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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의 바다 맛 기행] (24) 전남 벌교 섬마을 꼬막밭 트는 날

    [김준의 바다 맛 기행] (24) 전남 벌교 섬마을 꼬막밭 트는 날

    전남 보성군 벌교읍 장도의 섬마을, 물이 빠지고 있는 갯벌에 ‘널배’를 챙겨 든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일찍 도착해 모닥불을 피우고 추위를 쫓는 사람도 있었다. 어젯밤 늦게야 알고 광주에서 택시를 타고 왔다는 주민도 있었다. 마을 꼬막밭을 ‘트는’ 날이다. 한 집에서 한 명씩은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참석하지 못할 경우 벌금을 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연말 배당금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서울이나 부산으로 자식들을 만나러 갔던 사람도 이날만큼은 열 일 뒤로하고 귀향한다. 나이가 많아 일을 하기 어려운 집은 자녀는 물론 사위까지 대신 참석할 정도다. 바닷물이 빠지자 어촌계장의 신호에 따라 수십 명이 널배를 타고 미끄러지듯 꼬막밭으로 향했다. 그 모습이 아름답다 못해 장엄하다. 꼬막은 꼬막, 새꼬막, 피조개로 나뉘며 연체동물 돌조개과에 속하는 이매패류다. 이 중 꼬막을 ‘참꼬막’이라고도 부른다. 참꼬막의 ‘참’은 진짜라는 말이지만 으뜸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반면 새꼬막은 ‘똥꼬막’이라 부른다. 새꼬막은 썰물에도 갯벌이 드러나지 않는 깊은 곳에 살지만 참꼬막은 바닷물이 빠지면 바닥이 드러나는 갯벌의 5~10㎝ 깊이에서 자란다. 따라서 추위와 더위를 견디기 위해 껍질이 매우 두꺼울 수밖에 없다. 반대로 새꼬막은 껍질이 얇아 채취할 때 쉽게 부서진다. 참꼬막은 상품이 되려면 4, 5년을 기다려야 하지만 새꼬막은 2년이면 팔 수 있을 만큼 자란다. ●전라도서는 망자의 상에도 반드시 올려 집 앞 골목시장에서 참꼬막 1㎏에 2만원, 새꼬막은 1만원에 샀다. 피조개는 세 개를 덤으로 얻었다. ‘꼬막 맛이 떨어지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산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죽은 자도 꼬막 맛을 잊지 못한 것일까. 전라도에서는 망자의 상에도 반드시 올려야 하는 음식이 꼬막이었다. 잔칫상에도 홍어와 함께 참꼬막이 오르면 ‘걸게 장만했다’는 말을 들었다. 상을 잘 차렸다는 전라도말이다. 참꼬막은 새꼬막에 비해 짭조름한 맛이 강하다. 또 달다. ●참꼬막은 살이 검붉은 색·새꼬막은 희멀건 색 맛의 차이는 삶아서 껍질을 까 보면 알 수 있다. 참꼬막은 살이 검붉은 색을 띠며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지만 새꼬막은 희멀건 색을 띤다. 얼마나 다행인가. 짭짤함 없이 달기만 했다면 꼬막은 진즉 갯벌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자산어보’에서는 참꼬막을 ‘감’(?), 새꼬막을 ‘작감’(雀?)이라 했다. ‘달콤한 조개’라는 뜻이다. 그리고 작감은 속명을 ‘새고기’라 하고 ‘참새가 물에 들어가서 된 조개’라 했다. 채소를 손질하다 건져내야 할 시간을 놓쳤다. 몇 개는 벌써 입을 벌리고 살이 오므라들었다. 꼬막 살을 꺼내 보니 모습이 꼭 새를 닮았다. 그래서 새고기라 하지는 않았을까. ‘우해이어보’에서는 껍질이 지붕의 기왓골을 닮았다고 해서 ‘와농자’라 했다. 그런데 정약전은 정말 꼬막을 보기나 했을까. 갯벌도 없고 조류도 거센 흑산도에서 말이다. 그가 쓴 ‘자산어보’의 ‘원편’에는 꼬막이 없었던 것 같다. 나중에 이청이 자신의 경험과 중국 문헌을 보고 보충해 집어넣었다. 이청은 다산이 강진 유배 생활을 하며 가르쳤던 제자다. 그곳 ‘도암만’은 지금도 꼬막이 잡히고 있으며 갯벌을 막아 논을 만들기 전에는 보성 벌교에 뒤지지 않는 서식지였다. 참꼬막은 전남 여자만과 가막만이 주산지다. 그중에서도 보성 벌교와 고흥 남양에서 많이 생산된다. 충남 서산과 전남 여수 등지에서도 꼬막이 잡힌다. 모두 파도의 영향을 적게 받는 내만이거나 섬과 섬 사이의 펄갯벌이 발달한 곳이다. 이들 지역은 펄의 깊이가 수m에서 10여m에 이르러 물이 빠져도 걸어 다닐 수 없다. 그래서 어민들은 길이가 어른 키보다 길고 폭이 어깨 넓이만 한 ‘널배’(뻘배라고도 부른다)를 타고 이동한다. 어머니들이 널배를 타고 갯벌을 누비는 것을 보면 쉬울 것 같지만 의외로 힘이 많이 들고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한 발을 기다란 널배 위에 올려놓고 다른 발로 갯벌을 밀어 이동한다. 꼬막을 잡을 때는 가슴을 판자 위에 올려놓은 물동이에 대고 엎드려 조금씩 이동해 가며 양손으로 열심히 갯벌을 휘젓거나 주물러 꼬막을 찾는다. 긴 판자에 갈퀴처럼 철사로 심을 박아서 만든 도구를 널배에 붙이고 밀어서 잡기도 한다. 글 사진 전남발전연구원 책임연구원 joonkim@jeri.re.kr ■ 어떻게 먹을까 씨알 굵고 살짝 입 벌린 놈 골라 끓는 물 식혀 80℃로 삶으랑께 꼬막은 씨알이 굵고 무늬가 선명하며 입을 꽉 다문 것보다 벌어져 있는 것이 좋다. 물에 소금을 좀 뿌리고 박박 문질러 개흙과 이물질을 제거한 후 소금물에 담가 한두 시간 동안 해감한다. 꼬막을 삶을 때 썩은 것이 한 개라도 들어가면 같이 삶은 꼬막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잘 선별해야 한다. 꼬막을 삶을 때는 펄펄 끓는 물을 약간 식힌 후(75~80℃) 꼬막을 넣어 같은 방향으로 십여 차례 저은 후 꺼낸다. 꼬막은 따뜻할 때 먹어야 하며 특히 새꼬막은 식은 후에는 맛이 떨어진다. 최근에는 꼬막무침, 꼬막장조림, 꼬막된장국, 꼬막전 등 꼬막요리가 많이 개발됐다. 꼬막의 고장이라는 벌교에는 갖가지 밑반찬에 꼬막탕수육, 꼬막전, 삶은 꼬막(꼬막찜), 꼬막꼬치, 꼬막초무침 등으로 ‘꼬막정식’을 내놓는 식당이 인기다. 문학기행만 아니라 소설 ‘태백산맥’의 꼬막 맛을 찾아온 사람도 많다. 꼬막무침은 오이, 미나리, 풋고추, 배, 시금치 등의 야채에 삶은 꼬막 살을 넣고 고추장과 양념을 넣은 후 버무리는 것이다. 보성에서는 특산물인 녹차 분말을 섞은 밀가루에 꼬막 살을 넣어 녹차꼬막전을 내놓기도 한다. 또 김치를 송송 썰어 꼬막과 함께 전을 부치기도 한다. 메추리알, 소고기 등으로 만드는 장조림에 꼬막을 더해 만드는 장조림은 짭짤한 밥반찬으로 좋다. 벌교시장은 꼬막과 숭어로부터 겨울이 온다. 시장 골목으로 들어서면 꼬막을 삶아주는 집이 있다. 한 됫박 사서 먹다 남은 꼬막은 까서 밥 한 공기에 남은 반찬을 넣고 참기름을 얹어 쓱쓱 비벼 먹으면 추운 겨울도 거뜬하다.
  • 74년 인생 통해 엿본 인간 정약용의 모든 것

    74년 인생 통해 엿본 인간 정약용의 모든 것

    다산의 한평생/정규영 지음/송재소 역주/창비/289쪽/1만 7000원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1762~1836)은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다산(茶山) 외에 열수, 사암, 자하도인, 문암일인, 철마산초 등 여러 개의 호를 썼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호했던 것은 사암이다. 사암(俟菴)은 중용 29장에 나오는 내용에서 따온 것으로 “백세 뒤의 성인을 기다려 물어보더라도 의혹이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500권에 이르는 자신의 저술에 대한 당당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책은 다산의 고손자 정규영(丁奎英, 1872~1927)이 1921년 다산의 가계와 행적을 연월순으로 기록하고 대표 저술의 주제와 서문을 수록한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를 완역한 것이다. 유년부터 서거할 때까지 다산의 행적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연보는 ‘자찬묘지명’ 이후 공백으로 남았던 15년이 정식으로 완성됐다는 의미를 지닌다. 출생부터 서거할 때까지 다산의 굴곡 많은 한평생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책은 방대한 다산 저술이 언제 어떻게 이뤄졌는지, 다산 사상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일대기와 함께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정규영은 다산이 남긴 저술에 특히 주목했다. 그는 다산의 생애를 두고 “육경사서(六經史書)의 학에 있어서 ‘주역’은 다섯 번 원고를 바꿨고 그 나머지 구경(九經)도 두세 번씩 원고를 바꿨다”고 썼을 만큼 저술에 전념한 측면을 강조했다. 다산이 남긴 대표 저술의 서문도 거의 수록하고 있어 연보만으로도 다산 학문의 전반을 파악할 수 있다. 정규영은 다산의 가계와 행적을 상세히 기록하면서 배경 설명 또한 충실하게 달아 18세기 말~19세기 초 정치적 상황, 다산의 관직 생활과 인간관계, 유배 전후 상황, 인간적 면모, 만년의 집필 활동 등 연구자들에게 유용한 역사적 사실들을 제공하고 있다. 한문학자이자 다산 전문가인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유려한 번역과 함께 알찬 주석을 달았다. 송 교수의 ‘다산시 연구’도 개정증보판으로 함께 출간됐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공직 파워 열전] 외교부 다자·경제외교조정관

    [공직 파워 열전] 외교부 다자·경제외교조정관

    외교부 본부 내 고위직을 의미하는 ‘G7’ 중에서도 다자외교조정관과 경제외교조정관은 유엔 등 다자 외교와 경제 실무를 총괄하는 차관보급 핵심 보직으로 꼽힌다. 다자외교조정관은 유엔 및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 외교와 군축 문제, 다자 안보 체계를 다루는 다자 외교의 실무 사령탑이다. 역대 다자외교조정관 상당수가 ‘다자외교의 꽃’으로 꼽히는 외교부 유엔 과장이나 국제기구국장을 거쳐 유엔 주재 유엔대표부 대사에 중용된 유엔 전문가들이다. 유엔 대사를 지낸 최영진 전 주미대사와 박인국 대사, 현 오준 유엔 대사 모두 다자외교조정관 출신으로 양자와 다자 외교에 탁월한 능력을 드러냈다. 특히 다자 외교의 경우 출중한 영어 실력과 유엔 무대에서 이견을 조율하는 국제회의 주재 능력이 중시된다. 다자외교조정관으로는 초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주영국대사 등을 지낸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비서관이 눈에 띈다. 부산대 불어과 출신으로 외교부의 핵심 보직을 두루 거친 입지전적인 외교관으로 평가받지만 능통한 영어 구사로 다자 외교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인 인물로 꼽힌다. 조현 주오스트리아 대사도 지난해 2월 현 정부 출범 후 2차관 물망에 오르는 등 인사 때마다 주목받았다. 합리적이면서 업무 효율성을 중시하는 스타일로 후배 외교관의 신망이 두텁다. 오준 현 유엔 대사는 국제기구정책관과 주유엔 대표부 차석 대사 등 유엔 외교의 코스를 밟아온 실력파 외교관이다. 신동익 현 조정관은 친화력이 뛰어난 다자통으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계보로 평가된다. 주유엔 차석대사를 역임한 후 본부의 다자조정관으로 중용됐다. 지난해 2월 통상 기능이 산업통상자원부로 이관된 후 경제외교조정관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등과 같은 다자 경제 외교와 양자 경제 협력과 에너지, 환경 문제 등 외교부 내 경제 현안의 실무를 총괄하는 자리로 위상이 굳어졌다. 역대 경제외교조정관 상당수가 통상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 출신들이 맡았다. 이시형 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대사는 통상교섭조정관(현 경제외교조정관)을 지낸 대표적 통상 전문가다. 그는 한덕수 전 총리, 권오규 전 재정경제부 장관, 김중수 전 한국은행 총재 등 고위 경제 관료 출신 자리로 인식돼 온 OECD 대사에 정통 외교관 출신으로 처음 임명됐다. 조태열 현 외교부 2차관과 최고참 외교관 중에서 격조 있는 영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안호영 현 주미대사도 경제외교조정관 출신이다. 원래 외교부 내 통상 라인의 좌장인 안 대사는 참여정부 당시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의 눈 밖에 나 고려대 겸임교수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서 정무를 담당하는 외교부 1차관으로 부활했고, 현 정부 초대 주미대사로 발탁되는 등 직업 외교관의 실력을 발휘한 사례로 평가된다. 지역통상국장을 거쳐 경제 외교에 밝은 안총기 현 조정관은 주미참사관과 상하이 총영사를 지내 대미·대중 업무 이해도가 높다는 평가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씨줄날줄] 봉은사와 추사 김정희/서동철 논설위원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봉은사는 통일신라시대 개창설(說)이 전해진다. 하지만 역사의 전면에 뚜렷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연산군 4년(1498)이다.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가 이 절을 남편의 무덤인 선릉의 원찰로 삼아 봉은사라 이름을 짓고 중창한 것이다. 명종 6년(1551)에는 선종(禪宗) 수사찰(首寺刹)로 떠올랐으니 조선불교 양대 축의 하나였다. 교종(敎宗) 수사찰은 세조의 무덤인 광릉의 원찰인 지금의 남양주 봉선사였다. 과거 서울 도성에서 봉은사를 찾으려면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 했다. 1960년대까지도 강북에 사는 사람이라면 뚝섬유원지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 건너에 내린 뒤 한참을 걸어야 봉은사에 닿을 수 있었다. 하지만 1973년 영동대교가 세워지면서 나룻배 시대도 끝이 났다. 이후 강남 개발 붐이 본격적으로 일면서 한적하기만 했던 수도산(修道山) 기슭의 봉은사는 차츰 도심사찰로 탈바꿈해 갔다. 봉은사는 훌륭한 문화재를 적지 않게 갖고 있지만 세상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판전’(板殿) 현판일 듯하다. 추사는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린 1852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 김노경이 터전을 잡은 청계산 아래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보내며 추사체를 완성했다.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썼다는 ‘판전’은 ‘참으로 무르익으면 오히려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순수해 보인다’는 의미를 가진 대교약졸(大巧若卒)의 경지를 제대로 보여 주는 추사 예술의 결정판으로 찬사를 받는다. 이 절의 ‘대웅전’(大雄殿) 현판 역시 추사 글씨다. 추사는 불교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집안은 종택이 있는 충남 예산의 화암사를 원찰로 삼을 만큼 불교와 가까웠다. 추사 자신은 서른 살 무렵 만난 초의 선사와 평생 교유했고 젊은 시절부터 해박한 불교 지식을 종횡무진 드러냈다. 과천 시절에는 봉은사에 종종 머물며 불교의식에 참례해 불가(佛家)에 귀의한 것 아니냐고 여길 정도였다. 조계사 경내에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봉은사와 추사 김정희’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봉은사와 추사를 연결 고리로 조선 후기 불교와 유교의 소통을 조명하는 기획전시회다. ‘해인사 대적광전 중건 상량문’과 대구 은해사의 ‘佛光’(불광) 및 ‘대웅전’ 편액을 비롯한 추사의 명품 여럿이 선을 보이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 청동 은입사 향완과 봉은사에서 치러진 승과에 합격한 사명당 유정의 대구 동화사 진영도 보인다. 무엇보다 그 유명한 ‘판전’ 현판을 바로 눈앞에서 감상할 수 있다. 당분간 다시 오기 어려운 기회일지도 모른다. 전시회 폐막은 12월 14일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이동하는 여성근로자들의 쉼터

    이동하는 여성근로자들의 쉼터

    금천구에 사는 주부 보험설계사 최모(42)씨의 지갑에는 항상 커피숍 쿠폰이 가득하다. 고객을 만날 때도 이용을 많이 하지만 하루 종일 바깥에서 일을 하다 잠시 쉬려면 커피숍밖에 갈 곳이 없어서다. 하지만 커피숍도 눈치가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퉁퉁 부은 다리를 의자에 올리고 잠시라도 눈을 붙이고 싶지만 주변의 눈총이 따갑다. 최씨에게 필요한 것은 5분 동안 발을 올리고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금천구는 시흥2동 사랑채요양원 1층에 ‘이어쉼’ 쉼터를 열고 본격적으로 운영에 들어갔다고 20일 밝혔다. ‘이어쉼’은 고정된 업무공간 없이 계속 이동하며 일해야 하는 여성 근로자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현재 서울에 8곳이 운영 중이다. 구 관계자는 “1인 근로 형태로 여러 장소를 이동하며 일하는 요양보호사, 가사도우미, 아이돌보미 등 돌봄 종사자들과 방문판매원, 보험설계사, 학습지교사, 우유배달원 등이 주로 이용하는 장소가 될 것”이라면서 “이동 중간 간단한 식사와 휴식이 가능하도록 테이블과 의자, 전자레인지, 커피포트 등의 가전 제품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운영시간은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다. 구는 이어쉼 쉼터를 휴식 공간뿐만 아니라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소통 공간으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공간을 지원한 이명숙 사랑채요양원 원장은 “단순한 쉼터를 넘어 이곳이 이동하며 일을 하는 여성 근로자들의 사랑방이 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170세 된 세한도가 맺어준 동아시아 지식인 네트워크

    170세 된 세한도가 맺어준 동아시아 지식인 네트워크

    나무 네 그루와 집 한 채가 전부다. 추운 겨울의 황량함이 절로 느껴진다. 국보 180호인 ‘세한도’(歲寒圖)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 유배 중 그린 것으로 청나라 쟁쟁한 문인들의 감상문까지 더해져 무려 14m짜리 작품이 됐다. 추사가 중국 지식인들과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교류했음을 증명해 준다. 세한도가 탄생한 지 170주년이 됐다. 이를 기념하며 지난 10일 추사김정희선생국제교류학술회의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다. 추사가 중국을 찾은 것은 딱 한 차례뿐이다. 25세 때인 1809년 10월 부친을 따라 연행을 가서 완원(阮元·1764~1849)을 만났다.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추사가 자신의 호를 완당(阮堂)이라고 붙인 것도 스승에 대한 경외에서 비롯됐다. 그는 평생에 걸쳐 완원을 스승으로 모셨고, 다른 중국 학자들과도 깊이 있고 폭넓게 지적 교류를 지속했다. 중국 학자들은 추사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고 일컬었다. 아시아를 통틀어 유교에 가장 정통하다는 상찬이었다. 이번 학술회의는 완원의 후손과 추사의 후손이 만나 사제로 맺은 인연을 200년 뒤 다시 한번 되새기는 의미도 있다.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학술사에서 실사구시를 학문의 종지로 삼은 것은 추사인데, 추사로 와서 조선 지식인들의 중국관이 ‘숭명반청’에서 비로소 벗어나게 됐다”면서 “훨씬 자유롭고 열린 자세로 중국 학계와 활발히 소통할 수 있는 배경”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임 명예교수는 연배가 높은 다산 정약용(1762~1836), 연암 박지원(1737~1805)과 가졌던 학문적 교류도 소개했다. 박지원은 같은 노론으로서 정치적 입장이 같았지만 실질적인 교류는 물론 학문적 교감도 적은 반면, 정약용과는 노론과 남인으로서 정파는 달랐음에도 학문적 교유는 후세까지 긴장감을 유지해 왔다고 덧붙였다. 추사의 학문적 성취에 대해 소홀한 한국 학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특히 외국 학자들에게서 강하게 나왔다. 잔항룬(詹杭倫) 홍콩대 교수는 “추사의 서화 명성이 너무 높아서 항상 시가의 명성을 가린 측면이 있다”면서 “중국 정통 시학의 관념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해해 조선 시단에 소개한 추사의 문학적 성취를 폄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두보, 소식, 옹방강 등의 시를 차운하는 등 특정 인물에게서만 시학을 배웠던 점을 비판하는, 당대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지속되는 국내의 연구 경향을 지적한 것이다. 왕장타오(王章濤) 중국양주학파 연구회 이사는 추사와 완원의 학문적 승계 및 교감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했다. 왕 이사는 “추사는 학문을 논하고 연구 방법을 취할 때 고담허론을 멀리하고 근본을 택했다”면서 “만약 추사가 완원을 만나지 못하고 완원 특유 ‘이론’(二論)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가 옹방강 서학의 길로 충성스럽게 들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기껏해야 신라·고려시대 서예의 성취에 머물렀을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추사가 옹방강과 완원 사이를 빙빙 돈 상태를 극복했고 마침내 완원과 같은 길을 걸었으며 이후 자신만의 학문적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고서 속 ‘그윽한 향기’ 가을 새벽 채우네

    고서 속 ‘그윽한 향기’ 가을 새벽 채우네

    새벽 한시/안대회 엮고 지음/태학사/236쪽/1만 2000원 ‘바람도 없이 떠난 잎이 철렁! 땅에 떨어지니/야윈 가지 한올 한올 저녁 안개 속에 걸려 있다./부러진 갈대 마른 연잎이랑 서로 기대서 있을 때 원앙새는 옷이 추워 잠도 채 못 이룬다.’ 깊어 가는 가을, 혼자 깨어 있는 고요한 시간에 읽으면 제격인 이 시는 자하 신위(1769~1845)가 1818년 강원 춘천에 머물 때 지었다. 번잡한 현대의 삶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요함이 절절히 묻어난다. 한시(漢詩)는 현대적인 삶 이전의 세계와 인생을 넓고 다채롭게 표현해 낸 문학이다. 운율을 활용해 감정을 표현하기도 하고 유려한 시어로 회화적 기법을 발휘하기에 한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한문학자 안대회 교수(성균관대 한문학과)는 “과거에 지식인들이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이 바로 시였고, 문인들끼리 의사소통하는 방식도 시였다”면서 “순수한 감정 표현이야말로 우리 한시가 지닌 큰 매력”으로 꼽는다. 신간 ‘새벽 한시’는 안 교수가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문인들이 지은 한시 중에서도 서정성이 빼어난 작품 100수를 뽑아 엮은 책이다. 작품을 뽑되 하나도 겹치지 않도록 100명의 시인에게서 한 편씩 골랐고, 현대 독자들의 감성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정형시의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 자유롭게 번역했다. 선정 기준은 오로지 ‘감동’ 한 가지다. 대가의 명작으로 정평이 난 작품이나, 유명 시선에 실린 작품은 일부러 배제하고, 대신 안 교수 자신의 눈과 가슴에 신선한 충격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오는 시들을 가려 뽑았다. 안 교수는 “고서 속에 외롭게 홀로 향기를 풍기던 작품이 그 향기를 세상 독자들의 가슴에 전하도록 주력했다고 했다. 널리 알려진 명작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책에 실린 시의 4분의3은 학계에도, 일반 독자에게도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이라고 말했다. 18세기 후반 경기 양평에서 살았던 시인 취송 이희사(1728~1811)의 ‘난초’가 대표적인 사례다. ‘밭에다 곡식은 심지 않고 힘들여 난초를 심었다네./가을 되어 난초가 열매를 맺지 않아도 거문고 품에 안고 후회는 하지 않네.’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자연과 예술을 벗하며 살았던 그는 다른 길만 선택했고 반대로만 살았지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난초에 비유했다. 안 교수는 “이희사의 시를 접했을 때 돈 안 되는 인문학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노래한 것 같아 가슴에 와 닿았다”고 했다. 책에는 결함의 세계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흠 많은 인생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이 살아 있는 작품들이 많다. 19세기 말 당쟁에 휘말려 유배된 심노숭은 가족들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러나 담담하게 적어 내려갔다. ‘어린 아들은 문을 뛰쳐나와 좋아라고 웃고 노친께선 문을 열고 절반은 기쁜 내색, 절반은 걱정일세. 산수가 가로막혀 길이 멀어 넋은 잘도 다녀오는데 눈발이 날리는 밤하늘 아래 나는 홀로 시를 읊는다.’ 한시의 표현법은 현대인에게 친근한 시각이나 문법과는 많이 다르지만 직설적인 시어로 표현한 것보다 오히려 더 감성을 자극하는 경우가 많다. ‘봄바람은 괜스레 살랑거리고 어느새 달이 떠서 황혼 되었네./오지 않을 그대인 줄 잘도 알지만 그래도 문은 차마 닫지 못하네.’ 영조 임금 시절 전라도 부안의 복아(福娥)라는 기생이 임을 그리워하며 애타는 마음으로 지은 시 ‘봄바람’이다. 황윤석의 ‘이재란고’에 실린 이 시에는 여인의 사무친 그리움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시어는 없다. 다만 대문 닫기를 아쉬워한다는 석(惜)이란 글자를 살짝 드러내 보였을 뿐이다. 안 교수는 “한시가 과거의 향수나 자극하는 낡고 무감각한 문학이 아니며 오히려 20세기 이후의 문학이 놓치고 있거나 무관심하게 대하는 문제를 독특한 감각과 언어로 다루고 있다”며 “지난 시대의 인생과 역사가 고요히 가라앉아 있는 작품들은 지금 읽어도 얼마든지 새롭고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고 강조한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新 국토기행] 옹진군

    [新 국토기행] 옹진군

    옹진군은 인천광역시에 속해 있지만 아직도 ‘경기도 옹진’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경기도에서 인천시로 편입된 지 20년이 됐건만 오랫동안 경기권에 포함됐던 점이 이러한 인식을 유발하고 있다. 또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이 발생한 백령도와 북한군 포격 도발이 있었던 연평도는 잘 알아도 이들 섬이 옹진군에 속한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옹진군의 역사는 실로 오래됐다. 황해 도서 지역에 신석기시대 유적이 분포돼 있는 것으로 미뤄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옹진군은 25개의 유인도서와 75개의 무인도서로 이뤄졌다. 일찍이 덕적도, 백령도 등은 중국과 통하는 해상 교통의 중간 거점이었다. 고대 한국~중국 간 항로는 인천에서 덕적도를 거쳐 중국 산둥반도로 가는 동로(東)와 흑산도를 거쳐 중국 명주(明州)에 도달하는 남로(南)가 있었는데 거리가 가깝고 안전한 동로가 주로 이용됐다. 고려시대인 940년부터 현재의 명칭인 옹진(甕津)으로 불렸으며 1018년 현령을 뒀다. 대청도는 고려시대의 유배지로 널리 알려졌다. 황해도에 속했던 옹진군이 1945년부터 경기도 관할이 됐다. 1953년 휴전협정에 따라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등 도서 지역을 제외한 옹진군 육지 지역이 휴전선 이북에 포함되자 황해도 출신 피란민들이 대거 옹진군으로 유입됐다. 1973년에는 영종면, 북도면, 용유면, 덕적면, 영흥면, 대부면 등 섬 지역 6개 면이 편입돼 옹진군은 전체가 섬으로만 구성된 군이 됐다. 1989년 경계 조정으로 영종면과 용유면이 인천시에 편입됐고 1994년에는 대부면이 경기도 안산시로 넘어갔다. 이듬해인 19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옹진군 전체가 경기도에서 인천시로 편입돼 오늘에 이른다. 군청은 인천 남구 용현동에 위치해 있다. 65세 이상 주민이 4250명으로 노인 인구 비율(20.5%)이 타 지역에 비해 높은 편이며 혼자 사는 노인 수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옹진군의 대표적인 섬인 서해 5도는 북방한계선(NLL)에 인접해 북한 도발에 직면하곤 한다. 우리나라 최북단인 백령도에서는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사건이 일어났고 백령도 바로 밑에 있는 대청도에는 대청해전이 일어났다. 연평도에선 제1·2연평해전, 북한군 포격 도발 등이 이어졌다. 한시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2010년 11월 발생한 연평도 피격은 서해 5도의 거주환경을 바꾸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포격 당시 파손된 집과 상가 32채는 당국의 지원으로 신축됐고 188채의 노후 주택은 개량됐다. 하지만 예산이 적어 서해 5도 전체적으로 볼 때 신청 가구의 3분의1 정도만 혜택을 받고 있다. 사업 첫해인 2012년에는 주택 개량을 신청한 534가구 중 243가구(45%)가 혜택을 받았지만 지난해 402가구 가운데 134가구(33%), 올해는 485가구 중 140가구(28%)만 지원을 받았다. 신축 대상 주택까지 포함하면 사업 기간이 끝나는 2016년 이후에도 650가구의 노후 주택에 대한 지원이 필요한 실정이다. 그러나 서해 5도에 대한 정부 지원 예산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정부가 올해 서해 5도 발전 사업을 위해 반영한 예산은 401억원으로 2011년 이후 가장 적었다. 2011년 531억원에 달했던 게 2012년 482억원, 지난해 478억원으로 줄더니 올해는 400억원을 겨우 넘겼다. 정부가 3년간 투입한 예산은 1491억원으로 올해분을 포함하더라도 2000억원을 넘지 못한다. 정부는 지원 계획 발표 당시 2020년까지 9109억원의 재원을 투입하겠다고 강조했으나 이 추세라면 절반에도 못 미칠 것으로 보인다. 서해 5도 주민 5300여명에게 1인당 매달 5만원씩 지급하는 정주생활지원금도 주민 기대치에 못 미친다. 정모(56·연평도)씨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섬에 살라는 취지의 지원금이겠지만 용돈도 안 된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두 배가량 늘려줄 것을 원하고 있으나 현재 정부 재정 형편으로는 1만원도 늘리기 어려운 실정이다. 지역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 진행하는 취로사업도 일정한 틀 없이 들쭉날쭉해 주민들이 불만을 토로한다. 옹진군 서해5도지원팀 관계자는 “낙후된 서해 5도의 특성상 정주 환경 개선 사업이 본궤도에 오를수록 비용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지만 정부 지원은 갈수록 줄고 있어 걱정”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서해 5도 인근 해역에서의 중국 어선 불법 조업이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것도 주민들의 불안을 부채질한다. 특히 해양경찰청이 해체 위기에 처해 해경의 단속이 느슨해지자 중국 어선들이 제집 드나들듯 서해 5도 해역을 휘젓고 다니면서 치어까지 무분별하게 잡는 싹쓸이 조업을 해 어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이진구(56) 연평도 어민회장은 “중국 어선들은 아예 운반선, 유류선까지 동원해 불법 조업을 한다”면서 “심지어 우리 어선이 쳐 놓은 통발 위에 그대로 통발을 겹쳐 올리는 일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옹진군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 어획량이 날로 떨어지는 현실에서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전환하기 위해 수산 종묘 방류와 인공 어초 확대, 바다목장화 사업 등으로 어업 소득이 향상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고 있다. 지난해 서해 5도 어장 91㎢가 확장됨에 따라 꽃게, 까나리 등의 어획량이 250t 정도 늘어났다. 해양 생태계 복원을 위해 어장을 정화하고 갯벌 참굴단지와 해삼섬을 육성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아울러 농산물 브랜드화를 위해 고품질 쌀 생산 단지를 육성하고 단호박, 인삼, 무화과 등 특산품 재배를 확대하는 한편 고추 등의 작물에 대한 명품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옹진군은 어업만 성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지역의 최대 섬인 백령도의 경우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이 70% 이상이다. 노동력을 절감하기 위해 무인헬기를 활용한 방제를 확대하고 농기계 임대 사업, 공공비축미 매입, 농사 장비 지원 등 다양한 지원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옹진군 관계자는 “어업 못지않게 농업의 비중이 크다”면서 “어업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농업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섬의 미래를 좌우하는 또 다른 포인트는 관광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관광업이 위축된 것은 사실이지만 군은 관광을 지렛대 삼아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여객 운임 지원, 관광상품 개발, 섬 둘레길 조성, 서해 5도 안보 관광 개발, 민박 현대화 등 다양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지역별 소규모 축제 발굴에도 힘을 쏟고 있다. 7개 면으로 구성된 옹진군의 인구는 현재 2만 700명으로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다른 지역 대부분의 섬 주민이 날로 줄어드는 것과 대조적이다. 연평도의 경우 피격 사건 이후 인구가 오히려 100명 이상 늘어났다. 육지로 피난갔을 당시 연평도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며 당국에 새로운 정주처를 요구했던 주민들이지만 석달 만에 전원이 돌아왔다. 옹진 주민들에게 섬은 삶의 터전이자 숙명인지도 모른다. 조윤길 군수는 “군민들이 아픔을 딛고 일어서 새로운 도약을 이루려는 의지가 강하다”면서 “섬이 존재하는 한 주민들은 늘 그 자리에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홍길동전 저자’ 이상의 사상가 허균

    ‘홍길동전 저자’ 이상의 사상가 허균

    허균생각/이이화 지음/교유서가/324쪽/1만 5000원 허균은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쯤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허균은 일반의 인식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사상가요 문장가였다.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도 일관되게 고발정신과 개혁의지를 지켰던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허균 생각’은 일반의 인식과는 동떨어지게 가려졌던 그 허균의 진면모를 촘촘하게 들여다본 신간이다. 신군부가 등장한 1980년 월간 ‘뿌리 깊은 나무’가 강제 폐간된 뒤 단행본으로 출간, 금서로 지정됐던 책. 수정·보완을 통해 당대 정치, 학문, 문학에서 도드라졌던 ‘허균의 생각’을 다시 건져냈다. 허균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지만 역모죄에 얽혀 능지처참됐다. 부친 허엽은 부제학과 경상 관찰사를 지낸 청백리였고 맏형 허성 역시 빼어난 문장가이자 성리학자였다. 누이 난설헌은 해동에서 첫째가는 규수 시인으로 유명했다. 사대부의 자제로 유복하게 살 수 있었던 그는 왜 그리 험한 길을 갔을까. 순탄치 않은 가정사는 주요한 원인일 수 있다. 둘째 형 허봉은 아버지 뒤를 이어 동인의 우두머리가 됐지만 탄핵·유배됐고 누이 난설헌도 애환 많은 삶을 살다가 스물일곱에 요절했다. 서류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혀 방탕한 세월을 보낸 손곡 이달의 문하에 든 것도 주목할 이력이다. 그런 가정사 속에서 허균이 정치의 바탕을 민본에 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늘은 인재를 내리면서 차별하지 않는다는 ‘유재론’과 백성을 근본에 둔 ‘호민론’은 그 대표적인 글들이다. ‘호민’이란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 저항하고 도전하는 무리를 뜻한다. 빈민을 구제하고, 썩은 관료계급을 척결해 착취와 억압이 없는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건설한다는 ‘홍길동전’은 바로 그 호민정신의 결집이다. 산림에 묻히는 선비를 썩은 무리로 보고 현실의 잘못에 적극 개입해 고치려는 자를 참선비로 보았던 허균은 반유교적인 행동과 학문태도로 일관했다. 유교 교학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한 문장을 반대하고 시는 진솔한 감정과 정서를 담아내야 한다는 그의 문학적 성향 역시 애조와 현실에 대한 저항이 주를 이룬다. 올해 방한한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양국 간 우호를 상징하는 말로 ‘간과 쓸개를 늘 서로 꺼내 보이니 깨끗한 얼음 담은 병에 차가운 달이 비치는 듯하다’는 허균의 문장을 인용한 바 있다. 서문에서 저자가 밝혔듯 “극단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패거리들이 판치고 궤변을 늘어놓는 가짜 지식인들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허균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독자들의 몫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추사 김정희는 한류의 원조… 지금도 ‘법고창신’ 의미 되새기게 해”

    “추사 김정희는 한류의 원조… 지금도 ‘법고창신’ 의미 되새기게 해”

    #1. “나는 옥에 갇혀 있고 바다 밖으로 귀양 가 있으나 아직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한낱 부인의 죽음에 놀란 가슴이 무너져 마음을 겉잡을 수 없으니 어찌 된 까닭입니까.” 3년간 제주의 됫박만 한 한칸 방에 갇혀 지낸 추사 김정희(1786~1856)는 급작스러운 부인 예안 이씨의 죽음을 편지로 접하고 땅을 치며 통곡한다. “홀로 부인만 죽음이 있지 않을 수 있으리오”라면서도 죽음 곁으로 달려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통한을 속으로 삭여야 했다. ‘세한도’나 ‘고사소요’ ‘서원교필결후’ 등 9년의 제주 유배 생활이 남긴 작품들이 뼈대만 남은 앙상한 등걸처럼 거칠고 굳센 이유다. 최완수(72)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은 “당시 60세를 바라보는 추사의 작품들은 한티끌도 군더더기를 용납하지 않는 지고의 경지를 보여준다”며 “이렇게 창안해낸 고예체는 조화롭고 변화무쌍할 뿐”이라고 말했다. #2. “난을 치는 데 세 번 궁글리는 것으로 묘법을 삼아야 하는데 붓을 한번 쭉 뽑고 끝내 버렸구나.” 말년의 추사는 유일한 혈육인 서자 김상우에게 난초 치는 법을 가르쳤다. 이렇듯 추사의 가문인 경주 김씨는 정절을 앞세웠다. 고려 말 충청 관찰사를 지낸 김자수는 조선 개국과 함께 고향 안동으로 내려가 은둔하다 태종이 형조판서로 징소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이후 경주 김씨는 왕가와 혼인을 거듭하며 외척으로 위세를 누린다.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 대에 이르러 풍양 조씨 가문과 손잡고 순원왕후의 섭정에 맞설 정도였다. 이런 집안 배경 속에서 ‘천재 소년’으로 불리며 성장한 추사는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호조참판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연경으로 떠난다. 옹방강 등 명망 있는 고증학자와 그 무리를 만나 친분을 쌓으며 금석학을 배워 온다. 추사는 북학의 대가인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던 터였다. 지난 7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만난 최완수 소장은 “간송이야말로 한류의 원조”라고 말문을 뗐다. 청나라의 옹방강을 비롯해 그의 제자들이 추사의 글씨를 접한 뒤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며 앞다퉈 작품을 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최 소장은 “비록 한자는 중국에서 들어왔으나 유라시아 대륙의 종착역인 한반도에서 동양문화의 정수를 융합해 새롭게 예술 세계를 완성한 이가 바로 추사”라고 힘줘 말했다. 최 소장과 추사의 인연은 남다르다. 첫 만남은 1972년 봄 보화각(간송미술관의 옛 이름)에서 열린 추사전. 보화각은 1971년 가을 겸재 정선의 작품들로 개관전을 연 뒤 이듬해 봄, 가을에 걸쳐 온통 추사로 전시를 도배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추사의 종가가 충남 예산에 자리해 같은 고향이란 생각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서체를 보면 볼수록 빠져들었어요.” 이 화려한 전시는 32세의 젊은 미술사학자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4년 뒤 추사의 후손인 김익환이 1934년 펴낸 ‘완당선생집’을 처음으로 번역하도록 이끈다. 추사의 글과 작품을 담은 ‘추사집’(현암사)이다. 이후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으로 재직한 그는 평생 추사의 생애와 작품을 연구해 왔고, 최근 새 책 수준으로 재구성한 개정판을 38년 만에 내놨다. 금석학, 경학, 불교학 등을 아울러 애초 393쪽이던 분량이 768쪽으로 곱절 가까이 늘었다. “사실은 출판사가 귀찮게 해 절판을 선언했어요. 당시 함께 책을 냈던 동갑내기 출판사 회장님은 이미 고인이 됐습니다. 연보와 도판을 보충하고 초판에 없던 해제 논문 등을 추가했어요.” 최 소장은 간송미술관에서 오는 12일부터 26일까지 ‘추사정화’(秋史精華)전을 연다. 추사체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기획전이다. 87회 정기전으로 올 3월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외부 전시를 여느라 반년간 건너뛴 정기전을 재개한다는 의미도 지녔다. 전시에는 36세 추사가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중후하게 써 내려간 행서대련을 비롯해 정치적으로 은둔해 지내던 49세 때 선사가 보낸 차에 대한 보답으로 굵직하게 써 보낸 ‘명선’, 70세로 사망하던 해 봉은사에 은거하며 썼던 행서대련에 이르기까지 굴곡진 일생을 통해 완성된 작품 40여점이 등장한다. 최 소장은 “추사는 중국 고대 상형문자부터 전한을 거쳐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수천년간 이어져 온 중국 서법을 다 섭렵한 뒤 법고창신을 통해 추사체를 만들었다”며 “추사체는 서예적 의미를 넘어 지금 이 시대에도 법고창신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85세에 첫 수학여행… “잠도 잘 안 오고 아이 된 기분”

    85세에 첫 수학여행… “잠도 잘 안 오고 아이 된 기분”

    “수학여행은 난생처음이라 한없이 설레네. 잠이 오지 않을 정도야.”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인 서울 마포구 대흥동 양원초등학교 6학년 정대성(85) 할아버지가 29일 수학여행을 간다는 소식에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털어놨다. 이 학교 졸업반 최고령인 정 할아버지는 새달 1일 수학여행을 떠난다. 젊은이들이야 학창 시절 다녀온 수학여행이지만 할아버지는 처음이다. 정 할아버지는 “아내가 허리를 다쳐 혼자만 가는 것이 많이 아쉽다”면서도 “수학여행을 가게 되다니 마치 아이가 된 기분”이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여든한 살 때 아내와 함께 초등학교에 입학한 정 할아버지는 4년 동안 초등학교 과정을 거의 마쳤다. 내년 2월 졸업식에 앞서 이 학교 졸업반 할머니, 할아버지 140명이 1박 2일 일정으로 강원 영월과 정선으로 첫 수학여행을 떠난다. 새달 1일 아침 일찍 학교에서 출발해 한반도 지형 모양으로 유명한 선암마을과 단종 유배지인 청령포를 둘러본다. 2일에는 아라리촌 마을과 화암동굴을 본 뒤 서울로 올라온다. 수학여행을 기다리는 이들에게서 들뜬 기쁨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문춘화(82) 할머니는 “가족들 식사 챙겨 주느라 수학여행을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들이 꼭 가야 한다고 해서 가게 됐다”며 억지로 떠밀려 가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아들이 수학여행을 잘 다녀오라고 용돈도 많이 줬다”며 반가운 속내를 보였다. 조정임(80) 할머니는 “남편이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어 망설였지만 자녀가 적극적으로 권유해 수학여행을 가게 됐다”며 “팔십 평생에서 가장 즐거운 추억이 될 것”이라고 웃었다. 조 할머니는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에 의지해 걷고 있지만 4년 동안 결석도 하지 않고 일찍 등교해 공부하는 ‘모범생’으로 소문나 있다. 얼굴엔 주름이 깊었지만 마음은 해맑은 초등학생이었다. 2005년 개교한 양원초교는 국내 최초의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학력 인정 초등학교다. 1년 3학기씩 4년간 다니면 초등학교 졸업 학력을 인정해 준다. 올해 6회째 모두 1492명이 졸업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한국관광공사가 소개하는 가을 관광주간 명소 6선

    한국관광공사가 소개하는 가을 관광주간 명소 6선

     가을 관광주간이 25일 시작됐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가을 시즌에 벌이는 가장 큰 이벤트다. 관광주간 실무기관인 관광공사는 관광주간 홈페이지(fall.visitkorea.or.kr)를 별도로 마련하고 ‘테마가 있는 관광공사 추천 여행코스 23선’ 등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족, 연인, 친구 등과 함께 가면 좋을 여행코스 6선을 소개한다.  ●부부가 함께 떠나는 낭만여행  1. 바다와 호수 보며 느린 심호흡(충남 태안~예산, 2박3일)  <1일차 태안> 신진도, 영목항, 안면도자연휴양림, 꽃지해변  <2일차 태안~예산> 천리포수목원, 신두리 해안사구, 꾸지나무골 솔향기길  <3일차 예산> 예당호(느린꼬부랑길), 추사고택, 수덕사  태안에서 예산으로의 여행코스는 바다와 호수, 숲이 동행하는 여정이다. 첫째 날은 태안해안국립공원을 따라 바지락, 소라, 우럭, 농어 등이 가득한 영목항에서 싱싱한 해산물로 배를 채우고, 안면송 자생지인 안면도자연휴양림을 산책한다. 이어 서해안 최고의 일몰을 자랑하는 꽃지해변에서 해넘이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둘째 날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천리포수목원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신두리 해안사구를 지나 솔향기길이 조성된 꾸지해변을 산책한다. 마지막 날은 예산의 예당호를 따라 이어진 시골길에서 추억을 만들고, 추사 김정희의 혼이 담긴 추사고택과 덕숭산 자락 천년 고찰인 수덕사에서 여행을 마무리한다.  2. 눈부신 가을, 책 한 권 들고 문학여행 떠나볼까(경북 군위~안동~영양~청송 3박4일)  <1일차 군위> 한밤마을, 인각사, 권정생 선생 생가  <2일차 안동> 안동군자마을, 도산서원, 이육사문학관  <3일차 영양> 주실마을, 감천마을, 두들마을  <4일차 청송> 객주문학관, 주왕산국립공원  경북의 군위, 안동, 영양, 청송에는 문학가들의 생애와 작품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이 많다. 3박4일의 여행코스는 돌담이 아름다운 군위의 한밤마을에서 시작해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인각사와 ‘몽실언니’ 등 많은 작품을 남긴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의 생가를 둘러본다.  둘째 날에는 안동군자마을과 퇴계 이황의 학문과 행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도산서원 등에서 옛 향기를 느껴보고, 이어 육사문학관을 찾아 일제강점기의 민족시인인 이육사의 문학세계를 엿본다.  셋째 날에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고향인 영양 주실마을을 찾아 그의 작품과 유품을 감상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어 절필로 항거한 저항시인 오일도의 생가를 지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유명한 소설가 이문열이 태어난 두들마을에서 고향의 향수를 느껴본다. 마지막 날은 청송의 객주문학관과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주왕산국립공원을 둘러본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가족체험여행  1. 특별한 테마가 가득한 이색 체험여행(충북 음성~괴산~충주 2박3일)  <1일차 음성~괴산> 음성 철박물관, 음성동요마을, 괴산 둔율올갱이마을  <2일차 괴산~충주> 산막이옛길, 괴산한지체험박물관, 충주 하늘재&미륵대원지, 수안보온천  <3일차 충주> 충주조정체험학교, 술박물관 리쿼리움,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충북 음성에서 괴산을 지나 충주로 이어지는 2박3일 코스는 철, 한지, 동요, 조정, 다슬기 등 다양한 이색 테마로 가득하다. 음성의 철박물관에서는 철을 친근하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다. 음성동요마을은 가족단위 방문객을 위한 놀이형 체험프로그램을 잘 꾸려놨다. 괴산 둔율올갱이마을에서의 다슬기 잡기 체험도 이색적이다.  둘째 날에는 산과 호수가 절경을 이루는 산막이 옛길을 걷는다. 괴산한지체험박물관에서 한지와 관련된 귀한 유물과 전통한지 뜨기 등의 다채로운 체험도 맛본다. 충주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인 하늘재를 만나볼 수 있으며, ‘왕의 온천’ 이라고 불리는 수안보온천에서 여행의 피로도 풀 수 있다.  셋째 날은 충주조정체험학교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조정 체험 후에는 세계술문화박물관인 리쿼리움에서 세계 술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둘러본다. 이어 국내 유일의 고구려 석비인 고구려비가 위치한 충주고구려비전시관에서 여행을 마무리한다.  2. 맛 골목, 어촌, 동굴 등 종합선물세트(강원 강릉~삼척~태백 3박4일)  <1일차 강릉> 초당두부마을, 오죽헌, 안목해변 커피촌  <2일차 삼척> 삼척해양레일바이크, 장호어촌체험마을, 해신당  <3일차 삼척~태백> 새천년해안도로, 대금굴,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  <4일차 태백> 검룡소, 365세이프타운  강원 강릉에서 삼척을 거쳐 태백에 이르는 3박4일 코스는 초당두부마을에서 시작한다. 초당두부는 바닷물을 간수로 쓰는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지며,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허균·허난설헌 생가터’ 에서는 ‘홍길동전’의 허균과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매년 가을 강릉커피축제가 열리는 안목해변 커피촌에서는 직접 내린 커피도 맛 볼 수 있다.  삼척에서는 해양레일바이크 체험과 장호어촌체험마을의 투명 카누 바다 래프팅으로 삼척의 절경을 감상한다. 죽은 처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남근을 깎아 제사를 지내는 해신당의 독특한 풍경도 매력적이다. 셋째 날에는 삼척항이 보이는 새천년해안도로를 따라 경치를 구경하고, 모노레일을 따라 수억 년 전의 자연유산인 대금굴을 탐방하는 이색 체험을 해본다.  여행의 종착지인 태백에서는 태백의 생태계를 그대로 옮겨놓은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과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 등 자연을 느낄 수 있다. 자녀들을 위한 안전체험 테마파크인 365세이프 타운은 자연재해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안전교육도 실시한다.  ●친구와 함께 떠나는 가을추억여행  1. 20대의 감성을 채우는 서남 해안 온 더 로드(전남 여수~강진~해남~목포 3박4일)  <1일차 여수> 여수 엑스포해양공원, 해양레일바이크, 진남관, 수산물특화시장, 돌산공원(돌산대교 야경)  <2일차 여수~강진> 오동도, 다산초당, 백련사  <3일차 해남~목포> 땅끝전망대, 대흥사, 두륜산케이블카, 유달산 야경  <4일차 목포> 목포근대역사관, 구 목포 일본영사관, 유달산조각공원  전라도에는 바다를 품은 해안도시 명소들이 많다. 여수에서 강진, 해남을 지나 목포에 이르는 3박4일 코스는 여수엑스포해양공원을 산책하고 해양레일바이크를 즐기는 것으로 시작한다. 위풍당당한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의 객사를 지나 노래로 유명해진 여수 밤바다에서 돌산공원과 돌산대교의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한다.  다음날에는 동백나무로 유명한 오동도에서 아주 특별한 바다를 경험하고,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강진에서는 정약용 선생이 머물렀던 다산초당과 백련사로 이어지는 옛길을 산책한다. 3일차에는 해남으로 이동해 한반도 육지 끝에 위치한 땅끝전망대를 오른다. 모노레일을 타면 전망대 입구까지 쉽게 오를 수 있으며, 다도해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두륜산의 천년 고찰인 대흥사와 두륜산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두륜산의 전경은 또 다른 감동을 준다. 마지막 날에는 목포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유달산과 목포구시가지, 근대역사관을 둘러본다. 아름다운 목포의 야경은 별미다.  2. 전지현 루트에서 멜로 영화의 주인공처럼(부산, 경남 거제~통영 2박3일)  <1일차 부산> 영화의전당, 광안리해수욕장, 광안리 카페거리, 동백섬 등대전망대와 해운대해수욕장,달맞이길  <2일차 부산> 40계단 문화관광테마거리, 남포동 영화광장, 자갈치시장, 송도해수욕장, 을숙도  <3일차 거제~통영> 바람의 언덕, 장사도해상공원  부산은 영화의 도시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하는 10월에는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른다. 유명한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를 돌아보는 특별한 여행은 부산에서 시작해 거제를 지나 통영에 이르는 2박3일 코스다. 영화의 전당은 부산국제영화제의 주요 행사가 펼쳐지는 곳으로 다양한 문화 행사와 함께 아름다운 건축물이 볼거리다. 광안리해수욕장에서 고운 백사장을 거닐 어 보고, 카페거리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도 즐겨본다. 동백섬 등대전망대에서 해운대해수욕장을 감상하고 소나무 사이로 이어지는 달맞이길도 산책한다.  다음날에는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촬영지인 40계단 문화관광테마거리를 둘러본다. 남포동 영화의 광장과 더불어 부산의 명물인 자갈치 시장에서 다양한 해산물도 만나 볼 수 있다. 영화 ‘깡철이’의 주요 촬영지인 송도해변과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촬영지인 을숙도 역시 부산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이다.  마지막 날은 거제의 2000년대 초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바람의 언덕에 오른다. 이어 TV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촬영지인 통영 장사도해상공원의 동백숲에 들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읽어라, 청춘]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그리고 그는 그의 마음을 미지의 기술에 바쳤다.” 책머리에 나오는 이 말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제8권에서 인용한 말이다. 이 문장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이달로스가 크레타 섬에서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는 대목으로, 이 책의 주인공인 스티븐의 대사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다이달로스는 미노스 왕이 그를 크레타 섬에 가뒀을 때 손수 날개를 만들어 달고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탈출한 인물로, 주인공 스티븐 디달러스의 표상이다. 주인공 ‘스티븐’은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최초의 순교자 이름이고, 디달러스는 ‘명장’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다이달로스의 이름이다. 바로 이 인용문과 이름에서 작가가 예술가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예술가는 갇혀 있는 체제 속에서 격리되고 추방되는 동시에 창조를 통해 탈출하며 순교하는 자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 대사인 “삶이여, 오라. 나는 이제 백만번씩이라도 경험의 현실과 만나러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내 민족의 의식을 벼려 내러 간다”는 탈출에 성공해 비상하는 다이달로스의 이미지와 겹치며, 자신이 추구하는 삶으로의 비상을 표현한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소설 기법으로 창조했다. 의식의 흐름은 개인의 의식에 떠올라 그의 이성적 사고의 흐름에 병행해 의식의 일부를 이루는 시각적·청각적·물리적·연상적·잠재의식적인 수많은 인상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한 기법이다. 의식의 흐름은 인물이 갈등하는 상황과 그것에 대한 의식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데, 주로 주인공의 내적 독백으로 서술된다. 그래서 독자는 책을 읽으며 스티븐의 예민한 의식 깊숙이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의 내적 진실과 맞닥뜨린다.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프인 ‘에피퍼니’는 매 장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1장에서 스티븐이 돌란 신부에게 억울하게 매를 맞으며 종교의 부당한 권력에 대해 자각하는 순간, 2장에서 가정 경제의 몰락으로 인한 현실인식을 하는 순간, 3장에서 죄를 범한 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순간, 4장에서 바닷가에서 치마를 과감하게 걷어 올린 한 소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에 나타난다. 이는 스티븐에게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하는 순간이다. 특히 가장 중요한 에피퍼니인 바닷가 소녀를 보는 장면은 스티븐의 ‘살고, 실수하고, 타락하고, 승리하는’ 삶과 연관이 있다. 이는 당시 부모가 그에게 요구했던 아일랜드의 질서 안에서 성공하는 사람이나 가톨릭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 아니다. 교장이 요구했던 경건하고 순결한 성직자의 삶도 아니다. 온갖 관습과 의무를 벗어난 새로운 길인 것이다. 스티븐의 감수성과 의식은 가정, 학교, 정치, 성, 종교, 민족, 언어, 예술 등과 대면하며 갈등을 겪게 되는데 크게 가정, 종교, 국가와 충돌한다. 먼저 가정은 스티븐에게 안정을 주지도 못하고 평화롭지 않다. 경제적으로나 지성으로 무능한 아버지는 “게으른 암캐”라고 아들을 지칭하며 스티븐의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더구나 어린 스티븐에게 포근한 이미지였던 어머니는 주체적인 여성이라기보다는 맹목적으로 아들에게 종교를 종용하는 대변인이다. 스티븐에게 어머니는 “뚫고 날아가야 할 자신의 영혼 위에 덧씌워진 그물”일 뿐이다. 스티븐은 정신적 고아다. 종교 또한 스티븐에게 회의와 저항감을 줄 뿐이다. 전형적인 아일랜드 중류가정의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한 스티븐에게 종교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굴레였다. 스티븐은 성직자의 횡포와 위선을 겪으며 종교적 권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스티븐에게 가톨릭 설교는 인간의 감각적인 욕망을 지나치게 절제시켜 영혼을 짓누를 뿐이다. 스티븐은 신이 원하는 모습은 진실한 마음이지 강압적인 수행이나 고행 자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작문 시간에도 현실순응적인 테니슨보다 저항적이고 자유분방한 바이런의 강렬한 시적 표현에 심취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소명이 종교인보다는 예술가에 있음을 인식한다. 국가 역시 자유와 안식을 주지 못한다. 아일랜드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 상태였으며 가톨릭에서 심한 억압을 받았다. 민족독립운동가인 파넬이 독립을 이뤄낸 듯했으나 이후 불륜으로 실각하면서 자유를 쟁취하지 못한다. 독립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배신과 변절 등 사회 내부적 갈등이 산재해 있었다. 조이스는 이러한 아일랜드에 환멸을 느낀다. 이런 상황은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돼, 이 책을 읽다 보면 작가의 상상력과 더불어 작가의 내면과 당시 아일랜드의 도시와 시민, 의식, 정치, 역사 등을 체험하게 한다. 주인공 스티븐의 성격묘사와 배경이 되는 더블린의 모습은 젊은 시절 조이스가 살던 더블린을 반영하고 있으며, 소설에 등장하는 역사적인 사건들은 대부분 실제 아일랜드의 정치와 역사적 사실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스티븐이 대학에 들어갔을 때 학생들은 민족주의에 관심을 갖고 영국문화에 거부감을 드러내며 옛 고전 문화에서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스티븐은 이러한 문예부흥운동에 동참하지 않는다. 미래가치적인 것을 품고 나가려는 스티븐에게 과거 지향적인 문예부흥 및 민족주의는 희망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티븐은 “우리의 선조들은 자기네 언어를 버리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택했어…. 이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탄생할 때 그물을 뒤집어 씌워 날지 못하게 한다고…. 나는 그 그물을 빠져 도망치려고 노력할 거야”라며 국가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결국 스티븐은 “내가 믿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나의 가정이든 조국이든 나의 종교든, 결코 섬기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어떤 삶이나 예술양식을 빌려 내 자신을 가능한 한 자유로이, 가능한 한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무기인 침묵, 유배 및 간계를 이용하도록 하겠어”라며 가족이나 종교, 국가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기 내면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 예술가로 살아갈 것임을 선포한다. 실제로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의 왜곡되고 비뚤어진 내면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조국과 불화를 겪었는데, ‘더블린 사람들’이나 ‘율리시스’ 등 조이스의 작품은 삭제요구와 소송제기의 위협, 출간 금지를 당하며 고국의 핍박을 받았다. 그는 고국을 떠나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조국과 화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대부분 현실의 불합리와 부조리, 억압이나 속박을 알고 끊임없이 갈등하면서도 거기서 자유롭게 탈피하지 못하고 예속된 삶을 살아간다. 스티븐은 시대와 타협하지 않으며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며 예술가적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벗어나 자신의 정체를 찾아갔다. 그것은 자유로운 영혼의 길이며 예술의 방식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자각을 통해 비상하려는 이들에게 공감과 용기를 준다. 스티븐은 예술에서 그 길을 찾았다. 스티븐처럼 비록 시대와 불화하더라도 참된 자유를 누리고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어느 세계로 비상할 것인가. 이 물음은 욕망으로만 삶을 담보할 수 없는, 내 삶의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 신운선 한우리독서토론논술 책임연구원
  • [김준의 바다 맛 기행] (18) 보양식 뱀장어

    [김준의 바다 맛 기행] (18) 보양식 뱀장어

    계량에 봄이 들면 뱀장어 물때 좋아 그를 잡으러 활배가 푸른 물결을 헤쳐 간다. 높새바람 불면 일제히 나갔다가 마파람 세게 불면 그때가 올 때라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 탐진(현 전남 강진)에서 어민들의 삶을 표현한 시 ‘탐진어가’(1802년)의 일부다. 탐진강은 영암군 금정면과 장흥군 유치면 사이 국사봉에서 발원해 장흥군과 강진군을 지나 남해로 흐른다. 그 강에서는 지금도 간간이 자연산 뱀장어가 잡히고, 그 장어로 요리하는 식당이 대를 잇고 있다. 같은 시기 흑산도에 유배된 형 손암 정약전도 ‘자산어보’에 “모양은 뱀을 닮고 빛깔은 거무스름하며 뭍에서도 뱀처럼 잘 다닌다. 맛은 달콤하고 짙으며 사람에게 이롭다. 오랫동안 설사를 하는 사람은 이것으로 죽을 끓여 먹으면 낫는다”라며 뱀장어를 소개했다. 강에서 충분히 자란 뱀장어는 반년에 걸쳐 태평양 깊은 바다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이동한다. 그리고 알을 낳은 뒤 최후를 맞는다. 연어와 달리 바다에서 산란을 하고 강에서 자란다. 부화한 새끼는 아주 작은 댓잎 모양이다. 그래서 ‘댓잎뱀장어’라고 부른다. ●바다에서 산란·강에서 자라는 뱀장어 이 뱀장어는 어미와 반대로 1년에 걸쳐 약 3000㎞를 이동해 어미가 머물렀던 강으로 여행을 한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고 안내자도 없는 여행길이다. 강어귀에 이르면 손가락 정도의 길이로 자라 ‘실뱀장어’로 변한다. 이 비밀이 밝혀진 것도 불과 10여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부들 중에는 뱀장어가 산란하는 것을 본 사람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장어와 뱀이 사랑을 나눠 새끼를 낳는다고 했다. 중국의 ‘조벽공잡록’에는 ‘가물치에게 그림자를 비추면 그 새끼가 가물치의 지느러미에 붙어서 태어난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우리가 즐겨 먹는 뱀장어는 실뱀장어를 잡아 양만장에서 키운 것이다. 한 마리당 500원에 거래되던 실뱀장어값이 몇 년 전에는 7800원까지 뛰었다. 댐 개발, 해양오염, 서식지 파괴, 기후변화 등으로 실뱀장어 어획량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장어구이를 찾는 사람은 늘어났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 모기장 같은 그물을 피한 실뱀장어는 6년에서 12년을 강에서 자란다. 그래서 ‘민물장어’라고도 한다. 그런데 장어요리집은 한결같이 ‘풍천’이라는 이름을 성씨처럼 달고 있다. ‘바람이 부는 하천’이라는 뜻이다. 강어귀는 강바람과 바닷바람이 교차하는 곳이다. 육지와 바다, 낮과 밤의 온도가 다르기 때문에 기압이 교차하면서 부는 바람이다. 뱀장어가 서식하는 탐진강, 영산강, 금강, 인천강, 동진강, 만경강, 한강, 임진강 등이 그런 곳이다. 그래서 풍천을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강하구 혹은 기수역이라고도 한다. ●‘풍천장어’ 유래를 아시나요 풍천장어는 그곳에 뱀장어가 서식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탐진어가’에서 ‘높새바람’과 ‘마파람’이 부는 탐진강 어귀가 곧 풍천이며, 대를 이어 장어집을 운영하는 전남 영산강 구진포, 전북 고창 인천강(선운사 입구), 익산 목천포도 마찬가지다. 이 중 ‘풍천마케팅’에 성공한 곳이 고창군이다. 심지어 이기화 전 고창문화원장은 “풍천은 ‘자연현상을 거슬러 역류하는 하천’으로, 인천강과 선운천이 만나는 곳이 그곳”이라 설명하기도 했다. 글 사진 전남발전연구원 책임연구원 joonkim@jeri.re.kr ■어떻게 먹을까 생강·후추·청주로 비린 맛 제거…어른은 구이·아이는 튀김이 ‘딱’ 장어를 요리하려면 먼저 억센 뼈를 발라내야 한다. 칼집을 등에 넣어 내장과 뼈를 발라내고 머리를 자른다. 발라낸 살은 물로 깨끗이 씻어 밀가루를 듬뿍 넣고 바락바락 문질러 점액질을 제거한다. 마지막으로 흐르는 물에 씻어낸 다음 물기를 제거한다. 요즘에는 장어를 주문하면 손질해서 보내 주기도 한다. 장어는 구이, 튀김, 탕, 찜, 백숙, 덮밥 등 다양한 요리로 만들어 먹는다. 익숙한 요리법은 구이다. 굵은 천일염을 뿌려 구운 소금구이, 된장을 발라 구운 된장구이, 고추장을 바른 고추장구이, 갖은 양념장을 만들어 바른 양념구이, 복분자구이도 있다. 특유의 비린 맛을 제거하기 위해 장어소스를 만들 때 생강이나 후추, 청주 등을 사용한다. 또 구운 장어를 먹을 때 식초에 발효시킨 양파나 생강 혹은 깻잎을 곁들여 먹으면 맛이 깔끔하다. 장어구이가 어른들이 좋아하는 요리라면 아이들에게는 팬이나 오븐에 장어를 구워 소스와 함께 야채를 곁들이거나 장어살에 튀김용 가루를 발라 바삭하게 튀긴 것이 좋다. 장어조림은 구이와 달리 양념이 장어에 스며들어 맛이 있다. 이때 간장, 고추장, 청주, 매실, 설탕, 다진 마늘, 으깬 생강, 참기름, 후추 등을 넣어 양념장을 만든다. 손질이 잘된 장어를 반으로 잘라 노릇노릇하게 굽는다. 그리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다음 양념장을 넣고 조린다. 장어탕은 된장과 잘 어울린다. 발라낸 뼈와 머리를 소금물로 잘 씻은 다음 된장을 넣고 삶는다. 다 삶아지면 살며시 건져 뼈를 제거한 후 마늘을 넣고 다시 삶는다. 이때 간은 국간장으로 맞춘다. 팔팔 끓기 시작하면 시래기를 넣고 다시 끓인다. 시래기에 미리 양념을 해 두면 더욱 좋다. 장어를 통째로 넣어 끓이기도 한다. 장어 육수에 밥을 넣고 끓이는 장어죽이나 쌀을 넣고 만든 장어백숙도 권할 만하다. 좋은 장어는 미끈하고 눈이 투명하며 등이 회흑색이나 갈색을 띤다.
  • “밀양~함양 고속도 조기착공을” 경남시장군수협, 정부에 건의키로

    경남시장군수협의회는 30일 함양~밀양 간 고속도로 조기 착공과 지방자치단체의 교육경비 보조 제한 개선 등 2개 사안을 민선 6기 협의회의 첫 공동건의 사항으로 채택해 중앙정부 등에 건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경남시장군수협의회는 지난 29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제63차 정기회를 열어 민선 6기 새 임원진을 선출하고 지역 현안 등을 협의했다. 18개 시·군 가운데 13개 시장·군수가 참석해 민선 6기 상반기 경남시장군수협의회장으로 김동진 통영시장, 부회장에는 하창환 합천군수를 선출했다. 이와 함께 시장군수협의회는 지방자치단체의 교육경비 보조에 관한 규정 가운데 지방세와 세외수입 총액으로 소속 공무원 인건비를 충당하지 못하는 경우 보조를 제한하는 조항을 폐지하는 내용의 건의안을 중앙정부 공동건의 사항으로 채택했다. 협의회는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자체의 교육경비 보조를 제한하는 규정 때문에 교육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된다고 지적했다. 경남시장군수협의회는 또 울산~함양 간 고속도로 건설사업 가운데 예산 부족으로 내년 착공이 불투명한 밀양~함양 구간 사업의 빠른 착공도 경남도와 기획재정부 등에 건의하기로 했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삼식님’/김주혁 정책뉴스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삼식님’/김주혁 정책뉴스부 선임기자

    남자가 은퇴 후 집에서 밥 먹는 횟수를 소재로 한 우스갯소리가 나돈 지 꽤 됐다. 하루 한 끼도 안 먹으면 ‘0식님’, 한 끼 정도 먹으면 ‘1식씨’, 두 끼씩이나 먹으면 ‘2식이’, 세 끼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 ‘3식놈’이라는 식이다. 남자든 여자든 특정 성을 비하하는 유머는 기본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은퇴 후까지 밥상을 차려 달라고만 요구해 아내의 불만을 사는 상당수 남자들의 행태를 꼬집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부가 함께 또는 번갈아 밥상을 차리면서 시간을 함께 또 따로 보낸다면 집에서 먹는 끼니 수에 관계없이 ‘1식님’ ‘2식님’ ‘3식님’으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그러면 앞에서 언급한 씁쓸한 유머도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집안일도 함께하면 남편들이 은퇴 후에도 아내의 사랑을 듬뿍 받고 요즘 급증하는 황혼이혼도 확 줄어들 것이다. 50, 60대 이혼율은 아직 낮은 수준이지만 증가 속도는 가장 빠르다. 이혼 얘기가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이혼율’이라고 검색하면 ‘우리나라 이혼율 50% 시대, 세계 최고’라는 등 ‘사실과 다른’ 얘기가 난무한다. 이혼 전문 변호사뿐 아니라 사회 지도층 인사 중에서도 강연이나 글 등에서 ‘잘못된 이혼율’을 무심코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몽땅 엉터리다. 우리나라의 2013년 혼인 건수는 32만 2800건이고, 이혼 건수는 11만 5300건이다. 이를 두고 결혼한 사람의 35.7%가 이혼한다거나 이혼율이 35.7%라고 말하면 안 된다. 이혼한 사람이 결혼한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계산하면 결혼인구가 급감하는 해에는 이혼율이 100%를 넘을 수도 있다. 한 기관이 과거 ‘2002년 우리나라 결혼 대비 이혼율이 47.4%나 돼 세계 3위이고, 조만간 50%를 넘어 2쌍 가운데 1쌍 이상이 이혼하는 세계 최고의 이혼 국가가 될 것이라고’ 잘못 발표했고, 그것이 사실 확인 없이 재인용되는 경향이 있다. 이혼율을 과대포장하면 ‘이혼은 흠이 아니다’는 인식이 확산돼 이혼을 부추기는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이는 TV 드라마에서 이혼이 별것 아니라는 식의 이야기 소재로도 등장할 수 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국제통계의 기준인 조(粗)이혼율(인구 1000명당 이혼 건수)이 2013년 2.3이고, 유배우 이혼율(배우자가 있는 인구 1000명당 이혼 건수)은 4.7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조이혼율은 1970년 0.4로 시작해 83년 0.7, 93년 1.3을 거쳐 2003년 3.4로 정점을 찍은 뒤 줄어들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4년 가족통계에 따르면 2007년 자료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조이혼율은 33개 조사대상국 중 미국, 벨기에 등에 이어 스위스와 공동 6위다. 유엔의 2008년 세계결혼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63개 조사대상국 중 31위다. 물론 서구에는 동거가 많아서 이혼율이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혼율 국제 비교는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다. 부부가 가정에서부터 평등을 실천해서 남녀 모두 행복하고 이혼율도 감소하고 아이들도 보고 배워서 양성평등 실현이 앞당겨지면 좋겠다. happyhome@seoul.co.kr
  • [씨줄날줄] 정상외교와 동물 선물/문소영 논설위원

    한국을 국빈 방문한 시진핑 중국 주석이 판다(panda)를 선물했다. 대형 봉제인형 같은 판다는 그 덩치 덕분에 자이언트 판다(giant panda)라고 부른다. 귀여운 외모에 멸종 위기의 희귀동물이라는 특징이 덧붙여져 중국 정부의 외교 선물로 활용된다. 곰을 닮기도 하고, 너구리를 닮기도 해서 정체성이 논란이었는데 유전자 조사로 곰 쪽으로 정리됐다. 요즘엔 레서판다과(Ailuridae)로 독립해 분류한다. 높이 솟은 대나무에 매달려 하루 10~12시간 오물거리는 ‘미련 곰탱이’ 같아 아주 귀엽다. 유칼립투스 이파리만 먹는 코알라처럼 입맛도 까탈스럽다. 판다는 선물이지만 공짜가 아니다. 희귀동물 보전을 위해 발효된 1983년 워싱턴 조약 때문에 판다는 최대 10년 임대에 연간 임대료로 100만 달러, 별도의 관리비용이 들어간다. 한국은 한·중 수교를 기념해 1994년 판다 선물을 받았는데, 달러 부족에 시달리던 외환위기가 닥치자 1998년 조기 반납하기도 했다. 주요 2개국(G2)으로 떠오른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이지만 워싱턴 동물원에서 판다가 새끼를 낳자 국가적 경사처럼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아시아 국가가 외교 수단으로 희귀동물을 선물하는 것은 요즘의 일만은 아니다. 근대 이전에도 동물 선물 외교가 진행됐다. 고려 태조 왕건 25년(942년) 거란은 낙타 50마리를 선물했다. 당시 중원의 패자가 된 거란은 송나라와 거래하는 고려를 회유하려 한 것이다. 이에 왕건은 거란이 형제국 발해를 멸망시켰다는 이유를 들어 낙타를 개성 만부교에 묶어 두고 굶겨 죽였다. 이것이 빌미가 돼 거란이 침략하자 서희가 외교담판으로 강동6주를 얻어 고려 영토를 압록강변까지 넓혔다. 조선시대에는 코끼리, 물소, 양, 원숭이 등이 외교사절의 선물로 나온다. 태종 11년에 일본 국왕이 코끼리를 진상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산만한 코끼리를 선물받은 뒤 사북시에서 기르게 했지만, 1년 뒤 공조전서 이우가 코끼리에 밟혀 죽자 전라도 해도로 ‘유배’를 보냈다. 열대·아열대권 출신인 코끼리가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전라도를 떠돌며 고생했고, 또 코끼리의 먹거리 마련에 고생한 백성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역시 조선시대에 일본과 류큐왕국(현 오키나와) 등에서는 조공무역의 일환으로 원숭이 선물을 자주 했다. 실록에 “되돌려주라”는 기록을 보면 키우기가 만만찮았던 것 같다. 중국서 선물받은 양들은 장마 중의 습기와 열기를 견디지 못해 토착화에 실패했고, 조선 각궁(角弓)의 주원료인 물소뿔의 주인인 물소는 명나라에 선물로 달라고 요청해 받았으나, 거친 성정 탓에 끝내 조선에서 키울 수가 없었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문화 In&Out] 외세에 빼앗겼다 돌아온 우리 문화재 사연들

    [문화 In&Out] 외세에 빼앗겼다 돌아온 우리 문화재 사연들

    일제가 패망을 앞둔 1944년, 도쿄는 계속된 공습으로 아수라장이었다. 41세의 중년 신사 손재형(1903~1981)이 병석에 누워 있던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를 찾아 도쿄로 건너간 것도 이즈음이었다. 후지쓰카는 ‘추사 김정희에 미쳐 있다’고 할 만큼 추사의 금석학과 예술, 청나라 경학에 정통한 학자였다. ‘서예’라는 용어를 만든 서예가 손재형은 첫 만남에서 후지쓰카에게 아무 말 없이 인사만 하고 돌아왔다. 하루에도 수차례 공습경보가 이어졌지만 문안은 계속됐고, 일주일 뒤 후지쓰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 눈을 감기 전에 내놓을 수 없으나 세상을 뜰 때 아들에게 유언을 해 보내 줄 터이다.” 손재형은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그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서화는 조선시대 문인화의 최고 걸작인 추사의 ‘세한도’. 소나무와 잣나무가 어울린 조촐한 집과 추사체를 담은 그림이다. 제주로 유배를 떠난 추사가 1844년 역관인 이상적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그려 줬다. 이상적은 청나라를 방문해 세한도에 16명의 학자로부터 글을 받아 두루마리로 표구했는데, 이렇게 엮인 글과 그림의 길이가 14m를 넘는다. 이런 세한도는 기구한 운명을 지녔다. 이상적이 죽은 뒤 제자였던 김병선과 아들 김준학에게 차례로 넘겨진 작품은 이어 휘문고 설립자인 민영휘의 손에 들어갔다. 아들 민규식은 구한말 경성제대 교수였던 후지쓰카에게 양도했고, 후지쓰카는 퇴임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손재형이 이를 찾아왔으나 이후 큰 빚을 지고 사채업자에게 넘겼고, 돌고 돌아 지금은 미술품 소장가인 손창근이 갖고 있다. 손재형이 세한도를 찾아온 지 석 달쯤 지나 후지쓰카의 서재가 폭격을 맞아 소장품이 전소됐으니, 세한도는 기적적으로 질긴 삶을 이어 오고 있는 셈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현재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15만여점, 그중 일본에 6만 6000여점이 남아 있다. 불법 반출된 문화재의 반환을 규정한 유네스코협약이나 국제박물관협의회의 윤리강령이 있으나 ‘빛 좋은 개살구’일 따름이다. 우리가 1965년 6월 일본과 맺은 한일협정이 큰 걸림돌이다. 일본은 4개의 부속협정 중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따라 1432점만 돌려준 뒤 공식적으로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오구라 컬렉션과 같이 도굴·도난당한 것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는 동안 20년간의 협상 끝에 외규장각 의궤 등이 민간의 도움을 받아 속속 돌아왔다. 안휘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은 “교수부터 성직자, 교포, 외국인, 시민까지 수많은 사람이 힘을 보탰다”면서 “문화재 반환은 결과 못지않게 과정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재단은 최근 이 같은 이야기를 모아 ‘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란 단행본을 펴내기도 했다. 예컨대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모은 1만 9000여점의 데라우치문고 중 1995점은 문고를 관리하는 야마구치현과 자매결연 관계인 경남도의 노력으로 1996년 돌아왔다. 창덕궁 선정전 앞의 용모양 매화나무인 ‘와룡매’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 센다이번 영주인 다테 마사무네에게 뽑혀 일본으로 갔으나 400여년 만인 1999년 접목해 얻은 후계목들이 서울 남산의 안중근기념관 앞으로 돌아왔다. 국가 주도의 문화재 환수와 활용이 어떻게 민간과 조화를 이뤄야 하는지는 여전히 큰 의문이자 과제다. 환수 이야기가 단순한 무용담에 그치지 않고 소중한 가치를 지니기 위해선 보다 합리적인 토론과 공론화가 필요해 보인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열린세상] 필부필부에게서 거인을 보다/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열린세상] 필부필부에게서 거인을 보다/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사회적으로 이른바 ‘존경’ 받아오던 법조인, 교수, 언론인, 기업가가 그동안 숨겨 왔던 파렴치한 행위들이 폭로되면서 하루아침에 위선자가 돼 버리는 요지경 같은 세상이다. 아마도 이들은 ‘존경’이라는 단어를 앞세운 채 뒤에서는 출세욕, 물욕, 지배욕 같은 온갖 탐욕을 부리며 살아왔을 것이다. 이들은 주변의 모든 것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하찮은 수단 내지 도구로 여겼을 것이다. 팔순의 장인을 모시고 동서와 동해안으로 1박2일 여행을 다녀왔다. 백담사 입구에 도착해 밥을 먹으며 동서와 나는 백담사에 유배 왔던 대통령과 요즘 청문회 건으로 도마에 오른 인사들의 이야기를 했다. 어른은 대화를 듣고 나서 모든 것이 사람의 과한 욕심 때문이라면서 혀를 찼다. 어른이 살아온 삶을 알고 있는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른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면서 자식들을 키웠다. 장사를 하면서 어른은 한 번도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운 적이 없었다. “아버님, 그렇게 해서 돈 버시겠어요”라고 웃으면서 묻자 어른은 그저 욕심부리지 않고 주어진 대로 살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숙소인 금강산 콘도로 가는 도중, 어른은 거진 항구에 꼭 들러야 한다고 했다. 항구에 도착하자 어시장 한구석 좌판에서 회를 뜨는 할머니가 반갑게 어른을 맞이했고, 어른은 서울에서부터 준비해 간 옷 한 보따리를 할머니에게 선물했다. 사연인 즉, 어른은 지난 20여년 동안 거진항에서 친목 모임을 해왔고, 그때마다 할머니에게서 회를 샀다는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할머니는 매년 어른에게 감사의 인사로 횟감을 보냈고, 어른은 할머니에게 답례로 옷을 부쳤다는 것이다. 내가 근사한 횟집으로 어른을 모시려 하자, 어른은 할머니와 약속을 했기 때문에 할머니 좌판에서 꼭 회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할머니가 내놓은 회는 물기가 덜 빠져서 그런지 동서와 나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사실, 어른은 몸이 불편해서 회를 가능하면 먹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어른은 진귀한 회를 대접받은 듯이 맛있게 먹으면서 할머니와 즐거운 담소를 나누었다. 숙소로 와 잠을 자고 새벽에 한국 대 러시아의 축구 경기를 보았다. 어른은 한국이 축구를 잘한다면서 마냥 즐거워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른은 조기 축구회 회원으로 젊은 사람 못지않게 90분 시합을 거뜬하게 소화해 냈다. 그렇게 건강했던 어른이 요즘 기력이 많이 쇠약해졌다. 숙소를 나올 때 어른을 부축하기 위해 손을 잡았는데, 살집도 예전 같지 않았다. 통일전망대에 도착해서 어른은 망원경으로 철조망 너머 북녘 땅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른은 6·25전쟁 참전 용사다. 아마도 어른은 젊은 시절 체험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떠올리면서 죽어간 전우들을 위로하고 분단된 나라의 통일을 간절히 염원했을지도 모른다. 어른은 전쟁 때 통일전망대 부근 고지에서 치른 전투를 이야기하면서, 대한민국이 이렇게 잘사는 나라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른은 피곤한지 눈을 감고 있었다. 여행 내내 사람들은 장인과 두 사위가 같이 여행을 다니는 것에 대해 매우 신기해했다. 그런데 동서나 나는 그런 시선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아마도 어른의 평소 가르침 때문일 것이다. 어른은 자식들에게 돈보다, 권력보다, 명성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고 늘 가르쳤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족 구성원 간의 참사랑이다. 그러면서 그 사랑이 사회와 나라의 참사랑으로 연결되도록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면서 가르쳐왔다. 동서와 내가 장인을 친아버지처럼 여기는 것도 그런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 부정한 아버지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 진정한 아버지의 상이 무엇인지를 그동안 나는 찾아 헤맸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통해 그런 아버지를 비로소 만나게 된 것이다. 어른을 마냥 평범한 분이라 여겼는데, 알고 보니 어른은 거인이었다. 자동차 뒷거울로 어른의 모습을 보면서 몸가짐, 마음가짐, 그 모든 것에서 나는 어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버지가 될지 모른다는 조바심이 났다. 많은 제자를 둔 스승으로서,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나는 과연 그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반문해 본다.
  • 나를 지웠다, 이 오래된 정원에서…

    나를 지웠다, 이 오래된 정원에서…

    알아야 잘 보인다. 모르면 봐도 별 감흥이 없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명승 제40호)이 그랬다. 오래전 소쇄원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고백건대 잘 지은 정자와 잘 조성된 정원을 구경했다는 것 외의 감흥은 받지 못했다. 대개의 범부들이 이와 비슷할 텐데, 건축가 승효상이 쓴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란 책을 읽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저자는 책을 통해 소쇄원 안에 담긴 인문 정신을 헤아려야 비로소 소쇄원이 제대로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간다. 제월광풍(霽月光風, 비 갠 저녁 무렵 휘영청 떠오른 달빛에 섞여 부는 맑은 바람) 일렁이는 곳으로. 소쇄원(瀟灑園). ‘맑을 소’(瀟), ‘깨끗할 쇄’(灑)다. 맑고 깨끗한 기운이 넘치는 곳이란 뜻이다. 소쇄한 곳으로 길을 이끄는 건 뜻밖에 오리다. 소쇄원 초입의 시냇가에서 늘 볼 수 있는 오리들이 내방객들을 홍진 너머의 세계로 안내하는 방자 노릇을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소쇄원을 조성한 양산보(1503~1557)의 발자취를 좇다 보면 알게 된다. 양산보는 담양 북쪽의 창평 출신이다. 열다섯 살 때 한양으로 올라가 조광조를 사사한 양산보는 불과 열일곱 되던 해에 과거에 나가 제꺼덕 급제한다. 한데 그해 겨울,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에 연루돼 전남 화순으로 유배된 뒤 사약을 받는다. 유배지까지 따라나섰던 양산보는 스승의 죽음을 목격하고는 충격을 받아 고향으로 내려온다. ●양산보가 30대에 짓기 시작… 3代 걸쳐 완성 낙향한 ‘정치 신인’ 양산보는 30대에 이르러 소쇄원을 짓기 시작한다. 바로 이 대목부터 후손들의 주장과 구전 등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내용은 이렇다. 양산보가 어느 날 작은 계곡에서 노닐던 오리와 마주하게 됐다. 계곡 상류로 뒤뚱뒤뚱 달아나는 오리를 쫓던 양산보는 작은 폭포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양산보는 오리가 알려 준 계곡에 정자를 짓고 정원을 가꾼다. 이게 시작이었다. 이후 소쇄원은 아들과 손자 등 3대에 걸쳐 완성됐다. 현재 소쇄원의 면적은 4060㎡(약 1230평)다. 하지만 조성 당시엔 이보다 훨씬 컸다고 한다. 양인용(77) 문화관광해설사는 “예전엔 담장을 기준으로 내·외원으로 나뉘었으나 주변 여건이 변하면서 담장 안쪽의 내원 지역만 남았다”고 설명했다. ●대봉대·애양단 등 인문학적 의미 담겨 소쇄원의 들머리는 대나무숲이다. 어둑한 대숲을 지나면 한순간 하늘이 탁 트이고, 그 아래 작은 계곡이 나온다. 이른바 ‘올곧은 선비의 오래된 정원’은 볕 환한 계곡 위에 그림처럼 앉아 있다. 오래전 소쇄원을 찾은 객들이 ‘이리 오너라’라며 통자를 넣었던 곳도 필경 이쯤이었을 터다. 대숲을 나서면서부터는 주변 사물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인문학적 사유가 스미지 않은 게 없으니, 당연히 허투루 보아 넘길 것도 없다. 맨 처음 마주하는 건 두 개의 작은 못이다. 계곡수 일부를 상지(上池)로 끌어들인 뒤, 하지(下池)를 거쳐 다시 계곡으로 빠져나가도록 했다. 연못 위는 봉황을 기다린다는 뜻의 정자 대봉대(待鳳臺)다. 원두막 형태의 정자는 근래 지어진 것이지만 다진 바닥은 옛 모습 그대로다. 대봉대 맞은편엔 벽오동(碧梧桐) 한 그루가 서 있다. 비췻빛 수피를 가진 오동나무다. 봉황은 벽오동에만 깃들고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 하니, 소쇄원 초입의 조경 속엔 성군의 출현을 기다리는 양산보의 바람이 담겼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이처럼 소쇄원 곳곳에 식재된 나무들은 저마다 뜻을 갖고 있다. 동백나무는 효를, 매화나무는 선비의 기상을 상징한다. 장수를 기원하는 복숭아나무도 심었다. 담장 안쪽의 모퉁이는 애양단(愛陽壇)이다. 소쇄원 안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지역이란다. 담장이 꺾어지는 한복판에 동백나무 한 그루가 단정하게 서 있다. 가장 따뜻한 지역에 효를 상징하는 동백나무를 심은 뜻, 부모에게 따스한 볕 한 줌 선물하려는 바람이란 것쯤은 누구라도 쉬 짐작할 터다. ●정적인 제월당·동적인 광풍각 결국 하나로 바로 옆은 오곡문(五谷門)이다. 암반 위로 계류가 ‘갈지’(之)자를 그리며 다섯 번 돌아간다 해서 오곡이다. 오곡문은 담장과 계곡이 만나는 곳에 세운 담장 겸 수로다. 담 아래 투박한 돌을 쌓아 주춧돌로 삼고 그 사이 구멍으로 계곡수를 흘려보내는 구조다. 얼핏 부실해 뵈지만 450년이 넘도록 온갖 물난리에도 끄떡없이 버텼다고 한다. 걸핏하면 붕괴 사고를 일으키는 부실한 후손보다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오곡문을 등지고 서면 건물 두 채가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위의 세 칸 집은 주인이 머무는 제월당(霽月堂), 그 아래 날아갈 듯 팔작지붕을 인 집은 주로 객이 머물던 광풍각(光風閣)이다. ‘비 갠(霽) 저녁 무렵 떠오른 달빛(月)에 부는 맑은 바람(光風)’은 바로 이 두 건물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이쯤에서 전문가의 해석을 듣자. 승효상의 감상을 요약하면 이렇다. 먼저 제월당과 광풍각이 들어앉은 자세가 대단히 교묘하다. 제월당의 레벨은 나무와 담장 등 정적인 요소들이 수평으로 연결돼 있다. 반면 광풍각은 활개 치듯 오르는 처마선과 변화무쌍한 바위, 계곡수가 만드는 음향 등 동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다. 두 레벨 사이엔 통로가 삽입돼 있다. 이 통로는 때로는 바위를 건너고, 때로는 물길을 돌며, 또 때로는 단을 딛도록 설계돼 두 레벨이 서로 교류하고 부딪치게 한 뒤 결국 하나가 되도록 만드는 매개공간 노릇을 한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바위를 절단하고 물길을 틀고, 지형의 레벨을 조작하기도 했다. 자, 이처럼 정원과 건물 전체가 인위적인 공간을 자연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승효상의 답은 명료하다. “그 모든 조작의 결과가 결단코 부자연스럽지 않으니, 여기에는 자연을 지배하려는 오만이 있는 것이 아니며 자연을 희롱하려 드는 모자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자연과 적극적으로 공존하려는 자세이며 자연과 나를 서로 납득시키는 지식인의 창조적 태도이다.” 이게 바로 인문 정신이며 소쇄원은 그 치열한 작가 정신의 소산이라는 얘기다. ●제월당 뒤 낮은 굴뚝… 선비 정신 엿볼수 있어 잊지 말아야 할 것 하나. 제월당 뒤편에 키 낮은 굴뚝이 있다. 효율만 따지자면 굴뚝은 높아야 옳다. 그래야 연기가 잘 빠지고 온기도 온전하게 방으로 전달된다. 한데 굳이 무릎 높이로 만든 건 다소 불편하고 부족하게 살겠다는 뜻이다. 스스로에게 내핍을 강제하는 것, 그게 선비 정신일 테니 말이다. 담양읍내에도 볼거리가 많다. 이맘때라면 관방제림을 ‘강추’할 만하다. 200여년 전 관방천을 따라 조성된 느티나무, 팽나무 등의 숲이 2㎞가량 운치 있게 이어졌다. 담양 대나무 축제는 27~30일 죽녹원과 관방천 일대에서 열린다. 대나무 소망탑 쌓기, BMX(묘기 자전거)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됐다. 글 사진 담양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61) →가는 길:소쇄원은 담양 남쪽, 관방제림 등은 북쪽에 있다.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소쇄원은 호남고속도로 창평나들목으로 나오는 게 가장 알기 쉽다. 이어 광주 방면 60번 지방도를 따라 고서교차로까지 간 뒤 887번 지방도로로 갈아타고 소쇄원 방면으로 곧장 가면 된다. 이 루트에 명옥헌 원림, 창평 삼지내 마을 등 명소들이 밀집돼 있다. 소쇄원 요금소 381-0115. 관방제림, 죽녹원 등을 먼저 보려면 88고속도로 담양나들목을 이용하는 게 낫다. 이어 죽향대로를 타고 무주읍내 방면으로 곧장 가면 된다. 죽녹원 380-2680. →맛집:죽녹원 건너편 영산강변에 국수의 거리가 조성돼 있다. 옛 담양장이 활기를 띠던 시절, 장터를 찾은 이들에게 싼값에 국수를 말아 주던 집들이 하나둘 늘면서 이제는 20여개에 이를 정도로 커졌다. 잔치·비빔국수, 약계란 등을 맛볼 수 있다. 대나무에 밥을 지은 대통밥은 읍내 박물관앞집(381-1990)이 이름났다. 슬로시티 중 하나인 삼지내 마을 초입 전통시장 주변에 국밥집이 몰려 있다. 창평시장국밥(383-4424)이 그중 유명하다. →잘 곳:옛 한옥에서 묵으려면 삼지내 마을로 가야 한다. 일반 숙박업소는 담양읍내에 많다. 고가의 숙소로는 담양온천호텔이 꼽힌다. 38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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