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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새달 중순 핵실험/일 언론 보도

    【도쿄=강석진특파원】 중국 인민해방군은 2월19일 구정(춘절)전에 지하핵실험을 실시키로 결정,신강 위구르자치구의 로프노르핵실험장에서 준비작업을 진행중이라고 됴쿄신문등 일본언론이 14일 보도했다. 이 신문들은 북경발 지지(시사)통신을 인용한 이 보도에서 『중국측은 핵실험장에 이미 수천m 깊이의 수직동굴을 파놓았으며 동굴속에 핵폭발장치만 설치하면 준비가 마무리된다』고 전했다. 북경 소식통들은 이와 관련,실험준비상황에 대해 핵폭발장치를 설치할 단계에 있으며 『겨울에는 땅이 얼어 실험에 적당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으나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이 체결되기 전에 가능한 많은 실험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 서둘러 핵실험을 실시키로 했다고 말했다. 도쿄신문은 이에 대해 『중국측의 핵실험강행은 오는 3월 대만총통선거에 대한 위협의 의미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중국은 당초 지난해 세차례 핵실험을 실시할 계획이었으나 핵실험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대에 부딪쳐 5월과 8월 두차례밖에 실험을 갖지 않았다. 한편 CTBT는 22일부터 제네바에서 초안작성에 들어가 빠르면 3월중 초안이 마련될 전망이다.
  • 중국 “핵실험 곧 강행”/금년들어 세번째 계획/외교부 대변인

    ◎“「전면금지」 서명전까지 계속” 【홍콩 연합】 중국 외교부 진건 대변인은 『중국이 다음번 핵실험을 곧 실시한다』고 밝혔다고 홍콩신문들이 4일 일제히 보도했다. 중국은 지난 8월17일 신강위구르자치구의 로프 노르(나포박)핵실험기지에서 올해 두번째 핵실험을 실시했으며 곧 실시될 새 핵실험은 금년 세번째다. 진건 대변인은 스페인 언론과의 회견에서 『핵실험 전면금지조약이 서명되기 전까지 중국은 계속 핵실험을 실시할 것』이라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일본이 핵무기를 갖는 것을 중국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중국은 핵무기를 사용해 핵무기가 없는 국가에 대처하지 않을 것이며 핵무기를 상대방보다 먼저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중,각료·성장 곧 “세대교체”/이달말 심사작업 매듭/호금도 주도

    【홍콩 연합】 중국공산당 중앙은 내년 상반기 성장과 자치구주석 및 성,자치구 당위서기,국무원 장관들에 대해 대규모 인사이동을 실시키로 하고 지난달부터 이달말까지 심사작업에 돌입했다고 홍콩의 성도일보가 22일 보도했다. 이에따라 심사조들이 「전국적으로」 파견돼 조사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당 정치국 상무위원 호금도가 심사책임을 맡았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이번 인사의 주목적은 각지방에 만연된 지방주의와 제후세력의 팽창을 저지하는데 있으며 그 주요대상은 각지방에서 장기 통치했거나 65세 전후의 은퇴연령에 이른 지도자들이다. 지난 89년 강택민 당총서기 집권후 아직 경질되지 않았던 청해성 서기 윤극승,신강 위구르자치구 서기 송한양,절강성 서기 이택민,안휘성 서기 노영경,운남성 성장 화지강이 이번 인사의 주요대상이다. 또 산동성 서기 조지호(64),흑룡강성 서기 악기봉(64),사천성 성장 소앙(65),광동성 성장 주삼림(64),당중앙조직부장 장전경(64),당중앙 대외연락부장 이숙쟁(66)등 65세 전후의 간부들도 인사대상에 올랐다.
  • 부랴트공 수도 울란우데(시베리아 대탐방:37)

    ◎시장마다 중국상인 호객소리 시끌벅적/중 국경과 인접,17세기부터 국제 교역도시/한때 칭기즈칸이 지배… 몽골·중·러 문화 혼재 울란우데에 도착하며 모스크바로부터의 거리는 5천5백32㎞로 늘어났다.이곳에서 제일 먼저 실감하는 것은 중국상인들의 위력이다.몽골국경을 넘어 들어온 중국상인들은 울란우데 시내 곳곳에 대형 중국시장을 형성해 오랜 소비에트체제에 젖어 굼뜬 이곳 사람들의 「혼을 빼놓고」 있다.우리나라 남대문·동대문시장의 축소판을 연상시킬 정도로 활기찬 중국상인들의 호객소리·흥정소리는 주민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이곳 러시아인들의 의식에 가히 폭풍같은 변화를 몰고 왔다. ○남대문시장 축소판 이곳 민족시인 개세르의 이름을 딴 호텔 리셉션의 부랴트 아가씨는 얼마나 친절한지 이 도시에 대한 인상을 여행중 최고로 만들어 놓았다.택시기사·식당의 여급 등 대부분의 시민들이 지나온 시베리아의 다른 도시들과는 완전히 다른 개방 마인드를 보여주었다.중국상인들의 영향과 함께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거쳐 북경으로가는 기차의 교차역이라는 지리적 위치가 개방의식을 불어넣는 데 일조했음이 분명하다. 울란우데는 국제무역 도시로서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처음 도시는 1666년 코사크요새로 출발했다.이 요새를 거점으로 부랴트인·에벵키인 등 원주민들로부터 「애삭(공물)」을 거둬들였다.우다강과 그 지류인 셀렝가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울란우데의 옛지명은 「우다강 상류」라는 뜻의 베르흐니우딘스크였다.베르흐니우딘스크는 중국국경과 인접한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곧바로 바이칼 이동 지역의 대형 상업중심지로 성장했다.이곳을 거점으로 중국으로부터 차·비단 등이 대거 수입됐다.1899년 시베리아횡단열차가 이곳을 통과하며 도시발전을 더욱 가속화시켰다.1920년 잠시 극동공화국 수도였고 58년부터 부랴트공화국의 수도가 됐다.「붉은 우다강」이라는 뜻의 울란우데로 개명한 것은 1984년이었다. 부랴트인들은 원래 이곳 토착민들이다.그러다 8세기에는 위구르·투르크한의 지배를 받았고,9세기 때 몽골의 침략을 받기 시작해 10세기에 들어 칭기즈칸에 의해 완전히 몽골로 편입됐다.이후 줄곧 몽골말과 몽골글을 사용했다.그러다 17세기중반부터 러시아의 점령이 시작됐고 1939년부터 러시아문자를 쓰기 시작했다.이같은 복잡한 역사 탓에 여러 문화·종교·관습이 어지럽게 혼재돼 있다. ○곳곳에 라마교 사찰 특히 이곳은 시베리아에 진출한 라마교의 총본산이 있는 곳이다.도착한 이튿날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이곳을 찾아갔다.도심을 벗어나자 곧바로 광대한 평원이 펼쳐진다.평원 뒤로 얕은 산이 둘러쳐진 전형적인 자바이칼 스텝이다.평원에는 주말을 맞아 사람들이 대거 몰려나와 감자를 심고 있다. 불교의 절을 부랴트 말로는 「다싼」이라고 부른다.불과 1시간여만에 유명한 항공기 제작공장이 있는 소콜시를 지나 1백여호의 이볼긴스키 다싼 마을에 도착했다.평원 한 가운데 요란한 치장을 한 다싼의 불탑이 솟아있다.티베트에 있는 라마교 사원과 거의 똑같은 양식이고 불당안에는 달라이 라마의 초상이 곳곳에 걸려있다.주말인데도 불구하고 10여명의 승려만 예불을 보고있고 신도는 2∼3명에 불과했다.부랴트의 다싼들은 스탈린시절인 30년대말 종교탄압때 거의 폐쇄당해 이볼스키 다싼 한곳만 남았다고 한다.물론 NKVD(KGB의 전신)의 철저한 통제를 받았다.그러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복원운동이 일어나 현재는 부랴트공화국 안에 모두 14개의 다싼이 문을 열었다고 한다.이볼스키 다싼에는 시베리아유일의 라마교 신학교도 개설돼 있다.바이칼 서쪽의 퉁가라는 마을에서 왔다는 한 신학생의 말에 따르면 현재 1백명의 신학생이 있으며 철학·천문·티베트어·영어·몽골어 등을 공부한다고 했다.그는 라마교와 불교의 차이점을 묻는 질문에 『라마교는 샤머니즘 요소가 강하며 호랑이·큰 바위 등 잡신을 많이 섬긴다』고 했다. 이곳과 달리 바이칼 서쪽의 부랴트인들은 대부분 러시아정교를 믿는다.이 지역의 기독교화는 1681년부터 시작됐는데 러시아역사에는 이 선교운동을 「다우리아 미션」으로 부른다.18세기에 이르러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10만명 정도의 부랴트인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초대형 레닌 두상도 울란우데 시내중심가의 주청사앞 광장에는 아마도 러시아 전역에서 제일 클 것같은 초대형 레닌두상이 세워져 있다.기단높이 20여m,두상높이가 15m는 됨직하다.그런데 그 두상을 정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부랴트인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알마아타 중앙광장의 레닌얼굴은 어딘가 카자흐인을 닮았고 타슈켄트의 레닌동상에서는 우즈베크인의 분위기를 느꼈던 기억이 난다.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묘한 일이다. 주청사 꼭대기에는 백·청·적의 러시아국기와 함께 청·백·황의 부랴트국기가 나란히 걸려있다.현재 이곳은 2년전 주민 직선으로 선출한 레오니드 보탐포브 대통령이 있고 자체국기,자체 공식언어 등 외형적으로는 거의 독립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다. 울란우데 교외에는 시베리아 최대의 민속촌이 있다.고대 에벵키인·부랴트인들의 무속·관습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면 반드시 한번 둘러볼만한 곳이다.이들이 사용했던 유르타(천막집)·사냥도구·각종 무구 등이 잘 보존,전시돼 있다.차르 이반 그로즈니때 러시아정교가 신구파로 양분되고 난 뒤 구파 정교회의 건물도 이곳에만 보존돼 있다.지금의 러시아정교회는 당시 왕실과 타협해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새로운 전통을 받아들인 신파다.「라스콜(분리)」이라고 부르는 이 신구파 분리는 러시아 교회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구파,즉 「스타라오브랴치(전통관습이란 뜻)」는 주도권을 신파에게 빼앗긴 뒤 얼마간 독자적인 교회양식,전통을 고수하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하오에는 트람바이를 타고 울란우데 외곽을 돌아보았다.반갑게도 「크바스」라고 부르는 러시아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전통음료를 길거리에서 팔고 있었다.이스트를 넣어 시큼달콤한 맛을 내는데 리어카에 실은 큰 철제탱커에 수도꼭지를 달아 아주 싼값에 판다.모스크바에서는 2∼3년전부터 코카콜라·펩시 등 서방음료에 밀려 자취를 감추었는데 시골마을이라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큰 유리컵에 가득 담긴 크바스를 노인과 젊은이 2명이 번갈아 마시는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 중 “핵실험 두번 더 실시”/일본에 통고

    ◎새달 올 3번째 실험 가능성 【도쿄=강석진 특파원】 중국은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이 체결될 때까지 앞으로 핵실험을 두 번 더 실시한다는 방침을 일본 정부에 통고해 왔다고 도쿄(동경)신문이 25일 보도했다. 도쿄신문은 정부 소식통을 인용,중국의 핵실험 목적은 군사기술 향상에 있으며 올 가을에 금년들어 세번째 핵실험을 실시할 예정이며 종전과 같이 신강 위구르 자치구의 로프누르(나포박)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시기적으로 올들어 세번째 핵실험은 9월하순에서 10월초가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측은 남은 또 한차례의 핵실험은 CTBT가 체결되기 전인 내년중에 실시할 것이라고 신문은 설명했다.
  • 중국/오늘 수교 3주년… 통계로 본 경제·사회상

    ◎개방 15년간 연평균 9.3% 성장/인구 11억9천만… 조선족 백92만명/무역규모 세계 9위… 미·일·홍콩 편중/실업률 3%… 실업자 80%가 청년층 송진과 동백기름이 여전히 많이 생산되고 1천만마리의 당나귀와 노새가 살고 있는 나라.한편으론 부동산업자의 수입이 가장 높고 고도의 성장을 구가하는 나라,중국….통계청이 한중수교 3주년을 맞아 23일 발표한 「중국의 경제사회 지표」에는 「전통을 고수하는」는 대국과 「개방으로 질주하는」 현대 중국의 모습이 혼재해 있다.최근 「중국 통계연감」을 입수·분석한 이 자료엔 대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모습이 통계로 담겨 있다. ◇인구=지난해말 추계인구는 11억9천8백만명.전세계 인구의 21·2%로 남자 6억1천2백만명,여자 5억8천6백만명 이다.여자 1백명당 남자 숫자인 성비가 1백4.5명으로 우리나라(1백1.4)보다 높다.지역별로는 사천성 인구가 가장 많고(전체 9.5%)고 하남성 산동성 강소성 순이다.인구밀도는 ㎦당 1백22명으로 세계평균(40명)보다 높지만 한국(4백52명) 일본(3백29명) 영국(2백37명)보다 낮다.인구증가는 52년 2%에서 65년 2.8%로 높아졌으나 이후 둔화돼 지난 해 1.1%로 떨어졌다.출생률은 인구증가율과 비슷하나 사망률이 52년 1.7%에서 지난 해 0.7%로 내려앉았다.초혼 연령은 22.7세로 우리(24.9세)나 미국(23.3세)보다 낮고 인도(18.7세) 인도네시아(20세)보다 높다.민족은 한족 등 모두 57개.한족이 전체 91.9%로 태반이나 인구 1백만명이 넘는 민족도 장족 만주족 회족 위구르족 조선족 등 15 종족이나 된다.조선족은 90년 인구총조사때 1백92만명으로 길림·흑룡강·요녕성과 내몽고에 주로 산다. ◇고용·임금·물가=개방정책으로 농업에서 공업과 서비스쪽으로 노동력이 빠르게 옮아가고 있다.1차산업 종사자가 56%,2차 22.4%,3차 21.2%.실업률은 2.9%로 낮지만 실업자의 80%가 청년층 이다.53∼78년까지 1인당 명목임금 상승은 1.25%였으나 경제개방이 시작된 79∼93년의 연평균 임금상승률은 12.9%로 급상승 추세다.1인당 연평균 임금은 3천3백71원(93년 환율은 백달러당 5백74∼5백7원)이며,지역별로는 상해(5천6백46원) 북경(4천5백10원) 천진(4천3원) 광동(5천3백22원)이 높다.부동산업 종사자의 임금이 4천3백20원으로 가장 높다.전기·가스·수도업(4천3백19원) 운수·창고 및 통신업(4천2백73원) 과학연구기술서비스업(3천9백4원)이 뒤를 잇는다.88년 한때 18.5%까지 치솟은 소매물가는 이후 긴축정책으로 안정됐으나 91년 긴축정책 완화 이후 93년 13.2%로 오르는 등 다소 불안하다. ◇생산·교역=경제개혁과 대외개방 이후 중국의 공업생산이 크게 늘어 컬러 TV는 79년부터 93년까지 연평균 73% 증가했다.생산량은 선풍기의 경우 우리보다 31배 많은 7천3백87만대,사진기는 6.5배 많은 1천1백36만대,세탁기는 4배 많은 8백95만대에 이른다.수출은 93년 9백17억달러,수입은 1천40억달러로 각각 세계 9위.일본과 홍콩,미국 등 3개국과의 교역이 절반을 넘는다.외자는 지난해 총 1천2백32억달러를 들여왔고,집행기준으로 홍콩 일본 대만으로부터의 외자도입이 전체 70%였다.외채는 93년말 8백35억달러로 원리금 상환부담률(7.7%)이 위험수위(25%)는 아니다.대외개방으로 국방비가 감소,78년 전체 15.1%에서 93년 8.1%로 떨어졌다.경제는 79년부터 93년까지 평균 9.3%(한국 7.6%)의 고성장을 지속했고,1인당 국민총생산은 78년 2백23달러에서 93년 4백62달러로 늘었다. ◇교육·사회=국교 입학률과 국교졸업생 진학률은 98.4%,86.6%로 높지만 중학 졸업생의 진학률은 46.4%로 낮다.그러나 교원 1인당 학생수는 국교가 22.4명으로 미국·일본(20명) 수준이고 중·고교도 14.7명으로 미국 일본과 비슷하다. ◇기타=스포츠 세계기록 경신이 매년 늘어 93년에는 1백24개 중 88%가 여성에 의해 이루어졌다.소 사육두수 1억1천만마리,돼지 3억9천만마리,말 9백만마리,당나귀 1천만마리,노새 5백50만마리 등 가축만 7억5천만마리다.한해에 벌꿀 17만t,동백기름 48만t,송진 58만t,오동기름 42만t이 생산되며,자동차 생산은 1백29만대,자전거 생산은 4천2백만대나 된다.
  • 중,또 지하 핵실험/어제 신강성서

    ◎올들어 두번째… 러·일 등 강력비난 【북경·캔버라·도쿄 외신 종합】 중국은 17일 금년들어 두번째로 지하핵실험을 실시했다고 진건 외교부대변인이 밝혔다. 중국의 이날 지하핵실험은 신화통신을 통해 발표됐으나 신화통신은 핵실험 장소나 규모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그러난 캔버라의 호주지진센터는 이날 상오 10시(한국시간) 북경에서 서쪽으로 2천5백㎞ 떨어진 신강 위구르자치구의 롭 노르 핵실험장에서 핵실험이 실시됐으며 리히터 규모 5.6의 진도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호주 지진학자들은 또 이번 실험에서 나타난 폭파력은 재래식 화약 20㏏에서 80㏏의 파괴력과 맞먹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진대변인은 『중국은 핵실험의 완전한 금지와 핵무기의 완전폐기를 지지한다』고 말하고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소수의 핵무기는 전적으로 자위를 위한 것이며 다른 나라에는 전혀 위협을 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지난 64년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을 실시한 이래 이번으로 43번째 핵실험을 기록했으며 금년 들어서는 지난 5월15일 첫 지하핵실험을 한 바 있다. 중국은 금년중 최소한 한차례 더,그리고 내년에 3차례 정도의 핵실험을 실시한다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다른 핵강국보다 핵실험 계획에서 크게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핵실험을 실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한편 일본과 러시아·호주·뉴질랜드 등 세계 각국은 이날 중국의 핵실험에 대해 즉각 강력히 비난하고 나섰다. 노사카 고켄(야판호현) 일본관방장관은 『종전 50주년을 맞아 전세계가 핵 비무장을 위한 노력을 강화하는 시점에서 나온 중국의 핵실험에 대해 매우 유감』이라고 말하고 중국에 대한 원조를 추가감축할 것임을 시사했다. 폴 키팅 호주총리와 제임스 볼저 뉴질랜드총리도 중국의 핵실험은 핵무기를 해체하려는 전세계적 노력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핵확금 정신에 위배/정부,우려·유감 표명 정부는 17일 중국이 올들어 두번째로 핵실험을 실시한데 대해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정부는 이날 서대원 외무부대변인의 논평을 통해 『중국의 핵실험은 지난 5월 핵무기 비보유국과 보유국간에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진 핵확산금지조약(NPT) 무기한 연장의 기본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며 모든 핵실험의 중단을 촉구한 지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의장성명에도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국 사흘이내로 또 핵실험 가능성”/그린피스 일 지부 【도쿄 아타르타스 교도 연합】 중국은 이달 20일까지 중국에서 또 한차례 핵실험을 실시할지 모른다고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일본지부 대변인이 주장했다. 믿을 만한 소식통으로 알려진 이 대변인은 다양한 정보원으로부터 수집한 자료를 근거로 판단해 볼 때 이같은 주장은 매우 신빙성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 중 신강/5만명 “독립” 시위/지난 5월

    ◎“공산통치 종식” 외쳐… 88명 사망 【홍콩 연합】 중국 서북부 신강위구르자치구에서 지난 4월22일부터 26일까지 소수민족인 위구르인과 카자흐인 5만명 이상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과 공산당통치의 종식을 요구하는 시위와 폭동을 벌여 88명이 사망하고 3백여명이 부상했다고 홍콩의 중국 전문 월간지 「동향」 최신호가 15일 폭로했다. 이날부터 배포되기 시작한 동향 6월호는 「신강 5만명 무장폭동」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번 유혈시위와 폭동이 발생한 곳은 인근 티베트자치구처럼 중국내에서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한 이륵극,찰포사이,소소,특극사,공류,신원 등 6개 변경지역이라고 말했다. 이들 지역은 중국의 통제로 서방언론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곳이다. 시위와 폭동 참가자들은 신강위구르자치구의 독립과 카자흐국의 창설 및 종족적으로 유사한 인근 카자흐스탄공화국으로의 편입을 요구하며 공산당과 한주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동향은 말했다.
  • 카자흐 자치주 이리계곡(서역 문화기행:12·끝)

    ◎천산 산맥자락 초원… 기마민족의 터전/18세기 들어 영·러 등 열강 각축… 중,54년 자치주 선언/아편전쟁 승리 이끈 임칙서 장군 동상 혜원성에 남아 밤낮을 부리나케 보름을 달리면서 겨우 서역의 중로와 남로를 말 타고 꽃 보듯 하였다.이제 남은 것은 사막에 논을 일구고 초원을 비단으로 가꾼,그래서 서역의 낙원으로 불리는 북로를 결코 빠뜨릴 수 없었다. 우루무치에서 이닝(이령)까지 공로 한시간은 정말 미의 여로였다.중로나 남로가 백색 아니면 적갈색의 질식적인 영토였다면 북로는 적갈색이 마르고 청록색이 살 찌는 낙원이었다.멀리 아이비호와 사이리무(새리목)호의 쪽빛 물결이 굽어 보이고 카자흐의 팔카스호로 흘러가는 이리강의 굽이치는 맥류조차 역력히 보인다.그보다는 하얀 만년설의 천산산맥과 파란 초원과 바둑판인양 구획 정리된 논밭들을 보면서 그 장관과 풍요를 읽고 있을 때 저 땅에 흥망과 공방이 오갔던 역사,그 소용돌이가 들리는 듯했다. ○꼬마들도 말타고 사냥 여기는 기원전 6세기경부터 흑해로부터 동점한 스키타이들이 유목하면서 행국을 형성하던 곳.기마민족의 마당은 초원이었었다.따라서 초원위에서 꼬마조차 말을 타고 새를 쏜다는 흉노와 한무제때부터 동맹을 시도했던 오손과의 밀고 당기던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땅이다.그래서 눈물겨운 이야기도 있었다. 기원전 110년부터 기원전 105년 사이의 일이었다.한무제의 사신 장건이 오손의 곤막왕을 찾아 명마 천필을 요구하자 오손왕은 한왕조의 공주를 소망하였다.오손과의 동맹으로 흉노를 치고 명마 천필을 위해 이를 응낙하였다.무제 조카의 딸인 세군공주를 구천리밖 오손에게 보냈다.공주가 왕의 우부인이 되었지만 멀지 않아 곤막조차 노환으로 죽었다.오손의 풍습대로 곤막의 손자에게 다시 시집을 가서 딸 하나를 두었다지만 고향을 그리다가 끝내 백조가 되어 환고향하겠다는 슬픈 시를 남겼었다. 아름다운 이리계곡에 싸움은 쉬지 않았다.18세기에 들면서 이슬람교도의 반란으로 야기된 서터키스탄의 무장 침입을 비롯,영국·러시아등 열강의 침노로 영일이 없었다.19 54년 중국 중앙정부가 이닝에다 「이리지역카자흐자치주」를 선포하면서 안정을 되찾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이리강 유역은 뎅구리(카자흐말로 하늘이란 뜻)신앙에 뿌리 깊은 기마민족과 세계최대의 농업민족인 한족과 교전으로 얼룩진 「화성」이요,「백양성」이다. 「사기」,「대원전」에 따르면 오손은 흉노보다 작은 행국으로 준갈분지의 남역과 천산북로를 무대로한 천산유목민이었다.그들은 늘 몽골 고원으로부터 침노하는 흉노나 서쪽으로부터 밀려오는 대월씨,대원등과 쫓고 쫓기면서 혼혈을 거듭하였다.그래서 옛날 오손국을 점거한 카자흐사람이 혈맥상 오손의 후예일 가능성도 없지않지만 유목적인 생활모형만은 오손의 계승자임이 틀림 없다. 이닝지역의 인구는 비록 카자흐·위구르·한의 삼분천하였지만 카자흐의 자치주인 만큼 카자흐의 색깔이 진했다.거기서 손을 뻗치면 옛날 소련연방이었던 카자흐공화국과 맞닿는 국경이다.텁수룩한 수염에 뾰죽하면서도 결코 높지 않은 코.형상은 사뭇 위구르사람을 닮았지만 살갗은 흉노쪽,역시 알타이가 가까워선지 모르겠다. ○위구르사람 얼굴 닮아그러한 카자흐사람을 보면 옛날 한나라때부터 이곳에 죽치고 살았던 터주들임에도 그들이 뽐내는 천마를 기르고 천산 산마루나 초원을 질풍처럼 달리면서 함성을 지르는 기마술 말고 그들 스스로의 역사는 쓸쓸하리만큼 한산하다. 1978년 북경의 고고학자들이 이닝의 서쪽 고을 신웬(신원)에서 오손의 무덤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었다.필자는 그때 의아했었다.유목민에게는 성토해서 봉분을 만드는 습속이 없어서였다.오손족은 그만 두고 천하를 휩쓸었던 칭기즈칸의 무덤조차 알 길이 없지 않았던가? 그들은 시신을 풀밭에 묻고 그 위로 말이 달리고 새풀이 돋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풀밭이 되었었다. 그럼에도 차푸차알(찰포사이)에 있는 시보(석백)족 자치현에 오손 고분이 있다는 말을 듣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그 고분이 있는 진첸(김천)읍은 이닝의 동남쪽 4.8㎞지점.진쳰읍 이라치뉴루(의랍재오록)마을엔 크고 작은 고분 2기가 있었다.그들은 모두 만두모양의 대머리 무덤,그 위에는 풀 한포기 없는 황토의 언덕이었다. 진쳰 씨앗공장뒤편에 있는큰 무덤은 그 높이가 10m에 직경이 25m쯤,거기서 서쪽으로 4백m지점인 시보중학교 교문옆에 있는 작은 무덤은 큰 무덤의 3분의 1 크기였는데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임은 마찬가지였다.다만 아무 곳에도 2천년전의 오손 무덤임을 증명하는 기록은 없었다.1978년,신웬고분의 발굴조사에서 이미 밝혀진대로 비록 2천년의 연조는 밝혀졌지만 그 속에서 고작 유골과 약간의 목기만 출토되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렇게 다만 흙 둥주리뿐인 오손 고분을 답사하고 돌아오면서 결코 허행이 아니었다는 생각은 차푸차알에 들러 시보족들의 마음을 참관하고서였다.그곳은 이닝 남쪽 20㎞지점,서역에서는 유일하게 시보족이 집단 거주하는 촌락이었다.그 마을 이름이 시보말로 「곡식의 창고」라는 뜻,그만큼 풍요로운 땅이었다. 필자가 서역을 떠돈지 스무날,이제 귀로에 올랐는데 뜻밖에도 타관서 동향을 만난 설렘이 있었다.글세,차푸차알을 거닐다가 거리에서 만난 얼굴들은 몹시 낯이 익었었다.작은 키에 둥글 넙죽한 얼굴,낮은 코에 가는 눈.그뿐이랴? 그들의 민속촌에서는 울긋불긋한 과녁에 활쏘기와 장사들의 씨름판이 벌어지고 있었다.거기다 서너근이 될법한 무와 빈대떡 비슷한 밀떡을 부침질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2년여 남짓 귀향살이 그들은 벌써 백여년전,빈발하는 청로전쟁에 만주로부터 파견된 청군의 후예들이었다.그러니까 우리 민족과 가장 사촌민족인 만주족이었는데 그곳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만주어 보존 구역이었다. 그러나 풍운의 현대사가 남아 있는 곳은 역시 중·카국경옆 훠청현에 있는 후이웬(혜원)읍이었다.후이웬은 이닝 북서 40㎞지점.거기는 청대 이리장군(총통이 등진장군의 약칭)의 주둔지였다. 청나라는 1757년,준갈분지의 반란을 평정하여 서역을 재통일하고,1762년,거기다 「이리장군」을 설치하여 신강지역 최고의 행정및 국방의 수장으로 천산산맥의 남북로는 물론 팔카스호 동쪽지구를 총관장했었다.1764년부터 3년에 걸쳐 이곳에다 둘레 7㎞의 성을 쌓았지만 1871년의 러시아침략으로 무너졌던 것을 18 82년에 오늘의 후이웬성으로 복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이웬성이 역사의 무게를 지니게 된 것은 2백30년에 달한 연조 그 자체보다는 그를 다스리던 사람과 역사와 예술을 한 곳에 응집 표현한 몇채의 건물이 있다.그 사람은 임칙서(1785∼ 1850년)요,그 건물이란 후이웬루(혜원루)와 장군부·장군정이다. 임칙서는 애국의 장군이었다.광동광서의 총독으로 금연운동을 펼치고 아편전쟁을 일으킨 영국군대를 물리쳐 공을 세웠으면서도 면직 당한 채,1842년12월부터 이리장군으로 전임,1845년1월 사면 받기까지 2년남짓 귀양살이하면서도 농지를 확장하고 농산을 장려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의 자취는 사방에 있었다.후이엔성안에 보존되고 있는 당시 이리장군의 거소요 지휘본부였던 「장군부」와 「장군정」이 중국 남방의 소박한 건축양식과 정원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는가하면 후이웬성 북쪽 5백m쯤엔 임씨가 손수 심었다는 청강수 네그루가 「임공수」란 이름으로 빨간 벽돌담안에 모셔 있었다.거기에 그치지 않았다.이닝시 서북쪽 교외의 경제개발구역에는 이닝시문화국에서 1994년8월에 완공한 「임칙서기념관」이 문을 열었는데 그안에는 임씨의 동상과 사적전시실이 꾸며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리지역을 상징하는 마크는 뭐니뭐니해도 후이웬성밖에 북경의 고루를 본 떠서 1897년에 축조한 「후이웬루」다.벽돌 축대위에 날듯한 처마와 울긋불긋한 기둥의 3층 누각은 어쩌면 중국 서북단을 지키고 카자흐 자치주에 세워진 가장 한족적인 문화의 축도로 서 있다.
  • 언기국의 고성 사십리성(서역 문화기행:11)

    ◎비바람에 크게 훼손… 한·수 유물 출토/당대부터 관개시설 발달… 보리·배·사과 등 풍성/인근엔 거대한 담수호… 연간 4백여t 고기잡아 서역에 오직 하나뿐인 지방철도 남강선은 우루무치에서 동남쪽으로 천산산맥의 북록을 넘어 쿨라까지 4백70㎞.쿨라는 그 남강선의 종점이며,서역의 몸통격인 타림(탑리목)분지의 동북단에 위치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곳은 서한때 서역에 열립했던 36국중의 하나인 거리의 도읍이었지만 동한때엔 언기나라에 합병되었던 곳이다.한·당의 서역도호부였던 오루(오뢰)·윤대·쿠차 등이 모두 쿨라의 남쪽에 위치했다. 언기는 쿨라의 서북 50㎞밖에 있었다.오늘은 비록 쿨라가 이 지역 몽골자치주의 도읍으로 그 정치적인 위상이 높지만 청나라 이전까지만도 언기의 지위가 높았다.따라서 한나라때는 「언기」,위진때는 「오이」,당나라때는 「아기니(아기니)」,송원대에는 몽골사람과 위구르족이 정착하면서 「카라사알(객라사이)」로 불리었던 언기에는 역사의 유적도 많았다.그것은 한나라때 언기국의 세가 거리국의 그것보다 우월했음을 말해주었다. 현장법사가 쓴 「대당서역기」에는 언기를 국방에 유리한 요새지요,관개가 발달하여 보리 기장 대추 포도 배 사과가 풍성한 농산지요,가람이 10여곳에 승려가 삼천을 넘는 불교의 본산이라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의 언기읍은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의 취락일뿐 아무런 역사 유적이 없었다.가장 상징적인 유적은 언기현에서 중국 최대의 내륙 담수호인 보스텅(박사등)호로 가는 길옆의 「사십리성」이었다. ○개원통보가 당대확인 그것은 필자가 서역에서 보았던 많은 고성중에선 가장 규모가 작고 풍화와 손괴의 정도가 심한 데다 출토된 유물조차 적어서 그 연대를 단정하기에 어렵게 했다.필자는 정문을 통해 고성에서 불룩한 언덕으로 올랐다.둘레의 길이가 3㎞ 남짓한 정방형의 고성,성안에는 비록 그 형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부서졌지만 판축된 토벽의 두께와 높이로 보아 장대한 요새는 아닐지언정 어느 관아의 건축이나 창고등의 용처로 보였다. 19 63년,「사십리성」의 탐사 발굴때 출토되었던 도기 동경 철검 동전 등으로 이 땅이 한대로부터 북조를 거쳐 수당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와 생활이 묻혔던 현장임을 믿게 되었다.특히 그속에는 당대의 주전인 「개원통보」가 그러한 확신을 주기도 했었다. 청대 서송이 쓴 「서역수도기」는 이곳을 한대에 존립했던 언기국의 도읍지인 「원거」성으로 추정한 바 있었다. 그 「원거」는 둥근 도랑이란 뜻,지금 황막한 사막속에 당치도 않은 말로 보이지만 지금도 사십리성의 둘레를 살피면 지형이 움푹한 데다 멀지 않은 곳에 관개의 수로가 출렁거려 어쩌면 당시의 호성하였을지도 모른다.더구나 여기서 불과 20리밖 남쪽엔 58㎞의 길이에 28㎞ 너비의 호수,그래서 「서해」로 불리는 보스텅호가 있었다. 보스텅호 선착장.우거진 갈대숲에 서서 함박눈처럼 분분한 갈매기를 보면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쯤 서 있노라는 착각을 오래 오래 씻을 수 없었다. 연간 4백여t의 어획고를 자랑하는 선창.거기엔 갈대의 늪을 이어주는 판교도 여러 군데 있었다. 옳지! 여기서 정동으로 4백㎞를 훌쩍 날면 거기엔 또 하나의 담수호 로프·노오르(나포박)늪이 있다.거기는 비록 중국이 첨단무기를 시험하는 척박한 땅이지만 그 언저리엔 지금부터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 330년까지 4백년동안 선선의 왕조가 떵떵거리고 영화를 누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몰아닥친 풍사에 덮인 채 춘몽처럼 사라진 누란의 땅이 아닌가? 필자가 연민하는 그 누란의 유적지,그 길은 너무 험했다.다만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서방기선 통천하 기록 보스텅호에서 쿨라로 돌아가는 황혼,다시 언기현을 관통,언기산을 굽어 돌 때 휘몰아치는 가을 바람에 뽀얗게 모래가 일면서 시야가 흐렸다.이 때 10세기 말 송나라 시인이었던 심료의 시 「언기행」이 생각났다.세월은 천번이나 바뀌었어도 이 계절 이 고장을 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언기산두모연자. 오량성단행인지. 평사풍급권한봉, 천사궁로월여수」(후략) (언기산 산마루엔 자줏빛 저녁연기, 소·염소 움막 들고 인기척도 끊겼네. 사막에 모진 바람,쑥풀을 날리고, 하늘은 천막이요 달빛은 물이네) 언기산 너머로 서울의 안양천만한 강이 흘렀다.이름하여「개도하」.비록 천리를 굽이치는 장강은 아닐지라도 수십m의 강폭에 훤칠한 다리.그것은 공작강(공작하)에 합류되어 로프·노오르로 유입하는 강줄기였다.이를 두고 사람들은 「서유기」에 나오는 「통천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명작을 남긴 현장으로 「철문관」만한 곳이 없다.당대의 변새시인 참삼(음참·714 ∼ 770)은 여기서 「철문관누각에 쓰노라(제철문관루)」와 「철문관 서관에 자면서(숙철문관서관)」등 두편의 명시를 남겼다. ○3층누각 철문관 우뚝 철문관이란 언기현과 쿨라를 연결 짓는 협곡인 바,공작강 상류에 있으면서 망망 수천리의 타림분지로 들어가는 목이다.그래서 「철관곡」으로 불리는 험관이다.무엇보다 참삼의 「철문관누각에 쓰노라」가 12 00년전의 당시를 생생하게 투시해서 철문관 시로는 아무도 그를 따르지 못한다. 「철관천서애,극목소행객. 관문일소이,종일대석벽. 교과천인위,노반양애착. 시등서루망,일망두욕백」 (철관 서쪽으로 아득한 하늘/눈을 휘둥거려도 사람 그림자 뜸하네. 관문에 문지기,해 지도록돌벼랑 마주보네. 천길 낭떠러지에 놓인 다리와 두 벼랑 사이에 가물거리는 길. 어렵사리 그 서루에 올라,휘­둘러보면 머리조차 희겠네) 철문관은 쿨라시 북쪽 10㎞지점.쿨라시의 오아시스를 벗어나자 키질천불동이나 자오후리사원유적을 찾았을 때나 마찬가지의 숨막히는 적갈색 암벽의 산들.협곡을 돌고 돌아 차가 멈춘 곳엔 웬걸 즐비한 청사들,한눈에 무슨 관아의 건물 같았다.공작강 수력발전소요 공작강 댐의 관리 사무소였다.거기서 왼쪽으로 냇물이 흐르고 그 냇물위쪽으로 3층 누각이 보였다.그게 「철문관」이란다. 철문관뒤로 정말 천길 낭떠러지가 공작강을 중심으로 양쪽에 깎아세운듯 했다.그 동쪽이 쿠루크산(고로극산),서쪽은 허라산(하랍산).지금은 그 협곡을 잇는 다리와 낭떠러지에 가물거리는 길은 물론 온 종일 석벽을 마주 보던 문지기를 만날 까닭은 더구나 없었다. 필자는 중국문학에 출현하는 관문중 최서단의 철관문과 거리의 도읍이었던 쿨라를 떠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인양 아쉬웠다.그것은 쿨라나 언기가 누란의 인근이었고,필자에게도 당나라의 유명한 변새시인 왕창령(692∼757)이 그의 「종군행」에서 「누란을 공략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으리(불파루란종불환)」하면서 비장하게 그 개선을 맹세했던 마음이 있었기에 말이다.
  • 키질 천불동/무자트강 40m벼랑위 석굴236개(서역문화기행:10)

    ◎석가 고행 그린 미륵설법도 등 “벽화의 보고”/인도불교문화 동점 중간역… 쿠차·위구르·중국 3가지 문자·풍속 엿보여 쿠차에서 키질천불동을 찾아가는 73㎞는 감탄의 협곡이었다.쿠차에서 서쪽 바이청(배성)까지 그 중로에는 두개의 천불동이 있었다.기암절벽을 병풍으로 두른 염수 계곡을 따라 잠시 북상하면 문득 뻘겋고 황량한 촐타크산을 만나는데 그 바른쪽에 쿠무투라(고목토랍)천불동이 열린다.이곳 사람들은 「아래쪽 천불동」으로 부른다.여기서 다시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을 방불케하는 도깨비 형상의 뻘건 바위의 협곡을 빠져나오면 활짝 트인 고비사막.그 건너편으로 하얀 눈 모자를 눌러 쓰고 서쪽으로 달리는 천산산맥과 동행한다. 거기서 만난 고비사막 그 대부분은 회백색의 황량이지만 쿠차강 언저리는 기름진 초원이었다.바른편으로 하얀 천산,왼편으로 빨간 촐타크산,그렇게 선연한 색채의 무한속을 덜커덩거리다 필자는 불현듯 서울에 두고온 대칸짜리 집 한채와 반생을 넘게 일심전력 주워모은 만권의 책이 아침 햇살에 희끈거리는 먼지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이 났다. 다시 좌회전,촐타크산의 지맥인 밍우타크산(명옥달격산)의 허리를 넘어 서면 동에서 서로 흐르는 무자트강(목찰제하)이 보인다.산과 강사이에는 기름진 총림에 갈대가 우거졌고,그 북쪽 벼랑 40m쯤의 높이로 비둘기집처럼 네모난 석굴들이 일렬,혹은 이렬·삼렬 횡대로 서 있는데 그 2백36개의 석굴군을 통틀어 「키질천불동」으로 불렀다. ○모래돌 퇴적 벼랑이뤄 그것들은 몇 만년전 모래돌이 퇴적한 벼랑이었다.그것들이 석굴로 개착된 것은 기원1∼2세기 동한후기,불교의 동점때 시작해서 13세기 이슬람교에 밀려나기까지 1천여년에 걸친 일이다.바로 승려와 불도들이 불상을 모시고 종교의식을 올리는 불전으로서의 지제굴,승려들이 기도하면서 고행하는 선굴,그리고 승려들이 생활하는 승방으로서의 비가라굴,그리고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굴등의 구실을 했었다. 키질석굴은 카슈가르에 남은 삼선동보다 약간 늦지만 돈황의 막고굴보다 1세기 이상 앞선 것으로 판명된 중국서북지역 최초의 천불동이었다.그 규모나 가치로 보아돈황의 그것보다 초라하고 엉성하지만 키질천불동의 석굴 양식이나 벽화의 내용,기법에 있어 인도의 불교문화가 동점하는 중간역이 분명했다.그속에 쿠차·위구르·중국등의 세가지 문자와 풍속이 출현하는가하면 서역의 간다라미술의 동점이 역력했다.예를 들어 타원형의 얼굴에 가는 눈썹과 높은 코,넓은 턱에 엷은 입술,그리고 물결치는 헤어스타일,그러한 불상이 곧 간다라의 그것이었다. 석굴은 2㎞의 벼랑에 동서로 분포되어 있었다.그 가운데쯤 남북을 움푹 자른 작은 골짜기를 중심으로 서쪽에 81개,골짜기에 55개,동쪽에 1백개의 석굴이 분포되었는데 형체가 온전하거나 벽화를 보유한 것은 1백군데에 미치지 못했다. 석굴의 양식으로 볼때 그 절대다수가 지제굴이었는데 지제굴은 인도에서 전래한 원초적인 형태로 석굴의 안쪽에 기둥을 두고 기둥뒤로 반원형,기둥밖으로 사방형,곧 말굽모양의 중심주형과 다만 네모뿐인 방형,리고 불전을 전후 2개실로 나뉘고 전실 중앙에 입불을 모신 대상형 등 세가지가 있는데 중심주형으론 4호·7호·8호·13호·17호등 40개굴,방형으론 3호·9호·14호·39호·40호등 23개굴,대상형으론 47호·48호·60호·1백36호 등 4개굴이 있었다.용도와 내실을 갖춘 승려의 생활 공간인 비가라굴로 2호·5호·6호·10호·15호 등 31개굴이 있었다. 그러나 키질 천불동의 영혼은 석굴에 있지 않고 거기 벽면마다 그려진 벽화임을 누구나 부인하지 않는다.그 벽화가 자그마치 1만㎡에 달했다.그중 가장 보편적인 주제로 석가모니 전생에 노루나 곰·토끼등 짐승이 되었던 사적을 그린 본생고사가 70여종,석가모니의 일생에 있었던 각양각색의 형을 그린 불전고사가 60여종,다시 인과보응의 설법을 도해한 인연고사가 40여종이 있었다.이밖에도 약간의 천궁기락도·비천도·동물도·천상도 등이 있었지만 그림 자체가 불법을 설명하는 시각적인 강론인만큼 그 중요성은 말할 나위가 없다. ○오현의 구자비파 발견 필자는 서쪽 벼랑의 석굴부터 순례를 시작했다.그 최서단의 8호굴은 중심주형 지제굴로 높이 6m쯤의 비교적 큰 석굴이었다.비록 그 벽화의 대부분이 벗겨지거나 탈색되었지만 마름모의 무늬,곧 능격화아래 희미하게나마 오현의 비파,곧 당시에 나오는 구자비파를 발견했을 때의 감격은 대단했다.안내자의 손전등을 빌려 그 높은 벽면을 열심히 비추었지만 오현은 더욱 가물가물 침침한 것이 안타까웠다. 8호굴과 비슷한 서쪽 벼랑을 사다리로 10m쯤 올랐을 때 거기 17호굴이 있었다.키질에서는 특굴로 알려져서인지 그 입장료도 곱으로 비쌌다.거기는 키질 특유의 문양인 마름모 무늬의 천장 아래 정병을 가진 미륵보살이 많은 협시 보살을 거느린 「미륵설법도」를 비롯해 석가모니의 생전 고행을 그린 본생고사가 널려 있다. 17호굴의 아래로 역시 특굴로서의 38호굴은 「음악동」으로 불릴만큼 많은 보살이 피리·공후·북·비파등의 악기를 들거나 원형의 천장에는 기다란 낙천도가 흐르는 선율처럼 그려져 있었다.그런가 하면 선연한 마름모 바탕에 두마리 꿩의 「쌍치도」도 눈에 띄었다. 다시 그 옆으로 나란히 있는 47호굴과 48호굴은 모두 대상형의 지제굴이었는데 18m가 넘는 높은 석굴속에 16m의 불상이 버티고 서 있고,그 좌우로 다섯렬의 좌불들이 빽빽했지만 휑하게 쓸쓸한 공간에서 망망했던 찰나,필자는 그 왼쪽 벽면에서 호랑이에게 몸을 바치고 그 먹이가 되는 「사신사호」의 본생고사에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었다. ○독일인이 훔쳐간 흔적 서쪽 벼랑 중앙쯤의 76호굴은 궁융굴,석굴은 직방형이지만 천장은 활모양의 반원형,그런데 그 천장엔 공작의 현란한 날개만 남아 있었다.물론 독일사람에게 절도당한 것이다.이 천장에 저토록 현란한 공작의 날개가 온전한 모습으로 거드름을 펼 수 있더라면 얼마나 광채로울까. 바로 그 옆에 대상형 지제굴 77호굴.그 널따란 석굴의 천장은 너울너울 신나게 춤추는 보살의 무기도,격렬한 선율을 타고 무녀의 귀고리·면사·스카프·치마등이 물결치고 있었다.그리고 후실의 용도에는 꿩·양·사슴·오리·말·호랑이·원숭이등 열한가지 동물이 칙칙한 색상으로 생동했다. 그 옆으로 80호석굴,거기 본생고사와 인연고사에는 한마당 지옥이 그려졌는데 석가모니 앉은 땅밑으로 누군지 사람의 머리를 불로 태우는 끔찍한 장면이 자못 리얼했다. 이밖에 화랑식인 석굴로는 석가모니일생의 각종 형상을 종합한 불전고사 50여폭의 1백10호굴과 호랑이·사자·사슴·개·오리·꿩·토끼·뱀·말·곰·기러기등 열여덟가지 동물이 사실적으로 혹은 인상적으로 그려진 2백24호 굴은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키질천불동에서 잊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다.그 하나는 인도사람으로 정승의 자리를 마다하고 쿠차로 도망왔던 구마라옌(구마라염)의 아들인 구마라주바(구마라십·Kumarajuva 344∼413)가 여기서 나서 출가하여 「대품반야」,「법화」,「유마힐」 등 74부 3백84권을 중역함으로써 남조의 진체,당의 현장등과 함께 중국 삼대불경번역가로 지위를 굳힌 사람이다.마침 지난해 가을 9월17일부터 키질천불동에 있는 키질석굴연구소에서는 그의 1천6백50주 탄신을 기념하는 국제세미나를 개최하고 그 동상을 세웠다. 또 하나는 우리 교포 화가인 한낙연씨(?∼1947).1946년 이곳에 와서 벽화를 임모하다가 결국 석굴의 미술을 고증하는 전문가가 되어 오늘의 69호굴을 발견하고 각 석굴의 벽화를 통일,정리하여 일련번호를 만든 공을 남긴 사람이다.두번째의 정리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1947년6월,그는 비행기사고로 조난당하고 지금 10호석굴에는 그의 작업일지가 석각되어 있다.
  • 불교거점도시 쿠차(서역 문화기행:9)

    ◎시원1백여채는 흙담만 남아/3세기 서역정치의 중심… 7백년간 영화/쿠차강 벼랑에 석굴 여러개 산재… 베제크리크 천불동 흡사 카슈가르에서 쿠차까지 사막 7백50㎞.새벽부터 오밤중까지 장장 15시간을 덜커덩거려도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천산남로가 천산산맥과 타클라마칸사막이란 장관들을 좌우에 놓고 그를 줄곧 볼 수 있는 데다 서역 역사의 중심을 이제사 찾아가는 길이어서 였다. 쿠차의 옛 이름으로 구자 굴지 고차등이 있지만 모두 쿠차라는 위구르말을 다르게 표기했을 뿐이다.서한때만해도 겨우 36국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는데 동한때 반초(반초·33∼103)가 서역을 확장하던 기원 91년엔 「서역도호부」를 두어 서역정치의 중심으로 부상,당나라때 「안서도호부」로 지속되었다. 쿠차는 기원3세기부터 11세기까지 서역에서 불교의 거점으로 가장 그 꽃을 피웠던 곳으로 스바시(소파십)에 두군데의 자오후리사원외에도 키질(극자이)석굴을 비롯하여 쿠무토라(고목토랍),키질가하등 세군데의 천불동이 있다.무엇보다 당나라의고승 현장이 인도에서 귀국할 때 여기서 두달을 머물면서 쿠차의 융성한 불교와 음악을 그의 「대당서역기」에 대서특필한 바 있었다. ○혜초,한달 걸려 통과 필자가 쿠차를 특별히 동경했던 연유는 따로 있었다.신라의 혜초가 인도로부터 장안으로 돌아갈 때,바로 카슈가르에서 쿠차로 뚫린 이 코스를 장장 한달이나 걸어서 당시 정치·군사의 중심지였던 쿠차를 그의 「왕오천축국전」에 기록하였고,고구려 출신의 명장인 고선지(?∼755)는 당 천보(742∼755)연간에 서역방위 총사령격인 「안서도호」를 지내며 천하를 호령했었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서역의 악기,특히 쿠차를 대표하는 갈고는 꼭 우리나라의 장구를 닮았기에 똑같은 흥을 느꼈고,또 최근 필자는 돈황의 막고굴보다 한세기 앞서 착굴되었던 키질천불동의 벽화를 정리하여 일련번호를 엮었던(1946∼47)최초의 키질 전문가가 우리의 재중동포 한낙연(?∼1947)씨임을 발견했기에 그렇다. 쿠차의 가을은 상쾌했었다.길에는 온통 코스모스였고 호마와 노새가 끄는 마차가 한가로웠다.멀리 해발 2천m가넘을 법한 뻘건 암벽의 촐타크(확이달격)산,그리고 보다 멀리 만년설의 하얀 천산산맥이 둘렀건만 시가는 넓고 사람들도 훤칠했다. 옛날 「양서」의 「제이전」에 쿠차의 외성은 장안성에 견줄만하고 가옥은 장려하다고 기록되었다.그 외성을 찾으려 필자는 맨 처음 쿠차의 옛 성곽을 찾았다. 쿠차의 간선도로 서쪽에는 인민공원,그 건너편 7m 높이에 5m 폭의 토성,그 허무러진 폐허가 보였다.그 밑으로 작은 개울,개울옆으로 쿠차 고성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그 토성은 40m 간격으로 넓은 장벽을 세운 채 옛날의 궁궐을 휘감았는데 자그마치 7∼8㎞에 달한다고 했다.그 안에서 출토된 기와나 벽돌의 무늬와 크기는 장안 대명궁에서 발굴된 그것들과 비슷했다는 르포를 본 일이 있었다. ○40m간격으로 토성 이곳이 한때 쿠차국 국왕의 궁궐임은 물론 당나라때 「안서도호부」의 주둔지였으니 1천2백50년전 우리 고선지장군이 호령하던 곳에 필자가 서 있는 셈이었다. 「산 깊숙한 곳에,하나의 강을 사이에 두고 2개의 가람이 있었다.둘 모두 자오후리라 이름했지만 위치에 따라 동·서로 불렸다.…서문밖 좌우에는 높이 90여자의 불상이 서 있고,절은 백여채요 승려가 5천여명…사람들은 공덕을 다투어 쌓고,…불상의 장엄은 사람의 공력을 뛰어넘었네라.…」 위의 글은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 자오후리사원에 관한 기록을 발췌한 것이다.비록 자오후리의 확실한 명칭과 위치를 밝힌 바 없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오늘의 스바시(소파십)에 있는 자오후리사원을 지칭함에는 의심할 바가 없다. 필자는 쿠차 고성에서 북쪽으로 23㎞ 지점에 있는 자오후리를 찾았다.쿠차 시가를 벗어나 일로 정북을 향하여 지프를 몰았다.쿠차강의 긴 다리를 건너자 촐타크산이 화염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화염산의 머리가 타원형으로 다소곳한데 비해서 촐타크산은 들쭉날쭉한 적갈색 바위.위구르말로 「촐」이 「황량」을 뜻한다는 데 실상은 더 했다.더구나 촐타크의 아래로 뿌연 산등성이와 모랫벌,그 가운데로 쿠차강,강바닥의 하상조차 뿌옇게 말라 비틀어진 채 였으나 붉은 산등성이는 몹시 환상적이었다. 현장의 기록대로 「산깊숙한 곳」이요,「하나의 강을 사이에 두고 두개의 가람이 있었 지만」,높이 90여자의 불상은 물론 백여채의 사원 건물들은 모두 풍화중인 흙담들로 침묵만 흘렀다. 필자는 서쪽 언덕에 있는 자오후리사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산기슭을 오르다가 문득 건너 동쪽 사원의 최북단에 절반쯤 무너진 탑신을 보았다.그쪽으로 건너가기까지 족히 반시간은 걸렸다. 그 탑의 중턱에 올라 동서 양쪽의 자오후리사원을 굽어보는 감격은 무너질듯한 그것이었다.자오후리 사원의 강역이 7천㎦.그러니까 투루판에서 보았던 교하 고성이나 고창 고성보다 넓었다.교하나 고창이 다목적용 성곽이었음에 비추어 자오후리의 성곽은 오직 사원용이었으며 그 범위은 서역 최대의 것이었다. 비록 그 연대를 확정할 순 없지만 1978년5월에 출토된 위진·남북조와 당대의 철·동·도기와 벽화·전폐·간찰등으로 미루어 멀리는 위진시대요,늦게는 당말연대까지 적어도 7백년의 영화를 누렸던 불교 사원도시였음이 틀림 없다. 서역의 역사가 위대한 것은 인류가 황량하고 척박한 자연과 고투하는 데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을 잃어버린 흙과 모래를 빚어 인류의 문화를 창조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마침 석양이었다.그 사양속에 자오후리 사원 유적지는 자욱한 언덕들.동쪽 사원은 산의 비탈따라 전개되었고 서쪽 사원은 사원의 본당이나 강원·승방등이 밀집된 모양이다.그래도 높이 10m의 담들은 동서에 널려 있다.서쪽의 본당으로 보이는 입구쪽 토담은 봉화대에 상당할만큼 중후했고,그 둘레도 어림잡아 3백m는 넘을만했다. ○흙·모래로 문화창조 안내자가 필자를 서쪽 사원 북단으로 인도했다.거기서 놀란 것은 쿠차강을 굽어보는 벼랑에 여러개의 석굴이 뚫렸는데 그 위치나 구조가 투루판의 베제크리크천불등을 방불케한 때문이었다.다만 규모가 작을 뿐이었다.석굴에서 내려오는데 길 바닥에 방사선 모양의 파란 덩굴에 수박잎모양의 큼직한 잎새들이 싱싱하게 자라서 적어도 한평쯤의 땅을 휘덮고 있었다.들수박이라했다.서역의 사막만을 방황하는 나그네에겐 또 한가지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쿠차로 돌아오는 도중,필자는 「키질가하토탑」을 굳이 찾기로 했다.쿠차 북쪽 12㎞지점에 있는 이곳을 찾기위해 쿠차에서 자오후리사원 중간쯤 도로에서 서쪽으로 돌아 작은 구릉을 한참동안 달렸다.그 왼쪽엔 염수계곡으로 수만년전 지구의 조륙운동으로 말미암아 벽해가 상전된 지질 변화로 만들어 진 곳이다. 염수계곡위로 우뚝 솟은 15m의 토탑.사막에서 자라는 풀인 소소초같은 것을 배합한 판축법으로 세운 흙탑인데 적어도 2천년을 견딘 이 탑의 툭불거져나온 위치와 상단의 망루적인 구조로 보아 봉화대로 단정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키질가하토탑에서 동쪽을 조망하면 불과 2㎞ 전방에 송송 구멍이 뚫린 벌집처럼 또 하나의 천불동이 보였다.이름하여 「키질가하천불동」.거기도 46개나 되는 석굴이 모여 촌락을 이루었는데 대체로 당대에 개착된 것으로 키질천불동보다 늦은 연대라했다. 서쪽으로 40㎞ 지점엔 또 하나의 천불동이 있다.이름하여「쿠무토라천불동」으로 그 휘하에 72개의 석굴을 거느리고 있다한다.필자는 키질가하토탑아래 우두커니 서서 성큼 다가오는 황혼에 쫓겨 지프에올랐다.어디를 보아도 천불동,누가 버린 땅이라하랴! 『선생! 제가 어릴적만해도 쿠차의 왕자가 어디쯤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위구르족 기사의 말이었다.정녕 그들 나름의 왕국이 청말까지도 실재했을지 모른다.
  • 이슬람교 상륙 거점… 에이티갈시원 웅장(서역문화기행:8)

    ◎동서문물 교류 실크로드의 중심지/중국 서쪽끝 도시 카시갈/녹색돔의 전도사 호오쟈가족묘… 궁전 방불/중국최초의 석굴시원 삼선동도 시외곽에… 생불벽화 유명 호탄에서 중국 최서단 도시로서 이슬람교의 중심지인 카시갈까지 5백9㎞는 필자에게 신선한 체험을 안겨주었다. 그밤이 팔월 한가위 어스름 저녁,고물딱지 장거리버스에 올랐다.승객은 온통 위구르족.꼬박 밤을 새우면서 열두시간을 달렸다.차창의 깨진 창틈으로 몰아치는 고춧바람에 기침이 나도록 맵디매운 담배연기,그리고 양고기 노릿내,그것들이 시간마다 코란의 독경소리와 범벅이 되어 눈과 귀를 찌르는데 창밖의 몽롱한 달빛에 스쳐가는 부연 모래빛,가도 가도 불빛 없는 바다에 뜬 느낌이었다. 카시갈은 옛날 소륵국의 도읍지.우전이나 마찬가지로 한나라 때는 36국의 하나요,당나라 때는 안서사진의 하나였다.「한서」,서역전의 기록대로라면 장안에서 9천3백50리(4천6백75㎞)지점,벌써 2천년전의 호구가 1천5백호에 인구 8천6백여명,거기다 시열,그러니까 오늘의 바자,곧 장을 말하는데 카스갈의 바자는 아직도 전중국을 대표하고 있다. 중국은 한나라 때부터 그들의 국토방위를 위한 최서단 요새로 생각했었다.후한 때의 명장 반초(33∼103)가 파미르고원을 넘어 쳐들어온 쿠샨왕조(대월씨국)를 대파하고 그의 부하인 감영을 무역의 사절로 로마에 파견한 것도 여기였었다.인도의 불교가 동점한 최초의 거점도 여기요,중동의 이슬람교가 상륙한 최초의 거점 또한 이곳이었다. ○로마로 넘어가는 관문 그도 그럴것이 카시갈은 알타이산맥으로부터 시작한 타림분지가 솟아오르면서 파미르고원으로 달려가는 바로 해발 1,294m의 낮은 고원지대라는 지리적 특색을 살린 곳이다.거기서 파미르고원을 넘으면 곧장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이란·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기스탄 등의 관문으로 통한다.그러니까 로마로 넘어가는 실크로드의 중국측 마지막 역참인 것이다. 중국에서 실크로드의 의의를 동서의 교통과 무역외로 서역의 침입을 막고 중원을 지키겠다는 국방에 두지만 그에 못지않은 의의는 예술에 있다.예술의 가시적인 성취는 무엇보다 석굴이다. 석굴은 사실상 「석굴사」 혹은 「석굴암자」의 약칭이다.그것은 벼랑이나 석굴속에 설시한 불교사원으로 초기불교가 「이진수행」을 제창함에 비추어 석굴은 적지였었다.석굴은 속세의 잡음이 들리지 않는데다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한 이점 탓에 불교의 고사와 원리를 벽화로,석가를 비롯한 보살·미륵을 조각하기에 좋았었다. 기원 3세기전부터 인도에서 성행했던 석굴 개착은 그로부터 대략 5세기 뒤인 동한말,그러니까 기원 200년 전후해서 중국에 출현했으니 그 최초의 석굴이요,최서단의 석굴이 카시갈에 있다.바로 「삼선동」. 삼선동은 위구르말로 「투쿠자우지라」.그 이름 그대로라면 세사람의 신선이 사는 동굴이지만 실상은 세개의 석굴을 말했다.카시갈에서 북쪽으로 18㎞지점,차크마크(흡극마극)강을 따라 황막한 사막을 달리다 문득 그 강둑에 멈추었다.대절한 택시기사는 남쪽 벼랑을 가리킨다.파미르고원에서 흘러내리는 설수의 강인데 강폭은 1백50m를 넘을 만큼 넓었다.필자 혼자서 차크마크를 건너서 조금전 택시기사가 가리키는 곳까지 족히 20여분을 헐레벌떡 뛰었다. 삼선동은 하상으로부터 15m쯤 벼랑,그 12m쯤 높이에 1m 남짓의 간격으로 나란히 뚫린 세개의 석굴이어서 필자는 지붕위에 매단 비둘기집 상자를 보는 느낌이었다.중간석굴이 약간 컸지만 대체로 높이 2m 남짓에 너비 2m쯤.거기서 벼랑끝도 3m 남짓 보였다. 그속에 한말 불교미술이 아직도 남았다니 나그네의 속을 태울 수밖에 없었다.옛날 인수봉 타던 가락으로 적갈색 그 벼랑을 올랐지만 겨우 4m 높이서 쩔쩔매고 말았다.그 나머지 수직의 암벽은 어쩔 수 없었다.미리 알았더라면 조립식 사다리를 준비하거나 아예 벼랑의 상단에서 자일을 묶고 낙하할 것을. ○전래 불교미술의 원형 자료에 따르면 석굴은 굴마다 전후 2실로 나뉘었다고.서굴과 중간굴은 텅텅 비어 있고 오직 동쪽 석굴만이 진귀한 미술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특히 70여개의 불상이 사방을 벽화로 메운데다 조정(물풀을 그린 천장)에는 연꽃이 그려졌다고.그중에도 미술사적·불교사적 초점의 벽화는 그 벽화중의 좌불한 컷으로 ,그 좌불은 방격무늬의 가사를 입고 거기에 녹색·남색·홍색 등 세가지 색깔이 어울린 채색의 구성이라고 했다.그것은 인도불교가 중국 전래당시 불교미술의 초기적인 원형을 보인 것이다.무엇보다 쿠츠의 키질천불동이나 돈황의 막고굴보다 연대가 앞선데다 간다라의 영향조차 보이지 않는 점에서 주의를 받아왔었다. 삼선동 그 석굴에 발을 디디지 못한 채 돌아서는 필자는 청나라 시인 철보(1752∼1825)가 카스갈의 지방관으로 귀양살이하던 1810년 무렵에 쓴 「유삼선동」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칠십이동천,무지용탁석. 내찬소륵서,착공의암벽. 응고적선인,도명둔공적. 산황운불서,석쇄사여격. 위제고백인,욕상심전탕. 선인불가견,선동차친력. 적환여적선,탑연경수적.」 (세상엔 72동천의 선계가 있다지만,중 하나 설 곳 없네. 카시갈 서쪽으로 숨어,석굴을 파고 암벽에 기댔네. 신선이 여기로 귀양와서,명예를 피한 채 적막세계로 숨은 거지. 산이 거칠어 구름조차 깃들지 못하고,돌이 부서져 모래는 여울처럼 흐르네. 백길되는 아스라한 사다리에,발을 딛자 후들거리는 마음. 신선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고,사람은 여기 삼선굴에 올랐네. 귀양살이 이 사람도 속세의 신선처럼,우두커니 다시 누굴 따를까?) 근 2백년이 지났건만 차크마크강은 예대로 황량했다.예전의 사다리마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매일 다섯차례씩 예불 카시갈에서 불교의 유적이 삼선동에 상징적으로 남았다면 이슬람교의 유적은 카시갈이 이슬람교의 중심지답게 웅장하고 찬란하다.우선 이슬람의 예배당으로 4백50여년의 역사에 1만7천㎡의 면적을 지닌 맘모스의 에이티갈(애제□이)사원이 있고,이슬람의 일개 무덤으로 아바호오쟈(아파곽가)같은 궁전식 능묘가 그것이다. 카시갈시의 해방북로에 있는 에이티갈사원은 중국 최대의 청진사다.아랍어와 이란어의 복합사인 「에이티갈」은 곧 예배당을 뜻하는데 1426년 당시 카시갈의 통치자였던 사크서즈 미잘의 후예가 세운 것이다. 그 사원은 넓은 땅에 돔과 첨탑을 배합한 예배당·독경당·문루·연못 등의 장엄한 외형이 나그네의 시선을 끌지만 사원의 광장으로부터 중정·본전까지 사원 전역에매일 새벽부터 드리는 다섯차례의 예배,더구나 매주 금요일 하오에 드리는 주말예배의 성황은 열렬하다.신도 모두가 깔개를 깔고 이맘(예배의 인도자)이 암송하는 코란에 따라 무겁게 화창하는 군중의 소리는 파도되어 출렁이고,다시 신도들이 대지에 이마를 조아리며 무엇인가 외치는 장면은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카시갈시 동북쪽 5㎞지점의 하오한(호한)촌에 있는 호오쟈의 무덤은 우리의 상식과 너무 달랐다.작은 개울을 건너 낮은 언덕을 올라 고목 서너그루 아래로 말굽형의 아치를 들어서면 왼쪽으론 줄줄이 높은 기둥의 예배당이요,바른편에는 기다란 담안으로 마치 궁전을 방불케 초록빛 타일의 돔이 우뚝 솟아 있다. 궁궐의 문을 열 듯 대문을 열자 그 안에는 침침한 광선에 무거운 침묵이 덤벼오면서 울긋불긋 현란함을 느꼈다.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것들은 야외의 봉분이 아닌 옥내의 설단식 무덤이었는데 강렬한 채색의 주단이 그 관을 덮고 있는 모습은 마치 1인용 텐트를 치고 있는 야영장을 방불케 했다. 3백50여년전 이슬람교 전도사였던 호오쟈로부터 5대에 걸친 그의 가족 72명의 집단 묘지였다.그 안에는 청나라 건륭황제의 부름으로 궁궐에 갔다가 황제의 구애를 거절하고 자살하였다는 호오쟈의 딸 향비의 묘도 있다.비록 전설이지만.
  • 타클라마칸사막 동남단 호탄(서역 문화기행:7)

    ◎실크로드 남로 중심… 명주·옥의 명산지/한때 열국우전의 수도… 토기·벽돌 파편 널려/동보고승 법현이 도닦은 찬목묘 유명… 바로 옆엔 이슬람 예배당 우루무치부근을 떠돈지 엿새째,지구의 지붕으로 불리는 천산산맥언저리이건만 또 한번 서역의 깊숙한 벽지로 날고싶었다.호탄(화전)을. 호탄은 곤륜산맥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타클라마칸사막의 동남단.세갈래의 실크로드,그중 가장 환상의 코스인 남로의 중간지점이자 한나라때 서른여섯개의 열국중,남로의 최강국이었던 우전나라의 도읍지였고,「한서」의 「서역전」에선 「서성」으로 불렸던 곳이다. 우루무치에서 직항 2시간10분에 도착한 호탄비행장은 온통 잿빛 모랫벌이었다.과연 33만㎦에 달하는 중국 최대의 사막인 타클라마칸사막의 동남단답게 끝이 없는 모랫벌이 이어져 있으며 그 모래는 콩가루같은 미립자로서 바람이 부는 날이면 활주로조차 묻혀 이착륙이 어렵다고 했다. 호탄시내까지 11㎞의 공항로를 달리면서 필자는 깊은 생각에 잠겼었다.창밖에 하늘을 뚫는 포플러나무와 자작나무가서 있는데 그 잎새는 한결같이 잿빛으로 모랫바람이 휩쓸고 지난 자국들이었다.이런 모랫바람속 그 어디쯤에 화사한 꽃들이 피어서 꽃 따는 사람을 불렀고,또 이 사막 어디쯤에 꽃다운 비단을 짜 낸 뽕밭이 숨었을까? 그리고 이렇게 삭막한 모랫벌 그 어디쯤 깊숙한 골에 하얀 구슬,푸른 구슬이 묻혔을까? 그런가하면 인도에서 불경을 구하여 장안으로 돌아가던 현장법사가 기원645년에 이곳을 지났는데 그들의 발길과 그들의 말방울이 울렸던 곳은 어딜까? ○화향 5천여명 수도 수나라때의 시선집인 「전수시」에는 「우전에서 꽃 따기(우전채화)」라는 무명씨의 시가 이렇게 실려 있다. 「산천수이소,초목상동춘. 역여진유지,자유채화인.」 (산천은 비록 멀리 떨어졌지만,초목의 봄은 마찬가지. 하남땅 진이나 유지처럼,여기도 꽃 따는 사람 있어라) 그런가하면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기록된 호탄은 1백여군데의 절에 5천여 화상들이 불도를 닦던 대승불교의 중심지로 그 사방을 둘러싼 뽕밭이 화려한 명주와 주단의 생산지임을 밝혔고,반고의 「한서」「서역전」엔 우전국이 장안으로부터 9천6백70리(4천8백35㎞)떨어진 곳에 3천3백의 호구와 1만9천3백명의 인구를 지닌 나라,특히 옥의 산지로 중원에 알려졌었다.「우전옥」,또는 「곤륜옥」으로 불리는 호탄옥의 성가는 1968년 하북에서 발굴된 한나라 중산왕의 「금루옥의」로 더욱 증명되었다.기원전 154년 2천4백89장의 연녹색 옥판으로 얽어 맨 시의,그것들이 몽땅 호탄의 옥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호탄을 에워 싼 두줄기의 강,백옥강과 묵옥강이 각각 동쪽과 서쪽을 흘렀다.옛날엔 이 두줄기 중간에 또 하나의 강 녹옥강이 있었다고 하니 강 이름으로 미루어서도 백옥·청옥·흑옥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호탄시내에 도착한 필자는 처음으로 이방감을 느꼈다.우선 거리에서 만나는 십중팔구가 까무잡잡하면서 무성한 수염을 단 위구르사람들,그들의 오똑한 콧마루에 쌍꺼풀,달걀모양의 갸름한 얼굴에 푸르딩딩한 눈동자,거기다 다혈질의 말씨에 굴뚝처럼 뿜어대는 담배연기를 보면서 어리둥절했다. 필자는 서역땅에 들어 처음으로 필자가 서 있는 곳이지금 중국의 강토이면서도 중국의 한족이 아닌 서역의 원주민속에 깊숙이 들어왔노라는 사실과 이곳 서역의 남로 도처에서 최근 민족갈등의 충돌이 가끔 일어난다는 생각때문에 얼른 여관문을 두들겼다. 이튿날 우전국의 고도를 찾기로 했다.한나라때는 36개부족국가의 하나였지만 당나라때는 「안서사진」의 하나였던 그 도읍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았다.혹자는 호탄시 남쪽 25㎞지점 카스강 서쪽언덕에 지금도 남아 있는 높이 6m,둘러 60m의 석탑근린을 두고 말하는가하면 혹자는 호탄시 서쪽 10㎞지점 요트칸(약특간)마을이라는 설이 있다. 그 두군데가 모두 우전국 도읍일 가능성은 있었다.거기에 남아 있는 폐허는 물론 거기서 지금도 출토되고 있는 기와조각·벽돌·질그릇·철제농구등이 그를 증언하고 있는데,특히 요트칸 유적지의 개울물에선 지금도 벽돌이나 질그릇 파편쯤은 쉽게 주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요트칸 유적지 찾아 필자는 그 말에 혹하여 요트칸을 찾기로 했다.호탄시에서 서쪽으로 10㎞라지만 아주 기름진 오아시스.가느니 굽이 굽이 농로요,농로를 따라 출렁이는 관개로,곤륜산에서 녹아 내리는 설수는 파랗고 차가웠다.게다가 농로는 자작나무가 목책처럼 늘어 섰거나 포도덩굴이 푸른 터널을 지어서 홀연 여기가 사막임을 잊게했다. 이윽고 「허톈셴바허치공사(화전현파합기공사)」라는 팻말이 보였다.거기서 좌로 돌아 또 한번 농로를 달렸다.마찬가지로 우거진 자작나무요 포도덩굴인데 길가엔 맨발의 개구쟁이가 흙투성이가 되어 뒹굴고,관개의 수문에는 빗장이 걸린 채 그 안으로 물살이 출렁거렸다.그 무렵 난데없이 「요트칸유적지」란 안내판이 보였다.필자는 습관처럼 사방을 둘러 보았지만 산 한자락도 보이지 않는 편편한 언덕일 뿐이었다. 마치 환토하느라 새흙을 옮겨놓은 논바닥을 방불케 여기저기 울퉁불퉁한 지면이었다.아닌게 아니라 버드나무 사이로 개울이 흘렀다.필자는 얼른 그 개울물에 손을 담았다.어렸을 적 뱀장어나 게를 잡았던 그 몸짓으로 개울을 뒤졌는데 당장 손끝에 잡히는 것은 빨간 토기의 파편이었다.풀잎무늬의 얇은 토기였다.또 한번 소매를 걷어 올리고 개울을뒤졌더니 월척의 붕어를 잡듯 큼직한 벽돌 하나가 잡혔다. 호탄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요트칸일대 10㎦의 유적지에는 그런한 영세한 파편들이 널려 있다고 했다.더구나 그 일대는 일찍이 홍적기의 침적된 지질인만큼 겨우 3m내지 6m의 지층속에는 상당한 질량의 박물이 잠겼을지 모른다고 했다.그동안 발굴된 도기·옥기·전폐등 특히 개원통보 같은 엽전이나 인면·수면의 도기로 보아 기원 3세기로부터 8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고시대의 궁궐이나 도시의 유적으로,그리고 당시의 주민들이 황색의 한족이 아닌 긴 얼굴,긴 눈썹에 푸른 눈,황갈 피부의 회골족,곧 오늘의 위구르족임을 추정하기에 충분했다. ○인도수행길 머물러 비록 묻히고 무너졌지만 정치의 유적을 답사한지라 이젠 우전국의 종교 유적지를 찾기로 했다.그것은 「커커마르무」(극가마일목)유적,한족들은 「찬목묘」라고 부른다. 그것은 동진때의 고승 법현(337?∼422?)이 기원399년 인도에 갈때 여길 경유하면서 불법을 닦다가 그렇게 명명했다는 작은 암자였다.호탄시에서 남으로 36㎞지점,바로파랗게 굽이치는 카라카스강 동쪽,80m의 벼랑위에 있었다.그 벼랑을 오르느라 그 산의 북쪽을 우회하여 나무 한그루 없는 능선을 탔는데 거기서 굽어보는 카라카스강 유역은 정말 스펙터클한 장관이었다.파랗게 강이 굽이치고 강가로 푸른 오아시스,오아시스는 젖줄 따라 허리띠처럼 뻗는데 그 배경은 온통 황갈색의 구릉들.그림으로는 단조로운 삼원색,그러나 영원의 구도였지만 지세로는 찬목묘가 천혜의 요새였다.발밑으로 벼랑,벼랑아래로 강물,강물밖으론 사막.그렇게 무한히 펼쳐진 곳에서 상과 무상은 날마다 피부로 오득했을 지 모른다. 찬목묘는 천연의 작은 2층석굴이었다.석굴의 높이 겨우 6m남짓,그 한쪽에 사다리를 가설했는데 그 2층까지 기어올라간 필자의 눈에는 침침한 골방 하나쯤의 공간,그러나 아무런 시야도 없었다.법현이 책상다리하고 앉았을 때 그 귓전에 들렸을 법한 강물 소리,유사의 소리를 생각하면서 사다리를 내려섰다. 그 석굴밖으로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마자(마찰) 두어칸이 있었고,산 허리를 돌아 카라카스강가에도 몇군데의 마자가 보였는데,여기 호탄 실크로드에 우뚝 선 커커마르무는 지금 종교의 금석을 한눈에 보여주는 박물관이었다.곧 불교의 유적에 이슬람의 마자가 공존한 사실말이다.바로 기원 10세기를 전후해서 불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했던 것이다.
  • 캉자스먼쯔의 신산(서역 문화기행:6)

    ◎붉은 암벽에 모계사회 생식숭배 그림/기원전 2∼3세기 카자크족 원주민들이 새겨/무도회·인구번식회에 인물 2백명… 여성이 대부분 우고,그들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생식의 필요는 절실하다. 수렵과 유목을 위해서는 심산유곡과 만경초원이 안성맞춤이다.우랄·알타이산맥 남쪽으로 천산산맥과 곤륜산맥을 등지고,팔카스호 동쪽으로 아라호·아이피호·이리강·카스강·마나스강등을 낀 신강의 서북지대가 바로 최적의 지대로 꼽힌다. 그 지대를 기원전 7세기부터 누빈 것은 오손(오손)·강거(강거)·엄채등 돌궐어족인데,그들은 모두 오늘날 하사크족의 원조민족이었다.지금도 중국 서역에는 백만명을 헤아리는 카자크족이 신강의 서북지역을 물 따라 풀 쫓아 유목하고 있다. 그 유목하는 곳엔 카자크족이 살고 카자크족이 사는 곳,그러니까 팔카스호 동쪽의 초원에는 암화(암화)가 많았다. 지금 독립연합국의 하나인 카자흐스탄을 비롯,신강의 이리강과 초하유역인 쿨자파스산상에는 기원전 6세기에서 3세기로 추정되는 동물암화가 많다.다시 동쪽으로이동하면서 비록 연대는 기원전 3세기 이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리강유역의 훠청(휘성)현 베이간(북간)계곡을 비롯,니러커(이근극)현의 훙광목장등 하미(합밀)의 남산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50여군데에서 발견되었다. ○초원에 천마 노닐어 그중에 위민(유민)현 팔타쿨(파이달고이)과 후투비(호도벽)의 캉자스먼쯔(강가석문자)의 암화도 포함되었지만 여느 암화와 다른 모계사회의 생식숭배를 보였다 한다.특히 최근에 발견된 캉자쯔먼즈의 그것이 보다 사실적인 데다 화면이 또렷하다는 신강사범대학 중문과의 황천(황천)주임의 권고와 안내로 그곳으로 머리를 돌렸다. 우루무치에서 캉자쯔먼즈까지 1백50㎞.위구르말로「도깨비 고을」이라는 후투비까지 70㎞는 시원한 아스팔트길이었지만,후투비에서 그 이름도 시골스런 추이얼거우(최예구)향에 있는 현장까지는 험한 산허리를 뚫고 천산산맥 서쪽의 어디쯤을 덜컹거릴 수 밖에 없었다. 깔딱 어느 고개를 넘어설 때,황주임은 별안간 차를 멈추게했다.일행이 내려서 멀리 산맥을 굽어 보았다.시뻘건 바위산맥이 서남쪽으로 꿈틀거리며 이어져 있는데 그 기상은 수십척의 함대가 파도를 가르며 행진하는 모습이었다.그 산맥은 적어도 20∼30㎞를 쪽빛 하늘밑으로 이어져 있는데 그 한복판에 활짝 열린 대문을 방불케 웅장한 바위가 보였다.그것이 바로 생식 숭배의 암화 현장이라했다.결코 소풍하는 산등성이가 아니라 출렁이는 산맥,어디를 보아도 기운이 넘치는 그러한 암맥들이었다. 후투비에서 거의 80㎞를 달려서 이윽고 골짜기의 초원에 도달했다.초원에는 낙타와 천마들이 떼를 지어 풀을 뜯고 있었다.신산의 어귀에 갔을 때,동그랗고 커다란 눈에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청년이 길을 막았다.입장하는 표를 사라했다.아직은 알려지지 않아서 관객은 물론 관리자도 없을 줄 알았는데.그들의 재빠른 상혼이 놀랄만 했다. 문제의 암화가 있는 바위는 깎아 세운듯한 암벽이었다.그 암화는 비록 동서 14m,상하 9m의 크기,화면면적이 1백20㎡쯤되어 보이는 분사암에 그려졌지만,그 암화의 모체는 동서 1백50m쯤에 상하 50여m의 엄청난 바위였다. 필자는 마치 방을 보는 수험생처럼 고개를 들고,마치 숨은 그림을 찾듯 훑었다.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족히 2백명은 넘었다.보이는 대부분이 여성으로 이곳이 모계중심의 사회였음을 알게 했다.높은 모자를 눌러 쓰고 모자위에는 두개의 깃털을 꽂은 여성이었다.풍만한 가슴에다 둥실한 엉덩이,갸름한 얼굴에 높은 코,커다란 눈에 작은 입술,가느다란 목에 끊어질 듯한 허리,긴 다리에 섬섬옥수.첫눈에 모던한 서구의 처녀들을 연상케했다. 그 화면은 무질서하게 많은 군상이 여기저기 불거져 나왔는데 가만히 살피면 몇가지 화폭으로 분별할 수 있었다.약간 좌측엔 아홉명의 여인이 한결같이 오른팔은 올리고 왼팔을 내리면서 춤의 동작을 보였는데,어찌보면 벌거숭이요,어찌보면 오늘의 발레복처럼 성감적인 복장이었다. ○남자는 까까중머리 윗 그림을 「누드의 무도회」라 한다면 그 좌측으로 「혼무도(혼무도)」에 상당한 그림이 있었다.남녀 각각 10여명씩 춤을 추는데 여성은 위에서와 마찬가지지만 두팔을 모두 내렸고 남성은 모자도 깃털도 없이 까까중머리에다 홀쭉한 배에 뾰족한 그것을 기운 차게 달고 있었다.여기 저기 동체가 달아난 얼굴이 몇개 있는데 가필한 그림이거나 다른 상징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보다 특기할 일은 남성의 가슴과 여성의 가슴에 각각 한 사람의 이성을 품고 있는가 하면 그러한 혼무의 마당을 향해 호랑이 두마리가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선명한 주제의 그림이 우측 가장자리에 보였다.한 사내가 발기된 길고 둔탁한 그것을 한손으로 들면서 계집의 하체에 조준하고 그 아래로 성숙한 여인 하나와 50명의 꼬마가 상하단으로 나뉘어 마치 기차놀이하듯이 이열 횡대로 서 있는 그림이었다.인구의 번식을 노골적으로 기구하는 강렬한 포스터같았다. 암화에 등장하는 여성은 대체로 갸름한 얼굴에 깊은 눈,높은 코,가는 목,긴 다리,그리고 높은 모자에 깃털,남자는 높은 코에 기다란 생식기,가냘픈 하체에 긴 다리,두건식의 모자에 동그란 얼굴이 인상적이었다.이러한 외모와 복식으로 미루어 한(한)족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카자크의 체모에 가장 근사할 뿐 아니라 그러한 암화가 아직도 카자크족의 집거 부락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금속도구 이용 음각 마지막 궁금한 것은 연대였다. 현지의 문화국이나 박물관에선 아직 뚜렷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게 없다지만 카자흐스탄 팔카스호 동쪽에서 발견되고 있는 카자크족의 암화,그 대부분이 기원전 6세기에서 3세기 사이,더구나 동점(동참)하였다는 사실 외에도 캉자스먼쯔의 암화가 금속도구에 의한 음각이란 방법으로 미루어볼 때 신석기시대의 말기에 시작해서 청동 및 철기시대였음을 단정할 수 있겠다.그렇다면 기원전 2,3세기의 작품으로 추정하는데 무리가 가지 않는다. 이러한 암화를 작품시하는 데도 그 나름의 의의가 있다.첫째는 그 구성이 부호나 도안처럼 단순하지만 감성적이고 질박하다는 것이요,둘째는 그 표현이 비록 과장적이지만 주장이 선명하다는 것이요,셋째는 그 내용이 조잡하지만 당시의 생활을 생생하게 반영한 역사의 단편들이란 점이다. 필자는 돌아오는 길,캉자스먼쯔 바위에 생식 숭배를 그림으로 새긴 그 후손들을 만나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조금전 들어갈 때,인민폐 몇푼을 쥐어 준 그 청년을찾기 위해 돌아오는데 난데없이 「시집 가는 날」을 만났다.말 세필에 영감과 할멈이 혼수를 실은 행렬.어쩌면 선발대격인듯,영감은 앞에서 말을 끌고 할멈은 말을 타고 깡마른 언덕을 넘고 있었다. 그 청년은 서른여덟살의 마이무라치라고.형제가 다섯인데 모두 분가해서 한마을을 형성했다 한다.조심스럽게 재산정도를 묻자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염소 1백50마리에 낙타·말·황소를 합해서 50마리』라고. 그리고 염소 한마리의 값은 큰 것은 2백위안(한화 2만원상담). 짓궂게 통혼사정을 묻자 그 대답은 자못 단호했다. 위구르족이나 회족,시부족과 통혼할지언정 한족과의 통혼은 싫다고 했다.왜냐면 한족은 이슬람교를 믿지 않기 때문이란다. 주인은 우리 일행을 그들의 흙집에 안내했다.사방이 흙벽,마루나 침대가 따로 없다.물론 안방과 건넌방의 구별도 없이 밋밋한 헛간 비슷한 구조였다.
  • 투루판분지 고창고성(서역 문화기행:5)

    ◎서한군이 지은 토성… 내·외성 2중구조/성복판에 망루… 인도식 원형불탑 남아/서쪽 사막지대엔 고분 5백여기… 고대문서·미술품 등 유물 20년간 1만여점 출토 아테네가 로마의 폐허에 들어서면 보이느니 돌기둥에 돌계단이지만 서역의 폐허에 들어서면 모두가 흙의 덩어리요 흙의 동굴이다°그 황색의 폐허는 중국의 감숙·섬서는 물론 산서·하북·하남·산동 등 황하가 흐르는 그 언저리였다. 걸핏하면 토성의 자드락길이요,때로는 치열하게 활싸움을 벌였던 보루의 주춧돌이었다.그런 흔적들을 보면 흙은 먼지가 아니라는 사실과 그러한 폐허가 결코 앙상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된다.투루판에는 그러한 역사의 현장으로 두군데의 고성이 있다.하나는 서쪽 13㎞지점에 있는 교하고성이요,다른 하나는 동쪽 40㎞ 지벙에 있는 고창고성이다. 고창고성은 바로 베제크리크천불동이 있는 무르룩계곡을 빠져나와 승금구에서 약간 남쪽의 언덕위,그러니까 멀리 화염산이 병풍처럼 북쪽을 가린 나직한 오아시스에 세워진 성곽이다. 교하고성과 비슷한 역사배경을 지닌 고창고성은 교하보다 1세기,차사왕국에 주둔한 서한둔전부대가 축조한 것이다. 그곳은 적어도 한 두개의 사단 병력이 훈련을 받다가 세워총을 하고 휴식중인 연병장을 방불케 했다.5㎞의 둘레에 2백20만㎡의 넓이,바로 그러한 광장인데 그 유적들은 모두 올망종망한 높이로 유적과 유적사이의 길조차 좁고 꼬불꼬불 하였다.그것은 교하의 토성이 흙 자체의 판축인데 반해 고창의 것은 흙벽돌의 축조라서 무너지기로 말하면 와르르 붕괴되었기게 그렇다. ○외성엔 4개문 설치 그들 설계의 구도도 달랐다.교하의 그것이 남북의 중앙대로를 중심한 동서의 정연한 분포임에 비추어 고창의 그것은 불규칙한 정방형의 외성이 있고 한 복판에 내성이 있는 이중구도로서 그 내성의 주위로 사원이나 민가들,다시 변두리로 무덤들이 산발적으로 분포된 것으로 보였다. 온전한 외성은 12m의 높이며,그 두께도 넉넉했다.그동안 출토된 기록에 따르면 외성 4면에 「현덕문,「금복문」,「금장문」,「건양문」,「무성문」등의 성문이 가설되었다고 한다.과연 외성의 풍모는 당당했다.내성 어디쯤으로 보이는 복판에 국기대나 첨성대인양 높다란 축대가 솟았는데 거기에 규칙적으로 뚫린 구멍으로 보아 당시 둔병을 총지휘하던 교위의 청사나 말대쯤으로 쓰였을지 모른다.보다 분명한 유적은 동남쪽과 서남쪽에 남은 불사의 폐허였다.동남쪽의 그것이 인도식 불탑의 원형층탑이라면 서남쪽의 그것은 사각의 튼튼한 기초위에 원형의 건물이다.그 언저리로 널따란 마당에 우두커니 선 필자에게 적어도 천년전 서로 다른 피부에 서로 다른 언어와 복장들이 오락가락하면서 희희낙락했을 그 소리들이 들리는 듯 했다. 명나라 초엽의 명시인이었던 진성의 「화주성」이란 시가 바로 이 자리서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창구치월씨서, 성곽숙조시사희. 유적상존당제도, 거인쟁도한관의. 범궁영락류금상, 신도류량와석비. 정마불지풍토이, 격화유자인시」. (고창은 옛날 월씨의 도성 너녘, 성곽은 썰렁한채 저자도 한산해. 폐헤엔 아직도당나라 법도, 주민들은 다투어 한관을 쳐다보네. 절터엔 스산하게 공부처가 뒹굴고, 신도엔 황량스레 돌비석이누웠네. 전마는 달라진 풍토에 영문 모른채, 꽃 그늘에 사람보고 소리지르네) ○현장법사도 머물러 지금부터 6백년전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그때만해도 성곽이나 사원은 무너졌어도 유물은 즐비한데다 아직 주민들이 살았음을 짐작케 한다. 여기서 고창의 역사를 거슬러 보면 고창성을 다스렸던 회골의 마지막 고창국왕인 훠츠할(화적합이)이 몽골군의 위공에 못견디어 전사하고 그 전화로 소실되던 1275년까지 고창은 1천4백년동안 때로는 군현의 치소로,때로는 와국의 서울로 그 나름의 번영과 웨세를 부렸던 곳이다. 기원전 1세기는 서한 둔병들의 주둔지로,기원 327년엔 전향(전량)의 군현으로,기원 460년엔 원주의 함·장·마·국씨 등이 서로 번갈아 「고창국왕」을 1백40년이나 누리다가 640년에는 당나라의 군현으로,840년에는 회골족이 와국을 세워 가장 강력한 왕권을 부리다가 훠츠할에 다다른 것이다. 무덥고 낮은 투루판에도 많은 와국이 엎치락 뒤치락 흥망을 반복했지만 가장 오랫동안 흥성했던 와국으로 두말할 것 없이 서로 쿠처(고차),동으로 하미(합밀),북으로 천산의 북록 창지(창길)까지 넓은 영토를 4백년이 넘게 떵떵거렸던 회골의 「고창왕국」을,그리고 가장 흥성했던 군형시기로 한·당(한·당)두 조대를 들수 있겠다.그것은 고창이란 지명이 곧 한나라때 대완국을 원정하던 이광장군에 의해 명명된 것으로 「지세가 높고 넓은데다 백성이 창성하다(지세고창 인서창성)는 뜻으로 미뤄보아 그렇고,당나라 때인 630년 2월경 현장법사가 인도로 가던중 고창왕 국씨의 요청으로 한달이나 머물면서 불법을 강론했다는 데서도 문물이 성행했음을 알게한다. 당나라와 당나라 이전의 문물이 출토되어 「투루판문서」로 불리는 지하박물관은 바로 고창고성의 서단 하라허줘촌 사막에 있었다.이름하여 「아스타나(아사탑나)고분」.50년대말에서 70년대까지 계속된 발굴탐사에서 드러난 5백여 고분은 10여㎦의 넓은 모랫벌에 묻혀 있었다. 그것은 흡사 우리나라 한강변 고수부지에 쌓아 둔 동그란 모래 둥지 같았다.도시 이토록 삭막한 사막에 무덤은 웬 일이며 더구나 거기서 2천7백여점의 고대문서를 포함한 만여점의 미술품·농기구·생활구등이 쏟아져 나왔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대부분 부부합장 묘 필자가 답사한 세걔의 무던은 그 구조가 대체로 비슷했는데 지상에서 비스듬히 팬 1·20m의 묘도를 따라 묘실에 들어가면 안창에는 묘주의 시신,그 중간에는 두개 혹은 네개의 이실이 사랑방처럼 양쪽에 설시되어 있었다.삼면의 묘벽에 벽화를 두르고 누운 시신은 대체로 부부,그것도 미라로 누웠고 그 미라 가운데로 장난감같은 헌금함,그 뒤로 삶인지 죽음인지 알수 없도록 희미한 불빛에 묘실을 지키는 소년이 졸고 있었다.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다.소년은 웬걸『시원해서 좋다』며 빙그시 웃었다.하긴 서역 사막에서 미라를 만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건조한 기후와 토질 때문에 시신도 얼른 수분을 뺏긴 채 건시로 남는다 했다. 진나라에서 당나라때까지 고창 주민들의 공동묘지였던 아스타나무덤에는 뜻밖에 북량의 장군으로부터 당나라의 도호같은 고관도 끼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부부합장,혹은 가족합장이었고,관목보다는 초석이나 목판같은 간소한절차를 따랐음에도 그 속에 벽화와 문물을 시설허가너 부장한 것이 특기할만 했다. 특히 필자가 보았던 인물화나 동물화같은 벽화는 진·남북조시기의 사실적이면서 전원적인 생활의 단면이 생동하게 표현되어 있었다.그것들은 어쩌면 무덤의 주인이 살았을 때의 생활이요 윤리였을 것이다. 아스타나고분에서 투루판으로 돌아오는 도중,투루판 동쪽 2㎞지점에 있는 훤칠하고 준수한 건축물인 「에민탑(액민탑),속칭 소공탑을 답사했는데,1777년 투루판 군왕이었던 에민의 수복을 빌기 위해 그의 아들 수라이만(소래만)이 청대의 이름난 위구르족 건축사 이푸라인(이포랍음)을 시켜 세운 높이 37m 72단 사다리의 이슬람식 탑이다. 커다란 강당크기의 예배당 입구에 우뚝 솟은 탑신에는 삼각·물결·꽃잎·마늘덩굴등 열몇가지 무늬가 적갈색으로 새겨져 있는데 얼핏 단조로운듯 하면서도 근엄한 분위기를 뿜으면서 멀리 천산산맥의 만년설을 마주보고 있다.이 탑은 그 탑기에 새긴 비문이 한문과 위구르문자인 것처럼 또 한가지 성공적인 동서 융합이었다.
  • 베제크리크 천불동/허세욱(서역 문화기행:4)

    ◎화염산기슭 석굴 83개… 6세기 불교유적/위구르족 왕가 사원… 당시 생활상 벽화로 남겨/서유기의 무대… 삼장법사­손오공 등 3제자의 조각상 곳곳에 투루판은 그 동서를 관통하는 국도 312번에 놓여있다.그것은 신강의 최서단인 이닝(이령)에서 황하와 황해가 만나는 최동단의 상하이(상해)까지 장장 5천㎞,어쩌면 미국의 동서를 횡단하는 80번 하이웨이에 상당하다. 투루판에서 312번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40㎞쯤 달렸을 때,갑자기 그 왼편으로 빨간 바위산을 만나는데 그 형상은 얼핏 한국전쟁당시 철의 삼각지,아이스크림고지를 방불케하는 타원형으로 마치 험상궂도록 쪼글쪼글한 노인의 얼굴 혹은,여름날 여인의 풍덩한 주름 치마같았다.한 포기의 폴도 없이 세로의 주름살은 차라리 빨간 폭포가 쏟아지는 형상이었다. 그것이 바로 화염산의 남쪽 기슭이었다.그 맹렬한 화염의 섭곡을 보자 놀랍고 반가웠다.그 명성을 들은지 너무 오래라서 그렇다.당나라의 고승 현장(602∼664)의 「대당서역기」를 비롯,당나라의 유명한 변새시인 잠참(715∼770)이 이곳에서 벼슬하는 동안 썼던 경화산」,「화산운가송별」등의 명작,그리고 중국4대기서로 꼽히는 오승은(1500?∼1582?)의 「서유기」등에서 익히 화염산,그 「팔백리에 걸친 불길」을 들어 왔었다. ○홍산에 풀한포기 안나 화염산은 「홍산」혹은 「화산」으로 불렸다.그보다 위구르말로는 「쿠즈로다고」즉 홍산이란 뜻이다.그것은 지구상에서 두번째로 넓고 낮은 동서 1백20㎞,남북 60㎞의 투루판분지에 동서 98㎞의 길이에 남북 9㎞의 폭으로 가장 높은 곳이라야 8백32m,평균 높이는 고작 5백m다.하지만 해발 이하의 분지라서 그 높이는 상당했다.연간 강우량이 겨우 16㎜의 초건조지역에 평균 기온이 섭씨38도 최고 기온이 49도나 된다.그래서 암석표면의 온도는 무려 80도를 넘는다.거기다 지층에 매장된 무진장의 석탄과 석탄에서 배출되는 가스로부터 폭발 연소도 적지 않다고 하니 「서유기」에 묘사한 대로 「화두 불길이 천길의 높이」란 형용도 결코 터무니 없는 말이 아니었다. 필자가 화염산을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은 지금부터 1천2백45년전인 기원749년,이곳에 당도했던 잠참의 「화산을 지나며」란 시에 잘 나타났다. 「화산금시견, 돌올포창동. 적염소로운, 염기증색공. 불지음양탄, 하독연차중? 아래엄동시, 산하다염풍. 인마주한류, 열지조화공」 (처음 만난 화염산은, 포창 동녘에 우뚝하여라. 화염은 오랑캐의 구름을 불지르고, 증기는 변방의 하늘을 찜질한다. 음양의 숯이, 어찌 여기서만 훨훨 타오르는가? 엄동설한에도 산밑엔 삼복의 열풍이. 사람도 말도 땀을 뻘뻘 흘리거늘, 누가 알랴? 자연의 조화를) 화염산 섭곡이 끝나는 승금구에서 312번 국도를 작별하고 좌회전하자 이윽고 빨간협곡이 열리면서 차는 화염산 북록을 휘돌았다.그 협곡의 정면에 보이는 둥근 모자모양의 홍산이 피라미드의 형세로 성큼 다가섰다.그것이 화염산의 주봉이었는데 주봉은 충격적 이라기보다 다소곳한 곡선으로 다만 풀 한 포기 없을 뿐 여느 동리앞을 지키는 안산의 크기였다.거기서 삼장의 길이 막히고 손오공이 파초의 부채로 재주를 부렸다는 곳이다. ○아래쪽 설수도 흘러 그 주봉아래로 기원6세기 고창왕국씨때부터 9세기까지 3세기에 걸쳐 위구르족들 왕가의 사원으로 건설한 석굴의 촌락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있고 천불동아래로는 파란 설수가 콸콸 흐르는 목두구.그리고 천불동 입구 편편한 산기슭엔 최근 「서주천성원」이라는 작은 전시장을 개설 해 놓았다.그 안에는 「서유기」의 주연으로 삼장법사를 비롯,손오공·저팔계등을 조소한 외로도 「팔십일난」을 도해한 동굴,동굴밖 언덕위로는 잠참의 입상과 그의 대표작인 「화산운가송별」을 새긴 시비가 있었다.그 시비에 새겨진 첫 절은 이러했다. 「화산돌올적정구, 화산오월화운후. 수운만산응미개, 비조천리불감래」 화산이 우뚝 적정 어귀에 섰거늘, 오월이라 불꽃 구름 뭉게 뭉게. 불꽃 구름 엉긴 채 풀리지 않거늘, 천리길 나는 새도 얼씬할 수 없네) 필자가 찾은 때는 다행히 쾌청한 9월중순 이어서 인지 불꽃구름커녕 흰구름 한 조각도 보이지 않는 진하디 진한 쪽빛 하늘 뿐이었다.그 쪽빛에 적갈의 산빛,골짜기와 석굴,길가에 굴러가는 돌멩이조차 일색으로 빨갰다. 그런데 그토록 숨 막힌 빨간 모랫벌과협곡에도 서원의 의지는 굴을 파고 예술의 꽃을 피웠었다.바로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그것이다. 화염산 주봉 동쪽 기슭엔 광장이 닦여 있었다.그 왼편엔 「서유기」의 일사삼도의 조상을 세웠는데 초입의 서주천성원에서 보았던 그것보다 규모가 큰데다 훨씬 정교하고 생동감이 있었다.그 바른편 계단으로 내려가면 황갈색의 가파른 벼랑이 무르토크강(목두구))을 굽어 보고 있었다.과연 「베제크리크」란 지명이 「산 허리」라는 위구르말을 딸만했다. 기록상으로 석굴의 수는 83개라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50여개이며 그중 벽화를 소유했던 것이 40여개요 벽화의 총면적은 1천2백㎡라고.그것들은 열차의 창을 방불케 일렬횡대로 늘어서 있었고,그 내부는 대체로 석굴의 길이 20m에 5m의 폭과 5m의 높이의 장방형,거기다 천장은 동그란 궁륭식이라 쿠차의 키질,돈황의 막고굴에 비해 훨씬 넓고 시원했다. ○일부 벽화 손실 아쉬워 기원6세기부터 13세기까지 지금 위구르족의 조선인 고창왕국씨들의 왕가 사원을 비롯,당시 불가의 승려·신도들의 승방,고승을 기리는은굴,혹은 그들이 좌선하던 비가라굴로 쓰였었다.당대의 문헌인 「서주도경」에 고창지역 불교의 승지로 소개한 「영융굴사」가 바로 베제크리크 천불동인 것이다. 여기 벽화는 비록 석가모니 전생의 사적을 선양하는 본생고사를 비롯,서원도·경변도·공양상·인연고사등 불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거기에 등장하는 왕공 귀족과 공양 신도들의 복식·가옥·거마·기악등을 통해 당시 불교를 신앙하던 회골사람들의 생생한 생활과 문화를 볼수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했다. 특히 33호 석굴의 「왕자거애도」에 그려진 여러나라 왕자의 각기 다른 모습과 표정은 마치 오늘날 정상들의 모임을 발불케했고,39호 석굴의 커다란 공양 보살의 풍윤한 얼굴과 굵직한 청화의 무늬,그리고 31호 석굴의 설법도에 그려진 보살의 성장과 복식등은 생생한 역사와 문화가 묻혀 있음을 직감케 했다. 그러나 20호 석굴과 27호 석굴에서 만난 복사물의 대체와 훼손된 잔화를 대하면서 허탈과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특히 20호 석굴의 서원도,회골국왕과 왕후의 형상은 10세기 당시 회골국 복식을 알수있는 증거임에도 절취된 채 지금 영인된 사진만 걸려 있음은 27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필자가 참관한 9호,37호등 석굴에서도 불상의 눈이 뭉개지거나 벽면을 도려낸 칼날의 선이 남아 여기 저기서 수난의 흔적은 완연했다. 베제크리크의 수난은 크게 두번 있었다.13세기말,몽골의 말굽 아래 처음 망가졌고,그를 전후해서 이슬람교가 흥성하면서 불교의 석굴은 쇠락을 거듭하였다.또 한번은 금세기초인 1902년,독일의 그륀베델과 로코크 등이 네차례나 답사를 빙자한 예술품의 절취가 있었다. 그 속에는 20호,27호 석굴의 것 말고도 회골귀족과 몽골인들의 복식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공양도」와 회골문자가 들어 있는 「본생고사도」등이 절취당한 것은 통석할 일이다.더구나 그중 베를린 박물관으로 납치되었던 벽화 일부가 2차대전의 전화에 소실되었다니 서역의 찬란했던 회골문화의 운명도 꽤나 기구한 것이었다.
  • 중국 신강성 극장에 불/국교생 3백여명 사망

    ◎비상구 닫혀 피해 늘어… 누전 추정 【북경 로이터 AFP 연합】 중국 북서부 신강위구르자치구의 카라마이시 중심부 한 극장에서 8일 저녁 화재가 발생,국민학생 3백12명이 숨지고 2백25명 이상이 부상했다고 현지관리들과 병원 관계자들이 밝혔다. 화재당시 어린이 5백명을 포함한 8백여명이 연극공연을 보고 있었으며 부상자들 중에는 카라마이시 부시장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79년 역시 신강위구르자치구의 한 극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6백여명이 사망한 이래 최대의 희생자를 낳은 이번 화재와 관련,카라마이시 관리들은 추운 날씨로 극장 비상구 5개가 닫혀 있어 화재가 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2개의 출입문으로 몰려 서로 빠져나가려고 소동을 벌이는 바람에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한 관리는 전기 사고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시 대변인은 화재가 처음 무대 위쪽에서 발생하여 연기가 극장 전체로 퍼졌으며 『곧이어 전기가 나가고 아비규환이 벌여졌다』고 전했다. 카라마이시는 신강위구르자치구의 수도 우루무치에서 약 3백㎞ 북서쪽에 위치한 유전 노동자들이 모여사는 작은 도시이다. 이번 화재는 지난 2주동안 중국에서 발생한 두번째 대형 화재로 지난달 27일 중국 동부 요령성의 한 디스코클럽에서 불이 나 2백33명이 사망했다.
  • 장수의 조건(외언내언)

    장수촌과 단명촌을 돌며 식사와 건강 및 수명간의 상관관계를 살핀 세계보건기구(WHO) 조사가 마무리단계에 있다.불로장수는 지나친 욕심이지만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은 환경·생활조건에 따라 가능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지난 85년부터 10년사업으로 조사중이다. 세계적 장수촌으로 알려진 파키스탄 훈자지역이나 코카서스지역등이 맑은 공기와 미네랄이 풍부한 물,신선한 음식섭취로 장수를 누리고 있다는 것은 알려져 있어 이번에는 음식물에 초점을 맞췄다.WHO의 「뇌·심장·순환기질환연구센터」가 주관하여 의사·생리학자등 관련분야 전문가가 팀이 되어 24개국 56개 지역 1만여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혈액과 뇨를 검사하고 먹는 것과 병력·수명을 조사하여 먹는 것과 건강·수명과의 관계를 비교연구한 것이다. 잠정결론은 장수지역 주민 모두 좋은 단백질과 식물섬유·칼륨·칼슘·마그네슘등이 풍부하게 함유된 신선한 음식을 먹고 식염은 적게 섭취한다는 것이다.세계에서 장수촌으로 이미 인정된 코카서스,실크로드의 위구르족지역,남미 에콰도르의빌카밤바,하와이 일본인 이민지역등의 식생활은 지방분 없는 고기류와 함께 야채·과일류를 풍족하게 들고 우유를 마시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이미 단명촌으로 알려진 티베트는 그 식생활에서 단백질 부족이 드러났고 전에는 자연식을 먹던 개발도상국의 몇곳이 식생활을 서구식으로 바꾸며 혈·심장관계질환·당뇨병 같은 것이 늘어 조로하는 것도 확인됐다. 중국 장수학연구협회가 2일 발표한 장수3대조건과 10대수칙은 충분한 숙면,조기취침 조기기상,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의 원칙과 함께 맑은 공기속 생활,많은 채소와 적당한 고기류 섭취등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숨쉬고 마시고 먹는 것 모두 건강·장수조건에서 멀어지고 있다.나쁜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생활행태를 바꾸면 천수를 누릴 수 있다는 WHO조언을 명심할 일이다.
  • 신강위구르 성도 우루무치/허세욱(서역 문화기행:2)

    ◎동쪽 1백㎞ 천산중턱의 천지 장관/만년설 녹은 물 담겨… 설봉·수해와 함께 “한폭 그림”/시 한폭판에 호랑이모양 홍산 “우뚝”… 벼랑위엔 진요탑 남고 우루무치의 금석 청나라때 유명한 소설가였던 기윤(1724∼1805)이 1768년부터 1771년까지 우루무치에 유배되었을 때 쓴 「오로목재잡시」1백60편은 2백20여년전의 우루무치를 사생활처럼 볼 수 있었다. 「독차력록만장가 화수은화대대배. 무수홍군란초수, 유인습득봉황혜」 (오로목재잡시·유람) (삐걱 삐걱 달구지소리 거리를 누비고, 불빛 나무 은빛 꽃들,쌍쌍이 줄을 섰네. 빨간 치마들 몰려나와 왁자지껄한데, 구경꾼들은 그녀들 벗겨진 봉황신을 줍네) 정월 대보름에 불놀이하던 풍물을 그렸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우루무치엔 송아지나 노새들이 끄는 달구지나 손수레가 많았었다. 이보다 옛적인 당나라시대에는 우루무치를 윤대라 불렀다.지금 우루무치교외의 오랍박댐 근처를 말하는데 그때 변새시인이었던 음참(715∼770)이 754년부터 3년이나 안서절도사 판관으로 이곳에 주재했었다.그때에 쓴 윤대군사에는 우루무치 당시의 풍물 풍속이 생생하다. 「윤대풍물이, 지시고단우. 삼월무청초, 천가진백유. 번서문자별, 호속어음수. 수견류사북, 천서해일우」 (윤대의 풍물이 달랐다, 옛날 흉노의 땅이라서. 삼월에도 풀이 돋지 않고, 집집마다 하얀 느릅나무. 오랑캐 글씨라 글도 다르고, 오랑캐 말이라 소리도 달랐네. 사막 북녘을 망연히 보면, 하늘은 로부노오르 저편에) 1천2백년이 지났어도 별로 변함이 없다.어디를 가도 느릅나무요,거리마다 위구르 문자에 들리는 것은 낯선 언어들,다만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뒤,비록 1954년 신강성을 「위구르족자치구」로 선포하고 소수민족의 풍습과 문화의 고유성을 보호한대지만 우루무치같은 대도시를 비롯,북로의 연도도시엔 한족들의 이주가 늘어 지금 한족대 소수민족의 인구비율은 거의 반반을 형성한 것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서왕모의 전설 간직 우루무치에서 시인묵객의 붓끝에 자주 오르던 명승으로는 천지와 홍산이 있었다.천지는 우루무치 동쪽 1백여㎞ 지점의 천산산맥에안긴 호면 해발 1천9백28m의 반월형 호수요,홍산은 우루무치시의 한복판에 선 해발 9백10m의 호랑이 형상을 한 적갈색의 바위산이었다. 천산산맥의 제2주봉인 해발 5천4백45m의 보고다(박격달),그 서북쪽 음지의 능선 아래로 설수의 모임이다.그 동남에 웅장한 만년설의 병풍을 두르고 그 품안에 길이 3.4㎞ 너비 1.5㎞의 호수와 호수에 누운 설봉의 그림자를 안았기로 그 천지의 절경은 백두산의 천지에,그 배경은 스위스의 몽블랑에 견줄만했다. 오죽해야 중국 최초의 허구적인 전기요,허구적인 여행기인 「목천자전」에서 주나라 목왕이 서역 선녀의 수령격인 서왕모를 만난 무대로 여기를 골랐던 것이다.그로부터 천지는 요지 용담 천경 신지등으로 미화되었다. 필자가 탄 버스가 부강현을 지나 두시간뒤에야 천산산맥으로 접어들었는데 그 첫번째 경관은 아무래도 해발1천5백m 높이서 만난 석문이었다.20∼30m 높이의 우람한 바위가 마치 두쪽 대문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그 사이를 뚫고 굽이 굽이 산길을 오르면 파란 전나무의 진하디 진한 바람을 타고 하얀적설이 시야에 부딪는다.다시 가파른 비탈을 오르면서 기우뚱 보이는 시퍼런 호수,그게 「목천자전」에 서왕모가 발을 씻었다는 「서소천지」였다. 버스의 종점부터 필자는 4시간동안 준마 한필에 마부 한사람을 빌리곤,더덩실 안장에 가랑이를 얹고 천산의 가파른 등성이를 향해 고삐를 죄었다. 반달 모양의 천지,그 북쪽 제방을 거드름 피우며 건너가는데 늙은 느릅나무 한그루가 호수쪽으로 누운 채 버티고 있다.목책을 세워서 그 자빠진 나무를 보호했고,그 옆으로 「정해신침」,곧 「서유기」의 한장면을 표시하는 비를 세웠다.호수를 안정시키는 신침이란 뜻.듣건대 여기 산지 사람들은 그 느릅나무와 호수의 간격으로 호수의 저수량을 측정한다고 했다.그보다는 여기에도 서왕모의 전설이 서려 있었다.어느날 서왕모가 벌인 반도회잔치에 훼방을 부리는 도깨비가 있어 자기의 비녀를 뽑아 던졌더니 그 자리서 느릅나무가 돋았다는 비녀의 화신설이다. ○분지는 마치 솥바닥 천지에서 서쪽으로 3㎞쯤 올랐다.고개를 넘자 널찍한 분지,그 뒤로 팽이처럼 꼿꼿한등간산,등간산 꼭지에는 뾰족한 바위 세덩이가 창모양으로 서있다.이름하여 「정천삼석」.등간산 아래로 그 분지는 마치 솥바닥,그래서 서왕모가 밥을 짓던 솥이라는 전설이 있었는데 한때 군마를 사육하고 훈련시켰다던 곳이다. 등간산분지로부터 하산할 때 굽어보는 천지는 절경이었다.하얀 설봉에 파란 수해,거기에 저 아래로 시퍼런 호수,문득 천산의 높이와 천산의 주변을 잊고,천지가 작은 그림엽서로 보였다.청나라 역사학자요 시인이었던 홍량길(1746∼1809)이 1800년 유배길에 쓴 천산가의 한대목이 잘 말해 준다. 「지맥지차단, 천산사포천. 일월하처루, 총괘청송전」(후략) (지맥이 여기서 끊겼고 천산은 벌써 하늘을 안았으니,해와 달은 어디서 살까? 청송 가지끝에 가만 걸렸네) 천지 언저리엔 일찍이 팔대사가 있었다고 한다.그런데도 몽땅 폐허로 남았다.그중에도 천지 서북쪽 7백m 비탈에 남은 철와사가 그 유적만으로도 당시의 장관을 짐작케하는 제일사원이었다.원나라때 칭기즈칸이 유럽 정벌길에 목천자의 전설을 따라 천지를 오르고는 거기다도관을 짓토록 명령했다고.그러나 확실한 연혁은 아무래도 청나라 건륭연간,푸른 벽돌로 벽을 쌓고 쇠 기와로 지붕을 이었대서 「철와사」로 불린 것이다.학교 운동장을 방불케 널따란 폐허에 유적비만 동그마니 서 있었다. ○하사크족 파오 즐비 철와사 유적지 아래로 하사크족들의 파오가 즐비했다.몽골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그러나 하얀 모전의 둥근 텐트형의 그 속은 난로에 식탁·침구정도의 간소한 가구지만 초원의 주막이라고 호객도 서슴지 않았다. 이토록 빼어난 경관을 지녔음에도 발길 닿는 곳마다 서왕모의 전설이 얽힌 곳.말하자면 천혜의 상품에다 전설의 포장을 덧붙여 나그네를 맞고 있었다. 우루무치로 돌아와서 곧장 홍산으로 차를 몰았다.고개를 치켜 들고 하늘로 치솟는 용이나 호랑이의 형국이다.천산에선 청색과 백색을 보았는데 홍산에선 검붉은 바위,그러니까 원색과 원색을 옮겨 다니는 강렬한 대비로 오싹한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홍산은 벼랑,벼랑위로 회청빛 9층탑이 섰다.거기서 우루무치 전경을 굽어 볼 수 있었는데 이름하여 「진요탑」.옛날 해마다 여름이면 범람하는 홍수로 우루무치가 물 바다였다고.그것을 요괴의 장난이라고 믿은 청나라 총독은 드디어 1788년 거기다 탑을 쌓고 요괴의 맥을 끊었던 것이다. 「진요탑」에서 정상으로 한참 오르면 「임칙서시비」가 새로운 초점으로 우뚝 섰다.청나라 아편전쟁때 아편을 금지하였던 항전파의 수령이요 시인이었던 임칙서(1785∼1850)를 기념하는 비다.거기에는 그가 영국 투항파에 쫓겨 신강으로 귀양살이하던 1845년12월4일,이곳 홍산에 올라 단숨에 썼던 「금루곡」,그 명작이 절록되어 있었다. 「임광가,취와홍산취. 풍경처,주린기」 (미친듯 노래하다가 홍산에 누웠노라! 바람 모진곳에 술잔조차 일렁인다.) 한 영웅의 강개가 뭉클하게 표출되었다.더구나 싸늘한 서역의 바위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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