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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용하 기자의 사이언스 톡] 사무실 능률 오르는 ‘명당’은 여기

    [유용하 기자의 사이언스 톡] 사무실 능률 오르는 ‘명당’은 여기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법학자이기도 했던 벤담은 다수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죄수를 교화하기 위한 ‘파놉티콘’을 설계하기도 했습니다. 파놉티콘은 중앙에 탑을 세우고 감방들을 주변에 둥글게 배치한 원형 감옥입니다. 간수가 있는 중앙탑은 어둡지만 감방은 밝게 만든 것도 특징입니다. 죄수들 스스로 간수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여기도록 해 규면을 내면화하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자신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파놉티콘의 핵심은 ‘시선’에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 때문에 스스로를 통제하게 된다는 겁니다. 시선은 예술작품에서나 심리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미국 역사학자 스티븐 컨은 ‘문학과 예술의 문화사’라는 책에서 19세기 문학작품과 인상주의 예술을 시선이라는 차원에서 분석해 문화사, 사회사적 해석을 제시했습니다. 과학자와 공학자들도 시선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이들은 인문학자들과 달리 좀더 실용적 차원에서 접근합니다. 어떻게 공간을 배치해야 시선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자유롭게 일하면서 생산성을 높이고 의사소통도 원활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지요. ●시각적 환경 통제 가능하면 결속력도 ‘업’ 영국 런던대(ULC) 바틀릿건축학교에서 건축환경과 공간디자인을 연구하는 커스틴 세일러 교수팀도 이 같은 차원에서 접근했습니다. 연구팀은 직원 각자가 시각적 환경을 통제 가능한 개방형 사무실이 업무 집중력과 생산성을 높이고 업무 협력, 결속력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미국 공공과학도서관에서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플로스 원’ 4월 29일자에 발표했습니다. 연구팀은 700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는 대형 국제기술기업의 런던 본사 사무실 4개 층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연구팀은 4개 층의 사무실 배치도와 사무실 내 책상 위치, 업무 위치에 따른 직원들의 시선 각도 등 물리적 정보 분석과 작업 공간에 대한 만족도 조사를 했습니다. ●마주 보는 3~6명 공간·창가 집중력 향상 분석 결과 개방형 사무실이지만 시야에 다른 사람들의 사무공간이나 책상이 많이 보이는 경우와 동료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1인 사무실이 배치돼 있는 경우는 집중력과 업무 효율은 물론 팀원 간 결속력도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반면 동료들과 마주 보는 형태로 책상이 배치되고 시야가 3~6명으로 제한된 공간에서 근무하는 경우 업무 집중력과 생산성이 높아지고 의사 소통도 원활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또 벽과 맞닿아 있는 곳보다는 창가에 책상이 배치된 경우 집중력이 더 높아진다고 합니다. 자신이 물리적 업무 환경을 통제 가능하다고 느낄 경우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생산성, 집중력, 유대감에 대한 긍정적 평가비율이 약 40배 높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연구팀에 따르면 개방형 사무실 내에서도 팀 단위로 구획을 나누는 것이 업무 효율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재택근무가 일상화된 요즘이지만 코로나19가 종식되는 그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다시 한 공간에 모이게 될 것입니다. 물론 코로나19 이전과 같은 형태는 아닐 것입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업무 효율을 높이고 사람과의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공간 활용에 대한 고민도 미리 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edmondy@seoul.co.kr
  • 이을 사람 없고… 얼쑤, 신명 잃고… 우리 전통 잊고

    이을 사람 없고… 얼쑤, 신명 잃고… 우리 전통 잊고

    우리의 전통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특히 무형문화재는 계승자를 찾지 못하고 하나둘씩 맥이 끊기고 있다. 사회적 외면과 정부의 쥐꼬리만 한 지원, 지자체의 무관심 등이 원인이다. 우리는 고유의 문화를 잃고 있지만, 중국은 ‘문화 동북공정’을 앞세우며 우리 문화의 침탈을 가속하고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정부가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수년 내에 우리의 전통문화가 자취를 감출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 무형문화재의 현주소와 과제 등을 알아봤다.●“칼 만들어 어떻게 먹고사냐” 아들 말에 침묵 은장도 등 칼집 있는 작은 칼을 만드는 경북무형문화재 15호 장도장 후계자 이면규(60)씨는 “배우겠다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자신이 15살 때 입문한 것과 딴판이다. 고민 끝에 4년 전 무역회사에 다니던 아들(33)에게 기술을 전수하려고 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어떻게 칼을 만들어 먹고살 수 있느냐’는 아들의 반문에 이씨는 답을 하지 못했다. 장도를 만들어 자식 교육 등 기본적인 생활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씨는 “눈이 나빠져 제작에 어려움이 많다. 내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국가무형문화재 60호 장도장 보유자 박종군(57·국가무형문화재기능협회 이사장)씨는 ‘인간문화재’여서 정부 지원을 받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전남 광양에 작업장이 있는 박씨는 “한 달에 한 개 안 팔릴 때도 있다”며 “지역 내 초중학교에서 장도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해 살림에 보탠다”고 했다. 후계자가 없어 두 아들에게 가르친다. 그는 “후계자가 있어도 노사관계로 변해 매달 받는 150만원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희생해 우리 장도 문화를 물려주자’고 아들들을 꼬드겨서 겨우 전승하는 중”이라며 “중국이 우리 것들을 자기네 거라고 동북공정을 외치는데, 이러다가 나라까지 빼앗긴다”고 말했다.전승에 어려움을 겪는 분야는 이뿐만이 아니다. 대나무로 베틀을 만드는 국가무형문화재 88호 바디장은 충남 서천의 인간문화재가 숨진 뒤 끊겼다가 같은 마을 40대 젊은이가 잇고 있다. 바디장 보유자가 생존했을 때 배워 이수자가 됐다. 장경희 한서대 교수는 “무형문화재는 일반적으로 조상이 하던 것을 자식이 물려받는데 동네 청년이 전승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며 “아직은 이수자로 국가 지원을 받지 못해 건축일을 곁들여 ‘투잡’을 한다”고 전했다. 가죽으로 전통 신발을 만드는 국가무형문화재 116호 화혜장(갖바치) 등 후계 작업이 순조롭지 않은 종목이 수두룩하다. 26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국가무형문화재는 149개 종목이 있다. 예능 52개, 기능 53개, 생활관습 8개, 의례의식 19개, 놀이무예 13개, 전통지식 4개다. ‘인간문화재’로 불리는 보유자는 175명, 그 밑 단계로 전승교육사(조교) 253명에 이수자는 6608명이 있다. 보유단체도 70개 있다. 문화재청이 관리 지원하는 국가무형문화재 외에 시도 무형문화재도 594개 종목이 있다. 강재훈 문화재청 사무관은 “일부 종목은 국가와 시도 둘 다 지정돼 있다”며 “하지만 바디장 등 4개 종목은 보유자가 없다”고 말했다.●종묘제례악 ‘1호’… 체육처럼 인기·비인기 갈려 국가무형문화재는 1964년 12월 종묘제례악을 1호로 출발했다. 한 번에 서너 개씩 지정돼 종목이 늘면서 스포츠처럼 인기·비인기 종목으로 나뉘고 있다. 그나마 대중이나 언론매체 등에서 관심을 보이는 판소리, 현악기(거문고, 가야금)는 인기가 있다. 반면 편종과 편경, 북은 비인기 종목이다. 거의 안 팔려 다른 직업이 없으면 전업으로 이어 가기엔 언감생심이다.사회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쪼그라드는 종목도 있다. 곰방대(담뱃대)를 만드는 제65호 백동연죽은 금연 문화·정책으로 소비가 급감해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 말총으로 제작하는 갓일, 망건장, 탕건장도 마찬가지다. 이지은 문화재청 사무관은 “백동연죽은 흡연 도구보다 주로 전시용으로 나간다”면서 “갓은 공연연기자 정도만 사 가고 있다”고 말했다. 모두 단체 종목인 의례의식(19개)과 놀이무예(13개)는 농어촌 고령화 현상으로 인해 직격탄을 맞고 있다. 마을 주민이 나이 들어 하나둘 숨지면서 굿이나 풍어제를 벌일 사람이 사라진 것이다. 옛날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과 힘을 보태 잇던 생활 속 전통 의식이다. 이동순 사무관은 “참가 인원이 부족하면 어깨 너머로 배운 이웃 마을 주민이 나서 간신히 맥을 잇고 있지만 이마저 시골 교회에서 굿을 ‘미신’으로 봐 쉽지 않다”면서 “그동안 폐지된 의식은 없지만 앞으로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이 사무관은 “시연 때마다 전승자들 간에 ‘원형 논란’이 인다”며 “원형이란 게 있을 수 없고 발전적 변화로 봐야 하지만 이마저 전승이 끊길 위기”라고 덧붙였다.●이수자 5년 넘게 해야 ‘전승교육자’ 시험 자격 문화재청은 인간문화재(보유자)에게 매달 150만원을, 전승교육자에게 70만원을 지원한다. 단체 종목에는 다달이 360만원을 주는데, 보유자가 없으면 550만원을 지원한다. 이수자는 지원금이 없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 연간 한 번 이상 언제 어디서든 실연할 의무가 있다. 문화재청은 실연 비용으로 80만원에서 최대 4000만원까지 지원하고 있다. 이수자도 공연전시 때 만큼은 연간 600만~800만원을 지원 받을 수 있다. 이처럼 급이 높아질수록 지원금이 더 많아져 장인들이 승격을 위해 온 힘을 쏟지만 매년 시험이 있지는 않다. 이수자는 5년 넘게 전승활동을 해야 전승교육사 시험을 볼 수 있다. 인간문화재는 이수자든, 조교든 실력만 뒷받침되면 도전할 수 있다. 명맥을 이으려는 고육책이다. 문화재청은 발굴과 신청을 통해 후보자를 받아 무형문화재위원회 심사를 통과하면 관보에 실어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를 다시 열어 지정 여부를 정한다. 지정할지는 역사·예술성과 사회문화적 가치를 따져 판가름한다.●나전칠기 여름, 궁시장은 겨울… 시험 일정 달라 종목 특성에 따라 계절을 달리해 시험을 보는 점도 특이하다. 나전칠기 시험은 여름철에 치른다. 습기가 많아야 옻칠이 잘되기 때문에 장마철에 볼 때도 있다. 반면 궁시장은 겨울철이 좋다. 접착제로 쓰는 민어 부레가 날이 무더우면 제대로 붙지 않는 탓이다. 한지장도 종이 원료인 닥나무 수확철이 1~2월이고, 생산지인 농촌의 농한기가 겨울철인 점을 들어 그때 시험을 본다.●무형문화재 선진국이라지만… 中 침탈 우려도 이종규 사무관은 “힘들게 우리 전통 문화를 전승하고는 있지만, 우리나라는 무형문화재 선진국 축에 든다”면서 “지정하고 평생 지원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고 했다. 독일은 공예 위주로 ‘마이스터’를 지정하지만, 지원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형문화재 전승을 위해 가장 많이 힘쓰는 지역은 동북아시아다. 특히 중국은 2011년쯤부터 무형문화재를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이름 지어 지정하고 지원한다. ‘유물론’ 국가다운 이름이다. 문제는 아리랑, 농악 등 조선족 문화재를 지정하고 자기네가 ‘원조’라고 마구 억지를 부리는 점이다. 이른바 무형문화재편 ‘동북공정’으로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은 공예만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집중 관리한다.사회주의 국가인 북한도 무형문화재를 ‘비물질민족유산’으로 명명했다. 평양랭면과 아리랑, 씨름, 연백농악무 등 100여개가 지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지은 사무관은 “남한과 비슷한 게 많다. 그렇지만 원류는 같아도 사회 분위기가 달라 약간씩 차이는 난다”면서 “우리가 종목 중심이라면 북한은 인물 위주로 지정해 인간문화재 등보다 ‘쟁이’라는 용어를 많이 붙인다”고 했다. 문화재청은 맥이 끊겨 사라져도 훗날 복원할 수 있도록 기록화 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강 사무관은 “요즘은 온돌, 김치·장 담그기 등 생활 속 문화재를 지정하는 것이 추세”라고 했다. 이 사무관은 “무형문화재 전승에 많은 예산을 투자하지만 그것보다 나라의 문화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면서 “코로나19로 해외 공연·전시회를 못 열어 걱정”이라고 했다.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영주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도시개발로 사라질 근대문화유산 부천 ‘죽산박씨 고택’ 보존해야”

    “도시개발로 사라질 근대문화유산 부천 ‘죽산박씨 고택’ 보존해야”

    “역곡동 안동네에 있는 죽산박씨 고택은 수직과 수평선, 휘어진 지붕선이 우리 전통한옥 모습입니다. 이처럼 130여년간 잘 유지·보존된 고택은 역사적 가치가 충분해 반드시 보존해야 합니다.” 경기 부천의 향토사학자 A씨는 역곡일대 공공주택 개발예정으로 선조들이 지켜온 전통 한옥 고택이 사라질 위기에 있다며 안타깝다고 말했다. 부천시 역곡동 165번지에 자리한 127년 된 죽산박씨 고택은 1894년에 건축된 근대 문화유산이다. 주변에 5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으며 540여 년을 지켜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최근 이 역곡동(역곡 안동네~까치울역) 일대 71만 7000㎡ 부지에 공공주택이 건설될 예정이어서 마을전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고택이 위치한 벌응절리(역곡 안동네)는 죽산박씨 종손(고택 주인 박희자)이 5대째 살고 있으며, 가옥도 큰 변형 없이 1894년 건립된 후 지금까지 잘 보존돼 왔다. 이 마을은 역곡동의 주산인 원미산 동쪽 날개에 해당하는 산 끝자락에 있다. 고택은 ‘ㄴ’ 자형 안채와 ‘ㄱ’자형 문간채, ‘ㄷ’자형 바깥채, 후원 및 경계 등 배치와 건물 골격은 건립 때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다만 안채의 창호와 바닥, 바깥채의 기와 등 마감 부분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보수했다. 50년 전부터 살아온 이 마을 한 어르신은 “문화특별시라는 부천시가 획일화된 아파트 건립으로 마지막 남은 유서 깊은 전통 한옥마을이 옛 정취를 잃어가고 있다”며, “이곳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선조들의 지혜와 풍속이 담겨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후세에 물려줘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조선말기의 전통건축양식인 이 고택은 부천뿐만 아니라 경기도내에서도 원형 유지와 보존상태가 양호해 학술적·역사적으로 가치와 희소성이 있다. 이에 시민들은 개발 주체인 부천시와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신도시 조성만 몰입할 게 아니라 유서 깊은 안동네마을을 존치·보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부천역곡 지주협의회와 대책위원회, 부천시자연호보협의회를 중심으로 고택영구보전 범시민서명운동을 펼쳐 이미 4만 여명이 참여했다. 고택주인인 종손 박희자(81)씨는 “여생을 바쳐 전통유산을 복원하고 스토리텔링이 있는 고택으로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주민들의 기억과 경험을 소중히 기록할 계획”이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올해 향토문화재 지정 등록을 신청하고, 수용시 고택 전체를 부천시에 기부채납하겠다”고 밝혔다. 박명혜 부천시의원은 지난 시정질문을 통해 “부천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높이기 위해 문화적 자산 현황을 철저히 파악해 향토문화와 도시유산에 대한 개념을 정의하고 정책을 마련해 역곡고택 보존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시에 주문했다. 이와 관련해 부천시 관계자는 “문화재를 발굴·보존하기 위해 관련 조례를 내실 있게 정비하고, 문화 산업화에 대한 중장기적 계획을 수립하며 유관기관과 경쟁력 있는 문화도시로 나아갈 수 있도록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역곡동 고택은 경기도에 등록문화재 지정을 신청(2011년 11월)한 바 부결 통보돼 도를 상대로 이의신청(행정심판 소송)한 상황이다. 시는 “경기도에서 향토문화제 등록 심의를 보류하고 있다”며 “소송이 마무리되면 ‘부천시 향토문화재보호조례’에 의거 향토문화제로 등록할 수 있는 방법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전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씨줄날줄] 광화문광장 새 단장과 삼군부/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광화문광장 새 단장과 삼군부/서동철 논설위원

    조선의 국방정책은 의정부와 병조의 몫이었지만 초기 여진과 왜의 침범이 잦자 비상기구가 필요했다. 결국 삼포왜란을 계기로 비정규 기구였던 비변사를 정규 조직화하고, 임진왜란 이후 사실상 국정최고기관의 지위를 부여한다. 흥선대원군이 1865년 비변사를 폐지하고 삼군부(三軍府)를 부활시킨 것은 비변사가 세도정치의 본거지가 됐다고 인식한 결과다.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광화문에서 보아 왼쪽 전면과 오른쪽 전면에 각각 의정부와 삼군부를 배치한 것은 국정의 양대축(軸)이라는 상징성을 부여한 것이다. 창덕궁 돈화문 앞의 비변사 터 일부에 서울우리소리박물관이 2019년 들어섰다. 서울시가 주유소를 사들여 문화공간을 조성한 것으로 비변사 터 보존을 위해서도 잘한 일이다. 하지만 주유소는 기름저장탱크가 필요했으니 지하유구는 이미 훼손됐을 것이다. 박물관 남쪽도 상당 면적이 비변사 터였다. 최근 지어진 민간 건물 지하에는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흔적이 옹색하나마 일부 보존돼 있다. 광화문 동남쪽의 의정부 터에는 지금 높다란 임시 담장이 쳐져 있다. 이 자리는 일제강점기 붉은 벽돌 건물이 지어져 경기도청으로 쓰였고, 광복 이후에도 내무부 치안국 청사로 활용됐다. 2016년 이후 네 차례의 발굴조사에서 중심 전각인 정본당과 그 좌우 석획당과 협선당의 건물 흔적이 확인됐다. 지붕이 한 단 높은 건물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물이 나란히 배치된 3당병립형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후원의 연지와 정자, 우물 자리도 찾아냈다. 삼군부는 그 건너 정부중앙청사 위치다. 의정부와 같은 권위를 부여한 만큼 삼군부 청사도 3당병립형이었다. 총무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청헌당, 오른쪽에 덕의당이 자리잡았다. 그런데 잘 안 알려졌으나 총무당과 청헌당 건물이 멀쩡하게 남아 있다. 삼군부 총무당은 1930년대 삼선동 한성대 곁으로 옮겨졌다. 청헌당은 1968년 당시 중앙청사가 지어질 때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경내로 이건됐다. 덕의당만 사라졌을 뿐이니 삼군부는 비변사나 의정부보다 훨씬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다. 서울시가 새 광화문광장 조성에 앞서 벌이는 발굴조사에서 조선의 여러 중앙행정기관 옛터가 확인됐다. 특히 삼군부 터에서는 담장 석렬과 행랑의 기단, 배수로 등을 찾아냈다. 주변 발굴조사에서 중추부 터와 사헌부 터, 병조 터, 형조 터 유구도 상당 부분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시는 발굴조사 결과를 새달 문화재위원회에 회부할 것이다. 왕궁인 경복궁만큼이나 중요한 조선의 육조거리 유적군(群)이다. 어떻게 문화유산의 역사성을 살릴 것인지는 전적으로 서울시의 의지에 달려 있다.
  • 문화재 4000여건 3차원 DB구축 추진

    문화재청은 2025년까지 전국의 모든 국가지정·등록문화재 4000여건(종이류 등 제외)에 대한 3차원(3D) 데이터베이스(DB)구축사업을 추진한다고 11일 밝혔다. 레이저 스캐닝등 비접촉 디지털 데이터 획득 방식을 이용해 문화재를 훼손 없이 디지털 자료화하는 사업이다.사업의 성과물은 멸실과 훼손 시 원형복원을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영구보존된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전국 국가지정·등록문화재 2025년까지 3D 자료화

    전국 국가지정·등록문화재 2025년까지 3D 자료화

    문화재청은 오는 2025년까지 전국의 모든 국가지정·등록문화재 4000여 건(종이류 등 제외)에 대한 3차원(3D) 데이터베이스(DB)구축 사업을 추진한다고 11일 밝혔다. 지상과 항공에서 광대역 및 정밀 레이저 스캐닝, 사진측량, 초분광 및 열화상 광학센서 등 비접촉 디지털 데이터 획득 방식을 이용해 문화재를 훼손 없이 디지털 자료화하는 사업이다. 총 713억원이 투입된다. 문화재청은 “정확한 크기와 형태, 색상, 질감 등을 밀리미터(㎜) 단위 정밀도와 기가픽셀급 해상도로 기록하고, 축적된 데이터를 쉽게 관리·활용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사업의 성과물은 지진, 태풍, 산불, 방화 등 재난과 재해로 인한 문화유산 멸실과 훼손 시 원형복원을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영구 보존된다. 아울러 실감 콘텐츠 제작, 비대면 교육, 관광, 웹툰·게임·영화·전시·디자인 등 문화산업 원천 콘텐츠 자원으로 쓰일 수 있도록 개방한다. 문화재청은 2018년부터 축적된 데이터를 3D 프린팅 등 활용 수요에 맞게 가공해 국가문화유산포털을 통해 개방해왔다. 이번 사업으로 개방 대상과 활용 범위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어부들의 개밥그릇·재떨이로 ‘천덕꾸러기’… 700년 만에 보물로 깨어난 침몰선 도자기

    어부들의 개밥그릇·재떨이로 ‘천덕꾸러기’… 700년 만에 보물로 깨어난 침몰선 도자기

    1970년대 어부 그물에 도자기 자주 걸려당시 중요성 몰라 다시 바다에 던져 버려1976년 도굴꾼 유물 팔려다 존재 알려져 수중발굴 경험 없어 해군 등과 합동조사세계 수중고고학 사상 대규모 유물 나와금속품·도자기 등 2만 4000여점 찾아내 목간 글씨 연구 결과 원나라 국적 밝혀져당시 항로·유물 추정… 고려 거쳐 日향한 듯신안보물선 14세기 해양 실크로드의 실증1970년대 중반 보물선 신드롬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당시 발굴된 신안보물선에서 값진 고려청자와 송·원대 도자기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수중 발굴은 물의 흐름, 기상조건, 기압차이 등에 따라 매우 한정된 시간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까다롭기 짝이 없고, 고가의 발굴 장비와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수중고고학은 신안보물선 발굴 전까지 국내에서 매우 생소한 학문이었지만, 이 일을 기점으로 급속히 발전했다.●어부 그물에 걸린 도자기 6점의 가치 신안보물선은 1975년 8월 처음 확인됐다. 어부 최모씨 그물에 도자기 6점이 걸려 올라온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다른 어부들은 도자기가 올라오면 바다에 다시 던져 버리거나 집으로 가져가 개밥그릇이나 재떨이로 썼다. 최씨도 도자기의 중요성을 몰랐지만,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의 동생은 달랐다. 동생의 관심으로 신안군청에 신고해 나온 감정 결과, 중국 송·원대의 도자기였다. 그 이듬해 침몰선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무려 700년 동안 깊은 바닷속에 잠들었던 보물선이 비로소 물 위로 떠올랐다. 이듬해 9월 도굴꾼이 잠수부를 고용해 유물을 건져내 팔려다 검거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에도 도굴이 잇달아 일어났고, 발굴 해역 주민들도 도굴에 가담했다.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관계 당국은 조사를 서둘렀지만 수중발굴 경험이 없던 탓에 유물을 건져 올릴 수 있는 도구나 장비도 딱히 갖추지 못했다.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 국립중앙박물관과 해군해난구조대 등이 합동조사단을 꾸렸다.신안보물선의 발굴 위치는 전남 신안군 증도 해역이다. 증도는 전남 목포에서 서북 방향으로 약 40㎞ 떨어진 섬이다. 발굴 현장은 증도와 임자도에서 각각 4㎞ 떨어진 해역이었다. 여기서 1976년 10월 26일 우리나라 최초의 수중발굴이 시작됐다. 이후 약 10년 동안 조사가 이어진다. 밀물과 썰물의 차가 커서 물의 흐름이 바뀌는 정조 시간에만 발굴할 수 있었다. 수심은 평균 20m 정도였는데, 수중 시야가 좋지 않고 조류가 빨라 조사에 어려움이 상당했다. 1977년 제3차부터 바둑판 모양의 철재로 된 ‘그리드’를 설치해 육상 발굴처럼 조사 결과를 기록했다. 해군이 발굴하고, 학자들은 유물과 도면을 정리했다. 이렇게 해 선박과 송·원대 도자기 등 무려 2만 4000여점이 최종 출수됐다.신안보물선의 국적은 뜨거운 관심사였다. 고려냐, 중국이냐, 아니면 일본이냐로 의견이 속출했다. 연구 결과 중국 선박으로 최종 밝혀졌다. 신안보물선에서 나온 ‘지치삼년’(至治參年)이라고 새겨진 목간의 글씨가 중국 원 영종 3년(1323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국가와 연대가 확인된 것이다. 선박의 구조는 어땠을까. 당시는 고려시대로, 우리나라에서 수중발굴된 선박은 모두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었지만 신안선은 중국 선박으로 배 밑이 ‘V’자 모양인 첨저선이었다. 신안보물선은 중국 푸젠 지역 첨저선으로, 수심이 깊은 해역에서의 운항과 파도를 가르기에 적합하고, 배를 만들 때 무사 항해와 안녕을 기원하는 보수공이 있어 중국 선박임을 확인할 수 있다. 보수공은 선수·선미 용골재 연결부에 위치한다. 선수 수직접합면 원형 구멍에는 청동거울을 넣었고 선미에는 송대 화폐인 태평통보를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치했다. 선체는 모두 720여편(조각)으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20여년 동안 보존처리 후 복원했다. 추정 실물 크기는 길이 34m, 폭 11m, 깊이 3.7m이다. ●신안보물선에 고려인들도 승선한 듯 신안보물선의 유물은 도자기 2만여점, 금속품 1000여점, 자단목 1000여점, 향신료, 약제품, 석제품, 목제품, 유리·골각제품, 동전 28t(약 800만개) 등이다. 도자기는 길이 50~70㎝, 너비 40~60㎝, 높이 40~60㎝ 정도 나무상자에 10~20개씩 포개서 끈으로 묶어 적재했다. 배의 균형을 잡고자 자단목을 배 밑에 골고루 깔고 그 위에 28t이나 되는 동전을 쌓았다. 동전 상단에는 도자기와 칠기·금속제품 등을 수납했다.우리나라 유물은 청자 매병과 청자 베개, 선원들이 배 위에서 사용하던 청동숟가락 등이 있다. 고려청자는 12~13세기 강진 사당리요와 부안 유천리요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중국에서 수집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인이 쓰던 것으로 보이는 숟가락이 나온 것으로 보아 고려인들도 승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당시 신안보물선의 항로나 유물로 봐서는 고려를 거쳤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고려 왕실과 귀족들에게는 중국의 영향으로 차를 마시고, 향을 피우고, 꽃을 감상하는 문화가 있었다. 이 취향은 실용성과 예술성을 갖춘 공예의 발전을 이끌어 고품질 상감청자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본 유물로는 세토매병과 나막신, 칼코 등이 있다. 일본 가마쿠라시대는 중국과 외교 관계가 중단된 상태였지만,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교류는 활발했다. 차 마시고, 향 피우고, 꽃을 감상하는 문화가 선종사찰, 가마쿠라 막부의 주요 인사와 상급 무사들 사이에서 더 인기가 있었고 이런 문화를 즐기고자 관련 기물을 중국에서 수입했다. 이와 관련한 유물들이 향로, 향합, 꽃병, 잔, 주전자 등이다. 신안선에서 나온 유물 중 가장 많은 것은 도자기·토기류로, 2만 660여점에 이른다. 도자기는 청자와 청백자가 다수였는데 대부분 중국 용천요와 경덕진요계였다. 도자기 분류로 편년과 생산지 등도 밝혀냈는데, 이렇게 대량으로 출수된 도자기는 지금까지도 세계 수중고고학 사상 유례가 드물다. 금속 유물은 1000여점으로 분향구, 불교의식구, 주방용구, 생활용구, 금속정 등 다양했다. 금속덩어리인 금속정은 녹여서 불상이나 기타 기물 제작에 사용하고자 했을 터다. 주석정과 철정이 340여점으로 가장 많고 ‘왕구랑’(王九郞)이라는 장인의 이름이 새겨졌다. 특히 ‘경원로’(慶元路)가 새겨진 청동추 덕분에 선박 출항지가 중국 경원로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목제유물로는 목간, 목기발, 목제반, 칠기완, 자단목 등이 나왔다. 목간 360여점은 화물표이니만큼 화물주·적재품 단위 등을 밝히는 데 요긴하게 쓰였고 침몰연대를 분석하는 데에도 사용됐다. 이 중 목간에서 언급한 ‘도후쿠지’(東福寺)는 일본 교토시 도잔구에 있는 임제종 사찰을 가리킨다. 1319년 화재로 소실됐다가 1325년 가마쿠라 막부의 도움으로 재건됐다. ‘도후쿠지’ 목간은 1323년 도후쿠지 사찰 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는 신안보물선을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묵인 아래 파견된 무역선으로 보는 근거이기도 하다. 식물류는 후추, 은행, 빈낭(기호식품), 여지(과일) 씨 등이 나왔다. 이러한 식물은 한약재와 향료 등이 거래되거나 구급약, 혹은 식용이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며 당시 해상운송의 규모와 교류 정도를 가늠케 한다.●출항한 신안보물선, 최종 목적지는 신안보물선의 항로는 두 갈래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추정은 중국 푸젠성 취안저우항에서 연안 항로를 따라 온저우 등을 거쳐 칭위안으로 북상해 무역품을 싣고 고려, 일본으로 향하는 항로다. 중국 저장성 칭위안항을 출발한 배는 고려 개경을 중간 기착지로 삼았을 것이다. 배의 발굴 지점은 한중 항로인 서남해사단항으로, 기상재해 등 돌발 상황으로 인해 침몰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다른 추정은 중일 무역이 활발했던 일본 후쿠오카 하카다항이 목적지인 항로다. 중국에서 출발해 일본으로 직항하던 무역선이 남송·원대의 중국과 일본 간 주요 무역품이던 도자기와 동전들을 싣고 표류하다 침몰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화물주는 일본인과 기관의 대리인 등이 많았으며 목간에 새겨진 ‘조자쿠암’(釣寂巖), ‘하코자키’(筥崎) 등은 규슈의 사찰로, 하카다항과 관련이 있다. 출항지는 청동추에 새겨진 대로 ‘경원로’이다. 칭위안은 현재 중국 저장성 닝보 지역으로 남송대에 광저우, 취안저우와 더불어 국제항으로 성장한 곳이다. ‘지치삼년육월삼일’(至治參年六月二日) 목간은 신안선이 6월 남풍 시기에 출항했음을 알려준다. 신안보물선과 유물은 14세기 전후 해양 실크로드 무역의 실증이며 고려·일본 유물도 출수돼 한중일 관련성도 증명한다. 당시 중국 범선의 무대는 고려·일본과 동남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였다. 신안보물선이 고려를 경유해 일본으로 갔는지, 아니면 바로 일본으로 갔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출수가 우리나라 해역인 것은 분명한 만큼 우리나라가 해양 실크로드의 일원이었음을 대변한다. 신안보물선 수중발굴은 우리나라를 아시아 수중고고학 선도국가로 자리매김했다. 복원된 신안보물선의 선체와 다양한 도자기, 자단목, 목간, 금속제품 등 유물은 목포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전시하고 있다. 연구소를 방문하면 영상과 전시를 통해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신안 증도 발굴해역은 현재 사적 제274호로 지정돼 안내판과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생생한 해양 실크로드를 보고 싶다면 직접 방문해 볼 만하다. 김병근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 코로나19 액운 막을 황금빛 갑옷 장군…광화문에 ‘문배도’ 붙인다

    코로나19 액운 막을 황금빛 갑옷 장군…광화문에 ‘문배도’ 붙인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는 설 연휴 기간인 오는 11일부터 14일까지 경복궁 광화문에 황금빛 갑옷을 입은 장군이 그려진 ‘문배도’를 붙인다고 8일 밝혔다. ‘문배’는 정월 초하루 궁궐 정문에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는 의미로 그림을 붙이는 풍속을 뜻하며, 이때 붙이는 그림을 ‘문배도’라고 한다. 문배도 제작은 관청인 도화서에서 담당했으며, 이러한 풍속은 조선 후기 이후 민간으로도 퍼져나갔다. ‘문배’에 관한 기록은 그동안 조선 시대 문헌 자료인‘열양세시기’, ‘동국세시기’, ‘육전조례’ 등에 나와 있지만 도상의 실체에 대해서는 뚜렷이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번 문배도 제작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2015년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복원·재현 과정 중 미국 의회도서관이 소장한 경복궁 광화문 사진을 발굴하면서 가능해졌다. 19세기 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진에서 궁궐 문배도의 실체가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당시 광화문 양쪽에 붙은 문배도는 길이 약 3m로, 험상궂은 얼굴에 금갑장군이 그려져 있다. 위쪽 3분의 1 정도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찢긴 상태다.문화재청은 “도상의 일부만 남아 있는 광화문 사진만으로는 재현이 어려워 자문회의를 거쳐 왕실과의 연계성이 있고 유일하게 완형이 남아 있는 안동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 본가 소장 유물을 바탕으로 문배도를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문배도는 원래 종이로 제작해 붙여야 하나 광화문의 훼손을 우려해 현수막 형태로 부착한다. 문화재청은 “연초 액과 나쁜 기운을 쫓는다는 조선 시대 세시풍속에서 착안해 코로나19로 지친 국민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기획했다”면서 “광화문 문배도 도상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한 추가적인 고증 연구도 시행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110년 상처 씻은 ‘지광국사탑’ 고향 간다

    110년 상처 씻은 ‘지광국사탑’ 고향 간다

    문화재청, 보존처리 작업 5년 만에 끝복원 장소는 원위치·전시관 등 논의 중일제에 의해 반출된 뒤 10여 차례 이전되고, 한국전쟁 중에 폭격을 당하는 등 한국 근대사의 고난과 상처를 품은 국보 제101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 5년간의 보존 처리 끝에 제 모습을 되찾으며 110년 만에 귀향할 채비를 마쳤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20일 “2016년부터 진행한 지광국사탑 보존 처리 작업을 최근 완료했으며, 연구 결과를 담은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보존·복원Ⅲ’ 보고서를 발간해 국립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에 공개했다”고 밝혔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은 강원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지에 세워졌던 고려시대 국사(國師) 해린(984~1070)의 승탑이다.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 뛰어난 장엄장식으로 역대 가장 개성적이고 화려한 승탑으로 평가받는다.지광국사탑의 비운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이 탑을 해체해 원주에서 서울로 반출하며 시작됐다. 명동의 무라카미 병원으로 옮겨진 탑은 이듬해 중구 남창동의 와다 저택 정원으로 이동했다가 그해 5월 일본 오사카로 넘어갔다. 조선총독부의 반환 요청으로 1912년 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원래 있던 원주가 아니라 경복궁에 자리잡았고, 그 후로도 경복궁 내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크게 파손돼 1957년 복원 작업을 벌였지만 치밀한 고증 없이 시멘트와 철근 등으로 보존 처리해 2005년, 2010년 두 차례 정기조사와 2014년 특별종합점검 등에서 다수의 균열과 복원 부위 탈락 등이 발견됐다. 특히 모르타르로 복원된 옥개석(지붕돌)과 상륜부는 구조적 불안정까지 더해져 추가 훼손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5년 9월 탑의 전면 보수를 결정하고 2016년 3월 석탑을 완전 해체한 뒤 문화재보존과학센터로 옮겨 보존 처리를 진행해 왔다. 보존 처리는 모르타르를 걷어 내고, 결실된 부재를 새로운 석재로 제작하며, 유리건판과 실측도면을 바탕으로 결실 부분의 도상을 복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전체 29개 부재 중 19개에 대해 부분적으로 신석재를 사용했으며, 옥개석과 앙화(꽃이 위를 쳐다보는 모양의 조각), 보륜(탑 상륜부 원형 모양의 부재) 등의 부재는 절반 정도를 신석재로 복원해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신석재는 지광국사탑이 있던 원주에서 채석해 탑이 조성될 당시 석재와 가장 유사한 재료를 사용했다. 탑신석 사리공(사리를 넣는 구멍)에서 발견된 옥개석 파손 부재 조각과 법천사지에서 발굴된 하층 기단 갑석(돌 위에 포개어 얹는 넓적한 돌) 조각도 원래 위치에 복원했다. 단장은 마쳤으나 지광국사탑의 귀향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2019년 문화재위원회가 원주로 이전 결정을 내렸지만 정확한 복원 장소는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천사지 내 원위치에 놓는 방안, 이 자리에 보호각을 세워 복원하는 방안, 사지 내 건립 중인 전시관으로 이전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다. 문화재청 이종희 유형문화재과장은 “원주시와 긴밀히 협의해 지광국사탑을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고 말했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제 모습 찾은 국보 지광국사탑, 귀향만 남았다

    제 모습 찾은 국보 지광국사탑, 귀향만 남았다

    일제에 의해 반출된 뒤에 10여 차례 이전되고, 한국전쟁 중에 폭격을 당하는 등 한국 근대사의 고난과 상처를 품은 국보 제101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 5년간의 보존 처리 끝에 제 모습을 되찾고 110년 만에 귀향할 채비를 마쳤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20일 “2016년부터 진행한 지광국사탑 보존처리 작업을 최근 완료했으며, 연구 결과를 담은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보존·복원Ⅲ’ 보고서를 발간해 국립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에 공개했다”고 밝혔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지에 세워졌던 고려시대 국사(國師) 해린(984∼1070)의 승탑이다.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 뛰어난 장엄장식으로 역대 가장 개성적이고 화려한 승탑으로 평가받는다. 지광국사탑의 비운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이 탑을 해체해 원주에서 서울로 반출하며 시작됐다. 명동의 무라카미 병원으로 옮겨진 탑은 이듬해 중구 남창동의 와다 저택 정원으로 이동했다가 그해 5월 일본 오사카로 넘어갔다. 조선총독부의 반환 요청으로 1912년 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원래 있던 원주가 아니라 경복궁에 자리잡았고, 그후로도 경복궁 내 여러 곳을 옮겨다녔다.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크게 파손돼 1957년 복원 작업을 벌였지만 치밀한 고증 없이 시멘트와 철근 등으로 보존처리해 2005년, 2010년 두 차례 정기조사와 2014년 특별종합점검 등에서 다수의 균열과 복원 부위 탈락 등이 발견됐다. 특히 모르타르로 복원된 옥개석(지붕돌)과 상륜부는 구조적 불안정까지 더해져 추가 훼손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5년 9월 탑의 전면 보수를 결정하고 2016년 3월 석탑을 완전 해체한 뒤 문화재보존센터로 옮겨 보존 처리를 진행해 왔다.보존 처리는 모르타르를 걷어내고, 결실된 부재를 새로운 석재로 제작하며, 유리건판과 실측도면을 바탕으로 결실 부분의 도상을 복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전체 29개 부재 중 19개에 대해 부분적으로 신석재를 사용했으며, 옥개석과 앙화(꽃이 위를 쳐다보는 모양의 조각), 보륜(탑 상륜부 원형 모양의 부재) 등의 부재는 절반 정도를 신석재로 복원해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신석재는 지광국사탑이 있던 원주에서 채석해 탑이 조성될 당시 석재와 가장 유사한 재료를 사용했다. 탑신석 사리공(사리를 넣는 구멍)에서 발견된 옥개석 파손 부재 조각과 법천사지에서 발굴된 하층 기단 갑석(돌 위에 포개어 얹는 넓적한 돌) 조각도 원래 위치에 복원했다. 단장은 마쳤으나 지광국사탑의 귀향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2019년 문화재위원회가 원주로 이전 결정을 내렸지만 정확한 복원 장소는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천사지 내 원위치에 놓는 방안, 이 자리에 보호각을 세워 복원하는 방안, 사지 내 건립 중인 전시관으로 이전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다. 문화재청 이종희 유형문화재과장은 “원주시와 긴밀히 협의해 지광국사탑을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고 말했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조선의 숨결 125㎞… 구리~양평 ‘평해길’ 걸어볼까

    조선의 숨결 125㎞… 구리~양평 ‘평해길’ 걸어볼까

    경기도, 연내 경흥길·강화길 추가 개통경기문화재단 경기옛길센터가 구리~양평을 잇는 ‘평해길’ 125㎞를 개통했다고 3일 밝혔다. ‘관동대로’라고도 불린 평해길은 관동지방인 강원도와 한양을 연결해주던 옛길이다. 한강 수변과 산, 들판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10개 구간으로 이뤄진 탐방로는 망우묘역·조말생묘·정약용 유적지·지평향교 등 다양한 문화유산을 거치도록 설계했다. 종합안내판·문화재 안내문·완주 확인함 등도 설치했다. 2018년 원형 노선 조사를 시작해 대체노선 확정, 안내체계 정비를 거쳐 지난달 말 조성을 끝냈다. 경기문화재단은 조선 시대 실학자 여암 신경준(1712∼1781) 선생이 1770년 집필한 역사 지리서 ‘도로고’(道路考)를 기반으로 옛길을 복원하고 있다. 경기옛길은 역사적 고증을 토대로 지역의 문화유산을 도보길로 연결한 ‘역사문화탐방로’이다. 조선시대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 가운데 경기도를 지나는 주요 6개의 도로망은 제1로인 의주로를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경흥로·평해로·영남로·삼남로·강화로가 있었다. 경기옛길에는 지역의 문화유산과 민담·설화·지명유래와 같은 스토리텔링이 곳곳에 녹아 있다. 그동안 점으로 산재해 소외됐던 문화유산을 선으로 연결해 많은 사람이 문화유산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평해길은 4번째 경기옛길이며 삼남길(과천∼평택) 100㎞, 의주길(고양∼파주) 56.5㎞, 영남길(성남∼이천) 116㎞ 등 3개가 개통됐다. 올해는 경흥길(의정부∼포천)과 강화길(김포)이 뚫린다. 경기옛길은 모바일 앱으로 제작해 이달 중 선보일 예정이다. 앱에는 ‘노선 따라가기’, ‘완주 인증’등 다양한 기능을 탑재한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In&Out] 태릉선수촌을 태릉전통무예촌으로/나영일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

    [In&Out] 태릉선수촌을 태릉전통무예촌으로/나영일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

    태릉은 1408년부터 5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조선왕릉 40기 중 하나다. 일반인에게 왕릉은 어릴적 소풍 다니던 도심 속 휴식 공간으로 흔히 기억된다. 이 중 태릉은 올림픽과 세계 대회 등을 준비하는 국가대표의 요람, 태릉선수촌으로 널리 알려졌다. 조선왕릉 40기는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에 문화재청이 태릉과 강릉 사이에 있는 태릉선수촌을 철거하고 왕릉의 원형을 복원시키겠다고 나서 현재는 선수촌 시설 대부분이 철거됐다. 대한체육회는 태릉선수촌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해 전체 시설 중 8곳을 존치하고자 했으나 4개만 남기기로 2018년 문화재청과 내부적으로 합의했다고 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 진천선수촌이 새로 탄생했다. 선수촌을 현대적인 시설의 새로운 장소로 이전하기만 하면 무조건 좋은 것일까. 젊은 세대 중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우리나라 근대 체육의 메카인 서울(동대문)운동장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태릉선수촌의 무조건 철거가 능사는 아니다. 그동안 선수촌 이전과 존치 문제를 스포츠적으로만 접근한 경향이 있었다. 태릉 지역은 조선시대 오군영의 하나인 수어청(守禦廳)의 중영(中營)이 있던 곳으로, 무예를 연마하는 공간, 강무장(講武場)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육군훈련소로 사용되고 광복 후 1946년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인 남조선국방경비대 및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가 자리했다. 2015년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광복 이후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으로 ‘2002 한일월드컵 4강 진출’(29.5%)을 첫손에 꼽았고, ‘88올림픽 개최’(19.0%)와 ‘IMF 극복, 금모으기 운동’(6.3%) 등을 그다음으로 꼽았다. 스포츠만큼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만든 분야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태릉선수촌은 민족적 자존심을 높이고 대한민국을 우뚝 서게 한 매우 상징적인 공간이다. 역사적으로 여러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태릉을 조금 더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싶다. 태릉 지역을 조선왕릉 복원과 함께 세계무형문화유산인 택견과 씨름, 세계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준비 중인 활쏘기 등의 대한체육회 산하 단체들로 하여금 왕릉 수호군과 능군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다. 태릉선수촌을 태릉전통무예촌으로 탈바꿈시켜 세계문화유산 단지로 조성하면 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왕릉 행차에 수반되던 ‘관사’(觀射·활쏘기)와 ‘열무’(閱武·무예)를 재현하는 행사도 가능하다. 대한체육회뿐만 아니라 문화재청 그리고 유네스코도 모두 윈윈할 수 있는 일석삼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곳을 단순한 왕실 무덤이 아니라 씨름, 택견, 활쏘기 등 전통 무예를 교육하고 민족 정신을 함양하는 전통무예촌으로 만든다면 전통 문화를 보존하고 민족 정신이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 새벽 예매로 들떴던 충무로, 그때 군밤 냄새… 영화 같은 추억 속으로

    새벽 예매로 들떴던 충무로, 그때 군밤 냄새… 영화 같은 추억 속으로

    지난 1월 시작된 코로나19가 11월이 되도록 지속되는 상황에서 영화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크게 줄어들었다. 서울신문과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이 함께하는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4회 ‘추억의 극장가’ 편에 참여하기 위해 충무로역 1번 출구 앞에 모인 우리들은 눈앞의 대한극장을 바라보며 잠시 감회에 젖었다. 1958년 개관해 초대형 스크린에 ‘벤허’, ‘마지막 황제’ 등 대작을 상영했던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도 있을 테고, 2001년 11개 상영관의 멀티플렉스로 완전히 변신했을 때를 되돌아보는 이도 있을 터였다. 저마다의 나이에 따라 추억은 다르겠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기억은 바로 지난 11개월간의 일상일 것이다. 지난해 가을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이하고 올 초에는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이 전해지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에 감염병의 습격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바꿔 놨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 사람끼리 어떤 형태로든 접촉한다는 것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절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던 그때 영화관은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이었고 오락 공간이었다. 돌아보면 어느새 전설처럼 그리운 시절이다. 어둡고 밀폐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앉아서 스크린 속의 이야기에 함께 빠져들며 같은 장면에서 소리 내어 함께 웃고 눈물 콧물 훌쩍거리며 함께 울기도 했던…. 가을이 깊어 가는 주말 우리는 충무로를 거쳐 을지로와 종로까지 한때 ‘서울의 10대 개봉관’으로 불렸던 극장들을 따라서 걸어 보기로 했다. 사라지고 변화되고 그나마 남아 있기도 한 그 모습들을 찾아서.먼저 서울미래유산 산업노동 분야에 선정된 ‘충무로 인쇄골목’을 따라 걷는 동안 오래되고 활력을 잃은 듯한 분위기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영화산업의 발전과 함께 영화 관련 홍보물을 제작하면서 형성된 충무로 인쇄골목은 이제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인해 인쇄산업 메카로서의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산업과 함께 발전해 온 흔적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특히 연말을 맞아 달력과 연하장, 다이어리 등을 진열해 놓은 가게 앞을 지날 때는 디지털 시대에도 인쇄물을 통해 시간을 관리하고 손글씨로 안부를 전하는 풍경이 사라지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정겹게 되돌아보며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만난 스카라극장 터. 지금은 아시아미디어타워 건물이 우뚝 솟아올라 있다. 1935년에 1000석이 넘는 규모로 세워져 국내 초창기 극장 건축의 역사를 간직해 온 까닭에 2005년 문화재 등록이 예고되자 건물주가 재산권 침해라며 철거를 해 버린 것이다. 급속한 사회 변화로 근현대 서울 시민의 모습이 담긴 문화유산이 덧없이 사라져 버린 생생한 현장이다. 1990년대 들어 멀티플렉스 체인들이 생겨나면서 기존의 극장들이 복합상영관으로 변신해 갈 때도 스카라는 단관을 고수하며 국내 최대 스크린을 유지해 왔으나 반원형 현관 부분이 도로 쪽으로 튀어나온 독특한 모양새로 모더니즘 건축 양식의 전형을 70년 동안 보여 주던 모습은 이제 찾을 수 없다. 서울미래유산처럼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개별적 특성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연한 보전 방식이 그때도 있었다면, 문화재나 문화 전반에 대한 인식이 그때도 지금처럼 높았다면…. 아쉬운 마음으로 대각선 방향의 명보극장으로 향하자 그나마 안심이 된다. 이제는 뮤지컬과 연극 등의 공연을 주로 하는 명보아트홀로 바뀌었지만 1957년 개관한 이래 스카라극장과 마주 보며 관객몰이를 했던 모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극장 앞 광장에 새겨진 영화인들의 핸드프린팅은 그 시절의 추억을 불러오고, 광장 한쪽의 이순신 장군 생가터 표지석은 충무로라는 도로명의 유래까지 알려 준다.하지만 을지로로 접어들어 국도극장 터에 이르자 또다시 진한 아쉬움이 밀려든다. 문화재로 등록될 기미가 보이자 극장주가 건물을 허물어 버린 것은 이곳이 스카라보다 먼저였으니 1936년에 동양풍을 가미한 아름다운 르네상스식 대리석 건물로 세워진 국도극장은 1999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국도호텔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충무로 인쇄골목을 지나오면서 1970년대 지어진 낡은 건물들 속의 인쇄 관련 업체들을 살펴봤고, 또한 1970년대에 완공된 세운상가 건물군을 지나쳐 온 까닭일까. 국도극장 터를 표시하는 기념 표석 앞에서 우리는 어느덧 1970년대를 추억하게 됐다. 지금과 같은 예매 시스템도 없이 단일 개봉관에서 신작 영화를 몇 달씩 상영했던 그 시절에는 이곳 국도극장에서도 아침부터 영화표를 예매하려는 줄이 길게 늘어서곤 했을 것이다. 서울미래유산으로도 선정된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영자의 전성시대’가 모두 이곳 국도극장에서 개봉됐으니 이른바 70년대 청년영화를 보기 위해 당시 을지로의 대표적인 극장이었던 이곳에 얼마나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을까.고도 성장기에 접어든 70년대 산업화의 역군들은 극장에서 한국 영화가 보여 주는 젊은이들의 욕망과 방황과 좌절에 공감하며 한편으로는 영화처럼 빛나는 삶을 꿈꾸기도 했을 것이다. 급격한 산업화의 그늘과 유신 시절의 억압을 잠시 잊은 채 함께 울고 웃던 사람들이 극장 밖으로 나서며 새로운 삶의 희망을 얻었듯 우리는 국도극장 터를 뒤로한 채 바로 앞 세운상가 3층 보행데크로 발걸음을 옮겼다. 충무로와 나란히 종로로 이어지는 세운상가는 약 1㎞ 길이의 초대형 주상복합상가로 일제강점기에 전쟁을 대비해 비워 둔 공터 자리에 세워져 각종 전자제품을 취급하며 명성을 날렸으나 1990년대 용산전자상가가 생기고 강남이 부상하면서 급격히 침체에 빠졌다. 그래서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녹지축을 만들기 위한 시도도 있었으나 5년 전부터 서울시가 도시재생 사업의 하나로 ‘다시세운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역동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오디오와 비디오, 컴퓨터, 불법 복제 등 세운상가를 통해 보급되고 발달한 다양한 ‘신기술’과 ‘신문화’는 종합예술로서의 영화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시 정비된 세운상가의 3층 보행데크를 걸으면서 한국 영화와 극장 건물에 대해 생각이 이어졌다. 이쪽은 기존의 제조 산업을 디지털 디바이스와 결합하고 우리가 지나온 인쇄골목 쪽 상가 구간은 인쇄산업과 크리에이티브 디자인을 결합해 4차 산업혁명의 거점으로 다시 살리겠다고 하니 철거 대신 선택한 존치 재생이 다른 여러 산업과 문화에도 좋은 본보기가 됐으면 싶었다. 청계천을 지나는 구간에서는 세운상가군이 자연스럽게 공중 보행교로 연결되고 있어서 잠시 청계천을 내려다보는 시간도 가져 봤다. 근대화의 상징과도 같았던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청계천을 복원한 지도 어느덧 15년. 산업화 시대를 지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는 진정한 현대화를 이뤄 가는 우리의 미래를 청계천 물길을 따라 상상해 본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종로와 만나는 세운상가 끝자락에서 다시세운광장 건설 때 발굴한 조선시대 중부관아 터 유적을 둘러보고 9층 옥상에 올라 눈앞에 펼쳐진 종묘 숲을 보면서 서울이 얼마나 오랜 역사를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인가를 실감했다. 옥상에서 사방으로 둘러보는 도심은 현대식 빌딩으로 가득하지만 바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으니 다시 한번 개발과 보존에 관한 여러 생각이 교차한 순간이었다.다시세운옥상에서 서울의 기운을 가득 받아 안고 종로로 내려가서 서울극장 앞에 이르자 추억의 오징어구이와 군밤 냄새가 우리를 반겼다. 길 건너 단성사는 한국 영화 100년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지만 새로 지은 빌딩의 이름 속에 흔적으로만 남았고, 피카디리극장도 광장의 핸드프린팅마저 지하로 내려가 옛 모습이 아니었지만 영화관으로서의 역할은 여전히 다 하고 있다. 1960년대의 세기극장을 인수해 1979년 서울극장으로 개관한 이후 증축을 거듭하며 일찌감치 복합상영관 시대를 열었던 서울극장은 종로와 충무로 일대 영화의 역사를 대변하는 극장으로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마지막으로 우리가 찾은 허리우드극장 역시 서울미래유산인데, 1969년 낙원상가 건립과 동시에 개관했던 모습 그대로 이제는 노년층을 위한 실버 극장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사회적 기업 방식으로 특화돼 어르신들을 위한 영화를 저렴한 관람료로 상영하는 그곳에는 모처럼 만나는 옛 영화들이 알록달록한 포스터로 가득했다.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언젠가는 낡은 게 된다. 코로나19에 저당 잡힌 이 시대도 언젠가는 추억이 될 것이다. 서울 도심을 가로질러 추억의 극장가를 걸어온 끝에 우리에게 다가온 화두는 결국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였다. 글·해설 고은주 소설가 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 다음 일정 - 제25회 경의선 숲길 걷기 ●출발 일시 11월 14일(토) 오전 10시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여주 세종대왕릉 6년여만에 제모습 복원

    여주 세종대왕릉 6년여만에 제모습 복원

    경기 여주시에 있는 세종대왕릉(영릉·英陵)과 효종대왕릉(영릉·寧陵)이 6년 2개월에 걸친 정비사업을 마치고 한글날인 9일 대중에 공개됐다. 문화재청은 이날 오후 2시 세종대왕릉 일원에서 ‘세종대왕릉 제 모습 찾기’ 준공식을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정세균 국무총리,정재숙 문화재청장,국민의힘 김선교 의원,이항진 여주시장 등이 참석했다. 코로나19 확산 예방을 위해 행사 참석 인원은 50여 명으로 제한됐고,행사와 동시에 유튜브 등을 통한 온라인 생중계가 진행됐다. 이날 행사는 경과보고와 기념사 ‘문무와 무무 그리고 태평성대’ 축하 공연,제막식,기념 식재,재실 관람,헌화 및 분향 순서로 진행됐다. 정 총리는 준공식 축사에서 “뜻깊은 오늘을 기쁜 마음으로 축하드린다.세종대왕릉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더 널리 알려지고,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로 지친 국민께도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 총리는 “세종대왕은 늘 백성을 먼저 생각했다.‘내가 꿈꾸는 태평성대는 백성이 하려고 하는 일을 원만하게 하는 세상’이라고 말씀하셨다”며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문화융성 시대를 열었던 것도 애민정신의 힘 덕분”이라고 덧붙였다. 문화재청은 2009년 6월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계기로 왕릉의 모습을 바로잡기 위해 영·영릉 유적 종합정비사업을 추진했다. 능제(陵制·무덤 양식)와 예법에 맞지 않게 조성된 인위적인 시설물을 철거했으며,발굴조사를 통해 세종대왕릉의 재실,배수를 위한 도랑인 어구(御溝),향·어로와 영릉(寧陵) 연지 등의 원래 터를 확인해 원형에 가깝게 정비했다. 복원된 영·영릉은 지난 5월부터 일부 권역이 개방된 데 이날부터 복원 재실을 포함한 전체 권역을 공개한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600년 역사 품은 한양도성, 온·오프라인 축제로 만난다

    600년 역사 품은 한양도성, 온·오프라인 축제로 만난다

    AR 활용한 ‘내 손안의 한양도성’ 앱집에서 순성놀이… 돈의문 3D로 복원보물 1호 흥인지문에서 첫 국악공연유튜브 채널 ‘라이브 서울’로 생중계도전! 골든벨·온라인 가요제도 열려 “한양도성을 축조한 태조 이성계는 바뀌는 계절마다 도성을 따라 걸어봤을까, 성문을 지키던 수문장이 올려다봤을 달빛은 어땠을까. 과거시험을 보러 온 선비들은 봇짐을 내려놓자마자 한달음에 한양도성을 돌며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한양도성 안팎에서 살던 사람들의 삶은 어땠을까.” 도성은 도시를 지키는 벽이자 연결하는 길이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몸의 거리두기와 마음의 연결이 무엇보다 절실해진 지금,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서울을 둘러싼 600년 역사를 간직한 한양도성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축제가 열린다.서울시는 코로나19를 극복하고 일상의 소중함과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아 ‘한양도성, 다시 봄’이라는 주제로 제8회 한양도성문화제를 9~10일 개최한다고 7일 밝혔다. 특히 올해는 매년 핵심 행사였던 순성놀이를 집에서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증강현실(AR) 기술을 활용한 ‘내 손안의 한양도성’ 앱은 한양도성 18.6㎞ 중 한양도성박물관, 흥인지문,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인왕산, 돈의문, 창의문 등 대표명소 6곳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 앱을 실행해 한양도성문화제 홈페이지의 지도를 인식하면 된다. 이 중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인 돈의문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됐지만 3D기술로 당시의 모습을 복원해냈다. 6개 명소마다 영상을 시청하거나 퀴즈를 푸는 등 미션을 수행하면 스탬프를 획득할 수 있다. 스탬프를 모두 모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스타그램에 인증 사진을 올린 후 댓글을 남기면 추첨해 선물을 준다. 9일 오후 8시부터 진행되는 ‘흥인지문 풍류 음악회’는 보물 제1호인 흥인지문에서 열리는 최초의 국악 공연이다. 서울시 공식 유튜브 채널인 ‘라이브 서울’로 생중계한다. 조선시대 도성의 동쪽으로 출입하는 성문이었던 흥인지문은 도성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지형적 약점을 보호하기 위해 반원형의 성벽을 한 겹 더 쌓은 구조)으로 돼 있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소리꾼 오정해와 유태평양, 연주가 김효영 등 정통 국악 장인들, 서영호 명인과 전통 예술단체 ‘한국시나위악회’ 및 타악단과 무용단으로 구성된 종합연희예술단인 ‘고르예술단’ 등 퓨전 국악 예술가들이 함께 무대에 선다.코로나19 극복을 기원하는 릴레이 순성도 열린다. 조선시대에 과거를 보러 한양에 온 선비들이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돌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믿어 장원급제를 빌며 도성을 돌았다는 설에서 유래했다. 9일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되며 전국에서 보내온 코로나19 극복 응원 메시지를 등에 매단 참가자들이 도성을 완주하는 행사다. 참가자 120명이 10명씩 12개 팀으로 나눠 도성 걷기를 이어나간다. 각 지점에는 방역요원이 배치되며, 팀별 2명씩 방역 담당자를 지정한다. 사전 신청자 1000명을 대상으로는 지난달 28일부터 오는 31일까지 비대면 개별 순성놀이도 운영 중이다. 이 밖에도 전국의 초등학생이 참여해 서울의 역사에 대한 퀴즈를 푸는 ‘도전! 한양도성 골든벨’과 비대면 온라인 가요제 ‘한양도성으로 가요’, 서울에 사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양도성 말하기대회’와 ‘외국인 도전! 골든벨’ 등 다양한 시민 참여 행사도 열린다. 행사가 열리는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에는 대형 발광다이오드(LED) 전광판 화면이 설치돼 현장 진행자의 진행 아래 참가자들은 화상회의 시스템을 통해 비대면으로 대회에 참여한다.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 도심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 공격을 막기 위해 축조했다. 1396년 태조 5년에 백악(북악산), 타락(낙산), 목멱(남산), 인왕 등 내사산(조선시대 한양을 둘러싼 4개의 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보수했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1910년까지 514년에 걸쳐 서울을 지켜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 도성의 기능을 수행했다.서울시는 2012년 9월 한양도성도감을 신설하고 2013년 10월 국제 기준에 맞는 한양도성 보존 관리 활용계획을 수립하는 등 ‘한양도성 살리기’에 나섰다. 2012년 11월 23일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안중호 서울시 한양도성도감과장은 “가을이면 많은 분들이 한양도성을 방문하는데 올해는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온라인과 비대면으로 한양도성을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방법을 모색했다”고 말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품위있게, 단아하게… 순종 칙서로 만든 한글 ‘재민체’

    품위있게, 단아하게… 순종 칙서로 만든 한글 ‘재민체’

    1908년 10월 24일 대한제국 순종 황제는 근대식 국립병원인 대한의원 개원일에 칙서를 내렸다. ‘국운의 성쇠는 국민의 건강과 질병에 연유함이 많다’로 시작하는 국한문 혼용의 ‘대한의원 개원칙서’(국가등록문화재 제449호)는 옛 대한의원 본관인 서울대병원 의학박물관 현관에 걸려 있다. 이 칙서에 쓰인 글씨체를 토대로 만든 디지털 글꼴 ‘재민체’가 나왔다. 개발 주역은 국립암센터 초대원장을 지낸 박재갑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와 국민대 사회문화디자인연구소 김민 교수팀이다. 박 교수는 6일 기자간담회에서 “건물을 드나들며 칙서를 볼 때마다 한글 필체가 매우 품위있고, 단아하다고 느꼈다”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글씨가 왜 통용이 안 될까 안타까웠다”고 했다. 그러다 2년 전 서예를 배우면서 칙서의 번역본을 궁서체로 옮기는 연습을 했는데 지난해 2월 이를 본 김 교수가 서체 제작을 제안했다. 그는 시인 윤동주·천상병, 신영복 교수의 육필을 디지털 폰트로 복원한 서체 전문가다.김 교수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염려하는 마지막 황제의 뜻이 담겼고, 당대 최고 솜씨를 지닌 사자관(寫字官)의 한글 서체여서 의미가 크다”면서 박윤정 겸임교수, 이규선 연구원과 함께 칙서의 33자 한글 자소를 기반으로 총 2350자를 완성했다고 소개했다. 폰트 이름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의미와 아울러 두 교수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형태는 칙서의 한글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대신 현대적인 감성으로 재해석했다. 한국저작권위원회 웹사이트 공유마당에 오픈소스 형식으로 기증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앞으로 한글과 한자를 혼용할 수 있도록 KS 상용한자 4888자를 개발할 예정이다.  574돌 한글날을 맞아 오는 8일부터 11월 12일까지 서울대병원 의학박물관에서 특별전 ‘함께 쓰고, 함께 그리다-개원칙서에서 한글재민으로’가 열린다. ‘대한의원 개원 칙서’와 지석영이 쓴 의학교 설립 요청서 ‘학부대신께 올리는 글’ 등 박 교수가 재민체로 옮겨 쓴 서예 작품들이 전시된다. 글 사진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세월호 선체 목포 고하도 거치 74% 이상 ‘찬성’

    세월호 선체 목포 고하도 거치 74% 이상 ‘찬성’

    목포시가 세월호 선체 고하도 거치 관련 시민 설문조사를 한 결과 ‘찬성’ 의견이 74%로 나타났다. 시는 정부의 세월호 선체 거치 장소 후보지 논의 중 목포의 고하도 신항 배후부지가 유력한 장소로 거론됨에 따라 시민 의견 수렴을 위해 설문조사를 했다. 지난 15일부터 22일까지 8일간 온·오프라인으로 실시했다. 시민·사회단체·유관기관·학생 등 1만 3092명(시 인구의 5.8%)이 설문에 참여해 찬성 74%, 반대 26%를 보였다. 찬성 이유로 생명·안전·교육 공간 조성, 새로운 관광자원 활용, 선체 인양 인근지역 순으로 조사됐다. 또한 역점을 두고 조성돼야 할 부문으로는 안전교육·체험 인프라 확충과 추모·기억공간 조성, 고하도 연계개발 등이 꼽혔다. 시 관계자는 “이번 설문조사를 통해 세월호 선체 고하도 거치에 대한 시민들의 긍정적인 의견을 알게 됐다”며 “설문조사 결과를 정부에 전달해 고하도로 확정될 경우 시설 조성에 시민의견이 반영되도록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세월호 선체 거치장소에 1500억원 이상을 투입, 국민 안전교육·체험시설과 전시공간 등을 조성하고 인근은 주변환경과 잘 어우러지는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선체 원형은 복원해 물위에 띄우는 형태로 전시하고, 선체 일부는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해 방문객들에게 안전에 관한 교훈을 줄 수 있는 시설로 구성한다는 방침이다. 시 관계자는 “시설 설치와 운영은 국가가 직접 추진해 시의 재정 부담이 없다”며 “고하도에 안전체험시설과 공원을 조성해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거듭나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목포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숭례문 현판 등 ‘아픈 문화재’ 치료… 10년간 4458점 원래 소장처로 퇴원

    숭례문 현판 등 ‘아픈 문화재’ 치료… 10년간 4458점 원래 소장처로 퇴원

    난중일기·청자 등 국보 보존처리 성공부석사 조사당 벽화 ‘6년 대수술’ 돌입유물의 구조·상태 육안 파악 어려워CT 촬영기 등 노후 장비 개선 절실지난 6월 18일 경북 영주 부석사. 경내 성보박물관에 보관·전시돼 오던 국보 제46호 부석사 조사당 벽화 6폭이 무진동 특수차량에 실려 사찰 밖으로 나섰다. 고려 우왕 3년(1377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벽화가 외부로 반출된 건 700여년 만에 처음이었다.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사찰 벽화의 행선지는 대전에 위치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 일명 ‘문화재종합병원’이다. 세월의 흐름만큼 벽화의 병은 깊었다. 조사당 안쪽 벽면에 자리했던 벽화는 일제강점기인 1916~1918년 해체·분리돼 목재보호틀에 담긴 채 무량수전과 보장각, 성보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겨다녔다. 과거 여러 차례 보존처리가 이뤄졌지만 분리할 때 보강 재료로 사용한 석고 탓에 백화 현상이 심각했고 채색층에 긁힘과 박리·박락 현상, 벽체의 균열도 극심했다. 지난 3월 문화재위원회가 벽화의 종합검진과 대수술을 결정했다. 입원 기간은 2026년까지 6년 정도. 절차는 일반 병원과 비슷하다. 우선 방사선 기술을 활용한 비파괴 구조 분석으로 벽화 구조를 정밀 진단하고 초분광분석 등으로 채색층 제작 기법을 연구한다. 이어 국내외 전문가 논의에서 보존처리 범위와 재처리 기법을 정한 뒤 보존처리와 복원에 들어간다. 보존처리 전 과정에 대한 연구 성과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마지막이다. 인간의 생로병사와 마찬가지로 유물도 늙고, 병드는가 하면, 사고로 다치기도 한다.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훼손된 유물의 원형을 보존하고 새 생명을 불어넣는 문화재 보존·복원 전담 국가기관이다. 센터가 문을 연 것은 2009년.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기획운영팀과 무기질보존팀, 유기질보존팀 등 3개 팀으로 구성돼 있다. 무기질보존팀은 금속·도자기·석조·벽화 유물을, 유기질보존팀은 지류·직물·목재·비파괴 진단 업무를 담당한다. 학예연구관과 연구사, 연구원 등 36명이 소속돼 있다. 이곳에서 보존처리를 마치고 원래 소장처로 돌아간 유물은 지난해까지 총 4458점이다. 숭례문현판, 보물 제326호 이충무공유물, 국보 제76호 난중일기, 국보 제326호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등이 대표적이다. 고려청자의 기원으로 평가받는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는 1년 6개월간 보존처리를 받고 2018년 소장처인 이화여대박물관에 인계됐다. 이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현재 전시 중인 ‘새 보물 납시었네, 신국보보물전’에서 만날 수 있다. 장성윤 무기질보존팀 학예연구관은 “문화재 보존·복원에서 가장 중요한 고민은 원형과 재료”라면서 “전통재료가 우선 고려돼야 하지만 안정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현대의 재료를 쓰는 것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나중에 추가 보존처리를 위해 제거가 가능한 가역성 재료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육안으로 확인이 어려운 유물의 구조와 상태를 파악하려면 과학 장비의 활용이 필수다. 적외선·자외선 조사, 엑스선컴퓨터단층촬영(X선 CT) 등이 비파괴 진단 주요 기법으로 사용된다. 특히 X선 CT는 내부 구조를 3차원으로 형상화한 형태를 기록하기 때문에 원형 유지가 중요한 문화재 보존·관리에서 독보적인 역할을 한다. 센터 설립 때 들여온 장비들이 노후화되면서 정밀한 유물 진단을 위해 시설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우리 동네 이거 알아?] 누에의 신을 만나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별명이 있는 걸 아시나요? 간송미술관, 한국가구박물관, 우리옛돌박물관, 길상사 등이 자리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용운, 조지훈, 염상섭, 김광섭, 김환기 등 우리나라 근현대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인이 창작활동을 펼친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에의 신’을 모신 선잠단(성북구 성북로 17)을 통해 우리 조상의 의(衣)문화도 엿볼 수 있습니다. 선잠단은 누에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단으로 조선시대 왕비들이 친히 왕림해 제를 올린 곳이라고 해요. 현재 선잠단은 원형 복원 작업이 한창입니다. 대신 성북선잠박물관(성북로 96)에서 이곳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습니다. 2018년 4월 개관한 성북선잠박물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3개의 전시실과 개방형 수장고로 조성돼 있어요. 선잠제와 선잠단, 비단 관련 유물의 보존·전시와 의(衣)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특별전시와 교육·체험 프로그램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양잠을 처음 시작했던 선잠 서릉씨를 신으로 모시고 한 해의 풍요를 기원했던 선잠제와 조선 초기부터 현재까지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선잠단지의 역사, 선잠제의 구체적인 장면을 생생한 모형과 3차원(3D) 영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다가오는 주말, 성북선잠박물관을 찾아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왕실 여성의 예복과 큰머리를 꾸몄던 장신구도 꼭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5·18 총탄 흔적조사,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 재진입 작전때 헬기사격 여부도 판가름날듯

    5·18민주화운동 최후 항쟁지인 옛 전남도청에 대한 총탄 흔적 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이에 따라 1980년 5월 27일 ‘상무충정작전’(전남 도청 진압작전) 때 계엄군의 무차별 헬기 사격이 물증으로 입증될 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당시 군 기록상 무장헬기 지원 요청이 확인됐고, 도청에서도 헬기사격 목격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22일 문화체육관광부 옛 전남도청 복원추진단 등에 따르면 올 연말까지 5·18 당시 옛 전남도청에 남겨진 총탄 흔적을 심층 조사한다. 용역을 맡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보존과학연구소 등은 옛 도청 본관·별관·회의실, 전남경찰청(전남도경찰국) 본관·민원실·상무관 등 6개관 내·외부에 대한 벽면 철근 계측도·외관 흔적도 등을 3차원 지도로 제작, 탄흔을 찾는다. 분석 과정에 ‘도청 본관 후면’과 ‘전남도경찰국 후면’에서 탄흔이 나올 경우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헬기 사격에 따른 탄흔 여부를 심층 조사할 것으로 보인다. 시민군의 관련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5·18 때 시민군이었던 김모씨는 1980년 5월 27일 오전 3시40분에서 4시 사이 도청 후문 쪽에서 고교 친구인 서모씨와 보초를 서던 중 서씨가 군의 헬기 사격으로 숨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김씨는 “(당시 군이) 헬기에서 로프를 타고 (도경찰국 지붕 쪽으로) 360도로 돌며 내려오면서 무차별 사격을 했다. 헬기에서도 총을 쐈다”고 진술했다. 이같은 증언으로 미뤄 도청 본관·도경 후문 쪽에서 탄흔이 발견되면, 5·18진상조사위가 탄흔 생산 시기·구경, 발사각, 계엄군의 진압 작전 당시 상황 등을 두루 조사해 헬기 사격 여부를 규명할 것으로 보인다. 1980년 5월 27일 전투교육사령부 상황일지에도 ‘3(공수)여단 무장 Hel(헬)기 지원 요청’라는 기록이 남아 있고, ‘항공 연락장교 지원’이라고 적혀 있어 실제 헬기가 투입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5·18진상조사위 관계자는 “도청 본관·도경 후문에서 1980년 5월 쏜 탄흔이 발견될 경우 헬기사격 여부를 면밀히 조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옛 전남도청 복원추진단은 최근 원형 복원을 위한 예비 조사 과정에서 탄흔으로 추정되는 구멍 8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곳은 1980년 5월 항쟁 당시 시민군이 상황실로 사용하던 서무과 출입문 위쪽 벽면으로 현재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민주평화교류원 엘리베이터 기계실로 리모델링된 상태다. 앞서 옛 전남도청과 이웃한 전일빌딩 10층에서 발견된 수백개의 탄흔 대부분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헬기에서 쏜 것이라고 감정했고, 그동안 국방부 헬기사격 특조위 등 국가기관 조사에서도 헬기 사격은 사실로 드러났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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