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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반인 조문 시작… 저격범도 ‘비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바티칸으로 모여든 수만명의 순례객들은 4일 오후 5시(한국시간 4일 밤 12시) 성베드로 대성당으로 모셔진 교황의 시신을 대면하고는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세계 곳곳에서 바티칸에 도착한 추기경들은 이날 첫 모임을 갖고 장례식 날짜를 확정했으며 차기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 일정을 논의하는 등 본격적인 장례절차에 들어갔다. ●교황 청사에서 교황청 및 이탈리아 정부 관계자들과의 첫 대면식을 마친 교황의 시신은 4일 오후 방부 처리를 끝낸 뒤 일반인들의 조문을 받기 위해 성베드로 대성당으로 운구됐다. 교황의 시신은 수만명의 신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소를 출발, 성베드로 광장을 지나 성베드로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교황의 시신은 대부분의 교황들이 묻힌 성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소에 안치될 것이라고 교황청은 밝혔다. 앞서 폴란드 유력 일간지는 “교황이 생전에 자신의 심장이 고향인 크라쿠프의 바벨 왕립성당에 안치되길 원했으며 교황청이 동의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보도했으나 교황청은 “교황이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고 밝혔다. ●1981년 5월13일 성베드로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를 저격하려다 실패한 뒤 터키교도소에 수감 중인 극우파 회교도 메메트 알리 아그자는 교황의 서거 소식에 매우 슬퍼하고 있다고 가족들이 전했다. 아그자의 가족들은 가능하다면 교황의 장례식에 참석, 애도를 표하고 싶다고 말했다. ●2시간 30분에 걸쳐 4일 첫 회의를 가진 추기경들은 교황의 장지와 장례식 일정뿐 아니라 교황이 생전에 끼고 있던 어부의 반지(페스카토리오)와 각종 서한을 봉인·날인하는 데 썼던 철인(鐵印) 폐기 일정도 논의했다. ●콘클라베에서 선출될 새 교황이 가장 먼저 할 일은 재위기간 중 사용할 이름을 직접 고르는 것이다. 새 교황은 자신의 세례명을 라틴어로 표기하거나 과거 교황 중 한 사람, 또는 성자의 이름 중에서 선택해 쓸 수 있다. 또 ‘헌신’을 뜻하는 비오(Pius)나 ‘순결’을 뜻하는 이노센트(Innocent) 등 자신에게 부여하길 원하는 품성을 이름으로 쓸 수도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은 전세계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세기의 ‘조문외교의 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장례식에 참석하는 등 200여명의 각국 지도자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세계 각국 지도자들과 약 200만명 이상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이탈리아 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로마시 당국은 경찰 6430명을 장례식장에 배치하는 등 경찰 1만명을 동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로마시는 또 올림픽 주경기장 등 경기장과 철도역 등을 개방,‘텐트촌’으로 만들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시내 호텔들은 이미 예약이 완료됐으며, 시내 곳곳에 장례식을 생중계할 대형 TV 스크린도 설치됐다. ●영국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파커 볼스의 결혼식이 교황의 장례식 일정과 겹침에 따라 왕세자의 공식 거처인 클래런스 하우스측은 이날 “결혼식 날짜를 9일로 연기 할 것이며 찰스 왕세자는 8일 교황 장례식에 참석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 말기암 투병하며 LG배 출전 김수영 7단

    말기암 투병하며 LG배 출전 김수영 7단

    ‘내 생명의 불꽃은 아직도 뜨겁다.’ 프로바둑기사 김수영(61) 7단이 췌장암 말기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투병 대국을 펼쳐 바둑팬들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지난 70년대 TBC에서 시작해 현재의 바둑TV에 이르기까지 방송을 통해 유창한 언변과 재치있는 해설로 사랑을 받아 온 김 7단은 최근 병원에서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그는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토가 나더니 체중이 한달 새 무려 25㎏이나 빠지더군요. 통증 때문에 눕지도 못하고 앉아서 밤을 새우곤 했는데, 병원에서는 별 이상이 없다고 하고…. 그랬다가 지난달 초 CT(컴퓨터 단층촬영)검사를 했더니 이게….”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항암치료를 권했지만 이미 상황을 간파한 그는 이를 거부했다. “상황이 그렇다면 내 방식대로 거기에 순응하는 것도 아름답지 않습니까?”라는 그의 핼쑥한 얼굴에서 평생 미학적 행마로 일관해 온 원로 기사의 자존심이 읽혀졌다. 항암치료로 피폐해지는 자신을 용납하지 못할 만큼 그는 자존심 강한 바둑인이었다. 지난해부터 교회를 찾은 그는 한 때 깊은 산에라도 들어가 삶을 정리할 생각이었으나 스승인 조남철 9단의 부인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그의 마음을 돌려놨다.“선생님께서는 제가 병에 걸린 것을 모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사모님께 유언처럼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내가 죽거든 모든 것은 수영이하고 상의해서 처리해라.’” 이렇게 전하면서 그는 굵은 눈물을 흘렸다. 부모처럼 믿고 존경했던 스승이 아닌가. 이런 주위의 신뢰에 힘을 얻은 듯 그는 자꾸만 쇠약해지는 자신을 추슬러 지난달 21일 제10회 LG배 세계기왕전 대국장에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독한 약제 때문에 온 몸에서 진땀이 흘러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는 한 판의 공식대국을 치러내 주변을 놀라게 했다. “바둑판 위에서 내 생을 접겠다.”며 꼿꼿하게 기사로서의 품위를 지켜내는 김 7단의 얼굴은 차라리 평안해 보였다.“암도 결국 내 일부 아니겠습니까. 싫든 좋든 같이 가야죠. 그러다 미안해 떠나주면 고마운 일이고….” “둘 수 있는 한 바둑을 둘 것이고,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그의 얼굴에서 말기암의 심술에 기죽지 않고 타개의 묘수를 찾아 고심하는 한 승부사의 불꽃 같은 열정이 뜨겁게 불씨를 살려내고 있었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박동섭 가족클리닉 행복만들기] 남편 전처의 딸이 돈 요구 행패

    저는 1988년 결혼해 남편과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미국에서 돌아왔다는 20대의 젊은 여성이 남편의 전처 딸이라고 하면서 행패를 부립니다. 한번은 술을 마시고 찾아와 “아버지의 돈을 내놓아라. 그 많은 재산은 다 어떻게 했느냐.”면서 거실의 유리창을 깨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막을 길은 없을까요. 하지만 형사고소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 이런 것이 남편을 상대로 이혼청구를 할 수 있는 사유가 될 수는 없을까요. -김인숙(가명)- 접근금지가처분 신청을 하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신청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일반 민사소송절차로 신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신청하는 것입니다. 남자대학생이 어떤 여학생을 일방적으로 좋아해 편지나 이메일을 보내고, 계속 전화를 걸고, 뒤를 따라 다닌다든지, 집 앞에서 일정한 시간에 기다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서로 좋아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여학생은 싫어하는데 남학생만 일방적으로 무리하게 좋아해 ‘스토킹’을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이 경우 그 남자의 친구를 동원하여 말리는 길도 있지만, 역시 어렵다면 민사신청으로 “홍길동은 ○○○에게 100m 이내의 접근을 금지한다.”는 신청을 내면 법원에서는 당사자를 소환합니다. 그리고 담당판사가 신청인의 진술과 상대방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보고, 접근금지명령을 내립니다. 이런 결정을 받고도 위반하면 과태료 처분을 내릴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할머니가 재산이 많아 장남이 자기에게 유리한 유언을 받아내려고 평소와 달리 어머니에게 잘 대하고 나아가 다른 형제자매를 일절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딸들이 “오빠가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게 한다. 나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싶다.”고 호소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면접교섭 방해금지 가처분신청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으로 가족간의 접근금지 신청은 가족의 일원이 상습적으로 폭력을 행사해 가정생활의 평온을 깨트릴 때 사용됩니다. 인숙씨의 경우처럼 딸은 인숙씨의 1촌의 인척(배우자의 혈족)이고, 친족이므로 서로에게 일정한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딸은 아버지의 재산에 대하여 현재 청구할 권한은 없지만 생계유지가 곤란하다면 아버지를 상대로 부양청구를 할 수는 있습니다. 만일 같이 살고 있었다면 계모인 인숙씨와 딸 사이에도 서로 부양할 의무가 있습니다. 인숙씨가 남긴 재산에 대하여 그 딸이 상속할 권리는 없고, 딸이 남긴 재산도 인숙씨가 상속할 수 없음은 마찬가지입니다. 인숙씨가 딸을 상대로 접근금지신청을 하려면, 주소지 관할 수사기관에 고소하고 동시에 접근금지를 신청해야 합니다. 신고를 받은 사법경찰관은 폭력행위가 진행되고 있다면, 즉시 현장에 출동해 폭력행위의 제지, 행위자와 피해자 분리, 범죄수사 등을 합니다. 이런 응급조치에도 불구하고 폭력행위가 재발될 염려가 있다고 인정되면, 검사는 가정법원에 임시조치를 청구할 수 있습니다. 가정법원은 행위자를 피해자의 집이나 방으로부터 퇴거 등 격리, 피해자의 집·직장 등에서 100m 이내의 접근금지, 병원 등 기타 요양소에 위탁, 경찰서 유치장·구치소에 유치 등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판사로부터 접근금지결정을 받으면 행위자는 피해자와 항상 100m 밖에 있어야 하고 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이를 위반하면 바로 구속됩니다. 접근금지결정은 사실 상당히 가혹한 최후의 수단인 만큼 가족의 건강, 가정의 평화 등을 고려해 신중하게 신청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딸의 행동이 남편에 대한 이혼사유가 될 수 있는가는 남편이 혼인 당시 전처와 딸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아내에게 알렸다면 이혼사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를 알리지 않고 느닷없이 전처의 딸이 나타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행패를 부리는데도 남편이 수수방관하거나 딸의 편을 든다면 이혼사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클리닉의 상담 의뢰는 인터넷 서울신문(www.seoul.co.kr)에서 받습니다.
  • 儒林(314)-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儒林(314)-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유서를 쓰고 난 후 정오에는 제자들을 만나보았는데, 몸이 편치 못하니 그만두라고 자제가 말렸으나 ‘죽음과 삶이 갈라지는 이때에 마지막으로 만나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한 후 상의를 벗고 의관을 정제한 후 제생들을 불러 모아 놓고 결별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평소에 잘 모르는 것을 가지고 제군들과 더불어 날이 저물도록 강론을 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연보에 의하면 죽기 사흘 전 12월5일에는 죽은 후 자신이 묻힐 ‘관을 미리 짜라고 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분매에 물을 주라.’는 최후의 유언은 가족, 그리고 제자들과 차례로 작별의 인사를 나눈 후 마지막으로 자신의 관까지 짤 것을 명령한 후 임종하는 그날 아침에 행한 것이므로 실제로 퇴계의 입에서 나온 가장 마지막 일성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는 어찌하여 이 분매를 그토록 사랑하였을까. 물론 퇴계 스스로가 표현하였던 대로 이 분매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퇴계가 그 매화꽃을 빙설(氷雪)에 비유했던 것은 문자 그대로 눈처럼 깨끗하고 결백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빙설은 ‘얼음과 눈’이라는 뜻 이외에 ‘청렴과 결백을 비유해서 이르는 말’이 아닐 것인가. 그러나 이 매화가 한성에서 이별할 때 증답가(贈答歌)를 통해 매화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음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임이 돌아간 뒤에 천향(天香)을 피우리라.(待公歸去發天香) 원컨대 임이시여, 마주 앉아 생각할 때(願公相對相思處) 청진한 옥설 그대로 함께 고이 간직해주오.(玉雪淸眞共善藏)” 노래에 나오는 임(公)이란 즉 퇴계 자신을 이르는 말. 그러므로 이미 떠난 뒤에도 ‘천향’, 즉 천하제일의 향기를 피우겠다는 말은 바로 매화를 의인화시켜 매화가 퇴계에게 한 맹세였던 것이다. 또한 ‘원컨대 임이시여, 마주 앉아 생각할 때’라는 시 구에서 사용된 ‘상사처(相思處)’란 말을 직역하면 문자 그대로 ‘마주 앉아 생각할 때’란 뜻이 되지만 원래 ‘상사(相思)’라 함은 ‘남녀간의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 의역하면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닌 것이다. “원컨대 임이시여, 우리 서로 사랑할 때” 또한 ‘천향’이란 말도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원래 ‘천향국색’은 ‘천하제일의 향기와 자색’으로 ‘모란꽃’을 가리키는 말도 되지만 ‘절세의 미인’을 가리킨다. 특히 삼국지에 나오는 왕윤의 가기(歌妓)였던 초선(貂蟬)을 ‘천향국색’으로 불렀던 것이다. 왕윤은 간신 동탁을 죽이기 위해서 초선을 동탁에게 진상하는 한편 동탁의 호위대장이었던 여포에게도 추파를 보임으로써 삼각관계를 만들어 미인계를 통하여 동탁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천향’이라함은 삼국지에 나오는 초선과 같은 절세미인을 가리키는 말로 퇴계가 그 분매를 마치 절세미인처럼 사랑하고 있었음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퇴계가 그 분매를 상사하고 그리워하였던 것은 다만 그 매화가 아름답고 향기로웠기 때문이었을까. 그 매화에 얽힌 사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임과 이별을 한 뒤에도 천향을 피우는 것은 매화가 아니라 어떤 여인의 향기가 아니었을까.
  • 한겨레 정태기 사장 선임

    한겨레신문은 26일 주주총회를 열고 정태기(鄭泰基·64) 사장 내정자를 대표이사 사장에 선임했다. 정태기 신임 사장은 1965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가 75년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참가해 해직된 뒤 도서출판 두레 대표, 화담기술㈜ 대표 등을 거쳐 88년 한겨레 상무로 언론계에 복귀했다. 92년 퇴사한 뒤에는 포스코경영연구소 부사장,㈜신세기통신 대표, 교보정보통신 사장 등 전문경영인으로 일해 왔다. 정 사장은 앞으로 3년 임기의 사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이날 주주총회에서 편집국장(편집위원장)에 권태선 편집국 부국장이 선임되고 경영총괄 전무이사에 서형수씨, 편집인 전무이사에 김효순씨, 사장실장 이사에 고광헌씨, 상임감사에 김광호씨, 사외이사에 장하성·이민규·하승수씨가 선임되는 등 임원 선임도 마무리됐다.
  • 儒林(313)-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儒林(313)-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퇴계가 이 매화를 얼마나 사랑하였던가는 8개월의 체경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이 매화와의 이별을 슬퍼하면서 ‘한성우사분매증답(漢城寓舍盆梅贈答)’이란 시까지 남기고 있음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행히 이 매선이 나와 함께 서늘하여 객창이 소쇄하여 꿈마저 향기로웠네. 동으로 돌아갈 제 그대와 함께 하지 못하니 서울티끌 이 속에서도 고이 간직하여다오.” 이 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퇴계는 이 매화를 유독 사랑하여 ‘매화의 신선(梅仙)’으로까지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퇴계는 그 매선을 잊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이에 기억되는 것이 있으니 지난봄 서울에서 분매를 얻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집으로 돌아오고 보니 그 분매생각이 그치질 않는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다음과 같은 영매시를 짓는다. “잊혀지지 않는구나. 지난해 봄 서울에서 분매 두고 돌아오는 소매 신선바람에 스쳤더니 어찌 오늘에서야 시냇가 나의 서재 속에 황종률(黃鐘律)로 변했으니 그 조화무궁하여라.” 이퇴계가 그처럼 그 매선을 몽매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나선 사람은 김취려(金就礪). 그는 퇴계가 한양에 머무르고 있을 무렵 가깝게 지내던 문인이었다. 그는 퇴계의 손자 이안도에게 부탁하여 이 분매를 배로 운반하여 안동으로 가져왔던 것이다. 이때가 경오년(1570년) 정월. 퇴계가 숨을 거두던 바로 그해 초였던 것이다. 이 분매를 받자마자 퇴계는 ‘기뻐서 한 구절을 읊다(來喜題一絶云)’라고 시제하고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붉은 티끌 일만 겁을 초연히 벗어나 속세 아닌 이곳 찾아 이 늙은이와 벗하니 일을 좋아하는 그대가(김취려를 말함) 나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빙설(氷雪) 같은 그 얼굴 어찌 볼 수 있었으리요.” 퇴계는 유독 그 매분만을 신선으로까지 부르고 있고, 매화의 모습을 빙설로 표현하고 있음인 것이다. 그리고 수명이 다해 임종을 앞두고 있던 퇴계는 이 고고한 능설청향(凌雪淸香)의 벗에게도 작별을 고했던 것이다. 평소 때와 같으면 마지막 고별의 인사로서 손수 물을 주고 싶었을 것이나 몸을 움직일 수 없으므로 시종하는 사람에게 ‘매분에 물을 주라’고 유언하였던 것이다. 이는 4일전 제자들을 불러 죽음과 삶이 갈라지는 마당에서 최후의 고별 인사를 한 것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연보는 퇴계가 죽기 전의 며칠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12월3일에는 퇴계가 ‘자제들에게 명하여 남에게 빌려온 서적을 모두 반환하라 하고 책을 잃어버리지 말 것을 당부하였으며, 이때 아들 준이 봉화현감으로 있었는데, 감사에게 사직서를 내라고 명하였으며, 가족들에게는 기도하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죽기 4일전인 12월4일에는 조카 영(寗)에게 유서를 쓸 것을 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儒林(312)-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儒林(312)-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연보의 기록대로라면 앉은 채 좌탈입망하여 숨을 거둔 이퇴계. 그는 죽기직전까지도 분매에 물을 주라 일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음일까. ‘매화에 물을 주라.’일렀던 이퇴계의 마지막 유언은 세기의 철인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유언을 떠올리게 한다. ‘아테네의 청년을 부패시키고 새로운 신을 섬긴다.’는 죄명으로 독배를 마시며 죽게 된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의 편안한 여행을 기원하는 기도’를 드린 다음 태연히 독약을 마신다. 이를 보던 제자들이 얼굴을 감싸고 통곡하자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웬 곡소리들인가. 이런 창피한 꼴을 보게 될까봐 아낙네들을 먼저 보냈거늘,‘사람은 마땅히 평화롭게 죽어야 한다(A man should die in peace)’고 들었었네. 조용히 하고 꿋꿋하게 행동하게” 감각이 사라지고 온몸이 뻣뻣해지며 죽어가던 소크라테스는 얼굴을 덮었던 천을 벗기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보게 크리톤, 아스클레오피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다네. 자네가 기억했다가 대신 갚아주게나.” 진리의 성인이었던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유언은 의미심장하다. 아스클레오피스는 그리스인들의 의신(醫神). 뱀이 기어오르는 지팡이를 짚고 다녀서 오늘날에도 병원이나 약국에서는 뱀의 지팡이로 상징되는 아스클레오피스의 문장을 내걸고 있다. 죽어가는 소크라테스는 이승의 삶은 고통스러운 병이었으나 죽음으로써 병으로부터 치유되어 영혼의 자유와 해방을 얻었으니 직접 가서 아스클레오피스신전에 감사의 제물을 바치지 못하므로 친구인 크리톤에게 대신 닭 한 마리의 제물을 바쳐달라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이는 죽기 전에 ‘매화에 물을 주라’는 이퇴계의 유언과 상통하고 있다. 이퇴계는 사람이 낳고,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일생이 매화에게 물을 주는 일상사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 후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듯 앉은 채 죽음을 조용히 하고 편안히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듯 임종을 지켰던 매화분 하나가 단양을 떠나는 퇴계의 행장 속에 깊숙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매화는 도대체 누가 주었던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이 수수께끼의 매화가 선조의 소명을 받고 68세 때인 7월에 잠시 한성에 입조하였다가 69세 때인 3월에 귀향하기까지 8개월간의 체류기간 중 한성우사(漢城寓舍)에서 지낼 때 애완하던 분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누가 이 분매를 퇴계에게 기증하였는지, 혹은 퇴계가 이 분매를 직접 구하였는지 알려진 바는 없지만 한양객사에서 이 매화를 즐기다가 임금의 허락을 받고 다시 안동으로 내려갈 때 이 매화를 가져가지 못하는 슬픔을 퇴계는 ‘분매답(盆梅答)’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듣건대 도선(陶仙)과 나 서늘하다 하셨으니, 임이 돌아간 뒤에 천향을 피우리라. 원컨대 님이시여, 마주앉아 생각할 때 청진한 옥설(玉雪) 그대로 함께 고이 간직해주오.” 매화의 이별을 퇴계는 마치 사랑하는 님과의 이별처럼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분매는 마침내 퇴계의 손자였던 이안도가 배로 운반하여 퇴계가 숨을 거두던 바로 그해 정월에 도산서원으로 옮겨지는데, 이때 퇴계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 儒林(311)-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儒林(311)-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퇴계는 평생 동안 특히 매화를 사랑하였다. 퇴계는 일찍이 북송(北宋)시대 때의 은사 임포(林逋)를 마음 깊이 사숙하고 있었다. 임포는 서호(西湖)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20년간 산을 내려오지 않았고, 일생 동안 독신으로 지냈으며, 학을 사육하고 매화를 완성하며 살았다.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같이 길렀으므로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리었다. 후세 사람들은 ‘매처학자’라는 말로 풍류생활을 비유하였는데, 퇴계는 임포의 매화와 일치된 삶을 본받고자 하면서 평생 동안 75제 107수에 달하는 매화시를 썼던 것이다. 평소에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으로 의인화하며 부르면서 인격체로 대접할 정도로 매화를 사랑하였던 퇴계는 살아생전 ‘매화시첩(梅花詩帖)’이란 시집도 편집하였다. 특히 퇴계는 ‘매한불매향(梅寒不賣香)’이란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으며 ‘매화는 죽더라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이 문장의 뜻을 통해 선비의 기개와 정신을 지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매화꽃을 꺾어 책상 위에 꽂아 두고 바라보기도 하고, 뜨락의 매화를 바라보며 매화와 서로 묻고 화답하는 시를 여러 차례 읊고 있다. 때로 매화 아래서 찾아온 문인들과 술잔을 나누기도 하고, 매화가 겨울 추위에 손상되었음을 개탄하는 시까지 읊었다. 예부터 조선의 선비들은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란 그림을 벽에 붙여 놓고 봄을 기다렸다. 동지로부터 날짜를 세기 시작하여 81일간이 구구(九九)에 해당하는 것이다. 흰 매화꽃 81개를 그려 놓고 매일 한 봉오리씩 붉은색을 칠해서 81개째가 되면 백매가 모두 홍매로 변하는 그림인데, 이때가 대충 3월12일 무렵이 되는 것이다. 퇴계는 평소에 솔, 대, 매화, 국화, 연(蓮)의 다섯을 벗으로 삼아 자신까지 포함하여 여섯 벗이 한 뜰에 모인 육우원(六友園)을 꿈꾸었다. 61세 때는 도산서원 동쪽에 절우사(節友社)란 단을 쌓고 솔, 대, 매화, 국화를 심어 이들과 함께 절의를 맹세하는 결사(結社)를 이룬다. 이때 퇴계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솔과 국화는 도현명 뜰에서 대와 함께 셋이더니 매화형(梅兄)은 어이하여서 참가 못했던가. 나는 이제 넷과 함께 풍상계를 맺었으니 곧은 절개 맑은 향기 가장 잘 알았다오.” 함께 바람과 서리를 견디는 결사를 맺은 이퇴계. 그는 이들 중에서 매화를 가장 사랑하며 매화를 형으로까지 부른다. 그리하여 임종에 가까운 68세 때에는 다음과 같이 매화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내 벗은 다섯이니 솔, 국화, 매화, 대, 연꽃/사귀는 정이야 담담하여 싫지가 않네. 그중에 매화가 특히 날 좋아하여/절우사에 맞이할 제 가장 먼저 피었네. 내 맘에 일어나는 끝없는 매화 생각에/새벽이나 저녁이나 몇 번을 찾았던고.” 새벽 안개 속에서도 저녁 노을빛 아래에서도 달빛 머금은 어스름한 밤에도 매화 향기를 찾아가는 노년의 이퇴계. 이퇴계는 죽기 직전 매화꽃에 물을 주라고 유언한다. 이때의 기록이 연보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선조 3년(1570년) 12월8일. 유시(酉時:저녁 6시경)에 숙소에서 종명(終命)하다. 이날 아침 시봉하는 사람을 시켜 분매(盆梅)에 물을 주라 명하다. 저녁 5시경에 와석(臥席)을 정돈하라고 명하고 부축하여 일으켜 앉히니 조용하고 편안하게 돌아가시다.”
  • [무슨 영화 볼까]

    ●지금, 만나러 갑니다 (25일 개봉) 장르/예매율 드라마/17.12%(12세) 감독/배우는 도이 노부히로/다케우치 유코·나카무라 시도 어떤 줄거리 비의 계절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떠난 아내와의 기적같은 6주간의 재회 이래서 좋아 영원한 사랑에 대한 팬터지를 꿈꾼다면… 이래서 별로 너무 순수해서 밋밋한… 홈피 반응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영화” ●마파도 장르/예매율 코미디/31.74%(15세) 감독/배우는 추창민/이정진·이문식 어떤 줄거리 160억원에 당첨된 복권을 찾아 다섯 할매들이 사는 마파도로… 이래서 좋아 웃지 않고 못 배기게하는 연기자들의 힘 이래서 별로 ‘복권 찾기’와 관계없는 에피소드들의 잔치 홈피 반응은 “실컷 웃을 수는 있습니다.” ●몽상가들(25일 개봉) 장르/예매율 드라마/4.38%(18세) 감독/배우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마이클 피트·에바 그린·루이스 가렐 어떤 줄거리 68혁명 당시 세 청춘남녀가 벌이는 성적 유희 이래서 좋아 60년대 문화와 청춘들에 바치는 헌사 이래서 별로 파격적인 섹스신이 부담스러울 수도. 홈피 반응은 “변태스럽지만 이상하게 끌리는 영화” ●호스티지 장르/예매율 액션·스릴러/4.93%(15세) 감독/배우는 플로언트 시리/브루스 윌리스·케빈 폴락 어떤 줄거리 대저택에 갇힌 인질범을 구하러 나선 협상 전문가 이래서 좋아 이중 인질구조의 치밀한 전개에 감동까지 이래서 별로 전형적인 할리우드 인질 액션극 홈피 반응은 “심리전과 액션의 절묘한 조화” ●윔블던(25일 개봉) 장르/예매율 로맨틱코미디/5.16%(15세) 감독/배우는 리처드 론크레인/폴 베타니·커스틴 던스트 어떤 줄거리 노장 테니스 선수, 사랑의 힘으로 윔블던 도전. 이래서 좋아 풋풋한 사랑의 달콤함에 스포츠영화의 짜릿함까지 이래서 별로 … 홈피 반응은 “워킹타이틀다운 로맨틱코미디” ●Mr. 히치:당신을 위한 데이트 코치 장르/예매율 로맨틱코미디/9.62%(12세) 감독/배우는 앤디 테넌트/윌 스미스·에바 멘데스 어떤 줄거리 뉴욕의 유명한 데이트 코치, 사랑에 빠지다 이래서 좋아 여성이 남성에게 끌리는 상황을 어쩜 그렇게 정확하게… 이래서 별로 … 홈피 반응은 “히치와 함께 연애공부를” ●잠복근무 장르/예매율 코미디·액션/12.90%(15세) 감독/배우는 박광춘/김선아·공유 어떤 줄거리 조폭 두부목의 딸을 감시하기 위해 학생으로 위장잠입한 여형사 이래서 좋아 무르익은 김선아의 코믹 연기 이래서 별로 서로 겉도는 액션과 코미디 홈피 반응은 “김선아도 웃기지만 조연도 장난 아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장르/예매율 드라마/8.44%(12세) 감독/배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클린트 이스트우드·힐러리 스왱크·모건 프리먼 어떤 줄거리 여성복서와 늙은 트레이너의 피보다 진한 교감 이래서 좋아 삶을 통찰하는 깊은 시선과 긴 여운 이래서 별로 숨가쁜 휴먼드라마와 권투영화를 기대했다면 홈피 반응은 “오랜 연륜이 만들어낸 감동”
  • 일본영화 3편 잇따라 개봉

    봄기운이 완연한 극장가에 세가지 색깔의 일본 영화 3편이 나란히 스크린에 걸린다. 지난해 소리소문없이 인기를 모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처럼 작지만 알찬 영화들로 기대를 모은다. 25일 개봉하는 ‘69식스티나인’은 베트남전쟁으로 촉발된 반전시위와 우드스톡 페스티벌로 대변되는 히피문화가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가던 1969년, 일본 규슈지역의 작은 도시 고교생들의 자화상을 담고 있다. 무라카미 류의 동명 소설을 재일교포 이상일 감독이 영화화했다. 불안한 사회와 흔들리는 청춘의 어느 지점에서 물불 가리지 않고 맘껏 상상력을 발휘해 행동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키즈리턴’의 안도 마사노부 등 꽃미남 배우들을 만날 수 있는 점도 매력. 4월1일 나란히 개봉하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아무도 모른다’는 각각 운명적인 사랑과 가족애를 다룬 내용으로 눈물샘을 자극한다.‘지금,‘은 일본에서 개봉 13일 만에 100만명을 넘긴 흥행작.‘1년 후 비의 계절에 돌아온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아내와의 기적같은 재회를 통해 눈물겨운 순애보를 들려준다. 한·일공동제작 드라마 ‘프렌즈’의 도이 노부히로 감독이 연출했고,‘환생’의 여주인공 다케우치 유코가 아내역을 맡았다. ‘아무도 모른다’(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는 주인공 야기라 유야가 만 14살의 나이로 최연소 남우주연상 수상이라는 신기록을 세우며 지난해 칸영화제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오른 작품. 어느날 엄마가 갑자기 떠나버린 후 고아로 남겨진 네 남매가 주변의 무관심 속에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을 과장되지 않게 차분한 톤으로 그려내고 있다. 야기라 유야는 의젓하게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는 역할을 소화해냈다. 개봉에 앞서 오는 21일 1박2일 일정으로 내한할 예정이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피터팬 속편 ‘팬 선장’ 나온다

    |런던 연합|100년 이상 전세계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사로잡았던 제임스 M 배리의 소설 ‘피터 팬’의 공인된 속편이 ‘팬 선장’이란 제목으로 세상에 나온다. 1937년 숨진 배리의 유언으로 ‘피터 팬’의 판권을 보유하고 있는 런던 그레이트 오먼드 스트리트 아동병원측은 13일(현지시간) 저명한 여성 동화작가 제럴딘 머코크런(53)이 숙원 사업인 ‘피터 팬’ 속편의 집필자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병원측은 ‘팬 선장’에는 어른이 되지 않는 소년 피터와 친구 웬디, 요정 팅커벨, 잃어버린 소년들, 무시무시한 해적 후크 선장 등 원작 속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다시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의 권위있는 아동문학상인 휘트브레드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머코크런은 “펜 한 자루만 갖고 배리의 발자국을 따라 네버랜드를 누비고 다닐 수 있게 됐다는 건 엄청난 특혜이며 이 책을 완성하는 것은 일생 일대의 글쓰기 모험이 될 것”이라며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머코크런은 여러 차례 고전의 재구성 작업을 해 온 작가로 지난 1월에는 구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다시 풀어 쓴 ‘세상의 끝은 아니란다’로 세번째 휘트브레드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단은 머코크런이 제출한 시험원고는 “원작의 미묘한 정신을 포착하면서도 새롭고 놀라운 창의적 대응방식을 보여줘 어린이와 어른들 모두에게 호소력을 갖게 될 것”이라며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심사위원이자 배리의 재종손인 데이비드는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셨다면 그녀의 스타일을 좋아하셨을 것”이라며 “어쩌면 그 분이 살아 돌아오실 지도 모르겠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머코크런은 ‘피터 팬’ 속편에서 나오는 인세를 병원과 나누게 된다. ‘피터 팬’은 1902년 ‘작은 하얀 새’라는 소설 속에 처음 등장했으며 2년 뒤 런던의 극장에서 연극으로 공연돼 유명해졌다. 배리는 1911년 이를 동화로 만들었고 환상과 마법이 뒤섞인 이 소설은 이후 전세계 어린이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 儒林(302)-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302)-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두향의 죽음은 두 가지의 소문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유서를 남기고 부자를 달인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소복을 입고 강선대바위 위에서 뛰어내려 남한강에 투신하였다는 것이다. 워낙 물살이 급한 천탄(淺灘)이라 두향의 몸은 사흘 만에 강물 위로 떠올랐다고 하는데, 어쨌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던 것은 정확한 사실인 듯 여겨진다. 마을 사람들은 두향이 남긴 유언에 따라 생전에 그녀의 초당이 있던 자리에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 처음에는 해마다 매화가 무덤 주위에서 피어나 봄 소식을 알리곤 하였다는데, 어느새 매화는 사라져버리고 적막강산의 무덤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마시고 남은 술병을 들고 축대를 내려갔다. 가파른 경사를 따라 언덕 아래로 가자 넘실거리는 강물이 암벽을 핥고 있었다. 나는 남은 술을 강물 위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강물 속에 깃들어 있는 두향의 넋을 초혼(招魂)하기 위해서 마음 속으로 두향의 이름을 연거푸 세 번 불렀다. 내 초혼에 화답이라도 하듯 수면위로 갑자기 수상한 바람이 하나 일어서더니 작은 물결을 일으키면서 출렁거렸다. 이로써. 나는 한 방울의 술까지 다 강 속에 쏟아 붓고 나서 두 손을 털면서 생각하였다. 두향의 넋을 달래는 진혼제(鎭魂祭)는 모두 끝난 셈이다. 나는 다시 무덤 위로 올라서서 말하였다. “자 이제 갑시다.” 선원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다 끝나셨습니까.” “모두 끝났습니다.” “그럼 가시지요.” 우리는 무덤가를 벗어나 가파른 산길을 내려갔다. 기슭에 밧줄로 매어놓은 배 위에 올라타자 선원은 밧줄을 풀고 막대기로 바위를 밀어 배를 호수 바깥쪽으로 견인하였다. 발동을 걸자 투투타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배는 진저리를 치기 시작하였다. 방향을 바꿔 배는 순식간에 호수 한복판으로 가로지르기 시작하였다. 나는 물보라 치는 선상에 서서 방금 떠나온 두향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빠르게 전진하는 배의 속도에 맞춰 그만큼 두향의 무덤도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정오를 넘어있었으므로 정수리를 찌르는 한낮의 햇볕은 호수 수면 위에서 박살난 유리조각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문득 나는 생각하였다. 내가 본 무덤은 실제 두향의 묘가 아니라 어쩌면 신기루(蜃氣樓)가 아니었을까. 일찍이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대지’에서 사막에 나타나는 신기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사막의 지평선에는 광선의 장난으로 좀 더 마음에 걸리는 신기루들이 생긴다. 요새와 회교 교당의 첨탑과 수직선으로 된 규칙적인 건물집단들이다. 또 식물행세를 하는 커다란 검은 점도 발견된다. 그러나 그것은 낮에 흩어졌다가 오늘 저녁에 다시 생겨날 구름 중에 마지막 구름에 덮여 있다. 그것은 층운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층운(層雲)의 그림자. 내가 본 두향의 무덤은 생텍쥐페리의 표현대로 안개처럼 땅에 가장 가까이 퍼져 있는 층운들이 만들어낸 신기루의 그림자가 아닐까.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머리를 흔들며 생각하였다. ―이퇴계와 두향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 [주한미군 역할과 전략적 유연성] “亞太미군 신속기동태세 추진”

    |워싱턴 이도운특파원|윌리엄 팰런 신임 미 태평양사령관은 8일(현지시간) “안보 환경 변화에 따라 태평양 지역에 배치한 미군의 구조를 전반적으로 재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팰런 신임 태평양사령관은 이날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테러와의 전쟁 수행과 승리 ▲합동·연합 전쟁 역량 성숙화 ▲작전계획 신뢰성 확보 ▲아시아태평양 안보협력 향상 ▲아·태지역 미 군사력의 신속대응 기동 태세 구비를 우선과제로 제시했다. 그는 또 이 지역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는 동맹 및 우방과의 관계 강화가 필수적이라며 “가능한 한 자주 직접 접촉을 가짐으로써 상호 이해 기반을 구축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같은 청문회에서 리언 러포트 주한미군사령관은 최근 한·미간 논란이 되고 있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언성’과 관련,“대북 억지 및 필요시 격퇴라는 한·미동맹의 근본 목적은 굳건하게 변함이 없으며, 동시에 지역 안정이라는 상호공약도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러포트 사령관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량과 관련, 미 정보기관의 평가를 인용해 “1,2개이지만 폐연료봉 8000개를 재처리했다면 더 많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러포트 사령관은 또 북한의 미사일 능력에 대한 질문에 “장거리 미사일인 대포동 2호나 그보다 큰 미사일은 고정발사대가 필요하지만 북한이 그런 준비를 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에 대해 러포트 사령관은 “공군 조종사들은 매년 12∼15시간 항공기가 작동하도록 유지하는 수준에서 비행훈련을 하기 때문에 군사준비 태세로는 부족하며, 지상군은 여단규모 기동훈련이 매우 드물 정도로 대규모 기동훈련은 줄었고 사단급 이상은 주로 지휘소 훈련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dawn@seoul.co.kr
  • [고시칼럼] ‘합격보장’ 광고에 속지 마세요/강혜승 공공정책부 기자

    매일 같이 쏟아지는 스팸 메일 가운데 상당수가 자격증 허위·과장 광고다. 하루에 많게는 수십 통씩 답지하는 이 스팸 메일들은 민간자격을 공인자격인 양, 취업이 100% 보장되는 양 포장한다. 현재로서는 이를 제지할 법적근거도 마땅치 않아 매년 수천여명의 소비자들이 이같은 자격증 허위·과장광고로 피해를 입고 있다. 이런 중에 올해는 공인중개사자격시험 광고까지 가세하고 나섰다.‘합격보장’ ‘고소득보장’이란 말로 수험생들을 현혹하는 광고가 최근 부쩍 늘었다.‘60점만 넘으면 무조건 합격’이라며 당연한 얘기를 마치 합격기준이 낮아진 듯 포장하기도 한다. 지난해 공인중개사시험 파문으로 인해 재실시되는 추가시험을 관련 업계에서 수험생 유치를 위한 호기로 보는 탓이다. 이들은 지난번 시험이 지나치게 어려워 파장이 일었으니 향후 치러지는 시험은 쉬울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올 하반기 시험은 더욱 쉬워진다.”며 호언장담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공인중개사시험 주관 부처인 건설교통부는 하반기 시험과 관련, 시험이 10월 30일에 치러진다는 일정 외에 확정된 바가 아무 것도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반기 정기시험에 앞서 치러지는 추가시험의 선발방식 등에 대해 공식 발표를 했듯이 하반기 시험 역시 출제방향이 정해지는 대로 공개하겠다는 것이 건교부측의 설명이다. 건교부 발표 전까지 시중에 떠도는 이런저런 말들은 유언비어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더욱이 이같은 스팸 광고들은 잘못된 정보까지도 여과없이 내보내고 있다. 공인중개사시험의 경우 시행기관이 올해부터 한국토지공사로 바뀌었는데도 주관 기관을 산업인력공단으로 명시하는 등 오류를 범하고 있다. 또한 추가시험에 적용되는 절대평가와 상대평가의 혼합방식 등 새로운 정보도 누락돼 있어 수험생들의 꼼꼼한 주의가 요구된다. 공인중개사시험뿐만 아니라 다른 자격시험 역시 공부를 시작하기에 앞서 해당 부처를 통해 정확한 정보를 숙지하는 것이 허위·과장광고의 피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강혜승 공공정책부 기자 1fineday@seoul.co.kr
  • 儒林(299)-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99)-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그러나 이러한 일화로 인하여 이산해의 가문에서는 아버지 이지번과 작은아버지 이지함이 은둔하였던 단양의 구담을 대대로 기리고 곁들여 두향에게 제사를 지내주었던 것이다. 스승 이퇴계를 존경하여 애인이었던 두향의 제사까지 함께 지내준 이산해의 사제지도(師弟之道). 그러한 사제지도가 없었더라면 오래 전에 두향의 무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표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새겨져 있다. 나는 그 내용을 읽어보았다. “…조선 숙종 때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호조정랑, 의금부부사, 단양군수였던 수촌(水村) 임방(任傍:1640~1724)은 ‘두향묘시(杜香墓詩)’를 남긴다.…” 묘석에 나오는 임방은 송시열의 제자로 의금부도사를 거쳐 대사성·호조판서에 이르렀던 명신인데, 일찍이 단양의 군수로 재직하다가 두향의 무덤 앞에서 추모시를 한수 읊는다. 그 추모시가 임방의 문집 수촌집(水村集)에 실려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로운 무덤 하나 두향이라네. 강 언덕 강선대 그 아래 있네. 어여쁜 이 멋있게 놀던 값으로 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 주었네.(一點孤墳是杜秋 降仙臺下楚江頭 芳魂償得風流價 絶勝眞娘葬虎丘)” 두향에 대해서 노래한 시 중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이 시에서는 두향을 ‘두추(杜秋)’라고 부르고 있다. 두추는 당나라에서 전해 내려오는 최고의 명기. 따라서 임방은 두향을 감히 두추에 비유하여 시를 읊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임방은 두향이 묻힌 이곳을 ‘호구(虎丘)’라고 명명하고 있다. 호구는 오늘날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에 있는 경승지를 말함이다. 하이융산(海湧山)이라고도 하는데,‘오월춘추(吳越春秋)’에 의하면 오나라의 왕 부차가 아버지 합려를 장사지낸 지 3일 후에 백호(白虎)가 나타나 그 무덤을 지켰다는 고사에서 연유하여 호구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언덕 위에는 높이 47.5m의 8각 7층 벽돌건물인 운암사탑(雲岩寺塔)이 있고, 수목이 무성하며 기암괴석이 풍부한 절경이다. 서남쪽 교외 19㎞ 지점에 있는 영암산(靈岩山)에는 월왕 구천이 감금되었다는 굴이 있고, 구천이 복수하기 위해서 부차에게 진상하였던 서시(西施)를 위해 지었다는 별궁터가 남아 있다. 서시는 중국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절세미인. 눈길 한번 돌아보면 성이 기울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가 기울 만큼의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는데, 서시가 몸이 아파 낯을 찌푸리면 나라의 모든 여인들이 이를 흉내내어 낯을 찌푸렸다는 이 전설의 여인은 바로 이 궁터의 금대에서 거문고를 켰던 것이다. 그러나 호구가 유명한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에 육조시대(六朝時代) 때에 이르러 나라의 많은 명기들은 자신이 죽으면 동양의 클레오파트라인 서시처럼 자신을 바로 이 호구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구는 유명한 미인들이나 기생들이 사후에 묻히는 북망산(北邙山)으로 유명했던 곳. 북망산이 낙양(洛陽) 북쪽에 있는 작은 산으로 제왕, 귀인, 명사들의 무덤이 많은 곳이라면 호구는 이처럼 명기들의 공동묘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임방은 이곳을 빗대어 두향이 묻힌 강선대의 무덤가를 호구라고 명명하고 있음인 것이다.
  • 이문구 문학관 세운다

    지난 2003년 타계한 소설가 이문구씨의 2주기를 즈음해 ‘명천(鳴川) 이문구 기념사업회’가 출범, 그의 문학세계를 추모하는 문학관 건립 및 문학제 개최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펼친다. 소설가 김주영씨가 위원장을 맡은 이문구 기념사업회는 22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1960년대 후반부터 문단활동을 한 고인은 문단의 진보와 보수단체에 두루 참여하며 한국문학 발전에 힘썼다.”면서 “명천은 생전에 자신과 관련한 어떤 기념행사도 갖지 말라고 유언했으나,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것은 후배 문인들의 몫”이라며 출범취지를 밝혔다. 기념사업회에는 고은 박경리 박상륭 박완서 백낙청 성기조 송기숙 신경림 신세훈 염무웅 이창동 이청준 최일남 현기영 황석영씨 등 문학인들과 이미경 국회문화관광위원장, 심대평 충남지사, 이시우 보령시장 등 정관계 인사 10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6) 신도안은 대한독립의 소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6) 신도안은 대한독립의 소망

    ●신도안 사람 김씨 김철호(가명) 노인(78세)을 다시 만난 것은 금년 초였다. 옛날 신도안 사람들의 생활이 궁금해 거기 살던 이를 수소문하던 참에 그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1988년 봄, 먼지가 풀썩거리는 시골길을 따라 소형차를 몰고 간 곳이 충남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였다. 나는 종교사회학적 입장에서 신도안을 조사할 계획이었다. 부남리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유독 김씨가 기억에 가장 오래 남았다. 차분하면서도 다부진 말씨도 인상적이었지만 그 집안 내력도 독특했다. 김철호씨는 3대째 신도안에 살고 있는, 이를테면 신도안 토박이였다.19세기 말 그의 조부 김병선이 평안도 정주에서 문전옥답을 다 처분하고 식구를 인솔해 들어온 곳이 바로 부남리였다. 밥술이나 먹던 김씨의 조부가 하루아침에 고향을 등진 것은 ‘정감록’의 예언을 좇아서였다.‘머지않아 난리가 난다. 조선이 망하고 새 왕조가 계룡산에 들어선다.’ 김씨의 조부는 신도안에 들어가면 난리도 피하고 새 세상에서 벼슬도 할 수 있단 말에 귀가 솔깃해 마침내 고향을 등졌다고 했다. 구한말에는 외세의 간섭이 심해지고, 각종 민란과 갑오동학농민운동 등으로 사회가 몹시 혼란했다. 그 시절에 신도안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본격화됐던 것인데 이주민 중엔 수 백 년 동안 지역차별에 희생됐던 서북 출신이 많았다. 본래 살림살이가 유족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정감록’이 처음 출현한 곳도 서북지역이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김철호씨의 조부는 전형적인 초기 이주민이었다. 신도안의 토착인구는 19세기 초까지 수십 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이주민이 점증한 결과,1918년 말 총 584호에 남녀 2667명으로 불어났다. ●신도안의 여러 뜻 ‘정감록’의 신봉자들은 누구나 새 도읍지를 신도안이라 믿었다. 이 태조가 대궐 터를 닦던 곳이고 계룡산에서 가장 빼어난 명당이기 때문에 거기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 신도안이란 지명엔 흥미로운 유래가 있다. 신라 때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계룡산에 왔는데, 그는 신라 사람들이 계룡산의 정상인 천황봉 아래 있는 제자봉(帝字峰)을 제도(帝都)라 일컫는 사실을 알고 격노했다. 엄연히 중국에 황제가 있는데 신라같이 작은 나라에 제도(帝都)란 말은 당치 않으니 당장 바꾸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제도’의 ‘제(帝)’ 자에서 양편 획(劃)을 떼 신(辛)자로 고쳐 ‘신도(辛都)’라 불렀다 한다. 신도안이란 지명을 둘러싼 해석은 제각각이다.1988년 조사 당시 내가 현지서 만난 계통불명의 어느 신종교단체 교주는, 새 세상을 가져다줄 구세주가 도읍할 곳이므로 ‘신도안(新都案)’ 즉, 신도읍 예정지라고 했다. 단군을 모신다는 어느 신종교단체의 사제는 이곳은 신정(神政)이 베풀어질 곳이라 ‘신도안(神都案)’이라 해야 옳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동학 계통의 어느 신종교인은 정감록에 예정된 정씨(鄭氏)의 도읍인 때문에 조선왕조의 도읍은 아니라는 뜻이 있어 ‘新都안’이라고 했다. 그는 ‘안’은 아니라는 부정의 뜻이라고 재삼 강조했다. 김철호 씨를 비롯한 현지 주민들은 ‘새로운 도읍지의 안쪽’ 즉, 신도내(新都內)로 이해했다. 이번에 다시 만났을 때 김씨는 21세기엔 드디어 신도안 시대가 열려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될 거라 했다. 그는 아직도 3대를 품어온 희망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지명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달랐지만 신도안이 장차 일대변화를 불러올 중심지여야 한다는 믿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정감록’의 신봉자들은 세상이 그냥 이대로 지속돼선 안 된다, 뭔가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확신을 가진 듯하다. 따지고 보면 이런 믿음은 기독교와 불교를 비롯한 이른바 모든 고등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정감록’ 신봉자들은 질적 변화의 진원지를 신도안이란 구체적인 장소로 못 박은 점이다. 신도안의 지리적 범위를 묻는 내 질문에 김철호씨는 이렇게 답했다.“계룡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한참 내려오면 암용추와 숫용추 두 폭포가 있어. 바로 그 아래 한 자락이 신도안이지. 충남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 석계리, 용동리, 정장리에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를 더한 5개 마을이 신도안이란 말이여. 일제 때부텀 행정구역으론 그랬어.” 지도를 펴놓고 보니 대략 동서 6㎞, 남북 7㎞ 정도 공간이었다. ●3·1운동으로 조성된 신도안 열풍 1919년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신도안을 향한 이주 물결이 한층 거세졌다. 엄밀한 의미로 독립만세운동은 실패가 아니었다. 그 영향으로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졌고 식민당국도 무단통치를 이른바 ‘문화정책’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수십만 명이 일경의 체포, 구속, 구타로 시달림을 겪은 터라 후유증이 몹시 컸다. 상당수 민중은 일종의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심리적 위안을 받는 일이 시급했다. ‘정감록’이 그 문제를 떠맡았다. 알다시피 정감록은 현재의 평안과 미래의 성공을 기약하는 길지(吉地)를 선사했다. 정감록을 믿었던 민중은 가족을 거느리고 이주대열에 섞였다. 무엇보다도 신도안이 가장 인기 있는 길지였다. 거기서 기도하면 소원성취 할 수 있다, 암수 폭포수가 흐르는 신도안 개울물에 서식하는 올챙이를 복용하면 만병통치 효과가 있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김씨가 부친 김연수에게 들은 바로,1920년쯤 3·4월이면 올챙이를 잡으러 개울가로 몰려드는 인파가 수천 명이나 됐단다. 김씨도 개구쟁이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올챙이를 꽤 많이 잡았다고 한다. 실제로 1919년 이후 4∼5년 동안 신도안의 인구는 급성장했는데 이 점은 통계로도 입증된다.1923년 말 1570호에 7008명으로 5년 전인 1918년에 비해 3배가량 늘어났다. 신도안은 이미 사람이 가득 찼기 때문에 그 주변 마을로 이주민이 몰려들 지경이었다. 그들은 대개 ‘정감록’을 신봉하는 신종교단체들에 속했다. 아예 그런 신종교단체가 수백 명의 신도들을 이끌고 이주해온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금강교가 그랬다.‘금빛 병풍 산기슭에 만 명이 살 수 있다’는 ‘정감록’의 구절을 근거로 금강교도들은 신도안에 근접한 충남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 터를 잡았다. 하루아침에 100호도 넘는 큰 마을이 들어섰다. ●신도안에서도 꺼지지 않는 대한독립의 꿈 나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점이지만, 신도안 이주는 독립에 대한 열망과 맞물려 있었다. 이미 1910년대 중반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증산교의 일파인 음치교와 태을교 측은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돌아간다. 정진인이 한국 출신 장교를 거느리고 독일편에서 싸우기 때문이다. 세계전쟁이 끝나면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나 인류가 모두 사멸하게 돼 있으나 음치교나 태을교를 믿는 신도들만은 재난을 면한다. 어쨌거나 세계전쟁을 마무리지은 정진인은 대한독립을 이룬 다음 계룡산에 도읍한다. 이때가 되면 음치교나 태을교 신도들은 신앙심과 포교성적에 따라 관직을 상으로 받는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흥미롭게도 그들 신종교단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점쳤고, 그 이유를 정진인에게서 찾았다. 당시 독일은 일본과 적대관계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심정적으로나마 독일편을 들었다고 풀이된다. 음치교나 태을교도 그랬지만 신종교의 대부분은 정감록을 믿었다. 그들은 진인왕의 등극을 기다렸는데 그것은 나라의 독립을 뜻하기도 했다. 진인왕은 어떤 경우에도 일본의 꼭두각시일 수가 없었다. 여러모로 허황된 예언이었지만 신종교 단체가 퍼뜨린 유언비어에는 대체로 독립을 열망하는 민중의 마음이 얼마간 담겨 있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뒤부터 민중은 국가의 독립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일단 나라를 되찾아야 개인의 평안과 출세도 가능하다는 인식이었다. 식민지 당국은 이들 ‘위험한’ 신종교단체를 탄압했다. 일제는 그런 단체들에게 사기, 폭력, 금품 갈취, 음란행위 따위의 죄목을 씌워 마음대로 탄압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들 단체의 특징이었던 민족주의 성향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빌라도 총독이 신종교 지도자 예수를 처형할 때 파렴치범과 나란히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도 그 비슷한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1920년대에도 신도안 이주를 부추기는 유언비어들이 계속해서 나돌았다.1921년쯤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에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유행했다.‘정감록’에 왜왕(倭王) 3년을 지내고 가도(假都) 3년이 되면 참된 정씨 왕이 나타나 계룡산 신도에 나라를 세운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왜왕 3년이란 총독 삼대(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이토 마코토)요, 가도 3년은 상해임시정부 3년이다. 요컨대 1921년쯤 계룡산 신도안에 임시정부가 도읍을 세운다는 예언이었는데, 그 말이 퍼지자 신도안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1921년 한 해 동안 모두 610호에 2443명이 신도안에 정착했다. 김철호씨는 고향마을 선배 중에도 그 때 이주해온 집안이 적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경기도 교하 지방에도 조선독립에 관한 유언비어가 널리 퍼졌다. 계룡산 바위틈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었다.‘음력 2월15일은 독립을 외치는 날이다.10번을 외치면 일가를 보존하게 되며,20번을 외치면 독립을 회복한다. 이 취지를 쓴 종이 두 장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자기 한 몸이 보존되고,8장을 전하면 충신 효자가 된다. 만일 이를 남에게 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했다. 주술적 효과를 가진 종이 쪽지가 계룡산 바위틈에서 발견됐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것은 어느덧 계룡산은 독립을 실현해 줄 희망의 등잔이요, 신도안은 그 불꽃이 타오를 심지가 됐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어느덧 신도안은 민족의 성지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신도안의 명물 칠성교의 ‘지푸라기 북’ 1920년대 민중의 관심사는 신도안이 과연 언제 도읍이 되는가, 달리 말해 나라가 독립될 시기를 점쳐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24년 신도안 사람들은 지푸라기 북(草鼓) 하나를 만들었다. 그 북은 김철호씨의 고향 부남리의 칠성각에 안치되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 마을에 있던 칠성교란 신종교의 보물이었다. 부남리에 관한 일이라 나는 김씨에게 그 북을 아는지 물어보았다. 뜻밖에도 김씨의 부친과 평안도 박천에서 내려온 부친의 친구 분이 모두 칠성교를 믿었다고 한다. 김씨 역시 어린 시절 부모의 손에 이끌려 칠성교당에 다녔단다. 1928년 그 북을 쳐 만약 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한국 종교계의 우두머리로 삼는다는 소문이 원근에 파다했다. 이 소문을 듣고 각지에서 몰려든 구경꾼만 해도 무려 2만 5000명이었다. 당황한 식민지 경찰은 서둘러 지푸라기 북을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민중의 아쉬움은 수그러지지 않아 2년 뒤 북을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지푸라기 북이 소리를 낼 리는 없다. 하지만 ‘정감록’ 속의 정진인이 나온다면 그 정도 기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게 민중의 믿음이었다. 1989년 김씨를 포함한 신도안 주민들은 신도안에서 쫓겨났다. 이른바 6·20 사업으로 신도안 일대에 군사시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제5공화국의 시퍼런 서슬에 누구도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알고 보면 신도안의 ‘정감록’ 신봉자들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신앙이 약화되었다. 상당수는 생계의 어려움과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로 떠나갔다. 김씨는 고집스럽게 신도안에 눌러앉았지만 그의 두 자녀만 해도 이미 오래 전에 서울로 나갔다고 한다. 지금은 지푸라기도 북도 없고,‘정감록’의 예언에 목을 매는 이들도 많지 않지만 때로 간절한 소망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다. 팔순을 바라보는 김철호 씨가 아직 신도안 시대를 꿈꾼다 해도 그 허망함을 탓하기만 해야할지 모르겠다.(푸른역사연구소장)
  • [금융대전 라이벌] ⑤·끝 갈수록 커지는 여성파워

    은행권에도 여성 파워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부행장에서 지점장,PB(프라이빗뱅커)까지 전문성을 갖춘 여성 뱅커들이 분야마다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국내 은행들을 외국계 은행들과 비교해 볼 때 책임자급 관리직 여성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고 지점 텔러 등 사무직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최근 몇년간 신입행원 선발에서 여성 고급인력이 많게는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늘어난 만큼 여성 금융전문가에 대한 체계적인 육성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女뱅커 체계적 육성을 국내 은행에서 여성 임원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지만 실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지난해 말 국민은행 강정원 행장이 임원진을 새로 짜면서 영입한 구안숙(50) PB·자산운용그룹 부행장과 제일은행 최초의 여성 임원인 김선주(52) 운영지원단 상무가 대표적이다. 구 부행장은 씨티은행 소매금융 이사와 교보생명 자금운용 상무, 우리은행 PB사업단장 등을 거쳤다. 주력사업인 PB영업을 맡아 특유의 섬세함과 리더십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제일은행 김 상무는 은행 경력 35년째인 ‘왕언니’ 같은 존재. 치밀한 업무처리 능력을 바탕으로 후선지원업무를 혁신했다는 평가다. 은행 여성 파워의 경쟁력은 친밀한 대고객 접촉을 통한 영업력에 있다. 여성 본부장·지점장의 대다수가 최고 수준의 마케팅·영업 노하우를 갖췄다. 우리은행 황의선(54) 송파영업본부장은 지점만 26곳을 돌며 발로 뛰어온 영업 최고봉이다.‘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팀워크를 끌어내 학동역지점장 시절에는 방카슈랑스 판매 1위를 달성했다. 국민은행 신대옥(54) 강남지역본부장은 ‘한번 고객은 평생고객’이라는 신념으로 지난 10여년간 업적평가에서 최상위를 차지해오고 있다. 여성 지점장 및 PB인력의 경쟁도 뜨겁다. 우리은행 김경옥(50) 서빙고동지점장은 지점을 맡은 지 5개월 만에 영업이익 및 수신증가율 2위, 방카슈랑스 증가율 1위 점포로 변모시켰다. 지난해에는 영업이익과 수신 증가율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조흥은행 김천옥(47) 일원역지점장은 ‘감성리더십’을 통한 자율적인 점포운영을 통해 4년 연속 평가 1등급을 달성한 입지전적인 인물. 꾸준한 자기계발로 귀감이 된다는 평가다. 하나은행 장정옥(40) 이매동지점장은 하나은행 최초의 PB출신 여성 지점장으로,2년간 지점 평가에서 최상위권을 기록했다. 제일은행 이애리(49) 트윈타워지점장은 고객별 섬세한 관리를 통한 연결마케팅을 통해 매년 지점 실적을 100% 이상씩 키웠다. 한국씨티은행 이종숙 중동지점장은 다년간의 PB 경력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금융종합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특히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한 전문적인 자산관리가 강점이다. 노차영(45) 서울지점장은 기업·소비자금융을 두루 거친 전문가. 방배지점장 시절 수신고와 고객숫자를 2∼3배씩 늘리는 등 탁월한 영업력을 인정받고 있다. ●국내최초 유언상속서비스 도입도 신한은행 최초의 여성PB팀장인 왕미화(41) 강남PB센터 팀장은 PB영업의 새바람을 몰고 온 장본인이다. 국내 최초로 유언상속 서비스를 실시했으며, 부동산 중개거래를 처음으로 성공시켰다. 조흥은행 김재성(41) 개포지점 차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스타 세일즈우먼’이다. 고객 모두가 ‘왕’으로 느끼도록 다양한 세일즈 기법을 개발, 연간 800억원 수신에 200억원의 펀드 영업실적을 올렸다. 외환은행 오정선 PB팀장은 다수의 금융소비자 교육·상담·저술활동을 통해 최고의 재테크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남극일기/박미경 엮음

    1911년 남극 대륙 위에는 두 남자가 있었다. 노르웨이와 영국으로 국적은 달랐지만 목표는 똑같은 남극점 최초정복이었다. 그러나 준비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었다. 노르웨이인은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에스키모들에게서 배운 방법을 썼다. 운송수단으로 개썰매를 선택했다. 탐험대원들도 당연히 개썰매나 스키를 잘 아는 노련한 전문가들로 구성했다. 최단 코스를 선택한 뒤 중간중간 설치한 기지에는 충분한 양의 보급품을 쌓아뒀다. 그래야 기지에서 기지로 이동할 때 지고 가야 할 짐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영국인보다 남극에 늦게 왔지만 한달여 빠른 12월 14일 남극점에 도착, 영웅이 됐다. ●준비 철저했던 아문센 먼저 남극에 반면 영국인에게 사전답사란 없었다. 대원 중에는 기상·지질·물리학자들이 있었다. 또 개썰매 대신 말과 모터엔진 썰매를 택했다. 썰매개보다 월등한 힘을 믿었기에 보급기지는 부실했다. 그러나 강추위에 말은 얼어죽고 모터엔진은 고장났다. 겨우 다다른 남극점에는 이미 노르웨이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귀환길에 대원들은 자신의 장비 뿐 아니라 각종 수집품까지 들쳐메고 눈밭을 달려야 했다. 이 팀은 8개월 뒤에 얼어죽은 채 발견됐다. 노르웨이인은 남극점을 정복한 아문센, 영국인은 로버트 팰컨 스콧이다. 아문센처럼 철저한 준비 끝에 오직 남극점을 향해 달리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비록 대원들의 몰사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런 저런 기상·지질조사까지 병행했던 스콧의 귀족적 고상함이 맞을까. 평가는 엇갈릴 수밖에 없다. ●스콧 일행 역경 맞닥트리며 탐험 ‘남극일기’(박미경 엮음, 세상을 여는 창 펴냄)는 스콧의 귀족적 취향에 찬성표를 던지고 있는 책이다.1911년 1월 4일부터 다음해 3월 29일까지 기록된 스콧의 일기와 스콧이 죽기 전에 남긴 유언편지들이 책의 뼈대다. 일기라 그런지 아문센과의 경쟁과 같은 그런 배경 지식을 따져가며 읽기보다는 역경에 맞닥트린 인간의 고뇌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 자칫 앞뒤 맥락을 잘 모를 수 있다는 일기의 단점은 편역자의 설명과 다른 대원의 기록이 보충자료 형식으로 간간이 섞여 있어 그다지 느낄 수 없다. 책 말미에 붙어 있는 탐험실패 이유를 먼저 읽어보는 것도 이해에 도움된다. 그러나 19세기말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들의 유행이었던 박물관이나 동물원이 일종의 사치스러운 약탈품의 전시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영국과 노르웨이의 민족주의 기싸움 비슷한 이 얘기를 우리가 왜 가까이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마침 개봉을 앞둔 송강호·유지태 주연의 영화 ‘남극일기’의 스토리가 80년전 남극에서 사망한 영국 탐험대와 관련 있다 하니 이 책의 포커스가 무엇인지는 짐작된다.1만2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문학이 머문 풍경] 소설가 이문구의 고향 ‘보령’

    [문학이 머문 풍경] 소설가 이문구의 고향 ‘보령’

    “바깥 마실꾼을 안이서 워치기 알유.내외허는 댁인디.” 이문구(1941∼2003)의 대표적 소설 ‘관촌수필’ 가운데 ‘행운유수(行雲流水)’편에서 옹점이가 가택수색을 나온 순경에게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말이다. 김원일이 경상도 말을,조정래가 전라도 말을 빛냈다면 이문구는 충청도 말을 가장 빛낸 작가다.‘관촌(冠村)’이란 곳은 충남 보령시 대관동에 있는 자연부락으로 이문구의 고향이다. ●우울한 유년시절 그의 고향에는 친구들이 거의 없다.한두사람 있었지만 모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생전에 작가와 자주 어울렸던 한국문인협회 보령시지부장 문상재(50)씨는 “이 선생이 살아계실 적에 ‘어린 시절이 우울해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책이 유일한 친구였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작가의 부친은 남로당 간부였다.문씨와 가까워진 것도 동병상련의 내력이 있어서다.문씨는 “1989년쯤 선생과 우연히 만나 내 외삼촌 얘기를 하는데 아무 말도 하지않고 듣고만 있더라.”면서 “나중에 선생이 ‘내 아버지 얘기여서 가슴이 철렁했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작가의 부친은 한국전쟁 즈음 보령 일대를 책임진 남로당 지구당위원장,문씨의 외삼촌은 부위원장이었다고 했다. 위원장이 되기 전엔 사법서사를 했다고 한다.문씨는 “선생은 엄격하고 무서운 아버지보다 할아버지를 많이 따랐다.”고 작가로부터 들은 얘기를 전해줬다.이 얘기는 작가의 유년시절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관촌수필’에 잘 묘사돼 있다.8개 단편으로 된 이 연작소설은 ‘일락서산(日落西山)’이란 첫 단편에서 할아버지 얘기를 한다. 한국전쟁 때 작가는 아버지와 형 둘을 잃었다.중학교 때 고향을 떠난 이문구는 오래동안 고향을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문씨와 만난 것은 간이 좋지 않아 3년간 고향에 내려와 쉬던 때였다.그때 보령시 청라면 청라저수지 부근에 허름한 기와집을 한채 샀다. 작가는 간간이 서울에서 내려와 1주일 이상 이 집에 머물며 ‘매월당 김시습’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등을 썼다.문씨는 “서울에서 문인단체 활동을 왕성히 하다 보니 소설을 쓸 시간이 별로 없었을 것”이라며 “내려올 때는 타자기를 한대 갖고 왔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겉은 무뚝뚝…속은 따뜻 문씨에게 “살기 위해 김동리 문하생이 됐다.”고 했다는 작가 이문구.반공이데올로기시대에 이른바 문단의 대표적 우익인사로 김동리가 꼽힌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내성적이라고 할 만큼 무뚝뚝했지만 속은 무척 따뜻했다.”고 이문구를 평했다.보령에 있는 집필실에 혼자 머물면서 조그만 텃밭에 심은 배추와 열무 등을 속아서 데친 뒤 서울로 가져가 식구들과 함께 먹었다. 작가의 미망인 임경애씨는 “무척 자상했다.”고 말했다.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줬고,엄격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자신의 자식은 자유롭게 키웠다 한다.가족간의 문제도 처자식 의견을 모두 수렴해 풀어가는 스타일이었다 한다. 한해에 1∼2번 대천에 내려오던 이문구는 부인과 동행한 날에는 문씨 부부와 인근 성주산 냇가로 가 다슬기를 잡으며 동심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대천에서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허름한 집필실과 옛 생가 앞에 있는 안내문뿐이다.생가 바로 앞까지 펼쳐졌던 갯벌은 30여년 제방이 쌓여져 대부분 논밭으로 변했다. 최근 문씨와 권영민 서울대 교수,소설가 김주영 등이 생가 터를 매입,‘이문구문학관’을 세우기 위한 추진위를 구성하려고 적극 활동하고 있다. ●만인이 다 친구다 “글 쓰는 이는 어디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평소 말했고,김시습을 쓸 때 ‘네가 뭘 안다고‘ 호통치는 것 같아 부여 무량사까지 가서도 그곳에 있는 김시습의 영정을 쳐다 보지 못했을 정도로 글쓰기를 진정 외경했던 작가였다. 우리말 특유의 가락을 잘 살려낸 유장한 문장으로 만연체,구어체,토속어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기도 했다.김동리는 ‘현대문학’에 그를 추천하면서 “한국문단은 가장 이채로운 스타일리스트를 얻게 됐다.”고 했다. 그는 또 한국문인협회 이사,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등 보수와 진보 문인단체 모두에서 활동을 했고,모두와 어울리며 모든 구듭을 친 문단의 일꾼이었다. 위암으로 작고한 그의 장례도 이례적으로 전 문학계의 합동장으로 치러졌다.화장 후 그의 유골은 유언대로 어릴적 놀던 생가 뒷동산 소나무밭에 뿌려졌다.한국전쟁 때 숨진 아버지와 형들의 묘가 없는 것도 화장을 한 이유일 게라고 주변 사람들은 추측했다. 보령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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