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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안’ 다음달 역사 속으로 퇴장···56년 만

    ‘공안’ 다음달 역사 속으로 퇴장···56년 만

    檢 공안부, 공공수사부로 간판 바꿔달기 입법예고 담당 업무도 축소 ‘학원·종교·사회단체’ 사건 제외기존 공안 개념을 대공·테러 등 고유영역으로 한정 대공·선거·노동 사건을 담당하는 검찰 공안부가 56년 만에 ‘공공수사부’로 이름을 바꾼다. 나아가 공안 업무에서 학원·사회·종교 관련 단체 사건을 제외하고, 공안·노동 정세 분석 업무도 폐지된다.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공안의 역할을 대폭 축소한 것이다.행정안전부는 16일 ‘검찰청 사무기구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령안’ 입법예고를 통해 대검 공안부를 비롯한 산하 공안 관련 직책, 부서의 명칭을 변경한다고 밝혔다. 지난 1월 대검은 공안부 명칭 변경 방안을 법무부에 보고했고, 정부조직 개편 소관인 행안부 검토를 거쳐 반년 만에 일부개정령안이 확정됐다. 이번 개정은 국무회의를 거쳐 이르면 다음 달 13일부터 시행된다. 개정안에 따르면 ‘대검 공안부’는 ‘대검 공공수사부’로, ‘대검 공안기획관’은 ‘대검 공공수사정책관’으로 이름이 변경된다. 이어 간첩·대테러 사건을 담당하는 대검 공안1과는 공안수사지원과로, 선거 사건을 담당하는 대검 공안2과는 선거수사지원과로, 노동 사건을 담당하는 대검 공안3과는 노동수사지원과로 바뀐다. 공안 관련 부서를 3개나 두는 서울중앙지검은 공안1·2부와 공공형사수사부를 공공수사1~3부로 바꾸고, 공안 업무를 지원하는 공안과도 공공수사지원과로 변경한다. 인천지검, 부산지검 등 공안부가 설치된 주요 일선 청도 마찬가지로 바뀐다. 단순한 이름 변경을 넘어 공안 업무도 대폭 축소된다. 우선 과거 군사정권에서 공안 핵심 업무로 꼽혔던 학원·사회·종교 단체 사건은 공안 업무에서 제외된다. 앞서 법무부 산하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지난해 6월 “공안부가 그동안 공공의 안전을 해치는 범죄의 범위를 폭넓게 분류하면서 사회단체와 노동·학원·종교단체 등에 관한 사건은 정치권력이 바라는 대로 처리함으로써 인권옹호기관으로서 역할을 소홀히 했다”고 지적하며 노동·선거 사건은 공안 영역에서 분리해 전문검사 체제로 개편하고, 학원·사회·종교 단체 사건은 공안사건에서 제외할 것을 권고했다. 정부는 권고안을 부분적으로 수용해 학원·사회·종교 단체 사건만 공안 업무에서 배제했다. 나아가 기존 대검 공안기획관이 담당하던 공안정세 분석, 공안 관련 출판물·유인물 분석, 남북교류협력사건수사 기획·지원 업무도 폐지된다. 이에 공안기획관은 공안업무 기획, 공안사건 수사지도 등 최소한의 업무만 맡게 된다. 공안·노동 사건 정세 조사 업무를 겸하던 서울중앙지검 3개 공안부서도 관련 업무를 폐지한다. 정부는 개정이유로 “공안의 개념이 지나치게 확장돼 편향성 등의 논란이 제기됨에 따라 ‘공안’ 개념을 대공·테러 등 고유영역으로 한정하여 변화된 사회상에 맞도록 부서의 명칭을 변경하고, 불필요한 오해나 논란의 소지가 있는 정세분석 등의 업무를 폐지했다”고 밝혔다. 검찰 공안부는 박정희 정권 제3공화국이 출범한 1963년 서울지검에, 유신 독재 체제로 전환된 1973년 대검에 처음 설치됐다. 나상현 기자 greentea@seoul.co.kr
  • 조국 “대통령 발언 한마디 한마디 중요”…잦은 페북글에 논란도

    조국 “대통령 발언 한마디 한마디 중요”…잦은 페북글에 논란도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직접 메시지 전달 속도를 줄이지 않고 있다. 일본의 경제보복 사태 이후 SNS 활동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조 수석의 글은 나흘째 10여건의 글이 올라왔고 이에 비례해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죽창가’ 논란 등도 이어졌다. 조 수석은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문재인 대통령의 수석·보좌관 회의 발언을 올린 뒤 “이번 대통령님의 발언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중요하다”고 남겼다. 문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결국 일본 경제에 더 큰 피해가 갈 것을 경고한다”면서 “일본 정부는 일방적인 압박을 거두고 이제라도 외교적 해결의 장으로 돌아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 수석은 이 글까지 포함해 지난 12일부터 현재까지 나흘간 일본 수출규제와 관련한 게시물 10여건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대부분 본인의 생각을 길게 쓰기보다는 청와대나 정부의 발표 자료 혹은 언론 기사 등을 링크하며 자신의 의견을 짤막하게 덧붙이는 형태를 취했다. 이 과정에서 해프닝도 발생했다. 조 수석은 지난 14일 산업통상자원부가 작성한 ‘일본 수출규제 조치세계무역기구(WTO) 일반 이사회에서 논의 예정’이라는 보도자료를 페이스북에 공유했다. 문제는 산업부가 이 자료를 공식 배포한 시간은 오후 5시 27분이었으나, 조 수석이 이를 공유한 시간은 그보다 빠른 5시 13분이었다는 점이다.이는 산업부 보도자료에 ‘즉시 보도’라는 공지가 돼 있어, 조 수석 측에서 이미 배포가 된 것으로 착각해 벌어진 일로 알려졌다. 통상 해당 부처의 보도자료는 청와대에도 사전에 알려지지만 부처보다도 더 빨리 청와대 직원의 개인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 자칫 주요 정책에 있어 혼선이 빚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조 수석이 지난 13일 페이스북에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노래인 ‘죽창가’를 소개한 것을 두고도 의견이 갈렸다. 조 수석은 페이스북에 노래와 함께 “SBS 드라마 ‘녹두꽃’ 마지막 회를 보는데 한참 잊고 있던 이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나왔다”고 소개했다. 죽창가는 유신 체제의 대표적 공안사건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1979년) 사건으로 9년여를 복역한 고 김남주 시인이 작사했다. 녹두꽃과 죽창가 모두 구한말 내정간섭을 강화하던 일본과 맞선 민초를 다뤘다는 점에서 조 수석의 글 역시 일본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종합정책질의에 출석해 조 수석의 ‘죽창가’ 게시글에 대해 “대일관계에서 감정적 표현보다는 우리 정부가 필요한 분야에서는 단호하게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반면 홍성문 민주평화당 대변인은 논평에서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데 민정수석은 죽창가를 들먹인다”면서 “철없는 과일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데 철없는 사람들은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고 비판했다. 조 수석은 지난 12일에는 페이스북에 한 언론의 칼럼 가운데 “남은 건 절치부심이다. 정부와 국민을 농락하는 아베 정권의 졸렬함과 야비함에는 조용히 분노하되 그 에너지를 내부 역량 축적에 쏟아야 한다”는 대목을 인용하기도 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미래유산 톡톡] 고풍스러운 건물 빼곡한 ‘보물 장소’ 덕수궁 일대

    [미래유산 톡톡] 고풍스러운 건물 빼곡한 ‘보물 장소’ 덕수궁 일대

    이번 답사의 주제는 2016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이용민 감독의 영화 ‘서울의 휴일’이다. 구성이 탄탄하고 위트가 넘치며 등장인물들의 세련된 차림새와 소품 등 볼거리가 풍부한 영화다. 덕수궁 일대는 눈에 들어오는 고풍스러운 건물이 많은 보물 같은 장소다. 한성교회는 1912년 여선교사 더밍과 한의사 차도심이 YMCA방 한 칸을 빌려 집회를 가지면서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화교 교회다. 1960년에 준공된 철근콘크리트조의 건물은 2012년 교회 건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리모델링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췄고, 2013년에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한국에 화교 사회가 생성된 것은 임오군란 때 파견된 청군을 지원하기 위해 따라온 화상이었으니, 외세의 거센 바람이 한국에 화교 사회를 날라다 놓은 모양새다. 맞은편에는 프란치스코 한국관구인 작은형제회 건물이 있었다. 본관은 공사 중이라 보지 못했지만 연말에 완공된다고 한다. 영화 속 1950년대 정동길을 상상하며 조금 내려가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를 복원한 정동극장을 만날 수 있다. 한국 전통 공연예술을 총망라한 뮤지컬 ‘미소’ 덕분에 ‘미소극장’이라는 별칭이 붙은 곳이다. 지난해 10월에 개방한 ‘고종의 길’을 뒤로하고 덕수궁 산책로를 따라 영국대사관 앞에 이르니 성공회 건물에 자리한 세실극장이 나타난다. 1976년 당시 유신체제에 반대해 프랑스로 추방된 김중업 건축가가 설계도면을 우편으로 보내 지어졌다. 42년 역사의 세실극장을 지난해 5월 재개관한 것은 서울시의 노력이다. 세실극장은 현재 서울연극협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답사단은 극장 측의 배려로 부채꼴 모양의 공연장을 편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상동교회도 역사의 아픔을 겪었다. 1888년 설립된 교회는 1907년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는 계획을 세웠던 장소였고, 신민회의 탄생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1911년 전덕기 목사가 105인 사건으로 투옥돼 순국했으며 3·1운동에 민족대표 4명이 참가하는 등 민족운동의 중심지였다. 일제는 1944년에 교회를 폐쇄하고 신사참배와 소위 황도정신의 훈련장인 황도문화관으로 바꾸고 만다. 김은선 서울도시문화지도사
  • ‘유신 반대’ 부마 민주항쟁 10월 16일, 올해부터 국가기념일

    ‘유신 반대’ 부마 민주항쟁 10월 16일, 올해부터 국가기념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체제에 맞선 부마 민주항쟁이 40주년을 맞는 가운데 항쟁이 처음 시작된 1979년 10월 16일이 올해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된다. 행정안전부는 1일 부마 민주항쟁이 시작된 날을 기리고자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기 위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안’을 최근 입법예고했다고 밝혔다. 행안부는 개정 취지에 대해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하고 그 정신을 기념하고자 부마민주항쟁 최초 발생일인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새로 지정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부마 민주항쟁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 체제에 저항해 1979년 10월 16일부터 닷새간 부산과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회원구)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말한다. 시위 기간은 짧았지만 군사정권 철권통치 18년을 끝내는 계기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부마 민주항쟁은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함께 대한민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민주화운동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행안부는 8월 5일까지 국민 의견을 수렴한 뒤 법제처 심사와 차관회의, 국무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개정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10월 16일 이전에 개정 절차가 완료되면 부마 민주항쟁 40주년을 맞는 올해부터 정부 주관으로 기념행사를 진행하게 된다. 이전까지는 부산과 창원 지역의 부마항쟁 기념사업 관련 단체들이 따로 기념식을 열었다. 행안부는 “관련 단체·기관들이 의견을 조율한 상태여서 큰 반대의견이 없으면 올해 기념일 이전에 개정을 완료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계획대로 개정이 이뤄지면 올해부터 정부에서 기념식을 주도하고 부마항쟁의 의미를 새기는 다양한 행사도 전국적인 규모로 진행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박정희 한 게 뭐냐” 비판했던 농부, 43년 만의 재심서 무죄

    “박정희 한 게 뭐냐” 비판했던 농부, 43년 만의 재심서 무죄

    박정희 정권 집권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겨져 유죄가 확정된 고인에 대해 법원이 재심 절차를 통해 43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광주고법 형사1부(부장 김태호)는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이 확정된 백모(1992년 사망 당시 63)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고 연합뉴스가 16일 전했다. 앞서 박 전 대통령은 장기 집권을 목적으로 1972년 10월 17일 국회를 해산하는 등 기존의 헌정 질서를 중단시키고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이후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를 제정해 유신헌법을 부정·반대·왜곡·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다. 이를 어기면 징역 1년 이상에 처하도록 했다. 농업에 종사했던 백씨는 1975년 9월 21일 밤 10시 30분쯤 전북 옥구군 옥구면 양수장 앞에서 주민들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왜곡된 사실을 진술한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백씨는 병충해가 발생해 피해를 입자 양수장 기사들에게 “논에 나락이 다 죽어도 박정희나 농림부 장관이 한 게 뭐냐”, “박정희 XXX 잘한 게 뭐 있느냐. 박 정권은 무너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일로 백씨는 1976년 2월 전주지법 군산지원에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으며, 같은 해 6월 항소심에서 원심의 형이 과중하다는 이유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고 형이 확정됐다. 그러나 재판부는 “긴급조치 제9호는 유신헌법에 근거해 발령됐으나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했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해 위헌·무효”라면서 “백씨에 대한 공소사실은 범죄로 되지 아니한 때에 해당하기 때문에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 9호에 대해 2013년 3월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고, 검찰은 2017년 10월 과거사 반성 차원에서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포토] ‘반공법 사건’ 재심 속행공판 출석하는 이재오

    [포토] ‘반공법 사건’ 재심 속행공판 출석하는 이재오

    1972년 유신체제 반대 시위 배후로 지목돼 고문을 당하고 유죄를 선고받은 자유한국당 이재오 상임고문이 13일 오후 서울고법에서 열린 재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 상임고문은 1973년 북한 사회과학 출판사가 발행한 철학사전을 일본인으로부터 입수하고 이를 세 권으로 나눠서 다른 사람에게 반포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1974년 항소심에서 유죄가 인정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과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고, 상고가 기각돼 형이 확정됐다. 이 상임고문 측은 “당시 중앙정보부가 영장 없이 불법 구금을 했고, 가혹 행위로 허위 진술을 하게 됐다”며 2014년 재심을 청구했다. 2019.6.13 연합뉴스
  • [서울광장] 황교안 vs 이낙연의 ‘종로 빅매치’ 성사될까/이종락 논설위원

    [서울광장] 황교안 vs 이낙연의 ‘종로 빅매치’ 성사될까/이종락 논설위원

    최근 정치권 안팎에서는 차기 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1, 2위를 달리고 있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이낙연 국무총리 간의 내년 4월 총선 ‘종로 빅매치’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재의 지지율대로라면 두 사람이 2022년 대선에서 대결하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다. 내년 총선에서 당운을 건 격돌을 준비하는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각각의 진영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대선 전에 맞붙어 승기를 잡아 달라는 주문을 쏟아내는 상황이다. 하지만 둘 중 한 사람이 종로에서 패배한다면 대권 가도에서 탈락하는 ‘서든데스’라는 점에서 쉽지 않은 결정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빅매치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사전에 정리돼야 할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한국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의 김세연 원장은 “황교안 대표가 내년 총선에서 종로에 출마하는 것이 정공법”이라며 황 대표의 종로 출마를 부추기고 있다. 당 선거 전략을 짜는 핵심 축인 여의도연구원장이 사실상 황 대표의 종로 출마를 공개적으로 권유한 것이다. 한 번도 자신의 선거를 치른 적이 없는 황 대표가 대선후보가 되려면 정치 1번지에서 경쟁력을 검증받아야 한다는 논리다. 반면 당 대표가 자기 선거에 묶이게 되면 전체 총선 판이 꼬일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비례대표로 출마해 전국 지원 유세를 돌며 총선을 지휘하는 것이 당에 유익하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황 대표는 “당이 원하는 일이라고 하면 무슨 일이든 당의 입장에서 결정할 것”이라는 원론적 입장만 내놓은 상황이다. 여권에서도 차기 대선주자 선두인 이낙연 총리 활용법이 거론되고 있다. 이 총리가 경쟁력을 검증받으려면 종로 출마가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이 총리는 지난달 ‘총선 역할론’과 관련해 “저도 정부·여당에 속한 일원으로 거기서 뭔가 일을 시키면 합당한 일을 할 것”이라며 지역구 출마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 하지만 종로는 정세균 전 국회의장의 지역구로 정 전 의장의 양보가 선결돼야 한다. 정 전 의장에게 이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줘야 한다는 얘기다. 이 총리가 종로에서 출마한다면 차기 총리로 정세균 전 의장이 바통을 이어받을 것이라는 관측이 거론되는 이유다. 이 총리가 종로에 출마하지 않고 다른 지역구를 선택한다면 여권에서는 총선 전 부분 정계개편 차원에서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의 총리 카드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 거주지를 종로로 옮긴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설득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임 전 실장은 2016년 총선 때 서울 은평을에 출마했다가 당내 경선에서 떨어진 전례가 있다. ‘정치 1번지’인 종로에서 당선돼 유력한 대선주자의 반열에 올라서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는 터라 이 총리에게 지역구를 양보하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이낙연 현직 총리와 황교안 전직 총리가 유력한 대선주자로 떠오름으로써 흑역사로 끝난 ‘총리 대망론’이 실현되지 않겠냐는 전망도 조심스레 나온다. 역대 총리는 잦은 언론 노출 덕분에 재임 중 높은 지지를 받아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지만, 정치적 자생력을 키우지 못한다는 한계 때문에 대권까지 쥐지는 못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국무총리를 지낸 인물은 이낙연 총리가 25번째다. 직선제 이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당시 최규하 총리가 10대 대통령에 올랐지만, 유신헌법 체제하에서 ‘체육관 선거’로 뽑힌 간선 대통령이었다. 역대 총리 중에는 이회창 전 총리가 대권에 가장 근접했었다. 대법관, 감사원장 등을 역임한 이 전 총리는 1993년 12월부터 1994년 4월까지 불과 125일만 재임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대드는 ‘대쪽’ 같은 이미지로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1997, 2002, 200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끝내 대권을 품진 못했다.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총리 출신이 대통령이 되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총리는 2인자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개성 있는 정치활동을 못 하고 반대로 이회창 전 총리처럼 2인자를 넘어 대통령과 맞서면 국민이 너무하다는 평가를 내리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총리직은 ‘주어지는 자리’지만, 대통령은 권력의지의 산물이자 정치적 쟁취의 결과물이다. 총리 이력 자체로 대선 지름길에 올라타긴 어렵다.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과 한국당이 명운을 건 사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에서 두 사람에게 승리를 쟁취해 오라는 요구가 쏟아지면 총리 출신 간의 ‘종로 대혈투’는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jrlee@seoul.co.kr
  • 10월 유신 때 박정희 비난했다 징역…47년 만의 재심에서 무죄

    10월 유신 때 박정희 비난했다 징역…47년 만의 재심에서 무죄

    1972년 10월 17일 유신체제를 선포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공공연히 비난했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고인에 대해 법원이 재심 절차를 통해 47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서울북부지법 형사항소4부(부장 강혁성)는 계엄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3개월 형이 확정된 이모(사건 당시 49세)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고 연합뉴스가 6일 전했다. 앞서 박 전 대통령은 장기 집권을 목적으로 1972년 10월 17일 국회를 해산하는 등 기존의 헌정 질서를 중단시키고 유신체제를 이행하고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씨는 그 다음 날인 18일 서울 성북구 일대 상점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박정희는 집권을 연장하려고 계엄을 선포하고 개헌을 하려고 한다. 죽여야 한다”고 여러 차례 비난 발언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는 1972년 10월 31일 이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이에 항소한 이씨는 이듬해 1월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6개월로 감형받았고, 판결 직후 군법회의 관할관이 이씨의 형량을 3개월로 감형해 징역 3개월 형이 확정됐다. 이후 약 47년이 흐른 올해 3월 검찰은 재심을 청구했다. 이씨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재판부는 당시 정부가 선포한 계엄령에 대해 “헌법과 법률에서 정한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발령됐고, 내용도 영장주의와 죄형 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에 위배되며, 표현의 자유·학문의 자유·대학의 자율성 등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었다”면서 “계엄 포고가 처음부터 위헌이고 무효인 이상 이를 위반했음을 전제로 한 이씨의 공소사실 또한 범죄가 되지 않아 무죄를 선고해야 함에도 원심은 유죄를 선고한 잘못이 있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천년 역사 담은 구시가지 프라하의 봄이 오기까지

    천년 역사 담은 구시가지 프라하의 봄이 오기까지

    체코에 가 보면 어마어마한 문화유산에 놀라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9세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체코는 12세기 유럽의 강대국으로 성장했고 14세기 카를 4세 때 신성로마제국 수도가 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그 유명한 프라하의 카를교는 카를 4세에 의해 건설된 것이다. 이후 종교전쟁과 세계대전, 공산주의 혁명 등으로 부침을 거듭해 왔다. 많은 것이 파괴되었지만 복구했고, 시간의 더께는 고풍스러움을 사랑하는 여행자를 매혹한다. 체코 민주화운동의 장으로 유명한 바츨라프 광장에선 금남로나 광화문이 떠올랐다. 광장이라고는 하지만 길게 이어진 대로에 가깝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구시가지에 닿았고 프라하의 천년 역사가 동서남북으로 펼쳐졌다. 노천 카페에 앉아 체코인의 자부심인 필스너 우르켈 맥주를 한 잔 마시며 광장을 둘러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구 시청사 천문시계 앞이다. 정각이 되니 조그만 창문에서 해골 인형이 종을 치며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가 지나간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소리와 감탄이 터졌다. 1분 남짓한 짧은 퍼포먼스를 보며 인간의 욕심은 부질없고 삶은 유한하다는 철학적 메시지를 눈치채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1410년에 만들어진 천문시계는 얼마나 정교한지 침이 가리키는 별자리 그림을 보고 당시 농민들은 시기별로 할 일을 알아챘다. 쾰른 대성당과 비슷하게 생긴 틴 성당은 80m 높이까지 치솟은 쌍둥이 첨탑 때문에 어디에서나 눈에 띈다. 외관은 고딕 양식으로 뾰족하고 내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화려하다. 바로 앞에는 프라하를 대표하는 또 다른 아이콘, ‘성’(城)의 작가 카프카 생가가 있다. 고풍스러운 건축물은 건립 시기가 모두 다르다. 로마네스크 양식부터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아르누보 양식까지 다양한 건축이 혼재돼 있어 유럽 건축의 전시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소와 이야기를 일일이 풀어내다 보면 신문 한 지면을 다 채워도 모자란다. 프라하 역사를 담은 구시가지는 ‘프라하 역사지구’라는 이름으로 199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프라하는 1989년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개방의 문이 열리고 나서부터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거듭났다. 반공 교육에 익숙한 중년 이상에게는 체코가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로 기억될 테지만, 젊은 사람들에겐 꼭 가 보고 싶은 낭만적인 여행지일 것이다.‘프라하의 봄’은 매년 5월 프라하에서 열리는 국제 음악축제 이름이기도 하다. 1968년 체코 유혈사태 당시 한 외신기자가 “프라하의 봄은 과연 언제 올 것인가”라고 표현한 후 ‘프라하의 봄’은 자유와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용어가 됐다. 우리나라는 유신체제가 막을 내린 1979년 10·26 사태 이후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6개월 남짓한 시기를 ‘서울의 봄’이라 한다. 김진 칼럼니스트·여행작가
  • “일본은 조선을 무력침략해 보호국화 했다”

    “일본은 조선을 무력침략해 보호국화 했다”

    1894년 6월 기록 추적 통해 밝혀… “일본은 부끄럼 알고 사죄해야”대한민국 수립 100주년. 미래의 100년을 설계하는 뜻 깊은 올해, 125년 전 침략당한 역사를 찾아 내 밝힌 ‘1894 일본조선침략’이란 책이 출간돼 화제다. 그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일본의 조선침략 계획서, 전사 등 극비, 특비 공문서가 담겼다. ‘1894 일본조선침략’은 일본이 청국과 전쟁을 하기 전 조선침략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군대를 앞세워 1894년 6월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한 뒤 식민지조선으로 이어가는 과정을 일본의 공문서로 추적했다. 이 책은 1894년 6월을 조선이 일본에게 무력침략과 점령을 당하기 시작해 7월 23일 조선왕궁 침탈, 국정상실한 과정을 증거로 제시한다. 즉 일본군에 의한 동학농민군의 철저하고 무자비한 토벌과 몰살을 거쳐 1895년 또 다시 경복궁 침범으로 천인공노할 ‘조선왕비살륙’이 자행되고, 러일전쟁 직후의 을사늑약으로 이어졌다. 이 책을 따라 조선침략을 극비에 붙인 채 일본 자기들끼리는 자랑스런 조선침략사로 기록해 둔 ‘조선침략 기록’을 만나보자. 편집자 주 ●일본의 역사진실 감추기 일본은 1894년 6월 ‘조선 무력침략’을 철저히 금기의 영역으로 어둠의 수장고에 가둬버렸다. 일본은 자국국민에게 추한 것은 감추고 행위 당사자들은 은밀하게 자랑하고 즐기면서 조선왕실을 겁박해 무력으로 침묵을 강요했다. 조선 침략의 첫걸음부터 진실을 삭제하고 왜곡해 조선역사의 한 부분이 기록에서 사라졌다. 일본은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살리고 싶은 기록은 살을 덧붙여 미화하고, 부끄러운 행위는 감추는 일에 진력했다. ‘쓰쿠바함의 조선국 첩보 보고서’가 대표적이다. 일본은 1893년 12월 일본이 조선의 정보와 첩보 수집을 위해 연습함 쓰쿠바와 경비함 오시마를 조선 인천항으로 파견했다. 이때 조선에 파견되어 이듬해인 1894년 3월말까지 첩보활동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이 보고서다. 쓰쿠바함의 해군대원들이 조사한 조선국에 관한 군사정찰 보고, 첩보활동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이 때 작성된 ‘인천·경성 간 도로시찰 보고’에는 경성공략이 7시간에 가능토록 세밀하게 그린 지도가 첨부돼 있다. 이 지도는 1894년 6월 일본의 조선 무력침략에 적극 활용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겨왔다.●일본의 조선무력 점령 1894년 일본이 조선침탈을 얼마나 철저히 준비했는지는 그들의 자료에 잘 나타나 있다. 6월 5일 일본이 대본영을 설치하기 이전 혼성여단의 출병이 확정되었다. 이어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에 있는 육군성의 청일전쟁 자료 가운데는 ‘명령훈령, 1894년 6월~1895년 6월’의 6월 1일자 ‘육해군에 명령하달’이라는 훈령은 발 빠르게 전쟁으로 향해가는 일본의 첫걸음이 일찍 시작되었음을 말해 준다. 6월 2일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 외무차관 하야시 타다스,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는 외상의 관저에서 조선파병에 관한 군사적, 외교적 책략을 협의했다. 일본은 대본영을 설치하고 혼성여단을 파병하기 전에 조선국 특명전권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를 특파해 육전대와 함께 경성을 장악했다. 육전대의 파견은 그 자체가 불법한 조선침략의 증거이다. 이 책은 일본이 남긴 기록에서 1894년 6월 29일 경성과 인천 사이의 병력 배치도를 찾아내 무력 점령 상태임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게 돋보인다. 또 일본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가 남긴 ‘메이지 이십칠팔년 재한고심록’,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가 회고록 형식으로 쓴 외교기록 ‘건건록’, ‘유취전기 대일본사’ 등 일본이 남긴 기록을 통해 일본의 무력 점령 아래 가해졌던 조선정부에 대한 내정압박, 조선왕궁 점령의 실체를 추적했다. 특히 7월 23일 조선왕궁 점령은 철저한 계획에 의한 실행이었다는 사실이 은폐되었다는 것도 밝힌 것이다. ●일본의 오랜 꿈, 조선침략과 구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해야 한다는 인식을 노골화해 조선침략을 말한 일본의 대표적 사상가는 ‘우내혼동비책(1823년)’을 쓴 사토 노부히로이다. 우내혼동비책은 ‘세계정복을 꾀하는 비밀스러운 책략’이라는 의미의 책이다.“이 책은 일본인이 읽되 외국인에게는 보여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전해 주듯 일본의 우월성, 세계정복욕, 아시아와 조선 침략방법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오카쿠라 텐신은 ‘일본의 각성(1904년)’이란 책에서 “우리의 적대국이 조선반도를 점령하게 되면 쉽게 일본으로 진격할 수 있다. 조선은 늘 날카로운 비수처럼 일본의 심장을 향해 뻗어 있어서다”고 주장했다. 조선무력 침략의 핵심인물 중 한명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건건록’에서 “일청 양국의 외교관계를 일변시켜 세계에서 일본을 동양의 우등국으로 인식하기에 이르게 된 것도 그 근본원인은 청한 양국정부가 이 동학당의 반란에 대한 내치, 외교 루트를 잘못 찾은 데 있었다”며 일본 외교역사의 제1장에 두어야 한다고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의 조선침략 열망이 조선의 혼란을 틈타 무력침탈로 강행된 것”일 뿐으로 “일본인들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청일전생의 직접적인 원인은 외교분쟁이 된 김옥균의 죽음이나 동학농민전쟁 때문이 아닌 일본의 해외정벌, 조선 무력침략”이라고 밝혔다. 이어 저자는 “여기에 일본에 협조하며 일신의 영달을 추구했던 부패한 조선의 관리가 기름을 더했다”고 논평했다. ‘동학난’과 ‘김옥균의 죽음’은 일본이 조선침략의 꿈을 위해 침략의 구실로 활용된 사건일 뿐이란 지적이다. ●끝없이 되살아나는 정한론 일본은 메이지 초기, 아니 그 이전부터 꾸준히 조선을 공격하고 토벌해 일본의 지배 아래 두어야 한다고 해 왔다. 정치적으로는 서국 열강의 압력과 내부의 혼란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상적으로는 조선에 대한 뿌리 깊은 멸시관이 존재해 조선과의 외교적 갈등 없이도 자연스럽게 정한론을 논의했다. 1868년 일본은 왕정복고 세력에 의한 혁명의 성공으로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의 근대국가 메이지정권을 수립했다. 봉건체제를 해체하고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미약했던 메이지 정권은 유신 직후부터 조선 침략을 말하고 있었다. 일본 국내의 사회개혁을 위한 민중봉기의 위협과 정치적 현안에 대한 대처를 해외 침략정책으로 일관했다. 1873년 정한론 정변, 1874년 대만출병, 1875년 강화도 조약, 1894년 조선무력침략과 청일전쟁, 1895년 조선의 왕비살륙, 1904년 러일전쟁 등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류큐왕국, 대만, 조선이 병합되었다. 뒤를 이어 일본은 동아시아의 제국을 구축해 여러나라를 그들의 지배권 안에 넣는 전쟁을 이어갔다. ●침략 없는 평화를 꿈꾸며 저자는 책에서 “힘없고 가난한 조선의 백성이 자신만의 배를 불리는 관리와 정치인들에 반발해 목소리를 내고 있을 때 일본은 그 틈을 타 조선을 침략해 들어왔다. 그 부당함을 뻔히 알면서 교활한 수법으로 조선정부를 속이고, 힘으로 억눌렀다”면서 “이때 일본에 부역한 자들이 누구인가, 나라를 팔아먹고, 백성을 개돼지보다 못한 지옥으로 이끌고 간 자들, 골수 친일부역자들이다”고 밝혔다. 이어 책에서 그는 “일본은 여전히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사죄도 없다”면서 “그들을 도와 나라를 팔고, 백성의 고혈을 짜내 배를 불렸던 자들의 후손이 버젓이 지금도 권력과 돈을 쥐고 한반도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한 일본은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 사죄도, 반성도 않을 것”이라며 친일파 청산을 강력히 호소했다. 서원호 객원기자 guil@seoul.co.kr
  • 김경수 구속…야3당 “여론조작 사건 실체 규명해야”

    김경수 구속…야3당 “여론조작 사건 실체 규명해야”

    자유한국당은 30일 김경수 경남지사의 법정구속과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후보 당시 최측근인 김경수 경남지사의 댓글 조작 개입을 인지하고 관여했는지 여부가 중요한 쟁점으로 이에 대한 사법적 판단도 조속히 진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윤영석 수석대변인은 논평에서 “김 지사와 드루킹의 댓글 조작은 2017년 대통령 선거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대선 결과의 정당성에 대한 국민적인 의혹이 거세지고 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윤 대변인은 “김 지사가 댓글로 대선 여론을 조작하고 여론조작의 대가로 인사를 약속한 것은 민주주의를 유린한 중대한 범죄”라면서 “즉시 지사직에서 사퇴하고, 문 대통령은 김 지사의 대선 댓글 조작 개입을 인지하고 관여했는지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바른미래당도 이날 논평을 내고 “일탈한 정치인에 내려진 당연한 판결로, 검찰은 이제 불법 여론조작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화 대변인은 서면 논평에서 “불법 여론조작 사건은 여론을 왜곡해 민주주의 선거제도를 공격한 질 나쁜 선거범죄인만큼 10년 징역형도 부족하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김 대변인은 “드루킹을 처음에 모른다고 잡아떼던 김 지사는 앞에서는 정의를, 뒤에서는 조작을 한 민주주의 파괴자”라면서 “거짓 덩어리 김 지사는 부끄러움을 알고 사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 김경수의 진짜 배후를 밝혀야 한다”면서 “불법 여론조작 사건에 관용과 성역이 있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민주평화당은 “민주주의 폄훼에 대한 사법부의 엄중한 판단으로 당연지사”라고 평가했다. 박주현 수석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이같이 밝히고 “현직 지사에 대한 법정구속을 계기로 정치권은 정상적 민주주의로 거듭나고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를 얻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박 수석대변인은 또 “댓글조작과 매크로조작은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는 반민주주의 행태”라며 “박정희 유신체제 이래 수십 년간 자행돼온 마타도어와 여론공작은 이제 중단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약자에 강했던 ‘사법 엘리트’… 입법 로비·재판 거래로 무너졌다

    약자에 강했던 ‘사법 엘리트’… 입법 로비·재판 거래로 무너졌다

    “너무 완벽한 게 흠” “체제에 순응적 성향” 법원행정처 경력만 8년… 승진 코스 개척 청문회때 “권력분립, 민주주의 징표” 언행 불일치가 국가적 불행으로 이어져 유신시절 ‘긴급조치 유죄 판결’로 논란 여성단체 “인권 감수성·약자 이해 부족” 71번째 생일 앞두고 수감자 신세로 전락“너무 완벽한 게 흠이라면 흠이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 직권남용 혐의 등으로 24일 구속 수감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2011년 국회에서 열린 대법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극과 극의 평가를 받았다. ‘엘리트 판사’로 이름을 날렸던 양 전 대법원장은 부정적 평가를 한 증인에 대해 몹시 불쾌했을 것이다. 인사청문회 직전에도 그는 청문회에 출석한 증인들을 대기실로 모아 놓고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트레킹하면서 겪은 무용담을 풀어놓았다고 한다. 증인들이 모두 자신을 긍정적으로 증언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없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 그가 2017년 9월 퇴임사에서도 밝혔듯이 ‘뜻하지 않게´ 맡은 대법원장직 때문에 스스로를 무너뜨렸다. 1월 26일생인 그는 결국 71번째 생일을 이틀 앞두고 사법부 1인자에서 구치소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1970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군법무관을 거쳐 1975년 판사가 됐다. 사법연수원 수료생 중 최고만 갈 수 있다는 서울민사지방법원에 당당히 입성한 그는 2005년 대법관에 임명되기까지 30년 동안 사법부 내에서 새로운 역사를 썼다. 동료 판사들이 서울과 지방을 오갈 때, 양 전 대법원장은 법원과 법원행정처에서 번갈아 근무하며 대법관으로 가는 승진 코스를 개척했다. 법원행정처에서의 경력만 8년이다. 대법원도 2005년 당시 양 전 대법원장을 대법관으로 추천한 이유로 재판 실무와 사법 행정에 탁월하다는 점을 높이 샀다. 다만 양 전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에 처음 불려 갈 때도 “안 갔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피력했을 정도로 행정보다는 재판을 더 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재판 업무에서 두각을 나타낸 건 1999년 서울중앙지법 파산부 초대 수석부장판사 때다. 당시 외환위기 여파로 도산 직전에 몰린 기업들이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 짓는 막강한 권한을 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나름의 절차와 기준을 가지고 부실 기업들을 회생시켰다. 2001년 서울지법 북부지원장(현 서울북부지법원장) 시절, 그는 “남성 우선 호주 승계 등을 규정한 민법 조항이 남녀 차별을 조장하고 있다”며 위헌 소지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보수적인 법조계에서 소신 판결을 했다는 극찬이 쏟아졌다. 이듬해인 2002년 양 전 대법원장은 한국여성단체연합으로부터 ‘여성권익 디딤돌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9년 뒤인 2011년 한국여성단체연합은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된 양승태를 반대하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사법부 독립 수호나 사법개혁 실천에 대한 의지가 의심스럽고, 대법원장으로서 갖춰야 할 인권 감수성과 사회적 소수자, 약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2003년 4차 사법파동 때 법원행정처 차장으로서 책임지고 물러나겠다고 했지만 번복한 것도 문제 삼았다. 또 1970년대 유신 시절 긴급조치 사건에 배석 판사로 참여해 유죄 판결을 내린 것도 논란이 됐다. 이런 우려에도 국회 청문회를 무사 통과한 양 전 대법원장은 본격적으로 상고법원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법원행정처를 활용한 의회 로비, 청와대와의 재판 거래 등 각종 불법 행위 등이 자행된 것으로 검찰 조사 결과 드러났다.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글을 올린 판사에 대해 사찰을 하도록 지시했다는 정황도 포착됐다. 그동안 양 전 대법원장이 그토록 강조했던 재판의 독립과 법관의 독립은 말뿐이었던 것일까. 그는 2011년 청문회 당시 이런 얘기를 했다.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법언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권력분립의 원칙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적 징표라고 확신한다. 특히 사법의 독립 없이는 민주주의가 이뤄질 수 없다는 데에 신앙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가 불러온 비극은 개인의 몰락을 넘어 국가적 불행이 됐다. 제왕적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 보수화와 관료화로 인한 폐해는 결국 국민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긴급조치 사건에서 유죄를 선고했다는 것만 봐도 얼마나 체제 순응적인지 알 수 있다”면서 “엘리트 법관으로서 사법부를 관료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이 됐다”고 말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시시콜콜]국방백서 ‘주적’(主敵) 논란

    [시시콜콜]국방백서 ‘주적’(主敵) 논란

    1970년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군 부대에 인접한 동네에 살았던 난 항상 군인들의 구호 소리에 잠을 깼다. 군인들은 새벽마다 점호 뒤 동네의 비포장 길에서 열을 맞춰 구보를 하면서 큰 소리로 군가를 부르거나 구호를 외쳤다. 구호는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무찌르자 북괴군’‘이룩하자 유신과업’ 네 가지였는데, 돌이켜보면 참 살벌한 내용이었다. 수 년 동안 거의 매일 아침 들어서인지 구호 내용과 외치는 순서까지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그때만 해도 한국전쟁이 끝난지 20년밖에 안되는데다 휴전선에선 심심치 않게 작은 충돌이 있었으니 남측으로선 북한 지도부와 북한군은 오직 무찌르고 쳐부수어야 할 대상이 분명했다. 당시 어렸던 난 김일성이나 북한군은 사람이 아닌 도깨비나 괴물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반공교육도 철저했다. 접경지역에 살다 보니 산이나 들판에 가면 북한에서 날려 보낸 선전 전단(당시엔 일본말인 ‘삐라’라고 불렀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전단은 대부분 북 체제를 홍보하는 사탕발림이나 남측 체제나 대통령을 공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반공정신이 투철했던 대부분의 아이들은 전단을 주워 모아서 학교나 동네 지서(파출소)에 제출하곤 했다. 그동안 한반도 정세가 적잖이 변했음에도 분단의 상처가 워낙 깊어선지 남한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은 것 같다. 국방백서가 발간될 때마다 ‘주적(主敵)’ 논란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국방부는 얼마 전 발간한 국방백서에서 ‘북한 정권과 군은 우리의 적’이란 표현을 삭제했다. 대신 적의 개념을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침해하는 세력’이라고 정의했다. 2년마다 발간되는 국방백서의 주적 표기 문제는 해묵은 논쟁을 불렀다. 국방부는 1967년 국방백서를 처음 발간했는데 당시엔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인지 주적이나 북한은 적이란 표현을 넣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4년 남북 실무접촉에서 북측 대표의 “서울 불바다”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면서 처음으로 ‘북한군은 주적’이라고 적시했다. 이후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는 등 해빙기를 맞아 2002년 발간된 국방정책보고서(1998~2002)에서 주적 개념을 미언급한데 이어 2004년엔 아예 주적 표현을 삭제했다. 그러다가 2010년 연평도 포격사건이 발생하면서 다시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란 표현을 넣었다. 백서에 주적이나 적이란 표현을 꼭 적시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지금보다 훨씬 남북관계가 냉랭했던 1970·80년대에도 백서엔 이런 표현이 없었지만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대한민국 영토나 국민을 위협하거나 침탈하는 세력은 당연히 우리의 적일수 밖에 없고, 그 세력이 누구든 우리 군인은 영토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해야할 의무를 지고 있다. 남북 정상이 지난해 사실상 불가침 약속을 맺은데다가, 지금도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 정착을 위한 북·미간, 남북간 대화가 한창 진행되는 상황에서 북한을 콕 찍어 ‘적’이라고 못박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 임창용 논설위원 sdragon@seoul.co.kr
  • 대법원 “‘유신 선포’ 계엄포고 무효” 첫 판단…재심청구 이어질 듯

    대법원 “‘유신 선포’ 계엄포고 무효” 첫 판단…재심청구 이어질 듯

    1972년 박정희 정부가 유신 체제를 선포하면서 전국에 내린 비상계엄 포고령은 계엄 요건을 갖추지 못해 위헌·위법적인 조치였다는 대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정부의 계엄 포고 자체가 무효라는 판단이어서 당시 비상계엄 포고령을 위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유죄를 선고받은 피해자들의 재심 청구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3부(주심 조희대 대법관)는 1972년 10월 계엄령 당시 불법 집회를 열어 도박을 한 혐의(계엄령 위반)로 기소돼 징역 8개월을 확정받은 허모(76)씨의 재심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고 21일 밝혔다. 재판부는 “1972년 비상계엄 포고령은 기존의 헌정 질서를 중단시키고 유신 체제를 이행하고자 그에 대한 저항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또 “계엄 포고가 발령될 당시의 정치 상황 및 사회 상황이 계엄 요건인 ‘군사상 필요할 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고 봤다. 이어 “포고령 내용은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도록 한 당시 헌법 규정에도 불구하고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자유, 영장주의 원칙, 학문의 자유, 대학의 자율성 등을 침해했다”면서 “1972년 10월 계엄 포고는 위헌이고 위법해 무효”라고 규정했다. 허씨는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내려진 비상계엄령 포고령 중 ‘불법 집회 금지’ 규정을 어긴 혐의로 기소됐다. 같은 해 11월 5일 지인들과 모여 도박을 했다는 이유였다. 허씨는 육군고등군법회의와 대법원을 거쳐 1973년 7월 징역 8개월을 확정받았고, 2013년 12월에야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 청구를 받아들인 창원지법은 2016년 1월 “(허씨의 처벌은) 군사상 필요성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영장주의의 본질을 침해해 위헌이자 무효”라면서 무죄를 인정했다. 대법원도 ‘당시 헌법과 계엄법을 위반한 비상계엄 포고령’이라면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그대로 유지했다. 대법원은 지난달에도 박정희 정권이 1979년 10월 18일 부산과 마산에 내렸던 계엄령도 ‘군사상 필요성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위법한 조치였다는 판단을 내렸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현 정부는 독재 국가”… 44년 만에 빛 본 민청학련 기록들

    “현 정부는 독재 국가”… 44년 만에 빛 본 민청학련 기록들

    “현 정부는 비민주적인 독재 체제이기 때문에 우호국들조차 경찰 국가이자 독재 국가라는 비난이 지대하다.”(1974년 5월 비상군법회의에 회부된 윤보선 전 대통령의 피의자 신문조서 중)44년 전 발생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관련 기록물이 처음 공개된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국방부 검찰단에서 보관하던 민청학련 사건 관련 기록물을 지난달 이관받았다고 10일 밝혔다. 이번 기록물은 총 105권이다. 대부분 기소대상자(140여명) 관련 기록이다. 민청학련 사건은 1972년 유신헌법 제정 뒤 반유신 운동이 일어나자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배후에 간첩단(인민혁명당)이 있다”고 규정하고 조사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1974년 4월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해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1024명을 조사하고 이 가운데 180명을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했다. 2005년 12월 국가정보원과거사진실위원회는 이 사건을 ‘대한민국 최대 학생운동 탄압사건’으로 규정했다. 2010년 10월 법원은 피해자에게 국가 배상 판결을 내렸다. 이번 기록물은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180명에 대한 재판기록과 수사기록을 모은 것이다. 구속영장과 공소장, 공판조서, 수사보고, 진술조서, 피의자 신문조서, 증거자료 등을 담고 있다. 이번 기록물은 유신헌법 이후 긴급조치가 사건화되고 긴급조치 위반자들이 구속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 자료라고 행안부는 설명했다. 민청학련 사건 이외에도 1967년 대통령선거법 위반 사건 등 관련 기록물이 대거 포함돼 있다. 윤보선 전 대통령과 장준하·제정구 전 국회의원, 민주화운동가 백기완 등 다양한 인물들의 기록도 담겨 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김명수 “유신시절 소신 판결 내린 이영구 판사 뜻 기려 재판독립 지키겠다”

    김명수 “유신시절 소신 판결 내린 이영구 판사 뜻 기려 재판독립 지키겠다”

    대법원이 1970년대 유신정권 시절 정치적 외압에도 불구하고 소신 있는 판결을 내린 故 이영구 판사의 1주기를 맞이해 추모전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은 최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불거진 사법부가 위기에 처해있다며 이 판사의 뜻을 이어 사법권 독립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16일 故 이영구 판사 1주기 추모전을 열고 이 판사의 생애를 추모하고 재판의 독립을 수호하자던 고인의 뜻을 기렸다. 김 대법원장은 이 자리에 참석해 “우리 사법부는 최근 드러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큰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면서 ‘재판의 독립이 지켜지지 않으면 국민이 재판을 신뢰하지 않고 사법권의 독립을 지켜야할 사명과 임무는 사법행정의 책임자에게 있다’던 이 판사의 말을 소개했다. 이어 김 대법원장은 “고인이 꿈꿨던 정의롭고 독립된 법원을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영구 판사는 1976년 당시 서울지방법원 영등포지원 부장판사로 재직하면서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시위를 주도하는 서울대학교 대학생들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해 석방시켰다. 이 판결은 당시 독재정권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관대한 판결이었다. 이에 “서울대가 최전방이고 영등포 형사재판장이 최고사령부인데 이 판결로 정권의 방어체제가 무너졌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 판사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그해 11월 긴급조치 9호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서문여고 교사에게도 무죄를 선고했다. 이 교사는 수업 도중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비판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 판결은 그 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판결을 선고받은 221명 중 유일한 무죄판결이었다.  당시 이 판사는 판결문에 “박정희 대통령의 재위기간이 15년을 넘는 장기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라면서 “피고인의 말은 장기집권에서 오는 지루한 안정에 대한 자유국민이면 누구나 흔히 느낄 수 있는 단순하고도 가벼운 염증감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이 판결로 이 판사는 인사 관행을 깨고 전주지방법원으로 전보돼 사실상 좌천됐고 한 달 후 법복을 벗어야 했다.   지난 9월 문재인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고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이후 대법원 역시 고인의 뜻을 기려 1주기 추모전을 열기로 했다. 이번 전시는 12월 28일까지 대법원 1층 법원전시관에서 열릴 예정이며 고인의 주요 판결문과 법복 등 물품을 볼 수 있다.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부마항쟁 39주년] “역사 앞에 부끄럽다…기억 않고 기록 않는 부마의 함성과 열정”

    [부마항쟁 39주년] “역사 앞에 부끄럽다…기억 않고 기록 않는 부마의 함성과 열정”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이정표는 1960년 4·19혁명에서 시작해 1979년 부마(부산+마산)항쟁,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10항쟁을 거쳐 촛불혁명으로 완결됐습니다. 이 가운데 부마항쟁만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그 의미를 살릴 수 있도록 진상 조사와 재평가가 필요합니다.” 지방자치 4선인 유덕열 서울 동대문구청장은 16일 부마항쟁 39주년을 앞둔 지난 12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유신 독재에 맞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다. 학생들이 선도하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이끈 민중항쟁인데도 전두환 시대와 함께 독재의 사슬을 끊지 못해 진정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유 구청장은 4대 민주항쟁 중 유일하게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지 않는 등 관심과 평가가 미흡하다며 항쟁에 대한 진상 규명과 함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제도적 과제도 함께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답을 통해 과제를 짚어 봤다.→항쟁 발발 계기는. -5·16 군사쿠데타로 최고 권력을 쥔 박정희 정권은 영구 집권을 위해 1972년 유신체제를 선포한 뒤 긴급조치를 수시로 발동해 민주 인사를 탄압하는 등 탄압 정치를 이어 갔다. 그러던 중 당시 야당인 신민당 김영삼 총재가 YH여성노동자 신민당사 농성 사건에 대해 외신과 인터뷰하면서 유신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979년 10월 4일 국회에서 제명되자 ‘전제군주 시대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며 부산 지역 민심이 동요했다. 이를 기화로 10월 16일 부산대 학생 중심으로 독재 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번지면서 10월 17일 부산 전역으로 번졌다. 물론 단순히 야당 총재 한 사람에 대한 국회의원 제명이나 야당 탄압에 대한 항거라기보다 오래 짓눌린 민주화에 대한 민중의 목마름이 분출된 것이다. →직접 시위대를 이끌었는데. -당시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2학년 복학생이었다. 학교 후문 100m 인근에 있던 내 하숙집은 학우들 사랑방이었다. 그곳에서 유신 독재의 부당성에 대해 토론과 비판을 하던 중 16일 부산대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고 동아대 학생들도 17일 아침부터 삼삼오오 모여 분위기를 달궜다. 오후 법학과, 행정학과, 정외과 2학년 합동 교련 수업 시작 전에 제가 단상에 올라 “청년 학도를 탄압하고 민주 인사를 구속하는 참상 앞에서 교련 수업이나 받을 게 아니라 운동장으로 함께 나가 시국과 인권 문제에 대해 토론하자”고 외쳤다. 금세 500~600명 이상으로 늘어 유신 철폐, 독재 타도 등 구호를 외쳤다. 그러자 경찰 진압대가 들어와 최루탄을 발사해 저녁 6시 남포동에서 다시 만나자며 흩어졌다. 그리고 저녁에 시가에서 시민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0시(10월 18일)를 기해 부산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됐고 1058명이 경찰에 끌려갔다. 20일엔 위수령이 발동됐다.→시위 주도로 어떤 불이익을 받았나. -주동자로 찍혀 피신 생활을 하던 중 ‘10·26’으로 유신독재에 종지부를 찍었다. 항쟁을 직접 보고 충격을 받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손을 빌리긴 했지만, 철옹성 같던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것은 사실상 부산과 마산의 시민, 그리고 우리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12·12사태가 발생했고 부산에서도 총 검거령이 내려져 다시 서울로 피신했으나 5·18민중항쟁으로 계엄이 확대됐다. 결국 도피 생활 7개월 만인 1980월 5월 28일 은신 중이던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 친구 집에서 체포된 뒤 부산 망미동 보안대로 끌려가 36일간 각종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7월 2일 구속영장 집행으로 부산 제15헌병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인간 이하의 참혹한 수감생활을 겪었다. 헌병대에서 다시 부산 사상구 학장교도소로 이감된 데 이어 군법회의를 통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마침내 석방됐지만 대학에서 제적돼 졸업장을 받는 데 12년이 걸렸다. →당시 함께 항쟁을 주도한 이들은. -헌병대 영창 한 막사에 40~50명 수용됐는데, 원래 있던 군인 죄수와 부마항쟁을 주도한 대학생 8명 등 20여명, 그리고 얼마 후 사회 폭력배들이 잡혀 왔다. 대학생은 부산대 조태원, 신재식, 정광민, 김종세, 김영, 이상경과 진주 경상대 김문규와 동아대 유덕열 등 8명이다. 조태원은 긴급조치로 이미 두 번 투옥된 바 있고, 신재식은 부산에서 사업을 한다. 정광민은 부마항쟁연구소장이다. 김영은 7~8년 복역했는데 김하기란 이름으로 소설을 쓴다. 김종세는 올해 초까지 부산민주공원 관장을 지냈다. 우리는 아직도 가끔 서로 안부를 묻고 연락을 한다.→DJ(김대중 전 대통령)와 노무현 정부 때도 부마항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이유는. -DJ가 1997년 정권교체를 이뤘지만 JP(김종필 전 국무총리)와의 연대라는 한계에 부딪혔고, 이어진 노무현 정부는 각종 개혁 작업으로 탄핵 등 집권 초반부터 계속 흔들리면서 부마항쟁 재평가를 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지난해 10월 3년에 걸친 부마항쟁 진상조사 기간이 종료됐는데. -2010년 5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국가 기관으로 처음 부마항쟁 기간 중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를 인정한 바 있지만 전체 진상 규명은 이뤄지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부마항쟁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나 진상규명위가 형식적으로만 구성돼 제대로 활동하지 않았다. →잊지 말아야 할 부마항쟁의 의의는. -부마항쟁은 18년이나 이어진 군사독재정권을 끌어내린 민주화운동이다. 군부의 집권 야욕으로 곧장 민주화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5·18항쟁이라는 참혹하면서도 위대한 시민항쟁으로 이어졌지만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에서 군사정권을 축출하는 투쟁을 본격적으로 시도했다는 점에 의미를 둔다. 8년 뒤 이어진 6월 항쟁으로 신군부가 항복 선언을 하면서 군사독재는 더이상 우리나라에 발붙일 수 없게 됐다. 무엇보다 조국 근대화라는 명분 아래 철저히 짓밟혀 온 노동자와 농민의 기본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를 전면에 내걸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항쟁 정신 계승을 위한 제도적 과제가 있다면. -지난 3월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 전문에 부마항쟁의 이념이 명시되는 등 역사적 의미를 올바로 각인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이에 더해 우선 항쟁 당시 자행된 인권 침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위해 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기간을 연장해야 한다. 국가로부터 인권을 침해받았음에도 숨죽이고 살았던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국가유공자로 지정하는 등의 보상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4대 민중항쟁으로서의 역사적 의의를 충분히 살릴 수 있도록 조치가 따라야 한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열린세상] 김정은과 ‘대중독재’/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열린세상] 김정은과 ‘대중독재’/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대중독재’는 한국에서 탄생한 개념이다. 임지현(서강대) 교수가 2003년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장일 때 동료 학자들과 20세기 근대 독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용어를 만들고 특징을 규정했다.근대독재는 군주독재나 전체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권력자가 폭력과 강제로 민중을 억압하고 지배했다는 흑백논리가 아닌 ‘폭력과 강제는 물의 표면에서 작동하는 현상일 뿐 대중의 동의와 자발적 동원 체제를 만들어 내는 다양하고 정교한 장치들이 물밑에 숨어서 작동한다’고 했다. 대중독재는 나치즘, 파시즘, 스탈린주의, 스페인의 프랑코이즘은 물론 중국의 문화혁명까지 두루 다루고 있지만, 주목적은 박정희 체제의 비판에 있었다. 조희연(현 서울시교육감) 교수가 펴낸 ‘동원된 근대화’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유신 이전까지 박정희 체제의 장기 집권과 그에 대한 폭넓은 대중의 지지와 참여, 근대화와 산업화의 성공을 비판하려면. 박근혜 정부의 몰락으로 지금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지만, 한국 사회에 긍정적 집단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의 ‘신화’를 전체주의에 넣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이 말한 대중독재는 아래로부터의 독재다. 대의민주주의나 의회민주주의가 아닌 대중의 직접 민주주의를 표방한다. 권력의 강압이나 임의적 선택이 아닌 대중의 강제다. 이 때문에 대중의 자발적 지지와 동원의 모습을 띠며, 동의의 정치를 추구하며, 근대화와 산업화의 성공을 통한 대중의 소원과 희망을 반영할 때 더 호소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고, 대중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란 호칭으로 산업 전사로 동원해 국가경제의 고도성장과 노동자들의 소득 향상을 달성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착취까지 사회적 양보가 받아들여졌다. 도시 노동자들만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산업화에서 소외됐던 농민들도 ‘잘살아 보자’며 새마을운동에 참여했다. 대중독재에서 이 모두는 자발적 동원이 아닌 강제동원이다. 이를 위해 박정희는 우상화한 개인숭배보다는 대중과 일상을 같이하고, 심지어 인생에 대한 대중의 태도까지 공유했다는 것이다. 대중독재는 무엇보다 유기적 공동체로서 ‘민족’을 강조하며 민족공동체란 소속감이 유지되는 한 체제에 대한 동의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나라처럼 단일 민족국가에서 민족은 국민이고 대중이다. 이 때문에 대중 참여는 곧 국민주권이자 민족주권의 행사이며, 대중의 지지와 자발적 동원이 때론 초법적 권력이 돼 불법을 합법으로 바꾸어 놓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 이 같은 정의와 해석이 타당한가, 아닌가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수많은 독재자를 포함시켰지만, 다분히 박정희 체제의 비판을 겨냥한 대중독재의 그림자가 30년이 지난 지금 북한의 김정은에게 어른거리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북한 인민(대중)은 물론 우리까지 놀라게 만드는 최근 그의 모습은 과거 전체주의에서의 김일성이나 김정일과는 분명 다르다. 북한 주민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서 북한 주민의 삶에 대한 관심, 남북 정상회담에서의 유연한 행동과 솔직한 표현, ‘민족공동체’를 강조하는 발언까지 모두 ‘대중독재’가 말하는 것들이다. 계산된 전략이든 아니든 그와 북한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우리 국민의 그에 대한 신뢰도가 77.5%까지 치솟았고, 보수층에서조차 72.9%를 기록한 것(MBC 4월 29일 조사)이 말해 준다. 나아가 그의 변신은 북한에서의 그의 권력을 더욱 강화, 안정시켜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남북 평화와 통일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도 알 수 없다. 한국의 진보사학자들이 규정한 대중독재는 과거 20세기 파시즘이나 박정희 개발독재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북한의 김정은에게만 그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말할 수 없다. 의회제를 부정하면서 대중 참여민주주의의 환상을 심어 주고, 대중의 열광과 갈채로 초법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는 사회주의든 민주주의든, 보수든 진보든 대중독재다.
  • 창원시, 18일 3·15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제39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

    창원시, 18일 3·15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제39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

    경남 창원시는 오는 18일 3·15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제39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을 개최한다고 12일 밝혔다. 올해 기념식은 ‘부마민주항쟁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꾸다’라는 슬로건 아래 식전행사와 기념식, 축하공연 등으로 진행된다. 기념식에는 부마민주항쟁 기념재단 송기인 이사장을 비롯한 전국민주화단체장, 김경수 경남지사, 허성무 창원시장, 이찬호 창원시의회 의장 등 기관 단체장과 시민 10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부마민주항쟁사 동영상 상영과 레이저 대북공연으로 당시 민주항쟁 함성을 되새기며 경과보고, 기념사, 축사 등이 이어진다.‘나도 잘못이 있고 너도 잘못이 있으니 서로 상처를 안아줘야 한다’는 부마민주항쟁 상징 조형물 의미를 담아 부마민주항쟁 조형물 대형퍼즐 완성하기 기념 퍼포먼스가 열린다. 지역합창단과 참석자 전원이 부마항쟁 찬가를 제창하고 환상적인 하모니를 자랑하는 팝페라 가수 아이엘이 축하공연을 선보인다.시는 부마민주항쟁 연계행사로 오는 21일 팔용산 걷기대회, 오는 27일 부마장승제 및 대중강연회, 부마민주 영화제(11월 3·4일), 부마음악제(12월 6일) 등 연말까지 다양한 행사를 열어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시민과 함께 재조명하는 자리를 이어갈 계획이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20일 유신 체제에 항거하는 학생시위가 발단이 돼 부산과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시민·학생들의 민주항쟁이다. 시는 부마민주항쟁은 유신독재 종식의 결정적 계기가 됐고 5월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의 초석이 됐으며 2016년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대장정의 토대가 되는 등 우리나라 민주발전에 큰 기여를 한 시민항쟁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밝혔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유신체제 반대 유죄’ 이재오 재심 청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문에 눈물”

    ‘유신체제 반대 유죄’ 이재오 재심 청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문에 눈물”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때 반공법 위반 유죄 선고“세월 많이 바뀌었으니 후대에 정의롭게 밝혀졌으면” 43년 전 반공법 위반 혐의로 붙잡혀 고문을 당한 뒤 유죄를 선고받았던 이재오 자유한국당 상임고문이 “한 시대에 정의롭지 못했다면 후대에 정의롭게 밝혀졌으면 좋겠다”며 재심 청구 사유를 밝혔다.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 박형준)는 18일 이 상임고문의 반공법 위반 등 혐의에 대한 재심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심문기일을 열었다. 지난 2015년 4월 심문기일이 열린 뒤 3년 5개월 만이다. 이 상임고문은 1973년 북한 사회과학연구원에서 발행된 책을 지인에게 넘겨준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 상임고문은 “알고 지내던 일본인 국비유학생이 우리 집에 책 보따리를 놔둔 걸 민주수호청년회 경기지부장이 여기저기 나눠줬다”면서 “당시 유신정권이 데모를 진압하기 위해 청년회 회장인 나를 배후로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당시 수사기관이 영장 없이 자신을 불법 구금하고 고문을 자행해 허위로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 상임고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해 아직도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면서 “매일 고문을 당해 무릎을 쓸 수가 없어서 교도관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재판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이 상임고문은 또 “마침 오늘 남북정상회담을 하는데 43년 전 유신체제 유지를 위해 정권이 무리수를 둬서 사람들을 집어넣고 고문과 감금 등 불법이 이뤄졌다”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해서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날 정도다. 참 억울하고 무죄가 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어 “이미 43년 전에 지나간 사건이지만 기록은 남는 거니까 재심을 청구했다”면서 “저 뿐만 아니라 시대상황이 그랬고 저보다 억울하게 잡혀간 사람도 많다. 43년이나 흘러서 세월이 많이 바뀌었으니 후대에 정의롭게 밝혀졌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이 상임고문은 지난 1964년 한일국교정상화 반대시위에 가담했다가 경찰서에 구류된 것을 시작으로 총 5번 구속됐다. 이 중 1976년 유신정권을 풍자하는 단막극을 연출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붙잡혔던 사건은 지난 2013년 재심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상임고문은 “이번 재심을 포함해 남은 사건들도 차례대로 재심을 청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심문 내용을 검토한 뒤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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