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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한 美 공군 사령관에 버거슨 내정

    주한 美 공군 사령관에 버거슨 내정

    신임 주한 미 공군 사령관에 토머스 버거슨 미 공군장관실 의회 연락 단장이 내정됐다고 미 국방부가 27일(현지시간) 밝혔다. 애슈턴 카터 국방장관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버거슨을 소장에서 중장으로 승진시켜 신임 주한 유엔군·미군 부사령관 겸 제7공군 사령관에 내정하는 한편 상원에 인준을 요청했다고 보도자료를 통해 발표했다. 버거슨 중장은 인준 과정을 통과하면 현 제7공군 사령관인 테런스 오샤너시 중장과 교체한다. 오샤너시 중장은 대장 승진과 함께 공석인 태평양공군 사령관으로 내정됐다. 미 공군사관학교를 거쳐 1985년 임관한 그는 전투비행대대장, 제1 전투비행단장, 제3 항공단장, 영국 주재 공군 무관, 공군사령부 작전평가국장 등을 거쳤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문경근의 남북통신]북한에서 6·25는 ‘反美의 날’…전국서 대대적 맹세모임

    [문경근의 남북통신]북한에서 6·25는 ‘反美의 날’…전국서 대대적 맹세모임

     25일은 한국전쟁 발발 66주년입니다. 북한은 매년 이날을 ‘반미교양의 날’로 정하고 전국에서 대대적인 반미 교육을 진행합니다. 특히 황해북도 신천박물관에서는 청년동맹, 농근맹, 여맹, 관계부문 일꾼, 청년학생, 농근맹원들과 농업근로자, 여맹원들이 참가해 반미제국주의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맹세모임’이 진행됩니다. 북한은 황해도 신촌군에서 발생한 양민학살의 주범으로 미군을 지목합니다. 그러나 북한에서 목격자들이 전하는 사실은 한국전쟁이라는 혼란 속에서 공산권의 탄압과 거기에 저항하는 세력 간의 대립으로 인해 동족끼리 서로 싸우고 죽인 사건입니다.  신천군에서 살다 해주에서 대학교를 다녔던 한 탈북자는 “한국전쟁을 경험하신 동네 어르신들은 신천에는 미군 전투부대가 주둔한 적이 없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다. 미군 통신소대가 잠시 전화기 등을 개설하기 위해 며칠 머문것 외 미군은 그림자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신천군은 황해도 중부의 곡창지대로 대부분의 농가들이 자급자족했습니다. 또 집집마다 기독교를 숭상해 기독교를 탄압하는 북한 정권에 대한 반감도 상당했습니다. 그러던중 북한이 토지개혁을 빌미로 지주와 부유한 자작농의 재산을 몰수하고, 이를 반대하는 기독교 세력들을 축출했습니다. 그러자 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 중 일부는 남한행을 택하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곳에 남아 공산권 치하에서 ‘절치부심’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유엔군이 북상하자 신천군에 남아있던 반공세력들이 폭동을 일으킵니다. 신천군당 청사와 보안서 등 주요 관청을 장악하고, 퇴각하던 인민군을 공격했습니다. 또 북상하는 연합군을 맞이함과 동시에 공산권에 부역했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총살하는 등 숙청이 시작됩니다. 이후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북한 인민군이 다시 남쪽으로 진군합니다. 신천 지역에서 가족을 잃은 인민군들 또한 미처 후퇴하지 못한 국군 가족들과 치안대 등 남한 정부와 관련된 인사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합니다. 희생당한 가족에 대한 복수로 말입니다. 이렇게 동족간에 죽고 죽이는 사건이 반복돼 신천군에서만 전투로 사망한 것 보다 훨씬 많은 양민들이 희생됩니다. 북한의 발표에 따르면 신천군에서 당시 전체주민 4분의 1인 3만 5000여명의 양민이 미군에 의해 학살됐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전쟁상황에서 미군이 아닌 남과 북이 보복과 재보복으로 서로의 가족들을 죽인 숫자를 합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결국 신천군 사건은 북한의 탄압과 공산권에 대한 주민들의 저항, 6·25 전쟁 등의 복합적인 원인이 맞물려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통일이후 우리 사회가 용서하고 치유하며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한편 신천에서의 양민학살은 스페인의 유명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1881~1973년)의 ‘한국에서의 학살’에 모티브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작가 황석영의 소설 ‘손님’(2001년)도 신천에서의 양민학살을 소재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66년 전처럼… 거장의 건반, 전우를 울리다

    66년 전처럼… 거장의 건반, 전우를 울리다

    피아니스트 세이모어 번스타인 참석 최전방서 자주 쳤던 리스트 ‘위안’ 연주 “김정은에게 피아노 가르치고 싶다” 朴대통령 “자유·평화는 여러분 덕”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라는 영화를 보면 아무리 음악 문외한이라도 당장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 영화는 피아노 거장 세이모어 번스타인(89)의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피아노와 결혼해 일생을 살다시피 하고 피아노를 연주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는 번스타인은 어릴 적 운명처럼 피아노를 사랑하게 된 순간을 영화에서 밝힌다. “어느 날 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피아노로 연주한 뒤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요. 잠에서 깬 어머니가 ‘너 왜 우는 거니’라고 물었고, 나는 ‘엄마, 어떻게 음악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죠’라고 답했어요.” 영화 속 그 번스타인이 24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의 초청으로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을 방문했다. 한밤중에 자신이 연주한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 눈물을 흘린 천부적 감수성의 소유자 번스타인은 살육의 6·25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다. 1950년 입대한 그는 1951년 4월부터 1년 6개월간 미 8군 보병으로 6·25에 참전했다. 이날 행사는 ‘6·25전쟁 제66주년 국군 및 유엔군 참전 유공자 위로연’으로, 참전용사와 주한 외교사절 등 500여명이 참석한 자리였다. 6·25 당시 경기도 파주와 연천 등 최전방에서 100여 차례 피아노 공연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에 상처받은 전우들의 마음을 치유했던 번스타인은 이날 66년 만에 옛 전우들 앞에서 다시 한번 피아노를 연주해 감동을 줬다. 번스타인은 연주에 앞서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박근혜 대통령님 만나서 영광입니다”라고 인사했다. 이어 “1951년 4월 24일 새벽 5시 30분 인천에 도착한 날은 저의 23세 생일이었는데 이는 한국과 끈끈히 맺고 살라는 계시처럼 여겨졌으며, 동시에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웠다”고 털어놨다. 그는 “최전선에서의 연주는 두려움에 지친 병사들에게 용기와 희망이 됐다”면서 “열화와 같은 기립박수와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던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전방에서 군인들을 위해 자주 연주했던 프란츠 리스트의 ‘위안’이란 곡을 이번에 7시간 동안 연습했다”며 ‘위안’을 연주했다. 앞서 이날 오전 번스타인은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에 가서 김정은에게 피아노 연주를 가르치고 싶다”면서 “오직 농구에만 관심을 보이는 김정은이 교화되도록 첫 피아노 레슨을 했으면 한다”고도 했다. 이날 위로연에서 박 대통령은 “피아니스트 세이모어 번스타인 용사님을 비롯한 참전용사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면서 “여러분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가 얼마나 큰 희생과 헌신을 바탕으로 지켜져 왔는지를 보여 주는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말했다. 위로연에서는 미국 정부 선정 한국전쟁 4대 영웅 중 한 명인 고(故) 김동석 대령의 딸인 가수 진미령(본명 김미령)씨가 ‘아버지께 바치는 편지’를 낭독해 주위를 숙연하게 하기도 했다. 김상연 기자 carlos@seoul.co.kr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근현대사의 산증인 충정아파트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근현대사의 산증인 충정아파트

    이 연재에 충정 아파트를 포함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이 있었다. 한국 도시에 지어진 무지개떡 건축, 즉 주거와 다른 기능이 복합된 건물들을 추적하는 것이 이 연재의 골격이다. 그런데 과연 충정 아파트가 그 기준을 충족하는가? 현재의 충정 아파트는 물론 1층에 상점과 음식점 등이 들어가 있으므로 상가아파트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랬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상가아파트였다는 확실한 기록은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정 아파트를 이 연재에 포함하기로 한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어쨌건 현재 상가아파트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그다음으로는 충정 아파트가 한국 최초의 아파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최초의 아파트 충정공 민영환 이름 딴 거리정작 설계한 일본인 이름 따 ‘도요다 아파트’로 불리워 ‘최고’, ‘최대’, ‘최장’ 등 뭐든지 1등에 민감한 사회에서 ‘최초’가 예외일 리 없다. 아파트가 하도 많아서 ‘아파트 공화국’으로 불리는 한국 사회가 아닌가. 그러니 ‘최초의 아파트’란 타이틀에 대해서 민감한 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 타이틀을 가져갈 주인공에 대한 합의는 어느 정도 이루어진 듯하다. 적어도 이에 대한 강력한 반대 의견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다름 아닌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위치한 충정 아파트가 그 주인공이다. 을사보호조약 당시 분사한 충정공 민영환의 이름을 딴 거리에, 게다가 같은 이름이 붙은 건물이다. 그러나 정작 건물을 설계하고 지은 것은 일본인 도요다 다네오(豊田種松)였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의 이름을 따라 ‘도요다 아파트’ 혹은 ‘풍전 아파트’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한국 최초의 아파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일본의 미쿠니 상사가 조선 주재 일본인 직원들을 위해 지었다고 하는 미쿠니 아파트가 있었다. 심지어 평양에 있었다는 아즈마 아파트까지 이 논쟁에 등장한다. 하지만 회사 직원들을 위한 관사가 아닌 일반 임대용이었다는 점에서 결국 충정 아파트가 우세를 보였다. 주거 연구가인 박철수 서울시립대 교수에 따르면 시기적으로도 1930년에 건립된 충정 아파트가 가장 앞선다. # 영욕의 세월 30년 지상 4층 건립 이후 45년 동포들에 무단 점유 50년 민간인 학살 장소로 한국전쟁 때도 원형 유지 학문적인 논쟁과 별도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 최초의 아파트가 비록 심하게 변형되기는 했으나 21세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도 원래의 기능을 수행 중이다. 다만 그 과정이 보통의 건물에 비해 너무나 험난하다. 실로 한 건물의 인생역정이라 할 만하다. 존중하는 의미에서 연도별로 소개한다. 1930년 일본인 도요다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1050평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였다. 당시 이 지역은 갑신정변 당시 일본 공사였던 다케조에 이치로의 이름을 따서(!) 다케조에초로 불렸다. 이후 호텔 혹은 어묵 파는 술집이 되었다거나, 동아기업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는 등의 내력이 전해진다. 1933년에는 같은 죽첨정 3가 구역에서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살인사건이었던 금화장 문화주택지 단두 유아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45년 이후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들에 의해 무단 점유되었다는 설이 있다. 1946년 10월 1일 이 지역의 이름이 충정로로 변경되었다. 민영환은 종로구 공평동에서 순국했는데 왜 이 지역에 그의 이름이 붙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1950년 인민군 재판소가 설치되어 지하실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사실은 충정 아파트에 대한 자료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다만 그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도 공통적이다. 추정하자면 그 기간은 서울 함락에서 수복에 이르는 6월 28일에서 9월 28일 사이의 3개월이었을 것이다. 물론 1951년 1·4 후퇴 당시인 1월 4일에서 3월 14일 사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면 개전 초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 인민군 재판소가 여기 있었을까? 그랬다면 이 건물이 당시 우익 인사들이 수용되어 있던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지금의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의 중간 지점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그리고 그 학살설이 사실이라면 서울대병원 학살 사건 등과 더불어 인민군의 서울 점령 기간과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건축사와 전쟁사가 교차하는 중요한 사례로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이 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였다. 서울역에서 신촌역으로 가는 경의선 충정로 터널이 인민군의 군수창고로 쓰여 미군 전투기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충정 아파트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것은 바로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국방부의 정책 블로그인 ‘NARA’에 따르면 9·28 서울 수복 전날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이 사진은 AP통신의 맥스 데스퍼 기자가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미 해병대가 땅속에 숨어 있던 북한 저격병을 백린 연막탄으로 공격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 희귀한 사진이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배경에 바로 당시의 충정 아파트가 등장한다. 층간의 가로줄과 굴뚝이 선명하다. 옥상에는 옥탑으로 보이는 구조물과 경사지붕 등이 보인다. 충정 아파트의 원형을 보여 주는 자료이면서 동시에 한국전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렇게 전쟁통에도 원형을 유지한 충정 아파트가 오히려 전후에 여러 번의 변형을 겪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한편 미군은 서울 수복 후 이 건물을 수용하여 ‘트레머 호텔’이란 이름을 붙이고 유엔군을 위한 시설로 활용했다. 1961년 한국전쟁 당시 아들 6형제를 모두 잃었다는 김병조라는 사람에게 불하되어 5층이 증축되었고 이름이 ‘코리아 관광호텔’이 되었다. 그러나 김병조는 사기꾼으로 판명되어 구속되었다. 당시 상황을 담은 뉴스 영상도 존재한다. 이후 이 건물은 국세청 등 여러 소유주를 전전했다. 1975년 서울은행 소유가 되면서 이름이 ‘유림 아파트’가 되었다. 이후 다시 주민들에게 소유가 넘어갔다. 다만 유림 아파트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던 시점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있다. 1979년 충정로가 8차선으로 확장되면서 건물 전면이 잘려 나갔다. 원래 전면이 계단식 평면으로 된 특이한 건물이었다고 전하나 이 부분이 깨끗하게 일직선으로 잘려져 나갔다. 이 과정에서 52가구 중 19가구 270여평이 헐렸다. 1층 전면의 상가는 어쩌면 이 과정에서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2015년 서울시의 미래 유산 후보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건축물 관리대장에 따르면 현재 충정 아파트의 규모는 김병조에 의한 5층 불법 증축과 도로 확장으로 인한 멸실 부분을 종합하여 지하 1층, 지상 5층이다. 5층은 불법 증축 이후 양성화된 것으로 보인다. 연면적은 3550.41㎡, 즉 1074평이다. 도요다가 지었을 때보다 층은 하나가 더 늘었고 연면적은 24평이 늘었다. 총 41가구이다. 물론 오래된 건물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이러한 공식 기록이 얼마나 현재 상태와 일치하는지는 정밀 실측과 조사를 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 충정 상가아파트? 식당 등 상가 들어선 1층 인도보다 1m 높아 이례적 지하실 채광 위해 올린 듯 녹색 외관도 본래는 타일 현재의 충정 아파트는 상가아파트다. 만약에 처음부터 그랬다면 한국 최초의 아파트는 바로 상가아파트였다는 사실이 확립된다. 지금의 아파트 문화로 보면 매우 생소하게 들릴 이야기다. 즉, 주거동과 상가동이 분리된 요즘의 통상적인 아파트가 아닌 주거와 상가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요즘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상복합 건물에서 한국의 아파트가 시작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기록이 충분치 않아 단언할 수는 없다. 1층의 경우 현재의 건축물 관리대장에 따르면 일부의 상가를 제외하고는 아직 대부분이 아파트다. 전면이 모두 상가인 것을 감안하면 현실과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뿐 아니라 처음부터 이 부분이 모두 상가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하실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건립 당시부터 지하층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건축물 관리대장에 따르면 지금도 이 부분은 ‘근린생활시설’(일반음식점)로 되어 있다. 지하실은 어차피 건물이 세워지고 난 다음에는 팔 수도 없다. 환기나 채광 등으로 인해 주거가 들어가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바로 이 지하실의 존재야말로 한국 최초의 아파트는 상가아파트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충정 아파트는 이야깃거리도 많고 역사적 의미도 깊은 셈이다. 충정 아파트를 찾아가면 제일 처음 눈에 띄는 것이 흔치 않은 녹색의 외관이다. 원래는 타일로 마감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위에 두껍게 페인트가 발라져 있다. 특이한 색상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 건물 앞이 버스 정류장이라 사람들의 왕래도 활발하다. 그런데 건물과 인도가 만나는 부분이 다소 독특하다. 1층은 모두 상가고 아파트로 들어가는 입구가 별도로 있는데 모두 전면에 1m 정도 높이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즉 건물이 일종의 기단 위에 올려져 있는 셈이다. 물론 오래된 건물에서 흔히 보는 방식이기는 하다. 그러나 충정 아파트의 경우는 그 높이가 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상가 입장에서 보면 계단을 올라와 진입하는 것은 매우 불리한 방식이다. 다만 1층이 처음부터 상가가 아니고 주거였다면 그리고 지하실의 환기나 채광을 위한 개구부를 설치하기 위해서 1층을 들어 올렸다면 이해될 수 있는 문제다. 이 역시 건물의 변화 과정을 면밀히 추적해 봐야 풀릴 수 있는 수수께끼다. 나이가 80이 넘었고 풍상을 하도 겪어서 그런지 건물은 매우 낡은 상태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써 놓고도 ‘과연 그래야 할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건물 나이 80이면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 사실 건물의 나이는 현실적으로는 무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구 상 수많은 오래된 건물들이 이를 보여 준다. 물론 애초에 짓기도 잘 지어야 하겠지만 관리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이 점에서 건물과 사람은 유사하다. 약골로 태어나도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사람도 있고, 무쇠 같은 몸을 갖고 있지만 험하게 굴려서 망가뜨리는 사람도 있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세계적으로도 긴 편이지만 건물은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 점에서 충정 아파트는 안타까운 예다.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기는 하지만 이제 이 건물을 제대로 돌봐야 할 때가 되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으로 이만 한 건물도 드물다.
  • ‘민정경찰’ 한강 하구 中 어선 퇴거 작전… 北 “무모한 군사적 도발” 비난

    우리 군과 해경, 유엔군사령부로 구성된 ‘민정경찰’이 한강 하구 수역에서 중국 어선 퇴거작전을 한 것에 대해 북한이 20일 ‘군사적 도발’이라며 거세게 비난했다. 이에 국방부는 북한이 ‘억지 주장을 한다’며 일축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대결과 충돌위험을 조장격화시키는 무모한 군사적 준동’이라는 제목의 보도에서 “무모한 해상침범과 선불질과 같은 군사적 도발을 절대로 허용할 수가 없다”며 “도발자들은 연평도 포격전의 처절한 피의 교훈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위협했다. 이어 “최근 남조선 괴뢰군부호전광들이 그 무슨 3국어선의 불법어로활동을 ‘단속’한다고 하면서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리는 ‘유엔군’과 괴뢰를 상징하는 저주받을 기발(깃발)까지 뻐젓이 띄운 전투함선들을 이른바 ‘한강 작전’이라는 미명 밑에 서해열점수역을 벗어나 한강 하구까지 대량 들이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번 보도는 민정경찰이 지난 10일부터 한강 하구에서 불법 조업하는 중국 어선을 대상으로 벌여온 퇴거작전에 대해 북한 매체가 공식적으로 보인 첫 반응이다. 이와 관련, 문상균 국방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한강 하구 민정경찰 운영은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을 단속하기 위해 정전협정에 따라 적법한 절차를 거쳐 정당하게 실시하는 작전”이라며 “군사적 도발 운운하는 것은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고 북한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어 “한강 하구 수역은 지난 수십년간 남북 양측이 사실상 출입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해 민정경찰 운영 전에 북한에 유엔사 군정위 명의의 대북 전통문을 사전 발송하고, 군정위 요원이 동승한 가운데 단속활동을 실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중국 어선 또 한강하구에… 2척 도주

     한강 하구 수역에 17일 중국 어선 2척이 또 들어와 군과 해경, 유엔군사령부로 구성된 ‘민정경찰’이 퇴거작전을 재개했다. 군 관계자는 “오늘 새벽 한강 하구 수역에 중국 어선 2척이 진입해 민정경찰이 퇴거작전을 재개했다”며 “1척은 수역을 빠져나갔고 나머지 1척은 북쪽 연안으로 도주했다”고 밝혔다. 민정경찰은 지난 10일부터 한강 하구에서 불법 조업 중인 중국 어선들을 몰아내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한-프랑스, 대북제재 추가조치 공동 검토한다

    한-프랑스, 대북제재 추가조치 공동 검토한다

    한국과 프랑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조치와 별개로 추가적인 제재 문제를 공동으로 검토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한국 내에서 실시되는 각종 훈련에 프랑스군의 참여도 확대되고, 방산기술을 공동으로 개발하고 완성품에 대한 공동마케팅도 펼치게 된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장-이브 르 드리앙 프랑스 국방부 장관은 15일 오후 5시 30분(한국시간 16일 00시 30분) 끝난 양국 국방장관회담에서 이같이 합의했다. 양국 장관은 프랑스 국방부 구청사에 진행된 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심각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공조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 두 장관은 두 나라 국방정보본부 주관 정보교류회의를 통해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 이행 현황을 평가하고 추가적인 제재 조치 검토 문제를 의제화하기로 했다. 1987년부터 시작된 한국과 프랑스 정보교류회의는 지난해까지 24회 열렸다. 특히 르 드리앙 장관은 회담에서 “아프리카와 중동국가들이 (유엔 안보리 및 유럽연합에서 결의한) 대북제재 조치를 적극적으로 이행하도록 독려할 것”이라며 “프랑스는 북한에 대해 강력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북한에 대해서는 입장이 심플하고 분명하다”고 말했다고 국방부 고위관계자가 전했다. 양국 장관은 한국 내에서 실시되는 군사훈련에 프랑스군 참여를 확대하는 데도 합의했다. 이 훈련은 한미연합훈련도 포함된다. 현재 프랑스군은 키리졸브(KR) 연합훈련에 2명,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합훈련에 3명을 옵서버 자격으로 각각 참여시키고 있다. 우리 군 독자적인 훈련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앞으로 한국군 훈련에도 참관단을 파견할 것으로 보인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방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프랑스 측도 NATO 훈련 등에 한국군 파견을 희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산협력과 관련해서는 양국이 방산기술을 공동으로 연구하고 개발하며 마케팅까지 하는 방안을 증진해 나가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이달 중으로 방산·군수협력 양해각서(MOU) 개정안을 체결하기로 했다. 이 개정안은 MOU 합의 내용을 이행하는 권한을 우리나라 국방부 차관에서 방위사업청장으로 변경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 개정안이 체결되면 양국의 방산협력은 범위가 넓어지고 이행 속도 또한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방사청이 무기 획득 조달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한국형 전투기(KF-X)에 탑재되는 다기능위상배열(AESA) 레이더와 같은 핵심기술 협력 문제 등도 다뤄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중동·아프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유엔평화유지활동(PKO)에 참여하는 프랑스군과 유엔의 16개 임무단 지역에서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는 우리 군 부대 간 협의체계 구축과 상호 정보교류 협력을 강화하는 데도 합의했다. 이를 위해 이른 시일 내 상호군수지원 협정을 체결하기로 했다. 양 장관은 두 나라 사이버 안보 담당자가 상대국이 개최하는 사이버 안보 관련 회의체에 참석해 관련 정보를 공유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밖에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차례 열리고 중단된 ‘한-프랑스 국방전략대화’를 재개하는 한편 연내에 개최하기로 했다. 르 드리앙 장관은 “이번 국방장관회담을 통해 한·프랑스 간 전략적 국방협력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고 평가했다. 이에 국방부 관계자는 “이번 국방장관회담은 지난해 11월 양국 정상이 채택한 ‘21세기 포괄적 동반자 관계 강화를 위한 행동계획’과 이달 초 정상회담 결과 채택한 ‘한·프랑스 수교 130주년 기념 공동선언’ 등에 기반해 양국 간 전략적 국방협력 추진방향을 모색한 의미 있는 계기라고 평가된다”고 말했다. 한민구 장관은 회담에 앞서 프랑스군 6·25전쟁 참전비에 헌화했으며, 앵발리드(군사박물관)를 방문했다. 이곳에는 6·25전쟁 당시 프랑스 대대를 지휘한 대대장 몽클라르 장군과 나폴레옹 황제 등의 유해와 군사박물관이 있다. 프랑스는 6·25 전쟁 당시 3천 명 이상의 병력을 지원했고 지금도 주한 유엔군사령부에 전력을 제공하고 있다. 한 장관은 프랑스 장교 교육기관인 고등군사교육국도 방문해 고등군사교육연구원, 전쟁대학, 국방대학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설한다. 이 자리에서 한 장관은 한국과 프랑스의 전략적 국방협력 계획을 설명하고 우리 정부의 국방정책에 대한 이해와 지지를 당부할 계획이다. 연합뉴스
  • 중국 어선 격렬 저항…민정경찰, 전격 나포

    불법조업 철수 경고방송도 무시 퇴거작전 시작 나흘 만에 첫 사례 우리 군과 해경,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로 구성된 ‘민정경찰’이 작전 개시 나흘 만인 14일 한강 하구 중립수역에서 불법 조업 중인 중국 어선 2척을 나포했다. 합동참모본부는 이날 “민정경찰이 오늘(14일) 오후 7시 10분쯤 한강 하구 중립수역 내에서 불법 조업 중이던 중국 어선 2척을 나포해 인천 해경에 인계했다”고 밝혔다. 민정경찰이 지난 10일 중국 어선 퇴거 작전을 시작한 이후 중국 어선을 직접 나포한 것은 처음이다. 한강 하구인 인천 강화군 교동도 인근 해상은 유엔군사령부가 관할하는 중립수역이다. 지난 10일 민정경찰이 작전을 시작한 뒤 10여척이었던 중국 어선들은 수역 밖으로 도주했다가 재진입하는 과정을 반복해 왔다. 그러다가 이날 오후 6시 50분쯤 중국 어선 8척이 다시 수역에 진입했다. 민정경찰은 이 가운데 2척을 나포했고, 나머지 6척은 수역 밖으로 도주했다. 나포된 중국 어선 2척에는 총 14명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정경찰은 경고방송을 통해 중국 어선의 자진 철수를 유도하려 했지만, 이들이 응하지 않고 위협 행위를 하자 민정경찰들이 어선에 승선해 직접 나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정경찰은 K2 소총과 K5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사격을 하지는 않았다. 민정경찰의 고속단정(RIB)에는 유엔사 군정위 요원이 탑승해 정전협정 위반 여부를 감시했다. 중국 어선들은 15일 새벽 인천 해경에 도착할 것으로 알려졌다. 군 관계자는 “이 과정에서 북한군의 특이 동향은 없었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민정경찰이 중국 어선 2척을 나포함에 따라 한·중 간 외교 마찰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지난 10일 민정경찰의 중국 어선 퇴거 작전에 대해 “중국은 어민 교육 강화를 고도로 중시한다”면서 “관련 국가와 어업 집법(활동)에 관한 소통과 협력을 강화해 정상적인 어업 질서를 수호하기를 원한다”고 밝혔었다. 합참은 “우리 군은 한강 하구 중립수역에서 중국 어선이 철수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단속 작전을 실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한강 하구 中어선 수척 또 진입…군·경·유엔 합동 퇴거작전 재개

    한강 하구 中어선 수척 또 진입…군·경·유엔 합동 퇴거작전 재개

    우리 군과 해경 등으로 구성된 민정경찰의 퇴거 작전으로 한강 하구 수역을 모두 빠져나갔던 중국 어선들이 다시 이곳 수역으로 들어와 민정경찰이 작전을 재개했다. 군 관계자는 14일 “전날 중국 어선들이 한강 하구 수역에서 모두 이탈한 이후 야간에 중국 어선 수척이 다시 한강 하구 수역으로 들어왔다”면서 “우리 군과 해경은 이날 아침 한강 하구 수역에서 중국 어선 철수 유도 작전을 재개했다”고 덧붙였다. 민정경찰이 퇴거작전에 나서자 한강 하구 수역에 들어온 중국 어선들은 이번에도 모두 북쪽 연안으로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1953년 6·25 전쟁을 중단한 정전협정 후속합의서에 따라 우리 측 민정경찰은 한강 하구 수역 북한 연안에서 100m 안쪽으로는 진입할 수 없다. 군과 해경,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로 구성된 민정경찰은 지난 10일 한강 하구 수역에서 중국 어선 퇴거작전에 돌입했다. 한강 하구 수역에 민정경찰이 투입된 것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 처음이다. 민정경찰이 퇴거 작전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한강 하구 수역에는 10여척의 중국 어선들이 불법으로 조업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작전 개시 사흘 만인 지난 13일 모두 이곳 수역을 빠져나갔다. 중국 어선들이 한강 하구 수역을 모두 빠져나간 지 채 하루도 안 돼 또 중국 어선들이 들어온 것이다. 군 관계자는 “한강 하구 수역에서 민정경찰이 퇴거작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중국 어선들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민정경찰은 한강 하구 수역에서 중국 어선들이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퇴거 작전을 계속한다는 방침이다. 민정경찰의 활동에 대해 북한군은 아직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9년 만에 韓·佛 국방장관 회담… 북핵·미사일 문제 등 협력 강화

    9년 만에 韓·佛 국방장관 회담… 북핵·미사일 문제 등 협력 강화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맞아 14일부터 16일까지 프랑스를 공식 방문해 북핵·미사일 문제 등 상호 관심 의제에 대한 협력 방안을 논의한다. 국방부는 13일 “지난해 11월 한·프랑스 정상회담 시 합의 사항인 ‘양국 간 국방 분야에서의 협력 확대·강화’를 위한 실질적 방안 논의를 희망하는 프랑스 측 초청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라면서 “우리 장관의 프랑스 방문은 2007년 12월 김장수 당시 국방부 장관이 프랑스를 공식 방문해 양국 국방장관회담을 개최한 이래 9년 만”이라고 밝혔다. 한 장관은 15일 장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국방장관과 회담을 하고 ▲북핵·미사일 문제 ▲핵 비확산 ▲국제평화유지활동 ▲사이버 안보 등 상호 관심 의제에 대한 협력 강화 방안을 중점적으로 논의할 예정이다. 한 장관은 또 프랑스군 6·25전쟁 참전비에 헌화하고 프랑스 고등군사교육국을 방문해 고등군사교육연구원·전쟁대학·국방대학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한다. 국방부 관계자는 “프랑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자 유럽연합(EU)의 주도국인 동시에 주한유엔군사령부(UNC) 전력제공국으로 한반도 등 글로벌 이슈와 관련해 우리와 핵심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면서 “이번 국방장관 회담을 계기로 프랑스와의 전략적 국방 협력 강화 기반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中어선 10여척 北연안에… 한강하구 작전 재개 검토

    中어선 10여척 北연안에… 한강하구 작전 재개 검토

    우리 군과 해경,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로 구성된 ‘민정경찰’의 한강 하구 중립수역 투입 사흘째인 12일까지 불법 조업을 하던 중국 어선 수척이 이곳을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군과 해경, 유엔사는 앞으로 중국 어선 퇴거 작전을 재개할지 검토 중이다. 북한군의 특이 동향은 이날까지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군 관계자는 이날 “민정경찰의 중국 어선 퇴거 작전으로 한강 하구 중립수역에서 불법 조업을 하던 중국 어선 수척이 수역을 빠져나갔다”면서 “남아 있는 중국 어선은 10척 안팎”이라고 밝혔다. 한강 하구 중립수역에 남아 있는 중국 어선들은 민정경찰의 단속을 피해 북한 연안에 머무르고 있다. 중국 어선들이 북한 연안에 머무르기만 한다면 굳이 작전을 재개할 필요가 없어 군과 해경, 유엔사는 중국 어선 퇴거 작전을 잠정 중단한 상태다. 한편 백령도와 연평도 등 서해 5도 북방한계선(NLL)을 넘나들며 불법 조업을 하는 중국 어선들을 막기 위해 대형 인공 어초(魚礁)의 설치 확대가 추진된다. 해양수산부는 어초를 늘려 달라는 어민들의 요구 등을 반영해 당초 제출했던 규모보다 최소 1.5배 늘어난 50억원 이상을 내년 예산으로 기획재정부에 요청하기로 했다. 인공 어초는 상단부에 갈고리 모양의 어망 걸림 장치가 있어 쌍끌이 저인망 조업을 할 때 그물을 망가뜨리는 효과가 있다. 서울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세종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한강하구까지 들어와 불법조업… 中 어선 ‘퇴거 작전’

    한강하구까지 들어와 불법조업… 中 어선 ‘퇴거 작전’

    중국어선 10여척 北 수역으로 도주 中·北에 사전 통보… 北 특이동향 없어 정부가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유엔군사령부와 함께 한강 하구에서 불법 조업하는 중국 어선을 퇴거하는 작전에 나서 중국 어선 10여척을 북측 연안으로 몰아냈다. 최근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이 급증하자 ‘특단의 대책’을 꺼낸 것이지만 이 수역에서 남북의 우발적 충돌이 빚어질 가능성도 커졌다. 정부는 10일 해군과 해병대, 해양경찰,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요원 등으로 구성된 민정경찰을 편성해 한강 하구에서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을 차단하는 작전에 들어갔다. 합참 관계자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시행된 작전에서 민정경찰들이 불법 조업 중인 중국 어선에 근접해 경고 방송을 했다”면서 “중국 어선들이 황급히 어망을 거둬 북측 연안으로 도피했다”고 밝혔다. 이날 작전은 오후 3시 40분쯤 종료됐다. 비무장지대(DMZ) 수색 임무 등에 투입되던 민정경찰을 제3국 어선 단속을 위해 해상에 투입한 것은 처음이다. 민정경찰은 각 기관 요원을 합쳐 총 24명으로 편성됐으며, 고속단정 4척을 활용해 볼음도와 서검도 수역 등을 집중 단속했다. 이들은 정전협정 후속 합의서에 따라 유엔사 깃발을 게양하고 소총 등으로 무장한 채 임무를 수행했다. 정부 관계자는 “다각적인 외교적 노력에도 이 수역에서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이 이어지자 외교적 조치의 한계를 인식해 민정경찰을 운용하기로 한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정부는 지난 8일 중국 측에 민정경찰 운용 사실과 함께 단속 과정에서 중국 어선들에 안전상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음을 통보했다. 또 남북 간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해 같은 날 민정경찰 운용 사실을 담은 유엔사 군정위 명의의 대북 전화통지문을 북측에 통보했다. 이날 작전 종료 시까지 북측의 특이 동향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합참 관계자는 “내일 만조가 되면 유사 작전을 다시 시작할 것”이라면서 “한강 하구에서 중국 어선이 완전히 철퇴될 때까지 작전을 펼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박승 前 한은 총재 ‘인생경제학’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박승 前 한은 총재 ‘인생경제학’

    나이를 무색하게 했던 10년 전의 ‘혈기방장’은 아직도 그대로일까. 팔순에 접어든 그가 어떤 모습으로 손님을 맞을지 그려보며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빌라의 초인종을 눌렀다. “아유, 많이 덥지? 어서 와, 어서 와.” 문을 여는 그의 말투와 표정. 10년 전의 그가 다시 보였다. 한국은행 총재 시절(2002~2006년) 어떤 전임자들보다 시장과의 소통을 강조했던 박승(80) 전 총재는 여전히 세상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이봐 학생, 기껏 어려운 시험 봐서 합격해 놓고 왜 포기하려는 거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1954년 2월 어느 날, 해군 제복을 입은 군인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해군사관학교에 합격하고도 입교 절차를 밟지 않자 ‘등록을 서두르라’는 독촉장이 날아오더니 이마저도 반응이 없자 저 멀리 경남 진해에서 전북 김제의 깡촌까지 직접 사람이 달려온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대학에 가고 싶어요.” 이리공고 수석 졸업 예정자를 반드시 데려와 입교시키라는 해사 교장의 ‘특명’을 받은 그 군인은 나의 고집에 아주 난처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가 끝내 임무 완수를 못 하고 돌아간 그날은 나의 힘겨운 주경야독(晝耕夜讀)이 시작된 날이기도 했다. -내가 태어난 1936년, 호남 벽촌 마을에서 어느 집이라고 여유가 있었겠냐마는 우리 집은 특히 더 어려웠다. 아버지는 원래 한의사였는데 그건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고, 나를 보셨던 44세 때의 아버지는 가족의 기초 생계도 감당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가장일 뿐이었다. 치료하던 환자가 급사한 뒤 의술의 길을 포기했던 아버지는 그 후 평생을 한글 초서체 연구에 바치셨다. -1948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7㎞ 떨어진 이리공업중·고에 진학했는데, 결석을 밥 먹듯이 했다. 어떤 때는 모심고 김매느라고, 어떤 때는 산에서 땔감을 구해야 해서 학교에 못 갔다. 어머니 혼자 새벽엔 보리방아 찧고 낮에는 논일하고 저녁엔 길쌈해서 생계를 꾸리시다 보니 중·고교 6년 동안 수업료 때문에 가슴 졸이지 않은 때가 없었다. 당시에는 교문 앞에서 선생님이 불시에 수업료 납부 영수증 검사를 해서 영수증이 없으면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잦았는데, 그런 일을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공부를 하고 싶은데 돈을 못 내서 공부를 못 한다면 그건 누구의 책임일까.” 그렇게 터덜터덜 집에 와 보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방 안에 틀어박혀 한글 서체와 씨름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깨, 콩, 닭, 토끼를 이고 지고 5㎞ 떨어진 읍내에 가서 고생을 하시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중3 때 6·25전쟁이 났다. 전쟁이 터지고 얼마 후 인민군이 우리 마을에 들어왔다. 인민군들은 학생단체를 만들어 고등학생들을 강제로 가입시켰다. 김일성 찬양 노래를 부르게 하고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켰다. 학생들 중 6명은 나와 같이 아침마다 기차로 통학하던 고2, 고3 형들이었다. 얼마 후 유엔군이 들어와 인민군이 퇴각했는데, 그 형들은 천생 ‘빨갱이 부역자’로 몰려 처형당할 판이었다. 결국 다들 산으로 도망쳤는데, 나중에 빨치산이 돼서 경찰서를 습격했다가 결국엔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내가 몇 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이렇게 개죽음을 했겠구나.’ 좌우 이념 대결의 허망하고 참혹한 결과를 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이 집 아들 빨리 결혼해서 부모님 모시고 농사지어야 되겠네.” 동네 아낙이 무심결에 던진 말이지만 고3 졸업반인 내가 피해 갈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나 아니면 예순 넘긴 부모님과 여동생을 부양할 사람이 없었다. 우리 2남 4녀 중 형은 일찍 돌아가셨고 누나 3명은 출가한 상태였다. 하지만 농사꾼으로 남을 수는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게 수업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군 사관학교였고 나는 그 중에서도 해사에 시험을 쳤다. -해사 입교를 포기하고 농사에 전념했던 그해, 가을 수확을 하니 먹고살 것 빼고 딱 쌀 다섯 가마가 남았다. ‘이 정도면 일단 대학에 등록할 수준의 돈은 되겠다.’ 이듬해 초 서울대 경제학과 입학시험을 봤다. 어머니가 싸 주신 찐 고구마 5개를 손에 들고 난생처음 서울행 기차를 탔다.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서울역과 남대문 주변의 살풍경은 60년이 지난 현재도 머리에 또렷하다. 곰탕집 간판을 보고는 ‘곰고기를 파는 곳’, 복덕방 간판을 보고는 ‘떡 파는 곳’으로 오해했던 건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됐다. -55학번으로 서울대 합격을 했는데, 입학 때의 감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그래서 고등교육받는 게 가당치도 않은 시골 출신의 고학생일 뿐이었다. 서울에서 가정교사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러자니 고향집의 농사가 문제였다. 수시로 서울과 김제를 농사 때문에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이 이어졌고, 중·고교 6년 동안 그랬듯 학비와의 전쟁이 대학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대학 졸업이 다가올수록 입학 때 가졌던 경제학 교수에 대한 바람은 더 절실해져 갔다. 그러려면 대학원에 진학해야 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나의 선택은 돈을 벌면서도 배움을 이어 갈 수 있는 한국은행 조사부 근무였다. -1961년 한국은행 배지를 달았다. 만 25세였다. 양복 한 벌을 18개월 할부로 사 입으니 세상이 마치 내 것 같았다. 얼마 후 5·16 정변이 났다. 정권을 잡은 군부는 동국대 옆에 중앙공무원교육원을 만들고 여기에서 사무관 이상 공무원과 교사, 교수, 기업인들에게 소정의 교육을 받도록 했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인데 입행 첫해의 내가 여기에 강사로 위촉됐다. 매주 3~5시간씩 강의를 했는데, 모교의 교장 선생님과 대학 총장, 학장도 나의 강의를 듣는 상황이 됐다. 대학 은사 박희범 교수님께서 나를 추천했기 때문이란 건 강의를 시작하고 얼마가 지난 후에야 알았다. 경제기획론과 경제발전론을 가르치셨던 박 교수님은 비교적 진보적인 색채의 학자이셨는데, 혁명정부에서 새로운 경제의 틀을 짜는 역할을 맡으셨다. 교수님은 나중에 교육부 차관과 충남대 총장을 지내셨다. -운명을 바꾼 미국 유학은 뜻하지 않은 기회에 찾아왔다. 1968년 나는 남산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몇 날 며칠을 심하게 취조당했다. 일인즉슨 이랬다. 당시 우리나라는 무역적자가 대단히 심했는데 한국은행은 환율을 올려 수출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해서 폈다. 그러나 정부는 환율이 오르면 물가도 같이 뛴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한국은행은 서봉균 재무장관을 초청해 환율 인상 정책을 펴도록 설득시키기 위한 브리핑을 진행했다. 원고 작성과 발표를 대리급 조사역에 불과했던 내가 담당했다. 그런데 다음날 조간신문 1면 톱에 당장이라도 정부가 환율을 대폭 올리는 듯한 기사가 났다. 국민과 기업들 사이에 혼란이 왔다. 얼마 후 중앙정보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행원부터 부총재보까지 담당자들을 모조리 연행해 갔다. 중앙정보부 분실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누가 멋대로 신문사에 원고를 넘겨줬느냐”는 추궁이 이어졌는데, 작성자인 내가 우선적으로 용의선상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후배 행원이 신문기자 친구에게 발설한 사실이 드러나 나의 혐의점은 벗겨졌지만, 어쨌든 나는 후배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한 책임으로 감봉 징계를 받았다. 이게 한국은행 간부들에게 마음의 빚을 안겼다. “자네 혼자 책임을 지게 해서 미안해. 다음에 확실히 보상해 줄게.” -보상을 받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71년 한국은행 최초로 국외에 유학생 2명을 파견하게 됐다. 전체 행원을 대상으로 시험을 봤는데 나는 통계학에서 과락이 나와 탈락했다. 그런데 재시험 공고가 떴다. “어떻게든 박승 대리는 합격시키라”는 상부의 지시 때문이었다. -1972년 1월 미국 뉴욕주립대(올버니캠퍼스)로 유학을 떠났고 2년여가 흐른 1974년 4월 석사와 박사 학위를 동시에 받아 왔다. 유학을 마친 뒤 은행에 복귀하고 나서 얼마 지나 두 군데에서 제안이 들어왔다. 나중에 한국은행 총재를 하게 되는 이경식 당시 경제수석이 청와대에 들어와 함께 일을 하자고 했다. 이 수석은 한국은행 재직 때 나의 직속상관이었다. 또 하나는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김재익 경제기획국장을 통해 타진해 온 ‘사우디아라비아 경제자문단’의 단장 역할이었다. 당시 사우디는 ‘1차 오일쇼크’로 막대한 달러를 벌게 됐지만 경제 개발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우디 국왕은 경제 개발을 도와줄 자문단 파견을 한국에 요청했다. 나의 선택은 사우디였다. -사우디에서 1년 만에 돌아와 1976년 9월 한국은행에 사표를 내고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로 갔다. 교수 부임 직후에 쓴 ‘경제발전론’은 지금도 일부 대학에서 교재로 쓰고 있다. 교수가 되고 이듬해인 1977년부터 3년 동안은 서울신문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경제 관련 사설을 썼다. 한 편 작성에 30분 정도밖에 안 걸렸는데 이게 소문이 나면서 다른 언론사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기도 했다. 나와 함께 김학준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정치 관련 사설을 서울신문에 썼다. 교수로서 경력을 쌓아가며 학교 안에서는 정경대학장과 대학원장을, 학교 밖에서는 국제경제학회장과 한국경제학회장을 지냈는데 1988년 뜻하지 않은 인생의 전기가 찾아왔다. -“박 교수, 나랑 같이 한번 일해 봅시다.” 노태우 대통령이 그해 2월 취임을 앞두고 경제수석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만 52세였다. 노 대통령과는 이전에 일면식도 없었지만 다양한 언론 기고와 강연 활동 등으로 몇몇 경제단체에서 나를 천거했던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내가 맡았던 첫 번째 과제는 ‘200만호 주택 건설’ 공약의 실현이었다. 말이 200만호이지 엄청난 물량이었는데 막상 아파트를 지으려고 보니 서울 시내에는 땅이 없었고, 서울시 외곽은 그린벨트로 묶여 있었다. “서울 시내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린벨트 밖으로 나가자.” 지도를 펴놓고 서울 세종로 사거리의 측량원표를 중심으로 반경 25㎞를 컴퍼스로 동그랗게 돌려 봤다. 25㎞ 이내로 한 것은 ‘지하철 1시간 이내’의 원칙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온 지역이 경기 분당, 산본, 평촌, 인천 중동 등 4곳이었다. 4대 신도시 추진이 확정되자 1988년 12월 노 대통령이 다시 나를 불렀다. “박 수석, 이제는 건설부 장관으로 고생 좀 해야겠습니다. 계획을 세웠으니 실행까지 맡아 주셔야지요.” -건설부 장관이 되고 나서 이듬해 서울 북쪽의 일산이 추가돼 5대 신도시 계획이 확정됐다. 그러나 그해 여름이 되면서 나는 청와대 경제수석실과 심각한 마찰에 부딪치게 됐다. 당시 아파트 분양가가 평당 평균 130만원대였는데 건축비는 170만원, 시장 가격은 250만~300만원 수준이었다. 사람들은 분양 당첨만 받으면 막대한 이익이 남는 구조였고, 건설회사는 낮은 분양가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날림 공사를 했다. 나는 대통령에게 분양가를 올려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경제수석실의 반대가 심했다. 분양가를 올리면 집값이 더 뛴다고 했다. 대통령을 만나 건의했지만 “그 얘기는 이미 경제수석한테 들었다”고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구나.” 사표를 냈다. 다음날 사실상 경질 통보를 받았다. 그게 1989년 7월이었고 이듬해 3월 신학기부터 다시 강단으로 돌아갔다. -2001년 3월 정년퇴임을 하고 이듬해 초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은행 총재로 임명했다. 숱한 공직을 거쳤지만 2006년 3월 퇴임할 때까지의 한국은행 총재 4년간이 내 생애에서 가장 큰 보람을 느끼고 성취를 이룬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한국은행을 가장 사랑한 총재, 한국은행의 독립성과 위상을 높인 총재, 경제와 민생을 위해 고뇌한 총재’의 3가지 이미지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5남매를 결혼시키면서 4명을 청첩장 없이 보냈다. 첫째와 둘째 아이의 결혼을 주변에 알리지 않고 치렀더니 친구들이 “축의금 낼 기회를 좀 달라”고 해서 셋째 때는 200장을 찍었다. 그런데 역시 나의 생각과 맞지 않았다. 다시 넷째, 다섯째의 결혼은 순수 가족 행사로 치렀다. -내가 모은 재산은 언젠가는 전부 사회에 내놓고 갈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한국은행 총재 재임 시절부터 월급의 20%를 가난한 사람이나 소외된 사람을 위해 써 왔다. 모교인 백석초등학교에 도서관도 만들었다. 오래전에 장기 기증 서약도 마친 상태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된 데는 개인의 이익만이 아니라 타인과 사회의 이익을 중시하는 자세가 바탕이 됐을 것이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김태균 경제정책부장 windsea@seoul.co.kr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박승 前 총재 중앙은행(한국은행)과 정부(청와대·건설부·공공기관)에서, 또 대학 강단(중앙대 경제학과)에서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굽이굽이마다 굵직한 족적을 남겨 온 경제계의 원로다. 한국은행 총재 때 소신 있고 선제적인 통화정책을 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장과의 ‘소통’을 중시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1936년 전북 김제 출생 ▲김제 백석초, 이리공업중·고,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뉴욕주립대(올버니) 경제학 석사·박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신문 논설위원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청와대 경제수석, 건설부 장관, 주택공사·교통개발연구원 이사장, 공적자금관리위원장, 한국은행 총재 ▲회고록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 “꽃게 씨 말랐는데… NLL 제집 드나들 듯” 성난 어민들 집단행동

    “꽃게 씨 말랐는데… NLL 제집 드나들 듯” 성난 어민들 집단행동

    北과 인접한 지정학적 불안 악용… 쌍끌이 조업에 치어까지 싹쓸이 휴일인 5일 오전 5시 6분쯤 해군은 레이더를 통해 서해에서 조업하던 연평도 어선 19척이 북상하는 정황을 포착했다. 이 어선들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오전 4시 50분 연평부대에 정상조업을 신고한 터였다. 정밀탐지에 나선 해군 2함대는 연평도 고속함 4척과 고속단정 3척을 급히 보내 선단의 북상을 차단하도록 조치했다. 연평도 선단은 오전 5시 23분쯤 마침내 연평도 북동방 0.5해리(0.93㎞)에서 멈췄다. 중국 선단을 뒤쫓아 가다 5척이 때마침 가박(假泊·휴식을 위해 바다 위에서 잠시 정박함) 중이던 목선 2척을 발견하곤 닻줄을 걸어 나포한 것이다. 해군은 국민안전처 인천해양경비안전서에 이 같은 사실을 통보했다. 해경도 경비함정 2척과 연평특공대 소속 고속단정 1척을 사고해역으로 보냈다. 해경은 북상해 우리 어선과 중국 어선을 연평도 당섬 선착장으로 무사히 예인했다. 만약을 대비해 우리 어민과 중국 어민을 분리해 조사를 시작했다. 해경은 사고 경위 조사에서도 중국 어선은 물론 우리 어선의 조업구역 무단이탈과 관련해 선박안전조업규칙 등 관련 법률을 어겼는지를 캐내는 데 초동 조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천해경 관계자는 “해당 장소는 우리 어선들에도 조업을 금지한 북방한계선(NLL) 인접구역으로 군 작전지역에 속한다”며 “6일 오전 5~6시까지 중국 어선들에 대해 초동 조사를 벌인 뒤 인천 해경전용 부두로 옮겨 본격적으로 조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중국 어선 2척의 선장 2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나머지 선원 9명에 대해선 출입국사무소를 통해 중국으로 돌려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해경에 따르면 중국 선원들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둥강시(東港市) 둥강항에서 출항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해경은 중국 선주협회에 이들 선박의 등록증서와 선주 이름, 소속 회사, 선원들에 대한 정보를 요청한 상태다. 인천해경은 중국 어선들을 나포한 연평도 어민들로부터 자세한 경위를 듣고 있다. 우리 어선들이 중국 어선들을 나포한 지점은 해경 레이더에 모두 기록돼 있는 만큼 설명을 들은 다음 해경 입장을 정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안전처는 또 외교부, 해양수산부, 합동참모본부 등 군 당국과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향후 재발 방지 및 연평도 근해 불법 조업 문제에 대해 긴밀히 대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번 사태는 갈수록 심해지는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이 빌미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연평도 북방 해상은 NLL과 불과 1.4∼2.5㎞가량 떨어져 있는 데다 북한군 해안포에 노출돼 있어 우리 어민에게 허가된 어장이 없다. 이런 점을 노린 중국 어선들은 NLL과 연평도 사이 바다에서 상습적으로 불법 조업을 하다가 우리 해군이 나포 작전에 나서면 북한 해역으로 도주하곤 한다. 더구나 중국 어선들은 쌍끌이 저인망식 조업을 펴 치어까지 싹쓸이함으로써 어획량 감소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해 서해5도 어민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최근 중국 어선들은 특히 NLL을 넘어 한강 하구까지 침입해 불법 조업을 일삼는다. 중국 어선끼리도 경쟁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지난 4월 말 꽃게잡이 철이 본격화하면서 거의 매일 교동도 서쪽과 북쪽 해역에 출몰하고 있다. 교동도 해안 500m 이내까지 접근하는 바람에 우리 측이 경고 방송을 하는 경우도 잦다고 해병대 관계자가 전했다. 그러나 해당 지역은 북한과 가깝고 유엔군 사령부가 관할하는 중립지역이기 때문에 우리 당국의 단속이 쉽지 않은 실정이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연평도 근해서 어민들이 중국어선 직접 2척 나포

    연평도 근해서 어민들이 중국어선 직접 2척 나포

    서해 북방한계선(NLL) 남방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정박 중이던 중국어선 2척을 어민들이 직접 나포했다. 해경 측은 갈수록 심해지는 중국어선 불법조업에 흥분해 있던 어민들에 의한 돌발상황으로 보고 처리에 고심하고 있다. 5일 인천해양경비안전서에 따르면 이날 오전 5시 23분쯤 NLL 남방 0.3해리, 연평도 북방 0.5해리에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던 중국어선 2척을 연평도 어선 5척이 로프를 걸어 연평도로 끌고 와 해경에 인계했다. 중국어선을 나포한 어선은 오전 4시 50분쯤 연평부대장의 출항허가를 받고 바다로 나간 우리 어선 19척 중 일부다. 해군은 연평도 레이더 기지에서 이들 어선이 출항한 지 30분 만에 허가된 어장을 이탈해 연평도 북방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했다. 나포된 중국어선 22t급에는 7명, 15t급에는 4명이 타고 있었다. 중국어민들은 잠을 자던 중이어서 별다른 저항 없이 나포됐다고 해경 측은 설명했다. 중국어선이 나포된 지역은 NLL과 가까워 우리 어선도 조업이나 항해를 할 수 없는 해역이다. 해경은 일단 나포된 중국어민들에 대해 불법조업과 영해 침범 여부 등을 조사하고 있다. 우리 어민에 대해서도 조업구역 무단이탈과 관련해 조사를 벌일 방침이다. 연평도에서는 2005년에도 우리 어민들이 불법조업하는 중국어선 4척을 나포한 적이 있지만 어민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이번 사태는 갈수록 심해지는 중국어선 불법조업이 빌미가 된 것으로 보이다. 이날 새벽에도 연평도 북쪽 바다와 NLL 사이 해역에 70∼100척의 중국 어선이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해경은 파악하고 있다. 선장 진모(57)씨는 “중국 어선들이 우리 어장을 파괴해 굶어 죽게 생겼는데 바다를 새까맣게 메운 중국 어선들을 보고 순간적으로 화가 나 어민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연평도 북방 해상은 NLL과 불과 1.4∼2.5㎞ 가량 떨어져 있는 데다 북한군 해안포에 노출돼 있어 우리 어민에게 허가된 어장이 없다. 이런 점을 노린 중국 어선들은 NLL과 연평도 사이 바다에서 상습적으로 불법조업을 하다가 우리 해군이 나포 작전에 나서면 북한 해역으로 도주하곤 한다. 더구나 중국어선들은 쌍끌이 저인망식 조업을 펴 치어까지 싹쓸이함으로써 어획량 감소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해 서해5도 어민들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다. 어민들이 미리 바다에 던져놓은 통발까지 깡그리 훼손하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옹진군의 집계에 따르면 중국어선 탓에 매년 수십억원의 어구 손실을 보고 있다. 백령도 주민 김재흥씨는 “어두운 밤 두무진이나 장산곶 인근을 보면 시커먼 바다가 훤한데 그게 다 중국어선”이라며 “갈고리로 어구까지 싹 쓸어가 버리니 손실이 어마어마하다”고 말했다. 연평도 박태원 어촌계장은 “어떤 때보면 중국어선들이 연평도 200~300m 접근해 고기를 잡는 등 과감하기 그지없다“면서 “그들은 우리 영해에 있는 수산물을 싹쓸이 해간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2014년 봄·가을 조업기간에는 어선 77척이 바다에 쳐놓은 통발 778틀을 잃어버렸다. 안강망 8틀, 주낙 어구 384바퀴, 닻 71개도 회수하지 못했다. 피해액 106억 5700만원 가운데 어구 피해가 14억 1700만원, 조업하지 못해 난 손실이 92억 4000만원에 이른다. 옹진군 관계자는 “피해가 워낙 광범위해 지난해 자료는 아직 통계조차 잡히지 않았다”며 “어민들이 신고한 건수를 토대로 피해 액수를 산정하는데 실제 피해는 더 클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중국 어선들은 NLL을 넘어 한강 하구까지 침입해 불법 조업을 하고 있다. 지난 4월 말 꽃게잡이 철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중국 어선들이 거의 매일 교동도 서쪽과 북쪽 구역에 출몰하고 있다. 교동도 해안 500m 이내까지 접근하는 바람에 이곳을 지키는 해병대가 경고 방송을 하는 경우도 빈발하고 있다고 군 관계자가 전했다. 지난해까지 중국 어선들은 주로 연평도 근해에서 조업했지만 최근 어선끼리 경쟁이 심해지면서 한강 하구까지 밀려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해당 지역은 북한과 가깝고 유엔군 사령부가 관할하는 중립지역이기 때문에 우리 당국의 단속이 쉽지 않은 실정이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정부는 선 그었는데… 주한美사령관 “北과 대화·조율 계속될 필요”

    軍, 신형 K2전차 100대 배치 추진 빈센트 브룩스 신임 한미연합군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이 12일 “북한과의 대화와 조율이 계속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제7차 당대회에서 제시한 남북 군사회담 개최에 대해 우리 정부가 부정적 입장을 고수한 가운데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 의지를 피력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올 만한 언급이어서 주목된다. 브룩스 사령관은 이날 오후 이순진 합참의장과 함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과 비무장지대(DMZ) 최북단에 위치한 경계소초(OP)인 오울렛 초소 등을 시찰한 자리에서 “과거에 오울렛 초소를 여러 번 와 봤지만 올 때마다 한반도의 상황이 얼마나 빨리 변할 수 있는지, 왜 우리가 항상 강력한 준비태세를 유지해야 하는지를 느낄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통제구역에 서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며 “북한과 대화와 조율은 계속될 필요가 있으며 그 같은 일(대화와 조율)이 재개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브룩스 사령관은 이어 “평화와 안정에 필수적인 강한 동맹을 만들기 위해 이 의장을 비롯한 한국군과 함께 일할 수 있어 영광”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정전 상태를 수호하고 유지해 나가는 가운데 가장 강한 준비태세와 힘을 갖출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것을 약속드린다”고 강조했다. 브룩스 사령관의 발언이 핵보유국을 주장하는 북한과의 대화 재개 의지를 보인 것 아니냐는 관측에 대해 주한미군 관계자는 “(북한의 도발로) 정전협정이 잘 지켜지지 않고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하는 긴박한 상황의 장병들을 격려하는 도중에 유엔군사령관으로서 정전협정의 틀 내에서 남북 간 대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피력한 것”이라며 “북한과의 대화 필요성을 이야기한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해병대는 이날 오후 백령도와 연평도에서 1시간 동안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대비해 해상사격훈련을 실시했다. 한편 군 당국은 북한 지상군 위협에 대응하고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독자적 기갑 전력을 증강하기로 했다. 특히 군은 전시에 북한으로 진격할 수 있는 신형 K2 전차 100여대를 추가 배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군은 K2 전차 200여대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2014년부터 이를 생산하고 있지만 북한 신형 전차 위협이 극대화돼 2020년부터 추가로 100여대를 증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北 GPS 교란에 조업 포기 속출

    北 GPS 교란에 조업 포기 속출

    北 동해로 단거리 미사일 발사 무력시위 靑·유엔사 군정위 “北 도발 중단하라” 정부는 북한이 이틀 연속 강도 높은 위성항법장치(GPS) 교란 전파를 발사한 것을 도발로 규정하고 즉각적인 중단을 요구했다. 북한은 지난달 31일 저녁부터 군사분계선(MDL) 북방 해주, 연안, 평강, 금강 등 4개 지역에서 GPS 전파 교란 행위를 지속적으로 감행하고 있다. 청와대는 1일 오후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열어 대응책을 논의했다. 정연국 대변인은 서면브리핑을 통해 “관련 국제협약을 위반하고 우리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하고도 무모한 행위로서 즉각 중단돼야 한다”고 밝혔다. 국방부도 “교란 행위를 지속한다면 국제사회와 긴밀한 공조 체제를 유지한 가운데 북한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는 이날 오후 판문점에서 북측에 육성으로 GPS 교란행위에 대해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군 당국은 북한의 전파 교란 가능 거리는 100여㎞에 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북한은 10여종의 GPS 교란 장비를 개발해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GPS 교란으로 이른 새벽 조업에 나섰던 강원도 동해안 어민들이 망망대해에서 위치를 찾지 못해 해가 뜰 때까지 한동안 애를 먹기도 했다. 속초해양경비안전서는 이날 새벽 관할 구역에서 출어한 어선 332척 가운데 71척이 GPS 이상으로 조기 귀항했다고 밝혔다. 한편 합동참모본부는 이날 “북한이 오늘 낮 12시 45분쯤 함경남도 선덕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단거리 지대공미사일 1발을 발사했다”고 밝혔다. 선덕은 강원도 원산에서 북쪽으로 약 60㎞ 떨어진 곳에 있다. 이 미사일은 100여㎞를 비행했으며 군 당국은 SA 계열 및 KN06 단거리 지대공미사일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서울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속초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한미 연합훈련 공식 시작 발표… “역대 최대 규모 병력”

    한미 연합훈련 공식 시작 발표… “역대 최대 규모 병력”

    한미연합사령부는 7일 한미 양국 군이 연합훈련인 ‘키리졸브(KR)’와 ‘독수리(FE) 연습’을 시작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미연합사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한미연합사령부가 연례적으로 실시하는 키리졸브 및 독수리 연습이 오늘 시작됐다”고 밝혔다. 지휘소 훈련(CPX)인 키리졸브 연습은 오는 18일까지 진행되며, 실기동 훈련(FTX)인 독수리 연습은 다음 달 30일까지 실시된다. 연합사는 “키리졸브 연습은 한미 간 오랫동안 지속해온 굳건한 동맹관계와 우호, 대한민국과 역내 안정을 방어하는 양국의 공약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8주 동안의 독수리 연습 기간에는 한미연합사와 주한미군사의 지상군, 공군, 해군, 특수작전 등 구성군사령부에서 실시하는 일련의 다양한 연합·합동 야외기동작전을 연습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연합사는 “유엔군사령부는 판문점을 통해 북한군에 키리졸브와 독수리 연습 일자와 두 연습의 비도발적 성격에 대해 통보했다”고 말했다. 유엔군사령부는 이날 오전 9시 34분쯤 확성기로 북측에 훈련 일자 등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번 키리졸브와 독수리 연습에 참가하는 미군 병력은 각각 7000여명, 1만여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주한미군 병력은 2만 5000여명으로, 대부분 키리졸브 연습에 참가한다. 나머지 병력은 미국 본토를 포함한 해외에서 들어오는 증원군이다.키리졸브와 독수리 연습에 참가하는 한국군 병력은 약 30만여명이다.한미연합사 관계자는 “이번 훈련에 참가하는 병력과 장비 등 모든 전력을 통틀어 보면 역대 최대 규모의 키리졸브·독수리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훈련 규모가 예년보다 커진 것은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인 존 C. 스테니스호를 포함한 항모 강습단의 훈련 참가가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제9 항공단, 제21 구축함전대, 스톡데일 구축함, 윌리엄 로런스 구축함, 모빌베이 순양함 등을 포함하는 강습단은 다음주 한국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할 예정이다.이와 함께 한미 해병대도 이날 한미 연합훈련인 쌍용훈련에 돌입했다. 18일까지 진행되는 훈련에는 한국 해군과 해병대, 미군 제3 해병원정여단, 제7 강습상륙전단, 76기동부대 등이 참가한다. 병력 역시 미 해병대 9200여명과 해군 3000여명, 한국 해병대와 해군 5000여명 등 역대 최대 규모다. 호주군 130여명과 뉴질랜드군 600여명도 유엔사령부 파견군 자격으로 훈련에 참가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안보 이슈 Q&A] 中, 對北 레버리지 강화·美 견제 노림수… 韓·美 “비핵화 먼저”

    [안보 이슈 Q&A] 中, 對北 레버리지 강화·美 견제 노림수… 韓·美 “비핵화 먼저”

    북한의 핵 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안 논의가 이달 중 마무리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가운데 중국이 ‘평화협정’ 병행을 주장하고 나섰다. 지난 17일 중국 왕이 외교부장이 이같이 주장하자 우리 정부는 “비핵화가 먼저”라고 선을 그은 상태다. 평화협정에 대한 궁금증을 문답 형식으로 짚어 본다. Q. 평화협정은 뭘 말하는 것인가. A. 현재 휴전 상태를 완전히 끝내는 종전 협상을 하자는 의미다. 1953년 7월 27일 미국을 위시한 유엔군과 북한이 6·25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하며 남북은 지금까지 휴전 상태로 있다. 평화협정은 이를 끝내고 서로 체제를 보장하며 평화롭게 지내는 방법을 논의하자는 것이다. Q. 평화협정 주장의 근거는. A. 정전협정 합의 및 9·19공동성명 등이다. 정전협정 전문에는 이 협정이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의 한시적 성격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 협정문 4조 60항에는 휴전협정 후 쌍방이 정치회담을 소집해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을 협의할 것을 건의한다”고 돼 있다. 북한은 1960년 말부터 평화협정을 미국에 제의했고 이것이 우여곡절 끝에 현재 6자 회담 형태가 됐다. 6자 회담은 2005년 9·19공동성명에서 북한 비핵화의 대가로 평화체제 협상을 제시했다. Q. 평화협정의 주체는 남북인가. A. 아니다. 평화협정은 보통 북·미 협상을 뜻한다. 정전협정 당시 우리나라는 주체가 아니라 단지 유엔군 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이 때문에 북한은 평화협정도 우리나라를 배제하고 미국과 하겠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평화협정 주장을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Q. 한·미는 왜 평화협정을 반대하나. A. 진정성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북한의 평화협정 주장은 한반도 내 외국 주둔군, 즉 주한미군의 영구적인 철수를 뜻한다. 정전 상황에도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을 이어 왔기 때문에 한·미는 북한의 비핵화가 전제돼야 대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북한은 핵·경제 병진노선을 천명했고 비핵화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어 평화 체제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Q. 중국은 왜 갑자기 평화협정을 주장했나. A. 대북 레버리지 강화 및 미국 견제 차원이다. 평화협정은 북한 체제를 인정하고 보장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실제 북한과 대화가 시작되면 6자 회담 테이블 등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커지게 된다. 또 미국이 한반도에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공식화하자 평화협정을 내세워 주한미군 철수 주장으로 맞서겠다는 의도도 담긴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한·미·일이 안보리의 고강도 제재 결의를 강조하며 중국을 압박하자 북한 손을 들어주며 불만을 표출한 것이란 분석도 있다. Q. 안보리 제재 논의에 영향을 줄까. A. 미지수다. 중국이 고강도 제재 결의안에 불만을 표하며 평화협정 개시를 연계시킬 경우 안보리 논의에 다시 제동이 걸릴 수 있다. 왕 외교부장은 평화협정을 주장하며 “적절한 때에 구체적 논의를 하기 원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당장 안보리 결의 등 대북 제재 국면보다는 북한의 5월 노동당 대회 및 미국 대선 이후 상황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포석이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난 ‘이문열 키드’였다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난 ‘이문열 키드’였다

    나는 문학인이 아니다. 당연히 특정 작가의 작품에 대해 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다. 아니 그럴 만한 능력도 아예 없다. 내가 지금부터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순전히 1980년대를 살아온 일개 독자로서의 쓸쓸한 회고에 불과하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둔다. 청춘의 재발견이다. 80년대는 이문열의 시대였다, 이문열을 얘기하지 않고 80년대를 넘어가기 어렵다. 지금의 중년이 이문열을 떠올린다는 것은 지나온 젊은 날의 고비고비를 떠올리고 추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나온 많은 세월의 어느 순간에서도 이문열은 지금의 40~50대와 함께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소설은 이 땅의 중년에게 가늠할 수 없는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비록 우리 위 세대지만 그는 듬직한 길동무이자 우리를 열광케 한 생의 멘토였다. 그로 인해 우리는 사랑과 인생을 고민했고 남루한 현실을 생각하며 밤잠을 설쳤다.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시구절 ‘대추야자 꽃피는 아름다운 시절, 추락하는 모든 것은 날개가 있다’에서 제목을 따온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읽고 지독히도 광기 어린 사랑에 진저리를 쳤으며 책 서두에 등장하는 오스트리아 그라츠는 나에게 동경의 도시로 자리잡게 했다. 지금은 국민 배우쯤으로 인정되는 최민식을 알게 된 것은 강수연, 손창민이 등장하는 동명의 영화가 한몫했다. 젊은 날 누구나 한번쯤 근원적인 고민에 빠지게 했을 ‘사람의 아들’, 유장한 고어체 문장의 아름다움에 숨을 멎게 했던 ‘황제를 위하여’나, 권력과 인간의 위선적 속성을 통렬하게 까발린 ‘필론의 돼지’는 또 어떠했던가. 삶에 대한 고뇌와 불안으로 밤을 새우게 한 ‘젊은 날의 초상’은 나로 하여금 부끄러움에 떨게 했다. 얼마 전 EBS틀 통해 본 동명의 영화가 끝난 그날 밤 자정, 나는 속절없이 사라져버린 젊은 날을 생각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처럼 80년대를 거쳐온 우리들의 생의 마디마디에는 이문열이 함께하고 있다 그러나 80년대, 그 시절 청춘을 휘어잡았던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극단적인 찬사와 더불어 그에 비견하는 비판이 교직하고 있다. 작품 그 자체보다는 그가 드러낸 정치적인 주장이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정치적인 견해를, 그것도 직설적으로 내뱉은 데 대한 거부감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진보 쪽 젊은 비평가들의 경우 가장 과대평가된 작가로 그를 첫손가락에 꼽았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문학적 성과에 비해 지나친 권력 보유’와 ’정치적 발언의 파장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 결여’가 이유라고 했다. 비판자들은 또 이문열의 숲에 들어서는 독자들이 그가 가꾸어 놓은 보기 좋은 나무들과 꽃들을 바라보는 데 취해 그 숲 전체가 내뿜는 이념 혐오의, 아니 탈현실의 독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비판자는 이문열의 엄청난 대중적인 인기를 두고 당시 독재권력하에 엄혹했던 민중의 현실을 적당히 건드리면서 사실상 관념적인 낭만주의 세계로 80년대 준열한 사회의식을 희석시키거나 호도시켰다고 깎아내린다. 문학 문외한인 나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반론할 능력이 안 되고 또 일정 부분 공감이 가는 대목도 있다. 그러나 비평가들의 이 같은 전문가적인 지적과는 별개로 이문열은 그 시절 젊음을 열광케 한 괴력의 작가였다. 그가 보여준 허무주의, 낭만주의, 교양, 취미, 엘리티시즘 등등이 주는 매력을 우리는 정녕 무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소설은 물론이고 ‘레떼의 연가’ ‘사람의 아들’ ‘구로아리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등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수많은 영화를 보고 울고 웃게 된다. 우리는 순전히 정치적인 지향 태도의 문제로 문학적 성과를 폄훼하는 일부의 비평에 마땅치 않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한 인간의 삶이 극렬한 치달음에 이르렀을 때 어떤 식으로 발화되는지를 문장으로 보여주는 흔치 않은 작가였기 때문이다. 이문열 키드쯤 되는 나는 매 학기 첫 강의시간에 나눠 주는 강의계획서 끝에 예외 없이 ‘더 베스트 이즈 옛 투 비’(The best is yet to be)라는 한 구절을 슬쩍 붙여 놓았다. 더러는 무심히 지나치기도 하지만 결국은 수강생 중 누군가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그럴 경우 그 구절의 의미를 뭉클한 맘으로, 내심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해 준다. “우리가 동경 낡은 하숙집에서 굶주리며 조국 해방을 꿈꾸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쫓겨가야 하다니…” “아닐쎄…좋은 것은 언제나 미래에 있지 않은가. 미래에 올 그 무엇을 위해 우리는 시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이문열의 초기 작품인 영웅시대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한국전쟁이 나고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쟁 동안 북한 정권이 임명한 수원농대 책(서울농대 학장)으로 있던 주인공과 동료가 북으로 쫓겨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고받은 대화다. 소설 속 주인공은 일제시대 동경 유학까지 다녀온 식민지 지식인으로, 작가의 월북한 친아버지가 모델이다. 더없이 극한 상황에서도 ‘좋은 것은 미래에 있다’는 주인공의 한마디는 당시 20대 청춘인 나에게 무한한 의미를 던져 주었다. 인터넷이 없던 80년대, ‘좋은 것은 언제나 미래에 있다’는 구절을 찾기 위해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고 결국은 로버트 브라우닝(1812~1889)의 시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아내게 된다. ‘영웅시대’가 이데올로기를 고민케 하는 작품이었다면 ‘젊은 날의 초상’은 80년대를 관통한 청춘의 성장통이었다. 서가에서 찾아낸 빛바랜 책에는 내가 20대 때 읽으며 밑줄을 그은 대목들이 불현듯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는 대목으로 인해 나는 지금껏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폭탄주를 이를 악물고 마시게 되었다. 또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라는 대목을 무슨 탈무드의 잠언처럼 외우고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특별히 드러내 놓을 것도 없는 나의 삶에도 이처럼 이문열의 영향을 받은 바가 적지 않다. 그래서 쏟아지는 비난의 대상이 된 그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나의 심정은 안타깝다. 한때 더없는 구애의 대상이었으나 이제 초라해진 옛사랑을 마주하듯 비감스럽다. “비록 턱없는 감상과 애정 때문에 극적인 과장과 미화의 폐해를 입고 있긴 해도 이 갈피갈피에는 무슨 열병처럼 지나온 내 젊은 날들이 영원한 그리움과 회한으로 숨쉬고 있다”는 작가의 후기가 마치 변변치 않은 삶을 살아온 나의 고백 같아 부르르 떨린다. 계절은 어느새 겨울의 막바지에 와 있다. 문밖에 서성이는 봄은 각시방 영창에 달아 놓고 싶었던 수정 고드름을 녹이고 있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봄이 온다는 말이 실감 나는 계절이다. 봄은 만물을 소생케 한다지만 그 대상에 인간은 빠져 있다. 지난 시절은 장려했지만 새봄을 맞는 지금의 중년은 외롭고 허전하다. 그러나 옷을 벗은 산들이 다가올 봄의 신록을 거부하지 못하듯이 힘듦 속에서도 희망의 씨는 자라고 있다. 설날이다. 더없이 곤고한 상황에서도 그가 ‘영웅시대’를 통해 던진 한마디를 새겨 보자.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은 언제나 미래에 있으리 (The best is yet to be). 그때 종로 코아 빌딩 언저리 맥주집에서 ‘영웅시대’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던 그 시절 우리들의 청춘이 문득 그립다.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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