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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꽂이]

    지도의 역사(맬컴 스완스턴·알렉산더 스완스턴 지음, 유나영 옮김, 소소의책 펴냄) 지도제작 전문가인 스완스턴 부자가 인류 문명 발전사에 획을 그은 지도 제작자 이야기를 생생하게 펼쳤다. 기원전 6세기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부터 20세기 런던 메트로폴리스까지 지도 65점이 들려주는 세계사를 담았다. 288쪽. 2만 1000원.내일의 세계(안희경 지음, 메디치 펴냄) 재미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인류 문명의 미래에 대해 지성 7명의 의견을 물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 케이트 레이워스, 다니엘 코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대니얼 마코비츠, 조한혜정, 사티시 쿠마르 등 석학들은 기후 위기와 자원 고갈,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10년 안에 생존 전략을 마련할 것과 공동체적 연대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240쪽. 1만 6000원.구독, 좋아요, 알림설정까지(정연욱 지음, 천년의상상 펴냄) 2000명 이상의 팔로어를 보유한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 325명의 인터뷰 모음집. 문화인류학 전문가의 시각에서 물질적 부와 건강한 신체, 지적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2030세대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전달한다. 294쪽. 1만 7500원.망우리공원 인물열전(정종배 지음, 지노출판 펴냄) ‘한국 근현대사의 보고’ 망우리 공원묘지에 잠든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교양사전. 오세창, 문일평, 유관순, 한용운, 김상용, 박인환, 계용묵, 조봉암 등 한국 근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독립운동가, 문인, 정치인 130여명이 포함됐다. 이들의 생애와 작품, 일화를 중심으로 시대정신을 밝혔다. 708쪽. 3만 3000원.ASEAN 주재원이 바라본 진짜 ASEAN(박성민 외 11인 지음, 박영스토리 펴냄) 동남아국가연합(ASEAN) 주재원 출신 저자들이 ASEAN 10개국의 과거와 현재, 사업 정보, 생활 팁을 한 권에 담았다. 수도 이전을 준비하는 인도네시아, 경제 성장에 여념 없는 베트남, 민주화 바람이 거센 태국 등 현황을 생생히 기록했다. 620쪽. 3만 8000원.방금 떠나온 세계(김초엽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국 과학문학상 대상을 받으며 ‘한국 문학의 미래’로 떠오른 김초엽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인지 공간’, ‘오래된 협약’ 등 SF 단편소설 7편으로 낯선 우주 저편의 이야기를 그렸다. 장애와 복제인간, 정신질환 등을 소재로 한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사회 모순에 맞선다. 324쪽. 1만 5000원.
  • NYT 부고면 절반 채운 김학순 할머니 24주기

    NYT 부고면 절반 채운 김학순 할머니 24주기

    뉴욕타임스(NYT)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증언했던 김학순 할머니의 부고 기사를 25일(현지시간)자 지면에 게재했다. 별세한 지 24년 만에 김 할머니의 삶과 진실에 대한 의지를 재조명했다. 충실한 부고 기사를 쓰기로 유명한 NYT는 1851년 이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던 인물을 재조명해 늦게나마 그들의 생애를 다시 돌아보는 취지의 기획물인 ‘간과된 여성들’(Overlooked) 시리즈에서 김 할머니를 소개했다. 앞서 2018년 3월에 유관순 열사의 삶을 다룬 적이 있는 시리즈다. NYT 부고면의 절반을 할애한 이날 기사는 1991년 8월 14일 김 할머니가 첫 기자회견을 하던 모습으로 서두를 열었다. 그날의 기자회견에 대해 NYT는 “그의 강렬한 설명은 일본의 많은 정치 지도자가 수십년 동안 부인해 오던 역사에 생생한 힘을 실었다”고 평가했다. 또 성폭력 피해자라는 수치심 때문에 침묵하던 피해 여성들이 김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보고 용기를 얻었기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추가 증언이 이어질 수 있었음을 강조했다. 김 할머니는 1997년 12월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기자회견으로 진실이 드러났던 8월 14일은 2018년부터 한국에서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 됐다는 소식도 기사는 전했다. 김 할머니를 추모하는 연구자들의 목소리도 전해졌다. 1998년 일본군 위안소 운영을 반인류 범죄로 규정한 맥두걸 전 유엔 특별보고관은 “내가 보고서에 쓴 어떤 것도 김 할머니의 30년 전 직접 증언이 미친 영향력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고 최근 고백했다. 역사학자 알렉시스 더든 미 코네티컷대 교수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김 할머니는 20세기의 가장 용감한 인물 중 하나”라고 했다.
  • 조병옥 박사 동상 철거…“그는 아우내만세운동 때 없었다”

    조병옥 박사 동상 철거…“그는 아우내만세운동 때 없었다”

    “조병옥(1894~1960) 박사는 1919년 아우내 독립만세 운동 때 미국 유학 중이었다” 충남 천안시는 지난달 8일 병천면 아우내독립만세기념공원 ‘그날의 함성’ 조형물 중 조병옥 박사 동상(청동)을 철거했다고 26일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조 박사는 아우내 만세와 무관하다”며 철거를 요구한 때문이다. 대신 시는 5000만원을 들여 그 자리에 인물을 특정할 수 없는 동상을 만들어 세웠다.그날의 함성 조형물은 2009년 10월 ‘3·1 운동 90주년’을 맞아 모 작가가 횃불을 든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1919년 4월 1일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당시 시위군중 10명을 동상으로 표현한 것으로 조 박사를 닮은 조형물은 양복 차림에 나비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시 관계자는 “작가가 유관순 열사 뒤에 만세운동을 한 일반 주민의 동상을 만들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조 박사 부친의 조형물을 넣는 과정에서 그 모습을 몰라 조 박사 사진을 보고 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면서 “동상에 조병옥 박사라고 표기하지 않았지만 관람객들이 조 박사로 알아 시민단체에서 줄기차게 철거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조 박사는 1918년 미국에 건너가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25년 귀국했다.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는 2년 전부터 “국가 권력의 폭력으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빨갱이란 이념의 잣대를 씌워 제주도를 피로 억압한 조병옥을 독립만세 기념공원에 동상으로 건립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천안시에 철거를 요구했다. 제주 4.3 사건 때 조 박사는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있었다. 이들은 이날 천안시청에서 조 박사 동상 철거 환영 기자회견을 열고 “조병옥은 ‘공’이 있지만 ‘과’도 분명하기 때문에 동상 교체 과정을 기록한 표지판을 설치해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추가로 요구했다. 이에대해 시 관계자는 “동상 교체 과정을 담은 표지판을 세울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 켜켜이 文香 쌓인 시민의 안식처… ‘공감의 공간’ 채운 시인의 온기

    켜켜이 文香 쌓인 시민의 안식처… ‘공감의 공간’ 채운 시인의 온기

    서울 남산 자락 예장동에 아담하게 들어선 ‘문학의집·서울’이 탄생 20주년을 맞았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문단의 중요한 행사와 공연과 토론의 장 역할을 했던 문학의집·서울로서는 큰 경사다. 설립 주역으로서 오랫동안 문학인들을 모으고 그들의 가교 역할을 해온 이사장 김후란 시인으로서는 소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겠다. “여럿이 생각을 모으면 이로움이 크다는 ‘집사광익’(集思廣益)이라는 말을 소중하게 생각해 봅니다. 지난 20년간 문학인들의 힘을 합쳐 우리 사회에 문화융성의 기운을 불어넣는 데 작지 않은 역할을 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영광스럽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겨울이 오면 함박눈이 쌓이는 아름다운 공간에서 김후란 이사장은 우리 문단의 궂은 일, 중요한 일, 미래 지향적인 일들을 끊임없이 구상하고 설계하고 수행해 왔다. 기념할 만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문학의집·서울, 그 꿈의 역사 1999년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이었던 김후란 시인은 국제심포지엄을 하는 동안 독일의 베를린, 본, 함부르크, 뮌헨 등에 아름다운 ‘문학의 집’이 있어서 지역 문화의 중추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울에도 그런 곳이 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는데, 당시 ‘생명의 숲 국민운동’을 주도하던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이 듣더니 매우 좋은 생각이라고 응원해 준 것이 탄생의 빛을 보게 됐다고 한다. “건물을 찾아보는데, 그때 서울시 소유의 전 안기부장 공관이 비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는 그는 “잡초로 우거져 있었지만 남산 기슭 숲에 둘러싸인 2층 대리석 집이 눈에 들어온 순간 바로 이거다 직감했다”고 떠올렸다. 문학의집·서울은 2001년 5월 7일 창립총회를 가졌고, 7월 12일 문인과 내빈들이 모여 착공식을 진행했다. 10월 26일 드디어 찬연한 개관식을 가졌다. 많은 원로 중진 문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당시 고건 서울시장과 이어령 고문의 축사로 뜻 깊은 축하를 받았다. “이날 기존의 높은 담과 대문을 과감하게 철거한 것은 시민 모두에게 이곳을 개방한다는 뜻을 함축하는 것이었습니다. 2005년에는 산림청과 유한킴벌리의 지원으로 강당도 지어서 많은 문학단체들이 소중하게 활용하게 됐지요.” 문학의집·서울은 특정 문인을 기리는 일반 문학관과는 다르게 다양한 행사를 주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민들에게 문향(文香)을 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온 셈인데, 중요한 정기 행사로는 ‘음악이 있는 문학마당’과 ‘수요문학광장’을 꼽을 수 있다. 그 외에도 문학청소년축제, 자연사랑문학제, 신작가곡음악회, 예장문학콘서트 등을 계속해 오다가 지금은 코로나19 상황으로 잠시 쉬어 가고 있다. “문학인들이 편하게 무대로 활용하고 시민 누구나 부담 없이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곳으로 이제는 정착된 것 같아요. 앞으로도 문학 행사가 연중 열리는 곳으로, 문학정신이 엄존하고 문학인들의 흔적들이 오래도록 숨쉬는 그런 문화공간으로 가꾸어 갈 꿈을 꿉니다.”●‘시인 김후란’의 탄생과 전선 취재의 경험 그는 195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우리 시단 전체에서도 보기 드문, 등단 환력(還曆)을 넘은 원로 시인인 셈이다. ‘바라춤’으로 유명한 신석초 선생의 추천이었다. 1956년에 한국일보에 기자로 입사했을 때 신석초 선생은 당시 문화부장이었다. 신석초 선생을 그는 “충청도 출신 기질 그대로 조용하고 품격 있는 분”이라고 기억한다. “부산사범대 시절 백일장에서 장원도 하고 문예반 친구들끼리 ‘푸른 꿈’이라는 합동 시집도 내보았기에 그 가운데 ‘오늘을 위한 노래’라는 작품을 정서해서 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좋은데’ 한마디하시고는 며칠 후 종이에 ‘김후란’이라고 써서 주셨어요.” 형덕(炯德)이라는 본명이 조금 무거워 필명을 하나 지었다면서 “어때요?” 하고 물으셨다고 한다. 이름 뜻을 여쭈니까 조선의 유명 시인 허난설헌의 뒤를 잇는 훌륭한 시인이 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날부터 저는 김후란이 됐어요. 선생님께서 붙여 주신 이름은 ‘후’(後) 자였지만 나중에 ‘후’(后)로 바꾸었습니다.” 김후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기둥 하나는 언론인으로서의 시간이었다. 그는 여러 언론사에서 재직하면서 국가 혹은 인류 차원의 큰 틀에서 현실을 보아 왔다. “초기 기자 생활은 조석간에 일요일도 쉬지 못하기 일쑤였어요. 다니던 대학의 복학 기회도 놓쳤지요. 나중에 사회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졸업장을 받기는 했지만요. 그러나 보람은 정말 컸습니다.” 그 가운데 그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일은 서울신문 시절 베트남 전선 종군취재를 한 달간 했던 경험이다. 프랑스 여기자 납치 사건으로 전선은 초긴장 상태였는데 당시 문공부에서 파월국군위문공연단을 파견하면서 여기자 세 명을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단장은 소설가 최정희 선생이었고 한국일보 이영희, 동아일보 박동은, 서울신문 김형덕이 참가했다. 전선은 위험해서 연예인단 순회 공연은 별도로 진행됐고, 취재단은 사이공에서 최북단 추라이까지 취재를 하면서 지냈다. 최전방 일개 소대가 있는 고지에 갈 때는 헬리콥터 두 대가 대기했는데 하나는 공격받아 사고가 나면 싣고 올 예비용이라 아무도 태우지 않는다고 해서 김형덕과 이영희만 올랐다. 기사와 사진은 매일 아침 서울로 가는 파우치편으로 전해서 신문 1면에 실리곤 했다. “한 달 만에 군용기로 귀국하면서 어떤 명목으로든 인간을 파괴하는 전쟁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뼈아프게 통감했습니다.”●정서적 교감을 주변에 번져 가게 하는 등불 김후란 시인은 60년 너머의 세월을 이어 오면서 문학의집·서울의 모토처럼 자연을 사랑하고 인간을 존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전형적 서정시의 정점을 구가해 왔다. 흔들리는 등불을 보듯이 오래도록 자신의 안에 침잠해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많았던 시인은 자신만의 밝고 따뜻한 시세계를 융융하게 쌓아 온 것이다. 평생 다양한 활동을 해온 입장에서도 일편단심 몰입했던 것은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만큼 저의 정신세계는 시인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안고 꾸준히 정진해 왔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 열정이 있었기에 문학의집·서울에서 20년이 되도록 지치지 않고 보람을 느끼며 일해 왔다고 하겠지요.” 그는 시인이야말로 개인을 초월해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하는 존재여야 한다고 믿는다. 진실 모색을 통한 정서적 교감을 주변에 번져 가게 하는 등불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인이란 삶과 생명의 소중함을 노래하는 존재이며, 활자로 시의 집을 짓고 그 집에 들어선 누구나 따듯하게 영접해 공감지대에 머물게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숲을 찾아가 치유를 하듯이 시인도 정신적 치유를 경험하도록 독자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제 감성에는 서정시가 맞는 것 같아요.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난삽한 신조어나 비속어를 시에 도입하는 것은 시의 맑은 물길을 흙탕물로 만드는 일이니까 삼갔으면 합니다.” 난해하고 서투른 언어를 인위적으로 가미하는 시편을 경계해 온 시인은 최근 한국 시의 성좌들에 대한 시집을 낸 바 있다. 제14시집 ‘그 별 우리 가슴에 빛나고’(2020)는 일제강점기를 한국 시단의 별들이 어떻게 견디며 시의 명맥을 지켜 왔는지에 대한 지극한 공경심으로 쓴 헌시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발전할 수 없다고 합니다. 후세대를 위해서도 소중한 우리 나라를 직시하고 앞으로도 올바르게 발전해 가게끔 해야지요.” 김후란 시인은 이제 우리 시단의 존경받는 원로로서 후배들에게 삶과 시의 수범 사례로 남았다. “나이에 비해 아직 심신이 건강하므로 시간을 아껴 차분히 헤쳐 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그는 안중근 의사, 김대건 신부, 유관순 열사, 신사임당, 허난설헌 등 우리 역사의 큰 인물을 존경하면서 앞으로도 역사 속 인물들을 다양하게 만나는 시인이 되고 싶다고 말을 이어 갔다. 이후로도 김후란은 자연의 아름다운 생명력을 포착하고 따뜻한 정서로 감싼 시를 우리에게 전해 줄 것이다. 생명의 율동과 함께 눈부신 사랑의 극점을 아름다운 형상으로 보여 줄 것이다. 오늘 10월 25일 문학의집·서울에서는 탄생 20주년 행사가 조촐하고도 멋지게 열린다고 한다. 그 시간을 축하하면서 앞으로 백년 역사를 써 가기를 마음 깊이 희원해 본다.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 용산 명소 ‘스탬프 투어’ 기념품 받으세요

    용산 명소 ‘스탬프 투어’ 기념품 받으세요

    “여권 들고 동네 산책하는 ‘스탬프 투어’ 떠나요!” 서울 용산구 마을자치센터가 주민들의 건강한 가을나기를 지원하기 위해 오는 18일까지 ‘용산마을 삼삼오오 스탬프 투어’를 운영한다고 11일 밝혔다. 스탬프 투어 방식은 간단하다. 참가 신청 후 투어 여권(수첩)을 수령해 원하는 방문지를 찾아 도장을 찍으면 된다. 방문지는 남이장군 사당, 당고개 순교성지, 심원정 왜명강화지처비, 용산기지 옛 미군장교숙소, 유관순 열사 추모비, 순교성지 새남터, 국립한글박물관 등 지역 명소들과 마을공동체 공모사업 현장으로 센터에서 총 29곳을 선정했다. 센터 관계자는 “여권을 보고 방문지별 운영 일정을 미리 확인하는 게 좋다”면서 “일부 시설은 관람 시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어 “스탬프 투어를 통해 우리 동네에는 어떤 명소가 있는지, 마을공동체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투어를 마치고 여권을 구 마을자치센터에 가져오면 스탬프 개수에 따라 다양한 기념품도 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참여를 원하는 이는 센터로 문의하면 된다. 접수 마감일은 15일까지다. 여권은 구 마을자치센터, 용산2가·효창·용문·한강로·한남동 주민자치회, 해방촌 도시재생지원센터, 후암동 마을공방에서 배부한다. 김경욱 센터장은 “삼삼오오 스탬프 투어를 통해 내가 사는 마을을 직접 걸으며 멋과 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마을공동체, 주민자치회 사업에도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고 말했다.
  • 유관순 열사 추모 발걸음 7년째… 용산구청장의 마지막 꽃 한 송이

    유관순 열사 추모 발걸음 7년째… 용산구청장의 마지막 꽃 한 송이

    일제 때 이태원에 묻혔다가 사라져성 구청장, 추모 사업 제안해 비 건립“후대 잊지 않도록 하는 게 우리 의무” 이봉창 역사울림관 등 역사도시 강조“눈 앞에 내려다보이는 저 땅이 미군 부대입니다. 70년 넘게 서울 용산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죠. 그 이전에는 40년간 일본군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유관순 열사 추모비 앞에서 저 땅을 보고 있으니 소회가 남다릅니다.” 성장현 서울 용산구청장이 지난달 28일 미군 기지와 남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을 찾았다. 유관순 열사 순국 제101주기를 맞아 이 공원에서 추모제를 지내기 위해서다. 성 구청장은 “매년 공원 안에 세워져 있는 유관순 열사 추모비 앞에서 기념식을 해왔는데, 오늘이 제 임기 중 마지막 추모제라 감회가 남다르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용산구가 유관순 열사 추모 사업을 시작한 건 2015년부터다. 열사의 유해가 한때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었다는 사실을 접한 성 구청장이 관련 부서에 추모 사업을 제안했다. 192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난 열사의 시신은 당시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묘지 일대가 일제강점기 때 군용기지로 전환됨에 따라 열사의 묘는 망우리 공동묘지로 옮겨졌고, 그 과정에서 실전(失傳)된 것으로 알려졌다. 구는 유족들과 상의한 뒤 2015년 옛 이태원 공동묘지 터와 용산 일대가 보이는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에 작은 추모비를 세우고 인근에는 ‘유관순길’이라는 명예 도로명도 붙였다. 2016년 식목일에는 유 열사의 천안 생가에서 가져온 흙과 소나무를 추모비 앞에 심었다. 열사가 이용했다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그 소나무에 물을 주기도 했다. 성 구청장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큰 역할을 하신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고 후대에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의무”라면서 “우리의 노력으로 열사의 넋이 조금이나마 위로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제 조만간 100만평에 달하는 미군 기지가 우리 정부에 반환돼 국가공원으로 거듭난다”면서 “그 기쁨을 열사와 함께 나누고 싶다”고 덧붙였다. 평소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성 구청장은 유관순 열사 추모비 외에도 용산이 서울의 대표 역사문화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6년 효창공원 의열사를 상시 개방한 데 이어 2019~2020년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역사문화명소 100곳을 선정해 안내판을 세웠다. 지난해에는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을 개관했고, 2022년 3월에는 용산역사박물관의 문도 새로 연다. 성 구청장은 “앞으로 용산의 역사문화시설을 두루 탐방할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 등을 운영할 계획”이라며 “역사적 인물의 순국일이 아니더라도 평소에 자연스럽게 역사적 공간을 찾아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겠다”고 강조했다.
  • “유관순 열사 덕에 자유·번영 누려”…‘순국선열 선양’ 마음 다하는 중랑

    “유관순 열사 덕에 자유·번영 누려”…‘순국선열 선양’ 마음 다하는 중랑

    류 구청장 “공동체 위해 생각하는 시간”내일까지 자율 추모·음악공연도 진행망우리공원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연말 ‘망우공간’ 만들어 교육의 場 활용“유관순 열사의 목숨을 바친 헌신이 있어서 지금의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난 28일 서울 중랑구 망우리 역사문화공원 유관순 열사 합장분묘 묘역.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류경기 중랑구청장은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 관계자, 유족 등 30여명이 참석한 유관순 열사 순국 제101주기 추모식에서 추념사를 했다. 류 구청장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추모식에 참석한 인원의 숫자는 조촐하지만, 유관순 열사에 대한 추모의 깊이는 여느 때보다 깊다”면서 “지역 공동체와 주민을 위해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목소리 높여 외쳤고,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숨진 유관순 열사가 묘지도 없이 무연고자 2만 8000명과 합장된 경위와 이유가 아직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후손인 우리가 합장 과정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헌화와 추모글을 남기고, 다 같이 ‘만세 삼창’을 했다. 지역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참여도 눈길을 끌었다. 송곡여중 국악동아리에서는 추모곡을 부르고 연주했으며 송곡여고와 혜원여고 학생은 추모글을 낭독했다. 김유나(18) 양은 추모글에서 “열여덟의 한 소녀에게 조국을 지킨다는 일이 얼마나 버거웠을지, 현재를 살아가는 열여덟의 제가 감히 해아려본다”면서 “열사님의 나이가 돼 보니 그 시절 열사님의 용기가, 또 나라를 지키겠다는 굳센 다짐이 무엇보다도 위대했다는 사실을 새삼 마음 깊숙이 새기게 된다”고 했다. 구는 다음 달 1일까지 자율 추모 기간으로 운영한다. 주민 누구나 자유롭게 상설 헌화대에서 추모할 수 있다. 인물가벽 앞에서 하루 2번 중랑아티스트의 추모 음악공연도 진행된다. 중랑구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 근현대사 격동의 시기를 살다간 많은 인물이 잠든 망우리공원을 주민과 함께 서울 대표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하고 있다. 지난해 이태원 묘지 무연분묘 합장묘역 정비사업을 통해 노인, 장애인을 위한 무장애 데크 길을 설치하고 진입로를 정비했다. 또 87개 단체 1000여명 주민이 ‘영원한 기억봉사단’이란 이름으로 망우리공원 묘역을 1대1로 결연해 직접 가꾸고 있다. 중랑구는 서울시로부터 지난해 7월 망우리공원 관리권을 이양받고 올해 7월에는 전담부서인 망우리공원과를 신설하기도 했다. 올해 말에는 망우리 공원에 지상 2층 전체 면적 1247㎡ 규모의 거점시설인 ‘중랑망우공간’이 조성된다. 이 시설에는 카페, 전망대, 홍보전시관, 교육실 등을 갖춰 미래 세대를 위한 역사 교육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 ‘유관순 순국 101주기’ 음악으로 추모하는 중랑

    ‘유관순 순국 101주기’ 음악으로 추모하는 중랑

    순국 제101주기를 맞은 유관순 열사의 추모식이 열린다. 서울 중랑구와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는 오는 28일 망우리공원 유관순 열사 분묘합장표지비 앞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정신을 기리고 희생에 감사하는 추모식을 연다고 26일 밝혔다. 이날 추모식에는 코로나19의 확산 우려로 최소 인원만 참석할 예정이다. 이후 다음달 1일까지 자율 추모 기간으로 운영한다. 유관순 열사는 형무소에서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순국했다. 같은 해 10월 14일 이화학당의 도움으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낼 수 있었다. 이후 1935~1936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 유관순 열사의 묘는 망우리 공동묘지로 옮기는 과정에서 실전됐으며 무연고자 2만 8000명 분묘 화장 때 합장됐다. 이후 오랫동안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로 불리다 2018년 9월 7일 유관순 열사 분묘합장표지비를 마련하면서 비로소 이름을 얻었다. 이번 추모 기간 중 누구나 상설 헌화대에서 비치된 국화와 함께 추모하고 메시지 보드에 메시지를 남길 수 있다. 특히 기간 내내 운영되는 중랑 아티스트들의 추모음악회가 열린다. 음악회에서는 추모와 가을이라는 주제에 맞는 클래식 및 재즈곡을 감상할 수 있다. 공연은 추모 기간 오후 3시와 5시, 2회에 걸쳐 1시간 동안 망우리공원 입구 유명 인사 인물가벽 앞에서 진행된다. 류경기 중랑구청장은 “이번 추모음악회를 통해 치열한 시대를 살다 간 열사의 고귀한 순국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전 세계 반한 ‘오징어게임’, 한국선 ‘여혐’ 논란…“불공평한 게임”

    전 세계 반한 ‘오징어게임’, 한국선 ‘여혐’ 논란…“불공평한 게임”

    지난 17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오징어 게임’이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가운데, 국내 일부 네티즌들이 여성 혐오(여혐) 논란을 제기해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지난 22일 국내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오징어 게임 왜 봄? 여혐 진짜 심하다’라는 제목의 글이 게재됐다. 글쓴이는 “생각나는 것만 정리해봤는데도 이만큼이다”라면서 “제발 안 봤으면 좋겠다. 본 거 진짜 후회 중”이라며 ‘오징어 게임’을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 11가지를 나열했다. 그는 “빚지고 노름하는 한국 남성들 때문에 엄마들이 고생한다”면서 “주인공이 전처 집까지 들어가서 윽박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충분히 폭력적이고 위협적으로 느껴진다”고 적었다. 이어 “성인 남성이 어린 여자아이 폭행하는 장면이 나온다”면서 “평등한 게임이라고 강요하지만 힘겨루기 같은 여자한테는 불공평한 게임 넣어서 팀 정할 때 여자들은 선택받지 못하는 장면 자주 나온다”고 했다. 또 글쓴이는 “죽은 여자 시체를 남성 여럿이서 강간했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사가 나온다. 여자는 죽어서도 시체를 남기면 안 된다는 걸 제대로 연출했다”면서 “여자가 자기 생식기 안에 담배를 숨겨서 게임장에 가져와 이를 꺼내는 장면을 연출했다. 굳이 그런 장면을 왜 넣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분노했다. 다른 네티즌 역시 여성 가슴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거나 발 받침대, 장식품으로 쓰는 등 여성을 도구화했다고 비판했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여혐 논란 외에도 독립운동가를 모욕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탈북자 여성 캐릭터가 독립하고 싶다고 하자 “네가 유관순이냐? 그럼 태극기나 쳐 흔들던가. 아 넌 북한 X이니까 인공기 흔들어야겠네”라는 대사가 나왔기 때문. 유관순 열사를 깎아내렸다는 지적이다. 네티즌들은 “대사 듣고 깜짝 놀랐다”, “보면서 눈을 의심했다”, “여운은 하나도 안 남는 드라마”, “더럽고 여혐 범벅이다”, “약자 혐오에 외국인 노동자, 노인 묘사도 왜곡됐다”, “이런 게 흥하고 있다는 걸 보면 우리나라 아직 갈 길이 까마득하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뭐만 하면 여혐이냐”, “그런 논리면 모든 영화 남혐이고 여혐이다”, “피곤해서 어떻게 사냐”, “검열 좀 그만해라”, “장기매매, 살인, 집단 폭행까지 하는데 성폭행은 왜 표현하면 안 되냐”, “성별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았으면” 등 작품은 작품으로만 보라고 지적했다. 한편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의문의 서바이벌에 참가한 사람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극한의 게임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담은 ‘오징어 게임’은 지난 17일 공개 이후 국내는 물론 미주, 유럽, 아시아 등 여러 국가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K콘텐츠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한국 시리즈 최초로 미국 넷플릭스 ‘오늘의 Top 10’ 전체 1위에 등극한 것은 물론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베트남 등의 동남아시아와 카타르, 오만, 에콰도르, 볼리비아에서 정상을 차지했다. 또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39개 국가에서도 상위권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 한국예총 이범헌 회장, 독도 NFT 기부캠페인 통한 작품 경매 수익금 전액, 독도 관련단체에 기부

    한국예총 이범헌 회장, 독도 NFT 기부캠페인 통한 작품 경매 수익금 전액, 독도 관련단체에 기부

    (사)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이하 한국예총) 이범헌 회장이 8월 27일, 서울 목동 대한민국예술인센터에서 기부금 전달식을 갖고 독도 NFT 기부캠페인 ‘독도는 한국 땅’을 통해서 발표한 NFT작품의 경매 수익금 6,800만원 상당(18.1ETH, 총 68,653,300원/경매종료시점 기준)을 독도수호국제연대·독도아카데미와 (사)대한민국독도협회에 전액 기부했다고 밝혔다. 지난 7월 1일부터 8월 15일까지 한국 외 다른 나라에서도 총 80만 표가 넘는 뜨거운 참여열기를 보인 ‘독도는 한국 땅’ 캠페인은 한국예총 이범헌 회장이 기부한 작품 ‘Dokdo Korea(대한민국 독도)’에 대중이 직접 투표로 선정한 ‘한국을 빛낸 영웅’ 315명과 캠페인 참여자 500명의 성명을 새겨 완성된 NFT 작품을 경매하여 수익금 전액을 독도를 위해 기부하는 캠페인이다.‘Dokdo Korea(대한민국 독도)’ 작품 하단에는 8.15 광복절을 기념하여 위대한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 매헌 윤봉길, 도마 안중근, 유관순 열사를 시작으로 올림픽 영웅인 양궁 안산, 김제덕 선수, 펜싱 오상욱, 김준호 선수, 대중이 선정한 TOP10 임영웅, 김호중, 이찬원, 영탁, 방탄소년단, 강다니엘, 유재석, 박지성 등 한국을 빛낸 영웅 315명과 캠페인에 참여한 500명, 총 815명의 성명이 캘리그라피로 새겨져 있다. 이날 전달된 기부금은 (사)대한민국독도협회를 통해 독도 교육자재 및 영상 제작 후원되어 전국 중·고등학교 및 해외 한국국제학교에 독도 교육자료로 배포될 예정이며, 독도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청소년·대학생 독도 탐방 및 교육 사업에 지원된다.국민의 뜨거운 관심과 참여속에 진행되고 국민들의 성명이 새겨진 ‘독도 작품’은 최초인 만큼 뜻 깊은 캠페인의 취지를 기념하기 위해 이범헌 회장은 기부금과 별도로 ‘Dokdo Korea(대한민국 독도)’작품의 판화를 직접 준비하여 독도수호국제연대·독도아카데미 고창근 교장과 (사)대한민국독도협회 전일재 회장에게 각각 전달했다.
  • 이범헌 한국예총 회장 ‘독도는 한국땅 캠페인’에 NFT 작품 기부

    이범헌 한국예총 회장 ‘독도는 한국땅 캠페인’에 NFT 작품 기부

    전 세계에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것을 알리고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고취하기 위해 지난 7월 1일부터 시작된 독도 수호 캠페인 ‘독도는 한국 땅’이 76주년 광복절인 8월 15일에 성황리에 막을 내리며, 사단법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예총) 이범헌 회장의 NFT 작품인 ‘Dokdo Korea’가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됐다. 엔버월드 사이트를 통해 공개된 이번 작품은 동해 바다와 독도가 반도에서 울릉도를 지나 독도로 연결된 대륙 위에 바닷물이 들어온 상태를 형상화하고 그림 우측에는 태극무늬로 장식된 의자와 함께 물방울이 늘어져 있는 모습을 연필과 색연필로 표현한 작품이다. 특히 8.15 광복절을 기념하여 위대한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 도마 안중근, 유관순 열사, 매헌 윤봉길을 시작으로 양궁의 안산, 김제덕 선수, 펜싱의 오상욱 선수 등 도쿄올림픽 스타들과 대중이 선정한 영웅인 유재석, 박지성, 이승엽 등 한국을 빛낸 영웅 315명을 비롯한 캠페인에 참여한 500명의 성명이 작품 하단에 캘리그래피로 새겨져 있다. ‘Dokdo Korea’작품은 8월 18일부터 엔버월드 사이트에서 경매가 진행되며 경매 수익금은 ‘(사)대한민국독도협회’와 ‘독도수호국제연대·독도아카데미’에 전액 기부될 예정이다. 이번 캠페인에 독도 NFT 작품을 기부한 한국예총 이범헌 회장은 “독도가 단순한 섬이 아닌, 우리 조상에게 물려받아 대대로 살아오고 있는 영토의 한 축이며, 동해를 걸쳐 대한민국이 세계로 나아가는 길잡이이자 등대라는 의미를 국민들과 전 세계인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다.”라며, “이번 캠페인에 많은 이들이 참여하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를 통해 국민들의 주권 의식을 고취시키고 나아가 앞으로도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전 세계가 모두 ‘독도’라고 부르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평소 한반도 평화와 교류를 위해 다방면으로 솔선수범하고 있는 한국예총 이범헌 회장은 지난 7월 28일 남·북 통신연락선의 복원을 환영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지난 4월에는 ‘코리아 피스펀드’(KOREA PEACE FUND)를 출범해 “남북이 함께 문화예술 콘텐츠 이용해 경제적 가치 창출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반도의 평화경제 프로세스 도입에 나서며 ‘평화경제’를 선도하는 등 문화예술읕 통한 평화와 남북교류에 전력해 왔다. 이범헌 회장은 국내·외 개인전 36회 및 단체전 1,000회 이상 전시 활동을 하였고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3회, 대한민국 서화 아트페어 최우수상, 한국예총 예술문화 공로상, 통일부 장관상, 창조문화예술대상, 2019 자랑스러운 홍익인상 등을 수상하였다. 또한 현재 (사)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사)한국미술협회 명예이사장, 중국 서안 과기대 예술대학원 객좌교수, 신한대학교 특임교수, 서울신문사 서울갤러리 운영위원장, 매일노동뉴스 고문, 민화협 공동대표, 6·15 남측위원회 공동대표로 활동하면서 예술인을 위한 다양한 정책 수립 및 예술인 복지증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전북 군산에 등장한 BTS 멤버 벽화, 누가 왜 그렸나

    전북 군산에 등장한 BTS 멤버 벽화, 누가 왜 그렸나

    전북 군산시 건물 곳곳에 그룹 방탄소년단(BTS) 멤버들의 얼굴이 새겨진 그라피티 벽화가 등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 6월 7일과 8일 뷔와 정국의 얼굴이 새만금북로 534-5번지와 월명로 449번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같은 달 11일과 28일에는 제이홉과 지민의 얼굴이 각각 해망로 146-24번지와 축동안3길 29번지에, 지난 7월 9일과 11일에는 뷔와 슈가의 모습이 각각 조촌로 163번지, 해망로 146-49번지에 등장했다. 이어 8월 6일에는 경촌안3길 49번지에 정국의 얼굴 벽화가 공개됐다. 벽화를 그린 주인공은 군산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그라피티 아티스트 이종배(43, 예명 STAZ) 작가다.이 작가는 24일 서울신문과 인터뷰에서 “BTS프로젝트는 전 세계에 한국 대중문화를 알리고 있는 BTS와 아미(ARMY)들을 위해 기획한 것”이라며 “저 또한 한국의 그라피티 아티스트로서 BTS와 아미들을 응원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일명 ‘BTS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 작가는 직접 발로 뛰며 장소 섭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장소를 선택하는 데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멤버들과의 연관성을 조금이라도 찾으려고 한 것”이며 “또 중요하게 생각한 건 벽화의 크기였다. 작게 그리기보다 크게 그리려고 애썼다”고 말했다.지난 6월 4일부터 시작된 ‘BTS 프로젝트’는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랐다. 지금까지 방탄소년단 멤버 일곱 명 중 다섯 명의 작품을 완성했다. 이 작가는 나머지 멤버 RM과 진을 9월 초까지 완성할 계획이다. 이미 장소 섭외는 끝난 상태. 이 작가는 이번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모든 경비를 자비로 충당했다. 벽화 하나 완성하는 데 평균 50여만 원이 든다. 힘들지만, 그가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건, 군산 시민들의 든든한 지원 때문이다. 이 작가는 “건물 벽을 흔쾌히 내어주시고 응원해주신 군산 시민께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더 노력해서 군산의 자랑이 되려고 한다. 많이 지켜봐주고 응원해 달라”고 당부했다.강원도 강릉이 고향인 이 작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2000년 초 부모님의 직장 탓에 군산으로 이사했다. 청소년기 시절, 비보이로 활동한 이력이 있는 그는 우연히 그라피티 매력에 빠졌다. 그의 나이 22살 때였다. 이후 그는 국내외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시작했고, 특별한 재능기부도 하고 있다. 그는 201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 70주기를 맞아 군산 월명동 한 벽면에 독립운동가(김구, 윤봉길, 안중근) 3인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또 같은 해 7월 17일 제헌절이자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미국 조지아주 워너로빈스의 한 체육관 벽면에 유관순 열사와 안중근 의사를 선보였다.이에 대해 이 작가는 “우리는 지금 아픈 역사와 함께 잊지 말아야 할 인물들(독립운동가)의 고귀한 희생으로 평화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 역사를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작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현재 소외계층, 장애인 시설 등 도움이 필요한 곳에 ‘찾아가는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라며 “저의 재능을 사회에 환원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싶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전했다.
  • [포토] 유관순 열사 추모각 방문한 이낙연

    [포토] 유관순 열사 추모각 방문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권주자인 이낙연 전 대표가 21일 오전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 열사 추모각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2021.8.21 연합뉴스
  • 망우리공원서 애국지사 기리는 한마디 적어 보세요

    망우리공원서 애국지사 기리는 한마디 적어 보세요

    ‘나라 사랑! 겨레 사랑! 애국지사와 순국선열의 숭고한 뜻을 기립니다.’ 서울 중랑구는 제76주년 광복절을 맞이해 망우리 공원에 잠들어 있는 애국지사들을 기리고자 메시지 보드를 설치했다고 15일 밝혔다. 애초 구는 광복절 당일 지역 내 독립유공자와 기념행사를 개최하려고 했으나,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에 따라 이번 메시지 보드로 대체한 것이다. 메시지 보드는 망우리 공원 내 인물전시관 앞과 구청 중랑구민광장 2곳에 설치돼 있다. 누구나 메시지 작성에 동참할 수 있으며, 오는 20일까지 이어진다. 망우리 공원은 1933년부터 1973년까지 40년 동안 공동묘지였으나 현재는 숲과 산책로, 근현대사 유명 인물들의 묘역 등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주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곳에는 3·1 운동을 주도한 한용운 선생과 함께, 오세창, 문일평, 방정환, 조봉암 등 애국지사들이 잠들어 있다. 또 유관순 열사도 이곳에 영면해 있다. 중랑구는 지난달 망우리공원과를 신설할 정도로 망우리 공원을 서울 대표 역사문화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역사문화공원의 거점 시설인 ‘중랑망우공간’을 지상 2층 전체 면적 1247㎡(377평) 규모로 올해 안에 개관할 예정이다. 류경기 중랑구청장은 “메시지보드 작성에 동참해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겨보시길 바란다”면서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해 근현대사를 이끌어간 수많은 인물이 잠들어 있는 망우리 공원을 앞으로도 잘 관리해나가겠다”고 말했다.
  • 성남문화재단, 독립운동가 100인 웹툰 카카오페이지 연재

    성남문화재단, 독립운동가 100인 웹툰 카카오페이지 연재

    경기 성남시 산하 성남문화재단은 광복절인 15일부터 카카오페이지 전용관을 통해 ‘독립운동가 100인 웹툰 프로젝트’를 연재한다고 12일 밝혔다. 독립운동가 100인 웹툰 프로젝트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2019년부터 올해까지 3년간 독립운동가 100명의 삶과 정신을 웹툰으로 그려내는 공공문화 콘텐츠 사업이다. 올해 제작하는 34개 작품 가운데 30개의 첫 회를 15일 공개한 뒤 매주 1회 연재를 진행한다.나머지 4개 작품은 연말까지 차례로 선보일 예정이다. 앞서 2019년과 2020년 제작해 다음웹툰과 EBS툰을 통해 연재 완료한 66개 작품도 카카오페이지 전용관에서 재오픈한다. 올해에는 ‘머털도사’로 유명한 이두호,‘리니지’를 그린 신일숙,대표적인 순정만화 작가인 이은혜 등 37명이 안중근,유관순,한용운 등 독립운동가 웹툰을 만들었다.독도의 거주민과 서식 동식물을 그린 작품도 포함됐다. 2019∼2020년에는 허영만,이현세,지강민 등 작가 87명이 김구,윤봉길,안창호 등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웹툰으로 그렸다. 성남문화재단 관계자는 “독립운동가와 웹툰이라는 이색적이면서도 참신한 조합이 돋보인 프로젝트가 3차 연재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며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데 있어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 그냥 지나쳤던 독립성지 이번 여름엔 꼭!

    그냥 지나쳤던 독립성지 이번 여름엔 꼭!

    서울 외곽에도 덜 알려진 독립운동의 성지들이 있다. 등산이나 피서, 하다못해 업무 때문에라도 한번쯤 지나쳤을 곳에 선열들의 공간이 숨겨져 있다.봉황각부터 찾는다. 3·1만세운동을 이끈 의암 손병희(1862∼1922) 선생이 항일독립운동을 이끌 천도교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지은 교육·수련시설이다. 1912년 세워졌으니 내년이면 꼬박 110년이 되는 건물이다. 현재는 천도교 의창수도원 건물 중 하나다. 박충남 수도원장에 따르면 당시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의암은 3만평에 이르는 땅을 800원을 주고 매입했다고 한다. 당시 ‘경성’(일제강점기 서울을 부르던 이름)의 규모로 볼 때 의암이 사들인 북한산 일대는 인가가 거의 없는 심산유곡이었을 것이다. 봉황각과 이웃한 도선사도 당시엔 도선암이란 산중 암자였다고 한다. 의암이 이처럼 외딴곳에 수련시설을 지은 이유는 자명해 보인다.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가를 길러내기 위해서다. 3·1운동을 이끈 33명의 지도자 가운데 15명이 봉황각에서 수학했고, 봉황각 출신 독립투사 483명이 나라 곳곳에서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천도교 쪽에선 한발 더 나가 ‘3·1운동의 발상지’로 추앙하는 분위기다. 봉황각 조성 당시엔 의친왕 이강(1877~1955)이 자주 의암을 찾았다고 한다. 박 원장은 “두 분이 함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항일 투쟁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벌였을 것”이라며 “봉황각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벌어진 건청궁과 비슷한 형태로 지어진 것도 의친왕의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박 원장 등 천도교 측의 주장이긴 하나, 역사학계에서 한번쯤 짚어 볼 만한 내용이 아닐까 싶다.의친왕에 대해서도 좀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의친왕은 고종과 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5남이다. 일본에서 교육받은 스무 살 아래 동생 영친왕에게 황태자 지위를 내주고, 말년에 영양실조 상태에서 죽음을 맞은 비운의 왕족으로 알려져 있다. 의친왕은 한때 주색에 빠진 파락호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한데 이는 자신에게 쏠리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조조의 장막 아래 비굴한 겁쟁이로 지냈던 삼국지 유비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광복 이후에도 쉬 바뀌지 않았던지, 그가 영양실조 등으로 죽음을 맞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의친왕이 1919년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남긴 글이 인상적이다.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임시정부에 참여해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고도 했다. 비록 중국 안동역(현 단둥역)에서 체포되며 망명 시도는 물거품이 됐지만, 이후에도 그는 일제의 일본행 제안이나 단발령을 거부하는 등 일제와 대립각을 세우며 지냈다. 봉황각은 110년 된 건물치고는 상당히 말끔한 편이다. 그동안 한국전쟁 등 변고가 많았던 걸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봉황각이란 이름은 천도교 교조 최제우가 자주 썼던 ‘봉황’이라는 단어에서 따온 것이다. 현판은 당대의 명필 위창 오세창이 썼다고 한다. 봉황각 외형은 명성황후의 침전이었던 건청궁 내 곤녕합의 구조와 흡사하다. 봉황각 조성 때 의친왕의 의견이 반영됐을 것이라는 천도교 측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듯하다. 건물 내부엔 의암 초상화와 3·1운동을 숙의하는 벽화 등이 있다. 봉황각 옆의 기와집은 의암이 실제 기거했던 공간이다. 박 원장에 따르면 의암은 이 사저에서 7년 정도 생활했다고 한다. 봉황각 바로 앞에 있는 적벽돌 건물도 무척 고풍스럽다. 1922년 지어진 천도교 중앙종리원 건물(중앙총부 본관)이다. 원래 종로에 있다가 1970년쯤 수운회관이 들어서면서 현 위치로 고스란히 옮겨 왔다. 옛 중앙총부 건물은 세계어린이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 건물이 종로에 있을 당시 의암의 사위였던 소파 방정환이 머물며 어린이 잡지를 내는 등 어린이운동을 펼쳤다. 이제 망우리 공원으로 넘어간다. 한때 서울의 대표적인 ‘공동묘지’였던 곳. 한데 잠든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결코 ‘묘지’나 ‘공원’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될, 성지 같은 곳이다. 만해 한용운 등 독립지사는 물론 시인 박인환, ‘코리안 엘비스’라 불렸던 가수 차중락, 화가 이중섭, 작가 김말봉 등의 묘가 너른 공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그중 하나가 도산 안창호의 묘터와 태허 유상규의 묘다. 둘의 사연은 몇 번을 곱씹어도 애틋한 감동을 안겨 준다. 태허는 도산의 비서다. 경성의전(현 서울대 의대) 출신의 의사였던 태허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 임시정부로 건너가 도산의 비서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에 나선다. 그러다 인재가 필요한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도산의 권고로 1924년 귀국한 그는 의사와 독립운동가의 길을 병행하다 세균에 감염돼 1936년 39세로 요절하고 만다. 둘의 사연은 2년 뒤 도산이 세상을 뜨기 전 남긴 말이 회자되며 세인의 가슴을 적셨다. “나 죽거든 내 시체를 고향에 가져가지 말고, 달리 선산 가튼 데도 쓸 생각을 말고, 서울에다 무더 주오. 공동묘지에다가. 유상규군이 눕어잇는 그겻 공동묘지에다가 무더 주오.”(당시 표기법을 따름) 도산에게 태허는 죽음 이후의 세계마저 공유하고 싶은 정신적 아들이자 동지였던 거다. 유관순(1902~1920) 열사의 무덤도 있다. 다만 단독 봉분은 아니고 합장묘 형태다. 일제가 1936년 2만 8000여기에 달하는 이태원 공동묘지의 무연고 분묘를 망우리로 이전할 때 유 열사의 유해도 함께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이태원 합장묘는 공원 초입에 있어서 찾기 쉽다. 태허의 묘와 도산의 묘비는 산자락 중턱에 있어서 20분 남짓 걸어 올라야 한다. 공원 측이 조성한 ‘사잇길’이 지름길이긴 하지만 거의 등산에 가까운 수준이다. 다소 돌더라도 완만하게 오를 수 있는 둘레길로 가길 권한다. 망우리 공원 주차장은 공사 중이다. 주변 주차장에 차를 두거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 18년 5개월 수감 생활 최장기 복역수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 18년 5개월 수감 생활 최장기 복역수

    “많은 죄수가 앉아 있을 때엔 마치 콩나물 대가리 나오듯이 되었다가 잘 때에는 한 사람은 머리를 동쪽, 한 사람은 서쪽으로 해서 모로 눕는다. 그러고도 더 누울 자리가 없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일어서고, 좌우에 한 사람씩 힘이 센 사람이 판자벽에 등을 붙이고 두 발로 먼저 누운 자의 가슴을 힘껏 민다. 그러면 누운 자들은 ‘아이고, 가슴뼈 부러진다’라고 야단이다.”(김구 ‘백범일지’) “어머니!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심훈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 열악하다 못해 인격을 말살하는 감옥 생활은 그 자체로 고문의 수단이라고 할 만큼 혹독했다. 지옥 같은 감옥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유관순, 이육사, 윤동주, 김동삼, 오동진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런 감옥 생활을 18년 5개월이나 견뎌낸 독립운동가가 정이형 선생이다. 독립운동가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옥고를 치른 사람은 일왕 암살을 기도한 박열로 22년이나 갇혀 있었는데 일본에서 재판을 받고 일본 감옥에서 복역했다. 정이형은 더 악명 높은 국내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한 최장기 복역수다.“비로소 인정풍속이 다른 만리타국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나서 장탄일호(長嘆一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나는 이렇게 쓸쓸한 곳을 급급히 찾아왔을까. 집에 있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처자들은 다 어찌 될까.”(선생의 회고록 중에서)●평북 의주 출신… 장성에서 ‘3·1운동’ 시위 선생은 1897년 9월 16일(음력) 평북 의주 월화면에서 태어났다. 김평식에게서 한학을 배웠는데 그는 복벽주의(復主義·대한제국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독립운동의 이념) 독립군 단체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했던 인물이다. 친형 정원익도 독립군에 군자금을 제공한 독립운동가였다. 형과 스승의 항일 정신을 이어받은 선생은 1919년 1월 독립운동가 김계순, 서상연을 만나 의기투합해 전남 장성으로 내려갔다. 이주 직후 3·1운동이 발발하고 장성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시위에 앞장섰다. 친형의 지원을 받아 1921년 장성 북하면에 4년제 선룡사립보통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 운동에 뛰어들었다.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된 선생은 체포돼 취조를 받았고 다행히 풀려났지만, 장성에서 더 활동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임시정부의 국내 연락 조직인 연통제에 참여해 의주 군감으로 활동하다가 1922년 11월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일경에 체포된 형 원익이 고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자 그 길로 떠난 것이다. 총을 들고 싸우고 싶었다. 선생은 관전현에 있던 대한통의부에 들어가 오동진, 김창환을 만났다. 1923년 12월 대한통의부가 군사 체제로 개편되면서 선생은 의용군 사령관 신팔균의 부관을 거쳐 이듬해 가을 의용군 제6중대 제1소대장이 됐다. 첫 임무는 부하 10여명과 봉천성 환인현에서 반(反)통의부 분자를 처단하는 일이었다.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열과 반목 속에 일어난 통합 운동으로 대한통의부는 그해 11월 10여개 독립운동 단체와 더불어 군정기관인 정의부로 확대 개편됐고 선생도 참여했다. ●조선인 밀정·친일파 처단 등 임무 수행 정의부는 정부 형태를 갖추고 서간도 한인 동포들을 통치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일본 육사 출신인 이청천이 군사위원장, 만주의 광복군 총영장을 지낸 오동진이 사령장을 맡아 군사조직을 지휘했다. 선생과 양세봉·문학빈 등 주로 평안도 출신이 중대장과 소대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1925년 3월 18일 선생은 정의부 의용군 제6중대장으로서 제8중대장 김석하, 제6중대 제3소대장 김정호 등과 압록강 건너편에 있는 일제 경찰서 습격 계획을 세웠다. 그날 자정,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선생은 부하 6명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새벽 5시쯤. 목표로 삼은 벽동경찰서 여해경찰관출장소에 접근했다. 안에는 일경 5명이 있었다. 대원들은 건물 안으로 총을 난사했다. 순식간에 니시카와 류키치와 임무, 신현택 등 순사 3명은 절명했고 일본인 순사 1명은 크게 다쳤다. 선생은 대원들과 출장소 건물을 불태우고 총기류 등 군수품을 노획했다. 1926년 3월 정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으로 부하 병사 20여명과 지린성 한인 동포들을 상대로 군자금 모금 활동도 하면서 조선인 밀정과 친일파들을 처단했다. 선생은 독립군을 정탐하는 밀정 처단을 일제와 싸우는 일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미쓰야협정’(조선 총독과 중국 측이 독립군 탄압을 목적으로 맺은 협정)으로 군사 활동이 더 어려워지자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복벽주의도 수용하면서 진보주의를 표방한 좌우합작 정당인 고려혁명당이다. “이념 없는 혁명, 이데올로기 없는 독립투쟁은 오히려 무자비한 반동밖에는 초래하지 못한다.” 고려혁명당은 이런 기치를 내세웠다. 천도교 교주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도 동참해 1926년 4월 지린성에서 고려혁명당이 출범했다. 만주를 중심으로 100여명의 당원을 확보하고 10여곳에 세포조직을 만들며 세를 키워 나갔다. 그러다 1926년 12월 중앙집행위원 이동락과 당원들이 일제에 체포돼 당의 세력이 위축되고 말았다. 선생은 하얼빈으로 이동해 조직 재건을 꾀했지만 1927년 3월 11일 동지 6명과 하얼빈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1차 공판에서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다. 하고자 하는 바를 했을 뿐이다”라고 당당히 말하고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다.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조금의 공포의 빛도 없이 태연자약하게 서 있었다. 1928년 4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서대문·마포·대전형무소를 전전하며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최시형 아들 최동희 동참해 세 키워나가 “공부하는 이상은 글자만을 배우는 것 아니요. 자기 인격을 향상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니 절대로 악습관에 감염되지 말고 오풍속(汚風俗)에 타락하지 말기를 바란다.” 1941년 당시 이화여고보 3학년에 다니던 맏딸 문경씨에게 보낸 옥중 편지에 선생은 이렇게 적었다. 여느 아버지와 다름없이 딸의 앞날을 걱정하고 올바른 품행을 당부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문경씨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선생과 같이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 이규창(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아들)과 결혼했다. 광복 후 선생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 의원으로 선임됐다. 1947년에는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률조례 제정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돼 남다른 의지를 갖고 활동했다. 일제와의 투쟁과 친일파 엄단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생각이었다.●맏딸 정문경씨 독립운동가 이규창과 결혼 “애국자들은 (조선인) 순사들에 의해 죽음에 가까운 고문과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남한 과도정부는 그런 왜놈 앞잡이와 매국노 편을 드는 듯합니다.” 선생은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편지를 보내 친일파 중용을 비난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친일파 척결 조례를 폐기하며 무시했다.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도 고려혁명당 때부터 지녀온 신념 때문이었다.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승만의 눈 밖에 난 선생은 감시 속에 서울 장교동 집에서 유폐와 같은 생활을 하다가 1956년 12월 10일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함석헌의 발자취’ 그리다…용산, 근현대 역사 기리다

    ‘함석헌의 발자취’ 그리다…용산, 근현대 역사 기리다

    가로쉼터 정비해 연혁 동판·문장비 세워 “용산서 28년 생활… 민주·인권운동 헌신함 선생 탄생 120주년, 업적 되새김 첫 발”유관순 추모비·이봉창 역사울림관까지탐방 코스로 이어 역사문화 도시로 도약“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인 고 함석헌(1901~1989) 선생은 서울 용산에서 28년간 생활하셨습니다. ‘사상계’를 집필하고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는 등 다양한 일을 진행하셨는데 이런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안타깝습니다.”성장현 서울 용산구청장이 지난달 30일 용산구 산천동 30-3번지에 있는 가로쉼터를 찾았다. 이달 완공 예정인 ‘함석헌 기념공원’의 마무리 공사를 점검하기 위해서다. 성 구청장은 “올해가 함석헌 선생이 탄생한 지 120주년이 되는 해”라면서 “이 기념공원을 시작으로 앞으로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함석헌 선생은 1956년 용산구 원효로4가 70번지 자신의 집에서 ‘사상계’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983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거처를 옮긴 뒤 1989년 사망할 때까지 민주·인권 운동에 헌신했다. 서울 용산구는 함석헌 선생의 일대기를 재조명하기 위해 산천동 가로쉼터를 정비해 기념공원으로 만들었다. 공원 전체 면적은 482㎡로 크게 함석헌 기념 공간과 어린이 놀이공간으로 구분했다. 어린이 놀이공간에는 기차 모양 놀이대, 흔들놀이말, 체력 단련 기구 등을 설치한다. 성 구청장은 “기념공원 바로 앞에 함 선생 옛 집터와 국공립어린이집이 있다”면서 “아이들과 학부모, 지역 주민들이 공원을 이용하면서 자연스럽게 함 선생의 정신을 배울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통 기와담장으로 두른 기념공원은 함석헌 선생의 사진과 연혁, 활동 내역 등을 담은 동판 등 기념 시설물이 마련돼 있다. 선생이 쓴 ‘너 자신을 혁명하라’ 글귀가 적힌 문장비를 세우고, 기존에 있었던 정자 시설을 활용해 ‘씨알의 소리’ 현판도 설치한다. 평소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성 구청장은 용산이 서울의 대표 ‘역사문화도시’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그간 관련 인프라를 꾸준히 구축해왔다. 2015년 유관순 열사 추모비를 건립한 데 이어 2019년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역사문화명소 100곳을 선정해 안내판을 세웠다. 작년에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을 개관했고, 올해는 함석헌 선생의 기념 공간을 마련했다. 올해 하반기 중에는 함석헌 선생의 옛 집터 인근에 명예 도로명도 부여할 계획이다. 성 구청장은 “지역의 역사적 공간을 잇는 탐방 코스를 개발할 예정”이라며 “내년 초 용산역사박물관이 완성되면 함석헌 선생을 비롯해 주요 역사 인물들을 기획전 형태로 주민들에게 소개해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 한국 속 지구촌의 대혁신… “용산 르네상스 시대”

    한국 속 지구촌의 대혁신… “용산 르네상스 시대”

    서울 용산구는 문화관광 인프라가 풍부한 도시다. ‘한국 속 작은 지구촌’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외국인이 찾을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공관이 몰려 있기도 하다. 또 국내 대표 박물관인 국립중앙박물관 등 9개의 박물관과 4곳의 미술관이 자리잡은 곳이다. 최근에는 전국적으로 화제를 모은 ‘이건희미술관’의 최종 건립 후보지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군이 떠난 자리에 들어설 국가 공원인 ‘용산공원’까지 조성되면 용산은 그야말로 문화와 휴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서울의 대표 도시로 변신한다. 용산이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한 것은 성장현 용산구청장의 구정 철학 덕분이다. 민선 2기에 이어 5~7기, 용산을 이끌고 있는 성 구청장은 ‘지방정부의 경쟁력은 문화관광에 있다’고 늘 강조해 왔다. 12일 성 구청장에게 ‘용산이 꿈꾸는 문화도시’ 비전에 대해 들었다. -지난 4월 용산구 한강로3가 일대 57만㎡가 중소벤처기업부 지역특화발전특구로 신규 지정됐다. “특구 명칭은 ‘용산 역사문화 르네상스 특구’다. 2024년까지 510억원을 투입한다. 특구 지정을 계기로 역사문화 르네상스 사업을 본격화하려고 한다. 주요 4대 특화 사업으로 ▲도심 역사 거점 구축 ▲삶 속에 스며드는 역사문화 ▲역사문화 콘텐츠 확장·연계 ▲역사문화 일자리 발굴 등을 추진한다. 구는 우선 용산역사박물관(한강대로14길 35-29) 등 도심에 역사 거점을 구축하는 데 행정력을 집중할 예정이다. 용산역사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 등 관련 시설을 묶은 투어 프로그램도 만들 계획이다. 또 역사문화 전문 해설사와 역사박물관 청년 인턴, 한국 전통 공예품 홍보·판매 인력 등 관련 일자리도 430여개 마련할 계획이다. 문화 관련 서비스업을 다수 창출하고 외부 투자를 활성화해 지속적인 경제 선순환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겠다.” -역사문화 르네상스 특구로 지정되기까지 자체적으로 문화 역사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투자를 해 왔는데. “우선 2015년 유관순 열사 추모비를 건립했고, 2018년에는 용산공예관을, 작년에는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의 문을 열었다. 특히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는 용산공예관은 개인적으로 관심을 많이 기울인 공간이다. 이태원과 한남동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지역 상권을 활성화하기 위해 마련한 문화복합시설이다. 전국의 우수 명장과 젊은 공예가들의 작품을 전시·판매하고, 공예가들과 강좌를 듣는 수강생들을 위한 창작 공간도 운영한다. 더불어 전통 공예 방법을 전수하는 것에서부터 판매하는 것까지 지역 어르신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일자리도 제공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을 인정받아 용산이 역사문화 르네상스 특구로 지정됐다고 본다. 향후 지역에 있는 박물관 인프라를 연계해 ‘박물관 도시’로서의 도시 브랜드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현재 용산역사박물관도 한창 준비 중인 것으로 안다. “등록문화재 제428호인 옛 용산철도병원 건물 내부 일부를 개·보수해 지역사 박물관으로 용도를 바꿨다. 내년 상반기에 개관할 예정이다. 구민들의 참여와 관심 속에 용산 환삼주조장 백자 술동이, 경성 용산시가도 등 유물 3000여점을 이미 확보한 상태다. 시설을 개관하기 전까지 매입, 기증, 복사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추가 자료를 확보해 나가겠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에 이어 용산역사박물관까지 서빙고로 일대에 ‘박물관 클러스터’를 만들 계획이다. 용산역사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국제빌딩4구역에서는 서울시에서 규모가 가장 큰 청년 커뮤니티 공간인 ‘청년지음’과 청년창업지원센터 등 구민 편의시설이 이미 문을 열고 운영하고 있다. 박물관이 조성되면 미래 세대에게 지역에 대한 관심을 환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역사문화 르네상스 특구와의 시너지 효과를 위해 남은 임기 동안 용산역사박물관 건립에 주력할 계획이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이건희미술관’ 건립 후보지로 용산과 송현동을 꼽았다. “구는 지난 5월 문체부에 이건희미술관 용산 유치를 제안했다. 용산가족공원 내 문체부 소유 부지를 활용하는 방안도 함께 제출했다. 용산은 국내외 관람객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면서 한국의 문화 부흥을 꿈꾼 고인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과 역사문화 르네상스 특구, 이태원 관광 특구를 찾은 관광객들이 함께 방문해 즐길 수 있도록 이건희미술관이 용산에 자리잡는 것이 좋다고 본다. 향후 미술관이 들어서면 ‘국립중앙박물관(고미술)~이건희미술관(근대미술)~삼성미술관 리움(현대미술)’로 이어지는 ‘이건희 컬렉션 투어 프로그램’도 개설해 운영할 예정이다. 향후 남북 철길이 연결되면 용산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은 더욱 급증할 것이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미술관을 만들어야 한다. 이건희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용산공원 일대를 묶어 대한민국 대표 문화관광 벨트로 가꿔 나가겠다.” -용산미군기지 일부에 최초의 국가 공원인 용산공원이 생긴다. “지난해 임오군란 이후 138년 만에 용산미군기지 일부가 실질적으로 반환됐다. 미군기지가 용산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던 만큼 감회가 새롭다. 이곳이 최초의 국가공원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단순히 공원을 조성하는 것을 넘어 공간적 주권 회복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와 함께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본다. 용산구가 관할 자치구로서 온전한 용산공원을 조성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공원 내 잔류시설을 이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인지 설명해 달라. “서울 광화문에 있는 주한미국대사관이 용산기지의 북쪽 캠프코이너 부지로 이전하는데 미대사관 측은 현재 용산기지 남쪽 사우스포스트 구역에 있는 직원 숙소도 함께 옮길 계획이었다. 이렇게 되면 향후 용산기지에 조성되는 용산공원 북측 통로가 막혀 주민들이 불편할뿐더러 국가공원으로서의 의미 또한 반감된다. 직원 숙소를 공원 밖으로 이전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 끝에 미대사관, 서울시와 협의해 한강로3가에 있는 아세아아파트 부지를 대안으로 제안했다. 2018년 서울시에 이를 공식 제안했고, 이후 미대사관 직원 숙소 이전이 공식화됐다. 남영·후암동과 이어지는 용산공원 북측 통행로 3만㎡를 추가로 확보한 만큼 앞으로 온전한 공원을 조성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와 더불어 이제는 용산기지 중심에 있는 드래곤힐호텔을 이전할 때까지 우리의 목소리를 높여 나갈 것이다. 용산공원이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공원으로 조성되도록 용산구의 몫을 제대로 해 나가겠다.”-민선 7기를 돌아볼 때 성과로 꼽고 싶은 것이 있다면. “상대적으로 국가적 지원이 부족한 청년·장애인 복지 정책을 강화했다. 2019년 용산구 청년 기본 조례를 제정한 이후 청년정책자문단(215명)도 구성·운영했다. 올해는 기존 자문단을 청년 정책 네트워크로 변경했다. 지난달 발대식을 열었는데 일자리, 문화예술, 복지, 제도 등 각 분야에 걸쳐 청년 정책을 함께 논의할 예정이다. 또 청년들을 위한 110억원 규모의 일자리 기금을 조성해 일자리 사업에 투입한다. 관내에 있는 7개 장애인 단체가 참여하는 장애인복지단체협의회를 구성한 것도 성과다. 옛 창업지원센터를 리모델링해 지난해 11월 장애인커뮤니티센터도 준공했다. 앞으로 발달장애인 평생교육센터와 장애인 작업장 등 장애인 시설도 곧 확충할 예정이다.”
  • 15만 회원 안에 ‘의병 DNA’… 외교부엔 청년대사 왜 없나

    15만 회원 안에 ‘의병 DNA’… 외교부엔 청년대사 왜 없나

    “최근 일주일 사이 정치권 쪽에서 제안이 많이 왔는데 모두 거절했습니다.” 우리 역사·문화를 바로 알리는 데 매진해 온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 박기태(47) 단장은 “정치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제가 잘할 수 있는 건 교육”이라면서 “예전에도 제안이 올 때마다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못다 한 일이 있다”면서 “인생 2막은 청소년, 청년뿐 아니라 국민 모두가 각자의 영역에서 한국을 빛낼 수 있게 ‘국민외교 아카데미’(가칭)와 같은 혁신적인 교육 기관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꿈을 내비쳤다. 1999년 야간 대학을 다니다가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한국 바로 알리기’ 운동에 나선 청년 박기태. 당시 25세였던 그는 2년 뒤 사무실을 차리고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반크 회원 수는 외국인 3만 5000여명을 포함해 총 15만명이다. 이 중 한 달간 교육·활동에 참여한 사람은 5만명에 달한다. 이들은 외교관도, 역사가도 아니지만 한국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찾아내고 시정하는 데 앞장선다. 지난 23일 서울 성북구 보문동 반크 사무실에서 만난 박 단장은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반크 회원들을 향해 “기적 같은 일”이라면서 “의병·독립운동가 DNA가 우리 안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짜뉴스·관영매체 비판… 중일 견제 심해 -반크 하면 독도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독도가 주는 교훈은 이 땅을 다시는 뺏기지 말자는 것이다.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가 못다 한 꿈을 이 시대가 이뤄야 하는 상징과도 같다. 일본은 독도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독도를 바라보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도쿄올림픽 홈페이지 지도에서 독도는 확대를 해야 겨우 보인다. 독도 사랑을 크기로 잰다면 그들에겐 1㎜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독도는 한반도 5000년 역사 전체다.” -20년 전에 비해 뭐가 가장 달라졌나. “감당할 수 없는 더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매일 먹는 김치를 뺏어 가려고 하지 않나. 그래도 다행인 점은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등 한류 열풍으로 한국을 홍보하기에 좋은 시기라는 점이다. 20년 전에는 일본, 중국에 상대가 안 되는 무명배우에 불과했던 한국이 이제는 해외에서 더 알아주는 스타가 됐다.” -일본·중국의 견제도 만만찮을 것 같다. “일본의 일부 매체, 유튜버들은 반크 뒤에 한국 정부가 있다는 프레임을 씌우려고 한다. 심지어 반크 직원이 100명, 예산이 200억원에 달한다는 가짜뉴스도 올라왔다. 지난 2월 중국 관영매체도 반크를 직접 거론하고 비판했다. 우리 명성에 해를 끼치려는 것 같아서 최대한 반크의 실체를 보여 주려고 한다. 상주 직원 5명에 1년 예산으로 5억원을 쓴다고. 일본 언론에서 취재를 하러 사무실에 오면 ‘여기에 공무원이 있는 것 같냐’고 묻는다.” -화가 날 때도 있을 것 같다. “청소년들을 꼬셔서 선전용으로 이용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흥분을 안 할 수가 있겠나. 우리가 무슨 최면이라도 걸었다는 건가. 그들 사고방식으로는 오늘날 반크의 활동을 이해할 수 없는 거다. 국가가 무기를 주지 않아도 목숨 걸고 싸운 의병의 역사, 독립운동의 역사를 이해 못하면 반크가 걸어온 길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제보의 힘도 클 것 같다. “한 달 전에 프랑스에서 유학 중인 한국인 학생이 넷플릭스로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프랑스어 자막에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사실을 발견하고 제보를 한 적이 있다. 우리는 곧바로 넷플릭스 측에 문제제기를 했고, 4시간 만에 일본해 표기가 동해 단독 표기로 수정됐다. 어떤 건 하루 만에 시정되거나 1년이 걸릴 때도 있다.” -오류 시정을 넘어 등재 쪽으로 활동 범위가 넓어졌다. “제가 그동안 잘못된 걸 고치는 역할을 했다면 지금 반크 청년들은 우리 역사·문화 유산을 일본, 중국이 빼앗아 가기 전에 올바로 등재시키는 일을 한다. 최근 영국의 유명 사전인 콜린스에 ‘한복’(Hanbok)을 등재시키고 한국의 전통 의상이라는 점을 확실히 했다. 제가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직지)을 콜린스에 등재시키려고 1년 내내 노력해도 안 됐는데 우리 직원이 한 달 만에 해냈다. 새로운 길이 뚫린 셈이다. 이제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민원 넣듯 ‘고쳐라’ 항의… 외교부 소속 아냐 -반크가 유명해지면서 힘든 점은. “100명 중 1명은 우리를 외교부 소속으로 안다. 민원 넣듯이 ‘이건 왜 안 고치냐’, ‘왜 이렇게 빨리 시정이 안 되느냐’고 항의를 해 온다. 한편으로는 ‘시정하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나’라고 생각되면서도 ‘그만큼 우리를 믿고 의지하는구나’라고 새삼 깨닫게 될 때가 있다.” -반크에 대한 기대에 맞게 몸집도 키워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작은 조직을 꿈꾼다. 반크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와야만 활동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만든 홍보물이 100여개가 있는데 이걸 외국인들한테 보여 줄 수도 있는 거다. 최근에 반크에 대한 기사가 올라오면 댓글에 ‘반크 후원하자’는 반응이 많은데, 그것보다는 ‘나도 한 번 해 볼까’라고 도전을 받았으면 좋겠다. 후원보다는 참여가 필요한 때다.” -외국인들에게 우리 것만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이다. 외국인과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 역사·문화를 알리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한국을 홍보할 수는 없다. 잘못하면 국수주의가 된다. 반크에서는 제국주의 피해를 입은 아시아·남미·아프리카 국가들의 찬란한 역사·문화를 대신 홍보해 주기도 한다. 이들 국가의 역사·문화 수준이 서구에 비해 낮지 않다는 점을 정보기술(IT) 강국인 한국이 대신 알리는 것이다.” ●국수주의 경계… 후원 보다 필요한 건 참여 -자녀들도 반크 회원인가. “가입은 했는데 교육 이수를 하지 않아 ‘반크 대사’가 되진 못했다. 아빠 강의가 재미없다고 한다. 그때 알게 됐다. 제가 강연을 다니면 늘 200~300명의 청소년들이 모여 있고 관심을 보여서 이런 친구들이 태반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자기 시간을 투자하고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반크 청년들을 보면서 겸손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반크 청년들을 ‘겨자씨’에 빗대기도 한다. “하찮고 작은 씨앗이지만 좋은 땅에 심고 물과 거름을 주면 나무가 되고 새가 깃들이는 숲이 된다. 반크 청년을 통해 한반도가 희망의 숲이 되는 게 제 바람이다. 이 청년들은 마음만큼은 공무원 이상으로 한국을 대표해 활동한다. 다윗과 골리앗처럼 일본·중국을 상대로 맞짱을 뜨는 이들 덕분에 반크가 이만큼 왔다.” -반크 청년들은 외교관 못지않은 것 같다. “지금 사이버상에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 열리고 있는데 외교부에는 사이버를 관할하는 대사가 없다. 언제까지 20세기형 직제에 머물러 있어야 하나. 외교부에 청년대사·디지털대사를 정식 직책 중 하나로 만들어 청년을 앉히면 청년 눈높이에 맞는 대응이 이뤄질 수 있다. 청와대가 20대 청년비서관을 임명한 것처럼 외교부도 못할 것 없다고 본다. 이 분야는 우리가 가장 앞서가야 하지 않겠나.” -얼마 전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반크를 찾았다. 정치권·정부와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 보나. “반크의 정체성·독립성이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가 ‘키’를 쥐면 된다. 대권주자든 국회의원이든 배우러 온다고 하면 국민 세금인 예산을 똑바로 쓸 수 있게 알려 줘야 한다. 막상 들어보면 내용도 별 것 없는 국제 콘퍼런스에 수억원의 예산을 쓰는 것보다는 한국을 알리는 홍보물을 만들어 배포하는 게 낫지 않겠나.” -기업들이 후원하겠다고 하나. “반크 활동에 도움이 되는 후원은 받지만 많지 않다. 일부 기업은 반크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고 한다. 자기네 기업을 노출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후원하는 건 다 거절했다.” -반크 이후의 삶도 그리고 있나. “‘미네르바 스쿨’처럼 캠퍼스는 없지만 가상의 국민외교대학을 세우고, ‘동북아 평화게스트하우스’도 짓는 꿈을 꾼다. 일본인, 중국인들에게는 반값만 받을 생각이다. 그동안 일본, 중국과 싸우는 데 에너지를 썼다면 앞으로는 한중일 청년이 모여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이룰 수 있는 네트워크를 만들어 보고 싶다. 지금 하는 일도 그날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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