 같은 입장은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핵문제가 공정하게 해결될 때까지 절대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우리는 앞으로의 사태발전을 예리하게 주시할 것이다.
  • 환경의 날(외언내언)

    「벌목노동자를 구하라.올빼미를 희생시켜라」이 구호는 미북서태평양지역 사람들이 너도나도 자동차 범퍼에 붙이고 다니는 스티커 문구이다.절멸위기에 놓인 점박이올빼미를 구하기위한 벌목중지계획이 알려지자 수만명의 일자리가 줄어들것에 대한 반대의견이 자못 거칠게 나온 것이다.이 지역은 현재 경제의 건강과 궁극적으로 경제를 밑받침하는 자연계 건강사이의 긴장관계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 일자리와 환경보호는 세계도처에서 대립상태를 만들고 있다.그러나 환경을 지키는것이 꼭 일자리를 줄이는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91년 독일에선 승용차­트럭중심의 수송산업이 수백만명을 고용하기는 하나,이 수송체계를 바꾼다해서 일자리가 줄어드는것은 아니라는 평가를 공식으로 내놓았다. 이 자료는 10억 독일마르크(5억8천만달러)를 간선도로건설에 투자하면 1만4천∼1만9천개 일자리가 만들어지나,철도선로건설에 투자하면 2만2천개의 일자리,경궤도선로에 투자하면 2만3천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진다는 계산을 했다.자동차교통체계에 대한 근본적 개혁안을 뜻하고 있다. 오늘은 세계환경의 날.1972년 유엔총회에서 제정되어 22회째를 맞지만,92년 리우데자네이루 환경회의로부터 새로운 단계를 시작했다.개발과 환경보전을 조화시키자는 「지속 가능한 개발」이 새목표이다.미올빼미대립이나 독일의 일자리분석들은 바로 이 「지속 가능」의 개발을 위한 고통의 모습과 대안적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91년기준 환경추세에 이런것이 있다.매일 적어도 1백40종의 동식물이 사라지고 있다.매년 1천7백만㏊의 삼림(핀란드 크기의 절반)이 사라지고 있다.세계인구는 연간 9천2백만명(멕시코의 현인구)씩 늘어나고 있는데 이중 8천8백만명은 개발도상국에서 늘고 있다.지속 가능한 개발의 환경정치가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 남아공 무기금수 해제/안보리서 곧 결의안 채택

    【유엔본부 로이터 AFP 연합】 유엔안보이는 23일 남아공에 대한 무기금수를 17년만에 해제하기로 원칙적으로 결정했으며 이같은 내용의 결의를 조만간 채택할 것이라고 안보이소식통들이 밝혔다. 이것은 남아공의 다인종 정부구성과 인종차별정책 철폐에 따른 것으로 소식통들은 안보이가 이밖에 지난 77년부터 대남아공 무기금수를 감독하기 위해 설치했던 한 위원회도 해체할 것이라고 전했다. 안보이가 현재 심의중인 이 결의는 전세계 모든 국가들에게 대남아공 제재 철폐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하고 있다.안보이는 지난 77년 남아공에 대한 무기수출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었다. 남아공은 또 내달중 유엔총회 및 유엔관련기구의 회원국 자격을 회복할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단결기구(OAU)는 이날 남아공을 정회원국으로 가입시켰다.
  • 탈북자 난민 인정을/「돕기 운동본부」

    북한탈출동포돕기운동본부(회장 오제도)는 20일 『북한을 탈출한 통포들이 강제로 송환되는 것을 저지하고 인도주의에 입각해 국제난민으로 합당한 권리를 인정받아 자유대한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달라』고 호소하는 메시지를 유엔총회의장및 사무총장에게 보냈다.
  • 부산한 동교동(외언내언)

    미국을 방문중인 김대중 아·태평화재단이사장의 북핵관련 발언파문을 둘러싼 동교동계 측근들의 사흘 연이은 기자회견 성명전공세는 발언의 사실여부를 떠나 「정치인」의 언행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느냐를 잘 보여준다. 발언이 잘못 전해졌다며 김이사장이 자기이름으로 성명을 내기는 92년12월 정계은퇴선언후 처음 있는 일이란 점에서 발언파문의 심각성을 엿보게 한다.특히 공당인 민주당의 대변인이 당사를 떠나 당원자격뿐인 김이사장을 현지까지 따라가 부인성명을 내기까지 하는 모습은 정말 이상하고 어색한 느낌을 준다. 동교동계는 「신판 용공조작」이라며 정부에 화살을 돌렸고 이 문제와 상관도 없는 김영삼대통령과 김이사장의 회동추진사실까지 공개하면서 만나기로 해놓고 약속을 어겼다는등 엉뚱하게도 청와대를 걸고 나서기도 했다. 김이사장은 뉴욕특파원들과 만나 북한이 2∼3개의 핵폭탄을 가졌다 해도 미국이 갖고 있는 2만개의 핵폭탄에 비하면 아무 쓸모도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 잘못 해석돼 「북한이 핵무기 두세개를 가져도 무방하다」고 말한 것처럼 전해진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명했다.또 김일성 북한주석에 대해서도 클린턴대통령의 초청으로 방미를 실현시키라고 한 게 아니라 유엔정회원국 대표로서 유엔총회에 참석하는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통일원은 김이사장 발언이 한두번으로 그치고 파장이 없었더라면 굳이 부총리논평도 발표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홍구부총리의 논평은 왜곡된 부분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우리는 김이사장이 이번 미국방문에서 행한 수십차례의 강연및 대담·인터뷰에서 일관되게 북한의 핵야심을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했다는 해명이 사실이길 바라는 마음이다.그러나 진위여부를 떠나 왜 그러한 파동이 일어나게 되었는지,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은 누구와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프랑스는 약속 지키라(사설)

    우리나라에서 약탈되어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외규장각고서의 반환이 여의치 않은 것같다.지난해 9월 방한한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에 의해 반환이 약속되었음에도 지금까지 양국 실무접촉에서 이렇다할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우리는 한·불정상회담에서 원칙이 합의된 외규장각고서의 반환에 대해 국내법상 「문화재반출금지」등의 이유를 들어 이론을 제기하고 있는 프랑스정부의 태도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미테랑대통령은 분명히 고서의 반환을 전제로 외규장각도서중 한권을 상징적으로 김영삼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하기까지 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시한부 상호교환임대방식이란 걸 제의하면서 사실상 반환의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시한부 상호교환임대방식이란 외규장각도서를 한국에 보내는 대신 우리측에서 그에 상당하는 고서를 프랑스측에 대여하되 시한부로 한다는 것이다.따라서 외규장각도서의 임대시한을 연장하기 위해서 우리측은 계속 다른 고서를 교체해주어야만 한다.이같은 프랑스정부의 제안은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억지논리」다.배보다 배꼽이 더 큰 부담을 우리가 떠안게 되기 때문이다. 미테랑대통령은 지난해 방한을 앞두고 파리주재 한국특파원들과의 회견에서 『한국 역사와 문화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것으로 생각되는 이 고문서들이 한국에 반환되는 것을 개인적으로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밝혔었다.이 발언은 순수한 반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사태의 진전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프랑스에 농락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우리정부는 당초의 반환에서 크게 양보,「영구임대」를 제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영구임대방식을 프랑스가 거부한다면 고속철도의 테제베계약을 위해 외규장각도서반환을 이용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외규장각고서는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범,불법약탈해 간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다.약탈문화재의 원소유국반환에 대해서는 유네스코협약이나 유엔총회결의,국제법에서도 명시하고 있다.이러한 규정이 없다 하더라도 양국 정상간의 약속은 당연히 지켜져야만 한다.그것은 외교적 관례이며 우호와 신의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외규장각도서를 영구임대방식으로 반환받는다는 원칙아래 관련기관 대책회의를 갖고 최종방침을 확정하리라고 한다.우리는 프랑스측의 어떤 명분이나 조건에도 영구임대방식 이상의 양보를 우리정부가 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또한 프랑스정부는 문화대국답게 「반환원칙」의 정신으로 되돌아가 이 문제의 해결에 임해주길 바란다.고서반환을 둘러싸고 양국의 전통적인 우호와 친선에 흠집이 생겨서는 안될 것이다.
  • 이제 중국의 북한설득 차례다(사설)

    북한의 핵사찰수용 유도를 위한 국제적 노력이 가중되고있다.전쟁을 각오하더라도 북한의 핵개발은 막고야 말겠다는 미국의 단호한 의지가 천명된 가운데 유엔안보리는 북한에대해 한달내에 재사찰을 받도록 촉구하는 의장성명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형식과 내용이 우리의 원하던바에는 크게 못미치고 있으나 중국등 상임이사국 포함의 전원합의 채택이다.간접적이지만 시한도 1개월로 명시되었으며 북한의 호응이 없으면 안보리의 추가심의가 있을 것임도 밝히고있다.북핵에대한 유엔 곧 온세계의 일치된 반대의사 표시인 것이다.북한만 반대했던 작년 유엔총회결의때의 세계분위기를 재확인하는 것이라 할수있다. 우리는 중국의 요청을 크게 반영한 이번 의장성명 채택이 비슷한 의장성명및 안보리결의 채택과 북한의 애매한 양보로 이어졌던 지난 1년간에 걸친 무의미했던 과정의 새로운 시작이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한다.북한이 핵을 개발하고있지 않다는 투명성에대한 확실한 증명이 이루어지지 않는한 안보리의 결의안 채택과 경제제재의 필요한 단계적 조치들이 착실하게 취해져야 한다. 사실 북핵문제는 너무오래 끌어왔다.이번에는 정말 끝장을 내야한다.북한이 무엇이그리 대단한 존재인가.유엔표결에서도 볼수있듯 북한의 핵개발은 모두가 반대다.핵개발을 하지않고있다는 사실의 검증만 수용하면 끝나는 일이다.북한에 타격이 될 일은 하나도 없다.그런데도 그것을 거부하며 온세계를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그런 북한을 비호할 필요가 어디에 있단말인가. 우리는 중국의 지나친 북한비호가 대단히 못마땅하다.이번에는 유엔안보리의 확고한 의지를 보이는 단호한 결의안채택에서 부터 시작했어야 했다.중국의 반대로 안보리결의가 의장성명으로 후퇴하고 한달내라는 시한의 설정도 간접적인 표현으로 변했다.안들으면 제재결의를 한다는것도 아니고 필요하다면 재심의를 한다는 정도의 완화된 내용이다.중국의사를 반영한 결과다. 그렇다면 이제부터의 북한핵사찰 수용관철의 가장큰 책임은 중국으로 넘어간셈이다.아시아 제일의 대국이자 유일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격만으로도 중국의 책임은 크다.대화를 강조하면서 온건한 성명을 주도했으며 우리와 세계가 그것을 수용한이상 이제 중국은 의장성명정신에 입각해 안보리 재심의와 제재결의 채택전에 북한이 알아듣도록 설득하고 승복시켜야 한다. 그리고 북한은 사태의 심각성을 있는 그대로 인식해야 할것이다.미국의 태도는 전례없이 단호하다.패트리어트와 아파치헬기 배치및 주한미군 추가탄약보급등은 제재를 상정한 대비다.핵투명성 보장없이는 절대 무사할수없다.이쯤해서 유엔의 권유와 중국의 설득을 듣는것이 현명할 것이다.
  • 북 지연전술로 특사교환 “기피”

    ◎대미 협상에 주력 속셈… 계속 사족 달아/맞물린 사찰·북미회담 등 차질 불가피/입씨름 일관… 남북실무접촉 답보 안팎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접촉이 계속 공전됨에 따라 미­북 3단계회담이 예정된 오는 21일 이전에 특사교환이 이뤄질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북측은 12일 있은 6차실무접촉에서 김영삼대통령의 북한핵 관련 발언 취소등 이른바 4개항의 전제조건을 사실상 철회하면서도 특사교환 합의서 채택 이전에 특사교환에 대한 양측의 의지를 담은 공동보도문을 내자고 하는등 또 다른 지연전술을 폈다. 북한의 이같은 태도는 한­미공조의 강도를 저울질해 보면서 가능한한 특사교환을 미­북3단계회담 이후로 넘기려는 속셈이라고 볼 수 있다.한마디로 우리측과 진지한 대화를 할 뜻이 없다는 얘기다. 그 이면에는 미국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핵카드의 효력을 극대화할 필요성이 있고,그러기 위해선 우리측과의 대화보다 미국과의 직접 협상에 주력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북측의 이같은 자세는 한­미 양국이 특사교환이 3단계 미­북회담의 전제조건임을 확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줄곧 이를 부인하고 있는 데서 이미 예견됐었다.지난 4,5차 접촉에서 기존의 ▲「핵전쟁연습」중지 ▲국제공조체제 포기 등의 요구에다 패트리어트미사일 반입중지 등 터무니없는 2개항의 전제조건을 추가한 것은 특사교환 무산의 책임을 우리측에 넘기려는 수순이었다.반면 이번에 특사교환 실현의지를 담은 공동보도문을 내자는 식의 협상술은 특사교환 실현을 최대한 지연시키려는 의도라는 게 우리측의 해석이다. 말하자면 북측은 가능한한 3단계회담이 임박한 시점까지 실무회담을 끌고가 3단계회담은 얻어내고 실제 특사교환은 그 이후로 넘기는 곡예를 시도하고 있다는 추론이다. 때문에 미­북 뉴욕 실무접촉에서 「합의」한대로 오는 21일의 3단계 미­북회담에 앞서 특사교환이 이뤄지기는 사실상 어렵게 됐다. 그러나 특사교환이 없는 한 3단계 미­북회담도 없다는 한­미 양국의 입장이 확고하다.때문에 IAEA의 사찰­특사교환­3단계 미·북회담이라는 일정표 자체가 전체적으로 뒤틀릴 수 밖에 없게됐다. 물론 북한은 이번 실무접촉에서 『4개항 요구는 타당하나 특사교환 과정에서 논의해도 좋다』며 기존의 4개항 전제조건을 사실상 거둬들였다.이는 북측이 김대통령의 발언에 시비를 건데 대해 김일성주석의 신년사를 문제삼는 등 그들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며 역공을 펴는 바람에 전술적 후퇴를 한데 지나지 않는다는 분석이다.우리측은 북측이 또 다시 4개항을 고집할 경우 ▲노동1호 미사일 개발 중지 ▲국가원수에 대한 비방중지 ▲반정부 선전·선동 중지 등의 요구로 「맞불」을 놓을 방침이었다는 후문이다. 북측은 오는 15일께 끝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만 허용한 채 체제유지 차원에서 사활을 걸고 있는 3단계회담이 무산되는 상황을 원치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때문에 특사교환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것이라고 최종 판단한 시점에 한차례 정도 특사교환에 호응해 올 한가닥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4개 요구조건 철회로 판단”/송 대표/북측 “갈루치 왜 방한 했느냐” 못마땅/남북실무접촉 이모저모 12일 판문점 우리측 지역 「평화의 집」에서 있은 6차 실무접촉은 35분간의 수석대표접촉을 포함,3시간 이상의 마라톤회담으로 진행됐으나 북측이 특사교환 공동보도문을 발표하자는 등 의도적인 지연전술을 펴는 바람에 또 공전되고 말았다. ○…접촉을 마친 뒤 우리측 송영대 수석대표는 『오늘 절차문제에 대한 합의에 실패했다』면서 북측이 『특사교환을 하자는 양측의 의지를 담은 공동발표문을 내자』는 등 엉뚱한 주장으로 특사교환 절차 합의를 외면한 데 대해 불쾌감을 표시. ○엉뚱한 주장에 “불쾌” 송대표는 『절차문제 토의와 합의서 타결이 중요하지 모양새만 갖추기 위한 알맹이 없는 공동보도문 발표는 불필요하다고 반박했다』고 설명. 송대표는 그러나 『북측은 당초 내건 4개 요구사항에 대해 「특사교환 앞에 놓인 차단봉이 올려졌다」고 스스로 밝히는 등 사실상 철회했다』면서 『이에 따라 양측은 실무절차 토의에 들어가게 된 것』이라고 부연. ○…이날 접촉에서 북측이 『4개 요구조건은 특사교환과정에서 다시 논의하자』며 한발 물러서는 듯한 태도를 보임에 따라 한때 회담진전 가능성을 암시. ○북측 단장 굳은 표정 북측은 그러나 곧바로 『오늘 특사교환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고 공동보도문 형식으로 발표한 뒤 이를 위한 실무절차를 다시 논의하자』고 주장해 남측과 논란. 남측은 이에 대해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접촉이 이미 재개돼 있는 마당에 특사교환원칙 합의발표가 웬 말이냐』고 반박해 회담은 다시 공전. 이에 따라 양측은 12시35분쯤 일단 정회,10분간 휴식한 뒤 점심을 거른채 12시45분부터 송영대남측수석대표와 박영수북측대표단장간 수석대표회담을 통해 절충을 계속. 하오 35분간 진행된 단독회담을 마치고 난뒤 양측 수석대표는 다소 어색하게 웃으며 악수한후 작별,난항을 겪은 회담분위기를 반영. 박북측단장은 『회담결과가 진전이 있느냐』는 남측기자 질문에 굳은 표정으로 묵묵부답. ○…송대표는 특히 미­북 3단계회담 이전에 특사교환이 가능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16일 접촉이 순조롭게 진전될 경우 21일 이전에 특사교환 실현이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특사의 임무나 방문순차 등의 이견이 그대로 상존하고 있고 북측의 공동보도문을 마련하자고 한 태도로 미뤄 낙관하기는 어렵다』고 다소 어두운 표정. ○한미입장 거듭강조 송대표는 그러나 『3단계회담 이전에 특사교환이 안되면 안된다는 것은 한­미 양국의 확고한 입장』이라고 거듭 강조. ○…북측 대표단의 수행원과 기자들은 이날 로버트 갈루치 미국무부차관보의 방한에 관심을 표명. 한 북측기자는 『갈루치차관보가 왜 남한을 방문했느냐』며 『남북문제는 우리 민족의 문제이니 우리가 해결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갈루치 방한에 대해 못마땅하다는 시각을 표출. ○“민족끼리 해결해야” 다른 기자는 또 갈루치차관보의 기자회견이 오늘 접촉결과를 보고난 후 예정돼있다는 말에 약간 놀라는 듯한 모습. 그는 『거듭 밝히지만 우리측은 미국과의 합의문에서 조­미 3단계회담전에 특사교환을 하기로 약속한바 없다』고 주장. ◎지루한 핵줄다리기… 우여곡절 끝 사찰 재개/북 NPT탈퇴 1년 12일은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북한은 지난해 이날 녕변의 미신고시설 두곳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결정에 대한 반발로 NPT를 뛰쳐나갔다.지난 1년,우리를 지겹도록 한 「북한 핵문제」는 이렇게 발생했다. 정부는 즉각 정부대변인 성명을 발표했고 같은달 19일에는 유화책으로 이인모노인을 송환하기에 이른다.그러나 「북한핵」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는 새정부의 한해를 지겹게 따라다녔다.5월9일 유엔안보리에서는 「조속히 NPT에 복귀하라」는 대북결의안이 채택되고 우리의 양해와 중국의 주문으로 미국과 북한과의 대화가 시작됐다. 정부가 그때 「국제공조」를 들고나온 것은 더 이상 남북경협등의 카드가 핵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우리가 북한에 제의한 고위급회담,대표접촉등이 모두 무위로 끝난 것이 바로 그 예이다.이에 따라 핵문제는 미국­북한의 대화라는 채널을 통해 진행되기 시작했다. 미국­북한의 고위급회담은 6월과 7월 뉴욕과 제네바에서 두차례에 걸쳐 열렸다.6월의 첫 회담에서 북한은 자주권등을 인정받은 대신 NPT 탈퇴를 유보했다.7월의 두번째 회담에서는 미국과 북한의 관계개선을 논의 할 3단계회담을 2개월 안에 열되 그전에 북한이 ▲의미있는 남북대화 ▲IAEA의 핵사찰 수락이라는 두개의 조건을 수용해야 한다는데 양측이 합의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북한은 2개월 가까이 IAEA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않았고,남과 북은 『특사를 교환하자』『핵문제를 논의할 대표접촉이어야 한다』고 서로 맞서 세월만 보냈다. 그 사이 빈에서는 북한의 사찰수락을 촉구하는 대북결의안,이어 10월초 유엔총회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결의안이 채택됐다. 그러나 북한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IAEA는 8월초에 교체한 감시용카메라와 배터리가 『소진될 위기를 맞고있다』는 대북경고를 거듭했다.자연히 IAEA 사찰이 국제적 관심으로 부상했고,11월의 한­미정상회담에서 「철저하고도 광범위한 해결」 방식이 합의되기에 이른다.그러면서 12월 들어 미국­북한의 뉴욕실무접촉이 재개되고 급기야 29일 미국­북한이 4개항에 합의한다.그러나 지난 1월 북한과 IAEA의 협상이 다시 결렬되고 미국에서는 강경여론이 고조되면서 「한반도위기설」까지 등장했다.급기야 한승주외무부장관이 미국에 건너가 강경론을 진화시키고,지난달 26일 극적 반전을 이끌어내 미국­북한의 4개 합의사항을 다시 이끌어냈다.
  • 내년 안보리국 입후보 정부,유엔에 공식통보

    정부는 오는 96∼97년 2년 임기의 유엔안보리 비상임 이사국에 진출하겠다는 뜻을 유엔에 공식통보했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10일 『정부는 지난달 26일 4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 아시아그룹(의장국 라오스)에 내년 유엔총회에서 있을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선거에 입후보하겠다는 뜻을 공식 전달했다』고 밝혔다.
  • 반환돼야할 약탈문화재(사설)

    해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 가운데 1천수백여점이 약탈문화재인 것으로 밝혀졌다.문화체육부가 1차로 공개한 약탈문화재는 일본에 7백46점,프랑스에 3백78점 등이 소장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이들 문화재는 국력이 기울어가던 구한말에서 일제식민지통치기간동안에 불법적으로 유출된 것들이다.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해외유출문화재는 6만4천여점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10만점에 달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추산이다.따라서 약탈문화재의 숫자도 앞으로 조사가 진행되면 훨씬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가장 많이 유출된 것은 일제강점기간중 문화재의 대약탈이 감행되었기 때문이다.조선총독부는 고적조사라는 미명하에 「고적조사위원회」를 구성,전국의 고분과 유적을 마구잡이로 파헤쳤다.그것은 발굴조사가 아니라 유물에만 눈독을 들인 「보물캐기」식 유적파괴였다.1920년대이후 경주를 비롯 가야문화권인 창령,낙낭과 고구려의 유적이 밀집된 평양근교 등에서 야만적인 발굴이 성행하였다.이들 지역에서 수습된 귀중한 유물들은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을 빌려 일본으로 반출되었다.일본의 대학들도 이에 가세,문화재약탈을 도왔다.국권이 상실된 식민지상태에서 자행된 유물의 발굴및 반출은 명백한 약탈행위에 해당된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때(1866)강화도에서 외규장각도서 2백97책을 가져간 것도 전쟁중의 약탈행위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해외에 불법유출된 문화재가 약탈에 의한 것임이 확인된 이상 그것은 원소유국에 반환되어야 마땅하다. 인류문화의 유산인 문화재는 그 문화의 창조자인 출처국에 소재해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통념으로 되어 있다.문화재의 약탈과 불법반출을 방지하기 위해 유네스코는 1970년 「문화재 불법반출 및 소유권 양도의 금지를 위한 협약」을 채택,『불법반출된 국가문화재는 원래의 소유국에 반환되어야 한다』고 규정해 놓고 있다.또한 문화재 원산지반환을 위한 정부간 협의회도 구성됐고 1983년 유엔총회는 문화재반환 촉구결의안을 채택했다.국제법상에도 약탈문화재의 반환은 이행규범으로 공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외규장각 도서는 지난해 9월 한·불정상회담에서 미테랑대통령이 우리측의 반환 요청에 동의했고 그중 1권이 상징적으로 전달된바 있다.프랑스정부의 이같은 약탈문화재반환조치에 비해 일본의 냉담한 무관심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일본은 우리 문화재의 일본내 전시에서 출토지조차 일부러 밝히지 않는 옹졸함도 보이고 있다.식민지지배기간동안에 약탈해간 문화재는 구체적 실증을 거친뒤 당연히 한국에 반환되어야 한다.그것이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도리다.
  • 공개행정 실천 본격화/정부,외교문서 첫 공개 안팎

    ◎국익 침해 등 우려 40여건은 제외/한·일 국교회담 문건은 내년 공개 지난 48년 정부수립이후 59년까지 우리 정부가 만들거나 접수한 외교문서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유럽등 선진국들은 이미 19세기부터 일정 시점이 지난 외교문서를 공개해왔다.「외교백서」「외교청서」등의 이름으로 강대국의 외교문서가 집대성 되어 발간되면 세계적인 관심을 끌곤 한다.이웃 일본은 지난 75년부터 외교문서를 공개해오고 있다. 우리나라도 80년대 들어 외교문서를 공개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으나 워낙 보안을 중시하던 시절이라 시행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공개행정을 천명한 문민정부가 출범한 뒤 외교문서의 공개를 위한 법령제정에 착수,지난해 7월 「외교문서보존및 공개에 관한 규칙」이 제정·발효됐다. 이 규칙은 30년이 지난 외교문서는 공개하도록 규정했다.때문에 올해는 64년까지의 문서가 공개되어야 하나 한꺼번에 공개작업을 하려니 양이 방대해 1차로 59년까지의 문서를 공개하기로 했다.나머지 60년에서 64년까지의 외교문서는 연말쯤 공개할 방침이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의 양은 모두 4백25권의 책자로 정리되었다.한권마다 2백쪽 남짓 되므로 모두 9천쪽에 이르는 분량이다.50년대 외교문서는 전쟁통에 유실된 것이 많았으며 연말쯤 공개예정인 60∼64년분은 8백권에 이른다는 것이다. 공개된 문서 가운데 이제까지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뒤엎을만한 내용은 없다고 외무부측은 밝혔다. 외교문서 공개규칙에 의해 국가이익 혹은 개인의 사생활 침해가 우려되는 40여건은 공개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또 일반의 관심이 큰 한국·일본 국교수립회담(52∼65년)관련 문건은 일본정부와의 사전협의를 거쳐 내년에 공개할 방침이다. 그렇다고 이번 외교문서공개의 의미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한미상호방위조약,제네바정치회담등 민감한 정치사건의 결과는 알려졌지만 그 과정까지 자세히 전해주는 문건은 없었다.우리가 맺은 조약,연관된 국제적 사건을 둘러싸고 정상 사이에 오간 서한및 주재관에 대한 훈령등은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학계·언론계 뿐 아니라 외교사에관심있는 일반에게는 이번에 공개된 자료가 외교막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에 틀림없다.게다가 비공개로 분류된 문서라 하더라도 학술연구등 공익을 목적으로 열람을 원한다면 외교문서공개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허용될 수 있다. 공개 외교문서에 대한 일반열람은 31일부터 가능하다.서울 서초동에 있는 외교안보연구원 외교문서열람실을 방문,소정의 수수료(대체로 한쪽에 1백원)만 내면 마이크로필름판독기를 통해 원하는 외교문서를 열람·복사할 수 있다. 공개된 주요 외교문서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대통령의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앞 친서(56년)및 비망록(57년) ▲제네바정치회담(54년) ▲백림사태조서(58년) ▲미국의 대한방위공약일람(51∼59년) ▲인도에 송환된 반공포로 관계철(53∼57년) ▲한국전쟁 피납치인명부관계(54∼59년) ▲유엔총회 한국문제결의문(47∼58년) ▲국군통수권이양에 관한 이승만대통령의 각서및 맥아더유엔군총사령관의 회한(50년) ▲한미간 상호방위조약(54년)▲한미간 재정및 재산에 관한 제협정(50년) ▲한미간 사법공조문제(51년) ▲한일어업협정안(52∼56년) ▲유엔군사령부의 해상방위봉쇄선(클라크선)설정및 폐지(53년) ▲동독및 헝가리 북한 유학생의 독일 망명처리문제(57∼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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