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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로마 韓人음악도들의 對北메시지

    새천년 희망의 장정(長程)을 목전에 두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참극이이곳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다.공포에 질리고 굶주림에 지친 코소보 난민의행렬이 끝없이 이어진다.그들이 전하는 살육과 파괴의 증언에 전율을 금할수 없다. 고통받는 이들의 모습은 반세기 전의 우리 자화상이기도 하다.한국전쟁시참혹한 경험을 한 우리에게는 남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고 어려움을 나누는미덕이 있다.재해를 당한 이웃에 전하는 온정은 이제 우리의 문화이며 저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지난 5월15일 로마에서 활동중인 우리의 젊은 음악인들이 세계식량계획(WFP) 본부에서 코소보 난민 지원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가졌다.WFP와 한국대사관이 공동 주최해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토대로 푸치니가 작곡한 ‘잔니 스키키’를 공연하였다.인습과 낡은 제도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조소,새시대를 향한 인간의 갈망이 주제였다.공연이 끝난 후의 오랜 기립박수는 관객이 받은 감동의 깊이를 나타낸 것으로서 그만큼 보람도 컸다.이번 행사는 그동안각국으로부터 기여금을 받아 긴급식량을 지원해 온 WFP가 처음으로 자체적으로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주선한 행사라는 의미도 있었다. WFP는 ‘기아로부터의 해방’을 모토로 1961년 유엔총회 결의를 통해 창설됐다.이후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개도국을 도왔으며 60년대 전반까지 우리나라도 수혜자였다.북한은 95년 홍수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해 기아의 위기에몰리자 국제사회에 긴급지원을 호소했다.이에 따라 WFP는 95년 9월부터 금년 3월까지 4차에 걸쳐 곡물 102만톤(3억700만달러 상당)을 북한에 제공했다. 우리는 이중 3,300만달러 정도를 WFP를 통해 북한에 지원했다.로마에는 WFP외에 주로 세계식량안보를 위한 농업기술 지원 및 정책조언을 하는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개도국의 농업개발사업을 지원하는 목적의 국제농업개발기금(IFAD)이 있다. 북한은 이들 유엔기구를 통해 이루어진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최악의 위기는 면했으나 아직 식량이 부족하며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왜냐하면 북한의 식량난은 자연재해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북한의 농업정책,농업의 구조적 취약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오늘의 북한은 단순한 식량원조를 넘어 ‘식량의 증산을 위한 원조’를 필요로 하고 있다.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나 북한이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는 조짐이 있다. 부분적으로 개별농가의 자영농업을 허용하고 농수산물 유통경로로 농민시장활성화도 묵인하고 있다.선진국으로부터의 농업기술 도입을 모색하고 있으며 관련 유엔 농업기구로부터 기술 및 개발사업의 지원도 받고 있다.문제는 우리의 적극적인 협조의지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남북간의 직접협력을 기피하는 점이다.북한의 변화가 기대되는 부분인 동시에 그때까지 우리가 ‘길을 돌아’ 목적지로 향하는 지혜를 강구해 볼 대목이기도 하다. 냉전이 끝난 후 세계는 정치적,이념적 대립의 유산을 청산하고 무한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다.유럽은 단일통화를 출범시키고 완전한 통합의 길로 매진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아직도 ‘역사의 유물’로 전락한 냉전의 볼모가 되어 우리에게 아까운 시간과 노력의 소모를 강요하고 있다.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는 북한이 종래의 태도를 바꾸어야 가능하다.남북한이 하루빨리 협력하고 공존 공영하는 것만이 한민족이 세계의 조류에 뒤지지 않고 그 중심에 서는 길이다.대북 포용정책의 진의도 바로여기에 있다.북한의 화답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700년 전 피렌체의 무대를 빌린 한인 음악도들의 ‘잔니 스키키’ 공연은잘못된 현실을 박차고 새 시대를 열자는 북한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鄭泰翼 駐이탈리아 대사]
  • [제2공화국과 張勉](25)-장면의 정치역정·생애(上)

    1950년 6월24일 오후9시쯤(이하 현지시각)워싱턴의 장면(張勉)주미대사는 모처럼 토요일 밤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주미대사로서 매일 저녁 칵테일파티니,디너파티니 두세 군데를 쫓아다니며 바쁘게 외교활동을 벌이다 이날은 오랜만에 관저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참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AP통신의 해리스기자였다.해리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북한군이 전면 남침했다는데 아느냐”고 물었다.장면은 “흔히 있는 산발적인 전투일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응답했다.이어 UP통신도 같은 내용의 전화를 해 장면은 미 국무부로 급히 연락하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밤10시30분쯤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이승만(李承晩)대통령은 “북괴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밀고내려오니,장대사가 빨리 행동해 주어야겠소”라고 말했다.전화를 넘겨받은 임병직(林炳稷)외무장관은 “당신 한사람의역량에 국가 운명이 달렸소”라고 목이 메어 우는 소리를 했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갓 세운 조국,대한민국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빠진 순간이었다. 장면은 곧바로 미 국무부로 달려가 딘 러스크 극동담당차관보 등을 만났다. 장면과 러스크는 한국사태를 25일 열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기로 하고 이를 휴가중인 트루먼 대통령,애치슨 국무장관에게 알렸다. 일단 관저로 돌아온 장면은 부랴부랴 짐을 꾸린 뒤 바로 비행장으로 나가 군용기 편으로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에 갔다.오후2시 개막한 안보리에서 장면은 연설 기회를 얻었다.“유엔 승인을 얻은 대한민국은 북괴군의 불법공격을 받고 있다.이 공격은 인도(人道)와 민심을 거슬리는 죄악이자 국제평화·안보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다”라면서 지원을 호소했다. 안보리는 미국이 제안한 결의안을 표결에 부쳐 9대0으로 통과시켰다.결의한내용은 ▲북한군은 전쟁을 중지하고 38이북으로 철수할 것 ▲유엔한국위원단이 이를 감시할 것 ▲유엔회원국은 북한에 일체의 원조를 하지 말 것 등이었다.북한을 침략국으로 규정한 유엔 안보리 결의는 이처럼 6·25발발 50여시간만에 이루어졌다. 안보리 결의가 나온 다음날 장면은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다.“너무도 황급해서 국가원수에 대한 예모도 차릴 겨를이 없이”(회고록에서의 표현)장면은트루먼에게 “6개월전 요청한 무기원조를 왜 해주지 않았느냐,이제 우리나라 운명이 당신 손에 달렸으니 어떻게 하겠느냐”고 마구 항변했다. 이 자리에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 트루먼은 27일 낮 해·공군을 한국에 파병한다고 발표했다.이날 유엔 안보리도 ‘북한의 공격을 격퇴하고 한국의 안전보장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라고 권고하는’결의문을 추가로 채택했다.30일에는 미국이 육군을 출동시켰다. 6·25가 발발하자마자 유엔 안보리 결의,미국의 파병을 이끌어낸 이 며칠은한국이 적화(赤化)위기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나날이었다.그 결실은 장면의 초인적인 노력 덕에 맺어졌다고 할 수 있다.장면은 훗날 “본국으로부터의 지시나 의논할 사람이 없어 고군분투하며 우방 제국(諸國)의 대표들에게 눈물의 호소를 했다”면서 당시를 “한 시간이 일년만큼이나 귀중했다”고 회고했다. 장면정부를 ‘실패’라고 규정하고 장면 개인을‘무능하다’고 폄하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건국 초기에 두가지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한다.하나는 6·25직후 미국 및 유엔의 군사적 지원을 즉각 이끌어낸 점이고,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이 ‘유일·합법 정부’임을 유엔에서 승인받은 일이다. 장면은 48월 5월10일 제헌의회 선거에서 서울 종로을구에 무소속으로 출마,당선함으로써 정치의 장(場)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정부 출범 며칠뒤 장면은 9월 파리에서 열리는 제3차 유엔총회에 참가하는 한국대표단의 수석으로임명받았다.그와 함께 대표단으로 참가한 이들은 조병옥(趙炳玉)정일형(鄭一亨)장기영(張基永)김활란(金活蘭)모윤숙(毛允淑)전규홍(全奎弘)김우평(金佑枰)김준구(金俊九)등이었다. 한국의 법통(法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막중한 회의에,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떨어지는 장면이 수석대표로 임명된 사실은 의외로 받아들여졌다.특히 조병옥을 앞섰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조병옥은 독립운동 경력이 화려한데다 한민당 창당에 한몫 했으며 미군정 때는 경찰총수인 경무부장을 지냈다.더욱이 대통령 이승만에게서 미 유학시절부터 상당한 총애를 받고 있었다.반면 장면은 주요 경력이 동성상업학교 교장,입법의원 정도였다.이승만과도 해방공간에서야 처음 만난 사이다. 그런데도 당시 ‘국가 승인’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이승만이 장면을 수석대표로 선택한 것은 그만큼 신뢰가 두터웠기 때문일 것이다. 대표단을 이끌고 파리에 도착한 장면은 바티칸을 비롯한 가톨릭 국가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그해 12월12일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 내의 유일·합법정부임’을 승인받는다.장면은 “쉬는 시간에도 혼자서 한국승인 문제를 위해 천주교인을 만나러 다녔고”(장기영의 회고담),그토록 과로한 탓에 쓰러져 입원한다.이때 병원에서 주사를 잘못 맞아 간염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바람에 생을 마칠 때까지 간질환으로 고생하게 된다. ‘유엔의 한국 승인’에 성공한 장면은 대통령 특사로서 바티칸에 가 교황을 알현했다.귀국길에 미국에 들른 그는 그곳에서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됐다는 연락을 받았다.짐은 이미 집으로 부친 뒤였다. 장면은 다음날부터 각국 대사를 찾아다니며 대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먼저 공부했다.한편으로는 사무실과 사람을 구하는 등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갔다.1년반 동안 노력한 끝에 주미대사관이 궤도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듯 6·25가 터졌고,장면은 그에게 부여된 국가적 과제를 훌륭하게 완수했다. 그해 11월 이승만은 장면을 제2대 국무총리로 지명했고 국회는 23일 이를 인준했다.그러나 장면은,유엔이 51년 2월1일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것까지를 지켜본 뒤에야 귀국해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이용원기자ywyi@
  • [제2공화국과 張勉]18-봇물터진 통일론(下)

    ‘중립화 통일론’이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장면(張勉)정부는서둘러 불끄기에 나선다.1960년 11월2일 장면총리는 담화를 발표해 오스트리아식의 중립화 방안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장총리는 그 이유로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지정학적 차이점을 제시했다.‘소련·중공과 인접한 한국이 전략적인 가치가 훨씬 높다’는 점을 비롯 ▲침략을 당하면 오스트리아는 즉각 지원 받을 수 있지만 한국은 지원군이 바다 건너 있다 ▲중립국이 되기 전 오스트리아는 단일정부를 유지했지만 한국은 남북으로 갈려 전쟁까지 치렀다는 사실 들을 지적했다.따라서 “유엔 감시하남북총선거가 현정부의 유일한 통일방안”이라고 장총리는 거듭 강조했다. 같은 날 민의원도 ‘대한민국 헌법 절차에 따라 유엔 감시하에 인구비례로자유선거를 실시하는’통일방안을 만장일치로 결의해 이를 제15차 유엔총회에 전달키로 했다.‘대한민국 헌법 절차를 따른다’는 전제조건을 단 민의원 결의는 장면정부의 통일정책보다 더욱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장면정부를 긴장케 한 요인은 혁신계도,중립화 통일론도 아니었다.4월혁명의 주역인 학생세력이 통일논쟁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었다. 학생들은 4월혁명으로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무너지자 이에 만족하고 ‘혁명과업 수행’은 기성 정치인들에게 맡기는 듯했다.이들은 학교로 돌아가 학도호국단 대신 학생회를 구성하고 어용교수 퇴진과 재단 민주화를 요구하는 등 학원민주화운동에 나섰다.또 공명선거·농촌계몽·국산품애용 같은 국민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통일논쟁이 확산되자 학원가는 그 흡인력에 급속히 빨려들어갔다.각대학에는 통일문제를 연구하는 동아리가 들어섰고 크고작은 토론회·강연회가 잇따랐다. 11월18일 서울대에서 300여 학생이 참여해 ‘서울대 민족통일연맹(民統)’을 결성했다.이들은 ▲통일에 관한 국민의식을 높이고 ▲분위기를 무르익게 하며 ▲통일방안을 정부·사회에 제시해 여론을 조성하겠다고 공표했다.아울러 ‘북한 학도’들에게는 “4·19로 이승만정권을 타도했듯이 김일성(金日成)정권을 타도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이들의 통일론은 한마디로 ‘기성 정치인은 믿지 못하니 남북의 학생들이 직접 나서자’는 것이었다. 61년 들어 정부의 ‘유엔 주도하 통일’방안에 충격을 주는 사태가 발생했다.4월12일 제15차 유엔총회 정치위원회에서 한국문제 토의에 남북한을 동시에 초청하자는 안이 나왔다.당시 중립국이던 인도네시아가 제출한 ‘동시초청안’이 높은 지지를 받자 미국대사 스티븐슨은 ‘북한이 유엔의 권위와 권능을 수락할 경우에만 초청한다’는 수정안을 냈다.‘스티븐슨 안’은 59대 14로 통과된다. 그동안 유엔이 통한(統韓)문제를 토의하면서 늘 남한 대표만을 초청해 왔기때문에 조건부라 해도 북한이 함께 초청받은 사실은 국내에 큰 영향을 미쳤다.‘스티븐슨 안’자체를 반대하던 장면정부는 막상 수정안이 통과되자 다음날 환영 성명을 발표한다. 장면총리는 “공산측이 기왕의 파괴적 태도를 청산하고 이 획기적인 결의의모든 조건을 성실히 충족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면서 북한이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을 받아들여 그 임무수행을가능케 하라고 촉구했다. 이같은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과는 달리 사회 분위기는 “스티븐슨 안은 미국이 북한과 타협하는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고 보수계 신문들은 “정치인들이 충격을 받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할 정도”라고 보도했다. 남한 사회는 이제 통일논쟁으로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혁신계와 급진 학생세력이 ‘어떻게든 통일만은 이루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공격적으로나온 반면 장면정부는 기존 원칙만을 고수하며 소극적·방어적으로 대응할수밖에 없었다.북한은 북한대로 혁신계·학생세력을 부추기는 제안을 끊임없이 해댔다.유엔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도 한국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점차 변해갔다. 그 달구어진 용광로의 문을 열어제끼려고 한 세력은 학생들이었다.‘중립화’니 ‘남북교류’니 논쟁 차원에 머물던 통일문제에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4·19 1주년 기념일을 맞아 민통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통일을 기피하고 민족통일세력을 탄압하는 현정권은 피를 보기 전에 물러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이어 5월3일 남북문화교류의 전제로서 남북학생 모임을 갖자고 북한 학생들에게 제의했다. 이틀뒤 전국 18개 대학과 경북고 대표가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민통학련)’결성준비대회를 열고 판문점에서 남북학생회담을 열겠다고 발표했다.혁신계 정당과 사회단체들은 즉각 이를 환영했으나 집권 민주당과 신민당(민주당 구파)등 기성 정치권은 우려를 표명했다. 정부 대변인인 정헌주(鄭憲柱)국무원 사무처장은 ”학생들의 주장은 정부 방침에 어긋나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면서 “순진한 학생들이 공산당의 흉계에 넘어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보호할 의무가 정부에게 있다”고 단호한입장을 밝혔다. 5월13일 민통학련은 ‘남북학생회담 및 통일축제’개최 원칙을 공개했고 정부는 이에 대해 “학생들이 판문점에 가면 전원 체포하겠다”고 발표했다.그러나 3일후부터 통일논의는 쿠데타군의 총검에 눌려 전면중단된다. ‘가자 북으로,오라 남으로’를 외치던 학생이건,‘중립화’를 꼭 이뤄야 하느냐 아니냐로 다투던 혁신계건 그 운명은 장면정부와 다르지 않았다.박정희(朴正熙)시대에 ‘통일지상주의자’들은 자유당정권 때보다도 훨씬 가혹한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분단의 역사에서 통일은 우리 민족이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숙제임에 틀림없다.민주주의가 활짝 꽃핀 제2공화국에서 통일논의가 최고의 이슈로 떠오른 것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체제간 경쟁이 엄존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에만 치우친 통일론,자파(自派)의 세력 확장에 급급해 중구난방 식으로 쏟아부은 통일론은 급기야 스스로가 발디딘 토대마저 무너뜨리고야 말았다. 이용원기자 ywyi@
  • 金三雄 칼럼-장면박사 출생100년

    “자기의 명성이 자기의 진실보다 더 빛나지 않는 자는 축복이다”―인도시인 타고르의 말을 올해 출생 100주년을 맞는 제2공화국 張勉총리에게 드리는 헌사로 삼으면 어떨까. 격동의 현대사에서 장면박사처럼 잘못 평가된 정치지도자도 흔치 않다. 그가 이끈 야당과 시민 학생에 의해 타도된 독재자나 합법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한 군사독재자가 ‘존경받는 인물’의 상위를 차지하는 반면 인격적이고도덕적인 품성과 자질로써 ‘단군 이래의 자유’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동시적으로 추진하다 좌절한 민주지도자는 망각되고 있다. 이것은 5·16이래 거듭된 군사쿠데타와 그 아류 정권에 의한 ‘승자의 기록’의 결과이지만, 진실을 탐구하고 가르치는 학자·교사·언론인들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한국역사상 최초로 성공한 4월 시민혁명으로 출범한 장면정권은, 프랑스대혁명이 입헌군주주의자와 시민계급, 온건파와 과격파싸움으로 나폴레옹쿠데타를 불러오고, 독일 바이마르 공화정이 ‘지구상에서 가장 자유로운’사회를 구현한다면서 극좌·극우싸움의 혼돈끝에 히틀러 나치스를 맞았듯이, 집권8개월만에 박정희쿠데타로 붕괴되었다. [인간 장면의 인품] 역사상 대부분의 시민혁명이나 개혁이 쿠데타나 반동세력에 의해 좌절된 것처럼 장면정권 역시 5·16쿠데타를 겪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그는 무능과부패의 상징으로 낙인찍혔으며, 독재자들이 역사인물로 격상되는 가치전도현상이 나타났다. 우리 현대사나 국민정신면에서 대단히 부끄러운 모습이다. 장면박사는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한 분으로 평가된다. 한없이 온후하고 어진 분으로서 인자하면서도 강직하며 사려깊은 분이었다. 외유내강의 독실한신앙인이고 지식인이었다. 그는 ‘각하’의 호칭보다 ‘장박사’로 불리기를 원했으며 집권 8개월 동안‘단군 이래의 자유’로 불릴만큼 민주주의를 허용했다. 물론 무질서와 정치사회적 혼란이 따르기도 했지만 오랜 억압구조에서 시달리던 국민에게 과도기적 현상이었다. 반민주행위자와 부정축재자의 처단등 4·19혁명과업을 수행하는 데 너무 미온적이었다는 비판도 따른다. 그러나 독재정권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정권으로서의 시대적 한계와, 민주정치 제도에서 가장 운영이 어렵고 높은 민도와 양식있는 국회의원들을 전제로 하는 의원내각제에 발이 묶여서 과단성있는 정책을 추진하지 못한 제도적 한계도 따랐다. 여기에 야당의 사사건건 발목잡기와 이상주의적 조급성에 기운 혁신계와 일부 지식인·학생들의 급진적 통일론도 장면정권 좌절의 요인으로 지적된다. [재평가와 교훈찾아야] 장면은 비록 군인들에게 탈권당한 비운의 정치인이지만 그가 한국현대사에남긴 족적은 너무 크다. 무엇보다 제3차 유엔총회 한국수석대표로서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 합법정부로 유엔의 승인을 받는데 기여한 일이다. 또 6·25전란 당시 주미대사로서 유엔군 참전을 위해 발휘한 역량도 큰 업적이다. 특히 민주당을 결성하여 이승만정권으로부터 암살 저격까지 받으면서 끝까지 반독재투쟁을 벌인 것이나, 집권기 혼란속에서도 일관되게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고 경제개발계획을 착실히 마련한 것등은 큰 업적이다. 그러나 교과서적 민주주의나 미온적인 시국 대처는 프랑스혁명기와 독일 바이마르공화정 시기처럼 반동세력에게 기회를 주게 되고 결국 역사를 후퇴시킨 행위로서오늘의 김대중정부에도 교훈으로 남는다. 곧 시작될 대한매일의 ‘제2공화국과 장면’연재는 장면박사의 재평가를 통해 왜곡된 현대사를 바로잡고 제2공화국 좌절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자는데 있다.
  • 카터 등 5명 유엔인권상 수상/인권선언 50돌 기념 특별총회

    ◎인종차별 반대 결의안 등 통과 【유엔본부 연합】 세계 인권선언 채택 50주년인 10일 뉴욕의 유엔본부에서는 유엔인권상 시상식과 기념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다. 유엔은 오전 10시 기념 특별총회를 열었다. 밤 11시30분까지 계속된 특별총회는 인권선언 50주년을 기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세계 인권선언문은 이날 250개 언어로 번역돼 게제된 유엔의 인터넷 웹사이트가 개통되기도 했다. 유엔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등 5명의 인권운동가들에게 ‘98유엔 인권상’을 수여했다. 수상자는 스리랑카의 수닐라 마베예세케라,우간다의 안젤리나 아쳉 아티얌,브라질의 호세 그레고리,체코의 안나 사바토바 등. 유엔 인권상은 세계인권선언 20주년이었던 68년에 제정되어 5년혹은 10년마다 수상자를 선정해왔다. 지금까지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국제사면위원회 등이 받았다. 유엔총회는 또 9일 인권운동가 보호를 위한 결의안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잇따라 통과시킨데 이어 인권보호에 대한 유엔의 신념을 재확인하는 결의안을 10일 통과시켰다. 결의안은 수백만명이 권리와 자유를 거부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기본적 인권,인간의 위엄과 가치,남녀평등,국가간 평등에 대한 유엔의신념’을 재확인하고 있다.
  • 친일의 군상/前 이화여대 총장 金活蘭(정직한 역사 되찾기)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 때 어찌 여성인들 잠잣코 구경만 할 수가 잇겟습니까.이 날을 위한 마음의 준비는 이미 벌서부터 되여 잇섯습니다.내지(일본)학도들과 함께 전문대학 법문계(문과) 반도(조선)학도들은 우렁찬 진군을 이르키어 특별지원병으로서 오는 1월20일에는 영예의 입영을 하게 되엿습니다.이번 반도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거러가야될 길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가지 리유 때문에 참렬을 못하는 것입니다.…아프로는 결전하의 국가목적에 쪼차 한사람이라도 더만히 우수한 지도원을 양성하기에 전력을 다할 각오가 잇슬 뿐입니다.” 金活蘭(1899∼1970)이 1943년 12월25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에 기고한 ‘男子에게 지지안케­皇國女性으로서의 使命을 完遂’라는 제목의 기고문 중 한 대목이다. ◎이대 키운 공 크지만 ‘여성계 상징’으론 논란 여지/3·1운동 당시 한때 지하 독립운동 조직과 연계/1936년 이화학당 부교장 시절부터 변절 첫 걸음/동포청년 전쟁에 내몰고도 사과 한마디 없어/“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로 모여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을…” 일제하 지식인이 신문에 쓴 친일성향의 글 한 두편을 통해 그의 삶 전체를 평가받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거대한 감옥’또는 ‘노예선’으로 불리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쓴 글이라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그러나 여기에는 몇가지 조건이 있다.우선 생명에 위협이 있었느냐,그리고 나중에 자신의 행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성했느냐 하는 점 등이다. 모든 지식인들에게 지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몇몇 의사·열사가 이에 속할 뿐이다.그러나 지식인이라면 자신의 과오에 대한 반성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그러나 거의 모든 친일 지식인들은 자신의 친일행위를 반성하지 않았다.친일 지식인들이 더 비난받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 때문이다. 일제시대 여성 지식인이었으며 최근 그의 이름을 딴 상(賞)제정 문제로논란이 되고 있는 김활란은 역사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을까?답은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다.이유는 그가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그의 이름을 딴 상 제정은 지식인 사회에서 여러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흔히 김활란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수식어 가운데 하나는 ‘여성박사 제1호’다.그는 학사·석사·박사를 따기까지 세 차례에 걸쳐 5년간 미국유학을 했다.귀국해서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절러(당시 이화여전 교장)의 뒤를 이어 1939년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했다.굳이 나눈다면 그는 친미(親美)인사로 분류되는 사람이다.그런 그가 ‘대동아전쟁’이 터지자 친일,반미(反美)인사로 돌변하였다. ○전쟁 터지자 반미로 돌변 “저 흑노(黑奴)해방의 싸움을 성전(聖戰)이라 했고 십자군의 싸움도 성전이라고 했다.…제일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 하여 도의를 무시한 물질제일주의의 서양문명을 박차버리고 동아(東亞)의 천지로부터 미영(美英)을 격퇴하여 버리자”.김활란은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결성식(1941.12.27,부민관 대강당)에서 ‘여성의 무장’이란 주제로 미영 타도를 외쳤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일제하 대부분의 친미·기독교계 인사들(白樂濬·申興雨 등)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다시 친미인사로 변신했다.그는 미군정 시절 초대 이화여대 총장에 취임했고 이승만정권 하에서 한미(韓美)재단 이사 등을 지냈다. 3·1만세의거 당시 김활란은 이화학당 대학과를 마치고 모교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그 무렵 지하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돼 활동하고 있었다.‘7인의 전도대(傳道隊)’를 만들어 기독교 포교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단순한 전도활동 수준을 넘는,일종의 민족운동이었다.20년대 후반 좌우 민족진영의 통합으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뒤이어 27년 4월 여성계 민족단체로 근우회(槿友會)가 결성되었다.그는 근우회 창립멤버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돌연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유학을 떠났다. 31년말 그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농촌교육 관련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 귀국했다.귀국후 문맹퇴치·봉건잔재 타파 등을 내걸고농촌운동에 주력하였는데 이는 미국유학을 한 인텔리 여성의 소박한 조국에 대한 헌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일제 침략전쟁 미화·선전 그의 친일행보는 36년 이화학당 부교장으로 있던 시절 첫걸음을 내딛는다. 그해 말 총독부 사회교육과 주최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위한 사회교화간담회에 참석하였다.37년 1월 그는 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를 결성하였고 7월 들어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이 단체는 한일병합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들의 부인들이 주동이 돼 전쟁물자로 바칠 금비녀·가락지를 모으기 위해 결성한 친일 여성단체였다.이후 여러 친일단체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방송선전협의회,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임전대책협의회,조선교화단체연합회,조선임전보국단,조선언론보국회 등등. 그의 활동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기독교 활동이다.38년 6월 조선YWCA의 회장으로 있던 그는 “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아래로 모여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을 자기(自期)하는 의미에서…”(매일신보,38년 6월9일)라며 일본YWCA에 가맹을 발표하였다.당시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가 학교가 폐교를 당하고 구속자·순교자가 잇따르던 때였다. 39년 4월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한 이후 그의 친일행각은 본격화되었다.물론 그 배경에는 학교를 지키기 위한 목적도 없지는 않았다.그러나 김해 김씨인 그의 문중이 본관을 따라 ‘김해(金海)’로 창씨를 한 것과는 달리 그는 독자적으로 ‘천성활란(天城活蘭·아마기 가쓰란)’으로 창씨개명하였다.‘어차피 창씨를 해야한다면 정말 (일본식으로)창씨를 해서 자신의 독립된 일가를 세울 생각’이었다.(金貞玉의 저서 ‘이모님 金活蘭’중에서) ○순풍에 돛단 배처럼 살아 ‘대동아전쟁’ 개전(41.12.8) 이후부터는 강연·방송은 물론 가두로 나서서 일제의 침략정책을 미화,선전하였다.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등 인력동원에 대한 이해와 협력을 촉구했다. 43년8월1일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황국신민의 무쌍(無雙)한 영광인 징병제는 드디어 우리에게도 실시되었다.…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공하옵신 성지(聖旨)에 다시금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나라를 위하여 불덩이 같이 끓는 피와 몸을 통털어 바쳐 성은(聖恩)에 보답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렸으며 반도 남아의 의기를 뵈일 기회는 드디어 왔다.이 얼마나 기쁜 일이며 수 천년 역사 이래 모처럼 보는 거룩한 감격…”(‘매일신보’1943년 8월7일)이라고 썼다. 그는 해방직전 심한 눈병으로 고생하고 있던 자신을 문병차 찾아온 조카(金貞玉 전 이대교수)에게 “남의 소중한 아들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라고 연설을 하고다닌 죄값”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김정옥의 앞의 책 중에서) 당시 여기자 崔銀喜는 그를 두고 ‘모질고 악착한 역경을 맛보지 않고 순풍에 돛단 배처럼 산 행운아’라고 평했다.식민지 시대와 격동기를 산 지식인의 일생이 대체로 고뇌와 아픔으로 점철됐겠지만 그는 상류층의 한 층을 이루는 생애로 일관하였다. 그가 60년 가까이 이화인(梨花人)으로 살면서 일제하와 건국기에 학교를 지키고 가꾼 공로는 인정할만 하다.그러나 그를 여성교육계,나아가 한국여성계의 상징으로 내세우기에는 그의 일생 가운데 ‘흠결’은 큰 편이다.이대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그의 친일활동이 적극적이었다.이대측의 ‘김활란상’ 제정 추진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보다는 그의 떳떳하지 못한 삶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김활란 연보 1899년 인천 출생 1914년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1918년 이화여전 교수·부교장 1928년 ‘근우회’ 발기인으로 참여 1931년 미국 컴럼비아대 철학박사(‘여성박사 1호’) 1937년∼45년 애국금차회·임전대책협의회·조선언론보국회 등 친일 단체 간부로 활동 1939년∼70년 이화여전 교장·이화여대 총장·이화학당 이사장 1948년∼65년 한국대표로 유엔총회 6회 참석 1950년 공보처장 1952년 ‘코리아타임스’ 사장 1954년∼61년 국제기독교선교위원회 부위 원장 1955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1959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1963년 대한민국장·막사이사이상·다락방상 수상 1965년 대한민국 순회대사 1970년 별세,망우리 금란동산에 묻힘.대한민국 1등수교훈 장추서 1996년 추모문집 발간,그의 친일 논쟁을 계기로 ‘인터넷 반민특위’이 등장 1998년 이대측의 ‘김활란상’ 제정 계획 발표로 찬반논란
  • 北에 핵협정 준수 촉구/유엔총회 결의안

    【유엔 본부 연합】 유엔총회는 2일 북한이 핵안전협정을 계속 이행하지 않는데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핵안접협정준수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은 표결을 통해 찬성 114,반대 1,기권 8표로 통과됐으며 북한만이 반대표를 던졌다. 이 결의안은 북한에 대한 협정준수 촉구 외에 이라크에 대해서도 관련 유엔 결의안 및 양해각서의 이행을 요구하는 등 핵문제와 관련된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 건군 50년을 기린다(사설)

    오늘은 국군의 날이다. 예년처럼 단순한 국군의 날이 아니라 건군 50주년과 함께하는 날이라는 점에서 감회가 남다르다. 우리 군은 지금까지 대남 적화야욕의 기본노선에 변함이 없는 북한집단을 상대로 일초 일각을 다투며 국가안보의 최일선에서,그리고 국익수호의 최후 보루로서 사명과 역할을 다해왔다. 건군 50주년의 슬로건대로 ‘조국과 함께,국민과 함께’해온 우리 군에 대해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건군 50년을 돌아볼 때 우리 군은 무엇보다 이 나라 민주화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큰 지렛대 역할을 했다. 군이 튼튼하게 나라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다원화사회라는 민주주의의 꽃을 피워냈으며,50년만의 정권교체라는 민주주의의 역사적 정치이벤트를 창출하면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다. 우리 군에게는 영광의 길이 있었던 반면 오욕의 역사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 부끄러운 역사를 들추기에는 갈 길이 멀다. 우리 군의 가장 큰 현안인 21세기를 지향하는 개혁과 장비 현대화,조직의 효율적 운영,정신전력(精神戰力) 강화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 것이다. 최근 발표된 ‘98국방백서’를 통해서도 드러났지만 북한은 가공할만한 무기와 병력을 보유하고,이들의 대부분을 전방기지에 전진 배치하고 있다. 지난 28일에는 북한 외무성 부상 최수헌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제2의 한국전쟁 발발 위험이 임박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북한의 무력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때, 우리는 하루속히 첨단 과학장비를 갖추어 철저 대응해야 한다. 그것이 21세기를 지향하는 미래 강군으로서의 선결요건이다. 햇볕정책이나 금강산 관광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도 강군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추진하고 있는 개혁에 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군의 특성상 보수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동안 개선하지 못한 낡은 제도와 관행을 과감히 뜯어고치고,장병의 정신전력을 강화하는 프로그램 개발에 능동적으로 대처해나가야 할 것이다. 군대는 조국의 방패로서만이 아니라 그동안 사회나 학교가 젊은이들에게 미치지 못했던 교육을 맡는 또 다른 교육기관 몫까지 담당하고 있다는 것도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방과 경제는 나라의 두 축이다. 경제가 살얼음판을 딛고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를 어렵사리 넘어가고 있는 이때,군 역시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경제군대로서의 몫을 다해야 한다. 마른 걸레를 또 쥐어짜듯 주변에 절약요인이 없나를 살펴보면서 창군 이래 처음으로 국방예산 삭감이라는 나라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아울러 시대도 바뀐만큼 국민의 정부와 함께 민주군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군 내부에 권위적이며 비효율적인 행정체계나 제도가 있다면 과감히 고쳐나가기를 거듭 바란다.
  • 北,제2의 韓國戰 경고/崔守憲 외무부상 유엔 연설

    【유엔 본부 연합】 북한의 崔守憲 외무 부상은 28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한반도와 인근지역에서 전개되는 북한을 겨냥한 군사훈련의 결과로 20세기가 끝나거나 21세기가 개막될 시점에 또다른 한국전쟁이 발발할 위험이 더 임박했다”고 말했다. 崔부상은 이같은 상황에서 통일이 전쟁 발발 위험을 제거할 것이라고 주장하고,주한미군이 통일에 최대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 흔들리는 IMF/빗나간 처방 바닥난 금고

    국제통화기금(IMF)이 비틀거린다.30년 넘게 경제위기 해결사를 자처하며 세계의 경제경찰로 행세해온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전 세계에 불어닥친 경제위기에 대한 처방은 잇따라 실패하고 힘의 원천이었던 금고도 바닥이 보인다.세계 여론이 등을 돌린 것은 물론이고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간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등 유수의 경쟁기구들은 대안임을 자처하고 나서고 있다.긴축재정과 고금리정책으로 요약되는 IMF식 경제해법은 녹슬었다는 지적이다.그나마 무차별 적용하는게 더 큰 문제란다.급기야 존폐마저 논의되는 IMF를 해부한다. ◎처방 실패와 원인/국가 형편 고려안해 ‘독’으로 작용/지원 89개국중 48개국 ‘중병 시름’ 옛날 얘기다.그리스에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노상강도가 있었다.길가는 나그네를 잡아다가 자신의 침대에 눕혀 침대보다 키가 크면 다리를 자르고 작으면 다리나 머리를 잡아당겨 침대에 맞추곤 했다고 한다. 긴급하게 돈이 필요한 ‘서민국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해주는 대신 경제정책을 수렴청정하고 있는 국제통화기금(IMF).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아시아와 러시아,남미 국가들에게 IMF는 프로크루스테스임에 틀림없다. 76년 외환위기를 맞았던 영국에 적용해 성공을 거두었던 처방을 무조건 강요해왔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증상에 따라 처방을 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처방전에 증상을 맞추는 설명이다. 당시 영국은 사회보장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었고,국영기업이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었으며,노사분규가 극심했다.IMF는 영국에 대해 재정 및 금융 긴축,공기업 민영화 등을 요구해 성과를 거뒀다.그후 IMF의 처방은 22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국가형편을 불문하고 비슷했다. 멕시코의 처방도 영국과 거의 같았다.그러나 멕시코는 정치불안과 저축률 감소,국제자본이 이탈되면서 금융위기를 맞았다.4년이 지난 요즘 외환위기의 재발이 우려되고 있다.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에 대해서도 IMF는 같은 요구를 했다.그러나 고(高)금리는 외자유입이라는 긍정적 효과보다는 신용경색에 따른 기업도산과 대량 실업을 낳았다.통화가치 평가절하는 수출증대에도 불구,수입 수요를 봉쇄시켜 결과적으로 실물경제 기반을 붕괴시키고 있다. 65년부터 95년까지 IMF가 금융지원을 한 나라는 자그마치 89개국.절반이 넘는 48개국이 경제형편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연구결과는 IMF의 독선을 증명해주었다. IMF는 최근 발표한 ‘98 하반기 연례보고서’에서 아시아 각국의 사정을 파악하지 못한채 고금리,재정긴축을 밀어붙여 경제여건을 악화시켰다고 뒤늦게 실토했다. 국제 경제전문가들은 “IMF의 처방은 금융자본주의,빈익빈 부익부 구조를 심화시키는 승자독점주의로 요약되는 미국식 시장경제의 이식에 다름아니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텅 비어가는 금고/여유자금 고작 100억∼150억달러/미 의회 ‘푼돈’만 지원 자금난 심화 【도쿄=黃性淇 특파원】 국제통화기금(IMF)의 금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지난해 아시아 각국의 통화위기에 이어 올해 러시아 금융위기까지 겹쳐 자금을 대량 지원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는 7월 IMF에 20억달러의 추가지원을 요청했지만 IMF는 자금난으로 3억달러밖에 손에 쥐어주지 못했다.IMF에 목을 매달고 있는 나라들로선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러시아와 아시아 각국 사이에 IMF 지원금 쟁탈전마저 벌어질 태세다. IMF는 태국,인도네시아 등에 350억달러를 지원키로 한데 이어 러시아에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로 거액을 쏟아부었다.최근 각국에 대해 지원한 총액은 멕시코 금융위기때의 3배에 이른다. 출자금 1,950억달러로 출발한 IMF는 이미 지원했거나 지원을 약속한 금액을 뺀 여유자금으로 고작 100억∼150억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미국은 추산하고 있다.IMF의 자금난은 연말부터 내년 전반에 표면화될 것으로 보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IMF는 지난 7월 러시아와 합의한 125억달러 융자금 마련을 위해 20년만에 선진 회원국으로부터 특별차입을 결정했다.78년 카터 대통령시절 미국이 달러화 방어를 위해 대량의 자금을 요청했던 이후 처음이다. 그러나 가장 많은 돈을 내놓아야 할 미국이 의회의 반대로 형편이 안 좋다.미국에 요청한 자금은 모두 180억달러.상원은 자금지원을 승인했으나 하원에서는 겨우 35억달러만을승인했을 뿐이다.IMF는 자칫 ‘돈없는 은행’꼴이 될 위기를 맞고 있다. ◎해결책은 무엇인가/강도 높은 개혁·금융기구 재편 필요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중인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는 22일 뉴욕의 증권거래소를 찾았다.서방선진 7개국(G7)의 의장이기도 한 블레어 총리는 국제통화기금(IMF)을 재편해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국제자금의 흐름이 훨씬 적었던 54년 브레튼우즈 협정으로 탄생된 IMF가 이제는 세계경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안정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고 단언했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나 세계무역기구(WTO) 차기 사무총장 후보인 수파차이 파닛팍 태국 부총리 등도 IMF의 단세포적인 정책을 꼬집는다.구제금융을 지원하면서 해당국가의 특수성을 철저하게 무시해 산업기반마저 붕괴시키고 있다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IMF의 잘못을 앞장서서 꾸짖는 대표적 학자인 폴 크루그만 미국 MIT대학 교수.금융지원을 받는 국가들에게 실물경제를 무시한채 고금리 정책과 초긴축 정책만을 강요해 금융을 마비시키고경기를 오히려 침체시켰다고 실례를 들어가며 비판한다. 특히 9월 들어서는 국제기구들이 앞다투어 IMF의 근본적인 잘못을 들춰내고 있다.유엔 무역개발회의(UNCTAD)는 지난 17일 IMF의 정책들이 아시아 경제상황을 악화시켰다며 강도 높은 자체 개혁을 촉구했다. 경제선진국의 의사조정기구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IMF가 아시아 기업의 연쇄부도와 은행 부실화를 가속화시켰다면서 경기부양책의 결여를 문제 삼았다. 캉드쉬 IMF 총재는 24일 동남아시아와 러시아를 강타한 금융위기를 예측하고 방지하는 데 실수가 있었다고 실토했다.뒤늦게나마 IMF가 허물을 지적하는 외부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됐다. ◎IMF란/45년 탄생… 금융위기국가에 자금 지원/미 등 회원 182개국… 한국은 55년 가입 국제통화기금(IMF)은 45년 세계은행(IBRD)과 함께 설립됐다.IBRD가 개발도상국에 개발자금을 지원한다면 IMF는 세계 각국의 외환 흐름을 안정시키고 국제수지 불균형을 해소하는 역할을 맡는다. 두차례 세계대전의 막대한 전쟁 피해와 극심한 인플레,미국 달러화의 국제 유동성 부족 등으로 세계경제가 총체적 위기를 맞은게 직접적인 설립 배경이 됐다. 미국과 영국 등 44개국은 44년 7월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서 세계 경제의 안정과 번영을 보장할 수 있는 국제통화제도와 개발기구의 필요성을 논의,45년 12월17일 마침내 IMF를 탄생시켰다. 가맹국들의 통화 협력을 통해 환율을 안정시키고 무역을 늘려 각국이 균형있게 발전하도록 노력하고 달러화가 일시적으로 모자라 어려움을 겪는 나라에 돈을 빌려주는 역할을 해왔다. 총재,부총재 밑에 지역기구,직능 및 특별서비스 기구,정보 및 연락기구,지원기구 등으로 구성돼 있다.요원은 110개국에서 파견된 2,600명.87년부터 프랑스 출신의 미셸 캉드쉬가 총재로 일하고 있다.회원국은 182개국으로 출자액은 1,453억SDR(특별인출권·1SDR=1.36달러·1,950억달러)이다.미국이 전체의 18.25%인 265억SDR를 출자했다.한국은 55년에 7억9,960만SDR를 출자하며 회원으로 가입했다.8월말 현재 60개국이 IMF로부터 금융지원을 받았고 총액은 468억SDR.절반에 가까운 226억SDR가 지난해부터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아시아 지역에 지원됐다.
  • 北,核禁의무 이행해야/張淸洙 논설위원(時論)

    ○북한이 유일한 반대 국가 그동안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의 서명을 반대해온 파키스탄과 인도가 24,25일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서명의사를 밝혔다.원자로를 보유한 44개국의 서명과 비준이 필수적인 이 조약에서 북한만이 유일한 조약 반대국가로 남게 됐다. 지난 96년 9월 유엔총회에서 제네바 군축협의회가 2년 반 만에 협상을 통해 결정한 CTBT는 북한이 서명하게 되면 내년 9월 이 조약이 발효될 것도 같다.평화목적의 핵실험까지도 영구히 완전 금지하는 이 조약은 핵 전략무기로부터 세계평화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발효돼야 한다. ○IAEA핵사찰 즉각 수용을 북한이 진정으로 세계평화에 기여할 의사가 있다면 이 조약에 반드시 서명해야 한다.국제원자력기구(IAEA)가 25일 북한의 핵사찰 거부를 비난하는 대북결의안을 채택한 것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미 핵합의에도 불구하고 북의 핵투명성은 완전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북한의 핵안전협정 불이행 지속에 심각한 우려를 제기하고 북한에게 과거 핵관련 활동에 필요한 정보 보전을 촉구한 대북결의 내용은 북한 핵개발 의혹을 풀지 못한 대목이다. 북·미 핵합의 이후 IAEA가 7차례에 걸쳐 대북핵사찰 협상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洪淳瑛 외교통상부장관이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북의 핵합의 이행을 촉구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다음달 20일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4자회담 3차 본회담의 성과를 기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핵에 관한 북의 의도는 한마디로 핵문제를 김정일체제의 존립이 걸린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명제로 인식,이를 당면한 대내외적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생존의 카드로 이용하고 있음이 입증된 것이다. 핵문제를 국가안보의 최후수단과 정권안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판단이다.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북한은 CTBT의 서명은 물론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을 수용하는 국제적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해야 한다.또한 핵을 담보로 내부의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대미협상전략도 북한의 핵전략이 포기되지 않는 한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인식해야한다. 특히 현시점에서 북한이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문제는 반민족·반통일적 핵전략을 포기하는 것이다. 오늘날 국제사회가 체제를 초월해 국가, 민족의 이익을 우선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핵개발의 1차적 목표가 민족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그리고 북한이 끝내 핵전략을 고수할 경우 국제적 고립은 물론 경제적·물리적 제재까지도 감수하는 파국을 자초하게 될 것이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 ○한반도 평화구축 첩경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민족전체의 생존을 담보하고 있다는 문제의 심각성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핵전략을 즉각 포기해야 한다.북한의 핵문제는 완전한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핵안전협정의 이행은 물론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을 즉각 수용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의 핵위협을 제거할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이며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첩경이 되기 때문이다.
  • 洪 외통 유엔총회 참석 출국

    洪淳瑛 외교통상부 장관이 뉴욕에서 열리는 제53차 유엔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20일 출국했다. 洪장관은 오는 25일(이하 현지시간) 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최근 북한 인공위성 발사 논란을 둘러싼 한반도 정세 및 새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 기조를 설명하고 회원국들의 지지와 협력을 요청할 계획이다.
  • 北 미사일·핵 대응 공조 모색/洪 외통부장관 20일 유엔 방문

    ◎취임후 처음 韓·美·日 외무회담 열어/러·埃·이스라엘과 대좌도 주목거리 洪淳瑛 외교통상부장관이 유엔을 방문,취임 후 처음으로 다자(多者)외교무대에 나선다.洪장관은 오는 20일부터 27일까지 유엔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한다. 洪장관은 우선 21일 한·미·일 외무장관 회담에 참석,북한의 지하 핵시설건설 의혹과 미사일 개발에 대한 3국 공조방안을 모색한다.또 일본(21일),중국(22일)을 비롯한 16∼17개국 외무장관과의 양자회담도 매일 두세차례씩 예정돼 있다.이바노프 신임 러시아 외무장관과의 회담도 주목거리다.17일 한·러 정부가 정보외교관 추방사건의 앙금을 씻고 관계정상화를 선언한 만큼 양국 정상회담 추진 등 건설적 의견 교환이 예상된다. 최근 군사사절단이 입북(入北)한 것으로 알려진 이집트와의 외무장관 회담(23일)에 이어 북한 미사일의 중동 수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스라엘과의 회담(25일)도 잡혀 있어 북한 미사일의 중동 수출과 관련된 논의가 심도 있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洪장관은 귀국 전날인 25일상오 11시(뉴욕 현지시각) 유엔총회에서 우리의 대북(對北) 포용정책과 북한 미사일개발에 대한 입장 등에 관해 20분간 기조연설을 한다.북한은 자신들의 미사일발사 능력에 우려를 표명하는 한·미·일의 기조연설에 일일이 답변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洪장관은 22일 뉴욕타임스 본사를 방문,웅거 논설위원 등과 대담한 뒤 다음날에는 CNN과 생방송으로 7분간 인터뷰할 예정이다.아울러‘기후변화협약 교토의정서’와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유치한 국제기구인‘국제백신연구소(IVI)’의 본부협정에도 서명한다.
  • 洪淳瑛 외통 20일 유엔 방문

    洪淳瑛 외교통상부장관이 오는 20일부터 27일까지 유엔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뉴욕을 방문한다고 외교통상부가 16일 밝혔다. 洪장관은 21일 한·미·일 외무장관 회담에 참석, 북한 지하핵시설 의혹과 미사일 개발에 대한 3국의 공동보조 방안을 논의한다.
  • 정부,기후변화협약 내주 서명

    ◎美 등 선진국의 온실가스감축 압력 거세질듯 정부는 내주 洪淳瑛 외교통상장관이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총회 참석기간에 기후변화협약에 정식 서명할 방침이다. 외통부 당국자는 15일 “정부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세계적인 노력에 공감한다는 취지에 따라 우선 교토 기후변화협약에 서명키로 했다”며 “그러나 서명이 곧 협약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국내 비준 절차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가 기후변화협약에 서명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이를 비준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어서 앞으로 미국 등 선진국의 온실가스 감축의무이행 압력이 거세질 전망이다. 지난해 12월 열린 교토협약에서 27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과 동구권 11개국으로 구성된 이른바 ‘AnnexⅠ’ 국가들은 온실가스를 1990년 수준으로 맞추기 위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미국은 7%,유럽연합(EU)은 8%,일본은 6%를 감축하겠다는 목표수치를 제시했었다. 반면 정부는 오는 2008년부터 2017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자율규제하고 2018년부터 기후변화협약에 따른 감축의무를 이행하겠다며 개도국 지위 인정을 요구하는 동시에 유예기간을 최대로 확보하려는 입장을 지켜왔다. 정부는 오는 17일부터 이틀간 도쿄에서 열리는 기후협약 당자국간 비공식 각료회담에 韓悳洙 통상교섭본부장을 대표로 파견,이같은 정부 입장을 관계 당사국들에 밝히고 이해를 구할 계획이다.
  • 53차 유엔총회 오늘 개막/한국 등 185개 회원국 대표 참석

    【뉴욕=崔哲昊 특파원】 제53차 유엔 총회가 한국의 洪淳瑛 외교통상부 장관을 비롯한 185개 회원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9일(이하 현지시간) 유엔본부에서 개막된다. 이번 총회에서는 개막식에 이어 곧바로 디디에르 오페르티 우루과이 외무장관을 총회 의장으로 선출한 뒤 부의장단을 구성해 의제 및 의사일정을 논의할 예정이다. 총회는 21일부터 2주 동안 일반 토의를 열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등 각국 국가 원수 및 정부대표 기조연설을 듣는다. 한국은 洪장관이 오는 25일 상오 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안보리 개편과 핵 비확산 등에 관한 정부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코피 아난 사무총장은 8일 유엔총회에 보내는 연례 보고서를 배포,“오늘날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의 하나는 세계화의 사회·경제적 힘과 형태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이라면서 “유엔과 같은 세계기구만이 세계화의 혜택을 모든 국가에 돌릴 수 있는 능력과 정당성을 갖고있다”고 강조했다.
  • 동아시아 평화와 국제학술대회 기조연설

    ◎동티모르 독립투쟁 아세안도 책임 다해야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을 심도있게 논의하는 제2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학술대회가 제주4·3항쟁 50주년을 맞아 21일부터 24일까지 제주도에서 열린다. 한국위원회 대표 姜萬吉 고려대교수를 비롯 국내외 250여명의 학자와 법조인,예술인들이 참여한 이번 대회에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독립운동과 관련 96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호세 라모스 오르타가 21일 기조연설을 했다. 그의 ‘동티모르의 민족자결을 위한 투쟁과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인권’이란 제목의 연설을 요약한다. ○민주주의·법치추구는 순리 세계의 국가들은 점차 경쟁적이며 상호의존적이 되어 관리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국가적 이익이 단지 무역상의 우월함과 양적인 소득의 관점에서만 정의될 수는 없다. 어떤 나라든 다른 나라와 윤리,원칙에 충실하고 독립과 정직을 존중하고 우방국 간의 의견차이를 인정할 때 그 나라의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이는 바로 신중한 외교정책의 룰이 존재해야 되고 그것은 기본적인 가치와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를 향한 인권과 법치를 향한 움직임은 거역할 수 없는 순리이다. 고문이 성행하는 아시아의 국가에서도 유례없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의 타도는 민주주의와 법치를 추구하는 전체 아시아 지역에 큰 의미를 지닌다. 수십년간 독재정권을 견뎌낸 한국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에서 무력이 아닌 평화적으로 용감하게 서울과 광주에서 군대에 대항하여 값진 승리를 거뒀다. ○미얀마 강력한 제재를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인권이 침해되는 지역이 있다.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동티모르도 그중의 하나다. 동티모르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아세안 국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만약 아세안이 책임을 다한다면 많은 고통과 비참한 생명의 손실이 방지되고 국제적인 비난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미얀마에서도 인권침해가 심하다. 그러한 미얀마 상황에 대해 유엔은 비난 결의안을 매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유엔 결의안 이상의 확고한 조치가 필요하다. 미얀마 국민과 국제사회를 속인 미얀마 군사정권에 대해서는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종차별 정권에게 유엔총회에서 의석을 주지않은 것처럼 유엔 회원국 자격을 박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60년대와 70년대를 통해 우리는 기본적 인권과 근본적인 자유는 집단적인 권리를 옹호하는 공산세계에 대항한 서구의 개념이라고 들어왔다. 옛 소련이 이끈 동부와 중부유럽은 이데올로기에 인권을 주입시켜 유엔인권단체에서 탈퇴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공산주의 붕괴 후에 이런 논리는 전제주의와 군사독재가 남아있는 특정 아시아국가로 전용됐다. ○인권침해 비난 당연 인권침해는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났든 반드시 비난받아야 한다. 비정부기구(NGOs)및 남과 북의 민주정부는 세계에서 인권 최하위국들(쿠바,인도네시아,이란,이라크,수단,자이레)에 의해 결성된 동맹을 와해시키기 위해 확고한 인권수호의 의지를 나타내야 한다. 인권에 대한 논쟁은 선진국과 후진국사이의 갈등의 요소가 돼선 안된다. 그보다 오히려 민주주의 국가와 인권침해를 일으키는 몇몇 공산정권 사이에 이상과 원칙사이의 투쟁이 돼야 한다.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법치를 바탕으로 한 민주국가와 NGOs의 전략적 동맹을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 보장을 보다 확고하게 할 수 있다.
  • 日 오부치 내각/경제위기 극복 최대 과제

    경제위기가 일본의 내각을 바꿔 놨다.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내각이 아시아 경제위기에 휘말리면서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총사퇴하게 됐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내각의 최대 과제는 경제위기 극복. 일본도 경제구조의 재편과 사회구조의 개혁으로 한동안 뒤숭숭할 것이다. 조금의 시간차는 있지만 한국의 ‘국민의 정부’와 같은 과제를 안고 비슷한 상황에서 출범하는 오부치 내각의 행보를 더듬어 본다. ◎경제정책/오부치·미야자와·사카이야 3각구도안서 틀 잡아갈듯/금융개혁·경기부양책 강력 추진 예상 일본의 경제정책은 3각 구도안에서 틀을 잡아갈 전망이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를 꼭지점으로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대장상과 경제평론가 출신의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 경제기획청 장관이 두점을 이룰 것이다. 총론은 오부치 총리의 몫이 될 것같다. 총재 선거 유세를 통해 먼저 내수를 촉진시키기 위해 소득세와 법인세를 영구 감면하되 규모를 6조엔으로 늘이겠다고 밝혔다. 금융기관의 정보공개와 경영책임을 추궁하되 재정개혁법은 동결시키겠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내수를 늘이고 금융개혁으로 지금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얘기다. 각론은 미야자와 대장상과 사카이야 경제기획청 장관이 정리할 것 같다. 미야자와 대장상은 금융의 귀재. 경력을 보자.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서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91년 11월부터 1년10개월동안 총리를 지내면서 경제기획청 장관과 대장상을 지낸 경험을 살려 효율적인 재정운용을 통해 침체된 경기를 성공적으로 끌어 올렸다. 지난해 11월부터 자민당 금융시스템안정 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금융기관 부실채권 처리대책으로 가교(架橋)은행 설립 방안을 내놨다. 철저한 금융 개혁과 함께 과감한 경기부양책을 과감하게 밀고 나갈 것이라고 짐작케 하는 대목들이다. 사카이야 장관은 각 분야에서 행정규제 완화와 구조조정에서 역할을 할 것같다. 도쿄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통산성에 들어 갔다가 78년 공업개발원 연구개발관을 끝으로 18년간의 공직생활을 청산한다. 행정개혁추진 500인 위원회 대표 추진위원으로 일하면서 작은 정부와 지방분권 추진,교육 자유화 등을 주창해왔다. 또 갖가지 정보의 공개와 정치의 신뢰 회복에도 목소리를 높여왔다. 오부치 총리를 비롯한 이들이 하나같이 구조적인 불황 탈출과 함께 개혁을 역설해온 인사라는 점에서 경기회복 대책이 과감하게 추진될만은 확실해 보인다. ◎외교정책/미·일 정상회담 최우선 추진/江澤民 9월 방일 계기 對中관계 강화 나설듯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 외상으로 이어지는 새 내각은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전 총리의 퇴진으로 중단됐던 미·일 정상회담을 우선 추진할 것이다. 때는 당장이 아닌 오는 9월쯤이 될 것같다. 유엔총회 참석에 때 맞춘 것 같지만 실은 시간을 벌어 입지를 다져 보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경제회복과 관련,감세조치,부실채권 처리 등 눈에 보이는 실적을 회담장에 지니고 가려는 것이다. 영토 반환을 최대 과제로 삼고 있는 러시아와의 외교에도 예전처럼 무게가 실린다. 러시아에 대한 외교 전략은 정상간에 신뢰관계를 북돋우는 것. 하시모토 총리의 퇴진으로 평화조약 체결 교섭이 주춤거리지 않을까 우려됐으나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오부치 총리는 국내 형편이 호전되는 대로 지난 4월 옐친 대통령의 방문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러시아를 방문해 국경선 획정 문제 등을 논의할 전망이다. 오는 9월로 예정되어 있는 중국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의 일본 방문은 새 내각의 외교적 성과로 기록될 판이다. 중국의 국가원수로선 처음인 장 주석의 방문을 계기로 중국과의 관계를 한 단계 끌어 올린다는 목표를 추진하고 있다. 다만 미·일 안보체제의 재정립 내지 강화에는 다소나마 차질이 우려된다. 참의원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야당측이 변수가 된다. 이번 임시국회에서 신(新)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관련 법안이 본격 심의될 것이지만 결과는 두고 볼이다. ◎파벌/오부치파가 최대… 각료 6자리 차지/맹종태도 퇴색… 정치계산 따라 이탈 일본 정치는 흔히 주요 정당들의 파벌 움직임을 들여다 보면보인다고 한다. 새로 출범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내각은 파벌정치에 희미하나마 틈새를 보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오부치 내각도 파벌 정치의 산물이다. 예전에 없이 ‘무파벌’의 민간인을 기용하는 파격도 보였지만 기본 틀은 바뀌지 않았다. 총리 자신을 비롯,자민당내 최대 파벌인 오부치파는 자치상 등 각료의 6자리를 차지했다. 미야자와파는 미야자와기이치(宮澤喜一)대장상을 비롯,5자리,미쓰즈카파는 3자리를 각각 차지했다. 고모토파와 와타나베파는 각각 2자리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철옹성같은 자민당의 파벌정치도 예전같지는 못했다. 오부치 총리는 총재선거 초반 젊은 의원들이 막후 밀실정치에 반발하며 투명하고 공개적인 경쟁에 의한 총재 선출을 주장하는 바람에 경선을 치러야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같은 파의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靜六) 전 관방장관이 경선에 나서는 이변도 겪어야 했다. 파벌 영수가 나눠주던 정치자금의 액수나 소선구제 아래의 공천보장도 예전같지 못한 것도 보수의 권위와 파벌의 응징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파벌의 틀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예전처럼 파벌에 맹종하는 태도는 눈에 띄게 퇴색되고 있다. 자신의 정치적 계산과 파벌내 소그룹의 이해를 위해 다른 파벌과도 손을 잡고 보수에 반기를 드는 새로운 정치문화가 일본 정계에서도 서서히 모습을 그려가고 있다. ◎知韓派/오부치 총리가 대표적/고무라 외상·다케시타 의원도 후원자/경제계선 이마이 경단련 회장 꼽혀 【도쿄=黃性淇 특파원】 일본의 새 내각에서도 한일관계는 역시 각계의 지한파(知韓派) 인사들이 주도해 나갈 것이다. 대표적인 지한파라면 역시 제84대째인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 일한의원연맹 창립멤버로 지금은 부회장이다. 지난해 12월과 올 3월에 서울에서 있었던 외상 회담에 참석하면서 이미 金大中 대통령과도 만났다. 외상으로 발탁된 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씨도 낯익다. 96년부터 외무성 정무차관으로 일해왔던 터다. 오부치 총리의 정치적 스승인 다케시다 노보루(竹下登)씨도 한국적 정서를 이해하는 정치인. 일한의원연맹 회장으로 일본 정계의 든든한 ‘후원자’인 셈이다. 일한 친선협회장을 맡고 있는 미쯔스카 히로시(三塚博)의원도 한일관계를 음양으로 돕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계 인사로는 수십년간 일한 경제협회장을 맡았던 하쿠라 노부야(羽倉信也)씨와 현 회장인 후지무라 마사야(藤村正也 미쓰비시 머티어리얼 회장)씨가 꼽힌다. 한국의 경제인과 교분이 두텁다. 경단련(經團連)의 이마이 다카시(今井敬) 회장도 한국 경제인들과 교류가 잦다. 2002년 월드컵 일본조직위원장 나스 쇼(邦須翔 동경전력 회장)씨가 체육계의 대표적인 지한파라면 아사리 게이타(淺利慶太)씨는 문화계 대표. 이밖에도 적잖은 지한파 인사들이 있으나 건전하고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국력 신장과 함께 신뢰를 쌓아가는 노력들이 뒤따라야 할것 같다.
  • 올해의 인권상 수상 연설문

    먼저,오늘 나에게 영예로운 인권상을 수여해 주신 국제인권연맹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국은 금년 2월에 한국 국민이 그토록 염원하던 여야간 정권교체를 50년만에 처음으로 이루어냈습니다.그것은 아시아에서 이룬 또 하나의 민주주의의 승리였습니다.지금 한국은 유엔인권위원국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인권보호를 위한 국제적 노력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결과는 한국 국민이 기나긴 고난과 고통의 시간속에서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전진의 발걸음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오늘의 이 인권상은 내가 받을 영광이 아니라 나와 함께 투쟁하며 민주주의를 쟁취해 낸 우리 한국 국민에게 돌아가야 할 영예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세계 각국의 언론인으로부터 ‘당신이 대통령이 될 것으로 예상했었느냐’하는 질문을 자주 받았습니다.그에 대한 답변은 두가지였습니다.하나는 ‘우리 국민은 반드시 민주주의를 회복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만일 죽지 않으면,나는 국민을 위해서 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라는것이고,다른 하나는 ‘내가 비록 이대로 죽는다 하더라도 인권과 정의,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사람은 역사속에서 패배하는 일이 결코 없기 때문에,나는 우리 국민과 역사속에서 반드시 승리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은 금년 2월에 그토록 염원하던 여야간 정권교체를 50년만에 처음으로 이루어냈습니다.그것은 아시아에서 이룬 또 하나의 민주주의의 승리였습니다.한국은 유엔인권위원국의 당당한 일원으로 인권보호를 위한 국제적 노력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금년은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된지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그러나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권력과 금력의 폭압 앞에 인권이 유린되고 있으며,인권운동가들의 투쟁 또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지역적 특성이나 문화적 특수성이 인권침해를 합리화할 수 없습니다. 세계에서는 그동안 ‘아시아적 가치’라는 것이 널리 논의되어 왔습니다.아시아에는 서구적 개념의 인권이나 민주주의의 철학과 전통이 없다는 것입니다.그리고 경제건설을 위해서는 인권이나 민주주의는 희생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아시아에도 서구 못지 않은 인권사상의 철학적 기반이 있었습니다.중국의 맹자는 서구 민주주의의 철학적 시조인 존 로크보다 2,000년을 앞서서 ‘임금이 백성을 위해서 선정을 베풀지 않으면 백성은 이를 쫓아낼 권리가 있다’는 주권재민론을 주장했습니다.부처님도 ‘천상천하에 내 인격이 제일 존귀하다’고 말했습니다.우리나라의 민족종교인 동학에서도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서구보다 2,000년 앞서서 중국에서는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오늘의 군현제도를 실시했습니다.또한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아무리 고관의 아들도 공개 국가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간부직 관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누구도 인권을 위해 싸울 수가 없습니다.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선배영웅들은 이번에 유엔인권위원회가 ‘인권옹호가 선언’을 채택한 것을 지하에서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나는 이 선언이 금년말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난 반세기동안 인권수호의 고귀한 사명에 헌신해온 국제인권연맹과 인권분야 비정부기구(NGO)의 활약상에 대해 찬사를 보냅니다. 한국의 새 정부는 명실상부한 ‘국민의 정부’로서 국민 개개인의 인권문제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그 일환으로서 인권법 제정과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등 제도적인 인권수호 방안을 적극 추진하고 있습니다.나아가 지구촌 도처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한국이 세계의 모든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면서,인권옹호가와 국제인권연맹의 헌신에 동참하는 것을 매우 기쁘고 영광스러운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 원점으로 돌아간 중동평화/이軍 ‘팔’시위대에 발포 참사

    ◎진전없는 협상 노력에 종지부/美·유엔 중재불구 해빙 힘들듯 한동안 지속되던 중동 평화정착을 위한 노력이 일거에 물거품이 되면서 중동지역의 앞날에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14일 가자지역 등에서 빚어진 유혈참극이 불길한 전조다.이스라엘 건국으로 나라를 잃은 것을 애도하는 ‘알­나크바(재앙)’기간을 맞아 행진을 벌이던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군이 충돌,팔레스타인 9명이 죽고,4백여명이 다친 것이다.96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치안군간 총격전으로 팔레스타인인 70명과 이스라엘 병사 15명이 숨진 사건 이후 최악의 사태다. 이번 사태는 그렇지 않아도 삐걱거리던 중동 평화협상 무드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다.지난해 3월 팔레스타인에 강경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동예루살렘 지역에 유태인 정착촌 건설을 강행한 이래 중동평화협상은 15개월째 교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이에 반발한 팔레스타인측도 과격 회교단체들이 협상을 거부하면서 이스라엘을 겨냥한 테러를 잇따라 감행해 왔다. 때문에 이번 유혈사태는 양측간 뿌리깊은 적대감과 불신감이 표출로 받아들여진다.단순한 우발적 충돌이 아니라는 얘기다.그런 만큼 중동평화 협상의 정상궤도 재진입도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운 분위기다.양측 최고지도자들의 사건 직후 반응에서도 그러한 기류가 감지된다.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충돌 직후 라디오방송 연설에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독립국가를 수립해 ‘나크바’를 종식시킨다는 오랜 꿈을 실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반면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는 팔레스타인의 시위를 겨냥,이스라엘을 해치기 위한 폭력사태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했다.특히 이스라엘측은 충돌후 탱크와 장갑차를 가자지구의 국경부근에 근접배치,‘무력시위’에 들어갔다. 물론 국면 반전의 계기는 남아 있다.우선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임하는 미국이 적극적 중재에 나설 참이다.사태가 완전히 파국에 이르기 전에 유엔도 어떤 형태로든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팔레스타인 당국은 이미 유엔 사무총장,유엔총회 의장,안보리 의장에 서한을 보내 대응조치를 촉구했다. 그럼에도 조기 평화정착 전망은 밝지 않다.한동안 양측간 불신의 골이 오히려 깊어질 것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요르단강 서안 병력철수를 둘러싼 미국­팔레스타인측과 이스라엘의 대립이 전혀 진전을 보지 못한 채 감정싸움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이처럼 어두운 중동 평화협상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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