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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마지막 위안부’ 메인 예고편

    영화 ‘마지막 위안부’ 메인 예고편

    일본군 위안소에 강제 동원된 한·중·일 세 여성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영화 ‘마지막 위안부’의 메인 예고편이 공개됐다. ‘마지막 위안부’는 일제의 만행으로 의도치 않게 위안부로 치욕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던 연희(한가영)와 중국에서 납치돼 끌려온 단단(레이), 그리고 일본의 퇴기 미야꼬(김미영)가 일본군 위안소에서 겪게 되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적나라하게 그린 작품이다. 이번에 공개된 메인 예고편은 배 한 척이 만주 일본군 위안소로 향하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어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고이 간직해온 순결을 빼앗겼다”는 내레이션은 위안소에 도착한 여성들의 비극적인 삶을 암시한다. 이어 “뭘 또 가져가려고 해. 다 줬잖아!”라고 울부짖는 연희의 모습은 그녀의 고통과 절망을 전한다. 영화 ‘마지막 위안부’ 예고편이 공개된 후 일부 포털 사이트 등에서는 검색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는 작품 제작이 많은 이들에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비극적인 삶에 대해 관심과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 ‘7악동’과 ‘스트라이커’ 등을 연출한 임선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마지막 위안부’는 오는 8월 개봉 예정이다. 15세 관람가. 상영시간 90분. 사진 영상=라이온컴퍼니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새로운 50년을 열자] 되풀이되는 과거사 불화… 적극 외교로 日 우경화 저지 절실

    [새로운 50년을 열자] 되풀이되는 과거사 불화… 적극 외교로 日 우경화 저지 절실

    김외한, 김달선, 김연희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명이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이달 들어 별세했다. ‘독도를 한국이 불법 점거 중’이라고 표기한 일본 중학교 교과서는 2011년 4종에서 올해 4월 13종으로 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약탈해 간 우리 문화재는 일부만 반환됐을뿐더러 국내에서 문화재 반환 운동이 시작된 이후에는 전시대에서 사라졌다. 한·일 수교 반세기. 50주년이란 숫자를 딛고 미래를 기약하기에 양국의 과거사 화해 성적은 초라하다. 오히려 국내 사정에 밀려 양국 간 화해 노력이 무위로 끝나고 많은 일이 반복, 재연됐다. 일본 총리가 전범을 합사한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나서는 행보는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2000년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로 이어졌다. 아베 신조 내각에서 “위안부는 전시 중 합법”이라는 취지의 발언은 아베 총리뿐 아니라 내각 장관들의 입을 거치며 반복됐다. 미래를 향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양국이 한·일 수교 반세기를 계기로 관계 개선을 위한 외교적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침략 전쟁을 금지한 일본 평화헌법 9조에 대해 한·일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을 추진하는 행보처럼 일본의 우경화를 저지할 여론 환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얘기다. 위안부 문제는 양국이 제자리걸음을 멈춰야 할 명분을 주는 상징적 이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28일 김연희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거론하며 “이제 위안부 생존자는 49명”이라고 전했다. 정대협이 전한 김연희 할머니의 삶은 해방, 한·일 국교 정상화, 한국의 경제 발전, 민주화와 같은 집단적 성취가 이미 망가져 버린 개인의 삶에 대리 만족을 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은유였다. 1932년생인 할머니는 국민학교 5학년이던 열두 살에 일본인 교장의 차출에 따라 일본으로 끌려갔고, 일본 도야마현의 비행기 부속 공장에서 9개월 동안 근무하다 아오모리현 위안소로 끌려가 7개월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해방 뒤 귀향한 할머니는 결혼하지 않고 가정부로 일했으며, 정신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1965년 한·일 수교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개인적으로 보상받을 길을 차단하는 제약으로 작용했다. 일본 정부는 시종일관 성노예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수교에 맞춰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종결됐다고 주장했고, 이 문제가 국제적 이슈가 된 최근에도 아베 총리 등이 “위안부 문제는 정치·외교 문제로 삼아서는 안 된다”(2013년 의회 답변)거나 “위안부는 인신매매 희생자”(올해 언론 인터뷰)라는 식으로 일본 정부 차원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 단체는 최근 적극적인 대응 행보를 보여 주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가 7월까지 사과하지 않으면 미국 법원에 2000만 달러(약 220억원)의 집단 손해배상 청구를 낼 계획이다. 이미 2000년 미국 워싱턴 법정에서 패소한 전례가 있지만, 이후 르완다와 유고 내전 중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된 국제 판례가 나왔기 때문에 승소 기대감이 생기고 있다. 최근 방한한 자이드 라아드 알 후세인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유엔의 위안부 문제 해결 의지를 밝히며 “위안부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그들의 고통을 인정하는 우리의 모습과 진정 어린 참회”라며 피해자인 개인을 향한 직접 사죄만이 고통을 치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국제사회의 진일보한 인식을 드러냈다. 할머니들의 죽음이 위안부 문제 해결의 시급함을 더했다면, 독도 영유권 문제에서는 일본의 속도가 한국의 고민을 키우고 있다. 독도 자체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멋대로 독도 주변에 영유권 선을 그어 국제분쟁화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단행될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다. 일본 내에서 체계적으로 진행돼 온 ‘한국의 독도 불법점거’ 주장은 이를 위한 사전 단계로 볼 수 있다. 2000년 이후 독도 문제는 양국 불화의 ‘뇌관’이 돼 왔다. 2005년 3월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2월 22일을 ‘다케시마(일본이 독도를 부르는 말)의 날’로 제정하는 조례안을 가결하자,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날 침략을 정당화하는 행위”라고 반발했다. 2012년 8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하자 주한 일본대사가 본국으로 소환됐다. 한·일 네티즌끼리 독도 지명 표기를 놓고 여러 사이트에서 인터넷 청원 전쟁을 벌이는가 하면 독도 관련 공연을 한 한국 가수가 일본 입국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제사법의 영역에서 한국은 독도 문제에 대해 ‘조용한 외교’로 일관하는 중이다. 이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뒤 일본이 1954년, 1962년에 이어 세 번째로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과 대비되는 전략이다.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독도는 영토 분쟁 지역이 아니어서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면 긁어 부스럼이란 게 ‘조용한 외교’의 근간이 되고 있다. 문제는 한국이 차분하게 대응하는 동안 일본은 자국의 독도 편입 논리를 강단 있게 전파해 왔다는 데 있다. ‘1905년 무주지인 독도를 일본이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는데, 한국 정부가 1952년 1월 독도를 포함하는 이승만 라인을 일방적으로 설정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일본의 주장이 굳어지면, 한국 외교는 조용하게 있다 힘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독도연구소장을 지낸 김현수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적극적 외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 교수는 “독도는 이미 국제사회에서 분쟁도서로 인식된다”며 “독도 문제 언급을 피할 게 아니라 분쟁의 해결을 위한 한·일 간 진지한 교섭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위안부, 독도, 교과서를 둘러싼 갈등 국면에서 적극 대응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면 일제강점기 약탈 문화재 반환 이슈에서는 다소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문화재 반환이 성사되려면 현재 국면에서 받는 입장인 한국 못지않게 주는 쪽인 일본의 태도 변화가 중요한 변수가 되기 때문에 면밀한 대응이 요구된다. 한·일 수교 당시 박정희 정권이 반환을 요구한 문화재는 4479점으로 조선총독부가 일본으로 가져간 고분 출토품, 개인이 약탈한 문화재가 망라됐다. 수교 이듬해인 1966년 5월까지 한국으로 돌아온 약탈 문화재는 거북 모양 청자 주전자(보물 452호) 등 1432점에 불과했다. 개인 소유 문화재가 제외된 탓이다. 대표적으로 일본인 사업가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1910~50년대 한반도에서 수집한 1100여점의 문화재, 이른바 ‘오구라 컬렉션’이 돌아오지 못했다. 한·일 협정 당시 개인 소장품이었지만 1982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된 유물들이다. 국내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는 국제박물관협의회에 오구라 컬렉션 반환 청원서를 전달하고 도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등 환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소송이 제기된 직후 도쿄국립박물관에 전시됐던 한국 문화재들이 수장고 안으로 자취를 감추는 등 부작용도 적지 않다. 일본 법원도 한·일 협정으로 타결된 문제인 만큼 일본에 반환 의무가 없다는 입장이다. 문화재 약탈이 이뤄지고 이들 문화재가 어떻게 불법 경로를 통해 유출돼 일본으로 흘러들어 갔는지를 일본 정부에 소상하게 밝힐 수 있는 입증 자료 구비 등 한국 측의 빈틈없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김연희 할머니 별세… ‘49’, 50분도 안 남은 위안부 생존자

    김연희 할머니 별세… ‘49’, 50분도 안 남은 위안부 생존자

    김연희(83) 할머니는 12세 어린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7개월간 고초를 겪었고, 이후 한평생을 ‘성폭력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결혼조차 하지 않은 채 무너진 인생을 홀로 추스러 온 김 할머니는 지난 24일 경기 용인의 한 요양병원에서 한 많은 세상과 작별했다. 올 1월 황선순(89)·박위남(93) 할머니, 4월 이효순(90) 할머니, 이달 11일 김달선(90)·김외한(81) 할머니에 이어 올 들어 6번째의 위안부 피해자 별세다. ●수요집회서 “당시 놀러가는 줄 알았지” 25일 김 할머니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영등포구 신화병원 장례식장은 평생 혼자였던 고인의 삶처럼 어둡고 쓸쓸했다. 김 할머니의 유일한 피붙이로, 평생 의지했던 여동생만 휑한 빈소를 지키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김 할머니는 1932년 대구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상경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다른 학생들과 함께 일본인 교장의 농간으로 일본에 보내졌다. 일본 도야마 현에 있는 항공기 부속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9개월을 일하다 아오모리 현의 군 위안소에 끌려갔다. 김 할머니는 과거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 나와 “당시 우리는 놀러가는 줄로만 알았다”며 어린이까지 닥치는 대로 유린했던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김 할머니는 해방을 맞아 귀국했지만 어린 나이에 위안소에서 겪은 성폭력 후유증으로 평생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대외 활동을 꺼렸던 김 할머니는 서울에서 여동생 가족과 함께 생활하다 6~7년 전부터 요양병원을 전전했다. ●평생 정신과 치료… 결혼 않고 독신 생활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할머니들께서 임종을 앞두고 그런 말씀들을 하세요. ‘난 죽더라도 죽은 게 아니다. 일본은 더 독해질 테지만 나는 죽어서도 맞서 싸우겠다’는 말에 안타깝고 울분이 치솟습니다.” 이날 빈소를 찾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관계자는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이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49명으로 줄었다. 김 할머니의 장례식은 26일 오전 6시 30분에 치러진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위안부 김연희 할머니 별세, 생존 할머니 49명만 남아..

    위안부 김연희 할머니 별세, 생존 할머니 49명만 남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부고] 故 김연희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을 게재했다. 해당 글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연희 할머니(83)는 지난 24일 밤 10시 별세했다. 1932년 대구에서 태어난 故 김연희 할머니는 5살 때 서울로 이사를 가 서울의 한 국민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44년 일본인 교장에 의해 차출돼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후 일본의 시모노세키를 거쳐 도야마겡의 한 비행기 부속 공장에서 약 9개월 동안 일하다, 아오모리겡 위안소에 끌려가 약 7개월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다. 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위안부 생존자 수는 49명으로 줄었다.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를 듣지 못한 채 6월에만 3명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위안부 김연희 할머니 별세, 끝내 일본 사과 못받고… ‘6월에만 3명 별세’ 생존자 49명으로 줄어

    위안부 김연희 할머니 별세, 끝내 일본 사과 못받고… ‘6월에만 3명 별세’ 생존자 49명으로 줄어

    위안부 김연희 할머니 별세, 끝내 일본 사과 못 받고… ‘남은 생존자 49분’ ‘위안부 김연희 할머니 별세’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부고] 故 김연희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을 게재했다. 해당 글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연희 할머니(83)는 지난 24일 밤 10시 별세했다. 1932년 대구에서 태어난 故 김연희 할머니는 5살 때 서울로 이사를 가 서울의 한 국민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44년 일본인 교장에 의해 차출돼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후 일본의 시모노세키를 거쳐 도야마겡의 한 비행기 부속 공장에서 약 9개월 동안 일하다, 아오모리겡 위안소에 끌려가 약 7개월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해방이 되면서 배를 타고 겨우 서울로 돌아왔지만,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이후 가정부로 일하는 등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다 세상을 떠났다. 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위안부 생존자 수는 49명으로 줄었다.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를 듣지 못한 채 6월에만 3명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하루빨리 할머니들이 고통을 덜어놓고 여생을 편히 사실 수 있도록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더욱 큰 관심과 연대를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김 할머니의 빈소는 서울 영등포 신화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새로운 50년을 열자]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 “한국은 100년 전 고래들 속 새우 아니다…돌고래 정도로 성장”

    [새로운 50년을 열자]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 “한국은 100년 전 고래들 속 새우 아니다…돌고래 정도로 성장”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는 “한·일 국교정상화는 양국 모두 경축해야 할 역사의 마디”라며 “국교정상화 이후 50년간 양국은 서로 윈윈한 사이였으며 최근 갈등이 빚어지는 것은 양국 관계가 수평적 관계로 바뀐 것에 대한 상호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정 교수는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서울신문과 지난 21일 가진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히고 한국은 더이상 100년 전 강대국이라는 고래 틈바구니에서 허우적대던 새우가 아닌 돌고래 정도로 성장했다고 강조했다. →현재 한·일 관계를 진단하고 정상화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일까. -1965년 이뤄진 한·일 국교정상화 협정은 두 나라가 함께 경축해야 할 역사의 마디다. 그런데 정작 두 나라는 경축해야 할 시기에 정상회담도 열지 않고 국민 간 호감도도 오히려 나빠졌다. 일본 내 혐한론도 돌이키기 힘들 정도다. 직접적인 원인은 분명히 역사 인식과 과거사 처리를 둘러싼 갈등이지만 그 배경에는 한·일 관계의 구조가 바뀐 내력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1910년 한국은 주변의 열강인 고래의 싸움에 휘말려 자기 몸도 지키지 못한 새우 신세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더이상 새우가 아닌 돌고래 정도로 성장했다. 한·일 관계 역시 오랫동안 지속됐던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 관계로 바뀌었다. 양국 모두 이런 상황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한·일 국교정상화 협정의 의의와 기여한 사람을 굳이 꼽는다면. -세계사에서 식민지와 지배국이 과거사를 사죄하고 배상하며 대등한 조건에서 국교를 맺은 사례가 없다. 없는 모델을 만들다 보니 한국과 일본은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나 배상을 애매하게 처리하고 국교를 정상화했다.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으로서는 민생과 안보가 시급한 상황에서 경제 협력 방식의 국교정상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냉전이 격화되자 일본에도 한국은 안보와 경제 면에서 중요했다. 누가 뭐래도 한국에서는 최고 권력자였던 박정희를 기여자로 꼽을 수 있다. 또 기본 틀을 만든 김종필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는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를 들 수 있다. 전 총리 기시 노부스케는 사토의 친형이자 현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로서 막후에서 도왔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와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한·일 국교정상화를 추진한 사람들은 국익이 뭔지를 알고 있었다.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한국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국교정상화 이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큰 틀에서 볼 때 한국에 이득이 됐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일본은 더 큰 이익을 얻었다는 점도 얘기해야 한다. 일본인들은 한국이 어려울 때 많이 도와줬는데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한국이 받은 자금은 현금이 아닌 노무와 물자 및 서비스 등이었다. 그것을 통해 떼돈을 번 것은 일본 기업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일본에서 들어온 공적 자금은 13억 달러 정도인데 일본은 무역에서 200억 달러 이상의 흑자를 남겼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한국은 부단히 자본과 기술을 축적해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양국이 모두 득을 봤다. 1965년 당시 1년에 1만명이 두 나라를 왕래했는데 지금은 550만명이 넘는다. 무역액도 1000억 달러에 이른다. 이런 수치를 보면 한·일 관계가 생각보다 훨씬 깊고 넓게 진전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은 받아들이고 부족한 점은 보완해야 한다. →식민 지배 가해자로서 일본의 책임은 이제 끝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한국병합조약(1910년)의 불법·무효, 합법·유효 여부를 놓고 논쟁을 계속했다. 평행선을 달리다 보니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이 조약에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일본이 처음으로 ‘일본’이라는 주어와 ‘한국’이라는 상대를 지칭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명한 문서는 1998년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공동선언이었다. 2010년 당시 간 나오토 총리가 한국병합조약 100주년을 맞아 담화를 발표하면서 ‘한국인의 의사에 반한 식민지 지배’라는 표현을 사용해 한국병합조약이 강제로 이뤄졌다는 점을 처음으로 시사했다. 그때가 과거사에 대한 가해자로서의 역사 인식이 절정에 달한 시기라고 본다. 지금도 일본은 국교정상화조약으로 과거사 문제는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해결됐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할린에 버려둔 한국인이나 원자폭탄 피폭자 등에 대해서는 인도적 견지에서 나름대로 보완 조치를 취해 왔다. 한국으로서는 성에 차지 않지만 일본이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닌 만큼 한 것은 한 것대로 평가하면서 부족한 점을 보완하라고 지적하는 것이 좋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일 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데 해법은 무엇일까. -한·일 양국 정부가 국장급 회담을 하고 있으므로 조만간 어떤 결론이 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국가의 책임과 배상을 둘러싸고 의견 차이를 좁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난해 일본 도쿄에서 양국의 주요 운동단체가 논의해 제시한 의견도 참고가 될 것이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만들고 통제했으며 ‘위안부’를 본인의 의사에 반해 모집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선이다. 그런 후에 적절한 사죄와 보상 및 기념 등의 후속 조치를 하면 해결의 길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당사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 →양국이 미래를 위해 협력할 사안은 무엇인지. -한국은 자유, 민주, 지력, 기술, 평화, 인권, 환경 등에서 일본에 상당히 근접한 수준으로 올라섰다.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성취다. 한국의 강인한 개척정신과 일본의 뛰어난 노하우 등을 합치면 서로 도움이 되는 분야가 많다. 환경이나 에너지 및 사회안전망 등은 더욱 배울 만하다. 중국의 부상 속에서 우리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일본과 적당히 손잡고 가는 것은 플러스가 된다. 남북 통일을 전망하면 더욱 그렇다. →21세기 동북아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양국이 노력해야 할 일은. -한국과 중국, 일본 등 3국이 유럽연합(EU)과 같은 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20~30년이 지나더라도 어려울 것이다. 현실적으로 3국 간 국력 차이가 너무 크다. 중국의 국토는 한국의 100배, 인구는 30배에 달한다. 다행히 한·일 간 국력 차이는 줄어들었다. 20년 전만 해도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한국의 12배였으나 지금은 5분의1로 줄었다. 따라서 3국이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되 쉬운 것부터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가운데 남북 통일의 분위기를 형성해 가야 한다. →동북아 지역 협력을 위한 화해의 실마리를 무엇으로 풀어야 할까. -우선 경제적으로 한·일 간 상호 이익을 심화시키기 위해 자유무역협정(FTA)을 빨리 체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역사 문제는 포괄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추진해 볼 수 있다. 과거사와 관련된 주요 행위자, 곧 한·일 양국의 정부와 기업 등 4자가 공동으로 출연하는 재단(가칭 한일미래재단 또는 한일우호신뢰재단)을 만들어 식민지 지배와 관련한 모든 사안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이다. 이의 출범과 함께 양국의 수뇌가 역사 문제를 더이상 정치외교의 현안으로 삼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런 후에 역사 인식의 개선은 연구자, 교육자, 시민의 역할에 맡겨야 한다. →양국 시민사회 간 연대 강화가 두 나라 관계 발전과 협력의 대안이 될 수 없을까. -양국 시민사회 간 교류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본격화됐다. 그 전만 해도 양국은 경제나 안보 면에서 가까웠지만 일본인들은 한국을 군사독재국가라는 시각에서 바라봤다. 한국이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민주사회를 이룩함에 따라 일본 시민사회와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역사 분야만 해도 한·일 간 공동 연구가 진척돼 공통 교재 개발에까지 이르게 됐다. 양국에서 동시 출판한 것이 5종류나 된다. 시민사회의 교류는 두 나라의 관계 발전에 기여했고 앞으로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한국과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는 유럽연합(EU)처럼 될 수 없나. -우리와 중국은 이미 FTA를 맺었다. 일본이 그 장점을 이용하기 위해 한국을 교두보로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한·일 양국은 이미 고령화와 저출산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의 젊은 정보기술(IT) 인력이 일본에 많이 진출해 있다. 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도 더러 있다. 앞으로 한·일은 경제 통합을 어느 정도 이룰 수 있다고 보는데, 중국은 여러 문제 때문에 힘들 것이다. 한·중·일이 EU처럼 되는 것은 멀고 먼 이야기다. →미·일 동맹 강화가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평화에 어떤 영향을 줄까. -역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은 남북 통일이 되기까지 미국과의 동맹을 버릴 수 없다. 따라서 한·미·일 3국 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국익에 맞는다고 본다. 중국도 한국의 처지를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스스로 줏대 있는 자세를 견지하는 게 좋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대해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일본에 설명을 요구하고 이를 활용해야 한다. 우리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에 관해서는 중국에도 쓴소리를 하고 이해를 구할 필요가 있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흔들리다가는 또 새우 신세가 된다. →양국 지도자에 대한 바람이나 제언이 있다면. -양국의 지도자가 한·일 관계를 너무 단편적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양국은 2000년 이상의 역사 속에서 전쟁 등의 불행한 일도 겪었지만 교류를 통해 자신의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서로 강한 영향을 주고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겪고 있는 갈등은 극복하기 어려운 게 아니다. 일본이 고대문명을 형성하는 과정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른바 도래인이 큰 역할을 했고 한국이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이 소화한 서양문명을 받아들인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웃 간에 사이가 좋지 않으면 이사를 가면 그만이지만 국경을 맞댄 나라 사이는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교류 협력해 상호 발전에 이바지하는 관계를 맺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면 한국과 일본이 공유할 수 있는 비전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정재정 교수 정재정 교수는 1951년 9월생으로 충남 당진 출신이다. 1974년 서울대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대 대학원에서 한국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울대에서 한·일 관계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94년부터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3년 제1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2009년에는 제2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과 일본의 왜곡된 역사 교과서 채택 및 독도 영유권 주장 등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2006년 9월에 설립된 교육부 산하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이다.
  • 한일 외교장관 ‘위안부 담판’ 무얼 담을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양국 간의 협의가 막바지에 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지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당장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8일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재정 지원하고 사죄의 성명을 발표하는 대신 한국 정부가 문제의 최종 해결을 보증하는 구상이 양국 간에 논의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렇지만 노광일 외교부 대변인은 이 같은 보도에 대해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정부는 그동안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군이 조직적으로 동원한 만큼 법적인 책임을 인정하고 정부 예산으로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 정부 및 일본군이 군 시설로 위안소를 관리 통제하고 본인의 의사에 반해 위안부가 된 만큼 정부 차원의 보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해 4월부터 최근까지 진행된 8차례의 한·일 국장급 협의에서도 이 같은 내용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일본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의 내용이 포함된 성명을 아베 신조 총리가 발표하고 주한 일본대사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만나 고개를 숙이는 방안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타협의 특성상 어느 한쪽의 입장을 모두 담아내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일본 정부의 법적인 책임을 어떻게 인정하느냐다. 정부는 일본 정부의 책임을 명확하게 하고 싶은 반면 일본은 정부 예산을 사용해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지원은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인도적인 차원이라는 점에 방점을 두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한·일 수교 50주년을 맞아 일본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과 한·일 외교장관회담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 담판을 이끌어 낼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성급한 기대는 이르다는 관측도 만만치 않다. 외교부 고위관계자도 “너무 큰 기대를 걸기보다는 차분하게 보면서 현안이 진전되는 방향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즉 윤 장관 방일을 계기로 위안부 문제가 풀리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얘기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역시 법적인 책임을 명확하게 하길 원하지만 문서화 등이 불가능할 경우 일본 정부 예산으로 보상이 이뤄진다는 선에서 묵인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외교부 관계자는 “협상은 상대방이 있는 만큼 100대0이라는 스코어가 아닌 51대49로 마무리된다”며 “결국 위안부 문제도 각자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방식으로 마무리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맺힌 恨 못 풀고… 같은 날 떠난 두 위안부 피해 할머니

    맺힌 恨 못 풀고… 같은 날 떠난 두 위안부 피해 할머니

    30분 간격을 두고 두 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한 맺힌 생을 마감했다. 여성가족부는 경북 포항에 사는 김달선(왼쪽·91) 할머니와 경기 광주의 김외한(오른쪽·81) 할머니가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12일 밝혔다. 김달선 할머니와 김외한 할머니는 각각 11일 오후 9시 15분, 오후 8시 40분에 눈을 감았다. 두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50명만 남게 됐다. 김달선 할머니는 1925년 경북 포항시 북구 환여동에서 3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세 때인 1943년 어머니를 따라 흥해읍에서 청어를 팔던 중 일본 경찰에 의해 미얀마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무참히 성을 유린당하며 자궁 수술을 두 차례 받고 자살을 시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해방이 된 뒤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위안소에서 받은 고초로 평생 병원과 요양원을 전전했다. 고인의 여동생 김만금(73)씨는 “생전에 ‘일본놈들이 우리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라고 하는 데 죽기 전에 자꾸 이야기를 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자주 말하셨다”면서 “언니는 평생 사과 한마디 없는 일본 정부를 증오했다”고 전했다. 경기 광주 나눔의집에서 생활해 온 김외한 할머니는 1943년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 훗카이도에서 혹독한 생활을 했다. 위안부 피해 후유증으로 오랜 기간 병을 앓아온 김외한 할머니는 1998년 12월 공식 피해자로 등록됐다. 김희정 여성가족부 장관은 이날 오후 김외한 할머니의 빈소가 차려진 안동의료원 장례식장과 김달선 할머니 빈소인 포항시민장례식장을 각각 찾아 조문했다. 김 장관은 “일본군의 위안부 만행은 피해 당사자가 없는 상태에서의 사과는 의미가 없다”면서 “생전에 사과하지 않는다면 또 한 번의 씻을 수 없는 역사적 과오로 인류사에 기억될 것임을 가해 당사국이 명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일본 지식인 281명 “침략 등 반성·사죄…아베담화에 재표명”

    한반도 전문가 등 일본 지식인 281명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발표할 전후 70년 담화에 사죄와 반성을 명확히 표명하고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韓·中에 고통 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시급” 이들은 8일 일본 참의원 회관에서 ‘2015년 한·일 역사문제에 관해 일본의 지식인이 성명한다’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고 “아베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가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간 나오토 담화 등 일본 정부의 역사문제 담화의 계승을 확인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침략과 식민 지배가 한국, 중국 등에 손해와 고통을 초래했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다시 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제언했다. 지식인들은 양국 간 역사 문제 중 가장 해결이 시급한 것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꼽았다. 고노 담화 이후 한·일 양국에서 새롭게 발굴된 위안부 자료를 통해 위안소의 설치·운영·관리 주체가 민간업자가 아니라 바로 일본군이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며 일본이 국가적 책임을 인정할 것을 촉구했다. 이번 성명에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미즈노 나오키 교토대 교수, 우에노 지즈코 도쿄대 명예교수, 오타 오사무 일본 도시샤대 교수 등 17명이 발기인으로 나섰고 한반도 전문가를 중심으로 281명이 서명했다. ●美·日 공동개발 ‘해상 요격 미사일’ 발사실험 성공 한편 이날 교도통신은 미사일방어(MD)의 하나로 미국과 일본이 공동 개발 중인 해상 배치형 요격 미사일 ‘SM3블록2A’의 첫 발사실험이 성공했다고 밝혔다. 두 나라는 탄두 등이 장착되는 미사일 앞부분인 노즈콘과 진로제어, 추진로켓 분리 등의 성능을 실험했다. 타깃 미사일은 발사되지 않았으며 실제 요격 실험까지는 진행하지 않았다. ‘SM3블록2A’는 현재 해상자위대의 이지스함에 탑재된 ‘블록1A’의 개량형으로 2017년쯤 개발을 마친 뒤 해상자위대에 배치할 예정이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할매들 다 떠나기 전에 일본 사과 꼭 받았으면”

    “할매들 다 떠나기 전에 일본 사과 꼭 받았으면”

    비영리 공익재단인 ‘아름다운재단’ 소속 김현아 국장과 간사 등 10여명이 지난 4일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찾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의 구순(九旬)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거동이 불편해 보조기구에 의지하던 김 할머니는 화사한 노란색 옷을 입고 손님들을 맞았다. 13세에 고아가 된 김 할머니는 열일곱 살이었던 1942년 중국 혼춘의 위안소로 끌려가 광복이 될 때까지 고초를 겪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억척같이 일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돌봤다. 김 할머니가 아름다운재단이 창립된 2000년에 기부한 5000만원은 ‘재단 1호 기금’이 됐다. 김 할머니는 2006년 재단에 또 5000만원을 추가로 기부했다. 이 일로 지난해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최근에는 인근 퇴촌성당에 장학금으로 써달라며 남은 재산 1억원마저 기부했다. 이제 김 할머니 수중에는 40만원만 남았다. 김 할머니는 평소 “내가 돈을 쓰는 건 너무 아까운데 남 주는 건 하나도 안 아까워. 나 같은 사람이 더이상 안 나오게 하려고 그렇게 살았어”라고 말했다. 2007년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위안부 피해 증언을 했던 김 할머니는 8일 “일본은 결국 사과와 배상을 안 하고는 못 견디게 될거야. 그런데 사과받기도 전에 자꾸 할매들이 저세상으로 가고 있어. 죽기 전에 일본이 사과하는 거 꼭 봤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이효순(91) 할머니가 타계했고, 현재 우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김 할머니를 포함, 총 52명(국내 47명·국외 5명)뿐이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남·북·중 학자들, 日의 위안부 문제 공식 사죄 촉구

    남·북·중 학자들, 日의 위안부 문제 공식 사죄 촉구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박제가 돼 가는 살아 있는 역사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일본은 역사 교과서에 ‘자발적 성매매’로 기술하는 등 진실 뒤집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달 30일 중국 옌볜대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국제학술회의’에서 남·북한, 중국, 일본 학자들은 한목소리로 일본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 인정과 공식 사죄를 촉구했다. 학술회의는 중국사회과학원 중일역사연구센터와 옌볜대 조선한국연구센터가 공동 주최하고 동북아역사재단이 후원했다. 쑤즈량 상하이사범대 인문학원장은 “전쟁 당시 일본군 성노예 제도에 관한 증거 자료는 각종 역사적 문헌, 그리고 지린(吉林)성 기록보관소에서 발견된 일본군 관련 문서와 피해자의 구술 자료, 일본에서 출판된 문헌까지 셀 수 없이 많다”면서 진실을 덮으려는 일본 측 기류를 강하게 비판했다. 북측 입장 역시 단호했다. 조선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리철홍 연구사는 함북, 청진, 나남, 회령 등 북쪽에서 발견된 위안소가 있던 지역은 모두 일본군 제19사단 관할 구역이었음을 강조하며 명백한 일본군의 성노예 범죄 사실을 밝혔다. 또한 서정호 연구사는 북쪽의 위안부 피해자 40여명 중 일본 군경에 강제로 납치된 여성이 16명, 속임수에 넘어간 여성이 20명, 빚 때문에 끌려간 여성이 3명, 범죄 흔적을 없애기 위해 넘겨진 여성이 1명 등 납치, 유괴, 사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통계를 발표했다. 김철남 조선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장은 “일본군 위안부 범죄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중요하며 일본에 대한 국제적 압력의 강도를 높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일교포 학자인 김부자 도쿄외국어대 교수는 일본 내에서 진보 언론으로 통하는 아사히신문에 대한 우파의 공격 양상, 그리고 그 결과 아사히신문이 위안부의 자발성 내용을 담고 있는 ‘제국의 위안부’ 책을 극찬하는 등 역사주정주의에 굴복하는 모습을 들며 “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자긍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여성의 인권’ 문제이며 전쟁과 식민주의 극복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일본 역사단체 “위안부 강제연행은 실증된 사실”

    일본 역사단체 “위안부 강제연행은 실증된 사실”

    ‘일본 역사단체’ 일본 역사단체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왜곡 중단을 촉구하는 성명을 일본어와 영어로 발표했다. 이들 단체는 25일 중의원 제2의원회관에서 발표한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의 역사학회·역사교육자단체의 성명’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강제연행된 위안부의 존재는 그간의 많은 사료와 연구에 의해서 실증돼 왔다”고 밝혔다. 이들 단체는 인도네시아 스마랑·중국 산시(山西)성에서 확인됐고, 한반도에서 다수의 증언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억지로 데리고 간 사례’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의사에 반한 연행 사례가 모두 강제 연행에 포함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작년에 아사히신문이 ‘전쟁 때 제주도에서 여성을 강제로 연행했다’는 일본인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사망)의 발언에 관한 기사를 취소한 것이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담화의 근거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최근 연구에서 피해자가 동원과정뿐만 아니라 위안소에서 인권을 유린당하는 성노예 상태에 있었다는 것까지 드러났다고 위안부 제도의 반인도성을 지적했다. 이들 단체는 “위안부 제도와 일상적인 식민지 지배·차별구조와의 관련성도 지적되고 있다. 가령 성매매 계약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배후에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구조가 존재했다”며 정치·사회적 배경을 함께 고려해야 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는 무책임한 태도를 일부 정치가나 미디어가 계속한다면 그것은 일본이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발신하는 것과 같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처음 보도한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전 아사히(朝日) 신문 기자에 대한 협박 등이 벌어지는 것에 관해 “학문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며 결코 인정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성명에는 일본역사학협회, 오사카역사학회, 규슈역사과학연구회, 센슈(專修) 대학역사학회, 종합여성사학회, 조선사연구회간사회, 도쿄역사과학연구회, 도쿄가쿠게이(學藝)대학사학회, 나고야역사과학연구회, 일본사연구회, 일본사고구(攷究)회, 일본사상사연구회(교토), 후쿠시마대학사학회, 역사과학협의회, 역사학연구회, 역사교육자협의회가 참여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위안부 만행은 검증 끝난 사실” 쐐기… ‘역주행 아베’ 압박

    “위안부 만행은 검증 끝난 사실” 쐐기… ‘역주행 아베’ 압박

    5일(현지시간) 영어와 일본어로 동시에 발표된 세계 10여개국 일본학 관련 학자 187명의 집단성명은 학계의 단합된 목소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일본의 역사와 정치, 문화 등을 연구하는 저명한 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향후 행보에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성명을 주도한 알렉산더 더든 미 코네티컷대 교수는 이날 서울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미 학자들이 지난 2월 일본 정부의 미 교과서 왜곡 규탄 성명을 낸 뒤 3월 시카고에서 열린 아시아학협회에서 세계 학자들이 이번 성명에 대한 협의를 시작했다”며 “과거 고노 담화 때처럼 아베 정권이 일본군 위안부 등 과거 전쟁에서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역사 왜곡과 정치 쟁점화를 하지 말라는 직접적인 호소를 담았다”고 밝혔다. 그는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를 ‘인신매매’라고만 표현한 것은 책임을 회피하고 희생자들을 비난하려는 의도를 보여 준 것”이라며 “성명은 일본군이 일제 식민지·점령지에서 위협과 기만을 통해 희생자들을 강제 동원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강조했다. 성명에는 ‘위안부’와 ‘위안소’를 의미하는 표현이 8번 등장한다. 특히 역사학자들이 그동안 발굴한 수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위안부 문제의 본질인 국가 개입과 강제 동원성을 명확히 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 만행은 이미 검증이 끝난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성명에 참여한 학자들의 면면도 눈길을 끈다. 이들은 일본의 역사와 정치, 문화 등 일본학과 일본 문제에 정통한 인물들이다. 일본 현대사와 위안부 등을 다룬 저서로 퓰리처상을 받은 허버트 빅스 미 빙엄턴대 교수, 디어도어 쿡·하루코 다야 쿡 미 윌리엄패터슨대 교수 부부, 존 다우어 매사추세츠공과대 교수와 함께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저서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 미국에서 최고의 아시아 전문가로 꼽히는 에즈라 보걸 하버드대 교수 등이 이름을 올렸다. 일본 학자도 다수 참여했다. 워싱턴 외교소식통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낸 집단성명은 아베 정부에 상당한 타격”이라고 진단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위안부 인정·피해 배상을” 日정부 법적책임엔 유연성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해 한·일 시민단체가 절충안을 제시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 한·일 양국 시민단체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2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새로운 방안을 내놨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관리했다는 사실, 피해자들이 본인 의사에 반해 위안부 성노예가 됐다는 사실, 심각한 피해가 있었으며 그 피해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 국내법 및 국제법에 위반되는 중대 인권침해가 있었다는 사실 등 4가지 사실 인정을 요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명백한 사죄, 피해자 배상, 일본 보유자료 전면 공개, 교육 및 추도사업 등을 포함한 재발방지 조치 등 4가지 요구 사항을 내세웠다. 일본 정부의 배상을 요구함으로써 일본이 제안한 아시아여성기금은 딱 잘라 거절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민간 모금 형식이어서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과 배상 여부가 모호하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다만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을 명시적으로 표시하지는 않았다. 일본 정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조치다. 지난해 6월 마련된 이 방안은 무엇보다 위안부 피해자 목소리를 대표하는 정대협이 동의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일본 측은 ‘정부 간 합의가 있어도 정대협이 거부하면 무산되는 것 아니냐’며 소극적 태도를 보여 왔다. 지한파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문제 해결의 기초가 될 만한 방안”이라며 높게 평가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일본 軍 비행장 공사 현장에도 위안부 동원”

    “일본 軍 비행장 공사 현장에도 위안부 동원”

    기자 출신 일본인 활동가가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 현지 군 비행장 공사 현장에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20여명이 강제 동원됐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일본 나라신문 기자였던 가와세 슌지(67)는 10일 통영시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나라현 덴리시 야나기모토 해군 비행장 군위안소에 통영·진주 지역 등의 출신 10~20대 여성 위안부 20여명을 강제 동원해 노역을 시켰다고 공개했다. 가와세는 “1975년 8월 덴리시에서 재일 조선인 강정시(당시 65세)씨 등을 상대로 취재를 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인터뷰 내용이 기록돼 있는 취재노트도 공개했다. 취재노트에는 가와세가 손으로 그린 시설물 배치도와 위안소 위치 등이 기록돼 있다. 가와세는 “취재 당시 위안부로 끌려온 여성들이 극한 상태에서 군사용 메틸알코올을 마시며 배고픔을 견뎠으며 근처에 사는 재일 조선인 남성이 ‘여성들을 구출해 숨겨주었다’는 진술도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40여년 전 취재 당시에는 한국 내 지명을 확인하기 어려워 기사화하지 못하고 보관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시민모임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일본 정부의 책임 이행을 촉구하는 언론보도를 보고 취재내용을 공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대표 송도자)이 주관했다. 통영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女性’ 전쟁의 최대 피해자

    ‘女性’ 전쟁의 최대 피해자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윤명숙 지음/최민순 옮김/이학사/606쪽/3만 2000원 아우슈비츠의 여자들/캐럴라인 무어헤드 지음/한우리 옮김/현실문화/536쪽/1만 8000원 올해는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다. 동시에 세계 2차대전이 종전된 지 70주년이자 독일이 패망해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소련의 붉은 군대에 의해 해방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기에 앞서 우리는 전쟁의 희생자들에 대한 진정한 애도와 사과를 잊지 말아야 한다. 성적 소수자인 여성의 인권은 전쟁의 참화 속에 무참히 짓밟혔다. 이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 제기와 조명 작업이 필요하다. 일본 제국주의 점령기인 1930년대부터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중국과 아시아 일대 전선에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로 인권을 유린당한 일본군 위안부들, 제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에서 항독 활동을 하다 체포돼 정치범으로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여성들에 주목한 책이 나란히 출간돼 의미를 더한다.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는 이 문제의 권위자인 윤명숙 박사가 일본 히토쓰바키대에서 9년 동안 연구해 얻은 성과를 고스란히 담았다. 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문헌자료를 기반으로 철저히 실증주의에 입각해 써 내려간 묵직한 책이다. 2002년도 과학연구비 보조금을 지원받아 일본 아카시 서점에서 2003년 출간한 책을 번역한 것으로 저자는 “출간 10년이 지났지만 책의 논지는 변함 없이 유효하며, 조선인 군 위안부의 형성 과정과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실태를 이해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책은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군 위안부 문제가 어떻게 전후 보상 문제로 부상했고,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검토한다. 아울러 군위안소 정책과 관련한 일본 정부와 군의 통제감독 실태를 군 위안소 설치, 군 위안부의 징모와 이송, 군위안소의 운영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일본 군부는 군의 기강해이와 각종 범죄에 대응해 점령지의 치안 유지와 병사들에 대한 위안을 충족시킬 목적, 점령지 부대의 성병 확산 방지책으로 공창제도를 대신하는 효과적인 제도로서 군위안소를 확대해 나갔다는 것이 드러난다. 2부에서는 조선인 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토대로 군 위안부 징모 및 징모업자 등에 대해 검토한다. 당시 조선에서의 징모는 인신매매 업자들의 취업 사기, 유괴, 역취 등 영리 유괴와 비슷한 양태로 지속됐으며 경찰이 직접 징모하거나 인솔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경찰은 도항에 필요한 신분증명서를 발급하고 징모에 협력했다. 저자는 조선인 군 위안부가 양산된 배경으로 경제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을 지적한다.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으로 총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촌 인구 중 70%가 빈농이었다. 집안의 가난과 불우한 사정이 더해진 학력이 없는 빈농 출신 여성들은 징모업자들의 표적이 됐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일본군 위안소 제도 규명을 통해 제국주의 군대의 폭력성을,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위안부 징모와 관련한 실태 규명을 통해 일제의 식민주의·식민성·폭력성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밝혔다. ‘아우슈비츠의 여자들’은 역사·인권 분야에서 활약하는 영국의 기록문학 작가 캐럴라인 무어헤드가 아우슈비츠 생환자들의 개인적 기록과 공문서, 생존자 구술을 채록해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르포르타주다. 나치의 피해자 가운데 ‘여성들’에 주목한 최초의 책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2011년과 2012년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가 되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책은 프랑스의 평범한 아내, 어머니, 딸이었던 여성들이 가족과 이웃을 잃고 분노하며 레지스탕스의 심장이자 팔다리가 돼 지하 언론 제작과 배포를 담당하고 유대인의 밀항을 도우며 투사가 된 이야기들을 다룬다. 거대한 폭력에 맞서 나치에 저항하며 프랑스 전역에서 활약하던 여성들은 피말리는 감시와 미행 끝에 1942년부터 각각 체포돼 1943년 1월 24일 가축 수송열차에 실려 아우슈비츠로 향한다. 정치범이라는 딱지를 달고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간 여성은 모두 230명. 이들 중 181명이 구타와 질병, 생체실험으로 죽었지만 49명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저자는 이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로 “그들 각자가 믿을 수 없을 만큼 행운아였으며, 그들 사이의 우애가 극심했던 야만성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다”고 썼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책 ‘제국의 위안부’ 위안부 명예훼손”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매춘부나 일본군 협력자로 표현한 세종대 일어일문학과 박유하(59)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동부지법 민사21부(부장 고충정)는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 위안부 피해 여성 9명이 “허위사실을 적어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정신적 고통을 준 책이 출판, 광고되지 못하도록 해달라”며 저자 박 교수 등을 상대로 낸 ‘도서출판 등 금지 및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일부 인용했다고 17일 밝혔다. 재판부는 “이 책에서 군 위안부에 대해 ‘정신적 위안자’ ‘군인의 전쟁 수행을 도운 애국처녀’ ‘자발적 매춘부’ 등으로 표현한 부분을 삭제하지 않으면 군 위안부의 명예나 인권에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법원이 삭제 인용한 부분을 보면 “‘조선인 위안부’의 고통이 일본인 창기의 고통과 기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점” “(일본군을) 정신적, 신체적으로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역할, ‘일본 제국’의 일원으로서 요구된 ‘조선인 위안부’의 역할은 그런 것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사랑도 싹틀 수 있었다.” 등이 포함돼 있다. 재판부는 “군 위안부가 민간 업자에 속아 인신매매 등으로 모집됐어도 군 부대 위안소로 끌려와서야 자신의 상황을 알게 됐다”면서 “저항을 하면 일본군이 폭력·협박을 통해 제압했기 때문에 군 위안부들은 일본의 매춘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덧붙였다. 다만, 재판부는 군 위안부의 명예를 훼손하는 표현과는 무관한 저자 개인의 단순 의견 표명에 대해서는 출판 등 금지 신청을 기각했다. 이에 대해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은 “사법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결정”이라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교과서에 ‘위안부 참상’ 자세히 담는다

    초·중·고교생에게 일본군 위안부 관련 교육이 강화된다. 역사 교과서에 위안부 참상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별도의 교사용 교재도 개발돼 보급된다. 교육부는 13일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의 위안부 교육 관련 현황 및 추진 과제를 보고했다고 밝혔다. 현재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서 위안부 관련 내용은 0.5~2쪽 정도에 불과하고 내용 역시 일제의 인적·경제적 수탈 중 일부로 포함해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현행 고교 동아시아사의 ‘일제강점기 및 근대국가 수립’ 단원은 교육 목표를 “제국주의 침략전쟁과 그로 인한 가해와 피해의 실상을 알아보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피해’의 일부로 포함시켜 놓은 것이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 기준 역시 태평양전쟁 시기 징용·징병, 강제 동원, 물적 수탈과 함께 위안부 문제를 다룰 것을 제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일제의 다른 수탈과 달리 위안부 강제 동원의 핵심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 인권 유린 문제가 제대로 다뤄지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교육부는 현재 개발 중인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의 일제 침탈 과정 관련 내용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인권 문제를 더욱 명시적으로 서술토록 했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사의 학습 목표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수탈과 일본군 위안부 인권 문제 등 가해와 피해의 다양한 실상”으로 확대, 변경된다. 또 한국사 교과서 집필 기준에도 오는 9월까지 위안부에 대한 내용을 상세화해 기술토록 지침을 마련할 방침이다. 세부적인 표현에서도 ‘강제 연행’ 또는 ‘여성 인권 유린’ 등 보다 선명한 표현을 사용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초·중·고교별로 동영상, 프레젠테이션 등의 관련 수업 활동 자료 및 교사용 교재를 개발해 다음달까지 보급을 마칠 계획이다. 교재 세부 내용에는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과 위안소 실태, 한국인 위안부 피해 실태 및 한국인 피해자의 삶과 운동, 한국 정부의 피해자 지원 정책, 국제사회의 활동 등이 포함된다. 교육부 관계자는 “위안부와 관련된 연구·조사·홍보 활동은 여성가족부가, 학교 교육은 교육부가 주도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장형우 기자 zangzak@seoul.co.kr
  • 미국 역사학자들, 日 아베 역사왜곡에 뿔났다 “위안부 역사 논쟁여지 없다”

    미국 역사학자들, 日 아베 역사왜곡에 뿔났다 “위안부 역사 논쟁여지 없다”

    미국 역사학자들, 일본 아베 역사왜곡에 뿔났다 “위안부 역사 논쟁여지 없다” ‘미국 역사학자들’ 미국의 저명 역사학자들이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미국 역사교과서 왜곡 시도에 반기를 들고 이를 비판하는 집단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코네티컷대의 알렉시스 더든 교수는 5일(현지 시간) 미국 역사협회(AHA) 소속 역사학자 19명이 연대 서명한 ‘일본의 역사가들과 함께 서서’라는 제목의 집단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의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이처럼 특정 이슈를 놓고 집단성명을 발표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미국 역사학자들은 집단성명을 통해 “최근 일본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성 착취의 야만적 시스템 하에서 고통을 겪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일본과 다른 국가의 역사교과서 기술을 억압하려는 시도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입을 열었다. 미국 역사학자들은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우기 위해 역사를 가르치고, 또 만들어가고 있다”며 “국가나 특정 이익단체가 정치적 목적 아래 출판사나 역사학자들에게 연구결과를 바꾸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특히 아베 총리가 미국 맥그로힐 출판사의 역사교과서를 거론하며 위안부 관련 기술이 잘못됐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우리는 출판사를 지지하고 ‘어떤 정부도 역사를 검열할 권리가 없다’는 허버트 지글러 하와이대 교수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전했다. 앞서 아베 총리는 지난달 29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미국 맥그로힐 출판사가 펴낸 교과서에 ‘일본군이 최대 20만 명에 달하는 14∼20세의 여성을 위안부로 강제 모집·징용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정말 깜짝 놀랐다”며 “정정해야 할 것을 국제사회에서 바로 잡지 않아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 역사학자들은 해당 교과서의 일본군 위안부 기술과 관련해 “일본 정부 문헌을 통한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일본 주오(中央)대 교수의 신중한 연구와 생존자들의 증언은 국가가 후원한 성노예 시스템의 본질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많은 여성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징집됐으며 아무런 이동의 자유가 없는 최전선의 위안소로 끌려갔다”며 “생존자들은 장교들에게 강간을 당했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폭행을 당했다고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베 정권은 애국적 교육을 고취하려는 목적의 일환으로 위안부와 관련해 이미 확립된 역사에 목소리를 높여 문제를 제기하고 학교교과서에서 관련된 언급을 삭제할 것을 시도하고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성명에 이름을 올린 학자들은 더든 교수 외에 프린스턴 대학의 제레미 아델만, 코네티컷 대학의 젤라니 콥·마크 힐리, 산타바바라 대학의 세이바인 프뤼스틱, 컬럼비아 대학의 캐럴 글럭, 콜로라도 대학의 미리엄 킹스버그, 조지아 공과대학의 니콜라이 코포소프, 아메리칸대학의 피터 커즈닉, 피츠버그대학의 패트릭 매닝이다. 또 보스턴 칼리지의 데빈 펜다스·프란치스카 세라핌, 코넬 대학의 마크 셀덴, 샌디에고 캘리포니아 대학의 스테판 다나카, 노트르담대학의 줄리아 애드니 토머스, 어바인 캘리포니아 대학의 제프리 워서스트롬, 하와이대학의 지글러와 시어도어 윤주 교수가 참여했다. 사진=SBS 방송캡쳐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닷새 만에 또… 위안부 할머니 떠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황선순 할머니가 숨을 거둔 지 닷새 만에 또 한 명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세상을 등졌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여성가족부는 위안부 피해자인 박위남 할머니가 지난달 31일 입원했던 병원에서 지병으로 숨졌다고 2일 밝혔다. 93세. 고인의 유골은 ‘망향의 동산’에 안치됐다. 이로써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53명으로 줄었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박 할머니는 1938년쯤인 16∼17세 무렵 만주 군수공장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동네 사람의 말에 속아 위안소로 끌려간 뒤 광복이 되는 날까지 7년 정도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박 할머니는 광복 이후 귀국했지만 정신적 후유증 등으로 힘들게 생활하다 지난해 8월 뒤늦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됐다. 박 할머니는 별세 전날 밤 건강이 갑자기 악화돼 눈을 감았다고 여가부는 전했다. 지난달 26일 89세로 생을 마감한 황 할머니에 이어 올해만 벌써 2명의 피해자가 일본 정부의 제대로 된 사과 한 마디 듣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앞서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는 제1163차 수요집회에서 “떠난 할머니뿐 아니라 앞으로 돌아가실 분들의 몫까지 힘껏 싸워야 한다”며 “남은 할머니들이 일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포기하지 않도록 존경과 사랑을 표현해 달라”고 당부한 바 있다. 정대협도 이날 박 할머니의 부고를 알리며 “하루속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피해자들이 진정한 해방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함께 해 달라”고 호소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김주혁 선임기자 happyhom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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