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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 “항일운동가 베델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니 자랑스럽다”

    [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 “항일운동가 베델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니 자랑스럽다”

    “베델 역사 몰랐다는 게 조금 부끄러워 생가라는 사실 알고 독립활동 공부해” 외관은 1860년대 원형 완벽하게 보존 보훈처, 수집된 자료 통해 막바지 고증 확인되면 국외 현충시설 지정해 관리“베델의 생가가 제 집이란 소식을 접하고 베델의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브리스틀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훌륭한 일을 하신 분이 있었다는 걸 몰랐다는 게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항일언론운동을 펼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의 생가 현 주인인 아서 쿡(71)은 지난 20일(현지시간) 영국 브리스틀에 위치한 자택이 베델의 생가였다는 사실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항일운동가 베델이 우리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게 자랑스럽다”고 했다. 브리스틀은 런던에서 서쪽으로 190㎞ 떨어진 항구도시다. 베델 생가는 쿡과 부인 조(70)가 1999년부터 관리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8월 서울신문의 취재<2018년 8월 10일 27면>로 자신의 집이 베델 생가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안 뒤 도서관을 다니며 베델의 독립활동을 공부했다고 전했다. 베델의 생가가 위치한 ‘에저턴 로드’(Egerton Road)는 산업혁명으로 브리스틀에 공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늘자 조성됐다. 해당 주택은 1860년대 건축됐다. 현지에서 확인한 주택의 외관은 건축 당시 원형이 대부분 그대로 보존됐다. 단독주택 2개를 붙여서 지은 ‘이호연립주택’(semidetached house)으로 2층 집이었다. 현재도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택 형태다. 1800년대 후반에는 주로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 거주했다.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외관과 달리 내부는 거주를 위해 수차례 리모델링을 했기 때문에 당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건축 당시 있었던 벽난로 등은 사라졌고 주택 확장 공사로 출입문의 위치도 바뀌었다.보훈처 관계자들은 이날 베델의 생가를 고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쿡이 보관하고 있던 지번 부여 안내서, 마을이 들어설 당시의 지적도 등을 확인했다. 지번 부여 안내서에는 1900년대 초 브리스틀시에서 지번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베델의 생가도 이때 ‘54’라는 지번을 받았다. 또 브리스틀시 기록보관소(아카이브)를 찾아 당시 인구실태조사 자료 등을 확인했다.보훈처는 이번 1차 현장 점검 결과, 베델의 생가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후속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과거 정진석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는 현지에서 찾은 ‘브리스틀 인명록’(1872년판)을 통해 베델의 출생지 주소(Egerton villa, Egerton Road, Horfield)를 특정한 바 있다. 하지만 현재 영국 주소 체계와 달라 생가를 직접 찾아가지는 못했다. 이후 지난 8월 서울신문이 브리스틀시 공무원의 도움으로 베델이 1872년 태어난 주택(54 Egerton Road, Bishopston, Bristol)을 찾았다. 보훈처는 향후 베델의 생가임을 완전히 확인하면 향후 이곳을 국외 현충 시설로 지정해 관리하는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다. 현재 영국에 있는 국외 현충 시설은 이한응 열사의 순국지 등 총 네 곳으로 베델의 생가가 지정되면 다섯 번째가 된다. 유럽의 항일운동 역사 유적지는 희귀한 데다 항일언론운동의 주축이었던 베델이 태어난 곳을 기념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게 보훈처의 설명이다. 현충 시설로 지정되면 ‘독립유공자의 생가’를 표시하는 안내판을 부착하고 더 나아가 정부가 매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정 교수도 “(베델 생가의 현충 시설 지정은) 환영할 일”이라며 “향후 시설을 어떻게 관리할지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생가의 현재 주인인 쿡은 “나도 지역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쳤기 때문에 역사에 관심이 많다”며 “베델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했지만 크게 본다면 그의 일생이 영국이나 일본 등 당시 만연하던 제국주의에 어떤 의미를 전달하지 않았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브리스틀에 많은 한국인 유학생이 있는데 이들에게도 큰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의 역사를 영국 사람에게 제대로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감회를 전했다. 브리스틀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캠페인 성금 주요 기부자 명단 총 모금액 4112만 702원(최종) ▲개인 이상우 외 203명 ▲단체 대한국인, 스타키 그룹, 복주요양병원, 대구금오회, 광주제일고 등
  • 영국인들은 왜 8900㎞ 건너와 한국 도왔을까

    영국인들은 왜 8900㎞ 건너와 한국 도왔을까

    쇼, 자신의 배로 독립운동가·무기 운송 매켄지 ‘을사늑약 무효 밀서’ 지면 게재 “한국인 독립정신에 감동받아 진실 알려”국가보훈처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한민족의 항일의식을 높이는데 기여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의 생가를 보훈시설로 지정하는 작업에 착수하면서 영국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8900㎞ 떨어진 동양의 나라까지 왔던 영국인들은 처음에는 일본과 더 가까웠지만 한국인의 독립정신에 감화돼 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서게 된 경우가 많았다. 한철호 동국대 역사학과 교수는 26일 “당시 국력이 셌던 영국인들은 동양에 많이 왔고 사실 일본과 가까웠다”며 “하지만 우리나라의 실상을 접한 결과, 한국인의 독립심을 동경하거나 일제강점을 인류보편적 가치에 비추어 옳지 않다고 본 이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인정한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총 70명이다. 이 중 영국인은 6명으로 한국 독립운동의 해외 기지였던 중국(33명)과 미국(21명)에 이어 세 번째다. 베델은 1872년 영국 브리스틀에서 태어나 1888년부터 일본에서 사업을 했다. 하지만 실패했고 형제간 불화가 겹치며 1904년 영국 데일리크로니클 내한 통신원으로 한국(대한제국)에 왔다. 같은 해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했고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고종 황제의 밀서를 보도했다. 1909년 일본의 추방 소송에 대응하던 중 건강이 악화돼 사망했다. 당시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업가 조지 루이스 쇼는 중국 단둥에서 운영하던 무역회사 이륭양행 안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사무국을 설치토록 했다. 또 자신의 배로 한국인 독립운동가, 무기, 출판물, 자금 등을 운송했다. 1920년 7월 일제에 의해 체포돼 내란죄로 기소됐고 4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보석으로 석방됐지만 멈추지 않았다. 쇼는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한국의 독립운동에 더 쉽게 공감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는 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로 일어난 정미의병의 사진, 베델의 재판 사진 등을 통해 일제침략을 고발했다. 영국 트리뷴지의 특별통신원이던 더글러스 스토리는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려 건넨 밀서를 지면에 게재했다. 대한매일신보의 보도는 이 내용을 전재한 것이다. 미국 정부의 한국임시정부 승인을 지원한 프레더릭 브라운 해리스 목사, 제주 서홍천주교회 신부로 재직하며 신도들에게 항일 교육을 하다 2년간 징역을 살았던 어거스틴 스워니도 영국인이다. 한편 영국 런던의 서리 공사였던 이한응 선생은 1905년 일제에 의해 한국공사관이 폐쇄되자 유서를 남긴 채 음독으로 순국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당시 순국한 외교관은 이한응 선생 혼자였다”며 “그가 근무하던 런던 얼스코트의 주영 한국공사관 건물은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환경부, 경유차 폐차 후 LPG트럭 구입자에 최고 565만원 보조금 준다

    노후 경유차를 폐차하고 액화석유가스(LPG) 1t 트럭을 새로 구매하면 정부가 최대 565만원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환경부는 26일부터 다음달 18일까지 LPG 1t 트럭 전환사업 사전 신청자를 모집한다고 25일 밝혔다. 신청 대상자는 자동차 배출가스 등급 산정에 관한 규정에 따라 배출가스 5등급을 받은 경유 자동차를 소유한 개인 또는 기관이다. 신청 수요가 많으면 저소득층·장애인·국가유공자 등 취약계층을 우선 선발한다. 환경부는 신청 수요가 내년 예산 범위(38억원·950대)를 넘으면 합법적인 예산 조정 등을 통해 물량을 더 많이 확보할 계획이다. 또 사단법인 LPG협회를 통해 추가 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안도 협의하고 있다. 환경부는 LPG 1t 트럭 사전 신청을 정식 접수한 신청자에 한해 비상저감조치 위반 과태료 처분을 미루는 방안을 서울시와 경기도, 인천시와 협의 중이다. 신청이 완료된 시점부터 차량을 폐차할 때까지 과태료 처분을 미루고 폐차가 확인되면 과태료 처분을 최종적으로 면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보조금을 신청했지만 별다른 이유 없이 기존 차량을 폐차하지 않고 계속 운행하는 차량 소유자가 허위로 신청했다고 판단되면 과태료를 바로 부과한다.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독립군 탄압 거점 부산경찰서 폭파… 의열단 거사 1호 ‘부산의 윤봉길’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독립군 탄압 거점 부산경찰서 폭파… 의열단 거사 1호 ‘부산의 윤봉길’

    “왜놈 손에 사형당하기 싫어 단식하고 있으니 도로 가져가게.” 1921년 5월 5일 대구감옥으로 면회 온 친구 최천택이 가져온 달걀꾸러미를 건네자 박재혁 의사(義士)는 이렇게 말했다. 엿새 후인 5월 11일 오전 11시 20분 박 의사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식음을 전폐한 지 열이틀째, 사형 집행 사흘 전이었다. 며칠 후 의사의 시신은 부산진역에 도착했다. 박 의사의 노모와 친구들, 수많은 시민이 역 앞에 몰려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천만뜻밖에 이 지경이 되니 하늘이 무너진 듯합니다.” 노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최초로 의열단 거사를 성공으로 이끈 주인공이자 ‘부산의 윤봉길’로 불릴 만한 박 의사가 순국한 지 97년이 흘렀다.취재차 찾은 부산 날씨는 바람이 심하게 불어 체감온도가 영하 10도쯤 됐다. 서봉수 박재혁 의사 기념사업회장 겸 삼일동지회중앙회장을 만나 박 의사의 생애와 기념사업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삼일동지회는 해마다 박 의사 추모제를 여는 등 기념사업을 주관하고 있다. 박 의사는 직계 후손이 없다. 박 의사 여동생 명진의 손녀인 김경은(53)씨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인데 업적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아 가슴 아프다”고 말문을 떼었다.●정부·지자체 관심 부족… 담당자도 박재혁 몰라 김씨와 서 회장은 인터뷰 내내 독립유공자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정부와 지자체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실제로 고위층은 물론 현지 담당자 중에도 박재혁이 누군지 모르는 이가 있다고 했다. 10억원 가까운 예산을 들여 조성했다는 ‘박재혁 거리’를 찾아가 보니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박 의사는 1895년 5월 17일 부산 동구 범일동 183번지에서 가난한 선비 박희선과 어머니 이치수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생가 복원은 고사하고 아직 출생지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범일동 550번지라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550번지는 1919년 이사해서 가족이 살았던 집으로 보인다. 현재 ‘183번지’는 공용 주차장이 돼 있고 ‘550번지’에는 민가가 있다. 박 의사는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여동생 명진과 어렵게 살았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었다. 교육열 높은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의사는 1915년 부산공립상업학교(부산상고, 현 개성고)를 4회로 졸업했다. 박 의사와 동급생 최천택, 오택(오재영)은 친형제보다 가깝게 지낸 ‘삼총사’였다. 의형제를 맺고 부모상을 당하면 같이 상주 노릇을 하자고 다짐할 정도였다. 최천택이 남긴 글에 따르면 “박재혁, 김인태, 김병태, 김영주, 장지형(장건상 조카), 오택 등 친구들과 매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전도를 모의하였다”고 한다.●고서적상으로 위장… 서장실 들어가 폭탄 던져 2학년 때인 1913년 박 의사와 최천택 등은 일제가 금서로 규정한 ‘동국역사’를 여러 학교와 학우들에게 몰래 나눠주다 발각됐다. 구한말 역사가인 현채가 지은 우리 역사교과서였다. 이때부터 박 의사는 요주의 인물로 찍혀 일경의 감시를 받게 된다. 3학년이 된 박 의사는 최천택 등 16명과 ‘구세단’을 결성, 지역 청년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탄로 나 1주일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았다. 구세단은 1915년을 전후해 경남 밀양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이 결성한 ‘일합사’와 교류했다. 이는 나중에 박 의사가 의열단에 가입하는 계기가 됐다. 박 의사는 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과 싱가포르를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고 항일 의지를 불태웠다. 1920년 초 박 의사는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김원봉은 “부산경찰서장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는 의열단원 다수를 체포한 악질 경찰로 경남북 경무부 관내 수석 서장인 거물이었다. 박 의사는 김원봉에게서 거사 자금 300원과 여비 50원, 러시아제 원통형 폭탄 한 개를 받아 중국 상하이를 떠났다. ●“모든 책임 진다” 편지 붓대롱에 넣어 친구에 박 의사는 감시가 심한 관부연락선을 타려던 계획을 바꿔 대마도를 거쳐 부산항에 잠입했다. 선생은 상하이 동지들에게 ‘熱落仙他地末古 大馬渡路徐看多’(열락선 타지 말고 대마도로 간다)고 적은 엽서를 보냈다. 검열을 피하려고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부산에 들어온 날은 1920년 9월 6일이었다. 폭탄은 친구 오택의 집에 숨기고 “총독부를 폭파할 것”이라고 거짓으로 얘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경은 오택을 찾아와 박 의사의 입국 경위를 캐물었다. 의사는 더 지체할 수 없었다. 폭탄을 숨겨둔 오택의 집으로 갔다. 오택은 유고집에서 이렇게 썼다. “박형이 시간이 절박하다며 맡겨둔 물건을 내어달라고 독촉했다. 나는 암실에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고 나왔다.” 박 의사는 가족을 부탁하면서 붙잡히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홀로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박 의사가 중국 고서적상을 가장해 용두산공원 아래 부산경찰서에 도착한 것은 9월 14일 오후 2시 30분쯤이었다. 폭탄을 숨긴 짐꾸러미를 들고서였다. 최천택은 용두산공원에서 망을 보았다고 한다. 고서적상으로 위장한 것은 하시모토가 중국 고서적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박 의사는 서장실로 들어가 서장이 몸을 돌리는 순간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라며 준엄하게 꾸짖고는 폭탄을 던졌다. “꽝” 하고 폭탄이 터졌다. 폭탄은 1층 유리창과 책상을 부수고 천장을 관통할 만큼 강력했다. 하시모토는 중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의사도 오른쪽 무릎을 심하게 다쳤다.●“일본 관광객 보기 안 좋다”… 표지석도 안 세워 다친 박 의사는 현장에서 검거됐다. 투탄 후 경남 전역에 비상령이 내려졌다. 일경은 경찰서 주변을 지나던 행인 등 수십 명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들였다. 어머니와 여동생도 잡혀와 심문을 받았다. 최천택 등 친구들도 붙잡혔다. 오택은 폭탄을 숨겨준 혐의로 1년 동안 수감됐다. 응급처치를 받은 박 의사는 공범을 불라는 일경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단독범행임을 고집했다. 박 의사는 부립병원 간호원을 통해 유치장에 갇힌 최천택에게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짧은 편지를 붓대롱에 넣어 전달했다고 한다. 망을 보았던 최천택(1897~1962·건국훈장 애족장)은 모진 고문을 받아 의식을 잃은 채 풀려났다. 치안 조직의 핵심인 경찰서장실에 폭탄을 던진 박 의사의 의거는 일본 본토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일본 신문들은 “일선(日鮮) 동화를 단념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썼다. 박 의사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2심에서 사형으로 형량이 높아졌고 경성고법 상고심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사형이 선고되자 선생의 홀어머니와 누이동생은 대성통곡했다. 방청객 모두 따라 울었다. 폭탄 파편에 맞은 부상과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 생활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박 의사는 면회 온 사람들에게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여한이 없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의사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고 유해도 1969년 부산에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그러나 부산에서도 박 의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데는 정부나 부산시의 책임이 크다. 동상조차 예산 한푼 들이지 않고 롯데그룹 지원으로 건립했고 그나마도 인적이 드문 부산 성지곡 수원지 맨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산길을 돌아 찾아간 동상 앞에는 등산객 몇몇이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을 뿐이었다. 폭탄 의거가 있었던 옛 부산경찰서 자리엔 모텔과 상가가 들어서 있었다. 그 자리에 마땅히 있어야 할 표지석도 없었다. “개인 땅이어서 안 된다”거나 “일본 관광객들 보기에 안 좋다”는 반대에 부닥쳐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예멘 난민 뉴스 보면서 한국 사회가 우리 잊었나 해서 서운했습니다”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예멘 난민 뉴스 보면서 한국 사회가 우리 잊었나 해서 서운했습니다”

    노송달 초대 대한고려인협회장이 말하는 ‘한국과 난민’“한국에서 최근 난민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 우리들은 기분이 묘했습니다. 한편으론 잊혔다는 억울함도 들고, 난민 문제를 이슈화시킨 단체들이 우리 문제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것이 아니냐는 복잡한 심경입니다. 우리들 문제도 신경을 많이 써줬으면 합니다.” 지난 12일 발족한 ‘대한고려인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취임한 노 알렉산드르(46·한국 이름 노송달)는 지난 2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제주도에서 예멘인 수백 명의 난민 문제를 뉴스로 볼 때 우리 입장은 착잡하다”고 말했다. 그가 대한고려인협회의 사무실로 사용하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있는 시민단체 ‘너머’로 찾아갔다. 고려인협회는 러시아를 비롯해 구소련에서 떨어져 나온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의 나라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동포 8만여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대다수는 한국에서 소위 ‘3D업종’에 종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를 만나러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그가 ‘우리’와 약간 다르게 생겼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만나보니 길거리에서 마주친다면 그가 ‘고려인’이라고 알아챌 방도가 없었다. 한국말로도 인터뷰에 잘 응했다. 너무나 똑같은 ‘우리의 모습’에 놀랐다.“우리 할아버지들, 타국서 독립운동한 애국자우리는 그런 난민의 후손, 푸대접 착잡한 심경” “우리 할아버지들, 구한말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소련이나 중국에 난민이 되었습니다. 우리 조상은 그곳에 직접적으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하시거나, 그렇지 못하면 생업에 종사하면서 적은 돈이지만 몰래몰래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애국자들입니다. 나라를 잃은 서러움을 이중으로 경험한 것이지요. 우리는 그런 분들의 후손입니다. 말 그대로 할아버지의 나라 조국(祖國)에서는 우리들은 제쳐놓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라 사람을 ‘받아들여야 하네’, ‘마네’ 하는 뉴스를 보면 좀 억울한 심정, 착잡한 심경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을 받아들이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가까이 있었던 우리 동포 문제가 더 시급한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노 회장은 비자 문제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 고려인들에게 나오는 F4비자(외국 국적 재외동포 비자)가 차별적이라고 느낍니다. 예컨대 러시아 국적의 동포는 F4비자는 신청만 하면 발급돼 나오는데, 중앙아시아 같은 경우 F4비자 신청 조건이 대졸입니다. 러시아나 중앙아시아나 구소련 국가로 다 같잖아요. 또 있습니다. H2비자(취업비자)는 중국 동포에겐 5세대까지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만, 고려인들에겐 3세대까지밖에 안 나옵니다. 고려인 3세대의 자녀들은 만 19세가 되면 외국인으로 분류되어서 출국해야 합니다. 생이별이지요. 이것도 차별이고, 조국이 우리를 서운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고려인동포 합법적 체류자격 취득 및 정착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빨리 처리되어 이런 차별이 사라지길 바랄 뿐입니다.” ‘영주권은 어떠냐’ 하고 물었더니 노 회장은 영주권(F5비자)에는 ‘외국인 등록증’의 글귀도 거슬린다고 한다. “F4비자는 ‘외국국적 재외동포’라는 핏줄 인연이 있지만 영주권은 그냥 우리를 외국인 취급합니다. 지금 제주도에서 이슈화되고 있는 예멘 난민과 우리가 똑같은 거죠. 우리 대우를 잘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신분상 안정적으로 살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는 불만을 우회해서 토로했다.“고려인 비자 차별하는 조국에 서운특별 대우 아냐…안정적 생활 바람” 대한고려인협회 초대 회장으로서의 각오를 물었다. “한국에서 활동이 주요 목적입니다. 여기 안산의 고려인문화센터와 같이 고려인의 정착과 교육을 지원하는 센터를 청주와 화성 등에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또 하나는 ‘고려인 독립운동 기념비 건립’을 추진할 작정입니다. 전해철 의원이 낸 특별법 처리에 힘을 보태겠다는 것, 이 세 가지가 제 목표입니다.” 그에게 한국 이름을 물으니 “노송달”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가슴 찡한 사연을 들려줬다. “제가 원래 태어날 때 성이 뭐로 기록됐느냐 하면 ‘노가이’였습니다. 성명은 ‘노가이 알렉산드르’. 옛날에 할아버지가 러시아 당국에 등록할 때 성을 물어보니 ‘노가입니다’로 답했는데, 러시아 직원이 ‘노가이’로 기록한 것이 성이 된거죠. 러시아 말을 몰랐던 할아버지는 알렉산드르가 발음하기 어려워 ‘송달이, 송달아’하고 불렀던 게 제 한국 이름이 된 거죠. 그때는 송달이 웃긴 이름인 줄 모르고 쓰게 된 것입니다.”가족은 다국적…한국 생활 노 회장은 러시아 국적모친은 우즈베키스탄, 부인·딸은 카자흐스탄 국적 그의 가족은 ‘다국적’이다. 한국에서 생활하는 노 회장은 러시아 국적, 어머니는 우즈베키스탄, 부인과 딸(7)은 카자흐스탄 국적이란다. 부인과 딸은 비행기로 7000km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다. 독립유공자 계봉우(1880~1959) 선생의 후손인 부인은 카자흐스탄에서 독립유공자 후손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단다. 1년에 한두 번 그가 카자흐스탄에 가거나, 부인이 한국에 와야 가족의 생이별을 달랠 수 있다. “민요 아라랑만 들어도 콧잔등이 시큰하다”는 노 회장은 한국 생활을 하면서도 뿌리를 찾을 생각을 하지 못했단다. “1937년 강제이주를 당하면서 서류나 짐, 족보 같은 것은 아예 챙겨가지 못해 없어져 버렸습니다. 할아버지 정확한 고향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을 ‘장연 노씨’라고 이야기했다. 할아버지 함자를 알고 문중에 가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자 그는 “할아버지 함자가 노.태.경입니다. 그런데 문중이 북한에 있어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노 회장의 한국 생활은 20년이 넘었다. “1997년 한국에 들어와 막노동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고층건물 외벽 도장을 하는 작은 사업체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직원은 30~40명 됩니다.” 돈을 잘 버느냐는 물음에 그는 “돈을 못 벌면 이런 조직을 맡을 수가 없겠죠”라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면서 ‘고려인문화센터’를 지원하는 시민단체 너머에 대해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죠”라고 몇 차례 말했다. “그동안 느낀 바로는 한국 사람들이 고려인에 대해 대체로 ‘모르겠다’는 입장인 것같았습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남아 있는 조상들의 독립운동을 알려주고 싶은데…, 한국 사람들이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고, ‘지금 내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 심한 것같더라고요.” 자신들을 왜 ‘고려인’이라고 부르는지 물어봤다. “원래는 중국처럼 조선인으로 부르다가 1988년 6월 ‘전소련고려인협회’가 결성되면서부터입니다. 그때 우리는 조선 사람도, 한국 사람도 아닌 러시아 사람이고, 남한이나 북한의 그 어디도 아니고 해서 고려인이라 한 것입니다. 고려인(Korean)은 러시아 어로 ‘카레이츠’라 합니다.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타·카자흐스탄 등등해서 50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고구려나 발해시대를 제외한다면 구한말인 1860년대에 한인들이 러시아에 연해주 일대에 가서 살던 게 고려인의 시초이다.“우즈베크는 고향이지만 이질감한국은 ‘여기가 우리 땅’ 자신감” 그에게 한국과 고향 우즈베키스탄을 비교해 달라고 했다. “우즈베크는 제가 나서 자란 곳입니다. 친구들도 많고, 말도 잘 되고 문화도 잘 알고 그렇지만 코리안은 주류가 되지 않습니다. 간혹 밖에서 ‘니들 나라, 코리아로 돌아가라’는 말도 들립니다. 그럴 땐 기분이 매우 안 좋지요. 자신감도 없어졌습니다. 같은 문화 속에서 이질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한국에선 그런 말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이나 외모가 똑같아서인지 …. 여기서 누군가가 ‘니들 나라로 돌아가라’라고 하면 제가 자신감이 있습니다. ‘여기가 우리 땅’이라고.”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 국민성금 4000만원 넘어… “내년 3월까지 7647명 명패 전달”

    [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 국민성금 4000만원 넘어… “내년 3월까지 7647명 명패 전달”

    서울신문과 대한광복회가 지난 10월부터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진행한 ‘독립유공자의 명패 성금’을 모금한 결과, 포스코가 7700개의 명패를 제작해 후원키로 했고, 4000만원 이상의 국민 성금이 모였다. 모금된 국민 성금은 명패 케이스를 제작하는 데 사용된다. 보훈처는 내년부터 총 7647명의 독립유공자 및 직계 후손에게 명패를 전달하는 계획을 세웠다. 우선 정부는 올해 상징적으로 시제품 2개를 만들어 국내외 유공자 각각 1명에게 전달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달 3일 제89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맞아 광주시 남구에 있는 노동훈(92) 애국지사의 가정을 방문해 처음으로 명패를 달았다. 또 피우진 보훈처장은 22일(현지시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의 후손을 찾아 해외 유공자에게 처음으로 명패를 전달했다. 보훈처는 내년부터 42명의 국내외 생존 유공자를 직접 찾아 명패를 전달한다. 또 내년 3월까지 국내외 모든 유공자와 후손의 자택에 명패를 달아주는 게 목표다. 해외 유공자 및 후손은 미국(81명), 일본(30명), 호주(7명) 등 13개국 157명이 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캠페인 성금 주요 기부자 명단 총 모금액 4112만 702원(20일 현재) ▲개인 이상우 외 203명 ▲단체 대한국인, 스타키 그룹, 복주요양병원, 대구금오회, 광주제일고 등
  • [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 가치 검증 후 문화재 지정땐 독립기념관 전시

    [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 가치 검증 후 문화재 지정땐 독립기념관 전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의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의 후손들이 베델 부부가 사용하던 수납용 가구 등에 대해 정부에 유품 기증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국가보훈처는 곧 유물로서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검증에 착수한다. 보훈처 관계자는 23일 “베델 선생의 후손들이 ‘독립유공자의 명패’를 전달하기 위해 방문한 피우진 보훈처장에게 직접 유품 기증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곧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유품 조사를 의뢰 및 접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국외 한국문화재의 구입·기증과 불법·부당 반출 문화재의 환수를 추진하기 위해 2012년 7월 설립됐다. 보훈처는 베델의 유품이 국외 한국문화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보훈처의 의뢰를 받은 재단은 서면 또는 방문을 통해 유품을 조사하게 된다. 1차 판단이 끝나면 유품 소장자에게 임시보관증을 발급하고 유품을 국내의 임시격납처로 옮기게 된다. 이후 재단 유물수증심의위원회를 열어 소장 가치를 판단하고 유물로 지정될 경우 소장자에게 기증수납서를 보낸다. 마지막으로 재단은 유물을 기증처로 보내게 되는데 베델의 유물은 독립기념관 전시가 유력하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베델 손녀집에 ‘독립유공자 명패’ 걸렸다

    베델 손녀집에 ‘독립유공자 명패’ 걸렸다

    을사늑약 부당함 폭로 글 게재 등 인정“제 집이 해외에서 처음으로 독립유공자의 명패를 부착하는 곳인 데다 한국의 국가보훈처가 여기서 공식 기념행사까지 열어주니 정말 기쁩니다. 한국인들이 우리 할아버지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에게 얼마나 감사하는지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1904년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항일언론운동을 한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62)은 22일(현지시간) 영국 스폴딩의 자택에 독립유공자 명패가 걸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처럼 감격스러워 했다. 피우진 보훈처장은 이날 이곳에서 열린 ‘독립유공자의 명패 전달식’에 참석했다. 피 처장과 수전은 문 왼편에 ‘독립유공자의 집’이라고 적힌 명패와 베델의 항일 공적을 설명하는 영문 설명판을 부착했다. 수전은 감회에 젖은 듯 연신 명패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보훈처는 해외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중 첫 명패 전달 대상으로 베델을 선정했다. 그만큼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베델의 역할을 크게 인정한 것이다. 베델은 민족언론을 창간했을 뿐 아니라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글과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글을 게재하는 등 독립운동의 ‘촉진자’로 활약했다. 1968년 한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수전은 1995년 베델의 직계 후손으로서 처음 한국을 방문해 훈장을 받았다. 수전은 “할아버지를 기리는 공식 행사 때마다 한국을 자주 찾았는데, 오늘은 한국 정부가 영국을 직접 찾아줘 감회가 새롭다”며 “이 명패로 할아버지가 조선이란 나라에 가서 특별한 업적을 남긴 사실이 이웃에 전파될 것이고, 아이들에게도 좋은 교육이 될 것”이라고 했다. 또 “내 조상이 한 나라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사실이 영광스럽다”고 덧붙였다. 서울신문과 대한광복회는 보훈처 후원으로 지난 10월부터 내년 3·1운동·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독립유공자의 명패’ 모금 활동을 벌여왔다. 한편 이날 수전은 베델 부부가 조선에서 사용하다 영국으로 가져간 수납용 가구, 우편엽서, 베델이 촬영한 당시 사진 등을 한국 정부에 기증(영구 임대)했다. <서울신문 8월 3일 27면> 스폴딩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경기도, 2020년까지 산하기관 의무고용률 100% 맞춘다

    경기도, 2020년까지 산하기관 의무고용률 100% 맞춘다

    경기도가 산하 공공기관 공개채용 시 법에서 정한 의무고용 대상자 고용률을 2020년까지 100%로 끌어올리기로 했다. 도는 이런 내용을 담은 공공기관 의무고용 미달에 따른 보완대책을 마련, 내년부터 시행한다고 23일 밝혔다. 이번 조치는 이재명 경기도지사 지시에 따른 것으로, 이 지사는 최근 경기도 공공기관 상당수가 장애인 의무고용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후 장애인뿐 아니라 의무고용 대상자 전체의 고용률을 높일 수 있는 개선 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이를 위해 내년부터 공공기관 공개채용 시 의무고용 대상 채용 할당 비율을 도와 협의하도록 할 방침이다. 또 내년부터 공공기관 경영평가 시 의무고용률 평가 배점을 확대하고 2020년부터 2년 연속 의무고용률 미달 기관장에 대해서는 성과급 최저비율을 적용하는 등 단계적으로 벌칙을 강화할 예정이다. 현행 제도는 상시근로자 50인 이상 공공기관은 전체 근로자의 3.2%를 장애인으로, 정원 30인 이상 공공기관은 매년 정원의 3%를 청년으로, 상시근로자 20인 이상 되는 공공기관은 1년 이상 상시근로자의 3∼8% 범위에서 국가유공자를 의무 고용하도록 하고 있다. 경기도 조사에 따르면 국가유공자의 경우 의무고용 대상 24개 기관 가운데 11개 기관이, 청년은 19개 대상기관 중 16개 기관이, 장애인은 19개 기관 중 11개 기관이 준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유공자는 13개 기관(54.2%), 청년은 3개 기관(15.8%), 장애인은 8개 기관(42.1%)이 의무고용을 어기고 있는 셈이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김생환 부의장,“보육교사 처우개선 위해 적극 지원할 터”

    서울특별시의회 김생환 부의장(더불어민주당, 노원4)은 12월 20일 오후 서울시청 8층 다목적홀에서 열린 「2018 서울시 보육인의 날」행사에 참석, 축사를 통해 “보육교사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시의회가 적극적으로 지원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이날 보육인의 날 행사는 영유아보육을 위해 성실히 근무하는 보육인들을 위로, 격려하고 유공자를 표창함으로서 보육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축제의 장으로 만들기 위한 취지로 서울시 민간어린이집 연합회(회장 안미숙)가 주최, 주관했다. 김생환 서울시의회 부의장은 축사를 통해 “21세기 주인공인 아이들은 이 나라의 희망이고 보배이며 우리 미래의 가장 큰 자산임에 따라 미래의 주역이 될 아이들을 올바르고 튼튼하게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주는 일은 바로 우리 모두의 책임으로서 보육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면서 “영유아기 교육을 담당하고 계시는 보육인 여러분들의 소임이야말로 정말 가치있고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김생환 부의장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아이들이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늘 수고해주시는 보육교사 여러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고 인사하며 “서울시의회는 여러분이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근무하실 수 있도록 의회 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김 부의장의 축사에 이어 보육인들이 서울시에 보내는 메시지 전달식과 보육유공자 표창 수여, 보육을 주제로 한 샌드아트 공연 등이 함께 진행됐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김생환 부의장을 비롯해 황연옥·정인자 전 국공립어린이집연합회 회장, 소재진 (사)가정어린이집연합회장, 한경옥 가정어린이집분과위원회 회장, 백명자 법인단체어린이집연합회장, 김정미 직장어린이집연합회장 등 내빈과 원장, 보육교사, 보육관계자 등 500여명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5·18 발포자 국립묘지 안장 취소해야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을 향해 최초로 발포한 계엄군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는 논란과 관련해 5월 단체들이 성명을 내고 즉각 훈포장 취소와 시혜 중지를 촉구했다. 5·18기념재단과 5·18민주유공자유족회,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5·18구속부상자회 등은 21일 성명을 내고 5·18민주화운동 당시 가해 군인들에 대한 훈포장 및 예우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 5월 관련 단체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최초 발포자가 국립묘지에 버젓이 안장된 것은 분노를 넘어 허탈감이 앞선다”며 “이는 5·18에 대한 왜곡과 폄훼의 근원지는 여전히 국가와 정부라는 사실을 방증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권력찬탈의 도구로서 무고한 시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댄 5·18학살현장 군인들의 심리적 고통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들은 전사자가 아니며 더더구나 국가유공자도 아니다“며 ”대한민국의 민주적 정통성을 바로 세운 역사적 사건이 5·18이라는 국가 차원의 전제가 있음에도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한다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는 5·18 당시 시민들에 총격 등 폭력을 가한 군인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훈포장 및 국립묘지 안장 등 모든 예우 조치를 즉시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서울 구로구, 안양천 눈썰매장 개장

    서울 구로구, 안양천 눈썰매장 개장

    서울 구로구의 안양천 둔치에 겨울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눈썰매장이 오는 21일 문을 연다. 오금교 인근 안양천 둔치 인라인스케이트장에 조성된 눈썰매장은 6세 이상부터 성인 대상의 일반용 슬로프, 36개월 이상 6세 미만 유아들이 이용할 수 있는 소형 슬로프를 갖추고 있다. 플라스틱이 아닌 튜브 형태의 썰매를 사용해 안전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눈썰매를 즐길 수 있다. 아울러 미니 바이킹, 회전 그네, 디스코 팡팡 등의 놀이기구와 빙어 잡기 체험장, 눈놀이동산, 민속놀이 체험 부스 등도 마련돼 있다. 행사장에는 푸드코트와 매점 등 먹을거리 장터도 문을 연다. 이용요금은 9000원이며 구로구민은 6500원, 20인 이상 단체는 6000원이다. 장애인(동반 1인 포함), 국가유공자, 만 65세 이상 어르신에게는 50% 감면 혜택을 주며 36개월 미만은 무료다. 놀이기구 이용료는 별도로 내야 한다. 눈썰매장은 내년 2월 24일까지 휴일 없이 운영되며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 구로구는 사전 교육을 이수한 안전요원을 배치하고 정기적인 시설 안전점검도 시행한다. 구 관계자는 “여름철 물놀이장으로 주민의 사랑을 받은 안양천이 겨울철을 맞아 눈썰매장으로 변신했다”고 전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광화문광장에 31운동 100주년 기념탑 세운다

    광화문광장에 31운동 100주년 기념탑 세운다

    유공자 후손 도울 봉사 프로그램 발굴내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서울 광화문광장에 기념사업 홍보탑이 세워진다.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20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에서 홍보탑을 공개하고 한국자원봉사협의회,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등과 함께 독립운동 관련 자원봉사 활성화 업무협약을 체결한다. 이날 제막식을 하는 홍보탑은 3·1운동을 상징하는 형태로 마련됐다. 홍보탑은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를 모티브로 했다. 기념탑 외벽은 임시정부가 활동했던 중국 상하이 현지에서 생산된 적색 벽돌을 사용했다. 출입문도 임시정부 수립 이후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질감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홍보탑 상단에는 3·1운동의 비폭력 평화정신과 임시정부의 민주주의 가치를 계승하는 의미로 100, 태극, 악수, 불꽃 등을 형상화한 엠블럼과 슬로건을 설치했다. 이날 제막식에는 한완상 위원장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위원회 홍보대사인 래퍼 비와이 등이 참여한다. 추진위는 홍보탑 주변지역을 ‘100주년 광장’으로 이름 붙였다. 또 ‘동상 행위예술가’들이 제막식에 참여해 과거 임시정부 요원들의 모습을 재현한다. 홍보탑은 내년 4월까지 운영할 예정이다. 자원봉사 업무협약은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원봉사 프로그램 발굴과 국민 이해와 관심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협약기관인 자원봉사협의회와 자원봉사센터협회는 전국 규모의 자원봉사단체협의체로 자원봉사 문화 확산을 맡고 있다. 이들 기관에 소속된 자원봉사자들이 나서 독립운동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일 예정이다.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2018 시큐리티 어워드 코리아, 44개 사 시상 진행

    2018 시큐리티 어워드 코리아, 44개 사 시상 진행

    물리·정보 보안 분야 산·학·연 전문가들로 구성된 시큐리티어워드코리아위원회(위원장 최정식)가 주최하고, 보안뉴스·시큐리티월드가 주관한 ‘2018 시큐리티 어워드 코리아(Security Award Korea 2018)’ 시상식이 18일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 성황리에 개최됐다. ‘2018 시큐리티 어워드 코리아’는 한 해 동안 탁월한 경영과 우수한 제품 경쟁력을 바탕으로 보안산업 발전에 공로가 큰 유공자와 기술, 제품 및 솔루션을 선정하여 시상함으로써 우리 사회전반에 걸쳐 보안 수준 제고에 기여하기 위해 올해 처음으로 제정됐다. ‘산업발전 공로상’의 경우 보안 관련 법안 추진과 보안산업 발전에 적극 뒷받침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 △정우택 자유한국당 의원(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위원) △김규환 자유한국당 의원(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위원) △송희경 자유한국당 의원(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 △이민수 회장(한국정보보호산업협회)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공공부문 대상’의 경우 기업지원, 기술지원, 산업발전, 시장개척, 성과창출, 민원해결 등의 평가 요소를 합산해 수상자를 선정했다. 그 결과, 지자체로는 △서울특별시 △대전광역시가 수상했으며, 공기업에서는 △인천국제공항공사 △부산항보안공사가 공공부문에서의 보안 수요 창출과 보안문화 조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8 시큐리티 어워드 코리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기업대상 보안기업 부문에서는 경쟁력, 혁신성, 성장예측, 지속가능성, 기업문화, 고객만족 등의 평가 요소를 합산한 결과, △한화테크윈이 ‘브랜드대상’ △에스원이 ‘산업선도대상’ △ADT캡스가 ‘기업혁신대상’을 각각 수상했으며, 기업대상 일반기업 부문의 경우 CEO, 보안조직/인력, 보안관리/운영, 보안교육/문화, 기타 등의 항목을 평가해 △KB국민은행(은행부문) △아모레퍼시픽(코스메틱부문) △롯데정보통신(SI부문) △코스콤(IT서비스부문) △티몬(소셜커머스부문) △넥슨(게임부문)이 각 부문별 수상자로 선정됐다. 마지막으로 솔루션대상 부문에서는 △아이디스(영상보안 통합솔루션) △HIKVISION KOREA(영상보안 AI솔루션) △Dahua Technology Co., Ltd(영상보안 분석솔루션) △대명코퍼레이션 웹게이트 (DVR) △원우이엔지(줌카메라) △트루엔(IP카메라) △엔토스정보통신(센서카메라) △웨스턴디지털 (스토리지) △쿠도커뮤니케이션(지능형관제) △이노뎁(데이터매니지먼트) △인콘(지능형화재감시) △한국하니웰(스마트빌딩) △코맥스(홈네트워크) △슈프리마(지문인식) △테크스피어(정맥인식) △세환엠에스(시큐리티게이트) △안랩(EDR) △이글루시큐리티(보안관제) △지란지교시큐리티(모바일보안) △지니언스(네트워크접근제어) △위즈코리아(개인정보접속이력관리) △시큐어가드테크놀러지(패스워드관리) △한국쓰리엠(비주얼해킹) △모니터랩(웹방화벽) 등 24개 기업이 각 부문별로 올해 두각을 나타내면서 영예의 ‘솔루션대상’ 기업으로 선정됐다. 시큐리티어워드코리아위원회 최정식 위원장은 “최근 보안 분야는 산업간 경계를 뛰어넘어 다른 영역과 결합하는 추세로 가고 있다”며 “시큐리티 어워드 코리아는 각 산업에 적용되는 보안 기술과 제품 및 솔루션을 발굴·시상함으로써 융합보안의 성공적인 사례를 소개하고, 국내 보안산업에 가치 있는 기업과 기술, 비즈니스를 발굴하는 새로운 플랫폼으로써의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베트남 고아들과 합창단 운영 박성민씨 올해 해외문화홍보 유공자에

    베트남 고아들과 합창단 운영 박성민씨 올해 해외문화홍보 유공자에

    베트남 고아들과 함께 합창단을 만들어 운영하는 박성민(사진)씨, 러시아에 한국 음악을 알린 카라티기나 마르가리타씨, 태국에 한국 소식을 전하는 피앙오 라오하윌라이씨 등 9명이 정부 포상을 받는다.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은 문화·예술·체육 등 각 분야에서 우리 문화를 외국에 널리 알리고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데 이바지한 유공자 9명을 올해의 해외문화홍보 유공자로 선정했다고 19일 밝혔다. 박성민씨는 2013년 8월 주베트남 한국문화원과 업무협약을 체결해 베트남 고아들로 구성한 ‘미러클 합창단’, 2015년에는 ‘미러클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운영 중이다. 카라티기나 마르가리타씨는 지난 2007년부터 주러시아 한국문화원과 차이콥스키 국립음악원이 협력한 한국 음악인 초청 공연을 27회 열었다. 지난해에는 대통령 국빈방문 기념 한-러 클래식 음악회 등을 열기도 했다. 피앙오 라오하윌라이씨는 2008년부터 10년 동안 매주 1회 태국 주요 신문사인 ‘포스트 투데이’에 ‘성까올리(Watch Korea)’라는 제목으로 한국 문화와 한류, 관광, 정치, 한·태 수교 60주년 등 다양한 한국 관련 칼럼 530여건을 기고했다. 이밖에 재외 한국문화원과 협력해 한국 문화 홍보에 이바지한 홍엘리(미국·한국콘텐츠진흥원 미국비즈니스센터), 나선나(캐나다·The Swan at Carp Restaurant 대표), 백인성(아르헨티나·Baek & Asociados 대표), 아파프 아라브(프랑스·봉주르코레 한국문화협회장), 시모야카와 교스케(일본·쇼와음악대학 이사장), 쉬웨이펑(중국·중국현대문학관 연구원)이 선정됐다. 수상자들에게는 각국 한국문화원을 통해 문체부 장관 표창과 소정의 부상을 전달한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마윈·야오밍, 中 개혁개방 유공자 표창

    마윈·야오밍, 中 개혁개방 유공자 표창

    시진핑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부는 1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개혁개방 40주년 경축식’에서 중국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마윈(馬雲·왼쪽) 알리바바 회장 등 100명에게 메달과 상장을 수여했다. 이날 경축 행사가 열린 인민대회당 안에는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당 중앙의 지도 아래’와 더불어 ‘덩샤오핑 이론, 3개 대표론, 과학발전관,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신시대 개혁개방을 향해 전진하자’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마 회장은 디지털 경제 혁신자로 수상했으며, 중국농구협회장이자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 출신 야오밍(姚明·오른쪽)은 스포츠 분야 교류·개방의 우수 공로자로 선정됐다. 마 회장의 유공은 인터넷 행동의 선구자로 소개됐다. 수상자 중에는 마화텅(馬化騰) 텐센트그룹 회장도 포함됐으며, 중국이 자랑하는 고속철 푸싱호 개발 주역, 우주개발사업 촉진자, 초심을 잃지 않은 퇴직간부 등도 상을 받았다. 외국인으로는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등이 수상했다. 중국중앙TV(CCTV)는 1시간 30분간 계속된 시 주석의 연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생중계했다. 신화통신은 ‘신시대 개혁의 리더 시진핑’이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기사를 싣는 등 중국 언론들은 개혁개방에서 시 주석의 역할을 강조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개혁개방 기념 기업 광고에는 삼성전자가 외국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한 면에 걸친 축하 광고를 냈다. 그러나 중국의 개혁개방 40주년은 10년 전 30주년보다 차분했다는 평가다. 30주년은 베이징올림픽과 같이 열린 데다 지금처럼 미국과 심각한 무역전쟁 국면도 아니어서 훨씬 더 경사스런 분위기였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K9 자주포 사고피해자 이찬호 “괜찮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어도”(영상)

    K9 자주포 사고피해자 이찬호 “괜찮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어도”(영상)

    전역을 8개월 앞둔 2017년 8월 18일 강원도 철원에서 K9 자주포 사격훈련 중 폭발사고로 전신화상을 입고 올해 5월 전역한 이찬호 예비역 병장. 전역과 함께 치료비를 지원받지 못하게 된 사연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이어졌고 올해 9월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한 달 후 페이스북에 올린 화상 입은 팔 사진은 각 종 포털의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오를 만큼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나라를 지키다 상처를 입은 부상을 걱정 어린 눈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반면에 ‘흉하다’라는 악플로부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댓글들도 이어져 그는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런 반응들은 충분히 예상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 자신이 당한 군 사고에 대해서 잊혀져 가는 게 싫었다. 알려야만 했다. 그것이 그에겐 가장 먼저였고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잊혀지기 싫었어요. 내 흉터는 죽을 때까지 나를 괴롭힐 거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씩 잊혀지더라고요, 뭐라도 했어야 됐어요. 사고가 난 후 1년 4개월이 지났는데 확실한 해결책이 나온 것도 아니고 제2의 피해자가 생기지 말란 법도 없고요. 악성 댓글 같은 건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저 알려야 됐어요. 제가 당한 군 사고에 대해서요. 어찌보면 제 필살기를 꺼내 든 거죠. 이 흉터들은 그때의 온도, 공기뿐만 아니라 당시 제가 느꼈던 고통과 촉감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죠.“ 완치될 수 없는 그의 흉터들은 결코 중단할 수 없는 투쟁의 바탕인 된 셈이다.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대중으로부터 쉽게 잊혀져 가기 마련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 희대의 악인들, 우리를 슬프게도 기쁘게도 했던 수많은 세상 일들. 단 하나의 예외도 없다. 그저 잊지 않으려고, 잊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힘겨움과의 싸움만 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14일 서울시 마포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이찬호(25)씨도 그런 힘겨운 싸움을 기꺼이 감당하기로 한 사람이다. 이씨는 자신이 당한 군 사고가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자신과 같은 제2의 피해자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알려야 할 사명감을 갖고 있어 보였다. 수도 없이 죽음을 생각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어 그것 마저도 포기해야 했던 그가, 다시 한번 대중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또 다른 ‘필살기’를 책으로 준비하고 있다. 상처를 당당히 드러내며 아픔의 치유 과정을 글과 사진으로 엮은 <괜찮아 돌아갈 수 없어도>란 제목의 책으로 말이다. 모금액 전액 또한 기부할 예정에 있다고 한다. 두 번째 삶을 새롭게 시작한 그와의 만남을 정리했다.(Q) 인터뷰 요청을 승낙한 이유가 있다면? 매번 안 좋은 소식으로 찾아뵀었다. 이번에는 좀 좋은 소식으로 찾아뵙고자 제가 1년 4개월 동안 사고 이후의 일들을 메모한 내용을 책으로 출판하게 됐다. 많은 분들에게 잊히지 않기 위해서 다시 찾아뵙게 됐다. (Q) 현재 몸 상태는 어떤지?총 5번 수술을 한 상태다. 화상치료라는 게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이후에도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정신적 트라우마라든지 마음의 상처라든지 몸에서 지울 수 없는 흉터들이 상당이 많은데 지금까지도 병원에서 다양한 치료를 받고 있는 상태다. 추후에도 수술받을 예정이다. (Q) 사고 후 1년 4개월이 지났다. 보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이중보상금지법이란 게 있다. 제가 국가유공자가 됐기 때문에 나라에 보상이라든지 그런 부분에서 소송을 걸 수가 없는 법이 있다. 그런 부분 때문에 소송을 진행 못하고 있다. 아직 보상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진행 중에 있는 상태다. 일단 보훈처로 소속이 넘어가서 보훈처의 지정병원, 보훈처병원 혹은 위탁승인 절차를 거친 전문병원에서 다행히 치료를 받고 있는 상태다. (Q) 군 복무 중 사고는 전역 6개월까지만 치료받을 수 있단 말 듣고 심정이 어땠는지?처음에는 매우 우울하고 너무 힘들었는데 저는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많은 국민들이 일단 지켜보고 있고, 많은 국민들이 군대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혹은 여성분들도 군대를 가는데, 사고 이후 복지라든지 관리가 안 된다면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없을 거 같다. 저는 아직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지만 잘 해결될 거라고 믿고 있다.(Q) 생각조차 싫겠지만 폭발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실 수 있는지?저도 실제 사격을 여러 번 해봐서 부담감이 없었다. 거기서 제일 고참이었고, 제일 많이 쏴봤기 때문에. 이것만 하고 바로 다음날 외박이어서 기분 좋게 끝내고 쉬려고 했다. 첫 번째 두 번째 발사에선 잘 작동이 됐다. 근데 세 번째 탄에서 격발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 탄이 나갔다. 그러면서 폐쇄기가 제대로 안 닫혀서 내부로 들어오지 않아야 될 연기와 스파크가 들어오게 됐다. 게다가 밀폐사격을 해서 문을 모두 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 불똥들이 밑에 있던 나머지 화약들을 연소시키면서 엄청난 큰 폭발을 일으켰다. 너무 뜨거웠다. 감각을 잃을 정도로 너무 뜨거웠고 너무 짧은 순간이었고 눈 떠보니깐 전투복이 제 피부에 다 붙어 있고, 제 눈은 섬광, 빛 때문에 하얗게 아무것도 안보여서 제가 그 뜨거운 쇳덩어리들을 만지면서 나왔다. 그래서 지금 지문도 없는 상태고 손가락이 제대로 펴지지도 않고, “사람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주세요” 정말 죽겠다 싶었다. 그때 당시에는 그때 전차 뚜껑이 다 찢겨 날아갔다. 40톤 규모인데 그게 두 동강 나면서 모든 문이란 문은 다 찢겨 날아가서 제가 몸으로 짚으면서 출구를 찾아서 다행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상태였다.(Q) 배우가 꿈이었는데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거 같은데사고 직후에도 포대장님한테 ‘제 얼굴 괜찮냐’고 먼저 물어봤다. 제 상태가 어떤지 그런 것보다도 얼굴이 가장 걱정이 많이 됐다. 죽기 직전까지 꿈에 대한, 연기자가 되기 위한 그런 꿈들에 정말 애착이 있었던 거다. 중학교 3년 때부터 꿈을 꿔 왔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연습실에서 살았고 개인관리를 매우 철저히 했다. 그게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니깐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Q) 사고로 인해 어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지?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정말 악몽이랑, 환청 그리고 환영과 여러 가지가 겹쳐서 너무 힘들었다. 작은 소리에도 크게 민감해하고 남들보다 상당히 예민해져 있다. 폐쇄된 곳이라든지 소리가 상당히 큰 곳이라든지 아니면 풍선이 터진다는 그런 폭발 같은 형상을 보면 되게 겁부터 난다. 지금도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서 약물 치료를 병행하고 있는 상태다. (Q) 많은 응원의 글과 달리 부정적인 댓글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들었는데이렇게 많은 분들이 응원을 해주시고 많은 관심을 해주실 줄 몰랐다. 댓글에 흉하다는 말을 또 보고 왔어요. 방금 전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는데 사실 강력 대응을 하고 싶다. 근데 지금은 그분들도 분명히 저와 같은 아픔이라든지 저와 같은 흉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분들의 (상처가) 잘 아물기를 흉터 없이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잊을 만큼 많은 분들이 정말 응원해 주시고 좋은 분들이 정말 많다는 거를 저는 다시 느꼈다. (Q) 병실에서부터 지금까지 함께한 가족에 대해 고마움이 클 거 같은데사고는 제가 났는데 피해 보는 건 저희 가족들이 너무 많은 피해를 봤다. 제가 붕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고 있었다. 어머니는 누가 누구 아들인지도 모르셨다고 한다. 그때 당시에. 그 정도로 너무 심각한 상태였고 병원에서 볼 줄을 꿈에도 몰랐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주신다. 제가 어린애가 된 거 같다.(Q) 왜 이런 고난이 나에게 왔을까 원망도 많았을 텐데처음에는 정말 원망을 많이 했다. 신께서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을, 이런 고난과 시험을 주셨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지금 1년 4개월이 지난 뒤에 생각해보니깐 그런 생각을 했던 게 후회가 된다. 정말 지금은 많이 의지하고 있고 기도도 많이 하고 있다. 그만큼 주시는 것도 많았고 믿음적으로 많이 단단해진 거 같다. (Q) 치료 과정을 담은 <괜찮아 돌아갈 수 없어도>란 포토에세이 출간 배경은?아직도 K9 자주포를 군에서 사용하고 있고 제2의 피해자 혹은 군대에서 많은 사건 사고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저는 책이라는 수단으로 잊히지 않기 위해서 책을 쓰게 됐다. 이 책은 나의 이야기이면서도 누구나의 이야기다. 흉터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상처 없는 사람도 없고 저도 그 흉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1년 4개월 동안 제가 보고 느낀 것들을 메모한 것이 책으로 나오게 됐다. 화상 환자나 소방관이나 장애단체라든지 제 모든 수익금은 기부할 예정이다. (Q) 아픔을 같이 공유하고 응원해 준 국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 주신다면인터뷰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고마우신 분이 너무 많다. 도와주시는 분도 많고 응원해주시는 분도 많고 그런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힘을 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고 그런 힘과 응원을 받아서 앞으로 제가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Q) 앞으로의 계획과 소망이 있다면어떻게 하면 제 이 뜨거움을 나눠 드려서 따뜻함으로 전달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봤다. 혹시 목함 지뢰 사건을 아시나요. 그때 있었던 하재헌 하사가 동갑이기도 해서 많이 친해졌다. 그분이랑 아마 1월에 좋은 소식으로 찾아뵙지 않을까 싶다. (Q) 본인과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신다면화상 환자분들께는 어떠한 따뜻한 말을 해도 그분들의 뜨거운 고통을 위로해 줄 수는 없다. 사실 저도 많은 위로와 응원을 받았는데 많은 위로와 응원에 비해서 고통이 너무 심하다. 조심스럽게 말을 하자면 이번 겨울도 몹시 추울 거 같다. 화상 환자들은 건조해지면 더 악화될 수가 있다. 그래서 이번 겨울 따뜻하게 건강하게 잘 보내셨으면 한다. 글 박홍규 기자 gophk@seoul.co.kr 영상 박홍규,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국가유공자 생활수당 4년 만에 월 5만원 인상

    국가보훈처가 내년부터 국가유공자에게 지급되는 생활조정수당을 5만원 인상하고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본격 추진한다. 보훈처는 17일 이 같은 내용이 담긴 ‘2019년 보훈정책’을 발표하고 고령 국가유공자 보상복지 및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보훈처는 국가유공자와 유족의 생활안정을 위해 생활조정수당 단가를 5만원 인상해 지원하기로 했다. 현행 생활조정수당은 2015년 1만원이 인상된 이후 올해까지 3년간 동결됐다. 보훈처는 내년부터 단가를 5만원 인상해 월 21만~32만원을 국가유공자와 유족에게 지급할 계획이다. 보훈처는 “생활조정수당을 전년 대비 최대 31% 인상함으로써 생활이 어려운 저소득 국가유공자와 유족 등에게 생활안정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또 내년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그동안 지방자치단체에서 개별적으로 실시하던 ‘국가유공자 명패’ 사업을 명패의 문구와 디자인을 통일해 모든 국가유공자에게 전달하는 사업을 추진한다. 명패는 내년 6·25 참전용사와 군 작전 중 부상을 당한 국가유공자 20만 8000명에게 우선적으로 보급될 예정이다. 아울러 가짜 독립유공자 색출을 위해 ‘독립유공자 검증위원회’(가칭)를 구성해 내년부터 2023년까지 단계적으로 독립유공자 1만 5000여명 전체를 대상으로 공적을 전수조사하는 등 철저히 검증할 계획이다. 보훈처는 이 밖에도 국가유공자 고령화 등에 따라 증가하는 치과 진료 수요에 대응하고자 중앙보훈병원 치과병원을 증축한다. 또 국립묘지를 확충하고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묘역을 국가가 체계적으로 관리할 방침이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추모의 벽’ 건립비 3억 돌파… 새 국가유공자 상징 도입

    ‘추모의 벽’ 건립비 3억 돌파… 새 국가유공자 상징 도입

    미국 워싱턴DC에 건립될 한국전참전용사 ‘추모의 벽’ 건립 성금이 3억원을 돌파했다고 대한민국재향군인회(향군)가 16일 밝혔다.향군 관계자는 “지난 10월 15일 본격적으로 모금을 시작한 뒤 한 달 만에 모금액이 1억원을 넘었고 두 달째인 12월 14일 3억원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그간 누적금액은 한화 2억 9456만 8655원과 미화 1만 3000달러(약 1475억원)이다. 추모의 벽 건립은 한국전참전기념공원 안의 ‘추모의 못’ 주변에 둘레 50m, 높이 2.2m의 원형 유리벽을 설치하고 한국전에서 전사한 미군 3만 6000여 명과 카투사 전사자 8000여 명의 이름을 새겨 넣는 사업이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와 존경, 감사의 뜻을 담은 새 국가유공자 상징을 도입했다고 밝혔다. 이 상징을 이용해 국가유공자 거주지 명패, 국가유공자증, 국가유공자 관련 서식 등에 적용하는 통합체계를 구축한다. 이와 관련해 서울신문과 광복회는 보훈처의 후원으로 독립유공자의 명패 제작을 위해 이달 말까지 국민 성금을 모금한다. 내년에 독립유공자에게 전달할 7700개의 명패는 포스코에서 후원 제작키로 했다. 국민 성금은 명패 케이스 등을 제작하는데 사용할 계획이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김포 거주 5·18유공자 13명 정부지원 받게 된다

    김포 거주 5·18유공자 13명 정부지원 받게 된다

    경기 김포에 거주하는 5·18유공자 13명이 앞으로 정부지원을 받게 된다. 김포시의회는 오강현 시의회 의원이 발의한 ‘김포시 국가보훈대상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이 13일 열린 제189회 시의회 정례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고 밝혔다. 기존 김포시 국가보훈대상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조례의 제4조 예우 대상자에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해 4·19유공자들에게 지원을 하고 있다. 또 참전유공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예우하고 있다. 특수임무유공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과 고엽제후유증 등 환자지원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에 의해 적용을 받는 사람에게는 국가보훈대상자로 예우하고 지원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번 개정하는 내용은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을 적용해 기존 국가보훈대상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조례에 ‘5·18민주유공자’를 추가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김포에 거주하는 5·18유공자는 13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조례안 통과로 김포시에서도 처음으로 5·18유공자를 지원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김포시는 수원시와 부천시·파주시 등에 이어 13번째 조례 제정 지방정부가 된다. 경기도 조례에도 지원조례안이 있다. 또 이번 정례회에서는 기존 녹색김포실천협의회라는 이름이 지속가능발전협의회로 명칭이 개칭되는 ‘녹색김포실천협의회 설치 및 운영 조례 일부개정조례안도 발의됐다. 오 의원을 비롯해 김옥균·최명진·유영숙 의원이 공동발의해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이로써 내년부터 단체 성격을 규정하는 명칭 개정으로 환경사업뿐만 아니라 김포시의 지속가능한 의제들을 발굴하고 사업을 본격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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