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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케이블 하이라이트]

    ■미안해, 고마워(씨네프 밤 7시) 6살 소녀에게 찾아온 생애 첫 번째 이별. 강아지 보리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보은에게 진짜 동생이 생기면서 갑작스럽게 보리와 이별의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한편 집 없는 고양이를 끔찍이 돌보는 딸과 고양이라면 질색하는 아버지. 하지만 사사건건 부딪쳐온 부녀는 길 고양이를 돌보며 서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푸른거탑 제로(tvN 밤 11시) 어느 날, 건조대에 널어놓은 빨랫감을 몽땅 도둑맞은 4소대. 라이벌인 3소대가 훔쳐간 것이 틀림없지만, 3소대는 뻔뻔하게도 끝까지 오리발을 내민다. 한편 수류탄 투척 훈련 날. 훈련이 두려운 동현은 소중한 인형 키키를 꺼내 마인드 컨트롤을 하기에 이른다.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진영은 키키를 빼앗다 그만 실수로 키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만다. ■특수범죄사건파일(FX 밤 11시) 한 주택가 파티 중 바비큐를 하려고 넣어 둔 돼지 아래에서 이웃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커트 베세트의 시신이 발견된다. 유골에는 세 곳에 서로 다른 상흔이 남아 있다. 알고 보니 커트 베세트는 동시에 한집안의 엄마와 딸, 그리고 다른 이웃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음이 드러난다. 그렇게 용의자는 그 두 집안의 남자들로 좁혀지는데…. ■블루 블러드3(AXN 오후 10시 50분) 에린은 니키의 16번째 생일에 잭이 아버지 노릇을 훌륭히 해주길 바란다. 한편 두 명의 남자가 같은 수법으로 살해되고 사건을 맡은 대니와 재키는 두 남자가 강간 사건의 용의자였다는 걸 알아낸다. 그리고 릴리라는 소녀가 네 명의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지만 증거 부족으로 풀려난 사실을 알게 된다. ■윤손하와 마쓰오의 잇 하우스 시즌2(홈스토리 오후 1시 30분) 오늘의 주인공은 일본 나라시에 사는 나카와키다. 그는 사택에 살다가 나라에서도 고급 주택지로 유명한 가쿠엔마에에 집을 짓기로 한다. 땅값이 비싸 난관에 부딪히던 중 높이가 6m인 경사지를 발견해 싼값에 구입했다. 건물을 좌우로 나눈 옥외 복도 등 나카와키 집의 독특한 아이디어를 살펴본다. ■명탐정 코난(애니맥스 오전 9시) 부동산 회사의 사장이 탐정사무소에 찾아와 기묘한 부탁을 한다. 사장은 회사 건강검진을 통해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전문 살인청부업자인 폭스에게 자신을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는데 건강검진이 오진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장은 폭스가 자신을 죽이기 전에 그를 찾아달라고 유명한에게 부탁한다.
  • 치매 시어머니 살해·유기한 며느리 구속

    치매 시어머니 살해·유기한 며느리 구속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며느리가 경찰에 구속됐다. 전북 군산경찰서는 26일 김모(52·여)씨를 존속폭행치사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2008년 7월 하순 함께 사는 시어머니(82)를 손으로 밀어 방 문턱에 부딪혀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시어머니의 시신을 집 근처 정화조에 유기한 혐의도 받고 있다. 김씨는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가 방안에 눈 대소변을 청소하던 중 자신에게 욕을 하자 홧김에 밀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지난 7월 김씨 집 인근 정화조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유골이 발견돼 수사를 벌여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여군 임산부의 죽음] 만삭의 몸, 한달 50시간 초과근무 이 악물고 버티다…

    [여군 임산부의 죽음] 만삭의 몸, 한달 50시간 초과근무 이 악물고 버티다…

    전방 부대에서 근무하던 여군이 제대로 된 산부인과 진료를 받지 못한 채 격무에 시달리다 출산 다음 날 사망했다. 유가족의 순직 처리 요구에 군은 전례가 없다며 버텼다. 결국 국민권익위원회가 나섰고 군은 순직 처리키로 방침을 바꿨다. 지난 2월 3일 사망한 이신애(28·여군 사관 55기) 중위 이야기다. 사건은 일단락된 듯 보이지만 현재의 여군에 대한 인식이나 열악한 군 의료체계가 지속되는 한 제2, 제3의 이 중위는 언제든 나올 수밖에 없다. 도대체 무엇이 이 중위를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악바리’ 이 중위는 지난 2월 2일 679g의 사내아이 봄봄이(태명)를 세상에 선물하고 이튿날 오전 7시 47분 숨을 거뒀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기 손 한번 잡아 보지 못했다. 임신 7개월의 몸으로 한 달 내내 초과근무하며 준비했던 혹한기 훈련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사망 원인은 임신성 고혈압에 의한 뇌출혈. 육군본부는 4월 11일 “군 복무와 사망의 연관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순직이 아닌 ‘일반 사망’으로 결정했다. 아버지 재학씨와 남편 연두봉씨는 6월 16일 강원 횡성군 봉안소에서 유해를 인수했다. 육군 대위 출신의 할아버지, 중령으로 예편한 부친에 이어 3대째 군인의 길을 걷던 이 중위의 마지막은 쓸쓸했다. 그대로 묻히는 듯했던 이 중위의 죽음은 권익위가 지난 10일 과로로 인한 순직으로 인정할 것을 육군본부에 권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지난 1월 초 마지막 산부인과 검진에서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던 이 중위는 왜 죽었을까. 산부인과 전문의 3명은 과로에 따른 극심한 스트레스가 임신성 고혈압을 악화시킨 것으로 권익위에 자문했다. 실제 지난해 12월 대대 지휘관이 교체되고 직속 상관인 부대 운영과장이 1월에 전출된 후 업무량이 급격히 늘었다. 후임자도 배치되지 않았다. 혹한기 훈련 준비까지 겹쳐 정보작전 임무를 맡은 이 중위는 오전 7시에 출근해 밤 11시가 넘어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이 중위의 죽음에는 군의 상명하복 문화와 낮은 모성 보호 인식, 낙후된 의료체계가 복합 작용했다. 근무지였던 인제군에는 산부인과 병원이 없다. 가장 가까운 속초까지 왕복 두 시간, 춘천은 왕복 세 시간 거리다. 두 곳 모두 위수지역 밖이어서 지휘관 승인을 받아 휴가를 내야 한다. 서상원 권익위 조사관은 “지금 같은 상황이면 ‘제2의 이신애’가 또 나올 수 있다”며 “군의 시스템과 제도가 충분치 않다”고 지적했다. 3월 말 현재 장교·부사관으로 근무하는 여군은 8448명, 전체 군인의 4.7%이다. 2007년 말(4959명)보다 58% 늘었다. 주로 전방에 배치되는 전투병과는 전체 여군의 36%(3120명)에 이른다. 군은 2015년까지 여군을 1만명 이상까지 늘릴 계획이다. 하지만 여군 대책은 이중적이다. ‘기계적 평등’을 강조할 뿐 일과 가정의 병립을 위한 지원은 인색하다. 공공연하게 여군을 전투력 저하 요인으로 꼽는 가부장적 지휘관들도 적지 않다. 육군 관계자는 “일부 지휘관들은 결혼한 여군 장교를 노골적으로 꺼린다”면서 “육아휴직으로 인한 결원이 제때 충원되지 않기 때문에 짐을 떠안는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놓았다. 낙후된 의료지원 체계도 문제다. 16개 국군병원 중 산부인과가 설치된 곳은 국군수도병원, 국군서울지구병원, 국군대전병원, 항공우주의료원(청주), 해양의료원(진해) 등 5곳뿐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산부인과 군의관 증원이 필요하지만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현재 임신한 여군의 경우 산부인과 진료는 민간에서 받고 진료비를 지원받고 있지만 전방 지역의 경우 민간 산부인과 병원이 전무해 이 같은 원칙은 사실상 무용지물인 셈이다. 늦었지만 육군은 이달 중 재심의를 열어 이 중위를 순직 처리키로 했다. 이 중위의 유골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때까지 부친의 집에 임시로 보관돼 있다. 엄마의 부재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들 봄봄이는 그동안 건강하게 자라 체중이 6㎏이 됐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여군 임산부의 죽음] 이런 모습 보이려고 軍 가고 싶어 발버둥쳤니, 신애야!

    ‘아버지의 일기’는 지난 2월 이신애 중위의 생명의 불씨가 사그라지던 시점부터 시작됐다. 비통한 심정뿐 아니라 각종 의문도 담겨 있다. 다음은 일기의 일부. 2월 2일 신애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맺혀 있다. 살려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2월 3일 신애가 하늘나라로 갔다. 공황 상태다. 헌병대 수사과장의 조사가 이뤄졌다. 2월 20일 사단장과 면담을 했다. 인제군 전체에 산부인과가 한 군데도 없으니 어느 여군이 이곳에 근무하려 하겠는가. 임신한 여군 대책이 전무했다. 제일 가까운 산부인과가 있는 속초나 춘천은 위수지역 이탈 아닌가. 평일에 병원 갈 엄두도 못 내고 일만 했던 아이다. 순직 처리를 해야 한다고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사단장은 여군이 임신 중 사망한 사례는 처음이라고 한다. 사단의 역량을 벗어나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3월 27일 대대 주임원사가 부대에 신애 추모비를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순직이 부결되면서 보류됨). 4월 11일 사단 인사참모가 육군본부가 순직을 부결했다고 통보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4월 19일 국민권익위원회에 민원을 접수시켰다. 국방부, 보훈처, 인터넷, 방송사에 호소해야 할까. 모르겠다. 5월 9일 권익위 조사관과 면담했다. 임신한 여군의 복무 중 사망이 처음이라 판례가 없다고 했다. 업무상 과로가 증명돼야 한다고 한다. 6월 6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참배를 갔다가 의연하자고 다짐했건만 눈물을 보였다. 아버지(육군 대위로 예편한 이 중위 할아버지,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에게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6월 16일 횡성군 봉안소에서 신애(유골)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자대 배치될 때 씩씩했던 모습은 없고 아무 말 없이 뒷좌석에 있다. 순직이 되지 않아 군의 어떤 행사도 없이 물건을 수령하듯 (유골을) 받아든 내 모습이 너무 처량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6월 17일 신애 유골을 오동나무 유골함에 옮겼다. 이런 모습 보이려고 그리도 군대에 가고 싶어 발버둥쳤니. 신애야!
  • 세계 최초 화학전 사망 유골 발견…서기 256년 시리아 고대전투서

    세계 최초 화학전 사망 유골 발견…서기 256년 시리아 고대전투서

    내전 중인 시리아 정부가 반군과 민간인들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한 의혹과 관련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가 군사 개입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이미 1700년 전인 서기 256년에 시리아에서 있었던 고대 전투에서 맹독성 독가스가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의 일간 데일리메일은 7일(현지시각) 영국의 고고학자 시몬 제임스 박사의 말을 빌려 3세기경에 동부 시리아 지역에서 20여 명의 로마군이 당시 페르시아군의 치명적인 독가스 공격을 받고 즉시 사망했다고 전했다. 제임스 박사는 이미 2009년에 이러한 사실을 학계에 발표한 바 있는데 그에 의하면 당시 발굴된 20여 구의 로마군 유골들을 조사한 결과, 페르시아군이 유황 등 화학 성분을 함유한 물질에 불을 붙여 그 연기를 로마군 요새의 터널로 들여보내 공격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제임스 박사는 “이들 로마군들은 몇 초 만에 의식을 잃고 수 분 후 모두 즉사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발굴된 관련 유골들 근처에서 이와 같은 화학물질들이 발견되었다”고 밝혔다. 데일리메일은 최근 스탠퍼드대학의 아드리엔 메이어 과학역사학 교수가 ‘디스커버리뉴스’에 기원전(BC) 429년에 있었던 고대 전투에서도 화학 물질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아직 256년에 시리아에서 있었던 독가스를 이용한 전투가 가장 최초로 화학 물질을 사용한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고 전했다. 사진 : 데일리메일 캡처 다니엘 김 미국 통신원 danielkim.ok@gmail.com
  • “이게 바로 추파카브라 미이라!” 아르헨 여성 공개

    “이게 바로 추파카브라 미이라!” 아르헨 여성 공개

    추파카브라는 진짜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르헨티나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 미이라가 공개돼 화제가 되고 있다. 미이라를 본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의 동물 추파카브라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며 추파카브라의 존재가 확인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4일(현지시각) 현지 언론에 따르면 미이라가 공개된 곳은 아르헨티나 산타페 주의 로사리오라는 곳이다. 스텔라 페르난데스라는 여자가 정체불명 동물 미이라를 전격적으로 공개했다. 언뜻 보면 일단 미이라는 전설 속 추파카브라의 모습과 비슷하다.두개골은 타원형이고 큰 귀가 윗쪽으로 달려 있다. 눈과 콧구멍이 뚜렷하다. 입안엔 상당히 날카로워 보이는 송곳니가 박혀 있다. 손(?)과 발엔 각각 5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달려 있다. 손가락과 발가락에는 긴 손톱과 발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정체불명의 미이라를 발견한 건 페르난데스의 아들이다. 가축을 운반하는 트럭을 운전하는 그의 아들은 지금으로부터 2년 반 전 산타페의 베라라는 곳에서 우연히 의문의 미이라를 발견했다. 페르난데스는 “처음 봤을 땐 마치 외계인의 사체를 보는 것 같았다”면서 “연구소 등이 사체를 분석해 정체를 가려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편 페르난데스의 집에는 추파카브라의 것으로 의심되는 미이라를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다. 현지 언론은 유골을 본 사람들이 경악, 공포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추파카브라는 중남미에 살고 있는 전설 속 흡혈동물이다. 가축을 공격해 피를 빨아먹는다는 전설이 있다. 중미 푸에르토리코에서 처음 추파카브라를 봤다는 사람이 나온 뒤로 미주대륙 위로는 미국 남부지역, 아래로는 아르헨티나까지 여기저기에서 목격설이 제기됐다. 임석훈 남미통신원 juanlimmx@naver.com
  • 장묘 특허 5년동안 172건 납골함 기술이 91% 차지

    2001년 38.3%이던 화장률이 2011년 71.1%로 증가하는 등 장묘문화가 매장에서 화장 중심으로 변화했다. 3일 특허청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최근 5년간 특허출원된 장묘 관련 기술은 172건으로 집계됐다. 기술 분야별로는 납골함(유골함) 관련 기술이 전체의 91%(156건)에 달하고 수목장 등 친환경적인 장사방법인 자연장이 9%(16건)를 차지했다. 최근에는 납골함에 디스플레이 장치를 부착해 스마트폰이나 개인용 컴퓨터에서 볼 수 있게 하고, 추모글이나 방명록 작성 등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아이디어도 출원됐다. 특허청은 가족구조 변화, 매장공간 부족, 편리성 등으로 화장률이 매년 증가함에 따라 장묘 관련 기술도 점차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대전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한강변에서 발견된 유골, 훼손 흔적은…

    한강변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성의 유골이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경찰에 따르면 3일 오전 11시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행주산성 부근 한강변에서 환경정화활동을 하던 공무원 A씨가 유골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 유골은 흰색 바지와 파란색 신발을 신고 있었으며 경찰은 성인 남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골이 훼손된 흔적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유골이 상류에서 하류로 떠내려 온 것으로 보고 자살자, 실종자 등을 위주로 신원파악을 하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사할린 강제동원 한인 유골 첫 봉환

    정부가 일제강점기 러시아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됐다가 귀환하지 못하고 현지에서 사망한 한인 유해를 국내로 처음 봉환했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는 1945년 초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돼 현지에서 숨진 고(故) 유흥준씨의 유해가 29일 인천공항을 통해 국내로 들어왔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2008년 사할린 한인 묘지 표본조사 과정에서 1977년 1월에 사망해 현지 공동묘지에 있는 유씨의 묘를 발견했다. 지난해 5월부터 한·러 정부가 사할린 한인 묘 조사와 시범발굴 등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면서 유씨의 유골을 봉환하기로 합의했다. 고국에 돌아온 유씨의 유골은 30일 충남 천안에 있는 국립 망향의 동산에 안치된다. 이날 추도식에는 한·러·일 정부 관계자와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1938년 4월 일제의 ‘국가총동원 체제’와 태평양전쟁 이후 수많은 한인이 사할린의 탄광 등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했다. 위원회가 2005년부터 현지에서 확인한 한인 묘는 약 6000기다. 위원회는 유골 확인과 봉환 작업을 계속할 계획이지만 관련법상 위원회 활동이 올해 말까지여서 사업이 지속될지는 불투명하다. 세종 이석우 기자 jun88@seoul.co.kr
  • 고국의 거리서 스러진 고려인 마지막 길만은 외롭지 않았다

    고국의 거리서 스러진 고려인 마지막 길만은 외롭지 않았다

    “먼 나라 우즈베키스탄에서 그 어느 나라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소수 민족으로 살아가야 했던 고려인. 당신이 한국에 도착해 겪었을 아픔과 슬픔, 그리고 외로움에 미리 손 내밀어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질병 속에서 고통받을 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수 있도록 치엔씨의 얼굴을 마주한 채 마음의 문을 열어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2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동신병원 장례식장. 조근조근한 말투의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이 조사를 낭독했다. 주변에는 서대문구, 우즈베키스탄 영사관, 한국이주노동재단 관계자들만 보였다. 장례식이라면 응당 눈에 띄어야 할 격렬하게 울어 대는 유족이 없다. 그도 그럴 게 치엔(57)씨는 살아서도 혹독하게 외로웠을, 그리고 죽어서도 배웅하는 이 하나 없이 떠나야 하는 무연고 사망자다. 원래 무연고 사망자는 장례절차 없이 화장된다. 연고자가 나타날 것에 대비해 화장 뒤 10년간 안치하고 그다음 집단 매장된다. 이렇게 이승에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한 채 하나의 물건처럼 ‘소각 처리’될 치엔씨에게 온당한 죽음의 형식을 갖춰 준 것은 지난 5월 출범한 마을장례지원단 ‘두레’다. 두레는 서대문구 사회복지협의회, 동주민센터의 지역사회복지협의체, 교원라이프, 동신병원 등이 함께 출범시켰다. 두레는 장례뿐 아니라 두레를 처음 기획했던 3월 13일을 기념해 매년 이날에는 무연고 사망자들을 위한 ‘추모의 날’도 운영할 계획이다. 장례에서 화장, 유골 안치는 물론 제사까지 치러 준다. “병원에서든 빈민촌에서든 외롭게 홀로 죽어 가는 사람을 방치하는 사회는 급속히 자멸하는 사회”라며 “죽음의 공동체만이 사랑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해 준다”는 어느 철학자의 외침을 떠올리게 한다. 서대문구가 세브란스병원에서 치엔씨에 대한 사망처리 의뢰를 받은 것은 지난 18일. 지난 3월 한국에 방문취업으로 입국한 뒤 경기 안산에서 살았던 치엔씨는 지난달 10일 은평구 길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 직후 숨졌다. 조사 결과 치엔씨는 고려인으로 밝혀졌다. 1937년 스탈린의 소수 민족 이주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17만 조선인의 후예였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방문취업 고려인 무연고 동포’여서다. 법무부는 2007년부터 모국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중앙아시아 국가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국가별 쿼터에 따른 입국을 허용하고 있다. 고국 땅에서 무연고자로 죽어야 했던 치엔씨는 강제이주 때문에 우즈베키스탄에서도 무연고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서대문구와 두레는 고려인 치엔씨에게 한국식 장례를 치러 주기로 했다. 그렇게 치엔씨는 일산 화장장을 거쳐 파주 추모의 집으로 갔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전쟁 멈춰도 끝나지 않는 납북자 가족의 60년 가슴앓이

    전쟁 멈춰도 끝나지 않는 납북자 가족의 60년 가슴앓이

    한반도를 눈물과 피로 물들인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된 지 60년이 지났다. 고운 새색시의 손에 검버섯이 피고, 철모르던 아이가 노인이 되는 긴 세월이 지난 후에도 차마 묻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전쟁 당시 북한에서 납치해간 ‘전시 납북자’들의 이야기다. 돌아오지 않는 피붙이를 평생 가슴앓이하며 기다린 전시 납북자들의 가족.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사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남긴 우리 사회의 아픔을 보듬는 시간이 마련된다. KBS 1TV가 27일 오후 7시 10분 정전 60주년 특별기획으로 방영하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다. 전쟁 통에 제대로 된 인사 한마디 할 새 없이 북으로 끌려간 납북자들은 지금까지 생사확인조차 되지 않아 남은 가족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됐다. 전시 납북자 가족들은 모르쇠로 일관해온 북한과, 전시 납북자에 대한 정부와 국민의 무관심과 냉대, 무엇보다 사무치는 그리움을 이겨내야 했다. 반세기가 지난 뒤에야 가족들의 노력으로 납북자 명부가 발견되고, 이들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전시 납북자가 규명되고 인정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공식 인정된 납북자는 2265명. 1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전시 납북자 수에 비하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리고 가족들의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대한민국 최초의 전기 기술자인 황갑성씨의 장남 황용군씨는 아버지의 유골이라도 품에 안아보고 싶다. 그가 13세 되던 해 전쟁이 터졌다. 외할머니 댁으로 피신해서 담배 장사를 하며 소일하던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아버지는 그에게 “곧 데리러 오마”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북으로 끌려간 것이었다. 황씨는 아버지 대신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학업도 중도에 포기하고 살아야 했다. 그는 아버지의 생사라도 확인하기 위해 빈 유골함을 목에 걸고 미국의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까지 찾아갔다. 수년간의 노력 끝에 전시 납북자 인정을 받았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생사는 알 길이 없다. 강화금융조합이란 어엿한 직장에 다니던 일등 신랑감 김재봉씨는 전쟁이 터지자 북으로 끌려갔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남편을 잃은 아내 김항태씨는 뱃속에 딸이 있는지도 모른 채 60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환갑을 넘긴 딸과 함께 남편의 고향이자 신혼살림을 차렸던 강화 교동도를 다시 찾은 김항태씨의 눈에 또다시 눈물과 고통이 번진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태인 우석 병학 동환 준형아… 미안해” 하늘도 눈물로 배웅한 마지막 하굣길

    “태인 우석 병학 동환 준형아… 미안해” 하늘도 눈물로 배웅한 마지막 하굣길

    “사랑하는 태인아, 우석아, 병학아, 동환아, 준형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못다 핀 꿈은 더 좋은 세상에서 피우길 바란다. 잘 가라.” 충남 태안군 안면도 사설 해병대 캠프에서 숨진 공주사대부고 학생 5명의 합동 영결식이 24일 오전 10시 20분부터 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재학생과 각계 인사 등 100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이 뛰어놀던 운동장은 유족들의 하염없는 눈물로 뒤덮였고 하늘도 슬픈 듯 간간이 비를 뿌렸다. 시민들도 교정 곳곳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눈물을 쏟았다. 운구차 행렬을 따라 운동장에 들어선 유족들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오열했고, 몇몇의 어머니는 쓰러져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 유족석으로 옮겨졌다. 장례위원장인 서만철 공주대 총장은 조사에서 “장맛비도 우리의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으니 너희는 우리를 용서하지 마라”고 말했다.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추도사에서 울먹이며 수차례 “미안하다”를 외치고 “자식을 가슴에 묻고 피눈물 흘리는 유족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이런 아픔이 마지막이 되도록 모든 힘을 쏟겠다”고 약속했다. 이 학교 이한재 교사는 숨진 학생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면서 “하늘이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큰 아픔을 주고 이를 씻어 주려는 듯 빗물을 쏟아내고 있다”면서 “이들에게 못다 준 사랑을 여기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주겠다”고 다짐했다. 동급생 대표 김현겸군은 “(너희가 파도에 휩쓸릴 때) 나는 아무 일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면서 “친구들아,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다 언젠가는 돌아올 거야. 우리는 그것을 믿고 기다릴게”라며 가슴을 쳤다. 유족 대표인 이병학군의 아버지 이후식씨는 “아이들이 내일을 향해 달렸건만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 있는 친구들이 그 꿈을 이뤄 달라”면서 “국가도 대책을 세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다. 학생들의 시신은 화장 후 “고향이 각기 다른 동기생인 만큼 서로 외롭지 않게 하자”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각각의 유골함에 담겨 천안공원묘지에 합동 안장됐다. 한편 태안해경은 이날 안면유스호스텔 운영업체 ㈜한영T&Y 대표 오모(50)씨와 영업이사 김모(49)씨, 해병대 캠프 용역업체 ㈜코오롱트래블 대표 김모(49)씨, 이를 재하청받아 실제 캠프를 운영한 개인 사업자 김모(48)씨 등 4명에 대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공주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공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유골 수집가, ‘망자의 평화 방해’혐의로 체포돼

    유골 수집가, ‘망자의 평화 방해’혐의로 체포돼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는 유골을 무더기로 훔쳐 집에서 보관한 남자가 체포됐다. 남자는 보관하고 있던 해골 등을 팔려다가 경찰에 덜미가 잡혔다. 그러나 남자가 기이한 행각을 벌인 이유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지 공영라디오 ORF 등에 따르면 사건은 오스트리아 버젠란드에서 발생했다. 47세로 나이만 확인된 문제의 남자는 자택 주변에 있는 성당 공동묘지에서 유골을 훔쳐 집에다 보관했다. 자택을 급습한 경찰이 확인한 장물(?)만 두개골 56개, 기타 유골 55개 등 100개가 넘었다. 유골은 남자의 집에 전시되듯 보관돼 있었다. 남자는 유골 일부를 몰래 팔려다 꼬리를 잡혔다. 에페통신 등 외신은 현지 언론을 인용, “남자가 두개골 3개와 대퇴골 2개를 내다팔려다 적발됐다”고 보도했다. 현지 당국은 남자를 긴급 체포하는 한편 남자의 자택에서 발견된 유골을 공동묘지에 돌려주기로 했다. 당국은 남자를 ‘망자의 평화를 방해한 혐의’로 처벌할 예정이다. 사진=자료사진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참수된 채 묻힌 ‘뱀파이어 유골’ 폴란드서 발견

    참수된 채 묻힌 ‘뱀파이어 유골’ 폴란드서 발견

    폴란드에서 뱀파이어로 추정되는 유골 4구가 발견돼 관심을 끌고 있다. 현지 고고학 박사 예츠 피어체크는 최근 글리비체 인근 한 빌딩 부지에서 16세기 전후 처형된 것으로 보이는 유골 4구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이 유골들이 뱀파이어 꼬리표를 단 것은 독특한 매장 방식 때문이다. 4구 모두 참수형을 당했으며 머리가 다리 사이에 놓여 있었던 것. 또한 일반적으로 무덤에 함께 매장되는 장신구 등 개인 물품들은 전혀 없었다. 피어체크 박사는 “중세시대에는 뱀파이어로 추정되는 인물을 참수한 후 부활이 두려워 머리를 다리 사이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자세한 분석이 진행 중이지만 대략 16세기 경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고고학자들에 따르면 동유럽을 중심으로 뱀파이어와 관련된 전설은 널리 퍼져있다. 지난해에도 불가리아 흑해연안 도시 소조폴에 위치한 수도원 근처에서 가슴에 쇠말뚝이 박힌 채 800년 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 2구가 발견된 바 있다.         당시 불가리아 국립역사박물관장인 보이다르 디미트로프는 “과거 이 지역에서는 뱀파이어 심장에 말뚝을 박아 매장하지 않으면 부활한다고 믿는 풍습이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 유골들이 뱀파이어 처형 방식으로 매장됐을 뿐 진짜 뱀파이어라는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미신의 ‘희생양’일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이탈리아 피렌체대학 인류학자 마테오 보리니는 “중세인들은 마을에 도는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의 배후로 특정 인물을 뱀파이어로 지목해 희생양을 삼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사진=멀티비츠(지난해 불가리아에서 발견된 뱀파이어 유골)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6·25 참전한 동생 61년 만에 유골로 돌아왔다

    6·25 참전한 동생 61년 만에 유골로 돌아왔다

    열아홉 나이에 6·25전쟁에 참전했던 그가 가족 품에 돌아오는 데는 꼬박 61년이 걸렸다. 그 사이 누나는 팔순을 훌쩍 넘겼고, 여동생은 칠순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됐다. 1952년 6월 휴가를 나온 그는 고향(경북 문경)에 고구마를 심어 놓고 “가을에 캐서 맛있게 먹어라”라고 당부한 뒤 부대로 돌아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정철호(1931~1953) 이등상사 이야기다. 정 상사의 손때 묻은 유품이 누나 정상남(87), 여동생 정경분(68), 조카 정용수(55)씨에게 전달됐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단장 박신한 대령)은 11일 유해발굴 당시 정 이등상사의 관을 덮었던 태극기와 유품, 전사자 신원확인서 등을 울산 울주군의 정용수씨 자택에서 유족들에게 전달했다. 오빠의 흔적을 맞이하려고 대구에서 한걸음에 달려온 여동생 정씨는 “1953년 전사통지서를 받은 어머니께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에 휩싸였다”면서 “1979년 돌아가실 때까지 아들의 이름을 부르시는 등 평생을 한으로 보냈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고령인 누나는 복받치는 감정에 말문을 잇지 못했다. 고인은 1950년 11월 27일 입대했다. 유족들은 ‘고인이 총명했고, 당시 시골에서는 드물게 중학교에 다녔다. 영어도 곧잘 했다’고 기억했다. 평남 영원전투와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 횡성전투 등에 나섰다. 1953년 4월 상이기장을 받았고, 1954년 10월에는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될 만큼 전공을 세웠다. 정 이등상사의 유해가 발굴된 건 지난 5월 21일이다. 정전협정 체결 직전인 1953년 7월 15~18일 중공군 60군 181사단을 상대로 국군 8사단이 한 치의 땅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 철원 별우지구 현장에서 국유단이 유해와 철모, 야전삽 등을 발굴한 것. 가족 품으로 돌아가고픈 고인의 간절한 바람 덕일까. 유해와 함께 드러난 부식된 나무도장을 정밀감식한 결과 ‘鄭喆鎬’(정철호)란 이름이 나왔다. 병적기록부를 추적한 결과 6명의 동명이인이 확인됐다. 참가 전투 지역을 바탕으로 범위를 좁힌 국유단은 조카와 여동생의 DNA 시료를 채취해 혈연관계를 최종 확인했다. 정 이등상사의 유해는 유가족과의 협의를 거쳐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상)민간인 학살 경산코발트광산 르포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상)민간인 학살 경산코발트광산 르포

    장맛비가 퍼붓던 지난 4일, 경북 경산시 평산동의 폐(廢)코발트광산. 일제가 군사용 코발트를 확보하려고 1930년대 채광을 시작해 1942년 폐광된 동굴 입구는 냉동 창고 문이라도 열어 놓은 듯 한기를 쏟아냈다. 안전모를 쓴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들어선 갱도 바닥에는 광산 내부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고 침침한 전구 불빛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붉은색의 갱도 옆 벽면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꼭 온도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100여m를 더 들어가자 수직으로 뚫린 또 하나의 굴과 연결됐다. 동행한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 박의원 대표가 말문을 열었다. “수직 동굴 저 위쪽에서 6·25전쟁 당시 군인과 경찰들이 사람들을 줄줄이 묶은 채 총으로 쏴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수직 동굴 높이가 50m 정도인데 시체로 가득 차 더는 못 떨어뜨리게 되니까 나중에는 골짜기 이곳저곳에 시체들을 묻었다고 해요. 동굴에서 기관총 탄피나 수류탄 흔적도 발견됐어요. 산 채로 떨어진 사람들을 확실하게 처리했던 모양이에요.” 1950년 7~8월, 이곳에서 민간인 3500명이 군경에 의해 집단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희생자들은 경산, 청도 등지의 국민보도연맹원 1000여명, 대구형무소 수감자 2500여명 등이다. 앞서 1949년 이승만 정부는 좌익에 전향 기회를 주겠다는 명분으로 보도연맹을 만들었다. 1년 만에 보도연맹원 숫자는 30만명을 웃돌았다. 지역 할당제가 떨어지자 빨치산의 짐을 날라 주고 밥을 해 주고 심부름을 해 줬던 이들까지 보도연맹원으로 엮어 넣은 탓이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이 인민군과 동조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동시다발적으로 집단 학살에 나섰다. 1950년 여름, 남한 전역 수십여 곳에서 벌어진 학살 중 대전 산내 골령골과 더불어 가장 희생자가 많은 곳이 바로 경산이다. 1990년대부터 경산코발트광산 사건 규명에 천착해 온 최승호 경산신문 대표는 “정말 논매고 밭매다 붙들려 간 억울한 분들도 있겠지만 희생자 대부분이 보도연맹원인 것은 맞다”면서도 “하지만 살아남으려고 어쩔 수 없이 단순 부역을 했던 분들이다. 전쟁 중이라고 해도 법적 근거 없이 죽임을 당할 죄는 결코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회는 진상 규명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듬해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없던 일’이 됐다. 유족들은 군사정권의 서슬에 ‘빨갱이’로 몰릴까 봐 숨을 죽였다. 2000년대 들어 유족회와 시민단체 등이 유해 발굴에 나섰지만 정부와 경산시는 뒷짐만 졌다. 2005년 비로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면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굴에 나서 420여구를 수습했다. 이전까지 유족회가 발굴한 유골이 80여구다. 그동안 이곳에는 골프장과 노인요양병원이 들어섰다. 하지만 수십~수백m 떨어진 폐광과 골짜기에는 여전히 3000여구의 유골이 방치된 상황이다. 2010년 특별법 종료와 함께 발굴은 중단됐고, 그나마 유족들이 발굴한 80여구마저 임시 컨테이너에서 조금씩 부식되고 있다. 2010년 진실화해위 보고서는 ‘5·16 이후 유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받으며 현재까지 사회적 약자로 살아오고 있으며, 특히 연좌제로 인한 사회적 차별로 정상적인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밝혔다. 유가족 300여명은 지난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121억여원의 배상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국가의 항소로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남편을 잃은 10여명의 부인들을 비롯한 유족들은 정전 6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의 비극을 겪고 있다. 나정태 유족회 부회장은 “3000여구의 유골도 수습해야겠지만 시급한 건 컨테이너에 보관된 탓에 빠르게 훼손되고 있는 80여구를 처리하는 문제”라면서 “충북대에 보관 중인 420여구도 내년까진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국군 유해 발굴 사업처럼 하기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우리도 똑같은 국민”이라면서 “유골을 모아 합동 화장을 하고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장소와 작은 기념관 정도는 세울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 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경산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통일 2018’ 판타지에 국악 선율 넘실

    ‘한반도가 통일을 이룬 2018년, 홍범도 장군의 유골이 고국으로 돌아온다.’ 소리극 ‘아리랑’은 이렇게 시공간을 넘나드는 판타지극에 국악의 선율을 다채롭게 선사한다.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해 국립국악원이 기획한 공연으로, 26~30일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오른다. 연극계의 거장 오태석 연출가와 국악계의 거장 박범훈 작곡가의 결합이 특히 눈길을 끈다. 오태석 연출가는 “아리랑은 국민들의 ‘맥박’과 같은 노래”라며 “저마다의 사연만 얹으면 우리의 피를 뛰게 하는 노래를 젊은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하려고 통일이라는 허구의 상황을 가정했다”고 말했다. 올해가 남북 분단 60주년이라는 점에서 극은 해방 당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남북 중 어느 곳도 선택하지 못해 제3국을 선택한 위인들을 불러들였다. 그는 “홍범도 장군과 그의 아들이 통일이 되어 즐겁게 귀국하며 부르는 아리랑을 염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극은 갖가지 가상의 설정으로 호기심을 자아낸다. 남편 홍범도를 기다리는 122세의 아내, 메마른 아랄 호수에 드리는 기우제,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이 수위로 일했던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의 고려극장 등이 등장한다. 박범훈·김성국 작곡가는 자진아리, 해주 아리랑, 독립군 아리랑, 상주 아리랑 등 기존의 아리랑뿐 아니라 기쁨, 희망을 주제로 새로 작곡한 아리랑을 선보인다. 김광숙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대행)은 “마이크나 분장 없이 맨발로 무대에 서는 배우들의 힘으로 무대의 생생한 기운이 더 강하게 느껴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1만~3만원. (02)580-3300.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시생처럼 아예 엄지머리로 지내는 것이 신수에 편한 것이겠습니다.” “딱히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 지게를 지고 제사를 지내도 제멋이란 말도 있긴 하지만, 식솔을 두고 성가심을 받는 것도 겪어보면 사람 사는 낙이 아니겠나.” “행중 식구에게 부대끼는 것도 시생에게는 힘에 겨운데요.” “세상사란 보기에 따라서 다르게 보일 수 있네. 조그만 구멍 하나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바위를 높다랗게 쌓았다고 볼 수도 있고, 다르게 보면 높은 성벽을 단단하게 쌓기 위해서 둥그런 구멍을 터놓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나.” “무슨 말씀을 하는 것인지 시생은 대중을 못 하겠습니다.” 그때 권재만은 말없이 웃고 말았다. 상단 식구는 오랜만에 종아리에 칭칭 감았던 통행전과 신들메를 풀어 거풍을 시키거나, 담배 잎이나 신갈나무 잎사귀로 밑창을 깐 짚신들을 벗어 햇볕에 말리기도 하였다. 뼈에까지 사무쳤던 땀을 들인 축들이 나귀 등에서 복물짐을 내리는 광경을 멀리 비켜 앉아 지켜보면서, 정한조는 그런 생각에 젖어 있었다. 문득, 콧등을 스치는 강바람이 크게 차갑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강가에는 부들솜을 뭉친 것 같은 버들개지가 흐드러지게 피었고, 멀리 바라보이는 몇 그루의 버드나무는 어느새 연둣빛을 띠며 봄바람을 타고 주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분천 강가 길턱에는 나른한 봄빛이 찾아든 것이었다. 시절이 4월 하순으로 들어서면, 질경이에 새순이 돋고, 노린내 나는 괴불주머니, 노란 꽃다지, 눈 속에 피는 복수초, 자주색의 제비꽃, 쇠뜨기, 진달래, 곤드레 잎들이 피면서 수리부엉이가 번식을 시작한다. 너무 바쁘게 설치며 살아온 터라 시절이 바뀌는 것조차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이 가슴속으로 가만히 스며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봄볕에 취해 앉은 채로 꼬박 졸고 말았다. 상단 일행이 등짐을 거룻배로 옮겨 싣느라 북새통을 벌이는 중에 정한조는 사공막 앞에 앉아 흐릿한 눈으로 강 건너를 바라보는 늙은 사공 곁으로 갔다. 그가 나이로 보아선 띠 동갑으로 십수년 손위였지만 안면을 트고 흉허물 없이 지낸 지도 십 년이 넘는 사이였다. “요지간에 짐이나 괴나리봇짐 없이 거루를 타고 건너 다닌 패거리가 여럿이었소?” 강가에 기거하면서 늙어가는 사공이라면 지금 정한조가 건넨 언사가 언중유골임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사공으로 연명하려면 알고 있는 것이 많다 할지라도 미주알고주알 주둥이를 헤프게 놀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언사를 사양하지 않고 대중없이 나불거렸다간 사공막이 불살라지고 옆구리에 칼침을 맞는 변고를 겪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울진 염전과 현동과 내성을 수시로 오가는 소금 상단 행수와는 자별한 사이로, 나중에야 조리돌림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닌 보살로 손사래만 칠 수 없는 처지였다. 금쪽 같은 됫박 소금도 수시로 얻어먹은 전력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입이 간질간질하였으나 또다시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처지는 그렇다 할지라도 지금 거룻배에서 노질하고 있는 두 젊은이는 모두 늙은이 슬하에 거두고 있는 소생들이었다. 낡은 거룻배 한 척에 늙은이를 비롯해서 주렁주렁 매달린 가솔의 생계가 붙잡혀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간질거리던 입술이 굳어지고 말았다.
  •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곽개천의 분부가 떨어지기 바쁘게 쌓아두었던 삭정이에 불을 댕겼다. 마른 솔가지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산기슭을 타고 올랐다. 불을 피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녕 계곡길 위쪽으로 단단한 면목을 가진 장정 여섯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보기에는 계곡 위에 있는 묵정논을 갈아엎기 위해 나타난 농투성이 두 사람이 곁불을 쬐기 위해 화톳불을 피운 것처럼 보였다. 화톳불 가까이 다가가자 비위를 자극하는 냄새에 여섯 사람은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런 첩첩산중에서는 전혀 예견할 수 없었던 육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대처의 술청거리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광경을 산양 같은 짐승들도 가까스로 발을 붙이고 다니는 이런 조도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그릴 수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육고기를 굽고 있는 작자들의 행색이 겨우 삭숭이나 가린 남루한 농투성이들인지라, 자리를 비켜 달라고 다투지 않아도 되었다. 여섯 장정은 벌써부터 게걸이 들려 목젖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불을 피우던 세 사람은 익은 꽈리처럼 새빨간 얼굴로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산적들을 아무런 적의가 없는 시선으로 빤히 쳐다보기만 하였다. 산적 여섯은 화톳불 앞에 당도하자마자 고기 굽던 세 사람의 옆구리를 흙 묻은 신발로 툭 차서 밀쳐내고 화톳불가로 둘러앉으며 비꼬았다. “이놈들, 인적이라곤 눈 씻고 봐도 없는 이런 막다른 무인지경에 무슨 배짱으로 푸줏간을 열었겠다? 이곳에 호환이 잦다는 걸 모르느냐?” 다가온 떨거지들은 일견해서 입성들은 꾀죄죄했으나 지난밤에 잠을 설쳤는지 부리부리한 두 눈초리들이 마뜩잖았다. 그들의 번들거리는 면목과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마음을 다잡아 먹고 내색하지 않았다. 행중의 동무 한 사람이 우물쭈물하다가 반몸만 뒤틀고 볼멘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옆에 내려놓은 구럭*을 보면 눈치챘겠지만…, 우리는 풀뿌리나 캐 먹으며 연명하는 약초꾼들이오. 다행히 호환은 겪지 않았소만 댁들은 뉘신데…, 일삼아 구워놓은 남의 밥그릇부터 탐하시오. 찬물에도 순서가 있다 하지 않았소.” 아니나 다를까, 그중 한 놈이 괴춤 속을 뒤져 날이 시퍼런 예도 하나를 냉큼 꺼내 뉘시냐고 물었던 행중의 턱밑에 바싹 들이대고 이죽거렸다. “이놈 봐라. 좆도 모르는 놈이 탱자 보고 부랄 타령한다더니…야, 이놈아. 찬물에 아래위가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뜨거운 물에도 순서가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네놈이 뭔데 방정맞게 나불거리느냐.” “댁들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한시름 되더니 잘 만났소. 그렇다 하더라도 남의 좌석에 다짜고짜 비집고 들어앉아 이토록 반죽 좋게 굴면 되겠소?” 산적들은 행중의 말이 언중유골인 것은 눈치채지 못하고 대뜸 육두문자부터 들이댔다. “이 육포를 뜰 놈이 주둥이가 온전하다고 말 탄 년의 씹처럼 너부적너부적 제법 악지를 부리고 있네. 이놈아, 우리가 산채 사람이란 걸 몰라서 아득바득 파고드느냐? 이놈 조짐머리 보아하니 옆구리에 칼침이 들어가야 헤픈 주둥이를 닥치겠군.” *구럭: 망태기
  • [열린세상] ‘NLL-연평해전’ 따스한 추모영화를 기대하며/홍승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열린세상] ‘NLL-연평해전’ 따스한 추모영화를 기대하며/홍승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5월의 마지막 날이다. 6월에는 현충일을 시작으로 6·25전쟁과 2차 연평해전 추모일이 기다린다. 하기야 우리 해군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와 선제공격에 나선 북한 경비정을 격파하였던 1차 연평해전도 1999년 6월 15일에 있었다. 2차 연평해전을 소재로 영화 ‘NLL-연평해전’을 제작 중인 김학순 감독에게 ‘따스한 추모 영화’(memorial film)를 만드시라고 주문하였다. 여러 감독이 연평해전의 영화화에 관심을 나타냈으나 아무도 제작에 이르지 못했던 이유는 투자자가 나서지 않아서일 것이다. 김 감독도 영화진흥위원회의 ‘3D 영화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우여곡절 끝에 제작비 일부를 조달하였으나 더 이상 번듯한 투자사를 구하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제작진은 해군의 배려로 진해 해군기지를 이용할 수 있으니 오픈세트 제작비 수십억원을 절약한 셈이라고 서로 위로하고 있다.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2차 연평해전’은 2002년 6월 29일 벌어졌다. 월드컵 3, 4위전을 응원하느라 전국이 분주하던 바로 그날 우리 해군이 북한의 기습공격을 받은 사건이다. 윤영하 소령을 위시하여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이 전사하였고 18명이 크게 다쳤다. 40여일 후 심해에서 인양된 참수리 357호에는 한상국 중사의 시신이 그때까지 조타키를 움켜쥐고 있었다고 한다. 조천형 중사는 100일이 안 된 딸을 남기고 세상을 떴고, 박동혁 병장은 100여개의 파편을 품고 84일 만에 숨을 멈추었는데 그의 유골에서 나온 쇳덩이 무게가 3kg이었다니 고통이 어떠했으랴.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해전 다음 날 월드컵 결승전을 보러 일본으로 날아갔다는데 이후에도 추모행사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참모진이 ‘우발적 충돌’로 보고했을 터이나 참모진의 행태도, 대통령의 행보도 독해가 곤란하다. 대통령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청와대로 돌아와 비상태세를 갖추었어야 마땅한 상황이었다. 정권이 두 번 바뀐 6주기에 비로소 정부주관 행사로 격을 올렸고, 10주기 추모행사에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참석하였다. 해군 출신인 김 감독은, 정부도 국민도 희생자를 외면하던 황망한 분위기에서 해마다 추모제를 찾아 유족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영화계 주변을 얼쩡대던 나는 20년 전 뉴욕에서 김 감독을 만났다. 필라델피아 템플대학에서 영화 강의를 하던 김 감독이 미국 로케 영화 ‘아주 특별한 변신’(1993, 이석기 감독)에 현지 스태프로 참여한 것이 인연이었다. 김 감독은 작은 체구에 붐 마이크를 들고, 국내 스태프들에게 익숙하지 않던 현장음(ambience)까지 일일이 챙겼다. 그래서 그 영화는 우리 녹음기사들의 분석 교재가 되었다고 들었다. 그는 귀국하여 대학에 자리를 잡았으나 촬영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다큐멘터리로 여러 번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저예산 영화 ‘비디오를 보는 남자’는 영화기자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외국여행을 하다 보면 일상적인 추모 현장을 자주 발견한다. 조그만 시골 군청 벽면에서든 대학 캠퍼스 모퉁이에서든, 언제 어느 전쟁에서 산화하였다는 젊은이의 이름이며 사진을 접할 수 있다. 전쟁이라는 파렴치한 현상의 희생자로서든 그 사회를 지키다가 스러진 젊은이로서든, 그들의 터무니없는 죽음에 대한 공동체의 최소한의 예의인 셈이다. 김 감독은 전쟁영웅에 무감각한 우리 풍토를 아쉬워한다. 연평해전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는 김 감독의 의욕을 대하며 과연 크랭크인이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북한의 호전성에 대하여는 무조건 접어주어야 한다는 특이한 멘털리티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알기 때문이다. 2차 연평해전 발발 당시 권력의 핵심에서 벌어진 행태는 민망하지만, 그렇다고 영화 ‘NLL-연평해전’이 이념 과잉의 영화는 아니기를 바란다. 존재 그 자체로서 만만치 않은 사회적 가치를 보여줄 영화, 희생자들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하는 따스한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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