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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열사 열전:4/金相眞 서울농대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할복 자결… 反 유신의 魂으로 부활/학생운동사 목숨 던진 첫 인물/꺼져가던 투쟁의 불씨 되살려/암울한 시대 희망의 새싹 틔워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합법을 가장한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75년 4월11일 상오 11시. 서울대농대 4학년 金相眞은 수원에 있는 농대 캠퍼스에서 그렇게 ‘양심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격정의 순간이었지만 오히려 차분했다. 그러나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는 비장함에 묻혀 이내 사그라졌다. 선언문 낭독이 거의 끝나갈 즈음. “이 보잘것 없는 생명,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는 말이 나오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순간 그는 품속에서 과도를 빼 치켜들었다. 그리고 하복부를 깊게 찔러 위로 그어올렸다. 그는 친구들에게 들려 택시까지 가며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했다. 수원도립병원에서 1·2차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으로 이송중이던 12일 상오 8시55분 그는 앰뷸런스 안에서 눈을 감았다. ○죽어가며 “애국가 불러주오”金相眞 열사는 민주화투쟁 학생운동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던진 최초의 인물이다. 주변의 증언을 종합하면 그는 죽음을 위한 치밀한 준비를 했고,그 파장까지도 충분히 예측했던 것 같다. 75년 2월 朴正熙 정권은 유신체제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에서의 승리를 내세워 강경으로 선회했다. 정부가 약속했던 구속학생과 교수들의 복학·복직을 불허하고 극심한 언론탄압을 일삼는 등 유신체제가 오히려 폭악화되자 그는 어떤 돌파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미온적인 동료·후배들의 자세도 그를 피할 수 없는 ‘결단’으로 밀어댔다. 그는 ‘양심선언문’과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꼼꼼히 작성했다. 그리고 4월9일 ‘인혁당 재건 사건’으로 8명이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기가 무섭게 사형당했다는 소식에 치를 떨며 과도를 구입했다. 인혁당사건은 10년 뒤인 95년 모방송사가 법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우리 사법사상 ‘가장 치욕스런 판결’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김상진기념사업회 安鍾健 회장(50·방송대 교수)은 “相眞이는 복학후 되도록 시위에서 빠지려고 했다. 그러나 74년말부터 급격히 암울해지는 시대상황에 매우 당혹스러워했고,무언가 돌파구를 찾는 모습이 역력했다”고 회고했다. 安회장은 金相眞 열사와 고등학교 및 대학 같은 과 동기다. 그는 또 “相眞이가 할복 전날 밤 자신을 찾아와 칼을 보여주며 가족과 애인 걱정을 했다”고 전한다. “相眞형은 항상 ‘이래선 안되는데’라고 중얼거렸어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때다’‘내가 해야할 것 같다’고 결의를 나타내기도 했구요”후배 鄭鉉敦씨(축산·74학번)의 회고다. ○시위 확산에 긴급조치 9호 선포 朴正熙 정권은 金相眞의 죽음이 반유신의 상징으로 남지 않게 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숨을 거둔 지 15시간만에 장례식도 없이 화장하게 했으며,서울대 농대를 사실상 폐쇄했다. 각 대학에도 휴교·휴강 조치를 내려 4월 중순까지 25개 대학이 전면 휴강에 들어갔으며,시위 주동자의 대량 연행과 구속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정부는 5월13일 체제에 관한 어떤형태의 반대의견이나 행동도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그러나 서울대생 1,000여명은 5월 22일 관악 캠퍼스에서 기어이 ‘金相眞 열사 장례식’을 거행하고 긴급조치 철폐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5·22사건’이다. 朴炯圭 목사는 95년 金相眞 20주기 행사때 “모든 사람들이 좌절할 때 꺼져가는 민주화운동의 불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댕긴 이가 金相眞 열사”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튼 민주화와 정의의 물길을 우리가 제대로 타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반문했다. 당시 5·22사건으로 수배됐던 金槿泰 의원(국민회의)은 “金相眞형과 그 사건은 아직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며 “진정한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노력과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제의 폭압아래 똑같은 나이(27살)에 옥사한 尹東柱의 ‘서시’는 그의 이상이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金相眞 열사는 尹東柱의 ‘서시’처럼 한점 부끄럼 없이 살려고 노력했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가슴에 간직한 채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민주화투쟁은 오늘의 민주주의로 승화됐고 밝은 미래의 희망으로 존재할 것이다. ◎어머니 朴載娟 여사의 통곡/“정부에 의한 명예회복 평생소원” “에미로서 자식 마음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고 혼자 고통을 겪다 가게 했어요…” 金相眞 열사의 어머니 朴載娟 여사(80)가 아직도 못내 아쉬워하는 점이다. ‘군대까지 다녀와서 데모에 끼겠느냐’며 항상 어머니를 안심시키던 아들. 그가 죽자 슬픔과 원망이 뼈에 사무쳤지만 朴여사는 차차 목숨을 던져야 했던 아들의 장한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相眞이는 유난히 정이 많고 심지가 깊었어요. 친구를 무던히도 좋아했지요. 친구들을 몰고와 내가 음식상을 내오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어요” 어머니는 95년 20주기 행사때 손수 음식을 장만해 벽제 묘소로 가져가 100여명의 아들선·후배 동료들을 먹였다. 朴여사는 아들이 죽자 병원에서 “제발 화장하지 말고 묘를 쓰게 해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은 포항에 있던 맏아들을 불러올려 억지로 설득해 화장을 강행했다고. 그녀는 “화장터로 쫓아가 ‘우리가 뿌릴 터이니 유골단지를 달라’고 해 중앙청 옆 법륜사에 감췄다”고 했다. 그로부터 1년후에 金相眞 열사는 벽제공원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 朴여사는 현재 서울 갈현동 자그마한 한옥에 혼자 산다. 신경통과 위경련을 앓고 있지만 심하지는 않은 듯했다. 고려컨테이너 부사장인 맏아들 상운씨와 대한투신 원주지점장으로 있는 둘째아들 상근씨 등 8남매가 모두 건실하게 살고 있어 흐뭇하다고 했다. 그녀는 “아들이 공식적으로 정부에 의해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죽기 전에 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후배 鄭赫基씨의 맺힌 恨/“긴 겨울 몰아낸 ‘민주햇살’ 빛 봐야” 김상진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鄭赫基씨(42·산야농산 대표)는 “相眞이 형이 죽은 이후 학생들은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재야나 지식인들이 자기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金相眞 할복사건이 유신독재정권이 내리막길을 걷는 시대적 분기점이 됐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朴正熙 정권의 폭압이 절정에 달해 정권 말기적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죠. 공권력으로는 도저히 국민의 항거를 막기 힘들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건 당시 축산과 새내기였던 그는 金相眞 열사가 할복하는 순간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뒤에 있던 선배들은 그가 칼을 빼드는 순간 그 뜻을 얼른 알아차리고 덮쳤지요. 그러나 정작 저는 ‘단순히 각오를 다지기 위해 빼들었겠지’했어요. 그런데 막상 할복하고 쓰러지자 정신이 멍하고 아찔했습니다” 그는 “그후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鄭씨는 지난 95년 기념사업회가 출간한 金相眞 열사 평전 “긴겨울 얼음뚫고’의 정리작업을 맡았었다. 3년이나 걸린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는 “죄책감에 대한 빚갚음의 의미도 있지만 相眞이 형의 진실이 진정한 역사로 기록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민주화가 후퇴하고 권력이 부패하면 언제라도 제2,제3의 金相眞이 나올수 있다”는 鄭씨. 그는 “全·盧 시대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며 “지금의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지도층이 항상 경계해야 할 점”이라고 강조했다. ◎金相眞 열사 연보 ▲1949년 金東壽·朴載娟씨의 3남6녀중 여섯째로 서울에서 출생 ▲1962년 혜화국민학교 졸업 ▲1965년 보성중학교 졸업 ▲1968년 보성고등학교 졸업,서울대농대 축산학과 입학 ▲1971년 군입대.경기 포천의 공병대에서 근무 ▲1974년 2학기 복학 ▲1975년 4월11일 서울대 수원농대 교정에서 유신정권의 허위성을 고발하는 ‘양심선언문’낭독하고 할복 자결 ▲1975년 4월12일 상오 8시55분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도중 사망
  • ‘죽음의 계곡’ 안개속 통곡소리만/선유동계곡 수색 현장

    ◎실종자 42명… 가족들 시신 찾아 이틀째 헤매/벽제지류엔 떠내려온 유골 찾는 인파 북적 9일 상오 6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선유리 계곡.자욱한 새벽 안개속에 시신을 찾아 헤매는 유족들의 통곡으로 가득했다. 유족들은 노도와 같이 흐르는 계곡물도 아랑곳하지 않은채 하천변의 돌틈과 떠내려온 쓰레기 더미를 작대기로 헤집으며 샅샅이 뒤져나갔다. “이미 살아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습니다.다만 사체라도 건질 수 있었으면 하는…” 어린 아들을 잃고 사흘째 이곳을 찾아다닌다는 金淑子씨(36·고양시 선유동)는 말을 잊지 못한채 눈물만 쏟아냈다.金씨는 지난 6일 새벽 3시쯤 안방에서 잠을 자다 목까지 차오른 물을 피해 뒷일은 남편에게 맡기고 아들 재빈(5)을 판자 위에 싣고 나오다가 그만 물살에 휩쓸렸다. 송추계곡에서 통닭집을 운영하는 韓英默씨(42)도 가족의 시신을 찾아 이곳을 헤맨지 이틀째다.그 역시 아내와 딸(13),집까지 통째로 떠내려 보내고 미친듯이 계곡을 훑고 다녔지만 불어난 물에 장비는 물론 사람조차 접근이 어려워 기진맥진해 있다.이번 폭우에 ‘죽음의 계곡’으로 돌변한 이곳은 곡릉천 상류로 송추와 장흥유원지,벽제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쳐지는 길목이어서 실종된 수십구의 사체가 떠내려왔을 것으로 추정된다.지금까지 이곳에서 발굴된 사체는 모두 8구에 이른다.송추·일영·장흥계곡 등 상류지역 실종자 수는 모두 42명에 달한다. 이곳에서 상류를 따라 벽제지류로 조금 올라간 하천 주변은 온통 유골을 찾아 헤매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朴正文씨(51·서울 성북구 길음동)는 “묘지가 유실됐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보니 부친의 산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펄펄 뛰었다. 수거된 유골만도 수십구.하지만 모두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채 인명과 유골을 삼키고도 여전히 성난 기세로 물벼락을 쏟아내는 계곡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 민주열사 열전:1­1(정직한 역사 되찾기)

    ◎재조명의 의미/이제 ‘민족대통합의 빛’으로/60년대이후 319명 희생/진상규명·바른 평가 과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처절한 투쟁의 역사였다.질식할 듯한 독재체제의 폭압과 최루탄 연기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한 많은 사람들의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그들의 희생적 투쟁이 밀알이 되어 오늘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굴절된 현대사에서 희망의 빛이었던 민주열사들이다. 그들은 거리에서,노동현장에서,학원에서 또는 감옥에서 민주화와 인권이 보장되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싸웠다.때로는 분신과 투신으로,단식투쟁으로, 시위로 독재정권과 악덕 기업주들에 항거했다.그들의 위대함은 독재정권에 굴복하지 않고 물질적 풍요와 세속적 이익이 최고의 가치처럼 여겨지던 사회풍토 속에서도 개인의 이익이 아닌 사회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점이다. 민주열사들은 비겁의 사회에서 진정한 용기를,억압의 구조에서 영원한 자유를 실천한 사람들이었다. 김상진 열사는 “무릎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며 할복했다.대학생이던 그는 “숭고한 피를흩뿌려 이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젊은 생을 마감했다.‘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는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살지만 우리도 깨우쳐서 바보로 남지말자”며 노동운동에 나섰다.그리고 거대한 구조악 앞에 번민을 거듭하다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방울 이슬이 되기 위하여”란 말을 남기고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당겼다. 많은 목숨들이 이렇게 스러져 갔다.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숨졌는지 알 수없는 의문사와 고문사도 적지않았다.주위의 외면 속에 죽어간 ‘이름없는 민주열사’들도 많았다.그들은 비록 이름없이 죽어 갔지만 그들의 고귀한 희생은 오늘의 민주주의로 부활됐다. 전국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상임의장 李昌馥)가 집계한 60년대 이후의 민족민주열사는 319명.분신·투신·할복의 방법으로 목숨을 바치는가 하면 고문과 사건 조작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또 오랜 운동과정에서 병을 얻거나 고문 후유증,불의의 사고 등으로 숨진 열사들도 있다.노동운동 와중에 92명,학생운동 과정에 60명이 숨졌고,처형이나 옥중사망,출옥후 사망자도 103명에 이른다. 5·18 광주민중항쟁에서 희생된 열사들은 제외하고 그렇다. 그러나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는 여전히 미미하고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金三雄 친일문제연구회 회장(서울신문 주필)은 “민주열사들에 대한 법적·도덕적 예우와 진상규명이야말로 가장 먼저 서둘렀어야할 역사적 과제”라고 지적하고 있다.그는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희생당한 열사와 유족들에게 정부가 그동안 무엇으로 보답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도 “민주열사 의문사에 대한 망각은 정의의 망각”이라며 반드시 진상규명 노력이 있어야한다고 강조했다. 독재정권에 의해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났던 그들은 이제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민족의 화합과 통합을 위해서도 그들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은 “과거를 기억하지 않고는 진정한 화해란 없다”고 강조했다. ◎李富榮 의원 인터뷰/“전과기록 없애 명예회복부터”/피살자 진상조사위 구성… 특별검사 둬야/과거·현재·미래 묶어 민족정통성 확고히 여야 정치권의 개혁그룹과 초·재선 의원을 중심으로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제정이 추진되고 있다.그런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는 李富榮 의원(한나라당)에게 특별법 추진의 의미와 전망을 들어 보았다. 李의원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수차례 투옥당한 경험이 있는 대표적 재야출신 인사다.부인 孫守珦씨는 고(故) 張俊河 선생의 비서였다. ­민주열사 명예회복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정치적으로 폭력,독재가 횡행했을 때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던 사람들의 값어치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일제시대 때 독립을 되찾고자 했던 선열들을 받드는 것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습니다.대한민국이 민족사의 유구한 전통을 잇고 통일된 조국의 주체가 되려면 독립정신과 민주주의 확립,그리고 경제발전이라는 세가지 시대적가치를 고양시켜야 된다고 봅니다.그런 의미에서 민주열사에 대한 재평가와 명예회복은 이 시대에 당연히 논의되어야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명예회복의 구체적 방안으로 어떤 조치가 필요합니까. ▲전과기록을 우선 없애야 합니다.또 민주화에 공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훈포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더 중요한 것은 고문에 의했건,암살당했건 민주화운동과정에서 피살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진상을 밝히는 것입니다.특별법에 의한 진상조사위를 만들고 특별검사가 임명되어야 합니다.심지어 10여년전에 의문사한 사람의 사인규명이 되지않아 가족들이 유골을 묻지 못하고 집에 보존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가족들의 노력으로 진상이 밝혀진 사례도 있는데 국가공권력이 외면하고 있습니다.민주주의를 앞세우는 정부라면 당연히 진상규명에 나서야 합니다. ­특별법은 언제쯤 제정되리라 예상하십니까. ▲연내에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봅니다.올 정기국회에서는 특별법을 만들어야지요.이는 새 정부의 의지에 달린 것입니다.이런 일부터 여야의 벽을 깨야 합니다.실제로 여야 의원들 사이에 얘기가 되고 있습니다.여당에도,야당에도 이런 일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분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대화로써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하자는 의견도 있는데요. ▲우리 현대사는 아직도 독립운동 흐름과 친일파 흐름의 대결이 계속되고 있습니다.민족 정통성을 세우느냐,못세우느냐 그리고 우리 자식들에게 어떤 가치관을 물려줄 것이냐를 우선 고려해야 합니다.민주열사 명예회복이 지금의 세계화 추진과 맞부딪치는 것도 아닙니다.자기 정체성 확립없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과거와 현재,미래를 함께 묶어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기고/고난·희생은 위대한 유산/張琪杓 신문명정책硏 원장 한평생 민족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남의 나라 땅에서 옥사하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다.그래서 사필(史筆)이 강해야 민족이 강해진다”고 설파하셨다.훌륭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으며,자기 민족의 역사를 아는국민이라야 참된 번영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민족정체성 확립 시급 지금 우리는 IMF사태라는 경제위기를 맞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장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그러나 따지고 보면 정신적 빈곤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오늘의 이 시기는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윤리 등 사회의 전 부문에 걸친 총체적 위기이다.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경제성장 위주의 서구 근대화에 몰두한 나머지 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데 가장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8·15해방 후 민족반역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함으로써 민족정기를 세우지 못한 일은 두고두고 민족적 수치이자 민족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그러나 우리는 해방후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한 일만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군사독재시절 민주화와 민족통일과 민중해방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해온 살아 있는 역사를 외면하고 있는 것 또한 크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더 없이 아픈 역사이기도 하지만 자랑스러운 역사이기도 하다.제1차 세계대전 후 전세계 약소민족 해방투쟁의 선구자 역할을 한 3·1 운동을 비롯하여,4·19혁명,군사독재 반대투쟁,민주노동운동,부마항쟁,광주항쟁,6월 민주항쟁 등은 민족의 위대한 전통이 아닐 수 없다.이러한 민족적 전통속에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고난이 담겨 있기에 우리는 이 전통을 더욱더 값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특히 한국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분신자결과 고문사가 특별히 많았다는 사실이다.1970년대 이후 분신자결한 사람이 69명이나 되며 할복자결, 투신자결,고문사 등을 합하면 무려 226명이나 된다.전세계 어떤나라의 민족해방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서도 이런 예를 찾을 수 없다.수십년간 1,000여명의 ‘양심수’가 계속되어온 나라도 유례를 찾을 수 없거니와,특히 이념 문제 때문에 43년간이나 감옥생활을 한 나라도 없다.한없이 가슴아프고 수치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족의 위대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그동안의 투쟁이 얼마나 치열하고 고난에 찬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이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민족도약의 밑거름이 되게 하는가는 후세 사람의 몫이다. ○왜곡 현대사 논의 물꼬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E.H.카)라는 말이 있다.역사란 과거의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보다 더 의미있게 하기 위해 과거를 재창조해 내는 인간의 합목적적인 행위이다.그러기에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이 어떠한 세계관과 역사관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역사서술자의 세계관과 역사관에 따라 역사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역사적 소명감을 가져야 바른 역사를 쓸 수 있다.특히 민족정기가 훼손될 만큼 무시되고 왜곡되어온 한국현대사를 ‘역사의 장’에 올리는 일은 그 역사적 의미가 큰 만큼 책임도 클 것이다.
  • 內助/李世基 논설위원(外言內言)

    ‘우리는 왜 말을 하는가’란 질문에서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의사소통을 위해서 아무 말이나 막 하라는 것은 아니다. 언제 어느장소 누구냐에 따라 할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할 말이 있다. 예를 들어 술자리에서 아무렇게나 떠드는 말은 잡담이다. 그러나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고 했듯이 예사로이 들어넘기지 못할 단단한 속뜻이 말속에 담겨져 있기도 하다. 공식석상에서는 ‘할말’만을 골라서 제대로 하는 것이 상식이다. 전 축구국가대표팀 감독 차범근씨 부부의 월간지 인터뷰내용중 ‘해서는 안될 말’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축구경기에서의 ‘승부조작’과 축구협회기술위원들을 ‘파리떼’에 비유한 예등이다. 처음엔 ‘지금으로선 인터뷰할 처지가 아니다’고 사양했으나 결국 부인을 동반한 자리에서 ‘할말 안할 말’을 너무 쏟아놓았고 말 잘하는 부인이 이를 보충설명하고 있다. 물론 말없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할말을 하는 것도 미덕이다. 그러나 할말이 태산같아도 때와 장소를 가려 말을 참는 것은 자기자신을 아끼는 일이다. 아무리 분통이 터지고 억울해도 자신의 처지와 입지만을 내세우는 말은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더구나 당사자도 아닌 조언자의 입장에서 말을 고르지 않고 함부로 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느낌마저 준다. 감독부인의 자리에 있다보면 궂은일 마른일을 고루 살피고 참견하고 판단해야 할 일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조란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또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짧으면서도 의미심장하게 요소를 찌르는 말이 잘하는 말이다. 남편이 냉정을 잃더라도 이를 자제시키는 일이 내조다. 모든 위대한 지도자들의 뒤에는 숨은 내조의 공이 울타리를 치고 있다. 소리없는 그림자 내조도 있고 남편의 위치에 버금가는 권한을 행사하는 내조도 있다. 이번 발언중에서 부인의 ‘제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벨란제 앞에서는 무릎을 굽히고 인사합니다’란 구절은 내조가 잘못 가고 있음을 일깨운다. ‘익은 벼’의 모습은 무르익은 지성이라는 것과 ‘침묵’은 때로 빛나는 금이라는 것을 되새겨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 육군박물관(생활속의 박물관·미술관:5)

    ◎“조국사랑” 참군인 정신 일깨운다/선사시대 이래 군사자료 8,600점 한눈에 金日成 작전명령서·베트콩 전단까지/부서진 총열·녹슨 수통·구멍뚫린 철모…/장렬히 숨져간 무명용사의 외침 절절이 불암산의 서기(瑞氣)가 어린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호국 간성의 요람인 이곳에 들어선 육군박물관은 일반인들의 군(軍)에 대한 거리감을 친근감으로 바꿔주는 묘한 공간이다. ‘한국의 시인 건축가’ 金重業씨(88년 작고)가 조국통일의 염원을 담아 그 물꼬를 트는 상징으로 열쇠 형상을 택해 설계했다는 이 건물은 흰색 화강암 건물로 잔디와 숲으로 차분히 정돈된 육사 캠퍼스 남쪽 끝에 들어앉아 있다. 정면에 연병장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고 바로 앞에는 고 姜在求 소령 동상이 달려가는 듯한 자세로 서 있다. 30여년전 월남 파병을 앞두고 수류탄 훈련장에서 부하를 구하고 산화한 그의 모습은 오늘날 이 박물관을 찾는 이들에게 참군인정신과 함께 참나라사랑의 정신을 일깨워 준다. 육군박물관은 이 땅에서 ‘저질러진’ 전쟁에 관한 많은 것을 증언한다.지상3층 지하1층 건물중 고대실·현대실 등 두 개의 전시실에는 가깝게는 6·25전쟁에서부터 임진왜란,멀리는 선사시대의 군사 관련 유품과 문화재까지 모두 8,600여점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의 가치는 유형의 물질에서 옛 사람들의 혼과 정신을 만나는데 있다고 했던가. 전시실을 떠받치고 있는 14개의 원추형 돌기둥이 두 열로 돌아나간 옥외 전시장에서 당시의 총통과 대포들이 전장의 신음을 오늘에 전한다. 건물 중앙으로 맞닿은 기둥 사이에 朴正熙 대통령이 서거 때까지 타던 캐딜락과,맹호부대가 월남에서 대승을 거둔 것을 기념한 ‘안케패스 전승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군인으로 시작해 대통령이 되고,또 독재자로 총에 맞아 생을 마감한 한 불운한 정치인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볼 수 있다. 3층에 위치한 현대실에는 광복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각종 무기와 장비 복식 문서 등 4,500여점이 전시돼 있다. 현대사의 흐름을 요약한 다양한 색과 제각각 형태의 볼 것들이 눈을 자극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은 6·25전쟁이다. 전쟁에 쓰였던 장비와 전단 복장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붉은빛 일색인 공산군의 그것들은 지금도 섬짓한 느낌을 전한다. 어느 시인은 뜰 안에 핀 장미꽃 빛깔에도 가슴이 내려앉는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 0097호’에는 金日成이 전쟁중 직접 작전을 명령한 극비사항이 적혀있다. 1951년 8월8일로 찍혀진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지령문’도 있다. 특히 6·25전적지인 설악산 소청봉에서 유골과 함께 발굴된 무명용사의 유품 앞에는 관람객들이 유난히 많다. 소총의 총신부분과 녹슬은 수통·구멍뚫린 철모. 누군지는 몰라도 분명 전장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다가 외롭게 숨져갔을 그의 외침이 귓전을 때리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6·25전쟁중 물자가 고갈되자 인민군이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쓴 병뚜껑으로 만든 모표,허름한 방한화,버선,철모,수통 등이 월남전 당시의 궁색한 베트콩 군수품과 나란히 진열돼 있어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또한 “고향의 달밤,임이 그리워 밤마다 웁니다.”“그리운 이여! 딸라도 선물도 싫어요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대의 산 목숨뿐” 등 월남전 당시 우리 군의 사기를 떨어트리기 위해 살포됐던 전단도 눈길을 끈다. 2층의 고대실에는 선사시대부터 대한제국 이전까지의 군사관련 문화재 4,128점이 시대순으로 전시돼 있다.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주먹도끼 등 석제무기와 3∼4세기 신라의 철검·무쇠도끼·무쇠창 등 철제무기들은 인류를 말살할 수 있을 정도의 현대무기에 비하면 정겨운 느낌마저 든다. 한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조선후기 화살 연발장치인 녹로노나 부녀자도 쏠 수 있게 만든 수노(手弩)인 삼시수노기(三矢手弩機)가 복원품이긴 하지만 눈길을 끈다. 화살을 4개까지 장전해 쏘던 조선전기의 사전총통(四箭銃筒),조총,화강암 탄알인 단석(團石),발사기인 대완구(大碗口)와 비격진천뢰쯤에 이르면 본격적인 전쟁 분위기가 풍긴다. 대완구는 국내 유일한 것이며 비격진천뢰도 연세대박물관과 함께 유일한 소장자로 돼있다. ‘부산진 순절도’와 ‘동래부 순절도’는 임진왜란 당시 군민(軍民)들의 처절한 항전모습을 담은 보물들이다. 박물관 건물을 나와 연병장 길을 따라 오른 쪽으로 접어들면 헬리콥터 장갑차 곡사포 전차들이 도열한 야외전시장에 접어들게 된다.50년 6월25일 남침의 선봉에 섰던 북한군 탱크 T­34와 이에 맞섰던 미제 M46탱크,전쟁초기 투입된 적 관측및 업무연락용 항공기 L­19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40여년 전 서로를 죽이기 위해 첨예하게 대치했던 주인공들이 지금은 친구가 되어 한자리에 있는 모습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관장 姜性文 중령/“40년 전통 국내 유일 군사종합박물관”/군사문화 발달과정 전시/전쟁유적지 학술 조사도 육군박물관의 현 관장 姜性文 중령(53·18대)은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주2회씩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는 현직 교수이기도 하다. 지난 96년 12월 관장직을 맡아 박물관 운영을 책임지랴 강의준비 하랴 하루하루가 바쁘기만 하다. 특히 지난해 2월부터 육사 경내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면서 관람객이 늘어나는 바람에 할 일이 부쩍 많아졌다. “용산의 전쟁기념관이 한국전쟁에 초점을 맞춘 전쟁과 무기중심의 기념관 성격을 갖추고 있다면 육군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군사관련 종합 박물관입니다. 40년이 넘은 전통에 비해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육군사관학교 경내를 둘러보는 관광상품이 마련되면서 새롭게 인식되고 있지요” 육군박물관은 56년 육군사관학교 기념관으로 처음 문을 연뒤 10년만인 66년 육군사관학교 군사(軍事)박물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83년 지금의 자리에 새 건물이 완공돼 2년뒤인 85년 개관했다. 주변의 넓은 공원 분위기와 어울려 딱딱하게 느껴지는 군사문화를 순하게 바꿔낸다. 군사유물을 통해 군의 업적과 전통·발전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전시형태가 독특하다는게 일반적인 평가다. “유형적인 군사관련 소장품들이 무형의 자산을 표현한다고 할까요.외침이 있을 때마다 민군(民軍)이 일치단결해 민족 수호에 나섰던 조상들의 자취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자부심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지요” 비록 군사문화를 다룬 박물관이지만 전통문화 유지역할에 큰 몫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는게 姜관장의 설명이다. 휴전선 일대 군사유적지에 대한 학술조사와 군사유물에 대한 논문지 발간도 활발하다. 지난 94년부터 파주·연천·철원·포천군 지역의 산성·봉수대·한국전 격전지에 대한 지표조사를 벌여 보고서를 작성해 왔고 학술 논문지 ‘학예지’도 통권 5권을 펴냈다. 육군 박물관이 군사(軍史)를 다룬 박물관인 만큼 대학 역사교육의 보조 기능을 무시할 수 없다는게 그의 지론이다. “대학의 역사교육에는 군사 문화재의 발달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빠져 있지요. 이 틈새를 메울 수 있는 박물관이 바로 육군박물관입니다. 소장품들이 모두 가치있는 자료들인 만큼 영구보존을 위한 전시장 보완이 시급합니다” ◎육군박물관 가는 길/전철·노선버스 연계/육사후문으로 입장 70만평의 캠퍼스안에 다양한 레포츠 시설과 편의시설을 함께 갖추고 있는 특수목적 대학인 육군사관학교 안에 자리잡은 이색 박물관이다. 육군사관학교가 관리 운영하는 군 관련 시설인만큼 일반인들의 접근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그러나 지난해 봄부터 육사 경내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됐고 관광코스도 마련돼 있어 뜻만 세우면 얼마든지 알찬 볼거리들을 만날수가 있다. 전철 1호선이 석계역,7호선이 먹골역까지 닿아 있고 노선버스는 45­2,803,45,745번이 운행한다. 버스를 이용할 경우 서울여대 앞에서 내린다. 매일 상오 9시 호텔신라에서 출발하는 셔틀버스도 있다. 육사 후문에서 안내를 받아 박물관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으며 정기 관광코스는 상오 10시와 하오 2시 등 매일 두차례. 화요일∼일요일 개관하며 관람시간은 상오 10시부터 하오 4시까지. 관람료는 어른 2,000원,학생 1,000원.
  • 군사­인도적 문제 구분 처리/잠수정·승조원 앞날

    ◎잠수정·무기탄약류·통신장비 안돌려줘/사망자 ‘적군묘지’ 매장… 돌려보낼수도 【동해=특별취재반】 우리 영해를 침범한 북한 잠수정 및 승조원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96년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의 전례에 비춰 이들의 처리방안은 군사 문제와 인도적인 문제로 구분해 처리된다. 유고급 잠수정을 비롯,잠수정안의 각종 무기·탄약류,통신장비 등은 ‘적으로부터 노획한 군수품’으로 되돌려 주지 않는다. 공격용 무기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94년 말 북한이 비무장지대를 넘어 불시착한 미군헬기를 아직도 돌려보내지 않고 있는 전례에 비춰 보거나 훈련이 아닌 ‘침투’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넘겨주지 않는다. 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때도 잠수함 및무기·탄약류 등은 돌려주지 않았다. 승조원 가운데 사망자는 인도적 차원에서 돌려보낼 수 있다. 통상 무장간첩의 시신은 경기도 파주군 ‘적군묘지’에 매장해왔으나 96년 북측의 요구를 수용,군병원에서 냉동상태로 보관해오다 화장해 유골을 송환했다. 송환때까지 3달 이상이 걸려 화장했다. 생존자도 원칙적으로는 인도적 차원에서 본인의 의사를 존중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절차에 대한 남북한간 협의도 영해 침범에 대한 북한측의 분명한 사과가 선행되어야만 가능하다. 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북한은 “훈련중 표류하다 좌초한 잠수함과 승조원을 즉시 돌려보내라”고 주장하다가 사건이 일어난 지 3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깊은 유감’을 나타내는 외교부 명의의 사과성명을 공식 발표했다. 이어 사살된 간첩들의 유해송환이 이뤄졌다.
  • 국군포로 송환(정직한 역사 되찾기)

    ◎‘실종 45년’ 2,000명 생존 추정 올해는 6·25전쟁 발발 48주년,종전 45주년이다.반세기 동안 죽은줄로만 알고 있던 국군포로들이 버젓이 살아서 돌아오는 현실은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이는 그동안 무대책으로 일관해온 우리의 국군포로 송환 문제 인식에 일대 각성의 전기를 가져왔다.18일은 이승만 정부의 반공포로 석방 45주년이기도 하다 최근 梁珣容 일병의 귀환은 94년 趙昌浩 소위의 귀환과 함께 생존 국군포로의 존재를 명확히 했다.100여명의 생존자 명단까지 확인되고 있다.북한에 억류돼 강제노역 등 어려운 삶을 연명해온 이들은 대부분 70세 전후.더이상 기다릴 여유도 없다.이들의 송환노력에 박차를 가하는 것야말로 민족상흔 치유의 첫걸음이 된다.그 현실과 대책을 살펴본다. ◎정부의 해결방안/송환문제는 남북관계 진전 봐가며 추진/정착돕게 연금지급 근거법 등 제도 정비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 문제와 관련,정부는 두갈래 대책을 추진하고 있다. 1차적으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강구중이다.북한은 6·25전쟁 포로가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때문에 전쟁포로의 존재 유무를 놓고 소모적 공방을 벌이기 보다는 우선 생사확인부터 해보자는 취지다.송환은 남북관계의 진전을 보아가면서 추진키로 했다. 또 지난해 탈북자보호법을 만든데 이어 올 가을 정기국회에서 ‘귀환자지원법’을 제정키로 했다.국군포로나 강제납북자는 대한민국 국민이다.이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북한 주민의 귀순과 다르다. 지원내용도 달라야한다.정부는 지난해말 귀환한 梁珣容씨 같은 국군포로에게 정당한 수준의 연금을 지급할 근거규정도 마련키로 했다. 인도적 차원에서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 송환 추진이 당연하다.제네바 포로협약을 근거로한 송환 공식요구,유엔 총회 및 안보리에서 문제제기 등을 생각할 수 있다.남북경협과 포로송환을 연계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이를 쟁점화함으로써 지금도 어려운 남북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가능성을 정부는 염려한다. 曺龍男 통일원 인도지원1과장은 “북한은 현재 국군포로가 없으며 강제납치한 경우도 없다고주장하고 있다”면서 “남북관계의 확실한 진전 없이는 국군포로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고 밝혔다.유가족들이 여러 국제기구를 통해 개인 차원에서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방법도 있으나 실효성이 의문이라는 것이다. 국군포로 및 강제납북자 유가족과 민간단체들은 정부의 태도가 불만이다.李哲承 건국50주년기념사업준비위 회장은 “국군포로와 함께 6·25 당시,그리고 그 이후 강제납북된 민간인들을 송환하기 위해 유엔과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정정당당하게 우리의 주장을 전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기념사업준비위는 국군포로 송환 촉구 100만 서명운동도 벌이고 있다. ◎2만2,562명 전사/6·25 희생국군 분류/1만7,020명 실종처리/민간 7,000여명 남북 국방부는 6·25전쟁에서 실종된 국군숫자가 4만1,954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중 2만2,562명이 추후에 전사처리 되었다. 나머지 1만7,020명을 실종으로 처리했고 2,372명을 미확인으로 분류했다. 국방부의 실종자 분류는 정확한게 아니다.주로 유가족 증언을 토대로 한탓이다.유가족이 신고해오면 전사로 처리하고 제보가 없는 경우 실종으로 분류했다. 현재 생존 국군포로는 2,000명 안팎일 것으로 관계당국은 추산하고 있다. 6·25전쟁 기간동안 납북된 민간인을 뜻하는 실향사민(私民)은 7,000여명이다.동진호 선원 등 전쟁후 납북억류자는 450명이다. ◎기고/지만원 군사평론가/‘戰士일생 관리’시스템 갖춰라 ○희생자 보상 형편없어 군이 무기를 구매할 때는 무기의 일생을 관리하기 위한 ‘종합군수지원’(ILS;Integrated Logistic Support)시스템을 운영한다.그러나 정작 전사(戰士)들의 일생을 관리하는 ILS시스템은 만들어져 있지 않다.군이 스스로의 일생을 관리하는데 게을리해온 것이다. 94년 10월 趙昌浩 소위가 64세의 나이로 귀환했다.그에게는 밀린 봉급,퇴직금,연금조로 1억6,000만원이 지급됐다.조국을 위해 아까운 일생을 송두리채 희생당하고 탈출해온 노전사에게 주어지는 돈 치고는 너무나 초라했다. 98년 4월 梁珣容씨가 72세의 나이로 귀환,기자회견을 가졌다.그에게는 45년간 밀린 사병봉급 200만원이지급됐지만 그는 이 돈을 군에 반납했다.그에 대한 국가의 대접이 겨우 이런 식이냐는데 대한 섭섭함과 항의의 뜻이었을 것이다.결국 그에게는 탈북자지원법에 따라 6,400만원 지급이 결정되긴 했지만,이 또한 국가의 도리가 아니었다. ○희생의 대가 충분히 정부는 ‘국군포로(귀환자)특별법’을 연내로 제정하고 적십자 기구나 유엔 등의 협력을 얻어 북한에 남아 있을 포로의 귀환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지만 포로송환 문제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주관 주체도 아직은 만들지 않고있는 듯하다.전사들의 일생을 관리하기 위한 시스템이 준비돼 있지 않은 것은 바로 군 자신들의 수치요,직무유기다.그러나 더 부끄러운 것은 전우애의 실종이다. 200만원을 돈이라고 지급하는 군수뇌의 식견에도 문제가 있지만 더 큰 문제는 군전체가 72세의 나이로 적진을 탈출해온 기막힌 영웅들을 열열이 환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현역 장병들과 향우회에서는 실직자들에게는 봉급의 10%를 떼어주면서도 그 기막힌 고통을 치르고 돌아온 전우를 위해 단 한푼의 성금도 갹출하지않았다.눈만 뜨면 외치는 전우애는 과연 무엇이며 이들이 목숨바쳐 따랐던 상관이란 과연 무슨 존재들이란 말인가. 전쟁이 나면 70만 현역은 누구나 다 포로가 될 수 있다.그들도 포로가 되면 두사람의 노병들처럼 북에서는 아오지탄광에서 혹사 당하고,남에서는 불청객에 가까운 대우를 받게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희생당하는 자만 억울하다.그러면 다음 전쟁에는 누가 나가 싸우려 할 것인가.국가는 위기에 처했을때 국민에게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달라고 당당히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그러나 지금의 우리 국가는 그런 입장에 서있지 못하다. ○보병전 개념 수정해야 이번 기회를 통해 군은 두가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하나는 전사의 일생관리를 책임지는 곳은 군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집행은 다른 행정부처에서 하더라도 마스터플랜과 시스템은 군이 만들어야 한다.아울러 월남전에 참가했던 병사가 고엽제 질환과 유사한 질환을 앓으면 무조건 보상해주어야 한다. 또다른 하나는 실속없이 사상자와 포로를 대량으로 양산할 수 밖에 없는 지금의 보병전 개념을 수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지금의 전쟁은 전자전과 화력전이다.군은 이에 대한 충분한 장비를 구비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군은 현대적 장비를 가지고도 19세기식 보병전에 집착하고 있다.세상이 모두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한국군만 변화의 사각지대가 아닌지 생각해주기 바란다. ◎작년 탈북 국군포로 梁珣容씨 인터뷰/“편지왕래 물꼬라도 텄으면”/북에 남겨진 전우 생각하면 가슴 찢어져/정확한 숫자 조사·국제여론 유도 아쉬워 지난해말 북한을 탈출한 국군포로 梁珣容씨(72)는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고향집에서 살고 있다. 실명한 왼쪽 눈,몇 개만 남은치아,절룩이는 다리….45년간 긴긴 억류의 흔적은 아직도 그를 괴롭힌다. 그러나 북녘에 남겨진 동료들을 생각하면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 ­귀환후 첫 6·25를 맞는 느낌은. ▲지금도 미귀환 포로로 북한 공산체제 아래서 온갖 고난을 당하고 있을 동료들이 생각납니다.제네바협정을 지키지 않는 북한당국에 대해 우리 정부의 대응이 너무 미약한 것 같습니다. ­정부에 바라는 사항은. ▲미국은 6·25전쟁 전사자들의 유골까지 본국으로 송환하고 있는데 우리는 포로는 물론 전사자 조사 조차 제대로 안돼 있어 실망을 금할 수 없습니다.이는 역대 대통령들이 성의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백발노인이 자식의 생사를 알기 위해 찾아와 눈시울을 붉히는 것을 봤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북한을 상대하려면 처음부터 너무 크게 시작하면 안됩니다.우선 편지왕래라도 하여 살아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확인해야 합니다. 한국도 국력이 신장됐으니 국제여론을 환기시켜 북한이 전쟁포로들의 생사여부라도 확인해주도록 해야 합니다. ­지원금 수령을 계속 거부할 것인지요. ▲지난 4월 귀환 기자회견을 마치고 동생(병용·64)이 연금수령을 거절하며 국방부관계자에게 거칠게 항의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여기가 조국이구나’하는 것을 새삼 느끼기도 했지요.북한에 억류됐던 세월동안 조국이 그리웠고,나이가 들면서 고향 선산에 묻히겠다는 일념 밖에 없었습니다.돈이 탐나서 돌아온게 아닙니다.하지만 46년전에 일등병이었는데 지금도 일등병 연금을 준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정부가 관련법을 고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바뀐 법에 의해 책정된 연금은 받아야지요.
  • 누명 벗은 이브 몽탕/무덤 파헤쳐 유전자 검사

    ◎친자확인 소송 거짓 판명 【파리 AP AFP 연합】 프랑스의 유명가수이자 배우로 91년 타계한 이브 몽탕의 유골에 대한 유전자 감식 결과 몽탕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주장한 오로르 드로사르(22)와는 친자관계가 아닌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법원 관계자들이 11일 밝혔다. 이들은 지난 3월 몽탕의 무덤을 파헤쳐 발굴한 치아와 드로사르의 치아를 비교·분석했으나 두사람의 유전자구조가 다른 것으로 판명됐다고 말했다. 프랑스 여배우 안 질베르트의 딸인 드로사르는 몽탕이 자신의 아버지라며 법원에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었다. 몽탕은 74년 당시 19살인 안과 만나 2년동안 교제했다.생전에 안과 관계를 가진 사실은 인정했으나 드로사르와의 친자관계는 부인,혈액 검사 등 친자확인에 필요한 어떤 조사도 거부했었다. 파리법원은 그러나 4년전 몽탕과 드로사르의 생김새가 닮았다는 점과 몽탕이 두번이나 혈액검사를 거부한 사실을 들어 몽탕이 드로사르의 친아버지라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 YS 답변 청와대 시각

    ◎선거 앞둔 미묘한 시점 신·구정권 갈등 조장/“지방선거를 대리전으로 만들 속셈” 불쾌 청와대는 7일 金泳三 전 대통령의 검찰 답변서 공개로 빚어지고 있는 ‘환란(換亂) 파문’에 일단 흥분을 자제하고 있다.‘환란과 경제파탄 책임을 어떻게든 모면해보려는 데서 파생된 문제’로 의미를 축소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관계자들도 “5년 동안의 경제정책 잘못으로 나라가 온통 결단난 것을 놓고 마지막 1주일 절차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넌센스”라고 애써 맞대응을 자제하고 있다. 그러나 파문 초반에 비하면 상당한 유연성이 보인다.청와대에서 답변할 사안은 아니라는 전날의 태도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나,원론적인 대응조차 주저하는 것은 아니다.朴智元 청와대대변인도 “金대통령의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다”고 전제하면서도 당쪽의 ‘청문회 출석’ 등 金전대통령을 겨냥한 직격포화에 대해 “당이 대통령의 뜻을 모른다고 할 수는 없다”며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변화의 저변에는 이번 파문이 신정권과 구정권의 갈등양상으로 비화하고,급속히 선거쟁점화 하는데 따른 방어의 측면도 함축되어 있는 것 같다.취임전과 달리 양측의 공식 채널은 개설되어 있지 않다.그러나 청와대측은 金전대통령이 답변서 파문을 증폭시킨 시점에 주목하는 눈치다.지방선거를 대리전 양상으로 나아가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지 않느냐는 관측이다.이는 金대통령과 자민련 朴泰俊 총재가 ‘환란을 정치적으로 이용돼서는 안된다’는 우려를 표명한 것이나,朴대변인이 “구정권측에서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표현에서도 어느 정도 감지된다. 그런 점에서 朴대변인이 金전대통령의 검찰 답변서 내용에 대해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라고 일축하면서 “청와대는 항상 점잖게 얘기해도 언중유골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한 불쾌감을 표시한 대목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 ‘사고의 거품’도 걷어내자/박성래 외대부총장(서울광장)

    지난 1월 6일 미국의 한 천문학자 유골이 달로 떠났다. 미국은 25년만에 달 나라에 인공 위성을 쏘아 보냈는데,정말로 달에는 물은 없을까 등등 여러가지 의문을 풀기 위한 과학적 조사를 하게 된다. ‘루나 프로스펙터’라는 이 위성은 1년 반 동안 달 주위를 돌며 달을 탐사한 다음 거기 안착하며,그때 유골을 내려 놓을 예정이다. ○달로간 미 천문학자 유골 이로써 달여행을 꿈꾸며 우주인 양성에 힘썼던 천문학자 유진 슈메이커의 무덤이 달에 생겨나게 되었다. 지난해 7월 사망한 슈메이커는 그 몇달 전부터친구들에게 달 표면에서 암석을 채집하고 싶다고 말해 왔다. “달에 착륙해내 망치로 표면을 두드려 보지 못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이라고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아내 및 다른 동료와 함께 ‘슈메이커­레비 9호’ 혜성을 발견하기도 한 그는 한때 달 여행 기회를 얻기도 했으나 건강 문제로 우주비행사의 꿈을 포기하고 대신 비행사들을 훈련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것이 한이 된 그는 유언을 남겨 자기의 유골을 달에 장사지내게한 것이다. 유골 상자에는 아내와 함께 발견한 혜성의 사진과 아폴로 우주인들의 훈련 사진,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한 구절이 들어 있다고 한다. ‘루나 프로스펙터’는 앞으로 1년반 후 이 상자를 달 표면에 내려놓을예정이다. 이 뉴스를 읽으며 내게 떠오른 생각은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이다.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치고 당나라를 몰아내어 신라의 삼국 통일을완성한 임금으로 알려진 그는 681년에 죽었는데,유언에 따라 무덤은 동해 바다에 만들어졌다. 경상북도 월성군 감은사 앞 또는 월성 원자력발전소 앞의 동해 바다에 있는 대왕암이 바로 그의 무덤인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동해에 묻힌 신라 문무왕 “7월 1일 임금이 돌아가니 시호를 문무라 하였다. 모든 신하들이 왕의 유언을 따라 동해 어구의 큰 바위에 장사하였다. 세상 전설에 의하면 그는 변하여 용이 되었다고 하는데,그를 장사지낸 바위를 대왕석이라 부른다.”또 이 이야기를 받아 ‘삼국유사’권2 ‘만파식적’조에는 대왕암을 바라보는 자리에 세운 감은사의 유래가 설명되어 있다. 감은사는 원래 문무왕이 짓기 시작한 절인데,그 아들 신문왕이 완성했다. 감은사 금당 밑에는 동해 바다로 이어지는 굴이 뚫려 있어서 문무왕이 변해진 용이 절을 드나들수 있게 되어 있었다는 기록이다. 문무왕과 슈메이커­이 두 사람의 무덤은 모두 이 땅위에는 있지 않다. 이들의 유해는 모두 화장되었다는 공통점은 있지만,그것을 한 사람은 달 표면에 보냈고,다른 한 사람은 동해 바닷 속에 넣었다. 그 어느 쪽도 좌청룡 우백호를 되뇌며 후손의 발복을 기원하여 명당을 찾아 유해를 땅 속에 묻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어느 누가 이 두 사람 무덤을 잘못 썼다고 타박할 수 있을까? 아마 오히려 이들 두 삶의 의미는 최고의 명당을 찾아 조상을 장사지낸 한국의 어느 집안보다도 더 훌륭한 것으로 두고두고 기념될 것이 분명하다. 거품이 심한 시대여서 더욱 그렇기도 했겠지만,작년까지 우리는 너무나 허황된 묘자리 미신에 휘둘려가며 살아 왔다. 오늘의 한국인들은 너무나 풍수지리에 탐닉하고 있는 것이다. ○풍수지리에 너무 탐닉 좋은 무덤 자리 고르기와 지맥이나 수맥 이야기가 점점 더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런 믿음을 부추기는 책들이 대중적 인기를몰아가고 있기도 하다. 이런 비합리적 사고의 유행은 한국인들의 미신 의존도를 높이고,그것이 사회 전체의 불합리성을 높여주는 것 같아서 나는 그것이 걱정이다. 해마다 전국의 무덤 넓이가 여의도 만큼 커진다 하여,우리 좁은 국토 이용의 비합리성을 개탄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런 태도가 중단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한국인의 사고를 둘러싸 짓누르고 있는 ‘사고의 거품’으로부터 헤어나기가 어렵다. 이왕 어려운 시대를 맞아 모든 거품을 빼기로 결심할 생각이라면,우리 사고방식에서도 거품을 빼고,좀더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 첫걸음으로 우리의 지도자 누군가가 문무왕이나 슈메이커 같은 유언을 한 번 할 사람은 없을까?
  • 러 마지막황제 ‘쉼터’ 어디냐

    ◎니콜라이2세 무덤연고권 싸고 2개주 7년째 논쟁/페테르부르그주­역대 왕족 묻힌 혁명도시에 매장해야/예카테린부르그주­유골 발견된 역사적 장소… 반출불가 “러시아 마지막황제 니콜라이2세와 그 가족들이 묻힐 곳은 어디냐.” 올해로 7년째를 맞은 이 논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페테르부르그주와 예카테린부르그주가 각각 자신들의 ‘연고권’을 주장,무덤유치를 놓고 팽팽히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현재 러시아정부는 보리스 넴초프 제1부총리를 위원장으로 ‘니콜라이2세사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사망경위,유골확인 등에 대한 정밀조사를 진행중이다.또 내년 2월중 조사가 끝나는 대로니콜라이2세 및 가족들의 유골을 페테르부르그주로 가져가 봉분할 것을 결정해놓고 있다. 문제는 유골의 진위를 정밀 조사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유골을 옮기라는 옐친 대통령의 포고령에 예카테린부르그주가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예카테린부르그 지방법원은 최근 “유골의 소유권은 주에게 있으므로 다른 주로의 반출을 금한다”고 주정부의 ‘반출금지청원’을 받아들였다.이어 주정부는 유골이 안치돼 있는 ‘이파티예브가’에 경찰력을 동원,유골을 운송해 가져가려는 연방검찰측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다.물론 연방검찰도 주정부의 반출금지조치에 맞서 헌법재판소에 소원을 제기해놓은 상태다. ‘혁명도시’ 페테르부르그는 소위 로마노프왕가부터 니콜라이2세 이전까지 역대왕 일가들이 이곳 피터요새(페트로파블로브스크)에 묻혀 있음을 강조한다.반면 예카테린부르그주는 러시아혁명 1년후인 1918년 황제 일가족이 예카테린부르그로 끌려온 뒤 이곳에서 총살됐다는 역사적인 이유를 들어 연고권을 주장한다. 이들 두 주가 서로 ‘마지막 황제의 쉼터’가 되겠다고 나서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러시아 전지역에서 최근 고개를 들고 있는 러시아민족주의 물결 때문.소속 주 주민들은 ‘과거로의 회귀’는 ‘러시아의 영광’이며 무덤유치에 실패하면 이는 주지사가 정치를 잘못하는 것으로까지 생각하려 든다. 불과 몇개월 전만 해도 ‘마지막 황제 논쟁’은 발굴된 시신이 진짜 니콜라이2세와 그가족의 것이냐였다.이 숙제는 거의 풀렸다.러시아 정부는 지난 91년 예카테린부르그주 이웃 한 무명묘에서 유골들을 발굴,이후 영국의 올더마스톤 과학수사연구소와 미국의 국방연구소에 DNA테스트와 유전자 검사를 의뢰해 똑같은 결과를 얻어냈다.발굴 유골들은 니콜라이2세 본인과 부인 알렉산드라,그리고 딸 3명의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1남4녀 가운데 아들과 막내딸의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 김윤환·이기택 ‘투톱’ 가동/한나라당 선대위 출항

    ◎선대위장 12명 역할분담/지역·직능별 유세전 투입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28일 상오 여의도 당사에서 김윤환 이기택 중앙선대위 공동의장을 만났다.전날 공동의장제를 도입한 뒤 첫 모임이었다. 회동시간은 길지 않았다.유세 등 현장일정 때문이다.두 공동의장은 옛 신한국당과 민주당 조직을 나눠 맡기로 했다.양당 출신 인사 1명씩으로 짜여진 지역별 공동선대위원장들이 각각 두 공동의장의 지휘를 받게 된다. 선거사령실이 투톱 시스템으로 꾸려지는 셈이다.물론 구심점은 아무래도 옛 신한국당쪽에 있다. 이들은 12명의 공동선대위원장들과 종적 횡적인 역할 분담을 통해 선거전을 이끈다.박찬종 황낙주 권익현 고문과 김덕룡 최병렬 박관용 김영균 신상우 김종호 양정규 의원,강창성 전 민주당 총재권한대행,홍성우 변호사 등이 공동선대위원장의 직함을 갖고 지역·직능·계층별 유세전에 투입된다. 특히 선대위원장직 사퇴 의사를 밝혔던 박찬종 위원장은 최근 김윤환 공동의장의 간곡한 요청으로 부산경남 지역 유세전에 나설 것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는 후문이다.이후보도 금명간 박고문을 만나 ‘복귀’를 설득할 것으로 알려졌다.이기택 공동의장도 부산경남 지역에 긴급 수혈된다.박고문과 이공동의장이 발벗고 나서면 이후보의 영남권 공략이 한층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본격 현장투입에 앞서 선대위원장단은 29일 상오 조순 총재로부터 임명장을 받는다.이 자리에서 위원장단은 선거 초반 판세와 전략을 점검할 예정이다.선대위원장단의 본격 출항을 계기로 기획회의도 하루 2차례에서 3차례로 늘렸다.중앙당 여성선대위도 이날 328명의 선대위원에게 위촉장을 수여하고 여성표 공략에 본격 시동을 걸었다. ‘김윤환-이기택 공동의장’ 카드의 파괴력이 기대치에 이를지는 미리 판단키 어렵다.대선 이후 당내 입지를 염두에 둔 두 공동의장의 묘한 신경전이 쌍곡선을 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날 이후보와 회동하기에 앞서 두사람이 주고 받은 언중유골의 선문답도 예사롭지 않다.“이회창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여기에 왔다”(이) “어디 딴데 갈데라도 있었나”(김) “선대위의 전략 등을 논의해 전향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이) “지금까지 역할분담을 잘 하고 있는데… 뭘”(김)
  • 영 작가 피터스의 ‘캐드펠 시리즈’ 2권 출간

    ◎긴장감 만점 ‘중세 스릴러의 세계’/1천만부 판매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아서 코난 도일 이후 영국 추리소설의 맥을 잇는 영국의 여성작가 엘리스 피터스(본명 에디스 파지터,1913∼1995).그를 일약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수도사 ‘캐드펠 시리즈’중 두 권이 우리말로 옮겨져 나왔다.도서출판 북하우스에서 펴낸 ‘성녀의 유골’(최인석 옮김)과 ‘99번째 주검’(김훈 옮김).모두 20권으로 된 이 시리즈는 지금까지 미국·프랑스·일본 등 22개국에서 출간돼 1천만부 이상 판매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작가의 고향 시로프셔 주의 시루즈베리를 중심으로 한 중세 영국의 역사와아가사 크리스티를 능가하는 치밀한 구성,아서 코난 도일 경의 셜록 홈즈에버금가는 매력적인 인물 캐드펠 수사의 추리력이 어우러진 절묘한 중세 스릴러의 세계가 긴박감을 안겨준다. ‘성녀의 유골’은 ‘캐드펠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주인공은 십자군 전쟁에서 퇴역해 수도원에 은둔한 늙은 수도사 캐드펠이다.캐드펠은 수도사와 추리소설하면 으레 떠오르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과는 달리 현학적이지 않으며 경건하지도 엄숙하지도 않다.그는 늙은 몸을 수도원에 의탁했을뿐,종교적인 경건함이나 중세적인 엄숙주의와는 거리가멀다.소설은 웨일스의 궁벽한 마을로 성녀의 유골을 찾아 나서면서 본궤도에 오른다.수도원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떠난 성골찾기 여행은 사기와 살인으로 얼룩진다.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탐욕을 고발하려는 작가의 의도는 빛난다. ‘99번째 주검’은 영국 역사상 실재했던 사건,곧 1138년 영국의 왕권을 걸고 사촌인 모드 황후와 각축을 벌이던 스티븐 왕이 시루즈베리를 공격한 사건을 토대로 한 작품이다.스티븐이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않아 영국 중부를 평정하기 위해 시루즈베리로 진군한 때부터 모드 황후의 오른팔 격인 로버트 백작을 응징하기 위해 우스터로 진군한 때까지를 시대배경으로 한다.이번에 선보인 두 작품에 이어 ‘수도사의 두건’‘성 베드로 축제’‘죽음의 혼례’ 등 3권이 올해안으로 더 나올 예정이다.
  • 동양종교와 죽음/베르나르 포르 지음(화제의 책)

    ◎죽음의 개념과 의미·윤회관념 등 고찰 죽음으로 완성되는 동양종교의 실체와 신화를 고찰한 연구서.미국 스탠포드대 아시아 종교역사학 교수인 지은이는 각 문화권 마다 상이하게 드러나는 죽음의 개념과 의미,윤회관념,제례의식 등을 구체적 실례를 들어 살핀다.서양에서는 죽음이라고 하면 으레 죽음의 천사나,낫을 들고 있는 불길한 사자의 모습을 떠올려 왔다.그러나 이와는 달리 아시아에서는 죽음을 의인화하여 생각하지 않았다.한 예로 불교교리에 의하면 붓다는 마치 불어 꺼버린 촛불의 불길처럼 열반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불교의 가르침은 나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죽음 이후의 ‘간다르바’를 인정한다.간다르바는 ‘향기를 먹고 사는 존재’라는 뜻으로 죽은 후에 새로운 육체를 입고 다시 환생하기까지 의식체의 상태로 남아 있는 정신적 실체를 일컫는 말이다. 윤회의 개념은 인도의 베다교에서 그 기원을 찾을수 있다.‘베다’‘우파니샤드’와 함께 힌두교의 3대 경전의 하나로 꼽히는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 신은 그의 제자인 아르주나에게 이렇게 선언한다.“인간들이 낡은 옷을 벗어 던지고 새 옷을 입듯이,환생한 영혼도 낡은 육신을 벗고 새로운 다른 육신속으로 옮겨간다” 이같은 인도의 윤회관념은 중국의 전생관념과는 차이가 있다.중국의 전생개념이 씨족적·가문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 비해 인도에서의 윤회는 사람들이 벗어나기 위해 무척이나 애쓰는 끈질긴 순환구조로 인식된다.한편 이 책은 육체의 죽음을 정복하려는 의지를 구체화한 미이라에 대해서도 언급한다.지은이는 인도에서는 육체의 불멸성을 믿는 신앙과 유골숭배 관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이라를 만들지 않았던 것 같다는 주장을 편다.김주경 옮김 영림카디널 4천500원.
  • 일본은 한반도 고고사의 일부

    ◎전국고고학대회 참석 니시다니 다다시 교수 밝혀/남서해안·동부지역 한반도계 유물 다수 발굴/나가사키겐 고인돌무덤 신석기 말기의 흔적 일본열도에서는 최근 들어서도 한반도계 유적 및 유물이 계속 발굴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이는 한국고고학회가 지난 8일 광주 전남대에서 연 전국고고학대회에 초청받은 큐수대 니시다니 다다시(서곡정) 교수에 의해 확인되었다.그가 발표한 주제는 ‘요즘 일본에서 발굴한 한·일관계 새 자료’.그는 한반도계 유적발굴 실상을 소개하고 일본에 존재하는 한반도계 유적을 문화흐름의 한 현상으로 보았다. 그는 주로 1994∼97년까지 아주 최근에 발굴한 유적만을 한국학자들에게 전해주었다.먼저 나가사키겐(장기현)기타마츠우라군(북송포군) 우쿠마츠바라(우구송원)유적에서 지난해 6기의 고인돌무덤과 3기의 널무덤이 발굴되었다고 소개했다.특히 고인돌무덤에서 나온 붉은 간토기는 일본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신석기시대 말기의 한반도유물로 결론지었다.또 고인돌무덤과 널무덤에서 발굴한 일곱 사람몫의 인골도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른바 도래인으로 보았다.그리고 이들을 일본에 벼농사를 퍼뜨린 장본인으로 추정했다. 우큐마츠바라유적은 한반도와 쉽게 교류할 수 있는 지리적 입지에 위치했다는 그는 다른 고인돌유적도 들추어냈다.나가사키 사가겐(좌하현) 모리다(삼전)등 신석기시대 말기의 한반도계 유적이 계속 발굴되었다는 것이다.이들 일본열도 남서해안 유적 뿐 아니라 동일본 지역에서도 한반도계 유골이 나온다는 사실을 중시했다.이를테면 나가노겐(장야현) 네즈카(근총)유적인데,지난해 발굴조사에서 청동기시대 최말기의 철검 2자루가 나왔다고 밝혔다.이 가운데 칼자루와 날 사이에 돌기가 돋아난 칼 1자루는 일본에서 나온 예가 얹는 유물.그는 이 철검의 원류를 경남 김해시 양동리유적 출토품인 다래덩굴무늬 칼자루가 달린 철검에서 찾았다. 그는 한국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일본의 고분시대 유적에서도 한반도와의 관계를 살폈다. 지난 1995년 교토부(경도부) 다케노군(죽야군) 다쿠오카기다(내구강북)1호무덤인 전방후원분에서 나온 도질토기와 굽다리잔은 가야토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그러니까 가야토기라는 이야기다.그는 이들 토기를 가야와 왜가 교류를 하는데 필요한 일정한 해상루투가 동해상에 존재한 사실을 보여준 유물로 평가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올해와서 관동지방 북부인 군마겐(군마현) 다카사키시(고산시) 여러 유적에서 나온 유물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5세기 중엽 주거유적 출토품 연질토기와 5세기중엽∼6세기쯤의 네모꼴돌무지무덤 출토품 연질토기병 및 금제느리개가 달린 귀걸이가 그것.그는 이들 유물을 통해 일본 고대유적의 가야문화를 중시하고 지난 1994년에 5세기 전반의 도질토기가 나온 도쿄도(동경도) 아다치구(족입구) 무사시이코(무장이흥) 유적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했다. 이와 더불어 1994년 후쿠오카겐(복강현) 아케노구치 유적에서 발굴한 4세기 전반과 5세기쯤의 온돌유구는 경기도 수원시 서둔동과 하남시 미사동 원삼국시대의 움집 온돌과 일치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또 후쿠오카겐 유쿠하시(항교시)를 중심으로 쌓은 일본 고대산성의 기원을 백제산성에서찾은 그는 아오야마겐(강산현)에도 백제계 산성이 분포되었다고 말했다.
  • 어제 49회 감식의 난… 감식의 어제와 오늘

    ◎범죄수사·신원파악 해결사로/1910년 첫 도입… 3천7백만명 지문 보관 4일은 제49회 ‘감식의 날’.감식은 범죄수사나 사망자의 신원을 파악하는데 ‘해결사’ 역할을 한다. 감식법에는 10여가지가 있으나 가장 많이 이용되는 것이 지문감식과 유전자감식이다.골상학,부검,거짓말탐지기,몽타쥬,족흔 감식 등도 있다. 지문감식은 사람마다 다른 지문을 갖고 있는 점을 이용,지문을 대조하는 방법이다.경찰청은 18세 이상의 남녀 3천7백만여명의 지문을 보관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특정 지문과 같은 것을 찾아내는데는 기술적으로 큰 어려움이 따른다.지난 2월15일 이한영씨 피살사건처럼 현장에서 채취한 지문으로 용의자를 찾으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처럼 지문감식에도 한계가 있다. 지문감식보다 한 단계 발달한 것이 유전자 감식법.이는 사망자의 세포에서 DNA를 추출,유족과 비교해 동일여부를 판명하는 것이다.DNA는 머리카락 모근 혈액 정자 입안의 점막세포 등 어떤 세포에서도 쉽게 발견되기 때문에 10년 정도 지난 유골의 신원도 파악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1910년 지문감식법이 처음 도입됐다.
  • 페루 마추픽추(세계 문화유산 순례:46)

    ◎고대 잉카제국 천혜의 요새도시 장관/2,400m 고산에 신전·왕궁·서민주택 한곳에/계단 농경지·상수도시설 갖춘 ‘산상 자급도시’ 페루의 마추픽추(Machu Picchu)는 한때 잃어버린 고대도시였다.고고한 안데스산맥의 푸른 기운을 한껏 뿜어내며 해발 2천400m 고지에 자리한 잉카 최후의 도시이기도 하다.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쫓긴 잉카인들이 마지막으로 은거했다는 마추픽추.잉카문명의 위용과 신비를 모조리 한데 모아놓은듯 그야말로 장대했다. 쿠스코에서 하룻밤을 묵은뒤 아침 6시가 조금 지나 협궤열차 아우토바곤에 몸을 실었다.우루밤바강을 따라 이어진 잉카의 흔적들과 수풀 사이로 언뜻 언뜻 내비치는 만년설을 감상하는 맛에 지루함을 덜며 3시간 남짓 달렸을까.푸엔테스 루이나스라는 작은 마을에 닿았다.여기서 마추픽추까지는 다시 버스를 타고 8㎞나 되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랐다.길옆으로 내려다 보이는 낭떠러지가 아찔했다.침략자를 피해 숨어들기 알맞은 천혜의 요새다. ○잉카제국 최후의 도시 마추픽추 유적지는 두 개의큰 봉우리를 양쪽에 거느린 너른 분지에 자리했다.잉카말인 케초아어로 ‘늙은 봉우리’를 뜻하는 마추픽추에다 왕족과 귀족 및 서민들의 주거지를 먼저 만들었다.건너편에 더 높은 ‘젊은 봉우리’ 와이나픽추는 적의 침략을 감시하는 망루로 삼았다.그리고 분지 뒤로는 깎아지른 듯한 까마득한 절벽이 병풍을 둘렀다. 봉우리 정상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모습은 질서정연했다.잉카유적 어디서나 볼수 있듯 태양의 신전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의 궁전,제사장·시종·군인들의 거처가 둘러싸였다.경사면 아래쪽으로는 서민들의 주택과 농경지가 이어졌다.또 고산지대인 탓에 1∼2m폭으로 만든 계단식 밭이 구불구불 돌아갔다.샘물을 이용한 17개의 양수시설과 상수도 시설도 갖춘 이 산상도시는 농경지 면적으로 미루어 2만명 정도는 족히 먹고 살았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그러니까 자급자족의 공동체였던 것이다. 자연과 인공이 어울린 도시이자 요새이기도 했다.산꼭대기로 피신하고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도시 전체를 2∼3m 높이의 돌벽으로 둘러쌓았다.출입구는 단 하나만을 두었을 뿐이다.외침으로부터 문명을 지켜내려는 잉카인들의 노력은 대단했다.막다른 벼랑끝을 기어 올라야 했던 그들의 가여운 처지가 자꾸만 연상됐다. 봉우리 정상에는 잉카인들의 무덤이 있었다.1911년 미국인 고고학자 하이럼 빙엄(Hiram Bingham)이 무덤을 처음 발견했을 당시 120여구의 유골이 나왔다고 한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유골은 모두 어린이나 여자·노인들 것이었다.이에 대한 학설은 분분했다.쿠스코가 정복당한뒤 태양의 처녀들이 마지막으로 숨어살다 죽은뒤 묻히거나 전쟁으로 남자들이 모두 죽고 어린이·여자·노인들만 남아 끝까지 살다 죽은 것이라는 등의 추측이 그것이다. ○주변에 깎아지른 절벽 좁은 비탈길을 내려가 도시안으로 들어섰다.미로형의 통로를 따라 늘어선 신전이나 왕궁은 쿠스코에서 보던 것 보다는 다소 거친 모습이었다.그러나 5각·7각·32각 등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돌로 벽을 쌓았던 당시의 건축양식을 충실히 따르기는 마찬가지였다.특히 왕궁과 왕비궁 사이의 커다란 자연석 위에 자리한 태양의 신전은 마추픽추 유적 가운데 가장 정교했다.왕궁 옆으로는 마치 콘도르의 비상을 연상케 하는 바위가 버티어 있고,그 위로 콘도르 신전이 우뚝했다.콘도르는 지금의 페루는 물론 볼리비아·아르헨티나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호령했던 잉카 왕권의 상징이었다. ○1911년 미 고고학자 발견 잉카문명에 대한 모든 수수께끼는 마추픽추에 집합됐다.우선 잉카에는 짐을 끄는데 부릴만한 가축이 거의 없었다.그런데도 몇톤씩 나가는 돌들이 겹겹이 쌓여있다.또 돌을 가공하는데 사용한 도구도 이제까지 무엇하나 발견하지 못했다.그렇다면 잉카인들은 무엇을 가지고 돌의 도시를 건설한 것일까.불가사의가 아닐수 없다. ◎여행가이드/현지에 숙박시설 없어 쿠스코서 여장 풀어야 마추픽추를 가려면 미국 LA에서 페루 수도 리마를 거쳐 국내선을 타고 쿠스코까지 가야 한다.LA에서 리마까지는 비행기로 8시간,리마∼쿠스코는 1시간 정도 걸린다.마추픽추에는 숙박시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쿠스코에서 여장을 풀어야 한다.식사는 호텔 보다는 시내로 나가 페루음식을 즐기는 것도 묘미다. 마추픽추를 가려면 쿠스코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는 협궤열차 아우토바곤을 타는 것이 좋다.3시간 남짓 걸리는 기차여행이지만 주변경관을 살피는 즐거움도 맛볼수 있다.마추픽추를 빠져 나올때는 하오 3시에 출발하는 아우토바곤을 타면 된다.왕복 기차요금과 입장료·셔틀버스비를 합치면 1인당 140솔(미화 약 65달러)정도.
  • ‘백제 초기도읍지는 천안’설 주목

    ◎서울대 고고학 조사단,유물 다수 발굴/숯 연대측정… 2010년전으로 밝혀져/토성흔적·대형 돌무지무덤도 발견 백제가 처음 나라를 세운 초기 도읍지는 어디인가.이 문제는 아직 명쾌하게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다.다만 시조 온조가 기원전(BC) 18년 하남위례성에서 건국했다는 기록만은 전해내려 온다.그러나 하남위례성 자리는 꼬집어 밝혀내지는 못했다.학자에 따라 서울 강동구와 경기도 광주 일대,또는 충남 천안시 직산 일대를 백제 초기 도읍지로 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천안지역에서 진행한 유적발굴에서 백제 초기의 유물이 속속 나오고 있다.특히 서울대 고고학발굴조사단이 천안시 북면 운용리 위례산성(해발 825m)에서 유물과 함께 거둔 시료(숯)의 연대측정가는 백제 건국시기에 접근했다.서울대가 일본 교토산업대에 맡겨 실시한 시료의 과학적 연대측정에서 오차는 약간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2010년전 숯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서울대팀이 발굴한 위례산성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하남위례성’의 ‘위례성’과 일치한다.그래서 일찍‘삼국유사’에 등장했거니와 이 사서는 도읍지 위례성은 사천인데 지금의 직산이라고 했다.이밖에 ‘고려사’ 지리지,‘세종실록’ 직산조,‘대록지’,‘동사강목’,‘둥국여지승람’에도 같은 내용을 적어 놓았다,또 여러 고지도 역시 천안(직산)땅에 위례성을 그려넣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아주 최근에는 백승명씨를 주축으로 한 천안지역 향토사학자들이 서울대 규장각에서 위례성을 뚜렷이 표시한 고지도를 찾아냈다.1735년에 간행한 ‘해동지도’인데,당시 직산현 일대를 상세히 그렸다.또 이들 향토사학자들은 위례산성에서 직선으로 3㎞쯤 떨어진 천안시 입장면 도림리 뒷산에서 대형 돌무지무덤 2기를 발견했다.3단으로 축조한 이들 돌무지무덤은 하단의 장축이 9m나 되었다.이와 더불어 위례산성 기슭에서 가로 1m,세로 80㎝의 갈돌 6점을 확인했다. 이들 향토사학자들이 새로 찾은 돌무지무덤은 규모가 비교적 큰 것으로 미루어 백제초기 한 세력집단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특히 천안시 직산읍 안국리 한 과수원에서 발견한 토성 흔적은 주목을 끌었다.왜냐하면 평지성이라는 점에서 백제초기 도읍지의 거성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이 직산읍 안국리 토성이 거성일 경우 북면 용운리 위례산성은 비상시 사용한 배후성이라는 결론이 나온다.서울대는 지난해 이 산성에서 백제 특유의 삼발이토기의 철제무기류,토마와 철마 따위의 유골을 수습한 바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아 직산 일대를 하남위례성으로 지목한 향토사학자들은 서울 강동구 일대를 하남 위례성으로 본 종래의 학설을 비판하고 나섰다.이는 ‘삼국사기’를 그릇 해석한데서 비롯한 오류라는 것이다.북으로 한수가 띠를 둘렀다는 ‘북대한수’의 ‘한수’는 한강이 아니고 오늘의 안성천이라는 주장이다.그 근거는 일본인들이 안성천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이전 안성천 본래의 이름이 ‘한내’ 또는 ‘한천’이었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그래서 경기도 평택시 오산출장소 뒷산인 부악산을 ‘삼국사기’의 부아산으로 보면 지세가 꼭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동쪽에 높은 산이 자리 잡았다는 ‘동거고악’으로 안성의 칠현산,천안의 성거산과위례산 등 12개 산을 꼽았다.남쪽으로 넓은 들이 보인다는 ‘남망옥택’은 평택평야를 말하는 것이고,서쪽은 바다로 막혔다는 ‘서조대해’는 바로 아산만이라는 주장이다. 어떻든 이들의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녔다.고고학 발굴과 일련의 유적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하지만 고대사학계가 얼마만큼 받아들일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 화장장·납골당 고급화 추진/복지부 5개년계획 마련

    ◎설치·개선자금 지원… 명칭 개정 검토 보건복지부는 28일 개정 장묘법의 시행에 맞춰 화장장 납골당 현대화 5개년 계획을 마련,내년부터 추진하기로 했다. 이는 지난 달 25일∼6일까지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44개 화장장을 조사한 결과,경기도 벽제화장장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설이 낡아 화장에 대한 좋지않은 인식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공·사설 납골당 54개 가운데 41개는 유골을 단순히 보관하는데 그치는 창고식이거나 주변 환경이 열악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우선 내년에 사설 납골당 설치 융자금 40억원을 보조해주는 한편 지방자치단체의 화장장 개선에도 국고 58억원,납골당 신축에 55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다.또 화장장과 납골당의 명칭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명칭을 바꾸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 네안데르탈Ⅱ/에릭 트링카우스·팻 십먼 지음(화제의 책)

    ◎인류기원 둘러싼 90년대까지의 논쟁 네안데르탈인은 과연 인류의 조상인가.이 문제는 오늘날 인류학계의 가장 뜨거운 쟁점중의 하나다.한바탕의 해프닝으로 끝난 물랭퀴뇽이나 필트다운의 날조에서부터 네안데르탈인의 이미지를 야만적인 짐승으로부터 예민한 종교적 존재로 바꿔놓은 1939년의 몬테 치르체오의 화석에 이르기까지 네안데르탈인에 관한 논쟁은 전환에 전환을 거듭해 왔다.이 책은 인류의 기원을 둘러싼 복잡한 논쟁의 단초와 과정을 소설처럼 흥미롭게 보여준다.1856년 독일에서 네안데르탈인의 뼈가 발견된 뒤부터 1918년까지를 다룬 1권에 이어 2권에서는 1990년대의 논쟁까지 생생하게 다룬다. 해부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네안데르탈인의 신체구조는 현생인류와 매우 비슷하다.그러나 금세기초 영국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인류학자 아서 키스와 마르슬랭 불은 네안데르탈인이 야수적인 유인원과 너무 유사하기 때문에 우리의 조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반면 이 책의 저자들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야수성과 낮은 지능을 이유로 네안데르탈인을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그들의 행동양식을 추론해 보면 그 지능과 성질이 현생인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피테칸트로푸스에서 내려온 유럽 인류의 계통이 네안데르탈인을 거쳐 현생인류로 진화했다는 견해는 현재 다수설로 되어 있다.그러나 최근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에 대한 유전자 분석결과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는 서로 교잡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네안데르탈인 논쟁은 바야흐로 다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윤소영 옮김 금호문화 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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