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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 노동자 통일축구대회…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개최

    남북 노동자 통일축구대회…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개최

    3년 만에 개최된 남북 노동자 통일축구경기가 11일 오후 4시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다. 한국노총 대표팀과 북측 조선직업총동맹(직총) 건설노동자팀, 민주노총 대표팀과 직총 경공업팀의 2개 경기로 나뉘어 진행될 예정이다. 양대 노총 조합원과 서울시민 등 3만여 명이 모일 것으로 주최 측은 보고 있다. 남북 노동자 축구대회는 1999년 평양 대회, 2007년 경남 창원 대회, 2015년 평양 대회에 이어 네 번째다. 올해 들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난 4월 27일 판문점 선언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민간 행사인 이번 대회는 의미가 남다르다. 북측 대표단은 이날 오전에는 숙소인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남북 노동단체 대표자회의를 하고 교류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이어 남북 노동단체 산별·지역별 모임을 하고 용산역에 있는 강제징용노동자상을 찾아 헌화도 한다. 주영길 직총 위원장을 비롯한 북측 대표단 64명은 전날 오전 서해 육로를 통해 방남했다. 이들은 남북 노동 3단체 공동기자회견을 한 다음,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사무실을 방문하고 환영 만찬에 참석했다. 이들은 대회 마지막 날인 12일 오전에는 경기도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을 찾아 전태일 열사와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문익환 목사 묘소에 참배하고 서해 육로를 통해 북한으로 귀환할 예정이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서울포토] ‘남북 노동자축구대회’ 참석차 서울 온 北 인사들

    [서울포토] ‘남북 노동자축구대회’ 참석차 서울 온 北 인사들

    10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로 남북 노동자 축구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북측인사들이 들어서고 있다. 2018.8.10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서울포토] 손 맞잡은 남북 노동3단체장

    [서울포토] 손 맞잡은 남북 노동3단체장

    10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남북 노동3단체장 합동 기자회견에서 노동단체장들이 손을 잡고 만세를 부르고 있다. 2018.8.10 박지환기자 popocar@seoul.co.kr
  • [서울포토] 호텔들어서는 북측 인사

    [서울포토] 호텔들어서는 북측 인사

    ▲ 조선직업총동맹 대표단이 10일 낮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 도착해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조합원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2018.8.10 박지환기자 popocar@seoul.co.kr
  • [서울포토] 손흔드는 북한 노동자대표

    [서울포토] 손흔드는 북한 노동자대표

    ▲ 10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남북 노동자축구대회를 위해 입국한 북한 선수단이 호텔로 들어서고 있다. 2018.8.10 박지환기자 popocar@seoul.co.kr
  • [서울포토] 호텔들어서는 북측 선수단

    [서울포토] 호텔들어서는 북측 선수단

    10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남북 노동자축구대회를 위해 입국한 북한 선수단이 호텔로 들어서고 있다. 2018.8.10 박지환기자 popocar@seoul.co.kr
  • [서울포토] 북측 노동자 환영하는 인파

    [서울포토] 북측 노동자 환영하는 인파

    ▲ 10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남북 노동자축구대회를 위해 입국한 북한 선수단이 호텔로 들어서고 있다. 2018.8.10 박지환기자 popocar@seoul.co.kr
  • 슈 연락두절, 고소인 측 “‘작업’ 사실 아냐...슈 잘못 깨닫길 바랐다” [공식]

    슈 연락두절, 고소인 측 “‘작업’ 사실 아냐...슈 잘못 깨닫길 바랐다” [공식]

    도박 자금 사기 혐의로 피소된 S.E.S 출신 슈가 고소인들과 연락을 두절한 채 원금을 갚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9일 S.E.S 출신 슈(38·유수영)에게 도박 자금을 빌려줬다가 변제받지 못해 고소한 고소인들이 입장을 전했다. 이날 고소인 측 변호를 맡은 박희정 법무법인 윈스 변호사는 공식 입장문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그는 “유수영(슈) 씨는 6월 중순경부터 고소인들과의 연락을 차단해 현재까지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며 “변제기가 지났음에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돈을 빌려줄 당시 고소인들이 들었던 말은 사실과 다름을 확인했다”며 “유수영 씨 측에서 법적 절차를 진행하는 부분을 용인했다. 고소인들은 더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해 고심 끝에 고소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변호인은 “고소인들은 이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며 “유수영 씨가 언론을 통해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잘못을 깨닫길 바랐다”고 덧붙였다. 변호인 측은 이어 “그러나 유수영 씨는 최근 변호인을 통해 ‘고소인들에게 작업당했다’는 등 고소인들을 비방하는 내용의 입장을 밝혔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해당 카지노는 적법하게 운영되는 카지노로 이른바 ‘작업’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고소인들은 카지노와 무관한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해명했다. 변호인 측은 마지막으로 “유수영 씨가 피해자인 고소인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갚지 않은 돈을 하루속히 변제하길 바란다”며 “고소인들에 대한 비방이 계속될 경우 추가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앞서 지난 3일 슈는 6억 원대 도박자금을 빌린 후 갚지 않은 혐의로 피소된 사실이 전해져 논란을 일으켰다. 서울동부지검 형사2부에 따르면 그는 올해 6월 서울 광진구 광장동 파라다이스워커힐 카지노에서 지인 2명으로부터 도박자금으로 각각 3억 5000만 원과 2억 5000만 원을 빌린 뒤 갚지 않은 혐의로 피소됐다. 이와 관련 최근 슈 법률대리인을 맡은 이정원 법무법인 강남 변호사는 한 매체를 통해 “우리는 작업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도박자금을 빌려주는 것 자체가 불법이다. 소위 도박 자금을 대주고 이를 높은 이자로 불려 나가는 방식에 당한 것이다. 도박 빚은 그 자체로도 불법이라 갚을 필요가 없음에도, 슈는 이미 수 억 원을 갚았다. 그러나 이자가 꼬리를 물어 갚으라 압박을 한 것이다. 억울한 부분이 많다”고 주장했다. 슈 고소인 측 입장 전문 유수영씨는 6월 중순경부터 고소인들과의 연락을 차단해 현재까지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변제기가 지났음에도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돈을 빌려줄 당시 고소인들이 들었던 말들은 사실과 다름을 확인했습니다. 유수영씨 측에서도 법적인 절차를 진행하는 부분을 용인했습니다. 고소인들은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고 고심 끝에 유수영씨를 고소하게 되었습니다. 고소인들은 언론을 통해 이 사건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이 사건이 기사화되었습니다. 고소인들은 유수영씨가 언론을 통해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를 바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유수영씨는 최근 변호인을 통해 “고소인들에게 작업 당했다”는 등 고소인들을 비방하는 내용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고소인들은 기사를 접하고 다시 한 번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파라다이스 카지노는 적법하게 운영되는 카지노로서 이른바 ‘작업’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물며 고소인들은 카지노와는 무관한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유수영씨를 적극적으로 카지노로 유인해서 불법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유수영씨의 절박함이 담긴 부탁에 고소인들은 마지못해 여러 번에 걸쳐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제때 갚을 것이라는 말, 변제능력이 충분하다는 취지의 말을 믿고 빌려준 것입니다. 고소인들은 유수영씨의 추가적인 금전대여요청을 받았지만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빌려 줄 돈도 없었습니다. 변제기가 지났음에도 고소인 A씨가 변제 받지 못한 3억 5천만 원은 원금입니다. 고소인 B씨도 원금을 전혀 변제 받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돈을 돌려받지 못 하고 있는 피해자일 뿐입니다. 범죄피해자로서 정당하게 고소권을 행사했습니다. 도박자금으로 사용될 것을 알고 돈을 빌려주었더라도, 돈을 빌린 사람이 기망행위를 통해 돈을 지급 받았다면 사기죄 성립이 가능합니다. 대법원 판단입니다. 그리고 허가된 카지노에서 사용될 것을 알고 빌려준 돈은 불법원인급여가 아니라는 판례가 존재하기 때문에 민사상 대여금청구도 가능한 상황이고, 고소인들은 소제기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유수영씨가 억울한 점이 있다면 언론이 아닌 검찰과 법원에서 그 억울함을 토로하기를 바랍니다. 고소인들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을 중단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실하게 수사에 협조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기를, 피해자인 고소인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갚지 않은 돈을 하루 속히 변제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고소인들에 대한 비방이 계속될 경우 추가적인 조치를 취할 예정입니다. 2018년 8월 8일 법무법인 윈스 변호사 박희정 연예팀 seoulen@seoul.co.kr
  • 11일 남북노동자축구... 양대노총, 시민 등 3만명 운집 예상

    11일 남북노동자축구... 양대노총, 시민 등 3만명 운집 예상

    오는 11일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남북 노동자 통일축구대회에 3만 여명의 관중이 운집할 것으로 예상된다. 8일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중심으로 구성된 남북 노동자 통일축구대회 조직위원회는 여의도 한국노총 대회의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오는 10∼12일 개최하는 남북 노동자 통일축구대회의 구체적인 일정을 소개했다. 행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남북 노동자 축구경기는 대회 이틀째인 11일 오후 4시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진행된다. 주최 측은 양대 노총 조합원과 서울시민 등 3만 여명이 모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대회에는 북한 노동단체인 조선직업총동맹(직총) 주영길 위원장을 비롯한 북측 대표단 64명이 참석한다. 이들은 10일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CIQ)로 방한해 일정을 시작할 것으로 전해졌다. 축구경기는 한국노총 대표팀과 직총 건설노동자팀 경기에 이어 민주노총 대표팀과 직총 경공업팀 경기로 진행된다. 100여명으로 구성된 ‘통일축구 서울시민 서포터즈’는 열띤 응원전을 펼치며 분위기를 띄운다. 이번 남북 통일축구대회는 지난 4월 ‘판문점 선언’ 이후 추진되는 남북 민간단체 행사로, 본격적인 남북 민간 교류로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남북 노동자 통일축구대회는 1999년 평양 대회를 시작으로 2007년 창원, 2015년 평양에서 개최됐다. 대회 기간 북측 대표단은 서울 워커힐호텔을 숙소로 이용하며 축구경기 외에도 다양한 교류를 이어 갈 계획이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슈 근황, 변호인 측 “많이 놀란 상태...사태 커질지 예상 못 한 듯”

    슈 근황, 변호인 측 “많이 놀란 상태...사태 커질지 예상 못 한 듯”

    그룹 S.E.S 출신 슈 근황이 전해졌다. 7일 한 매체는 최근 도박 자금을 빌린 뒤 갚지 않아 피소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관심이 쏠린 S.E.S 슈 측 입장을 전했다. 해당 매체는 슈 변호인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해당 매체에 따르면 슈 변호인 측은 이날 “슈가 정신적으로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변호인은 “여러 억측이 나오고 있다”며 “아직 슈는 검찰 조사를 받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검찰도 이번 주, 다음 주까지 여름 휴가 기간이라 당장 조사가 이뤄지진 않을 것 같다. 아직 출석 연락을 받지 못했다.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조사를 받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덧붙였다. 변호인은 또 “(사건이 알려진 뒤) 슈는 정신적으로 충격을 많이 받았다. (카지노를) 출입한 것에 깊이 반성하고 있다. 사태가 이렇게 커질지 본인도 예상 못 한 것 같다. 많이 놀란 상태”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여러 억측이 나와 필요하다면 입장을 밝힐 자리를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한편 슈는 올해 6월 서울 광진구 광장동 파라다이스워커힐 카지노에서 지인 2명으로부터 도박 자금 명목으로 각각 3억 5000만 원과 2억 5000만 원을 빌린 뒤 갚지 않은 혐의로 피소됐다. 언론 보도 이후 슈를 카지노에서 목격했다는 목격담이 여기저기서 나오며 ‘상습도박’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또 슈와 남편 임효성의 이혼 루머까지 나오면서 임효성이 직접 이를 해명하기도 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걸그룹 도박 연예인’ 거론된 유진 측 “관련 없다” 공식 부인

    ‘걸그룹 도박 연예인’ 거론된 유진 측 “관련 없다” 공식 부인

    도박자금 수억원을 빌린 뒤 갚지 않아 고소당한 연예인으로 거론된 걸그룹 S.E.S 출신 유진 측이 해당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진 측 관계자는 3일 “아침부터 관련 사건에 대해 문의를 많이 받고 있다”면서 “확인 결과 유진씨는 해당 인물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당사자도 그렇고 직원들도 많이 당황스러워 하고 있고 놀랐다”면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해당 인물은 유진씨가 아니다”라고 재차 확인했다. 앞서 이날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서울동부지검 형사2부는 지난달 유명 걸그룹 출신 A(37)씨에 대해 6억원대 사기 혐의 고소장을 접수하고, 사건을 같은 검찰청 조사과에 내려 수사를 지휘하고 있다. 고소인 중 1명인 미국인 박모(35)씨는 A씨가 지난 6월초 서울 광장동 소재 파라다이스워커힐 카지노에서 도박자금 명목으로 카지노수표 3억 5000만원을 빌리고 지금까지 갚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파라다이스워커힐 카지노는 내국인은 출입할 수 없지만, A씨는 외국 국적을 갖고 있어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고소인인 한국인 오모(42)씨도 A씨가 6월 초에 2억 5000만원을 빌린 뒤 갚지 않았다며 A씨를 고소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90년대 걸그룹 출신 연예인 “도박 자금 6억원 사기 혐의로 피소”

    90년대 걸그룹 출신 연예인 “도박 자금 6억원 사기 혐의로 피소”

    1990년대 활동한 가수가 또 도마 위에 올랐다. 걸그룹 출신 연예인이 도박자금 수억 원을 빌렸다가 갚지 않아 고소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3일 경향신문에 따르면 1990년대 데뷔한 걸그룹 출신 연예인 A 씨가 6억 원대 사기 혐의로 고소당했다. 서울동부지검 형사2부는 지난달 A 씨(37)에 대한 6억 원대 사기 혐의 고소장을 접수, 해당 사건을 같은 검찰청 조사과에 내려 수사를 지휘하고 있다. 고소인 중 한 명인 미국인 B 씨는 “A 씨가 지난 6월 초, 서울 광진구 광장동 파라다이스워커힐 도박장에서 도박자금 명목으로 카지노수표 3억 5000만 원을 빌리고 지금까지 갚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다른 고소인(한국인) 역시 “A 씨가 6월 초 2억 5000만 원을 빌린 뒤 갚지 않았다”고 밝혔다. 한편 해당 도박장은 내국인은 출입할 수 없는 곳으로 알려졌다. A 씨는 외국 국적을 가지고 있어 출입이 가능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90년대 데뷔한 걸그룹에 네티즌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앞서 전날에는 90년대 활동했던 한 인기 가수가 수입차 매장에서 난동을 부려 갑질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90년대 데뷔 유명 걸그룹 출신 연예인, 6억대 도박자금 안 갚아 고소당해

    90년대 데뷔 유명 걸그룹 출신 연예인, 6억대 도박자금 안 갚아 고소당해

    1990년대 데뷔한 대표적 걸그룹 출신 연예인이 도박자금 수억원을 빌린 뒤 갚지 않아 고소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3일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서울동부지검 형사2부는 지난달 유명 걸그룹 출신 A(37)씨에 대해 6억원대 사기 혐의 고소장을 접수하고, 사건을 같은 검찰청 조사과에 내려 수사를 지휘하고 있다. 고소인 중 1명인 미국인 박모(35)씨는 A씨가 지난 6월초 서울 광장동 소재 파라다이스워커힐 카지노에서 도박자금 명목으로 카지노수표 3억 5000만원을 빌리고 지금까지 갚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파라다이스워커힐 카지노는 내국인은 출입할 수 없지만, A씨는 외국 국적을 갖고 있어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고소인인 한국인 오모(42)씨도 A씨가 6월 초에 2억 5000만원을 빌린 뒤 갚지 않았다며 A씨를 고소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호캉스’ 행복한 예비 엄마

    ‘호캉스’ 행복한 예비 엄마

    ‘프리미엄 시장 잡아라’ 업계 잇단 출시 숙박형 건강관리 프로그램 운영부터 튼살 예방 크림·아기 타월 등 선물도 “해외여행보다 저렴하고 마사지까지”보건복지부와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의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말하는 합계출산율은 1.05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출생아 수는 사상 처음으로 40만명 아래로 떨어졌고, 지난 5월 출생아 수는 2만 7900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7.9% 감소했다. 해마다 출산율은 하락세를 거듭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유통업계 전반에서는 육아 관련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특히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프리미엄 시장´으로 변화하는 추세다. 아이를 적게 낳는 만큼 한 아이에게 많은 투자가 이뤄지는 셈이다. 이 같은 현상은 관광업계에도 마찬가지다. 자녀를 동반한 가족 고객을 위한 여행 프로그램이 늘어나는가 하면, 출산 전 산모가 떠나는 ‘태교여행´도 이제는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거주하는 유모(29·여)씨는 임신 21주차였던 지난달 서울의 한 특급호텔로 2박 3일 동안 ‘호캉스’(호텔과 바캉스의 합성어로, 유명 여행지가 아닌 호텔에서 휴가를 즐기는 문화)를 다녀왔다. 유씨는 “날씨가 너무 더워서 멀리 여행을 가면 외려 지칠 것 같았다”면서 “본격적인 여름휴가철까지 기다리면 몸이 더 무거워져 움직이기가 힘들 것 같아 미리 여름휴가와 태교여행을 겸해 호캉스를 다녀왔는데, 해외여행을 가는 것보다 적은 금액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발마사지를 받으면서 편히 쉴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태교여행은 임신부의 정신적·육체적 안정과 건강을 위해 떠나는 여행을 가리킨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는 육아에 전념하느라 한동안 마음 놓고 여행을 떠나기 어려운 만큼 예비엄마들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의 의미기도 하다. 과거에는 임신을 하면 되도록 외부 활동을 피하고 몸을 조심하는 분위기였지만, 전문가들은 외려 적절한 운동이나 외부 활동이 산모와 태아의 건강에 도움을 준다고 조언한다. 다만 비행기 등을 타고 장거리 여행을 가거나 지나치게 격한 운동을 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박지윤 분당서울대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유산 위험이 높은 임신 초기나 만삭일 때를 제외하고는 여행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보통 임신 12주부터 32~33주까지는 여행을 가는데 무리가 없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태교여행지를 고를 때는 예상치 못한 증상이 발생했을 때 즉각 방문할 수 있는 산부인과나 의료 자문기관이 가까이 있는 곳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태교여행의 선택지가 다양해지면서 최근에는 해외로 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도심이나 가까운 국내 여행지를 찾아 호캉스를 즐기는 예비엄마도 늘고 있다. 특히 본격적인 여름휴가철이 시작되면서 북적이는 피서지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가까운 호텔에서 안전하고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려는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게 호텔업계 측의 설명이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도 저마다 태교여행과 관련한 상품을 출시하고 나섰다.●힐튼 서울, 한정 ‘디어 마이 베이비 패키지’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 위치한 그랜드 힐튼 서울 호텔은 최근 예비 부모와 태어날 아기를 위한 ‘디어 마이 베이비 패키지’를 100개 한정으로 선보였다. 객실 1박, 조식 뷔페 2인 이용권과 더불어 튼살 예방 크림인 ‘쏭레브 타이트닝 크림’, 프리미엄 아기 후드 타월과 호텔 슬리퍼 등으로 이뤄진 ‘밤밤 베이비 샤워 선물 세트’ 등으로 구성됐다. 패키지를 이용하는 모든 고객은 들어오는 실내 수영장과 피트니스 클럽을 하루종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며, 사우나 50% 할인 혜택도 적용된다.단순히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맞춤형 건강관리를 받는 특별 상품도 나왔다. 서울 광진구 광장동의 비스타 워커힐 서울 웰니스 클럽은 예비엄마를 위한 숙박형 건강관리 프로그램을 상시 운영한다. 비스타 워커힐의 ‘예비맘 건강관리 프로그램’은 임신 5~8개월차 임신부와 배우자를 대상으로 2박 3일 동안 집중적인 관리와 상담을 받는 프로그램이다. 전문가와의 1:1 컨설팅을 통해 운동 및 영양 처방을 받을 수 있으며, 임신부 특화 개인 트레이닝(PT) 및 그룹 트레이닝(GX), 부부가 함께하는 요가 GX, 산책 및 휴식, 트리트먼트 등이 함께 진행된다.●롯데 제주, 입욕제 등 포함 ‘베이비 문’ 패키지 롯데 호텔 제주에서는 오는 9월 2일까지 태교 여행을 계획 중인 예비 부모들을 위한 ‘베이비 문’ 패키지를 선보인다. 제주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프리미어 오션뷰 객실 1박, 2인 조식과 함께 태어날 아이에게 선물할 ‘몽슈레 오가닉 애착인형’, ‘비엘리츠카 스톤솔트’ 입욕제, 보디필로 대여와 호텔 발레파킹 무제한 서비스 등으로 구성됐다.●아난티 남해는 가족전용 ‘패밀리 에디션’ 태교뿐 아니라 아기를 동반한 가족까지도 두루 즐길 수 있는 상품도 있다. 아난티 남해는 가족 고객 전용 상품인 ‘아난티 패밀리 에디션’ 패키지를 내놨다. 올해 12월 31일까지 연중 운영되며, 예비 부모나 임산부를 대상으로 한 ‘퍼스트 에디션’과 아기 동반 가족을 위한 ‘세컨드 에디션’으로 각각 마련됐다. 두 패키지 모두 스튜디오 스위트, 디럭스 스위트, 디럭스 플러스 스위트 3가지 객실 타입 중에서 선택할 수 있으며, 조식 뷔페 2인 이용권, 사우나와 찜질방으로 구성된 워터 하우스 입장권이 포함된다. 프리미엄 아동 스파 브랜드 ‘리틀마마’의 ‘3스텝 트라이얼 키트’를 베이비 어메니티(샴푸, 린스, 비누 등 객실 내에 비치하는 생활편의 용품)로 제공하는 것도 특징이다. 한 호텔업계 관계자는 “최근 몇년 새 호캉스 열풍이 일면서 경쟁이 치열해지자 업체들도 단순히 호텔의 부대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상황별 맞춤형 상품을 선보이며 차별화를 하려는 곳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탐방 플러스] 한식을 ‘알리다’… 한식으로 ‘돕다’

    [탐방 플러스] 한식을 ‘알리다’… 한식으로 ‘돕다’

    서울의 동쪽, 광나루에 따뜻한 집을 뜻하는 ‘가온’(家溫). 공간의 따뜻함도 중요하지만 그곳에는 마음이 따뜻한 음식이 있다. 종갓집에서 지켜 온 전통 음식의 맛이 살아 있는 ‘나루가온’ 이야기다. 2008년 서울 광진구에서 한식당으로 시작된 나루가온은 2018년 현재 나루가온에프앤씨(주)라는 한식 전문 식품기업이 됐다. 2010년 법인화한 나루가온에프앤씨는 만두류를 중심으로 한식 식품과 식자재를 제조·판매한다. 남양주시에 한식류 전문 제조공장이 있으며 광장동 워커힐 본점을 비롯해 명동성당점, 코엑스 나루국밥 그리고 4개의 현대백화점에 ‘리원’이라는 직영매장을 운영 중이다. 나루가온에프앤씨 성공의 배경에는 기업을 창업해 이끌어 온 박효순 회장의 집안에서 내려오는 손맛이 있다. 박 회장의 집안은 경기도 이천의 유명한 대종가였다. 1년이면 제사를 13~15번 치르는 집안에서 박 회장은 자연스럽게 음식 맛과 손님을 대접하는 자세를 배웠다. 집안에서 지켜온 전통 요리법에 “집밥의 맛, 할머니와 어머니의 아련한 손맛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는 박 회장의 ‘마음 맛’이 더해졌다. 손님이 만족하고 계속해서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편집자 주●다시 돌아와 지키는 가문의 전통 박 회장의 외식사업은 나루가온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IMF 직후였던 1999년에 레스토랑으로 외식업에 뛰어들었다. 유명호텔 조리실장과 호텔지배인을 영입하고 고급 인테리어로 매장을 꾸며 경쟁력을 갖췄다. 그의 첫 성공작인 레스토랑 ‘프로렌스’다. 외식업 성공 노하우는 크랩 전문점, 스파게티 전문점, 이자카야 등으로 이어졌다.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매장과 직원은 날이 갈수록 늘어갔다. 문제는 음식이나 장사가 아니었다. 사업이 커가면서 박 회장에게 부담이 늘어났다. 특히 직원들을 운영하는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스스로 지쳤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모든 사업을 정리했다. 박 회장을 다시 외식사업가로 불러낸 요인은 돈이나 성공이 아니었다. 동부지방검찰청 피해자지원센터에서 민·형사 조정위원으로 활동하며 범죄 피해자 지원의 필요성을 알게 된 그는 도울 방법을 고민하던 끝에 외식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어려운 이들을 도우려는 마음이 따뜻한 집 ‘나루가온’의 시작이었던 것. 박 회장은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마음으로 음식으로 전수해주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박 회장은 국내 최초의 민간 피해자지원기구 (사)한국피해자지원협회(KOBA, Korea Organization for Victim Assistance) 수석부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사실 외식사업을 한창 확장할 때에도 박 회장은 한식 브랜드를 개발하지 않았다. 사업적으로 접근하기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접근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을 때, 손맛을 살리는 수고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음식, 가장 마음을 담을 수 있는 음식은 역시 한식이었다. 본격적으로 범죄 피해자를 돕는 프랜차이즈를 준비하면서 박 회장은 면이나 만두와 같은 비교적 간편한 한식을 메뉴로 고급화해나갔다. 서울 삼성역 코엑스에 있는 ‘나루국밥’은 프랜차이즈 브랜딩의 중심이다. 박 회장의 어머니인 김영순 할머니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한 국밥은 옛날부터 줄 서서 먹던 맛집의 깊이가 담겨있다. 박 회장에게 한식 프랜차이즈는 종갓집의 음식을 지키면서 동시에 사회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일이었다. ●종갓집 손맛으로 한식 세계화 앞장 지난해 나루가온은 명동성당 안에 직영점을 열었다. 사업적인 판단으로 확장한 것이 아니라 명동성당의 오랜 제안으로 이뤄진 일이었다.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에서 퓨전 한식이 아닌 정통 한식을 선보인다는 의미가 있었다. 현재까지 결과는 성공적이다. 따뜻한 마음으로 차려낸 한식에 외국인들도 감탄했다. 출장으로 온 외국인들은 그다음에 한국에 올 때 재방문하며 단골이 됐고, 자신들의 나라에 들여가고 싶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박 회장은 “일본에서 제안이 있었고 베트남에서도 제안을 받았다. 이런 맛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말씀들을 하신다”고 외국인 손님들의 반응을 전했다. 박 회장은 이 같은 호평의 이유를 ‘한식다움’에서 찾았다. 한식 세계화를 이야기하면서 떡볶이나 김밥, 잡채 등의 분식을 중심으로 대중화 전략에 치우쳐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지나치게 고급음식인 궁중요리도 일상적인 한식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고도 지적했다. 나루가온에서 외국인들이 감탄하는 메뉴는 우리 민족이 집에서 먹어왔던 가정식이다. 따뜻한 사골국물과 하나씩 빚어낸 만두가 외국인들의 마음을 녹였다. 박 회장은 “명동점은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쓰는 곳”이라며 “손님을 대접하려면 드실 때의 반응을 보며 만족하실 수 있도록 응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명동은 외국인들이 많기 때문에 음식 문화가 다른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잘 살피고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태기 객원기자 jtk3355@seoul.co.kr
  • YS·DJ의 ‘킹메이커’… 5·16쿠데타 이끈 ‘영원한 2인자’

    YS·DJ의 ‘킹메이커’… 5·16쿠데타 이끈 ‘영원한 2인자’

    ‘쿠데타의 주역’, ‘풍운아’, ‘영원한 2인자’, ‘처세의 달인’…. 수많은 수식어에서 보듯 지난 23일 별세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2004년 정계 은퇴까지 40여년간 영욕과 부침을 거듭했다.●박정희 정권 2인자… 처삼촌 혹독한 견제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교사를 꿈꾸며 서울대 사대에 진학했지만, 부친의 죽음이 인생행로를 바꿔 놓았다. 가세가 기울면서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한 것. 1949년 6월 육사를 졸업한 JP는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됐고, 작전정보실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박 전 대통령의 조카딸 박영옥(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딸)을 알게 됐고, 결혼했다. 이로써 상사와 부하인 동시에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연을 맺었다. 1960년 9월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해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정풍(整風) 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의 주모자로 몰려 강제예편됐다. 그러나 이듬해 5·16 쿠데타로 일약 권력의 정점으로 떠올랐다. 5·16의 전면에는 박정희 소장이 나섰지만, 뒤에서 쿠데타를 치밀하게 기획하고 밀어붙인 이는 JP였다. 그의 나이 불과 35세였다. 2인자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박정희 정부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맡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었으나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려 1963년 2월 공화당 창당을 하루 앞두고 외유에 나서야 했다. 1963년 11월 6대 총선에서 당선되면서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 등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또 외유길에 올랐다. JP 공과(功過)의 대표적인 사례가 이 1965년 한·일 협정과 산업화다. JP는 8억 달러의 경제 보상과 차관을 대가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 보상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일본의 식민 지배 범죄에 면죄부를 준 셈이다. 이 협정을 근거로 일본은 지금도 피해자들의 대일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그는 산업화 시대의 선구자로도 평가받는다. 박 전 대통령을 도와 산업화를 이끌었다. 1960년 79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1980년 1645달러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가 ‘매국노’란 비판을 들으며 받아온 8억 달러의 식민지 배상금은 산업화의 기반이 된 포항제철·소양강댐·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사용됐다.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JP는 45세의 나이에 최연소 총리로 임명됐다. 1979년 10·26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포스트 박정희시대’를 이끌 대중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까마득한 육사 후배들인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돼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으로 떠났다.●충청맹주로 고비마다 캐스팅보트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중심으로 35석을 확보, 화려하게 재기했다.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보수대연합’인 3당 합당을 통해 여당으로 변신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가 되는 듯했다. 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진한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2선 후퇴 압력을 받았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임에도 1993년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으로 강등됐다. 1995년 민자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키고 이듬해 15대 총선에서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지역 정서를 자극해 제3당(55석)으로 재기했다. 1997년 내각제를 고리로 ‘킹메이커’가 됐다. 그해 11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DJ) 총재와 극적인 DJP 단일화를 이뤄 낸 것. 보수 성향이 짙은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정권의 축이 됐다. 박정희 정권 시절 정적(政敵)으로 탄압했던 DJ와 손을 잡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6개월간의 총리 서리 등 국민의정부의 한 축을 이뤘던 그는 1999년 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정부를 깼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17석에 그치며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결국 다시 DJ와 손잡았다. 민주당에서 의원 3명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다. 그러나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자 공동정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선거 참패로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으로 10선 등정에 실패했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 선생도 해보고 싶었고, 군에서는 정풍(整風)도 해보고 싶었고, 제대해서는 혁명도 해보고 싶었으며,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해 도전도 했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향년 92세.●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 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 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 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2008년 말 뇌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지만 2010년 초인적인 재활운동 끝에 회복하기도 했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92세.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는 선생을 하고 싶었다. 군에서는 정풍(整風)을, 제대해서는 혁명을 원했다.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한 도전도 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듯 했으나 뇌경색이 발병하면서 입원하기에 이른다. 이후 건강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회’를 창립하고, 회고록을 내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삼육대, 30일 ‘Glory 삼육’ 발전위원 위촉식

    삼육대, 30일 ‘Glory 삼육’ 발전위원 위촉식

    삼육대(총장 김성익)는 5월 30일 서울 그랜드워커힐호텔 코스모스홀에서 ‘글로리(Glory) 삼육’ 캠페인 발전위원 위촉식을 갖고 캠페인의 공식 출발을 선언한다.삼육대가 개교 112주년을 맞아 추진하는 ‘글로리 삼육’은 ‘국제화 캠퍼스 구축’과 ‘이글프로젝트’, ‘글로벌한국학과 및 IT융합공학과 신설’ 등 대학의 미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발전기금 모금 캠페인이다. 이날 삼육대는 김성익 총장과 한상경 아침고요수목원 회장, 이봉춘 평소·임재단 이사장을 발전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추대했다. 황춘광 삼육학원 이사장, 남대극 전 총장, 서광수 전 총장, 김기곤 전 총장은 고문으로 활동한다. 아울러 대학 주요 보직자로 구성된 부위원장(9명)과 추진위원(8명)을 포함한 총 100명의 발전위원을 위촉할 예정이다. 이들 발전위원은 오는 10월 개교 112주년 개교기념일에 열리는 ‘글로리 삼육’ 캠페인 메인행사까지 위원회 공식 활동을 전개한다. 캠페인의 확산을 위해 각 전문 영역의 네트워킹을 활성화하고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펼치는 한편, 다방면의 지원과 선도적인 참여로 캠페인을 성공으로 이끌 계획이다. 김성익 총장은 “‘글로리 삼육’은 삼육대학교가 강한 대학으로 도약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며 “112년 삼육교육의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일에 함께 뛰어 달라”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1대1 재건축·사업 연기… 부담금 줄이기 ‘초비상’

    1대1 재건축·사업 연기… 부담금 줄이기 ‘초비상’

    반포현대 조합원 이익 크게 감소 “진작 팔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이촌동 등 일부선 일반분양 포기 안전진단 남은 곳은 사업 불투명 가격 하락 등 시장 침체 확산 우려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재초제) 부활에 따른 초과이익 부담금이 부과되자 서울 재건축 아파트 시장이 혼란에 빠졌다. 부담금이 예상했던 수준을 뛰어넘자 조합들은 사업 시기를 조절하고, 사업 방식을 변경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부담금 부과를 피한 단지는 개발이익을 고스란히 챙길 수 있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올해 들어 시장이 급랭하고 있는 재건축 아파트 시장은 부담금 윤곽이 드러나면서 더욱 얼어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사업 추진 빠른 곳은 반사이익 기대 재건축 아파트 단지라고 모두 울상은 아니다. 재초제 부활에 따른 부담금은 모든 재건축 단지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업시행 인가와 시공사 선정을 마친 재건축 아파트 단지 가운데 지난해 말까지 구청에 관리처분 인가를 신청한 곳은 부담금 부과 적용 대상에서 빠진다. 사업 추진이 빠른 단지는 상대적으로 반사이득이 기대된다. 재초제 적용을 피한 단지는 사업이 탄탄대로를 걸으면서 조합원들은 최대의 개발 이익도 챙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해 말 부담금 적용을 피하고자 서둘러 관리처분을 신청한 서울 서초구 반포1단지 1·2·4주구를 비롯한 강남권 대형 재건축 단지 10여곳은 부담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지난해 말 신청한 단지의 관리처분 인가 여부는 구청이 정하지만 일단 모두 통과했다. 국토교통부가 인가 전에 전문기관의 철저한 검증을 요구했지만, 구청이 자체 검증으로 인가해 줬다. 그러나 사업 추진이 더뎌 부담금을 내야 하는 단지는 반포 현대아파트처럼 조합원의 이익이 많이 줄어들 전망이다. 시공사 선정을 앞둔 반포주공1단지 3주구, 강남구 대치쌍용2차 아파트 등도 곧 부담금 부과액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건설업체와 시공 계약을 마치면 한 달 안에 구청에 부담금 예정액 산출 자료를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청은 조합에서 받은 자료를 토대로 30일 안에 최종 부담 금액을 조합에 통지한다. ●개발이익 줄이려 사업 속도조절 부담금 폭탄 쇼크로 조합마다 비상이 걸렸다. 재건축 사업 방식을 변경하거나 추진 일정을 늦추는 단지도 등장했다. 재건축을 접고 리모델링으로 바꾸는 경우도 나올 수 있다. 강남구 개포주공5단지는 애초 계획과 달리 재건축 추진위원회 구성을 내년으로 미루기로 했다. 개포주공6·7단지도 추진위 설립을 일단 연기했다. 부담금을 피할 수는 없지만, 부담금 산정의 기준이 되는 개발이익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다. 개발이익은 사업 종료 이후 주택가격에서 사업 개시 시점 주택가격과 정상 상승분 가격, 개발비용을 빼고 산정하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큰 폭으로 오른 집값을 내년 공시지가에 반영하면 사업 개시 시점 주택가격을 높여 개발이익과 부담액을 줄일 수 있다는 계산이다. 개발이익을 줄이려고 일반분양을 포기하고 1대1 재건축 사업을 결정한 단지도 있다. 용산구 이촌동 왕궁아파트, 강남구 압구정동 특별계획 3구역, 서초구 반포동 강남원효성빌라,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아파트 등이 조합원 가구수만큼만 지어 일반분양을 포기했다. 개발이익을 줄여 재건축 부담금을 최소화하고, 사업 이후 시세 상승을 기대하자는 전략이다. ●안전진단 강화로 사업 자체 흔들 안전진단을 통과하지 못한 단지는 사업 추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안전진단 단계를 넘어서면 시공사 선정, 사업인가신청 등의 절차를 밟아 관리처분 인가를 받는다. 재초제 부담금은 피할 수 없지만,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행정적 걸림돌은 제거돼 추진할 수 있다.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이 강화돼 지금까지 구청이 좌지우지했던 안전진단 과정에 전문 공공기관이 참여해 꼼꼼히 따지도록 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준공 연한 30년이 지난 아파트 가운데 안전진단을 받지 못한 아파트가 10만 3822가구나 된다. 양천구, 노원구, 송파구 등 대규모 단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조합원 지위 양도 금지돼 ‘발동동’ 부담금 부과 윤곽이 드러나면서 조합원들은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반포 현대아파트 조합은 오는 24일 조합원 총회를 열고 부담금 부과 사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부담금 통보를 앞둔 조합들도 긴급회의를 여는 등 대책을 논의하고 있지만, 해결책은 없어 보인다. 반포1단지 3주구 한 주민은 “수억원의 부담금을 어떻게 마련해 재건축을 추진할 수 있느냐”며 “진작 팔고 나가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고 말했다. 다른 주민은 “부담금을 낼 수 없다면 집을 팔아서 내라는 것인데, 집을 처분할 퇴로도 없는데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서울 등 투기과열지구에서는 조합 설립 이후 1주택 장기 보유자(10년 이상 보유, 5년 이상 거주)를 제외하고는 재건축 조합원의 지위 양도가 사실상 금지됐기 때문이다. 재초제 위헌 공방도 다시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잠실주공5단지·대치쌍용2차·과천주공4단지 등은 지난 14일 헌법재판소의 위헌 소송 각하 결정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다음달 지방선거에서 서초구청장 재선(再選)에 도전한 조은희 자유한국당 후보는 재초제 폐지를 주장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재건축 아파트 투자가 줄어들고 주택시장 침체가 확산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재건축 아파트값은 올해 들어 계속 떨어지고 있다. 보유세를 올리는 쪽으로 세제 개편이 추진되고 있어 재건축 아파트 보유자들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반포 주공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있는 한 부동산중개업자는 “투자 문의조차 사라져 시장이 급속도로 얼어붙었다”며 “재건축 아파트값은 더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류찬희 선임기자 chan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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