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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9)이득윤과 ‘서계이선생가장결’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9)이득윤과 ‘서계이선생가장결’

    ‘정감록’에 수록된 예언서의 저자들 중에도 비교적 낯선 인물이 있다.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1553∼1630)이 그런 경우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서계 역시 조선시대엔 상당히 유명한 예언가였다. 서계가 살던 16세기는 우리 역사상 별들의 시대였다. 퇴계 이황, 화담 서경덕, 하서 김인후, 율곡 이이, 고봉 기대승, 우계 성혼, 남명 조식 등 조선 유학사(儒學史)의 거장들이 일시에 배출되어, 성리(性理)를 궁구했다. 노수신·백인걸·유희춘임억령 등 선비의 기개를 떨친 이도 많았고, 최경창·백광훈·이달 등 시문의 대가도 적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북창 정렴, 토정 이지함, 격암 남사고 등은 신선의 세계를 드나들어 이채를 띠었다. 불가(佛家)에도 서산대사 같은 거물이 있었다. 위에 언급한 16세기의 인물 가운데 상당수는 예언서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우선 토정과 북창이 그렇고, 격암과 서산대사도 예외는 아니다. 서계도 이 부류에 속한다. 서계는 유학자인 동시에, 역술가요 음악가였다. 그가 지었다는 ‘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臧訣)은 현재 ‘정감록’의 일부로 되어 있다. 서계는 누구였는가? 그의 저술로 알려진 ‘서계이선생가장결’은 또 어떤 책인가? 그리고 서계가 살던 16세기가 ‘예언가들의 전성시대’로 불릴 수 있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서계 이득윤이란 예언가 서계는 어려서부터 성리학 공부를 많이 했다. 선조 21년(1588년)에는 진사(進士)가 되었으므로, 그의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서계는 수학과 역학(易學)에도 밝았다. 당시 역술의 대가 박지화(朴枝華)를 방문해 수준 높은 토론을 펼쳤다 하며, 이를 계기로 역학의 대가로 이름을 얻었다. 그는 우주자연의 생성과 운행원리에 관한 전문가였다. 쉽게 말해, 서계는 주역 점을 잘 치기로 유명했다. 아마 그런 덕택이었겠지만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1597년 서계는 관직에 등용되었다. 처음엔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이밖에 한두 가지 벼슬을 더 지냈다. 그러다 광해군이 집권하자 조정에서 물러났다. 오늘날 충북 청원군 미원면이 서계의 고향이었다. 그는 낙향 직후인 광해1년(1609) 미원면 일대 9곳에 이른바 ‘옥화구곡’(玉華九曲)을 정했다. 일찍이 성리학의 대가 주희(朱熹)가 송나라 때 푸젠성 무이산에 머물며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묻혀 지낸 사실을 모범으로 삼은 것이다. 서계는 청원군 미원면을 남북으로 흐르는 박대천을 따라 하류에서 상류 쪽으로 만경대(萬景臺), 후운정(後雲亭), 어암(漁巖), 옥화대(玉華臺), 천경대(天鏡臺), 오담(鰲潭), 인풍정(引風亭) 및 봉황대(鳳凰臺)를 두었다. 옥화구곡이란 이름이 암시하듯 구곡 가운데서 서계에게 가장 중요한 곳은 제4곡 옥화대였다. 옥화란 옥구슬이 떨어지듯 아름답다는 뜻이다. 옥화대의 이름에서 유래한 미원면 옥화리엔 서계가 지은 추월정(秋月亭)도 남아 있다. 서계처럼 ‘구곡’을 정해놓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에 침잠하는 태도는 16세기 이후 선비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했다. 전라도 해남의 고산 윤선도 같은 이도 ‘고산구곡’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려 십여 년 동안이나 서계는 옥화구곡에 칩거했다. 이 때 그는 기호지방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서신을 통해 태극도(太極圖)와 역학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여기서도 재차 확인되듯, 일평생 서계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역학이었다. 그에겐 또 하나 전문분야가 있었다. 음악이었다. 정두원(鄭斗源)을 상대로 거문고에 관한 지식을 교류했는데, 나중에 서계는 한국의 역대 금보(琴譜·거문고 악보)를 집성하여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를 만들었다. 일종의 거문고 악보였고, 이를 통해 서계는 한국음악사에 길이 남을 자료를 남겼다. 서계가 못마땅하게 여긴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즉위하자 그는 관직에 복귀했다. 선공감정(繕工監正)을 거쳐 충청도 괴산 군수에 임명됐다. 바로 그 때의 일이다.‘실록’에 보면, 서계는 서울에 올라와 국왕에게 사은(謝恩)하는 길에 의미심장한 예언을 했다. 서울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 나서 서계가 이렇게 말했다.“아직도 쇳소리가 거세게 나오고 있으니, 난리가 끝이 안 났다.” 그 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서계의 예언이 맞았다며 그의 예언능력에 감탄했다. 예언가 서계는 매우 유능한 지방관이기도 해 통치 실적이 당대 최고였다 한다(실록, 인조8년 5월28일 정미). 요컨대, 서계는 주역(周易)의 대가로 출세해 훌륭한 목민관(牧民官)이 되었고 정묘호란을 예언하기도 했다. 물론 예언가 서계의 명성은 그의 탁월한 주역 실력에 기인했다. 뒷날 서계는 후손과 후학들에 의해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과 귀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그들은 서계를 주역의 대가로서보다는 성리학자의 전형으로 기렸다. 이것은 예언가 서계에 관한 일반 민중들의 기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서계이선생가장결’의 내막 서계가 남겼다는 예언서의 제목엔 ‘가장결’이란 용어가 포함돼 있다. 말 그대로라면 집안에 보존되어 오던 비결이어야겠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후손과 후학들이 기억하는 서계는 근본적으로 성리학자였다. 그런데 그 ‘가장결’의 내용을 보더라도 그것은 서계의 집안에 전승된 비결은 아니었다. “선생이 사기막(沙器幕)에 살 때 이웃에 살던 최생(崔生)이 와서 여쭸다. 임진(壬辰)의 화는 피할 수 있었으나, 앞으로 2백여 년 뒤엔 반드시 큰 난리가 일어날 텐데, 그 일을 조목조목 적어두어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자 선생이 그럼 네게 말해줄까 라고 대답했다.”(서계이선생가장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따른다면, 문제의 예언서는 서계 집안에 전해진 것이 아니었다. 서계의 제자로 추측되는 최씨가 애써 부탁해서 얻은 예언서였던 만큼 그 전승과정에서도 최씨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봐야 한다. 과연 최씨는 서계의 예언을 받아 적었을까? 우선 당장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이 예언서가 ‘정감록’과 대체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잠시 예를 들어보자. “적호(赤虎):이인(異人)이 남쪽으로부터 오니 한곳에 소동이 일어난다. 왜인(倭人) 같으면서도 왜인은 아닌데 화친을 주장한다.(중략) 청계(靑鷄):천리 강산이 셋으로 나뉘니 어찌할 것인가.(중략) 흑룡·현사(黑龍·玄蛇): 푸른 옷과 흰옷이 함께 동쪽과 남쪽에서 나온다.”(‘서계이선생’) 위에 인용한 내용은 말세의 시운을 말하는 것인데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말세엔 이인 또는 진인이 등장한다. 둘째, 국토가 분단된다. 셋째, 남동쪽에서 정체불명의 침략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해, 인용문에 나오는 ‘적호’와 ‘청계’ 같은 것은 60갑자를 이용해 연도를 표시한 것이다. 예컨대 ‘청계’의 ‘청’은 갑(甲)과 을(乙),‘계’는 유(酉)를 가리킨다. 청계는 곧 을유년이다.‘서계이선생은’ 을유년에 천리강산이 셋으로 나뉜다고 하였다. 이미 말했다시피 3국 분국설은 18세기 이래 정감록의 골자를 이뤘다.‘서계이선생’은 그 전통에 충실한 예언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일제식민지에서 해방되던 1945년이 바로 을유년이었다. 예언서의 내용과는 달리 나라는 셋으로 쪼개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 해에 남북으로 분단된 것은 틀림없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서계의 예언이 또 적중했다고 믿었다. 그것은 물론 우연이었다. 적호(병인)에 이인이 나와 화친을 주장한다는 내용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적중했다고 볼 수 있다. 무리한 점이 없지 않으나 고종 3년의 병인양요(1866)를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흑룡(임진) 현사(계사) 연간에 정체불명의 외국군대가 침략해 온다고 본 것은 전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만일 병인양요에 관한 예언이 들어맞았다면 그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병인양요를 겪은 뒤에 창작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서계이선생’은 일단 1860∼1870년대에 창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서계이선생’의 저술연대에 대해 좀더 생각해보자. 첫째,‘서계이선생’이 19세기 후반에 저술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그 근거는 예언서에서 발견된다.“이상하도다, 세상의 재난이여! 병란도 아니요, 칼날도 아니로다. 가뭄이 아니면 수재요, 흉년이 아니면 역병이다.”(‘서계이선생’) 여기서 보듯, 이 예언서에서 거론되고 있는 말세의 가장 중요한 조짐은 외침이나 내전을 비롯한 전쟁이 아니었다. 문제는 천연재해와 전염병이었다. 인플루엔자와 장티푸스, 콜레라가 한국을 강타해 많은 피해를 주었던 시기에 ‘서계이선생’은 쓰여졌다고 본다.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가며 민중을 몹시 괴롭히던 때 ‘서계 이선생’을 빙자한 말세의 예언이 나왔다고 추정된다. 그 때는 다름 아닌 19세기 후반이었다. 그러나 아직 갑오동학농민전쟁이나 청·일전쟁 같은 대사건이 터지기 전이었다. 그렇다면 병인년(1866) 이후 갑오년(1894) 이전에 저술됐다는 이야기다. 둘째,19세기 후반 창작설을 뒤집을 만한 근거도 ‘서계이선생’에서 발견된다. 문제의 예언서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서계가 활동하던 16세기의 사정을 반영하는 부분도 있다. 이 기회에 ‘서계이선생’의 특징을 간략히 요약해 보자. ●‘서계이선생가장결’의 특징 이 예언서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위에서 언급한 대로 말세의 징후를 전염병과 자연재해에서 찾았다는 점이다.‘정감록’은 대체로 전쟁의 발발을 말세의 시작으로 본다. 둘째, 피란지를 충청도, 그것도 주로 충청북도에 설정하였다는 점이다. 충북 보은에 있는 속리산의 증항(甑項), 황간(黃澗)과 영동(永同) 사이, 청주(淸州) 남쪽과 문의(文義) 북쪽, 옥천(沃川)이 주요한 길지로 부각된다. 충청남도의 경우 진잠(鎭岑)과 공주의 유구(維鳩)와 마곡(麻谷)도 거론된다. 길지로 선정된 지역이 충청북도에 많고, 특히 청주와 보은을 중심으로 사방에 배치된 점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서계 이득윤의 고향이 충북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연치 않은 것 같다. 설사 말세의 징조에 관한 예언은 서계의 붓끝에서 직접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길지에 관한 언급은 서계와 모종의 관련이 있었을 법하다. 서계와 동시대의 인물이던 격암 남사고가 그랬듯, 서계도 자기 고향을 중심으로 길지를 논의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셋째, 이 예언서엔 부지런히 농사짓는 것이 말세를 헤쳐 나가는 최고의 방법으로 돼 있다.“이런 세상을 맞아 남편은 땅을 갈고 아내는 베를 짜되 벼슬자리에 오르지 말고 농사 짓는 데 부지런히 힘씀으로써 스스로 살길을 버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이런 구절도 있다.“밭이여, 밭이여!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농사일에 진력하면 난세를 이겨낸다고 주장한 것이 흥미롭다. 이것은 여느 예언서와는 다른 점이다. 간혹 ‘정감록’에 밭(田) 또는 개활지에 살길이 있다고 된 부분이 있긴 하다. 하지만 ‘서계이선생’처럼 뚜렷하게 독농(篤農)을 주장한 경우는 없다. 굳이 부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서계이선생’은 힘써 농사짓기를 거듭 강조한다. 이런 대목은 생전에 훌륭한 지방관으로 이름을 날리던 서계의 진심과 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계이선생’엔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서계의 본뜻을 담고 있는 대목도 있지 싶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서계가 작고한지 300년가량 지난 19세기 후반, 그 이름을 빌려 위작한 것으로 봐야 옳겠다. ●16세기는 예언가들의 전성시대 신기하게도 서계가 활동하던 16세기에는 문화계에 많은 별들이 등장했다. 특히 그 가운데 이름난 예언가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쏟아져 나왔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이것은 내 억단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 이유를 나는 다음의 세 가지로 짐작한다. 첫째, 당시 사회가 무척 불안정했다는 점이다.16세기에는 여러 차례 사화(士禍)가 일어나 억울하게 핍박을 받는 선비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연히 인간의 길흉화복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고, 그런 문제를 직접 연구하는 선비들도 생겨났다. 토정 이지함과 북창 정렴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당쟁이 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왜적이 침략해 사회는 위기감에 젖어들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16세기에 활동한 기인(奇人)과 이승(異僧)의 언행에서 예언을 발견하려는 분위기가 더욱 강화됐다. 둘째,16세기까지만 해도 한국의 문화계는 성리학 일변도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그 시기엔 성리학계에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대두해 자웅을 겨뤘다. 하지만 조선의 사상계는 아직 그다지 경화되지는 않았다. 이 시대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여러 학설에 골고루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대가들이 이단으로 지목한 불교, 도교 및 음양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 마디로, 학계의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런 까닭에 격암 남사고의 경우처럼 역학 또는 음양학의 대가들도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을 받았다. 이 번호의 주인공 서계 이득윤 역시 그러했다. 셋째, 한국역사상 드물게 지방문화가 융성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실 통일신라시대는 물론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고급문화의 생산과 소비는 수도에서만 가능했다. 그 시대엔 지방에 고급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앙과 지방의 문화적 편차는 조선시대에 들어가자 급격히 줄어들었다. 중국에서 창안된 강남농법(江南農法)이 전해지면서 지역개발 붐이 일어났고, 새 시대의 국가적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이상에 따라 전원문화(田園文化)가 고급문화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16세기에는 경상, 전라, 충청도 각지가 경제적인 면에서 골고루 개발됐고, 그 문화적 수준도 서울과 비등하였다. 각지에 고급문화의 거점이 들어섬으로써 성리학이든 역술이든 대가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예컨대 남사고는 경상도 출신이며, 이지함과 이득윤은 충청도 출신이었다. 서산대사는 평안도에서 자라나 전라도와 강원도를 비롯한 각지에서 활동했다. 조선 후기에도 사회적 불안은 수그러지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는 더욱 심해졌다고까지 하겠다. 지방의 문화적 수준은 여전히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비해 서울과의 문화적 편차는 더욱 커졌다. 사상적인 면에선 어떠했나? 이른바 ‘이단’(異端)이 공식적인 논의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심지어는 성리학 내부에서도 사상적 통일을 강조하는 경향이 지나쳤다. 지배층이 내세운 이론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멀쩡한 성리학자들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배척되었다. 이처럼 사회분위기가 경직되다 보니 새 예언가가 ‘공식적으로 탄생’하기란 불가능했다. 예언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더욱 늘었지만 누구도 자기 이름을 내걸고 예언가로 행세할 수는 없는 분위기였다. 이런 판국이라 16세기를 수놓은 예언가들의 화려한 이름은 계속 도용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본래 예언가로 정평이 나있던 토정이나 서계의 이름을 빌려 새 예언서가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 그와 더불어 그들은 해묵은 명성을 더욱 드날렸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8) 토정 이지함과 ‘토정가장결’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8) 토정 이지함과 ‘토정가장결’

    ‘토정비결’(土亭秘訣)을 굳게 믿는 친구가 있다. 그는 해가 바뀔 때마다 자기 자신의 일년 신수는 물론 가족과 친지들의 새해운수도 일일이 챙겨준다. 실은 그 친구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엔 그런 이들이 참 많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1517~1578년)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토정은 매월당 김시습, 북창 정렴과 함께 조선의 3대 기인으로 손꼽힌다. 놀랍게도 ‘정감록’가운데는 토정이 지었다는 ‘토정가장결’이 포함돼 있어 관심을 끈다. 더욱이 이 예언서는 여러 대 동안 비밀리에 전해졌다고 하므로 더욱 호기심이 일어난다. 그런데 ‘토정가장결’에 무슨 사연이 담겨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친숙한 이름이긴 하지만 실상 우리가 잘 모르는 토정 이지함의 비극적인 생애를 알아보자, 이 기회에 그가 후세에 남겼다는 ‘토정비결’과 ‘토정가장결’, 그리고 ‘정감록’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좋겠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을 굳게 믿는 친구가 있다. 그는 해가 바뀔 때마다 자기 자신의 일년 신수는 물론 가족과 친지들의 새해운수도 일일이 챙겨준다. 실은 그 친구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엔 그런 이들이 참 많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1517~1578년)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토정은 매월당 김시습, 북창 정렴과 함께 조선의 3대 기인으로 손꼽힌다. 놀랍게도 ‘정감록’가운데는 토정이 지었다는 ‘토정가장결’이 포함돼 있어 관심을 끈다. 더욱이 이 예언서는 여러 대 동안 비밀리에 전해졌다고 하므로 더욱 호기심이 일어난다. 그런데 ‘토정가장결’에 무슨 사연이 담겨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친숙한 이름이긴 하지만 실상 우리가 잘 모르는 토정 이지함의 비극적인 생애를 알아보자, 이 기회에 그가 후세에 남겼다는 ‘토정비결’과 ‘토정가장결’, 그리고 ‘정감록’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좋겠다. ●토정은 대단한 기인(奇人) ‘조선왕조실록’엔 토정의 풍모를 전해주는 몇 가지 기록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지함을 토정이라 불렀다. 이지함이 거처하던 곳이 토정(土亭)이었기 때문이다. 토정은 일찍이 한양의 마포 항구(麻浦港口)에 흙을 쌓아 언덕처럼 만들어 놓고 그 아래 굴을 팠으며 위에는 정자를 지었다. 그런데 큰물이 졌을 때도 토정이 만든 흙 언덕은 언제나 그대로였다(실록, 선조 수정 11년 7월1일 경술). 토정은 여느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어 보이는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이었다. 특히 발이 무척 컸다고 한다. 토정의 얼굴은 둥글고 검은 편이었고 눈빛이 강렬했다. 목소리는 우렁차고 맑아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토정은 보통 선비들과는 차림새도 확연히 달랐다. 그는 짚신을 신고 죽립(竹笠)을 쓴 채 걸어 다녔다고 한다. 초립(草笠)에 나막신을 신은 구부정한 모습이었다는 진술도 있다. 그 당시 선비들은 당연히 조랑말이라도 타고 다녀야 되는 줄로 알았고, 항시 의관을 정제했다. 고급스러운 말총으로 꾸민 큰 갓을 쓰고 가죽신을 착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토정은 이런 풍습을 도외시했으므로, 그가 길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비웃기 마련이었다. 담화를 나눌 때도 토정은 수수께끼나 농담을 즐겼고, 점잖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도 많았다(실록, 선조 수정 6년 5월1일 경진). 한마디로, 토정은 격식을 초월했다. 혼례를 치른 다음 날에도 의외의 행동으로 가족과 친지들을 놀라게 했다. 모처럼 새로 지은 도포를 입고 외출한 토정은 어느 다리 밑을 지나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세 명의 거지아이를 만났다. 토정은 입고 있던 새 도포를 벗어 세 폭으로 찢어서 그 아이들에게 입혀주었다. 그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종일 바깥에서 일을 보았다. 토정은 이처럼 호방한 성격이었다. 도인의 면모를 보인 적도 많았다. 그는 열흘 정도는 굶어도 거뜬했다. 무더운 여름철에도 냉수 한 모금 마시는 일이 없었다. 요즘의 건강상식에 크게 어긋난 행동이었다. 토정은 간혹 천리 길을 걸어 어딘가를 바람처럼 다녀오기도 하였다. 배를 타고 방랑하기를 좋아해 제주도를 여러 번 찾았다는데 태풍이 불거나 파도가 거센 날을 용케 피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간혹 여행 중에 기생들이 별의별 수단을 다 써 유혹했으나 한 번도 넘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토정은 정욕마저 완전히 끊어버린 이를테면 속세의 신선이었다는 이야기다.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설화도 그래서일까. 토정에겐 앞일을 내다보는 예지 능력이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장인에게 화가 닥칠 것을 미리 알았다 한다. 명종 초년의 일이다. 하루는 토정이 그 부친에게,“아내의 가문에 불길한 기운이 있어 집을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 라고 아뢴 뒤 식구들을 이끌고 서둘러 한양을 떠났다. 바로 그 다음 날, 토정의 장인은 사화에 연루돼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까지 용했을까 하는 일말의 의문이 없지 않다. 어쨌거나 ‘실록’은 토정의 예언 능력을 무척 칭찬한다. 한 번 사람을 만나보면 그 성품은 물론, 앞날의 길흉까지 환히 알아 맞혔다 한다. 토정은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오래 전에 사태를 예언했다는 구비설화가 남아 있다. 만년에 그는 조선 팔도를 두루 유람했다고 한다. 당연히 천하명산 금강산에도 들렀다. 하루는 날이 기울자 토정은 지친 몸을 이끌고 암벽 위에 서 있는 초라한 암자를 찾아갔다. 워낙 피곤해서 제대로 자리를 펴고 누울 겨를도 없이 방안에 들어가 한 쪽 벽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들었다. 조금 있다가 꿈속에 스님 두 분이 나타났다. 그들은 병풍과 자리를 깔며 부산을 떨었다. 토정은 스님들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 여러 산의 산신령들이 모여 장차 다가올 난리를 의논할 거라는 답변이었다. 과연 전국 명산의 산신령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회의를 열었다. 여러 주장이 난무했다. 그러자 금강산 산신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왜놈들이 동방예의지국 조선을 침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최선을 다해 놈들을 물리치자고 주장했다. 놀란 토정은 퍼뜩 깨어났다. 조금 전 기대어 잠을 청했던 암자는 오간 데 없었다. 암벽 위엔 한 그루 늙은 소나무만 외롭게 서 있었다. 이런 일을 겪고 나서 토정은 왜란이 일어날 줄을 짐작했다. 이것은 한낱 설화다. 토정을 뛰어난 예언가로 간주하게 된 후대의 민중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가 있다. 역사 속에서 믿고 따를 만한 인물을 재발견하는 것이 민중들로선 익숙한 일이었다. 그들은 본래 토정이 특이한 선비인 줄 알고 있었으므로, 이런 설화를 덧붙여 민중의 스승으로 이상화했다고 풀이된다. 왜란에 관해선 또 다른 이야기가 토정의 문집에 실려 있다. 일찍이 그는 상중(喪中)에 있던 제자 조헌(趙憲)을 조문하였다. 그날 혜성(彗星)이 밤하늘에 뻗쳐 조헌이 그 조짐을 물었고, 토정은 이 혜성이 천하에 큰 난리가 일어날 조짐이라며 그때에 대비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다 한다(실록, 영조 30년 11월27일 임인). 스승의 말을 가슴에 새긴 조헌은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돼 금산에서 북상하던 왜적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문집의 기록은 사제간의 문답을 확대 해석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토정이란 인물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기도 한다. 그는 일상적인 일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국가의 장래를 염려했던 것이다. 토정은 다분히 도가적(道家的)이었지만 본질적으론 유가(儒家)의 선비였다. ●사화에 얽혀 불우했던 토정 사실 토정은 국가경영에 관심이 컸다. 평상시 그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내가 일백 리 되는 고을을 맡아 다스리게 되면 가난한 백성을 모두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바꿀 것이다.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아 나라의 평안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토정은 벼슬에 나아갈 기회를 얻지 못했다. 명종5년(1549년) 토정이 33세 되던 해에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토정의 장인이 역모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당했고, 연좌법에 걸린 토정은 벼슬길이 막혔다. 설상가상으로 죽마고우(竹馬故友) 안명세(安名世)마저 필화를 입고 죽었다. 사관(史官)으로 이름이 높았던 안명세는 명종 연간 을사사화(1545년)에 관련해 윤원형과 이기 등 소윤(小尹)이 윤임 등 대윤(大尹)을 모함해 몰살했다고 적었다. 윤원형 일파는 몰래 사초를 들여다보았고, 자기들에게 불리한 기사를 쓴 안명세를 제거한 것이다. 이후 토정은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기인(奇人)으로 처세하게 됐다. 지지난 호에 소개한 정렴은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의 아들이라 스스로 세상을 피했던 데 비해, 토정은 억울하게도 세상에 용납되지 못해 기벽(奇癖)을 갖게 됐다고 해야 맞다. 어찌 보면 세상을 원망하고 자포자기하기가 참 쉬웠을 텐데, 토정은 절망하지 않고 학문에 힘썼다.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및 의학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고, 조헌과 이산보를 비롯해 여러 제자를 키웠다. 조정이 토정에게 벼슬길을 열어준 것은 한참 지나서였다. 을사사화의 주도세력이 조정에서 물러난 선조 초년이었는데, 그 사이 토정은 이미 늙어버렸다. 그는 60이 가까운 나이에 사실상 초임이나 다름없는 아산군수 자리에서 세상을 떴다. 평생 닦아온 선비의 웅지를 펼칠 겨를도 없었다. 토정이 남긴 글은 뒷날 ‘토정유고’(2권1책)로 정리됐다. 이와는 별도로 민간에서는 ‘토정비결’과 ‘토정가장결’, 주역(周易)에 관한 ‘월영도’, 풍수지리를 다룬 ‘농아집’ 등을 토정의 저술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실상 ‘토정유고’에는 위에 언급한 어떤 책자도 거론되지 않고 있다. 만일 실증주의의 입장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토정비결’이나 ‘토정가장결’ 등은 토정의 저술이 될 수 없다.‘토정유고’외에는 이지함의 저술로 단정할 만한 결정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모두 후대의 위작으로 볼 것인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토정비결의 매력 물론 어느 쪽도 단언하긴 어렵다. 그러나 다른 책은 몰라도 ‘토정비결’만은 토정의 붓끝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토정은 의학과 점에 능통했기 때문에 그를 찾아와 운수를 묻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반의 그런 요구가 많아지자 토정은 아예 한 권의 책을 지어 일상의 번거로움에서 해방되기를 도모했을 법도 하다. ‘토정비결’은 주역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주역과는 다르다. 주역의 기본 괘는 48개인데 비해 ‘토정비결’은 32개다. 괘를 짓는 방법도 달라 이른바 사주 가운데 시(時)를 뺀 년(年), 월(月), 일(日)을 사용할 뿐이다. 조선시대 민간에는 시계가 없어 시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편의를 도모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토정비결’은 주역을 이용하면서도 조선의 특성을 십분 고려했다. 그러다 보니 점괘의 총수도 주역과는 다르게 됐다. 주역에는 총 424개의 괘가 있으나 ‘토정비결’은 총 144개뿐이다. 훨씬 간편하다고 말할 수 있다. 토정 이지함처럼 기발하고 독창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토정비결’은 열두 달의 운수를 시구(詩句)로 적어 놓았다.“동쪽에서 목성을 가진 귀인이 와서 도와주리라.”,“관재수가 있으니 혀끝을 조심하라.”는 식이다. 간단명료한 글귀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점괘다. 각 항목마다 길흉이 적절한 비율로 배합돼 있어 낙관도 실망도 하기 어렵게 돼 있다. 결과적으로,‘토정비결’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며, 일마다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해 처리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토정비결’은 운수를 판별하는 데 중점이 있다기보다 일반 민중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토정비결’은 단순히 점을 봐주고 금품을 요구하는 직업적인 점쟁이의 저술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내 눈엔 그것이 점을 통해 점을 치는 사람들이 점에만 의존하지 않게 유도하는 기능이 숨겨진 반점술서(反占術書)로 보인다. 토정 이지함과 같이 점에 능통하면서도, 본질적으론 유가(儒家)의 철학을 신봉한 큰선비가 남겼을 법한 저술이다. ●그럼 ‘토정가장결’은? 정리하면, 토정은 살아생전에 이미 기인, 도사 그리고 큰선비로 세상에 유명했다. 더욱이 후세에는 ‘토정비결’과 같은 명저의 지은이로 민중에게 더욱 친숙한 이름이 됐다. 그가 만일 무수한 개인의 운명을 점칠 수 있다면, 나라의 운수인들 모를 까닭이 있었겠느냐는 의견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맴돌았음이 틀림없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선 토정이 남긴 예언서가 어디선가 발견돼야만 했다. 이것이 조선후기 ‘토정가장결’이 탄생한 문화적 배경이다. 분명한 사실은 ‘토정가장결’에 앞서 ‘정감록’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조선왕조가 망하고 진인 정씨가 새 나라를 세운다는 ‘정감록’의 예언을 참작해 ‘토정가장결’이 쓰였다.“내 비록 재주 없으되 우러러보고 굽어 살피며 수년 간 별의 숫자로 헤아려 보니 한양이 50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토정가장결’은 이런 식으로 조선왕조의 멸망을 점쳤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수년 간 별의 숫자로 헤아려” 본 결과, 조선왕조의 운수를 짐작하게 됐다고 했다. 천문에 중점을 두고 예언을 했다는 점이 ‘토정가장결’의 특징이다.‘감결’을 비롯해 다른 예언서들이 풍수지리에 의존해 국운을 점친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참고로, 천문 점의 전문가들은 서북지방에 많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의 천문지식은 중국 사람들도 감탄할 정도였다. ‘토정가장결’에 보이는 두 번째 특징은 압록강 이북의 요동이 중시된다는 점이다. 이 점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잠시 비결을 인용하겠다.“장류수(계사) 운은 푸른 옷과 흰 옷이 서쪽, 남쪽에서 침략한다. 이때 전읍(奠 , 즉 鄭姓 眞人)이 바다 섬의 군사를 이끌고 방성, 두성의 장수와 함께 갑오년 섣달 즉시 금강을 건너면 다시 천운이 커질 것이다.(중략) 곽 장군이 요동 군사를 이끌고 방씨, 두씨 장수와 함께 왜적 및 서남 오랑캐를 무찌르며, 청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돕는다. 정씨를 편들고 이씨를 공격하면 이씨는 제주로 들어갈 것이니 4,5년간의 운수에 지나지 않는다.” 요약하면, 계사년에 외침이 있는데 만일 그 때 요동의 곽 장군이 나서서 정씨를 도우면 동아시아의 정치질서가 재편된다고 했다. 곽 장군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확립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인데, 곽 장군은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 사람으로 상정되었다. 늦어도 19세기 후반엔 고구려의 옛 땅이던 만주가 가난에 쫓겨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간 상당수 민중들의 손길로 개발되고 있었다.‘토정가장결’에 등장하는 곽 장군은 아마도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인물로 해석된다. 달리 말해, 간도에 진출한 빈농들이 이상적인 지도자로 여겼을 법한 가상인물이다. 셋째,‘토정가장결’은 난세의 피란지로 전혀 새로운 장소를 거론했다.“만약 요동 간방으로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반드시 삼척부 대소궁기를 향하여 부지런히 힘을 기울여 곡식을 쌓을 일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정감록’은 주로 삼남 지방에 십승지 또는 길지를 설정해두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경상도의 풍기, 충청도 공주 및 전라도 운봉이었다.‘토정가장결’은 이를 정면에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요동과 삼척이란 뜻밖의 장소를 최고의 길지로 내세운다. 확실히 새로운 변화였다. 여기서 나는 ‘토정가장결’이 출현한 시기를 좀더 정확하게 짐작해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간도로의 ‘불법이민’이 본격화된 19세기 후반에 이 예언서가 창작된 것은 아닐까. 참고로, 삼척이 길지로 대두된 이유를 헤아려 보겠다. 토정에 관한 구전설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한때 토정은 삼척에 머문 적이 있었다는데 거기서 스님 행색으로 위장한 왜놈 첩자를 붙들었다. 이 일로 임진왜란 때 왜군은 토정이 살던 삼척에는 아예 얼씬도 못했다는 설화가 있다. 신기하게도 구전설화는 예언서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 모양이다. 물론 거꾸로 됐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토정은 정치적으로 무척 불우한 재사였다. 그래서 그는 기인이자 도사가 되기도 했고,‘토정비결’ 같은 책을 지어 고난 받는 민중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으려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토정은 민중의 스승으로 자리매김돼 ‘토정가장결’의 저자로도 둔갑됐다.‘토정가장결’은 ‘정감록’의 논리를 존중하면서도 19세기 후반의 변화된 사회현실을 그대로 투영한다.“알 자는 알리라.” (푸른역사연구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5) 한국 최고의 예언가 도선과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5) 한국 최고의 예언가 도선과 정감록

    ‘정감록’엔 ‘도선비결’(道詵 訣)이 포함돼 있다. 한국 풍수지리설의 원조로 평가받는 신라말의 선승(禪僧) 도선의 저작이란 이야기인데, 도선(827∼898)의 스승이라는 중국 당나라의 고승 일행(一行)이 한국의 미래를 예언하는 형식이다. “임진년에 섬 오랑캐가 나라를 좀 먹으면 송백(松栢)에 의지하라. 병자년에 북쪽 오랑캐가 나라 안에 들끓으면 산도 불리하고 물도 불리하다. 궁궁(弓弓)이 이롭도다.” ‘정감록’ 곳곳에 나오는 주장이 ‘도선비결’에도 그대로 나온다. 정씨가 세 이웃의 도움을 받아 세 아들과 함께 계룡산(鷄龍山)에 도읍한다는 내용도 ‘도선비결’에서 발견된다. 요컨대 고승 도선이 이미 9세기에 조선왕조의 멸망과 정씨의 계룡산 도읍을 예언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따르면 도선은 고려왕조의 등장을 정확히 예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감록에 실린 ‘도선비결’에는 고려에 관한 예언이 한 줄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조선왕조와 정씨왕조의 계승만 언급되어 있다. 과연 ‘도선비결’을 도선이 직접 저술한 것으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도선은 누구기에 사후 1000 년이 지난 다음에도 정감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예언서의 저자로 논의되는지가 문득 궁금해진다. 예언가 도선의 정체를 알아 보고, 그가 보급한 풍수지리설이 국운의 예언에 관여하게 된 역사적 과정을 조사해 보자. ●신라 말 풍수지리설은 예언의 중심으로 떠올라 도선은 출생부터 남달랐다고 한다. 조선 세종 때 채집된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도선은 하늘이 점지한 아이였다. 이야기는 영암에 사는 최씨의 밭에 열린 오이에서 시작된다. 문제의 오이는 길이가 한 자를 넘어 보는 사람마다 신기하게 여겼다는데 하루는 최씨의 딸이 그 오이를 몰래 따먹었다. 그러자 저절로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게 되었다. 최씨는 아비 없는 자식을 낳았다며 딸을 꾸짖고 아이를 대숲에 버려 두었다. 여러 날 뒤 딸이 대숲에 가서 살펴 보니 비둘기가 날개로 아이를 감싸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고 딸은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 아이는 장성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이름을 도선(道詵)이라 하였다고 한다(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 나주목 영암군). 아이를 비둘기가 날개로 감싸주었다는 대목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설화를 연상하게 한다. 물론 주몽과 다른 점도 있다. 이를 테면 주몽이 하늘의 손자라면 도선은 땅의 손자다. 오이는 땅의 기운이 열매 맺힌 것이라 땅의 아들로 봐야 하며, 그것도 매우 큰 오이라 하였으므로, 보통 아들은 아닌 것이다. 이를 테면 땅 임금의 손자나 다름없는 도선은 태어날 때부터 세상에서 제일가는 지관(地官)이 되게끔 예정되어 있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이 설화라는 것은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가 분명하다. 그러나 그만큼 도선이 지관으로서 명성이 유별났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역사상 도선이 예언가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그가 쉰 살쯤 되던 서기 876년께였다. 당시 신라는 내란기였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도선은 하늘의 명을 받아 송악군으로 갔는데 마침 왕건의 아버지 융건이 집을 짓고 있었다. 도선은 집을 다시 고쳐 지으라며 왕건의 출생을 예언했다. 그리고는 한 권의 책을 건네주면서 훗날 왕건이 장성하면 이 책을 꼭 전하라고 부탁하였다. 때가 되어 왕건은 그 책을 펼쳐보았고 자신이 천명을 받아 왕이 될 줄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은 고려 전기에 최유청이 쓴 도선의 비문에 자세히 나와 있다(先覺國師 證聖慧燈 塔碑). 정리하면, 도선은 왕건의 출생과 고려 건국을 정확히 예언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도선의 예언은 한국 고대의 예언과는 색다른 방식에 근거했다. 고대의 예언은 해, 달, 별 등 천체의 움직임이나 동물, 식물의 변화를 통해 앞일을 내다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도선은 그런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한 가지 새로운 요소를 부각시켰다. 바로 풍수지리설이었다. 왕건의 아버지에게 집을 고쳐 지으라 했을 때 그가 한 말이 흥미롭다.“이곳은 지맥이 임방(壬方)인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수모(水母)의 나무를 줄기로 삼다가 말머리 명당에서 그칩니다. 그러므로 그대 또한 물의 운명이군요. 마땅히 물의 대수(大數)에 따라서 집을 지어야 합니다.36구라야 천지의 대수에 부응하겠고, 그러면 내년에 반드시 성자(聖子)를 낳게 됩니다. 부디 아이의 이름을 왕건이라 하십시오.” 도선의 이 말은 ‘고려사’ 세계(世系)에 실려 있다. 단 몇 줄밖에 안 되는 간단한 내용이지만 거기서 우리는 도선의 사상적 근원을 뚜렷이 알 수 있다. 그는 풍수지리설에 음양오행설을 단단히 결합시켰던 것이다. 집터의 성격을 물(水)로 읽었고, 주인의 운명도 그와 똑같은 것으로 본 것이 그 증거다. 더욱이 주인이 살 건물까지도 물이 되어야 한다면서 36칸 집으로 고쳐짓기를 요구했다. 오행설에서는 물을 1 또는 6으로 본다. 그 가운데 1은 작은 물,6은 큰물이다. 따라서 큰물의 조합은 6에 6을 곱한 36이 되므로 ‘36구’설을 폈던 것이다. 도선은 그 명당 기운을 살리려면 집도 터의 성격에 맞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성자’ 즉, 미래의 임금을 아들로 얻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도선은 왕건 집안이 살던 송악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종(禪宗)의 일파인 지리산 동리산의 혜철(慧澈) 스님의 제자로 전남 광양의 옥룡사(玉龍寺)에 오랫동안 주석했다. 줄곧 거기 머물다가 후백제가 건국된 지 7년 만인 898년에 입적하였다. 궁예의 태봉이 건국되기 3년 전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세력 판도를 기준으로 보면 도선은 견훤의 세력권 내에 있었다. 그는 평생 견훤과 어떠한 마찰도 없었다. 그런 도선이 정말 왕건의 가문과 밀접한 관계였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도선은 왕건가문보다 견훤과 밀접한 관계 도선의 행적에 관한 ‘고려사’의 기록은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말이다. 또 다른 예로 ‘고려사’는 도선이 중국에 유학해 일행에게 풍수지리를 배웠다고 했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류다. 도선은 중국에 유학한 적이 없었다. 참고로, 도선의 스승 혜철과 제자 경보(慶甫,868∼948) 두 사람은 유학했다. 왕건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은 다름 아닌 경보였다. 그는 후백제가 망하기 직전에 고려태조와 접촉하였다. 그럼 그 때까지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도선이든 그 제자인 경보든 후백제를 위해 봉사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대 최고의 지관이었던 그들을 후백제의 왕 견훤이 가만히 내버려뒀을 리가 없다. 만일 경보가 오래 전부터 왕건을 추종했다면 후백제 영토 안에서 살아남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거나 분명한 사실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던 무렵부터 도선의 제자들이 고려왕조에 봉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도선과 고려 왕실의 관계는 차츰 윤색되기 시작했다. 도선 일파가 지관으로서 워낙 이름이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밖에도 통일신라 말기 또는 후삼국 시기에는 이름난 지관들이 상당수 있었다. 역사책에 이름이 기록된 신라의 감간(監干) 팔원(八元)은 좋은 예다. 팔원은 왕건의 조상 강충을 찾아가 “군(郡)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산에 소나무를 심어서 바위가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합할 이가 그대의 집안에서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려사, 세계). 이것은 풍수지리설에 근거해 새 왕조의 출현을 예측한 최초의 사례였다. 본래 민둥산이었던 부소산에 소나무를 심어 땅의 기운을 북돋웠다든가 그래서 지명이 송악이 되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이 이야기의 중요성은 도선에 앞서 유명한 지관들이 있었고 그들 역시 풍수지리설을 통해 복잡한 사회현실에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도선의 제자들, 고려의 예언계를 평정하다 도선이 죽은 지 150년가량 되던 11세기 중반, 그가 남겼다는 비기(記)가 느닷없이 등장했다.‘도선송악명당기’(道詵松嶽明堂記)라는 비결이었다. 비결 가운데 “서강(예성강) 가에 군자가 말을 몰고 있는 모양을 한 명당이 있다. 태조가 통일한 병신년(936)으로부터 120년이 되는 해에 이곳에 건물(이궁)을 창건하라. 그러면 왕업이 연장될 것이다.”(西江邊 有君子御馬明堂之地.自太祖統一丙申之歲 至百二十年 就此創構.國業延長)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근거해 조정에서는 부랴부랴 임시 궁궐을 짓는다(‘고려사절요’, 권 4). 어느덧 도선은 고려왕실의 지속적 번영을 위해 동원되는 인물이 되었다. 이것은 물론 도선의 후예를 자처하는 고려의 술관(術官)들이 나서서 하는 일이었다. 그 무렵의 가장 대표적인 술관은 김위제였다. 그만하더라도 도선과의 학맥을 무척 강조하는 편이었다.‘고려사’에는 “신라말에 도선이란 스님이 있었는데, 당 나라에 들어가서 일행(一行)에게 지리의 법을 배웠다. 돌아와서는 비기를 지었다. 그것이 김위제에게 전해져 김위제는 그 술법을 배웠다.”고 기록돼 있을 정도다. 김위제는 도선이 지었다는 ‘도선기’(道詵記)라는 예언서를 인용해 가며 당시의 남경(南京) 즉,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주장하였다. “고려에는 세 개의 서울이 있게 되리라. 송악은 중경, 목멱양은 남경, 평양은 서경이 되리라.11,12,1,2월은 중경에 머무르고 3,4,5,6월은 남경에 머무르며,7,8,9,10월은 서경에 머물러라. 그러면 36국이 고려의 천자에게 조공을 바칠 것이다.” 도선의 예언서에 나오는 구절이었다.“개국 후 160여년에는 木覓壤(한양)에 도읍할 것이다.”라고도 했다. 그러나 김위제는 한양으로 천도까지 할 필요는 없고 삼경을 돌아가며 머물면 나라의 운수가 장구할 거라고 주장했다.(‘고려사’ 권 122) ●한강 북쪽에 도읍 정하면 나라 부흥 그밖에도 김위제는 도선이 남긴 또 다른 예언서라면서 ‘도선답산가’(道詵沓山歌)를 인용하였다. 그에 따르면, 한강의 북쪽에 도읍을 정하면 “나라가 길이 영원하며 천하의 온 나라가 와서 조공을 바치게 되고 왕족이 창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한강을 건너 남쪽에 서울을 두게 되면 나라가 분열되어 나라가 한강을 경계로 이분된다고 말했다.(‘고려사’ 권 122) 또한 김위제는 도선이 지었다는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를 인용하면서 삼각산 아래 왕궁을 지으면 신하들 사이에 다툼이 없어지고, 왕실재정이 저절로 풍부해지며, 사방의 인재들이 조정에 가득 차게 된다고 했다. 한 마디로 국정의 운영이 순조롭게 되며 온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러 온다고 극찬했다. 요약하면, 한양 즉, 오늘날의 서울은 최고의 명당이라는 것이고, 오늘날 서울의 강북 지역이야말로 나라의 중심이어야 된다고 했다. 만일 강남 또는 한강 이남이 수도로 지정될 경우 나라가 망하고 만다는 식의 이야기다. 이를 현실에 적용한다면, 최근 진행 중인 신행정 수도 같은 것은 전혀 불필요하며, 부동산 개발로 문제가 돼 있는 강남이고 판교고 개발해선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서두에서 소개한 이른바 ‘도선비결’의 내용과 잠시 비교해 보자. 다시 말하면 ‘도선비결’은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내용이었다.‘도선답산가’,‘도선기’ 등과는 아무런 유사성도 찾을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예언서다. 좀더 꼼꼼히 살펴 보면 고려시대에 등장한 도선의 예언서들도 내용상 상호 모순 관계에 있다.‘도선송악명당기’는 고려의 수도는 어디까지나 개경이라는 입장을 밝힌 것인데 ‘도선기’는 3경설을 편다. 이에 비해 ‘도선답산가’와 ‘삼각산명당기’는 한양천도를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완전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예언서들이다. 이 모두를 고승 도선이 지었다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도선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지은 것으로 봐야 옳을 것이다. 김위제를 비롯한 고려의 술관들은 도선이 남긴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설의 전통 위에서 국가가 당면한 모든 문제들을 풀려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국가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들은 도선의 권위를 빌렸다. 도선의 예언이라고 내세우면 모든 것이 합리화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능력은 과대평가되었다. 도선은 기껏해야 고려왕조의 출현에 관심을 가졌을 텐데, 그의 제자인 후대의 술관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빙자해 국가의 모든 현안에 개입하였다. 고려 후기까지 줄곧 그런 전통이 이어졌다. 예컨대 원나라 생활에 익숙한 충열왕이 중국을 본떠 높은 건물을 지으려 하자 술관들은 그에 반대했다. 반대의 이유는 물론 도선의 예언이었다. 술관들은 ‘도선밀기’(道詵密記)를 들먹였다.“산이 드물면 높은 집을 지어라. 산이 많거든 낮은 집을 지어라. 산이 많으면 양이다. 산이 드물면 음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 만일 높은 집을 짓는다면 반드시 손해를 가져온다.” 만일 이말 대로라면 63빌딩 같은 것은 당장이라도 허물어야 할 판이다. 도선의 제자들은 고려 태조 때부터 높은 건물을 금지해온 것이 고려의 국법이며 이는 바로 자기네 스승의 가르침이었다고 말했다. 만일 “도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태조의 명령을 좇지 않는 것이 되고, 그 결과는 엄청난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다(고려사, 권 28) 과연 도선이 고층건물을 반대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술관들의 이런 견해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국가의 비용이 절약되는데다가 백성들의 노역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도선의 제자들은 대대로 고려의 술관으로 위세를 떨쳤기 때문에 도선의 명성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높아졌다. 따라서 이른바 도선의 예언서는 어느 것이나 일단 위작(僞作)이라고 봐야 한다. 사실 고려시대에는 예언서를 포함한 음양서(陰陽書) 일반이 조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주역은 전문가인 술관과 스님들이었고, 문장에 능한 문사들이 보조적인 역할을 떠맡았다. 그러나 고려시대만 해도 이런 책들을 생산, 소비하는 계층은 수도 개경의 특수층에 국한되었다.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도선의 명성 조선 건국 직후에도 도선의 예언서는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태종은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 때도 도선이 이용되었다. 당시 천도 문제를 실질적으로 담당한 이는 술관 이양달(李陽達)과 정승 하륜(河崙) 등이었다. 하륜은 ‘도선비기’를 존중해 “한수가 명당으로 들어온다는 말”(漢水入明堂之語)에 주목했다. 한편 이양달은 ‘도선비기’에 “서쪽에 공암 있고 붉은 색깔로 글씨 쓴 돌 벽이 있다.”는 구절에 암시를 받아 인왕산에서 붉은 글씨를 찾았고, 결국 경복궁터를 정하게 되었다.(‘필원잡기’, 권 2) 고려의 건국을 예언했다는 도선이 이제는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일어선 조선왕조의 안정과 발전을 보장해 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왕조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잡히자 도선의 예언서는 폐기처분되었다. 세조는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을 금지시켰던 것이다(실록, 세조 3년5월26일 무자). 이미 한 두 차례 강조했듯이 고대로부터 국가는 예언을 독점하고 통제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예언이 ‘불순분자’들의 수중에 들어가면 사회적 혼란이 초래된다는 판단에서였다. 더욱이 성리학을 국시(國是)로 삼은 조선왕조의 경우, 예언은 점차 악덕으로 간주되었다. 그 결과 15세기 후반 이래 국가의 공식 기록에서 도선에 관한 언급은 사라졌다. 그러나 일반 민중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에게 도선은 영원한 스승으로 남았다.‘정감록’에 ‘도선비결’이 실리고, 도선의 출생에 대한 신비한 설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그 증거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도선은 “신(神)이 통한 밝고 지혜로운 스님이었다.”(성종 16년1월8일 신묘). 도선은 새 세상이 동터 옴을 알릴 만한 참된 예언가였던 것인데, 이런 기대는 그가 이 땅에 풍수지리설을 최초로 집대성하였던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시대 도선의 제자들은 풍수지리설을 국가운명을 예언하는 도구로 정착시켰으며, 이것은 한국의 고유한 전통이 되었다.(푸른역사연구소장)
  • 추리소설의 계절… 출판사마다 신작 봇물

    성큼 다가온 무더위 탓일까. 서가에 속속 쌓이는 신간 중에서 유독 추리소설에 자꾸 눈길이 간다. 일년 내내 꾸준히 작품이 나오고는 있지만 추리소설은 역시 여름에 읽어야 제맛. 본격적인 대목을 앞두고 출판사마다 신작 출시에 한창이다. 올해는 특히 지난해 대박을 터트린 ‘다빈치 코드’를 능가할 만한 베스트셀러가 나올 것인지에 관심이 쏠린다. 딱 1년전 출간된 ‘다빈치 코드’(전 2권)는 지금까지 총 220만부가 팔려 나갔으며, 여전히 베스트셀러 순위 5위 안에 드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성(聖)수의(壽衣)결사단´ 17개국에 판권 팔려 ‘다빈치 코드’류의 역사추리물, 이른바 팩션은 이제 추리소설의 대세로 자리잡은 듯하다. 스페인 작가 훌리아 나바로의 ‘성(聖)수의(壽衣)결사단’(전 2권, 랜덤하우스중앙)과 김탁환의 ‘열녀문의 비밀’(전 2권, 황금가지)은 추리소설 특유의 스릴러적 재미와 인문학적인 성취를 동시에 즐기려는 독자들을 위한 역사추리소설이다. ‘성 수의 결사단’은 지금도 진위 논란이 진행중인 성 수의를 소재로 하고 있다. 예수의 시신을 감싼 것으로 알려진 성 수의는 1357년 프랑스에서 처음 존재가 알려졌고 이후 과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가짜 의혹이 제기돼 왔다. 어느날 성 수의가 보관된 이탈리아 토리노성당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잿더미 속에서 혀가 절단된 한 남자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중세 템플 기사단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성 수의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그에 얽힌 비밀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줄거리다. 소설은 지난해 4월 출간되자마자 스페인 현지에서 ‘다빈치 코드’를 제치고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전세계 17개국에 판권이 팔렸다. ●정조시대 실학자 활약그린 역사추리물 ‘열녀문의 비밀’은 소설가 김탁환이 ‘방각본 살인사건’에 이어 내놓은 정조시대 실학자들의 활약을 그린 역사추리소설 백탑파(白塔派)시리즈의 두번째 작품. 열녀 종사 폐단을 한탄한 박지원의 글 ‘열녀함양박씨전’에서 모티프를 얻어 집필한 것으로, 거짓 열녀 적발을 위해 시작된 수사를 통해 사회를 앞서간 한 여인의 비참한 죽음에 맞닥뜨리는 과정을 그렸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작중 김아영과 기생 계목향이 공동창작하는 가상소설 ‘별투색전’이 소설안에서 서로 꼬리를 물고 얽히는 독특한 구조로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역사추리물은 아니지만 ‘다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의 초기작 ‘디지틀 포트리스’(대교베텔스만)도 관심을 모은다. 국가 안보와 테러 방지를 위해 감청과 암호화된 메시지를 해석하는 NSA와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주장하는 프로그래머 사이의 치열한 두뇌싸움을 다룬 작품이다. 색다른 소재의 추리소설을 찾는다면 미술추리소설을 표방한 ‘라파엘로의 유혹’(서해문집)을 권할 만하다. ●미술사 미스터리 독특한 색깔로 그려 저자 이언 피어스는 미술사를 전공한 전문가로서의 장점을 십분 살려 ‘미술사 미스터리’라는 독특한 색깔의 추리소설 시리즈를 내고 있는 작가.‘라파엘로의 유혹’은 라파엘로의 새로운 걸작을 두고 젊은 미술사가와 위작화가, 야심찬 박물관장이 벌이는 치밀한 두뇌싸움을 다루고 있다. 출판사의 한 관계자는 “‘다빈치 코드’의 대성공 이후 유사한 책들이 나왔지만 잘 안 됐다.”면서 “역사추리물 시장 자체는 커진 만큼 ‘다빈치 코드’와 차별되는 매력을 지닌 작품이 나온다면 얼마든지 대박을 터트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7) ‘정감록(鄭鑑錄)’이 정감록인 까닭?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7) ‘정감록(鄭鑑錄)’이 정감록인 까닭?

    예언서는 예언가의 이름을 빌려 제목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단군조선 때의 ‘신지’, 후삼국의 ‘도선’, 조선의 ‘남사고’와 ‘이토정’은 유명한 예언가였다. 그들의 이름을 딴 ‘신지비사’‘도선비기’‘남사고비결’‘토정비결’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인용한 예언서였다. 대부분 내용은 위작으로 보이지만 신지비사는 이미 자취를 감췄고, 나머지 책들은 아직 남아 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정감록’은 어떠한가? ‘영조실록’에 보면 ‘정감의 참서’라고 돼 있어 예언가 정감이 쓴 책으로 보아야 옳다. 아닌 게 아니라 현전하는 정감록을 읽어 보아도 예언가 정감이 중요하다. 정감은 누구인가? 그는 실존 인물이었는가? 만약 가공 인물이라면 하필 왜 정감인가? 그리고 무슨 이유로 ‘정감비기’ 또는 ‘정감비결’이 아니라 ‘정감록’인가? 역사상 최초로 문제가 됐던 정감록은 어떻게 생긴 책이었을까? 나는 정감록이 정감록인 까닭을 좀더 정확히 알고 싶다. 이번 호에서 검토될 사항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다뤄진 적이 없는 새로운 내용이다. 지난 호와 마찬가지로 이번 호에서도 정감록의 기원을 밝히려는 나의 새로운 시도는 계속된다. ●실존 인물 정감이 정감록의 저자?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면 17세기 초반에 정감(鄭鑑)이란 관리가 있긴 했다. 그는 흔히 소과(小科)라 불리는 생원진사시험에 합격한 뒤 추천을 받아 관리가 됐다. 실록엔 형조 정랑(正郞)이란 중견관리로 나와 있다. 관리로서 제법 성공한 편이다. 그는 당시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난 행위를 많이 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광해 8년(1616) 5월 국왕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사헌부는 정감의 치부를 샅샅이 들춰냈다. 그는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도 말썽을 일으켜 처벌된 사실이 있다고 했다. 일가친척이 성관계를 가진 여성을 데려다 첩으로 삼았다고도 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의 독직(瀆職) 행위였다. 고위층의 청탁 유무와 뇌물의 많고 적음으로 판결을 내린다 했다. 사헌부의 주장대로 정감은 부도덕한 부패 관리의 전형이었을까? 강경한 사헌부의 처벌 요구와는 달리 국왕이 정감에게 내린 처벌은 그야말로 솜방망이 처분이었다. 광해군은 정감의 벼슬을 바꾸는 소극적인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불법 행위에 대한 사헌부의 고발이 한낱 풍문에 근거한 것이라 중벌이 가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정감을 애써 두둔할 생각이 내겐 없다. 내 관심은 17세기 전반 형조정랑을 지낸 정감이 1739년 서북지방에서 출현한 ‘정감의 참서’와 무슨 관계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아무 관계도 없었다. 형조정랑 정감은 생전에든 사후에든 단 한번도 예언서 ‘정감록’의 저자로 간주된 적이 없었다.1782년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사건 피의자 박서집의 진술이 참조된다. 그는 정감록의 유래에 대해 “그것이 처음 나온 것은 고려 왕조 때라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박서집의 이런 진술을 취조관들도 문제삼지 않았다. 요컨대 정감록의 저자 정감은 가공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씨가 조선왕조의 대안? 가공 인물 정감이 하필 정(鄭)씨인 이유는 무엇인가? 250개나 되는 한국의 많은 성씨들 가운데서 굳이 ‘정’을 가공의 예언자에게 준 까닭은 무엇일까? 역사적 사실에 눈을 돌려보자. 조선 왕조가 출범한 14세기 말부터 정감록이 출현한 18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정씨 성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반 왕조적인 인물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첫째, 정몽주(鄭夢周)를 빠뜨릴 수 없다. 그는 고려 말의 대표적 유신(儒臣)이었다. 충의(忠義)를 다하기 위해 그는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의 회유를 끝까지 물리쳤다. 결국 태종 이방원이 보낸 자객의 손에 의해 개성의 선죽교(善竹橋)에서 무참히 격살(擊殺)됐다. 흥미롭게도 ‘정감록’에 보면 정감이 정몽주를 후손이라 부르고 있다. 둘째, 정도전(鄭道傳)도 거론해야 옳다. 그는 조선 개국의 중심인물이었다. 조선의 수많은 제도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런 까닭에 현대 역사학자들 중에는 정도전을 ‘조선왕조의 설계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도전은 정말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들의 갈등에 관련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셋째, 정여립(鄭汝立)이 있다. 재능과 학식이 탁월했던 그는 선조 연간에 불붙기 시작한 당쟁에 휘말려 국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향리에서 세월을 보내던 정여립은 끝내 반역자로 낙인 찍혀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된다. 그는 도주하던 끝에 깊은 산골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람들은 그가 정감록을 지었다고 보기도 하고 그의 비참한 운명을 애달파하기도 했다. 이밖에 영조 때 역모를 일으켰다가 죽은 정희량(鄭希亮)이 주목된다.1728년 그는 이인좌 등과 함께 남부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처음엔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지만 그는 거창에서 관군에 붙잡혀 사형 당했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정희량이 아직 살아 있고 머지않아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 온다는 유언비어가 각지에 유행할 정도였다. 그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기인(奇人)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며 민중의 기림을 유독 많이 받았다. 알다시피 역사상 반왕조적인 인물로 지목된 사람은 결코 한둘이 아니었다. 이씨와 김씨를 비롯해 여러 성씨가 골고루 뒤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위에서 언급한 몇몇 정씨는 민중들의 기억에 깊이 각인된 존재였다. 정여립과 정희량의 일생은 특히나 비극적이었고 신비한 부분도 적지 않았다. 민중들은 그들에 관한 추억을 더듬으며 더욱더 정씨를 이씨 왕조의 대안으로 삼게 된 것도 같다. 물론 민중의 이러한 역사인식이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정성진인’에서 ‘정감’까지 16세기 말 정여립이 죽고 나서부터였다. 다음은 정씨 왕조가 들어설 차례란 생각이 민중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이런 생각이 차츰 영글어 17세기엔 이른바 ‘정성진인(鄭姓眞人)’이 민중들 사이에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다. 달리 말해 정씨 성을 가진 완벽한 인간이 출현해 민중을 도탄에서 구해낼 거란 믿음이었다. 그런 인식이 널리 퍼진 가운데 18세기 전반 정희량이 붙들려 죽었다. 그는 군사를 일으켰을 때 자신에게 유리한 ‘정성진인설’을 적극적으로 사방에 유포하지 않았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정희량은 현실에선 실패했다. 그럼에도 민중의 뇌리엔 ‘이씨 왕조를 대체할 이는 정씨뿐이다.’라는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18세기에 등장한 정감록은 민중의 그런 생각에 확신을 불어넣어준 것으로 봐야 한다. 정감록의 핵심 내용은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예언이었기 때문이다. ●감(鑑)이란 이름의 뜻은? 좀더 생각해 보면 정감록에 예언가의 이름을 ‘감(鑑)’이라 설정한 이유도 무척 궁금하다. 그것을 일부 이본엔 ‘감(堪)’이라고도 했다. 예언가의 이름에 무슨 뜻이 숨어 있는지 따져 보고 싶다. 가공 인물을 대단한 예언가로 부각시키려 했을 때 우선적으로 고려될 점은 이름에 담긴 상징성이었을 것이다. 고도의 상징성을 가진 이름이라야 예언서의 독자들 그리고 민중을 설득해 믿게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바로 이러한 숙고의 결과가 ‘감(鑑)’ 또는 ‘감(堪)’이란 글자의 선택이었다고 본다. ‘감(堪)’은 감여(堪輿) 즉 풍수지리를 뜻한다. 달리 표현하면 ‘감’은 천도(天道),‘여’는 지도(地道)라고도 한다. 감이란 글자를 이름으로 쓴다면 본인이 풍수가 또는 예언가임을 이미 천명한 셈이 된다. 현전하는 정감록은 풍수지리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감(堪)’은 책의 성격에 적합한 이름이다. 하지만 내가 본 정감록의 대부분은 ‘감(鑑)’을 주인공으로 정해 두고 있다.‘거울 감(鑑)’자엔 도대체 무슨 깊은 뜻이 담겨 있어 그런가? 고대로부터 한국에선 거울이란 사물은 매우 특별한 존재로 인식돼 왔다. 거울은 과거, 현재 및 미래를 비추는 마술적인 존재로 주목돼 왔다. 청동기 시대에 제작된 다뉴세문경은 당시 최고지배층이었던 제사장들이 소유했던 특수한 물건이었다. 주술을 비롯한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대에도 거울의 마술적 속성은 여전하다. 무당들은 누구나 명도(明圖)라는 거울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 명도를 이용해 집을 나간 사람을 찾거나 잃어버린 물건의 행방도 점친다. 무당들은 명도 거울이 신(神)의 영력(靈力)을 상징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바로 그 거울이 있어서 인간의 미래를 투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거울이 국가의 운명을 예언하는 데 동원된 적도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아직 궁예의 부하로 있던 시절, 낡은 청동 거울에 새겨진 예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즉위, 그리고 후삼국의 통일을 예언한 것이었다. 중국 고대에 ‘은감불원(殷鑑不遠)’이라는 말도 있었다. 은(殷)나라의 거울은 먼 데 있지 않다는 말이다. 부연하면 주(周)나라 왕은 바로 앞선 시기에 존재한 은나라의 역사를 돌이켜보란 뜻이다. 다른 사람의 실패를 거울로 삼으란 것이다. 이 경우 거울이란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정감록의 주인공 정감 역시 역사의 교훈을 알려준다. 하지만 좀더 중요한 강조점은 다른 데 있었다. 정감록은 거울이란 이름을 가진 정감을 저자로 내세워 거울이 가진 주술성을 빌리고자 했다. 한마디로 말해 거울의 신비한 힘에 의존한 정감록은 결코 한 자도 틀리지 않는 예언서란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록(錄)’은 조선후기에 등장한 예언서 따지고 보면 예언서 ‘정감록’의 제목이 ‘록(錄)’자로 끝나는 것도 범상한 일은 아니다. 이게 웬 말인가 되물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려고 역대 예언서의 이름을 모두 조사해 봤다. 놀랍게도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전기에 발견된 예언서 중에 ‘록’자로 제목이 끝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15세기까지 우리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 예언서들은 그 제목이 무슨 무슨 비기(秘記), 비사(秘詞)’ 또는 유훈(遺訓)이라 돼 있었다.‘기’와 ‘사’는 한문학의 장르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의 예언서는 은연중에 문학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짐작은 실제로 예언서를 검토해본 결과와 일치한다. 한시와 같은 분위기를 가진 운문(韻文) 형태의 예언서들이 많았다. 그에 비해 ‘훈’자를 예언서 제목으로 삼은 경우는 도덕적인 명령을 내세우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고려시대에 나온 ‘해동고현유훈(海東古賢遺訓)’이 대표적인 예다. 이 ‘유훈’도 문장의 표현 방식은 역시 운문이었다. 조선 후기에 출현한 ‘정감록’은 그 제목부터 새롭다.‘록’은 ‘실록’을 연상시킨다. 수사의 멋과 맛을 중시하는 과거의 예언서와 달리 앞으로 일어날 사실을 묵묵히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태도와 정신이 엿보인다. 예언서 정감록은 서술양식도 과거의 운문에서 벗어나 산문(散文)이 되었다. 한문학을 대표하는 시문(詩文)을 버리고 역사책의 전형인 편년체(編年體)를 택하거나 유교 경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화체를 선택했다. 정감록은 기왕의 예언서와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서술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18세기의 정감록은 한글본이었다! 정조 6년(1783) 1월에 발생한 정감록 사건의 연루자 안필복은 자기가 읽은 정감록에 대해 상세히 진술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그가 집에 소장했던 정감록은 책자의 길이가 52∼62㎝, 두께는 4㎝,200장 정도 분량이었다. 정감록은 형태와 크기에 있어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여느 한적(韓籍)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사실은 정감록이 백지에 한글(諺文)로 적혀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필사본이었다. 안필복의 진술이 있기 한 해 전에도 정감록 사건이 있었다. 그때 피의자 박서집은 정감록에 대해 “저는 어렸을 때 단지 한글로 된 ‘정감록’을 보았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박서집의 출생 연도를 감안하면, 그가 정감록을 읽은 시기는 1740∼50년대에 해당한다. 아마도 1739년 최초로 조정의 관심을 끌었던 정감록은 박서집이 읽은 한글본 정감록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런데 그 당시 유행한 ‘정감록’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정감록이 본래 한글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다. 20세기에 와서 정감록을 집대성한 여러 편찬자들뿐만 아니라 정감록을 연구한 학자들도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정감록이라 하면 한문으로 된 ‘감결(鑑訣)’을 원본으로 간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20세기 초 ‘비난정감록진본(非難鄭鑑錄眞本)’을 편찬한 현병주는 ‘감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본장의 기록문자가 즉 정감록의 원본이다. 본장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전 사회를 통하여 오백년간의 시선이 집주(集注)하던 정감록의 편명이 성립된 것이다.” 그 뒤의 다른 연구에서도 정감록이라면 으레 한문본을 염두에 두었을 뿐이다. 이 한문본은 18세기의 한글본 정감록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이것은 반드시 규명해야 할 장래의 과제다. ●새 예언서의 출현은 조선후기 사회문화의 변화를 반영해 정감록의 등장은 조선 후기 사회에 일어난 사회문화적 지각변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선 글을 읽고 쓰는 것이 더이상 극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은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시기엔 내면의 미묘한 감정이나 사물의 복잡다단한 성격을 상세히 서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서사적인 글쓰기가 유행하게 돼 정감록과 같은 편년체 또는 대화체 서술이 일반화된 것이다. 책이 흔해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종이 생산량도 늘어났고 소비도 활발해 정감록과 같은 필사본 예언서가 유행했다. 그런가 하면 상층 지식인들 사이에선 실사구시(實事求是) 즉 사실에 입각해 진리를 추구하는 지적 분위기가 유행했다. 정감록을 향유한 하층 지식인과 민중들도 사실성을 강조하는 시대적 담론에 그 나름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구태의연한 ‘정감비결’이나 ‘정감비기’가 아니라 하필 ‘정감록’이 된 데는 다 그만한 시대적 이유가 있었다. 정감록이 한글본이었다는 점도 중요한데 지식의 생산과 소비는 더이상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정감록과 더불어 새 시대의 동은 터 오고 있었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클릭이슈] 법정 간 이중섭 위작 논란

    [클릭이슈] 법정 간 이중섭 위작 논란

    이중섭 화백 유작의 진위여부를 놓고 유족과 한국미술감정협회간의 법정공방이 가열되고 있다. 이 화백의 아들 태성(56)씨가 25일 부친의 작품에 대해 가짜 의혹을 제기한 한국미술감정협회 관계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를 하자 한국미술감정협회측도 26일 태성씨와 이 화백의 작품을 경매한 서울옥션 등을 상대로 무고죄로 고발하겠다고 맞대응을 하고 나섰다. 감정협회 최명윤 감정위원은 이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누가 누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면서 “이중섭 화백을 제대로 지키겠다는 차원에서 태성씨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무고죄로 검찰 수사를 의뢰하겠다.”고 말했다. 최씨는 “이번 기회에 누가 이중섭화백을 폄하하고 있는지 밝혀질 것”이라고 밝혔다. ●엇갈리는 양측 입장 사건의 발단은 지난 3월 한국근현대미술품 경매를 앞두고 서울옥션측이 ‘물고기와 아이’의 감정을 의뢰하자 감정협회가 위작판정을 내리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서울옥션측은 경매를 단행했고 감정협회는 “서명이나 필선이 이중섭 화백의 것이 아니다.”고 거듭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자 유족들은 “50년 이상 소장해온 것”이라고 맞섰고 감정협회는 “가짜 작품을 가지고 박수근 화백의 가족들에게 접근, 전시회를 갖자고 제의한 조직들이 있다.”며 배후 세력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고서점에서 이중섭 화백 그림 뭉텅이로 사 이런 논란속에 ‘이중섭 50주기 기념 미발표작 전시준비위원회’를 이끄는 김용수씨가 자신이 소장중인 이중섭 그림 650여점 가운데 50여점을 25일 공개해 논쟁에 불을 붙였다. 한국고서연구회 명예회장인 김씨는 “유족을 통해 가짜 그림을 유통시켰다.”고 감정협회가 지목한 인물이다. 김씨는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이중섭의 수채화, 연필 드로잉, 은지화 등 50여점을 내놓고 나머지 작품은 은행금고에 보관중이라며 ‘진품’임을 강조했다. 김씨는 “70년대 초반 인사동의 한 고서점에서 고서 사는 기분으로 뭉텅이로 구입했다.”며 “당시 이중섭의 그림이 그렇게 비싸고 중요한 것인지 몰랐기에 그런 값에 그만한 양을 산 것”이라며 이중섭 그림의 소장 경위에 대해 설명했다. 김씨는 유족이 50년간 소장한 작품과 김씨 소장품이 흡사하다는 지적에 대해 “이중섭의 그림은 똑같은 것이 많아 내가 일본에 가서 유족에게 그림을 보였을 때 그들도 놀라는 눈치였다.”고 했다. 감정협회가 김씨의 소장품 대부분이 가짜고 현재 경매와 화랑가에 나도는 이중섭 그림의 출처가 김씨라는 의견에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이중섭·박수근 화백 전시회 제의받은 화랑도 있어 강남의 A화랑은 지난해 가을 대구에 산다는 한 남자로부터 “이중섭 화백과 박수근 화백을 포함해 대가들의 그림 1000여점을 갖고 있다.”면서 “전시회가 끝나면 이중섭 화백이나 박수근 화백의 그림 한 점을 주겠다.”는 솔깃한 전시회 제의를 받았다. 이 화랑 사장은 26일 기자와 만나 “전시회에 드는 비용이 2000여만원인데 전시회가 끝난 뒤 적어도 수억원 정도 하는 이중섭·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거져 주겠다고 해 의아하게 생각해 화랑협회로부터 감정서를 받고 전시를 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후 그 남자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미술시장 위축시킬까 걱정 미술계에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삼가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대부분은 “이중섭 화백의 작품 자체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몇십점, 몇백점의 작품들이 나타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일각에서는 “일부 화가는 똑같은 작품을 그리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예술성이 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며 진짜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미술계에서는 이번 유작의 진위 공방은 결과적으로 가뜩이나 위축된 미술시장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미술평론가 최병식 경희대 교수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누가 값비싼 작품을 거래하려고 하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번 기회에 제3의 감정반을 새로 구성, 이 화백 작품의 진위를 반드시 가려내자.”고 제안했다. 또 이번 사건이 검찰 소송으로까지 비화됐지만 양측의 주장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기에 ‘오리무중’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있다. 미술감정이라는 것이 ‘과학감정’보다 ‘안목감정’이 더 중요한 예술분야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데이터베이스화해야 할 때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미술 감정전문가는 40∼50명 정도. 이 가운데 권위 있는 감정가는 5명 안팎으로 손꼽을 만큼 적다. 그러다 보니 가짜 그림을 제도적으로 양산하는 시스템을 갖췄다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미술계는 열악한 환경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을 통해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재 화랑협회에서 지난 2002년 4000만∼5000만원의 예산을 투입, 작가 200여명의 작품 1만 5000여점을 데이터베이스(DB)화한 것이 고작이다. 그것도 지난 82년부터 2001년까지 주로 감정의뢰가 들어온 작품과 화가들을 중심으로 작업이 진행됐다. 최 교수는 “화랑협회의 자체 예산이 부족해 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DB화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그마저 다 완성하지 못한 상태”라며 “정부 지원과 국가차원의 통합관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술시장 활성화를 위해 작가들에 대한 지원도 중요하지만 감정, 평론등의 분야에 대한 지원도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씨줄날줄] 위작 논란/ 신연숙 수석논설위원

    경매에 나온 이중섭 작품의 위작시비가 일파만파다.‘물고기와 아이’를 가짜라고 판정한 한국미술품감정협회는 급기야 이화백의 차남이 대규모 위작(僞作)거래 조직으로부터 가짜 그림을 넘겨받아 경매에 내놓았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일본서 황급히 건너온 차남 측은 “아버지 그림은 비슷한 것들이 많다.”며 유품을 가지고 맞서 검찰 수사의뢰까지 운위되기에 이르렀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받았다는 그림까지 진품 의심을 받는 사실에 일견 당혹스러운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가족이 내놓은 작품이라고 다 안심할 수는 없다는 게 우리 미술계의 위작 유통 현실을 아는 사람들의 견해다. 특히나 이중섭 작품은 가짜가 가장 많다. 화랑협회 감정위원회가 1982년부터 10년동안 감정한 이중섭 작품 189점 중 75.7%인 143점이 가짜판정을 받았다.2위는 박수근이다.101점 중 36.6%인 37점이 가짜였다. 한국적 정서를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두 작가의 작품은 최근 부쩍 거래가 늘어 위작 유입설이 미술계 내부에도 돌고 있었던 터다. 작가가 살아있다면 속시원히 밝혀질 일이지만 작고작가는 말이 없다 보니 시비는 끊일 줄 모른다. 작가 다음으로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전문감정가가 있지만 이 역시도 커다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다. 대표적 사례로 천경자의 ‘미인도’사건을 들 수 있다. 국립박물관이 소장한 미인도는 작가가 ‘내 작품이 아닌 가짜’라고 주장했음에도 감정가들이 ‘진짜가 맞다.’고 판정해 파문을 일으켰다. 졸지에 작가는 ‘자기 자식도 몰라보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고 화단을 떠났으나 문제가 된 지 8년후 한 서화위조범이 ‘미인도도 내가 그렸다.’는 고백을 하고 나왔다.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진실여부는 가리지 못했지만, 감정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다. 3년여 전 서울에서는 이색전시회가 열렸다.‘명·청 근대기의 진작·위작 대비전-명작과 가짜 명작’전. 이미 800년대 미술사책에 언급될 정도로 발달한 중국의 서화감정의 세계를 흥미롭게 보여준 전시로 국내의 일천한 감정 역사를 되돌아보는 계기도 됐었다. 이번 파문이 검찰수사로 이어지든, 아니든 미술품 유통질서를 바로잡고 감정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신연숙 수석논설위원 yshin@seoul.co.kr
  • 이탁오 평전/옌리에산·주지엔구오 지음

    중국 역사, 특히 사상사에서 최대의 이단아로 꼽히는 이탁오(李卓吾·1527∼1602)가 그의 저서 ‘분서’(焚書)에서 내뱉은 이 절절한 한 마디 한 마디는 한 사상가의 참회록이자 이 시대의 학문하는 이들에게 가하는 뼈아픈 일침이다. 명나라 때 ‘유교전제’ ‘문화전제’에 맞서 정신의 자유를 부르짖다 76세의 나이에 이단의 낙인이 찍혀 감옥에서 스스로 머리를 찧고 죽은 그의 삶과 사상을 담은 ‘이탁오 평전’(옌리에산·주지엔구오 지음, 홍승직 옮김, 돌베개 펴냄)이 나왔다. ‘탁오’는 그의 호이고, 이름은 지(贄)다. 이지는 정신의 자유를 추구하다 희생됐다는 점에서,2년 앞서(1600) 로마의 캄포 데 피오리 광장의 화형대에서 ‘이단’의 죄명으로 희생된 지오다노 브루노와 맥을 같이한다. 저자는 그래서 이지를 중국의 ‘브루노’로, 브루노처럼 후세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고 있으며, 그 존경의 표현으로 책을 썼다고 후기에 밝히고 있다. 이지의 사상은 윤리와 ‘사회지향’의 유교국가에서 부처와 노자보다 훨씬 파괴력을 지닌 이단이었다. 송나라 이후 주희의 주석으로 고정된 유교경전은 국가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학문체계였다. 공자를 비판하거나 경전의 진리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지가 공자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대의 한 사상가이자 교육자요 학자로서 공자를 존경했다. 하지만 그를 신성불가침의 우상으로 떠받들면서 살아있는 천만 사람의 입을 틀어막는 주술로 삼고, 중생의 성령을 조여 죽이는 법보로 삼는다면 이는 가증스러운 짓이라고 비판했다. 이지로서는 차라리 머리가 깨져서 피를 흘리는 한이 있어도 이런 행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지가 공격한 공자는 춘추시기의 공자가 아니라 ‘백가를 배척하고 오로지 유가의 학술만 존중하는’ 후대의 공자였으며,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음에도 주희의 것만을 신봉하는 주희의 유교였다. 이지는 ‘분서’ ‘장서’(藏書) ‘설서’(說書) 등 수많은 저작들을 통해 자신의 이같은 사상을 설파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책들이 나오게 된다면 자신에게 미치게 될 화가 단지 지금까지의 비난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님을. 그러했기에 책 이름도 ‘불태워버려야 할 책’(분서), 감추어야 할 책(장서)이라고 붙였지만 정작 그의 책은 불태워지지도, 감춰질 수도 없었다. 이 책들을 꿰뚫는 맥락은 이지의 끊임없는 정신의 자유에 대한 추구다. 이는 자연스럽게 당시로선 신성불가침한 권위로 세상을 지배했던 공자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중니(仲尼·공자의 자)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지 않았다면 만고의 역사는 기나긴 밤과 같았을 것이다.’ 주희의 이 말에 대해 이지는 ‘유해칭찬’(贊劉諧)이란 글에서 “그러면 아마도 중니가 태어나기 전의 복희나 그 이전 성인들은 날이면 날마다 촛불을 밝혀 길을 다녔겠소이다.”라고 설파한다. 공자를 신격화하는 황담함과 가소로움을 조소한 이 글을 근거로 이지는 성인을 비난하고 법을 어겼다는 죄명을 쓰게 된다. 이지의 사상은 ‘동심설’(童心說)에서 한층 성숙해진다. 그는 인간이 사회화되기 이전의 동심을 ‘진성진정’(眞性眞情)이라고 했다. 그런데 도리와 견문, 그리고 사회로부터의 무언의 암시가 내심으로 들어오면서 동심이 오염되고, 결국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서란 본래 동심을 지켜서 잃지 않게 하려는 것인데, 오히려 대의를 훔치고 성현을 사칭하는 도구로 전락했음을 꼬집는다. 송대 이후 독서란 곧 주희를 통한 공자 읽기였으며, 이는 과거를 통해 입신양명하려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이지의 동심설은 이같은 전제적 유교, 그리고 이를 신봉하며 부와 명예를 낚는 관리와 학자들에 대한 뼈아픈 질타였던 것이다. 책은 관료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오직 자유정신을 추구하며 겪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여정을 물흐르듯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로부터 수백년이 흐른 지금,‘현대’라는 옷을 껴입기만 했을 뿐 또 다른 문화적 전제가 엄존한다는 점에서 결코 허투루 읽히지 않는 책이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이탁오는 이탁오는 26세 때 관리 등용문인 ‘거인’에 합격해 하남·남경·북경 등지에서 하급관료 생활을 하다가 54세 되던 해 운남의 요안 지부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40세 되던 해 왕양명의 학문을 접하고 심학(心學)에 몰두했으며,62세에 삭발하고 이단임을 자처하며 불교에 심취했다. 그는 유·불·도의 종지(終止)가 같다고 보았으며, 유가의 전제에 반대했다. 이탁오의 동심설은 독서와 견문으로 물들지 않은 아동의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며, 도가적인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마음이 존중되어야 하고, 인욕 또한 가식 없이 그대로 긍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통속문학의 가치를 긍정하여 ‘서상기’‘수호전’ 같은 백화문학도 경전, 역사와 나란히 고금을 통한 최고의 문학이라고 평가했다. 76세 되던 해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투옥되어 옥중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저서로는 ‘분서’ 6권,‘속분서’(續焚書) 5권, ‘장서’(藏書) 68권,‘속장서’ 27권’ ‘설서’(說書) 등이 있다. 그의 저작들은 명·청 시대의 가장 유명한 금서였지만, 대부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저작에 대한 위작시비도 여전하다.
  • 이중섭 가짜그림 논쟁 법정으로?

    이중섭 가짜그림 논쟁 법정으로?

    사단법인 한국미술품감정협회는 30일 최근 서울옥션을 통해 판매된 이중섭 화백의 작품 중 ‘물고기와 아이’에 대해 감정위원 전원일치로 위품 판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협회는 또 서울옥션이 참고자료로 제시한 ‘사슴’‘가지’와 아이들 3명이 한데 얽혀 있는 ‘아이들’에 대해서도 위작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화백의 유족들이 발족한 이중섭예술문화진흥회(회장 야마모토 마사코)는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아들 태성씨가 직접 서명 확인한 작품에 대해 위작이라 판정하는 것은 유족을 원천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좌시할 수 없다.”며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밝히는 등 양측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협회 감정위원들은 ‘물고기와 아이’에 대해 위작의 근거로 선의 표현에 속도감이 없고 생동감이 부족하고, 공통적인 주둥이 표현양식이 다르며, 채색화에 나타나는 지느러미·비늘 등 미세한 표현묘사가 없고, 이중섭의 특징인 빠르고 활달한 필선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협회측은 ‘사슴’등 나머지 세 작품의 경우 감정 의뢰가 들어온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위작이라는 판정을 내리지 않고 위작으로 간주한다는 의견을 낸 것이라고 말했다. 감정위원들은 이들 작품에 대해 이 화백이 일본에 건너가 아내의 집에서 제작했다고 주장하나 이를 뒷받침할 실증적 증거가 없다는 점과 이 화백 서명서체의 필순에 변화가 발견된다고 덧붙였다. 한편 미술계에서는 논란의 열쇠를 쥐고 있을 이 화백의 아내 이남덕(84·일본명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가 직접 나서 진위를 확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中 “분배 우선”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국 헌법상 최고의결기구인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제10기 3차 전체회의가 5일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에서 개막됐다. 후진타오(胡錦濤) 당총서기 겸 국가 주석과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상무위원장,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등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지도부 전원과 2944명의 전인대 대표가 참석했다. 오는 14일까지 열흘간 열리는 이번 회의에서 원 총리는 올해 8%의 경제성장 목표를 제시하고 올해 3대 정책목표로 ▲거시경제 조정 강화 ▲개혁ㆍ개방의 지속 추진 ▲조화로운 사회 건설을 제시했다. 원 총리는 대외정책과 관련, 자주적인 평화외교 정책을 견지하며 영원히 패권을 추구하지 않고 세계평화를 수호하겠다고 강조했다. 또한 일국양제(一國兩制)와 평화통일의 기본 방침 아래 독립을 기도하는 분열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올 성장 목표 8% 제시 올해 중국의 국정운영방향이 총괄된 정부공작보고에는 고도 경제성장 지속과 부문간 균형 발전을 병행하겠다는 새 지도부의 강력한 의지가 함축됐다. 지난 20여년간 성장 위주의 ‘선부론(先富論)’이 도·농간, 지역간, 계층간 빈부격차를 확대시켜 분열 조짐이 곳곳에서 분출되면서 4세대 지도부가 새롭게 제시한 국가발전 전략이다. 이를 위해 긴축을 위주로 한 거시(宏觀)조정 정책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지난해 9.5%에 달했던 경제성장률을 8%로 낮춰 잡았다. 수출 증가율도 지난해에 34.5%에 달했던 것을 올해 15%로 하향 조정했다. 도시의 900만명 신고용 창출, 도시실업률 4.6% 통제, 소비자가격 상승 4% 억제 등의 목표도 모두 안정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재정 수입은 지난해보다 10.5% 늘어난 1조 6662억위안(약 216조원), 재정 지출은 7.6% 증액한 1조 9662억위안이다. 예산적자는 지난해보다 198억위안 감소한 3000억위안 규모이다. ●분배 정의 중시하는 조화사회 건설 원 총리는 새로운 국정이념으로 ‘사회주의 조화주의(社會主義 和諧社會)’를 제시했다. 농민과 도시 하층민 등 소외계층에 대한 분배 정의를 강조하고 분열과 격차해소를 위한 해법이다. 사회 안정의 저해요소인 지역간 발전 격차, 실업문제, 관료주의, 부정부패, 농업세 폐지와 농촌경제의 구조조정 등이 주요 정책이다. 중국은 2020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을 2000년보다 4배 많은 4조달러,1인당 GNP는 3배 많은 3000달러로 각각 늘려 초기 복지국가수준인 샤오캉(小康)사회를 건설한다는 복안이다. ●두 자릿수 국방예산 증액 중국은 올해 국방예산 지출을 지난해보다 12.% 늘리기로 했다. 인민무장 경찰부대를 강화, 돌발사건 대처능력을 높이는 대신 병력 20만명을 감원할 방침이다. 원 총리는 정부공작보고에서 “국방과 군대 건설을 강화하는 것은 중국 현대화 건설을 위한 전략적 과업”이라고 전제하고 중국 특색의 군사변혁을 적극 추진하고 군대의 총체적 방위작전 능력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주요 국방예산 지출항목은 ▲과학기술적 군사훈련을 통한 군사인재 육성 ▲국방과학 연구 및 무기ㆍ장비 현대화 ▲국방과학기술공업의 개혁과 발전 ▲군대의 정규화 수준 향상 ▲국방동원체제 정비 등이다. oilman@seoul.co.kr
  • 天上 그곳, 앙코르와트에 가 볼까

    天上 그곳, 앙코르와트에 가 볼까

    앙코르는 ‘느낌’이다. 형언할 수 없는 뭔가 특별한 느낌이 배어 있다. 보는 순간마다, 보는 장소마다, 보는 기분에 따라 각각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유적지의 웅대함에 놀라고, 고색창연한 건축물의 신비로움과 인류의 위대함에 매료된다. 캄보디아인의 인자한 미소가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 그러나 어딘지 모를 슬픔이 느껴진다.13세기 인도차이나 반도를 지배하던 앙코르 왕조의 몰락과 폐허로 변해버린 유적지는 삶의 허망함을 느끼게 만든다. 또 유적지 곳곳에서 구걸하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앙코르 유적은 아는 만큼 보인다. 사전 지식없이 무작정 찾았다가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 ‘돌무더기’의 지루함만을 느낄 수도 있다. 신들이 사는 세계를 이땅에 재현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지. 왕조가 멸망된 뒤 수세기동안 역사의 어둠속에 묻혀있다가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앙코르의 느낌속으로 들어가 보자. # 설렘 앙코르 유적과의 만남은 설렘으로 시작됐다. 캄보디아 시엠레압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신들의 땅을 직접 본다는 기대감으로 부풀어 오른 가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늦은 밤에 도착한 탓에 유적지 인근 호텔에서 들어가 잠을 청했지만 뒤척임 속에 새벽을 맞아야 했다. 호텔을 출발해 처음 찾은 곳은 ‘거대한 도시’라는 뜻의 앙코르톰. 시엠레압 주변 1000여개 유적지 가운데 앙코르와트와 함께 최고로 손꼽히는 걸작이다. 유적지 매표소에서 3일 동안 자유롭게 유적지를 볼 수 있는 앙코르 패스(40달러)를 끊은 뒤 앙코르톰의 관문인 남문에 도착하자 장엄한 건축물이 눈앞에 펼쳐졌다. 불교도로는 처음 왕위에 오른 자이야바르만 7세(1181∼1201)때 지은 정사각형 도성이다. 입구에는 벌써부터 관광객들이 몰려 사진을 찍느라 복잡했다. 각 변이 3㎞로 돌벽과 해자(성곽 주변의 못)를 가로지르는 다리는 힌두교의 창조신화인 유해교반(乳海攪拌)이 형상화돼 있다. 다리 난간에는 일곱개의 머리를 가진 뱀의 몸통을 부여잡고 있는 54개의 반인반수의 나가(크메르인이 믿었던 뱀 신)상과 입구인 남문에 새겨진 관음보살의 얼굴, 코끼리 조각과 비슈누 등 화려한 장식물이 먼저 발길을 사로잡았다. #웅대함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가르는 다리를 건너 남문을 통과하자 본격적인 신들의 안식처가 눈앞에 펼쳐졌다. 앙코르 톰의 중심에 있는 바이욘 사원은 ‘크메르의 미소’라고 불리는 관음보살의 얼굴이 새겨진 사면 돌탑이 있는 곳. 보는 각도와 시간에 따라 표정이 변한다. 수백m에 이르는 회랑 벽화에는 다른 앙코르 유적과 달리 당시의 생활상과 위대한 왕의 전투장면이 관광객을 맞는다. 벽화에는 창을 들고 전쟁에 나서는 크메르인과 밥을 짓느라 분주한 여성의 모습, 투견과 투계에 빠져있는 남자들의 모습 등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복원 공사를 잘못해 무너져 내린 수많은 석축물들은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했다. 바이욘 사원 북쪽에 있는 바푸온 사원은 복원공사가 한창이다.13세기 이 곳을 방문한 원나라 사신이 쓴 ‘진랍풍토기’에 ‘아침에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 도성을 비추던 곳’으로 묘사된 힌두 사원이다. 바로 위에는 3층 피라미드 형식으로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피미야나카스(천상의 궁전) 사원이 버티고 서있고, 오른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열병식을 거행했던 광장과 코끼리 테라스, 라이왕 테라스를 볼수있다. 앙코르 톰 동쪽에 있는 타프롬 사원(왕의 수도원)은 복원이 어려워 발견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1861년 프랑스 탐험가 앙리 무어에 의해 발견될 당시 ‘앙코르 유적은 거대한 나무뿌리로 뒤덮여 있었다.’는 말 그대로 스퐁(열대 무화과 일종)이라 불리는 나무가 사원 곳곳을 뒤덮고 있다. 나무 뿌리가 돌틈 사이를 파고 들어가 사원이 무너져 내렸다. 현재로서는 나무를 베어낼 수도 벽돌을 다시 세우기도 어려워 유네스코에서도 복원보다는 현상을 유지키로 했다는 후문이다. 이 곳은 영화 ‘툼레이더’의 매력적인 여주인공 ‘라라 크로프트’(안젤리나 졸리)가 사원에서 나오는 장면을 촬영한 장소로 알려져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명소다. # 경외로움 그동안의 앙코르 유적은 서막에 불과했다. 다음날 새벽 5시. 짙은 어둠을 가로질러 앙코르와트로 향했다. 숨죽일 만큼 아름답다는 앙코르와트의 일출을 보기 위해서다. 해자를 지나 본당으로 들어가는 폭 12m, 길이 540m의 참배도로 주변에는 일찌감치 관광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길은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가르는 갈림길. 죽음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잠시 뒤 수미산(세계 중심에 있는 산)을 상징하는 중앙탑 등 5개의 탑 뒤로 장엄한 일출이 시작되자 곳곳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사원이 시시각각으로 붉게 물드는 장면은 마치 신들이 자신의 세계를 인간들에게 조금씩 내어주는 듯했다.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건축과 예술이 집대성돼 있으며 앙코르의 유적 중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장엄한 규모와 균형, 조화 그리고 섬세함에 있어 최고로 꼽힌다. 이 사원은 동쪽을 향하고 있는 다른 사원과 달리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왕의 사후세계를 위한 고려인 듯하다. 수리야바르만 2세(1112∼1152)때 3만명의 숙련된 장인들이 30여년에 걸쳐 완성했다.7t짜리 돌기둥 1800개, 높이가 67m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다. 3개의 회랑 벽면과 기둥에 새겨진 정교한 벽화는 힌두교 2대 경전인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의 이야기. 라마야나 이야기는 비슈누(힌두교 3대 신 중 우주를 관장하는 신)의 화신인 라마 왕자가 팔이 스무개인 악마 라바나에게 강탈당한 아내 시타 왕비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내용으로 캄보디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대표적인 신화다. 3층으로 된 앙코르와트의 중앙탑에 오르는 길은 70도 경사도. 손과 발을 이용해 기다시피 해야 올라설 수 있다. 신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어찌 인간이 두발로 걸어 갈 수 있겠는가. # 아쉬움 앙코르 유적지에서 북쪽으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쿨렌산은 앙코르의 발원지. 앙코르의 건립자 자야바르만 2세(802∼850)가 최초로 도읍을 정했던 곳. 돌무더기 유적에 질린 관광객들이라면 꼭 한번 다녀와 볼 만한 코스다. 정상에서 약 10m크기의 와불상과 함께 멋진 풍광을 볼 수 있다. 또 툼레이더가 촬영된 멋진 폭포도 구경할 수 있다. 돌아오는 길에 반테아이스레이 사원도 볼 만하다. 이 사원은 왕들이 세운 다른 사원과 달리 고위 관료가 지은 사원. 붉은 색 사암으로 지어진 핑크빛의 사원은 규모가 작지만 다른 사원과 비교해 어느 한군데 빠지지 않는 화려한 조각품들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 곳은 프랑스 문화장관을 지낸 전위작가 앙드레 말로가 1923년 사원내에 있는 데비상을 밀반출하려다 체포돼 실형을 받은 일화도 있다. 앙코르 관광의 마무리는 프놈바켕의 일몰. 앙코르와트와 바이욘의 중간지점에 있는 높이 60m의 작은 언덕으로 오르는 길이 힘들고 가파르지만 수평선 너머로 지는 석양을 바라볼 수 있다. 길고도 짧은 앙코르 관광이 끝났지만 신들이 새겨놓은 장엄한 잔상들은 쉽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원들을 돌아보느라 밀려드는 피곤함보다는 다시 보고 싶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특히 9∼15세기에 걸쳐 인도차이나 반도 중앙에서 번성하던 앙코르 왕조와 내전으로 피폐해진 현재의 캄보디아 모습이 복잡하게 교차한다. 사원 곳곳에서 구걸하거나 물건을 파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은 여행 내내 마음을 무겁고 아프게 했다. 과연 역사란, 삶이란 무엇일까. 알고가면 편해요 앙코르와트 여행은 겨울철이 가장 좋다.11∼2월이 건기로 이 기간이 가장 시원해서 유적을 둘러보기 적합하다. 고온 다습한 열대몬순 기후지만 하루에 몇번 스콜이 지나가는 정도일 뿐 금방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반면 3∼4월은 최고기온이 40도까지 올라가는 혹서기이며,5∼10월은 고온다습한 우기다.시차는 2시간으로 한국이 오전 10시면 캄보디아에서는 오전 8시다. 화폐는 리엘(Riel)이지만 시엠레압 등 대도시에서는 달러가 유통돼 환전할 필요는 없다. 소규모 상점에서는 거스름돈이 부족하므로 1달러짜리 소액권을 많이 준비해야 한다.1달러는 약 4000리엘 정도. 입국에는 비자가 필요하다. 여행을 떠나기전 캄보디아 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거나 현지 도착후 공항에서 비자를 받을 수 있다. 여권과 여권용 사진 1장, 비용 20달러가 필요하다. 종교는 상좌부불교(소승 불교)이며, 인종은 크메르족이 80%를 차지한다. 유의 사항으로는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위생사정이 좋지 않다. 반드시 생수를 사먹는 편이 좋다. 관광지에서는 돌 하나도 가져가면 밀반출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으며, 하루종일 햇볕이 강하게 내려쬐므로 모자는 필수다. 전화가 거의 없으며, 호텔에서도 1분당 6달러 정도로 비싸다.전압은 220V로 우리나라 제품을 사용할 수 있다. 유적지에 들어 가려면 앙코르 패스를 구입해야 한다.1일권 20달러,3일권 40달러,7일권 60달러이며,1일권 외에는 사진을 찍어 함께 코팅해 준다. ‘쏙 싸바이’(안녕하세요),‘쭙닙수’(반갑습니다),‘옥꾸운’(감사합니다) 등 기본적인 캄보디아어를 외워두면 편하다. 가는 길은 시엠레압까지는 직항편이 없어 태국 방콕이나 베트남 하노이 등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한다. 인천에서 방콕까지는 4시간 20분, 방콕에서 시엠레압까지는 1시간이 걸린다. 이르면 3월부터 아시아나항공에서 주 2회 직항편을 준비하고 있다. 숙박은 공항과 앙코르 유적지에서 각각 10여분 거리에 위치한 ‘르 메르디앙호텔’이 있다. 지난해 9월 개관한 리조트형 5성급 호텔로 223개의 객실을 보유하고 있다.www.lemeridien.com, (02)794-4011. 여행 상품으로는 가야여행사(www.kayatour.co.kr·(02)536-4200)에서 앙코르 문화유적지를 충분히 둘러보는 3∼5일 여행상품을 준비하고 있다. 공항서 급행료 주지마세요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지는 연간 10만여명의 우리나라 관광객이 찾는 곳. 그러나 이에 걸맞지 않은 부끄러운 모습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시엠레압 공항에서 한국 단체관광객들은 다른 외국인들과 달리 입국심사를 제대로 받지 않고 통과하는 특권을 누린다. 공항 직원에게 일종의 ‘급행료’(?)를 지불했기 때문. 실제로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우리 일행에게 공항직원이 “10달러를 주면 빨리 통과시켜 주겠다.”는 요구를 했다. 거부하자 한명에 5∼10분가량의 까다로운 입국심사를 거쳐야 했다. 급행료를 만든 것은 한국인. 좁은 공항에서 다소 오래 걸리는 입국 시간을 줄이기 위해 뇌물을 건넨 것이 관행화됐다는 게 현지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설명이다. 유적지를 훼손하는 사례도 종종 발생한다. 이 때문에 현지 한국인 관광안내원이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은 유물을 훼손하지 말라는 말이다. 얼마전 한국인 관광객이 유적지내 돌탑을 흔들며 심한 장난을 치다 부숴뜨려 벌금 800만원과 함께 한달간 실형을 산 뒤 영구 추방조치되기도 했다. 캄보디아인들은 평소에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지만 앙코르 유적지를 모독하거나 훼손, 파손할 경우 엄하게 처벌한다. 또 현지인들이 우리보다 못 산다고 무시하거나 종교적으로 모독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신들의 세계를 관광하기에 앞서 좀더 차분하고 경건한 마음 자세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시엠레압 글 사진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광개토왕비 最古 탁본 공개

    1883∼1884년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광개토대왕비의 최고(最古) 탁본이 나왔다. 지난 21∼22일 중국 베이징에서 우리의 고구려연구재단과 중국 사회과학원이 공동주최한 ‘고구려 문화의 역사적 가치’ 학술회의에서 쉬젠신(徐建新) 사회과학원 세계역사연구소 연구원이 소개한 것으로 고구려연구재단측이 28일 공개했다. 이 탁본은 광개토대왕비 조작이 일어났던 것으로 알려진 1890년대 이전에 이뤄진 것이어서 위작논란을 해소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국감 하이라이트] IT산업 3대 문제점 추궁

    한국은 초고속 인터넷 세계 1위의 정보기술(IT) 강국이다. 디지털 콘텐츠산업이 매년 30% 증가하는 등 IT시장의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외형에 견줘 내용은 부실하다는 지적이 많다.14일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과 게임산업개발원을 상대로 열린 국회 문화관광위와 한국정보보호진흥원을 상대로 열린 과학기술정보통신위에서는 IT 산업의 문제점을 놓고 여야 의원들의 집중 추궁이 이어졌다. ●나는 해킹·바이러스, 기는 정보보호 대책 지난 1998년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해킹사고는 매년 2.8배씩 급증하고 있고 휴대전화에도 바이러스가 침입할 우려가 높은데 대책은 지지부진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나라당 심재엽 의원에 따르면 국내 해킹사고는 98년 15건에서 99년 572건,2000년 1943건,2001년 5333건,2002년 1만 5192건, 지난해 2만 6179건으로 급속도로 늘어났다. 심 의원은 “정부의 소극적 보호대책으로 해킹이 증가한다.”면서 “내년 정보화 예산으로 편성한 1조 8859억원 가운데 정보화 역기능 방지산업 , 즉 정보보호 대책에 397억원을 투입키로 해 지난해보다 17억원이 줄었다.”고 꼬집었다. 열린우리당 홍창선 의원은 정보보호진흥원과 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협조하지 않는 것도 컴퓨터 범죄 급증의 이유라고 지적했다.2000년부터 지난 8월까지 정보보호진흥원이 경찰청에 수사를 의뢰한 건수는 111건에 불과하고 같은 기간 경찰청이 정보보호진흥원에 협조를 요청한 사례는 고작 7건이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김희정 의원은 “운영체계를 내장한 이동통신 단말기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내년 4월 휴대전화 플랫폼이 통일되면 국내 휴대전화에도 외국처럼 바이러스가 자유롭게 이동하고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외국 사례를 참고삼아 정부도 바이러스를 재해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대책을 세우고 이동통신업체도 백신 개발에 투자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국내 이동통신사 가운데 SKT만이 ‘안철수연구소’와 협력, 휴대전화 단말기에 백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문화콘텐츠 생산자 보호 방기 문화콘텐츠의 중요성이 증대하고 있는 가운데 지적재산권 보호와 불법 복제 차단 대책에 대한 질의도 많이 나왔다. 한나라당 박형준 의원은 “지난해 문화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한 ‘2003 만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대상’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은 애니메이션 ‘올림푸스 가디언’이 홍은영 원작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방한 작품”이라며 “문화콘텐츠진흥원이 콘텐츠 생산자인 창작자를 보호해야 할 책임을 방기했다.”고 지적했다. 심사 과정에서 2,3차 저작권에 대한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아 위작 시비에 휘말림으로써 중국·태국 등지서 쇄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 2,3차 작품 수출에 지장을 빚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병문 원장은 “위작 여부가 가려지면 입상 취소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답변했다. 지적 재산권 문제는 디지털 콘텐츠에도 이어졌다. 한나라당 진영 의원은 “지난해 매출액 5조 4000억여원 등 디지털콘텐츠산업 시장 규모의 확대에 따라 복제도 매년 증가하고 있는데 정작 정통부와 산하기관에서는 불법복제 현황을 파악할 자료조차 없다.”고 따졌다. ●두 부처에서 한 업무를? 한나라당 박형준 의원은 “문화관광부 산하의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과 정보통신부 산하의 디지털콘텐츠사업단의 업무가 중복돼 예산 낭비는 물론 관련 업계의 부담과 혼란을 가중시킨다.”고 따졌다. 박 의원은 대표적 사례로 “문화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 4억원의 예산으로 모바일콘텐츠 테스트베드’를 운영하고 있는데 소프트웨어진흥원도 15억원의 예산으로 지난 3월 모바일테스트베드를 오픈했다.”고 지적했다. 같은 당 최구식 의원도 문화콘텐츠진흥원과 게임산업진흥원, 방송영상산업진흥원의 업무를 거론하면서 “게임도 콘텐츠에 포함되는데 업무가 비슷비슷한 것 아닌가.”라고 질의한 뒤 “신기술·첨단산업이 중요하다 하면 무조건 기구를 만들고 관할 다툼을 하다가 얼마 안가 흐지부지해지는데 과감하게 통합하는 것이 좋지 않나.”라고 물었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자이툰 물자수송 ‘광개토함’이 호위

    이라크 무장단체가 미국의 군수물자를 나르는 주요 국가 선박에 테러를 가하겠다고 위협하고 나섬에 따라 이라크 파병 자이툰부대의 물자 수송작전에도 초비상이 걸렸다. 군 관계자는 “장비와 군수 물자에 대한 해상 수송이 시작되기 직전 선박 테러경고가 나옴에 따라,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수송작전계획을 면밀하게 재점검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초 군 당국은 물자 수송의 경우 부산∼쿠웨이트간 해상로(1만 1300여㎞)보다는 쿠웨이트∼아르빌간 육로(1150㎞)에 훨씬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전망했었다.우리 병력이 물자와 장비 등을 차량에 싣고 이동해야 할 이라크내 주요 도로 주변에서 저항세력의 공격이 계속되는 등 치안이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육상이 아닌 해상 수송로에서도 만만치 않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총 5000여t에 이르는 군수 물자는 지난 9일 2만 5000t급 민간 수송선 2척에 선적을 시작했으며,25∼30일간의 항해 끝에 8월 중 쿠웨이트에 도착할 예정이다.하지만 테러공격에 대비해 출항 날짜는 철저하게 보안에 부치고 있다. 군 당국은 테러범들이 해상에서 수송선을 공격할 가능성에 대비,3200t급 구축함인 광개토대왕함에 호위작전을 맡길 방침이다. 구축함은 ‘하푼’ 함대함미사일과 ‘시 스패로’ 함대공미사일,슈퍼링스 헬기 등을 탑재하고 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수중폭파와 대(對) 테러작전 임무수행이 가능한 해군의 최정예 특수전 여단(UDT/SEAL)소속 요원들이 탑승하게 된다. 테러 공격 징후가 포착되면 이들은 헬기에서 밧줄을 이용해 수송선 갑판에 내려 해당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군은 또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필리핀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테러범들이 알 카에다와 직·간접으로 연계돼 있는 만큼 말라카 해협 등지에서 테러위협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수송선에도 특수전 요원들을 승선시키는 방안을 고려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주한·해외무관 등을 통해 수송선이 지나는 인근 국가의 해군 및 해상 치안기관과 24시간 연락·협력이 가능한 비상망을 구축하는 방안도 마련 중이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골동품을 알면 역사와 돈이 보인다/이상문 지음

    서민들이 막 사용했다고 해서 막사발이라 불린 조선 초 백자그릇이 일본의 국보가 된 것은 더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진주 지리산 자락의 한 가마에서 만들어진 막사발이 일본에서 ‘이도차완’이란 이름의 국보로 지정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진주 지역에서 출토된 막사발은 다른 곳의 그것들과는 조금 다르다.우선 크기가 약간 작아 말찻잔으로 쓰기에 알맞고 구연부도 밖으로 눕지 않아 차를 마실 때 옆으로 새지 않는다.뿐만 아니라 사용하면 할수록 찻물의 색이 잔의 몸체에 배어 마치 그림을 그려넣은 듯 아름다운 경치를 연출한다.그러나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막사발이 일본의 국보가 된 것은 아니다.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가져간 이 막사발은 수백년 동안 쓰이면서 상세한 족보를 남기고 있다.찻잔에 얽힌 내력을 비롯해 찻잔으로 누구와 무슨 차를 마시며 무슨 이야기를 했다는 것까지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이런 역사가 이 찻잔을 국보로 지정하게 만든 진짜 이유인지 모른다. ‘골동품을 알면 역사와 돈이 보인다’(이상문 지음,선 펴냄)는 이같은 골동품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지,우리 문화재를 정말로 아끼고 사랑하는 길은 어떤 것인지 일러준다.고미술품은 오래 돼야만 값이 나가고 명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천년이 됐어도 가치가 없는 물건이 있는가 하면,시대상을 생생히 전해주는 명품은 몇십년만 지나도 문화재로 인정받기도 한다.고미술의 값을 매기는 데는 무엇보다 그 작품에 녹아 있는 정신과 역사,즉 무형의 가치가 중요하다.당대의 명필 이완용의 글씨는 친일 행적으로 인해 그 가치가 20만원대에 불과하지만,손바닥 낙관이 찍힌 안중근 의사의 ‘담박명지영정치원(澹泊明志寧靜致遠)’ 같은 글씨는 2억원이 훨씬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해야 뜻을 밝게 가질 수 있고,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야 원대한 포부를 이룰 수 있다는 고귀한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골동품의 진위는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까.고미술 감정전문가인 저자는 “화가의 붓놀림은 백번을 고쳐 그어도 변함이 없는 법”이라고 말한다.작가마다의 독특한 그림 버릇이 진위 판단의 근거가 된다는 얘기다.예컨대 단원의 인물화는 얼굴 표정이 분명하다.어느 곳을 주시하는지 눈동자의 방향이 확실히 찍혀 있다.손의 모양은 정교하지 않게 시늉만 그리고 옷자락은 인물의 지위에 걸맞게 섬세하게 표현한다.그림이나 글씨에 찍는 유명작가의 낙관은 대부분 돌낙관으로,나무도장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기억할 만하다.나무도장이 찍혀 있으면 십중팔구 위작이다. 도자기의 경우 높이에 비해 몸통이 너무 크거나 작으면 가짜일 가능성이 많다.크기에 비해 너무 무겁거나 가벼워도 안된다.도자기 속에 감춰진 은은한 색깔도 캐낼 줄 알아야 한다.저자에 따르면 분청사기는 원래 색깔이 희면서도 연한 노란색을 띠고 있지만 모조품은 완전 흰색이거나 진한 베이지색에 가깝다.저자는 우리 도자기의 발전을 위해서는 가품은 물론 재현품의 남발도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외국 사람들은 흔히 “한국에는 고려청자가 있고 조선백자가 있으나 한국 자기는 없다.”고 말한다.업계에서는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 가운데 80%가 옛 것의 재현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으로 본다.특히 북한에서 제작되는 청자는 고려청자와 너무 똑같아 전문가도 구분하기 힘들다.“고려청자나 조선백자도 당시에는 생활도자기였다.”는 게 저자의 말.보다 새로운 기술과 재료로 창의성을 발휘해 우리 도자기의 실용성과 국제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저자는 우리 문화재의 ‘대외개방’을 특별히 강조한다.국보나 보물,중요 문화재 외의 것은 적극적으로 해외로 내보내 줘야 한다는 것이다.일본은 100년 전부터 해외 박물관에 유물을 기증하고 일본실 설치를 지원하고 있다.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것 말고는 별도의 감정절차 없이 해외반출이 자유롭다.문부성이 기증하는 문화재 보호 도구까지 싸서 보내는 정성과 기업들의 후원으로 일본은 이미 ‘문화대국’으로 뿌리내리고 있다.중국 또한 올해 문화재 보호법을 크게 고쳐 국보나 보물,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 외에는 해외반출을 자유롭게 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바야흐로 ‘문화재 전쟁’의 시대다. 혼자만 보는 고미술품은 ‘고물’에 불과하다.하지만 시대가 함께 공유하는 고미술품은 작품으로 거듭 난다.골동품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유통방식은 경매다.그래야만 억울하게 싸게 팔거나 너무 비싸게 사는 일이 없고 자금의 회전도 원활하게 된다.최근엔 국내에도 고미술 전문 경매회사가 하나 둘 생겨나고 있는 추세다.일본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고미술품 경매가 활성화돼 도쿄도내에만 50여 곳의 경매장이 있다.고미술은 결코 사유물이 돼서는 안된다는 게 이 책의 결론이다.1만 5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美 “이지스함 9월 동해 배치”

    |워싱턴 연합|고든 잉글랜드 미국 해군장관은 22일 북한 같은 국가들의 공격가능성에 대비한 미사일방어(MD)체제 구축 노력의 일환으로 오는 9월 동해에 이지스 전투시스템을 장착한 구축함을 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잉글랜드 장관은 이날 워싱턴에서 연설을 갖고 “탄도미사일방위(BMD)의 초기 방위작전능력 배치를 촉진하기 위한 대통령 명령의 일환으로 해군은 오는 9월부터 시작해 사실상 지속적으로 장거리 감시와 포좌의 추적을 위해 동해에 유도미사일 탑재구축함을 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잉글랜드 장관은 “이는 6개월 내로 우리가 이 지역으로부터 다단계 방위시스템의 지휘통제체계와 지상배치 부대들이 즉각 공유할 수 있는 목표물에 대한 데이터를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 ‘부당내부거래’ 의심 기업만 조사

    기업들에 대한 부당내부거래 조사방식이 ‘투망식’에서 ‘선별식’으로 바뀐다.종전에는 10대 재벌 등 단순하게 ‘기업 서열’로 묶어 일제조사를 벌였지만 올해부터는 혐의있는 기업들만 추려내 수시조사를 벌인다.지배구조가 우수하거나 법 위반 전력(前歷)이 없는 기업에는 일정기간 조사면제 등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또 조사방식의 변화에 따라 자산규모가 2조원 이상인 48개 재벌그룹 소속 800여개 계열사(상장·등록기업)는 내년 초부터 은행 대출·유가증권 발행·부동산 거래내역 등을 상세히 기록한 ‘내부거래 조사표’를 해마다 당국에 내야 한다.공시의무 외에 추가되는 것이어서 기업에 ‘이중부담’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강철규(姜哲圭) 공정거래위원장은 24일 이같은 내용의 새 부당내부거래 조사방식을 발표했다.강 위원장은 “현행 조사방식은 혐의가 있든 없든 서열순으로 잘라 연례행사처럼 투망조사를 벌이는 폐단이 있다.”면서 “부당내부거래 관행이 개선된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는 만큼 차별화된 선별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공정위의 계좌추적권(금융거래정보요구권)이 이달 초 종료됨에 따라 불가피하게 조사방식을 바꾼 측면도 있다. 강 위원장은 “20쪽 분량의 내부거래조사표 작성항목을 20%가량 줄이고,작성대상에서 아예 제외되는 예외기준도 만들어 기업부담을 최소화할 방침”이라고 해명했다.기업이 이 표를 불성실 또는 허위작성하면 최고 1억원의 과태료(개인 1000만원)를 물게 된다. 한편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출자총액제한제’ 폐지방침을 밝힌 것과 관련,강 위원장은 “기업의 투명성이 확보되면 이 규제를 포함해 모든 기업규제를 폐지한다는 데 전혀 이견이 없다.”고 밝혔다. 안미현기자 hyun@˝
  • [먹고 사는 이야기] 딸꾹질엔 설탕물을

    태아가 엄마 뱃속에서 딸꾹질을 할까.지난주 동창모임에서 이 문제로 한참동안 입씨름을 하다가 경험자의 증언으로 끝이났다. 보통 임신 6개월이 되면 태아에게도 횡격막이 형성되기 때문에 아가의 딸꾹질이 가능하다.이렇게 출생 전 뱃속의 아가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딸꾹질 때문에 고생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이러한 딸꾹질은 대개 수분 이내에 저절로 멈추지만,재발이 잦거나 딸꾹질이 오래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딸꾹질이란 횡격막의 불수의적운동(근육 경련)에 의해 성문이 갑자기 닫히면서 특징적인 소리가 들리는 것을 말한다.갑자기 음식이나 술을 많이 먹은 다음 위가 확장되어 횡격막을 자극해 딸꾹질이 나기도 한다.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미주신경과 같은 신경체계가 강한 자극을 받았을 때도 생긴다.한의학적으론 주로 폐나 위의 기운이 역류해서 생긴다고 보며 주원인으로는 차가운 기운을 꼽는다.갑자기 찬물에 들어가거나 차가운 것을 먹었을 때 딸꾹질이 나와 괴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이러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급작스런 운동이나 스트레스와 같은 감정변화도 원인이 될 수 있다.마치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어린이가 실제로 복통을 일으키는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딸꾹질의 정확한 완치법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증상을 덜어주려면 갑자기 놀라게 하거나 손가락을 입안에 넣어 목젖을 자극하기도 한다.또 숨이 차게 함으로서 멈추게 할 수 있다.재채기를 유발하는 것도 좋은 방법.레몬을 빨아 먹거나 식초 한 스푼을 삼키기도 하며,설탕물을 마시기도 한다.지속적으로 많은 양의 물을 마시거나,한꺼번에 많이 마시기도 한다. 그래도 잘 멎지 않으면 감꼭지를 달여 마시면 좋다.물 300㏄에 감꼭지 10개 정도를 넣고 약 10분 정도 끓인다.이때 생강을 두 쪽 가미해도 좋다.솔잎 15g을 넣어도 좋다.감의 올소릭산과 오리아릭산이 근육을 평온하게 해 주는 까닭이다. 마늘 한쪽을 입에 넣고 씹다가 딸꾹질소리가 나려고 할 때에 삼키기도 한다.이는 마늘의 소화,건위작용에 의하여 음식을 잘못 먹어서 생기는 딸꾹질을 곧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무를 채판에 갈아 즙을 낸 다음 꿀을 적당히 섞어 먹어도 효과가 있다.도라지를 짓찧어 그 즙을 한두 숟가락씩 하루에 3번 빈속에 먹는다.그래도 딸꾹질이 멈추지 않으면 껍질 벗긴 생강을 짓찧어 가제나 얇은 천에 짜 즙을 내 한 숟가락에 꿀 한 숟가락을 풀어먹으면 효과적이다. 그러나 한시간 이상 딸꾹질이 지속되어 호흡이 곤란하거나,딸꾹질이 너무 자주 일어날 때와 딸꾹질과 더불어 흉통,속쓰림 등의 증상이 나타날 때는 의사를 찾아가야 한다.인체의 다른 심각한 질환으로도 딸꾹질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장동민 하늘땅한의원 원장
  • “현장경험 갖춘 감정전문가 육성”최병식교수 세미나서 주장

    지난 92년 7월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회에 이중섭의 작품이라는 시가 10억원 상당(진품일 경우)의 ‘흰소’와 ‘황소머리’의 감정의뢰가 들어왔다.감정위는 이 두 작품에 만장일치로 위작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6개월 뒤 “가짜로 판정난 그림인데도 3억원에 두 점을 사겠다는 인물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진품임을 주장하는 측은 “화랑들이 진짜를 가짜로 만들어 헐값에 구입하려는 수법”이라며 비난했다.이 문제는 마침내 법정으로까지 비화됐지만 진위논쟁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미술작품에 대한 위작 시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미술계에서는 감정(鑑定)문제는 너무나 민감한 것이어서 감정(感情)을 사기 십상이라고 말한다.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감정의 오류’를 줄일 수 있을까. 지난 15일 서울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서 ‘미술품 감정의 이론과 실제’란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미술평론가인 경희대 최병식 교수는 한국 미술품 감정의 문제점으로 먼저 전문가 그룹의 한계를 꼽았다. 화랑협회는 감정 전문가를화랑운영 경력 20년 이상의 전문적 식견을 갖춘 자로 제한하고 있지만,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이와 관련,최 교수는 “머리 속에 들어있는 파일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다.”면서 현장 경험을 갖춘 전문가 양성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밝혔다. 특히 근·현대 미술품의 경우 대부분 ‘안목감정’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현장전문가 양성은 더욱 절실하다는 것.그는 프랑스처럼 국가자격시험을 통해 미술품 감정사 자격증을 주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고 밝혔다. 이날 세미나에서 또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 예술품감정학과 이동천 교수는 현대 중국서화감정학의 ‘과학적인’ 방법론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폈다.서화감정을 할 때 먼저 작품의 시대풍격을 파악한 뒤 개인풍격을 관찰하고 나아가 인장(印章)·발제(跋題)·지견(紙絹) 등의 요소를 살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김종면기자 jmkim@
  • 美軍, 바그다드 10㎞앞 진격/ 남부방어선 돌파… 포위작전 돌입

    쿠웨이트 북부전선 김균미 도준석·워싱턴 백문일특파원 바그다드 남서쪽,동남쪽 2개 방향에서 북진하던 미 육군 제3보병사단과 미 해병대 제3원정사단은 3일 낮(현지시간)바그다드 외곽에 진입,사실상 수도 포위작전에 들어갔다. 로이터통신과 AFP통신 등은 이라크 중서부에서 바그다드로 진격중인 미 제3보병 사단은 3일 바그다드 인근 10㎞ 지점인 사담 국제공항 근처까지 진군했다고 보도했다.미군은 바그다드로 향하는 도중 사담 후세인 대통령궁 중 한 곳을 수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기사 7·8면 앞서 2일 북진하던 미군은 미군 저지를 위해 남하한 이라크군 공화국수비대 메디나 기갑사단과 바그다드 보병사단과 교전 끝에 이들을 대파,이라크 남부 방어선 돌파에 성공했다. 미 국방부 작전부국장 스탠리 매크리스털 중장은 2일 브리핑을 통해 “메디나 사단과 바그다드 사단이 완전 궤멸됐으며 이들은 더 이상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제프 훈 영국 국방장관은 3일 이와 관련,미 보병 제3사단 일부가 바그다드 교외까지 진격,9000명 이상의 이라크군 병사를 전쟁포로로 잡았다고 밝혔다.미 국방부 관리는 해병대 선봉대와 공격 헬기 승무원들은 3일 이라크군의 화학무기 공격에 대비,방호복 등 방호장구를 착용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빅토리아 클라크 미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앞으로 있을 바그다드 대공세와 관련,“곧바로 바그다드로 진입해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혀,당분간 바그다드 포위 뒤 고립작전을 시도할 것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모하메드 사이드 알 사하프 이라크 공보장관은 3일 미군이 바그다드에 바짝 다가서고 있다는 보도를 부인했다.그는 미군이 아직 티그리스강을 건너지 못했으며 공화국수비대를 대파했다는 연합군의 주장은 거짓이라고 밝히고 “적들은 매일 쓰러지고 있다.”고 주장했다.km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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