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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근의 서울&평양 리포트]‘북한판 유배’ 신세 황병서와 평창 오는 김영남의 차이

    [문경근의 서울&평양 리포트]‘북한판 유배’ 신세 황병서와 평창 오는 김영남의 차이

    5일 국가정보원은 황병서 전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해임이후 혁명화 교육 중이라고 밝히면서 혁명화 대상의 면면에 대해 관심이다. 혁명화란 북한판 ‘유배’(流配)에 해당하는 것으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집권이후 이같은 ‘충격요법’이 자주 사용된다.김정일 국방위원장 집권 당시에도 간부들을 대상으로 혁명화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북한 당·정·군의 수뇌부들이 실각, 복권, 승진 등 반복적으로 교체되는 일은 없었다. 2012년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최고 권력자에 오른 김정은은 자신의 후견인이자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했다. 북한이 그를 처형한 죄목은 ‘불경죄’였다. 단순히 실각으로 끝내지 않고 불온의 싹을 잘라낸 것이다. 현영철 인민군 총참모장도 태도 불손으로 처형당했다. 장성택 처형이후 남은 자들에게도 파면, 복권, 재임명 등 롤러코스트는 반복됐다. 최룡해 당 조직지도부장도 2015년 인민군 총정치국장에서 실각이후 혁명화를 거쳐 지난해 사실상 북한 내 2인자인 당 조직지도부로 재신임 받았다. 당시 최룡해를 실각시킨 배후는 현재 혁명화 중인 황병서와 김원홍 전 국가보위부장으로 전해졌다. 황병서도 패턴으로 봐서는 최룡해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황병서는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되기 이전부터 그를 보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황병서는 김정은 앞에서 ‘절대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정은이 지시를 할 때 무릎을 끓고 있거나, 보고를 할 때도 입을 손으로 가리고 하는 등 극도로 조심하는 행동을 보여왔기 때문이다.불나방 같은 북한 간부들에게 있어 혁명화는 일상처럼 보이지만, 이마저도 피해가는 인물들이 있다. 오는 9일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내려오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 같은 인물들이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세습 내내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들이지만, 눈에 뛰는 과오 없이 버티고 있어 주목 받고 있다. 올해 나이 90인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북한 외무상과 당 외교담당 비서 등 외교분야에서 김일성, 김정일의 신임을 받았다. 김정은 집권이후 명목상의 국가수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태복도 김책공업종합대학 총장과 교육부총리, 당 비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와 김기남 당 비서 등 고령의 원로 정치인들은 현재 북한 권력지도에서 사라진 상태다. 이를 두고 한 대북소식통은 “혁명화도 권력의 중추로서 실세여야 가능한 일종의 ‘훈장’과 같은 개념이다”며 “권력의 시각으로 봤을 때 김영남, 김기남, 최태복, 양형섭과 같은 인물들은 견제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인물들이어서 내부에 적이 별로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10년 유배·유랑생활에도 새 시대 준비…세상을 피하지 않았던 ‘삼봉’의 신념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10년 유배·유랑생활에도 새 시대 준비…세상을 피하지 않았던 ‘삼봉’의 신념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은 죽는 법/ 구차하게 산들 편할 리 없네.’(自古有一死(자고유일사) 偸生非所安(투생비소안)) 몇 년 전 큰 화제를 모았던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에 소개된 시의 일부다. 신념을 지키는 일이 목숨을 지키는 일보다 중하다는 시구의 울림이 크다. 이는 1375년 여름 정도전이 성균관 사예(司藝)로 있을 당시 지은 ‘감흥’(感興)이라는 시다. 그는 이즈음 정세의 잘잘못을 따졌다가 재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전라도 회진현으로 추방을 당했다. 드라마 작가는 이 시를 어디에서 찾았을까? 이 시는 어떤 배경에서 지어진 걸까? 이 시의 전체 내용은 무엇일까? 이 모든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문집이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구축한 한국고전종합DB(db.itkc.or.kr)에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역사문헌 외에도 ‘한국문집총간’으로 집대성된 문집들을 만나볼 수 있다. 옛 선비들이 남긴 기록물을 한 가득 차려 놓은 ‘잔칫상’을 만난 느낌이 들 것이다. 관심 가는 대로 관련 검색어를 넣고, 검색 결과를 읽으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옛 선인들에 대한 정보를 구할 수 있고, 새로운 콘텐츠를 입체적으로 엮어낼 수도 있다. ‘삼봉집’(三峯集)을 시작으로 한국고전번역원과 서울신문이 격주로 옛 선비들이 남긴 문집을 소개한다.# 하늘이 큰 임무를 맡긴 사람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 소임을 내리려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 살과 뼈를 고달프게 하고, 그 신체와 피부를 말라붙게 하고, 그 몸을 궁핍하게 하며, 그가 하는 일마다 잘못되고 어지러워지게 하는데, 이는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격을 강인하게 함으로써 그의 부족한 능력을 키워 주려는 것이다.” 맹자의 ‘고자’(告子)에 실린 구절이다. 큰 임무를 맡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없는 사람이라 해도 미래가 보이지 않아 힘들 때 이 구절을 읽으면 용기를 되찾게 된다. 하늘의 뜻인지는 몰라도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면 마음도 강해지고 역량도 커지는 것만은 틀림없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기에 역사의 중심에 서서 새 왕조의 정치, 경제, 사회, 외교의 구도를 설계한 인물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1342∼1398). 조선을 개국할 무렵, 정도전은 취중에 종종 “한고조(漢高祖)가 장자방(張子房)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쓴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세워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하였고, 최고 통치자의 거처인 경복궁의 터를 잡고 건물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훗날 ‘경국대전’의 기초가 되는 법 규정을 마련하였고,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조선의 중심 사상으로 성리학을 안착시켰다. 이런 큰 임무를 맡기려는 하늘의 뜻이 있어서였을까? 새 왕조를 세우기 이전, 정도전은 유배와 유랑 속에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불우한 시기를 보낼 때의 정도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이 시기에 그는 어떤 마음으로 무슨 일을 했을까? 현인군자(賢人君子)도 진실로 이런 것입니까? 정도전은 향리에서 출발하여 사족(士族)으로 성장한 전형적인 신흥사대부 출신이다. 그는 뚜렷한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채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1374년 우왕이 즉위하고 이인임 일파가 집권하게 된다. 이인임 일파는 친원반명(親元反明) 정책을 펴고, 이에 반대한 정도전은 결국 개경에서 쫓겨나 나주 부근의 회진현으로 유배를 간다. 비방이 들끓어 앞으로 어떤 화가 닥칠지 모를 상황이 되자, 정도전의 아내는 두려운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 보낸다. “경은 평소 부지런히 글을 읽기만 했지, 아침저녁으로 끼니를 어떻게 해결하는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집 안은 종을 걸어 놓은 것처럼 텅 비어 곡식 한 섬도 마련할 길이 없는데, 방 안 가득한 어린 것들은 춥고 배고프다고 울어댔습니다. 제가 끼니 해결을 맡아 그때그때 마련하면서도 경께서 열심히 공부하시기에 언젠가는 입신양명하여 처자들이 우러러 의지할 날이 있겠지, 가문에 영광이 있겠지 하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국법을 어겨 욕을 당하고 쫓겨나, 자신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서 장독(瘴毒)이나 마시게 되고 형제들은 자빠져서 가문이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이 지경까지 세상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현인군자도 진실로 이런 것입니까?” 고생스러워도 언젠가는 좋아질 거라 믿고 생계를 꾸려 왔던 아내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신세를 한탄하며 남편을 책망한 내용이었다. 이 편지를 받은 정도전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당신 말이 참으로 맞소. 나에게는 형제보다도 정이 두터운 친구가 있었는데, 내가 패한 것을 보더니 뜬구름같이 흩어졌소. 그들이 나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본래 세력으로 맺어졌지, 은혜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서 그렇소. 부부의 도는 한번 결혼하면 종신토록 바뀌지 않는 것이니, 당신이 나를 책망하는 것은 사랑해서이지 미워서가 아닐 것이오.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이 이치는 진실한 것으로, 모두 하늘에서 얻은 것이요. 당신이 집을 근심하는 것과 내가 나라를 근심하는 것 외에 어찌 다른 것이 있겠소? 각각 그 직분을 다하면 될 뿐이요. 그 성패(成敗)와 이둔(利鈍)과 영욕(榮辱)과 득실(得失)은 하늘이 정한 것이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오. 그러니 근심할 게 뭐 있겠소?”# 삼봉집 제4권 가난 답장의 첫마디는 아내의 문제 제기에 대한 ‘인정’이었다. 아내가 겪고 있을 고충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처지에서 ‘도리’를 부탁할 수밖에 없는 지아비가 건넬 수 있었던 유일한 위로는 아내의 격한 감정에 대한 ‘공감’이었다. 그는 부부의 중한 인연을 강조하면서 운명에 순응하며 현실을 수용하자고 아내를 다독인다.# 현실적 한계 속에서도 꺾이지 않다 삼봉의 동년 친구 이유(李㽥)는 삼봉이 유배 기간에 지은 시와 문을 엮은 ‘금남잡제’(錦南雜題) 서문에서 자신이 지켜본 삼봉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지난해 여름에 선생이 충직한 마음으로 국가의 일을 말했다가 집권자의 비위를 거슬러 호남으로 유배되었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간 적이 있다. 선생은 집 하나를 빌려 좌우에 책을 두고, 갖옷과 베옷 한 벌로 추위와 더위를 맞았다. 아침저녁 나물 반찬을 먹으면서도 성현이 말한 인의, 도덕의 설을 이야기하여 천리와 인욕을 구분해서 밝히자, 남방의 학자들 중에 따르는 자가 많았다. (중략) 얻으면 좋아하고 잃으면 슬퍼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귀양 온 것도 신실해서였고, 그가 스스로 잘 지내는 것도 의리를 편안하게 여겨서였다. 부귀를 뜬구름같이 생각하고, 공명을 흙이나 지푸라기같이 생각하여, 산림과 조시(朝市·조정이나 저자)를 똑같이 보고, 사생과 궁달 앞에서 한결같은 절개를 지켰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자세로 생명을 포기하고서라도 의리 취하려는 일, 그것을 도를 독실히 믿고 스스로를 분명히 아는 자가 아니면 할 수 있겠는가? 역경(易經) 건괘(乾卦)의 문언전(文言傳)에, ‘옳다는 인정을 받지 못해도 걱정하지 않는다’(不見是而無悶)는 것이 바로 선생을 두고 한 말이다.” 삼봉집 제2권에 실린 ‘촌거즉사’(村居即事)에도 이 시기 삼봉의 생활 모습과 신념이 잘 담겨 있다. 띠풀 지붕 이고 있는 몇 칸짜리 작은 집(茅茨數間屋) 깊고도 외지다 보니 절로 먼지 일지 않네(幽絶自無塵) 낮이 길어 책을 보다 게을러지고(晝永看書懶) 바람 맑아 두건을 젖힐 때가 많다네(風淸岸幘頻) 푸른 산은 어느 때고 문으로 들어오고(靑山時入戶) 밝은 달은 밤이면 이웃이 되어 주네(明月夜爲鄰) 어쩌다 번뇌를 내려놓고는 있지만(偶此息煩慮) 원래 세상을 피하는 사람은 아니라네(原非避世人) 외진 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한가하게 지내고 있긴 하지만 자신은 세상을 피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는 10년에 걸친 유배·유랑 생활을 할 때에도 지식인으로서 사회를 걱정하고, 현실적 한계 속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새 시대를 열어 갈 준비를 했다. 정도전이 나주 동루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서 나주의 부로들을 일깨우며 쓴 글이 있다. “이 고을은 파괴되어 흩어져 버린 이웃 고을 한가운데, 강포한 왜구의 침략을 받는 곳에 있으면서도 유독 안전하게 있으니, 이는 마치 만 길이나 되는 높은 언덕이 거센 물결을 막아 주어, 파도가 극도로 성난 기세로 분탕 치며 부딪치더라도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방파제가 되는 것과 같다. (중략) 이는 목사(牧使)를 잘 정해 덕의를 베풂으로써 민심이 흩어지지 않게 모아서가 아니겠는가? 또한 부로들이 평소 잘 가르쳐 백성들이 의리를 향할 줄 알아서일 것이다. 아! 가상하다 하겠다. 그러나 요사이 왜구들이 더욱 날뛰어 그 형세가 날로 더하고 덜해지지 않고 있다. 부로들은 지금까지 무사했다 하여 타성에 젖어 있지 말고, 자제들을 격려하여 기계를 수리하고 봉화를 점검하여 주와 현을 지켜 국가에서 남쪽을 걱정할 일이 없게 하라.”(삼봉집 제3권 ’나주의 동루에 올라서 부로들을 일깨우는 글’(登羅州東樓諭父老書) 중에서)# 오늘, 여기서, 세상을 걱정하다 정도전은 나주 동루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서 산천의 아름다움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남방의 일대 규모가 큰 진이 온전히 유지된 데 대해 나주 부로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이곳을 지킬 구체적인 계책을 이야기하며 더욱 경계할 것을 당부했다. 정도전은 어려운 시기에 학문적인 역량을 기르고 자기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사회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후에 조선이라는 나라를 설계하고 기반을 닦는 큰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결국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죽음을 당한다. 하늘은 삼봉에게 큰 임무를 맡기기 위해 어려움을 내려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격을 강인하게 하여 그의 역량을 키워 주었지만 그가 세운 원대한 계획을 다 이루도록 해 주지 않았다. 이는 또 누구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격을 강인하게 하기 위해 내린 모진 결정일까? 산 사람들이 역량을 키워 가며 짊어져야 할 또 다른 큰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하늘의 뜻이다. 하승현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삼봉집(三峯集)은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의 시문집… ‘여말선초’ 역사·정치 등 오롯이 삼봉집(三峰集)은 조선 개국공신이자 나라의 기틀을 세운 삼봉 정도전의 시문집이다. 이 책의 서문을 권근이 고려 말에 쓴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 처음으로 출간된 것으로 보이나 확실하지 않다. 판본은 1397년에 아들 정진이 2권의 문집으로 간행한 ‘홍무초본’(洪武初本), 1465년에 증손 정문형이 수정 보완하여 안동에서 간행한 중간본(重刊本), 1486년에 시문 100여수와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첨가하여 간행한 본, 1791년에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에서 판본에서 누락된 진법과 시문을 수록하고 비점과 주석을 첨가하여 14권 7책으로 간행한 본이 전해진다. 시와 문을 따로 수록하고 각각 문체별로 구분하였다. 문집의 권1~2는 운문으로, 한시와 악장, 사부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3~4는 산문으로 소, 전, 계 등 공적인 내용의 글과 서, 제발(題跋)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5에는 불씨잡변(佛氏雜辨)이, 권6에는 심기이편(心氣理篇), 심문(心問), 천답(天答)이, 권7에는 진법(陣法)과 습유(拾遺)가 수록돼 있다. 권8은 부록으로, 여기에는 사실(事實), 교고문(敎告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9~10에는 경제문감(經濟文鑑)이, 권11~12에는 경제문감별집이, 권13~14에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 수록되어 있다.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역사, 경제, 정치, 사상, 철학, 군사, 문학 등을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 맨부커 수상 플래너건 ‘인간의 영혼 ’ 풀어놓다

    맨부커 수상 플래너건 ‘인간의 영혼 ’ 풀어놓다

    “몇 해간 좋은 작품들이 맨부커상을 받았지만 올해 수상작은 그야말로 걸작이다. 리처드 플래너건은 이 책을 쓰려고 태어난 게 아닐까. 이 책은 세계문학의 캐논(정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 맨부커상의 2014년 심사위원단이 호주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57)을 수상자로 선정하며 한 말이다. “사랑도 잃고 전우도 잃은 전장에서 삶을 짓누르는 경험을 떠안고 살아야만 하는 자의 트라우마를 담아낸, 그야말로 최고의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은 장편소설 ‘먼 북으로 가는 길’과 2002년 영연방 작가상 수상작인 ‘굴드의 물고기 책’(이상 문학동네)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돼 나왔다.작가가 12년간 집필에 매달려 5개의 다른 판본을 쓴 끝에 완성한 ‘먼 북으로 가는 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태국·미얀마 간 철도건설 현장에서 살아남은 외과의사 도리고 에번스의 이야기다. 전쟁포로에서 전쟁영웅으로 부활한 그의 기억과 경험을 중심으로 사랑과 죽음, 전쟁과 진실의 세계를 그렸다. ‘죽음의 철도’라고 불리는 미얀마 철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기 위해 만든 415㎞의 철도로 군인과 전쟁물자 수송을 위해 건설됐다. 지옥과도 같았던 철도건설 현장의 풍경과, 여기서 살아남은 생존자와 전범이 무감각하게 영위해 나가는 일상의 풍경이 강렬한 대조를 이루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 준다. 작가는 일본군 전쟁포로로 이곳 현장에 동원됐던 아버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썼다.역사학을 전공한 작가는 전작에서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영혼을 탐색하는 깊이 있는 작품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함께 출간된 ‘굴드의 물고기 책’ 역시 19세기 영국의 식민지이자 유형지였던 호주 태즈메이니아의 가혹한 현실에 몽환적 기억을 더한 환상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인 윌리엄 뷜로 굴드(1801~1853)는 영국에서 태어나 위조를 일삼다 태즈메이니아에 유배된 화가다. 그가 태즈메이니아에 갇혀 사는 동안 그곳에서 서식하는 물고기들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물고기 화첩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작가는 사실적이면서도 인간적인 표정을 담고 있는 물고기의 그림에서 얻은 착상에 상상력을 더해 새로운 허구의 세계를 창조했다. 거리낌 없고 제멋대로인 굴드의 성격을 제외한 나머지를 작가가 새롭게 지어냈다. 소설 속 굴드는 밤마다 물이 차오르는 동굴 감옥에서 물고기를 그리면서 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써내려 간다. 영국 관리의 눈을 피해 나라를 세우려 하는 사기꾼 사령관, 죄수의 재능과 노역을 착취해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고자 하는 의사, 유형지의 실제 모습을 왜곡해 역사를 날조하는 서기 등 굴드가 만들어낸 인물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역사와 환상의 경계를 능수능란하게 허물었다가 다시 포개는 작가의 솜씨가 돋보인다. 이 작품은 2001년 출간 당시 “독창적이고 도발적이며 수상하고도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듬해 앨리스 먼로의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이언 매큐언의 ‘속죄’ 등 쟁쟁한 후보작을 제치고 영연방 작가상을 수상하며 작가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한반도의 본이 되려면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한반도의 본이 되려면

    산업연구원(KIET)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과거 고도성장을 견인했던 서울이 쇠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고 했다. 인근 경기도와 충청 지역에 산업단지와 행정타운 등이 생기면서 인력이 많이 빠져나감으로써 서울의 소득증가율과 인구증가율이 전국 평균에 못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경기, 충남, 충북, 경남, 제주는 성장 지역으로 분류했다. 특히 제주는 높은 경제성장률에 따른 생산 가능 인구 유입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2006년 특별자치도로 승격된 이후 관광지 등 지역 개발 속도가 빨라진 효과라는 것이다. 제주관광객이 2005년 502만명에서 지난해 1475만명으로 3배 가까이 늘었고, 귀농·귀촌 인구도 해마다 증가해 ‘일자리가 사람을 부른다’는 공식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고 했다. 이와 달리 전남, 경북은 생산 가능 인구를 늘릴 방법이 없어 쇠퇴 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전남은 제주도까지 해저터널을 뚫겠다는 황당한 계획을 잊을 만하면 발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중앙집권적 정치제도가 확립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방 경시의 병폐가 누적됐다. 모든 것이 서울에 집중되고 서울의 중앙은 자기가 늘 전체인 것처럼 착각해 왔으며 지방에 대해 중앙사대주의를 조성해 왔다. 이런 점에서 서울의 쇠퇴와 유배지였던 제주의 성장은 의미가 크다. 러시아 시베리아도 요즘 저렴한 전기요금을 앞세워 비트코인 채굴 중심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디지털 골드 러시’라고 할 정도로 비트코인 채굴을 본업으로 삼는 주민들이 늘어나면서 시베리아에 비트코인 광산을 건설하려는 계획까지 나오고 있다. 시베리아는 동방을 침략한 러시아제국이 지역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활용했던 유배지였다.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 1825년에 일어난 ‘12월혁명’에 참가했던 귀족 청년 장교들의 유배를 계기로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렸다. 20세기 초에 이르쿠츠크를 거쳐 간 유배인은 연간 2만여명에 달했으며, 소련은 시베리아 유배 정책을 더 강화했다. 이런 동토의 유배지 시베리아가 ‘컴퓨터 금광’으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제주도의 성장과 시베리아의 변화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유배지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말도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감당하기 힘든 수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과잉관광’으로 발생하는 각종 문제는 이제 제주의 엄연한 현실이 됐으며, 가상화폐의 열풍으로 빚어지고 있는 노다지 꿈은 결국 시베리아를 투기장으로 만들 것이 불을 보듯 분명하기에 되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제주도는 탐라고국으로서 한반도의 본이 되게 하기 위하여 하늘이 여기에 둔 것이다. 제주도가 한반도의 본이고 한라산이 산의 본인 것마냥 제주도 사람들은 한국 사람의 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이는 민족교육운동의 대표이자 제주도의 마지막 유배인이었던 남강 이승훈 선생이다. 그는 변방의 유배지였던 제주도의 변화와 성장을 예감했던 것일까? 그러나 남강 선생이 예감하고 기대했던 제주도의 변화와 성장은 한반도의 본, 한국 사람의 본이 돼야 한다는 쪽이었다. 지금 제주도는 한반도의 본이고, 과연 제주도 사람은 한국 사람의 본인가. 본이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본이 돼야 하고, 될 수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제 제주가 나서서 대답해야 할 차례다.
  • ‘흑기사’ 시청률, 자체 최고 경신..전생의 악연 “구천 떠도는 귀신 돼라”

    ‘흑기사’ 시청률, 자체 최고 경신..전생의 악연 “구천 떠도는 귀신 돼라”

    ‘흑기사’가 탄력 받은 스토리 전개를 이어가며 압도적 몰입감을 선사했다.쏟아지는 호평 속에 10%대 시청률을 돌파한 KBS 2TV 수목드라마 ‘흑기사(BLACK KNIGHT)’(극본 김인영 연출 한상우 제작 n.CH 엔터테인먼트)가 21일 방송된 6회에서 11.1%(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한 회 만에 경신하며 5회 연속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문수호(김래원 분)와 정해라(신세경 분), 샤론(서지혜 분), 베키(장백희/장미희 분)의 전생 이야기가 전부 공개되며 다시 한 번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다. 지난 6회 방송에서는 200여 년 전 명소(수호의 전생), 분이(해라의 전생), 서린(샤론의 전생)을 둘러싼 전생의 이야기가 더욱 극적인 전개로 펼쳐졌다. 명소와 분이가 합방한 날,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을 뿐 동침하지 않았으나 서린은 질투와 분노에 휩싸였고, 이후 조정에서 진보적 사상가들을 탄압하기 시작하며 명소가 잡혀가자 분이에게 자신의 옷을 입혀 “내 대신 죽어”라고 독하게 말했다. 서린 대신 갖은 고초를 겪은 분이는 결국 목소리를 잃은 채 명소가 유배당한 곳으로 향했고, 그 곳에서 명소와 분이는 풍족하지 않더라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 행복도 오래가진 못했고, 유배지를 찾아갔다가 명소와 분이의 모습을 본 서린은 결국 질투에 눈이 멀어 집에 불을 질렀다. 서린은 명소가 불 속에서 분이까지 데리고 나오려 하자 혼자 나올 게 아니면 같이 죽으라며 악을 썼고, 분이는 죽어가며 “영원히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어라”고 서린을 저주해 세 사람 사이의 지독한 악연을 보여줬다. 샤론과 베키의 인연도 베일을 벗었다. 분이의 저주가 통해 죽지도 못하게 된 서린을 장백희(베키의 전생)가 거둬 200여 년 넘게 함께 지내온 것. 베키는 자신이 갓난 아이였던 분이와 서린의 신분을 뒤바꾼 죄로 불로불사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샤론에게 “그 사람은 네 남자가 아니다”라고 서늘하게 경고했으나 샤론은 여전히 “부부로 만나게 된 그 사람과 내가 인연이다”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생에서 재회한 수호와 해라는 알콩달콩 ‘한 달 연애’를 시작한 상태였고, 해라를 사랑하는 수호는 샤론에게 단호히 선을 그었다. 이에 상처 받은 샤론은 시기심과 분노로 이성을 잃었고, 불로불사의 몸이 된 뒤 생긴 능력을 이용해 해라의 모습으로 변하며 극적 긴장감을 최고조로 높였다. 이처럼 ‘흑기사’ 6회에서는 수호 해라 커플이 전생에서 겪어야 했던 비극적인 죽음, 샤론과 베키가 불로불사의 벌을 받은 이유와 이들 사이의 악연, 해라에 대한 질투로 폭주하기 시작하는 샤론이 모습이 속도감 있게 그려지며 흥미를 배가시켰다. 특히 샤론의 양장점에서 잠든 해라와 해라의 형상을 한 채 차갑게 미소 짓는 샤론의 모습에서 이날 방송이 마무리되며 다음 전개에 대한 궁금증을 키운 가운데, 수목극 중 유일하게 두 자리 수 시청률을 기록하며 독주 체제를 완성한 ‘흑기사’의 상승세가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한편 ‘흑기사’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위험한 운명에 맞서는 한 남자의 순애보를 다룬 작품으로 매주 수,목요일 오후 10시 방송된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MBC ‘PD수첩’ 5개월 만에 방송…손정은 아나운서 “기레기라는 말 들었다”

    MBC ‘PD수첩’ 5개월 만에 방송…손정은 아나운서 “기레기라는 말 들었다”

    MBC 시사교양 프로그램 ‘PD수첩’이 5개월 만에 특집 방송으로 다시 전파를 탔다.12일 방송에서 PD수첩은 ‘MBC 몰락, 7년의 기록’ 특집으로 방송돼 7년간 MBC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보도했다. 손정은 아나운서는 “지난 겨울 촛불 집회가 벌어진 이곳에서 MBC는 시민 여러분께 숱한 질책을 당했다. MBC도 언론이냐, 권력의 나팔수, 기레기라는 말도 들었다”고 밝혔다. 손 아나운서는 “MBC가 불과 7년만에 이렇게 외면당하고 침몰할 수 있었나. 오늘 PD수첩에선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고 말했다. PD수첩은 이날 방송에서 MB 정권 당시 국가정보원이 MBC를 장악하기 위해 작성했던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화’ 문서를 보도했다. 이 문건에는 좌편향 프로그램 진행자들과 작가들은 반드시 교체하라는 지침이 담겨 있었다. 이에 라디오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을 진행하던 방송인 김미화씨가 하차했고, 소설가 이외수씨가 진행하는 ‘이외수의 언중유쾌’도 중단됐다. ‘손석희의 시선 집중’에 나왔던 시사 평론가 김종배씨도 하차했다. 김미화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김재철 사장이 다른 프로 많으니 다른 좋은 프로그램 나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외수씨는 “아무 이유 없이 해체시켰다. 방송국 측에서도 ‘더 이상 묻지 말아달라’고 했다”고 밝혔다. 문건에 따르면 정권에 불리한 의제와 이슈를 다룬 시사 프로그램들이 퇴출 대상에 올랐다. PD수첩에 따르면 손석희 등 주요 진행자들이 퇴출 압력을 받고 물러났다. 국가정보원은 이어 최승호PD, 이우환 PD, 한학수 PD 등 비판적 프로그램을 만든 PD들을 내쫓거나 전보했다. 작가진도 해고됐다. 전 국가정보원 직원은 이 문건에 대해 “김재철 사장이 선임되고 취임 날짜 즈음에 문건을 생산해 이틀 후 파기하도록 설정된 것 보면 김재철 사장에 전달하기 위한 문건”이라고 추정했다. 회사측에 부정적 의견을 보였던 직원들에 대한 보복성 인사도 진행됐다. 2012년 파업에 참여했던 최일구 전 앵커는 파업 직후 재교육을 받았다. 재교육 현장을 다시 찾은 최일구 앵커는 “저희는 이곳을 아우슈비츠, 유배지라고 했다. 정말 비참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조치도 국정원의 계획이었다. 재교육을 받은 PD와 기자, 아나운서들은 수도권 곳곳에 마련된 외부 지역으로 갔다. 이우환 PD와 김범도 아나운서는 겨울엔 스케이트장에 배치돼 눈을 치우고 동전을 바꿔주는 일을 했다. 이재은 MBC아나운서는 당시 “그 다음 차례는 누가 될지 알 수 없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두려웠다. 다음은 나일까, 아니면 내 옆자리 선배님일까”라며 울먹였다. 그러나 현재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전 MBC 경영진들은 국정원 문건을 본적도, 받은 적도 없다고 이와 같은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손 아나운서는 “공영방송 MBC는 국정원 문건이 제시한 시나리오에 따라 차근차근 권력에 장악됐다. 말 그대로 청와대 방송이 됐다”고 했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세월호 참사다. 유례없는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MBC는 슬픔에 빠진 국민과 유가족을 위로하긴 커녕 권력자의 안위를 살폈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목포 MBC 취재를 지휘했던 김선태 전 목포MBC 보도국장은 “내가 그때 용기를 갖고 속보를 냈으면 단 한 명이라도 더 구하지 않았을까 싶다”며 “여기에만 오면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MBC는 참사 당시 학생들 전원 구조라는 보도를 냈다. 하지만 목포 MBC는 전원구조가 아님을 알았고, 김선태 전 국장이 “현장에 수백 명이 갇혀 있다고 했다”고 수 차례 알렸다. 그럼에도 서울 MBC 박상후 부장은 9차례나 ‘전원 구조’ 자막을 내보냈다. 이 보도에 구조작업을 돕기 위해 내려간 민간 단체도 돌아갔다. 박상후 부장은 현재 이에 대해 “대답할 의무가 없다”고 말했다. 세월호 특조위에서 사고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적을 확인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MBC 측은 비판조의 보도를 내놨고, 세월호 특조위를 무력화시키라는 보도 지침을 받았다. 세월호 유가족인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세월호 특조법을 요구하며 단식을 시작할 때도 MBC는 “단식을 비판하는 주장이 나왔다”며 이혼 후 김영오씨가 아이들을 다루지 않았다고 했다. 지상파 중 이 보도를 한 것은 MBC가 유일했다. 김영오씨는 “언론이 정부의 편에 서서 또 저를 두 번 죽인 것”이라며 “세월호 진실에 대해 은폐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선 말도 안 하고 보상금 방송 등으로 진실을 묻히게 했다. 언론이 힘없는 국민들의 편에 서서 있는 그대로만 보도해주면 세상은 이렇게 안 됐을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인용 당일에도 MBC는 탄핵 반대 집회를 미화했다. 탄핵 국면 당시 주요 언론들은 촛불혁명, 민주주의 등으로 표현했지만 MBC는 북한, 충돌 등 부정적인 단어를 사용했다. 손 아나운서는 “권력에 장악되며 허물어져버린 MBC 7년의 몰락사는 저희에게도 소중한 교훈을 남겼다. 권력자에 인정받을 때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공정방송을 할 때 비로소 사랑받고 인정받을 수 있단 것”이라며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성하겠다”라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남겨서 돌아가게 하니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남겨서 돌아가게 하니

    한 해가 가고 있다. 실학자 이덕무는 한 해를 보내면서 “한평생 마음이 게으르기에 매번 섣달그믐이 슬퍼진다”고 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고, 넘어야 할 산은 높은데 몸과 마음이 게으르기만 하니 큰일이라 여겨질 것이다. 그래서 새해엔 부지런한 사람이 되고자 거듭 맹세하게 된다. 그러나 작심삼일이다. 그래서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마음이 어수선해질 때면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생활 때 남긴 ‘유재’(留齋)라는 현판 글씨의 내용을 한 번쯤 되새겨 볼 일이다. ‘유재’란 말 그대로 ‘남김을 두는 집’이라는 뜻이다. 부지런히 채워도 부족하기만 한데 대체 무엇을 남기라는 것인지. 추사는 “기교를 다 쓰지 않고 남겨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고(留不盡之巧以還造化), 녹봉을 다 쓰지 않고 남겨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留不盡之祿以還朝廷), 재물을 다 쓰지 않고 남겨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留不盡之財以還百姓), 내 복을 다 쓰지 않고 남겨 자손에게 돌아가게 하라(留不盡之福以還子孫)”고 했다. 바쁠수록, 잘나갈수록, 많이 가질수록, 높이 오를수록 ‘남기는 여유와 나누는 미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무엇보다 주변을 둘러볼 ‘시간’이 필요하다. 바쁘고 부지런한 사람들은 그런 시간이 없다. 버트런드 러셀이 지적했듯이 오히려 게을러야 실제로 가장 값비싼 소모품인 ‘시간’이 충분해지므로 여유와 미덕에 대해 고민하고 또 가능할 수 있다. 어떤 인기 연예인이 거액을 벌어 90억원대의 빌딩을 샀다는 뉴스가 세밑을 장식하고 있다. 그이 외에도 빌딩 부자가 된 스타들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그들이 남기고 나누었다는 이야기는 과문한 탓인지 듣질 못했다. 그들은 노래와 연기의 고되고 바쁜 일정으로 얻은 당연한 대가라고 하겠지만, 빌딩만을 구입한 채 남기는 여유와 나누는 미덕을 갖지 못한다면 결국은 자신들의 인기로부터 자신들이 소외당하게 될 것이다. 인기도, 권력도, 세상만사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한 번 성하면 반드시 멀지 않아 쇠해진다는 말이다. 쇠해짐을 대비해 빌딩을 사기보다는 오히려 쇠해짐을 대비해 남기고 나누어야 함을 충고한 것이 추사 김정희 ‘유재’의 가르침인 것이다. 연예인이나 정치인만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모두가 모자라다고 아우성이다. 노조는 노조대로 넘쳐도 멈출 줄 모른 채 파국을 자초하고, 거대 교회는 아량도 도량도 없이 세습을 당연시하는 데다 재산 증식은 이제 고위 공직자들의 빼어난 실력이고, 편법 상속은 기업가들의 탁월한 경영 능력이 된 지 오래며, 소시민들은 가족의 행복이라는 미명 아래 남기지 않고 알뜰하게 챙기고, 그 누구와도 나누지 않는 욕심으로 대를 잇는다. 유배인이었던 다산 정약용은 ‘죽는다는 것은 아침에 생겼다가 없어지는 버섯처럼 덧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덧없는 인간사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는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마라. 노심초사하지 마라. 사는 것을 하늘에 맡겨라. 부질없이 바쁘지 마라. 쓸데없는 계획을 세우지 마라. 독서하고 탐구하라. 마음을 닦고 천품을 온전히 하라. 높은 정신에 도달하라”고 했다. ‘남기는 여유와 나누는 미덕’이야말로 다산이 말한 ‘천품’이요 ‘높은 정신’일 것이다. 추사나 다산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를 수 있다면 바쁜 한 해를 보내면서 세월타령이나 건강타령, 돈타령, 술타령 대신 ‘매번 남기고 나눌 수 있어 기쁘다’고 진정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사는 인생 제대로 값나가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 독거중년도 위험…짙어진 고독사 그림자

    독거중년도 위험…짙어진 고독사 그림자

    “고령화에 각종 사회문제도 얽혀 정부, 생애주기별 대책 마련해야” 배우 이미지(58·본명 김정미)씨가 혼자 살다 숨진 사실이 2주 만에 알려지면서 ‘고독사’에 사회적 시선이 쏠리고 있다.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쓸쓸하게 사망하는 것을 뜻하는 고독사에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문제가 얽히고설켜 있어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고독사의 일차적인 원인으로는 인구 고령화와 1인 가구의 확산 등이 꼽힌다. 고독사의 현황은 주로 ‘무연고자 사망’으로 설명돼 왔다. 사망자에게 유가족이 없거나 유가족이 시신 인수를 거부하면 무연고 사망자로 분류된다. 29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무연고 사망자 수는 2011년 693명에서 지난해 1232명으로 5년 사이 2배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고독사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단순히 ‘무연고 사망’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발견된다. 고독사하더라도 가족이 있으면 ‘무연고 사망자’로 처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독사한 이씨도 유가족으로 남동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무연고 사망자로 분류되진 않을 전망이다. 이런 배경에서 고독사는 ‘현대판 고려장’에 비유된다. 고려장은 늙은 부모를 산속 구덩이에 버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빈곤’이 원인이었다. 오늘날 고독사가 ‘쪽방촌’ 등 홀로 사는 노인 가구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맥락은 비슷하다. 특히 노숙인들의 사망은 고독사인 동시에 무연고 사망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 사회의 핵가족화로 인한 부모 부양 문제도 고독사와 관련성이 적지 않다. 자녀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며 홀로 사는 부모 가구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가정 내 갈등으로 인한 가족 해체도 고독사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고령자 1인 가구 수는 2010년 106만 6000가구에서 2016년 129만 4000가구로 6년 만에 21.4% 증가했다. 박민성 사회복지연대 사무처장은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양극화되고 저소득층들이 개인화되면서 경제력까지 약화돼 고독사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더욱이 이런 고독사는 갈수록 저연령화되고 있다. 정부는 지금까지 ‘독거노인’을 고독사 고위험군으로 분류해 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독거중년’까지 고위험군에 포함시켜야 할 것으로 보인다. 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무연고 사망자는 50대 이하가 2333명으로, 60대 이상 2265명보다 더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30대 이하 ‘청년 고독사’도 지난해 66건으로 매주 1명꼴로 목숨을 잃고 있다. 김수영 경성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1인 가구 전체에 대해 생애주기별·계층별 맞춤형 대책이 필요하다”면서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들이 연대해 고독감을 이겨 내는 ‘컬렉티브하우스’(공동체주택) 등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은 해결방법이 되지 못한다”면서 “온라인화돼 있는 사회 커뮤니티를 오프라인화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보다 먼저 고독사를 사회문제로 겪었던 일본은 민관 협력하에 대책을 마련하고 있어 주목된다. 일본의 사가미하라시는 우유유통개선협회와 업무협약(MOU)을 맺고 우유배달부가 우편함에 신문이 그대로 있거나 비가 내리는데도 세탁물이 걸려 있는 가구를 발견해 시청에 연락하면 해당 가구를 살피는 등 조치를 취하고 있다. 지자체가 쓰레기 배출량과 가스·수도 사용량을 확인해 안부를 확인하는 것도 보편화돼 있다. 우리 정부는 지난달 고독사 예방 태스크포스(TF)를 만들고 고독사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혜리 기자 hyerily@seoul.co.kr
  • [역사 속 행정] 영조 부동산 대책이 주는 교훈

    [역사 속 행정] 영조 부동산 대책이 주는 교훈

    즉위 즉시 한양 매매·이사 금지령 권력자 비싼 임대 부조리 잡았지만 이주 불가피한 서민은 또다른 불법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개경에서 서울로 수도를 옮겼다. 이때부터 “땅이 부족하니 가구당 허용 면적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세종 13년(1431년)에는 “왕자와 공주는 50간, 대군은 60간, 2품 이상은 40간, 3품 이하는 30간을 넘지 못한다”라고 못박았다. 일반인들이 호화롭게 집을 짓고 돈만 있으면 누구나 사치생활을 해 사회규범이 없어진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대지와 주택이 부족한 것이 진짜 원인이었다. 왕족이나 재상들은 궁 가까이 살았다. 근무처에 가까이 사는 것만이 출퇴근 시간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을 포용하기에 궁궐 주변 집들은 너무 적었다. 우리나라의 독특한 부동산 제도인 ‘전세’는 이런 현실을 반영해 조선 전기에 시작됐다. 연산군은 서울 인구가 늘고 대지가 부족해지자 무허가 가옥을 모두 철거하게 했다. 왕의 입장에서는 법과 정의를 실현한 것이지만 이로 인한 백성의 주거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정부가 찾은 해결책이 주택 총량을 고정시키되 임대차 제도를 활성화해 주거 효율을 높이는 것이었다. 전세는 관료들에게도 매력이 있었다. 궁궐 옆 저택에 살던 재상이 실각해도 당장 집을 팔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다시 임용되거나 아들이나 손자가 관리가 될 수도 있는 만큼 때를 기다리기에 좋았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서울 인구가 크게 늘자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는 주택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특히 권력자들은 자신의 힘을 이용해 주변 민가를 헐값에 사들여 비싸게 세를 주거나 강제로 담장을 헐고 자기 집을 넓히곤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서민들은 집을 구하기가 더 힘들어져 집세가 더욱 높아졌다. 정통 세자가 아니었던 영조는 궁 밖에서 살며 이런 현실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왕이 되면 저런 부조리를 뿌리 뽑겠다’고 결심했다. 실제 영조는 1724년 즉위하자마자 과거의 결심을 잊지 않고 획기적 조치를 단행했다. ‘여염집 탈취금지령’이다. 민가에서 주인을 몰아낸 자는 남의 집을 불법으로 점령한 죄로 간주해 다스린다는 것이다. 왕이 법령을 내려도 그것이 어떻게 왜곡되고 사문화되는지를 잘 알던 영조는 탈취금지령을 내리면 분명 매매나 전세로 위장할 거라는 사실도 간파하고 이조차 금지시켰다. 결국 이사가 불가능해져 모든 주민이 당시 살던 집에 평생 살게 만든 것이다. 이 법은 영조 재위 시절 내내 강력하게 시행됐다. 금지령을 위반하면 양반뿐 아니라 왕족과 고급 관료들까지 예외 없이 유배에 처해졌다. 그러나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매매와 전세, 이사를 모두 금지하는 것은 심각한 불편을 낳았다. 그나마 명문세가여서 자기 집이 여러 채 있는 이들은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지만 집 없는 사람과 서울로 갓 이주해 온 사람, 생계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 자주 돌아다녀야 하는 서민들은 뇌물을 주거나 또 다른 불법 행위를 감수해야만 했다. 영조의 금지령은 시장에서 벌어지는 부조리에 정부가 법과 행정망을 동원해 대응한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백성의 고충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왕의 취지는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이 근본 대안이 아니었을뿐더러 선의의 피해자도 양산했다.영조의 대책은 사회현상을 행정력으로만 해결하려다 나타난 오류였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부조리를 방치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이것은 오늘날 모든 국가가 지니고 있는 딜레마다.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가졌다고 해도 행정 개입은 다양한 부작용을 감안해 장기적 관점에서 섬세하게 운영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한국행정연구원 ‘역사 속 행정이야기’ 요약 노혜경 호서대 창의교양학부 교수
  • [백승종의 역사 산책] 백인걸, 기회주의자를 몰아내다

    [백승종의 역사 산책] 백인걸, 기회주의자를 몰아내다

    1545년(명종 즉위) 가을, 외척 윤원형이 대비의 ‘밀지’(密旨)를 얻어 사림을 해치려 하였다. 그때 백인걸(白仁傑)이 언관으로 있었다. 그는 밀지의 그릇됨을 홀로 아뢰다 옥에 갇혔다. 동료 유희춘이 탄복하였다지만, 백인걸은 겨우 죽음을 면해 먼 시골로 유배되었다.곤궁하고 불우하던 시절, 백인걸은 날마다 ‘태극도설’과 ‘사서’ 등을 읽었다. 스승 조광조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세월이 20년가량 이어졌다(송시열, ‘송자대전’, 제21권). 선조가 등극하자 드디어 백인걸이 다시 기용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그는 조정에 웅크리고 있던 기회주의자들을 적발해, 그들의 관직을 거두게 하였다. 광평군 김명윤(金明胤)도 소위 청산 대상이었다. 김명윤은 본래 ‘현량과’를 통해 조정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기민하게 노선을 바꾸었다. 김명윤은 다시 과거에 응시해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의 변절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이이,‘석담일기’, 상권). 김명윤의 변모에는 끝이 없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권세가에 붙어, 반대파인 윤임과 봉성군 이완에게 역모죄를 씌웠다. 김명윤의 무고로 인해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윤원형 등 외척세력이 권세를 잃었다. 그러자 김명윤은 또다시 입장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경연에 나아가 사화의 희생자들을 편들었다. “을사년에 처벌된 선비들 가운데 억울한 사람들이 많사오니, 전하께서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어디 그뿐인가. 청명(淸名)이 높은 남명 조식 등이 발탁되자, 김명윤은 청류(淸流)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하였다. “이 선비들을 언관으로 삼아 임금님을 측근에서 모시게 해야 마땅합니다.” 변화무쌍한 김명윤은 항상 ‘농단’(?斷)을 꾀하였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놓치지 않고자 가면을 썼다. 그러나 진즉부터 백인걸은 그의 잔꾀를 알고 있었다. 이야기는 1544년 인종의 즉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인종에게 기대를 거는 선비들이 많았다. 그들을 대신하여 언관들은 기묘사화의 희생자들을 복권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의 상소문에는, “기묘의 선비는 모두 정직합니다”라는 구절이 포함되었다. 지평(정5품) 백인걸은 이 표현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기묘년의 선비들 가운데 현명한 분들이 많았으나, 어찌 모든 이가 정직하다고 말하겠소. 현량과가 혁파된 뒤 과거시험장을 기웃거린 사람도 있었잖소. 과연 이런 사람을 정직하다고 말하겠소.” 백인걸은 김명윤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훗날 백인걸은 김명윤의 면전에서, “그대는 천만 번씩이나 변신하는 사람이오!”라고 핀잔을 주었다. 이 소식을 듣고 식자들이 통쾌해하였다. ‘석담일기’에 그 전말이 나온다. 역사기록은 무거운 것이다. 이익만 좇아 함부로 굴다가는 후세의 비웃음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최근 잇따라 폭로되고 있는 역대 정권의 비리 사건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친다. 백인걸은 참찬(정2품)을 끝으로 조정을 떠났다. 향년 83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그는 기회가 될 때마다 우계 성혼 및 율곡 이이와 함께 학문을 닦았다. 성혼과 이이는 청년시절 그의 문생이었다. 백인걸은 이이와 성혼이 김명윤 같은 썩은 선비를 대신하여 나라의 믿음직한 동량이기를 바랐다(‘우계연보’와 ‘송자대전’).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단종 복위 꿈꿨던 금성대군… 순흥서 스러져 ‘산신령’으로 남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단종 복위 꿈꿨던 금성대군… 순흥서 스러져 ‘산신령’으로 남다

    순흥(順興)은 오늘날 경상북도 영주시의 일개 면(面)일 뿐이다. 하지만 순흥의 역사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삼국시대 순흥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대였다. 고구려는 장수왕 시절 죽령을 넘어 영주 일대까지 장악했다. 죽령을 사이에 두고 영주와 이웃한 충청북도 단양에 고구려 온달장군의 전설이 어린 온달산성이 남아 있는 것도 이런 역사와 관계가 있다.순흥에 고구려의 장례 풍습을 보여주는 벽화고분이 남아 있는 것도 그렇다. 풍경화를 방불케 하는 연꽃 그림은 일본 미술에도 영향을 미친 고구려 특유의 표현이라고 한다. 가까운 부석사의 창건설화도 그렇다. ‘삼국유사’에는 의상대사의 부석사 창건을 방해하는 ‘500명이 도둑’이 보이는데, 학계는 이들을 신라에 협력하지 않은 고구려계 주민으로 본다. 고구려 통치 시대 순흥은 급벌산군(及伐山郡)이었다. 이후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이 급산군(及山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는 흥주(興州), 순안현(順安縣), 순흥부(順興府)로 잇따라 개칭했다. 순흥은 조선 초기 전국 75개 도호부의 하나였다. 하지만 1457년(세조 3) 도호부는 폐지되고 땅덩어리는 풍기·봉화·영주 세 고을로 분산됐다.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사건 때문이었다.오늘날 영주의 양대(兩大) 문화유산이라면 부석사와 소수서원을 꼽아야 할 것이다. 이 고장의 유교문화와 불교문화를 상징한다. 이들을 돌아보려면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을 이용하게 마련이다. 풍기는 인삼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이맘때 찾으면 사과가 지천이다. 풍기에서 소수서원이 있는 순흥을 거쳐 부석사에 이르는 길은 문화유산 순례길이다. 순흥 벽화고분도 이 길 주변에 있다. ●역적의 땅 된 순흥, 이름마저 200년간 사라져 소수서원에서 나와 부석사로 방향을 잡으면 곧바로 왼쪽에 금성대군신단(錦城大君神壇)이 보인다. 그냥 지나치기 일쑤지만, 잠시 둘러보기를 권한다. ‘역적의 땅’이 되어 순흥이라는 이름마저 200년 넘게 사라지게 했던 역사가 담겨 있다. 정축지변이란 금성대군이 주도하고 순흥부사 이보흠이 뒷받침한 단종 복위 운동과 뒤따른 대학살 사건을 이른다. 세종은 6명의 부인과 18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정비인 소현왕후 심씨와 사이에는 8남 2녀가 있었다. 첫째가 세종의 보위를 이은 문종이고 둘째가 문종의 맏아들인 어린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곧 세조다.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이 뒤를 이었다. 그러니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 번째 적자(嫡子)다.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금성대군에 앞서 목숨을 잃은 형제는 안평대군이었다. 시문(詩文)과 서화(書畵)에 능했던 안평대군은 문종 시절 조정의 실력자 역할을 하면서 김종서를 비롯한 주요 문신과 가까웠으니 수양대군과는 라이벌이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킨 1453년 반역을 도모했다는 구실로 유배지 교동도에서 사사(賜死)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금성대군은 단종의 측근을 제거하려는 수양대군의 뜻에 따라 1455년 오늘날의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을 아우르는 삭녕에 유배된 데 이어 경기도 광주(廣州)로 이배된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넘겨받은 해다. 이듬해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이 단종 복위를 노리다 실패한다.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다. 이미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된 단종은 1457년 영월로 유배되는데, 이때 금성대군도 순흥에 위리안치된다. 금성대군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는 데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가 도움이 된다. ‘공이 순흥부에 이르러 이보흠과 마주하여 눈물을 흘리고 산호 갓끈을 주었다. 드디어 주변 지역 인사와 몰래 결탁하여 상왕(上王)을 복위시킬 계획을 하고 이보흠을 불러 좌우를 물리고서 격문(檄文)을 기초하게 하였는데, 순흥의 관노(官奴)가 벽에 숨어 들은 뒤 공의 시녀와 교통하여 초안을 훔쳐 달아났다.… 공과 이보흠이 잡혀 죽었고, 지역과 주변 인사 중 사형에 연좌된 자도 많았다.’ 금성대군은 순흥에서 의거를 일으키면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 선비들이 대거 뜻을 같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 영월 청령포에서 노산대군을 모셔와 다시 임금으로 세우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강원도 영월과 경상도 순흥은 심리적 거리가 멀지 않다. 비록 좁은 산길이지만, 태백산이 끝나고 소백산이 시작되는 곳에 고치령이 있다. 이 고개 정상에는 산령각(山靈閣)이 있다. 단종과 금성대군을 태백산 산신과 소백산 산신으로 각각 모셨다. 역사를 민중의 시각에서 해석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금성대군은 안동부 관아에서 사사됐다. 시신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무덤도 없다. 순흥에는 금성대군이 피를 흘리며 죽은 자리에 신단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지만, 전설일 뿐이다. 순흥이 복읍된 것은 숙종 시절이다. 이후 금성대군신단은 1719년(숙종 45) 설치했고 1742년(영조 18) 정비했다고 한다. 신단은 품(品) 자 형태로 3개의 단을 설치했다. 가운데가 금성대군, 왼쪽이 이보흠, 오른쪽이 순절의사를 기린다.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라고 새긴 비석도 세웠다.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물론 화를 입은 사람들 모두를 추모하는 제단이라 할 수 있다. 금성대군의 아들 이맹한은 충청도 청주에 유배됐다. 이후 중종 시절인 1519년 함종군에 복작되며 명예회복이 이루어진다. 충북 청주 미원면 대신리에는 금성대군 제단(祭壇)이 있다. 그를 정점으로 하는 전주 이씨 금성대군파 묘역이다. 제단 오른쪽에는 부인 전주 최씨의 무덤이 있다. 합장묘라는 상징성을 부여한 것이다.●충북 진천·영월에도 금성대군 사당·위패 보존 청주 제단에서 자동차로 20~30뿐쯤 걸리는 충북 진천 초평면 용기리에는 금성대군의 사당인 청당사(靑塘祠)가 있다. 사당을 지은 시절에는 진천이 아닌 청안 땅이었다. 영조 16년(1740) 세웠지만, 흥선대원군이 훼철한 것을 1974년 중건했다고 한다. 충북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주변은 정리되지 않았고, 쓸쓸한 느낌마저 든다. 금성대군은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의 배식단(配食壇)에도 배향되어 있다. 정단(正壇) 32인과 별단(別壇) 236인 등 268인의 위패를 봉안한 제단이다. 금성대군의 위패는 육종영(六宗英)의 일원으로 정단에 봉안되어 있다. 육종영은 안평대군을 비롯한 여섯 종친을 뜻한다. 고치령 산령각에서 보듯 금성대군은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더욱 각광받았다. 서울과 경기 지역에도 금성대군을 모신 여러 곳의 굿당이 있었다. 이 가운데 서울 은평뉴타운 한복판의 금성당은 한때 사라질 위기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금성당 건물은 샤머니즘박물관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해마다 5월이면 금성당제도 열린다. 지하의 금성대군도 자신이 ‘아파트 타운 축제’의 주인공이 될 줄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나부터 바로 서서 그에게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나부터 바로 서서 그에게

    유배인들이 유배지에서 했던 일들은 많다. 한시를 짓고 가사를 씀으로써 소위 유배문학이라는 전통을 만든 것도 그들이다. 그들이 살던 시대에는 한시를 짓는 능력이 교양으로 매우 중시됐다. 특히 과거시험을 위해 어려서부터 한시 짓는 방법을 익혀야 했다. 문학을 도덕과 교훈을 위한 도구로 생각했던 조선 지식인들은 한시를 짓는 일이 원칙적으로 남성들의 일이라 여겼다. 이 때문에 유배지에서도 많은 유배인들이 한시를 남겼다. 그런가 하면 한시 외에 편지를 쓴 유배인도 많다. 소학에 ‘선비의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 글씨를 익히고 편지를 쓰는 일’이라고 했듯이 편지는 조선 지식인들이 사는 일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유배인들은 외부와의 유일한 의사전달 방법이 편지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두 아들과 둘째형, 그리고 제자들에게 수백여 통의 편지를 보냈고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김정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들은 모두 유배인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유배지의 현지 주민들을 위한 행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중국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해남도(海南島)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소동파를 두고 “동파는 불행했지만 해남은 행복했다”고 하는 이유가 그가 시를 잘 썼기 때문이 아니라 무지몽매한 유배지 현지 주민들과 함께 어울렸기 때문이다. 어울림 가운데 으뜸은 바로 교육 활동이다. 1545년 을사사화로 성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이문건 역시 유배지 주민들과 잘 어울리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현지 주민들에게서 전세 공물 및 잡역 등 부세를 받아서 대신 관에 납부하고 중간에서 차액을 남기는 방납에 관여해 상당한 수익을 올리는 경제활동을 했을 뿐이었다. 유배인 신분에도 재산을 증식한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유배지의 어려운 환경에서도 현지의 젊은이들을 잘 가르쳐 조선 건국 이래 처음으로 가장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4년 뒤 사면을 받았던 강백 같은 유배인도 있었다. 그는 1728년 이인좌의 난에 연루돼 철산에 유배됐는데 교육 활동을 통해 현지 주민들과 적극적으로 만남으로써 그 결과 “강백은 불행했지만 철산은 행복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선비들이 유배를 당하면 정치인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학자적 기능은 여전히 가능했기 때문에 유배생활을 서재생활로 전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많은 한시도 쓰고, 편지도 썼지만 어떤 유배인은 이 시간에 현지 주민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사실 김정희가 위대한 것은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그렸기 때문만이 아니라 제주도 주민들과 기꺼이 만나고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배인들의 교육 활동이 왜 이렇듯 중요한가 하면 당시 계급으로 차별을 구조화한 조선시대의 위계질서를 넘어선 이타적 행위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만남, 이런 교육 활동이다. 자본의 위계질서를 정당화하고 부익부 빈익빈의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교육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행복한 ‘함께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교육이 가능하려면 무지몽매한 유배지 주민들에게 헌신했던 유배인들처럼 정부와 기업, 기득권자, 그리고 우리 개개인들이 나서서 가난과 질병, 냉대와 무관심, 스트레스로 소외받고 있는 아이들과 이웃들에게 지속적으로 인간적이고 생산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연말연시, 그 바람이 더욱 커진다.
  • 손석희 사장 하마평에 MBC기협 회장 “그런 소문 들었는데…”

    손석희 사장 하마평에 MBC기협 회장 “그런 소문 들었는데…”

    MBC노조 “15일 9시 업무복귀…보도·시사 제작중단 계속” 파업 72일째를 맞은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이하 MBC노조)가 15일 오전 9시 업무에 복귀한다. 다만 보도·시사 부문 조합원과 아나운서 부문 일부 조합원은 새 사장이 선임될 때까지 제작·업무 중단을 이어나가기로 했다.지난 9월 4일부터 경영진 퇴진을 요구하며 조합원 2000여명이 참여하는 파업을 진행해 온 MBC노조는 13일 김장겸 사장이 해임되자 파업중단 시점과 향후 투쟁 계획 등을 논의했다. 김연국 MBC노조 위원장은 14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 사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파업은 잠정 중단한다”면서도 “보도, 시사, 아나운서 조합원 일부는 제작중단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지난 8월 30일 ‘유배지 폐쇄’ 선언을 하고 업무 거부 대열에 합류한 경인지사, 뉴미디어포맷개발센터, 신사옥개발센터 소속 기자·PD·아나운서 조합원들도 해당 부서로 출근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뉴스의 경우 개별 제작자의 힘만으로는 바꿔낼 수 없는 프로그램이며 현재의 뉴스는 적폐 뉴스”라며 “새로운 경영진이 올 때까지는 제작 중단을 계속하겠다”고 설명했다. 김 위원장은 3주에서 한 달 정도 걸릴 것으로 보이는 신임 사장 선임 절차와 관련해 “방문진에 백종문 부사장 권한 대행 체제가 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절차를 신속히 진행해달라고 요청할 것”이라고 했다. MBC 사장은 방문진이 공모를 통해 후보자를 모집한 뒤 3배수로 압축하고 후보자들의 발표와 면접 등을 거쳐 최종 선임한다. 지난 2월 선임된 김 전 사장이 해임됨에 따라 후임 사장의 임기는 김 전 사장의 잔여 임기인 2020년 주주총회때까지다. 김 위원장은 “사장추천위원회 구성, 사장 후보자 면접 과정 생중계 등을 포함해 MBC 사장을 공정하게 뽑기 위한 모든 방법을 검토해 방문진에 이를 요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새로운 경영진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로 해직자 복직을 꼽았다. MBC는 2012년 김재철 사장 재임 당시 벌인 파업의 책임을 물어 정영하 전 노조위원장을 비롯해 최승호·강지웅 PD, 박성제·박성호·이용마 기자 등 6명을 해고했다. 현재 이와 관련해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다. 김 위원장은 라디오 작가, 리포터, 뉴스 AD의 복귀에 대해서도 “노조에서 법적인 내용 검토해 같이 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싸우겠다”고 말했다.한편 일각에서는 MBC 새 사장으로 손석희 JTBC 보도담당 사장이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왕종명 MBC 기자협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손석희 사장이 MBC 사장으로 오는 것 아니냐 이런 소문들이 있던데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그런 소문들은 들었다. 그분은 저희도 관찰자 중에 한 명이지 저희가 어떻게 그거에 대해서 의견을, 그럴까 아닐까 저희들끼리 그 정도 얘기만 하지 지금 답을 드리기는 어려운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만약 (손석희 사장이 MBC 사장으로) 온다면 환영이냐”는 말에 “저 개인적인 질문으로 본다면 저는 손석희 선배를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선배로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과천 추사박물관, 제주추사관과 학술 콘텐츠 교류

     과천 추사박물관, 제주추사관과 학술 콘텐츠 교류

    추사 김정희가 꽃피웠던 학문과 예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개관한 두 기관이 학술과 콘텐츠를 교류하고, 네트워크를 공동으로 구축한다. 경기 과천시 추사박물관은 이를 위해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산하 제주추사관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13일 밝혔다. 이에 따라 두 기관은 추사 공동연구 및 심포지엄 개최, 전시·교육·체험 프로그램 교류 및 정보의 공유, 학술출판물 등 콘텐츠 개발과 행사에 서로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년)는 추사체로 상징되는 조선말 글씨의 명인이다. 또한 청나라 고증학을 기반으로 한 금석학자이기도 하다. 추사는 현종 때 풍양 조씨가 득세하자 다시 반격을 가한 안동 김씨가 10년 만에 윤상도의 옥사를 다시 거론, 유배를 가게 되면서 제주와 첫 인연을 맺는다. 인생의 첫 좌절, 9년 유배생활 동안 생애 최고의 명작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는 세한도(국보 180호)를 그리고, 추사체를 제주에서 완성했다.과천과 인연은 1851년 당시 영의정이던 친구 권돈의 일에 연루돼 또다시 북청으로 유배됐다 풀려난 뒤 과천에 자리 잡으면서 시작됐다. 추사는 유배로 삭탈관작된 생부 김노경의 복원을 위해 한양에서 가까운 과천의 주암동에 묘역을 모시고, 아버지가 조성한 과지초당에 기거했다. 과천에 4년 동안 거주하면서 말년의 완숙인 불이선란도, 판전, 대팽고회 대련 등 작품을 남겼다. 과천에서 봉은사를 오가던 그는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런 추사와의 인연으로 두 지자체에 세워진 추사 박물관은 ‘세한도, 또 다른 자화상’, ‘추사 가문의 글씨’ 등 특별기획전에 소장유물을 서로 대여해 주는 등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해 왔다. 과천 추사박물관은 2013년 6월 3일, 추사 김정희의 음력생일에 맞춰 개관했다.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전시하고 있다. 2016년에는 ‘자하 신위 전’을 통해 학술적인 성과를 인정받아 경기도 도지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주추사관은 서귀포 대정의 추사 유배지에 2010년 재개관했으며, 현재 제주도를 대표하는 박물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연간 7만 명의 관람객이 찾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이상기 과천시 추사박물관장은 “제주추사관과의 협약을 통해 관람객에게 더 다양한 양질의 문화콘텐츠를 제공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이덕일의 역사의 창] 자살의 여러 유형

    [이덕일의 역사의 창] 자살의 여러 유형

    ‘삼국지’의 순욱(荀彧)은 조조(曹操)의 책사가 된 후 쫓기던 후한의 헌제(獻帝)를 조조에게 모시도록 건의했다. 그 결과 후한 조정에서 조조에게 국공(國公)의 작위와 구석(九錫)의 특례를 주어야 한다는 의논이 일었다. 국공은 국왕에 버금가는 지위고, 구석은 큰 공을 세운 제후에게 천자가 거마(車馬)·궁시(弓矢) 등 아홉 가지 물품을 내려 주는 것을 뜻한다. 순욱은 조조에게 받으면 안 된다고 말렸고 둘 사이는 멀어졌다.조조가 유수(濡須)로 진격할 때 순욱은 수춘(壽春)에 남아 있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삼국지’의 ‘순욱 열전’은 이를 ‘우울해하다 죽었다’는 뜻의 ‘우훙’(憂薨)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후한서’의 ‘순욱 열전’은 수춘에 남아 있었던 순욱에게 조조가 음식 상자를 보냈는데, 빈 그릇임을 안 순욱이 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전혀 달리 썼다. 순욱의 죽음은 황제를 꿈꾸는 조조와 후한 황실을 높이려는 순욱의 정치관의 충돌이었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자결하면 따라서 죽는 것도 인(仁)이었다. 제(齊)나라 양공(襄公)이 죽자 공자 소백(小白)과 동생인 규(糾)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관중(管仲)은 소홀(召忽)과 함께 동생 규를 지지한 반면 포숙아는 공자 소백 편에 섰다. 관중은 소백을 죽이기 위해서 활까지 쐈지만 소백은 살아남아 제 환공(桓公)이 됐다. 이에 공자 규가 자결하자 소홀은 뒤따라 죽었는데, 관중은 거꾸로 포숙아의 천거로 환공의 재상이 됐다. 그래서 자로와 자공이 공자에게 ‘소홀은 따라 죽었는데,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관중은 어질지 못한 사람입니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공자의 생각은 달랐다. 공자는 “관중이 환공의 재상이 돼 천하를 바로잡아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다. … 어찌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의 헤아림으로 도랑에서 스스로 목매 죽어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겠는가”(‘논어’ 중 ‘헌문’)라고 관중을 옹호했다. 관중이 제 환공을 도와 전쟁을 하지 않고도 큰 평화를 가져왔으니 혼자 자결한 것보다 훨씬 큰 인(仁)을 이뤘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도랑에서 스스로 목매 죽는 의미 없는 죽음’이라는 뜻의 자경구독(自經溝瀆)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왔다. 초(楚)나라 회왕(懷王) 때 굴원(屈原)은 삼려대부(三閭大夫)로서 직간하다가 좌천된 후 억울한 심정을 읊은 ‘이소’(離騷)를 지은 후 상강(湘江)에 뛰어내려 자살했다. 그 ‘이소’는 초나라 문학을 뜻하는 초사(楚辭)의 대표로서 ‘시경’(詩經) 못지않은 평가를 받는다. 굴원의 ‘이소’ 등을 부(賦)라고도 하는데, 자신의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 등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시는 많이 썼지만 부(賦)는 드물게 썼는데, 그중 하나가 ‘염우부’(鹽雨賦)다. 정조 사후 경상도 인동(仁同)의 장시경·현경 부자 등은 정조를 독살한 역적들을 제거하겠다면서 인동 관아를 습격하고 서울까지 올라가려다 저지당하자 절벽에서 투신자살했다. 그 일로 장현경의 부인은 두 딸, 막내아들과 함께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갔는데, 큰딸이 그곳에서 군졸로부터 성희롱을 당해 투신자살했다. 어머니도 투신자살하면서 따라 죽으려는 막내딸에게 “너는 관가에 알려 원수를 갚고 또 네 동생을 길러야 한다”고 말렸다. 그러나 막내딸의 신고를 받은 강진 현감 이건식과 관찰사 이면응 등은 뇌물을 받고 없던 일로 덮어 버렸다. 그 후 모녀가 자살한 7월 28일이 되면 매년 큰 바람과 해일이 일었고, 정약용이 ‘염우부’를 지어 이 모녀의 한을 위로했다. 우리 사회는 예로부터 자살을 큰 불효로 쳤기 때문에 자살자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강진의 모녀처럼 억울한 자살은 사실상 타살로서 하늘이 대신 벌해 준다는 믿음이 있었다. 근래 부정과 불법에 연루된 사람들이 잇따라 자살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풍속도다. 북송 때 시인 황정견(黃庭堅)은 ‘박박주’(薄薄酒)라는 시에서 “필부는 보배를 가진 탓에 죽고, 백귀는 고명한 집을 엿본다”(匹夫懷璧死 百鬼瞰高明)는 시구를 남겼다. 필부가 권력에 취해 무리하면 화를 입고, 잘나가는 집안은 백귀가 노린다는 것이다. 지금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전락해 자살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이 늘 되새겨야 할 교훈이다.
  • 홍준표, 친박 반발에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 비판

    홍준표, 친박 반발에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 비판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7일 박근혜 전 대통령 제명에 반발하고 있는 친박(친박근혜)계 의원들에 대해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고 비판했다.홍 대표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1993년 개혁에 저항하는 수구 세력에게 일갈한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명언이다. 혁신의 길을 멀고 험난하지만 이에 성공해야만 한국당이 산다”면서 이와 같은 글을 올렸다. 홍 대표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초래한 단초가 된 사건이 1979년 8월 신민당 원외위원장이던 유기준 등 원조 사꾸라 3인방이 차지철(전 경호실장)과 공모한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치공작의 결과로 신민당은 정치적 당수와 법적 당수로 분할돼 정운갑 대행 체재가 등장했으나 내분에 휩싸였고, 이후 YH여공 추락사건, YS 국회의원 제명사건, 부마사태, 박정희 피격으로 박정희 정권은 종식된다”고 설명했다. 정운갑 전 국회의원은 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의 부친이다. 홍 대표는 이어 “‘잔박’(잔류 친박)들은 뒤에 숨고 이름 없는 사람들을 내세워 YS 사건을 재연하려고 한다”며 “(그러나 이런 행태는) 신민당 원조 사꾸라들처럼 숨어서 공작하고 있는 잔박들의 정치생명만 단축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천명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한국당 이종길 중앙위원 등 당원 151명이 6일 제기한 ‘박 전 대통령 징계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서’와 ‘홍 대표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서’를 지칭하는 말이다. 홍 대표는 “이런 류의 공작을 예측하고 친박 핵심을 친 것인데 이를 준비하지 않고 했겠나”라며 “지금은 국민들이 잔박들보다 더 똑똑한 세상”이라고 밝혔다. 홍 대표는 또 한국당의 인터넷 방송인 ‘민경욱의 파워토크’에 출연해 “친박 청산과 보수대통합은 별개”라며 “친박 청산은 나라와 당을 이 꼴로 만들었으니 책임지고 물러나라는 책임정치의 차원이고, 바른정당 의원들의 복당은 정치적 선택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바른정당에서) 돌아오지 않는 분들은 지방선거나 총선에서 국민이 자유배신자로 심판할 것”이라며 “바른정당 의원을 추가로 영입해서 세를 불릴 생각이 추호도 없다. 국회의원의 수가 집권의 기준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홍 대표는 바른정당 의원들의 추가 탈당 가능성과 관련해 “들어오든 들어오지 않든 그것은 그분들의 정치적 선택의 문제”라고 말했고, 통합과 관련해 김무성 의원을 만났느냐는 질문에 “통화한 일도 없다”고 답했다. 한미 정상회담과 관련해서는 “미국의 현재 집권세력들이 문재인 정부를 믿지 않는다”며 “사실상 한·미 동맹을 깨는 방향으로 외교·국방 정책을 끌고 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중 양국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 봉합에 대해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방한을 앞두고 군사주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중국과 굴욕적인 협약을 맺어 참으로 유감”이라고 비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선비에 가려진 조선시대 ‘자식 바보’

    선비에 가려진 조선시대 ‘자식 바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박동욱 지음/휴머니스트/308쪽/1만 5000원20대엔 30대가 어른처럼 보인다. 30대가 되면 40대가 또 그렇다. 그렇게 40대가 돼 되돌아본들 스스로 어른이라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도 그렇지 싶다. 내가 저 나이가 되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 나이가 돼도 아버지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야 나도 아버지가 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영웅이자 ‘꼰대’인 복잡다단한 존재,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선비라는 이름 뒤에 숨겨야 했던 조선의 ‘자식 바보’ 아버지들의 모습이 담겼다. 책은 조선시대 아버지 13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개는 자식을 앞세우거나, 유배지에서 아이들과 떨어져 지낼 때의 소회 등 상실의 체험들이다. 조선시대 평균 연령은 30대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니 환갑에 가까워질수록 참척의 고통을 겪게 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었을 터다. 다산 정약용은 6남 3녀를 낳아 그중 4남 2녀를 천연두로 잃었다. 출생 후 4일부터 길게는 4년까지 살다 갔다. 그렇게 죽은 자식이 여섯이나 되니 그 아픔을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슬픈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하늘에 대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글을 쓰는 게 고작이었을까. 그는 당시의 고통을 ‘마과회통’이란 책에 여실히 남아 냈다. 문장가 김창협의 사연도 절절하다. 그는 ‘어린 자식 청상의 광지’라는 글을 통해 “피붙이가 이따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운명일 뿐”이라면서도 “뒷사람들은 이곳에 쟁기를 대어 파헤치지 말기를 바란다”며 통곡했다. 잔소리 많은 ‘꼰대’의 모습이 빠질 리 없다. 실학자 안정복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집에서는 중처럼 지내고 마을에선 아낙처럼 처신하라”며 근신을 다그친다. “중은 가난을 마다하지 않고 아낙은 늘 남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라며 아들이 듣기 싫을 법한 해설까지 곁들였다. 채팽윤은 피붙이인 친자보다 양자로 들인 아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보였고, 윤기는 ‘흙수저’만 안겨줄 수밖에 없던 아버지로서의 버거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역사 속 공익신고] 역모보다 무서운 불고지죄

    [역사 속 공익신고] 역모보다 무서운 불고지죄

    상전 부인 통정 묵인했다 교수형연산군 6년(1500년) 충청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대도(大盜) 홍길동이 체포됐다. 그는 평소 정3품 당상관이 입는 옷을 입고 수하들에게 자신을 ‘첨지’라고 부르게 했다. 대낮에도 관아를 자유롭게 출입해 아무도 그가 도적질을 한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고을 수령과 아전들은 그의 정체를 눈치채고도 위세에 눌려 이를 문제 삼지 못했다. 의금부 조사 결과 지역 관리들은 홍길동의 도적 행위를 알고도 뒷감당이 두려워 묵인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모두 홍길동을 고발하지 않은 죄로 변방에 유배됐다. 조정 내에도 당상관 엄귀손이 그와 연루됐던 사실이 확인됐다. 엄귀손은 평소 홍길동이 관리로 행세하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눈감아줬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가 한양에 거처할 집까지 마련해줬다. 엄귀손은 ‘실정을 알고도 죄인을 숨겨준 죄’에 처해져 곤장 100대에 3000리 유배형을 받고 옥사했다. ‘불고지죄’(不告知罪)란 불법 행위를 한 자를 알면서도 관청에 고발하지 않는 범죄를 말한다. 조선 시대 왕들은 이를 중대 범죄로 여겨 엄하게 처벌했다. 특히 역모 범죄의 경우 불고지죄가 큰 위력을 발휘했다. 세조 3년(1457년) 성삼문과 박팽년 등이 주도한 단종 복위가 실패했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돼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났다. 이때 그를 배웅 나온 환관 안노가 울먹이자 “나도 성삼문의 역모를 알고 있었으나 (세조에게) 아뢰지 못했다. 이것이 나의 죄”라며 환관을 달랬다. 단종도 불고지죄가 얼마나 강력하게 처벌받는지 알고 있었다. 연산 4년(1498년) 실록 편찬과정에서 김일손의 사초가 발단이 돼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발생했다. 김일손은 실록에 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이 왜곡돼 기술되자 이를 후세에 알리고자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중국 고사에 비유한 단종 애도사)을 사초(실록의 초고)에 적었다. 이 일로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유배됐다. 특히 강경서와 이수공, 정희량은 불고지죄로 곤장 100대를 맞고 3000리 밖으로 쫓겨났다. 역모죄의 경우 사전에 어느 정도까지 역모 행위를 알고 있었는지가 모호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당시 관리들은 정쟁에 희생되지 않고자 조금이라도 역모와 관련이 있는 사실을 알게 되면 즉시 왕에게 신고해 면책받으려 했다. 불고지죄는 일반 범죄행위에도 광범위하게 적용됐다. 인조 10년(1632년) 관리 김이가 상전의 부인과 통정해 온 사실을 동료 김동이 알고 있었지만 이를 관아에 고발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 사실이 발각되자 사헌부는 김동에게 불고지죄를 물어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왕에게 보고했다. 조선시대 각종 고발 방문을 보면 신고 시 보상 내역과 함께 불고지죄 적발 시 처벌 규정도 명시돼 있다. 영조 4년(1728) 조정을 비방하는 익명의 벽서가 잇따라 붙어 사회가 불안해졌다. 그러자 왕은 벽서를 쓴 사람을 제보한 자에게 은 1000냥을 주겠다고 밝히는 동시에 작성자를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은 자를 엄벌에 처한다고 압박했다. ‘당근과 채찍’을 함께 쓴 것이다.인간이라면 누구나 친한 사람이 죄를 저지르면 이를 덮어주려는 측은지심이 생겨난다. 하지만 역대 왕들은 이를 불고지죄로 엄히 다스렸다. 백성에게 ‘불법 행위를 할 경우 언제 어디서나 고발당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우려고 노력했다. ■출처:세조 3년(1457년) 6월 22일, 연산군 4년(1498년) 7월, 인조 10년(1632년) 2월 25일 곽형석 명예기자 (국민권익위원회 대변인)
  • 성북 주민 발걸음, 단종·정순왕후 넋 기리다

    성북 주민 발걸음, 단종·정순왕후 넋 기리다

    “고증에 더 신경써 소중한 문화유산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25일 오전 11시 서울 성북구 보문동 주민센터에는 옛 복식을 차려입은 150여명의 주민이 모였다. 김영배 성북구청장도 보문동 주민들을 응원하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했다. 이날 보문동 주민들은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고 지역의 무사 안녕과 평온을 기원하기 위한 ‘2017 동망봉제례’ 행사를 진행했다. 또한 지난 1월 건립한 동망각 신축을 기념하기 위해 제례봉행 퍼레이드를 벌였다. 작은아버지(세조)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열일곱 나이에 유배지 영월에서 삶을 마감한 비운의 왕 단종. 그의 비 정순왕후가 매일 조석으로 올라 영월이 있는 동쪽 하늘을 향해 단종의 명복을 빌었던 동망봉이 보문동에 있다. 지역 역사를 문화로 승화하기 위해 천종수 동망봉제례보존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보문동 주민은 매년 가을 길일을 택해 제례를 지낸다. 천 위원장은 “서울의 흔치 않은 동제(洞祭)로 마을에서 행하던 기존의 산신제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100여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설명했다. 퍼레이드에는 단종, 정순왕후, 구립취타대, 사물놀이패, 동망봉제례보존위원 등 지역 주민이 참여했다. 오전 11시 보문동 주민센터를 출발해 보문역, 동신초등학교, 동망각을 경유했다. 보도변 1차로와 보도의 교통이 통제됐다. 행렬이 동망각에 도착하자 한국무용가들이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는 살풀이 공연을 펼쳤다. 이어 제례가 봉행됐다. 앞서 지난 24일엔 지신밟기 행사가 진행됐다. 동망봉제례를 주관하는 보존위원회와 사물놀이패가 동네를 순회하며 제례의 시작을 알리고 분위기를 조성했다. 26일 오전 11시부터 동주민센터 앞에서는 지역 노인 700여명을 대상 경로행사가 펼쳐진다. 김 구청장은 “마을 역사와 문화가 공동체 활성화로 이어지는 의미 있는 행사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역사 속 공익신고] 벼슬아치 내부 비리 고발하면 노비는 양인으로 신분 올려주고 양인에겐 관직·양반에겐 승진 내려

    [역사 속 공익신고] 벼슬아치 내부 비리 고발하면 노비는 양인으로 신분 올려주고 양인에겐 관직·양반에겐 승진 내려

    세조 2년(1456년) 공주 판관 송맹연이 분대어사(임금의 명으로 지방에 파견돼 민정을 살피던 관리)에게 탄핵돼 수령 자리에서 쫒겨났다. 이 소식을 접한 아전들이 밀고자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됐다. 유력한 고발자는 관노 득만이었다. 그는 관아의 대소사를 두루 챙기는 일을 맡아 송맹연의 부정 행위를 샅샅이 알 수 있었다. 어사가 공주를 찾았을 때 몰래 그와 접촉했다는 정황도 포착됐다. 관리 이득신과 우성, 김비, 이정근이 그를 불러내 강하게 문초했다. 득만은 “나는 고발자가 아니다”라고 버텨 가까스로 풀려났다.득만은 여기에 남았다가는 더 이상 살아남기 힘들 것으로 보고 한양에 올라가 어사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어사가 세조에게 득만의 사연을 알리자 세조는 격분해 관련자 모두를 중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대신들은 난감해했다. 고발 보복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었고 득만을 고문한 이들 가운데 공신의 손자도 있어서였다. 사헌부는 고심 끝에 “왕에게 참된 것만 아뢰야 하는 ‘조당진언(阻當陳言)의 율(律)’을 적용하라”고 건의했다. 결국 왕은 조당진언의 율에 적시된 기준보다 한단계씩 낮춰 처벌했다. 이득신에게 장 100대에 3000리 유배형, 김비·이정근에게 각각 장 100대에 3년 노역형을 내렸다. 우성의 경우 공신의 손자여서 신체형 없이 파직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중종 4년(1509년) 엄동설한에 한 황해도 사람이 신무문(경복궁 북문) 밖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며 격쟁(꽹과리나 북 등으로 주변을 시끄럽게 해 왕의 이목을 끄는 행위)을 했다. 그가 행대감찰(지역을 다니며 비위를 살피는 감사)에게 고을 수령의 비리를 고발했는데, 수령이 이 사실을 눈치채고 복수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왕은 이 사안을 조사해 그가 보복받는 일이 없게 하라고 명했다. 역대 왕들은 진실한 언로를 확보하는 것이 민심을 얻는 데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성종 19년(1484년) 한 사헌부 간관이 왕에게 “대신 김석이 어머니 상(喪) 중에 기생을 끌어들였다”며 탄핵했다. 왕이 조사 경위를 묻자 그는 “어떤 관리에게서 전해 들었다”라고 답했다. 왕은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고 재차 추궁했지만 간관은 더 이상은 밝힐 수 없다고 맞섰다. 결국 그는 옥에 갇혔다. 사헌부는 왕에게 “김석 건을 제보한 이는 관리 권건”이라고 밝힌 뒤 “이런 식으로 제보 출처가 밝혀지면 간관들은 ‘들을 곳’이 없어져 조정 내 언로도 막힌다. 앞으로 대간의 말 출처를 밝히는 것은 불가하다”는 공식 입장을 냈다. 머쓱해진 성종은 한 발 물러나 옥에 가둔 간관을 풀어줬다. 이런 진통 끝에 조정에는 간관이 왕에게 말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 전통이 생겨났다.고발자를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발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경제적·사회적 어려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조선 시대에는 내부고발자에 대해 “그가 노비면 양인으로 풀어주고, 양인이면 관직을 주며, 관리면 승진시킨다”는 보호책을 썼다. 고발자에 대한 직접적 보복만을 막아주는 소극적 보호책에 머물고 있는 지금보다 훨씬 앞선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도 조선의 사례를 거울삼아 신고자의 어려움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더 크게 포상하는 방식으로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 ■출처:고려사 권85, 형법지2, 포도조(捕盜條), 세조 2년(1456년) 3월 8일, 성종 19년(1488년) 1월 14일, 중종 4년(1509년) 1월 15일 곽형석 명예기자(국민권익위원회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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