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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다리 걷어차기/장하준 지음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경제발전을 도모하던 시기엔 보호관세와 정부보조금을 통해 산업을 발전시켜 놓고 정작 지금에 와선 후진국들에 자유무역을 채택하고 보조금을 철폐하라고 강요한다.과거 자신들은 여성,빈민,저학력자,유색인종에 대해선 투표권조차 주지 않았으면서 지금은 후진국들에 민주주의가 자리잡지 못하면 경제가 발전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준(경제학) 교수는 자신의 저서 ‘사다리 걷어차기’(원제 ‘Kicking away the Ladder’,형성백 옮김,부키 펴냄)에서 후진국 및 개발도상국을 위한 선진국의 경제처방을 정면으로 반박한다.보호무역주의를 바탕으로 성장한 선진국들이 이제 와서 일방적인 세계화를 강조하는 태도는 자신이 밟고 올라온 사다리를 스스로 걷어차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2002년 영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지난해 제도경제학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뮈르달상’을 받은 화제작이다. 저자는 먼저 무역·투자자유화 논리에 숨어 있는 선진국의 이기주의적 의도를 고발한다.특히 영국의 성장신화 속에 감춰진 은밀한 역사를 파헤친다.저자에 따르면 ‘자유무역국가 영국’의 이미지는 완전히 허구다.영국은 중세 이후 13∼14세기까지만 해도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보다 경제력이 떨어졌다.그런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유치산업 보호정책을 펼쳤다.당시 영국의 주력 산업은 양의 원모와 ‘짧은 옷감(short cloth)’이라 불린 모직 옷감을 수출하는 것이었다.에드워드 3세 시절의 ‘국산품애용운동’ 이래 영국의 모직업은 꾸준히 발전해 엘리자베스1세 시대엔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영국의 산업혁명은 바로 이같은 모직업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식민지 국가들은 말편자의 못도 만들지 못하게 하라.”는 영국 정치가 대(大) 피트의 말은 영국이 얼마나 철저하게 보호주의정책을 펼쳤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영국은 19세기 경제 최강국의 자리에 오르자 자유무역의 장점을 역설하고 나섰다.저자는 영국의 곡물법 폐지 등 일련의 조치를 농업상품 및 원자재 시장을 확장함으로써 유럽대륙의 산업화를 저지하려는 ‘자유무역 제국주의’적 행위라고 비판한다.이런 위선적 행태는 물론 영국에만 특유한 게 아니었다.‘근대 보호주의의 모국이자 철옹성’으로 불린 미국은 발명품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 않는 등의 절차적 수단을 통해 외국인의 특허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미국 역시 선진국 대열에 오르자 영국과 마찬가지로 자유무역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처럼 자기 편한대로 왔다갔다하는 ‘박쥐외교’를 비판한다.나아가 선진국들이 내세우는 ‘글로벌 스탠더드’도 금과옥조로 여기지 않는다.우리와 비슷한 단계에서 선진국들이 어떤 정책과 제도를 썼는지를 살펴보고 현재의 여건에 맞는 정책과 제도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1만 2000원. 김종면기자˝
  • [마당] 예술가의 거짓말/백지연 문학평론가

    한여름처럼 뜨겁고 나른한 휴일의 늦은 저녁에 영화를 보러 나섰다.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바람의 전설’을 보고 싶어서 전날부터 마음먹었던 일정이었다.한낮의 날씨가 덥다 못해 습하다 싶더니 출발하면서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빗길을 핑계삼아 여기저기 헤매면서 뒤늦게 영화관에 당도했다.영화관 내부는 적당히 한산하고 따뜻했으며 여가를 즐기러 나온 가족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엉겁결에 춤의 쾌락에 빠져들어 ‘제비’가 되어버린 한 남자의 인생유전을 다룬 영화는 시종일관 매혹적인 춤의 장면들을 동원하여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몇몇 인상적인 배우의 연기들도 있었고 적당히 신파적인 장면들도 있어서 실소를 머금게 했다.결국 영화는 주인공으로 인해 춤추는 즐거움을 알게 된 여성이 행복한 표정으로 춤을 추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의 주인공 ‘풍식’은 수완좋은 ‘프로 제비’의 삶을 살지만 그 스스로는 자신의 삶을 ‘예술’로 여긴다.그가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것은 누군가 자신을 ‘제비’로 부르는 것이다.어쨌든 그가 자처했던 예술가의 진실은 냉혹한 ‘프로 꽃뱀’에 의해 철저히 짓밟힌다.감독은 풍식의 거짓말에 대해 더 이상 파고들지 않은 채 ‘몰입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인간을 구원한다는 메시지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바람의 전설’은 따뜻한 감동의 세계를 호소하고 있지만 실제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성석제의 ‘소설 쓰는 인간’은 영화와 사뭇 다른 거짓말의 세계를 보여준다.영화에서 유일하게 풍식을 신뢰했던 여형사는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자신의 삶이 한 편의 소설 이상으로 드라마틱하다고 허풍을 떠는 소설 속의 풍식은 시니컬한 거짓말쟁이임을 자처한다.영화의 풍식은 춤상대로 삼은 여인들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베풀었다고 자부하지만 소설의 풍식은 단지 최선을 다했다고 이야기할 따름이다.그는 순전히 권태를 이기고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춤을 춘다고 고백한다. 성석제의 소설은 춤의 세계에 관한 화려한 입담들이 완벽한 거짓말의 세계임을 암시한다.예술의 존재 이유에 대한 유쾌한 비유일 수 있는 이 작품은 예술가의 거짓말을 다채롭게 해석하고 있다.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각주와 춤에 대한 참고문헌은 모두 가상의 것이다.문학이란,혹은 예술이란 이렇듯 유쾌한 거짓말들을 통해 변주되는 세계라는 것이 작가의 신념이다. 예술가의 악의없는 거짓말이 인간을 진심으로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의 세계가 현실과 끊임없이 길항하기 때문일 것이다.섣불리 진실을 약속하거나 감동을 약속하지 않는 것,삶에 대한 위선적인 환상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좋은 거짓말의 세계이다.진실로 포장된 그 무수한 가짜들의 껍데기를 스스로 비웃을 수 있다는 것,그것은 예술가의 명랑한 거짓말이 주는 선물이다. 짧고 숨가쁜 선거 유세의 기간 동안 우리는 길거리에서,공원에서,시장에서,신문과 방송에서 대놓고 ‘진심’을 호소하는 악의적인 거짓말의 세계를 너무 많이 만났다.어떤 진심은 듣기만 해도 낯이 뜨거워지는 가짜의 수사들로 가득차 있었다.‘만약…한다면’의 가정법을 빌려 호기롭게 남발한 그들의 위태로운 공약은 앞으로 얼마나 실현될 것인가.신뢰를 잃어버린 정치인들의 호언장담은 새삼 예술가들이 들려주는 유쾌하고 시니컬한 거짓말의 힘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백지연 문학평론가˝
  • [마당] 이미지와 감성정치/유성호 한국교원대 문학평론가 교수

    ‘악어의 눈물’이란 말이 있다.나일 강에 사는 악어가 사람을 잡아먹고 난 후 눈물을 흘린다는 이집트 전설에서 비롯된 말이다.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도 여러 번 인용하고 있는 이 말은 위선자의 거짓 모습을 비유할 때 흔히 사용된다. 특히 선거에 이긴 정치인이 패배한 정적(政敵) 앞에서 가슴 아픈 표정을 지을 때 많이 쓰인다.실제로 악어는 먹이를 먹을 때 눈물을 흘리는데,이는 눈물샘 신경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악어의 눈물’은 감동이나 참회의 순간에 솟구치는 진실한 눈물이 아니라,전략적이고 계산적인 속내에서 나오는 건조한 물질일 뿐이다. 지난주에 막을 내린 제17대 총선에서 각 정당의 지도자들은 ‘눈물’과 ‘읍소(泣訴)’를 통해 감성과 이미지 중심의 선거운동을 했다.이를 두고 상대방에서는 ‘악어의 눈물’이니까 속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일급 경계령을 내렸다.이러한 감성과 이미지의 정치는 당사를 천막이나 공판장으로 옮겨 부패와의 절연을 상징적으로 보인다든가,삼보일배 장면이나 회초리 맞는 방송 광고를 통해 그동안 민의를 등진 것에 대해 참회하는 모습을 보인다든가,단식이나 전격 사퇴 등을 통해 실언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든가 하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따지고 보면 모두 선거의 핵심 장치인 정책과 비전 제시보다는 유권자의 감성과 이미지에 호소하는 것들이었다. 이같은 감성과 이미지 중심의 정치 혹은 선거 문화를 향해 이 나라 주류 언론들은 한결같이 강력한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정책과 인물을 통한 승부가 아니라,감성과 이미지 정치로 선거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된 논지였다. 대중의 합리적 선택을 가로막고 집단적 최면을 부추기는 ‘눈물’과 ‘읍소’의 포즈에 대한 이러한 경계와 비판은 그 자체로 매우 정당한 것이다.특히 미디어 선거가 본격적으로 뿌리내린 이번 선거에서 이 같은 이미지 메이킹의 범람은 진정한 대의 민주주의의 정착에 일정한 역기능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이같은 감성과 이미지 중심의 선거문화를 적극적으로 부추기고 확산시킨 것 또한 언론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론의 확연한 이중성을 발견한다.우리 주류 언론은 ‘탄풍’ ‘박풍’ ‘노풍’ ‘추풍’ 등 온갖 조어(造語)를 만들어가면서 선거 유세 현장의 감성적 이미지 확산과 상징 조작에 공을 들였고,한편으로 각 정당더러는 이미지 정치를 삼가라고 권고하였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감성이나 이미지가 합리성과 반드시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감성과 이성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인간의 판단 행위를 상보적으로 규율하기 때문이다.그리고 이미지를 완전히 거세한 순수 객관의 실체는 정치문화에 존재하지 않는다.정책정당임을 자임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대표조차도 지난 대선에서 “여러분 행복하십니까.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감성적 언어로 진보정치를 친숙하게 체험하도록 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감성 속에 담긴 내용일 것이다.이번 선거에서 국민들은 진정한 참회가 없는,정치적 계산만 있는,지역주의의 부활을 호소하는,때늦은 ‘악어의 눈물’만은 철저하게 외면했다.이번 선거에서 우리가 얻은 또 하나의 성과이다. 유성호 한국교원대 문학평론가 교수 ˝
  • 儒林(6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공자는 말하였다. ‘선비는 자기와 같은 부류라 해서 무조건 친하지 않고,자기와 다른 부류라 해서 무조건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와 다른 부류는 배척하지 않았던가.그러므로 나는 선비이면서도 선비의 길을 지키지 못한 위선자였다.내 자신은 군자를 꿈꾸고 있으면서도,실상 나는 소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쉴새없이 흔들거리는 수레에 몸을 맡기면서 조광조는 심사숙고하였다. 내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완전한 군자였다.한훤당은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고치려고 노력하였던 선비였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그들에게서 좋은 점은 가려서 따르고,좋지 못한 점은 거울삼아 고치기 때문이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스승 한훤당은 비록 제자라 할지라도 좋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 이를 고치려고 애를 썼던 참 선비였다.실제로 한훤당은 17세의 제자 조광조에게 ‘네가 나의 스승이로구나.’하고 말하였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루는 한훤당에게 꿩을 선물로 주고 간 손님이 있었다.고달픈 유배생활에 몸보신하라고 준 선물이었던 것이다.그러나 효성이 지극한 한훤당은 꿩을 보자 문득 한양에 있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유난히 꿩고기를 좋아하는 어머니에게 주고 싶어 한훤당은 직접 꿩의 털을 뽑고,내장을 꺼내어 고기를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솔개 한 마리가 햇볕에 말리는 꿩고기를 물고 사라져버린 것이었다.얼마 후 이를 알게 된 한훤당은 화가 나서 집에 있는 계집종을 불러다가 꾸짖기 시작하였다. “네 이년,내가 그토록 이르지 않았더냐.혹시 개나 고양이가 먹을지 모르니 주의해서 지키라고 신신당부하였거늘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어 그것 하나 지키지 못하였단 말이냐.” 옆에는 조광조를 비롯하여 최수성 등 몇 명의 제자들이 있었으나 스승은 화를 참지 못하였으며,계집종은 땅에 무릎을 꿇은 채 울기만 할 뿐이었다. 본인의 심정이야 어떻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좀 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지엄하신 스승이었으므로 제자들은 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어느 정도 노여움이 가라앉은 후 조광조가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선생님,선생님께오서 노모를 봉양하시려는 정성이 간절하다는 것은 저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일찍이 공자께오서는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자를 보면 마음 속으로 스스로를 반성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고 하였습니다.선생님께오서 효성이 지극하다 하더라도 군자가 하는 말은 언제나 가려서 해야 할 줄 압니다.선생님께서 어질지 못한 말씀을 하신다면 저희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 한훤당은 일어서서 조광조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마침 스스로 후회하고 있었는데 너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심히 부끄럽구나.이제야 알겠으니 이제야 네가 나의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못되는구나.” 기록에 의하면 이때부터 한훤당은 조광조를 더욱 아껴 애지중지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모습을 송시열은 심곡서원기(深谷書院記)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광조 선생의 자질은 이처럼 탁월하고 한훤당 역시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어 사제 간에 서로 계발된 바가 있었다.아직까지 희천에 살고 있는 늙은이들 간에 이 이야기는 전해오며 미담으로 삼고 있다.”˝
  • 儒林(6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6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공자는 말하였다. ‘선비는 자기와 같은 부류라 해서 무조건 친하지 않고,자기와 다른 부류라 해서 무조건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와 다른 부류는 배척하지 않았던가.그러므로 나는 선비이면서도 선비의 길을 지키지 못한 위선자였다.내 자신은 군자를 꿈꾸고 있으면서도,실상 나는 소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쉴새없이 흔들거리는 수레에 몸을 맡기면서 조광조는 심사숙고하였다. 내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완전한 군자였다.한훤당은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고치려고 노력하였던 선비였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그들에게서 좋은 점은 가려서 따르고,좋지 못한 점은 거울삼아 고치기 때문이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스승 한훤당은 비록 제자라 할지라도 좋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 이를 고치려고 애를 썼던 참 선비였다.실제로 한훤당은 17세의 제자 조광조에게 ‘네가 나의 스승이로구나.’하고 말하였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루는 한훤당에게 꿩을 선물로 주고 간 손님이 있었다.고달픈 유배생활에 몸보신하라고 준 선물이었던 것이다.그러나 효성이 지극한 한훤당은 꿩을 보자 문득 한양에 있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유난히 꿩고기를 좋아하는 어머니에게 주고 싶어 한훤당은 직접 꿩의 털을 뽑고,내장을 꺼내어 고기를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솔개 한 마리가 햇볕에 말리는 꿩고기를 물고 사라져버린 것이었다.얼마 후 이를 알게 된 한훤당은 화가 나서 집에 있는 계집종을 불러다가 꾸짖기 시작하였다. “네 이년,내가 그토록 이르지 않았더냐.혹시 개나 고양이가 먹을지 모르니 주의해서 지키라고 신신당부하였거늘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어 그것 하나 지키지 못하였단 말이냐.” 옆에는 조광조를 비롯하여 최수성 등 몇 명의 제자들이 있었으나 스승은 화를 참지 못하였으며,계집종은 땅에 무릎을 꿇은 채 울기만 할 뿐이었다. 본인의 심정이야 어떻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좀 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지엄하신 스승이었으므로 제자들은 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어느 정도 노여움이 가라앉은 후 조광조가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선생님,선생님께오서 노모를 봉양하시려는 정성이 간절하다는 것은 저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일찍이 공자께오서는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자를 보면 마음 속으로 스스로를 반성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고 하였습니다.선생님께오서 효성이 지극하다 하더라도 군자가 하는 말은 언제나 가려서 해야 할 줄 압니다.선생님께서 어질지 못한 말씀을 하신다면 저희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 한훤당은 일어서서 조광조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마침 스스로 후회하고 있었는데 너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심히 부끄럽구나.이제야 알겠으니 이제야 네가 나의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못되는구나.” 기록에 의하면 이때부터 한훤당은 조광조를 더욱 아껴 애지중지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모습을 송시열은 심곡서원기(深谷書院記)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광조 선생의 자질은 이처럼 탁월하고 한훤당 역시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어 사제 간에 서로 계발된 바가 있었다.아직까지 희천에 살고 있는 늙은이들 간에 이 이야기는 전해오며 미담으로 삼고 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9)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下)

    흔히 진주를 한국 인권의 고향이라 말한다.1862년 류계춘과 그의 동지들이 주도했고 한국 최초의 농민 생존권 투쟁이 된 ‘임술년 농민항쟁’과 1923년 ‘형평사 운동’이 진주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003년은 형평운동 80주년이었고,지난 1993년에는 해방 후 처음으로 진주에서 형평운동 70주년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다.백정해방운동을 백정이라는 특수 신분의 해방 운동으로 기념하는 데 그치지 말고,보다 폭넓은 인간의 불평등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한 계기로 삼자는 뜻이었다.인권문제에 애정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 형평기념탑을 세우고,인권 문제에 관한 국제 회의도 열어 70년 전 일제 때에 시작된 형평운동 정신을 새롭게 하는 일을 논의하였다.일본에서는 일본의 백정에 해당하는 부락민(部落民) 다수와 부락민의 인권과 차별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부락민의 생존권을 돕고 일본사회의 차별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락해방인권연구소 관계자들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강상호와 장지필의 이름과 생애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그 이전에는 국내의 극히 적은 연구자들에 의해 간신히 이름과 생애가 이야기되고 있었을 뿐이었다.다행스럽게도 강상호는 진주를 대표하는 부자이며 명문가 출신인데다 후손들이 진주 지역에 살아 있었기에 그에 대한 연구 자료는 풍부한 편이었다.그러나 장지필의 경우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아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한국의 후예들은 공식참배 안해 형평운동 70주년 국제 행사 이후 한 해에 두 차례씩 일본 부락민들이 강상호의 무덤을 참배하는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일본 부락민들의 강상호 무덤 참배 때마다 안내자로 참석해온 필자는 올봄 그의 아들 강인수씨와 둘이서만 참배를 했다.참배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 최초의 인권해방운동 선구자는 차도 옆에 누워서 자동차 굉음과 흙먼지,행인들이 내던지는 오물,그 보다 더 심한 무관심 속에서 초라하게 삭아가고 있었다.아들은 여유없는 그의 노년을 부끄러워할 뿐 말이 없었다.한국의 백정 후예들이 강상호 무덤을 공식적으로 참배했다는 이야기도 아직 듣지 못하였는데,이 역시 안타깝다. 형평사 운동이 시작되던 1923년 당시 한국에는 40여만 명의 백정들이 살고 있었는데,백정의 원류는 고구려의 영토 확장 때 생겨난 전쟁 포로나 귀순자들이라고 한다.그들은 고구려로 온 뒤 주로 변방에서만 살았는데,‘삼국사기’는 이들이 모여 살았던 곳을 부락(部落)이라 불렀음을 적고 있다.‘280년(서천왕11)에는 숙신을 공격하여 주민 600호를 옮기고 항복한 부락 예닐곱 곳을 부용으로 삼았다’는 것이다.원래 부락은 흉노족이 사막지대에서 떼를 지어(部) 천막을 치고 정착한 곳(落)을 의미했다.고려 때는 고구려에 복속당한 북방 유목민들의 후예인 수척(水尺),양수척(揚水尺),화척(火尺)들이 살던 곳을 부락이라 불렀다.이런 예를 두고 볼 때 부락은 원주민과 다른 족속이 집단을 이루고 사는 곳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겠다. 일제 식민지 이후 총독부는 한국 민속을 파괴하고 마을이나 산의 지명을 바꾸는 것으로 정체성을 소멸시키려 하였다.그 과정에서 한국 고유어인 ‘동네,마을’ 대신 ‘부락’을 쓰게 하였는데,일본의 부락과 부락민이 일본인들로부터 차별 멸시당하듯이 한국인 전체를 부락,부락민으로 취급함으로써 식민지배의 우월성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백정들의 거주지를 부락이라 불렀던 것과 일본의 부락민들이 사는 곳을 부락이라 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있겠다. ●일반인들의 생활언어도 사용못해 당시에 백정들은 갓 대신 패랭이를 써야 했고,상투머리엔 반드시 검은 띠를 둘러 백정임을 표시해야 했다.백정 여자들은 언제나 검정색 물들인 치마를 입어야 했고,비단옷이나 양반들이 입는 두루마기며 도포를 입어서는 안되었다.기와집에 살 수 없었으며 세 칸 이상의 넓은 집은 갖지 못했다.또,백정들끼리만 결혼할 수 있었고,혼인할 때 신부는 가마를 타지 못하고 신랑은 말을 탈 수 없었다.서당이나 향교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글을 배워서도 안되었다.죽은 뒤에도 상여에 관을 얹지 못하며,거적대기에 말아 매장하되 일반인 무덤보다 높은 곳에는 봉분을 짓지 못했다.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일반인 소년이나 아이에게 백정은 존댓말을 써야 했고 공공장소를 지날 때는 허리를 숙인 채 빠르게 뜀박질하여 지나가야 했다.이러한 법이나 관습을 어길 경우에는 때와 장소와 상관없이 일반인으로부터 처벌받아야 하고,같은 죄를 다시 범한 백정은 중형에 처해졌다.심지어 일반인들의 생활 언어를 사용하는 것까지 금했다.백정들의 삶은 온갖 금지와 차별의 울타리 안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정마을은 전국 주요 행정관청이 있는 곳에 만들어졌는데,각 지방관아와 병영에서 필요로 하는 육류와 피혁을 손쉽게 얻기 위해서였다.특히 향교가 있는 지역에서는 봄·가을에 있는 공자와 유교 선현들께 올리는 제사 음식 중에 반드시 필요로 하는 육류와 육류를 가공하여 만든 제수를 공급받기 위해 백정을 꼭 필요로 했다.따라서 숙종 연간만 하더라도 백정은 일종의 관노비였다.그 후 조선사회 신분제도와 경제토대의 붕괴로 지방 토호들이 백정을 사노비화하면서 백정들의 사회 진출이 시작되었다.그러나 대부분의 백정들은 철저한 문맹과 궁핍으로 최하층민의 가련한 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백정들에게는 무거운 의무만 있고 사람답게 살 권리가 없었다. 강상호는 백정들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임을 절감했다.그리고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질타하였다.인간은 평등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사는 삶이야말로 고귀하다고 외쳤다.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기 때문이며,미래를 위해 인간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고 굳건히 믿었다. 1923년 봄 진주에서는 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 시작되었다.이 운동에는 백정 출신들과 함께 일반 지식인들도 참여함으로써 신분차별의 철폐가 민족해방보다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새로운 생각을 낳았다.형평운동이 시작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일제히 환영하면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다.전국적인 사회 문화 운동의 출발지가 서울이 아닌 진주라는 작은 도시라는 점과 운동본부 및 핵심 지도부 인물 대부분이 지역인들이라는 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백정자식 양자로 들여 취학시켜 강상호·장지필 등 본부 임원들은 각각 순회 지역을 나누어 돌면서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백정들의 군중 집회에 참석,축사를 하거나 앞으로의 진행방향에 대하여 토론을 벌였다.백정들은 수백년 동안 억눌러온 감정을 폭발시켰지만 폭력 사태로는 나아가지 않았다.철저한 온건 노선을 지키면서 모든 조선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눈물 겨운 장면을 만들어냈다.민족 해방을 부르짖는 것도 아니고,어떤 사회적 쟁점을 논의하기 위한 집회도 아닌 오직 천한 신분 백정도 똑같은 인간임을 인정해달라는 선언과 맹세의 집회다보니 일본 경찰도 적극 단속할 수는 없었다. 형평운동이 본 궤도에 올라 백정들의 생활 개선과 교육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난 차별의 벽은 백정들이 일반인 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만약 백정들이 학교에 입학하면 일반인들이 모두 동맹 휴학을 하겠다는 선언을 했다.강상호는 그때 두 명의 백정 자식을 양자로 들여 직접 아이들 손을 잡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등 일반 지식인들이 먼저 백정 차별을 극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듯 들불처럼 확산되는 형평운동은 그때 막 한국사회에 상륙한 사회주의 노선과 다른 몇몇 사상단체들의 관심을 끌었다.그러면서 점점 예기치 못한 혼란 속으로 빨려 들었다.강상호는 장지필과의 계속되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백정도 떳떳한 조선인으로 대우받는 것이 어쩌면 민족해방보다 값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형평운동에 자신과 전 재산을 아낌없이 던져 넣었다.국가나 사회보다 인간이 소중하다는 그의 사상을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 그는 심한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죽었다. 굳이 형평운동이 아니더라도 인간평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진주 촉석공원 앞 그의 작고 외로운 무덤 앞에 술 한 잔을 올리고 강상호란 이름을 불러 보면 어떨까.˝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9)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9)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下)

    흔히 진주를 한국 인권의 고향이라 말한다.1862년 류계춘과 그의 동지들이 주도했고 한국 최초의 농민 생존권 투쟁이 된 ‘임술년 농민항쟁’과 1923년 ‘형평사 운동’이 진주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003년은 형평운동 80주년이었고,지난 1993년에는 해방 후 처음으로 진주에서 형평운동 70주년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다.백정해방운동을 백정이라는 특수 신분의 해방 운동으로 기념하는 데 그치지 말고,보다 폭넓은 인간의 불평등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한 계기로 삼자는 뜻이었다.인권문제에 애정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 형평기념탑을 세우고,인권 문제에 관한 국제 회의도 열어 70년 전 일제 때에 시작된 형평운동 정신을 새롭게 하는 일을 논의하였다.일본에서는 일본의 백정에 해당하는 부락민(部落民) 다수와 부락민의 인권과 차별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부락민의 생존권을 돕고 일본사회의 차별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락해방인권연구소 관계자들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강상호와 장지필의 이름과 생애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그 이전에는 국내의 극히 적은 연구자들에 의해 간신히 이름과 생애가 이야기되고 있었을 뿐이었다.다행스럽게도 강상호는 진주를 대표하는 부자이며 명문가 출신인데다 후손들이 진주 지역에 살아 있었기에 그에 대한 연구 자료는 풍부한 편이었다.그러나 장지필의 경우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아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한국의 후예들은 공식참배 안해 형평운동 70주년 국제 행사 이후 한 해에 두 차례씩 일본 부락민들이 강상호의 무덤을 참배하는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일본 부락민들의 강상호 무덤 참배 때마다 안내자로 참석해온 필자는 올봄 그의 아들 강인수씨와 둘이서만 참배를 했다.참배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 최초의 인권해방운동 선구자는 차도 옆에 누워서 자동차 굉음과 흙먼지,행인들이 내던지는 오물,그 보다 더 심한 무관심 속에서 초라하게 삭아가고 있었다.아들은 여유없는 그의 노년을 부끄러워할 뿐 말이 없었다.한국의 백정 후예들이 강상호 무덤을 공식적으로 참배했다는 이야기도 아직 듣지 못하였는데,이 역시 안타깝다. 형평사 운동이 시작되던 1923년 당시 한국에는 40여만 명의 백정들이 살고 있었는데,백정의 원류는 고구려의 영토 확장 때 생겨난 전쟁 포로나 귀순자들이라고 한다.그들은 고구려로 온 뒤 주로 변방에서만 살았는데,‘삼국사기’는 이들이 모여 살았던 곳을 부락(部落)이라 불렀음을 적고 있다.‘280년(서천왕11)에는 숙신을 공격하여 주민 600호를 옮기고 항복한 부락 예닐곱 곳을 부용으로 삼았다’는 것이다.원래 부락은 흉노족이 사막지대에서 떼를 지어(部) 천막을 치고 정착한 곳(落)을 의미했다.고려 때는 고구려에 복속당한 북방 유목민들의 후예인 수척(水尺),양수척(揚水尺),화척(火尺)들이 살던 곳을 부락이라 불렀다.이런 예를 두고 볼 때 부락은 원주민과 다른 족속이 집단을 이루고 사는 곳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겠다. 일제 식민지 이후 총독부는 한국 민속을 파괴하고 마을이나 산의 지명을 바꾸는 것으로 정체성을 소멸시키려 하였다.그 과정에서 한국 고유어인 ‘동네,마을’ 대신 ‘부락’을 쓰게 하였는데,일본의 부락과 부락민이 일본인들로부터 차별 멸시당하듯이 한국인 전체를 부락,부락민으로 취급함으로써 식민지배의 우월성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백정들의 거주지를 부락이라 불렀던 것과 일본의 부락민들이 사는 곳을 부락이라 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있겠다. ●일반인들의 생활언어도 사용못해 당시에 백정들은 갓 대신 패랭이를 써야 했고,상투머리엔 반드시 검은 띠를 둘러 백정임을 표시해야 했다.백정 여자들은 언제나 검정색 물들인 치마를 입어야 했고,비단옷이나 양반들이 입는 두루마기며 도포를 입어서는 안되었다.기와집에 살 수 없었으며 세 칸 이상의 넓은 집은 갖지 못했다.또,백정들끼리만 결혼할 수 있었고,혼인할 때 신부는 가마를 타지 못하고 신랑은 말을 탈 수 없었다.서당이나 향교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글을 배워서도 안되었다.죽은 뒤에도 상여에 관을 얹지 못하며,거적대기에 말아 매장하되 일반인 무덤보다 높은 곳에는 봉분을 짓지 못했다.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일반인 소년이나 아이에게 백정은 존댓말을 써야 했고 공공장소를 지날 때는 허리를 숙인 채 빠르게 뜀박질하여 지나가야 했다.이러한 법이나 관습을 어길 경우에는 때와 장소와 상관없이 일반인으로부터 처벌받아야 하고,같은 죄를 다시 범한 백정은 중형에 처해졌다.심지어 일반인들의 생활 언어를 사용하는 것까지 금했다.백정들의 삶은 온갖 금지와 차별의 울타리 안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정마을은 전국 주요 행정관청이 있는 곳에 만들어졌는데,각 지방관아와 병영에서 필요로 하는 육류와 피혁을 손쉽게 얻기 위해서였다.특히 향교가 있는 지역에서는 봄·가을에 있는 공자와 유교 선현들께 올리는 제사 음식 중에 반드시 필요로 하는 육류와 육류를 가공하여 만든 제수를 공급받기 위해 백정을 꼭 필요로 했다.따라서 숙종 연간만 하더라도 백정은 일종의 관노비였다.그 후 조선사회 신분제도와 경제토대의 붕괴로 지방 토호들이 백정을 사노비화하면서 백정들의 사회 진출이 시작되었다.그러나 대부분의 백정들은 철저한 문맹과 궁핍으로 최하층민의 가련한 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백정들에게는 무거운 의무만 있고 사람답게 살 권리가 없었다. 강상호는 백정들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임을 절감했다.그리고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질타하였다.인간은 평등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사는 삶이야말로 고귀하다고 외쳤다.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기 때문이며,미래를 위해 인간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고 굳건히 믿었다. 1923년 봄 진주에서는 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 시작되었다.이 운동에는 백정 출신들과 함께 일반 지식인들도 참여함으로써 신분차별의 철폐가 민족해방보다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새로운 생각을 낳았다.형평운동이 시작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일제히 환영하면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다.전국적인 사회 문화 운동의 출발지가 서울이 아닌 진주라는 작은 도시라는 점과 운동본부 및 핵심 지도부 인물 대부분이 지역인들이라는 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백정자식 양자로 들여 취학시켜 강상호·장지필 등 본부 임원들은 각각 순회 지역을 나누어 돌면서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백정들의 군중 집회에 참석,축사를 하거나 앞으로의 진행방향에 대하여 토론을 벌였다.백정들은 수백년 동안 억눌러온 감정을 폭발시켰지만 폭력 사태로는 나아가지 않았다.철저한 온건 노선을 지키면서 모든 조선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눈물 겨운 장면을 만들어냈다.민족 해방을 부르짖는 것도 아니고,어떤 사회적 쟁점을 논의하기 위한 집회도 아닌 오직 천한 신분 백정도 똑같은 인간임을 인정해달라는 선언과 맹세의 집회다보니 일본 경찰도 적극 단속할 수는 없었다. 형평운동이 본 궤도에 올라 백정들의 생활 개선과 교육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난 차별의 벽은 백정들이 일반인 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만약 백정들이 학교에 입학하면 일반인들이 모두 동맹 휴학을 하겠다는 선언을 했다.강상호는 그때 두 명의 백정 자식을 양자로 들여 직접 아이들 손을 잡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등 일반 지식인들이 먼저 백정 차별을 극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듯 들불처럼 확산되는 형평운동은 그때 막 한국사회에 상륙한 사회주의 노선과 다른 몇몇 사상단체들의 관심을 끌었다.그러면서 점점 예기치 못한 혼란 속으로 빨려 들었다.강상호는 장지필과의 계속되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백정도 떳떳한 조선인으로 대우받는 것이 어쩌면 민족해방보다 값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형평운동에 자신과 전 재산을 아낌없이 던져 넣었다.국가나 사회보다 인간이 소중하다는 그의 사상을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 그는 심한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죽었다. 굳이 형평운동이 아니더라도 인간평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진주 촉석공원 앞 그의 작고 외로운 무덤 앞에 술 한 잔을 올리고 강상호란 이름을 불러 보면 어떨까.
  • [씨줄날줄] 악어의 눈물/오풍연 논설위원

    정치인의 눈물은 곧잘 ‘악어의 눈물’에 비유된다.측은지심(惻隱之心)을 위한 것으로 진실성이 없다는 얘기다.영국의 대문호인 셰익스피어도 희곡에서 이 말을 썼다.이는 위선적인 거짓 눈물을 가리킨다.처음엔 악어의 눈물을 참회(懺悔)의 눈물로 보았다.로마의 사학자 플리니우스가 저서 ‘박물지’에서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곡(哭)을 잘하는 것도 정치인의 큰 장기라고 한다.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상가에서 많은 지역 유권자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정치인의 문상은 필수 코스다.생판 처음 보는 영정 앞에서 눈물을 훔치기라도 하면 표심이 움직인다는 것이다.어느 정치인이 이를 마다하겠는가.지역구 의원이 하루 저녁에 3∼4곳을 방문하는 것은 보통이다.정 싫으면 정치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최근 탄핵사태 이후 정치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모두가 이미지와 이벤트에 기대는 양상이다.이성정치는 실종되고 감성정치에만 매달리고 있다.호화 당사의 폐공판장 이전,천막 당사 설치,삼보일배 역시 마찬가지다.이처럼 각 당 총재,의장,대표,선대위원장이 나서 읍소(泣訴) 작전을 펴고 있지만 왠지 어색해 보인다.잘 나갈 때는 나 몰라라 하던 정치지도자들이 처연하리만큼 납작 엎드리고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민주당 추미애 선대위원장에다 자민련 김종필(JP) 총재까지 가세하고 있는 형국이다.유권자의 눈물샘을 자극,한 표라도 더 모으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이들 모두 자신의 정치생명과도 직결돼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셋은 차기 대권주자로 경쟁관계에 있고,JP는 ‘10선’을 노리고 있다.악어의 눈물이라도 좋으니,많이만 흘릴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에게는 때가 있는 법이다.어떠한 눈물로도 거스를 수 없는 게 민심이고,역사의 흐름이다.그런 만큼 스스로도 결단할 줄 알아야 한다.“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분분한 낙화…/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지금은 가야 할 때”이형기 시인이 쓴 ‘낙화’의 한 대목을 들려주고 싶다. 오풍연 논설위원 poongynn@seoul.co.kr˝
  • 미궁에 빠진 세계사의 100대 음모론/데이비드 사우스웰 지음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인류의 역사는 ‘음모의 역사’다.음모는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가지를 치며 번성해왔다.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어온 많은 것들은 어쩌면 사실이 아닌지도 모른다.특별한 권력집단이 만들어낸 위선과 거짓,곧 음모론의 산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음모론은 이미 우리 문화의 일부가 됐다.왜 이처럼 음모론이 기승을 부릴까.우리는 왜 음모론을 필요로 할까. ‘미궁에 빠진 세계사의 100대 음모론’(데이비드 사우스웰 지음,이종인 옮김,이마고 펴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모론 100가지를 골라 사건에 얽힌 의혹,유력한 용의자,회의론자의 입장 등을 균형있게 소개한 음모론 백과다. ●미국, 진주만 공습 미리 알고 있었다 음모론엔 사실과 의견,해석이 뒤섞여 있다.가장 설득력 있는 음모론 가운데 하나인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그 생생한 예다.1941년 일본은 진주만을 침공했고,당시 해군력의 꽃이라 할 미국의 항공모함들은 대부분 5000㎞나 떨어진 샌디에이고에 정박해 있었다.이것은 ‘사실’이다.이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의견’이 도출된다.“미국의 주요 전력을 이런 식으로 빼돌린 걸 보면 일본이 공격할 것을 미리 알고 조치를 취한 게 아닐까.” 이런 의견은 다시 ‘해석’으로 발전한다.“루스벨트 대통령은 당시 미국내 참전 반대여론을 잠재우고 결정적인 참전의 계기를 잡기 위해 진주만 침공을 방치했다.” ●존 F 케네디는 음모의 희생양? 하지만 음모론이 꼭 사실과 의견,해석의 상호작용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사실과 의견의 경계 자체가 모호할 때도 있다.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 같은 경우다.이 사건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발표는 용공주의자 리 하비 오스왈드가 혼자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그렇지만 70%가 넘는 미국인들은 아직도 대통령이 음모의 희생자라고 믿는다.케네디 암살사건은 이를 추적하던 여기자 도로시 킬갈렌이 의문사하고 암살범 오스왈드가 마피아에 다시 암살당하는 등 음모에 음모를 낳았다.FBI,CIA,마피아,존슨 부통령,심지어 캐나다 자유당과 재클린 케네디까지 암살 배후로 입에 오르내린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FBI의 비호 아래 살아있다?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가 마흔 두살의 나이에 죽었다는 소문은 대중을 속이기 위한 기만전술일 뿐,그는 아직도 건재하며 그를 본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책은 음모론의 진원지로 엘비스 자신을 지목한다.엘비스는 존 버로스라는 가명을 즐겨 썼으며,총기 오발사고를 가장해 자신의 죽음을 꾸며낸 적도 있다.자신을 명성이란 이름의 감옥에 갇힌 죄수쯤으로 여긴 엘비스의 자작극이라는 것이 엘비스 음모론의 요체다. ●외계인 둘러싼 끝없는 음모 음모론의 단골 메뉴는 역시 외계인이다.외계인에게 납치됐다가 돌아왔다는 사람들의 증언,외계인들의 홍보장이 돼버린 할리우드,외계인들에게 인간을 생체실험 대상으로 준 대신 얻은 게 첨단기술이라는 설 등 외계인과 관련된 음모론은 밑도 끝도 없다.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947년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웰에 추락한 UFO를 둘러싼 음모론이다.실제 목격자가 신고까지 했던 이 사건은 발생한 지 47년이 지나서야 미 공군의 공식보고서가 나왔다.그러나 로스웰 사건은 여전히 미스터리다.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추락 현장을 방문했을 뿐 아니라 살아남은 외계인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는 소문도 있다. ●남극 빙산 밑엔 나치 비밀기지가? 책은 논리나 추리 혹은 과학이나 역사적 증거에 토대를 둔 ‘유력한’ 음모론과 함께 ‘믿거나 말거나’식의 음모론도 가감없이 전한다.히틀러와 나치가 달의 뒷면과 남극의 빙상 아래 비밀기지를 건설했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연합국에 패배할 것을 예감한 나치가 작전기지를 달로 옮겨 제3제국의 장기적인 식민지 건설을 도모했다는 얘기.히틀러가 초자연적이고 환상적인 것을 좋아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황당함을 지울 수 없다.음모론의 옥석을 가리기 위해선 물론 믿기지 않는 이야기라도 열린 시각으로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음모론을 부정적으로만 봐야 할까.피해의식이나 전도된 욕망의 표현이란 점에선 부정적이지만,고정관념의 틀을 깨뜨리는 데 일정한 도움을 준다는 점에선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다.음모론은 때로 ‘창조정신의 비약’을 가져오기도 한다.1만 8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총선 D-19] 파국 치닫는 ‘趙 秋갈등’

    민주당 추미애 의원이 26일 한·민공조에 의한 탄핵 추진을 사과하고 조순형 대표의 퇴진을 요구함으로써 양측의 대치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탄핵 문제만큼은 거론하지 않기를 바랐던 조 대표측은 추 의원의 최후통첩성 촉구에 “강을 건넜다.”는 반응이다. 추 의원은 이날 저녁 기자회견을 갖고 “한·민 공조로 지지자들에게 충격과 상처를 주고 평화민주개혁 세력이라는 민주당의 방향성과 정체성을 실종시킨 데 깊이 사죄한다.”면서 “나 역시 책임이 가볍다 할 수 없다.”고 밝혔다.비상대책위 구성 후 탄핵 철회 가능성도 열어놨다. ●“당 정체성 훼손 깊이 사죄” 그러면서 조 대표의 거취에 대해 “대통령이 헌재 결정이 날 때까지 직무정지가 돼 있는 것처럼 대표도 헌재 결정이 있을 때까지 (탄핵의)정당성 판단을 맡기고 당신 스스로를 직무정지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더 나아가 “대표를 에워싸 탄핵 추진을 압박했던 분들에게 책임이 크다.”며 이른바 ‘개혁 공천’을 통해 몇몇 호남 중진뿐 아니라 당권파들의 책임도 묻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조 대표는 당내 쇄도하는 퇴진 요구에 아직 묵묵부답이다.서울 모처에 머물면서 언론과의 접촉을 피한 채 장고를 이어간 그는 부인 김금지 여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심경을 전해왔다.김 여사는 조 대표가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이승희 대변인의 ‘돌출’ 논평도 양측 갈등의 골을 짐작케 했다.이 대변인은 “탄핵소추안 작성에 참여한 추 의원이야말로 한·민 공조의 당사자인데 위선적 가면을 벗으라.”고 쏘아붙였다.조 대표의 대구 지지자들도 올라와 추 의원 회견에 거칠게 항의했다. 앞서 심재권 대표비서실장은 “자리에 연연하는 분이 아니다.”면서 “다만 공천이 이미 확정된 지역에 손대면 당을 더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설훈의원 “탈당·불출마”목청 그러나 상황은 예사롭지 않다.소장파들은 조 대표가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추 의원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며 이낙연·이정일·전갑길·배기운·김효석 의원 등이 이날 광주에서 조 대표의 백의종군을 외쳤다.고진부 의원은 불출마를,5일째 단식 중인 설훈 의원은 “27일까지 사퇴하지 않으면 탈당하겠다.”고 선언했다.설 의원은 조 대표의 ‘버티기’에 “좋게 보면 오판이고 나쁘게 보면 자기 보신책”이라는 원색적인 표현도 썼다.조 대표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 중인 사무처 당직자,원외 공천자들이 세를 불릴수록 당권파들의 저항도 만만찮았다. 김상현·최명헌·박상천·이만섭·정균환·김충조 의원 등 상임고문들은 추 의원에게 “27일까지 선대위원장직을 맡아달라.”고 시한을 못박았고 중재자를 자처하는 한화갑 의원도 추 의원의 조건없는 수락을 촉구했다. 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류계춘(柳繼春,1830∼1862).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 노래이자 혁명가(革命歌) 노랫말을 순 한글로 짓고 곡을 붙여 널리 퍼뜨렸으며,농사꾼이 사는 동네라면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사금파리 뾰족뾰족 박힌 골목길을 내달으면서 불렀고,그보다 조금 더 큰 조무래기들은 마을 타작마당이나 마을 앞 빈 논바닥에서 뛰놀며 이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희미한 등잔불이 가물거리는 사랑방에서 새끼줄을 꼬는 머슴들이나,긴긴 겨울밤 무명실 잣는 물레질로 길쌈하는 아낙들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를 부를수록 마음 속에 시퍼렇게 응어리진 일들이 새삼스레 아파오기도 하고,끝 소절에 잔뜩 힘을 넣어 큰소리로 부르면 그 혹독하고 두려운 것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한번 입에 올린 뒤엔 좀체로 떠나지 않는 이 노래를 두고 사람들은 이상한 노래라거나 귀신이 든 노래라고도 했다.이 노래를 만든 류계춘은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수백만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일약 인기 작곡가에다 돈방석에 올라 앉는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1862년 민란주도 ‘참수형’ … 족보에서도 삭제돼 한국 농민의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아보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의 이름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또한 한국 농민사에서 가장 슬픈 이름을 물어도 그를 불러 보인다.그는 경상도 진주사람이었다.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晋州) 망건(網巾)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揮項巾) 도래 줌치 장두(狀頭) 칼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 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또는 ‘언가(諺歌)’라고 부르는 이 노래를 류계춘이 지었다고 단정지은 것은 그가 계획하고 주도한,1862년 ‘진주농민항쟁(일명 임술 진주민란)’에 관한 당시 조선 정부 수사 기록을 통해서였다. 이 노래의 특징은 노랫말이 지닌 고도의 은유와 상징에 있다.이 노랫말 속에는 진주농민항쟁의 원인과 역사가 밀도 높게 응축되어 있다. 빼어난 노랫말 속에는 풍부한 시적 감성과 치열한 시대정신이 깃들어 있는데,이 노래의 두 박자 리듬에서 우러나는 근원적인 힘과 조화를 이루면서 역동적인 행진곡으로서의 맛까지 곁들이고 있다. 지난 5일 경칩날 류계춘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를 찾아 갔다.선생의 증손자인 류일렬(柳一烈)씨가 동행해주었다. 마을 노인들에게 선생의 묘소를 묻자 대뜸 “아,그 풋심 떼던 묏등”이라고 대답한다.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 사람들은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풋심’이라는 병을 앓곤 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높은 열이 나는 특징을 지닌 병으로서 3일열 또는 4일열 등으로 구분하는데, 심하면 빈혈이 생기고 황달을 일으키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학질(말라리아)이라고 부르는 이 질병을 농촌 사람들은 흔히 풋심이라 했다. 뚜렷한 처방약이 없어서 한 번 걸리면 한달 이상은 예사로 고생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사흘이나 나흘 간격으로 재발하기 때문에 몇 차례 재발한 고열로 고생한 사람들은 귀신이 든 것이라고 여기면서 푸닥거리를 하는 등 안타까운 시달림을 겪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섬뜩한 처방전이 흘러나왔다.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형장에서 참수된 자의 무덤을 찾아내어 마지막 치유 방법을 시도해보라는 것이었다.즉, 풋심을 앓는 환자가 캄캄한 한밤중을 이용하여 참수된 자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가는 것이다.이때 등불을 켜서는 안된다. 무덤의 왼쪽이나 오른쪽 어떤 쪽이든 한쪽에 가서 시체가 누워 있는 방향과는 반대방향으로 세 번 구르는 것이다. 그때 환자는 ‘내 풋심 떼어가거라!’를 세 번 외치면서 거꾸로 구른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데,아무리 무서워도 뒤돌아보면 안된다.만약 뒤를 돌아보면 떨어졌던 풋심이 되붙어서 다시는 안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과연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으스스한 그 처방전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류계춘 선생의 삶은 그의 주검이 매장된 묘소와 함께 이 지역 농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매우 독특한 정서로 자리잡고 있었다. 선생은 진주농민들을 선동하여 민란을 주도한 책임으로 다른 아홉명의 동지들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다. ●80년대 ‘진주농민항쟁’ 으로 정정… 명예회복 선생의 증손자 류일렬씨는 진주 변두리에서 작은 꽃집을 경영하며 산다고 했다.일렬씨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반역자의 후손으로 찍혀서 세상 한가운데 드러난채 살 수 없었다고 한다.그래도 일렬씨 아버지는 류계춘 선생의 뜨겁고 적극적이었던 삶을 죄인으로 몰아붙인 조선후기 양반들의 태도가 더 나빴다는 신념을 꺾지 않았었다. 열린 세상이 오면 류계춘의 삶이 옳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그 희망이 실현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자식들에게 비겁한 삶을 살지 않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진주민란이라는 말이 진주농민항쟁으로 바뀌게 되는 날이 왔다. 민란을 주도한 반역자 류계춘을 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로 고쳐 부르자는 민주화의 추세로 마침내 문화류씨(文化柳氏) 좌상공파(左相公派)의 족보에 류계춘 선생의 이름이 오르면서 업적을 기리는 기록이 새롭게 추가되기도 했다. 류일렬씨는 증조부 산소를 참배하기 위해 신발을 벗고 무덤 앞에 섰다.그의 표정이 흔들렸다.그 흔한 비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초라한 무덤을 누가 저 격렬했던 진주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의 무덤으로 보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작은 돌 하나도 깎아 세우지 못할 만큼 일렬씨 집안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비석을 만들어 세우자는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때마다 일렬씨 아버지의 태도는 강직했다.그 따위 돌 하나 깎아 세워달라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아니셨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잔혹한 농민 탄압,가련한 농민의 살점과 피를 짓밟고 올라서서 누린 양반관료들의 교만과 위선으로 꽉찬 모순을 온몸으로 질타하면서 농민도 인간임을 절규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선생이 과연 후손들에게 뭘 바라시겠느냐고 되물었다.빛나는 비석에다 화려한 문장으로 죽은 시대의 허위의식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단청 입힌 사당이며 으리으리한 기념관을 세워 살아남은 자들의 비겁과 죄악을 은폐시키려 하기보다는,역사 앞에서 한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싶어하지 않겠느냐고 했단다.일렬씨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옳다고 믿고 있었다. ●흔한 비석 하나 없는 쓸쓸한 혁명가의 무덤 그날 류계춘 선생 묘소 앞에서 그가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은 것은 묘소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오는 가진자들의 별장이 언젠가는 선생의 무덤을 딛고 올라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뒤에.일렬씨는 이 시대 농촌,농업,농민의 삶이 시장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밀린 채 무시되어 짓밟히는 것과 류계춘 선생 동지들의 농민항쟁 정신이 왜곡,무시되는 점이 닮아보인다며 한숨지었다. 류계춘 선생과 혁명동지들을 진주형장에서 참수하여 그 목을 진주 남강 건너는 나루터와 장터에 높이 매달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에 반역하면 누구든 저렇게 되고만다는 것을 보여준 그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였던가? 그리고 지금 이 시대 농민과 농업의 위기,농촌문화의 황폐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진주농민항쟁같은 역사의 몸부림이 필요한 것일까?˝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류계춘(柳繼春,1830∼1862).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 노래이자 혁명가(革命歌) 노랫말을 순 한글로 짓고 곡을 붙여 널리 퍼뜨렸으며,농사꾼이 사는 동네라면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사금파리 뾰족뾰족 박힌 골목길을 내달으면서 불렀고,그보다 조금 더 큰 조무래기들은 마을 타작마당이나 마을 앞 빈 논바닥에서 뛰놀며 이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희미한 등잔불이 가물거리는 사랑방에서 새끼줄을 꼬는 머슴들이나,긴긴 겨울밤 무명실 잣는 물레질로 길쌈하는 아낙들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를 부를수록 마음 속에 시퍼렇게 응어리진 일들이 새삼스레 아파오기도 하고,끝 소절에 잔뜩 힘을 넣어 큰소리로 부르면 그 혹독하고 두려운 것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한번 입에 올린 뒤엔 좀체로 떠나지 않는 이 노래를 두고 사람들은 이상한 노래라거나 귀신이 든 노래라고도 했다.이 노래를 만든 류계춘은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수백만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일약 인기 작곡가에다 돈방석에 올라 앉는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1862년 민란주도 ‘참수형’ … 족보에서도 삭제돼 한국 농민의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아보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의 이름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또한 한국 농민사에서 가장 슬픈 이름을 물어도 그를 불러 보인다.그는 경상도 진주사람이었다.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晋州) 망건(網巾)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揮項巾) 도래 줌치 장두(狀頭) 칼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 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또는 ‘언가(諺歌)’라고 부르는 이 노래를 류계춘이 지었다고 단정지은 것은 그가 계획하고 주도한,1862년 ‘진주농민항쟁(일명 임술 진주민란)’에 관한 당시 조선 정부 수사 기록을 통해서였다. 이 노래의 특징은 노랫말이 지닌 고도의 은유와 상징에 있다.이 노랫말 속에는 진주농민항쟁의 원인과 역사가 밀도 높게 응축되어 있다. 빼어난 노랫말 속에는 풍부한 시적 감성과 치열한 시대정신이 깃들어 있는데,이 노래의 두 박자 리듬에서 우러나는 근원적인 힘과 조화를 이루면서 역동적인 행진곡으로서의 맛까지 곁들이고 있다. 지난 5일 경칩날 류계춘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를 찾아 갔다.선생의 증손자인 류일렬(柳一烈)씨가 동행해주었다. 마을 노인들에게 선생의 묘소를 묻자 대뜸 “아,그 풋심 떼던 묏등”이라고 대답한다.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 사람들은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풋심’이라는 병을 앓곤 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높은 열이 나는 특징을 지닌 병으로서 3일열 또는 4일열 등으로 구분하는데, 심하면 빈혈이 생기고 황달을 일으키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학질(말라리아)이라고 부르는 이 질병을 농촌 사람들은 흔히 풋심이라 했다. 뚜렷한 처방약이 없어서 한 번 걸리면 한달 이상은 예사로 고생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사흘이나 나흘 간격으로 재발하기 때문에 몇 차례 재발한 고열로 고생한 사람들은 귀신이 든 것이라고 여기면서 푸닥거리를 하는 등 안타까운 시달림을 겪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섬뜩한 처방전이 흘러나왔다.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형장에서 참수된 자의 무덤을 찾아내어 마지막 치유 방법을 시도해보라는 것이었다.즉, 풋심을 앓는 환자가 캄캄한 한밤중을 이용하여 참수된 자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가는 것이다.이때 등불을 켜서는 안된다. 무덤의 왼쪽이나 오른쪽 어떤 쪽이든 한쪽에 가서 시체가 누워 있는 방향과는 반대방향으로 세 번 구르는 것이다. 그때 환자는 ‘내 풋심 떼어가거라!’를 세 번 외치면서 거꾸로 구른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데,아무리 무서워도 뒤돌아보면 안된다.만약 뒤를 돌아보면 떨어졌던 풋심이 되붙어서 다시는 안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과연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으스스한 그 처방전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류계춘 선생의 삶은 그의 주검이 매장된 묘소와 함께 이 지역 농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매우 독특한 정서로 자리잡고 있었다. 선생은 진주농민들을 선동하여 민란을 주도한 책임으로 다른 아홉명의 동지들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다. ●80년대 ‘진주농민항쟁’ 으로 정정… 명예회복 선생의 증손자 류일렬씨는 진주 변두리에서 작은 꽃집을 경영하며 산다고 했다.일렬씨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반역자의 후손으로 찍혀서 세상 한가운데 드러난채 살 수 없었다고 한다.그래도 일렬씨 아버지는 류계춘 선생의 뜨겁고 적극적이었던 삶을 죄인으로 몰아붙인 조선후기 양반들의 태도가 더 나빴다는 신념을 꺾지 않았었다. 열린 세상이 오면 류계춘의 삶이 옳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그 희망이 실현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자식들에게 비겁한 삶을 살지 않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진주민란이라는 말이 진주농민항쟁으로 바뀌게 되는 날이 왔다. 민란을 주도한 반역자 류계춘을 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로 고쳐 부르자는 민주화의 추세로 마침내 문화류씨(文化柳氏) 좌상공파(左相公派)의 족보에 류계춘 선생의 이름이 오르면서 업적을 기리는 기록이 새롭게 추가되기도 했다. 류일렬씨는 증조부 산소를 참배하기 위해 신발을 벗고 무덤 앞에 섰다.그의 표정이 흔들렸다.그 흔한 비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초라한 무덤을 누가 저 격렬했던 진주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의 무덤으로 보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작은 돌 하나도 깎아 세우지 못할 만큼 일렬씨 집안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비석을 만들어 세우자는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때마다 일렬씨 아버지의 태도는 강직했다.그 따위 돌 하나 깎아 세워달라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아니셨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잔혹한 농민 탄압,가련한 농민의 살점과 피를 짓밟고 올라서서 누린 양반관료들의 교만과 위선으로 꽉찬 모순을 온몸으로 질타하면서 농민도 인간임을 절규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선생이 과연 후손들에게 뭘 바라시겠느냐고 되물었다.빛나는 비석에다 화려한 문장으로 죽은 시대의 허위의식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단청 입힌 사당이며 으리으리한 기념관을 세워 살아남은 자들의 비겁과 죄악을 은폐시키려 하기보다는,역사 앞에서 한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싶어하지 않겠느냐고 했단다.일렬씨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옳다고 믿고 있었다. ●흔한 비석 하나 없는 쓸쓸한 혁명가의 무덤 그날 류계춘 선생 묘소 앞에서 그가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은 것은 묘소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오는 가진자들의 별장이 언젠가는 선생의 무덤을 딛고 올라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뒤에.일렬씨는 이 시대 농촌,농업,농민의 삶이 시장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밀린 채 무시되어 짓밟히는 것과 류계춘 선생 동지들의 농민항쟁 정신이 왜곡,무시되는 점이 닮아보인다며 한숨지었다. 류계춘 선생과 혁명동지들을 진주형장에서 참수하여 그 목을 진주 남강 건너는 나루터와 장터에 높이 매달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에 반역하면 누구든 저렇게 되고만다는 것을 보여준 그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였던가? 그리고 지금 이 시대 농민과 농업의 위기,농촌문화의 황폐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진주농민항쟁같은 역사의 몸부림이 필요한 것일까?
  • [씨줄날줄] 대한민국 스캔들/정인학 논설위원

    스포츠 외교를 모두 밝히면 ‘대한민국 스캔들’이 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체육단체 공금 등 38억 4000여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김운용 의원이 법정에서 토설한 한 토막이라고 한다.횡령 혐의의 시궁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조국의 국제적 망신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협박인 셈이다.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온갖 영화를 누렸던 당사자라면 설혹 대한민국 스캔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치졸한 인질극으로 위기를 넘기려 해서야 쓰겠는가. 요즘 대한민국은 집단 울화병을 앓고 있다.감투썼던 ‘나리’들의 간교한 위선 행각이며 국민을 인질로 협박을 일삼는 그 행태가 속을 뒤집어 놓는다.금방 감옥에 갇히면서도 검은 돈을 받지 않았다고 고함을 질러댄다.청렴과 결백의 화신인 양 떠들어 대던 이른바 386들의 추잡한 치부며,궤변으로 변명을 일삼는 행태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총선 얘기만 나오면 몇 석을 얻지 못하면 알량한 벼슬을 내놓겠다느니,개헌 저지선이 어쩌느니 하고 국민을 협박해 댄다. 김운용씨는 기회 있을 때마다 국가 위상을 높이기 위해 스포츠 외교에 헌신해 왔다는 말을 반복해 왔다.그리고 이제 와선 바로 스포츠 외교를 인질로 삼은 것이다.국가를 앞세워 개인 영달을 획책해 왔음을 웅변적으로 털어 놓은 게 아닌가.하기야 한국올림픽위원회 위원을 선임하면서 돈을 챙긴 연유를 신문하자 ‘스포츠 활동이라는 게 돈 있고 시간 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니까 (돈을)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니 국가의 위신 따위야 안중에 들어 올 리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른바 지도층 인사에 대한 관찰의 눈초리를 곧추세워야 한다.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다고 떠벌이거든 더욱 경계해야 한다.어찌어찌하면 어찌어찌하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거든 그대로 응징해야 한다.나중에 대한민국 스캔들을 볼모로 대국민 인질극을 벌일 것이다.우리는 싸늘해져야 한다.싹수가 노란 것은 노란 것이다.상대적 온정주의에 빠져 그래도 누구보다는 낫다며 노란 싹수가 파랗게 변할 수 있으리라고 현혹되어선 안 된다.이번 대한민국 스캔들에서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어느날 또 조국을 인질로 삼는 협박에 운명을 맡겨야 할지 모른다. 정인학 논설위원 chung@˝
  • ‘남자충동’ 7년만에 재공연

    유행이 한물가긴 했지만 여전히 ‘조폭(조직폭력배)’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쓰이는 소재이다.요즘 트렌드로 보자면 연극 ‘남자충동’도 그런 흔한 조폭 드라마의 아류쯤으로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지난 97년 초연 당시 이 연극이 불러온 반향은 대단했다.그해 동아연극상,백상예술대상,서울연극제 등 각종 연극상을 휩쓸었을 뿐 아니라 평론가들로부터도 찬사를 받았다.과장을 보태면 대학로 연극인들 사이에선 ‘전설’로까지 일컬어진다.연극을 봤던 이들에겐 ‘다시 보고픈 추억의 명작’으로,보지 못했던 관객들에겐 ‘꼭 봐야 할 화제작’으로 기대를 모아온 ‘남자충동’이 7년 만에 무대에 오른다. 연극은 ‘대부’의 알 파치노를 꿈꾸며 가족과 조직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주인공 장정(안석환)을 내세워 남자들의 비뚤어진 가부장적 의식을 정면으로 공격한다.전남 목포가 배경인 탓에 질펀한 호남 사투리가 공연 내내 객석을 향해 무차별 난사되는 것도 이 연극의 특징. 극작과 연출을 겸한 조광화는 “영웅에 대한 반영웅 정서라고 할까,가부장적 강박증에 사로잡힌 삼류 건달의 이야기를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지금이야 조폭 이야기가 흔하지만 그때는 영화 ‘초록물고기’‘넘버3’ 등에서 막 다뤄지기 시작하던 즈음이라 충격의 강도가 컸다.”고 했다. 주인공 장정은 ‘강한 남자’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전형적인 인물.아무리 무섭고 두려워도 가족과 부하들 앞에서는 잔뜩 허세를 부려야 직성이 풀린다.관객을 향한 방백이 유독 많은 이유도 ‘강한 척’하려는 남성들의 위선과 허세를 까발리려는 의도에서다. 연극열전 두번째 대극장 작품으로 재공연되는 이번 무대에는 초연 멤버들이 전부 출연한다.특히 장정역의 안석환은 무자비한 폭력 장면에도 불구하고 슬픔이 배어나는 묘한 카리스마 연기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안석환은 “그때 동숭아트센터 외벽에 걸려있던 2m짜리 대형 포스터를 떼어다 집 거실에 걸어놨다.”며 작품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장정의 어머니로 출연해 신인연기상을 수상했던 황정민,동생 유정역의 이남희,그리고 달래역의 이유정 등도 이번 무대에서 만날 수 있는 반가운 얼굴들. 이 작품으로 극작가 겸 연출가로 입문한 조광화는 이후 잇단 좌절을 맛봤다.그는 “그동안 참 많이 방황했다.‘남자충동’ 재공연이 내 연극인생에 새로운 계기를 가져다 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12일∼4월18일 동숭아트센터 동숭홀.(02)764-8760. 이순녀기자˝
  • 고총리 “장군봉분 합법화 중단” 고충위선 국립묘지 납골당 권고

    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서울과 대전의 국립현충원에 납골당을 지으라고 국방부에 권고했다.장군급 묘역의 봉분을 허용하려는 국방부의 방침에 고건 국무총리가 중단을 지시했다. 국민고충처리위원회는 27일 “국방부가 전·공상 군·경과 무공훈장 수여자 등 국가유공자의 국립묘지 안장을 사망시점별로 제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안장 방식을 개선하라고 국방부에 권고했다.이는 김구득(가명·42·경기도 안산시 선부동)씨가 낸 민원을 심사한데 따른 것이다. 김씨는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부친이 1991년 5월20일 사망했으나,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유공자는 1997년 1월1일 이후 사망자에게만 국립묘지 안장을 허용한다는 국방부 규정 때문에 국립묘지 안장이 불허되자 민원을 제기했다. 고충위는 특히 사망시점별 제한 규정을 고치면 4만 5000여기의 분묘가 필요하고,앞으로 20년 동안 18만기가 추가로 소요될 전망이지만 서울과 대전 국립묘지의 수용능력은 2만 2753기에 불과한 점을 고려해 납골당을 만들어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고했다. 한편 고 총리는 이날 국립현충원내 장군급 묘역의 봉분을 합법화하는 내용의 ‘국립묘지령’ 개정 작업을 중단하도록 지시했다.고 총리는 총리실에 설치돼 있는 ‘국립묘지발전위원회’에서 오는 5월말까지 국립묘지제도 종합발전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조덕현 조현석기자 hyoun@˝
  • [盧대통령 회견]야당 “대통령 탄핵받아 마땅”

    야권은 24일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방송기자 클럽과 가진 취임 1주년 회견에서 “대선후보 경선 때 십수억원을 썼을 것”이라고 밝힌 것과 관련,경선자금에 대한 검찰 수사를 촉구하는 등 강도 높게 비난했다. 한나라당 은진수 수석부대변인은 논평에서 “4억원을 받아 구속영장이 청구된 한화갑 의원의 경우에 비춰 형사불소추 특권의 보호막 뒤에 숨지 말고 즉각 검찰 수사를 자청해야 한다.”며 “부패하고 무능한데다 위선에 가득찬 노 대통령은 탄핵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민주당 조순형 대표도 이날 관훈클럽 초청토론에서 “국민의 이해를 얻으면 탄핵을 추진할 것”이라며 “어떤 사람은 구속하자면서 자기만 고통스럽다고 넘어가자는 것은 검찰에 지침을 주는 것”이라고 성토했다.장전형 부대변인은 “어느 기업에서 받아 어디에 사용했는지 밝혀야 한다.”면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경선자금과 함께 수사해야 한다.”고 몰아세웠다.야권은 또 노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지 기대’ 발언에 대해서도 맹공을 퍼부었다.자민련 유운영 대변인은 “국정을 내팽개친 채 열린우리당의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착각하는 듯한 언행을 계속할 경우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민주노동당 김종철 대변인은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에 대한 압도적 지지를 기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은 상식 이하의 발언”이라며 “그렇게 총선 결과가 걱정된다면 차라리 대통령 그만두고 출마하라고 권하고 싶다.”고 혹평했다. 전광삼기자 hisam@˝
  • 권노갑씨 “경선자금 공개하면 정동영 죽어”

    민주당 권노갑 전 고문이 이른바 ‘권노갑 장학생’의 일원인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을 겨냥,‘정치적 사망 선고’에 가까운 독설을 퍼부어 파문이 일고 있다. 권 전 고문은 11일 발매된 주간동아와 가진 옥중 인터뷰에서 “그 친구 경선자금을 볼 때 법적 처벌을 받는 시효는 만료됐을 것이지만 아직도 도덕적 심판은 남아 있고 받을 가치가 충분하다.”면서 “내가 내용을 공개하면 그는 도덕적으로 죽는다.”고 강조했다. 이어 “(구치소에서)나가면 뭔가 말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 중”이라고 말해 출소 후 ‘폭탄 발언’을 내비쳤다.그는 이달 중순 재판 이후 병보석을 신청할 예정이다. 권 전 고문은 정 의장이 자신을 ‘제2의 김현철’로 비난한 것과 관련,“그 사람 자기 부인하고 우리집에 찾아와 집사람이 (돈가스점으로)힘들게 돈 번다며 어깨 주무르고 그렇게 나한테 잘했다.그러다가 느닷없이….”라며 회한에 잠긴 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밟고 가는 방법을 택했다.그가 하는 모든 말과 개혁은 위선과 거짓”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지난 2000년 4월 총선과 8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 자금지원 내역인 ‘권노갑 파일’에 대해서는 “파일이랄 것까지는 없고….”라며 존재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정 의장은 권 전 고문의 주장에 대해 “터무니 없는 날조”라면서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한다.”고 일축했다고 정기남 부대변인이 전했다. 박정경기자 olive@˝
  • 역사 속의 매춘부들/니키 로버츠 지음

    그리스 일곱 현인 가운데 한 명인 아테네의 입법가 솔론은 매춘을 영리 목적에 이용,최초로 공창제를 도입하고 그 수익으로 국가 재정을 충당한 인물이다.솔론의 여성관은 분명했다.여성은 아내 아니면 창녀였다.여성을 무력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에 기여한 것으로 말하면 장 자크 루소 또한 빠지지 않는다.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 루소는 “남성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인 여성이 아이를 낳다 죽는 것은 영광”이라며 현모양처론을 펼쳤다.‘남성 중심’의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이들도 각도를 달리 해 보면 전혀 다른 평가의 대상이다. ●`나쁜´ 창녀를 탄생시킨 건 위선적인 성도덕 ‘역사 속의 매춘부들’(니키 로버츠 지음,김지혜 옮김,책세상 펴냄)은 이런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성도덕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출발한다.영국의 소호에서 매춘부로 일한 경험이 있는 저자의 시각은 여러 면에서 전복적이다. 여성을 아내와 창녀로 나누는 것은 가부장제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일이다.기원전 2000년경 고대 수메르에서 아내와 창녀를 분리하는 법이 처음 생겼다.저자는 여성을 ‘착한’ 아내 대 ‘나쁜’ 창녀의 이분법으로 구분하게 된 데는 기독교의 위선적인 성도덕이 큰 구실을 했다고 주장한다.여성에게 현모양처를 강요하는 기독교의 금욕주의가 그 반대편에 ‘비정상적인’ 여인의 표상으로 매춘부를 만들어냄으로써 그들에게 불도장이 찍히게 했다는 것이다.구약의 선지자들은 매춘부를 고집 세고 도발적인 여성들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책은 매춘의 역사가 남성 중심의 기록임을 밝힌다.매춘의 기원을 고대문명의 ‘사원 매춘’에서 찾는 것은 저자 또한 기존의 역사가들과 다르지 않다.고대 가나안에선 종교적 매춘과 세속적 매춘이 모두 번성했다.고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원 가운데 하나로 이름 높았던 코린트의 아프로디테 사원은 1000명이 넘는 ‘신성한’ 창녀들을 거느렸다.히에로둘레라 불린 이들은 여신의 시녀로 간주된 매춘부 계급이었다. 저자가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그동안 여성 사제가 정치·경제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이 외면당해 왔다는 점이다.예컨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에서 왕이 매춘부를 겸한 여성 사제와 신성한 혼인을 치른 것은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의례였음에도 단순히 ‘다산 의식’으로 치부돼 왔다는 것이다. ●도시의 매춘은 왕궁의 시궁창과 같다 매춘 혹은 매춘부에 대한 이중적인 기준은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중세의 교회는 매춘을 금지하면서도 ‘필요악’으로 규정해 제한적으로 허용했다.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회의 이런 태도를 다음과 같은 비유로 정당화했다.“도시의 매춘은 왕궁의 시궁창과 같다.시궁창을 없애버리면 궁에서는 더럽고 역겨운 냄새가 날 것이다.” 수많은 왕과 주교들은 성도덕이란 잣대를 매춘에 들이대는 한편 자신의 쾌락을 위해선 매춘부들을 궁 안으로 데려왔다. 19세기에 들어서는 매춘부에 대한 편견과 낙인이 ‘과학적으로’ 정당화되기도 했다.범죄인류학을 창시한 이탈리아의 법의학자 체사레 롬브로소는 매춘부들의 신체적 특징을 조사한 뒤 그들은 모두 좁은 이마와 비정상적인 코뼈,그리고 거대한 턱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나아가 과학자들은 창녀가 고통에 둔감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창녀의 몸에 전기충격 실험을 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들이 확인한 것은 매춘부들 역시 다른 여성과 마찬가지로 자녀를 부양하기 위해 직업 전선에 나선 평범한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매춘, 정당한 산업으로 인정해야 저자에 따르면 매춘부들은 사회의 통념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매춘을 선택한 경우가 많았다.그들은 성적 억압이 일상화된 가정을 떠나 자신의 성적 자율성을 되찾기 위해,혹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에 몸을 팔았다.그와 같은 맥락에서 매춘은 정당한 산업으로 인정돼야 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자발적인 매춘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매춘에 도덕적 굴레를 씌워 게토로 몰아내는 것이야말로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불평등한 지배구조를 영속화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2만 5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이번 밸런타인데이엔… 영화 한편 키스 한번

    8일 후면 밸런타인 데이.상술로 얼룩졌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지만 여전히 연인들을 설레게 한다.초콜릿을 주면서 큐피드의 화살을 날리기 전 영화 한편 보면서 분위기를 분홍빛으로 만들면 어떨까.때맞춰 영화 3편이 13일 개봉된다.달콤·발랄·진지함 등 색깔도 각양 각색이어서 빛깔에 따라 골라 볼 수 있다.영화를 본 뒤 은근한 눈빛으로 “내 사랑의 빛깔이 이런 거야.”라고 들려주면 어떨까? ●늘그막에 찾아온 사랑 사랑은 젊은이들만의 것이 아니다.사랑을 향한 탈주의 감정은 언제 어디서든 아름답다.이에 공감하거나 사랑하기엔 너무 세월이 지나갔다고 망설이는 이들이라면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Something’s Gotta Give)’은 놓치면 아까울,유쾌한 영화다. 영화는 잭 니콜슨,다이앤 키튼,키아누 리브스 등 호화 배역이 만나서 빚어내는 웃음과 감동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로맨틱 코미디다.20대 여성만 전문(?)으로 사귀어온 유들유들한 플레이보이인 63살의 독신남 해리(잭 니콜슨)가 유명한 희곡작가이자 이혼녀인 에리카(다이앤 키튼)를 만난 뒤 갖가지 해프닝과 가슴앓이를 겪으며 엮는 이 ‘은빛 사랑’의 맛이 여간 매콤 달콤한 게 아니다. 해리는 평소 애정관대로 에리카의 딸인 미모의 경매사 마린(아만다 피트)과 작업(?)하려고 에리카의 해안 별장에 갔다가 작품을 집필하러온 에리카를 만난다.에리카는 자기 또래인 ‘딸의 남자친구’가 못내 느끼하고 경멸스럽지만 그가 심장발작을 일으킨 뒤 돌봐주다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한편 해리를 치료하던 젊은 의사 줄리안(키아누 리브스)은 평소 흠모하던 작가 에리카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사랑을 고백하면서 큐피드의 화살은 일상적인 사랑의 나이를 초월해 얽히고 설킨다. ●장난기 가득 그러나 목숨 건… 소꿉놀이 친구처럼 지내왔기에 마음을 털어놓기가 쑥스럽다고? 그러면 ‘러브 미 이프 유 대어(Love me if you dare,원제:Jeux d’enfants)’를 함께 보라.만약 연인이 장난꾸러기라면 금상첨화. ‘러브 미…’는 8살부터 사귄 두 남녀가 아웅다웅 다투며 나누는 장난기어린 사랑으로 연신 배꼽을 잡게 만든다.초현실주의 분위기의 팬터지로 처리한 다양한 장면과 빠른 이야기 전개도 장점.두 사람이 펼치는 엽기에 가까운 재기 발랄한 사랑놀이에 젖어 웃다보면 옆자리에 앉은 친구같은 연인에게 고백할 마음이 절로 든다. 줄리앙(기욤 카네)과 소피(마리옹 코티아르)는 악동 기질이 다분한 초등학생.폴란드에서 이민왔다고 친구들에게 놀림받는 소피를 달래느라 준 카루젤(회전목마가 그려진 사탕상자)을 준 것을 계기로 둘은 친해진다.상자를 주고받으며 내기를 제안하면서 두 악동은 엽기적 발상으로 담임 교사와 교장을 골탕먹이고 소피 언니의 결혼 피로연장이나 줄리앙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소동을 벌인다.그러다 고등학생이 된 뒤 서로 묘한 느낌을 갖고 감정의 색깔도 바뀐다.하지만 ‘삶은 큰 내기’라 여기는 둘의 짓궂음은 초지일관. 카루젤 박스를 징검다리로 사랑을 엮어가는 모양은 앙증스럽고 경쾌하다.각본을 쓴 얀 샤무엘감독은 삽화가와 무대 디자이너 등으로 다진 실력을 맘껏 뽐낸다. ●아가페와 에로스 사이에서… 파트너가 이타적 사랑에만 관심이 많아 아쉽다면 ‘머나먼 사랑(Beyond Boards)’을 보면 어떨까.영화는 지구촌의 모든 전장(戰場)을 누비며 ‘난민 구조’에 목숨을 건 냉철한 의사와 그의 가슴을 녹인 청순한 여인이 주고받는 애타는 사랑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든다. 에티오피아 난민 캠프를 이끄는 영국인 의사 닉 칼라한(클라이브 오웬)이 기아돕기 재단의 자선파티장에 무단 침입해 자선사업가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꼬집는다.그 장면에 충격을 받은 재단 이사장의 며느리 사라(안젤리나 졸리)는 가진 돈을 털어 구호물자를 갖고 닉의 캠프를 찾아간다.그녀가 여느 백인여자처럼 과장된 미소로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가는 줄 안 닉은 매사에 빈정거리다 차츰 사라의 참모습에 감동한다.하지만 닉은 지원금 부족으로 존폐위기에 놓인 캠프에 매달리느라 사랑할 겨를조차 없다. 세월이 훌쩍 흘러 유엔 난민 고등 판무위원회에서 일하는 사라는 닉을 돕기 위해 캄보디아 난민캠프로 향한다.재회한 두 사람은 이제 ‘사적 사랑’으로 성큼 다가간다.그러나 닉은 “내 곁에 있게 되면 불행해진다.”며 사라를 보내는데 이 속끓는 사랑은 체첸으로 이어진다. 이종수기자 vielee@˝
  • 기고/ 中의 고구려사 왜곡을 바라보며

    중국에는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고사성어가 전해진다.위선적 우호선린(友好善隣)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원교근공(遠交近攻)’이란 말 역시 우호선린 관계의 지속이 어려운 상황에서 중국이 자주 사용한 전통적 대외전략이다.이러한 대외관계의 특징은 현대에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중국사회과학원이 주체가 된 ‘동북프로젝트(東北工程)’라는 국책사업이 진행되고 있다.이는 역사연구를 통해 우리 민족의 뿌리인 고구려를 중국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으로 편입시키려는 작업이다.중국이 틈만 나면 강조하는 우호선린 관계의 또 다른 이면을 엿볼 수 있다.우호관계를 아무리 강조해도 선린관계로의 발전에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중국은 인근에 위치한 여러 국가들이 경계하는 대상이다.베트남,인도,러시아,일본을 비롯해 지금은 중국에 속해 있는 티베트 역시 중국에 대해 좋지 못한 감정을 갖고 있다.인근 국가들이 갖고 있는 반감의 원인은 단지 국가간의 이해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중국의 국민성에서도 그 원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추악한 중국인(醜陋的中國人)’의 저자 바이양(柏楊)선생은 현대 중국의 국민성도 전통적 국민성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중국이 개방되고 외국기업의 대 중국투자가 급증하고 있는 현재도 중국인의 자기중심적이고 보수적인 국민성은 별로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이를 국가 규모로 확대시킨다면 자국중심주의가 될 것이다.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부터 “중국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이며,중국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는 모두 중국역사”라는 억지주장을 펼쳐왔다.현재의 중국 영토를 잣대로 사용하는 궤변이다.나아가 주변국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무시하는 중화(中華)주의적 세계관의 표출인 것이다.중국인의 민족성 가운데 또 한가지 위험한 것은 ‘집요함’이다.자신의 적에 대해서는 분묘라도 파헤치고,원한은 3대를 걸쳐서라도 반드시 갚는다는 섬뜩한 집요함이 있다. 5년 동안 연구비만 200억 위안(약 3조원)을 투입하는 ‘동북프로젝트’가 갑자기 시작된 일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20년 이상 수백편의 논문을 통해서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계속해왔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이는 자신의 억지주장에 대해 더욱 정교한 이론적 틀을 갖춰가려는 작업으로 판단된다.나아가 한국의 고대사를 폄하함으로써 남북통일 이후 예상되는 국경·영토분쟁에 대비하고,최근 불거지는 ‘북간도 문제’를 제압하려는 국가 차원의 전략이기도 하다. 현안이 되고 있는 타이완문제,티베트문제와 동일한 선상에서 집요하게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중국의 태도에 두려움을 느낀다.중국의 이러한 움직임에 우리의 정부나 학계는 뒤늦게 심각성을 인식하고 중국교과서를 분석하고 북한과의 공동대응,국제연대를 모색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대응방법에 한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조선족 문제 하나도 중국의 눈치를 보는 마당에 강력한 대응을 할 수 있겠느냐는 자조섞인 비아냥이다.사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약한 자의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강한 자에 대한 도전의 의지가 부족하다. 일본이 동방의작은 섬나라에서 멈추지 않고 세계적 강자로 부상한데는 지속적으로 강자에 도전하는 국민적 의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일제가 실증사학이란 명분으로 한민족사를 축소·왜곡한 영향이 아직도 우리 학계에 남아 있다는 핑계는 본질적인 반성이 아니다.차제에 고구려사에 대한 논리적·실증적 연구를 펴는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고대사 연구진 양성 등 전문인력 확보를 위한 정부의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지원도 절실하다.아울러 강자에 대한 도전의지를 갖고 정부가 보다 강력하게 대처해주기를 바란다.우리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에서도 중국과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는 대만정부의 담력과 지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김윤태 동덕여대교수 중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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