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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로켓으로 유골 쏘아올려 첫 ‘우주葬’

    150명 유골분 1g씩… 1기당 280만원 몇년간 극궤도 돌다 대기권진입 후 연소 지난 3일 오전 10시 34분(현지시간) 미국 민간우주탐사기업 스페이스X의 ‘팰컨9’ 로켓이 캘리포니아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발사됐다. 우주탐사 사상 최초로 동일한 로켓을 세 번째 재활용한다는 의미가 전면에 내걸렸지만, 또 하나 주목받은 것이 있었다. 이 안에 실린 약 60개의 인공위성 중에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최초의 위성체가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우주 장례식을 위한 초소형 위성 ‘엘리시움 스타2’였다. 내부공간이 가로·세로·높이 각 10㎝밖에 안 되는 이 위성에는 150명의 유골분이 1㎝ 크기의 정육면체 캡슐에 1g씩 들어 있었다. 인류 첫 ‘우주장’(宇宙葬)을 기획한 건 미항공우주국(NASA) 엔지니어 출신 토머스 시바이트가 설립한 엘리시움 스페이스였다. 우주장 참가비용은 유골 1기에 2500달러(약 280만원). 유족들은 전용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위성의 위치 파악이 가능해 우주에 떠 있는 가족이 언제 자신들의 머리 위를 지나는지 알 수 있다. 엘리시움 스타2는 지상 550㎞ 높이의 극궤도를 수년 동안 돈 뒤 대기권으로 진입해 연소되면서 최후를 맞는다. 이번 우주장에는 30명의 일본인이 포함돼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사망 전에 미리 치르는 이른바 ‘생전장’(生前葬) 의례를 위해 자신의 손톱을 캡슐에 넣어 참가한 ‘은하철도 999’의 원작 만화가 마쓰모토 레이지(80)도 있었다. 인간의 유해가 우주로 보내진 게 처음은 아니다. 1998년 천문학자 유진 슈메이커의 유골이 달에 도착했고 명왕성 발견자인 클라이드 톰보의 유골도 2006년 명왕성을 향해 발사된 우주선 ‘뉴허라이즌’에 실린 바 있다. 그러나 오직 장례식만을 위해 유골이 우주에 간 건 처음이다. 시바이트 엘리시움 스페이스 대표는 “내년에 엘리시움 스타3를 발사하는 등 매년 우주장 프로젝트를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3700년 동안 태아 품고 있던 여성의 미라 발견

    3700년 동안 태아 품고 있던 여성의 미라 발견

    무려 3700년 동안 태아와 함께 묻혀 있던 여성의 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 예일대학과 이탈리아 볼로냐대학 공동 연구진이 이집트 남동부 아스완에서 발견한 이 미라는 기원전 1750~1550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 고대유물보존위원회는 최근 공식 발표를 통해 이 여성의 사망당시 나이는 25세 전후였으며, 여성의 복부에서는 태어나지 못한 채 죽은 태아의 미라가 함께 발견됐다고 전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태아의 머리 방향은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으며, 이는 태아가 이미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가 돼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태아의 머리는 여성의 골반에 위치해 있었고, 전문가들은 여성이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산모와 태아가 모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여성 미라에게서 골절이 발견됐는데, 이것이 여성과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 중 하나로 파악된다”고 설명했다. 3700년 전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이 여성의 유골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수의에 감싸여 있었다. 주변에는 미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기들도 함께 매장돼 있었다. 미라의 무덤에서는 타조알로 만든 구슬도 발견됐는데, 이는 당시 사망한 여성의 가족이 여성의 죽음을 기억하고 명예를 기리기 위해 함께 매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미라의 발견은 고대 누비아 문명을 자세히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연구진은 “미라의 주인이 생존했던 시기는 고대 누비아 문명이 번성했던 당시이며, 이 여성과 함께 매장된 유물이나 무덤의 형식 등을 통해 누비아 문명을 한층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캘리포니아 산불 현장서 ‘국기’ 구한 경찰관에 찬사 쏟아져

    캘리포니아 산불 현장서 ‘국기’ 구한 경찰관에 찬사 쏟아져

    역대 최악의 동시다발 대형산불이 발생한 캘리포니아에서 미국 국기를 ‘구해’내는 경찰관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뉴욕포스트 등 현지 언론의 11일 보도에 따르면 화제가 된 사진은 화마가 휩쓴 캘리포니아 주 북부지역에서 화재 진압 및 수습에 나선 경찰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진 속 경찰관이 손에 든 것은 다름 아닌 미국 국기.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카운티에 있는 엘크 그로브지역 소속의 경찰관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타버린 가정집 주변에서 홀로 펄럭이는 국기를 찾아냈다. 놀랍게도 이 국기는 약간 그을렸을 뿐, 크게 손상된 곳이 없었고 이를 확인한 경찰관은 소중하게 국기를 챙겼다. 자신의 키 정도 되는 커다란 국기를 손에 쥔 그는 국기가 땅에 끌릴 것을 걱정해 번쩍 들고 이동했다. 화제 현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국기를 내려놓은 그는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국기에 묻은 재와 먼지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이후 이 경찰관은 불에 타 피해를 입은 집 앞에 다시 국기를 걸었두었고, 동료가 촬영한 이 모습은 SNS를 통해 영상과 함께 공개됐다. 해당 경찰서는 SNS를 통해 “국기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파괴됐다”면서 “우리는 이 집의 주인이 돌아오길 희망하는 마음으로 국기를 그곳에 다시 걸어두었다”고 전했다. 이를 본 네티즌들은 "이들의 봉사에 감사를 보낸다", "감동적인 스토리다", "경찰과 소방관, 주민들이 모두 안전하길 바란다"며 찬사를 보냈다. 한편 현지 경찰에 따르면 이번 산불로 인한 사망자는 31명으로 늘었으며, 일부 시신은 유골만 남거나 심하게 훼손돼 현장에서 DNA 감식반이 신원을 확인 중이다. 이번 산불은 캘리포니아 주 재난 역사상 최대 규모로 꼽히며, 실종자 수도 200명을 훌쩍 넘어서면서 피해 규모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셔츠 벗고 골 세리머니한 선수 “안 벗었어요”, 그냥 넘어간 주심

    셔츠 벗고 골 세리머니한 선수 “안 벗었어요”, 그냥 넘어간 주심

    골을 넣은 뒤 셔츠를 벗고 세리머니를 펼친 선수가 주심이 “너, 옷 벗었지?”라고 물으니까 “아뇨”라고 답했다. 그런데 그가 셔츠를 벗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널려 있는데도 주심은 옐로카드를 주지 않고 넘어가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주인공은 잉글랜드 프로축구 카디프시티의 수비수 솔 밤바. 10일(현지시간) 브라이턴 호브 앨비언과의 프리미어리그 13라운드 후반 45분 극적인 2-1 결승골을 터뜨린 뒤 코너 플랙 쪽으로 달려가 셔츠를 벗어 던지고 동료들과 어울려 기쁨을 나눴다. 초보 팬도 알겠지만 이러면 옐로카드가 나와야 한다. 지난 주말 드마레이 그래디(레스터시티)도 골을 넣은 뒤 같은 행동을 했다가 옐로카드를 받았다. 그런데 똑똑한 밤바는 이를 면했다. 그는 경기 뒤 “주심이 ‘셔츠 벗은 거니?’라고 묻길래 ‘아뇨’라고 답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마틴 앳킨스 주심을 비롯한 심판진은 뭘하고 있었는지 밤바가 셔츠 벗고 그 난리 피운 것을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밤바는 대기심 쪽으로 달려갔을 때 거의 옷을 벗은 상태였다. 매사 솔직하기로 유명한 닐 워녹 카디프 감독조차 어이없어 했다. “마틴이 일부러 그랬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못 봤다면 선심이라도 봤어야 했는데”라고 말하면서 “주심이 우리에게 경기 전 셔츠를 벗지 말라고 경고하길래 오늘 경고를 받더라도 세 명이 셔츠를 벗었으면 좋겠다고 농을 했다. 우리가 그만큼 골을 많이 넣지 못해 주심이 그런 거냐”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는 지난달 중순 “솔직히 나라도 우리 팀의 잔류에 돈을 안 건다”라고 털어놓아 주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밤바와 포커 치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워낙 포커페이스니까’ 라고 이 기사의 처음을 시작하며 다른 앵글로 잡힌 그의 상반신 탈의 사진 석 장을 명백한 증거로 제시한 영국 BBC는 역시 언중유골로 마무리했다. ‘정말이다. 카디프는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11골 밖에 넣지 못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2000여년 전 피라미드에서 ‘비밀의 방과 터널’ 발견

    2000여년 전 피라미드에서 ‘비밀의 방과 터널’ 발견

    기원전 2세기에 만들어진 멕시코 피라미드 내에서 의문의 방으로 향하는 ‘비밀의 터널’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멕시코뉴스데일리 등 현지 언론의 25일 보도에 따르면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UNAM) 연구진은 북부 테오티우아칸에 있는 달의 피라미드(Pyramid of Mood)에서 특정 공간으로 향하는 터널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달의 피라미드는 기원전 2세기 후반 건립된 것으로, 달을 향한 제사를 목적으로 건축됐다. 높이 46m, 한 변의 길이는 146m이며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발굴을 책임지고 있는 베로니카 오르테가 박사 및 전문가들은 달의 피라미드 지하 8m 부근에서 방사선(엑스선) 탐사를 이용해 해당 터널의 존재를 확인했다. 전문가들은 이 터널이 장례의식에 사용된 방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고대인들은 현존하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 인간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신앙이 있었으며, 발견된 터널과 공간은 이러한 의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오르가테 박사는 “이번에 발견된 터널은 달의 피라미드 광장의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터널을 지나면 아직 공개되지 않은 의문의 방이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전 발굴을 통해 터널 부근에서 기형의 유골들과 함께 목걸이나 의인화 된 신의 형태를 본딴 돌들이 발견됐다”면서 “의심할 여지없이 더 깊은 지하에서 이와 유사한 유물들이 발견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이번 발견이 고대 주요도시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이와 이어진 메소아메리카 문명에 대한 이해를 얻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편 달의 피라미드는 과거 꼭대기에 20t이 넘는 거대한 조각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많은 사람들이 테오티우아칸 중앙을 가로지르는 ‘죽은 자의 길’을 지나 달의 피라미드에서 심장과 피를 바치는 제물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폼페이 최후의 날’ 고스란히…2000년 전 아이와 여성 유골 발견

    ‘폼페이 최후의 날’ 고스란히…2000년 전 아이와 여성 유골 발견

    약 2000년 전 엄청난 화산재를 피해 마지막까지 서로를 지키려 했던 여성과 아이들의 유골이 폼페이 유적지에서 발견됐다. 이탈리아 남동부의 폼페이는 기원전 29년, 폼페이 인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다량의 화산재에 뒤덮인 도시로, 당시 1만 6000명의 주민이 사망하고 도시는 소멸했다. 이후 1592년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 및 미술 작품들의 흔적이 발견되기 시작했고, 현재까지 발굴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AP통신 등 해외 언론의 24일 보도에 따르면 이번에 발견된 유골은 총 5구로, 이중 2구는 여성, 나머지 3구는 아이의 것으로 추정된다. 유골이 발견된 장소는 유전지 내에 있는 한 집의 작은 방이며, 안전한 곳에 피해 있다가 화산재에 지붕이 무너져 내리거나 화산의 영향으로 불타면서 매장된 것으로 보여진다. 유골들은 모두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보존돼 있었다. 이들은 모두 근거리에 누운 채 몸을 웅크린 상태였으며, 누워있는 자세와 유골 간의 거리 등으로 봤을 때 ‘최후의 날’이 오기 직전까지 서로를 떠나지 않으려 애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유골이 발견된 집은 당시 집을 보수하던 한 작업자가 목탄으로 벽에 휘갈겨 쓴 날짜가 남아있는 유적지로, 최근 고고학자들은 당시 날짜를 분석하면 10월 7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고 밝힌 바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결과를 바탕으로, 화산이 분출했을 가능성이 큰 날이 기존 예측일인 8월 24일보다 약 2개월 후인 10월 24일일 수 있다고 밝혔다.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현지 고고학자인 마시모 오산나는 “여성과 아이들의 유골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면서 ‘이 유골들의 발견은 매우 충격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폼페이는 현재 로마 콜로세움에 이어 이탈리아에서 관광객들이 두 번째로 많이 찾는 명소로, 올해 들어 8월까지 300만 명 이상이 찾았다. 사진=AP·연합뉴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입안에 돌덩이 박힌 ‘뱀파이어 어린이’ 유골 발견

    입안에 돌덩이 박힌 ‘뱀파이어 어린이’ 유골 발견

    이탈리아 루냐노의 고대 묘지에서 약 5세기 경 매장된 것으로 보이는 특이한 유골이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학계에서 이 유골에 붙인 별칭은 바로 '뱀파이어 유골'이다. 지난 14일(현지시간) 영국 인디펜던트 등 해외언론은 10세 어린이로 보이는 1550년 전 유골이 발굴돼 조사가 진행 중에 있다고 보도했다. 최근 이탈리아와 미국 고고학 공동연구팀이 찾아낸 이 유골은 루냐노 내 어린이 공동묘지에서 발굴됐다. 이 유골에 뱀파이어라는 으스스한 별칭이 붙은 이유는 특이한 매장 방식 때문이다. 아직 남아인지 여아인지 밝혀지지 않은 이 유골에는 놀랍게도 입에 큰 돌덩이가 박혀있다. 매장당시 누군가 일부러 시체 입안에 넣은 것으로 이는 당시 미신과 관련이 깊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생전 이 유골은 말라리아로 사망했으며, 부활해 전염병이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당시 주민들은 이같은 방식으로 매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에 참여한 미국 애리조나 대학교 인류학과 데이비드 소렌 교수는 "극단적으로 기괴한 방식으로 시체가 매장됐다"면서 "주민들은 이를 '루냐노의 뱀파이어'라고 불렀다"고 밝혔다. 이어 "과거 로마인들은 전염병의 확산을 매우 무서워했다"면서 "이들에게 전염병은 '악마'같은 존재였고 이를 막고자 주술까지 동원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중세시대 폴란드와 불가리아 등 유럽 각지에서도 뱀파이어로 여겨진 시체의 심장이나 척추 부위를 못으로 박아 매장하기도 했다. 이에대해 전문가들은 크게 두가지로 뱀파이어의 정체를 추정하는데 첫번째로 이들 대부분 치열한 권력 암투에 밀린 희생양이라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이 시기 유럽은 흑사병이나 콜레라 등 전염병이 만연했는데 특정인을 뱀파이어로 몰고 병균의 원인으로 지목해 살해하는 방식으로 여론을 잠재우려는 의도였다는 분석이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미스 마 복수의 여신’ 김윤진, 안방극장에 강렬 눈도장 “美친 오열”

    ‘미스 마 복수의 여신’ 김윤진, 안방극장에 강렬 눈도장 “美친 오열”

    SBS 새 주말 특별기획 ‘미스 마, 복수의 여신’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김윤진의 카리스마와 예측 불가의 긴장감 넘치는 전개로 토요일 밤 안방극장에 강렬한 눈도장을 찍었다. 지난 6일 첫 방송된 ‘미스 마, 복수의 여신’ 4회가 닐슨 코리아 시청률 기준 수도권 9.3%, 전국 9.1%의 시청률을 기록, 기분 좋은 첫 출발을 알렸다. 1-4회 방송에는 딸을 죽인 누명을 쓰고 9년 동안 치료감호소에 갇혀 있던 미스 마(김윤진 분)의 탈옥과 형사 한태규(정웅인)의 추격, 무지개 마을에서 발생한 첫 번째 사건과 날카로운 추리로 이를 해결한 미스 마의 모습이 중점적으로 그려졌다. 이 날 방송은 미스 마가 어두운 산 속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딸의 시신을 발견하며 미친듯이 오열하는 과거의 모습으로 시작됐다. 이어 시간은 다시 현재로 돌아왔고, 어딘가로 긴박하게 출동하는 경찰차 행렬이 등장했다. 미스 마가 수감 중이던 치료감호소는 9년 동안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갇혀 있던 그녀의 탈옥으로 아수라장이 되고, 탈옥을 치밀하게 준비했던 미스 마는 교묘하게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복수 행보의 시작을 알렸다. 9년 전 미스 마 사건을 담당했던 한태규는 그녀가 딸 살해 사건의 목격자를 찾기 위해 탈옥했다는 사실을 눈치챘고, 이내 그녀를 집요하게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딸의 유골함이 보관된 납골당을 찾아 눈물을 흘리는 미스 마를 발견한 한태규는 순식간에 쫓아가 총을 겨눴다가 미스 마의 엄청난 힘에 제압당했다. “함부로 아가리 놀리지 마. 난 죽이지 않았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듣기도 했던 것. 한편, 미스 마는 추리 소설 작가로 신분을 위장한 뒤 고급 주택 단지인 무지개 마을에 머물렀다. 그리고는 딸 살해 사건의 목격자를 찾기 위해 은밀하게 움직이던 와중에 마을문고 홍선생(유지수)의 신용카드가 분실된 사건을 알게 되었다. 미스 마는 홍선생이 고말구(최광제)가 조직 폭력배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 자신의 신용카드를 훔친 범인이라고 확신한 뒤 파출소에 신고했다는 사실, 그리고 파출소장 조창길(성지루)은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고말구를 파출소로 불러들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때 미스 마는 예리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한 추리로 홍선생 신용카드를 훔친 범인이 홍선생의 딸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홍선생 남편의 불륜까지 밝혀냈다. 이로 인해 누명을 벗은 고말구는 처음으로 자신의 결백을 밝혀준 미스 마에게 감사를 표하지만 미스 마는 차가운 표정으로 “나도 깡패 싫어해요”라는 말로 선을 긋기도 했다. 미스 마는 사건 해결 이후에도 계속해서 딸 살해 사건의 목격자로 추정되는 배우 이정희(윤해영)를 찾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녔고, 드디어 이정희와 마주했지만, 그녀는 찾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자리를 피했다. 바로 그때 한태규가 들이닥치면서 미스 마는 최대 위기를 맞이했고, 한태규가 그녀에게 수갑을 채우려는 순간 의문의 여인 서은지(고성희 분)가 등장했다. 특히 은지는 미스 마를 향해 “이모! 나 안 보고 싶었어?”라는 말을 던졌고, 이로 인해 미스 마가 과연 위기에서 벗어 날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냈다. ‘미스 마, 복수의 여신’은 추리 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중 여성 탐정 ‘미스 마플’의 이야기만을 모아 국내 최초로 드라마화한 작품이다. 딸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절망에 빠져 있던 한 여자가 딸을 죽인 진범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뛰어난 추리력을 발휘, 주변인들의 사건까지 해결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인간 본성을 돌아보게 하는 휴머니즘 가득한 추리극이라 할 수 있다. ‘미스 마, 복수의 여신’은 매주 토요일 밤 9시 5분에 4회가 연속해서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제2의 숭례문 화재 막는다

    브라질 국립박물관 참사 계기 한 달간 소방청이 한 달간 전국 박물관과 미술관 50곳을 선정해 화재안전특별점검에 나선다고 2일 밝혔다. 이번 특별점검은 소방청과 미술관·박물관 담당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가 합동으로 실시한다. 지난달 2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발생한 국립박물관 화재와 같은 참사를 사전에 막자는 취지다. 당시 화재에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여성유골이 불타는 등 유물 2000만점이 소실됐다. 한국에서도 2008년 2월 국보1호인 숭례문이 화재로 소실되고 2014년 11월에는 종로구 우정총국에서 가스성분 소화기가 방출돼 11명이 다치는 등 문화재 관련 시설 안전 사고가 발생했다. 이번 특별점검 대상은 전국에 위치한 주요 미술관·박물관이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은 소방청이 직접 화재점검에 나선다. 그 외에 세종 조세박물관 등 46곳은 자체적으로 안전 상태를 점검한 뒤 소방청에 자료를 제출한다. 소방청은 현장 인력 부족으로 인해 전수조사가 아닌 표본조사에 임하게 됐다고 밝혔다. 현재 미술관과 박물관 안전점검은 공공기관 소방안전관리에 관한 규정에 따라 지정된 안전관리자가 자체적으로 소방시설과 전기·가스를 점검하는 형태로 진행하고 있다. 소방청은 자체적으로 화재안전점검을 하고 있는 기관들을 비정기적으로 특별점검할 예정이다. 소방청 관계자는 “앞으로도 안전 점검이 특별히 필요한 기관에 따라 관계부처와 합동으로 분야별 긴급점검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한국전 최대 격전지 칠곡, 평화를 품다

    한국전 최대 격전지 칠곡, 평화를 품다

    헬기 고공강하쇼 등 100여개 공연 풍성 참전 미군 자녀 초청 군민증 수여도한국전쟁 최대 격전지였던 경북 칠곡 일원에서 국내 유일의 호국·평화 축제가 열린다. 칠곡군은 오는 12∼14일 칠곡보 생태공원 일원에서 ‘낙동강 세계평화 문화대축전 2018’ 행사를 갖는다고 1일 밝혔다. 올해로 6회째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연합군의 반전 기틀을 마련한 칠곡 다부동 지구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고 호국 및 평화 메시지를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2013년부터 매년 열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국방부의 ‘낙동강지구 전투전승행사’와 통합해 430m 부교, 프린지 공연, 헬기 고공강하 등 100여개의 다양한 전시·체험 행사가 펼쳐진다. 마술 공연, 버블 쇼, 군 문화체험, 평화동요제 등 어린이를 위한 공연과 체험 행사도 마련한다. 올해 대축전에는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에서 실종된 미군 엘리엇 중위의 아들 제임스 레슬리(71)와 딸 조르자 래 레이번(70)이 참석할 예정이다. 엘리엇 중위의 자녀들은 2015년 칠곡군을 찾아 어머니 알딘 엘리엇 블랙스톤의 유골을 낙동강에 뿌렸다. 칠곡군은 이들에게 명예 군민증을 수여할 계획이다. 한국전쟁 당시 칠곡에서 치러진 전투의 치열함은 왜관철교 폭파, 328고지 백병전, 다부동 볼링엘리 전차전, 유학산 전투, 융단폭격지 등 곳곳에 산재돼 있는 전쟁의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백선기 칠곡군수는 “참전용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내고 평화 메시지를 세계에 전하는 축제”라며 “특히 올해 행사는 최근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북·미 간 정상회담과 남북 간 정상회담이 잇따라 개최되는 가운데 열려 더욱 뜻깊은 행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칠곡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전사 학생 명단에 오라버니 이름이… 하염없는 눈물과 통곡만”

    “전사 학생 명단에 오라버니 이름이… 하염없는 눈물과 통곡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15회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아래의 글은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 송용식의 유골을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移葬)한 기록문으로 송용식 참전기를 대신한다. 6·25 전사 인천학생 묘가 인천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그중에는 비석도 없고 봉분이 점차 사라져가는 현실을 되돌아보고, 이제는 고향 인천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잊혀져가지만, 후대에 그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억해 달라고 이 참전기를 기록한다.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활동 1996년 7월 15일 창립된 인천학생스승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가 인천지역 6년제 중학교 학생들의 6·25 참전 역사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확정한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은 208명이고, 전사 스승은 심선택 해병 소위 1명이다. 23년 동안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가 제보를 받거나 혹은 기록을 찾아서 이름과 출신 중학교 등을 확인한 전사 인천학생은 105명뿐이다. 나머지 103명의 전사 인천학생은 이름조차도 알 수가 없다. 전사 학생 기록의 정확성을 기하고자 여러 차례 서울 동작구 현충로 국립묘지를 찾아 전사자 위패와 묘 그리고 고향 인천 여기저기 묻혀있는 묘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관련 지방자치단체에 기록되어있는 호적 제적등본을 일일이 다 떼어서, 최종적으로 전사를 확인한 결과 그 전사자는 105명이다. 6·25 전사 인천학생 명단에서 오빠의 이름을 찾아보고 통곡하던 할머니 자매 2001년 6월 1일부터 6월 15일까지 인천 중구 자유공원 내 맥아더 장군 동상 앞에서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주최로 제3회 인천학생 625 참전 기록사진 전시회를 개최 중일 때 있었던 일이었다. 첫날 두 분의 할머니께서 인천학생스승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경종 편찬위원에게 다가와 울면서 “저기 우리 오라버니 이름이 있습니다”라며 따라가 보니까 전사 학생 명단이 있는 참전 전시판에 할머니들이 가리키는 이름은 송용식이었다.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경종 편찬위원이 “송용식 전사자의 묘가 따로 있는가?”라고 물었더니 “지금 오라버니는 서구 검암동 간재울 고향 땅에 묻혀 있으며 우리들은 동생 송옥림·옥란 자매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시면서 서럽게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6·25 참전 사진 전시회가 끝나고 본 편찬위원회에서는 송용식 전사자의 묘지를 확인하기 위해 두 자매의 안내로 서구 검암동으로 송용식 전사자의 묘지가 있는 인천광역시 서구 검암동 438-18번지를 찾아갔으나 묘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 묘지가 보이지 않는가?”라고 물어보았더니 “우리들이 어릴 때 군에 입대한 오빠가 전사하여 유골로 돌아와 아버지께서 이 근방 양지바른 곳에 묻고 봉분을 잘 만들어 해마다 제사를 드렸었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아무도 돌보지 않아 봉분이 깎여 이리됐다”하면서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본 편찬위원회에서는 “송용식 전사자 묘를 국립묘지로 우리가 옮겨 주겠으니 이장하겠는가?”라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두 자매는 그리하겠다는 뜻을 밝혀 이때부터 묘지 확인 작업을 위해 현장에 직접 검암동 동직원과 같이 유골이 묻혀 있는 지번(인천 서구 검암동 438-18)을 확인하였다.6·25 전사 학생 송용식 이장(移葬)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는 육군본부에서 이장 허가서를 발급받았다. 2003년 5월 27일 아침 일찍부터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 송용식의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건하게 6·25 참전 전사 학생 고(故) 송용식의 유골(遺骨) 발굴 작업을 시작하여 어렵게 유골을 찾아 수습한 후 유골함에 담아 제(祭)를 올렸다.전사한 친구여, 이제는 편히 쉬게나! 2003년 5월 27일 오후에 대전 현충원 봉안관 임시안치소에 모셨다가 2003년 6월 26일 유가족들의 오열 속에 이제는 편안히 잠들 유택(대전 현충원 2묘역 16129)에 안장되었다. 2003년 6월 26일 유골 이장에 참석하신 아버지(6·25 참전 인천학생 이경종)께서 송용식 전사자 묘에서 “중학교 3학년 때 나와 같이 부산까지 걸어가서 참전하여 전사한 친구여, 자 이제는 편히 쉬게나!”라고 말씀하신 것을 나(이경종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는 들었다. 고향에 돌아온 6·25 전사 인천학생들 유골 6·25 사변 발발 후 한창 전쟁 중일 때 전사한 전사자들은 그 당시 전투가 워낙 치열했기에 정부에서는 일정한 묘지를 정하지 못하고, 화장을 한 뒤에 유골을 직접 유가족에게 전하였다.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온 아들의 유골을 받은 부모님들께서는 가슴이 베이는 심정으로 대성통곡하시고는 집 근처 아들이 놀던 양지바른 동산에 곱게 묻었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참전기 15회를 마치며 한때 인천에 6년제 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중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징병 모집에 대하여 한참이나 어려서 입대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중학생이었습니다. 송용식이 학창시절을 보낸 옛 6년제 인천공업중학교(현재 인천기계공고)의 넓은 운동장은 아직도 송용식을 기억합니다. 송용식과 같이 부산까지 걸어가서 입대하셨던 저의 아버지께서는 언젠가 송용식이 공부했던 인천기계공고 운동장 한편에 송용식을 기리는 추모비를 건립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이제 고향 인천에서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지만, 이 참전기에 그 이름 송용식을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으로 기록합니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6·25 참전 전사 인천학생 송용식 ▲인천공업중학교 3학년 때 자원입대 ▲육군 통신병으로 참전·전사송용식 전사자는 인천 서구 검암동에서 태어나, 인천공업중 3학년 재학 중이던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하여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통신학교에 자원입대 후 육군통신병(군번 0243043)으로 참전하여 1951년 5월 30일 강원도 양구에서 전사함.
  • 사할린 징용자 유골 70년 만에 봉환

    “아버지께서 사할린에 강제 동원돼 고생하시다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 생전에 유골이라도 모셔와 평생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린 것 같아 더없이 기쁩니다.” 일제강점기 러시아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자의 유족인 박재일(68)씨는 기쁨의 눈물에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행정안전부는 13일 러시아 사할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끝내 귀국하지 못한 한국인 노무자의 유골 16위를 70여년 만에 고국으로 봉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강제징용에 시달린 모든 희생자의 유골을 봉환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확인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묘지 수가 1395기였는데 고인의 생전 행정정보가 러시아에 없는 사례가 많아 피해자 신원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다. 70여년의 세월이 흐른 것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행안부 관계자는 “고인이 러시아에서 생활하며 현지에 새로운 유족이 생겼고, 한국으로 희생자의 유골을 봉환하는 데 의견을 달리할 때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추도식은 14일 충남 천안에 있는 ‘국립망향의 동산’에서 열린다. 추도식에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과 유족단체, 정부 부처 관계자와 국회의원 등 200여명이 참석한다.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일본 옴진리교’ 아사하라 교주, 구치소 유골 쟁탈전 왜?

    일본 옴진리교’ 아사하라 교주, 구치소 유골 쟁탈전 왜?

    1995년 지하철역 ‘사린가스 테러’ 등을 일으켜 일본은 물론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일본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본명 마쓰모토 지즈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지 2개월이 넘었지만, 유골이 아직도 가족에게 인도되지 않고 있다. 일본 공안당국은 유골이 아사하라를 추종하는 세력에게 넘어가 ‘부활’ 등 선전도구로 악용될까 봐 긴장하고 있다.10일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지난 7월 6일 사형이 집행(당시 63세)된 아사하라의 유골은 아직도 도쿄 구치소에 안치돼 있다. 유골을 인수해 바다에 산골하려는 넷째 딸과 자신들에게 유골이 넘겨져야 한다는 아사하라의 아내 측과의 갈등이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법무성은 “유골의 소유권을 둘러싼 유족간 분쟁이 계속되는 상태에서 어느 한 쪽에게 일방적으로 인계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어 최종 인수자는 재판을 통해 결정될 가능성도 보이고 있다.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아사하라는 교도관들에게 사후 유골의 인수자로 그동안 옴진리교 세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 온 넷째 딸(29)을 지목했다. 넷째 딸은 아버지의 시신을 넘겨받으면 이를 바다에 뿌리겠다고 변호사를 통해 발표한 상태다. 그러나 아사하라의 아내(60)와 다른 딸들은 “형이 집행되지 직전 고인의 정신상태를 감안할 때 넷째 딸을 유골의 인수자로 지정한 것은 무효”라며 자신들이 유골을 넘겨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무성 간부는 “넷째 딸 쪽과 아내 쪽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으면 유골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재판까지 가면서 사태가 장기화할 수도 있다”고 요미우리에 말했다. 재판으로 갈 경우 사형집행 직전 아사하라의 발언과 모습을 기록한 내부보고서, 당시 아사하라의 심신상태에 대해 의사가 작성한 진단서 등을 토대로 법원이 판단을 하게 된다.이런 가운데 사법당국은 아사하라의 부인이 옴진리교의 후계단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공안조사청의 한 관계자는 “후계단체가 유골을 손에 넣게 되면 이를 이용해 교단의 세력을 확대하려고 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7월에 사형이 집행된 옴진리교 사건 관련자 13명 중 아사하라를 제외한 12명의 시신이나 유골은 가족 등에게 인도됐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여성 항일투쟁의 선봉… 김원봉만큼 조국 사랑했던 그녀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여성 항일투쟁의 선봉… 김원봉만큼 조국 사랑했던 그녀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그러나 사랑이여/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헝가리 시인 페퇴피 산도르의 시)의열단장 김원봉은 고국이 해방되자 이역에서 숨진 아내 박차정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 귀국했다. 김원봉은 피 묻은 박차정의 속적삼을 친정 식구들에게 전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고향인 경남 밀양 부북면 제대리 뒷산에 유골을 묻었다. 13년이란 짧은 세월이었지만 중국 땅에서 함께 투쟁한 동지이자 반려자였다. ●중국서 만난 김원봉과 13년간 항일독립운동 제대리에서 내려 농가를 지나 야산으로 들어가 수풀을 헤치고 올라가니 띄엄띄엄 무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동묘지였다는데 나무와 덤불로 뒤덮여 있었다. 100m쯤 올라가니 박차정의 묘소가 나타났다. 마른 솔잎이 봉분을 뒤덮는 바람에 풀이 자라지 않아 메말라 있었다. 피 흘리며 싸우다 숨진 여성 독립운동가의 묘소로는 너무 초라했다. ‘약산 김원봉 장군의 처, 박차정 여사의 묘’란 비문만이 묘주(墓主)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묘소에서 멀리 너른 들녘이 보이고 밀양강이 굽이쳐 흐른다. 밀양강 바로 북쪽, 해천 옆에 남편 김원봉의 생가가 있었다. 그 위쪽 부북면 신작로에는 해방 후 귀국해 고향을 방문한 김원봉을 환영하는 인파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찼었다.‘빨갱이’로 낙인찍힌 김원봉의 배우자란 딱지는 박차정의 공훈을 인정받는 데도 오랫동안 장애물이 됐다. 1995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박차정의 생가는 부산 동래구 칠산동 동래고등학교 담벼락 옆 동네 안쪽에 있다. 지금은 옛날 모습대로 깔끔하게 복원돼 드문드문한 관람객의 방문을 받고 있었다. 충절의 고향 밀양에서 태어난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은 어릴 때부터 반일 감정이 남다른 소년이었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 방황하던 김원봉은 대한광복회의 암살 활동에 충격을 받고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약산은 난징 진링대학에 입학한 이듬해 터진 3·1운동의 비폭력에 실망했다. 그가 선택한 길은 암살·파괴활동이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열혈 운동가들은 민중 속에 잠재한 폭력의 위력을 끌어내는 뇌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1919년 11월 9일 중국 지린성 반 아무개 농부의 집에 우국 청년 10명이 모였다. 밤샘 토론 끝에 김원봉을 의백(義伯·단장)으로 하는 의열단이 결성됐다.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거두 등을 ‘칠가살’(七可殺)로 규정, 처단의 목표로 삼았다. 단원들은 거사에 서로 가겠다고 싸울 정도로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첫 거사 모의는 그만 악명 높은 조선인 경찰 김태석에게 발각돼 윤세주 등 6명이 붙잡히고 말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최수봉의 밀양경찰서장 폭탄 투척,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 기도,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습격 등 잇단 의거를 감행했다. 헝가리인 마자알의 고성능 폭탄 제조법 전수와 의열단 정신을 명문화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으로 의열단의 기세는 더욱 높아져 단원이 1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의열단원 김지섭은 화물선 석탄창고 속에서 열이틀을 지낸 끝에 일본에 도착해 황궁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원들의 잇단 항거는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김원봉에게는 김구 선생보다 많은 100만원(현재 가치 약 320억원)이란 막대한 현상금이 붙었다. 김원봉은 잠자리를 자주 옮겨 다니고 같이 사진을 찍고 나서는 원판을 회수하는 치밀함을 보이며 일경을 따돌렸다. 신출귀몰이었다. ●신출귀몰 약산,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 더 붙어 5~6년 동안 수백건의 투쟁을 했지만 자금이 바닥나자 의열단의 활동도 주춤해졌다.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약산은 군관학교에 다니던 조선 학생들을 가입시키면서 의열단 재건에 나섰다. 김원봉이 박차정을 만난 것은 이즈음이다. “천궁에서 내다보는 한 조각의 반월이/ 고요히 대지 위에 비칠 때(…)/ 옛 기억이 마음의 향로에서 흘러넘쳐서/ 비애의 눈물이 떨어집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1910~1944)이 18세 때 모교(동래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교지에 발표한 시 ‘개구리 소리’다. 꿈 많은 문학소녀였던 박차정은 항일 정신으로 무장된 집안의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용한은 일제의 침략에 비분강개해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박차정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이어 1930년 1월에 서울 여학생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바로 ‘근우회 사건’이다. 두 번의 구금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해 몸은 거의 반신불수가 되었다. 병석에 누워 있던 박차정을 중국으로 부른 사람은 의열단에 몸담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였다. 박차정은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합류했다. 1930년 3~4월쯤이었다.●독립투쟁·문학 공통관심… 사랑으로 발전 박차정은 등단을 권유받을 만큼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김원봉도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 등의 러시아 문학을 좋아했다. 독립투쟁과 문학이라는 공통의 목표와 관심사는 사랑으로 승화됐다. 두 사람은 1931년 3월 결혼했다. 김원봉은 난징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장제스의 지원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개설해 투사들을 양성했다. 이육사는 이 학교 1기 졸업생이었다. 박차정은 교관으로 힘을 보탰다. 김원봉은 일본의 침략이 격화되자 혁명세력의 통합을 위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박차정은 그 산하에 난징조선부녀회를 만들어 당원 가족을 중심으로 한 여성들을 규합해 항일투쟁을 독려했다. 약산은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8년 10월 10일 항일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약산은 의용대장이 됐고 박차정은 부녀복무단장을 맡았다. 의용대는 주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선전활동을 했고 총을 들고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1939년 2월 박차정은 장시성 쿤륜관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 후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화베이지방으로 북상해 팔로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 김원봉은 화베이로 가지 않고 임시정부에 합류해 광복군 부사령관, 임정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군무부장 취임 직후인 1944년 5월 27일 부상의 후유증이 깊어져 아내 박차정은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김원봉은 광복을 맞아 근 30년 만에 귀국했으나 더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좌익 인사 김원봉에게 반대파의 백색테러와 암살 위협이 지속됐다. 미군정에 체포됐을 때 고문을 하고 수모를 준 경찰이 친일 앞잡이 노덕술이었다. 김원봉은 풀려난 뒤 너무나 분해서 사흘 동안 통곡했다고 한다. 김원봉이 월북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북한에서는 검열상과 노동상이란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는 1958년 숙청당하고 말았다. 남북 양쪽에서 버림받은 것이다. 그는 본질적으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좌우를 넘나들며 독립을 염원한 민족주의자였다.●약산 생가터엔 의열기념관… 서훈은 거부 당해 밀양 내이동 김원봉의 생가터에는 의열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그 앞에 흐르는 해천변에는 항일테마거리가 조성돼 있다. 이준설 학예연구사는 “김원봉뿐만 아니라 박제혁, 최수봉, 강우규 의사 등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라면서 “의열단에 최초로 참여한 사람은 알려진 대로 13명이 아니라 10명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약산 집안의 9남2녀 중 4형제는 6·25 때 보도연맹사건으로 총살당했다. 막내 김학봉(86)씨가 생존해 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 중이다. 김원봉에 대한 유족과 밀양시민들의 서훈 신청은 번번이 거부됐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강변에 널려있는 수많은 유골… 낙동강 전투 참혹함 잊지 못해”

    “강변에 널려있는 수많은 유골… 낙동강 전투 참혹함 잊지 못해”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정대연 인터뷰 일시 1997년 8월 4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규원 치과 3층) 대담 정대연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 실종된 인천 학생들 나(정대연)는 인천 화도진 고개 넘어 화수동 111번지 쌍 우물 앞 배급소 집 외아들로 태어나 창영국교를 졸업하고, 인천동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서대문에 있는 감리교 신학대학교 2학년 때 6·25 사변이 터졌다. 인천을 점령한 북한괴뢰군들은 인천 지역에서 중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인민의용군에 입대시켰는데, 강제로 끌려간 중학생들은 그 후 모두 실종이 되었다. 9·15 인천수복과 인천학도의용대의 창설 UN군의 9·15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수복이 되어서, 고려대 2학년생 이계송을 대장으로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를 조직하여 치안 유지, 피난민 안내 등 호국(護國)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때 나는 인천학도의용대의 부연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50년 늦은 가을 중공군의 참전으로 우리 국군과 UN군은 후퇴하게 되어, 또다시 인천이 적화(赤化)가 되면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실종될 것 같은 두려움으로 우리들은 걱정만 하고 있었다.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 남하 1950년 12월 초 국방부 정훈국 인천파견대에서는 인천 지역의 중학생들도 남쪽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하였다. 1950년 12월 18일 제일은행 인천지점 건너편에 있었던 경기도 병사구 사령부(현재 병무청) 소속 국민방위군 소위가 선두에서 인천학도의용대 3000명 대원을 이끌고 경상남도 통영의 국민방위군 수용소(통영충렬국교)를 향하여 우리들은 걸어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1950년 12월 24일 대전역 도착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하여 처음 1박을 한 곳은 안양이었다. 우리들은 1950년 12월 20일 수원에 도착하여 수원역에 안내판을 만들어 성탄절 날까지 대전으로 오라고 알렸다. 1950년 12월 24일 인천학도의용대 본대는 대전에 도착하여 성탄절을 대전역에서 맞았다. 1950년 12월 29일 마산 도착 대구를 지나서 경산, 청도, 밀양, 삼랑진을 거치면서 우리들은 논밭에 버려진 수많은 얼거나 굶어 죽은 국민방위군 시체를 보면서 그 머나먼 남쪽 끝까지 모진 고생을 하면서 내려온 우리들은 부패한 국민방위군의 제3수용소(통영충열국교)에 어린 대원들을 입소시킬 수 없어서 마산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통영으로 남하하는 것을 정지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참모회의를 신마산역 중앙여관에서 하여, 대구 육군본부를 찾아가서 담판 짓기로 하였다.대구 육군본부에서 황헌친 인사국장 만남 이계송 대장과 나는 걸어서 대구를 가게 되었다. 낙동강에 도착했을 때는 생전에 잊지 못할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강변에 많은 유골이 널려있는 것이 낙동강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보여 주는 끔찍한 장면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계송 대장과 나는 육군본부 인사국장 황헌친(黃憲親) 준장을 만나서 우리가 육군본부에 찾아오게 된 동기를 인사국장에게 설명하고 인천학도의용대의 진로에 대한 각서를 받았다. 황헌친 준장이 만들어준 각서 내용 ①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의 이동함에 있어 차량이나 선박을 이용할 수 있는 차량·선박 징발권(徵發權)을 준다. ②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은 부산 육군 제2훈련소에 1951년 1월 10일까지 입소하고, 포병사관학교에 응시할 기회를 준다.中 4~6학년생들이 먼저 해병으로 자원입대 이계송 대장과 나는 다시 걸어서 낙동강을 건너 인천학도의용대원들이 수용돼 있는 마산 임시 거처에 와서 보니까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마산에서 가까운 진해 해병교육대 신병으로 중학교 4~6학년생들 600여명이 자원입대했고, 인천에서 같이 출발한 국민방위군 소위가 나머지 중학교 1~3학년 대원들을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경남 통영출열국교)로 데리고 갔다. 中 1~3학년생들 부산 육군 제2훈련소 입소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에 수용돼 있는 우리 대원들을 데려오기 위해서, 이 계송 연대장과 나는 마산에서 출발하여 통영을 향하여 배를 타고 가서, 통영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인 충렬국민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우리 대원들이 마산에서 통영으로 가게 된 경위는 인천에서부터 우리와 같이 행동했던 국민방위군 인솔 소위가 자기가 받은 명령대로 2000명이 넘는 대원들을 통영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에 입소시킨 것이었다. 육군본부에서 받은 징발증(徵發證)을 수용소 소장에게 보여주고, 우리들은 모두 배에 나누어 타고 통영에서 출발하여 부산으로 향하였다. 1951년 1월 10일 인천학도의용대원 1500여명은 육군 제2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입소하였으며 훈련병이 된 이 날부터 인천학도의용대의 조직은 사라지게 되었다. 1951년 2월 1일 육군통신학교 입교 부산육군 제2훈련소를 마치고 부산육군통신학교로 간 날이 1951년 2월 1일이다. 우리가 지휘관 옆에서 조금 안전하게 근무하는 통신병이 된 데에는 인천상업중학교 물리 교사 출신의 부산육군통신학교 신봉순 교육대장님 덕분이었다. 신봉순 교육대장님은 1951년 2월 1일 인천학도의용대 대원 중 500명을 부산육군통신학교에 입교시켰으며, 오갈 데 없었던 여학생 120명의 숙식을 해결해 주고, 다시 인천으로 여학생들이 돌아가는 것을 도와주신 인천학도의용대의 영원한 스승이시다. “반드시 살아서 고향에서 꼭 다시 만나자” 부산육군통신학교에서 통신교육을 마친 나는 인천에서부터 부산까지 같이 걸어와서 함께 자원입대한 고향 후배들에게 반드시 살아서 인천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하며 울면서 헤어졌다. 처음에는 육군 제8사단으로 배치받았다. 다음에 나는 육군본부 내의 통신부분을 담당하는 561부대로 가게 되었다. 그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서, 1953년 3월 9일 군에서 명예제대하였다. ‘전쟁터의 이슬로 사라진 학창시절’ 1997년 6월 25일 자 인천일보에서 6·25 특집(特輯) ‘전쟁터 이슬로 사라진 학창시절’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내 가슴에 와닿는 것은 나하고 같이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했던 인천학도의용대 대원 이경종(인천상업중학교 3학년때 자원입대)의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이 우리 인천학도의용대의 6·25 참전역사 찾기를 시작했다는 기사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또한 나의 기억을 글로 남기게 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이경종규원 2부자(父子)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역사 편찬 사업이 잘 이루어지길 바란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참전기 14회를 마치며 23살 대학교 2학년생이었던 정대연 인천학도의용대 부연대장님은 육군 중위로 장교 현지임관 제의도 거절하고, 중학생 동생들과 사병으로 자원입대하여 참전하였습니다. 많은 인천의 중학생들을 위기에서 구했지만,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않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으나 섭섭해하지 않았던 인천의 훌륭한 형입니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정 대 연 ▲인천학도의용대 부연대장 1951년 10월 5일 강원도 향로봉전투에서의 정대연(가운데). 1928년 9월 3일 인천 화수동 출생 1949년 2월 15일 인천동산중학교 졸업 1950년 6월 25일 서울감리신학대학 2학년 1950년 9월 25일 인천학도의용대 부연대장으로 추대 1951년 1월 10일 통신병으로 입대(군번 0246202) 1953년 3월 9일 의병 제대
  • 中서 4300년 된 고대 도시 발견…대규모 인신공양 만연

    中서 4300년 된 고대 도시 발견…대규모 인신공양 만연

    중국에서 약 4300년 된 고대 도시를 발견했다는 연구논문이 발표돼 화제가 되고 있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 등 외신은 24일(현지시간) 중국 산시성 위린 선무(神木)현에 있는 스마오(石峁) 유적을 소개했다. 1976년 처음 발견된 스마오 유적은 초기에 작은 마을로 여겨졌지만, 2011년부터 대대적인 발굴 조사가 이뤄지면서 황성(皇城·황제가 있는 나라의 수도)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번 조사에서는 황토로 된 고지대에 피라미드식 층단이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 목조로 된 황궁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11층으로 된 층단의 높이는 최소 70m에 달해 당시 내성 밖 거주지는 물론 외성 밖 시골 지역에서도 황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는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연구팀은 유적지에서 대규모 인신공양의 흔적을 발견했다. 총 6개의 구덩이에서 유골이 나왔는데 외성 근처에 있는 구덩이에는 목이 잘려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이 가득했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유골과 제물이 발견됐다. 발견된 유물들은 중국 신석기 시대 만기인 롱산(龍山)문화 끝무렵부터 하(夏)나라 초기까지의 문화를 보여준다. 이에 대해 연구팀은 “이번 연구는 기원전 2000년까지 중원이 아니라 황토로 된 고지대가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를 대표하는 복잡한 사회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면서 “중원 문명과 관련한 청동기 후기 시대의 핵심적인 상징들은 사실 스마오에서 훨씬 더 일찍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사진=Antiquity 자세한 연구 결과는 영국 고고학 학술지 ‘앤티쿼티’(Antiquity) 22일자에 실렸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현생인류 호모사피엔스, 순수 혈통 아니다

    현생인류 호모사피엔스, 순수 혈통 아니다

    유골 화석, 빅데이터로 DNA 게놈 분석 혈연 관계·집단적 이동 등 고대사 파악 네안데르탈-데니소바인 혼혈 자녀 존재 유전자 1.7% 현 인류와 일치…교류 시사‘고고학자’라는 단어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은 페도라 모자를 눌러쓰고 낡은 크로스백을 맨 채 유적을 찾아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 세계 전역을 종횡무진 누비는 영화 속 주인공 ‘인디아나 존스’를 떠올린다. 19~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고고학자들은 보물 사냥꾼인 인디아나 존스까지는 아니지만 유물을 찾기 위해 먼지를 뒤집어쓰고 몸을 움직이는 현장 작업자 같은 분위기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최근 많은 고고학자들은 현장 작업도 하고 있지만 인공위성이나 컴퓨터 프로그램, 각종 실험기구에 둘러싸여 있는 과학자의 모습에 더 가깝다. 실제로 고고학계에서는 발굴된 유물의 DNA 분석을 통해 과거를 추적하는 ‘DNA 고고학’이라는 분야가 주목받고 있다. DNA 고고학은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유기체의 DNA를 분석해 과거 유전적 특징을 과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혈연, 민족 간 유연관계, 집단이나 문화의 이동에 대한 고고학적 정보를 자연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분야다.DNA 고고학은 고고유전학(Archaeogenetics)이나 고유전학(Paleogenetics)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엄격하게 구분하자면 고고유전학은 고고학적 해석을 위해 분자유전학적 기술을 접목시킨 것이고 고유전학은 유전학적 입장에서 생물의 진화와 과거 생물의 특징에 대한 연구다. DNA 고고학에서는 빅데이터 처리나 시뮬레이션 같은 첨단 과학기술도 자주 활용된다. 오래된 고대인의 뼈나 유품에서 미량의 DNA 조각을 채취해 분석할 경우 방대한 게놈 정보가 나온다. 방대한 데이터를 비교, 분석해 고인류의 복잡한 관계망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알고리즘과 빅데이터 처리기술은 고고학에 새로운 장을 열어 줬다. 실제로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 23일자에 실린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인류사연구소, 캐나다 토론토대, 러시아 국립과학아카데미 고고학 및 민족지학연구소, 국립노보시비르스크대, 영국 옥스퍼드대 국제공동연구팀의 연구결과만 봐도 DNA 고고학 연구가 얼마나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연구팀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작고 길쭉한 돌맹이처럼 보이는 크기 1~2㎝의 뼛조각들에서 DNA를 추출해 유전자 시퀀스를 분석했다. 그 결과 ‘데니소바 11’로 이름 붙여진 뼛조각의 주인은 네안데르탈인 엄마와 데니소바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사망 시 나이는 13살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현생 인류는 호모사피엔스 1종만 존재하고 있지만 5만~6만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과 서아시아 지역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 시베리아와 동남아시아 지역에 살았던 데니소바인 등 최소 3종의 인류(호미닌)가 함께 공존했다. 그러다 네안데르탈인은 5만년 전부터, 데니소바인은 4만년 전부터 서서히 사라져 멸종하게 됐다. 이 때문에 고인류학계에서는 각 인류 종간 분리시기와 교배 여부는 인류 진화를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연구 주제였다.2016년에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연구진은 시베리아 남부 알타이산맥 동굴에서 발굴한 네안데르탈인 화석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의 교배가 최소 10만년 전에 이뤄졌다는 사실을 ‘네이처’에 발표하기도 했다. 연구팀은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 사이에 교배가 있었다면 네안데르탈인과 동시대를 살았던 데니소바인과의 교배도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약 39만년 전 유전적으로 분리돼 다른 종이 됐다. 연구팀은 엄마 네안데르탈인 유전자를 분석해 러시아 데니소바 동굴 부근으로 이동한 초기 네안데르탈인보다 서유럽에 살고 있었던 후기 네안데르탈인 유전자와 더 가깝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데니소바 11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한 결과 이 혼혈소녀는 현생인류와 1.7% 정도의 유전적 일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데니소바 11이 태어나기 이전 데니소바인,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의 조상 간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스반테 파에보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박사는 “이번 단일 게놈분석만으로도 현생인류의 친척들 간 교류가 생각보다 더 잦았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며 “현생인류는 호모사피엔스의 단일 순수혈통이 아니라 인류의 다양한 친척종들과 교배해 유전자가 섞여 있는 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세월호 직립 후 첫 유골 1점 수습

    세월호 직립 이후 선체 수색 과정에서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뼈(앞니)가 추가로 수습됐다. 지난 5월 옆으로 누워 있던 세월호 선체를 바로 세우는 직립 작업 이후 유골이 수습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3일 해양수산부 세월호 현장수습본부에 따르면 이날 오후 3시 15분쯤 세월호 3층 객실부 협착구역에서 사람 앞니로 추정되는 뼈 1점이 발견됐다. 이곳은 이날 수색을 위한 선체 일부절단 작업이 시작된 곳이다. 현장수습본부는 정확한 신원확인을 위해 이 뼈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본원으로 보내 정밀 감식을 의뢰할 계획이다. 해수부는 세월호 선체 직립 직후부터 세월호 미수습자 5명의 흔적을 찾기 위한 ‘마지막 수색’을 벌이고 있다. 현재 미수습자는 단원고 남현철·박영인군, 양승진 교사, 권재근·혁규 부자 등 5명이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세월호 직립 후 첫 유골 1점 수습

    세월호 직립 이후 선체 수색 과정에서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뼈(앞니)가 추가로 수습됐다. 지난 5월 옆으로 누워 있던 세월호 선체를 바로 세우는 직립 작업 이후 유골이 수습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3일 해양수산부 세월호 현장수습본부에 따르면 이날 오후 3시 15분쯤 세월호 3층 객실부 협착구역에서 사람 앞니로 추정되는 뼈 1점이 발견됐다. 이곳은 이날 수색을 위한 선체 일부절단 작업이 시작된 곳이다. 현장수습본부는 정확한 신원확인을 위해 이 뼈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본원으로 보내 정밀 감식을 의뢰할 계획이다.  해수부는 세월호 선체 직립 직후부터 세월호 미수습자 5명의 흔적을 찾기 위한 ‘마지막 수색’을 벌이고 있다. 현재 미수습자는 단원고 남현철·박영인군, 양승진 교사, 권재근·혁규 부자 등 5명이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여기는 남미] 멕시코 공동묘지서 ‘해골 도둑’ 출현…이유는?

    [여기는 남미] 멕시코 공동묘지서 ‘해골 도둑’ 출현…이유는?

    멕시코의 한 공동묘지에 도둑이 들어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해괴한 절도사건이 벌어진 곳은 멕시코 할리스코주 테파티틀란에 있는 한 공동묘지다. 프로세소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문제의 공동묘지엔 도둑이 든 건 지난 주말. 도둑은 관을 꺼내 뚜껑을 강제로 열고 해골을 훔쳐갔다. 공격을 당한 시설은 아파트처럼 지어진 구조물로 관을 보관하는 곳이다. 도둑은 벽돌 등을 이용해 문을 훼손한 후 관을 꺼냈다. 사건현장을 처음 발견한 공동묘지 관리인은 "아침에 순찰을 도는데 뚜껑이 열린 관들이 널려져 있었다"면서 "주변에선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벽돌들이 발견됐다"고 말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확인한 결과 도둑이 노린 건 머리부분이었다. 공격을 받은 무덤은 모두 5곳으로 도둑은 유골의 머리부분만 떼어내 가져갔다.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지만 현재로선 뚜렷한 단서를 잡지 못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주말 새벽에 도둑이 든 것으로 추정되지만 단서가 될 만한 흔적은 나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도둑이 해골을 노린 이유부터가 미스테리다. 경찰은 "해골의 수요자(?)가 있다면 의대생이나 치대생뿐"이라면서 "학생들에게 해골을 팔아넘기려고 범행을 저질렀을 수는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종교적 의식을 위해 해골을 훔쳐간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죽음의 신' 등 미신을 섬기는 누군가가 제단을 만들기 위해 해골을 훔쳐갔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공동묘지 관리인은 "이런 사건은 난생 처음"이라면서 "가족의 해골을 잃어버린 유족들에게 정말 죄송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사진=프로세소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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