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유엔군
    2026-03-29
    검색기록 지우기
  • 감염증
    2026-03-2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125
  • 60년 지나도 여전한 ‘끝이 없는 전쟁’

    60년 지나도 여전한 ‘끝이 없는 전쟁’

    한국전쟁의 그림자는 여전히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중국과 일본도 수시로 한국전쟁의 여파에 휩싸이며, 미국과 유엔 동맹국들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한국을 침공한 지 60년이 지났지만 한국전쟁은 관련국들에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한국에서 전쟁은 1948년 제주와 여수·순천반란에서부터 시작됐다. 반란의 뿌리는 1919년 3월 일본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대규모 만세운동에 있다. 3·1만세운동이 실패하면서 일부는 중국으로 피해 국민당과 공산당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다른 이들은 한국 내에서 은신처를 찾아 숨었고, 일군의 무리는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운동에 가담했다. 또 다른 이들은 소련에 의탁했다. 독립된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던 이들은 1945년 광복을 맞자 중국과 일본, 미국에서 물밀듯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한국인들에게는 희생의 경험이 주를 이룬다. 1945~1948년 미국과 소련 군정의 유일한 목적은 한국에서 일본과 이들의 잔재를 몰아내는 데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대한(對韓) 정책의 지향점은 같았지만 달성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도 달랐다. 소련은 1904~1905년 러·일전쟁 참패에 대한 인적·물적 배상을 북한에 물어 2차대전의 피해를 충당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반면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 잔존 인물들이 일본으로 돌아가 경제·사회적 개혁을 순탄하게 진행시키길 바랐다. 이처럼 한반도에 들어서는 과도정부는 다양한 목적에 부합돼야 했고, 결국 서로 다른 후원국들에 의해 남북한에 들어선 정부가 서로의 적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모두 흡수통일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미국과 소련간의 차이점은 미국은(물론 나름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을 위해 싸울 준비가 돼 있었지만, 소련은 직접 관여하기보다 북한과 중국을 앞세워 싸웠다. 한국전쟁이 국제적인 분쟁으로 확대된 1950~1953년은 남북한 상호간에 뿌리깊은 증오를 낳았고, 이같은 적개심을 오늘날 한국의 젊은 세대들과 세계는 이해하지 못한다. 남북한간 증오는 전선을 넘어 광범위하게 자행된 잔혹성에 근거한다. 한국전쟁은 유럽의 30년전쟁(1618~1648) 당시 공포를 연상시킨다. 한국의 민간인 사망자는 한국군 전사자수를 능가했다. 기근과 질병, 유엔군의 무자비한 폭격, 남북한군에 의한 인질과 포로 학살로 최소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에 패배한 북한은 수많은 양민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해 학살했다. 수천명이 집단농장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됐다. 전쟁의 정당성과 김일성의 ‘신성’에 도전하는 사람은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됐다. 남한의 사정도 전혀 다를 바 없었다. 비무장지대에서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공산주의 게릴라들과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공산당 잔당에 대한 토벌작전으로 남한의 인구는 급격히 줄었다. 1950년대 한국의 상황은 잔혹했던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김일성은 1953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휴전할 생각이 없었다. 소련과 중국이 북한의 경제적 재건과 군사적 안보의 열쇠를 쥐고 있었기에 결국 김일성은 이들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았고, 휴전협정에 서명하길 거부했다. 이후 이승만은 미국과의 상호안보조약체결과 10억달러 원조, 한국군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한국·일본에 주둔하는 미군이 한국을 방위한다는 약속을 얻어낸 뒤에야 휴전을 받아들였다. 한반도 통일이라는 전쟁 목적을 양보하는 대신 미국은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수십억달러를 지불했고, 현재도 지불하고 있다. 3년간의 전쟁으로 남북한을 통틀어 민간인과 군인 2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군이 2차대전에서 입은 인명피해와 맞먹는다. 이 밖에 교전국 인명피해는 50만명에 이르며, 이중 90%가 중국인이다. 휴전협정은 순식간에 한국인들로 하여금 정복이 아닌 전복을 위한 전쟁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 미국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핵전쟁이나 재래식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억지한다는 데 암묵적 합의를 도출해 냈다. 그렇다면 남북한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우선 남북한은 계속해서 주변국들과 미국의 우려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한국이 태평양의 주요 국가로 발전해 나가지 않는 한, 역사와 지정학적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의 미래는 다른 여타 포스트모던 시장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밝다. 반면 북한은 이미 실패한 국가이지만 이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독재체제는 3대를 넘기지 못한다. 다음에 닥쳐올 ‘제국’의 몰락을 국제사회는 준비 없이 맞아서는 안 된다. 이번에는 한국인들이 그렇게 열망하는 새로운 통일된 국가를 전쟁 없이 세울 수 있도록 도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 종군기자 눈에 비친 한국전쟁의 참상

    종군기자 눈에 비친 한국전쟁의 참상

    1951년 미국의 퓰리처상은 6명에게 주어졌는데, 수상자는 모두 한국전을 취재한 종군기자들이었다. 드레스보다 군복이 잘 어울리는 것으로 유명했던 마거릿 히긴스 기자에게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을 안겨준 것도 한국전쟁이었다. 전쟁의 현장을 일반인들이 안방에서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고 현장에 뛰어든 종군기자들의 활약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6·25전쟁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리랑TV의 데일리 매거진쇼 ‘아리랑 투데이’는 6·25 60주년을 맞아 5부작 연속기획 ‘한국전쟁과 언론’을 21~25일 오전 7시에 방송한다. 제작진은 전쟁 발발에서 서울 함락, 인천상륙작전에서 중공군에 밀린 연합군의 후퇴, 휴전 협정 등으로 기간을 나눠 당시 주요 보도 내용을 소개하고 종군기자의 눈을 통해 한국전쟁을 되돌아본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 이후 세계의 시선이 한반도로 쏠리면서 종군기자들의 취재 경쟁이 시작됐다. 한국전쟁을 최초로 보도한 기자는 UP통신(현 UPI통신)의 잭 제임스였다. 제임스의 기사는 미국 대사관이 본국에 타전한 보고보다 빨랐다. 전쟁 발발 후 북한군의 공세에 밀리기만 하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 사건의 1보는 AP통신 신화봉(영어명 빌 신) 기자의 기사로 미국사령부 발표보다 9시간 앞섰다. 타전 이후 맥아더 사령부가 항의할 정도로 발빠른 보도였다. 이 밖에도 당시 기사와 사진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전하고, ‘대동강 다리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UP통신의 맥스 데스포 기자와의 대담을 통해 휴전협정 현장과 이산가족의 아픔 등을 직접 들어본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實錄, 한국전쟁] (4)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상이몽

    [實錄, 한국전쟁] (4)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상이몽

    휴전협상을 앞두고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일 년째 접어들자 기력이 쇠한 중국은 휴전을 꾀했다. 김일성도 정전을 원했지만, 스탈린의 생각은 달랐다. 유엔에 휴전을 발의하는 한편 남한 내 빨치산 활동 강화 등 적극적인 군사 반격을 재촉했다. ●“스탈린, 끝없는 마오요구에 짜증” 베이징은 휴전교섭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달라고 모스크바에 요구했다. 모스크바는 오히려 한 발을 뺐다. 마오쩌둥이 휴전을 주도하도록 권한을 위임했다. 토르쿠노프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총장은 “소련이 전쟁의 주체자가 아님을 보여주려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휴전협정 문제가 처음 거론된 1951년 6월5일부터 유엔주재 소련대표 말리크가 정전교섭을 제안한 6월23일까지 모스크바와 베이징 그리고 평양 간 비밀문서의 교환이 급증했다. 마오쩌둥의 정전제안에 대해 스탈린의 첫 반응은 신통찮았지만, 김일성과 가오강 중국 동북성 서기를 만나고 나서 태도가 달라졌다. 스탈린은 6월13일 마오쩌둥에게 “정전이 현시점에서 타당하다고 판단했다.”고 긍정적인 내용의 친서를 보냈다. 두 공산 거목이 주고받은 서신의 형식에도 변화가 엿보인다. 모스크바 주재 대사나 베이징 주재 대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주고받았다. ‘경애하는 스탈린 동지’ 같은 서두는 생략됐고, ‘볼셰비키적 경의를 표하며 마오쩌둥’이라고 꼬박꼬박 썼던 마무리도 ‘마오쩌둥’이라는 이름 석 자를 적는 것으로 끝냈다. 내용적으로도 마오쩌둥의 자기주장이 강해졌다. 휴전협정 장소가 개성으로 정해진 것은 마오쩌둥의 아이디어였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보낸 1951년 6월30일자 친서에서 “다음 몇 가지 문제에 관해 귀하에게 나의 의견을 전한다. 검토 후 김일성에게 직접 지시하시기 바란다.”면서 “회담 장소로 미국 리지웨이(유엔군 총사령관)는 원산항을 제안했지만, 북한 해군의 요새기지인 원산항에 적의 함정을 상륙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내 생각에는 38선 부근의 개성이 적당하다고 본다. 회담개시는 7월15일로 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같은 날 스탈린은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 중지와 휴전을 포함한 모든 평화적 제안에 우리는 동의한다. 회담장소는 38선 인근의 개성지구를 제안한다. 귀하가 동의한다면 7월10일부터 15일 사이에 귀측 대표단과 만날 것이다.”라는 내용의 유엔군에 보내는 회답문을 직접 작성해 마오쩌둥에게 보낸 친서에 동봉했다. 마오쩌둥의 의견을 100% 받아들였다. 스탈린은 또 이 친서에서 “모스크바가 휴전교섭을 지시해야 한다는 제안은 잘못된 생각이며 그럴 필요조차 없다. 교섭을 지휘할 사람은 바로 마오쩌둥 귀하 자신이다. 우리는 개별 문제에 대해 조언할 뿐이다. 우리는 김일성과 접촉할 수 없다. 귀하가 직접 김일성과 접촉해야 한다.”고 썼다. 스탈린은 휴전교섭 책임의 배턴을 마오쩌둥에게 넘겨버렸다. 이후 스탈린은 중국이 요청한 군사고문 파견과 6억루블의 군사차관에는 동의했지만, 추가 고문파견과 장비공급은 거부했다.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 사이에 오간 1951년부터 1953년까지의 기밀문서를 분석한 토르쿠노프 총장은 “휴전교섭 과정에서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끊임없는 지원요구에 짜증을 냈고, 분노마저 느끼는 듯했다.”고 말했다. 휴전교섭의 열쇠는 마오쩌둥이 쥐고 있었다. 스탈린에게 정기적으로 진행상황을 보고하고, 충고도 받았지만 형식적이었다. 김일성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박헌영은 “북한 인구의 10%가 기아상태에 있다.”면서 조기정전을 요청했다. 다급해진 김일성도 ‘유엔군 측의 요구를 다 수용하겠다.’고 나섰지만, 스탈린은 불리한 전쟁종결을 원치 않았다. 나약한 보습을 보여 정치적 불이익을 가져왔다고 김일성을 나무랐다. ●마오, 스탈린에 협상상황 형식적 보고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1951년 7월20일자 전문에서 “휴전제안에 동의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전쟁종결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이 같은 견해는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 3월까지 유지됐다. 3월5일 독재자가 죽자 소련 내각회의는 전쟁을 종결짓는 쪽으로 한반도정책을 바꿨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휴전협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 대통령은 6월18일 반공포로 2만 7000명을 석방하는 초강수를 뒀지만, 전쟁을 종식하고자 하는 중국과 미국의 의사를 꺾을 수는 없었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타이완에 각각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영어권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 ‘원치 않은 전쟁’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서점에서 베트남전쟁에 관한 책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지만, 한국전쟁에 관한 책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콜디스트 윈터’를 쓴 퓰리처상 수상작가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책을 저술하던 2004년 미국 플로리다의 한 도서관 서가에 베트남전 관련 책은 88권이나 꽂혀 있었지만 한국전쟁 관련 서적은 4권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영화도 그랬다. 미국이 만든 전쟁영화의 무대는 대개 베트남 정글이거나 사이공 거리였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중 인기를 끈 작품은 ‘M.A.S.H’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80년대 이후에는 사라졌다. 한국전쟁에서 3만 3000명의 미군이 희생됐고, 10만 명이 넘는 상이군인이 발생했지만, 미국의 영광은 별것이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낳은 최고의 전쟁영웅 맥아더를 추락시킨 것도 한국전쟁이었다. 그래서 잊고 싶은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을 총지휘한 스탈린의 나라, 옛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2차 대전 종식과 함께 38선 이북을 점령해 공산 이데올로기를 수혈시켰다. 항일무장 게릴라 지휘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둔갑시켰다. 막대한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하지만 전쟁은 무승부로 종결됐다. 무엇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부동항을 가진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중국으로 넘어간 것이 뼈아팠다. ●타이완 ‘戰禍’ 모면… 또 다른 수혜국 굳이 한국전쟁의 승자를 따지자면 중국을 거론할 수 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마오쩌둥이었다. 냉전체제 아래에서 중국은 한국전쟁의 의미를 내전으로 축소했고, 마오쩌둥과 중국의 한국전쟁 관련성을 부인했다. 80년대 말까지 무려 40년 동안 감췄다. 중국과 마오쩌둥의 역할은 90년대 들어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공개된 러시아와 중국의 비밀문서에서 속살을 드러냈다. 한반도를 무대로 치른 미국과 중국의 전쟁이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한때 130만명의 대군을 일시에 참전시켰다. 3년간 연인원 500만명을 동원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파병이다. 갓 태어난 신생 사회주의국가 중국은 비록 미국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지옥을 보여줬다.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계획했던 연합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미국의 전쟁사에서 가장 처참한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됐다. 한국전쟁 최대의 수혜국은 일본이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는 “일본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참전해 경제적 이익을 챙겼다.”고 분석했다. 전쟁 기간 중 일본은 군사기지 역할을 했으며,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 전차상륙함(LST)은 대부분 일본인 승무원에 의해 조정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알아차린 미국의 전후 복구자금은 대부분 일본으로 흘러들어 갔다. 한국경제는 일본 예속형으로 변했다. 일본의 경제부흥에는 한국전쟁의 공이 지대했다. 타이완도 수혜국으로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한국전쟁을 대체하는 또 다른 전쟁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마오쩌둥과 중국은 한반도보다 타이완 점령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3년 동안 발이 묶였고, 힘을 소진하는 바람에 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1950년 6월27일 7함대를 출동시켜 타이완해협을 봉쇄한 것도 중국 참전의 한 요인이었다. 해군력과 공군력이 없다시피 한 중국의 처지에서는 불리한 양안(兩岸)전쟁을 치르는 것보다 한반도에서 보병으로 싸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미국은 1941년부터 1949년까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워싱턴에는 중국의 공산화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른바 ‘차이나 로비’였다. 워싱턴 정가에 영향을 미치는 외국단체 중에서 가장 활발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존재감은 중국보다 워싱턴에서 오히려 더 클 정도였다. 장제스의 희망은 미국의 지원을 얻어 공산당을 밀어내고 본토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군대를 한반도에 파견해 중국과 싸우겠다고 큰소리쳤다. 한국전쟁 덕분에 타이완은 호전적인 마오쩌둥과의 전화(戰禍)를 피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의 공산 측 두 주역,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같은 전쟁을 치르면서 다른 꿈을 꿨다. 상호 의견교환이 별로 없던 두 지도자 사이에서 한국전쟁이라는 공통관심사가 생기면서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러나 목적은 달랐다. 스탈린은 전지전능한 영향력의 유지를 원했지만, 마오쩌둥은 한반도와 타이완, 베트남으로부터 가해지는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신생 조국을 지켜내고 싶었다. 연합군의 파상공세로 궁지에 몰린 북한이 9월28일 노동당 중앙정치국 긴급회의를 열어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10월1일 아침,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김일성에게 긴급 메시지를 타전했다. 김일성에게는 “중국의 동지와 협의하라.”고 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는 “조선의 동지들이 절망적인 곤경에 빠졌다. 지원군을 보낼 수 있다면 속히 38선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이 건에 관하여 나는 조선의 동지에게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전할 생각이 없다.”라고 썼다. ●中 참전번복… 체면 구긴 스탈린 노회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는 ‘마오쩌둥에게 말하지 않겠지만’이라고 했고, 마오쩌둥에게는 ‘김일성에게 알리지 않겠지만’이라고 전했다. 도요가쿠엔 대학 주지안롱 교수는 “중국과 북한을 분리시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군을 출병시킨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중국의 참전결정이 두 번, 세 번 번복되면서 스탈린의 체면이 구겨진 것도 사실이다. 10월12일부터 14일까지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보낸 전보내용이 ‘중국이 참전한다.’ ‘참전을 거부했다.’ ‘참전이 최종 결정됐다.’는 식으로 계속 변경됐다. 비록 목적과 계산법은 달랐지만, 약속을 지킨 쪽은 마오쩌둥이었다. 독자적 참전 결단에 따라 스탈린은 중국과 마오쩌둥을 다시 보게 됐다. 중국은 공산주의국가의 ‘둘째 형’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했다. 소련은 중국에 공군 사단을 배치해 본토방위에 대한 염려를 놓게 했다. 1953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1차 5개년 계획에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어졌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美 정전회담 당시 한반도 非무장화 검토”

    한국전쟁 당시 미국 극동군 사령부가 한반도에서의 전면철수에 대비해 정부 관료 및 주요 인사들을 제주, 혹은 해외로 대피시키는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정전협정 개시 직후 미 육군참모부는 한반도 전역을 비무장화하는 방안을 검토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한국전쟁 관련 비밀문서를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발굴, 전시회를 통해 공개한다고 17일 밝혔다. 중앙도서관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미 극동군사령부는 1951년 한국 정부 피란 계획을 수립하면서 정부 관료 및 주요 인사 100만명을 제주도로 소개(疏開)시키는 ‘대규모 소개’와 주요 인사 2만명을 선정해 해외 지역으로 소개시키는 ‘제한 소개’의 두 방법을 검토했다. ‘제한 소개’의 경우 1순위는 대통령과 내각, 국회의원, 중앙 및 지방 고위 경찰 등 정부 주요 인사와 가족 4000명, 2순위 한국군 고위 장교·기술 요원과 가족 3000명, 3순위 종교계·교육계 등 비정부기관 요인과 가족 1만명이었다. 한반도 전역을 비무장화하는 방안도 신중하게 검토됐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 개성에서 정전협정 첫 예비회담이 열린 직후인 1953년 7월23일, 미 육군 참모부가 작성한 ‘한국의 비무장화(Demilitarization of Korea)’란 제목의 비밀 보고서는 ‘남북한의 군비 경쟁은 한반도 평화 정착의 최대 걸림돌이 될 수 있음. 유엔군과 중공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경우, 남북한 군사 대치 상황이 재현되면서 한국전 발발 당시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되고, 한반도 및 세계 평화와 안정에 커다란 위협 요소가 될 것임’이라며 한반도 전역의 비무장화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밖에도 브래들리 당시 미 합참의장이 정전 협정 2개월 전인 1953년 5월19일, 미 국방부 장관에게 제출한 ‘한국에서의 행동 방향’이란 제목의 1급 비밀 비망록 등 흥미로운 자료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중앙도서관은 22일~새달 27일 관내 디지털도서관 대회의실에서 ‘NARA 기록으로 보는 6·25’ 전시회를 연다. 중앙도서관이 수집한 총 120여만쪽의 한국 관련 기록 중 선별한 기록물이 전시된다.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김일성 각본, 스탈린 연출, 마오쩌둥 주연

    [한국전쟁 60주년 기획]김일성 각본, 스탈린 연출, 마오쩌둥 주연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학설은 대략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대표적인 학설이 ‘남침설’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옛 소련이 자국의 팽창주의에 따라 북한을 부추겨 남한의 무력통일을 획책했다는 주장이다. 대척점에 서 있는 학설이 ‘북침설’이다. 미국이 한국을 조종해 북으로 쳐들어갔다는 주장이다. 중간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 ‘남침유도설’이다. 대체로 북한의 북침설을 옹호하는 수정주의적 사관이다. 냉전해체 이후 공개된 러시아문서는 분분한 학설을 일거에 정리하는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의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이 주고받은 대화록과 편지가 담긴 극비문서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제 서방세계는 물론 러시아와 중국의 학자와 일반인들에게도 북한의 남침설은 다시 뒤집히기 어려운 정설로 자리 잡았다. 전쟁을 일으킨 발발자는 누구일까. 전쟁의 주체는 남침설과 북침설, 남침유도설 등 어느 학설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남침설은 스탈린의 김일성 사주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공모설, 마오쩌둥 주도설 등이 주류를 이룬다. 지금은 대체로 스탈린과 마오쩌둥 두 사람을 전쟁발발의 공동주체로 본다. 김일성은 괴뢰로 취급해 평가절하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을 국내적 요인보다, 냉전체제라는 국제적 요인에서 찾은 결론이다. ●스탈린·마오쩌둥 한국전 공동주체 북침설의 입장에서는 이승만을 전쟁의 주동자로 본다. ‘김일성 저작집’ 제6권을 보면 김일성은 1950년 6월25일 새벽 3시 노동당 정치위원회와 내각 합동 비상회의를 소집해 “리승만 도당의 괴뢰군들이 오늘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불의의 무력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 적들은 이미 38선 이북지역으로 1~2km 침공하였습니다.”라고 연설했다. 지금은 북한주민들만 그렇게 믿는다. 중국군이 펴낸 책자에는 ‘1950년 6월25일 새벽, 38도 선에서 오랫동안 계속되어 오던 소규모 무장충돌과 마찰이 마침내 질적인 변화를 일으켜 한반도에서의 대규모 내전으로 전면적으로 폭발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중국은 초기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고 있으며, 미군 등 유엔군 참전과 중국의 개입 이후를 ‘국제전쟁’이라고 보는 시각을 갖고 있다. 한때 수정주의 이론이 득세했다. 스톤의 ‘한국전쟁 비사’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한국전쟁의 기원을 1945년 해방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좌우이데올로기로 나뉜 불완전한 해방의 연장 선상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심지어 스탈린의 옆에서 전쟁결정 과정을 지켜봤던 후루시초프가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라고 밝혔지만, CIA 공작설을 거론하면서 믿지 않았다. 그러나 수정주의 이론은 러시아문서가 비밀에서 해제돼 세상에 공개되자 설득력을 잃었다. 냉전이 해체되면서 이데올로기적 제약이 사라진 것이다. 커밍스는 자신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각본을 썼고, 스탈린이 연출했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저돌적인 전쟁공세에 머뭇거리기도 했지만 밑질 것이 없다고 여겼다. 전쟁을 승인하고 군사원조를 제공했으며 마오쩌둥을 설득해 동맹국으로 끌어들였다. 군사고문단을 보내 전쟁준비부터 휴전까지 직접 챙겼다. 1953년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휴전협정 조인은 더 미뤄졌을 것이고 꽃다운 생명의 희생은 더 늘어났을 것이다. ●“김일성은 꼭두각시”… 평가절하 러시아 극비문서가 공개되기 전까지 한국전쟁에서 마오쩌둥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절하된 감이 있다. 갑자기 압록강 국경을 넘어 나타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의해 연합군이 압록강에서 38선 이남까지 밀려난 정도로밖에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김일성이 전쟁발발을 선창했다면, 스탈린은 총연출을 맡았다. 주역은 사실상 마오쩌둥과 중국이었다. 마오쩌둥은 전쟁을 측면에서 조종했고, 참전을 선택했고, 치렀다. 1950년 9월15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나서 압록강 국경까지 진군했다. 이때부터 한국전쟁을 주도한 것은 중공군이었고, 휴전협정의 관장자도 중국이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의 당당한 주연배우로 등장했다. 마오쩌둥은 소련과 미국이 38선 분할통치에 합의했기 때문에 소련 지상군이 동원되면 미군을 끌어들이는 구실이 된다고 봤다. 하지만 중국해방군은 예외라고 판단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참전을 이끌어낸 김일성의 역할도 무시할 순 없다. 주지안룽 동양학원대학 교수는 저서 ‘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에서 “김일성은 온 힘을 기울여 소국의 지혜로 대국의 지도자를 움직이게 하는 일류의 연기를 펼쳤다.”라고 평가했다. 러시아말과 중국말에 능했던 김일성은 양국 수뇌와 외교관 사이를 오가면서 스탈린에게는 ‘마오쩌둥 카드’를 내밀고, 마오쩌둥에게는 ‘스탈린 카드’로 말을 바꾸는 절묘한 ‘양다리 외교’를 펼쳤다. “마오쩌둥은 평화적 수단에 의한 남북통일은 불가능하며, 통일은 군사적 수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스탈린에게 전달했다. 김일성을 꼭두각시로 깎아내리는 시각도 있지만, 한국전쟁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은 분명히 김일성이었다. 다만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은 1950년 10월 19일 이전까지 전쟁을 총지휘한 사람은 스탈린이었다. 그는 북한의 군비 요청 사항 중 90% 이상을 지원했다. 1950년 6월15일 평양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는 ‘6월25일 새벽에 진격한다. 조선인민군이 옹진반도를 공격하고 서쪽 연안으로 총공격을 가한다. 적 주력부대는 서울 근방에서 괴멸되고 서울과 춘천, 강릉이 동시 점령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남한은 해방될 것이다.’라고 크렘린에 보고했다. 비밀문서에 나타난 전쟁개시일과 전황이 정확하게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실제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됐고, 8월20일쯤에는 낙동강 전선을 제외한 남한영토의 90% 이상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한편 소련군 군사고문단장인 바실레프스키 원수에게 서울의 총사령부에 상주토록 조치했다. ●기고만장해진 北, 中 홀대 스탈린은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8월25일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은 친서를 보냈다. ‘조선인민의 위대한 해방투쟁에 찬사를 바친다. 미군개입으로 부분적으로 실패하는 것에 당황할 필요가 없다. 북한은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지원할 맹우들이 곁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조종사를 지원하는 방법을 검토하겠다.’ 김일성은 용기백배해 다음날 노동당 정치위원회를 소집했다. 북한지도부는 ‘친애하는 동지 스탈린의 아버지와 같은 심려와 지원이 조선인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라는 내용의 공식 회답문을 채택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바실레프스키 원수는 9월21일 ‘소련군 제147사단 84전투기연대 소속 전투기 야크-9형 40기의 파견을 모스크바에 요청했고 승인받았다. 소련 공군이 한국전에 참전했다. 바실레프스키 원수는 ‘소련 조종사가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군에게 숨길 수는 없다. 공중전에서 행해지는 교신이 러시아말로 이뤄지기 때문이다.’라고 보고했다. 성공확률 5000분의1에 불과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작전으로 보였던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인 성공은 전쟁의 흐름을 180도 바꿔 놓았다. 인민군과 소련군사고문단은 이 작전의 의미를 부정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중국은 서방 측 보도를 보고 이 사실을 알았다. 스탈린은 상륙작전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잘못을 문책해 스티코프 대사를 경질했다. 인민군은 패주에 패주를 거듭했다. 다급해진 김일성과 박헌영은 9월29일 ‘적이 38선을 넘을 때 대비해 소련 측의 직접적인 군사원조를 부탁한다.’라며 보병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스탈린은 응하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은 중국이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급기야 스탈린은 10월13일 ‘중국은 군사개입을 거부하고 있다. 귀하는 소련이나 중국으로 탈출을 준비하고 부대 및 병기를 대피할 필요가 있다.’라는 절망의 통첩을 김일성에게 보냈다. 한국전쟁에 개입한 소련, 중국 그리고 미국 지도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열도라는 사실이 러시아 비밀문서에 자주 등장한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콜디스트 윈터’에서 “미국이 한국을 위해 죽을 각오로 싸울 태세를 갖춘다는 게 아주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미국이 정말 염려했던 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이었다.”라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일본이 분쟁에 개입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 “미군의 전투력이 일본군 이하이므로 우리가 이긴다.”라는 발언을 했다. 일본에 대한 생각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美·中·소련 관심대상은 日 스탈린은 패색이 짙어진 10월8일자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에서 일본을 막으려면 중국의 참전이 필요한 논리를 폈다. 스탈린은 ‘국제정세를 보면 군국주의 세력이 부활하지 못한 일본은 미국을 원조할 수 없다. 중국이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한다면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막지 못한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미국의 동맹자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되살아나는 미래보다 지금이 우리에게 훨씬 유리하다. 이승만 치하의 남한이 미국과 일본의 대륙에 대한 전진기지가 될 수년 후보다 지금이 유리하다.’라고 썼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전까지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점령국 일본에서 황제처럼 군림했다. 전쟁을 지휘하는 동안 한국에서 하룻밤도 보내지 않았다. 그는 195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유력한 공화당 후보로 점쳐지고 있었다. 한국전쟁 최대의 판단오류 중 하나였던 ‘중국 불개입론’은 그의 신념이었다. 이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낳은 위대한 장군’ 맥아더는 불명예스럽게도 전쟁 기간에 파면당하는 신세가 됐다. 연합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중공군의 개입시기를 앞당겼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한국戰 참전용사 희생에 예술로 보답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유엔 참전국과 참전용사들의 희생에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한 리틀엔젤스 예술단의 유엔 참전 16개국 순회공연이 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케네디센터에서 대장정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케네디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공연은 미국의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가족, 주요국 외교사절, 미 의회 주요 인사 등을 초청해 2시간 동안 리틀엔젤스 예술단의 부채춤과 북춤, 장구춤, 가야금병창, 농악, 궁중무 등 한국의 전통춤과 노래를 선사했다. 한국전 참전용사로 공연 시작에 앞서 축사를 한 새뮤얼 존슨(텍사스·공화) 연방 하원의원은 “리틀엔젤스의 공연을 과거에도 인상 깊게 봤지만 이번 공연은 남다른 기대를 갖게 한다.”면서 “리틀엔젤스의 감사 공연은 참전용사들에게 대단한 영예와 자부심을 갖게 하는 행사”라고 말했다. 메릴랜드주 한국전참전용사회 회장인 빈센트 크렙스는 “국가를 위해 전쟁에 나가 싸운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행사를 마련한 한국 측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공연을 기획한 ‘유엔군 한국전 참전 60주년 기념사업회’의 박보희 추진위원장은 공연이 끝난 뒤 참전용사 8명에게 감사 메달을 증정했다. 리틀엔젤스는 12일까지 참전용사들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4차례 공연을 가진 뒤 뉴욕과 애틀랜타 공연에 이어 캐나다와 콜롬비아 등을 순회한다. 이어 8월부터는 태국·필리핀·호주·뉴질랜드, 12월부터는 유럽 7개국 및 아프리카 등을 돌며 한국전에 참전했던 16개국에서 감사 공연을 이어간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60년전 6·25때 삐라 한자리에

    60년전 6·25때 삐라 한자리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추운 겨울,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적을 경계하며 눈밭에 엎드린 군인이 있다. 이 군인에게 애인의 편지가 사진과 함께 전달된다. “사랑하는 그대, 크리스마스에는 꼭 돌아올 거죠?” 편지를 읽는 순간 군인은 지독한 향수병이 도져 지긋지긋한 전쟁 따위는 당장 그만두고 싶어진다. 이런 반응이 바로 선전용 전단지 속칭 ‘삐라’가 노리는 효과다.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북한군은 심리전의 일환으로 삐라를 대량 살포했다. 유엔군은 총 25억장을, 공산군은 3억장가량을 뿌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당시 삐라를 직접 볼 수 있는 독특한 전시가 열린다. 서울역사박물관 분관인 서울 마장동 청계천문화관이 오는 15일부터 8월22일까지 개최하는 ‘보이지 않는 전쟁, 삐라’ 특별전에서다. 전쟁 3년 동안 뿌려진 삐라 445점을 만날 수 있다. 유엔군이 북한군을 대상으로 뿌린 한 삐라에는 고통스러운 모습의 군인 그림과 함께 “얼어 죽기 전에 다쳐 죽기 전에 굶어 죽기 전에 어서 도망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북한군의 투항을 유도하려는 의도다. 삐라 제작에는 ‘코주부’ 김용환 화백, ‘고바우’ 김성환 화백 등 당대 유명 화가나 문인들도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소련, 중국 등이 가세한 국제전이었던 만큼 영어·중국어 삐라도 눈에 띈다. 김영관 청계천문화관장은 10일 “대부분 전쟁이 주는 고통과 평화에 대한 갈망 등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자극하는 내용들”이라며 “전쟁의 비극을 대변하는 상징물”이라고 말했다. 전쟁 당시 일상용품을 보여 주는 ‘전쟁과 일상’(인사동 갤러리 떼), 피란지 부산의 풍경을 담은 ‘굳세어라 금순아!’(국립민속박물관), 전쟁 기록물과 비무장지대 미공개 사진을 모은 ‘아! 6·25’(용산 전쟁기념관) 등 다른 특별전도 서울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천안함’ 안보리에 정식 회부

    천안함 사건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됐다. 천안함이 침몰한 지 70일 만이다. 정부는 4일 오전 11시(뉴욕 현지시간) 박인국 주 유엔대표부 대사 명의로 천안함 사건을 안보리에서 다뤄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서한을 안보리 의장국(멕시코)에 제출했다. 정부는 서한에서 “천안함 침몰은 북한의 어뢰공격에 의한 것임이 민·군 합동조사단 조사결과 명백히 드러났다.”며 “북한의 무력공격이 국제평화와 안전에 위협이 되고 있는 만큼 안보리가 이번 사안을 논의해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엄중하게 대응해 줄 것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북한의 이번 공격행위가 1953년 유엔군이 당사자로 참여한 정전협정 2조12항, 15항과 유엔헌장 7장을 정면 위배한 것으로 규정했다. 박 대사는 이날 클라우데 에예르 주 유엔 멕시코 대사를 만나 이같은 내용의 서한과 함께 합조단의 조사결과 요약본을 직접 제출했다. 이에 따라 안보리 의장은 조만간 이사국들이 서한을 회람하는 절차를 거쳐 천안함 사건 논의를 위한 의사일정을 확정하게 된다. 정부 관계자는 “안보리에서의 대북 징계 결정은 천안함 사태가 북한 소행이라는 점을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안보리 징계를 명분으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대북 금융 압박 등 실질적인 제재에 돌입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대북제재의 동력을 잃지 않도록 서둘러 오는 20일 이전에 안보리 의장성명과 같은 대북 징계를 도출한다는 계획이다. 한편 북한은 이날 우리 정부의 안보리 회부 전에 “일방적인 조사 결과만 갖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정 논의를 강행한다면 우리가 지난 시기처럼 초강경 대응해도 미국과 안보리는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 기자와의 문답에서 “천안호 침몰 문제가 안보리 이사회에 제기될 경우 그 성원국들이 사건의 진상을 객관적으로 밝히는 데 선차적 주의를 돌리고 자체의 옳은 판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미국과 남조선은 피해 당사자인 우리가 제기한 국방위원회 검열단을 받아들여 조사결과를 확인시키도록 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연 김정은기자 carlos@seoul.co.kr
  • [테이크 아웃 여행] 호국의 달, 자녀 학습 위한 ‘애국여행’

    [테이크 아웃 여행] 호국의 달, 자녀 학습 위한 ‘애국여행’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애국여행’이라는 주제로 국내 이색 여행이 있어 눈길을 끈다.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호국선열들을 기리는 행사가 지역마다 늘어나고 있어 자녀를 갖고 있는 부모가 호국과 애국이라는 단어를 학습시키기 위해 여행 겸으로 현장을 찾고 있다.이는 요즘 아이들에게 호국, 애국이라는 단어가 낯설고 현충일과 6.25를 모르는 자녀에게 국가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위해서다. 더불어 여행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애국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다.옥션숙박을 담당하는 양승재 팀장은 “애국여행은 여행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국가의 소중함도 알 수 있는 소중한 시간과 경험이 될 것”이라며 “또한 주요 여행지의 경우 교과서 내용과도 연계가 되기 때문에 교육적인 효과도 볼 수 있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애국 열사들의 흔적이 가득한 충남으로 떠나자충남은 항일열사를 비롯해 위인들 생가를 찾아볼 수 있는 충절의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천안 독립기념관에서는 식민지 세월의 아픔과 독립열사들의 얼을 느낄 수 있는 곳이며 예산은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 충의사가 있다. 윤봉길 기념관에는 그의 귀중한 유물 56점을 비롯해 짧은 삶을 볼 수 있는 영상이 준비돼 있다.아산에서는 이순신장군의 혼이 서린 현충사를 둘러 볼 수 있으며 홍성은 김좌진 장군 생가와 한용운 생가 등도 찾아볼 수 있다.특히 충남에는 리솜스파캐슬을 비롯해 온천수로 인정받는 덕산온천이 위치해 있어 가족여행의 피로를 풀 수 있다.이에 따라 옥션숙박에서는 ‘애국여행’ 후 피로를 풀 수 있는 숙박시설을 저렴하게 제공하고 있다.최저 5만원(산울림팬션 등)부터 이용할 수 있으며 천안센트럴관광호텔의 경우 예약 시 생수, 목욕용품 등을 무료로 제공한다.◆ 호국의 역사를 안고 있는 강화도강화도는 외세와 맞선 항전의 유적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으로 대몽항전의 상징인 삼별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배중손 장군이 항몽 근거지로 삼았던 용장산성과 최후를 맞은 남도석성이 있다. 이어 남도석성의 경우 조선시대 개축한 상태로 보존이 잘돼있는 곳이다.또 강화도에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전략적 요충지 초지진도 있다. 초지진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를 물리친 곳이다. 하지만 고종 8년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 중장에게 처음으로 함락됐으며 그 후에는 일본과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을 맺어야 했던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이곳에는 아직도 당시의 치열한 전투를 떠오르게 하는 포탄 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어 자녀들을 위한 역사 학습 체험 현장으로 좋은 곳이다.◆ 6.25 결사 항전지, 경상북도 칠곡칠곡군은 다가오는 6.25 전쟁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유적이 많다. 먼저 다부동전적기념관은 탱크모양으로 디자인돼 있어 외벽에는 6.25 당시의 격전 모습을 엿 볼 수 있다.이어 부근에는 6.25 전쟁을 기념해 6.25㎞로 조성한 탐사코스를 돌며 당시 상황을 체험할 수도 있다.또한 왜관지구전적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낙동강 일대에서 벌어졌던 격전을 기념하여 건립된 곳이다. 6개의 전시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당시 사용되던 무기류와 피복 등을 관람할 수 있다.호국의 다리는 대구와 부산의 함락을 막기 위해 폭파된 곳이며 철교의 형태로 다시 복원돼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파주 임진강변파주는 자유의 다리, 평화의 종각, 도라전망대가 있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적합하다.자유의 다리는 1953년 휴전협정 때 유엔군과 국군 포로를 교환하기 위해 건립한 임시 목교로 다리 끝 벽면엔 숱한 사람들의 통일 기원 메시지가 담긴 천조각과 종이, 셔츠 등이 걸려 있다.도라전망대는 개성을 비롯한 북한 땅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으로 북한의 소탈한 농촌 생활과 어린 소년들의 군사훈련을 관측할 수 있다. 또 평화 누리공원에서 통일의 염원을 담은 이색적인 조형물들을 둘러 볼 수 있다.이에 옥션숙박에서는 파주에 위치한 헤이리, 평화누리공원 바람개비 동산 등을 최저 1만 9,900원부터 저렴하게 이용할 수 는 상품도 내놨다. 여행 상품은 헤이리 예술마을을 비롯해 프로방스 마을, 바람개비 공원 등을 방문한다.◆ 북한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자녀의 꿈이 늠름한 군인이라면 태풍전망대를 방문해 보는 것도 괜찮다.지난 1991년 개관한 태풍전망대는 휴전선과 가장 가까운 국군 전망대로 비끼산 최고봉인 수리봉에 자리 잡고 있다.전망대에서 휴전선까지 거리가 고작 800m에 불과해 맑은 날에는 망원경으로 개성 부근까지 볼 수 있으며 전망대에서 2km 떨어진 필승교 부근에 위치한 전시관에서는 강으로 떠내려 온 북한 생활필수품, 일용품, 간첩의 침투장비 등을 관람할 수도 있다.옥션숙박에서는 고성 부근의 콘도, 펜션 등을 저렴하게 제공한다. 특히 아이파크 콘도는 최저 3만 9000원부터 이용할 수 있으며, 고성 금강산콘도 객실 예약 시 커피, 햄버거, 주유권 등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사진=강화도 광성보, 강화도 광성보 용두돈대, 독립기념관, 평화누리공원서울신문NTN 이규하 기자 judi@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對北제재조치 이후] “北 태도따라 추가 군사조치”

    월터 샤프 한미연합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은 2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경비대대와 캠프 보니파스, 오울렛 초소 등을 방문했다. 남북한 대치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전시 작전통제권의 결정권자인 샤프 사령관이 천안함 사태 이후 최전방을 직접 방문한 것은 처음이다. 유엔사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샤프 사령관이 판문점지역을 방문해 그곳의 경비대대를 검열하고 부대 지휘관들과 정전협정과 관련된 여러 가지 책임문제를 검토했다.”고 밝혔다. 샤프 사령관은 남한과 북한, 유엔사가 함께 경비업무를 서고 있는 JSA의 분위기 등에 대해 전해 듣고 근무 장병들을 격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샤프 사령관은 JSA 경비대대장 스킵 로즈 중령과 부대대장 손광재 중령으로부터 현황을 보고받은 뒤 군사정전위 비서장 커트 테일러 대령으로부터 군사정전위 업무보고를 청취했다. 앞서 샤프 사령관은 경의선 출입관리소(CIQ)와 도라산 관측소(OP)도 방문했다. 국방부는 이날 북한의 반응과 태도에 따라 추가적인 군사 및 비군사적 조치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방부 류제승 정책기획관은 예비역 주요 직위자 초청 천안함 설명회에서 “대북 심리전 재개와 남북 해상항로대 폐쇄에 따른 군사적 조치, 대규모 한·미 연합 대잠수함 훈련,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역내외 차단훈련 실시 등의 대북조치를 시행하거나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류 기획관은 이어 “북한이 (성명서와 통고문 등을 통한) 수사적 위협에 이어 실질적으로 군사 및 비군사적 도발을 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유엔司, 北 정전협정 위반 결론

    유엔군 사령부 특별조사팀이 천안함 사태가 북한의 어뢰공격에 따른 것이며, 이는 정전협정을 위반한 것이라는 결론을 이미 내렸다고 정부 및 군 고위관계자가 27일 밝혔다. 군 관계자는 “유엔사 특별조사팀이 지난 22일부터 천안함 침몰에 대한 검증작업을 벌인 결과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특별조사팀은 26일 조사작업을 종료했으며, 보고서를 작성 중이다. 보고서 작성작업이 끝나면 이를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에 제출하고, 정전위는 바로 유엔본부에 정식으로 보고하게 된다. 이달 말에서 다음달 초까지 이런 절차가 완료될 전망이다. 관계자는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가 워낙 명확하고 압도적이어서 검증작업이 별다른 이견 없이 빨리 끝났다.”면서 “정전위의 보고서가 유엔에 제출되면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논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는 이날 “북남 협력교류와 관련해 우리 군대가 이행하게 되어 있는 모든 군사적 보장 조치를 전면 철회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인민군 총참모부는 ‘중대통고문’을 통해 7개항의 ‘중대조치’를 밝히면서 동·서해 군 통신연락소의 폐쇄와 개성공단 등에 대한 육로 통행 차단을 검토하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김상연 오이석기자 carlos@seoul.co.kr
  • “北도발, 유엔헌장·정전협정 위반”

    이명박 대통령은 21일 천안함 사태에 대해 “(북한의) 군사적 도발행위이며, 유엔헌장과 정전협정, 남북기본합의서를 위반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 대통령은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천안함 사태는) 국민들이 휴식을 취하는 늦은 시간에 북한으로부터 무력기습을 당한 것”이라면서 “심각하고 중대한 사안인 만큼 우리가 대응하는 모든 조치사항도 한치의 실수가 없고 매우 신중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김은혜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포토]천안함 ‘北소행’ 결정적 증거 이어 “오늘은 이번 사태와 관련해 우선 군사적인 측면, 또 남북관계의 오늘과 내일,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국제적인 측면과 우리 사회, 모처럼 회복세에 있던 경제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면서 “오늘 논의사항을 토대로 국민과 국제사회 앞에 담화를 발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또 “북한이 다시는 무모한 도발을 자행할 수 없도록 정부가 중심을 잡고 한치의 흔들림 없이 북한에 대해 체계적이고 단호하게 대응하라.”고 각 부처에 지시했다. 회의에는 정운찬 국무총리와 유명환 외교통상, 현인택 통일·김태영 국방·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 원세훈 국가정보원장, 정정길 대통령실장 등 NSC 위원 전원과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선평화통일위원회는 이날 “이 시각부터 현 사태를 전쟁국면으로 간주하고 북남관계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그에 맞게 단호히 대처해 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외무성도 대변인 담화를 통해 천안함 사건과 무관함을 거듭 주장하면서 한국 정부의 조사결과 발표에 대한 미국의 지지 입장을 비난했다. 이외에도 북측은 앞서 국방위원회 성명에서 제안한 천안함 조사결과 관련 북측 검열단을 주말에 파견하겠다고 당국에 통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조평통은 대변인 성명을 내고 “괴뢰 패당이 대응과 보복으로 나올 경우 북남관계 전면폐쇄, 북남불가침 합의 전면 파기, 북남협력사업 전면 철폐 등 무자비한 징벌로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방부는 북한이 ‘국방위원회 검열단’을 보내겠다고 통보한 것과 관련, ‘정전위 조사 후 대화’ 취지의 전통문을 보냈다고 밝혔다. 전통문에는 합조단의 조사결과에 대해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의 특별조사팀이 정전위 규정과 절차에 따른 조사를 끝낸 후 장성급 회담을 통해 대화하자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와 관련, 김태영 국방부장관은 외신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강도나 살인범이 현장을 검열하겠다는 의도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엔군사령부는 천안함 침몰 사태가 정전협정을 위반했는지 여부를 조사할 특별조사팀을 구성하고 이번 주말부터 조사에 들어간다. 한·미 군당국은 대북 감시태세인 ‘워치콘’을 3단계에서 2단계로 한단계 격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성수 오이석 김정은기자 sskim@seoul.co.kr
  • [천안함 ‘北소행’ 이후] 유엔사 조사 어떻게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수석대표 윤영범)가 천안함 침몰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조사팀(SIT)’을 구성해 주말부터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 여부에 대한 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주말부터 착수… 이달내 마무리 21일 국방부와 유엔군사령부에 따르면 정전위는 민·군 합동조사단이 천안함 침몰 원인을 ‘북한의 어뢰공격’이란 점을 밝힘에 따라 이 사안에 대한 객관성 등을 확인하고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 여부를 조사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우리 정부가 정전위에 정전협정 위반사실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천안함 사건은 우리 함정을 무력 공격한 명백한 군사도발로 이는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라면서 “합조단 조사결과와 상관없이 군사정전위 특별조사팀에 조사를 의뢰했다.”고 말했다. [포토]천안함 ‘北소행’ 결정적 증거 SIT는 유엔사 소속 프랑스, 뉴질랜드, 덴마크, 영국, 호주, 캐나다, 한국, 터키, 미국의 요원들과 중립국 감독위원회 소속 스웨덴과 스위스의 요원들로 구성된다고 유엔사 측은 설명했다. 이들은 앞으로 이번 사건에 대한 합조단의 조사결과에 대해 객관성과 합리성을 검증할 예정이다. ●북한지역 조사는 北서 거부할듯 이 과정에는 합조단의 결과를 참고해 직접 평택 해군 2함대사령부에 있는 천안함 선체에 대한 현장조사도 실시한다. 또 사건해역에 대한 조사와 함께 북측에 대한 조사도 시도한다. 하지만 1968년 이후 북측이 정전위의 북한에 대한 조사에 응한 사례가 없어 이번에도 우리측 사건 해역에 대한 조사만 이뤄질 전망이다. 국방부 고위관계자는 “정전위 특별조사팀의 조사는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확인하는 수준인데 북한지역 조사는 북측에서 거부할 것”이라면서 “조사는 신속히 이뤄질 예정이며 이번 달 안에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전위는 SIT 조사를 근거로 정전협정 위반사항의 범위를 판단하고 그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유엔에 보고한다. 유엔사와 우리 군도 보고서를 근거로 판문점에서 장성급 회담을 열고 북한 측 대표를 참석시켜 조사 내용을 설명한 뒤 북측의 입장을 들을 예정이다. 1953년 7월27일 국제연합군 총사령관과 북한군 최고사령관, 중공인민지원군사령원 사이에 체결된 정전협정은 무력도발을 금지하고 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민간학살기록은 이념선전 도구 노근리사건 축소될 수밖에 없어”

    1999년 AP통신의 보도로 수면 위에 떠오른 노근리 사건. 1950년 7월 한국전쟁 와중에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이었지만 모두가 쉬쉬했다. 한·미 양국은 2001년까지 공동조사를 벌인 뒤 “군인들에 의한 우발적인 사건으로 군 지휘부의 사살 명령은 없었다.”고 정리했다. 그러나 사건을 축소했다는 반발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양정심 성균관대 연구교수는 최근 애초부터 노근리 사건은 축소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분석을 내놨다. 지난 24일 수선사학회,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성균관대 사학과 BK21 사업단이 공동개최한 ‘전쟁의 고통-노근리 파일을 중심으로’ 학술대회에서다. 양 교수는 미군이 1950년 10월부터 만들어 운용한 전쟁범죄조사단 기록을 인용했다. 조사단은 포로신문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관련 자료를 수집했으나 적극적으로 이를 이용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양 교수는 “민간인 학살기록은 처음부터 중국과 옛 소련 등 상대국을 비난하기 위한 선전전에 쓰일 자료를 모으기 위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전범 재판 등은 이뤄질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서술의 불균형에서 드러난다. 미군이나 유엔군이 피해를 입었을 경우 체계적인 조사가 진행됐지만, 미군이 가해자일 경우 대부분 가려졌고 공개적으로 문제가 된 경우에만 어쩔 수 없이 조사가 추진됐다. 그나마도 중립적인 작전 결과로 일어난 부수적인 피해인 것처럼 기술됐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한국전때 투항권유 전단 효과컸다”

    “한국전때 투항권유 전단 효과컸다”

    한국전쟁이 미국 주도의 유엔군과 중공군 사이의 ‘대리전’ 양상으로 바뀌고 38선 언저리에서 지루한 공방이 이어질 즈음에 양측은 적병의 전투 의지를 꺾고자 고도의 심리전을 병행했다. 이 과정에서 탈영과 투항을 권유하는 ‘전단’은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일일이 발품을 팔아가며 100여명의 한국전 참전용사를 직접 만나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벨기에군 한국전 참전 기록서를 펴낸 유호 피어링스(72)는 “희귀한 자료일 것”이라면서 조심스럽게 보관해 온 서류첩을 보여 주었다. 서류첩에는 그가 대면한 한국전 참전용사들로부터 받은 사진들과 함께 당시 전장에서 이들이 습득했던 유엔군과 중공군 측 회유 전단이 담겨 있다. 한 전단은 3명의 북한군 병사가 전투 중 부상한 사진, 병원에서 치료받는 사진, 건강한 모습으로 음식을 먹는 모습의 사진과 함께 동료 북한군 병사에게 띄우는 글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선명하다. 전단에는 “친절한 유엔군은 우리를 도와주었소. 우리는 유엔군 포로병원에 입원해서 좋은 치료를 받고 이제 완쾌했소. 우리는 음식도 잘 먹고 행복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소.”라고 적혀 있었다. 피어링스는 “실제 전단이 심리적으로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증언한 참전용사들이 있다.”고 전했다. 피어링스의 서류첩에는 복사해 보관 중인 대(對) 미군용 중공군 측 전단도 들어 있다. 한 전단은 추운 겨울 전장에서 처량한 모습으로 통조림 배급식량을 든 병사와 칠면조 요리가 차려진 크리스마스 저녁식사를 준비 중인 미국가정의 사진이 대비돼 있다. 그러고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은 당신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전장에서) 빠져나갈 방도를 찾으라! 이 부당한 전쟁에서 싸움을 중단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행동이 아니다.”라고 꼬드기고 있다. 피어링스는 1956년 육군에 입대하면서 전해 들은 한국전쟁에 관심을 갖게 됐다. 군 복무 이후 직장 생활을 하다 1995년 은퇴하면서 본격적으로 벨기에의 한국전쟁 참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2002년 만학도로서 한국전쟁 참전 기록을 대학 졸업논문으로 썼고 이 논문을 기초로 해 125명의 참전용사를 면담, 작년 5월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로 된 벨기에군 한국전 참전 기록서를 펴냈다. 그는 “벨기에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한국전에 참전했지만 제대로 된 기록물이 없어 안타까웠다. 군 입대 직후 처음 접한 한국전에 매료돼 시작했던 일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브뤼셀 연합뉴스
  • ‘청년가장’ 빨간 마후라 됐다

    ‘청년가장’ 빨간 마후라 됐다

    10일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박현철(23·58기) 소위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수석입학에 이어 뛰어난 성적으로 공사 생활을 마친 아들의 모습을 하늘에서 보고 계실 부모님 생각에서다. 박 소위는 18살 때 사고로 어머니를 잃었으나 흔들리지 않고 어린 동생을 돌보며 입시에 전념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고교시절 1등을 놓치지 않고 공사에 수석합격했다. 하지만 박 소위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생도생활 1년 만에 동생과 생활하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박 소위는 또다시 찾아온 시련을 극복했다. 명랑한 모습으로 생도생활을 끝낸 박 소위는 134명의 동기 중 6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식에서 유엔군 사령관상을 수상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열린세상]당포함 순국 장병 43주기를 보내며/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열린세상]당포함 순국 장병 43주기를 보내며/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지난 1월19일 오전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당포함 충혼탑에서 해군 제1함대 사령부 주관으로 당포함 순국 장병 43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당포함(56함)은 1967년 1월19일 동해 북방한계선(NLL) 근해에서 조업하던 우리 어선을 보호하는 작전을 펼치다 북한 경비정과 대치하던 중 북한 해안포에서 발사한 280여발의 포탄을 맞아 침몰했다. 39명의 해군 장병들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당시 당포함은 170여발로 대응사격을 했으나 북한 해안포의 벌떼 포격으로 불행히 교전 초반 기관실이 피격되어 함이 기동력을 잃고 선체가 침몰했다. 당포함 사건은 해군력 증강의 필요성 및 유사시 북한 해안포의 소나기 포격을 주의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교훈은 작전권과 관련된 부분이다. 정부는 북한의 당포함 격침행위를 유엔군사령부를 통해 엄중 항의하고 재발방지 보장을 얻어내려 했으나 허사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찰스 본스틸 유엔군사령관에게 북한 도발에 응분의 군사조치를 취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본스틸 사령관은 보복은 정책문제로 상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지 못했으며 한국군이 단독 행동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점만을 강조했다. 한국 정부의 실망과 분노는 이듬해 1월 북한이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에 이어 청와대 기습을 노렸을 때 절정에 달했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고 사이러스 밴스를 특사로 파견했다. 밴스 특사는 박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존슨 대통령의 의사임을 밝히면서 북한에 대한 여하한 단독 보복 행동을 자제할 것과 이를 약속한다는 각서를 요구했다. 밴스는 이에 대한 대가로 추가 군원(軍援)을 통해 한국의 방위력 증강을 돕겠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군함만 갖다 놓고 가만히 있으니 북한이 깔보고 있지 않은가.” “방위력을 증강해도 북한의 침공은 줄어들지 않았다.” “아무리 남침하더라도 보복은 없다.”고 북한이 인식한다면 “우리의 여하한 방위력 증강도 근본문제(남침 억제)를 해결 할 수 없다.”고 맞받았다. 박 대통령의 단호한 결의를 알아차린 밴스는 격퇴와 보복은 구별돼야 하며 보복조치를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 보복조치’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라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그때그때 결정하자고 제의했다. 박 대통령은 미국도 대북 군사행동 시 한국과 협의해야 하는 상호주의를 내세워 각서를 거부했다. 또 박 대통령은 앞으로 유사사태가 발생했을 때 미국과 사전 협의를 하겠지만 경우에 따라 단독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미 양국 정상의 공동성명에 미국의 ‘직접 반격’의 용어가 삽입된 것은 1983년 아웅산 사건 직후였다. 지난해 11월 NLL을 넘었던 북한 경비정이 우리 함정의 대응사격으로 대파 일보 직전에 이르렀지만 북한의 해안포는 침묵을 지켰다. 1월 말 이후 북한은 NLL 이남 지역을 포함해 일방적으로 항해금지구역을 선포한 후 해안포를 잇따라 발사했지만 포탄은 NLL을 넘지 않았다. 정부와 해군은 당당하고 차분하게 대응했다. 우리는 작전권의 중요성을 알았고, 북한은 군사력의 군사적·정치적 한계를 배우고 있다. 전작권 전환시기를 늦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2012년 안보상황이 좋지 않은 시기라면 전환시점은 평화정착 이후가 안전하다. 하지만 미국과의 재협상 시 불이익, 북한 위기 및 평화구축과정이 우리의 군사·외교 주도권과 자율성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최근 월터 샤프 주한 미 사령관은 한국에 전작권을 넘겨도 공군구성군 사령부, 대량살상무기 대응전력 및 연합해병강습부대의 운영을 주도한다고 말했다. 미래 한·미 작전협력은 병렬형의 독자적인 지휘체제를 근간으로 하되 유사시 사태의 내용에 따라 한국군 주도에서 미군 주도 직렬형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유연성을 갖는 체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부고] 한국전 참전 헤이그 전 美국무장관

    │워싱턴 김균미특파원│알렉산더 헤이그 전 미국 국무장관이 20일 새벽(현지시간) 사망했다. 85세.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소재 존스홉킨스 병원 측은 이날 입원 치료를 받아 오던 헤이그 전 국무장관이 감염에 따른 합병증으로 숨졌다고 밝혔다. 4성 장군 출신인 헤이그는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로널드 레이건 등 3개 공화당 행정부에서 백악관 비서실장과 국무장관 등 고위직을 지냈다. 헤이그는 특히 레이건 행정부 초대 국무장관으로서 1980년대 초반 한·미 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최근 기밀해제된 미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 직후 첫 외국정상으로 미국에 초청했을 때 한국 정부가 미국의 정치적 지지 문안을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포함시키려다 헤이그의 거부로 무산된 것으로 밝혀졌다. 헤이그는 레이건 대통령 핵심참모들과의 갈등으로 17개월 만에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47년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군 생활을 시작한 헤이그는 6·25전쟁 때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참모로 직접 참전해 한국과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이후 베트남전에도 참전했으며 1969년 당시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군참모로 발탁되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1969~1974년 백악관에서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과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대령에서 4성 장군으로 고속 진급하며 승승장구했다. 국무장관 재직 시절 발생한 레이건 대통령 저격 사건 직후 백악관 기자들 앞에서 “부통령의 귀환을 기다리면서 지금은 내가 백악관을 통제하고 있다.”고 선언한 일화는 과도한 권력집착 성향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헤이그는 198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려다 포기하고, 1988년 대권 도전에 나섰지만 중도하차하며 대통령에 대한 꿈을 접었다. kmkim@seoul.co.kr
  • 동키부대 활약상

    동키부대 활약상

    미군 측은 1·4후퇴 이후 재북진 작전을 구상하면서 적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유격전과 첩보망을 매우 중요시 여겨 동키부대원들을 북한으로 속속 보내게 된다. 동키부대의 첫 임무는 1951년 3월 6일 부여됐다. 대원 26명이 적진에 침투해 근거지를 확보하고 반공 동조자를 규합한 뒤 군사정보를 수집하고 교량·철도 및 주요 군사시설을 파괴하라는 명령이었다. 이후 장산반도에 파견된 대원들은 주로 육도·월래도·마합도·초도와 장산곶 등에 근거지를 두고 첩보활동을 했다. 내륙으로 들어간 대원들은 박석산 등 산악지대 동굴에 은거하면서 주변의 반공청년들과 연대해 크고 작은 유격전을 펼쳤다. 하지만 전투장비와 식량, 의복 등 모든 것이 부족해 악전고투를 거듭했다. 동키부대원들의 초기 복장은 북한 탈출 시 착용했던 인민군 방한복이거나 다양한 민간복 차림이었고 제대로 된 신발도 없어 고향 난민들이 만들어준 짚신을 신곤 했다. 당시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한 남한 빨치산도 이와 같은 복장을 했다고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1년 정도 지난 후에야 미군 측이 대원들에게 군복과 군화 등을 지급했다. 당시 황해도 일대에서 전개된 유격전은 현지 주민들의 도움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유엔군 재수복을 믿은 주민들은 인민군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십시일반으로 유격대원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여성 대원들의 활약도 적지 않았다. 장산반도에서 주로 활동한 여성 대원들은 정보와 의무를 담당했다. 이들은 장산반도 앞 육도(陸島)를 근거지로 해서 내륙까지 수시로 침투, 현지 주민을 가장해 적정을 효과적으로 살펴 유격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백령도에 파견된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이 이들을 에이전트로 활용할 정도였다. 동키부대원들이 이처럼 황해도 연안의 크고 작은 섬을 사실상 지배했기에 휴전협정 당시 백령도, 대청도, 연평도 등 서해5도가 휴전선 남방으로 책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북방한계선(NLL)은 명예도 보상도 없이 죽어간 무명의 동키부대원들이 만들어낸 ‘눈물의 선’인 것이다. 백령도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北 포격 전함열세 만회 훈련”

    지난 27일 개시된 북한군의 해안포 발사는 정치적 목적의 위협 차원 외에 남한보다 열세인 해군 전력을 보완하기 위한 실전훈련의 성격도 비중 있게 가미돼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군 소식통은 29일 “북한군이 지난해 11월 대청해전 패퇴 이후 남한 해군력에 대한 우려를 심각하게 갖기 시작했다.”면서 “이번 사격은 전함의 열세를 해안포로 만회하려는 훈련의 성격도 상당하다.”고 말했다. 전함 대결에서 밀리자 믿을 것은 해안포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실전에 버금가는 훈련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북방한계선(NLL) 쪽으로 포문을 향한 것도 최대한 실전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란 분석이다. 여러 개의 포가 동시에 수백발을 한 지점에 퍼붓는, 일명 투망식 탄막사격(TOT·Time On Target)을 실시한 것 역시 실전훈련의 성격이 짙다. 소식통은 “단순히 정치적 목적뿐이었다면 드문드문 몇발 씩만 쏴도 된다.”면서 “다양한 포로 화력과 사거리를 시험한 것 같다.”고 했다. 1999년 1차 연평해전과 2002년 2차 연평해전에서 우리 군에 열세를 드러낸 데 이어 지난해 대청해전에서 완패한 것이 북한 해군에 직접적인 위기의식을 안긴 요인으로 꼽힌다.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1953년 8월30일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서해에 NLL을 그은 이유도 당시 해군력에서 우위에 있던 남측의 북진을 막기 위한 차원이었을 만큼 북한군은 ‘서해 공포’를 갖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편 우리 군은 해안포 도발에 대비, 백령도와 연평도에 대포병레이더(TPQ)를 고정배치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국방부는 이날 김태영 장관과 국회 국방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긴급 간담회에서 이같이 보고했다. 과거 연평도 인근에서 긴장이 고조됐을 때 TPQ가 배치된 적이 있다. TPQ가 고정배치될 경우 군은 해안포 발사지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전망이다. 국방부는 또 현재 서해에 배치된 K-9 자주포를 추가 배치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북한은 27일 300여발의 포사격을 개시한 데 이어 28일과 29일까지 50여발을 쏘는 등 3일간 총 350여발의 해안포를 발사한 것으로 국방부는 집계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