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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종의 유배지, 마차리 폐광촌, 복합예술공간, 벽화거리까지…뉴트로 영월로

    단종의 유배지, 마차리 폐광촌, 복합예술공간, 벽화거리까지…뉴트로 영월로

    강원도 영월이 변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고도와 오지 산골마을의 낡은 이미지가 싫어서였을까요. 레트로 감성에 젖을 만한 곳도 있고,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전위적인 풍경의 예술공간도 새로 조성됐습니다. 이런 새 요소들이 기왕에 갖고 있던 장릉, 청령포 등 영월의 옛 풍경과 어우러지며 매우 독특한 시각적 즐거움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완전히 새롭거나, 혹은 새롭게 변화한 영월의 아이콘들을 찾아가 봤습니다.●다양한 미술작품·박물관·공방이 어우러진 와이파크 먼저 ‘젊은달 영월 와이파크’부터. 흔히 와이파크라 불린다. ‘젊은달’은 영어의 영(young)과 한자 달 월(月)을 합친 조어다. 지역명 영월을 이렇게 비틀었다. 단어의 조합이 절묘하다. 와이파크는 복합예술공간이다. 다양한 미술 작품과 박물관, 공방 등이 함께 깃들어 있다. 저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만 이들이 합쳐지며 하나의 거대한 대지미술공간을 이루고 있다. 와이파크가 조성된 곳은 주천(酒泉)면이다. 한글로 풀어 쓰면 ‘술샘’이다. 지난 2014년 세워진 술샘박물관의 내부를 뜯어내 ‘붉은 파빌리온’, ‘목성’ 등의 미술관, 대지미술공간 등과 연결하면서 와이파크가 됐다. 와이파크는 들어서는 길부터 예술이다. 최옥영 작가의 설치미술 ‘붉은대나무’가 객을 맞고 있다. 붉은 금속파이프를 연결한 작품으로, 관객들에게 붉은 대나무밭에 들어선 느낌을 준다. 안내판은 “주변의 짙은 초록과 대비되는 붉은색을 사용해 젊은달 와이파크의 넘치는 에너지와 우주를 표현했다”고 적고 있다. 접객 공간을 지나면 곧 소나무 장작더미로 만든 통로다. 최 작가의 설치미술 ‘목성’(木星)의 입구다.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소나무 장작이 겹겹이 쌓인 거대한 돔이 나온다. 장작더미 사이사이에선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꼭 수많은 별이 반짝이는 듯하다. 최 작가는 “강원도에 지천으로 널린 소나무를 엮어서 만든 작품”이라며 “어머니가 가진 원초적인 자궁의 힘, 사랑, 우주의 힘을 이 공간에 쏟아냈다”고 밝혔다. 곧이어 눈을 의심할 만큼 농염한 색의 공간이 펼쳐진다. 그레이스 박 작가의 ‘시간의 거울-사임당이 걷던 길’이다. 수많은 조화와 넝쿨, 와이어, 거울 등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작품명은 ‘사임당이 걷던 길’이지만 관객이 갖는 느낌은 회중시계를 든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들어온 앨리스가 된 듯하다. 세 개의 방을 지나면 붉고 거대한 철재 구조물이 관람객을 막아선다. 이 역시 최 작가의 공간대지미술 작품인 ‘붉은 파빌리온’이다. 천장에는 거미를 닮은 거대한 그물망이 매달려 있다. ‘스파이더 웹 플레이 스페이스’다. 날씨가 맑으면 그물망 안에서 놀 수도 있다. 그물망 아래엔 탁명열 작가의 ‘푸른 사슴’이 세워져 있다. 파랑과 빨강의 대비가 강렬하다. 이어 ‘실과 소금의 이야기展’, ‘바람의 길’, ‘맥주 뮤지엄’, 술샘박물관 등이 줄줄이 펼쳐진다.●단종의 한이 서린 곳… 유배지 청령포·안식에 든 장릉 영월은 조선의 6대 왕 단종의 한이 서린 곳이다. 읍내 청령포와 장릉은 꼭 들러야 할 명소다. 청령포는 단종의 유배지다. 뒤로는 육육봉 등 험준한 산이, 앞으로는 동강 물줄기가 가로막고 있다. 최근 청령포에 전기가 공급됐다. 종전에는 관음송(천연기념물 제349호) 등 문화재 훼손 우려 때문에 전기가 들어가지 않았다. 영월군은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는 대로 최소한의 야간 조명을 할 계획이다. 장릉은 단종이 영원한 안식에 든 곳이다. 2009년 다른 조선 왕릉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장릉 뒤의 보덕사는 단종의 명복을 비는 원당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금몽암도 나온다. 단종이 한양에 있을 때 꿈에서 본 곳이라 해서 금몽암이다. 절집이 아닌 조선시대 여염집 같은 분위기가 매우 인상적이다.영월은 사진 관련 박물관이 많고 행사도 잦은 곳이다. 대표적인 행사가 동강국제사진제로, 동강사진상 수상자전, 국제공모전 등의 행사가 동강사진박물관 등에서 29일까지 펼쳐진다. 보도사진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보도사진가전’도 동강사진박물관에서 열린다. ‘꿈의 세상, 하늘과 바다’를 주제로 장남원, 김연수, 김진수, 박수현 등 전·현직 보도사진가 4인의 작품을 전시한다. 하늘과 땅, 강과 바다 등에 서식하는 야생동물을 담은 사진들이다. 단언컨대 이 전시만 봐도 영월 여행경비의 절반은 뽑는다.●대표 아이콘 별마로 천문대박물관·서부시장·탄광마을… 별마로 천문대는 영월을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다. 별(star)과 마루(정상), 로(고요할 로)의 합성어로 ‘별을 보는 고요한 정상’이라는 뜻이다. 천문대는 별을 보는 곳이지만, 천문대가 깃든 봉래산(해발 800m)은 풍경을 내려다보는 곳이다. 작은 시골마을 영월과 그 너머를 감싸고 있는 장쾌한 풍경이 한눈에 담긴다. 영월 여정에서 낮밤을 가리지 않고 꼭 방문하기를 권한다. 영월 서부시장 앞으로는 요리골목이 이어진다. 벽화거리로 유명했던 곳인데, 업그레이드가 안 돼 다소 쇠락한 모습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서부시장 종합상가 건물에 새로 그려진 벽화다. 영월이 주무대였던 영화 ‘라디오스타’(2006)의 두 주인공 최곤(박중훈 분)과 박민수(안성기 분)를 두 건물 전면에 그렸다. “언제나 나를 최고라고 불러준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최곤),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없어. 별은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박민수)라는 두 배우의 명대사가 가슴에 잔잔한 울림을 안겨 준다. 영월은 한때 강원도의 대표적인 탄광마을이었다. 마차리도 그중 하나다. 일제강점기에 광산이 개발되면서 ‘검은 진주’를 캐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됐다. 마을 이름은 갈 마(磨)에 갈 차(磋)를 쓴다. 절차탁마(切磋琢磨)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에서처럼 ‘갈고, 쪼개고, 파는’ 탄광이 들어선 것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한때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댔던 마을은 석탄산업이 하향길에 접어들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 검은 고요만 흐르던 폐광촌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지난 2013년이다. 영월군이 도시재생사업 ‘마차리 폐광촌 프로젝트’를 통해 낡은 풍경들을 걷어내기 시작했고, 프랑스의 한 유명 패션브랜드에서 ‘절차탁마’의 과정을 거친 이가 귀향해 힘을 보태면서 이제는 작지만 제법 문화의 태가 나는 마을로 변모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강원도탄광문화촌이 조성돼 있다. 1960년대 탄광 마을의 생활상들을 엿볼 수 있다. 글 사진 영월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영월의 면적은 서울의 두배 정도다. 차량 정체는 없지만 명소를 찾아 이동하는 데 시간이 꽤 많이 소요된다. 방문 코스를 잘 짜야 효율적으로 돌아볼 수 있다. 와이파크(644-9411)는 오전 10시~오후 6시 운영된다. 월요일은 휴관이다. 입장료는 1만 5000원이다. 별마로 천문대(372-8445)를 오르는 산길은 외길이다. 곳곳에 차량 교행 장소를 마련해 두긴 했지만 폭이 좁아 조심해서 올라야 한다. 영월 읍내 청록다방은 영화 ‘라디오스타’ 촬영지로 뜬 곳이다. 그저 다방 커피를 파는 곳이지만 쉬어가는 기분은 꽤 색다르다. →맛집:덕포리 성호식당은 다슬기 해장국으로 유명한 곳. 다슬기를 잔뜩 넣고 쓱쓱 비벼먹는 비빔밥도 좋다. 읍내 서부시장엔 올챙이국수, 메밀전병, 닭발과 닭강정 등을 맛볼 수 있는 집들이 많다.
  • 세 옛 절의 향기는 여전… 정릉시대 구가하던 문예촌은 흔적만

    세 옛 절의 향기는 여전… 정릉시대 구가하던 문예촌은 흔적만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1차 정릉천 따라’ 편이 추석 다음날인 지난 14일 성북구 정릉동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추석 연휴 주말을 북한산의 맑은 계곡물이 쏟아지는 정릉천에서 보냈다. 참가자들은 이날 오전 10시 우이신설선 북한산보국문역에 집결, 경국사에 들어가 고찰의 향기를 즐겼다. 주말이라 문을 열지 않는 명원민속관(한규설 가옥)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정릉천변은 1950~1970년대 쟁쟁한 문인·예술가들이 ‘정릉시대’를 구가하며 살던 ‘문예촌’이었다. 화가 이중섭·박고석·한묵·박세원·김병기, 소설가 박경리·박화성·박연희·박계주·최정희·계용묵, 시인 고은·조영암·신경림, 조각가 최만린, 작곡가 금수현·김대현, 극작가 차범석, 시사만화가 김성환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명절증후군에 시달린 주부 참가자들에게 피로를 씻어 주는 해설을 들려주기 위해 애썼다.정릉 박경리 가옥으로 가는 골목 어귀에는 ‘박경리 가옥’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있고, 담벼락에 그려진 해바라기 그림과 책 표지가 길손을 안내한다. 그러나 ‘보국문로 29가길 11’이라는 도로명주소판이 붙은 집엔 서글프게도 ‘박경리’ 문패가 아니라 ‘서울 정릉 발도르프학교’라는 낯선 대안학교 간판이 걸려 있다.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지만 서울시가 예산 부족으로 매입하지 못한 까닭이다. 참가자들은 안타까움에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문 앞을 자꾸 서성거렸다. 정비석의 ‘자유부인’ 속 댄스장이자 고급 요정이었고, 한때 신혼여행지였던 옛 청수장을 개조해 사용하는 북한산탐방안내소에 들어가 과거의 영화를 떠올렸다. 북한산 정릉골은 1971년 북악터널이 개통된 뒤 2007년 내부순환도로 국민대입구 램프가 추가 개통되기 전까지도 백악산~보현봉 자락이 장벽처럼 막아서서 개발의 손길을 거부하는 청정의 숲이었다. 청수장으로 대표되는 정릉유원지는 추억과 안식의 공간이었다. 정릉천을 따라 청수장으로 가노라면 경국사가 나타난다. ‘경국사적기’에 따르면 1325년(고려 충숙왕 12년) 자장율사가 창건할 당시 청봉 아래에 있다고 해서 청암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정릉의 옛 지명이 ‘살을 에듯 추운’ 사을한리이고, 정릉천이 청수라고 불리고, 청수장이 정릉유원지의 랜드마크가 된 배경에는 모두 청봉이라는 자연 지명의 힘이 작용했다. 청암사는 1546년(명종 1년) 문정왕후가 사찰을 중창하면서 ‘부처님의 가호로 국가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경국사라고 개명했다. 1669년(현종 10년)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복원하면서 흥천사, 봉국사와 함께 능을 수호하는 원찰로 지정돼 부흥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정릉이라는 능이 사라졌다가 260년 만에 부활한 것처럼 능을 지키는 3개 원찰의 이름이 모두 바뀌는 변고를 겪었다. 봉국사는 본래 약사여래를 모시는 약사사였지만 현종 때 ‘나라를 받든다’는 봉국사로 개명해 명맥을 이었다. 또 1409년 정릉이 정동을 떠나 정릉동으로 이장됐을 때 신흥암이라는 암자를 신흥사로 개창, 원찰로 삼았는데 1865년 흥선대원군이 흥천사라는 휘호를 내리면서 이름을 바꿨다.조계종 본산 흥천사는 신덕왕후가 처음 묻혔던 지금의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던 170여칸 규모의 대가람이었다. 태조가 죽은 지 9년 만에 능이 지금의 정릉동으로 이장되고, 1510년 유생들이 이단을 없애 버린다며 불을 질러 폐사의 비운을 맞았다. 흥천사 종은 덕수궁에 남아 있다. 태종 이방원은 종묘에 신주를 모실 때 친어머니 신의왕후 한씨만 모시고, 계모 신덕왕후는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이방원의 앙갚음에 정릉동 정릉은 황폐화했다. 172년이 흐른 1581년(선조 14년) 신덕왕후의 후손인 강순일이 군역을 면제받고자 상소를 올린 것을 계기로 조정에서 정릉의 위치를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겨우 찾았다. 1669년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종묘에 배향되고, 능의 위상을 되찾았다. 정릉을 개수하고 제사를 지내는 날 소낙비가 내려 정릉골을 흠뻑 적셨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비를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 준 ‘세원우’라고 반가워했다. 조선의 사실상 첫 왕후인 신덕왕후를 모신 정릉 흥천사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종 비 순정효황후 윤씨가 한국전쟁 때 거주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흥천사는 조선 첫 왕비와 마지막 왕비가 동시에 깃든 기구한 운명의 장소다. 정릉의 터줏대감은 서양화가 박고석이었다. 1955년 정릉에 자리잡은 박고석을 따라 부산 피난 시절 삼총사를 이뤘던 이중섭, 한묵이 가세했고, 청수장 물줄기를 따라 김병기, 김대현, 최정희, 박경리, 금수현 등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가 집을 지으면서 형성됐다. 이중섭이 죽자 유골은 삼등분됐는데 일부는 일본의 부인(이남덕)에게 보내고, 또 일부는 시인 구상에 의해 망우리 묘지로 갔다. 나머지는 박고석이 보관하다가 정릉에 뿌려졌다. 북한산행의 기점 청수장은 1910년대에 세워져 일본인 별장으로 이용되다가 1945년 해방 뒤 민간인이 인수해 사용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엔 특수부대 훈련 숙소로 사용됐다. 그 후 고급 요정 ‘청수장’으로 탈바꿈하면서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의 댄스홀로 등장한다. 1974년 이후 제법 기품 있는 음식점, 여관으로 운영되다가 1983년 4월 2일 북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여기에 편입됐다. 개축 공사를 거쳐 2001년부터 북한산탐방안내소로 바뀌었다. 유럽풍 카페를 연상케 하던 청수장 본관만 남겨 두고 등산로와 맞닿아 있던 담과 부속 건물은 허물어 아담한 정원으로 꾸몄다.1950년대 후반 돈암동 셋방에 살던 박경리(1926~2008)는 1965년부터 2002년까지 정릉동 골짜기 집에 머물렀다. 이 집에서 1969년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대장정을 담은 장편 대하소설 ‘토지’ 집필을 시작했다. 1980년 사위 김지하의 옥바라지를 위해 강원 원주로 이사할 때까지 삶의 터전이었다. 이웃사촌 박고석이 삽화를 그린 ‘노을진 들녘’은 1961년 10월부터 연재를 시작해 총 250여회를 이어 나갔다.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출간한 뒤 대표작 토지 1부 집필에 들어갔다. 정릉은 그의 대표작들이 잉태되고, 외동딸 김영주의 연애와 결혼이 이뤄진 행복한 장소였지만 고통도 담긴 곳이다. 피신해 있던 사위가 체포된 정릉 집은 차라리 유배지였다.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 선생은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사위는 서대문 형무소에 있었고/우리 식구는 기피 인물로/유배지 같은 정릉에서 살았다/천지간에 의지할 곳이 없이 살았다/수수께끼는/우리가 좌익과 우익의 압박을 동시에 받았다는 사실이다/그리고 인간이 얼마만큼 추악해질 수 있는가를/뼈가 으스러지게/눈앞에서 보아야 했던 세월/태평양 전쟁 육이오를 겪었지만/그런 세상은 처음이었다/악은 강렬했고 천하무적이었다/아 참, 그 얘기는/저승에나 가서 풀어놔야지/그 끔찍한 사실들을/측천무후인들 믿을 것인가”라고 절규했다. 정릉시대의 쓰라린 편린이다. 선생의 무덤에는 비석이 없다.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기파랑, 2017년 간)에 실린 김형국의 ‘박경리, 포한이 원력이던 소설문학’에 따르면 “이전에 무덤 앞 상석에 당신 필체로 ‘박경리’라고 성명 석 자만 달랑 새겼다던데 나중에 다시 가족이 당신 이름도 빼고 그냥 민짜 상석을 놓아 달라 했단다. 고사로 치면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는 백비(白碑)를 말함이었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고 썼다. 실제 통영 박경리기념관 선생의 묘소에는 상석 하나만 달랑 놓여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제22차 서울의 문학3(윤극영의 반달) ■일시 및 집결장소 : 9월 21일(토) 오전 10시 우이신설선 4·19민주묘지역 2번 출구 구내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풍경은 말이 없고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풍경은 말이 없고

    1870년 보불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나폴레옹 3세가 물러났다. 제3공화정이 수립됐고 프랑스는 비로소 근대적인 민주국가가 됐다. 제3공화정은 그때까지 프랑스에 존재했던 어떤 정권보다 민주적이었다. 민주적인 분위기 속에서 경제가 번성하고, 문화와 예술이 꽃피었다. 사람들은 훗날 이 시기를 그리워하며 ‘벨 에포크’, 즉 아름다운 시대라 이름 붙였다. 다들 좋았겠다고? 아니다. 제3공화정은 권위적이지 않은 대신에 정치적 소요와 사회적 갈등에 취약했다. 정치를 주도한 세 개의 주요 정당은 각자 정통성을 주장하고 과거의 실패를 다른 정파 탓으로 돌리며 뜯고 싸웠다. 종교계, 귀족, 벼락부자는 공화정을 혐오했고 전쟁을 일으켜 보불전쟁 때 독일에 빼앗긴 알자스로렌 지역을 되찾아야 한다고 핏대를 세웠다.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정부가 충분히 개혁적이지 못한 것이 불만이었다. 부유함은 가난함의 그늘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고 이는 사회 갈등을 부추겼다. 드레퓌스 사건은 제3공화정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을 집약해서 보여 준다. 1894년 군부는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오인해 유죄 판결을 내리고 프랑스령 기아나에 유배시켰다. 영화 ‘파피용’에 나오는 그 무시무시한 유배지. 나중에 진짜 범인이 드러났으나 군부는 실책을 인정하지 않고 사건을 덮어 버렸다. 재심 과정에서 프랑스 사회는 완전히 두 쪽이 났다. 보수 진영은 국익 보호, 군대의 명예를 옹호하며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표출했고, 진보 진영은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고 인권을 외치면서 군부를 규탄했다. 예술가들도 두 패로 나뉘었다. 무정부주의자이고 유대인이었던 피사로는 당연히 드레퓌스 지지파였다. 그는 구명 운동에 돈을 기부했지만, 석방 요구 탄원서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덴마크 국적 때문에 추방당할까 겁이 났던 것이다. 광풍이 지나간 후 피사로는 회고했다. “나의 최대 관심사는 따로 있었지만, 나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창문으로 시내를 내다보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1906년 드레퓌스는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의 인생은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이 논쟁은 프랑스 사회에 깊은 골을 남겼다. 미술평론가
  • ‘쌉니다 천리마마트’ 정혜성 “웃다가 진지…모든 감정 경험할 것”

    ‘쌉니다 천리마마트’ 정혜성 “웃다가 진지…모든 감정 경험할 것”

    개성으로 똘똘 뭉친 연기를 선보여온 배우 정혜성이 “‘쌉니다 천리마마트’는 웃다가 설레다가 또 눈물이 왈칵하는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드라마”라고 말해 첫 방송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상승시켰다. tvN 새 금요드라마 ‘쌉니다 천리마마트’에서 권영구(박호산)의 명령으로 정복동(김병철)을 감시하기 위해 천리마마트로 파견된 DM그룹 초엘리트 첩자 조미란 역을 맡은 정혜성. “원작 캐릭터가 굉장히 재미있었고 또 나의 본모습과 비슷한 면이 있다”며 “재밌게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는 자신이 넘치는 작품 선택의 이유를 밝혔다. 이러한 그녀의 자신감에는 캐릭터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남다른 준비가 바탕이 돼 있었다. 4개국어를 마스터한 만능 대리 조미란을 연기하기 위해, 대본 연습 때부터 유창한 영어로 대사를 준비해 와 모든 이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 또한, 원작을 꼼꼼히 읽고 캐릭터를 철저하게 비교, 분석했다. “드라마 속 조미란이 더 다채롭다고 생각했다. 불같은 성격이면서도, 새침하고 도도한 느낌, 그리고 여성미와 인간미까지 갖추고 있다”며 “이런 캐릭터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천리마마트의 다른 직원분들과 잘 어우러지는 데 중점을 두고 연기하고 있다”고. 조미란 또한 천리마마트를 통해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되는 인물이다. DM그룹에서 그녀는 사내 정치는 물론 대인관계에도 별 관심 없는 사람이었다. 첫째도, 둘째도 실적과 실력이 제일이라 생각하는 “일 잘하는 커리어 우먼”이었던 것. 그러나 천리마마트에서 근무하며 “인간미 있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정혜성 역시 캐릭터 관전 포인트로 “천리마마트로 발령받고 난 뒤 조미란이 어떻게 바뀌게 될지 지켜봐 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이와 함께 드라마에 대한 흥미로운 감상도 전했다. “웃다가 설레다가 또 눈물이 왈칵 하는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드라마가 바로 ‘쌉니다 천리마마트’”라고. “순간 훅 빠져들어서 빵빵 웃음이 터지다가도 진지해지고 또 감동하게 되는 기이한 체험을 하시게 될 것이다. 이 즐거운 경험을 꼭 함께 해주시길 바란다”며 9월 20일 첫 방송에 대한 기대에 불을 지폈다. ‘쌉니다 천리마마트’는 DM그룹의 공식 유배지이자 재래 상권에도 밀리는 저품격 무사태평 천리마마트를 기사회생시키려는 엘리트 점장과 마트를 말아먹으려는 휴먼 불도저 사장이 만들어내는 사생결단 코믹 뺨타지 드라마다. 원작은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이끌어가는 재기발랄한 이야기로 네이버웹툰 연재 당시 누적 조회수 11억 뷰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며 남녀노소 모두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김규삼 작가의 동명 웹툰. ‘잉여공주’, ‘배우학교’, ‘SNL코리아’, ‘막돼먹은 영애씨’ 등 예능과 드라마를 넘나들며 개성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온 백승룡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오는 9월 20일 금요일 밤 11시 tvN에서 첫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과천시 등 4개 기관, 추사 김정희의 글로벌 콘텐츠 진흥위해 협력

    과천시 등 4개 기관, 추사 김정희의 글로벌 콘텐츠 진흥위해 협력

    추사 김정희 선생의 숨결이 남아있는 3개 지자체가 추사의 글로벌 콘텐츠 진흥을 위해 서로 협력키로 했다. 과천시는 예산군, 제주도. 예술의 전당과 함께 추사사업 추진 4개 기관 업무 협약식을 예술의 전당에서 가졌다고 22일 밝혔다. 지난 21일 협약에 따르면 추사 김정희 선생의 본향 예산군과 유배지였던 제주도, 생의 말년을 보낸 과천시를 비롯한 예술의전당 4개 기관 공동으로 추사의 글로벌 콘텐츠 개발을 위해 연구와 전시, 교육 등 상호협력하며 공동사업을 개발·기획하기로 했다. 4개 기관은 내년 1월부터 3월까지 ‘2020년 추사한국전’을 170여 점의 작품으로 공동으로 기획하며 4곳에서 동시에 주제별 전시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김 시장은 “이번 업무협약을 계기로 추사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기리고 콘텐츠 개발로 추사 김정희 선생의 뛰어난 작품을 세계 속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정태관 화가 ‘남도 유배 섬을 가다’ 화첩 기행전

    정태관 화가 ‘남도 유배 섬을 가다’ 화첩 기행전

    전남 목포에서 활동중인 정태관 화백이 제1회 섬의 날을 맞아 ‘남도 유배 섬을 가다’ 화첩 기행전을 연다. 오는 3일부터 8일 섬의 날까지 목포 오거리 문화센터에서 전시한다. 정 화백은 “섬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국민의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매년 8월 8일이 섬의 날로 지정됐다”며 “그 첫 해를 맞아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다 본 유배 섬을 소재로 작품을 전시하게 됐다”고 밝혔다. 정 화가는 2012년부터 남도 섬을 중심으로 답사 기행하며 현지에서 화첩에 수묵화 작품을 그려 왔다. 남도 유배지 답사 기행, 땅이름 화첩기행, 해상 포구 화첩 기행, 강상 포구 화첩 기행, 섬 나들이 화첩 기행 등 섬에 대해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다 본 수묵화를 현지에서 직접 그렸다. 10m 길이의 화첩 30권 분량이다.첫 번째 기획 전시회로 남도 유배섬을 중심으로 신안 흑산도(정약전, 최익현 등), 우이도(정약전), 보길도(고산 윤선도), 여수(정만조, 노수진, 이영 등) 등을 9권의 화첩에 제작해 157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정 화가는 기존의 미술관 전시회에서 탈피한 ‘SNS전’을 개최해 미술관을 찾아 가지 않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매스 미디어를 통한 그림전시회도 함께 개최한다. 정 화가는 “전라도 해안지역과 섬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서남해 유배지는 25개 군현 36곳으로 늘고, 560여명이 유배를 왔다”며 “중앙의 관리나 학식 높은 선비들이 가져온 학문과 문화는 섬의 토착 문화와 융합돼 독특하고도 새로운 문화를 형성, 한 차원 높은 섬 문화를 꽃 피웠다”고 설명했다. 정 화가는 “다도해 유배 문화를 재해석해 섬 지방의 풍부한 문화예술 자원을 현대적인 수묵화 기법으로 그렸다”며 “그들이 살아왔던 흔적을 자연과 소통을 통해 새로운 해양문화예술로 재발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정태관 화가는 목포문화연대 공동대표로 그동안 ‘세월호 304 서화 퍼포먼스’, ‘12지를 테마로 한 SNS 풍자전’ 등의 시사적인 기획전을 펼쳐왔다. 그는 앞으로도 섬에 대한 인문학적인 시각에서 수묵화의 기법을 현지에서 재해석하는 작품을 꾸준히 화첩에 담아 테마별 기획전 등을 계획하고 있다. 목포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종종 제자들의 아기 이름을 지어 주곤 한다. 그 아기들이 잘 크는 것을 보면 기쁨과 안심이 교차한다. 고려 때 애주가 이규보는 아들 이름을 ‘삼백’(三白)이라고 지었는데 자기를 닮아서 술을 잘 마시자 “삼백이라 이름한 것 이제야 뉘우치나니, 매일 삼백 잔씩 마실까 걱정이구나” 하며 푸념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러니 이름 짓기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이름은 형식이 아니다. ‘이름이 곧 운명’(Nomen est omen)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에 어울리게 사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이름은 주술적 효과가 있다고도 했다. ‘유배로 악명 높은 10개의 섬’ 가운데 남아프리카 로벤섬에서 26년을 복역했던 넬슨 만델라는 흔히 ‘로하바’라 불렸는데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름에 걸맞게 흑백 대립을 해결하고, 민족 화해를 성사시킨 위대한 대통령이 됐다. 이름에는 사연도 가지가지다. 선조 때 19년간 제주도와 함경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유희춘은 고향인 해남을 그리워하며 4명의 딸 이름을 해성, 해복, 해명, 해귀라 지었다. 돌아가신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은 골수 해태 야구팬이어서 아들을 승태, 딸을 리태, 그리고 애완견을 개태로 지었다고도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사연 있는 이름들이 무수하다. 이름에 얽힌 재미도 많다. 홈런 한 방으로 2018년 한국시리즈를 원점으로 돌려놓은 두산의 정수빈 선수가 있다. 그는 2015년에도 한 방으로 팀을 우승으로 만들었다. 아무래도 수빈이라는 이름이 한 방에 강한 모양이다. 정조의 후궁 가운데 ‘수빈 박씨’가 있었다. 여러 후궁을 두고도 자식이 매우 귀했던 임금이 정조였다. 이런 정조의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해 준 사람이 ‘수빈 박씨’였으며 바로 순조의 생모였다. 그런가 하면 요즘 ‘기생충’으로 유명한 봉준호 감독은 유전자 변형 슈퍼돼지를 ‘옥자’라고 이름 지었다. 조지 오웰의 ‘동물왕국’에는 독재자 돼지 ‘나폴레옹’과 경쟁자 돼지 ‘스노볼’ 등이 나온다. 이름을 가지면 그것들은 더이상 돼지도 고기도 아니다. 시인 김춘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름이 중요하다. 옥자는 슈퍼돼지가 아니라 소중한 가족이었다. 후배가 게스트하우스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바닷가 언덕에 위치한 데다 후배가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해롱당’(海龍堂)이라고 해 줬다. ‘용’(龍)은 ‘언덕 롱’으로 읽기도 하고, 해롱해롱대면서 늘 취한 후배 모습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 농담으로 말한 거라 잊은 줄 알았는데 후배는 유명인에게 현판 글씨까지 받아 왔다. 글씨도 해롱대는 듯했다. 어쩔 수 없었다. 농담이 현실이 된 것이다. 때로 이름은 주인보다도 이름을 지어 주는 사람에게 더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김정희가 제주 유배지에서 그린 ‘세한도’를 받은 제자가 이상적이다. 그의 부친인 이정직은 몸이 좋지 않았는데 아들의 아명을 ‘약아’(藥兒)라 짓고 수시로 불렀다. 결국은 그 덕분에 “내 병을 고치는 약 같은 아이”라고 했듯이 건강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름은 참으로 묘한 힘을 갖고 있다. 요즘 학교 비정규직 차별 철폐 요구가 거세다. 그런데 그들의 요구를 들어보면 정당한 직업에 대한 합당한 대우만큼이나 법적 근거가 있는 호칭으로 통일해서 제대로 불러 달라고 이름의 문제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대로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 그들의 현실은 다만 차별이고, 해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장 피해를 입고 있는 학생들조차도 그들을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기왕에 그들의 이름을 제대로 지어 주고, 제대로 불러 주도록 하자.
  • 선비의 빈집, 대부의 정원… 마주 앉은 군자의 道

    선비의 빈집, 대부의 정원… 마주 앉은 군자의 道

    ●안동 권씨를 명문가로 발전시킨 권벌의 닭실마을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4대 길지라는 마을들을 꼽았는데, 경주 양동, 안동 하회와 내앞, 그리고 봉화의 닭실이다. 특히 닭실(유곡)마을은 ‘금계포란형’이라 하여, 마을을 감싸는 앞뒤 산이 닭 모양을 하고, 닭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명당이다. 예나 지금이나 집의 가치를 평가하는 최우선 조건은 그 집이 서 있는 위치, 즉 입지이다. 똑같은 크기와 구조의 아파트가 입지에 따라 수십 배 가격 차이가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학군, 상권, 교통 등 인위적인 조건을 최우선으로 꼽지만, 과거에는 산과 강, 들판과 숲으로 이루어지는 자연 조건이 중요했다. 명당은 경제적 풍요를 가져오고 위대한 인물을 배출한다고 믿었다. 달걀을 품어 금병아리를 부화한다는 믿음대로, 닭실은 이곳에 사는 안동 권씨 가문을 최고의 명문가로 발전시켰다. 이 마을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사대부 권벌(1478~1548)에서 시작한다. 그가 지은 종가가 실질적인 권씨 가문의 시작이었으며, 대를 이어 후손들의 주거지가 이 마을을 이루었다. 터만 좋다고 명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상을 받들어 효를 실천하고(봉제사), 손님들을 환대해(접빈객) 사회적 관계망을 이뤄야 한다. 무엇보다 구성원 개개인이 학문을 익히고 인격을 닦아 뛰어난 인물이 돼야 한다.권벌은 종가 옆에 충재라는 서재를 지어 수양공간으로 삼았고, 청암정을 지어 벗들과 교류하는 정원으로 삼았다. 그의 아들인 권동보는 마을 어귀에 큰 규모의 석천정사를 지어 학문 연마와 교육의 장소로 만들었다. 더 나아가 인근에 부친을 모신 삼계서원을 건립해 가문의 학문과 효를 향촌 공동체의 정규 시설로 승화시켰다. 또한 마을의 뒷산, 재궁골에 충재와 그 선대조상을 모신 선산을 마련하고, 묘 아래에재라는 재실을 지었다. 종가와 별당, 선산과 재실, 정사와 서원까지, 명문가와 명문마을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구비한 것이다. 닭실은 권벌이 터를 세우고 권동보가 완성한, 부자가 대를 이어 발전시킨 마을이다. 닭실마을의 원래 입구는 석천정사가 있는 석천계곡이다. 절경을 이루는 경치와 아늑한 분위기를 가진 환상적인 장소다. 계곡 입구 너럭바위에 한자 초서로 ‘청하동천’이라는 네 글자가 붉은색으로 새겨져 있다. 권벌의 5대손 권두응의 글씨다. ‘청하’란 해지기 직전 반짝 나타나는 맑고 찬란한 푸른 노을을 뜻한다. ‘동천’이란 신선들이 영생을 사는 도교의 이상향이다. “순간의 찬란함을 영원히 지속하는 곳.” 청하동천의 깊은 뜻이기도 하고, 닭실마을의 꿈같은 바람이기도 하다.●사대부의 인격 드러내는 양용삼칸 ‘충재’·팔작지붕 ‘청암정’ 사대부의 ‘사’는 선비이고 ‘대부’는 벼슬아치다. 사로서 고향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대부로서 세상에 나아가 경륜을 펼쳐 나라를 이롭게 한다. 성리학을 통해 깨달은 진리를 목숨을 걸고 실천하는 지행합일의 인간이 진정한 사대부다. 충재 권벌은 영의정에 추증될 정도의 최고위 관료였고, 진정한 선비로서도 추앙을 받은 인물이다. 연산군의 폭정기간에 무오, 갑자사화로 이미 많은 선비들이 처참하게 피해를 입었다. 사화란 ‘사림지화’, 즉 선비 무리에 대한 박해를 의미한다. 권벌이 30세로 관직에 오른 때는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이듬해였다. 조광조 등 급진사림파와 반정의 주인공인 훈구파의 대립이 극심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온건사림인 권벌은 두 세력의 중재를 꾀했으나, 42세 때 기묘사화로 결국 파직을 당한다. 낙향해 터를 잡은 곳이 바로 닭실마을이다. 충재와 청암정을 지은 것도 이때, 14년의 은거생활 중이었다. 1533년 56세에 복직했다가 68세에는 을사사화 때 직언으로 다시 파직당한다.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2년 후 이른바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평안도 삭주로 귀양 갔다가 유배지에서 71세 나이로 운명했다. 이 사건은 을사사화의 승자인 집권 소윤세력이 나머지 잠재적 정적들까지 말살하려 조작한 역모사건이었다. 권벌뿐 아니라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등 20여명의 큰 선비들이 화를 입었고, 이들은 후대에 국가적 추앙을 받게 된다. 서재로 지은 충재는 권벌의 인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건물이다. 2칸 온돌과 1칸 마루의 총 3칸, 지붕도 가장 간단한 맞배지붕이다. 선비들은 자신의 거처가 이른바 ‘양용삼칸’, 즉 부엌-방-마루의 3칸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은 과욕이요, 낭비다. ‘비어 있는 집’이라는 이름답게 장식도 일절 없고, 오로지 극히 필요한 것만 갖추었다. 권벌의 호는 충재요, 자는 중허다. 모두 ‘비어 있다’는 뜻이다. 세속적인 욕망을 비워 내야 성리학의 도를 깨우칠 수 있고, 국가적 공익을 담을 수 있다. 권벌은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비어 있는 충재를 지었다. 아무 기교도 없는 것 같지만 문짝 하나의 모양, 부재 하나의 위치도 의미 없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최소의 물질로 만든, 그러나 선비정신으로 가득한 집이다. 반면 바로 뒤의 청암정은 크기나 형태가 대조적이다. 큰 거북모양의 바위 위에 10칸의 丁자형 건물을 얹은 모습이다. 추녀선을 활짝 펼친 팔작지붕에 단청까지 칠한 화려한 정자다. 거북바위 주위로 둥그렇게 인공 수로를 만들었다. 마치 연못 안의 섬에 정자를 세운 모습이 된다. 물 가운데 있는 정자는 ‘사’()라 하여 매우 귀한 정원 건축으로 친다. 보통의 정자는 멋진 바위를 즐기도록 건너편에 짓는데, 이처럼 바위 위에 올라탄 건물은 극히 드물다. 충재는 그토록 소박하게 만들었는데, 청암정은 왜 이런 호사를 부렸을까? 아마도 충재가 선비(사)의 청빈정신을 드러내는 집이라면, 청암정은 관료(대부)의 호연지기를 발하는 집일 것이다. 사와 대부가 사대부의 양면이듯이, 충재와 청암정은 권벌이 가진 두 방향의 정신세계를 표상하는 집이다.●선비의 피서법… “고요하니 시원하고 비워 두니 서늘하다” 공자는 군자의 조건과 즐거움을 논어 첫머리에서 밝혔다.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을 알고, 먼 곳의 친구를 만나는 것을 기뻐하며, 그리고 남이 나를 무시해도 화내지 않는 이가 군자라고 했다. 맹자는 더 나아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을 더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서재를 마련하고, 친구들과 교우하기 위해 정자를 짓고 정원를 가꾸며, 후학을 기르기 위해 정사와 서원을 세우는 수고는 모두 군자가 되기 위한 투자다. 선비의 궁극적인 롤 모델은 바로 군자이며, 산과 계곡을 거닐며 심신을 수련해 군자가 되려고 평생 노력한다. 이는 곧 선비들의 이상적인 은거생활이었다. 닭실의 충재와 청암정, 석천정사와 삼계서원은 은거생활을 위한 필요충분 시설이었다. 또한 선비는 지역 사회의 지도자로서 용모를 단정하게 하고, 타의 모범이 되도록 조신하게 행동해야 했다. 한여름에도 몇 겹의 옷을 껴입고, 머리에는 갓을 써야 했다. 아무리 정신적인 존재라지만 푹푹 찌는 더위를 어떻게 견뎠을까? 정약용은 ‘소서팔사’에서 8가지 대표적인 선비들의 피서법을 소개했다. ‘대자리 깔고 바둑 두기/소나무 아래서 활쏘기/빈 누각에서 투호놀이/느티나무 그늘에서 그네 타기/연못에서 연꽃 구경하기/숲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비 오는 날 한시 짓기/달 밝은 밤에 탁족하기.’ 다산이 제시한 피서법은 무언가에 몰입해 더위를 잊는 방법이다. 몰입을 위해서는 우선 좋은 환경이 필요하다. 대자리와 누각 같은 인공 환경, 숲과 계곡 같은 자연환경이 조건이다. 연못의 정원, 누각과 정자와 같은 건물은 더위를 피하기 위한 필수 시설이었다. 권벌은 더운 여름날, 청암정에 올라 시를 짓고, 주변 연못의 연꽃을 바라보며 더위를 잊었을 것이다. 그의 후손들은 석천정사에서 공부하다가, 그 앞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더위를 식혔을 것이다. 맹자가 말했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는다.” 이른바 탁영과 탁족은 선비들의 비교적 적극적인 피서법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너무 소극적이다. 갓과 옷을 벗고 냇물에 온몸을 담그지 않는다. 탁족은 오히려 물이라는 자연을 적극적으로 느끼며 자연에 몰입함으로써 더위를 잊는 방법일 것이다. 몰입은 고요한 가운데 정신을 집중하는 지극히 정적인 활동이다. 중국 시인 백거이는 더위를 쫓는 또 다른 방법을 시로 지었다. “마음이 고요하니 열기 흩어지고, 방안이 텅 비어 서늘함이 감도네.” 고요함은 시원함을 일으키고, 비움은 서늘함을 가져온다. 왜 충재는 비어 있고 청암정은 고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권벌이 잊고 싶었던 것은 더위만은 아니었다. 모략과 배신 따위의 온갖 세속적인 찌꺼기들을 비우고 잊기 위해, 자연 속에서 자기 수양에 몰입했을 것이다. 선비에게 피서법은 곧 은거법이었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선비의 빈집, 대부의 정원… 마주 앉은 군자의 道

    선비의 빈집, 대부의 정원… 마주 앉은 군자의 道

    ●안동 권씨를 명문가로 발전시킨 사대부 권벌의 닭실마을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4대 길지라는 마을들을 꼽았는데, 경주 양동, 안동 하회와 내앞, 그리고 봉화의 닭실이다. 특히 닭실(유곡)마을은 ‘금계포란형’이라 하여, 마을을 감싸는 앞뒤 산이 닭 모양을 하고, 닭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명당이다. 예나 지금이나 집의 가치를 평가하는 최우선 조건은 그 집이 서 있는 위치, 즉 입지이다. 똑같은 크기와 구조의 아파트가 입지에 따라 수십 배 가격 차이가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지금이야 학군, 상권, 교통 등 인위적인 조건을 최우선으로 꼽지만, 과거에는 산과 강, 들판과 숲으로 이루어지는 자연 조건이 중요했다. 명당은 경제적 풍요를 가져오고 위대한 인물을 배출한다고 믿었다. 달걀을 품어 금병아리를 부화한다는 믿음대로, 닭실은 이곳에 사는 안동 권씨 가문을 최고의 명문가로 발전시켰다. 이 마을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사대부 권벌(1478~1548)에서 시작한다. 그가 지은 종가가 실질적인 권씨 가문의 시작이었으며, 대를 이어 후손들의 주거지가 이 마을을 이루었다. 터만 좋다고 명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상을 받들어 효를 실천하고(봉제사), 손님들을 환대해(접빈객) 사회적 관계망을 이뤄야 한다. 무엇보다 구성원 개개인이 학문을 익히고 인격을 닦아 뛰어난 인물이 돼야 한다. 권벌은 종가 옆에 충재라는 서재를 지어 수양공간으로 삼았고, 청암정을 지어 벗들과 교류하는 정원으로 삼았다. 그의 아들인 권동보는 마을 어귀에 큰 규모의 석천정사를 지어 학문 연마와 교육의 장소로 만들었다. 더 나아가 인근에 부친을 모신 삼계서원을 건립해 가문의 학문과 효를 향촌 공동체의 정규 시설로 승화시켰다. 또한 마을의 뒷산, 재궁골에 충재와 그 선대조상을 모신 선산을 마련하고, 묘 아래에 추원재라는 재실을 지었다. 종가와 별당, 선산과 재실, 정사와 서원까지, 명문가와 명문마을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구비한 것이다. 닭실은 권벌이 터를 세우고 권동보가 완성한, 부자가 대를 이어 발전시킨 마을이다. 닭실마을의 원래 입구는 석천정사가 있는 석천계곡이다. 절경을 이루는 경치와 아늑한 분위기를 가진 환상적인 장소다. 계곡 입구 너럭바위에 한자 초서로 ‘청하동천’이라는 네 글자가 붉은색으로 새겨져 있다. 권벌의 5대손 권두응의 글씨다. ‘청하’란 해지기 직전 반짝 나타나는 맑고 찬란한 푸른 노을을 뜻한다. ‘동천’이란 신선들이 영생을 사는 도교의 이상향이다. “순간의 찬란함을 영원히 지속하는 곳.” 청하동천의 깊은 뜻이기도 하고, 닭실마을의 꿈같은 바람이기도 하다. ●권벌의 인격을 드러내는 양용삼칸 ‘충재’·팔작지붕 ‘청암정’ 사대부의 ‘사’는 선비이고 ‘대부’는 벼슬아치다. 사로서 고향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대부로서 세상에 나아가 경륜을 펼쳐 나라를 이롭게 한다. 성리학을 통해 깨달은 진리를 목숨을 걸고 실천하는 지행합일의 인간이 진정한 사대부다. 충재 권벌은 영의정에 추증될 정도의 최고위 관료였고, 진정한 선비로서도 추앙을 받은 인물이다. 연산군의 폭정기간에 무오, 갑자사화로 이미 많은 선비들이 처참하게 피해를 입었다. 사화란 ‘사림지화’, 즉 선비 무리에 대한 박해를 의미한다. 권벌이 30세로 관직에 오른 때는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이듬해였다. 조광조 등 급진사림파와 반정의 주인공인 훈구파의 대립이 극심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온건사림인 권벌은 두 세력의 중재를 꾀했으나, 42세 때 기묘사화로 결국 파직을 당한다. 낙향해 터를 잡은 곳이 바로 닭실마을이다. 충재와 청암정을 지은 것도 이때, 14년의 은거생활 중이었다. 1533년 56세에 복직했다가 68세에는 을사사화 때 직언으로 다시 파직당한다.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2년 후 이른바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평안도 삭주로 귀양 갔다가 유배지에서 71세 나이로 운명했다. 이 사건은 을사사화의 승자인 집권 소윤세력이 나머지 잠재적 정적들까지 말살하려 조작한 역모사건이었다. 권벌뿐 아니라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등 20여명의 큰 선비들이 화를 입었고, 이들은 후대에 국가적 추앙을 받게 된다. 서재로 지은 충재는 권벌의 인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건물이다. 2칸 온돌과 1칸 마루의 총 3칸, 지붕도 가장 간단한 맞배지붕이다. 선비들은 자신의 거처가 이른바 ‘양용삼칸’, 즉 부엌-방-마루의 3칸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은 과욕이요, 낭비다. ‘비어 있는 집’이라는 이름답게 장식도 일절 없고, 오로지 극히 필요한 것만 갖추었다. 권벌의 호는 충재요, 자는 중허다. 모두 ‘비어 있다’는 뜻이다. 세속적인 욕망을 비워 내야 성리학의 도를 깨우칠 수 있고, 국가적 공익을 담을 수 있다. 권벌은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비어 있는 충재를 지었다. 아무 기교도 없는 것 같지만 문짝 하나의 모양, 부재 하나의 위치도 의미 없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최소의 물질로 만든, 그러나 선비정신으로 가득한 집이다. 반면 바로 뒤의 청암정은 크기나 형태가 대조적이다. 큰 거북모양의 바위 위에 10칸의 丁자형 건물을 얹은 모습이다. 추녀선을 활짝 펼친 팔작지붕에 단청까지 칠한 화려한 정자다. 거북바위 주위로 둥그렇게 인공 수로를 만들었다. 마치 연못 안의 섬에 정자를 세운 모습이 된다. 물 가운데 있는 정자는 ‘사’()라 하여 매우 귀한 정원 건축으로 친다. 보통의 정자는 멋진 바위를 즐기도록 건너편에 짓는데, 이처럼 바위 위에 올라탄 건물은 극히 드물다. 충재는 그토록 소박하게 만들었는데, 청암정은 왜 이런 호사를 부렸을까? 아마도 충재가 선비(사)의 청빈정신을 드러내는 집이라면, 청암정은 관료(대부)의 호연지기를 발하는 집일 것이다. 사와 대부가 사대부의 양면이듯이, 충재와 청암정은 권벌이 가진 두 방향의 정신세계를 표상하는 집이다.●선비의 피서법… “고요하니 시원하고 비워 두니 서늘하다” 공자는 군자의 조건과 즐거움을 논어 첫머리에서 밝혔다.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을 알고, 먼 곳의 친구를 만나는 것을 기뻐하며, 그리고 남이 나를 무시해도 화내지 않는 이가 군자라고 했다. 맹자는 더 나아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을 더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서재를 마련하고, 친구들과 교우하기 위해 정자를 짓고 정원를 가꾸며, 후학을 기르기 위해 정사와 서원을 세우는 수고는 모두 군자가 되기 위한 투자다. 선비의 궁극적인 롤 모델은 바로 군자이며, 산과 계곡을 거닐며 심신을 수련해 군자가 되려고 평생 노력한다. 이는 곧 선비들의 이상적인 은거생활이었다. 닭실의 충재와 청암정, 석천정사와 삼계서원은 은거생활을 위한 필요충분 시설이었다. 또한 선비는 지역 사회의 지도자로서 용모를 단정하게 하고, 타의 모범이 되도록 조신하게 행동해야 했다. 한여름에도 몇 겹의 옷을 껴입고, 머리에는 갓을 써야 했다. 아무리 정신적인 존재라지만 푹푹 찌는 더위를 어떻게 견뎠을까? 정약용은 ‘소서팔사’에서 8가지 대표적인 선비들의 피서법을 소개했다. ‘대자리 깔고 바둑 두기/소나무 아래서 활쏘기/빈 누각에서 투호놀이/느티나무 그늘에서 그네 타기/연못에서 연꽃 구경하기/숲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비 오는 날 한시 짓기/달 밝은 밤에 탁족하기.’ 다산이 제시한 피서법은 무언가에 몰입해 더위를 잊는 방법이다. 몰입을 위해서는 우선 좋은 환경이 필요하다. 대자리와 누각 같은 인공 환경, 숲과 계곡 같은 자연환경이 조건이다. 연못의 정원, 누각과 정자와 같은 건물은 더위를 피하기 위한 필수 시설이었다. 권벌은 더운 여름날, 청암정에 올라 시를 짓고, 주변 연못의 연꽃을 바라보며 더위를 잊었을 것이다. 그의 후손들은 석천정사에서 공부하다가, 그 앞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더위를 식혔을 것이다. 맹자가 말했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는다.” 이른바 탁영과 탁족은 선비들의 비교적 적극적인 피서법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너무 소극적이다. 갓과 옷을 벗고 냇물에 온몸을 담그지 않는다. 탁족은 오히려 물이라는 자연을 적극적으로 느끼며 자연에 몰입함으로써 더위를 잊는 방법일 것이다. 몰입은 고요한 가운데 정신을 집중하는 지극히 정적인 활동이다. 중국 시인 백거이는 더위를 쫓는 또 다른 방법을 시로 지었다. “마음이 고요하니 열기 흩어지고, 방안이 텅 비어 서늘함이 감도네.” 고요함은 시원함을 일으키고, 비움은 서늘함을 가져온다. 왜 충재는 비어 있고 청암정은 고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권벌이 잊고 싶었던 것은 더위만은 아니었다. 모략과 배신 따위의 온갖 세속적인 찌꺼기들을 비우고 잊기 위해, 자연 속에서 자기 수양에 몰입했을 것이다. 선비에게 피서법은 곧 은거법이었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생강으로 정치를 생각하다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생강으로 정치를 생각하다

    실낱같은 목숨을 “차, 생강, 막걸리 따위로 겨우 부지해 간다”(茶薑紅麯與相依)고 제주 유배인 김정희는 말했다. 그는 이 가운데 특히 생강을 적극적으로 먹었던 것 같다. 가장 좋은 반찬으로 “두부, 오이, 생강, 나물”(大烹豆腐瓜薑菜)을 꼽았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김정희는 비교적 장수를 했다. 송시열도 제주도에 유배를 와서 생강 농사를 지었다. 1772년에 세워진 유허비에 보면 “하루는 지팡이를 들고 뜰을 둘러보고 빈 땅에 손수 생강을 심었다”고 했다. 이제 곧 사약을 먹고 죽게 될 사람이 왜 생강을 심었는지 모르겠다. 포항에서 유배살이할 때도 “뜰 앞에 작은 채소밭을 만들어 놓고 밭 가운데 생강을 심었다”고 했다. 이처럼 생강을 중시했다. 물론 그 덕분인지 그도 장수를 했다. 생강이 몸에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효능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귀중하고 소중한 식재료이자 약재임이 분명하다. 필자도 생강차는 물론 꿀에 잰 생강절편을 좋아한다. 특히 막걸리를 사 가면 안주로 어머니가 만들어 내놓으시는 생강김치야말로 최고의 별미다. 생강 맛의 기묘한 탄산음료도 있다지만 아직 마셔 보진 못했다. 해로움보다 이로움이 많은 것이 생강이다. 그런데 김정희나 송시열이 생강을 좋아한 것이 비단 건강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화합할 줄 알며, 자기 색을 잃지 않는 생강이 되라”고 했던 이율곡의 충고처럼 자기 향과 맛을 강하게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음식들을 만나면 과감히 화합해서 새로운 맛과 향을 만들어 내는 그런 ‘생강 같은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자기의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남들과 과감히 화합할 줄 아는 삶. 바로 그것이 ‘생강 같은 삶’이다. 결코 쉽지 않은 삶이다. 이런 점에서 김정희는 성공했다. 그의 유배생활을 필자는 한마디로 “추사는 불행했지만 제주는 행복했다”고 정리한다. 그는 불행한 유배인이었지만 유배지 주민들과 잘 어울리고, 그들을 제자로 삼아 격려하고 가르쳐 준 덕분에 제주는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삶을 살면서 자기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문제는 자기도 행복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지 못한 경우다. 최근의 우리 정치권이 그렇다. 여야가 정면충돌하면서 국회 파행이 장기화되고 있다. 자기 당에 대한 고집과 막말로 화합이 전혀 안 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도 전혀 행복하지 못한 상황이다. “화합할 줄 알며, 자기 색을 잃지 않는 생강이 되라”던 충고가 새삼스럽다. 우스개일지 모르지만 정치권 양반들은 생강을 먹어 본 적이 없는 게 확실하다. 그렇다면 국회 식당의 요리사가 문제다. 생강의 인문학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국회 파행을 지켜보면서 절묘한 생강 요리로 국회의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어야 했다. 어쩌면 그런 노력을 했지만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우리 국회는 생강 요리 하나로 회복되기에는 이미 살벌한 투쟁장으로 변한 지 오래기 때문이다. 생강의 힘은 조화의 힘이다. 단순히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고 친하게 지내는 것만이 조화가 아니다. 대종교의 논리를 빌리자면 조화하지 못한다는 것은 창조의 원리를 어기는 것이고, 파탄의 길을 가는 것이다. 조화야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장수하게 하는 묘수다. 과감히 조화하지 못하면 제주 유배인 최익현의 지적처럼 “이욕(利欲)이 넘쳐 나고, 의리가 어두워져 밤낮으로 괴이한 데로만 치달리고, 예의와 염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돼 결국 모두가 파국을 맞게 된다. 모쪼록 생강을 통해 정치를 생각해 보자.
  • 여성해방 진두지휘, 6·10만세운동 주도…파란만장했던 ‘최고 미인’

    여성해방 진두지휘, 6·10만세운동 주도…파란만장했던 ‘최고 미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대표적인 인물은 이동휘(대통령장,1995년) 선생이다. 2005년 3·1절에 몽양 여운형(대한민국장) 등 사회주의 계열 54명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는 등 2007년까지 다수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훈장을 받았다. 그중에 주세죽이 있다. “남로당 총책 박헌영의 부인. 코뮤니스트. 당대의 ‘얼짱’. 3·1만세운동과 6·10만세운동에 참여한 항일투사. 여성해방운동가.” 주세죽의 일생은 파란만장하고 비극적이다. 주세죽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돼 왔다. 수년 전 손석춘 작가의 ‘코레예바의 눈물’과 조선희 작가의 ‘세 여자 이야기’를 통해 생애가 알려졌다. ‘코레예바의 눈물’은 손 작가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여행을 갔다가 발견한 주세죽의 자필 기록을 토대로 쓴 소설이다.주세죽은 함남 함흥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으로는 1901년생이다. 중농 집안에서 태어난 주세죽은 영생여학교 고등과에 다녔고 피아노 실력이 출중했다고 한다. 1919년 3월 3일 함흥 장날,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주세죽도 참가했다가 붙잡혔다. 한 달 동안 입에 담기 어려운 모멸적인 성고문을 받고 출소했다. 풀려난 주세죽은 함흥 시내 병원에서 간호 보조원으로 일했다. 일본인 의사의 성추행에 또다시 진저리를 친 주세죽은 중국 상하이 유학을 결심했다. 그곳에는 한 살 아래 친구 허정숙이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피아노를 공부하러 간 상하이에서 주세죽의 운명은 바뀌게 된다. 허정숙의 소개로 박헌영을 만났다. 박헌영, 김단야 등은 주세죽이 오기 한 달 전인 1921년 3월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했다. 박헌영은 책임비서였고 주세죽도 고려공청에 가입해 기관지 ‘올타’를 편집하는 등 사회주의 활동을 벌였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동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박헌영을 뒤따라 주세죽은 1922년 3월 조국으로 돌아왔다. 조국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벌이겠다는 의지에 불타 있었다. 먼저 갔던 박헌영과 허정숙의 남편 임원근, 김단야는 귀국 정보를 알아낸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세 사람은 각각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됐다. 주세죽은 여성해방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당대 조선 최고의 미인으로 통했다. 박헌영의 친구인 소설가 심훈은 대리석으로 깎은 얼굴이라고 했다. 주세죽을 모델로 ‘동방의 애인’이라는 소설도 썼다. 주세죽, 허정숙, 김단야의 동거녀 고명자를 당시 언론은 여성 트로이카라고 불렀다.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은 남자 삼총사였다. 주세죽과 허정숙은 반봉건, 여성해방의 뜻으로 단발머리를 했다. 주세죽은 허정숙, 정종명 등과 함께 1924년 5월 서울 천도교회관에서 조선여성동우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여성 노동자들의 인권 향상을 위한 조직이었다. 고무공장, 비단공장, 정미소를 찾아다니며 강연회와 토론회를 열었다. 여성 항일운동단체 근우회에도 동참했다. 1925년 5월 조선공산당이 출범했다. 조선공산당을 추동할 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도 창립했다. 박헌영이 고려공청 책임비서를 맡았고 주세죽은 후보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우발적인 술자리 사고로 조직이 탄로 났다. 김단야만 피신했고 주세죽, 박헌영, 임원근, 허정숙이 검거됐다. 주세죽은 증거 부족으로 한 달 만에 풀려났다. 순종의 국장일인 1926년 6월 10일, 주세죽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또 보름 만에 풀려났다. 주세죽은 만세운동을 기획한 공청 중앙위원이었지만, 박헌영이 아니라고 보호했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정신이상자가 됐다. 그러나 이는 위장이었다. 박헌영은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주세죽과 박헌영은 요양을 이유로 함흥으로 간 뒤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로 배를 타고 탈출했다. 임신한 주세죽은 도착하자마자 딸 영(影)을 낳았다. 1928년이었다. 그해 11월 두 사람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김단야가 먼저 가 있었다. 김단야는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조선담당관이었다. 주세죽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박헌영은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했다. 박헌영은 주세죽에게 ‘코레예바’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지어줬다. 고려의 여성이라는 뜻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두 사람은 1932년 초 딸을 국제유아원에 맡겨놓고 상하이로 갔다. 영에게 ‘비비안나’라는 다른 이름을 지었다. 상하이에서 주세죽은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활동을 지원하고 기관지를 국내로 들여보냈다. 이듬해 7월 박헌영은 체포됐다. 그 사이 주세죽과 김단야는 도망쳤다. 김단야는 박헌영이 고문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주세죽을 연모한 김단야의 거짓말이었다. 그러고는 사랑을 고백했다. 둘은 1934년 1월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박헌영이 죽었다고 믿은 주세죽은 김단야와 결혼했다. 1937년 소련은 일제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씌워 김단야를 체포했다. 이성태란 사람의 모함이었다. 이듬해 2월 13일 석 달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주세죽도 5년 유배형을 받았다. ‘제1급 범죄자의 아내로서 사회적 위험분자’라는 죄목이었다. 1938년 5월 주세죽은 유배지 카자흐스탄으로 떠났다. 김단야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은 유배지에 도착하자마자 병에 걸려 죽었다. 유배지 크질오르다는 사할린에서 활동하던 홍범도 장군이 강제이주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광복 후 지하에서 활동하던 박헌영은 월북한 뒤 1946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주세죽은 프라우다지에 난 기사를 보고 박헌영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당시 18세이던 비비안나에게 아버지임을 알렸다. 박헌영은 주세죽이 유배된 사실을 알고 최대한의 배려를 요청했다. 주세죽은 그다음 날 거주 제한이 풀렸다. 박헌영은 비비안나를 만났다. 그러나 주세죽을 만날 의사는 없었다. 주세죽은 스탈린에게 조선으로 보내달라는 청원서를 보냈다. 스탈린은 거부했다. 주세죽은 딸에게로 가다 병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휴전 회담이 한창이던 1953년 나이 52세 때였다. 두 남자를 똑같이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3년 후 죽임을 당했다. 주세죽의 첫 남편은 미제 스파이, 두 번째 남편은 일제 스파이로 몰려 죽은 것이다. 허정숙은 북한 문화선전상,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남북적십자회담 대표 등을 지내고 1991년 89세로 사망했다. 고명자는 일제의 고문으로 원치 않는 전향을 했다가 친일적인 글을 쓰기도 했고 6·25 전쟁 중에 사망했다.1989년 소련 당국은 주세죽과 김단야를 사면했다. 1991년 박비비안나는 한국을 방문했다. 박헌영의 고향 충남 예산에서 가져간 흙을 주세죽의 묘비에 뿌려줬다. 비비안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무덤이라도 있는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행복한 편입니다.” 비비안나는 무용수와 대학교수로 활동하다 2013년 사망했다.우리 정부는 2007년 주세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단야에게는 독립장을 추서했다. 임원근은 앞서 1993년 애국장을 받았다. 중국 태행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사망한 윤세주(독립장)와 진광화(애국장)도 건국훈장을 받았다. 님 웨일스 ‘아리랑’의 실제 주인공 김산(장지락)에게도 2005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그러나 아직도 복권되지 못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많다. “‘빨갱이’에게 무슨 훈장이냐”는 우파의 공격을 받고 있다. 전쟁과 분단을 겪은 현실에서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념의 무덤에서 독립유공자를 파내는 일을 멈춰선 안 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취해 있지 않고 깨어서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취해 있지 않고 깨어서

    북한이 평안도 구성에서 미사일을 발사했다. 숙종 때 구성에서 유배살이하던 송시열의 제자 이선은 세상이 취해 있지만 홀로 깨어 있겠다는 뜻에서 자신의 유배지를 ‘깨어 있는 집’ 즉 ‘성와’(醒窩)라 이름 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비상시국에 당연히 우리도 깨어 있어야 한다. 태평성대를 이끈 세종대왕 때는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년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어떻게 된 것이 오늘 우리의 형편은 3년도 편안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무엇이 문제인가. 많은 경세가와 평론가들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만 지엽적일 뿐이다. 요즘 마약 문제가 연일 터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병들었다는 방증이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가 호문쇄연(虎門鎖煙)이다. 아편이 중국 민생에 심각한 피해를 주자 임칙서(林則徐)가 1839년 영국 상선에 실려 있던 아편을 전부 거둬들여 호문의 모래사장에서 불태워 버린 사건을 말한다. 임칙서는 아편 반대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낡은 중화사상에서 벗어나 세계로 시야를 넓힐 것을 중국인들에게 외쳤다. 그러나 아편전쟁이 터지고 중국이 잇달아 패배하자 조정은 그 책임을 임칙서에게 물었고 결국 신강성 우루무치로 유배를 당한다. 귀양길에 오르며 친구 위원(魏源)에게 자료들을 넘겨주면서 세계지리서인 ‘해국도지’(海國圖誌) 편찬을 부탁했고 1842년에 출간된다. 1845년 추사 김정희는 보물이라며 제주도 유배 중에 제자인 이상적을 통해 이 책을 구해 읽는다. 우리는 마약 문제 해결을 검찰과 경찰에만 맡기고 있다. 중국의 임칙서와 같은 기개와 예지가 있는 영웅이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모두 자기 밥그릇 싸움에만 혈안이다. 정치는 혹세무민의 포장이 된 지 오래고, 경제는 민생을 외면하고 있다. 사회가 병드는 게 당연하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지만 우리에겐 영웅이 없다. 잘못된 교육 탓이다. 며칠 전 어버이날에 조사된 것을 보니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현금이고 받기 싫은 것이 책이라고 했다. 책은 멀고 돈은 가까운 시대가 도래했다. 조선에서 유일하게 부부 문집을 간행했던 정조 때 홍인모 부부는 자녀들과 함께 독서하면서 늘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특히 아버지는 맏이에게, 맏이는 둘째에게 둘째는 막냇동생에게 읽어야 할 책 목록을 선물했는데 이른바 ‘홍씨독서록’이다, 이 덕분에 아들 3형제는 훌륭한 관료가 됐고 딸은 저명한 시인이 됐다. 집안이 잘되기를 바라는 욕심이 가장 큰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래도 과거에는 책의 교육을 선택했지만 지금은 현금에 의한, 현금을 위한, 현금의 교육만을 선택하고 있고 그것이 이른바 ‘SKY캐슬’ 교육이다. 인사청문회를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탈락은 했지만 주택 투자와 절세의 달인이라 평가받는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가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아 송구하다”며 청문회에 앞서 설레발을 쳤다. 정말 송구하다면 애초 후보 수락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고위공직자들마다 제주유배인 최익현이 말했던 것처럼 “이욕(利欲)이 넘쳐 나고 예의와 염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공직윤리가 없는 것은 가정과 학교 교육 탓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세종대왕과 임칙서처럼 공동체를 염려하는 영웅이 탄생할 수 없다. 결국은 교육이다. 북한 미사일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정치나 민생 경제를 위해서도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다. 기성의 질서에, 기성의 문법에 취해 있지 않고 깨어서 새 말, 새 몸짓으로 새 세상을 열기 위한 새로운 접근과 새로운 시도가 진정 시급하다.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흔한 것이 귀한 것이니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흔한 것이 귀한 것이니

    “봄은 자유롭다. 자 봐라, 꽃 피고 싶은 놈 꽃 피고,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라고 시인 오규원은 말했다. 과연 봄이 무르익었다. 버들이 연둣빛이다. 추사 김정희의 인장 가운데 ‘양류당년’(楊柳當年)이 있다. “버들처럼 무성하던 그때”라는 뜻이다. 김정희가 가장 활발하던 시기를 상징한다. 누구에게나 물오른 버들처럼 푸른 시절이 있다. 그러나 꿈처럼 그 시절은 간다. 귀한 것들이 흔할 때가 봄이다. 충암 김정은 “산나물로는 삼백초와 고사리가 가장 많았다”고 했다. 300가지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그 귀한 삼백초가 제주도에 흔한 것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 추사의 편지에도 “산채는 더러 있으나 본디 여기 사람은 먹지 않으니 괴이한 풍속이오”라고 했다. 산나물을 먹지 않는 제주 사람들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흔하기 때문이었다. 흔한 것을 이용한 귀한 행사가 있다. 제주 고사리축제가 그것이다. 제주 5현 가운데 한 사람인 동계 정온은 10년을 귀양살이했다. 이 긴 시간 동안 제주 여인 강씨가 고사리를 꺾으며 도왔던 덕분에 동계는 무사히 유배를 마쳤고, 말년에는 덕유산 자락에 “고사리를 꺾는 집”이라는 뜻의 채미헌(採薇軒)을 짓고 살았다. 이렇게 사랑과 정성은 물론 의리와 절개의 스토리가 제주 고사리와 함께 자란다. 흔한 것이 귀한 거라고 한다. 그러나 흔하기에 그 가치를 모르거나 잊고 지내기 십상이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 강진은 “바닷가라서 좋은 채소는 적고, 좋다는 것은 쑥갓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쑥갓처럼 영양소가 풍부한 나물도 드물다. 또한 그가 좋아했던 것 중 하나가 아욱국이다. 맛이 너무 좋아 문을 걸어 잠그고 먹는 것이 ‘가을 아욱국’이고 그래서 막내 사위만 준다 했지만 ‘봄 아욱국’도 만만치 않다. 그 흔한 쑥갓과 아욱이야말로 귀한 나물이었던 것이다. 흔하지만 처리에 따라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봄에 흔한 꽃이 진달래다. 그러나 정조 때 권상신은 국수에다 진달래를 멋들어지게 얹힌 “진달래국수가 맛이 매우 좋았다”며 입을 다셨다. 어디 그뿐이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삼짇날이면 화전을 안주 삼아 술을 걸치는 전화음(煎花飮)의 풍습이 있었다. 화전 가운데 으뜸이 진달래전이었다. 함열에서 귀양 살던 허균도 봄날 별미로 진달래전을 꼽았다. 봄철 바닷가에는 갯무라는 ‘야생 무’ 꽃 또한 흔하다. 야생 무를 포르투갈에서는 사라마구라고 한다. 1998년 노벨문학상 작가인 조제 사라마구(Jose de Sousa Saramago)의 이름이기도 하다. 71세에 발표했던 소설이 교황청과 갈등을 빚자 정부는 유럽문학상에 선정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데, 이에 반발한 사라마구는 스페인의 란사로테로 자발적 유배를 가 버린다. 여기서 75세에 발표한 작품이 그 유명한 ‘눈먼 자들의 도시´다. 그러니까 갯무는 흔한 꽃이 아니라 가장 귀한 꽃인 셈이다. 몸소 귀하게 여길 때만 흔한 것도 귀해진다. 우암 송시열은 장기에서 귀양살이할 때 “뜰 앞에 작은 채소밭을 만들어 놓고 친히 스스로 모종을 심고 풀을 벴다. 또한 밭 가운데 생강을 심었다”라고 했다. 제주에서도 몸소 농사를 지었다. 아마도 “내가 지어야 할 농사를 내가 지어서 내 삶을 보살피고, 내가 가진 책을 내가 읽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 마음대로 하며 내 인생을 마치려 한다”라고 했던 제주 유배인 유언호와 같은 자세라면 가장 흔한 것도 가장 귀한 것이 될 것이다. 봄이 가기 전에 그래야 한다.
  • ‘해치’ 정일우, 한승현 충격 죽음에 핏줄 선 오열 “형님”

    ‘해치’ 정일우, 한승현 충격 죽음에 핏줄 선 오열 “형님”

    SBS ‘해치’ 정일우가 ‘경종’ 한승현의 충격적인 죽음에 처절하게 오열했다. 60분 내내 브라운관 압도한 미친 몰입도와 함께 혼란스러운 조정에서 ‘왕세제’ 정일우가 앞으로 펼칠 활약에 관심이 치솟는다. 지난 8일(월) 방송된 SBS 월화드라마 ‘해치’ 33회, 34회에서는 경종(한승현 분)이 끝내 밀풍군(정문성 분)의 계략에 의해 죽음을 맞아 충격을 안겼다. 특히 이 과정에서 왕세제 이금(정일우 분)이 자신에게 향할 비난과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내의원의 탕제를 물리는 등 경종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해 눈길을 끌었다. 이날 이금은 내의원에서 혈흔이 발견됐다는 사실을 확인, 그 배후에 밀풍군이 있을 수 있다는 의혹을 품었다. 이에 이금은 갑작스레 병환이 악화된 경종에게 내의원 탕약을 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다. 하지만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은 없는 상황. 이금은 박문수(권율 분)에게 밀풍군과 위병주(한상진 분), 도지광(한지상 분)의 재조사를 지시했고, 내의원을 긴급 수색했다. 하지만 이는 이금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는 사안이었고 그를 향한 신료들의 반발은 거셌다. 탕약에 독이 사용됐을지 모른다는 의혹은 있으나, 이가 밀풍군의 소행이라는 점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경종의 병세 악화를 눈 앞에서 지켜만 봐야 하는 것. 이금은 내의원을 대신해 도성의 명의를 불러냈지만 그 또한 병의 원인조차 찾지 못하는 절체절명 위기가 이어졌다. 특히 조태구(손병호 분)는 “주상전하의 병을 치료할 의지는 있으신 것이옵니까”라며 이금을 능멸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중전(송지인 분) 또한 “세제의 처분을 납득할 수 없다”며 분노했다. 이에 민진헌(이경영 분)은 현실적인 충언을 건넸다. 그는 “장차 군왕이 되고자 한다면, 불구덩이는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명백한 진실도 외면할 수 있는 것. 때론 그것이 진짜 책임일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라며 일침했다. 하지만 이금은 “책임을 피해야 한다면. 그런 것이 군왕이라면. 난 차라리 그 길을 가지 않을 것이다”라며 이 또한 자신이 감내해야 할 길임을 되새기는 등 왕세제으로서 소신을 드러냈다. 사방에서 이금을 향해 날을 세울 때 인원왕후(남기애 분)가 힘을 보탰다. 특히 인원왕후는 궁녀 수업을 받고 있던 여지(고아라 분)를 궐 안으로 불러 대비전의 나인으로 삼는 등 향후 이뤄질 이금과 여지의 재회에 관심을 높였다. 그런 가운데 이 모든 것이 밀풍군의 계략이었음이 실제로 드러나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밀풍군은 채윤영(배정화 분)을 앞세워 내의원 수의녀에게 해독제가 없는 극독을 탕재에 넣게 한 것. 더욱이 밀풍군은 이금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경종을 살리기 위해 탕약을 물릴 것이라는 것을 예측했고, 이로 인해 경종이 죽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탕약을 금한 이금의 잘못된 선택이 될 것이라는 악마 같은 계략을 그려냈다. 특히 채윤영이 해당 수의녀를 독살하며 증험을 입증할 결정적인 증인까지 사라지게 됐다. 무엇보다 끝내 경종이 죽음을 맞이해 충격을 안겼다. 경종은 “그만 애쓰거라. 너는 부디 만백성을 위한 좋은 왕이 되어다오. 나는 될 수 없었던 내가 꿈꿨던 그런 왕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이후 경종을 붙잡고 처절하게 오열하는 이금의 모습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특히 스스로 살을 도려내 경종에게 자신의 피를 수혈하는 이금의 모습이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 과정에서 정일우는 얼굴의 핏줄이 곤두설 만큼 고통에 찬 절규로 보는 이들까지 눈물을 쏟게 만들었다. 더욱이 “형님”이라는 짧은 울부짖음 속에서 경종을 향한 아우의 깊은 우애가 드러나 마음을 아리게 했다. 그런 가운데 남인인 이인좌(고주원 분)가 첫 등장해 이목을 끌었다. 특히 이인좌가 유배지에 있는 위병주를 찾아가 또 다시 파란이 일어날 것이 예고돼 긴장감을 높였다. 그런가 하면 조태구와 소론이 대비전에 몰려가 “저하께선 이 나라의 왕이 될 자격이 없으십니다”라며 집단 반발해 위기 속 이금이 앞으로 보여줄 행보에 관심을 높였다. SBS 월화드라마 ‘해치’는 오늘(9일) 밤 10시에 35회, 36회가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바람처럼 자유롭게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바람처럼 자유롭게

    전설의 유배지 탈출기, 영화 ‘빠삐용’(Papillon)이 다시 만들어져 개봉됐다. 스티브 매퀸과 더스틴 호프먼이 열연하던 영화 장면들이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 있어서 나는 새로 만들어진 영화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1973년에 제작된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 유명한 탈출 장면과 ‘바람처럼 자유롭게’(Free as the wind)라는 주제곡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빠삐용´은 앙리 샤르에르라는 실제 인물의 자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샤르에르는 1930년 살인 사건에 연루돼 누명을 쓰고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의 섬’(Devil’s Island)에 유배된다. 13년간 그는 아홉 번에 걸친 치열한 시도 끝에 마침내 그 섬을 탈출한다. ‘악명 높은 세계 10대 유배지’ 가운데 하나인 ‘악마의 섬’은 1854년 나폴레옹 3세가 유배지로 지정한 이래 1940년대까지 8만여명의 죄수가 수감됐고, 사망률이 워낙 높아 사형수들의 목을 자르는 ‘건조한 기요틴’이라 불릴 정도였다. 유배지 탈출의 예는 비단 ‘빠삐용’만이 아니다. 패배한 나폴레옹은 1814년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유배된다. 그러나 ‘제비꽃이 피면 돌아오겠다’던 약속처럼 10개월 후 그는 탈출해 파리로 돌아온다. 유배지에서도 황제의 복장을 벗지 않고 노심초사하던 그는 승전국들이 영토 배분 문제로 탁상공론을 벌이는 틈을 타서 탈출했던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였던 스탈린은 여덟 번 체포돼 일곱 번 시베리아로 유배됐지만 여섯 번이나 탈출을 했던 기이한 경력자다. 미하일 바쿠닌은 시베리아 유배지를 탈출해 육로로 북태평양 연안까지 가서 이곳에서 일본으로 간 뒤 일본에서 미국으로 갔다가 미국에서 서유럽으로 건너가 제네바에서 무정부주의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유배지 탈출 시도는 무궁무진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게 된다.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한 폐모살제(廢母殺弟)의 부도덕과 명나라를 배반하고 후금과 우호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이로써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세자 이지와 폐빈 박씨는 강화도로 유배된다. 이때 폐세자 이지는 땅굴을 파고 탈출을 시도한다. 그런데 땅굴을 파서 밖으로 나가기는 했지만 곧 발각돼 인조의 명에 따라 자진을 하게 된다. 한편 동정을 살피던 폐빈 박씨도 남편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역시 자진을 한다. 아들 부부를 잃은 충격으로 폐비 유씨 또한 세상을 하직하자 광해군은 제주도로 옮겨지고 4년 후 죽는다. 왜 그들은 탈출하려 했을까? 그러나 탈출은 쉽지 않다. 체포가 항시 뒤따르기 때문이다. 소련의 비밀경찰들은 ‘체포학’이라는 이론을 정립할 만큼 치밀했다. 소련의 민낯을 파헤친 솔제니친의 소설 ‘수용소 군도(群島)’의 제1장은 바로 체포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체포! 이것은 당신 전 생애의 파멸을 뜻한다”고 했다. 그렇다. 파멸하고 싶지 않기에 우리는 탈출을 감행한다. 우리는 현재 신자유주의라는 투기적 욕망과 이기적 경쟁 체제 안에 갇혀 살고 있다. 이 아비규환 속에서 과연 탈출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애초 탈출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유배된 채 이것이 삶이라며 자위하고 때로 강변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삶이 과연 정상인가? 정상처럼 보이는 이상한 정상은 아닌가? 그 끝은 혹시 파멸이 아닌가? 그렇다면 탈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악마의 섬을 탈출했던 빠삐용처럼 투기적 욕망과 이기적 경쟁이라는 악마의 체제를 탈출할 수는 없는가? 나는 유배인인가 탈주자인가? 대체 나는 누구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 오로지 국가·민생 위하여… 18년 유배생활서 ‘실사구시’ 꽃피우다

    오로지 국가·민생 위하여… 18년 유배생활서 ‘실사구시’ 꽃피우다

    다산은 유배된 후 할 일이 없어 고금을 연구하고 민생 문제와 국가의 대계에 유념하여 토론하고 저술하였다. 그는 근본적인 것을 규명하여 실제 사용할 수 있는 학문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저술은 모두 후세의 법이 되었던 것이다. -황현, ‘매천야록’ 권1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고, 민과 국가가 처한 위기를 타개하고자 개혁 사상을 내세운 실학자다. 그가 남긴 저술과 제시한 개혁안이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새로운 차원에서 기억되고 호출되고 있는 것은 어째서일까. 이는 그가 남긴 학문적 성취가 현재까지 남아 현재로 이월되었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의 학술적 역량과 개혁적 사유는 ‘여유당전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매천이 다산의 저술을 두고 현실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범으로 주목한 것은 다산의 실사구시 정신을 주목한 것일 터이다.#시대를 아파하고 민을 노래한 거인 다산은 실학자이기도 하지만, 그가 남긴 시문은 여느 시인과 달리 현실 문제를 소재로 포착하고 있어 진한 울림을 준다. 더욱이 다산의 남시문은 그의 학술적 성취와 안팎을 이룰 정도로 조화를 이룬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요,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개탄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며, 높은 덕을 찬미하고 나쁜 행실을 풍자하여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한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다. -‘다산시문집’ 권21, ‘아들 연아(淵兒)에게 보냄’ 다산은 일찍이 “나는 조선사람. 조선시를 즐겨 지으리라”라고 해 ‘조선시 선언’을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한시 특유의 음풍농월과 달리 민의 삶을 포착하여 민을 위한 비가(悲歌)로 표출한 바 있다. 나라와 시대를 걱정하고 권선과 징악을 풍자하는 시만이 진실한 시라고 주장한 다산의 사유 속에는 항상 민과 나라가 자리잡고 있었다. 다산은 다른 글에서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려는 마음이 없는 자는 시를 지을 수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매우 단호한 문학인식을 보여 줬다. 그 문학적 단호함은 ‘애절양’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군적을 만들어 군포(軍布)를 거두는 폐단을 고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모두 죽을 것’이라고 확언하면서 ‘애절양’을 인용한 바 있다. ‘애절양’은 조선조 후기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군포 착취로 농민이 스스로 자신의 남근을 자른다는 비참한 내용을 담은 한시다. 다산은 ‘경세유표’ 앞머리에서 “지금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라고 발언하고 있거니와, 이는 남근을 스스로 자르는 비참한 현실을 개혁하려는 의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자 당대 현실의 정확한 진단이다.#좌절을 딛고 고뇌 속에 꽃핀 창조 다산은 유배 생활에서 숱한 좌절을 겪지만, 그 상황에 굴하지 않고 학단을 만들어 제자를 기르는 한편 그들의 학문적 역량을 빌려 저술활동을 하고 개인적 좌절도 이겨 내었다. 그는 유배 기간 내내 학문적 고뇌 속에 창조적 예봉을 마다하지 않았다. ‘경세유표’를 비롯해 ‘목민심서’와 ‘흠흠심서’ 등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은 대부분 유배 시기에 구상하거나 저술했다. 학술적 두 축인 경세학과 경학의 성취가 모두 이 시기에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다산은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창조적 시간으로 활용해 학술적 역량을 꽃피운 것이다. 유배를 마친 이후에도 다산은 저술을 보완하고 수정을 거듭하며 자신이 구상한 사회개혁과 새로운 국가건설의 대안을 녹여 내었다. 하지만 자신의 학술적 성취가 유명무실해지는 것을 항상 두려워했다. 내 죽은 뒤에 아무리 정결한 희생과 풍성한 안주를 두고 제사를 지낸다 하여도, 내가 진정 흠향하고 기뻐하는 것은 내 책 한 편을 읽고 내 책 한 장을 베껴 주는 일보다는 못할 것이니, 너희는 그 점을 기억해 두어라. -‘다산시문집’ 권21, ‘두 자식에게 보여 주는 훈계’ 유배지에서 학술 교류가 없던 상황이다 보니 자신의 성취를 외면하지 말 것을 자식에게 당부하지만, 언젠가 자신의 저술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는 민을 위하고 국가를 혁신하는 대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산의 저술은 민과 국가를 자양분으로 사고한 학술적 꽃이다. 무엇보다 다산 스스로 유배지에서 넉넉한 민의 품성을 재발견하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를 개혁하려 한 역사적 전망을 지녔기 때문이다. 다산이 시문에서 ‘민’을 중심에 놓고 노래한 것이나, 사서삼경과 같은 경전을 재해석한 저술과 ‘경세유표’와 같은 경세서에서 국가를 중심에 놓고 혁신적 안을 마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다산은 ‘자찬묘지명’에서 ‘낡고 오랜 우리 조선을 새롭게 혁신’(新我之舊邦)할 것을 주장했다. ‘경세유표’ 머리글에서는 “지금 곧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다”라는 발언을 거리낌 없이 했다. #난세에 호출되는 ‘여유당전서’ 다산의 저술은 한국학의 거점이자 19세기 학술의 뛰어난 성과다. 그의 저술은 이후 역사 공간에서 비상한 주목을 받는다. 과거사가 아닌 현재진행의 역사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호출된다. 고종은 부강정책에 예의주시하여 경장을 서둘렀다. 그러나 많은 신하 중에서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을유년과 병술년 사이에 ‘여유당집’을 올리라고 하였다. -‘매천야록’ 권1 고종이 부국강병을 위해 다산의 저술을 기억한 것은 새로운 국가체제의 구상에 필요한 대안을 다산의 경세서에서 찾으려 한 것임은 물론이다. 시대의 호출에 다산의 저술이 부활한 것이다. 다산의 혁신적 사유와 개혁적 여러 안들은 갑오농민전쟁 시기에도 다시 주목을 받는다. 1930년대 실학 연구의 선구자인 최익한은 ‘강진읍지’를 인용하면서 전봉준, 김개남 등의 갑오농민군 지도자들이 ‘경세유표’를 활용하였음을 밝힌 바 있다.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우리는 정약용의 저술이 역사적 변혁기에 재발견되고 호출하고 있는 점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다산의 저술은 일제강점기에 이월돼 조선학 운동을 추동하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 1930년대 중반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등은 ‘신조선사’라는 출판사에서 ‘여유당전서’와 ‘담헌서’ 등을 출간하면서 조선학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근대적 학술이 식민지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식민지학에 대응한 자국학의 정립에 방점이 있다. 자국학의 구체적 학술적 성과에 ‘여유당전서’를 그 중심에 둔 것은 지금의 한국학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처럼 다산의 저술은 시공을 넘어 수시로 기억된다. 진재교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 여유당전서는 다산의 저술 정리한 문집 필사·목판본 등으로 간행 다산의 저술은 일찍이 필사본과 목판본, 연활자본 등으로 유통됐다. 다산의 자제와 제자들은 문집 간행을 위해 원고본을 만들었지만 500권 100책에 이르는 저술은 조선조가 끝날 때까지도 간행하지 못했다. 그의 저술 중에서 실용적인 문헌은 19세기까지 필사본으로 유통됐지만, 공식 출판은 19세기말 목판본인 ‘이담속찬’이 유일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일부 학술단체의 일본인들이 다산의 저술을 필사하고 연활자로 간행한 바 있고 이후 장지연, 최남선, 정인보 등 지식인들은 다산의 저술을 재발견해 일부 저술을 연활자로 간행했다. 다산 서거 100주년을 전후로 1934~38년 신조선사에서 154권 76책 ‘여유당전서’를 간행했다. 이 ‘여유당전서’는 정약용 스스로 구상한 체재와 다르게 7집 체재로 돼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일찍이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번역했고 1982~94년 ‘여유당전서’ 중에서 시문집 22권 10책을 국역 간행했다.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지극한 관심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지극한 관심

    새해 첫날과 설날을 대표하는 음식이 떡국이다. 그런데 이 떡국 한 그릇조차 먹기 힘든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위해 떡국 나눔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경종 때 추자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이진유는 새해를 맞아 ‘바닷물에 절인 배추와 채소를 넣어 끓인 떡국’밖에 못 먹는 자신의 신세를 통탄했다. 재미있는 것은 세상은 변해 바닷물에 절인 배추야말로 미네랄이 풍부한 최고의 김치감이 됐고, 채소로 끓인 떡국은 건강식으로 변모했다는 사실이다. 떡국 한 그릇을 먹기 힘든 사람들도 이처럼 세상이 바뀌어 어느 새해인가부터는 웃으며 다른 힘든 사람들에게 떡국을 나누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스 신화에 이카로스 이야기가 있다. 크레타섬에 갇혀 있던 다이달로스는 탈출을 위해 아들 이카로스에게 깃털에 밀랍을 발라 날개를 만들어 준다. 그는 “너무 높이 날면 태양열에 밀랍이 녹고, 너무 낮게 날면 바다 물기에 날개가 무거워지니 항상 중간으로만 날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이카로스는 하늘로 더 높게 날고자 하다가 태양열에 밀랍이 녹아 바다에 추락해 결국 죽고 만다. 흔히 이카로스 신화를 ‘자유를 향한 비상(飛上)’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을 그린 네덜란드의 화가 P 브뤼겔과 그 그림을 보고 시를 쓴 영국 시인 W H 오든은 “브뤼겔의 이카로스를 보라. 모든 것이 고통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지 않은가”라고 하면서 오히려 이웃의 비극과 고통을 철저히 외면하는 세태를 고발한다. 누가 추락해 고통을 받든 세상 사람은 아무 관심이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 그림과 비슷한 꿈을 꾼 여자가 있다. 제주도와 함경도 종성에서 20여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던 유희춘은 부인 송덕봉에게 ‘몸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다가 너무 높이 오르면 끝내는 추락할 것이기에 날기를 그만두었다’는 꿈 이야기를 듣는다. 송덕봉은 권력의 정점에서 남편의 몰락을 걱정했던 것이다. 나아가 누가 쓰러지든, 누가 20년의 유배 생활로 고통을 받든 세상은 아무 관심이 없음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웃의 비극과 고통을 철저히 외면하는 세태는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 최근에 청년 하청노동자 김용균이 비참하게 죽었다. “지극히 원통한 일을 당하여 하늘에 호소해도 응답이 없고, 땅에 호소해도 응답이 없다”(至?大痛 呼天不應 呼地不應)고 했던 정약용의 말을 증거하는 사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 이런 비참함과 원통함이 ‘사람 중심의 국가’를 내세우는 문재인 정부에서 생기는 것인지 모르겠다. 위험을 모두 이웃에게 미루고, 그들의 비극과 고통은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 다름 아닌 ‘위험의 외주화’다. 이 때문에 발생하는 죽음들이 김용균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를 방지하려면 무엇보다 위험 앞에 선 사람들에 대한 생산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시위에 나선 사람들이 “내가 김용균이다”를 외치고 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죽하면 이 당연한 관심을 제발 기울여 달라고 호소할 정도이겠는가. “그대가 날마다 무량수경(無量壽經)을 읽으며 빌어 주는 성의에 힘입어 편안하게 살고 있으니 기쁘고 감사하오”라고 김정희는 제주에서 친구 초의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대의 관심 덕분에 위험한 유배지에서 잘 견디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누군가를 살리는 관심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관심 덕분에 나 역시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힘든 사람들의 처지가 바뀌고, 원통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에 대해 세밀하고 지극한 관심이 필요하다.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우리들의 밧모섬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우리들의 밧모섬

    로마시대 정치범을 유배 보내던 에게해의 파트모스섬은 세계에서 ‘유배로 악명 높은 10개의 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기독교인들에게는 ‘밧모’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며, 로마 황제가 사도 요한을 유배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사도 요한은 이곳에서 ‘요한계시록’을 썼고 그래서 유네스코(UNESCO)에서는 1999년 ‘성 요한 수도원과 파트모스섬 요한계시록 동굴’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마르틴 루터는 1520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을 받고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어서 지냈다. 이곳에서 루터는 질병과 두려움에 시달리며 교황에서 벗어난 그리스도교를 구상했고, 성서를 번역했으며, 방대한 저작물들을 남겼다. 이곳에서 루터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열정과 집중력을 발휘함으로써 일약 그리스도교 사상의 정점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성을 “나의 밧모섬”이라고 불렀다. 한말의 3대 시인이었던 강위는 제주 유배 중이던 김정희를 찾아가 보고 “달팽이집에서 10년간 가부좌를 트셨다”(蝸廬十載跏趺膝)며 스승의 유배지를 ‘달팽이집’에 비유했다. 윤선도 역시 ‘어부사시사’에서 “와실(蝸室)을 바라보니 백운이 둘러 있다”고 하면서 작고 누추한 자신의 유배지를 에둘러 표현했다. 그러니까 김정희나 윤선도에게 달팽이집은 그들의 ‘밧모섬’이었던 셈이다. 로맹 가리는 가장 권위 있는 프랑스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1956년에는 본명으로, 1975년에는 가명으로 2회 수상했던 특이한 작가다. 그는 굴레를 벗은 자유로운 말이라는 뜻의 ‘시마론’이라는 별장에서 온종일 글을 썼다. 그런데 하수구를 별장 근처에 만들려 하자 홧김에 그 집을 팔아 버린다. 그 후로 그는 햇볕이 작열하는 또 다른 은신처를 찾아 끊임없이 헤맨다. 그의 ‘밧모섬’을 찾아 헤매었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밧모섬’이 필요하다. 적어도 ‘다른 길과 다른 가치와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을 원한다면 자신의 ‘밧모섬’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연암 박지원은 “경조사도 폐하고 혹 며칠씩 세수도 않고 혹 열흘간 망건도 쓰지 않고 지냈다”고 했다. “잠이 오면 자고, 깨면 책을 보거나 글을 쓰기도 하고, 막 배운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어쩌다 친구가 술이라도 보내오면 마시고 취하기도” 했다. 이렇게 무엇을 해야겠다는 목표를 두지 않고, 몸과 마음이 하자는 대로 지내는 동안 박지원은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이라는 다른 상상을 할 수 있었다. 혼자 있으면 쓸쓸하다고 이를 달래기 위해 ‘쓸쓸비용’을 지출하는 사람들이 많다. 안 써도 되지만 혼자인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쓰는 것이다. 반려동물에 대한 지출이 그렇다. 1인 가구 중심으로 관련 시장이 팽창 중이다. 이런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의 밧모섬에서 쓸쓸함을 이겨 내는 사람들도 많다. 도서관에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중년들이 그들 중 하나다. 나만의 서재, 나만의 작업 공간으로 느껴져 자주 찾는다는 그들에게 도서관이야말로 나의 ‘밧모섬’인 것이다. 이렇게 각자의 ‘밧모섬’에서 소위 ‘셀프 유배’를 하는 동안 어느덧 ‘다른 길과 다른 가치와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을 하게 됨은 물론 더욱이 몸과 마음도 따라서 건강해지니 놀랍고 신기한 일일 수밖엔 없다. 그래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도 “유배 와서야 세상사 끊고 기쁨 얻었네”(謫來?喜世情?)라고 했었는지도 모른다. 한 해가 화살처럼 가는데 더 늦기 전에 각자의 밧모섬에서 제대로 기쁨을 맛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끝이 없는 유배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끝이 없는 유배

    오랜만에 배를 탔다. 비행기로 육지 나들이를 하는 까닭에 특별한 일이 아니고선 배를 이용하는 일이 거의 없다. 대학생 때만 하더라도 주로 배를 탔지만 이제는 바쁘고 편하다는 이유로 비행기 이용이 당연하게 됐다. 더욱이 저가항공사 덕분에 배를 타는 일은 정말 웬만하지 않고서는 하지 않는다.배도 타 보지 않고 어떻게 유배에 대한 글을 쓰느냐는 친구의 핀잔도 한몫했지만 남도를 찾을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배인들의 처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유배인을 실은 배가 제주도와 가까워지면서 무엇보다 한라산 봉우리를 맨 먼저 만났을 것이다. 배를 타 본 사람이라면 알지만 이때부터가 먼 시간이다. 잡힐 듯이 한라산 봉우리가 보이는데도 정작 제주도는 멀기만 하기 때문이다. 잡힐 듯한 것은 늘 멀기 마련이다. 돈도, 권력도, 심지어 사람도 그렇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아마도 유배인들은 제주도를 향한 뱃머리에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추사 김정희만 하더라도 유배를 올 때가 9월인 데다 날씨가 좋다 보니 바람결도 순해서 배 타는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았을 법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난날을 뒤돌아보니 속이 울컥거리고 처지가 원망스러워져 “하늘이여! 대저 나는 어떤 사람이란 말입니까?”(天乎此何人斯) 하고 자탄을 했다. 당연하다. 한때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특히 글씨를 잘 쓴다는 명성을 천하에 떨치던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서 멀리 중국에서조차 명성이 아깝지 않았던 그였지 않은가. 그러던 그가 하잘것없는 권력 싸움에 버려져 졸지에 죄인 신세가 됐으니 알다가도 모를 것이 세상이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그렇고 심지어는 흥망성쇠의 나라 운명조차도 알다가 모를 일이다. 헌종 임금이 “바다의 파도 속으로 왕래하는 것이 어렵지 않더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스승을 찾아 제주도를 다녔던 제자 허련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하늘에 맡겨 버린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바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도착한 곳이 “적막한 귀양지”(寂寞之濱) 제주도였던 것이다. 이 극악의 유배지에서 과연 살아서 돌아갈 수나 있을지 어느 유배인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절망은 제주 바다만큼이나 깊었을 것이고 한라산만큼이나 컸을 테다. 과연 살아 돌아가 다시 아내와 피붙이들을 만날 수는 있을 것인지, 흩어진 친구와 이웃들의 얼굴은 다시 볼 수나 있을 것인지 기약할 수 없는 곳이 제주도였다. “이제 몇 년을 어떻게 견디어야 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유배인들이 제주도에 첫발을 내디디며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이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그렇다 견디어야 한다. 절망이 클수록 견뎌 내야 한다. 남편과 사랑하던 아들을 졸지에 잃고 동물처럼 신음하던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극복이 아니라 그것을 견디어 냈다고 했다. 박경리 선생도 “내 조상은 역신(逆臣)이던가. 끝이 없는 유배”라고 자신의 일생을 표현했다. 견디는 것이야말로 유배인들의 자세였다. 요즘 우리 서민들의 처지가 “모진 고생과 상심 속에 구사일생으로 지냈다”고 했던 유배인들의 삶과 다를 바 없다고 하면 지나칠지 모르겠다.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니라 저녁을 굶는 삶”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이 나올 정도이니 “사람 중심 국가”를 외치는 문재인 정부 자체가 유배의 상황으로 빠져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해서 어려움이 깊어지는지 촛불을 지지했던 한 사람으로서 염려스러울 뿐이다. 오랜만에 배를 타고 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개인이나 공동체나 이 어려운 시기를 지혜로웠던 유배인들처럼 잘 견뎌 내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보았다.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가 끝나다 - 영월 청령포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가 끝나다 - 영월 청령포

    ‘노산군이 세종이 임어하시던 자미당 창가의 난간을 보고 크게 탄식하기를, 할바마마께서 살아 계시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어찌 적겠는가? 하니, 종자(從者)들이 모두 감격하여 울었다.’ <단종실록 12권, 단종 2년 11월 25일. 국편영인본 6책 712면> 역사서에는 그를 노산군 혹은 홍위(弘暐), 또는 휘지(輝之)라고 불렀다 한다. 그는 왕이었지만 왕이 되지는 못했다. 그를 왕이라 부르는 자는 여지없이 가문의 뿌리까지 뽑히었다. 삶의 그림자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불운한 소년, 조선의 제 6대 국왕인 단종(端宗. 1441-1457)이다. 단종은 출생부터가 남달랐다. 태종(1367-1462) 이후 적장자(嫡長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조선의 왕위 계승 원칙이었다고는 하지만 실제 적장자로 즉위한 왕은 조선을 통틀어 고작 7명에 불과하였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단종은 적장자를 넘어 적장손 신분이었기에 더더욱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실히 갖추고 있었다. 그가 태어나던 1441년에는 이미 아버지 문종(1414-1452)은 공식적으로 왕위 계승 세자 신분이었으며, 할아버지 세종(1397-1450)은 강력한 왕권을 지닌 국왕이었다. 또한 어머니인 현덕왕후 역시 비록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지만, 단종이 출생하던 시기에는 정실인 세자빈의 위치에 있었다. 한마디로 단종은 적자이면서 적손이었으며, 장자이면서 장손이었고, 이에 원손이자 세손, 세자라는 조선 왕조 계보상 가장 순수 혈통의 정통성을 제대로 갖춘 최초의 국왕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권력은 하늘 끝을 찌르는 정통성이라는 명분보다는 칼을 쥘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게 돌아간다. 단종이 12살 어린 나이에 국왕으로 오른 때인 1452년에는 이미 할아버지인 세종, 할머니 소헌왕후, 아버지 문종과 어머니 현덕왕후마저 세상을 떠나고 없던 시기였다. 수렴청정조차 해줄 왕실의 어른도 없는 미래를 짐작이나 한 듯 세종대왕과 문종은 서거 전에 김종서, 황보인 등에 단종을 보필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어린 임금인 단종을 앞에 내세운 채 조정대신을 대표하는 김종서, 황보인 그리고 이들을 지원해주던 세종의 셋째 안평대군 세력에 반하여 위기의식을 느끼던 왕실 훈신 세력의 대표격인 세종의 둘째인 수양대군과 세종에게 왕위를 빼앗긴 양녕대군(1394-1462) 세력 등이 충돌하는 계유정난(1453)이 일어난다. 결론적으로 수양대군은 1455년 세조가 되었고 모든 권력을 잡게 된다. 권력은 결코 자비가 없다. 단종의 죽음은 예고된 셈이었다. 1457년(세조 3년)에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영월에 위치한 청령포에 유배된다.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인 육육봉으로 막힌 이곳은 지금도 배가 아니면 드나들 수 없는 육지 속의 단절된 섬같은 곳이다. 결국 단종은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57년 10월 21일에 자결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죽임을 ‘당했다’라는 기록도 전해진다. 사육신 박팽년의 9세손 박경여가 권화와 함께 엮은 책인 장릉지(莊陵誌)에는 “세조 3년 10월 24일 유시(酉時)에 공생(貢生)이 활끈으로 노산군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하였다. 노산군의 옥체는 청령포의 강물에 던져 버린 것을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거두어 영월군 북쪽 5리쯤의 동을지(冬乙旨)에 매장했다.”라는 기록도 남아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청령포는 이름난 관광지가 되었다. 이곳에는 현재 복원한 단종어소를 비롯하여, 영조대왕의 친필이 음각된 단묘재본부시유지비와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는 금표비, 단종 유배 이야기를 간직한 소나무인 관음송과 단종이 직접 쌓아올렸다고 전해지는 망향단 돌탑 등이 남아 당시의 슬픔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청령포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영월을 방문한다면 한 번쯤은 2. 누구와 함께? - 가족 단위, 친목회 3. 가는 방법은? - 영월군 영월읍 청령포로 133 - 88번 지방도를 타도 되고, 38번 국도를 타고 가도 된다. 38번 국도가 낫다. 4. 감탄하는 점은? - 육지 속의 섬. 유배지로서의 최적지로 볼 수 있는 장소를 그 당시 어떻게 찾았을까?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최근 방문객이 부쩍 늘었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망향단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닭강정 ‘일미강정식당’, 다슬기해장국 ‘성호식당’. 칼국수 ‘고향’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5,00500000,32&pageNo=5_2_1_0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한반도 지형으로 유명한 선암마을, 별마로 천문대, 국가지정 명승 제 76호인 선돌.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조선의 가장 불운한 왕이었던 단종. 조선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오래된 슬픔을, 권력의 무자비함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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