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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유림) 한자이야기

    작가 최인호씨의 연재소설의 제목 의 儒(선비 유)자는 사람 인(人)과 모름지기 수(需=須)의 결합이다. 사람들에게 모름지기 있어야 할 道(도리 도)를 닦는 선비를 뜻한다. 儒라는 한자는 집단을 뜻하는 林(수풀 림)자와 결합되어 공자 등 聖賢(성현:성인과 현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는 經典(경전:성인의 글이나 언행을 기록한 책)과 그에 관련된 학문을 연구·실천하고 국가사회에 구현하고자 했던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이러한 구조의 어휘로는 선비의 무리를 뜻하는 士林(사림)과 道敎(도교)가 유행이었던 고려시대에 盲人(맹인)들이 杖(지팡이 장)을 짚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운수를 보아 주고 숙식을 해결했다고 해서 생긴 杖林(장림),그리고 학자 또는 文人(문인)의 모임이라는 뜻의 翰林(한림) 등이 있다. 유림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본다면 유학이 삼국시대에 정착된 후 조선왕조 건국이념의 기반이자 주 학문 및 이념으로 정립되면서 특정 學者(학자) 또는 서원 및 향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서원은 주세붕이 설립한 경북 영주에 있는 백운동서원(지금의 소수서원)을 시초로 각 지방마다 세워져 사립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해 왔으며,향교는 국가가 관장하는 일종의 국립교육기관이었다. 서원과 향교에서는 유학 경전과 유교의 儀禮(의례) 내지 행동지침을 공부하는 한편,성현들을 기리는 祭享(제향)을 통해서도 그들의 가르침과 정신을 기르는 동시에 직접 교육을 맡아 참다운 유교인을 양성하였다. 중앙의 성균관은 文廟配享(문묘배향)과 함께 국립대학의 기능을 하면서 유교교육의 중심이 되어 국가 동량을 길러냈다. 서원이나 향교를 중심으로 한 인맥이나 學風(학풍) 형성은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덕을 쌓아 완전한 유교인으로서의 인격을 닦은 후 성현의 도를 국가사회에 구현한다는 면도 있었으나,출세의 한 방법으로 활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종 21년(1884) 과거제도의 폐지로 儒者(유자)들의 一身榮達(일신영달)과 현실참여의 통로가 봉쇄되면서 향교와 서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유림은 해체의 길로 접어들고,일부 인사들에 의해 명맥만을 유지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儒學(유학)에서 중요시하는 仁(인),義(의),禮(예),智(지),名分(명분),淸廉(청렴) 등은 조선시대 내내 선비정신의 중추를 이루었다.이러한 선비정신은 丙子胡亂(병자호란:丙子年에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침입해 일으킨 난)과 壬辰倭亂(임진왜란:壬辰年에 왜구,즉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입한 난)때에는 우리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의병들의 정신적 기조가 되기도 했다. 義(의)와 名分(명분),正道(정도) 등을 중요시하다 보니 옳고 곧은 말을 서슴지 않아 유배 등의 벌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중종 반정 이후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려다 반대파의 모함을 받고 전라남도로 유배(중종14년인 1519년)된 후 1개월 만에 賜藥(사약:賜 줄 사,藥 약 약,임금이 죄인에게 먹고 죽을 독약을 내려 주는 것)을 받고 죽은 조광조도 그 중의 하나였다. 박 교 선 교육부 연구사
  • 정동주가 말하는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민중의 恨·魂 다시 보듬을 것”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은 한국인의 삶을 뒤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앞만 보고 달리는 삶을 두고 우리는 뭔가에 쫓기듯 사는 삶,뒤돌아볼 겨를이 없는 삶,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곰곰 되씹어 볼 생각을 하고 있는 삶을 산다고들 한다.정신 없이 바쁘게 산다는 말로 압축시켜 볼 수 있겠다.바쁘다는 말은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웬만한 잘못쯤은 면책시켜주거나 아예 문제삼지 않으려는 집단면죄부와 같은 능력을 지닌 것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바쁘다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려니와 냉혹하게 말하자면 죄악에 속할 것이다.큰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말이다.한국인은 뭐든 잘 잊어버린다고 한다.망각증이라고도 하는 이 심리는 분명 한국인 특유의 자기중심주의 사고 방식이 낳고 기른 질병이다. ●허탈·부끄러움의 역사 참회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금방 잊어버리지만 유리한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특이한 질병이다.지배계급일수록,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자일수록,권력이 있고 이른바 한국을 망해먹는 3연(緣) 즉 지연,혈연,학연이 치밀하게얽힐수록 망각증이 심하다.이 따위 엉터리 삶을 부끄럽지만 뒤돌아보고 참회하려는 것이다. 한국인의 삶 모두가 역사 안으로 들어와서 역사를 기록하는 닥나무로 만든 책갈피에 안겨 있는 것은 아니다.역사를 정사(正史)와 야사(野史)로 나누어 말할 때 앞의 것은 대개 지배자 중심이다.후자에 속하는 많은 것들은 역사의 책갈피가 아닌 강물이나 바람소리,풀잎이나 나무,물과 불,흙과 바위의 체온 속에 숨거나 기대어 한국인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다.그들의 삶을 불러내어 역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한 시도가 ‘달빛의 역사’다. 그들의 삶 어떤 것은 귀신이나 도깨비가 되고,어떤 것은 전설이나 노래가 되어 한사코 한국인의 삶과 죽음 언저리를 기웃거리기도 한다.이것들은 절대적으로 신화가 될 수 없다.신화라는 이양물(異洋物)로 덮어 싸서 헐값으로 치워버리려는 서구적 태도는 그 저의가 아무래도 수상쩍어 보인다.알고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로 둔갑시키려 하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한국인은 잘못이 없는가? 중국 역사에 함몰된 중화사대주의자나 서구우월주의자 모두 ‘달빛의 역사’로 볼 때는 지배계급들이며 정사의 편에서 살다 죽고 싶은 이들이다.죽어서도 그렇게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역사 바깥에서 서성거리거나 웅크리고 있다가 잊혀져버리기도 하는 것이 달빛의 역사다.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달빛의 역사는 햇빛의 역사와 관계 있다.이것을 부정하는 것이 관제사학이다.한국 관제사학의 근원에는 중화사대주의와 친일사관이 숨어 있다.한국역사이면서도 한국사에서 추방당해야 하거나 폄하되고 무시되어온 것이 달빛의 역사다. 달빛의 역사는 이 땅에 발 딛고 하늘 이고 살아온 사람들의,다만 자연에 순응하고 노래해온 인간과 자연의 생생한 허밍 코러스다.그래서 아직 따뜻한 체온과 숨결이 남아 있다.눈물의 고뇌와 웃음의 향기가 살아 있다. 일년 동안 만나게 될 주제는 모두 90여 개이다.그중 몇 개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될 것이다. 맨 먼저 풀고 싶은 과제는 이른바 천불천탑의 성지로 불리는 운주사 석탑에 새겨져 있는 낯선 문양들의 의미다.어쩌면 이 문양들의 비밀이 풀려짐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지녀온 여러 생각들이 허탈과 부끄러움으로 결론지워지게 될지도 모른다. ●잠들지 못하는 편견·박해의 희생물 대원군의 편견과 오만이 빚은 천주교도의 대학살,영원을 꿈꾸는 자의 시간이 시작되는 미륵의 세계,보기 드문 인문적 감동의 명소이면서도 숨겨져 있는 역사와 문화의 남평문씨 마을,새뮤얼 무어 목사가 심어준 한국 천민들의 인권해방을 향한 기도,전쟁과 증오의 폐허에서 꽃 피운 화엄사상의 전설,한국 찻그릇의 미학을 빚은 젊은 사기장들,차별 없는 삶을 꿈꾼 스승들,조선의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며 떠나간 논개와 그 후예들,김시습이 일본 차문화에 끼친 불멸의 정신사,목 없는 불상들이 전하는 조선 유학생들의 이념과 시위문화,임술년 진주농민항쟁과 오늘의 한국농민들,편견과 증오의 상처를 통해서 읽는 파괴와 자기 부정의 역사인 양주 회암사지의 교훈,외로움과 절약으로 산 여성운동사의 한 증거,이도차완의 비밀과 미륵사상,초의가 침묵으로 외친 조선은 중국보다 못하지 않다는 교훈,서포 김만중의 유배지 파도소리로 다시 읽은 구운몽,남한산성에 숨겨진 종교 박해사,한국은 일본 차 문화와 중국 차 문화의 식민지 등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일궈왔으면서도 지배계층의 이념이나 편견에 매몰된 채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애절하고 그리운 옛일이면서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참회하게 하는 부끄러움들을 만나보고 싶다. 대부분 한국인 역사의식의 수면 아래서 잠행하고 있는 이 대단한 비밀 아닌 편견과 박해의 희생물들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잠들지 못하고 있다.더는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전쟁과 이별,기구한 삶과 죽음의 기록 혹은 그림들은 숨길 수 없는 한국인의 자화상이면서 그리운 것들로 쌓여온 역사의 원천이자 문화의 양식이다. 살아서 먼 길을 걸어 죽음 너머의 시간에 닿기 위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있다면,그 노래 듣기를 원한다면,먼저 차별의식을 극복해야 한다.성,신분,지역,소유에서 차별의식이 남아 있는 한 그대는 영원히 인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무어 목사의절규 앞에서 과연 우리는 떳떳한가? 인간의 아름다움을 본 이는 그 자리에서 천국을 볼 것이라는 그의 말이 오늘날 한국인에게 어떤 교훈으로 다가올 것인가.햇빛으로서의 지배자가 아닌 달빛에 물들 뿐인 피지배자의 낮은 삶과 고요한 죽음이 때로는 우리를 지나온 길로 뒤돌아보게 한다. ●지나온 길 되돌아 가는것도 여행 지금 한국인은 너무 바쁘다.바쁘기만 한 삶에서는 그윽한 향기를 만들기 어렵다.향기 없는 삶은 거칠고 단조롭다.자신은 물론 남에게도 역겨울 수 있고 귀찮은 존재이기 쉽다.그것은 인생을 다만 분주하게 살 뿐이다.시끄럽고 무의미하다.그래서 새로움을 느끼게 하고 나를 그 위에 싣고서 더욱 새로워져 모두에게 새로움을 주는 문화가 필요하다.그것의 절반은 내가 스쳐 지나온 길 위에 놓여 있다.잠깐만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자.지나온 길로 돌아가는 것도 여행이고 나그네 길이다.잘만 돌아가면 그것만큼 진보하기도 어렵다.그리고 새벽을 기다리자.깨어 있어야 새벽을 본다.집이 아닌 들길이나 산길에서 밤을 맞으면 달빛은 더 아름답다.집이어야만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오래도록 눈비 맞고 자란 슬픔을 만나려면 눈비 내리는 들길에 서야 옳다.슬픔을 지나야 문화가 보인다. 슬픔은 인간의 조건이니까.달빛을 쪼이고 슬픔을 캐는 여행이 될 것 같다.
  • 社告/ 최인호 장편소설 새해부터 연재합니다

    대한매일이 서울신문으로 새로 나면서 새달 5일부터 최인호(58)씨의 장편소설 ‘유림(儒林)’을 연재합니다.‘유림’은 공자의 사상에 담긴 참된 ‘정치와 권력’의 의미를 조선 시대의 풍운아 조광조와 대학자 퇴계 이황,율곡 이이의 사상과 삶을 통해 되짚어 보는 대하 서사시입니다. ▶작가 인터뷰 6면 자칫 딱딱하게 생각하기 쉬운 성인의 삶과 사상을 ‘탁월한 이야기꾼’의 감수성으로 현대화하여 깊이 있으면서도 재미있게 풀어나갈 것입니다. ‘유림’의 세계는 과거에 갇혀 있지 않고 정치와 권력의 본질을 파헤치면서 현재적 의미로 되살아납니다.이는 개혁이란 대의를 내세워 정쟁에 사로잡혀 있는 혼탁한 현대 정치판에 청량제 역할을 하면서 참된 정치의 의미가 무엇인지 냉철하게 되돌아볼 객관적인 거울이 될 것입니다.아울러 옛것에서 오늘을 사는 지혜를 길어 올리면서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은 물론 독자들에게도 혼돈의 시대를 헤쳐갈 슬기를 제시할 것입니다. 작가는 늘 공부하는 자세로 시대를 앞서가는 감수성을 벼리면서 문제작을 터뜨려 왔습니다.그 저력을 바탕으로 ‘유림’에서도 특유의 탁월한 상상력과 재기 넘치는 문체로 연재소설의 새 장을 열 것입니다.“재미있으면서도 ‘만고 불변의 지혜’가 담긴 작품”이라고 밝히는 작가는 15년 전 이 작품을 구상했고 공자의 고향인 중국의 취푸(曲阜)를 비롯,조광조의 유배지 전남 화순의 능주,퇴계 이황의 경북 안동 도산서원과 풍기의 소수서원 등을 빈틈없이 취재하면서 ‘유림'의 형상화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난 작가 최인호씨는 고교 2학년 때인 1963년 단편 ‘벽구멍으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한 뒤 1967년 ‘견습환자’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일찍이 문재를 알렸습니다.소설 ‘타인의 방’‘잠자는 신화’‘별들의 고향’‘도시의 사냥꾼’‘지구인’‘잃어버린 왕국’‘길 없는 길’‘왕도의 비밀’‘상도’‘해신’ 등 주옥 같은 작품으로 현대문학상,이상문학상,가톨릭문학상,현대불교문학상 등을 받았습니다. 소설의 삽화는 최씨와 ‘바보들의 행진’ 이후 20여년 동안 호흡을 맞춰온 이우범(60) 화백이맡습니다.62년 삽화 작업을 시작한 이 화백은 세심하고 정감 어린 화풍으로 소설의 품격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난세의 지혜를 문향(文香)으로 들려줄 ‘유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격려 바랍니다.
  • [발언대] 기나 긴 파출소의 하룻밤

    초겨울 추위가 제법 살을 파고들던 며칠전 저녁,순찰지구대(파출소)안에는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박순경이 “오늘 저녁에도 꽤나 시끄럽겠구먼.”이라고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려온다.출동장비를 챙겨 교대를 한 뒤 순찰차를 타고 어둠이 깔린 도시의 주택가로 출동한다. 우리가 맡은 구역의 골목골목을 돌며 대문 열린 집,불 꺼진 사무실,범죄우범지역을 부단히 순찰하고 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112신고가 들어온다.‘학교 옆 공원에서 패싸움이 벌어졌다.’는 112지령센터 근무자의 다급한 무전이었다.급히 출동하니 현장에는 앳된 얼굴의 10대 여러명이 단지 “쳐다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시비가 벌어져 한바탕 치고받은 상태였다.양쪽 모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상대를 잡아먹을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싸움을 말리고 연행하려 하자 “내가 피해자인데 너희들 똑바로 처리해.”라며 행패를 부렸다.간신히 연행하여 사무실에서 조사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다시 주먹다짐을 하려고 했다.또 경찰관이 말린다는 이유로 사무실 탁자·의자를 걷어차고 던지거나,경찰관 멱살을 잡고 “민중의 지팡이가 사람을 친다.”는 둥 난동을 부렸다. ‘이러한 행위를 하는 자들을 방치한다면 과연 질서를 잡을 수 있겠는가.공권력이 바로 서야 국민이 편한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꾹 참고 이들을 경찰서로 이송했다.그 후에도 사건은 계속 들어왔다.새벽 2시 만취한 행인이 차도 중앙에서 지나가는 택시를 가로막아 택시기사와 멱살을 잡고 싸운 사건,남편이 아내를 폭행한 가정폭력 사건 등등을 처리했다. 길고 긴 하룻밤을 지내며 잠시 피곤함을 달래고자 사무실 밖으로 나오니 날이 이미 훤하게 밝아온다.도심의 새벽을 여는 청소부 아저씨,신문·우유배달원,새벽에 출근하는 아파트 경비아저씨들과 반갑게 인사한다.지난 밤에 있었던 쓰린 기억은 어느새 잊고,새벽에 만나는 정겨운 사람들에게서 다시 오늘 하루의 희망을 본다. 인천 중부경찰서 남부지구대 고승기 경사
  • [녹색공간] 산감스님의 불끄기

    불교를 이야기할 때 놀라운 사실 하나는 붓다의 성스러운 일생이 항상 숲과 함께였다는 점이다.그는 숲속에서 태어나고,깨달음을 얻고,숲속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마침내 숲속에서 열반에 들었다. 1600년 한국불교도 숲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신라 말 구산선문도 깊은 산 숲속에 자리했고,지금도 많은 수행자들이 산에 기대어 생사를 걸고 있다.전통적으로 수행자들이 지은 숲속의 절집들은 숲을 지키는 산막(山幕)으로서의 오랜 역할을 다했다.절숲이 건강하게 남아 있음은 절집이 숲을 지켜온 내셔널 트러스트의 산막이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숲속 수행자들은 각 지방의 기후풍토에 맞는 숲을 유지해 국토를 푸르게 하는 데 공헌했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로부터 나무와 꽃을 들여와 우리 숲의 다양성을 이룬 숲의 전령사들이었다.은행나무며,배롱나무며,파초며…. 수행자들의 숲을 위한 노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지금도 큰 절집에는 ‘산감(山監)’제도를 두고 숲을 지키고 있다.산감은 ‘산감독(山監督)’의 준말로,총림과 같은 큰 사찰에서 산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맡긴 소임이다.산감 소임은 대중스님들이 돌아가면서 맡는데,주로 사람들의 도벌을 막고,숲을 돌보고,산불을 감시하는 등의 일을 맡았다. 그러나 에너지 다변화로 사람들이 나무를 때지 않게 되고,숲 또한 솎아 주어야 할 만큼 울창해지면서 산감 소임도 한동안 유명무실해졌다.그래서 산감은 일없이 사하촌이나 드나들며 마을 개구쟁이들과 노는 게 소임이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산감스님들의 발걸음이 바빠졌다.개발지상주의에 의해 사찰의 자연환경이 날로 망가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예전에는 작대기 하나 들고 마을사람들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면 그만이었지만,지금은 그게 아니다.거대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나 기업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중차대한 소임으로 바뀌었다. 낙동정맥 천성산은 내원사라는 비구니 사찰이 신라 원효 때부터 지켜온 산이다.거기 가녀린 비구니 스님들이 천성산 자연을 지키기 위해 좌충우돌 설쳐대는 거대한 공룡 정부와 몸으로 맞서 싸우고 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추운 겨울 도보를 시작으로,천성산 지키기 삼보일배,정부 과천청사에서의 일인 시위,성명서 발표,일일 삼천배 등을 이끌고 있는 산감 지율스님의 뒤를 이어 종교를 초월한 많은 이들이 스스로 산감이 되고자 줄을 잇고 있다. 천성산과 사패산이 몇 해째 산불에 타고 있다.예전에 산불이 나면 몰래 나무하다가 들켜서 산감에게 곱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던 사람들도 너나없이 열일 제쳐두고 발 벗고 나서 불을 끄러 산으로 올라갔다.그 숲이 거기 있어야 자신들도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을 지키는 일은 개인적 이해타산에 따라 찬반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자연을 지키는 일은 그 어떤 정치적 입장에도 우선하는 가치다.숭유배불의 살벌했던 조선왕조도 사찰의 자연환경만은 함부로 훼손하지 않았다.오히려 곳곳에 금표(禁標)를 박아 지켜주었음을 우리 시대는 상기해야 할 것이다.노 정권은 ‘재신임’ 운운하는 정치적 도박판에 환경문제를 ‘돈 놓고 돈 먹기’식으로 내놓지 않기를 기대한다. 김 재 일 두레 생태기행 대표
  • 높다란 흙돌담 사이로 이방인 하멜의 숨소리…/‘하멜 유배지’ 강진 병영 역사기행

    높은 담은 예나 지금이나 부와 권위의 상징.가진 것을 지키고,위세를 부려보고 싶은 마음에서 담장을 높이 높이 쌓았을 것이다. 그런데 전남 강진군 병영에 가면 이같은 상식을 깨는 마을이 있다.자그마한 초가와 무늬만 기와집인 누추한 주택들이 2m 정도의 높은 담에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병영은 또 조선 중기 네덜란드의 하멜 일행이 7년간이나 머물렀던 마을로,곳곳에 이들의 고단했던 삶의 흔적이 묻어 있어 애잔함을 더한다. 지금 병영은 가을이 무르익었다.높은 흙돌담 위로 펼쳐진 새파란 가을,그림을 그리듯 하늘을 수놓은 담 위의 홍시가 나들이객을 반긴다.높다란 흙돌담 사이로 마을을 가르는 ‘한골목’엔 이따금씩 촌로 혹은 아낙네들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무료함을 던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부릴 위세도 없으면서 담은 왜 이렇게 높이 쌓았을까?.궁금증은 마을의 역사를 들으면서 비로소 풀리기 시작한다. 병영(兵營)이란 지명은 1417년 왜구 침입에 대비해 마천목 장군이 지은 병영성에서 따왔다.병영면 성동리 일원은 전라도 53주6진을 관할한 호남 육군 최고 지휘부가 자리했던 군사지역이었다. 높은 담은 말 탄 군사들로부터 집안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 쌓았던 것으로 전해진다.군관이나 병사들이 수시로 말을 타고 마을 골목을 지나 인근의 수인산성으로 순시를 나갔기 때문에 아낙네가 있던 집집마다 이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담을 높게 쌓았던 것이다. 높은 담장 사이로 마을 중심을 가로지르는 ‘한골목’은 마을의 중심길로,크고 긴 골목이라는 뜻.이맘때면 집집마다 담장 안에서 자란 감나무에 매달린 선홍색 홍시들이 골목길의 운치를 돋운다.예전의 흙길에서 아스팔트로 포장돼 옛모습이 많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집들이 흙과 짚을 이겨 쌓아올린 아름다운 돌담을 유지하고 있다. 옛날엔 한골목에서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골목을 사이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했다고 한다. 이방인 하멜 일행의 한이 서린 병영 성동리 중심엔 높이 30m,둘레 7m의 은행나무가 서 있다.800년 동안 마을의 풍상을 고스란히 품고 보아온 나무.하멜은 지금도 남아 있는 이 나무 밑의 돌에 앉아 하염없이 향수를 달래곤 했다고 그가 쓴 ‘하멜표류기’에 전해진다. 하멜 표류기를 써 조선의 존재를 서양에 상세히 알렸던 하멜 일행 32명은 타이완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배가 난파돼 1653년 제주도 모슬포에 피신했다가 13년간 조선에서 모진 고초를 겪게 된다.그중 7년간 이곳 병영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남씨 성을 받은 이들은 스님들의 도움으로 돌담 쌓기,나막신 만들기 등으로 생활했고,흉년이 들면 거리에서 춤판을 벌여 걸식으로 연명했다고 하니 그 고초가 가히 짐작이 간다. 이들중 일부는 이곳에 뼈를 묻었고,하멜을 비롯한 8명은 1966년 여수에서 탈출에 성공,나가사키를 통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멜의 자취는 병영의 흙돌담에도 남아 있다.진흙을 이겨 돌을 빗살무늬 형태로 쌓아올린 것은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독특한 방식으로,병영 주민들은 당시 하멜 일행의 담쌓기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서해안고속도로 끝인 목포나들목으로 나와 2번 국도를 타고 영암을 거쳐 814번 지방도를 타면 작전을 지나 병영면으로 갈 수 있다.광주에서 병영행 직행버스가 하루 10여차례 있다.광주에선 나주를 거쳐 영암에서 835번 지방도를 타면 갈 수 있다. 병영엔 묵을 곳이 마땅치 않으므로 강진이나 영암의 숙박업소를 이용하는게 좋다.영암 월출산관광호텔(061-473-6311)이 온천욕도 즐기면서 가을 풍광이 아름다운 월출산 산행도 할 수 있다.병영면사무소 인근 설성식당(061-433-1282)의 고추장 삼겹살구이(1인분 5000원)가 먹을 만하다.문의 병영면사무소(061-430-3610). 강진 글·사진 임창용기자 sdargon@
  • 책 /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박석무 지음 한길사 펴냄 ●다산 정약용의 학문은 조선학 보고 위당 정인보는 “조선의 역사를 알려면 다산 정약용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조선의 성쇠와 존망을 알아보려면 다산의 학문을 통해야 한다는 뜻이다.그의 학문은 바로 조선학의 보고다.정치·경제·역사·지리·문화·철학·사상·의약·건축 등 온갖 사상과 학문이 다산학 속에 녹아 있다.다산의 학문을 현대의 학문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현대 우리나라 학문의 역사성을 이해하려면 다산학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다산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박석무(61) 전남대 초빙교수는 “동양의 중세나 조선의 중세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자학을 통해야 하듯이,근세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산학이라는 징검다리를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박석무 지음,한길사 펴냄)는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선비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삶과 사상을 풍부한 시문과 예화를 통해 조명한 다산 일대기다. 저자는 다산의 학문과 사상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의 험난한 인생역정과 그 극복과정을 살핀다.다산은 당쟁의 희생양이 돼 경상도 장기와 전라도 강진에서 40세부터 57세까지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다산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때가 바로 그의 나이 마흔 되던 신유년이었다. 두 차례나 감옥에 갇히고 국청에 나가 국문을 받아야 했다.국청에서 당한 모진 고문으로 허리를 똑바로 펴지 못하고 공포증에 시달려야 했던 다산이 “몸뚱이 아깝게도 이미 이지러졌습니다.”라고 부모 묘소 앞에서 토해낸 고백은 참담한 정황을 말해준다. ●유배의 고난 속에서도 학문에만 몰두 하지만 다산은 유배의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학문에 몰두했다.고달픈 귀양살이 중에도 학연·학유 두 아들에게 “폐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일 한 가지밖에 없다.”는 편지를 써 인생의 길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왜 지금 다산인가.저자는 왜 그토록 다산으로 돌아가자고,다산이 우리 곁에 살아 있어야 한다고 외치는가.서양사람들이 중세의 암담한 세상에서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 당대의 정신과사상을 새롭게 찾아냈듯이 또 청나라 말 타락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예기’의 대동사상을 되새겼듯이,우리 또한 혼탁한 현실을 헤쳐나가기 위해 다산의 대승적인 실천정신을 배우자는 것이다. ●그의 실천철학서 나아갈 길 찾아야 다산은 당대의 지배담론이었던 성리학을 공리공담의 거짓 학문으로 간주했다.나라는 가난에 찌들어 온 나라가 허덕이건만 나랏일에는 눈을 감고 이(理)니 기(氣)니 떠드는 공허한 행세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실천철학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했다.다산을 비롯한 일련의 실학자들은 공자학(孔子學),즉 수사학(洙泗學)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본질적인 경학(經學) 연구에 생애를 바쳤다.특히 다산은 공맹의 사상과 철학을 민중의 논리로 재해석,선구적이고 진보적인 ‘다산 경학’을 확립했다.훗날 위당 정인보는 다산의 경학을 ‘민중적 경학’이라 이름붙였다.다산의 경학은 백성과 나라의 실익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경학인 동시에 경세학이다.그야말로 본말이 구비된 학문인 것이다.저자는 “다산의 실학사상은 사실 고전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경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며 “다산이 그의 실학사상과 개혁사상을 고경(古經)의 새로운 해석으로 이룩해냈듯이,이제는 고전이 된 다산의 실학사상과 개혁사상에서 오늘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귀한 자료 한 점을 발견했다.다산의 둘째형인 손암(巽菴) 정약전의 친필 편지 한 통을 찾아내게 된 것.이번에 처음으로 책에서 공개된 이 편지는 손암이 다산에게 보낸 것으로,다산의 제자 황상의 인물 됨됨이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을 지낸 저자는 1979년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펴낸 것을 비롯,‘애절양’‘다산산문선’‘다산기행’‘다산논설선집’‘다산문학선집’‘역주 흠흠신서’‘다산시정선’등 숱한 저서를 통해 다산학의 정립에 헌신해온 철두철미한 ‘다산주의자’다.1만 7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책 / 부처, 통곡하다

    “경주박물관 앞마당,봉숭아도 맨드라미도 피어있는 화단가,목잘린 부처들이 나란히 앉아…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자기 머리를 얹어본다….” 시인 정호승은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앉아계시는 목 없는 부처님들을 보고 이런 시상(詩想)을 떠올렸다. 반면 소설가 정동주는 같은 장소의 같은 부처님들을 친견(親見)하고는 ‘섬뜩한 전율’을 느꼈다.경주박물관 마당의 안내판에는 지금도 이렇게 씌어있다고 한다.“조선시대 성리학을 받드는 유생들이 불상의 목을 베고 불상의 몸을 훼손하여 우물 속에 던져넣어 버렸는데 뒷날 이를 발굴했다고….” 정동주가 쓴 ‘부처,통곡하다’(이룸 펴냄)는 글자 그대로 조선왕조 오백년의 불교탄압사(史)이다. 그는 전국 어디를 가나 찾아볼 수 있는 ‘망가진 불상’들을 보면서 누가,왜 이런 짓을 했는지 궁금했다.의문을 풀고자 ‘조선왕조실록’을 반년 넘게 읽었고,산중 스님들의 도움을 받아 귀중한 문헌과 증언들도 모았다. 길고 긴 박해의 역사 가운데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던 대목만 가려 정리한 것이 이 책이라는 것이다.말미에는 조선 불교 박해를 위해 유생들이 올린 107편의 상소문도 실었다. 지은이는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는 사적 제105호 칠백의총(七百義塚)에서부터 이의를 제기한다.1592년 8월1일 의병장 조헌이 지휘하는 의병 700명과 승려 영규가 이끄는 승병 800명이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청주성을 수복한 뒤 8월18일 금산으로 진격하여 처절한 혈전을 벌인 끝에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다.그럼에도 역사는,800명의 의승군은 간데 없이 조헌의 뒤를 따른 700명의 의병만을 추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명종대의 고승 보우는 제주로 유배된 뒤 참살됐다.그가 주석하던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는 유생들의 방화로 잿더미가 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최근의 발굴조사에서도 화재로 폐사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나아가 한 유생은 회암사의 부도와 비석을 파괴하고,그곳에 죽은 아버지를 묻었다. 훗날 대원군이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충남 예산군 덕산에 이장하는 과정과도 비슷하다.대원군은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라는 말에 가야산 자락에 있던 가야사에 불을 지르고,그 자리에 묘를 썼다.오페르트가 분묘 도굴사건을 일으킨 바로 그 무덤이다. 조선시대 내내 종이를 만들어 정부 및 지방 기관에 바치는 것은 사찰과 승려들이 감당해야 할 가장 어려운 부역이었다.그러나 공공기관뿐 아니라 왕실의 친인척은 물론이고 지방의 호족과 탐관오리들까지 사찰에 종이부역을 가중시켰다.그 결과 승려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떠나는 절들이 속출했다. 그럼에도 1790년의 한 장계는 뜻밖에도 “승려를 머물러 살게 할 대책과 사찰을 소생시킨 방도”를 논의하고 있다.불교에 가한 박해를 참회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부역을 부과하기 위하여 속된 말로 ‘키워서 잡아먹자.’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정동주는 “사찰출입을 금지한 법률이 서슬 퍼렇게 존재했음에도 사찰은 종교적 위엄을 더하고 숫자를 늘려갔다.”면서 “조선 유교정치의 불교 탄압 정책이 유생들의 주장을 대변했는지는 몰라도,국민들에게 필요한 정치는 아니었다는 역사의 교훈이며,좋은 정치란 어떤 것인지를깨닫게 해주는 역사의 교훈”이라고 말했다. 서동철기자 dcsuh@
  • 시간강사 평균임금 月56만원/방학땐 택시운전·자장면배달도 전국 대학별 현황 분석 결과

    4년제 대학 시간강사들의 월 평균 임금은 56만원에 불과하며,시간강사의 80% 이상이 전업 강사로 처우 개선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교육위 박창달(한나라당) 의원은 17일 교육인적자원부의 ‘2003전국 대학별 시간강사 현황’을 분석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교육대학을 제외한 전국 175개 4년제 대학의 시간당 평균 강사료는 2만 8000원,월 평균 임금은 56만원이었다.국·공립대의 경우 시간당 평균 강사료 3만 4000원,월 평균 임금 72만 3000원으로 평균보다 높은 반면,사립대는 각각 2만 7000원과 48만 9000원으로 평균보다 낮았다. 특히 국립 산업대의 경우 시간당 평균 강사료는 3만 3000원으로 다른 국·공립대보다 적었지만 강의시간이 많아 월 평균 임금은 95만 1000원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박 의원은 또 지난해 시간강사 현황을 분석한 결과 175개 대학에 출강하는 3만 9487명 가운데 82.8%인 3만 2694명은 다른 직업을 갖지 않은 전업 강사인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격월간지인 ‘아웃사이더’도 최근호에서 다룬 특집기사에서 “주당 9시간 기준으로 강사들의 평균 연봉은 800여만원으로 전임교수 연봉의 10∼20% 수준에 불과하다.”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한국비정규직교수노조 성균관대 분회 사무국장인 홍영경씨는 기고문에서 “강사의 비우호적 현실은 고등교육법상 강사 지위에 대한 규정이 없는 데다 노동부조차 대학강사를 비정규 일용잡급직으로 취급하고 있어 교원의 권리도 노동자의 권리도 갖지 못하고 있다.”면서 “강사의 신분을 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남대 윤병태 교수는 “‘교수-부교수-조교수-전임강사-시간강사’라는 교원 직급체계에 내재한 불균등 연공서열 때문에 비정규직들이 돈보따리를 들고서라도 임용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교육을 통해 돈벌이를 하겠다는 반교육적인 관점이 비정규직 교수제를 온존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비판했다. 한국비정규직교수노조 변상출 위원장은 “임금이 없는 방학 때면 택시운전이나 우유배달,자장면 배달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부업 때문에 연구·강의준비를 제대로 못하는 것이 학생들에게 부끄럽다.”고 토로했다. 김재천기자 patrick@
  • 권노갑 비자금 파문 / 2000년총선 權의 역할

    현대측으로부터 100억원 이상의 비자금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체포된 민주당 권노갑 전 고문은 2000년 4·13총선 때 어떤 역할을 했을까. ●직책은 상임고문… 실권은 ‘DJ분신' 당시 권씨의 민주당 내 직함은 상임고문이 고작이었다.어찌보면 초라하게 비쳐질 수도 있었다.김대중(DJ) 전 대통령 집권 뒤에도 한동안 해외유배 생활을 하다 귀국,1999년 11월 상임고문직을 달고 막 정치활동을 재개한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에는 여러 명의 상임고문이 있었지만 권씨의 경우는 달랐다.그가 16대 총선 당시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중책을 맡고,일부 공천권도 행사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권노갑은 역시 살아 있다.’는 말이 자자했다. 권씨가 공천에서 탈락시키려 작심만 하면 해당 인사는 민주당 공천을 받기가 불가능했다는 얘기도 나돌았다.해당 인사가 당시 권씨를 거론하며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반대로 공천을 시키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총선 때 권씨의 역할이 제한적이었다는 평도 없지는 않다.DJ의 용인술 결과 때문이라고도 한다.당시 문화부장관으로 총선 직전 남북정상회담 성사 사실을 밝혔던 박지원씨,한광옥 전 청와대비서실장 등과 함께 권력을 분점하고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지출 499억 신고… 실사용액 미지수 16대 총선 당시인 2000년 1월1일부터 5월3일까지 중앙선관위에 신고된 중앙당 회계내역에 따르면 민주당은 총 566억원의 수입을 기록,이 가운데 499억원을 지출했다.한나라당은 202억원 수입에 194억원의 지출 내용을 신고했다. 하지만 신고내역은 사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신고되지 않은,장부에 계상되지 않은 자금규모가 어마어마할 것이란 얘기였다. 이춘규기자 taein@
  • [씨줄날줄] 브라질판 ‘쇼생크 탈출’

    ‘법 없이’ 사는 사람들도 때로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허우적대고 있다며 답답해한다.평범한 일상 가운데 왠지 모를 속박감에 수많은 이들이 무한 자유를 향한 탈주를 꿈꾼다.참혹하고 무서운 감옥에서의 탈주를 그린 영화나 논픽션물 등이 시공을 초월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까닭이다. 탈옥 영화의 대명사는 1973년에 발표된 ‘빠삐용’.살인죄를 뒤집어쓴 주인공 스티브 매퀸이 감옥인 ‘악마섬’의 깎아지른 절벽에서 몸을 날려 탈출하는 마지막 장면은 지금도 감동적이다.실제 인물인 주인공은 탈출한 뒤 남아프리카에 표착해 자유인으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1984년에 출시돼 ‘희망을 가르쳐준 영화’라는 찬사와 함께 인터넷 동호인 사이트까지 등장한 ‘쇼생크 탈출’은 탈옥 영화의 대표작이라고 부를 만하다.아내와 정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살던 은행원 앤드루 두플레인은 세금을 적게 내는 요령을 알려주며 교도관들의 신임을 쌓은 뒤 19년 동안 조그만 망치로 감방 벽을 뚫은 끝에 쇼생크 감옥을 탈출한다. 이들 영화가 스릴 넘치는 화면으로 전세계 관객을 사로잡았다면 프랑스군 유대인 포병대위 드레퓌스 사건은 ‘합법적인 자유’를 향한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준다.1894년 군기밀을 독일에 제공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드레퓌스는 자유와 진실을 향한 긴 투쟁에 나선다.이에 작가 에밀 졸라는 ‘프랑스군의 명예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진범을 감싸던 군부와 프랑스의 여론에 맞서 구명운동을 펼친다.졸라는 1898년 일간지 ‘여명’에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나는 고발한다.’를 기고해 사건의 전환점을 마련한다.졸라는 이로 인해 추방령을 선고받고 런던에서 1년 유배생활을 한 끝에 1902년 프랑스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하지만 자유와 진실을 향한 투쟁은 계속됐고,드레퓌스는 1906년 최고재판소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12년 만에 ‘합법적인 자유’를 쟁취한 것이다. 브라질의 한 교도소에서 지난 9일 죄수 84명이 건물 밖 밀림지역까지 연결되는 50m짜리 땅굴을 파고 탈주했으나 3명은 붙잡혔다.목숨을 건 탈옥에 ‘브라질판’ 쇼생크 탈출이니 빠삐용이니 하며 세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하지만 이번 탈옥이 ‘합법적인 자유’ 투쟁이 부당하게 묵살된 데 따른 정당행위로 인정될지 의문이다. 김인철 논설위원
  • 영욕의 권노갑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은 지난달 2일 진승현 게이트 관련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본격적인 정치적 복권을 준비했다. 공판 직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 오열하며 큰절을 올렸던 노(老)정객은,오는 14일 김근태 의원의 정치자금 관련 재판이 잘 마무리되면 미국에 있는 둘째 손자를 보러가겠노라며 기뻐했다. 그는 국민의 정부에서 ‘권력의 핵심’이라는 뜻에서 ‘권부’로 통했으나,그만한 영화를 누리지 못한 채 오욕의 길을 걸었다.국민의 정부 출범 전과 임기말 등 2차례 구속됐고,정치자금과 관련된 각종 스캔들에 단골로 거론됐다.지난 97년 2월 한보사건으로 구속돼 정권교체의 감격을 옥중에서 삭여야 했고,이듬해 8·15특사로 풀려나 복권된 이후에도 당시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과 이종찬 국정원장 등 여권 신주류에 밀려 일본 등 해외를 떠돌며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2000년 16대 총선때는 스스로 출마를 포기하면서 공천 교통정리와 산하단체장 인사를 주도하고 그해 8·30전당대회에서 지명직 최고위원에 임명되면서 권력의 핵으로 재부상했으나,당시 특보였던 최규선 게이트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2000년 12월에는 정동영 고문을 비롯한 당내 쇄신파의 ‘인적 쇄신’ 요구에 밀려 ‘순명(順命)’이란 말을 남기고 최고위원직을 사퇴,2선 퇴진을 강요당했다.이어 이인제 의원을 대선후보로 밀면서 ‘킹 메이커’로서의 변신을 꾀했으나 노무현 돌풍에 밀려 재기의 발판을 잃었다. 지난해 5월에는 진승현씨로부터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수감됐고,일생의 고락을 함께 해온 김 전 대통령과의 관계마저 소원해지기까지 했다. 박현갑기자 eagleduo@
  • 인간의 땅 시베리아 400년 역사여행

    우랄산맥과 태평양 사이의 러시아 영토’ 아시아 북부 500만 평방마일,지구상 육지 면적의 12분의1을 차지하는 거대한 땅 시베리아는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추운 곳이다.겨울철 평균 기온이 영하 30∼40도,영하 60도까지 떨어지는 경우도 흔하다.숨을 내쉬면 수정구슬 모양으로 얼어붙는 숨결이 소나기처럼 땅바닥에 내리꽂힌다.그때 들리는 살랑거리는 소리를 사람들은 ‘별들의 속삭임’이라 부른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베리아가 원래부터 러시아 소유의 유럽 땅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또 이 땅에 거주민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있다면,동토의 땅으로 유배된 유럽의 혁명가나 전쟁포로,굴라그(Gulag,사상범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된 노예들일 것이라고 상상한다.그러나 러시아인이 시베리아에 발을 들여놓은 16세기 말엽 이전에도 시베리아는 이른바 ‘신세계’가 아니었다.러시아에 의해 정복되기 전에도 시베리아엔 30여 민족,25만명가량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북아메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과 마찬가지로 시베리아는 수천년 동안 그곳을 지키며 살아온원주민들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샤머니즘 통해 시베리아 정체성 파악 ‘샤먼의 코트:사라진 시베리아 왕국을 찾아서’(안나 레이드 지음,윤철희 옮김,미다스북스 펴냄)는 ‘동토의 땅’ 시베리아가 사실은 인류의 문명 이전의 살아있는 문화가 숨쉬는 ‘인간의 땅’이었음을 보여준다.영국 출신의 러시아사 학자인 저자는 오늘날 시베리아의 샤머니즘을 러시아 통치하에 있는 시베리아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는 유력한 단서로 삼는다.원주민들이 춥고 거친 환경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 샤먼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시베리아의 원형적인 모습을 살핀다. ●대표적인 아홉 민족 직접 찾아가 시베리아인들은 세상 만물은 살아 있으며 제각기 혼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그들의 세계관에 따르면 신들은 서로 싸울 때 바위를 집어 던진다.미동도 하지 않는 북극성은 신령들이 말을 매기 위해 박아놓은 말뚝.하다 못해 구름조차도 안개 자욱한 천막과 냄비가 갖춰진 가정과 가족을 거느린다고 믿는다.이처럼 활기 넘치는 만물이 우글대는 세상과 시베리아 원주민 사이를 이어주는 이가 바로 샤먼,곧 무당이다.저자는 쇠로 만든 새와 뱀,가죽끈 등으로 장식된 샤먼의 코트를 보면 동방박사가 입었던 것으로 착각할 만큼 이국적이라고 말한다.하늘에 올리는 감사제와 속죄의식을 주재하는 샤먼의 활동 중 가장 독특한 것은 혼령여행이다.혼령여행 길에 오른 샤먼은 사지가 잘렸다 다시 붙는 고통을 감내하는 가운데 샤먼의 영험한 능력을 얻게 된다.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시베리아를 시베리아인에게’라는 관점에서 씌어졌다는 점이다.저자는 시베리아를 대표하는 아홉 민족을 직접 찾아나선다.타타르,한티,부랴트,투바,사하,아이누,니브히,우일타,추크치족.이들의 문화는 민족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모두 근친상간을 허용하고 공동소유를 인정하는 원시공산제적인 모습을 보인다.그러나 이같은 근대적인 문명 이전의 문화는 ‘유럽의 아시아’가 우랄산맥 너머에서 나는 각종 특산물을 얻기 위해 ‘아시아의 시베리아’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적잖이 훼손됐다. ●러시아 문화 유입… 타락의 길로 러시아인들에게 시베리아가강렬한 유혹의 대상이 된 것은 단연 어둠보다 까맣고 백설보다 고운 검은담비 모피 때문이었다.검은담비 모피는 권위와 부의 상징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며 유럽으로 퍼져나갔다.모피는 러시아 경제를 살찌우는 데 큰 몫을 했다.하지만 시베리아에 검은담비 숫자가 줄어드는 대신 보드카와 담배가 들어왔고,매독과 천연두가 따라왔다.유럽인들 특히 러시아인들에게 시베리아는,더이상 고리키가 말한 ‘죽음과 사슬의 땅’이 아니었다.새로운 자원과 기회가 쌓여있는 ‘신천지’로 탈바꿈한 것이다.그러나 이와 함께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타락과 노예화의 길로 접어들었고,마침내 자신의 땅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러시아에서 발간된 역사책들은 물론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카자크가 칸을 상대로 출정하던 아득한 과거로부터 원주민 민권운동가들이 석유개발에 반대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400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한다.전래민담과 KGB보고서 같은 참고문헌뿐 아니라 승려와 샤먼,수용소 생존자,공산당 기관원등과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한 정보를 전해준다. 이 책은 시베리아 원주민의 민족적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또 각 민족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인류애적인 관심 속에 되돌아보게 한다.한민족의 시원이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본향인 바이칼이란 주장도 있고 보면,우리로선 더욱 주의깊게 볼 만한 책이다.1만 3500원. 김종면기자 jmkim@
  • 昌 조기귀국설 ‘솔솔’

    빙모상을 마치고 지난 2일 미국으로 재출국한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가 또다시 ‘조기 귀국설’에 휩싸였다.오는 11월2일 귀국 항공편을 예약한 게 발단이 됐다. 이 전 총재의 한 측근은 3일 “항공요금 등을 감안,미리 귀국편을 예약한 것일 뿐 조기 귀국과는 상관이 없다.”고 해명했다.다른 측근은 “이 전 총재가 연말을 앞두고 보고서 작성을 위한 연구자료 수집차 일시 귀국할 수도 있지만 영구 귀국 일정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된 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빙모상 입국을 계기로 불거진 조기 귀국설이 출국 후에도 쉽사리 잦아들지 않는 데는 이 전 총재의 도미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됐다는 논리와 모친 김사순(92)씨의 병세 악화,이 전 총재의 ‘귀양살이’ 같은 미국 유학 생활 등 동정적 보도들이 한몫하고 있다. 측근들은 “이 전 총재가 대선 패배 후 현 정부와 한나라당의 안착을 위해 쫓겨가다시피 자리를 비켜준 측면이 강한데,이제 정부나 당 모두 어느 정도 자리잡은 만큼 계속 유배 생활을 하듯 이국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조기 귀국 분위기 잡기에 나선 인상을 주고 있다. 이 전 총재의 미국 유학비자 만료 기간은 내년 2월.내년 4월에 있을 총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엔 다소 빠듯한 시간이다. 따라서 이 전 총재의 조기귀국설과 관련,이 전 총재가 공천 과정에서부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한나라당 선거를 지원하기 위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나아가 정계복귀 가능성과 연관시키는 시각도 없지 않다. 박정경기자 olive@
  • 영월 / 단종의 恨·동강의 활기 절묘한 어우러짐

    38번 국도를 타고 제천을 지나 영월로 접어들다 보면 왠지 숙연함을 느끼게 된다.공교롭게도 산비탈에서 도로쪽을 향해 자란 낙락장송들이 550여년 전 열다섯의 나이에 왕위에서 쫓겨나 영월로 유배왔던 비운의 단종을 향해 허리를 굽힌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영월은 깎아지른 동강,선돌 등의 비경을 품고 있어 문화유적지 답사와 피서를 겸해 나들이하기에 알맞은 여행지.동강 굽이굽이 래프팅을 즐기는 피서객의 발랄함이 넘쳐나는 영월을 찾았다. ●패전장수의 전설 간직한 ‘자라바위' 영월읍에 접어들면서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비경중 하나가 길 오른쪽 서강 한 쪽에 두 갈래로 우뚝 솟아 있는 선돌(立石)이다.소나기재 정상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50여m쯤 서강쪽으로 걸어가 전망대에 서면 푸른 물줄기와 층암절벽이 어우러진 한폭의 한국화를 보는 듯하다.선돌과 절벽 사이로 보이는 강물이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선돌 아래엔 현재의 38국도가 개통되기 전 사람과 우마차가 다녔던 옛길이 남아 있고,그 앞의 소(沼)엔 가슴아픈 사연을 지닌 ‘자라바위’가 솟아 있다.전설에 따르면 선돌 아래의 남애(南涯)마을 출신의 한 장수가 적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이곳에서 몸을 던져 자라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장릉옆 소나무도 ‘비운의 왕' 애도하는 듯 선돌을 뒤로하고 영월읍을 향해 10여분쯤 달리니 오른쪽으로 청령포 가는 길이 나온다.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돼 유배중 거처했던 청령포는 입장권(1000원)을 끊어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다.삼면이 강줄기로 둘러싸여 있고 뒤로는 험한 산자락과 절벽으로 막혀 있기 때문.‘어린 왕의 고독과 두려움이 얼마나 지독했을까?’하는 생각에 새삼 가슴속이 시려온다.선착장 앞 주차장 왼쪽 편엔 단종에게 전할 사약을 가지고 왔던 왕방연이 지었다는 시를 새긴 시비가 서 있어 애잔함을 더한다. 영월읍 영흥리엔 단종의 능인 장릉이 있다.유배 끝에 결국 사약을 받고 승하하자 영월 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거두어 모신 곳이다.이곳 주위의 소나무는 모두 능에 절을 하듯 묘하게 틀어져 있어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영월읍 일원엔이밖에도 단종이 홍수 때문에 거처를 옮겨 사약을 받을 때까지 살았던 관풍헌,단종 승하후 시종과 시녀가 뛰어내려 죽었다는 낙화암,단종의 영정을 모신 영모전,사육신과 생육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창절서원,엄흥도 기념관 등이 있다. 비운의 흔적을 찾아 이곳저곳 발길을 옮기다 보니 한여름 땡볕에 등줄기가 축축하다.이럴 때는 스릴 있고 시원한 래프팅이 최고.굽이쳐 흐르는 동강의 물줄기에 몸을 맡겨보기로 했다. 동강 래프팅은 출발 지점에 따라 3가지 코스가 있다.가장 참가자가 많은 구간은 문산나루∼어라연주차장(9㎞) 코스로 3시간 소요.요금은 성인 2만 5000원,초등생 이하 2만원.이밖에 진탄리(12㎞·3만 5000원) 및 정선읍 운치리에서 시작하는 코스(30㎞·7만원)도 있다. ●동강 비경에 한여름 땡볕도 잊고 코스가 완만한 동강 래프팅은 스릴감보다는 강 양편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기암절벽 등 비경을 감상하는 기쁨이 크다.문산나루에서 ‘섭새’라고 불리는 어라연 주차장까지 옥선암,두꺼비바위,상·중·하선암 등 기기묘묘한 바위들이늘어서 있다.또 ‘햇살에 비친 물고기 비늘이 비단처럼 아름답다.’는 어라연(魚羅淵),한때 댐 예정지로 거론됐던 만지(滿池)가 이어진다.만지는 과거 아리랑의 발상지인 정선 아우라지로부터 목재를 운반하던 사공이 뗏목을 대놓고 쉬던 자리.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가득하다는 뜻으로 ‘만지’란 이름이 붙었다. 래프팅을 즐기는 동안 물에 빠트리기,배 뒤집기,물싸움 등 각종 게임을 즐기면서 옷이 흠뻑 젖기 때문에 반바지와 티셔츠,속옷 등을 여벌로 준비하는 게 좋다.동강 인근에 대자연레저본부(www.iloveleisure.co.kr),태백산맥(02-3477-3114) 등 60여개의 래프팅 대행업체가 있다.대자연레저본부는 서울에서 출발하는 왕복 교통편 및 식사를 포함하는 패키지 상품(4만 2000원,아이 3만 8000원)도 운영한다. 영월 글·사진 임창용기자 sdargon@ 가이드/ 아이들 손잡고 곤충박물관에도 ●가는 길 서울 방면에선 경부·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신갈·호법 분기점)∼중앙고속도로(서제천IC) 코스가 가장 빠르다.서제천IC에서 빠져 38번 국도를 타고 40분쯤달리면 영월로 접어들게 된다.부산방면에선 남해고속도로∼구마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광주 방면에선 88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 코스를 이용하면 된다.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영월읍내 버스터미널(033-374-2451)까지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요금은 9500원. ●숙박 영월읍 일원에 여관과 민박집이 많다.방절리의 청령포모텔(033-374-4114),문산리 동강사랑(033-375-2865),황새여울민박(033-375-0069) 등이 비교적 깔끔하다.요금은 평수에 따라 3만∼10만원. ●이색박물관 영월의 명물로 자리잡고 있는 책박물관,곤충박물관,조선민화박물관 등 이색박물관도 아이들 손을 잡고 가볼 만하다.서면 광전리 평창강변에 자리한 책박물관(033-372-1713)엔 1922년 김영보의 ‘황야에서’ 등 대표적 단행본 100여권과 격몽요결을 비롯한 1960년대까지의 어린이 교과서·동화·만화 등 100여점,개화기 조선의 풍물 사진,잡지 등 총 6000여점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하동면 와석리의 조선민화박물관(033-375-6100)은 1300여점의 소장 민화중 까치와 호랑이등 130여점의 민화 및 고가구 50여점을 선보이고 있다.관람객이 직접 민화 그리기에 참여하는 ‘민화 사랑 체험코너’도 운영하며,박물관내 50평 규모의 통나무집에서 단체 또는 가족 숙박도 가능하다.북면 문곡리의 곤충박물관(033-374-5888)에선 나비,나방류,갑충류,매미류,잠자리류,동강 유역 곤충류 등을 구경할 수 있다.입장료는 세 박물관 모두 어린이 1000원,어른 2000원. 식후경/ 구수하고 은은한 보리된장 별미 영월읍내 장릉 인근의 보리밥 전문식당인 ‘장릉 보리밥집’(033-374-3986)은 음식이 싸면서도 맛있기로 유명하다.30년 된 이곳의 식사메뉴는 보리밥 정식(5000원) 한 가지.따끈한 보리밥에 산나물과 묵나물 15가지,된장찌개가 상차림의 전부다.나물과 된장을 넣고 비벼먹든지,아니면 밥 따로 찬 따로 먹든지 먹는 방법은 손님 맘이다.이집 음식 맛의 포인트는 보리된장에 있다.1년전 쑨 메주로 담근 된장은 구수하면서도 은은한 된장 맛을 자랑한다.맛에 반해 나갈 때 된장을 사가는 사람도 제법 많다고 한다. 술 생각이 나면 역시 직접 담근동동주를 시켜 먹으면 된다.안주로는 도토리묵 무침,생두부,메밀·감자 부침개가 있다.묵과 두부 모두 직접 만든 것.생두부는 양념간장을 얹어서 먹는다.1접시에 3000원인데,먹고 나올 땐 탁월한 맛과 풍성한 양에 미안한 느낌이 들 정도다.
  • 강릉 지방사무소 준공식 참석

    김유배(金有培)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은 25일 오전 11시 공단 강릉지방사무소 청사 준공식에 참석한다.
  • [녹색공간] 붉은귀거북 방기 대책을

    경기도 안성 칠장사는 의상대사가 세운 신라고찰이다.이 절의 중흥기는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던 고려 초기이다.혜소는 안성 출신으로,25세때 승과에 급제하고 말년에 문종의 왕사가 된 당대의 고승이다.대웅전 뒤쪽 언덕에 그의 비(碑)가 비각 속에 잠들어 있다. 그의 행장을 기록한 비문에 방생 이야기가 있어 눈길을 끈다.내용인 즉,전국을 운수하던 중 속리산 아래 큰 냇가를 지나게 되었다.마침 사람들이 고기를 잡고 있었다.망태기 속에 담긴 고기들이 헐떡거리며 죽어가는 것을 본 그는 측은지심이 생겼다.해서 그동안 탁발한 식량을 사람들에게 모두 주고 물고기를 얻어 냇물에 놓아주었다는 내용이다.방생(放生)의 전형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방생은 한국불교의 오랜 전통이다.살생은 생명을 죽이는 것뿐 아니라 죽음을 방관하는 행위까지 포함한다.불살생계는 생명을 죽이지 않겠다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죽음에 이른 생명을 살려내는 적극적인 방생까지 포함한다.경전의 예를 보면 대개 방생물들은 가뭄과 같은 천재지변에 의해 죽어가는 것을 살려준 것이었다.방생은 내적(內的)으로 자기 성찰(省察)과 적덕(積德)의 기회를 주고,사회적으로는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좋은 전통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와 숭유배불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재의식(齋儀式)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방생이 기복성(祈福性)이 끼어들어 점차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다.많은 이들이 복을 빌기 위해 시장에서 물고기와 거북 등을 사다가 놓아주는 것이다.순수무위의 방생이 ‘give and take’의 작위적 방생으로 변질된 것이다. 얼마 전에 경주 감은사 옛터가 있는 대종천을 탐사한 적이 있었다.대종천은 봄이면 큰가시고기와 은어가 올라오는 생명의 젖줄이다.그런데 거기서 등짝에 흰 글씨로 ‘기축생 ○○○’이라고 쓴 붉은귀거북(청거북)을 발견하고는 크게 상심했다.방생의 기복성 측면에서도 ‘이게 아니다.’ 싶었지만,외래종인 붉은귀거북이 세수대야만하게 자라는 동안 대종천의 담수어류 생태계를 얼마나 교란시켰는지를 상상하면 끔찍했다. 최근 방생이 논란이 되는 원인은 방생 자체가 아니라 예전과 달라진시대상황과 환경상황에 있다.붉은귀거북은 1980년대 초 정부의 허가를 얻어 업자들이 애완용으로 대량 수입해 들어온 것이다.통계에 따르면 지난 5년간 600만마리 가까이 수입되었다고 한다.다행히 지난해부터 수입금지 품목으로 지정되고,불교계에서도 방생지침을 만들어 붉은귀거북 방생을 금지하고 있지만,아직도 시중에서는 애완용으로 판매되고 있다. 어린 붉은귀거북은 처음엔 귀엽지만,몸집이 커지면 집안에 배설물로 인한 악취가 풍기고,관리하기가 귀찮아져서 강이나 연못 등에 몰래 갖다버리는 예가 많다.도시 주변에서 발견되는 붉은귀거북은 모두 그렇게 버려진 것들이다.현재 각 가정에서 기르는 대개의 붉은귀거북은 머지않아 연못이나 하천으로 몰래 버려질 것이다. 정부 당국은 외래종 수입을 무분별하게 허가한 책임이 있는 만큼 애완용 붉은귀거북의 잠재적 방기(放棄)에 대한 대책도 강구해야 할 것이다.다만 과거 황소개구리 때려잡기식으로 붉은귀거북을 무차별 학살하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할 것이다.생명경시 풍조를 부추기기보다는 차라리외국에서처럼 붉은귀거북에 대한 불임시술이 더 생명적일 수 있다. 김 재 일 두레생태기행 대표
  • [젊은이 광장] 해외로 떠나는 배낭족에게

    방학을 맞아 외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젊은이들이 많다. 최근 해외 배낭여행은 크게 단체여행과 자유여행 두가지로 나뉜다.물론 두가지의 장점만 뽑아 숙소가 해결되고 일정도 어느 정도 짜여있는 ‘호텔팩’도 있지만 배낭여행의 백미는 역시 자유배낭여행이라고 생각한다.내가 주인이 돼서 결정하는 여행,비록 안정감은 없지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설렘은 자유배낭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미다. 든든한 배낭,도전정신 그리고 열린 마음 이 세가지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이겠는가.필자도 지난해 이맘때 혼자,자유 배낭여행으로 보름 동안 터키에 다녀왔다.그곳에는 전 세계에서 온 자유 배낭여행자가 많았다.대부분 여행자들은 그 나라의 유명한 유적지나 미술관은 꼭 가는 편이다.워낙 구경할 게 많고 유명하니 당연한 일이다.이 같은 ‘필수 방문 코스’도 좋지만 그 나라 혹은 지역의 대학에 가보는 건 어떨까. 비록 유적지나 미술관보다 구경거리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같은 또래 젊은이와 대화를 통해 느끼는 것은 만만치 않다. 터키 여행의 마지막 날 필자는 이스탄불 아흐멧에서 전차로 세 정거장 떨어진 베야지트 지구에 위치한 이스탄불 대학에 갔다.볼 것 많기로 유명한 이곳에서 이스탄불 대학은 봐도 그만,안 봐도 그만인 곳이다.하지만 내 또래 젊은이가 어떤 모습인지,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고 싶었다.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계단식 강의실에 들어섰을 때 눈에 확 띈 것은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의 초상화였다.적어도 대학은 어떤 정치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야한다고 생각했던 필자에게 우리나라로 따지면 태극기 자리에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의 초상이 걸려 있는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김일성 초상화와 다를 게 뭐냐 싶어 한 여학생에게 어설픈 영어로 아타투르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그는 터키인들은 모두 아타투르크를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말했다.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개혁을 이루는 등 충분히 영웅으로 추앙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터키의 역사와 국민성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이스탄불 대학에 가지 않았다면 단순히 터키라는 나라를 볼거리가 많고 음식이 싸고 맛있는 곳으로만 기억했을지도 모른다.관광객들로 득실대는 모스크(사원)에서보다 훨씬 더 이슬람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지난해 여름 5주 동안 미국 동부를 여행한 친구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갔던 얘기를 할 때마다 두눈에 부러움이 가득하다.그는 “정말 미국의 국민성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곳”이라고 열변을 토한다.캠퍼스 자체가 작은 마을 같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자연과 주변 환경에 어울리며,학생들은 자기 표현이 확실하다고 했다.이런 모습에서 친구는 ‘자유’를 느낀 것 같았다. 학교에서 외국인 교환학생의 모습을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국인이나 일본인 관광객도 학교 앞에서 많이 봤다.그들이 한국의 대학생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진다.단순히 예쁜 학교 건물 앞에서 사진만 찍고 가는 사람보다 뭔가 느끼고 가려는 관광객을 보면 내가 먼저 나서서 말을 걸고 싶을 때가 많다. 우리네 젊은이도 단순히 눈요기만 하기보다 뭔가 느낌이 있는 여행을 했으면 좋겠다.그런 점에서 현지 대학은충분한 ‘느낌’을 제공할 것이다. 서 주 원 이화여대 웹진 Dew 전 편집장
  • “기능올림픽 입상자 창업 지원”김유배 기능올림픽전략위 부의장

    “우리나라는 그동안 국제기능올림픽에서 13번이나 종합우승을 차지했지만 대회 운영에는 전혀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이번에 부의장 국가가 된 것은 우리나라의 기술력과 위상을 세계에 과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최근 스위스 상갈렌에서 열린 ‘제37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전략위원회 부의장에 피선된 국제기능올림픽대회 한국위원회 김유배(60) 회장.현재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이기도 한 김 회장은 이번 대회에서 선수단장직을 맡아 39명 참가 선수들의 온갖 뒷바라지를 해 금메달 11개,은메달 6개,동메달 8개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종합우승을 차지했다.특히 대회 통산 14회 종합우승의 쾌거를 이뤄내기도 했다. 국제기능올림픽 전략위원회 부의장 피선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있는 일.더욱이 일본과 이란을 누르고 피선된 것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김 회장은 “이번 대회 출전을 앞두고 기능 선진국들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참가 선수들에게 정신력 강화 훈련은 물론이고 마인드 컨트롤 훈련을 병행했다.”고 밝혔다.김 회장은 국제기능올림픽에 대한 국민들의 무관심이 못내 아쉽다고 말했다. “지난 1970∼80년대에는 선수들이 귀국할 때 카퍼레이드가 벌어졌고 화려한 종이꽃 환영식이 벌어지곤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이공계 기피현상 때문이지요.” 김 회장은 3D 및 이공계 기피현상을 막고 기능인들을 우대하기 위해서는 예산지원 등 정부 차원의 대대적인 뒷받침이 필수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또 “이번 대회 입상자들이 자신의 전문분야를 살려 창업할 수 있도록 창업 인큐베이터를 운영하고 창업 자금을 지원할 계획”이라며 “끊임없이 변하는 지식사회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관리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김용수기자 dragon@
  • “기술 한국” 세계기능올림픽 14번째 우승

    우리나라가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종합우승 통산 14번째 위업을 달성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지난 11일부터 25일까지 스위스 상갈렌에서 열린 제37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단이 금 11개와 은 6개,동 8개의 메달을 획득,종합우승을 차지했다고 26일 밝혔다. 우리나라는 지난 1967년 스페인 마드리드 대회에 처음 참가했으며 93년 대회에서 타이완에 우승을 빼앗긴 것을 제외하고 77년부터 총 14차례의 종합우승을 차지했다.특히 이번 대회에서 획득한 CAD(Computer Aided Design)분야 금메달은 지난 77년 네덜란드 대회 이후 15연패의 대기록을 세웠다.또한 조적(벽돌쌓기) 분야는 20년 일본 대회 이후 33년 만에,냉동기술은 97년 스위스 대회에서 신설된 이후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가 처음 개발,이번 대회에 시범분야로 채택된 웹디자인에서도 금메달을 차지,우리나라가 IT강국임을 전세계에 재확인시켰다. 한편 김유배 국제기능올림픽대회 한국위원회 회장은 25일 열린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총회에서 임기 4년의 국제조직위원회 전략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김용수기자 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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