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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미 “임상아 백 디자이너? 난 항상 의아해했다..”

    방미 “임상아 백 디자이너? 난 항상 의아해했다..”

    방송인 방미는 지난 9월 10일 ‘임상아 그녀의 뉴욕생활을 보며 나의 뉴욕 생활이 떠올랐다’는 제목의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했다. 방미는 “나는 8년 동안 뉴욕 생활을 버텼는데 임상아는 아마도 남편과 아이가 있어서 뉴욕에서 지내기에는 나보다 훨씬 쉬웠을 것이다. 난 뉴욕 맨해튼 중심, 그러니까 가장 바쁜 비즈니스 정글인 미드타운에서 죽도록 일하며 회사를 일구면서 차디찬 일명 악질 방미로 살아왔다”고 말문을 열었다. 방미는 “가끔 사람들을 통해 임상아 소식을 듣곤 했다. 그녀의 베일 속 ‘백(Bag)’ 디자이너 수식어에 난 항상 의아해했다. 그녀에게 회사도, 스토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 상아 백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는지 뉴욕 교포들은 나에게 물어보곤 했다”며 임상아의 성공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어 방미는 “임상아의 남편은 유대인이며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끔 할리우드 연예인이 가방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 업계에 종사하는 남편이 찍어와 매스컴에 낸 것이 아닐까 싶다”면서 “그나저나 그녀는 아마도 그리운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미 마케팅이 돼 있는 그녀는 백 디자인 일을 하겠지. 임상아는 맨해튼 패션 스쿨인 파슨스를 잠시 다니면서 삼성 이서현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녀의 지원으로 백 일은 계속 하지 않을까?”라고 덧붙였다. 방미는 16일에는 난방비 부조리로 이웃 주민과 폭행 사건에 휘말린 김부선에 대해 “김부선이 좀 조용히 지냈으면 좋겠다. 내가 LA에 있을 때나 서울에 있을 때나 이 분은 연기자보단 자기 개인적인 일로 더 바쁘고 시끄럽게 산다. 억울함, 흥분되는 일, 알리고 싶은 일, 설치면서 드러내고 싶은 일들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메르켈 “서울평화상 선정돼 기뻐… 한국 방문해 상 받고 싶어”

    메르켈 “서울평화상 선정돼 기뻐… 한국 방문해 상 받고 싶어”

    1990년 제정된 이후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연이어 배출하며 아시아의 대표적인 평화상으로 ‘격’이 제고된 서울평화상 수상자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선정됐다. 현직 정부 수반이 수상하는 건 처음이다. 서울평화상심사위원회(위원장 이철승)는 17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최종 심사위원회를 열어 메르켈 총리를 제12회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메르켈 총리는 서울평화상 측에 “권위 있는 상을 받게 돼 매우 기쁘며 한국을 방문해 수상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철승 심사위원장은 이날 “독일의 과거사를 사죄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 문제를 국제사회에 분명하게 인식시킨 메르켈 총리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며 “과거의 만행을 부정하고 있는 국가와 인권을 유린하고 있는 국가들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인권 경시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고 밝혔다. 메르켈 총리는 독일의 첫 여성 총리로 2005년 취임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출생한 첫 독일 총리이지만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량학살)에 대해서는 ‘멈추지 않는’ 사죄를 이어간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2007년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나 이전의 모든 독일 총리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독일의 특별한 역사적 책임을 의무로 여겨왔고, 저는 이런 특별한 역사적 책임을 명확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혀 주목받았다. 2008년 3월에는 이스라엘 의회에서 “쇼아(홀로코스트의 히브리어 표현)는 독일인에게 가장 큰 수치”라고 공개적으로 사죄했다. 메르켈 총리의 행보는 제국주의 침략 역사를 부정하고 전시 여성에 대한 강압적인 군대 성노예 행위를 부인하는 데 열중하고 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뚜렷하게 대비된다. 역대 서울평화상 수상자 가운데 ‘국경없는 의사회’와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 무함마드 유누스 그라민은행 설립자가 이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한국인으로는 2012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처음 수상했다. 서울평화상 측은 격년제로 시상하는 이 상을 매년 수여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메르켈 총리는 상패와 상금 20만 달러를 받는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유대인 비난 말라” 진화 나선 메르켈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가자 사태를 계기로 최근 자국에 불어닥친 반(反)유대주의 진화에 나섰다. 메르켈 총리는 14일(현지시간) 중동 가자 사태 기간에 독일에서 벌어진 유대인 비난 공격을 규탄하고자 열린 집회에서 “반유대주의와 싸우는 것은 우리 국가와 시민의 의무이며 이 자리에 참석한 누구도 반유대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맞서 싸워 온 공로로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명예 시민훈장을 받은 메르켈 총리는 “오늘날 유대인이 독일에서 다시 살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며 유대인의 삶은 우리 정체성의 일부”라고 덧붙였다. 이날 집회는 정계와 종교계 지도자들을 포함해 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홀로코스트 기념공원 부근의 브란덴부르크문에서 열렸다. 세계유대인회의(WJC)의 로널드 라우더 회장은 “전후 독일은 가장 책임 있는 국가 가운데 하나이며 이스라엘의 친구이지만 올여름 반유대주의 물결로 지난 70년간의 진전이 퇴색했다”고 비난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앞서 지난 7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이 한창일 때 독일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집회들이 열렸고 일부 시위대는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라’는 구호를 외쳤다. 지난 5월엔 브뤼셀 유대 박물관 입구에서 유대인을 겨냥한 총기 난사 테러가 발생, 4명이 사망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그는 아랍을 사랑한 유대인 기자였다

    그는 아랍을 사랑한 유대인 기자였다

    “시아파 골목을 돌아 크리스천 마을로 들어설 때 느꼈던 레바논의 신비함을 잊을 수 없습니다. 비잔틴의 품격을 간직한 시리아가 ‘깡패 국가’라니요. 서방에 물들지 않은 예멘의 공기는 또 어떻습니까. 아랍어 하나로 이 모든 문화를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요원에게 참수당한 프리랜서 기자 스티븐 소틀로프가 2010년 카타르 대학 언어학부에 보낸 입학지원서의 일부분이다. 3일(현지시간) 이 편지를 공개한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소트로프를 “아랍인보다 더 아랍을 사랑한 유대인 기자”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소틀로프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조부모를 둔 유대인이었다. 사망 전까지 이스라엘과 미국 국적을 모두 보유할 정도로 유대인 정체성이 강했다. 그러나 그는 ‘유대 세계’에 갇혀 있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리비아 등 혼돈이 끊이지 않는 중동을 누비며 고통받는 아랍인들의 삶을 뉴욕타임스, 타임,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 등을 통해 전 세계에 타전했다. 이집트에서 함께 취재했던 앤 말로베는 “모든 동료들이 만류했지만 그는 기어코 ‘무슬림 형제단’의 본부로 들어갔고, 납치 직전까지 시리아 난민과 함께했다”고 회고했다. 2012년 리비아 벵가지의 미국 영사관이 테러를 당했을 때도 그는 “리비아 국민은 미국을 좋아한다. 지금 폭격하면 미래의 우방을 잃을 것”이라며 군사작전에 신중할 것을 호소하는 기사를 썼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철학자’로 자신을 소개한 그의 트위터에는 중동의 참상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지만 IS에 납치된 지난해 8월 이후로는 휴면상태다. 추모 열기가 뜨거워지자 그의 어머니 셜리 소틀로프는 “우리 아들은 영웅이 아니다. 단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기자였다”고 말했다. 동영상을 통해 아들을 풀어달라고 호소할 때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이창구 기자 window2@seoul.co.kr
  • [함혜리 선임기자의 미술관 건축기행] 獨, 50여개 수용소 추모·교육 공간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

    [함혜리 선임기자의 미술관 건축기행] 獨, 50여개 수용소 추모·교육 공간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독일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다양한 방법으로 2차대전 희생자들에게 사죄의 뜻을 나타냈다. 말에서 그치지 않고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조치들이 이어졌다. 그 한 가지가 남아 있는 수용 시설이나 관련 시설을 추모와 교육의 공간으로 바꿔 피해자인 유대인과 가해자인 독일인의 후손들이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판단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독일 전역에는 50개가 넘는 유대인 수용소 추모관 및 관련 박물관이 건립돼 있다.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공원과 테러의 토포그라피 박물관은 진심으로 속죄하고 미래 세대가 바른 역사의식을 갖도록 노력하는 독일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브란덴부르크 문 남쪽으로 5분 거리에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공원은 6000여평에 달하는 대규모 부지에 관처럼 생긴 2711개의 콘크리트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장소다. 미국인 건축가 피터 아이젠먼이 설계하고 2004년 완공된 이곳은 과거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평균 무게 8t에 달하는 콘크리트 추모비들이 높낮이를 달리하며 줄지어 서 있어 공동묘지를 마주하는 듯 비장함을 안겨준다. 베를린의 심장부에 이 의미 있는 장소가 생기기까지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는 것 역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한다. 통일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대규모 추모시설 건설을 주장한 사람은 저널리스트인 레아 로스와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예켈이다. 베를린이 포츠다머광장을 중심으로 급속한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1990년대 초반이었다. 유대인박물관이 논란을 거듭하며 건설되던 때다. 이미 유사한 시설이 많은 상황에서 대규모의 유대인 추모시설을 세울 바에야 그 돈을 복지에 사용하라는 반대론자들이 많았다. 예켈은 반대하는 이들을 향해 “새 시대를 준비하는 지금이야말로 역사 앞에서 진실하고 겸허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격렬한 논쟁을 거친 끝에 정부와 의회는 홀로코스트 추모공원 건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독일 정부는 성명에서 “600만명의 유대인을 추모하는 시설을 통일독일의 수도에 건립하는 것은 독일은 물론 세계가 이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우리가 담당해야 할 역사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추모공원이 자리한 곳은 과거 히틀러의 최측근이었던 나치 선동가 괴벨스의 집무실이 있었던 곳이다. 1994년 현상설계가 진행돼 아이젠먼이 선택됐다. ‘테러의 지형학’으로 번역할 수 있는 테러의 토포그라피 박물관(Topographie des Terrors)은 1933~1945년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 나치 친위대 슈츠슈타펠(SS), 제국 중앙보안국의 헤드쿼터가 있던 자리에 있다. 히틀러 치하의 베를린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곳이었다. 과거 프린츠 알프레히트 거리로 불리던 니더크리슈너로에 있는 이곳은 2차 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됐고, 일부에 베를린 장벽이 지나가면서 오랜 세월 폐쇄됐었다. 유대인들에게 큰 공포를 안겼던 장소가 조심스럽게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한 것은 42년이 지난 1987년. 베를린시 수립 750년을 맞은 행사의 일환으로 당시 고문실로 쓰였던 지하실을 개방했다. 1989년 동서독 학자들의 공동 연구를 토대로 그 일부에 나치의 범죄를 기록한 야외 전시실이 마련됐고 2년 뒤에는 이곳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재단도 설립됐다. 그 위쪽으로 건축가 페터 춤토르의 설계로 2010년 완공된 박물관에서는 각종 학술행사와 전시회가 열린다. lotus@seoul.co.kr
  • [함혜리 선임기자의 미술관 건축기행] 베를린 유대인박물관

    [함혜리 선임기자의 미술관 건축기행] 베를린 유대인박물관

    나치의 광적인 반(反)유대주의는 600만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하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20세기 역사에서 인류가 가장 부끄럽게 여기는 참혹한 범죄에 대해 가해자인 독일은 다양한 방식으로 참회를 계속해 오고 있다. 베를린 유대인박물관은 과거에 대한 독일인들의 속죄의 뜻을 담은 대표적인 장소일 뿐 아니라 건축적 의미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모으는 장소다. 2001년 9월 정식 개관에 앞서 비어 있는 상태에서도 전 세계에서 수많은 방문객이 찾았고, 지금은 베를린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방문지로 꼽힐 정도로 높은 관심을 받고 있는 명소다. 린덴스트라세 14번지에 있는 이 박물관은 독일의 유대인들이 떠안아야 했던 참담한 역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이 왜 중요한 가치인지, 올바른 역사의식이란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다. 말없이 서 있을 뿐인 건물이 이런 철학적이고 어려운 과제를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비극적 역사의 무게감과 엄숙함을 시각적, 공간적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한 건축가는 다니엘 리베스킨트다. 폴란드 유대계이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은 그가 설계한 포스트모던 양식의 건축물은 외형과 외부 장식, 내부 디자인의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고 심오하고 무거운 철학적 개념들을 담고 있다. 리베스킨트는 2001년 9·11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자리에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추모공원 ‘그라운드 제로’의 마스터플랜 설계자로 세계적 명성을 확인한 바 있다. 하지만 유대인박물관 설계공모전이 열린 1989년까지만 해도 그는 실현 불가능한 건축 설계와 드로잉을 하는 ‘언빌트’ 건축가로 알려졌었다. 이스라엘에서 음악을 공부한 뒤 미국과 영국에서 건축을 전공한 그는 음악을 드로잉의 모티브로 삼기도 하고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비정형의 드로잉을 통해 자신의 건축 철학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름을 알렸다. 상상력 가득한 그가 첫 번째로 도전한 설계 공모전이 베를린의 유대인박물관이다. 리베스킨트가 설계한 유대인박물관은 전형적인 박물관과는 시작부터 다르다. 티타늄과 아연 합금으로 뒤덮인 이 건축물에는 입구가 없다. ‘리베스킨트 빌딩’이라고 불리는 박물관에 들어가려면 바로 옆에 있는 올드 빌딩, 즉 베를린박물관 건물을 통해야 한다. 바로크양식의 베를린박물관은 과거에 프로이센의 법원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건물에 들어서면 정원 쪽으로 탁 트인 휴식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지그재그로 된 강철재와 유리로 된 천장을 얹은 ‘유리정원’은 2007년 리베스킨트의 설계로 완성됐다. 기념품 판매소 앞쪽으로 계단실이 있다. 60도로 급격하게 경사진 이 계단을 내려가면 긴 복도가 나오고 어느덧 유대인박물관의 전시 공간에 도착하게 된다. 박물관 안내를 해 준 독일인 가이드 카르스텐 크리거는 “유리정원은 18세기에 지어진 베를린박물관 건물과 21세기에 지어진 포스트모던 양식의 유대인박물관 건물을 공간적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급격한 경사에 이어지는 긴 복도는 방문객들이 시간여행을 하도록 이끌어 주는 건축적 장치”라고 설명했다. 박물관 건물은 나치의 대학살로 희생된 수백만 유대인의 비극적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치들로 가득하다. 건물의 지그재그형 구조는 유대인의 표식인 ‘다윗의 별’이 부러진 모양이다. 그 모양은 조감도로 봤을 때 확연히 나타나지만 건물 내부를 관람하는 동안에는 미로처럼 끝없이 흩어지는 좁다란 복도와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 없는 야릇한 공간감으로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다. 리베스킨트는 건물 청사진을 발표할 때 박물관을 ‘선(線) 사이’라고 명명했었다. “사고와 조직, 관계에서 어긋나는 두개의 선을 표현하고자 했다. 똑바로 뻗어 있는 하나의 선은 수많은 조각으로 날카롭게 부서지고, 다른 하나는 우여곡절이 많지만 정체성을 이어 가는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를 상징하는 선이다.”(리베스킨트, 1998) 박물관의 외벽과 창문, 그리고 내부에는 무수히 그어진 날카로운 선들이 교차한다. 금속 외벽의 차가움과 난도질당한 듯 잘라진 선들은 보기에도 섬뜩하고 긴장감을 높인다. 무의미해 보이는 선들은 마구잡이로 그어진 게 아니다. 2차 대전 전에 베를린에서 살았던 독일인과 유대인 유명 인사들의 거주지를 연결해 얻어낸 매트릭스다. 리베스킨트가 이 건축물의 구조적 요소로 택한 기본 개념은 ‘공백’(void)이다. 단절된 역사, 사람들이 떠난 자리, 재가 돼 버린 인간성 등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모든 종류의 공백이 건물 곳곳에서 실물로, 느낌으로 다가온다. 2층 구석에 있는 ‘공백의 기억’은 공백을 극단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공간이다. 노출 콘크리트 벽이 높이 서 있는 기다란 공간은 원래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으로 설계된 것인데 지금은 바닥에 이스라엘의 조각가 메나슈 카디슈만(1932~)의 작품 ‘샬레헤트’(낙엽이라는 뜻의 히브리어)가 설치돼 있다. 쇠로 만든 얼굴 조각 1만개가 바닥에 깔려 있다. 각기 다른 크기에 다른 표정인데 그 표정은 한결같이 불행과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 위를 지나가면 쇠로 만든 얼굴들이 서로 부딪치며 삐거덕삐거덕 괴상한 소리를 낸다. 감옥에서 인간성을 말살당한 채 죽음을 기다리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지를 상상하게 된다. 박물관의 미로들은 세 개의 축을 따라 유대인이 처했던 비극적인 상황을 체험하도록 관람객을 이끈다. 30도의 완만한 경사로 올라가는 긴 복도는 ‘연속성의 축’이다. 기나긴 베를린의 역사는 미로처럼 계속되다가 무질서하게 갈라진 좁고 긴 공간들과 함께 사라진다. 마치 유대인들이 어느 순간 도시에서 사라졌던 것처럼. 또 다른 축은 ‘방랑의 축’이다. 그 끝에 있는 문을 열고 나가면 ‘추방의 정원’이 있다. 12도의 경사로 비스듬히 세워진 49개의 콘크리트 기둥 사이를 걸어가다 보면 사람들은 방향감각을 잃고 만다. 독일에서 추방당해 불안한 마음으로 낯선 땅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느꼈던 심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리베스킨트는 이곳이 ‘역사에서의 조난’을 상징한다고 표현했다.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알지 못하는 천진한 아이들은 기둥 사이를 숨바꼭질하듯 돌아다닌다. 콘크리트 기둥 위에는 희망을 상징하는 러시안졸참나무가 심어져 있다. 마지막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축’을 남기고 독일인 가이드는 “백 마디 설명을 듣는 것보다 직접 느껴 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고는 총총 사라졌다. 그 이유를 곧 알게 됐다. 복도에 설치된 장에는 비참하게 학살당한 사람들이 지녔던 물건들이 추억과 함께 전시돼 있고 좁은 복도 끝에는 무거운 철문이 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홀로코스트 타워’다. 묵직한 철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히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20m 높이의 노출 콘크리트 탑은 출구도 없고 창문도 없다. 절대 어둠에 놓인 공간을 밝히는 것이라곤 천장 쪽으로 살짝 열린 창을 통해 들어오는 가느다란 광선이 전부다. 평상시에는 이 창문을 통해 박물관 뒤편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도 들린다고 한다. 자유와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절망과 공포가 얼마나 컸을지 상상하게 된다. 어디에도 갈 수 없는 복도, 벽에 가로막힌 계단들을 지나면서 유대인들의 상처와 분노, 고통, 그리고 비틀린 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 사진 lotus@seoul.co.kr
  • 다시 고개든 KKK

    미국 뉴욕주 햄턴 베이에 사는 카를로스 엔리케 론도뇨는 최근 집 앞에서 ‘미국을 구하려면 이곳에 가입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KKK(쿠클럭스클랜) 회원 가입 신청서를 발견했다. 그는 “난 콜롬비아 출신인데다가 유색 인종이어서 받아주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흑인 주민은 “내 이웃이 이런 전단지를 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하다”고 우려했다. 가입 전단지를 받은 주민은 이들뿐만이 아니다. 31일(현지시간) CNN방송에 따르면 지난 6개월간 뉴욕주, 캘리포니아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텍사스주를 비롯해 12개 도시 거주민이 KKK가 사탕과 함께 살포한 가입 권유 전단을 받았다. ‘퍼거슨 사태’로 촉발된 흑백 인종갈등과 불법이민이 올해 미국 주요 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백인 우월주의 과격단체 KKK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가입원 모집과 홍보를 통해 세를 확대하려는 것이다. 흑인, 유대인, 이민자, 동성애자, 천주교 신자 등을 향해 무차별 테러를 자행했던 이 조직은 1970년대 이후 숱한 법정 소송과 내부 갈등으로 세력이 많이 약화됐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KKK멤버는 5000∼8000명이다. 흑인과 소수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시민단체인 남부빈곤법센터(SPLC)에서 일하는 라이언 렌즈는 CNN 방송에 “KKK 관계자들이 퍼거슨시를 방문해 백인 경찰을 지지하고 백인 시위대와의 유대를 강화했다”며 KKK의 재등장으로 인한 갈등을 우려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독일, 쿠르드에 무기제공…”국제사회 책임 회피 않겠다” 능동적 대외개입

    독일이 마침내 이라크 쿠르드자치정부에 대(對)전차 미사일 같은 살상무기 제공을 결정했다. 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서 자제했던 금단 영역으로의 본격적 진입이다. 독일의 대외 군사개입은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1년 걸프전 당시 이스라엘이 이라크 미사일을 요격하려고 요구한 패트리어트 시스템을 제공하는 등 간헐적으로 개입 정책을 펴왔다. 그러나 그것은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맞물린 이스라엘과의 특수관계 때문으로 이번과는 상황이 매우 다르다. 독일은 무엇보다 지난 2003년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 당시에도 한국을 비롯한 다른 우방과 달리 ‘국제법 위반’을 앞세워 파병을 거부했던 나라다. 그런 만큼 이번 결정을 계기로 독일의 대외정책 변화에 쏠린 국제사회의 관심은 증폭될 전망이다. 독일의 대외 군사개입 강화 태세는 진작에 예고됐다.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의 지난 2월 발언이 대표적이다. 가우크 대통령은 각국 안보 책임자들이 참석한 뮌헨 안보회의 연설에서 “군대 파견 문제가 대두하면 독일은 무조건 ‘노’ 해선 안된다”며 독일의 더 많은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내쳐 6월 현지 라디오 인터뷰에선 “독일은 더욱 책임감을 갖는 차원에서 수십 년간 가져온 주저함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때론 인권을 위해 싸우고 무고한 사람들을 구하려면 무기를 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국방장관도 뮌헨 안보회의에서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더 많은 책임을 독일로서는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쿠르드정부가 맞서 싸우는 ‘이슬람국가’(IS)의 직접적 위협도 어느 때보다 무기 제공의 큰 명분을 제공했다. 독일 정보당국은 적어도 400명의 독일인이 IS 전투요원으로 가세했다고 보고 있다. 단순히 타국의 내전 위험이 아니라 자국 안보 위협의 영향권에 들어온 문제라는 판단의 근거다. 국제사회의 시선은 그러나 이번 지원의 표피적 배경보다는 독일 대외정책의 근본적 방향성에 더 모아진다. 일회적 결정이냐, 아니면 지속하는 대외정책의 변화냐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후자 쪽의 견해로 기운다. 개입 확대 쪽으로 대외정책이 변하는 와중에 이뤄진 결정이 쿠르드 지원이라는 것이다. 유럽연합(EU) 통합의 주도국이자 경제중심국인 독일을 향한 국제사회의 책임 증대 요구를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다. 독일은 종합적 국력의 크기로 미뤄 ‘디폴트(Default) 파워’인 미국, 그리고 EU 중추국인 프랑스와 영국의 분담 요청에 더는 눈 감을 수 없는 처지라는 분석이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독일의 책임 확대는 독일이 일본과는 다르게 철저한 과거사 반성으로 쌓은 국제사회의 신뢰 크기에 비례한다. 국제사회에 여전히 ‘배드 보이’(Bad Boy) 이미지가 강한 일본에 견줘 독일은 ‘굿 보이’(Good Boy) 평판을 들은 지 오래다. 그 점에서 독일의 개입 확대 정책을 능동적 선택의 결과물로 보는 시각도 많은 편이다. 국제사회의 요구에 떼밀린 강요된 행위가 아니라 독일이 오히려 주도적으로 만들어 가는 자발적 실천이라는 것이다. 이런 판단의 가장 큰 근거는 연속 3기 집권한 앙겔라 메르켈 연방정부의 운용 양상이다. 메르켈의 기독교민주당(CDU)은 사회민주당(SPD)과 연정을 가동하며 주고받기식 타협 정책의 성과를 내고 있다. 물론 여러 이슈에서 파열음도 내지만, 적어도 이번 결정처럼 중대 이슈에 대해서는 사민당의 폭넓은 지지에 힘입어 정책 추진의 동력을 얻고 있다. 대외정책에서 결기를 보이라는 주문에 대한 ‘무티(Mutti·엄마) 리더십’의 메르켈식 대응인 셈이다. CDU의 차기 주자로 꼽히지만, 유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폰데어라이엔 국방장관의 강경책 구사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7명의 자녀를 둔 엄마로서 그의 지론인 ‘가정과 군대 생활의 조화’만을 강조해서는 최고지도자로서 지지를 받기 어렵다는 배경에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도전 이슈도 독일의 대외정책 드라이브를 이끄는 요인이라는 해석이 있다. 집단자위권을 들고 나와 전열을 정비하고 있는 일본에 대한 독일 방식의 대응이라는 것이다. 독일과 일본, 그리고 인도, 브라질은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노크하는 국가들이다. 독일이 폴란드, 루마니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 5개국에 신설되는 군 전략수립 기관에 병력 150명을 파견할 계획이라는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FAZ) 일요판의 31일 보도도 그런 맥락이다. 그러나 독일 연방군이 지속가능한 대외 개입 정책을 수행할 준비가 돼 있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만해도 연방정부는 국방예산을 4억 유로 줄여 328억 유로로 낮췄다. 2016년에는 321억 유로로 더 감소한다. 올해 기준으로 독일 국방예산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29%이다. 다음 주 열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서 각국 국방예산이 GDP의 최소 2.0%가 돼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는 것을 비쳐볼 때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이 기준을 충족하려면 180억 유로 증액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독일 유력 주간지 슈피겔은 최근 독일군 병력의 질(質) 저하도 거론했다. 독일이 2011년 징병제를 무한 유예하고 사실상 모병제로 바꾼 상황에서 빚어지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의 대외 개입정책 확대 속도는 기민당을 ‘전쟁당’으로 공격하는 좌파당(Linke)과 녹색당의 상당수 세력을 설득하는 데 더해 약화한 군사력을 보강하는 데 따라 좌우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내전 상처 후비는 보스니아 교과서 전쟁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의 대학생 다니엘 에로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2차 세계대전 당시 보스니아에 나치 괴뢰정권을 세웠던 독재자 우스타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가 배운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우스타세가 전쟁 중에 훈련 캠프를 운영했다”라고만 나와있기 때문이다. 에로르는 최근에야 그 캠프가 유대인 10만명을 학살한 야세누바크 수용소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에로르가 야세누바크 수용소를 몰랐던 건 크로아티아계인 우스타세의 과오를 말하지 않는 크로아티아 역사교과서로 공부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사이어스모니터(CSM)는 1일 보스니아의 역사교과서 문제를 짚었다. 2차 대전 이후 가장 잔혹한 전쟁이라는 보스니아 내전이 끝난 지 20년이 됐지만 ‘역사교과서 전쟁’으로 인해 ‘국민통합’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25만명이 목숨을 잃은 내전이 끝난 뒤 보스니아는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가 주축이 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세르비아계가 주축이 된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나뉘는 1국 2체제를 채택했다. 두 체제에는 별도의 입법부와 행정부가 있다. 여기에다 세르비아계와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계에서 각각 뽑힌 3인의 공동 대통령이 8개월씩 돌아가며 국가를 대표한다. 통합되지 못한 정치는 역사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됐다. 세르비아 교과서, 보스니아 교과서, 크로아티아 교과서가 별도로 있다. 각각의 교과서는 상대를 ‘침략자’로, 자신은 ‘피해자’로 기술해 학생들에게 ‘증오의 민족주의’를 부추긴다.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교과서 통합 움직임이 일고 있지만, 정치권이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교육부장관이 무려 13명에 이르는 데는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이전투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역사교과서 통합 운동을 벌여온 역사학자 카타리나 바탈리오는 “정치인들이 역사교과서를 매개로 민족주의를 부추겨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면서 “다양한 사실과 시각을 허용하지 않는 역사교육이 계속되는 한 보스니아의 미래는 어둡다”고 말했다. 이창구 기자 window2@seoul.co.kr
  • 이스라엘, 서안지구에 122만평 정착촌 추진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정착촌을 건설하기 위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팔레스타인과 무기한 휴전에 들어간 지 불과 5일 만이다.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이스라엘 정부는 정착촌을 확대하기 위해 31일(현지시간) 서안지구의 베들레헴 인근 약 4.04㎢(약 122만 4174평)의 땅을 수용한다고 발표했다. 정착촌 건설에 반대하는 이스라엘 단체 피스나우는 이번에 수용 예정인 땅이 1980년대 이후 가장 큰 규모라고 밝혔다. 이스라엘이 수용을 결정한 땅은 지난 6월 유대인 10대 3명이 납치된 뒤 살해됐던 장소 부근이다. 이스라엘 당국자들은 이번 토지 수용이 해당 사건에 대한 정치적 결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정착촌 건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이나 다름없다. 최근까지 계속된 분쟁의 씨앗이 결국 영토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랍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을 1차 세계대전 뒤 영국이 통치하자, 유럽에 있던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시작됐다. 팔레스타인은 조상들의 땅에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지상목표지만 이스라엘의 점령과 이주 정책으로 살 곳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이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할 때 팔레스타인 주민의 주 수입원인 올리브 나무 숲을 밀어버리기 때문에 몰수당한 지역 주민의 생계는 끊어진다. 이번에 몰수 예정인 수리프, 알자바아, 와디푸킨 마을의 땅도 팔레스타인 가족들이 소유하고 있던 올리브 숲이다. 정착촌 확대는 팔레스타인과 국제사회가 줄곧 반대해 왔던 사업이다. 이스라엘의 최대 우방인 미국 국무부도 “유대인 정착촌 건설에 오랫동안 분명히 반대해 왔다”면서 “이스라엘이 결정을 재고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변인인 나빌 아부 루데이나는 “이스라엘의 토지 수용은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라면서 철회를 촉구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91년 전 그날의 조선인 학살… 지금의 日 혐한시위로 이어져”

    “91년 전 그날의 조선인 학살… 지금의 日 혐한시위로 이어져”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 지방에서 발생한 관동대지진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도 크나큰 비극으로 남아 있다. 혼란을 틈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등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일본 군인과 경찰, 자경단에 의해 수천명의 조선인이 학살됐다. 1일로 관동대지진 발생 91주년을 맞이한 가운데 당시 조선인 학살의 기록을 발굴해 지역별로 서술한 책 ‘9월, 도쿄의 길 위에서’가 일본 내에서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3월 출간된 이 책은 혐한 서적의 범람 속에서 발행 1만부, 판매 7000부를 돌파하며 예상외의 실적을 올리고 있다. 저자인 프리랜서 저술가 가토 나오키(47)를 지난 29일 만나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이 지금의 일본에선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등을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어떤 계기로 쓰게 됐나. -도쿄의 ‘코리아타운’인 오쿠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2012년 여름 무렵부터 재특회(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모임) 같은 집단이 오쿠보에서 “조선인을 죽여라”는 등 혐한 시위를 하는 것을 보고 그 시위의 역사적인 뿌리는 수십년 전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이라고 생각했다. 지난해 8월 31일부터 10월 8일까지 ‘관동대지진을 다시 전하는 블로그’를 개설했다. 1923년 9월 3일 누군가 살해됐다는 기록이 있으면 그것을 90년이 지난 2013년의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현장 사진과 글을 올리는 식이었다. 꽤 반향이 컸고 출판사의 제안으로 책을 내게 됐다. →최근 히로시마에서 발생한 산사태 사고 때도 넷우익들이 ‘자이니치(재일) 한국인들이 빈집털이를 하고 있다’며 자경단을 꾸리는 사건이 있었다. 재난의 현장에서 외국인을 타깃으로 하는 유언비어는 91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세계사를 봐도 그렇다. 중세 프랑스에서 페스트가 유행했을 당시 ‘유대인이 병을 살포시켰다’는 말이 돈 적도 있다. 다행히도 히로시마현 경찰이 “빈집털이로 인해 외국인이 체포된 사례는 없다”며 대응을 잘했다. 앞으로 어떤 지역이라도 그런 대응이 되도록 태세를 갖춰야 한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타깃이 된 이유에 대해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고 언어도 서툴러 일본인과의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왜곡된 인식을 믿어 버린다”고 밝혔다. 상황이 완전히 바뀐 지금도 인종주의가 이어지는 이유는. -91년 전에는 잘 모르는 낯선 외국인에 대한 무서움과 의심이 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공상적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고 생각한다. 넷우익은 진짜 자이니치 한국인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들을 괴물로 상정하고 인터넷에서 욕설을 퍼붓는다. 이를 미디어의 혐한 기사가 뒷받침한다. 다른 맥락으로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유일한 선진국이라는 자부심이 1990년대 이후 무너졌지만 현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고, 그런 버릴 수 없는 자신감을 흔드는 존재로 아시아의 다른 나라(한국, 중국)가 보였다고 생각한다. →91년 전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공감을 자리 잡게 하는 일이다. 역사수정주의자나 인종주의자들은 “한국은 거짓말을 한다”, “중국인은 정부에서 돈을 받아 데모를 한다”고 선입견을 심어 왔다. 이것을 뛰어넘는 힘은 공감 의식이다. 현실의 문제에 대한 논쟁은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위안부 등 식민 치하 피해자에 대한 생각을 일본의 일반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공감의 파이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 사진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지금&여기] 상처와 ‘집단기억’/오상도 문화부 기자

    [지금&여기] 상처와 ‘집단기억’/오상도 문화부 기자

    누군가 이야기했다. 참혹한 전쟁을 갈무리한 ‘종전’을 기념하는 나라는 많아도 전쟁 발발을 기념하는 곳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고. 그런데 우리는 올해도 어김없이 한국전쟁 발발 64주년 기념식을 치렀다. 매운 김장김치에 길들여진 독한 민족이라 그럴까. 아니면 종전보다 휴전이란 불완전함을 택한 우리의 특수성 탓일까. 개인적으론 이도 저도 아니라고 본다. 멍에에 쓸려 생긴 아물지 않는 상처 탓이 아닌가 싶다. 같은 겨레끼리 싸우고 죽였다는 틀에 박힌 이야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전쟁이 진한 상처, 아니 흉터를 남겼다는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우리에게 역사적 상처는 비단 한국전쟁뿐만이 아니다. 나치 독일과 달리 이웃 일본은 여태껏 침략과 지배,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남긴 상흔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피해자에 대한 자발적 상처 치유 활동은 아예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종군 위안부 문제다. 일본 정부는 그렇다 치고 왜 일본인들은 상식적인 생각의 틀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 최근 한국을 찾은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지금 일본의 청·장년층은 일본이 단지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전쟁이 남긴 상처에 대해선 알고 싶어 하지도, 알려 들지도 않는다”고 고백했다. 프랑스 사회학자 모리스 알브바슈는 이 같은 현상의 원인을 ‘집단기억’에서 찾으려 했다. 한 민족이나 한 사회집단이 공통으로 겪은 역사적 경험은 그것을 직접 체험한 개개인의 생애를 넘어 집단적으로 보존되고 기억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의 정체성 확립 과정은 배타성 형성과 동일시된다고 한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집단학살을 경험한 유대인은 이 같은 집단기억을 구심점으로 강력한 내부적 통합을 이뤘고, 반인륜적 전쟁범죄에 대한 인류 차원의 역사적 집단기억으로 확장했다. 반면 일본 제국주의는 한민족을 우직한 황국신민으로 개조하는 데 바빴으나, 정작 패전 후에는 과거의 집단기억에 대한 스스로의 치유 시간을 갖는 데 실패했다. 미국과 옛 소련 간 냉전체제를 교묘히 이용해 ‘영혼 없는 경제적 동물’로 몸집을 불리는 데만 전력한 탓이다. 최근 방한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죄지은 형제들을 남김없이 용서하라”고 진언했다. 잠재된 역사 미화의 본능에 빠져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일본의 대다수 국민들을 위해 우리는 과연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그들의 집단기억을 되돌리는 해법은 언제쯤 찾을 수 있을까. sdoh@seoul.co.kr
  • [씨줄날줄] 구글 캠퍼스와 유대인 DNA/정기홍 논설위원

    유대인의 유치원 교육 사례가 흥미롭다. 교실의 칠판에 꿀을 바르고, 과자로 만든 알파벳 모양 등의 교재를 붙인다. 문제를 해결하면 과자를 먹게 되니 원생들의 눈은 금세 똘똘해진다. ‘공부가 달콤한 것’이란 인식을 하게 하는 창의적 교육인 셈이다. 이런 독특함 때문인지 몰라도 미국 맨해튼의 유대인 유치원 들어가기가 하버드대 등 아이비리그의 입학보다 어렵다고 한다. 교육만큼은 둘째라면 서운해 하는 우리보다 분명히 한 수 위다. “무엇을 배웠느냐”(한국)와 “어떤 질문을 했느냐”(유대인)는 말과도 비교된다. 돈 버는 법도 유달리 일찍 시킨다. 열세 살 때 하는 성인식에서는 조부모가 유산 형식으로 얼마간의 돈을 쥐여준다. 이를 받은 뒤 부모와 함께 돈 불리는 방법을 익힌다. 유대인의 ‘경제 DNA’는 이처럼 어릴 때 만들어진다. 구글의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등 벤처신화의 상당수 유대인들이 20대 초중반 창업한 것이 이와 연관된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지하 창고 등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젊은 나이와 매우 관련이 돼 있다. 돈 버는 법을 일찍 가르치는 것은 이웃 민족으로부터 수없는 배척을 당하며 떠돌아다닌 처절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래 관계도 철저하다. 손톱만큼의 손해도 안 보는 것으로 정평이 났다. 사업 계약을 ‘하느님과 하는 것’으로 여길 정도다. 이 또한 어릴 때부터 받은 경제교육의 영향이 크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나오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돈을 못 갚으면 살을 1파운드 베 가겠다고 한 것은 대표 사례다. 우리의 정(情) 문화와 사뭇 다르다. 그렇다고 구두쇠 짓만 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최고의 자선가인 MS의 빌 게이츠와 지난해 1조원을 기부해 화제가 됐던 마크 저커버그에서 보듯 대규모 기부와 자선은 이들에게서 나온다. 장사를 파한 유대인 상점이 언제나 팔던 물건을 상점 밖에 내놓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의 돼지저금통과 같은 기부 저금통 ‘체다카’(Tzedakah)도 몸소 운영한다. 며칠 전 이러한 ‘유대인 DNA’가 서울에 상륙한다는 소식들이 있었다. 구글이 서울 강남의 한 건물에 ‘서울 캠퍼스’를 만든다는 것과 이스라엘의 요즈마그룹이 3년간 1조원 규모의 펀드를 만들어 창업에 투자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런던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이어 세 번째이고, 아시아에선 처음이다. 구글은 “아시아를 둘러보았지만 IT 생태계가 서울만 한 곳이 없었다”며 “세계를 뒤흔들 아이디어가 서울에서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어떻게 자리 잡을지 궁금해진다. 벤처창업의 ‘꽃밭’을 만들지, 샤일록의 사례가 될지는 우리의 몫이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자라, 유대인 죄수복 닮은 유아복 판매 중단

    자라, 유대인 죄수복 닮은 유아복 판매 중단

    “진정으로 사과드립니다. 티셔츠는 옛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보안관의 별에서 따왔습니다. 이제 티셔츠는 가게에 없을 겁니다.” 스페인 패스트패션업체 자라가 자사의 공식 트위터에 황급히 올린 사과문이다. 27일(현지시간) CNN 등에 따르면 자라는 유대인 죄수복을 닮았다는 지적에 아동용 티셔츠 판매를 급하게 중단했다. 이 티셔츠는 3~4세 아동용으로 흰색 바탕에 파란색 가로 줄무늬가 있고 왼쪽 가슴에는 커다란 노란 별이 들어가 있다. 자세히 보면 별 안에 ‘Sheriff’(보안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이 티셔츠를 본 사람들은 곧 수군대기 시작했다. 노란 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정권이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달도록 한 ‘다윗의 별’과 닮았고, 파란색 줄무늬는 죄수복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유대인 죄수들은 파란색 세로 줄무늬 옷에 유대인을 상징하는 노란 다윗의 별을 가슴에 달았다. 곧 자라의 공식 트위터 계정에는 ‘아이들에게 유대인 죄수복을 입히란 말이냐’는 항의가 쏟아졌다. 역풍을 우려한 자라의 모회사인 인디텍스는 “다윗의 별을 연상시킨다는 우려에 따라 전 매장에서 문제가 된 옷을 철수시켰으며 남은 물량은 모두 폐기 처분될 것”이라고 밝혔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베를린 연가/함혜리 문화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베를린 연가/함혜리 문화부 선임기자

    요즘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미술관건축기행 취재차 지난달 베를린을 찾았다. 2005년 독일 통일 15년 특집기획 취재를 한 이후 9년 만에 찾은 베를린은 도시에서 풍기는 분위기부터 확 달라져 있었다. 예전의 동베를린 지역을 찾았을 때 무언가 공허하고 암울한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알렉산더 광장에 있는 한 맥주집에서 우연히 만나 인터뷰한 동독 출신 근로자는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은 좋다. 하지만 높은 실업률과 예전에는 없던 보육비 부담, 서독과의 경제적 격차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분단 시절이 그리울 때가 많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가 하면 통일 비용 부담으로 독일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자 옛 서독지역 사람들의 불만도 극에 달했었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인 4명 중 1명은 베를린 장벽의 복원을 원했을 정도다. 장벽이 무너진 지 25년째를 맞은 2014년의 베를린은 그야말로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베를린 장벽으로 인해 완전히 폐허가 됐던 포츠다머 광장은 최첨단 시설을 갖춘 초고층 빌딩들이 숲을 이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쟁쟁한 건축가들이 ‘최고’의 자존심을 걸고 그려낸 독특한 스카이라인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광장에서 장벽의 흔적이라곤 선을 따라 바닥에 박아 놓은 벽돌에서 겨우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카페와 클럽이 줄지어 들어선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은 멋지게 차려입고 밤 나들이 나온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즐겁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분단의 상처를 묻는 것은 난센스였다. 며칠간 머물면서 베를린이 통일 독일의 수도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다른 유럽국가들이 재정 적자로 허덕이는 것과는 달리 경제는 튼실하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된 상태에서 유럽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허황된 생각은 아니리라. 이런 변화는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 독일 정부는 그동안 끈기 있고 치밀하게 인적, 물적, 재정적 투자를 지속했다. 정말 놀랍고 부러웠던 것은 그들이 미래를 설계해 나가는 동시에 과거를 복원해 나가는 대목이었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대로변으로 2차 대전으로 파괴됐다가 통일 이후 수년에 걸쳐 세심하게 복원된 역사적인 건물과 현대적인 건물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전쟁으로 소중한 문화재가 파괴되는 가슴 아픈 현장을 목격했던 이들은 되살릴 수 있는 것이라면 벽돌 한 장, 총탄의 흔적, 유대인 학살과 같은 섬뜩하고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면도 놓치지 않았다. 문화적 전통, 그들이 아끼고 사랑하던 문화재를 포함하는 과거는 분단으로 멀어졌던 독일인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고 본다. 오랜 세월 다른 이념과 체제 아래 살았던 양 진영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가장 빠른 길은 같은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한반도가 통일된 후 25년이 지나면 어떤 모습이 펼쳐질지 잠시 상상해 봤다. 어떤 식으로든 통일을 이룬 후 이념적 통합과 사회·문화적 통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생각하니 괜스레 어깨가 무거웠다. 어찌됐든 희생과 노력 없이 통일 대박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lotus@seoul.co.kr
  • 의류브랜드 ‘자라’, 나치 수용소 떠올리는 아동복 판매 중단

    의류브랜드 ‘자라’, 나치 수용소 떠올리는 아동복 판매 중단

    스페인 패션 브랜드 자라(Zara)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이 입던 옷을 연상시키는 아동복 판매를 중단했다고 AFP통신이 27일 보도했다. 이 옷은 흰색 바탕에 파란색 줄무늬가 있으며 가슴에 유대교를 상징하는 ‘다윗의 별’과 비슷한 육각 모양의 별이 붙어 있다. 이 아동복은 자라 웹사이트에서 판매됐으나 소비자들의 반발이 빗발치자 자라는 이날 판매를 중단했다. 자라 대변인은 “원래 별은 미국 서부 보안관 배지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면서 “이 디자인이 나치 강제수용소복과 무관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자라는 이 주제가 얼마나 예민한 줄 알고 있다”면서 “소비자에게 사과한다”고 밝혔다. 자라는 앞서 2007년에도 나치 상징 문양이 새겨진 가방을 팔아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자라는 당시 가방 제조업자가 동의 없이 문양을 넣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임상아 이혼 소식 전해져 ”종교 불교였는데 유대교로 개종” 이유 알고보니 ‘깜짝’

    임상아 이혼 소식 전해져 ”종교 불교였는데 유대교로 개종” 이유 알고보니 ‘깜짝’

    임상아 이혼 소식 전해져 ”종교 불교였는데 유대교로 개종” 이유 알고보니 ‘깜짝’ 가수에서 디자이너로 변신한 임상아(41)가 최근 미국인 남편과 이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7일 한 매체는 임상아가 2001년 결혼한 미국인 음반 프로듀서 제이미 프롭과 10년 만에 이혼했다고 전했다. 이혼 사유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임상아는 2009년 한 예능 방송에 출연해 “결혼 당시 종교가 불교였는데 남편은 유대인이었다”면서 “1년 6개월 동안 공부해 개종했고, 또 한 번 식구들을 전부 모아놓고 결혼식을 올렸다”고 밝힌 바 있다. 임상아는 배우 출신 가방 디자이너로 1999년 뉴욕에서 ‘SANG A(상아)’라는 핸드백 브랜드를 론칭했다. 그는 음반 프로듀서 제이미 프롭과 2001년 결혼에 골인해 슬하에 딸 1명을 두고 있다. 네티즌들은 “임상아 이혼, 두 사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임상아 이혼, 정말 이혼 맞나”, “임상아 이혼, 무슨 이유인 지는 모르겠지만 안타깝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임상아 이혼 소식 “종교 불교였는데 유대교로 개종한 뒤…” 깜짝

    임상아 이혼 소식 “종교 불교였는데 유대교로 개종한 뒤…” 깜짝

    임상아 이혼 소식 ”종교 불교였는데 유대교로 개종한 뒤…” 깜짝 가수에서 디자이너로 변신한 임상아(41)가 최근 미국인 남편과 이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7일 한 매체는 임상아가 2001년 결혼한 미국인 음반 프로듀서 제이미 프롭과 10년 만에 이혼했다고 전했다. 이혼 사유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임상아는 2009년 한 예능 방송에 출연해 “결혼 당시 종교가 불교였는데 남편은 유대인이었다”면서 “1년 6개월 동안 공부해 개종했고, 또 한 번 식구들을 전부 모아놓고 결혼식을 올렸다”고 밝힌 바 있다. 임상아는 배우 출신 가방 디자이너로 1999년 뉴욕에서 ‘SANG A(상아)’라는 핸드백 브랜드를 론칭했다. 그는 음반 프로듀서 제이미 프롭과 2001년 결혼에 골인해 슬하에 딸 1명을 두고 있다. 네티즌들은 “임상아 이혼, 무슨 일일까”, “임상아 이혼, 무슨 이유로 이혼했나”, “임상아 이혼, 결혼식을 다시올리다니 대단하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주 5일 근무제’가 비효율적인 이유

    ‘주 5일 근무제’가 비효율적인 이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일상으로의 복귀와 함께 누군가는 벌써 ‘한 주의 끝’인 주말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 세계적으로 한 주 5일 근무, 이틀 휴식이라는 ‘주 5일 근무제’가 도입되고 있다. 물론 이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주 5일 근무제는 비효율적이라고 미국의 유력 월간지 아틀랜틱(The Atlantic)이 보도했다. 이 잡지는 ‘1주일’이 7일이라는 것은 실제로 자연적인 주기가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주 4일 근무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을 기업의 사례를 토대로 소개하고 있다. ◆ 주 5일 근무제의 기원 세계에서 ‘7일’은 하나의 주기로 파악되고 있는데, 1991년 8월 비톨트 립진스키(Witold Rybczynski)는 아틀랜틱을 통해 “자연 현상은 7일마다 발생하지 않으므로 7일 주기는 부자연스럽다”고 설명하고 있다. 1년이 365일인 것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이므로, 자연적인 주기로 파악되지만, 1주일이 7일인 것은 인공적인 주기라는 것이다. 4000년 전,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태양계에 7개의 행성이 있다고 믿어, 행성의 수 그대로 ‘7일 주’의 기원이 됐다. 이는 이집트, 그리스, 로마,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에게까지 전해져, 국가별로 7일 주가 만들어져 갔다. 또한 기원전 250년에 서구에서도 7일 주를 채용한 달력이 발견되기도 했다. 1879년에 처음으로 ‘주말’(week-end)이라는 말이 미국 학술지 ‘노츠 앤드 커리스’(Notes and Queries)에서 사용됐다. 19세기 영국의 노동자들은 오락거리가 없어 일요일에는 음주와 도박으로 보내고 있었다. 이들 노동자는 일요일 폭음으로 인한 숙취를 해소하기 위해 ‘성 월요일’(Saint Monday)을 마련하고 일을 쉬는 습관을 갖게 됐다. 하지만 월요일에 일을 쉬는 것이 곤란한 공장 소유주들이 근로자에 대해 월요일 대신 토요일에 한나절을 일하고 쉬는 제도에 합의하도록 해 성월요일은 사라졌다. 이로부터 수십 년 후에는 토요일 종일이 휴일이 됐으며, 주 5일 근무제가 탄생했다. 1908년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주 5일 근무를 제정한 공장이 등장하고 다양한 우여곡절 끝에 주 5일 근무제가 탄생하게 됐다는 것이다. ◆ 주 5일 근무제, 비효율적이라는 증거 미국 역학저널(American Journal of Epidemiology) 연구에 따르면 일주일에 55시간 일한 사람은 주 40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보다 지적 작업의 효율이 떨어진다. 또한 저자(원서명: Be Excellent at Anything)인 토니 슈워츠는 사람은 휴식 후 90분간의 폭발적인 집중을 얻을 수 있다고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를 통해 밝혔다. 이를 종합하면 노동 시간을 줄이고 휴식을 많이 두는 것이 장시간 일하는 것보다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글의 래리 페이지 CEO는 아직 자사에서 실행하지 않았지만 최근 ‘주 4일 근무제’를 권장한다고 밝혔으며, 프로젝트 관리도구인 ‘베이스캠프’(Basecamp)의 제이슨 프라이드 CEO는 직원들에게 1년의 절반은 ‘주 4일 근무, 주 32시간’이라는 근무 체계를 채택하고 있다. 프라이드 CEO는 “압축된 근무 시간 안에서 적어진 시간을 소중히 하기 위해 중요한 것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또한 영국의 공공건강단체(UK Faculty of Public Health)는 주 4일 근무제는 직원의 혈압을 저하시키고 정신 건강을 개선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주 4일 근무제가 효과적 페이스북의 사진공유 앱 ‘슬링샷’(Slingshot)은 일주일에 3일간의 연휴 제도를 도입했는데, 직원 유지 비율이 급증했다고 제이 러브 CEO는 말하고 있다. 이에 따라 웹 디자인 및 웹 개발 학습 플랫폼 ‘트리하우스’(Treehouse)가 주 4일 근무제를 도입했는데, 회사가 급성장하는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 주 4일 근무 제도를 도입하려면… 세계적으로 주 5일 근무제를 인정하므로, 대부분의 회사는 거래상의 형편 등에서 평일을 휴일로 대체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실정이다. 이에 대해 미국 휴스턴 중심으로 활동하는 컨설턴트 데이비드 스티븐스는 비즈니스 전문 소셜 네트워크인 링크드인(LinkeIn)에서 주 4일 근무제를 도입하기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 방법은 회사를 2개의 팀으로 나눠 분업제로 한다. A팀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를 할당하고 B팀은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를 할당한다. 이 근무 교대는 매주 전환되므로 매월 두 주의 주말은 실질적으로 4일 연휴가 된다. 영업 시간은 8시~17시에서 7시~18시까지로 변경해 1일의 근로 시간은 10시간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근무일의 병가도 취득하기 쉬운 환경이 되므로, 전체의 사기는 급상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직원은 ‘8시간 주 5일 근무’하는 것보다 ‘10시간 주 4일 근무’하는 새로운 근무 체계를 더 선호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포토리아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서울광장]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진경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진경호 논설위원

    역사는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임을 증명하는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모든 전쟁이 그렇고, 피를 보든 안 보든 대개의 범죄 또한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고 말한다. 28사단 포병연대의 어느 꿈 많은 청년과 마음 둘 곳 잃은 김해의 한 소녀에게 가해진 잔혹극은 그래서, 아우슈비츠 형무소와 일본 관동군 731부대에서 벌어진 참상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충격과 별개로 인간에게 늑대인 인간들의 세상에 어제도 살았고 내일도 살도록 주어진 현실을 새삼 일깨워 주기에 더 끔찍하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학살범 아돌프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한 건 악의 평범함이었다. 유대인 학살의 중심에 섰던 그는 악마가 아니었다. 저주스러울 만큼 평범했다. 체제에 순응했을 뿐이고, 그걸 충성이라 여겼을 뿐이다. 링거주사를 맞혀 가며 윤 일병을 때리고 또 때린 이 병장과 그 무리들도 빈도와 강도만 더 했을 뿐 여느 내무반의 고참들과 다를 바 없음을 지금 봇물 터진 듯 구타와 학대의 온갖 양태를 쏟아내는 곳곳의 증언들이 말해준다. 선임들에게 이유 없이 당했기에 후임들에게 이유 없이 갚았을 뿐이다. 그 가학의 대물림에 일말의 망설임은 설 땅이 없다. 조금만 허점이 보여도 떼로 달려들어 굴종을 강요하는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엄석대’들과, 그와 잠시 맞서다가도 시나브로 곁에 서고 마는 ‘한병태’들이 있을 뿐이다. 군 입대 전 이미 수년 동안 학교 교실에서 ‘빵셔틀’과 같은 지배와 굴종의 권력게임을 몸에 익히고 인터넷 게임을 통해 폭력에 무뎌진 그들, 우리의 아이들이다. 고립된 병영 막사, 그 밀폐된 공간에서 선임과 후임은 너무나도 쉽고 빠르게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치환되고, 가학과 피학의 살 떨리는 장면들을 연출해 냈다. 불과 엿새 만에 성폭력으로까지 이어지는 극도의 학대극으로 끝난 1971년 미국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을 물로 희석해 전국으로 흩어놓은 것이 지금 우리의 병영이라 한다면 지나친 과장임은 분명할지언정 그 속에 담긴 일방적 위계질서가 만들어내는 평범한 악의 본질만큼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돌아보면 윤 일병의 맞아죽음은 세월호 참사와도 뿌리가 닿아 있다. 이유 없는 죽음들 뒤에 악다구니 세상이 펼쳐져 있다. 아렌트는 악의 뿌리로 ‘사유의 결핍’을 꼽았다. 인간이 악해서 악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생각하고 반성하길 거부하기에 악한 행동을 한다고 봤다. 분명 반성하지 않는 우리, 싸울 만큼 싸워 그 어떤 고통과 비극에도 무뎌진 무감각한 이 시대 우리가 이 잔혹사 뒤에 서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며 치를 떠는 과장과, 윤 일병이 맞아 죽은 부대를 찾아 미소 띤 얼굴로 찍은 단체사진에 담긴 위선과, 세월호 참사는 교통사고이며 희생자 가족들의 울부짖음은 시체장사라는 몰인간성이 뒤섞인 공감 불능의 정치가 그 바탕일 수도 있다. 이념과 진영 논리에 갇힌 채 정치 갈등의 선봉에 서서 적의(敵意)와 증오의 기운을 퍼뜨리기 바쁜 언론도 빠뜨릴 수 없다. 오직 부의 축적만이 유일 가치인 탐욕의 자본시장과, 그에 빌붙어 알량한 권력을 편법과 비리로 바꿔치기하는 썩은 관료집단과, 깊이 있는 성찰과 학자적 양심은 제쳐둔 채 대중 입맛에 맞는 몇 마디 교언만 늘어놓고 뒤로 빠지는 비겁한 지식인 집단도 사회적 각성을 마비시킨 기제로 손색이 없다. 윤 일병의 주검 앞에서 펼쳐지는 새삼스러운 호들갑으로 이제 병사들은 휴대전화를 손에 쥘 수도 있겠다. 군 인권법이 만들어지고, 병영 감시의 눈도 늘어날 모양이다. 눈치 없는 야당 의원 말처럼 한동안 군부모들이 발 뻗고 잘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잠시뿐이란 걸 우린 지난 시절로 안다. 답을 구한다면 더 멀리 가야 한다. 증오와 저주, 그리고 그 위로 자란 폭력에 대한 집단적 불감을 털어내지 않는 한 제아무리 아이들 인성교육을 강화한들 데자뷔는 내일도 모레도 계속될 것이다. 어느 해보다 많은 눈물이 뿌려진 이 낮은 땅에 교황이 온다. 더 많이, 더 뜨겁게 울어야 할 시간이 온다. jad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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