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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Out] ‘문화재지킴이’ 국가의 품격을 지키는 일/조상열 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연합회장

    [In&Out] ‘문화재지킴이’ 국가의 품격을 지키는 일/조상열 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연합회장

    ‘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연합회’(이하 한지연)가 지난 2월 출범하면서 문화재 보존 운동의 진일보가 시작됐다. 전국 40여개 문화재 보존 활동 단체들은 문화재지킴이 운동의 재도약을 위해 힘을 모으자고 결의했다. 문화재지킴이 운동은 1990년 민간이 자율적으로 시작한 민관 협력 문화재 보존 운동으로 2005년부터 문화재청이 지원하는 ‘1문화재 1지킴이 운동’으로 발전했고, 올해 11주년을 맞게 됐다. 현재 전국 각지에서 개인, 가족, 단체, 청소년, 기업 등 8만여명의 문화재지킴이가 활동하고 있다. 참여 인력으로 평가해 보면 훌륭한 민관 협력의 대표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이뤄지지 않는 것도 현실이다. 이 때문에 지킴이 활동의 취지에 부합해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전문적인 회원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다. 문화재지킴이 운동은 문화재 해설가 활동, 문화유산 교육, 문화유산 신탁 운동, ‘생생 문화재’ 프로그램, 문화재 돌봄 사업 등 다양한 시민 참여 프로그램으로 확산되면서 문화복지의 한 축이 되고 있다. 문화재 보존과 활용 분야에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고품격 문화관광 상품이 만들어지고 있는 만큼 문화재지킴이 운동도 정부 예산의 대폭적 증액 등 관계 당국의 지원이 절실한 실정이다. 문화융성의 핵심은 우수 전통문화 재발견 및 새로운 가치 창출이다. 전통문화에 기반한 국가 브랜드 개발, 한류 확대, 창조 산업 벨트 조성, 문화 향유 프로그램을 통한 세대 공감 등이 그것이다. 고품격 문화유산 대표 브랜드를 만들고 문화유산 국민 향유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발, 보급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문화재 예방 보존 관리체계를 고도화하고 문화재에 대한 국민 의식을 전환해야 한다. 그리고 문화유산 교육을 다양화해 역사 왜곡에 대처하고 국민 문화 향유권을 확대해야 하며 문화유산의 국제적 수준을 높이고 협력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 문화유산을 관광 자원화하는 콘텐츠 개발의 기술적·문화적 수준을 높여 나가야 한다. 문화재지킴이 운동을 기반으로 한 문화재 활용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지연이 바로 이런 문화재 시민운동의 풀뿌리 역할을 해 나갈 것이다. 먼저 문화재청과 연계된 여러 프로그램을 시민운동의 품으로 가져와야 한다. 문화재지킴이 조직을 재정비해 실질적 활동가들의 터전을 마련하고 지킴이 단체 간 네트워크를 강화해 나갈 것이다. 전문가 그룹이라 할 수 있는 문화재지킴이 지도사 양성, 자원봉사 활동 교육, 지킴이 전국대회, 학술포럼 행사 등을 통해 민간단체가 중심이 돼 좀 더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문화재지킴이 운동을 활성화해 나가야 한다. 효율적인 지킴이 사업을 위해서는 전국 문화재지킴이센터의 설립이 절실하다. 인프라를 구축해 전국 민간단체들이 교류, 소통하고 지킴이 교육과 학술포럼 등을 주관하면서 다채로운 문화재 보존 민간 공동체 사업을 펼쳐 나갈 ‘공유 마당’이 마련돼야 한다. 문화재를 제대로 알리고 시민들의 관심을 북돋우기 위해 문화재 전문 신문을 발행하고, 체계적인 문화재 운동을 위해 소셜네트워크와 온라인을 통한 전국적인 네트워크로 소통과 공감이 이뤄져야 한다. 문화유산을 관광 자원화하는 콘텐츠가 개발되는 단계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문화재지킴이 운동을 이끌어 가는 전문가와 젊은 인재들이 동참할 수 있는 문화 생태계가 마련돼야 한다. 문화재지킴이 운동은 ‘문화재 의병 운동’이라고도 한다. 나라가 어려웠을 때 정규군이 아닌 의병들이 전국에서 봉기해 나라를 지켜냈다. 이처럼 문화재지킴이 운동이 국가의 품격을 지켜내는 운동으로 승화되도록 국민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문화재 의병이 되어 주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 100주년 소록도 병원 “오늘만 같아라”

    총리 등 방문… 역사적 의미 기려 전남 고흥군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 및 제13회 한센인의 날 기념식이 17일 소록도병원 복합문화센터에서 열렸다. 한센인의 한과 피, 눈물의 역사를 기억하는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한센병 박물관 개관식도 함께 진행됐다. 기념식에는 5000명의 한센인과 황교안 국무총리, 이낙연 전남도지사, 양승조·황주홍 국회의원, 박병종 고흥군수, 소록도병원에서 40여년간 봉사한 뒤 11년 전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가 최근 소록도를 다시 찾은 명예 고흥군민인 마리안느 수녀 등이 참석했다. 황 총리는 치사에서 “새로 개관한 한센병 박물관이 소록도가 가진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 인권교육의 장으로서 온 세계에 생명과 사랑을 전하는 기념비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지사는 축사에서 “소록도를 국가정원으로 지정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할 필요가 있다”며 “중앙정부의 결단과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이 지사는 이어 “소록도는 한센인들의 피와 눈물이 배었기에 아프도록 아름답고, 마리안느 수녀님 등의 사랑과 땀이 스몄기에 눈부시게 아름답다”며 “‘세계의 소록도’로 가꾸자”고 호소했다. 전국에서 온 한센인과 가족들은 병원 앞 잔디밭에 모여 앉아 음식을 먹고 즐거운 담소를 나누면서 “소록도병원이 365일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염원도 전했다. 고흥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서울시의회 이성희 의원 “수유동 ‘근현대기념관’ 체험형 공간 되길”

    서울시의회 이성희 의원 “수유동 ‘근현대기념관’ 체험형 공간 되길”

    서울시의회 이성희 의원(새누리, 강북 2)은 2016년 5월 17일(화) 강북구 수유동의 ‘근현대사기념관’(서울 강북구 4.19로 114) 의 개관식에 축하와 함께 당부의 뜻을 밝혔다. ‘근현대사기념관’은 서울시가 조성‧운영비 전액을 시비를 투입해 조성했으며 운영은 강북구가 담당한다.(조성비 39억 원, 연간 운영비 2억8천만 원) 지하1층, 지상1층에 상설‧기획 전시실, 강의실, 열람실 등을 갖춘 연면적 총 951,33㎡ 규모의 전시‧체험 공간으로 마련됐다. 동학농민운동부터 4‧19혁명까지 우리 근·현대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유물과 관련자료 등 140여 점을 전시하고 시민교육강좌, 체험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북한산 순례길을 따라 자리 잡은 국립4‧19민주묘지와 순국선열묘역 등 역사문화유산들과 연결되는 ‘북한산 역사문화관광벨트’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될 예정이다. □이 의원은 “단순히 유물과 자료만 전시 해놓은 곳이 아닌 학생들과 시민들이 쉽게 찾아오고 배우고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기념관이 되길 바란다”며 당부의 뜻을 밝혔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살 빼려면 식이요법보다 운동 더 신경써야”(연구)

    “살 빼려면 식이요법보다 운동 더 신경써야”(연구)

    규칙적인 운동이 다이어트(식이요법)보다 비만은 물론 심혈관계 질환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더 크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플로리다애틀랜틱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들이 이끈 연구팀이 미국인과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규칙적인 운동 실태에 관한 통계 자료를 분석한 결과, 위와 같은 결론을 얻게 됐다고 밝혔다. 이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 운동을 충분하게 하고 있는 사람은 20% 안팎(남성 23%, 여성 18%)에 불과하며, 약 64%에 이르는 이들은 어떤 운동도 하지 않았다. 유럽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단 33%만이 권장 수준에 해당하는 운동을 했으며, 42%는 어떤 운동도 하지 않았다. 이번 연구에 공동저자로 참여한 찰스 헤네켄스 교수는 “규칙적인 운동이 만약 약이 된다고 한다면 아마 더 많은 사람이 하려고 할 것”이라면서 “체중 증가는 물론 중년에 과체중이나 비만이 되는 것은 심장마비나 뇌졸중, 제2형 당뇨병, 골관절염과 같은 질환뿐만 아니라 대장암과 같이 흔하지만 치명적인 암의 발병 위험을 높인다”고 설명했다. 또 연구팀은 규칙적인 운동이 체중 감량을 넘어 혈압과 콜레스테롤, 트리글리세리드(혈중 지방성분)를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당뇨병이나 심장마비, 뇌졸중, 대장암, 유방암, 전립선암 위험을 낮추고 관절염과 기분, 활력, 수면, 성생활을 개선하는 등 중요한 건강 효과를 준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규칙적인 운동이 위와 같이 중요한 모든 혜택을 갖고 있음에도 잘 하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해 연구팀은 규칙적인 운동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즉각적이고 장기적인 이점에 관한 정확한 지식이 제한돼 있어 우리가 주로 앉아있는 생활 습관에 빠지도록 내버려둔다고 말했다. 이런 가설은 어떤 운동도 전혀 하지 않는 42%의 유럽인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 자료가 그 이유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번 연구에 역시 공동저자로 참여한 스티븐 루이스 교수는 “규칙적인 운동과 열량 섭취, 그리고 운동 시 열량 소모의 역할에 관한 많은 오해가 있다”면서 “그 결과로, 열량을 제한하는 다이어트가 일반적인 운동보다 체중 조절에 더 실용적인 것으로 추천되고 있는데 이는 커다란 문제”라고 설명했다. 많은 미국인과 유럽인은 30대 이후부터 매년 0.5~1.5kg의 체중이 늘며, 55세가 될 때까지 그중 많은 사람이 13.5~22.5kg의 체중이 더 불어 과체중이 된다고 한다. 이런 전형적인 체중 증가는 또 운동하지 않는 생활 습관을 동반해 지방조직 질량의 증가와 무지방 신체질량의 감소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 헤네켄스 교수는 “대부분 사람이 열량 섭취를 제한하는 큰 노력으로 체중 감량을 유지하고 있다”면서 “따라서 오늘날 운동하지 않는 생활 습관은 최소한 비만의 원인이 되므로 운동은 다이어트만큼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를 통해 하루에 20분만이라도 활기차게 걸으면 일주일에 약 700칼로리를 소비할 수 있고 관상동맥성 심장질환 위험을 30~40%까지 줄이며, 이런 효과는 심지어 노인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연구팀은 심지어 노인과 심부전 환자들도 규칙적인 운동에 아령 들기와 같이 비교적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저항력 운동을 포함시켜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저항력 운동을 통해 무지방 신체질량이 유지되거나 증가되면 체중 조절에 상당한 추가적인 기여를 더해 운동을 하지 않고 쉬는 시간에도 열량 소비의 증가를 촉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루이스 교수는 “중년과 노년에게 저항력 운동이 갖는 일반적인 건강 혜택은 노화 관련 근육감소증을 예방하고 근육량 유지를 향상하며 골다공증과 관련한 골절이나 넘어짐, 신체장애, 사망 위험을 감소하는 등 많은 것이 있다”고 말했다. 운동 부족은 관상동맥성 심장질환과 대장암에서 각각 22%, 골다공증 관련 골절에서 18%, 당뇨병과 고혈압에서 각각 12%, 유방암에서 5%가 그 원인으로 여겨진다. 또한 운동은 미국에서 연간 약 240억 달러 또는 약 2.4%의 건강관리 비용을 절약하는 효과를 갖는다. 헤네켄스 교수는 “임상의들과 그 환자들은 규칙적인 운동이 삶의 질과 양을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면서 “활기차게 걷는 것과 같이 정기적인 유산소 운동은 물론 그에 더해 유익한 보조 수단으로 저항력 운동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높일 필요가 있다”면서 “마지막으로 체중 조절을 위한 규칙적인 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환자들을 교육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끝으로, 연구팀은 현재 심혈관계 질환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사망 원인이 되고 있으며 개발도상국들에서의 주된 인자는 비만 증가와 운동 감소라고 경고했다. 이번 연구결과는 미국 심장 저널(journal Cardiology) 최신호에 실렸다. 사진=ⓒ포토리아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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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1층은 상점·2층은 주거… ‘무지개떡 건축’의 탄생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1층은 상점·2층은 주거… ‘무지개떡 건축’의 탄생

    좋은 도시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나는 ‘무지개떡 건축’이 많아야 좋은 도시라고 답하고 싶다. ‘무지개떡 건축’이란 ‘중층 고밀도 주상복합 건축’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일단 ‘상가주택’으로 이해해도 큰 문제는 없다. 이런 유형의 건축은 가로를 활성화하여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그리고 일터와 집이 서로 가까이 있다는 의미인 직주근접(職住近接)을 통해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을 줄여준다. 나아가 옥상에 마당을 조성하면 도시 안에서도 경관을 즐기며 야외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도시건축의 범세계적 기본 유형인 것이 우연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한국 도시에서 이러한 유형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단일 용도를 갖는다. 주거면 주거, 상업이면 상업, 업무면 업무, 이런 식이다. 그 결과 한국 도시의 복합 지수는 매우 낮으며 이것은 다음 세대에게 부담을 줄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고민을 할 시점이 되었다. 그간 흥미로운 시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도시의 미래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줄 선례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무지개떡 건축’의 사례들을 발굴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관련 있는 해외 사례들도 등장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지난해 말에 펴낸 ‘무지개떡 건축, 회색 도시의 미래’에서 일부 소개했던 내용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보행자 중심의 도시, 직주근접, 옥상의 재발견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염두에 두고 이 연재를 접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도시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 한국 건축史 최대 실험, 그 시작은 ‘가게’였다 한국 최초의 무지개떡 건축은 무엇이었을까? 이 간단한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다. 당장 조선 시대만 해도 기록이나 유구가 부족한 형편이며, 시간을 거슬러 고려나 삼국시대로 올라가면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라면 상점과 주거가 연결된 유형이 있었을 것이라는 정도는 추측할 수 있다. 즉, 삶의 절실한 필요에 의해서 사는 곳이 곧 일터가 되는 그런 상황 말이다. ‘가내수공업’이라는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집안에 생산을 위한 공간이나 간단한 시설이 들어 있는 경우도 생겼다. 만들어진 물건은 장터에 나가 팔기도 했지만 거리에 면한 집의 한 구석에서 팔기도 했을 텐데, 이것이 가게라는 단어의 한 기원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주거가 딸린 가게는 가히 무지개떡 건축의 시원적 사례라고 할 만하다. 사실상 이러한 ‘상가주택 1.0’ 유형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종종 발견된다. 특히 여러 도시의 구도심에 가면 상점이나 식당의 안쪽에 주인의 가족들이 기거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만큼 역사가 오래고 생명력이 질긴 유형인 셈이다. 동네가 완전히 재개발된다면 모를까, 이런 집들은 의외로 세상의 변화에도 잘 버틴다. 박지원의 ‘양반전’, 김주영의 ‘객주’ 등 역사소설에서 등장하는 객주의 집, 즉 객주가(家) 또한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객주란 일종의 브로커인데 매매를 주선한 수수료를 받을 뿐 아니라 상인에 대한 숙박업, 화물의 보관 및 운반, 심지어 기본적인 금융 서비스도 제공했던 존재였다. 즉 객주가란 당시의 기준으로는 가히 복합건축의 결정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음식점으로 사용하는 인천 중구 소재 월아천 등이 현존하는 객주가의 하나며, 19세기 말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인 ‘넉넉한 객주’는 당시의 객주가의 모습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상업을 천하게 여기는 분위기에서 그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중세 유럽의 상인주택이나 일본의 마치야(町屋, 혹은 町家) 등 상업이 발달한 나라들에서 흔히 보는 본격적인 다층 상가주택은 아직 찾아볼 수 없었다. 기원전 세워진 로마의 배후 도시인 오스티아의 경우 1층은 상가고 그 위에 주거가 있는 대규모의 상가주택이 보편적인 유형이었는데, 이러한 사례에 비하면 한국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상가주택의 발전이 상당히 늦었다. 흥미로운 것은 규모나 형태는 다르더라도 이러한 복합적인 삶의 방식이 서서히 되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듣는 ‘소호’가 그 대표적인 예다. 특히 컴퓨터나 모바일 기기 등의 보급이 이런 현상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일터에서만 일하지 않는다. 주거는 다시 생산과 작업의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서서히 회복 중이다. 또한 이런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지고 있다. 상업 활동이 보편화되고 도시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런 현상들은 오히려 도시적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진다. 생존의 절박한 필요에서 시작된 직주근접이 오히려 도시적 삶의 매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 2층 한옥, 주거·생산의 공존 ‘소호’로 진화하다 서울 서촌의 옥인동. 지금은 주거와 상업이 혼재된 지역으로 서울의 새로운 관광지가 되었지만 한때 이곳은 장동 김씨와 파평 윤씨라는, 당대 세도가들의 세거지였다. 겸재 정선이 이곳에 살면서 주변 풍광을 그렸을 정도로 도성 안에서도 유난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옥인동이 그 남쪽의 누상동 및 누하동과 이루는 경계는 계곡을 따라 형성되어 있고 당연히 이를 따라 개울이 흐른다. 지금은 복개되어 그 존재를 알 수 없지만 서울시는 청계천처럼 언젠가 이 물길도 다시 햇빛을 보게 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인왕산 중턱의 수성동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이 개울이 통인시장 서쪽 입구 근처에서 동남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그 근처에 작은 2층 한옥 하나가 서 있다(자세히 보면 두 채지만 한 채는 심하게 변형되어 한옥으로 보이지 않는다). 1층에는 옷과 모자 등을 파는 패션 상점들이 있고 그 오른쪽에 작은 쪽문이 하나 있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주인이 2층에 기거한다고 한다. 별것 아닌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여기에는 흥미로운 사실 두 가지가 담겨 있다. 우선 2층 한옥의 존재 그 자체다. 2층 한옥은 개화기에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한옥으로서 서울의 경우 20세기 초반에 주로 운종가, 즉 현재의 종로 등 기존의 상업 가로변에 세워진 것이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대상지의 범위를 넓히면서 급기야 도심에서 비교적 떨어져 있는 옥인동 계곡에까지 2층 한옥 상가가 들어선 것이다. 이 건물의 건립 연대가 1940년대라고 하므로 이 과정에 수십년이 걸린 셈이다. 보문동, 삼선교, 북아현동 등 사대문 밖 지역에도 수많은 2층 한옥 상가가 들어섰다. 2층 한옥 상가의 출현은 관점에 따라서는 한국 건축사 최대의 사건 중 하나로 봐도 좋을 듯하다. 그 이전에도 육안상 다층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있었으나 주로 궁궐이나 사찰 등 일상적인 용도가 아니었고, 게다가 문루를 제외하고는 내부 공간은 단층으로 구성된 것이 대부분이었다(물론 덕수궁 석어당과 같은 예외는 있다). 일부 민가 건축에 2층으로 볼 수 있는 구조가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경우이기 때문에 보통 중층(重層) 구조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로 본격적인 2층 건물이 출현한 것이니 그 의미가 자못 크다. 또 다른 의미는 이것이야말로 의도적으로 계획된 최초의 본격적인 상가건축 유형이라는 것이다(위에서 이야기한 주거가 딸린 가게나 객주가 같은 것은 주거 건축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변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가로에 면한 2층 부분은 위아래 모두 상가로 사용되었고, 주거, 즉 살림집 부분은 그 뒤에 따로 전형적인 단층으로 딸려 있었던 점이 흥미롭다. 즉 주거와 상업이 공존하되, 수직적인 방식이 아니라 수평적인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 옥인동 2층 한옥 상가의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2층에 주거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건립 당시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고 후대의 개·보수에 의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당초 2층 한옥의 2층에는 주거가 들어가지 않았던 것일까? 여기에는 기술적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온돌 때문이었다. 주거가 들어가려면 온돌이 필수적인데 당시 기술로는 축열층이 수십㎝에 이르는 재래식 구들을 목구조의 2층에 올려놓을 수 없었다. 물론 이후 기술이 발달하여 현재와 같은 온수 혹은 전기 코일 방식 등이 개발되면서 드디어 주거와 상업은 처음으로 수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옥인동 2층 한옥 상가는 이러한 진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는 사례인 것이다. 이것은 정세건의 건양사에 의해서 주도된 주거용 도시 한옥의 대량 보급 및 진화에 필적하는, 한옥 근대화의 큰 흐름 중 하나다. 지금은 이런 기술이 보편화되어 은평 한옥마을 등 전국 곳곳에서 본격적인 2층 한옥의 시대가 다시 열리고 있다. # 유럽·日선 흔한 상가주택… 도시건축이 가야할 길 그러나 2층 한옥 상가와 1층 살림집의 조합이라는 유형은 곧 그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상업의 밀도가 높아지면 2층으로는 도저히 그 압력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복잡해지는 도심에서 주거와 상업이 수평적으로 공존하면 주거 공간의 질이 급격히 나빠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 바로 인사동, 관훈동, 낙원동, 청진동 등 종로변의 구도심 일대다. 이 일대에 있었던 수많은 2층 한옥 상가는 지금 거의 다 사라지고 없다. 예외적으로 남아 있는 것들도 외관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되어 있다. 특히 한때 주거 및 상업이 혼재되어 있던 지역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상주인구가 대폭 감소되어 있다. 1990년대 말 학생들과 함께 이 지역을 조사한 경험이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이발소, 상점 등 지역 거주민을 상대로 하는 상업 기능이 건물의 3, 4층에 올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이미 상주인구가 상당히 감소했으나 그나마 일부는 남아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임대비가 싼 상층부로 일반 도시 기능이 올라간 것이었다. 지금은 이마저도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인사동 일대는 완전히 상업화되어 대낮의 활기와 한밤중의 적막함이 공존하는, 서울의 대표적인 도심 공동화 지역이 되었다. 한때 2층 한옥 상가에 인접하여 살림집으로 사용되던 부분은 살던 사람들이 떠난 이후 마당을 유리로 덮은 한정식 집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2층이라는 낮은 밀도가 갖는 절대적인 한계, 그리고 주거와 상업 기능의 수평적 공존이 갖는 한계 등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한국에 5층 정도 규모로 주거와 상업이 수직적으로 공존하는 건축의 유형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면, 현재 구도심의 풍경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즉 한국은 근본적으로 밀도와 복합이란 측면에서 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에서 본격적인 경제 성장기를 맞이한 것이다. 이에 부응하는 새로운 건축 유형의 탄생은 전통적인 구법이나 개념으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다. 그것은 철과 유리, 그리고 콘크리트라는 신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아마도 한반도 최초였을, 전통적 방식을 응용한 다층 상가건축 실험은 지극히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두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2층 한옥 상가에 대한 부분은 문정기가 쓴 서울시립대학교의 석사 논문 참조.) ■ 건축가 황두진은 건축가 황두진은 건축 작업과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으며 현대 건축가지만 한옥 작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주요 작업으로는 ‘춘원당 한방병원 및 박물관’,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 ‘원 앤 원 빌딩’, ‘무카스 파주 사옥’, ‘통인시장 아트 게이트’ 등이 있다. 저서로는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건축가 김수근’, ‘한옥이 돌아왔다’ 등이 있고, 최근 ‘무지개떡 건축’을 펴냈다. 건축문화대상, 서울시건축상, 대한민국 공공디자인 대상,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 문화유산상 등을 수상했다.
  • [현장 행정] 역사와 걷는 봄밤의 축제

    [현장 행정] 역사와 걷는 봄밤의 축제

    “서구 문화가 한국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서울 정동에 자리잡았습니다. 최초의 서양공사관, 최초의 민간교육시설, 최초의 개신교회 등 정동에는 다양한 ‘최초의 문화’가 있죠. 서너 곳만 들러도 아주 의미 있는 시간으로 다가갈 겁니다.” 최창식 중구청장은 16일 서울시청에서 ‘정동야행 축제’(정동야행)의 의미를 이렇게 담았다. 정동야행은 근대 역사문화유산이 즐비한 정동을 밤늦은 시간에도 볼 수 있게 한 프로그램이다. 지난해 5월 첫선을 보인 뒤 10월에 두 번째로 진행된 축제는 사흘 동안 10만명이 다녀가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해 전국 9개 지역에 확산할 계획도 세웠다. 올해 첫 정동야행은 오는 27~28일 열린다. 올해는 관람부터 체험, 먹거리까지 밀도 있게 준비했다. 이틀 동안 덕수궁과 서울시립미술관,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중명전, 정동극장, 옛 러시아공사관 등 29곳이 밤 10시까지 문을 연다. 옛 미국공사관, 영국대사관, 캐나다대사관 등도 일부 개방한다. 웅장한 모습과 아름다운 건축미를 자랑하는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성공회성가수녀원의 아름다운 정원, 경운궁 양이재도 눈여겨볼 만하다. 영국대사관과 성공회성가수녀원은 18일까지 정동야행 홈페이지를 통해 관람 신청을 받는다. 공연도 풍성하다. 덕수궁 중화전에서는 27~28일 오후 7시 30분 ‘봄여름가을겨울’ 콘서트와 금난새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공연이 각각 열린다. 정동제일교회와 성공회성당에서 파이프오르간 연주가 펼쳐지고, 서울시립미술관 앞마당에서 그림자 인형극도 열린다. 구한말 신문물을 엿보는 ‘덜덜불 골목 체험’도 곳곳에 마련했다. 덜덜불은 1901년 덕수궁에 설치된 발전기다. 백열전구를 밝히려고 전기를 만들 때 덜덜거리며 요란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체험 시간에는 덜덜(꼬마등)을 만들고, 자가발전기의 원리도 배운다. 고종이 즐겼던 커피를 만드는 ‘가비의 향’, 당시 은행인 전환국에서 찍은 주화 제작 등 다양하게 준비했다. 정동야행 설명 책자에는 스탬프북을 넣었다. 야간개방 시설 도장을 7개 이상 찍으면 아트캘리그라피 기념품을 증정한다. 해설사와 함께하는 투어 코스에 참여하거나, 중구가 내세우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중구 스토리여행’으로 설명을 들으면서 둘러볼 수도 있다. 최 구청장은 “봄의 정동은 매우 아름답다. 근대문화유산이 몰려 있는 정동에서 밤늦도록 멋과 추억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기억하겠습니다, 광주 ‘5월 정신’

    5·18민주화운동 36돌 기념일 이틀 전인 16일 국립 5·18민주묘지엔 참배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광주 곳곳에선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열리는 등 추모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보수정권’ 8년째 진행 중인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이 커지는 가운데 각지에서 참배객이 몰리면서 5·18의 전국화에도 청신호가 되고 있다. 이날 5·18민주묘지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이달 들어 15만여명이 ‘오월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묘지를 찾았다. 전국 대학생들은 단체로 참배에 나서고 있다. 서울에서 온 김모(20·대학생)씨는 “학교 역사동아리에서 단체로 버스를 빌려 타고 묘지를 참배한 뒤 5·18 공원과 사적지 등을 둘러봤다”며 “전남대·금남로 등 선배들이 독재에 맞서 싸웠던 현장에 와 보니 책에서 접했던 5·18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광주시 곳곳에서는 5·18 역사 왜곡에 대한 학술대회와 음악회, 전시회 등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는 각종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오는 7월 31일까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5주년 및 개관 1주년 기념 기획전’을 연다. ‘진실의 주인’이란 주제로 1980년 광주시민들이 남긴 기록물을 통해 5·18민주화운동 이후 진실 규명 과정을 회고한다. 이날 오후엔 5·18 참상을 세계에 처음 알린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추모식이 5·18 구묘역에서 열렸다. 추모식에는 지난 15일 광주를 찾은 힌츠페터 가족과 5월 단체, 1980년 해직 언론인 등이 참석했다. 광주시는 특히 15~19일 1980년 광주 현장에서 취재를 했던 외신기자들을 초청해 5·18 역사를 재증언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이번에 초청된 외신기자는 미국의 브래들리 마틴(더 볼티모어 선)·노만 소프(아시아 월스트리트저널)·팀 셔록(저널 오브 커머스)·도널드 커크(시카고 트리뷴) 등 4명이다. 브래들리 마틴은 이날 “옛 전남도청, 광주YMCA 건물이 현대화되는 등 변화 속에서도 광주시민이 얼마나 용감하게 살았는지 느꼈다”며 소회를 털어놨다. 이들은 광주에 머무는 동안 대학생·시민과 미팅을 갖고 ‘1980년 5월의 광주,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를 주제로 기자회견을 열고 ‘광주의 하루’란 주제의 기사도 쓸 예정이다. 또 5·18민주광장에서 열리는 5·18민중항쟁기념 전야제와 5·18민주화운동기념식, 민주의 종 타종식에도 참여한다. 윤상원 열사 생가도 방문한다. 서구 쌍촌동 5·18기념문화관 전시실에서 5·18아카이브전 ‘5·18, 그 위대한 연대’ 전시회가 열린다. 17일에는 금남로 일원에서 전야제와 민주대행진, 주먹밥 나눔행사 등이 펼쳐진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도로 달리는 전기열차 ‘트램’ 슬로시티 가는 새로운 변화”

    “도로 달리는 전기열차 ‘트램’ 슬로시티 가는 새로운 변화”

    “대도시는 인구가 다 줄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현상이고, 슬로시티로 가야 합니다. 대전시가 트램으로 결정하니까 서울 위례 신도시를 포함해 수원, 성남 등 전국 10여개 도시가 하겠다고 해요. 정부도 오송에 트램 시험노선을 만들어 운행하고 있어요. 4·13 총선에서 ‘트램 공약’으로 당선된 국회의원이 5명입니다. 트램이 인기 폭발이죠. ” 권선택 대전시장은 지난 12일 대전시장실에서 서울신문과 단독 인터뷰한 자리에서 대전도시철도 2호선 건설 방식을 노면 전차인 트램으로 정한 덕분에 국가 산업정책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권 시장은 취임한 2014년 말 전임 시장의 고가 자기부상열차 운행 결정을 노면 전차 트램으로 정책을 변경하며 관련 사업자들이 반발하는 등 애를 먹었다. 그러나 진짜 고된 일은 이제부터다. 권 시장은 “‘도로에 기차는 다니지 못하게 한 도로법’ 등 관련법 6개를 개정해야 한다”고 했다. 권 시장은 또한 “대전에 대기업이 별로 없어 조선 해운 구조조정과 같은 어려운 일이 비켜 가니 정말 다행”이라면서 “중소산업과 서비스산업 중심인 대전은 상대적으로 실업률과 청년실업률이 낮다”고 자랑했다. 지난 4월 19대 국회에서 폐기될 뻔한 ‘도청이전특별법’을 가까스로 통과시켰는데 대전시 발전의 임무를 여야 국회의원과 협력해 진행한 덕분이다. 성과를 혼자 독차지하지 않고 나누는 것이 행정자치부 관료와 2번의 국회의원을 지낸 권 시장의 미덕이다. 권 시장은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지만, 광역단체 시장으로서 할 일은 소신 있게 하겠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고가에서 왜 지상철 트램으로 바꿨나. -서울 따라서 대전·대구·광주 1호선은 다 지하철로 했다. 요즘 정부가 돈이 없으니까 지하철을 건설한다고 하면 국비 보조를 안 한다. 전직 시장이 고가로 결정해 절차를 밟고 있었는데 내가 2014년 출마하면서 공약으로 트램을 내걸었고, 그해 말 지상철인 트램으로 바꿨다. 정책 변경으로 갈등이 심해 애를 먹었지만, 트램이 강점이 많다. 우선 건설 비용이 저렴하다. 고가의 3분의1이고, 지하철의 6분의1로 굉장히 싸다. 운영비도 전철의 40% 수준이다. 트램은 교통 약자에게도 매우 편리하다. 노상에서 쉽게 타고 쉽게 내릴 수 있다. 인구 감소와 노령화하는 현대 대도시 환경에 잘 맞는다. 고가는 도시가 고속 성장할 때 대량 수송에 맞는 교통수단이다. →다른 나라에 트램이 많은가. -대도시인 프랑스 파리, 독일 뮌헨에 있다. 세계 150여개 도시에서 400여개 노선이 운행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경전철 대부분이 트램이다. 안전성이 검증됐다. 지난달 독일 드레스덴을 방문했을 때 내가 트램을 직접 운전도 해 봤다. 파리는 교통사고가 40% 줄었고, 니스는 관광자원이 됐다. 자동차가 아닌 사람 중심의 교통수단이다. →대전 트램의 특징은. -유럽은 다 유가선이다. 도로에 전기선을 설치해 열차를 달리게 한다. 우리는 무가선이다. 배터리로 움직인다. 그 무가선 트램을 대한민국 철도기술연구원에서 개발했다. 전기차를 한국에서 개발했으니 정부도 보급의 책임이 있지 않겠나. 정부가 충북 오송에 1.5㎞짜리 무가 트램 철도를 깔고 시험운행하고 있다. →트램의 안전성은 어떤가. -시민들은 기차가 도로 위로 다니니까 불안하고 무섭다고 생각한다. 시속 300㎞인 고속철도(KTX)를 연상하는데, 도심을 달리는 트램은 시속 30㎞다. 안전하다. →언제 개통되나. -지난달 시범노선 2개를 결정했다. 유성온천역과 원골네거리를 잇는 2.4㎞와 동부네거리와 동부여성가족원 사이 2.7㎞ 구간이다. 시범노선 개통이 2020년이니, 본노선은 2021년 착공해 2025년 개통한다. 트램이 달리려면 법을 바꿔야 한다. 현재 도로법에 도로 위에는 기차는 안 되고 ‘자동차만’ 다닌다고 돼 있다. 그래서 관련법 6~7개를 개정해야 한다. 중앙정부가 처음에 굉장히 부정적이었는데 요즘은 동의하고 있다. 4·13 총선에서 당선된 전국 국회의원 5명도 트램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대전시장을 3번 해야 트램 개통을 보겠네요. -내가 시장으로 있을 때 기초를 만들어 두면 된다. →대전역 주변은 시골이고, 둔산 신도시는 서울 같다. 양극화 아닌가. -내 정치적 고향이 동구다. 동구에서 국회의원 2번이나 했지 않나. 그런 마음으로 동구와 중구 도시재생사업을 한다. 옛 충남도청에 시장 제2집무실을 뒀고, 도시재생본부도 거기서 일한다. 19대 국회에서 폐기될 뻔했던 도청이전특별법이 지난 4월 이상민 법사위원장과 권영진 대구시장 등과 합쳐서 잘됐다. 대전역세권 개발에도 2020년까지 1조 7334억원을 투입한다. 다음달 공고하고 9월에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한 뒤 내년 상반기에 착공할 계획이다. 대전역사 증축, 국립철도박물관 유치, 철도관사촌 복원 등 철도산업의 메카로 만들겠다. →옛 충남도청은 무엇으로 활용할 예정인가. -대전시민은 근대문화문화재인 충남도청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살릴 수 있는 문화예술창작복합단지를 요구하고 있다. 청년 창업공간, 예술인의 전시·판매공간에 호텔 등 상업지구가 융합된 복합시설이 필요하다. 도청 공무원이 1200명일 때처럼 은행동 주변 상인이 효과를 보려면 1000명은 상주해야 상권이 산다. →대전 도시 경쟁력은 뭔가. -대전이 생산 규모는 16위인데 소득 규모는 3위다. 78%가 서비스업이고, 연구개발(R&D)이 중심이다. 대기업은 별로 없는 덕분에 요즘은 구조조정을 안 해서 좋다. 조선 해운 이런 게 없지 않으냐. 대기업에 의존하면 다 망한다. 중견기업 중심의 강소도시가 목표다. 대만은 부강하지 않지만 잘사는 나라다. 국방산업을 연계시키려고 한다. 요즘 국방산업은 정보통신기술(ICT)이 전략의 핵심이다. 충남대 근처에 가 보면 많다. LIG넥스원도 기공을 했다. →대전산업단지가 도심에 있어 이미지가 나쁜 것 같은데. -1960~70년대 조성된 대전 최초 산업단지가 문제다. 도심에 걸맞지 않은 섬유산업 등 부적합 업종부터 솎아내고 있다. 2020년까지 단계적으로 추진한다. 5000억원이 드는데 돈을 끌어오려고 정부에 로비하고 있다. 국회의원도 동원한다. 이번 총선에 새누리당 3명, 더불어민주당 4명이 당선됐다. 시장은 여야를 떠나서 모두 친해야 한다. 이장우·정용기 새누리당 당선자하고도 친하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와는 자유선진당을 함께해 친하다. 일이 잘되려면 여야를 가리지 않고 협력하려고 한다. 공개석상에서 여야 국회의원에게 감사를 표한다. →대전시민과 소통을 어떻게 하나. -시민행복위원회를 지난해 3월 만들었다. 대전밖에 없는 기구다. 시민을 공모해 500명으로 구성했다. 경쟁률이 6대1이나 됐다. 범죄자 등 결격자만 빼고 남은 시민 중 무작위로 추첨했다. 연령대별로 구성했고, 여성은 40%다. 전체 모임은 1년에 한 번 하고, 분과모임으로 한다. 현장도 많이 다닌다. 시장이 가는 곳이 바로 현장 시장실 아닌가. →시민행복위원회에서 나온 것을 정책에 반영한 것이 있나. -세 건을 했다. 옛 충남도청을 어떻게 활용할 거냐와 둘째 복지 기준에 대한 세부사업 우선순위를 선정했다. 소득과 거주지 등 환경과 관계없이 대전시민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최소한의 복지 기준선을 정했다. 이 기준에 따라 공립 어린이집을 확충하고 저소득 주민 난방비를 지원했다. 세 번째는 갑천친수구역 조성사업을 민관검토위원회를 만들어 해결했다. →관료·국회의원에 시장까지 하고 있다. -청와대 비서실 인사비서관으로 공직을 미완으로 매듭지었고, 정치를 하면서 단체장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로드맵상에 단체장이 있었다. →재임 중에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대전은 10년에 한 번씩 발전의 계기가 있었다. 1980년대 대덕특구로 부흥했고, 90년대 엑스포가 열렸다. 그 후로 별다른 이슈와 먹거리가 없다. 그래도 시장 정책의 우선순위 1번이 청년취업·창업이었다. 청년인력관리센터도 대전이 제일 먼저 만들었다. 대학생을 취업시키는 것을 원스톱으로 하고 있다. 6개월 만에 1000명을 취업시켰다. 대전이 전국에서 청년실업률이 최고 낮다. 정리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男고령 임신 위험…40세 넘으면 아이 자폐증 6배↑”(연구)

    “男고령 임신 위험…40세 넘으면 아이 자폐증 6배↑”(연구)

    건강한 아이 아빠를 꿈꾸는 남성이라면 40세가 되기 전에 아이를 갖는 것이 좋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조지타운 대학이 이끈 연구팀은 남성의 나이와 생활 습관이 자녀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여러 연구를 검토한 결과 위와 같은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고령 임신은 여성에게만 해당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이제 남성도 임신 계획이 있다면 몸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된다는 것이다. 연구팀이 검토한 한 연구에서는 40세 이상 남성의 아이가 30세 이하 남성의 아이보다 자폐증이 생길 위험이 거의 6배나 높은 것을 발견했다. 이는 남성도 나이가 들게 되면 생식 세포인 정자에 손상이 생길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려스럽게도 이런 부정적인 영향은 자식뿐만 아니라 손주 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또한 이번 검토 연구에서는 술을 많이 마시는 남성일수록 태어날 자녀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도 확인됐다. 예를 들어, 아이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어머니가 술을 마신적이 없는 경우에도 아이에게서 ‘태아 알코올 스펙트럼 장애’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의력 장애나 과잉 행동 장애, 운동 기능 감소 등을 일으킬 수 있다. 이번 검토 연구를 이끈 조안나 키틀린스카 박사는 “이 장애를 가진 어린이 75%가 술을 마시는 아버지를 두고 있어 부모의 알코올 섭취가 자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또한 이 연구는 부모의 알코올 섭취가 자녀의 더 작은 뇌와 더 낮은 지능과 연관성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는 부모의 흡연으로도 손상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이번 연구는 남성의 비만이 다음 세대에 당뇨병이나 뇌종양과도 연관성이 있으며 부모의 스트레스는 자녀의 행동 문제와 연관성이 있다는 연구들을 강조했다. 영국 쉐필드 대학의 생식 전문가인 앨런 퍼시 박사는 “건강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40세가 되기 전에 아이를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 나이를 넘기면 일반적으로 임신 성공률이 떨어진다”면서 “심지어 배우자가 한참 어려도 유산할 가능성이 높고 태어난 아이에게서는 정신분열증이나 자폐증, 선천적 결손증 등 질환이 생길 확률이 현저하게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다른 전문가들은 나이 든 남성에게서 태어난 거의 모든 아이가 건강해 그런 자격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UCL)의 아동건강 전문가인 알라스테어 서트클리프 교수는 “나이 든 아버지의 이런 문제점은 더 침착하고 더 경제적으로 형편이 좋은 장점으로 상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영국출산사회(British Fertility Society)의 회장인 아담 발렌 교수는 “젊은 사람들은 그런 영향이 불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알고 있어야 한다”면서 “따라서 젊은 부부가 경력 단절 없이 더 건강할 때 자녀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결과는 ‘미국 줄기세포 저널’(American Journal of Stem Cells) 최신호에 실렸다. 사진=ⓒ포토리아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고종이 총애한 ‘덜덜불’ 들어봤나? 늦은 봄밤 역사를 체험하는 ‘정동야행

    “서구 문화가 한국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서울 정동에 자리잡았습니다. 최초의 서양공사관, 최초의 민간교육시설, 최초의 개신교회 등 정동에는 다양한 ‘최초의 문화’가 있죠. 서너 곳만 들러도 아주 의미 있는 시간으로 다가갈 겁니다.” 최창식 서울 중구청장은 16일 서울시청에서 ‘정동야행 축제’(정동야행)의 의미를 이렇게 담았다. 정동야행은 근대 역사문화유산이 즐비한 정동을 밤 늦은 시간에도 볼 수 있게 한 프로그램이다. 지난해 5월 첫선을 보인 뒤 10월에 두 번째로 진행된 축제에서는 사흘동안 10만 명이 다녀가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해 전국 9개 지역에 확산할 계획도 세웠다. 올해 첫 정동야행은 오는 27~28일 열린다. 올해는 관람부터 체험, 먹거리까지 밀도 있게 준비했다. 이틀 동안 덕수궁과 서울시립미술관,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중명전, 정동극장, 구 러시아공사관 등 29곳이 밤 10시까지 문을 연다. 옛 미국공사관, 영국대사관, 캐나다대사관 등도 일부 개방한다. 웅장한 모습과 아름다운 건축미를 자랑하는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성공회성가수녀원의 아름다운 정원, 경운궁 양이재도 눈여겨 볼만 하다. 영국대사관과 성공회성가수녀원은 18일까지 정동야행 홈페이지를 통해 관람 신청을 받는다. 공연도 풍성하다. 덕수궁 중화전에서는 27~28일 오후 7시 30분 ‘봄여름가을겨울’ 콘서트와 금난새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공연이 각각 열린다. 정동제일교회와 성공회성당에서 파이프오르간 연주가 펼쳐지고, 서울시립미술관 앞마당에서 그림자 인형극도 열린다. 구한말 신문물을 엿보는 ‘덜덜불 골목 체험’도 곳곳에 마련했다. 덜덜불은 1901년 덕수궁에 설치된 발전기다. 백열전구를 밝히려고 전기를 만들때 덜덜거리며 요란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체험 시간에는 덜덜(꼬마등)을 만들고, 자가발전기의 원리도 배운다. 고종이 즐겼던 커피를 만드는 ‘가비의 향’, 당시 은행인 전환국에서 찍은 주화 제작 등 다양하게 준비했다. 정동야행 설명 책자에는 스탬프북을 넣었다. 야간개방 시설 도장을 7개 이상 찍으면 아트캘리그라피 기념품을 증정한다. 해설사와 함께하는 투어코스에 참여하거나, 중구가 내세우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중구 스토리여행’으로 설명을 들으면서 둘러볼 수도 있다. 최 구청장은 “봄의 정동은 매우 아름답다. 근대문화유산이 몰려있는 정동에서 밤 늦도록 멋과 추억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함혜리 기자의 미술관 기행]르네상스 회화 걸작, 다 빈치 ‘최후의 만찬’ 을 만나다

    [함혜리 기자의 미술관 기행]르네상스 회화 걸작, 다 빈치 ‘최후의 만찬’ 을 만나다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Chiesa di Santa Maria delle Grazie) 르네상스 회화, 아니 서양 회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그림을 꼽으라면 아마도 이 그림이 아닐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 1452~1519)의 ‘최후의 만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나누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외에도 최후의 만찬을 그린 화가들은 많지만 이 작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 르네상스의 전성기는 이 작품과 함께 시작됐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작품이다. 작품은 500년 전 탄생 순간부터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며 수많은 모사의 대상이 됐다. 20세기 들어서도 앤디워홀을 비롯해 많은 팝아티스트들이 이미지를 차용해 패러디해 쓰기도 했다.  책이나 프린트물 등을 통해 숱하게 보아 와서 마치 실제를 본 듯 착각할 정도로 낯익은 이미지이지만 실상 이 그림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안다고 해도 시간이 빠듯한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이 작품을 보기가 간단치 않다. 수개월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하고, 만약에 운이 좋아서 당일 현장에서 입장권을 구하더라도 작품 앞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15분으로 정해져 있다. 그래도 이런 어려움을 감내하고 찾을만한 가치는 차고도 넘친다. 500년 전 천재 거장이 심혈을 기울여 남긴 걸작이 주는 감동은 평생을 두고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니 이만하면 충분한 보상이 아니겠나.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 대성당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Chiesa di Santa Maria delle Grazie)의 부속 건물 벽에 그려져 있다. 도미니코회 수도회에 속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 옆으로 ‘체나콜로(Cenacolo)’라고 쓰여진 곳이 입구다. 체나콜로는 수도원의 식당, 최후의 만찬을 그린 그림,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을 한 식당을 가리킨다. 15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이라는 주제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수도원 식당을 장식하는 단골 소재로 등장했다. 수도원 식당에 걸린 ‘최후의 만찬’ 그림은 식사를 묵상의 연장으로 만든다는 기대에서 벽에 실물크기로 거대하게 그리곤 했다. 다빈치가 그의 후원자였던 밀라노 공국의 로도비코 스포르차의 요청으로 1494년부터 1498년까지 그린 최후의 만찬은 지금까지 총 일곱 차례에 걸친 복원 작업을 거쳐 원래의 색을 되찾아 전 세계의 예술 애호가들을 맞이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1980년 이 작품이 소장된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과 함께 이 작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이곳을 찾았던 날은 운이 무척 좋아던지 당일 입장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성당을 찬찬히 둘러본 뒤 티켓에 적힌 시간에 맞춰 전시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신호에 따라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뒤의 문이 자동으로 닫히고 드디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높이 벽 위에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앉은 프레스코화가 눈에 들어왔다. 걸작의 아우라에 심장이 쿵 멎는 것 같았다.  작은 프린트 물에 익숙해서인지 회벽에 유채와 템페라로 그린 작품(세로 460cm, 가로 910㎝)은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 큰 것이 인상적이었다. 숭고한 주제를 다루는 방식, 면밀하게 연구된 원근법의 표현, 해부학과 골상학에 입각한 인물의 묘사, 색조의 조화, 풍부한 상징성과 생생한 서사, 우아한 선과 동작의 표현 등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다. 복원 작업 이전의 상태를 가늠할 수 없지만 고미술품 복원 분야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이탈리아에서도 최고의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인 결과는 대단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쭈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마태복음 26장 21~23절)  다 빈치는 바로 이 순간을 표현하고자 했다.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1419~1457)는 다빈치보다 50년 전에 피렌체의 산타 아폴로니아 수도원 식당에 프레스코화 ‘최후의 만찬’을 남겼다. 원근법 효과나 인물들의 극적인 표적이 인상적인 이 그림은 많은 프레스코화들이 그랬듯이 회벽으로 덮였다가 1860년 수도회가 해산된 뒤 흰색 도료를 제거하면서 재발견됐다. 카스타뇨의 그림에서 예수와 제자들은 식탁 한편에 일렬로 앉아있고 유다 한 사람만이 건너편에 앉았다. 이는 예수가 말한 배신자가 유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장치로 당시 화가들이 채택하던 전형적인 구도였다. 피렌체에서 화가활동을 시작한 다빈치도 분명 이 프레스코화를 보고 많은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스타뇨와는 다른 방식으로 주제를 표현했다.  다 빈치는 과감하게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나란히 앉혔다. 그가 표현하고 했던 것은 제자들이 일으킨 마음의 동요였고 전체 화면의 조형성이었다. 다 빈치는 열두제자 무리에 유다를 포함시켜 3명씩 4개의 무리로 인물을 배치시킨 뒤 제자들의 동요를 놀라움, 두려움, 사랑, 고뇌, 분노로 표현했다. 유다는 멈칫하며 겁을 먹은 듯한 표정으로 오른 손은 예수를 팔아넘기고 받은 돈주머니를 쥔채 오른 손으로 빵을 집으려 하고 있다. 곧 배신할 유다를 비롯해 의심이 많은 베드로가 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은 예수가 체포될 때 로마 병사의 귀를 자를 것임을 암시하고 있으며 테이블 위의 물건들도 많은 일들을 상징한다. 3개의 창문, 4개의 무리를 이룬 12제자 등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4 복음서, 예루살렘의 12문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이전의 최후의 만찬은 평면성이 강조되지만 다빈치는 수도원 식당이 확장되게 보이도록 중앙 투시도법을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다. 화면 안쪽으로 후퇴하는 천장과 측벽의 선들이 모두 중앙에 앉아있는 그리스도의 머리로 집중하면서 강조했다. 천장의 바둑판 무늬는 관람자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축소되어 화면의 공간감과 입체감을 생생하게 부각시킨다.  다빈치는 이 그림을 그리는데 총 4년의 세월을 꼬박 바쳤다. 밀라노의 거리와 시장을 돌아다니며 모델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았고 그림 속 인물의 동작과 손의 표현을 연구했다. 그는 작품의 수정이 가능하고 색상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템페라와 기름을 섞어 쓰는 실험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그림은 생동감이 넘치고 인간적인 표현이 가능해 졌지만 식당의 습기 때문에 안료가 쉽게 벗져지는 치명적인 결함을 낳았다. 완성된 당시부터 이 주제에서는 단연 최고의 걸작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작품은 세월과 숱한 전쟁을 견디면서 심하게 손상됐다. 마지막 복원은 1978년부터 1999년까지 21년간 이뤄졌다. 워낙 손상이 심해서 원래 색깔을 알아보기도 힘들었던 것을 화가가 완성 직후에 베껴 그린 그림이 온전히 남아있어 이를 기준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이런 연유로 일부 학자들은 복원화가들이 80%,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20%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 근처 빈치에서 테어나 피렌체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왜 그는 밀라노에 이 걸작을 남기게 됐을까? 밀라노는 14세기 말 비스콘티 공작 하에서 막대한 번영을 누려 15세기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가 됐다. 비스콘티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였던 필리포 마리아의 후계권을 둘러싼 전투에서 용병 대장 프란체스코 스포르차(1401~1466)가 승리해 권좌에 올랐다. 그의 대를 이은 로도비코 스포르차(1451~1508)는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실력 있는 장인과 예술가들을 고용해 도시를 건설하고 궁정을 장식하도록 했다. 인체의 구성과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해부학적 구조와 근육조직을 분석하고 인체 기관의 이상적인 비례에 관해 연구했으며 천체와 우주를 연구하고, 건축을 설계하고, 악기를 연주하는데도 뛰어났던 만능 천재 다빈치는 1492년 스포르차에게 편지를 보냈다.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이주해 스포르차를 위해 자신의 재능을 바치고 싶다며 건물을 설계할 수 있으며 조각가이자 화가로 훈련받았고 공병학에도 재능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로도비코는 레오나르도를 밀라노로 불러 아버지인 프란체스코의 청동 기마상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기마상을 위해 주문했던 청동이 대포 만드는 데 쓰이게 되는 바람에 레오나르도는 결국 청동 주물을 완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궁정 미술가로 궁정에서 열리는 가면극의 의상과 무대 장치를 설계하고 조신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로도비코의 신임을 얻었다.  로도비코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을 확장해 스포르차 가문의 영묘를 만들면서 레오나르도에게 수도원 식당에 전통적으로 수도원 식당을 장식하는 단골 주제였던 ‘최후의 만찬’을 그리도록 주문했다. 로도비코의 통치는 ‘최후의 만찬’이 완성된 이듬 해(1499년) 프랑스의 밀라노 침공으로 막을 내리고 궁정은 해산됐다. 화려한 삶을 살았고 너무나 많은 호기심과 재능을 지녔던 레오나르도의 말년은 어땠을까. 피렌체로 돌아가 있던 그에게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중부 프랑스의 루아르지역에 아름다운 성과 많은 연금을 제공했다. 그는 프랑스로 가 3년간 클로뤼세 성에서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1519년 생을 마감했다. 왕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항상 지니고 다니던 그림 ‘모나리자’를 왕에게 기증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벽에 그려져 있는 곳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벽에 그려져 있는 곳

    르네상스 회화, 아니 서양 회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그림을 꼽으라면 아마도 이 그림이 아닐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 1452~1519)의 ‘최후의 만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나누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외에도 최후의 만찬을 그린 화가들은 많지만 이 작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 르네상스의 전성기는 이 작품과 함께 시작됐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작품이다. 작품은 500년 전 탄생 순간부터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며 수많은 모사의 대상이 됐다. 20세기 들어서도 앤디워홀을 비롯해 많은 팝아티스트들이 이미지를 차용해 패러디해 쓰기도 했다.  책이나 프린트물 등을 통해 숱하게 보아 와서 마치 실제를 본 듯 착각할 정도로 낯익은 이미지이지만 실상 이 그림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안다고 해도 시간이 빠듯한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이 작품을 보기가 간단치 않다. 수개월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하고, 만약에 운이 좋아서 당일 현장에서 입장권을 구하더라도 작품 앞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15분으로 정해져 있다. 그래도 이런 어려움을 감내하고 찾을만한 가치는 차고도 넘친다. 500년 전 천재 거장이 심혈을 기울여 남긴 걸작이 주는 감동은 평생을 두고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니 이만하면 충분한 보상이 아니겠나.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 대성당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Chiesa di Santa Maria delle Grazie)의 부속 건물 벽에 그려져 있다. 도미니코회 수도회에 속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 옆으로 ‘체나콜로(Cenacolo)’라고 쓰여진 곳이 입구다. 체나콜로는 수도원의 식당, 최후의 만찬을 그린 그림,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을 한 식당을 가리킨다. 15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이라는 주제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수도원 식당을 장식하는 단골 소재로 등장했다. 수도원 식당에 걸린 ‘최후의 만찬’ 그림은 식사를 묵상의 연장으로 만든다는 기대에서 벽에 실물크기로 거대하게 그리곤 했다.  다빈치가 그의 후원자였던 밀라노 공국의 로도비코 스포르차의 요청으로 1494년부터 1498년까지 그린 최후의 만찬은 지금까지 총 일곱 차례에 걸친 복원 작업을 거쳐 원래의 색을 되찾아 전 세계의 예술 애호가들을 맞이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1980년 이 작품이 소장된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과 함께 이 작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이곳을 찾았던 날은 운이 무척 좋아던지 당일 입장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성당을 찬찬히 둘러본 뒤 티켓에 적힌 시간에 맞춰 전시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신호에 따라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뒤의 문이 자동으로 닫히고 드디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높이 벽 위에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앉은 프레스코화가 눈에 들어왔다. 걸작의 아우라에 심장이 쿵 멎는 것 같았다.  작은 프린트 물에 익숙해서인지 회벽에 유채와 템페라로 그린 작품(세로 460cm, 가로 910㎝)은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 큰 것이 인상적이었다. 숭고한 주제를 다루는 방식, 면밀하게 연구된 원근법의 표현, 해부학과 골상학에 입각한 인물의 묘사, 색조의 조화, 풍부한 상징성과 생생한 서사, 우아한 선과 동작의 표현 등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다. 복원 작업 이전의 상태를 가늠할 수 없지만 고미술품 복원 분야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이탈리아에서도 최고의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인 결과는 대단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쭈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마태복음 26장 21~23절) 다 빈치는 바로 이 순간을 표현하고자 했다.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1419~1457)는 다빈치보다 50년 전에 피렌체의 산타 아폴로니아 수도원 식당에 프레스코화 ‘최후의 만찬’을 남겼다. 원근법 효과나 인물들의 극적인 표적이 인상적인 이 그림은 많은 프레스코화들이 그랬듯이 회벽으로 덮였다가 1860년 수도회가 해산된 뒤 흰색 도료를 제거하면서 재발견됐다. 카스타뇨의 그림에서 예수와 제자들은 식탁 한편에 일렬로 앉아있고 유다 한 사람만이 건너편에 앉았다. 이는 예수가 말한 배신자가 유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장치로 당시 화가들이 채택하던 전형적인 구도였다. 피렌체에서 화가활동을 시작한 다빈치도 분명 이 프레스코화를 보고 많은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스타뇨와는 다른 방식으로 주제를 표현했다.    다 빈치는 과감하게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나란히 앉혔다. 그가 표현하고 했던 것은 제자들이 일으킨 마음의 동요였고 전체 화면의 조형성이었다. 다 빈치는 열두제자 무리에 유다를 포함시켜 3명씩 4개의 무리로 인물을 배치시킨 뒤 제자들의 동요를 놀라움, 두려움, 사랑, 고뇌, 분노로 표현했다. 유다는 멈칫하며 겁을 먹은 듯한 표정으로 오른 손은 예수를 팔아넘기고 받은 돈주머니를 쥔채 오른 손으로 빵을 집으려 하고 있다. 곧 배신할 유다를 비롯해 의심이 많은 베드로가 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은 예수가 체포될 때 로마 병사의 귀를 자를 것임을 암시하고 있으며 테이블 위의 물건들도 많은 일들을 상징한다. 3개의 창문, 4개의 무리를 이룬 12제자 등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4 복음서, 예루살렘의 12문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이전의 최후의 만찬은 평면성이 강조되지만 다빈치는 수도원 식당이 확장되게 보이도록 중앙 투시도법을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다. 화면 안쪽으로 후퇴하는 천장과 측벽의 선들이 모두 중앙에 앉아있는 그리스도의 머리로 집중하면서 강조했다. 천장의 바둑판 무늬는 관람자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축소되어 화면의 공간감과 입체감을 생생하게 부각시킨다.  다빈치는 이 그림을 그리는데 총 4년의 세월을 꼬박 바쳤다. 밀라노의 거리와 시장을 돌아다니며 모델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았고 그림 속 인물의 동작과 손의 표현을 연구했다. 그는 작품의 수정이 가능하고 색상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템페라와 기름을 섞어 쓰는 실험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그림은 생동감이 넘치고 인간적인 표현이 가능해 졌지만 식당의 습기 때문에 안료가 쉽게 벗져지는 치명적인 결함을 낳았다. 완성된 당시부터 이 주제에서는 단연 최고의 걸작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작품은 세월과 숱한 전쟁을 견디면서 심하게 손상됐다. 마지막 복원은 1978년부터 1999년까지 21년간 이뤄졌다. 워낙 손상이 심해서 원래 색깔을 알아보기도 힘들었던 것을 화가가 완성 직후에 베껴 그린 그림이 온전히 남아있어 이를 기준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이런 연유로 일부 학자들은 복원화가들이 80%,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20%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 근처 빈치에서 테어나 피렌체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왜 그는 밀라노에 이 걸작을 남기게 됐을까? 밀라노는 14세기 말 비스콘티 공작 하에서 막대한 번영을 누려 15세기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가 됐다. 비스콘티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였던 필리포 마리아의 후계권을 둘러싼 전투에서 용병 대장 프란체스코 스포르차(1401~1466)가 승리해 권좌에 올랐다. 그의 대를 이은 로도비코 스포르차(1451~1508)는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실력 있는 장인과 예술가들을 고용해 도시를 건설하고 궁정을 장식하도록 했다. 인체의 구성과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해부학적 구조와 근육조직을 분석하고 인체 기관의 이상적인 비례에 관해 연구했으며 천체와 우주를 연구하고, 건축을 설계하고, 악기를 연주하는데도 뛰어났던 만능 천재 다빈치는 1492년 스포르차에게 편지를 보냈다.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이주해 스포르차를 위해 자신의 재능을 바치고 싶다며 건물을 설계할 수 있으며 조각가이자 화가로 훈련받았고 공병학에도 재능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로도비코는 레오나르도를 밀라노로 불러 아버지인 프란체스코의 청동 기마상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기마상을 위해 주문했던 청동이 대포 만드는 데 쓰이게 되는 바람에 레오나르도는 결국 청동 주물을 완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궁정 미술가로 궁정에서 열리는 가면극의 의상과 무대 장치를 설계하고 조신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로도비코의 신임을 얻었다.  로도비코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을 확장해 스포르차 가문의 영묘를 만들면서 레오나르도에게 수도원 식당에 전통적으로 수도원 식당을 장식하는 단골 주제였던 ‘최후의 만찬’을 그리도록 주문했다. 로도비코의 통치는 ‘최후의 만찬’이 완성된 이듬 해(1499년) 프랑스의 밀라노 침공으로 막을 내리고 궁정은 해산됐다. 화려한 삶을 살았고 너무나 많은 호기심과 재능을 지녔던 레오나르도의 말년은 어땠을까. 피렌체로 돌아가 있던 그에게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중부 프랑스의 루아르지역에 아름다운 성과 많은 연금을 제공했다. 그는 프랑스로 가 3년간 클로뤼세 성에서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1519년 생을 마감했다. 왕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항상 지니고 다니던 그림 ‘모나리자’를 왕에게 기증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강력한 왕권의 상징 관음보살? 민초엔 혁명 지도자 미륵보살!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강력한 왕권의 상징 관음보살? 민초엔 혁명 지도자 미륵보살!

    논산(山)이라는 땅이름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논란도 없지 않다. 백제시대에도 충남 논산 일대는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라 불렀다. ‘삼국사기’에는 황산지원(黃山之原),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황산지야(黃山之野)라는 표현이 보인다. 곧 ‘황산벌’이다. 삼국통일전쟁의 마지막 격전지이자, 후삼국통일전쟁의 마지막 격전지다. 황산(黃山)이 노랗다는 뜻이 아니라 넓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해석이 가장 그럴듯하게 들린다. 놀뫼라는 순수한 우리말 땅이름을 한자식 표현으로 고치는 과정에서 ‘누를 황(黃)’을 훈차(訓借)한 결과 황산이 됐다는 것이다. 훈차란 한자의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이다. 같은 원리로 논산은 놀뫼를 음차(音借)해서 만들어진 지명이라는 주장이다. 음차는 한자의 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이다. ●38년 걸쳐 만든 높이 18.2m 고려 석불 실제로 현지에서는 논산의 우리말 이름이 놀뫼라는 것을 거의 정설로 받아들인다. 놀뫼유치원에 놀뫼아파트, 놀뫼새마을금고, 놀뫼신문까지 폭넓게 쓰이고 있다. 놀뫼가 넓은 벌판을 뜻한다는 것은 논산에 가보면 깨닫게 된다. 그 넓은 벌판 여기저기에 백제장수 계백의 무덤과 백제군사박물관, 후백제왕 견훤의 무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기념으로 세운 개태사가 흩어져 있다. 관촉사는 이 황산벌이 내려다보이는 충남 논산시 은진면 반야산 중턱에 있다. 관촉사라면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는 돌부처로 더욱 유명한 절이다. 높이 18.2m의 고려시대 거대불상은 실제로는 관음보살이지만 오래전부터 미륵불로 굳게 믿어졌다. 지금도 석불을 배례하는 전각에는 ‘미륵전’이라는 현판이 내걸려 있으니 이 돌부처가 장차 세상을 구원할 미륵이라는 확신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륵·관음 논쟁… 도상적으론 관음 특징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유산이라면 글자 그대로 문화적 유산이다. 하지만 그것이 꼭 문화적인 이유로 이뤄졌는지는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대표적인 조선시대 문화유산인 경복궁과 숭례문 같은 궁궐과 한양성곽의 각종 구조물은 문화적 이유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은진미륵 또한 종교적 이유에서만 조성된 것은 아니다. 고려 같은 불교국가에서 대형 불사(佛事)는 너무나도 당연히 뚜렷한 목적이 있는 정치 행위였다. 은진미륵은 그동안 불상의 존명(尊名)을 둘러싼 논란이 적지 않았다. 미륵보살이냐, 관음보살이냐 하는 논쟁이었다. 그런데 은진미륵은 미술사학자들이 잘 쓰는 표현대로 관음보살의 도상적 특징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갖추고 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이마에 아미타불의 모습인 화불(化佛)이 새겨졌고, 손에는 연꽃가지를 들고 있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둘 다 관음보살을 나타내는 대표적 특징이다. 그럼에도 미륵이라는 전칭(傳稱)에도 적지 않게 미련을 두었다. 하기는 기도하는 민초들에게 미륵부처와 관음보살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을 이루어 주는 존재라면 어떤 부처님이든 무슨 상관인가. ●후백제민 회유·경고… 민초는 변혁 기원 은진미륵은 고려 광종 19년(968) 조성을 시작해 목종 9년(1006) 완성했다. 광종은 잘 알려진 대로 과거제를 도입해 지방호족의 자제가 칼 대신 붓을 잡게 만든 인물이다. 중앙집권국가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후백제와의 마지막 결전지에 거대 석불을 조성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과거 적국 및 변방의 주민들에게 위세를 보여 주면서 관음보살의 권능처럼 현세의 고통을 덜어 주겠다는 일종의 정치적 약속을 담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듯 강력한 왕조에 ‘딴마음’을 먹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당대는 물론 이후에도 줄곧 미륵으로 믿어진 것은 고려왕조의 정치적 회유가 먹혀들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권력은 지역민에게 고통을 견디며 순응하라는 상징성을 담아 관음을 조성했지만, 역설적으로 민초는 그 관음조차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 줄 혁명의 지도자로 믿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은진미륵이라고 부른 것은 무지에 따른 오류가 아니라 관음도 미륵으로 믿으며 의지하고 싶은 민초의 적극적 해석에 따른 의도적 오류로 보고 싶다. 글 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니사, 아할테케… 고대 파르티아의 추억에 젖다

    중앙아시아 남단에 있는 투르크메니스탄은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국가다. 지난달 걸그룹 에이핑크의 멤버 정은지가 신곡을 소개하면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일하고 있는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고 언급해 주목을 받았지만 어떤 나라인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투르크메니스탄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유럽에서는 ‘파르티아 사법’(射法·말을 탄 채 몸을 돌리며 활을 쏘는 사법), 동아시아에선 ‘한혈마’(汗血馬·하루에 천리를 가는 말) 정도다. 그러나 1991년 구소련의 해체와 함께 독립한 투르크메니스탄은 파르티아 제국의 수도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니사’ 유적 등 헬레니즘을 상징하는 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내년 9월 열리는 아시아 실내무도대회를 앞두고 들썩이고 있는 투르크메니스탄을 다녀왔다.지난 6일 투르크메니스탄 정부가 개최한 아시아 실내무도대회 개막 500일 전 기념행사가 열린 곳은 니사 유적지였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아할테케’. 한 소년이 한혈마를 데리고 니사 성채에서 내려오는 장면이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이 해외 언론인들과 각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국가적 자존심인 니사 유적과 한혈마, 두 가지를 결합한 공연이다. 니사 유적지는 투르크메니스탄 수도 아시가바트에서 서쪽으로 15㎞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코베트다크 산맥이 바라보이는 산기슭에 넓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기후와 상수원 모두 수도를 삼기에 적당하다. 이곳을 바탕으로 파르티아 제국은 기원전 3세기 중반부터 서기 3세기까지 고대 서남아시아를 무대로 동서 교역을 장악하며 번성했다. 니사 유적지는 2007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20세기 들어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하면서 다양한 건축물 유적을 찾아냈다. 유적지는 왕궁인 5각형 내성, 이른바 ‘옛 니사’와 바깥쪽 상업·거주 지역인 외성, 이른바 ‘새 니사’로 나뉜다. 내성은 진흙과 벽돌로 20m 높이 벽을 쌓고 그 안쪽으로 정원과 신전, 탑, 방 같은 구조물을 배치했다. 왕실 기둥을 비롯해 연회장으로 썼던 ‘붉은 방’, 조로아스터교 원형 사원 흔적 등이 지금도 남아 있다. 니사 유적지가 세계사에서 중요한 것은 이곳이 바로 알렉산더 대왕이 이끈 동방원정을 계기로 동서문화가 융합하며 헬레니즘 문화를 만들어낸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조로아스터교 사원과 그리스 신상이 공존하고 그리스식 양조법에 따라 포도주를 빚은 흔적이 남아 있다. 동서교류사 권위자인 정수일 박사는 한 글에서 니사 유적지가 바로 헬레니즘의 산실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안서도호의 푸른 호마(胡馬), 만리를 뛰는 한혈마를 이제 보았네. 장안의 장사들이야 감히 타 보기나 하랴, 번개보다 더 빠른 걸 세상이 아는데. 푸른 실로 갈기 딴 채 늙고 있으니, 언제나 서역 큰길을 다시 달릴까.’당나라 시인 두보가 지은 ‘고도호총마행’(高都護聰馬行)은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었던 고선지 장군이 아끼던 한혈마를 소재로 했다. 피 같은 땀을 흘린다는 한혈마는 동아시아에서 천리마의 대명사다. 그 한혈마의 후손들이 현재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천연기념물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아할테케다. 아시아 실내무도대회 기념행사에서도 전통의상을 입은 의장대 수십명이 아할테케를 타고 행진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소련에서 독립한 뒤 외교 무대에선 영세 중립국으로서 독자적 생존을 모색하고 있는 투르크메니스탄은 내년 9월 열리는 제5회 아시아 실내무도대회를 통해 국가적 위상을 높이려 한다. 천연가스 매장량 세계 4위인 지하자원을 갖고 있지만 최근 수송로를 장악한 러시아와의 관계가 불편해지면서 발생한 경제적 어려움을 탈피하자는 국내외 정치적 목적도 있다. 아시아 실내무도대회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가 실내 아시안게임과 무도 아시안게임을 통합해 주최하는 국제 스포츠 행사로 4년에 한 번씩 열린다. 제4회 대회는 인천에서 열렸다. 댄스스포츠, e스포츠, 당구, 볼링, 체스, 바둑을 비롯해 태권도와 킥복싱, 무에타이 등 다양한 종목을 포함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아시가바트에서 만난 시민들은 하나같이 “내년에 아시안게임을 개최한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2014년 인천에서 열렸고 2018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우리가 익히 아는 아시안게임과 아시아 실내무도대회가 별개 대회라는 건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인다. 중요한 건 1991년 독립 이후 처음으로 자신들이 주체가 돼 개최하는 대규모 국제 스포츠 행사이기 때문이다. 글 니사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니사, 아할테케… 고대 파르티아의 추억에 젖다

    니사, 아할테케… 고대 파르티아의 추억에 젖다

    중앙아시아 남단의 생소한 국가… 구소련 해체 뒤 영세 중립국으로실내무도 대회로 독자 생존 모색 지난달 걸그룹 에이핑크의 멤버 정은지가 신곡을 소개하면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일하는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고 하면서 잠깐 주목받은 정도를 빼면 투르크메니스탄은 우리에게 이름조차 생소한 게 현실이다.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투르크메니스탄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유럽에서는 ‘파르티아 사법’(射法·말을 달리면서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기술), 동아시아에선 ‘한혈마’(汗血馬·피땀을 흘린다는 천리마) 정도다. 하지만 투르크메니스탄은 파르티아 제국의 수도였던 ‘니사’ 유적지 등 헬레니즘을 대표하는 역사가 살아숨쉬는 독특한 매력으로 가득한 곳이다. 내년 9월 열리는 아시아 실내무도대회를 앞둔 투르크메니스탄을 다녀왔다. 지난 6일 투르크메니스탄 정부가 개최한 아시아 실내무도대회 개막 500일 전 기념행사에서 하이라이트는 한 소년이 ‘아할테케’ 이른바 한혈마를 데리고 니사 성채에서 내려오는 장면이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이 해외 언론인들과 각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국가적 자존심인 니사 유적과 한혈마 두 가지를 결합했다. 니사 유적지는 투르크메니스탄 수도 아시가바트에서 서쪽으로 15㎞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코베트다크 산맥이 바라보이는 산기슭에 넓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기후와 상수원 모두 도읍지로 적당하다. 파르티아 제국은 기원전 3세기 중반부터 서기 3세기까지 고대 서남아시아를 무대로 동서 교역을 장악하며 번성했다. 강력한 기병 전력을 무기로 기원전 53년 카르헤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주기도 했다. 유네스코는 2007년 니사 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20세기 들어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하면서 다양한 건축물 유적이 드러났다. 유적지는 왕궁인 5각형 내성, 이른바 ‘옛 니사’와 바깥쪽 상업·거주 지역인 외성, 이른바 ‘새 니사’로 나뉜다. 내성은 진흙과 벽돌로 20m 높이 벽을 쌓고 그 안쪽으로 정원과 신전, 탑, 방 같은 구조물을 배치했다. 니사 유적지가 세계사에서 중요한 것은 이곳이 바로 헬레니즘 문화를 만들어낸 동서문화의 용광로였기 때문이다. 조로아스터교 사원과 그리스 신상이 공존하고 그리스식 양조법에 따라 포도주를 빚은 흔적이 남아 있다. 동서교류사 권위자인 정수일 박사는 한 글에서 니사 유적지가 바로 헬레니즘의 산실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안서도호의 푸른 호마(胡馬), 만리를 뛰는 한혈마를 이제 보았네. 장안의 장사들이야 감히 타 보기나 하랴, 번개보다 더 빠른 걸 세상이 아는데. 푸른 실로 갈기 딴 채 늙고 있으니, 언제나 서역 큰길을 다시 달릴까.’ 당나라 시인 두보가 지은 ‘고도호총마행’(高都護聰馬行)은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었던 고선지 장군이 아끼던 한혈마를 소재로 했다. 피 같은 땀을 흘린다는 한혈마는 동아시아에서 천리마의 대명사다. 그 한혈마의 후손들이 현재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천연기념물로 귀한 대접을 받는 아할테케다. 아시아 실내무도대회 엠블럼도 아할테케를 형상화했다. 투르크메니스탄을 구성하는 5대 부족 중 가장 규모가 큰 부족 이름도 아할테케다. 소련에서 독립한 뒤 외교 무대에선 영세 중립국으로서 독자 생존을 모색하는 투르크메니스탄은 내년 9월 열리는 제5회 아시아 실내무도대회를 통해 국가적 위상을 높이려 한다. 천연가스 매장량 세계 4위인 지하자원을 갖고 있지만 최근 수송로를 장악한 러시아와 관계가 나빠지면서 발생한 경제적 어려움을 탈피하자는 국내외 정치적 목적도 있다. 아시아 실내무도대회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가 실내 아시안게임과 무도 아시안게임을 통합해 주최하는 국제 스포츠 행사로 4년에 한 번씩 열린다. 제4회 대회는 인천에서 열렸다. e스포츠, 당구, 볼링, 체스, 바둑을 비롯해 태권도와 킥복싱, 무에타이 등 다양한 종목을 포함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아시가바트에서 만난 시민들이 하나같이 “내년에 아시안게임을 개최한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각종 시설 건설비로만 50억 달러를 쓰는 그 ‘아시안게임’과 2014년 인천에서 열렸고 2018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우리가 익히 아는 아시안게임과 다르다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1991년 독립 이후 처음으로 자신들이 주체가 돼 개최하는 대규모 국제 행사이기 때문이다. 글 사진 니사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열린세상] 자식의 날과 학생의 날은 왜 없는가/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열린세상] 자식의 날과 학생의 날은 왜 없는가/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지난 일요일에 어버이날을 맞았는데, 돌아오는 일요일에는 스승의 날이 기다린다. 일주일 간격으로 부모와 선생을 공경하는 기념일이 이어지니, 축하받는 입장의 부모와 스승은 은근히 신이 날지도 모르겠으나, 마음으로만 고마움을 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금이나 선물까지 드려야 하는 자식과 학생으로서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날일 수도 있다. 그래도 부모와 스승의 중요성은 모든 문명권에서 인정하기에 그런 기념일을 만든 데 반대할 의사는 없다. 다만 ‘자식의 날’은 아예 들어 보지도 못한 점이 마음에 걸린다. ‘학생의 날’도 예전에는 잠시 있었지만, 2006년에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바뀌면서 사실상 폐지됐다. 그나마 한때 존재했던 학생의 날도 학생을 격려하고 존중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광주학생항일운동(1929)이라는 특정 사건을 기리는 역사적 기념일이었다. 따라서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과 같이 순수한 기념일로서의 학생의 날은 존재한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을 맞는 마음이 썩 가볍지만은 않다. 굳이 특별한 기념일을 만들지 않더라도 부모와 스승은 일상에서 필요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며 자식이나 학생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갑(甲)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정과 학교에서는 1년 365일이 사실상 어버이날이요, 스승의 날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도 굳이 국가에서 그들을 위해 특별 기념일까지 제정할 필요가 있을까? 일상에서 오히려 일년 내내 사실상 을(乙)의 위치인 상대적 약자인 자식과 학생을 위로하고 북돋기 위한 기념일 제정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서 말이다. 어린이날이 곧 자식의 날이 아니겠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린이날과 자식의 날은 크게 다르다. 어린이는 그 연령대가 극히 제한적인 데 비해 자식은 연령대의 제한이 없다. 또한 어린이날이 어린이들의 잔칫날인 데 비해 어버이날과 짝을 이룰 자식의 날은 어버이와 자식이 가정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서로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뿐 아니라 자식의 날에는 어버이를 중심으로 한 일방성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 사이의 상호 소통을 지향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미국 사람들이 기념하는 ‘아버지날’, ‘어머니날’, ‘어린이날’ 등이 바로 그런 상호관계를 바탕으로 한 기념일이다. 비단 유교적 유산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한국은 세계 문명사에서 부모와 스승 같은 웃어른을 절대적으로 공경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국가에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한 문명권에 속한다.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부모가 잘못을 돌이키라고 진정으로 간청하는 자식을 피가 나도록 때리더라도 자식은 그 부모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계속 공경하고 효도를 다하라는 게 남송(南宋)의 유학자 주희(朱熹·1127~1200)가 ‘소학’(小學)에서 규정한 자식의 행동규범이다. 주희보다 100년 가까이 앞선 나종언(從彦·1072~1135)이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다”고 선언한 사실과 연결해 보면 이는 동네방네 행실이 나쁜 부모가 자식마저 때려 죽이려 할지라도 자식은 묵묵히 순종해 맞아 죽으라는 일방적 강요와 다름없다. 이런 주자학이 온 나라를 컴퓨터 포맷 수준으로 강타한 조선시대를 거친 한국 사회의 부모에게는 솔직히 하루하루가 극단적으로 교조화한 효(孝) 이데올로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어버이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생과 대비되는 스승의 위상도 이와 마찬가지였음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만 떠올려도 바로 알 수 있다. 한국의 각종 학교에서는 매일매일이 사실상 스승의 날인 셈이다. 교권이 추락하고 학생들이 말을 잘 안 듣는다는 푸념이 최근에 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학교 생활에서 칼자루를 잡은 쪽은 학생이 아니라 교사(스승)임은 부정할 수 없다. 상대적 약자인 자식과 학생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고 격려하자는 자식의 날과 학생의 날은 한국에 없다. 오히려 상대적 강자인 부모와 스승을 더욱더 극진히 공경하자는 국가 지정 기념일은 매년 5월이면 일주일 간격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한국은 어버이와 스승의 나라다. 5월의 대한민국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 [新국토기행] ‘섬들의 고향’ 전남 신안군

    [新국토기행] ‘섬들의 고향’ 전남 신안군

    우리나라 최서남단에 있는 전남 신안군은 880개의 섬으로 이뤄졌다. 보석같이 아름다운 수많은 섬들이 빛나 ‘섬 은하계’로 불린다. 유인도 91개, 무인도 789개다. 신안군 면적 1만 3308㎢ 중 바다면적은 1만 2654㎢로 이는 전남도 육지 면적과 같다. 서울시 면적 605㎢의 22배에 달한다. 그중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170호로 지정된 홍도가 가장 유명하다. 국내 최대 규모의 광활한 갯벌과 전국 천일염의 70%를 생산하는 넓은 염전 등 풍부한 자원과 사시사철 많은 볼거리와 때 묻지 않은 풍광을 지녔다. 청정한 바다에서 생산되는 수산물과 게르마늄 토양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또한 그 맛과 질이 우수하다고 인정받는다. 람사협약에 등록된 장도 습지와 홍어로 유명한 흑산도, 백사장만 500여개에 이른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중국 송·원대 해저보물이 발견된 증도 등 섬마다 특유의 문화유산이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2008년 한국관광공사와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휴양하기 좋은 섬, 가고 싶은 섬 30’에 증도·우이도·임자도·비금도·흑산도·홍도·가거도 등 7곳이 지정돼 가장 많았다. 신안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볼거리 ●천년의 신비! 홍도·흑산도… 유람선 투어 필수 홍도는 그 수려함으로 2012년 한국관광공사 선정 ‘한국인이 가봐야 할 관광지 100선’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거친 파도와 바람이 빚어낸 환상의 섬으로 연평균 20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명소다. 섬 주위에 펼쳐진 크고 작은 무인도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은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형언할 수 없는 절경을 이룬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울창한 숲의 조화가 절묘해 남해의 소금강이라 불린다. 물이 맑고 투명해 바람이 없는 날에는 바닷속 10㎞가 넘게 들여다보인다. 바다 밑의 신비로운 경관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유람선을 타고 선상에서 바라보는 남문바위 등 홍도 10경은 관광객의 탄성을 자아낸다. 선상에서 즐기는 회 맛 또한 일품이다. 홍도에 가서 유람선을 타지 않는다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지 않은 것과 같다. 그것을 아는지 대부분의 관광객은 1구 마을 선착장에 닿자마자 유람선표를 산다. 유람선 투어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다. 홍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푸르다 못해 검은 섬 흑산도는 가수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와 ‘흑산홍어’로 유명하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생태적으로도 청정지역이다. 정약전 유적지, 철새전시관, 상라봉굽이길, 명품마을 영산도, 장도습지 등이 있다. ●‘느림의 행복’ 슬로시티 증도 힐링여행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 증도는 느려서 더 행복한 섬이다. 2012년 한국관광공사 선정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 2위에 올랐고, 2015년에도 선정되는 등 대한민국 대표 생태 관광지로 각광받는다. 한반도 해송 숲을 따라 걸으며 우전해변의 진한 바다 냄새에 취하고, 다양한 수생생물이 서식하는 광활한 갯벌에 또 한 번 취한다. 특히 단일 염전으론 국내 최대 규모인 태평염전(①)은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돼 옛날 방식 그대로 천일염을 만든다. 파란 하늘이 만들어 내는 반짝이는 소금을 보면 자연의 경이로움에 또 한 번 놀란다. 462만㎡(약 140만평) 규모다. ‘모든 생물은 생명이 시작된 바다를 기억한다’는 발생학적 논거에서 시작되는 소금박물관 여행도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경제사, 기술사, 사회사는 물론 예술과 신화를 넘나들며 인류와 함께한 소금의 역사를 재밌게 보여준다. 천일염을 배우고, 만들어 보는 과정을 통해 자연환경과 먹거리의 중요성을 체험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이외에도 염생식물원(②), 갯벌생태 전시관 등에서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다도해 한눈에 보는 바다정원 송공산 분재공원 송공산 분재공원은 다도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송공산 남쪽 기슭 10㏊의 부지에 조성됐다. 분재원, 쇼나조각, 미니 수목원, 화목원, 산림욕장, 미술관 등이 있다. 바쁜 현대인들이 자연 속에서 분재와 미술작품을 보며 마음의 여유와 평안을 찾을 수 있도록 조성한 자연 친화적 분재공원이다. 분재원에는 소나무, 주목, 소사나무, 모과나무, 먼나무, 팽나무, 금솔, 금송, 피라칸사 등 1000여점의 분재와 신안 출신 우암 박용규 화백의 작품 등이 전시돼 있다. ● 12㎞ 백사장 걸으며 추억 쌓는 대광해수욕장 임자도 서쪽에 자리잡은 대광해수욕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넓은 해수욕장이다.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백사장은 12㎞에 달하며 폭은 300m가 넘는다. 해수욕장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려면 걸어서는 1시간 20분이나 걸린다. 1990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됐다. 완만한 경사와 따뜻한 수온, 광활한 백사장에 넓은 야영장과 천연 잔디, 운동장, 체육시설, 샤워장, 숙박시설 등 편의시설을 갖췄다. 가족 단위의 피서객은 물론 학생들 수련회 및 운동선수들의 전지훈련장으로도 인기다. 모래 해변에서 즐기는 승마체험은 색다른 체험거리다. 매년 4월이면 국내 최대규모의 튤립단지에서 ‘튤립축제’(④)가 개최된다. ●비금도엔 이세돌 바둑기념관·생가·명사십리 비금도는 조훈현에 이어 한국바둑을 이끌어가는 천재 기사 이세돌이 태어난 곳이다. 구글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 겨루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세돌은 세계대회 15회 우승자다. 이세돌 바둑기념관(③)은 옛 비금 대광초등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바둑동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인근의 이세돌 생가와 함께 비금도의 관광코스로 자라잡고 있다. 인근에 있는 생가에는 어머니가 아직 산다. 기념관 뒤편에 대나무 숲으로 이뤄진 망각의 길을 지나면 천혜의 명사십리 해수욕장이 자리한다. ●6칸의 초가집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 하의도는 제15대 대통령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후광 김대중이란 거목을 낳은 고장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24년 하의면 후광리 원후광마을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는 태어난 마을의 이름에서 따왔다. 어릴 적 김연 선생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하의초등학교를 다니던 중 열두 살 때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목포로 이주했다. 생가는 1999년 종친들이 복원해 신안군에 기증했다. 복원된 생가는 6칸의 초가집으로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도 준다. 생가의 앞쪽에는 하의면의 전통적인 염전 체험장이 있어 탐방로와 소금전시관도 이용할 수 있다. >>먹거리 ●유일하게 삭혀서 톡 쏘는 매력 있는 홍어 흑산 홍어는 육질이 차지고 부드러우며 담을 삭히는 효능이 뛰어나 기관지 천식, 소화기능 개선에 효과가 있다. 식중독을 일으키지 않는 유일하게 삭혀서 먹는 특별한 생선이다. 입 안을 톡 쏘는 맛과 목과 코가 펑 뚫릴 정도의 특유한 냄새가 나지만 한번 맛 들이면 푹 빠진다. 고가임도 불구하고 찾게 되는 매력이 있다. 고단백·저지방으로 숙취도 풀어준다. 발효시킬 때 나온 끈적끈적한 점액은 스테미너 식품으로 알려졌다. 10월에서 다음해 3월까지가 가장 제 맛을 내지만 시기에 상관없이 언제나 먹어도 좋다. 비싸기도 하고 많이 잡히지 않아 시중에서는 수입산이 흑산 홍어로 둔갑하기도 한다. 홍어맛을 그대로 느끼고 싶다면 회로 먹어야 한다. ●비린내·잔가시 없는 원기회복 생선 병어 4~8월 지도, 증도, 임자, 비금지역에서 주로 많이 생산된다. 200어가에서 2200여t을 잡아 170여억원의 수익을 올릴 정도다. 맛도 맛이려니와 병어는 금방이라도 팔딱 튀어오를 듯이 살이 탱탱하고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흰살생선인 병어는 살코기가 연하며 맛이 담백하다. 비린내가 없어 생선을 잘 먹지 않는 이들도 쉽게 정붙일 수 있고 잔가시가 없어 아이들이 먹기에도 좋다. 게다가 조리법도 다양해 반찬이 마땅치 않을 때 병어를 이리저리 요리해 밥상에 자주 올려도 물리지 않는다. ●6월 알 꽉찬 젓새우로 담근 육젓이 일품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오젓과 육젓은 겨울을 난 후 음력 5월이나 6월 산란 직전에 알이 꽉 찬 젓새우로 담근 젓을 말한다. 이 중 매년 6월쯤 잡히는 바다 참새우는 살이 통통하고 우윳빛이 감돌아 최상품으로 쳐주는데 이 새우로 담는 것을 육젓이라고 한다. 값싼 중국산 새우젓이 밀려와도 육젓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비싼 값에 팔린다. 신안와 연광군 연근해에서 한창 잡히는 젓새우는 230어가에서 9300여t을 생산해 수익 310억원을 올릴 정도로 신안군의 대표 음식이다. ●살·뼈·내장·부레 버릴 것 없는 민어 한방에서 보는 민어는 맛이 달고 성질이 따뜻해 예로부터 봄과 여름철에 냉해지는 오장육부의 기운을 돋우고 뼈를 튼튼히 하는데 애용돼왔다. 어린이 성장 발육과 노인 환자들의 건강회복에 특효인 민어는 산란기를 앞둔 여름철에 가장 맛이 있다. 탕은 복날 보신탕 대신 흔히 즐기기도 한다. 살과 뼈, 내장을 구분한 후 살은 회로 먹고, 부레는 그대로 썰어 소금에 찍어 먹는다. 민어의 부레는 꽤 비싼 편인데 잘게 썰어서 볶으면 진주 같은 구슬이 되는데 이것을 ‘아교구’라 하며 보약의 재료로 쓴다.
  • 대구 망월지 새끼 두꺼비 ‘목숨 건’ 이동

    대구 망월지 새끼 두꺼비 ‘목숨 건’ 이동

    전국 최대의 두꺼비 산란지인 망월지에서 새끼 두꺼비들의 대이동이 시작됐다. 11일 오전 대구 수성구 욱수동 망월지에서 새끼 두꺼비 100여 마리가 망월지 둑에서 서식처인 욱수골로 이동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거리는 2㎞가량 된다. 지구온난화로 전 세계 양서류종이 급감하는 상황에서 망월지 새끼 두꺼비 움직임은 대구의 생태건강성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로 평가받는다. 매년 봄철이 되면 성체 두꺼비들이 망월지에서 집단 산란을 한다. 알에서 깨어난 올챙이들은 보통 60~70일가량 수중에서 무리 지어 다니다 새끼 두꺼비로 변한다. 새끼 두꺼비들은 200만~300만 마리에 이르며 5월 중순쯤이면 서식처인 욱수골로 이동한다. 이동 기간은 2주에 이르며 올해는 예년보다 다소 빠르다. 서식처로 이동하는 새끼 두꺼비들의 생존율은 0.1%에 그치는 것으로 추정된다. 2000~3000마리만 살아남는 셈이다. 이동 과정에서 로드킬을 당하거나 깊은 산에 들어가며 지쳐 죽기도 한다. 살아남아도 다른 동물의 먹이로 희생된다. 대구 수성구청은 지난 2월 두꺼비 로드킬 방지용 울타리를 망월지 인근 400m 구간에 설치했다. 경북대 박희천 교수는 “두꺼비는 산의 계곡이나 낙엽이 쌓여 있는 곳에 살지만 알은 물에서 낳는다. 물속이 육지보다 온도 변화가 적고 단단하지 않은 알을 잘 보호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수성구청 관계자는 “새끼 두꺼비들은 비 오는 날이나 습기가 많은 날에 이동한다”며 “올해 새끼 두꺼비 이동은 지난해보다 열흘 이상 이르다”고 밝혔다. 한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2010년 망월지를 꼭 지켜야 할 자연유산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가족끼리 왜이래… 상속재산 분할청구 1000건 넘어

    피를 나눈 친부모와 자식, 친형제들끼리 벌이는 재산 관련 분쟁이 지난해 1000건을 넘은 것으로 집계됐다. 11일 법원에 따르면 가족 간에 벌어지는 ‘상속재산 분할에 관한 심판 청구 사건’이 지난해 1008건으로 잠정 집계됐다. 2010년 435건과 비교하면 5년 만에 2배 이상으로 늘었다. 상속재산 분할 심판 청구와 함께 내거나 분쟁 상대방이 맞소송 격으로 내는 ‘기여분 결정 청구’도 2010년 98건에서 지난해 225건(잠정 집계)으로 늘었다. 기여분 청구는 유산을 나누기 전에 이 재산 형성에 자신이 기여한 부분을 우선 인정해 달라는 요구다. 불황이 지속되자 가족 간 재산 분쟁은 꼭 상속재산이 많은 경우뿐 아니라 중산층이나 서민 가정에서도 적지 않게 벌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편이 사망하고 집 한 채를 유산으로 남겼을 경우 이를 당장 나눠 가지려는 자식들에게 맞서 자신이 살 집을 지키기 위해 남편 재산의 기여분을 인정해 달라는 청구를 내는 여성들도 종종 있다고 법조계는 전했다. 민법은 상속 순위를 규정하고 있다. 사망한 사람의 직계비속(자녀, 손자녀 등)이 1순위, 직계존속(부모, 조부모 등)이 2순위다. 형제자매는 3순위, 4촌 이내 방계혈족(삼촌, 고모 등)은 4순위다. 배우자는 직계비속이나 직계존속이 상속인이 될 때 그들이 받는 재산에 0.5를 가산해 받는 공동 상속인이 된다. 따라서 법이 정한 상속 지분은 배우자와 자녀의 분할 비율이 1.5대1이다. 자식이 3명이면 1.5대1대1대1로 나눠야 해 배우자의 지분은 작아진다. 따라서 친어머니와 자식들 간에도 집 한 채를 놓고 분쟁을 벌이는 경우가 나온다는 것이다. 조용철 기자 choskku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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