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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진우는 누구/항일유격대 출신 혁명 1세대

    ◎세습체제 구축 「절대적 후원자」 25일 새벽 사망한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은 북한 군부를 장악해 온 권력서열 2위의 핵심인물이다.그는 김일성의 항일유격대원 출신 혁명 1세대로 김정일 후계체제를 확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절대적 후원자」였다. 오진우는 1917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어린 시절을 만주 간도에서 보낸 그는 33년부터 김일성을 따라 항일 빨치산 투쟁에 나섰으며 옛 소련 보병학교와 육군대학에서 군사학을 배우기도 했다.6·25전쟁 때는 특수부대인 766유격부대장으로 참전했고 61년 당 중앙위원,62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올랐다.67년 3월에는 김정일이 박금철 등 갑산파를 숙청하는데 돌격대로 나서 대장승진과 함께 인민군 총정치국장으로 영전했다.오는 이때부터 책략가로서 김정일의 반대파 숙청에 앞장서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67년1월 군당 제4기4차 확대회의에서 민족보위상인 김창봉과 대남사업총책 허봉학·총참모장 최광 등 군수뇌부 대숙청을 진두지휘한 뒤 군참모장으로 승진했고 76년5월 인민무력부장 최현을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격상시키면서 인민무력부장을 맡았다.이후 오는 김일성과 김정일로 이어지는 북한 권력 구조에서 20년이 넘게 자리를 유지했다.92년 4월에는 원수에,93년 4월에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올라 실질적인 3인자 지위에 있던 그는 김일성 사망후 권력서열 2위로 뛰어올랐다.특히 김일성 장례식에 김정일과 함께 나타남으로써 북한의 권력 승계작업이 그의 전폭적인 지지속에 진행되고 있음을 과시했다.그러나 그는 지난해 7월 16일 평양 금수산의사당에서 거행된 김일성사망 1백일 중앙추모회에 참석했을 때 한쪽 다리를 저는등 부쩍 건강이 악화된 모습을 보였다.
  • 일총리 “한반도분단 일도 책임”발언번복/남·북한과의 외교마찰 덜기

    ◎분단책임론 대두·대북수교협상 부담 우려 무라야마 총리가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한반도의 분할에 일본이 얼마간 책임이 있다고 공식 인정했다가 하룻만에 이를 번복한 것은 한반도 분할이 복잡한 국제문제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무라야마 총리는 지난 30일 중의원 예산위원회 답변을 통해 『역시 일본국민으로서 역사적인 책임이 얼마간 있다고 생각한다.어떤 일이 있더라도 분쟁상태는 절대로 남아있어서는 안된다』고 명확히 책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날 발언이 전해지자 외무성 등은 정부의 공식견해와는 다르다면서 총리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라고 해명.외무성은 한반도와 관련,일본이 전후 맺은 조약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한일기본조약으로 어느 쪽에도 남북분단을 초래한 것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책임을 극구 부인했다. 결국 무라야마 총리는 31일 같은 위원회에서 다시 답변에 나서 『어제 이야기는 과거 식민지배가 역사적으로 초래한 이제까지의 경위에 있어서의 책임이다.일본 정부가 분단한 것은 아니다.전승국과의 관계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남북이 분단돼 있는 점에 대한 책임은 일본국에는 없다고 명확히 해두고 싶다』고 말을 완전히 바꿨다.결론은 일본 외무성이 정부 공식입장으로 취하고 있는 대로다.일본 관료사회의 파워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총리의 발언 번복을 지진 대책 마련에 허둥대면서 이러저러한 발언을 자주 뒤바꾸는 총리가 경험부족으로 「소박한 심정을 표명한 것」으로 돌리려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첫날 총리의 개인적 견해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도 다음날 총리로 하여금 명확히 부인하도록 한 것은 남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우려한 때문이었다. 한반도 분단은 전후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연합군인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38선을 경계로 진주함으로써 비롯됐다는게 통설.따라서 총리의 책임인정 발언이 번복되지 않으면 새로이 분단책임에 대한 논의가 한국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큰데다 특히 전후 보상까지 요구하고 있는 북한과는 국교정상화를 둘러싸고 새로운 부담으로 작용할 우려가 컸던 것이다.또 무라야마 총리의 부인 발언 가운데는 「전승국과의 관계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남북한을 전승국의 범위에서 제외시키는 듯한 발언으로 대일선전포고등을 행한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승계를 주장하고 있는 한국,대일유격전을 주장하고 있는 북한등의 입장과는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있다.앞으로 통일 이후까지 전망하면서 면밀한 국제법적인 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 김정일 국가원수 지명/내년1월∼2월께 가능/미 스칼라피노교수

    【도쿄 연합】 동아시아 연구 권위자인 로버트 스칼라피노 미 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는 북한 김정일이 내년 1월이나 2월까지는 국가원수로 지명될 것이라고 밝혔다. 국제회의 참석차 서울을 방문중인 스칼라피노 교수는 12일 일 교도통신과 가진 회견에서 『김이 국가주석이나 노동당 총비서에 선출되지 않고 있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문제는 『김정일이 젊은 세대와 함께 효과적으로 (권력승계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김정일체제는 권력을 세습했다는 차원에서뿐 아니라 김일성의 항일유격대에 소속했던 구지도자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과도기라고 규정하고 40∼60대의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동유럽이나 옛 소련에서 과학기술분야 교육을 받은 만큼 김정일이 장래 정책에 관해서 이들에게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따라서 과도기에 옛 세대 몇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나 앞으로 3∼5년후에는 사실상 옛 세대 전체가 무대에서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남북정상회담이 조기에 실현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며 북한은 한국 민간기업과의 접촉은 시작했으나 정부간 대화에는 의욕을 보이지 않고 있다면서 미국과 한국이 남북대화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미·북한 합의가 전체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남북대화도 시작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 통일영화 「이도백화」(이 영화)

    ◎연변 이산가족의 휴먼스토리/민족 대화합·조선족 생활상 묘사/백두산의 절경·문화유적도 볼만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비경과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생활상,광활한 중국대륙의 전경을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게 됐다. 우리영화로서는 처음으로 백두산과 중국 동북3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도백화」(감독 강상룡)가 최근 갖가지 화제속에 현지촬영을 끝내고 개봉날짜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도백화」는 민족분단으로 중국 연변에 흩어져 살고있는 가족들의 눈물겨운 재회과정을 통해 이산의 아픔을 그린 일종의 「통일영화」.민족의 대화합,곧 통일을 소재로 한 영화는 그동안 여러차례 만들어졌지만 대부분 분단극복이라는 무거운 주제의식에 눌려 경직된 이데올로기 영화의 틀을 벗지 못했다.하지만 이 영화는 이성에 매달리는 직접적인 주제전달 방식 보다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역사성이 가미된 휴먼드라마를 지향하고 있어 기존의 이념영화와는 일단 차별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8년간 기획… 제작비 10억 8년의 기획기간(총제작비10억원)을 거쳐 작년 7월부터 올해 10월까지 10여차례 중국을 오가며 촬영한 만큼 「이도백화」에는 놓치고 싶지 않은 볼거리들이 풍성하다.중국 동북 일대에서 가장 높은 해발 2천6백91m의 백운봉을 비롯한 기암절벽들,거울처럼 고요하던 천지가 비구름에 덮이며 이내 성난 바다로 변하는 모습,은하수가 기울어지는가 싶도록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장백폭포의 물줄기,천지용궁의 다섯마리 교룡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백두산의 승사하,고도차이에 따라 천태만상의 변화를 보이는 백두산의 수직경관대,백두산 아래 첫마을인 내두산촌의 풍정 등…. ○항일기지 내두산촌 담아 이 가운데 특히 조선사람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옮겨와 일군 마을로 알려지고 있는 내두산촌의 모습을 필름에 담은 것은 여러모로 뜻깊다.제작팀에 따르면 현재 이 마을에는 30여호의 조선족들이 단오놀이 등 우리민족 고유의 생활풍습을 그대로 유지한채 살아가고 있으며 일제 당시 항일유격대가 묵었던 타원형 석굴과 병원자리 등의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 ○중국서 헬기 지원 받아 현지로케 기간중 무엇보다 제작팀을 애타게 한 것은 겨울 백두산 촬영과 투명한 천지의 모습을 영상에 담는 일이었다.외국인에 대한 촬영제한은 고사하고 폭설이 내리는 9월 중순부터 이듬해 5월까지는 백두산 입산이 금지되어 있을 뿐 아니라 천지의 경우에는 기후변화가 심해 1년중 7,8월에만 그것도 사흘에 한번 꼴로 맑은 천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중국에서 세번째로 큰 메이저 영화사인 장춘영화사와 연변 TV방송국 사람들,그리고 조선족 동포들에게 막무가내로 매달려 헬기항공촬영 지원을 받아내는 등 「007 첩보전」을 벌였기에 그나마 가능했다는 것이 제작 후일담이다. ○내년 2월 개봉 예정 20여년 동안 조명전문가로 활동하다 뒤늦게 메가폰을 잡은 강상룡 감독(50)은 이 작품이 생각하는 고통을 요구하는 영화인 만큼 흥행문제를 의식한듯 『「이도백화」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각 문화유적지를 훑어가는 로드무비 성격의 「재미있는」영화』라며 『민족분단이 강요한 이산의 한을 안고 사는 이땅의 모든 이들에게 이 영화를 바치고 싶다』고 비장한 감독데뷔의 소감을 밝혔다. 주인공 고진하 박사 역에는 정계진출로 영화계를 비웠던 이대엽 전의원이 16년만에 출연,육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백두산을 한달음에 오르는 등 열연을 보여 영화의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광복 50주년을 맞는 내년 2월께 개봉될 예정이다.
  • 아동문학/최인학(연변조선족 1백년:8)

    ◎“어린이가 희망” 일제때 창작 활발/탄압 피해 최서해·윤동주·윤극영 등 간도서 활약/해방후 「어린이신문」 발간… 80년대 중편 소년소설 등장 창작활동이 한반도보다 비교적 자유스러웠던 1930년대의 간도는 작가들의 활동무대였고 은신처였다.아동문학도 예외는 아니다.암흑기를 방불케 하는 그 시대를 살았던 아동문학가들은 다음 세대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러한 절박한 심정으로 동화 동시를 써 왔다.30년대 초창기 문학가중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작가들이 간도에서 아동문학으로 활동해 온 사실을 알 수 있다. ○농사짓다 문학생활 최서해는 1915년에 북간도 백하지구에 건너와서 농사를 짓다가 쪼들린 생활을 이기지 못해 7년간이나 유랑생활을 했다.그러다 1924년에 서울로 향했다.윤극영은 1926년 용정에 와서 동흥중학교 음악교사로 있었다.그 후 일본,하얼빈 등지로 다니며 음악을 전공하며 가무단을 이끌기도 하다가 용정에서 광복을 맞이했다.김예삼은 1935년 흑룡강성 목릉현 흥원에 이주하여 교편을 잡았으며,채택룡은 1938년연길현 명륜학교로 와서 교편을 잡다가 광복을 맞았다.그리고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명동에서 출생하여 평양숭실학교를 다니다가 36년에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에 편입했다. 이 밖에도 간도에서 이 무렵 활동하던 아동문학가로서 윤해영 안수길 함형수 이호남 천청송 염호열 김연호 박화목 한해수 등을 꼽을 수 있다.중국 조선족의 아동문학은 이들 작가군에 의해 형성되었고 1936년 창간된 「가톨릭 소년」은 작품의 발표원이 되었다.당시의 상황은 조국을 빼앗긴 설움은 문학적 공감대를 형성했다.그리고 항일운동과 독립전쟁을 몸소 경험하는 현장이었기에 아동문학의 저변도 이러한 경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의 생활상 표현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이곳까지 물밀듯 엄습했다.작가들은 붓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이 무렵 윤동주는 참혹한 당시의 생활상을 동시로 표현했다.그의 초기 작품중 한편을 감상해보자.「굴뚝」이라는 동시다.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몽기몽기 웨인 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게지 총각애들이/깜박깜박 검은눈이 모여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옛이야기 한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1940년대에 와서는 윤동주에 이어 이호남 천청송 함형수 등이 계속 동요와 동시를 썼다.그러나 검열제도가 심해지자 전처럼 노골적인 항일의지 표현의 길은 막혀버렸다.다만 상징적으로 모호한 표현을 써가며 새경지를 개척해 갈 수밖에 없었다.이러한 와중에서도 항일유격대 안에서는 전투성이 강하고 선동성이 짙은 아동문학이 생성되었다.항일가요로는 「혁명군이 왔고나」「아동단가」「어디까지 왔나」등이 있으며 아동극으로는 「유언을 받들고」「아버지는 이겼다」등이 있다.이들 선동성이 강한 작품을 통해서 미래의 혁명투사를 만들고자 했던 의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일제의 탄압이 끈질겼으나 작가들이 붓을 꺾지 아니한 보람이 있어서 중국조선족 아동문학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1945년 광복을 맞아 아동문학은 활기를 찾게 된다.연변에서는 주로 채택룡 염호열 이호남 김순기 최형동 등이 활동을 했으며 「연변일보」「길동일보」「동북조선족인민보」「불꽃」등 신문과 잡지에 발표를 했다.목단강 일대에서는 주로 김예산이 발표를 많이 했는데 1949년에는 「건설」이라는 잡지를 편집하여 작품을 게재도 했다.하얼빈일대에서는 김태희 임효원 등이 「인민신보」를 내면서 작품을 게재했다.특히 임효원은 1947년 「어린이신문」을 발간하기도 했다. ○70년대 30여명 활동 그 후 문화대혁명의 혼란기를 거쳐 1970년대부터는 새로운 국가건설이라는 목표아래 중국조선족도 새로운 문단조직으로 가다듬었다.그 결과 아동 문학작가는 거의 30여명에 달했다.발표지도 늘어나 「소년아동」「중국조선족소년보」「별나라」「꽃동산」등이 속속 발행하기에 이른다.그러나 이처럼 많은 작가와 발표지를 가지면서도 아동문학의 문학성 부진을 면치 못했으니 이는 자아확립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던 까닭이다.그러므로 1980년대는 모두가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아동문학의 나아갈 길이 무엇인가 깊이 반성하기에 이른다.즉 과거처럼 틀에 박힌 작품활동,교시적이고 피상적인 주제보다는현실적이고 자아개발이라는 나를 발견하는 새로운 질서에 대하여 재고해 가는 과정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난날의 계급투쟁을 기본으로 하는 인위적인 갈등을 설정하여 정치적 교훈을 주는 목적으로 하던 창작정신은 이제 지양되어야 한다.이러한 반성문학운동을 업고 궤도수정을 한 것이 다름아닌 중편 소년소설의 등장이다.과거 동시나 동요 위주였던 아동문학이 중편소설의 등장으로 새국면을 맞는다.이처럼 중편소년소설이 등장하자 최소한 아이들의 성격 묘사가 가능해졌다.진정한 의미의 문학성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 서일병,17발 난사… 사대 곳곳 핏자국/「총기난사」 현장조사 주변

    ◎범인 형도 군복무중 자살 밝혀져 ○…1일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덕도리 육군 기계화사단내 사격장에서 실시된 총기난사 현장조사는 국회 국방위소속 민주당의원들이 사고원인과 대책을 묻고 군관계자들이 답변한후 현장검증을 하는 식으로 약 1시간40분가량 차분하게 진행. 이날 현장조사에는 정대철·임복진의원등 국회 국방위 민주당소속 의원 5명이 참석했으며 군에서는 26사단 박노숙사단장등 20여명이 배석. ○…사건 현장에는 사고 발생 이틀이 됐으나 여기 저기 핏자국이 선명해 당시의 참상을 짐작케 했다. 사대 앞 간이 탄약대를 중심으로 5m 반경내에는 숨진 중대장 김수영대위와 소대장 황재호중위 등 사상자와 자살한 서문석일병이 흘린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부하 사병의 총격으로 숨진 김대위는 외동아들 방환군의 돌잔치를 하루 앞두고 참변을 당해 주위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특히 김대위는 사고 5일전 장교의 최고 영예인 「강재구소령상」을 수상했으며 평소 모범적인 군생활로 상사와 부하들로부터 촉망받는 장교였다.김대위와 같은 대대에서 복무하다 지난 3월 제대해 TV를 통해 사망소식을 듣고 이날 김대위의 시신이 안치된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덕계리 국군덕정병원에 조문온 김태환씨(26)은 『대대에서 후배를 가장 아끼는 장교로 소문나 있었으며 인내심이 부족한 사병들에게 몸소 군인정신을 실천한 군인의 표상이었다』며 울먹거렸다. ○…서일병이 자신이 지니고 있던 자동소총으로 자살했다는 군 발표와 관련,K­2 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으나 일선 군관계자들은 K­2소총이 한국인 체형에 맞게 개발된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자살할 수 있다고 해명. K­2 소총은 총구에서 개머리판까지의 전장이 98㎝에 이르나 개머리판을 접고나면 총구에서 방아쇠까지의 길이가 60여㎝에 불과하다는 것. ○…서일병이 난사한 총탄은 모두 17발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군 관계자는 『서일병이 소대장 2명에게 발사하자 사병들이 모두 엎드렸으나 서일병과 16m간격을 두고 사로에 서있던 김대위가 몸을 피하지 않은 채 서일병을 바라보다가 조준사격을 당해 후송도중 숨졌다』고 말했다. ○…서일병의 친형인 광석씨도 91년 군복무중 자살한 것으로 군 조사결과 밝혀졌다.부대 관계자에 따르면 서일병의 둘째 형인 광석씨는 91년 3월 21일 ○○사단에서 사병으로 복무하던 중 신체 허약 및 유격훈련을 앞둔 두려움에 청산가리를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사건으로 숨진 김대위와 황중위의 영결식은 2일 이들의 사체가 안치돼 있는 국군 덕정병원에서 여단장 주관으로 치러질 예정.
  • 특별기 타고 급행…“폐암 중증” 관측/오진우,왜 갑자기 파리 갔나

    ◎주치의등만 수행… 정치목적 없는듯/의료수준·인도적 정책 고려 불 선택 북한의 권력서열 2위인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폐암치료를 위해 프랑스를 방문한 것은 입국 신청 4일만에 급작스럽게 이뤄졌다. 한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측은 지난 20일 북경주재 프랑스대사관에 오진우부장의 입국 비자를 신청했다는 것이다.프랑스정부는 정식 외교관계가 없는 북한 「거물」의 입국 여부를 놓고 고민하다 이틀 뒤인 지난 22일 알렝 쥐페 외무장관의 승인을 받아 입국을 허락한 것으로 알려진다. 오진우부장은 비자를 받은지 이틀 뒤인 24일 서둘러 평양을 출발했다.그의 비자발급을 위한 입국 목적도 「폐암 치료」라고 돼 있을뿐 아직은 그가 중병을 앓고 있는지 단순한 검진차원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미수교국간의 영공통과 문제로 특별기보다는 민간항공기를 이용해 달라는 프랑스정부의 의사전달에도 굳이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는 특별기를 타고온 점등을 보면 그의 폐암이 중증일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오진우부장을 수행한 인물은 주치의2명,간호요원 2명,경호원 1명,통역 1명인 것으로 전해졌다.때문에 그의 프랑스 방문에 신병치료 이외의 망명등 정치적 목적은 없는 것으로 소식통들은 전하고 있다. 그가 입원한 것으로 알려진 파리 시내 라에넥병원은 파리의 6대 종합병원의 하나로 호흡기전문 병원이다.그러나 26일 현재 그의 병원입원 기록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가명으로 입원한 것으로 보인다. 오진우부장이 중국 등 수교국을 두고도 프랑스를 택한 것은 프랑스의 발달된 의료기술,프랑스와의 관계및 프랑스의 인도주의적 정책 때문인 것으로 관측된다.프랑스는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회당 정권의 출범으로 서방국가 가운데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84년 12월에는 통상대표부에서 일반대표부로 승격됐다.평양의 양각도호텔도 프랑스 기업이 투자한 적이 있다. 프랑스의 의료기술은 에이즈 백신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등 세계적 수준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또 고 김일성주석의 심장박동기도 프랑스 의료진이 방북해 달았을 만큼 북한에는 프랑스 의료기술이 친숙한 점도 고려된듯하다. 또 프랑스가 미수교국의 지도층이 치료나 검진을 희망하는 때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허락해준 전례들도 오진우부장의 프랑스행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관측통들은 보고 있다.프랑스는 지난 85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제2인자의 치료를 받도록 했으며 지난 5월에는 리비아의 외무장관이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대통령의 취임식 참석을 위해 파리를 경유하는 과정에 건강진단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한 적이 있다. ◎오진우의 전력과 최근 행보/항일유격대출신 혁명 1세대… 77세로 거동 불편/군 좌지우지… 김정일과 권력투쟁설 올해로 만 77세인 북한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는 최근 그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육안으로도 확인이 될 정도로 노쇠현상이 뚜렷했다.가장 최근에 그가 공식석상에 나타난 것은 지난 16일 김일성사망 1백일 추모회였는데 이때 다리를 저는등 거동이 몹시 불편한 모습으로 북한 TV에 비쳐졌다. 그는 김정일에 이어 권력서열 제2인자 자리를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7월8일 김일성사망 이후 몇몇 주요 행사에 나타나지 않아 김정일과의 불화설등 그의 신변을 둘러싸고 이상이 있다는 추측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즉,7월20일 중앙추도대회 후 첫 중요행사인 「7·27 전승기념일」 행사에 군원로이며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그가 당연히 참석해야 했으나 불참했고,이어 9·9절(정권수립기념일)행사,10월11일의 단군릉 개건 준공식등 비중있는 행사에 잇달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다만 지난달 20일 추석을 맞아 「혁명열사릉」에 헌화한 뒤 다음날인 21일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사망 45주 추모회에 참석했고 또 하루 뒤인 22일 김정숙동상에 헌화한 사실이 전해졌다.생전에 두터운 교분을 유지해 왔던 김일성부부,혁명열사 추모행사에만 참석했을 뿐이다. 폐암이라는 오의 병력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지금까지 파악된 것으로는 86년 9월께 음주운전 사고를 내 의식불명의 중태에까지 빠졌었다는 것이 전부일 정도이다.당시 오는 한 연회에 참석한 뒤 만취된 채로 차를 몰고가다 평양시내 전승기념관의 가로수를 들이받아 9개월가량 고위 당정간부 전용병원인 「봉화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이때 김정일이 헬리콥터까지 동원,긴급 후송을 하도록 지시하고 치료에도 세심한 배려를 해 준 것이 계기가 돼 김정일에 호감을 갖게 됐다는 후문이다.그의 출생연도가 김일성보다 불과 5년 아래인 1917년생인 것으로 알려져 폐암이 아니더라도 노환을 피할 수 없는 나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김일성의 항일유격대원 출신으로 혁명 1세대를 대표하고있는 그는 김일성과함께 오늘의 북한 체제를 구축한 주역의 한사람이다.함남 북청출신인 오는 김일성과 김정일로 이어지는 북한 권력 구조에서 언제나 2인자로 군림함으로써 그의 거취에 관심이 집중됐다.옛 소련보병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학을 수료한 뒤 항일유격대에 가담한 오는 45년 10월 인민군 최고사령부 호위국장에 취임하면서 북한 군부의 핵심라인에 올랐다.이어 60년 8월 1집단군 군사령관을 거쳐 당정치위 후보위원이 됐으며 마침내 76년 5월 인민무력부장에 취임,군부를 장악했다.92년 4월에는 원수에,93년 4월에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올라 실질적인 3인자 지위에 있다가 김일성이 죽자 권력서열 2위로 뛰어올랐다.최근에는 그의 「거세설」·「연금설」과 함께 아들의 중국탈출설도 나왔었다. ◎“오진우란 환자없다” 입원 부인/파리병원 주변 스케치 ○…파리시내 비노가에 있는 북한 일반대표부는 오진우 부장의 방문에도 불구,겉으로는 조용한 분위기. 북한측 한 관계자는 기자가 전화를 걸어 오부장이 대표부내에 있는지 등을 묻자 『그런 일 없다』고 잡아떼면서 『왜 그리 관심이 많으냐』고 딱딱한 반응. 북측은 한달여전부터 폐암치료병원을 물색해 왔으며 암치료약을 상당분량 구입해 평양으로 수송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오늘중 검진 받을것” ○…오부장은 입원할 병원이 워낙 취재진에게 노출돼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거소에서 의사왕진을 통해 진료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라에네크병원측은 많은 취재진이 몰리자 『오늘 이 시간 현재 「오진우」라는 환자는 병원에 없다』며 『그러나 앞으로 어찌될지는 모르겠다』고 발표. ○노출우려 왕진 가능성 ○…프랑스 내무부는 26일 상오 오부장이 이날 중 라에테크병원의 검진을 받을 예정이라고 발표. 외무부는 검진결과에 따라 입원,수술,귀국등이 결정될 것이라고 설명. ○외교소식통,망명 일축 ○…한 외교소식통은 오부장이 망명할 가능성에 대해 『프랑스정부는 인권탄압등의 경우에 한해 망명을 허용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며 일축. 이 소식통은 『오부장의 프랑스방문이 핵문제합의문 채택에 이어 남북대화등 관계진전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
  • 신세대들에 혁명의식 교육 강화(북한 이모저모)

    ○계급교양 사업 실시 ○…북한은 최근 새 세대들의 혁명성 약화를 우려,이들에 대한 「계급교양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고. 당 기관지 노동신문 최근호가 보도한데 따르면 북한은 최근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감안,청소년·학생들이 지주·자본가와 미·일 제국주의자들을 증오하는 계급의식을 높이기 위한 「계급교양 사업」을 다양한 방법으로 실시하고 있다는 것. 북한이 새 세대들을 집단적으로 참관시켜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계급교양실」에는 「착취받고 압박받던 지난 날을 잊지 말자」는 구호아래 지주·자본가의 「악랄성」을 부각하는 사진과 그림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베틀·물레·다듬이방망이 등을 진열,사회주의「우월성」을 선전하고 있는 것으로 이 신문은 보도. 또 과거에 소작인이었거나 머슴살이를 했던 노인을 동원,이야기모임을 갖고 있으며 해설강사를 통해 교육을 시킨후 조직이나 단체별로 학습토론,감상발표모임,실효투쟁을 벌이도록 하고 있다는 것. 북한은 「계급교양 사업」을 통해 새 세대들의 혁명의식을 고취시키고 「북한식 사회주의」를 고수해 나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김정일,신조어 양산 ○…북한에서 선전선동 구호나 일상용어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주체성」「수령관」「우리식」「항일유격대식 사업방법」「혁명영화」등 신조어는 모두 김정일이 만든 것이라고 계간 언어잡지 「문화어학습」 최근호가 보도. 「문화어학습」은 김정일이 『주체시대의 요구를 반영하여 새 말을 많이 창조했다』면서 이같은 낱말들을 예시. ○가공식품 생산 박차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은 최근 식량확보를 위해 양곡의 출미율을 높이는 한편 주식대용의 가공식품 생산에 주력. 북한 정부기관지 민주조선 최근호에 따르면 북한 정무원산하 양정부에서는 한 행정단위로 하여금 특정제품에 대해 「모범」을 창조토록 하고 이를 일반화하는 방법으로 주식대용 가공식품들을 생산하는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는 것. 이에 따라 평성시는 옥쌀 가공공정을,삼천군은 옥수수쌀 가공공정을,황주군과 북창군은 벼정미공정을,평양시는 국수 가공공정과 쌀밥 가공공정을 각각 「시범창조대상」으로 설정,이에 대한 「모범」을 창조하고 있다고.
  • 「가짜 투성이」 사회(최두삼 귀국 리포트:5)

    ◎“경찰복 입은 사람 3분의 2는 가짜”/마오타이 술 절반·웅담 사향은 99.9% 위조품 중국에는 요즘 가짜들이 너무 많다.가짜 술,가짜 약에서부터 가짜 경찰,가짜 군인까지 있다.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으로 어느 정도 자유가 주어지고 사유재산이 인정되면서부터 생겨난 독버섯들이다.그 이전 장춘교 강청등 이른바 4인방이 지배하던 70년대 중반까지의 강경좌파시절에는 감히 엄두도 내기 어려웠던 일들이다. 가짜중에 으뜸은 아마도 중국의 모조골동품들이 아닌가 생각된다.진짜를 뺨칠 정도로 구분하기 어려운 모조품들이 골동상가를 뒤덮고 있다.웬만한 물건들은 자기네들도 모조품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은채 팔고 있으나 문제는 진짜라고 팔고 있는 것들중 상당부분이 가짜라는 사실이다. 이같은 골동품 상가에 최근들어 한국인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뉴욕 경매장에서 조선조 때의 접시 하나가 3백만달러에 경매되고 춘추전국시대의 한 골동품이 한국에서 1억달러에 호가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가면서부터 조용히 골동품 붐이 일고 있는 것이다.특히 북경시내의 찐쑹이라는 뒷골목에는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골동품거래를 위한 대규모 장이 선다.여기에는 일반 민가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꽃병이나 그림등의 가보에서부터 갖가지 골동품들이 수없이 쏟아져나오지만 매우 희귀한 진짜골동품을 구하기란 쉽지않다. 이 골동품시장을 둘러보고나면 중국인들의 모방술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골동품 항아리로부터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병마용에 이르기까지 모조품이 진짜를 뺨칠 정도로 정교하다. 그런가하면 어떤 술이나 약이 명성을 날리게 되면 대체로 모조품이 생겨난다.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술인 마오타이(모대주)는 시중판매량의 거의 절반이 가짜라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을 정도이다.획기적인 암치료제가 개발됐다는 소문이 나돌면 대량생산체제를 갖추기도 전에 가짜가 먼저 시판에 들어가기까지 한다.중국에서 웅담이나 사향을 사봐야 99.9%가 가짜다.그렇다고 모든 약이 가짜가 아닌가 의심할 필요는 없다.사기꾼들이 싸구려 약까지 모방해서 제조하려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건만 가짜 모조품이 있는게 아니다.중국에서는 그래도 대단한 권세를 휘두르는 경찰에 가짜가 많다.한 중국신문 보도에 따르면 하남성에서는 평소 경찰복을 입고다니는 사람중 3분의 2가 가짜라고 하며 협서성의 한 조그마한 현에서는 경찰이 2백명인데 경찰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2천명이나 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같이 가짜경찰이 많은 것은 경찰복이나 경찰표지등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이들중 상당수는 그저 멋으로 경찰복을 입기도 하지만 실제로 경찰행세를 하면서 갖가지 편의를 제공받거나 심지어 범죄까지 저지르고 있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복건성의 한 현법원 직원 4명은 암달러상을 덮쳐 10만여원(원·약 1천만원)을 강탈해 갔는데 『당신들은 법복이 있는데 하필이면 왜 경찰복을 입고 그따위 짓을 했느냐』는 물음에 『경찰복이 법복보다 권위가 더 있어서』라고 대답했다. 가짜경찰이 횡행하면서 일부 지방에서는「벌금유격대」까지 생겨났다.이들은 큰길가에서 3∼4명씩 조를 이뤄 적재량이 초과됐다거나 정비불량등 갖가지 이유로 벌금을 거둬들이는데,운전기사들이 뭔가 질문만 던져도 「불손하다」며 몇백원(원)짜리 「태도벌금」을 매겨 저항을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흑룡강성의 한 현에서는 건설국직원들에게 복리를 돕는다는 이유로 경찰복 한벌씩을 내주기도 했다.그래서 이곳 직원들은 경찰복을 입고 다니며 톡톡히 재미를 봤다.시장이나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때 우대가격으로 할인해주는 것은 물론 큰길을 가다가 손을 한번 들기만해도 달리던 승용차가 급정거를 했다.영화관이나 체육관에 들어가도 표를 보자는 사람도 없었다. 최근에는 신문에서 사회부조리문제를 조금씩 다루기 시작한 때문인지 가짜기자들도 생겨나고 가짜군인에 가짜 군용차량들도 많아져 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다.중국에는 민간차량과 군용간에 구별이 잘 안되는 경우가 많아서 군용차량번호판만 달고 다니면 연간 1만원(원·약 1백만원)정도의 도로세와 통행료를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달의 독입운동가 양세봉장군/압록강 순시한 사이토총독 저격

    ◎조선혁명군 이끌고 만주서 항일투쟁/일군과 2백차례 혈전… 밀정에 살해돼 『나를 따라 생명을 각오하는 동지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조국광복군과 동만백만동포의 생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우리는…』 1932년 조선혁명군사령관 벽해 양세봉장군(1896년6월5일∼1934년8월12일)이 만주 흥경현에서 일제 관동군과 대회전을 갖기에 앞서 동료 독립운동가들에게 행한 연설의 일부다. 양장군은 이 전투를 포함,일제와 밀정들에게 붙잡혀 순국한 34년까지 2백여차례이상 혈전을 치른 신화적인 무장항일투사였다. 선생은 30년대 만주지역에서 활약한 최후의 독립군 명장으로 항일독립운동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선생이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26세때인 22년부터.이전에도 3·1만세 시위운동을 펼치는등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이즈음부터 무장독립운동가로 본격 활약하게 된다.선생은 의주·삭주 경계의 천마산을 근거지로 해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무장단체 천마산대(대장 최시흥)에 가입,창성군 대유동 경찰서와 금광사무소·영림창을 습격하고군수물자를 빼앗는등 기염을 토했다. 5백여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천마산대는 유격전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일제에 위협을 가하던 단체였다. 선생은 천마산대가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로 활동불가능 상태에 빠지자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해 구성한 대한통의부등에서 의용군으로 활약했다. 대한통의부 의용군이 발전해 참의부가 결성되자 제3소대장에 임명된 선생은 24년5월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평북 초산군·강계군에서 일경과 교전해 수명을 사살했으며 압록강을 순시하던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재등실)일행에 총격을 퍼부어 일제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선생은 일제의 배후조종을 받은 마적단의 습격으로 통의부 신팔균총사령이 전사한뒤 통의부·대한군정서·의성단등이 정의부로 확대통합되자 정의부 의용군 중대장에 임명돼 일경·친일분자의 처단에 앞장섰다. 정의부는 김동삼선생을 의장으로 지역군사·재정·행정·교육·사법등 모든 부문을 국가체제에 맞춰 틀을 짰다. 선생은 이어 만주지역에서 벌어진 좌우합작운동의 영향으로 정의부를주축으로 여러 독립운동단체들과 연합해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결성,이 동맹이 다시 조선혁명당으로 발전하자 소속 부대인 조선혁명군 부사령의 중책을 맡게 된다. 조선혁명군은 30년대 적기관을 습격하고 밀정을 처단하는 한편 대중조직및 거점확보를 위해 특수공작원을 국내로 특파하는등 독립운동사에 맹활약을 펼친 것으로 기록돼있다. 선생은 31년 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한·중 공동대응을 위해 중국인 실력자 왕동헌의 요령 농민자위군과 협의해 연합부대를 편성했다. 이런 가운데 32년 조선혁명당은 비밀간부회의를 열었으나 정보를 입수한 일경의 급습으로 간부 83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선생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혁명당의 총사령에 취임하는 동시에 혁명투사 양성을 위해 조선혁명당이 설립한 속성사관학교 명예교장에 추대된다. 선생은 또 중국 의용군 총사령 이춘윤과 요령 민중자위군 결성 협정을 체결,일제와 2백여차례에 걸쳐 혈전을 치렀다.32년3월 신빈현 남쪽에서 벌어진 일제 관동군과의 접전에서선생의 부대는 일군의 주둔지를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달 하순 일제가 폭격기까지 동원해 반격전을 펼치자 선생은 한중연합군 1만여명을 투입,치열한 전투 끝에 일제를 물리치는 억센 투혼을 발휘하기도 했다. 한중연합군은 그러나 관동군이 두달후 세력을 재결집,대대적인 공세를 가해옴에 따라 10월까지 5개월동안 여러차례 전투를 치렀으나 일제 공군력에 밀려 주공격력을 잃게 된다. 선생은 이에 따라 다음해인 34년1월 조선혁명군 재건을 위해 총사령에 취임,같은해 5월 황해도 사리원경찰서를 습격하는등 유격전에 나선다. 조선혁명군은 이어 장개석의 국민군에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흥경현 진주령에서 일본군 병력수송기차를 습격,수십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대포등을 노획하기도 했다.또 1개 대대병력으로 기습해온 일군을 물리치고 오히려 추격전을 펼쳐 일군 80여명을 사살한다. 선생은 그러나 34년 평소 혁명군을 지원해온 중국인을 만나기 위해 환인현 소광구 골짜기로 나갔다가 일제 밀정등의 총격을 받고 장렬하게 순국한다.이 중국인은일제 밀정의 꾐에 빠져 변절하고 선생을 인적드문 골짜기로 유인한 것이었다. 일제는 후에 선생의 묘를 파헤치고 시신에세 목을 떼어 가져가는 만행을 저지르는등 잔악상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조선혁명군은 선생의 순국이후 급격히 세력이 위축돼 소규모 유격전으로 독립군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그쳤다. 선생은 동지는 물론 주민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은 명장이었으며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김좌진·홍범도등과 함께 3명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고침◁ 7월의 독립운동가 이준열사는 1859년1월12일 출생,1907년7월14일 순국했기에 바로 잡습니다.
  • 북한 주체예술/세습 정당화 도구로 이용

    ◎60년대 김정일이 사회주의리얼리즘에 속도전 이론 접목/혁명가극­집단창작 통해 김일성 신격화/김정일 직접지도… 후계자능력 인정받아 김정일은 지난 60년대 후반부터 김일성 주체사상을 선전·선동하는 방편으로서 북한의 문예활동을 선도해 왔다. 73년 9월 북한의 당 중앙위원회 제5기 7차 전원회의에서 조직 및 선전·선동 담당 비서로 선출되면서 그는 김일성의 후계자로 부각됐으나 이미 67년 당 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각종 문화분야에서 이른바 「지도」를 본격화했다. 특히 김정일은 김일성이 내세우는 마르크스·레닌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예관을 북한 특유의 주체문예관으로 변경시켜 김일성의 신격화운동을 직접주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먼저 연극분야에서 1970년대초 김정일은 『연극혁명을 일으켜 낡은 연극에 종지부를 찍고 혁명연극의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혁명가극의 시대를 개척했다. 항일 유격대원의 이야기를 다룬 가극 「피바다」를 71년 초연하기위해 김정일의 지도가 있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빨치산 출신의 당시 북한 권력층 원로들이 이 「피바다」 공연을 보고 김정일의 능력을 크게 평가,후계자로 정하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김일성 신격화 작업의 상징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정일은 1980년 혁명연극 「혈분만국회」를 직접 제작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미술 부문은 1970년대에 김정일의 지도에 따라 주체미술의 대전성기를 맞았다고 북한은 선전해 왔다. 그때까지 역사적 사실 속의 한 인물로 형상화되던 김일성이 70년대 북한의 회화에서는 현실적이며 인민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또 혁명적 기념비 미술은 거의 김정일의 업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조선 노동당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1975년부터 5년에 걸쳐 만들어진 「왕재산대기념비」의 경우 김정일이 비행기까지 동원하는 관심 속에 진행되었다. 70년대의 「평양 지하철 벽화」,「삼지연 대기념비」등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주체사상탑」,「개선문」등 80년대의 혁명적 기념비 미술로 이어진다. 음악의경우 혁명가극 「피바다」가 혁명의 무기로 생산 현장에서 공연됐다. 김정일의 음악관이 비교적 늦게 정립된 탓인지 87년 「행복의 노래」와 88∼89년 평양예술단이 창조한 민족가극 「춘향전」등이 김정일의 지도에 따라 무대공연 형식으로 발표됐다. 김은 오케스트라연주중 연주자의 반음 착오까지 지적할 정도로 조예가 깊다. 김정일은 또 4.15창작단,왕재산창작단,백두산창작단등을 만들어 문학분야에 집단창작제를 제도화시켜 「조선의 별」등의 대하소설을 기획하게 했다. 그는 『우리가 건설해야할 새로운 혁명문학은 명실공히 수령을 형상화한 문학을 말한다』고 역설했다. 무용에서도 「피바다식 가극무용」이 보통명사로 사용될 만큼 가극 「피바다」에서 구사된 수법이 정형으로 자리잡았다. 북한에서 4대 명무용의 하나로 꼽는 「키춤」은 원래 「피바다」의 3장 2경에서 물방아간 가무로 나오는 것을 떼어 내 72년에 군무로 개작한 작품이다. 이처럼 북한의 각종 예술활동을 지도해온 김정일은 특히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입각한 속도전이론등을 가미한 새로운 문예이론을 만들어 부자 세습에 대비한 신격화운동에 문화 예술을 적극 활용했다.
  • 「김정일 전처오빠」 서울 산다/분단 비극 또한명의 희생자 성일기씨

    ◎“배우출신 동생 성격차로 결혼 실패”/월북한 가족 생전에 만나보는게 꿈” 김일성의 사망으로 북한의 최고 권좌에 오를 것이 확실시되는 김정일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성혜임씨(57)의 친오빠 일기씨(62)가 서울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다. 은평구 갈현 1동에 살고 있는 성씨는 10일 자택으로 찾아간 기자에게 『우리 가족의 비극적인 역사는 이제 그만 땅속에 묻혀져야 한다.가족의 비극적 역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않다』며 사진 촬영을 극구 사양했다. 그는 동생 혜임씨가 김정일의 첫 부인이었다는 사실을 6년전 당국과 다른 경로를 통해 들었다고 소개했다.뛰어난 미모의 영화배우 출신인 그녀는 첫 결혼에 실패한 뒤 67년 당시 30세의 나이로 5살 연하였던 김정일과 결혼,71년 첫아들인 정남군을 낳았다. 그녀는 그러나 김정일과의 성격차이로 또다시 원만한 결혼생활에는 실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씨는 동생이 김정일과 결혼한 배경에 대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동생이 북에서 영화배우를 했기 때문에 예술분야에 관심이 많은 김정일과 연이 닿게 됐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고 말했다. 성씨 가족의 비극은 일기씨의 아버지 유경씨가 48년 일기씨만 서울에 남긴 채 어머니 김원주씨와 세 딸(혜랑,혜임,화자)을 데리고 월북하면서 시작됐다. 아버지 유경씨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30년대 중반부터 서울에서 남로당 고위 조직원으로 활동하다 월북,노동당 고위직을 지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기씨도 가족들이 월북한 직후인 49년 북으로 가 유격대원 교육을 받은뒤 6·25에 참전,경남·북 일대에서 빨치산 활동을 3년 넘게 벌이다 53년 12월 당국에 체포됐으나 김창용 당시 특무대장의 「배려」로 옥고를 치르지 않고 풀려났다. 성씨는 『우리 가족이야말로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장 뼈저리게 겪었다』면서 『아직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죽기전에 한번 만나보았으면 하는게 마지막 소망』이라고 밝혔다.
  • 비정한 권력투쟁가… 유례없는 반세기 독재/김일성 82년의 인생역정

    ◎유년 평양·만주 전전… 20세에 빨치산 활동/해방후 구소점령군 배경업고 권력장악/도전세력 가치없이 제거… 1인체제 구축/민족통일 빙자 6·25남침… 「전범」 낙인/67년 주체사상 만들어 사회주의 통치도구로 활용하기도 김일성.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집권을 누린 독재자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난 45년 소련군을 등에 업고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땅의 통치자가 된 뒤 거의 반세기동안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러왔다.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과 당총비서라는 사회주의 체제 특유의 어마어마한 권력집중적 직책도 모자라 북한주민들에게 「위대한 수령」,「민족의 태양」으로 부르기를 강요한 전제군주적 독재자였다. 김은 어찌보면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전지전능하고 무오류의 존재로 인식되도록 주민들을 세뇌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먹을 것이 모자라 하루 두끼 먹기운동을 벌이면서도 철저한 사상무장과 외부 정보통제로 주민들로 하여금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믿도록 만드는능력을 갖춘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은 1912년 4월15일 평양의 한 농가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을 부모로 하여 철주와 영주를 동생으로 둔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본명은 성주였으나 만주에서 빨치산활동을 할 때 일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상화과정에서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엄청나게 날조되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그의 출생지가 평남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에 있는 외가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을 거쳐 다시 일성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공식」생가는 평양 대동강변 언덕에 자리잡은 지금의 만경대이며 이른바 「혁명의 요람」으로 북한의 모든 주민들에게는 참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김은 어린 시절 한때 외할아버지가 개신교 장로를 지내는 등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외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강반석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그는 만경대에서 짧은 유년시절을 보낸 뒤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그후 김은 만주의 중국계 소학교인 모예산소학교,팔도구소학교와 평양근교 외가인 칠골에 있는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던 창덕학교 등을 전전하며 파란많은 소년기를 보내다 26년 역시 중국계인 무송소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32년 유격대활동에 적극 가담하기까지의 기간은 뚜렷한 활동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다만 북한에서 나온 그의 전기들은 이 기간중 장춘과 길림 사이에 있는 가륜에서 한인농민들에게 사상교화작업을 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32년 중순부터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항일 빨치산집단에 참여한다.이때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김의 항일투쟁경력은 그가 북한정권을 장악한뒤 유일체제를 강화하면서 그에 대한 우상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과장·미화되었다.북한의 선전용 김일성 전기들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32년 그가 조선공산당을 창설했다고 하지만 당시 불과 19세였던 그는 당시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양세봉이라는 한인이 이끄는 유격조직에 들어감으로써 항일빨치산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후 그는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사병으로 들어가 활동하다 우수한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대대장급으로 승진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 유격활동을 벌이던 김은 37년 유격대원 2백명을 이끌고 국경 마을인 함남 보천보를 습격했다.일본경찰지서와 우체국 등을 방화하고 추격해오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일경 7명을 살해한 이른바 「보천보전투」를 벌여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김은 이 전투가 자신이 참여한 빨치산 전투중 가장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랑하며 보천보에 자신의 동상과 혁명박물관까지 세우고 북한 주민들에개 참관을 강요했다.하지만 보천보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내는 학자들도 있다.즉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그해 11월 죽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사람이 소련으로 도피한 뒤 그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보천보사건 이후 일본이 중국 본토 침략의 전초전으로 만주의 빨친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에나서는 바람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때문에 김도 41년 8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 피신해야 했다. 소련은 이 무렵 만주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중국인과 한인유격대원들을 모아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등지에 「88독립저격여단」이라는 부대를 창설했다.김도 김책,최용건,이동화 등 빨치산 동료들과 함께 이 부대에 들어가 43년에는 대위급으로 진급한다. 김은 여기서 만주에서 함께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김정숙과 결혼했다.그녀는 16세 때인 35년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에 가담해 주방일 등 잡일을 보았던 여자였다. 김은 42년 그녀와의 사이에 첫아들인 정일(소련명 유라)을 낳았다.하지만 그녀는 49년 평양에서 사산아를 낳다가 사망했다. 해방과 함께 무명의 소련군 장교로 평양에 입성한 그는 이후 소련의 절대적 후원과 타고난 권모술수로 재빨리 권력을 장악한다.소련 점령군은 친소세력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의 필요성에 따라 자신들의 협조자들 가운데 하나를 북한지도자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김이 바로 그같은소련의 의도를 기민하게 포착한 것이다. 소련점령군이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지명하면서 정치지도자로서의 그의 기반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에서 4월까지 한달동안 자신을 도와준 소련에 감사를 표시하기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인 6월 24일 북로당과 남로당 중앙위원회연석회의를 열어 당 위원장자리를 차지했다.이 회의에서 당의 명칭도 북조선노동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 바꾸었다. 당과 정부기관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그는 자신에게 협력했던 인사도 자신에 도전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숙청 또는 암살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심지어 자신과 유격대활동을 함께했던 빨치산대원들까지 가차없이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박헌영,김두봉등과 같이 자신에게 협력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한국전쟁에 대한패전책임을 덮어씌우거나 종파주의를 부추키고 있다는등의 갖가지 죄목을 걸어 제거함으로써 결국 북한정권을 족벌체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소련의 힘을 빌려 48년 북한정권의 초대수상에,49년 조선노동당 초대위원장에 오른뒤 도전세력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기 시작했다.그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는 물론 현준혁 등 국내파,박헌영 등 남로당계,김두봉을 위시한 연안파,허가이 등 소련파를 차례로 숙청해 결국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김은 자신의 권좌가 어느 정도 다져진 50년 6월25일 한반도의 적화통일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침내 무력 남침을 감행한다. 그 자신이 식은죽먹기라고 여겼던 적화통일이 유엔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음에도 그는 전혀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김일성이 무력 적화통일이라는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였다.그는 신년사를 통해 『단합된 민주조선의 건설은 남한에 있는 반동적인 매국노들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군과 보안대를 강화시켜야한다』고 역설했다. 김일성은 모든 상황이 유리하다고 판단,밤도둑처럼 새벽야음을 틈타 남침을 했으나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국의용군이 자신을 도와주러 왔을때는 이미 전쟁이 자신의 관리능력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국제정세를 너무 단순하게 보았던 판단착오의 결과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실수로 엄청난 결과가 빚어지자 동료들을 숙청했다.그는 1950년 12월 21일 강계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그의 빨치산 동료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그 가운데서 김일,최광,임춘추,김열,무정등은 당에서 축출해버렸다. 김일성은 뒤이어 당의 재조직문제를 놓고 자신과 이견을 보인 소련파의 거두 허가이를 숙청했으며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들도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미국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했다는등의 죄목으로 체포해 사형에 처하는등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더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세력은 여지없이 제거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김일성은 50년대 중반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도전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 67년에 「주체사상」을 만들어 냈으며 72년에 와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에 통치이념으로 명문화시켜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체사상과 김일성에 대한 극단적인 우상화가 맞물리면서 북한정권이 안에서부터 서서히 허물어지는 요인이 됐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이 김일성에 대해 『가랑잎을 띄우고 대하를 건너가는 만고의 영웅이며 그가 한번 노려보기만 하면 원쑤도 가을 풀같이 쓰러진다』고 보도할 정도로 북한은 이후 유사종교집단적 사회구조를 띠면서 경직적인 김일성 1인체제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70년대 이후 김일성은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면서 철저한 폐쇄체제로 주민들을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 아들인 김정일에게로 후계세습작업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나름대로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72년 12월 비공개리에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거쳐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그도 소련의 스탈린 등의 전례를 보고 자신의 사후에 대해 대비를 시작한 것이다.다시 말해 스탈린 사망후 대대적인 격하운동에 충격을 받은 김이 사후 안전판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부자간 권력승계라는 희화적 구도를 상정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 이상으로 김정일에 대한 상징조작을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가면서 권력을 하나씩 아들에게 이양하기 시작했다.김정일에 대한 호칭을 「당중앙」에서부터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향도의 별」 등으로 격상시켜나가면서 노동당 조직비서(73년),노동당 정치 상무위원회 위원(80년),인민군 최고사령관(91년),국방위원장(93년) 등 핵심요직을 하나하나 물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우상화작업을 펴온 김일성도 끝내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한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그 자신도 70년대 이후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건강유지에 발버둥쳐온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김일성의 질환은 지난 73년께부터 확인된 뒷머리의 혹에서부터 고혈압·당뇨·난청·신경통·뇌일혈을 비롯해 그를 8일 새벽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간 심근경색 등 10여가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그는 분단 반세기만에 초유의 역사적 사건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사했다.그를 갑작스런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이 그의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상회담에 대한 준비과정에서의 과로 때문인지,아니면 경제난과 대외적 고립에 따른 누적된 스트레스 탓인지는 아무도 모른다.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한주민들에게 영생불사의 존재로 신격화된 그도 죽음 앞에 아무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철리를 그의 맹목적인 추종세력들에게 마침내 일께워 준것이다. 그의 공과는 후세의 사가가 엄정하게 평가해줄 것이다.그가 역사의 장에 어떻게 기록되든 과대망상에 빠진 권력의 화신이었다는 사실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미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연표◁ △1912.4.15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출생(본명은 김성주) △1923 만주 장백현 팔도구 소학교 졸업 △1926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재학중 공청 가입 △1930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개명 △1931 중국공산당 입당 △19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 △1935 김일성으로 재개명 △1936 조국광복회 조직 △1937.6 함남 보천보 습격 △1937.9 함남 증평리 습격 △1940말 소련으로 망명 △1945.8 소련군 소좌 △1945.9 소련점령군 비호하 입북 △1945.10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참석 △1945.10 「김일성장군」환영 평양시군중대회에 등장 △1945.1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1946.2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7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장단 의장 △1946.8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1947.2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8.8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8.9 수상(제1차 내각) △1949.3 경제문화 협정체결차 소련방문 △1949.6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0.6 군사위원회 위원장 △1950.7 인민군 최고사령관 △1953.2 원솔칭호 △1953.7 영웅칭호 △1956.4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7.9 수상(제2차 내각) △1957.11 당 및 정부 대표단장으로 소련 10월혁명 40주년 기념식 참석 △1959.1 소련 제21차 공산당대회 참석 △1959.9 중국 정권창건 10주년 기념식 참석 △1961.7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조약 체결차 소련 중국 방문 △1961.9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및 정치위원회 위원장 △1961.10 소련공산당 제22차대회 참석 △1962.10 수상(제3차 내각) △1966.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7.1 소련방문 △1967.12 수상(제4차 내각) △1970.11 노동당 총비서 겸 정치위원 △1972.12국가주석 △1972.12중앙인민위원회 위원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1975.4중국방문 △1975.5루마니아·알제리·모리타니·불가리아·유고 순방 △1977.11국방위원회 위원장 △1977.11인민군 최고사령관(원수) △1977.12 국가주석 △1980.5 유고 티토대통령 장례식 참석 및 루마니아 방문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총비서·군사위원장 △1982.4 국가주석 △1982.9 중국 방문 △1984.5 소련등 동구권 8개국(소련·폴란드·동독·체코·헝가리·유고·불가리아·루마니아)순방 △1986.10 소련 방문 △1986.12 국가주석 △1988.6 몽골 방문(중국·소련 경유) △1989.11 중국 방문 △1990.5 국가주석 △1991.10 중국 방문 △1992.4 대원솔 칭호 △1993.4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발표 △1994.4.8 사망
  • 북한전문가들이 말하는 의미와 전망(남북 정상회담)

    ◎분단·적대 50년… 「만남」 자체가 새역사/순조로운 진행땐 민족화해 향한 디딤돌/공산당 기본전략 고려 정치적이용 대비/북의 서울회담 확약않는 의미도 새겨야/대좌에만 집착땐 시간낭비 우려… 성급한 낙관은 경계해야 □좌담 참석자 이명영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용필 서울대 교수 박화진 서울신문 논설위원실장 남북한이 다음달 25일부터 3일동안 평양에서 김영삼대통령과 김일성주석의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함에 따라 국내외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전문가인 이명영성균관대명예교수와 이용필서울대교수,박화진서울신문논설위원실장의 좌담을 통해 정상회담의 의미와 전망을 짚어본다. ▲박화진실장=분단 50년만에 남북한 정상이 만난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특히 문민 대통령이 처음으로 평양땅을 밟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6·25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면 이번 정상회담은 가장 긍정적인 사건이 될 것으로 봅니다.대통령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북한동포들의 심정이 어떨는지도 매우 궁금한 대목입니다.김영삼대통령의 첫 방북이 남북화해와 공존공영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이명영교수=회담에 앞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북한 노동당의 기본원칙과 협상전술입니다.김일성주석은 공산당의 기본전술에다가 30년대 만주에서 익힌 중국공산당의 유격전 원칙에 따라 적진아퇴,적퇴아진을 철저히 구사하고 있습니다.지금은 특히 한국과 미국이 강력한 제재태세로 밀어 붙이니까(적진) 한걸음 물러서서 대화를 추구하는(아퇴)국면으로 볼수 있습니다.카터의 방북을 통해 미국과 협상국면을 유도해 수세국면에서 탈출하고 이를 위한 보조축으로 남북간 대화무드를 조성하려는 것같습니다. ▲이용필교수=분단 반세기가 지난 적대적인 체제의 정상끼리 만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잘되면 민족화해를 위한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동시에 동북아 국제정세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의미는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 아래서 어떤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가와연관시켜 봐야 할것입니다.성급한 장미빛 낙관은 금물입니다.북한이 회담에 응한것은 몇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볼수 있습니다.우선 북한은 핵개발에 따른 국제적 압력과 긴장고조에 따른 내외적인 불이익을 해소하려는 것입니다.그들은 정상회담을 남북한 최고위급회담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김대통령을 남한의 여러 정치,사회단체 가운데 하나의 장으로만 본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정상회담 개최논의가 어제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여러번에 걸쳐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북한이 진심으로 만나고자 하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이번에 정상회담의 일시와 장소가 합의되었다고 해서 남북문제가 일시에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될것입니다. ▲박실장=회담에 상당히 회의적인 시각도 있는 것 같습니다.북한측이 이번 정상회담을 비록 체제유지등 사회·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카드로 쓰고 있다해도 우리로서는 대화를 유도,통일에 유리한 국면을 촉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물론 북한은 시간벌기와 제재완화라는 목적에서보면 이미 상당한 재미를 보고 있는 셈이죠.그러나 북한이 대화에 나선데는 카터의 역할보다 더 깊은 곳에 북한핵을 무한정 나몰라라 할 수 없는 중국의 설득과 한·미의 강경한 제재태세등이 작용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금은 대화가 제재보다 효과적일 수 있을 것입니다. ○수세 벗기 전술일수도 ▲이명영교수=북한은 어찌보면 우리의 정책 흐름을 간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우리정부가 반개의 핵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수 있습니다.또 미국은 북한에 핵이 한두개 있다한들 문제있겠느냐고 생각하는 것 같고요.이 때문에 북한은 대화로 위기 상황을 빠져나가도 되겠다고 판단했고 그에 따라 정책을 변화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용필교수=물론 용의주도한 준비와 경계로써 회담에 임한다면 냉전을 해소하고 통일로 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김대통령은 이미 지난 2월 북한핵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김주석을 만날 수 있다는 조건부 제안을 했습니다.그러나 북한은 평양에서의 1차회담 이후의 일정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유보하고 있습니다.우리가 만남에만 집착할때는 과거처럼 소득없는 시간낭비만 하게될 우려도 있습니다. ▲박실장=평양과 서울에서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획기적인 사건이 되겠지만 일부에서는 오히려 우리정부가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조심스런 의견을 제기하기도 합니다.또 실제로 그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이용필교수=북한당국은 김대통령이 북한에 가면 이인모노인이 송환됐을 때나 카터전미국대통령이 방북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북한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몰아가려 할 것입니다.우리측은 회담시기를 8월중순으로 하려는 북한의 의도를 간파,7월말로 시기를 잡았습니다.그러나 일시보다는 장소가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독일 통일전에 동서독 정상이 만날 때도 장소를 양쪽 수도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동서독통일때와 달라 ▲이명영교수=북한은 정상회담에서 틀림없이 통일을 강조할 것입니다.그러나 북한의 통일이란 김일성 주권 아래서의,다시말해 주체의 통일을 의미합니다.따라서 북한은 하나 하나 요구조건을 내걸다가 충족되지 않으면 회담을 결렬시키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실장=북한이 일방적으로 회담을 결렬시킨다면 우리에게도 북한핵에 대한 제재등 강경책을 쓸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지 않을까요.사실 김주석이 서울에 오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손실이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 소극적 견해인 것 같습니다.우리측이 서울방문에 집착하지 않은 것도 북한의 진의가 어디에 있건 북한의 핵무장을 막고 개방과 개혁을 유도하며 교류 협력을 통한 통일기반의 확대를 위해 김주석을 만나는 자체에 의미를 둔 것으로 보입니다. ▲이용필교수=북한이 정상회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만 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역량을 정비한다면 이 회담을 건설적으로 끌고갈 수 있습니다.또 우리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고 봅니다. ▲박실장=충분한 의심이 손실을 최소화하고 성공의 가능성을 높일수 있습니다.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북한의 한계를 단정짓고,실패를 전제로 회담에 소극적으로 임할때 북한은 더욱 소극적으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우리로서는 북한의 핵개발포기와 핵투명성보장등이 첫번째 관심사이며 이산가족재회,남북교류확대등도 중요 관심사이지만 북한이 이들 문제에 쉽게 호응하고 나오리라는 기대는 하기 어려울것 같습니다.특히 북한은 핵문제와 관련,앞으로의 개발계획중단만을 미국에 통보했을 뿐 과거는 불문에 부치자는 미국의 약속을 얻어내는데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는 느낌입니다.우리가 남북회담을 통해 남북상호사찰과 한반도 비핵화,남북합의서의 이행을 강력히 촉구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화해전제조건 촉구를 ▲이용필교수=지금 북한을 대화의 문턱으로까지 끌고 나온 것도 남한과 미국의 북한핵을 저지하겠다는 태도가 확고했기 때문입니다.우리에게는 동독을 조금씩 흡수해나간 서독의 높은 경제력도 없고 상대는 동구의 막스­레닌주의보다 가부장적인 민족주의적 단일지도체제를 가진 북한입니다.우리의 목표를 분명히하고 저지선을 분명히 하는 것만이 북한을 한걸음이라도 움직이게 하는 길일 것입니다. ▲이명영교수=김대통령은 중요한 사안을 영수회담을 통해 결정짓는 스타일입니다.김일성주석이 제아무리 능수능란하다 해도 직접 만나 얘기해보면 문제가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그러나 김주석은 수십년에 걸쳐 혼자 북한을 통치해왔지만 정책을 추진하는데 몇가지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노동당과 정무원,최고인민회의등에서 결의한 기본노선을 변경하지는 않습니다.그 원칙이라는 것은 남한정부가 괴뢰정부라는 것,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것,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등입니다.그러므로 북한은 앞으로 실무접촉등을 통해 이러한 사항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는 쪽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려 할 것입니다.그들은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받아들이자니 곤란한 조건들을 계속 내세우려 할 것이 분명합니다.우리측도 마찬가지로 그런 제안을 북한측에 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우리가 양보하면 북한도 양보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것이 좋습니다.그들은 오히려 또 다른 것을 양보하도록 요구할 것입니다.득촌진척,담담정정가 바로 그들의 전술입니다. ▲이용필교수=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핵문제에 대한 성의를 보이는 대가로 평화협정체결을 통해 국제사회의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북한측이 소극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은 남북한 공동합의서및 비핵화선언을 성실히 이행하도록 촉구해야 합니다.북한의 정치공세에 핵문제의 해결을 역으로 촉구함으로써 북한으로부터 실질적으로 이행이 가능한 약속들을 얻어내야 하는 것입니다.북한은 「회담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노력」등 비록 애매한 수준에서나마 주한미군철수,팀스피리트훈련중지등을 요구할 수 있는 카드를 마련하려 할 것입니다.미국에 대해는 주장을 펴기위한 사전준비작업이라고도 볼수 있죠.심각한 북한의 경제난도 미국의 북한 목조르기만 벗어나면 극복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고 있을 겁니다. ▲박실장=상호주의 원칙에 의해 김일성주석이 서울에 올 가능성은 아직 점치기 힘듭니다.모처럼 이루어진 남북정상회담을 결렬시킨다는 것은 북한이 바라는 미국­북한간 관계개선에도 곤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봅니다.우리가 철저히 대비하되 줄 것은 주면서 설득에 나서고 실현가능한 대북지원계획을 제시하기 위한 준비를 해나간다면 북한의 딴 생각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입니다. ○대화위해선 강경책도 ▲이용필교수=북한은 애매모호한 상태에서 미국과의 관계,우리체제와의 역학등을 고려하면서 회담을 끌고갈 것으로 보입니다.우리는 독일과 예멘의 경우를 다각도로 검토하면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서독은 체제의 우월성을 앞세워 동독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했는데 한반도에서는 오히려 북측이 남측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최근 북한이 어렵고 곧 무너질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북의 체제관리능력을 과소평가한 측면이 있습니다.그들은 정치선전에 매우 능란하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이명영교수=28일자 예비회담 합의문도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북한에 관한한 포괄적 또는 원칙적 합의가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무것도 합의되지 않았다는 것과 같습니다.예비회담합의문은 그 자체가 실천의 아무런 담보도 되지 못합니다.북한의 의도에 대한 99%의 경계와 1%의 낙관만이 실제적인 회담성과를 가져올 수 있는 태도라고나 할까요. ▲이용필교수=언론등에서 북에 대한 경계론을 펴는 것이 오히려 정부에 유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정치지도자와 국민이 단결해서 지혜를 짜내야 합니다.파업이 계속되고 남한사회가 뒤죽박죽이 되면 북한이 오판하게 되고 상황은 더 어려워질지 모른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 6·25전 좌익활동 학계의견 정리

    ◎“대구폭동­제주 4·3사건 항쟁일수 없다”/박헌영의 「미군정 타도」 폭력 노선이 원인/민중사관 주장 극복… “분명한 폭동” 결론 「대구폭동」인가 「10월항쟁」인가,「제주도 4·3사건」인가 「제주도 4·3항쟁」인가.지난 봄 교과서의 역사용어 변경을 위한 시안을 놓고 벌어졌던 이같은 논란은 과거와 같은 권위주의 정부 아래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비록 논의 차원이기는 했지만 새 정부가 그처럼 진보적인 사관을 교과서개편 문제에까지 개방했기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그만큼 정부의 자신감이 바탕이 되었다는 평가였다. 그러나 나라 전체가 들썩거렸을 만큼 파문이 길었던 것은 이 시비가 대한민국의 정통성 시비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6·25 44주년을 앞두고 이 문제가 다시 기억되어야 하는 것도 「10월 항쟁」「4·3항쟁」이라는 시각이 수용된다면 6·25 또한 「민족해방전쟁」이라고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성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교수는 『「10월항쟁」이나 「4·3항쟁」이라는 표기는 첫째 국내의 민중사관,둘째 북한의조선전사,셋째 중국의 혁명사관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단언했다.그들의 시각에 따르면 일제하의 독립운동은 이른바 「민족해방투쟁」인 만큼 8·15는 광복이 아닌 「민족해방」이다.또 일제하 「민족해방투쟁」은 8·15이후 미군정 치하 남한에서 「민중항쟁」이라는 형태로 계속 진행된다는 것이다. 박교수는 『이같은 논리에 따라 그들은 「민족의 통일염원을 저버린 대한민국의 건국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징벌을 받게되며 6·25는 북침이었을지도 모르는 단지 한국전쟁일 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현강연세대교수는 『그같은 민중사관을 그동안 적지않은 학자들이 편향적이 아닌가 우려하면서도 용인해 온 것은 학문의 자유를 존중했기 때문』이라면서 『학계를 벗어나면 용인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학자들은 「폭동」과 「사건」이라는 단어의 차이만큼 현재 국사 교과서의 표기대로 「대구폭동」과 「4·3사건」을 차별화한다. 이현희성신여대교수는 먼저 『「대구폭동」은 폭동일 뿐』이라고 말했다.아무리 진보적인 연구성과가 나와 있다고 해도 그 때를 체험·목격한 격앙의 세대가 악의적의 공산 파괴공작의 맥락에서 비롯된 당시 상황을 증언·열변하고 있는 한 달리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덕규이화여대교수는 『1948년 대구에서 일어난 사건을 폭동으로 보느냐 항쟁으로 보느냐는 문제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면서 『이는 우리 국가의 이념까지 연결되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현희교수는 그러나 『과거 일반화된 표기였던 「4·3제주폭동」은 그 간의 연구와 지역적 특수성으로 볼 때 「폭동」이라 표기하기에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 학계 대다수의 시각』이라고 전하고 『이같은 시각은 교과서에 「4·3사건」이라고 표기됨으로써 이미 수용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승조고려대교수는 이 두 사건을 남로당 총책 박헌영과 직접적으로 연결시켰다.남로당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하자 1946년 가을부터 폭력투쟁 노선으로 전술을 바꿨으며 이는 좌익세력에 대한 과신과 우익 세력에 대한 과소평가에서 비롯된 과오로「대구폭동」과 「4·3사건」이 대표적이라는 것이다.한교수에 따르면 박헌영이 보기에는 미군정이 국민적 지지기반을 갖지 못했고 보수세력도 한줌 밖에 안되므로 밀어붙이면 된다고 계산했다.한편으로는 북한 인민군이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해 3만명의 경찰과 5만명의 국방경비대를 상대로 폭력과 무장투쟁을 하다 좌익세력은 모두 소진됐다.또 박헌영은 남로당 조직에게 모두 총탄이 되어서 「5·10총선거」를 저지할 것을 명했으나 많은 인명의 살상과 대량 구속을 초래했을 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저지하지 못했다.결론적으로 상대방의 전력을 정확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극한투쟁을 벌이다 좌익세력의 총 붕괴를 재촉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정통주의적 입장에 서는 학자들 사이에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좌익·혁신적인 학자들에 비해 무기력하고 나약하며 기회주의적인 경향이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좌파학자들에게 보수·반동·어용으로 낙인찍히며 공격당할까 두려워 사실과 다른 억지주장을 하고 있음에도 이의나 반론을 제기하기를 꺼려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우려 속에서도 이제 폭동을 폭동이라고 제목소리를 내는 학자가 많아졌다는 것은 폭동이냐 항쟁이냐의 논쟁을 계기로 우리 학계가 한부분의 건강은 되찾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평가이다. ◎46년10월 대구폭동/경찰서 등 방화·군수 살해/식량요구 시위가 발단… 경남북 등 확산 「대구폭동」은 1946년10월1일 상오 쌀을 나누어준다는 풍문을 듣고 대구시청 앞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가 발단이 됐다.당시는 미군정 아래 좌우대립으로 정국불안이 계속되고 물자부족과 군정당국의 식량공출로 생활고가 극심한 가운데 좌익계열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주도한 이른바 「9월총파업」이 전국을 휩쓸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태는 하오 들어 시위군중이 1만여명으로 늘어난 가운데 하오7시쯤 대구역 앞에서 경찰의 사격으로 한 시민이 숨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흥분한 시민들은 이튿날인 2일 아침부터 경찰서·역·시청 앞 등에서 대규모시위를 벌였고 당초 식량배급을 요구하던 구호도 애국자석방,조선인에게 행정권이양 등 정치적 문제로 발전되어갔다.경찰서를 점거해 무기를 탈취하고 대구시청 간부의 집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이에 군정당국은 하오7시 대구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미군의 출동으로 대구의 소요사태는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시위는 다음 날인 3일 저녁부터 영천·달성 등 주변지역으로 번져나가 11월 중순까지 경북전역과 경남·전남·강원지역에서 계속됐다.시위가 일어난 대부부의 지역은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교량·철도가 파괴됐다.특히 시위가 극심한 영천의 경우 경찰서·군청·재판소가 불타고 군수가 살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48년4월 4·3사건/좌익의 지서습격이 원인/9년간 희생자 3만∼8만명 추정 「4·3사건」은 제주도에서 1948년4월부터 만9년동안 최소 3만명에서 최대 8만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를 낸 해방후 최대의 유혈사태였다. 사건은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5·10총선을 한달남짓 앞둔 4월3일 상오2시,산중에 집결해 있던 제주도민 2천여명이 도내 15개 경찰지서 가운데 14개를 일제히 습격하면서 시작됐다.이들은 「미군철수」와 「단독선거반대」 「이승만매국도당타도」 등 구호를 외치며 일부는 일본군이 남기고 간 99식소총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좌익세력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미군정은 즉각 1천7백여명의 경찰을 비롯,국방경비대와 우익인사들인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했다.이에 봉기대와 이에 동조한 도민들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장기적인 유격전의 성격으로 전환됐다. 이후 봉기대를 주민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근거지가 되는 마을전체를 불살라버리고 주민들을 집단이주시키는 군·경의 소개작전과 이에 맞선 봉기대의 격렬한 저항이 이어졌다.이 과정에서 양민을 포함해 수많은 인명피해가 났다. 이 사건은 또 진압을 명령받은 군대가 이를 거부하고 소요를 일으킨 48년10월 「여순반란사건」을 촉발시키기도 했다.「4·3사건」은 1957년4월2일 마지막 「빨치산」 오완권이 생포되어서야 비로소 막을 내렸다.
  • 백정기 의사/흑색공포단 결성…일밀정 제거 앞장(이달의 독립운동가)

    ◎상해서 학도병 구출 등 항일투쟁/일군 회의장 폭파하려다 체포돼 『나의 구국일념은 강도 일제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공생공사의 맹우 여러분,대륙침략의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겨레에 바치는 마지막 소원을』 독립투사 구파 백정기의사(1896년 1월19일∼1934년 6월5일)가 1933년 3월17일 중국 상해의 한요릿집에 모인 일제 군간부와 중국의 친일분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비장한 결의로 떠나면서 남긴 유서다. 의사는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요리사등으로 가장해 숨어있던 일경과 일제헌병들에게 붙잡혀 1년3개월여 옥고를 치르다 끝내 조국해방의 제단에 목숨을 바쳤다. 이 거사는 비록 미수로 끝났으나 한국인과 중국인의 항일의식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후대에 평가되고 있다. 의사는 명성황후가 일제에게 시해되고 고종이 아관파천하던 해 전북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 농가에서 태어났다.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하면서 독학으로 글을 익힌 의사는 일찍이 소년기부터 민족의식에 눈을 떴으며 23세 인 1919년 2월 상경,독립투사의 길을 믿아 나섰다. 서울에 도착한 의사는 사람들로부터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됐으며 곧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벌였다. 의사는 그 뒤 인천등지에서 무장독립활동을 펼치기 위한 준비를 하다 일제의 주목을 받게 되자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당시 북경에는 이회영,유자명,이을규,신채호등이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었다. 이들은 신채호가 1923년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에 크게 영향을 받아 무정부주의를 행동강령으로 채택하고 이를 통해 독립을 관철할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이들이 표방한 무정부주의의 내용은 무지배,무권력의 민족혁명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었다. 의사는 이들과 만나면서 자연스레 무정부주의에 심취,한때 호남성 동정호부근에서 이상적 농촌사회 건설을 위해 애썼다. 의사는 다음해인 1924년 일본 조천수력공사장을 폭파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도쿄에 잠입했다가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계획을 포기하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온다. 북경에서 곧바로 상해로 옮긴 의사는 영국인이 운영하는 철공장에 들어가 폭탄제조기술을 익힌 뒤 1925년 상해에서 5·30총파업이 실시되자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들과 노동조합을 결성,독립운동의 기반으로 활용할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1927년 복건성 천주시에서 중국인 동료들과 함께 무정부주의자 양성소인 민단훈련소를 설립,농민 3천5백여명을 모아 농민자위대를 조직했다. 의사는 1930년 상해에서 동료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일본침략세력 저지작전과 밀정제거작전을 주임무로 삼는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이 조직은 나중 일제에 징용된 한인학도병 귀순작전과 포로구출작전,항일전쟁참가등 많은 공을 세웠다. 의사는 또 이 조직등을 골간으로 1931년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로 「자유신문」을 발행,결사항일투쟁의지를 북돋우는데 힘을 기울였다. 의사는 제1차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중국동지와 함께 파괴암살을 주목적으로 하는 비밀단체 「흑색공포단」을 결성,일본기관 파괴와 침략원흉의 처단활동에 나섰다. 이 흑색공포단은 결성되자마자 일제 밀정들을 다수 처형하는등 맹활약을 펼쳐 일제를 긴장시켰다. 일제는 이처럼 비정규적인 유격전이 펼쳐지자 이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해 상해의 고급음식점 「육삼정」에서 군간부등이 참가한 가운데 비밀회의를 개최키로 했으며 이 정보를 흑색공포단이 입수,의사가 이 음식점을 폭파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의사를 비롯한 흑색공포단원들은 이 거사를 서로 자기가 적임이라고 주장,추첨으로 의사와 동료 이강훈이 행동대원에 선정됐다. 의사등 행동대원 2명은 거사일인 1933년 3월17일 육삼정 비밀회의가 시작되기 2시간전인 하오 6시쯤 폭탄과 권총,수류탄등으로 무장을 하고 현장에 도착해 정세를 살피기 시작했다.그러나 이들은 변절한 일본인 무정부주의자로부터 사전정보를 입수한 일제가 인력거꾼·요리사등으로 변장하고 수십여명이 현장주변에 숨어 있는 것을 알아 채지 못해 그 자리에서 체포돼 거사는 불발로 끝났다. 의사등은 바로 일본으로 압송됐으며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의사는 1년3개월여 복역하다 지병인 폐결핵으로 천추의 한을 가슴에 품고 옥중에서 순국했다. 백의사의 유해는 적지 일본에 묻혔다가 광복 1년 뒤인 1946년 7월 이봉창·윤봉길의사의 유해와 함께 조국에 봉환됐으며 국민장으로 천묘의식을 치른 뒤 효창원에 안장됐다. 정부는 의사의 공을 기려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고향인 전북 영원면에는 도민의 성금을 모아 건립한 순국기념비가 서 있다.
  • 신팔균선생/항일비밀결사 「대동청년단」 이끌어(이달의 독립운동가)

    ◎충북 진천에 사립학교 세워 인재 양성/만주망명후 독립군 총지휘… 일 괴롭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이후 수많은 선열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줄기차게 항일투쟁을 벌여왔다. 동천 신팔균선생은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조국광복의 제단에 바친 대표적인 애국선열로 손꼽히고 있다. 선생은 김좌진,홍범도,김동삼등과 함께 만주를 무대로 항일독립전쟁을 전개한 무장이다. 선생은 부친이 한성부판윤과 좌변포도대장등을,조부가 금위대장·삼도수군통제사·형조와 병조판서를 지낸 명문가출신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1882년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한 선생은 육군참위로 임관,강계 진위대에서 첫 근무를 했다. 선생은 1909년 대한제국군대가 해체되자 인재양성에 힘을 쏟기로 하고 충북 진천에 사립 보명학교(현 이월국교 자리)를 세웠다. 이와함께 전국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을 갖고 80여명으로 항일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을 결성,항일무장독립운동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데도 성공했다. 대동청년단은 국권회복을 위한 지하단체로 광복때까지 은밀한 활동을 벌였다. 이 단체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보안 때문이었다. 이들은 처음 단체를 출범하면서 단원이나 단명등에 관한 사항은 일절 문자로 표시하지 않으며 경찰등에 체포될 경우 다른 단원을 연루시키지 않는다는 「피의 서약」을 맺었다. 선생은 1910년 마침내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종지부를 찍고 일제통치가 시작되자 무장항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선생은 일단 만주로 망명,독립운동 단체 중광단에 가입했으며 3·1운동에 앞서 만주 동삼성의 민족지도자 38인 가운데 1인으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선생은 이어 만주 서간도의 독립군 양성학교인 경학사의 후신인 한주회 소속 독립군단 서로군정서에 가입,군단무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후진교육을 맡았다. 당시 교관으로는 일본육사출신인 지청천과 김경천,한말 무관출신인 김창환등이 학생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청산리독립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선생을 비롯한 애국투사들의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3·1운동을 전후해 만주지역에는 50여개의 독립군단이 조직됐으며 이들은 각각 일제에 전쟁을 선포하고 일제 주재소와 헌병대등을 습격하는등 맹렬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선생도 서로군정서의 독립군을 이끌고 수시로 일제 군경과 치열한 총격전을 가졌으며 친일주구들을 처단하는등 용맹을 떨쳤다. 독립군부대는 그러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1천여명의 병사를 잃은 일제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만주지역의 한인들을 무차별 살육하는등 초토화작전으로 맞서자 어쩔 수 없이 근거지를 이동하게 된다. 당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독립군 연합부대는 북만으로 옮겼으며 선생이 활약하고 있는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등은 남만의 홍경현으로 이주했다. 1922년 봄,남만에 있던 독립군부대들은 강력한 독립군단의 조직을 위해 기존 부대를 해체,대한통군부를 결성했으며 이 통군부는 그해 가을,북만의 독립군부대까지 결합시켜 대한통의부로 새로 출발했다. 선생은 1923년 대한통의부 의용군사령관에 임명돼 독립군병력을 총지휘하게 된다. 이 의용군은 5개중대와 유격대,헌병대로 조직됐으며 각 중대는 5백∼9백명의 병력으로 구성됐다. 의용군은 당시 압록강 접경에서 일제와 치열한 접전을 펼쳤으며 국내에도 잠입,게릴라전으로 일제를 괴롭혔다.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이 의용군은 1923년 1월 유격대원 7명이 평북 창성군 후평주재소를 습격,일경을 사살하는등 무수한 전과를 남겼다. 선생은 그러나 1924년 7월 홍경현 밀림에서 야외군사훈련중 중국 마적 3백여명의 급습을 받고 총격전을 벌이다 총에 맞아 쓰러져 42세로 운명했다. 선생은 『일제와 싸우다 죽으려했더니 중국사람과 싸우다 죽는구나』라고 외치며 안타까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생을 숨지게 한 마적들은 사후 일제의 사주를 받은 장작림 군벌부대와 경찰들로 밝혀졌다. 한편 선생이 순국할 당시 서울 셋방에서 만삭의 몸을 이끌며 살고 있던 부인 임수명여사는 남편의 전사소식을 듣고 쓰러져 운명,일가족이 조국독립에 몸을 바친 셈이 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추서했다.
  • 식량난 심화로 주민들 대용식품 개발붐(북한 이모저모)

    ◎「민족과 운명」 고박대통령역 김윤홍 인기 ○지게미밥·송기떡 등 ○…북한의 식량난이 갈수록 심각해 짐에 따라 북한주민들은 자구책으로 ▲강냉이쌀겨죽 ▲지게미 밥 ▲송기떡 ▲배죽 등 「대용식품」을 만들어 먹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대용식품은 배급된 강냉이와 식용으로 쓸 수 있는 모든 재료를 혼합해 만든 것으로 강냉이겨죽은 강냉이 쌀을 만들고 난 껍질(겨)을 볶은 뒤 절구에 찧어 물에 쑨 죽인데 역겨운 냄새가 나 먹기가 고통스러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지게미밥은 옥수수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지게미)에 한두줌 쌀을 넣어 지은 밥으로 기름성분이 많아 대용식품으로 주민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고 있으나 구하기가 무척 힘든 실정이다. ○북 태권도 특집방송 ○…최근 북한이 주도하는 국제태권도연맹(총재 최흥희)이 한국이 주도하는 세계태권도연맹에 태권도기구 단일화를 제의해 관심을 끌고 있는 가운데 대남전용 평양방송이 23일 북한에서 행해지고 있는 태권도를 상세히 소개. 평양방송은 이날 「조선의 태권도」라는제목의 특집프로에서 태권도가 『고구려 시기부터 전해온 격술인 택견과 수박치기를 바탕으로한 민족문화유산의 귀중한 재부로서 인민의 커다란 자랑과 긍지로 되고있다』면서 북한의 태권도가 경기실천에 응용되는 기본동작(3천2백여가지)을 비롯해 틀·맞서기·위력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소개했다. ○60년 북송된 영화배우 ○…북한이 최근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고 있는 극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고 박정희대통령 역을 맡은 김윤홍이 주연배우 못지않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최근호가 보도. 올해 48세인 김윤홍은 일본에서 고아로 자라났으나 예술에 남다른 호기심을 갖고 있었으며 지난 60년 북송선에 올라 북한에 정착했는데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양성반을 졸업하고 69년 처음으로 극영화 「중대의 누나」에 단역(항일유격대원)으로 출연하게 됐다고 이 신문은 소개. ○효모사료개발 성공 ○…북한은 최근 식료품공장에서 나오는 폐설물을 이용,새로운 효모사료를 개발했다고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최근호가 보도. 평양 곡산공장 공업시험소와 경공업과학원 강냉이가공연구소의 과학자·기술자들에 의해 개발된 새로운 효모사료는 비타민·호르몬효소·인칼슘 등과 미량원소들이 들어 있어 가축들의 소화흡수를 도와주며 비육시간도 단축시키고 폐사율을 낮추는 한편 우유생산량을 늘릴 수 있게 한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 엑스포 기업전시관안내 컴패니언의 소감 좌담

    ◎“관람객 질서의식 놀랄 정도예요”/지구촌 축제… 새치기·짜증은 금기로/공수부대서 지옥훈련… 친절 익혀/힘들지만 “국가위해 봉사” 자부심 대전엑스포가 성공적으로 치러지고 있는 데는 수많은 일꾼들의 땀이 엉겨 있다.이 가운데서도 관람객들을 가장 많이 접하며 엑스포의 인상을 좌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꽃들이 컴패니언(기업전시관안내양)이다.조직위 소속으로 박람회장 전체의 안내를 맡고 있는 도우미들과는 달리 박람회참가기업 소속으로 상설전시관에서 관람객 안내와 설명을 맡고 있는 이들은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는 또하나의 주역들이다.좌담회를 통해 컴패니언들의의 보람. ­요즘 하루일과는 어떻게 짜여 있나요. ▲전보현=저희들의 경우는 오전과 오후 2교대로 근무를 하는데 오전근무때는 아침8시10분에 출근해서 9시부터 근무를 시작해 하오4시30분에 끝나고 오후근무는 2시에 출근해 저녁10시에 귀가합니다. ▲조성경=저희들은 아침6시30분에 일어나 운동을 한뒤 출근합니다. ▲서백임=우리의 경우는 귀가시간이 자유롭고 근무시간외에는 자율적으로 지내고 있어요. ­관람객들의 관람태도는 어떤가요. ▲(일제히 입을 모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요. ▲오은지=개장초에 비가 내리는데도 흩어지지 않고 우산을 쓰고 줄을 그대로 지켜 높은 관심에 놀랐어요.질서의식도 높고요. ▲장수양=비속에서도 컵라면이나 도시락을 먹으며 기다리는 손님들이 많아요. ­관람객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서=극히 일부관람객들이 새치기를 하는 경우가 가끔 있어요.대기시간이 길어 짜증을 내는 경우도 있고요.다같이 즐거운 관람을 하기 위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즐겁게 기다려줬으면해요. ○하루 2교대 근무 ▲오=우리의 능력과 친절을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인만큼 외국인관람객들이 지속적으로 많이 찾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손경오=개장초에 비가 내려 관람객들이 적을까봐 걱정을 했었어요.이번 엑스포가 우리나라 재도약의 계기가 되고 국민 질서의식확립의 산 교육장으로 훌륭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계속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어요. ­엑스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상설전시관의 컴패니언들인데 그만큼 보람도 많겠죠. ▲오=엑스포는 우리가 세계인을 상대로 벌이는 기술올림픽이기 때문에 최대한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해요.우리들이 열심히 노력하는만큼 엑스포가 빛난다고 생각하니 힘들지 않아요.우리를 외국에 알리는 최일선에서 일한다는 데 큰 보람을 느낍니다. ▲구상진=관람객들이 전시관을 나가면서 『고생이 많다.어쩜 이렇게 친절하냐』고 한마디씩 해줄 때 보람을 느낍니다. ▲손=특히 학생들에게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곳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껴요. ▲서=앞으로 어머니가 됐을 때 자식들에게 93대전엑스포에서 일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해주고 싶어요. ­컴패니언이 된 뒤 새롭게 배운 게 있다면 ▲조=인사성이 밝은 편이 아니었는데 이젠 자연스럽게 친절한 인사가 나올 정도로 바뀌어 스스로도 놀라고 있어요.또 여러사람을 접하다보니 사회경험도 많아지고 이해심도 넓어졌어요. ○“고맙다”에 보람 ▲전=봉사정신이 생긴 것같아요. ▲구=가끔 구토를 하는 관객이 있는데 그 구토물을 직접 치우면서도 짜증이 나지 않아 나도 놀랄 정도로 변했어요. ▲서=가끔 대기시간이 길어 관람객들이 짜증을 내도 상냥하게 대할 정도가 됐어요. ­개장후에 생활이 어떻게 달라졌나요. ▲구=개장전에는 교육등으로 규율이 엄격해 수녀원을 방불케 했는데 개장후에는 다소 자율적인 분위기로 바뀌었어요.하지만 여전히 생활에 대한 규율은 엄격합니다. ▲서=아마도 엄격한 규율보다는 자율적인 생활이 관람객들에게 자연스러운 미소와 친절을 보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아요.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오=청소해주는 아주머니들과 친하게 지내요.커피도 같이 마시고 아주머니들은 「엑스포에서 제일 가는 아가씨가 돼요」라는 쪽지를 남기기도 해요. ▲장=일과후에 숙소에 돌아가면 전화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해요.대개 타운아파트 한집에 7∼10명이 사는데 전화는 1대니까 통화가 쉽지 않아요.여자들이니까 한번에 30분정도 통화는 보통으로 통화시간이 길고요.그래서 이젠 매일 순서를 정해 전화를 쓰고 있어요.▲조=지난 4월 수련회때 야간훈련에서 여자들만으로 조를 짰다가 밤10시에 길을 잃어 낙오된 적이 있는데 다른 동료들이 일제히 찾아나서 우리를 발견한 뒤 눈물을 글썽이며 반가워해 진한 동료애를 느낀 적이 있어요 ▲손=한번은 60대할머니 한분이 극구 말리는데도 움직임이 심한 기구에 타겠다고 고집해 할 수 없이 태워드렸는데 태연히 타고내려와 『고맙다 너무 재미있었다』고 해 무안했던 적이 있어요. ­가장 힘들었던 일은 . ▲구=7월중순에 공수부대에서 비를 흠뻑 맞으며 사격과 유격훈련을 받을 때가 힘들었어요. (일동 일제히 비슷한 수련과정을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떠들썩했다) ○끝나면 해외여행 ­집을 떠나 힘든 점은 ▲서=고3인 동생이 수학능력시험을 봐야 하는데 제대로 응원을 못해줘 미안해요. ▲장=개막직전 어머니와 통화를 했는데 어찌나 보고 싶었는지 밤새 울어 다음날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출근한 적이 있어요. ▲전=개막리허설 때 초청된 가족들 앞에서 아맥스영화를 소개하는데 눈물이 글썽거려 혼났어요.한편으로는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컴패니언이 된 동기는 ▲장=장래에 홍보계통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때마침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 공채에 응시했어요.더구나 나라를 위해 일하니 더 잘됐지요. ▲손=외국에서는 컴패니언이 전문직업화되고 있다기에 앞으로 전문직으로 개척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응시했어요. ▲오=미래항공관의 경우는 별도공채없이 대한항공 스튜어디스들이 컴패니언으로 일하고 있어요.하지만 국제적인 대규모행사에서 세계인을 상대로 일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기꺼이 받아들였어요. ­엑스포가 끝나면 무엇을 할 계획입니까. ▲서=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어요. ▲구=회사부담으로 전원이 해외여행을 가요. ▲(일제히)와 부럽다. ­컴패니언으로서의 각오가 있다면. ▲(입을 모아)이번 엑스포가 미래를 여는 세계인의 축제로서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어요. ­빠쁜 일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시간을 내줘 고맙습니다. ▷참석자◁ ◇구상진 25·우주탐험관 ◇손경오 24·자동차관 ◇서백임 24·롯데환타지월드 ◇오은지 22·미래항공관 ◇장수양 22·인간과학관 ◇전보현 22·지구관 ◇조성경 24·한국IBM관
  • 재미학자 방선주씨,OSS의 「NAPKO 계획」 공개

    ◎“미,일제말 한국인 특공대 조직 추진”/지하 저항운동 목적… 45년 하반기 투입 계획/징용포로로 구성… 일 항복으로 중단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5년 하반기.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특수훈련을 받은 한국인 특공대가 서울과 평남 진남포등지로 잠입,현지조직을 만들어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처럼 지하저항운동을 벌인다」 이같은 상황은 소설속의 한 장면이 아니라 당시에 실제로 추진된 작전계획의 내용이었다.「NAPCO 계획」이라고 이름붙여진 이 작전은 다만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항복하는 바람에 중단됐을 뿐이다. 그동안 역사의 그늘 속에 묻혀있던「NAPCO 계획」의 실상이 재미 한국인 학자인 방선주씨(아메라시안 데이터 리서치 소장)에 의해 밝혀졌다.방소장은 이에 관한 연구결과를 오는 1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독립기념관부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주최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방소장이 미국립문서보관소의 OSS(전략첩보국·CIA의 전신으로 1943∼45년 존속)관련자료를 입수,분석한「NAPCO 계획」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등 재미독립운동가들은 중국및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구성된 게릴라부대를 조직,일제에 대한 적후방 교란작전을 벌일 것을 미정부에 요청한다.미정부는 그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이승만을 통한 특공대원모집을 거부하고 OSS에게「NAPCO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OSS는「1개조 5명이내의 공작조 10개를 구성,우선 한국내에 침투시켜 첩보·지하조직결성등의 활동을 벌여 2천3백만 한국인의 지지를 얻은 다음 이 공작조를 나중에는 일본으로 보내 사보타지·무장저항운동으로 이어나간다」는 세부계획을 확정했다.공작조는 잠수함을 타고 잠입하기로 했으며 상륙지점으로는 서울·진남포·서산·목포등지를 선정했다. 공작원은 한국에 연고가 있는 유학생과 사이판·괌등지에서 포로가 된 징용자 가운데 선발하기로 했다.이에따라 44년11월에는 OSS요원인 한국인(이태모로 추정)이 포로로 위장,수용소에 들어가 직접 요원을 뽑았다. 45년3월에는 문서상에 A∼H로 표시된 8명의 요원이 미국 남캘리포니아의 산타카타리나섬등지에서 유격전투·파괴·낙하·교신·선전등의 각종 훈련을 받고 있었다.방소장은 이들이 유일한(당시 50세·유한양행창업자) 이초(49·시카고YMCA 체육과 출신) 변일서(44·OSS요원) 차진주(39·미네소타주립대 ROTC 출신) 이근성(35·이왕가 혈통) 김강(43·금속화학기술자) 변준호(43·사회과학연구회 회원)임을 밝혀냈다.그러나 나머지 요원 1명의 신원과「NAPCO」의 의미등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방소장은『일본이 일찍 항복하는 바람에「NAPCO 계획」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아쉬워 하고『그러나 일의 성사여부와 상관없이 요원들의 불굴의 애국심과 용기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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