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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흉흉한 ‘e세상’…악성 유언비어 유포

    일부 네티즌들이 북핵 실험에 따른 불안심리를 증폭시키는 근거없는 유언비어를 유포해 지탄을 받고 있다.9일 오전 북한이 핵 실험을 강행했다는 보도가 나간 이후 인터넷 관련 기사에는 수천건의 댓글이 달렸다. 그러나 일부 네티즌들은 신문기사 형식을 빌리거나 북한·군사·핵 관련 전문용어들을 사용해 가며 날조된 얘기들을 퍼뜨렸다. 인터넷 포털 네이버에서 아이디 ‘tl○○○○’를 쓰는 사람은 ‘(속보)미국, 북한 선제공격 결정’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이 글은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모든 문장을 신문기사처럼 작성했으며 관련 내용들이 일본에서 먼저 보도됐다는 등의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근거로 제시한 일본어 기사는 북핵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아이디 ‘ku○○○’는 “북한의 핵 공격에 대비해 예비군 동원령이 떨어졌다. 지금 해당 부대로 가고 있으니 다들 확인해 보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퍼뜨렸다. 경기도 포천·의정부, 강원도 고성·원주 등 군 부대 밀집지역이나 휴전선 인접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면서 올린 20여개의 댓글도 네티즌들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이들은 “지금 탱크 수십대를 앞세운 군인들이 도로를 통해 휴전선으로 이동하고 있다.”“공격용 헬리콥터와 군인들이 운동장에 집결하고 있다.”고 허튼소리를 해댔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부정적인 정보는 긍정적인 정보보다 확산 속도가 빠르고, 사람들은 공포 상황에서 정보를 공유하려는 속성이 있다.”면서 “이렇게 확산되는 유언비어는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에게는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성인? 평생 친구가족을 위해 몸바치는 사내

    성인? 평생 친구가족을 위해 몸바치는 사내

    “보통 사람이 어떻게 친구 가족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시킬 수 있겠습니까? ‘성인(聖人)이나 할 수 있는 일이죠.” 중국 대륙에 한 남성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친구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 동남부 푸젠(福建)성 사오우(邵武)시에 살고 있는 한 60대 남성은 자신의 가족을 돌봐달라는 친구의 유언을 좇아 지금까지 무려 39년 동안이나 친구 가족들을 자신의 몸보다 더 훌륭하게 돌보고 있어 ‘살아 있는 부처’로 불리고 있다고 동남쾌보(東南快報)가 최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화제의 주인공은 올해 69세의 주방웨(朱邦月)씨.가족을 돌봐달라는 친구의 유언을 좇아 지금까지 39년째 그의 가족들을 돌봐주고 있다.그것도 20년전 교통 사고를 당해 왼쪽 다리를 잃은 상황에서…. 주씨가 친구 가족을 떠맡은 것은 지난 1967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주씨는 당시 사오무 탄광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구웨이자오(顧偉照)씨와 아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샤먼(厦門)대학 상대를 졸업한 인텔리 출신인 구씨는 66년부터 시작된 문화혁명으로 샤팡(下放·중국이 당·정·군 간부를 비롯해 지식인들의 정신을 개조하기 위해 농촌이나 공장으로 내려보내는 일하게 한 것)당해 이곳에서 탄광의 채탄부로 일을 하고 있었다.심장병을 앓고 있던 그는 이곳의 채탄부 일이 너무나 힘에 겨웠다. 그러던중 67년 5월 어느날 저녁,구씨는 갑자기 심장 발작을 일으켜 열명길에 올랐다.임종하기 직전 그는 주씨의 손을 잡으며 남아 있는 아내 주링메이(朱玲妹)씨와 4살된 큰아들 구중화(顧中華)군,그리고 5개월된 유복자(나중에 어머니의 성을 따 주샤오화라고 이름 지음)를 돌봐달라고 유언했다. 주씨는 이때부터 친구의 가족을 돌보기 시작했다.특히 이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결혼도 하지 않았다.친구와의 약속을 지킨다는 마음에서 애옥살이지만 힘든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의 앞날에는 또다른 어려움이 닥쳤다.이들 모자가 모두 장애인인 탓에 성인이 됐지만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어 돈을 벌만한 경제력이 거의 없는 까닭이다. 게다가 주씨에게도 큰 불행마져 닥쳤다.86년 5월 16일 근무를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중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왼쪽 다리를 잃어버렸다.이 때문에 의족을 한 그는 현재 칠순을 바라보고 있지만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병든 이들 모자가 오로지 주씨만 바라보고 있다. 그나마 요즘에는 조그마한 희망이 보인다.유복자였던 샤오화씨가 샤면대학 회계학과를 졸업한 뒤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정도로 정상인 못지 않게 훌륭하게 생활하고 있는 덕분이다.특히 그는 미니 홈피를 만들어 눈물겨운 삶을 소설로 풀어 쓰는 등 삶을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벌써 40여편이 올려져 있다. 샤오화씨가 올린 40여편의 소설은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게 씌어진 것이다.그가 왼손 무명지만으로 한자 한자 컴퓨터에 쳤다.샤오화씨는 이 소설에서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 “하느님이 나를 잔인하게 웃기고 있다.나를 유복자로 태어나게 했으며,어머니와 형,나 세사람 모두 장애인으로 만들어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그렇지만 나는 굳게 믿고 있다.하느님이 나에게 사랑하는 미래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깔깔깔]

    ●술꾼의 유언 술이라면 죽고 못 사는 두 친구가 있었다. 이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항상 둘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잔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 친구가 술을 먹다가 쓰러져 병원에 갔다.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죽기 직전이 되자 술꾼인 다른 친구를 불러 유언을 했다. “여보게 친구, 내가 죽으면 내 무덤에 위스키 한 병 뿌려주게나.” 친구의 유언을 듣고는 한참을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래, 뿌려줌세…. 그런데 내 콩팥으로 한번 거르고 난 것도 괜찮지?” ●구원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새 신자가 자기를 인도한 집사님에게 물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왕 인간에게 ‘구원’을 주실 바에는 일원 더 보태서 십원을 주실 것이지 왜 하필이면 구원을 주신 거죠?” 그러자 그 집사님이 대답했다.“그건 하나님께서 미리 십일조로 일원을 떼고 주셨기 때문입니다!”
  • [이 한권의 책] 세상을 바꾼 법정/마이클 리프·미첼 콜드웰 지음

    1955년 미국에서 매카시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 존 헨리 폴크는 라디오 DJ로서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송연예계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블랙리스트’의 존재에 격분했고, 이에 대항하다가 그 자신도 모든 것을 잃게 된다. 폴크는 변호사를 구해 소송에 나섰고,6년간의 재판 끝에 결국 승소를 이끌어냈다. 재판은 공판중심주의에 의해 이루어졌고, 최종 판결은 배심원이 내렸다. 당시 이성이 마비된 사회분위기 속에서 이같은 판결이 내려질 수 있었던 것은 공판중심주의란 틀에서 변호인이 엄청난 세력을 등에 업은 원고측과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논쟁을 벌일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배심원들이 양심과 상식에 의거, 판결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꾼 법정’(마이클 리프·미첼 콜드웰 지음, 금태섭 옮김, 궁리 펴냄)은 미국사회에서 공판 중심주의와 배심제 하에서 이루어진 판결이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지 잘 보여주는 책이다.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둘러싼 안락사 논쟁, 매카시 광풍속의 언론자유 투쟁, 여성의 투표권 행사를 가져온 사건 등 세상에 변화를 가져온 8가지 판결들을 선별해서 그 최종 변론을 모아놓았다. 역사적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 시초는 대부분 작고 일상적 사건이었다.1872년 여성운동가 수전 B 앤서니는 선거에서 투표했다는 죄로 경찰에 체포됐다.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지 않던 당시, 수전은 여성 참정권을 부여하는 헌법개정안을 위해 싸웠고, 이는 재판으로 이어졌다. 앤서니 변호인은 법정에서 ‘피고인의 투표행위가 위법하다는 유일한 이유는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참정권을 빼앗긴 사람은 노예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며 원고측과 뜨거운 공방을 벌였다. 수전은 결국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미국사회에서 여성의 권리와 지위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재판 50년 뒤 비로소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1975년 벌어진 카렌 앤 퀸란의 안락사 논쟁은 지금도 유사한 상황에서 길잡이로 작용하는 사건이다. 친구 생일파티에 갔다가 쓰러져 식물인간이 된 카렌에 대해 가족은 ‘치료법을 주지 못하고 깨어날 가망성이 없는 사람의 생명을 억지로 연장시키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산소호흡기 떼기를 거부하는 주치의측과 법정 공방을 벌여 승소했다. 이 판결 이후 안락사를 희망하는 생전 유언과 생명유지장치를 거부하는 사전 지시가 가능해졌으며, 병원과 의료시설에 윤리위원회가 설치됐다. 책은 이밖에도 19세기 스페인 선박에서 선상반란을 일으킨 뒤 미국땅을 밟은 노예들을 둘러싼 재판에서 이들을 위한 변호인으로 나선 존 퀸시 애덤스 전 대통령이 탁월한 변론으로 승소를 이끌어내는 이야기,18세기 초 영국 식민지 시절 뉴욕에서 잡지를 발간해 무능력한 총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선 사람의 변호인으로 나서 무죄판결을 받아낸 해밀턴의 빼어난 변론 등이 소개된다. 현재 우리 법조계도 공판중심주의와 배심제가 화두다. 사법의 민주화로 일컬어지는 이러한 공개된 법정 중심의 재판이 이룩되면 전관예우, 유전무죄·무전유죄 같은 논란도 많이 줄어들지 모른다. 이 책이 보여주는 배심제에서 이루어진 판결과 변론 중심의 생생한 재판과정이 혁신적인 변화가 요구되는 우리 사법체계에도 중요한 시금석이 되지 않을까.2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책꽂이]

    ●새로운 한국식물도감(이영노 지음, 교학사 펴냄) 전세계에서 나는 식물은 대략 20여만종. 그 중 한반도에서 나는 관속식물은 4000여종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는 종자식물과 귀화식물, 양치식물, 원예식물 등 한반도에 야생하는 식물들이 망라됐다. 식물용어는 되도록 쉽게 풀어 썼으며 사진은 식물의 특징적인 부분을 보여주는 데 역점을 뒀다. 식물이름이 흉한 느낌을 주는 개불알꽃은 복주머니란으로, 풀솜대와 석산은 각각 지장보살(전남 구례의 지방명), 꽃무릇(전남 백양산 근처의 지방명)등 정다운 지방 특유의 이름으로 부르는 등 새로운 감각을 살렸다. 전2권. 한 세트 30만원.●현대 고고학의 이해(콜린 렌프류·폴 반 지음, 이희준 옮김, 사회평론 펴냄) ‘삽의 증언’이라 불리는 고고학의 세계를 종합적으로 다룬 현대고고학 개설서.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과 열형광연대측정법,GIS와 DNA연구기법 등 과학적 기법에 대한 설명과 함께 과정주의고고학이라 불리는 ‘신고고학’, 인지고고학, 공공고고학 등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고고학에 관한 최신 논의들이 실렸다.4만원.●역사를 움직인 157인의 마지막 한마디, 유언(한스 할터 지음, 한윤진 옮김, 말글빛냄 펴냄) 성인들의 유언은 감동스러운 데가 있다. 공자는 “지는 꽃잎처럼 현자는 그렇게 가는 구나.”라고 끝맺었다. 폭군 네로는 “한 예술가가 가고 세계는 혼란스러워지는구나.”라는 말을 남겼다. 칭기즈칸은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잠을 잤구나.”라고 말한 뒤 저세상으로 갔고, 대영제국의 초석을 마련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아주 짧은 한순간을 위한 것이었어.”라며 자신을 뒤돌아봤다.“다시 볼게요. 다시 보자구요.”라는 한없이 슬픈 유언은 마릴린 먼로의 것이다. 역사를 움직인 인물들의 유언 백과사전.1만 8500원.●도산 안창호 평전(이태복 지음, 동녘 펴냄)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의 삶을 조명. 도산은 1898년 평양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18개 쾌재와 18개 불쾌로 탐관오리들의 학정을 규탄하고 외세의 침탈에 대응할 것을 호소하면서 이름을 알렸다.1907년에 신민회를,1913년에 흥사단을 조직했으며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직을 맡았다. 일부에선 도산을 단순한 인격수양파, 무장투쟁론에 반대한 준비론자, 조선혁명이 아닌 개량주의자로 규정하지만 도산이야말로 현실적인 조건에 기반한 과학적이고 구체화된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라는 주장이 담겼다.1만 5000원. ●로맹가리(도미니크 보나 지음, 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펴냄) 유대계 러시아인으로 태어나 프랑스인으로 살다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이자 외교관, 전쟁영웅이었던 로맹가리. 참전중에 쓴 첫 소설 ‘유럽의 교육’으로 비평가상을 받으며 명성을 얻은 그는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 상을 받은 데 이어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소설 ‘자기 앞의 생’으로 다시 한번 공쿠르 상을 수상, 프랑스 역사상 유일하게 공쿠르 상을 두 번 받은 작가로 기록됐다. 이 전기에는 24살 연하 진 시버그와의 운명적 사랑 등 일화도 실렸다.1만 8000원.
  • 儒林(693)-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9)

    儒林(693)-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9)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9) 그 당시 과거에 급제하면 대체로 일생동안 편히 먹고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자는 학문에 전념한다.19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치기는 했지만 약 9년 동안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한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학문에 대한 집념이 주자를 대학자로 만들었다. 그는 주로 도교사원을 관리하는 사록(祠祿)을 선호하였다. 이 자리는 명예직이기 때문에 자기 시간을 학문에 할애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정신을 딴 데 팔지 아니하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주자가 학문에 눈을 뜬 계기는 좋은 스승을 만난 것. 주자는 평생 동안 학문적 완성을 이루는 여건으로 좋은 스승과 친구, 그리고 제자들을 만났었던 행운아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난 것은 결정적인 계기였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호적계, 유백수 그리고 유병산의 스승을 만나서 가르침을 받았으나 그 가르침은 불교와 노자에 관한 내용에 불과하였었다. 따라서 주자는 15세의 어린나이 때부터 불교의 선학에 심취하여 당대 최고의 선벌이었던 도겸(道謙)스님으로부터 선문답을 주고받은 후 ‘주자의 선은 소소영명(昭昭靈明)하다.’라고 인증을 받을 만큼 선의 천재였던 것이다. 이러한 주자의 선학에 대한 관심은 24세 때 이연평을 만나 가르침을 받을 때까지 거의 10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었다. 이연평은 이통(李)이라고 불리는 당대의 노유학자로 주자보다 27년이나 연상이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격렬한 사단칠정 논변을 벌인 퇴계와 고봉의 나이차이도 26년이었으니, 이통과 주자의 만남은 이퇴계와 고봉의 만남을 연상시킬 정도로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연평은 송대 유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정호(程顥)의 제자 양시(楊時)로부터 유학을 배운 나종언(羅從彦)에게서 양시계열의 도남학(道南學) 학풍을 이어받은 거유였다. 주자와 이연평의 만남이 중요한 이유로는 바로 그가 북송시대 이래 도학이란 이름으로만 전해오던 신유학의 내밀한 전통이 깃든 깊은 고뇌와 에센스를 청년주자에게 그대로 이식시켜 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4세 때 이연평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주자는 ‘인간이 아집으로부터 벗어난다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완성자로서 부처가 될 수 있고, 인간이 아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잠재성이 오직 불성(佛性)뿐’이라는 불교철학에 깊이 빠져있었으며, 이 불성을 깨닫는 법은 오직 선이라는 불교적 방법에 집착하고 있었던 불자였다. 주자는 자신의 참스승이었던 이연평과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을 ‘주자어류(朱子語類)’를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 뒤에 동안(同安)에 부임했을 때 내 나이 24.5살이었다. 처음 연평선생을 뵙고 선(禪)에 대해서 말씀드렸다. 그러나 연평선생은 다만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 儒林(692)-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8)

    儒林(692)-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8)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8) 그러나 송재공은 퇴계의 밝은 얼굴에서 뭔가 한소식 하였음을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그래도 뭔가 얻은 것이 있을 터인데.” 그러자 퇴계는 대답하였다. “아직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사오나 모든 사물에서 마땅히 그래야할 시(是)를 이(理)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퇴계의 이 대답에 평소엔 조금도 칭찬하거나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엄격한 송재공도 크게 기뻐하면서 ‘너의 학문은 이로서 문리(文理)를 얻은 것’이라고 크게 평가하였다고 ‘퇴계언행록’은 기록하고 있는데, 어쨌든 12살의 퇴계가 ‘이를 모든 사물이 마땅히 그려야 할 시’로 깨달은 것은 성리학에 대해 초견성을 한 것이며, 평생을 두고 거경궁리해야 할 화두를 점지받은 것이었다. 주자가 죽은 것은 1200년, 그로부터 정확히 300년 후인 1501년 12월, 퇴계가 태어났으니, 두 사람은 비록 300년의 시간과 공간의 차이는 있지만 ‘저 높은 하늘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서부터 깨달은 주자의 ‘이’와 ‘마땅히 그래야할 시를 이’로 초견성한 퇴계의 ‘이’라는 공통된 바톤(baton)을 들고 수천 년의 유가적 계주에서 뜀박질을 하였던 위대한 사상가들이었던 것이다. 퇴계가 그 릴레이 계주에서 돋보이는 것은 그가 주자로부터 바톤 터치하여 유림의 숲이 끝나는 골인지점인 종착점까지 뛰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며, 퇴계가 유림의 완성자라고 불린 것은 결승점을 통과하여 테이프를 끊은 실질적인 유가의 마지막 주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주자는 1546년, 아버지의 친구였던 유면지(劉勉之)의 딸과 16살의 어린 나이로 결혼을 한다. 주자는 부인과의 사이에 세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을 두었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자식들을 둘만큼 부부의 가정생활은 화목했지만 그의 부인은 주자보다 일찍 죽는다. 주자는 부인이 병들자 매우 비통해 하였다고 한다. 아내가 죽자 그는 손수 묘자리를 쓴다. 흔히 주자를 신안(新安) 주씨라고 하는데, 신안은 주자의 조상이 살던 무원( 源:지금의 안후이성)의 옛 지명이다. 우리나라의 신안 주씨는 주자의 증손 잠(潛)이 고려 때 건너와서 성씨를 이룬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주자의 나이 14살 되던 해 아버지 주송은 세상을 떠난다. 주송은 세상을 떠나면서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 등 세 사람의 스승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라는 유언을 남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주자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스승 유병산이 머무르고 있는 오부리(五夫里)에 집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50년간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주자는 유백수의 딸을 아내로 삼아 가정을 이루는 한편 학문에 몰두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19세의 나이로 주자는 과거에 급제한다. 278등으로 그리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던 조숙한 수재였다.
  • 날인없는 ‘123억 유언장’ 연세대 패소 확정

    날인없는 ‘123억 유언장’ 연세대 패소 확정

    123억여원의 유산을 두고 유족과 연세대가 3년 가까이 끌어온 ‘날인 없는 유언장’ 소송에서 연세대가 패소했다. 대법원 2부(주심 박일환 대법관)는 사회사업가 고 김운초씨의 동생(72) 등 유족이 ‘날인 없는 유언장은 무효’라며 우리은행을 상대로 김씨가 연세대 앞으로 남긴 예금을 돌려달라며 낸 소송에서 독립당사자로 참가한 연세대의 상고를 기각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민법에서 유언의 방식을 엄격하게 규정한 것은 유언자의 진의를 명확히 하고 법적 분쟁과 혼란을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법정 요건과 방식에 어긋난 유언은 유언자의 진정한 의사와 합치하더라도 무효”라고 판결했다. 김씨는 숨지기 전에 “전 재산을 연세대에 기부한다.”는 자필 유언장과 함께 예금과 채권 등 123억여원을 우리은행에 맡겼다. 하지만 유언장에는 날인이나 손도장이 없었다. 유족들은 예금 등을 돌려달라면서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김씨의 유산 중 20억∼30억원대의 부동산과 현금 7억원은 연세대가 갖고 나머지 116억원은 유족이 상속받도록 조정안을 냈지만 양측이 모두 이의를 제기했다. 결국 1·2심 재판부는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현행 민법과 판례는 유언의 요건을 까다롭게 적용하고 있어 법에서 정한 유언 방식에 따르지 않을 경우 유언자의 뜻과 일치하더라도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민법에서는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 구수(口授)증서 등 5가지 방식에 의한 유언만 인정하고 있다.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의 경우, 전문을 유언자가 직접 쓰고 작성한 날짜, 이름, 주소를 쓴 뒤 서명날인까지 해야 한다.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유언은 무효가 된다. 워드프로세서나 복사본 유언장도 무효가 되고 날짜에서 연월만 있고 일자가 없어서 유언장이 무효로 된 경우도 있다.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의 경우 유언자의 ‘명백한 의사표시’가 중요하다. 수술을 받은 아버지가 자식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 의사를 확인하는 식으로 유언장을 작성한 것에 대해 법원은 유언자가 공증인의 앞에서 구두로 진술하지 않았다며 무효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또 녹음이나 공정증서의 경우 증인들이 필요하지만 이때 유언에 의해 이익을 받게 되는 사람 등 이해 관계자는 증인이 될 수 없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사학계에 부는 새 역사 접근법 ‘일상사’ 바로보기 이송순 박사

    사학계에 부는 새 역사 접근법 ‘일상사’ 바로보기 이송순 박사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일상사에 정작 일상은 없다? 무슨 철지난 말장난인가 싶은데, 최근 부는 일상사 열풍을 이송순 박사(근현대사·고려대 강사)는 이처럼 꼬집었다. 일상사란 최근 탈근대론과 맞물려 각광받고 있는 역사 접근법. 특정 인물이나 제도·구조의 변동이 아닌 보통사람들의 삶으로 역사를 보자는 것이다. ●민중·대중의 삶으로 역사보기에는 공감 이 박사도 일상사의 문제의식에는 공감한다.“말로는 역사를 이끄는 것은 대중·민중이라면서 실제 역사 연구는 그렇게 이뤄져오지 않았죠. 민중·대중을 도리어 이용해먹은 게 아니냐는 비판에서 일상사가 나옵니다. 역사를 이끌었다는 대중·민중이 과연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는 대단히 매력적인 작업입니다.” 그럼에도 일상사도 결국 개인의 삶을 구조·제도와 연결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으면 단편적인 사실의 나열에 그친다. 문제는 이런 연구성과가 없다는데 있다. 한마디로 전체적인 시대상을 보지 못하고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만 찾는,‘소재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다. 구체적으로 식민시기 일상사 연구를 들었다. 식민시기에 ‘착취 VS 독립운동’만 있었던 게 아니라 근대성도 나타났다고 주장한다.“그런 연구에서 참조하는 게 당대의 신문·잡지입니다. 그러나 그 시절 조선에서 신문·잡지를 만들고, 구독해보는 사람이 어떤 계층일지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들이 당시 조선사회의 표준일까요.” 당시 신문·잡지를 만들고 이를 사보던 사람들이 그 시기 ‘일상’이냐는 질문이다. 압구정동 오렌지족이 20대 대한민국 남성을 대표할 수 있느냐는 반문이기도 하다.“1940년대 전 시기에 일제가 유언비어를 단속한 기록이 있는 데요, 여기 실린 유언비어라는 게 정말 믿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그만큼 보통사람들에게 일제통치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겁니다.” ●대안 없이 기존 역사연구법 대체할지 의문 궁극적으로 일상사가 기존의 역사연구방법을 대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강한 의문을 표시했다.“일상사는 탈근대이론과 함께 등장했습니다. 근대를 비판할 뿐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탈근대론의 문제가 그대로 일상사에 적용됩니다. 기존 역사접근법을 비판한 그 다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실제 일상사 연구의 본고장인 독일에서는 1960년대 ‘역사작업장’운동으로 일상사 붐이 일었다. 랑케의 실증주의 전통이 강한 독일이었기에 그 반작용으로 발생했던 것. 이 운동은 국문학·사회학 중심의 우리나라와 달리 역사학자들 중심으로 진중하게 추진됐음에도, 독일통일 같은 초대형 이슈를 만나면서 사실상 와해됐다. ●근대비판적인 연구영역 더 개발해야 이 박사는 그런 의미에서 일상사는 근대비판적인 연구영역을 더 개발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젠더, 성적 소수자, 장애인, 아동 등 소외받는 마이너리티에 대한 연구와 근대·자본주의·민주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할 수 있는 연구 등이 이뤄져야 진정한 의미에서 일상사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파문에서 보듯 탈근대에서 출발한 일상사 연구가 거꾸로 근대지상주의 논리에 포섭당하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조금 더 세심한 접근이 이뤄지지 않는다면,‘이제 일상사 연구가 대안’이라는 주장은 성급한 오류일 수밖에 없다는 게 이 박사의 결론이다. 글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30세에 여자되어 흑인남편 모신지 1년

    30세에 여자되어 흑인남편 모신지 1년

    성전환(性轉煥)수술을 받고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신한 미국 작가(作家) 「돈·사이먼즈」 여사. 그 변신(變身) 자체가 벌써 엽기취미를 자극하는데, 수술이 끝나자 마자 열살이나 손 아래인, 게다가 무식한 흑인(黑人) 청년과 결혼을 해서 소문을 뿌렸다. 그리고는 임신했다가 유산했다는 유언비어까지 퍼뜨린 그녀가 결혼 1년만에 처음으로 사생활(私生活)을 공개했다. 미국의 작가 「고든·홀」의 성전환, 흑인과의 결혼사건은 1969년 미국의 통속취미를 자극하는 화제였다. 나이 서른이 된 남성이 성전환(性轉煥) 수술을 받고 여인(女人)으로 재생을 했다. 여인이 되자 마자 「돈」이라고 이름까지 여성화(女性化)한 그녀는 열살이나 손 아래인 흑인남자 「사이몬즈」와 결혼을 했다. 갓 서른의 아내와 갓 스물의 남편이었다. 「돈·랑글리·사이몬즈」 여사가 된 전 「고든·홀」 은 지금 자신의 『반생기(半生記)』를 집필하면서 남(南)「캐롤라이나」 주(州) 「찰스턴」에서 조용히 결혼생활을 하고있다. 좀처럼 남의 방문을 받지 않고 칩거생활을 하고있는 「사이몬즈」가(家)에서는 열마리쯤 되는 맹견(猛犬)이 집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성(性)」 이라는 벽에다가 인종(人種)이라는 벽까지 둘러쳐진 환경에서 「사이몬즈」 여사는 맹견의 보호를 받고 살아야할 만큼 주위의 적시(敵視)를 받고있다는 것이다. 작가 「고든·홀」 은 1962년까지 약 10권의 책을 썼다. 대개는 동화, 선교사(宣敎師) 취향 그렇지 않으면 「프린세스」에 관한 것들. 「마가레트」 여왕이 「스노든」경(卿)과 결혼 했을 때 『「마가레트」공주 이야기』를 썼고「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자 『재클린·케네디』를 써서 꽤 명성을 올렸다. 모두 「고십」수준을 넘지 않는 것이었다. 1960년에는 『「링컨」대통령에게 장미를』 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것은 「링컨」대통령 부인이 대단한 악처(惡妻)였다는 소설에 반대하는 내용 이었다.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의 편을 든다는 것이 아마 「사이몬즈」 여사의 보람인 모양인데 자기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모두 그런 처지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0년의 남성을 처리해 버리고 여성이 된 「돈·사이몬즈」 는 아무래도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밍크·코트」를 입고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는 모습은 상당히 여성답다. 쪽 곧지만 조금 뼈대가 모나게 튀어나와 보인다. 자세히 보면 코밑이며 턱에 수염자국이 있다. 집안의 조명은 어느 방이나 어두컴컴 하다. 남편 「존」은 스물두살의 청년답게 응석스러운 그러나 꽤 날카로운 데도 있는 표정의 흑인. 『난방을 고치게 돈 15「달러」만…』하면 연상(年上)의 아내 「돈」은 「핸드백」 에서 20 「달러」지폐를 꺼내준다. 『나머지는 꼭 가져와야 돼요』 하고 다짐을 한다. 연하(年下) 남편 「존」은 『오케이!』 하면서 나가 버린다. 마치 엄마가 아들을 내보내는 광경이다. 남편 「존」이 「사이몬즈」 여사의 하인이었다는 설(設)이 있긴 하지만 이 흑인청년이 「사이몬즈」 여사와 알게 된 것은 68년, 여성으로 수술한 직후 친구로서였다. 여자가 된 전(前)「고든·홀」은 그때 시골도시인 「찰스턴」의 사교계로 뚫고 들어 가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사실 그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양성(兩性)의 비밀을 혼자 간직하고 늘 사회의 그늘 속에서만 살고 있었다. 작가가 된 것도 어쩌면 그것이 사람과의 접촉이 없이 할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녀는 사교계에 진출함으로써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난생 처음 확립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이 도시의 역사적 건물을 복원하는등 상당한 애를 쓴덕에, 또 성전환자(性轉煥者)로서의 명성도 있어서 그 뜻은 쉽게 이루어졌다. 이 집 저 집 불려다니느라고 흑인요리사도 고용하는 지위와 형편이 되었다. 「존」과「돈」 이 만나게 된것은 바로 이 흑인요리사 때문이었다. 젊은 여자였으므로 이웃의 흑인 청년들이 놀러 드나 들었다. 그리고 그 중의 한 사람이 「돈·사이먼즈」였다. 하룻밤 우연히 서로 얘기를 나눈 것이 사랑의 시초였다. 곧 동서생활이 시작되었다. 수술을 끝내자마자였으므로 시술자였던 「존·홉킨즈」대학 의사들은 깜짝 놀랐다. 너무 이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관도 않고 두 사람은 사랑의 생활을 계속 했다. 뿐만 아니라 「찰스턴」 에서는 법석이었다. 일껏 얻어놓은 사교계의 명성도 엉망이었다. 지방신문의 사주(社主)가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겠다고 협박을 하는가 하면 친구들은 『내용으로야 그 녀석하고 살더라도 남부(南部)의 체면 을 봐서라도 늙은 백인(白人)하고 형식적인 결혼을 하라』는 충고까지 하는 형편. 69년 1월 22일 자택에서 흑인 목사를 데려다가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자 이웃의 악의(惡義)에 찬 장난질이 시작되었다. 문앞에 의용(儀用) 백합이 놓이는 한편 신문의 사망난에 『작가, 「니그로」하인과 결혼 』 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남편 「존」은 세번이나 저격을 받았고 한번은 산보하고 있는 두 사람이 경찰의 순찰차에 쫓기다가 유치장 신세를 졌다. 남성인 「고든·홀」 이 처음으로 자기의 성(性)을 의심한 것은 스무살 가까와서였다. 원래 영국태생인 「홀」은 사생아나 다름 없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양성(兩性)을 걱정해줄 사람은 어려서나 어른이 되어서나 아무도 없었다. 유방이 부푸는 낌새도 보이고 여성 생리현상의 흔적이 속옷에 묻어있곤 했다. 1964년(26세)부터는 우방의 발달이 급격해지고. 다달이 비치는 것도 규칙적으로 되어 버렸다. 이제는 견디다 못해 이웃의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거기서 미국 유일의 성전환(性轉煥) 전문학과가 있는 「존스·홉킨즈」 의대(醫大)를 추천 받았고 성전환(性轉煥)으로의 출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2년이나 걸린 진찰끝에 양성(兩性)중 남성(男性)을 버리는 편이 「고든·홀」에게는 적성(適性)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정신적으로 여성화하는 훈련을 받고 여성의 일상생활을 배우는 한편 장기(長期)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 여성이 된지 1년인 지금 「사이몬즈」 여사의 소원은 아기를 갖는 것이다. 그녀는 임신했다가 유산(流産)했다는 발표를 했지만 아무도 그 근거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남편인「존」 까지도 그럴리가 없다는 발언을 하는 형편. 「사이몬즈」 여사의 생활은 아직도 밝고 행복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선데이서울 70년 1월18일호 제3권 3호 통권 제 68호]
  • 달구벌 오페라 선율 가득

    대구시와 대구오페라하우스가 주최하는 ‘2006대구국제오페라축제’가 24일부터 10월1일까지 열린다. 지방자치단체가 주최하는 단일 음악축제로는 덩치가 제법 큰 이 행사는 대구 시민은 물론 주말에 나들이 삼아 대구에 들러 관람해볼 만한 구경거리를 적지 않게 담았다. 축제기간에 무대에 오르는 9개의 크고 작은 오페라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대구오페라하우스가 자체제작한 ‘불의 혼’이다.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답게 내년 이 운동의 100주년을 한해 앞두고 기획한 초연작이다. 친일파가 득세하던 시절, 대구에서 광문사 문회가 열리고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다. 고종 황제까지 참여한 이 운동을 막기 위해 일진회 등 친일파 세력과 일본 경찰이 나서는 가운데, 친일파 박중서가 살해된다. 박중서의 장례식날, 자기의 전 재산을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으로 내겠다고 유언한 것이 알려지면서 이 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는 게 작품 내용이다. 또한 국립오페라단이 ‘투란도트’를 9월1,2일 공연하는 데 이어 국립민속국악원이 ‘신 판놀음’(9월6일)을, 독일 칼스루에 국립극장과 대구오페라하우스 단원들이 번갈아 ‘박쥐’를 9월21일부터 23일까지 합작공연한다. 폐막작으로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국립오페라단이 ‘일트로바토레’를 9월30일,10월1일 이틀간 무대에 올린다. 특별음악회로는 성악가 조수미가 해외 데뷔 2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9월8일 가지며, 소규모 오페라로는 예원오페라단의 ‘비밀결혼’(9월12,13일), 디 오페라단의 ‘길’(9월13,14일), 대구오페라단의 ‘내사랑 리타’(9월19,20일), 중구문화원의 ‘브루스키노씨’(9월27,28일)가 오페라하우스가 아닌 대구 시내의 시민회관, 문예회관 대극장 등에서 열린다.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 [儒林 속 한자이야기] (135) 柱石之臣(주석지신)

    儒林 (659)에는 ‘柱石之臣’(기둥 주/돌 석/어조사 지/신하 신)이 나오는데,‘나라를 떠받치는 중요한 구실을 하는 신하’를 뜻하는 말이다. ‘柱’는 意符(의부)인 ‘木’(목)과 音符(음부)에 해당하는 ‘主’(주)가 결합하여 ‘기둥’의 뜻을 나타냈다.‘主’는 본래 ‘횃불’‘등잔의 불’을 나타낸 글자였고 이와 모양이 유사한 ‘王’(왕)은 자루가 없는 ‘큰 도끼’의 상형이다.‘柱’의 用例(용례)는 ‘氷柱(빙주:고드름),柱聯(주련:기둥이나 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서 붙이는 글귀),支柱(지주:어떠한 물건이 쓰러지지 아니하도록 버티어 괴는 기둥, 정신적·사상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근거나 힘)’ 등이 있다. ‘石’자는 손아귀에 잡을 수 있는 크기의 날이 있는 돌의 상형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 돌을 무기로 쓰고, 흙을 파거나 물건을 자르는 도구로도 사용했다.‘石間水(석간수:바위틈에서 나오는 샘물),鐵石肝腸(철석간장:굳센 의지나 지조가 있는 마음),試金石(시금석:가치, 능력, 역량 따위를 알아볼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기회나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등에 쓰인다. ‘之’자는 ‘止’(지)와 ‘一’(일)을 합한 글자.‘발’을 뜻하는 止 아래에 出發線(출발선) 또는 地面(지면)을 가리키는 一을 넣어 ‘어디론가 가다.’라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臣’자는 포로가 結縛(결박)된 채 무릎을 꿇고 눈을 치켜 뜨고 있는 형상이다. 본 뜻은 ‘포로’ 혹은 ‘노예’로, 주군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을 감시하는 ‘신하’의 뜻도 생겨났다.用例에는 ‘家臣(가신:정승의 집에 딸려 있으면서 그들을 섬기던 사람),亂臣(난신: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 난시에 나라를 잘 다스리는 신하),忠臣(충신: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신하)’ 등이 있다. 尙書(상서) 益稷(익직)편에는 聖君(성군)으로 알려진 순(舜)임금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下敎(하교)한 내용이 있다.“신하는 짐의 팔과 다리(股肱:고굉)요, 눈과 귀가 되어야 한다. 내가 백성들의 삶에 보탬이 되고자 하면 너희들은 내 뜻을 따라주고, 내가 사방에 힘을 펼치려 하면 너희들도 동참해야 한다.(중략)만일 내가 도리에서 벗어나거든 너희들이 規正(규정)하여 輔弼(보필)하고,面前(면전)에서는 순종하는 척하다가 뒤에서 수군거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股肱之臣’(고굉지신)은 여기서 나온 말로 柱石之臣(주석지신)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社稷之臣(사직지신),股掌之臣(고장지신)도 유사한 말이다. 김후직(金后稷)은 신라 지증왕의 曾孫(증손)으로, 진평왕을 섬겨 병부령(兵部令)을 지냈다. 그는 정사를 내팽개치고 사냥을 즐기는 왕에게 直言(직언)을 서슴지 않았다.“옛날 老子(노자)가 이르기를,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發狂(발광)케 한다고 하였습니다.書經(서경)에서는 ‘안에서 여색에 빠지거나 밖에 나가 사냥에 몰두하는 것 중 한 가지만이라도 있으면 망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병을 얻어 세상을 하직하는 마당에도 충심은 변함이 없었고 遺骸(유해)를 왕의 사냥 길목에 묻어달라는 遺言(유언)을 남겼다. 후직의 사후에도 왕의 사냥놀음은 그칠 줄 몰랐다. 어느날 왕이 사냥을 가는 도중 어디선가 “가지 마시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出處(출처)는 후직의 무덤이었다. 왕은 후직의 충성심에 感服(감복)하여 다시는 사냥터에 나가지 않았다. 김석제 경기도군포의왕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눈·귀 닫은 日… 100년 화근 남길 기로”

    “눈·귀 닫은 日… 100년 화근 남길 기로”

    |도쿄 이춘규특파원|아사히·요미우리·니혼게이자이·마이니치·도쿄신문 등 일본 신문들은 16일 사설과 기명칼럼을 통해 일제히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8·15 야스쿠니신사 참배’ 강행을 거세게 비판하고, 아시아 외교 복원을 촉구했다. 특히 도쿄신문이 사회면 머리기사로 실은 “일본은 세계적으로 고립될 우려가 있다. 이런 경향은 ‘언젠가 왔던 길’을 떠올리며, 매우 위험한 조짐이다.”라는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지난 1일 별세한 니시무라 마사오 일본흥업은행장은 별세 나흘전 도쿄신문과 가진 회견에서 이같이 말했다. 고인은 ‘게이단렌’의 상임이사를 지낸 재계 인물로 차기 총리로 확실시되고 있는 아베 신조 관방장관의 숙부이다. 그는 회견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계획을 우려하며 차기 정권에 맡겨진 최대 과제를 ‘전략적 아시아 외교의 재구축’이라고 강조했다. 조카인 아베 장관에게 한 유언처럼 ‘조언’한 셈이라고 신문은 해석했다. 그는 자민당 젊은 국회의원들을 겨냥해 “과거의 전쟁을 긍정하는 등 역사인식이 결여된 의원도 있다.”고 우려했다. 아울러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정당화하는 이유는 국내에서는 통할지라도 국제적으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며 “차기 총리는 과거 전쟁책임을 자각해 현실외교를 우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도쿄신문은 또 정치부장의 이날자 2면 기명칼럼을 통해서는 “공약을 지킨다든가, 마음의 문제라는 이유로 (참배를)정당화하는 것은 지나치게 근시안적”이라며 “총리는 자신의 언어에 도취하지 말고, 상대방(한국·중국)을 설득할 정보를 주는 게 필요하다.”고 비판했다. 아사히신문은 ‘귀를 막고, 눈을 닫았다.’는 사설을 통해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특집기사를 통해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참배에 관한 ‘변명’을 5개항에 걸쳐 반박했다. 즉 야스쿠니문제는 ‘하나의 의견 차이’가 아니며, 과거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일본의 정치지도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는 역사인식의 문제와 직결돼 있다고 지적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사설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A급 전범을 위해 참배한 것은 아니라고 하나, 총리 자신이 A급 전범을 전쟁범죄자로 인식하고 있는 만큼 참배는 모순이라고 비판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사설을 통해 “전쟁지도자를 합사한 야스쿠니신사에 총리가 참배한 것은 안팎의 이해를 얻기 어렵다.”고 비판하면서 “총리의 오산은 A급 전범 합사 문제를 너무 대수롭지 않게 봤다는 것에 있다.”고 강조했다. 마이니치신문은 편집국장의 1면 기명칼럼을 통해 고이즈미 총리를 “국가지도자로서 사고의 체계성, 역사관이 결정적으로 결여돼 있다.”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역이 곧 퇴장하지만 이 행동에 대한 평가를 잘못하면 이후 100년 동안 화근을 남기는 기로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현대사를 이해하는데 균형감각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 taein@seoul.co.kr
  • 靑 “고흥길 의원에 법적대응”

    청와대는 15일 유진룡 전 문화관광부 차관에게 청와대 관계자가 말한 것으로 거론되는 문제의 ‘배째라면 배째드리지요.’라는 발언이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한 것이라고 주장한 한나라당 고흥길 의원에 대해 “허위사실을 갖고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유포한 고 의원에 대해 엄정한 법적·정치적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박홍기기자 hkpark@seoul.co.kr
  • 한나라 홈피는 ‘벌써 대선’

    한나라 홈피는 ‘벌써 대선’

    한나라당 홈페이지에서는 요즘 ‘대전(大戰)’이 벌어지고 있다. 유력 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시장을 지지하는 네티즌이 서로 상대 후보를 헐뜯느라 게시판이 마비될 정도다. 저속한 욕설은 없다. 그러나 낯뜨거운 상호 비방은 차고 넘친다. 특히 자유게시판은 양측의 팬클럽을 자처하는 네티즌이 ‘접수’했다. 예를 들어 “박그네(박 전 대표를 비하해 쓰는 표현)는 가을이 되기 전에 망한다.”는 제목의 글이 뜨면 곧바로 상대쪽에서 “명바기(이 전 시장을 비하하는 표현)는 경선 탈락하면 탈당할 사람”이라는 화답이 나오는 식이다. 서로 지지하는 후보를 응원한답시고 “국민은 이미 마음 속에 ‘박근혜 대통령’으로 결정해 놓았다.”거나 “대통령은 연장자 순으로 해야 합니다.50대보다 60대가 먼저! 여자보다 남자 먼저! 박씨보다 이씨가 먼저!”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나마 점잖은 애교에 속한다. 문제는 근거 없는 허위 사실, 유언비어가 난무한다는 것이다. 툭하면 “박근혜에게는 숨겨둔 아들과 딸이 있다.”,“이명박은 국민연금을 2만원만 냈다.”는 식의 비난이 올라온다. 여기다 “○○쪽에는 인간 말종이 많다.”,“노사모, 열우당 떨거지 빼면 △△ 지지율은 10%대”라는 식의 비하도 숱하게 오른다. 박 전 대표가 경제를 공부한다는 보도가 나온 뒤에는 “경제 전문가도 경제를 이끌기 어려운데 지금 과외 받아서 뭘 할 수 있나. 한심하다.”는 비난성 글이 올랐다. 그러자 “청계또랑 지지자들은 완전히 병자 수준”이라고 응수가 나왔다. 박 전 대표 지지자가 이 전 시장의 업적인 청계천 복원을 비하한 것이다. 이런 비방 글은 하루에만 400∼500건씩 올라온다.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고 홈페이지 회원으로 가입해야 글을 쓸 수 있는데, 한 ID로 하루에 적게는 2∼3건, 많게는 7∼8건씩 글을 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똑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일도 잦다. 말 그대로 ‘도배’ 수준이다. 그러나 정작 글을 열심히 읽는 사람은 없다. 조회수를 100건 넘기는 글이 드물기 때문이다.‘그들만의 전쟁’인 셈. 심지어는 조회수와 추천수가 같은 사례도 많다.‘조직적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상대를 가리켜 ‘박빠’,‘명빠’로 폄하하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세력을 비하해 ‘노빠’라고 부르듯 같은 당원끼리 서로 비난하는 것이다. 반(反)한나라당 ‘골수 세력’이 당원을 위장해 비방 대열에 끼어들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위장 박사모(박 전 대표 팬클럽)’,‘위장 MB프렌즈(이 전 시장 팬클럽)’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게시판에는 “너 노빠지?”,“박근혜 지지를 가장한 노빠들이 설치고 있다.”거나 “열린우리당 고첩이 명빠짓을 하고 있다.”는 비난도 난무한다. 이 게시판이 처음부터 논리 없는 상호 비방전으로 물든 것은 아니었다.7·11 전당대회를 전후해 양 후보의 기싸움이 시작되면서 팬클럽도 덩달아 세를 과시하며 ‘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그 이전에는 참여정부와 노무현 대통령, 부동산 정책을 욕하는 글이 압도적이었다. “서로 욕하면 상처만 남을 뿐인데 뭐하자는 거냐.”,“매너라고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상대 뒷다리 잡기에만 열심인 선수들은 퇴장하라.”며 자정을 당부하는 글도 일부 오르지만 ‘약발’은 먹히지 않고 있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독재시절의 우울한 시험답안

    <1987학년도 2학기 서울대 사회학과 사회변동론 기말고사>문제=사회심리학적 변동론에 대하여 논하시오./답=사랑하는 후배의 분신 소식을 듣는 순간, 책을 잡고 있는 제 모습이 너무 역겨웠습니다. 지금 제게는 지식이 아니라 비굴한 저를 벌할 수 있는 채찍이 필요합니다.(경영학과 4학년 김○○) 진보학계의 거두였던 고 김진균(1937∼2004)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과목에서는 유난히 이런 시험 답안이 많았다. 여러 학과에서 모여든 학생들은 문제와 상관 없이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와 울분을 답안지에 토해내곤 했다. 그 속에는 시대의 아픔을 스승과 함께 나누려는 제자들의 정열과 믿음이 담겨 있었다. 고인의 수택(手澤·손때)이 밴 제자들 답안지 1만 1000장이 오는 10월 세상에 공개돼 제자들과 해후한다. 답안지는 고인의 학교기증 유품의 일부. 딸 지인(36)씨는 2004년 2월 타계한 부친의 유언에 따라 그해 6월 부친이 갖고 있던 자료를 서울대에 기증했다. 책, 논문, 강의록, 연구자료, 비디오자료 등 5t 트럭 하나 가득이었다. 모든 학생들의 답안지를 문서파일(PDF)로 바꿔 저장한 석장의 CD는 고인이 투병 중에 손수 제작했다는 데서 더욱 의미가 크다. 줄곧 대장암과 싸워 온 고인은 2003년 정년퇴임 후 제자들과의 인연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1985년부터 퇴임 직전까지 18년간 단 한장도 버리지 않고 모아 온 1만 1000여장의 답안지를 딸의 도움을 받아 일일이 스캐닝해 PDF파일로 만들었다. 고인은 독재정권에 의해 필화, 해직 등 갖은 수난을 당했지만 학생들을 통해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았다. 제자였던 86학번 김모(회사원)씨의 말.“학생들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해직 되기도 했던 김 교수님을 진보적 실천 지식인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수업·시험 거부가 계속되는 와중에도 운동권 학생들을 포함해 많은 학생들이 교수님의 수업을 듣고 시험을 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답안에는 87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씨가 당선된 뒤의 절망과 체념도 녹아 있고 연일 이어지는 시위로 성적이 좋지 않음을 헤아려 달라는 애교도 담겨 있다.“올해는 기필코 해방을 쟁취하는 해가 되길 바라며 저희들도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시험거부 과목이 너무 많아 성적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대기과학과 3학년생) 서울대 기록관은 10월 개교 기념일에 즈음해 김 교수 유품을 기획전시할 계획이다. 기록관 관계자는 “방대한 양의 답안지들 중에서 시대상황에 따른 학생들의 의식을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추리고 있다.”고 말했다.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Book Review] ‘단도와 활-지한(知韓)과 혐한(嫌韓) 사이’ /채명석 지음

    일본 후소샤판 역사교과서에는 “조선반도는 일본 열도를 향해 돌출된 흉기”라고 씌어져 있다. 그렇듯 일본인들은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패배한 이래 한반도가 일본 열도의 옆구리를 겨누는 ‘단도’라는 피해망상에 젖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활’처럼 구부러진 열도의 나라 일본이 백촌강 전투 이후 1300여년 동안 끊임없이 한반도를 공격했다. 약자일 때는 전수방어 운운하다가도 강자로 바뀌면 이익선, 생명선, 주권선 등 온갖 명분을 내세워 반도에 대한 전진방어, 즉 선제공격을 감행해 온 것이다. 최근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론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단도와 활-지한(知韓)과 혐한(嫌韓) 사이’(채명석 지음, 미래M&B 펴냄)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일본분석서다. 저자는 시사저널 도쿄 주재 편집위원으로 10여 년간 활동한 일본통. 스스로를 반일도 친일도 아닌 ‘숙일파(熟日派)’라고 부른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 정치는 지금 ‘혼네(본심)의 정치’ 즉 ‘강자의 정치’로 바뀌어가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하고 있는 것이 그 한 예.‘일본의 네오콘’으로 불리는 세습 정치가들은 이제 주변국의 눈치를 봐가며 과거사를 사죄하는 척하는 ‘다테마에(표면상의 방침)의 정치’ 즉 ‘약자의 정치’의 간판을 내리려 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일본의 변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저자는 먼저 ‘극장국가(theatre state)’라는 개념을 통해 국가로서의 일본이 어떤 습성을 갖고 있는가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극장국가는 문명국가의 반대 개념으로, 국가운영의 시나리오를 제 힘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극장국가에는 반드시 ‘모범적 중앙’이 존재한다.1982년 ‘극장국가’라는 책을 펴낸 야노 도오루(矢野暢) 전 교토대 교수는 일찍이 일본이야말로 일왕, 즉 모범적인 중앙을 정점으로 한 극장국가라고 갈파했다. 한국과 중국의 정치 문화를 모방해 율령제 국가를 이룬 것이 제1기 극장국가 시대라면, 메이지 유신 전후 서양문명을 모방해 근대화를 이룩한 시기는 제2기 극장국가 시대다. 제3기 극장국가는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후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내건 ‘경무장, 경제우선´이란 기치 아래 미국을 모방,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을 건설한 시기. 일본은 지금 평화헌법의 족쇄를 풀고 일왕을 정식 국가원수로,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한 ‘제4기 극장국가´로 전환하기 위해 온힘을 쏟고 있다. 책은 부제가 암시하듯 지한의 얼굴을 한 혐한의 계보를 밝히는 데 적잖은 지면을 내준다. 한국 흠집내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 저자는 에도시대 유학자로 조선 멸시에 앞장 선 아라이 하쿠세키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시로 경성에서 한성순보를 발행한 이노우에 스미고로의 행적을 좇으며 구로다가 그들 혐한파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밝힌다. 오늘의 한류(韓流)에 대한 진단도 주목할 만하다. 고대 일본의 도래인(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 붐,17세기 조선통신사 행차에 몰려든 ‘군왜(群倭, 왜나라 군중)’에 이어 최근의 한류는 역사상 세 번째 한류라는 게 저자의 말. 이 지점에서 저자는 다시 한번 반한파와 혐한파의 도발을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과거 일본은 편의에 따라 정한론(征韓論, 임진왜란, 일제의 식민통치)과 대한론(帶韓論, 삼한과의 교류, 조선통신사 환대)을 구사하며 우리를 괴롭혀 온 만큼 현재의 한류 붐이 멸한론과 정한론의 종언을 고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일본이 뿌리 깊은 탈아론적 의식을 버리지 않는 한 아시아의 평화는 요원하다고 강조한다. 그런 관점에서 아시아 침략과 태평양 전쟁의 이론적 토대인 탈아론을 주창한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엄정한 평가를 주문한다. 침략주의자보다는 조선문명화론자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듯한 후쿠자와는 “시나·조선 같은 악우(惡友)와는 사귀지 말라.”“돈 문제로 조선인을 상대해선 안된다.”고 한 인물. 저자는 섣부른 낙관이나 비관을 모두 경계하며 500년전 신숙주가 남긴 유언을 결론으로 삼는다.“왜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되 우호친선을 끊지 말라.”1만 3000원. 김종면기자 jmkim@ seoul.co.kr
  • [재계 인사이드] 바람 잘날 없는 한진家

    [재계 인사이드] 바람 잘날 없는 한진家

    한진 조씨가(家)가 형제간 다툼과 흉흉한 소문으로 바람 잘 날이 없다. 두산 박씨가(家)를 제치고 재계의 ‘트러블 메이커’로 떠오를 정도다. 이 때문에 한진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따갑기만 하다. 재계 관계자는 10일 “(재산 분쟁이)아무에게도 도움이 안되는데, 알 만한 분들이 왜들 이러는지….”라며 답답해했다. 한진가는 최근 형제 분쟁 ‘2라운드’에 들어갔다. 지난해 말부터 정석기업 지분을 놓고 ‘장남-3남 vs 2남-4남’간 법정 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이번에는 2남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과 4남 조정호 메리츠증권 회장이 형인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에게 60억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조남호 회장측은 “아버지가 생전에 설립한 브릭트레이딩 컴퍼니의 사업권을 (우리들의)동의 없이 이전해 상당한 피해를 봤다.”고 밝혔다. 브릭트레이딩은 대한항공에 기내 면세품을 공급하는 회사다. 이에 대해 조양호 회장측은 “소송이라는 극한 방법을 동원해 사실과 다른 왜곡된 주장으로 큰 형의 도덕성을 흠집 내는 비이성적 행위”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재계에선 이번 소송도 ‘돈’보다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가 된 브릭트레이딩 컴퍼니의 연간 수익은 10억∼15억원 수준이다. 조남호 회장과 조정호 회장의 몫은 2억∼4억원에 불과하다. 부친 유언장에 줄곧 의혹을 제기했던 조남호 회장과 조정호 회장이 형인 조양호 회장을 계속 압박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형제간 분쟁에 이어 3남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의 ‘건강 이상설’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조 회장은 지난해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이사회에 모습을 비친 이후 16개월째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난해 4월 이사회도 10개월 만의 공식 행사여서 그 이전에도 ‘와병설’이 파다했었다. 특히 지난 5월에는 조양호 회장의 장남 조원태 대한항공 부장 결혼식에 조수호 회장의 부인 최은영씨만 참석했다. 이에 대해 한진해운 관계자는 “조 회장이 일상적인 경영은 박정원 사장에게 맡기고 굵직한 업무만 챙기다 보니 이같은 ‘설’들이 퍼진 것 같다.”면서 “경영활동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한진해운 투기 세력들이 이런 악성 소문을 내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덧붙였다. 세간에는 또 조양호 회장과 조수호 회장 사이도 예전만 못하다는 말도 나돌고 있다. 하지만 한진 관계자는 “10일 열린 한진해운 이사회에 조양호 회장과 조수호 회장이 나란히 화상으로 참석, 안건을 논의하는 등 여전히 돈독한 편”이라고 말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발언대] 노벨상에 대한 집념/정기연 전 곡성 오산초등학교 교장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가장 흠모하는 상은 노벨상이다. 노벨상은 상금도 많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인류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이다. 따라서 노벨상을 받는 사람도 보람이지만 노벨상을 받는 사람이 있는 국가도 자랑스럽다. 우리나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2000년 12월10일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우리나라도 노벨상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노벨상은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주는 상이며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의 상이다. 한국인들도 끊임없이 집념을 가지고 노력하면 노벨상을 각 분야에서 받을 수 있는 저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스포츠 부문에서 세계 강대국을 물리치고 앞서가듯이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받아 가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 여건 조성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분야별로 꿈나무들을 발굴하고 지속적으로 집중지도를 해야 한다. 그러나 노벨상을 받는 것이 국가적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연구를 고차원적으로 집념을 갖고 하다보니 인정받아 상을 받게 되어야 한다. 상을 받기 위한 조급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사돈이 논 사면 배아프다.’는 식으로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풍조는 없어져야 한다. 또 황우석 교수처럼 조급한 생각으로 국제적 신뢰를 추락시키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MIT에서 세계 각국 유학생들의 창의력 검사를 했는데 인종별로는 유태계 학생들이 창의력이 가장 높고 다음이 한국계 학생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의 유능한 인재들이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 연구소에서 뛰어난 연구를 하고 있으며 매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한다.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의 국가적 목표는 기술혁신 인재육성 연구개발에 집중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또 한국의 젊은 엘리트들이 자기가 하고 있는 분야에서 세계첨단 연구에 성공하겠다는 간절한 꿈과 집념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한국은 각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는 자랑스러운 나라가 될 것이다. 정기연 전 곡성 오산초등학교 교장
  • 아인슈타인 개인서신 공개

    아인슈타인 개인서신 공개

    “나도 열심히 이를 닦는데,건강한 치아를 유지할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단다.” 평범한 아버지가 썼을 법한 이 편지의 주인공은 위대한 천재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1879∼1955).불행한 가족사를 잊기 위해 연구에 몰두하려 했던 그의 고독한 내면을 엿볼 수 있는 편지들이 이번 주 공개된다고 미국의 시사주간 타임이 10일 보도했다.편지들은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출판될 예정이다. 이번 편지들은 양녀 마곳이 보관하다 자기가 죽은 뒤 20년간 공개하지 말라고 유언했던 것들로 아인슈타인이 1915년 4월부터 8개월간 가족,친구,학문적 동지들과 주고받은 것이다.이때는 그가 10년 전에 특수상대성이론을 발견한 뒤 일반상대성이론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씨름하던 시절이다. 개인적으로는 세르비아 출신 물리학자이자 자신의 1905년 논문에 수학 지식을 접목하는 데 도움을 준 첫째 아내 밀레바 마리치와의 갈등이 폭발한 때이기도 했다.마리치는 그를 베를린에 남겨둔 채 아들 한스 알버트(당시 11세)와 에두아르트(당시 5세)를 데리고 취리히로 가버렸다. 장남 한스는 4월 초에 쓴 편지에서 봄방학에 자신들을 만나러 취리히로 와달라고 간청한다.“아빠,상상해보세요.동생이 곱셈,나눗셈도 할 줄 알아요.왜 저희한테 편지를 안하세요?부활절에 아빠가 우리를 보러 올거라고 동생에게 말해도 되지요?” 아인슈타인은 아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싶어했지만 그럴 수 없어 몹시 속상해했다.그는 “네가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아도 내 답장을 읽어볼 때쯤이면 이미 네가 해답을 알고 있지 않겠니?”라고 안타까워했다.그는 두 아들에게 각자 선물을 보내는 한편,이를 잘 닦으라고 신신당부했다. 몇차례 편지가 오갔지만 취리히 행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화가 난 한스는 편지 말미에 별칭 ‘아두’ 대신 아버지가 공식 문서에 사용하던 ‘A 아인슈타인’이라고 서명하는 무례함까지 보였다. 그는 마리치가 뒤에서 조종한 것으로 여겼고 그 뒤 둘은 양육비나 휴가 문제로 서로를 공격하는 편지를 주고받았다.이때 그는 마리치를 ‘사기꾼’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7월에 아인슈타인은 두 부부를 화해시키려고 애썼던 취리히의 의학 교수인 하인리히 쟁거에게 편지를 보내 “취리히에 가보았자 아이들 얼굴도 못 볼게 뻔해요.그러니 난 괴팅겐에 가서 일반상대성이론에 관해 수학자와 얘기를 나눌 거예요.”라고 썼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학문적 업적을 위해선 득이 됐다.일반상대성이론의 마지막 걸림돌을 제거할 수 있는 힌트를 얻었기 때문이다. 11월에 그는 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생애 가장 멋진 논문 하나를 끝냈단다.네가 좀 더 큰 다음,말해줄게.난 점심 먹는 걸 깜박할만큼 연구에 빠져들곤 한단다.”라고 자랑한 뒤 보름 있다 “스위스에서 함께 신년을 맞자꾸나.네 생각은 어떠니?”라고 묻는 편지를 보냈다. 아내 마리치에겐 “아들들과 관계를 방해하지 말아요.”라고 간청했다.우여곡절 끝에 그는 한스의 소원대로 취리히를 찾게 됐고 이때 쟁거에게 “사랑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기 그지 없다.”고 털어놓았다. 아내에겐 아들과 상봉을 위해 분위기를 조성해주고 “아이들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키워준 데 감사”하는 메모를 건넸다.부활절을 가족과 보낸 아인슈타인은 한스와 하이킹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베를린에서 위장장애에 걸린 자신을 극진히 간호해준 조카 엘자에게 편지를 썼다.“한스가 따듯한 마음에 믿을 만하고 무엇보다 배움에 열정을 가진 점에 놀랐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마리치에게 이혼을 제의하면서 나중에 노벨상 상금을 타면 위자료로 건네겠다고 했고 몇년 뒤 그녀는 취리히의 방 세개 아파트를 얻는 데 성공했다.그는 엘자와 재혼했고 한스는 나중에 UC버클리대 교수가 돼 아버지 임종을 했다.에두아르트는 불행히도 정신병동에 수감돼 여생을 마쳤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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