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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시각] 왜 또 일본인가/이종락 도쿄특파원

    [데스크 시각] 왜 또 일본인가/이종락 도쿄특파원

    아직도 기분이 영 개운치 않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중국방문시 보인 중국의 태도 때문이다. 오만함이 현해탄을 넘어서까지 느껴질 정도다. 장위(姜瑜)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천안함 사태와 관련해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 양국(남북한)은 냉정하고 절제하며 언행을 신중하게 해야 된다.”고 말했다. 상대 국민들에게 언행을 신중하게 하라니. 일국의 외교부 대변인이 할 말인가. 이웃나라 국민을 가르치려는 듯한 결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중국 공산당에서 발행하는 국제전문 기관지인 환구시보는 한술 더떴다. “중국은 대국(大國)으로서 주변 국가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논쟁과 충돌에 대해 한쪽이 원하는 대로 편을 들어줄 수는 없다.”며 거들먹거렸다. 중국의 이런 태도를 보고 다소 엉뚱하지만 그럴 듯한 상상을 해봤다. 우리 역사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던 20세 초부터 국교가 수립된 1992년까지가 양국 간 외교사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대로 기록될 거라고. 미국과 함께 G2의 한 축으로 성장한 중국의 영향력이 갈수록 높아질 것이라는 예상은 해 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상대국의 위신을 업신여길 수 있는 위치로 올라설 줄은 몰랐다. 당장 한반도에 놓여 있는 최근의 정치상황을 보더라도 중국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북한을 어떻게든 6자회담에 복귀시키려는 중국에 맞서 한국과 미국, 일본이 이를 제지하며 유엔안보리에 제소하려는 형국이 꼭 그렇다. 경제분야에서도 중국의 파워는 압도적이다. 한국과 중국의 교역 규모는 1992년 63억 7911만달러에서 지난해 1409억 4930만달러로 22배나 증가했다. 이는 한국이 일본(712억달러), 미국(667억달러)과의 교역규모를 합친 것보다 많다. 지난해 취재차 베트남, 태국, 싱가포르를 간 적이 있다. 이들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상권들은 이미 중국에 넘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만난 한 기업인은 “싱가포르가 홍콩이나 마카오처럼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더라도 대부분의 싱가포르인들은 환영할 것”이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도 이들 국가처럼 중국의 영향권에 편입돼서는 안 될일 아닌가. 그러려면 공동전선을 펼 수 있는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 일본이 해답이다. 혹자는 일본은 ‘지는 해’라며 선뜻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위치에서 내려오고 있지만 여전히 선진 강국이다. 우리가 글로벌 시장에서 최고 경쟁력을 보이는 첨단 제품의 핵심부품·소재는 대부분 일본이 제공한다. 중국이 중저가 시장을 석권하고 고가 시장에서 한국과 경쟁할 때 공동 연합전선을 펴며 맞설 수 있는 파트너도 일본이다. 공교롭게도 한국과 일본은 북한의 핵위협과 중국의 고도성장이라는 최대 도전에 공동으로 직면해 있다. 양국이 교과서와 일본군 위안부 등 민감한 문제들을 안고 있지만 긴밀한 관계를 모색해야 하는 이유다. 다행히 어두운 과거를 지닌 양국이 최근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게 긍정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 일방적으로 몰렸던 한국이 최근들어 일본을 상대하는 여유가 생겼다.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결과다. 1980년에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이 세계의 9%를 점한 것에 비해 한국은 0.5%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에는 일본이 8.1%로 하락한 반면 한국은 1.6%까지 존재감을 높였다.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기업들도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의 산업계가 한국을 쫓는 장면도 부각된다. 일본 내 분위기도 몇년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일본 지식인들이 도쿄 시내 한복판에서 “한·일병합은 원천 무효”라고 선언한다. 지상파와 위성 TV 11개 채널에서 매주 35개의 한국 드라마를 틀어댄다. 일본과의 불행했던 100년을 넘어 새로운 파트너십을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은 마련되고 있다. jrlee@seoul.co.kr
  • 언론·기업 ‘살색’ 표현 혼쭐 낸 청소년 모임 김민영양

    언론·기업 ‘살색’ 표현 혼쭐 낸 청소년 모임 김민영양

    “신문에서 바르고 옳은 말을 써야 되는 거 아닌가요? 왜 ‘살색’을 아직도 써요? 서울신문은 그나마 적네요.” ‘살색’에서 ‘살구색’으로 바뀐 지 5년이 지났지만 이를 지키지 않는 어른들을 향한 일침이었다. 10대 청소년 다섯명이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통해 인종차별적 단어인 ‘살색’을 사용한 언론사와 대기업에 항의해 바로잡는 ‘일’을 해냈다. 변화를 주도한 ‘평화를 사랑하는 청소년들의 모임’ 김민영(17)양을 10일 만났다. 민영양은 지난해 9월 가족들과 쇼핑을 하던 당시를 떠올렸다. “스타킹을 사러갔는데 대부분 브랜드가 아직도 ‘살색’이라고 써놨더라고요. 살구색으로 바뀐 지 한참 지났는데 말이죠.” 언니(민하·19)와 다른 코너를 둘러봤는데, 크레파스와 물감에도 ‘연주황’이라고 잘못 표기돼 있었다. ●외국인노동자 대부 김해성 목사의 딸 이에 민영양은 코시안(한국인+아시아인), 위안부, 학생인권 등 평소에 사회문제에 뜻을 함께하는 친구들 4명과 힘을 합쳤다. 일간지, 경제지, 인터넷언론, 방송사 등 14개 언론사 7년치 기사를 검색하고 대형 할인마트 3곳의 매장도 찾아갔다. 결과는 형편 없었다. 중앙일보가 184건, 조선일보 99건, 오마이뉴스 87건, 한국경제 74건이 잘못된 표현을 썼다. 지난해 9월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고, 올해 3월 답을 얻어냈다. 언론사와 기업 모두 ‘살색’이란 용어를 쓰지 않겠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살구색’ 표현에 대한 민영양의 집착은 6년전부터 이어져 왔다. 2004년 당시 ‘살색’에서 ‘연주황’으로 바뀐 단어가 어려워 어린이들에게 인권침해가 된다고 인권위에 진정해 ‘살구색’으로 바꿔놨다. 이 모든 과정에는 어렸을 적부터 ‘인권’이 무엇인가를 체험으로 가르쳐준 아버지가 있다. 민하·민영양은 외국인노동자들의 ‘대부’로 불리는 김해성 목사의 딸. 김 목사가 2001년 8월 “크레파스 색깔 가운데 특정색을 ‘살색’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종차별”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면서 ‘색깔 논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때 아빠한테 물어봤어요. 살색이 어떤 말로 바뀌었냐고. ‘연주황’이라고 하는데 초등학교 5학년인 제가 들어도 갸웃할 정도로 어려운 한자어였죠.” ●“NGO에서 아동인권 일 하고 싶어” 민영양은 공부보다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토론을 하는 것이 더 좋아 대안학교를 선택했다. 일반 고등학교를 가면 공부에만 매달릴 것 같아 싫었단다. “중3 때 진로를 놓고 고민이 많았는데 부모님이 경기 분당 이우고등학교를 소개해주셨어요. 딱 이거다 싶었죠.” 민영양은 교내 인권동아리 ‘아우름’에서 부장을 맡고 있다. 다음주에 열리는 인권환경주간 행사를 앞두고 콘서트, 토론회 등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또래에 비해 사회문제에 대한 감수성이 깊지만 평소에는 여느 여고생과 똑같다. 노래방이라면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고, 틈만 나면 친구들과 수다를 떤다. 아동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민영양은 ‘평화를 사랑하는 청소년들의 모임’을 활성화해 관련 사이트를 구축한다는 야무진 계획을 갖고 있다. 어른이 되면 비정부기구(NGO)에서 아동인권을 위한 일을 하는 ‘사회사업가’를 꿈꾼다. “어린이들을 대변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누구보다 존중받고 보호받아야할 아이들을 위해 일할 거예요.”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8일 어버이날… 6년째 일본군위안부 할머니 3명 모시는 손영미씨

    8일 어버이날… 6년째 일본군위안부 할머니 3명 모시는 손영미씨

    “배 아파 낳지만 않았지 모두 저를 친딸로 여겨주시는 어머니이십니다.”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7일 오전 서울 충정로 3가의 ‘우리집 쉼터’.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 세 분이 사는 이곳에서 만난 손영미(50·여·사회복지사)씨는 한 할머니의 머리를 매만지며 밝게 웃었다. 이날은 어버이날을 맞아 위안부 할머니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직원들이 함께 점심 외식을 하는 날이었다. 정성스레 할머니들의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손씨의 표정은 싱글벙글이었다. 손씨는 “오후엔 어버이날 할머니들께 해드릴 고기를 사러 시장에 나갈 것”이라며 활짝 웃었다. ‘우리집 쉼터’에는 4명의 여성이 산다. 위안부 출신 길원옥(83)·이순덕(93)·김복동(83) 할머니와 이들의 ‘수호천사’인 손씨다. 2003년 11월 문을 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부속기관인 우리집 쉼터는 건강이 나빠져 혼자 지내기 힘든 위안부 할머니들을 보듬어 주는 곳이다. 손씨는 할머니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딸이자 엄마, 그리고 때로는 든든한 가장이다. 24시간 할머니들과 함께 생활하며 할머니들의 식사, 건강, 취미 등을 모두 책임진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 아침에 눈을 떠 밤에 잠들 때까지 할머니들을 씻기고, 식사를 준비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돌아오는 서예교실과 한글교실의 준비물을 챙긴다. 건강이 안 좋으신 할머니들이 시시때때로 두통과 복통을 호소하면 손씨는 새벽이라도 할머니들을 차에 태워 응급실로 달려간다. 그는 2004년부터 할머니들과 인연을 맺었다. 이 곳에 오기 전 부산의 한 수도원에서 행정일을 봤다는 그는 신부님의 추천으로 서울에 올라와 사회복지 공부를 시작했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할머니들을 보다 전문적으로 돌보기 위해 경기대 사회복지학과에서 석사과정도 마쳤다. 학교도 쉼터에서 가까운 곳으로 정했다. 그는“급하면 바로 뛰어와야 되는데 어디 멀리 갈 수 있겠어요.”라며 웃었다. 손씨는 아버지를 19년 전에, 어머니를 12년 전에 잃었다.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았다. 때문에 “쉼터에서 할머니들을 만난 이후 ‘할머니들이 내 엄마고 할머니’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할머니들을 내가 모신다는 생각보다 이분들을 만나서 내 삶이 행복해지고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돼 오히려 감사하다.”면서 “요즘 사람들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보지도 않고 귀찮아한다. 어른들과 함께 살면 내가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면서 웃어 보였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클럽소울, 위안부 할머니 위한 자선공연 개최

    클럽소울, 위안부 할머니 위한 자선공연 개최

    혼성듀오 클럽소울이 꾸준한 자선공연을 펼치고 있다. 클럽소울 멤버 손가람은 최근 경남 하동 녹차축제 기간중에 열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자선공연’에 노개런티로 출연해 주위를 훈훈하게 했다. 이 밖에도 클럽소울은 매년 결식아동돕기 및 독거노인 콘서트를 개최, ‘찾아가는 음악회’를 열고 오지에서 공연을 하는 등 지속적인 자선활동을 펼치고 있다. 클럽소울은 천가연, 손가람으로 구성된 혼성 R&B 듀오로 지난해 싱글 앨범 타이틀곡 ‘헤어진 그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현재 세 번째 음반을 준비중이다. 사진 = 클럽소울 엔터테인먼트 제공 서울신문NTN 박영웅 기자 hero@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위안부 할머니들과 ‘茶소풍’ 행사

    성신여대 문화산업대학원은 5월1~2일 경남 하동군 매암차문화박물관과 악양면 일대에서 하동야생차문화축제의 일환인 차(茶)소풍 ‘동무야, 소풍가자’ 행사를 연다. ‘차와 소통, 그리고 나눔’이라는 주제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차와 관련된 다채로운 행사와 전시, 체험전을 갖는다.
  • 日 위안부 인정 교과서 2012년부터 사라진다

    │도쿄 이종락특파원│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일본 출판사 니혼쇼세키(日本書籍)의 중학교 역사교과서가 오는 2012년부터 사라진다고 산케이신문이 22일 보도했다. 니혼쇼세키의 역사교과서 발행처인 니혼쇼세키신샤(日本書籍新社)는 21일 마감된 문부과학성의 교과서 검정신청에서 2012년부터 사용될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검정을 신청하지 않았다. 니혼쇼세키의 역사교과서는 우익 학자나 단체들로부터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를 인정하는 등 이른바 ‘자학적 사관’에 바탕을 둔 역사기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이 때문에 이 교과서를 채택하는 학교가 올해 3%로 격감해 출판사가 어려움을 겪어 왔다. 니혼쇼세키신샤의 전신인 니혼쇼세키의 역사교과서는 한때 도쿄의 23개구가 모두 채택한 대규모 출판사였지만 채택률이 감소하면서 2005년에 파산했고 이후 니혼쇼세키신샤가 교과서 발행을 이어받았다. 역사를 다루는 중학교 3학년 교과서는 모두 8종이 있다. 니혼쇼세키의 역사교과서는 일본 우익들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종군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일본의 전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 우익 단체들은 “극단적 자학사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비판해 왔다. 이 모임의 후지오카 노부카쓰 회장은 “국민의 의식이나 교육위원회의 교과서 채택 방향이 바뀌어 이 교과서가 검정 신청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jrlee@seoul.co.kr
  • 에메랄드 빛 바다 사이판을 가다

    에메랄드 빛 바다 사이판을 가다

    │사이판 이은주특파원│에메랄드빛 바다와 파란 하늘이 맞닿은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섬 사이판. 서울에서 불과 4시간 거리에 따뜻한 남국의 정취가 펼쳐진다. 상업 자본에 덜 물들어 개발보다 순수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리는 섬. 원주민의 해맑은 미소와 별들이 쏟아지는 맑고 깊은 밤하늘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자연친화적인 곳이다. ●자연이 살아 숨쉬는 섬 사이판 마치 권총을 눕혀 놓은 것 같은 지형을 하고 있는 사이판은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차로 30~40분이면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작고 아담하다. 파도가 없어 바다는 장판을 깐 듯 잔잔하다. 섬을 둘러싸고 있는 산호초가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산호가루로 만들어진 백사장 모래는 밀가루처럼 희고 부드럽다. 남북으로 가늘고 긴 형태의 사이판은 우리 나라와 같은 동고서저의 지형이다. 평탄한 서해안에 호텔 등 대부분의 숙박시설과 주민들의 주거지가 밀집해 있다. 섬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타포차우산(473m)을 기점으로 섬 동쪽으로는 수풀이 우거진 정글이 펼쳐진다. 사이판의 매력은 산과 바다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바닷물은 비린내가 나지 않고, 맑고 투명해 스노클링과 스쿠버 다이빙 등 각종 해양 스포츠를 즐기기에 제격이다. 특히 ‘사이판의 진주’라고 불리는 마나가하섬은 바닷속 가시거리가 30m나 되기 때문에 바로 눈앞에서 형형색색의 열대어와 마주할 수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옮겨 다니며 물고기도 낚고 스노클링도 하는 ‘호핑 투어’를 즐기며 남태평양의 한가로움을 느껴 보거나, 해질녘 선셋 크루즈를 타고 느긋하게 저녁 식사를 즐기면서 황금빛 노을을 감상할 수도 있다. 한없이 온화할 것만 같은 사이판은 정글에 들어서면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4륜 구동 차량을 타고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야생의 원시림을 헤쳐 나오면 각종 기암괴석과 거친 파도가 밀려와 부서지는 ‘타로포포 해변’의 절경이 펼쳐진다. 해변가에서 불과 1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깊은 곳, 마리아나 해구(1만 1034m)가 위치해 있다. 4륜 바이크인 ATV나 2인용 몬스터 트럭을 타고 굽이굽이 이어진 비포장도로와 풀숲을 헤치고 타포차우산에 오르면 사이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 정상의 전망대에서 검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태평양과 인근 지역 섬들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다. ●슬픈 역사를 간직한 섬 사이판 사이판은 밤의 얼굴도 색다르다. 섬 최고의 번화가인 가라판 중심거리에서 매주 목요일 오후 6시부터 열리는 스트리트 마켓은 섬 주민들이 직접 여는 야시장이다. 길 양쪽에 늘어선 포장마차 형태의 간이 음식점에서 열대과일과 사이판의 토속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사이판을 단순히 즐기는 휴양지로만 알고 돌아간다면 미흡하다. 사이판은 태평양 전쟁의 비극을 간직하고 있는 섬이다. 섬 북부에는 ‘태평양 한국인 위령평화탑’이 세워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강제 징용되거나 위안부로 끌려와 조국을 그리다 억울하게 스러져간 한국인 영령을 위로하기 위한 탑이다. 사이판 최북단의 만세절벽은 일본인 부녀자와 노인들이 미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80m 높이의 절벽에서 바닷속으로 몸을 던진 곳이고, 인근의 자살절벽은 미군에 항복을 거부한 수천명의 일본군과 가족들이 절벽 아래 정글로 뛰어내린 곳이다. 아직도 이들의 유골이 발견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사이판만으로 성에 차지 않는다면, 인근 섬을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사이판에서 경비행기로 약 10분(페리로는 1시간) 거리에 있는 티니안섬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을 탑재한 곳이다. 섬 내에서 카지노를 즐길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화려하고 요란하진 않지만, 언제 가든 넉넉한 품으로 반겨주는 섬 사이판. 복잡한 일상에 지칠 대로 지쳐 있다면 잠시 시름을 잊고 사이판의 풍요로운 자연에 몸을 맡겨보는 것은 어떨까. 글 사진 erin@seoul.co.kr # 여행수첩 → 항공 아시아나 항공이 인천과 부산에서 직항편을 운항한다. 인천은 월~일요일 매일 오후에 출발하며 화·목·토·일요일은 오전에도 출발한다. 부산은 수·목·토·일요일 오전에 출발한다. → 시차 및 화폐 우리나라보다 1시간 빠르며 서머타임은 실시하지 않는다. 미국 달러를 사용하며, 현지에서도 은행이나 호텔, 일부 면세점에서 환전할 수 있다. → 전압 120V로 전원 콘센트 변환 플러그를 가져가는 것이 좋다. → 쇼핑 가라판 시내에 위치한 DFS갤러리아 면세점에는 다양한 명품 브랜드가 입점돼 있고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한다. 연중 무휴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30분까지 영업한다. → 날씨 11~4월까지 건기이고 5~10월까지 우기다. 온도는 연중 27도로 7~8월은 한국보다 기온이 낮다. 습도는 70% 이상이지만 연중 무역풍이 불기 때문에 불쾌지수가 높지 않다.
  • [사설] 우리를 부끄럽게 한 위안부 할머니의 기부

    지난 1월2일 82세를 일기로 별세한 위안부 피해자 김순악 할머니가 평생 모은 재산 1억 826만원을 사회에 기부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김 할머니는 지난해 12월 대장암 수술을 앞두고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관계자와 아들을 불러 전 재산을 소년소녀가장 돕기와 위안부 역사관 건립에 절반씩 기부할 것을 유언했다고 한다. 시민모임 측은 그제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위안부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에 기부금을 전달했다. 섬유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열여섯에 고향(경북 경산)을 떠난 김 할머니는 중국 하얼빈 등지로 끌려다니며 온갖 고초를 겪었다. 해방 이듬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어 전국을 떠돌며 식모살이, 날품팔이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 돈을 모았다. 2000년부터 지급받은 위안부 생활지원금과 기초생활수급자 지원금도 아끼고 아꼈다. 그토록 원하던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받지 못하고 평생의 한을 짊어진 채 눈을 감으면서도 남을 위해 모든 것을 남겨 두고 떠날 결심을 한 김 할머니의 고귀한 정신 앞에 후손으로서 그저 면목이 없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근로정신대 연금탈퇴수당 99엔 지급, 영주귀국한 사할린강제징용 피해자 청구권소멸 등 일본 정부의 후안무치한 주장은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리고 있다. 정부가 어제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강제동원 근로자 17만명분의 공탁기록을 넘겨받은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일본이 강제동원 피해와 관련해 민간인 공탁금 기록을 넘겨준 것은 전후 처음이라고 한다. 정부는 위안부 할머니 등 역사의 증인이 사라지기 전에 잘못된 한·일 과거를 바로잡고,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받는 일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김 할머니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는 길이다.
  • “위안부 역사관 세우는데 써주세요”

    “위안부 역사관 세우는데 써주세요”

    정신대 할머니의 평생 모은 재산이 위안부 역사관 건립과 소년 소녀 가장을 위해 전달됐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25일 대구시의회 3층 소회의실에서 지난 1월 세상을 떠난 위안부 피해자 고 김순악 할머니의 유산 1억 826만원을 대구시에 전달했다. 김 할머니가 시골 논밭에서 일하고 받은 품삯과 정신대 피해자 생활지원금, 기초생활수급자 지원금 등을 모은 돈이다. 김 할머니는 유산을 위안부 역사관 건립 등에 사용할 것을 유언했다. 김 할머니 유일한 혈육인 아들도 기부에 흔쾌히 동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1월 2일 경북 경산 자택에서 82세의 일기로 별세한 김 할머니는 1944년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1946년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온 이후 어려운 형편에 전국 곳곳을 오가며 살아왔다. 200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신고한 김 할머니는 이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진행하는 집회 참가 등을 통해 위안부의 실상을 증언해 왔다. 김 할머니는 생전에 대구에 위안부 역사관을 건립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게 됐다.”며 크게 기뻐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구시와 시민모임은 할머니의 기부금중 절반인 5413만원은 위안부 역사관 건립에, 나머지 절반은 소년 소녀 가장을 위해 사용할 계획이다. 위안부 역사관은 대구 중구 남산동 명덕초등학교 내에 세울 예정인 2·28 민주운동 기념회관에 함께 건립된다. 시민모임 안경욱 상임대표는 “할머니의 뜻이 헛되지 않게 기부금을 소중하게 쓰겠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명성황후 시해 칼 ‘히젠토’를 한국으로”

    “명성황후 시해 칼 ‘히젠토’를 한국으로”

    안중근 의사 순국 100년을 맞아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히젠토’ 칼을 한국으로 가져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히젠토 환수위원회는 26일 조계종 중앙신도회 전법회관에서 출범식을 열고 구시다 신사에 히젠토 환수요청서를 보낼 예정이라고 25일 밝혔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첫 번째 이유로 ‘남의 나라 황후를 살해한 죄’를 거론했다. 이때 사용된 ‘히젠토(肥前刀)’가 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구시다 신사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히젠토 칼집에는 ‘한순간에 번개처럼 늙은 여우를 베었다. (一瞬電光刺狐)’라고 새겨져 있다. 신사에서는 ‘황후를 이 칼로 베었다.’라고 적힌 문서가 보관돼 있다. 환수위는 최봉태 변호사와 혜문 스님을 위원장으로 하고 기획위원은 이종우 문화재 제자리찾기 실행위원, 이용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보향 불교여성개발원 이사가 맡았다. 혜문 스님은 “2006년 문화재 환수운동을 하면서 구시다 신사에 들러 칼, 칼집, 봉납기록을 확인했다.”면서 “일본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참회하는 차원에서 이 칼을 한국에 인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26일 열리는 출범식에는 고종과 명성황후 무덤이 있는 경기 남양주의 시의원도 행사에 참석, 시의회에 환수요구안을 발의하고 일본에서의 법적 대응도 검토한다는 입장을 밝힌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을사늑약·강제징집 부인…日 오욕의 근대사 왜곡 고집

    을사늑약·강제징집 부인…日 오욕의 근대사 왜곡 고집

    제2기 한·일 역사공동위원회가 23일 양국 정부에 제출한 결과 보고서를 발표하며 공식 활동을 종료했다. 2기 공동위원회는 한·일 고대사 중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허구를 확인하는 등 부분적인 성과를 냈다. 하지만 1기 위원회의 쟁점 사항이었던 근·현대사의 식민지 과정 등 민감한 이슈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을 보인 채 각자 의견을 병기하는 선에 그쳤다. 또 독도와 종군위안부 문제 등은 논의조차 하지 못해 무거운 과제를 남겼다는 평가다. ●고대사… 임나일본부 허구 확인 2기 위원회가 거둔 가장 큰 수확은 ‘임나일본부설’의 허구를 확인한 것. 한·일 고대사 부분을 연구한 제1분과에서 한국은 “‘일본서기’ 신공(神功) 49년조의 해석을 통해 왜의 임나 지배를 논하던 전형적인 임나일본부설은 설득력을 상실했다.”며 “임나일본부의 외무관서적 성격으로 미루어 ‘안라왜신관’(安羅倭臣館)이라는 용어로 대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제시했다. 일본 또한 “한반도에서 왜인의 활동 흔적은 여러 곳에서 인정되지만, 왜국의 영토가 존재했다는 이해는 불가능하다.”며 “왜국이 한반도에서 대대적인 군사 전개를 했다는 이해에는 재검토와 정정이 필요하다.”고 동의했다. 아울러 일본의 벼농사와 금속 문화가 한반도에서 전래됐다는 사실에도 대체적인 의견일치를 보았다. ●중·근세사… 왜구는 일본 어부 1300~1400년대 한국 연안에서 출몰했던 왜구의 정체에 대해 ‘고려·조선인설’ ‘제주도 해민설’ 등의 주장이 그동안 일본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돼 왔다. 그러나 이번 연구를 통해 이들이 쓰시마와 이키, 마쓰우라 등의 영주와 해민(어부)들이었다는 결론을 냈다. 아울러 양국 연구진은 임진왜란의 발발 원인에 대해서도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내부 불안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인식을 같이했다. ●근·현대사… 양국 인식차 커 한일병탄 과정과 식민지 시대에 대한 성격 규정 등 근·현대사 부분에서는 양국의 역사 인식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무엇보다 “일본이 한반도를 일방적으로 침략한 것이 아니라 한국 주류 세력도 이에 동조했다.”거나 “고종이 을사조약을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약의 주체로서 반대 운동을 탄압했다.”는 등 일본의 편향된 인식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인 노동자 동원 과정에서 강제와 폭력이 없었다는 주장도 반복된 것으로 드러났다. ●교과서 왜곡관련 논의도 난항 2기 공동위원회에서 처음 수행한 양국 교과서에 대한 연구 역시 현저한 시각차를 드러냈다. ‘한·일 관계의 지뢰밭’이라 할 독도 영유권과 위안부 문제 등은 주요 의제에서 제외됐다. 한국 측 위원장인 조광 고려대 교수는 “유럽이 30~70년 걸려 공동교과서를 만들었고 아직 의견이 합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는 만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며 지속적인 공동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3기 위원회 출범 여부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2001년 일본 후소샤(扶桑社) 역사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이듬해 출범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2005년 6월 1차 보고서를 낸 뒤, 2007년 6월 34명의 위원이 참여한 2기 공동위원회를 출범시켰고, 24개 공동 연구주제에 대해 67차례 회의 끝에 이날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한·일100년 대기획]위안부피해자…진상규명·구제 요원

    강제동원 징용자와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같지만 대응은 크게 다르다. 진상규명을 같은 목표로 하지만 정부 지원이나 사회적 공감대는 차이가 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따르면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한 할머니는 85명이다. 현재 국내에 있는 할머니들은 서울 정대협 쉼터와 광주 나눔의 집 등에 10명이 살고 있으며 나머지는 자택이나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할머니들은 일본군위안부 생활지원 및 기념사업법에 따라 정부와 지자체에서 주는 각종 생활지원금으로 살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되면 의료보호 1종 수급자가 될 수 있다. 강주혜 정대협 사무처장은 “지원금을 모두 합치면 150만~180만원 정도 된다.”면서 “최소한 경제적 문제만큼은 해결된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기만 하다. 한국 정부가 문제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강 사무처장은 “정부가 특별기구를 구성하는 등 노력하지 않으면 문제 해결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징용자 문제는 더 심각하다. 규모 파악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자진상규명위원회가 피해자를 대상으로 접수하고 있지만 이조차 제대로 된 통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 자료를 보면 1939년부터 44년까지 조선반도에서 끌고 가려 계획했던 인원이 80만명 정도다. 김광열 광운대 일본학과 교수는 “규명위가 파악한 23만명은 조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접수만 해놓은 것”이라면서 “국가가 징용자 피해에 대해 기초 연구를 시행해서 전모를 모두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징용 피해자에 대한 정부지원은 극히 적다. 태평양전쟁 피해희생자 전국연합회에 따르면 현재 의료비 지원 외에 피해 보상이 되고 있지 않다. 희생자 유족에게 2000만원을 보상하는 것도 1945년 이전에 외국에서 사망한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최용상 사무총장은 “징용자 문제는 위안부 문제와 달리 공론화도 안 됐고, 피해자 진상규명도 요원하다.”면서 정부지원을 촉구했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한·일100년 대기획] 아물지 않는 전쟁 상흔

    [한·일100년 대기획] 아물지 않는 전쟁 상흔

    한·일 관계에서 원자폭탄 피해자를 비롯해 위안부,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는 과거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모두에게 잊혀져 가고 있지만 잊을 수 없는 역사의 과제이다. 아물지 않은 상처는 살아남은 자와 그들의 죄 없는 자녀들 몫이 됐다. 피해자들은 정부의 무관심과 일본의 외면, 사회의 편견등 겹겹의 고통속에서 살고 있다. 광복과 종전 65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피해자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대를 잇는 아픔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짚어 보고, 앞으로 우리가 취해야 할 방향을 살펴본다. ●국내환우 150여명 10세이전 사망 한국원폭2세 환우회장 한정순(52)씨는 넓적다리에 혈액순환 장애로 인해 인공관절 수술을 두 번이나 했지만 여전히 거동이 불편하다. 20여년간 섬유공장에서 일하다 보니 팔 연골에 이상이 생겨 이젠 직업을 구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에게 몸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은 뇌성마비를 갖고 태어난 아들이다. 올해 스물여덟 살인 아들은 1급장애로 간단한 대화정도만 가능한 상태. 그는 “엄마 피를 받아 저렇게 아픈가 싶어 마음이 항상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처럼 무겁고 아립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같은 제 몸 하나조차 움직이기가 힘든데 아들까지 무슨 죄가 있어서 저런 병을….”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부모는 생계 때문에 일본 히로시마로 건너갔다가 각각 19세와 28세가 되던 해에 원폭 피해를 입었다. 이후 태어난 그의 오빠 2명은 심근경색을 앓고 있고, 언니 둘은 피부병과 다리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아들과 본인의 병으로 남편과 불화가 잦았던 한씨는 이혼한 뒤 아픈 몸을 이끌고 간병인 일을 하며 근근이 지내고 있다. ●빈혈 발생확률 일반인의 88배 원인 모를 병마에 ‘대 이은 고통’을 겪는 것은 비단 한씨만의 일이 아니다. 일본 정부와의 기나긴 싸움 끝에 어렵게 원호수당을 받고 있는 원폭피해 1세대들과 달리 2, 3세 환우들은 우리나라와 일본 정부의 무관심 속에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 한국원폭2세 환우회에 따르면 한씨와 같은 원폭 피해자 2~3세는 1만여명(추정)이나 된다. 이 가운데 국가인권위원회가 2004년 원폭피해 2세 1226명을 대상으로 건강실태를 조사한 결과 남성의 경우 빈혈 발생확률이 일반인의 88배에 달했다. 심근경색·협심증이 81배, 우울증은 65배, 천식은 26배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원폭피해 2세 중 7.3%(300명)는 사망했고, 사망당시 연령이 10세 미만인 경우가 52.2%를 차지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심진태 합천지부장은 “일본 정부는 원폭 피해문제가 1세대에서 끝나기만을 바라고 미국이나 우리나라도 책임을 회피하려는 상황이기 때문에 유전성 입증은 쉽지 않다. 하지만 발병률이 이렇게 높은 만큼 2세들의 의료비 지원이라도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최초로 자신이 원폭2세 환우임을 밝힌 고(故) 김형율씨도 생전의 대부분을 병실에서 보냈다. 그는 태어난 지 20일이 될 때부터 선천성 면역글로불린결핍증을 앓다 2005년 34세로 숨을 거뒀다. 하지만 그는 짧은 생애 동안 정부에 호소해 원폭피해자들의 기초현황과 건강실태 조사를 이끌어내고 2세 환우들의 인권 운동에 앞장섰다. 김씨의 부친인 김봉대(74)씨는 “아직도 고통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데 정부는 피해자들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국적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다.”고 울먹였다. ●“지원 특별법 조속통과를” 호소 원폭 피해 1세대들에 대한 지원도 민간차원의 수준에 그치고 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은 한국인은 7만여명. 이 가운데 2만 3000여명이 귀국했는데 3월 현재 2662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의 지원은 거의 없고, 일본이 정부차원이 아니라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국내 피폭자들에게 1인당 원호수당 월 45만원가량과 연간 194만원 한도의 진료비 등을 지급하고 있다. 이 때문에 1, 2세대 원폭피해자들과 시민단체 등은 ‘특별법’제정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한나라당 조진래 의원이 발의한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와 그 피해자 자녀의 실태조사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이 조속히 통과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진경숙 한국원폭2세 환우회 사무국장은 “혹시나 누가 알까 싶어 아프다고 말도 못하고 사는 원폭 2, 3세들에게 정부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도움”이라며 신속한 법안통과를 호소했다. 백민경기자 white@seoul.co.kr
  • [한ㆍ일 100년 대기획] 청산되지 않은 과거

    [한ㆍ일 100년 대기획] 청산되지 않은 과거

    독도와 역사왜곡 문제는 건전한 한·일 관계에서 결코 우회할 수 없는, 치명적인 현안이다. 미래의 100년을 위한 동반자적 양국 관계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우호 증진의 기폭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 광복과 종전 65년이 지났지만 일본은 여전히 이를 두고 도발적인 책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일본의 극우 보수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이 같은 반역사적 도발은 한·일 양국의 미래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로 작용한다. 독도는 우리 땅이고, 대한민국은 고조선 이래로 반만년의 역사를 지켜온 자주 국가이다. 이것이 한국인이 갖는 영토 개념이고, 역사 인식이다. 일본의 정권이나 시민단체가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무시하며 도발했을 때 우리 국민들은 일제히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독도에 대한 실효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우리가 이미 갖고 있고 역사 문제는 내정의 측면이 있는 만큼, 한국과 일본을 분쟁지역으로 두드러지게 만드는 게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며 ‘조용한 외교’를 주장한 학자들이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그만큼 독도와 역사왜곡 문제는 국가적 자존심을 흔드는 문제였다. 그런데 2001년 4월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왜곡된 역사교과서가 일본 문부성 검정을 통과하고 2005년 3월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독도)의 날’ 조례를 제정한 뒤 세월이 흐르면서 두 문제를 푸는 방식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독도 문제는 현대 국가의 근간인 ‘영토’ 개념을 침범한 것이기 때문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되지만, 역사교과서 문제는 왜곡행위를 바로잡는 한편으로 양국이 대립이 아닌 화해를 모색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양국은 2002년 3월 1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세웠고, 2007년 6월 2기 위원회를 운영했다. 이 위원회는 24일 최종보고서를 낼 계획이지만, 아직까지 공동역사교과서를 내는 방안은 합의를 보지 못했다. 3기 위원회가 설립된다면 궁극적으로 공동역사교과서를 내는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관측된다. 왜곡된 내용을 담은 후소샤와 지유샤 역사교과서를 채택한 비율은 지난해 1.71%로 미미하지만, 2001년 0.039%에서 2005년 0.39% 등으로 증가세다. 새역모 등의 활동이 꾸준히 이어지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새역모는 지난해 4월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내놓은 데 이어 다음달 초등학교 역사 과목 격인 사회교과서 검정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사회교과서가 시중에 유통되는 즉시 분석작업을 하기 위해 동북아역사재단 안에 관련 팀을 꾸렸다. 일본이 간헐적으로 독도 영유권 주장과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내놓고, 한국은 이에 대해 반박하는 모습은 곧잘 독일의 전후처리 문제와 비교된다. 전후 패전국인 독일은 나서서 사과를 하고, 프랑스나 폴란드 등 주변국가와 공동역사교과서를 내놓았다. 반면 한·일 관계에서 화해의 손짓을 먼저 내미는 쪽은 피해국인 한국이다. 한국은 1998년 일본문화 개방이라는 결단을 내렸고, 최근 양국의 동반자적 관계 설정에 적극적인 것도 우리 측이다. 때때로 한국 측 대일 협상 대상자를 상대로 ‘지일’(知日)이라든지 ‘친일’(親日) 논란이 나올 정도이다. 동북아역사재단 이명찬 연구위원은 “역사문제는 존재의 문제와 직결된다.”고 말했다. 2차세계대전의 전범과 이후의 경제성장을 이룬 원로층이 동일인인 일본의 특수한 상황에서 이들의 후손인 일본 지도층이 ‘주인공이 되지 못했거나 인륜을 저버린 행위를 한 역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조부를 욕하는 글로 장원급제를 한 사실을 깨닫고 평생 자기부정을 하며 떠돌게 된 것처럼, 아직도 ‘천황’체제를 유지시키고 있는 일본이 스스로의 죄과를 인정하지 못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얘기다. 이런 일본의 집단의식은 독도와 역사왜곡 문제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무관심에서 드러난다. 지난해 12월 일본의 가와바타 다쓰오 문부과학상이 “독도는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하는 등 최근까지 일본 관료들의 망언이 이어질 때마다 한국인들이 규탄하는 반면, 일본인들 중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는 소수이다. 전후 미국 중심의 외교관계에만 치중해 온 일본의 특징이자 한계로 지적되는 현상이다. 지금까지는 한국 정부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 망언에 대해 적절한 대응기술을 습득했다는 평가이다.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학문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독도 망언에 대해서는 전 국민적인 반발로 대처하는 모습이 매뉴얼처럼 내면화되어 있다. 그래서 독도는 여전히 우리 땅이고, 우리는 여전히 단군 할아버지의 후손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왜곡과 독도 문제에 대해 한층 더 단호하고 발전적인 대응이 필요한 이유는 이 문제들이 한·일 간에 청산되지 않은 부분 자체일 뿐 아니라 이 문제들로 인해 많은 숙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 일제 강제징용 문제, 원폭 피해자 문제, 일본의 헌법개정과 재무장 문제가 모두 역사왜곡과 독도 문제에서 비롯된다. 홍희경 이민영기자 saloo@seoul.co.kr
  • 日주장과 상반…對日청구권 논란 재점화

    日주장과 상반…對日청구권 논란 재점화

    │도쿄 이종락특파원│1965년 6월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한일협정)의 개인 청구권 범위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협정 제2조에는 ‘체약국 및 국민의 청구권에 관해서는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양국 및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이후 한국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3억달러’ 등의 청구권 자금을 받은 것으로 위안부나 징용피해자 등 개인의 권리침해까지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1990년대까지 청구권 여지 인정 일본 정부의 입장도 수시로 바뀌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에는 ‘개인청구권에 대해 추가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고 1990년대까지는 ‘한일협정 체결 후에도 개인의 청구권은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인과 중국인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미국 법원에 낸 소송에선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까지 포기됐다.”고 주장했는가 하면 조선인 근로자들의 미지급 임금과 한일협정 당시 무상 3억달러 지원금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피해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는 2007년 4월 “국가간 조약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실체적 권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재판상 청구권은 소멸됐다.”고 판시했다. 이후 일본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자발적인 보상을 받으려는 취지의 판결들이 늘었다. 이런 와중에 일본 외무성이 1965년 협정 체결 전후에 한일협정과 개인청구권의 관계를 법률적으로 검토했던 결과를 담은 내부 문서가 공개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상황에 따라 말을 바꿔온 일본 정부가 한일협정 체결 직전에 내부적으로 법률관계를 검토한 뒤 개인청구권이 협정 체결 후에도 유효하다고 결론을 내린 사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외교전문가 “이미 소멸” 주장도 하지만 우리 정부의 입장은 일단 부정적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14일 “정부는 1965년 당시 한일청구권에 관한 합의의사록에 명기된 8개 항목에 대해서는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입장이어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은 소멸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당시 회담에서 논의되지 않은 군위안부와 사할린 한인, 원폭피해자 문제는 개인청구권이 유효하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jrlee@seoul.co.kr
  • “잘못된 美정치절차에 대응하려 나섰죠”

    “잘못된 美정치절차에 대응하려 나섰죠”

    │워싱턴 김균미특파원│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부 출범 이후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보수성향의 풀뿌리 정치참여 운동인 ‘티 파티’에 대응하는 진보성향 정치참여 운동인 ‘커피 파티’를 한인 1.5세 여성이 조직, 주도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주인공은 워싱턴과 버지니아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제작자이자 여성운동가인 애너벨 박(41·한국명 박수현)이다. 박씨가 이끄는 커피 파티는 13일(현지시간) 미 전역 350여개의 커피전문점에서 토론회를 갖고 극단적인 파당적 성향을 보이는 현재의 미국 정치 상황과 풍토를 논의했다. 커피 파티가 오바마 행정부의 큰 정부와 재정적자 확대에 반대하는 보수성향의 티 파티에 대응세력으로 성장, 영향력을 갖게 될지 주목된다. 커피 파티는 미 의회가 부활절 휴회에 들어가는 오는 27일 처음으로 전국 총회를 열어 각 지역구 출신 의원들을 상대로 풀뿌리 의견을 대변할 것을 촉구하는 운동 방법을 협의하기로 했다. 티 파티도 이날 활동 1주년을 기념해 전국 50여곳에서 집회를 열 계획이어서 27일은 미 전역이 보수와 진보 진영 간의 논쟁으로 뜨겁게 달아오를 전망이다. 커피 파티는 박씨가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커피 파티’를 제안한 뒤 두 달 새 회원이 13만 8000명으로 급증했다. 박씨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잘못된 미국 정치 절차에 대응하고 나선 것이 커피 파티”라면서 “깨어나 일어나 미국 정부가 우리를 대표하도록 힘써 노력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9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가 텍사스와 메릴랜드에서 자란 박씨는 보스턴대에서 철학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마셜장학생으로 정치이론을 전공했다. 이후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다. 여성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지난 2007년 ‘위안부 결의안’의 미국 하원 통과 때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버지니아주 프린스 윌리엄스 카운티에서 중남미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입법의 폐해를 고발한 다큐멘터리 ‘자유 9500’으로 샤롯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위안부 결의안 121호’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도 곧 발표할 예정이다. 지난 대선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진영에서 동영상 담당자로 자원봉사활동을 했다. kmkim@seoul.co.kr
  • [사설] 日 한일협정 관련문서 전면 공개하라

    일본 정부가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한일협정) 이후에도 강제 징용자들의 개인 청구권은 유효하다는 입장을 협정 당시 정리했음을 보여주는 일본 외무성 내부자료가 확인됐다. 최근 일본에서 열린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에 제출된 ‘평화조약에서의 국민재산 및 청구권 포기의 법률적 의미(1965년 4월)’와 ‘일한 청구권조약과 재한 사유재산 등에 관한 국내 보상문제(1965년 9월)’ 등 3건을 통해서다. 이 문건들은 모두 한일청구권협정이 ‘외교보호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것이지, 개인청구권으로 국가의 채무를 충당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한일협정으로 위안부나 조선인 징용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이 모두 포기됐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일본 정부가 분명하게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이번 문건들은 일본이 한일협정 당시부터 나중에 불거질 강제징용자들의 소송과 배상문제에 미리 대비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 정부와 법원은 소송이 불거질 때마다 ‘청구권 유효’와 ‘소멸시효 종결’의 모호한 입장과 판결을 되풀이했다. 그러다가 2007년 최고재판소(대법원)의 ‘재판상 청구권소멸’ 판시 이후 희생자들이 자발적으로 알아서 보상받으라는 정부 입장과 법원 판결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내 진보적 정치인과 학자들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 왔던 한일협정의 효력과 배상문제에 일본 정부가 이제는 근본적인 입장을 정해 조치에 나서야 한다고 우리는 본다. 우리 정부는 지난 2005년 한일협정에 관한 외교문서 전량을 공개했다. 협정을 둘러싸고 지속됐던 잡음과 의혹을 씻기 위한 차원에서다. 과거사 청산을 외쳐온 하토야마 정권이 진정한 의지를 보이려면 우선 음지에 묻히고 가렸던 진실부터 양지로 끌어내 보여줘야 할 것이다. 이번 자료도 사실상 우리 정부의 협정문서 공개 이후 일본 시민단체가 나선 소송으로 2008년 공개된 자료 중 하나라고 한다. 이것 말고도 진실을 보여주는 회담 문건들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최근 과거정권의 ‘미·일 핵반입 허용’ 밀약까지 공개하고 나선 하토야마 정권이다. 형평성 차원에서도 한일협정 문서를 전면 공개할 것을 촉구한다.
  • “한일협정 후에도 개인청구권 유효”

    │도쿄 이종락특파원│일본이 지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하 한일협정) 체결 당시부터 ‘협정 체결 후에도 개인 청구권은 유효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일본 외무성의 내부 문서에서 14일 드러났다. 지난 2008년 일부 공개된 외무성의 ‘평화조약에서 국민의 재산 및 청구권 포기의 법률적 의미’(1965년 4월6일자)와 ‘일한 청구권조약과 재한(在韓) 사유재산 등에 관한 국내 보상 문제’(1965년 9월1일자) 등 내부문서 3건에 따르면 “한일청구권협정 2조의 의미는 국제법상 국가에 인정된 고유한 권리인 외교보호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것이고, 국민의 재산(개인청구권)으로 국가의 채무를 충당한 것은 아니다.”라면서 “개인이 상대국 국내법상의 청구권을 갖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일본 측이 협정체결 당시부터 위안부나 징용 피해자 등 개인의 배상청구를 위한 소송 권리마저 소멸된 것이 아니라고 본 셈이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도 포기됐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개인 소송을 통해 승소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jrlee@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11) 고노 요헤이 일본 중의원 前의장 특별인터뷰

    [한·일 100년 대기획] (11) 고노 요헤이 일본 중의원 前의장 특별인터뷰

    “장기간에, 광범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됐고,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인정됐다. 위안소의 설치·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은 옛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모집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맡았으나 감언과 강압을 쓰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한 사례가 많았다.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가담했다는 것이 명확하다. 위안소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 아래 참혹했다. 위안부는 일본을 빼면 한반도의 비중이 컸다. 결국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줬다. 정부는 종군위안부로서 큰 고통을 당하고,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드린다. 역사의 사실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역사의 교훈으로서 직시하겠다. 같은 잘못을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 고노 요헤이 담화 요지 1993년 8월 4일 │도쿄 박홍기특파원│지난 1993년 8월4일 ‘고노 담화’는 2년 뒤인 95년 8월15일 ‘무라야마 담화’로 이어졌다. 고노 담화는 인권을 짓밟고 유린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 반성한 ‘사건’으로 한·일 양국의 과거사 청산을 위한 단초를 제공하는 등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담화를 발표한 장본인인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은 지난달 18일 도쿄 토라노몽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특별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상처받은 많은 분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생활하는 것에 대해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거듭 담화의 취지를 밝혔다. 고노 전 의장은 지난해 7월 중의원 해산과 동시에 정계를 은퇴한 뒤 처음 외신과의 인터뷰에 응했다. →1993년의 고노 담화는 한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담화 발표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위안부 피해자인 당사자들을 찾아 경험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당사자들은 과거를 말하고 싶지 않아했다. 그러나 서로 시간을 가진 끝에 신뢰감이 쌓여 갔다.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시점에서조차 당사자들이 입을 다물고 세상을 떠난다면 영원히 묻혀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대화가 가능했다. 귀중한 경험담을 들었다. 명쾌한 자료는 발견할 수 없었으나 당사자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한 자료가 진실성이 높다고 판단, 발표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정부 차원에서는 1965년 한·일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공식적인 것들은 이미 끝났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는 분명한 사실이다. 당사자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는 점에서 일본은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일은 하고자 했다. →고노 담화는 자민당 내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2007년 당시 아베 신조 총리는 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인했는데. -아베 전 총리는 항상 부인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대부분의 국민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진실이다.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은 아직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피해자들 중에도 여러 입장이 있다. 명예를 중히 여겨 사죄를 요구하시는 분, 과거의 사실을 나름대로 인정받아 전에 비해 한이 좀 풀렸다는 분 등등. 한 가지의 형태로 묶어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의 대통령이나 외교장관과 대화를 나눴을 때 일본이 사실을 사실로 시인하면 그 이후는 한국 정부의 일로서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분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일본은 사죄하는 기분, 감정을 잘 전달해야 한다. 정부로서는 대응에 한계가 있어 민간단체를 구성, 뜻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이 점에 대해 이해 받고 싶다. 거듭 밝히지만 일본의 잘못된 행동 탓에 상처받은 많은 분들이 무거운 부담을 지고 살아가는 데 대단히 죄송하다. →올해 100년이 된 병탄의 역사적 의미는. -현역에서 물러나 있으므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할 뿐이다. 오카다 외무상이 방한해 밝힌 발언과 내 의견이 다르지 않다.(오카다 가쓰야 외무상은 지난달 11일 방한 때 “한국인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 자긍심이 깊이 상처받은 일이었다. 합병 당한 측의 아픔을 기억하고 피해자의 기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일 간에는 ‘독도, 역사교과서, 야스쿠니신사 참배’라는 이른바 ‘3점 세트’가 있다. 해법을 찾는다면. -현재 상태에서 완전한 해결은 어렵다고 본다. 무엇보다 양국 정치권에 바란다. 해결될 때까지 예민한 부분은 자극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싶다. →현재의 한·일관계는. -좋다.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 한국의 대통령도 대단히 노력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병탄 100년을 맞아 새로운 한·일 관계의 이정표를 만들 방안은. -양국 사이에 협력의 의지를 명확히 했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양국 정상의 합의도 중요하다. 여러 면에서 협력하고 관계를 이뤄 나가야 한다. 민간차원에서는 영화나 음악 등 이미 활발하게 교류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것들은 더욱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때의 일본 문화 개방은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정부차원에서 ‘이것은 옳다, 이것은 그르다.’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니 양국 상호 간 좋은 것들을 교류, 흡수해 나갔으면 좋겠다. 문화라는 것은 섞였을 때 더 강해진다. →일본과 북한의 과거 청산, 국교 정상화를 향한 진전이 없다.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아직 정상화될 상황에 있지 않다. 북한과의 과거청산을 위해서는, 예를 들어 일본의 경제적 보상 및 지원 등 여러 조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일본 국민의 이해를 먼저 얻어야 한다. 납치 문제는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상태로는 정부 간의 교섭은 불가능하다. 가능한 한 빨리 납치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북한은 일본의 피해자들이 납득할 만한 설명과 행동을 해야 한다. →동북아시아의 관계는 복잡하다. 중국의 부상에 따른 한국·일본의 역할은. -국제사회에서는 어느 한 나라도 자국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예를 들어 환경,식량 등 지구적 규모의 문제들은 모든 국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몇 개의 국가 또는 전세계가 협력해 해결에 나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과 일본, 중국은 긴밀히 협력하고 노력해야만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을 한국에 초대하겠다고 밝혔는데. -조건이 갖춰지면 당연히 좋은 일이다. 이웃 나라로서 더더욱 그렇다. 양국 간에 좋은 조건을 만든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일본에서도 여론이 천황(표현대로)의 방한을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쪽으로 형성돼야 하고, 한국에서도 천황의 방한에 대한 의미를 바르게 받아들여진다는 전제 아래 추진돼야 한다. 즉, 조건이라기보다 양국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위에 진행돼야 한다는 말이다.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의 지방정치참정권 부여에 대한 찬반이 뜨겁다.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어떤 것이 옳은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일치하지 않고 있다. 민주당 안에서조차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권 안에서도 오랫동안 토론하고 있지만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도 신중한 결론을 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기본적으로 찬성한다.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단순히 관광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상대 나라를 알고, 진정한 의미의 친구가 되길 바란다. 단지 책을 읽거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방적으로 추측하거나, 개인적으로 결론을 내리지 말고 같은 시대 사람들끼리 직접 만나서 친구가 되고, 이야기하고, 의견을 나누며,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깊게 교류하길 바란다. 글 사진 hkpark@seoul.co.kr
  • [사설] 일본 정부 과거사 배상 공식화하라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가 한·일 과거사 문제를 순차적으로 보상하겠다는 뜻을 비공식적으로 표명했다는 내용이 어제 보도됐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 중인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측의 전언에 따르면 하토야마 총리는 올초 일본을 방문한 미국의 한 중진의원과의 극비면담에서 이런 입장을 전달했다고 한다. 일본 관방장관은 “일본 정부는 지금 그 문제에 대해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부인했지만 비공식, 극비면담 등의 전제가 붙어 있어 총리 발언의 진위에 대한 최종 판단은 유보할 필요가 있다. 이 발언이 총리 개인의 소신을 밝힌 것이라 해도 미래를 향한 한·일 관계를 열어가는 전향적인 태도 변화의 단초가 될지 주목할 만하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상에 따라 정부 차원에서의 피해 보상 의무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무라야마 전 총리가 1995년 식민지 지배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죄의 뜻을 밝혔지만 강제징용,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과거사 배상 문제는 법을 앞세워 철저히 외면해 왔다. 독일 정부가 법적인 책임과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2차 대전 피해자들에게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사과와 배상을 한 것과는 딴판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지난해 9월 취임한 민주당의 하토야마 총리는 한·일관계의 새로운 지평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하토야마 총리가 지난해 10월 방한 당시 “역사를 직시하겠다.”고 했던 발언의 무게는 엄중하다고 우리는 믿는다. 일각에선 하토야마 총리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선도 있다. 후생성 연금탈퇴수당 99엔 지급, 재일교포 지방참정권법안 무산, 조선학교 고교 수업료 무상화 대상 제외 등 일련의 사건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이 시점에서 하토야마 총리의 결단이 중요하다. 그가 강조하는 새로운 한·일관계와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현실화하려면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그에 합당한 피해 보상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이왕 할 거라면 비공식적 루트가 아니라 공식적으로 해야 한다. 과거사 보상에 반대하는 우파와 국민이 두려워 뒤에서 쉬쉬하거나 혹은 여론 무마를 위한 립서비스 차원이라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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