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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서문화 장벽 ‘천산’(중앙아시아를 가다:7)

    ◎당,751년 ‘천산전투’ 이슬람에 패배/중의 중앙아 포기,이슬람화 가속 천산을 넘었다.우루무치를 떠나 알마아타로 오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설산은 장관이었다.사막을 풍요로 가꾸어주는 만년설을 인 설산 준봉들이 끝없이 늘어섰다.그 천산은 알마아타공항에 내렸을때도 마치 군림하는 자세로 여전히 우뚝했다.카자흐말로는 티엔산이다.옛 소련연방시절에도 그랬지만,자연풍광이 수려한 천산을 넘으면 늘 푸근한 감회가 안겨왔다. 그것은 천산너머 첫 도시 알마아타에 사는 사람들 때문인지도 모른다.그들 카자흐인들은 우리민족과 아주 가까운 친연관계의 문화를 지녔다.그래서 문화에서는 친근감이 우러나고 사람들은 정겨웠다.처음 알마아타를 찾았을때 당혹스러웠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전화교환원과 영어로 대화를 하면서 그들은 ‘차이나(중국)’가 무슨 뜻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위구르족도 불교서 개종 그들은 중국을 러시아말로 ‘기타이’라 했다.이말은 알고보면 우리말에 뿌리를 두었다.우리말의 거란을 중국식으로 발음한 ‘기단’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다.그러니까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는 중국인을 요나라 사람들인 거란족으로 알고 있었다.우리 역사속에서 비중있게 조우한 중국 동북지방의 그 거란족이다.중국인들이 회홀 또는 회골이라 부르던 위구르족들의 종교라는 뜻에서 이슬람을 회회교라 했다는 것은 지난번에 밝혀 두었다.그러나 위구르족이 불교에서 실제 이슬람으로 완전 개종한 시기는 14세기의 일이다. 이들 두가지 사례는 참으로 놀라운데가 있다.중국은 한대이후 22세기 동안의 역사 가운데 절반 이상을 유목기마민족의 침략을 받았다.그렇다면 중국은 기마민족의 주무대인 서역의 정보를 언어체계 안에제대로 반영했을 법도 하다.하지만 중국의 언어문화체계는 이러한 상식적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기마민족들 역시 22세기동안 교역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던 중국역사의 실체에 무지했다.얼마나 몰랐으면 중국인을 거란족으로 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문화의 장벽은 천산에서 비롯되었다.그래서 천산을 넘으면 중국은 없었다.751년 고구려의 고선지 장군이 이끈 당나라 군대와 지아드 이븐 살리히 휘하의 이슬람군이 천산 서북쪽 탈라스강에서 맞붙었다.닷새간 벌어진 치열한 싸움에서 당군이 패배했다.이는 중국세력이 천산너머의 중앙아시아 대초원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를 부추겼다. 그렇듯 탈라스전투는 세계사의 한획을 그었고 또 천산의 문화장벽을 한층더 높였다.중앙아시아에 가면 한문은 실제 신화에 나오는 문자에 불과했다.중국문화가 배어들어 온 흔적이 없는 것이다.다만 한무제가 서역정벌에서 남긴 차를 마시는 습관만이 있을뿐이다.그 천산너머의 사람들은 건조한 기후조건을 이겨내기 위해 발효한 검은차를 마셨다.검은차를 마시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 옛날 몽골이나 알타이,또 중국과의 국경지대가 아니면 중국과 직접 교역하던 민족의 후예다.그들 문화가 얼핏 이슬람 일색인듯 하면서도 문화전통과 인종학적 혈통이 다른 까닭도 여기 있다. ○한문은 신화속의 문자로 중앙아시아의 민족과 문화는 참으로 혼돈스럽다.그 혼돈의 문제를 중앙아시아 종교사로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나름대로 가닥을 잡아보았다.인종과 문화가 복잡하게 얽힌 가장 두드러진 까닭은 기마민족 탄생에 있다.청동기시대에 나타난 기마민족은 기마술을 이용한 민족의 대이동을 재촉했다.기원전인 BC 13세기쯤 인도유럽족의 한 갈래인 힉소스족의 기마병이 이집트를 쳤을때 이집트인들은 기마병을 처음 목격했다.그래서 말을 괴물로 여겼다. ○기마술로 민족의 대이동 인도유럽족이 기마술을 선도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이보다 앞서 BC15세기말에 말을 처음 보고 산에서 자란 큰 당나귀로 여겼다는 것이다. 어떻든 BC2000년쯤 알타이와 남부 시베리아에 와서 아파나시에보 청동기문화를 이룩한 인도유럽족은 일찍 기마술을 터득했다.이는 정착농경이나 반농경생활로 삶을 꾸려오던 스텝지역 주민들에게 충격으로 작용했다.농경 대신에 가축으로 부를 가늠하는 유목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이 때문에 활동무대도 차츰 넓어졌다.그리하여 그리스어로 스키타이,이란어로 사카라는 왕조들이 BC8세기부터 기원후인 AD4세기까지 스텝지방과 북인도를 지배했다.그무렵 동서인종의 혼혈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몽골지역에서는 BC4세기부터 흉노가 일어나 서쪽으로 나갔다.AD5세기 중엽에는 아틸라왕이 중부유럽 전역을 완전히 휩쓸어 동서로마제국을 기진맥진한 상태로 몰아넣었다.흉노의 서진은 결국 게르만의 대이동을 가져왔다.이어 6세기 이후에는 돌궐 또는 투르크제국이 등장하고,오스만터키는 세계1차대전까지 유럽을 위협하는 대제국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흉노의 후예가 돌궐이다.이들은 여러 종족이 혼합한 정치세력이어서 인종적으로 매우 복잡하다.그러나 언어만큼은 동양어족의 말인 투르크어를 썼다.그러니까 인종으로 보아서는 복합적이었지만,문화적으로는 동질성을 지녔던 것이다.투르크족이 8세기쯤부터 이슬람화하면서 얼핏 투르크민족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특히 중국과 유럽 양쪽 눈에 비친 투르크는 더욱 더 그러했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언어로,때로는 인종적 혈연을 매개로민족의 정체성을 끈끈하게 이어오고 있다.그들 투루크족들에게는 아직도 같은 기마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 3천여년전의 여인(중앙아시아를 가다:6)

    ◎얼굴·옷·장신구까지 위구르족과 비슷/죽음의 사막 신강성 타클라마칸/해뜨면 45도가 넘는 건조한 기후/이곳 묻힌 주검은 완벽한 미라로 중앙아시아를 몇차례 여행한 경험에 비추어 타클라마칸사막을 찾는 일이마나 어려운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사막에 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만한 어려움쯤은 이미 각오를 해둔 터였기 때문이다. 막상 사막에 도착했을때는 그 결연한 의지가 흔들리기 시작했으나,다시 이를 악물었다.사막에서 죽으면 안된다는 생각은 투루판의 아시타나 고분군과 코알라박물관을 보고 나서 더욱 절실했다. 코알라박물관 진열장에는 3천년 세월을 뒤로한 미라가 잠을 자듯이 누워있다.해가 뜨면 45도를 웃도는 건조한 사막에 묻힌 주검은 곧바로 탈수되어 완벽한 미라로 변한다. 만약 나 자신이 사막에 묻힌다면 미라가 될 것이다.그리고 수천년 후에 세인의 구경거리가 될지도 모른다.사막에서 죽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된 연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우루무치박물관에서도 또 다른 미라를 보았다.이른바 ‘누란미인’라는 미라다.누란미인은 약 3천800년전에 죽었다. 그 여자는 인도 유럽족 곧 서양인이다.지금도 금발에 높은 코를 했고 깊은 눈의 속눈썹이 완연했다.서양여인이 분명한 여인은 고대 누란고성에서 발굴되었다.고고학자들은 이 미라를 누란미인이라는 뜻으로 ‘키쿠란 쿠잘리’라 명명했다. 누란미인이 처음 세상에 공개되었을때 위구르족의 반응은 대단한 것이었다.첫 대면의 순간 위구르족들은 ‘우리 민족의 어머니’라고 찬탄했다.그리고 ‘키루란 쿠잘라’는 바로 대중음악으로 작곡되어 위구르족들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지금도 시중에서 카세트를 쉽게 살 수 있다.누란미인과 함께 박물관에서 깊은 잠을 자는 미라들은 3천년전,다시 말하면 기원전인 BC1000년쯤의 사람들이다. 박물관의 미라들은 가죽세무옷을 입고 아직도 신발을 신고 있다.장신구는 물론이고 몸에 새긴 문신까지 생생했다.입고 걸친 옷과 쇼올,사슴가죽 부츠는 오늘날 위구르족 차림새 그대로다.얼굴 생김새 역시 위구르족인 미라 그들은 누구인가.BC1000∼2000년 아직 위구르족이라는 민족명칭이 생기기 이전사람들이 아닌가 한다.기원후인 AD 3세기 중국 기록은 몽골지방에서 내려온 여러 갈래의 유목민족 가운데 하나가 위구르족이라고 썼다.또 오르혼비문에는 717년 돌궐제국의 빌카칸이 셀렝가강변의 돌궐을 평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투루크에 대한 최초의 자료인 것이다. 어느 쪽이든 위구르는 돌궐의 세력을 이어받은 투루크계의 왕조였다.그들은 돌궐의 본향이었던 알타이산맥과 내몽골 어딘가에서부터 오늘날 신강성지역으로 들어왔을 것이다.그리고 9세기 이르러 왕조의 영광을 누린 위구르는 소그드문자를 근거로 한 위구르문자를 사용했다. 그들은 14세기 회교로 개종하고 나서 아랍문자를 사용했지만, 그 이전까지는 위구르문자를 썼다. ○‘키쿠란 쿠잘리’로 명명 흉노와 위구르족의 고향인 알타이지역에는 우코크라는 데가 있다.그런데 우코크에서는 1993년 ‘파지리크 여사제’라고 명명한 미라가 발견되었다.지난 1995년 서울 경복궁으로 나들이를 나왔던 이른바 ‘얼음공주’가 그 미라다. 파지리크는 BC6~2세기 산지 알타이지역의 철기문화다.그런데 얼음으로 얼린 ‘파지리크 여사제’는 피부가 흰 백인이었음을 기억한다.고고학 자료들은 이미 청동기 시대에 백인종들이 시베리아 바이칼호반과 몽골,신강성일대에 들어왔다는 여러 정황을 밝혀낸 바 있다. 우리 청동기문화도 인종과 문화의 동서교류에 의한 파장의 하나로 일어났다.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 모습의 오늘날 위구르족에게서 우리는 더욱 많은 역사적 비밀과 인류의 역동성을 읽을수 있다.그러니까 고대로부터 서양인은 저 멀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였다. ○몸에 새긴 문신까지 생생 지금까지 위구르족 기원을 선명하게 정리하는 작업을 모두가 꺼렸다.그러나 이번 중앙아시아 현장답사와 역사적 지식을 근거로 감히 이런 결론을 내려보았다.적어도 BC2000년쯤 인도 유럽 어족인 이른바 아리안 또는 이란족이 카스피안지역에서 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그들은 우선 바티칼호와 알타이지역까지 진출하여 자신들의 청동기문화를 아시아대륙 깊숙이 퍼뜨렸다.물론 아시아에도 청동기문화가 없지는 않았으나,아리안의 영향은 아시아 선사문화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그리고 인종도 섞여들었다. 위구르족은 결국 아리안편에 동양이 끼어들어 형성한 민족이다. 그렇듯 아리안의 피가 주류를 이룬 위구르족은 역사진행 과정에서 급기야 동양의 터키계 언어를 받아들였다.그들이 마치 위구르문자를 버리고 아라비아문자를 쓰는 것처럼 언어와 문자를 피보다 먼저 바꾸어 나갔던 것이다. ○알타이 지역까지 진출 우루무치로 가는 만원버스에서 마이라(마의랍)라는 위구르족 여인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그녀는 우루무치석유화학공단 병원에 근무하는 30대의 여의사였는데 미모가 뛰어났다.그녀의 집으로 초대되어 가서 만난 고등학교교장 출신의 그녀의 아버지 역시 잘 생긴 노신사였다.그 집에서 저녁을 먹는 동안 마치 러시아 가정에 초대 받은 착각을 여러 차례 느낄 정도로 가족모두가 서양인 인상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부러 추어준 것인지는 모르나 한국사람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예절이 바르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자신들이 늘상 만나는 중국사람들과는 다른 동양인을발견했다는 말이 분명했다.그와는 반대로 중국인들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개방적 인상을 그녀로부터 받았다. 그러니까 중국인들 사고속의변방인 위구르인과 한국인은 제각기 중국적인 가치를 매개로 상대방을 보았던 것이다. 중국 중심의 고정된 안목으로 마이라씨와 그 가정,곧 위구르족의 정체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들 위구르족은 우리를 중국 중심의 폐쇄적 사고 바깥으로 떠밀어 내기에 충분했다.
  • 인류최초 농경생활/1만년전 터키서 밀 첫 경작

    ◎노르웨이대 맨프레드 해운박사팀,첨단 유전자 분석 확인/나일강∼티그리스강∼페르시아만 ‘초승달지대’/중둥지역 야생밀 DNA이용 분석 11종 찾아내/고고학계 커다란 반향… 사이언스지·NYT지 특집 인류가 오랜 유목생활을 끝내고 한 곳에 정착해 경작생활을 시작한 곳은 어디인가. 그 곳은 어떠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농경생활의 싹이 움텄을까.그리고 인간이 씨앗을 뿌려 수확을 시작한 곡물은 어떤 것인가. 지금부터 1만여년전에 나일강과 티그리스강,페르시아만을 잇는 이른바 ‘초승달지대’(Fertile Crescent)에서 인류가 처음 농경생활을 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학계의 정설이다.‘초승달지대’는 이스라엘에서 레바논,시리아,이라크 산간지역,터키 남부를 거쳐 페르시아만 윗쪽까지 뻗쳐 있는 초승달 모양의 매우 광활한 지역. 고고학자들은 지금까지 ‘초승달지대’가 농업의 발현지라는 점에는 동감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지점에서 농경생활이 시작됐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해왔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을 통해 농업의 발현지가 ‘초승달지대’의 터키산맥 남서부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내튜피안’이란 원시족이 요르단강 계곡의 오아시스에서 처음 농사일을 시작했다는 학설도 있다.또 미국 예일대학의 프랭크 호울박사(고고학)와 같은 학자는 최초의 곡물 경작지가 다마스커스에서 사해에 이르는 지역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으로 농업 발현지와 인류 최초의 경작곡물을 정확히 가려내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고고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근 노르웨이 농업대학 맨프레드 헤운박사팀은 첨단 유전자분석을 통해 “지금부터 1만여년전에 ‘초승달지대’ 북쪽 변방이자 터키 남동부지대에 있는 ‘카라카다그 산맥’에서 인간이 밀을 처음 경작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혀 주목을 받고 있다. 연구팀은 경작 밀 68종의 계통과 아직도 중동지역에서 자라는 야생 밀 261종의 계통에 대해 DNA를 이용해 비교·분석한 결과 경작 밀과 유전적 특징 및 외형이 매우 비슷한 야생 밀 11종을 찾아냈다.연구팀은 야생 밀이 아직도 카라카다그 산맥에서 자라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 지대가 농경생활이 처음싹튼 곳이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이 사실은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최신 뉴스로 소개됐으며 뉴욕타임스도 최근 특집기사로 보도했다.이 연구결과는 즉각 전세계 고고학계의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스미소니언 연구소의 브루스 D.스미스 박사(고고학)는 “고고학이 안고 있는 숙제를 첨단과학이 해결했다”면서 크게 반겼다. 캘리포니아대학의 자레드 다이아몬드 박사는 “카라카다그 산맥에는 밀을 경작하기 전에도 이미 야생 밀이 광범위하게 자생하고 있었다”면서 “유목민이 이 곳에 정착,밀을 경작해 식량으로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DNA분석 결과 야생 밀은 낟알이 가늘어 쭉정이 처럼 생겼지만 경작밀의 낟알은 대체로 굵고 토실토실한 형태인 것으로 밝혀졌다.이에 대해 다이아몬드 박사는 “굵고 먹음직스러운 낟알을 골라 파종과 수확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유전자 변이가 자연스럽게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이아몬드 박사는 또 “카라카다그 산맥을 중심으로 한 유라시아대륙은 지축이 동서방향으로 돼 있어 날씨나 위도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동물이나 식물이 무척 빠른 속도로 번성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위구르족의 땅 신강성(중앙아시아를 가다:5)

    ◎중국면적의 17%… 사막과 산맥으로/예부터 세갈래 무역통로의 교차로·요충지/상술 뛰어나 친구사이도 흥정하는 장사꾼 중국 신강성 타크라마칸 사막을 흔히 ‘죽음의 사막’이라 했다.그 죽음의 사막에 이르면 대자연에 압도되어 인간은 왜소해질 뿐이다.타크라마칸사막이 있는 신강성은 북으로 천산산맥,남으로는 곤륜산맥이 에워쌌다.그리고 서쪽은 카라콜룸산맥으로 막혀있다.이들 높은 산자락을 빼고나면 온통 사막인 신강성의 크기는 중국 전체면적의 6분의 1이나 되었다. 그 넓은 땅에는 위그루족과 카자흐족,기르키스탄족과 몽골족이 퍼져 산다.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위그루족이 신강성의 주인이다.투루판에서 신강성 수도 우루무치까지 두번씩 갈아탄 고장난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도 거의가 위그루족이었다.차내 온도가 40도를 웃도는 만원 버스에서 그들과 꼬박 6시간을 함께 지냈다.그들은 불평 한마디가 없다.털털거리는 버스안에서 놀랍도록 인내심을 발휘하는 그들은 외국인에게 더 없이 너그러웠다. ○산자락 빼면 온통 사막 그 버스에는 일곱살 짜리 꼬마 승객이 탔다.로신이라는 사내아이였는데,차안이 덥고 지루한 탓인지 멋대로 딩굴었다.몸을 엄마한테 맡긴 로신이의 몸부림은 대단한 것이었으나 후덕한 엄마는 그 떼를 다 받아주었다.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보였던 그 사내아이의 조상은 본래 투루크의 한 갈래로 몽골지역에서 들어온 위그루라는 설이 있다.투루크,또는 돌궐은 흉노의 후예들로 모두 몽골 알타이산맥이 기원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그루족은 몽골족과 다르다는 사실이 외모에서 드러난다.흉로와 투루크는 제 나름대로 각각 대제국을 세웠던 강력한 세력의 민족이다.그토록 큰 힘을 지녔던 민족이 몽골에서 왔다면,지금 몽골에 상당수의 투루크족이 살아야 할 것이다.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로신이의 선조가 아직은 불분명하다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비단길 한 목을 맡은 것은 분명하다.중국 서안에서 비단을 싣고 비잔틴에서 짐을 내리자면 반드시 타크라마칸사막을 거쳐야 했다.또 비잔틴과 로마의 공산품과 호탄의 옥을 서안으로 실어가는 길도 타크라마칸사막이었다.그렇듯 대상들이 동서를 오가는 목 좋은 길가에 살았던 위그루족의 상술은 뛰어났다.그것은 가히 체질적이었다. 위그루족을 장사속으로 만나지 않으면 무척 관대하다.그러나 일단 상업적인 거래라면 무자비할 만큼 안면을 바꾼다.친구 사이에서도 이익을 챙긴 흥정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라는 것이다.이슬람이 지닌 공통점이기도 한 위그루족의 상술은 물론 비단길에서 비롯되었다.농업생산에 삶을 의족한 전통적인 경사회 사람들 정서로는 헤아릴 수 없는 대목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타크라마칸은 중요한 전략요충지였다.서역의 유목민들로부터 중원을 보호한다는 것과 중국산 비단의 대외무역 주통로를 지킨다는 두가지 목적이 함축되었다.그래서 한대에 이미 신강성 장악을 서둘렀다.천산북로에는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길이,천산남로에는 오늘의 중동으로 가는 페르샤통로가 존재했기 때문에 타크라마칸을 중시했다.남쪽 사막을 따라 인도로 가는 길을 합하면 신강성은 세 갈래 무역통로를 거느린 물물의 교차로였던 것이다. ○동서문화매개자 역할 세계에 위용을 떨친 징기스칸의 몽골제국 뒤에도 위그루족이 숨어 있었다.그렇듯 위그루족은 동서문화의 매개자 역할을 했다.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동양인들은 위그루족이 이슬람을 대표하는 민족인 것으로 생각했다.중국과 더불어 우리는 옛날에 위그루족을 한문으로 회홀 또는 회골이라 썼다.그리고 이슬람을 지칭하는 회회교라는 말은 위그루족이 믿는 종교를 뜻하는 것이다. 이들이 사육한 말은 중국에서 첫 손가락을 꼽는 명마였다.한대나 당대에 마(천마)라고 한 명마는 위그루말을 의미했다.그 품종을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비단길을 거쳐 들어온 아랍종 혈통의 말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오늘날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말은 아랍종 피를 받지않은 말이 없다고 할 정도이고 보면 고대 중국인들 역시 위그루말을 선호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 일대가 이슬람으로 편입한 중세 이후 이 지역은 투르크스탄이라는 통합적 개념으로 호칭되었다.그리고 신강성의 위그루는 동투르크스탄이라 불렀다. 볼세비키혁명 이후 스탈린은 범투르크주의운동을 아주 싫어했다.그래서 위그루의 땅 신강성은 급기야 소련과 중국 공산정권 사이의 주도권다툼에 휘말렸다.신강성의 석유와 광물이 두 공산세력의 각출을 유도했던 것이다. ○55년 자치지역으로 선포 그것은 20세기에 재현한 비단길 분쟁이었는지 모른다.1949년 모택동의 대장정은 신강성까지 이어졌다.1955년에는 신강위그루족자치지역으로 선포되었다.어떻든 공산정권의 중국은 1959~60년 사이에 이른바 ‘신강성 해방’을과감히 단행하고 소련과의 국경분쟁을 마무리지었다.오늘도 위그루족의 땅신강성을 가면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민족분열을 절대 반대한다’는 붉은글씨 구호가 곳곳에 널렸다.위그루족의 독립운동을 반대하는 내용이다. 그 표어는 이방인에게 혼돈을 안겨주었다.단일민족으로 살아온 우리에게는 조국과 민족이 얼핏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떼를 내놓았던 위그루족 꼬마 로신이가 어느 틈에 잠이 들었는지 조용하다.로신이가 자라 중국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알게 되는 순간 지금처럼 행복할 것인가.유구한문화와 선천적 상술을 지니고 태어났을 위그루족 장래가 자못 궁금했다.
  • 불교문화의 보고 돈황(중앙아시아를 가다:3)

    ◎동서문화 교류의 루트… 굴마다 불상·불화/‘사막의 오아시스’ 막고굴은 대상들 휴식처/유목민족 중국 넘나들면서 대중불교 전파 오늘날 중국 감숙성 땅 돈황은 멀고먼 비단길을 오가던 대상들의 영원한 오아시스이자,동서문화교류 루트의 빛나는 금자탑이다.만리장성 서쪽 끝 요새인 가욕관에서 하서주랑의 넓은 계곡을 따라 400여㎞를 달려가면 벌써 모래바람이 일고 곧 돈황에 이른다.돈황 계곡 남쪽에는 장족 말로 ‘하늘에 닿는다’는 뜻의 기련산이 우뚝했다.돈황에서 서쪽으로 100㎞를 가면 옥문관과 양관이 사막 한가운데 서있다.고대로부터 유명한 호탄의 옥을 싣고 대상들이 중국으로 들어오는 관문이 바로 옥문관이었다.옥문관과 양관은 한무제가 개통한 비단길의 중국측 전초 기지였다.이곳을 지나면 신강성의 ‘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이 기다렸다. ○옥문관 비단길 전초기지 이와는 반대로 대상들이 험난한 타클라마칸을 지나 옥문관에 이르면 한숨을 돌렸다.눈 앞에 나타난 돈황에서 쉬어갈 참이어서 마음의 위안을 얻게 마련이었다.그리고 장안을 떠나 서역으로 가는 대상들은 이 오아시스 도시에서 죽음의 사막을 지날 채비를 단단히 차렸다.대상들은 험난한 사막과 끝없는 초원을 지나는 길에서 닥칠 온갖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으레 무리를 이루어 떠났다.그들을 대상이라 한 이유도 여기에 있거니와 사실상 군단이었다.대상은 비단을 싣고 중앙 아시아를 지나 서쪽 멀리 콘스탄티노플까지 갔다.동서를 오가는 대상의 편대에는 불교인들이 자연스럽게 끼여들었다.그리고 중국에 불교를 전했다.비단길의 여울목,돈황이 불교문화의 보고가 된 것도 이때문이다. 돈황은 주변 사막마을들과는 달리 흥청거린다.그 유명한 막고굴을 찾고 명사산에 오르기 위해 온 관광객들로 해서 시장과 거리는 활기에 차있다.막고굴은 명사산 동쪽 벼랑에 있다.기련산맥의 한 자락,삼위산을 마주보고 늘어선 단애에 천불동 석굴을 파고,그 안에 무수한 불·보살의 소상을 빚고 불화를 그렸다.그렇듯 돈황의 명성은 막고굴에서 비롯되었다. 석굴에 안치한 불상과 벽화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대작들이다.처음에는 이 거대한 불사의 규모와 작품의 정교함에 경탄을 금치 못하다가,이내 그런 작업을 한 인간의 도전적인 노력에 경외감이 들었다.누가 이처럼 놀라운 일을 했고,어째서 이런 일을 했단 말인가.외경스러울 뿐이다. 막고굴은 가히 중국 불교사의 박물관이다.대략 3세기에 시작한 막고굴 조성은 북위(442∼534년)때에 이르러 더욱 활발해졌다.이어 당대(618∼906년)들어서는 돈황 불교마을이 극치를 이루었다.비단길이 쇠락한 송대(960∼1035년)에는 막고굴 불사도 한풀이 꺾였다.그이후 청대까지는 주로 보수와 개조를 거듭했다. ○당대 불교문화 꽃피워 막고굴의 초기,다시 말하면 북위의 그림들은 어느 모로나 서역의 그림이다.검정선으로 이미지를 정리한 화법과 강력한 색상은 중국의 감각과 전혀 다르다.인도의 산악 라다크지방 알치의 불화를 보는 듯하다.그것은 아리안의 미적 감각이다.그러나 당대에 오면 중국적인 기법으로 불보살을 표현했다.중국불화로 바뀌는 것이다.그러니까 중국불교의 변천을 보여주는 실체가 막고굴 불교미술이기도 했다. 대승불교가 당대에 왜 꽃을피울수 있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돈황유적은 던져준다.불교는 기원 전후해서 중국에 들어왔다.유교사회였던 한대의 불교는 대수롭지 않았다.그러나 한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서기까지(220∼618년) 약 4세기는 유목민족들이 중국을 넘나들면서 여러 왕조를 세우던 시대였다.이 시기 비단길을 지배한 세력은 유목민족들이었다.이들 유목민족은 자신들과 친숙한 불교를 널리 전파했다.그래서 불교가 중국에 차츰 든든하게 뿌리를 내렸고,당나라에 오면서 중국적인 대승불교로 훌쩍 날개를 폈다.다시 한족이 세운 송대에는 신유학에 의해 문화가 쇄신되면서 불교가 사양의 길을 걷게 되었다.천불동은 이런 역사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돈황 막고굴 불사에는 왕실과 귀족들의 기복적인 동기가 깔렸다.그런 맥락에서 막고굴 유적을 깊게 들여다보노라면 고차원의 교리에 대중불교의 요소가 습합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그래서 더욱 다채롭다.또 중국인들은 막고굴유적에서처럼 자신들의 감성을 통해 대승불교의 문헌전통을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그리고 당나라예술을 불교와 더불어 더욱 꽃피웠다.문헌전통의 주체적 수용이 문화를 한단계 높게 끌어올린 것이다.
  • 중국문화의 실체(중앙아시아를 가다:2)

    ◎한문과 대통일주의의 융합체/중국문화의 중심지는 서안서 낙양으로 갔다가 오늘의 북경으로 옮겨졌다 중국의 역사지도를 보면 중국문화의 중심지는 서안에서 황하를 따라 낙양지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오늘의 북경으로 옮겨왔다.몽고인들이 북경을 원나라(1206∼1368)의 수도로 정한 이후,명과 청조를 거쳐 북경이 오늘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그러니까 북송(960∼1127년)이전에는 서안과 낙양이 여러 왕조의 중심지였다.낙양과 인근에 있는 개봉은 중국 중세문화의 중심지였다.중국문화의 특성을 살펴보기 위하여 북경을 거쳐 이 지역을 찾았다. 한족이 세운 왕조는 전한(BC202∼AD8:195년간),당(289년간),남북송(322년간),그리고 명(276년간)나라 뿐이다.그 통치연한을 합하면 1079년이다.따라서 2천200여년동안의 중국역사 가운데 절반은 한족이 지배했고,나머지는 이민족 왕조의 시기였다.그러나 왕조를 누가 세웠는가에 상관없이 중국문화와 관계되면 모두 중국역사에 포함시킨 것이 중국적 태도이다.무엇이 그러한 포용성을 가능하게 하는가.그것은 한문이라는 문자와 문헌전통이다. 화북과 화남인 사이에 언어소통이 잘 안되는 것이 오늘의 중국 실정이다.그러나 그들은 문자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는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다.표의문자인 한문은 그 융통성 또한 크다.예컨대 한국과 일본인들은 각각 그들의 언어체계안에서 한문을 쓰고,또 그를 통해서 중국인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마찬가지로 이민족이 중국을 지배하는동안 한문을 쓰면서 한문체계에 동화되곤 했다.한문이 지닌 그 포용력이 유목민족을 이른바 문약에 빠지도록 한 힘이었고,다양한 민족을 하나로 묶는 끈이었다.만약 한문이 표음문자라면 오늘의 중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문이 다양성을 하나로 묶는 수단이라면,그 수단을 운영하는 이념이 이른바 대통일주의이다.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며,중국문화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것이다.그래서 고구려도 그 활동무대가 만주이기 때문에 중국역사에 예속한다고 해석한다.이러한 대통일주의는 한대에 무르익었으며,그 이후 다양한 이질적인 요소들을 중국의 것으로 포용하는 기틀이 되었다. ○중세문화의 중심지 개봉 한문이라는 수단과 대통일주의라는 이념이 합해서 중국역사의 실체를 이루었다.따라서 그것은 민족개념을 넘어선 문화적 실체로서의 복합성을 지닌다.낙양의 근교에 유명한 용문석굴이 있다.다른 석굴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남북조시대를 거쳐 당대에 화려한 불상들이 조성되었다.남북조는 이민족이 지배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서역에서 온 불교가 쉽게 융성할 수 있었다.그리고 다음 왕조인 당대에는 비록 유학자들에 의하여 훼불하는 사례가 있었으나,중국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시대이다.중국은 이민족의 군사적 침략뿐만 아니라 불교라는 외래종교마저도 그 품안에 넣어 자기 것으로 포용했다. 낙양에서 두시간 거리에 중국무술의 본고장으로 알려진 소림사가 있다.웅장한 산으로 둘러쌓인 소림사 주변 계곡의 크고작은 무술학교에서는 젊은 학생들이 무술을 연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남북조때 세워진 이래 1천500년을 지나온 소림사의 역사를 말해주는 많은 석조 비문들이 경내에 즐비했다.또 무술시범 조각들도 잘 조성되었다.이곳에선 중국무술의 신화가 일어나고,또 중국 선의 한 가닥이 잡혔다. 선은 모든 의식과 행동을 거두어 마음을 적멸의 상태로 이끌어가는 수행의 방법이다.무술은 의식을 고도로 집중한 상태에서 행동하는 수련방법이다.이들은 원리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는 두개의 다른 행위이다.그러나 소림사는 이들을 하나로 묶은 수행체계를 전수한다.진정으로 중국적이 아닐수 없다.이러한 적극적 포용주의는 중국에서 오래전에 순수한 참선전통을 없어지게 했던 것이다. ○포청천 고장으로 유명 낙양과 개봉 가운데 정주가 있다.정주역에서 두시간 남짓 달리면 개봉에 이른다.개봉은 북송의 수도로서 우리에게는 명관 포청천의 고장으로 알려진 곳이다.송나라는 이민족의 훼손으로부터 중국문화를 재건하려던 중세의 왕조이다.그러나 이 왕조는 군사적으로는 이민족의 위협앞에서 전전긍긍했다.이러한 개봉시 한쪽에는 유태인 청진사,곧 시나고그건물의 주춧돌을 모아둔 곳이 있다.그리고 개봉시 박물관에는 유태교 청진사의 중건비가 소장되었다.이 금석문 자료에 따르면,송나라 효종 융흥 원년(1163년)에 청진사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유태인들의 12세기는 바그다드와 코르도바에서 탈무드 전통을 크게 발전시키고 국제활동을 할때이다.이 시기에 유태인들이 중동의 면화를 중국에 유통시켰다.고려시대의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면화씨를 몰래 개성으로 가져왔을 정도로,면화는 송과 원나라가 엄격히 통제하던 귀한 무역품이었다.이 비석은 12세기에 활발한 도서문화의 교류를 말없이 입증해준다.중국유태인들은 이제는 그 모습이 중국인으로 변했을뿐만 아니라,그들에 대한 접근마저도 당국이 달가워하지 않는다. ○문자풀이 한계 넘어설때 흑룡강성의 하얼빈에서부터 신강성의 카시카르까지는 적어도 4시간 이상의 시차가 있다.그러나 중국 각 지역의 시간은 북경시간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이러한 대통일주의를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않는 곳이 중국이다.중국의 역사감각은 역사의 주체인 민족과 그 강역의 개념이 매우 유동적이다.그래서 단일민족으로 한반도라는 제한된 지역에서 오래 살아온 우리에게는 그 실체를 파악하는 일이 쉽지않다.따라서 중국 사서의 기록은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삼한에 관한 중국쪽 기록에서 그런 경우가 보인다.‘삼한의 각국에는 별읍이 있는데,이를 소도라고 이른다’는 기록이 그것이다.여기서 소도의 위치가 읍밖이냐 읍안이냐는 연구가들의 논의는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사료자체를 먼저 비판하지 않고는 기사내용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한 것이다.우리는 이제 중국기록에 매달려 문자풀이만을 일삼는 한계를 넘어서야할 때가 되었다.
  • 새로운 각성(중앙아시아를 가다:1)

    ◎중국 능가했던 주체적 고구려문화/집안 오회분의 ‘달님­해님’ 그림 독창적 솜씨/중원에 업은 샅바싸움 강건한 기상의 무예 서울신문은 민족문화 원류를 탐사하는 새 주간기획물 ‘중앙아시아를 가다’를 연재합니다.중국 동북지방에서 중원을 거쳐 중앙아시아 대초원과 사막을 찾은 서울대 윤이흠 교수(세계종교사)가 엮는 로망의 문화기행입니다.이 시리즈는 현지에서 확인한 고구려와 발해문화를 통해 고대 민족문화 루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그래서 낙양과 서안,돈황을 거쳐 천산산맥 남북 기슭을 여러 차례 넘나들며 중앙아시아 곳곳을 누볐습니다.거기에는 우리 고대문화와 유사한 흔적을 간직한 옛 소련땅 독립국가들의 문화유산 모두가 포함되었습니다.민족문화를 역동적으로 끌어올린 고대문화 통로를 찾는데 물론 역점을 두었지만,중앙아시아에서 만난 동포들의 삶도 함께 다룰 예정입니다. 만주 벌판의 광활한 땅과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백두산에 이른다.그 웅비하는 산세를 접하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여기가 우리 민족의발원지려니 하는 마음을 갖는다.7년전 100명의 제천단을 이끌고 처음 백두산을 올랐을때 감격은 지금도 지울 수 없다.어째서 여기를 민족의 기원지라 믿게 되는 것일까.이 풀리지 않는 숙제를 안고 민족문화의 뿌리를 찾아 나섰다.그래서 발길을 먼저 연변지역으로 돌렸다. 우리는 흔히 문화의 뿌리와 기원에 대한 질문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과 본질을 찾으려 한다.기원과 본질을 동일시하는 것은 자칫 혼돈스러운 것이다.이는 아주 오래된 인간의 사유습관으로 정착했다.그 오래된 습관이 민족의 기원과 본질을 이해하는데 혼돈을 불러 일으키는 대표적 사례는 우리 문화와 중국문화의 관계에서 드러난다.그 관계를 컴퓨터용어를 빌려 설명하면,우리가 한문을 수용하면서 중국문화가 우리의 고유문화를 덮어씌운 것이다. ○중국시각서 탈피할때 그래서 모든 고유 개념어들이 중국문화 내용으로 대체되었다.이를테면 삼재사상같은 것이 그런 경우다.천지인을 말하는 삼재사상은 주대에 시작해서 한대에 와서 완성되었다.따라서 그 이전 단군조선 문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그럼에도 삼재사상이 한국문화의 뿌리이자 본질인 양 착각한다.이는 분명히 오래된 사유습관의 오류를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우리는 이제 중국 일변도의 시각에서 자유로워질 때가 되었다. 그런데 북방에서 만난 고구려와 발해의 문화는 중국 일변도의 오류에 대한 각성 그것이었다.집안 고구려 고분인 오회분 4,5호 묘에서 비는 달님 ‘여와’ 및 햇님 ‘복희’의 그림과 각저총의 격투기 및 씨름 그림은 중국문화에 예속하지 않은 고구려인의 솜씨다.두꺼비가 있는 달을 머리에 인 여와는 물론 중국 문헌에 나오는 내용이다.그러나 7세기에 그린 이 그림은 흐트러지고 유연한 당시 중국의 비천과는 전혀 다른 강건한 기상을 담았다. 그러니까 고구려인들은 중국으로부터 문헌전통을 받아들였으되,미의 감각 만큼은 자신들의 것을 버리지 않았다.그들은 고구려의 정서라는 그릇에 중국의 문화를 담았던 것이다.이는 고구려문화에 나타난 일관된 현상이다.무예대결의 그림수박도 고구려인들의 고유한 자기수련 전통이 배었다.또한 샅바를 맨 씨름은 중국에 없는 무예다.특히 고구려인과 대결중인 상대방 얼굴의 코는 유난히 높게 강조되었다.서역(서역)의 서양인이 분명했다.이는 고구려인들이 중국 밖에 사는 사막과 스텝의 민족들과도 교류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 그림이다. 중국 대륙은 한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서기 전까지는 북방 유목민족들에게 철저히 유린되었다.그 오합지졸의 상태였던 시기에 고구려는 대륙 동북방에서 강성한 제국을 이루었다.고구려는 당시 대륙에서 크게 봐야할 국가도 없었고,그렇게 해야할 이유도 없었다.그리고 문화적 주체성을 지녔던 고구려는 유교나 불교,도교와 같은 외래종교를 등거리에서 조정할 수 있었다.그러나 고구려의 태도는 왕조가 망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또 방대한 스텝지방에 자리한 돌궐제국의 칸들과 적극적인 접촉을 통해 서역과 활발한 물물교류를 가졌다. ○외래종교 등거리서 조정 고구려가 망하면서 발해가 대신 나서 그 고토를 차지했다.고구려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만주족을 끌어안고 나라를 세운 발해인들의 애환은 흔히 만주라 일컫는중국 동북지방 곳곳에 스며있다.그 많은 발해 무덤에서는 화려했던 문화의 흔적이 속속 드러났다.근·현대에 걸쳐 일어난 압록·두만강 건너로의 민족대이동은 어쩌면 귀소본능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씨앗을 뿌리고 터전을 잡았다.항일독립전쟁에도 힘이 되어준 그들은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고구려 고토에 살고 있다. 북하의 중국쪽 두만강변 언덕에는 조선족 민족시인 이욱(1907∼1984년)의 시비가 서 있다.‘칠순/할아버지/나무를 심으며/어린 손자를 보고/싱그레 웃는/그 마음/그 마음’이라는 시다.그 시를 읊조려보며 내려다 본 강건너 무산시는 무척 적막했다.동양 제일이었다는 철광도시가 폐허로 변한 무산은 적막하다 못해 살벌했다.내일을 위해 나무를 심지않은 땅 무산.그의 시가 구구절절 절실하게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 암울했던 시대에 더러는 일제를 피해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삼위로 들어갔다.일제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했더니 스탈린은 그들을 중앙아시아로 내몰았다. ○고려인 삶도 조명 옛날 고구려인들이 칸들과 교류하던 바로 그 스텝에서 살고 있는 오늘의 고구려인이 그들이다.그래서 중앙아시아 이방인들 틈새에서 외롭게 살아온 고구려인들도 만나기로 했다.우리 민족문화의 원초적 잔영이 어슴프레 보이는 땅으로까지 역류하여 들어간 고구려인의 이주는 우연이었을까.그러나 역사는 필연적일수 밖에 없다. 어떻든 이번 ‘민족 문화의 원류’를 탐사한 여행목적은 우선 고구려인이 서역과 문화를 교류하는데 뒤따랐던 두가지 통로를 찾는 것이었다.다시 말하면 중국 서안에서 돈황을 거치는 비단길과 그 밖의 북방통로를 살피는 것으로 압축된다.이와 더불어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먼 한반도 동남쪽 끝자락 신라와 중앙아시아의 관계를 짚어본다는 의도도 깔았다.그리고 비단길이 지나던 중국 오지의 조선족과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삶에서 세계속의 한민족 위치를 발견코자 노력했다. □필자 약력 △1940년 서울생 △서울대 종교학과졸 △미 밴더빌트대 대학원석사 △미 노스웨스턴대 대학원 철학박사(종교학) △정신문화연구원연구원 △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 몽골 어느 탈북자의 삶과 고백(흑룡강 7천리:9)

    ◎노동·농사·목부… 고독한 이방인/“자본주의가 나쁘다는 말만 듣고 살아서리 눈으로 보겠다는 생각에 고향을 뛰쳐 나왔디요 외몽골·소련을 거쳐 구라파로갈 타산으로…” 중국으로 넘어오는 북한 동포들이 꽤나 되는 모양이다.탈북자라고 부르는 북한 동포들의 중국 월경은 오늘날의 일만이 아니다.식량난으로 허덕이는 북한의 현실을 고려하면 요즘의 탈북은 설득력을 갖는다.그런데 중국 보다 살기가 좀 나아서 밥술이나 먹던 시대에도 탈북자가 있었다.금을 캐는 노구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이한우씨(62·가명)가 그런 장본인이다.그것도 두차례에 걸친 탈북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역마살이 끼었는지 지금도 떠돌아 다니는 신세다.내몽골에 처자가 산다고 얼버무릴뿐 가족 이야기는 더 하지 않았다.다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대륙에서 살아온 힘겨운 시절만을 털어놓는 것으로 일관했다.그러면서도 연신 주변을 경계하는 눈초리로 목소리를 낮추었다.그가 살아온 처지를 생각하면 그럴수 밖에 없겠지만,신분노출을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선땅이 가까운데서 온 작가선생이라 내레 믿고 얘기합네다.내 이름을 구태여 알라고는 하지 마소.수소문만 하면 형제들이 조선에 살지 않갔수.어디 살던 아무개가 중국에 산다는 것이 소문나면 좋지 않을 것입네다.내레 처음 압록강을 건너 단동에서 화물차를 탔으니까,고향이 어디쯤이라는 것은 짐작하실 거우다.선생도 그쪽 사람들 다 굶어 죽게 되었다는 소리 들었디요.내 가족들은 죽지나 않았는지…” 그는 1961년 10월 압록강을 건너 단동에서 무작정 화물열차를 탔다.화물차에 숨어 꼬박 이틀을 달려 어느 역에 닿았다.지금 생각하면 아성이었다는 것이다.중국말을 모르는 지라 벙어리 흉내를 내면서 밥을 빌어 먹었다.그리고 걸어서 하얼빈에 온 그는 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화물차에 올랐다.열차는 쉬지도 않고 하루낮 하루밤을 달린 끝에 내몽골 하이라얼(해라이)에 도착했다. 중국은 당시 살기가 어려웠다.나무껍질과 같은 먹을수 있는 것이라면 다 먹었던 이른바 대식품시대라서 빌어먹기도 어려운 때였다.주린 배를 움켜 쥐고 역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잘 수 밖에….그러다 경찰에 잡혔다.조선인민군 정찰병으로 권투에도 능했던 그였지만,석탄차를 타고온 주제 꼴은 말이 아니었다.자신이 보아도 의심을 받기 딱 좋았다.붙잡히고 나서 곧바로 수용소로 직행했다.그러나 수용소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식량난이 극심해서 죄수가 도망가도 찾지 않았다.그는 수용소에서 만난 몽골족과 함께 탈출한 뒤 말을 훔쳐타고 외몽골로 들어갔다.조선인(북한인)넷에 몽골족 둘을 합해 일행은 여섯이었는데,몽골족 도움으로 조선족들도 모두 몽골족 차림을 했다.중국에는 당시 먹을 것이 없어서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떼지어 들어가던 시절,그는 왜 탈북자가 되었는가.그의 말을 들어보면 탈출 목적지는 중국이 아니었다. ○“가족들 죽지나 않았는지…” “외몽골과 소련을 거쳐 서구라파로 들어갈 타산을 댔디요.자본주의가 하도 나쁘다는 말만 듣고 살아서리 눈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네다.지금은 부자로 사는 남한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네다.여하간 호기심이 많아서리 고향을 뛰쳐나왔디요.중국과 몽골공화국은 다 같은 공산국가고 우호 인방이라 그랬는지 몰라도 내몽골 들어가기가 쉬웠드랬습네다.순라병은 그림자도 없고 철조망 서너 가닥을 늘여 놓았더라 이겁네다.” 그는 일행과 초원 풀더미속에서 잠을 청하다 또 붙잡히고 말았다. 하이라얼 감옥에서 꼬박 두달을 살았다.그리고 나서 추방을 당했다.그를 기다린 곳은 함경도 아오지탄광이었다.그래도 하루 쌀 300g을 배급받았다. 북한은 당시 중국에 비해 사정이 좋아 노동개조를 받는 죄수에게도 쌀을 주었다.요즘 북한과는 천양지판이었으나 그는 또 탈북을 꿈꾸었다.1961년이 돌아오고 음력 설날을 며칠 앞둔 어느날 아오지를 탈출했다.두만강을 건너 도문에 와서 화물열차를 탔다.그래도 있던데가 좋았는지,다시 하이라얼에서 내렸다. ○아오지탄광서 또 탈출 그는 배가 무척 고팠다.자신도 모르게 식당 앞을 서성거리다 식사를 하던 노년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때를 놓치지 않고 손짓 발짓으로 식사를 구걸했다.여인은 측은한 눈길을 주면서 얼결에 말을 걸었다.조선말이었다.내몽골에서 조선말을듣는 것은 엄동설한에 불을 만나는 것과 같았다.모든 사연을 실토하고 밥 한 그릇을 얻어먹었다.그 여인은 당시 쉰 살의 조선족이었는데,몽골족 남편과 산다고 했다.이름은 이영숙,슬하에는 자식이 없었다. “내 딱한 사정을 듣고 자기를 따라가지 않겠느냐고 묻습데다.내 거절할 이유가 없었디요.하이라얼에서 90리가 떨어진 그 집을 따라 갔더니,몽골족 남편이 양자를 삼겠다고 제의를 해왔디요.그분은 자기 이름을 투린자라고 소개합데다.촌의 당서기고 해서 사는 것도 그만했디요.몽골 초원에서 당서기 양아들로 사니끼니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고….모처럼 좌정을 하게 되었다 이겁네다.” ○넓은 초원서 3년을 목부로 몽골 유목민들은 양자를 두거나 데릴사위를 들이는 일을 해운으로 여기기 일쑤다.그래서 여남은 살을 먹은 소년을 소나 말,양 따위와 바꾸어 데려다 키우는 경우도 있다.이는 초원에서 노동력을 확보하는 수단의 하나인데,온정을 베푼다는 의미도 지녔다.‘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속담처럼 양쪽 모두가 손해볼 것이 없는 양속인지도 모른다.어떻든 초원에서 석 삼년을 목부로 살았다.그러는 동안 몽골말도 배우고 짐승을 방목하는 일에도 이골이 났다.이웃에는 28가구가 사는 조선족 마을이 있었으나 가난하기가 이루 말할수 없었다. 초원에 겨울이 오면 유목민들은 정거생활에 들어간다.그 때에 반드시 필요한 시설은 우물이다.그래서 이한우씨는 목축을 하면서 우물을 파는 일에 매달렸다.우물을 파서 돈도 제법 번 일이 있다는 그는 노다지 소문을 듣고 흑룡강상류로 들어왔다고 했다.그러나 어디까지나 고독한 이방인으로 초원을 잊지 않았다. “몽골 노래가 왜 음이 길고 높은지 아오? 망망한 초원엔서 방목을 하다 보면 고독할 때가 많디요.그 고독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길고 구성지게 부르는 겁네다.”
  • 관광인류학의 이해/야마시타 신지 엮음(화제의 책)

    ◎북유럽 ‘산타클로스민족’·생태관광 다뤄 인류학의 주요 주제로 등장한 관광현상과 그것이 초래하는 문화변용의 문제를 폭넓게 고찰.고통을 수반하는 여행의 역사는 고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이에 비해 관광이라는 여행형태는 근대의 현상이다.위안이나 오락을 위한 대중적인 관광은 17∼18세기 유럽의 귀족자제들이 교양을 쌓기 위해 각지를 둘러본 ‘그랜드 투어’에서 시작됐으며 19세기 후반들어 대중화됐다.이 책은 근대관광은 패놉티콘(panopticon),곧 원형감옥에 대한 바람에서 출발했다는 색다른 견해를 편다.감옥의 감시탑에 올라가 주위의 모든 것을 눈아래 두고 싶다는 19세기 서구인의 일망감시주의가 세계일주여행의 열기로 승화돼 갔다는 것이다. 이 책은 북유럽의 랩랜드(Lapland)관광에 대해서 상세히 소개한다.랩랜드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최북부 지역으로 유럽의 최변두리 땅에 속한다.그곳에 사는 랩인들은 자연과 인간을 이어주는 ‘대자연의 아이들’로서 ‘자연인 관광’의 대상으로 유명했다.그러나 랩인은 산타클로스의 눈썰매를 끄는 순록유목민족,즉 ‘산타클로스민족’임을 부각시킴으로써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를 더욱 높여가고 있다.북유럽 국가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가 ‘산타클로스의 나라’임을 주장하며 그에 따른 관광개발을 추진하고 있다.이 산타클로스 관광은 종종 복잡한 민족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이 책에서는 자연과의 대화를 목표로 하는 생태관광의 문제점도 지적한다.르완다나 브라질,코스타리카 등 일부 국가에서는 지나치게 관광이익만을 좇아 이른바 ‘지속가능한 개발’과의 모순을 빚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밝힌다.황달기 옮김,일신사,9천원.
  • “일본 현대문학을 읽자”/문학비평지 ‘포에티카’가을호 특집 실어

    ◎무라카미 류 등장 등 시대흐름 조명 도서출판 민음사가 펴내는 계간 문학비평 전문지 ‘포에티카’ 가을호가 나왔다.이번 호에는 한양대 윤상인 교수의 ‘탈식민주의 시대의 일본문학 읽기’를 비롯 ‘탈근대라는 이름의 허구’‘일본의 현대 작가들’‘한국문학 속의 일본문학,그 영향과 수용을 넘어’ 등 4편의 일본문학론을 특집으로 꾸몄다. 한국문학도 이제 ‘민족문학’이라는 닫힌 이념에 매몰되어 있기 보다는 좀더 적극적으로 세계문학의 다양한 조류와 교감하고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이번 특집은 일본이라는 타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 위에서만 한국 문학의 정체성에 관한 추구도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윤상인 교수는 “일본 문학이야말로 탈식민주의적 글읽기를 권유하는 흥미진진한 텍스트”라고 말한다.지난 100여년간 일본문학의 변천과정에서 볼 수 있는 순혈과 혼혈,중심과 변경,수렴과 방사라는 이항대립 구도는 드라마틱하기조차 하다는 것이 윤교수의 주장.나아가 최근 무라카미 류나 하루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부분에서 전체로,변경에서 중심으로,해체에서 구축으로의 중심이동은 일본문학이 1980년 이후 15년 이상 지속해온 유목민적 유랑끝에 다시 정주의 울타리안으로 회귀하는 것을 예고하는 조짐이라고 강조한다. 이번 호에서는 일본 현대문학의 흐름과 족보도 소상히 살핀다.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문학은 소설의 흐름과 정치의 흐름이 괴리현상을 빚고 앙가주망 문학은 소멸의 길을 걷는다.평론가 오다기리 히데오는 이 시기에 등장한 새로운 작가군,곧 후루이 유기치·구로이 센지·고토 아키오 등을 ‘내향의 세대’라고 불렀다.이들은 사회적인 문제나 정치상황 보다는 자아와 개인적인 상황속에서 작품의 진실을 추구하려고 한 ‘탈이데올로기’ 문학세대다.그러나 1979년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젊은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등장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출현은 무라카미 류의 등장과 더불어 ‘내향의 세대’의 세대교체를 의미하는 사건이었다.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일본의 문학아카데미즘은 기호론과 오컬티즘을 수용하게 된다.1990년대 일본 문학계의 가장 큰 충격중의 하나는 92년 나카가미 겐지의 죽음이다.일본문학의 등줄기를 이뤄온 그의 죽음은 이른바 ‘하루키현상’‘바나나현상’에 묻혀있던 시마다 마사히코나 신예 오쿠미스 히카루,다와다 요코 등에게 길을 터주는 계기가 됐다.이번 호에는 일본 문학계의 진보적 입장을 이끌어온 가라타니 고진(병곡항인)과 냉철한 이성주의자의 입장에서 우리 사회와 문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온 고려대 김우창 교수의 대담을 싣고 있어 관심을 끈다.
  • 햄버거 소동(외언내언)

    햄버거와 콜라는 미국문화를 상징한다.자본주의의 첨병으로서 19세기 서양 선교사에 비유되기도 한다.어떤 사회라도 햄버거와 콜라가 상륙할 경우 이미 미국식 자본주의 영향권안에 들어간 것으로 받아 들여진다.공산권이 해체될 당시에도 그랬다. 그러나 햄버거의 고향은 미국이 아니다.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살던 타타르족 유목민들은 중세부터 고기를 갈아 먹었다.그 요리법을 아시아에서 장사하던 함부르크 상인들이 독일로 가져갔다.이 타타르족 스테이크 요리에 햄버거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19세기말.미국 햄버거의 역사는 독일 이민들에 의해 시작된다.지금처럼 빵에 넣은 햄버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04년 세인트루이스의 세계박람회에서였다는 주장도 있고 같은해 뉴헤이븐의 한 식당 ‘루이 런치’에서였다는 설도 있다.뉴헤이븐의 그 식당은 문화재로 지정됐다. 미국 최대의 햄버거 납품업체인 허드슨 푸드사 제품이 식중독을 일으키는 대장균에 감염된 것으로 밝혀져 큰 소동이 일고 있다.허드슨사로부터 햄버거 고기를 납품받아온 버거킹과 K­마트는 물론 다른 햄버거체인도 타격을 받아 파리를 날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문제의 허드슨사는 제품을 전량 회수하고 공장을 폐쇄하게 됐다. 미국 국민 1인당 한해에 14㎏ 정도의 햄버거를 먹는다고 하니 당연한 소동이겠지만 햄버거가 전세계적으로 보급됐다는 점에서 남의 일만은 아닌 듯 싶다.미국의 햄버거체인은 외국에 진출할때도 고기는 물론 튀김용 감자까지 일괄 공급,품질관리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워 왔다. 한국의 버거킹은 원료를 국내조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관계당국은 이번 기회에 국민건강을 위한 미국의 철저한 조치를 참고해 우리의 식품안전정책을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다.세계무역기구(WTO)체제속에서도 식품수입에 대해서는 각국이 가능한한 장벽을 높이 쌓고 있다.미국과 유럽이 최근 서로 닭고기와 쇠고기 수입금지조치로 무역갈등을 빚고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지구촌 시대 한 지역의 식품오염은 세계적 재앙이 될 수도 있다.
  • 문화차이(외언내언)

    유대인과 이슬람교인들은 돼지를 혐오하는데 뉴기니 마링족은 돼지를 자식처럼 아낀다.왜 그런가.‘문화의 수수께끼’라는 책을 낸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이를 문화의 차이로 설명한다. 유대인과 이슬람교인의 돼지 혐오증은 그들 조상의 유목생활에 돼지가 큰 걸림돌이 된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돼지는 덥고 건조한 중동지방의 기후에는 견디지 못한다.반면 마링족이 사는 축축한 밀림속은 돼지 사육에 이상적인 환경이다.돼지는 마링족에게 고단백질,고농도의 지방질을 섭취토록 해주는 최적의 동물이다.이처럼 한 문화는 수백년 또는 수천년의 생활습관의 결과로서 쉽게 변하지 않는다. 세계가 좁아져 지구촌으로 바뀌면서 이런 문화차이가 곳곳에서 드러나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아이가 귀엽다고 쓰다듬어 주려던 한국 어른이 미국에서 성폭행혐의로 봉변을 당한 것이나 외국에서 어색한 상황에 처해 웃음을 짓던 한국인이 실성한 것으로 오해받은 경우 등이 그런 예.유럽이나 일본에서는 ‘문화차이 극복회사’‘다문화 경영비법회사’‘컬처 쇼크 비지니스’ 등이 등장하기도 했다. 괌에서 일어난 KAL기 사고 처리 과정에서도 한국과 미국간의 문화차이가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는 모양이다.슬픔을 못이긴 유족의 몸부림에 미국측이 긴장하는가 하면 시신수습보다 사고원인 규명에 우선순위를 두는 미국측 태도에 한국의 유족들이 격분했다는 것이다. 문화차이는 국제분쟁의 주요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기도 하다.‘문명의 충돌’론으로 세계적 논쟁을 불러 일으킨 미국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턴은 물론이고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을 역임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도 “국제문제는 일차적으로 문화적이고 철학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다.‘문화의 수수께끼’는 “특이한 문명과 생활습관은 그 상황에서는 일정한 합리성을 갖게 마련이므로 다른 문화를 자신의 관념으로 섣불리 재단해서는 안된다”고 충고한다.‘문화차이 극복회사’들도 이렇게 가르친다.“문화차이에서 오는 문제는 단순히 지식습득을 통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 지구촌에 부는 변화의 바람/안병준 국제부장(데스크 시각)

    지구촌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선·후진국을 막론하고,이 바람은 거세다.희망과 기회의 바람이다. 23일 실시된 이란 대통령선거는 온건개혁파인 모함마드 하타미 후보가 더블 스코어 이상으로 당선했다.예상을 뒤엎은 결과로,정치적 변혁이 예고된다.이란 대통령 권한은 그다지 크지 않다.그러나 눈여겨 볼 대목은,그가 도시인·청년층·여성·지식인 등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다.그것은 이란 국민들이 현정권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음을 뜻한다.엄격한 회교국가인 이란의 대선은,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첫 경선이라는 점에도 큰 의미가 있다. 몽골에서는 지난주 인민혁명당의 나차긴 바가반디가,현직 대통령인 푼살마긴 오치르바트를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당선했다.바가반디는 유목민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뛰어 넘은 민중의 대변자다.그의 득표율은 61%를 넘는 놀라운 것이었다.오치르바트는 급속한 시장경제 개혁을 추진해왔으나,불과 30% 만의 득표를 기록한 뒤 추락했다. 이에앞서 지난1일 실시된 영국 총선 역시,집권 보수당의 참패로끝난 바 있다.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이 과반수를 훨씬 넘는 의석을 차지한 것은 「지극히 감동적인 승리」였다.특히 보수당 정권 18년은,사회가 안정돼 있었고 경제도 호황이었기 때문에 영국 총선은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자이르의 반군 지도자 로랑 카빌라는 모부투 세세 세코 정권을 무너 뜨렸다.그는 모부투의 32년 독재 청산에 나섰다.자이르의 정권교체는 내전에 의한 것으로,민주적 절차를 밟았다고 할 수는 없다.그러나 워싱턴 포스트는 『새 희망이 움트고 있다.자이르 국민들은 제2의 기회를 맞고 있다』고 찬양했다. 정권교체 또는 정계개편이 예고되고 있는 나라들도 많다.25일 실시되는 프랑스 총선은 유럽통합·실업·사회복지문제 등을 놓고 우파연합과 사회당이 박빙의 게임을 벌이고 있다.그야말로 「이슈 선거」이다.용이냐,지렁이냐 하는 「우물안 개구리」들의 경쟁이 아니다.또한,어느 쪽이 승리하든 총리는 바뀐다. ○각국서 의외선거결과 인도네시아는 29일 총선을 실시한다.여기도 장기집권 골카르당이 위협을 받고 있다.최대 야당인 통일개발당이 또다른 야당인 민주당과 제휴했기 때문이다.민주당 당수는 지난해 정부의 야당파괴 공작에 따라,이번 총선에도 출마가 금지된 바 있다.이때문에 발생한 총선소요로 벌써 100명 가까운 시민이 사망했다.껍데기 뿐인 축제인가,수확 거둘 축제인가? 인도네시아 총선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밖에 캐나다와 알바니아 총선이 6월에 실시된다.내각 사퇴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대만에서는,집권 국민당과 제1야당의 합작이 도모되고 있어 정계의 지각변동이 예상된다. ○다양한 욕구표출 결과 이같은 권력의 변화와 변혁 가능성들은,다음과 같은 요인들에서 비롯됐다. △실업과 인프레가 증가하고 빈부격차가 커진데 대한 국민들의 불만(몽골) △장기집권에 따른 변화 욕구(영국·인도네시아·대만) △권력 집중과 사욕 채우기,다당 정치경험 결핍(자이르) △엄격한 회교율법에 의한 신정에 대한 불만(이란) △냉전 종식의 달라진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근시안적 국가이익에 매달림(프랑스) △야당 파괴공작에 대한 반발(인도네시아) △범죄 척결정책의 실패(대만) 등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새로운 정권 창출세력들은 경세제민이라는 확실한 비전을 제시해 호응을 얻었다.세계화는 인류로 하여금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게 만들었다.지구촌 많은 나라의 국민들은 21세기를 바라보며,변화를 추구하고 있음이 선거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그것은 흑인·백인·황색인 등 인종을 초월한다.불교·기독교·가톨릭·회교 등 종교도 초월한다.지구촌에 부는 새로운 바람은 희망과 기회의 바람이다.
  • DJP공조 갈수록 불투명/JP“후보단일화 안되면 우리당 갈길로”

    ◎내각제 수용 언급한 DJ와 힘겨루기 「DJP(김대중­김종필 총재) 공조」에 먹구름이 가득하다.대선가도에 접어들면서 양측은 후보단일화와 내각제 문제를 둘러싸고 난기류에 빨려드는 형국이다. 14일 시민대토론회에 나선 자민련 김종필 총재(JP)는 『후보단일화가 안되면 정당의 고유목적을 위해 나가야 한다』며 우회적으로 독자출마 의사를 피력했다.이어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15대 국회가 끝나기 전에 내각제를 도입하고 대통령을 그만 둘 것』이라며 DJ를 한껏 압박했다. 물론 이런 신경전은 결별선언이 아닌,힘겨루기의 「샅바싸움」 성격이 짙다.DJ는 『후보단일화와 내각제 문제는 일괄타결로 처리하자』면서 『협상과정에서 내각제를 수용하게 될 것』이라며 JP에 추파(?)를 던지고 있다.반면 JP는 보다 복잡한 계산이다.측근들은 『내각제 개헌론자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말을 흘리고 있다.내각제 신봉자인 박태준 전 포철회장과 일부 여권인사들을 결집,DJ를 압박하면서 단일후보와 내각제 모두를 쟁취하겠다는 포석이다.향후 DJP단일화 과정의험난함을 예고하는 전주곡인 셈이다.
  • 쌍용정보통신 첫 야심작 「전사 라이안」 출전 준비 “끝”

    ◎해외시장까지 겨냥 40국 언어로 제작/웅장한 사운드에 1백여 캐릭터 등장 쌍용정보통신(02­262­8260)이 만든 첫 게임이 나왔다.「전사 라이안」(부제:The Last Warrior). 윈도 95전용의 RPG로,국내는 물론 해외시장 공략을 위해 영어,일어,불어 등 40개국의 언어로 제작했다. 탄탄한 시나리오와 사실적인 그래픽,100개가 넘는 캐릭터,웅장한 음향효과 등이 외국게임에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인터넷을 통해 여러명이 함께 즐길수 있는 「인터넷 멀티플레이게임」으로도 곧 출시된다. 게임은 유목마을,공동묘지,이스턴마을,금단의 지역,샤산마을,외딴섬,지하미로,델타스마을,크루거함선 등 9개의 무대에서 펼쳐진다. 주인공 「라이안」은 어느날 샤산족의 왕자로서 몰락한 왕가를 되살려야 하는 운명을 깨닫는다.게이머는 주인공 라이안과 함께 「이쉬바」라는 상상의 별에서 대모험을 떠난다.이 과정에서 여러 동료 전사들을 만나 암흑의 성에 숨겨진 왕가의 비밀을 풀고 라이안이 가지고 있는 신비의 샤산검으로 암흑대왕을 물리치는 것이 게이머의 임무다.라이안을 비롯해 그를 돕는 아델,칼립,마쏘네,라모타 등의 전사들과 악당 캐릭터인 크루거,암흑대왕,고르곤,미노타우,나가로,만드라곤 등의 대결이 특히 볼 만하다. 게임 진행은 화면안에서 오른쪽 버튼을 눌러 메뉴바를 이용하면 된다. 방향키를 이용해서 8방향으로 캐릭터를 움직일 수 있고 「Shift+방향키」를 하면 캐릭터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전투방법은 크게 직접공격과 간접공격으로 나뉜다.라이안같은 전사들이 칼을 가지고 근거리에서 가격하는 스타일은 직접공격에 해당하며,마법,원거리 공격,아이템 공격 등은 간접공격이다. 각각의 공격동작을 오른쪽 버턴으로 선택하고 왼쪽 버턴으로 실행하는 것은 다른 RPG와 마찬가지다. 펜티엄이상.8MB이상.4만4천원.
  • 전경련 적대적 M&A 공동 방어

    ◎외국인보다 불리한 각종 규제완화 촉구 재계는 앞으로 외국자본 등에 의한 적대적 M&A(기업인수·합병)에 대해서는 전경련차원에서 공동 대처키로 했다.아울러 출자제한 등 외국인에 비해 불합리하게 돼있는 경제력집중 억제시책을 개선,경영권 탈취나 주식시세차익을 겨냥한 M&A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정부에 촉구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11일 열린 회장단회의에서 경영합리화 등을 목적으로 한 우호적 M&A는 지원하되 적대적 M&A에 대해서는 전경련에서 직접 개입키로 했다.이와 관련,전경련은 최근 미도파 주식을 놓고 지분경쟁을 벌였던 대농그룹과 신동방그룹간의 협의중재에 들어갔다. 손병두 전경련부회장은 회장단회의가 끝난 뒤 『개정 증권거래법의 발효를 계기로 외국인의 적대적 M&A가 우려된다』며 『적대적 M&A로부터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출자제한과 지분제한 등 외국인에 비해 불리하게 돼 있는 각종 제한을 과감히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는 『출자제한이나 금융기관의 소유제한 등으로 국내기업들이 주식소유에 규제를 받는반면 외국자본은 국내기업에 비해 훨씬 자유롭다』고 지적했다. 손부회장은 미도파 지분인수 경쟁과 관련,『최종현회장이 대농그룹과 신동방측에 합의를 촉구했다』며 『현재 양측이 협의를 진행중이며 원만히 이뤄지지 않을 경우 최회장이 직접 나설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신동방그룹 계열사인 동방페레그린 증권은 지난해 11월22일부터 지난 4일까지 미도파주식 29만3천1백77주(지분비율 1.98%)를 매입했다고 지난 10일 증권거래소에 신고하면서 주식 보유목적에 「경영참가」라고 밝혀 미도파에 대한 경영참가 의사를 공식화했다.신동방은 지난 6일 고려산업과 함께 「미도파 주식에 대한 공개매수를 검토중」이라고 공시,미도파에 대한 공개매수의사를 처음 밝힌데 이어 대농 주식에 대해서도 공개매수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미도파주식에 대한 신동방그룹의 공식지분은 현재 15.64%이다.
  • 한화종금 이어 미도파도… 적대적 M&A 왜 잦나

    ◎공개매수→위장지분 확보… 경영권 쉽게 장악/규제강화된 관련법 시행 앞두고 틈새 공략 한화종금에 이어 미도파에 대한 적대적 M&A가 증권가의 핫 이슈로 떠올랐다.기업들의 M&A가 부쩍 잦아진 이유는 뭔가.4월부터 기업인수합병 관련법규가 바뀌기 때문이다. 4월 1일부터 대주주 이외의 사람(법인 포함)이 상장사가 발행한 주식의 10% 이상을 취득할 경우 증권관리위원회로부터 사전승인을 받아야 하는 증권거래법 제200조가 폐지된다.그러나 200조가 폐지되더라도 강제 공개매수제도 등이 시행돼 기업 인수합병은 쉽지 않게 돼있다. 따라서 새 증권거래법이 시행되기 전 한화종금·미도파 등 지주회사를 대상으로 한 적대적 M&A가 활발해지고 있다.현행 증권거래법 200조를 어기기 않고도 얼마든지 지분매집을 통해 기업인수가 가능하다.증권감독원 보고사항으로 돼있는 「5% 지분변동」을 피해 지분을 5% 이하로 유지하고 관계사나 협력사·우호세력에 분산시킬수 있기 때문이다.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는 지분을 「수면 아래」에서 확보한 뒤 공개매수를 통해「위장지분」을 합법화해 인수작업을 마무리지을수 있는 것이다. 물론 4월부터는 사정은 달라진다.이미 보유하고 있는 지분을 포함,총발행주식의 25% 이상을 취득하려면 총발행주식의 50%+1주를 의무적으로 공개매수해야 한다.이른바 강제 공개매수제도로 그만큼 인수부담이 따르게 돼있다.공개 매수주체의 지분과 합산되는 특별관계자 범위도 배우자,직계존비속,35% 출자법인에서 배우자,6촌 이내의 부계혈족·3촌 이내 모계혈족,20%이상 출자법인과 임원,주요주주,임원,사실상 계열관계법인,영향력 행사자,공동보유자 등으로 확대된다.이같은 범위는 5% 지분변동에 따른 보고(5%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5%룰 대상유가증권에 전환사채,신주인수권부사채,교환사채 등이 추가되고 보유목적과 취득자금도 기재하도록 명시,비교적 투명하고 공정한 룰아래에서만 기업 인수·방어게임이 가능해졌다.
  • 말과 글 가진 위구르족 독립외침에(박갑천 칼럼)

    중국서북쪽 신장(신강)성 위구르자치구 이닝(이령)시에서의 유혈사태가 알려진다.독립을 외치는 위구르족이 한족을 공격,양쪽에서 3백여명이 죽고 위구르족 1천여명이 잡혀갔다니 규모가 꽤큰 폭동이었던 듯하다. 위구르는 한자로 「회홀·회흘·외올아」라 적는다.6∼7세기께까지 동돌궐제국 지배아래 있었는데 8세기들어 위구르제국을 세우면서 한때는 남쪽 토번과 함께 당나라 2대 대항세력으로 뻗는다.하나,괘그르는 역사의 흐름 따르는 영고성쇠.현재 신장성에는 13개 소수민족이 쓰적쓰적 엉켜사는데 위구르족이 70%를 넘는다. 그들에게는 위구르어가 있고 위구르문자가 있다.말과 글자를 가질수 있었던 뒷심이 「독립만세」를 외치게한 바탕으로 되지 않았겠나 생각케도 한다.고대위구르어는 고대튀르크어의 하나로 동투르키스탄에 살았던 위구르족 말이다.현대위구르어는 투르키스탄에서 쓰는 현대튀르크어.이는 1921년부터 「위구르어」라 부르도록 공식화했다. 마니교 문헌 등에서 볼 수 있는 소그드문자에서부터 제나라글자를 만들어낸 겨레가 위구르족이다.초기에는 소그드문자같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로쓰기하다가 나중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로쓰기한다.그게 몽골문자로 이어진다는 점이 흥미롭다.13세기초 위구르족은 칭기스칸의 지배를 받는다.그러나 그들은 조정의 문서기록을 맡으면서 위구르문자를 쓴다.나중에 몽골어 성격에 맞추어 수정보완한게 몽골문자.힘에는 눌렸지만 문화는 물려준 셈이었다. 신장성지역 위구르족에게는 「에팽티」란 이름의 설화주인공이 있다(강명상 「재미있는 중국의 이색풍속」).그가 엮어내는 얘기의 하나인「금씨앗 뿌리기」는 백성들 잡죄는 통치자의 독단과 부정부패를 웃음거리로 만들면서 꼬집는다.­에팽티가 금붙이들을 빌어다가 모래밭에 뿌린다.이곳을 지나던 임금이 까닭을 묻자 며칠만 지나면 몇곱절을 수확하게 된다고 대답한다.임금은 그말을 믿고 궁중의 금붙이를 모두 가져나와 뿌리고 그걸 가난한 백성들과 유목민들이 줍는다.비가 안와 금나무가 시들어서 거둘게 없다는데 임금인들 어쩌랴. 냉전시대가 가면서 옛소련등 사회주의 나라쪽에서 「독립」소리가 높아져 온다.위구르족의 동투르키스탄공화국 건설외침도 그점에서 쉬이 간정될 것 같진 않다.과연 소망은 이뤄질건지.〈칼럼니스트〉
  • 민족문화 경제성 되찾자/김주영 작가(서울광장)

    정부는 올해를 문화유산의 해로 지정하고,수십년동안 무분별한 개발논리에 희생되었던 문화재에 대한 일반의 인식에 대전환을 가져다줄 발굴과 보존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갈 계기로 만들겠다는 의욕이다.검증없이 도입된 저질의 외래문화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문화의 정체성이 흐트러진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가치관의 전도,소비풍조의 무분별성,전통적 가족개념의 파괴,공동체의식의 우려할만한 훼손까지도 우리의 가치관이 정치와 경제논리에 무게중심이 얹혀있었으므로 겪게된 방황과 좌절이었다.견고한 문화유산의 보존이 경제발전의 기틀이 되며,지고한 목표라는 의식이 우리에겐 희박하다.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문화유산은,삭풍이 산야를 휘몰아치는 추운 겨울날,안방에 놓여진 질화로의 불씨와 같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망각하고 있다.경제발전을 위해선 문화유산 따위는 얼마든지 희생시켜도 좋다는 단순논리는,경제발전을 이룩한 다음에 우리에게 남아있어야 할 민족적 자긍심과 미래에 대한 또다른 포부는 어디서 찾아내야 하는가라는치명적 의문을 낳게한다.그래서 문화재를 올바르게 보존하자는 일들이 과연 한가로운 일이며,몇몇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분별력있는 반성이 필요하다. ○문화유산 보존의식 희박 문화적 바탕이 없는 국가는 결코 올바로 설 수 없었다는 역사적 교훈을 우리는 13세기 동양의 한 위대한 정복자의 행적에서 읽고 있다.그가 바로 징기스칸이다.만주벌판에서 일어선 여진의 후예였던 그는 중국대륙을 질풍노도와 같이 가로질러 동유럽 정복에 착수하였다.당시 유럽인들은 밤마다,징기스칸의 군대가 다시 나타날까 전전긍긍하였다.그가 유럽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말타기에 능숙한 용맹스런 군대와 그 군대의 보급창 역할을 하였떤 양떼들이 항상 뒤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그 유목민들에겐 불행하게도 문화의 바탕이 없었으므로 정복한 땅을 지킬 수 없었던 불운을 맞았다.국가를 지탱하는 힘의 중심 논리가 어느 바탕에서 출발해야 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풍남토성 안에서 건축되고 있는 아파트 공사장의이야기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귀중한 문화유적지에 치밀한 사전조사도 거치지 않고개발허가를 해준 행정당국이나,토기들이 출토되고 있다는데도 그런 일이 없다고 버티는 현장의 목소리는 우리를 흥분시킨다.경향각지에 흩어져 있는 개발공사장에서 들려오는 가당찮은 소문들을 우리는 끊임없이 듣고 있다..많은 작업장에서 유물이 발견되면,서둘러 그 출토의 증거를 없애버린다는 것이다.그 사실이 언론에라도 보도될라치면 그로써 격게될 기업의 재정적 손실이 두렵기 때문이다.어디 그뿐인가.경부고속철도의 경주통과를 둘러싼 정부의 부처간,그리고 민간의 이해 당사자들 사이에 벌어졌던 끝없는 갑론을박도 그동안 우리가 문화재를 얼마나 하찮게 보아왔는가를 보여준 부끄러운 사례였다. ○사전조사없이 개발 허가 한가지 사례가 또 있다.국민의 문화향유권을 확대시켜주는 작업의 일환으로,전국의 문화재 안내판을 중학생 수준으로써도 금방 이해할 수 있도록 고쳐나가는 일이 그것이었다.좋은 발상이라고 생각해서 보수를 차치하고 필자도 참여했었다.그 일에서 필자는 〈사지〉라는 어려운 한자말 대신〈절터〉로,〈석불〉을 〈돌부처〉로,〈일원〉을 〈둘레〉따위로 고쳐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었다.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담당직원의 대답은,무슨 위원인가 하는 분들이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사리와 분별,하고자하는 작업의 골자를 생각하기 전에 권위와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라는 피해의식이 앞섰던 결과다.이런 무분별하고 독선적인 문화규제가 곧 우리 국민의 문화적 긍지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도 문화유산의 해인 이 시점에서 눈 똑바로 뜨고 극복해야 할 과제중의 한가지다. 문화유산의 보존은 전국민적 공감대가 설정됨으로써 그 추진력을 노릴 수 있다.그것이 문화의 향유권을 확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 광대역 ISDN·플림스 곧 상용화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 가능/21세기 「통신유목민」시대 온다 □광대역 ISDN ·음성·문자·영상·음향정보 동시 송수신 ·협대역보다 전송속도 1,000배이상 빨라 □플림스 ·세계 통신망 하나로 묶는 무선통신 종착역 ·우리나라도 99년까지 표준모델 개발키로 21세기에 펼쳐질 정보통신사회는 곧잘 「노마딕(유목민)환경」으로 표현된다.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거나 다른 사람과 통신할 수 있는 「자유로운 유목민」의 세상이 될 것이란 전망에서다. 21세기에는 전세계의 컴퓨터망을 연결하는 정보고속도로가 깔리고 통신·방송·컴퓨터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단말기 하나로 각종 형태의 정보를 얻을수 있게 되리라는데 토를 다는 사람은 없다. 우리나라도 2010년을 앞뒤로 전국의 가정이나 기업·학교·연구소·정부를 최첨단 광케이블로 연결해 음성은 물론 데이터·영상정보를 초고속통신망으로 주고 받는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따라서 앞으로 15년 남짓 뒤면 광섬유를 중심으로 유선·무선·이동통신이 한데 어우러진 정보통신 대동맥의 정보유통체제를 갖추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21세기 정보통신혁명을 주도할 쌍두마차로 광대역 종합정보통신망(B­ISDN)과 미래공중육상이동통신(플림스)을 꼽는다.광대역ISDN이 유선부문의 이상향이라면 종합 무선통신망의 최종 목표는 플림스로 삼고 있는 것이다. ISDN은 음성 뿐 아니라 문자·영상·음향정보를 종합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멀티미디어시대의 첨병으로 불린다.하지만 현재 실용화된 협대역 종합정보통신망(N­ISDN)은 전송능력의 한계로 본격적인 영상정보를 주고 받기에는 역부족이다.음성·문자·영상정보를 한꺼번에 자유롭게 송수신하려면 기존의 협대역ISDN보다 한단계 앞선 차세대 정보통신망이 나와야 한다.이러한 맥락에서 세계 각국이 앞다퉈 개발중인 통신망이 바로 광대역ISDN. 협대역ISDN은 64Kbps(1초에 6만4천비트의 정보전송)를 기본 속도로 144Kbps에서 2천Kbps(2Mbps)까지 가능하지만 광대역ISDN에서는 155∼622Mbps가 가능해 전송속도가 1천배이상 빠르다. 일반적으로 음성신호(전화)를 보내려면 64Kbps의 전송속도가 필요하며 영상신호는 일반TV의 경우 90Mbps,고화질(HD)TV는 300∼400Mbps는 돼야 한다.따라서 협대역ISDN은 음성이나 저속의 데이터와 정지화상,준동화상을 주고 받을수 있을 뿐이며 고화질 영상이나 대용량의 데이터전송을 하기 위해서는 광대역ISDN이 필수적이다. 이같은 광대역ISDN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광교환기와 광통신기술.일부 선진국에서 상용화한 비동기 전송모드(ATM) 교환기는 동작속도에 한계가 있어 광대역ISDN 가입자가 수백만명에 이르게 될 경우 광교환방식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광교환기술은 아직까지 실용화단계에 이르지 못했다.전문가들은 미국과 일본이 최근 시제품을 선보이고 있는 상황을 감안해 볼 때 앞으로 10년이내 실용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광대역ISDN을 가능케해 줄 또 하나의 핵심기술은 음성·데이터·영상등의 신호를 빛으로 바꿔 광케이블을 통해 보내는 광통신.기존의 구리전화선을 대체할 광통신은 21세기 정보사회의 대동맥으로 불린다. 광통신은 20여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비약적인 기술발전을 거듭하고 있다.80년대의 메가(백만)비트 시대에서 90년대의 기가(10억)비트시대를 거쳐 21세기의 테라(1조)비트,즉 테라콤(Teracom)시대를 향해 줄달음 치고 있다. 테라비트 광통신이란 머리카락 굵기(0.125㎜)의 광섬유 한가닥으로 1초에 조단위의 비트(한글 한자는 16비트로 구성)정보를 보내는 것으로 초고속화·초대용량화를 뜻한다. 정부는 오는 2003년까지 산·학·연 공동으로 총 6천850억원의 연구개발비와 1만6백여명의 연구인력을 투입해 광대역ISDN 상용화를 위한 교환·전송·단말·통신망기술을 개발할 계획이다. 광대역ISDN이 21세기 꿈의 멀티미디어사회를 실현할 주역이라면 플림스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세계를 하나로 연결해 줄 무선통신의 종착역이다. 미래의 무선통신은 모름지기 육상·산악·해상·공중 등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용이 가능하며 외국에 나가서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요구조건을 충족해 줄 무선통신망이 플림스다.플림스는 지상이동전화망과 이리듐·글로벌스타 등 저궤도위성망을 결합한 무선통신시스템.가입자가 육상·해상·공중에 있거나 도심·교외·국내외 어디에 있건 서비스를 제공해 준다.내용도 음성·무선호출·무선데이터·영상 등을 포괄한다. 현재의 이동전화서비스는 다른 통신망과의 연동이 불완전하며 특히 전세계적인 통합성이 없다는 결정적인 흠을 안고 있다.그러나 플림스는 여러 종류의 단말기가 지상이나 저궤도위성의 통신망과 연결됨으로써 유선망과 이동통신망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전세계적인 통신망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미국·일본등 선진국은 오는 2000대 초반 플림스를 상용화한다는 목표 아래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국제전기통신연합(ITU)은 지난 92년 플림스용 주파수대역을 결정한데 이어 99년까지 국제표준을 마련할 예정이다. 우리나라도 ITU의 국제표준화 일정을 감안해 99년까지 정부와 업체가 3백15억원씩 총 6백30억원을 들여 플림스 표준모델을 개발,이를 ITU에 국제표준으로 제안하기로 했다.이어 99년부터는 우리가 개발한 표준모델을 바탕으로 업체간개발경쟁을 통해 2001년에는 플림스를 상용화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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