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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3)대원위대감의 생각 (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3)대원위대감의 생각 (下)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옥양봉 절골에 있던 가야사 터에다 아버지의 무덤을 옮겨쓴 지 12년 만에 둘째아들 명복을 낳은 것이 풍수설의 힘이라는 증거는 없다.또한 명복이 태어난 지 12년 뒤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것도 풍수설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라는 증거도 없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대원위대감의 그 해괴한 행동이 명복을 왕이 되게 했다고 여겼다.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민중들은 오래된 전통과 관습을 따르게 마련인가보다.풍수지리설은 조선 민중들에게 부정할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꿈이었다. ●백성들, 부친묘 옮겨서 덕본 것이라 믿어 이하응이란 파락호(破落戶),궁도령(宮道令)의 둘째 자식이 왕위에 오르고,아비는 대원위대감이 되는 좀체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을 두고 민중들은 마치 자신들의 옹색한 신세가 훤히 펴지기라도 한 듯이 좋아했다.대리만족의 한 극치였다. 대원위대감은 세상의 그런 민심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집권 초기부터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민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당색과 문벌을 초월한 인재 등용,탐관오리의 숙청,양반 토호의 면세토지 조사와 세금의 징수,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것,복식의 간소화 등 후기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폐단들을 혁명적으로 개혁해 나갔다. 집권 초반의 개혁 정치가 성과를 거두자 이를 발판으로 삼아 쇠미해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경복궁 중건을 강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경복궁 짓는 일로 대원위대감은 그동안 쌓아온 정치적 성과와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고,사회 모든 부문에서 지탄받기에 이르렀지만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그는 난세의 정략가답게 저돌적으로 일을 밀어붙였다. 그의 저돌성에 희생된 대표적인 경우가 속리산 법주사에 모셔져 있던 청동 미륵장륙상을 헐어다 녹여서 건축자재로 사용하게 한 것이었다. 그의 정치 역정에는 대외적 위협과 난관도 만만치 않았다.천주교와 관련된 외세들과의 갈등이었다. ●정권유지 위해 천주교 탄압으로 급선회 집권 초기 그는 천주교에 대해 나름의 이해를 보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그랬던 그가 장기간에 걸쳐 천주교 박해를 감행한 것은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 감춰져 있었다. 대외적인 첫 위협은 러시아였다.두만강이 러시아와의 국경으로 바뀌게 되자 러시아의 통상요구는 대원위대감을 비롯,정부고관들에게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다. 이때 천주교인이자 정부 관리인 김면호(金勉浩),홍봉주(洪鳳周) 등이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물리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고 대원군은 이를 정치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분위기는 승지를 지낸 남종삼(南鍾三)이 대원군으로 하여금 한불조약(韓佛條約)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는 정책을 펴도록 건의하기까지 이르렀다.숨막히는 긴장의 나날이었다. 이같은 정책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체류중이던 베르뇌(Berneux) 주교와의 만남을 주선하게 되었고,그때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만 있다면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어 천주교인들은 자못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1866년 1월에 북경사신이 보내온 편지가 도착했다.청나라는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이 분위기에 편승한 국내의 반 대원군 세력들은 대원군이 천주교와 불순한 정치적 흥정을 한다며 공세를 취했고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껴 천주교 탄압 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된 것이다. 1866년 2월 베르뇌를 비롯해 홍봉주,남종삼,김면호를 포함한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서울과 그밖의 여러 지역에서 체포되어 순교했는데,이때 베르뇌,다블뤼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들은 서울 새남터와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프랑스 군대와 대원위대감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대원위대감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인들을 외국의 적들을 불러들이는 무리로 규정하여 거듭되는 박해로 맞섰다. 서양오랑캐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내통하는 천주교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해안지방으로 정해졌다.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이 계속되자 프랑스는 대원위대감을 기필코 굴복시켜 그들이 겪은 수모를 되갚아주겠다며 방법을 모색했다. 그때 프랑스 신부 페롱(Feron)이 묘안을 내놓았다.그는 1866년 8월 프랑스 제독 로즈가 조선을 공격할 때 뱃길을 안내했던 인물이다.또한 그는 조선의 사정에도 밝아서 대원위대감을 꺾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그는 독일의 무역상인인 오페르트(Oppert,E.J)라는 인물을 끌어들일 궁리를 했다.오페르트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서 모두 실패한 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페롱은 오페르트를 책임자로 하여 대원군과 정치적 교섭을 벌이면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묘책을 마련했다. 이 묘책을 강구하는 데는 조선인 천주교인도 가담했다.묘책이란 다름 아닌 대원위대감의 아버지 남연군이 묻혀 있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사 옛터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이었다. 묘를 파헤쳐 시체와 부장품을 미끼로 내걸고 대원군과 통상문제,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흥정하자는 것이었다.조선은 조상의 무덤에 대하여 특별한 관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역이용하자는 극단적인 방법을 내세웠다. 오페르트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그는 자금을 담당할 인물로 미국인 젠킨스를 끌어들였다.통상교섭이 성공하면 이익을 배당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도굴단이 결정되었다.오페르트,젠킨스,페롱,선장 묄레,조선인 안내자 2명,유럽·필리핀·중국인 선원 등 모두 140명으로 이루어졌다.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에 실패 1868년 5월 차이나(China)호,그레타(Greta)호 등 1000t급 기선 두 척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무기와 도굴용 장비를 구입한 다음,5월10일 충남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했다. 도굴단은 자신들을 러시아인이라고 말하면서 조선인의 안내를 받아 남연군 묘소로 직행했다.덕산 군청을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는가 하면 민가들을 습격하면서 고의적인 난동을 부렸다. 절골의 남연군묘까지 온 그들은 도굴을 시작했으나 묘광이 워낙 견고하여 그들이 준비해온 도구로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대원위대감은 마치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측이나 했던 듯 성능이 매우 좋은 폭약을 사용하지 않는 한 묘를 파헤치기 어렵도록 만들어 둔 것이었다. 결국 남연군묘 도굴은 실패했다.오페르트는 돌아가는 길에 인천 앞 영종도에서 프랑스 제독 알리망 명의로 된 협박장을 대원위대감에게 보냈다.남연군의 시체와 부장품이 그들 손아귀에 있으니 교섭에 응하라는 내용이었다.그러나 이 협박문을 접수한 영종첨사는 도굴행위가 인간의 짓이 아니므로 대응할 가치가 없다며 협박문을 되돌려주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젠킨스는 같은 미국인에 의하여 파렴치범으로 고발당하였고,페롱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당하였다. ●대원군의 박해로 8000명 이상 순교 대원위대감의 분노는 컸다.조선은 조상숭배 사상이 유별하여 묘를 신성시하는 데다,국왕의 할아버지며 자신의 아버지 묘를 파헤쳤으니 그의 생각은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대원위대감은 덕산군 내포지방 천주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했다. 내포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가 전파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부근의 지방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렇듯 대원군에 의하여 감행된,이른바 병인박해는 6년에 걸쳐 8000명 이상이 순교하는 불행을 낳았다. 한 정치가의 무모한 권력욕구가 불러온 결과는 조선의 세계사 합류를 지연시켜 근대화의 길을 막음으로써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극을 초래했고,나쁜 지도자로서의 선례가 되었다. 그같은 대원위대감은 1871년 무슨 생각에선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서원산 남쪽 기슭에 자신이 불태웠던 가야사의 3층석탑을 옮기면서 보덕사(報德寺)라는 절을 지었다.아들이 보위에 올랐으므로 보은(報恩)의 뜻으로 절을 지은 대원위대감의 생각은 오늘날 한국 정치지도자들처럼 혼란스럽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3)대원위대감의 생각 (下)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옥양봉 절골에 있던 가야사 터에다 아버지의 무덤을 옮겨쓴 지 12년 만에 둘째아들 명복을 낳은 것이 풍수설의 힘이라는 증거는 없다.또한 명복이 태어난 지 12년 뒤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것도 풍수설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라는 증거도 없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대원위대감의 그 해괴한 행동이 명복을 왕이 되게 했다고 여겼다.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민중들은 오래된 전통과 관습을 따르게 마련인가보다.풍수지리설은 조선 민중들에게 부정할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꿈이었다. ●백성들, 부친묘 옮겨서 덕본 것이라 믿어 이하응이란 파락호(破落戶),궁도령(宮道令)의 둘째 자식이 왕위에 오르고,아비는 대원위대감이 되는 좀체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을 두고 민중들은 마치 자신들의 옹색한 신세가 훤히 펴지기라도 한 듯이 좋아했다.대리만족의 한 극치였다. 대원위대감은 세상의 그런 민심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집권 초기부터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민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당색과 문벌을 초월한 인재 등용,탐관오리의 숙청,양반 토호의 면세토지 조사와 세금의 징수,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것,복식의 간소화 등 후기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폐단들을 혁명적으로 개혁해 나갔다. 집권 초반의 개혁 정치가 성과를 거두자 이를 발판으로 삼아 쇠미해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경복궁 중건을 강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경복궁 짓는 일로 대원위대감은 그동안 쌓아온 정치적 성과와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고,사회 모든 부문에서 지탄받기에 이르렀지만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그는 난세의 정략가답게 저돌적으로 일을 밀어붙였다. 그의 저돌성에 희생된 대표적인 경우가 속리산 법주사에 모셔져 있던 청동 미륵장륙상을 헐어다 녹여서 건축자재로 사용하게 한 것이었다. 그의 정치 역정에는 대외적 위협과 난관도 만만치 않았다.천주교와 관련된 외세들과의 갈등이었다. ●정권유지 위해 천주교 탄압으로 급선회 집권 초기 그는 천주교에 대해 나름의 이해를 보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그랬던 그가 장기간에 걸쳐 천주교 박해를 감행한 것은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 감춰져 있었다. 대외적인 첫 위협은 러시아였다.두만강이 러시아와의 국경으로 바뀌게 되자 러시아의 통상요구는 대원위대감을 비롯,정부고관들에게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다. 이때 천주교인이자 정부 관리인 김면호(金勉浩),홍봉주(洪鳳周) 등이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물리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고 대원군은 이를 정치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분위기는 승지를 지낸 남종삼(南鍾三)이 대원군으로 하여금 한불조약(韓佛條約)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는 정책을 펴도록 건의하기까지 이르렀다.숨막히는 긴장의 나날이었다. 이같은 정책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체류중이던 베르뇌(Berneux) 주교와의 만남을 주선하게 되었고,그때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만 있다면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어 천주교인들은 자못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1866년 1월에 북경사신이 보내온 편지가 도착했다.청나라는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이 분위기에 편승한 국내의 반 대원군 세력들은 대원군이 천주교와 불순한 정치적 흥정을 한다며 공세를 취했고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껴 천주교 탄압 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된 것이다. 1866년 2월 베르뇌를 비롯해 홍봉주,남종삼,김면호를 포함한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서울과 그밖의 여러 지역에서 체포되어 순교했는데,이때 베르뇌,다블뤼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들은 서울 새남터와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프랑스 군대와 대원위대감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대원위대감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인들을 외국의 적들을 불러들이는 무리로 규정하여 거듭되는 박해로 맞섰다. 서양오랑캐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내통하는 천주교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해안지방으로 정해졌다.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이 계속되자 프랑스는 대원위대감을 기필코 굴복시켜 그들이 겪은 수모를 되갚아주겠다며 방법을 모색했다. 그때 프랑스 신부 페롱(Feron)이 묘안을 내놓았다.그는 1866년 8월 프랑스 제독 로즈가 조선을 공격할 때 뱃길을 안내했던 인물이다.또한 그는 조선의 사정에도 밝아서 대원위대감을 꺾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그는 독일의 무역상인인 오페르트(Oppert,E.J)라는 인물을 끌어들일 궁리를 했다.오페르트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서 모두 실패한 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페롱은 오페르트를 책임자로 하여 대원군과 정치적 교섭을 벌이면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묘책을 마련했다. 이 묘책을 강구하는 데는 조선인 천주교인도 가담했다.묘책이란 다름 아닌 대원위대감의 아버지 남연군이 묻혀 있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사 옛터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이었다. 묘를 파헤쳐 시체와 부장품을 미끼로 내걸고 대원군과 통상문제,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흥정하자는 것이었다.조선은 조상의 무덤에 대하여 특별한 관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역이용하자는 극단적인 방법을 내세웠다. 오페르트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그는 자금을 담당할 인물로 미국인 젠킨스를 끌어들였다.통상교섭이 성공하면 이익을 배당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도굴단이 결정되었다.오페르트,젠킨스,페롱,선장 묄레,조선인 안내자 2명,유럽·필리핀·중국인 선원 등 모두 140명으로 이루어졌다.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에 실패 1868년 5월 차이나(China)호,그레타(Greta)호 등 1000t급 기선 두 척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무기와 도굴용 장비를 구입한 다음,5월10일 충남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했다. 도굴단은 자신들을 러시아인이라고 말하면서 조선인의 안내를 받아 남연군 묘소로 직행했다.덕산 군청을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는가 하면 민가들을 습격하면서 고의적인 난동을 부렸다. 절골의 남연군묘까지 온 그들은 도굴을 시작했으나 묘광이 워낙 견고하여 그들이 준비해온 도구로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대원위대감은 마치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측이나 했던 듯 성능이 매우 좋은 폭약을 사용하지 않는 한 묘를 파헤치기 어렵도록 만들어 둔 것이었다. 결국 남연군묘 도굴은 실패했다.오페르트는 돌아가는 길에 인천 앞 영종도에서 프랑스 제독 알리망 명의로 된 협박장을 대원위대감에게 보냈다.남연군의 시체와 부장품이 그들 손아귀에 있으니 교섭에 응하라는 내용이었다.그러나 이 협박문을 접수한 영종첨사는 도굴행위가 인간의 짓이 아니므로 대응할 가치가 없다며 협박문을 되돌려주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젠킨스는 같은 미국인에 의하여 파렴치범으로 고발당하였고,페롱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당하였다. ●대원군의 박해로 8000명 이상 순교 대원위대감의 분노는 컸다.조선은 조상숭배 사상이 유별하여 묘를 신성시하는 데다,국왕의 할아버지며 자신의 아버지 묘를 파헤쳤으니 그의 생각은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대원위대감은 덕산군 내포지방 천주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했다. 내포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가 전파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부근의 지방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렇듯 대원군에 의하여 감행된,이른바 병인박해는 6년에 걸쳐 8000명 이상이 순교하는 불행을 낳았다. 한 정치가의 무모한 권력욕구가 불러온 결과는 조선의 세계사 합류를 지연시켜 근대화의 길을 막음으로써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극을 초래했고,나쁜 지도자로서의 선례가 되었다. 그같은 대원위대감은 1871년 무슨 생각에선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서원산 남쪽 기슭에 자신이 불태웠던 가야사의 3층석탑을 옮기면서 보덕사(報德寺)라는 절을 지었다.아들이 보위에 올랐으므로 보은(報恩)의 뜻으로 절을 지은 대원위대감의 생각은 오늘날 한국 정치지도자들처럼 혼란스럽다.˝
  • 남미·EU, FTA 10월 체결 가능성

    |멕시코시티 연합|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포함된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과 유럽연합(EU)간 자유무역협정(FTA)이 올 10월까지 체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같은 전망은 브라질 등의 문제 제기로 미국을 주축으로 한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창설 협상이 크게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라 주목된다. 14일 브라질 언론에 따르면 헤지스 아슬라니안 브라질 외무부 국제협상국 사무총장은 최근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된 메르코수르-EU 양 블록간 실무자 회의 개최 후 “원산지 규정,위생검역,세관절차,협력분야 등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고 밝혔다.아슬라니안 사무총장은 “이번 회의의 주요 성과 중 하나는 3년간 협상 끝에 EU가 드디어 오는 4월15일 개최되는 양자 회의에서 농산물 분야에 대한 제안서 초안을 내놓을 계획”이라며 “이는 오는 10월 FTA 체결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2)대원위대감의 생각 (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2)대원위대감의 생각 (上)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高宗,1852∼1919)의 아버지 이하응(李昰應)을 두고 세간에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 불렀다. 그는 조선후기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쇠락한 왕권을 강화해 프랑스,독일,미국,일본,청나라,러시아등 19세기 세계 열강의 침략에 맞설 힘을 기르며 조선을 중흥시키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던 인물이다. 오늘은 그 대원위대감이 왜 그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결과는 어떻게 끝났는지,파란만장한 그의 생애 이면에 감춰진,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의 한 증거를 찾아서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로 간다. 예산(禮山)은 유서깊은 고장이다.백제시대에는 오산현(五山縣)이라 불렀는데 신라에 정복당한 뒤 고산(高山)으로 바뀌었으며,예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고려 태조2년의 일이었다. 왕건은 견훤이 다스리던 후백제를 정복한 뒤 이곳을 다스리려 했으나 민중은 왕건의 통치에 순응하지 않았다.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미 신라에 정복당한 뒤 100년이 넘도록 신라의 강권통치에 대를 물려 저항해왔던 백제유민들이기 때문에 백제가 망한 지 2세기가 지난 후에 견훤이 후백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백제 유민들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왕건에 대해서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인들의 핏속에 흐르는 자긍심과 백제문화에 대한 뿌리깊은 정신의 힘때문이었다. 이 정신은 곧 현대사회에서도 충청·전라도 사람들의 기질,즉 겉은 부드럽지만 안은 강철처럼 단단하고,문학과 예술 그리고 아름다움의 근원을 지향하는 삶으로 드러나고 있다. 왕건은 이곳 사람들의 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정복자로서의 권위나 자신감이 아닌,존경과 화해의 마음으로 새로운 이름을 선물하고자 했다.충절과 예의의 고장임을 기리기 위해 예산이란 새 이름을 정하고 민중의 뜻을 물었다.이곳 사람들도 더는 거부하지 않고 새롭게 시작된 고려왕조에 동의해주었다. 그 후 대흥(大興)과 덕산(德山)을 합쳐 지금의 예산군이 된 것은 1914년부터다.오늘의 여행 목적지 예산군 덕산면(德山面) 상가리(象伽里)에는 대원위대감의 야망과,권력 장악을 위한 고뇌와 갈등,정치의 권모술수와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새로운 차원에서 재조명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와 문화적 논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만약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이 증거들을 완벽하게 없애버리고 싶을 것이다.그리고 역사를 향하여 그 사실들을 부정할 것이다.한국의 정치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거짓말과 책임회피 증후군으로 볼 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하지만 어쩌랴,누구도 자신의 죄를 제 손으로 지울 수는 없으니. ●‘명당’ 가야사 품은 옥양봉, 기도처로 이름나 덕산 들녘에서 서북 방향을 바라보면 예산군과 서산군 경계 쯤에 산맥이 걸쳐 있다.가야산(伽倻山)이다.들길을 지나 상가리 쪽으로 다가서면 맞은편에 잘 생긴 산 하나가 보이고,오른쪽으로도 얌전한 산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맞은편 산은 옥양(玉陽)산이고,오른쪽 산은 서원(書院)산이다.두 산 모두 가야산이 거느리고 있는 줄기다. 해인사가 깃들어 있는 산도 가야산이라 부르는데,경상도와 충청도에 있는 가야산은 모두 같은 뜻을 지녔다.즉 가야(伽倻,迦倻)라는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 gaya를 음역하여 표기한 것인데,흰코끼리를 의미하는 말이다. 석가모니가 도를 이룬 곳을 부다가야(Budhagaya)라고 부르는 것과 맥이 통하는 상징어다.이 가야산에는 일찍이 6세기 후반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이 북쪽 자락 해발 200m 가량의 능선 암벽에 새겨져 있기도 해서 온 산이 불교신앙의 성지처럼 숭배되어 왔다. 가야산 남쪽 기슭이 되는 옥양봉 아래에 가야사(伽耶寺)라는 절이 있었다.이곳에는 금탑(金塔)으로 부르는 철첨석탑(鐵尖石塔)이 있었고 탑 사면에는 석감(石龕)이 있어 각각 석불이 봉안되었을 만큼 빼어난 작품이었는데 백제 불교 미술의 정교함과 깊은 신앙심이 깃든 걸작이었다고 한다. 또한 가야사에는 예부터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매우 흥미있는 풍수설이 전해져 왔다.가야사 대웅전 터에서 왕손(王孫)이 생겨나리라는 풍수지리설이었다.세간에서는 절을 허물어내고 그 자리에 묘를 쓰면 반드시 왕손을 낳게 된다는 풍수설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하지만 감히 누구도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는 못하고,대신 훌륭한 자식을 점지해달라는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옥양봉에 이르는 계곡은 펀펀하면서도 깊다.그래서 그런지 옥양봉 계곡에는 한때 1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사찰들로 꽉 차서 절골이라고도 불렀을 만큼 승려들의 목탁소리와 범종소리,향 내음과 독경 소리가 일년 사철 끊이질 않았다.상가리(象伽里)라는 이름이 그래서 붙여졌던 것이다. ●구걸로 어린시절 연명한 ‘권력의 화신’ 이하응 이같은 솔깃하고 엄청난 비밀이 깃든 것처럼 느껴질수도 있는 풍수설을 은밀하게 새기면서 가야사 주변을 여러 해 동안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이하응이란 청년이었다.올때마다 동행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름난 지관(地官)이었다.그는 옥양봉,서원산,가야산 정상 어느 한곳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살피고 돌아다녔다.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전혀 얼굴이 알려진 자도 아니었거니와 행색도 남루했고 늘 빈털터리였다. 이하응은 유아기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후기의 왕족이다.이름은 구(球),사도세자의 서자로서 정조(正祖)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서 남연군(南延君)에 봉해졌다.1771년(영조 47년) 양부 은신군이 정적의 모함으로 작위를 삭탈당한 뒤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변사하자 남연군도 불우한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1821년 수릉관(守陵官)이란 말단직을 지내다가 쓸쓸하게 죽었다.이하응은 남연군이 죽던 해에 겨우 세 살짜리 어린 아이였었다. 이하응의 유년과 청년 시절은 지독하게 불우했다.이름뿐인 왕족으로서 구걸,비웃음과 온갖 능멸로 양식을 삼았다.수모,고뇌,방랑으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암울하고 억울한 세월 속에서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을 불태웠다.집념의 핵심은 목숨을 건 타협과 거래였다. 긴 방랑생활 중에 이하응은 가야사의 풍수설을 알게 되었다.딱히 할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심심풀이 삼아 가야사와 가야산 일대를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풍수설의 내용을 음미해보았다.왕손을 낳을 수만 있다면 가야사를 불태워버리는 일쯤은 얼마든지 감행할 자신이 있었다.수차례에 걸친 답사와 계획 끝에 결심을 굳혔다. 그의 나이 21세 때인 1840년(헌종 6년) 마침내 목숨을 건 모험에 돌입했다.부랑배들을 이용하여 가야사에 기거하는 승려들을 밖으로 유인해 낸 다음 절에다 불을 질렀다.목조 건물은 한밤 중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 무렵 조선사회는 이하응의 행동과 같은 짓거리들이 크게 유행했다. ●남연군묘 이장뒤 얻은 둘째 명복이 훗날 고종 전국 곳곳의 사찰이 불타고,불탄 자리에 무덤을 짓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대표적인 예는 신라 선문9산의 하나인 경남 창원 봉림사,경기도 양주 회암사,전라도 흥덕 연기사,경남 산청 단속사를 비롯해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자리로 알려진 사찰들이 유생들에 의하여 불탔다. 이같은 시대적 추세에 따라 이하응도 그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가야사 법당터에다 이장했다.누구도 이를 비난하거나 저지하지 못했다. 그런 다음 해인 1841년 그는 흥선정(興宣正),1843년에는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1846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어 벼슬의 맛을 보기 시작했다. 남연군의 묘를 옮겨 쓴지 12년만인 1852년 이하응은 둘째아들을 보았고,그로부터 다시 11년 뒤인 1863년 둘째아들 명복(命福)이 조선 제 26대 국왕인 고종(高宗)이 되고,이하응은 마침내 대원위대감이 되어 모험에 찬 정치도박이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2)대원위대감의 생각 (上)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高宗,1852∼1919)의 아버지 이하응(李昰應)을 두고 세간에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 불렀다. 그는 조선후기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쇠락한 왕권을 강화해 프랑스,독일,미국,일본,청나라,러시아등 19세기 세계 열강의 침략에 맞설 힘을 기르며 조선을 중흥시키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던 인물이다. 오늘은 그 대원위대감이 왜 그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결과는 어떻게 끝났는지,파란만장한 그의 생애 이면에 감춰진,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의 한 증거를 찾아서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로 간다. 예산(禮山)은 유서깊은 고장이다.백제시대에는 오산현(五山縣)이라 불렀는데 신라에 정복당한 뒤 고산(高山)으로 바뀌었으며,예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고려 태조2년의 일이었다. 왕건은 견훤이 다스리던 후백제를 정복한 뒤 이곳을 다스리려 했으나 민중은 왕건의 통치에 순응하지 않았다.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미 신라에 정복당한 뒤 100년이 넘도록 신라의 강권통치에 대를 물려 저항해왔던 백제유민들이기 때문에 백제가 망한 지 2세기가 지난 후에 견훤이 후백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백제 유민들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왕건에 대해서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인들의 핏속에 흐르는 자긍심과 백제문화에 대한 뿌리깊은 정신의 힘때문이었다. 이 정신은 곧 현대사회에서도 충청·전라도 사람들의 기질,즉 겉은 부드럽지만 안은 강철처럼 단단하고,문학과 예술 그리고 아름다움의 근원을 지향하는 삶으로 드러나고 있다. 왕건은 이곳 사람들의 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정복자로서의 권위나 자신감이 아닌,존경과 화해의 마음으로 새로운 이름을 선물하고자 했다.충절과 예의의 고장임을 기리기 위해 예산이란 새 이름을 정하고 민중의 뜻을 물었다.이곳 사람들도 더는 거부하지 않고 새롭게 시작된 고려왕조에 동의해주었다. 그 후 대흥(大興)과 덕산(德山)을 합쳐 지금의 예산군이 된 것은 1914년부터다.오늘의 여행 목적지 예산군 덕산면(德山面) 상가리(象伽里)에는 대원위대감의 야망과,권력 장악을 위한 고뇌와 갈등,정치의 권모술수와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새로운 차원에서 재조명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와 문화적 논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만약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이 증거들을 완벽하게 없애버리고 싶을 것이다.그리고 역사를 향하여 그 사실들을 부정할 것이다.한국의 정치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거짓말과 책임회피 증후군으로 볼 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하지만 어쩌랴,누구도 자신의 죄를 제 손으로 지울 수는 없으니. ●‘명당’ 가야사 품은 옥양봉, 기도처로 이름나 덕산 들녘에서 서북 방향을 바라보면 예산군과 서산군 경계 쯤에 산맥이 걸쳐 있다.가야산(伽倻山)이다.들길을 지나 상가리 쪽으로 다가서면 맞은편에 잘 생긴 산 하나가 보이고,오른쪽으로도 얌전한 산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맞은편 산은 옥양(玉陽)산이고,오른쪽 산은 서원(書院)산이다.두 산 모두 가야산이 거느리고 있는 줄기다. 해인사가 깃들어 있는 산도 가야산이라 부르는데,경상도와 충청도에 있는 가야산은 모두 같은 뜻을 지녔다.즉 가야(伽倻,迦倻)라는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 gaya를 음역하여 표기한 것인데,흰코끼리를 의미하는 말이다. 석가모니가 도를 이룬 곳을 부다가야(Budhagaya)라고 부르는 것과 맥이 통하는 상징어다.이 가야산에는 일찍이 6세기 후반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이 북쪽 자락 해발 200m 가량의 능선 암벽에 새겨져 있기도 해서 온 산이 불교신앙의 성지처럼 숭배되어 왔다. 가야산 남쪽 기슭이 되는 옥양봉 아래에 가야사(伽耶寺)라는 절이 있었다.이곳에는 금탑(金塔)으로 부르는 철첨석탑(鐵尖石塔)이 있었고 탑 사면에는 석감(石龕)이 있어 각각 석불이 봉안되었을 만큼 빼어난 작품이었는데 백제 불교 미술의 정교함과 깊은 신앙심이 깃든 걸작이었다고 한다. 또한 가야사에는 예부터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매우 흥미있는 풍수설이 전해져 왔다.가야사 대웅전 터에서 왕손(王孫)이 생겨나리라는 풍수지리설이었다.세간에서는 절을 허물어내고 그 자리에 묘를 쓰면 반드시 왕손을 낳게 된다는 풍수설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하지만 감히 누구도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는 못하고,대신 훌륭한 자식을 점지해달라는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옥양봉에 이르는 계곡은 펀펀하면서도 깊다.그래서 그런지 옥양봉 계곡에는 한때 1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사찰들로 꽉 차서 절골이라고도 불렀을 만큼 승려들의 목탁소리와 범종소리,향 내음과 독경 소리가 일년 사철 끊이질 않았다.상가리(象伽里)라는 이름이 그래서 붙여졌던 것이다. ●구걸로 어린시절 연명한 ‘권력의 화신’ 이하응 이같은 솔깃하고 엄청난 비밀이 깃든 것처럼 느껴질수도 있는 풍수설을 은밀하게 새기면서 가야사 주변을 여러 해 동안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이하응이란 청년이었다.올때마다 동행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름난 지관(地官)이었다.그는 옥양봉,서원산,가야산 정상 어느 한곳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살피고 돌아다녔다.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전혀 얼굴이 알려진 자도 아니었거니와 행색도 남루했고 늘 빈털터리였다. 이하응은 유아기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후기의 왕족이다.이름은 구(球),사도세자의 서자로서 정조(正祖)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서 남연군(南延君)에 봉해졌다.1771년(영조 47년) 양부 은신군이 정적의 모함으로 작위를 삭탈당한 뒤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변사하자 남연군도 불우한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1821년 수릉관(守陵官)이란 말단직을 지내다가 쓸쓸하게 죽었다.이하응은 남연군이 죽던 해에 겨우 세 살짜리 어린 아이였었다. 이하응의 유년과 청년 시절은 지독하게 불우했다.이름뿐인 왕족으로서 구걸,비웃음과 온갖 능멸로 양식을 삼았다.수모,고뇌,방랑으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암울하고 억울한 세월 속에서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을 불태웠다.집념의 핵심은 목숨을 건 타협과 거래였다. 긴 방랑생활 중에 이하응은 가야사의 풍수설을 알게 되었다.딱히 할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심심풀이 삼아 가야사와 가야산 일대를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풍수설의 내용을 음미해보았다.왕손을 낳을 수만 있다면 가야사를 불태워버리는 일쯤은 얼마든지 감행할 자신이 있었다.수차례에 걸친 답사와 계획 끝에 결심을 굳혔다. 그의 나이 21세 때인 1840년(헌종 6년) 마침내 목숨을 건 모험에 돌입했다.부랑배들을 이용하여 가야사에 기거하는 승려들을 밖으로 유인해 낸 다음 절에다 불을 질렀다.목조 건물은 한밤 중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 무렵 조선사회는 이하응의 행동과 같은 짓거리들이 크게 유행했다. ●남연군묘 이장뒤 얻은 둘째 명복이 훗날 고종 전국 곳곳의 사찰이 불타고,불탄 자리에 무덤을 짓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대표적인 예는 신라 선문9산의 하나인 경남 창원 봉림사,경기도 양주 회암사,전라도 흥덕 연기사,경남 산청 단속사를 비롯해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자리로 알려진 사찰들이 유생들에 의하여 불탔다. 이같은 시대적 추세에 따라 이하응도 그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가야사 법당터에다 이장했다.누구도 이를 비난하거나 저지하지 못했다. 그런 다음 해인 1841년 그는 흥선정(興宣正),1843년에는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1846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어 벼슬의 맛을 보기 시작했다. 남연군의 묘를 옮겨 쓴지 12년만인 1852년 이하응은 둘째아들을 보았고,그로부터 다시 11년 뒤인 1863년 둘째아들 명복(命福)이 조선 제 26대 국왕인 고종(高宗)이 되고,이하응은 마침내 대원위대감이 되어 모험에 찬 정치도박이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 [국제플러스] 한국 스팸메일 생산 4위 불명예

    한국이 전 세계에서 스팸메일을 양산하는 국가순위에서 4위를 차지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2일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에 따르면 컴퓨터 보안업체 소포스가 지난 2월 중순 이틀간 수신된 스팸메일의 원산지를 분석한 결과,한국이 4번째로 스팸메일을 많이 ‘날리는’ 국가에 올랐다.부동의 1위는 미국으로 조사기간 동안 생산된 스팸메일의 56.7%를 양산했다.이어 캐나다가 6.8%로 2위를 차지했고,중국이 6.2%로 3위에 올랐다.˝
  • 박물관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성혜영 지음

    박물관 하면 우리는 막연히 교육적이고 문화적인 것을 떠올린다.그렇기에 박물관은 왠지 껄끄럽고 만만찮은 공간으로 다가온다.그러나 박물관은 단순히 머리 속에 추상으로 군림하는 고급문화의 장이 아니다.박물관에는 우리의 지난 삶의 구체적 흔적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그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숲은 시공간은 다르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박물관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성혜영 지음,휴머니스트 펴냄)는 박물관학을 전공한 저자가 박물관과 나눈 일종의 대화록이다. 저자는 박제된 유물들의 무덤에 불과했던 지난 시대의 박물관을 우리 삶 속에 살아있는 소통의 마당으로 불러내기 위해 박물관에 말을 걸고 이야기를 끌어낸다. ●박물관의 기원이자 어원 ‘무제이온’ 책은 먼저 진화를 거듭해온 박물관의 역사부터 살핀다.그리스 무제이온 언덕의 흔적을 통해 박물관의 기원을 더듬어보는 것을 시작으로 대영박물관 등 유럽 각국의 국립 박물관을 순례한다.박물관(museum)의 어원인 무제이온(mouseion)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문예·음악·학술을 관장하는 아홉명의 뮤즈 여신에게 바쳐진 신전을 일컫는 말.그 제례에는 회화와 조각품들이 헌정됐고 온갖 공연이 올려졌다.당시의 학문과 예술의 성과들이 집결됐던 무제이온을 오늘날 박물관의 기원으로 삼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19세기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역사는 문명을 창조했지만 침략자는 문화재를 약탈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인류 문화의 보고’ 대영박물관은 거대한 ‘약탈 전시관’이요 ‘문화제국주의의 신전’이다. ●대영박물관 ‘엘긴 마블스’ 반환논쟁 한창 저자는 대영박물관을 둘러보며 제국의 빛과 그늘을 읽는다.대영박물관은 1753년에 문을 연 세계 최초의 공공 박물관이다.스페인 무적함대와의 해전을 승리로 이끈 1588년 이래 영국은 세계의 패권을 쥐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자리잡아 갔다.제국주의 정복전쟁은 곧 문화재 전쟁이라 불릴 만큼 세계 각지의 유물은 전승국의 전리품이 됐다.그 최대의 피해자는 약소국으로 전락한 이집트,그리스 등 옛 문명국이었다.“대영박물관에 진짜 영국제는 수위밖에 없다.”는 우스갯소리는 그런 정황을 잘 말해준다. 약탈 유물 중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문화재 반환 논쟁이 한창인 ‘엘긴 마블스’다.이것은 원래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 조각상이다.현재 그리스 정부는 엘긴 마블스의 반환을 위해 그동안 문제점으로 지적됐던 보존·전시기술을 보강하는 한편 약탈 문화재의 원산국 반환이라는 국제여론을 조성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특히 정치인보다 영화배우로 더 유명한 멜리나 메르쿠리는 엘긴 마블스를 되찾는 데 일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영박물관에 필적하는 소장품을 지닌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헬레니즘 문화의 진수를 간직하고 있는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그들이 자랑하는 많은 보물들은 낳은 자식이 아니라 기른 자식이다. 그러나 박물관을 진정한 소통의 장으로 만들기 위한 유럽 각국의 노력은 평가할 만하다.이 책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생겨난 에코뮤지엄과 지방자치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유럽 각 지역의 마을박물관 등 주민들의 삶과 박물관을 연계시키려는 운동을 소상히 소개한다. ●프랑스 에코뮤지엄 운동 상세히 소개 ‘에코뮤지엄’이라는 말은 1971년 국제 박물관학회 총회에서 프랑스 환경부 장관 로베르 푸자드에 의해 처음 사용됐다.에코뮤지엄은 단순히 친환경적 박물관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문화유산’을 그것이 태어나고 성장한 환경 속에서 이해하고 소개하고자 하는 뜻이 강하다.노르망디나 부르타뉴처럼 독특한 역사와 자연환경을 지닌 지역에 새로 등장한 지방분권적인 박물관들이 바로 전형적인 에코뮤지엄이다.에코뮤지엄 운동은 ‘68혁명’이라는 지적·사회적 동요를 겪으면서 프랑스 정부가 혼란에 대처하기 위해 시행한 일종의 ‘박물관 요법’이다. 이 책에서는 세계 12개국,44개의 박물관을 찾아간다.우리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만한 주제들을 대표하는 박물관들을 골랐다.예컨대 9·11테러와 관련해서는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다루고,우리 사회의 이민열풍과 관련해서는 엘리스 아일랜드 이민사 박물관을 소개한다.네덜란드 북부 블레더 마을에 있는 ‘가짜 박물관’을 통해서는 예술의 사회적 의미를 살핀다. 저자는 자기 방식대로 박물관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왜 아직도 ‘문화’를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하는 지 모르겠어요.우리 박물관도 하루 빨리 ‘작은’ 유물을 통해 ‘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1만3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뉴스플러스]北선박 제주남단 우회운항 허용

    북한 선박이 앞으로는 제주도 남단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이에 따라 남포항∼원산항간 운항거리는 400마일 정도 줄어든다. 그동안 북측은 북한 선박의 제주해협 통과를 허용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남측은 안보상의 이유로 제주 남단을 돌아가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북측이 이를 전격 수용해 합의가 이뤄졌다.대신 남측 선박은 북한 영해와 항구에서도 국내 선사와 자유롭게 통신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됐다. 남북 양측은 26일 개성 자남산 여관에서 열린 제4차 남북 해운협력실무접촉에서 ‘남북 해운합의서 이행을 위한 부속합의서’를 집중 논의해 이같이 의견을 모았다. 이날 동시에 열린 제9차 남북 철도·도로연결 실무접촉에서 양측은 경의선·동해선 완공을 위해 도로 포장용 자재장비를 3월부터,동해선 교량상판을 5월부터 공사일정에 맞춰 제공하도록 협력키로 했다.˝
  • 동원산업 대표에 이용준씨

    동원그룹은 24일 동원산업 대표에 이용준 전무를 임명하는 등 임원인사를 실시했다. 동원홈푸드 대표는 윤형식 동원F&B 식품연구소장이,동원HRD 대표는 이국진 동원홈푸드 대표가 새로 맡게 된다.신성택 전 동원산업 사장은 부회장으로 승진했다.동원그룹측은 분야별로 전문성을 감안해 원양어업의 동원산업은 해양 전문가를,단체급식과 식당운영을 하는 동원홈푸드는 식품전문가를,동원HRD는 인사 전문가를 각각 대표로 선임했다고 설명했다.˝
  • [부동산플러스]성원상떼뷰 오피스텔 분양·임대

    성원산업개발은 서울시 성동구 성수2가 지하철 성수역 인근에 즉시 입주가 가능한 ‘성원상떼뷰’ 원룸 오피스텔을 분양 및 임대하고 있다.오피스텔은 14평형 130실,16평형 196실,17·20·24평형 각각 10실 등 356실로 구성돼 있다.분양 및 임대 대상은 14,16평형.지하철 2호선 성수역까지 걸어서 5∼7분 걸리며 영동대교,강변북로,올림픽대로 등을 이용,강남·북 이동이 쉽다.(02)498-9911.˝
  • 포천 실종 女보험설계사 통장·피묻은 수건 발견

    포천 여중생 엄모(15)양 피살과 여 보험설계사 A(47)씨 실종사건을 수사중인 경기도 포천경찰서는 16일 A씨의 통장과 피묻은 수건 등 유류품을 포천시 군내면 직두리 수원산 미타사 인근 지방도로 56호 옆 배수로에서 발견했다. 경찰은 A씨가 살해된 뒤 유기됐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미타사 주변에서 집중적인 수색작업을 벌이는 한편 A씨와 금전거래가 있었던 이들의 통화내역 등을 조사하고 있다. 경찰은 이날 오전 A씨의 아반떼XD 승용차가 지난 12일 발견된 포천시 군내면 하성북리 청성공원 주차장에서 직선거리로 2㎞가량 떨어진 56호 도로변에서 A씨의 통장 11개와 명함 3장,피묻은 수건 1장,소형수첩 1개,A씨의 이름이 새겨진 볼펜 3자루 등을 수거했다. 유류품 발견 장소는 A씨가 마지막으로 휴대전화를 사용한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포천 한만교기자 mghann@˝
  • 석원산업, 수산중공업 인수 대규모 신규사업 투자검토

    플랜트건설 전문업체인 석원산업(회장 정석현)이 수산중공업을 인수했다. 석원산업 컨소시엄은 최근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관계인집회에서 출석 채권자의 87.4%의 동의를 얻어 수산중공업에 대한 인수 인가를 받았다.인수 대금은 415억원.이로써 수산중공업은 법정관리에서 벗어나 재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석원산업은 수산중공업의 조기 정상화를 위해 기존 경영진에 대한 임기를 최대한 보장할 방침이다.석원산업 김상인 전무는 “연구개발과 판로 개척에 대한 지원을 강구할 계획”이라며 “수산중공업에 대한 신규사업 투자도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수산중공업은 유·공압 브레이카와 트럭크레인을 생산하는 업체.1997년 신규법인 설립과 인수·합병(M&A)에 따른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부도를 냈다. 그러나 법정관리 이후 강력한 구조조정과 비용 절감으로 현재는 수십억원의 영업이익을 낼 정도로 사업구조가 탄탄해졌다.지난해에는 수산중공업의 주력제품인 브레이카가 세계일류화 상품에 선정됐다. 올해는 중국 건설경기 호황으로 2000만달러의 수출 목표를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보고 있다. 김경두기자 golders@
  • 前 굿머니직원 청문회 증언 “10억씩 두차례 정치권 전달”

    인터넷 대부업체 굿머니사의 핵심관계자가 “대선 당시 굿머니사가 20억원을 노무현 후보 비서실장이던 신계륜 (현 열린우리당 소속)의원에게 건넨 것으로 안다.”고 말해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관련 당사자간의 진술이 상반돼 이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12일 국회 법사위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굿머니사 전 직원 김진희씨는 “2002년 11월 말과 12월 말 등 두 차례에 걸쳐 직원들이 계좌에 있는 돈을 빼서 10억원을 2억원씩 5개로 나눠 여행용 가방에 담는 것을 봤다.”며 “이 돈은 정치권에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관련기사 4면 김씨는 “돈이 신계륜 의원에게 직접 전달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으나 회사대표 김영훈씨가 동료직원과 통화하면서 신 의원을 두차례 거명했고,그 뒤에도 ‘신 의원에게 보험을 들었다.’‘신 의원이 우리를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는 얘기를 김 대표가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 의원은 “김영훈 대표를 아는 것은 사실이지만,노 후보 비서실장 등으로 있으면서 단돈 1원도 받지 않았다.”면서 “민주당 조재환 의원의 30억원 수수 주장은 명백한 명예훼손으로,법적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김재철 동원산업 회장은 민주당 김경재 의원이 제기한 50억원 노 후보 제공 의혹에 대해 “2002년 민주당에 합법적인 후원금을 2억 2600만원 제공했으나 불법자금은 단 한푼도 노 후보측에 준 적이 없다.”고 관련의혹 일체를 부인했다. 한편 민주당 유용태 원내대표는 “국회 법사위 청문회가 열린우리당의 폭력과 배후세력의 조직적 방해,핵심증인 불출석 등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며 “진실규명을 위해 국정조사나 특검을 통해 진실을 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경호 박정경기자 jade@ ˝
  • [盧 측근비리 청문회] 굿머니 모금책 김진희씨 증언

    12일 국회에서 열린 불법대선자금 청문회에서는 전날 민주당 조재환 의원의 ‘굿머니 자금 여권 전달설’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내놓은 ‘굿머니 모금책’ 김진희씨의 입에 시선이 집중됐다.김씨는 “확실하게 정치권에 돈이 들어갔으며 신계륜의원에게 보험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강조했다.김씨는 그러나 질문 의원에 따라 다소 뉘앙스가 다르게 답변하기도 했다. ●“전화내용을 들었다” 김씨는 굿머니 돈을 건네받은 것으로 지목된 신계륜 의원과 관련,“(굿머니) 김영훈 대표와 직원간의 통화내용을 옆에서 들었다.”면서도 “하지만 재판중이라 구체적인 통화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고,말하고 싶지 않고,말할 수 없다.”며 궁금증을 증폭시켰다.김씨는 ‘신 의원에게 돈이 건네졌다는 것을 들었느냐.’는 민주당 김영환 의원의 질문에 “직접 들은 적 없고 ‘윗분한테 로비했다.’는 말을 두 차례 들었다.”고 말했다.김씨는 뒤에 “‘신계륜 의원이 우리를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는 얘기를 사장한테서 들었다는 거냐.”는 함승희 의원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신계륜의원 굿머니 위해 뛰어” 김씨는 민주당 조재환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당시 김영훈 대표에게 ‘감사하다.’고 한 육성 녹음 보이스펜이 존재한다고 전날 주장한 데 대해 “일부분 들은 내용이 있는데 말씀드리기 곤란하다.”고 답변했다.김씨는 회의 후 만난 기자들이 ‘보이스펜 녹음분량이 얼마나 많기에 CD 6장에 구워졌느냐.’고 묻자 “6장은 같은 내용으로,나도 일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녹음된 당사자가 조 의원이 주장한 것처럼 노무현 후보였느냐.’는 질문엔 입을 굳게 다물었다.김씨는 보이스펜 내용을 CD에 복사한 이유에 대해 “(사람의) 마음까지는 알 수 없는 것 아니냐.”면서 만일을 대비해 자료를 남겼음을 시사했다. ●민경찬 펀드 축소의혹 의원들은 투자자가 50명 이상이면 범법이라는 금감원 보고서를 청와대가 본 뒤 투자자 숫자가 달라지는 등 청와대와 금감원,민경찬씨와의 조율 의혹을 제기했다.증언에 나선 신해용 자산운용국장 등은 “청와대와 조율했다면 발표내용이 청와대와 금감원이 똑같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민주당 함승희 의원은 민경찬 펀드 참여자와 관련,“강남 모 호텔에서 열린 민경찬씨의 누이 민미영씨의 아들 생일잔치에 모인 사람들이 펀딩 중심이라는 얘기도 있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후보측에 대한 동원산업의 50억원 제공설과 관련,민주당 김경재 의원은 “양평TPC 골프장 담보대출 후 경영난을 겪은 동원개발이 ‘대지개발’을 만들어 썬앤문그룹 문병욱 회장에게 (골프장을) 넘겼다. 문 회장의 동생 병근씨가 대지개발 대표이사라는 사실은 문 회장과 고리가 있었다는 걸 말하는 것”이라고 동원과 썬앤문의 관계에 의혹을 제기했다.김재철 동원산업회장은 “회사가 10여개가 있어 그런 일은 일일이 알 수 없고,당시 골프장 매매건도 7개나 됐다.그런 일은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면서 연관설을 부인했다. 한편 이광재 전 국정상황실장은 “2001년 8월∼2002년 12월 노무현 후보의 카드가 연체되는 상황이 12차례나 있었다.”면서 “대한민국 정치인이 대통령 노무현에게 적어도 돈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지운 박정경기자 jj@˝
  • 음식점 쇠고기 원산지표시 의무화

    이르면 내년 하반기부터 갈빗집 등 대형 음식점에서 쇠고기 원산지 표시제가 의무화된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한 이후 관계부처간 협의를 수차례 갖고 쇠고기에 대한 음식점 원산지 표시제의 도입을 추진키로 방침을 정했다고 8일 밝혔다. 현행 농산물품질관리법에 백화점과 정육점 등의 쇠고기 원산지 표시는 의무화돼 있지만,식품위생법에는 일반 음식점에 대한 원산지 표시 규정이 없다. 이에 따라 일반 정육점처럼 수입산뿐 아니라 국산에 대해서도 원산지 표시를 의무화하는 한편 국산의 경우 한우고기,젖소고기 등을 구분 표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다만,시행상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형업소부터 단계별로 적용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농림부는 보건복지부가 단속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축산물가공처리법을 개정,식육판매업자가 음식점에 쇠고기를 납품할 때 원산지 증명서를 발급해줄 것을 요청함에 따라 실현 가능한 방법을 찾고 있다. 한편 정부는 미국에서 생산돼 공업용으로 사용되는 우지(牛脂)와 소부산물이 포함되지 않은 가축용 사료의 수입을 허가하기로 했다.공업용 우지의 수입 허용기준은 단백질 고형분 0.15% 이하 제품이다. 산자부 관계자는 “광우병 파동으로 공업용 우지의 수입이 금지된 뒤 재고물량으로 제품을 생산해온 관련업계가 최근 두달분의 재고분이 바닥나자 수입재개를 요청해 이뤄졌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공업용 우지는 대부분 비누 원료로 사용돼 인체에 감염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면서 “국제수역사무소에서도 이를 수입금지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우리나라가 미국·캐나다·호주 등으로부터 들어오는 공업용 우지는 연간 3만t 가량이다. 김경운기자 kkwoon@˝
  • [러일전쟁 100주년]박종효 前모스크바대 교수 본지 기고 (상)

    8일은 러일전쟁의 첫 포성이 울린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일본은 이 전쟁에서 러시아를 이겨 사실상 대한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최근 일제 식민시대의 서막을 연 러일전쟁의 발발지가 중국 뤼순(旅順)항이 아니라 제물포 팔미도(八尾島)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박종효 전 국립모스크바대 교수가 러시아국립 해군함대 문서보관소 자료에서 확인한 것이다.박 전 교수가 서울신문에 보내온 ‘러일전쟁의 서막,러시아 바략함과 카레예츠함의 제물포해전’이라는 글을 2회에 걸쳐 요약한다. 러일전쟁으로 대한제국은 위태롭게 유지하던 독립을 일본에 약탈당하게 되었다.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남한은 패전국 일본 대신 전승국 미국이,북한은 공교롭게도 제정 러시아의 후신인 구 소련이 점령하여 각각 자기 세력권으로 편입시켰다. 일본은 1896년 야마기다 원수를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사절로 보냈다.야마기다는 러시아 외무장관 로바노프 로스토프스키에게 한반도를 38선으로 분할하여 각각 러·일의 영향권으로 설정하자는 제안을 했다.러시아는 이 제안을 거부했으나,한반도 분할문제는 이때부터 러·일 사이에 잠정적인 논의 대상이 됐다.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소련에 제의한 38선 분할안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은 1945년 8월13일부터 청진과 원산 등으로 상륙한 소련군의 남하를 시급히 차단해야 했다.이에 제정 러시아 시대에 이미 일본이 제안한 38선을 상기했다.우리의 비극적 근·현대사의 기원과 원인 제공은 열강의 침투와 러일전쟁에서 비롯되었다. ●러 국립 문서보관소 자료에서 확인 제정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문서에 따르면 러일전쟁의 첫 포성은 중국 뤼순항이라고 한국학계가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제물포 팔미도 앞바다에서 울렸다.일본 함대는 1904년 2월9일 새벽 뤼순항에 앞서 2월8일 우리 영해에서 러시아 포함 카레예츠함과 처음 교전했다.고려인이라는 뜻의 ‘카레예츠’는 마산포 개항을 기념하여 러시아 해군이 붙인 이름이다.이날 밤 제물포에 상륙한 3000여명의 일본군은 대한제국군 2만여명과 청룡1호 해군훈련함이 있었지만,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서울을 점령했다. 앞서 1903년 말 한반도에는 동학교도가 일본인을 내쫓기 위해 다시 봉기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일본군이 이를 진압하려 상륙하면 대한제국군은 동학교도들에 가담하여 폭동을 일으키고,독립을 위협하는 영일조약 당사자인 일본공사관과 영국공사관을 습격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놀란 영국은 12월 말 공사관 보호를 위해 순양함 시리어스함에 28명의 해병대원을 승선시켜 제물포로 파견하고,곧 이어 탈보트함에 도착했다.다른 열강도 제각기 함대를 급파했다.미국을 빅스버그,프랑스는 파스칼,이탈리아는 엘바,독일은 한사,일본은 지오다,러시아는 바략함을 보내 제물포는 마치 열강 해군의 집합소처럼 변모했다. 일본군은 전신선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에 800명,원산에 400명,부산에 400명을 주둔시키고 있었다.그런데 1904년 2월 초부터는 마산포에 1만 2000명을 상륙시키고,군수품과 식량을 수송해 왔다.원산에도 민간인 복장을 한 예비군과 군인 및 군마를 비롯한 군수품과 탄약 등을 수송했다.일본은 이처럼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하면서도 한반도 문제에 대한 러일협상은 계속 진행하고 있었다. 이 무렵 러시아 극동총본부는 1904년 2월2일부터 4일까지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아무르 군관구 사령부로부터 극동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귀국하고 있다는 긴급보고를 받았다.이미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일본인 귀국여객선이 대기하고 있었다.긴박감을 느낀 극동총독은 니콜라이 2세에게 총동원령과 함대 배치 칙령을 요청했으나,황제는 일본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한반도 남쪽이나 동해안 원산 이남에 상륙할 경우 러시아가 절대 방해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그러나 서해안에 일본의 상륙군을 수송하는 군함이 나타나거나,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하는 군함이 있으면 발포를 기다리지 말고 선제 공격하라고 덧붙였다.이처럼 러·일 양국은 이미 묵시적으로 각각 한반도 남북의 영향권을 인정하고 있었던 셈이다. 러시아는 제물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뤼순항의 배후 항으로 서울의 러시아 공사관과 멀지 않은 제물포에 1903년 3척의 순양함을 파견했다.1904년 1월18일 두 척의 순양함이 뤼순으로 귀항하자,제물포에는 바략함과 소형 포함 카레예츠함,여객선 순가리(송화강)호만 남았다.일본은 1903년 말에 러시아가 아직 미완성이었던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통하여 유럽지역으로부터 일부 군대를 연해주 군관구로 이동시켰다는 첩보를 받고 크게 놀랐다.대한제국 협상에서 러시아가 시간을 끄는 것도 일본에 불안감을 가중시켰다.일본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러시아에 유리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반대로 러시아는 태평양함대와 극동 주둔 육군이 일본에 열세였으므로 협상을 통하여 철도를 완성시킬 때까지 시간을 벌면서 어떻게든 대한제국 문제를 카드로 만주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러시아는 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원하지 않았다.대한제국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하면서 직접적으로 국경선을 접한 만주의 이권을 보호하고 만주개방을 요구하는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한반도를 고려하고 있었다.극동 현상유지 정책으로 대한제국이 독립국가로 있는 것이 러시아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여,특히 고종에게 정치적의 호의를 보이면서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1904년 2월4일 청나라 주재 일본영사가 뤼순항의 러시아군함이 모종의 중대한 임무를 띠고 출항했다는 급보를 도쿄에 보냈다.그러나 28척의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해상훈련을 나간 것이었다. ●日, 러 공사관·군함 통신망 봉쇄 일본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4일 밤 일왕 특별 어전회의를 열어 대 러시아전쟁을 결의했다.일본이 외교단절을 선언했지만 제물포의 러시아 함대와 서울의 러시아 공사관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일본은 한반도의 통신망을 장악하고 있으면서,전략적으로 서울 러시아 공사관이 외부와 통신연락이 되지 않도록 철저히 봉쇄했다. 5일 한 미국인이 중국의 상하이에서 제물포에 도착하면서 러·일 사이에 곧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6일 아침 일본 해군중장 도고는 사세보(佐世保)로 함장들을 소집했다.전 함대는 황해로 발진하여 제물포와 뤼순항에 정박하고 있는 러시아 함대를 습격하라고 명령했다.일본 연합함대는 6척의 전함,14척의 순양함,35척 이상의 어뢰정으로 구성됐다. 7일 제4전투함대사령관 우리우 소장은 5척의 순양함과 8척의 어뢰정,3척의 대형 상륙군 수송선으로 제물포로 향했다.제물포에 정박중이던 순양함 지오다함은 8일 새벽 출항하여 러시아 함대 동향을 보고한 뒤 일본함대에 합세했다.우리우는 러시아의 바략함과 카레예츠함은 제물포에 상륙하는 일본군을 방해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 있었던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는 바략함장 루든예프에게 공사관의 비밀 보고문서를 카레예프함으로 직접 뤼순항으로 전달하라고 지시했다.이 긴급문서 가운데는 고종 황제가 은밀히 전한 문서도 있었다.일본 함대가 압록강 하구로 항해하고 있으며,제물포에 일본군이 상륙할 계획이라는 내용이었다. 카레예츠함은 8일 오후 3시40분 제물포를 출항하여 15분 만에 멀리서 2열종대로 다가오는 일본 순양함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마침내 제물포 남방 13.5㎞ 지점에 있는 작은 섬 팔미도 근해에서 일본함대와 조우했다.카레예츠함장 벨야예프 해군중령은 러시아와 일본의 외교단절을 모르는 상태였다.일본함대가 진로를 가로막고 공격태세를 취하자 카레예츠함은 제물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4척의 일본 어뢰정 가운데 한 척이 어뢰로 첫 공격을 했을 때 벨야예프도 전투경보를 내렸다.오후 4시35분이었다.제2,제3의 어뢰정이 잇따라 어뢰를 발사했다.벨야예프도 두 번째 어뢰공격을 받자 발포명령을 내렸다. 일본측의 ‘해전기록(海戰記錄)’은 카레예츠함이 일본의 어뢰정을 보자 갑자기 오른쪽으로 피하면서 어뢰정에 포를 발사했고,수송선에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만 되어 있다.일본함대가 응사하여 교전이 이루어졌다는 대목은 없다.그러나 대형 함대에 소형 포함 한 척이 먼저 포를 발사했다는 일본측 주장은 신뢰할 수 없다. ●러 바략함 수장, 카레예츠함 폭파 이렇게 러일전쟁은 뤼순항이 아니라 2월8일 오후 4시40분쯤 제물포 팔미도에서 일본측이 먼저 발포하여 시작됐다.그러나 통신이 두절된 제물포의 러시아군은 본국에 보고할 수 없었고,다음날 새벽 뤼순의 태평양함대가 기습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이 페테르부르크에 먼저 전달되면서 전쟁 발발 날짜가 2월9일로 기정사실화된 것이다.한편 제물포의 일본함대는 9일 낮 바략함 및 카레예츠함과 다시 본격적인 교전을 벌였고,전함수 14대2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러시아군은 결국 바략함을 수장시키고,카레예츠함은 폭파시켰다.러시아는 제물포해전을 패전이 아닌 러시아 해군 사상 가장 영웅적인 전투로 평가하면서,전설적인 신화처럼 한 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기념하고 있다.˝
  • [시론] FTA 정면 돌파하자/신동헌 전국농민단체협의회 사무총장

    키위는 원산지가 중국이다.한국에는 ‘참다래’라는 이름으로 키위가 생산된다.참다래 육성농가의 농민대표는 정운천씨다. 요즘 뉴질랜드산 키위가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참다래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지난해 1500농가와 함께 올린 매출이 500억원이다.현재 참다래는 1㎏에 4500원에 팔리는데,수입산 키위에 비해 두배쯤 비싸다.하지만 참다래는 수입 키위를 무서워하지 않는다.수확후 관리 등 고품격 농업이 이를 보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씨는 정면돌파형이다.이 때문에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도 빨리 처리되기를 바란다.그는 “키위 수출 세계 3위인 칠레와 자유무역을 하게 되면 참다래도 힘들 수밖에 없죠.하지만 비켜갈 생각은 없습니다.위기는 기포회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한·칠레 FTA를 놓고 찬반 대립의 연속이다.대다수 여론이 국회 비준을 촉구하고 있다. 칠레는 지난 1월 상원까지 비준안이 통과됐다.이제 우리 국회도 ‘특단의 대책’ 등의 상투어는 접어두고 어떻게 칠레 농업을 극복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한다.칠레를 이기지 못하면 우리 농업의 미래도 없다.칠레의 지난해 농산물 수출은 세계 24위로 세계교역량의 0.78%를 차지했다.대부분 포도,사과,배 등이다. 엊그제 백화점을 둘러보았다.칠레산 수입 포도가 1㎏에 8500원으로 3∼5월 출하되는 우리의 시설포도 8000∼1만 2000원과 가격이 엇비슷하다.문제는 품질이다.세계 1위 칠레 포도의 품질에 약점이 보였다.줄기가 부실해 들어올리면 포도알이 떨어질 듯하고 푸석해 보였다.적도를 통과하는 45일간의 장기항해가 칠레 포도를 지치게 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도관세 46.5%가 무관세가 되더라도 품질경쟁이라면 한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일본은 칠레산 포도를 이겨내고 있다.포도관세가 7.6%이지만 수입이 7000t(우리는 6000t)에 머물고 있다.‘500g 포도’를 개발해 고품질로 승부를 걸었기 때문이다. 칠레보다 더 경계를 늦쳐서는 안 될 곳이 중국 등 주변국가다.우리는 한·중 마늘파동을 겪었다.아무리 막으려 해도 안 된다는 것도 배웠다.벅찬 상대는 무수히 많다.칠레는 우리 수출농업의 스파링 상대라는 생각을 갖고 농업발전의 새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정부가 농가부채를 모두 해결해 주어도 농촌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다.더 중요한 것은 개방시대에 꼭 살아남겠다는 자신감과 정직한 농심,그리고 성실한 실천뿐이다. 월드컵 4강을 이룬 것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투혼과 체력,그리고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다.농업도 3박자가 맞아야 한다. 정운천씨는 어떻게 하든지 이 기회에 고품질 생산기반을 확실히 다져 놓을 생각을 하고 있다.대형 수입상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브랜드 육성과 생산자 조직강화에 심혈을 쏟고 있다.브랜드 ‘맛젤’은 그래서 태어났다.델몬트나 돌,선키스트와 한번 붙어 보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언젠가 언론에서 상어에게 왼팔을 잃은 13세 소녀를 소개했다.해밀턴이라는 이 미국인 소녀는 학생서핑대회에서 5등을 했다. 주위의 도움을 거절하고 밀려오는 파도를 한손으로 헤쳐나갔다고 한다.올해 우리 농업은 정말 힘겨울 것 같다.쌀 재협상과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업협상이 기다리고 있다.감당할 수밖에 없는 파고들이다.시련을 정면 돌파하려는 농민들에게 격려의 한마디가 필요한 때다. 신동헌 전국농민단체협의회 사무총장˝
  • ‘盧대통령 금고지기’ 줄소환

    국회 법사위가 2일 채택한 ‘불법대선자금 및 당선축하금 의혹 청문회’의 증인은 모두 93명으로 청문회 사상 최대 인원이다.노무현 대통령의 대선자금뿐 아니라 경선자금과 당선 후 축하금까지 낱낱이 파헤치겠다는 두 야당의 ‘매머드급’ 정치공세를 예고한다. 법사위는 오는 11일 대검찰청을 방문,송광수 검찰총장과 안대희 중수부장,남기춘 중수1과장을 상대로 대선자금 수사의 형평성을 집중 추궁하기로 했다.“피의자가 수사진을 신문하냐.”며 열린우리당이 반발하고 있고 민주당도 역풍을 우려,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500억 대 0’이라는 수사결과에 불만은 품은 한나라당의 강력한 요구로 증인에 포함됐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주장한 한나라당의 김영일·최돈웅 의원과 이재현 전 재정국장,부국팀 이흥주 특보 및 16개 시도지부장 등 19명은 증인 채택에서 제외됐다.민주당은 검찰이나 특검 대상 인물을 가급적 배제한다는 원칙 아래 열린우리당 이상수 의원·이재정 전 의원 등을 함께 제외하면서 사실상 한나라당의 청문회 개최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부담을 덜어줬다.양당 법사위원들은 “이미 구속됐거나 수사 중인 인물로 재탕·삼탕 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정 의장 경선자금도 대상 민주당은 대신 노 대통령의 당선축하금과 경선자금과 관련해 새로 제기된 의혹을 중심으로 청문회를 끌어갈 방침이다.이에 따라 노 대통령의 자금담당자 등 최측근 인사가 모두 망라됐고,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경선자금 문제를 증언할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과 한영우 정동영 의장후원회장도 포함됐다.그러나 청문기간이 사흘에 불과한 데다 핵심 증인 상당수가 출석을 거부할 것으로 보여 실질적인 진상규명보다는 야당의 폭로공세에 그칠 공산이 크다. 특히 최근 650억원 모금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노 대통령의 사돈 민경찬씨와 그의 동생 민상철씨,선봉술씨 부인 박희자씨,사채업자 김연수씨 등을 증언대에 세워 민씨의 거액 모금 과정을 중점 다루기로 했다. 민주당 김경재 의원이 최근 폭로한 동원산업 50억원 제공 의혹은 김재철 회장 등을,여권의 총선자금 2000억원 조성설은 김대평 금융감독원국장 등을 불러 캐묻는다.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동원캐피탈 관련 의혹의 경우 동원수산으로 알고 있다.”면서 “한나라당에 객관적인 자료 일부가 있고 2000억원 조성문제도 자료가 있다.”고 가세했다. ●검찰 “수사 중 사건 전례 없다” 송 검찰총장은 “수사 중인 사건에 청문회를 한다고 하니 특별히 할 말은 없다.”고 말을 아꼈지만 검찰측은 이미 법률 검토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번 청문회가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상 ‘수사 중인 사건의 소추에 관여할 목적’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사는 “정치권의 이런 움직임은 국민들이 먼저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며 “정치권에서 검찰을 흔드는 행동은 제발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검찰 내부에서는 이번 청문회가 지난 1999년 8월 박순용 전 총장에 대한 파면공세로 치달았던 ‘조폐공사 파업유도 국정조사’의 재판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정경기자 olive@
  • 檢, 불법자금 청문회 반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2일 불법 대선자금 및 노무현 대통령 당선축하금 의혹 등과 관련한 국회 법사위 청문회를 오는 10일부터 사흘간 실시하기로 한 데 대해 여권과 검찰이 강력 반발하고 나서 야당측과 여당·검찰간 대치가 격화되고 있다. ▶관련기사 4면 국회 법사위는 2일 전체회의를 열고 표결 끝에 찬성 9,반대 2,기권 1표로 청문회 개최를 의결했다.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은 찬성,열린우리당 의원은 반대했다. 법사위는 10일 금감원·국세청에 이어 11일 대검을 방문,기관보고와 함께 증인신문을 실시한 뒤 12일 증인들을 국회로 불러 종합질의를 할 계획이다. 법사위는 청문회 증인으로 송광수 검찰총장과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남기춘 중수1과장 등 대선자금 수사 핵심 지휘부와 최도술·안희정·이광재씨 등 노 대통령 핵심 측근,노 대통령 사돈 민경찬씨,김재철 동원산업 회장,문병욱 썬앤문그룹 회장,김대평 금감원 국장 등 93명을 채택했다. 이에 대해 안 중수부장은 사견을 전제로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국회가 청문회를 개최하는 것은 법과 원칙에 반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검찰은 3일 송 검찰총장 주재로 대검 수뇌부 회의를 갖고 청문회에 대한 검찰의 입장을 내놓을 방침이다.열린우리당측도 야당이 대선자금 수사팀을 증인으로 채택한 데 반발,11일 대검 청문회에는 불참하기로 했다. 법사위는 당초 청문회 명칭을 ‘불법대선자금 및 노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 등에 관한 청문회’로 정했으나 이날 논의 끝에 당선 축하금을 포함시켜 청문회가 노 대통령의 불법대선자금 및 당선축하금,대선후보 경선자금 등 3대 자금 의혹에 집중될 것임을 예고했다. 민주당 김경재 의원은 “한나라당의 불법대선자금 모금은 청문회 대상에서 제외됐다.”고 말했다. 특히 법사위는 물의를 빚고 있는 노 대통령 친형 건평씨의 처남인 민경찬씨의 650억원 펀드 모금과 노 대통령의 고교 동문인 금융감독원 국장 김대평씨의 총선자금 2000억원 조성 의혹 등도 다루기로 했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후원회장인 한영우씨와 민주당 권노갑 전 고문을 불러 정 의장의 대선후보 경선자금도 추궁할 계획이다. 현 정부 들어 쟁점 현안에 대해 상임위 차원의 청문회가 열리기는 처음으로,4·15총선을 60여일 남겨 놓고 실시된다는 점에서 여야의 가파른 대치가 예상된다. 진경호 박정경기자 jade@
  • 원산지 표시위반 ‘쇠고기 最多’

    미국·호주산 쇠고기가 한우로,중국산 삼겹살이 제주산으로 많이 둔갑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은 지난해 적발된 원산지 표시위반 건수는 허위표시 4463건,미표시 3048건 등 모두 7511건으로 집계됐다고 1일 밝혔다. 주로 수입산을 국내산으로 속여 파는 원산지 허위표시는 쇠고기가 723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돼지고기 670건,고춧가루 230건,당근 157건,엿기름 103건 등이었다.쇠고기는 미국·호주산을 한우로,돼지고기는 중국산 삼겹살 부위를 제주산 등으로 속인 사례가 많았다. 원산지 미표시도 쇠고기가 428건으로 으뜸이었고 돼지고기(232건),땅콩(174건),고사리(159건),당근(113건)이 뒤를 이었다. 김경운기자 kkw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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