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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車보험도 개성시대

    ‘붕어빵’ 일색이었던 자동차 보험이 다양해지고 있다. 할인 폭을 높이기 위해 자동갱신특약이 출시되는 등 고객 취향에 맞게 세분화된 상품이 쏟아지고 있다. 3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자동차보험을 두 차례 자동 갱신하는 특약에 가입하면 보험료를 2% 가까이 할인해 주는 상품이 곧 출시될 예정이다. 이른바 ‘자동갱신특약’ 보험이다. 메리츠화재는 창립 90주년을 맞아 오는 10일 첫선을 보이는 상품(M-basket)에 이 특약을 넣을 방침이다. 불과 5~6년 전만 해도 자동차보험은 의무 가입 사항으로 일부 특약만 변경됐을 뿐 상품 자체는 단순했다. 하지만 인터넷 사용자들이 늘어나고 고객들의 요구가 다양해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보험설계사에게 가입했던 자동차 보험보다는 온라인이나 전화 한 통으로 해결하는 다이렉트 자동차 보험이 대세로 바뀌었다. 2011회계연도엔 개인용 자동차보험 고객 중 36.3%가 온라인으로 가입했다. 30대는 45.3%나 된다. 운전을 덜 할수록 보험료가 저렴한 ‘마일리지 자동차보험’도 지난해 12월에 출시된 지 8개월 만에 가입 100만건을 돌파했다. 손해보험업계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올 연말까지 200만건을 거뜬히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무배당 연금보험도 나온다. 메리츠화재가 취급하는 상품이다. 무배당 연금보험은 배당금이 없는 대신 보험료가 유배당보다 10% 저렴하다. 삼성화재 등 대형 손보사가 전에도 시도했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포기했었다. 이성원기자 lsw1469@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5) 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하)

    [선택! 역사를 갈랐다] (25) 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하)

    법부고문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 具禮)는 1896년 4월 15일 을미사변 관련 히로시마 재판소 결정서와 함께 흥선대원군에게 한 통의 문서를 보냈다. 그레이트하우스는 “올해 1월 20일에 일본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결정서를 작성했는데, 그 결정서 내용 중 전하의 행동이 많이 언급되었다.”며 “전하와 관련된 내용을 해명하실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아직도 이 문제가 세간에 걱정거리로 남아 있다 하니 참기 어려운 일이며 한스럽기 그지없다. 작년 을미사변에 대해서는 여론이 제멋대로인데 나의 말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나는 잠잠히 있을 뿐이다.”라고 답변했다. 흥선대원군은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해명보다는 침묵을 선택했다. 그 침묵은 오랫동안 그 시기를 흥선대원군(1820~1899)과 명성황후(1851~1895)의 대립구도로 만드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1895년 10월 8일(양력) 새벽 1시. 전 군부고문 오카모토는 마포에서 일본 영사관보 호리구치 등을 대동하고 숨가쁘게 달려 흥선대원군의 저택에 도착했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그의 아들 이재면과 손자 이준용은 낯설지 않은 불청객을 맞이했다. 오카모토의 회고록을 살펴보면 당시 흥선대원군은 스스로 의관을 갖추고 일본이 의도한 것처럼 경복궁으로 순순히 향했다. 하지만 오카모토의 기록과는 달리 흥선대원군은 그날 새벽 1시에 곧바로 출발하지 않고 2시간 동안 자신의 저택에서 지체했다. 을미사변 직후 주한 외교관을 포함한 외국인 대부분은 을미사변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그것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첨예한 대립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의 을미사변 주도와 관련되어 당대 주한 외교관 및 외국인의 기록에서도 판단이 상호 엇갈렸다. 동일한 자료조차도 흥선대원군의 주도설과 관련되어 모순된 기록의 사례가 많았다. 을미사변 직후 주한 프랑스 주교 뮈텔, 주한 미국공사대리 알렌, 주한 영국총영사 힐리어,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 등은 흥선대원군이 사건의 배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인의 경복궁 침입, 흥선대원군의 경복궁으로의 출발 지체, 일본공사관의 문서위조 등 흥선대원군을 배후라고 볼 수 없는 많은 사실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을미사변 직후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분리되면서 정치현안에 개입하지도 못했다. 흥선대원군을 배후로 내세운 세력에 대한 혐의가 자연스럽게 일본공사관으로 옮겨졌다. ●명성황후, 고종의 충실한 조언자 명성황후 민씨는 1866년 왕비로 선택되어 운현궁에서 가례(嘉禮)를 치렀다. 명성왕후에게는 4남 1녀가 있었지만 1874년에 태어난 왕세자(순종)만이 생존했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조언자와 후원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경서와 역사를 널리 알고 옛 규례에 익숙하여 나를 도와주고 안을 다스리는 데 유익한 것이 많았다.”고 기록했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사변에 대처해서는 정상적인 방도와 임시변통을 잘 배합했다.”며 위기에 대처하는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고종은 “일찍이 왕비가 말한 것마다 모두 들어맞았다.”며 명성황후의 판단력에 대한 강한 신뢰감을 표시했다. 명성황후는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의 정치적 격변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명성황후의 행록(行錄)에는 “임오군란 당시 왕비는 온화한 태도로 임시방편을 써서 그의 목숨을 보존했다.”고 기록돼 있다. 갑신정변 당시 고종은 명성황후가 “역적 박영효를 타일러 그 음모를 좌절시켰다.”고 주장했다. 또한 명성황후는 “이 무리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의심했으며 “이 무리들을 죽이면 자연히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고종은 “왕비가 성의 동쪽에 피해 있으면서 자성(慈聖)을 호위하고 세자를 보호하였는데 시종한 사람들이 한 명도 흩어져가지 않았다.”며 위기에 대처하는 결단력 및 정치적 결집력을 높이 평가했다. 명성황후는 대원군과 연결된 임오군란 등 혁명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녀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한 후 잠시 상실한 권력을 다시 회복하는 집념을 보여주었다. ●일본의 치밀한 을미사변 조작 기존 일본에서는 자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에 을미사변에 관한 연구를 오랫동안 기피했다. 일본에서는 주로 사실 정황에 대해서 을미사변과 관련된 인물인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주한 일본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 한성신보 편집장 고바야카와 등의 기록을 참고했다. 그런데 이들은 사건 당일에 관한 행적을 매우 소략하게 기록했다. 또한 이들의 기록은 철저하게 그 시기를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 구도로 부각시켰다. 최근 소설가 쓰노다 후사코는 을미사변 관련 일본 외무대신 무쓰의 의혹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명성황후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여 을미사변에 관한 일본의 정치적 의도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녀는 일본의 사상가 고야스 등의 찬사를 받으며 을미사변에 관한 일본정부의 책임에 면죄부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사건 초기 주한 일본공사관은 여론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서 대원군을 철저하게 이용했고, 대원군을 음모의 배후자로 주목받게 만들었다. 일본은 대원군을 책임자로 희생시킨다면 을미사변에 관련된 자국의 중요인물을 보호할 수 있고, 일본의 책임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이미 미우라를 비롯한 일본공사관은 을미사변 이후 수습방안 중 사건의 책임자로 대원군을 설정했다. 그래서 스기무라는 대원군이 자발적으로 4개조의 밀약까지 동의한 것으로 기술했다. ●명성황후를 향한 죽음의 그림자 사건이 발생한 10월 7일 밤 궁궐에서는 민영준이 궁중에 등용된 것을 축하하는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잔칫날 명성황후는 자신의 측근인 민영준의 기용, 훈련대의 해산 등으로 주도권이 다시 왕실로 집중되는 것에 대해 만족했다. 그날 밤 그녀는 궁녀들과 함께 궁궐 후원으로 달구경을 나갔다. 대궐 내부에는 정변을 예측하는 여러 징후가 있었다. 1895년 9월 초 백작 이노우에는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왕족이나 혹 다른 조선 사람이 역모를 꾀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일본정부에서 군사의 힘으로 왕실을 보호하여 국가의 평안함을 보전한다.”며 고종과 명성황후를 안심시켰다. 특히 명성황후는 정변이 발생하면 오히려 대궐이 안전하다는 농상공부협판 정병하의 주장을 믿었다. 왕실의 신뢰를 받아 재정을 도맡았던 정병하는 “일본군대가 대궐에 들어옴은 성체를 보호코자 함인 줄로 아옵나니, 의심하실 바가 없사온즉, 피하여 나가시지 마옵소서.”라며 명성황후의 피신을 막았다. 대궐에서 성대한 잔치가 끝나자 새벽녘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곤령전의 전각문 북쪽의 작은 난간(干)”을 산책했다. 그런데 고종과 왕비는 일본군대와 훈련대가 대궐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속히 곤녕합으로 이동했다. 그날 왕비는 궁궐 내에서 침입자에 대비할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대와 훈련대가 경복궁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비가 궁궐 밖으로 도피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왕비는 침입자의 목표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대원군의 선택과 침묵 흥선대원군은 을미사변 당일 왜 경복궁으로 향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추정된다. 첫째, 1880년대부터 대립했던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1894년 9월에도 정국 주도권을 둘러싸고 심각하게 갈등했다.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청일전쟁 이후 발생한 삼국간섭 이후 정국을 주도한 명성황후의 영향력을 단절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둘째, 흥선대원군은 1895년 4월 ‘이준용 역모사건’ 당시 특별법원의 심리 기간 중 강력하게 항의했고, 5월 이준용이 강화도 교동도에 유배당하자 교동도까지 방문하려고 시도했다. 이렇듯 흥선대원군은 그의 손자 이준용에 대해 강한 애착을 보였다. 스기무라는 이러한 손자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애착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스기무라를 비롯한 일본공사관은 만약 흥선대원군이 4개조 약속 초안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이준용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다고 흥선대원군을 위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날 흥선대원군은 일본 자객이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손자 이준용을 위협하자 일정한 타협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일본과의 결탁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이미지에 커다란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을미사변 당일 오카모토가 새벽 1시에 찾아왔지만 흥선대원군은 새벽 3시까지 출발하지 못하고 고심했고, 그 후 침묵을 선택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으로 혹은 타인의 잘못으로 생의 불행을 겪게 되었더라도 적어도 침묵할 줄 알아야만 한다. 대원군은 최소한 불행을 감출 줄 아는 사람이었다. 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서울신문·푸른역사 아카데미 공동기획
  • 위화도 회군 없었다면 이성계와 고려 왕조는?

    우리가 역사를 얘기할 때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장 부질없는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런 가정을 떠올리면서 은근히 흥미를 돋운다. 하지만, 배울 점이 없지는 않다. 이모저모로 가정해 봐야만 역사에 대한 지식이 깊어지고 앞으로 닥칠 유사한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도 높아질 것이다. 이제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가끔 되돌아보는 사람이 미래의 인생을 더 잘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역사가 있기에 현재가 존재하고 미래를 예측 가능하게 한다. 신간 ‘조선을 바꾼 반전의 역사’(김종성 지음, 지식의숲 펴냄)는 바로 이런 맥락에 의해 쓰인 책이다. 다시 말해 ‘반전’을 키워드로 역사의 숨겨진 이면을 살펴보고 있다. 반전이 없었다면 벌어졌을 가상의 상황을 보여주면서 ‘반전’이 주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통해 한국사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반전’을 통해 바뀐 역사와 인물의 이야기에서 기지와 전략 등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에 발생한 30가지의 사건을 놓고 각각의 사건이 전혀 다른 결론으로 종결됐다면 역사가 과연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추리한다. 예를 들어 이성계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이켜 왕조를 배반하지 않았다면 이성계는 어떻게 됐을까. 또 고려왕조는 어떻게 됐을까. 이러한 점을 추리해나가다 보면 순간의 선택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설명한다. 퇴계 이황은 공부만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부와 정치 사이의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그런 까닭에 신진세력인 사림파가 구세력인 훈구파를 제거하고 새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또 장희빈이 사약을 마시지 않고 중전 자리를 지켰다면 백 년 뒤의 정약용이 18년 유배라는 고난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대목 또한 눈길을 끈다. 변절의 대명사로 알려진 신숙주가 사실은 조선 전기의 태평성대를 이룬 인물이라는 것, 수양대군이 아니었어도 단종은 결국 어린 나이에 죽었어야 할 운명이라는 주장 등은 ‘가정’을 통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역사적 진실을 다루고 있다. 남성과 권력자만 역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비(非)권력자도 역사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례도 보여준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이리저리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생각을 유도한다. 1만5000원.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독자의 소리] 휴가안내 게시는 범행의 표적/평택경찰서 경무계 경장 박성주

    연일 기록적인 폭염과 열대야도 어느덧 수그러졌다. 막바지 휴가다. 바다와 계곡 등 시원한 곳을 찾는 피서객들이 붐비고 있다. 유원지마다 만원사례다. 소규모 상점을 운영하는 상인들도 경기 침체 탓에 문을 닫고 휴가를 떠나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휴가철 무심코 하는 행동 가운데 안타까운 점이 하나 있다. 며칠 전 상점 앞을 지나가는데 ‘8월 ○일부터 ○일까지 하계휴가 정기휴무’라고 쓰인 글귀를 보고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휴가기간을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공고, 게시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주인이 없으니 안심하고 침입해도 된다는 말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휴가를 떠나기 전 신문과 우유배달을 정지시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듯이 상점 휴가안내문 게시도 하지 말아야 할 상식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의 차원에서 붙인 휴가안내문이 자칫 범죄에 이용될 수 있고, 그 결과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평택경찰서 경무계 경장 박성주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3) 노론 명문 가문 박지원 vs 남인 몰락 가문 정약용

    [선택! 역사를 갈랐다] (23) 노론 명문 가문 박지원 vs 남인 몰락 가문 정약용

    연암은 아무런 관직도 없이 중국에 갔다. 집안 덕이었다. 건륭제의 칠순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단 책임자(정사)로 금성도위 박명원이 임명되었는데 그가 연암의 삼종형(팔촌)이어서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다산은 중국에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연암(1737~1805)과 다산(1762~1836)은 모두 영조 시대에 태어났다. 다만 연암이 다산보다 25세 위다. 연암의 집안은 반남 박씨로 노론 명문가로 꼽혔다. 다산의 집안은 압해 정씨로 정치적으로 실세한 남인 몰락 가문이었다.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두 사람은 대표적인 실학자로 나란히 거론된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같다고 보면 문득 다르고 다르다고 보면 문득 같다. 연암은 당대의 주류 다수파에 속했으면서도 비주류 소수파의 모습이 보인다. 다산은 당대의 비주류 소수파에 속했으면서도 주류 다수파의 모습이 보인다. 연암은 16세에 결혼해 장인의 지도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학업에 임했다. 공부가 늦은 감이 있다. 다산은 어린 시절부터 잘나갔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면서 일찌감치 학업에 정진했다. 7세에 시를 쓰기 시작하고 10세에 시집을 만들 정도였다. 연암은 몇 차례 과거를 봤지만 이내 단념하고 말았다. 다산은 과거 공부를 열심히 했다. 과거에 합격해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갔고 28세에 벼슬길에 나갔다. 과거를 통과하지 않았던 연암은 50세가 넘어서야 정조의 배려와 친구의 천거로 벼슬에 나아갔다. 55세에 첫 지방수령직으로 안의현감에 임명되었다. 지방관 경력을 잠시 비교해보자. 다산은 36세의 나이에 곡산부사로 나갔다. 같은 해에 연암은 61세에 면천군수로, 그 후 64세에 양양부사로 승진되었다. 다산은 30대 부사, 연암은 60대 부사였다. 아무튼 문과에 급제하지 않고도 양양부사에 임명된 사람은 연암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과거 단념·서얼들과 교류… 연암의 ‘강남 스타일’ 과거를 단념한 연암은 30대였던 1760년대 후반부터 탑골공원 근처에 살면서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과 교유했다. 주로 노론 출신이라는 점과 이덕무 등이 신분상 천대받은 서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은 이른바 ‘북학파’ ‘연암그룹’ 또는 ‘백탑시사’ 등으로 불린다. 10대의 다산은 줄곧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다녔고 성호 이익의 가르침을 받은 권철신, 이가환 등을 만나고 한국 천주교를 스스로 일으킨 이벽, 이승훈과 어울렸다. 이들은 ‘성호학파’ 또는 ‘기호남인’으로 불린다. 다산은 15세에 결혼한 후 서울 남촌에서 살았다. 연암은 고관대작들이 많이 사는 서울 북촌에 살았으니 요즘으로 치면 연암은 강남, 다산은 강북에 산 셈이다. 두 사람은 문장가, 학자로서 스타일이 사뭇 다르다. 사마천의 ‘사기’를 읽을 때 연암은 사마천의 마음을 읽으라 했다. 다산은 연표를 꼼꼼히 챙기라 했다. 연암은 사물을 제대로 보기 위해 마음을 비우라 했다. 다산은 글을 쓰려면 속을 꽉 채우라 했다. 연암은 시를 별로 남기지 않았는데 다산은 마치 일기 쓰듯 많은 시를 남겼다. 연암은 글쓰기엔 요령이 있다고 가르치는데 다산은 문장학이야말로 유학의 큰 해악이라고 내쳤다. 연암은 문장가, 다산은 학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글쓰기에는 두 방법이 있다고 하는데 은밀하게 감추는 방법과 들춰내 드러내는 방법이 그것이다. 연암의 글은 감추는 방법을 잘 활용했다. 다 읽고 나서도 그의 뜻을 제대로 포착했는지 돌아보게 한다. 다산의 글은 명징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주로 했다. 읽노라면 곡진한 느낌을 준다. 연암은 인상파 화가인 듯하고, 다산은 사실주의 작가인 듯하다. 연암은 정조에 의해 당시의 자유분방한 문체를 주도한 죄인으로 지목되었다. 다산은 정조의 우등생이요 모범생이었다. 다산은 정조의 순정한 문체 주장에 적극 동조했다. 다산은 당시 사교라 불린 천주교에 감화돼 적극 동조했다가 나중에 태도를 바꾸어 거리를 두었다. 반성문도 썼다. 연암은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폭력적 탄압에는 반대했다. 이렇듯 다르다 보니 동시대 인물인데도 두 사람이 만났는지조차 의문스럽다. 나이도 차이나고 사는 동네도 달랐지 않은가. 두 사람을 연결하는 인물로 박제가(1750~1805)를 생각할 수 있다. 그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낮에는 규장각에서 다산과 함께 근무했고 저녁에 퇴근하면 연암그룹과 어울렸을 것이다. 박제가를 통해, 또 베스트셀러 작가 연암의 이름이 이미 높았기에 다산은 연암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혹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치면 다산이 손위인 연암에게 먼저 인사를 했을 것이다. 인사를 받은 연암은 어떻게 대꾸했을까? 젊은 친구가 누군지 몰라 심드렁하게 인사만 받았을까, 자신보다 품계가 높은 관리라 공손하게 인사를 받았을까. 다산이 18년 유배 기간이 끝날 무렵에 마무리한 ‘경세유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가 지은 ‘북학의’ 6권을 보았으며 유신(儒臣) 박지원이 저술한 ‘열하일기’ 20권을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 실린 중국의 기구 이용 제도는 보통 사람이 헤아리기 힘든 것이 많았다.” 다산의 ‘경세유표’는 유가적 이상에 입각한 국정 전반의 제도 개혁안이다. 여기서 다산은 청나라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北學)의 의견에 적극 동조하여 오로지 그것을 직무로 하는 관청을 별도로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이른바 ‘이용감’이었다. 다산은 ‘경세유표’에서 제안한 제도 중 꼭 그대로 시행되길 바라는 열다섯 가지를 꼽았는데 이용감 설치는 그중 하나다. ●저자와 독자 그 이상의 연결고리 ‘열하일기’ 이로 볼 때 두 사람은 ‘열하일기’로 연결되고 있었다. 물론 저자와 독자의 관계였지만. ‘열하일기’는 연암이 중국에 다녀와서 쓴 책이다.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야구도하기’ 또는 유명한 소설 ‘허생전’을 교과서에서 읽었을 텐데 모두 ‘열하일기’에 실려 있다. 그래서 ‘열하일기’를 여행기 또는 문학작품으로만 생각할지 모른다. 그 해 여름, 44세 연암은 붓 두 자루, 먹 하나, 작은 공책 네 권 등 간단한 행장으로 중국을 향했다. 압록강을 눈앞에 두고 자객 형가를 생각했다. 진시황을 죽이러 적국이며 강대국인 진나라로 강을 건너가기 직전의 형가가 하필 떠올랐을까! 연암은 국경을 넘어 살림살이가 넉넉해 보이는 여염집을 보고서는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변방의 촌마을이 이 정도라니. 연암은 중국에서 정말 볼 만한 것은 큰 누각이나 성곽이 아니라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이라고 했다. 민간의 이용후생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연암은 도중에 목격한 수레, 벽돌, 목축, 선박 등 여러 제도들을 소개했다. 허구적이고 자폐적인 북벌론의 미몽에서 깨어나 북학을 해야만 북벌도 가능할 터. 대내용 북벌만 강경하게 외칠 뿐 민생은 나아지지 않는 조선 현실에 대한 분노였다. ‘열하일기’를 통해 연암은 여정의 진행에 따라 보고 들은 것들을 전하면서 갖가지 주제를 넘나들었다. 형식 또한 일기 형식으로 시작해 다양한 산문 형식을 시도했다. 이러한 다양한 주제와 형식에도 불구하고 ‘열하일기’ 전체에 흐르는 주제의 하나는 ‘천하의 정세를 살피는 것’이었다. 연암은 사신의 일행이면서 공식 임무가 없었다. 새벽이면 일행보다 먼저 출발해 여기저기 많은 곳을 둘러보려고 했고 저녁이면 몰래 숙소를 벗어나 중국 지식인들과 만나 필담을 나누다 새벽에 들어오곤 했다. 청 황실의 대내외 통제 술책을 간파하면서 지금 태평연월을 누리고 있는 천하가 장차 어찌 될지 변역의 기미를 살폈다. ‘열하일기’는 현실적 존재인 청 왕조를 오랑캐라 외면하고 무시하는 자폐에 대한 질타였다. 다양한 주제를 통해 조선의 식자층 내지 지배층에 고정관념과 좁은 소견에서 벗어나 열린 마음을 갖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내 눈으로만 보는 자폐와 남의 눈으로만 보는 자아 상실의 극단은 늘 경계할 병통이다. 또한 천하대세를 전망하고 변역의 기미를 놓치지 않는 예민함은 지금도 절실하다. 아, 아깝다. 또 다른 위대한 저술가 다산은 해외 여행 갈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그도 외국에 다녀왔다면 필시 굉장한 저서를 낳았을 터이다. 다산이 유배 18년 동안에 육경사서와 정치·경제·행정·역사·지리·언어·국방·의학 등 다방면에 걸쳐 이룬 저서가 모두 500권이 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라. 그는 다만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에 관한 책을 부지런히 찾아 읽었을 뿐이다. 그러나 당대에 큰 반향을 일으킨 연암의 역저 ‘열하일기’는 점차 위축되었다. 그릇된 문체의 본산으로 지목되고 오랑캐 연호를 사용한 원고라는 비난을 들으면서 후손조차 문집 간행을 보류했을 정도다. 나라를 잃은 1911년에 와서야 활자로 간행되었다. 다산의 역저 ‘경세유표’ 등도 빛을 보지 못하다가 조선왕조가 망할 때에 가서야 주목을 받았다. 연암은 문체 문제로, 다산은 천주교 문제로 각각 정조의 지적을 받았지만 두 사람 다 정조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정조가 죽자 다산은 유배를 가고 연암은 몇 년 후 세상을 떴다. 조선왕조는 망하기 직전인 1910년 다산과 연암에게 시호를 내렸는데 둘 다 ‘문도공’(文度公)이었다. 만시지탄. 그들은 글로써 세상을 바꾸고자 필생의 역저를 남겼다. 그 진가는 뜻있는 독자들에게 달렸다. 김태희(다산연구소 기획실장)
  • “연말이면 멀쩡한 보도블록 교체… 왜 반복될까”

    “연말이면 멀쩡한 보도블록 교체… 왜 반복될까”

    경기 수원시 6급 공무원들이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고 지방행정의 문제점을 오늘의 시각으로 풀어낸 ‘대한민국 목민심서’를 6일 출간했다. ●지방행정 문제점을 오늘의 시각으로 풀어 책은 380쪽 분량으로 목민심서의 목차에 따라 일반행정(기획·인사·회계), 지적, 세무, 건설(토목), 건축, 녹지(임업), 복지(사회), 정보(통신) 등 8개 분야로 나눴다. 저자는 ‘다산을 사랑하는 수원시 공무원 모임’ 소속인 정책기획과 장보웅 행정전략팀장, 토지정보과 지준만 토지관리팀장, 주택건축과 기우진 주택행정팀장 등 9명으로 공직 사회의 묵은 관례를 공직자 스스로 건드렸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들은 집필에 앞서 2007년부터 모임을 만들어 목민심서를 함께 읽고 정기적으로 모여 토론하며 다산 시대와 오늘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주말이나 휴가를 이용해 다산 생가와 유배지 등 유적지를 답사했으며 때때로 전문가를 초청해 목민심서가 전해 주는 시대정신과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고민도 했다. 특히 책에는 공직 사회가 어떻게 조직돼 어떤 의사결정 과정을 거치는지, 그 과정에 어떤 문제들이 개입되는지, 그 속에서 겪는 공무원들의 고민과 애환은 무엇인지 세세하게 밝혔다. 멀쩡한 보도블록을 뜯어내고 새것으로 교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보도 조성 ▲가스·수도관 교체 ▲낡은 시설 교체 등 이유가 있겠지만 어떤 사유든 공사기간과 공사방법, 기관 간 공사시기 등을 조정해 예산낭비 요인을 줄여야 한다고 개선책을 제시했다. 또 기획과장을 비롯한 각 과장은 철저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예산을 집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공직 사회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가 근절되지 않고 어떻게 계속되는지를 알아볼 수 있도록 부패의 종류와 유형, 사례를 가감 없이 까발려 부록으로 실었다. ●판매수익 전액 장학재단에 기부키로 책 출간을 주도한 장 팀장은 “올해는 다산 정약용이 탄생한 지 250주년 되는 해인데 그는 18년간의 유배 생활 중에도 집필을 멈추지 않았을 뿐 아니라 후학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며 “이런 다산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책 판매 수익 전액을 장학재단에 기부하기로 동료들과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추천사에서 “공직사회를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책은 21세기 공직자들의 현장 지침서이자 교양서”라며 “지방행정에 대한 관심과 논의를 촉발하고 시대적 가치와 정신을 확인하는 일에 이 책이 귀중한 촉매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씨줄날줄] 주도(酒道)/최광숙 논설위원

    술꾼 시인 천상병은 늘 술을 찬미했다.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詩人)의 보람,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莊嚴)하다.”(시 ‘주막에서’), “인생은 고해(苦海), 그 괴로움을 달래주는 것은 술뿐이다.”(시 ‘술’)라고 읊었다. 술에서 자유로운 문인들이 있으랴만은 그가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 한국 문단의 최고 기인 김관식의 집에서 책들을 훔쳐 헌책방에 팔아 술값을 내곤 했다고 한다. 월탄 박종화를 ‘박군’이라고 낮춰 부르던 김관식 역시 술을 좋아해 못다 마신 됫병 소주를 옆에 두고 시멘트 포대가 깔린 방에서 37세에 요절했다. 그렇지만 애주가이던 시인 조지훈은 ‘주도유단’(酒道有段)을 통해 술에도 급(9급)이 있고, 단(9단)이 있다며 주도(酒道)를 설파했다. “술을 마시면 누구나 영웅호걸이 되고 위인 현사(賢士)도 안중에 없는 법”이라면서 “술 먹고 부리는 주정에도 교양이 있다. ”고 자신의 술 철학을 폈다. 조선 시대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아들 학유가 폭음을 한다는 소식에 편지를 썼다. “술의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다.”며 “얼굴빛이 붉은 귀신 같고 구토를 해대고 잠에 곯아떨어지는 자들이야 무슨 정취가 있겠느냐.”고 아들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나라를 망하게 하고 가정을 파탄 내는 잘못된 행동은 모두 술에서 비롯된다.”고 술 경계령을 내렸던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에서 술 먹는 법도를 정해 향교나 서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세종대왕이 주나라 예법을 바탕으로 만든 ‘향음주례’(鄕飮酒禮)가 바로 그것이다. 의복을 단정히 하고 끝까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아야, 즉 깍듯이 예의를 갖춰 술을 마셔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주폭(酒暴)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 강릉시는 경포대에서 술을 못 마시게 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백사장 음주 규제를 시행했다. 그 뒤 해변의 술판이 사라지고 쓰레기도 대폭 줄었다고 한다. 강만수 산은금융그룹 회장이 최근 ‘KDB 선비 술 문화 5계명’을 사내에 선포해 화제가 되고 있다. ‘술잔은 돌리지 말라.’, ‘취하지 말고 즐겨라.’, ‘저녁에는 1차로 끝내라.’ 등 다섯 가지 내용이다. 구구절절 옳은 얘기다. 유난히 술에 대해 관대했던 우리 사회. 풍류로 받아들여진 잘못된 술 문화가 이제는 도를 넘어 성폭행 등 각종 범죄로 이어지고 있다. 술과 단절하자며 곳곳에서 나오는 자성의 움직임들이 누구보다 여성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지역경제 견인차 특구 6선] 강원 영월군 ‘테마박물관 특구’

    [지역경제 견인차 특구 6선] 강원 영월군 ‘테마박물관 특구’

    ‘별마로 천문대, 곤충박물관, 조선민화 박물관, 세계민속악기 박물관, 곰인형 박물관’ 단종의 유배지로 잘 알려진 첩첩산중 강원 영월군이 다양한 테마 박물관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 2005년 이후 영월지역에 들어선 24개의 박물관이 지역경제의 핵심 축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다 술샘박물관, 만봉불화박물관, 사진창작센터 등 4개 박물관이 오는 2015년 개관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인구 4만명 남짓인 산골마을에 30개의 박물관이 들어서는 셈이다. 지금도 입주를 희망하는 문의 전화가 이어지고 있어 앞으로 영월지역에는 테마 박물관이 더 늘어날 전망이다. 군이 박물관 유치에 나선 것은 지역경제를 담당했던 석탄·텅스텐광산이 사라지면서 급격하게 쇠락해진 경제를 살리겠다는 취지에서였다. 한때 13만여명에 달하던 인구는 4만명으로 줄었다. 이처럼 주력산업의 쇠퇴와 인구감소에 따른 낙후를 극복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대안이 테마 박물관이었다. 2005년부터 박물관고을 육성사업을 펼쳐 영월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문화공간 조성과 관광상품 개발, 체류형 관광지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박물관을 유치하기 시작했다. 천혜의 오염되지 않은 동강과 서강이 흐르는 자연자원과 박물관이 어우러진 영월이 다시 각광받기 시작해 지금은 문화와 자연, 박물관의 고장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더불어 인구도 4만 200명으로 늘었고 박물관 관람객을 포함한 유동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박물관 유료 관람객만 따져봐도 박물관 육성사업 이전인 2004년 30만명에서 육성사업 추진 이후 2007년 72만여명, 2010년 146만여명 등으로 늘어나면서 영월지역 경제의 효자 역할을 하고 있다. 주5일 근무제의 본격 도입으로 가족단위 여행이 늘고 단순관광에서 체험과 학습여행으로 여행의 목적이 바뀌면서 영월 박물관들은 더 각광을 받고 있다. 이에 편승해 군은 더 많은 박물관을 유치하고 기존 박물관의 활성화를 위해 군에 ‘박물관계’를 두고 3명의 전담 공무원까지 배치했다. 이들이 행정지원과 홍보를 대신 맡아 해 주고 있다. 또 체험프로그램과 상품개발까지 돕고 있다. 2008년부터는 박물관 특구로 지정돼 토지이용 등 각종 행정규제 완화 효과까지 얻고 있다. 30개 박물관의 특구지역만 63만 4772㎡에 이른다. 스토리텔링 기반의 박물관 연계 프로그램 개발과 공동브랜드 구축도 가능하다. 박선규 군수는 “청정한 동강과 석회암 동굴 등 자연이 살아 있고 각종 테마 박물관이 널려 있어 시너지효과를 얻으려는 박물관들이 앞으로 더 입주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영월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0) 다산 정약용과 풍석 서유구

    [선택! 역사를 갈랐다} (20) 다산 정약용과 풍석 서유구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최고의 스타다. 풍석 서유구(1764~1845)는 조선의 무명스타다. 서로 두 살 터울. 다산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조명했다. 풍석은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고,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고, 18년이라는 정치적 유폐기를 거쳤고, 유폐기에 대작을 저술했고, 조선의 융성을 위해 노심초사했고, 남양주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사후 많은 사대부가 추앙했다. 다산만의 얘기라 생각하는가. 풍석도 꼭 그랬다. 그럼에도, 두 위인의 학문적 지향은 전혀 달랐다. 후생들은 결국 다산에게 마음을 기울였고, 풍석은 거의 뒷전이었다. 다산은 풍석의 과거 선배다. 요샛말로 다산은 1789년에 급제한 89학번으로 60명 중 2등, 풍석은 1790년에 급제한 90학번으로 46명 중 24등이었다. 두 사람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 명을 받았다. 이는 여러 절차를 생략하고 곧장 최종 과거에 응시하라는 왕명이다. 이러면 급제는 따 놓은 당상이다. 급제 후 곧장 초계문신이 되었다는 점도 같다. 초계문신은 정조의 최측근 문신 집단이다. 다산의 승진 속도는 풍석보다 빨랐다. 고위직인 정3품 당상관 품계를 5년 먼저 받은 것이다. 정조가 군주이자 학문적 스승을 자처하며 왕권을 강고하게 행사할 때까지, 둘은 겉으로 보기에 같은 쪽을 향하는 듯했다. 다산은 한미한 집안 출신이다.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정조의 두터운 신임은 여전했다. 이에 반해 풍석은 최대 문벌 중 하나인 대구(달성) 서씨의 후예다. 게다가 진퇴에 신중했기에 큰 반대에 부딪힌 적이 없다. 다산이 ‘문제적 범생’이라면 풍석은 ‘범생’ 그 자체다. ●정약용·서유구 정치적 공백기 18년 정조는 집권 초부터 젊은 문신 양성의 일환으로 ‘경사강의’(經史講義)라는 재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이 중 시경(詩經)을 분석하는 ‘시경강의’에 두 사람이 동시에 참여한다. 이 시경강의는 16년 동안 25회에 걸쳐 실시했던 경사강의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정조는 590문제를 출제했고, 초계문신에게 40일이 주어졌다. 이로도 모자라 20일을 연장했다는 다산의 고백에서 얼마나 힘든 테스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는 이 중 579개의 문제와 답을 적어두었다. 수험자가 18명이니, 1인당 32문제꼴로 답안이 채택되어야 평균이다. 누구 답변이 가장 많이 채택되었겠는가. 우리의 영웅 다산일 거라 짐작한 독자에게는 미안하다. 풍석이 독보적이다. 풍석의 답안은 총 181개로, 전체의 31.3%다. 시작과 끝 문제의 답안 역시 풍석의 것이었다. 다산의 답안은 117개가 실렸으며 총 20.2%를 차지한다. 다산의 것도 결코 적은 비중은 아니나 풍석의 월등함에 빛이 바랬다. 시경강의는 두 사람에게 큰 이력이었다. 다산은 인생에서 가장 큰 영광의 추억으로 이 시경강의를 들었다. 다음과 같은 정조의 어평(御評)을 두고두고 써먹었다. “백가(百家)의 말을 두루 인용하여 그 출처가 무궁하니, 진실로 평소의 온축이 깊고 넓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으랴.” 자신이 남긴 ‘시경강의’ 서문에는 물론이고, 스스로 쓴 묘지명에도, 가장 존경했던 형 정약전에게도, 아들에게도 그날의 기억을 되풀이했다. 또 자신의 답안이 최고였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압도적 수석인 풍석은 이 기억을 되새기지 않았다. “책을 열자 바로 개안하는 느낌이다.”라거나 “근거가 분명하고 충분하며 언어가 알맞고 정연하여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이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는 등 총 6군데서 어평을 받았으면서 말이다. 그래도 젊은 시절 풍석은 분명히 경학의 당대 최고 실력자 중 한 사람이었다. 다산은 정조 사후 천주학 타도 바람에 휘말려 귀양살이를 시작한다(1801년). 풍석은 이 바람과 무관하게 승승장구했다. 그러다 5년 뒤 김달순 옥사를 계기로 풍석의 탄탄대로에 탈이 났다. 작은아버지 경기감사 서형수는 유배형을 받고, 재종숙부 영의정 서매수가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가세는 급격히 쇠락한다. 연좌의 공포에 휩싸인 풍석의 선택은 귀향이었다. ●정약용, 이상적 통치 목표 ´경학·경세학´ 몰두 억울하게 유배지에 갇힌 다산과 죄 없이 죄인을 자처하며 낙향한 풍석. 과정이 어쨌든 불우한 처지이기는 피차일반이었다. 정치적 공백기 18년. 그러나 여기서부터 이들의 길은 판이하게 갈린다. 다산은 유학의 정통 분야인 경학과 경세학(經世學)에 몰두했다. 조선 유자의 지향점을 요약하면 수기(修己)와 치인(治人). 수기는 자신의 몸과 덕성을 수양하는 일이요, 치인은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다. 수기는 치인을 위한 인문학적 토양이고, 치인은 자기 수양의 경세론적 확장이다. 다산은 61세에 자신의 학문을 이렇게 정리했다.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로 자기 몸을 닦고 1표(表)와 2서(書)로 천하·국가를 다스리니, 본말을 갖추었다.” 육경과 사서는 경학이고, 수기의 세계다.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심서는 경세학이고, 치인의 영역이다. 저술은 경집(經集) 232권, 1표2서를 포함한 문집 260여 권으로 총 500권이 다 된다. 다산의 지향은 조선 제도를 개혁하는 일이었다. 반면 풍석은 파주 장단으로 귀농하고서 경학과 경세학을 철저히 외면했다. 경학을 해봐야 옛 사람의 중언부언이고, 경세학을 해봐야 결국 ‘흙 국’이나 ‘종이 떡’처럼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서 ‘잡학’ 마니아가 된다. 풍석의 잡학은 ‘임원경제지’(林園經濟誌)에 질서 있게 배열되었다. 농학, 천문학, 공학, 수학, 요리학, 의학, 어업, 예술, 상업 등 총 16분야다. 경학과 경세학의 언어를 빌리지 않고서 113권으로 마무리했다. 종류는 다양하지만 주제는 하나다. 시골에서의 자립적인 삶을 위한 지식 체계. 풍석의 지향은 사대부 일상을 개혁하는 일이었다. 풍석은 18년 공백 후 정계에 복귀해 15년간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그 와중에도 시골생활 백과사전 정리를 그치지 않았다. 임원 생활을 대비했고 임원을 동경하기도 했다. 반면 다산은 해배 후 야인으로 머물러야 했다. 그래도 여전히 경학, 경세학 정리와 심화에 몰두했다. 국정 참여의 뜻을 꺾지 않은 듯하다. 묘한 대비가 아닐 수 없다. 다산과 풍석은 일생을 어떻게 정리했을까. 다산은 ‘자찬 묘지명’(1822년, 61세)을, 풍석은 ‘오비거사 생광 자표’(1842년, 79세)라는 다소 긴 이름으로 자신의 묘지명을 썼다. 환갑 때 쓴 다산의 묘지명은 분량이 아주 많다. 주요 개인사를 모두 적었고 저술 체계도 매우 상세히 서술했다. 글자 수가 자그마치 1만 2316자! 내가 아는 자기 묘지명 중 가장 길다. 1000자 내외가 대부분이다. 가슴에 묻어둔 한이 많았던 걸까. 이와 대조적으로 풍석은 평생을 다섯 시기로 구분하여, 그 시기를 모두 허비했다며 반성으로 일관한다. 심지어 40년 가까이 공 들인 ‘임원경제지’ 저술도 인쇄할 뒷심이 없어 낭비였다고 회고한다. 자신을 오비거사(五費居士)로 칭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산의 묘지명은 828자인 풍석의 것보다 무려 15배나 많다. 파란만장으로 말하면 누군들 할 말이 없을까마는, 다산은 거의 회고록 콘셉트이었고, 풍석은 반성문 콘셉트였다. ●서유구, 현실에서 적용되지 않는 지식 외면 다산은 농사를 짓지 않고 농업 원론만 얘기했다. 풍석은 논두렁 밭두렁을 돌아다닌 체험으로 구체적인 농사 기술을 제안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여기서 비롯된다. 풍석은 입으로만 농사를 짓지 않았고, 글로만 물고기를 잡지 않았다. 그리고 온갖 정보를 조직적으로 정리했다. 그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실행되거나 실행되어야 할 선진 기술을 전달하려는 노력이 역력하다. 다산은 스스로 말한다. 자신의 경세학은 “지금의 쓰임에 구애되지 않고 기준을 제시해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려는 연구다.”라고. 당대의 활용보다는 이상적 통치 기준을 만들겠다는 포부다. 하지만, 풍석이 흙으로 끓인 국 즉 토갱(土羹)이요, 종이로 만든 떡 즉 지병(紙餠)이라 비판했던 저술은 바로 이런 거였다. 풍석은 이상을 추구하되 반드시 이 땅의 현실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울 정도의 철저한 현실론을 견지했다. 실현할 수 없는 지식은 ‘토갱지병’이다! 이상적 기준을 제시하고서 현실을 이상으로 밀고가려 했던 다산의 방법론과는 대조적이다. 풍석의 이용후생론은 바로 이런 실용학이었다. 다산 탄신 250주기를 맞아 여기저기서 다산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조선의 다빈치’라는 평가도 나온다. 그럼에도, 그의 위대성을 유학사상과 정치철학에서 찾으려는 경향은 여전하다. 다산의 저작을 폄하하려는 마음은 없다. 그러나 다산에게서 조선의 모든 잠재성과 가능성을 찾으려는 경향은 지나치다. 풍석의 평생 역작 ‘임원경제지’는 제도적 개혁을 주장하지 않는다. 개혁은 일상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게 풍석의 신념이었다. 풍석은 ‘놈팡이 선비’를 제일 혐오했다. “곡식만 축내며 보탬이 안 되는 자 중에 저술하는 선비가 으뜸이다!” 선비들이여, 농업·공업·상업 알기를 똥으로 아는 그 엘리트 의식부터 싹 뜯어고쳐라. 버러지처럼 놀고먹지 마라. 경서를 공부하되 제 식구 먹을거리, 입을거리, 살 곳은 유지하면서 하라. 방 안에 틀어 앉아 공맹과 성리를 논할 시간에 밖에서 바지 걷어붙이고 쟁기질하라! 그물 던져 물고기 잡아라! 짐 지고 나가 장사하라! 몸놀림을 혁신하라. 땀 흘려 일해서 벌어먹는 일을 점점 기피하고, 종일 컴퓨터로 하루를 보내는 일이 사람다운 노동이라고 여기는 우리가 여기서 얻을 힌트는 과연 없는 것일까. 정명현(임원경제연구소 소장)
  • 토지문학상·김만중 문학상 공모

    경남 하동군과 토지문학제추진위원회는 올해 토지문학상 작품을 공모한다. 남해군과 남해문학관도 제3회 김만중 문학상 작품을 공모한다. 토지문학상은 평사리 문학대상(소설, 시, 수필), 평사리 청소년 문학상(소설), 전국 토지 독서 토론과제, 하동소재 작품상 등 4개 분야에 걸쳐 공모하며 공모기간은 오는 9월 7일까지다. 당선작 발표와 시상은 10월 12~14일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열리는 토지문학제 때 한다. 남해군은 서포 김만중 선생을 기리고 유배문학 계승·발전을 위해 제정해 해마다 시상하는 김만중 문학상 작품을 공모한다. 공모부문은 시(시조 포함), 소설(장편, 중편, 단편), 희곡 3개 부문이다. 공모기간은 31일까지다. 다음 달 30일 남해유배문학관과 군 홈페이지에서 결과를 발표하고 심사를 거쳐 11월 1일 시상할 예정이다. 하동·남해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삼남길’ 경기구간 9월 개통

    ‘삼남길’ 경기구간 9월 개통

    한양부터 전라도 해남 땅끝마을까지 이어졌던 ‘삼남길’ 의 경기도 첫 구간이 9월 개통한다. 경기도, 수원·화성·오산시, 코오롱스포츠, 아름다운 도보여행 등 7개 기관은 3일 경기도청에서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협약을 맺었다. 개통되는 삼남길 구간은 수원∼화성∼오산 간 50㎞다. ●도보탐방위한 역사문화콘텐츠 발굴 남태령을 지나 경기 과천, 수원, 평택을 거쳐 충청·전라·경상도를 연결하는 삼남길은 조선시대 10대 대로(大路) 가운데 가장 긴 보도 구간이었다. 7개 기관은 앞으로 삼남길 운영, 유지관리, 홍보 등에 공동 협력하게 된다. 삼남길 경기구간은 정도전과 정약용이 나주와 강진으로 유배를 가면서 걸었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융릉)에 가기 위해 자주 이용했다. ●내년 4월 과천·안양 등 전구간 개통 도는 옛길 복원사업으로 주민들에게 ‘길’을 통해 생활공간을 재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한편 도보탐방객의 증가로 체험형 관광수요 확대, 민박 및 토산품 등 지역밀착형 소비 증가 등의 경제적 효과를 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경기도는 이번 3개 시 구간 개통을 시작으로 내년 4월에는 과천, 의왕, 안양, 평택 등 경기 삼남길 나머지 구간을 개통할 예정이다. 장기적으로는 의주로(연행길), 영남로(사행길), 경흥로 등 경기도 관통 6대로를 모두 복원할 계획이다. 도 관계자는 “옛 대로를 오롯이 되살려 옛길과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콘텐츠를 더 발굴하고 다양한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을 개척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대기업계열 보험사 8곳 일감 몰아주기 손본다

    금융감독원이 대주주와 부당거래 가능성이 큰 대기업 계열 보험회사의 ‘일감 몰아주기’ 등에 대한 부문검사에 착수했다. 금감원은 2일 삼성, 대한, 미래에셋, 동양, 교보, 신한, ING, IBK 등 모두 8개 생명보험회사에 대해 지난달 25일부터 한 달 일정으로 부문검사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금감원, 부문검사 착수 금감원 관계자는 “이번 감사의 목적은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배당결정 과정 및 공시율 결정방법의 적정 여부와 내부통제 장치 작동 여부 등이 주요 점검사항”이라고 밝혔다. 금감원의 검사는 권혁세 금감원장이 최근 보험사 사장단과의 간담회에서 “대기업 계열 보험회사가 자산운용, 퇴직연금, 부동산관리용역 등을 90% 이상 계열사에 맡김에 따라 ‘일감 몰아주기’란 사회적 비난이 커지고 있다.”며 “부당 내부거래 차단을 위해 ‘부당지원 거래 유형 및 판단기준’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등 제도 개선도 현장검사와 함께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힌 데 따른 것이다. ●대주주 배당 확대 여부도 조사 금감원은 이번 8개 생명보험사의 부문검사를 통해 유배당상품과 무배당상품 간의 비용 전가 등을 통해 대주주에게 가는 배당을 늘렸는지도 검사한다고 설명했다. 생명보험사의 상품은 운용수익의 90%를 상품 가입자에게 돌려주고 주주에게 나머지 10%를 주는 유배당상품과 운용수익이 모두 주주에게 돌아가는 무배당상품으로 나누어진다. 무배당상품은 주주에게 수익이 돌아가는 대신 보험료가 상대적으로 낮다. 금감원은 보험사들이 무배당상품의 공시이율을 무리하게 높여 보험가입자를 모은 뒤 손실만 유배당상품에 넘겨 대주주의 배를 불렸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17) ‘실학거성’ 정약용 & ‘북학거두’ 김정희

    [선택! 역사를 갈랐다] (17) ‘실학거성’ 정약용 & ‘북학거두’ 김정희

    다산(茶山)과 추사(秋史)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이다. 한 사람은 조선 실학(實學)을 집대성한 인물로 추앙받고, 한 사람은 북학(北學)의 종장으로 일컬어진다. 중국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청나라의 학술과 문화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다산, 청나라에 유학하여 중국인을 스승으로 삼고 청나라의 학술과 문화를 배우고 좋아했던 추사, 이런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삶이 달랐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당색(黨色)마저 달랐으니 애초부터 가까이 지내기엔 서로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럼에도, 추사는 다산의 아들 정학연과 가까운 친구였고 선배인 다산을 존경했다. 다산 사후에는 다산의 제자들이 추사의 문하를 수시로 출입하며 교유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의 삶이 다르면서도 닿아 있는 것은 정치적인 이유로 죄인의 몸이 되어 유배형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배의 설움 글로 푼 정약용 대대로 문한(文翰)을 숭상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다산은 정조 임금의 총애를 온몸으로 받았던 신하이자 제자였다. 그런데 출세가도를 달리던 다산에게 시련이 닥쳤다. 젊은 시절 천주학(天主學)에 관한 책을 읽고 연구했던 게 화근이었다. 다산의 집안에는 형님과 매형을 비롯한 천주교도들이 많았다. 호기심 많던 다산이 천주학에 관심을 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후에 다산은 성균관에 들어가면서 천주학과의 인연을 끊지만, 젊은 시절 그가 한때 마음을 두었던 천주학은 결국 인생의 항로를 바꾸고 만다.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젊은 시절 천주학에 몸담았던 사실은 점점 다산의 목을 겨누는 칼로 변해갔다. ●든든한 후원자 정조 죽자 유배생활 시작 상황이 악화되자 다산은 짐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갔다. 1800년 봄의 일이었다. 얼마 후 다산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정조가 승하하자, 다산은 다음해 2월에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10월에 상경하여 재조사를 받았지만, 이번에는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고 만다. 죄인의 몸이 되어 강진을 찾은 다산을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801년 겨울,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동문 밖 술집에 거처를 마련했다. 동천여사(東泉旅舍) 뒷골방인 사의재(四宜齋)였다. 이곳에서 1806년 여름까지 지냈다. 1805년 겨울은 승려인 아암(兒庵)의 배려로 아들 정학연과 함께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지냈다. 1806년 가을에는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1년 남짓 살았다. 이렇게 떠돌던 다산은 1808년 봄부터 1818년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다산초당(茶山草堂)에 머물렀다. 다산은 유배생활 대부분을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하는 일로 보냈다. 누구보다도 승려들과 많은 교유를 하였고 차(茶)를 사랑했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었다. 강진에 도착한 다음해 봄부터 붓과 벼루를 옆에 두고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저술에 매달렸다. 그 때문에 왼쪽 어깨에 마비 증세가 나타나 폐인이 될 지경이 되었고, 시력은 나빠져 늘 안경을 끼고 살았다. 다산이 그렇게 저술에 매달린 것은 폐족(廢族)이 되어버린 자신의 가문과 자신을 구원할 길이 오직 저술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저술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전하고, 이로써 죄인의 오명을 벗어 던지고 싶었던 것이다. ●폐족 벗어나기 위해 두 아들의 학문정진 강조 한편으로는 두 아들에게 수시로 훈계의 글을 써 보내 공부를 강조했다. 청족(淸族)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존경을 받게 되지만, 폐족이 된 마당에 학문에 힘쓰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천시하고 세상에서도 버림을 받게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두 아들이 자포자기하면 자신의 저술이 후대에 전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자신의 글이 전해지지 못한다면 후세 사람들은 단지 관청의 문서만 가지고 자신을 평가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끝내 죄인의 오명을 벗을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이런 절박함은 다산으로 하여금 500권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기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유배의 恨 서화로 푼 김정희 김정희의 증조부는 영조 임금의 사위였다. 그런 집안에서 자랐으니 왕실의 한 구성원인 셈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부러울 게 없는 생활을 하였다. 1810년 부친을 따라 중국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을 다녀온 뒤로 북학의 종장으로 성장하였다. 연경의 지식인들은 김정희와 교유하기를 희망하였고, 김정희의 연구 논문이 나오기를 기다리곤 하였다. 이미 동아시아 최고의 석학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親청’ 추사, 反청 다산 선배로 여기고 후학들끼리 교류도 그러나 김정희가 45세 되던 1830년에는 부친 김노경이 전라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840년에는 그 자신마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모두가 정쟁 속에서 빚어진 일들이었다. 평생 고생이란 걸 모르고 살았던 김정희에게 제주도의 유배생활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음식은 거칠어 목에 넘어가지도 않았고, 날씨는 맞지 않아 걸핏하면 앓아누웠다. 제주도에 도착한 다음해, 추사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가장 친한 친구 김유근의 부음이 전해졌던 것이다. 김유근은 추사를 유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가장 큰 희망이었는데, 이제 그 희망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김유근의 사망 소식을 들은 뒤로 추사는 미쳐버린 듯, 정신이 나가버린 듯하였다. 하늘을 향해 혀를 차고 밥상을 대하면 수저를 드는 것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돌멩이가 목구멍에 걸린 듯하고 대못이 가슴에 박혀 있는 듯하여 몰골은 날마다 말라가고 정신도 따라서 나가버린 것 같았다. 슬픔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추사는 두 번째 아내인 예안(禮安) 이씨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반대파들의 박해도 끊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울의 친구들과는 소식도 점차 끊어졌다. 젊은 시절 그렇게도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마저 소식 한 통 전해오지 않았다. 그런 추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책뿐이었다. 역관이었던 추사의 제자 이상적은 그런 추사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중국에 갈 때마다 최신의 서적들을 구해다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모두 쉽게 구할 수 없는 책들이었다. 그 덕분에 몸은 제주에 있었지만, 중국 소식을 손금 보듯 하며 지낼 수 있었다. 유배 가기 전이나 유배 간 뒤나 언제나 똑같이 자신을 대하는 이상적의 행동을 보면서 추사는 문득 ‘논어’의 구절을 떠올렸다. ‘자한’ 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라는 구절이었다. 공자께서는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 사람도 어려운 지경을 만나야 진정한 친구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추사는 이상적의 행동이야말로 공자가 인정했던 송백(松柏)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추사는 그 고마움을 그림에 담아 이상적에게 선물하였다. 그렇게 ‘세한도’가 탄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추사체로 불리는 그의 글씨는 바로 9년간의 유배생활 속에서 탄생하였다. 추사 또한 평생 수많은 저술을 하였고, 유배기간에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자신의 저술을 두 번에 걸쳐 불에 태워버렸다. 그가 남긴 것은 그의 혼이 담긴 서화뿐이었다. ●올해 다산 탄생 250주년… 활발한 학술행사 열려 18년 유배생활을 저술로 보냈던 다산, 9년 유배생활을 예술로 승화시킨 추사, 이들의 삶은 이렇게 같으면서도 달랐다. 한 사람은 가슴 속에 쌓인 것을 밖으로 풀어내 책을 지었고, 또 한 사람은 가슴 속에 쌓인 것을 붓 끝에 모아 서화로 표출했다. 올해는 다산이 세상에 태어난 지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여러 곳에서 다양한 전시회와 함께 그의 삶과 업적을 조명하는 학술행사가 열린다. 다산의 바람대로 죄인이라는 오명은 오래 전에 씻어졌다. 이제 다산을 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500권의 저술을 남긴 위대한 학자로서의 명성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다산의 치열했던 삶이 온전히 살아나기를 기대해 본다. 박철상(고서연구가)
  • [선택! 역사를 갈랐다] (16) 연산군과 김일손

    [선택! 역사를 갈랐다] (16) 연산군과 김일손

    세조의 치세가 열리는 길목은 가파르고 무서웠다. 많은 죽음이 널렸고, 한때의 임금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목숨을 빼앗기고 제사도 받지 못하였다. 또한 문종의 현덕왕후까지 ‘왕이 아닌 자의 어미’라는 이유로 폐출되었다. 문종에 앞서 소릉에 묻혔기 때문에 ‘소릉폐치사건’이라고 한다. 공포와 쇠락의 시대,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일탈과 분노의 서사였다. 세조의 공신들은 정변과 찬탈의 전리품을 즐겼다. 유학의 수기치인과 의리명분을 벗어난 화려한 외도였다. 역사의 상흔을 감추고 기억을 억압하였다. ‘사관의 이름을 적으면 바른 사초가 어렵다.’라고 말하는 관료들도 죽였다. 또한 남이의 옥사와 성종 즉위를 빌미로 공훈을 보탰다. 이들에게 세조는 ‘불세출의 중흥주’였다. 1478년(성종 9) 4월 이심원이 세조 공신의 퇴진을 상소하고, 이레 후 남효온은 소릉복위를 주장하였다. 철벽같은 권력에 대한 도전이며, 누구도 말하지 못한 금기를 들춘 것이다. 이심원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종친이며, 남효온은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개국공신 남재의 후예였다. 이 둘은 평소 친분이 깊었고, 논지는 서로 연속하였다. 새 정치 질서를 모색하자면 진실을 밝히고 상흔을 치유하자는 바람을 담았다. 기억운동, 역사운동의 시작이었다. ●왕실의 분란,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다 남효온이 세조의 최대 흠결을 적시하며 국가의 도덕성 회복을 주장할 즈음 왕실은 원자를 낳은 중전 윤씨 문제로 분란에 휩싸였다. 중전 윤씨는 결국 폐서인되어 사저로 쫓겨났다가 3년 후 환란의 싹을 자른다는 포고문과 함께 사약을 받았다. 원자가 7살이던 1482년 8월 세자 책봉이 있기 반년 전이었다. 폐비의 묘는 버려지고 제사도 없었다. 1489년 5월 수호와 제사에 관한 방침이 처음으로 정해졌다. 수령이 주관하였으며, 기일제(忌日祭)가 아닌 명절의 속절제(俗節祭)였다. 물론 묘호나 사당도 없었다. 다만 제례의 물품만은 ‘죽은 왕비’의 예로 하였다. 세자의 마음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미래의 국왕을 배려한 고육책이었다. 폐비 윤씨를 제사지냈던 그해 겨울 남효온이 경상도 의령에서 ‘육신전’을 탈고하였다. ‘사육신충신론’이었다. 이듬해(1490) 3월 김일손은 경연에서 “노산군은 유약하여 책무를 이기지 못하였을 뿐이지 종사에 죄를 짓지 않았음”을 이유로 입후치제(立後致祭)를 건의하였다. 이때 무오사화로 밝혀진 사초를 작성하였다. “노산군의 시체를 숲 속에 버려서 한 달이 지나도 거두는 자가 없자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짊어지고 달아나서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 없다.” ‘세조실록’의 ‘예로서 장사 지냈다.’는 사론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김종직이 과거 들기 전에 꿈속에서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충분(忠憤)을 부쳤다.’는 평가와 더불어 ‘조의제문’ 전문을 옮겨 놓았다. 또한 현덕왕후의 복위를 상소하고는 사초에 “소릉의 관을 바닷가에 버렸다.”고 적었다. 몰래 살폈던 길 위의 노래, 억압된 기억과 기록을 사초에 담았던 것이다. 왕조실록에 실리면 노래는 불멸의 증언이 되고 야사는 국가의 정사가 된다. ●치유와 화해로 미래를 열어야 김일손은 일찍부터 문명이 높았다. 1486년 식년문과에 제출한 ‘중흥대책’(中興對策)은 인구에 비장하였다. 여기에 역대 왕조의 일치일란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하면서 당대를 ‘중쇠’(中衰)로 규정하였다. 중쇠에서 중흥의 기회로 삼는 길은 간명하였다. “천지의 억울함을 풀고 일월의 어둠을 걷어내야 비로소 기강과 법도가 찬연하게 수복되고 예악문물이 가지런히 거행되고 마침내 중흥할 수 있다.” 즉 과거의 상흔을 치유하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한 것이다. 재야의 역사운동이 조정에 점화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한편 역사운동은 과거로 돌아가기가 아니라 과거에서 교훈 찾기였다. 김일손은 심온 일가를 멸문시키고도 중궁 심씨는 끝까지 보전한 태종의 도량을 새삼 되살렸다. 또한 두 왕자를 부왕에게 희생된 방번ㆍ방석의 후사로 삼아 제사 지내게 하였던 세종의 인정과 고려 왕씨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숭의전을 세운 문종의 관용을 추앙하였다. 그만큼 좋은 정치, 어진 임금을 향한 바람이 컸던 것이다. 남효온도 사육신을 희생시킨 세조를 광명의 군주로 리메이크하고 싶은 염원이 강렬하였다. “육신으로 하여금 금석 같은 단심을 지키며 강호에 물러나 살게 하였다면, 상왕의 수명도 연장할 수 있었고 세조의 치세는 더욱 빛났을 것이다.” 이렇듯 역사운동은 증오와 분열을 마감하고 화해와 미래를 향한 소망을 담았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수 없다. 세자는 처음부터 국왕 수업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공부를 싫어하고 환관들과 희롱하기 일쑤였다. 장성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부왕의 훈계가 두려워 시강원에 나가더라도 건성이었고, 관료가 공부라도 독려할라치면 얼굴을 찌푸리며 배척하였다. 기본경전 ‘사서’를 멀리했다. 읽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만 방대한 ‘명신언행록’을 뒤적일 따름이었다. 날이 지날수록 유희는 심해졌다. 성종도 걱정이 많았다. 인정전 연회에서 우찬성 손순효가 반쯤 술에 취하여 용상 아래 엎드려 무언가를 아뢰고 임금도 몸을 굽혀 화답한 적이 있었다. ‘성종실록’ 21년 8월 22일 기사인데, 너무 소리가 작아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폭군의 맨얼굴 신왕은 경연에 소홀하고 국정에도 별반 관심이 없었다. 대신 생모의 추복에 적극적이었다. 먼저 영사전(永思殿)에서 기일제를 지내고 분묘를 천장하고 ‘회묘’(懷墓)라 하고 ‘효사묘’(孝思廟)를 지었다. 신왕 즉위 6개월, 김일손은 시무개혁안 26조를 올렸다. 이때 국왕의 마음 공부를 기본으로 ‘내수사 혁파’ ‘공물 감액과 공안 개정’ ‘사관제도 확대’ ‘제조제의 혁파’ ‘천거제의 확대’ ‘어진 종친의 발탁’ 등을 제안하였다. ‘경국대전’을 보완하는 구상으로 차세대 기묘사림도 개혁과제로 삼았다. 물론 소릉 복위도 포함하였다. 신왕의 반응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김일손은 멈추지 않았다. 왕실 전래의 불교의식인 수륙재 반대에 앞장섰다. 이단을 반대한다는 것보다는 백성을 위한 일이 아니면 복을 빌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외척을 우대하는 인사방침이나 폐비 제사도 반대하였다. 신왕은 싸늘했다. “총명을 조작하며 옛 법을 어지럽히지 말라.” 또한 “김일손은 나를 용렬하다고 여겨서 섬기려 하지 않을뿐더러 임금을 아끼는 마음도 없다.”고 비난했다. 결국 김일손은 소릉복위소를 마지막으로 조정을 떠났다. 1498년 봄 모친상을 끝낸 김일손은 고향 청도를 떠나 함양 남계로 옮겼다. 정여창이 살던 마을에서 멀지 않게 정사를 마련하고 서로 강론하고자 함이었다. 김일손은 여기에서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국왕은 모질었다. 처음에는 사초에 나오는 궁중 비사의 출처와 이유를 캤다. 그러다가 추국 3일 만에 유자광이 ‘조의제문’을 풀이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졌다. 김일손 등은 능지처사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였다. 또한 수기철학을 실천하던 도학자까지 난언과 붕당죄로 걸렸다. 무오사화는 왕실과 훈구세력의 비판 언론과 실천 도학에 대한 국가폭력이었다. 정국은 일순 얼어붙었고 국왕은 정국주도권을 틀어쥐었다. 그래도 뜻대로 폐비 복위는 쉽지 않았다. 많은 신료가 성종의 유지를 내세워 반대한 것이다. 겁박으로 제헌(齊憲)란 시호를 얻어내고 회묘는 회릉(懷陵)으로 높였다. 그리고 폐비사건에 직간접으로 연관된 신료에게 보복하였다. 그동안 무오사화를 처결하고 폐비 추숭을 진행한 윤필상 등 훈구원로나 이미 세상 떠난 세조의 으뜸 공신 한명회까지 참화를 입었다. 또한 국왕의 뜻을 거슬렀던 삼사언론을 ‘능상’(上)으로 처벌하였다. 국왕은 스스로 공도(公道)의 주인임을 포기하였다. 과거로 인재 뽑듯 ‘흥청망청’ 각처 기생을 끌어오는 ‘도가니’ 세상을 연출한 것이다. 민심이반은 심각하고, 군신관계는 결딴났다. 신하들은 묵언패를 걸고 전전긍긍, 생존게임이 벌어졌다. ●자신을 세우지 않고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없다 국왕 재위 12년 여름 전라도에서 유배객 김준손·이과·유빈 그리고 옥과현감 김개 등이 반정의병을 준비하였다. 9월 15일 남원 광한루에 출정하기로 하였다. 도성의 성희안·유순정에게도 알렸다. 반정과 반란의 길목에서 혼선을 막고 경중 호응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9월 1일 김개가 격문을 가지고 도성으로 향하였다. 여의치 않으면 진성대군을 호위하여 내전에 대비할 요량이었다. 바로 이날 밤, 도성의 반정세력이 궁궐을 장악하였다. 인심을 잃으면 임금도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 일대 사변, 중종반정이었다. 국왕은 연산군으로 강등되어 쫓겨났다. 그런데 전라도의 거사에 앞장선 김준손은 김일손의 백형이었다. 연산군과 김일손은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는 관점과 방향이 정반대였다. 선택과 방식도 천양지차였다. 김일손이 진실을 통하여 상흔을 치유하고 미래가치를 지향하였다면, 연산군은 개인적 분노와 욕심으로 엄청난 폭력을 동원하며 보복하였다. 한편은 관용의 진보이며 다른 한편은 파괴의 퇴행이었다. 이렇게 갈리는 근본은 무엇이며, 교훈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극기복례, 수기처신(修己處身)의 마음 공부가 아닐까? 이종범(조선대 사학과 교수)
  • [CEO 칼럼] 지혜로운 말(言)로 따뜻한 가슴을 얻자/김창범 한화L&C 대표

    [CEO 칼럼] 지혜로운 말(言)로 따뜻한 가슴을 얻자/김창범 한화L&C 대표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하던 대구에서 어린 학생들이 연이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충격을 줬다. 집요한 따돌림과 괴롭힘, 즉 ‘왕따’의 심각함에 학부모, 교육계는 물론 사회 전반이 크게 들끓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체적 폭력의 수준이 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거친 행동은 사실 험한 말에서 비롯된다. 피해 학생들이 당한 지속적인 언어폭력도 신체폭력에 버금갈 만큼 정도가 심각했다. 요즘 아이들은 예전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상황과 장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욕을 내뱉는다. 여성가족부 실태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의 73.4%가 매일 욕설을 사용한다. 이 중 50% 정도가 ‘습관’처럼 욕을 하지만 그 의미를 아는 청소년은 27%에 불과했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언어 사용에 대한 책임을 아이들에게만 물을 수 있을까. 막말을 일삼는 것은 어른들이 먼저다. TV는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는 인사들이 선동적이고 비속적인 언행을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걸 생생히 전한다.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도 원색적인 비난과 비판이 거름망 없이 유통된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해진 ‘폭언 세례’에 아이들은 무방비 상태다.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인데, 그대로 닮는 것은 당연지사 아닌가. 말은 사람과 조직 사이를 뚫는 물줄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 다양한 의견이 막힘 없이 전해지고 흐를 때 인간관계는 물론 조직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이것이 소통이다. 소통의 관점에서 리더십 이론을 풀어 쓴 마이클 해크먼과 크레이그 존슨은 성공한 리더가 되려면 공평하게 대하기, 관심과 염려 표현하기, 경청하기, 타인의 공헌에 감사하기, 과거의 행동에 대해 숙고하기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모두 지혜로운 말의 사용이 전제될 때 가능한 일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지 않던가. 일찍이 우리 선조들은 ‘말(言)의 지혜’가 중요함을 알고 가르쳐 왔다. 말을 사용하되 뜻이 있게 하고, 마음을 닦아 말에 담기도록 했다. 어릴 적부터 붓글씨를 쓰면서 정신을 수양하고 지혜를 키우도록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명필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 유배돼 집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형을 받았다. 권력다툼 속에서 희생됐으나 울분을 말로 뱉어내기보다는 안으로 수양을 쌓는 데 매진,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천 자루가 닳아 없어지게 할 정도로 고독한 정진을 한 끝에 추사체를 완성했다. 덕분에 세한도(歲寒圖)를 비롯한 숱한 명작을 남겨 삶을 관조하고 즐길 줄 아는 지혜와 정신을 후세인 우리가 기리도록 했다. ‘칼의 노래’의 작가 김훈은 아직도 육필 원고를 고집한다고 한다. 스스로를 ‘인터넷 낙오자’라 칭하는 그는 직접 자료를 찾아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쓴다. 그는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고통스럽고 행복하다.”(‘밥벌이의 지겨움’ 중)고 말한다. 남이 볼 때는 불편한 노동이지만 그에게는 몸으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인 셈이다. 다듬고 정제된 글로 쓰여진 이야기가 독자에게 감동으로 전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너나없이 잘나고 내 일이 우선인 세상이다. 지면 끝장이란 경쟁심리도 하늘을 찌른다. 하지만 서로 뾰족하게 찌르기만 한다면 남는 것은 상처뿐이다. 말로 주고받은 상처는 가슴 깊이 생채기를 남겨 지우기도 힘들다. “우리 시대의 말은 무기를 닮아 자기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는 무지몽매한 언어 습관이 많다.”고 한 김훈의 말을 곰곰이 새겨볼 일이다. ‘박살내자’고 소리치면 한 번쯤 쳐다볼 수는 있다. 그러나 ‘안아드릴게요’라는, 다정한 프리 허그(Free Hugs) 광고 카피는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다. 한 자 한 자 원고지에 연필로 쓴 듯 지혜로운 언어가 귓가에 흐르는 날이 많아지길 소망해 본다.
  • [공직열전 2012] (12)외교통상부 (상)고위직 현황과 면면

    [공직열전 2012] (12)외교통상부 (상)고위직 현황과 면면

    외교통상부 본부 내 고위직을 뜻하는 ‘G7’은 몇년 전부터 7명이 아니라 ‘G15’ 수준으로 대폭 늘었다. 외교부가 담당하는 업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고위급 회의 등에 참석하는 간부들 또한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외교부는 특히 장관보다 기수가 높은 재외공관장 등 고위공무원단에 270명이 포진해 있을 정도로 상층부가 두껍다. 형님 같은 인상에 온화한 성품의 김성환 장관과 통상 쪽 수장인 박태호 통상교섭본부장은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동기동창이라는 인연이 있다. 덕분에 정무와 통상 분야의 협업이 무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평가다. 유명환 전 장관 딸 특채 파동 직후부터 외교부 쇄신을 위해 뛰어온 김 장관은 다양한 인사 혁신안을 도입하는 등 조직 안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무관용 원칙’ 등은 외교부 내에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외교부 간부 인맥은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소위 ‘4강’ 대사와 주유엔 대사를 제외하고는 논하기 힘들다. 김 장관보다 선배인 최영진 주미 대사와 이규형 주중 대사, 신각수 주일 대사를 비롯해 김숙 주유엔 대사와 위성락 주러 대사 등 소위 ‘빅 5’는 차기 정부에서도 언제든지 장관이나 대통령실 외교안보수석 등 고위직을 맡을 준비가 돼 있는 화려한 경력의 베테랑 외교관들로 손꼽힌다. 이들과 함께 올해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심윤조 전 주오스트리아 대사와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도 외교부 인맥의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인 안호영 제1차관은 외교부에서 가장 유려한 영어를 구사한다는 평을 받는다. 참여정부 시절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의 눈밖에 나 고려대 겸임교수로 ‘유배’를 갔다가, 통상 분야가 전문인데도 정무 담당인 1차관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교수 출신인 김성한 제2차관은 윤덕민 국립외교원 교수와 함께 이명박 대통령의 오랜 외교정책 참모다. 한·미 동맹 등 양자관계를 다루다가 다자외교에 도전하고 있다. 5개국어에 능숙한 임성남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협상의 달인’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6자회담의 교착 상태가 이어지면서 돌파구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외시 14회로 입부했으나 연수는 15회와 받았다. 친화력도 좋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규현 차관보는 장관특보를 오래 지낸, 뛰어난 전략가로 꼽힌다. ‘직설화법의 대가’인 조병제 대변인은 주미얀마 대사로 간 지 1년 만에 대변인으로 발탁됐다. 김 장관의 신임이 높아 최장수 대변인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재팬 스쿨’의 최고참인 이혁 기획조정실장은 김재신 전 차관보와 함께 대통령실 외교비서관으로 장수했다. 배재현 의전장은 문화외교국장, 주터키 대사를 거치면서 쌓은 문화외교를 의전에 적용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중동 전문가인 마영삼 평가담당대사는 공공외교대사와 겸직하면서 공공외교 확산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김봉현 다자외교조정관은 외시 16회 가운데 가장 먼저 차관보급으로 승진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라인의 핵심으로, 협상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 등 학구적이지만 너무 진지하다는 평가도 있다. 통상교섭본부의 두 차관보급인 이시형 통상교섭조정관과 최석영 자유무역협정(FTA) 교섭대표는 통상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다. 한·미 FTA 타결에 큰 역할을 한 최 교섭대표는 부드러운 인상에 침착함을 갖췄다는 평을 듣고 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조선 후기 콘텐츠의 보고 ‘임원경제지’ 개관서 나왔다

    조선 후기 콘텐츠의 보고 ‘임원경제지’ 개관서 나왔다

    ‘조선판 브리태니커’로 불릴 만한 조선 후기의 실학서 ‘임원경제지’의 개관서가 최근 나왔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조선 후기 실학자 풍석 서유구(徐有?·1764~1845)가 30여년에 걸쳐 쓴 책으로 총 54책 113권에 2만 8000여 가지의 지식을 담았다. 흔히 농경서로 알려졌지만, 조선 후기 실용백과사전이라고 보는 것이 책의 성격에 더 가깝다. 농사, 경제, 축산, 의학, 문학, 상업, 의례, 공업, 건축 등 모든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의학을 기술한 ‘보양지’와 ‘인제지’ 부분은 광해군 때 완성된 허준의 ‘동의보감’과 비슷한 규모다. 단일 저작으로는 조선 최대의 저술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방대하고, 전문적이다 보니 필요에 따라 일부만 번역됐을 뿐 책 전체가 번역된 적은 없다. ●서유구, 정약용과 비견될 ‘실학 대가’ 이번에 나온 ‘임원경제지 개관서’(씨앗을뿌리는사람 펴냄)는 이같이 방대한 임원경제지의 구성과 구조 등에 대해 해제를 달고, 왜 중요한 책인지를 대중적으로 설명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풍석 서유구는 어떤 사람인지, 실학의 대가로 알려진 다산 정약용(1762~1836)과 비교할 때 임원경제지는 어떤 수준인지 등이 들어 있다. 고려대 유전공학과를 나와 이 책의 번역에 벌써 10년째 매달리고 있는 정명헌 임원경제연구소장은 지난 11일 기자간담회에서 “2003년부터 학자 42명이 번역에 참여해 3년 동안 초벌 번역을 마쳤다.”면서 “2014년 3월 번역 완간을 목표로 정본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본으로 만든 뒤 초벌 번역한 것을 교정해 나가면 전집 55권으로 나오게 된다. 정 소장은 “정약용은 89학번, 서유구는 90학번으로 같은 시대의 실학자”라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정조가 사랑한 ‘초계문신’으로, 정약용은 1789년에 갑과 2위로, 서유구는 1790년 병과 14위로 과거를 통과해 관리가 됐다. 재미있는 것은 정조는 시경 강의에서 500개의 시험문제를 제시하는데 정약용의 답변 중 채택된 답변은 117개로 채택률 20.2%이고, 서유구는 181개의 답변이 채택돼 31.3%에 이른다. 과거시험 결과는 정약용이 더 똑똑했지만, 시경 강의 답안 채택률을 보면 서유구가 더 똑똑했다. 이렇게 똑똑한 서유구는 벼슬을 살다가 작은아버지 서형수의 전라도 유배 등으로 벼슬이 떨어지고, 1806년 고향인 경기도 장단으로 낙향해 18년간 임진강변 장단에서 농사짓고, 물고기 잡으며 저술에 들어간다. 이때 그는 경학보다 실용 학문에 심취한다. 임원경제지에 나오는 실용 기술들은 대체로 서유구가 직접 해보고 써넣은 것으로 보면 된다. 논에 물을 대는 데 사용하는 ‘자승차’(自升車) 같은 큰 기구부터 베개 만드는 법, 밭의 두둑과 고랑을 만들어 생산량을 늘리는 법, 다양한 재료로 만드는 술과 음식에 관한 정보 등 구체적인 지식을 담았다. 다시 그가 벼슬에 나간 것은 1823년이다. 조선 후기 경학의 대가답게 규장각 제학과 예조판서, 호조판서, 홍문관 제관과 제학,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한다. 아쉽게도 정승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다. 또한 벼슬길에 다시 올랐을 때 귀향해 자신이 보고 겪고 느꼈던 조선 후기 가난한 국가 경제를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하지 않은 것도 아쉽다. 서울의 세도가, 이른바 경화세족(京華世族)이었던 그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사대부들이 일상을 개혁하면 국가 경제와 문화를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지만 정책을 통해 빛을 보지는 못한 것이다. 임원경제연구소의 민철기 번역팀장은 “임원경제지는 조선 후기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있어 전통음식 복원, 신약 개발, 드라마·영화의 문화 콘텐츠, 테마파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의 보고”라고 말했다. ●전액 민간 후원금으로 번역작업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는 현재 학문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교훈을 준다. 책은 모두 252만자로 구성돼 있는데, 이 중 서유구가 중국·일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을 아주 정확하게 기록했고, 인용이 부실한 대목도 명확하게 지적해 놓았다. 그 결과 서유구가 직접 자신의 생각과 기술을 저술한 부분이 46만 9000자로 전체 책의 18.6%라고 밝혀 낼 수 있었다. 이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학자들이 박사 학위 논문을 무작위로 베끼고, 자기 복제를 반복하는 행태와는 아주 다른, 엄격한 학문 태도다. 책의 번역에는 도올 김용옥의 제자들인 다양한 전공자와 직업인들이 매달리고 있다. 고전번역원이 아니라 전액 민간 후원금으로 진행된 점도 특이하다. 일본 오사카 부립 나카노시마 도서관에 있는 ‘임원경제지’ 초고, 고려대·연세대·규장각의 필사본을 종합해 정비하고, 분야별로 초벌 번역을 마치는 데 10억원이 들었다. 번역 완간까지 25억원 정도가 더 필요하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황제 나폴레옹이 영어로 쓴 ‘엉성한 편지’ 가격은?

    황제 나폴레옹이 영어로 쓴 ‘엉성한 편지’ 가격은?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1769~1821)이 유배시절에 영어로 직접 쓴 희귀한 편지가 경매에 나와 32만 5000유로(약 4억 8000만원)에 낙찰됐다. 지난 10일(현지시간) 프랑스 경매업체 오세나트는 “1816년 나폴레옹이 그의 영어교사에게 쓴 자필 편지가 당초 예상가의 5배인 32만 5000유로에 낙찰됐다.”고 밝혔다. 이 편지는 나폴레옹이 쓴 3장의 영어 편지 중 하나로 1815년 워털루 전쟁에서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에 패한 뒤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갔을 당시 쓴 것이다. 일반 편지지 크기의 이 편지에는 유배중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나폴레옹의 엉성한 영어실력이 잘 드러나있다. 나폴레옹은 편지 서두에 ‘It‘s two o’clock after midnight, I have enow(enough의 오기) sleep’이라고 썼으며 말미에는 ‘Four o’clock in the morning’라고 써 불면증으로 거의 잠자지 못하고 이 편지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오세나트의 회장 장-피에르 오세나트는 “이 편지는 매우 희귀하고 가치있는 편지” 라면서 “통념과는 달리 나폴레옹은 영국을 미워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나폴레옹이 말년에 영어를 배운 것은 아마도 영국 문학에 대한 관심과 자신을 영국 언론이 어떻게 묘사할지 직접 읽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선택! 역사를 말하다] (15) 박제가와 유수원

    [선택! 역사를 말하다] (15) 박제가와 유수원

    국왕이 내려주는 술잔을 받고 국왕과 더불어 꽃길을 산책하고 시를 쓰는 신하가 있다. 가득 내려진 음식에 국왕의 따스한 눈길을 받는 신하는 감격하여 세상을 품에 얻은 것 같다. 한편, 국왕을 인정하지 않고 끌어내려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다가 역모라는 이름으로 대역죄인이 되어 형장에 서 있는 신하가 있다. 그의 학문은 세상을 바꾸기에 충분하였지만,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뜻을 펼칠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의 운명은 왜 이리 다를까? ●정조의 총애 받은 자 vs 북학의 원조지만 잊힌 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경륜의 학자들. 서얼이라는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국왕 정조의 총애로 정조시대 북학을 중심 정책으로 만들어낸 박제가와 북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지만 영조대 반역자로 규정된 유수원의 삶은 한편으로 유사하면서 한편으로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유수원과 박제가는 모두 우리 역사에서 북학을 강조한 학자들이다. 박제가는 정조가 규장각 5대 검서관의 한 명으로 가장 총애하는 인물이었고 ‘북학의’라는 명저를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유수원에 대해서는 조선후기 역사를 전공한 학자들이 아니고는 대부분 관심 밖의 인물이며 그가 ‘우서’(迂書)라는 개혁사상이 가득 담긴 책을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거의 없다. 그만큼 역사의 기억에 남는 인물이 아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그가 영조대 ‘나주벽서 사건’(1755년 을해옥사)이라는 역모 사건의 관련자이고 그 탓에 대역죄인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적으로 몰린 그의 이야기가 후세에 제대로 전달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얼 출신이었지만 정조의 총애를 입었던 박제가는 정조의 배려에 의해 두 번이나 연행사로 참여하면서 새로운 중국 문화를 볼 수 있었고, 이러한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조선의 다양한 문화에 적용시켜 변화를 추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그의 북학 정신은 정조의 적극적 후원으로 경세치용학파와 더불어 이용후생이라는 큰 사상으로 발전하여 정조시대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 많은 이바지를 하였다. 두 사람 모두 시대를 앞서가는 개혁 사상이 있었지만 한 사람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한 사람은 역사에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국가 권력의 최고 정점이었던 국왕과의 관계였다. 국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인물과 국왕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와 더불어 파트너로서 국가 개혁에 동참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어떤 시대적 이유로 인생과 역사의 평가가 달라졌을까? ●명문 소론 가문 출신의 귀머거리 유수원 유수원은 1694년(숙종 20년)에 유봉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종숙부가 영조 연간 영의정을 지냈던 유봉휘이니 명문 가문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본관인 문화 유씨는 당파적으로 소론이었고, 유수원은 소론의 중심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사실 유수원은 소론 중에서도 급진파라고 할 수 있다. 유수원에게는 치명적인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귀머거리였던 것이다. 그가 언제부터 귀가 먹었는지 알 수 없지만, 훗날 영조와의 대화에서도 필담으로 할 정도였으니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신체적 결함은 그를 더욱 과격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유수원의 종숙인 유봉휘는 영조 즉위년에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지만, 영조는 그를 끝내 조선 팔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저주의 땅 경원으로 유배 보내고 말았다. 그 이유는 유봉휘가 “경종이 즉위한 뒤 ‘김창집 등 4명의 노론 대신들이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을 시키라고 강요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노론 입장에서는 당연히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기에 제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유봉휘를 종숙으로 두었으니 유수원 역시 노론에게 있어서는 견제의 대상이었다. 유수원은 20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24세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가히 천재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과거 평균 합격 연령이 41세였으니 24세에 합격한 것은 그가 뛰어난 자질과 열심히 공부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유수원의 급진성은 경종에 의해 정6품의 정언으로 임명받은 후 나타났다. 나라가 안정이 안 되고 국정이 어지러운 것은 바로 소론 온건파인 영의정 조태구가 국정운영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영의정 조태구는 소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종대에 노론 4대신의 입장을 받아들여 영조의 왕세제 책봉을 묵인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소론 급진파로서 소론 온건파인 조태억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것은 이미 마음속으로 영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영조가 국왕이 되고자 자신의 형인 경종을 독살하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속에선 노론에 대한 적개심만이 아니라 국왕에 대한 반감도 가지고 있었다. 집권 세력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는 유수원은 영조를 비롯한 집권 노론에게 중용될 수 없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본격적으로 사회 개혁에 대한 구상과 집필을 하였다. 나라가 왜 이리 어려워졌을까에 대한 고민을 그는 깊이 하였다. 그 결과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농공상’에 따른 신분 차별이 나라가 가난하고 백성이 빈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개인의 능력에 따른 직업 선택의 자유를 주어야 각자가 자신의 능력에 맞는 직분을 찾을 수 있고,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나라와 백성은 부국안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농공상이라는 편벽되고 고루한 강제성이 나라의 변화 발전을 이루지 못하게 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는 학문에 관심도 없고 실력도 없는 양반 사대부들이 유생(儒生)이라고 자처하면서 온갖 편법과 협잡으로 벼슬자리를 구한 다음 권력과 세도를 부려서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고 진단하였다. 바로 노론을 자임하는 양반들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다. 결국, 양반들 역시 놀고먹을 것이 아니라 일해야 하고 특히 상업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훗날 그를 양반상인론의 원조로 평가하는 것이다. 영조는 그의 ‘우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중용하고자 하였으나 노론 대신들의 집요한 반대로 그를 우대할 수 없었다. 나주에 유배 가 있던 소론 윤지는 나주목사 등을 포섭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영조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영조는 자신의 최대 약점인 경종과의 관계를 건드린 이 사건에 대하여 격노하였고 직접 국문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이 죽어나갔다. 탕평의 군주 영조는 이미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주벽서 사건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관련 인물들을 찾는 과정에서 유수원이 검거되었고 유수원은 영조 앞에서 당당히 국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그 결과 그는 다음 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모든 가족은 관노로 편입되었다. ●박제가 “조선의 가장 큰 폐단은 바로 가난” 유수원과 반대로 서얼 출신이었던 박제가는 정조를 만났다. 흔히들 사람들은 정조와 정약용의 관계를 이야기하지만, 실제 이덕무나 박제가에 대한 정조의 총애는 정약용 이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제가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배워서 조선의 발전을 강조한 이용후생 학파의 대명사이다. 연암 박지원, 청장관 이덕무, 그리고 지난해 TV드라마 ‘무사 백동수’의 주인공이었던 야뇌 백동수(1743~1816)와 교류를 하며 북학파의 일원이 된 그는 정조 즉위 후 연경에 사신단의 일원으로 다녀온 후 북학에 대한 생각을 굳혔다. 이들 모두 정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는 인물들이었다. 정조는 국가 개혁을 위해서라면 당론을 가리지 않고 우대를 하는 인물이었다. 특히 민생 안정을 위해 그는 과감한 주장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조의 의중을 파악한 그는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 그것이 바로 ‘병오소회’(丙午所懷)이다. 1786년인 병오년에 자신이 품은 생각을 아뢴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바로 중국과의 통상과 양반상인론이었다. 박제가는 그렇게 이야기하였다. “현재 국가의 가장 큰 폐단은 바로 가난이옵니다. 그렇다면, 가난을 어떻게 하면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중국과 통상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박제가는 중국과 통상을 중요시했고, 중국 통상 이후 주변의 여러 나라들과도 통상해야 한다고 하였다. 서양의 선교사들까지 조선으로 입국시켜 그들의 지식을 배워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도 하였다. 국가의 경제적 안정과 백성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하여 양반들이 상인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양반상인론은 실제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축성하고 양반들을 대거 상업과 유통업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정책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유수원이 노론으로 전향했더라면 결국, 유수원과 박제가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개혁 사상가이자 관료였다. 하지만, 유수원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박제가는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정조시대 문화의 중심에 서 있었다. 어떤 군주를 만나느냐에 따라 정치적 생명이 달라지는 봉건적 구조의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유수원이 만약 영조를 국왕으로 인정하고 노론으로 전향하여 그가 가진 생각을 적극적으로 펼쳤다면 어떤 세상을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 박제가가 서얼이라는 이유로 조정에 대한 반감으로 출사하지 않고 역모를 꿈꾸었다면 그의 북학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선택은 어렵고 힘든 것이다. 김준혁(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 “목민심서 유배 초기부터 썼다”

    “목민심서 유배 초기부터 썼다”

    다산 정약용(1762~1836) 탄생 250주년을 맞아 한국한문학회와 한국실학학회·실학박물관이 공동 개최하는 ‘다산 연구의 새로운 모색’ 학술세미나가 9일 서울 안암로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다. 올해 열리는 다산 관련 학술 대회 중 가장 큰 규모로 박철상 고문헌연구가와 이헌창 고려대 교수, 김용흠 연세대 교수, 이영호 성균관대 교수, 박종천 한국국학진흥연구원 등 23명이 발표에 나선다. ●박철상 고문헌연구가 “미경당, 다산의 다른 호” 세미나에서 박철상 고문헌연구가는 새로운 자료 ‘선암총서’(船菴叢書)를 발굴해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저술시기를 정정하고 저술과정을 검토하는 소논문을 발표한다. 선암총서는 2권 1책 46장의 필사본으로 누가 편찬한 책인지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여기에 목민심서 일부(작은 사진)가 수록돼 있어 주목받았다. 특히 이 필사본 속의 목민심서는 1902년 근대적 인쇄로 제작·보급된 목민심서 목차나 글의 배열 등과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박 고문헌연구가는 5일 “선암총서의 선암은 다산의 강진읍 제자 중 선암(船菴) 손병조가 엮은 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선암총서의 표지에는 선암 외에 미경당(味經堂)도 병기 돼 있는데 박 고문헌연구가는 “다산의 또 다른 호가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강진읍 제자들은 이후 다산초당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이다. 현전하는 목민심서는 1810년대 중반부터 시작돼 1818년 완성되고, 3년 뒤인 1821년 봄 서문을 붙여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1801~2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선암총서의 존재 덕분에 다산이 목민심서를 유배 초기부터 준비한 것으로 해석된다. 박 고문헌연구가는 “목민심서의 초기 형태로 추정된다.”면서 “목민심서가 유배지에서 단기간에 기획하고 만든 책이 아니라, 다산이 지방관 시절부터 계획하고 준비한 저작으로 20년 이상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역작이라는 것을 방증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산은 목민심서 서문에서 ‘심서’는 백성을 다스릴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써놓았다.”면서 “다시 말해 더이상 백성을 다스릴 수 없게 된 시점, 즉 유배 직후에 목민심서의 저술이 시작됐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목민심서에 대한 해석을 “단순한 지방행정의 실무교본이 아니라, 문사철(文史哲)이 융합된 다산 사상의 결정체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헌창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다산 정약용의 국가제도론에 대한 일고찰’에서 “다산이 붕당의 폐해를 절감하고 이를 극복하면서 부국강병을 유효하게 추진하는 국가 건설을 우선 과제로 제시했고, 또한 과학·기술·제도 등에 관한 유용한 지식을 제시한 점에서 조선시대 지력을 한 차원 높게 성장시켰다.”면서 “다산의 사상이 유학적 사유를 벗어나는 근대지향적 요소를 담기도 했지만, 동시기 유럽의 근대사상과의 격차가 가볍지 않았고, 전통 유학사상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단순 행정교본 아닌 사상의 결정체” 김용흠 연세대 강진다산실학연구원 교수는 ‘다산의 국가 구상과 정조 탕평책’이란 논문에서 “‘조선후기 실학’을 정치에서 소외된 재야 지식인의 사상으로 규정하는 통설은 편견”이라며 “실학과 탕평책 사이의 합당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정조 탕평책의 관건이었던 사도세자의 복권과 추숭 과정에서 정약용 등이 정조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당쟁이 무의미한 권력투쟁으로 일관한 것이 아니라, 양난기 이래 국가의 대내외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으로 치열하게 시도됐다.”고 평가했다. 특히 “당색을 불문하고 국가의 역할과 기능을 강화시켜 계급 모순을 해소함으로써 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려고 구상했던 점을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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