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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전후 좌익 등 민간인 학살도 규명”

    북한군과 좌익세력 등 6·25전쟁 전후 적대세력에 의한 집단희생사건에 대해 첫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양평적대세력사건’과 ‘주문진지역 양봉열 외 4인의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고 20일 밝혔다.‘양평적대세력사건’은 1950년 9월26일에서 30일 사이 후퇴하던 인민군과 정치보위부 내무서원에 의해 양평군 주민 600여명이 집단희생된 사건이다. 진실화해위는 “희생자들은 주로 우익단체원이나 공무원 및 부농 등으로, 국군과 유엔군에 협조했다고 판단한 적대세력이 이들을 양평면 한강변 백사장으로 끌고 가 집단총살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희생자들 중 대한청년단원이 31명, 공무원 12명, 국민회와 대한국민당원이 7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진실화해위는 또 50년 4월5일 양봉열씨 등 대한청년단원 4명이 인민군에게 의해 산채로 매장당한 ‘주문진 지역 양봉열 외 4인의 희생사건’에 대해서도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외국 전문가 진단

    ■진징이 베이징대 조선문제硏 소장 “힐 방북때 교감 있었을 수도” 북한이 이 시점에서 미국에 군사회담을 하자고 제안한 주요 원인은 결국 ‘핵 문제’다. 핵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어 보려는 의도로 보인다. 북핵을 둘러싼 전반적인 상황이 나쁘지 않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진전을 이루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군사회담의 의제로 내건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전보장과 관련한 문제’는 그간 북한의 일관된 요구와 주장이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 체제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유엔 대표도 같이 참가하는’이라는 표현을 적시한 것은 정전협정 논의가 북한과 미국 관계를 뛰어넘는 유엔군이 포함돼 있는 다자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과의 역학관계 등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중국은 한반도 정전협정의 주체 중 일원이다. 미국과의 교감이 있었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중요하다. 양측은 관계개선이란 점에서나 평화체제 구축이란 점에서 서로 같은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때 어떤 논의가 있었을 수도 있다. ■이종원 일본 릿쿄대 교수 “북핵문제 초점 흐려질 가능성”북·미 군사회담은 북핵 문제의 진전에 따라 자연스럽게 제기될 수밖에 없는 수순이다. 북·미간의 돌파구로 작용할 수 있다. 실제 북핵이 해결되면 미사일 문제 등도 부각될 가능성이 컸었다. 그러나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군사회담까지 다뤄질 경우, 북핵 문제의 초점이 흐려질 수 있다. 자칫 ‘물타기 게임’으로 변질, 북핵 문제가 지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점에서 미국이 선뜻 응할지 회의적이다. 평화체제 문제에서는 당사자인 한국도 보다 확실한 입장을 보여야 한다. 일본은 북·미 군사회담까지 이뤄지면 미국을 비롯,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적 관계에서 더욱 소외될 우려가 큰 탓에 강한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 북·미관계에 대한 두 나라의 이해관계는 일치한다. 북한은 부시정권 체제에서 평화·안전에 대한 보장을 기대한다. 미·중 사이에 균형을 잡으려는 전략일 수도 있다. 미국은 북핵 해결을 외교적 업적으로 삼기 위해 의욕을 보이고 있다. ■그레그 싱글턴 美육군대령 “한·중 참여없인 합의 어려워” 우선 나의 코멘트는 미군이나 국립전쟁대학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시작하겠다. 미군은 북한이 제안한 군사회담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설령 미북 군사회담이 이뤄지더라도, 거기에서는 아무런 합의가 나올 수 없다. 합의가 이뤄지려면 반드시 한국과 중국이 참여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 프로세스’는 한국과 중국을 배제하고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지적해야 할 부분은 북한이 아직까지 영변의 핵 시설을 중단하거나 폐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미 2·13 합의에 따라 영변 핵 시설 폐쇄를 대가로 받기로 한 중유를 한국으로부터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북한은 분명히 대가는 받고 행동은 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제안은 북한이 영변 원자로를 폐쇄하는 또다른 대가를 얻어내려는 의도가 아닌가라는 의심도 하게된다. 북한 정권은 늘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그 안에서 이익을 취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번 제안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서는 잃을 것이 없는 카드라고 생각할 것이다. 미국이 제안을 받아들여 미북 군사회담이 이뤄지면 북한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주도하는 모양새가 된다. 또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완고한 미군이 한반도 평화를 논의하는 회담에 반대했다.”고 선전할 것이다. 만일 미북 군사회담이 이뤄지면 그것은 6자회담 밖에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6자회담은 한반도의 비핵화에만 집중해야 한다. 일본인 납치나 미군 유해 송환, 그리고 이번에 제안된 북미군사회담 등은 6자회담 밖에서 이뤄지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 [국방硏 한반도 안보전략 보고서] “군비감축은 남북연합 단계에 추진”

    [국방硏 한반도 안보전략 보고서] “군비감축은 남북연합 단계에 추진”

    서울신문이 단독 입수한 국방연구원의 ‘한반도 안보상황 진전 대비 군사분야 추진전략’이란 보고서는 북한의 핵폐기 이행조치와 연계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한다는 기조 아래 ‘4단계 로드맵’을 제시한 것이 특징이다. 핵 폐기 과정을 세부단계로 쪼개 협상력을 높이려는 북한의 ‘분할 전술’에 맞선 일종의 ‘역(逆)분할 전술’인 셈이다. 구체적으로 보고서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준비단계(현재∼종전선언) ▲진입단계(종전선언∼평화협정) ▲전환단계(평화협정∼평화공존) ▲정착단계(평화공존∼남북연합)로 나눠 제시하고 있다. ●종전선언, 미국에 ‘선수’치기? 준비단계는 북한이 2·13합의 이행을 완료하기로 돼 있는 2007년 말까지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주도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종전선언을 제안해야 한다는 것도 이 시기의 전략이다. 보고서가 우려하는 것은 미국이 먼저 종전선언을 제안함으로써 논의의 주도권이 미국으로 넘어가는 상황이다. 평화프로세스의 주역이 미국과 북한이 되고 한국은 들러리에 머무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6년 하노이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 당시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종전선언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북한도 1996년 외무성 담화를 통해 평화협정 체결 전까지 정전협정을 대신해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잠정협정’체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보고서는 “미국이 북한의 2·13합의 이행을 유도하기 위해 먼저 제의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만약 우리측의 종전선언 제안에 북한과 미·중이 화답한다면 다음 수순은 남북 정상회담이나 남·북·미·중 4자정상회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보고서의 관측이다. ●평화협정 ‘2+2´ 형태 제시 종전선언 이후 체결될 평화협정에 대해서는 남북이 주체가 되고 미·중이 보장하는 ‘2+2’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한반도 비핵화가 완료된 뒤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북핵폐기가 가시화되는 단계에서 비핵화와 냉전구조 해체를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협정이 체결될 가능성도 있다.”며 평화협정 역시 우리 정부 주도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평화협정 추진단계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유엔사령부의 기능전환 문제다. 일단 종전선언에 서명하게 되면 유엔사의 존폐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엔사는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유엔 안보리 결의로 탄생,1953년 정전협정 체결 땐 참전 16개국을 대표해 유엔군 사령관이 서명함으로써 정전협정의 유지·관리를 책임지게 됐다. 정전협정을 대체해 평화협정이 맺어지면 유엔사는 창설목적을 달성하고 해체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보고서는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북한에 적대적인 기능보다는 종전선언 이행을 감시하기 위한 국제적 감시기구로 기능을 전환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문제는 평화협정 체결 이후에도 유엔사를 존치시키려는 구상이 함께 담겨 있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유엔사령부가 해체된다면 새로운 유엔결의 없이는 (유사시)국제사회의 군사지원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된다.”면서 “유엔 결의를 통해 유엔사를 한반도 국제평화보장기구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북한이 유엔사를 정전체제와 북·미 적대관계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즉각 해체를 요구해온 사실을 고려할 때 유엔사 문제가 평화협정 체결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더라도 군비증강 기조를 유지한다는 내용도 주목된다. 보고서는 “평화공존기에도 한반도 안정을 위한 군비증강과 현존장비 정예화 등의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며 실질적인 군축을 남북 연합군사령부가 창설되는 남북연합 추진 단계로 미뤘다. ●군비증강 기조는 유지 논란이 예고되는 부분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사이인 ‘진입단계’의 군사 전략이다.“북한을 제압하고 군비통제 협상 테이블로 유도하기 위해 군사력 증강을 지속 추진한다.”는 내용은 북한의 강한 반발을 부를 수 있다. 평화협정 체결의 2대 난제인 유엔사와 군축문제에 있어 군과 국방부의 보수적 기조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종전선언 이후에도 평화협정 체결을 둘러싸고 지루한 밀고당기기가 이어질 수 있음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홍순영 칼럼] 나라의 성장과 발전

    [홍순영 칼럼] 나라의 성장과 발전

    1945년 광복 이후 60여년간의 나라의 성장과 발전을 회고하여 본다. 이승만 시대에 이룩한 자유민주주의 가치관에 입각한 정부수립 그리고 북한의 남침에 저항하여 나라의 자유를 지킨 국가정체성 확립의 시대. 이승만은 그때에 이미 스탈린 소련이 주도하는 국제공산주의의 팽창정책을 예견하였으니 우리는 역사를 내다보고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관을 수호한 훌륭한 건국의 지도자를 가졌었다. 그후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과 새마을운동. 박정희는 한국을 수천년의 빈곤으로부터 구출하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기백을 가지고 동아시아의 네 마리 용의 등장을 선도한 선각자이었다. 그 이후 문민대통령 시대의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 제도와 관행의 정착, 그리고 현재의 노무현 정부에 의한 세계화 흐름에의 동참, 미국과의 FTA 체결로 세계화의 큰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 이것이 광복 후 나라의 성장과 발전의 큰 4단계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시대가 다 큰 혼란과 동요를 수반하면서 그러나 줄기차고 분명하게 건국, 경제입국, 민주화, 세계화의 큰 단계적 성취를 이룩하여 왔다. 지난 60여년의 성장과정에 있었던 혼란과 동요 속에서 어느 편에 서 있었든지 간에 많은 희생과 희생자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어느 지도자에게도 그를 매도하고 거부해야 할 압도적 이유가 있다고 판단되지는 아니한다. 이러한 모든 성장과정이 역사의 큰 흐름과 맞았기 때문이다. 나라가 오늘날의 발전수준에 와있다는 점을 평가하고 싶다. 또 한가지 이러한 발전의 4단계가 모두 한·미 맹방관계를 그 기반으로 하고 가능하였다는 점이다. 한·미관계는 큰 틀로 보면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지향한다는 가치관의 공유로 인하여 확고하게 유지·강화되어 왔다는 점을 인정하여야 한다.6·25 전쟁 중에 유엔군의 전사자가 5만여명이나 있었다는 점, 그리고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있어서도 미국의 권장과 ‘압력’이 일관되게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음 다섯번째 나라의 발전단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남북간의 평화공존 그리고 자유와 풍요의 북한땅에의 확산이다. 평화공존은 남북간에 투명한 협력과 교류를 증진하고 그리고 종당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라는 가치관의 공유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 기간의 길이와 절차를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다섯번째의 발전은 일본의 지배에서 독립한 것에 비교할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다. 자유통일한국의 시작이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것이 오늘의 나라의 과제이다. 자유통일한국의 성취를 위한 기초작업은 우리가 표방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관을 거듭 확인하고 강화하는 일이다. 평화공존의 기준과 목표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증진함에 있다는 엄숙한 진리, 그래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 자주나 통일보다 우선하는 가치라는 점을 재확인하는 일이다. 미국은 다만 군사력이나 과학기술력으로만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자유정신을 건국의 기본이념으로 삼고 있고 링컨의 노예해방, 마틴 루터 킹의 흑인 인권운동을 선도한 나라이다. 개인의 창의와 자유를 존중하는 시장경제를 선도하는 나라이다. 러시아가 주도해온 공산주의 국가들은 이제 모두 자유와 인권의 큰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자유화·세계화로의 큰 역사적 행보를 우리는 북한에 보여주어야 한다. 북한에 간청하거나 협박하지 아니하고 역사의 흐름을 가르치고 보게 하는 당당한 지도력을 발휘하여야 한다(leadership by example). 통일한국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아니하는 평화지향의 자유민주주의의 나라임을 거듭 천명하여야 한다. 통일한국의 날을 앞당기는 일에 조급하지 아니하다고 선언하여야 한다. 통일은 한국의 과제이면서 국제공동체의 과제이다. 우리나라는 이 과제를 과거의 성장과 발전을 기반으로 하여 분명히 여유있게 달성할 것이다. 이 과제가 다음 정부, 아니면 그 다음 정부에서 성취되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홍순영 전 외교부·통일부 장관
  • [열린세상] 우리 농업 외롭지 않다/최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

    [열린세상] 우리 농업 외롭지 않다/최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

    6·25전쟁이 들어 있는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57년 전 6월, 전방에 배치된 병력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대규모 침공에 대비한 훈련도 미흡했다. 그 결과 서울을 3일만에 내주었다가 유엔군의 도움으로 석달만에 탈환했으나, 이후 약 3년 동안 온 국민과 국토는 상상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올해 제네바의 여름은 총성 없는 전쟁인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업 협상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의장이 내놓은 제안서에는 가장 민감한 문제인 농산물 관세 감축에 대한 의견도 들어 있다. 여기에는 ‘높은 관세는 많이 인하한다.’는 원칙 아래 90%를 넘는 농산물 관세는 선진국의 경우 최고 85%까지 인하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다자간 협상에서는 유사한 입장을 가진 회원국들이 그룹을 형성하여 활동한다. 우리 협상대표단은 ‘농산물 수입국 그룹’과 ‘개도국 그룹’에 참여하여, 관세 인하율은 가급적 낮추고 개도국에 대한 특별대우는 확대하려 노력하고 있다. 우루과이 라운드(UR) 농업협상에서 인정받은 개도국 지위를 지킴으로써 관세 인하율과 이행 기간에서 조금이라도 충격을 줄이려는 것이다. ‘농산물 수입국 그룹’을 구성하고 있는 국가들은 대개 선진국인 데다가 높은 관세를 매기는 농산물이 상대적으로 적다. 우리와 여건이 비교적 유사한 일본의 농가는 겸업소득이 많아 문제가 덜 심각하다. 반면에 ‘개도국 그룹’은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 1970년대 수준의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독특한 우리 입장 때문에 제네바에서 우리 농업 협상대표는 우군을 찾아 연합전선을 펼치기에 어려운 환경 속에서 협상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 농업의 외로운 입장은 칠레 및 미국 등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자유무역협정은 국가 전체의 이득이 손실보다 크기 때문에 추진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피해 분야로서 농업은 다른 산업 분야와는 물론이고, 혜택을 보는 소비자와도 반대편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농업은 결코 외롭지만은 않다. 품질 좋고 안전한 우리 농산물을 찾는 소비자들이 전국에 분포해 있다. 많은 소비자들이 국내산 농·축산물임을 확인할 수 있고 품질만 보장된다면 가격에 관계없이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보이고 있다. 또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농촌에 가서 살고 싶다는 도시민들의 비중도 매우 높다. 젊은 층들은 농촌의 주거 환경과 교육 여건이 개선된다면 귀농할 사람이 많고, 연세가 드신 분들은 ‘제2의 인생’의 터전으로 농촌을 고려하는 경우가 많다. 서로 이웃하고 있는 경기도 안성시, 충남 천안시, 충북 진천군이 농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합치기로 하였다는 멋진 뉴스가 최근에 전해졌다. 고품질 쌀을 생산하고, 가축질병을 방지하는 데 세 곳의 지방자치단체가 협력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농촌의 외로움과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지자체들이 공동으로 정책을 펴나가기로 한 것은 반가운 결단이다. 이러한 노력이 다른 지역뿐만 아니라, 중앙부처 간에도 확산되기를 바란다. 요즘 농촌 문제가 광역화되고 복잡해지면서 더욱 종합적인 접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독특한 여건 속에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한국 농업에 국산을 선호하는 농산물 소비자와 농촌이주 수요자들이 희망을 주고 있다. 국가 균형발전을 위한 농촌개발의 중요성과 농촌개발에서 차지하는 농업의 중요성은 농업 비중이 감소하더라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농업이 고유의 다원적 기능을 발휘하고 농업인의 삶의 질이 향상될 수 있도록 모두 관심을 갖고 지원 방안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최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
  • [기고] 호국·보훈에 담긴 뜻은/김정복 국가보훈처장

    “삭풍은 칼날보다 날카로워 살을 에는데, 살은 깎이어도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기어도 슬프지 않노라. 차라리 이 머리 잘릴지언정 어찌 무릎을 꿇어 일제의 종이 될까보냐” 독립운동가 이상룡 지사가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면서 지은 시의 일부이다. 우리 민족이 숱한 시련을 극복하고 오랜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민족정신이요 자존심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강인한 정신과 자긍심은 국난을 이겨내는 원동력으로 표출되었다. 누구에게나 가장 귀중한 목숨을 국가를 위해 아낌없이 내놓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행동 중에 최고의 가치를 지닌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것으로 칭송되어 왔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보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라 위해 헌신하신 분들에 대한 응분의 예우를 통해 국민의 애국심을 키우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건강한 국가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진국일수록 나라를 이끌어 가는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고 있다. 국가유공자들이 바로 서지 않고서는 국민의 가치관도 사회정의도 바로 설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나라 위한 헌신이 진정 명예로운 것이 될 때 나라의 장래도 보장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보훈’은 국민 된 도리인 것이다. 선열들의 희생을 현재에 되살리고 미래를 밝히는 가치로 우뚝 세우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시대적 소임이다. 국가보훈은 대한민국의 과거-현재-미래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국제화의 물결 속에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치열한 생존경쟁을 이겨내려면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해소하고 공동체의식을 키워 국가적 힘을 키워나가야 한다. 또한 국가 발전을 이루고 민족 번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국가유공자의 위국헌신 정신을 되살리고 건전한 국민정신으로 승화시켜 국민통합을 이루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에게는 분단된 국토를 통일하고 분열된 민족을 통합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 있다. 그러나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완전한 광복을 이루지 못한 채 분단의 강은 깊어만 갔다. 이러한 때 지난 5월17일 한차례의 시험운행이긴 했지만 50여년 만에 발이 묶였던 철마가 7000만 한민족 통일의 꿈을 싣고 힘차게 달렸다. 이제 북핵문제도 평화적 해결의 가닥을 잡고 있고, 남북관계 개선도 한발 한발 진전을 보이고 있다. 남북의 화해 분위기도 무르익고 있다. 우리는 오늘이 있기까지는 6·25전쟁 때 목숨 걸고 나라와 자유를 지킨 호국용사들과 21개국의 유엔군 참전용사들이 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매년 유엔군 참전용사 초청행사가 이뤄지고 있다. 참전용사들은 한결같이 한국전 참전에 대한 자긍심을 말한다. 우리는 유엔용사들을 통해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라는 참뜻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특히 올해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일으킨 국채보상운동 100년,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일제의 침략상을 알리고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백성이 나라를 위하는 정신이 있는 때는 흥하고 그 정신이 없는 때는 망하는 것이다.”라는 이준 열사님의 가르침은 가치관의 혼란을 극복하고 국가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는 우리에게 살아있는 교훈으로 다가온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 나라를 위해 싸우고 민주화를 위해 애쓴 이들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널리 조성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정복 국가보훈처장
  • [종교건축 이야기] (27) 한남동 이슬람 중앙 사원

    [종교건축 이야기] (27) 한남동 이슬람 중앙 사원

    서울 한남대교에서 남산 터널 쪽으로 차를 달리다 보면 왼쪽 이태원 언덕의 도드라진 이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1976년 세워진 뒤 31년간 그 자리를 지키며 한국 이슬람 총본산 역할을 해온 이슬람교 중앙 사원(모스크·용산구 한남동 732~21)이다. 전국 10개의 이슬람 사원과 선교원,40여개의 이슬람교 예배소를 총괄하는 한국 이슬람의 핵. 많은 이들에겐 그저 호기심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지만 3만 5000여명의 한국 무슬림(이슬람 신도)과 10만여 외국인 무슬림들에겐 절실한 신앙공간이다. 이태원 소방서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보광초등학교 삼거리 왼쪽 길을 택해 오르면 허름한 주택들이 줄지어 선 골목 양쪽에 아랍어 간판을 단 집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이슬람 성서인 코란을 비롯해 아랍 과자·음료수를 파는 가게며 서점, 터키 전통음식을 파는 음식점들이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골목 끝에 서면 푸른색의 아치형 문이 길을 막는다.‘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무하마드는 그분의 사도입니다.’ 이슬람 교리를 가장 극명하게 압축한 문구를 보며 회랑처럼 생긴 오르막길을 올라 너른 마당에 서면 큼지막한 아랍어로 ‘알라후 아크바르’(알라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다)라 쓴 중앙 사원이 눈에 든다. 매일 오전 6시부터 밤 11시까지 5차례의 이슬람 예배가 어김없이 열리는 곳. 한국은 물론 서남아시아와 북부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서 한국에 온 무슬림들의 신앙이 이어지는 이색지대이다. 멀찌감치선 우람하게 비쳐지는 것과는 달리 막상 사원 앞에 서면 아주 단촐한 인상을 받는다. 모스크를 상징하는 지붕 중앙의 돔(쿱바)과 앞쪽 두 개의 높은 첨탑(미나렛), 그리고 돔과 첨탑을 호위하듯 선 자그마한 첨탑들이 건물 외관을 장식하는 모든 것이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을 잘 불러모을 수 있도록 높은 곳에 모스크를 세운 것처럼 한국의 무슬림들도 중앙 사원을 이태원 꼭대기 높은 언덕에 세워놓았다. 사원이 세워진 것은 1976년.6·25전쟁 중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터키 제6여단 사령부의 군(軍) 이맘(이슬람교 예배 인도자), 압둘 가푸르 카라 이스마일 오울루의 전도로 1955년 압둘라 김유도와 우마르 김진규 등 한국 최초의 무슬림이 탄생한 지 21년 만의 일이었다. 중동 붐을 타고 이슬람 국가와의 친교가 긴요했던 무렵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초동 쓰레기 매립장 10만평과 지금의 사원 자리 등 두 군데 중 한 곳을 사원 터로 무상 제공할 뜻을 비쳤다고 한다. 한국 이슬람교가 지금의 부지를 택한 것은 당시 주변에 아랍 상인들과 이슬람 신도들이 모여 살았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태원에 살던 영향력 있는 한국인 신도가 고집을 부렸기 때문인 것으로 전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에선 신도층이 두텁지 못해 사원 건립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구걸하다시피 전 세계 이슬람 나라들에 손을 벌려야 했다.1970년 부지가 확보된 뒤 한국의 무슬림들이 모금 사절단을 구성, 이슬람 각국을 돌아 미화 40만달러를 모았다.1974년 10월 첫 삽을 뜬 지 1년 7개월 만인 1976년 5월 마침내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이슬람 건축물을 세워놓은 것이다. 당시 개원행사엔 17개 이슬람 국가의 장관과 국회의원을 포함한 50여명의 종교지도자들이 참석,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지붕 위의 첨탑인 미나렛은 이슬람의 가장 대표적인 순례지인 사우디아라비아 하람성원의 것을 그대로 본떴다. 미나렛은 무앗진이라 불리는 사람이 올라가 아잔(예배 시간을 알리는 소리)을 외치는 첨탑. 이슬람 전통을 따르자면 매 예배 때마다 무앗진이 이곳에 올라 예배시간을 알려야 하지만 마이크와 스피커로 대신하고 있다. 사무실과 회의실이 들어선 1층에서 계단으로 오르게 되는 2층 예배공간에선 교회나 성당에 흔한 성상이나 초상, 상징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코란 구절만이 빙 둘러 새겨져 있을 뿐이다. 6개의 둔중한 기둥이 떠받치는 중앙 돔과, 양측 벽 위쪽의 아치형 창에서 쏟아지는 자연채광이 바닥의 붉은색 양탄자와 어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예배공간의 중심은 아랍어로 ‘너희들이 어디에 있건 하람성원을 향할 지니.’라 쓰여진 미흐랍. 전 세계의 이슬람 신도들이 예배 때 마음과 몸을 둔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해 만든 예배 방향 표시이다. 그 오른쪽, 예배 인도자인 이맘이 올라서서 설교하는 계단인 민바르도 독특하다.2층이 남자 신도들의 예배공간이라면 3층은 여 신도들의 공간. 남녀를 엄격히 구분하는 이슬람 세계의 문화가 이곳에도 살아 있다.3층 여 신도 공간 앞쪽엔 가리개를 쳐 남자 신도나 예배 인도자조차 여 신도들을 볼 수 없도록 했다. 여 신도들은 이맘의 목소리만 듣고 예배드릴 뿐이다. 평일 5차례씩 열리는 예배 참석자는 매회 40명 정도. 대부분 한남동과 이태원 일대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외국인 무슬림들이다. 평일과는 달리 금요일 오후 1시 특별 예배엔 전국에서 500여명이 몰리며 한국인 신도도 40∼50명 정도가 참석한다고 한다. 예배는 한국인 이맘 2명과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들어온 선교사 2명이 번갈아 인도한다. 라마단이 끝나는 다음날인 이슬람력 10월1일과 이슬람 성천(聖遷)일인 이슬람력 12월10일의 축제일엔 3000명이 모여 신앙을 넘어선 거대한 만남의 장을 일군다. “서구인들이 이슬람교를 왜곡하기 위해 지어낸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란 말 그대로 많은 한국인들은 이슬람교와 교도들을 호전적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이슬람 중앙 사원의 이행래(70) 이맘. 그는 “순종과 평화를 추구하는 이슬람 신자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며 이슬람 사원은 무슬림들의 본 모습을 가감없이 볼 수 있는 평화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kimus@seoul.co.kr ●한반도와 이슬람교 서기 610년경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 무하마드에 의해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이슬람교. 유일신 ‘알라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 ‘코란’을 따르며,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천국에 임할 수 있음을 기초교리로 삼는 일신교다. 신성에 관한 한 어떠한 복수(複數)적 개념도 받아들이지 않은채 ‘가장 훌륭한 일신교도’라는 자부심을 갖고 사는 이슬람 신도, 즉 무슬림은 전세계 13억명. 이 땅에선 1955년 첫 한국인 무슬림이 탄생하면서 신앙이 태동했지만 한반도와 이슬람의 관계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학계에서는 통일신라기 무슬림 상인들의 교역상품이나 이슬람 세계의 것으로 여겨지는 물품들이 흔히 사용된 기록으로 미루어 9세기 중엽부터 이미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처용 일행을 ‘동해안에 나타난 모양과 의상이 괴이한 4명의 자연인’으로 묘사한 삼국사기 기록은 ‘처용가’의 주인공이 아랍인이라는 설을 낳기도 했다.11세기 초 고려기엔 ‘대식(大食)’으로 알려진 아랍 상인들이 고려조정과 교역을 자주 시도했다. 고려사에 ‘1024년,1025년,1040년에 아랍 상인이 100여명씩 무리를 지어 수은이나 몰약을 갖고 개경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슬람의 종교와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여말선초(麗末鮮初)기인 13∼14세기 무렵. 당시 원(元)의 간섭을 받았던 고려조정에는 중앙아시아계의 무슬림들이 대거 진출해 있었다. 이들은 고려사에 ‘회회인(回回人)’으로 기술된 투르크계의 위구르 무슬림들로 수도 개성에 이슬람 성원까지 세웠다고 한다. 조선조 세종 때엔 궁중 행사에 무슬림 대표들이 코란을 낭송하며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도 했으며, 그때 이슬람 역법이나 도자기 기술이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조 유교사상으로 인해 이 땅의 이슬람은 15세기 중엽 이후 썰물처럼 빠졌다. 이후 1920년대 들어 소련치하 소수민족인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한반도에 망명해와 학교며 이슬람 성원을 건립하기도 했으나 해방과 한국전쟁의 와중에 대부분 해외로 이주한 것으로 한국이슬람교 중앙회측은 보고 있다.
  • 北, 또 벼랑끝 전술?

    북한, 언제까지 버틸 것인가. 영변 핵시설 폐쇄, 중유 5만t 지원 등 6자회담 ‘2·13합의’ 초기조치 이행이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자금 해제문제에 발목을 잡혀 지연되고 있는 가운데 북한의 2·13합의 이행 의지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18일 북한이 최근 유엔군축위원회(UNDC)에서 미국의 신형 핵무기 개발을 비난하면서 자국의 핵무기 보유 당위성을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북한대표는 지난 10일 유엔본부에서 열린 UNDC회의 연설에서 “외국의 공격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나라와 인민을 보호하고 제도를 수호하기 위한 자주권의 응당한 행사”라고 강조했다. 그는 그러나 “9·19공동성명과 2·13합의를 이행하려는 우리 공화국의 의지는 변함없다.”고 재차 확언했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미군유해 6구 11일 판문점 송환

    6·25전쟁 당시 전사한 미군 유해가 방북 중인 빌 리처드슨 미국 뉴멕시코 주지사 일행의 귀환과 함께 11일 오전 판문점을 통해 송환된다고 유엔군사령부가 10일 밝혔다. 유엔사 측은 송환되는 미군 유해 수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며 “수구 정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리처드슨 주지사 측은 지난 9일 워싱턴에서 발표한 성명을 통해 북한이 미군 유해 6구를 송환하기로 약속했다고 밝힌 바 있다. 유엔사 측은 송환된 미군 유해에 대한 송환행사를 12일 오전 10시 서울 용산미군기지 연병장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이날 행사에는 북한을 방문, 직접 유해를 인도한 리처드슨 주지사와 앤소니 프린시피 전 미 보훈처장관, 버웰 벨 주한미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유해는 신원확인을 위해 12일 송환행사에 이어 오산 미 공군기지에서 미군 수송기를 통해 하와이에 있는 ‘전쟁포로 및 실종자담당 합동사령부’(JPAC)로 옮겨진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수는 3만 3000여명에 달하며 아직도 8100명의 미군이 실종자 리스트에 올라 있다.미국은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북한과 공동 유해발굴 작업을 벌여 그동안 229구의 미군 유해를 발굴, 이 가운데 27구의 신원을 확인했다.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시론] 전작권 환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김경수 명지대 국제정치학 교수

    [시론] 전작권 환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김경수 명지대 국제정치학 교수

    한·미가 2012년 4월17일자로 한미연합사(CFC)의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군에 이양키로 합의한 지 20여일이 됐다. 이로써 그간 논란이 돼 온 ‘주권국가’ 시비가 사라졌다. 하지만 야당 등 우리 사회 일각에선 ‘안보공백’을 이유로 차기 정부가 환수시점을 재협상해야 하다는 주장을 꾸준히 제기하고 있다. 차제에 전작권 환수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 어떤 과제가 남아 있는지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전작권 환수는 한마디로 ‘비정상적’인 상태를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는 의미가 있다. 주권국가의 핵심인 군사작전권을 외국인 야전군사령관이 행사하는 비극적 현실은 어떠한 이유와 명분으로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해외주둔미군의 지위를 정하는 SOFA협정을 전세계 85개국과 맺고 있으나 한국처럼 주둔국의 야전군 총사령관까지 맡고 있는 경우는 없다. 이런 ‘비정상’이 초래된 배경에는 한·미연합사(CFC)가 있다. 한·미연합사는 1978년 카터 미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정책과 박정희 대통령의 독자 핵무기 개발계획 무산 등에 따른 한·미간 타협의 산물이다. 그러나 90년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주권국가의 핵심인 군사작전권을 외국군이 갖는 데 대한 비판이 비등하면서 94년 말 평시작전권이 한국군에 우선 이양됐다. 하지만 전작권은 아직까지 한·미연합사령관이 갖고 있다. 작전통제권을 ‘평시’와 ‘전시’로 나눈 것도 유례가 없다. 문민정부가 선거공약인 작통권 환수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독자적인 전쟁수행 능력 미비를 이유로 내놓은 궁여지책이다. 당시 리스커시 한·미연합사령관도 “전시와 평시를 분리하면 전쟁을 제대로 준비하기 어렵다.”고 반대했으나 결국 정치적인 선택을 따랐다. 이는 이른바 6개항의 연합권한위임사항(CO DA)을 정해 평시에도 연합훈련, 정보관리, 작전계획작성 등의 주요 군사활동을 CFC사령관의 통제하에 둔 데서도 알 수 있다. 일부에서 제기하는 추가 미군감축 등 ‘안보공백’ 논란은 군사동맹조약의 기능과 성격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원래 군사동맹은 체약국 간에 유사시에 와서 돕는다는 것이지 평시에 군대를 타국에 주둔시켜 방어한다는 개념이 아니다. 또 미국은 우리와 달리 전쟁선포권이 의회에 있고 미군의 해외파병권도 의회가 가지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대한 방위공약이나 미군 감축은 행정협정인 CFC의 설치·해체 교환각서에 의해 구애받는 것이 아니다. 미군 해외파병의 요체는 미국의 국가이익이다. 다행히도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발흥으로 한국이 대북 관계에서 미국을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미국도 한국을 필요로 하게 됐다. 요컨대, 미국이 한국전 당시 30만명의 병력을 파병하고 월남전에 50만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던 것은 국제정치적인 요인이 컸던 것이지 동맹조약이나 파병약속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연합사 해체와 전작권 환수에 따른 보완책은 무엇일까?가장 현실적인 대응책은 유명무실화돼 있는 유엔군사령부(UNC)를 재정비, 강화하는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후속 조약인 합의의사록에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의 작전통제 하에 둔다는 규정이 있고 상황에 따라 한·미간에 협의의 여지를 남겨 놓고 있기 때문에 UNC를 나토형 통합군 편제를 참고, 전시 지휘체계를 일원화하는 방안을 강구해 볼 필요가 있다. 김경수 명지대 국제정치학 교수
  • [6者 ‘2·13 합의’ 한달] 비핵화 이행·北美관계 정상화 관건

    [6者 ‘2·13 합의’ 한달] 비핵화 이행·北美관계 정상화 관건

    북핵 6자회담 ‘2·13합의’ 이후 비핵화 이행과 함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논의가 탄력을 받고 있다.2005년 ‘9·19공동성명’에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라고 명시된 뒤 1년5개월여만에 구체적 추진 논의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지난 1953년 유엔군과 북한, 중국이 체결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평화통일까지 내다보는 개념이다. 동북아 질서를 재편할 만큼 큰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 밑그림과 추진 로드맵 등에 관련 당사국들이 합의하기까지 숱한 선결 과제가 남아 있다는 지적이다. ●“남북이 주도적으로 해야” 통일연구원 허문영 평화기획실장은 12일 “한반도 평화체제는 한반도 평화의 회복과 유지는 물론, 나아가 통일을 지향하고 기여할 수 있는 체제”라면서 “민족자결 원칙과 당사자 해결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평화체제 최대 당사자인 남북이 주도권을 갖고 기존 남북기본합의서를 이행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함과 동시에 미·중 등은 보장국으로서 다자적 한반도 평화협정에 참여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허 실장은 설명했다. 통일연구원이 마련한 한반도 평화체제 로드맵(표)에 따르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단계별로 동시에 이행하면서 동북아와 남북이 각각 관계정상화 및 군축 등을 추진하는 방향이 제시됐다. 과거 남·북·미·중 4자회담이나 남북고위급접촉 등에서 남측은 선(先) 비핵화, 후(後) 평화협정 체결을 제시한 반면 북측은 미측의 안보 위협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화체제를 먼저 구축한 뒤 비핵화 등 신뢰구축에 나서자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최근 6자회담 이후 비핵화 과정이 시작된 상황에서 선후 개념보다는 단계와 수준을 종횡으로 결합한 병행안이 추진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평가된다. ●풀어야 할 과제도 산적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동시에 진행한다는 큰 그림에는 당사국들간 이견이 없어 보이지만 각론에선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지향점은 같지만 국익에 따라 요구사항이 달라 목표 도달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평화협정 이후 한반도와 동북아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구체적 계획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먼저 비핵화의 순조로운 이행과 함께 북·미 관계정상화가 관건이다. 비핵화 초기단계 이행이 시작된 만큼 완전한 핵폐기가 이뤄져야 비로소 평화체제가 구축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평화체제 논의시 한·미와 북·중이 가장 큰 이견을 보여온 주한미군 문제는 언제든지 다시 불거질 수 있다. 정부 소식통은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지만 한·미는 평화협정 이후 평화체제 유지를 위해서라도 주한미군은 필요하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남북 군사당국회담 실시, 서해 북방한계선(NLL) 재획정 문제, 국가보안법 문제 등도 남북이 풀어야 할 어려운 과제다. 한반도 평화체제는 동북아 평화·안보체제와 직접 연결되는 만큼 단순히 정전협정이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으로 바뀐다고 해서 평화체제가 구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처절한 대비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신안보연구실장은 “종전선언이라는 중간단계를 거치면 한반도 냉전체제는 해체되지만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지 않는 상황이 올 수 있다.”며 “평화협정에 따른 관리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 실장은 이어 “동북아의 기존 안보질서가 해체되면서 새로운 안보체제를 만드려면 시간이 걸리고, 그 기간 중 한반도는 평화통일의 기반을 닦거나 오히려 분단이 고착화되는 기로에 설 수 있다.”며 “동북아 질서재편 과정에서 한반도가 각축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대북정책과 한·미동맹 등이 흔들리지 않고 추진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6者 ‘2·13 합의’ 한달] 군축검증·주변국이해 얽혀 진통클듯

    차기정부 임기 안에 평화체제 전환의 극적 돌파구가 마련될 것이란 외교라인 일각의 낙관론과 달리 군과 안보전문가들의 시각은 조심스럽다. 평화체제는 근본적으로 ‘군사적’ 문제가 중심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남북간의 정치적 신뢰가 쌓이더라도 실질적인 군사적 긴장완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중론이다.●“핵 폐기와 재래식 군축은 별개 문제” 정전협정을 대신할 평화협정 역시 논의의 중심엔 군사적 이슈들이 자리잡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 용역으로 평화협정문 시안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던 한국국방연구원(KIDA)의 전경만 책임연구위원은 “50여개 조항 가운데 40개 이상이 군사적 사안”이라면서 “구조적·운용적 군비통제(군축)의 경우엔 상호 검증 등 복잡한 문제들이 걸려 있어 성과를 내기까지는 상당한 진통을 겪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합참 관계자도 “재래식 무기 감축을 합의하려면 한반도 주변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서도 남북의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면서 “다양한 국내·외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합의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유엔사령부, 강화냐 해체냐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 가장 민감한 군사적 사안이 유엔군 사령부 존속문제다. 유엔사는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유엔 안보리 결의로 탄생,1953년 정전협정 체결 땐 참전 16개국을 대표해 유엔군 사령관이 서명함으로써 정전협정의 유지·관리를 책임지게 됐다. 따라서 정전협정을 대체해 평화협정이 맺어지면 유엔사는 창설목적을 달성하고 해체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유엔사의 미래에 대해서는 이해당사자마다 입장이 엇갈린다. 신속기동군으로의 전환을 노리는 주한미군으로선 한반도 방위에서 유엔사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북한은 정전체제와 북·미 적대관계의 상징인 유엔사의 즉각 해체를 요구하고 있다. 주한미군의 지위문제와 관련, 평화협정 체결 이후에도 ‘지역 안정자’ 역할을 위해 한반도에 주둔해야 한다는 한·미 입장에 대해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관심거리다.●“한·미 연합연습 조정 불가피” 한반도 전쟁억제와 군사대비태세 강화를 위해 한·미 양국이 매년 실시하는 연합전시증원(RSOI), 독수리(FE)연습과 을지포커스렌즈(UFL)연습 등도 논란의 불씨를 안고 있다. 방어 목적의 연습이라는 한·미 당국의 공식적 해명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북침을 위한 전쟁연습이라며 반발해왔다. 국방부 관계자는 “평화체제 구축과 한·미 합동연습은 별개 문제”라면서도 “(쟁점화된다면) 훈련시기와 횟수, 규모 등은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는 있지 않겠냐.”는 입장이다. 일각에선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전제로 진행해온 군의 각종 전력증강 사업도 큰 폭의 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사설] 전작권 환수, 논란 끊고 준비에 만전을

    한·미 국방장관이 한반도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일정에 합의했다. 한·미연합사령관이 갖고 있는 전시작전권을 2012년 4월 한국군이 넘겨받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유엔군에 넘겨준 작전통제권을 62년 만에 온전히 되찾게 된다. 우리 안보를 우리가 책임지는 자주국방 주권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는 점에서 전작권 환수의 의미는 값지다. 우리가 침략을 받아도 미군의 지휘통제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 군 스스로 작전을 펴고 미군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우리를 지원하는 형태로 방위체제가 바뀌는 것이다. 조기 이양을 주장하던 미국이 한국정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2012년 이양키로 한 것도 한·미 안보동맹 차원에서 소중한 결실이라 하겠다. 이제 중요한 것은 독자적인 작전수행을 가능케 할 국방력을 갖추는 일과 이를 뒷받침할 국론의 결집이다. 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권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안보공백을 메울 첨단전력 확충이 시급하다. 앞으로 5년간 151조원을 투입해 감시·정찰, 정밀타격 전력을 강화하기로 한 정부의 전력증강 계획에 차질이 없어야 한다. 한·미연합사를 해체하는 대신 한국군 합동사령부와 주한미군 사령부를 연결할 군사협조본부(MCC)를 설치하고,‘연합사 작전계획 5027’을 대신할 새 작전계획을 수립하는 일도 중요하다. 온 국민의 일치된 노력이 필요한 때다. 일부 보수진영에서 전작권 환수를 북핵 해결 뒤로 미루자거나, 심지어 다음 정권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북핵은 6자회담 틀에서 다뤄지고 있으며, 전작권과 관계없이 미국의 핵 억지력으로 대응할 사안인 것이다. 전작권 환수를 둘러싼 소모적 논쟁은 이만 끝내고 이제 안보 공백을 메우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 [작통권 환수] 유사시 ‘군사협조본부’서 공동방위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합의에 따라 60년 넘게 이어져온 한·미 양국의 군사동맹구조도 일대 변혁을 맞게 됐다. 특히 1978년 창설 이후 한반도의 실질적인 군사지휘부 역할을 해온 한미연합군사령부는 이번 합의로 34년 만에 사라진다. 연합사의 해체는 양국의 군사동맹구조가 지금의 ‘연합방위체제’에서 ‘공동방위체제’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합동군사령부와 주한미합동군사령부가 유사시 공동으로 작전을 벌이는 ‘수평적’ 구조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1977년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이 주한 미 2사단을 철수시키겠다고 선언한 뒤 한·미 양국은 작전지휘체계를 효율적으로 통합해 한국의 방위력을 증진하려는 목적에서 연합사 창설을 본격 논의하게 된다. 이후 1978년 11월7일 용산기지 안에 연합사가 창설됐다. 이에 따라 유엔사령부가 맡아온 한국방위 임무를 연합사가 담당하고 유엔사는 정전협정 유지 책임만 맡게 됐다. 연합사 창설로 유엔사령관에게 위임됐던 작전통제권이 연합사령관에게 전환됨에 따라 양국은 ‘국가통수 및 지휘기구’(NCMA)로부터 작전지침 및 전략지시를 받아 한미군사위원회(MC)를 통해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연합사는 육·해·공군을 포함한 60만명 이상의 양국 현역 정규군을 통제하고 있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350만 규모의 한국 예비군 병력과 미군 병력의 증편 계획도 마련해 놓고 있다. 그러나 이번 합의에 따라 연합사는 2012년 4월17일 양국 군 장성이 공동위원장을 맡는 작전협의기구인 ‘한미 군사협조본부’(MCC)에 임무를 넘기게 됐다. 사실상 연합사를 대신해 구성되는 MCC는 앞으로 창설될 한국군 합동군사령부와 주한 미 통합군사령부(USJTF-K)간의 작전 및 업무협조 등의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다. 한·미 양국은 MCC 아래 10여 개의 기능별 상설·비상설 기구를 설치하는 한편 양측 육·해·공군 작전사급 부대 사이에도 작전협조반을 둘 계획이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전·평시 작전통제권 환수 일지 ▲1950.7.14 이승만 대통령, 유엔군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 이양 ▲1954.11.17 한·미합의의사록, 국군을 유엔군사령관 작전통제하에 둠 ▲1968.4.17 한·미 정상 공동성명, 대침투작전 한국군 단독 수행 ▲1978.11.7 한미 연합군사령부 창설 ▲1994.12.1 평시작전통제권 환수 ▲2003.7 한·미 미래동맹정책구상(FOTA) 3차회의, 지휘관계 연구 의제화 합의 ▲2005.9.28∼30 한·미 안보정책구상(SPI) 회의서 전작권 환수 협의 공식 제안 ▲2005.10.1 노무현 대통령 “전작권 행사를 통해 명실상부한 자주군대로 거듭날 것”(국군의 날) ▲2006.1.25 노무현 대통령 “올해 안에 전작권 환수 문제를 매듭짓도록 미국과 긴밀히 협의할 것”(연두기자회견) ▲2006.10.20 제38차 한미안보협의회(SCM),“2009년 10월15일 이후,2012년 3월15일 사이 이전”으로 전작권 전환시기 합의 ▲2007.2.7∼8 제11차 SPI회의서 미국 36개월(3년) 뒤, 한국 2012년 3월15일 전작권 전환 시기 제시 ▲2007.2.24 한·미 국방장관, 전작권 2012년 4월17일 이양과 동시에 한미연합사 해체 합의 ■ 中 ‘원칙적 환영’ 입장 전략적 유연성엔 민감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중국 언론들은 25일 한국과 미국이 국방장관 회담을 통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시기를 결정했다는 소식을 인터넷 뉴스 등을 통해 보도했다. 하지만 민감한 사안임을 고려해서였는지 논평이나 해석 없이 사실 관계만 소개했다. 중국 당국이나 관계자들도 한·미간 전작권 이양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와 관련, 이날 베이징의 한 군사 소식통은 “전시작전권 환수에는 중국은 원칙적으로 환영한다. 그러나 전략적 유연성과 관련해선 엄청나게 민감하다.”고 말했다.“만약의 사태를 놓고 상대할 때 중국으로서 미국은 버거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인사는 “중국에는 전선 개념으로 볼 때 미군이 동북아에서 일본쪽으로 한발 물러서는 것으로도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일부 학자들은 “한국과 중국이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이것이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연계될 때 중국은 이해관계가 대단히 복잡해진다. 이미 닝푸쿠이 주한 중국대사가 이례적으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시한 적도 있다. jj@seoul.co.kr ■ 정치권·대선후보 엇갈린 반응 지난 24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오는 2012년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키로 합의한 것과 관련, 대선주자들과 정치권은 엇갈린 평가를 했다. 박근혜 전 대표 캠프의 대변인인 한선교 의원은 25일 “작통권 이양 시기문제는 다음 정부에서 한·미 동맹 강화를 바탕으로 다시 진지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측도 “북핵으로 인한 한반도 긴장 여하에 따라서 차기 정부는 필요시 이 문제를 미국측과 재협상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측은 “한·미 동맹의 근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로드맵과 연계해 환수 시기를 정하는 식으로 큰 틀에서 유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정치권에서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통합신당추진모임이 일제히 환영한 반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북핵문제 해결이 먼저”라며 비판했다. 열린우리당 최재성 대변인은 “전시 작통권 환수는 한·미동맹을 전제로 한 환수여서 더 안정적이고 진일보한 안보시스템이 확립된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은 “노무현 정부는 ‘자주국방’이라는 정치적 슬로건 때문에 역사상 가장 완벽한 동맹체제를 깨게 됐다.”고 비판했다. 나길회 김기용기자 kkirina@seoul.co.kr ■ 시민단체·네티즌 찬반 팽팽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등을 둘러싸고 진보와 보수 진영은 각각 다른 시각에서 의구심과 불만을 내비쳤다. 정용준 한국진보연대 정책실장은 “전작권 이양은 원칙적으로 옳다.”면서도 “다만 기존의 한미연합사를 대신해 새로운 상설 협의기구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이 다시 종속적인 군사관계를 만들어 낸다면 문제가 된다.”고 의구심을 드러냈다. 반면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는 “자주를 위해서 작전권을 환수한다는 논리인데 연합사라는 대단히 유리한 체계를 무너뜨려 자동적으로 제공되던 정보와 물적지원을 협상을 통해 얻어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북핵반대 및 한미연합사령부 해체반대 1000만명 서명추진본부’의 송진섭 집행위원도 “대선 이후 차기 정권이 전시작전통제권 단독행사를 유보하도록 압박하겠다.”고 밝혔다. 누리꾼들도 각종 포털사이트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gospels1004’라는 누리꾼은 “작전권 환수와 연합사 해체는 한반도 주변 정세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조치다. 아직도 과거 체제 유지를 주장하고 안주하려는 자들의 주장은 순억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parks113’라는 누리꾼은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다고 전시작전권을 환수하느냐.”면서 “반드시 정권을 바꾸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비난을 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전시작통권 ‘62년만의 환수’

    한·미 양국이 2012년 4월 한반도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군에 이양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50년 한국전쟁의 와중에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된 뒤 1978년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위임됐던 작전통제권이 62년 만에 환수된다. 김장수 국방장관과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24일 미국 워싱턴에서 회담을 가진 뒤 공동발표문을 통해 “2012년 4월17일 한·미연합사령부를 해체하고 미군과 한국군간 새로운 지원·주도 관계로 전환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원활한 전시작전권 이양을 위해 양측은 오는 7월까지 구체적 ‘로드맵’을 작성한 뒤 2012년 3월 연합전시증원(RSOI) 연습을 통해 최종점검을 한 뒤 2주간의 보완평가를 갖기로 했다. 전시작전권 이양으로 해체되는 한·미연합사령부를 대신해 양국은 한국 합동군사령부와 주한미통합군사령부(USJTF-K)를 각각 창설, 독자적 작전권을 가지고 공동작전을 벌이는 형태로 동맹구조를 재편하기로 합의한 상태다. 양국은 연합사의 대체 조직인 군사협조본부(MCC)를 2010년쯤부터 가동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군당국은 전작권 환수 이후 한·미 연합ㆍ합동 군사훈련의 규모와 시기, 횟수 등에 대한 종합적 재검토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미연합사령부가 해체되고 한국과 주한미군의 공동방위체제로 전환되더라도 양국군의 공동연습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현행 연합전시증원(RSOI)연습, 독수리(FE)연습, 을지포커스렌즈(UFL)연습은 일단 존속하는 방향으로 양국이 의견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 국방부는 이와 관련, 현재로선 2008년 이후 주한미군의 추가 감축 계획이 없음을 확인했다. 데이비드 스미스 미 국방부 부대변인은 이날 한국에 주둔한 미군 2만 8000명이 내년 2만 5000명선으로 감축될 예정이며 “예측 가능한 미래엔 그 수준이 유지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역대 국방장관 등은 이와 관련,26일 오전 긴급 모임을 갖기로 했다. 이상훈 전 국방장관은 “성우회와 재향군인회의 회장단이 26일 오전 10시 향군회관에서 긴급모임을 갖는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은 “두 나라 장관의 첫 상견례에서 전작권 문제를 합의한 것에 의구심이 든다.”면서 “왜 그리 급하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작통권 환수] ‘2012년’ 시기연기 배경 논란

    전시 작전통제권을 2012년 4월 한국군에 이양한다는 23일 한·미 국방장관의 합의 배경을 두고 분석이 엇갈린다.우리 정부의 2012년 이양 요구에 2009년을 고집하며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여온 미국측 행보에 비춰 이번 합의는 의외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2012년 전에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우리측 설득을 미국이 수용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곧이 듣는 사람은 드물다. 미국이 상응하는 대가 없이 일방적으로 양보한 전례가 드문 탓이다. 모종의 ‘거래설’과 펜타곤의 기류 변화설 등 갖가지 추정도 그래서 나온다.●기지 이전비, 방위비 분담이 협상카드? 학계와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 일각에선 우리 정부가 2012년 환수안을 관철시키는 대신 양국 안보현안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돈 문제’를 협상카드로 활용했을 것으로 본다.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조성렬 신안보연구실장은 “(거래가 있었다면)기지이전과 환경오염 치유비용 등이 테이블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양국은 지난해부터 10조원이 넘는 기지이전 비용과 연간 7000억원대의 방위비 분담금 문제를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이태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도 “정부가 작전권 이양을 늦추는 조건으로 언론과 보수층의 거부감이 적은 미군지원비 증액카드를 사용할 것이란 우려가 전부터 있었다.”면서 “조만간 나올 기지이전 협상결과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막대한 예산이 걸린 차세대 무기도입과 전력증강 사업도 빅딜의 용의선상에 오르내린다.이준규 평화네트워크 정책실장은 “미국 입장에선 실익이 없는 시기문제에 매달리기보다 작전권 이양에 뒤따르는 정보전력 증강 등 돈 되는 사안들에 집중하는 게 현명한 전략일 것”이라고 분석했다.●작전권·유엔사 강화 ‘교환설’도 전시작전권 이양과 관련, 양국이 논의중인 유엔군사령부의 역할 변경 문제에 대해서도 뭔가 ‘신호’가 오갔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지난해부터 학계와 정치권 일각에선 작전권 이양 뒤에도 미국이 유엔사를 통해 전쟁수행의 핵심권한을 행사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의심했다. 실제 미국은 1994년 평시작전권 이양 과정에서도 연합권한위임사항(CODA)을 통해 작계수립과 연합정보관리 등 6개 핵심권한을 위임받은 전례가 있다. 최종일 국방부 국제협력차장도 “연합사가 해체되면 연합사령관이 CODA에 의해 행사하던 위기시 핵심권한이 사라진다.”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가 유엔사 역할강화 논의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박기학 평화통일연구소 연구위원은 “작전권 이양시기와 유엔사 기능 재편의 ‘맞교환’이 이뤄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 한·미 양국은 외교·국방분야 국장급 실무선에서 유엔사 역할 변경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펜타곤이 변했다? 군사적 권한이나 돈 문제보다는 미국 내부의 ‘정치적 상황’이 주로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중간선거 패배 뒤 “이라크만으로도 골치 아픈 상황에서 한반도 작전권 같은 ‘지엽적’ 문제로 에너지를 소진할 필요가 있느냐.”는 회의론이 미 정부 안에서 힘을 얻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장관 방미 전부터 ‘분위기가 좋다.’는 얘기가 많았다.”면서 “럼즈펠드로 상징되는 ‘군사혁신파’의 퇴진 후 펜타곤에 기류변화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또 다른 관계자는 “작전권 이양이 한국의 연말 대통령선거에서 쟁점화되는 것을 미국은 원치 않는다.”면서 “이 문제로 시간을 끌 경우 이익보다 부담이 더 크다는 것이 미 정부의 현실 인식”이라고 전했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벨사령관 발언 신중히 할 필요”

    버웰 벨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이 최근 주한미군 기지 이전 지연 가능성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한 것과 관련, 정부가 미국측에 ‘신중한 발언’을 당부한 것으로 확인됐다. 외교통상부 당국자는 30일 비공식 브리핑에서 최근 방한한 캐슬린 스티븐스 미국 국무부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벨 사령관의 발언이 경우에 따라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신중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정도의 말이 있었다.”고 밝혔다. 주한미군사령관의 발언에 대해 외교 당국자가 미측에 신중한 언행을 당부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 당국자는 “(벨 사령관에게 발언을)하지 말라는 얘기를 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런 발언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 나눴다.”고 덧붙였다. 벨 사령관은 지난 9일 가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평택기지 이전 지연 가능성 보도에 대해 “문제는 조만간 이것(기지이전)이 예산상 또는 정치적 결정으로 중단(지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싸울 것(I will fight this)”이라며 단호한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 한편 스티븐스 수석부차관보와의 면담에서 한·미는 전시 작통권 환수 이후 유엔군사령부의 역할 변화와 미군기지 이전, 방위비 분담,6자회담 이후 평화체제 구축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최대한 빨리 기지 이전을 완료하겠다는 방침을 전했고, 방위비는 총액 기준이 아닌 새로운 분담 방식을 마련키로 미측과 협의했다.”고 말했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벨 “유엔사 전시조직 갖춰야”

    버웰 벨 주한미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이 정전감시 임무를 맡고 있는 유엔군사령부를 전시조직으로 구성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 주목되고 있다. 벨 사령관은 1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외신기자클럽 초청연설에서 “유엔사의 구조와 역할, 임무에 대한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면서 “전시와 같은 조직으로 평시에 구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전시)유엔동맹국의 신속한 지원 메커니즘은 전쟁 억제에 기여하기 때문에 유지돼야 한다.”면서 “이는 오직 유엔사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벨 사령관은 또 “위기가 순간적으로 고조돼 전투 작전을 야기할 수 있는 한국에서는 이것(전시조직)이 필요하다.”면서 “위기가 고조됐을 때 지휘구조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도 했다. 유엔사가 한반도 유사시 병력과 물자지원 임무를 계속 수행하면서, 한반도에 전개되는 유엔회원국 병력에 대한 작전권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전시 작전통제권 이양과 관련된 민감한 발언도 나왔다. 벨 사령관은 “한·미연합사에서 한국군 단독으로 전작권을 행사토록 한 것은 올바른 결심”이라고 옹호하면서도 “전작권 전환은 유엔사의 권한·책임에 부조화를 야기시킬 것”이란 우려도 덧붙였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벨 “미군기지 이전 차질땐 싸울것”

    버웰 벨 주한미군 사령관이 미군기지 이전 사업이 2008년 이후로 늦춰질 수 있다는 정부 일각의 전망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벨 사령관은 9일 용산 미 8군 사령부 내 밴플리트홀에서 가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2008년까지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이전한다는 데 한·미 양국은 2004년 합의했다.”면서 “물리적 제약이나 예산 문제, 정치적 결정 등으로 차질이 빚어진다면, 이 문제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더 이상 기지이전 일정이 지연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싸운다.’는 표현과 관련, 주한미군 관계자는 “조속한 해결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뜻이지 ‘대결’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한·미 양국이 지난해 합의한 2007∼2008년 방위비 분담금 협상 결과에 대해서도 벨 사령관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한국측 부담비용으로 미국은 8320억원을 제시했지만 한국은 7225억원을 제시했다.”면서 “1000억원 이상의 부족분을 해결해야 하는 나로선 매우 난처하다.”고 말했다. 전시 작전통제권 이양과 관련해서는 “기지이전과 전작권 이양은 관계가 없다.”고 일축한 뒤 “2009년 전작권을 이양해도 한·미 동맹과 대북억지력에는 위험이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작권 이양 뒤엔 유엔군사령부의 역할도 강화돼야 한다는 소신도 다시 피력했다. 전작권 이양 뒤엔 유엔군사령부의 역할도 강화돼야 한다는 소신도 다시 피력했다. 그는 “한국군 병력을 지휘할 수 없는 유엔사령관은 정전유지 및 잠재적 위기 고조를 책임질 수 없다.”면서 “유엔사령관은 미래 주한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지원 역할과 유사한 지원역할을 하게 될 것”고 밝혔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단순死 2건→구타사망’ 첫 규명

    1998년 2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벙커에서 권총상(傷)을 입고 숨진 채 발견돼 자살이냐, 타살이냐의 논란을 빚었던 김훈 중위의 사망원인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다시 이뤄진다. 또 올 1월 대통령 직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군의문사위·위원장 이해동)가 출범한 이후 처음으로 과거 군 수사당국에서 단순사망으로 처리했던 의문사건 2건이 구타에 의한 사망으로 정정됐다. 군의문사위는 11일 김훈 중위 사건과 관련,“당시 군 수사기록 등을 검토한 결과, 권총의 출처 같은 기초 조사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살로 단정해 언론에 발표하는 등 의혹제기 이유가 상당해 조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앞서 김 중위의 부친 김척(64·예비역 중장)씨는 올해 5월24일 아들의 사인을 밝혀달라며 군의문사위에 진정을 냈다. 유엔군사령부 조사단은 당시 사건 발생 직후 김 중위의 사인을 자살로 상부에 보고했으며, 한·미 군당국과 육군 검찰부도 1998년 4월29일과 11월27일 각각 권총 자살로 결론을 내렸었다. 군의문사위는 이와 함께 1982년과 1996년 각각 복무 중 사망한 김모(당시 20세)씨와 박모(당시 21세)씨의 사인을 조사한 결과 선임자의 구타로 숨진 사실을 규명했다고 이날 밝혔다. 의문사위에 따르면, 사망 당시 육군 제1야전군사령부 예하 전방부대에서 하사로 근무한 김씨는 선임자의 구타로 숨졌으나 당시 군 헌병대는 김씨가 술을 마시고 자던 중 토하는 과정에서 음식물이 기도를 막아 사망한 것으로 처리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한 한 부대원이 24년간 가슴앓이를 해오다가 올해 초 의문사위에 당시 사건 정황을 제보, 진실 규명의 단서가 됐다는 것이다. 또 전환복무자로 강원도의 한 교도소에서 복무한 박씨(당시 계급 이교·이등병에 해당)는 여러 명의 선임자로부터 구타와 심한 욕설 등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소속 기관에서는 박씨가 우울증을 앓았고 소심한 성격으로 자살했다고 유가족에게 통보했으나, 의문사위는 “조사 결과 해당 기관에서 사망원인을 축소 은폐한 사실을 밝혀냈다.”고 말했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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