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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운의 지도자’ 자오쯔양 서거 15주기…‘재평가’ 이뤄질까

    ‘비운의 지도자’ 자오쯔양 서거 15주기…‘재평가’ 이뤄질까

    1989년 6월 4일 ‘톈안먼 사태’ 당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에 온정적 태도를 보였다가 실각한 자오쯔양(1919∼2005)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됐다. 가족과 지지자들은 지금도 그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다. 27일 대만 중앙통신 등에 따르면 지난 17일 자오 전 총서기 서거 15주기를 맞아 유가족과 톈안먼 사태 관련단체 회원들이 베이징 창핑구의 민간 묘지 톈서우위안에서 추모 행사를 가졌다. 공안당국은 묘역 주변 경비를 대폭 강화하고 얼굴 인식 카메라를 설치했다. 자오 총서기의 차남 자오얼쥔은 “지난해 10월 이곳에 부친의 묘지를 처음 조성했을 때와 비교해 (위치나 배열 등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현재 그의 묘지는 나무와 울타리 등으로 시야가 가려져 있어 일반인들이 쉽게 찾지 못하게 돼 있다. 2016년 폐간된 진보성향 월간지 ‘옌황춘추’의 부편집장 왕옌쥔은 “아직도 (중국에는) 자오쯔양을 제물로 삼으려는 이들이 많다”면서 “그의 묘지는 외부에 공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오쯔양과 친분이 두터웠던 톈지윈 전 국무원 부총리가 그를 추모하고자 묘지를 방문하겠다고 밝혔다가 불발됐다고 홍콩 매체들이 전했다. 톈 전 부총리는 자오 총서기 서거 2년 뒤인 2007년 옌황춘추에 “자오쯔양은 절약을 몸소 실천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 톈안먼 사태 뒤 중국 언론이 자오 총서기의 공적을 기술한 첫 기사였다. 1989년 초까지만 해도 자오쯔양은 덩샤오핑(1904~1997)이 아끼던 후계자였다. 하지만 5월 톈안먼에서 민주화 시위가 시작되자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군의 무력진압을 반대하고 시위 학생들과 대화를 통해 접점을 찾아 보려다가 덩샤오핑의 눈 밖에 난 것이다. 그는 당 요직에서 축출됐다. 중국 당국은 다음달 4일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후 자오쯔양은 가택연금돼 자연인으로 지내다가 2005년 1월 17일 별세했다. 중국의 최고지도자는 사망 뒤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공묘 지도자 구역에 안치되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베이징 당국은 그의 묘지가 민주화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고 보고 이를 막아왔다. 유족은 자오쯔양의 유골을 베이징 자택에 보관해 오다가 자오 탄생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10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지시로 민간 묘역에 안장할 수 있었다. 당시 시 주석의 부친 시중신(1913~2002)과 자오쯔양이 절친한 관계였다는 점이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가 말년에 살았던 베이징의 옛집에는 지금도 지지자와 추모객이 종종 방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BBC 방송은 자오쯔양이 쓰던 옛집의 서재에 사진과 기록물, 소장품을 보관한 소규모 추모 공간이 마련돼 있다고 전했다. 2005년 1월 신화통신은 그의 죽음에 대해 ”당과 인민 사업에 유익한 공헌을 했다. 하지만 1989년 정치적 풍파 속에 엄중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평가했다. 중국 공산당은 그에 대한 긴 침묵을 지키고 있다. 2015년 환구시보는 “중국 당국은 자오쯔양 10주기에 어떤 평가도 내놓지 않았다. 침묵 역시 일종의 태도 표명”이라고 전했다. 지난해 10월 자오쯔양의 딸 왕옌난은 BBC방송 인터뷰에서 “부친에 대한 정치적 복권이 이뤄질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면서도 “그러나 현실은 다른 문제”라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옛 광주교도소 발굴된 유골은 260여구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 묘지에서 발견된 유골이 당초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260여구에 이를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27일 광주시 등에 따르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지난달 19일 옛 광주교도소에서 무더기로 발굴된 유골을 정밀 감식하기 위해 유골을 분류하고 있다. 유골 분류는 두개골이나 대퇴골 등 큰 뼈를 중심으로 먼저 구분하고 나머지 작은 뼈를 맞춰가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당초 무연고자 묘지 합장묘 1기에서 발견된 유골은 법무부(광주교도소)가 관리하고 있던 41구와 신원미상의 유골 40여구 등 모두 80여구로 알려졌다. 그러나 국과수는 해당 유골을 분류하는 작업을 70%가량 마친 상황에서 전체 유골(사람) 숫자가 260여구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신원미상의 유골이 5·18행방불명자가 아니라 교도소 이전 과정에서 옮겨진 무연고자 유골일 가능성에 무게를 싣는 것으로 해석된다. 현재 광주시에 신고된 행방불명자는 242명이다. 이 가운데 행불자로 인정된 사람은 76명이다. 이번에 유골이 발견된 옛 광주교도소 부지는 5·18행불자의 주요 암매장지로 꼽혀왔다. 광주지검이 작성한 ‘광주교도소 동향’에는 ‘1980년 5월21일 시신 6구가 교도소 공동묘지 주변에 임시 매장됐다’고 기록돼 있다. 1980년 5월24일 검시를 교도소 측에 지시한 내용도 담겨 있다. 5·18 직후 교도소 안에서 시신 8구, 교도소 인근 야산에서는 시신 3구 등 모두 11구가 암매장 상태로 발견되기도 했다. 암매장지 발굴 작업은 1997년부터 2018년까지 옛 교도소 등지서 11차례 이뤄졌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5·18기념재단은 옛 광주교도소에서 28일부터 5일 동안 최근 유골이 무더기로 발굴된 무연고 묘지 인근 2888㎡ 부지를 대상으로 추가 발굴조사를 한다. 광주시는 5·18 행방불명자 가족의 DNA를 확보하기 위해 내달 3일부터 5월 29일까지 직계·모계 가족을 대상으로 혈액 채취 신청을 받는다. 시는 2001년부터 2018년까지 5차례에 걸쳐 5·18 행방불명자 가족 찾기 사업을 추진해 154가족, 334명 혈액 정보를 확보하고 전남대학교 법의학교실에 보관하고 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사망한 아버지 유해를 철도역 화장실에 유기한 日남성

    사망한 아버지 유해를 철도역 화장실에 유기한 日남성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해를 철도역 화장실에 유기한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아사히TV 등 현지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히로아키 히시지마(53)는 지난해 9월, 오래전 어머니와 이혼한 뒤 따로 생활하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가까운 가족이 없었던 그의 아버지 장례식은 도쿄 행정사무소가 대신 치렀고, 이후 행정사무소는 아들인 히로아키에게 화장한 유해를 모셔가라고 요구했다. 그는 2개월여가 흐른 뒤인 지난해 11월에야 도쿄 신주쿠의 한 행정사무소에 찾아가 고인의 유해를 받아들었지만, 곧장 집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현지에서는 그가 아버지의 유해를 집으로 가져갈경우 어머니가 화를 낼 것을 두려워했다는 설과, 어머니가 이혼한 남편의 유해를 집에 들이는 것을 거부했다는 설 등이 돌았지만, 정확한 사연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남성이 특정 장소에 유해를 안치하는 일 등에 큰 비용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이를 어머니 몰래 자신이 거주하던 작은 방에 보관해왔다는 사실이다. 이후 그는 도쿄철도 마루노우치역 화장실에 유해를 유기한 뒤 도망쳤다. 이후 마루노우치역 소속 직원이 버려진 유해를 발견하고는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조사 끝에 지난 17일, 문제의 남성을 체포했다. 현지법에 따르면 화장하고 남은 유해를 유기할 경우 벌금형 또는 징역 최대 3년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 남성이 아버지의 유해를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처리하려 한 정확한 사유는 공개되지 않은 가운데, 현지에서는 남성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쏟아져나왔다. 네티즌들은 “그는 어머니가 화를 낼 것은 두렵고, 해당 도시 사람들이나 경찰이 분노할 것은 두렵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런 범죄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두렵다니. 그는 무려 53세다” 등의 의견을 남겼다. 한편 CNN에 따르면 일본의 장례식 비용은 날이 갈수록 치솟고 있으며, 고인의 유가족이 개인의 묘지를 준비하는데 드는 비용은 50만 엔(한화 약 531만원)에 달한다. 전통적으로 화장된 유골은 상속된 매장지에 주로 묻히는데, 일본의 1인 가구가 증가함에 따라 상속 매장지에 대한 의존도는 점차 낮아지고 있다. 현지 장례업체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에는 비용면에서 효율적인 장례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보트를 대여하고 바다로 나가 유해를 뿌리거나 땅에 뿌리는 방식을 선택한다. 사진=123rf.com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광주시, 5·18행불자 찾기 위해 옛 광주교도소 추가 발굴

    광주시와 5·18단체가 최근 법무부가 관리하지 않은 유골이 무더기로 발견된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 공동묘지 인근에 대한 추가 발굴 조사에 나선다. 20일 광주시에 따르면 5·18기념재단과 공동으로 오는 28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5일간 옛 광주교도고 무연고자 공동묘지 인근 2800여㎡(870평)에 대해 유골 발굴 조사를 진행한다. 5·18기념재단과 5월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는 앞서 지난달 19일 신원 미상의 유골 40여구가 발견되자, 또 다른 유골의 매장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해 최근 광주시에 발굴 조사를 요청했다. 5월 단체의 요청을 받아들인 광주시는 해당 부지 인근 도로 신축공사를 중단하고 ‘대한문화재연구원’에 발굴을 의뢰하고 계약을 체결했다. 이 업체는 2017년과 동일한 방법인 땅속탐사레이더와 중장비를 동원한 기초 굴착 이후 문화재 출토방식으로 전환하는 발굴조사 방법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현재 5·18행불자로 신고된 사람은 242명에 달하지만, 심사를 거쳐 관련자로 인정된 이는 84명 뿐이다. 이들 84명 가운데 지난 2002년 5·18국립민주묘지 무연고 분묘에 매장된 11구의 유골과 행불자 유가족의 유전자 감식결과를 비교해 신원이 밝혀진 희생자는 6명이다. 나머지 78명은 아직까지 오리무중이다. 앞서 5·18기념재단 등은 지난 2017년까지 5·18 검찰 조사 기록과 관련자 진술 내용 등을 토대로 암매장 추정지 약도를 확보하고 교도소 북쪽 담장 주변 등에서 발굴조사를 했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마무리했다. 한편 전남대 법의학교실은 5·18 행불자 신고를 한 130가족 295명의 혈액을 보관하고 있으며, 최근 행불자 가족 등을 대상으로 추가 혈액 채취를 통해 DNA를 확보할 예정이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광주시, 올해도 5·18행불자 가족 유전자정보 채취

    광주시가 올해에도 유전자 정보를 활용해 5·18 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자 찾기를 지속한다. 16일 광주시에 따르면 5·18 행방불명자 가족의 DNA를 확보하기 위해 부모, 형제, 자매, 자녀, 모계 가족 등을 대상으로 혈액 채취 신청을 받는다. 시는 2월 3일~5월 29일 온·오프라인 방식으로 신청을 받는다. 우편, 이메일, 팩스, 직접 방문 접수는 2월 3일부터, 시 홈페이지(www.gwangju.go.kr) 접수는 프로그램 개편을 거쳐 3월 9일부터 시행한다. 확보한 혈액은 앞으로 암매장 발굴 등으로 유골이 발굴될 경우 유전자 정보를 비교하는 기초자료로 활용된다. 시는 그동안 5·18 구 묘역 무명열사묘, 주남 마을, 부엉산 등에서 발굴된 유골을 비교해 2002년 6명의 가족을 찾은 바 있다. 시는 2001년부터 2018년까지 5차례에 걸쳐 5·18 행방불명자 가족 찾기 사업을 추진해 154가족, 334명 혈액 정보를 확보하고 전남대학교 법의학교실에 보관하고 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반려견 어두운 데 가두면 처벌받아요

    반려견 어두운 데 가두면 처벌받아요

    2022년부터 교육받아야 동물 입양 가능 실내서 1m 짧은 목줄 금지 등 구체화 유골만 수습하는 장묘 ‘수분해장’ 허용농림축산식품부가 14일 발표한 ‘2020~2024년 동물복지 종합계획’은 유기견 발생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됐던 ‘쉽게 개를 사고팔던’ 시스템을 개선하고, 소유자의 의무를 강화해 사람과 동물이 공존하는 사회를 조성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전체 가구 중 반려동물 양육 가구 비중은 2010년 17.4%에서 지난해 26.4%로 크게 늘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반려동물 산업 규모가 올해 3조 4000억원에서 2026년 5조 7000억원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농식품부는 2022년부터 반려동물 입양 전 교육을 의무화해 교육 이수자만 동물 구매가 가능하도록 했다. 유기견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동물 등록도 활성화한다. 구매자 명의로 동물 등록 신청 후 판매가 의무화된다. 통계청은 올해 인구·주택 총조사 항목에서 반려동물 사육 여부와 마릿수 등을 묻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내년부터 동물이 학대당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면 지방자치단체가 주인으로부터 해당 동물을 격리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은 직접적인 상해나 신체적 고통이 확인돼야 격리된다. 소유자의 사육 관리 의무도 구체화된다. 예를 들어 집 안에서 1m가량의 짧은 목줄 등으로 묶어 사육해 동물의 행동을 심하게 제약하거나 채광이 차단된 어두운 공간에 감금해 사육하면 처벌 대상이 된다. 또 동물보호법을 개정해 등록 대상 동물과 동반 외출 땐 목줄 길이를 2m로 제한할 계획이다. 맹견 소유자가 내년부터 책임보험 가입 의무를 어기면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소유자 보험 가입과 공동주택 사육 허가제의 대상이 되는 맹견은 도사견, 아메리칸 핏불테리어, 아메리칸 스태퍼드셔 테리어, 스태퍼드셔 불 테리어, 로트와일러 등 5종과 이들의 잡종으로 한정된다. 다만 맹견은 아니지만 중형견들이 종종 사람을 무는 사례가 발생하자 농식품부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개의 공격성을 평가해 행동 교정과 안락사로 처리하는 방안을 2022년까지 마련하기로 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장기적으로 맹견 판정위원회를 도입해 맹견 기준을 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 반려동물이 증가함에 따로 올해부터 동물 장묘 방식에 강(强)알칼리 용액을 활용해 사체를 녹이고 유골만 수습하는 ‘수분해장’을 허용하기로 했다. 세종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옛 광주교도소 주변서 추가 유골 발굴 나선다

    옛 광주교도소 주변서 추가 유골 발굴 나선다

    5·18기념재단 “추가 발굴 조사 필요”광주시, 공사 중단하고 관련 절차 진행‘신원미상 유골’이 발굴된 옛 광주교도소 주변에서 추가 유골 발굴을 위한 조사가 추진된다. 3일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재단은 전날 솔로몬로파크 진입로 개설 공사를 맡은 광주시 측에 공사를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진입로 공사 부지와 바로 인접해 있는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 묘지에서 신원미상의 유골이 발견된 만큼, 그 주변에 또 다른 유골이 묻혀있는 지 확인이 필요하다는 이유다. 옛 광주교도소는 5·18암매장지로 꼽혀오던 곳이어서 신원미상의 유골이 5·18행방불명자일 가능성이 나온다. 김후식 5·18부상자회장은 “2017년 교도소 인근 암매장 추정지를 발굴 조사를 할 때 무연고자 묘지는 관리대장이 있다고 해서 제외했다. 그런데 이 곳에서 신원미상의 유골이 발굴된 만큼 추가 발굴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광주시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공사를 중단하고 발굴 조사를 위한 업체 선정과 비용 등을 확인하고 있다. 다만 아직 추가 발굴조사를 진행할 주체는 결정되지 않았다. 광주시 관계자는 “추가 유골 발굴 가능성이 있는 만큼 공사를 우선 중단하고 관련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달 19일 솔로몬로파크 조성 공사 중이던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 묘지에 있던 합장묘 1기에서 신원미상 유골 40여구가 발견됐다. 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 퓨마 세 마리, 사람 뼛조각 먹다가 사살…美 공원 일시 폐쇄

    퓨마 세 마리, 사람 뼛조각 먹다가 사살…美 공원 일시 폐쇄

    퓨마 세 마리가 사람의 것으로 확인된 뼛조각을 먹다가 발각돼 결국 사살됐다. CNN, 뉴욕포스트 등 현지 언론의 2일 보도에 따르면, 애리조나주 코로나도 국립공원 측은 공원 내 점검 중 등산객의 출입이 빈번한 하이킹 코스에 퓨마 세 마리가 사람의 뼛조각을 먹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국립공원 측에 따르면, 이들 퓨마 세 마리는 관리인들이 가까이 다가가 쫓아내기 위해 위협할 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들 퓨마가 먼저 사람을 공격한 뒤 유골을 훼손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사망한 시신을 먹잇감으로 인식한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당초 코로나도 국립공원 관리소 측은 해당 퓨마 세 마리를 잡기 위해 하루 동안 공원을 폐쇄했고, 결국 이들 세 마리를 모두 사살했다. 이후 의료진이 다가가 퓨마들이 훼손한 뼛조각을 수거했으며, 현재 신원과 사망원인 등을 밝히기 위한 검사가 진행되고 있다. 야생동물 전문가들은 “퓨마는 사람의 시신이나 유해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면서 “이번에 사살된 퓨마 세 마리의 행동은 매우 비정상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면서 “사살된 퓨마 세 마리가 유골의 주인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출입이 빈번한 코스에서 매우 근접한 지점에서 발견됐기 때문에 향후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사살 이유를 밝혔다. 공원 측은 해당 트래킹 코스는 더 이상 퓨마 등의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한 뒤 약 보름 후에 다시 개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퓨마는 주로 야행성으로 시각, 청각, 후각에 의존해서 행동한다. 어미를 떠난 새끼 수컷들은 다 자랄 때까지 무리를 지어 다니기도 한다. 뒷다리가 길어서 산악지대를 매우 잘 이동할 수 있다. 주로 사슴과 토끼 등을 사냥해 잡아먹는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부모의 간절함 통했다. 죽은 아들의 유해 훔쳐간 도둑 눈물 어린 사과

    부모의 간절함 통했다. 죽은 아들의 유해 훔쳐간 도둑 눈물 어린 사과

    아들의 유해를 훔쳐간 도둑들이 눈물 어린 전화를 걸어와 유해가 있는 곳을 알려줘 되찾았다. 지난 여름 스웨덴에서 교통사고로 열아홉 살 아들 데니스(사진)를 잃은 킹가 벱나즈와 바르텍 부부는 차가운 스웨덴에 유해를 뿌릴 수 없다는 생각 끝에 성탄 휴가를 맞아 키프로스로 향했다. 그곳이라면 아들을 따듯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27일(이하 현지시간) 오후 5시쯤 리마솔의 거버너스 해변 근처에 차를 주차하고 요기를 하고 돌아오니 도둑이 차 유리창을 깨고 뒷좌석에 놓아둔 검정색 등가방을 들고 가버렸다. 등가방 안에 아들 유해함이 들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유해함 겉에는 잠자리가 그려져 있고 데니스의 이름과 생몰연도 ‘2000-2019’가 새겨져 있어 다른 것과 혼동할 여지도 전혀 없었다. 폴란드 출신이지만 13년 전 스웨덴으로 이주했던 가족은 모든 희망을 버리고 29일 폴란드로 떠났다. 절박해진 마음에 유골함을 돌려주면 200유로(약 25만원)를 보상하겠다고까지 했지만 소식이 들려주지 않아 “쓰레기 속에 버려졌겠거니” 체념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날 저녁 폴란드에 있는 가족에게 키프로스 경찰이 전화를 걸어와 절도 용의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영국 BBC가 30일 전했다. 도둑은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키프로스 경찰은 두 남성과 한 여성을 차량 파손과 절도 혐의로 구금하고 있다고 확인했다. 어머니 바르텍은 전화를 걸어온 도둑에 화가 나지 않으며 “인간다운 감정과 따듯한 마음을 갖고 있어 인생이 바뀔 것이다.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했다. 안도한 부부는 31일 다시 키프로스로 돌아가 데니스의 유해를 받아 뿌려줄 예정이라고 했다. 바르텍은 “우리는 감정부터 가라앉혀야 할 것 같다. 난 지난 27일 이후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말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스웨덴에서 숨진 아들 따듯한 곳 뿌려주려 했는데 제발 돌려주”

    “스웨덴에서 숨진 아들 따듯한 곳 뿌려주려 했는데 제발 돌려주”

    “아들도 없는 집에서 성탄절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어요. 우리 인생에 최악이었던 한 해의 끄트머리에 더 따듯한 곳에서 아들을 보내주고 싶었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지난 여름 스웨덴에서 교통사고로 열아홉 살 아들 데니스(사진)를 잃은 킹가 벱나즈와 바르텍 부부의 하소연이다. 차가운 북해 바다에 유해를 뿌릴 수 없었던 부부는 유해를 고이 간직하다 성탄 휴가를 맞아 키프로스로 향했다. 그곳이라면 아들을 따듯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27일(이하 현지시간) 오후 5시쯤 리마솔의 거버너스 해변 근처에 차를 주차하고 요기를 하고 돌아오니 도둑이 차 유리창을 깨고 뒷좌석에 놓아둔 검정색 등가방을 들고 가버렸다. 등가방 안에 아들 유해함이 들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유해함 겉에는 잠자리가 그려져 있고 데니스의 이름과 생몰연도 ‘2000-2019’가 새겨져 있어 다른 것과 혼동할 여지도 전혀 없다. 부부는 폴란드 출신이지만 13년 전 스웨덴으로 이주했다. 어머니 바르텍은 가족들이 늘 여행을 즐겼다며 데니스의 유해를 뿌려주기 위해 “멋지고 따듯하며 아름다운 어딘가를 찾는 일이 중요했다”며 “백팩은 안 돌려줘도 좋으니 유해함이라도 돌려줬으면 좋겠다. 아주 각별한 일이라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영국 BBC는 전했다. 키프로스의 유일한 영자 신문 키프로스 메일에 따르면 일주일 전에 도착한 부부는 아들 유해를 뿌린 뒤 29일 귀국할 예정이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절박해진 부부는 훔쳐간 유골함을 돌려주면 200유로(약 25만원)를 보상하겠다고까지 했다. 바르텍은 “리마솔 주변 모든 이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돼 그 도둑이 어쩌면 인간의 도리를 조금이라도 되찾아 돌려줬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조선의 독립, 자유를 완성하기 위하여, 조선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도모하기 위하여, 최후 성공이 있을 때까지 왜적과 계속 투쟁하라! ” 만주를 호령하던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말했다.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과를 거둬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았지만 양세봉을 모르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양세봉은 1896년 7월 15일 평북 철산군 세리면 연산동에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마을 서당 문지기로 일하며 귀동냥으로 천자문과 논어, 명심보감 등을 익힌 것이 배움의 전부였다. 훈장의 안중근 의사 이야기는 그에게 큰 영향을 줬다. 양세봉은 죽음을 앞둔 안 의사가 남긴 “슬퍼하지 마라. 대장부로 태어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데 무엇이 슬프단 말이냐”는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1912년 아버지가 갑자기 병환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양세봉은 겨우 16세에 가장이 됐고 임재순과 결혼했다.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자 양세봉은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향했다. 흥경현(현 신빈현) 영릉가를 거쳐 한인 집단 거주지인 홍묘자 사도구에 정착했다. 1919년 4월 홍묘자에 있던 홍동학교 교장 이세일은 3·1운동 지지 시위를 주도했는데 양세봉도 동참했다. 이후 양세봉은 천마산대에 가입해 본격적인 독립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1920년 12월 최시흥이 청장년 500여명으로 조직한 천마산대는 경찰서,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밀정과 일경을 처단하는 활동을 하던 항일 유격대였다.●“중국인, 관운장보다 유능한 장군으로 흠모” 천마산대는 일제의 공격을 받자 만주 유하현으로 가 광복군총영에 합류했다. 양세봉은 군기 검사관이 됐다. 그 뒤 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은 대한통의부로 통합, 무력 부대를 설치했는데 오동진이 사령장이었고 양세봉도 두령이라는 작은 자리를 맡았다. 1923년 5월 양세봉은 평북 창성을 습격하고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하는 등 전투에 참여했다. 그 후 새로 출범한 참의부 소대장이 돼 압록강을 건너가 유격 투쟁을 이어 갔다. 평북 초산과 강계에서 일경 수명을 사살했고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경비선을 타고 압록강을 지나갈 때 저격을 지휘해 일제가 간담을 쓸어내리게 했다. 1924년부터 남만주에는 정의부가, 북만주에는 신민부가 설립돼 참의부와 함께 3부 체제가 됐다. 양세봉은 참의부 중대장으로 승진한 뒤 정의부로 옮겨 갔다. 3부는 1929년 4월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우여곡절 끝에 국민부로 통합됐다. 흥경현 왕청문에 자리잡은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을 창설했다. 국민부는 선민부 토벌에 나섰다. 조선민회라고도 불렸던 선민부는 한인 변절자들이 이끌고 있었다. 일제의 조종을 받아 독립군을 색출하고 가족을 살해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양세봉은 부사령을 맡아 선민부 지휘부와 지부를 습격해 우두머리와 일당을 모조리 죽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1931년 9·18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듬해 1월 조선혁명당과 군 간부 10여명이 회의 도중 습격을 받아 체포되고 이후 두 달 동안 간부 83명이 붙잡혀 혁명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지역 부대장들의 추천으로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양세봉 장군은 부대를 재정비하고 속성군관학교를 세우는 한편 조직적인 항일 투쟁에 나섰다. 또한 왕동헌, 이춘윤, 양희부 등 중국 지도자들과 협력해 ‘요령농민자위단’을 결성했다. 당취오가 총사령인 ‘요령민중자위군’과도 힘을 합쳐 자위군의 특무대 사령으로서 대일 연합작전을 벌였다. 괴뢰정부인 만주국 군대가 흥경현을 점령하자 연합부대는 20여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여 탈환했다. 일본군은 400여명의 사상자와 500명 가까운 실종자를 냈다. ‘제1차 흥경혈전’이다. 그 중심에 양세봉 장군이 있었다. 다음달 일본군은 비행기까지 동원해 흥경으로 돌진해 왔다. 2차 혈전에서도 연합부대는 악전고투 끝에 일본군을 물리쳤다. 연합부대는 1932년 8월 청원현을, 다음달에는 석탄 탄광이 있는 무순을 공격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연합부대가 지나갔던 평정산 마을 주민 3000여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32년까지 한중 연합부대는 일만 연합군과 200여 차례 전투를 벌였고 장군은 그때마다 크고 작은 승리를 거뒀다. 한편으로 멀리 경상도까지 소부대를 보내 경찰서 등을 파괴하고 악질 경찰을 살해했다. 1932~1933년 압록강 주변에서만 26차례 파괴 공작을 벌였고 일본 군경 243명을 사살했다. 1933년 5월 서원준을 황해도에 밀파해 사리원 경찰서 등을 습격한 것은 신문이 호외로 다룰 만큼 큰 사건이었다. 그럴수록 일제의 추격은 집요해졌다. 조선인 변절자를 이용해 혁명군을 체포하고 가족과 친구까지 살해했다. 혁명군 수백명을 처형해 머리를 매달았다. 장군의 체포에도 혈안이 돼 현상금을 걸었다. 1934년 3월 장군은 중국 동북인민혁명군 사령관 양정우와 연합했다. 장군은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지만 항일을 위해 신념도 버렸다. 조선혁명군과 인민혁명군은 진주령 일본군 기차 습격, 노구대 격전, 쾌대무자 전투 등 연합작전에서 연전연승, 일본군에 엄청난 타격을 줬다. 그해 9월 18일 일제의 지시를 받던 박창해는 장군과 면식이 있던 압동양을 보내 “저희 부대가 양 사령관께 오려고 합니다. 함께 가서 무기를 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라며 유인했다. 장군은 경호대원만 데리고 따라나섰고 일행이 소황구에 이르렀을 때 어둠 속에서 압동양이 옥수수밭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매복하고 있던 일군들이 기습 사격을 가했고 장군은 가슴에 총탄 두 발을 맞았다. 장군은 “조선독립혁명을 완성하고 가지 못하는 나는… 민족의 죄인입니다”라고 자책하며 20일 오후 1시쯤 숨을 거뒀다. 15년 동안 풍찬노숙하며 일제와 싸웠던 영웅은 이렇게 희생됐다. 한인들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며 슬퍼했다. 장군의 나이 38세였다.한인들은 시신을 위치가 드러나지 않게 평장(平葬)했다. 같은 달 26일 양세봉의 죽음을 알고 향수하자촌에 일군이 몰려와 한인 70여명을 모아 놓고 시신을 내놓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하는 수 없이 마을 둔장(屯長)이 묘의 위치를 말하자 일군은 시신을 파내 놓고 마을 노인 김도선에게 작두로 머리를 자르라고 했다. 김 노인은 “나는 조선 사람이다. 조선 사람이 어찌 자기 사령관의 머리를 자를 수 있단 말이냐”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김 노인의 머리를 베고 장군의 머리를 가져갔다. 마을 사람들은 머리 없는 장군의 시신을 다시 고구려산성 아래에 묻었다. 장군은 전투에선 호랑이 같았지만 마음은 너무나 따뜻했다. 계급을 불문하고 대원들을 평등하게 대했고 거친 밥을 똑같이 나눠 먹었다. 이불을 덮어 주고 발을 씻겨 주기도 했다. 배움이 부족한 ‘소작농 장군’이었지만 인격으로 감동시켰다. 장군의 비서였던 박윤걸(중국에서 작고)씨는 “중국인 이춘윤은 관운장보다 더 유능한 장군이라며 흠모했다”고 말했다.●김일성 아버지와 의형제… 가족들 평양에 정착 광복 후 북한은 장군의 가족을 평양으로 데려가 정착시켰다. 장군은 김일성의 아버지와 의형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1961년 후손들이 유골을 북한으로 이장했고 장군은 애국열사릉에 옮겨져 묻혔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도 이회영 선생 묘소의 바로 왼쪽에 장군의 가묘가 있다. 남북 양쪽 국립묘지에 묘소가 있는 독립투사는 장군이 유일하다. 우리 정부는 1962년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조선의 독립, 자유를 완성하기 위하여, 조선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도모하기 위하여, 최후 성공이 있을 때까지 왜적과 계속 투쟁하라! ” 만주를 호령하던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말했다.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과를 거둬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았지만 양세봉을 모르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양세봉은 1896년 7월 15일 평북 철산군 세리면 연산동에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마을 서당 문지기로 일하며 귀동냥으로 천자문과 논어, 명심보감 등을 익힌 것이 배움의 전부였다. 훈장의 안중근 의사 이야기는 그에게 큰 영향을 줬다. 양세봉은 죽음을 앞둔 안 의사가 남긴 “슬퍼하지 마라. 대장부로 태어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데 무엇이 슬프단 말이냐”는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1912년 아버지가 갑자기 병환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양세봉은 겨우 16세에 가장이 됐고 임재순과 결혼했다.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자 양세봉은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향했다. 흥경현(현 신빈현) 영릉가를 거쳐 한인 집단 거주지인 홍묘자 사도구에 정착했다. 1919년 4월 홍묘자에 있던 홍동학교 교장 이세일은 3·1운동 지지 시위를 주도했는데 양세봉도 동참했다. 이후 양세봉은 천마산대에 가입해 본격적인 독립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1920년 12월 최시흥이 청장년 500여명으로 조직한 천마산대는 경찰서,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밀정과 일경을 처단하는 활동을 하던 항일 유격대였다.●“중국인, 관운장보다 유능한 장군으로 흠모” 천마산대는 일제의 공격을 받자 만주 유하현으로 가 광복군총영에 합류했다. 양세봉은 군기 검사관이 됐다. 그 뒤 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은 대한통의부로 통합, 무력 부대를 설치했는데 오동진이 사령장이었고 양세봉도 두령이라는 작은 자리를 맡았다. 1923년 5월 양세봉은 평북 창성을 습격하고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하는 등 전투에 참여했다. 그 후 새로 출범한 참의부 소대장이 돼 압록강을 건너가 유격 투쟁을 이어 갔다. 평북 초산과 강계에서 일경 수명을 사살했고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경비선을 타고 압록강을 지나갈 때 저격을 지휘해 일제가 간담을 쓸어내리게 했다. 1924년부터 남만주에는 정의부가, 북만주에는 신민부가 설립돼 참의부와 함께 3부 체제가 됐다. 양세봉은 참의부 중대장으로 승진한 뒤 정의부로 옮겨 갔다. 3부는 1929년 4월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우여곡절 끝에 국민부로 통합됐다. 흥경현 왕청문에 자리잡은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을 창설했다. 국민부는 선민부 토벌에 나섰다. 조선민회라고도 불렸던 선민부는 한인 변절자들이 이끌고 있었다. 일제의 조종을 받아 독립군을 색출하고 가족을 살해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양세봉은 부사령을 맡아 선민부 지휘부와 지부를 습격해 우두머리와 일당을 모조리 죽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1931년 9·18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듬해 1월 조선혁명당과 군 간부 10여명이 회의 도중 습격을 받아 체포되고 이후 두 달 동안 간부 83명이 붙잡혀 혁명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지역 부대장들의 추천으로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양세봉 장군은 부대를 재정비하고 속성군관학교를 세우는 한편 조직적인 항일 투쟁에 나섰다. 또한 왕동헌, 이춘윤, 양희부 등 중국 지도자들과 협력해 ‘요령농민자위단’을 결성했다. 당취오가 총사령인 ‘요령민중자위군’과도 힘을 합쳐 자위군의 특무대 사령으로서 대일 연합작전을 벌였다. 괴뢰정부인 만주국 군대가 흥경현을 점령하자 연합부대는 20여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여 탈환했다. 일본군은 400여명의 사상자와 500명 가까운 실종자를 냈다. ‘제1차 흥경혈전’이다. 그 중심에 양세봉 장군이 있었다. 다음달 일본군은 비행기까지 동원해 흥경으로 돌진해 왔다. 2차 혈전에서도 연합부대는 악전고투 끝에 일본군을 물리쳤다. 연합부대는 1932년 8월 청원현을, 다음달에는 석탄 탄광이 있는 무순을 공격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연합부대가 지나갔던 평정산 마을 주민 3000여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32년까지 한중 연합부대는 일만 연합군과 200여 차례 전투를 벌였고 장군은 그때마다 크고 작은 승리를 거뒀다. 한편으로 멀리 경상도까지 소부대를 보내 경찰서 등을 파괴하고 악질 경찰을 살해했다. 1932~1933년 압록강 주변에서만 26차례 파괴 공작을 벌였고 일본 군경 243명을 사살했다. 1933년 5월 서원준을 황해도에 밀파해 사리원 경찰서 등을 습격한 것은 신문이 호외로 다룰 만큼 큰 사건이었다. 그럴수록 일제의 추격은 집요해졌다. 조선인 변절자를 이용해 혁명군을 체포하고 가족과 친구까지 살해했다. 혁명군 수백명을 처형해 머리를 매달았다. 장군의 체포에도 혈안이 돼 현상금을 걸었다. 1934년 3월 장군은 중국 동북인민혁명군 사령관 양정우와 연합했다. 장군은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지만 항일을 위해 신념도 버렸다. 조선혁명군과 인민혁명군은 진주령 일본군 기차 습격, 노구대 격전, 쾌대무자 전투 등 연합작전에서 연전연승, 일본군에 엄청난 타격을 줬다.그해 9월 18일 일제의 지시를 받던 박창해는 장군과 면식이 있던 압동양을 보내 “저희 부대가 양 사령관께 오려고 합니다. 함께 가서 무기를 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라며 유인했다. 장군은 경호대원만 데리고 따라나섰고 일행이 소황구에 이르렀을 때 어둠 속에서 압동양이 옥수수밭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매복하고 있던 일군들이 기습 사격을 가했고 장군은 가슴에 총탄 두 발을 맞았다. 장군은 “조선독립혁명을 완성하고 가지 못하는 나는… 민족의 죄인입니다”라고 자책하며 20일 오후 1시쯤 숨을 거뒀다. 15년 동안 풍찬노숙하며 일제와 싸웠던 영웅은 이렇게 희생됐다. 한인들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며 슬퍼했다. 장군의 나이 38세였다. 한인들은 시신을 위치가 드러나지 않게 평장(平葬)했다. 같은 달 26일 양세봉의 죽음을 알고 향수하자촌에 일군이 몰려와 한인 70여명을 모아 놓고 시신을 내놓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하는 수 없이 마을 둔장(屯長)이 묘의 위치를 말하자 일군은 시신을 파내 놓고 마을 노인 김도선에게 작두로 머리를 자르라고 했다. 김 노인은 “나는 조선 사람이다. 조선 사람이 어찌 자기 사령관의 머리를 자를 수 있단 말이냐”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김 노인의 머리를 베고 장군의 머리를 가져갔다. 마을 사람들은 머리 없는 장군의 시신을 다시 고구려산성 아래에 묻었다. 장군은 전투에선 호랑이 같았지만 마음은 너무나 따뜻했다. 계급을 불문하고 대원들을 평등하게 대했고 거친 밥을 똑같이 나눠 먹었다. 이불을 덮어 주고 발을 씻겨 주기도 했다. 배움이 부족한 ‘소작농 장군’이었지만 인격으로 감동시켰다. 장군의 비서였던 박윤걸(중국에서 작고)씨는 “중국인 이춘윤은 관운장보다 더 유능한 장군이라며 흠모했다”고 말했다. ●김일성 아버지와 의형제… 가족들 평양에 정착 광복 후 북한은 장군의 가족을 평양으로 데려가 정착시켰다. 장군은 김일성의 아버지와 의형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1961년 후손들이 유골을 북한으로 이장했고 장군은 애국열사릉에 옮겨져 묻혔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도 이회영 선생 묘소의 바로 왼쪽에 장군의 가묘가 있다. 남북 양쪽 국립묘지에 묘소가 있는 독립투사는 장군이 유일하다. 우리 정부는 1962년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5·18 행불자’ 78명… 10여년 수색 성과 없어

    ‘5·18 행불자’ 78명… 10여년 수색 성과 없어

    “오랜 시간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 묘지에서 신원미상 유골이 발견됨에 따라 5·18 행불자 암매장 추정 지역이 주목받고 있다. 지난 10여년 동안 수색작업이 계속 이뤄져 왔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 23일 광주시와 5월단체에 따르면 시와 단체는 2002년부터 2017년까지 4차에 걸쳐 60여건의 제보를 바탕으로 이번에 유해가 나온 옛 광주교도소를 비롯해 시내 11곳에서 암매장 발굴작업을 벌였다. 1차 발굴은 2002년 6월~2003년 5월 소촌동 공동묘지, 삼도동 야산 무연고 분묘,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담장밑, 황룡강 제방 등 지역에서 이뤄졌다. 삼도동에서 모두 10기가 나왔으나 5·18 유가족과 유전자 정보가 일치하지 않았다. 2~3차 발굴도 2006~2009년 사이에 이뤄졌다. 이 가운데 주월동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유골 137기가 발견됐지만 5·18 행불자와 역시 무관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가장 최근인 2017년 11월 4차 발굴 대상지는 옛 광주교도소와 광주~화순 너릿재 구간이었다. 이들 2개 지역은 계엄군이 주둔하면서 시민군과 교전이 벌어졌고, 실제 5·18 직후 가매장된 시신 11구가 발견되기도 했던 곳이어서 유가족들의 기대가 컸지만 결과는 없었다. 5·18 이후 행불자 신고는 448건, 242명에 달하지만 심사를 거쳐 관련자로 인정된 사람은 84명뿐이다. 이 가운데 6명은 2002년 국립5·18민주묘지 무연고 분묘를 개장하면서 희생자로 확인됐다. 지금껏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공식적 행불자는 78명이다. 적어도 100명 이상의 행불자 가족은 최근 무더기 유골 발견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실낱같은 희망을 이어 가고 있다. 행불자 유가족들은 이번 유해 발굴을 계기로 실제 계엄군이 시민을 살상한 장소와 관련해 체계적인 암매장 발굴이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5월 3단체(유공자회, 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법무부는 국방부·행정안전부 등과 공동조사단을 꾸려 유골의 정밀감식과 암매장 경위를 수사하되 5·18단체가 추천하는 법의학자 등의 참여를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이번엔 뼈라도 찾았으면” 5·18 미성년 행불 가족 ‘희망의 끈’ 39년

    “이번엔 뼈라도 찾았으면” 5·18 미성년 행불 가족 ‘희망의 끈’ 39년

    “빈 땅을 본께 속이 문드러진다 안하요. 뉴스보고 바로 왔는디….” 지난 21일 이귀복(83)씨는 옛 광주교도소로 미친듯이 달려갔다.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교도소 부지에서 신원 미상의 유골들이 무더기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안타깝지만 유골은 볼 수 없었다. 1차 감식을 위해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진 뒤였다. 1980년 5월 당시 7살짜리 아들 이창현군이 사라진 뒤부터 아버지는 39년째 이렇게 산다. 광주교육청에 따르면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사이에 희생된 초·중·고등학생 수는 18명이다. 옛 광주교도소 부지의 무연고자 공동묘지에서 지난 19일 신원 미상의 유골 40여구가 발견됐다. 아이로 추정되는 유골도 나왔다. 이곳은 전부터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된 사람들이 계엄군에 의해 암매장된 장소로 지목됐다. 단정할 수는 없다지만 유골이 5·18 행방불명자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23일 서울신문과 인터뷰를 한 5·18 행방불명자 가족들은 그렇게 가족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5·18 민주화운동의 영향으로 휴교령이 내려졌던 1980년 5월 19일 창현군은 집을 나갔다. 일을 마치고 온 어머니는 저녁 때까지 창현군이 돌아오지 않자 광주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아들을 찾고자 아버지도 광주 시내를 이 잡듯이 뒤졌지만 소식조차 알 수 없었다. “뼈라도 찾아 보겠다고 전국 안 간 데가 없지요. 5·18 행방불명자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다는 소리만 나오면 무조건 달려갔으니까.” 실종 10년째인 1989년 이씨는 5·18 유족회가 발간한 책자에서 아들의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사진 속 아들은 총상을 입은 채 숨져 있었다. 창현군은 1994년 5·18 행방불명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시신을 여전히 찾지 못했다. 7남매 중 장남인 남진현(77)씨도 1980년 5월 22일 이후로 지금까지 막내동생 남현규(당시 9살)군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나간 현규군이 돌아오지 않자 온 가족이 막내를 찾아 나섰다. 전남도청과 병원 등을 돌아다녔지만 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군용 트럭에 태워져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을 봤다는 아버지 친구의 증언이 동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남씨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네 동생 현규를 꼭 찾아야 한다’, ‘이대로는 억울해 눈을 못 감겠다’고 자주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현규군은 역시 지난해 말 5·18 행방불명자로 인정됐다. 남씨는 이번에 발견된 유골들이 5·18 행방불명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는 “교도소 공동묘지에 시신을 묻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면서 “민간인은 어차피 못 들어가고. 계엄군이 5·18 희생자들 시신을 매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내 아들이었으면 하지만 한편으론 큰 기대를 걸지는 않는다. 다만 유골이 누군가의 잃어버린 가족이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지금까지 광주시가 5·18 행방불명자로 인정한 경우는 84명이다. 이 중 6명은 실종자 가족 유전자(DNA)와 분석해 신원을 확인했으나 남은 78명은 소재가 불분명한 상태다. 158명은 행방불명으로 인정조차 받지 못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국과수 “한 점 의혹 남기지 않겠다”…간절한 5·18행불자 가족

    국과수 “한 점 의혹 남기지 않겠다”…간절한 5·18행불자 가족

    국과수, 광주과학수사연구소서 사전 회의“법의학 전문가들과 대책 논의할 것”5·18행불자 가족들, 일말의 기대감 나타내5·18단체 “유골 감식에 5·18전문가 참여해야”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신원미상 유골 40여구와 5·18 민주화운동 행방불명자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한 점 의혹도 남기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5·18 암매장지로 꼽혀오던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 묘지에서 유골이 나오자 당시 행방불명된 사람의 가족들은 일말의 기대감을 나타냈다. 양경무 국과수 중앙법의학센터장은 23일 광주과학수사연구소에서 “유골에 대한 부검 의뢰가 들어와 법의학 전문가들과 대책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양 센터장은 “뼈가 워낙 많이 발견돼 수사기관으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와 자료도 받아야 한다”면서 “정보와 자료를 검토하고 뼈 상태를 파악해 기간을 얼마나 둘지와 인력은 얼마나 투입할지 등을 정하겠다”고 설명했다. 국과수는 옛 광주교도소에서 발굴된 유골의 정밀감식에 앞서 향후 계획과 일정을 논의하고자 이날 광주과학수사연구소에서 사전 회의를 열었다.양 센터장은 “5·18과 관련 가능성이 커진다면 향후 출범할 진상규명위원회와 협의할 것”이라면서 “어느 한쪽이 독단적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정확한 분석을 위해 유골을 원주 본원이나 서울연구소로 옮겨갈 가능성도 시사했다. 양 센터장은 “그쪽 연구소가 좋은 점도 있다”면서 “법의학 전문가들과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국과수와 별도로 법무부, 검찰, 경찰,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도 이날 첫 회의를 열어 신원미상 유골의 5·18 희생자 여부 등을 가리는 활동을 시작했다. 유골 발견 소식에 5·18 행불자 가족들은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 5·18 당시 15살이던 늦둥이 동생을 잃어버린 행불자 가족 남진현(78)씨는 “시신이 나왔다, 유골이 나왔다고 하면 어디가 됐든지 모두 찾아다녔다. 매번 5·18과 관련이 없다는 소식에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면서 “유족들은 시신이라도 있어서 제사라도 지내고, 5·18 기념일이 되면 묘에 찾아가 보기라도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에 교도소 공동묘지에서 나온 유골이 비정상적으로 묻혀있다고 하니 행불자가 아닌지 기대된다”며 “유전자 검사를 통해 한 사람만 일치되면 5·18행불자 유골들일 가능성이 크지 않겠냐”고 말했다.1980년 5월 19일 행방불명된 정복남씨의 형 정옥남(73)씨도 “유골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옛 광주교도소 부지를 찾아가 보고 오는 길”이라며 “내 동생이 아니더라도 누가 됐든지 행불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이어 “유전자 검사라는 게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것이 아니어서 결과를 차분히 기다려볼 것”이라면서 “40년을 기다려왔는데 그걸 못 기다리겠느냐”고 말했다. 5·18단체는 철저한 조사를 촉구했다. 5·18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 등 5월 3단체는 이날 입장문을 내고 “유골은 행방불명자와 암매장 등 관련 의혹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다”면서 “5월 단체가 추천하는 법의학자와 5·18 전문가가 조사에 참여·입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어 “정밀 감식과 유전자 추출·비교 등 모든 절차는 5·18단체와 광주시 등이 참여하는 공동대책기구를 구성해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솔로몬 로파크 조성 예정부지에서 유골이 나온 만큼 전체 토목공사 과정에 5월 단체가 추천하는 전문가가 입회해 추가 유골이 발견될 경우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면서 “유골이 발견된 지점을 중심으로 추가 발굴도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 [사설] 옛 광주교도소 신원 미상 유골, 5·18 관련설 규명해야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암매장 장소로 지목됐던 옛 광주교도소의 무연고자 묘지 이장 과정에서 40여 구의 신원 미상 유골이 발견됐다. 교도소 내에서 사망한 무연고자는 1m 이상 깊이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만들어진 합장묘에 안치되는 등 최소한의 절차와 형식을 갖춘 것과 달리 이 유골들은 관을 덮은 봉분 20㎝ 깊이 흙더미 속에서 무더기로 뒤엉킨 채 발견됐다. 법무부와 검경, 국방부, 의문사조사위, 5·18단체 관계자 등으로 꾸려진 합동조사반의 육안 조사 결과 구멍이 뚫린 두개골과 어린이로 추정되는 두개골도 나왔다.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정상적이지 않은 매장 형태 등을 감안하면 5·18 당시 행방불명된 시민들의 유골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5·18 사적지 22호인 옛 광주교도소는 5·18 당시 3공수여단 등 계엄군이 사흘 동안 주둔한 곳이다. 2년 전 3공수여단 11대대 사병이 “시신 5구를 직접 암매장했다”고 증언하는 등 담양과 순천 등 광주 외곽으로 이동하던 시민들이 총격을 받아 희생된 곳이라는 증언들이 끊이지 않았다. 행방불명자로 신고된 사람은 공식적으로 448명이다. 전남대 법의학연구소는 행불자 가족들이 제공한 머리카락, 옷 등을 통해 이 중 295명의 DNA를 확보하고 있다. 광주시 또한 행불자 124명의 가족 혈액을 보관하고 있다. 최장 6개월에 이르는 DNA 확인 조사를 거쳐야 진실이 확인될 수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내년이면 40주년이다.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신군부 최고 결정권자인 전두환은 여전히 진실에 대한 고백도, 참회도 없이 국민과 역사를 우롱하고 있다. 39년 전 광주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실종자 가족의 가슴에는 아직도 피눈물이 흐르고 있다. 철저하고 엄격한 DNA 조사로 암매장된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야 하며, 더불어 5ㆍ18 실종자들과 관련이 있다면 현대사의 비극을 재조명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 유골은 알고 있다… 옛 광주교도소 40여구 발견 의문 증폭

    유골은 알고 있다… 옛 광주교도소 40여구 발견 의문 증폭

    DNA 분석 관건… 부식심해 난관 예상 법과학자들 “증거 없는 추정은 금물”옛 광주교도소 터에서 신원 미상의 유골 40여구가 발견돼 의문이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법과학자들이 죽은 이들의 신원 확인에 나섰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희생자일 가능성이 거론되지만 법과학자들은 “증거 없는 추정은 금물”이라고 선을 긋는다. 유골이 뒤엉킨 채로 발견돼 시신별로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한 데다 부식도 많이 진행돼 유전자(DNA) 확인 작업은 수개월이 걸릴 전망이다. 신원 확인을 위한 유전자 대조 작업에 필요한 5·18 유가족의 유전자 정보가 완전하지 않다는 점도 걸림돌이다.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23일 합동조사반, 5·18 관계자들과 회의를 열고 구체적인 유골 감식 기법과 참관 대상 등을 협의할 예정이다. 앞서 지난 19일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 공동묘지 합장묘 1기에서 80여구의 유골이 나왔다. 40여구는 땅속에 보관된 상자 형태의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나머지 40여구는 콘크리트 구조물 위를 덮은 봉분 흙더미에 섞여 흩어진 채 발견됐다. 교도소 기록에는 41구의 유골이 합장됐다고 나오는데 신원 미상의 유골이 40여구 더 나온 것이다. 국과수는 광주과학수사연구소로 책임자급 본원 직원들을 보내 유골의 뼈를 수습·분류해 정확한 유해 수를 확인하고 DNA 샘플을 채취할 예정이다. 국과수 관계자는 “유골을 확인해야 얼마나 시일이 걸릴지 알 수 있다”고 말했지만 워낙 많은 유골이 발견돼 최소한 5~6개월은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누구의 유골인지 확인하려면 먼저 뼈를 빻아서 DNA를 채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 사람 단위로 뼈를 모으고, 보존이 잘된 부위를 골라야 한다. 국과수 관계자는 “허벅지뼈처럼 단단하고 큰 뼈일수록 온전한 DNA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고 상아질로 이뤄진 치아에는 가장 마지막까지 DNA가 남는다”면서 “다만 땅속에서 40년 이상 썩은 뼈는 내부 세포가 파괴되기 때문에 DNA 분석이 길게는 한 달 이상 걸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어렵사리 뼛가루에서 DNA를 추출한다 해도 다음 단계인 유전자 대조 작업에서 막힐 가능성이 크다. 광주시에 따르면 5·18 당시 행방불명돼 아직 찾지 못했다고 가족이 신고한 사람은 모두 242명이다. 하지만 광주시는 이 중 152명의 가족(322명)에 대해서만 혈액 DNA를 확보했다. 행불로 신고된 사람 가운데 최소 89명은 DNA를 대조할 샘플 자체가 없는 셈이다.사인을 밝혀내는 작업은 더 까다롭다. 발견된 유골 가운데 두개골 2점에서 구멍이 뚫린 흔적이 발견되면서 총상에 따른 사망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서는 3차원(3D) 정밀 감식 등이 필요하다. 두개골이 부식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구멍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합동감식반 관계자도 “두개골에서 발견된 구멍을 총상 등 외상의 흔적으로 보기는 쉽지 않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견된 유골을 섣불리 5·18과 연관 지을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봉분 흙더미에서 발견된 유골이, 1975년 묻힌 것으로 알려진 콘크리트 구조물 안의 유골보다 부식이 심하다는 점에서 신원 미상의 유골이 그 이전에 묻혔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다만 전문가들은 산소 접촉 등 주변 환경에 따라 부식 속도가 달라질 수 있어 정확한 감식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숭덕 서울대 법의학 교수는 “관에 들어가면 산소 접촉이 줄어들어 상대적으로 보존이 잘된다”면서 “단순히 부패 정도만으로 유골이 묻힌 시기를 단정하는 것은 오히려 비과학적인 분석”이라고 말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윤연정 기자 yj2gaze@seoul.co.kr
  • 옛 광주교도소 유골 40구는 왜 유골함 위에 묻혀 있었나…의문 커져

    옛 광주교도소 유골 40구는 왜 유골함 위에 묻혀 있었나…의문 커져

    합동감식반 “5·18 연관성 속단하기 일러”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신원 미상의 유골 40여구가 5·18 희생자와 관련된 것인지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이번에 발굴된 유골들이 기존 무연고자 유골함 구조물 위에 비정상적으로 매장돼 있어 의문이 커지고 있다. 22일 합동감식반과 5·18 단체 관계자 등에 따르면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 공동묘지 합장묘 1기에서 80여구의 유골이 발견됐다. 40여구는 땅 속에 매장된 박스형 콘크리트 구조물 안에서, 나머지 40여구는 콘크리트 구조물 위를 덮고 있던 봉분 흙더미 속에서 발견됐다. 41구의 유골이 안치된 것으로 광주교도소에 기록된 합장묘에서 신원 미상의 유골 40여구가 추가로 발견된 셈이다. 일부 5·18단체 관계자들은 5·18 당시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유골일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머리에 구멍이 있거나, 크기가 유달리 작은 두개골이 나온 것으로 알려진 흙더미 속 유골 40여구의 정체에 관심이 모아진다. 그 동안 옛 광주교도소는 5·18 희생자를 암매장한 장소로 지목돼 왔다. 이 때문에 유골함 위에 또 다른 유골이 흙더미 속에 매장된 것은 비정상적이라는 것이 매장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해당 유골들은 봉분에서 깊지 않은 곳에 흩어진 형태로 매장돼 있었다는 점, 묘지가 교도소 안쪽에 있어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장소라는 점도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그러나 검경, 군, 의문사조사위 등으로 이뤄진 합동감식반 관계자는 유골의 상태와 매장 형태 등을 고려했을 때 5·18과의 연관성을 속단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신중한 입장이다.우선 봉분의 크기와 유골이 매장된 형태를 보면 시신 상태에서 묻어 유골이 됐다기보다 유골 자체를 묻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합동감식반의 판단이다. 또 흙더미에 묻혀 있던 유골의 상태가 1975년 조성돼 같은 조건으로 묻혀 있던 다른 유골보다 부식이 심한 상태로 발견된 점에 주목하고 있다. 1975년 이전에 사망한 사람들의 유골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구멍이 뚫렸거나 크기가 작은 두개골이 발견된 것 역시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나온다. 1971년 북구 문흥동으로 이전하기 전인 동구 ‘동명동 옛 광주교도소’ 당시 수감 중 숨진 4.3사건 희생자의 유골일 가능성이 나온다. 합동감식반 관계자는 “두개골에서 발견된 구멍은 총상 등 외상의 흔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형태”라며 “오랜 세월로 인해 부서진 것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작은 크기의 두개골에 대해서도 “두개골 크기만으로 성인과 아동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합동감식반은 유전자 검사 등 정밀 감식을 위해 발견된 유골 80여구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보냈다. 국과수는 오는 23일 합동조사반, 5·18 관계자들과 회의를 열고 구체적인 감식 기법과 참관 대상 등을 협의할 예정이다. 이와 별개로 경찰은 과거 기록이 전산화되기 전 서류상 누락된 무연고 사망자가 있을 수 있다고 보고 과거 사망자 현황 등을 재조사할 것을 광주교도소 측에 요청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속보] “옛 광주교도소 발견 유골 중 두개골 구멍 뚫린 흔적”

    [속보] “옛 광주교도소 발견 유골 중 두개골 구멍 뚫린 흔적”

    옛 광주교도소 부지에서 발견된 40여구의 유골 중 일부에서 구멍 뚫린 흔적이 발견됐다. 20일 5·18부상자회에 따르면 법무부와 검·경, 군 유해발굴단 등이 옛 광주교도소 무연분묘 현장에서 합동으로 육안감식을 벌인 결과 두개골 2개에서 구멍이 뚫린 흔적을 발견했다. 김후식 부상자회장은 “구멍이 총상인지 아닌지는 더 정밀하게 확인해봐야 한다”고 밝혔다. 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 옛 광주교도소서 신원미상 유골 40여구 발굴... 5·18 연관성 주목(종합)

    옛 광주교도소서 신원미상 유골 40여구 발굴... 5·18 연관성 주목(종합)

    옛 광주교도소 부지에서 법무부가 관리하지 않는 수십여구의 시신이 발굴되면서 5·18 행불자 암매장 여부와 관련성이 있는 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김오수 법무부 장관 대행은 20일 옛 광주교도소를 찾은 자리에서 부지 내 무연고 묘지 개장 작업 중 “저희가 관리하지 않는 신원미상의 유골 40여구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유골이 발굴된 곳은 법무부가 솔로몬로파크 조성사업을 추진하는 대상 부지로 무연고 묘지가 일부 포함된 장소다.이 공동묘지 개장 작업은 지난 16일부터 이날까지 이뤄졌다. 김오수 장관대행과 문찬석 광주지검장 등 관계자는 이날 현장을 둘러보고 개장 작업과정에서 발굴된 유골 등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무연고자 공동묘지는 교도소 안에서 사망했으나 가족 등 연고가 없어 매장하는 곳으로 2년 이내 시신을 인도할 사람이 없으면 화장 또는 합장하는 방식으로 관리됐다. 김 대행은 당초 이곳 공동묘지에는 개인 묘 50기와 합장묘 2기 등 모두 111구의 유골을 법무부가 관리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개장 과정에서 법무부(광주교도소)가 관리하지 않는 40여구의 유골이 추가로 발견됐다는 것이다. 법무부 관리 묘지는 개인묘가 52기,각 41명과 20명이 묻힌 합장묘 2기다. 이 113구의 유골 이외에 40여구가 추가로 발굴됐다는 점에서 5·18당시 암매장된 행불자일 가능성이 주목된다. 현장에서 발굴된 유골은 함평 국군통합병원에 안치된 것으로 전해졌다.김 대행은 “우리가 관리하지 않은 유골이 발견됐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확인·점검할 필요가 있다”며 “어떤 연유로 관리되지 않은 유골이 교정부지 내에 묻히게 됐는지 연유를 확인하는 것이 핵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이어 “현재로서는 5·18과 관련이 있는지 속단하기 어렵다”며 “하지만 가능성은 확인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후식 5·18부상자회장은 “유류품이 전혀 나오지 않아 5·18행방불명자일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유골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국방부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협조를 받아 1차 육안검사와 2차 DNA 검사 등을 통해 정확한 신원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옛 광주교도소는 5.18 당시 계엄군에 붙잡힌 시민들이 대거 수감된 곳으로 시위 과정에서 숨진 사람이 암매장 됐을 거라는 말이 나돌던 곳이다. 이곳에는 1980년 5월21일부터 24일까지 3공수여단이 주둔했다. 교도소 담장 안과 인근 야산에서는 5·18 직후 모두 11구의 시신이 암매장됐다가 수습되기도 했다. 5·18기념재단은 “당시 계엄당국은 광주교도소에서 28명의 시민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교도소 주변에서는 현재까지 11구의 시신만 발견됐다”며 “나머지 17명의 시신의 행방을 찾아왔으나 지금껏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광주시는 그동안 5·18과 관련해 행방불명자로 인정된 시민은 82명으로 이 중 6명만이 유전자분석을 통해 시신을 찾았다고 밝혔다. 76명의 행방은 지금껏 오리무중이다. 광주교도소는 2015년 북구 삼각동으로 이전했으며, 광주시와 법무부는 이곳 일대를 민주·인권 테마 파크로 조성하기 위해 건물과 지장물 철거 작업을 펴고 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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