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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들과 떠나요… 영월로 역사기행

    아이들과 떠나요… 영월로 역사기행

    봄방학 없이 2월말까지 겨울방학을 맞기는 올해가 처음이다. 따라서 긴긴 겨울방학 동안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학생들을 반긴다. 그중 겨울방학 역사기행도 새로운 트랜드. 자 아이들과 함께 강원도 ‘영월’로 떠나보자. 영월하면 사람들은 동강의 비경을 먼저 떠올리지만 곳곳에는 우리 역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조선 6대 임금인 단종의 가슴 아픈 사연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유적과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또 그가 마지막 사약을 받고 숨진 곳으로 아이들에게 우리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또한 각종 박물관, 천문대 등이 많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산교육장이 바로 영월이다. 단순히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살아있는 공부를 하러 떠난다며 겨울방학을 맞은 아이들에게 특별하고 재미난 체험이 될 것이다. 글 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단종의 아픔 오롯이… 영월로 향하는 차에서는 아이들에게 비운의 왕인 단종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러면 유적지를 돌아 볼 때 도움이 될 것이다. # 단종의 아픔이 묻어나는 비운의 단종은 자신의 믿고 따랐던 숙부에 의해 1457년 봄 영월 청령포로 한 많은 유배를 떠났다. 영월읍에서 남서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에 청령포가 있다. 서강의 물줄기가 동·남·북 삼면으로 흐르고, 서쪽은 험한 산이 절벽을 이루어 배가 아니면 건너갈 수가 없는 곳이어서 창살 없는 감옥이다. 요즘 청령포는 강이 얼어 배를 띄우지 못하고 걸어서 간다. 물론 좀 위험해 보이지만 관리소 직원들이 미리 강의 얼음 상태를 확인하고 빨간 튜브를 늘어놓아 그쪽으로 가면 안전하다. 살금살금 언 강을 건너 청령포에 도착하면 눈에 띄는 것이 서강에서 떠내려온 주먹만한 흰색 돌멩이들이 깔린 자갈밭. 살짝 위에 얼음이 얼어 있으니 걸을 때 주의해야 한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는 어른들의 손을 잡고 가는 것이 안전하다. 자갈밭을 따라 잠시 걷다 보면 아담한 기와집이 보인다. 바로 여기가 단종어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학생들과 관광객들이 눈에 많이 띈다. 어가 안에는 조용히 책을 읽는 단종과 고개를 한없이 떨구고 있는 내시의 모습이 인형으로 꾸며져 있다. 비록 5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건만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어가 옆의 소나무 숲을 좀 걷다보면 청령포 소나무 중에서 가장 크고 모양이 기이한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이 나무가 ‘관음송’. 단종이 관음송에 올라앉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아픔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당시 관음송이 수령이 80살이었지만 지금은 무려 600살이고 높이도 30m에 이른다. 단종은 이 나무와 얘기를 나누다 다시 서북쪽 절벽 위로 올라가 서강의 푸른 물결을 보며 돌로 망향탑을 쌓고는 시름을 달랬다. 바로 ‘노산대’. 단종은 여름철 장마로 거처를 읍내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긴다. 그리고 가을의 초입인 10월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청령포에 관한 문의는 (033) 370-2620. 어른 1300, 어린이 700원. 주차비 1000원. # 호장 엄흥도와 쓸쓸한 단종의 무덤 다음에 갈 곳이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이다. 단종이 죽어도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자 죽음을 무릅쓰고 영월 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거두어 모신 곳이 바로 장릉. 그래서인지 겨울의 장릉은 쓸쓸하다. 소나무만이 옛 주인을 기억하는 듯 그때의 그 모습으로 지키고 있다. 장릉에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264명의 위폐가 모셔진 배식단사,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 한식날 제를 올리는 정자각, 단종제를 올릴 때 올리는 물이 나오는 영천 등이 있다. 아울러 단종 역사관에도 보고 느낄 거리가 많다.(033) 370-2619. 입장료 어른 1200원, 어린이 640. 주차료 1000원. 이밖에 서강의 아름다운 기암괴석인 선돌, 한반도 지형으로 유명한 선암마을, 사리가 모셔져 있는 법흥사 등도 들러볼 만하다. 영월 주위에는 이색 체험의 박물관도 많다.. # 다양한 문화의 향기를 느끼며 책박물관(033-372-1713)은 책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소중함을 가르쳐 주는 곳. 이광수의 ‘무정’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그리고 ‘소년’ ‘어린이’ 등 다양한 책과 잡지가 원본 그대로 전시돼 있다. 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 곤충박물관(033-374-5888)은 각종 나방, 딱정벌레, 메뚜기 등 동강 유역에 서식하는 곤충 1000여점 등 5개 전시실에 모두 3000여 점의 순수 국내 곤충을 모아 놓아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곳. 입장료 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 매주 월, 화요일은 휴관. 민화박물관(033-375-6100)은 국내 최초로 민화를 주제로 한 박물관. 어해도와 화조도, 까치와 호랑이 등 소박한 서민의 애환이 담긴 대표적인 조선민화 80여점이 전시되고 있으며 1000여점의 분재와 조선시대 목기 등도 덤으로 볼 수 있다. 까치 호랑이 등을 주제로 한 여러 종류의 민화를 판화로 직접 찍어 갈 수 있는 ‘민화 판화 찍기’체험장이 있어 아이들이 좋아한다.2500원. 입장료 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 국제현대미술관(033-375-2752)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70개국 160여점의 수준 높은 조각 작품이 전시돼 있는 영월의 이름난 명소. 국내외 중견 예술가를 수시로 유치, 멋진 작품을 선보이기도 한다. 어른 3000원, 어린이 1000원. 묵산미술관(033-374-7249)은 작품을 감상하며 차를 마실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고대 근대 현대를 총 망라한 한국화 및 주변 풍경을 그린 수묵화 등 136점이 상설 전시돼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전통 찻집에서 차를 마시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커피는 1000원, 묵산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오디차는 5000원. # 별 헤는 밤 아이들과 영월을 찾았다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별자리로의 여행이다. 별마로천문대(033-374-7460,www.yao.or.kr)는 봉래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반인들을 위해 개방된 천문대 중에 제일 좋은 시설을 자랑한다. 지하 1층의 전체 투영실은 8.3m의 돔 스크린에 가상 별을 투영해 시간이나 날씨에 관계없이 밤하늘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아이들에게 우주에 대한 상상과 꿈을 심어준다. 또 1,2층의 전시실과 시청각실은 태양계 행성 모형, 태양의 내부구조, 우주 관련 다큐멘터리 등을 볼 수 있는 공간. 별마로천문대의 하이라이트는 4층. 주관측실과 보조 관측실이 있다. 슬라이딩 지붕으로 만들어져 갑자기 ‘찡찡찡’하는 소리와 함께 지붕이 열리고 밤하늘이 나타난다. 보조 관측실에는 크고 작은 14개의 망원경이 설치돼 직접 행성이나 은하, 성단을 관찰 할 수 있고 국내 최대의 반사망원경이 있는 주관측실에서도 직접 달이나 화성 등을 볼 수 있어 너무나 좋다. 어른 5000원, 청소년 4000원. 겨울철에는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별자리를 관측하고 교육을 받는데 2시간 이상 걸리므로 늦어도 저녁 7시 전에 도착하는 것이 좋다. ■ 출출한데 그냥 갈수 있나 강원도 영월에 가면 추천할 만한 식당이 몇군데 있다. #신일식당(033-372-7743)이다. 순수 영월 메밀로 만든 국수의 담백함과 할머니의 손맛이 일품인 무채무침과 김치가 있다. 메밀부침(500원), 조껍데기 막걸리(5000원), 만두국(4000원)도 별미. #주천묵집(033-372-3800)은 맛깔스러운 육수에 도토리 묵을 썰어 넣고 김치와 김가루, 깨를 얹어 내는 묵밥이 맛있다. 가격은 5000원.주천 옛찐빵(033-372-4936)은 영월의 별미. 안흥이 찐빵으로 유명하다지만 쫄깃하고 부드러운 빵에 적당히 달달한 팥이 들어있는 주천찐빵이 한 수 위라는 평가. 가격은 20개 5000원. 전화주문도 가능하다. #명품 메주 영월 섶다리 마을에 가면 검정 메주 익어가는 냄새가 고소하다. 일반 콩이 아닌 토종 야콩(쥐눈이콩)으로 만든 메주로 색깔이 검정색이다. 쥐눈이콩 중 서목태는 한약재로 쓰인다. 서목태로 만든 메주는 항암작용 등 각종 효소와 몸에 이로운 세균들이 일반 메주에 비해 20배 이상 포함돼 있다. 직접 검정 메주와 두부를 만들어 보는 체험도 가능하다.(033-372-0121,www.supdari.com) #폐교에서 하룻밤 주천면 금용분교를 개조해서 만든 영월자연학교(www.youngwol.net,033-374-7353)는 가족끼리 하루를 쉬어가기가 좋은 곳이다. 자그마한 학교가 옛추억을 떠올리게 하며 선생님들의 숙소 6개 동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해 콘도형태로 만들었다.4인 가족 기준으로 6만원.
  • 儒林(516)-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6)

    儒林(516)-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6)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6) 그러나 1년 반 동안의 불교입문 전력은 율곡 일생에 있어 두고두고 무거운 짐이 되었다. 조선조의 국시(國是)는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배불숭유(排佛崇儒)정책. 특히 율곡이 입신양명 중이었던 명종조에는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와 보우와의 유착으로 불교에 대한 비난여론이 비등하던 무렵이었다. 보우(普雨)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한학을 공부하다가 15세를 전후하여 금강산 장안사(長安寺)로 출가한 당대 최고의 명승이었다. 그가 처음 금강산에서 수륙대전을 올릴 때에는 여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릴 정도로 법명이 널리 알려진 승려였다. 그는 문정왕후의 비호에 의해서 승과(僧科)를 다시 세워 승려들에게 도첩(度牒)을 주고 자신이 주지로 있는 봉은사를 선교양종의 종찰(宗刹)로 삼았다. 이 승과를 통해 서산대사와 사명당과 같은 고승들이 스님이 되는 등 수많은 업적을 거두었으나 보우는 ‘요망한 이물(異物)’로 지탄받는 대상이 되었으며, 실제로 보우는 ‘요승(妖僧)’으로까지 불리며 배척되었다. 훗날 문정왕후가 죽자 곧 잡혀서 제주도로 유배되어 그곳의 목사 변협(邊協)에 의해서 피살되는 비극을 맞았으나 보우는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이 영원히 끊겨질 것이다.’라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불법을 보호하고 종단을 소생시키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 제일의 순교승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무렵 선비들은 지존(至尊)인 문정왕후 대신 보우에게 반감을 갖게 되어 역적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문이 75계(啓)에 이를 만큼 탄핵의 집중대상이었다. 이러할 때 율곡이 한때 불교에 입문하였던 것은 최고의 약점이 아닐 수 없던 것이다. 명종실록에 의하면 율곡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알성과에 응시하고자 하였을 때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작당하여 율곡을 묘정(廟廷)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 유생들은 율곡에게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너는 한때 이단에 빠졌던 자이다. 그런 네가 어찌 공자를 위시해 여러 성인들을 모셔 놓은 이곳에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겠느냐.” 과거로 입신하려는 율곡에게 유생들의 이러한 배척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으나 율곡은 시종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의연하게 행동하였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을 정도이다. 율곡이 금강산에 입산하였던 1년 반 동안 삭발을 하고 정식 비구승이 되었다는 소문과 다만 유발거사로 불교에 심취하였을 뿐이라는 소문도 평생 동안 율곡을 따라다닌 무거운 짐이었다. 이에 대해 율곡 자신은 단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았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금강산에 있을 때 율곡이 삭발을 하였는가, 아니면 유발거사로 지냈을 뿐인가 하고 물었을 때 율곡은 다만 이렇게 대답하였을 뿐이었다. “이미 입산하였으니 비록 외향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그에 빠졌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러니 너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율곡은 1년 반에 걸친 금강산의 운수행각 중 실제로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지는 않았다는 몇 가지의 증거는 있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8)정치적 야심가들과 ‘정감록-허균과 유효립’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8)정치적 야심가들과 ‘정감록-허균과 유효립’

    한국의 정치적 예언서는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정감록’은 그 대표적인 경우인데, 그 기원은 실로 오래됐다. 신라 말 풍수예언의 대가 도선국사가 고려태조의 아버지에게 바쳤다는 ‘봉서’(封書)가 그것이다. 도선은 하늘의 명을 받아 송악에서 왕이 배출될 줄을 미리 알았다. 그는 한 편의 예언서를 밀봉한 다음, 왕건의 아버지에게 바쳤다. 훗날 고려 태조는 예언서를 펼쳐 보고 자신에게 천명이 있는 줄 알게 되었다 한다. 이것은 고려 초기 최유청이 지은 글에 자세히 나와 있다. 도선이 전해준 ‘봉서’에 힘입어 왕건이 고려의 성립을 쉽게 정당화할 수 있었다. 역사상 왕건만큼 운이 좋은 경우는 드물었다. 후세에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내세워 대권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허균(許筠·1569~1618)과 유효립(柳孝立·1579~1628)의 경우도 그랬다. 그들 두 사람은 거사에 앞서 각기 자신들에게 유리한 예언을 조작해 널리 유포했다. 역사상의 야심가들이 예언을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게다가 그들이 퍼뜨린 예언은 직접 간접으로 ‘정감록’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끈다. ●허균과 유효립 허균은 우참찬(정2품)이란 고위직에 오르기까지 했으나 세평은 별로 좋지 않았다.“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입니다.” 광해 10년(1618) 대간(臺諫)들이 허균을 탄핵할 때 나온 말이다. 상소문에는 허균이 평소에 저지른 온갖 악행이 고발되었다. 그는 상중(喪中)에도 창기를 끼고 놀았으며, 예언을 조작하고, 난리를 꾸미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는 비난이다. 과장된 점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통용되던 도덕 기준을 가지고 보면 그에게 문제가 있긴 했다. 그는 본래 조정의 실권자 이이첨과 사이가 멀었다. 소문에 따르면, 이이첨의 집엔 머리가 큰 뱀이 하나 있다 했다. 허균은 그 뱀이 이이첨에게 죽임을 당한 최영경과 김직재의 귀신이라고 풀이했다. 허균은 이이첨을 저주했던 것인데 광해군 5년(1613) 이른바 ‘칠서(七庶·7명의 서자)사건’이 일어나 자기의 처신이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이이첨에게 매달렸다. 허균이 높은 벼슬을 하게 된 것은 변절의 대가였다. ‘칠서사건’에는 평소 허균이 가까이 하던 서울 양반의 서자들이 모두 관련되었다. 그들은 광해군에게 서얼 차별을 없애 달라고 호소했으나 뜻이 이뤄지지 않자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도적질을 하였다. 그러다 경상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의 은을 약탈한 사실이 적발돼 모두 사형을 당했다. 대북파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정권을 독점하려 했다. 서인과 남인이 서자들을 앞세워 광해군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며 사건을 조작해 정적들을 처단했다.‘칠서’와 가까웠던 허균은 신변의 위기를 느낀 나머지 이이첨에게 붙었다. 허균의 벼슬길은 트였다. 그러나 선비들은 허균의 처사를 비루하게 여겨 틈만 나면 공격해댔다. 약점을 잡힌 허균은 늘 우울하게 지냈다(실록 광해 6년(1614) 10월10일 기축). 그러나 그만한 처지도 유효립과 같은 사람이 보기엔 부럽기 그지없었을 테다. 허균이 처단되고 한참 지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이 축출되고 그 아래서 최고 실권자로 행세하던 이이첨, 박승종 및 유희분이 일거에 숙청되었다. 유효립은 바로 그 유희분의 친조카였기 때문에 연좌되어 충청도 제천으로 유배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울분을 참지 못한 유효립은 인조반정 자체를 부당한 역적행위로 규정하고, 유배지에서 역 쿠데타를 준비하였다. 그는 이미 폐위된 광해군을 상왕으로 모시고 인조의 숙부인 인성군공(仁城君珙)을 새 왕으로 추대할 계획이었다. 대북파의 복권을 위해서였다. ●유효립이 조작한 예언과 ‘정감록’ 예로부터 야심가들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예언을 조작하곤 했다. 인조 초년에 발생한 유효립 역모사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유포된 예언 중에는 ‘정감록’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유효립은 강원도 원주 치악산에 담화(曇華)라는 승려와 무척 친했다. 유효립의 사주를 받은 담화는 옛날 도선국사가 창건한 전남 광양의 옥룡사(玉龍寺)로 가서 “개해(戌年)와 돼지해(亥年)에 사람이 상하는 화가 발생한다. 그러면 범해(寅年)와 토끼해(卯年)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구절을 비석에 남몰래 새겨 넣었다. 인심을 선동하기 위해서였다. 그밖에도 담화는 예언서를 조작해 “쥐해(子年)와 소해(丑年)에는 안정되지 않다가 범해(寅年)와 토끼해(卯年)에 패한다.”라든가 “용해(辰年)와 뱀해(巳年)에 인성(仁城)을 얻는다.”는 대목을 삽입했다. 담화가 즐겨 이용한 편년체 예언방식은 18세기 이후 예언서의 기본형이 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정감록’에도 자주 발견된다. 그런데 담화가 ‘인성´을 인성군 이공으로 해석하였던 관계로, 강원도 원주 지방 사람들은 머지않아 인성군이 즉위할 것으로 믿고 큰 기대를 걸었다 한다. 유효립과 담화 등이 퍼뜨린 예언 중에는 새 임금이 등극할 시기를 “계룡산의 돌들이 흰색으로 변하고 거친 개펄에 배가 다닐” 때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이 구절은 현재 ‘정감록´의 ‘감결’에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계룡산의 돌들이 흰색으로 변하고 청포 죽이 흰색으로 변한다. 거친 개펄에 조수가 일어 배가 다니며 누런 안개와 검은 구름이 일고 붉은 기운이 삼일 동안 감싼다.”는 구절이다. 역시 ‘정감록’의 일부인 ‘징비록’에도 “진인이 남해에서 계룡으로 오면 창업을 알 수 있다. 말세가 되면 계룡산의 돌들이 흰색으로 변하고, 거친 개펄에 배가 다니며, 목멱산의 소나무가 붉게 변하고 삼각산의 모양이 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미 여러 차례 강조했듯,‘정감록’은 역사상 등장한 한국의 수많은 예언들이 모여서 이뤄진 호수다. 그 일부는 결과적으로 유효립 등이 목숨과 맞바꿔 조작한 예언들이다. 사실 계룡산의 돌이니, 개펄의 배 또는 용의 해 따위는 ‘정감록’ 가운데서 핵심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앞의 두 가지는 앞으로 세상이 바뀔 조짐을 보여주며, 마지막 것은 진인이 나오는 시기를 점치는 것이라서 중요하다. ●허균이 조작한 예언과 ‘정감록’ 그의 반대파들이 보기에도 허균의 문재(文才)는 뛰어났다. 그는 붓만 손에 들면 수천 마디의 글을 막힘없이 써 내려갔다 한다. 특히 위서(僞書·가짜 책) 짓는데 취미가 있어 산수참설(山水讖說)과 선불이적(仙佛異迹·신선과 부처의 기이한 행적) 등을 멋대로 꾸몄다 한다. 허균의 위작은 그가 평상시 지은 글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허균은 ‘산수비기’(山水秘記)라는 예언서를 읽다가 거기에 본래 없던 내용을 보태 썼다. 조선의 첫째 수도는 한(漢), 둘째는 하(河), 셋째는 강(江), 넷째는 해(海)라고 조작해 넣었다 한다.‘한’은 두말 할 나위 없이 한양이었다. 그리고 ‘하’는 경기도 교하(交河)를 가리켰다.‘강’과 ‘해’는 어디에도 밝혀져 있지 않으나 ‘강’은 아마도 계룡산이 있는 금강을 뜻하지 않았을까.‘정감록’의 ‘감결’을 보더라도 한국의 수도는 한양, 계룡산, 가야산, 전주, 개성 등으로 몇 차례 더 바뀐다고 되어 있다. 허균은 예언서를 조작해 우선 인심을 뒤흔든 다음, 영창대군의 외척인 김제남과 공모해 서울을 교하로 옮기려 했다. 이것은 ‘칠서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그러나 허균은 그에게 씌워진 이런 혐의를 강력히 부정한다.‘산수비기’를 읽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법률상 엄격히 금지돼 있어 집안에 들여놓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 뒤에도 허균은 도성의 인심을 동요시키기 위하여 매일 밤 부하를 시켜 남산에 올라가 고함을 지르게 했다.“서쪽의 도적이 이미 압록강을 건넜다.” “유구(琉球) 사람들이 바다 가운데 섬에 숨어 있다.”는 식이었다. 남북 양면에서 외적이 쳐들어올 기세란 거짓 소문이었다. 특히 유구는 조선에 쌓인 원한이 있어 군대를 보내 섬 속에 숨겨둔 채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주장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허균은 조선을 멸망시킬 군대가 섬에 있다는 예언을 조작해 널리 퍼뜨렸던 것인데,‘정감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발견된다. 오랑캐인지 왜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다에서 쳐들어 온다고도 했고, 새 나라를 일으킬 진인이 섬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온다고도 했다. 그밖에도 그는 다른 예언을 지어 전파시켰다.“성은 들만 같지 못하고 들은 멀리 도망가는 것만 못하다.”는 식이었다. 이 역시 ‘정감록’ 에 약간 변형된 형태로 남아 있다. 활활(活活 또는 闊闊), 궁궁(弓弓), 밭(田) 또는 소나무(松)가 난세에 가장 유리하다는 구절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허균은 부하들을 시켜 남산의 소나무 사이에 등불을 걸어 놓고 “살고 싶은 자는 피난을 가라.”고 소리쳤다 한다. 이런 소동으로 인해 도성 인심은 몹시 어지러워졌고 실제 도성을 떠나 피난을 가려는 인파가 길을 메웠다고 한다. 당시 한양 주민은 이미 임진왜란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허균이 조작한 외침 예언에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를 일으켰다. 아닌 게 아니라 광해 8년(1616)부터 북방이 어수선했다. 만주의 여진족들이 청나라를 일으켜 중국 대륙의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여진족들은 건주까지 밀려들어 국내 인심이 흉흉하였다. 바로 그때 허균은 변방이 위급하다며 거짓 예언을 조작했고, 익명으로 된 글을 지어 어느 해 어느 곳에서 역적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등 실로 터무니없는 예언을 퍼뜨렸다. 반란에 관한 허균의 예언은 18세기 이후 ‘정감록’에 여러 차례 기록된 ‘삼국분국설’ 즉 특정한 시기에 나라가 세 토막이 나고 만다는 예언과 유사하다.‘분국설’의 기원이 허균에게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끼친 영향이 결코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역자의 동지들 허균이든 유효립이든 그들이 일으킨 반역사건에는 다종다양한 여러 인사들이 관련되었다. 유효립 사건의 경우는 처형된 공범 수가 무려 50명을 헤아렸다. 그 가운데는 전 현직 관리는 물론 궁중의 내시와 화원(畵員)까지도 끼여 있었다. 이런 사건엔 늘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승려들도 상당수 포함되었다. 그 점에서는 허균의 역모사건도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위에 말한 부류 외에도 무사와 하인들도 다수 가담했다. 허균의 경우엔 한두 가지 이색적인 취향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는 평소 정도전(鄭道傳)을 흠모하여 “현인(賢人)”이라 칭찬했다 한다. 정도전은 왕자의 난 때 태종 이방원에게 희생된 고관이었다. 그는 명실 공히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공신이었으나 권력투쟁에서 실패해 역사에 오명을 남긴 불우한 인물이다. 허균은 바로 그 정도전을 사모해 ‘동인시문(東人詩文)’을 정리할 때 그의 시를 가장 먼저 실었다. 혹시 허균은 정도전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또 하나, 허균은 재주가 비상한 서자들과 가까웠다. 특히 처조카인 서자 심우영(沈友英)을 몹시 아꼈다. 심우영과 함께 ‘칠서사건’의 주범이던 서양갑과도 무척 친했다. 허균은 서양갑에게 석선(石仙)이란 자를 지어 주기도 했는데, 전설에 등장하는 신선 황초평(黃初平)이 돌을 양으로 둔갑시켰다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평소 허균은 주장하기를,“오늘날 영웅은 서석선(徐石仙)뿐이다.”라고 했다. 물론 허균이 친하게 지냈던 서자들은 글재주가 탁월해 장안의 명망가로 통하던 인물들이었고, 서울의 양반들 중에는 그들 서자와 사귀는 사람들이 많았다. 허균만 그들과 친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 해도, 현실세계에서 버림을 받은 재주 있는 서자들, 그리고 비명에 죽은 정도전 같은 인물을 허균은 유달리 좋아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는 반대파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허균은 자신의 신변안전을 위해 ‘칠서사건’ 이후 서자들을 비롯한 비제도권 인사들을 별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광해군 때 승려들이 난리를 일으키려고 모의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많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 허균이 꾸민 일이라고 비난했다. ●허균이 정말 반역을 꾀했을지는 의문 앞에서 예로 든 허균과 유효립은 서로 정치적 노선이 달랐다. 허균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왕이 될 생각이었다 한다. 그에 비해 유효립은 대북파의 재집권을 노렸다. 인조를 쫓아내고 광해군을 상왕으로 복권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주모자인 유효립은 자신의 ‘역모’가 정당하다고 굳게 믿었으므로, 체포된 뒤에도 떳떳했다. 그 태도에 놀란 조정 대신들은 “효립의 진술은 언사가 매우 흉악하고 버릇이 없어 차마 읽을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먼저 목을 베게 하소서.”라고 우선 처형부터 하자고 인조를 졸라댔다. 왕은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고, 유효립이 펼친 주장이 후세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두려워 “그가 진술한 내용을 불살라 버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허균의 역모사건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실록’에 나오는 여러 기록을 정리해 보면 그가 은밀히 무사를 모은 것과 승군(僧軍)을 동원한 일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은 뚜렷하지 않다. 당시 허균은 군사를 이끌고 인목대비의 처소로 쳐들어가 먼저 대비를 제거한 다음 광해군에게 아뢸 계획이었다 한다. 왕도 이미 그 계획을 허락하였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때 갑자기 조정의 실권자인 삼창(三昌·이이첨, 박승종 및 유희분)이 왕에게 허균이 반역을 꾀한다고 밀고했다. 대비를 없앤다는 구실 아래 허균이 역모를 일으킬 거라는 주장이었다. 그 말에 놀란 인조는 사건을 엄히 조사하게 했다. 아무리 보아도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는 증거는 명백하지 않다. 그는 대북파의 우두머리 이이첨을 상대로 인목대비의 폐모를 누가 먼저 할 것인가를 둘러싼 경쟁을 벌였다. 이이첨은 공을 빼앗길까봐 두려움을 느꼈고, 허균에게 반역죄를 씌워 반전을 도모한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실록 광해10년 8월21일 정축). 그때 허균을 궁지로 몰아넣는데 크게 조력한 이는 허균의 제자였던 기준격이었다. 기준격의 아버지 기자헌은 애초 허균의 친구였다. 그런데 인목대비에 관한 문제로 그들의 우정은 금이 갔다. 허균은 기자헌을 죽이려 들었고, 분노한 기준격은 허균의 과거 언행 가운데 문제 삼을 만한 부분을 꼬투리 삼아 공격했다(광해 9년 12월26일 정사). ●예언을 통한 집권의 정당화는 오랜 전통 어쨌거나 허균과 유효립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예언을 통해 기성의 정치세력에 반항하다 실패했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성사되었더라면 어찌 되었을지는 빤하다. 때로 예언은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이 예언을 바꾸는 경우는 더욱 많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부고]

    ●김유배(성균관대 교수)정배(농협중앙회)완배(경희대 의료원)양배(사업)씨 부친상 30일 오전 6시30분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월2일 오전 5시 (02)3010-2292●윤상기(개인사업)상운(개인사업)상돈(21세기 수학교육연구소장)상봉(개인사업)씨 부친상 30일 오전 6시15분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월2일 오전 6시30분 (02)3010-2293●김수재(㈜뉴월드축산 대표이사)영술(㈜뷰닉스 이사)씨 모친상 30일 오전 8시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월2일 오전 3시 (02)3010-2237●박영수(아이에스 하이텍㈜회장)병엽(팬택계열 부회장)씨부친상 정기태(선진해운항공 회장)김세옥(청와대 경호실장)이정근(이정근 안과원장)씨 빙부상 29일 서울대병원, 발인 2일 오전 6시30분 (02)2072-2010●신상전(덕성여대 총장)씨 모친상 3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월2일 오전 4시 (02)3410-6914●최승진(제일기획 국장)씨 부친상 정병문(대우자동차 감사)남기평(영남대 화학과 교수)강석현(개인사업)씨 빙부상 3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월2일 오전 (02)3410-6915●표재동(전 칩마스타 전무)씨 모친상 장석규(전 대구시 공무원교육원장)이정우(서울패션시티 대표)양세규(전 삼부토건 상무)씨 빙모상 정영철(해맑은피부과 원장)씨 외조모상 2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월1일 오전 6시 (02)3010-2268●박순원(㈜은하 양행)씨 부친상 2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월1일 오전 7시 (02)3010-2230●박의택(예람교회 목사)의관(전 육군법무차감 예비역 대령)의문(동안교회 담임목사)의용(영주배점교회 담임목사)의준(삼성종합사무기 대표)의동(예성IS 사장)씨 모친상 김반석(면류관교회 담임목사)씨 빙모상 2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월2일 오전 9시 (02)3010-2631●정진규(법무법인 대륙 대표변호사)진만(SKM 감사)진천(흥우산업 대표)진흥(정도케미칼 대표)씨 모친상 3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월2일 오전 7시 (02)3410-6907●최하규(대통령경호실)김대웅(한국전자통신 연구원)이기동(계명대 교수)씨 빙부상 2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월1일 오전 10시 (02)3010-2239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데뷔 35년… ‘문인들이 좋아하는 화가’ 이왈종 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데뷔 35년… ‘문인들이 좋아하는 화가’ 이왈종 씨

    폴 고갱은 나이 마흔셋에 문명 세계에 대한 혐오감을 느껴 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히티로 훌쩍 떠났다. 여기에서 ‘타히티의 여인들’ 등 불후의 명작을 많이 남겼다. 빈센트 반 고흐 역시 대도시 생활에 싫증을 느껴 지중해로 떠나 걸작 ‘해바라기’를 남겼다. 아마 예술가의 포부를 위해 자기유배의 길을 스스로 떠나지 않았을까. 이왈종(60)씨.‘생활속에서-중도 시리즈’로 잘 알려진 한국 화단의 중견작가다. 지난 1990년, 그해 어느날 교수직(추계예술대)을 홀연히 버리고 따뜻한 남쪽의 섬 제주를 택했다. 주위에서는 서울로 곧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예술가적인 기(氣)를 충전하고 돌아올 것으로 다들 생각했지만 15년째 눌러 살고 있는 것. 이젠, 자신을 해방시킨 제주를 왜 떠나느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또 복잡한 서울을 더 이상 생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푹 파묻혀 있다. 이 화백은 올해로 화단 데뷔 35년째를 맞고 있다. 그러니까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국립현대미술관)에 이어 이듬해인 스물여섯 나이에 국립공보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그동안 국내외 개인전만 20여차례, 단체전의 경우 매년 1∼2차례 참가했으니 그의 왕성한 작품활동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난주 제주의 밤 바다가 보이는 서귀포의 한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때마침 서울에서 온 손님(화랑 관계자)과 싱싱한 복어회에다 소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서울에서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후래삼배’를 먼저 권한다. 이 화백이 약간 취기가 있었기에 같이 보조를 맞추자는 뜻에서였다. 창너머 서귀포 앞바다에는 한치잡이 어선에서 켠 불빛이 아름답게 빛나 장관을 이루었다. 문득 한마디 건넨다.“선생님, 아름답죠?” 그러자 “암요,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돌아왔다. “……?” “자연입니다. 인간에게 맞추면 괴롭고요, 자연에 맞추면 아름답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지요. 괴로움도 즐거움도 말입니다. 파리나 참새도 똑같은 생명입니다.” 술잔이 다시 오고갔다. 안주도 권했다. 사전에 질문 거리를 몇 가지 생각했지만 취기가 있어서인지 갑자기 순서가 헷갈린다. 들켰을까. 이 화백도 그걸 아는지 껄껄 웃으며 선문답 형태의 얘기로 분위기를 설렁설렁 몰아간다. 에라 모르겠다,“선생님은 그동안 제주 어디에다 맞춤표를 두셨는지요?”라고 질문을 툭 던졌다. “아닌 곳이 없지요. 제주에 왔을 때 시장바닥을 봐도, 잡초나 동백꽃을 봐도 행복했습니다. 마음이 어디에 치우치느냐가 문제이지요. 꽃을 봐도 괴로울 수가 있습니다. 제주란 아름다움이고 그렇게 맞추었습니다. 또 집착하지 않고 평등하게 바라보면서 ‘중도관’을 생각했습니다.” 이 화백은 제주 생활을 하면서 ‘중도시리즈’를 표방해 왔다. 또 오랜 금욕적인 생활방식과 돌담처럼 쌓인 열정으로 붓의 힘이 더욱 세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동석한 화랑 관계자도 “이 화백은 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라면서 “(그림이)흥분된 에너지를 능란한 서예의 획으로 쓱쓱 그려진다.”고 거들었다. “중도란 무엇입니까.” “너무 가까이 가서도, 너무 멀리 떨어져도 괴롭지요. 하나는 전부요, 전부는 하나입니다.” “지난 제주생활의 15년을 관통한다면 어떤 의미로 새겨집니까?” “행복,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몸속에 채워져 있을 때가 괴롭지요. 비운 마음은 작은 것도 크게 보입니다. 사람 만날 일도 없고, 그림 그리고 밥 먹는 게 전부입니다.(제주)올 때 모든 것을 놓았어요.” 처음 5년은 그리고 싶은 그림을 실컷 그리다 죽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벌써 15년이 됐단다. 어디서나, 아무때나 들을 수 있는 새소리, 파도소리, 장중하고 때론 감미로운 바람소리, 그리고 동백꽃, 매화, 수선화 등 온갖 꽃들 향기에 취해 살아온 몽유의 세월이었다고 했다. 까닭에 화폭에는 꽃, 새, 물고기, 노루, 자동차, 전화기 등이 자주 등장했다. 요즘에는 골프장 풍경을 많이 그린다. 예술성이든, 상업성이든 따지지 않고 즐겁게 그렸고 그것으로 만족한다며 활짝 웃는다. “최근에는 도자기 작업에도 열중하고 있지요. 향로를 만들고 거기에 그림을 집어넣는 향로들이지요. 저 세상으로 떠난 친구의 영혼 안식을 빌어주고 또 다사다난한 현실에서 많은 번뇌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심사를 편안케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이지요.” 다시 건배를 하고 나서 잠시 창밖을 응시한다. 때를 놓칠세라 제주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곡선입니다. 인간은 수직적이고 상하관계로 연결되고 이해관계로 얽혀져 있습니다. 해안선과 돌담, 다들 아름다운 곡선이지요. 제주의 자연을 보면 마음을 덜어내는 행복을 느낍니다. 또 솟구치는 파도를 보면서 인간의 한계를 새삼 절감하지요.” “선생님, 왜 서울을 버리고 제주를 택했나요? 그리고 다시 서울 갈 생각은 없나요?” “그곳은 와글와글합니다. 먼지 속으로 사람 많은 곳으로 갈 이유가 하나도 없지요. 자연과 호흡하는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평생 제주에 있을 작정입니다. 여기에서 놓고 가야지, 어떡하겠습니까.” 요즘 그는 어린이들과 일주일에 두번씩 동심의 세계에 푹 빠져든다. 지난 10월 초부터 서귀포시 평생학습센터 ‘엄마랑 아이랑 함께하는 미술교실’의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있는 것. 매주 월요일 유아반, 화요일 초등반으로 나눠 각각 한시간반씩 그림 지도를 해주고 있다. 친근감을 주는 ‘동시’와 ‘동요’들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올해 초부터 틈틈이 어린이들에게 지도를 해오다 아예 고정적인 시간을 마련했다. 이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학부모들로부터 수강 문의가 줄을 잇고 있다고 서귀포시 관계자는 전했다. “어린이들한테 많이 배우고 있어요. 어른들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거든요. 어린이들에게 그림은 상상력과 사고력을 확충시켜 주지요.” 이 화백은 새벽 3시에 일어나 오후 5시까지 철저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버린 자식처럼 들꽃과 산꽃을 무작정 만나기도 하고 붓을 들어 그림의 세계에 빠져들기도 한다. 두달에 한번 만나는, 서귀포 시내의 향토예술인 모임 ‘문화사업회’에 참석하는 것이 유일한 개인생활이다. 슬쩍 젊었을 적 시절을 물었더니 “국전에서 아홉번 낙선하고 아홉번 당선(입선)했다.”는 말이 금방 나온다. 자료를 뒤졌더니 국전 15회(66년)부터 27회까지 17∼19회를 제외하곤 연이어 심사에 뽑힌 것으로 확인된다.‘9전9기’가 아니냐고 했더니 그냥 멋쩍게 웃기만 한다. 경기도 화성 출신인 그는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었다. 어려서 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몸이 하도 허약해 농사꾼조차 못되는 쓸모없는 아이로 취급받았다. 중학때 미술 선생이 좋아 특활시간에 미술반에 들어간 것이 계기가 돼 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 소정 변관식(76년 작고) 화백 등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데뷔 초기에는 실경산수를 자주 그렸다. 그는 슬하에 딸과 아들을 두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딸은 동양화를 전공, 현재 전시회를 준비 중이고 아들은 영국 켄트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다.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생로병사의 근심을 털고 모두들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 행복과 안식이 온 누리에 펼쳐지길 희망합니다.” ■ 그가 걸어온 길 ▲1945 경기도 화성 출생 ▲70년 중앙대 회화과 졸업, 한국미술대상전(국립현대미술관) 전시 ▲88년 건국대 교육대학원 회화과 석사 ▲79∼90년 추계예술대 교수 ▲90년∼현재 제주에서 생활 ▲71년 국립공보관 첫 개인전 ▲76년 2회 개인전 미도파화랑 ▲80년 3회 개인전 미도파화랑 ▲이후 2005년까지 19회 국내외 개인전 ▲단체전은 75년 아시아 현대미술전(도쿄)을 시작으로 50여회 참여 ■ 상훈 국전 제15,16,20,21,22,23,25,26,27회 입선. 한국미술대상전 입선(70년), 한국미술대전 문공부장관상(74년), 미술기자협회 미술기자상(83년), 미술시대 미술작가상(91년), 월전미술문화재단 제5회 월전미술상 수상(2001년) ■ 저서 ‘생활속에서-중도의 세계 이왈종의 회화’ ‘도가와 왈종’‘중국 회화 사상 및 문학성에 대한 연구’‘이왈종 화집’ km@seoul.co.kr
  • 儒林(483)-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5)

    儒林(483)-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5)

    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5) 율곡이 남긴 최초의 문장은 그가 7살 때 남긴 ‘진복창전(陳復昌傳)’이다. 진복창은 율곡이 살던 한양의 수진방 본가의 이웃에 살던 권신이었다. 진복창은 율곡이 세상에 태어나기 1년 전에 벌써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그 무렵 한창 벼슬길을 달리고 있던 전도유망한 사람이었다. 특히 진복창은 훗날 윤원형을 도와 을사사화를 일으킨 매우 부도덕한 인물로 사관들은 진복창을 독사로까지 매도하고 있는 인물인데,7살의 소년 이율곡은 평소에 자신이 본 진복창이란 인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성숙한 군자는 마음속에 덕을 쌓는 까닭에 늘 태연하고, 성숙하지 못한 소인은 마음속에 욕심을 쌓는 까닭에 마음이 늘 불안하다. 내가 진복창의 사람됨을 보니 속으로는 불평불만을 품었으되, 겉으로는 태연한 척한다. 이 사람이 벼슬자리를 얻게 된다면 나중에 닥칠 걱정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 문장에 나오는 ‘군자는 마음속에 덕을 쌓는 까닭에 늘 태연하고, 소인은 마음속에 욕심을 쌓는 까닭에 마음이 늘 불안하다.’라는 구절은 논어의 술이(述而)편에 나오는 공자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군자는 마음이 평탄하고 넓으며, 소인은 언제나 걱정을 한다.(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 이를 통해 7세에 율곡은 벌써 군자의 논어뿐 아니라 사서를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 무렵 병조판서 김안국(金安國)이 닥나무에 이끼를 섞은 태지(苔紙)라는 종이를 만들고 유교교과서인 사서삼경을 많이 간행하여 지방의 선비들에게까지 보급하였던 결과로 집안의 신분으로 보아서 율곡은 이와 같은 유교의 경전을 일찍 접하고 이를 어머니를 통해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7세의 율곡이 논어의 이 문장을 자유자재로 인용하였다는 것보다는 당대의 권신 ‘진복창’에 대해서 ‘이 사람이 벼슬자리를 얻게 된다면 나중에 닥칠 걱정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라는 인물평을 하였다는 점이다. 실제로 먼 훗날의 일이지만 율곡의 장인인 노경린이 진복창으로부터 탄핵을 입어 벼슬자리에서 좌천된 일이 있고 보면 사람의 됨됨이를 꿰뚫어보는 7살의 율곡의 혜안은 실로 경이적인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진복창은 윤원형의 심복이 되어 갖은 악행을 저지르다가 유배되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나중에 닥칠 걱정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라는 율곡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되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율곡의 시심(詩心) 역시 천재적인 것이었다. 그가 남긴 최초의 시는 파주군 파평면 임진강 기슭에 있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화석정(花石亭)이란 정자에서 지은 오언율시이다. 깊은 가을저녁에 이곳을 찾은 8세의 율곡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시인의 생각은 끝이 없어라. 멀리 흐르는 물은 마을에 닿아 푸르고/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붉어가네.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강은 만리에 바람을 머금었도다. 하늘가에 저 기러기 어디로 가는가/저무는 노을 속으로 울음소리 끊기누나.”
  • 儒林(481)-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3)

    儒林(481)-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3)

    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3) ‘질풍노도’의 계절은 비단 율곡의 한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나라도 미친 바람과 성난 파도의 질풍노도였다. 12세의 어린나이로 왕위에 오른 명종은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윤원형일파의 소윤이 권력을 장악하여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다.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 이 사화로 인하여 윤임, 유관 등은 사사되고, 이언적, 노수신을 유배시켜 불과 5,6년 사이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는 참극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명종은 20세 되던 해에 어머니로부터 수렴청정을 거두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명종은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속에서 간신히 왕위를 지켜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외척에 의한 권력독점은 양반관료층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나라는 안팎으로 소용돌이에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1555년 세견선(歲遣船)의 감소로 곤란을 겪은 왜인들이 전라도 지방을 침입하는 을묘왜변까지 일어나게 되자 민심은 흉흉하게 되었으며, 여진족의 빈번한 침범으로 북쪽지방도 불안에 빠져 나라 전체는 표류하는 배처럼 극도의 혼란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실록에 의하면 이러한 난세를 반영하듯 명종13년에는 한낮에 태백성이 수시로 나타났다고 전하고 있다. 태백성은 저녁 무렵 서쪽하늘에서 유난히 빛나는 금성(金星)을 이르는 말로 이 별이 한낮에 수시로 나타났다는 말은 국가의 변란을 예고하는 천재지변의 표징이었던 것이다. 또한 실록은 4월30일 밤에도 ‘유성이 남방의 하늘가로 들어가는데, 형상은 배(梨)와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1,2척쯤 되었으며, 붉은 적색을 띠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7월20일에는 평안도 평양부에 혜성이 서북방 하늘가에 나타났는데, 꼬리길이는 3,4척쯤 되었고, 모양은 흩어놓은 실과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이러한 자연현상의 괴변뿐 아니라 생명현상으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돌연변이가 발생하였다.8월15일에는 전라도 무장(茂長)의 민가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여 날개를 치며 새벽에 울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금산(錦山)의 민가에서는 한 여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왼쪽 겨드랑이로 출산하였다는 괴현상도 출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부패한 사회에 대한 불만과 백성들의 민심은 마침내 큰 난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이익(李瀷)이 ‘성호사설’에서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3대 의적으로 평가하였던 임거정(林巨正)의 난이었던 것이다. 임거정은 임거질정(林巨叱正)으로도 불리는 경기도 양주출신의 백정으로 흔히 소리나는 대로 임꺽정으로 불리던 도둑으로 처음에는 민가를 횡행하여 도적질을 일삼다가 차츰 세력이 커지자 황해도 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으로까지 성장하였던 것이다.
  • 윤석화 1인극 ‘영영 이별 영 이별’

    올초 연극 ‘위트’에서 암 투병 중인 영문학자 역으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배우 윤석화가 이번엔 지고지순한 사랑의 화신으로 분해 뭇 남성들의 심금을 울린다.24일 서울 산울림소극장에서 막올리는 ‘윤석화의 정순왕후, 영영 이별 영 이별’(전옥란 극본, 임영웅 연출)에서다. 정순왕후는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열일곱 나이에 목숨까지 빼앗긴 비운의 왕 단종의 아내. 열여덟에 남편을 잃고 궁에서 내쳐져 서인으로, 걸인으로, 날품팔이꾼으로 목숨을 연명하며 여든 두해를 살아낸 한 많은 여인이다. 연극 ‘…영영 이별 영 이별’은 정순왕후의 혼백이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의 1인극으로, 작가 김별아의 동명 작품을 원작으로 했다. 윤석화로서는 뮤지컬 ‘명성황후’, 연극 ‘덕혜옹주’의 뒤를 이어 세번째 연기하는 왕가의 여인인데다 ‘목소리’(1989),‘딸에게 보내는 편지’(1992)에 이은 세번째 모노드라마. 연출을 맡은 극단 산울림 임영웅 대표와는 연극 ‘세자매’이후 5년 만의 만남이어서 두루 의미가 깊다. “자신의 불행했던 일생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는 정순왕후의 내면을 배우로서 꼭 연기하고 싶었다.”는 윤석화는 공연을 앞두고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이별한 청계천 영도교와 단종의 유배지였던 강원도 영월을 찾아 심신을 가다듬었다. 극중에서 열다섯 어린 신부의 모습부터 여든 두살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까지 60여년의 세월을 펼쳐 보일 예정인 그는 이번 공연을 위해 시조창과 살풀이 연습에도 공을 들였다. 내년 2월19일까지.(02)334-5915.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5)조선 정조 北道 원수 주형채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5)조선 정조 北道 원수 주형채

    정조9년(1785) 봄이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는 천주교인 수십 명이 오늘날의 명동천주교회를 결성했고, 그것이 문제가 돼 이른바 을사박해가 일어났다. 마침 전국적인 지하조직망을 가진 것으로 조사된 또 한 번의 ‘정감록’ 사건까지 발생해 세상인심이 뒤숭숭했다. 결국 정감록 사건의 주모자 몇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주형채(朱炯采)라는 평민지식인이 끼어 있었다. 당시 심문 기록에는 주형채에 관한 단편적인 정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실로 구슬을 꿰듯 주워 모아보면 주형채의 일생은 역사상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조선후기의 허다한 평민지식인 또는 술사들의 삶을 대변한다. 더욱이 그들은 체제에 저항한 일부 양반들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그런 점에서 주형채의 삶은 더욱 관심을 끈다. ●주형채의 ‘범죄행위’ 정감록 사건의 또 다른 주범인 문양해는 동지 주형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함경도 영흥이 고향인데 향악선생(香嶽 속명은 김정 또는 김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흉악한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편지에 쓰인 흉악한 구절을 문양해는 자기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며, 예를 든다.“하늘이 내리는 재앙과 시국의 변천이 이와 같으니 이제 진인(眞人)이 마땅히 나와야 할 것이고, 우리들은 사람들을 모아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을 반정(反正)을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향악선생은 이 편지를 상자 속에 깊이 감추어 두었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언젠가 향악선생이 외출한 틈을 타서 평소 호기심이 많았던 문양해는 몰래 편지를 꺼내 보았다고 했다. 문제의 편지가 지리산에 도착한 것은 아마 사건 발생 한 해 전인 정조8년 정월로 짐작되는데, 주형채가 하필 왜 그 시점에 이런 편지를 보내왔는지 문양해는 까닭을 모르겠다고 했다. 주형채가 향악선생과 교제를 시작한 것은 오래 전이었다. 적어도 사건 발생 15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했다. 주형채는 얼굴 생김이 괴상하고 못났지만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여 사람을 쏘아보듯 하였다. 주형채와 향악선생 사이에는 오랫동안 편지가 오갔다. 지리산에서 함경도 영흥까지는 근 2000리나 되는 먼 길인데도 서로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편지 심부름을 한 이는 혜준 스님이었다. 혜준은 오래 전 함경도의 어느 사찰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는 주형채와 친해졌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뒤로도 함경도를 자주 왕래하였다. 사건 당시 혜준은 경상도 하동에 있는 영원사에 몸을 담고 있었다. 향악과 ‘괴이한’ 편지를 주고받은 것 외에도 주형채는 여러 차례 불온 문서를 조작했다고 한다. 그는 “멀리 귀양가는 노래”를 지어 조정의 잘못을 비난하고 민심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주형채는 아니라고 끝까지 부정했다. 그 노래는 충신이 멀리 귀양 갈 때 지은 시라고 누군가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그저 베껴두었을 뿐, 다른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발뺌이 용이하지 않았다. 주형채는 장차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주장을 동지들 앞에서 서슴없이 했던 것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함경도의 평민지식인 주형채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불순세력’과 연합해 조선왕조의 전복을 꾀했다.‘정감록’ 사건을 종결짓는 마지막 확정 판결의 일절은 이랬다.“이율, 양형, 문양해, 홍복영 등 여러 역적들이 반역을 음모해 여러 도에서 거사를 도모하면서 주형채를 북도의 원수로 정하였다. 그들이 서로 왕복하며 주도면밀하게 반역죄를 꾸민 사실은 여러 죄수들의 심문과정에서 샅샅이 드러났다.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죄인들을 군율에 의거하여 한강 모래밭에서 효시(梟示)하라.”(실록, 정조 9년 3월22일 신미) ●천문과 점술의 대가 주형채 정감록 사건에서 “북도 원수”로 거론된 주형채에게는 사실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그의 이웃사람들은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아리송한 일이 생기면 주형채를 찾아갔다. 주형채의 집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도가 만나는 접경지대에 있어 양도의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주형채는 이를 테면 ‘만물박사’였으며, 여러모로 평민들의 교사역할을 담당했다. 정감록 사건이 발생하기 일년 전인 정조8년 12월 초7일부터 사흘 동안 별자리에 이상이 있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주형채에게 물어왔다. 당시 주형채가 관찰한 바로는 위성(危星), 실성(室星), 벽성(壁星) 앞에 20여 개의 별이 벽을 쌓고 늘어섰었다. 그 가운데 붉은 기운이 있어 상서롭지 못했다. 특히 여러 별 가운데서도 장군성(將軍星)과 태백성(太白星)이 서로 사흘 동안 싸우다 1도(度) 거리로 멀어졌다. 그 때 태백성이 어깨로 장군성을 부딪쳐 여러 번 이겼다 졌다 했는데, 이 모든 것이 흉한 조짐이었다. 주형채는 이같은 현상이 조선이나 중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해로울 일이 조금도 없다고 주민들을 달랬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난리를 염려해 피란을 고려하고 있었지만 자기가 만류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조정의 심문관들은 주형채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관리들이 보기에 주형채는 민심을 선동해 피란행렬을 조장한 혐의가 짙었다. 실제로 그 무렵 함경도에는 남쪽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정감록’에 예언된 십승지가 모두 남쪽에 있는 관계로, 북도 사람들은 여차하면 남쪽으로 옮길 태세였다. 그들의 상당수는 이미 십승지를 찾아 이동을 시작했다. 주형채와 같은 평민지식인들은 이주운동에 음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주형채는 관리들의 문제제기를 부정했다.“저는 주민들을 타일렀습니다.‘현명한 임금이 다스리는 시대에 어찌 피란가는 일이 있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평민 주형채는 본래 고향 사람 장진익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의 스승은 사건 당시 이미 사망한 지 오래 되어 화를 면했다. 유교의 기본 경전은 물론이고 천문과 점술까지 통달한 주형채는 향악선생과 같은 도사는 물론이고 점술인들과도 친한 사이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형채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함구했다.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제게는 제자나 동문생도 전혀 없었으며, 도사나 점술인은 원래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주형채는 의리가 무척 강했던 사람이며, 의지가 대단했다. 그러나 사건을 수사한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주형채는 대단한 악질이었다.“주형채는 본래 흉악하고 요사스러운 놈으로 천문 역법과 점술, 둔갑술 등 갖은 술수를 써서 백성들을 속이고 인심을 선동하는 것을 일삼았다. 몰래 역적이 될 마음을 먹고 밤낮으로 기회를 엿보았으며, 스스로 ‘대장’이라 떠들기도 하고, 혹은 ‘도원수’라고 칭했다. 더러는 10만의 군사를 모을 수 있다고 했고, 혹은 영흥(永興)의 군사용 창고를 접수하겠다고 하였다. 심지어는 제가 세울 나라의 국호를 제(齊)나라라고까지 했다. 놈은 마음속으로 이것도 작다고 생각했던지 중국 황제를 만나 추천을 받아 자기가 임금이 될 거라고 했다. 또한 꿈의 해몽을 빙자해 신하로서는 감히 꺼낼 수도 없는 말을 멋대로 지껄인 편지가 남아 있다. 지극히 흉악한 죄상이 지금까지 압수된 문서 중에 이미 역력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자기 죄를 한마디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조정의 판단이었다. 평민지식인 주형채의 생각으로는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 때의 부정 불의한 세상이요, 조정이었다. 자기와 자기 동료들은 아무런 죄도 없었다. 따라서 썩어빠진 관리들이나 임금 앞에서 죄를 인정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살점이 떨어지는 혹독한 고문을 묵묵히 견디면서 주형채는 단 한마디도 잘못을 빌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사태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주형채가 지하조직에 편입된 계기 ‘정감록’ 역모사건의 소용돌이에 주형채가 휩쓸리게 된 것은 물론 그가 지하조직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가 지하조직에 가입하게 된 데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째, 주형채는 이 사건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문양해 일가와 인연이 깊었다. 문양해의 삼촌 문광도는 함경도 문천에서 잠시 감목관(監牧官 목장업무를 담당하는 관리)을 지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곳을 여행하던 주형채가 천문에 관한 일로 문광도와 토론을 벌였고, 이를 계기로 여러 문씨들을 사귀게 되었다. 문씨 일가는 충청도 공주의 평민으로 학식이 뛰어났다. 그들은 홍국영의 가까운 친족 홍낙순이 충청감사가 되었을 때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홍 감사가 충청도 감영(監營)에 계실 때 많은 은혜를 입었고, 감사께서 저희 집에 찾아오셔서 만났습니다.” 문양해의 아버지의 진술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평민 문광도 역시 홍낙순의 후원으로 감목관 벼슬을 얻은 게 틀림없다. 주형채는 이런 문광도와 서로 기맥이 통하게 됨으로써 장차 문양해 및 홍복영(홍낙순의 아들)과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둘째, 정감록 사건의 또 다른 주역 양형과도 깊이 사귀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형채의 사촌 주형로는 이미 양형을 알고 지냈다. 주형로(일명 주형일)는 사건 당시 충청도 단양에 머물고 있었다. 양형은 주형로를 통해 주형채란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자기 친척 문광도에게서 주형채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전해 듣게 되자 호기심이 발동했다. 양형과 주형채는 서로 연락해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사이는 곧 절친한 관계로 발전했다. 양형은 서울 입동에 사는 중인이었다. 낮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글재주가 출중했던 그는 서울의 양반 홍복영 및 이율과도 매우 친한 사이였다. 정조 초년, 홍복영은 충청감사로 임명된 아버지 홍낙순을 따라 공주에 내려가 있었다. 그 때 의약에 관한 일로 홍낙순은 고민을 하던 중 양형이 의술에 밝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 상의한 적이 있었다. 양형의 처방이 적중했던지 의술을 매개로 그들은 서로 친해졌다. 홍낙순 일가가 서울로 돌아온 뒤 양형과 홍씨들은 더욱 가까워졌다. 홍복영은 양형의 살림이 어려울 때 도와주기도 했다. 그들은 때때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나중에 함께 공모해 하동에 지하조직의 거점을 마련했다. 양형과 가까워진 주형채 역시 이 조직에 포섭된 것은 물론이었다. 셋째, 주형채와 홍복영은 끝까지 그 점을 부인했지만, 주형채는 여러 해 전부터 홍복영 일가와 알고 지냈다고 봐야 한다. 홍복영의 삼촌 홍낙빈은 주형채와 친밀해 편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정조 5년(1781) 세도정치가 홍국영이 실각하자 가까운 친척 홍낙빈도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그 때부터 주형채는 홍씨 일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다들 왕조의 전복을 꾀하였다. 위에서 살핀 몇 가지 경로를 통해 주형채는 ‘정감록’ 사건의 주역들과 마음을 합친 것으로 생각된다. 주형채와 양형, 문양해, 홍복영 등이 지하조직을 형성해 나간 과정을 살펴보면 뜻밖에도 두 가지 사실이 부각된다. 하나는 18세기 조선사회에서 중인 또는 평민 지식인들이 끊임없이 지리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주형채처럼 고향을 지키고 사는 경우에도 자주 이웃 지방을 여행해 사교범위를 확장하고 있었다. 둘째, 평민 또는 중인 지식인들은 계층을 뛰어넘어 양반들을 사귀는 데 열심이었고, 양반들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하층지식인들과 접촉하였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은 같은 신분층에 속하는 식자들만 사귀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완전히 달랐다. 양반과 평민지식인들은 그것이 비록 평교(平交 평등한 교제)는 아니었다 해도 인생의 다양한 국면에서 서로 만났던 것이다. ●주형채가 속한 전국규모의 지하조직 주형채는 조직의 상층부를 상당히 잘 알고 있었으나 하부구조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대다수의 조직원들은 지하조직의 일부를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 조직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던 지도층 인사는 문양해 정도였다. 문양해는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지하조직의 얼개를 비교적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다. 북도의 원수는 주형채였지만 그 밑에 여러 명의 두목이 활동했다. 함경도 안변에는 조상호와 유덕휘가, 그리고 강원도 통천에는 유경일이 대도독(大都督)이라 불렸다. 고성의 칠송정에 사는 권생만 역시 대도독으로 통했다. 그들은 일단 유사시 지역사령관으로 능력을 발휘할 참이었다.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유경일과 권생만은 지리산의 향악선생과 가끔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문양해는 사건 발생 2년 전에 그들이 향악선생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밖에 황해도 봉산에 있는 이형윤과 황주에 사는 정몽로도 해서지방의 괴수로 손꼽혔다. 고위간부는 아니었지만 평안도 곽산에 살던 박필현도 이 조직의 일원이었다. 주형채 등의 명단은 지리산 거점에 보관 돼 있던 두루마리에 모두 적혀 있었다 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서울 사는 양반들도 이 지하조직에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앞에서도 이름이 언급된 이율과 홍복영이었다. 진사 이율은 한양 이현에 살았는데 홍씨 일문에 보낸 편지에서,“이 세상을 보지 아니 할 때는 언제입니까? 제 뜻을 온 세상에 널리 펴지 못하게 된다면, 한탄한들 무엇 하겠습니까?”라며 반역의 뜻을 비쳤다. 서소문 밖에 살던 진사 정래정과 정래익도 지리산의 향악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조정을 비방하였다.“우리가 비록 재주가 없고 불민하지만 거사하는 날에는 조영흥(趙永興 이름은 미상)이나 주공(朱公 주형채)의 부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여기서 보듯 주형채는 조직 내에서 상당한 실력자로 인식되었다. 물론 지하조직을 총괄한 이는 향악선생이었고, 그를 측근에서 보좌한 이가 문양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향악선생이 끝내 체포되지 않은 가운데 이 사건은 종결된다. 어쩌면 향악선생이란 인물 자체가 허구였을 수가 있다. 문양해가 가공의 향악선생 노릇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문양해야말로 실은 지하조직의 괴수였던 셈이다. 문양해는 문장에 능한 미혼의 노총각으로 비승비속의 도사였다. 지하조직에서는 충청도출신 인사들의 참여도가 높은 편이었다. 특히 공주지방 사람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으며, 내포지방의 양반들도 여러 명이 관여했다. 조직의 실질적인 우두머리 문양해 일족이 공주 출신이었던 데다, 조직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한 홍복영의 아버지 홍낙순이 충청감사를 역임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공주 효포 출신의 권우는 지하조직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향악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생님의 재간은 천고에 뛰어납니다. 제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마땅히 보내서 글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훗날 거사할 기일을 정확히 알려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밖에 공주의 상대장리에 사는 진규도 향악선생과 함께 흉악한 묘책과 비밀스러운 계책을 짰다고 한다. 공주 유구역의 홍정유, 한산의 정탁 3형제, 태안의 조수정과 조수인 형제, 역시 태안에 사는 가명정(賈命正) 등도 조직에 합류했다. 당진의 조두진, 서홍기, 한제만, 대흥의 이인치도 관련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전라 경상 양도의 참여도는 무척 낮았다. 전라도 광양의 오성겸과 이춘홍이 군비 조달에 기여하기로 내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특히 경상도 쪽은 조직원이 아예 전무했다. 그것은 이 지하조직이 노론 출신의 홍국영 잔당과 긴밀하게 연계돼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남인의 세력근거지인 경상도 인사들은 이 조직을 외면했던 것이다. 국가전복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졌으면서도 이 조직은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가 짙었다. 하필 그 거점을 지리산에 둔 것은 안전은 물론 신비스러운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이 조직의 실체는 문양해의 진술을 통해 어느 정도 밝혀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비밀스러운 조직이었던 만큼, 그리고 심문과정에서 마지못해 털어 놓은 이야기란 점에서 불충분한 점이 적지 않다. ●동학의 원조 지하조직에 가담한 사람은 다양했다. 이율과 홍복영 등 실세한 양반이 한 축을 이뤘다면, 지하조직의 운영을 직접 담당한 실질적인 주도층은 중인 이하의 평민지식인들이었다. 주형채, 양형 및 문양해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 사건은 이미 18세기 후반에 정치 종교적인 성격을 띤 전국규모의 민중운동이 준비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실례다. 이런 운동 경험은 지속적으로 축적되어갔다. 그 결과,19세기 말 동학이 대두하자 각지의 농민은 순식간에 동학의 기치 아래 모여들어 거대조직을 만들어냈다. 빗방울이 바로 바다에 이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인 빗물은 어디엔가 웅덩이를 이룬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불임부부 64만쌍

    불임부부 64만쌍

    주변에서 불임부부를 한두 쌍 정도는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불임은 이제 일부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관별로 불임률을 추산하고는 있지만, 가임연령의 기준 등에 따라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불임부부가 존재하다는 게 전문기관의 분석이다. 일반적으로 불임은 ‘배우자와 동거하면서 피임을 하지 않고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가진 상태에서 1년 이내에 임신이 되지 않거나 생존아를 출산할 수 있는 임신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로 정의된다. 열린우리당 이기우 의원실은 지난 4월 보건복지부와 통계청의 자료를 토대로 구성한 자료에서 불임부부가 모두 64만쌍에 이른다고 발표했다.10년 전인 25만쌍보다 2.5배 이상 증가한 수치이며, 배우자가 있는 가임여성(15∼39세)의 14%에 이른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2003년 출간한 보고서에서는 불임발생률을 13.5%로 추산하고 있다. 전국 표본조사에서 추출된 15∼44세 유배우자 가임여성 6393명 가운데 피임한 경험이 전혀 없는 여성을 대상으로 배우자와 동거한 직후부터 미피임 기간이 1년 이상 경과한 여성 1123명 중 임신을 못한 여성을 백분율로 계산한 것이다. 불임발생 여성 가운데 미피임 기간이 3년 이상 경과했으나 임신을 못한 불임여성 비율은 11.3%였으며, 출산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유산된 경우가 3.3%였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정조7년(1783) 1월15일, 인정전에 모인 신하들은 ‘정감록’을 되뇌이던 역적들을 일망타진하게 된 사실을 기뻐하며 국왕에게 축하인사를 올렸다. 난리가 토벌되면 되풀이되는 하나의 관습이었다. 이날 정조는 전국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웬만한 죄인은 다 풀어주라는 것으로, 이 역시 뒤숭숭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상투적인 조치였다. 왕은 포고문에서 문제의 정감록 사건을 일으킨 문인방과 이경래 등 주범들의 죄상을 간단히 요약했다. 사면령을 내리는 동시에, 역모사건의 전모를 백성들에게 간단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실록, 정조 7년 1월15일 정미) 먼저 사건의 중심에 있던 문인방의 죄를 성토한다. 문인방은 삿된 술수를 써 백성들을 현혹하였다고 했다. 그가 역모를 꾸민 것은 고대 중국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과 비슷하다고 했다. 매우 심한 과장이었다. 그 옛날 장각이 이끈 황건적은 중국 한나라를 기우뚱거리게 만들었다. 문인방 사건이 미수에 그친 것과는 천양지차다. 정조는 문인방이 각지를 떠돌며 힘센 장사를 모으려 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명종 때 유명한 도적 임꺽정 사건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역시 과장된 표현이다. 문인방은 백천식, 김훈 등과 짜고 상주의 백학산 아래 만든 소굴에 머물렀다. 이 사건이 발각된 것은 그들과 한통속이던 박서집이 밀고했기 때문이었다. 전라도에서 체포된 문인방은 전주 감영에서 취조를 받았고, 곧이어 서울로 붙들려가 본격적인 신문을 받았다. 그는 역모 사실을 모두 실토했다. 군량을 담당할 사람, 난리를 일으킬 때 선봉장을 맡을 사람 등 가담자들의 역할은 이미 정확히 정해져 있었다고 했다. 그 가운데는 도원수도 있었고, 대선생(大先生)으로 불리는 선비까지 존재했다. 문인방 사건 때 도원수로 내정된 이는 이경래였다. 이 사건이 뒷날의 여러 정감록 사건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은 송덕상(宋德相)이란 유학자를 ‘대선생’이라 떠받들며,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다는 점이다. 정조 즉위 초 산림(山林·재야에 묻혀 있던 큰선비)의 중심인물로 천거돼 조정에서 크게 활약한 송덕상이 정감록 사건에 연루됐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각별히 주목된다. ●산림 송덕상과 권신 홍국영 문인방 사건으로 조정이 한 차례 홍역을 겪기 5년 전이었다. 대대로 충청도 회덕에 살고 있던 성리학자 송덕상은 산림으로 천거되었다. 정조는 송덕상의 학덕(學德)에 크게 감복한 듯, 그의 건의라면 무엇이든 대체로 수용하는 편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른바 산림이란 명목으로 향리에 묻혀 지내던 큰선비들이 일시에 높은 벼슬에 등용되곤 했다. 그런데 영조 이후로는 산림이란 카드가 집권세력인 노론에 의해 정국수습용 임시방편으로 활용되는 듯한 분위기도 있었다. 마치 1970∼80년대 한국의 국무총리 자리가 그러했듯, 산림은 일종의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가끔 예외도 있었다. 효종 때 북벌론(北伐論)을 내세우며 정국을 홀로 이끌던 송시열(宋時烈)의 경우다. 그는 산림으로서 노론의 명실상부한 우두머리였다. 산림 송덕상은 바로 송시열의 자손이었으나 그 처지는 자기 조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송덕상은 정조 즉위에 공을 세운 홍국영 일파의 추천으로 조정에 등용된 만큼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대변했다. 정조 3년(1779), 이조참판 송덕상은 홍국영 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김구주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한 적이 있다.(실록, 정조 3년 6월18일 경오) 알 사람은 이미 다 알지만 홍국영은 정조의 외척이었다. 그는 영조 말기 세손(世孫·정조)의 집권을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 홍인한, 김구주 등을 물리치고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홍국영은 수년간 반대파를 모두 내쫓는 데 부심하였다. 그는 정조의 신변보호를 구실로 숙위소를 창설해 직접 그 책임을 도맡으면서 더욱더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홍국영의 권력은 날로 비대해졌고, 과거에 그의 정적이었던 정후겸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은 홍국영을 ‘대후겸(大厚謙)’이라 부르며 비웃었다. 홍국영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자기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내 장차 외척으로 세력을 굳히려 했다. 하지만 일년 만에 누이 원빈이 병사하고 말았다. 홍국영은 꾀를 내어 왕제(王弟) 은언군 인의 아들 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훗날 세자로 정할 생각을 가졌다. 이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담에게 역모죄를 씌워 죽였다. 정조4년(1780)에는 왕비 김씨를 살해하려고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그 일로 홍국영은 실각했고 그 여파는 송덕상에게도 미쳤다. 송덕상은 재빨리 상소를 올려 홍국영과 자기의 사이가 별것 아님을 애써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홍문관 교리 서유성 등 홍국영의 반대파들은 송덕상이 겉으론 산림으로 행세하면서 실제는 홍국영에게 아부를 일삼아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왕세자 책봉 건에 관여하는 등 수많은 죄를 저질렀다고 맹렬히 규탄했다.(실록, 정조 5년 4월28일 신미) 결국 송덕상 역시 조정에서 물러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로선 억울한 점이 있었을 테지만, 이런 식의 정계 개편은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늘 되풀이되어 온 일이다. ●송덕상의 제자 문인방 뜻하지 않은 스승의 정치적 몰락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타격으로 다가왔다. 스승이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는 한 그들의 미래 역시 어두웠다. 보통 스승이 중벌을 받으면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미래를 기약하게 된다. 일단 죽림으로 들어간 젊은 선비들은 시서(詩書)를 연마하며 세상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그러다 운이 좋아 언젠가 관리로 등용되기만 하면 왕에게 스승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보통이다. 중종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개혁정치가 조광조의 복권과정이 바로 그랬다. 하지만 송덕상의 제자들 가운데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문인방 등이 바로 그러하다. 그들은 ‘정감록’을 빙자해 난리를 꾸몄다. 과연 제자들이 스승 송덕상을 위해 역모를 꾀했는지, 아니면 우연히 송덕상과 역적들 사이에 사제관계가 형성돼 있었던 것인지, 쉽게 가늠하기는 어렵다. 여하튼 송덕상의 몇몇 제자들은 군사적 행동을 준비하다 발각돼 역적으로 처형되었고, 그 여파로 송덕상 역시 옥에 갇힌 것이 사실이다. 노론들 사이에서 박학다식한 큰선비로 통했던 송덕상은 여러 달 동안 영어(囹圄)의 몸으로 고통을 받다 드디어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실록, 정조 7년 1월7일 기해) 다른 역모사건들도 그렇지만 이 사건 역시 피의자들이 자기들의 처지를 변호하며 남긴 기록은 찾아볼 길이 없다. 있다면 취조문서가 전부다. 사건을 수사한 국가의 입장에서 사건을 완전히 왜곡하였을 가능성마저 적지 않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문인방 사건의 내막을 살펴보겠다. 송덕상의 제자 신형하는 황해도 평산 사람이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함을 풀어야겠다며 스승을 변호하는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한다. 그것이 문제로 부각되어 신형하는 마침내 전라도의 한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송덕상을 추종하던 황해도 해주의 선비 박서집은 시를 지어 신형하의 절의를 기렸다. 그 시가 또 문제되어 박서집도 섬으로 귀양을 갔다. 박서집은 유배지에서 우연히 문인방이란 사람과 동거하게 되었다. 평안도 출신인 문인방은 놀랍게도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한 처지를 생각해서 장차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이라고 하였다. 물론 박서집은 그에 찬동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박서집은 겁이 났다. 그는 섬에 파견돼 유배자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문인방의 역모사건을 밀고하였다. 그 섬은 전라도 관할이어서 깜짝 놀란 전라관찰사는 급히 영을 내려 관련자 전원을 체포하였다. 전주와 서울에서 혹독한 신문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문인방은 자기가 역모를 꾸민 사실을 시인하였다. 함께 붙들려온 백천식도 반란혐의를 인정하였다. 그들은 밀고자 박서집과 함께 일의 성사를 기원하며 하늘에 축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평민지식인으로 술사이기도 했던 문인방은 ‘정감록’의 한 구절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때 ‘여섯 글자’의 흉악한 예언이 문제로 부각되었으나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 구절은 문인방이 소지했던 ‘경험록’이란 예언서에도 나와 있다고 하였다. 현재 ‘경험록’이란 책자는 남아 있지 않다. 이 사건 당시 문인방은 모두 4종류나 되는 예언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평소 그가 이른바 비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같은 당류 이경래는 강원도 양양 임천리에 살며, 도창국은 평안도 영원 내락림에 있고, 김정언과 오성현은 함경도 안변에 거주하고, 곽종대는 평안도 순안에 살며, 이밖에 김훈과 백천식이 또 있습니다. 만일 난이 성공하게 되면 대선생으로 청계 선생을 모시려 하는데, 이는 송덕상이며 그 손자 송계유는 지금 나이 28세로 저와 마음을 합해 역모를 꾀했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문인방처럼 고향이 평안도인 사람도 있지만 함경도 출신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이밖에 강원도 출신도 역모에 참여했다. 아울러 송덕상의 집안사람들도 일부 포섭돼 있던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송덕상 일가가 역모사건에 참여하였을지는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회덕에 세거하던 송씨 집안은 조선사회에서 손꼽히는 명문 양반이었다. 설사 그들이 송덕상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일이었다. 조선사회에서 그들이 향유한 특권적인 지위는 이런 정도의 일로는 무너질 리가 없었다. 따라서 송덕상의 손자가 모의에 참여했다는 문인방의 진술은 신문과정에서 억지로 강요됐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송덕상의 제자는 주로 서울과 충청도에 거주했을 텐데, 하필 조선사회의 변경인 서북지방과 강원도 해안지방의 몇몇 제자들만 스승을 위해 난리를 꾸몄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양반과 평민지식인들의 역적모의 사건의 주모자로 분류된 문인방은 힘세고 날랜 평안도 출신의 장사 도창국과 함께 강원도 양양의 선비 이경래와 친했다. 이경래 역시 송덕상의 제자였는데 정조5년(1781) 9월 문인방 등이 이경래를 찾아갔을 때 이경래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스승님 송덕상이 조정에 죄를 얻어 뜻밖에 멀리 귀양을 가 계시므로 지금 사태가 급해졌다. 빨리 일을 도모하는 게 좋겠다. 문인방 그대가 인재를 잘만 모집하면 일이 성사된 다음 장수든 정승이든 여하튼 높이 등용하겠다.” 문인방 등은 그 말에 기뻐하며 이경래를 도원수로 삼고, 도창국을 선봉장으로 정했다. 이경래는 양양에 일가친척이 많은 데다가 노복도 숫자가 많으므로, 일단 유사시에 난을 일으켜 양양군수를 잡아 죽이고 무기와 병사를 확보하는 것쯤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이웃 고을인 간성을 공격하고 강릉으로 밀고 들어간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 뒤 반란군은 원주를 함락시키고 곧이어 서울로 진격해 동대문을 거쳐 대궐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거사가 성공한 다음 그들은 송덕상을 ‘대선생’으로 책봉하기로 뜻을 모았다. 반란을 일으킬 시기는 갑진년(1784) 7월과 9월 사이로 정해졌다. 이경래의 집안은 강원도 양양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명문가였다. 이경래의 친척 공조참의 이택징은 우선적인 포섭대상으로 떠올랐다. 이택징은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해 규장각 운영을 강도 높게 비난한 적이 있다.“규장각은 전하의 사적인 관서에 지나지 않고, 규장각의 관리들은 전하의 사사로운 신하일 뿐입니다.” 이처럼 정조의 정책적 고려에 날카롭게 맞선 인물이었다. 문인방 등은 이런 이택징을 서둘러 합류시키고, 그들을 지렛대 삼아 서울의 여러 양반들을 역모에 끌어들이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몇 해 전에 거세된 홍국영 일파를 비롯해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하며 울분을 삭이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던 양반들이 많았다. 조선은 양반의 국가라, 양반들이 국가에 반기를 들 거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영조 초년 삼남지방에서 일어난 무신란(1728)을 비롯해 몰락한 양반들이 반란을 꾀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정적(政敵)들에 의해 완전히 조작된 역모사건도 없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17세기 초에 일어난 인조반정(1622)은 양반들이 반란을 통해 정권을 교체한 본보기였다. 그런 점에서 문인방과 이경래 등이 무력을 통해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소망을 품게 된 것도 전혀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니었다. 문인방 사건의 경우 역모사건이 새롭게 달라진 측면도 있다. 권좌에서 밀려난 제일급의 양반들이 서북지방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평민지식인들 또는 술객(術客)들과 합세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모의과정에서 평민지식인들의 역할이 점차 강화되었다는 점을 놓쳐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볼 때 이경래나 이택징과 같은 일급 양반들보다 평민지식인 문인방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해 보인다. 또 한 가지 강조할 사항은 ‘정감록’을 포함한 각종 예언서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문인방은 양양과 서울은 일단 이경래에게 부탁해 놓고 자신은 삼남지방으로 내려갔다. 힘이 센 장사들을 다수 모집해 거사를 성공으로 이끌 생각이었다. 그가 관헌에 체포되기 직전 충청도 진천에 머물고 있던 것도 장사를 모으기 위해서였다.(실록, 정조 6년 11월20일 계축) ●평민지식인이 송덕상 같은 양반과 결탁하다니 억울하게 멸시받던 평민지식인들로서야 송덕상과 같은 명문가 출신의 양반과 사귀고 싶어도 도저히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짐작은 매우 합리적으로 들리지만,18세기 조선사회의 실상과는 더 이상 부합되지 않는다. 문인방 사건 때 연루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용케 법망을 빠져나간 평민지식인들 중에 이규운이란 사람이 있다. 전국 각지를 떠돌며 훈장노릇을 하던 평민지식인이었다. 그런 이규운이 산림 송덕상과 서로 가까워진 것은 실로 우연한 기회에 비롯되었다. 정조 초년 이규운은 강원도 통천에 있었다. 통천은 송시열이 함경도로 귀양갔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머물던 곳이라 송시열의 기념비가 있었다. 이 비석을 다시 세우는 일로 이규운은 송덕상을 몇 차례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강원도 김화 수령으로 재임하던 송덕상의 아들까지도 사귀게 된다. 어렵게 대갓집과 연줄을 대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규운에게 돌아올 몫은 아무 것도 없었다. 쥐꼬리만 한 벼슬 한 개도 차지할 운이 아니었다. 이규운은 본래 평안도 선천 사람이었고 진짜 이름은 오도하라고 했다. 이규운은 고향을 떠나 강원도를 떠돌았다. 그는 서울 양반 이찬이란 사람을 대신해 과거시험 답안지를 써주었는데 그 덕에 이찬은 진사가 되었다. 제 이름을 걸면 아예 과거시험장 출입이 불가능한 이규운이었으나 그가 대필해준 글로 다른 사람은 진사가 되었다.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허탈과 공황 속에서 이규운은 ‘정감록’을 읽었고, 반란을 꿈꾸었다. 이규운은 송덕상 같은 양반을 위해 피를 흘릴 사람은 아니었다. 그와 같은 술객에게 송덕상의 명예회복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경북 영주 고치재, 오솔길

    경북 영주 고치재, 오솔길

    무작정 걷고 싶다. 아니 어디론가 정처없이 떠나고 싶다. 햇살이 색바랜 나무에 닿아 하얗게 부서지고 노랗고 붉은 낙엽이 바람에 춤추는 그런 곳으로…. 굽이치며 끝없이 흘러가다 파란 하늘에 맞닿을 것 같은 산속의 오솔길 끝에 있는 가을을 찾아 헤맸다. 소백산 끝자락에서 경북 영주와 충남 단양을 잇는 고치재 길은 가을의 달콤함을 느끼게 하는 길이다. 강하진 않지만 은은한 동양화 색깔처럼 노랗게 변해버린 이깔나무, 강렬한 빨강으로 온 산에 생기를 불어넣는 단풍나무와 가을에도 변하지 않는 푸른 침엽수들이 고치재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글 사진 영주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북 영주 좌석리에서 시작되는 고치재에 첫모습은 어린시절 외딴 외가집을 찾아가는 그런 시골길 같다. 순흥면에서 좌석리·마락리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해 오르면 옥대리. 길 오른쪽으로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차례로 나타난다.700년 이상 살아오며 고치재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나무들이다. 단산저수지를 지나 5㎞ 남짓 오르면 삼거리. 상좌석, 연화동 그리고 미락리로 갈라지는 좌석리의 중심이다. 좌석리에서 위좌석으로 오르다 보면 사과밭이 즐비하다. 연분홍빛의 사과를 주렁주렁 매단 가지가 도로까지 손을 내밀며 낯선 이방인에게 인사를 건네는 정겨운 동네다. 사과밭에 앉은 집채만 한 바위가 보인다. 이름하여 앉은바위.‘좌석리’라는 마을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제를 올리는 바위다. 삼거리에서 고치재 쪽으로 좀더 오르면 갈림길. 왼쪽이 연화동, 곧장 가면 고치재다. 연화동에는 두개의 예쁜 폭포가 있다. 마을 구경을 끝내고 이제 본격적으로 고치재로 향한다. 연화동 갈림길부터 울창한 숲길을 따라 고치재로 오른다. 거의 정상부근까지 포장이 되어 승용차도 쉽게 오르는 길이다. 차창을 열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길이 너무 좁아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길 옆으로 흐르는 풍경에 넋을 잃고 빠져든다.‘아차’하면 사고가 나겠다 싶어 아예 차를 한편에 세워놓고 내렸다. 길섶에 나무들은 제각기 다른 얼굴로 부서지는 햇살을 맞으며 몸을 흔든다. 나무 끝에 매달린 파란 하늘까지. 정말 아름답다. 굽이치는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나도 한 마리 다람쥐인 양 길가에 주저앉았다. 그제서야 저 밑에 두고온 ‘자동차’생각이 났다. 오늘처럼 차가 귀찮게 느껴질 때는 없었다. 되돌아 내려와 다시 차를 몰고 천천히 고치재를 올랐다. 비포장도로를 한 10여분 달렸을까. 껑충한 장승들이 반겨주는 널따란 광장이 나온다. 여기가 바로 해발 760m의 고치재 정상이다. 백두대간의 주능선으로 태백산이 끝나고 소백산이 시작하는 곳이다. 그런 연유로 여기엔 태백산신과 소백산신을 함께 모셨다는 ‘국사서낭당’이란 조그만 당집이 있다. 당집 안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산신은 단종 임금과 금성대군이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격하돼 영월에 유배됐을 때 세조의 동생이자 단종의 삼촌이었던 금성대군은 영주 순흥도호부 부사와 함께 단종 복위운동을 벌였다. 이 때문에 금성대군의 밀사들은 단종 복위를 꿈꾸며 영주와 영월을 잇는 가장 빠른 길인 고치재를 넘나들었다. 하지만 관노의 밀고로 복위운동은 물거품이 되고 단종은 영월, 금성대군은 안동에서 생을 마감했다. 복위운동의 근거지였던 순흥도호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꿈을 품고 이 험한 길을 다녔던 단종의 밀사들도 고치재에서 이마의 땀을 식혔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고치재의 단풍에서는 서글픈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고개를 넘어 마락리로 향한다. 말이 떨어져 죽을 정도로 계곡이 깊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내려가는 길은 흙길이다. 차를 세웠다. 노란 물감을 뿌려 놓은 듯 갖가지 노란색으로 물든 잎갈나무의 아름다움을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소백산을 넘는 지름길로 방물장수나 봇짐을 짊어진 보부상들이 다녔지만 이제는 찾는 이가 없다. 가끔씩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들를 뿐. 마락 청소년야영장이 나타났다. 여기는 1991년까지 옥대국민학교 마락분교였다. 폐교가 되면서 청소년야영장으로 바뀌었다.1964년 개교한 미락분교는 1991년까지 27년 동안 14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한다. ‘경상북도 경계’표지석을 지나면 의풍리에 이른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속하는 마을이다. 여기서 우회전해 남대리를 지나 마구재를 넘으면 부석사 쪽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의풍1리 삼거리에서 오른쪽 비포장길로 10여분을 가면 영월 김삿갓마을이 나온다. 삼거리 왼쪽 길은 배틀재 넘어 단양으로 가는 길인데 무척 험하다. 의풍리에서 도계까지 도로확장 공사가 한창이다. 여기까지가 고치재 여행의 종점. 하지만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진다. 역사의 아픔이 아직도 오롯이 묻어 있는 고치재 길의 늦가을 풍경은 남달랐다. 경북 영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부석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로 손꼽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사찰로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많은 문화재가 있다. 노란 은행잎이 흩날리는 길을 10여분 걸어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 앞에 이르렀다. 무량수전은 ‘배흘림기법’이란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가운데가 볼록한 기둥의 아름다운 선으로 유명하다. 여인의 치맛자락을 살짝 올린 듯한 지붕 끝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부석사는 늦은 오후가 제격이다. 소백산을 넘어 온 노을이 은행나무 사이를 뚫고 들어와 아늑한 절집에 내려앉으면 세상 시름도 잠시 잊게 된다. 운좋게 황금빛 노을을 무량수전 앞에서 본다면 금상첨화. 첩첩이 허리를 포개고 늘어선 백두대간의 황홀함에 빠지게 된다. 입장료 1000원, 주차료 3000원. 영주의 선비촌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공간이 아니다. 다양한 민속놀이와 다도, 붓글씨 등 선비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막걸리와 파전을 먹을 수 있는 토속음식점과 대장간, 한지, 도예품 등을 만드는 공방 등도 만날 수 있다. 입장료는 3000원, 주차료는 무료. 혹시 하루를 영주에서 묵고 갈 요량이라면 선비촌에서 머물 수 있다. 뜨끈한 아랫목에서 가족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문살 창호지를 간지럽히는 아침햇살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가격도 비싸지 않다.2인 기준 2만원부터.(054)638-7114,www.sunbitown.com 영주에는 소문난 먹을거리가 별로 없지만 순흥묵집은 한 번쯤 찾을 만하다. 따뜻한 육수에 신 김치를 썰어 넣고 쫄깃쫄깃한 묵을 말아준다. 값은 4000원. 이밖에 돼지고기와 김치를 볶다가 육수와 묵을 넣어먹는 ‘태평초’도 맛있다. 얼큰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마음에 들 듯.1만 5000원.(054)632-2028. ■ 찾아가는길 영동고속도로 남원주에서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 풍기나들목으로 나오면 된다. 나오자마자 우회전해 첫번째 사거리에서 다시 우회전하면 부석사 가는 931번 지방도. 부석사 방향으로 계속 달리다 단산면 옥대리 삼거리에서 좌석리·마락리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하면 고치령 길이다. 좌석리 소백산 매표소를 지나면 고치령 옛길이 시작된다. 좌석리에서 고치령 정상까지는 약 5㎞, 정상을 넘어 마락리까지는 4㎞ 정도.
  • 나폴레옹 ‘송곳니’ 1440만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것으로 보이는 송곳니가 오는 10일 영국 윌트셔 스윈든의 도미니크윈터 경매소에 출품되며 낙찰가는 8000파운드(약 1440만원)까지 치솟을 전망이라고 영국 언론들이 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 송곳니는, 나폴레옹이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뒤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배중이던 1817년 주치의인 배리 오매아라가 뽑아 보관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BBC방송은 전했다. 오매아라는 이 치아를 나폴리 국왕의 전시(戰時) 부관이었던 프란시스 마체로니 장군에게 바쳤으며, 마체로니 가문이 이를 300여년간 보관해 오다 1956년에 현재의 소유자에게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고 BBC는 보도했다. 일간 가디언도 감정 전문가인 크리스 앨버리의 말을 인용,“40대 남성의 오른쪽 위 송곳니이자 영구치로 보이며 나폴레옹의 외형에도 부합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앨버리는 “나폴레옹은 1816년 치통을 앓았던 것으로 역사 문건에도 나와 있다.”면서 “나폴레옹은 당시 비타민C 결핍에 따른 괴혈병으로 입속에 심한 염증을 앓았으며 1821년 사망할 때까지 신체적으로 매우 쇠약했고 잇몸 상태도 좋지 않아 피가 나고 이가 쉽게 빠졌던 것으로 알려졌다.”고 설명했다.연합뉴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3) 眞人의 四柱가 만들어지기까지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3) 眞人의 四柱가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이유에선가 ‘정감록’은 말해와 양해에 아주 특별한 경사가 일어나리라고 예언한다. 보다 정확히는 ‘무학비결’에 “진사(辰巳)년에 그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오년과 미년엔 즐거움이 크리라.”고 했다. 이미 태종 14년(1414) 경상도 보천 출신의 파계승 김을수가 태종을 위해 조작한 예언서에도 “말해와 양해에 뜻을 이룬다(午未志上)”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따져 보면, 태종이 즉위한 해는 경진(1400)년이나 그때는 정세가 몹시 불안정했다. 왕위를 빼앗다시피 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태종 2년 임오년 또는 그 다음해 계미년이 되면 왕권이 비로소 안정됐다고 평가될 만하다. 예언가 김을수는 바로 그 점에 착안해 말해와 양해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뱀이 자라서 용이 돼야 제격 이와 전혀 다른 풀이도 아마 가능할 것이다. 멀리 10세기 초부터 전해오는 한 가지 예언이 있다.‘고경참’에 “뱀해 중에 두 용이 나타날 것이다.”(於巳年中二龍見)라고 했다. 여기 언급된 두 용은 다름 아닌 태봉의 궁예 왕과 고려 태조 왕건으로 해석되는 것이 보통이다.‘용안(龍顔)’이니 ‘용상(龍床)’과 같은 표현에서 보듯 용은 임금을 위해 사용되는 특별한 상징이었다. 그런데 궁예와 왕건이란 두 영웅은 뱀해에 출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뱀해에 즉위하지도 않았다. 이 경우 뱀해에 성인이 등장한다는 예언은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하나의 상징이었다. 이런 상징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어, 다른 어떤 역사적 사실보다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뱀이 오래 묵으면 언젠가 용(龍)이 된다는 속설이 있다. 아무리 설화라도 모든 뱀이 다 용이 되지는 못한다. 용이 되려다 실패한 뱀을 고대 한국인들은 이무기라 불렀다. 상상의 동물인 이무기는 머리에 뿔이 나 있고, 몸통엔 4개의 발이 있다. 가슴은 붉고 등에는 푸른 무늬가 있다는데 그 옆구리와 배는 부드럽기가 비단 같다 한다. 이무기는 눈썹으로 교미하여 알을 낳는다고도 하는데, 때를 놓쳐 뜻을 이루지 못한 영웅호걸에 비유된다. 뱀이 큰 뜻을 품은 영웅이라면, 용은 이미 그 뜻을 이룬 왕을 가리킨다. 고대로부터 한국에 널리 퍼져 있던 상징의 법칙에 따르면, 영웅은 모름지기 뱀해에 태어나야 했다. 아마 그와 유사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겠지만, 중국에선 큰 인물이 되려면 용띠라야 한다는 관념이 보편적이다.21세기를 맞이하는 서기 2000년은 마침 용해였다. 그 해에 중국에선 아들을 낳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국에서도 물론 용띠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용띠보다 뱀띠를 더욱 선호한 흔적이 없지 않다. 용은 맨 처음부터 용이 아니라 뱀이 자라서 돼야 제격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왕은 뱀 또는 용해에 등극하게 되는데, 그로부터 1∼2년 뒤인 말해나 양해가 되면 완전히 제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됐다. 일찍이 태종 때 김을수가 말해나 양해에 뜻을 이룬다고 한 예언이나,‘무학비결’에서 “진사(辰巳)년에 그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오년과 미년엔 즐거움이 크리라.”라고 한 것은 다 그런 한국의 문화적 나이테 위에 쓰인 것이다.17세기 말에 유행하던 제목 미상의 어느 예언서에도 비슷한 구절이 포함돼 있었다.“진년(辰年)과 사년(巳年)에 성인(聖人)이 나와 오년(午年)과 미년(未年)에는 즐거움이 대단하다.” 이미 살핀 것처럼 ‘무학비결’은 조선 말엽에 저술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이미 그보다 200∼300년 전부터 그와 비슷한 구절이 각종 예언서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眞人의 四柱 조선 후기엔 이른바 진인(眞人)의 사주가 거론된 적도 있었다. 숙종 23년(1697) 이익화란 사람이 술사(術士) 이영창에게 다가올 세상의 참된 임금인 진인의 사주를 물었다. 그러자 이런 대답을 듣게 됐다.“진인은 기사년(己巳年) 무진월(戊辰月) 기사일(己巳日) 무진시(戊辰時)에 태어났다.” 이때 이영창은 진인의 등극을 도울 사람으로 운부라는 이가 있는데 정묘년에 출생했다고 덧붙였다. 당시 조선사회에 유행한 어느 예언서에 중국 사람으로 토끼해에 태어난 장수가 우리나라에 와서 팔도를 다 밟은 뒤에 진인이 등극한다고 돼 있었기 때문에 이영창의 발언은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문제의 예언서는 현재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필 중국인 장수가 예언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은 뒤여서 그렇지 않나 짐작되기도 한다. 어쨌든 지금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진인의 사주에 기사와 무진이 번갈아가며 나타난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그의 사주엔 뱀이 자라나 용(龍)이 되는 과정이 두 번씩이나 되풀이됐다. 뱀이 용 되는 사주는 명나라의 숭정황제(崇禎皇帝)가 해당한다. 물론 두 번이나 같은 현상이 목격되지는 않았다. 뱀이 변해 용이 되는 꼴이 한 번만 사주에 나와도 드넓은 중국 천하를 다스릴 천자가 되는 형편인데, 그런 것이 두 번씩이나 연거푸 나온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현세에 이상세계를 건설할 진인 왕에게나 어울리는 사주다. 세상을 뒤바꿀 것으로 기대됐던 진인의 활동에 대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다. 진인의 활동은 3단계로 나뉜다는데 처음에는 민간에 숨어 지낸다. 사건 관련자들의 말에 따르면, 진인은 강원도 고성에 사는 용장(勇將) 정학의 집에 머문다 했다. 간혹 운부가 거처하는 옥정암이란 암자에 들르기도 한다. 진인이 정체를 숨기고 지내는 동안 운부는 정학 등에게 명령해 신변보호에 철저를 기한다. 제2단계는 거사를 일으켜 대궐에 쳐들어가는 것이다. 거사를 준비하기 위해 운부는 이미 30여명가량의 승려를 서울 및 각지의 주요 사찰에 파견해 놓았다. 묘정과 일여를 비롯한 승려들이 숙종 23년 3월21일이 되기를 기다려 대궐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강계부사 신건과 상토첨사(上土僉使) 신일 및 여러 무사들도 이 사건에 공모자로 등장했다. 거사자금을 댈 사람으로 김화의 부자 지대호 등도 합세했다. 아울러 함경도의 술사(術士) 주비, 용인의 거사(居士) 조종석, 금성의 강거사 등 여러 명의 예언 전문가들이 관여했다(실록·숙종 23년 1월10일 임술). 마지막 단계는 진인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었지만, 이 모든 것은 한낱 미수에 그친 역모사건으로 막을 내렸다. ●진인의 탄생 진인의 사주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주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진인은 세상에 출현했다. 벌써 17세기 전반부터 진인 출생설이 유행했던 것이다. 사주에 앞서 진인이 탄생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희한한 이야기다. 내가 ‘실록’에서 살핀 바로 인조 6년(1628)이 그 방면에선 가장 오래다. 사건은 당시 전라도 남원에 살던 송광유가 밀고한 데서 비롯됐다. 전에 좌랑 벼슬을 지낸 적이 있는 윤운구가 지인인 송광유에게 진인(眞人)이 나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윤운구는 조선왕조가 망할 징조라며, 어떤 예언서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하늘이 사람을 내렸으니 그 나라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라는 대목이었다. 자기 말에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윤운구는 멀리 평안도 창성(昌城)에 내린 우박까지도 들먹였다. 그 우박 모양이 사람 얼굴을 닮았다는 소문도 전했다. 윤운구는 진인의 탄생을 기정사실로 못 박기 위해 천문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의 말이라며, 지금 푸른 구름이 남산을 감싸고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것은 성스러운 왕이 태어날 조짐이었다. 윤운구는 허의란 친구에게 관심의 눈길을 보냈다. 허의는 아명이 남산이라 남산의 푸른 구름과 뭔가 특수한 연관이 있어 보였다. 윤운구 등은 소문으로 들려온 여러 가지 이상한 사건을 이끌어다 허씨 집안에서 왕이 태어날 징조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허의의 관상 또한 특별하긴 했다. 그는 양미간 사이에 콩알만 한 검은 점이 있었다. 마치 부처의 양미간에 있는 백호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허의는 몸집이 비대한 편이라 허리가 뚱뚱했고, 배가 불룩하니 튀어나왔다. 당시만 해도 살찐 사람들을 유복하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허의의 복서골(伏犀骨·두 눈 사이에 있는 코뼈에서 이마까지 솟은 뼈 부위)이 반듯하게 서 있는 모양을 두고 영락없이 임금의 관상이라는 말이 있었다. 허의뿐만 아니라 그의 외삼촌도 외모가 남달라 귀티가 있었다. 더구나 그런 허의가 얼마 전에 천녀(天女)를 만나 신이한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윤운구와 그의 동지들은 허의가 천녀와 낳았다는 아들을 진인으로 간주하고 진인왕으로 믿었다. 그들은 이를테면 역모를 꾀했다. 우선 허의와 그의 외삼촌 임게를 비롯한 여러 임씨들이 포섭됐다. 그들은 전라도 광주와 화순에서 난리를 일으킬 계획이었다. 그밖에 이상온과 국사효 등은 담양에서 변을 일으킬 예정이었다. 거기서 가까운 남원에서는 이유가 반란을 주도하기로 했다. 남원의 경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당룡과 부용남 등 평민 이하의 사람들이 살인계(殺人契)를 조직해 놓고 있었는데, 그들도 반란에 합세하기로 했다. 한편 해안지방인 고부와 부안에선 유인창과 유선창 등이 반란에 가담했고, 충청도와 접경인 여산에선 송흥길과 소신생 등이 난리를 일으키기로 했다.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에서도 우전과 두기문 등이 들고 일어서기로 약속됐다. 때가 되면 허의는 진인인 아들과 함께 승려로 구성된 4000∼5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지리산을 거쳐 일단 경상도 진주로 진출해 근거지를 마련할 예정이었다. 윤운구와 전 주부(主簿) 원두추 등은 서울과 경기 지방의 반군을 이끌고 대궐을 공략하되, 만약에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면 충청, 전라 및 경상도를 확보해 놓고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한다고 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성된 반일 감정을 감안할 때 일본에 원병을 청한다는 계획은 정말 뜻밖이다. 하여간 이 모든 진술은 사건을 조정에 밀고한 송광유의 입에서 나왔다. ●‘역적들’의 자기변명 전라도 양반들이 진인을 내세워 반역을 도모한다는 소식을 접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곧 내병조(內兵曹)에 국청이 설치됐고, 관련자들이 체포돼 엄한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범으로 몰린 윤운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우선 송광유와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고 잡아뗐다. 죽은 송광유의 아버지와는 교유관계가 있었지만, 정작 송광유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함께 역모를 꾀할 처지가 아니란 것이었다. 송광유 일가는 이미 조정의 버림을 받은 처지였다. 송의 아버지는 광해군 말년 역모사건으로 죽은 허균과 무척 가까웠다. 정확히 말해 송광유의 서매(庶妹)는 유명한 문인이자 오늘날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의 첩이었다. 허균이 역모사건으로 죽게 되자 송광유의 아버지도 전라도 진도에 유배됐다가 사망했다. 윤운구는 태인에 있는 송광유의 본가에 들러 문상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송광유는 이웃 고을의 관비(官婢)를 훔쳤다. 그러고는 호랑이가 물어 갔다고 거짓으로 속이려 했으나, 비밀이 탄로됐다. 송광유는 이에 윤운구가 자기의 비밀을 퍼뜨린 것이라 생각해 윤운구를 모함하게 됐다. 이것이 윤운구의 설명이었다. 전 주부 원두추 역시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기 형 원두표가 전주부윤으로 있을 때 송광유를 잠시 사귀었지만 역적모의를 한 적은 없다고 발뺌을 했다. 당시 송광유는 남의 노비를 빼앗으려고 원두표에게 청탁했으나 거절당하자 송광유는 원씨 일가를 증오했다는 것이다. 그 뒤 송광유는 관비를 훔쳤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원두추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퍼뜨렸다. 그 때문에 송광유는 원두추를 해치려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허의의 외삼촌 임게 역시 변명했다. 허의에게 특이한 아들이 있다거나, 그 어미가 천녀(天女)라고 하는 말은 억지라는 것이었다. 여러 해 전 허의는 경상도 개령을 지나다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어떤 여인과 동침을 했는데, 그 뒤 그 여인은 걸인이 되어 사방을 떠돌다 벼랑에서 실족해 죽었다. 허의는 그 소문을 듣고 불쌍히 여긴 나머지 시신을 거둬 장례를 치른 적은 있다고 했다. ●인조반정에 대한 불만 국왕 인조는 심문을 담당한 여러 신하들에게 사건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다들 머뭇거리기만 했다. 누구도 사건을 명쾌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송광유가 밀고한 내용은 완전히 허구도 아니었지만, 모두 사실로 믿기도 어려웠다. 왕 역시 그 점에 동의했다. 다만 윤운구 등이 무언가 진인에 관한 말을 지어냈고, 새 세상의 도래를 이야기한 점만은 사실이라고 확신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혼란은 인조반정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 점에서 원두추 같은 이가 끼여 있다는 점은 다소 생뚱맞았다. 그의 친형 원두표는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 제2등 공신으로 책봉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은 그 자체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양반들이 적지 않았다. 반정 뒤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관해서도 불평들이 많아 이괄 같은 이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정 대신들은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진인 사건의 관련자들은 예언과 여러 징조를 빙자해 조정을 원망한 것이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죄는 역모에 해당해, 엄히 처벌돼야 마땅했다. 그러나 원두추처럼 집권층의 핵심과 가까운 인사들이 끼여 있어 함부로 처리하기가 어려웠다. 여러 경로를 통해 타협책이 마련됐다. 이 사건을 확대시키지 말고 최소한의 처벌로 마무리 짓는 것이었다. 만일 진실을 밝히겠다며 관련자들에게 고문 수사를 펼 경우, 조정의 실권자들에게까지도 불똥이 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조정 대신들은 전전긍긍했다. 그렇다고 관련자를 모두 무죄방면하기도 어려웠다. 인조는 이 사건을 서둘러 마무리 짓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식견이 어두워 사건의 전모를 다 알 수가 없도다. 경들이 공론에 따라 의논하여 아뢰라.” 꾀 많고 나약한 왕의 발언이었다. 대신들은 요망한 소문을 퍼뜨려 조정을 비방한 혐의가 뚜렷한 몇몇 사람만을 처벌하자고 제안했다. 윤운구, 유인창, 민안 등을 유배형에 처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줄이 좋은 원두추의 경우는 딱히 의심스러운 단서가 없으므로 풀어주자고 했다. 한편 송광유의 진술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허의와 임게 등에 대해선 그 처리를 일단 왕의 의사에 맡겼다. 왕은 윤운구 등에 대해선 원안대로 유배를 명했다. 원두추 등 그 밖의 관련자들은 대부분 무죄 방면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왕이 이 사건의 밀고자인 송광유를 풀어주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왕은 송광유의 진술이 대체로 사실에 근거했다고 판단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조정의 관리들은 송광유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헌부와 사간원을 통해 연일 송광유의 처벌을 주장했고, 왕은 마지못해 그 의견을 수용했다(실록·인조 6년 12월18일 갑진). 크게 보아 윤운구 사건은 인조반정에 불만을 품은 양반들이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민간에 퍼져 있던 예언서와 진인출현설을 이용했다. 이 단계에서 상층문화와 하층문화는 혼연일체가 됐다. 민중이 만들어낸 진인은 양반들에 의해 역사의 무대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진인은 출몰을 거듭하더니, 뱀이 용으로 변하는 사주가 만들어졌다. 진인의 사주에는 역사 속에 오래 단련된 한국의 기층문화가 숨쉰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책꽂이]

    ●꽃신(김용익 지음, 돋을새김 펴냄)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미국에서 활동한 소설가 김용익(1920∼1995)의 단편집.1956년 발표한 데뷔작 ‘꽃신’은 유명잡지 ‘하퍼스 바자’등 세계 각국의 유명 매체에 소개됐고,‘해녀’는 미국 중고등학교 영문학교과서에 실렸다. 이번 단편집은 두 작품외에 ‘종자돈´ `겨울의 사랑´ `동짓날 찾아온 사람’등 모두 6편을 묶었다.8000원.●해리포터와 혼혈왕자 1·2(조앤 K 롤링 지음, 최인자 옮김, 문학수첩 펴냄)발매 첫날 미국에서만 690만부가 팔린 ‘해리포터 시리즈’6탄이 번역돼 나왔다. 전편에 이어 음산하고 암울한 전쟁터를 배경으로 유머와 로맨스, 재기발랄한 대사로 짜릿한 모험의 세계를 펼친다. 늠름한 청소년이 된 해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애쓰는 존재론적 고민이 더해졌다. 각권 8500원.●쏘주 한 잔 합시다(유용주 지음, 큰나출판사 펴냄)중학교 중퇴후 중국집 배달원, 구두닦이, 우유배달 등을 하며 치열한 삶을 살아온 저자가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이후 5년 만에 낸 산문집. 부산에서 두바이까지 17일 간 항해여정을 기록한 ‘아름다운 것은 독한 벱이여’를 비롯해 고단한 현실의 속살을 헤집고 따뜻한 시선으로 건져올린 아름다운 이야기 16편을 실었다.9000원.●완벽한 하루(마르탱 파주 지음, 이승재 옮김, 문이당 펴냄)아침에 눈 뜬 순간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오직 자살만을 꿈꾸는 한 남자의 24시간을 그린 소설. 프랑스 문단이 주목하는 신예작가인 저자는 스물다섯 살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실업과 고용불안,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젊은 세대의 모습을 재기발랄하게 풀어낸다.9500원.●피아노 소나타 1987(강유일 지음, 민음사 펴냄)독일의 통일 과정을 지켜 본 재독 작가 강유일이 KAL기 폭파사건을 소재로 한국의 분단현실을 재구성한 소설. 북한의 동유럽 스파이 한세류는 동유럽에 초청받은 남한의 피아니스트 안누항의 공연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민간여객기를 폭파한 한세류는 세월이 흐른 뒤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가 안누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1만 2000원.
  • 다산초당 이름 걸맞게 초가집으로

    다산초당 이름 걸맞게 초가집으로

    다산초당이 40여년 만에 원형 그대로 다시 복원된다. 20일 전남 강진군에 따르면 역사적 고증없이 복원된 다산 초당을 원래 모습대로 재현키로 하고 문화재청에 지원을 요청했다. 다산 정약용이 10여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다산 초당’은 초가라는 이름과 걸맞지 않게 ‘기와집’으로 남아 있다. 이는 지난 1958년 해남 윤씨를 중심으로 한 ‘다산유족보존회’가 초당을 번듯한 기와집으로 변형, 복원했기 때문. 그 이후 1970년 다산이 제자를 가르쳤던 서암이나, 직접 기거하며 저술활동을 폈던 동암도 와당으로 복원됐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저서인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 등에서 “후학들이 다산을 기리는 마음에서 일부러 살아 생전의 오두막살이를 헐고 큰 집을 지어 드린 것은 이해하지만 다산의 유배생활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형대로 복원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지적했었다. 강진군은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현재의 와당채들을 300m쯤 아래로 옮기고, 그 자리에 당시의 초당으로다시 복원할 계획이다. 군은 이를 위해 다산 연구가 등 전문가에게 용역을 의뢰할 방침이다. 다산과 교류했던 초의선사가 지난 1812년 다산초당을 방문해 그린 ‘다산 초당도’는 두개의 연못과 초가집 몇채를 안에 두고 토담이 둥그렇게 설치돼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황주홍 군수는 “다산 초당을 원형대로 바꾸기 위해 내년 예산에 국비 등 20억원을 반영해 본격적으로 사업을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13) 차와물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13) 차와물

    새벽달빛이 창문 틈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풀벌레소리는 어느새 수곽의 물소리에 젖어들고 있다. 새벽예불을 위해 가만히 문을 열면 사방은 바로 고요해진다. 인간의 소음에 모든 삼라만상이 긴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분별과 자만으로 인해 자연과 소통하지 못한다. 파키스탄에서 일어난 인류최악의 강진도 제일 먼저 동물들이 그 반응을 보인 것은 그 같은 자연과학적인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문을 열고 나와 발우를 부여잡고 청수(淸水)를 공양하기 위해 자우홍련사 툇마루를 나선다. 오렌지처럼 푸른 달빛이 축축한 대지에 차가운 기운을 전달하고 있다. 맑고 청아한 물소리가 내 영혼을 먼저 깨운다. 초의스님이 그토록 사랑했던,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샘물인 유천의 물소리다. 산등성위에 살짝 얹힌 두개의 바위 틈 사이로 대나무가 박혀 있다. 그 대나무를 타고 세 개의 작은 수곽을 지나 유천의 물이 숙성되면 암반으로 흘러넘친다. 마치 안개비처럼 산구름처럼 소리없이 물이 흘러내린다. 그 물소리가 혼탁한 세상을 맑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유천에 가볍게 반배를 한다. 그리고 발우를 수곽에 얹으면 또르륵 이슬방울처럼 스며드는 유천의 물은 마치 광망한 바다에 아침을 물고 나오는 붉은 해가 세상에 젖어들 듯 장엄한 울림을 전해준다. 발우에 담긴 유천의 물을 부처님께 공양한다. 지심귀명례 지심귀명례. 물에 대해 초의스님은 이렇게 말했다.“물은 차의 몸이요 차는 물의 정신이 되는 것이다.” 물은 차의 맛을 좌우한다.“나에게 젖샘이 있어 이 물을 떠서 찻물을 끓이면 수벽탕이나 백수탕이 돼버리니 어찌하면 목멱산 아래 해거옹에게 이 물을 드릴 수 있을까.”라며 찻물을 끓이는데, 좋은 물을 권하고 있다. 찻맛의 절반은 물맛이라는 말이 있다. 차는 물에 우려내는 것이므로 물의 등급에 따라 찻맛과 그 효능은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옛 차인들은 물을 차를 내는 데 가장 우선순위로 두었다. 차를 우려내는 데 있어서 물은 그 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좋은 찻물을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렵게 되었다. 그나마 좋은 찻물을 먹을 수 있었던 산골이나 시골지역도 개발의 바람과 대기오염으로 인해 그 안전성을 보장받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은 현대산업사회의 폐해가 자연환경에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차인들에게 차의 물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좋은 차는 좋은 물을 통해 우리의 오감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의스님은 “차는 물의 마음과 정신이요, 물은 차의 몸이니 참 된물(眞水)이 아니면 다신(茶身)을 나타낼 수 없고, 참된 차 (眞茶)가 아니면 수체(水體)를 나타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제대로 된 물과 제대로 된 차가 만났을 때 좋은 차는 그 생명력이 살아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떤 물이 참된 물일까. 환경이 오염돼 버린 현재의 지구촌에서는 좋은 물을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다만 옛날 차인들이 추천했던 물의 품수(品水)를 통해 차를 우려내기 위한 참된 물을 정의해볼 뿐이다. 물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물에서 모든 생명은 태어나고 졌다. 물의 존재는 곧 생명체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좋은 물을 마시면 육신과 영혼을 증장시켜주는 역할을 하지만 나쁜 물을 먹었을 때는 육신과 영혼을 갉아먹는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정말로 순수한 물은 바로 깨달음을 얻은 부처 같은 물이다. 무색(無色), 무미(無味), 무취(無臭)한 것이 참된 물인 것이다. 초의스님께서는 이렇게 소중한 물에 대해 여덟가지 덕(八德)이 있다고 했다. 가볍고(輕), 맑고(淸), 시원하고(冷), 부드럽고(軟), 아름답고(美), 냄새가 나지 않고(不臭), 비위에 맞고(調滴), 먹어서 탈이 없는(無患) 여덟가지로 물의 덕을 설명하고 있다. 초의스님의 설명에 따른다면 물은 완전무결한 식품이다. 인간이 즐길 수 있는 모든 맛과 효용을 한꺼번에 가지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이렇게 완전무결한 것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에는 품천(品泉)이 있다. 육우는 (다경)에서 물의 등급을 “산의 물을 쓰는 것은 상품이고, 강물은 중품이며 우물물은 하품이다.”고 평하고 있다.(자천소품)(煮泉小品)에는 “돌은 금의 근본이요, 돌에서 흐르는 정기는 물을 낳는다.”고 깊은 산중에서 나오는 물이 최고임을 밝히고 있다. 산중의 물중에서도 최고는 이름난 명산의 샘물이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샘물은 바로 돌샘이다. 돌은 산의 뼈요, 물은 산의 골수같은 것이기 때문에 돌샘에서 나오는 샘물이 최고인 것이다. 돌샘은 산의 정기가 모인 것으로 담백하고 맑고 차기 때문에 물을 길어놓아도 오랫동안 물의 기운이 그대로 유지된다. 산중의 물중 산마루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맑고 가벼우며, 돌 사이에서 나는 석간수는 맑고 달며, 자갈샘은 차갑다. 땅밑의 샘은 담백한 물을 뿜어내고 황석(黃石)에서 솟아나는 물은 좋은 물이다. 다만 청석(靑石)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결코 좋지 않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계곡의 물은 발원지에서 멀수록 좋으며 그 흐름이 조용하고 완만하게 흐르며 맑아야 한다. 또한 계곡 위쪽의 인적이 끊어진 곳이어야 한다. 흐르는 물이 발원지에서 멀수록 좋은 것은 물이 흐르면서 광물질 이물질 등이 자연스럽게 여과되어 어느정도 흐르면 담백한 물이 되기 때문이다. 좋은 명산의 물중에서도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샘에 고여 있는 물이다. 물이 넘쳐 흐르지 않고 고여 있다는 것은 샘이 죽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물도 함께 죽어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음은 강물이다. 강물 역시 명산을 발원지로 해서 시작해 흐르는 물이 좋다. 강물은 또한 오염도를 줄이기 위해 가능하다면 인간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좋으며 빛깔은 맑으며 물맛은 지극히 찬 것이 좋은 것이다. 다음은 우물물이다. 인가가 밀집된 지역에서 인공적으로 솟아나게 하는 샘물인 우물물 중에서도 돌이나 모래속에서 솟아나는 상품의 물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물물은 가까이에 있는 인간의 오물이 섞일 수도 있고, 기름진 논이나 비옥한 땅에서 건수가 스며들 가능성이 많아서 제일 하품으로 쳤던 것이다. 이밖에도 호수물, 빗물, 웅덩이물 등이 있으나 찻물로서 적합하지 않다. 물은 흐르는 유천(流川)이 좋고 돌틈의 석간수가 솟아나는 샘물이 좋다. 물의 종류에는 하늘의 은택으로 내린 샘물인 영천(靈泉),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늘 물인 천수(天水), 바위틈에서 솟아 흐르는 지천(地泉), 강물인 강수(江水), 우물물인 정수(井水), 유황성분이 함유된 온천(溫泉), 미네랄이 많이 함유된 약수(藥水)가 있다. 이중에서 현재 찻물로 쓰일 수 있는 물은 영천 지천 정수 정도일 뿐이다. 현대에는 그 만큼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물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다천(茶泉)이 몇군데 존재한다. 신라시대의 다천으로 사선(四仙)들이 차를 달여마신 강릉 한송정, 보천과 효명 두 태자가 차를 달여마시고 차공양을 올린 오대산 서대 우통수, 고려시대 송악의 안화사(安和寺) 샘물, 충주의 달천수(達川水), 금강산에서 시작되어 한강으로 흐르는 우중수(牛重水), 속리산 삼타수(三陀水), 초의스님이 마셨던 두륜산 일지암의 유천(乳泉)등이 있었다. 현존하는 다천중 가장 유명한 것은 경주 기림사의 오종수(五種水)다. 석간수로 최상의 찻물로 꼽히며 물색이 음수(陰水)중 음수인 감로수(甘露水), 물맛이 젖처럼 달콤하며 마시면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지는 화정수(和靜水), 물에 기운이 있어 장수가 된다는 장군수(將軍水), 눈이 맑아지는 물인 안명수(眼明水), 까마귀가 쪼는 자리에 물빛이 배어 그 자리를 파서 감로수가 샘솟았다는 오탁수(烏啄水)가 그것이다. 초의스님이 계시던 일지암의 유천(乳泉)도 명수(明水)중 명수다. 초의스님은 “나에게 젖샘(乳泉)이 있어 이 물을 떠서 찻물을 끓이면, 수벽탕이나 백수탕이 돼버리니, 어찌하면 목멱산 아래 해거옹에게 이 물을 드릴 수 있을까.”라고 반문하고 있다. 일지암의 유천은 찻물로는 최상의 물로 평가할 수 있다. 오죽하면 초의스님이 젖샘이라고 불렀겠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써야 할 찻물은 어떤 것이 있는가. 차를 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물의 소중함과 귀함을 알고 있으나 도시에서 찻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우선 가장 좋은 찻물은 아침일찍 인근에 있는 높은 명산의 약수터 물을 길어 오는 것이다. 국가기관으로부터 검증을 받은 약수터인가를 확인한 후 찻물을 먹을 만큼 길어다 길게는 일주일, 짧게는 2∼3일 동안 먹는 것이다. 그다음은 시중에서 판매되는 생수(生水)다. 인위적으로 생산한 생수는 요즘 차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생수의 생명은 짧다.3∼4일이 지나면 생수의 본 성품이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정수기를 통해 걸러진 물도 찻물로 쓰기도 한다. 그러나 정수기를 통해 정수된 물은 많은 부분에서 물의 본 성품을 강제로 빼앗아버려 썩 좋은 찻물은 아니다. 마지막으로는 우리가 가장 흔히 마실 수 있는 수돗물이다. 수돗물을 찻물로 쓰기 위해서는 하루쯤 침전해야 한다. 침전하는 도구로는 옹기항아리가 가장 좋으며 유리병도 무방하다. 옹기항아리나 유리병 바닥에 삼투압을 할 수 있는 물질인 맥반석, 돌, 굵은 모래등을 가라앉혀 놓으면 맛있는 물을 얻을 수 있다. 여름에는 뚜껑을 삼배보자기로 덮는 것이 좋으며 겨울에는 본래 뚜껑을 덮어두면 된다. 한 항아리의 물은 3분의2만 쓰고 나머지는 허드렛물로 쓰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일지암 암주 ■ 김노경과 초의스님 ‘유천일화’ 일지암에는 유천이란 샘물이 있다. 유천(乳泉)은 말뜻 그대로 마치 어머니의 가슴에서 나오는 젖처럼 맑고 담백한 천상의 물이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생명을 기르는 젖과 같은 샘이다. 명나라 전예형은 (자전소품)에서 “젖샘이란 종유석의 샘이며 산골의 고수다. 그 샘물의 빛깔은 희고 비중은 무겁다. 매우 달고도 향기로워서 마치 감로와 같다.”고 적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물에 대한 비유다. 유천에 대한 또 다른 일화가 있다. 바로 추사의 부친인 김노경과의 일화다. 추사의 부친이었던 김노경은 일지암에서 가까운 완도 고금도에 유배를 왔다. 그곳에서 4년을 보낸 김노경이 마침 그 유배가 풀렸다. 해배가 되어 서울로 돌아가던 도중 김노경은 일지암을 들를 결심을 했다. 그가 촉망하는 아들 추사의 인품에 비해 초의스님의 인품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시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노경은 초의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의 학식과 선풍이 뛰어남을 알았다. 그런 그가 초의스님이 권하는 유천을 맛보았다. 김노경은 중국의 유명한 차와 물에 대해 깊은 조예가 있었다. 유천의 물을 맛본 김노경은 “일지암 유천의 물은 그 물맛이 ‘수락’보다 더 좋다.”고 극구 칭찬을 했다. 일지암 유천의 물맛은 참으로 뛰어나다. 당나라 때 소이는 (탕품)에서 물을 끓이는 기술에 따라 3품, 뜨거운 차를 잔에 따르는 솜씨에 따라 3품, 탕기의 종류에 따라 5품, 물을 끓이는 땔감의 종류에 따라 5품 등으로 분류했다. 소이는 이 중 가장 잘 끓인 물을 ‘득일탕’(得一湯)이라 했고 그 다음을 어린탕, 너무 많이 끓어버린 물을 백수탕으로 구분해놓았다. 좋은 물도 물이지만 좋은 용기에 잘 끓여야 제대로 된 찻물이 된다는 뜻이다. 소이는 “사람이 백살을 넘은 것처럼 너무 오래끓은 물을 이야기하다가, 때를 놓치거나, 볼일 때문에 내버려두다가 비로소 사용하려면 물은 이미 성품을 잃은 뒤다. 감희 묻거니와 머리털이 희고 얼굴이 창백한 나이 많은 늙은이가 활을 들고 과녁을 맞힐 수 있겠는가. 아니면 씩씩하게 높은 곳을 올라가거나 활발하게 걸어서 멀리까지 갈 수 있도록 돌이킬 수 있겠는가.” 끓인 물이 차의 생명을 좌우한다는 것은 조금 과장일 수 있다. 그러나 물 못지 않게 끓이는 물에 대한 차인의 정성은 소중해야 한다.
  • 연암, 근대문명 기획자? 전근대적 지식인?

    종전 ‘실학’하면 단연 다산 정약용이 거론되던 것과는 달리 최근에는 연암 박지원이 더욱 각광받는 듯하다. 알려졌다시피 다산은 소수파 남인 출신이었기에 강렬한 개혁정치인으로 살았다. 정조 사후 18여년간 유배생활을 한 것이나 그 때 남긴,‘다산학’이라 불리는 500여권의 방대한 이론서가 그 증거다. 이에 반해 연암은 집권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엉뚱한’ 일에만 열을 올렸다. 신분에 걸맞지 않게 당시로서는 쓰레기 취급당하던 단편소설(양반전 등)이나 기행문(열하일기) 같은 것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서는 연암을 더 매력적인 인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나고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엄정한 논리를 들이댄 인물이 다산이었다면, 그 논리 자체를 비껴나간 사람은 연암이었기 때문이다. 후대 학자들에게 다산은 끼어들 틈이 없어 심심하다면, 연암은 풍부한 해석을 즐길 수 있는 놀이터로 비춰질 만도 하다. 이를 반영하듯 박지원 서거 200주년을 맞아 1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국실학학회, 한국한문학회, 경기문화재단 공동주관으로 열린 ‘18세기 조선, 새로운 문명기획’ 국제학술회의에서도 연암에 대한 폭넓은 해석이 포인트였다. ●연암은 전근대인? 근대인? 탈근대인?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근대를 지향한’ 인물로서의 연암이었다. 기조발제에서 성균관대 송재소 교수는 “계몽의 시대 18세기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라고 물은 뒤 연암을 근대 문명의 기획자로 평가했다. 중국 옌볜대 김병민 총장 역시 ‘근대’에서 루쉰과 연암간의 유사성을 찾았다. 연암이 루신보다 더 빨랐던 것은 “중심부보다 주변부 지식인이었기에 더 유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봤다. 이에 반해 단국대 김문식 교수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지식인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열하일기’를 꼼꼼히 읽어보면, 연암은 천하를 제패했다는 청나라가 사실은 동으로는 조선, 서로는 서장, 남으로는 한족(漢族), 북으로는 몽골을 둔 위험한 상태라고 결론지었다. 김 교수는 이를 통해 연암의 근대민족국가 지향성을 말하고 싶었겠지만, 도리어 전근대적 면모로도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아주대 조성을 교수는 토론에서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노론 출신이었던 연암에게 알게 모르게 대명(大明)의리론이나 북벌론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고 해석할 수는 없느냐.”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연암의 접근법과 관점 자체가 명이 아닌 청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느냐는 것.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미숙씨는 저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선보였던 ‘탈근대적인’ 연암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찮았다. 계명대 김영진 교수는 “그런 측면이 있다.”면서도 장자와 불교의 영향에 대한 언급이 없다보니 추상적인 감탄사만 연발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명지대 문석윤 교수는 연암의 탈근대적 측면이 사실은 주자주의의 또 다른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실학을 즐기자 경기문화재단은 국제학술대회 외에도 13일부터 23일까지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유적지 일대에서 ‘실학축전’도 마련했다. 축전조직위원회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누구나 와서 즐길 수 있는 ‘풍류(風流)’로 실학을 선보이겠다는 각오다. 연암의 청나라행을 따라가는 ‘열하일기 보드게임’, 실학에 대한 문제를 풀면서 미로를 통과하는 ‘실학공부 미로여행’, 다산이 고안한 ‘거중기(擧重機)’를 소형 모델로 제작해서 작동해보는 거중기 행사, 지금의 비닐하우스격인 ‘궁중 온실’체험, 벌집을 녹여 인조매화를 만드는 ‘윤회매 만들기’ 등의 행사가 준비됐다. 다도와 붓글씨, 풍물 등을 배울 수도 있다. 구경갈 사람은 제 손과 발을 놀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세한 행사일정 등은 홈페이지(www.silhakfestival.com)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031)236-1734.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국감 하이라이트] 재경위

    5일 정부 과천청사에서 열린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의 재정경제부 국감에서는 삼성차의 채권손실 보전문제가 주로 논의됐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책임, 채권단의 채권회수 노력, 삼성생명 상장 등 삼성차 문제 외에도 삼성그룹과 관련된 금융산업구조개선법(금산법) 개정안, 에버랜드 주식 불법증여 등 삼성 관련 논의가 국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은 “이 회장이 삼성차 경영을 독단적으로 했기 때문에 삼성차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진 것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 회장이 독단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먹히지 않는다.”며 “그게 반기업 정서의 하나”라고 대꾸했다. 열린우리당 박영선 의원은 “삼성측은 채권단과의 합의서대로 이행되는 것을 ‘최악의 경우’로 판단, 실제 소송시 전액 패소하지 않을 것임을 법률 자문 결과 확신했다.”면서 “소송이 진행되면 빅딜과정의 위헌소송을 제기할 것도 검토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은 “이 회장이 생보사 미상장에 따른 위험을 계열사에 떠넘겼고 계열사는 그 부담을 채권단에 떠넘겨 국민들에게 부담을 지우려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이종구 의원은 “삼성차 채권을 세금으로 메울 수는 없다는 합의서 작성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 대승적으로 해결하라.”고 삼성에 충고했다. 삼성생명 상장 여부도 도마에 올랐다. 민주당 김효석 의원은 “삼성생명 상장을 적극 검토해 삼성차 빚 문제를 풀어야 한다.”며 “생보사 상장의 전제조건으로 유배당상품과 무배당상품의 자산을 회계장부에서 따로 계산하는 구분계리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여야 의원들은 채권단들에 삼성생명 상장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느냐고 다그치기도 했다. 삼성그룹은 삼성차 빚을 해결하기 위해 이 회장의 삼성생명 주식 350만주를 주당 70만원씩 계산, 채권단에 증여했다. 또 주식매각대금이 2조 4500억원에 미달하면 이 회장이 갖고 있는 삼성생명 주식 50만주를 추가로 증여하고 그래도 모자라면 31개 계열사가 부족액을 보전하기로 합의서를 작성했었다. 이 채권의 유효기간은 올 연말까지로 채권단은 올해 안에 채권회수를 위한 소송을 내야 한다. 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열린세상] 국방개혁이 軍만의 몫인가/심경욱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국방개혁안이 발표된 이래 시민단체들이 분석, 평가한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그 중에는 정치권과 군 지도층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들도 있다. 첫째, 병력 감축의 폭이 적다는 주장이며 둘째, 소요 예산의 규모가 지나치다는 비판이다. 셋째, 안보 위협이 과장되었다는 반론이다. 우선 50만명선으로의 감축이 충분치 않다는 주장은 작금의 남북한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창군 이래 처음 해보는 ‘살빼기’에 과욕을 부리지 않는 데 있다. 매년 1만명씩 줄여나갈 군의 부담을 생각해보자.40만, 아니 30만명으로의 감축을 욕심내다가 모처럼 시도하는 ‘열린 개혁’은 국민의 공감대를 얻지 못해 시작하기도 전에 닫혀 버릴 수 있다. 예산 소요가 과다하다는 우려는 누구나 예외 없이 갖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구축되면 병력 감축 수준은 예상 외로 커질 수 있다. 소요 예산은 당연히 줄어들 것이다. 여태껏 자주국방을 내세우지 못했던 것은 의지가 약했다기보다 넉넉지 못한 국가 재정의 탓이 더 컸다. 자주국방이 어디 투자없이 될 법한 일인가. 이번 개혁의 기저에 북한과 주변국들의 위협이 과장되어 있다는 주장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오늘날 주요 국가들은 인접지역에 적이 소멸된 가운데서도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다.9·11 이후엔 군사안보의 비중이 오히려 커지고 있다. 왜일까? 과거보다 위협의 강도는 줄었으나, 방호해야 할 국부(國富)와 국가이익, 그리고 사회 가치가 늘어난 것은 아닐까? 오늘날 우리 경찰이 우수한 인력과 강화된 조직으로 치안을 책임지고 있음에도 사설 보안업체들이 성업중인 것은 왜인가? 과거보다 도둑이 더 많아진 것일까? 그보다 집안의 소중한 추억과 손때 묻은 가족 자산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그래서 문단속에 더 많이 지출하는 우리의 달라진 인식 탓은 아닐까? 시민사회의 반론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이제 군을 품안에 끌어들이고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입증한다. 사실, 그간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군의 ‘제자리 찾기’도 꾸준히 이뤄져 왔다. 이 와중에 군은 독재정권을 주도한 정치군인들을 배출했다는 죄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묵묵히 소임에만 충실해 왔다. 시민사회가 군 전체를 부정적인 인식과 억제와 축소, 소외의 대상으로 매도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민주화를 주도했던 과거 문민정부들도 시민사회로부터 ‘유배’ 당하는 군과 그 군의 개혁에 대해선 제한된 지원과 관심을 보냈을 뿐이었다. 우리 경제·언론계도 군 내부에서는 부단히 시도되었던 변화 노력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참여정부에 들어와 상황은 달라졌다. 최고군통수권자가 대통령 당선자 시절부터 제대군인의 처우를 거론하고 군 개혁을 직접 다루겠다고 나섰다. 미·영·불·독 등 강국들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정권 지지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랜만에 국방예산도 증액했다. 대통령 직속 국방발전자문회의가 출범되어 장기 비전 아래 국방개혁 방향을 논의하고 있다. 안보와 국방이 군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듯이 군 개혁 또한 군인들의 손에만 맡겨 놓아선 안되겠다는 인식이 이제야 우리 사회 지도층 사이에서 일고 있는 것이다. 누구 앞에서건 당당한 군을 그리워해 온 국민들로선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간 국민의 신뢰에 보답하지 못하고 시대적 요구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했다는 자성에서인가. 이제 우리 군도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 변하려 하고 있다. 우리 국민도 황량한 유배지로부터 돌아온 군을 따스한 가슴으로 맞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듭 태어나고자 하는 그들의 변화하는 모습을 관심 어린 눈으로 지켜봐야 한다. 군의 개혁이 어디 군만의 몫이겠는가. 심경욱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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