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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비의 빈집, 대부의 정원… 마주 앉은 군자의 道

    선비의 빈집, 대부의 정원… 마주 앉은 군자의 道

    ●안동 권씨를 명문가로 발전시킨 사대부 권벌의 닭실마을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4대 길지라는 마을들을 꼽았는데, 경주 양동, 안동 하회와 내앞, 그리고 봉화의 닭실이다. 특히 닭실(유곡)마을은 ‘금계포란형’이라 하여, 마을을 감싸는 앞뒤 산이 닭 모양을 하고, 닭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명당이다. 예나 지금이나 집의 가치를 평가하는 최우선 조건은 그 집이 서 있는 위치, 즉 입지이다. 똑같은 크기와 구조의 아파트가 입지에 따라 수십 배 가격 차이가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지금이야 학군, 상권, 교통 등 인위적인 조건을 최우선으로 꼽지만, 과거에는 산과 강, 들판과 숲으로 이루어지는 자연 조건이 중요했다. 명당은 경제적 풍요를 가져오고 위대한 인물을 배출한다고 믿었다. 달걀을 품어 금병아리를 부화한다는 믿음대로, 닭실은 이곳에 사는 안동 권씨 가문을 최고의 명문가로 발전시켰다. 이 마을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사대부 권벌(1478~1548)에서 시작한다. 그가 지은 종가가 실질적인 권씨 가문의 시작이었으며, 대를 이어 후손들의 주거지가 이 마을을 이루었다. 터만 좋다고 명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상을 받들어 효를 실천하고(봉제사), 손님들을 환대해(접빈객) 사회적 관계망을 이뤄야 한다. 무엇보다 구성원 개개인이 학문을 익히고 인격을 닦아 뛰어난 인물이 돼야 한다. 권벌은 종가 옆에 충재라는 서재를 지어 수양공간으로 삼았고, 청암정을 지어 벗들과 교류하는 정원으로 삼았다. 그의 아들인 권동보는 마을 어귀에 큰 규모의 석천정사를 지어 학문 연마와 교육의 장소로 만들었다. 더 나아가 인근에 부친을 모신 삼계서원을 건립해 가문의 학문과 효를 향촌 공동체의 정규 시설로 승화시켰다. 또한 마을의 뒷산, 재궁골에 충재와 그 선대조상을 모신 선산을 마련하고, 묘 아래에 추원재라는 재실을 지었다. 종가와 별당, 선산과 재실, 정사와 서원까지, 명문가와 명문마을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구비한 것이다. 닭실은 권벌이 터를 세우고 권동보가 완성한, 부자가 대를 이어 발전시킨 마을이다. 닭실마을의 원래 입구는 석천정사가 있는 석천계곡이다. 절경을 이루는 경치와 아늑한 분위기를 가진 환상적인 장소다. 계곡 입구 너럭바위에 한자 초서로 ‘청하동천’이라는 네 글자가 붉은색으로 새겨져 있다. 권벌의 5대손 권두응의 글씨다. ‘청하’란 해지기 직전 반짝 나타나는 맑고 찬란한 푸른 노을을 뜻한다. ‘동천’이란 신선들이 영생을 사는 도교의 이상향이다. “순간의 찬란함을 영원히 지속하는 곳.” 청하동천의 깊은 뜻이기도 하고, 닭실마을의 꿈같은 바람이기도 하다. ●권벌의 인격을 드러내는 양용삼칸 ‘충재’·팔작지붕 ‘청암정’ 사대부의 ‘사’는 선비이고 ‘대부’는 벼슬아치다. 사로서 고향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대부로서 세상에 나아가 경륜을 펼쳐 나라를 이롭게 한다. 성리학을 통해 깨달은 진리를 목숨을 걸고 실천하는 지행합일의 인간이 진정한 사대부다. 충재 권벌은 영의정에 추증될 정도의 최고위 관료였고, 진정한 선비로서도 추앙을 받은 인물이다. 연산군의 폭정기간에 무오, 갑자사화로 이미 많은 선비들이 처참하게 피해를 입었다. 사화란 ‘사림지화’, 즉 선비 무리에 대한 박해를 의미한다. 권벌이 30세로 관직에 오른 때는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이듬해였다. 조광조 등 급진사림파와 반정의 주인공인 훈구파의 대립이 극심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온건사림인 권벌은 두 세력의 중재를 꾀했으나, 42세 때 기묘사화로 결국 파직을 당한다. 낙향해 터를 잡은 곳이 바로 닭실마을이다. 충재와 청암정을 지은 것도 이때, 14년의 은거생활 중이었다. 1533년 56세에 복직했다가 68세에는 을사사화 때 직언으로 다시 파직당한다.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2년 후 이른바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평안도 삭주로 귀양 갔다가 유배지에서 71세 나이로 운명했다. 이 사건은 을사사화의 승자인 집권 소윤세력이 나머지 잠재적 정적들까지 말살하려 조작한 역모사건이었다. 권벌뿐 아니라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등 20여명의 큰 선비들이 화를 입었고, 이들은 후대에 국가적 추앙을 받게 된다. 서재로 지은 충재는 권벌의 인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건물이다. 2칸 온돌과 1칸 마루의 총 3칸, 지붕도 가장 간단한 맞배지붕이다. 선비들은 자신의 거처가 이른바 ‘양용삼칸’, 즉 부엌-방-마루의 3칸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은 과욕이요, 낭비다. ‘비어 있는 집’이라는 이름답게 장식도 일절 없고, 오로지 극히 필요한 것만 갖추었다. 권벌의 호는 충재요, 자는 중허다. 모두 ‘비어 있다’는 뜻이다. 세속적인 욕망을 비워 내야 성리학의 도를 깨우칠 수 있고, 국가적 공익을 담을 수 있다. 권벌은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비어 있는 충재를 지었다. 아무 기교도 없는 것 같지만 문짝 하나의 모양, 부재 하나의 위치도 의미 없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최소의 물질로 만든, 그러나 선비정신으로 가득한 집이다. 반면 바로 뒤의 청암정은 크기나 형태가 대조적이다. 큰 거북모양의 바위 위에 10칸의 丁자형 건물을 얹은 모습이다. 추녀선을 활짝 펼친 팔작지붕에 단청까지 칠한 화려한 정자다. 거북바위 주위로 둥그렇게 인공 수로를 만들었다. 마치 연못 안의 섬에 정자를 세운 모습이 된다. 물 가운데 있는 정자는 ‘사’()라 하여 매우 귀한 정원 건축으로 친다. 보통의 정자는 멋진 바위를 즐기도록 건너편에 짓는데, 이처럼 바위 위에 올라탄 건물은 극히 드물다. 충재는 그토록 소박하게 만들었는데, 청암정은 왜 이런 호사를 부렸을까? 아마도 충재가 선비(사)의 청빈정신을 드러내는 집이라면, 청암정은 관료(대부)의 호연지기를 발하는 집일 것이다. 사와 대부가 사대부의 양면이듯이, 충재와 청암정은 권벌이 가진 두 방향의 정신세계를 표상하는 집이다.●선비의 피서법… “고요하니 시원하고 비워 두니 서늘하다” 공자는 군자의 조건과 즐거움을 논어 첫머리에서 밝혔다.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을 알고, 먼 곳의 친구를 만나는 것을 기뻐하며, 그리고 남이 나를 무시해도 화내지 않는 이가 군자라고 했다. 맹자는 더 나아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을 더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서재를 마련하고, 친구들과 교우하기 위해 정자를 짓고 정원를 가꾸며, 후학을 기르기 위해 정사와 서원을 세우는 수고는 모두 군자가 되기 위한 투자다. 선비의 궁극적인 롤 모델은 바로 군자이며, 산과 계곡을 거닐며 심신을 수련해 군자가 되려고 평생 노력한다. 이는 곧 선비들의 이상적인 은거생활이었다. 닭실의 충재와 청암정, 석천정사와 삼계서원은 은거생활을 위한 필요충분 시설이었다. 또한 선비는 지역 사회의 지도자로서 용모를 단정하게 하고, 타의 모범이 되도록 조신하게 행동해야 했다. 한여름에도 몇 겹의 옷을 껴입고, 머리에는 갓을 써야 했다. 아무리 정신적인 존재라지만 푹푹 찌는 더위를 어떻게 견뎠을까? 정약용은 ‘소서팔사’에서 8가지 대표적인 선비들의 피서법을 소개했다. ‘대자리 깔고 바둑 두기/소나무 아래서 활쏘기/빈 누각에서 투호놀이/느티나무 그늘에서 그네 타기/연못에서 연꽃 구경하기/숲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비 오는 날 한시 짓기/달 밝은 밤에 탁족하기.’ 다산이 제시한 피서법은 무언가에 몰입해 더위를 잊는 방법이다. 몰입을 위해서는 우선 좋은 환경이 필요하다. 대자리와 누각 같은 인공 환경, 숲과 계곡 같은 자연환경이 조건이다. 연못의 정원, 누각과 정자와 같은 건물은 더위를 피하기 위한 필수 시설이었다. 권벌은 더운 여름날, 청암정에 올라 시를 짓고, 주변 연못의 연꽃을 바라보며 더위를 잊었을 것이다. 그의 후손들은 석천정사에서 공부하다가, 그 앞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더위를 식혔을 것이다. 맹자가 말했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는다.” 이른바 탁영과 탁족은 선비들의 비교적 적극적인 피서법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너무 소극적이다. 갓과 옷을 벗고 냇물에 온몸을 담그지 않는다. 탁족은 오히려 물이라는 자연을 적극적으로 느끼며 자연에 몰입함으로써 더위를 잊는 방법일 것이다. 몰입은 고요한 가운데 정신을 집중하는 지극히 정적인 활동이다. 중국 시인 백거이는 더위를 쫓는 또 다른 방법을 시로 지었다. “마음이 고요하니 열기 흩어지고, 방안이 텅 비어 서늘함이 감도네.” 고요함은 시원함을 일으키고, 비움은 서늘함을 가져온다. 왜 충재는 비어 있고 청암정은 고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권벌이 잊고 싶었던 것은 더위만은 아니었다. 모략과 배신 따위의 온갖 세속적인 찌꺼기들을 비우고 잊기 위해, 자연 속에서 자기 수양에 몰입했을 것이다. 선비에게 피서법은 곧 은거법이었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생강으로 정치를 생각하다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생강으로 정치를 생각하다

    실낱같은 목숨을 “차, 생강, 막걸리 따위로 겨우 부지해 간다”(茶薑紅麯與相依)고 제주 유배인 김정희는 말했다. 그는 이 가운데 특히 생강을 적극적으로 먹었던 것 같다. 가장 좋은 반찬으로 “두부, 오이, 생강, 나물”(大烹豆腐瓜薑菜)을 꼽았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김정희는 비교적 장수를 했다. 송시열도 제주도에 유배를 와서 생강 농사를 지었다. 1772년에 세워진 유허비에 보면 “하루는 지팡이를 들고 뜰을 둘러보고 빈 땅에 손수 생강을 심었다”고 했다. 이제 곧 사약을 먹고 죽게 될 사람이 왜 생강을 심었는지 모르겠다. 포항에서 유배살이할 때도 “뜰 앞에 작은 채소밭을 만들어 놓고 밭 가운데 생강을 심었다”고 했다. 이처럼 생강을 중시했다. 물론 그 덕분인지 그도 장수를 했다. 생강이 몸에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효능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귀중하고 소중한 식재료이자 약재임이 분명하다. 필자도 생강차는 물론 꿀에 잰 생강절편을 좋아한다. 특히 막걸리를 사 가면 안주로 어머니가 만들어 내놓으시는 생강김치야말로 최고의 별미다. 생강 맛의 기묘한 탄산음료도 있다지만 아직 마셔 보진 못했다. 해로움보다 이로움이 많은 것이 생강이다. 그런데 김정희나 송시열이 생강을 좋아한 것이 비단 건강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화합할 줄 알며, 자기 색을 잃지 않는 생강이 되라”고 했던 이율곡의 충고처럼 자기 향과 맛을 강하게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음식들을 만나면 과감히 화합해서 새로운 맛과 향을 만들어 내는 그런 ‘생강 같은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자기의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남들과 과감히 화합할 줄 아는 삶. 바로 그것이 ‘생강 같은 삶’이다. 결코 쉽지 않은 삶이다. 이런 점에서 김정희는 성공했다. 그의 유배생활을 필자는 한마디로 “추사는 불행했지만 제주는 행복했다”고 정리한다. 그는 불행한 유배인이었지만 유배지 주민들과 잘 어울리고, 그들을 제자로 삼아 격려하고 가르쳐 준 덕분에 제주는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삶을 살면서 자기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문제는 자기도 행복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지 못한 경우다. 최근의 우리 정치권이 그렇다. 여야가 정면충돌하면서 국회 파행이 장기화되고 있다. 자기 당에 대한 고집과 막말로 화합이 전혀 안 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도 전혀 행복하지 못한 상황이다. “화합할 줄 알며, 자기 색을 잃지 않는 생강이 되라”던 충고가 새삼스럽다. 우스개일지 모르지만 정치권 양반들은 생강을 먹어 본 적이 없는 게 확실하다. 그렇다면 국회 식당의 요리사가 문제다. 생강의 인문학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국회 파행을 지켜보면서 절묘한 생강 요리로 국회의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어야 했다. 어쩌면 그런 노력을 했지만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우리 국회는 생강 요리 하나로 회복되기에는 이미 살벌한 투쟁장으로 변한 지 오래기 때문이다. 생강의 힘은 조화의 힘이다. 단순히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고 친하게 지내는 것만이 조화가 아니다. 대종교의 논리를 빌리자면 조화하지 못한다는 것은 창조의 원리를 어기는 것이고, 파탄의 길을 가는 것이다. 조화야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장수하게 하는 묘수다. 과감히 조화하지 못하면 제주 유배인 최익현의 지적처럼 “이욕(利欲)이 넘쳐 나고, 의리가 어두워져 밤낮으로 괴이한 데로만 치달리고, 예의와 염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돼 결국 모두가 파국을 맞게 된다. 모쪼록 생강을 통해 정치를 생각해 보자.
  • 여성해방 진두지휘, 6·10만세운동 주도…파란만장했던 ‘최고 미인’

    여성해방 진두지휘, 6·10만세운동 주도…파란만장했던 ‘최고 미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대표적인 인물은 이동휘(대통령장,1995년) 선생이다. 2005년 3·1절에 몽양 여운형(대한민국장) 등 사회주의 계열 54명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는 등 2007년까지 다수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훈장을 받았다. 그중에 주세죽이 있다. “남로당 총책 박헌영의 부인. 코뮤니스트. 당대의 ‘얼짱’. 3·1만세운동과 6·10만세운동에 참여한 항일투사. 여성해방운동가.” 주세죽의 일생은 파란만장하고 비극적이다. 주세죽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돼 왔다. 수년 전 손석춘 작가의 ‘코레예바의 눈물’과 조선희 작가의 ‘세 여자 이야기’를 통해 생애가 알려졌다. ‘코레예바의 눈물’은 손 작가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여행을 갔다가 발견한 주세죽의 자필 기록을 토대로 쓴 소설이다.주세죽은 함남 함흥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으로는 1901년생이다. 중농 집안에서 태어난 주세죽은 영생여학교 고등과에 다녔고 피아노 실력이 출중했다고 한다. 1919년 3월 3일 함흥 장날,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주세죽도 참가했다가 붙잡혔다. 한 달 동안 입에 담기 어려운 모멸적인 성고문을 받고 출소했다. 풀려난 주세죽은 함흥 시내 병원에서 간호 보조원으로 일했다. 일본인 의사의 성추행에 또다시 진저리를 친 주세죽은 중국 상하이 유학을 결심했다. 그곳에는 한 살 아래 친구 허정숙이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피아노를 공부하러 간 상하이에서 주세죽의 운명은 바뀌게 된다. 허정숙의 소개로 박헌영을 만났다. 박헌영, 김단야 등은 주세죽이 오기 한 달 전인 1921년 3월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했다. 박헌영은 책임비서였고 주세죽도 고려공청에 가입해 기관지 ‘올타’를 편집하는 등 사회주의 활동을 벌였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동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박헌영을 뒤따라 주세죽은 1922년 3월 조국으로 돌아왔다. 조국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벌이겠다는 의지에 불타 있었다. 먼저 갔던 박헌영과 허정숙의 남편 임원근, 김단야는 귀국 정보를 알아낸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세 사람은 각각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됐다. 주세죽은 여성해방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당대 조선 최고의 미인으로 통했다. 박헌영의 친구인 소설가 심훈은 대리석으로 깎은 얼굴이라고 했다. 주세죽을 모델로 ‘동방의 애인’이라는 소설도 썼다. 주세죽, 허정숙, 김단야의 동거녀 고명자를 당시 언론은 여성 트로이카라고 불렀다.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은 남자 삼총사였다. 주세죽과 허정숙은 반봉건, 여성해방의 뜻으로 단발머리를 했다. 주세죽은 허정숙, 정종명 등과 함께 1924년 5월 서울 천도교회관에서 조선여성동우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여성 노동자들의 인권 향상을 위한 조직이었다. 고무공장, 비단공장, 정미소를 찾아다니며 강연회와 토론회를 열었다. 여성 항일운동단체 근우회에도 동참했다. 1925년 5월 조선공산당이 출범했다. 조선공산당을 추동할 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도 창립했다. 박헌영이 고려공청 책임비서를 맡았고 주세죽은 후보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우발적인 술자리 사고로 조직이 탄로 났다. 김단야만 피신했고 주세죽, 박헌영, 임원근, 허정숙이 검거됐다. 주세죽은 증거 부족으로 한 달 만에 풀려났다. 순종의 국장일인 1926년 6월 10일, 주세죽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또 보름 만에 풀려났다. 주세죽은 만세운동을 기획한 공청 중앙위원이었지만, 박헌영이 아니라고 보호했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정신이상자가 됐다. 그러나 이는 위장이었다. 박헌영은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주세죽과 박헌영은 요양을 이유로 함흥으로 간 뒤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로 배를 타고 탈출했다. 임신한 주세죽은 도착하자마자 딸 영(影)을 낳았다. 1928년이었다. 그해 11월 두 사람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김단야가 먼저 가 있었다. 김단야는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조선담당관이었다. 주세죽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박헌영은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했다. 박헌영은 주세죽에게 ‘코레예바’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지어줬다. 고려의 여성이라는 뜻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두 사람은 1932년 초 딸을 국제유아원에 맡겨놓고 상하이로 갔다. 영에게 ‘비비안나’라는 다른 이름을 지었다. 상하이에서 주세죽은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활동을 지원하고 기관지를 국내로 들여보냈다. 이듬해 7월 박헌영은 체포됐다. 그 사이 주세죽과 김단야는 도망쳤다. 김단야는 박헌영이 고문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주세죽을 연모한 김단야의 거짓말이었다. 그러고는 사랑을 고백했다. 둘은 1934년 1월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박헌영이 죽었다고 믿은 주세죽은 김단야와 결혼했다. 1937년 소련은 일제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씌워 김단야를 체포했다. 이성태란 사람의 모함이었다. 이듬해 2월 13일 석 달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주세죽도 5년 유배형을 받았다. ‘제1급 범죄자의 아내로서 사회적 위험분자’라는 죄목이었다. 1938년 5월 주세죽은 유배지 카자흐스탄으로 떠났다. 김단야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은 유배지에 도착하자마자 병에 걸려 죽었다. 유배지 크질오르다는 사할린에서 활동하던 홍범도 장군이 강제이주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광복 후 지하에서 활동하던 박헌영은 월북한 뒤 1946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주세죽은 프라우다지에 난 기사를 보고 박헌영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당시 18세이던 비비안나에게 아버지임을 알렸다. 박헌영은 주세죽이 유배된 사실을 알고 최대한의 배려를 요청했다. 주세죽은 그다음 날 거주 제한이 풀렸다. 박헌영은 비비안나를 만났다. 그러나 주세죽을 만날 의사는 없었다. 주세죽은 스탈린에게 조선으로 보내달라는 청원서를 보냈다. 스탈린은 거부했다. 주세죽은 딸에게로 가다 병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휴전 회담이 한창이던 1953년 나이 52세 때였다. 두 남자를 똑같이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3년 후 죽임을 당했다. 주세죽의 첫 남편은 미제 스파이, 두 번째 남편은 일제 스파이로 몰려 죽은 것이다. 허정숙은 북한 문화선전상,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남북적십자회담 대표 등을 지내고 1991년 89세로 사망했다. 고명자는 일제의 고문으로 원치 않는 전향을 했다가 친일적인 글을 쓰기도 했고 6·25 전쟁 중에 사망했다.1989년 소련 당국은 주세죽과 김단야를 사면했다. 1991년 박비비안나는 한국을 방문했다. 박헌영의 고향 충남 예산에서 가져간 흙을 주세죽의 묘비에 뿌려줬다. 비비안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무덤이라도 있는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행복한 편입니다.” 비비안나는 무용수와 대학교수로 활동하다 2013년 사망했다.우리 정부는 2007년 주세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단야에게는 독립장을 추서했다. 임원근은 앞서 1993년 애국장을 받았다. 중국 태행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사망한 윤세주(독립장)와 진광화(애국장)도 건국훈장을 받았다. 님 웨일스 ‘아리랑’의 실제 주인공 김산(장지락)에게도 2005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그러나 아직도 복권되지 못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많다. “‘빨갱이’에게 무슨 훈장이냐”는 우파의 공격을 받고 있다. 전쟁과 분단을 겪은 현실에서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념의 무덤에서 독립유공자를 파내는 일을 멈춰선 안 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취해 있지 않고 깨어서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취해 있지 않고 깨어서

    북한이 평안도 구성에서 미사일을 발사했다. 숙종 때 구성에서 유배살이하던 송시열의 제자 이선은 세상이 취해 있지만 홀로 깨어 있겠다는 뜻에서 자신의 유배지를 ‘깨어 있는 집’ 즉 ‘성와’(醒窩)라 이름 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비상시국에 당연히 우리도 깨어 있어야 한다. 태평성대를 이끈 세종대왕 때는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년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어떻게 된 것이 오늘 우리의 형편은 3년도 편안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무엇이 문제인가. 많은 경세가와 평론가들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만 지엽적일 뿐이다. 요즘 마약 문제가 연일 터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병들었다는 방증이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가 호문쇄연(虎門鎖煙)이다. 아편이 중국 민생에 심각한 피해를 주자 임칙서(林則徐)가 1839년 영국 상선에 실려 있던 아편을 전부 거둬들여 호문의 모래사장에서 불태워 버린 사건을 말한다. 임칙서는 아편 반대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낡은 중화사상에서 벗어나 세계로 시야를 넓힐 것을 중국인들에게 외쳤다. 그러나 아편전쟁이 터지고 중국이 잇달아 패배하자 조정은 그 책임을 임칙서에게 물었고 결국 신강성 우루무치로 유배를 당한다. 귀양길에 오르며 친구 위원(魏源)에게 자료들을 넘겨주면서 세계지리서인 ‘해국도지’(海國圖誌) 편찬을 부탁했고 1842년에 출간된다. 1845년 추사 김정희는 보물이라며 제주도 유배 중에 제자인 이상적을 통해 이 책을 구해 읽는다. 우리는 마약 문제 해결을 검찰과 경찰에만 맡기고 있다. 중국의 임칙서와 같은 기개와 예지가 있는 영웅이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모두 자기 밥그릇 싸움에만 혈안이다. 정치는 혹세무민의 포장이 된 지 오래고, 경제는 민생을 외면하고 있다. 사회가 병드는 게 당연하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지만 우리에겐 영웅이 없다. 잘못된 교육 탓이다. 며칠 전 어버이날에 조사된 것을 보니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현금이고 받기 싫은 것이 책이라고 했다. 책은 멀고 돈은 가까운 시대가 도래했다. 조선에서 유일하게 부부 문집을 간행했던 정조 때 홍인모 부부는 자녀들과 함께 독서하면서 늘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특히 아버지는 맏이에게, 맏이는 둘째에게 둘째는 막냇동생에게 읽어야 할 책 목록을 선물했는데 이른바 ‘홍씨독서록’이다, 이 덕분에 아들 3형제는 훌륭한 관료가 됐고 딸은 저명한 시인이 됐다. 집안이 잘되기를 바라는 욕심이 가장 큰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래도 과거에는 책의 교육을 선택했지만 지금은 현금에 의한, 현금을 위한, 현금의 교육만을 선택하고 있고 그것이 이른바 ‘SKY캐슬’ 교육이다. 인사청문회를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탈락은 했지만 주택 투자와 절세의 달인이라 평가받는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가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아 송구하다”며 청문회에 앞서 설레발을 쳤다. 정말 송구하다면 애초 후보 수락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고위공직자들마다 제주유배인 최익현이 말했던 것처럼 “이욕(利欲)이 넘쳐 나고 예의와 염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공직윤리가 없는 것은 가정과 학교 교육 탓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세종대왕과 임칙서처럼 공동체를 염려하는 영웅이 탄생할 수 없다. 결국은 교육이다. 북한 미사일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정치나 민생 경제를 위해서도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다. 기성의 질서에, 기성의 문법에 취해 있지 않고 깨어서 새 말, 새 몸짓으로 새 세상을 열기 위한 새로운 접근과 새로운 시도가 진정 시급하다.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흔한 것이 귀한 것이니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흔한 것이 귀한 것이니

    “봄은 자유롭다. 자 봐라, 꽃 피고 싶은 놈 꽃 피고,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라고 시인 오규원은 말했다. 과연 봄이 무르익었다. 버들이 연둣빛이다. 추사 김정희의 인장 가운데 ‘양류당년’(楊柳當年)이 있다. “버들처럼 무성하던 그때”라는 뜻이다. 김정희가 가장 활발하던 시기를 상징한다. 누구에게나 물오른 버들처럼 푸른 시절이 있다. 그러나 꿈처럼 그 시절은 간다. 귀한 것들이 흔할 때가 봄이다. 충암 김정은 “산나물로는 삼백초와 고사리가 가장 많았다”고 했다. 300가지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그 귀한 삼백초가 제주도에 흔한 것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 추사의 편지에도 “산채는 더러 있으나 본디 여기 사람은 먹지 않으니 괴이한 풍속이오”라고 했다. 산나물을 먹지 않는 제주 사람들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흔하기 때문이었다. 흔한 것을 이용한 귀한 행사가 있다. 제주 고사리축제가 그것이다. 제주 5현 가운데 한 사람인 동계 정온은 10년을 귀양살이했다. 이 긴 시간 동안 제주 여인 강씨가 고사리를 꺾으며 도왔던 덕분에 동계는 무사히 유배를 마쳤고, 말년에는 덕유산 자락에 “고사리를 꺾는 집”이라는 뜻의 채미헌(採薇軒)을 짓고 살았다. 이렇게 사랑과 정성은 물론 의리와 절개의 스토리가 제주 고사리와 함께 자란다. 흔한 것이 귀한 거라고 한다. 그러나 흔하기에 그 가치를 모르거나 잊고 지내기 십상이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 강진은 “바닷가라서 좋은 채소는 적고, 좋다는 것은 쑥갓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쑥갓처럼 영양소가 풍부한 나물도 드물다. 또한 그가 좋아했던 것 중 하나가 아욱국이다. 맛이 너무 좋아 문을 걸어 잠그고 먹는 것이 ‘가을 아욱국’이고 그래서 막내 사위만 준다 했지만 ‘봄 아욱국’도 만만치 않다. 그 흔한 쑥갓과 아욱이야말로 귀한 나물이었던 것이다. 흔하지만 처리에 따라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봄에 흔한 꽃이 진달래다. 그러나 정조 때 권상신은 국수에다 진달래를 멋들어지게 얹힌 “진달래국수가 맛이 매우 좋았다”며 입을 다셨다. 어디 그뿐이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삼짇날이면 화전을 안주 삼아 술을 걸치는 전화음(煎花飮)의 풍습이 있었다. 화전 가운데 으뜸이 진달래전이었다. 함열에서 귀양 살던 허균도 봄날 별미로 진달래전을 꼽았다. 봄철 바닷가에는 갯무라는 ‘야생 무’ 꽃 또한 흔하다. 야생 무를 포르투갈에서는 사라마구라고 한다. 1998년 노벨문학상 작가인 조제 사라마구(Jose de Sousa Saramago)의 이름이기도 하다. 71세에 발표했던 소설이 교황청과 갈등을 빚자 정부는 유럽문학상에 선정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데, 이에 반발한 사라마구는 스페인의 란사로테로 자발적 유배를 가 버린다. 여기서 75세에 발표한 작품이 그 유명한 ‘눈먼 자들의 도시´다. 그러니까 갯무는 흔한 꽃이 아니라 가장 귀한 꽃인 셈이다. 몸소 귀하게 여길 때만 흔한 것도 귀해진다. 우암 송시열은 장기에서 귀양살이할 때 “뜰 앞에 작은 채소밭을 만들어 놓고 친히 스스로 모종을 심고 풀을 벴다. 또한 밭 가운데 생강을 심었다”라고 했다. 제주에서도 몸소 농사를 지었다. 아마도 “내가 지어야 할 농사를 내가 지어서 내 삶을 보살피고, 내가 가진 책을 내가 읽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 마음대로 하며 내 인생을 마치려 한다”라고 했던 제주 유배인 유언호와 같은 자세라면 가장 흔한 것도 가장 귀한 것이 될 것이다. 봄이 가기 전에 그래야 한다.
  • ‘해치’ 정일우, 한승현 충격 죽음에 핏줄 선 오열 “형님”

    ‘해치’ 정일우, 한승현 충격 죽음에 핏줄 선 오열 “형님”

    SBS ‘해치’ 정일우가 ‘경종’ 한승현의 충격적인 죽음에 처절하게 오열했다. 60분 내내 브라운관 압도한 미친 몰입도와 함께 혼란스러운 조정에서 ‘왕세제’ 정일우가 앞으로 펼칠 활약에 관심이 치솟는다. 지난 8일(월) 방송된 SBS 월화드라마 ‘해치’ 33회, 34회에서는 경종(한승현 분)이 끝내 밀풍군(정문성 분)의 계략에 의해 죽음을 맞아 충격을 안겼다. 특히 이 과정에서 왕세제 이금(정일우 분)이 자신에게 향할 비난과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내의원의 탕제를 물리는 등 경종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해 눈길을 끌었다. 이날 이금은 내의원에서 혈흔이 발견됐다는 사실을 확인, 그 배후에 밀풍군이 있을 수 있다는 의혹을 품었다. 이에 이금은 갑작스레 병환이 악화된 경종에게 내의원 탕약을 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다. 하지만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은 없는 상황. 이금은 박문수(권율 분)에게 밀풍군과 위병주(한상진 분), 도지광(한지상 분)의 재조사를 지시했고, 내의원을 긴급 수색했다. 하지만 이는 이금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는 사안이었고 그를 향한 신료들의 반발은 거셌다. 탕약에 독이 사용됐을지 모른다는 의혹은 있으나, 이가 밀풍군의 소행이라는 점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경종의 병세 악화를 눈 앞에서 지켜만 봐야 하는 것. 이금은 내의원을 대신해 도성의 명의를 불러냈지만 그 또한 병의 원인조차 찾지 못하는 절체절명 위기가 이어졌다. 특히 조태구(손병호 분)는 “주상전하의 병을 치료할 의지는 있으신 것이옵니까”라며 이금을 능멸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중전(송지인 분) 또한 “세제의 처분을 납득할 수 없다”며 분노했다. 이에 민진헌(이경영 분)은 현실적인 충언을 건넸다. 그는 “장차 군왕이 되고자 한다면, 불구덩이는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명백한 진실도 외면할 수 있는 것. 때론 그것이 진짜 책임일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라며 일침했다. 하지만 이금은 “책임을 피해야 한다면. 그런 것이 군왕이라면. 난 차라리 그 길을 가지 않을 것이다”라며 이 또한 자신이 감내해야 할 길임을 되새기는 등 왕세제으로서 소신을 드러냈다. 사방에서 이금을 향해 날을 세울 때 인원왕후(남기애 분)가 힘을 보탰다. 특히 인원왕후는 궁녀 수업을 받고 있던 여지(고아라 분)를 궐 안으로 불러 대비전의 나인으로 삼는 등 향후 이뤄질 이금과 여지의 재회에 관심을 높였다. 그런 가운데 이 모든 것이 밀풍군의 계략이었음이 실제로 드러나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밀풍군은 채윤영(배정화 분)을 앞세워 내의원 수의녀에게 해독제가 없는 극독을 탕재에 넣게 한 것. 더욱이 밀풍군은 이금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경종을 살리기 위해 탕약을 물릴 것이라는 것을 예측했고, 이로 인해 경종이 죽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탕약을 금한 이금의 잘못된 선택이 될 것이라는 악마 같은 계략을 그려냈다. 특히 채윤영이 해당 수의녀를 독살하며 증험을 입증할 결정적인 증인까지 사라지게 됐다. 무엇보다 끝내 경종이 죽음을 맞이해 충격을 안겼다. 경종은 “그만 애쓰거라. 너는 부디 만백성을 위한 좋은 왕이 되어다오. 나는 될 수 없었던 내가 꿈꿨던 그런 왕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이후 경종을 붙잡고 처절하게 오열하는 이금의 모습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특히 스스로 살을 도려내 경종에게 자신의 피를 수혈하는 이금의 모습이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 과정에서 정일우는 얼굴의 핏줄이 곤두설 만큼 고통에 찬 절규로 보는 이들까지 눈물을 쏟게 만들었다. 더욱이 “형님”이라는 짧은 울부짖음 속에서 경종을 향한 아우의 깊은 우애가 드러나 마음을 아리게 했다. 그런 가운데 남인인 이인좌(고주원 분)가 첫 등장해 이목을 끌었다. 특히 이인좌가 유배지에 있는 위병주를 찾아가 또 다시 파란이 일어날 것이 예고돼 긴장감을 높였다. 그런가 하면 조태구와 소론이 대비전에 몰려가 “저하께선 이 나라의 왕이 될 자격이 없으십니다”라며 집단 반발해 위기 속 이금이 앞으로 보여줄 행보에 관심을 높였다. SBS 월화드라마 ‘해치’는 오늘(9일) 밤 10시에 35회, 36회가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바람처럼 자유롭게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바람처럼 자유롭게

    전설의 유배지 탈출기, 영화 ‘빠삐용’(Papillon)이 다시 만들어져 개봉됐다. 스티브 매퀸과 더스틴 호프먼이 열연하던 영화 장면들이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 있어서 나는 새로 만들어진 영화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1973년에 제작된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 유명한 탈출 장면과 ‘바람처럼 자유롭게’(Free as the wind)라는 주제곡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빠삐용´은 앙리 샤르에르라는 실제 인물의 자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샤르에르는 1930년 살인 사건에 연루돼 누명을 쓰고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의 섬’(Devil’s Island)에 유배된다. 13년간 그는 아홉 번에 걸친 치열한 시도 끝에 마침내 그 섬을 탈출한다. ‘악명 높은 세계 10대 유배지’ 가운데 하나인 ‘악마의 섬’은 1854년 나폴레옹 3세가 유배지로 지정한 이래 1940년대까지 8만여명의 죄수가 수감됐고, 사망률이 워낙 높아 사형수들의 목을 자르는 ‘건조한 기요틴’이라 불릴 정도였다. 유배지 탈출의 예는 비단 ‘빠삐용’만이 아니다. 패배한 나폴레옹은 1814년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유배된다. 그러나 ‘제비꽃이 피면 돌아오겠다’던 약속처럼 10개월 후 그는 탈출해 파리로 돌아온다. 유배지에서도 황제의 복장을 벗지 않고 노심초사하던 그는 승전국들이 영토 배분 문제로 탁상공론을 벌이는 틈을 타서 탈출했던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였던 스탈린은 여덟 번 체포돼 일곱 번 시베리아로 유배됐지만 여섯 번이나 탈출을 했던 기이한 경력자다. 미하일 바쿠닌은 시베리아 유배지를 탈출해 육로로 북태평양 연안까지 가서 이곳에서 일본으로 간 뒤 일본에서 미국으로 갔다가 미국에서 서유럽으로 건너가 제네바에서 무정부주의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유배지 탈출 시도는 무궁무진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게 된다.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한 폐모살제(廢母殺弟)의 부도덕과 명나라를 배반하고 후금과 우호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이로써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세자 이지와 폐빈 박씨는 강화도로 유배된다. 이때 폐세자 이지는 땅굴을 파고 탈출을 시도한다. 그런데 땅굴을 파서 밖으로 나가기는 했지만 곧 발각돼 인조의 명에 따라 자진을 하게 된다. 한편 동정을 살피던 폐빈 박씨도 남편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역시 자진을 한다. 아들 부부를 잃은 충격으로 폐비 유씨 또한 세상을 하직하자 광해군은 제주도로 옮겨지고 4년 후 죽는다. 왜 그들은 탈출하려 했을까? 그러나 탈출은 쉽지 않다. 체포가 항시 뒤따르기 때문이다. 소련의 비밀경찰들은 ‘체포학’이라는 이론을 정립할 만큼 치밀했다. 소련의 민낯을 파헤친 솔제니친의 소설 ‘수용소 군도(群島)’의 제1장은 바로 체포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체포! 이것은 당신 전 생애의 파멸을 뜻한다”고 했다. 그렇다. 파멸하고 싶지 않기에 우리는 탈출을 감행한다. 우리는 현재 신자유주의라는 투기적 욕망과 이기적 경쟁 체제 안에 갇혀 살고 있다. 이 아비규환 속에서 과연 탈출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애초 탈출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유배된 채 이것이 삶이라며 자위하고 때로 강변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삶이 과연 정상인가? 정상처럼 보이는 이상한 정상은 아닌가? 그 끝은 혹시 파멸이 아닌가? 그렇다면 탈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악마의 섬을 탈출했던 빠삐용처럼 투기적 욕망과 이기적 경쟁이라는 악마의 체제를 탈출할 수는 없는가? 나는 유배인인가 탈주자인가? 대체 나는 누구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 오로지 국가·민생 위하여… 18년 유배생활서 ‘실사구시’ 꽃피우다

    오로지 국가·민생 위하여… 18년 유배생활서 ‘실사구시’ 꽃피우다

    다산은 유배된 후 할 일이 없어 고금을 연구하고 민생 문제와 국가의 대계에 유념하여 토론하고 저술하였다. 그는 근본적인 것을 규명하여 실제 사용할 수 있는 학문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저술은 모두 후세의 법이 되었던 것이다. -황현, ‘매천야록’ 권1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고, 민과 국가가 처한 위기를 타개하고자 개혁 사상을 내세운 실학자다. 그가 남긴 저술과 제시한 개혁안이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새로운 차원에서 기억되고 호출되고 있는 것은 어째서일까. 이는 그가 남긴 학문적 성취가 현재까지 남아 현재로 이월되었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의 학술적 역량과 개혁적 사유는 ‘여유당전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매천이 다산의 저술을 두고 현실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범으로 주목한 것은 다산의 실사구시 정신을 주목한 것일 터이다.#시대를 아파하고 민을 노래한 거인 다산은 실학자이기도 하지만, 그가 남긴 시문은 여느 시인과 달리 현실 문제를 소재로 포착하고 있어 진한 울림을 준다. 더욱이 다산의 남시문은 그의 학술적 성취와 안팎을 이룰 정도로 조화를 이룬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요,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개탄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며, 높은 덕을 찬미하고 나쁜 행실을 풍자하여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한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다. -‘다산시문집’ 권21, ‘아들 연아(淵兒)에게 보냄’ 다산은 일찍이 “나는 조선사람. 조선시를 즐겨 지으리라”라고 해 ‘조선시 선언’을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한시 특유의 음풍농월과 달리 민의 삶을 포착하여 민을 위한 비가(悲歌)로 표출한 바 있다. 나라와 시대를 걱정하고 권선과 징악을 풍자하는 시만이 진실한 시라고 주장한 다산의 사유 속에는 항상 민과 나라가 자리잡고 있었다. 다산은 다른 글에서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려는 마음이 없는 자는 시를 지을 수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매우 단호한 문학인식을 보여 줬다. 그 문학적 단호함은 ‘애절양’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군적을 만들어 군포(軍布)를 거두는 폐단을 고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모두 죽을 것’이라고 확언하면서 ‘애절양’을 인용한 바 있다. ‘애절양’은 조선조 후기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군포 착취로 농민이 스스로 자신의 남근을 자른다는 비참한 내용을 담은 한시다. 다산은 ‘경세유표’ 앞머리에서 “지금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라고 발언하고 있거니와, 이는 남근을 스스로 자르는 비참한 현실을 개혁하려는 의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자 당대 현실의 정확한 진단이다.#좌절을 딛고 고뇌 속에 꽃핀 창조 다산은 유배 생활에서 숱한 좌절을 겪지만, 그 상황에 굴하지 않고 학단을 만들어 제자를 기르는 한편 그들의 학문적 역량을 빌려 저술활동을 하고 개인적 좌절도 이겨 내었다. 그는 유배 기간 내내 학문적 고뇌 속에 창조적 예봉을 마다하지 않았다. ‘경세유표’를 비롯해 ‘목민심서’와 ‘흠흠심서’ 등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은 대부분 유배 시기에 구상하거나 저술했다. 학술적 두 축인 경세학과 경학의 성취가 모두 이 시기에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다산은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창조적 시간으로 활용해 학술적 역량을 꽃피운 것이다. 유배를 마친 이후에도 다산은 저술을 보완하고 수정을 거듭하며 자신이 구상한 사회개혁과 새로운 국가건설의 대안을 녹여 내었다. 하지만 자신의 학술적 성취가 유명무실해지는 것을 항상 두려워했다. 내 죽은 뒤에 아무리 정결한 희생과 풍성한 안주를 두고 제사를 지낸다 하여도, 내가 진정 흠향하고 기뻐하는 것은 내 책 한 편을 읽고 내 책 한 장을 베껴 주는 일보다는 못할 것이니, 너희는 그 점을 기억해 두어라. -‘다산시문집’ 권21, ‘두 자식에게 보여 주는 훈계’ 유배지에서 학술 교류가 없던 상황이다 보니 자신의 성취를 외면하지 말 것을 자식에게 당부하지만, 언젠가 자신의 저술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는 민을 위하고 국가를 혁신하는 대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산의 저술은 민과 국가를 자양분으로 사고한 학술적 꽃이다. 무엇보다 다산 스스로 유배지에서 넉넉한 민의 품성을 재발견하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를 개혁하려 한 역사적 전망을 지녔기 때문이다. 다산이 시문에서 ‘민’을 중심에 놓고 노래한 것이나, 사서삼경과 같은 경전을 재해석한 저술과 ‘경세유표’와 같은 경세서에서 국가를 중심에 놓고 혁신적 안을 마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다산은 ‘자찬묘지명’에서 ‘낡고 오랜 우리 조선을 새롭게 혁신’(新我之舊邦)할 것을 주장했다. ‘경세유표’ 머리글에서는 “지금 곧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다”라는 발언을 거리낌 없이 했다. #난세에 호출되는 ‘여유당전서’ 다산의 저술은 한국학의 거점이자 19세기 학술의 뛰어난 성과다. 그의 저술은 이후 역사 공간에서 비상한 주목을 받는다. 과거사가 아닌 현재진행의 역사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호출된다. 고종은 부강정책에 예의주시하여 경장을 서둘렀다. 그러나 많은 신하 중에서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을유년과 병술년 사이에 ‘여유당집’을 올리라고 하였다. -‘매천야록’ 권1 고종이 부국강병을 위해 다산의 저술을 기억한 것은 새로운 국가체제의 구상에 필요한 대안을 다산의 경세서에서 찾으려 한 것임은 물론이다. 시대의 호출에 다산의 저술이 부활한 것이다. 다산의 혁신적 사유와 개혁적 여러 안들은 갑오농민전쟁 시기에도 다시 주목을 받는다. 1930년대 실학 연구의 선구자인 최익한은 ‘강진읍지’를 인용하면서 전봉준, 김개남 등의 갑오농민군 지도자들이 ‘경세유표’를 활용하였음을 밝힌 바 있다.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우리는 정약용의 저술이 역사적 변혁기에 재발견되고 호출하고 있는 점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다산의 저술은 일제강점기에 이월돼 조선학 운동을 추동하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 1930년대 중반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등은 ‘신조선사’라는 출판사에서 ‘여유당전서’와 ‘담헌서’ 등을 출간하면서 조선학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근대적 학술이 식민지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식민지학에 대응한 자국학의 정립에 방점이 있다. 자국학의 구체적 학술적 성과에 ‘여유당전서’를 그 중심에 둔 것은 지금의 한국학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처럼 다산의 저술은 시공을 넘어 수시로 기억된다. 진재교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 여유당전서는 다산의 저술 정리한 문집 필사·목판본 등으로 간행 다산의 저술은 일찍이 필사본과 목판본, 연활자본 등으로 유통됐다. 다산의 자제와 제자들은 문집 간행을 위해 원고본을 만들었지만 500권 100책에 이르는 저술은 조선조가 끝날 때까지도 간행하지 못했다. 그의 저술 중에서 실용적인 문헌은 19세기까지 필사본으로 유통됐지만, 공식 출판은 19세기말 목판본인 ‘이담속찬’이 유일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일부 학술단체의 일본인들이 다산의 저술을 필사하고 연활자로 간행한 바 있고 이후 장지연, 최남선, 정인보 등 지식인들은 다산의 저술을 재발견해 일부 저술을 연활자로 간행했다. 다산 서거 100주년을 전후로 1934~38년 신조선사에서 154권 76책 ‘여유당전서’를 간행했다. 이 ‘여유당전서’는 정약용 스스로 구상한 체재와 다르게 7집 체재로 돼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일찍이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번역했고 1982~94년 ‘여유당전서’ 중에서 시문집 22권 10책을 국역 간행했다.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지극한 관심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지극한 관심

    새해 첫날과 설날을 대표하는 음식이 떡국이다. 그런데 이 떡국 한 그릇조차 먹기 힘든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위해 떡국 나눔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경종 때 추자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이진유는 새해를 맞아 ‘바닷물에 절인 배추와 채소를 넣어 끓인 떡국’밖에 못 먹는 자신의 신세를 통탄했다. 재미있는 것은 세상은 변해 바닷물에 절인 배추야말로 미네랄이 풍부한 최고의 김치감이 됐고, 채소로 끓인 떡국은 건강식으로 변모했다는 사실이다. 떡국 한 그릇을 먹기 힘든 사람들도 이처럼 세상이 바뀌어 어느 새해인가부터는 웃으며 다른 힘든 사람들에게 떡국을 나누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스 신화에 이카로스 이야기가 있다. 크레타섬에 갇혀 있던 다이달로스는 탈출을 위해 아들 이카로스에게 깃털에 밀랍을 발라 날개를 만들어 준다. 그는 “너무 높이 날면 태양열에 밀랍이 녹고, 너무 낮게 날면 바다 물기에 날개가 무거워지니 항상 중간으로만 날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이카로스는 하늘로 더 높게 날고자 하다가 태양열에 밀랍이 녹아 바다에 추락해 결국 죽고 만다. 흔히 이카로스 신화를 ‘자유를 향한 비상(飛上)’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을 그린 네덜란드의 화가 P 브뤼겔과 그 그림을 보고 시를 쓴 영국 시인 W H 오든은 “브뤼겔의 이카로스를 보라. 모든 것이 고통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오히려 이웃의 비극과 고통을 철저히 외면하는 세태를 고발한다. 누가 추락해 고통을 받든 세상 사람은 아무 관심이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 그림과 비슷한 꿈을 꾼 여자가 있다. 제주도와 함경도 종성에서 20여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던 유희춘은 부인 송덕봉에게 ‘몸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다가 너무 높이 오르면 끝내는 추락할 것이기에 날기를 그만두었다’는 꿈 이야기를 듣는다. 송덕봉은 권력의 정점에서 남편의 몰락을 걱정했던 것이다. 나아가 누가 쓰러지든, 누가 20년의 유배 생활로 고통을 받든 세상은 아무 관심이 없음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웃의 비극과 고통을 철저히 외면하는 세태는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 최근에 청년 하청노동자 김용균이 비참하게 죽었다. “지극히 원통한 일을 당하여 하늘에 호소해도 응답이 없고, 땅에 호소해도 응답이 없다”(至?大痛 呼天不應 呼地不應)고 했던 정약용의 말을 증거하는 사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 이런 비참함과 원통함이 ‘사람 중심의 국가’를 내세우는 문재인 정부에서 생기는 것인지 모르겠다. 위험을 모두 이웃에게 미루고, 그들의 비극과 고통은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 다름 아닌 ‘위험의 외주화’다. 이 때문에 발생하는 죽음들이 김용균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를 방지하려면 무엇보다 위험 앞에 선 사람들에 대한 생산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시위에 나선 사람들이 “내가 김용균이다”를 외치고 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죽하면 이 당연한 관심을 제발 기울여 달라고 호소할 정도이겠는가. “그대가 날마다 무량수경(無量壽經)을 읽으며 빌어 주는 성의에 힘입어 편안하게 살고 있으니 기쁘고 감사하오”라고 김정희는 제주에서 친구 초의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대의 관심 덕분에 위험한 유배지에서 잘 견디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누군가를 살리는 관심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관심 덕분에 나 역시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힘든 사람들의 처지가 바뀌고, 원통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에 대해 세밀하고 지극한 관심이 필요하다.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우리들의 밧모섬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우리들의 밧모섬

    로마시대 정치범을 유배 보내던 에게해의 파트모스섬은 세계에서 ‘유배로 악명 높은 10개의 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기독교인들에게는 ‘밧모’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며, 로마 황제가 사도 요한을 유배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사도 요한은 이곳에서 ‘요한계시록’을 썼고 그래서 유네스코(UNESCO)에서는 1999년 ‘성 요한 수도원과 파트모스섬 요한계시록 동굴’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마르틴 루터는 1520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을 받고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어서 지냈다. 이곳에서 루터는 질병과 두려움에 시달리며 교황에서 벗어난 그리스도교를 구상했고, 성서를 번역했으며, 방대한 저작물들을 남겼다. 이곳에서 루터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열정과 집중력을 발휘함으로써 일약 그리스도교 사상의 정점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성을 “나의 밧모섬”이라고 불렀다. 한말의 3대 시인이었던 강위는 제주 유배 중이던 김정희를 찾아가 보고 “달팽이집에서 10년간 가부좌를 트셨다”(蝸廬十載跏趺膝)며 스승의 유배지를 ‘달팽이집’에 비유했다. 윤선도 역시 ‘어부사시사’에서 “와실(蝸室)을 바라보니 백운이 둘러 있다”고 하면서 작고 누추한 자신의 유배지를 에둘러 표현했다. 그러니까 김정희나 윤선도에게 달팽이집은 그들의 ‘밧모섬’이었던 셈이다. 로맹 가리는 가장 권위 있는 프랑스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1956년에는 본명으로, 1975년에는 가명으로 2회 수상했던 특이한 작가다. 그는 굴레를 벗은 자유로운 말이라는 뜻의 ‘시마론’이라는 별장에서 온종일 글을 썼다. 그런데 하수구를 별장 근처에 만들려 하자 홧김에 그 집을 팔아 버린다. 그 후로 그는 햇볕이 작열하는 또 다른 은신처를 찾아 끊임없이 헤맨다. 그의 ‘밧모섬’을 찾아 헤매었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밧모섬’이 필요하다. 적어도 ‘다른 길과 다른 가치와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을 원한다면 자신의 ‘밧모섬’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연암 박지원은 “경조사도 폐하고 혹 며칠씩 세수도 않고 혹 열흘간 망건도 쓰지 않고 지냈다”고 했다. “잠이 오면 자고, 깨면 책을 보거나 글을 쓰기도 하고, 막 배운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어쩌다 친구가 술이라도 보내오면 마시고 취하기도” 했다. 이렇게 무엇을 해야겠다는 목표를 두지 않고, 몸과 마음이 하자는 대로 지내는 동안 박지원은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이라는 다른 상상을 할 수 있었다. 혼자 있으면 쓸쓸하다고 이를 달래기 위해 ‘쓸쓸비용’을 지출하는 사람들이 많다. 안 써도 되지만 혼자인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쓰는 것이다. 반려동물에 대한 지출이 그렇다. 1인 가구 중심으로 관련 시장이 팽창 중이다. 이런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의 밧모섬에서 쓸쓸함을 이겨 내는 사람들도 많다. 도서관에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중년들이 그들 중 하나다. 나만의 서재, 나만의 작업 공간으로 느껴져 자주 찾는다는 그들에게 도서관이야말로 나의 ‘밧모섬’인 것이다. 이렇게 각자의 ‘밧모섬’에서 소위 ‘셀프 유배’를 하는 동안 어느덧 ‘다른 길과 다른 가치와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을 하게 됨은 물론 더욱이 몸과 마음도 따라서 건강해지니 놀랍고 신기한 일일 수밖엔 없다. 그래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도 “유배 와서야 세상사 끊고 기쁨 얻었네”(謫來?喜世情?)라고 했었는지도 모른다. 한 해가 화살처럼 가는데 더 늦기 전에 각자의 밧모섬에서 제대로 기쁨을 맛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끝이 없는 유배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끝이 없는 유배

    오랜만에 배를 탔다. 비행기로 육지 나들이를 하는 까닭에 특별한 일이 아니고선 배를 이용하는 일이 거의 없다. 대학생 때만 하더라도 주로 배를 탔지만 이제는 바쁘고 편하다는 이유로 비행기 이용이 당연하게 됐다. 더욱이 저가항공사 덕분에 배를 타는 일은 정말 웬만하지 않고서는 하지 않는다.배도 타 보지 않고 어떻게 유배에 대한 글을 쓰느냐는 친구의 핀잔도 한몫했지만 남도를 찾을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배인들의 처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유배인을 실은 배가 제주도와 가까워지면서 무엇보다 한라산 봉우리를 맨 먼저 만났을 것이다. 배를 타 본 사람이라면 알지만 이때부터가 먼 시간이다. 잡힐 듯이 한라산 봉우리가 보이는데도 정작 제주도는 멀기만 하기 때문이다. 잡힐 듯한 것은 늘 멀기 마련이다. 돈도, 권력도, 심지어 사람도 그렇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아마도 유배인들은 제주도를 향한 뱃머리에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추사 김정희만 하더라도 유배를 올 때가 9월인 데다 날씨가 좋다 보니 바람결도 순해서 배 타는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았을 법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난날을 뒤돌아보니 속이 울컥거리고 처지가 원망스러워져 “하늘이여! 대저 나는 어떤 사람이란 말입니까?”(天乎此何人斯) 하고 자탄을 했다. 당연하다. 한때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특히 글씨를 잘 쓴다는 명성을 천하에 떨치던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서 멀리 중국에서조차 명성이 아깝지 않았던 그였지 않은가. 그러던 그가 하잘것없는 권력 싸움에 버려져 졸지에 죄인 신세가 됐으니 알다가도 모를 것이 세상이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그렇고 심지어는 흥망성쇠의 나라 운명조차도 알다가 모를 일이다. 헌종 임금이 “바다의 파도 속으로 왕래하는 것이 어렵지 않더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스승을 찾아 제주도를 다녔던 제자 허련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하늘에 맡겨 버린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바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도착한 곳이 “적막한 귀양지”(寂寞之濱) 제주도였던 것이다. 이 극악의 유배지에서 과연 살아서 돌아갈 수나 있을지 어느 유배인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절망은 제주 바다만큼이나 깊었을 것이고 한라산만큼이나 컸을 테다. 과연 살아 돌아가 다시 아내와 피붙이들을 만날 수는 있을 것인지, 흩어진 친구와 이웃들의 얼굴은 다시 볼 수나 있을 것인지 기약할 수 없는 곳이 제주도였다. “이제 몇 년을 어떻게 견디어야 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유배인들이 제주도에 첫발을 내디디며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이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그렇다 견디어야 한다. 절망이 클수록 견뎌 내야 한다. 남편과 사랑하던 아들을 졸지에 잃고 동물처럼 신음하던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극복이 아니라 그것을 견디어 냈다고 했다. 박경리 선생도 “내 조상은 역신(逆臣)이던가. 끝이 없는 유배”라고 자신의 일생을 표현했다. 견디는 것이야말로 유배인들의 자세였다. 요즘 우리 서민들의 처지가 “모진 고생과 상심 속에 구사일생으로 지냈다”고 했던 유배인들의 삶과 다를 바 없다고 하면 지나칠지 모르겠다.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니라 저녁을 굶는 삶”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이 나올 정도이니 “사람 중심 국가”를 외치는 문재인 정부 자체가 유배의 상황으로 빠져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해서 어려움이 깊어지는지 촛불을 지지했던 한 사람으로서 염려스러울 뿐이다. 오랜만에 배를 타고 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개인이나 공동체나 이 어려운 시기를 지혜로웠던 유배인들처럼 잘 견뎌 내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보았다.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가 끝나다 - 영월 청령포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가 끝나다 - 영월 청령포

    ‘노산군이 세종이 임어하시던 자미당 창가의 난간을 보고 크게 탄식하기를, 할바마마께서 살아 계시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어찌 적겠는가? 하니, 종자(從者)들이 모두 감격하여 울었다.’ <단종실록 12권, 단종 2년 11월 25일. 국편영인본 6책 712면> 역사서에는 그를 노산군 혹은 홍위(弘暐), 또는 휘지(輝之)라고 불렀다 한다. 그는 왕이었지만 왕이 되지는 못했다. 그를 왕이라 부르는 자는 여지없이 가문의 뿌리까지 뽑히었다. 삶의 그림자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불운한 소년, 조선의 제 6대 국왕인 단종(端宗. 1441-1457)이다. 단종은 출생부터가 남달랐다. 태종(1367-1462) 이후 적장자(嫡長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조선의 왕위 계승 원칙이었다고는 하지만 실제 적장자로 즉위한 왕은 조선을 통틀어 고작 7명에 불과하였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단종은 적장자를 넘어 적장손 신분이었기에 더더욱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실히 갖추고 있었다. 그가 태어나던 1441년에는 이미 아버지 문종(1414-1452)은 공식적으로 왕위 계승 세자 신분이었으며, 할아버지 세종(1397-1450)은 강력한 왕권을 지닌 국왕이었다. 또한 어머니인 현덕왕후 역시 비록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지만, 단종이 출생하던 시기에는 정실인 세자빈의 위치에 있었다. 한마디로 단종은 적자이면서 적손이었으며, 장자이면서 장손이었고, 이에 원손이자 세손, 세자라는 조선 왕조 계보상 가장 순수 혈통의 정통성을 제대로 갖춘 최초의 국왕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권력은 하늘 끝을 찌르는 정통성이라는 명분보다는 칼을 쥘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게 돌아간다. 단종이 12살 어린 나이에 국왕으로 오른 때인 1452년에는 이미 할아버지인 세종, 할머니 소헌왕후, 아버지 문종과 어머니 현덕왕후마저 세상을 떠나고 없던 시기였다. 수렴청정조차 해줄 왕실의 어른도 없는 미래를 짐작이나 한 듯 세종대왕과 문종은 서거 전에 김종서, 황보인 등에 단종을 보필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어린 임금인 단종을 앞에 내세운 채 조정대신을 대표하는 김종서, 황보인 그리고 이들을 지원해주던 세종의 셋째 안평대군 세력에 반하여 위기의식을 느끼던 왕실 훈신 세력의 대표격인 세종의 둘째인 수양대군과 세종에게 왕위를 빼앗긴 양녕대군(1394-1462) 세력 등이 충돌하는 계유정난(1453)이 일어난다. 결론적으로 수양대군은 1455년 세조가 되었고 모든 권력을 잡게 된다. 권력은 결코 자비가 없다. 단종의 죽음은 예고된 셈이었다. 1457년(세조 3년)에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영월에 위치한 청령포에 유배된다.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인 육육봉으로 막힌 이곳은 지금도 배가 아니면 드나들 수 없는 육지 속의 단절된 섬같은 곳이다. 결국 단종은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57년 10월 21일에 자결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죽임을 ‘당했다’라는 기록도 전해진다. 사육신 박팽년의 9세손 박경여가 권화와 함께 엮은 책인 장릉지(莊陵誌)에는 “세조 3년 10월 24일 유시(酉時)에 공생(貢生)이 활끈으로 노산군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하였다. 노산군의 옥체는 청령포의 강물에 던져 버린 것을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거두어 영월군 북쪽 5리쯤의 동을지(冬乙旨)에 매장했다.”라는 기록도 남아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청령포는 이름난 관광지가 되었다. 이곳에는 현재 복원한 단종어소를 비롯하여, 영조대왕의 친필이 음각된 단묘재본부시유지비와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는 금표비, 단종 유배 이야기를 간직한 소나무인 관음송과 단종이 직접 쌓아올렸다고 전해지는 망향단 돌탑 등이 남아 당시의 슬픔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청령포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영월을 방문한다면 한 번쯤은 2. 누구와 함께? - 가족 단위, 친목회 3. 가는 방법은? - 영월군 영월읍 청령포로 133 - 88번 지방도를 타도 되고, 38번 국도를 타고 가도 된다. 38번 국도가 낫다. 4. 감탄하는 점은? - 육지 속의 섬. 유배지로서의 최적지로 볼 수 있는 장소를 그 당시 어떻게 찾았을까?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최근 방문객이 부쩍 늘었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망향단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닭강정 ‘일미강정식당’, 다슬기해장국 ‘성호식당’. 칼국수 ‘고향’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5,00500000,32&pageNo=5_2_1_0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한반도 지형으로 유명한 선암마을, 별마로 천문대, 국가지정 명승 제 76호인 선돌.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조선의 가장 불운한 왕이었던 단종. 조선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오래된 슬픔을, 권력의 무자비함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퍼블릭IN 블로그] 깜빡이 켜고 들어온 1년짜리 육지사람… 제주 고질병을 고치다

    [퍼블릭IN 블로그] 깜빡이 켜고 들어온 1년짜리 육지사람… 제주 고질병을 고치다

    제주는 요즘 핫 플레이스다. TV만 틀면 제주도가 나온다. 변방의 섬, 유배지였던 제주는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며 이주민이 줄을 잇는다. 공직사회도 마찬가지다.# 유배지서 기회의 땅으로… 제주 근무 자원 넘쳐나 예전에는 제주에 발령이 나면 인사에 물을 먹은 것으로 쳤다. 서울에서 가장 먼 곳인 데다 교통마저 불편해 다들 유배간다고들 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조직에서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거나 보직을 못 받아 오갈 데가 없는 공직자들이 밀리고 밀려 제주에 왔다고들 한다. 자신들의 뜻과는 달리 제주로 유배(?) 왔던 중앙부처 공직자들의 관심사는 다음 인사 때 반드시 서울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허구한 날 북쪽 서울 하늘만 쳐다봤다. 툭 하면 서울에서 출장을 오거나 여행 오는 선후배들 밥을 사주며 여행가이드 노릇을 충실히 해야 했다. 업무는 면피만 하면 되고 서울 윗전에 계절마다 특산물을 챙겨 보내는 등 서울로 빨리 돌아가기 위한 인사 로비에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 서울만 보며 면피?… 토박이보다 문제점 찾고 해결 하지만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인사 때마다 제주 근무를 자원하는 공직자들이 넘쳐난다. 판사도 검사도, 교사도, 경찰도, 일반 행정공무원도 너도나도 제주에서 한 번쯤 살며 일해 보고 싶다고 난리들이다. 1대1 교류가 원칙인 교사와 자치단체 공무원의 제주 전입은 하늘의 별 따기다. 자신들이 희망한 곳, 한 번쯤 살아 보고 싶은 곳, 제주에서 일하게 되면서 업무를 대하는 이들의 태도도 사뭇 달라졌다. 제주 토박이보다 더 부지런히 제주를 관찰하고 문제점을 찾아내 해법을 제시한다. 북쪽 서울 하늘만 쳐다보며 대충대충 시간만 죽였다는 예전의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 이상정 제주경찰청장 부임후 교통무질서 추방 나서 육지사람 이상정 제주지방경찰청장은 제주에서 ‘깜빡이 경찰’로 불린다. 깜빡이는 자동차의 방향지시등을 말한다. 2016년 제주에 부임한 그는 제주의 무질서한 교통문화에 깜짝 놀랐다. 날마다 인명사고가 속출했지만 ‘그런가 보다’라는 제주사회의 무관심에 더 놀랐다고 한다. 제주에서 운전대를 잡아 본 여행객은 한 번쯤 경험했겠지만 제주의 교통문화는 거칠고 무질서하다. 운전자들은 기본적인 방향지시등도 안 켜고 보행자들은 무단횡단을 다반사로 한다. 방향지시등만 켜도 교통사고를 대폭 줄일 수 있다며 그는 제주의 교통무질서 추방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1년 정도 있다가 떠날 사람이 뭔 일을 크게 벌리냐’며 일부 직원들은 볼멘소리를 했고 제주사회의 반응도 ‘저러다 말겠지’라며 시큰둥했다. 하지만 그는 ‘제주에서 살아가야 하는 당신과 당신 가족들의 안전에 관한 문제’라며 교통경찰을 무질서 교통현장으로 보내고 또 보냈다. 제주 전 지역에서 교통사고 줄이기 월요 현장 캠페인을 1년째 벌이는가 하면 자신도 예외 없이 참여한다. 불러만 달라면서 지역방송에도 수시로 출연해 교통사고 예방 활동을 펼친다. # 주1회 캠페인·안전 투자… 교통문화 꼴찌서 3위로 이주민과 관광객 급증으로 차량이 늘어난 탓에 제주도의 교통정책이 도로 확장과 신규도로 개설에만 집중되고 있다며 보행자의 안전에도 관심을 호소했다. 도지사와 도의회를 찾아가 사망사고 예방을 위한 교통안전 시설 확충을 설득해 지난해 130여억원, 올해 300여억원의 교통안전 시설 투자를 이끌어 냈다. 2016년 전국 꼴찌 수준이었던 제주의 교통문화지수는 지난해 전국 3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중앙부처의 제주지역 기관장은 1년 남짓 제주에서 일한다. 새로운 일을 벌이고 결실을 얻기에는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이들은 예전처럼 면피나 하며 서울만 바라보지 않는다. 급격한 성장통을 앓는 제주가 그들에겐 자신의 열정과 솜씨를 마음껏 뽐낼 기회의 땅이기 때문이다. ‘깜빡이 켭시다’라고 외치는 육지사람 이상정이 제주의 오랜 고질병인 교통 무질서를 바꿔 가는 것처럼.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조선 선비 분투기(奮鬪記)…강진 다산초당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조선 선비 분투기(奮鬪記)…강진 다산초당

    “폐족(廢族) 집안의 자식으로서 학문마저 게을리한다면 어찌 하겠느냐. 과거를 치를 수는 없을지라도 책을 읽을 기회를 얻게 되었구나”(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정약용)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불운하였고 불우하였다. 그의 집안은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의 소용돌이 속에서 멸족(滅族)의 위기를 맞는다. 사실 신유박해는 사학(邪學)으로 규정한 천주교의 전파를 막는 것을 명분으로 하고 있지만 실상은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 벽파들이 남인 시파를 제거하기 위한 일련의 정치적 숙청이었다. 남인들 가운데 천주교를 믿는 이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에 노론들이 이를 트집 잡은 것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다시 한 번 더 세상에 나갈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조선 후기의 집권 주도층이었던 노론 세력들은 결국 일본에게 나라를 갖다 바치는 망국(亡國)의 주연들이 된다. 나라가 끝모르게 기울어져 가던 조선 후기, 선비 정약용은 전라남도 강진 땅에서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한다. 조선의 뿌리부터 바꾸어 세계와 교류하고자 하였던 앞선 지식인, 다산 정약용의 삶이 담긴 전라남도 강진의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가보자. 다산은 분명 조선조(朝鮮朝) 여타 선비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양반 구색이나 맞추어볼 심사로 삶을 띄워 보내던 게으른 사대부들과는 달리 정약용은 강진땅 험한 유배지에서도 여전히 정갈한 삶을 이어 나갈 정도로 타고난 선비였다. 다산은 일찌감치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던 인물이었는데, 1762년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4살 때에 천자문을 익힐 정도로 문재(文才)가 비상하였다. 1789년 봄 대과에 차석으로 급제한 정약용은 초계문신(抄?文臣)의 칭호를 얻어 예문관 검열에 임명이 되면서 승승장구의 삶을 살아갈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산은 정조(正祖. 1752-1800)가 가장 아끼던 젊은 신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는 1789년 한강의 배다리를 만드는 공사의 규제를 만들어 한강의 주교(舟橋)를 설계하였을 뿐만 아니라, 1796년에 축조한 화성 성곽을 올리는 공사에서 거중기를 이용하여 일을 수월하게 하였으니 정조 임금의 눈에는 꼭 들어맞는 신하임에는 분명하였다. 하지만,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삶은 대변혁을 맞게 된다. 정조임금이 승하한 뒤 바로 순조(純祖. 1790-1834)가 1800년에 즉위하고 정순대비 김 씨가 수렴청정하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된다. 이 와중에 다산과 가까이 교유(交遊)하였던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최필공 등과 아울러 친형인 정약종마저 목숨을 잃는다. 정약용과 정약전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여 각기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고, 정약용은 1801년 11월에 강진 땅에 도착한다. 다산이 처음 강진 땅에 머문 곳은 바로 동네 주막이었고, 후일 그는 이 주막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고마움을 표하기도 하였다. 이후 다산은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인 이청의 집 등등을 전전하다가 외가(外家)인 해남 윤씨 자손들의 공부방으로 사용되던 강진 땅 만덕산 언저리 야트막한 야산인 다산(茶山)의 산정(山亭) 주변에 초당을 짓는다. 다산초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저술에 몰두한다. 조선의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개혁안을 정리하는 데 우선 대표적인 목민관들의 지침서인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하여, 행정 기구의 개편을 비롯하여 모든 제도의 개혁 원리를 제시한 <경세유표(經世遺表)>, 죄와 형벌에 관한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포함하여 약 500여권 이상의 책을 갈무리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다산초당은 다산이 머물렀던 때의 초당(草堂)이 아니라 1958년 사적 제107호로 지정받으면서 초가를 허물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으로 중건한 것이어서 실제 그의 삶의 흔적을 그대로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머물던 초당의 자리에서 그가 품었음직한 삶의 회한과 슬픔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특히 다산초당에 오르는 뿌리의 길은 그가 머물던 당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관람객들에 여전히 깊은 여운을 준다. <다산초당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강진 땅을 밟게 된다면, 불우한 조선 선비의 삶을 이해하려면. 2. 누구와 함께? - 역사적, 문학적 지식을 나눌 수 있는 지인들과 함께라면 더더욱 좋다. 3. 가는 방법은?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다산초당길 68-35 / 귤동마을에 내려 걸어올라가야 한다. 4. 감탄하는 점은? - 다산초당에 이르는 길. 흔히 뿌리의 길이라고 불리며 다산초당의 진짜 모습이라고 일컫는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강진 땅에서 제일 많은 관광객이 다녀가는 곳. 평일은 한산하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천일각, 동암, 연못. 뿌리의 길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한정식 ‘설성식당’. ‘수인관’ ‘해태식당’ ‘제일식당’ ‘청자골 종가집’ ‘남문식당’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main_search.jsp?cid=126419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두륜산 대흥사, 고산 윤선도 기념관, 해남우항리공룡화석지, 땅끝마을 10. 총평 및 당부사항 - 다산초당에 이르는 뿌리의 길이 바로 다산의 삶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몸으로 전해오는 다산이 겪었던 삶의 흔적들. 다산초당이 목적지가 아니라 다산초당에 이르는 뿌리의 길을 꼭 밟아 보도록. 눈물겹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동백꽃이 고결하고 어여쁘니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동백꽃이 고결하고 어여쁘니

    올해 제주 4·3이 70주년을 맞는다. 그날의 공포와 고통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생존자들도 사실상 마지막 생애 주기를 맞게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래서 70주년을 맞아 제주 4·3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기념사업위원회에서는 증언 본풀이 마당, 캘리그래퍼 특별전, 네트워크 프로젝트, 4·3 평화기행 등 다양한 행사를 벌이고 있다. 특히 ‘동백꽃을 달아주세요’라는 행사를 통해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 없이 스러져 간 4·3 영혼들을 기억하기 위해 동백꽃을 디자인해 만든 4·3 배지를 다는 의미 있는 릴레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필자도 애월고등학교 미술부 학생들이 디자인한 4·3 동백꽃 배지를 4ㆍ3 희생자 및 유족들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가슴 한편에 소중하게 달고 있다. 제주도 동백꽃은 맵찬 제주 특유의 겨울바람을 견뎌내선지 어느 섬의 것보다도 붉다. 그런데 옛 어른들은 이 동백꽃이 봄에 한 번에 다 피면 풍년이 들고, 두 번에 나누어 피면 평년작이고, 세 번 이상 피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70년 전 제주 섬에서는 무고한 양민 3만여명이 죽어갔던 것으로 보아 어쩌면 동백꽃이 세 번 이상 계속 피면서 피로 젖은 세월을 예고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요즘 성당에 갈 때마다 천주교 제주교구 주보에 실린 강우일 주교님의 ‘4·3을 생각하다’라는 연재물을 읽는다. 주교님은 1944년과 1946년의 제주도 인구가 일본에서 귀향한 도민들 때문에 21만명에서 27만명으로 급등했지만 1944년에 26만석이던 보리 수확이 대흉년으로 1946년에 8만석밖에 안 되었던 것도 4·3을 야기한 요인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로 미루어 당시 제주 섬에는 동백꽃이 세 번 이상 피었음이 분명하다고 확신하게 된다. 예상치 못한 불행한 일을 동백꽃이 갑자기 떨어지는 일과 닮았다고 하여 춘사(椿事)라고 한다. 그래서 동백꽃은 불길함과 급사(急死)를 상징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 유배인들이 가장 싫어했던 꽃이 동백꽃이기도 했고, 어떤 유배인은 유배지 주변의 동백나무를 모두 잘라 버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고 보면 제주 4·3이야말로 춘사였음이 틀림없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규모 학살로 3만여명이 죽어갔으니 춘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기에 제주 4·3의 상징으로 동백꽃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동백꽃은 불길함과 급사의 상징만은 아니다. 우리나라 전통 혼례식에서는 동백나무를 대나무와 함께 항아리에 꽂아 놓는데 동백나무 모양이 단정하고 열매가 많이 열려 가문과 자식의 번창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임신이 어려운 여성의 볼기를 동백나무 가지로 치면 아기를 낳는다는 속신도 있었고, 귀한 사람을 맞이할 때는 동백꽃으로 꽃꽂이를 한다고도 했다. 한편 꽃이 시들지 않고 통째로 떨어지기 때문에 동백꽃은 절조와 의지를 상징하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제주 4·3의 상징을 동백꽃으로 삼은 이유가 비단 불행했던 춘사(椿事)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제주 도민의 절조와 의지를 말하고 싶고 나아가 자손만대 제주도의 번창을 천명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4·3 동백꽃은 제주 4·3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일찍이 성삼문은 동백꽃을 두고 ‘고결하기는 매화와 나란히 하고(高潔梅兄行) 어여쁘기는 더러 그보다 낫구나(嬋娟或過哉)’라고 했는데 70주년을 맞는 제주 4·3의 의미와 정신 또한 상징인 동백꽃처럼 그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기형도는 동성애자가 아니다”

    “기형도는 동성애자가 아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잃어버린 사랑을 향한 공허한 마음을 토로하듯 써 내려간 시인 기형도(사진ㆍ1960~1989)의 시 ‘빈집’이다. 시인과 대학시절 절친한 친구였던 소설가 김태연은 시 첫머리에 놓인 ‘사랑’이라는 낱말을 ‘기형도’로 대신해 이 시를 음미했다. 20대 청춘을 함께 보냈던 글벗이 세상을 떠난 이후 작가의 가슴을 묵직하게 만든 아릿한 통증이 쉽사리 줄어들지 않았던 탓이다. 작가는 오랜 시간 옛 친구를 왜 한시도 잊지 못하는지, 왜 그토록 그에게 연연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솔한 기록을 최근 책으로 펴냈다. 새달 7일 시인의 29주기를 앞두고 출간한 자전적 소설 ‘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휴먼앤북스)다.김 작가는 1979년 연세대 1학년 때 교내 서클 ‘연세문학회’에서 기형도 시인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학교에서, 서로의 자취방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밤새워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차분하면서도 섬세한 감성을 지닌 기형도 시인과 매사에 패기가 넘쳐 좌충우돌했던 김 작가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녔지만 문학이라는 공통분모 덕분에 잘 통하는 문우였다. 김 작가가 기형도의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지난해 11월 개관한 기형도문학관에서 시인의 유품 수집 총책임자를 맡으면서부터다. 2016년 4월부터 약 1년 반 동안 시인과 인연이 조금이라도 닿는 사람이라면 누가 됐든 수소문해서 만났다. 그 과정에서 시인의 매력을 재발견하기도 했지만 작가가 알고 있는 시인의 모습과 완전히 다르게 알려진 경우도 있었다. “기형도의 유품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놀란 것은 특히 인터넷을 통해 그에 대한 잘못된 사실이 많이 떠돈다는 것이었어요. 예를 들면 그의 시 속에 동성애 코드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죠. 기형도 시인은 호기심에 당시 동성애자들이 많이 모였던 파고다극장 주변에 저와 함께 가곤 했는데 그의 다정다감한 성격과 겹쳐져 동성애자라는 오해를 사게 됐죠. 또 기형도 시인이 생전에 문학보다 철학에 더욱 심취해 있었는데 (후대 사람들이) 그 사실을 간과한 채 시인의 작품을 분석하다 보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라도 기형도의 분신이 되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거나 몰랐던 사실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김 작가는 기형도와 주고받은 편지나 스스로 기록한 글들을 토대로 두 사람의 추억을 풀어냈다. 몇몇 소설적인 장치를 제외하면 책 속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대부분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소설은 연세대에 입학한 20살의 허승구(김태연 작가의 본명이 김승구)가 20살의 기형도를 우연히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남유럽 소년을 연상하게 할 만큼 이국적인 외모를 지니고 은근한 멋을 낸 기형도와의 첫 만남부터 슈만의 가곡 ‘2인의 척탄병’을 부르는 기형도의 모습, 두 사람의 ‘자발적인 유배지’였던 파고다극장에 대한 추억까지 오롯이 담겨 있다. “기형도 시인의 문학관도 세워졌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시인의 기일에 맞춰 열리는 행사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있습니다. 어떨 땐 기형도 시인의 누님과 저밖에 없었던 적도 있었죠. 이렇게 잊힐 만한 시인이 아닌데 말이죠. 대중들에게 이름이 덜 알려진 저로서는 기형도의 이름에 편승하려는 것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보단 이 소설을 통해 기형도의 문학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글ㆍ사진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고려ㆍ조선 모두 섬긴 ‘수재’… 새나라 문장의 기틀 다지다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고려ㆍ조선 모두 섬긴 ‘수재’… 새나라 문장의 기틀 다지다

    조선 유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학자이자 조선 최초 문형(文衡·대제학)으로 칭해지는 걸출한 문장가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 사람들은 동시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에게 열광할 뿐 왕조가 교체하는 격변기에 전형적인 삶을 살아간 그를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 초기 안정적 기반을 다지는 데는 양촌의 역할이 누구보다 컸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과거에 급제한 까마귀 소년 고려 공민왕 때 얼굴이 유난히 검었던 청년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까마귀라고 불렀고, 스스로도 작은 까마귀라는 의미의 ‘소오자’(小烏子)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 청년이 18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요즘으로 치면 고등고시에 합격한 셈이다. 공민왕이 급제자들의 면면을 살피다가 갑자기 그 과거를 주관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돌아보며 “아니, 이렇게 젊은 자도 급제시켰는가”라고 노기에 가까운 불평을 했다. 장차 크게 쓰일 그릇이라는 이색의 극찬을 듣고서야 왕은 화를 풀었다고 한다. 그 젊은이가 바로 양촌 권근이었다. 이후 양촌은 벼슬길에서 승승장구했지만, 왕조의 교체기에 불가피한 정치적 선택으로 인해 한 차례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유배지에서 꽃핀 학문 양촌은 1389년(창왕) 38세 되던 해에 탄핵을 받은 이숭인(李崇仁)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편당으로 몰려 황해도 우봉으로 유배됐다. 이후 약 1년간 이곳저곳으로 유배지를 옮겨 다녔다. 유배생활은 많은 제약을 받지만, 경우에 따라 오히려 자신을 성장시킬 기회일 수도 있다. 바쁜 세상사에서 벗어나 오로지 학문과 저술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전남 강진 유배지에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대표적인 사례다. 양촌의 저술도 이 시기에 주로 완성됐다. 1390년 7월부터 11월까지 전라도 익산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양촌은 초학자들이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에 담긴 유학의 기본 개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림과 설명을 곁들인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저술했다. 그 앞부분에 실린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선조에게 올린 ‘성학십도’(聖學十圖) 중 제4도인 ‘대학도’에 그대로 전재하고 있을 정도로 후대 성리학자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11월 홍수로 인해 사면받아 풀려났으나, 그는 다시 충주의 양촌으로 돌아가 오경의 주석 작업에 몰두했다. 54세 때인 1405년(태종)에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마지막으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완성했다. 겸손하게 ‘자신의 얕은 견해’라는 의미의 ‘천견’(淺見)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 경전 주석서다. 특히 유학 경전 주석의 독자적인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큰 저술이다. 이런 학문적 업적은 결코 짧은 시기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벼슬살이로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학문적 성과가 유배라는 일종의 휴식을 계기로 꽃피게 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려의 신하, 조선에 몸을 맡기다 양촌은 개국 소식을 듣고도 1년 가까이 양촌에서 은거하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양촌의 아버지 권희(權僖)를 통해 집요하게 설득했다. 양촌은 할 수 없이 계룡산에 행차했던 이성계에게 나아갔다. 그곳에서 이성계의 아버지인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개국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이성계의 덕을 송축하는 ‘풍요’(風謠)를 짓기도 했다. 애초에 고려의 신하로서 조선의 개국에 함께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새로운 왕조와 함께하겠다는 뜻을 보였던 것이다. 문제는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실망감이었다. ‘축수록’(逐睡錄)이라는 야사에 “당시 선비들이 평소에 공을 종주(宗主)로 여겼었는데, 그때 이후로 모두 머리를 돌리고 침을 뱉었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신원에 가장 공이 컸음에도 사람들은 그를 포은과 비교하며 변절(變節)이라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이런 시각은 조선 후기까지 계승돼 유학에 끼친 큰 공로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공자(孔子)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지 못하고 말았다.#황제가 시를 내리다 비슷한 시기에 건국한 명나라와 조선은 초기부터 기세 싸움이 있었다. 이른바 ‘표전’(表箋) 문제도 그중 하나이다. 표전은 국왕이 황제에게 올리는 일종의 외교 문서다. 평소 정도전의 요동정벌 계획이 거슬렸던 명나라 태조는 1396년(조선 태조)에 조선에서 보낸 표전의 표현을 문제 삼아 표문의 작성에 관여한 정도전을 명나라로 들여보내라고 독촉했다. 의도를 눈치 챈 삼봉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응하지 않자 45세의 양촌이 자원해 명나라로 들어가 대신 용서를 구했다. 그를 가상하게 여긴 황제가 학사들이 모인 문연각(文淵閣)에 머물게 하고 시를 지으라 명했다. 양촌은 모두 24수를 지어 올렸는데 18수는 여정과 조선의 역사, 절경을 읊었다. 6수는 명나라와 태조의 덕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감탄한 황제는 그를 ‘수재’로 칭하면서 직접 시 3수를 지어 하사하고 융숭하게 대우했다. 외교 문제도 자연히 잘 해결됐다. 이 당시 양촌이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는 훗날 일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사신 유사길(兪士吉)이 왔을 때 국경에서 양촌의 안부를 물었고 연회에서 양촌이 술을 권할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받는 등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나라의 문장을 주관하다 관각(館閣), 즉 예문관과 홍문관은 주로 왕실 의식, 외교 문서 등 국가의 공식적인 제술(製述)을 담당하던 관청이었다. 문학적 역량이 뛰어난 인물들이 배속되는데 그 수장인 대제학은 문형(文衡), 주문(主文)이라 해 국가에서 특별히 우대하였고 문신들도 가장 영예로운 자리로 생각했다. 양촌은 조선 최초의 문형으로 전해진다. 조선 초기의 국가적인 문 대부분은 그의 손에서 나왔다. “우리나라의 관각체(館閣體)는 권근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 정조(正祖)의 평가에서 양촌의 문학적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관각체는 수식적인 면이 많기 때문에 서정적인 문장에 비해 다소 형식적이고 무미건조한 느낌을 준다. 관각체 비중이 높은 양촌의 문장에 대해서도 자연히 비슷하게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양촌의 문장이 모두 그렇지는 않았다. 시의 경우는 꾸밈없이 평담하고 자연스러운 맛이 있었다. 그의 문학적 진가는 다음의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봄날 성남(城南)에서의 즉흥시 봄바람에 어느덧 청명절이 다가오니 / 春風忽已近淸明 가랑비 부슬부슬 늦도록 개질 않네 / 細雨??晩未晴 집 모퉁이 살구꽃은 온통 필 듯한데 / 屋角杏花開欲遍 이슬 머금은 몇 가지가 내게로 기울이네 / 數枝含露向人傾 정도전은 이 시를 보고 “시어가 천지조화를 빼앗았다”고 극찬했다. #수성(守城)의 군주를 보필하다 조선은 삼봉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국가의 각종 시스템은 물론 궁궐의 이름까지도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과언은 아니다. 양촌은 목은 문하에서 삼봉과 동문수학했다. 둘 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고 경세 능력도 출중했다. 서로를 존경하는 것도 같았다. 다만 정치적으로 선택한 길이 달랐다. 이는 두 사람의 기질과도 연관이 있었다. 개혁적인 성향의 삼봉은 창업 군주를 보필하는 쪽이 적성에 맞았고, 보수적인 가문에서 성장한 양촌은 수성 군주를 보필하는 쪽이 적성에 맞았다. 삼봉은 태조를 도와 조선을 개국하고 요동을 정벌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양촌은 태종을 도와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는 쪽에 더 치중했다. 결과적으로 누가 더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일까. 누구의 업적이 더 뛰어났던 것일까. 우열을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하다. 창업 시기에는 삼봉이 곧 양촌이었고, 수성 시기에는 양촌이 곧 삼봉이었기 때문이다.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성과평가실장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위대한 노인, 위대한 유배인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위대한 노인, 위대한 유배인

    “대한민국의 노인들은 유배인이다. 대한민국 모든 곳이 유배지다”라고 친구가 비꼬아 댔다. 양로원이나 요양원은 물론 탑골공원 등 노인들이 운집한 공간만을 한정한 줄 알았지만 모든 곳이 유배지라는 지적은 다소 충격적이다. 치매를 하고, 몸이 고장 나면서부터가 아니라 사회적 기준이 ‘노인’이 되는 순간부터 모두 유배인이 된다는 말이다. 노인층 빈곤율과 자살률이 세계 1위인 대한민국에서 맞는 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유배인은 극악무도의 죄인이다. 그렇다면 노인들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노후 대비는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가족만을 위해 지난 세월을 험하게 살아온 죄밖엔 없다. 그 때문에 지독히도 가난하고, 자살도 가장 많이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그것이 무슨 삼족을 멸할 죄라도 된다는 것인지. 더욱이 대한민국은 ‘효’를 제일 가치로 여기는 나라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이런 비참한 나라가 됐으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영화 제목이 제목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언젠가 ‘녹색평론’에 실렸던, 서울대 학생들한테 부모가 언제 죽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63세라고 했다는 기사가 다시 생각난다. 그 이유는 은퇴해 퇴직금 남겨 주고 바로 죽는 게 좋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필자도 곧 63세다. 그러니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긴장한다고 해서 달라지거나 해결될 일은 없다. 달게 사약을 받아야 할 판이다. 돈이 없으면 굶어 죽고, 돈이 있으면 맞아 죽는다는 말이 결코 우스개가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광인들을 일정 기간 배에 태워 이곳저곳을 항해시켰다. 정상인들의 거주지 정화를 위해 광인들을 분리하고 유배 보내기 위해 ‘광인들의 배’가 활용됐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노인들이야말로 그 ‘광인들의 배’를 탄 사람들이다. 그 배에는 행복한 노후를 기대하는 노인, 병 때문에 앞가림을 못 하는 노인, 빈털터리가 된 노인, 여전히 조국과 민족을 걱정하는 노인, 손자들의 장성을 낙으로 여기는 노인 등등 여러 부류의 노인들이 타고 있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유배의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다. 당나라 시인 유희이는 “들어라 한창 나이 젊은이들아(寄言全盛紅顔子) / 얼마 못 살 늙은이를 가엾어 하라(應憐半死白頭翁) / 노인의 흰머리가 가련하지만(此翁白頭眞可憐) / 그도 지난날엔 홍안의 미소년이었노라(伊昔紅顔美少年)”며 노인을 대신해 시를 쓰기도 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불안과 공포에 떠는 노인들을 대신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어찌해야 할 것인가? 방법은 노인들끼리 분노하고, 연대할 수밖엔 없다. 분노하고 연대해 ‘광인들의 배’에서 스스로 내려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는 그들이 그 배에서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래서 가정과 작은 공동체로 그들을 복귀시켜야 한다. 최근 ‘외로움’ 문제를 담당하는 장관이 영국에 생겼다고 하지 않는가. 사회적 단절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매일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 해롭다는데 바로 그 장관이 하는 일이 노인들을 정상인들과 어울리게 하는 일이다. 우선 노인들 스스로가 선거나 시위 때 동원되고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기 존엄성을 지키고 주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위대한 유배인들이 있듯이 그래서 위대한 노인들이 돼야 한다. 또한 그럴 수 있도록 국가나 지자체도 도움을 주어야 한다. 노인 질병 그 자체만을 지원할 것이 아니라 가족과 작은 공동체를 회복시키고 노인들을 거기에 복귀시키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문재인 정부가 노인들을 위해 할 일이다.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한반도의 본이 되려면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한반도의 본이 되려면

    산업연구원(KIET)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과거 고도성장을 견인했던 서울이 쇠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고 했다. 인근 경기도와 충청 지역에 산업단지와 행정타운 등이 생기면서 인력이 많이 빠져나감으로써 서울의 소득증가율과 인구증가율이 전국 평균에 못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경기, 충남, 충북, 경남, 제주는 성장 지역으로 분류했다. 특히 제주는 높은 경제성장률에 따른 생산 가능 인구 유입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2006년 특별자치도로 승격된 이후 관광지 등 지역 개발 속도가 빨라진 효과라는 것이다. 제주관광객이 2005년 502만명에서 지난해 1475만명으로 3배 가까이 늘었고, 귀농·귀촌 인구도 해마다 증가해 ‘일자리가 사람을 부른다’는 공식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고 했다. 이와 달리 전남, 경북은 생산 가능 인구를 늘릴 방법이 없어 쇠퇴 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전남은 제주도까지 해저터널을 뚫겠다는 황당한 계획을 잊을 만하면 발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중앙집권적 정치제도가 확립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방 경시의 병폐가 누적됐다. 모든 것이 서울에 집중되고 서울의 중앙은 자기가 늘 전체인 것처럼 착각해 왔으며 지방에 대해 중앙사대주의를 조성해 왔다. 이런 점에서 서울의 쇠퇴와 유배지였던 제주의 성장은 의미가 크다. 러시아 시베리아도 요즘 저렴한 전기요금을 앞세워 비트코인 채굴 중심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디지털 골드 러시’라고 할 정도로 비트코인 채굴을 본업으로 삼는 주민들이 늘어나면서 시베리아에 비트코인 광산을 건설하려는 계획까지 나오고 있다. 시베리아는 동방을 침략한 러시아제국이 지역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활용했던 유배지였다.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 1825년에 일어난 ‘12월혁명’에 참가했던 귀족 청년 장교들의 유배를 계기로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렸다. 20세기 초에 이르쿠츠크를 거쳐 간 유배인은 연간 2만여명에 달했으며, 소련은 시베리아 유배 정책을 더 강화했다. 이런 동토의 유배지 시베리아가 ‘컴퓨터 금광’으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제주도의 성장과 시베리아의 변화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유배지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말도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감당하기 힘든 수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과잉관광’으로 발생하는 각종 문제는 이제 제주의 엄연한 현실이 됐으며, 가상화폐의 열풍으로 빚어지고 있는 노다지 꿈은 결국 시베리아를 투기장으로 만들 것이 불을 보듯 분명하기에 되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제주도는 탐라고국으로서 한반도의 본이 되게 하기 위하여 하늘이 여기에 둔 것이다. 제주도가 한반도의 본이고 한라산이 산의 본인 것마냥 제주도 사람들은 한국 사람의 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이는 민족교육운동의 대표이자 제주도의 마지막 유배인이었던 남강 이승훈 선생이다. 그는 변방의 유배지였던 제주도의 변화와 성장을 예감했던 것일까? 그러나 남강 선생이 예감하고 기대했던 제주도의 변화와 성장은 한반도의 본, 한국 사람의 본이 돼야 한다는 쪽이었다. 지금 제주도는 한반도의 본이고, 과연 제주도 사람은 한국 사람의 본인가. 본이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본이 돼야 하고, 될 수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제 제주가 나서서 대답해야 할 차례다.
  • ‘흑기사’ 시청률, 자체 최고 경신..전생의 악연 “구천 떠도는 귀신 돼라”

    ‘흑기사’ 시청률, 자체 최고 경신..전생의 악연 “구천 떠도는 귀신 돼라”

    ‘흑기사’가 탄력 받은 스토리 전개를 이어가며 압도적 몰입감을 선사했다.쏟아지는 호평 속에 10%대 시청률을 돌파한 KBS 2TV 수목드라마 ‘흑기사(BLACK KNIGHT)’(극본 김인영 연출 한상우 제작 n.CH 엔터테인먼트)가 21일 방송된 6회에서 11.1%(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한 회 만에 경신하며 5회 연속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문수호(김래원 분)와 정해라(신세경 분), 샤론(서지혜 분), 베키(장백희/장미희 분)의 전생 이야기가 전부 공개되며 다시 한 번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다. 지난 6회 방송에서는 200여 년 전 명소(수호의 전생), 분이(해라의 전생), 서린(샤론의 전생)을 둘러싼 전생의 이야기가 더욱 극적인 전개로 펼쳐졌다. 명소와 분이가 합방한 날,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을 뿐 동침하지 않았으나 서린은 질투와 분노에 휩싸였고, 이후 조정에서 진보적 사상가들을 탄압하기 시작하며 명소가 잡혀가자 분이에게 자신의 옷을 입혀 “내 대신 죽어”라고 독하게 말했다. 서린 대신 갖은 고초를 겪은 분이는 결국 목소리를 잃은 채 명소가 유배당한 곳으로 향했고, 그 곳에서 명소와 분이는 풍족하지 않더라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 행복도 오래가진 못했고, 유배지를 찾아갔다가 명소와 분이의 모습을 본 서린은 결국 질투에 눈이 멀어 집에 불을 질렀다. 서린은 명소가 불 속에서 분이까지 데리고 나오려 하자 혼자 나올 게 아니면 같이 죽으라며 악을 썼고, 분이는 죽어가며 “영원히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어라”고 서린을 저주해 세 사람 사이의 지독한 악연을 보여줬다. 샤론과 베키의 인연도 베일을 벗었다. 분이의 저주가 통해 죽지도 못하게 된 서린을 장백희(베키의 전생)가 거둬 200여 년 넘게 함께 지내온 것. 베키는 자신이 갓난 아이였던 분이와 서린의 신분을 뒤바꾼 죄로 불로불사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샤론에게 “그 사람은 네 남자가 아니다”라고 서늘하게 경고했으나 샤론은 여전히 “부부로 만나게 된 그 사람과 내가 인연이다”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생에서 재회한 수호와 해라는 알콩달콩 ‘한 달 연애’를 시작한 상태였고, 해라를 사랑하는 수호는 샤론에게 단호히 선을 그었다. 이에 상처 받은 샤론은 시기심과 분노로 이성을 잃었고, 불로불사의 몸이 된 뒤 생긴 능력을 이용해 해라의 모습으로 변하며 극적 긴장감을 최고조로 높였다. 이처럼 ‘흑기사’ 6회에서는 수호 해라 커플이 전생에서 겪어야 했던 비극적인 죽음, 샤론과 베키가 불로불사의 벌을 받은 이유와 이들 사이의 악연, 해라에 대한 질투로 폭주하기 시작하는 샤론이 모습이 속도감 있게 그려지며 흥미를 배가시켰다. 특히 샤론의 양장점에서 잠든 해라와 해라의 형상을 한 채 차갑게 미소 짓는 샤론의 모습에서 이날 방송이 마무리되며 다음 전개에 대한 궁금증을 키운 가운데, 수목극 중 유일하게 두 자리 수 시청률을 기록하며 독주 체제를 완성한 ‘흑기사’의 상승세가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한편 ‘흑기사’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위험한 운명에 맞서는 한 남자의 순애보를 다룬 작품으로 매주 수,목요일 오후 10시 방송된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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