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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카프에 실려간 한국미술

    스카프에 실려간 한국미술

    국내 주요 한국화가들의 미술작품이 스카프에 실려 일본에 진출한다. 한국문화예술센터㈜(관장 이일영)의 기획으로 4월1일부터 30일까지 도쿄 신주쿠의 대형 한국공예아트숍인 ‘인사동’에서 열리는 ‘한국미술작품 스카프 일본전’은 한국 화가들의 예술성에 실용성을 입혀 입맛 까다로운 일본인들에게 선보이는 자리. 작가의 그림을 실크스크린 판화 기법으로 스카프 위에 찍어냈다. 가격은 한화 13만원 정도. 이종상, 김천일, 김춘옥, 송수련, 심경자, 원문자, 이설자, 홍순주 등 전현직 미대 교수 15명을 포함한 중견·원로작가들과 신진작가 등 모두 37명이 참여했다. 특히 20여년간 독도를 그려온 이종상(예술원 회원)의 독도 수묵화가 찍힌 스카프는 현지 일본인들이 매고 다님으로써 한·일 문화교류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주최측은 내다보고 있다. 스카프중에는 전통적 색채로 오랜 역사에 서린 이야기들을 흐릿한 조형으로 담아낸 심경자(세종대 교수)의 작품 등 한국 전통이 깃든 예술혼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적지 않다. 또 장혜용, 김일해, 서경자, 이현영 작가 등의 작품은 비록 소량이지만 벌써 일본 백화점 등 주요 패션유통망에 상품을 공급하는 한국소재 무역회사(K&I)와 계약단계에 이르는 등 전시 전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게 주최측 설명이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儒林(568)-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4)

    儒林(568)-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4)

    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4) 유생의 말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원래 이러한 모욕은 과하지욕(跨下之辱)이란 말에서 나온 것인데, 일찍이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던 명장 한신(韓信)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천하제일의 한신이었으나 청년시절에는 비참하고 불우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워낙 집이 가난하여 동네에서 놀림감이 되었으며, 용모도 신통치 않아 남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스스로의 손으로 농사를 짓지 않아 천하의 게으름뱅이로 손가락질까지 받고 있었다. ‘왜 가난하여도 농사를 짓지 않는가.’하고 사람들이 물으면 한신은 ‘농사를 짓는 일은 농부가 할 일이다.’라고 대답하고 천민의 신분으로는 어울리지 않게 허리에 칼을 차고 다녔다. 이를 불쌍히 여긴 빨래하던 노파가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밥을 주자 한신은 사양하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그 뒤부터 한신에게는 ‘노파에게 밥을 빌어먹은 한신’이란 별명이 붙어 더 한층 멸시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말이 밥을 얻어먹은 것이지, 실은 밥을 구걸한 거렁뱅이의 행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신이 칼을 차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동네의 불량배들이 한신을 크게 조롱한다. 불량배 중의 우두머리가 한신이 거리를 지나가려하자 길을 막고 갈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정히 가고 싶다면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라고 명령하였던 것이었다. 그러자 한신은 태연한 얼굴로 몸을 굽히고 개처럼 기어서 무뢰배의 두 가랑이 사이로 기어갔던 것이다. 수과하욕.‘다리 사이를 기어가며 욕을 참는다.’는 뜻의 고사성어는 바로 천하의 명장 한신의 이러한 모습에서 탄생된 것. 과하지욕((跨下之辱)으로도 불리는 이 장면은 영원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한 순간의 치욕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한 한신의 깊은 야망을 엿볼 수 있는 명장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율곡이 한신의 고사를 모방하여 유생의 명령대로 가랑이 사이를 기어갈 수는 없음이었다. 더구나 그 유생은 당대 제일의 세도가였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의 아들. 이준경은 그 무렵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두루 제수하고 있었던 최고의 권신이었다. 언젠가는 영의정에 오를 만큼 명종으로부터 큰 신망을 얻고 있었던 원로대신으로 큰 명망이 있었으나 그 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파락호(破落戶)였던 것이다. 율곡은 기세등등한 유생을 상대하지 않고 몸을 비켜 다른 길로 가려하였다. 그러자 선접꾼들이 재빠르게 율곡을 포위하였다. 선접꾼들은 자른 도포를 젖혀 매어 옷매무새를 단단히 하고 우산과 빈자리, 그리고 말뚝과 막대기 같은 도구들을 들고 과장이 열리면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가 현제판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려는 왈패들이었다. 이들이 그러한 이상한 도구들을 들고 다닌 것은 쟁접(爭接)을 통해 자기가 차지한 자리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식을 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현제판 근처에 자리 잡으면 장막을 치고 자리를 깔고 우산을 씌움으로써 자신을 고용한 주인에게 좋은 자리를 선점하였음을 알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숙연하여야 할 과거시험장은 이들에 의해서 삽시간에 난장판으로 변해 버리기 일쑤였다.
  • [책꽂이]

    ●스코르타의 태양(로랑 고데 지음, 김민정 옮김, 문학세계사 펴냄)이탈리아 남부 작은 마을에서 5대째 살아가는 스코르타 일가의 이야기. 대대로 이어져온 가족의 거짓과 비밀로 온갖 비극적 사건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운명에 맞서 싸우는 스코르타 가문 사람들을 통해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2004년 프랑스 공쿠르상 수상작.9400원.●진짜와 가짜의 틈새에서(김광림 지음, 다시 펴냄)화가 이중섭의 50주기를 맞아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원로시인인 저자가 털어놓는 비화.‘내 그림은 가짜’라며 주변의 그림을 몽땅 불사르려는 이중섭을 가까스로 만류한 사연과 군보급품 박스에서 양담배 은박지를 수집해 이중섭에게 전해줬던 일화 등을 실었다.9000원.●기적 불 때(윤진현 책임편집·해설, 범우 펴냄)일제시대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동아일보·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한 김정진(1886∼1936)의 작품집. 탄생 120주년을 맞아 ‘범우비평한국문학’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된 책에는 ‘사인의 심리’‘십오분간’등 희곡 11편, 평론 3편, 장편소설 ‘독와사’등 대표작들이 실렸다.1만 8000원.●한 뙈기의 땅(엘리자베스 레어드 지음, 정병선 옮김, 밝은세상 펴냄)이스라엘 점령 치하에서 테러의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비극을 묘사한 소설. 자유가 억압된 사회에서 맘껏 축구를 할 수 있는 ‘한 뙈기의 땅’을 갈망하는 아이들의 동심이 가슴을 울린다.9000원.●만인보 제21∼23권(고은 지음, 창비 펴냄)‘민족사의 거대한 벽화’를 목표로 1986년부터 내놓고 있는 연작시집.2004년 식민시대에서 한국전쟁 전후를 다룬 시 719편을 묶어 16∼20권을 낸 데 이어 4·19혁명과 5·16쿠데타를 배경으로 보통 사람들의 삶을 416편의 시에 담았다. 각권 8000원.
  • [이사람] 線으로 禪그리는 고희청년 박서보

    [이사람] 線으로 禪그리는 고희청년 박서보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추상미술을 이끌어온 박서보(75) 화백.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줄곧 색면 회화로 표현해 온 미니멀리즘의 대가다. 그의 작업은 구도자가 욕망을 끊고 엄격함과 절제로 자신을 다스리는 것과 비슷하다. 한지 위에 볼록하고 가늘게 세운 실오라기 같은 선(線)의 향연이 반복된다. 선(禪)의 세계에 맞닿아 있는 듯하다. 묵상과 명상의 시간이 필요한 현대인들이 애정을 갖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서울 동교동에 위치한 박 화백의 작업실을 세 차례나 찾았다. 그림이 좋아, 또 그의 매력적인 모습을 만나는 것이 즐거워 이뤄졌던 방문이 인터뷰로 이어졌다. ●손의 흔적을 쌓아가는 작업 처음 만난 박 화백의 느낌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정열의 느낌이 확 풍겨 나와 무척 놀랐다. 지긋한 나이이지만 젊은이 못지않게 색(色)의 기운도 넘치는 정력적인 모습이다.“너무 섹시해요.”라는 말이 툭 튀어나온다. 그는 “에이, 무슨 소리야.”라고 하면서 싫지 않는 듯 환하게 웃는다. 반들반들한 머리에서 풍겨 나오는 다이내믹함,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넘쳐나는 힘…. 솟구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청년 예술가의 모습이 따로 없다.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늘 작업복 차림에 손에는 물감을 묻히고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하루라도 거르는 날이 없다. 그것도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되는 작업이다. 오전 9시에 작업실로 출근, 집에서 싸 온 과일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고, 저녁은 근처 식당에서 먹는다. 미대생 몇 명이 작업실을 들락날락하며 박 화백의 작업을 돕다가 어둠이 내려앉자 퇴근했건만 그의 작업은 계속된다. “곁눈질하지 않고 바보처럼 외길로 50년 넘게 작업을 해왔어요. 휴가도 없어요. 가끔 해외 전시회 갈 때 잠시 쉰다고나 할까요.” 그의 작업은 일견 단순과 반복의 노동처럼 보인다. 한 가지 바탕색을 칠한 뒤 다른 색으로 간격을 맞춰 밭의 고랑을 세우는 듯 선을 입체화시키는 작업이다. 보기에는 단순한 작업 같아도 사전 작업은 철저하다. 색깔의 조화를 시뮬레이션해 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거친다.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맛’을 느끼도록 손의 흔적을 쌓아가는 작업이에요.” 따라서 그의 그림을 보노라면 무엇인가를 그렸다기보다 어떤 느낌을 강하게 전달한다. 작가는 자신의 ‘묘법’(描法·일종의 긋기) 시리즈에 대해 “그리지 않고 그린 그림이라고나 할까요.”라고 하면서 “그림은 수신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지요.”라고 말한다. ●디지털 시대 예술가는 일회용처럼 쓰고 버려져 그는 최소한의 것만 표현하는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다르다고 강조한다. 즉 자기를 비워내는, 부단한 자기 수행을 통해 자연과 합일되는 것을 추구해 왔다고 부연한다. 그는 또 디지털 시대 미술의 어려움을 토로한다.“아날로그 시대에는 표현이라는 이름 아래 캔버스에 자기 것을 마구 쏟아내면 됐거든요. 강력한 이미지로 관람객들을 압도했지요. 지금의 예술가는 일회용 컵처럼 한번 쓰여지고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버려집니다.” 시대를 앞서가던 예술가가 뒤돌아서면 폐기처분 당하는 시기가 바로 요즘의 디지털 시대라는 것.“지금의 작가들에게는 예술에 테크놀로지를 결합하는 작업을 하려면 오히려 아날로그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 시대 예술의 존재에 대해서는 목소리가 높아진다.“21세기 우리 사회는 스트레스로 정신 병동화됩니다. 예술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치유하는 역할을 해야지요.” ●평면예술은 끝나지 않아 요즘 영상·설치예술 등이 아무리 잘나간다고 해도 평면예술은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지붕 아래 사는 한 평면 예술은 존재합니다. 지붕이 있으면 벽이 있고, 빈 공간에 공포감을 느끼는 우리들은 뭔가를 곁에 두고 즐기려고 합니다. 그것이 그림이지요.” 박 화백의 작품들은 디지털 시대인 요즘에 더 잘 어울린다는 평이다. 휑한 벽에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으로 동·서양의 미를 통합한 그의 작품을 걸어 놓으면 철학적 조형미가 살아난다는 것. 요즘 들어 화려한 색채감까지 입혀져 더욱 생명력이 꿈틀댄다는 평가다. 한때 젊었을 때 선배들을 보고 “똥차 좀 비키시오.”라고 했다던 그. 지금은 입장이 바뀌었다. “후배들이 아무리 비키라고 해도 그럴 생각이 없어요. 자신 있으면 추월해 가구려.” ■ 박서보 그는… 박서보 화백은 화단의 멋쟁이로 소문나 있다. 추운 겨울에는 짧은 밍크 재킷에 여우꼬리가 달린 털 모자를 쓰고, 화려한 봄날에는 실크 양복으로 멋을 낸다. 게다가 프라다 크로스백을 가슴에 둘러맨 모습을 보면 원로화가가 아닌 열정 넘치는 젊은 대학생과 다름없다. 홍익대 서양학과 출신의 그는 1956년 26살에 동료 예술가들, 그리고 국전과의 결별을 과감히 선언했다. 기존의 가치·형식을 부정하면서 58년 ‘뜨거운 추상’으로 불린 앵포르멜운동의 기수가 된다.70년대 들어 그 유명한 묘법 시리즈를 선보이며 단색회화로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오랫동안 홍대 미대 교수로 재직해 이른바 우리 화단의 중심축인 홍대 미대 사단의 대부로도 불린다. 수첩에 부인의 신발, 블라우스 사이즈 등이 빼곡히 적혀 있을 정도의 소문난 애처가로 2남 1녀를 뒀다. 자녀 모두 미술을 전공했으며 현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대학가 ‘강의 리모델링’ 붐

    “너희는 교수님한테만 배우니?우리는 외국 대사한테도 배운다.”새학기를 맞아 대학들이 ‘강의 리모델링’에 나섰다. 간헐적으로 외부 인사를 초청하던 흥미와 이름값 위주의 기존 특강 형식에서 벗어나 주한 외국인 대사들을 강사로 초빙한 ‘명품 강좌’를 정규과목으로 개설하는가 하면 학계 원로인사들의 릴레이 강연을 마련하기도 한다. 학생들의 사고와 관심의 폭을 넓혀주기 위한 것으로 학생들은 좀체 접할 수 없는 특별한 기회를 반기고 있다. 하지만 체계적인 준비 없이 형식만 바꾼 강의는 가차없이 외면받는다. ●대사초빙 ‘명품강좌’, 학계 원로인사 릴레이 강연도 경희대가 이번 학기에 처음으로 도입한 ‘글로벌 리더십’ 강의는 각국의 주한 대사들이 매주 강사로 나서는 1학점짜리 정규과목이다. 지난 8일에는 마리우스 그리니우스 주한 캐나다 대사가 양국간 현안에 대해 강의했고,15일에는 이갈 카스피 이스라엘 대사가 중동 정세를 소개했다. 현재 태국, 핀란드, 스페인, 스웨덴 대사 등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60명 정원인 이 강좌는 수강신청을 시작하자마자 인원이 다 찼다. 수업을 듣고 있는 사학과 정수민(20·여)씨는 “사실 영어에 관심이 있어 수강신청을 했는데 시사지식까지 얻게 됐다.”면서 “만날 기회가 없는 외국 대사들이 강사로 나서니 참 흥미롭다.”고 말했다. 성균관대는 지난해 시작한 특별강좌 ‘명륜강좌’를 통해 정규강좌를 보완하고 있다. 이번 학기 주제는 ‘원로 지성과의 만남’으로 학생들이 평소 만날 수 없는 학계 원로들을 초빙했다. 지난 13일에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장인 김태길 서울대 명예교수가 강사로 나서 ‘한국인의 인성’을 주제로 강의했다. 앞으로 원로철학자 박이문 연세대 특별초빙교수, 사회학의 거목 이만갑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류승국 성균관대 명예교수 등이 강단에 서게 된다. 성균관대 신방과 김서라(25)씨는 “원로 지성에게서 직접 강의를 듣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기회라 참여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주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학교 관계자는 “특별한 체험과 경륜을 가진 인사들의 강의가 학생 교양에 기여할 것으로 판단했으며 앞으로 꾸준히 색다른 강의를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성급한 형식파괴, 도리어 학생 외면받기도 하지만 명확한 주제 없이 강의 형식면에서만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가 학생들의 외면을 받는 경우도 있다. 서울대는 특강 형식을 정규 과목에 도입한 ‘관악모둠강좌’를 마련했으나 최소 수강인원을 채우지 못해 폐강되고 말았다. 이 강좌는 한 가지 주제나 인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하는 옴니버스 형식의 기초교양과목으로 지난해 2학기 다산 정약용에 대한 강의를 개설하며 도입됐다. 올해 ‘엘니뇨, 세계를 바꾼 기후현상’‘생물학적 관점에서 본 생명과 사회’‘북한의 이해’ 등을 주제로 강좌 3개를 열었지만 학생들의 참여가 너무 낮았다. 서울대 기초교육원 관계자는 “정확한 주제가 없었고 학생들이 강좌에 대해 미리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강의계획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참여가 적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준석기자 hermes@seoul.co.kr
  • 조계종단 화합이냐 분란이냐

    ‘종단 화합의 정착인가, 지관 스님의 험로인가.’ 지난 1998년 송월주 총무원장의 3선에 대한 찬·반 대립에서 불거진 분규로 승적을 박탈당한(멸빈) 스님들을 구제하기로 한 결정을 놓고 조계종이 파란을 겪고 있다. 조계종단의 해묵은 과제가 해결됐다며 반기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종헌·종법 위배’와 함께 지관 총무원장의 선거과정에서 있었던 ‘야합’의 결과라며 반발하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따라서 지관 총무원장이 취임 후 첫 분란에 어떻게 대처할지가 주목된다. 분란의 발단은 지난 9일 조계종 특별심사위원회(위원장 월서 스님·호계원장)가 1998년 종단사태로 멸빈 징계를 받은 스님 8명 가운데 월탄·정우·원학·현소·남현·성문 스님에 대해 공권정지 10년을 판결하고 정영 스님에게 문서견책, 전 조계사 주지 현근 스님에게 동일 결정(멸빈) 판결을 각각 내린 것. 이날 결정에 따라 공권정지 처분을 받은 스님들은 2008년 사면되며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조기 사면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판결을 놓고 일단 총무원과 징계 당사자측을 비롯한 종단의 많은 관계자들은 즉각 “종단의 가장 첨예한 사안이자 해묵은 문제가 해결됐다.”며 환영하고 나섰다.그러나 한편에선 “징계를 받은 자로서 비행을 참회하고 특히 선행 또는 공로가 있는 자에 대하여는 집행 중이라도 징계를 사면, 경감 또는 복권시킬 수 있다. 다만, 멸빈의 징계를 받은 자는 제외한다.”고 명시한 종헌 제128조를 들어 ‘종헌 위배’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지난 총무원장 선거 때 일부 멸빈자들이 경쟁자였던 지관·정련 후보측에 자신들의 사면복권 문제를 거론하며 지지의사를 밝혔고 후보들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하고 나서 판결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문제가 확산되자 15일 법전 종정이 “멸빈 등 중징계를 받은 자 중 참회와 개전의 정이 현저한 자를 포용하는 대화합의 조치를 강구하라.”는 교시를 발표한 데 이어 종산 원로회의 의장이 멸빈자 재심사 결정을 환영하는 유시(諭示)를 발표해 진화에 나섰다. 월서 스님도 “종헌과 특별법의 상충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법규위원회의 심판에 따른다며 종헌ㆍ종법상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파란이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儒林(560)-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0)

    儒林(560)-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0)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0) 퇴계의 답장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와 같이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여 자꾸 쌓아 올리고 깊이 생각해서 자연히 심지(心知)가 차츰 밝아지고 의리의 실상도 차츰 눈앞에 나타날 때에 다시 그 전에 궁리하여 터득하지 못하였던 것을 가지고 상세히 궁구하여 이미 터득한 도리와 참험(參驗)하고 대조해 나가면 부지불식간에 앞에서 미처 궁리되지 못했던 것까지도 일시에 서로 깨닫게 된다. 이것이 바로 궁리의 활법(活法)이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율곡이 물었던 사마광의 지선(至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또 사물의 이치는 본질에서는 물론 지선이 아닌 것이 없지만 그러나 선(善)이 있으면 반드시 악(惡)이 있고 시(是)가 있으면 비(非)가 있는 것이 필연이니, 그러므로 무릇 격물궁리(格物窮理)하는 것은 그 시비와 선악을 밝혀 취사선택을 잘하고자 하는데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달리 엘리트의식이 강했던 율곡이 다만 스승으로부터 받은 유가적 화두인 ‘거경궁리’에 맹목적으로 집중할 리는 없었다. 율곡은 퇴계와 달리 사람들과의 인화관계는 썩 좋지 않았고, 벼슬길에 올랐던 젊은 시절에도 원로대신 이준경(李俊慶)에게 당돌하게 도전하였을 만큼 평생 동안 필요이상 많은 정적을 만들었던 트러블 메이커이기도 했었다. 이러한 사실은 율곡이 불의를 참지 못하고 바른 말을 잘 하는 선비기질 탓이기도 하지만 남다른 선량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율곡이 유가의 시조인 공자와 맹자가 평소에는 ‘경(敬)’을 덕목으로 주장하였으면서도 막상 자신들은 경에 위배되는 오만한 태도를 취한 불합리한 행동을 묵과하였을 리는 없을 것이다. 율곡이 ‘정자’와 ‘사마광’을 빌려서 거경궁리의 방법을 퇴계에게 묻는 한편 실제로는 ‘거경’에 위배된 행동을 하였던 공자와 맹자의 모순된 행동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율곡이 퇴계에게 보낸 첫 편지 말문에서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신랄한 질문을 던진 것은 몹시 흥미롭고 재미있는 사실이다. 실제로 경을 부르짖은 공자도 오만하고 무례한 태도를 보인 적이 있었다. 논어의 ‘양화편’에 나오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노나라 사람 유비(孺悲)가 공자에게 예를 배우러 온다. 공자를 만나기를 청원하였으나 공자는 신병을 이유로 거절한다. 그러고 심부름꾼을 보내어 이 사실을 통보한다. 그러고는 곧 바로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불러 제친다. 유비가 들으라고.” 공자의 이러한 오만한 태도는 ‘가르침에 있어서는 유별이 없다.(有敎無類)’ 또는 ‘속수의 예 이상을 갖춘 사람에게 나는 일찍이 가르치지 않은 일이 없다.(自行束修以上 吾未嘗無誨焉)’라고 말한 공자의 신념과 위배되는, 실로 미스테릭한 장면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 [씨줄날줄] 기부의 두얼굴/임태순 논설위원

    기부는 서구의 전통이고 문화이다. 로마시대 때 원로원 등 귀족들은 대회당이나 목욕탕 등을 건설해 시민들에게 남겼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장군 등 유공자들에게 전리품이 주어진다. 이처럼 부를 축적한 귀족들이 노후에 사재를 털어 공공시설을 지어 기부했던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부의 사회환원인 셈이다. 여기에다 국가의 안위를 위해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앞장서 국방의 의무 등을 다하는 것이 이른바 ‘가진 자의 고귀한 의무’로 불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다. 물론 기독교도 기부문화가 뿌리내리는 데 일조했다. 수입의 10%를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 예수님이 다섯개의 보리빵과 물고기 두마리로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다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나눔과 베풂의 힘을 일깨워주는 일화이다. 반면 우리의 기부문화는 아직 인색하다. 나눔운동을 선도하고 있는 아름다운 재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 2001년 우리나라 국민 1인당 한해 기부액은 5만 1000원이었다. 이는 1998년 미국의 1075달러(105만여원),96년 일본의 240달러(23만여원)에 비해 크게 부족한 것이다. 그나마 미국은 정기적인 기부자가 전체의 70%나 되지만 우리나라는 18.2%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를 말해주듯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모금실적도 ‘개미’보다는 기업 등 ‘큰손’들에 크게 좌우된다. 경기가 얼어붙으면 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은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의 금모으기운동, 태풍이나 홍수피해시의 불우이웃돕기 성금 등의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역시 기부문화보다는 위기상황에 따른 동원체제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엊그제 지난해 국회의원 후원금 내역이 공개됐다. 몇백만원 등 고액기부자들은 5·31 지방선거에 출마하려는 사람들이 공천을 노리고 낸 로비성 또는 대가성 후원금이라는 분석이다. 기업들은 업무와 연관된 상임위 의원들에게 보험성으로 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우리은행 ‘얼짱’ 농구선수 김은혜씨가 거인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는 선배농구인 김영희씨를 위해 연봉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1000만원을 내놓았다는 소식이 들린다. 또 정부보조금을 받는 80대 할머니는 20년간 모은 돈 600만원을 장학금으로 기증했다고 한다. 대비되는 우리 시대 기부의 두 얼굴이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주식 갑부’ 전문경영인들

    ‘주식 백만장자’에 오른 최고경영자(CEO) 가운데 범(凡) 삼성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아 눈길을 끈다. 오너가(家) 출신 ‘주식 갑부’들이 그룹별로 상위 랭킹에 골고루 포진해 있는 것과 비교하면 이는 삼성의 인재 우대를 간접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삼성 CEO 가운데 주식 백만장자는 단연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이다. 윤 부회장은 삼성전자 주식 2만 6300주를 보유, 주식 평가액(6일 종가 65만 8000원)이 173억원에 이른다.이 본부장도 삼성전자 주식(1만 3884주 보유)평가액으로만 91억원을 웃돈다. 이윤우 부회장도 현재 삼성전자 주식 1만주(65억 8000만원)를 보유하고 있지만 그동안 주식을 매각해 실현한 금액을 합하면 1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도석 사장도 삼성전자 주식 1만 3151주를 보유, 주식 평가액으로만 86억원대 재산가다. 삼성의 원로경영인 일부는 1000억원 이상의 주식 갑부로 평가받는다. 이수빈 삼성사회봉사단장(회장)은 삼성생명 주식 74만 8800주를 보유하고 있어 수천억원대의 주식 재산가로 꼽힌다. 삼성생명 거래가를 단순히 30만원만 적용해도 이 단장이 소유한 주식평가액은 2246억원에 이른다. 이를 주당 70만원으로 책정하면 무려 5000억원을 웃도는 ‘재벌 총수급’ 주식 부자로 떠오른다. 정계에 입문한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도 삼성생명 주식 28만 800주를 보유, 최소 1000억원대의 주식 부자로 평가된다. 신세계 ‘CEO 3인방’도 주식부자로 꼽히는 전문경영인이다. 구학서(전사 총괄) 사장은 현재 신세계 주식 4만 8798주를 보유하고 있어 6일 종가(44만 3000원)로 주식 재산이 216억원에 이른다. 이경상(이마트) 대표는 7만 9436주를 보유해 평가액이 351억원에 달하고, 석강(백화점) 대표는 4만 8765주를 보유해 216억원에 달한다. 비삼성 출신의 ‘CEO 주식 갑부’는 김선동 에쓰오일 회장이 손꼽힌다. 김 회장은 보통주 11만 8482주를 보유, 주식평가액(6일 종가 68만 100원)이 80억원을 웃돈다. 최근 스톡옵션 행사로 총 69만주를 보유해 ‘100억원대 갑부’에 오른 이동호 대우자동차판매 사장은 사실상 예외적인 사례로 꼽힌다.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환그룹-최종환 명예회장家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환그룹-최종환 명예회장家

    올해로 건설 외길 60주년을 맞는 삼환기업은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1세대 건설기업이다. 대림산업·삼환기업·삼부토건 3개사만 명맥을 잇고 있지만 창업주가 살아 있는 곳은 삼환뿐이다. 대부분의 건설기업은 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전후에 부도가 나 좌초됐다. 삼환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린다.70∼80년대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빌딩을 지은 주인공이자 중동에 처음 진출해 중동 붐을 일으킨 기업이지만, 최근엔 80년대에 비해 해외 수주액이 급감하는 등 예전보다 인지도가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부침이 심한 건설업계에서 꾸준한 수익성을 유지하며 ‘환갑’의 값진 전통을 이어간다는 데 이견이 없다. 삼환은 올해 창업 60년을 맞아 국내외로 외형을 확장, 건설 명가로서 제2의 도약을 꾀하고 있다. ●창업 60년 맞아 제2의 르네상스 꿈꾸는 삼환 삼환기업은 올해를 제2 해외 르네상스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제다공항 확장공사 입찰에서 최저가를 써 1순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돼 계약을 협의 중이다. 건축비가 지난해 삼환기업 해외 매출(600억원)의 4배 규모인 2500억원이다. 해외유전 사업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연 100억원대 수익을 올린 마리브 유전 투자에 이어, 지분투자(4.9%)로 참여한 베트남 가스전 개발사업이 올해 하반기부터 수익을 낸다. 이밖에 지분투자(1.6%)를 한 예멘 마리브 LNG 개발사업도 오는 2009년부터 수익을 낼 전망이다. 국내에서는 3조원대 규모의 대우건설 인수전에도 참여, 건설기업 전통 명맥을 잇기 위해 전력을 쏟고 있다. 창립자인 최종환(82) 삼환그룹 명예회장은 1924년 12월29일 최상림씨와 김림자씨의 5남2녀 중 4남으로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종로의 종(鍾)자에 돌림자인 환(煥)자를 붙여 지은 이름이다. 양반이 광화문 중심에서 사대문 밖으로 쫓겨나 사는 것을 몰락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사대부 출신인 그의 집안은 가세가 기울면서 광화문 중심에서 다동으로, 이어 효자동, 종로4·5가 등으로 밀려났고 그는 종로 4가에서 태어났다.‘종환’이란 이름에는 사대문 안은 벗어나지 않았다는 안도의 뜻이 담겨 있다는 회고다. 훗날(1980년) 창덕궁이 내려다 보이는 종로구 운니동에 20층 규모의 삼환사옥을 세운 것을 두고 그가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제 점령기에 초등학교(어의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를 다닌 그는 글재주가 뛰어나 졸업할 때까지 각종 작문 대회에서 1등을 휩쓸었지만 학업에 뜻을 두진 못했다. 열 살이 되던 해에 궁핍한 살림에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일찌감치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건설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형들과의 연관이 깊다. 큰 형인 고 명환씨와 둘째 형인 고 영환씨가 졸업 이후 수도·난방공사 자재를 생산·시공하는 스기야마 제작소에 들어갔는 데 회사에서 쓰다 남은 자투리 파이프를 집에 가져와 가공, 다시 납품하는 식으로 돈을 벌면서 1933년 경동기계제작소를 설립했다. 그는 어의보통학교에 이어 2년제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뒤 18세가 되던 1940년 형들의 회사인 경동에 합류했다. ●약관의 나이에 창업…미군 공사로 국내 기반 삼환은 설립 이후 60년대 초반까지 줄곧 주한미군에서 수주한 공사에 전념했다.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국 공병대에서 크고 작은 공사를 발주했는데 토목·수도·난방 등 업종별로 공사를 따로 주지 않고 한 업체에 모든 공사를 맡기는 식이었다. 그는 경동기계제작소안에 공사부를 설립해 영업부장으로 뛰며 미군 공사를 수주했다. 한발 더 나아가 하청업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물 한 살이던 1946년 3월15일 오늘의 삼환그룹 효시인 삼환기업공사를 설립했다. 큰 형과 둘째 형, 그리고 최 명예회장 삼형제가 합심해 만든 회사란 뜻에서 지은 이름이지만 실질적인 소유주나 최고경영자는 최 명예회장이다. 회사 설립후 8개월 동안 이룬 공사실적만 총 26건 130만원이다. 당시 공무원 월급이 1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액수다.1948년 가을 을지로 2가 119번지 53호를 매입해 신사옥도 마련했다. 1949년에 착공한 강원도 영월 등 7개 광산지역의 미국인 광산기술자용 주택공사는 당시 업계의 부러움을 산 초대형 공사였다.1950년 6·25로 공사는 중단됐고 건물은 불에 타버렸지만 이 공사는 훗날 새옹지마격으로 그에게 전쟁 이후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됐다. 서울 수복후 미군 공사 관계자는 그를 반도호텔(현 롯데호텔)로 불러내 큰 궤짝 하나를 내놓았는데 그 속에는 당시 2000만원이 들어 있었다. 불에 타버려 흔적조차 사라진 건물의 공사비를 뒤늦게 받은 것이다. 주식회사로 전환한 것은 전란 이후 1952년 9월의 일이다. 서울 수복후 전후 복구공사에 힙입어 사세를 키워나가던 중 삼환은 당시 주주 10명이 총 주식 2만주를 발행하면서 주식회사가 됐다. 그 중 최 회장이 1만주, 둘째 형 영환씨가 5000주, 큰 형 명환씨가 500주를 가졌다. ●국내 ‘중동 붐’ 조성…횃불신화로 국제 명성 쌓아 1961년 ‘5·16’은 새 전기를 가져왔다. 수의계약으로 이뤄지던 관급공사가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신문에 종종 입찰공고가 나는 일이 생겼고 삼환은 국내 주요 공사를 맡는 ‘건설 명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5·16 이후 삼환이 따낸 최초의 관급 공사는 1962년 발주한 서울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 호텔이다. 이어 경부·호남·영동·남해·동해고속도로 등 각종 토목 공사에 참여했고, 국립극장, 삼일빌딩, 조선·프라자·신라 호텔, 지금은 사라진 남산외인아파트, 여의도 전경련 회관, 국립묘지 현충탑, 포항제철(현 포스코) 공장 등을 지으며 주택·오피스빌딩·토목·플랜트 등 각 분야에서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삼환은 국내사업에 만족하지 않았다. 해외진출 가능성을 계속 탐색하던 최 명예회장은 1963년 월남 사이공(호찌민)에 지사를 설립하면서 첫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 정국 혼란으로 4개월 만에 철수했지만 이후 196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한국 업체 최초로 지사를 설립한 데 이어 1973년 국내 업계 최초로 중동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했다. 삼환은 사우디에서 네번 연거푸 고배를 마신 뒤 다섯번째 카이바∼알울라고속도로(175㎞) 입찰에서 2400만달러 규모의 공사를 따내며 국내 중동 진출 1호 기업이 됐다. 완공 때까지 3년간 자재 공급난, 종교 문제 등 시행 착오로 적자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어 사우디 최대 규모인 제다시(市) 전체를 뜯어고치는 미화사업을 맡으면서 행운을 잡았다. 미화공사를 메카순례기간 전까지 끝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횃불을 켜놓고 야간공사를 강행하던 것을 파이잘 국왕이 보고 감동을 받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삼환은 6000만달러 규모의 대형 공사를 수의계약하게 됐고 ‘횃불신화’라는 말을 남기며 국내 건설업체의 중동 진출 붐을 조성하는 등 명성을 널리 알리는 개가를 올렸다. ●해외 프론티어의 꿈…정체된 90년대 80년대 들어서는 해외시장에 더 집중했다.1978년 미수교국이던 예맨에 진출했고 이를 계기로 1984년 북예맨 마리브 유전개발에 참여하면서 원유사업을 시작했다. 이어 요르단, 파푸아 뉴기니아, 알래스카, 방글라데시, 사할린 등 시장을 개척했다. 국내 기술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국제 모임에 적극 참여,1982년 아시아 서태평양 건설연합회인 아이포카(IFAWPCA) 5대 회장에 추대됐고 재임시절 세계건설인대회도 제창했다.1990년대 들어서는 회사 일 보다 민간 외교에 시간을 쏟았다.1992년 한·소 경제협력회 2대 회장으로 선임됐고 재차 연임됐다. 러시아의 정치·경제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 성과를 이루지 못한 점은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아 있다. 이런 탓에 90년대 들어 삼환의 해외 실적은 급감했다. 건설협회에 따르면 삼환의 해외공사 수주액은 1982년 당시 5억 8834만 8000달러(한화 6000억원)였지만 10년 후인 1992년에는 10분의1 수준인 624만 4000달러에 그쳤다. 국내 건설 업계의 주요 테마인 아파트 실적도 많지 않다.90년대 후반부터 업계가 경쟁적으로 환상을 담은 아파트 브랜드와 광고에 집중하며 수주전에 열을 올릴 때에도 삼환은 아파트 광고를 하지 않았다. 최 명예회장은 오히려 당시 시류에 대해 자서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를 통해 “안쓰럽다.”는 평을 내놓았을 뿐이다. 한 때 9개에 달하던 계열사는 현재 6개로 정리됐다. 키친아트로 유명한 양식기 제조업체 경동산업(60년)과 코카콜라 등 청량음료 제조업체인 우성식품(69년)은 모두 1990년대 말 정리됐다. 태양관광(관광·77년)은 삼환엔지니어링(기술용역·76년)에 통합돼 삼환기술개발이 됐지만 설계 업무는 거의 하지 않고 관광업도 계열사 직원 출장을 위한 발권 업무 정도만 한다. 이밖에 우성개발(67년), 삼환까뮤(78년), 삼환종합기계(79년), 신민상호신용금고(78년), 회현상사(78년) 등은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러나 건설 명가로서의 국내 입지와 안정적인 매출은 줄곧 유지하고 있다. 건설 계열사를 가진 한화그룹의 1000억원대 대한생명 리모델링 공사를 지난해 수주했고,2007년 준공되는 건축비 595억원 규모의 팬택계열 서울 상암동 R&D센터도 짓고 있다. 삼환기업은 2005년 기준 매출 6612억원, 당기순이익 500억원을 기록했다. 올해 종합 수주액은 1조 5000억원 규모다. 삼환그릅 기준 2005년 매출은 1조 1000억원, 당기순익은 650억원이다. ●교사 부인과 1남1녀의 단촐한 가정 1947년 봄. 삼환기업공사의 30대 청년 사장으로 뛰면서 당시 숙명여학교 교사이던 고 채광영 여사와 2년여 열애 끝에 1949년 4월 결혼했다. 최 명예회장은 부인을 만났을 당시 “‘아!이 여자다.’라는 느낌이 퍼뜩 들어 프러포즈를 했다.”고 언론을 통해 회고한 바 있다. 부인 채씨는 그를 홀로 남겨둔 채 1999년 노환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부인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가업을 승계한 외아들 최용권(56) 회장은 동갑내기로 고 한정대 전 대한페인트잉크(DPI) 회장의 3녀인 봉주(56)씨와 1974년 결혼해 슬하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미 보스턴대를 나온 용권씨는 미 유학중 같은 유학생 신분이던 봉주씨를 만나 결혼했다.1975년 삼환기업 기획조정실장으로 입사해 8년 만인 1982년 32세 나이에 삼환기업 사장에 취임했다. 이어 삼환이 창립 50주년을 맞은 1996년 9월 회장으로 등극,2세 경영 체제를 굳혔다. 선친인 최종환 명예회장은 ‘바늘로 찌를 구멍’은 있어 보였던 데 비해 최용권 회장은 ‘찌를 구멍’조차 없는 사람이란 평이 임원들 사이에서 나온다. 최 명예회장의 손녀이자 최용권 회장의 장녀 영윤(31)씨는 이준용 대림산업 회장의 며느리가 됐다. 이 회장의 3남 해창(35)씨와 1999년 3월 결혼하면서 국내 두 전통 건설기업은 사돈관계를 맺게 된 것. 대림의 창업주인 고 이재준 선대 회장과 최 명예회장은 건설 1세대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해창씨는 현재 대림산업 계열사인 종합물류회사 대림H&L의 이사로 재직 중이다. 아는 사람 소개로 만나 2년여 교제끝에 결혼했다. 다른 손녀·손자들은 아직 모두 학생이다. 장손주 최제욱(29)씨는 예일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컬럼비아대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고, 최지연(26)씨는 세계 최고의 미술대학 중 하나로 꼽히는 미국 RSID에서 공부 중이다. 막내 최동욱(22)씨도 콜롬비아대에서 학부 과정을 밟고 있다. ●형제들과의 인연…삼환에 친인척 1명도 남아 있지 않아 삼환은 인척들의 경영 참여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없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친·인척이 맡았던 경동산업과 우성식품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리고 지금은 친·인척 중 단 한 명도 삼환에 적을 두는 이가 없다. 맏형 고 최명환씨는 6·25 당시 자신이 설립한 삼환기업의 모체인 경동기계가 잿더미로 변하자 동생 최 회장과 함께 삼환기업공사를 설립한 뒤 주주와 이사로 활동했다. 그의 아들인 동국대 출신의 용근(67)씨는 계열사인 우성식품 이사, 삼환기업 사장 등을 맡다가 1996년 삼환까뮤 사장직을 끝으로 삼환을 떠났다. 둘째 형인 고 최영환씨는 국내 최초 강관회사인 한국강관의 3인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삼환을 떠났는데 한국강관의 부회장까지 맡은 바 있다. 이대 영문과를 졸업한 그의 차녀 계자(64)씨는 18대 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낸 권숙일씨와 결혼했다. 장남 용재(56)씨는 1993년 삼환의 계열사로 지금은 사라진 키친아트 등 양식기를 제조했던 경동산업의 사장을 맡은 바 있다. 차남 용진(53)씨는 ㈜유창 사장으로 삼환과는 무관한 사업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셋째 형 고 최경환씨는 1958년 삼환의 관계사로 설립된 양식기 제조업체인 경동산업의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다. 이 회사가 정리되기 직전인 1999년까지 재직했다. 그의 아들 최용철(60)씨도 이 회사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경동산업은 인건비 상승과 경쟁 심화로 자금난을 겪다 94년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2000년 다시 법정관리 퇴출 명령을 받으면서 정리됐다. 그의 장녀 최형인(57)씨는 한양대 인문과학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고 최경환씨의 사위이자 최형인씨의 남편이 삼성의 반도체 신화를 이끌어온 이윤우(60) 삼성전자 기술총괄부회장이다. 막내 동생인 최정환(73)씨는 삼환이 코카콜라 부산·경남지역 판매권을 가진 우성식품을 1969년 창립하면서 이 회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연간 매출 1300억원대로 한 때 부산지역 대표 식품회사로 명성이 높았지만 방만경영과 과다 부채를 이유로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최정환씨는 형인 최 명예회장으로부터 1997년 4월 경질됐다. 이 회사는 1997년 코카콜라 부문을 매각한 뒤 같은해 말 부도처리됐다. 최정환 전 회장은 서울대 상대, 산업은행을 거쳐 1968년 삼환에 입사했다. 이 회사 사장을 지낸 최정환 회장의 장남 최용석(47)씨는 회사가 문을 닫은 뒤 새천년민주당 창당발기인으로 활동하는 등 한 때 정치에 뜻을 두기도 했지만 지금은 정리하고 지성산업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장녀 영혜(45)씨는 건설부 장관, 상공부 장관을 지낸 고 장예준씨의 차남 동욱(48)씨와 결혼했다. jhj@seoul.co.kr ■ 故 정주영 명예회장과 ‘형님-아우’ “아, 이리도 황망히 가셨습니까? 아직도 회장님이 하셔야할 일이 많이 남아있는 데 무얼 그리 급히 가셨습니까? 여든 여섯의 춘추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 경제의 영원한 등불로 언제나 함께하시기를 기도했는데 이리 가시니 이별의 안타까움과 아픔이 너무도 시리게 느껴집니다. 정주영 회장님.” 최종환 명예회장은 2001년 3월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타계한 직후 당시 서울신문을 통해 이같은 조사를 남긴 바 있다. 두 사람은 생시에 형님-동생으로 서로를 부르며 경쟁보다는 조언을 구하고, 돕고 의지하는 형님과 아우로서의 정이 돈독했다. 그는 건설 1세대 중에서도 특히 고 정 명예회장, 고 이재준 대림산업 명예회장, 그리고 조정구 삼부토건 명예회장을 존경하면서도 가깝게 지낸 인물로 꼽았다. 자서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이’에서 고 정 명예회장에 대해 “타고난 능력과 자질 이외에 뛰어난 판단력과 결단력, 저돌적인 돌파력에 감탄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평했다. 고 정 명예회장은 전경련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최 명예회장에게 부회장을 역임토록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최 명예회장에게 처음 소개시켜준 사람도 고 정 명예회장이라고 덧붙였다. 고 조정구 삼부토건 회장에 대해서는 “나는 상대방의 잘못이 보이면 즉석에서 쏘아대는 성격이지만 그 분은 어떤 경우에도 참고 있다가 나중에 조용한 목소리로 상대방이 스스로 깨닫도록 설명해 주는 등 깊은 인내의 미덕을 갖춘 분”이라고 회고했다. 고 조 회장이 건설협회 회장을 맡을 때 최 명예회장은 이사로 그를 도왔다. 최 명예회장은 이들과 함께 황무지나 다름없던 이 땅에서 건설업을 일궈냈다. 그러나 지금은 마지막 남은 건설 1세대로 원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 가회동 자택에서 지내고 있으며, 건강이 예전같지 않다. 수십년간 매일 30분씩 해온 ‘대나무 밟기’를 건강 비결로 소개했던 그였지만 요즘은 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1996년 아들에게 모든 경영을 물려주고도 일주일에 최소한 사흘은 회사에 나왔지만 올들어선 일주일에 병원가는 날 하루 정도만 오전에 회사에 들른다. 평상시처럼 직원들과 지하 구내 식당을 찾는 등 검소한 모습은 그대로라는 평이다. ■ ’60년전통’ 삼환을 만든 사람들 삼환이 60년 건설 명가의 전통을 지켜올 수 있었던 데에는 전문경영인들의 공이 컸다는 평이다. 최종환 명예회장이 꼽는 최고의 CEO는 경성공업학교(현 경기공고) 출신의 고 이창호 사장이다. 부사장직으로 순직한 뒤 사장으로 추서됐고, 최 명예회장으로부터 ‘고락을 함께한 벗’으로 불리기도 했다. 최 명예회장은 지난 1977년 회사장으로 치러진 고 이 사장의 영결식 조사에서 “지금 내 오른팔이 떨어져 피가 흐르고 여며드는 것만 같은 아픔이 밀어 닥치는군요. 그러나 당신의 유지를 받들어 나는 기어코 우리 삼환을 세계 속의 삼환으로 만들고야 말겠습니다.”라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격무로 일관하다 신병을 갖게 되어 휴양을 하다가도 중동 현장으로 달려가는 등 투철한 사명감은 지금도 귀감이 되고 있다. 그가 사망한 이듬해에는 ‘회사를 위해 노력한 사원에게는 응분의 보상이 꼭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연금제도와 사원주택단지조성사업이 시작되기도 했다. 전동진(74) 사장도 삼환에서는 전설로 불리는 CEO중 한 사람이다.1975년 월남이 패망할 당시 월남지사장으로 근무하던 중 하청업자 공사대금 지불 등 잔무 처리를 위해 남아 있다 8개월간 공산 치하에 억류된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68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뒤 삼환기업 중기부 과장으로 입사한 이후 1996년까지 삼환기업·삼환엔지니어링·삼환까뮤 등 계열사 사장을 두루 역임했다. 지금은 삼환의 육영재단인 우성문화재단에서 이사로 재직중이다. 행정고시 출신의 최석원(75) 고문은 내무부 치안본부장, 노동청장, 부산시장, 건설부 차관 등을 역임한 뒤 삼환의 해외사업이 꽃을 피우던 1982년 사장대우 상임고문으로 영입됐다. 지금도 우성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노년까지 삼환과의 인연을 지키고 있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故 박성용회장 서울대 명예박사 추대

    故 박성용회장 서울대 명예박사 추대

    서울대가 지난해 별세한 고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서울대가 고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는 것은 처음이다. 서울대는 2일 대학원위원회 회의를 열고 박 전 명예회장을 명예철학박사로 추대하는 안건을 가결시켰다. 학위 수여식은 오는 28일 오전 본부에서 열린다. 명예박사추대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태수 대학원장은 “이제 서울대도 건전한 기업 활동을 명예박사 학위 수여 선정에 고려할 때가 됐다.”면서 “박 전 명예회장은 학자인 동시에 노사화합과 사회봉사 등 덕목도 탁월히 수행한 성공적인 경영자이고, 기업의 성과를 문화예술계에 아낌없이 투자한 훌륭한 인사”라고 설명했다. 명예박사 추대절차가 까다로운 서울대가 고인이 된 기업인에게 학위를 수여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서울대는 개교 60년 이래 102명에게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으며, 한국인은 이승만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 등 6명이 전부다. 기업인으로서는 2000년 한국 반도체 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 놓은 성과를 인정해 학위를 준 이건희 삼성 회장 이후로 두번째다. 재계 1세대 원로 경영인으로 꼽히는 박 전 명예회장은 총수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금호문화재단 이사장, 예술의 전당 이사장, 한국메세나 협의회 회장 등을 맡아 지원을 아끼지 않은 문화예술계 최고 후원자로 생전에 ‘한국의 메디치’로 불렸다.‘통영 윤이상 음악회’를 세계적인 음악제로 키운 주인공이기도 하다. 박 전 명예회장은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서강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미리 가본 베이징 ‘다산쯔 국제예술축제’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미리 가본 베이징 ‘다산쯔 국제예술축제’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중국 현대예술의 최전선,‘다산쯔(大山子)’. 지난달 말, 이곳은 ‘베이징 다산쯔 국제예술축제’ 준비에 막 돌입한 모습이었다. 오는 4월로 세번째를 맞는 이 축제에는 세계 각지에서 10여만명이 몰려들 것으로 예상된다. 첫해 1만명 가량이던 관람객이 지난해에는 8만명으로 늘었고, 올해는 그 보다 더 큰 증가세를 보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지난해 봄만 해도 ‘개발이 시작돼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흉흉했던 이 곳이, 중국 최초의 ‘문화특구’로 지정된 것도 이같은 성과에 힘입은 것이다. 아름드리 나무들 사이로 늘어선 대형 공장 건물들. 당초 대규모 공장터였던 탓에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는 옛 흔적이 도리어 현대 예술과 어우러져 보인다. 잘 구획된 골목마다 미술전시장이 늘어서 있는가 하면, 여러 실내·외 공연장이 눈에 띈다. 실내 벽면에 ‘마오쩌둥주석 우리 마음의 붉은 태양’(毛澤東主席我們心中的紅太陽) 등의 선전문구가 그대로 남아 있는 ‘스페이스(時態空間)’란 갤러리는 이미 명소가 됐다. 한 서점에 들어서니 곳곳에 사진기를 든 젊은이들로 붐빈다. 잘 진열된 현대 건축·미술 관련 각종 해외 잡지와 서적을 찍어대고 있다.‘볼 것’에 목마른 예술지망생들이다. 서점 점원 리우제(劉杰)는 “현대 예술에 관한한 베이징의 어떤 대형 서점보다 풍부한 서적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랑했다.“그런만큼 많은 외국인과 학생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한 허름한 작업실을 찾으니 갖가지 인형 가운데 눈에 익은 ‘인민복을 입은 용’이 보인다. 이른바 ‘용머리 큰형님’(龍斗老大)’이다. 마오쩌둥 주석을 우화한 이 인형을 처음 제작한 진쩡허(金增鶴)는 제법 많은 양을 국내·외에 팔았다. 들여다 보기 어렵다는 작업실을 구경할 행운도 얻었다.20여평 남짓 공간에 가로, 세로 각 2m,3m짜리 창문이 2개.2층 길이가 넘는 높이의 돔형 천장에도 비슷한 크기의 유리창이 있어 채광이 뛰어나다. 공장 건물의 이점이다. 문 밖으로 대낮에도 컴컴한 복도 천장에 백열등 10여개를 켜놓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복도는 유명 영화의 촬영장소로도 쓰였다고 한다. 다산쯔는 더이상 ‘중국’만의 공간은 아니다.100여개의 화랑 가운데 절반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일본, 타이완 등 외국에서 왔다. 이 가운데 한국문화공간으로 ‘이음’이 들어선 것은 반갑다. 그리 멀지 않은 ‘지우창(酒廠)’이란 곳에도 한국 화랑과 예술가들이 몰려드는 중이다.“전 세계 유명 갤러리들과 예술 관계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인 만큼 한국의 또 다른 국제예술 교류의 거점이 될 것”이라는 게 이음의 컨설턴트 정수영씨의 설명이다. 이런 점에서 다산쯔가 한국인 밀집촌인 왕징(望京)과 인접한 건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한 대형 갤러리의 중국인 관계자는 “이번 3회 예술축제가 끝나면 그림 값도, 작가의 명성도 뛰고 국제 무대에서 다산쯔의 영향력도 크게 확대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보였다. 그는 “외국인과 전문 수집인들이 주요 고객인데 그림의 매매가 지금도 대단히 활발하다.”고 귀띔했다. 다만 다산쯔의 임대가격도 덩달아 오르는 게 문제이긴 하다. 이곳에 온지 2년 됐다는 한 중견작가는 “임대료가 딱 2배 올랐다.”고 전했다. 가난한 예술가들을 끌어모았던 유인책이 매력을 잃어가는 양상이다. 가난한 화가의 거리에서 ‘보보스’촌으로 변한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이나, 전위예술의 전진기지였다가 지금은 명품 숍의 전시장이 된 뉴욕의 ‘소호’처럼 다산쯔도 어떤 변신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산쯔는 활기에 넘친다. 분위기 좋은 카페와 음식점이 있고, 가구점과 패션샵이 공존한다. 주말 밤이면 각종 클럽 행사와 파티가 열리고 어떤 공연장은 나이트 클럽으로 변신하기도 한다.4월부터 한달간 열릴 축제가 다산쯔를 어떤 모습으로 바꿔놓을 지 궁금하다. jj@seoul.co.kr ■ 다산쯔의 어제와 오늘 |베이징 이지운특파원|다산쯔를 ‘문화동물원’으로 부른 중국의 한 원로 예술인이 있다. 또한 그는 이 곳을 “중국전자공업의 ‘역사박물관’”이라고도 했다. 다산쯔는 흔히 ‘798’로도 불린다. 공장지대에 붙여진 번호다. 과거 동독의 기술지원으로 1954∼57년 세워진 중국 전자산업의 요람이었다. 중국의 핵 프로그램과 위성발사기술, 대형 군사 및 산업 프로젝트의 주요 기술 거점이었던 곳이다.58년 공장 준공 이후 마오쩌둥(毛澤東) 국가주석으로부터 ‘휘호’를 받았을 때 노동자들의 사기와 자부심은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었을 정도라고 당시 공장 노동자는 전했다. 그랬던 이곳에 예술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90년대초다. 이 대형 국유기업은 80년대초부터 이익을 내지 못해 다른 공장으로의 노동자 이동이 시작됐고, 베이징의 도심 확대 등과 맞물려 사실상 폐업 상태에 빠지게 됐다. 비어가는 공장은 가난한 예술가들의 작업장과 숙소가 되기 시작했다. 다산쯔가 현대예술의 거점이 되기 시작한 것은 93년 무렵부터 해외에서 활동하던 중국 현대미술가들이 이곳에 돌아온 것과도 맞물린다. 물론 중국 최고의 미술계 대학인 ‘중앙미술학원’과 화가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화자디(花家地)’가 인근에 위치한 점과도 무관치는 않다. 특구로 지정되진 않았지만 베이징에는 이밖에도 ‘예술구(藝術區)’로 불리는 지역이 몇 곳 있다. 숭좡(宋莊) 등 자생적인 예술인 집단 거주지와 쒀자춘(索家村), 페이자춘(費家村) 등 화랑 밀집지역 등이 여기에 꼽힌다. 베이징 인근에 이같은 문화예술촌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위안밍위안(圓明園)으로 알려진다. 중국 개혁개방 이후에 형성된 곳이지만 곧 정부에 의해 폐쇄된다. 이후 형성된 예술촌이 숭좡과 베이징 남동쪽 퉁저우(通州)현의 건물밀집지역이다. 숭좡은 대표적인 화가 거주촌으로 다산즈의 많은 화가들이 이곳에서 옮겨왔다. 이 곳에선 지금도 일반인과 화가들이 작품세계를 교감할 수 있는 ‘화가 캠프’도 종종 운영된다. 뒤이어 둥춘(東村), 상위안(上苑), 란산(籃山) 등이 유명 예술가의 거주지와 작업실 밀집지역으로 자리잡는다. 이후 다산쯔에 엄청난 수의 예술가가 집결하면서 예술과 경제분야 모두에서 커다란 성과를 내자, 쒀자춘과 페이자춘 등에 갤러리와 복합 창작 및 전시공간들이 들어서 오늘날 예술촌이 구성됐다. 이렇게 형성된 예술촌은 해외 예술을 빨아들이는 흡입구요, 중국 현대예술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즈음해 중국의 최대 문화행사로 자리잡을 것으로 예상되는 ‘베이징 다산쯔 국제예술축제’도 이 예술촌간의 활발한 교류의 결과로 성장한 것이다. jj@seoul.co.kr ■ 작가 진쩡허가 말하는 다산쯔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주류(主流)가 아니면 살 수도 없었던 중국 예술계에 한줄기 숨통을 틔워 줬다.” 다산즈에서 1년여간 작은 작업실과 전시공간을 갖고 있는 진쩡허(金增鶴·30).‘다산쯔가 무엇을 주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중국에는 엄청난 수의 예술가가 있다. 능력도 많지만 생존이 어렵다. 주류만이 겨우 살아나갈 수 있다. 어느 나라든 상황은 비슷하겠지만 중국의 현실은 대단히 심하다.”는 것이다. 특히 현대미술 작가들은 중국내에서 활동 공간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그나마 현대미술의 주류는 서양미술의 모방에 치우쳤다.”고 질타했다. 작품판매의 활로가 외국에 한정됐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화랑을 찾아가서 전속 계약을 해야 생활과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지만 “100명이 가서 5명도 계약을 따내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내 것은 작품의 재료 자체가 비주류적인 것이어서 다산쯔가 아니었다면 활동 공간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라면서 “한국은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지만 중국엔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아쉽다.”는 말도 덧붙였다. ‘런(仁) 예술센터’ 매니저인 황이(黃毅)씨는 “쇼든 전시든 작품이든 표현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없는 것이 최대 장점”이라고 꼽았다.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 다른 지역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얘기다.“그래서 전위적이고 실험적이고 특색있는 작품이 나올 수 있고, 외국인들로부터 호응을 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홍콩에도 예술센터를 운영하고 있다는 그는 “심지어 홍콩보다도 훨씬 현대적인 작품들을 이곳에 전시하고 있다.”고도 소개했다. 유럽에서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가졌다는 중견 화가 스신닝(石心寧)씨는 “많은 수의 예술가들이 모여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낀다.”고 했다.“가까이서 다른 이들의 작품 활동을 지켜 보며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고, 전람회 등을 보면서 경쟁심리도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jj@seoul.co.kr
  • 인사동 ‘시인학교’ 살리기 나섰다

    인사동 ‘시인학교’ 살리기 나섰다

    ‘밥먹고 살려거든 시 하는 척 하지마라/시를 내걸고 장사한다는 건 위험한 짓이다./인사동 시인학교가 그렇게 망하고 말았다./(중략)시인학교 교장은 연금도 없이/어디서 뭘 먹고 사는지’(‘인사동에서 시 읽기’중) 원로 시인 이생진(77)선생이 일전에 낸 시집 ‘인사동’에 실린 시구다.20년간 인사동 시인묵객들의 사랑방 노릇을 했던 카페 ‘시인학교’가 문을 닫은 건 2004년 6월.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300만원을 내고 있었으나 밀린 세 때문에 나올 때 한푼도 건지지 못했다.‘연금도 없는 교장’은 공사장에서 막일도 하고, 인사동에서 노점상을 하다 수레를 빼앗기며 일터를 전전했다. 시인학교 교장 정동용(45). 그가 학교 문을 다시 열기위해 발벗고 나섰다. 시인학교를 기억하는 시인들로부터 육필 시를 받아 시집 ‘사랑을 머금은 자 이봄 목마르겠다’(랜덤하우스중앙)를 펴냈다. 원고료는커녕 저작권도 못 챙기는 일인데도 김규동, 김지하, 신경림, 정호승 등 150여명의 시인들이 기꺼이 시를 써줬다. 이번 시집에는 이 중 100편의 시만 실렸다. 그게 못내 아쉬운지 정씨는 “빨리 50편을 더 모아 새 시집을 내야 할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시인학교 초대 교장은 시인 정태승이다.‘두레시’동인을 이끌던 그는 1984년 김종삼 시인의 시 제목을 빌려 술집 간판을 달았다. 그 자신 등단 시인이면서, 인사동에서 아내를 만나 시인학교에서 결혼 뒤풀이를 한 정동용씨는 인연을 빌미삼아 퇴직금 털고 결혼반지 팔아 88년 시인학교를 인수했다. 화가, 음악가 등 모든 예술인들이 이곳을 아지트 삼아 날밤을 새웠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따로 여관방을 얻을 필요가 없었다.‘인사동 시인학교에는 시인이 아니어도 들어가서/술을 마실 수 있고/시인이어도 시인이 아닌 척 술을 마실 수 있다.’(전기철 ‘인사동 시인학교’중) 정씨의 재기 의지에 여러 지인들이 십시일반 힘을 보탰다.20년 단골 손님인 막사발 장인 김용문씨는 육필시를 집어넣은 도자와 막사발 500점을 구웠다. 그는 “시인은 아니지만 시인학교를 드나들면서 시인 술 친구들을 많이 알게 됐다. 이문재, 최승호, 신경림 시인들과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고, 흙피리를 불던 날들이 기억에 생생하다.”고 회고했다. 화가 김선두, 민정기, 이인 등도 선뜻 참여했다. 지난 1일 인사동 아트윌갤러리에서 문을 연 육필시그림도자전은 정씨와 김씨의 의기투합에 ‘문학과 문화를 사랑하는 모임’(대표 김주영), 대산문화재단, 교보문고가 지원해 마련한 행사다. 이날 오후 5시에 열린 개막식에서는 시인, 화가들이 참석해 고사를 지내며 전시회의 성공을 기원했다. 전시기간에 판매된 육필시와 그림, 도자와 막사발 등의 수익금은 시인학교를 다시 여는 데 쓸 계획이다. 정씨는 “흙을 빚어 시를 영원히 남기듯 시인의 예술혼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시인학교가 하루빨리 다시 개교하기를 기원한다.”고 소망했다. 전시는 7일까지 열린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오스카’ 누구 손 들어줄까

    ‘이안 감독,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을 수 있을까.’ 해마다 세계 영화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올해로 78회째다. 이번에 감독상과 작품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면 예년에 비해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작들이 많다. 8개 부문 후보에 오른 ‘브로크백 마운틴’은 남성미만 물씬 풍길 것 같은 카우보이들 사이에서 이뤄진 동성애를 소재로 했다. 특히 블록버스터 ‘헐크’의 실패를 딛고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이안 감독은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거머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매카시 광풍에 맞섰던 미국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를 그리고 있는 ‘굿나잇앤 굿럭’은 미남 배우 조지 클루니가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해 화제를 모았다. 조지 클루니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이어 배우 출신 명감독으로 등극할지도 관심거리이다. 미국 사회 인종 갈등을 그린 ‘크래쉬’(폴 해기스 감독), 뮌헨올림픽 테러 사건을 화두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민감한 관계를 담은 ‘뮌헨’(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자로 유명한 게이 작가 트루먼 카포테의 전기 영화 ‘카포테’(베넷 밀러 감독)도 작품상과 감독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남우주연상은 국내에서는 각종 할리우드 영화에서 조연으로 익숙한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카포테)과 ‘기사 윌리엄’,‘그림 형제’ 등을 통해 떠오르고 있는 스타 히스 레저(브로크백 마운틴)가 다툴 것으로 보인다. 두 명 모두 영화 속에서 동성애자를 연기했다. 미국의 전설적인 컨트리 가수 자니 캐시를 연기한 호아킨 피닉스(앙코르)도 다크호스. 여우주연상으로는 2년전 ‘몬스터’로 오스카를 거머쥐었던 샤를리즈 테론(노스 컨트리)과 원로배우 주디 덴치(미세스 핸더슨 프리젠츠), 리즈 위더스푼(앙코르) 등이 유력하다. 미국 할리우드 코닥 시어터에서 6일 오전 8시(한국시간)부터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은 영화전문채널 OCN에서 생중계한다.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한승원 토굴살이] 꽃들의 사업

    [한승원 토굴살이] 꽃들의 사업

    나의 92세 노모께서 강건한 ‘늙은이’이므로 그분의 아들은 예의상 싱싱한 ‘풋 늙은이’여야 한다. 나이 들면서 일과 꽃들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집착이고 탐욕인지도 모른다. 꽃을 보면 허기진 듯 코를 대고 향을 맡곤 한다. 색을 밝히는 남자들은 사랑해야 할 여인이 없으면 꽃이라도 희롱한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꽃을 탐하는 것은 무어라 흉허물해야 하는가. 나는 그것을 꽃들의 사업 사랑하기라고 말한다. 꽃 한 송이 피는 것을 보고 우주의 변환을 헤아린다. 꽃들이 하는 사업처럼 화사하고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우주 율동의 원리에 따라 천하 인민들에게 베푸는 것을 사업이라 한다.’고 주역은 말한다.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살이를 한 다산 정약용 선생은 실사구시적인 글쓰기가 사업이었다. 사업을 통해 정심(깨달음)에 이르곤 하신 그분의 한 권 한 권의 결과물들은 거대한 꽃 타래이다. 꽃들의 사업은 열정으로 자기를 불태우듯이 터뜨리는 것이고, 세상을 황홀하게 장식하는 것이고, 향기 퍼뜨리고 꿀벌에게 화분 주고 꿀 주고, 열매 맺어 번식한다. 세상을 온통 자기 꽃으로 덮으려 하고, 자기가 언제 떨어져 썩어 없어질 것인가를 알고 스스로 땅에 떨어진다. 꽃은 사람으로 치자면 생식기인 것인데, 사람의 그것과는 정 반대쪽에 향기롭고 화사한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이 자기의 꽃을 몸의 아래 땅 쪽(陰)의 깊숙한 옷 속에 감춘다면 그들은 몸 위의 하늘(陽)을 향해 드러내어 장엄하다. 나무의 뿌리와 사람의 머리털은 모양새가 비슷하다. 뿌리는 땅 속에 숨어 영양소를 빨아들이고, 머리털은 하늘 쪽으로 뻗어 신령스러움을 빨아들인다. 식물과 사람은 정 반대의 삶을 살면서 서로 교통하고 교감한다. 가장 불가사의한 것들은, 초봄에 잎사귀보다 먼저 꽃을 터뜨리는 족속들이다. 상식적으로는 줄기와 잎사귀들이 나온 다음에 꽃을 터뜨리는 순서여야 하는데, 그들은 발가벗은 몸으로 겨울철을 보낸 다음 꽃망울을 키웠다가 펑펑 터뜨린다. 입춘 훨씬 전, 눈보라 치는 소한·대한 때부터 나는 매화나무 산수유나무의 꽃망울들을 살피며 기다려왔다. 시인 김영랑이 한 해의 모란꽃잎 떨어져 시드는 5월의 어느 날부터 다음해 그 꽃 피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내내 기다렸듯이. 내 기다림에 보답하듯 매화나무는 입춘이 지나면서부터 좁쌀만하던 꽃망울들을 참새의 검은자위만하게 키우고 다시 녹두알만하게 키우고 콩알만하게 키웠다. 그리고 바야흐로 폭죽처럼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내 토굴 앞 정원의 매화 꽃망울 커지는 것을 보면서 한 원로 영화감독의 사업을 생각한다. 소설가에게는 소설쓰기가 사업이고 영화감독에게는 영화 찍는 일이 사업이다. 사람이 치열하게 자기 사업을 하면서 영육을 소진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행운인가. 또 그 사업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불행인가. 나는 살아 있는 한 내 사업을 할 것이고 사업을 하는 한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사업을 하지 않는 나의 생물학적인 생명은 무의미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가 찍으려 하는 영화가 돈이 안 될 것이라며 처음의 제작사가 매정하게 그를 배반했을 때,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각박한 인심에 분노하고 슬퍼했었다. 그런데 감격적이게도 그는 다른 제작사의 도움으로 그 영화를 다시 찍게 되었고 그의 영화는 천년 동안을 기다려 온 신화 속의 학처럼 비상을 꿈꾸고 있다. 청매화 꽃망울들은 가장자리가 진한 옥색으로 변하고 홍매화 꽃망울들은 붉은 빛을 띠고 있다. 그의 마음은 지금 광양의 매화 꽃 지천으로 피는 마을에 가 있을 터이다. 젊은 시절에 그가 영화 찍는 것을 따라다니며 구경한 적이 있다. 그는 한 장면을 찍기 위하여 하루 혹은 며칠을 허비하곤 했다. 허비한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찍을 대상에 내리는 빛과 어리는 그림자가 마음에 들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한 차례 봄비가 내린 다음에는 날씨가 연일 따스할 거라고 한다. 올해의 매화꽃들은 넉넉하게 그의 사업을 도와주는 향기로운 사업을 하게 될 것이다. 매화 꽃망울들아, 그의 천년학의 비상을 위해 한사코 곱고 예쁘게 터져라.
  • 한국현대미술제 새달 3일~15일까지

    박영덕화랑과 미술전문지 미술시대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6회 한국현대미술제가 3일부터 15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최된다. 견본시 형태의 아트페어로 진행되는 이번 전시엔 김창열, 안병석, 이두식 등 한국미술을 이끌어온 원로 및 중견작가와 패기 넘치는 삼십대 초반 작가들까지 190여명의 작품 2000여점을 선보인다. 한국문화예술센터가 기획하는 ‘한국미술작품 스카프전’ 및 일본 현대작가 7인의 작품도 함께 함께 할 수 있다. 입장료는 일반 5000원, 초·중·고생 4000원.(02)544-8141∼2.
  • ‘낭독의 낭만’ 박완서 15분간 낭송

    ‘낭독의 낭만’ 박완서 15분간 낭송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창백하게 일렁이던 카바이드 불빛,불손한 것도 같고 우울한 것도 같은 섬세한 표정,두툼한 파카를 통해서도 충분히 느껴지던 단단한 몸매,나는 내 몸에 위험한 바람이 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고희를 훌쩍 넘긴 원로 작가의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술렁이던 사위가 일순 조용해졌다. 혹자는 눈으로 문장을 따라가며, 혹자는 귀를 활짝 열고 작가의 낭독을 감상했다.15분간의 낭독이 끝나자 박수가 터졌다. 연분홍 코트를 입은 작가의 얼굴에는 수줍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22일 오후 교보문고 잠실점 티움. 교보문고와 대산문화재단이 마련한 ‘저자와 함께하는 낭독회-낭독공감’의 첫 행사에 소설가 박완서(75)씨가 초청됐다. 박씨는 이날 자전소설 ‘그 남자네 집’의 한 대목을 읽었다. 연극배우 김지숙도 동석해 감칠맛 나는 화술을 보여줬다. 작가의 대중적 인기를 입증이라도 하듯 평일 낮임에도 독자 100여명이 몰려들어 20평 남짓한 공간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낭독공감’은 유럽식 작품 낭독회를 표방한 행사.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독자 앞에서 읽고,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낭독회는 유럽 등 서구사회에선 중세 이래 일상화된 문학 행사다. 에단 호크가 주연한 ‘비포 선셋’처럼 작가가 주인공인 영화에서도 서점 낭독회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선 사인회나 강연회 같은 일방적인 통로만 있을 뿐 낭독회처럼 작가와 독자가 상호 소통하는 자리는 드물었다. 지난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앞두고 독일 각지에서 개최한 ‘한국문학 낭독회’가 자극제가 됐다. 대산문화재단 곽효환 사무국장은 “독일 어느 도시를 가든 현지인들의 호응이 높았다.”면서 “작가와 독자가 와인 잔을 앞에 두고 진지하게 작품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KBS가 2003년부터 방송 중인 교양프로그램 ‘낭독의 발견’도 밑거름이 됐다. 낭독회에 대한 작가와 독자의 반응은 양쪽 모두 호의적이다.“사인회는 여러번 했지만 낭독회는 처음”이라는 박완서 작가는 “공들여 쓴 부분을 읽으면서 독자의 호흡을 바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이런 행사가 널리 정착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날 낭독회에서 즉석으로 책을 낭독한 독자 조남주(28·여)씨는 “그동안 독자가 작가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어 아쉬웠는데 소중한 경험이 됐다.”고 즐거워했다. 신문에서 낭독회 소식을 접하고 찾아왔다는 서점애(68·여)씨도 “평소 좋아하는 박완서 작가를 직접 만나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낭독공감’은 앞으로 매달 한차례씩 신작을 낸 작가들을 초청해 정기적으로 진행된다. 일년에 두번 정도는 유명 문인들이 참여하는 규모있는 행사로 만들 계획이다. 곽효환 사무국장은 “문학이 더이상 고고한 위치에 머물지 않고 대중의 눈높이로 내려와야 한다.”면서 “낭독회는 독자를 위한 작가들의 서비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평론가 유종호교수 헌정 비평집

    전후 문학평론가 1세대인 유종호(71) 연세대 특임교수가 23일 오후 3시 교내 알렌관에서 퇴임기념 강연회를 끝으로 강단을 떠났다.충주 사범학교에서 시작된 그의 교육자 이력은 공주사범대, 인하대, 이화여대 등을 거치며 무려 47년을 이어왔다. 퇴임에 맞춰 원로 평론가의 비평 궤적을 정리한 책 ‘유종호 깊이 읽기’(민음사)가 나왔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정과리 연세대 교수 등 23인의 필자가 참여했고, 기존에 발표됐던 평론들과 새로 쓴 에세이들을 함께 묶었다. 1957년 ‘문학예술’에 평론 ‘불모의 도식’‘언어의 유곡’을 발표한 그는 ‘문학과 현실’‘시란 무엇인가’등 숱한 평론집과 더불어 체험 산문집 ‘나의 해방전후 1940∼1949’, 시집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 등을 내기도 했다. 그는 어떤 작품, 어떤 평론이든 문체의 아름다움과 토착어의 능숙한 사용을 무엇보다 중요시한 평론가로 유명하다.“인문주의의 의상을 입고 있는 지식인이 아니라 토착적이고 육화된 인문주의자”(이광호 서울예대 교수)이며,“세상의 혼란과 불공정을 교정하기 위한 최선의 행동을 끈기있게 실행하는 조용한 실천가”(정과리)다. 책에는 유 교수와 후배 평론가들의 대담, 유 교수의 저서에 대한 서평들과 더불어 시인 신경림, 김광규, 소설가 이청준, 이문열 등이 쓴 회고담이 실려있다.2만 2000원.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통계로 본 서울](15)외국인

    ‘서울의 외국인들은 어디에 몇명이 살고 있을까?’ 서울의 한 구성원으로 살고 있는 외국인들은 ‘지구촌 시대’를 맞아 매년 급증하고 있는 추세다.100명 가운데 1명 이상이 외국인이다. 이들은 취업, 국제결혼, 유학 등을 이유로 서울에 거주하고 있으며, 국가별로 정착촌을 형성하며 살고 있다. 17일 서울시의 ‘2005 주민등록인구통계’에 따르면 서울시내 등록외국인은 12만 9660명으로 전체 인구(1029만명)의 1.26%를 차지하고 있다. 10년전인 1995년(4만 5072명)과 비교하면 두배 이상 급증한 셈이다. 성별로는 여자(6만 8414명)가 남자(6만 1246명)보다 많다. 연령별로는 40대가 3만 2825명(25.3%)으로 가장 많고,30대 3만 2146명(24.8%),20대 2만 2008명(17.0%) 등이다. 국적별로는 중국인(한국계 중국인 포함)이 7만 7881명으로 60.1%를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인 1만 1487명(8.9%), 타이완 8923명(6.9%), 일본인 6710명(5.2%)의 순이다. 이어 필리핀 3646명, 베트남 2385명, 캐나다 2084명, 프랑스 1001명, 러시아인이 948명 등이다.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영등포구가 1만 2941명(10.0%), 구로구 1만 714명(8.3%), 용산구 9817명(7.6%), 관악구 7215명(5.6%), 금천구 7034명(5.4%) 등의 순이다. 외국인들은 국가별로 정착촌을 형성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은 ‘한국속의 아메리카’로 불리는 용산구 이태원. 용산 미 8군기지에 근무하는 군인과 군속 등의 생활 근거지로 미국인들의 상당수가 살고 있다. 미군 기지내 8만여평에는 50∼60채의 마을과 대형할인매장 등이 형성돼 있다. 이태원로에서 한남동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국내 최대 이슬람사원이 있어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이슬람권 국가 노동자들도 주변에 몰려 살고 있다. 대표적인 외국인 마을은 ‘일본인 마을’과 ‘프랑스 마을’.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용산구 이촌 1동은 ‘리틀 도쿄’로 불린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직후부터 일본인 상사주재원 5000여명이 한가람·대우·강촌아파트 등지에 모여 살고 있다. 주변에 일본인을 위한 식료품점과 은행, 부동산, 병원, 미용실, 이발소 등이 있다. 또 서초구 반포4동 서래마을은 ‘프랑스마을’로 불리는 곳. 프랑스인 500여명이 모여 산다. 지난 85년 한남동에 있던 프랑스학교가 옮겨오면서 형성된 이곳에는 프랑스 투자기업 직원과 가족들이 모여 산다. 팔레스호텔 옆 서래로 입구에서 방배중학교까지 이어지는 이 곳에는 프랑스식 레스토랑과 카페도 실제 프랑스풍으로 만들어져 한국의 ‘몽마르트’로 불린다. 독일인들은 용산구 한남동 독일인학교를 중심으로 400여명이 모여 산다. 가장 많은 외국인을 차지하는 중국인들은 공단지역에 밀집해 살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한국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인근지역을 비롯해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과 금천구 가산동 일대 중국인 촌을 형성해 모여 산다. 이 밖에 몽골,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에서 온 외국인들은 중구 광희동 일대에 ‘중앙아시아촌’을 형성하고 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평론가135명 참여 ‘비평용어사전’

    평론가 135명이 5년에 걸쳐 완성한 국내 최대 규모의 ‘문학비평용어사전’(국학자료원 펴냄)이 발간됐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회장 임헌영 중앙대교수)가 문화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이 사전은 상권 900쪽, 하권 12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사전에 수록된 용어 2000여개는 문학비평에만 한정되지 않고 인문학 전반을 광범위하게 수용해 오히려 ‘인문학용어사전’에 가깝다. 원로·중진 비평가부터 소장학자에 이르기까지 집필자가 워낙 많은 탓에 해설 쓰기와 예문 제시, 교차 참조 용어와 참고문헌 제시 등 모든 과정마다 세세하고 정확한 지침을 마련해 일관성있는 원고를 쓰도록 유도했다.사전은 전국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 등에 무료로 배포된다.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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