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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은 정당” 일 극우단체 시위/종전 50주년… 일·미·태 표정

    ◎워싱턴 공식행사 전무… 언론도 침묵­미국/10만여명 희생된 콰이강서 위령제­태국/일 각료 9명 전범위패 안치된 야스쿠니신사 참배 ○8천여명 추도식 ▷일본◁ ○…일본에서는 「종전기념일」로 불리는 15일 정부주관하에 「전국전몰자추도식」이 도쿄 기타노마루공원 무도관에서 일왕부처,무라야마 도미이치총리와 도이 다카코 중의원의장등 정부·국회관계자,유가족등 8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조선인·대만인 등을 포함한 군인·군속 2백30만명,일반인 85만명등 3백15만명을 추도한다는 이날 행사에서 무라야마총리는 『그 전쟁에서는 많은 나라,특히 아시아 여러 국민에 커다란 고통과 슬픔을 주었다.이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깊이 반성과 애도를 표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무라야마내각의 각료 9명이 전범들이 봉사되고 있어 늘 말썽을 빚고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 올해 참배각료는 14일 미리 참배한 우라노 야스오키 과학기술처 장관을 포함,10명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7명의 각료가 「개인」 자격으로 참배한데 비해 올해는수가 늘어났을 뿐 아니라 통산상,방위청장관등은 「공인」 자격으로 「공식참배」. 특히 히라누마 다케오 운수상은 이날 참배시 다른 각료들이 머리만 숙인것에 반해 「2례 2바교수 1례」의 신도식으로 참배해 「정교분리」를 규정한 헌법 규정과 관련해 물의 무라야먀 총리 등 연립여당 3당 당수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참배하지 않았으나 자민당의원 1백32명(대리참배 73명),신진당의원 36명(대리 20명)등 국회의원들도 대거 참배대열에 합류,정치권의 분위기가 지난해보다 「참배」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보여줬다. ○배상 등 요구 시위 ○…오사카(대판)에서는 15일 한국유족,중국남경대학살 생존자,일본시민등 4백7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일본의 전쟁책임을 추궁하는 집회가 열렸다고 교도통신이 보도. 이날 집회에서 일제징용으로 남편을 잃은 유족 이김주(74·전남 광주)씨는 『일본인은 한국인을 소모품처럼 사용하고 버렸다』면서 사죄와 배상을 일본정부에 촉구. ○안보리 기념성명 ▷미국◁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는 태평양전쟁승리 50주년이 「망각」된 채 지나갔다.현지시간 14일인 승전일에 미국정부의 전승기념 공식행사는 물론 이에 대한 언급도 전무했다.이를 다룬 신문사설조차 없었다. 미국에서 태평양전쟁 승리는 일본의 미 진주만 기습(41년12월7일) 기념행사때 함께 축하되지만 언제나 종속적인 신세를 면치 못한다.진주만기습 50주년 기념행사는 4년전 미전역에서 성대하게 치러진 바 있다. 미국인에게 정작 8월은 원자폭탄 투하의 달로 더 기억된다.미국언론은 지난 6일 원폭 투하 50주년 당시 히로시마에 대한 연민의 정을 담은 대대적인 기획기사를 다뤘다. 한편 유엔 안보리는 이날 아시아지역 2차대전 종전 50주년을 맞아 3개항의 기념성명을 채택,국가간 신뢰구축과 협력을 통한 단결이 전쟁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길이 된다고 밝혔다. ○생존포로 등 참석 ▷태국◁ ○…2차대전당시 일본군의 포로로 잡혀 태국에서 철도부설을 위한 강제노역에 동원됐다가 숨진 연합군장병 1만6천여명과 아시아인 10만여명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겸한 종전50주년 기념식이 15일 연합군 생존포로및 전일본군 병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콰이강의 다리가 있는 방콕서쪽 칸차나부리에서 거행됐다.
  • 과거 청산(21세기 한­일 새 지평:1)

    ◎바람직한 이웃관계를 위한 제언 광복 50년은 한국과 일본간에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여러가지 문제들을 매듭짓고 바람직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계기가 돼야 할것이다.과거청산,외교·안보,경제협력,문화교류등 주요 분야별로 두나라 전문가들로부터 바람직한 한일관계의 미래상을 연재로 들어본다. ◎“일은 수억 아시아인 고통 외면 말아야”/일의 과거사 인식 자세의 문제점/아직도 침략전쟁 책임 회피 급급/굴절된 역사 직시… 참된 자성 필요 지금으로부터 10년전인 85년5월 당시 서독의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독일 연방의회에서 『과거에 눈을 닫는 자는 현재도 볼 수 없게 된다.비인간적인 행위를 마음에 새겨두지 않는 자는 또다시 그러한 위험에 빠지기 쉽다』며 나치즘과 제2차대전의 교훈을 상기시켰다.같은해 8월 일본의 당시 나카소네총리는 A급 전범 7인의 위패가 모셔진 정국신사에 현직 총리로는 처음으로 참배를 감행하였다. ○독일과 인식 큰 차 일본 각료들의 참배는 해마다 계속되고 있다.금년 일본 각 지방자치단체 의회에서는제2차대전에 참전하였다가 죽은 일본군의 넋을 추모하는 결의가 무성하였다.과연 오늘의 독일에서 현직 각료가 나치 수뇌의 묘소를 참배하는 사태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똑같은 제2차대전의 추축국이었지만 일본과 독일의 이같은 차이는 과거사에 대한 양국 인식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일제의 침략주의에 대한 책임추궁제도로는 인적책임에 대한 전범재판과 물적책임에 대한 샌프란시스코조약체제로 요약될 수 있다.그러나 제2차대전 후의 냉전구도 속에서 일제의 과거사에 관하여는 인적 책임과 물적 책임 그 어느편도 철저히 규명되거나 추궁되지 못하였다.전후 국제질서를 주도한 미국은 전후처리 과정에서 일본의 과거사 책임을 단죄하기보다는 아시아에서의 대공방벽 구축에만 심혈을 기울였다.아시아 피해국에 대한 일본의 배상보다도 일본의 경제부흥과 재군비를 더욱 강조하였다.그 결과 일본에서는 침략전쟁의 책임자들이 전후의 집권세력으로 재등장하였으며 죄의식이 없는 이들에게 전후처리가 맡겨졌다. ○가해자 인식 부재 이러한과정속에서 진행된 일본의 전후처리 태도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부각되었다.첫째,일본의 가해자 의식의 부재이다.수억의 아시아인이 일본의 침략주의로 인하여 장기간 막대한 고통을 당한 사실은 외면되었고,오히려 일본은 세계 유일의 원자폭탄 피해국이라는 점만이 강조되었다.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한 것이다. 둘째,가해자 의식의 부재는 전쟁책임의식의 부재로 연결되었다.일본인 스스로가 피해자의 대열에 섬으로써 과거 침략행위의 진상이나 피해 파악을 외면하였고 역사에 대하여 특별히 책임질 일이 없다고 강변하였다.패전 50주년을 맞아 일본 국회차원에서 추진하던 사죄결의가 속빈 강정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배상의무도 회피 셋째,전쟁책임의식의 부재는 자연히 대외적 배상의무 회피를 조장하였다.전후 일본이 구군인 등 자국민 피해자에게 지불한 보상액의 누적합계가 근 40조엔에 육박하고 현재도 연간 2조엔에 상당하는 지불이 계속되고 있는데 반하여 일본이 25개국과 체결한 29개 전후처리조약을 통하여 대외적으로 지불한 금액의 합계는 1조엔을 약간 넘을 뿐이다.제2차대전의 희생자란 그릇된 나치즘의 피해자라는 성격 규명을 분명히 하고 있는 독일과 달리 일본에서의 전쟁희생자란 군국주의 정책수행에 앞장서다가 피해를 당한 자국민이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현재 일본 각지의 법원에서는 한국인을 비롯하여 필리핀인·중국인·네덜란드인·홍콩인 등 각국 외국인이 일본을 상대로 과거사 책임을 추궁하는 소송이 무려 30건 가까이 진행중이다.대부분이 70을 넘은 고령의 피해당사자가 그들 살아 생전에 끝나기나 할지조차 전망이 불투명한 소송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심정을 일본은 되새겨야 할 것이다. ○대일 소송 잇따라 금년 5월 유럽에서는 제2차대전 종전 50주년을 맞아 런던에서 모스크바까지 성대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파리에서는 독일군의 시가행진도 있었다.금년의 독일군이 50년전과 다른 점은 더 이상 침략자가 아닌 유럽 번영의 동반자로서 행진하였다는 점이다.일본은 현재 자신을 구적국으로 규정하고 출범한 유엔체제 내에서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그러나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기념하여 서울이나 남경 아니면 마닐라에서 일본자위대가 시가행진을 하는 모습을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그에 합당한 지도력을 확보하기가 어렵다.과거사에 대한 인식 전환­이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일본 자신이 될 것이다. ▲정인섭 방송통신대 교수(41세) ▲서울 법대졸 ▲법학박사 ◎“왜곡된 역사 교과서 바로잡는 일부터”/과거청산과 한­일 미래를 위하여/위안부 보상문제 등 적극 나설때/「불전결의 불발」 같은 추태 없어야 지난 6월9일 채택된 전후50주년 결의를 둘러싸고 일본 국회(중의원)가 보인 추태는 「50년 결의」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이웃나라에의 국제공약이었던 만큼 대외적으로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일 국민 기대 배신 그것은 또 전후50년 결의가 아시아 여러나라와 진실로 화해하고 미래지향의 관계 수립을 향해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을 마음으로부터 바란 많은 일본인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이었다. 하타 쓰토무(우전자) 전총리(신진당 부당수)는 『전후50년이라는 고비를 살리지 못하고 결의를 끝내게 되면 세계 여러나라로부터 대단히 엄한 반발을 받을 것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그 신진당은 「50년결의」 채택의 본회의를 보이콧했다.여당 3당으로부터도 다수의 결석자가 있어서 5백2명의 중의원중 채택에 참가한 것은 겨우 과반수인 2백52명으로 이례적인 사태였다. 가이후,미야자와,호소카와,무라야마등 역대 일본총리가 방한시 행한 불행한 과거에 대한 반성발언을 알고 있는 한국인으로서는 나라를 대표하는 역대 총리의 발언을 없었던 일과 마찬가지로 만들고 만 일본국회의 어처구니없는 전후결의의 결과는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찬물 끼얹는 행위 그런 가운데 일본인을 구해 준 것은 『일본의 국회결의는 대단히 유감스럽다.새로운 불신으로 연결되는 것을 우려한다』면서도 『좋은 내용의 결의를 향하여 노력해온 사람들의 노력을 평가하고 싶다.그 사람들은 이 결의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앞으로의 노력에 주목하고 싶다』라고 말한 김태지주일대사의 적절한 발언이었다.(아시히신문·통일일보 인터뷰) 한일기본조약 체결 30주년에 즈음하여 일본의 유력지들은 나름대로 특별기사를 게재하였으나 국교30년의 양국의 현재위치를 가장 단적으로 표현한 것은 「깊어가는 상호의존」,「아직 두꺼운 마음의 벽」이라는 제목을 붙인 닛케이신문 6월 20일자였다.앞서 언급한 추태의 극을 보인 일본국회의 전후결의가 마음의 벽을 없애기 위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었다는 사실은 더 말이 필요없다. 하지만 소걸음과 같지만 역사교과서 기술의 개선,종군위안부 문제의 구체적 해결등 불행한 과거의 청산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한 사실을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다. 일본의 문부성이 6월28일 발표한 국민학교 6년생의 사회과 교과서에는 일본어의 강제,창씨개명,토지의 몰수,손기정선수의 일장기 사건등 식민지 지배에 관한 기술이 대폭 늘어나 국민학생도 잘 알수 있도록 됐다. 90년 5월 방일한 노태우전대통령은 일본 국회연설과 일본 기자클럽 회견을 통해 역사의 진실에 대한 인식의 공유를 호소했다.일본 문부성이 한일 신시대의 개막을 향해 양국간의 역사에 대해 국교·중학교의 수업중 꼭 다루도록 지도를 거듭 내린 것도 이 때부터였다. 미야자와총리의 방한 이래 3년 넘어 보상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해서도 보상사업을 추진하는 임의단체로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 설립돼 7월27일에는 전참의원의장 하라 분베에(원문병위)씨가 이사장으로 취임,한국 중국 필리핀등 1천명을 넘는 것으로 보이는 전 위안부에게 일시금을 보상함과 아울러 복지와 의료면의 지원사업에는 일본정부로서도 일부 책임을 지는 형태로 됐다. ○청산 움직임 일어 관계의 긴밀도를 재는 사람의 왕래는 30년전의 1백20배.지난해는 2백69만명을 헤아렸다.필요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사람의 왕래의 확대다. 미래지향의 관계도 따지고 보면 한일 쌍방이 필요로 하는 관계의 심화와 발전인 것이다.앞에서 말한 닛케이신문은 「깊어지는 상호의존」의 관계를 묶는 키워드를 「공통의 이익」이라고 하고 있다. 최근 현실화하려 하고 있는 한일간 수평분업체제는 또한 공통의 이익을 위해 상호 필요로 하는 관계 자체다.엔고현상으로 생산거점을 대폭 해외이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일본기업의 움직임은 98년 생산개시를 목표로 하고 있는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에의 닛산자동차의 전면적인 참가에서도 나타난다. ○협력관계 불가피 관련부품 메이커 1백15개사의 부산유치와 함께 삼성자동차를 중심으로 기타큐슈를 한국 남부와 결부,국경을 넘는 경제권의 성립이 예상되는 것이다. 「국제무대에서 한일 양국이 이인삼각으로 보여지는 것은 양국민의 뿌리깊은 감정마찰과는 별도로 세계의 외교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기존사실로 돼 있다」라는 닛케이신문의 지적은 한일 양국의 미래지향적 관계를 앞서 짚어보는 것으로서 매우 시사적인 것이다. ▲하야시 다케히코 일본 동해대 교수 61세 ▲나고야대 졸
  • “임란·일제 36년 일인의 잘못 사죄”

    ◎순국선열 추모회사 일인 1백명 참회문/“수많은 한국애국지사 형장의 이슬로 보내/일 정치가들의 여전한 범죄사실 은폐에 분노” 『성스러운 대제를 봉행하는 자리를 빌려 일본인으로서 진심으로 참회와 사죄를 올리는 바입니다』 일제때 순국한 애국선열을 기리기 위한 추모행사에 일본인 1백여명이 참석,과거 일본의 잘못을 뉘우치는 참회문을 낭독할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끌고 있다. 5일 상오 서대문형무소 유적지인 서울 독립공원내 순국선열추념탑 앞에서 열리는 「광복 50주년 서대문감옥 순국선열 위령추모대회」에 참석하는 일본인은 일·한불교복지협회 가키누마 센신(폐소선심)스님등 1백여명.센신스님은 이날 상오10시부터 진행되는 1부 마지막 순서에서 함께 참석한 일본인을 대표해 참회문을 낭독한다. 이들은 독립유공자 후손의 모임인 순국선열유족회(회장 이종갑)와 함께 이 행사를 준비해온 부산 자비사 주지 삼중스님의 주선으로 행사에 참석하게 됐다. 『일본은 4백년전에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귀국을 침공했으며 명치시대에는 침략으로 식민지화해서 36년간이나 지배하여 많은 한국의 애국지사를 투옥과 고문으로 희생시켰습니다』 일본인은 참회문에서 과거 일본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인정부터 했다. 참회문은 이어 『일본은 이러한 만행을 그냥 지나치면서 세계평화를 논할 자격이 없다』고 지적하고 『아직도 일부 몰지각한 일본의 정치가와 그 추종배가 범죄사실을 은폐하고 미화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통분을 느낀다』고 분노했다.참회문은 이와 함께 『이 자리는 그 악명높은 일제하의 서대문형무소터로 아직도 혹독한 고문과 형장의 이슬로 세상을 떠난 수많은 애국지사의 귀혼이 머물러 있는 비극의 현장』이라며 『가해자인 일본사람으로서는 감히 서 있을 수도 없는 자리에 일본인을 대신해서 참석하게 되었으며 남은 여생을 바쳐 참회와 사죄를 올린다』고 말을 맺었다. 이날 제단에는 구한말 의병활동을 벌이다 체포된 13도창의군 총대장 이인영선생,군사장 허위선생,호서대장 이강년선생,3·1운동의 화신 유관순열사등 해방이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거나 옥사한 1백여명에 이르는순국열사의 위패가 모셔진다.또 안중근·윤봉길·이봉창의사등 해외에서 순국한 애국열사의 위패,일제시대 독립투사가 많이 투옥됐던 평양과 대구감옥의 순국선열 합동위패도 함께 받들어진다.
  • 조 서초구청장 집단 폭행/삼풍유족,합동위령제서

    ◎각막에 부상… 입원치료 29일 하오 2시25분쯤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초구민회관 강당에서 열린 「삼풍백화점사고 희생자합동위령제」에서 분향을 마치고 연단을 내려오던 조남호(57)서초구청장이 유족 30여명으로부터 15분동안 집단폭행을 당해 강남성모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조구청장은 이날 삼풍백화점사고 유가족위원회(위원장 김창식)주최로 열린 합동위령제에 참석,희생자 위패에 헌화한뒤 연단을 내려오다 『내 딸 살려내라』고 오른쪽 다리를 붙잡은 한 유가족을 피해 돌아가려는 순간 장내 곳곳에서 『잡아라』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몰려든 유족 30여명으로부터 주먹과 발로 마구 구타당했다. 유족들은 이어 조구청장이 구민회관을 빠져나와 성남대로 7개 차선을 가로질러 마주오던 쏘타나승용차에 올라탈 때까지 뒤쫓아가 계속 구타했으며 탑승한 승용차 위에 올라가 앞뒤 유리창을 부쉈다.이 과정에서 폭행을 말리던 일부 유족들도 구타당했다. 강남성모병원측은 『조구청장 오른쪽 눈의 각막과 조리개 사이에 피가 고여있고 각막이 약간 찢어지는 등 부상을 입었다』면서 『눈이 회복되는데 최소한 2주일 정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 “실종자 시신 찾기” 최대 과제로/「삼풍참사」 남은문제 무엇인가

    ◎부상자 보상산정 「사망」보다 더 복잡/남은건물 철거시기·방법에도 논란 사상 최대,최악의 인재로 기록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21일 사체발굴·잔해제거 작업 등이 모두 끝남에 따라 새로운 국면을 맞고있다. 이제 사고현장에서는 남은 건물 철거와 사고 뒷정리 등 제한된 업무만을 맡게 됐다.실종자 확인·보상 등 많은 과제들은 행정적·법률적 절차에 따라 건설교통부·서울시 등에서 다루게 된다. ▷사체발굴 및 실종자확인◁ 대책본부는 이날부터 실종자가족 대표·경찰 등과 함께 백화점 지하층에 대한 2차 사체수색에 들어갔다.그러나 잔해제거가 완료됐기 때문에 더이상의 사체는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고있다. 따라서 「실종된 사체」의 발굴을 위한 마지막 희망은 지난 18일부터 시작한 난지도 잔해물 재확인작업에 걸고 있는 형편이다.포클레인 10대 등 중장비를 동원,난지도 1만5천여평에 대한 재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이날까지 두개골 1개 등 뼈 19개,유류품 1천여점 등을 발굴해냈지만 실종자수와 시신수의 차이를 좁히기는 어려울 것으로 여겨진다. 대책본부는 이에 따라 사체가 확인되지 않은 실종자 1백51명에 대한 신상정보와 83점에 이르는 팔·다리 등 부분사체를 경찰에 넘겨 실종확인에 착수했다.경찰은 우선 실종신고한 각 가정을 방문,진위를 파악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부분사체를 보내 정밀 감식을 벌이기로 했다. ▷부상자치료 및 보상◁ 1천여명에 이르는 부상자들에 대한 치료비 및 보상금 지급은 일괄적으로 타결될 사망자 보상보다 훨씬 더 복잡할 것으로 보인다.병원 치료비는 물론 생업중단 기간 동안의 손실보상·후유증·정신적 충격에 대한 위자료 등 짚고 넘어가야할 대목이 한두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책본부는 시예산으로 부상자들의 치료비를 일단 바로 병원측에 지불한 뒤 나중에 삼풍백화점측으로부터 구상권을 청구하기로 했다.대책본부는 부상자를 치료하고 있는 구청보건소에 이미 1억8천만원을 지급한 상태이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성수대교붕괴사고 때 부상자 보상협의가 2개월 이상 걸린 점을 감안하면 이번에는 6개월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장대책본부 철수◁ 총괄·복구·잔해정리반 등 11개반,91명 규모로 운영되어온 대책본부는 1차수습이 마무리됨에 따라 부서를 통·폐합하고 인원을 줄이는 등 규모를 대폭 축소했다. 그러나 남은 A동 승강기탑과 B동 건물의 철거와 실종자가족들의 계속적인 사체수색 요구 등으로 철수를 하려면 적어도 10일 이상은 더 머물러야 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중장비도 실종자가족들의 요구에 따라 당분간은 현장에 그대로 대기시킬 계획이다. ▷건물철거◁ 남은 A동 승강기탑과 B동의 철거도 조속히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이웃 주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는데다 백화점 앞 차도의 통행이 아직까지 금지되어 있는 등 불편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거를 서울시와 서초구청 가운데 누가 맡을 것인지에서부터 철거시점·공법 등에 이르기까지 관계자들 사이에 이견이 커 어려움을 겪고있다. 현재는 1주일 안에 철거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유실물처리 및 물품반출◁ 지난 18일부터 시작된 B동쪽 52개 업소에 대한 물품반출은 22일 중으로 마무리될 예정이다.그러나 이날 현재 대책본부 유실물신고센터에 접수된 1천4백여건의 물품 가운데 주인이 찾아가지 않은 물건은 전체의 70%인 1천여건이나 돼 전부 반환되려면 2∼3주 정도 걸릴 것으로 보인다. ◎「삼풍」 현장 이모저모/지하 물탱크 등 수색… 사체발굴 실패/합동분향소엔 조문객 발길 줄이어 ○…대책본부는 21일 하오2시쯤부터 신현규씨 등 실종자가족대표 5명과 함께 A동 엘리베이터타워 아래와 지하 화장실,B동 지하4층 기계실·물탱크 등을 수색해 머리카락·목걸이·지갑·스카프 등 유류품 10점을 수거했으나 사체를 찾는데는 실패. 실종자가족들은 『대책본부가 잔해를 1백% 제거했다고 발표했음에도 현장과 난지도에서 유류품과 사체의 일부가 계속 나오고 있다』고 분개하며 끝까지 철저한 수색작업을 해줄 것을 요구. ○…사망자 4백58명 전원의 위패가 모셔진 서초구민회관 1층 사망자합동분향소에는 이날 하오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던 조남호 서초구청장이 찾아와 조의를 표하는 등 유가족과 조문객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20일 1백39명의 조문객이 찾아온데 이어 이날도 1백여명의 조문객들이 방문했는데 분향소에는 한글이름이 쓰인 위패만 있을뿐 영정도 없어 더욱 쓸쓸한 느낌. 분향소 옆에는 김영삼 대통령,황낙주 국회의장,조순 서울시장,김덕룡 의원 등이 보낸 대형조화 6개가 놓여 있었다. ○…합동분향소를 찾은 유가족들은 시신을 찾은데 그나마 안도하면서도 당국의 늑장구조에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 A동1층 수입의류매장에 근무하다 숨진 김선미씨(37·여)의 어머니 조정희씨(59)는 『합동분향소가 마련됐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면서 『국민학교 5학년,3학년밖에 안된 외손자들은 이제 어떻게 하느냐』며 딸의 위패를 감싸안고 자리를 뜨지 못했다. 조씨는 『지난 2일 딸의 시신을 찾았을때 팔을 만져보았더니 그때까지도 체온이 느껴질 정도여서 사망한지 얼마 안됐던 것이 분명하다』면서 『구조작업을 서둘렀다면 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오열. ○…서울교대 1백2호 강의실에 마련된 신원미상사망자 및 실종자합동분향소에도 64명의 희생자위패가 50여송이의 흰 국화꽃더미에 쌓인채 조문객을 맞았다. 열평 남짓한 합동분향소에는 민간인합동구조대와 PC통신자원봉사자 등이 보내온 조화가 놓여 있었고 위패에는 희생자들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이 꽂혀 있어 조문객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사고발생이후 강남성모병원 등 시내 주요병원에서 실종자가족들에게 사망자속보를 신속하게 전해주던 PC통신 자원봉사대원들도 이날 교대에 상주하던 50여명이 떠남으로써 완전히 철수. 사고 첫날부터 자원봉사를 했던 문동렬(문동렬·24·건국대 1년)군은 『아직도 1백56명이나 되는 실종자가 있는데 떠나려니 발길이 안떨어진다』면서 『더이상 시신발굴은 없을 것같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 ◎삼풍사고 남긴 뒷얘기들/역술인 예언에 비상대기 촌극도/구조대원들 「역한냄새」 내색않고 “구조활동”/강남성모병원 외래환자 하루 500명 줄어 건국이래 단순사고로는 최대의 참사로 기록될 삼풍백화점참사는 피해규모 만큼이나 많은 뒷얘기들을 남기고 있다. 특히 서울시사고대책본부의 늑장대응과 상황판단미숙,구조작업지연은 두고두고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으로 보인다. 119구조대원들의 활약상이 자주 소개되긴 했지만 이들이 겪은 정신적 스트레스 또한 엄청났다.시신이 부패하는 바람에 20여일동안 「역한 냄새」와 싸워야 했던 이들은 휴식시간에도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주변의 쓰레기통주변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훈훈한 미담을 남겼지만 「속셈있는」 자원봉사도 엿보였다.몇몇 대기업에서는 대규모 자원봉사단을 편성,식사나 간식 등으로 물량공세를 펴 목좋은 상업용부지를 선점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벌이는 것이 아니냐는 농담반진담반의 얘기도 심심찮게 나돌았다. 또 사고대책본부는 일부 자원봉사자들이 붕괴현장에 들어가 금품등을 챙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함부로 공개했다가는 대다수 자원봉사자들의 순수한 뜻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는 판단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는 후문이다. A동북쪽과 B동건물에 대한 안전진단을 벌였던 한 관계자는 『지하현장에 들어올 때는 옷이헐렁했으나 나갈때는 무엇을 챙겨넣었는지 불룩했던 자원봉사자가 한두명이 아니었다』며 양심불량에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참사현장에 모인 역술인들도 많은 얘기거리를 남겼다.한 역술가는 박승현(19)양이 구조된지 이틀뒤인 17일 사고대책본부와 현장기자실에 찾아와 『음양원리와 일진 등으로 미루어 오늘 하오5시에서 7시사이,9시에서 11시사이에 틀림없이 1∼5명의 생존자가 구조될 것』이라는 예언장을 돌려 보도진과 대책본부관계자들을 비상 대기하도록 하는 등 촌극을 빚기도 했다. 최명석(20)군등 3명의 생존자가 입원한 강남성모병원도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아직까지 삼풍사고피해자들이 몰려들어 북적댈 것이라는 우려때문에 하루 2천5백여명이던 외래환자수는 2천여명으로 줄었고 매일 70여명씩 몰리던 응급실은 아예 찾는 환자가 없어 썰렁한 분위기다.또 사고당일 북새통을 이루는 바람에 치료를 받고 귀가한 1백여명의 일반환자에게서도 돈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 보훈가족 출신 「유일한 별」 유보선 준장

    ◎휴전선 무너지는 날 빨리 왔으면…/「6·25 산화」 부친 뜻 새삼기려/어머니 모시고 금강·백두산 구경 가는게 꿈 『6·25때 전사한 부친의 뜻을 잇기위해 군인이 됐지만 아직도 통일의 날은 알 길 없어 안타깝습니다』 40여만명에 이르는 6·25 보훈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장군⊃이 된 유보선 육군준장(육사24기·49). 유장군은 광복 50주년이자 6·25 발발 45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합동참모본부 자신의 사무실에서 각별한 감회에 젖어들었다. 『남북통일의 선봉으로 탱크를 몰고 휴전선을 돌파할 날이 언제쯤일까』 『45년 반평생을 홀로 살아온 어머니(김봉희·71)의 「한」은 언제쯤이나 풀어드릴 수 있을까』 어느덧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둘 늘어난 유장군은 귀밑이 새파랗던 시절,육사에 지원할 당시가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가 64년 육사에 지원한 것은 오로지 부친의 유지를 이어 남북통일에 몸을 바치기 위해서였기 때문. 부친 유상재씨는 48년 7기로 육사에 입교해 대위로 근무중 6·25를 맞아 전사했다.그러나 유해를 찾지 못해 유장군등 유가족들은 해마다 현충일에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 위패에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제사를 대신하고 있다. 사후 소령으로 추서된 유상재씨는 전쟁발발 5일전 육군헌병학교에 입교했다가 전쟁이 터지자 학교에서 나와 전선투입을 자원했었다.그는 50년 8월26일 얼굴과 목등 3군데에 총상을 입고 병원에 후송돼 치료를 받던중 미처 완쾌되기도 전에 다시 전쟁터로 돌려보내줄 것을 요구,같은해 12월18일 2사단중대장으로 전투를 치르다 다음해 1월초 가평전투에서 전사했다. 유장군은 그동안 부친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다 지난해 비로소 부친의 실종처리서를 찾아내는데 성공,부친의 사망경위를 파악했다. 유장군은 『5살때 부친의 철모와 권총을 갖고 장난을 치다 넘어져 다친 기억이 있다』면서 『이런 기억 때문에 서울고를 졸업한뒤 곧바로 육사를 지원했고 군에서도 통일의 선봉장이 되기 위해 기갑병과를 택했다』고 말했다. 유장군이 당시 생도들에게 인기가 낮은 병과를 택한 것은 서독육사 재학중의 경험때문.우리나라는 65년 처음으로 육사생도 가운데 1∼2명을 뽑아 서독육사에서 수학시켰으며 이 때 유장군이 선발돼 서독육사 졸업 1호를 기록했다. 그는 68년 소위로 임관,소대장과 전차중대장·전차대대장·기갑여단장을 거쳤으며 91년7월 준장진급했다. 그는 『앞으로 남은 꿈은 금강산·백두산 구경하는 것』이라면서 『북한에게는 결코 만만하게 보여서는 안된다는게 지금까지의 경험』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 서대문 독립관 원상복원/서울시/강제철거 50년만에

    ◎8월 15일 착공… 내년 광복절 개관 서울시는 일제가 강제 철거했던 서대문 독립공원 안의 독립관을 광복 50돌을 맞아 원상 복원키로 했다.오는 7월 말까지 설계를 마치고 광복절인 8월15일에 착공,내년 광복절에 문을 연다. 7백40평의 터에 지상·지하 1층으로 복원한다.외벽은 전래 벽돌로 치장하고 지붕은 전통 기와로 처리해 옛 모습을 살린다.1층에는 전시실과 위패 봉안실을,지하에는 회의실과 자료실,관리실을 설치한다. 독립관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의 영접과 전송을 위해 잔치를 하던 모화관을 1896년 독립협회의 윤치호·서재필 박사 등이 사대주의를 청산한다는 취지로 이름을 바꾸고 전국 각지에서 들어온 기부금으로 시설을 고쳐 독립협회 회관으로 사용한 곳이다. 일제는 독립관을 철거한 뒤 형무소를 세워 독립투사를 가뒀으며 독립문도 함께 철거했었다.
  • 아들들의 어머니(송정숙 칼럼)

    아들을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은 두어야겠다고 벼르는 사람이 있다.「맏이는 사업가를 만들고 둘째는 법관시키고 셋째는 의사로 키우기 위해」셋은 있어야겠다는 것이다.언제부턴가 신문 부음란에는 화려한 직함이 열거된 아들들의 친상이 실리곤 한다.아들을 셋씩이나 원하는 마음도 그런데서 자극받은 것인지 모른다. 불화하던 재벌 형제의 극적인 화해소식이 최근 화제가 되었었다.아직은 소를 취하하기 전이므로 재연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지만 어쨌든 형제는 화해를 했다.그 아들들의 화해를 지켜보던 그들의 모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가업을 일으켜 거부의 재산을 남긴 그들 부친의 위패를 모신 재실에 형제를 데리고 들어가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대목이다. 또 최근에 지방에서는 아우가 형의 자동차에 폭발물을 설치하여 형의 아내와 자녀를 폭사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몇백만원의 빚시비가 형제간에 골깊은 불화를 만들었고 그러다 일어난 범행이었다.혹시 그들의 어머니가 생존해 있다면 이 기막힌 일을 어떻게 맞이했을까. 그리고 그 끔찍한 「아버지 살해」.어마어마한 부잣집 맏아들이면서도 공부도 잘해서 어엿한 대학교수가 되었고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우리 김 박사』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는 그 장남이 아버지 목줄에 칼을 꽂았다.우리로 하여금 몸이 오그라드는 전율을 맛보게 하고 세상에 회의를 느끼게 한 사건이다.그러나 살아있는 그의 모친에 비하면 우리의 전율과 회의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재산이란 사람을 그토록 가혹하게 시험하는 것인가보다.박한상은 돈이 직접 자식을 망친 경우라 치더라도 「금용」집안의 경우에는 재산관리에 엄격하고 가족에게 절제를 가르치며 금욕적으로 키운 것같은데도 마찬가지로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다.재산이란 이렇게 여러형태로 인성을 파괴하고 파탄시키는 힘을 지닌 모양이다.타락과 일탈만이 아니고 학문,교양,종교도 그것앞에서는 이처럼 무력하고 사람이기를 포기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돈의 한 속성인 모양이다. 요즘 세상은 어머니의 영향력이 커져서 아들의 대학입학식에도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따라다닌다.불화한 아들들이 안타까워 통곡하며 타이르는 어머니도 있고 「덕산」처럼 배후에서 자금줄을 죄고펴고 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머니도 있다.교육열 강한 어머니 치마폭에서 성장한 세대가 본격적인 사회의 주역이 된 시대가 지금 막 다가왔는데 이런 기막히고 절망스런 사회문제가 잇따르는 것은 그냥 우연일까. 요즘의 재산가는 그저 붙박이 땅부자일 뿐이던 고전적 부잣집과 다르다.그렇게 근대적인 부의 축적을 이룬 재산가의 가족노릇에는 재산에 걸맞은 자기 관리능력과 철학같은 것이 있어야만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것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을 못한 탓에 실패의 수렁에 빠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돈이란 워낙 힘있고 좋은 것이므로 그걸 갖고,유지하고,잘 쓸 수 있기 위해서는 능력과 자격을 갖추는 일을 충분히 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들을 셋이나 욕심내는 사람의 말처럼 아직은 아들이 보험이면서 재산으로 되어 있다.재산을 일구고 지키는 역할도 거기 맡겨야 하고 돈보다 소중한 재산이기도 하므로 돈에 의해 망쳐질 가능성도 크다.그러므로 돈의 부정적 기능에 대한 방어력과 적응력을 갖춰줘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자랄때 골목안에서는 매맞는 아우를 형이 영웅처럼 지켜주고,궁지에 몰린 형 곁에서 승산도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거는 것이 아우이다.그런 형제도 자란 뒤에 원수가 되어 폭발물로 날려보내는 일조차 서슴지 않게 되고,법정에서 치사한 이전투구를 벌인다.아버지에게는 「아비보다 나은 아들」이 기쁨이지만 「아버지만 못한 아들노릇」의 강박관념은 정신분열증의 빌미가 된다. 아버지의 승인을 받지 못한채 사업을 벌여놓고 거액의 부도가 나게 생긴 아들은 그로해서 아버지와 불화하고 마침내는 아예 「아버지 죽이기」를 계획했다고 말한다.성한 정신이 아니다.치마폭 넓은 현대의 어머니에게는 재산이 많을 경우 이렇게 끊임없이 시험당하는 「돈많은 집 아들」을 바르게 기를 역할도 주어져 있다.그것에 실패하면 희대의 패륜아를 아들로 두어야 하는 불행의 지옥을 헤매야 한다. 그런 어머니에게 재산은 무슨 소용이고 영화가 가당하겠는가.「공부 잘 하고 모범생이던 사랑하는 자식」도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우리 모두 같이 죽자』며 기절해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처참한 어머니.오늘의 아들들의 어머니노릇은 이렇게 가슴이 오그라드는 두려움을 바로 곁에 두고 있다.참으로 조심스럽고 힘든 노릇이다.
  • 조창호씨 위패 삭제/이국방에 중위진급 신고/보국훈장받고 오늘 전역

    김영삼대통령은 25일 하오 북한을 43년만에 탈출,지난달 조국으로 돌아온 조창호씨(64)를 청와대로 초청,오찬을 같이하며 격려한뒤 보국훈장 통일장(1등급)을 수여했다. 보국훈장 통일장은 「국가안전보장에 뚜렷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올해 국군의 날 해·공군참모총장 및 육군 2군 사령관에게 수여됐었다. 조씨는 이에 앞서 이날 상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 호국영령들에게 헌화·분향한뒤 자신의 위패를 제거하고 국방부에서 이병태국방장관에게 중위 진급신고를 가졌다. 조씨의 진급신고는 26일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릴 전역식에 앞서 이루어진 것으로 조씨는 43년만에 소위에서 한 계급 진급한 중위신분으로 군을 떠나게 됐다. ○…북한탈출 후 첫 외출을 나온 조창호씨는 이날 상오10시 소위 계급장을 단 정복차림으로 국립묘지에 도착.조씨는 장태완 재향군인회장등 관계자와 모교인 경기상고 학생등 1백여명과 함께 의장대 사열을 받은뒤 현충탑에 「조창호 소위」라고 적힌 대형 화환을 헌화하고 묵념. 조씨는 이어 현충탑 지하영현봉안관실 검은 대리석에 흰 글씨로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준비해간 검은 테이프로 가리는 것으로 위패삭제식을 대신.
  • 조창호씨 26일 전역/1억6천만원 지급

    국방부는 43년만에 북한을 탈출,고국에 돌아온 조창호소위의 전역식을 26일 상오 10시 육군사관학교에서 이병태국방장관등 군관계자등이 참석한 가운데 갖는다고 23일 밝혔다. 한편 국방부는 조소위에 대해 그동안 밀린 월급과 퇴직금조로 모두 1억6천만원을 지급키로 했다. 조소위는 이에 앞서 25일 그동안 입원해있던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퇴원,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순국선열들에게 헌화하고 전사자로 봉안돼있는 자신의 위패를 제거한다. 조소위는 또 같은날 국방부에서 이병태장관에게 중위진급신고를 마친뒤 청와대에서 보국훈장 통일장을 수여받는다.
  • 국보급 문화재/관리소홀로 훼손 심각

    ◎현모탑비 균열심해 “붕괴위기”/법주사 팔상전도 지붕서 비새 전국 주요사찰이나 유적지에 있는 국보급 문화재가 당국의 무관심과 관리소홀로 심하게 훼손·방치돼 관리에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또 탱화 및 불상 도난사건이 해마다 크게 늘고 있다. 특히 지방문화재는 각 시·군 담당공무원이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없는데다 숫자도 고작 2∼3명 정도여서 문화재 보존에 큰 문제가 되고 있다. 29일 조계사 등 불교계에 따르면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 법천리 지광국사에 있는 국보 59호 현묘탑비는 몸체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심한 균열로 붕괴직전에 놓여있다.또 경북 경주군 양북면 감은사지 3층석탑(국보 112호)은 쌍둥이탑중 왼쪽탑의 1층 탑신벽면이 깨지고 불에 검게 그을려 있는 등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국내 유일의 목탑인 충북 보은의 법주사 팔상전(국보 55호)도 지난해 10월의 폭우로 지붕에서 비가 새고 있다.천불천탑의 전설로 유명한 전남 화순의 운주사 와불도 보호울타리가 형식적으로 설치돼 있어 관광객들의 발에 마구 밟혀 원형을 잃어가고 있다. 조계사의 통계에 따르면 탱화나 불상의 도난사건은 91년 25건,92년 24건,93년 45건,94년 67건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지만 당국은 뒷짐만 지고 있는 상태다.지난 4일에도 경북의성 고운사의 고려시대 탱화 2점이 도둑맞았고 지난 9월24일에도 백양사에서 조선시대 탱화 1점과 위패 2개를 도난당했다.더구나 이들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일부 사찰에서는 징계가 두려워 도난사실을 신고하지 않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관리소홀로 인한 훼손·분실보다도 더욱 큰 문제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문화재로 지정되고도 관리대상 목록에서 누락돼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충청북도에 따르면 도내에는 문화재가 국보 8점을 포함,3백48점이 있지만 문화재관리국에서 작성하는 문화재대관에는 전체의 63%인 2백20점이 빠져있고 더구나 그중에는 국보도 3점이나 들어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 조창호씨 전역식/새달4일 9사단서

    국방부는 43년만에 북한을 탈출,생환한 조창호씨(64)의 전역식을 다음달 4일쯤 조씨가 6·25당시 육군소위로 근무하던 9사단에서 이병태국방장관·김동진육군참모총장등이 참석한 가운데 갖기로 했다. 현역소위로 인정을 받은 조씨는 이날 중위로 특진하는 동시에 전역한다. 조씨는 전역에 앞서 국립묘지를 참배,영현봉안관에 있는 자신의 위패를 치운뒤 청와대에서 김영삼대통령으로부터 무공훈장을 받을 예정이다.
  • 조창호씨/현역군인가 귀순동포인가/43년만의 생환… 군적 어찌되나

    ◎「포로」인정땐 원계급 회복,「최장수 소위」/단순 탈출… 「민간인」 간주땐 제대자 처리 6·25당시 포병소위로 참전했다가 중공군에 붙잡혀 북한땅에서 살아온 조창호씨(64)가 43년만에 북한을 탈출,생환해옴에 따라 조씨의 사망을 기정사실화하고 조치를 취했던 정부의 관련부처들이 조씨에 대한 대우등을 놓고 부심하고 있다. 국방부와 육군은 조씨를 「전사자」로 처리,중위로 1계급을 추서했으며 국립묘지측은 조씨의 위패를 봉안해놓고 있는 상태다.또 국가보훈처는 조씨를 국가유공자로 처리,가족들에게 일정액의 연금을 지급했었다. 조씨에 대한 처리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고 있는 부분은 조씨의 군적문제이다.즉,조씨에 대해 북한생활을 포로생활로 인정하고 지난 43년동안 군적을 유지한 것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제대한 것으로 처리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이다.이 문제는 조씨가 앞으로 군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각종 혜택을 부여받을 수 있는지와 관련돼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조씨는 포로상태가 인정되면 사망후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지만 단순한 탈출로 간주되면 앞으로 실제 사망때에는 국립묘지안장이 불가능해진다. 현행 국립묘지령등에 따르면 현역군인등으로 20년이상 근무한 군인연금 수급권자등을 국립묘지안장대상으로 선정하고 있어 조씨는 자칫 생존시에는 국립묘지에 위패가 봉안됐다가도 실제 사망했을 때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하게 될 우려도 있는 것이다.군인연금수혜여부는 조씨가 정상적으로 근무하지 않아 매달 연금갹출료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연금수혜는 받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와 육군은 따라서 조씨에 대해 북한생활이 포로생활이었는지를 앞으로 조사할 방침이다.이 조사에서 포로로 인정되면 당연히 지난 43년을 현역으로 근무한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이 경우 조씨는 전사를 조건으로 1계급특진,중위가 된 만큼 다시 원계급을 회복,「최장 소위근무자」가 된다.그러나 조씨가 북한에서 결혼을 하는등 포로생활에서 벗어난 민간인이며 북한을 탈출한 동포로 단순하게 보면 조씨는 군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게 된다.이때 조씨는 전사처리된 51년 9월 자동제대한 것으로 간주된다. 육군에 따르면 조씨는 51년 4월14일 임관,5월 실종돼 4개월후인 9월10일부로 전사처리됐다.병역법과 군인사법등 관련법규에서는 「전투중 행방불명자에 대해서는 2년 경과시 전사처리하고 생환시 전사처리일부로 제대처리한다」고 규정돼있어 조씨는 이 조항의 적용을 받게 되는 것이다.육군의 한 관계자는 『조씨의 사례가 처음있는 일이라 관련규정이 정비돼 있지 않다』면서 『조씨의 처리결과가 선례가 된다는 점에서 철저히 관련법규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군적문제 다음으로 관심을 끄는 대목은 조씨의 가족들이 그동안 받았던 국가유공자연금의 환수여부다.국가보훈처는 조씨가 전사처리된데 따라 61년 8월 국가유공자등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조씨를 국가유공자로 등록,조씨의 부모인 조연국씨(사망)와 이곤옥씨(사망)에게 61년 당시에는 한달에 5백원씩을,연금수혜자인 부모가 모두 사망한 82년 8월에는 마지막으로 1만9천9백원을 연금으로 지급했었다.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국가유공자예우등에 관한 법률에서 본인이 거짓말을 하는등 본인의 귀책사유가 없으면 군기록이 변경되더라도 관계없다는 조항이 있어 조씨가 받았던 연금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조씨가 앞으로 정착금등을 받을 수 있을지의 여부도 관심거리다.보사부와 안기부등 관계당국은 조씨에 대해 귀순동포인지의 여부를 가리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현행 「귀순월남동포보호법」은 북한에서 출생해 귀순한 사람을 대상으로 최저임금의 15∼20배를 정착금으로 지급하도록 돼있어 조씨의 경우는 해석이 다소 다르다는 입장이다. 관계당국은 이에따라 국방부가 조씨를 현역군인으로 인정할 것인지를 지켜본뒤 조씨에 대한 처우를 결정한다는 생각이다. ◎“포병소위 무사귀환 신고합니다”/생환 조창호씨,방문한 이국방에 거수경례 북한을 43년만에 탈출,극적으로 조국의 품에 안긴 조창호씨(64)는 25일 하오3시쯤 이병태 국방장관이 위문을 위해 병실을 방문하자 불편한 오른팔과 다리에도 불구하고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크게 군번등을 외치며거수경례,군인정신을 보여줬다. 조씨는 당초 자신이 입원해 있던 서울중앙병원에서 이날 하오2시47분쯤 국군통합병원 5층 VIP실로 이송된 뒤 이장관이 자신을 방문하자 병상에서 일어나 부동자세로 『포병소위,군번 212966,국방장관님께 무사히 귀환했음을 신고드립니다』라며 신고한 것. 이어 이장관은 『선배님이 오랫동안 고생하시다가 돌아오시게 된 데 대해 우리국민과 국군이 환영하며 대통령께서 저를 대신 보내셨다』면서 김영삼 대통령명의의 꽃다발을 전했다. 한편 이장관의 조씨 방문에 동행한 군 관계자들은 『조씨가 귀환신고를 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콧등이 시큰했다』며 『신고를 하는 조씨의 눈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니 조씨가 그토록 고생했어도 군인정신만큼은 살아 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 조씨 국립묘지에 위패 봉안중/「전사자규정」에 따라 77년 사망처리

    ◎생존자로 밝혀져 「위패삭제」 첫 기록 6·25 참전중 포로로 잡혀 납북됐다 43년만에 탈출한 전 육군소위 조창호씨(64)는 지난 77년이후 전사자로 처리돼 동작동 국립묘지 위패실에 봉안돼 있는 것으로 24일 확인됐다. 이에따라 조씨는 국립묘지에 위패가 봉안된 사람 중 생존자로 밝혀져 위패를 삭제하게된 최초의 인물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됐다. 국립묘지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6·25 참전 군인이나 경찰·군무원중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사람의 경우,「전사자 처리규정」에 따라 실종된지 25년이 지나면 전사자로 처리돼 위패를 봉안하게 되는데 위패가 봉안된 사람중 살아돌아온 경우는 조씨가 처음이라는 것이다. 조씨의 위패는 국립묘지 현충탑 지하에 설치된 위패실 좌측 대리석에 「육군 중위 조창호」라는 명단으로 새겨져있다. 조씨의 위패 카드번호는 47­8­052로 이 카드에는 성명과 함께 육군 중위로 추서된 계급,소속 사단,군번,사망일자,유가족 이름과 주소 등이 기록돼 있다. 조씨의 위패카드에는 육군 9사단 소속 육군 중위,군번 211366,사망일자 51년9월10일이라고 적혀 있다. 또 유가족난에는 부친 조영국씨의 성명과 서울 종로구 효자동 165라는 조씨의 당시 주소가 기록돼 있다.
  • 42년만에 치른 소대장 영결식/연천 DMZ서 심창섭소위 유골 발견

    ◎6·25 백마고지전투서 산화… 현장에 묻혀/신분증 등 찾아내 신원확인… 훈장 추서 「군번 120728.이름 심창섭.소속 보병 제9사단 28연대 2대대 5중대.계급 소위」 6·25당시 임관 6개월도 못돼 격전의 백마고지전투에서 전사,전우들에 의해 포연이 자욱한 그 자리에 묻힌 심소위의 유골과 유품이 42년만에 발굴돼 17일 현장에서 영결식이 치러졌다.심소위의 유골은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된다. 전방 열쇠부대 수색대대 소대장 권오윤소위(25)등 수색대원 10명은 지난 6월15일 연천북부 비무장지대에서 진지보수작업을 위해 땅을 파내려가던중 흩어진 유골을 찾아냈다. 초여름의 더위속에서 땀을 흘리며 삽을 놀리던 대원 이상현상병(22)이 땅에 묻힌 유골과 가죽지갑,글자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빛바랜 신분증 1개등을 발견한 것. 수색대원들은 이 유골이 전투끝에 산화한 선배장병의 것으로 직감,헌병대에 보고하고 정밀조사에 들어가 유골일체와 「심창섭」이라고 새겨진 플라스틱도장,실탄 10발이 들어 있는 카빈소총을 추가로 찾아냈다. 열쇠부대는 이 유품들을 즉시 국방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지문감식등을 의뢰하는 한편 육군본부 병적과의 참전장교연명부와 국립묘지의 위패봉안자명부등을 통한 신원확인작업에 나섰다. 지문감식에는 실패했지만 참전장교연명부와 국립묘지에서 전사·위패봉안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한달여만인 지난달 중순 신원이 최종확인됐다. 국군문서보관소는 심소위에 대해 「52년5월24일 소위임관,52년10월9일 강원 철원지구에서 두부파편창으로 전사,본가에 봉송」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마고지는 52년10월6일부터 15일까지 열흘동안 피아간에 뺏고 뺏기는 혈전이 펼쳐진 격전지.양측 합해 1만3천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고지의 주인이 무려 24번 바뀐 것으로 전사에 기록돼 있다. 육군은 당시 23세의 꽃다운 나이로 장렬하게 순국한 심소위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17일 상오 부대안에서 참전동지·유가족등이 참가한 가운데 영결식을 치르고 심소위에게 1계급특진과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독자로 대가 끊긴 심소위의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 이날 영결식에 참석한 심재홍씨(47)는『항상 위패만 국립묘지에 봉안돼 있어 안타까웠다』면서 『고인도 이제는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라고 눈시울을 적셨다.
  • 임란 코무덤 오늘 봉환/부안 호벌치에… 어제 부산서 노제

    【부산=이기철기자】 임진왜란때 왜군에 의해 살륙된 뒤 일본 오카야마현의 「코무덤」에 묻혀 있던 선조들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노제가 25일 하오 부산시 동래구 사직운동장앞 광장에서 열렸다. 이날 노제는 삼귀의례와 심경봉독·헌향·헌화에 이어 한·일 양측 각계 인사의 추도사와 조사 순으로 진행됐으며 원혼을 달래기 위한 고전무용가 홍복순씨(40·여)의 「살풀이 춤」도 펼쳐졌다. 노제를 마친 「코무덤」영령들의 위패와 유골함은 남해고속도로를 통해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호벌치로 떠났으며 26일 열리게 될 임진왜란 비총 환국 안장추모대회」가 끝난뒤 영구히 안장된다.
  • 내일 다비식… 연단 국화로 꾸며/성철 큰스님 열반 해인사 표정

    ◎2만명 참배… 전전대통령도 조문 성철종정 입적 닷새째인 8일 해인사에는 지난 이틀동안 궂었던 하늘이 활짝 열리면서 전두환 전대통령을 비롯한 조문객들로 크게 붐볐다. 해인사측은 10일로 예정된 영결식과 다비식을 이틀 앞두고 다비에 쓰일 떡갈나무를 쌓는 등 종단장준비에 바삐 움직였다. ○…해인사는 종단장 준비에 크게 분주한 모습.구광루앞 광장에 마련된 높이 4m·길이 12m의 영결식장 연단 중앙에 종정의 영정을 설치하고 황색과 흰색 국화로 연단을 꾸미는 한편 「전불심등 부종수교 조계종정 성철대종사 각령」(부처님의 법을 전하고 선종과 교종을 함께 일으키신 조계종종정 성철대종사의 깨치신 영혼이여)이라고 쓰여진 위패를 모셨다.다비식이 있을 연화대 주변에서는 10여명의 스님들이 다비식에 쓸 나무를 자르고 장작을 패느라 분주. 만장신청이 크게 늘어나자 해인사측은 청화당외에 관음전 심검당에서 만장접수를 받고 이날까지 선구·큰스님의 법문 등을 적은 1천여장의 만장을 준비. ○…해인사 일주문에서 본사까지 2㎞의 산길은 전국에서 몰려든 신도와 승려들로 가득 메워졌으며 분향소가 있는 궁현당에는 참배를 하려는 신도들이 20∼30m씩 줄을 서 대기하는 모습.해인사측은 이날 신도들을 위해 사찰내 방송시설을 통해 성철스님의 육성으로 녹음된 법문을 방송했으며 신도들은 참배차례를 기다리며 연신 합장배례.일부 신도들은 법체가 모셔진 퇴설당 앞에 몰려가 눈물을 흘리며 종정의 입적을 애도.이날 하룻동안 조문한 신도는 2만여명으로 집계됐는데 특히 서울·부산·광주·대구 등 대도시에서 사찰단위로 온 대규모 조문객이 대부분을 차지. ○…이날 상오 9시30분쯤 전두환 전대통령이 측근들과 함께 분향소를 찾아 참배했으며 미얀마연방 원로원 바딴다카마우따종정이 조전을 보내오는 등 국내외에서 20여통의 조전이 쇄도.
  • “일본 곳곳에 「한글숭배」 신사”/부산외대 김문길교수 확인

    ◎자모만 일부 바꿔 위패등 새겨/“학문신”… 시험합격 기원 참배/“개국때 만들어진 신대문자… 한글이 되레 모방” 주장 일본인들이 한글을 변형시켜 만든 문자를 신사에 모셔놓고 복을 기원하는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실이 밝혀졌다.게다가 그들은 그 문자가 일본의 개국신화 시대에 만들어진 「신대문자」이며,한글이 오히려「신대문자」를 모방했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부산외국어대 김문길교수(일본어학과)는 8일 자신이 일본 현지에서 조사한 신사에서의 「한글숭배」실태및 『한글은 신대문자를 베낀 것』이라고 주장한 일본 학자들의 저서를 공개했다.이에 따르면 일본의 신사에서는 정문 윗부분과 위패등지에 「신대문자」로 신의 이름을 새겨놓아 참배객들이 그 문자에 대해 절을 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그 글자는 한글을 약간 바꾼 정도라는게 김교수의 지적이다.그는 오카야마현 나가오(장미)신사를 예로 들었는데 사진에서 보듯 정문에 쓰여진 신의 이름은 「□ㅏㄱㅏㄴㅏㅁㅜㄱㅏ」였다. 김교수는 일본인들이 이 문자를「가무나가라」라고 읽는다며,한국인이 이 글자를 오른쪽부터 읽으면 단지 한글의 자모를 풀어 써 「무」를 「ㅁㅜ」로 표기했을 뿐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고 말했다.다만 「라」가 「□ㅏ」로 쓰인 것은 일본인들이 한글을 모방하면서 「ㄹ」을 「□」로 바꾸는등 문자 몇개를 변질시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교수는 자신이 지난 7∼8월 일본의 일부지방을 돌아 본 것만으로도 1백여개의 신사에서 이같은「한글숭배」를 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또 일본인들에게 왜「신대문자」에 절을 하느냐고 물으면 한결같이『신대문자로 이름이 쓰여진 신은 학문의 신이어서 그 신사를 참배하면 각종 시험에 무사히 합격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일본인들은 「신대문자」를 언제,왜 조작했을까. 김교수는 「신대문자」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초 일본의 대표적인 국학자 히라다 아쓰다네(평전독육)가 1819년 2월 발간한 「일문전」이라는 책에서였다고 밝혔다.당시 일본에 서구의 문물이 밀려들자 이에 위기를 느낀 민족주의 학자들이 가장 일본적인 학문(국학)과 종교(신도)를 부흥시키자는 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중국의 한자,불교경전에서 따온 「가다카나」「히라카나」와는 다른 일본 고유의 문자를 조작할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이에따라 히라다가 『일본의 개국신인 천조대신이 만든 문자를 발견했다』면서 「신대문자」를 공표하자 이 문자는 국학·신도의 인기를 타고 급속히 번져나갔으며 이후 신사의 문자로 정착했다는 분석이다.당시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일본학자들이 한글교본을 쉽게 접할 수 있었으리라고 김교수는 추정했다. 히라다가 만든 「신대문자」는 모두 47자로,그 모양새는 한글 자모를 풀어쓴「ㅁㅜ·ㄱㅏ」 형태와 「ㅏ·ㅓ」등을 자음 밑에 붙여쓴 「ㄱㅏ·ㄴㅓ」형태등 2종류이다. 김교수는 『일본의 국학자들은 「신대문자」를 고유문자라고 내세우기 위해 거꾸로 한글을 모방품으로 밀어붙였다』면서 그러나 1945년 종전이후 양식있는 일부 학자들은 그같은 주장을 부끄러워하고 있다고 밝혔다.
  • 대마도 이즈하라 만송원(일본속의 한국문화:3)

    ◎임란침략 선봉장 종의지 아들이 건립/20대 도주 의성,선친 명복 빌기위해 세워/마룻바닥 구석에 약탈한 조선제기 전시 『살아서 대마도에 가서 부산을 단 한치만이라도 바라볼 수 있다면 아침에 갔다 저녁에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 정유재란때 일본으로 끌려가 4년간 억류당한 유학자 강항의 비통한 한마디다.강항는 돌아와서 유명한 「간량록」을 지어 남겼다.「간양록」을 읽지 않고서는 일본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책이다. 대마도의 행정수도 이즈하라(엄원)에 가면 누구나 관광업소 제1호 만송원을 둘러보게 된다.본래 송음사라 이름지었다가 만송원으로 고쳤다고 하는데 만송은 우리나라 역사책에도 잘 알려진 임진왜란의 침략앞잡이 종의지라는 19대 대마도주의 법호라고 한다.그 아들 종의성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어 절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 이 만송원의 유래다.그런데 이 아들 의성 역시 임란후 국서(외교문서)를 위조하여 속임수로 한일국교를 정상화시킨 장본인이다.그러니 만송원으로 들어가는 한국관광객들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아니나 다를까 지은 뒤 화재를 만나 몇번이나 다시 지었다는 법당에는 일본막부 덕천가의 위패를 유리창속에 안치해놓고 앞의 마룻바닥 한 구석에는 조선국왕이 바쳤다는 이 절의 보물 삼구족을 마치 노획물이나 되는 듯 전시해놓았다.도대체 놓여 있는 자리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경복궁서 훔쳐온 듯 일본막부 덕천일주을 신주처럼 모셔놓고 그 앞에 그것도 마룻바닥 한 구석에다 우리나라 왕실에서나 쓰던 성스러운 기물을 진열하였으니 말이나 되는 일인가. 거기다 더한 것은 조선국왕이 이 보잘것없는 섬의 도주에게 왕실에서 쓰는 기물을 바쳤다(여기 말로 공헌하였다)는 말투다.아마도 이 말은 일제때 조선을 얕잡아보기 위해 지어낸 말이라 추측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말은 바른대로 해야 되지 않겠는가.조선국왕의 하사품이라든지,아니면 더 솔직하게 말하면 임진왜란 때 왜국의 선봉장으로 서울에 입성했을 때 경복궁에 들어가 훔쳐온 것이라든지 확실하게 사실을 고백해야 할 것이 아닌가.왜냐하면 필자가 아는 한 우리측의 어느 기록에도 이런 성스러운물건을 대마도주에게 하사하였다는 글이 없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별로 기분이 좋지 않는 상태에서 만송원 법당안을 둘러보고 나면 그 뒷산이 청수산이라는 이즈하라의 진산에 올라가게 되는데 30여대에 걸친 종가들 일족의 공동묘지가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종가의 족보문제다.도대체 종가란 자들은 언제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 임란 직후에 사상초유의 외침에 시달린 우리 조상들은 많은 임란일록을 지어 남겼다.그중에 화은 신경(신경,1614∼1653년)의 「재조번방지」란 책이 있다.이 책에 보면 대마도주 종가는 우리나라 송씨였다는 기록이 나온다.즉 신경은 대마도가 우리나라와 가장 친근한 섬이라 하면서 그 이유를 『대개 대마도땅은 모래와 돌로 되어 있어 전적으로 우리나라와 교역하여야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이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도주 종성장(12대)은 우리나라 송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섬(대마도)으로 들어가서 도주가 되어 성을 종으로 간 사람이다』 신경의 「재조번방지」는 매우 신빙성이 있는 책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에 대마도주 종가의 뿌리가 조선인 송가였다는 이 기록을 근거없다고 하여 일소에 붙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조선인 송씨가 조상 본시 일본 사람들의 습속이란 『성을 가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여겨온 우리네와는 달리 마음대로 갈고 고치는 사람들이므로 종가의 세계보를 그 어느 누구도 보증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만송원에 모셔져 있다는 종의지란 인물이 과연 어떤 인물이었나 하는 점이다.강항에 따르면 종의지는 『풍신수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는데 있어서 향도노릇을 한 모사였다』고 비난하고 있다. 또 임란 이전에는 우리나라 쌀을 받아먹다가 임란때 선봉장으로 공을 세워 수길에게 영지를 얻어 일본쌀을 먹게 되었다고 그 배신행위에 격분하고 있다. 그러나 강항이 4년간의 억류생활을 마치고 그리운 조국땅을 향해 대마도를 거쳐 오는데 이 이즈하라에서 의지의 참모역을 맡고 있던 심복부하 유천조신을 만나 이런 하소연을 들었다.대마도는 그때 임란 직후라 조선과의 교역이 끊겨 도민의 생계가 막막하던 때였다. 『이 섬은 한일 두나라 사이에 끼여 있어 수길(즉 일본)이 상국(즉 조선)을 침범하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그래서 우리가 사전에 수길이 조선을 침략하리라는 정보를 귀뜀하여 주지 않았습니까.미리 침략에 대비하라는 것이었는데 우리로서는 그때 할일을 다했습니다.수길이 침략군을 동원하게 되자 약한 우리 대마도로서는 어쩔 수 없이 선봉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에 장차 조선이 강해서 일본을 친다고 한다면 우리는 조선을 위해 일본을 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또 대마도는 과거 2백년간 위관의 소굴이었다고 하나 호남을 범한 일은 있으나 영남을 범한 일은 없습니다.우리 대마도가 조선의 영남을 지켜준 셈입니다』 ○임란발발 미리 알려 조신의 이 말 가운데 왜구의 방파제가 되어 조선의 영남지방을 지켜주었다는 마지막 말은 과장되어 있으나 임란 직전에 왜군이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를 조선에 알려준 사실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종의지와 조신은 임란 직전인 1590년에 우리 사신 황윤길과 김성일을 수행하여 일본에 갔었는데 돌아와서 두 사신의 보고가 엇갈리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했다.이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듬해(1591년) 5월 임란이 일어나기 꼭 1년전에 종의지가 홀로 배를 타고 부산 영도에 와서 『조선조정에 급히 아뢸 말씀이 있으니 나를 서울에 가도록 하여 주시오.일본이 곧 쳐들어옵니다.대비하여야 합니다』라고 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이때 서울의 조정에서는 어리석게도 현지 관리의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아무 회답도 보내지 않았다.종의지는 열흘동안 기다리다가 실망하고 대마도로 돌아가고 말았다.이 사실로 미루어 그는 과연 조선인 종씨의 후손이 아니었든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 이리 신룡벌(한국의 종교성지:10)

    ◎원불교단 심장부… 각종 사적·기관 소재 원불교 중앙총부가 자리잡고 있는 전북 이리시 신룡벌 일대는 소태산 대종사가 변산에서 제법후 이곳에 18년간 머물면서 교화를 펴다 열반한 전법성지로 오늘날 원불교단의 심장부를 형성하고 있다. 원기9년(1924년) 일제의 민족종교 탄압 속에서 「불법연구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이곳에서 교화가 시작된 이래 오늘날은 원광대학교를 포함,이리시 북부 50여만평에 교단 사적은 물론 원불교를 총괄하는 각종 기관들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1924년 9월에 최초로 지어진 본원실,대종사가 기거하던 금강원,사무소인 구조실,원광대 전신 유일학림의 강의실로 사용되던 상주선원,최초로 일원상이 봉안된 대각전,대종사 유골이 봉안된 대종사성탑,2대교주 정산종사성탑등 수많은 교단 사적들이 잘 보존돼 있다. 또한 대종사 이하 역대 선진들과 선성들의 위패를 모신 영모전,대종사의 유품및 유물 전시와 사상의 연구 발전을 위해 최근 건립한 소태산기념관,교단행정의 중심지인 교정원,교무들의 정기훈련및 교도들의 훈련을 담당하는 중앙훈련원이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다.길건너에 원광대학교가 있으며 인근에 보광사,만석평,동산선원,원불교 문화회관등이 흩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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