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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작, 양녕대군 이제묘역 전면개방

    동작, 양녕대군 이제묘역 전면개방

    서울 동작구는 ‘양녕대군 이제묘역’(서울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11호)에 대한 편의시설 공사를 마치고 27일부터 주민들에게 전면개방키로 했다고 26일 밝혔다.양녕대군 이제묘역은 태종의 장남이자 세종의 큰형 양녕대군 이제를 모시는 사당과 묘역이다. 사당은 숙종 1년(1675)에 세워져 1912년 지금의 상도4동에 자리잡았다. 사당 안에는 양녕대군과 부인 광산 김씨의 위패를 비롯해 양녕대군 친필인 숭례문 현판의 탁본과 정조가 지은 지덕사기 등이 있다. 그동안 양녕대군 이제묘역은 재단법인 지덕사(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종중) 소유로 신청자에 한해 제한적 개방이 이뤄졌다. 2014년 서울시 도시재생사업 공모를 위한 주민설명회에서 지역 문화자원 활용을 위한 전면개방 요구가 이어졌고 2016년 재단 측과 협의를 거쳐 문화재 개방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세월호 4주년] 네 번의 봄, 1462일 만에 분향소 떠나… 304개의 별이 되다

    [세월호 4주년] 네 번의 봄, 1462일 만에 분향소 떠나… 304개의 별이 되다

    영정·위패, 영결식장으로 옮기자 유족들 “어떻게 떠나 보내나” 오열 “오빠, 얼마나 더 지나야 무뎌질까” 단원고 재학생들 눈물의 편지 낭독 미수습자 가족 “영혼 달래줘 감사”“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겠습니다.” 세월호 참사 4주년인 1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 노란색 포스트잇 수천개가 붙어 노란 리본 모양을 네 개 만들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포스트잇이 덧붙을수록 리본은 점점 두꺼워졌다. 시민들은 포스트잇에 적힌 글귀를 꼼꼼히 읽었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많았다. 4·16가족협의회와 4·16연대, 서울시가 함께 광화문광장 북측에 설치한 ‘4.16 전시’ 공간에는 이날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왔다는 백예나(16)·안미현(16)양은 “세월호 참사 당시에는 초등학교 6학년이어서 무슨 일이었는지 잘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해 평소에도 리본을 달고 다닌다”고 말했다. 광화문광장 남측의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에는 이날 오후 내내 20m 넘는 긴 줄이 이어졌다. 시민들은 국화꽃을 헌화한 뒤 분향하고 희생자들 영정 앞에 묵념했다. 묵념하는 뒷모습은 차분해 보였으나 뒤돌아 나오는 얼굴을 보면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덕소에서 온 최성곤(53)씨는 “와 보니 젊은 친구들이 많아서 고맙고, 기성세대가 많지 않아서 부끄럽다”면서 “‘그만하자’ 이런 말 하는 사람도 있는데, 경쟁이 심한 사회라서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씁쓸해했다. 세월호 희생자인 단원고 김영경 학생과 나이와 이름이 같다는 김영경(21)씨는 “참사 당시에 정말 놀랐고 내 일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같은 학생들이 계속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이날 오전 안산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정부합동분향소에서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진혼식이 열렸다. 4년 동안 분향소에서 햇볕을 그리던 영정사진과 위패가 영결식장으로 옮겨지자 유족들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길목에 있던 한 어머니는 아들의 영정사진이 가까워지자 “불쌍한 내 자식을 어떻게 보내”라고 통곡하며 주저앉았다. 영정과 위패를 옮기는 ‘이운식’에서 황민우, 김주은을 시작으로 합동분향소에 안치됐던 단원고 학생과 교사의 영정 및 위패 258위가 차례로 옮겨졌다. 영정과 위패는 국가기록원으로 보내진다. 안산 단원고에서도 ‘다시 봄, 기억을 품다’를 주제로 추모식이 열렸다. 재학생과 교사 등 600여명이 참석했으며 학생들은 하늘의 별이 된 선배와 선생님들을 위해 편지를 낭독하는 행사를 가졌다. 희생자 중 한 명이 오빠라는 재학생의 편지는 다른 여학생이 대독했다. 이 학생은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무뎌진다고 하는데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나야 무뎌지고 얼마나 더 지나야 오빠 생각에 울지 않고 의연하게 넘어갈 수 있을까”라고 읽다가 목이 멘 듯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강당 곳곳에서는 학생들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반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영결식은 인천 부평구 인천가족공원 세월호일반인희생자 추모관 앞에서 열렸다. 희생자 유가족,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유정복 인천시장과 시민 300여명이 자리를 지켰다. 세월호 참사 일반인 희생자 43명 중 2014년에 영결식을 하지 못한 11명에 대한 영결식이 엄수됐다. 세월호 참사 당시 승객 구조 후 사망한 아르바이트생 김기웅씨와 이벤트사의 안현영 대표, 권재근씨와 아들 혁규군 등이다. 세월호 희생자 수습이 이뤄졌던 전남 진도에서는 군민들이 희생자를 추모하고, 안전 문화 확산을 위한 다양한 체험 행사를 열었다. 진도군과 세월호 참사 진도군 범군민대책위원회가 주최한 행사에는 군민과 학생 등 1000여 명이 참석해 이들의 넋을 기리며 눈물을 흘렸다. 2014년 4월 참사 당시 세월호 가족들이 8개월여간 머물면서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체육관은 추모식이 진행된 30분 동안 숙연한 분위기 그 자체였다. 세월호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참석한 미수습자 가족 권오복씨는 “이렇게 잊지 않고 영혼들을 달래줘 너무나 감사하다”면서 “경제적 타격을 수년 동안 받는 진도군민들에게 감사하고 죄송스럽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안산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서울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진도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하늘로 보낸 추모 메시지 109만건

    269명 영정·위패 국가기록원에 “미안해요.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살다 보니 너무 오랜만에 문자 보냅니다. 모두 그곳에서 안녕하시기를 바라며 잊지 않겠습니다.”(8138 드림) 경기 안산시 화랑유원지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제단 옆에 있는 전광판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메시지가 실시간으로 나온다. 15일 이석종 안산시 세월호사고수습지원단장에 따르면 지난 14일 현재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문자 전송 시스템인 전광판에는 109만 9380건이 전송됐다. 합동분향소를 방문하지 못한 시민들이 문자메시지로나마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1111’ 번호로 보낸 메시지다. 문자메시지 대행업체가 무료로 설치했다. 참사 초기에는 추모 메시지가 하루 2만여건에 달했다. 요즘에도 하루 100여건으로 꾸준하다. 바쁜 일상에도 문득 희생자가 떠오를 때마다 미안하고 그리운 추모객의 마음을 4년 동안 대신 전해 온 전광판이 합동분향소와 함께 16일 합동 영결·추도식을 끝으로 철거된다. 합동분향소가 철거되면 단원고 희생자 학생 247명과 교사 11명, 일반인 11명 등 269명의 영정과 위패 등은 국가기록원에 보내진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퇴계 선생 위패 모신 영주 이산서원 복원된다

    경북 영주시는 영주댐 수몰지역에 있던 이산서원(伊山書院)을 올해 연말까지 복원한다고 14일 밝혔다. 영주시 이산면 원리의 이산서원(경북도 기념물 제166호)은 퇴계 선생 위폐를 봉안한 서원으로, 영주댐 건설 때 해체됐다. 시는 이산면 석포리에 해체한 경지당(敬止堂)과 지도문(志道門)을 복원하고, 발굴 용역에서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동·서재 등 8개 동을 다시 만들어 올해 말 준공할 계획이다. 시는 복원한 서원을 지역 문화 발전과 선비 정신 함양을 위한 교육 장소로 활용할 방침이다. 시 관계자는 “이산서원은 퇴계 이황 사후에 세워진 안동의 도산서원과 달리 생전에 창건된 것이며, 퇴계는 이산서원 설립에 깊이 관여하고 애정을 쏟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면서 “이런 이산서원을 복원해 지역 유림의 회합 및 학생들의 강학장으로 활용함은 물론 선비인성교육 중심도시 영주 위상 제고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영주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화암사 ‘대시주’무인 성달생 위패 모신 한 칸짜리 사당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화암사 ‘대시주’무인 성달생 위패 모신 한 칸짜리 사당

    소박하면서도 단정하게 세월의 흔적을 머금은 사찰을 두고 흔히 ‘곱게 늙은 절집’이라고 표현한다. 아마도 안도현 시인이 ‘화암사, 내사랑’에서 말한 ‘잘 늙은 절 한 채’의 변주(變奏)가 아닐까 싶다. 시인이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다’고 했던 절은 완주 화암사(花巖寺)다. 절에 오르기는 쉽지가 않다. 시인이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다’고 한 그대로다. 그렇게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 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나타나는 절이 화암사다. 그런데 ‘화암사 중창비’의 분위기도 안 시인의 묘사와 닮아 있다. ‘바위 벼랑의 허리에 한 자 폭 좁은 길이 있어 그 벼랑을 타고 들어서면 이 절에 이른다.…바위가 기묘하고 나무는 늙어 깊고도 깊다’ 비문은 1441년(세종 23) 지은 것이다.●‘하앙식 구조’ 화암사 극락전 국보 지정 화암사라면 국보로 지정된 극락전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81년 해체 수리하면서 찾은 기록으로 1605년(선조 38) 세운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극락전은 이른바 하앙식(下昻式) 구조로 유명하다. 복잡한 설명이 뒤따라야 하지만, 한마디로 지붕을 높여 맵시 있게 보이기 위한 건축적 장치라면 크게 망발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건물의 겉모습만으로 알아차리기란 전문가도 쉽지 않다. 하앙식 구조가 아니더라도 날아갈 듯 아름다운 지붕이 우리나라에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극(極)·락(樂)·전(殿) 세 글자를 한 글자씩 따로따로 내건 편액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물론 편액을 이렇게 만든 것도 하앙식 구조이기 때문일 것이다.화암사를 말할 때 강당에 해당하는 우화루도 빼놓으면 안 된다. ‘잘 늙은 절 한 채’라는 이 절의 인상은 아마도 우화루에서 결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극락전과 우화루, 여기에 적묵당과 불명당이 마당을 감싸며 이른바 산지중정형 사찰의 모습이 완성됐다. 화암사가 아름다운 것도 각각의 전각도 전각이지만 이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오늘은 극락전도, 우화루도 아닌 화암사에서 가장 작은 철영재(英齋)로 눈길을 돌려보고자 한다. 극락전 동쪽에 자리잡은 철영재는 불과 한 칸짜리 사당이다. 뜻밖에 조선 초기의 무신(武臣) 성달생(1376~1444)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절집에 무신의 사당이라니….●철영재 현판 글씨는 문인 자하 신위가 써 철영재 현판 글씨는 자하 신위(1769~1845)가 썼다. 추사 김정희와 비교되곤 하는 조선 후기 문인이다. 자하는 금강경을 필사하고 감상을 적은 ‘서금강경후’(書金剛經後)를 남겼을 만큼 불교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인물이 사당의 현판 글씨를 썼다니 성달생과 화암사, 나아가 성달생과 불교의 인연이 결코 간단치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화암사는 창건 연대가 통일신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중창비는 전한다. 원효와 의상도 수도했다고 적었다. 1425년(세종 7)부터 1440년(세종 22)까지는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당시의 대(大)시주가 성달생이다. 그는 1417년(태종 17)부터 이듬해까지 전라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화암사와 인연을 맺은 듯하다. 그런데 인연은 중창에 머물지 않는다. 조선시대 불경(佛經) 간행의 역사에서 화암사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 중심에 성달생과의 인연이 있다. 성달생은 개성유후(開城留後)를 지낸 성석용의 아들이다. 유후는 조선의 창건 수도인 개성을 다스리는 벼슬이었다. 태종실록에 있는 성석용의 졸기(卒記)에는 ‘글씨를 잘 썼다’는 대목이 보인다. 그런데 글씨라면 그의 아들 삼형제 달생·개·허도 일가견이 있었다.●법화경 등 판각한 조선 불경 간행 중심지 성달생과 성개가 필사한 안심사판 묘법연화경은 최근 보물로 지정됐다. 완주 안심사는 화암사에서 멀지 않다. 화암사와 더불어 불경 판각이 활발했던 안심사에는 금강경, 원각경, 부모은중경 등 조선시대 한글 경판도 다수 전하고 있었지만, 6·25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다고 한다. 성달생의 글씨로 찍은 화암사판 불경은 1443년(세종 25)부터 쏟아져 나온다. 법화경, 능엄경, 중수경, 부모은중경, 지장경, 육경합부, 시왕경 등 모두 12종에 이른다. 육경합부(六經合部)는 금강경, 화엄경, 능엄경, 아미타경, 관세음보살예문, 법화경의 한 대목씩을 엮은 것이다. 성달생의 아들과 손자는 단종 복위 운동으로 나란히 목숨을 잃은 성승(?~1456)과 성삼문(1418~1456)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삼문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성달생이 필사한 화암사판 법화경에는 성승과 성삼문도 발원자로 참여했다. 화암사판 법화경은 이후 복각본만 24종이 나왔다. 조선시대 법화경은 성달생 글씨를 판각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봐도 크게 과장은 아니다. 철영재 현판을 쓴 자하 역시 ‘성달생 법화경’을 읽으며서 불교에 대한 인식 수준을 높여 갔을 것이다. 그러니 화암사는 성달생의 존재로 ‘조선시대 불경 간행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절 경내, 그것도 큰 법당 곁에 이런 인물의 사당을 지은 것도 이해할 만하다. 화암사에 남은 성달생의 흔적은 철영재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창비는 높이 130㎝, 폭 52㎝, 두께 11㎝이니 그야말로 아담하다. 비문은 15세기 중엽 지었다지만 비석을 세운 것은 1572년(선조 5)이다. 중창비에는 비문을 누가 짓고, 글씨를 누가 썼는지 나타나 있지 않다. 매우 이례적이다. 그 주인공으로 성달생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문을 지었다는 1441년은 그가 죽기 3년 전이다. 아들과 손자가 ‘역모’에 가담했으니 성달생도 무사하지 못했다. 세조실록에는 ‘예조에서 성승의 아비에 대하여 연좌를 청하여 그대로 따랐다’는 대목이 보인다. 파주 무덤의 석물(石物)을 모두 없앤 것이다. 성승과 성삼문이 복권된 것은 1691년(숙종 17)이다. 중창비를 세운 시기 그들은 여전히 ‘대역죄인’이었다. 성달승의 이름을 새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달생은 일화도 많이 남긴 인물이다. 전라도관찰사에서 내직인 내금위삼번절제사로 옮긴 1418년 세종이 명나라 사신을 전송할 때 직책상 칼을 찼다. 세종이 즉위한 해다. 그런데 상왕, 즉 태종 앞에서 칼을 찼다는 이유로 세종으로부터 질책을 받아 파직된 것이다. 형제의 난을 일으키는 등 칼로 일어선 태종 이방원이 적지 않게 놀랐던 때문일 듯하다. ●유감동 ‘섹스 스캔들’에 연루돼 물의도 성달생은 세종실록의 표현대로 ‘명나라 황제의 친척’이 되기도 했다. 명나라는 공녀(貢女)의 악습을 원나라로부터 물려받았는데, 1408년(명나라 영락 6)부터 1433년(명나라 선덕 8)까지 7차례에 걸쳐 114명의 조선 소녀를 징발한다. 성달생의 열일곱 살난 딸도 여기에 포함됐다. 공조판서 시절이었으니 조선시대를 통틀어 공녀의 부친으로는 가장 벼슬이 높았다. 성달생은 유감동의 간부(奸夫)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유감동은 양반 가문의 딸이자 고위 관리의 부인으로 세종시대 40명 남짓한 조정의 전·현직 관리와 스캔들을 일으켜 물의를 빚었는데, 성달생도 여기에 포함된 것이다. 그는 충청도 초수로 안질을 치료하러 간 세종을 호종하다 세상을 떠났다. 이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완전한 해결, 4·3의 진실 보듬다

    완전한 해결, 4·3의 진실 보듬다

    “국가폭력 따른 고통 깊이 사과 그만 됐다고 할 때까지 진실 규명” 盧 전대통령 이어 현직 두 번째문재인 대통령은 3일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과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을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국가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4·3사건을 국가권력에 의해 양민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완전한 해결’을 천명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유가족들과의 오찬에서도 “제주도민께서 그만 됐다고 할 때까지 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70주년을 맞는 4·3 추념식에 현직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2006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12년 만이다. 문 대통령은 제주 4·3평화공원에서 열린 4·3희생자 추념일 추념사에서 이렇게 언급한 뒤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4·3은 2000년 김대중 정부가 4·3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면서 공식화됐고 노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 정부 차원의 사과를 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문 대통령은 추념식에서 재차 사과하고 행방불명인 표석 및 위패봉안실을 방문해 4·3 영령들을 위로했다. 문 대통령은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다”며 “유해 발굴 사업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끝까지 계속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유족과 생존·희생자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배·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다”면서 “4·3의 완전한 해결이야말로 제주도민과 국민 모두가 바라는 화해와 통합, 평화와 인권의 확고한 밑받침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아직도 대한민국엔 낡은 이념이 만들어 낸 증오와 적대의 언어가 넘쳐난다”면서 “이제 우리는 아픈 역사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불행한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만 필요한 일이 아니며 우리 스스로도 4·3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4·3에 이념을 덧칠한 보수 진영의 역사관을 비판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광주시, 병자호란 충신 기리는 ‘정충묘 제향식’ 거행

    광주시, 병자호란 충신 기리는 ‘정충묘 제향식’ 거행

    경기 광주시는 18일 초월읍 대쌍령리 소재 정충묘에서 병자호란때 희생된 충신들의 넋을 위로하는 정충묘 제향식을 거행했다고 19일 밝혔다. 광주문화원과 성균관유도회 주관으로 열린 제향식에는 광주문화원 회원과 성균관유도회 유림, 시민 등 200여명이 참석했으며 헌작례, 일동배례, 음복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초헌관에는 조억동 광주시장, 아헌관에 임종성 국회의원, 종헌관에 박기준 문회원장이 맡아 제를 올렸다.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1호인 정충묘는 1636년 병자호란때 쌍령리 전투에서 분투하다 전사한 장군 네 분을 모신 사당으로 당시 남한산성에 포위된 인조를 구하기 위해 북상하던 영남의 근왕병들은 이곳에서 청나라에 선제공격을 당해 수 많은 장병과 함께 전사했다. 정충묘에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완 장군을 비롯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 장군, 공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 장군, 경상좌도 안동영장 선세강 장군 등 네 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년 음력 1월 3일 정충묘 제향식을 올리고 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임진왜란으로 소실 전 경복궁 원형 담은 그림 복원

    임진왜란으로 소실 전 경복궁 원형 담은 그림 복원

    서울시 서울역사박물관이 18세기 말~19세기 후반 사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복궁도’를 복원해 7일 최초 공개했다.경복궁 내 건물의 배치 모습을 그린 ‘경복궁도’는 현재까지 10여점이 발견됐지만, 족자 형태로 보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족자의 크기는 세로 127.6㎝, 가로 71.3㎝다. 특히 이번에 복원된 ‘경복궁도’는 1592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기 전의 경복궁 모습이 담겨 있다. 소실됐던 경복궁은 270여년 만에 고종 시 섭정하던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됐다. 박물관 측은 이 ‘경복궁도’가 경복궁 중건에 앞서 임진왜란 이전의 모습을 고증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문소전(태조의 정비인 신의왕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나 충순당(후원에 있던 전각)의 위치가 담겨 있지만, 경복궁 중건 이후 새로 세워진 건물 등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2016년 이 ‘경복궁도’를 공개 구입했으며 1년여 동안 보존 처리 과정을 거쳐 제작 당시의 원형으로 복원했다. 또 보존 처리 과정에서 배접지(그림을 보강하기 위해 뒷면에 붙이는 종이)로 사용된 고문서 5점(과거 답안지)도 발견했다고 밝혔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이보게, 귀티나게 쉬어 보시게

    이보게, 귀티나게 쉬어 보시게

    경남 의령을 찾아갑니다. 재물복을 나눠준다는 솥바위가 목적지입니다. 원래는 홍의장군 곽재우의 무용담이 깃든 전승지였지요. 한데 요즘은 ‘부자 되는 바위’로 더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의령엔 볼거리가 꽤 많습니다. 힘 하나 안 들이고 절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한우산, 기골이 장대한 봉황대 등의 자연 풍경에 옛 향기 그윽한 고택들이 수없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제대로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아마 1박2일 일정으로도 모자랄 겁니다.의령을 돌다 보면 인상적인 논두렁을 흔히 보게 된다. 돌로 촘촘하게 두럭을 쌓아 논배미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흙을 쌓아 만든 보통의 논두렁과 사뭇 대비되는 모습이다. 농가의 담장이며 논두렁들이 죄다 이런 모습이다. 돌담 두른 시골 마을이 어디 여기뿐일까만, 의령은 유독 그 수가 많다. 낡은 마을들을 보자면 언뜻 발전이 더디다는 생각도 갖게 된다. 한데 그보다는 옛것을 완고하게 지켜내고 있다는 게 맞을 듯하다.솥바위부터 찾아간다. 부자로 만들어 준다는 솥바위의 기운을 받고 싶어서다. 얄팍하다거나 미신에 현혹됐다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사진 찍어 휴대전화 바탕화면에 올려 두면 미구에 솥바위의 기운이 전해질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솥바위는 의령과 함안이 경계를 이룬 남강변에 있다. 한자로는 정암(鼎岩)이라 쓴다. 이름 그대로 솥(鼎)처럼 생긴 바위(岩)다. 바위 절반은 수면 위로 노출됐고, 절반은 수면 아래 잠겼다. 물 아래쪽에도 세 발 달린 솥처럼 세 개의 바위가 떠받치고 있다고 한다. 솥은 예부터 풍요를 뜻했다. 솥바위에도 이와 관련된 옛이야기가 전해 온다. 반경 20리(8㎞) 이내에 부귀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솥의 다리가 뻗은 세 방향에서 큰 부자가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공교롭게도 솥바위에서 세 방향에 해당되는 의령의 정곡면 중교리에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 함안 군북면 동촌리에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회장, 진주 지수면 승산리에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과 GS그룹 허정구 회장 등의 생가가 있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의 창업주 4명이 솥바위 인근에서 나고 자란 것이다. 물론 후대의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한데 만든 이야기치고는 퍽 기발하고 정교하다. 이쯤 되면 우연이라 치부하기보다 ‘풍수지리적 기운’에 더 점수를 주고 싶은 심정이다. 솥바위 일대는 예부터 정암진이라 불렸다. 임진왜란 때는 ‘홍의장군’ 곽재우가 2000여 왜적을 섬멸한 전승지였다. 당시 의병을 이끈 곽재우 장군은 밀려드는 왜적을 맞아 의령 곳곳에 전승지를 남겼다. 솥바위는 그중 하나다.솥바위에서 남강을 따라 8㎞쯤 거슬러 오르면 정곡면 중곡리다. 이 마을에 삼성그룹을 일궈 낸 고 이병철 선대회장의 생가가 있다. 이 회장의 할아버지가 지었다는 생가는 뜻밖에 소박하다. ‘고대광실’일 것이란 선입견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다. 생가는 안채와 바깥채, 그리고 농기구 등을 둔 광채 등으로 구성됐다. 나란히 선 안채와 바깥채의 자태가 단정하다. 어디 한구석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초가집의 소박함과 기와집의 엄정함을 동시에 갖춘 듯하다. 생가 주변으로 ‘역사·문화 부자길’이 조성돼 있다. 거리는 14.5㎞다. 의병 전적지, 탑바위, 성황리 소나무(천연기념물 359호) 등을 돌아본다.호사가들은 의령 9경 가운데 솥바위(5경)와 탑바위(6경), 봉황대(3경)의 코끼리 바위를 따로 묶어 ‘3대 기도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탑바위는 정곡면 호미산의 수직절벽 위에 얹혀 있는 바위다. 얇고 편평한 돌판이 탑처럼 층층이 쌓인 형태다. 높이는 8m 정도다. 탑바위 바로 아래는 비구니 스님들의 기도처인 불양암이다. 그 아래로 남강이 흐른다. 강 너머는 들녘이다. 땅은 깃들어 사는 사람 모두에게 요족한 삶을 안겨 줄 만큼 넓다. 궁류면의 봉황대는 거대한 석벽을 일컫는다. 판석처럼 주름 접힌 바위들의 자태가 우람하다. 바위 아래는 일붕사다. 동굴 속에 지은 대웅전으로 이름난 절집이다.부자 여정의 마지막 코스는 한우산이다. 한자로는 찰 한(寒)에 비 우(雨) 자를 쓴다. ‘차가운 비의 산’이란 뜻이다. 한우산은 정상 언저리까지 도로가 나 있다. 이 덕에 승용차로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도로는 이리저리 굽었다. 그 모양이 색소폰을 닮아 ‘색소폰 도로’라 불리기도 한다. 한우산 정상은 파노라마 전망대다. 지리산 천황봉과 합천 황매산 등 인근의 명산들이 360도로 펼쳐진다. 정상 아래 산사면에 설화원이 있다. 도깨비 전설을 토대로 조성한 짧은 산책로다. 도깨비 등 여러 형태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부자 여정의 마지막 주인공은 설화원 끝자락의 ‘망개떡 나눠 주는 도깨비’다. 망개떡은 의령 특산품으로, 망개나무 잎으로 싼 떡을 일컫는다.부자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도깨비가 들고 있는 망개떡을 만지기만 하면 된다. 역시 믿거나 말거나다. 관광객이 망개떡을 만질 때마다 ‘돈 나와라, 뚝딱!’이라 외쳤으면 좋으련만, 이 도깨비는 싱글싱글 웃기만 할 뿐 당최 방망이 휘두를 생각은 없는 듯하다. 설화원 일대는 철쭉 군락지다. 봄이 되면 산 사면이 온통 시뻘겋게 물들 터다. 그 장면만 눈에 담아도 부자 소리 들을 만하겠다. 의령은 ‘홍의장군’ 곽재우의 고향이다. 그가 임진왜란 당시 격전을 치렀던 현장들이 의령 곳곳에 널려 있다. 생가는 유곡면 세간리에 있다. 마을에 들면 ‘현고수’(懸鼓樹)가 객을 맞는다. ‘북을 매단 나무’라는 뜻이다. 곽재우 장군이 1592년 첫 의병을 일으킬 때 이 나무에 북을 매달고 거병을 알렸다고 한다. 나무의 수령은 ‘고작’ 550년 안팎이지만 담긴 사연이 깊어 천연기념물(493호)로 지정됐다. 현고수 바로 뒤는 곽재우 장군의 생가 터다. 한국전쟁 당시 전파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현재 생가 터에 세워진 건물은 다른 성씨를 가진 이의 소유다. 쇠락한 건물을 보고 있자면 씁쓸한 느낌이 든다. 나라를 구한 영웅의 뒤안길을 보는 듯해서다. 당시 곽재우 장군은 전공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한다. 백성을 버리고 줄행랑을 친 임금이 논공행상에서조차 무능했던 셈이다. 의령읍내 끝자락에 있는 충익사는 곽재우 장군과 그를 도운 17장령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둥근 고리로 층층이 쌓은 의병탑, 이채로운 디자인의 충의각, 500년을 살아낸 모과나무 등 볼거리가 많다. 구름다리도 의령의 명물이다. 세 개의 출렁다리가 중심부로 수렴되는 형태를 하고 있다. 세 발 달린 솥바위를 형상화한 듯하다. 출렁대는 다리 위를 걷다 보면 오금이 저릴 만큼 짜릿하다. 글 사진 의령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지역번호 055 →가는 길: 솥바위는 의령 남쪽에 있다. 남해고속도로 군북나들목이 가깝다. 솥바위를 기준으로 시계 방향, 혹은 반대 방향으로 돌아보는 게 수월하다. 한우산 등 의령 서쪽부터 짚어 내려가겠다면 대전통영고속도로 단성나들목으로 나오는 게 편하다. 한우산은 해넘이나 해돋이 때에 맞춰 찾으면 좋다.→맛집: 의령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가 소바다. 소바는 메밀을 주재료로 만든 면을 일컫는다. 일본식 표현을 차용해 쓰고 있는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난무한다. 의령 소바는 다소 슴슴하다. 맵짠 여느 경상도 음식과 결이 다르다. 다만 고명으로 얹은 장조림 고기는 짭조름하다. 이 덕에 간이 적당히 균형을 이룬다. 보다 차진 맛을 원한다면 고춧가루 풀고 간장을 한 바퀴 돌리면 된다. 다시식당(573-2514), 화정식당(572-1122), 체인 식당의 본점인 의령소바(572-0885) 등이 알려졌다. 소고기국밥도 의령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꼽힌다. 맛은 평이한 편이다. 중동식당(572-3377)과 마주한 종로식당(573-2785), 수정식당(573-2465) 등이 알려졌다. 주전부리의 최고봉은 망개떡이다. 차진 떡과 달달한 팥소가 기막히게 어울린다. 현지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곽재우 장군의 부인이 전장에 나가는 장령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비롯된 음식이란 점에서 진주비빔밥과 비슷하다. 전통시장 안쪽에 다수의 망개떡집이 있다.
  • 이육사ㆍ식혜… 안동 뿌리의 멋ㆍ맛

    이육사ㆍ식혜… 안동 뿌리의 멋ㆍ맛

    한국국학진흥원과 안동시가 공동 작업한 ‘안동문화 100선’의 첫 결과물이 나왔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안동 고유문화를 다룬 책 ‘태사묘’, ‘이육사’, ‘안동식혜’, ‘원이엄마’(사진ㆍ민속원) 4권을 출간했다고 1일 밝혔다.안동문화 100선은 안동 문화를 대표하는 100가지 주제를 선정, 소형 단행본 책자로 발간하는 사업이다. 고려 개국공신인 김선평, 권행, 장정필 3명 태사(太師) 위패를 모신 태사묘를 비롯해 일제강점기 고뇌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이육사, 죽은 남편을 그리며 한글편지를 쓴 원이엄마, 안동의 고유한 맛을 담은 식혜는 모두 안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선 1차 결과물로 나온 책은 권당 120~130쪽 분량으로, 50장 이상 사진을 수록했다. 가격은 권당 1만 2000원이다. 한국국학진흥원과 안동시는 안동문화 100선 주제를 선정하기 위해 안동 노인대학, 안동문화원 시민강좌 수강생, 안동청년유도회, 소학 강좌 수강생, 안동대 강사와 고교생 등 300여명의 시민들에게서 1000여개 아이템을 지난해 추천받아 우선 70개를 선정했다.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안동시 예산을 지원받아 10년 내에 100권의 책을 낼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전사한 친구여,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 역사 찾기를 도와다오!”

    “전사한 친구여,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 역사 찾기를 도와다오!”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 소위·24세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아래의 글은 6·25전사(戰死) 인천학생 양순혁의 인천상업중학교 동기 동창 이경종이, 전사한 고향 친구 고(故) 양순혁을 추모(追慕)하며 서해문화 1999년 1월호에 기고했던 글이다. 양순혁은 전사하였기 때문에 아래의 글로 양순혁 참전기(參戰記)를 대신한다.인천상업중학교 같은 반 친구 양순혁과 나 양순혁은 인천 중구 경동에서 태어나서, 인천송림국민학교를 졸업하고, 6·25 사변(事變) 때 6년제 공립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이 글을 쓰고 있는 나(6·25 참전 인천학생 이경종)하고는 인천상업중학교 동기동창생이었다. 1950년 6월 25일 6·25사변이 터지고, 악몽과도 같았던 인민군(人民軍) 치하에서 지옥보다도 더한 고통을 견디고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 치하에서 벗어났다. 6·25 사변(The Korean Civil War) 사변은 국가와 비국가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미국 남북전쟁(The Civil War)과 한국 6·25 사변(The Korean Civil War)이 있다. 6·25 사변은 대한민국과 북한 공산괴뢰 집단 간의 무력 충돌이기 때문에 사변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UN군의 개입과 중공군의 참전으로 너무 많은 국가가 참전하여 일반적으로 이제는 한국전쟁(韓國戰爭)이라 한다. 중공군의 참전과 인천학도의용대의 남하 1950년 11월이 되자 우리 국군과 UN군은 압록강까지 북진했으나, 만주 지역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하여 1950년 12월에는 우리 국군과 UN군은 후퇴하였다. 인천 지역의 학생들은 인천학도의용대를 결성하고 국가 위난의 혼란한 시국에 호국(護國)활동을 하였는데, 1950년 12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단체로 남하(南下)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가 인천 병사구 사령부(현재의 병무청)에서 파견을 나온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소위를 따라서 경상남도 통영충렬국민학교에 있었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를 최종 목적지로 남하할 때, 나와 양순혁도 같이 걸어서 남하하였다. 18일간 걸어서 내려가 도착한 마산 양순혁과 나는 함께 출발하여 첫날은 안양역에서 자고 그다음 날은 수원역에서 하룻밤을 자고, 대전에 도착했을 때는 1950년 12월 24일이었다. 양순혁과 나는 계속 걸어서 같이 내려 갔는데 대구를 지나서 경산, 청도, 밀양, 삼랑진을 지나서 마산에 도착한 것은 인천을 떠난 지 18일만인 1951년 1월 4일이었다. 양순혁과 나는 추운 겨울 함께 걸어서 내려갔는데, 행진하면서 굶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 시체를 많이 봤다. 국민방위군 사건 추운 겨울 땅이 얼어서 매장도 못 하고 논바닥에 버려진 많은 국빈방위군 시체는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국민방위군은 전시에 신속한 병력 동원을 위해 1950년 12월 제정한 국민방위군법에 의한 예비군이었으나 1951년 1·4 후퇴 때 소집된 50만명의 국민방위군 중에서 약 10만명이 굶거나 얼어서 죽은 사건이 발생하여 관련된 장성 5명이 총살당했고, 국민방위군은 1951년 5월에 해체되었다. 1951년 1월 4일 마산에서 해병 6기 지원 양순혁과 나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보고 경상남도 통영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초등학교)로 가지 않고 마산에서 해병 6기 모집 광고를 보고 둘이 같이 지원했는데 양순혁은 합격하였지만 나는 탈락하였다. 같은 중학교 같은 반으로 인천에서 마산까지 18일간 함께 의지하면서 같이 걸어서 내려온 양순혁과 나는 1951년 1월 4일 해병 6기에 합격한 양순혁이 입대하는 바람에 헤어지고, 나는 부산으로 배를 타고 가서 1951년 1월 10일 육군 제2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서 자원입대하였다.47년만에야 알게 된 양순혁의 전사 1996년 7월 15일날부터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역사 발굴을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의 도움으로 시작했는데 1997년 9월 10일 동네 친구 민병태를 만나서 양순혁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동네 친구 민병태가 나에게 “내가 해병 장교로 1958년 10월에 해병 제1사단 근무대대 영현(英顯·죽은 사람의 영혼을 높여 이르는 말) 소대장을 하고 있을 때 경기도 장단·양곡·용주골 등 많은 전투지역의 여기저기 흩어져 가매장(假埋葬)되어 있었던 6·25 사변 당시 해병 전사자 무덤을 찾아 그 유골을 개인별로 홍제동 화장장에 모셔 화장한 후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일을 지휘·감독한 일이 있었다. 그때 시신을 화장하고 이장하는 과정에서 명단을 보니 양순혁이 그 명단에 있었으며 양순혁은 우리와 같은 6년제 공립인천상업중학교 동기 동창생으로 해병대에 입대했다 전사하여 그때 국립묘지로 이장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48년만에 비석으로 만난 전사한 고향 친구들 동네 친구 민병태로부터 이러한 내용을 들은 나는 1998년 1월 2일 아침에 동작동 국립묘지를 큰아들 이규원(치과 원장)과 함께 찾아갔다. 양순혁이 잠들어 있는 국립묘지 번호는 서(西)16-1091이었고, 바로 옆 서(西)16-1093에는 박명호의 묘(墓)가 있었다. 근처 서(西)16-1386에 있는 최춘국(해병6기)과 근처 서(西)16-0911에 있는 이중수(해병6기)의 무덤도 찾아보았다. 무덤이 없이 위패 봉안소에 봉안되어 있는 해병대 제6기 김윤수(육군 위패06-7-18)와 해병대 제6기 임익순(육군 위패49-5-47)의 위패(位牌)도 찾아보았다.전사한 친구여! 참전역사 찾기를 도와다오! 나는 그들 무덤 앞에 앉아서 “48년 전 인천에서 같이 중학교에 다니다가,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함께 자원입대하여 참전하여 너희들은 전쟁터에서 죽고, 나는 참전하고 살아 돌아와 여기서 만나게 되었구나! 채 피지도 못하고 전쟁터에서 죽어간 너희들 기록을 남기려고 48년만에 이렇게 찾아왔다”라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또한 잠들어 있는 친구들에게 나는 “넋이 있다면 부디 편안한 잠들기 바라며, 나와 큰아들 이규원(치과 원장)이 하고 있는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 역사 찾기 사업을 도와다오!”라고 말했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 호에 8회 계속 참전기 7회를 마치며 한때 인천에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징병 모집에 대하여 한참이나 어려서 입대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중학생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 또한 중학교 3학년 16살이어서 인민군(人民軍)에나 끌려갈 나이지, 국군에 입대할 필요는 없는 어린 나이였습니다.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양순혁은 저의 아버지와는 동기 동창으로 같은 반이었습니다. 마산까지 저의 아버지와 같이 내려가서 16살 중학교 3학년 때 국가를 위하여 자원입대하면서 서로 헤어졌습니다. 48년만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누워있는 고향 친구 양순혁을 만나고서 아버지께서 비석을 어루만지시면서 구슬프게 우시는 모습을 저는 지켜봤습니다. 이제 고향 인천에서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지만, 이 참전기에 그 이름 양순혁을 6·25참전 전사(戰死) 인천학생으로 기록합니다. 이규원 치과 원장(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 6·25 참전용사 68년 만에 귀가

    6·25 참전용사 68년 만에 귀가

    6·25전쟁 당시 북진을 위한 공병작전을 하다가 전사한 국군 병사의 유해와 유품이 이제야 가족의 품에 안겼다. 전사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아들은 68년 만에 귀가한 아버지를 소중히 받아 안았다.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30일 건설공병단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고 김재권 일병의 아들 김성택씨의 강원 강릉 집을 방문해 김 일병의 전사자 신원확인통지서, 국방부 장관 위로패, 유품 등을 전달했다. 올해 첫 번째 ‘호국의 영웅 귀환행사’이다. 1924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난 김 일병은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결혼 2년째 신혼이었다. 당시 그의 아내 전옥순씨는 임신 중이었다. 부친이 운영하던 목재소에서 일하던 김 일병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자진 입대했다. 같은 해 10월 15일 경기 가평 일대에서 북한군 공격을 받아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국군은 김 일병의 유해를 수습하지 못했고 가족에게 전사통지서만 전달했다. 유해는 반세기도 더 지난 2008년 5월 가평군 북면 적목리에서 발굴됐다. 신원을 추정할 만한 유품이 없어 신원 미확인 유해로 분류됐으나 아들 김씨가 2016년 국립서울현충원에 부모님의 합동 위패 봉안을 신청하면서 비로소 신원 확인의 계기가 마련됐다. 1988년 작고한 모친을 국가유공자인 부친과 함께 현충원에 모시기로 한 김씨는 지난해 3월 합동 위패 봉안식에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유전자 시료 채취를 했는데 여러 차례의 검사 끝에 마침내 지난해 12월 김 일병과 유전자 정보가 일치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김씨는 “설 명절을 앞두고 큰 선물을 받았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박홍환 선임기자 stinger@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한벽루·석조여래입상…‘수몰’ 청풍도호부 역사·아픔 오롯이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한벽루·석조여래입상…‘수몰’ 청풍도호부 역사·아픔 오롯이

    조선 현종의 부인이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관향(貫鄕)은 청풍(淸風)이다. 이 때문에 현종은 즉위한 1659년 청풍군(郡)을 청풍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킨다. 청풍은 고을 규모에 비해 읍격(邑格)이 높았고, 남한강 수운(水運)을 이용하면 육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같은 거리의 다른 고을보다 한양을 오가기가 크게 수월했다. 무엇보다 청풍은 읍치(邑治)가 남한강이 절경을 이루는 곳에 자리잡았으니 당대의 실력자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와 묵어 갔다. 자연스럽게 청풍도호부사는 관료들에게 크게 인기 있는 자리였다고 한다.청풍도호부는 고종의 189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군(郡)으로 낮아졌고, 청풍군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다시 제천군에 편입됐다. 도호부로 위세를 떨치던 청풍은 이후 일개 면으로 지위가 낮아진 채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청풍도호부는 오늘날 충북 제천시의 청풍·금성·한수·수산면에 해당한다. 그런데 청풍 고을의 핵심을 이루던 옛 읍치는 1985년 충주다목적댐이 준공되면서 물에 잠기고 말았다. 당시 충주·중원·제천·단양 등 4개 시·군의 11개면 101개 이·동에서 7105가구 3만 8663명이 동시에 삶의 터전을 잃었다.●4개 시·군 7105가구가 삶의 터전 잃어 전체 수몰 면적 7698만 8069㎡ 가운데 제천이 차지한 면적은 절반에 이르렀다. 제천에서도 가장 피해가 컸던 지역이 청풍면이었는데, 25개 이·동이 물에 잠겨 1665가구, 9514명의 주민이 옛집을 떠나야 했다. 여기에 청풍면사무소와 파출소, 학교, 우체국 등도 모두 물에 잠겼으니 그야말로 ‘청풍 신도시’ 건설은 불가피했다. 새로운 청풍면소재지는 청풍도호부의 읍치이자, 청풍면의 옛 면소재지였던 읍리의 서남쪽 물태리에 세워졌다. 옛 읍치에는 청풍의 상징과도 같은 한벽루(寒壁樓)를 비롯해 문화재가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문화재 이주단지 또한 물태리에 조성됐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청풍문화재단지다. 한벽루는 물론 청풍도호부의 동헌(東軒)인 금병헌(錦屛軒)과 청풍향교, 황석리 고가(古家)를 비롯한 여러 채의 민가(民家)에 불상과 각종 선정비까지 옮겨 놓았다. 비록 제자리를 떠나기는 했어도 청풍 고을의 옛 분위기를 짐작게 하는 일종의 야외 박물관이다.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한 조선 후기 지도 ‘청풍부팔면’(淸風府八面)를 보면 옛 읍치의 모습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다. 관아를 중심으로 청풍 고을의 8개 면을 원형으로 배치한 지도다. 이 지도를 보면 청풍 읍치는 청풍호가 넓게 열린 청풍문화재단지의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한강의 남쪽에 자리잡았던 청풍 면소재지 읍리(邑里)는 물길을 따라 길게 이어진 마을이었다. 강 상류 쪽에서 하류 쪽으로 읍상리, 읍중리, 읍하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청풍 고을의 관문이었던 팔영루(八詠樓)는 이제 청풍문화재단지의 정문 노릇을 하고 있다. 제법 규모 있는 문루(門樓)다. 물길 의존도가 높았던 청풍이다. 배를 타고 청풍 관아에 가려면 북진(北津)에서 내려 팔영루로 들어섰을 것이다. 팔영루 앞 사적비(史蹟碑)에는 1702년(숙종 28) 부사 이기홍이 현덕문(賢德門) 자리에 중건해 ‘남덕문’(覽德門)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팔영루는 서향이었지만, 지금은 남향이다.팔영루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경양 민치상이 청풍 부사 시절 청풍팔경을 읊은 팔영시(八詠詩)를 짓고 이곳에 내걸었기 때문이다.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척족(戚族)인 민치상은 공충도(公忠道) 관찰사 시절에는 오페르트의 남연군무덤 도굴사건을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충청도는 순조와 철종 시대 각각 공충도라 이름이 바뀌어 불리기도 했다. 팔영시는 청풍호의 조는 백로(淸湖眠鷺·청호면로), 미도에 내리는 기러기(尾島落?·미도낙안), 청풍강에 흐르는 물(巴江流水·파강유수), 금병산 단풍(錦屛丹楓·금병단풍), 북진의 저녁 연기(北津暮煙·북진모연), 무림사 종소리(霧林鐘聲·무림종성), 한밤 목동의 피리(中夜牧笛·중야목적), 비봉의 해지는 모습(비봉낙조·飛鳳照)을 읊은 것이다. 청풍부팔면 지도를 보면, 과거 팔영루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감옥이 있었다. 지도에는 영어(囹圄)라고 적혀 있는데 둥그런 모습이다. 지금은 물론 팔영루로 들어서도 감옥은 보이지 않는다. 감옥은 댐 건설 당시 이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이곳에서 관람객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이어지는데, 청풍부의 아문(衙門)이었던 금남루(錦南樓)가 나타날 때쯤 오른쪽 솔밭 사이에 세칸짜리 맞배지붕이 보인다. 보물로 지정된 ‘제천 물태리 석조여래입상’이다. 역시 읍리에서 옮겨진 것이지만 이름에는 ‘청풍’도 ‘읍리’도 간데가 없다. 요즘식 표현으로 ‘출신지 세탁’이 이루어진 꼴이니 부처님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청풍은 고려시대 이 고을 출신 승려 청공(淸恭)이 왕사(王師)에 오르면서 1317년(충숙왕 4년) 군(郡)으로 승격한 역사도 있다. 물태리 여래입상은 높이가 341㎝에 이른다. 비교적 날씬한 몸매여서 당당해 보이지는 않지만 규모는 제법 크다. 학계에서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는 듯하다. 불교국가 고려의 청풍 고을에서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을 것이다. 금남루를 지나면 금병헌, 응청각, 한벽루가 줄지어 복원된 모습이 보인다. 한벽루가 객사(客舍)의 누각이라면 응청각은 관아의 누각이다. 한벽루와 응청각은 과거에도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객사는 국왕의 위패를 모시는 시설이자 지방에 파견된 중앙관이 머무는 숙소다. 응청각은 별도의 숙소이자 연회장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객사와 한벽루로는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소홀히 할 수 없는 방문객이 많았으니 연회 수요도 그만큼 늘어났을 것이다. 한벽루는 밀양 영남루, 남원 광한루처럼 본채 옆에 부속채가 딸려 있는 화려한 모습이다. 청풍 고을을 찾는 인물들의 정치적 비중도 그만큼 높았음을 뜻한다. 한벽루 내부에는 우암 송시열과 곡운 김수증의 편액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이 걸려 있다. 우암은 조선 후기권력을 오로지했던 노론의 영수, 곡운은 역시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 영화 ‘남한산성’에도 척화파의 대표로 등장했던 청음 김상헌의 손자다.●청풍문화재단지엔 수몰역사관도 한벽루 왼쪽에 솟은 해발 373m의 망월산에는 둘레 495m의 산성이 있다. 삼국시대 처음 쌓은 것이라는데, 서남쪽과 남쪽 성벽은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망월산성은 굳건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청풍문화재단지 안팎에서 유일하게 진정성을 유지하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금병헌과 망월산성 중간의 왼쪽 골짜기에는 청풍향교가 복원되어 있다. 옛 청풍 읍치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던 교리(敎里)에 있었다. ‘명륜당 중수기’에 따르면 청풍향교는 고려 충숙왕 시절 물태리에 세워진 것을 조선 정조 시대 교리로 이건했다. 이것을 다시 물태리로 옮겼으니 이 동네와는 인연이 적지 않다. 문화재단지에는 수몰역사관도 있다. 물이 차오르는 강가에서 마지막 잔치를 벌이는 주민들의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청풍의 문화유산은 그나마 문화재단지에 일부가 남았지만, 사람들의 흔적은 몇 장의 사진 말고는 모두 물밑에 가라앉았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故 종현 발인 “‘푸른밤’에 저도 쉬러 올게요” 마지막 목소리, 오늘 21일 밤 방송

    故 종현 발인 “‘푸른밤’에 저도 쉬러 올게요” 마지막 목소리, 오늘 21일 밤 방송

    故 샤이니 종현의 발인이 오늘 21일 엄수된 가운데 MBC 라디오 ‘푸른밤’이 종현을 위한 추모 특집을 마련했다.오늘 21일 밤 12시부터 2시간 동안 방송되는 ‘푸른밤과 종현, 1155일의 기억’에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종현이 남긴 마지막 목소리가 전파를 탈 예정이다. 평소 라디오를 통해 친분이 있던 밴드 소란의 고영배가 내레이션을 맡는다. 이번 추모 특집은 2014년 2월 3일, 종현이 처음 방송을 진행한 날부터 2017년 4월 2일 마지막 방송까지의 모습을 담는다. 종현이 생전 ‘푸른밤’을 위해 직접 써온 원고들 역시 방송을 통해 다시 한번 청취자들과 만날 예정이다. ‘푸른밤’측은 “종현은 방송을 통해 라디오가 자신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밝힐 만큼 ‘푸른밤’에 대한 애정이 컸다”며 “이번 추모 특집은 DJ 종현뿐 아니라 청년 김종현이 가지고 있던 세상에 대한 고민, 음악에 대한 고민을 마지막으로 함께 나누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푸른밤’은 매일 밤 12시부터 2시까지, MBC FM4U(수도권 91.9MHz)에서 방송된다. PC 및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mini’를 통해서도 들을 수 있다. 한편 종현은 지난 18일 오후 6시쯤 서울 강남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돼 인근 병원으로 옮겼지만 끝내 사망했다. 21일 오전 8시 유족과 SM엔터테인먼트 동료들, 지인들이 참석한 채 기독교 예식으로 영결식이 열렸다. 이어 8시 51분 고인이 잠든 관이 영결식장 밖을 빠져나왔다. 고인의 위패는 샤이니 멤버 민호가, 영정 사진은 고인의 누나가 들었다. 유족들은 운구차가 장례식장을 빠져나가기까지 기독교 찬송가를 부르며 고인의 가는 길을 위로했다. 장지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공개하지 않는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故 샤이니 종현 발인…마지막 가는 길 배웅

    故 샤이니 종현 발인…마지막 가는 길 배웅

    샤이니 종현(27·본명 김종현)의 발인식이 21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이날 오전 8시 유족과 SM엔터테인먼트 동료들, 지인들이 참석한 채 기독교 예식으로 영결식이 열렸다. 이어 8시 51분 고인이 잠든 관이 영결식장 밖을 빠져나왔다. 고인의 위패는 샤이니 멤버 민호가, 영정 사진은 고인의 누나가 들었다. 유족들은 운구차가 장례식장을 빠져나가기까지 기독교 찬송가를 부르며 고인의 가는 길을 위로했다. 장지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종현은 지난 18일 오후 6시 10분쯤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레지던스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사망 판정을 받았다. 경찰은 고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결론짓고 사건을 종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마지막 순간에는 혼자였지만…마지막 가는 길 쓸쓸하지 않길”

    “마지막 순간에는 혼자였지만…마지막 가는 길 쓸쓸하지 않길”

    세살배기 아이·이주노동자 등 45명 혼령 달래는 차 예식 진행“그대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혼자였지만 마지막 가는 길은 쓸쓸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20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장충동 2가 전통예절 교육단체 예지원 강당에서 올해 한 해 세상을 떠난 무연고 사망자 45명의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가 열렸다. 위패에는 43명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20 15년 12월 18일에 태어나 올해 8월 15일에 사망한 3살배기 아이는 ‘성명 미상’인 채로 제단에 올랐다. 한복 차림의 사회자가 “무연고 사망자를 위한 헌다례(차를 올리는 예식)를 시작합니다”라고 말하자 장내엔 침묵이 흘렀다. 검은색 한복을 입은 강태영(77)씨가 향을 피워 향로에 꽂은 뒤 절을 했다. 이어 녹차 한 잔이 제단 위에 올랐고, 참석자들은 고인의 혼령과 인사를 했다. 다시 녹차 세 잔이 올랐다. 은은하게 뒤섞인 향내와 녹차 향이 공간을 채웠다. 고인을 위한 축문, 시낭송, 거문고 연주 등이 이어졌다. 고인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는 이렇게 약 1시간 동안 진행됐다. 예지원은 2015년부터 무연고 사망자에 대한 장례와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올해에는 지난 5월 3일부터 11월 16일 사이에 사망자 45명에 대한 장례를 치렀다. 지난 8월 21일에는 이름도 없이 사망한 3살배기 남자 아이의 장례를 치르고 영혼을 달랬다. 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포대기에 싸여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의 베이비박스에 맡겨졌다. 아이는 입이 찢어져 있는 등 장애가 있었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21개월 만에 폐렴으로 숨졌다. 손남숙 본부장은 “예법상 어린아이에 대한 장례식은 치르지 않지만 이름도 없이 죽어간 아이가 너무 안타까워 과자 등을 준비해 명복을 빌었다”고 말했다.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임모(57)씨와 박모(32)씨도 지난 4월 27일과 5월 30일 간경화와 심폐 정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올해 서울시 무연고 사망자 250여명의 장례를 치른 박진욱(45) 나눔과 나눔 사무국장은 “무연고 이주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턱없이 부족하다”면서 “시신이 5년 동안 장례식장 안치실에 보관돼 있었던 적도 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무연고 사망자 수는 1226명으로 집계됐다. 2011년 693명, 2012년 741명, 2013년 922명, 2014년 1008명, 2015년 1245명으로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최근 5년 사이 2배가 늘어났다. 보통 서울의 무연고 사망자 시신은 서울시립승화원으로 옮겨져 화장되며 유골은 서울시립 무연고사망자봉안당에 10년간 안치된다. 예지원은 시신을 승화원으로 옮기기 전날 별도로 사망자를 위로하기 위한 장례를 해 왔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단종 복위 꿈꿨던 금성대군… 순흥서 스러져 ‘산신령’으로 남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단종 복위 꿈꿨던 금성대군… 순흥서 스러져 ‘산신령’으로 남다

    순흥(順興)은 오늘날 경상북도 영주시의 일개 면(面)일 뿐이다. 하지만 순흥의 역사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삼국시대 순흥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대였다. 고구려는 장수왕 시절 죽령을 넘어 영주 일대까지 장악했다. 죽령을 사이에 두고 영주와 이웃한 충청북도 단양에 고구려 온달장군의 전설이 어린 온달산성이 남아 있는 것도 이런 역사와 관계가 있다.순흥에 고구려의 장례 풍습을 보여주는 벽화고분이 남아 있는 것도 그렇다. 풍경화를 방불케 하는 연꽃 그림은 일본 미술에도 영향을 미친 고구려 특유의 표현이라고 한다. 가까운 부석사의 창건설화도 그렇다. ‘삼국유사’에는 의상대사의 부석사 창건을 방해하는 ‘500명이 도둑’이 보이는데, 학계는 이들을 신라에 협력하지 않은 고구려계 주민으로 본다. 고구려 통치 시대 순흥은 급벌산군(及伐山郡)이었다. 이후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이 급산군(及山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는 흥주(興州), 순안현(順安縣), 순흥부(順興府)로 잇따라 개칭했다. 순흥은 조선 초기 전국 75개 도호부의 하나였다. 하지만 1457년(세조 3) 도호부는 폐지되고 땅덩어리는 풍기·봉화·영주 세 고을로 분산됐다.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사건 때문이었다.오늘날 영주의 양대(兩大) 문화유산이라면 부석사와 소수서원을 꼽아야 할 것이다. 이 고장의 유교문화와 불교문화를 상징한다. 이들을 돌아보려면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을 이용하게 마련이다. 풍기는 인삼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이맘때 찾으면 사과가 지천이다. 풍기에서 소수서원이 있는 순흥을 거쳐 부석사에 이르는 길은 문화유산 순례길이다. 순흥 벽화고분도 이 길 주변에 있다. ●역적의 땅 된 순흥, 이름마저 200년간 사라져 소수서원에서 나와 부석사로 방향을 잡으면 곧바로 왼쪽에 금성대군신단(錦城大君神壇)이 보인다. 그냥 지나치기 일쑤지만, 잠시 둘러보기를 권한다. ‘역적의 땅’이 되어 순흥이라는 이름마저 200년 넘게 사라지게 했던 역사가 담겨 있다. 정축지변이란 금성대군이 주도하고 순흥부사 이보흠이 뒷받침한 단종 복위 운동과 뒤따른 대학살 사건을 이른다. 세종은 6명의 부인과 18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정비인 소현왕후 심씨와 사이에는 8남 2녀가 있었다. 첫째가 세종의 보위를 이은 문종이고 둘째가 문종의 맏아들인 어린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곧 세조다.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이 뒤를 이었다. 그러니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 번째 적자(嫡子)다.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금성대군에 앞서 목숨을 잃은 형제는 안평대군이었다. 시문(詩文)과 서화(書畵)에 능했던 안평대군은 문종 시절 조정의 실력자 역할을 하면서 김종서를 비롯한 주요 문신과 가까웠으니 수양대군과는 라이벌이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킨 1453년 반역을 도모했다는 구실로 유배지 교동도에서 사사(賜死)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금성대군은 단종의 측근을 제거하려는 수양대군의 뜻에 따라 1455년 오늘날의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을 아우르는 삭녕에 유배된 데 이어 경기도 광주(廣州)로 이배된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넘겨받은 해다. 이듬해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이 단종 복위를 노리다 실패한다.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다. 이미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된 단종은 1457년 영월로 유배되는데, 이때 금성대군도 순흥에 위리안치된다. 금성대군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는 데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가 도움이 된다. ‘공이 순흥부에 이르러 이보흠과 마주하여 눈물을 흘리고 산호 갓끈을 주었다. 드디어 주변 지역 인사와 몰래 결탁하여 상왕(上王)을 복위시킬 계획을 하고 이보흠을 불러 좌우를 물리고서 격문(檄文)을 기초하게 하였는데, 순흥의 관노(官奴)가 벽에 숨어 들은 뒤 공의 시녀와 교통하여 초안을 훔쳐 달아났다.… 공과 이보흠이 잡혀 죽었고, 지역과 주변 인사 중 사형에 연좌된 자도 많았다.’ 금성대군은 순흥에서 의거를 일으키면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 선비들이 대거 뜻을 같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 영월 청령포에서 노산대군을 모셔와 다시 임금으로 세우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강원도 영월과 경상도 순흥은 심리적 거리가 멀지 않다. 비록 좁은 산길이지만, 태백산이 끝나고 소백산이 시작되는 곳에 고치령이 있다. 이 고개 정상에는 산령각(山靈閣)이 있다. 단종과 금성대군을 태백산 산신과 소백산 산신으로 각각 모셨다. 역사를 민중의 시각에서 해석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금성대군은 안동부 관아에서 사사됐다. 시신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무덤도 없다. 순흥에는 금성대군이 피를 흘리며 죽은 자리에 신단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지만, 전설일 뿐이다. 순흥이 복읍된 것은 숙종 시절이다. 이후 금성대군신단은 1719년(숙종 45) 설치했고 1742년(영조 18) 정비했다고 한다. 신단은 품(品) 자 형태로 3개의 단을 설치했다. 가운데가 금성대군, 왼쪽이 이보흠, 오른쪽이 순절의사를 기린다.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라고 새긴 비석도 세웠다.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물론 화를 입은 사람들 모두를 추모하는 제단이라 할 수 있다. 금성대군의 아들 이맹한은 충청도 청주에 유배됐다. 이후 중종 시절인 1519년 함종군에 복작되며 명예회복이 이루어진다. 충북 청주 미원면 대신리에는 금성대군 제단(祭壇)이 있다. 그를 정점으로 하는 전주 이씨 금성대군파 묘역이다. 제단 오른쪽에는 부인 전주 최씨의 무덤이 있다. 합장묘라는 상징성을 부여한 것이다.●충북 진천·영월에도 금성대군 사당·위패 보존 청주 제단에서 자동차로 20~30뿐쯤 걸리는 충북 진천 초평면 용기리에는 금성대군의 사당인 청당사(靑塘祠)가 있다. 사당을 지은 시절에는 진천이 아닌 청안 땅이었다. 영조 16년(1740) 세웠지만, 흥선대원군이 훼철한 것을 1974년 중건했다고 한다. 충북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주변은 정리되지 않았고, 쓸쓸한 느낌마저 든다. 금성대군은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의 배식단(配食壇)에도 배향되어 있다. 정단(正壇) 32인과 별단(別壇) 236인 등 268인의 위패를 봉안한 제단이다. 금성대군의 위패는 육종영(六宗英)의 일원으로 정단에 봉안되어 있다. 육종영은 안평대군을 비롯한 여섯 종친을 뜻한다. 고치령 산령각에서 보듯 금성대군은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더욱 각광받았다. 서울과 경기 지역에도 금성대군을 모신 여러 곳의 굿당이 있었다. 이 가운데 서울 은평뉴타운 한복판의 금성당은 한때 사라질 위기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금성당 건물은 샤머니즘박물관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해마다 5월이면 금성당제도 열린다. 지하의 금성대군도 자신이 ‘아파트 타운 축제’의 주인공이 될 줄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임진왜란 ‘60전 전승’ 정기룡 장군 기념사업 본격화

    임진왜란 당시 ‘육전의 명장’으로 알려진 충의공(忠毅公) 정기룡(1562년∼1622년) 장군 기념사업회가 출범해 각종 기념사업을 본격 추진한다. 경남 하동군은 1일 정기룡 장군의 업적을 바로세우기 위한 기념사업회가 이날 창립총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다고 밝혔다. 정기룡 장군 기념사업회는 이날 총회에서 정두규 전 해군대학 총장을 회장으로 선출하는 등 임원진을 구성했다. 이사는 모두 70명이다. 기념사업회는 앞으로 정기룡 장군 업적을 바로 세우고 하동의 자랑과 긍지로 삼기 위한 다양한 기념사업을 한다. 주요 선양·기념사업으로 정기룡 장군 탄신제 등 제향 거행, 학술세미나, 책자 발간, 기마 동상 건립, 전적지 탐방 등을 할 예정이다. 정기룡 장군은 임진왜란 30년 전인 1562년 4월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상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정 장군은 24세 때인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왕명으로 기룡(起龍)을 하사 받아 이름을 바꿨다. 159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 장군 휘하에 들어가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방어사 조경을 따라 종군해 거창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7년간 60전 전승이라는 놀라운 전공을 거둔 것으로 전해진다. 35세 때인 1597년 상주 목사로 재임하면서 고령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성주·합천·초계·의령을 탈환한 공로 등으로 정3품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됐다. 임란 후에도 경상도방어사, 김해·밀양·울산부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고 삼도수군통제사를 거쳐 1622년 2월 통영 진중에서 순직했다. 사후 150년이 지난 뒤 1773년 영조 때 충의공 시호를 받았다. 문화재자료 제188호인 하동군 금남면 정기룡 장군 유허지 내 경충사에 장군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돼 있다. 유허지 유물전시관에는 교지·장검·유서 등 정 장군 유품(유형문화재 제286호)이 전시돼 있고 사당 입구에 장군 생가가 초가형태로 복원돼 있다. 하동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퇴계와 쌍벽을 이룬 남명… ‘곧은 칼로 마음 벼리던’ 덕산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퇴계와 쌍벽을 이룬 남명… ‘곧은 칼로 마음 벼리던’ 덕산

    조선은 1407년(태종 7) 군사행정 편의상 경상도를 좌우로 나누었다. 한양에서 바라보아 낙동강 오른쪽을 경상우도, 왼쪽을 경상좌도라 불렀다. 1519년(중종 14)에는 경상우도와 경상좌도에 각각 감사를 두는 행정구역 개편을 정식으로 단행한다. 하지만 폐해가 많다는 이유로 같은 해 경상도를 다시 하나로 환원했다. 다만 수사(水使), 병사(兵使)와 같은 군사상 직제는 좌우도 체제를 유지했다.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각각 강우(江右)와 강좌(江左)라 부르기도 한다. 황하의 서쪽과 동쪽을 각각 강우와 강좌라 하는 중국을 참고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경상우도 지역에서는 강우라는 표현을 즐겨 썼지만, 경상좌도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강좌란 표현이 흔치 않다. ‘왼쪽’의 ‘왼’에 무언가 바르지 않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학자가 남명 조식(1501~1572)과 퇴계 이황(1501~1570)이다. 이른바 퇴계학의 중심지가 도산서원이 있는 안동이라면, 이른바 남명학의 중심지는 덕천서원이 있는 과거의 진주땅 산청이다. 같은 해 태어나 불과 두 해 차이로 세상을 등진 두 사람은 완벽하게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상가다. 퇴계학파가 현실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성리학의 이상을 펴고자 했다면 남명학파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면서 실천을 요구하는 학문을 주도했다고 한국사상사는 적고 있다.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퇴계가 소백산 아래서 태어났고 남명이 두류산 동쪽에서 태어났는데 모두 경상도 땅으로, 북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했고 남도에서는 의(義)를 앞세웠다’면서 퇴계를 바다, 남명을 산에 비유하기도 했다. 서로 다른 길을 갔지만 결국 상보적(相補的)이라는 뜻도 되겠다. 두류산은 지리산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퇴계의 안동이 한국 유학의 본거지로 대접받는 반면 남명의 산청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것은 두 사람 사후의 정치적 변화 때문일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남명의 제자인 의령, 합천, 고령의 곽재우, 정인홍, 김면은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다. 이후 정인홍을 중심으로 파당을 이룬 북인이 정권을 잡았지만 인조반정으로 완전히 몰락한 것이 남명의 입지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불의에 결코 타협하지 않은 실천의 철학을 평생 갈고닦아 후세에 커다란 가르침을 남긴 남명 선생의 족적을 따라가 본다. 남명이라면 아무래도 산천재(山川齋)와 덕천서원(德川書院)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서른 무렵 오늘날의 김해 대동 처가 옆에 산해정(山海亭), 48세에는 생가가 있는 합천 삼가에 뇌룡정(龍亭)이라는 독서당을 각각 마련해 학문에 전념한 결과 명성을 쌓은 남명이 60세가 넘은 1561년 산청으로 이사하면서 새로 지은 공부방이 바로 산천재다.산천재가 있는 고장은 행정구역으로는 시천이지만 누구나 덕산이라 부른다. 초·중·고등학교 이름도 덕산이고 농협이나 축협도 덕산지점이고 덕산지소다. 남명의 시대에도 덕산이라고 했다. 이 지역 곶감도 ‘덕산곶감’이다. 덕산은 한 마을의 이름이었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호칭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설에는 지리산이 바로 덕산이고, 지리산의 양 골짜기에서 흘러든 시내가 이 고을에서 합쳐져 덕천을 이룬다고도 한다. 시천은 면 소재지 전체가 남명 유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북쪽과 서쪽에서 각각 흘러든 덕천강과 시천(矢川)은 고을 한복판에서 합류해 동쪽으로 나간다. 산천재는 고을 동쪽 물길이 넓어진 덕천강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길건너 쪽에는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집안의 가묘(家廟)인 여재실(如在室)이 있고 그 옆에는 현대식으로 지은 남명기념관이 보인다. ‘여재’라 한 것은 선생이 살아계신 듯하다는 뜻인가 보다. 뒷산에는 남명이 생전에 자리를 봐두었다는 선생의 무덤이 있다. 이미 거목(巨木)이었던 남명이었지만 산천재는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작은 집이다. 그런데 지금의 산천재는 그동안 봐 왔던 소박하지만 기품 있는 모습과는 다르다. 그러고 보니 새로 단청을 해놓았다. 절제를 평생의 미덕으로 삼은 학자의 공부방이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남명기념관과 여재실로 들어서는 솟을대문에는 ‘성성문’(惺惺門)이라는 편액이 걸렸다. ‘성성’의 의미는 기념관 전시실을 돌아보면 알 수 있다. 선생은 성성자(惺惺子)라 이름지은 작은 쇠방울을 차고 다녔는데, 소리가 날 때마다 자신을 돌아봤다고 한다. 기념관에는 남명이 품고 다니며 마음을 벼리는 데 썼다는 작은 칼 경의검(敬義劍)도 전시되어 있다. 경(敬)과 의(義)는 남명학을 함축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로 ‘군자는 경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로 바깥을 바르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선생은 경의검에 ‘안에서 밝히는 것을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라는 글자를 새겼다. 그러니 남명학의 진리인 경과 의를 상징하는 것이 성성자와 경의검인지도 모르겠다. 남명기념관 앞 넓은 마당에는 우람한 석물이 늘어서 있다. 대부분 최근 세운 것들인데, 맨 왼쪽에 그런대로 세월의 흔적이 조금은 쌓인 비석이 하나 보인다. ‘남명 선생 신도비’다. 1615년(광해군 7) 정인홍이 세운 당초의 신도비는 인조반정 당시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미수 허목과 우암 송시열이 지은 비문으로 각각 덕산과 합천 삼가에 선생의 신도비를 세웠다. 그런데 1685년(숙종 11) 세워진 덕산비는 1926년 남명의 후손들이 훼손했다. 남인인 미수가 남명을 비하하는 내용을 비문에 담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당의 갈등은 20세기까지 이어졌다. 지금의 신도비는 1909년 삼가 용암서원에 세웠던 것이다. 우암(1607~1689) 생전에 받아놓은 비문으로 새겼다. 이것을 2010년 기념관 마당으로 옮겨 놓았다. 우암은 북인과는 대척점에 있는 서인의 영수였지만, 남명을 퇴계를 비롯한 육군자(六君子)의 반열에 올리는 등 높이 평가했다. 남명을 기리는 덕천서원은 산천재 서쪽 너머에 있다. ‘덕천서원 중건기’(1622년)에는 ‘1572년(선조 5) 봄 남명 선생이 돌아가시자 수우당 최영경, 각재 하항, 영무성 하응도, 무송 손천우, 조계 류종지 등이 선생을 위한 사우 창건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575년(선조 8) 겨울 목사 구변과 함께 터를 보고 구곡봉 아래 살천(薩川) 가에 터를 정했다.…목사 구변과 감사 윤근수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일 년이 채 안 되어 사우와 강당, 동·서재를 건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옛 사람들은 시천을 살천이라고도 불렀다. ‘도료장(都料匠)은 승(僧) 지관이 맡았다’고 했으니 사찰 건축에 이력이 붙은 스님을 서원 건축 책임자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서원 앞에는 400살이 넘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 홍살문을 지나 시정문(時靜門)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경의당(敬義堂)이 보인다. 이름에도 남명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 덕천서원은 출범 당시에는 덕산서원이었다. 1609년(광해군 1) 지금 이름의 사액서원이 됐다. 서원은 인조반정 때는 당연히 정치적 풍파를 겪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30년대 복원하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서원 앞을 지나는 남명로를 건너면 시천 둑 위에 서원과 함께 지었다는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예전에는 글자 그대로 마음을 씻기(洗心)에 충분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남명의 체취를 조금 더 느껴 보고 싶다면 자동차로 30~40분쯤 걸리는 합천 삼가 외토리 생가 마을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 양천강변에는 뇌룡정과 용암서원(龍巖書院)이 있다. 서원 마당에는 남명의 ‘단성현감 사직소(疏)’를 최근 돌에 새겨놓았다. 선생은 뇌룡정에 머물던 155년(명종 10) 단성현감에 제수되자 ‘전하의 국정이 그릇된 지 오래고…’로 시작하는 이른바 ‘단성소’를 올렸다. ‘자전(慈殿·왕의 어머니, 당시 문정왕후)은 깊은 궁궐안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선왕의 나이 어린 고아일 뿐’이라는 목숨을 건 상소는 남명을 단숨에 기개 있는 사림의 대표주자로 떠오르게 했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K-9 사고’ 순직 위동민 병장 영면 ...육군 5군단장(葬)으로 엄수

    지난달 강원도 철원 육군 부대에서 발생한 K-9 자주포 화재 사고로 부상해 치료중 숨진 고 위동민(20) 병장의 영결식이 15일 오전 경기 성남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서 육군 5군단장(葬)으로 엄수됐다. 영결식에는 유가족과 친지, 장의위원장을 맡은 제갈용준 5군단장과 장병 등 160여 명이 참석했다. 또 더불어민주당 서영교·김병기 의원, 자유한국당 이종명·윤종필 의원, 바른정당 김영우 의원, 무소속 이정현 의원 등도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영결식은 약력 보고, 조사, 추도사, 헌화, 조총 발사, 묵념, 영현 운구 등의 순으로 30여 분 동안 진행됐다. 제갈용준 5군단장은 조사에서 “위 병장의 숭고한 정신은 육군 역사에 영원히 남게 될 것이고 전 장병들은 국가안보 수호 임무에 더욱 매진해 고인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위 병장과 고교 동창이면서 동반 입대한 진우건 상병은 추도사에서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을 때도 밝은 표정으로 맞아주고 그렇게 착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더니, 치료가 힘들었으면서도 넌 그렇게 우리를 안심시키려 했었구나”라고 고인을 떠올렸다. 이어 “아직도 고등학생 때 모습이 눈에 선하고 너의 웃는 얼굴이, 재미없는 얘기를 해도 뭐든 즐거웠던 그때가 미치도록 그립다”며 “여기 너무 걱정하지 말고 좋은 곳에서 편하게 지내. 사랑한다”라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유가족들은 위패와 영정을 앞세운 시신이 운구차로 향하자 오열했고 이 모습을 지켜본 장병과 친지들도 눈물을 훔쳤다. 유해는 화장된 뒤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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