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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국군 전사자 욕보이는 부실 유해발굴 사업

    6·25 국군 전사자들의 유해 발굴 작업에 성과를 부풀리기 위한 조작이 횡행한다는 소식이 들리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그제 서울신문 보도에 따르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은 아군과 적군의 유품을 바꿔치기하는 방식으로 국군 유해 숫자를 부풀렸다고 한다. 발굴에 참여한 30여명을 인터뷰했더니 여럿이 같은 증언을 했다는 것이다. 국군에 총부리를 겨눴던 적군이 버젓이 현충원에 안장됐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 무엇보다 경건해야 할 전사자 유해 발굴에 이런 속임수가 판을 쳤다니 기가 막힌다. 국유단 주변에서는 계속 소문이 나돈 모양인데 국방부는 도대체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몰랐어도 문제이며, 알면서 모른 척했으면 더 문제다. 국유단은 2007년 국방부 직속 조직으로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그해 11억여원이었던 예산은 크게 늘어 올해는 70억원 정도다. 그만큼 의미가 큰 국가 사업인 것이다. 지금까지 국유단은 8600여구의 국군 유해를 발굴해 109구의 신원을 확인했다. 조작 의혹이 사실이라면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국군 유해 중에 적군도 끼어 있다는 뜻이다. 거꾸로 아군이 적군으로 판정돼 적군 묘지로 가는 황당한 일도 없었으리라는 법이 없다. 세월이 60년도 더 흘러 나뭇가지처럼 삭은 유골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가 쉬울 수는 없다. 평균 170곳을 파야 간신히 1구 정도의 유골을 찾을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런 상황이니 성과를 내겠다는 조바심 때문에 적군이 아군으로 둔갑되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전문적 식견도 없는 발굴 현장의 간부가 유해 주변의 무기와 유품을 바꿔치기하라거나, 심지어 유해자 수를 부풀리려고 동일인의 유해를 흩뜨려 놓게 한다는 증언도 있었다. 6·25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국군 16만여명 중 13만여구의 유해를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갈 길이 멀기만 한 국유단에서 의혹이 쏟아져 나오게 더이상 두고 볼 수는 없다.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국군 전사자들을 이 지경으로까지 욕보여서야 될 말인가. 유해 조작 의혹을 낱낱이 밝히고 지속적으로 감독해야 한다. 해외에서는 전사자 유해 발굴에 인류학자나 고고학자들까지 투입하는 마당이다. 발굴 지식이 없는 군 간부에게 현장 책임을 맡기는 관행부터 손봐야 한다. 잘못된 간섭을 받지 않는 민간 발굴 전문가들의 참여가 절실하다.
  • [커버스토리] ‘피아 판정’ 어떻게 이루어지나

    [커버스토리] ‘피아 판정’ 어떻게 이루어지나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은 전투 자료와 참전 용사·지역 주민 등의 증언을 토대로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정해 발굴에 나선다. 평균 170곳의 땅을 파야 1구 정도 유골을 찾을 만큼 쉽지 않은 과정이다. 지역별 임시감식소에서는 발굴 정황과 성별·연령·신장·인종 등 법의인류학적 감식 결과, 아군과 적군 유품 등의 분석 결과 등을 토대로 1차적으로 적군, 아군 판단을 한다. 국유단 중앙감식소로 옮겨진 유해는 세척을 끝내고 조직분석실과 3D(3차원)스캐너실, 현미경실 등에서 분석과 담당자의 토의를 통해 2차 피아 판단이 이뤄진다는 게 국유단 측의 설명이다. 이후 국방부 조사본부에 보관 중인 6·25전사자 유가족 유전자(DNA) 데이터베이스와의 일치 여부를 확인한 뒤 피아 판단 심의위원회에서 최종 판정을 내린다. 형식적으로는 4단계에 걸친 촘촘한 판정 체계를 갖고 있지만 현장의 1차 판단 결과가 유지되는 게 대부분이다. 지금껏 피아 판단 심의위원회에서 피아 판정이 뒤바뀐 경우는 세 차례뿐이다. 신원이 확인된 아군 유해는 현충원에 안장된다. 지난 15년간 발굴된 8606구의 아군 유해 중 신원이 확인된 건 109구(1.3%)에 불과하다. 미확인 유골은 국유단 유해보관소(국선재)에 임시 안치된다. 신원 확인의 최대 장애물은 유골에서 채취한 DNA와 비교할 샘플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신원 확인을 위해선 전사자의 8촌 이내 유가족 DNA가 필요하다. 2011~2013년 연평균 4340명의 DNA 시료를 채취했지만 지난해 2645명, 올 6월 현재 847명 등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국유단 관계자는 “유해 소재 제보는 물론 유가족 시료 채취에도 국민들의 적극적 참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천경자 화백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무슨 일 있었나

    천경자 화백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무슨 일 있었나

    천경자 화백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무슨 일 있었나천경자 화백 별세 사망설이 꾸준히 제기된 천경자 화백이 지난 8월 이미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91세. 천 화백의 딸 이혜선씨는 지난 여름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22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천 화백의 딸 이씨가 몇 달 전 미술관에 유골함을 들고 수장고에 다녀갔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이씨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김 관장은 “당시 이씨가 관련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줄 것을 강력 요청했다고 들었다”며 “개인적인 일이라 본인이 적절한 시점에 밝힐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지인은 이날 연합뉴스에 이씨로부터 “병석에 계시던 천 화백이 지난해 11월 추수감사절 이후 몸 상태가 안 좋아졌으며 지난 8월 6일 새벽 의사가 보는 가운데 돌아가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지인은 “천 화백의 시신은 화장했고 뉴욕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씨가 “같은 달 서울시에 협조를 요청한 뒤 서울시립미술관에 있는 ‘천경자 상설전시실’과 그의 작품이 보관된 수장고를 다녀왔다”며 “어머니가 아끼는 작품이 시립미술관에 있으니 가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언론에 관련 사실을 알리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고 그는 말했다. 꽃과 여인의 화가로 불리는 천 화백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거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큰딸 이씨의 간호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외부와 접촉을 끊은 천 화백은 의식은 있는 상태라는 것이 이씨를 통해 그동안 미술계에 알려져 온 사실이다. 미술계에선 천 화백이 길게는 10여 년 전 이미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성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했고 이씨는 이에 반발해 탈퇴서를 제출했다. 예술원은 이씨에게 공문을 보내 천 화백의 의료 기록 등을 요구했으나 이씨는 이런 예술원의 요구가 천 화백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응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본인 의사를 알 수 없는 예술원으로선 탈퇴 처리를 하지 않았으며 현재 인터넷 홈페이지에선 미술 분야 회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술원은 그간 천 화백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 했으나 직접적인 확인은 하지 못했다. 천 화백은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딸 이씨는 천 화백이 서울시에 기증했던 작품이 관리 소홀로 훼손됐다며 93점을 반환할 것을 2013년 요구하기도 했다. 천 화백은 여인의 한(恨)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려 1960~1980년대 국내 화단에서 여류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화풍을 개척했고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폭넓게 활동했던 ‘스타’ 화가였다. 그러나 여인의 모습을 그린 ‘미인도’를 둘러싸고 1991년에 일어난 위작시비는 천 화백 노년의 최대 시련으로 심적 충격 속에 절필을 선언한 바 있다. 미인도 위작 논란은 1991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천경자의 작품에 대해 작가가 직접 위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 인물화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에 포함됐다. 이 작품의 아트 포스터(복제품)를 본 친지에게서 “복제품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천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과 복제품을 검토해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이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고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림의 제작연도부터 소장경위 등을 추적해 진품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1999년 고서화 위작 및 사기판매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모씨가 검찰 수사과정에서 “화랑을 하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소액을 받고 달력 그림 몇 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위작 시비가 재연됐다. 이에 대해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미인도’(29Ⅹ26㎝)는 진짜이며 현대미술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면서 “한국화 위조범과 현대 미술관 중 어느 쪽을 믿느냐”고 반문했었다. 천 화백은 “자기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후속 조치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화랑협회에서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당시 화백은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품으로 오도하는 화단 풍토에선 창작행위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며 붓을 놓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직도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불명예를 안았고 엄청난 정신적 고초를 겪었다. 천 화백의 둘째딸 김정희씨는 당시 “위작 시비는 언젠가는 밝혀질 자명한 사건”이라며 “위작 여부의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국가기관이나 특정 이익단체가 조직적으로 나서 일평생 외골수로 작업한 화가의 작가 정신을 말살하는 사건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 세상과 조용한 이별

    ‘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 세상과 조용한 이별

    사망설이 꾸준히 제기됐던 천경자 화백이 지난 8월 91세를 일기로 미국에서 사망했으며 천 화백의 딸 이혜선(70·미국 거주)씨가 유골함을 들고 기증 작품이 전시된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대한민국예술원은 22일 오후 “예술원 회원인 천 화백이 지난 8월 6일 사망한 사실을 확인했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며 후속 행정조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울시립미술관 관계자에 따르면 이씨는 지난 8월 19일 서울시를 통해 미술관에 협조 요청을 하고 이튿날인 20일 천 화백의 그림이 전시된 상설전시실과 수장고를 다녀갔다.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미국 뉴욕으로 떠났던 천 화백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거동을 하지 못해 뉴욕 맨해튼에 있는 큰딸 이씨의 간호를 받아 왔다. 장기간 병석에 있던 천 화백은 지난해 11월 추수감사절 이후 몸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졌으며 지난 8월 6일 새벽 의사가 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졌다. 천 화백의 시신은 화장했고 뉴욕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딸 이씨는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천 화백이 의식은 있는 상태라고 주장해 왔지만 미술계에선 천 화백이 길게는 10여년 전 이미 사망한 게 아니냐는 등 추측성 소문이 무성했다. 2013년 이씨는 천 화백이 서울시에 기증한 작품이 관리 소홀로 훼손됐다며 기증 작품을 모두 반환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회원인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월 180만원의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하자 이에 반발해 탈퇴서를 제출했다. 한 예술원 회원은 “사망설이 꾸준히 제기되는 상태에서 유가족이 천 화백의 사망 사실을 즉각 알리지 않고 감춘 것은 뭔가 꺼림칙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며 “고인의 명예를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했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천 화백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거쳐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때 혼담을 피해 일본 유학을 떠나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여인의 한(恨)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려 1960~1980년대 국내 화단에서 여류 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화풍을 개척했고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폭넓게 활동했던 ‘스타’ 화가였다. 꽃과 여인의 화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미인도’를 둘러싸고 1991년 일어난 위작 시비에 말려 심적 충격 속에 절필을 선언한 바 있다. 그의 작품에는 여인의 고독과 애틋한 사랑,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 이국에 대한 동경, 자신을 지탱하려는 나르시시즘이 복합적으로 묻어 있다는 평이 뒤따른다. 대표작인 ‘길례언니’(1973), ‘고’(孤·1974),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 ‘탱고가 흐르는 황혼’(1978), ‘황금의 비’(1982) 등은 몽환적이고도 섬뜩한 눈빛의 여인이 등장하는 작가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뛰어난 글솜씨를 지녔던 천 화백은 ‘언덕 위의 양옥집’ ‘아프리카 기행 화문집’ 등 수필집과 단행본 10여권을 냈다. 그의 사망 소식에 따라 작품 가격 추이에도 관심이 모이고 있다. 지난 10년간 경매시장에서 천 화백 작품의 호당 평균 가격은 1700만원으로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 김환기에 이어 다섯 번째로 높다. 최고가로 낙찰된 작품은 2009년 K옥션을 통해 거래된 ‘초원Ⅱ’(1978, 105.5×130㎝)로 12억원에 팔렸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33] 불상 없는 불전 적멸궁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33] 불상 없는 불전 적멸궁

     강원도 정선 사북에서 만항재를 넘어 영월 상동으로 가는 길은 별빛이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코스로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발 1330m의 만항재는 포장도로가 놓인 고갯길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1573m의 함백산과 1567m의 태백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정선카지노가 있는 사북에서 고한을 거쳐 414번 지방도에 접어든 뒤 만항재로 오르다 보면 왼쪽에 정암사가 나타난다. 그저 퇴락한 산골 암자처럼 소박한 모습이지만, 내력을 살피고 나면 별빛을 찾아나선 여행이 더욱 뜻깊어질 것이다.  정암사에도 적멸궁(寂滅宮)이 있다. 흔히 통도사와 오대산 중대, 사자산 법흥사, 정암사를 4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한다. 설악산 봉정암을 더하기도 한다. ‘보배 보(寶)’자로 이름부터 화려하게 장엄한 다른 적멸보궁과는 달리 정암사 적멸궁은 과장이 없다. 다른 적멸보궁과 마찬가지로 정암사 적멸궁도 불상이 없는 절집이다. 부처님 자리에는 연꽃을 수놓은 붉은 방석이 하나 놓였을 뿐이다.  대신, 적멸궁 뒤로 돌계단이 놓여진 가파른 산길을 100m쯤 오르면 7층짜리 수마노탑(水瑪瑙塔)이 나타난다. 적멸궁은 수마노탑에 예배 드리는 공간이다.  수마노란 붉은색, 검은색, 흰색이 곱게 어우러진 석영의 일종이라고 한다. 신라 자장법사(590∼658년)가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645년 돌아올 때 용왕이 건넨 수마노로 탑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정암사에 전한다. 하지만 지금의 탑은 고려시대에 수마노가 아닌 석회암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아올린 이른바 모전석탑이다.  정암사의 옛 이름은 석남원(石南院)이다. 자장은 석남원을 창건하면서 중국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했다고 한다. 진신사리란 부처님의 유골이다. 부처님을 모셨는데, 부처 모습을 흉내낸 불상을 적멸궁에 두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런 형태의 적멸궁은 우리나라에서 창안되었다고 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7세기 신라불교가 이미 외래 교리를 주체적으로 소화하여 새로운 상징체계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만큼 성장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적멸(寂滅)은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고뇌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부처가 깨달음을 이룬 보리수 아래는 그래서 적멸도량이 된다. 깨달음의 장소를 건축적으로 구현한 것이 적멸궁이다. 법왕(法王)이 머무는 곳이니 궁(宮)이다. 정암사 수마노탑과 적멸궁은 불교의 본질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웅변한다.  글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시리즈 전체보기
  • 천경자 화백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대체 이유가?

    천경자 화백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대체 이유가?

    천경자 화백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대체 이유가?천경자 별세 사망설이 꾸준히 제기된 천경자 화백이 지난 8월 이미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91세. 천 화백의 딸 이혜선씨는 지난 여름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22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천 화백의 딸 이씨가 몇 달 전 미술관에 유골함을 들고 수장고에 다녀갔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이씨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김 관장은 “당시 이씨가 관련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줄 것을 강력 요청했다고 들었다”며 “개인적인 일이라 본인이 적절한 시점에 밝힐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지인은 이날 연합뉴스에 이씨로부터 “병석에 계시던 천 화백이 지난해 11월 추수감사절 이후 몸 상태가 안 좋아졌으며 지난 8월 6일 새벽 의사가 보는 가운데 돌아가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지인은 “천 화백의 시신은 화장했고 뉴욕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씨가 “같은 달 서울시에 협조를 요청한 뒤 서울시립미술관에 있는 ‘천경자 상설전시실’과 그의 작품이 보관된 수장고를 다녀왔다”며 “어머니가 아끼는 작품이 시립미술관에 있으니 가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언론에 관련 사실을 알리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고 그는 말했다. 꽃과 여인의 화가로 불리는 천 화백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거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큰딸 이씨의 간호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외부와 접촉을 끊은 천 화백은 의식은 있는 상태라는 것이 이씨를 통해 그동안 미술계에 알려져 온 사실이다. 미술계에선 천 화백이 길게는 10여 년 전 이미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성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했고 이씨는 이에 반발해 탈퇴서를 제출했다. 예술원은 이씨에게 공문을 보내 천 화백의 의료 기록 등을 요구했으나 이씨는 이런 예술원의 요구가 천 화백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응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본인 의사를 알 수 없는 예술원으로선 탈퇴 처리를 하지 않았으며 현재 인터넷 홈페이지에선 미술 분야 회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술원은 그간 천 화백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 했으나 직접적인 확인은 하지 못했다. 천 화백은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딸 이씨는 천 화백이 서울시에 기증했던 작품이 관리 소홀로 훼손됐다며 93점을 반환할 것을 2013년 요구하기도 했다. 천 화백은 여인의 한(恨)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려 1960~1980년대 국내 화단에서 여류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화풍을 개척했고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폭넓게 활동했던 ‘스타’ 화가였다. 그러나 여인의 모습을 그린 ‘미인도’를 둘러싸고 1991년에 일어난 위작시비는 천 화백 노년의 최대 시련으로 심적 충격 속에 절필을 선언한 바 있다. 미인도 위작 논란은 1991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천경자의 작품에 대해 작가가 직접 위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 인물화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에 포함됐다. 이 작품의 아트 포스터(복제품)를 본 친지에게서 “복제품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천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과 복제품을 검토해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이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고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림의 제작연도부터 소장경위 등을 추적해 진품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1999년 고서화 위작 및 사기판매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모씨가 검찰 수사과정에서 “화랑을 하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소액을 받고 달력 그림 몇 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위작 시비가 재연됐다. 이에 대해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미인도’(29Ⅹ26㎝)는 진짜이며 현대미술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면서 “한국화 위조범과 현대 미술관 중 어느 쪽을 믿느냐”고 반문했었다. 천 화백은 “자기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후속 조치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화랑협회에서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당시 화백은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품으로 오도하는 화단 풍토에선 창작행위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며 붓을 놓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직도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불명예를 안았고 엄청난 정신적 고초를 겪었다. 천 화백의 둘째딸 김정희씨는 당시 “위작 시비는 언젠가는 밝혀질 자명한 사건”이라며 “위작 여부의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국가기관이나 특정 이익단체가 조직적으로 나서 일평생 외골수로 작업한 화가의 작가 정신을 말살하는 사건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천경자 별세, 위작시비에 “대한민국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이유가?

    천경자 별세, 위작시비에 “대한민국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이유가?

    천경자 별세, 위작시비에 “대한민국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이유가? 천경자 별세 사망설이 꾸준히 제기된 천경자 화백이 지난 8월 이미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91세. 천 화백의 딸 이혜선씨는 지난 여름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22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천 화백의 딸 이씨가 몇 달 전 미술관에 유골함을 들고 수장고에 다녀갔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이씨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김 관장은 “당시 이씨가 관련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줄 것을 강력 요청했다고 들었다”며 “개인적인 일이라 본인이 적절한 시점에 밝힐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지인은 이날 연합뉴스에 이씨로부터 “병석에 계시던 천 화백이 지난해 11월 추수감사절 이후 몸 상태가 안 좋아졌으며 지난 8월 6일 새벽 의사가 보는 가운데 돌아가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지인은 “천 화백의 시신은 화장했고 뉴욕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씨가 “같은 달 서울시에 협조를 요청한 뒤 서울시립미술관에 있는 ‘천경자 상설전시실’과 그의 작품이 보관된 수장고를 다녀왔다”며 “어머니가 아끼는 작품이 시립미술관에 있으니 가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언론에 관련 사실을 알리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고 그는 말했다. 꽃과 여인의 화가로 불리는 천 화백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거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큰딸 이씨의 간호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외부와 접촉을 끊은 천 화백은 의식은 있는 상태라는 것이 이씨를 통해 그동안 미술계에 알려져 온 사실이다. 미술계에선 천 화백이 길게는 10여 년 전 이미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성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했고 이씨는 이에 반발해 탈퇴서를 제출했다. 예술원은 이씨에게 공문을 보내 천 화백의 의료 기록 등을 요구했으나 이씨는 이런 예술원의 요구가 천 화백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응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본인 의사를 알 수 없는 예술원으로선 탈퇴 처리를 하지 않았으며 현재 인터넷 홈페이지에선 미술 분야 회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술원은 그간 천 화백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 했으나 직접적인 확인은 하지 못했다. 천 화백은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딸 이씨는 천 화백이 서울시에 기증했던 작품이 관리 소홀로 훼손됐다며 93점을 반환할 것을 2013년 요구하기도 했다. 천 화백은 여인의 한(恨)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려 1960~1980년대 국내 화단에서 여류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화풍을 개척했고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폭넓게 활동했던 ‘스타’ 화가였다. 그러나 여인의 모습을 그린 ‘미인도’를 둘러싸고 1991년에 일어난 위작시비는 천 화백 노년의 최대 시련으로 심적 충격 속에 절필을 선언한 바 있다. 미인도 위작 논란은 1991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천경자의 작품에 대해 작가가 직접 위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 인물화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에 포함됐다. 이 작품의 아트 포스터(복제품)를 본 친지에게서 “복제품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천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과 복제품을 검토해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이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고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림의 제작연도부터 소장경위 등을 추적해 진품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1999년 고서화 위작 및 사기판매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모씨가 검찰 수사과정에서 “화랑을 하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소액을 받고 달력 그림 몇 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위작 시비가 재연됐다. 이에 대해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미인도’(29Ⅹ26㎝)는 진짜이며 현대미술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면서 “한국화 위조범과 현대 미술관 중 어느 쪽을 믿느냐”고 반문했었다. 천 화백은 “자기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후속 조치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화랑협회에서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당시 화백은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품으로 오도하는 화단 풍토에선 창작행위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며 붓을 놓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직도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불명예를 안았고 엄청난 정신적 고초를 겪었다. 천 화백의 둘째딸 김정희씨는 당시 “위작 시비는 언젠가는 밝혀질 자명한 사건”이라며 “위작 여부의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국가기관이나 특정 이익단체가 조직적으로 나서 일평생 외골수로 작업한 화가의 작가 정신을 말살하는 사건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천경자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대체 왜?

    천경자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대체 왜?

    천경자 별세, 위작시비에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대체 왜? 천경자 별세 사망설이 꾸준히 제기된 천경자 화백이 지난 8월 이미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91세. 천 화백의 딸 이혜선씨는 지난 여름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22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천 화백의 딸 이씨가 몇 달 전 미술관에 유골함을 들고 수장고에 다녀갔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이씨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김 관장은 “당시 이씨가 관련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줄 것을 강력 요청했다고 들었다”며 “개인적인 일이라 본인이 적절한 시점에 밝힐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지인은 이날 연합뉴스에 이씨로부터 “병석에 계시던 천 화백이 지난해 11월 추수감사절 이후 몸 상태가 안 좋아졌으며 지난 8월 6일 새벽 의사가 보는 가운데 돌아가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지인은 “천 화백의 시신은 화장했고 뉴욕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씨가 “같은 달 서울시에 협조를 요청한 뒤 서울시립미술관에 있는 ‘천경자 상설전시실’과 그의 작품이 보관된 수장고를 다녀왔다”며 “어머니가 아끼는 작품이 시립미술관에 있으니 가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언론에 관련 사실을 알리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고 그는 말했다. 꽃과 여인의 화가로 불리는 천 화백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거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큰딸 이씨의 간호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외부와 접촉을 끊은 천 화백은 의식은 있는 상태라는 것이 이씨를 통해 그동안 미술계에 알려져 온 사실이다. 미술계에선 천 화백이 길게는 10여 년 전 이미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성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했고 이씨는 이에 반발해 탈퇴서를 제출했다. 예술원은 이씨에게 공문을 보내 천 화백의 의료 기록 등을 요구했으나 이씨는 이런 예술원의 요구가 천 화백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응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본인 의사를 알 수 없는 예술원으로선 탈퇴 처리를 하지 않았으며 현재 인터넷 홈페이지에선 미술 분야 회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술원은 그간 천 화백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 했으나 직접적인 확인은 하지 못했다. 천 화백은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딸 이씨는 천 화백이 서울시에 기증했던 작품이 관리 소홀로 훼손됐다며 93점을 반환할 것을 2013년 요구하기도 했다. 천 화백은 여인의 한(恨)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려 1960~1980년대 국내 화단에서 여류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화풍을 개척했고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폭넓게 활동했던 ‘스타’ 화가였다. 그러나 여인의 모습을 그린 ‘미인도’를 둘러싸고 1991년에 일어난 위작시비는 천 화백 노년의 최대 시련으로 심적 충격 속에 절필을 선언한 바 있다. 미인도 위작 논란은 1991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천경자의 작품에 대해 작가가 직접 위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 인물화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에 포함됐다. 이 작품의 아트 포스터(복제품)를 본 친지에게서 “복제품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천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과 복제품을 검토해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이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고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림의 제작연도부터 소장경위 등을 추적해 진품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1999년 고서화 위작 및 사기판매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모씨가 검찰 수사과정에서 “화랑을 하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소액을 받고 달력 그림 몇 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위작 시비가 재연됐다. 이에 대해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미인도’(29Ⅹ26㎝)는 진짜이며 현대미술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면서 “한국화 위조범과 현대 미술관 중 어느 쪽을 믿느냐”고 반문했었다. 천 화백은 “자기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후속 조치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화랑협회에서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당시 화백은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품으로 오도하는 화단 풍토에선 창작행위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며 붓을 놓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직도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불명예를 안았고 엄청난 정신적 고초를 겪었다. 천 화백의 둘째딸 김정희씨는 당시 “위작 시비는 언젠가는 밝혀질 자명한 사건”이라며 “위작 여부의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국가기관이나 특정 이익단체가 조직적으로 나서 일평생 외골수로 작업한 화가의 작가 정신을 말살하는 사건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천경자 별세, 위작 시비 일자 “대한민국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왜?

    천경자 별세, 위작 시비 일자 “대한민국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왜?

    천경자 별세, 위작 시비 일자 “대한민국 예술원 탈퇴하고 붓 놓겠다” 왜? 천경자 별세 사망설이 꾸준히 제기된 천경자 화백이 지난 8월 이미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91세. 천 화백의 딸 이혜선씨는 지난 여름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22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천 화백의 딸 이씨가 몇 달 전 미술관에 유골함을 들고 수장고에 다녀갔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이씨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김 관장은 “당시 이씨가 관련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줄 것을 강력 요청했다고 들었다”며 “개인적인 일이라 본인이 적절한 시점에 밝힐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지인은 이날 연합뉴스에 이씨로부터 “병석에 계시던 천 화백이 지난해 11월 추수감사절 이후 몸 상태가 안 좋아졌으며 지난 8월 6일 새벽 의사가 보는 가운데 돌아가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지인은 “천 화백의 시신은 화장했고 뉴욕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씨가 “같은 달 서울시에 협조를 요청한 뒤 서울시립미술관에 있는 ‘천경자 상설전시실’과 그의 작품이 보관된 수장고를 다녀왔다”며 “어머니가 아끼는 작품이 시립미술관에 있으니 가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언론에 관련 사실을 알리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고 그는 말했다. 꽃과 여인의 화가로 불리는 천 화백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거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큰딸 이씨의 간호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외부와 접촉을 끊은 천 화백은 의식은 있는 상태라는 것이 이씨를 통해 그동안 미술계에 알려져 온 사실이다. 미술계에선 천 화백이 길게는 10여 년 전 이미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성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했고 이씨는 이에 반발해 탈퇴서를 제출했다. 예술원은 이씨에게 공문을 보내 천 화백의 의료 기록 등을 요구했으나 이씨는 이런 예술원의 요구가 천 화백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응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본인 의사를 알 수 없는 예술원으로선 탈퇴 처리를 하지 않았으며 현재 인터넷 홈페이지에선 미술 분야 회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술원은 그간 천 화백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 했으나 직접적인 확인은 하지 못했다. 천 화백은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딸 이씨는 천 화백이 서울시에 기증했던 작품이 관리 소홀로 훼손됐다며 93점을 반환할 것을 2013년 요구하기도 했다. 천 화백은 여인의 한(恨)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려 1960~1980년대 국내 화단에서 여류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화풍을 개척했고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폭넓게 활동했던 ‘스타’ 화가였다. 그러나 여인의 모습을 그린 ‘미인도’를 둘러싸고 1991년에 일어난 위작시비는 천 화백 노년의 최대 시련으로 심적 충격 속에 절필을 선언한 바 있다. 미인도 위작 논란은 1991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천경자의 작품에 대해 작가가 직접 위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 인물화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 전시에 포함됐다. 이 작품의 아트 포스터(복제품)를 본 친지에게서 “복제품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천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과 복제품을 검토해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이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고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림의 제작연도부터 소장경위 등을 추적해 진품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1999년 고서화 위작 및 사기판매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모씨가 검찰 수사과정에서 “화랑을 하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소액을 받고 달력 그림 몇 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위작 시비가 재연됐다. 이에 대해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미인도’(29Ⅹ26㎝)는 진짜이며 현대미술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면서 “한국화 위조범과 현대 미술관 중 어느 쪽을 믿느냐”고 반문했었다. 천 화백은 “자기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후속 조치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화랑협회에서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당시 화백은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품으로 오도하는 화단 풍토에선 창작행위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며 붓을 놓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직도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불명예를 안았고 엄청난 정신적 고초를 겪었다. 천 화백의 둘째딸 김정희씨는 당시 “위작 시비는 언젠가는 밝혀질 자명한 사건”이라며 “위작 여부의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국가기관이나 특정 이익단체가 조직적으로 나서 일평생 외골수로 작업한 화가의 작가 정신을 말살하는 사건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박 대통령, 한국전 참전기념비 헌화…흥남철수 후손 참석

    박 대통령, 한국전 참전기념비 헌화…흥남철수 후손 참석

    미국을 공식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14일 오전 11시(현지시간) 워싱턴 한국전 참전 기념비에 헌화했다.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첫 일정인 헌화 행사는 한미 양국의 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국기에 대한 경례, 헌화, 묵념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유엔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21개국의 국기도 내걸렸다. 1995년 7월 제막한 한국전 참전기념비(Korean War Veterans Memorial)는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유명한 문구가 새겨져 있는 기념물로 올해가 제막 20주년이 된다. 한국전 참전기념비는 우리나라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와 군, 사회 주요인사 등이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가장 먼저 찾는 장소라는 점에서 ‘한미 동맹의 성지’로 불린다. 이날 행사에는 존 맥휴 미국 육군성 장관, 존 틸럴리(8대)·월터 샤프(12대) 전 한미연합사령관, 커티스 스캐퍼로티 현 한미 연합사령관, 김재창·박선우 전 연합사 부사령관, 한국전 참전 용사, 지갑종 유엔 한국전 참전국 협회장 등 120여명이 참석했다. 특히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의 손자인 클리프튼 트루먼 대니얼 트루먼대통령기념관장, 한국전 당시 에드워드 알몬드 미국 육군 10군단장의 외손자인 토머스 퍼거슨씨도 함께 해 자리를 빛냈다. 트루먼 전 대통령은 한국전이 발발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해 참전을 결정했고 알몬드 장군은 흥남철수 작전시 피난민 승선 결단을 내려 북한에 있던 주민 10만여명을 탈출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또한 흥남철수작전에 참여해 1만4000여명의 피난민을 구한 미국 상선 메리디스 빅토리호의 1등 항해사였던 로버트 루니 미국 해군 예비역 소장, 1950년 낙동강 지구 전투에서 실종된 제임스 엘리엇 미군 중위의 딸인 조르자 래 레이번씨도 헌화 행사에 참석했다. 레이번씨는 지난 5월 보훈처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올 2월 작고한 모친의 유골을 경북 칠곡군의 낙동강에 뿌리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던 2013년 5월에도 한국전 기념비에 헌화한 바 있다. 워싱턴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 해외여행 | Shalom, Israel 샬롬, 이스라엘②Judean Desert·Dead Sea 유대광야·사해, Masada 마사다

    해외여행 | Shalom, Israel 샬롬, 이스라엘②Judean Desert·Dead Sea 유대광야·사해, Masada 마사다

    ●Judean Desert·Dead Sea 유대광야·사해 광야Judean Desert를 지나 사해Dead Sea로 예루살렘을 벗어나 동쪽으로 달린다. 어떤 생명체도 살지 못할 듯 삭막하고 건조한 풍광이 펼쳐진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곳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대광야Judean Desert’라 부르는 암석사막이다. 예로부터 하느님께 몸을 바치려는 자들에게 황폐하고 쓸쓸한 유대광야는 이상적인 장소였다. 이들은 광야의 절벽을 깎고 수도원을 만들고 기도했다. 예수가 40일간 금식하고, 악마의 시험을 받으며 깨달음을 얻은 곳도 유대광야다. 그는 광야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광야의 끝에 사해가 나타난다. 해발 820m의 예루살렘에서 해발 마이너스 423m의 지하세계로 간다. 사해로 가는 길은 해저로 내려가는 길이다. 지구상에서 사람이 사는 곳 중 가장 낮은 곳이 사해다. ‘죽은 바다Dead Sea’라는 무서운 이름과 달리 사해는 곱디고운 옥빛이다. 색이 너무 예뻐 깜짝 놀랐다. 죽음의 색이 이런 거라면 지구상에서 죽음이 가장 매혹적으로 여겨질 곳이 사해일지도 모르겠다. 에인 보켁Ein Bokek의 관광단지에 위치한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수영복을 챙겨 입고 5분 거리의 바닷가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정말 둥둥 떠 있다. 바닷물 속에서 수영은 하지 않고 가만히 둥둥 떠 있는 사람들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사해 바닷물 속으로 발길을 옮긴다. 진한 염도 때문인지 미끈미끈한 바닷물이 기름처럼 쩍쩍 몸에 달라붙는 것 같다. 문득 궁금하다. 이 소금물 속에 얼굴을 담가 보면 어떨까? 장난기가 발동해 눈을 감고 얼굴을 넣어 본다. 아, 순식간에 눈가가 짜릿짜릿하다. 눈을 감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완전 오산이다. 내 손을 잡아끄는 누군가에 이끌려 샤워장으로 갔다. “여기서 수영할 수 없는 걸 몰랐어요?” “저 앞에 대기 중인 앰뷸런스 못 봤어요?” 눈에 스며든 염분을 씻어 내느라 경황없는 내게 그는 몇 번이나 괜찮은지를 되묻는다. 그는 내가 수영을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느 한국 신문에선가는 사해 물에 빠지면 실명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던데 나는 말짱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제 다시 사해 물 속에 얼굴을 담글 일은 없겠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사해의 남북 길이는 약 80km, 폭은 17km 정도다. 크고 넓다. 장소에 따라 사해 소금물은 여러 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염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해의 염도는 대략 33.7%, 보통 바다의 8배로 1리터당 340g의 염분을 갖고 있다. 세계 최고다. 수영을 할 순 없지만 사해를 찾는 관광객들이 빼먹지 않는 건 머드팩이다. 사해 바다 속 진흙은 염화마그네슘, 염화나트륨, 염화칼슘 등 무기질을 풍부히 갖고 있어 피부 미용에 좋다. 생명은 살지 않는데 미용에는 좋다는 곳이 사해다. 사해 건너편은 요르단이다. 동편이니 요르단 저 편에서 해가 떠오를 게 분명하다. 새벽 5시, 다시 사해 바닷가로 나간다. 소금 덩어리가 바닷물 속에 응결된 소금꽃 바닷물 속에 둥둥 뜬 채 떠오르는 태양을 맞는다. 이 순간을 위해 12시간 비행기를 타고 여기까지 왔구나 생각될 만큼 기억에 남은 순간이다. ●Masada 마사다 유대인의 초상, 마사다Masada 사해를 떠나 갈릴리에 도착하기 전에 들른 곳이 있다. 두 개의 사해 사이에 있는 마사다Masada다. 마사다는 사해 서쪽, 깎아 세운 듯 가파른 고원에 지어진 고대의 왕궁이자 요새다. 케이블카를 타고 마사다 정상으로 향한다. 꼭대기에 오르니 서쪽으로는 계단 모양의 단구와 구릉이 많은 유대광야가, 동쪽으로는 옥빛의 사해가 펼쳐진다. 아무리 살펴봐도 동서남북의 끝은 모두 가파른 벼랑이다. 사해 수면을 기준으로 450m 높이에 건설된 마사다 요새의 길이와 너비는 각각 650m, 300m 정도로 사막에 있는 요새라 하기에 장대한 규모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케이블카 오른편의 ‘북쪽 궁전’은 벼랑의 단구를 깎아 3개 층으로 만들었다. 북쪽 궁전 외 서쪽에도 궁전이 있다. 웨스턴 게이트 부근이다. 고대 로마 양식으로 지은 마사다의 궁전은 흔히 헤롯의 ‘요새 궁전’이라 불린다. 궁전 외에도 유대교 회당, 남쪽 물 저장고, 대중목욕탕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마사다 요새 서쪽 아래로는 로마군이 마사다를 공격할 때 사용한 공성의 흔적도 남아 있다. 마사다는 기원 후 70년, 로마 황제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에도 끝까지 로마에 맞선 유대인 전사들의 마지막 항전지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유대인 반란군은 마사다에 모여 결사항전을 다짐했고, 로마군은 철벽 요새인 마사다 서쪽 웨스턴 게이트 옆에 돌과 흙을 다져 댐을 쌓듯 거대한 경사로를 만들어 공격한다. 기원 후 73년 항전의 마지막 날,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할 지경에 이른 960명의 유대인은 집단 자결한다. 로마군은 마사다를 포위한 지 3년 만에 성벽을 넘었지만 그들이 마주한 것은 수많은 시신들이었다. 유대인들은 노예로서 목숨을 연장하는 대신 죽음을 선택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이를 명예로운 죽음으로 기억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마사다는 압제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상징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마사다 함락 이후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로마군은 40년에 걸쳐 마사다에 주둔하다 철수하고, 마사다는 버려진다. 그 후 몇몇 크리스천 공동체가 마사다에서 생활하기도 했으나 이들마저도 사라지고 1960년대 초반, 이스라엘군 참모총장 출신인 야딘의 주도하에 발굴이 시작될 때까지 마사다는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진다. 정작 1960년대 발굴시 집단 자결한 이들의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마사다는 영원한 성지이자 고대 유대 왕국의 증거다. 오늘날 마사다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신병 훈련을 마치는 장소로 종종 사용된다. 그들이 훈련을 마치며 외치는 말이 있다. “마사다는 두 번 다시 함락되지 않는다!” 에디터 천소현 기자 글·사진 Travie writer 박준 취재협조 이스라엘정부관광청 www.goisrael.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해외여행 | 슬로바키아 중심에서 만난 몰랐던 유럽②낡은 성들의 유혹 캐슬과 샤또

    해외여행 | 슬로바키아 중심에서 만난 몰랐던 유럽②낡은 성들의 유혹 캐슬과 샤또

    ●낡은 성들의 유혹 Castles & Chateaux 캐슬과 샤또 슬로바키아는 숱한 전쟁의 무대였다. 헝가리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몽골 타타르족과 투르크족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음을, 슬로바키아의 남은 성들이 증명하고 있다. 성의 파괴가 적에 의해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세금이나 관리비를 부담할 수 없어서 성주가 일부러 불을 놓 는 경우도 있었고, 세월이라는 파괴자의 위력도 대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슬로바키아에는 100 여 개의 성과 2,100여 개의 대저택들이 남아 있다. 차에서 졸다가 깰 때마다 새로운 성과 성터들이 보이는 이 유다. 용도 폐기된 성들의 운명은 제각각이다. 세계적인 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는 곳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폐허 로 방치되는 곳도 있다. 운이 좋으면 새로운 주인을 만나 호화스러운 호텔로 변신하기도 하고 정부에 귀속되어 박물관으로 운영되기도 한다. 역사의 부침이 컸던 만큼 중세에 우후죽순처럼 불어났던 슬로바키아의 성들은 아 직 각자의 운명을 시험 중이다. 로맨틱한 중세의 유혹 보이니체 성Bojnice Castle 로맨틱한 외관으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성이다. 1113년 문헌에 처음으로 존재를 드러낸 보이니체 성은 목재 요새에서 시작하여 차례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이 더해진 우아한 레지던스로 변신했다. 현재 모 습대로 네오고딕 양식의 로맨틱한 성이 완성된 것은 성의 소유가 장 팔피Jan Frantisek Palfi, 1829~1908년 백 작에게 넘어가면서다. 최고를 추구했던 탓에 공사가 무려 22년이나 걸렸고, 팔피 백작은 완성된 성을 보 지 못하고 후손 없이 죽고 말았다. 이후 유산을 둘러싸고 일어났을 친척들의 분쟁이야 뻔한 이야기. 황금의 방 Golden Hall, 주방, 사무실 등 호사스러운 내부를 깨알같이 설명해 주는 가이드 투어가 매일 진행된다. 지하의 거대한 동굴과 성 뒤쪽의 공원을 둘러보는 시간도 꼭 확보할 것. Zamok a okolie 1, 972 01 Bojnice, Slovakia 8유로(가이드 투어 포함) 5~9월 9:00~17:00, 10~4 월 10:00~15:00 +421 46 543 06 24 www.bojnicecastle.sk 중부 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요새 스피슈 성The Spiš Castle(Spišský Hrad)​ 해발 634m 높이의 고지에 4만1,426km²가 넘는 요새가 우뚝 솟아 있다. 1780년 세금을 피하기 위한 성주의 고의 화재로 소실된 성은 그 뼈대와 터만 남아 있지만 중부 유럽 최대 규모의 중세 요새라는 위용은 여전하다. 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일품.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촬영지인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 잔해일 뿐이 지만 르네상스, 로마네스크, 바로크, 고딕양식의 흔적이 모두 찾아질 뿐 아니라 신석기 시대의 유골이 발견되 기도 했다. 주방, 화장실 터 등도 흥미롭지만 지하의 감옥이나 무기저장고, 중세의 식사예절을 설명해 놓은 전 시 등 보기보다 볼거리가 풍부하다. Žehra, Slovakia 성인 6유로 9:00~16:00(5~9월 9:00~18:00, 4월, 10월 9:00~16:00, 11월 10:00~15:00, 12~3월 폐쇄) +421 53 454 13 36 www.spisskyhrad.com 시민들의 휴식처가 된 트렌친 성Trenčín Hrad 트렌친은 서로마 제국의 국경에 위치했던 도시이자 발칸반도에서 북유럽으로 이어지던 무역로 상에 자리잡은 도시다. 그 위치의 중요성 때문에 많은 침략을 받았지만 같은 이유로 항상 재건되곤 했던 곳이다. 일찌감치 9 세기 모라비아 왕국 때 타워가 세워졌고, 11세기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13세기 마테 카사크Mate Csak 성주의 통치 아래에서 가장 번성했다. 지금도 슬로바키아의 성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인근에 50개의 성을 소유했던 마테는 바강Vah River의 왕으로 불리기도 했었다. 비탈을 거슬러 성 입구로 올라가면 바강을 끼고 형 성된 트렌친과 이웃 도시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터키의 귀족 오마르와 파티마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사랑의 우물을 포함해 여러 개의 궁전으로 구성된 성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가이드 투어가 필수다. Mierove namestie 46 912 50 Trenčín, Slovakia 그랜드 투어 | 성인 5.1유로, 미니 투어 | 성인 3.6유로 +421 32 743 56 57 www.muzeumtn.sk 로마 가톨릭의 화려한 유산 니트라 성Nitra Hrad 니트라는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5세기경 카르파티안 산맥을 넘어온 슬라브족이 처음 자리를 잡 은 곳이 바로 니트라였기 때문. 상인 출신의 사모Samo가 7세기에 첫 번째 통합국가를 건국하였고 830년경 프리 비나Pribina 왕자가 슬로바키아 최초의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833년에 이르러 모라비아의 왕자 모이미 르 3세가 프리비나 왕자를 몰아내고 대 모라비아 제국을 세웠다. 첫 번째 교회의 유적은 니트라 성 아래 묻혀 있다. 성 에머람 성당Cathedral-Basilica of St. Emeram, 주교궁전, 교구 박물관 등으로 운영 중인 니트라 성 은 니트라 교구의 관리를 받고 있는 중요한 가톨릭 박물관이다. 내부에 전시된 성물들의 화려함은 입이 쩍 벌 어질 정도. 입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끌어안을 듯 팔을 벌리고 있는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동상도 인상적이다. Nám. Jána Pavla II. č. 7, P. O. Box 46/A, 950 50 Nitra, Slovakia 10:00~14:00(11~3월은 17:00까지 오픈) +421 37 772 1747 www.nitrianskyhrad.sk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Articular Churches 슬로바키아 목조 교회 목조 건축의 단점은 명확하다. 쉽고 저렴하지만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로 교회 를 세울 때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18세기 초 세워졌던 목조 교회에는 놀라운 탄생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슬로바키아는 가톨릭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구의 70% 가까이가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 863년 데살로니카에서 온 키릴로스St.Cyril와 메토디우스St. Methodius의 포교 이후 그 주류가 바뀐 적은 없었다. 그 한결같음에는 어쩔 수 없이 타 종교에 대한 배타가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16세기 유럽에는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 바람이 불었다. 이 영향으로 유럽 전역에 프로테스탄트로의 개종이 급 증하기 시작했다.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분열을 가다듬은 가톨릭의 반격은 특히 합스부르크 영토에서 활발했는데, 신교도에 대한 박해와 순교까지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케즈마록 출신의 백작이 오 스트리아 황제 레오폴드 1세로부터 부분적인 종교의 자유를 얻어냈고, 당연한 수순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은 교회 를 세우고 싶어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반드시 마을 외곽에 자리잡아야 하고 도로쪽으로는 문도 낼 수 없었다. 건축 재료로는 나무만을, 심지어 못 조차도 나무못을 사용해야 했으며 그것도 1년 안에 완공하는 조건이었다. 눈에 띄는 첨탑 등을 세울 수 없는 것은 물론이었다. 이런 조건 아래 완공된 목조 교회들을 ‘아티큘라 교회Articular Church’라고 한다. 계약Article이라는 이름의 ‘미션 임파서블’에도 불구하고 1718년에서 1730년 사이 38개의 교회들이 건립되었다. 현존하는 5 개 중 3개Kežmarok, Hronsek, Leštiny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 놀랍지 않을 정도. 현재 슬로바키 아에는 로마 가톨릭과 신교도 교회를 포함하여 총 60여 개의 목조 교회가 남이 있고 그중 유네스코세계문화유 산으로 지정된 것은 총 8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케즈마로크의 목조 교회와 흐론섹의 목조 교회를 차례로 방문했었다. 목재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대리석 교회 부럽지 않은 성상과 장식은 정성이라는 말로밖에 표현되지 않았다. 교회들은 낡았지만 규모가 컸고, 여전히 예 배를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흐론섹 교회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었던 팔순의 노파도 교회처럼 정정했다. 교회 마당으로 나온 가이드 마틴이 옆집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여기 사세요?’라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웅. 운이 나쁘지!”였다. 모두 한바탕 웃었다. 시도 때도 없이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상대하는 일이 노파에게는 얼마나 성가신 일이겠는가. 하지만 막상 설명에 나서면 작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알려 주는 그녀의 열정은 직업이 아니라 신앙에 서 나온 것처럼 보였다. 불가능할 것 같은 조건에서 탄생한 목조 교회들이 수백년 뒤에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이 되어 슬로바키아의 자랑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스칸디나비아 스타일로 흐론섹 목조 교회Dreveny Artikularny Kostol Hronsek 땅부터가 척박했다. 흐론섹 목조 교회는 강가의 습지에 세워졌다. 1725년 10월에 공사를 시작했다는 것뿐, 건 축가의 이름도 완공 날짜도 알지 못한다. 건축양식에서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이 엿보이기에 당시 스칸디나비아 에 있는 루터 교인들의 지원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기둥의 배열이나 지붕을 지탱하는 빔 등의 기술 은 빠른 시일 내에 완공해야 했던 제약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었던 핵심적인 요인이었다고. 이례적으로 2층의 네 면에 모두 좌석을 두어서 중앙의 제단을 내려다볼 수 있는데, 총1,100여 명을 수용하는 규모다. Augusta Horislava Krčméryho 8 976 31 Hronsek, Slovakia 9:00~17:00 +421 48 418 81 65 스웨덴 선박을 닮은 창 케즈마로크 목조 교회Dreveny Artikularny Evanjelicky Kostol 건물 외벽에 회반죽을 발라 놓은 케즈마로크Kežmarku목조 교회는 1688년 세워졌고 1717년에 재건축된 것이다. 4면으로 뻗은 팔의 길이가 똑같은 그리스 십자가의 형태로 설계하는 과정에 스웨덴 선원이 참여했다는 이야기 가 전해지는데, 교회 창의 모양이 선박의 둥근 창과 매우 흡사하여 이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대리석처럼 보이기 위해 세심하게 조각하고 색칠한 제단에서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고 싶었던 간절함 마음이 엿보인다. Hviezdoslavova, 060 01 Kežmarok, Slovakia 9:00~12:00, 14:00~16:00 +421 52 452 22 42 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슬로비카아관광청 www.sacr.sk 슬로바키아관광청 한국사무소 02 2265 2247 슬로바키아대사관 페이스북 www.facebook.com/Slovak.Embassy.Seoul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톡! 톡! talk 공무원]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마지막 안식처’ 단순 묘역 아닌 역사 교육의 장 됐으면”

    [톡! 톡! talk 공무원]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마지막 안식처’ 단순 묘역 아닌 역사 교육의 장 됐으면”

    충남 천안 서북구 성거읍에는 일제강점기 수난을 겪다 해외에서 숨진 동포들의 작은 묘역이 있다. 묘비에 새겨진 이름 하나하나가 한국사의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들이다. 1976년 조성된 이곳 ‘국립 망향의 동산’에는 일본과 러시아 사할린의 탄광, 토목공사장 등에서 가혹한 노동을 강요받다 숨진 강제징용 피해자가 잠들어 있다. 보건복지부 오양섭(58) 서기관은 2011년 1월 국립 망향의 동산 관리원장으로 부임해 고향을 그리다 죽어서야 고국 땅에 묻힌 고단한 넋들을 5년째 돌보고 있다. ●일제 침탈·민족 수난사 ‘생생’ 청소년들에게 일제강점기는 그저 역사책 속 이야기지만, 오 원장에게 일제 침탈과 민족 수난사는 매일 마주하는 생생한 ‘현장’이다. 지금도 러시아 사할린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사망한 한국인의 유골이 망향의 동산으로 끊임없이 오고 있다. 지난 9월에는 사할린 현지에서 발굴된 유골 13위(位) 가운데 11위가 망향의 동산 봉안당에 안장됐다.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희생자 유골 봉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숨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9명도 이곳에 묻혔다. 망향의 동산에선 매해 10월 2일 유족과 재외동포가 참석한 가운데 합동 위령제가 열린다. 재일동포 유해 212기가 처음 안장된 날이다. 오 원장은 “70년 이상을 떨어져 살아생전 만나지도 못하고 유해로서 부모 자식, 배우자 간 상봉하는 것을 볼 때 그 마음은 말로 표현 못 한다”고 말했다. 이곳 직원들의 주 업무는 위령제 준비와 묘역 관리, 안장, 방문객 안내 등이다. 피해자들의 마지막 안식처를 지킨다는 생각에 사명감으로 일하지만, 복지부 본부와 떨어진 탓에 주목을 받진 못한다. 복지부 초임 직원 중에는 망향의 동산이 복지부 관할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망향의 동산은 1970년대 중앙정부가 천안시(당시 충남 천원군)로부터 관리 업무를 넘겨받을 당시 재외동포 국립묘지라는 특성 때문에 장사 법규와 행정을 주관하는 복지부가 맡게 됐다. ●“역사 교육관 건립하고파” 오 원장과 관리원 직원들의 바람은 망향의 동산이 그저 묘역이 아니라 역사 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망향의 동산 이름을 본떠 만든 경부고속도로 ‘망향 휴게소’는 알아도 망향의 동산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 원장은 “광복 70주년을 되돌아보며 참혹한 고난을 겪은 분들도 기억해야 한다”며 “후손에게 국권 상실의 아픔과 교훈을 일깨워줄 수 있도록 근대사를 축약한 역사 교육관을 망향의 동산에 건립하고 싶다”고 말했다. 천안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경기도 연천 일대서 6·25 전사자 유해 봉송

    경기도 연천 일대서 6·25 전사자 유해 봉송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발굴 부대 장병들이 추석을 앞둔 22일 6·25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경기 연천 무명 293고지에서 수습한 3구의 유해가 담긴 유골함을 운구하고 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日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 봉환] “3000㎞ 대장정… 꼭 돌려 드려야만 했다”

    [日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 봉환] “3000㎞ 대장정… 꼭 돌려 드려야만 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강제 징용 희생자들의 유골 115위(位)가 광복 70주년 추석을 앞둔 20일 경기 파주시 용미리 서울시립묘지에 안장돼 고국 산천에 비로소 몸을 뉘었다. 이번 유골 봉환 작업에는 일본 민주당 중의원(하원)을 지낸 고바야시 지요미(46·여)도 참여했다. 고바야시는 지난 11일 홋카이도에서 출발해 19일 서울광장에 유골이 도착하기까지 3000㎞에 달하는 봉환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했다. 고바야시는 이날 “몸은 힘들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유골들을 돌려 드려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안전하게 유골을 고향까지 보내드리는 것, 그리고 (유골 봉환 작업에 나선) 참가자들의 몸 상태가 나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고 강조했다. 봉환 작업을 주도한 곳은 한·일 시민단체가 만든 ‘강제노동 희생자 추모 및 유골 귀향 추진위원회’. 고바야시는 추진위원회 일본 측 단체인 동아시아시민네트워크 부대표를 맡고 있다. 2010년까지 홋카이도에서 중의원으로 활동한 그는 2003년부터 조선인 유골 발굴과 송환 문제에 관여한 ‘지한파’로 꼽힌다. 의원 시절 ‘전후 보상을 생각하는 의원 연맹’ 등의 활동을 통해 꾸준히 한·일 문제를 환기시켜 온 고바야시는 2013년 일본 민주당 전·현직 의원들과 함께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를 방문한 바 있다. 일본 전국에는 수많은 조선인 강제 동원 피해자의 유골이 있지만 정부는 현재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양국 정부는 2008년 1월~2010년 5월 일본 사찰에 보관돼 온 조선인 군인과 군무원 유골 423위의 한국 봉환을 이끌어낸 뒤로 손을 놓고 있다. 고바야시는 “정부와 시민사회 어느 한쪽만의 노력으로는 결코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면서 “민간과 정부 차원의 협력이 자동차의 두 바퀴처럼 잘 굴러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日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 봉환] 고국 그리다 잠든 원혼, 70년만에 달래다

    [日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 봉환] 고국 그리다 잠든 원혼, 70년만에 달래다

    “국가·관료·법률의 벽을 넘어서 유골이 돌아올 수 있는 최초의 길을 70년만인 오늘 완성했다.” ‘강제노동 희생자 추모 및 유골 귀향 추진위원회’(귀향추진위)의 한국 측 대표 단체인 ㈔평화디딤돌 정병호(60·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대표는 20일 “이 자리(납골당)는 민족 수난의 역사와 상처를 확인하고 새 희망을 만드는 성지가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이날 오전 경기 파주시 용미리 서울시립묘지에서 귀향추진위와 유가족들은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사루후쓰 아사지노 일본육군비행장 희생자(34위), 슈마리나이 우류댐 희생자(4위), 비바이 토메이의 절 조코지 안치(6위), 삿포로 사찰 혼간지 별원 안치(71위) 유골 순서로 115 위(位)를 납골당에 모셨다. 납골당에는 가수 정태춘이 강제 노동 희생자를 위해 쓴 노래 ‘징용자 아리랑, 달아 높이 곰’이 적힌 동판이 붙었고,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가 쓴 ‘70년 만의 귀향’이라는 글귀도 달렸다. 유족 가운데 유일하게 귀향길을 함께한 김경수(65)씨는 삼촌 김일중(1925년 출생)씨를 모시면서 “추석을 앞두고 영령이라도 조상과 함께할 수 있게 돼 감사하다”며 가슴 벅찬 소회를 밝혔다. 출발 직전 교통사고를 당해 귀향에 참가하지 못한 현흥순(77)씨는 아버지 현종익(1916∼1942)씨의 유골 앞에서 “내 한을 풀어주어 고맙다”면서 “아직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불쌍한 유골을 위해 정부가 나섰으면 한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귀향추진위의 일본 측 대표 단체인 ㈔아시아시민네트워크의 도노하라 요시히코(70)는 “유골 발굴 40년이 다 돼서 이렇게 훌륭한 곳에 안치하니 희생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계속 활동할 것을 유골 앞에 맹세했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70년 만의 귀향

    70년 만의 귀향

    일본 홋카이도 조선인 ‘강제 노동 희생자 추모 및 유골 귀향 추진위원회’ 봉환단이 18일 오전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서 115위의 유골과 위패를 들고 들어오고 있다. 홋카이도에서 강제 노동으로 희생된 조선인 유골은 70년 만에 이날 고국인 부산항에 무사히 들어와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장례식은 19일 오후 7시 서울광장에서 엄수된다. 부산 연합뉴스
  • “일본 다카시마 공양탑 가는 꼬부랑길 재정비하겠다”

    “일본 다카시마 공양탑 가는 꼬부랑길 재정비하겠다”

    지난주 MBC 무한도전에서 소개해 큰 화제가 됐던 일본 다카시마의 공양탑 가는 길을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누구나 다 찾아가기 쉽도록 길 재정비를 하겠다고 18일 밝혔다. 무한도전 멤버 중 하하와 함께 다카시마 공양탑을 두 번 방문했던 서 교수는 “방송이 나간 후 네티즌들에게 너무나 많은 연락을 받았으며 그중 대부분이 공양탑을 방문하고 싶다는 내용이라 길 정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방송에서 나왔던 것 처럼 공양탑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허리를 90도로 꺾고 지나가야만 하는 좁은 길들로만 되어 있어서 주변 정리를 좀 한다면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다카시마 공양탑은 일본의 대기업 미쓰비시가 만들어 하시마(군함도) 탄광 및 다카시마 탄광에서 강제징용으로 사망한 조선인들의 유골을 매장한 곳으로 위패를 불태워 신원확인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대해 서 교수는 “유캔스타트와 크라우드펀딩(http://is.gd/28NJgU) 방식으로 네티즌들과 의기투합해 공양탑 가는 길을 정비하는 5명의 비용 및 안내판 설치 비용등을 모아 10월 중순에 작업을 마칠 계획이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다카시마 관광코스의 하나인 석탄자료관의 연표에는 1939년과 1946년 사이의 강제징용에 대한 사실을 또 빼놓고 있다. 이런 다카시마의 역사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전개할 예정이다”고 덧붙였다. 특히 서 교수는 “일본 정부의 역사왜곡만 탓할것이 아니라 일본 현지에 있는 우리의 아픈 역사 현장도 정부와 민간단체가 힘을 모아 잘 보전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서 교수는 지난 5월부터 하시마와 다카시마에서의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을 영어 및 일본어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전 세계에 널리 알려 왔으며 강제징용 사실에 대한 정보센터 건립 등을 약속하고 이행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곧 항의서한을 보낼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73년 만에 시동생 유골 찾았지만…

    73년 만에 시동생 유골 찾았지만…

    이옥순(88) 할머니가 지난 13일 일본 삿포로 소재 사찰인 혼간사에서 열린 조선 강제노동희생자 추모식에 참석해 73년 만에 시동생 김일중(1925년 출생)씨의 유골함을 확인한 뒤 울음을 터트리고 있다. 이 할머니는 2004년 혼간사를 찾아 김씨의 유골을 찾았지만 다른 사람의 유골이 섞여 있다는 이유로 고국으로 옮기지 못해 왔다. 결국 11년간의 긴 협의 끝에 섞여 있는 유골을 무작위로 71명분으로 나눠 가져갈 수 있게 됐다. 삿포로 연합뉴스
  • 무한도전 하시마섬, 찾기힘든 공양탑 위치에 하하 분노 “이걸 어떻게 찾아” 고국 밥상 전달

    무한도전 하시마섬, 찾기힘든 공양탑 위치에 하하 분노 “이걸 어떻게 찾아” 고국 밥상 전달

    무한도전 하시마섬, 찾기힘든 공양탑 위치에 하하 분노 “이걸 어떻게 찾아” ‘무한도전 하시마섬’ ‘무한도전’ 멤버 하하가 하시마섬에서 강제 노역 중 희생당한 한국인 유골이 묻힌 다카시마의 공양탑 위치에 분노했다. 12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배달의 무도’ 편에서는 멤버 하하가 서경덕 교수와 함께 하시마 섬을 방문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하시마 섬은 일본 나가사키 시에 있는 무인도로 일제강점기 당시에 한국인들의 노동력을 수탈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지옥섬’이라고도 불린다. 하시마섬에 입도한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징용 등 역사적인 사실은 쏙 뺀 채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만 홍보하는 관광 가이드의 말에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하는 “가슴이 답답하고 속상하다. 일본은 사람들한테 본인들이 한 것에 비해서 너무 아름다운 것만 기억에 남게 하려는 것 같다”고 씁쓸해했다. 이후 하하와 서경덕 교수는 강제 노역 중 희생당한 한국인 유골이 묻힌 다카시마의 공양탑을 찾아갔다. 공양탑을 찾기 위해 온 마을을 뒤졌으나 결국 찾지 못했고, 제작진은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했다. 몇 시간만에 찾아낸 공양탑은 거의 찾기힘든 수풀 속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하하는 “이걸 어떻게 찾아”라며 분노를 드러냈고 서경덕 교수와 함께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하하는 서경덕 교수와 함께 다시 공양탑을 찾았다. 앞서 하시마섬에 강제징용 됐던 할아버지는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고향 쌀밥과 고깃국을 먹는게 소원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하하는 쌀밥과 고깃국을 챙겨 공양탑에 놓았고,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해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사진=MBC 무한도전 방송캡처 연예팀 seoule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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