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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숭례문 살린 거장 “원형 복구가 핵심… 장인 육성 힘쓸 것”

    숭례문 살린 거장 “원형 복구가 핵심… 장인 육성 힘쓸 것”

    “문화재 수리 복원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입니다. 전통 재료를 최대한 활용하고 지형과 수목 등 주변 환경까지 같이 보존하는 것은 물론 해당 문화재의 인문학적 요소까지 고려해야죠.” 김창준(63) 문화재수리기술위원회 초대 위원장은 지난 1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수년간 글씨 색깔 문제로 논란을 빚은 광화문 현판 교체를 통해 얻은 교훈은 문화재 복원은 무엇보다 고증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필요할 때만 자문단을 구성하고 해체하는 방식으로는 객관성, 전문성, 일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수리기술위의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지난 7월 출범한 수리기술위는 의결권을 지닌 위원 30명이 포함된 90명으로 구성돼 모든 문화재의 수리 계획과 방법의 타당성 등을 조사·심의한다. 문화재청은 내년 심의 대상만 494건으로 예상하고 있다. 기술고시 15회로 공직에 입문한 김 위원장은 문화재청에서 33년 근무한 정통 관료 출신. 30년간 진행된 경복궁 복원 사업의 설계자이자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와 전각 복원이 갖는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은 “1980년대 경복궁에는 일제강점기 전국에서 가져온 불교 석탑들이 널려 있고 군 부대가 주둔하는 등 근정전, 경회루 등을 제외하고 온전히 남아 있는 건물이 없었다”며 “전각을 복원할 소나무를 찾아 전국 산을 헤매고 폭설 속에 왕복 25㎞를 걸었던 순간이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광화문 한자 현판을 시대정신에 따라 한글로 교체해야 한다는 일부 주장이 있지만 그는 “수리의 목적은 원형을 더 오래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역사성을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2008년 2월 방화로 소실된 숭례문 복구 단장을 맡기도 했다. 전통기법을 최대한 적용한다는 원칙에 따라 기와와 철물을 전통 방식으로 제작하는 등 옛 기법을 사용했지만 시행착오도 겪었다. 성곽과 육축은 전통 방식으로 잘 수리됐지만 단청은 경험이 없던 터라 벗겨지고 떨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김 위원장은 “이 때문에 전체 공사가 잘못된 것처럼 매도됐지만 숭례문은 일본 문화청 전문가들도 ‘현장 관리가 일본보다 낫다’고 극찬한 성공적 복원작”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또 “일제강점기에 없어진 전통가마를 재현해 지붕 기와를 올린 것에 큰 보람을 느꼈다”며 “숭례문 복원 사업을 기점으로 전통 재료와 기술을 발굴하고 체계적으로 문화재를 복원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수리기술위는 선진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직으로 문화재 수리를 우리처럼 체계적으로 법제화한 나라도 드물다”며 “기술자들의 고령화 추세 속에 끊임없이 전통 장인을 육성하는 것이 과제”라고 했다.
  • 숭례문 살린 거장 “문화재 복원, 충분한 고증 속 원형 그대로 해야“

    숭례문 살린 거장 “문화재 복원, 충분한 고증 속 원형 그대로 해야“

    “문화재 수리 복원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입니다. 전통 재료를 최대한 활용하고 지형과 수목 등 주변 환경까지 같이 보존하는 것은 물론 해당 문화재의 인문학적 요소까지 고려해야죠.” 김창준(63) 문화재수리기술위원회 초대 위원장은 지난 1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수년간 글씨 색깔 문제로 논란을 빚은 광화문 현판 교체를 통해 얻은 교훈은 문화재 복원은 무엇보다 고증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필요할 때만 자문단을 구성하고 해체하는 방식으로는 객관성, 전문성, 일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수리기술위의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지난 7월 출범한 수리기술위는 의결권을 지닌 위원 30명이 포함된 90명으로 구성돼 모든 문화재의 수리 계획과 방법의 타당성 등을 조사·심의한다. 문화재청은 내년 심의 대상만 494건으로 예상하고 있다. 기술고시 15회로 공직에 입문한 김 위원장은 문화재청에서 33년 근무한 정통 관료 출신. 30년간 진행된 경복궁 복원 사업의 설계자이자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와 전각 복원이 갖는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은 “1980년대 경복궁에는 일제강점기 전국에서 가져온 불교 석탑들이 널려 있고 군 부대가 주둔하는 등 근정전, 경회루 등을 제외하고 온전히 남아 있는 건물이 없었다”며 “전각을 복원할 소나무를 찾아 전국 산을 헤매고 폭설 속에 왕복 25㎞를 걸었던 순간이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광화문 한자 현판을 시대정신에 따라 한글로 교체해야 한다는 일부 주장이 있지만 그는 “수리의 목적은 원형을 더 오래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역사성을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2008년 2월 방화로 소실된 숭례문 복구 단장을 맡기도 했다. 전통기법을 최대한 적용한다는 원칙에 따라 기와와 철물을 전통 방식으로 제작하는 등 옛 기법을 사용했지만 시행착오도 겪었다. 성곽과 육축은 전통 방식으로 잘 수리됐지만 단청은 경험이 없던 터라 벗겨지고 떨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김 위원장은 “이 때문에 전체 공사가 잘못된 것처럼 매도됐지만 숭례문은 일본 문화청 전문가들도 ‘현장 관리가 일본보다 낫다’고 극찬한 성공적 복원작”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또 “일제강점기에 없어진 전통가마를 재현해 지붕 기와를 올린 것에 큰 보람을 느꼈다”며 “숭례문 복원 사업을 기점으로 전통 재료와 기술을 발굴하고 체계적으로 문화재를 복원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수리기술위는 선진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직으로 문화재 수리를 우리처럼 체계적으로 법제화한 나라도 드물다”며 “기술자들의 고령화 추세 속에 끊임없이 전통 장인을 육성하는 것이 과제”라고 했다.
  • 체류형 산악문화 특구 완성… 도심 속 휴양 ‘강북서 1박2일’

    체류형 산악문화 특구 완성… 도심 속 휴양 ‘강북서 1박2일’

    지난 8월 말 서울시내에서 유일한 휴양콘도미니엄이 문을 열면서 강북구는 ‘1박2일 역사문화 관광코스’의 마지막 퍼즐을 맞췄다. 강북구는 천혜의 경관 북한산, 3·1운동 발상지 봉황각, 민주화 성지인 국립 4·19 민주묘지, 건국 초석을 다진 순국선열 16위 묘역, 고려 말~조선 초 청자 가마터, 서울에서 유일하게 조선 선비의 ‘구곡(九曲)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우이구곡, 조선왕릉 채석장, 왕조 별장인 송계별업 터, 실학자 풍산 서유구 선생의 번계산장 터 등 역사문화 자원이 풍부하다. 박겸수 구청장은 지역에 흩어진 역사문화관광 자원을 선과 면으로 잇는 역사문화 관광벨트 조성에 10년을 쏟아부었다. 그가 그린 체류형 산악문화 특구 구상이 이제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우여곡절 끝 ‘마지막 퍼즐’ 맞췄다 한 달여 시범운영을 마치고 지난 8월 30일 정식 개장한 우이동 휴양콘도는 지하 3층~지상 7층 규모이며 대지는 약 8만 150㎡(약 2만 4300평)다. 숙박시설 14동, 문화·집회시설 1동으로 구성됐다. 객실은 334개로 사우나, 실내외 수영장, 옥상 정원, 레스토랑 등 부대시설을 갖췄다. 2009년 ‘우이동 유원지 사업’이란 이름으로 시작한 휴양콘도미니엄 공사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10년이 넘게 걸렸다. 2012년 시행사가 부도 처리되고 2014년엔 시공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주민들은 콘도를 언제까지 애물단지로 남겨둘 것이냐며 대책을 요구했다. 구는 사업 정상화에 나섰지만 난항을 거듭하며 시간이 흘렀다. 2018년 새 시행사가 나타나며 구는 서울시와 시행사가 참여하는 특별조직을 만들고 사업 정상화를 이끌어 냈다. 2019년 말 공사 재개를 앞두고 콘도의 공공성을 높이기 위한 사항들을 이행하는 업무협약을 맺었다. 콘도 객실 334개 중 110개는 일반에 개방됐다. 옥상 정원과 조각공원, 산책로 등도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했다. 구민을 채용하고 부대시설에 지역 업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구민은 객실과 부대시설 요금을 할인받을 수 있다. 시설 내 전시관은 운영일수 3분의1 이상을 지역 예술인에게 제공하기로 했다. 주변 동네와 콘도를 연결하는 백운천 보행교와 기부채납 시설을 조성하기로 했다. 박 구청장은 “도심 속 관광 분야에서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 지평을 열 것”이라며 “지난 10년간 강북구가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가 있는 1박2일 관광코스’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고 말했다. ●기부채납으로 AR·VR 활용 산악문화 체험관 콘도 정식 개장보다 한 달 앞서 문을 연 ‘우이동 산악문화 허브(H·U·B)’는 콘도의 기부채납 시설이면서 체류형 산악문화 특구의 한 축을 담당한다. 일종의 산악전시체험관인 허브는 ‘히말라야’(Himalaya), ‘엄홍길’(Um Hong Gil), ‘북한산’(Bukhansan)을 주제로 체험 요소를 배치한 공간이다. 시설은 산악체험관, 엄홍길 전시관, 기획전시실, 기념촬영 장소, 휴게시설 등으로 구성됐다. 산악체험관엔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 기반 훈련 시스템이 도입됐다. 방문객은 이곳에서 지구력, 순발력, 유연성을 기르는 동시에 지도 보는 법, 등산용품 사용법, 올바르게 걷는 요령, 유형별 비상상황 대처법 등을 배울 수 있다. 엄홍길 전시관은 실내 암벽 운동기구와 히말라야 가상현실 프로그램이 결합된 공간이다. 이용자는 엄 대장의 음성 안내에 따라 암벽 운동기구를 오르면서 에베레스트 등반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히말라야 절경과 함께 산악 도전 역사가 360도 전방위로 펼쳐지는 영상 시스템을 갖췄다. 엄 대장이 히말라야 등정에 사용했던 등산 장비도 볼 수 있다. ●우이동 가족캠핑장서 이야기가 있는 1박2일 강북구에서의 하룻밤은 콘도에서만 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구는 지난 4월부터 우이동 가족캠핑장을 개장했다. 박 구청장은 “애초 ‘이야기가 있는’ 1박2일 관광코스가 북한산 역사문화관광벨트 사업의 목표였다”며 “우이동 가족캠핑장은 그런 의미에서 필수시설”이라고 설명했다. 1만 1561㎡(약 3500평) 규모로 우이동 316 일대에 조성됐다. 캠핑사이트 31면(일반 27면, 글램핑 2면, 전통구들 2면)과 방문자센터, 주차장, 다목적 잔디광장 등으로 꾸며졌다. 내부 어디에서든 무선인터넷 이용이 가능하다. 캠핑장은 북한산 둘레길 제12구간인 우이령길과 다양한 토속음식을 즐길 수 있는 우이동 숲속문화마을 입구에 있다. 우이신설 도시철도의 종착지인 북한산 우이역이 도보로 4분 거리다. 주변엔 북한산 백운대로 오르는 등산로가 뻗어 있다. 현재 ‘LED 음악 꽃밭’도 운영하고 있다. 경관조명과 음악이 어우러진 장면이 연출돼 야간 볼거리가 다양해졌다.캠핑장 한편엔 청자 가마터 체험장이 설치될 예정이다. 2011년 북한산 자락에서 고려 말~조선 초 청자를 생산하던 가마터가 발굴됐다. 이곳엔 전시체험관과 가마모형, 야외학습장이 들어선다. 박 구청장은 “청소년과 탐방객들을 위한 역사교육 장소로 이곳을 활용할 것”이라며 “도예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북한산 우이역과 가까운 콘도 주변엔 이들 산악 관광 자원들이 모여 있다. 콘도가 박 구청장의 ‘큰 그림’에 마지막 조각인 이유다. 회전 교차로를 중심으로 우이동 가족캠핑장과 숲속문화마을이 있다. 그 옆으로 우이령길이 연결된다. 길목엔 외국인 등산화 무료 대여소와 산악인들의 약속 장소인 만남의 광장과 만난다. 북한산 우이역부터 등산화 대여소까지 이르는 구간도 여가문화 특화거리로 새 단장된다. ●‘우이구곡’서 조선 선비 풍류 느껴 볼까 콘도 옆으로는 또 다른 명소 ‘우이구곡’이 있다. 빼어난 경관을 가진 곳으로 조선 후기 문인 홍양호가 현 도선사 계곡에서 지내며 좋은 경치를 주제로 삼아 ‘우이동 구곡’이라 이름 짓고 자신의 문집인 ‘이계집’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구는 2017년부터 우이구곡 원형 복원 사업을 벌여 왔다. 우이동 산68-1 일원에 있는 선조들의 경관 장소를 복원해 시민들에게 개방하기 위한 사업이다. 이곳엔 제1곡인 만경폭부터 적취병, 찬운봉, 진의강, 세묵지, 월영담, 탁영담, 명옥탄, 재간정까지 아홉 개의 산수가 자리하고 있다. 구는 지난해부터 명소화 작업을 추진해 1곡 복원과 원형이 보존된 2~9곡 정비를 마쳤다. 박 구청장은 우이구곡의 명맥을 잇고 명소화한 뒤 ‘구곡문화제’까지 발전시키려는 꿈을 갖고 있다. ●역사문화관광 트레킹… 암벽장 공사 중 구는 강북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 ‘너랑나랑우리랑’ 트레킹 경로 탐방을 추천한다. 우이동 만남의 광장에서 봉황각과 독립운동가 묘역, 국립 4·19 민주묘지, 근현대사기념관을 거치는 길이다. 4㎞ 구간이며 차분차분 완보하면 3시간이 넘게 걸린다. 만남의 광장, 소나무쉼터, 4·19 전망대, 기념관에서 도장 4개를 모두 찍으면 주변 음식점에서 음식값 10%를 할인해 준다. 박 구청장의 체류형 산악문화 특구 구상엔 국제 규모 인공암벽장도 포함돼 있다. 암벽장은 만남의 광장 뒤편에 곧 들어선다. 건설될 인공암벽장은 19m 높이로 국제 대회 규격을 충족한다. 만남의 광장 공원에선 북한산 인수봉 만경대 백운대가 훤히 보인다. 박 구청장은 “완성된 인공암벽 꼭대기에 올라 북한산을 보면 세 봉우리가 더 시원하게 보일 것”이라면서 “전 세계 산악인들이 찾아와 인공암벽을 타고 다음날 북한산에 오르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130년 전 모습 찾은 ‘향원정’…’청운의 꿈’ 품은 고종의 시름 묻어나

    130년 전 모습 찾은 ‘향원정’…’청운의 꿈’ 품은 고종의 시름 묻어나

    조선 왕조 법궁인 경복궁 북쪽 후원에 자리 잡은 ‘향원정’(香遠亭)은 향원지(香遠池)로 불리는 연못 한가운데 지은 육각 2층 정자다. ‘향원’(香遠)은 북송 시대 중국 학자 주돈(1017∼1073)이 지은 ‘애련설’(愛蓮說)에서 따온 말로 ‘향기가 멀리 간다’는 뜻이다. 26대 임금 고종(재위 1863~1907)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고 건청궁(乾淸宮)을 지을 당시 왕과 왕비의 휴식 공간으로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향원정으로 향하는 다리 ‘취향교’(醉香橋)가 파괴되고 건물이 기울어지는 등 역사의 모진 풍파를 견뎌내야 했다.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3년간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5일 공개한 향원정 일대는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이 심화하던 19세기 말 향원정에서 시름을 달랜 고종과 민비(명성황후) 당시의 모습을 충실하게 재현했다.●건물 기울어 3년간 공사…말뚝 799개 박고 온돌도 찾아 2012년 보물로 지정된 향원정 보수 공사는 건물이 전반적으로 기울고 목재 접합부와 기단 등이 헐거워졌다는 진단에 따라 시작됐다. 2017년 5월 설계 용역을 추진하면서 향원지 주변에 가림막을 설치했고, 2018년 11월 작업에 들어가 3년 만에 마무리됐다.궁능유적본부는 향원정을 완전히 해체한 뒤 다시 조립했고, 섬 둘레에 있는 석축(石築)을 정비했다. 나무 부재는 10∼20%를 교체했으며, 건물 하부 지반을 보강하고자 말뚝 799개를 박았다. 궁능유적본부는 발굴조사를 통해 1층에 있던 도넛 형 온돌도 찾아냈다.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향원정 구들의 구체적인 형태와 연도(煙道·연기가 나가는 통로)의 위치 등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온돌은 보통 밭고랑이나 부챗살 모양으로 고래(구들 밑으로 난 연기가 통하는 길)를 설치하는데, 향원정은 가장자리를 따라 고래를 둬 난방이 바깥쪽을 중심으로 이뤄졌음이 드러났다. 또 현존하는 유구(遺構·건물의 자취)를 활용해 향원지 외부와 연결된 낮은 굴뚝을 복원했고,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연기가 연못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퍼져 나가는 모습을 확인했다.●취향교는 흰색 목제다리로 본래 위치로 옮겨 취향교는 옛 사진에 나타난 모습을 되찾았다. 이전에는 돌기둥에 평평한 나무를 얹은 평평한 다리였다면, 복원을 통해 아치형 나무다리로 바꿨다. 흰색으로 칠한 나무는 얼핏 보면 철제 구조물 같아 보인다. 이에 대해 정현정 궁능유적본부 주무관은 “흰색 나무가 낯설어 보일 수 있으나, 고종 때도 건축에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다양한 방식의 재료들이 도입됐다”고 설명했다. 길이 32m, 폭 165㎝의 다리인 취향교는 원래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건너갈 수 있게 향원정 북쪽에 세워졌다. 이후 1953년 재건립 됐지만, 관람 편의를 위해 향원정 북쪽의 본래 위치가 아닌 남쪽에 지었었다. 이번 공사를 통해 다리 위치를 북쪽으로 옮기면서 68년 만에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향원정 건립시기는 1885년으로 추정 이번 복원 공사를 통해 향원정과 취향교의 건립 시기도 알게 됐다. 1887년(고종 24년) 승정원일기에 ‘향원정’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면서 건립 연대를 1887년 이전으로 추정해왔는데, 목재 연륜 연대 조사를 통해 1881년과 1884년 두 차례에 걸쳐 벌채된 목재가 사용된 것이 확인됐다. 이에 문화재청은 향원정 건립시기를 1885년으로 추정하고 있다.궁능유적본부는 향원정의 6개 기둥 중 동남쪽 방향 주춧돌을 조사한 결과 주춧돌을 받치는 초반석의 균열로 가라앉는다는 것을 확인해 건물 기울어짐의 근본원인을 찾아냈다. 정 주무관은 “호수 위에 만든 인공섬 위쪽까지 지반을 보강하는 장치가 부족했던 탓”이라며 “이번에는 야구방망이보다 조금 더 두꺼운 정도의 나무 말뚝 799개를 박아 지반을 다졌다”고 설명했다. 6개 기둥 아래쪽에는 6m짜리 긴 말뚝 150개를 섬 바닥까지 닿게 박아넣고, 건물 주위에는 1.8m 혹은 2.7m짜리 짧은 말뚝을 649개 꽂아 토양이 조금 더 빡빡해지고 단단해지도록 했다.●푸른색 능화지로 1층 천장 도배…‘청운의 꿈’ 상징 향원지 일대의 옛 사진을 분석해 훼손된 절병통(지붕 중심에 세우는 항아리 모양의 장식기와), 창호, 능화지, 외부 난간대 등도 복원했다. 일제 시대에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친 향원정 내부의 지지목을 떼어낸 자리에선 향원정 건립 당시 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단청의 원형이 발견됐다. 2층 천장에는 봉황 무늬가 가득하다.건립 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내부에 발라져 있던 겹겹의 창호지 맨 아래에서는 왕실 건물에만 사용되는 ‘능화지’(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문양을 밀랍으로 눌러 새긴 한지)를 볼 수 있다. 강성찬 중요무형문화재 배첩장(전통 도배, 장판 등 기술 보유 장인) 이수자가 찍어낸 능화지 수백 장으로 천장과 기둥 등 벽지를 발랐다.강 이수자는 “능화지는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것으로 밀랍이 함유돼 있어 벌레가 오지 않고, 항산화·항습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며 “여러 문화재 복원 현장을 가봤지만 향원정은 고증을 많이 한 뒤 전통방식으로 오롯이 복원해 의미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천장을 바른 푸른색 능화지에 대해 강 이수자는 “옛 양반가에서는 청운(靑雲)의 꿈을 품는다는 것을 중시해 자제들의 방에 종종 푸른색 능화지를 사용했었다”면서 “벽에 붙인 흰색 능화지가 문양을 내기는 더 힘들다”고 덧붙였다.●내년 4월부터 내부 특별관람 형태로 공개 궁능유적본부는 건립 당시에 칠한 것으로 추정되는 단청의 안료를 추가로 조사하고, 내년 4월부터 내부를 특별관람 형태로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궁능유적본부 관계자는 “향원지 수위는 30∼40㎝ 정도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한다”며 “내년 봄이 지나면 홍련과 백련이 피어 화려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왕의 책방’에 앉아 여여한 시월愛 추며들다… 파사성에 서서 유유한 여강에 물들다

    ‘왕의 책방’에 앉아 여여한 시월愛 추며들다… 파사성에 서서 유유한 여강에 물들다

    10월은 십월이 아니라 시월이라 읽는다. 한글맞춤법의 속음을 따라 그렇다. 이 경우 속음은 말하는 대로의 소리, 틀에 갇히지 않은 유연한 음성이다. 경기 여주의 가을은 시월을 닮았다. 자음 하나 덜어낸 자리를 따라 무심한 낙엽처럼 유유히 여행하면 좋다. 하늘과 맞닿은 파사산의 단단한 바윗돌 위에 근심일랑 툭 소리 나게 내려놓고, 강변 고찰의 고목 아래 부도처럼 고요히 나를 마주하고, 책방으로 변신한 왕릉의 옛 재실에 앉아 여여(如如·있는 그대로의 모습)한 바람에 가만히 마음을 내어줄 만하다. 그럼 단풍처럼 세월 익은 자리에 시심이 물들 것이다. 그때 여주의 시월은 ‘시월’(詩月)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여주에는 세종대왕릉(英陵)과 효종대왕릉(寧陵)이 있다. 두 능을 합쳐 영녕릉(英寧陵)이라 부른다. 영녕릉은 지난해 10월 9일 재단장을 마쳤다. 6년 2개월에 걸친 ‘세종대왕릉 제 모습 찾기’ 정비 사업이었다. 그사이 방문한 적이 없다면 한글날을 맞아 찾아봄 직하다. 읽고 쓰는 것의 의미가 한층 각별하게 다가올 것이다. 꼭 한글날 때문만은 아니다.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은 ‘신들의 정원’이라 불린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조경가, 예술가, 사상가가 한데 모여 왕의 마지막 쉼터를 고심했을 것이다. 그러니 ‘신들의 정원’이란 수사가 과장일 수 없다. 영녕릉이 특별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재실이다. 왕릉의 재실은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제사에 쓰일 향과 제기를 간수하고, 왕과 제관이 의복을 갖추는 곳 역시 재실이다. 제례의 마음가짐이 이곳에서 시작된다. 영녕릉의 재실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책방과 노거수가 가치를 더한다. ‘신들의 정원’ 속 책방이고 재실보다 오래 산 아름드리나무다.●권위 내려놓고 넉넉한 품 내어준 세종의 ‘작은 책방’ 세종대왕릉은 재실이 두 곳이다. 옛 재실은 1970년대 ‘영릉 성역화 사업’ 당시 건립했다. 새 재실은 지난해 마무리한 정비 사업에서 문헌의 위치를 확인해 다시 지었다. 새 재실은 세종대왕의 위엄에 걸맞게 재방, 향안청, 전사청 등 요건을 제대로 갖췄다. 왕릉의 제례를 준비하던 과정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다. 옛 재실은 본래 기능을 상실했지만 올해 봄에 ‘작은 책방’으로 변신했다. 이 ‘작은 책방’이 세종대왕릉 가을 여행의 백미다. 권위를 내려놓고 책방이 된 옛 재실은 각별하다. 격식과 역할은 새 재실로 넘겼지만 40년 남짓한 세월의 주름은 쉽사리 무시할 수 없다. 왕의 권좌보다는 기품 있는 어른의 넉넉한 품 같다. 북촌한옥마을이나 어느 숲속 정원에 있었다면 좀더 유명세를 탔을 것이다. ‘작은 책방’은 책이 있는 방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세종대왕 때 출판과 인쇄를 담당한 관청 ‘책방’(冊房)의 의미도 땄다. 책방 안은 좌식과 입식 좌석이 공존한다. 실내화를 갈아 신고 들어간다. 과거이기는 하나 재실의 문턱을 넘는다는 설렘에 걸음이 조심스럽다. 대청마루에 앉으면 느린 바람이 토닥토닥 등을 다독인다. 귓가를 스칠 때는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라는 훈민정음 언해본 서문이 들리는 듯하다. 다시금 세종대왕릉의 재실을 실감한다. 그러다 슬며시 고개를 들면 막 가을로 접어드는 수목들이 간신히 붉다. 고즈넉해서 사색의 시간을 갖거나 생각을 글로 정리하며 보내기에도 알맞다. 얼마간은 자리를 옮겨 가며 그 정취를 느껴 보는 것도 좋다. 열람실은 재실 중심의 안채와 마당 지나 대문 좌우의 두 행랑채, 총 3곳으로 나뉜다. 최대 36인이 이용할 수 있는 규모다. 다만 서가의 구성은 아쉽다. 요즘 책방의 생명은 ‘큐레이션’이다. ‘작은 책방’의 장서 500여권은 구성의 세심함이 떨어진다. 그러니 읽을 책 한 권 정도 미리 챙기는 게 좋다. ‘작은 책방’은 상주하는 이는 따로 없고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원형 보존된 효종대왕릉 재실, 조선왕릉 유일 보물 효종대왕릉 재실은 세 그루 고목이 세종대왕릉의 ‘작은 책방’에 견줄 만하다. 먼발치부터 어렵잖게 알아챌 수 있다. 담장 위로 우뚝 솟은 향나무 한 그루가 랜드마크다. 기세가 등등하다. 사주문으로 들어서면 이번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다. 둘레가 한 아름은 족히 넘고도 남는다. 제기고와 재방 사이에서 양쪽 마당 쪽으로 몸을 기울여 자라는데 위태로울 만큼 경이롭다. 추정 수령은 약 500년으로 재실이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고목이었던 나무다. 그 앞쪽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평범한 나무 한 그루가 담장 곁에 소담하다. 유별날 게 없지만 회양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담장 높이로 자란 회양목은 좀체 보기 힘들다. 그 세월이 무려 300년이다. 노거수의 나이가 곧 재실의 역사인 셈이다. 천연기념물(제459호)이 괜스럽지 않다. 재방 마루에 걸터앉으니 세 노거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효종대왕릉 재실은 보물 제1532호다. 조선왕릉의 재실 가운데 유일한 보물이다. 조선왕릉의 재실이 대부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훼손됐으나 효종대왕릉 재실만은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 그래서 나이 든 나무를 보는 건 마치 나무의 세월을 읽는 것 같다. 그 몸에 새겨진 풍파를 읽는 것 같아 ‘자연적’이고, 그 몸이 새긴 사건을 보는 것 같아 ‘역사적’이다. 각자의 짧은 생을 노거수에 비춰 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시월 말에는 느티나무 단풍이 고와 또 잠깐 들뜨기도 할 것이다.●‘신들의 정원’ 따라 세종·소헌왕후 조선 최초 합장릉 재실 외에 새로이 단장한 영녕릉도 돌아볼 일이다. 세종대왕릉은 세종대왕의 유지에 따라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함께 묻혔다.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다. 정비를 마친 후 가장 크게 변한 것은 향어로다. 이전에는 가운데 향로를 두고 양옆에 어로가 있는 세 길이었다. 발굴 조사를 통해 향로와 어로 하나씩만으로 이뤄진 두 길로 바뀌었다. 중간 지점에서 방향을 꺾는 구간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선으로 곧다. 효종대왕릉은 효종과 비 인선왕후의 능이다. 상하로 조영한 쌍릉이 눈길을 끈다. 수라간 옆으로 난 길은 세종대왕릉과 달리 봉분 앞까지 올라갈 수 있어, 능의 석물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또한 금천교는 다른 왕릉과 달리 홍살문 안쪽 향어로 중간에 위치한다. 영릉길 초입의 연지도 새로이 복원 조성했다. 세종대왕역사관도 새단장하며 들어섰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휴관 중이다. 세종대왕역사관은 여강길 6코스 ‘왕터쌀길’의 출발점이다. 여주는 여강이 도시를 가로지른다. 여강은 여주사람이 여주를 지나는 남한강에 붙인 이름이다. 그들이 여강이라 부를 때, 남쪽을 가리키며 흐르던 한강은 여주사람의 마음속으로 방향을 튼다. ‘왕터쌀길’은 10.2㎞, 3~4시간 구간으로 여강을 곁에 두고 걸을 수 있다. 4코스인 ‘5일장터길’ 역시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을 지난다. 신륵사가 출발점이고 세종대왕릉역이 종점인 13㎞, 5~6시간 코스다. 걷는 수고는 싫고 그저 여강을 그윽하게 바라보기 원할 때는 곧장 신륵사로 간다. 고찰은 대개 산중에 있기 마련인데 신륵사는 여강 옆에 뿌리내렸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고 고려 때는 나옹선사가 입적했다 한다. 신륵사의 첫 번째 명소는 여강이 내려다보이는 정자 강월헌(江月軒)이다. 강월헌은 나옹선사가 머물던 회암사 거처의 당호를 땄다. 강월은 ‘강에 비친 달’이라는 의미다. 그 달은 나옹선사에게 부처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라던 나옹선사의 선시가 떠오른다. 강월헌 옆에는 삼층석탑이 자리한다. 나옹선사가 입적한 자리다. 신륵사에는 차분하게 머물 만한 곳이 또 있다. 조사당 뒤편 계단을 오르면 나옹선사의 사리를 안치한 부도탑과 탑비, 석등이 나온다. 모두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다. 그 가운데 부도탑인 보제존자석종은 탑신이 석종 형태다. 오래 바라보면 종소리가 마음에 울리는 듯하다.●체험·전시·쇼핑 ‘도예 세상’… 미술관은 예약제 신륵사 초입은 여주도자세상공원이다. 여주는 광주, 이천과 더불어 도예를 대표하는 고장이다. 마침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가 10월 1일부터 11월 28일까지 ‘다시_쓰다 Re: Start’라는 주제로 열린다. 여주도자세상과 경기도자생활미술관은 여주의 주 행사장이다. 미술관은 8~9월 휴관을 거쳐 비엔날레 기간 다시 문을 연다. 다만 코로나19로 인해 예약제로 운영한다. 1일 7회, 회당 65명이 입장 가능하다. 잔여분이 있을 경우 현장 방문으로 관람할 수 있다. 대신 올해 비엔날레는 예년과 달리 입장료가 무료다. 도예에 관심이 있다면 이도 여주세라믹스튜디오도 들러볼 만하다. 전시, 체험, 쇼핑이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으로 여주 동쪽 북내면의 한갓진 시골에 자리한다. 도자기를 할인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고 너른 야외 잔디밭에서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즐길 수 있다. 900개 머그컵으로 만든 모자이크 작품 ‘감각의 확장’과 앙리 루소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꿈꾸는 정글’ 등 전시도 단박에 시선을 끈다. 코로나19로 인해 투어프로그램은 중지 상태다. 일요일은 쉰다.●작은 책방의 여운 잇는 여주 핫플 ‘수연목서’ 세종대왕릉 ‘작은 책방’의 여운은 북카페 수연목서에서 이어 갈 만하다. 수연목서는 여주 ‘핫플’이다. 여주 북서쪽 끝 산북면에 있어 수도권에서 가벼운 나들이 삼는 이들이 많다. 건물은 카페와 사진 책방 그리고 사진가이자 목수인 최수연 작가의 개인 작업실 두 동으로 나뉜다. 건물과 건물은 구름다리가 잇고 있다. 내부는 복층 구조라 1층은 천장이 높아 시원스럽고 2층은 다락처럼 아늑하다. 남북 입면은 유리 커튼 월로 바깥의 산세가 그림처럼 안긴다. 카페와 책방 곳곳에 무심한 듯 전시된 사진과 카페의 가구는 최 작가의 솜씨다. 건물은 이충기 건축가 지었으며 2021 한국건축문화대상 준공건축물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박공지붕의 적고벽돌 외관이 단정하고 아름답다. 여강이 남한강의 일부라는 사실을 확인하고플 때는 파사성에 오른다. 정상까지는 주차장에서 도보로 약 30분이 걸린다. 파사성은 신라 파사왕 때 조성하고 임진왜란 당시 승려 의암의 승군이 증축했다 전한다. 중반부까지는 산길을 오르고, 능선에 다다라서 성벽 위를 걸어 이동하는데 몇 번씩 멈춰 서기를 반복한다. 먼발치 무태산, 양자산, 주봉산이 한데 어울려 춤을 추고, 그 곁으로 여강이 물길을 열며 양평 두물머리를 향한다. 그때 비로소 남한강이 보인다. 풍경이 광활하고 아득해서 가슴이 탁 트인다. 파사성 역시 여강길의 일부다. 여강길 8코스 ‘파사성길’은 당남리성입구에서 출발해 파사성 정상을 거쳐 원점으로 돌아온다. 5.4㎞ 순환구간으로 약 2~3시간이 걸린다. 파사성 주차장에서 출발해도 무방하다.여주대교 남단 영월루도 전망이 빼어나다. 무엇보다 여주 여행을 갈무리하기에 알맞다. 영월루는 마암(馬巖) 위 언덕에 들어선 2층 누각이다. 일몰과 야경을 감상하기 좋은 전망 명소다. 해는 여주 시가지 너머 서쪽으로 기우는데 그 어디 즈음에 세종대왕릉이 있다. 여주라는 지명은 세종대왕릉을 천릉할 때 새로 지은 이름이다. 그 지명을 따서 남한강은 여강이 됐을 것이다. 영월루에 서면 여주사람이 남한강을 여강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법하다. 시가지는 여강에 기대 촘촘하다. 여주의 삶 또한 오랜 시간 그러했을 것이다. 영월루가 옛 여주관아 정문이어서 감회가 남다른 것일 수도 있다. 해가 지고 시가지 불빛이 하나둘 켜질 즈음에는, 여행의 하루가 여주의 시월 속으로 스며드는 듯하다. 박상준 여행작가 seepark1@naver.com
  • 일제가 제주에 군사용 진지로 구축한 동굴 448개 확인

    일제 강점기 제주도에서 ‘옥쇄작전’을 감행하려던 일본군이 구축한 동굴진지가 무려 448개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옥쇄작전이란 일본 본토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깨끗하게 죽음을 택한다는 뜻으로, 일본군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10만 명 전원이 옥쇄했다. 한국동굴안전연구소와 제주도동굴연구소는 광복 76주년을 앞두고 ‘근대전쟁유적 제주도 일본군 동굴진지(요새) 현황조사 및 증언채록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13일 밝혔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증언 및 제보, 문헌조사 등을 거쳐 현장 확인 조사한 결과 일본군 동굴진지(요새)의 수는 제주시 지역 75곳에 278개, 서귀포시 지역 45곳에 170개로 모두 120곳에 448개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어승생악 복곽진지, 가마오름 주 저항진지, 서우봉 해군 특공대 기지, 섯알오름 전진 거점, 송악산 해군 특공대 기지, 일출봉 해군 특공대 기지, 송악산 지네형 동굴진지 등 7곳 73개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러나 나머지 375개의 동굴진지(요새)는 사실상 방치돼 있다. 일본군은 패망 직전 본토를 방어하기 위한 마지막 거점을 제주도로 선정하고, 제58군 7만4781명의 병력을 배치하는 ‘결7호’(決七號)라는 작전명으로 제주도 전 지역을 요새화하는데 사활을 걸었다. 현재는 유명 관광지가 된 성산일출봉을 비롯해 송악산, 서우봉, 삼매봉, 수월봉, 추자도를 비롯한 주요 해안 거점에 동굴진지를 구축했다. 미군 상륙 함정을 공격할 해군 특공대의 소형 함정과 어뢰 등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일본군은 또 제주도 내륙 지역 오름에는 복곽진지, 주저항진지, 전진거점, 위장진지 등으로 전술 용도를 구분해 포병기지, 보병기지, 지원부대와 관측소용 동굴진지, 고사포 진지를 구축했다. 일본군은 현 제주국제공항과 알뜨르비행장 등 4곳의 비행장도 건설했다. 보고서엔 구축 초기 단계에서 멈춰진 동굴진지 공사 현장도 제주시 삼의오름, 저지오름, 체오름, 거문오름 등 10여 곳에서 발견됐다는 내용과 천연동굴 다수도 군사시설로 이용됐던 증거를 발견했다는 내용도 담겼다. 보고서는 일제의 동굴진지 구축 과정의 강제노역에 동원됐거나 수탈 등을 직접 목격한 13명이 2004∼2005년에 증언한 내용도 실었다. 윤경도(1934년생) 씨는 12세 때 일본군이 제주국제공항 인근의 도두봉에 진지동굴을 파는 과정을 지켜본 기억을 전했다. 그는 일본군이 진지동굴 굴착 공사를 직접 수행해 내부를 목격하진 못했지만, 공사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화산송이가 외부로 배출됐으며, 유사시 전투지휘를 할 수 있는 지휘본부 역할을 할 수 있는 방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전했다. 김기선(1928년생) 씨는 16세 때 청년훈련소에 입소해 제주시 애월읍 새별오름 일대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군수물자를 숨기기 위해 지표면을 3m 깊이로 파내는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고 증언했다. 보고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동굴진지가 많은 것으로 추정돼 전 지역에 대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면서 “지질공학, 토목공학, 측량학, 군사학, 역사사회학 등 종합적인 학술조사가 이뤄져 선별된 시설에 대해 전쟁문화유적지로 지정해 원형을 복원하고,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민족적 역사의식을 고취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 130년 전 ‘관찰사의 밥상’ 찐 전주의 맛이 돌아왔다

    130년 전 ‘관찰사의 밥상’ 찐 전주의 맛이 돌아왔다

    1884년 전라감영 찾은 美 해군무관“모든 소리·유흥 中보다 웅장·환상적”17가지 음식 종류 등 그림으로 기록 전주시, 외국인 접대상 등 현대적 복원9월까지 음식점 선정 일반에 판매 벼슬아치는 아전만 못하고(官不如吏), 아전은 기생만 못하며(吏不如妓), 기생은 소리만 못하고(妓不如音), 소리는 음식만 못하다(音不如食). 조선시대 전라감영이 있던 전북 전주시는 4불여(不如)의 고장으로 전해온다. 이는 예로부터 전주가 음식으로 내로라하는 고장이었음을 칭송하는 글귀다. 최고의 맛을 자부하는 전주 음식의 뿌리는 조선시대 ‘관찰사 밥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관 종2품의 왕권대행자 전라 관찰사에게 올리는 밥상은 전주 음식의 결정체로 ‘찬품극정결’(饌品極精潔·음식에 극진히 정성을 다해 바르고 훌륭하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주시는 고증을 바탕으로 전주 음식의 계보를 추적해 원류인 관찰사 밥상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관찰사 밥상은 올가을쯤 전주 한정식집에서 일반에게 선보일 예정이어서 벌써부터 미식가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전주는 전라도의 중심지로 산물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교통이 편리해 넓은 평야, 산, 강, 바다에서 생산되는 산물이 모두 모여 교환되는 결절지(結節地) 역할을 했다. 이는 식재전주(食在全州)라는 이름을 가질 정도로 음식이 발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전라도와 제주도를 통치했던 전라감영은 전주 음식의 탯자리 역할을 했다. 전라감영에는 800여명의 영리가 근무했고 외부 손님과 고을 백성이 수시로 찾아 영주(주방)에서는 이들을 위한 다양한 음식을 준비했다. 감영에서 열리는 잔치도 많았다. 고종 황제 탄생일인 칠월연에는 당대의 판소리 명창들이 밤늦게까지 경연을 했고 끝나면 떡과 국수, 유과 등을 나누어 주었다. 동짓날에는 판소리 장원을 뽑는 대사습놀이가 열리는 동안 팥죽을 맛보게 했다. 특히 전라 관찰사의 진지상과 손님 접대상, 사대부와 지방 아전의 격식 있고 풍성한 반상이 한정식을 형성하고 음식이 발달하는 기원이 된 것으로 전해 내려온다. ●국내 최초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 뿌리 깊은 전주 음식의 발달 과정을 짚어보면 전국 어느 도시를 가나 맛집으로 소문난 음식점의 상호에 ‘전주’라는 지명이 붙은 사례가 유난히 많은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란 것을 짐작게 한다. 음식 앞에도 전주비빔밥, 전주콩나물국밥, 전주한정식, 전주막걸리 등 ‘전주’라는 상징적 단어가 붙어야 더욱 맛깔스럽다. 여기에 전라도의 손맛과 훈훈한 인심까지 더해져 전주 음식은 한층 게미(전라도 방언·음식 속에 녹아 있는 독특한 맛)를 더한다. 이 같은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2012년 전주시가 국내 최초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로 선정되는 배경이 됐다. 세계적으로도 콜롬비아 포파얀(2005년), 중국 칭다오(2010년), 스웨덴 외스테르순드(2010년)에 이어 네 번째다. 당시 유네스코 심사위원들은 전주시가 음식을 포함한 지역의 다양한 전통문화를 창의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온 점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또 수천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정성 어린 가정 음식, 한식전문 인력 양성 과정, 한 스타일 전문코디네이터 양성 등 창의적 인재 양성 노력 등을 높이 평가했다. 또 영국의 3대 일간지인 가디언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최를 기념한 ‘대한민국음식기행’이란 기획에서 전주를 ‘한국에서 음식으로 대적할 곳이 없는 도시’로 소개하기도 했다.●미국서 기록으로 발견된 전라 관찰사 밥상 전라 관찰사의 상차림과 감영의 접대·유희는 2008년 미국의 한 교수가 주한미국공사관 해군무관 조지 클레이턴 포크(1856~1893)의 일기를 책으로 펴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1884년 11월 10일 전라감영을 방문한 포크는 관찰사 김성근(1839~1919)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은 다음날 오전 10시 전주 객사인 풍패지관(豊沛之館)에서 받은 아침 밥상을 “가슴까지 차오르는 엄청난 성찬”이라고 극찬했다. 그는 콩을 섞은 쌀밥, 무와 계란이 들어간 소고깃국, 꿩탕, 숯불고기, 닭구이, 콩나물무침 등 17가지 음식의 종류와 위치를 그림으로 그리고 번호를 매겨 여행일기에 자세히 기록했다. 포크는 전라감영에서 받은 융숭한 대접에 대해 “모든 소리와 유흥은 중국에서 본 어떤 것보다 웅장했다. 실로 환정적인 날이다. 감영은 작은 왕궁이다”라고 적었다. 이 기록은 전주의 음식문화와 조리법을 알 수 있는 최초의 문헌이자 다른 지역 감영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접대·연희·상차림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동안 전주 음식은 ‘세종실록지리지’ 등 다양한 문헌과 ‘미암일기’(유희준), ‘호남일기’(이석표·이상황), ‘완영일록’(서유구) 등 전라감사들이 기록한 일지에 등장하지만 식자재와 조리법을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은 없었다.●관찰사 밥상 복원해 상품화 나서 전주시는 3년 전인 2018년부터 포크의 일기를 토대로 관찰사 밥상과 외국인 손님 접대상, 연회 복원에 나섰다. 전주대 송영애 교수는 문헌 연구와 사례를 통해 전라감영 관찰사 밥상을 개발했다. 송 교수는 또 130여년 전에 전라감영을 방문한 외국인 손님에게 차려낸 상차림도 재현했다. 관찰사 밥상은 조선시대 전라감영 관찰사(종2품)의 상차림을 기본으로 전주 식자재와 조리법을 활용하되 현대 식문화까지 고려해 수라상(12첩)보다 한 단계 낮은 9첩 반상으로 구성했다. 최종 음식선정 기준은 가치성, 지역성, 현실성 등을 반영해 밥, 국, 김치, 장류, 찌개 등 7종 11가지 기본 음식과 나물, 구이, 젓갈 등 반찬 9첩을 제시했다. 감영이 위치한 전주의 식재료와 조리법도 고려했다. 관찰사 밥상에 오른 기본 음식은 쌀밥, 고깃국, 김치(생강뿌리를 넣은 김치, 배추김치, 물김치), 장류(간장, 초간장, 초고추장), 찌개(생선조치, 조기찌개), 닭찜, 소고기전골 등이 선정됐다. 반찬은 무생채, 미나리나물, 숭어구이, 생치조림, 양하전, 죽순해, 소고기자반, 새우젓, 어채 등이 이름을 올렸다. 송 교수는 “전라감사는 국가적 축하나 의례행사가 끝나면 진지상을 아랫사람들에게 물려주었고 상물림이 끝나고 나면 남은 음식은 기름종이에 싸서 백성들이 골고루 나누어 가지고 갔으며 이 같은 밥상 물림과 싸 가지고 간 음식이 공간적, 시간적 음식문화유산으로 계승돼 오늘날 전주 한정식이 됐다”고 말했다. ●“전라 관찰사 밥상은 전주 한정식의 원형” 전주시는 관찰사 밥상을 전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상품화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관찰사 밥상과 외국인 접대상을 현대적으로 복원해 전라감영 재창조 복원사업과 더불어 전라감영의 식문화를 널리 알리는 데 활용한다는 복안이다. 지난 1월에는 관찰사 밥상 정식 출시를 앞두고 온라인을 통해 9첩 반상 2종(춘하·추동), 5첩 반상 1종, 국밥 2종, 다과 1종, 도시락 1종을 선보였다. 관찰사 밥상은 유튜브 채널 전주맛(https://youtu.be/t1W1BEY8jiA)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주시는 오는 9월까지 관찰사 밥상 판매업소를 선정할 방침이어서 빠르면 올가을 전라 관찰사 밥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전주시 관계자는 “전라 관찰사 밥상은 현재의 전주 한정식의 원형이 됐고 음식문화 유산으로 계승되고 있다”며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로서 ‘전주음식’의 뿌리를 찾아 위상을 높이고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지역 음식문화를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 한눈에 사진으로 보는 70년 용산기지史

    한눈에 사진으로 보는 70년 용산기지史

    서울 용산구가 용산기지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료집을 발간했다. 구는 ‘사진과 지도, 도면으로 본 용산기지의 역사’ 3권을 펴냈다고 5일 밝혔다. 2019년과 2020년 각각 1권과 2권을 발간한 데 이어 올해 용산기지의 1950~1953년을 다룬 3권을 추가로 내놨다. 신주백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과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이 함께 집필했다. 특히 이번 책에서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용산기지가 완전히 파괴된 모습과 주한 미군이 반영구기지로 시설을 복원하는 모습을 사진, 도면, 지도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51년 서울 재탈환 직후 남산과 서울역 일대 항공 전경을 비롯해 미8군사령관이었던 제임스 밴플리트 중장이 복구된 한강 인도교의 마지막 못을 박는 장면(1951년), 용산기지에 새로 자리 잡은 미8군사령부(1953년) 등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1952년 용산기지 재배치 계획도, 1953년 기지 복구 및 재건 상황도에서는 오늘날 용산기지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신주백 소장은 “미군은 한국전쟁 때 파괴돼 사용할 수 없는 건축물을 제외하면 일본군 건축물을 그대로 사용했다”며 “기지 내 공간도 일본군이 건설한 도로를 축으로 구분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용산기지를 국가공원으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기지를 둘러싼 공간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회복해 이곳이 역사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책에 실린 대부분의 자료는 2017~2018년 당시 저자들이 직접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을 찾아 수집한 것들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자료도 일부 활용했다. 김천수 실장은 “용산기지는 근현대 동북아 역사의 보고”라며 “관련 기록을 체계적으로 수집, 보존하고 이를 시민들과 공유함으로서 용산공원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 조선시대 객사 ‘벽제관‘ 원형 흔적 발견

    조선시대 객사 ‘벽제관‘ 원형 흔적 발견

    국가 사적인 경기 고양시 ‘벽제관지(碧蹄館址)’ 정밀발굴 현장에서 벽제관의 원형을 가늠할 수 있는 담장과 부속 건물 등의 흔적을 발견했다. 고양 벽제관지는 조선시대 대표적 객사인 벽제관이 위치했던 장소이며, 벽제관은 중국과 조선을 잇는 의주길에 위치한 객사(여관)다. 5일 고양시에 따르면 덕양구 고양동 55의 1 일대에 위치한 벽제관은 1625년 건축됐으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그 원형이 훼손돼 관광지로 전락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유일하게 남아 있던 정문인 삼문(三門)마저 불에 타 현재는 빈터만 남아있다. 고양시는 지난 4월부터 벽제관지에서 정밀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조사는 고양 벽제관의 문화재구역(4150㎡) 가운데 1998년 발굴조사를 통해 이미 조사된 벽제관의 주 건물지(정청 및 삼문)를 제외한 미조사 지역 2426㎡를 중심으로, 벽제관의 담장 유구(遺構·건물의 자취) 확인 등 향후 원형 정비·복원을 위한 고고학적 기초자료 수집을 목적으로 추진돼 왔다.조사 결과 그동안 파악되지 않았던 다양한 유구의 흔적이 확인됐다. 특히 벽제관을 기준으로 북서쪽에서 1∼2단의 기단이 잔존하는 폭 1m, 길이 11m 규모의 담장 유구가 발견됐다. 또 동쪽에서 원형과 방형의 건물 기둥 자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건물 흔적이 드러났다. 고양시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원형이 훼손됐으나, 이번 조사를 통해 벽제관의 담장 및 부속 건물의 존재가 새롭게 발견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재준 고양시장은 “발굴조사에서 새롭게 확인된 벽제관의 담장과 부속 건물 유구 등은 벽제관의 잃어버린 원형을 회복할 수 있는 기초자료로 적극 활용할 계획”이라며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벽제관의 원형 복원을 비롯해 고양동의 잃어버린 역사성도 동시에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푹푹 찌는 여름, 냉면 확 땡기쥬?” 쿨한 팔도 맛 기행 떠난 백 선생

    “푹푹 찌는 여름, 냉면 확 땡기쥬?” 쿨한 팔도 맛 기행 떠난 백 선생

    숨만 쉬어도 땀방울이 맺히는 요즘 얼음장 같은 냉면 한 그릇이 간절하다. 더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냉면 이야기를 전하는 다큐 2부작 ‘냉면 랩소디’가 29일과 8월 5일 오후 10시 KBS 1TV와 넷플릭스에서 차례로 공개된다. 지난해 ‘삼겹살 랩소디’에 이은 두 번째 시리즈로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이번에도 프레젠터로 나선다. 첫 회 ‘냉면 시대’는 냉면에 얽힌 역사를 하나씩 푼다. 4대째 이어 오는 서울 장충동 노포는 실향민이 최고로 꼽는 곳으로 담백하고 맑은 평양냉면의 원형을 만날 수 있다. 1946년 문을 연 가장 오래된 냉면집에서는 선주후면의 미덕과 고명꾼, 발대꾼, 앞잡이 등 노포에서만 들을 수 있는 특별한 주방의 작업을 확인한다. 눈이 먼저 즐거운 진주냉면도 빼놓을 수 없다. 평양뿐 아니라 메밀이 나는 모든 지역, 특히 남도에서도 오래전부터 냉면을 먹어 왔다. 한국전쟁과도 맞닿아 있는 음식이다. 실향민이 함흥식 농마국수를 본떠 오장동, 속초에서 만든 것이 함흥냉면이다. 전쟁 후 지원 물자로 손쉽게 얻은 밀가루를 가지고 만든 냉면이 요즘도 인기 좋은 밀면이다.먹을 땐 후루룩 넘어가지만 만들기는 매우 까다롭다. 매일 아침 온도와 습도를 확인한 후에야 반죽에 들어갈 수 있다. 불과 0.5초 차이로 익는 정도가 달라지는 예민한 메밀 반죽에 깨끗하고 차가운 육수를 더해야 완성된다. 한식 중에도 만들기 어려운 음식으로 꼽히는 이유다. 2부 ‘냉면 열정’에서는 뜻밖의 지역인 대한민국 최북단 백령도와 대구에서 만난 냉면을 소개한다. 백령도에서는 고기는커녕 간장을 만들 콩도 귀해 까나리액젓으로 맛을 낸다. 장조림 고명을 얹은 대구 냉면, 꿩육수로 맛을 낸 생치 냉면 등 이색 냉면도 만난다. 조선시대 요리법도 재현한다. 조선 후기에는 돌의 힘으로 누르는 제면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방송 최초로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의 책 ‘섬용지’에 나오는 냉면 틀을 복원해 당시의 면도 만들어 본다. 옛 방식을 만났으니 젊은 셰프들을 중심으로 탄생하는 새로운 조리법도 궁금해진다. 산낙지를 넣은 것부터 얼큰한 해장 냉면까지 다양하다.제작진은 “한때 실향민들의 고향 음식 정도였던 평양냉면이 최근 20~30대에게 가장 ‘힙한’ 음식문화이자 미식가들이 알아야 할 성지가 됐다”며 “냉면은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신비한 음식이라는 평을 받는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백종원도 제주에서 새 냉면에 도전장을 내민다. 전국 메밀 생산량의 40%를 차지하는 최고 산지로 좋은 돼지고기와 무, 깨끗한 물까지 갖춘 곳이다. 그의 손을 거친 제주냉면이 관광객들의 입맛을 사로잡을지 방송에서 만날 수 있다.
  • 문헌에만 있던 ‘흠경각 옥루’ 581년 만에 되살려낸 ‘복원의 달인’

    문헌에만 있던 ‘흠경각 옥루’ 581년 만에 되살려낸 ‘복원의 달인’

    홍대용 자명종·청동반가사유상 등 살려中日 잃어버린 기술 ‘고대 금도금법’ 성공멸실된 문화재 복원하려 고문헌과 ‘씨름’中 북송시대 고서·터키에서 실마리 찾아장영실은 동서양의 기술 융합해 재창조 1400~1450년 전세계가 일군 최첨단 기술日 과학사에 조선 29개·中 5개·日 0개 기록세종 때 확보한 첨단기술 다른 국가 압도“선조들의 뛰어난 과학 정확히 가르쳐야”물레방아처럼 생긴 수차가 자동 물시계를 움직이면 366개의 톱니를 가진 동력기륜이 12신기륜, 시보기륜, 4신 기륜과 천륜을 회전시킨다. 4신 기륜에 연결된 4신 옥녀는 1시간마다 방울종을 흔들고 동시에 4신 동물이 시계 방향으로 90도씩 회전한다. 산 중턱에 선 3명의 무사는 각각 종, 북, 징을 친다. 산 아래 평지에는 12지신과 12옥녀가 짝을 이뤄 누웠다가 2시간마다 일어선다. 천륜의 톱니와 연결된 혼천의 태양은 시계 방향으로 하루 한 바퀴 회전한다.1438년 세종과 장영실이 백성의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설계한 ‘흠경각 옥루’는 당대 국내외 최신 과학기술을 종합해 만들어 낸 첨단 자동 물시계였다. 문헌에만 남아 있던 흠경각 옥루를 581년 만에 복원한 이가 6일 인사혁신처의 협조로 서울신문이 만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립중앙과학관 전시총괄과장 윤용현 박사다. 윤 과장은 고천문학자, 고문헌학자, 고건축학자 등과 협력해 2019년 흠경각 옥루 복원에 성공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이 만든 자명종, 삼국시대 청동반가사유상, 청동기시대 잔무늬거울, 조선시대 화폐 상평통보가 그의 손을 거쳐 새 생명을 얻었다. 윤 과장은 “일본 과학기술사 사전에 1400~1 450년 반세기 동안 전 세계가 일군 최첨단 기술이 기록돼 있는데, 조선이 29개, 중국이 5개, 일본이 0개였고 동아시아 이외 기타 지역 하이테크 기술 합계가 28개였다. 조선 세종 때 확보한 최첨단 기술은 다른 국가를 압도한다”고 소개했다. 이어 “뛰어난 과학 문화재를 복원하지 않으면 선조들이 이룩한 과학기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무시하게 된다”며 “그간 학교에서 우리 선조들의 과학기술을 정확히 가르치지 못했던 것도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불행히도 흠경각 옥루를 비롯한 당시 과학기술 문화재 일부는 멸실돼 고문헌에만 남았다. 윤 과장은 흠경각 옥루를 복원하려고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흠경각기’, ‘동문선’, ‘여지승람’, ‘어제궁궐지’ 등 고문헌을 파고들었다. 그는 “흠경각기에 ‘수차를 사용했고, 외부에는 12옥녀, 12지신이 있었다’ 같은 내용이 있어 외부 복원은 문제가 아니었으나, 기륜이 몇 단위이고 수차는 얼마나 크고 바퀴가 몇 개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실마리는 의외로 중국 북송시대 소송이 지은 ‘신의상법요’에서 찾았다. 조선 천문학자 이순지가 쓴 ‘제가역상집’에서 중국 송나라에 ‘수운의상대’라는 자동 물시계가 있었다는 기록을 찾았고, 신의상법요에서 수운의상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확인했다. 윤 과장은 “이순지와 장영실이 동시대 사람이니 장영실도 수운의상대의 존재를 알았을 것이고, 관련 문헌도 꿰뚫고 있었을 것이란 가정하에 수운의상대 관련 기록을 하나하나 검토하며 연구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다만 수운의상대로도 해결이 안 되는 문제가 있었다. 흠경각 옥루는 쇠구슬을 이용해 소리로 시간을 알려 줬다는데, 관련 기록이 어디에도 없었다. ‘쇠구슬을 이용한 시계는 어디서 처음 만들었을까?’ 윤 과장은 해외로 눈을 돌려 터키를 찾았다. “과학사학자들이 셀주크튀르크 시대 앨제재리라는 과학자가 코끼리 자동 물시계를 만들었다는 기록을 찾았어요. 터키로 건너가 직접 관련 문헌을 확인하고 복원한 실물을 보고서 장영실이 흠경각 옥루에 적용한 쇠구슬 원리의 원형을 찾은 거죠.” 그럼 장영실은 먼 이국땅 터키의 기술을 어떻게 습득했던 걸까. 윤 과장은 “앨제재리가 활동한 시기에 셀주크튀르크가 원나라의 침략으로 150년 정도 나라를 잃었고, 그때 이런 기술이 원나라로 들어가 장영실에게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며 “장영실은 동서양의 기술을 융합해 재창조하는 창의력이 뛰어난 과학자였다”고 말했다. 고대 금도금법을 복원하기까지의 과정도 흥미롭다. 지금은 금속을 질산에 담가 표면을 부식시키고 아말감을 칠해 도금한다. 하지만 질산이 없었던 과거에는 도금을 어떻게 했을까. 여러 문헌에서 찾은 비법은 바로 매실이었다. 윤 과장은 매실을 3~4개월 숙성하고 착즙·농축해 1.9 수준의 강산성 매실산을 만들었다. 그다음 금속을 20분가량 매실산에 담갔다가 문헌에 나온 대로 숯으로 세척한 뒤 가열해 아말감을 발랐는데 생각처럼 도금이 되지 않았다. “일단 다음 일정이 있어 연구팀은 철수하기로 하고 함께 도금 작업을 하던 장인에게 마저 시험을 해 달라고 부탁했죠. 그런데 이분이 아말감을 바르고서 잊고 있다가 하루 정도 지나서야 ‘아차’ 한 거예요. 부랴부랴 숯에 올려 가열했더니 도금이 기가 막히게 됐어요. 실수에서 방법을 찾은 거죠. ‘아, 아말감도 숙성을 해야 하는구나.’ 그때 알았죠.” 고대 금도금법은 중국도, 일본도 잃어버린 기술이었다. 그는 “남은 문헌에만 의존하면 그 이상 진전할 수 없다. 동시대 기술이라면 동북아시아든 서양이든 문헌을 조사해야 좀더 실물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조선시대 화폐 상평통보 또한 성분 분석을 하고 당시 미국인이 남긴 기록을 보고서 합금 비율을 알아내 복원했다. 윤 과장은 “청동으로 동전을 만들다 조선 숙종 때 구리에 아연을 넣은 황동으로 바꿨고, 이 신기술을 적용한 화폐가 상평통보”라고 말했다. 그는 “조선 시대에는 주조기술이 굉장히 뛰어나 연산군 때 아연과 납에서 은을 분리하는 기술을 개발했고, 이는 중국 명나라보다도 200년 앞선 것이었다”면서 “은 추출 기술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을 부강하게 했고, 부강해진 일본이 조총을 사서 결국 우리를 침략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윤 과장은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청동유물 주조와 복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일한 건 1994년부터다. 공개경쟁채용 시험을 통해 학예연구사로 입직했다. 국립중앙과학관이 자리한 대전 유성구 구성동의 지명을 따 자신의 호도 ‘구성’으로 지을 만큼 일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그는 “전문 지식만 있다고 과학기술 문화재를 복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엇이든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끈기와 노력을 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과장의 정년은 2024년까지로 3년 남짓 남았다. 그는 “정년 전까지 철 불상 주조기술을 복원해 조상들의 첨단기술을 국민께 알려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 [사설] 한글 금속활자 출토, ‘사대문 내부’ 보존 계기 되길

    서울 인사동의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에서 조선 전기의 한글 금속활자와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를 비롯한 금속 유물이 한꺼번에 출토됐다. 문화 국가이자 과학 국가로 조선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뜻깊은 일이다. 한편으로 화려한 유물이 각광받는 동안 지하에 남은 유적 자체의 보존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현실은 안타깝다. 발굴조사가 이뤄진 종로2가 사거리 북서쪽에는 의금부와 전의감, 순화궁과 죽동궁이 있었다. 남쪽의 오늘날 종로는 상업시설인 시전행랑이 줄지어 있던 운종가다. 조사 지역에선 조선 전기부터 근대에 이르는 6개의 문화층이 확인됐다고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끊임없이 퇴적이 이루어졌고 발굴조사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 삶의 흔적도 각 문화층에서 드러났다. 서울 사대문 내부인 광화문·종로 일대는 공평지구처럼 ‘도시환경정비’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번에 조사된 지하 유적은 중요한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옹색하게나마 흔적을 남기는 ‘이전복원’이 결정됐다고 한다. 신축 상업시설이 500년 수도의 켜켜이 쌓인 역사의 흔적보다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지금의 분위기는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나라가 선진국이고, 문화 국가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사대문 내부를 전면 보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그럴 이유도 없다. 그럴수록 정치·행정·상업·생활의 중심 공간만큼은 최소한이라도 보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치 공간은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의 존재로 크게 모자람이 없고, 생활 공간도 근대에 형성된 것이나마 북촌이 대표할 수 있다. 반면 종로 시전행랑 터와 이어진 공평지구의 상업 공간은 일부라도 원형을 보존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불가능해 보이던 육조거리 관청가의 보존도 광화문광장 재구조화에 따른 발굴조사와 이조 및 호조 터의 일부였을 미국대사관의 이전 계획에 따라 여건이 달라진 것은 다행스럽다. 문화와 관광이 대표할 보존의 경제적 가치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높아질 것이다. 그런 나라가 문화 선진국이다.
  • 은밤 흐르는 자작나무 숲, 속세 비킨 접신의 땅, 신록 예찬 시인의 숲

    은밤 흐르는 자작나무 숲, 속세 비킨 접신의 땅, 신록 예찬 시인의 숲

    옛날옛적 대한민국에 ‘BYC’가 있었다. 오지의 대명사였던 경북의 봉화·영양·청송을 아울러 이르는 표현이다. 이 지역의 영어 표기에서 앞글자만 따 만들었다. 옛날옛적엔 오지의 동의어가 ‘낙후’였다. 요즘엔 다르다. ‘청정’이 동의어다. 숨막히는 도시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관심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오지에도 사람은 산다. 풍경도 깃들어 있다. 그 풍경이 무척이나 오지다. ‘BYC’의 가운데 고을, 영양으로 가는 길이다. 여정의 모토는 ‘끝까지 본다’이다. 영양에서도 한발 더 들어간 오지가 목적지다.나라 안에 ‘전설적인’ 오지 이야기들이 꽤 많이 전해온다. 그 가운데 영양 수비면은 ‘오지 이야기의 끝판왕’이라고 할 만하지 싶다. 보통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의 눈을 피해 숨어 지냈다거나,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혹은 조선시대에 관군을 피해 숨어 살던 곳 정도로 표현한다. 영양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간다. 수비면 끝자락의 오무마을 사람 하나가 설렁설렁 장 보러 나왔다가 한국전쟁이 터진 사실을 알게 됐단다. 이전까지는 전쟁 난 것도 모르고 지냈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사실과 허세가 헷갈릴 지경이다. 설령 전쟁 터진 걸 알았다 해도 이 정도의 오지였다면 남의 동네 싸움박질 정도로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자작나무 숲으로 ‘핫 플레이스’가 된 죽파리가 바로 그 수비면에 속한 마을 중 하나다. 죽파리 자작나무 숲은 아주 넓다. 검마산의 능선 두엇이 자작나무 일색이다. 숲의 면적은 발표하는 곳마다 조금씩 다르다. 영양군에서 ‘자작나무숲 권역 관광자원화 계획’에 포함시킨 면적은 약 31ha다. 산자락에 축구장 40개 크기 정도의 자작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숲은 1993년에 조성됐다. 이 일대가 솔잎혹파리 공격을 받아 황폐화되자 대안으로 자작나무를 심었다. 그 덕에 나이(평균수령 30년)도, 크기(평균 높이 20m)도 비슷한 자작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게 됐다. 자작나무 숲은 차분하면서도 화사하다. ‘자작자작’한 하얀 수피와 ‘초록초록’한 이파리들이 동화 속 세계를 펼쳐 놓았다. 숲에 들면 휴대전화가 먹통이 된다. 그러니 오래전 한 통신사의 광고 카피처럼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 두셔도 좋겠”다. 자작나무 숲 하면 흔히 강원 인제의 원대리 자작나무 숲을 떠올린다. 모양새로만 보면 사실 둘은 매우 비슷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죽파리 자작나무 숲이 덜 개발됐고 더 불편하다는 정도다. 수도권 접근성에서는 원대리가 앞선다. 한데 죽파리엔 이를 상쇄할 강력한 자원이 하나 더 있다. 들머리에서 자작나무 군락지로 이어지는 2㎞ 정도의 숲길과 계곡이다. 숲길은 가파르지 않다. 동네 뒷산을 걸어도 이보다는 더 숨이 차지 싶다. 나무들이 빼곡한 숲길엔 만지면 묻어날 듯한 초록빛이 한가득이다. 길 아래 계곡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시원의 골짜기다. 수량은 많지 않아도 탁족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영양군에서 앞으로 이 일대에 힐링센터, 전기차 등 친환경 시설들을 들이겠다는데, 부디 최소한에 그치길 빈다. 이곳은 ‘불편’이 더 잘 어울린다.자작나무 숲에서 수하계곡 쪽으로 가면 ‘국제밤하늘보호공원’이 나온다. 국제밤하늘협회로부터 ‘은밤’(Silver Night) 등급을 받은 곳이다. 사막처럼 특수한 환경을 제외하고, 육지에서 가장 투명한 밤하늘을 관측할 수 있는 곳이란 의미다. 오래전 표현 방식으로는 ‘별들의 고향’쯤 되려나. 이 일대는 빛 공해가 거의 없다. 모든 조명들은 낮게 땅을 비추고 가로등의 조도도 현저히 낮다. 그 덕에 은하수, 유성 등 밤하늘에 펼쳐지는 별들의 쇼를 관측할 수 있다. 여름철은 은하수의 시간이다. 뜨는 시간이 빨라져 관측하기가 한결 편해진다. 밤하늘보호공원 가운데엔 반딧불이천문대가 있다. 우리 은하계 행성은 물론 멀리 심연의 ‘딥 스카이’까지 관측할 수 있는 망원경을 갖췄다. 장비 없이, 그저 근처 풀밭에 누워 봐도 된다. 천문대의 박찬 연구원은 “사실 별은 맨눈으로 관찰 할 때가 가장 아름답고 환상적”이라고 말했다. 한데 날씨가 변수다. 날이 흐려 별들을 볼 수 없을 때는 반딧불이를 보면 된다. ‘형설지공’의 주인공이자, ‘개똥벌레’라는 애칭으로 흔히 불리는 녀석이다. 단언컨대 반딧불이는 인공의 빛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졌다. 단 ‘1’의 소리도 없이 연둣빛 불빛을 반짝이며 제 반쪽을 찾아 비행하는 녀석의 모습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만큼 서정적이다.칠흑같이 어두운 숲에서 반딧불이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검은 하늘에 뜬 초록별이 저와 같을까. 아쉽게도 이번 여정에선 많은 반딧불이와 조우할 수 없었다. 절정의 혼인비행 시기가 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낱마리라도 개똥벌레가 주는 위로의 힘은 무엇보다 강력하다. 보통 초여름에 관찰되는 애반딧불이는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볼 수 있다. 한데 올해는 꽃이 그랬듯, 반딧불이 출현 시기도 당겨졌다. 혹시 애반딧불이를 못 만났다면 늦반딧불이를 기대하시길. 8월 중순∼9월 중순에 또 한번 이 일대를 초록별의 세계로 만든다. 반딧불이 생태공원 일대가 널리 알려진 반딧불이 관찰 ‘포인트’다. 천문대 바로 앞에 있다.밤하늘공원 일대엔 밀밭이 많다. 장수포천 등의 물줄기를 따라 누렇게 익은 밀밭들이 주르륵 이어져 있다. 박목월의 시구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밀밭 끝엔 ‘비지미골’이 있다. 오래전에 베를 길러 길쌈을 많이 했다는 마을이다. 물론 지금은 흔적도 없다. 그저 대여섯 집 정도만 남은 상태다. 비지미골엔 투방집 ‘김대준 가옥’이 남아 있다. 안내판은 이 투방집에 대해 “200년을 훌쩍 넘긴 집”이라고 적고 있다. 한데 영양군청 누리집엔 1875년 이전에 처음 지어졌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둘 사이에 50년 정도의 간극이 있는 셈이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수세대를 이어 온 집인 것만은 분명하다. 투방집은 통나무를 사각형으로 쌓아 만든 집이다. 영양의 산골마을 주민들이 흔히 살던 가옥 형태다. 벽은 흙 등으로 보강했고 지붕은 짚이나 억새, 굴피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로 덮었다. 김대준 가옥은 ㄱ자형 안채, ㅡ자형 사랑채와 헛간 등으로 이뤄졌다. 건립 당시의 원형이 잘 유지된 상태다. 이 투방집의 안주인이었던 김통분 여사에 따르면 안채의 정지(부엌) 옆은 소가 살던 외양간이었다고 한다. 정지의 온기를 함께 나눌 만큼 소와 사람이 가까운 사이였다는 걸 이 집의 구조가 말해 주고 있다. ●수하계곡 끝자락 ‘오무마을’ 천문대 앞으로는 수하계곡이 흐른다. 계곡이 많은 영양에서도 물 맑고 경치 좋은 곳으로 소문난 계곡이다. 수하계곡 끝자락에 그 ‘오무마을’이 있다. 오무마을은 고립무원의 마을이다. 사람도 차도 이 마을에서 발길을 돌려야 한다. 온 길을 그대로 달려가는 건 물길밖에 없다. 수하계곡 맑은 물은 산자락을 몇 굽이 돌아 울진 땅의 왕피천과 연결된다. 예전엔 4륜구동 지프로 물길을 몇 번 건너야 마을에 이를 수 있었다. 요즘은 오무마을 앞까지 도로가 나 있다. 예전 같은 불편함은 많이 사라졌다. 그래도 길이 끊긴 건 마찬가지다. 영양군이 울진 왕피리마을까지 이어진 옛길의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환경 당국의 반대를 뚫고 계획을 성사시킬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무속인들이 ‘접신(接神)의 땅’이라 여기는 일월산 자락에 주실마을이 있다. 시인이자 국문학자였던 조지훈(1920~1968)이 나고 자란 곳이다. 이 마을 입향조가 살던 호은종택, 지훈문학관 등 볼거리가 많다. 마을 어귀엔 주실 숲이 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느릅나무 등이 숲을 이룬 곳이다. 주실마을 숲은 ‘시인의 숲’이라고도 불린다. 조지훈의 시비가 이 숲에 있어서다. 만지면 묻어날 것 같은 연둣빛이 일품이다.영양읍에서 가까운 삼지마을은 비단조개를 닮은 독특한 형태가 일품인 마을이다. 마을 앞에 연못 3개가 있다 해서 삼지(三池)마을이다. 마을이 비단조개 모양을 하게 된 건 물길의 변화 때문이다. 옛 삼지마을은 안동 하회마을이나 예천 회룡포 등과 같은 물돌이동이었다. 한데 물길이 변경되면서 물돌이동엔 더이상 물이 돌지 않게 됐고, 습지를 거쳐 서서히 육지가 됐다. 이를 우각호라 부른다.●산자락에 꽁꽁 숨은 삼지마을 모전석탑 삼지마을에 들면 모전석탑부터 찾아야 한다. 모전석탑은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쌓은 탑을 일컫는다. 아름답기로는 산해리의 봉감모전석탑이 가장 앞설 테다. 국보로 지정됐으니 당연하다. 한데 삼지리 모전석탑도 독특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 현 탑저리, 탑밑못 등의 지명도 이 전탑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삼지리 모전석탑은 마을 산자락에 꼭꼭 숨어 있다. 이정표가 부실한 데다, 오르는 길도 경사가 급하고 비좁아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전탑은 삼국통일 이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3층이었는데 현재는 2층만 남아 있다.전탑이 독특한 건 기단이 기반암이기 때문이다. 전탑이 선 곳은 절벽 끝자락의 햇살이 스며드는 자리다. 바위 하나가 기반암과 분리돼 있고, 전탑은 그 바위를 기단 삼아 세워졌다. 주변 풍경도 독특하다. 사방이 붉은빛 감도는 바위다. 붉은 절벽 아래에는 작은 동굴이 있고, 여기서 샘이 솟는다. 이 자리가 바로 신령스런(靈) 동굴(穴)이란 뜻의 영혈이다. 신라시대엔 이 자리에 영혈사(靈穴寺)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연대암이란 작은 암자와 관음전 등이 그 자리에 들어서 있다. 8월이 되면 삼지마을 연못엔 법수홍련이 핀다. 가야시대부터 전해져 온 토종 연꽃이다. 3㎞ 길이의 탐방로를 따라 연꽃을 감상할 수 있다.●구한말 김도현이 사재 털어 쌓은 검산성 이제 검산성을 방문할 차례다. 구한말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벽산 김도현(1852~1914)이 사재를 털어 세운 성이다. 검산성은 청기면 검산(劒山) 자락을 끼고 들어섰다. 바위 절벽이 있는 동북쪽을 ‘배수의 진’으로 삼고, 나머지 삼면을 성벽으로 둘러쳤다. 읍성이나 산성처럼 오랜 기간 거주하며 농성할 수 있는 기능을 갖췄다기보다는, 여차하면 일본군과 동귀어진하려는 최후의 결전장으로 조성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성의 규모는 작다. 현재 서쪽 200m가량과 남쪽 일부만 남아 있다. 엄밀하게 따지면 ‘성’이라기보다 ‘성터’에 가깝다. 성벽을 따라 길이 나 있다. 그리 알려지지 않았고, 굳이 알릴 생각도 없었던 듯, 성 안은 웃자란 띠 등의 잡초와 밤꽃 향기만 무성하다. 어지간한 산성보다 더 외진 느낌이다. 번다한 곳을 피해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딱일 듯하다. 성 아래 마을에 벽산생가가 있다. 아, 검산성 가는 길에 청기면 소재지는 꼭 둘러보시길. 아주 작은 마을인데도 숭조고택, 청계정 등 볼만한 고택들이 4채에 이른다. 영양의 전통술인 초화주를 만드는 공장도 이 마을에 있다. ■여행수첩 →죽파리 자작나무 숲을 가려면 내비게이션에서 장파마을회관을 찾으면 된다. 죽파마을회관에서 조금 더 들어간 곳이다. 여기서 서낭당을 끼고 돌아 1㎞쯤 오르면 바리케이드가 나온다. 차는 여기에 대고 걸어가야 한다. →영양 생태공원사업소(www.yyg.go.kr/np)에서 반딧불이천문대 부근 캠핑장과 수련원, 펜션 등을 예약할 수 있다. 천문대 체험 예약도 할 수 있다. →승우여행사에서 영양과 울진 등 경북의 오지마을을 돌아보는 ‘한여름의 시원한 영양·울진 1박 2일 여행’ 상품을 운용하고 있다. 영양 죽파리 자작나무 숲과 반딧불이생태공원, 울진 금강소나무 숲길(십이령길) 등을 돌아본다. 봉화군 봉성리의 숯불돼지구이 등 맛집들도 일정에 포함됐다. 특히 봉성 희망정은 숯불돼지구이뿐 아니라 곁들여 내는 반찬도 정갈하고 맛있다. 7월, 8월 두 달간 1·3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각각 출발한다. 승우여행사 누리집(www.swtour.co.kr) 참조.
  • 천문시계·물시계 주전… 세종의 ‘땅속 과학박물관’ 열렸다

    천문시계·물시계 주전… 세종의 ‘땅속 과학박물관’ 열렸다

    문화재청이 29일 공개한 서울 공평동 유적 발굴 결과물에는 기록으로만 전하던 세종 때 천문시계 일성정시의, 세종~중종 시기 제작된 자동물시계 주전 부속품이 포함됐다. 16세기 제작된 총통류 8점, 동종 1점도 나왔다. 과학기술 진흥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세종 시기의 유물들과 조선 전기 과학기술 수준을 실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이 뜨겁다. 금속활자가 담긴 항아리 안에서 세종~중종 때 제작된 자동 물시계의 주전(籌箭) 일부로 보이는 동제품들이 잘게 잘린 상태로 발견됐다. 동제품은 동판과 구슬방출기구로 구분되는데, 동판에는 여러 개의 원형 구멍과 ‘일전’(一箭)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구슬방출기구는 원통형 동제품 양쪽에 각각 걸쇠와 은행잎 형태의 갈고리가 결합됐다. ‘세종실록’에 나오는 작은 구슬을 저장했다 방출해 시간을 알리는 장치인 주전의 기록과 일치한다. 기록으로만 전해진 조선시대 자동 물시계의 주전 실물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과장은 “1438년(세종 20년)에 제작된 흠경각 옥루이거나 1536년(중종 31년) 창덕궁에 새로 설치한 보루각의 자격루로 추정된다”면서 “현재 복원된 옥루와 자격루의 보완에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세종이 만든 주야간 겸용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는 항아리 옆에서 출토됐다. 낮에는 해시계로 사용하고 밤에는 별자리를 이용해 시간을 가늠했다. ‘세종실록’에는 1437년 세종이 일성정시의 4개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실물은 전해지지 않았다. 이번에 출토된 유물은 일성정시의 중 주천도분환, 일구백각환, 성구백각환 등 주요 부품들로 시계 바퀴 테두리를 구성하는 원형 고리 3점으로 추정된다. 이용삼 충북대 교수는 “세종 시대는 최고의 천문 기술과 시설을 갖췄지만 남은 유물이 없어 문헌으로만 살펴볼 수 있었다”면서 “이번 조사 결과가 세종 때 제작된 천문의기 복원 연구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총통은 소형 화기인 승자총통 1점과 손잡이를 부착해 쓰는 소승자총통 7점으로 구성됐다. 길이는 모두 50∼60㎝이다. ‘계미’(癸未) 글자가 있는 승자총통은 1583년, ‘만력무자’(萬曆戊子) 글자를 새긴 소승자총통은 158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동종은 ‘가정십사년을미사월일’(嘉靖十四年乙未四月日)이라는 글자가 있어 1535년 4월로 제작시기가 확인됐다. 양식상으로 15세기 후반에 제작한 ‘전 유점사 동종’이나 ‘해인사 동종’과 비슷하다는 평가다.
  • “가장 오래된 한글활자 포함”...인사동서 조선금속활자 1600여점 발굴

    “가장 오래된 한글활자 포함”...인사동서 조선금속활자 1600여점 발굴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이 항아리에 담겨 한꺼번에 발견됐다. 이와 함께 세종시대 천문시계 등 다양한 금속유물도 무더기 동반 출토됐다. 29일 문화재청과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수도문물연구원은 탑골공원 인근인 ‘서울 공평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인 인사동 79번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조선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을 비롯해 물시계 부속품 주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화포인 총통(銃筒) 8점, 동종(銅鐘)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에서는 한자 활자 1000여 점과 한글 활자 600여 점이 발굴됐다. 조선 전기의 다양한 금속활자가 한 곳에서 발견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인 만큼 그 의미가 크다. 여기에는 구텐베르크가 1440년대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와 인쇄술을 개발할 무렵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도 포함됐다. 현재까지 전해진 가장 이른 조선 금속활자인 세조 ‘을해자’(1455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다 20년 이른 세종 ‘갑인자’(1434년)로 추정되는 활자가 다량 확인된 것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다양한 크기의 한글 금속활자가 출토됐다”며 “아직 금속활자 분석이 끝나지 않았는데, 종류가 다양해 인쇄본을 찍을 때 사용한 조선 전기 활자의 실물이 추가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크기와 뒷면을 깎은 모양새를 보면 활자가 각양각색”이라며 “활자 상태는 대부분 온전하지만, 일부는 불에 녹아 엉겨 붙어 있었다”고 덧붙였다.금속 활자와 함께 발견된 동제품은 자격루와 같은 자동 물시계에서 시간을 알리는 시보(時報) 장치를 작동시키는 주전으로 추정된다. 이 동제품은 활자를 제외한 다른 유물들 처럼 잘게 잘린 상태로 발견됐다. 동그란 구멍이 있고 ‘일전’(一箭)이라는 글씨를 새긴 동판, 걸쇠와 은행잎 형태 갈고리가 결합한 구슬 방출 기구로 구성된다. 이러한 형태는 ‘세종실록’에서 작은 구슬을 저장했다 방출해 자동물시계의 시보장치를 작동시키는 장치인 주전의 기록과 일치한다. 동제품이 주전이라면 세종 20년인 1438년 제작된 경복궁 흠경각 옥루나 중종 31년인 1536년 창덕궁에 새로 설치한 보루각 자격루의 부속품일 가능성이 있다. 옥루는 현존하는 부재가 전혀 없고, 자격루는 물통 일부가 남아 국보로 지정됐다.활자가 담겼던 항아리 옆에서는 일성정시의가 출토됐다. 이는 낮에는 해시계로 사용하고, 밤에는 별자리를 이용해 시간을 가늠한 도구이다. ‘세종실록’에는 1437년 일성정시의 4개를 제작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일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출토 유물을 복원하면 원형 고리 3점이 되는데, 명칭은 각각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 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이다.함께 출토된 소형화기인 총통은 승자총통 1점과 손잡이를 부착해 쓰는 소승자총통 7점으로 총 8점이다. 길이는 모두 50∼60㎝이다. ‘계미’(癸未) 글자가 있는 승자총통은 1583년, ‘만력무자’(萬曆戊子) 글자를 새긴 소승자총통은 158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소승자총통 명문(銘文, 금석에 새긴 글자) 중에는 제작자인 ‘희손’(希孫)이 있는데,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보물로 지정된 서울대박물관 소장 ‘차승자총통’에도 나오는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만력무자’ 글자 총통은 명량해역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동종은 일성정시의 아랫부분에서 여러 점의 작은 파편으로 나누어 출토됐다. 동종 상단에는 ‘가정십사년을미사월일’(嘉靖十四年乙未四月日)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1535년 4월(중종 30년)에 제작됐음이 확인됐다. 다만 왕실에서 발원(發願, 신에게 소원을 빎)한 동종과는 서체가 다른 것으로 분석됐다. 양식상으로는 15세기 후반에 제작한 ‘전 유점사 동종’이나 ‘해인사 동종’(보물)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모든 유물은 1588년 이후에 같이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않은 것 같다”며 “보존처리와 추가 연구를 거치면 조선 전기 인쇄술과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
  • 콜로세움 지하공간, 처음으로 관광객에 문 연다

    콜로세움 지하공간, 처음으로 관광객에 문 연다

    고대 로마제국 최대 원형경기장인 콜로세움의 지하 공간이 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개방된다고 CNN 등이 2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콜로세움 지하 공간은 검투사와 맹수들이 경기장으로 올라가기전 대기하던 장소다. 건물의 ‘심장’과도 같은 이곳의 모습이 공개되는 건 2000년 만이다. 원래 명칭이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인 콜로세움은 5만명의 수용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한 경기장으로, 연간 700만명이 찾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다. 그 중 검투사 대기소와 맹수 우리, 통로가 미로처럼 얽혀 있는 지하는 1만 5000㎡ 규모를 자랑한다. 콜로세움이 처음 세워진 서기 80년부터 523년까지 사용됐는데, 이후 버려지다시피 묻혀 있다가 19세기 발굴 작업을 통해 세상 밖에 모습을 드러냈다.이곳이 일부나마 대중에게 공개된 건 2010년 들어서지만, 2018년 복원 작업에 들어가며 다시 폐쇄됐다. 2년 6개월간의 복원을 거쳐 다시 그 위용을 드러내는 이 지하 공간이 이번에는 사상 처음으로 160m 길이의 통로를 포함한 전 구간에 걸쳐 개방되는 것이다. 이번 복원에는 고고학자와 공학자 등 전문가 81명이 투입됐다. 콜로세움에서는 이탈리아 유명 패션업체 토즈(Tod’s)가 제공한 2500만유로(약 337억원)의 기금을 토대로 2013년부터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하고 있다. 단계로 외관 정비 작업이 마무리됐고 지하 공간 복원이 2단계에 해당한다. 미술관 건립·조명시설 개선 등으로 구성된 마지막 3단계 복원 작업은 2024년경 완료될 예정이다. 콜로세움 바닥에 나무판을 깔아 검투사 전투 무대를 되살리는 복원 작업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는 2023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콜로세움 관리 책임자인 알폰시나 루소는 “유적 속의 유적이 다시 대중을 맞는다”며 “이곳은 사람들이 콜로세움이 어떻게 기능했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 광화문광장 월대·해치상 복원…내년 4월 정식 개장

    광화문광장 월대·해치상 복원…내년 4월 정식 개장

    오세훈 서울시장이 공사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기로 한 광화문광장이 내년 4월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 광장에서 새로 발굴된 조선시대 유물들이 원형 그대로 현장에 전시되며 2023년까지 광화문 월대와 해치상이 들어선다. 서울시는 이런 내용의 ‘광화문광장 보완·발전계획’을 세워 내년 4월 정식 개장한다고 23일 밝혔다. 시는 ▲문화재 복원 및 활용으로 역사성 강화 ▲역사·문화 스토리텔링 강화 ▲광장 주변과 연계 활성화 등 3대 분야에 초점을 맞췄다. 우선 2023년을 목표로 광화문 월대와 해치상이 복원된다. 월대는 궁궐이나 건물 앞에 놓인 넓은 기단으로 왕과 백성이 소통하던 공간이다. 시와 문화재청은 광화문 앞 사직로의 기능을 유지하면서 길이 50m, 폭 30m의 월대를 복원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내년 4월 문화재발굴조사를 시작한다. 발굴·복원 작업은 문화재청이 주도하고, 복원을 위한 주변정비와 우회도로 마련 등 제반사항은 시가 맡는다. 월대 복원으로 교통 흐름에 지장이 없도록 기존 차로수를 유지하되 광화문 삼거리의 세종대로 방향 우회전 차로를 기존 1개에서 2개로 추가할 방침이다. 또 육조거리의 흔적을 품은 광장 조성도 본격화한다. 문화재 발굴조사를 통해 발견된 조선시대 ‘삼군부(군사업무 총괄)’와 ‘사헌부(관리감찰 기구)’ 등 주요 관청의 실제 유구를 원형 보존해 현장 전시한다.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역사적 의미를 기억하는 다양한 시설물과 프로그램도 설치 및 운영된다. 세종대왕상 아래 및 지하에 있는 ‘세종이야기’와 ‘충무공이야기’(2009년~2010년 개관)는 전면 리모델링에 착수한다. 이와 함께 시는 주변 KT건물 등 민간·공공 건물을 통합적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오는 2023년 완공을 목표로 리모델링이 진행 중인 KT빌딩 지상 1층은 모두를 위한 공공 라운지로 개방한다. 지하 1층에는 식음료, 기념품 판매점 등 편의시설을 설치하고, 세종이야기와 바로 연결되는 지하연결로도 신설한다. 광화문~용산~한강으로 이어지는 ‘국가상징거리’ 조성을 위한 계획도 올해 안으로 착수, 2022년 6월까지 수립한다. 한편 시는 지난해 11월 서정협 전 시장 권한대행 체제에서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 공사에 착수했다. 광화문광장 조성사업은 지난해 11월 착공 이후 현재 38%(도로부 99%, 광장부 15%)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오 시장은 출마 전이던 지난해 11월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에 대해 “도대체 누굴 위한 공사인지 묻고 싶다”고 비판해 지속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취임 후 “역사성과 완성도를 더 높여 광장사업을 조속히 완성하겠다”며 재구조화 공사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생가 바로 옆에 집 지은 ‘후기 안도현’… 낙향 아닌 상향을 꿈꾸다

    생가 바로 옆에 집 지은 ‘후기 안도현’… 낙향 아닌 상향을 꿈꾸다

    ●초로의 귀향, 새로움의 출발 안도현을 만나러 경북 예천으로 간다. 그가 40년 가까이 살았던 전주 쪽에서 이병초·박태건 시인이 출발했고, 나는 나대로 서울을 떠나 그가 새롭게 안착한 모천회귀의 공간에 닿았다. 예천을 가로지르는 내성천의 굽이를 천천히 바라보면서 그의 집에 들어섰는데, 커다란 유리창 안으로 그가 오수(午睡)에 빠져 있는 게 보인다. 그 고요에 압도당해 나는 전주 쪽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시인의 낮잠을 방해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그 고요는 그가 차근한 노동으로 마련했을 돌담과 텃밭, 비닐하우스, 닭장, 연못, 꽃과 나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였을 것이다. 낮은 대문 앞에는 “안도현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시인이 베푼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여기 심었습니다”라고 쓰인 작은 비석과 함께 전북산(産) 팽나무가 지금은 비록 앳되지만 한 뼘씩 늘씬하게 자라 가고 있었다. 일행이 도착했고, 강릉 사는 딸네 집에 갔던 시인의 아내 박성란 선생도 돌아와 하룻밤 식구는 이제 다섯 명이 됐다. “귀향하고 나서 한 해가 어느새 훌쩍 지났네요. 나무와 꽃들을 마당 앞뒤로 심었고 돌담을 쌓았고 텃밭을 마련했습니다. 밭에 거름더미도 만들고 비닐하우스도 작게 지었어요. 정말 많이 바빴어요.” 어디 그뿐이랴. 시인은 그 사이사이로 학생들에게 온라인 강의를 하고, 아침저녁으로 새소리를 들으며 동식물들의 행적을 눈으로 귀로 따라갔다. 아파트라는 문명의 허공에서 수십 년 살다가 지상에 발을 디딘 결과가 이렇게 풍요롭고 즐겁기만 하다. 귀향 무렵 외손녀도 보았으니 이제 영락없이 할아버지가 된 초로(初老)의 시인은 경사를 겹으로 맞이한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예천은 ‘후기 안도현’의 넉넉하고 새로운 출발점이 돼 줄 것이다.●“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의 존재론 안도현은 1961년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에서 태어났다. 지금 집을 지은 곳은 자신이 태어난 생가 바로 옆이다. “고향을 떠나 스무 살 이후 전북 지역에서 40년간 살다가 작년 초에 고향으로 돌아와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년의 생애를 살러 낙향(落鄕)한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새로운 시와 생명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상향(上鄕)을 꿈꾼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과 실천은 그의 고향에 흐르는 내성천처럼 격한 탁류가 아니라 잔잔하고 투명한 시냇물이 돼 많은 이들의 기억으로 전이돼 갈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 시냇가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시간과 기억과 사물을 담으면서 그네들에게 새로운 생각과 마음과 이름을 선사해 갈 것이다. 안도현은 1981년 대구매일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약관 스무 살 때의 일이다. 물론 그는 십대 때부터 성숙한 소년 문사였다.“고등학교 때 문예반에 들어가면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 접한 문학은 마약 같은 것이어서 학교 공부를 제쳐 놓고 시를 읽고 쓰는 일에 푹 빠져 버렸습니다.” 그는 그때 겉으로 보기에는 말썽을 피우지 않는 얌전한 학생이었지만 마음속에는 삶과 문학에 대한 오기로 뭉쳐져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가 다닌 대구 대건고에서는 시인 도광의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지금도 문단에 나와 활동하는 대건고 출신 선후배 문인들이 제법 많다. 그러다가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확연하게 한국 현대시사로 진입하게 된다.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5)은 그를 우리 시단과 역사 속에 각인한 문학사적 사건이었다. “그 시절 저를 포함해 젊은 시인들이 가졌던 시와 역사를 향한 열정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제게도 시인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해 준 ‘불의 시대’였지요.”그 ‘불의 시대’를 건너 시인은 천천히 작고 느리고 외따로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를 발견해 간다. ‘불꽃’의 시대에서 ‘나무/꽃’의 시대로 옮겨 간 것이다. 특별히 ‘바닷가 우체국’ 이후 안도현은 자연에 대한 감각이 눈에 띄게 점증하면서 자신만의 시적 브랜드를 만들어 간다. 그의 시가 지닌 섬세한 감수성과 탁월한 언어 감각은 이때부터 아름다운 서정성으로 많은 독자를 사로잡아 갔다. 소소하고 쓸쓸한 존재자들에 대한 세심한 발견을 통해 현실 경험과 그것의 상상적 치유 과정을 깊이 있게 노래한 결과였다. 이처럼 시인은 따스한 화해의 세계를 지속시키면서도 인간과 자연이 하나로 몸을 바꾸는 순간을 드러내면서 허공의 물기가 한밤중 순식간에 나뭇가지에 맺혀 꽃을 피우는 순간까지 잡아내게 된다. 그 결과가 결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 둘 수 있게 되었다’라는 구절에 가닿게 된 것이다. 그의 열한 번째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 둘 수 있게 되었다’(2020)는 오랜만에 전해진 ‘시인 안도현’의 편지 같은 존재다. 한때 절필 선언 후 살아온 날들이 담긴 이번 시집을 독자들은 오래도록 기다렸을 것이다. “나무나 꽃과 대화하고 서로 알아보면서 이곳에서 인생을 완성에 가깝게 한번 만들어 보려고요. 거창하게 모천회귀라고까지 할 건 없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안긴 어머니 품 같기는 합니다.” 그는 이러한 시간이 담긴 이번 시집을 두고 “여건과 환경이 바뀌면서 모든 것을 세심하게 관찰하게 됐고 그에 따라 시도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 같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이번 시집의 ‘시인의 말’을 통해 “갈수록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안도현이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니? 안도현이 안 쓰면 누가 쓰나? 나는 그 말이 이제 그가 시를 ‘쓰는’ 단계에서 시를 ‘사는’ 단계로 이월하는 순간을 담아낸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둘레를 얻었고/그릇은 나를 얻었다//그릇에는 자잘한 빗금들이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었다/빗금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그릇)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자신이 버리기 어려운 허물을 고백하고 반성하지 않는가? 이제 좀 고독해져도 좋겠다는 생각을 들려주는 그는 자신이 사랑했고 평전까지 집필했던 백석(白石)이 노래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의 존재론을 고향 예천에서 구상하고 완성해 갈 것이다. 그 믿음이 이제 시를 ‘살아가는’ 힘을 줄 것이다.●잔잔하고 투명한 시냇물 같았던 봄날 시인이 고향에 돌아와 우선으로 한 일은 돌담이나 텃밭이라는 형상으로도 나타났지만, 예천의 자연과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알리는 잡지 ‘예천산천’ 창간으로도 결실을 이뤘다. 그는 이 계간 잡지의 편집인을 맡았다. “예천은 비록 작은 고을이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막무가내의 개발로부터 소외돼 온 곳이기도 합니다. 그나마 보존된 것들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고향분들을 한 분 한 분 만나 아직도 남아 있는 예천의 자연과 문화 유적들을 잘 지켜 가려고 합니다.” 그동안 안도현은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자연이, 자연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노래해 온 시인이다. 그러한 그의 시선이 이제 고향의 작고 느리고 아름다운 사물과 순간과 기억 속에서 더욱 고귀한 삶의 이법을 포착하고 발견해 가는 성취를 이루어 갈 것이다.“내성천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모래 강입니다. 폭도 매우 넓은 귀한 강이지요.” 그런데 상류에 갑자기 영주 댐이 건설되면서 모래사장은 풀밭으로 급속도로 변해 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은 모래가 제법 많다. 시인은 어릴 적 여름이면 매일 이 강변에서 살았다고 한다. “내성천 곁에 살게 됐으니 내성천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데 헌신하려고 합니다.” 이제 내성천의 역사와 기억을 담은 그의 시와 글과 삶의 흔적들이 안도현의 ‘예천 시대’를 열어 갈 것임을 내비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고향 예천은 안도현에게 아득한 과거이자 첨예한 미래다. 다음날 우리 일행은 시인의 안내를 따라 도정서원에 들렀다.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정탁(鄭琢)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에서 우리는 내성천의 살가운 흐름을 더 가까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이틀 동안 안도현의 고향 예천의 아름답고 잔잔하고 투명한 봄날을 누렸다. 그야말로 “오동꽃 핀 줄 모르고/5월이 간”(식물도감) 순간이 우리의 몸안에 남은 것이다. 이제 예천에서 외롭고 높고 쓸쓸한 ‘후기 안도현’의 시가 탄생해 갈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전주로 서울로 향했다. 고향의 자연과 역사에서 발견하는 시와 삶을 그리고 있을 안도현의 다음 세계가 더욱 아름다운 화폭으로 나타날 것을 마음 깊이 고대하면서 말이다. “뒷산에/핑계도 없이/와서//이마에 손을 얹는/먼 물소리”(우수(雨水))를 한껏 들을 수 있었던 따뜻하고 화창한 예천의 봄날이었다.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 천연 냉장고 ‘갯벌의 힘’… 700년 전 침몰한 나무배 지켜냈다

    천연 냉장고 ‘갯벌의 힘’… 700년 전 침몰한 나무배 지켜냈다

    1975년 신안선이 발굴되고 대규모 유물이 나오자 국내외 언론사들이 대서특필했다. 모두가 이 엄청난 유물에 관심을 기울이는 동안 학계에는 새로운 학문이 생겨났다. 바로 ‘수중고고학’과 ‘문화재 보존과학’이다. 당시 수중고고학은 걸음마조차 어려운 시기였다. 문화재보존과학 역시 1971년 공주 무령왕릉을 시작으로 1973년 경주 천마총·황남대총, 1975년 안압지 발굴조사로 이어지면서 육상 발굴에서나마 조금씩 영역을 넓혀 가던 중이었다. 특히 안압지에서 통일신라시대 목선이 출토되면서 ‘수침 목재 보존 처리’가 막 시작되는 단계였다. 반면 수중에서 발굴한 신안선은 인양에서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길이 28.4m, 깊이 3.7m로 규모가 워낙 커서 당시 기술로는 배를 통째로 들어 올릴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선체 연결 부위마다 7~8㎝ 길이 철못이 박혀 있어 외판을 톱으로 해체해 인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중 발굴을 시작한 지 8년째인 1983년에서야 마지막 용골을 들어 올렸다. 수침목재 보존 처리 과정으로 신안선은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흔히들 뼈와 나무는 땅에서 쉽게 썩는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700년 전 바다에 빠진 나무배가 썩지 않고 그대로 출토된 건 이색적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흔히들 갯벌이라 불리는 개흙이 선체를 신선하게 보관하는 냉장고 역할을 해서다. 개흙이라는 머드팩 덕분에 700여년을 물속에서 온전히 살아온 셈이다. 갯벌 퇴적층은 무산소 환경이라는 특수조건을 만들어 준다. 이에 따라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피해 인자를 막아 준다. 반면 갯벌에 노출된 부분은 쉽게 부식하거나 바다 해충들의 먹잇감이 돼 훼손되거나 파손되기 쉽다. 고선박은 ‘수습→예비조사(수종 분석, 엑스레이 촬영 등)→탈염 처리→강화 처리→건조→복원’ 순으로 보존 처리한다. 수습한 선체는 표면이 건조되지 않도록 바로 포장을 한다. 이때부터 탈염장까지 옮기는 시간이 보존 처리에서 가장 중요한 ‘골든타임’이다. 목재는 표면 건조 탓에 한번 뒤틀리면 아무리 처리를 잘해도 원형을 되찾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연구자들은 보존 처리 과정에서 다양한 과학적 조사를 진행한다. 보존과학자는 예비조사에서 엑스레이나 현미경을 들여다보면서 목재가 약골인지를 밝혀 나간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손으로 누르면 마치 물먹은 스펀지처럼 표면이 눌리고 물을 뱉어 낸다. 나무의 주성분인 셀룰로스와 헤미셀룰로스가 분해되고, 내부가 물로 가득 차 포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를 보존과학에서는 ‘수침 고목재’라고 한다.탈염 처리는 유물의 염(Cl-), 즉 소금기를 제거하는 것이다. 바다나 육지나 갯벌이나 토양이나 염은 존재한다. 매장 환경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물의 염(鹽)은 암(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바다에서 나온 나무는 소금(NaCl)에 절여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나무 속 소금기를 빼는 탈염 처리를 하는데, 삼투압 원리로 물속에 담가 염이온을 서서히 뱉어 내게 한다. 처음엔 한 달 주기로 교체하다 어느 정도 지나면 3~4개월 주기로 늘리면서 선체의 표면 세척도 함께 진행한다. 수돗물 염농도와 배출된 용액의 염농도가 같아지면 탈염을 종료한다.우리나라 전통 배는 철못을 사용하지 않는데 반해 중국의 신안선은 철못 탓에 부식 피해가 심각했다. 철못에서 생성된 철산화물을 제거하고자 화학적 세척을 진행했다. 2%의 ‘EDTA-2Na’에 7일간 담가 둔다. 잔류 약품을 제거하기 위해 또다시 물에 담그기를 반복하면서 산성 농도가 안정되면 비로소 본격적인 강화 처리를 시작한다.강화 처리는 목재 세포 내에 채워진 물을 다른 고분자물질로 서서히 바꿔 목재 내부를 단단하게 하고, 그 외형을 원형 그대로 유지하는 게 목적이다. 수침 목재는 물에서 나와 다시 물에서 처리된 뒤 최종 단계에서는 물 밖에서 건조한다. 처리에 사용하는 약품 종류는 매우 다양하며, 이에 따라 처리 방법 또한 달라진다. 그중 폴리에틸렌 글라이콜(PEG)을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며, 저농도인 5%에서 고농도인 70%가 될 때까지 서서히 침투시킨다. 한 번에 투입되는 약품의 양도 약 1000㎏에 달하기 때문에 이 기간이 짧게는 4~6개월이나 걸린다. 마지막으로 건조를 위해 밖으로 나온 목재는 서서히 수분을 조절하며 상온의 습도에 이르게 하는데, 이 또한 몇 년씩 걸린다. 신안선에서 출토된 선체 편이 720여편에 이르니 보존 처리 기간만 20년, 선박 복원까지 3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보존 처리를 위해 갖춰야 할 장비도 다양하다. 약품의 용해 온도인 40~45℃를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 대형 항온수조와 보일러, 수조 내 용액을 순환시키기 위한 순환펌프, 무거운 선체를 들어 올리는 호이스트, 목재 내부의 약품 침투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중량계 등 고가 설비가 필수적이다. 최근에는 선체 건조를 위한 초대형 진공 동결건조기까지 등장했다. 그래서 수침 목재 강화처리실은 가운을 입고 유물을 처리하는 실험실 분위기가 아니라 마치 산업 현장을 방불케 한다. 1981년 신안선 목재 보존 처리를 위해 갖춘 시설은 목포 해양유물보존처리장이 됐다. 지금은 국내 유일의 대형 수침 목재 보존 처리 시설을 갖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발전했다. 수침 목재 보존 처리 전문가들 중에는 대학이나 대학원의 목재 관련 전공자들이 많다. 나무의 성질은 물론 수종 분석 능력을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현미경을 통한 해부학적 분석을 통해 수종과 분해 정도를 확인하고, 어떤 해양 천공동물과 세균의 피해를 받았는지 진단한 후 알맞은 약제와 처리 방법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안선은 대부분 중국에서 자라는 소나무인 마미송이었다. 신안선이 중국에서 건조한 선박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단서였다. 그리고 나무의 나이테로 생장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나이테가 50개 이상 남아 있는 경우 간격과 패턴을 이용한 ‘연륜연대측정법’을 쓴다. 만약 나무껍질이 남아 있다면 벌목 시기까지 알 수 있다. 요즘은 소량의 나뭇조각이라도 연대 오차 범위가 적고 더 정확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과 산소연대측정법을 이용한다. 선체에서 출수된 목간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를 잘라 먹으로 글을 쓴 문서다. 주로 대형 선박 화물 운송에 쓰이는데, 배에서 출토된 목간 대부분은 택배 운송장이라고 보면 된다.판독을 위해 적외선 촬영을 하는데, 가시광선으로 보이지 않아도 파장이 긴 적외선을 쬐면 숨겨진 글씨가 나타나기도 한다. 신안선에서는 ‘지치삼년’(至治三年)이라고 적힌 목간이 발견됐다. 선박의 출항 시기가 1323년이었음을 알 수 있었고, 도교 도후쿠지와 후쿠오카의 조자쿠앙이 기록된 목간으로 화물의 목적지가 일본이었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신안선 이후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고선박은 14척에 이른다. 갯벌 속에서 아직도 인양을 기다리는 선박도 4척이나 있다. 국내에서 시설 규모가 제일 크다 해도 배 한 척만 들어가면 다음 배는 탈염장에서 기다리기 때문에 부지, 시설, 인력, 장비, 예산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최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40년간 수침 목재 보존 처리 기술력을 담은 ‘해양 출수유물 보존 처리 지침서’를 발간했다. 스웨덴, 독일, 영국, 중국, 일본 등 해외 고선박 보존 처리 연구진들과 학술적 교류를 하고 있다. 신안선과 고선박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면 목포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를 방문하면 된다. 많은 자료는 물론이거니와 복원한 고선박을 직접 볼 수 있다. 글 이보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사진 문화재청
  • 경기도의회 교육행정위, 단원고 기억교실 복원 ‘4.16민주시민교육원’ 현장방문 실시

    경기도의회 교육행정위, 단원고 기억교실 복원 ‘4.16민주시민교육원’ 현장방문 실시

    경기도의회 교육행정위원회(위원장 남종섭·더불어민주당·용인4)는 12일 오전 안산시 단원구 소재 세월호 추모 ‘4.16민주시민교육원’을 방문하여 전명선 원장으로부터 시설운영 계획을 청취하고 교육프로그램 운영과 시설지원 방안을 심도있게 논의했다. 이 자리에는 권정선 부위원장(더불어민주당·부천5)을 방문단장으로 배수문(민주당·과천)·박옥분(민주당·수원2)·고은정(민주당·고양9)·성준모(민주당·안산5)·전승희(민주당·비례) 의원이 참석해 세월호 참사를 통한 교훈과 의미를 되새기는 민주시민 교육의 장이 마련된 데 깊은 관심을 표했다. 세월호 참사 7주기를 맞아 지난달 12일 개원한 ‘4.16민주시민교육원’은 단원고 4.16 기억교실 보존과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민주시민으로의 성장을 돕기 위해 건립됐으며, 단원고와 인접한 안산교육지원청을 리모델링해 연면적 4840㎡,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 2개동으로 구성했다. 세부적으로 미래희망관은 다목적실과 대형 교육실(2곳), 중·소형 교육실(6곳)로 구성돼 전시회, 민주시민 교육의 장으로 운영될 예정이며, 기억관은 단원고 2학년 교실(10개 반)과 교무실을 원형대로 옮겨와 단원고 2학년 학생 250명과 교사 11명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조성됐다. 권정선 부위원장은 “4.16민주시민교육원은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공감하는 의미있는 장소”라며 “프로그램 운영과 인력 확충 등 미진한 부분을 보완해 민주시민역량 함양을 위한 희망의 공간으로서 역할을 다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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