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유가족
    2026-03-16
    검색기록 지우기
  • 野 대표
    2026-03-16
    검색기록 지우기
  • 등장인물
    2026-03-16
    검색기록 지우기
  • 대학교
    2026-03-16
    검색기록 지우기
  • 아수라장
    2026-03-1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1,750
  • 민주열사 열전:18회/前 조선대생 李哲揆(정직한 역사 되찾기)

    ◎반독재 활동혐의 수배… 경찰 검문뒤 변사체로/행방불명 1주뒤 의혹에 싸인 시신 수원지에서 발견/검찰 ‘도주중 실족 익사’로 수사종결… 재부검 요청 거부 불모의 독재 정권에서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민주화투쟁을 위해 스스로 몸을 받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의문사 희생자로부터도 푸른 수액을 받아 자라난다. 비록 몸은 독재의 철퇴 아래 억울하게 스러졌지만 잠들지 않는 푸른 혼은 철퇴를 두고두고 산화시켜 녹슬게 한다. 직선제 정부라던 6공화국 때도 철권 군사독재의 5공과 마찬가지로 여러 의문사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 광주 조선대생 李哲揆의 죽음은 10년이 거의 지난 지금도 선명한 의문들로 덮여 있다. 이 의문들은 거꾸로 당시 정권의 정통성과 공권력의 정당성에 날카로운 의문을 던진다. 1989년 5월10일 광주시 북구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조선대 교지 ‘민주조선’ 편집위원장 이철규(전자공학 4)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이철규는 교지에 게재한 자신의 논문과 관련하여 4월18일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광주 전남지역 공안 합수부에 의해 수배중이었다. ○검문경찰 “추격하다 철수” 주장 수배받고 있던 그는 5월3일 밤 10시쯤 후배의 생일을 위해 택시를 타고 무등산장 쪽으로 가던 중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경찰의 검문을 받게 되는데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당시 검문 경찰은 신원 파악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피검문자가 인근 산 속으로 도주,뒤쫓아 갔으나 붙잡지 못한 채 얼마후 철수했다고 주장했다.택시강도 혐의자를 잡기 위한 일상적 검문 상황이었지 피검문자가 300만원의 현상금과 1계급 특진이 걸린 공안 수배범 이철규인줄은 전연 몰랐다는 말이였다. 이철규는 검문 1주일 후 검문을 받던 청암교로부터 76m 떨어진 곳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그는 물가에서 3m 떨어지고 수심이 70㎝ 정도되는 지점에서 얼굴을 위로 한 채 물 위에 떠 있었다. 시신의 얼굴은 검은 색으로 심하게 변색된 가운데 퉁퉁 부어 있었으며 왼쪽 눈알이 돌출된 끔직한 형상이었다. 특히 오른쪽 어깨는 왼쪽에 비해 크게 부어 있었다. 사체 상태나 실종의 정황에 비춰 단순한 익사라고 인정할 수 없었던가족과 학생들은 즉시 진상규명 위원회를 만들었다. 5월11일 진상위에서 다수가 참관한 가운데 검찰 주도의 부검이 실시되었다. 진상위 측 참관인단은 위와 폐안에 물이 차 있지 않았으며 부종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익사는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타살 가능성을 제기했다. 검찰은 보다 상세한 검사가 필요하다면서 주요 장기를 국립 과학수사연구소로 보냈다. 14일 검사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좌측 눈의 돌출과 오른쪽 어깨의 부은 것은 단지 부패 때문이며 몸의 각 장기에서 플랑크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익사라고 결론내렸다. 보강 자료로 폐부종,국소출혈,폐포파열을 들었다. 검찰은 관련조사 및 부검 결과를 종합하여 익사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에 따르면 3일 밤 산 속으로 도주한 이철규는 경찰의 추격을 피해 다시 광주 쪽으로 돌아 오려고 철조망을 넘어 수원지 내로 들어왔다가 다소의 술기운에 실족,추락하여 익사하였다는 것이다. 추락의 방증으로 사건 당일 일부 경찰이 현장 근처에서 “풍덩,어푸어푸”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점을 들었다.다만 소리를 듣고 후레쉬를 비춰 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수면도 잔잔해져 물가까지 내려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족들과 학생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조선대생 8,000여명 등 학생 시민 1만여명은 89년 5월11일 정오부터 시신을 안치한 전남대 병원 앞 도로를 가득 메우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가두집회를 가졌다. 5·18 9주기를 앞둔 가운데 13일에는 전국 70여개 대학생과 시민 등 1만5,000천명이 전남대 금남로 조선대 등을 거쳐 시신이 안치된 병원까지 도심행진 시위를 벌였다. ○부거당시 슬라이드 공개안해 한때 2만5,000명까지 불어난 시위군중은 “이철규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쳤으나 경찰과 큰 충돌은 없었다. 평화적으로 계속되던 시위는 그러나 25일 현장검증을 실시한 검찰이 30일 ‘실족 후 익사’ 라는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수사를 종결하려 하자 격렬한 항의시위로 급변했다. 25일부터 전남대 영안실 앞과 서울 명동성당에서 수백명의 학생들이 사인규명을 요구하는 단식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철규 고문살인 진상규명”을 소리높이 외치며 학생들은 눈으로 보면 누구라도 사인에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며 사체의 사진을 언론에 공개할 것과 진상위 측과 합수부 측이 TV공개토론를 가질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여소야대의 국회도 개별 사안에 대해 십여년 만에 첫 국정감사를 6월1일부터 광주 현지에서 실시했다. 열흘 남짓 새에 60여명의 증인을 부르고 3,000페이지에 가까운 검찰수사 기록을 검토했으나 3주간의 조사에서 별다른 전기를 마련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사인규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재부검 요청을 검찰이 거부해 의원들 역시 의문점만 재론했을 따름이었다. 유족과 진상위 측은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법의학자 로버트 커쉬너 박사를 초청하여 그의 참관 아래 재부검을 갖자고 했지만 검찰은 응하지 않았다. 나아가 1차 부검 당시의 슬라이드 요청마저 거부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이철규가 실족해 익사한 뒤 1주일 동안 물 속에 있었다가 발견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3일 밤 검문 때 경찰에 붙잡혀 연행된 뒤 조사를 받다가 살해되었으며 이를 은폐하기 위해 발견 지점으로 옮겨져 익사체로 조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 의문은 수사관련 자료가 공개되지 않은 가운데 실증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늦게라도 6공 판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폭발될 잠재력을 안고 있다. ○187일간 냉동안치뒤 안장 이철규는 82년 조선대에 입학하면서 학생운동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84년에 ‘학원 민주화 자율추진회’,85년에 ‘반외세 반독재 투쟁위원회’ 위원으로 각각 활동하였다. 85년 11월 ‘반외세’ 위원회 활동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87년 7월 가석방되었다. 더욱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나섰던 이철규는 전횡을 일삼던 조선대 재단을 밀어내는 학생들의 투쟁에 앞장섰으며 89년 초 새 교지 ‘민주조선’ 편집위원장에 올랐다. 민주화와 정의를 위해 싸우던 그는 죽어서 가족에게 돌아왔다. 그의 시신은 진상규명을 위해 187일이나 영안실에 냉동되어 있다가 의문의 얼음장을 깨지 못하고 89년 11월4일 망월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의문사 진상규명 노력/50건 육박… 80년대 집중/5共 청문회 특위 무산/인권법에 조사 명시 방침 군사독재 등 정치적 혼란이 심했던 만큼 우리 현대사에서는 의문사가 여기 저기에 널려 있다. ‘타살당했다는 심적 및 물적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에 의해 은폐,조작되어 사인이 철저하게 묻혀져 버린 죽음’인 의문사는 전국민족민주 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50건에 육박한다. 지난 73년 최종길 서울법대 교수의 의문의 죽음을 필두로 한 이들 현대사 의문사는 80년대에 집중되어 있으나 문민정부 때에도 계속되었다. 그동안 유가족을 중심으로 의문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 노력이 끈질기게 펼쳐져 왔다. 서슬퍼런 5공 때인 84년에 강제징집 희생자 진상규명 노력이 있었다. 6공 초기 여소야대 직후인 88년 10월부터 유가족들이 기독교회관 3층 시멘트 바닥에 모포를 깔고 135일 동안 추위에 시달리고 전경과 부딪히면서 줄기차게 투쟁한 결과 5공청문회에서 의문사 특별위원회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특위 일정까지 잡혔다. 그러나 가해자 측 증인이 나오지 않고 TV 중계도 않는다고 하자 유가족 측이 거부,무산되고 말았다. 90년부터 일반 시민 11만명의 서명을 받아 의문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했으나 끝내 폐기되고 말았다. 정권교체가 이뤄지자 유가족들은 98년 11월4일부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을 위해 또다시 국회 앞 도로에서 텐트를 치고 장기 농성에 돌입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이전 정부와는 달리 현 정부·여당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인사들에 대한 진상조사 문제를 곧 제정할 인권법에 명시하고 새로 설치될 인권위원회에 전담기구를 둬 진상조사를 할 수 있도록 할 방침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 모든 군 의문사 철저규명을(사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소대장 金勳 중위 사망사건을 계기로 80년대 이후 군(軍)내에서 일어난 모든 의문사도 재조사키로 한 것은 당연하고 잘한 결정이다. 金중위의 경우뿐만 아니라 그동안 군이 밝힌 사망원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유가족들이 많은데다 자식을 군복무중 잃은 유가족에게 정확한 사망원인을 알려주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군은 한창 혈기가 왕성한 각양각색의 젊은이들이 모여있는 특수집단이다. 게다가 개인화기와 폭발물등 위험한 장비들을 가지고 각종 훈련과 작전을 해야하는 군에서 갖가지 사고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애통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죽음의 원인이 석연치 않을때 유가족들의 안타까움과 억울함은 대단할 것이다. 군대 안에서 일어나는 사고사의 경우 부대 밖에서는 구체적인 사고 내용이나 원인을 알 길이 없다. 군에서 통보해주는 대로 믿을 도리밖에 없다. 그러나 사고 경위나 사망원인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의 사망사고가 적지않아 유가족들이 진상규명이나 재조사를 탄원하지만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그동안의 현실이었다. 양쪽 가슴과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숨진 병사나 머리의 함몰상으로 과다한 출혈때문에 숨진 하사관을 자살이라고 하는 군의 처리를 믿을 유가족이 어디에 있겠는가. 육군 중장출신의 金중위 아버지가 30여년 동안 몸담았던 군을 상대로 그토록 애타게 타살가능성을 제기했지만 끝내 외면당했을 정도이니 다른 경우는 오죽하겠는가. 군에 따르면 매년 각종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400여명에 이르며 이들 대부분이 자살로 처리되고 있다. 자살의 경우 유가족들은 대개 사고 경위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가족을 잃은 슬픔도 견디기 어려운데 재조사를 진정하거나 탄원하려고 몇년동안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고생까지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군 의문사에 대한 이번 재조사로 유가족들의 의혹이 명백히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그래야만 군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국민들이 안심하고 자식들을 군에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앞으로 군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고사의 조사에는 민간 전문가와 유가족대표를 참여시켜 한점 의혹이 없도록 하는 것을 제도화하기 바란다. 지금처럼 사고조사를 군에게만 맡긴다면 문책이나 복잡해질 뒤처리를 피하기 위해 손쉽게 적당히 처리하는 일이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金 중위 死因 정확히 밝혀내야(사설)

    판문점 경비병사들의 북한 접촉사건과 함께 경비소대장 金勳 중위의 사망사건이 새롭게 관심을 모으고 있다. 군 당국의 자살 결론에 국회 국방위 진상조사소위가 金중위의 타살가능성을 지적하자 국방부는 이 사건을 전면 재조사키로 했다. 뒤늦었지만 군의 재조사 결정은 당연하며 철저한 조사로 金중위의 사망원인은 정확히 밝혀져야 한다. 金중위의 사망이 판문점 병사들의 북한접촉과 관련됐는지도 명확히 규명돼야 한다. 金중위의 사망원인은 지금까지 나타난 여러가지 정황과 증거들로 보아 자살보다는 타살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진전되고 있다. 재조사 결과 만약 金중위가 타살됐으며, 추측대로 북한에 포섭된 부대원에 의해 살해됐다면 병사들의 북한접촉 못지않은 엄청난 일이다. 우리 군의 정신자세와 안보의식에 근본적인 허점이 있음을 드러내며 군 기강을 뿌리째 뒤흔들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지난 2월24일 낮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 벙커에서 머리에 권총을 맞고 숨진채 발견된 金중위의 사망원인은 그동안 논란이 계속됐었다. 사고 후 군 당국이 金중위가 부대운영의 부담으로 자살했다고 밝히자 유가족들은 여러가지 증거와 함께 타살가능성을 강력하게 제기했었다. 육군중장 출신인 金중위의 아버지가 이리저리 뛰며 혼자 힘으로 조사해낸 증거들은 누가 보기에도 타살가능성이 짙다는 의심을 갖게 한다. 金중위가 사망하기 얼마전 북한 경비병 상위의 귀순으로 북한이 보복을 공언하고 있었고 구속된 부소대장의 북한 접촉사실도 일부 알려져 있었던 상황이라면 가족들의 탄원이 없었더라도 金중위의 사망원인은 보다 정밀하게 조사됐어야 했을 것이다. 더구나 남북이 민감하게 마주하고 있는 판문점 경비구역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결코 가볍게 처리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金중위 사망사건을 서둘러 자살로 처리한 군 수사당국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다. 유가족들의 10개월에 걸친 재조사 요구와 과학적 증거들도 묵살했다. 경비병들의 북한접촉사실과 관련여부도 국회 조사소위의 문제제기가 있고서야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이 문제를 더이상 확대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덮어버리려 했거나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다는 냄새가 짙게 풍긴다. 최근 잇따른 군 관련 사고들로 군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 국방과 안보태세에 대한 걱정도 크다. 철저한 조사와 근본적인 대책으로 안보태세를 더욱 굳건히 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 ‘軍 의문사’ 모두 20여건/사례와 문제점

    ◎유족들 재수사 요구해도 묵살 예사/지금까지 대부분 자살·사고사 처리 자살 타살의 여부가 분명하지 않으면서 사인에 관한 진실이 은폐되거나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있는 죽음인 의문사는 특히 군부대 내에서 많이 발생해왔다. 군의 본질인 구성원간의 수직적 관계가 잘못되어 ‘석연치 않은 죽음’을 싹틔운 토양으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독재 정권 시기일수록 이 토양은 비옥해져 의문사가 많았다. 전국 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유가협) 등에 따르면 의문사는 총 40여건에 달하며 이중 군부대 의문사가 20여건으로 절반이 된다. 특히 유가협은 군사독재정권인 5공과 6공 초기인 80년부터 88년 사이에 무려 18건의 군 의문사가 있었다고 밝혔다. 국정감사가 부활된 지난 88년 10월 국방부는 이제까지 군대에서 안전사고로 3,723명이,군기사고로 2,670명이 사망했으며 군기사고중 2,254명이 자살,나머지는 폭행으로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었다. 유가협이 제기한 군 의문사는 모두 성격결함,환경비관 등의 염세성 자살이거나 사고사인 것으로 처리되었다. 즉군에는 한건의 의문사도 없음을 천명한 것이다. 군 의문사 관련 가족들은 군부대가 자식들의 죽음을 연락하는 데는 크게 지체하지 않았지만 부대에 도착해도 상황을 설득력있게 설명해주기는 커녕 돌연사태에 경황이 없는 틈을 타 화장동의서를 받는 데 급급했다고 불평하고 있다. 유가협이 제기하고 있는 군 의문사는 5공 초기 시국관련 문제 대학생들을 강제징집하고 강제순화 교육을 실시한 ‘녹화사업’에서 처음 발생했다. 강제징집된 6명의 학생들이 프락치 역을 강요받으며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이 83년말부터 학원가에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5공은 국방장관의 국회보고를 통해 이들의 죽음이 모두 염세성 자살이거나 군기사고라며 의문사 의혹을 부인했다. 84년에 사망한 허원근의 경우 아버지가 앞가슴에서 어깨뼈를 관통하여 갈비뼈가 어깨 등뼈를 뚫고 나왔는데 어떻게 팔을 움직여 다시 총을 잡아 제 2, 제3의 총알을 쏠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자 부검의로 나온 군의는 “총을 일곱발이나 맞고도 살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87년에 사망한 이이동의 경우 아버지가 지문채취와 부검 미실시,사체검안 및 현장검증 등에서의 의문사항을 들며 재수사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또 87년 박상구의 의문사에서는 농약을 먹고 병원에서 죽었다는 군부대의 설명과 달리 부대내에서 타살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우측 목 부근에 칼 자국이 있어 어머니가 손가락을 넣어보니 끝이 닿지 않았으며 목이 졸린 흔적이 역력했다.
  • ‘판문점 병사 내통’이라니(사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근무하는 우리 병사들의 북한군 접촉사실은 국민들에게 또한번 충격을 주고 있다. 미사일 오발에다 불발포탄 폭발,조명탄 사고에 이어 최전선 병사들의 ‘적과의 내통’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최근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 군관련 사고와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도 군기(軍紀) 해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걱정한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근무하는 장병들에게는 투철한 군인정신과 보안의식이 필수적이다. 이들이 북한군과 수시로 접촉하며 값비싼 손목시계를 선물로 받는가 하면 몰래 북쪽으로 넘어가 술까지 마셨다니 우리 군의 기강이 얼마나 흐트러져 있는지 짐작할 만한 일이다. 더욱이 북한 경비병들은 심리전의 특수훈련을 받은 ‘적공조’요원들로 알려져 있다. 우리 병사들이 이들과 접촉하면서 어떤 중대한 정보를 얼마나 주었는지 걱정스럽다. 군 관계자들은 공동경비구역 장병들이 북한 경비병들과 접촉하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로 그리 놀라워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 언제 어떤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공동경비근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얼굴을 익히고 지내는 것이 긴장을 완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정은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사의 엄격한 통제아래 이루어져야 하며 결과는 반드시 지휘계통에 보고되어야 한다. 병사들이 멋대로 북쪽을 오가며 적과 만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마디로 지휘체계나 안보의식이 엉망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한가지 걱정되는 것은 우리 군의 보안체제이다. 구속된 김모중사의 경우 지난해 7월부터 북쪽을 들락거렸고 부대 안에서도 몇차례 문제가 됐었는데도 보안계통에 전혀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지난 2월 귀순한 북한군 상위가 우리 병사들의 북한군 접촉사실을 진술했는데도 이에 대한 조치가 없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군 당국이 알고도 방치하거나 은폐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게 한다. 이 사건이 판문점에 근무하던 한 소대장의 의문사와 관련됐다는 의혹도 주목된다. 군 당국이 스트레스로 인한권총자살이라고 발표한 소대장의 죽음이 유가족들의 주장대로 북한 접촉사실을 숨기기 위한 타살이라면 여간 큰 문제가 아니다. 철저한 재조사로 정확한 사망원인을 밝혀야 할 것이다. 군의 생명은 군기이다. 군의 기강이 이처럼 흐트러져서는 튼튼한 국방이나 안보는 기대할 수 없다. 특단의 대책을 거듭 촉구한다.
  • 반론 보도문

    지난 11월 14일 “대학은사 납치 생매장” 제하의 기사에서 충남 H대 홍교수가 제자에게 살해당한 사건 보도에 대해 숨진 홍교수의 유가족들은 피해자와 살인 용의자는 잘 모르는 사이이고,용의자가 경찰에서 진술한 것처럼 동성애 관계는 절대 아니라고 주장했다.
  • 친일의 군상:16/金羲善(정직한 역사 되찾기)

    ◎상해 臨政에 ‘위장취업’/독립운동 진영에 타격/일본육사 졸업… 구한말군대 간부지내/독립운동 ‘길목’서 체포된뒤 변절/3·1운동후 임정가담… 1922년 재차 변절/1980년 국민장 서훈… 96년 재심서 취소 지난 96년 10월 黃昌平 당시 국가보훈처장은 국정감사 답변을 통해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徐椿 등 5명에 대해서 독립유공자 예우를 배제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유는 이들의 친일행적이 확인됐다는 것. 이에 앞서 재야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친일경력자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주장이 수 차례 제기돼 왔었다. 그러나 당국이 이를 공식 확인하여 해당자들의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 박탈’이란 서훈취소는 물론 연금지급 중단 등 당국의 각종 보훈혜택을 취소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예우 박탈대상자로 발표한 5명 속에는 金羲善(김희선)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을 거쳐 대한독립군 참의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과전투중 ‘사망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63년 내각사무처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포상할 당시 그는 훈장급이 아닌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보훈처의 공적 재심사를 거쳐 80년 그는 국민장(3등급,현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국민장이라면 柳寬順 열사나 임정요인급이 받은 등급이니 그의 독립운동 공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런 그가 서훈이 취소됐다면 친일경력이 문제됐다는 얘긴데 과연 진상은 무엇인가? 김희선(1875∼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호는 옥봉(玉峯)이다. 일본 육사를 졸업(11기)하고 귀국하여 한말 구한국군 육군참령(현 소령)으로서 시위기병대장,시종무관을 지냈다.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에 격분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그는 1910년 도산 安昌浩가 주도한 청도회담(靑島會談)에 참석하였다가 중국본토로 가는 도중에 일본 관헌에 체포돼 강제로 귀국당하였다. 독립운동으로 나선 첫 길목에서 좌절당한 셈이다. ○사이토총독 3차례 면회 이무렵 일제는 광범위한 회유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일병합’ 직후 일제는 조선내에서 그들의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펴나가기 위해 직업적 친일분자를 정책적으로 육성하였는데 여기에 그가 걸려들고 말았다. 1913년 2월8일자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에 따르면 그는 동년 2월4일부로 조선총독부 군수(평안남도 개천군수,고등관 6등)에 임명되었다. 1915년 5월18일자 ‘관보’에는 동년 5월12일부로 평안남도 안주군수에 임명된 것으로 나와 있다. 물론 그는 임명만 된 것이 아니라 실지로 두 곳의 군수직에 취임했었다. 일제는 김희선과 같은 변절자들에게 경력을 참작하여 각기 능력에 걸맞는 대우와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에게는 군수자리와 거액의 하사금이 내려졌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와 같이 변절한 申泰鉉은 간도(間島)방면에서 농장 경영권을 부여받았다. 그 대가로 독립운동가를 투항하도록 권유하는데 이용됐다. ‘사이토(齋藤實)문서’에 의하면 김희선은 1919년 8월부터 1921년말 사이에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3차례 면회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 수치는 친일파 尹德榮·李夏榮·尹致昊·申錫麟 등이 사이토를 면회한 횟수와 동일하다. 안주 군수 재직중 1919년 3·1만세의거가 터지자 김희선은 총독부 군수 신분으로 만세운동을 지원하다가 마침내 군수직을 버리고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였다. 그가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원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상하이로 탈출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3·1운동후 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군무부 차장 겸 육군무관학교 교장,군무총장 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또 1922년 1월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국가보훈처 발행) 그러나 그는 어떤 연유에선지 1922년경 두 번째로 다시 친일,변절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김희선은 아(我)정부에서 중(重)히 등용하여 우우(優遇,우대)하여 왔는데 은의(恩義)를 망각하고 변심하여 드디어 적에게 투귀(投歸,투항)하였다. 그 죄 사면(赦免)하기 어렵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관보격인 ‘임시공보’ 제2호(1922년 2월25일) 내용중 김희선 관련부분만 발췌한 내용이다. 그의 변절사실을 확인할만한 자료는 또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기사를 보면 그의 변절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파렴치한 배신이었던 모양이다. 기사내용중 일부를 옮겨보자.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 “병학(兵學)배운(김희선이 일본육사를 졸업한 사실을 지칭한 것임) 애국자로 이름높은 김희선은 총독부의 군수노릇 내버리고 반정(反正)하매 그 전과(前過)를 용서하고 그 지기(志氣)를 가상히 여겨 동지들이 그를 채용하여 군무차장(軍務次長)시켰더니 목욕시킨 돼지가 감귤맛을 못 잊어서…제 계집년 도망할제 왜놈에게 재항(再降)하고 귀화장(歸化狀,항복문)을 써 바쳤다.…3년(1919년부터 1922년까지 그가 임정에 참여했던 기간을 지칭함),냄새나는 송장놈을 차장(次長)시킨 책임자의 잘못이다.그 놈 욕해 무엇하리. 이런 놈은 죽은 개니 육시처참(戮尸處斬)할까 말까”(‘독립신문’,1922년 5월6일,제124호) 결국 그가 1920년대 초반 잠시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순수한 독립운동 차원이 아니라 일제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초창기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하다가 도중에 변절한 사례는 더러 있다. 그러나 김희선처럼 두 번씩 변절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두번째 변절한 이후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혀진 자료는 별로 없다. 그러나 일제가 그를 다각적으로 회유하려고 노력한 사실이나 임시정부에서 그의 변절사실을 이례적으로 관보·기관지에 게재,공개한 것으로 봐 그의 변절은 민족진영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1930년 ‘한일병합’ 20주년 기념으로 일본 천황이 조선내 친일파들에게 내린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그가 받은 사실로 봐도 그의 친일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이같은 친일행적이 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모두 언급돼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유공자의 행적에 조그마한 의문점만 있어도 서훈을 보류해온 보훈처가 그에 대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한 셈이다. 독립유공 공적으로 대통령표창(63년)에 이어 다시 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은 그는 96년 보훈처가 서훈을 취소할 때까지 30여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돼왔었다. 뒤늦었지만 보훈처의 ‘서훈취소’는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셈이다. 해방후 고향에 머물다가 월남한 김희선은 서울시 임시정부추진회 부회장,육군상이군인유가족회장 등을 지내다가 6·25 발발 후인 50년 9월29일 서울 근교 공릉(현 노원구 공릉동) 근처에서 사망했다. ◎사망일자에 얽힌 치졸한 사연/순국선열 유족 연금 지급/해방전 사망땐 손자까지 혜택/손자 金宗彦 연금수혜 노려 김희선 사망날짜 조작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과연 언제인가?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서류마다 제각각인데 모두 세가지 설이 있다. 63년 당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담당했던 내각사무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는 ‘1925년 3월 대한독립단 참의부에서 활동중 집안현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다. 80년도에 국민장(현 독립장)으로 훈격이 상향조정될 때 주무부서인 원호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도 사망일은 역시 동일하다. 그러나 89년 보훈처가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에는 그의 사망일이 광복 직전인 45년 7월6일로 나와있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후손이 세운 묘비에 적힌 것으로 여기에는 ‘1950년 9월29일 卒’로 나와 있다. 실제 사망일은 그의 묘비에 후손이 새긴 날짜다. 1987년에 출간된 ‘강서군지(江西郡誌)’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김희선의 사망일자가 이처럼 여럿인 이유는 보훈당국의 자료조사 부실에다 그의 손자 金宗彦(70)의 ‘장난질’ 때문이다. 현행 국가유공자예우법에는 해방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손자까지,해방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자식까지만 연금수령 자격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조부 김희선의 훈장에 대한 연금을 타기 위해 김희선의 사망일자를 조작한 셈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두 번씩이나 친일로 변절한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나 할까?
  • 국가유공자 의무고용 비율 낮춰

    ◎보훈처,법정 고용인원 3만여명으로 줄여 내년부터 건설업체의 국가유공자 의무 채용비율이 정원의 8%에서 5%,사무기계기기제조업은 7%에서 3%로 낮아진다. 국가보훈처는 30일 경영난을 겪고 있는 영세기업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현행 정원의 3∼8%인 국가유공자 의무고용 비율을 업종에 따라 1∼4%포인트 낮춰주는 등 57건의 규제업무를 연말까지 폐지하거나 대폭 개선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산업구조 변동에 맞춰 현행 23개로 나뉜 업종구분이 61개 업종으로 세분화되며 이 중 음식료품·섬유제품·조립금속제품 제조업 등 37개 업종의 의무고용 비율이 1∼4%포인트씩 낮아진다. 이에 따라 기업체에서 국가유공자를 의무적으로 고용해야 하는 법정인원은 현재의 18만5,067명에서 14만6,024명으로 3만9,043명으로 준다. 보훈처는 이와 함께 국가유공자 국립묘지 안장 신청,취업 희망신청서 제출 등의 구비서류를 폐지하는 등 44건의 규제를 폐지하고 13건을 개선했다. 구비서류 제출 의무가 폐지되는 민원신청의 경우 보훈처가 직접 구비서류를 챙겨업무를 처리하게 된다. 국가유공자 자녀의 중·고교 학년별 우선 취학 범위도 종전의 정원 내 8%에서 6%로 완화되며 국가유공자 및 유가족의 등록신청시 호적등본과 소득신고서 제출 조항 등 5건은 행정종합전산망이 구축되는 오는 2002년까지 연차적으로 폐지된다.
  • FBI 점술가 동원 수사 ‘망신’(뉴스 인사이드)

    ◎96년 공중폭발 TWA기 사고조사때 한여인 말만듣고 “테러범 소행” 단정/은폐위해 교통안전국 調査까지 방해 【워싱턴 崔哲昊 특파원】 첨단 과학수사를 자랑하는 미 연방수사국(FBI)이 점술가를 동원해 수사를 했다가 크게 망신당하고 있다. 그것도 미국 전체를 슬픔에 젖게 했던 지난 96년 뉴욕 롱아일랜드 부근 바다 상공에서 공중 폭발한 TWA기 사고 조사에서 그랬던 것으로 밝혀져 유가족은 물론 미국민들의 분노마저 사고 있다. 사고는 96년 9월 승객과 승무원 230명을 태운 TWA기가 뉴욕 케네디공항을 이륙한 지 10여분 뒤 갑자기 공중폭발을 일으켜 탑승자가 모두 숨진 사건으로,사고원인을 두고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테러범들이 부근 바다에서 유람선으로 위장하고 있다. 적외선 유도미사일로 폭파시켰다” “화물칸에 숨겨졌던 폭탄이 터져 발생했다”는 등 테러설이 주류였다. 또 느닷없이 “미 해군이 미사일 시험을 하면서 잘못 발사해 비행기를 추락시켰다”는 말까지 나와 해군이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2년여 동안의 조사결과비행기 자체결함에 의한 폭발,즉 연료계통의 배선과 전기적결함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 문제는 당시 가장 설득력 있게 나돌던 테러설의 진원지가 다름 아닌 FBI였고 점술가의 절묘한(?) 분석에 따랐다는 사실이다. FBI는 사고 직후 삼엄한 경비속에 한 여인을 사고기 잔해를 쌓아둔 격납고로 데리고 가 둘러보게 했는데 그녀가 바로 점술가. 그녀는 사고 주변을 둘러본 뒤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놀랍게도 “화물칸 가방안에 있던 폭발물이 터지면서 추락한 것”이라고 사고 경위를 그럴싸하게 진단하고는 “이는 명백히 테러범의 소행”이라고 단정했다는 것. 현재 FBI는 “당시 하급조사관이 상부에 허락을 받지 않고 한 행동”이라며 발을 빼고 있다. 그러나 상원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 FBI가 점술가를 동원한 사실도 문제이지만 점술가 동원을 은폐하기 위해 미국립교통안전국의 사고조사까지 방해했던 것으로 드러나 FBI를 더욱 곤궁에 몰아넣고 있다. FBI는 당시 사건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수사에 점술가를 종종 동원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사고조사를 맡았던 교통국의 칼스트롬은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면서 “그러나 우리는 사고조사를 제대로 했다”고 주장했다.
  • 피노체트 면책특권 불인정

    ◎英 최고 법원 판결… 스페인으로 보내질듯 【런던 AP AFP 연합 특약】 영국의 대법원격인 상원 법사위의 5인 재판부는 25일 칠레 전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면책특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이날 오후 2시(현지시간) 상고심 판결에서 3대 2로 지난달 피노체트의 면책특권을 인정한 고등법원의 판결을 뒤집었다. 이에 따라 지난달 16일 신병치료차 영국을 방문했다가 스페인 사법당국의 요청에 의해 영국 경찰에 전격 체포된 피노체트는 스페인 법정에 인도돼 살해와 고문·납치 등의 반인도적 범죄혐의로 재판을 받을 위기에 처했으며,영국은 미국과 칠레와의 외교적 마찰이 불가피해져 국제적으로 큰 파문이 예상된다.특히 이날은 피노체트의 83회 생일이었다. 이와 관련,잭 스트로 영국 내무장관은 오는 12월2일까지 피노체트를 스페인 법정에 인도할지 여부를 결정한다. 피노체트는 지난 73∼90년의 통치기간중 3,000여명의 대량학살과 고문·테러 등의 혐의로 지난달 16일 스페인 사법당국의 체포요청에 따라 영국경찰에 전격 체포됐었다. 한편 이날 의회 밖에서 판결 소식을 전해들은 칠레 군부독재의 희생자 및 실종자 유가족들은 “이번 판결은 세계의 모든 독재자들에 대한 승리로 생각한다”며 기쁨의 환호성을 올렸다.
  • 의문사 규명 특별위 만든다/金元吉 정책위의장

    ◎민주유공자 명예회복특별법도 추진 국민회의가 내년에 설치될 국가인권위원회에 수사권을 가진 특별위원회를 두고 의문사 진상규명에 나서는 방안을 적극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회의 金元吉 정책위의장은 22일 오전 당사에서 裵恩心 회장 등 농성중이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관계자들을 만나 이런 뜻을 밝히고,민주유공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도 이번 회기내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고 유가협 관계자가 전했다. 유가협 회원 30여명은 지난 4일부터 국회 앞에서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노숙 농성을 벌여왔으며,21일 오후부터 국민회의의 적극적인 법안 제정 추진을 요구하며 당사안 복도에서 농성을 했다. 이들은 21일 金의장을 면담한 뒤 당사안 농성을 풀었다. 그러나 인권위에 수사권을 주는 문제는 그동안 이에 반대해 온 법무부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 의문사 규명 특별법 제정 절실/任昌龍 기자·특집기획팀(오늘의눈)

    의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은 끝내 어둠의 역사 속에 묻히고 말 것인가. 새정부 들어 의문사 관련 유가족들과 시민단체 등이 그토록 기대했던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 무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金鍾泌 총리는 13일 열린 국회 대정부질의 답변에서 의문사 문제는 시효가 지나 재수사는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지난 11일 열린 국민회의 확대간부회의에서도 ‘민주화 관련자 명예회복 및 예우에 관한 법’ 제정은 추진하되,의문사 진상규명 문제는 내년에 설치될 국가인권위원회에 넘기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인권위는 그 지위나 수사권 확보 등을 놓고 법무부,국민회의,시민단체들 간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유가족들은 이때문에 수사권이 보장될지 의문인 인권위에 의문사 문제를 넘겨서는 안되며 특별법을 만들어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안기관 전·현직 관계자 조사가 불가피한 작업을 수사권 없이 한다는 것은 ‘진상규명을 포기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의문사는 과거 독재정권 시절 적지않은 사람들의 죽음이 권력에 의해 은폐·조작되며 사회문제화되어 왔다. 지난 70년 이후 유가족들과 인권단체 등이 공식 제기한 의문사만 해도 40건이 넘는다. 그러나 진상이 규명된 것은 거의 없다. 유가족들은 군사독재하에서 숨죽여 살며 여기까지 왔는데 새정부마저 시효가 끝나 조사할 수 없다면 의문의 죽음은 영원히 의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허탈해하고 있다. 남아공은 수사권을 가진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설치,권력에 의해 자행된 고문·살해범죄의 진상을 낱낱이 밝혔다. 그리고 화해차원에서 범죄자들을 사면해주었다. 이는 진정한 화해는 진실을 바탕으로 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우리에게도 특별법이든,인권위든 의문사 진상규명에는 수사권이 꼭 필요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유가족들은 지난 4일부터 국회앞에 천막을 쳐놓고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자식의 억울한 죽음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 아버지들이 추위에 떨며 ‘진실의 햇볕’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도 범죄자들을 진정용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 日軍 학병서 광복군까지(항일독립군 장정따라 6천리:上)

    ◎臨泉 軍訓地서 ‘광복꿈’ 회상/銅山路 日 부대터에 中軍병영/연병장·단층막사 ‘옛 그대로’/끌려간 日 병영탈출 감행 뿌듯 한국 독립유공자협회 회원들이 조국 광복을 꿈꾸며 젊은 날 이역만리에서 피 흘렸던 중국땅을 찾았다.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韓光班) 출신 광복군 초급장교들로 흔히 광복군 마지막 세대로 분류된다. 일본군의 학병으로 끌려왔다가 탈출,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들이 항일투쟁의 족적을 찾아 나선 것은 광복의 참뜻을 지금의 시대 정신으로 승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중국 중부 장쑤(江蘇)성 쉬저우(徐州)에서 쓰촨(四川)성의 충칭(重慶)까지 장장 6,000리길. 일본군 탈출부터 광복군 훈련장,항일 지하공작 거점 등 열하루간 동행했던 이들의 답사 행로를 3회에 나눠 소개한다. ‘마지막 독립군’들의 첫 현장 답사는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시작됐다. 베이징(北京)서 814㎞. 기차로 8시간. 54년전에 거쳐온 길을 더듬기 위해 1시간 남짓한 비행기편도 마다했다. 1944년 2월초. 평양을 출발,기차에 강제로 실려 닿은 곳은 일본군과 중국군이 대치하던 최전방 쉬저우. 7월까지 쉬저우와 슈저우(宿州),푸양(阜陽)일대 전선에 배치됐던 이들은 그해 3월부터 7월까지 하나둘 일본병영을 탈출했다. “일본군이 되어 동포들의 가슴에 총을 겨누느니 차라리 탈출하다 죽기로 했다”고 50여년전 결의를 회상했다. “상당수는 우선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를 찾아가기로 했었습니다” 회고담은 이어졌다. 당시 쉬저우 주변에선 일본군이 밀집해 있었고 중국으로 끌려온 ‘조선학병’ 3,000여명의 대부분도 부근에 배치됐다. 때마침 텐진(天津)에서 시작된 진푸선(津浦線)철로가 쉬저우를 지나 상하이(上海),푸둥(浦東)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노 광복군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일본군은 철도와 주변을 점령,광대한 중국대륙을 ‘선’과 ‘점’으로 연결하는 전략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끌려갔던 학병들은 대부분 철도역 주변에 주둔해 있었단다. 밤을 틈타 3m가 넘는 철책을 넘었다. 짧게는 2∼3일에서 일주일이상을 풀잎이나 과일로 연명하며 낮에는 수수밭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들판을 달렸다. 대개는 중국 유격대와 조우했고 당당한 광복군이 되었다. 44년 6월 ‘宿縣부대’ 제4중대에서 탈출했던 金柔吉 부회장과 全履鎬 회원은 슈저우역에서 2㎞쯤 떨어진 곳을 찾아 헤맨끝에 당시의 탈출지점을 찾아냈다. 지금은 ‘宿縣 付小樓 村庄’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2∼3층의 주택들이 병영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에 앞서 5월에 같은 부대 보병중대에서 津浦線을 넘어 탈출했던 石根永 회원도 슈저우에서 50㎞ 떨어진 구쩐(固鎭)역부근에서 병영터를 찾아냈다. 일본군은 철도가 파괴되거나 공격받으면 주변의 중국인을 몰살시켜 보복했다고 악몽같은 50년전을 떠올렸다. 중국 유격대원이 생포되기라도 하면 총검술 연습의 표적으로 삼아 살해하기도 했단다고 치를 떨었다. 대부분의 병영들은 푯말하나 남지않고 촌락 등으로 바뀌는 등 사라졌지만 尹慶彬 회장과 金永錄 회원이 탈출했던 쉬저우시 통산로(銅山路)의 부대터는 지금도 ‘중국 인민해방군’ 주둔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부대안을 돌아본 尹慶彬 회장 등은 연병장앞의 3층 본부 건물,검은 벽돌과 돌로 지어진 단층 막사가 옛 그대로라며 회상에 젖었다. 높은 천정의 막사안에는 시멘트바닥에 철로 만든 2층 침대 10여개와 간단한 사물함이 눈에 띄었다. 張俊河 선생 등과 함께 尹회장 일행 4명이 44년 7월7일. 일본군의 이른바 ‘중국침략 기념일’로 경계가 느슨해 틈을 타 ‘취침전 15분의 자유시간’을 이용했다. 일본군을 벗어난 이들은 이틀밤을 앞만 보고 달리다 먼저 탈출해 중국 유격대에 와 있던 金俊燁(전 고대 총장)씨와 해후했다. “중국의 여러 유격대에 흩어져 있던 탈출자들은 린촨(臨泉)로 모였지요. 린촨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광복의 꿈을 키워 대일항전의 장정(長征)을 시작했습니다” 노 독립군의 회고는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따라 어느새 50년전의 린촨에 닿고 있었다. ◎독립유공자협회/항일전 참가 175명이 결성… 현 회원 220명 한국독립유공자협회는 광복회와 함께 항일투쟁의 일선에 섰던 독립운동가들의 양대 산맥. 81년 독립운동가 175명에 의해 발족됐다. 초대회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趙擎韓 선생. 한국전력 사장을 지낸 朴英俊 회장에 이어 尹慶彬 회장이 3대 협회를 이끌고 있다. 회원은 220명. 광복회가 독립지사의 유가족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비해 항일투쟁을 벌였던 본인만이 가입할 수 있다. 회원 모두 건국훈장을 받았다. 일제말기 학병 등으로 중국전선에 끌려갔다가 탈출,광복군에 합류했던 독립운동의 마지막 세대가 협회의 주축. 金九 선생을 보좌,충칭(重慶) 임시정부서 일했던 마지막 생존자들이기도 하다. 대부분 70대후반에서 80대초반. 색이 바라가는 독립정신을 드높이기위한 연구,탐사 등 학술사업과 사회사업,독립운동 사적에 대한 복원운동을 벌여왔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이 되는 내년 충칭시 광복군 총사령부건물 표지석 건립작업 등 후세에게 민족애국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각종 사업을 추진중이다. ◎광복군/임정 정규군… 美와 對日 공동작전 활약 광복군이 정규군으로 발족한 것은 40년 9월. 무력으로 조국을 되찾겠다며 중국으로 온 젊은이와 일본군에 끌려왔다가 탈출한 학병이 주축이 됐다. 총사령관은 李靑天 장군이었고 참모장 李範奭 장군.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 지하활동 등 갖가지 군사활동을 감행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였다. 3개의 직할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李範奭 장군이 지휘하는 2지대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을 거점으로 일본군 전력을 교란시키는 활동에 주력했다. 최전방에서 일본군과 필사의 전투는 3지대의 몫. 안후이성 푸양에 본부를 두고 산둥성(山東省) 등 화북지역에서 지하공작 활동도 병행했다. 44년부터는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들이 합류하면서 미국 첩보기구인 전략사무국(O.S.S)과 함께 일본군에 결정타를 가하기 위해 한반도침투 등 특수공작을 준비하기도 했다.해방직전 광복군은 700여명. 광복이 될 무렵에 중국에 거주하는 교포들로 30만여 군병력을 조직하는 계획에 착수하기도 했다. ◎임천사관학교/日軍 탈출한 한국인 광복군 간부 양성소 안후이성(安徽省) 린촨(臨泉)에 있던 ‘광복군 사관학교’. 더 정확히 말하면 44년 7월 린촨 중국 중앙군관학교 제10분교안에 설치됐던‘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일명 한광반(韓光班)’. 중국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본군서 탈출한 한국인을 광복군 간부로 양성하던 곳이다. 44년 7월에 들어온 첫 입학생들은 48명. 33명은 대학졸업후 일본군으로 징병돼 중국전선까지 끌려왔다가 탈출한 학병. 15명은 조국광복을 꿈꾸며 중국으로 건너왔던 애국청년들. 5개월 과정을 마친뒤 白正甲 등 25명은 6,000리 길을 걸어서 쓰촨성(四川省)충칭(重慶)의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본류에 합류한다. 나머지 8명은 최전방 안후성에 남아 정보수집 등 대일투쟁을 벌인다. 25명중 尹慶彬은 임시정부 경위대장으로,鮮于鎭은 金九 선생비서로 白凡 선생을 최후까지 보좌하게 된다. 또 張俊河,金俊燁,金柔吉 등 일부는 한·미군사협력으로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가 한반도진입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는다. 현재 한광반 첫 수료생 가운데 국내엔 11명이 생존해 있다.
  • ‘23년간 묻힌 인혁당 진실 밝히자’/진상규명 대책위 발족

    천주교 인권위원회(회장 金亨泰)는 9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가톨릭회관 강당에서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공동대표 李敦明 文正鉉) 발족식을 가졌다. 李공동대표는 “인혁당사건은 朴正熙 군사정권이 정권 연장을 위해 정보기관을 동원,무고한 시민을 고문해 조작한 사건”이라면서 “지난 23년간 묻혔던 진실을 밝히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고 밝혔다. 대책위는 재심청구 등 진상규명을 위한 법적 대응과 함께 추모비 건립,다큐멘터리 영상물 제작,책자 발간 등 진실 알리기에도 힘을 쏟을 계획이다. 인혁당 사건은 한일회담과 유신헌법을 둘러싸고 학생시위가 격화되던 지난 64년과 74년 두차례 발생한 사건으로,당시 정권은 인혁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시위를 배후조종,체제전복을 기도한 지하조직이라고 발표했었다.관련자 8명은 군사재판을 받고 사형당했지만 이 사건을 둘러싸고 국내외에서 고문 조작 의혹이 계속 제기돼 왔다. 발족식에는 서울신문사 金三雄 상무 겸 주필,柳鉉錫 경실련 대표,金勝勳 신부,金奉雨 민족문제연구소장 등과 희생자 유가족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 어머니의 한/한충목 열사범추위 집행위원장(굄돌)

    20년전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절규하며 산화한 청년 전태일이 있었습니다. 87년,‘독재 타도,호헌 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이한열 군이 직격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이렇게 죽어간 꽃다운 청춘이 430명. 자기 한 몸의 안락보다도 모두 더불어 잘사는 사회를 꿈꾸다가 지금 우리와 함께 할 수 없게 된 이들을 우리는 열사라 부릅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98년 스산한 초겨울,여의도 국민회의 당사앞에선 먼저 간 아들·딸보다 더 오래동안 싸우고 있는 어머님·아버님들이 ‘민족민주유공자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 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무기한 천막농성에 돌입하셨습니다. “살아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올해 안엔 특별법 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국민의 정부’의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유가족회장단을 초청한 자리에서 특별법이 정기국회에서 통과되도록 정부와 여당에 적극 협력할 것을 지시하겠다고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법안이 아직 국회 법사위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가족의 가슴은 한번 더 무너져내립니다. 김대통령은 지금 제2의건국 즉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에 모든 국민이 함께 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나라가 바로서려면 민주화를 외치며 스러져간 분들에의 올바른 역사적 평가,의문사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 그리고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분들 가슴에 맺힌 한과 억울함이 법제정으로 씻기리라고 여기지는 않지만, 특별법 제정은 우리 역사와 나라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 될 것이며 죽은 자식과 살아 있는 어버이들의 한맺힘을 푸는 소중한 시작이 될 것입니다.
  • 민주유공자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 촉구/유가협,무기농성 돌입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회원 30여명은 4일오후 국회 앞에서 민족민주유공자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유가협은 성명서에서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과 범법자의 굴레를 벗지 못한 민주유공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라며 ‘법 제정이 될 때가지 무기한 철야농성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 관례에 묵살된 민주화 공로/장준하 선생 금관문화훈장 추서 무산

    ◎정부 “잡지공로자엔 ‘은관’이 최고훈장”/가족들 거부… 상훈행정 난맥상 드러내 사상계 발행인 고 장준하씨에 대한 금관문화훈장 추서가 무산됐다. 정부는 지난 27일 국무회의를 열고 장씨의 훈장건을 의결할 예정이었으나 훈격을 둘러싼 유가족의 반발로 안건 상정조차 하지 못했다.이 문제가 불거진 것은 장씨 유족들이 은관문화훈장은 고인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거부했기 때문.정부는 그러나 고인에 대한 훈장 추서는 잡지에 기여한 공로에 국한된 것인 데다 잡지 공로자에 대한 최고훈장은 은관이라는 점을 들어 가족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 관행과 관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에 따라 오는 31일 잡지의 날로 예정된 장씨에 대한 훈장수여는 사실상 어렵게 됐다.정부측은 훈장상신의 효력은 유효한 것이라며 여운을 남기고 있지만 가족들이 은관문화훈장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장씨에 대한 훈장추서는 이번이 두번째.지난 91년 광복절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광복군에 투신,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공적이 평가된 것이다. 그러나 자유당정권을 거쳐 3공화국까지 사상계를 통해 민주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로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사상계는 50년대 초반부터 70년까지 지성인의 사랑을 받던 대표적인 잡지. 53년 4월 창간돼 70년 5월 당시 김지하의 ‘오적’을 게재한 것과 관련,폐간되기까지 모두 205권을 냈다.50년대 후반에는 정치 및 현실에 대한 심도 있는 비판을 가해 4·19의 정신적 배경이 됐으며 5·16 이후와 3공화국때는 군정연장 및 한·일수교에 반대한 것은 물론 언론탄압에 맞서 민주사상 고양에 앞장서 왔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잡지계 및 장씨와 행동을 함께 했던 민주인사들은 정부가 형식논리에 치우쳐 은관훈장을 고집하는 것은 인색한 처사라며 아쉬워하고 있다. 한편 이번 훈장추서 무산은 96년에 있었던 소설가 황순원씨의 은관문화훈장 거부와 이효재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의 국민훈장 석류장 거부와 더불어 상훈행정의 난맥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게 됐다.
  • 민주열사 열전:13/前경원대생 宋光永(정직한 역사 되찾기)

    ◎‘학원안정법 음모’ 온몸 항거 분신/학생운동 씨 말리려는 악법 제청 항의 선봉에/광주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 불꽃 확산 시도 “시상에 죽은 내 아들 광영이를 왜 이리도 무서워한당가.제 몸에 불을 지르고 뛰지도 못하는디.왜들 겹겹이 둘러싸고 문상도 못오게끄럼 막는당가.광영이 몸이사 이제 싸늘하게 식었지만 그 맴이사 어디 식겠어.어림 반푼 없는 소리제.이 에미 가슴 이리 불붙는디.그 맴이 어찌 식겠어…” 85년 10월 21일 서울기독병원 영안실.아들의 주검을 앞에 놓고 한 어머니는 이렇게 울부짖고 있었다.34일 전 학교에서 분신한 경원대 법대생 宋光永의 어머니 이오순 여사(당시 59세·94년 작고)였다.경찰은 한달 이상 1,000여명의 병력을 동원,병원을 두겹 세겹으로 에워싸고 출입자를 통제했다.그러나 그토록 삼엄한 경비와 장례 소동까지 불러온 송광영의 분신은 단 한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언론에 단 한줄도 보도안돼 그는 85년 9월 17일 오후 2시30분쯤 경원대 운동장에서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했다.그날은 학생총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비로 연기된 상태였다.그러나 그는 시위를 주도하며 몸에 불을 붙였고,뛰어가며 외쳤다.“학원안정법 음모 철회하라”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나라” 인근 성남병원과 서울대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서울기독병원으로 옮겨져 한달 이상 사투를 벌이다 끝내 숨졌다. 그가 온몸이 불에 휩싸인 채 몇번씩 쓰러졌다 일어서며 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의 희망이었다.그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광주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의 불꽃을 확산시키려 했다.광주민중항쟁은 5공화국 내내 꺼지지 않는 민주화의 불씨로 남아 있었다.군사정권의 강요된 침묵을 깨고 80년 5월 30일 서강대생 김의기가 최초로 광주민주화항쟁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 투신했다.그의 투쟁은 노동자 김종태의 이화여대 앞 분신과 또 다른 노동자 홍기일의 전남도청 앞 분신으로 이어졌다. 대학가에서도 5공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시위가 점차 가열됐다.위협을 느낀 군사독재정권은 아예 학생운동의 씨를 말리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바로 ‘학원안정법’ 제정 추진이다.골자는 학생의 좌경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시위학생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하고 일정 장소에 수용시켜 6개월 이내의 선도교육을 받게 한다는 것이었다. 독재정권은 비밀리에 법안을 마련해 국회에서 전격적으로 통과시키려 했다. 그러나 미리 그 내용이 새어나와 한 일간지에 폭로되면서 반대여론이 들끓자 일단 유보됐다.그럼에도 정권은 당시 손제석 문교부장관의 담화문을 통해 ‘학원소요가 계속되면 학원안정법을 연내에 제정하겠다’며 관철의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송광영은 어떻게 해서든지 학원안정법 음모를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분신의 가장 큰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그는 유서인 ‘양심 선언’에서 ‘결코 총칼이나 학원안정법 따위의 악법으로 복종을 강요할 수 없음을 엄중히 경고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는 70년대 노동운동의 싹을 틔웠던 전태일열사를 가장 존경했다.전태일에 대해 “소외된 민중의 대변인,억눌린 사회에서 참된 인간상을 제시해준 인물”이라고 항상 말했다고 한다.어려서부터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온 그는 소외된 삶들의 아픔을 나눌줄 알았고 그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했다.중학교를 졸업한 뒤 평화시장 재봉보조원 생활,신문팔이,Y셔츠 장사,돗자리 장사 등 닥치는 대로 밑바닥 삶을 이어갔다.재봉보조원 시절엔 청계피복노조에 적극 참여했다.성격이 활달하고 발이 넓었던 그는 동료들을 취직시켜 주는 일로도 바빴다. 그는 81년 형들이 학교를 마치고 자리를 잡고 나서야 대학에 가기 위해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거기서도 동료학원생이 교통사고를 당하자 학원을 10일씩이나 빠지면서 사고차를 찾아내 보상금을 타 가족들에게 전해주고 초상까지 치르게 해줬다.또 학원에서 탄 장학금을 집에 오는 길에 구두닦이 소년에게 줘버린 자신을 호되게 야단치는 어머니에게 “그래도 우리는 집도 있는데”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전태일 열사 가장 존경 송광영은 84년 27살의 나이로 경원대 법학과에 입학한다.법학을 선택한 것은 고시에 합격해 어머니에게 효도하고,법관이 돼 사회의 부정부패와 모순을 개선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시반에 들어가면 장학금을 탈 수 있는 것도 한 이유였다.그러나 그해 가을 어용교수 퇴진시위를 주도하면서 학생운동에 깊이 빠지게 된다.‘실존주의철학연구회’ ‘경제문제연구회’ 등의 학습모임을 만들어 이끌었다.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만둘 것을 설득하며 생활비를 끊어버리자 교내에서 구두를 닦으며 학교에 다녔다. 그는 학원악법이 통과되면 분신하겠다는 말을 했으나 후배들은 믿지 않았다.그러나 전세금을 빼 학교 등록을 못하던 친구를 등록시키고 분신 열흘 전에는 집에 들러 어머니에게 “호적을 정리하러 왔다”고 말하는 등 마지막 삶을 정리해 나갔다.누나 송영숙씨(49)는 “호적을 정리하려고 한 것은 그의 분신으로 형제들이 피해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회고한다. ‘…난자당하고 처절히 유린된 순백의 종이들이 책상 위에서 울고 있다/이렇게 또 하나의 밤이 사라져가는데/여자는 이제서야 피곤한 육신을 벗어제치고 있다/아! 그날 아침은 교회 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분신 얼마 전 써놓은 자작시 ‘에필로그 85’이다.송광영열사는 숨지는순간 그가 그토록 듣고 싶어하던 ‘민주의 종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연보 ▲1958:광주에서 출생 ▲74년:서울 경신중 졸업 ▲75∼76년:청계피복노조 활동 ▲82년: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 ▲84년:경원대 법학과 입학 ▲84년:실존주의철학연구회 만듦 ▲85년:경제문제연구회 만듦 ▲85년:9월17일 “학원안정법 음모 철회” 외치며 분신 ▲85년:10월21일 서울기독병원에서 운명 ◎학원안정법 파동/5共 ‘시위학생 선도교육’ 등 골자 立法 기도/야당·재야 “제도적 폭력” 강력 반발 저지시켜 광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점차 뜨거워지던 85년 여름,미국의 개입 의혹을 추궁하는 반미 시위가 거센 가운데 공안기관 주도로 중요한 음모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이른바 ‘학원안정법’ 제정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한 일간지가 공식 발표를 2주 앞두고 ‘학원안정법’ 음모를 폭로했다.시안 내용은 삼청교육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학원소요 등과 관련,형사처벌을 받아야 할 대상자들을 형사처벌 대신일정한 장소에 수용시켜 6개월 이내의 선도교육을 시킨다는 것이 골자였다.대상자 선정은 문교부에 준사법적 성격의 ‘학생선도교육위원회’를 설치해 하도록 했다. 교육을 거부하거나 교육장소를 무단 이탈하는 경우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해 학생들에게 극도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일부 좌경·용공학생들을 격리시켜 학원의 오염과 소요의 본거지화를 막고 선도교육을 통해 건전한 학교생활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고 취지를 밝혔다.하지만 야당과 재야단체들은 학원에 대한 제도적 폭력이라고 즉각 반발했다.대다수 국민도 우려를 나타냈다. 반발이 점차 거세지고 여야 관계가 극도로 경색되자 정부는 ‘국민적 공감대가 아직 미흡하다’며 법 제정을 일단 유보했다.그러나 당시 이원홍 문공부,손제석 문교부 장관은 소요가 계속될 경우 언제라도 법안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하지만 학원안정법은 결국 만들어지지 못했다. ◎분신대책위 김해성씨/“당국 협박속 유가족 설득/분신의 의미 찾고자 최선” 송광영 열사의 가족과 몇몇 민주인사들은 그의 입원 치료와 장례문제로 적지않은 고통을 겪었다.그가 입원하자 문익환 목사를 위원장으로 한 ‘송광영 동지 분신구명대책위원회’가 구성돼 진상규명과 모금활동을 펴나갔다.치료기간중 상태가 좀 호전되기도 했지만 경찰의 철저한 통제속에 가족 이외에는 면회가 금지됐다. 대책위 집행위원장이던 김해성 성남주민교회 전도사(38·현재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집 소장)가 얼굴에 붕대를 감고 환자 시늉을 하며 겨우 2차례 송광영을 면회했다. “가족들을 설득해 당국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지 말고 분신의 진상과 의미를 찾자고 했지요.비슷한 상황을 겪은 다른 가족들과 달리 그의 가족들은 저희와 뜻과 행동을 같이했습니다” 김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송광영이 입원했던 서울기독병원은 79년 여공들이 독재정권과 독점자본에 저항했던 YH사건의 YH무역 건물이었다.송광영이 역사적 민주투쟁의 산실이었던 그곳에 다시 경찰을 불러모아 영혼을 태웠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송광영이 숨지자 대책위는 장례위원회로 바뀌어 사회장을 준비했다.그러나 경찰은 장례 전날 문목사 및 이해학 목사,김소장 등 대책위 관계자들을 모두 연행한 뒤 가족들에게 간결한 장례를 강요했다.또 일방적으로 시신을 강원도 춘성에 매장하려고 했다.그러나 누나 송영숙씨(49·대한생명 근무)가 스카프로 목을 매고 영구차 바퀴 앞에 눕는 등 가족들이 격렬히 저항했다.영구차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병원을 출발할 수 있었다.그는 횃불을 밝힌 가운데 금촌기독묘소에 안장됐다.
  • “의문사 진상규명 최선”/金 대통령 유가협인사 청와대 초청 오찬

    ◎“이번 국회서 명예회복 등 적극 추진”/박종철·이한열군 부모 등 8명 참석 金大中 대통령이 20일 청와대에서 취임후 처음으로 ‘전국 민족민주운동 유가족협의회’인사들과 오찬을 함께 했다.민주화 운동과정에서 자녀를 잃었음에도,‘천덕꾸러기’ 비슷하게 취급당해온 인사들이 대통령의 초청을 받은 것이다.이번 정기국회에서 ‘의문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제정을 건의하기 위해 이들이 요청해 이뤄진 것이지만,만남 자체가 의미있는 행사였다는 게 朴仙淑 청와대부대변인의 설명이다. 오찬에는 8명이 참석했다.李韓烈군의 어머니 裵恩心씨를 비롯,朴鍾哲군의 아버지 朴正基씨,姜慶大군의 아버지 姜珉祚씨,全泰壹군의 어머니 李小仙씨와 李海東 목사,李昌馥 전국연합 상임의장 등이다.이들은 감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강민호군의 어머니 金惠洙씨와 李小仙씨의 경우는 金대통령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연신 눈시울을 훔쳤다. 金대통령은 “나도 어려움을 겪었지만 민주주의를 위해 생명을 바치고 박해를 당한 여러분들의 거룩한 희생이 없었더라면 민주주의가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을 토로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그러면서 “의문사 진상규명 등으로 고귀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이들을 위로했다.또 “우리 국민들이 민주화를 위해 숨진 희생자의 거룩한 정신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며 “여러분들도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조국통일을 앞당기는 데 협력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어 裵恩心씨와 朴正基씨,李昌馥씨의 건의가 이어졌고 金대통령은 의문사(42명)와 유가협회원(400명)현황을 물었다.이들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이번 정기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해 줄 것과 현재 광주묘역이 50기로 비좁아 제2의 묘역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金대통령은 “할 수 있는 일을 다할 것”이라며 “국회에서 명예회복이 될 수 있도록 청와대와 여당이 협력해서 추진하겠다”면서 배석한 李康來 정무수석에게 적극 검토를 지시했다.
  • 39쇼핑 사장 자살 결론/부검결과 타살흔적 없어

    39쇼핑 사장 朴京洪씨(39) 변사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용산경찰서는 15일 시신부검 결과 朴씨가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경찰은 이날 오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朴씨의 유가족과 유가족측이 요청한 의사 2명이 입회한 가운데 부검한 결과 朴씨의 직접 사인은 추락 당시 충격으로 인한 심한 장기손상이며 타살로 볼 만한 상처는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