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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청준 선생 노모곁에 묻혀

    지난달 31일 타계한 소설가 이청준(69)씨의 노제(路祭)가 2일 오후 고향인 전남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 마을회관 앞에서 열렸다. 이날 노제에는 유가족을 비롯해 전국 최초로 문학관광특구로 지정된 ‘문림(文林)’ 장흥을 대표하는 한승원, 송기숙, 장찬홍, 이승우, 김영남 등 문인들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켜봤다. 마을 주민들은 분향소 주변에 나와 고인을 기다렸고, 장례 행렬이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부인 남경자씨와 외동딸 은지씨를 위로하기도 했다. 노제가 시작되고 선생의 고향 친구이자 동료인 소설가 한승원(69) 추모위원장이 하얀 종이에 먹물로 쓴 조사(弔詞)를 읽어 나가자 분향소 앞에 모인 유가족과 문상객 사이에서는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한 위원장은 조사에서 “이지적이고 정직한 선생은 세상을 문명비평적인 시각으로 통찰하고 조용히 작품을 쓰면서 후학들에게 좋은 소설을 쓰는 전범을 보였고 천재이면서도 오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글을 쓰는 근면한 작가였다.”고 회고했다.“우리는 선생을 매장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니고 선학동에서 영원을 사는 선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당신은 저 태고의 신선들처럼 자기 시간의 한계를 극복한 문학으로써 영원을 살게 된 신화 그 자체입니다.”라고 이어갔다. 선생의 문인 후배인 이명흠 장흥군수와 김영남 시인이 각각 추모사와 조시(弔詩)를 읽어 내려갔고 선생의 유가족을 대표해 조카 이양래씨가 감사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어 제주민요제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지선씨의 판소리 ‘쑥대머리’와 장흥가무악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김덕숙씨의 가무가 펼쳐져 선생의 마지막 가는 길을 기렸다. 노제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분향소와 선생의 생가를 방문했으며 선생의 시신은 마을 인근 선생의 노모가 묻힌 곳에 함께 묻혔다.장흥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전우가 묻힌 유엔공원 보니 가슴 뭉클”

    “전우가 묻힌 유엔공원 보니 가슴 뭉클”

    6·25전쟁때 참전한 노르웨이의 ‘노병’들이 55년 만에 부산에 있는 전우의 묘소를 찾았다. 요한 브룬 예비역 소장을 단장으로 한 노르웨이 참전용사 5명과 현역 군인, 유가족 등 33명은 21일 오전 2300명의 유엔군 묘소가 있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방문, 노르웨이 기념비와 유엔군 전몰용사 추모명비 등을 둘러봤다. 6·25 당시 유엔군 의료지원단으로 참전했던 이들은 귀국 55년 만에 유일한 노르웨이군 전사자인 트베이트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헌화했다. 동두천에서 6개월간 간호사로 근무했다는 캐리 롤 클렙스타드(85·여)는 “55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아 전우가 묻힌 유엔공원을 보니 정말 가슴이 뭉클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방문단에 포함된 노르웨이 현역군인 5명은 6·25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을 전수받기 위해 노병들과 동행했다. 이들의 부산방문은 6·25 발발 58주년을 맞아 노르웨이 국방부와 참전용사회가 올해를 ‘한국전 참전용사를 위한 기념의 해’로 지정,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기 위해 마련했다. 이들은 이날 오후 영도구 태종대에 있는 6·25 의료지원단(5개국) 참전기념비도 참배했다.6·25때 노르웨이는 의료지원병 623명을 파병했다. 트베이트는 전투 중에 숨져 유엔기념공원에 안치됐고 2명은 고국으로 돌아간 뒤 숨졌다. 허남식 부산시장은 참전용사들과 오찬을 함께 하고 기념품을 전달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기고] 호국보훈과 진정한 촛불의 의미 / 이봉춘 서울지방보훈청장

    [기고] 호국보훈과 진정한 촛불의 의미 / 이봉춘 서울지방보훈청장

    얼마전 제2연평해전 기념식이 정부 기념행사로 격상되어 열렸다. 죽음으로 조국을 지켜낸 자식과 남편이 제대로 대접 받지 못했던 것에 섭섭했던 유가족들도 뒤늦게나마 국가가 관심을 가져주어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는 것을 보았다. 평생을 한으로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좀더 빨리 마음을 쓸어줄 위로를 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 너무 무관심하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당시 행사장에는 연평해전 사진전시회가 마련되었다. 역사적 현장을 담은 사진과 그날의 참상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참수리호를 보면서 가슴 한편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교전이 있던 그날은 2002년 월드컵 3,4위전이 열리던 날로, 우린 아무 걱정 없이 응원준비에 몰두하며 경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날 우리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승리를 염원하며 열광할 수 있었던 것은 한쪽에서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켜낸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히 여기는 것들, 하루의 일상이라든가 계획하는 미래의 꿈 등, 이 모든 것들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간단한 세상살이의 논리를 잊고 그저 나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기념식이 거행되던 날, 또다른 한쪽에선 촛불집회가 진행되었다. 촛불집회는 국민의 민의를 올바로 표현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한 계기가 되었고, 대통령의 독단을 막는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의 평화적 시작과 달리 시위하는 시민과 진압하는 경찰 사이에 마찰이 생겼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인터뷰를 보며 과연 “어느 쪽이 더 많이 다치고 또 누가 먼저 공격을 가했는지가 중요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모든 국민들의 뜻은 광우병 걸린 쇠고기가 아니라, 품질 좋은 쇠고기를 먹고 우리의 건강을 지키려는 것이다. 건강한 몸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것일 게다. 건강한 국민, 행복한 국민이 많은 나라가 곧 잘사는 국가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의 최종 목적은 잘사는 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그마한 균열이 커다란 댐을 허문다. 성곽을 둘러싼 전투에서도 한쪽 성문이 뚫리면 결국엔 전체 성이 무너지고 만다. 반대로 작은 힘이 모여 큰 것을 이룰 때도 많다. 모든 국민들이 경험하고 기억하는 일로 IMF 외환위기 때의 금 모으기 운동이 있다. 전 세계인들이 모두 놀란 일로, 국가적인 위기에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오로지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가 되어 위기를 극복하였다. 작은 힘이 모여 기적을 만든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다시 한번 작은 힘의 위대함을 보여주어야 하는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세계 속에 우뚝 서는 선진 일류국가 건설이 우리의 최종 목적임을 되새기며, 그 길을 위해 지금 촛불의 의미를 다시 되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난 6월 호국보훈의 달 동안 현충일 기념행사와 각종 추모제, 참전행사를 거행하면서 새삼 조국의 소중함을 되새겨보게 되었다. 좀더 좋은 세상을 누리지 못하고, 그저 후손에게 발전된 조국을 물려주기 위해 희생한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느끼며 새로운 각오를 해보았다. 나라가 침몰할 때 가라앉는 배를 건지기 위해 바다로 자신을 던지며 희생하신 분들이 세워놓은 이 나라를 생각해보면서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지금 당장 내 것을 앞세우는 마음보다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하는 마음들이 모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망들이 모여 좀 더 큰 숲을 그리며 강한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져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봉춘 서울지방보훈청장
  • [금강산 관광객 피격 파장] “고양이도 무서워하는 성격이었는데… 관광객에 어떻게 조준사격 할 수 있나”

    북한군에게 피격된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53)씨의 사망 경위가 속속 드러나자 시민들은 울분을 토로하며 정부와 현대아산의 안일한 대처를 성토했다. 직장인 유환규(40·성남시 분당구)씨는 13일 “사고가 아니라 고의적인 살인”이라며 “관광객이 많은 지역이고 여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조준해서 쐈는데, 민간인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졌다. 지난해 6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공동기도회에 참가했다가, 숨진 박씨와 같은 곳에서 북한군에게 붙들려 20여분간 억류됐던 도시빈민사회복지선교회 김홍술(52) 목사는 “정부와 현대아산은 이번 사건이 일어난 지역에서 북한군에 의해 남쪽 관광객이 자주 억류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면서 “사전에 관광객에게 위험을 알리거나 접근금지 팻말이라도 세웠다면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망연자실한 유족들은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4호실에 차려진 박씨의 빈소를 지키며 안타까워했다.6자매 중 셋째인 박씨의 둘째언니(56)는 “아직 팔순 노모가 살아 계신데 충격으로 정신을 놓을까봐 말을 못하고 있다. 뉴스를 보지 못하도록 TV도 일부러 고장 냈는데, 어디서 들으셨는지 ‘셋째 딸 어디 갔느냐.’며 계속 찾고 계신다.”며 울먹였다. 둘째 동서 강모(62)씨는 “길이 아니면 가지 않을 정도로 진실했고, 이웃에도 선행을 베푼 인자하신 분이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다섯째 동서 강모(59)씨는 “고양이도 무서워서 근처에 가지 못하는 성격”이라면서 “북한군 초소가 있는 줄 알았으면 절대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애석해했다. 아들 방재정(23)씨는 “믿기지도 않고,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며 긴 한숨을 토했다. 남편 방영민(53)씨는 “이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느냐. 아내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모든 의혹들이 시원하게 풀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승훈기자 hunnam@seoul.co.kr
  • [금강산관광객 피격 사망] 사인은 흉부 총상에 의한 호흡부전 추정

    박왕자(53)씨의 시신은 이날 밤 10시30분쯤 강원 속초병원에서 서울 신월동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졌다. 시신은 흰 천에 싸인 채 119 구급차량에 의해 도착했다. 국과수는 곧바로 부검에 착수했다. 박씨의 남편 방모(53)씨와 아들(23)은 미리 국과수에 도착해 박씨의 시신을 기다렸으며, 부검 과정을 지켜봤다. 방씨는 “아내가 생일을 맞아 고교동창들과 금강산에 갔다.”면서 “아내의 죽음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앞서 박씨의 시신을 검안한 속초병원 검안의는 “직접 사인은 호흡부전이며 선행 사인은 흉부 총상”이라면서 “등 뒤쪽에서 총격을 당한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강원 검·경은 속초병원에서는 부검이 어렵다고 판단해 국과수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한편 현대아산 관계자는 “12일 방북하는 윤만준 사장은 금강산 관광 사업자로서 현장을 확인해 남북 당국간 합동조사단이 원활하게 조사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유가족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기 위한 것”이라면서 “아직 북측과 일정은 잡힌 게 없지만 만날 수 있는 관계자들은 다 접촉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윤 사장은 12일 오전 방북에 앞서 현대아산의 입장과 더불어 유가족에 대한 애도를 표하고 향후 대책에 대해 언급할 예정이다. 이후 윤 사장을 비롯한 현대아산 임원 6명은 곧바로 방북 길에 올라 아태평화위 또는 명승지개발총국 등 북측 관계자들과 만나 사고 수습 대책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속초 조한종 서울 김효섭 황비웅기자 bell21@seoul.co.kr
  • 금강산관광 50대女, 北초병에 피격 사망

    금강산관광 50대女, 北초병에 피격 사망

    금강산 관광 10년 만에 남측 관광객이 북한군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처음으로 발생했다. 11일 오전 5시쯤 북한의 북강원도 온정리 금강산 특구 내 해수욕장 인근에서 관광객 박왕자(53·여)씨가 가슴과 다리에 북한군의 총격을 받아 숨졌다. 정부는 사건의 진상이 규명될 때까지 금강산 관광을 잠정 중단키로 했다. 당분간 남북관계가 경색될 전망이다. 그러나 개성관광은 계속된다. 금강산에 남아 있던 1300명 중 680명이 이날 돌아왔으며 나머지도 12일까지 귀환한다. 정부와 현대아산에 따르면 박씨는 이날 오전 4시30분쯤 숙소를 나와 해금강 해수욕장을 거닐던 중 군사보호 지역으로 들어갔다가 북측 초병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북측은 당시 박씨가 철조망을 넘어와 초병이 수차례 정지 명령을 내렸는데 도망을 가자 경고사격을 가한 뒤 발포했다고 주장했다. 북측은 이 같은 사실을 오전 9시20분쯤 현대아산에 통보했다. 박씨의 시신은 이날 오후 1시쯤 남북 출입국사무소를 통해 속초 병원에 안치돼 검찰 입회 하에 1차 검안됐으며 부검을 위해 서울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졌다. 병원 측은 검안 결과 등 뒤쪽에서 날아든 탄환에 의한 흉부 총상으로 폐 속에 혈액이 고여 호흡 곤란 및 과다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총상 부위는 오른쪽 등에서 가슴으로 난 관통상과 왼쪽 엉덩이 부분 관통상 등 2곳으로 확인됐다. ●이대통령 “北도 조사 협력해야”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이 희생된 데 대해 특히 관광을 갔던 관광객이 피격 사망한 데 대해 참으로 안타깝다.”면서 유감을 표명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유가족을 위로하고,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하고 “북한도 진상조사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강산 관광을 총괄하는 윤만준 현대아산 사장은 12일 오전 방북해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의 경위 파악에 나선다. 정부는 통일부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관계부처 합동 대책반을 구성, 진상조사에 착수하는 한편 향후 대책을 마련키로 했다. 김상연 윤설영기자 carlos@seoul.co.kr
  • 위도 ‘태영호 사건’ 무죄 선고

    ‘태영호 납북 귀환어부 간첩조작 의혹사건’(서울신문 7월9일자 10면 보도)에 휘말려 징역형을 받았던 어민과 주민들이 40여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전주지법 정읍지원은 9일 열린 ‘태영호 사건’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10년이 확정됐던 전북 부안군 위도면의 어부 강대광(68)씨와 유가족 등 5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또 “북한을 찬양한 어부들을 신고하지 않았다.”며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년∼1년6개월을 받았던 위도주민 5명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부고] 女가수 이라 자택서 사망

    [부고] 女가수 이라 자택서 사망

    지난해 데뷔 앨범을 내고 활동하던 스튜어디스 출신 여가수 이라(본명 엄이라)가 6일 서울 논현동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24세. 이라의 유가족은 7일 “친구와 함께 살던 자택에서 발견됐다.”며 “수면 중 구토로 기도가 막혀 질식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라는 지난해 ‘샤인’이라는 예명으로 데뷔했다가 ‘이라’로 이름을 바꿔 1집 ‘더 스토리 오브 12 러브’를 내고 활동해 왔다. 빈소는 서울 삼성동 서울의료원 영안실 8호실. 발인 8일 오후 1시.(02)3430-0458.
  • 북한산 ‘산악인 추모비’ 제막

    흩어져 있던 ‘자일의 정(情)’이 한 데 모였다. 서울 북한산과 도봉산을 오르다 등반사고로 숨진 이들의 원혼을 달래는 ‘산악인 추모비’가 북한산 우이산장터 위쪽 무당골에서 6일 제막됐다. 대한산악연맹과 서울시산악연맹, 한국산악회, 한국대학산악연맹 등 산악 관련 4개 단체는 북한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와 함께 이날 낮 암벽 등반 등 산악사고로 숨진 산악인의 유가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산악인 추모비 제막식을 열었다. 지금까지 두 산에 흩어져 있던 추모비와 동판은 각각 88개와 52개. 관리사무소 등은 지난 3월 공청회를 거쳐 4월과 5월 추모비와 동판 철거 작업을 벌인 뒤 이날 무당골 안에 지름 6.5m, 넓이 35㎡에 높이 3m의 원반형 돌출 추모비 제막식을 열게 됐다.4월에는 유족 등과 함께 합동 천도제와 개토제도 거행했다. 2006년 1월 북한산 영봉 코스를 개방한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자연 훼손과 경관 저해, 추모행사로 인한 산불 위험 등의 문제점을 탐방객들이 지적하며 정비를 요구하는 민원이 많아지자 여론수렴 등을 거쳐 합동 추모비를 건립하게 됐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부고] ‘재일동포들의 마틴 루터 킹’ 이인하 목사 별세

    |도쿄 박홍기특파원|‘재일 한인들의 마틴 루터 킹’으로 불렸던 이인하 목사가 지난달 30일 별세했다.83세. 교도통신은 2일 유가족의 말을 빌려 이 목사가 지난달 30일 오후 10시15분쯤 도쿄의 한 병원에서 폐렴 치료를 받다가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이 목사는 일본 강점기 시절 강제 징용된 뒤 일본에 체류한 동포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에 맞서 권익을 보호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지난 1991∼93년 재일동포 전후보상 추진위원장을 맡았으며 세계 재외한민족협회 발족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또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서 외국 국적의 아이들을 위한 보육센터를 세워 운영하는 등 사회복지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장례식은 오는 12일 오후 2시 도쿄 신주쿠에 있는 한국크리스찬교회에서 열린다. hkpark@seoul.co.kr
  • [기고] 제2연평해전 6주년을 보내며/박상은 해군OCS장교 중앙회 명예회장·국회의원

    [기고] 제2연평해전 6주년을 보내며/박상은 해군OCS장교 중앙회 명예회장·국회의원

    어제는 제2연평해전이 발발한 지 6주년 되는 날이었다. 월드컵 축구로 온 나라가 축제분위기에 들떠 있던 2002년 6월, 조국의 바다를 지키다 산화한 참수리357호 장병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죽는 그 순간까지도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은 여섯 영웅들의 영전에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고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이번 6주년은 여섯 영웅들과 유가족, 그리고 참전용사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뜻 깊은 날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까지 부대 자체행사로 거행되어 오던 추모행사가 새 정부 출범 이후 희생자들의 명예를 선양하고 국가가 이들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국가추모식으로 승격되었다.‘서해교전’으로 불리던 당시 전투가 지난 4월 ‘제2연평해전’으로 격상되었고, 전사자들의 흉상이 제작되어 지난 6월13일 해군사관학교에서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또한 15일에는 1999년에 발발한 제1연평해전의 전승비가 평택의 제2함대 충무동산에 세워졌다. 어느덧 제2연평해전이 발발한 지 6년, 제1연평해전이 발발한 지 9년의 세월이 흘렀다. 목숨을 바쳐 조국을 수호한 젊은이들이 어째서 이토록 오랫동안 제대로 예우 받지 못하고 쓸쓸히 묻혀 있어야만 했는가. 그간 곯을 대로 곯은 유가족과 참전용사들의 마음이 쉬이 아물 리 만무하겠지만 뒤늦게나마 그분들의 명예가 회복되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점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여섯 영웅들이 목숨을 바쳐 지킨 연평도 앞 바다는 바로 270만 인천시민들의 앞마당이자 삶의 터전이다. 지금도 서해 바다에는 수시로 긴장이 고조되곤 하지만,4700만 국민이 이처럼 평화롭게 생업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바로 여섯 영웅들과 참전용사들 덕분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시설들은 그들이 숨져갔던 곳과 인접한 인천이 아닌 다른 곳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든 군사시설 내에 있다. 이들을 제대로 예우하지 않은 정부를 비난하기 전에 가장 큰 은혜를 입은 우리들은 참수리357호의 장병들을 벌써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할 것이다. 경북 칠곡에는 6·25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알려진 다부동전투의 승전을 기념해 1951년에 칠곡 군민들이 건립한 ‘백선엽장군 호국구민비’가 있다.1981년과 95년에 정부에서 세운 전적기념관과 충혼비가 있지만, 주민들이 정부보다도 먼저 자발적으로 건립한 것이란 데에서 이 비석의 가치가 있다.‘호국구민’이란 비석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민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삶의 터전을 지켜준 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칠곡 군민들의 사례를 보며, 최근 인천자유공원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던 맥아더장군 동상 철거를 떠올렸다. 조국과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켜준 이들에 대한 마음과 태도가 어쩌면 이렇게 다른지 안타까울 뿐이다. 때문에 이참에 인천에 제2연평해전 추모비를 세워 삶의 터전을 지켜준 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인천의 월미공원이나 연안부두와 같은 접근이 용이한 곳에 세워,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작은 정성을 통해서 후세의 사람들이 그들을 영원히 잊지 않고 감사하게 여기도록 하는 것이 살아있는 우리들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박상은 해군OCS장교 중앙회 명예회장·국회의원
  • [재테크 칼럼] 보험 계약자·수익자 살펴봐야

    30대 치과 의사 L씨,60대 초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상속이 발생됐다. 아버지가 20억원대 자산이 있었고 어머니와 동생이 2명이라 공제액을 빼면 30% 세율이 적용돼 상속세가 1억 6000만원 정도라고 예상했다. 또 아버지 이름으로 보험금 5억원을 받을 수 있는 종신보험에 들었기 때문에 세금 납부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그런데 받는 보험금 5억원도 상속재산에 포함돼 상속세가 2억 3000만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보험계약에 있어 세금은 실제 보험료를 낸 사람과 그 수익을 받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결정된다. 보험료 낸 사람과 보험금 받을 사람이 같다면 세금은 부과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을 경우 증여세와 상속세 문제가 생긴다. 치과 의사 L씨는 소득이 충분하므로 본인을 계약자와 수익자로 하고 피보험자만 아버지로 했다면 받는 보험금 5억원에 대해서도 세금이 전혀 없게 된다. 즉 L씨가 계약과 관련된 계약자를 잘못 설정해 예상치 않은 세금 7000만원을 더 낸 것이다. 요즘 고액의 사망보험금이 지급되는 종신보험에 가입하는 고객들이 늘고 있다. 미래에 발생할 상속세 비용을 미리 준비해 물려줌으로써 상속재산을 지키고 절세를 하여 유가족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이 경우에는 계약자와 사망시 수익자는 자녀나 배우자가 되고 피보험자는 아버지가 되도록 계약 관계자를 지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경우에도 계약자인 자녀나 배우자는 반드시 소득이 있어야 한다. 소득이 없는 자녀나 배우자가 계약자인 경우는 실제 보험료를 낸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해 상속재산에 포함된다. 따라서 자녀나 배우자에게 소득이 발생할 수 있는 임대 부동산 등을 먼저 증여해 주고 거기서 발생하는 임대소득 등을 활용하여 종신보험에 든다면 추가적 상속세 부담 없이 상속 비용을 마련할 수 있다. 또 소득이 있는 자녀가 계약자와 수익자인 보험도 실제 보험료가 부모 계좌에서 이체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경우도 세금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즉 계약 관계자도 주의해서 지정해야 하지만 계약자 계좌에서 보험료가 이체되도록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최근에는 이혼 가정도 상당히 늘고 있다. 그런데 이혼 후에도 수익자가 전처로 지정돼 있는 상태로 계약이 유지되어 뜻하지 않게 전처에게 보험금이 지급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혼시에는 반드시 보험의 수익자나 계약자 변경을 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계약 관계자 지정, 계약자와 보험료 이체 계좌의 동일성 여부, 그에 따른 세금 문제를 전문가와 상담을 통해 확인하고 고치는 기회를 가져보자. 김기홍 대한생명 대전 FA 센터장
  • [문화플러스] 서울시립미술관 ‘신소장품’ 120점 전시

    [문화플러스] 서울시립미술관 ‘신소장품’ 120점 전시

    서울시립미술관이 새달 8일까지 본관1층에서 지난 한해 동안 새로 수집한 작품 가운데 120여점을 골라 선보이는 ‘신소장품’전을 연다. 지난해 새로 들어온 작품은 유가족에게서 기증받은 고(故) 최덕휴 화백의 작품 75점을 비롯해 모두 235점. 전시에는 최덕휴, 조덕현, 장운상, 류경채, 문학진 등의 작품이 나왔다. 서양화, 한국화, 사진, 판화, 조각 등 다양한 장르의 미술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02)2124-8800.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유해발굴감식단장 박신한 대령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유해발굴감식단장 박신한 대령

    경외에 찬 ‘그 독백’은 전 세계인의 심금을 참으로 건드렸다. 톨스토이 소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주인공 안드레이 청년이다. 격전의 전장에서 중상을 입고 쓰러진다. 의식을 가까스로 되찾았을 때 푸른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 하늘이었다. 청년은 중얼거린다. “어째서 지금까지 이 높은 하늘이 눈에 띄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제라도 겨우 이것을 알게 되었으니 나는 정말 행복하다. 그렇고 말고! 이 끝없는 하늘 외에는, 모든 것이 공허하고 모든 것이 기만이다. 이 하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푸른 하늘은 ‘영원’한데 지상의 ‘영광과 욕망’은 사소하고 부질없음을 처음 깨닫게 되는 장면으로 ‘전쟁과 평화’의 명문구로 꼽힌다. 이 말이 새삼 생각나는 까닭은 무엇일까.6·25전쟁 발발 58주년을 며칠 앞둔 지난 주,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위치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사무실에 들어섰다. 오전 10시가 채 안된 이른 시간인데도 6·25때 전사한 유해를 찾아달라는 유가족들의 애끓는 전화가 쇄도했다. 경남 마산에 거주하는 전이길(69)씨.“우리 큰형님이 6·25때 입대했는데 그 이후로는 연락이 없어요. 전사통보도 못 받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디에 계시는지 시신만이라도 꼭 확인하고 싶어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이렇게 전화를 합니다.” 대구광역시에 사는 김두남(62)씨.“어머니께서 위독해 돌아가시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6·25때 전사한 아버지(김봉곤)의 유해를 찾아 국립묘지에 안장해 드리고 싶어요.” 이처럼 아버님과 형님을 찾는 전화가 많았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지난 6일 현충일때 채혈행사를 가진 이후 이런 문의전화는 최근들어 더욱 많아졌다. 유가족의 채혈을 통해 유해를 보다 빨리 찾을 수 있는 희망의 방법이 하나 더 생겼기 때문. 실제로 지난 3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고(故) 강태수 일병의 경우 생존해 있는 아들(62)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우연히 국군수도통합병원에 들러 채혈을 했다가 극적으로 아버지 유해를 찾은 케이스. 신혼초에 신랑은 귀여운 아들을 하나 낳고 전장으로 떠났고 82세된 신부는 58년 만에야 신랑의 유해와 만나는 눈물겨운 광경을 연출했다.6·25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38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유해발굴 사업은 올해로 8년째. 처음에는 증언과 유품 등을 통한 신원확인에 의존했으나 2003년부터는 유해와 유가족의 DNA검사를 추가해 정밀도를 높였다. 특히 지난해 1월 관련법 제정에 의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되면서 조사와 발굴, 감식 등 전 분야에 걸쳐 독자적인 수행능력을 확보했다. 또한 올해 12월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내에 3층규모의 현대식 건물이 완공되면 감식실과 유해보존실을 갖추는 것은 물론 유전자 은행 설치 등으로 세계적 수준에 올라서게 된다. 지금까지 유가족 혈액의 경우 4973건을 채취했으며 발굴된 유해 1892구 중 72구가 신원이 확인됐다. 이 가운데 42구가 유가족 품에 안겼다. 국방부 기록에 의하면 6·25때 국군 전사자는 약 13만 7000명, 실종자는 2만여명이다. 국립현충원에 2만 7000여기가 안장돼 있으니 현재 13만명가량이 어디엔가 쓸쓸히 묻혀 있다는 것이다. 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유해발굴감식단 단장 박신한(51) 대령을 만났다. 집무실에는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반세기 만의 귀향’ 등의 문구와 발굴현장 모습의 사진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는 6·25전쟁이 몇년도에 일어났는지 모르는 젊은 대학생들이 3분의1이나 된다는 조사내용을 언급하면서 결코 잊혀진 전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러번 강조했다. ▶호국의 달이자 장마철입니다. 발굴사업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겠지요. “이달에만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던 안동(27일까지)과 강원도의 진부(7월11일까지), 인제(27일까지) 등에서 진행되고 있지요. 한 지역당 100곳정도 굴토하면서 유품이나 유골 등의 흔적이 나오면 전문요원 8명이 투입돼 정밀 감식을 하게 됩니다.1년중 동·하절기를 제외한 8개월 동안 계속 진행되지요.” ▶감식단 요원들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됐습니까. “군인과 군무원, 그리고 형질인류학과 법의학을 전공한 민간 감식전문요원 등 모두 134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89명의 발굴병인 경우 대학의 고고학이나 인류학과 출신의 지원자들로 모집·충원하고 있습니다. 또 이들은 비록 6·25의 3세대에 해당되지만 58년 동안 차가운 땅속에 묻힌 호국의 얼을 거둔다는 자긍심이 대단합니다. 인골탐지기도 없이 산간 고지대에서 주먹밥을 먹어가며 고생도 많지만 평생에 남을 보람으로 여기며 열심히 일하고 있지요.” ▶발굴사업에 가장 큰 어려움은 어떤 것인가요. “유해는 전투현장에 그대로 남아 있거나 마을 주변에 널부러져 있다가 마을 주민들이 수습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은 58년이 지났고, 지역개발도 많이 했고, 전사자 유해에 대한 자료조차 없습니다. 어디쯤에서 전사했다는 막연한 제보와 현장에서 당시 전술적 상황분석을 통해 진행하다 보니 어려움이 많지요.” ▶제보가 들어오면 어떤 과정을 거치나요. “제보내용과 현장상황 등을 여러가지를 종합 판단해 주요 포인트를 정하게 됩니다. 대개 70∼80%는 참호나 교통호,20∼30%는 논이나 밭 등이 대상입니다. 그 다음 전문요원들이 문화재 발굴처럼 기록과 수습을 하면서 진행되는데 소중한 유해인 관계로 중장비 없이 호미 등으로 조심스럽게 굴토합니다. 그러다가 유해가 발굴되면 먼저 아군인지 적군인지를 구분하지요. 유품과 기록 등으로 피아를 구분한 뒤 아군인 경우 시료를 채취하고 또 유가족으로부터 채혈을 통해 얻은 DNA 등을 대조합니다. 신원이 확인되면 현충원 정식묘역에 안장되고 미확인되면 일단 무명용사탑에 있다가 나중에 확인되면 다시 모셔집니다.” ▶적군의 유해는 어떻게 하는지요. “지금까지 북한군 384구, 중공군 177구의 유해가 발굴됐습니다. 이 가운데 북한군 352구, 중공군 84구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적군묘지에 인도적 차원에서 매장해 놓고 있지요. 저희는 매년 군사정전위를 통해 송환의사를 타진하지만 아직까지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측에서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발굴사업이 좀 늦었지요. “원래 이 사업은 2000년 6·25 50주년기념사업으로 처음에는 한시적으로 3년간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해를 거듭할수록 많은 유해가 발굴됐고 국민적 관심이 높아져 국가영구사업으로 전환시켰지요. 국가가 국방의무만 부과시켜 놓고 책임에는 소홀했다는 점에서 발굴사업이 다소 늦었다고 봅니다. 전후복구와 경제개발 등 국가가 먹고 사는데 전력하다 보니 국가적 여유가 없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난 8년 동안 말 그대로 ‘무에서 유’의 발굴사업을 진행해 오면서 벌에 쏘이는 등 단 한 건의 사고가 없었다는 그는 “아마 땅에 묻힌 영령들이 도와주는 것 같다.”고 했다. 또 “6·25세대들이 하루에 1만명정도 돌아가시고, 또 국토는 계속 개발되고 있어 유해발굴사업은 향후 5년이 매우 중요한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했다. “아직도 이 땅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13만여의 호국용사들이 이름모를 산야에 묻혀 있습니다. 이들의 유해는 단순한 뼛조각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있게 해준 버팀목입니다. 마지막 한 분까지 찾아 부모형제, 조국의 품으로 모시는 일은 살아 있는 우리들의 영원한 책무입니다.” ■ 그가 걸어온 길 ▲1957년 목포 출생. ▲75년 광성고 졸업. ▲80년 성균관대 졸업, 학군 18기 임관. ▲92∼95년 31사단 96연대 1대대장. ▲98∼2000년 동국대 행정대학원. ▲99∼2002년 육본 인사운영실 대령보직장교. ▲02∼03년 9공수여단 참모장. ▲03∼04년 36사단 107연대장. ▲05∼06년 육본 인사참모부 전사자 유해발굴과장. ▲07∼현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 ●유해발굴 주요 실적(2008년 6월 현재 누계) 아군 1892구, 북한군 384구, 중공군 177구. 유품 32종 5만 7995점(실탄, 장구류, 개인소품 등).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자랑스런 내 아들아 , 이제 편히 가거라”

    “자랑스런 내 아들아 , 이제 편히 가거라”

    “사랑하는 아들아, 자랑스러운 대한의 아들아. 이제 편히 가거라.” 제2연평해전 전사자 6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흉상으로 영원히 남았다. 해군은 13일 해군사관학교와 해군교육사령부의 각 학교에서 제2연평해전 전사자 고(故) 윤영하 소령과 조천형·황도현·서후원·한상국 중사, 박동혁 병장의 흉상 제막식을 거행했다. 이날 제막식에는 유가족들과 윤공용 해군사관학교장, 김정두 해군교육사령관, 장병 등 500여명이 참석해 전사자들의 숭고한 넋을 기렸다. 흉상 제막은 전사자들이 처음 군복을 입고 첫발을 들였던 해군 사관학교와 기술병과학교, 전투병과학교, 기초군사학교 4곳에서 잇따라 열렸다. 제막식은 고인에 대한 경과보고와 공적소개, 추모사, 제막, 헌화와 분향, 묵념, 흉상 만남 순으로 진행됐다.6주기를 맞은 이날도 유가족들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마치 교전 당시 한배를 탔던 전우들과 같이 이날 첫 제막식이 열린 해군사관학교부터 기초군사학교까지 4곳을 한가족처럼 함께 움직이며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눴다. 전사자 가운데 유일한 사병(의무병)이었던 고 박 병장의 어머니 이경진(52)씨는 “사랑하는 동혁아 그렇게 힘들고 아프게 가더니 이렇게 오늘 또 엄마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구나.”라며 오열해 제막식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김정두 해군교육사령관은 “영령들이시여, 이제 장병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어떠한 시련과 역경의 파도 앞에서도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필승 해군의 전통을 이어가게 해 주십시오.”라며 추모사를 했다. 제막식에는 해전 당시 참수리 357호 부정장으로 북한군 경비정의 포격으로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도 끝까지 전투를 지휘한 이희완(32·해사 근무) 대위 등 전우 4명도 참가했다. 전사자 등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에 실망해 2005년 4월 조국을 등지고 미국으로 떠났다가 3년만에 귀국한 전사자 한상국 중사의 미망인 김종선(34)씨는 “전사자들의 명예가 늦게나마 회복된 것이 다행스럽지만 이같은 행사가 여전히 군대내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정부는 올해부터 국가 차원에서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 대한 추모식과 행사를 갖는다. 제2연평해전은 2002년 6월29일 연평도 인근 북방한계선(NLL)에서 우리 해군과 북측 해군간에 일어난 교전으로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했으며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했다. 진해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6·10 촛불집회] ‘민주화 동창회’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 90학번 조모(38)씨는 10일 밤 1990년대 초반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친구 35명과 10여년 만에 광화문에서 만났다. 대학 때 단과대 학생회장을 지낸 조씨는 이 친구들과 1991년 강경대군 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이른바 ‘열사 정국’을 보냈다. 이후 ‘민주동호회’라는 걸 만들었지만 사는 데 바빠 자주 모이지 못했다. 조씨 일행은 촛불을 들고 민주화운동의 추억을 나눴다.“이번 촛불집회가 뿔뿔이 흩어졌던 친구들을 한자리에 모아줬습니다. 죽을 각오로 거리로 나섰던 동지들을 만나니 가슴이 벅찹니다.” 6·10 항쟁 21주년을 맞아 ‘100만 촛불대행진’이 열린 광화문 곳곳에서는 ‘민주화 동창회’가 열렸다.△△대학 민주동호회,△△학과 87학번 모임,△△노조 동지모임 등 동창회를 알리는 깃발도 많았다. 87년 6월 당시 민주항쟁 지도부였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비롯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박종철기념사업회 등 각종 민주화 단체들도 대거 촛불을 들었다. 과거 목에 핏대를 세우며 군사정권을 규탄하던 친구들이 이젠 아이들을 둔 평범한 직장인들이 됐다. 중년에 접어들어 머리가 벗겨지거나 뱃살이 출렁이는 친구들도 있었다. 6월 항쟁의 주역들과 386세대 넥타이부대는 ‘젊은 촛불들이여, 미안하고 고맙구나. 늦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우리들의 배후가 너희였구나.’등의 현수막을 들고 행진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본 집행부)는 “이번 촛불집회를 계기로 그동안 못 봤던 제자들이나 민주인사 등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면서 “그들과 예전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금 촛불행진에 나선 대한민국 국민이 다시 한 번 훌륭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김승훈기자 hunnam@seoul.co.kr
  • [씨줄날줄] 북파공작원/박재범 수석논설위원

    북파공작원이 새삼 눈길을 끌고 있다. 미국 쇠고기로 촛불시위가 한창인 가운데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대한민국 특수임무수행자’들이 추모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추모회를 갖는 연유야 어떻든, 이들이 한국현대사에 쏟은 노고는 평가받아야 한다. 이는 북파공작원이 태어난 과정과 활동상을 보면 자명하다. 한마디로 이들은 자유민주 체제의 수호자였다. 그러면서도 수십년간 음지에서 맴돌던 ‘그림자’였다. 먼저 탄생과정을 보자. 이들은 국가안보의 최일선에 서 있었다. 광복 이후 주한미군은 북한과 소련을 무조건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한국은 북한의 전쟁준비 상황을 알아야 했고 또 방해를 해야 했다. 한국군은 미군의 눈을 피해, 어쩔 수 없이 민간인 위주의 ‘유령’부대를 꾸리게 된 것이다. 수십년간 비밀이었던 이들은 2003년 정부가 “북파공작원을 1만 3000여명 양성했고,7726명이 사망했다.”고 시인함으로써 처음 존재가 확인됐다. 그러나 문제가 여기서 새로 발생했다. 보상법을 만들면서 ‘군 첩보부대’라고 한정짓는 바람에, 접수된 보상대상자가 500여명에 그치게 된 것이다. 민간인 신분을 갖게 된 배경을 깡그리 무시한 탓이다. 정부의 이같은 홀대는 최근 미군이 한강 바닥을 온통 헤집으며 한국전쟁 당시 미군전사자의 유해를 찾으려 하는 노력과 크게 대비된다. 미군의 유해찾기를 바라보며 정부는 극찬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정부는 무엇보다 북파공작원의 실체부터 새롭게 파악해야 한다.HID,AIU뿐 아니라 UDU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는 등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북파공작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군이건 민간이건 똑같이 봐야 한다. 그러나 한가지 덧붙이면, 북파공작원 스스로도 눈총을 받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점이다. 북파공작을 실제로 수행했는지, 어느 부대 소속이었는지 등으로 갈려 갈등을 빚는 양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에 휩쓸려 다니는 것도 보기 안 좋다. 제53회 현충일을 맞아 북파공작원과 유가족들이 겪은 역사의 아픔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드리는 고언이다. 박재범 수석논설위원 jaebum@seoul.co.kr
  • [기고] 현충일 아침에 생각한다/김양 국가보훈처장

    [기고] 현충일 아침에 생각한다/김양 국가보훈처장

    호국·보훈의 달 6월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무엇을 딛고 이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었나를 생각해 보는 달이다. 우리에게는 불과 1세기 전만 해도 외세의 침략으로 불안에 떨었던 때가 있었으며,6·25전쟁으로 더할 수 없는 아픔을 겪었던 때가 있었다.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만주의 거친 벌판이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이름 없는 산기슭에서 장렬히 산화한 애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자유와 번영 속에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국민 모두가 흘린 땀의 결실이기도 하지만 조국을 위해 헌신한 분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모든 현상에는 양면성이 있듯이, 이러한 과정에서 사회적 부작용, 즉 도덕성의 상실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급격한 서구화에 따른 정신적 빈곤 속에서 이기주의 만연과 세대, 계층간 갈등의 벽이 높아만 가고 있기 때문이다. 배금주의 풍조와 사회적 통합 해이의 결과라고 할 것이다. 선열들의 위국헌신 정신을 사회통합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국가보훈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국가보훈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가 충분하지 못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애국지사나 호국용사들의 위상이 바로 서지 않고는 국민의 가치관과 사회정의가 바로 설 수 없음은 너무 자명한 이치다. 이분들이 국권회복과 국가수호의 주인공으로서 응당히 평가받고, 나라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영예로운 것으로 존경 받을 때 국가안보가 튼튼해지고 우리의 미래도 밝아질 것이다. 선진국들이 하나같이 확고한 보훈의식과 발달된 보훈제도를 갖추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올해로 광복의 기쁨을 안은 지 63년,6·25전쟁 발발 58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나라없는 설움과 전쟁의 참상을 체험하지 못한 세대가 우리 사회의 주역이 되어가고 있다.58세의 초로가 6·25전쟁 발발 당시 겨우 태어났다. 민족의 비극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세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6·25를 단지 ‘역사’로만 객관화하려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그러나 6·25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많은 이산가족과,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고 있는 전상군경과 유가족들이 많이 있다. 그동안 많은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가발전 수준에 비해 시간이 갈수록 국가보훈 인식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국가유공자의 고귀한 희생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약해지고 국민들의 호국·보훈의식도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이다. 정신이 없는 민족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는 세계의 역사 속에서 보아왔다. 그리고 한 민족이 생명력을 잃지 않고 민족정신을 유지하고 계승할 수 있는 것은 국가라는 삶의 터전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생존은 곧 나의 생존이며, 그 무엇도 이 생존의 가치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보훈정신을 잊지 않는 국민만이 새로운 시대가 주는 자유와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현충일 53주년을 맞는다. 전에는 현충일이면 국민들이 경건하게 머리 숙여 호국영령들께 묵념도 함께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틀만 연휴가 되면 필리핀이나 호주로 골프여행을 계획하고 행락 일정을 세우는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현충일에는 국립묘지나 가까운 현충탑을 찾아 애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비는 시간을 가져보자. 주위의 보훈가족을 찾아보고 조국의 소중함을 되새겨 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지면 더욱 좋겠다. 김양 국가보훈처장
  • 유가족, 북파공작원 추모제 항의

    유가족, 북파공작원 추모제 항의

    ‘72시간 국민 릴레이 촛불집회’가 예정돼 있던 서울광장에 5일 전사자 신위를 세우고 추모회를 열려던 북파공작원(HID) 대한민국 특수임무 수행자회가 정작 유족회원들에겐 거센 항의를 받는 등 내분에 빠졌다. 수행자회가 지난 4일 국가유공자의 일원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난 뒤 급히 추모제 장소를 바꾼 것으로 알려져 촛불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일부러 장소를 바꾼 것 아니냐는 의혹도 일고 있다. 당초 수행자회는 6일 경기 판교 금토리 충혼탑에서 가지기로 예정돼 있던 추모식을 5일 오전 홈페이지 긴급공지를 통해 급히 서울광장으로 변경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이날 오후 갑자기 서울광장에 7000여명의 전사자 신위를 세우고 6일까지 추모행사와 108배 등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날 밤 10시쯤 김봉녀(45·여·서울 암사동)씨 등 HID 대한민국 특수임무수행자 유족동지회원 9명이 서울광장을 찾아 수행자회 측에 “왜 우리 허락도 없이 위패를 서울광장 땅바닥에 모셔 놓았느냐. 우리는 6일 판교 충혼탑으로 간다. 당장 위패를 충혼탑으로 옮겨놔라.”고 거세게 항의하며 소동이 빚어졌다. 수행자회 측은 이에 대해 “매년 해오던 현충일 행사이고 판교는 장소가 좁아 옮겼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게다가 수행자회 홈페이지에는 이들이 지난 4일 청와대를 방문, 이 대통령을 만나 어려운 점 등을 건의했던 사실이 글과 사진으로 한때 올려져 있었다. 하지만 수행자회는 촛불집회 참가자들에게 이런 사실이 알려져 네티즌들의 거센 항의를 받자 급히 이 글과 사진을 삭제하고 홈페이지를 폐쇄했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찾기 생방송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찾기 생방송

    한국전쟁 전사자의 유해를 찾아 유가족들에게 돌려주는 내용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KBS 1TV ‘반세기만의 귀향! 당신을 찾습니다’(연출 윤정화)가 올해도 안방극장을 찾아온다. 지난 2006년 첫 방송 이후 KBS는 해마다 현충일 특집으로 이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3회째인 올해는 6일 오전 10시35분부터 135분간 2부에 걸쳐 국립서울현충원과 KBS 본관 스튜디오를 연결해 이원 생방송된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현충일 당일 현충원을 찾는 13만여 유가족들의 직간접 참여를 유도하며 유가족 DNA 무료 채혈, 전사자 병적기록 실시간 조회 및 전화·현장제보 등의 과정이 생생하게 전해질 예정이다. 고 현용득 중사의 유복자로 태어난 현재인(61)씨도 이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다. 아버지의 기일도 모른 채 58년을 살아온 그는 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 한 전우 김봉선(82)씨와 함께 아버지가 전사한 현장을 직접 찾아간다. 프로그램은 또 남편을 한국전쟁으로 잃은 미망인들이 현충원 위패 봉안관을 찾아가는 여정에 동행한다. 또 고 안길동 일병의 유가족이 유해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한 개의 도장을 실마리로 안 일병의 유해를 찾아나서는 과정도 조명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지금까지 세 구의 전사자 유해가 유가족과 상봉했다. 올해는 과연 몇 구가 유가족들의 품에 안길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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