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개의 키워드로 읽는 한국 문화의 지형도/김기봉 외 28명 공동집필
한동안 지인의 미니홈피 메인화면에는 이런 문구가 떠 있었다.‘문득 10년 전의 나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졌다. 갑자기 10년 후의 나에게 전화가 올까 덜컥 겁이 났다.’ 2007년 8월,10년 후의 문화가 전화를 걸어온다.‘29개의 키워드로 읽는 한국 문화의 지형도’(김기봉 외 28명 공동집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펴냄)는 전문가들이 10년 후의 문화와 나눈 전화통화의 속기록이다.
여기에는 미술품 쇼핑의 속내가 담겨 있고, 마니아 문화의 손때가 찍혀 있다. 익스트림 스포츠의 거친 호흡이 담겨 있고 UCC의 경이로움이 살아 숨쉰다. 두려움과 낯섦을 딛고 시도한 대화들에는 이처럼 설렘, 희망, 반가움이 더 크게 눈에 띈다. 백은하, 김성곤, 원종원, 이송희일, 한기호, 현병호 등 이름만 들어도 무릎을 치게 되는 전문가들이 집필을 맡았다.
●상업자본, 새로운 문화의 인큐베이터
뮤지컬 평론가로 유명한 원종원씨는 ‘난타’,‘점프’ 등 해외시장에서도 각광을 받고 있는 ‘비언어 퍼포먼스’에 주목한다. 최근 ‘비보이 퍼포먼스’와도 결합해 영역을 넓혀 가는 비언어 퍼포먼스에 대해 그는 단순히 언어 장벽을 극복하기 위한 상업 자본의 ‘차선의 선택’이 아닌 새로운 형식적 구조에 가장 적합한 대안으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가장 원시적인 예술의 속성으로만 알고 있던 비언어성이 10년 후 포스트모던이 잉태한 가장 새로운 경향과 맞물릴 것을 생각하면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경구가 저절로 떠오른다.
그렇다고 10년 후가 지금과 비교해 명백히 갈린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역사가 늘 그렇듯 문화 또한 어떤 성향은 보존되고 어떤 성향은 추가된다. 미술품 컬렉션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 미술품을 재테크 수단의 하나로 여기는 ‘아트테크’가 대세를 이룬다고 해도, 이것은 정신적 만족감을 위한 순수한 컬렉션 성격과 작가를 후원한다는 긍정적 부대효과를 아우르기 마련이다.“미술품 구매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미래의 백남준과 반 고흐를 후원하는 일”이라는 정민영 씨의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29명 전문가의 신선한 진단
그러나 1년 후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10년 후를 예측한다는 것은 무리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이 운세집도, 타로카드도 아닌 이상 문화의 흐름을 짐작해 본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지금도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자마자 강풀의 웹툰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스크롤하며 읽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직장인들, 콩나물버스와 지옥철 속에서도 꿋꿋이 PMP로 미국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를 보는 것으로 짜증을 이겨내는 대학생 등 스스로도 궁금했던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남몰래 경외하지만 나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던 장르, 예를 들어 독립영화나 공공디자인 등을 놓고 수다를 떨듯 친숙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작은 기쁨으로 다가온다.
뚝심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무모하다고 해야 할까.‘29개의 키워드로 읽는 한국 문화의 지형도’는 이처럼 2017년을 내다 보겠다는 배짱두둑한 취지가 느껴진다. 깊이 있는 담론은 아니더라도 각 키워드를 조망하는 시선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무엇보다도 신선도 99.9%의 살아 있는 질감이 큰 장점이다. 값 1만 6000원.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