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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일요일 아침의 독도/임태순 논설위원

    어느 일요일 아침 카카오톡 소리에 잠이 깼다. 울릉도·독도 관광에 나선 친구가 태극기를 들고 독도에 오른 자신의 인증샷과 함께 아침 풍광을 여러 장 찍어 보낸 것이었다. 독도의 기암괴석, 세수를 한 듯 정갈한 울릉도 해변가, 장엄한 일출광경 등 하나같이 현장감이 물씬 풍겼다. 평소 같으면 곤히 잠들어 있을 일요일 아침이 갑자기 부산해졌다. “우와~, 독도 스타일 멋있다. 나도 한 번 가봐야지.” “바닷가 촌놈인 내가 봐도 독도 바다 색깔은 훨 청명해 보이네.” “운좋게 날씨가 좋았구나.” 등 추임새가 잇따랐다. 잠을 설친 친구들의 볼멘소리도 터져 나왔다. “잠 좀 자자. 일요일은 늦게 일어나는 날이야.” “새 나라의 어른들이 왜 이리 많은가.”…. 한가로운 일요일 아침을 뒤흔든 울릉도·독도의 감격이었다. 비록 휴일 단잠은 설쳤지만 서로가 각자의 위치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아울러 독도에 대한 사랑도 확인할 수 있었다. 때때로 이런 파격이 있어야 사는 재미가 더해질 것이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커버스토리-출구없는 농촌 空洞化] 아기울음 덮은 곡소리… 19년새 79만명 줄었다

    [커버스토리-출구없는 농촌 空洞化] 아기울음 덮은 곡소리… 19년새 79만명 줄었다

    #1. 고추 주산지인 경북 영양군의 이농 현상은 전국에서 가장 심각한 수준이다. 인구가 전국에서 꼴찌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 7만명에 육박했던 인구가 지난 6월 말 현재 1만 7990명으로 급감해 섬을 제외한 육지의 전국 자치단체 가운데 인구가 가장 적다. 지난 40여년간 매년 평균 1000명 이상씩 감소한 탓이다. 이런 추세라면 군의 인구는 8년 후쯤이면 1만명 이하로 추락해 존립 자체를 크게 위협할 전망이다. #2. 강원 태백시는 지난 2월 인구 5만명 선이 무너졌다. 2011년 말 5만 176명이던 인구가 4만 9837명으로 감소해서다. 석탄산업 활황 등으로 1987년 12만명이던 인구가 2년 뒤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 정책 이후 탄광들이 잇따라 문을 닫으면서 매년 인구가 줄었다. 1990년 8만 9770명으로 10만명 선이 무너진 지 22년 만에, 1998년 5만 9930명으로 6만명 이하로 떨어진 지 14년 만이다. 전국 농촌이 비어 가고 있다. 힘든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 농사를 포기하거나 자녀 교육을 위해, 결혼을 하고 직장을 구하기 위해 농촌을 등지고 대도시로 떠나는 젊은이들의 이농 행렬이 수십 년째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일 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2011년 말 기준 전국(16개 시·도)의 주민등록 인구는 5023만 6473명이다. 이 중 서울 및 수도권(경기·인천), 5개 광역시를 제외한 농촌 지역인 8개 도의 인구는 1557만 3121명으로 19년 전(1992년 말) 1636만 3803명에 비해 4.8%(79만 682명) 감소했다. 이는 같은 기간 다른 지역 인구가 2893만 79명에서 3437만 481명으로 18.8% 오히려 크게 증가한 것에 비하면 대조적이다. 농촌 지역 인구의 큰 폭 감소로 인해 전국에서 인구 3만명 이하로 떨어진 자치단체가 13곳이나 된다. 강원 화천·양구·양양군 등 3곳, 전북 진안·무주·장수·순창 등 4곳, 전남 구례군 1곳, 경북 군위·청송·영양·울릉 등 4곳, 경남 의령군 1곳 등이다. 4만명 이하는 배가 넘는 29곳이다. 이 때문에 20여년 전만 해도 대개 1만명이 넘던 읍·면 인구가 지금은 2000명도 안 되는 곳이 수두룩하다. 특히 상주시 화남면의 경우 고작 908명으로 도내 읍·면 중에서 인구가 가장 적다. 이 같은 농어촌 지역 인구 감소의 가장 큰 요인은 이농으로 꼽히고 있다. 전남의 경우 2000년 전입은 32만 5511명인 반면 전출은 37만 2218명에 달해 전체적으로 4만 6707명이 지역을 빠져나갔다. 이어 경북 2만 500여명, 전북 2만 1000여명, 강원 1만 1000여명이 고향을 등지고 서울, 경기, 부산 등지로 떠났다. 농촌 인구 감소는 고령화 현상을 심화시켰고, 결국 사망이 출생자 수를 앞지르는 등 인구 급감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경북 군위군의 경우 1983년만 해도 출생(1580명)이 사망(871명)의 배에 달했지만 지난해엔 사망(349명)이 출생(135명)을 압도했다. 의성군 역시 지난해 사망자는 847명으로 출생자 298명의 3배 가까이 됐다. 시·군의 읍·면 중 출생이 채 10명도 안 되는 곳이 부지기수며, 읍·면의 자연 마을은 아기 울음소리가 끊긴 지 이미 수십년이 됐다. 경북도 관계자는 “거듭되는 이농은 농촌에서 힘들게 농사를 짓지만, 먹고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라며 “이대로 간다면 10년 후쯤에는 버려진 논밭, 빈집이 즐비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자치단체의 인구는 존재의 의미이자 지역 발전의 원동력이다. 도시화, 산업화, 사회간접자본 확충 등 지자체가 추구하는 발전 방향도 인구를 기초로 계획되고 추진된다. 그러나 저출산·고령화 시대를 맞아 대다수 자치단체들이 인구 감소로 인한 공동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인구 감소는 곧 지자체의 재정, 행정기구, 지역개발, 사회간접자본 위축으로 직결되고 이로 인한 지역경제와 발전이 뒷걸음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 대다수의 광역, 기초자치단체들은 인구 감소의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지자체마다 인구를 늘리기 위해 기업유치, 지역개발사업 추진, 교육과 문화시설 확충, 출산장려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만 인구 감소 현상을 막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다. 농어촌 지역 지자체는 이농과 저출산의 이중고로 인구가 가파르게 감소하고 있고, 지방 도시도 완만하지만 전반적인 인구 감소 추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구가 감소한 지자체는 우선 행안부가 정한 기준에 따라 기구를 축소해야 한다. 광역시는 서울특별시만 실·국·본부가 14개 이내이고 인구 300만~500만명은 12개 이내, 200만~300만명은 11개 이내, 200만명 미만은 10개 이내다. 인구 200만명을 기준으로 100만명이 증가할 때마다 실·국·본부가 하나씩 늘어나지만 감소할 경우 하나씩 줄여야 한다. 도는 경기도만 실·국·본부가 18개 이내이고 인구 300만~400만명은 11개 이내, 200만~300만명은 10개 이내, 100~200만명은 9개 이내로 규정하고 있다. 인구 감소는 공무원들이 승진할 수 있는 자릿수 축소로 이어져 지자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정 규모 이상의 인구를 사수하려 한다. 인구수는 또 국회의원은 물론 도의원, 시·군·구의원의 선거구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전북 익산시는 지난해 지역 대학생들이 주민등록을 옮기면 20만원의 현금이나 상품권을 주는 방식으로 인구를 늘려 2석의 국회의원 선거구를 지켜 내기도 했다. 지자체가 인구수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재정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구가 줄어들면 우선 주민세 수입이 비례해 감소한다. 이와 함께 중앙정부에서 내려 주는 보통교부세를 산정하는 기준에서도 불이익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인구가 줄면 이들이 경제활동이나 일상생활을 하면서 매매하는 토지, 주택, 자동차 등의 취득세 수입도 감소한다. 인구가 적고 재정 상태가 열악한 지자체일수록 주민수를 늘리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유다. 인구 감소는 기업의 투자에도 부정적 영향을 준다. 기업들은 대규모 투자를 할 경우 직원들의 정주 기반과 인력수급 여건을 감안하기 때문에 인구가 감소하는 지역은 외면할 수밖에 없다. 인구수는 교육 여건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 인구가 늘어나면 곳곳에 학교가 들어서 통학 거리가 짧아지지만 줄어들면 소규모 학교들이 통폐합돼 통학 거리가 늘어나는 것은 물론 지역 공동화를 촉진하는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인구는 도시계획 등 지역 발전에 중대한 기초자료가 된다. 인구 증가는 택지, 주택,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으로 이어지지만 감소는 이 같은 사업의 필요성이 없어져 지역개발 사업이 퇴보하게 된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선거법 위반 김형태 집유 2년

    선거법 위반 김형태 집유 2년

    사전 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무소속 김형태(59·포항 남·울릉) 국회의원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대구지법 포항지원 형사1부(부장 이근수)는 31일 김 의원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공직선거법 위반죄를 적용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또 여론조사를 가장한 홍보활동을 한 혐의로 기소된 직원 김모(24)씨에 대해서도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국회의원 당선자로서 일반인보다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데도 인지도와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1년간 선거구민을 상대로 사전 선거운동을 한 혐의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김 의원은 지난해 3월 초 서울 여의도 오피스텔에 선진사회언론포럼이라는 사무실을 연 뒤 직원과 전화홍보원 10명에게 1년 동안 여론조사를 가장한 홍보활동을 하도록 지시하고 급여 명목으로 5000여만원을 제공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포항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2) 개항초 희비 가른 ‘소금’

    [선택! 역사를 갈랐다] (32) 개항초 희비 가른 ‘소금’

    ●소금의 격동기 : 쓰러진 사람과 뜬 사람 소금이 넘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소금의 중요성을 잘 모른다. 그러나 60여년 전만 하더라도 소금 1석에 쌀 1석이 맞교환되던 때가 있었다. 소금을 구하기가 어렵고 비싸다 보니 소금에 울고 소금에 웃는 자들이 생겨났다. 특히 구한말은 소금 시장을 둘러싸고 극한 변동이 있었던 시기였다. 개항 이후 일본의 소금과 청나라의 값싼 천일염이 밀려왔고, 일제는 우리나라 소금을 재원으로 하여 식민지 경영 자금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러한 염업사의 격동기는 온몸으로 저항하다 쓰러진 사람과 시류에 편승하여 뜬 사람을 갈라놓았다. 삶의 선택이 자유로운 만큼 역사의 평가가 냉혹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과연 알았을까. ●이토 통감 마차 가로막은 꼿꼿한 소금장수 김두원 1907년 10월 15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 있다. “원산항에 사는 김두원씨가 일인에게 소금값을 찾으려고 여러 해를 호소하더니 일전에 경시청에 잡히어 갇혔다더라.” 소금값을 받으려는 김두원을 경시청에서 잡아 가둔 까닭은 무엇인가? 김두원은 비록 항일운동가는 아니었지만, 일제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이었다. 좀처럼 변하지 않고 단단한 육각형의 결정체인 소금처럼 그는 일관되고 굽힘 없이 일제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 저항 방식은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핵심 인물을 찾아서 호통을 치는 일이었다. 구속되기 불과 3개월 전인 7월 10일에도 그는 오른손에는 직소(직접 호소한다)라고 쓴 종이를, 왼손에는 편지를 들고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의 마차 앞을 막았다. 일곱 번이나 시도를 하였지만, 한국통치를 위한 일제의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와의 직접 대화는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환갑을 몇 해 앞둔 노인을 이렇게 꼿꼿한 집념의 사나이로 만든 자는 일본인 사기꾼이었다. 때는 8년 전인 18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소금을 대규모로 매매하는 거상이었다. 함경도에도 영흥·문천과 같이 소금 생산지가 있었지만, 원산의 거상들은 경상도를 넘나들었다. 강원도와 영남 일대를 통틀어 최고의 소금 생산지는 경상도의 김해와 울산이었다. 김두원은 이곳에서 소금을 사서 원산에서 파는 방식으로 엄청난 차익을 남겼다. 당대의 소금 시장에서는 파는 자나 사는 자 모두가 신뢰를 기반으로 하였다. 믿음이 한 번 깨진 사람은 다시 상대하지 않았으니 소금 매매는 정말 짜디 짠 상거래였던 것이다. 이런 신뢰의 공동체에 금이 가기 시작한 때는 개항 이후였다. 개항 이후로 일제의 전오염(우리나라의 자염처럼 끓여서 만드는 소금)이 부산과 원산 등 개항지로 유입되었고, 일본인 상인들도 조선의 소금 시장에 직접 나섰다. 속칭 포대가리가 생긴 것도 이때였다. 일본인 상인들은 간수가 많은 일본의 저질 소금을 조선의 가마니에 담은 뒤에 조선 소금이라 속여 팔았다. 이런 일본인들을 믿은 것은 김두원의 큰 실수였다. 1899년 5월에도 김두원은 동해안과 낙동강을 오가면서 소금을 매입하여 한 포구에 모아두었다. 이렇게 모은 소금이 자그마치 1088석이었다. 당시 시세로 따지면 약 5100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기무라라는 성을 가진 일본인 형제가 객줏집에 머문 김두원에게 다가섰다. 고기 절이는 데 소금이 급하게 필요하여 소금값을 후하게 줄 테니 자신들의 배에 소금을 싣고 울릉도까지 가자고 속였다. 보름간의 항해를 거쳐 울릉도에 도착하자 기무라 형제는 김두원에게 소금 짐은 다음 날 하역하고 뭍에 내려 푹 쉬라고 하였다. 순진했던 김두원이 깊은 잠에 든 사이에 사기꾼 형제는 배를 띄워 유유히 동해를 건너 시무라 현으로 사라졌다. 희대의 ‘소금 먹튀’ 사건에 김두원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분통이 터져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조선의 외부대신에게 청원해 보았지만 이미 쇠멸해 가는 조선 정부는 자국민의 피해 보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후 김두원은 직접 일본 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사기꾼들이 이미 징역을 살고 있고, 소금값을 물어낼 형편이 못 된다는, 어이없는 답변을 내놓았다. 분기탱천한 김두원은 1903년 일본 공사인 하야시를 직접 찾아가서 소금값을 내놓으라고 고성을 질렀다. 인력거를 타고 가다가 놀란 하야시는 그만 종로의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렇게 김두원은 일본 공사뿐만 아니라 조선 통감, 일본 총리, 중의원을 상대로 청원하고 투쟁하였지만, 일제는 소금값을 지불해주는 것이 아니라 구휼금 얼마를 주겠다며 그를 회유하려 하였다. 김두원에게 불쌍한 사람을 돕는다는 구휼금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그는 경시청 총감에게 유명한 말을 남기고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 선박이 홍주군 바윗돌에 부딪혀 파손된 것을 그 바윗돌이 조선에 있다 하여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배상금 3000원을 받아가고, 공주군에 있던 일본인이 조선의 군인과 시비하다 구타를 당하였다고 치료비로 5000원을 받아간 즉, 전례와 같이 나의 소금값도 일본 정부에서 물어내는 일이 당연하다.” 참으로 논리정연하고, 당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장장 20여년에 걸친 배상 투쟁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본 정부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그가 정당히 받아야 할 소금값은 식민지의 역사 속에서 ‘소금이 물에 녹듯이’ 사라져 갔을 것으로 보인다. ●탁지부 대신 고영희, 소금세 높여 염민에 큰 고통 1907년 10월 김두원이 영문도 모른 채 경시청에 잡혀간 이유는 일본 황태자의 조선 방문 때문이었다. 일제는 언제나 그랬듯이 김두원이 황태자의 앞을 가로막고 ‘소금값 배상하라.’고 외칠 것이라 여겼다. 김두원이 일제에 의하여 불법 구금된 동안, 일본 황태자를 극진히 모시고 환영행사를 주관한 자가 있었으니 바로 탁지부 대신 고영희이다. 1849년생인 고영희와 김두원은 서로 나이도 엇비슷했으나 황태자 방문 앞에서 전혀 다른, 반대편의 삶에 서 있었다. 차가운 유치장에서 지내야 했던 김두원에게 그해 10월은 지옥과 같은 반면, 황태자 방문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일제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旭日大授章)까지 받은 고영희에게는 천국과 같았다. 1867년 역과에 합격한 고영희는 일제의 부상으로 호기를 맞았다. 1876년 김기수 수신사 일행으로서 일본어 통역을 맡아 일본을 시찰한 이후로 그는 순탄한 등용의 길을 걸었다. 1885년 연천 현감에서 사직하면서 잠시 가시밭을 만나는 듯하였으나 1895년 주일공사로 화려하게 복귀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고관대작의 지위를 한껏 누렸다. 특히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탁지부 관리로서 승승장구하였다. 1907년 5월에 출범된 이완용 내각에서 국가 재정을 총괄하는 탁지부 대신에 임명된 것도 그간 쌓아온 탁지부 스펙 때문이었다. 탁지부 대신인 고영희의 주요 임무는 일제가 식민지 재정을 수립하기 위하여 파견한 고문들을 충실히 돕는 일이었다. 그중 하나가 조선의 소금을 가지고 식민지 경영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1907년 9월 22일자 ‘대한매일신보’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명일에 총리대신 이완용, 농상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탁지대신 고영희 4대신이 인천 주안리에 나가서 소금 굽는 마당을 시찰한다더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친일파 4대신이 당시 한적한 어촌인 인천 주안리에 행차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 행사를 주관한 자는 탁지부의 고영희와 탁지부 소속의 재정고문이었던 메가타 다네타로였다. 1907년 우리나라의 인천 주안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천일염 시험장이 건설되었다. 수천년간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생산해 왔던 조선에서 바람과 햇볕으로 결정되는 천일염업의 등장은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천일염 시험장을 건설한 내막에는 ‘불편한 진실’이 깔렸었다. 일제가 조선에서 식민지 건설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재원이었다. 일제는 자국에서 담배, 소금 등의 전매제도를 통해서 침략전쟁의 군비를 마련했고, 식민지 타이완에서도 아편, 소금 등을 전매시켜서 재원을 확보했다. 그런데 이렇게 상품을 전매하여 톡톡히 재미를 본 일제에 늘 위협적인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동아시아를 휘젓고 다니는 청나라의 값싼 천일염이었다. 중국산 천일염에 대항하는 방법은 천혜의 갯벌이 깔린 조선의 서해안에서 직접 천일염을 생산하는 길밖에 없었다. 염화나트륨 함유량이 높은 천일염은 화학공업과 무기산업의 원료가 되었으므로 군사대국을 지향하는 일제에는 반드시 필요한 재료였다. 이때 고영희와 메가타 다네타로는 서로 합심하여 주안에 최초의 천일염전 시험장을 건설함으로써 일제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이다. 또 하나, 고영희는 일제의 의도대로 충실히 소금세를 걷어줌으로써 재원 확보에 도움을 주었다. 일제는 소금세가 궁내부에 귀속되어 왕실의 금고로 들어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조선의 금고를 빼앗기 위해서 먼저 왕실의 금고에 들어가는 소금세를 국가의 금고로 들어가게 했다. 소금세를 많이 매기기 위하여 탁지부를 시켜 염세 규정도 치밀하고 까다롭게 바꾸어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영희의 취임은 일제에는 희소식이었지만 소금 생산자인 염민들에게 큰 악재였다. 소금세가 갑자기 늘어나자 여기저기서 백성의 시위가 일어났다. 일본 순사들이 염민들을 잡아들이자 대규모 시위가 뒤따랐고, 이내 일본 군인들의 총칼 진압이 시작되었다. 일제와 탁지부의 강압적 소금세 징수로 인하여 결국 수많은 백성들이 죽음을 당했다. ●매국노 고영희 후손, 친일재산 환수 반환소송 나서 고영희는 일제에 수많은 재원을 넘겨 준 덕에 한평생 영화를 누렸다. 탁지부 대신으로서 한일합병조약의 체결에 앞장선 그는 이후 중추원의 고문이 되어 매년 1600원의 연금을 받기도 했다. 1916년 고영희가 사망하자 일제가 준 자작 작위는 장남인 고희경에게 세습되었다. 고영희 집안이 대를 이어서 호의호식할 때 소금장수 김두원은 여전히 소금값을 받지 못하고 허망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해 뜬금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영희의 증손자가 국가의 친일재산 환수에 반발하여 반환소송을 냈다는 것이다. 반환 소송이라면 억울하게 1088석의 소금을 일인에게 강탈당한 김두원의 후손들이 일본 법정에 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역사 앞에 부끄러운 자는 떠들고, 당당한 자는 조용하니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란 말인가. 유승훈(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 구글맵, 독도 삭제 이어 동해도 일본해 표기

    구글맵, 독도 삭제 이어 동해도 일본해 표기

    구글이 지도서비스 ‘구글맵’(maps.google.com)에서 독도의 한국 주소를 지운 데 이어 동해도 일본해로 표기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정부는 구글 측에 표기 시정을 요구할 방침이다. 구글은 25일 “전 세계적으로 독도 등 국가 간 논쟁이 벌어지는 지역에 관한 내부 정책에 맞춰 일부 지역 표기를 업데이트하면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했다. 이는 글로벌 정책에 맞춘 것으로 어떠한 정부의 요청과도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최근까지는 구글 이용자가 구글맵 검색창에 ‘동해’(East Sea)를 쳐도 지도상에서 아무런 표시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일본해’(Sea of Japan)라는 표기가 나온다. 동해 표기는 지도상에서 ‘줌인’ 기능을 이용해 확대할 때만 일본해 아래 괄호 속에 표시된다. 이후 ‘독도’(Dokdo)를 검색하면 독도의 위치만 표시될 뿐 한국 주소는 없다. 명칭도 ‘리앙쿠르 암초’(Liancourt Rocks)로 표기됐다. 이전까지는 독도 지도와 함께 한국 주소(울릉군 울릉읍 독도이사부길 63)가 나왔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 영토로 구글의 독도 주소 삭제는 우리 의사와 배치된다.”며 “일본해 표기 또한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앞서 일본 언론은 구글이 일본 지방자치단체와 정부 요청을 받아들여 지도 서비스에서 독도의 한국 주소를 삭제했다고 보도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독도 한국땅’ 인정 日제작 지도 복원

    ‘독도 한국땅’ 인정 日제작 지도 복원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사실을 일본 스스로 인정하며 만들었던 1930년대 지도가 복원됐다.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은 24일 “1936년 일본 정부의 지도제작기관인 육군참모본부 ‘육지측량부’가 제작한 ‘지도구역일람도’는 당시 일제가 점령하고 있는 조선을 비롯해 타이완, 홋카이도 등을 구역별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 중 조선구역을 보면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정확히 표기하고, 일본 구역과 구분하는 선을 굵게 그려놓았다.”면서 “제작 당시 양면에 인쇄됐으나 이후 뒷면에 종이를 덧붙여 액자를 만들어서 원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등 훼손된 상태였으나 초음파 봉합 처리 등을 통해 원래 지도 상태로 복원했다.”고 밝혔다. 서지학자 이종학씨가 1988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으며, 국가기록원은 지난 5월 독립기념관의 의뢰를 받아 다섯 달에 걸친 복원작업에 끝에 지도 뒷면에 덧붙인 종이를 제거하고 보존용 필름 사이에 기록물을 넣고 초음파로 봉합하는 등 원래 지도 상태로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신용하 독도학회 회장은 “‘지도구역일람도’는 제2차세계대전 직후 일제가 패망하고 연합국이 일제 식민지를 해체할 때 이 지도 등을 근거로 독도를 우리나라 고유 영토로 인정했던 중요한 기록물이다.”고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또 이상태 한국고지도연구학회장 역시 “일본 정부의 공식 기구가 발행한 지도에 독도를 조선 영토에 포함시킨 것은 일본이 공식적으로 독도를 우리나라 고유 영토로 간주한 것”이라고 이 지도에 담긴 현재적 의미를 설명했다. 국가기록원은 진본과 별도로 전시, 교육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별도의 복제본을 제작했다. 독립기념관은 조만간 ‘지도구역일람도’ 전시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지자체 곳간은 텅텅 직원 검진비는 펑펑

    지자체 곳간은 텅텅 직원 검진비는 펑펑

    지방자치단체들이 직원 및 지방의원들의 1인당 건강검진비로 수십만원씩을 지원해 선심성 행정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재정자립도 전국 최하위권인 자치단체들이 전국 최고 수준의 직원 검진비를 지원해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북 경주시는 올해 청원경찰 등 직원과 시의원 등 1460여명의 검진비로 예산 4억 5000만원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24일 밝혔다. 지난 2010년 3억 4980만원을 지원한 데 이어 두 번째다. 격년제로 직원 1인당 23만~30만원 지원한다. ●성주, 해마다 35만원씩 꼬박꼬박 포항시도 올해 직원 1000명의 검진비로 예산 3억원을 확보했다. 여기에는 시의원 35명도 포함됐다. 지난해엔 직원 등 936명의 검진비 2억 7400만원을 시비로 썼다. 영주시는 40세 이상의 직원에 한해 검진비를 준다. 2010년 처음으로 직원 660명에게 검진비 1억 3200만원을 지원했다. 올해는 674명에게 1억 3480만원을 줄 예정이다. 시의원 14명은 올해 처음으로 1인당 20만원씩 받게 된다. 올해 재정자립도 10.5%로 전국 최하위권인 봉화군은 도내 23개 시·군 가운데 직원 1인당 검진비가 50만원으로 가장 많다. 전국 최상위권인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45%로 도내에서 재정자립도가 가장 높은 구미시가 직원 1인당 검진비가 30만원씩인 것을 감안하면 봉화군의 지원액은 파격적이다. 봉화군은 올해 예산 1억 5000만원을 편성해 놨다. 울진군도 올해 직원 1인당 검진비 40만원씩, 모두 398명(군의원 8명 포함)에게 1억 6000만원 정도를 지원한다. 성주군은 2008년부터 도내에서 유일하게 매년 직원 580여명에게 검진비 35만원씩을 지원하고 있다. 4년간 8억 1200만원을 지원했다. 성주군의 올해 재정자립도는 16%다. 의성·청송·고령·청도·칠곡군 등도 격년에 30만~35만원씩을 지원해 주고 있다. 이 같은 지원액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개별 가입자에게 지원하는 검진비(암 제외) 4만여원의 10배 안팎에 이른다. 이런 가운데 일부 시·군은 내년에 1인당 10만~20만원 인상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문경시는 도내 시·군 가운데 유일하게 직원들의 검진비를 지원하지 않아 눈길을 끌고 있다. 김의섭(한국지방재정학회장) 한남대 교수는 “주민 삶의 질 향상에 쓸 예산이 지자체 공무원과 지방의원들의 검진비로 마구 지출되는 것은 개선돼야 할 문제”라면서 “정부가 검진비 지원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문경, 경북내 유일하게 지원금 없어 자치단체 관계자들은 “직원들에 대한 검진비 지원은 전국 자치단체가 마찬가지며, 대상 및 규모도 비슷하다.”면서 “최근 직원 ‘돌연사’가 잇따르는 등 건강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자 자치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직원 보호책을 마련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해명했다. 한편 지난해 기준으로 경북도 시·군에서 지방세 수입으로 소속 공무원의 인건비를 해결하지 못하는 곳은 울릉, 울진, 봉화, 예천, 성주, 고령, 청도, 영덕, 영양, 청송, 의성, 군위 등 12곳이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해외유출 생물표본 절반 日 소장

    해외유출 생물표본 절반 日 소장

    해외에 유출된 생물표본 중 국내에 없는 1종 표본을 비롯한 절반 분량이 일본에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환경부가 1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홍영표(민주통합당) 의원에게 제출한 국감자료에 따르면 외국에 유출된 한반도산 생물표본은 2만 4772점으로 이 중 일본에만 1만 2569점이 소장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환경부가 2008년부터 미국·일본·헝가리 등 국외 7개국 24개 기관을 방문해 조사한 결과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된 울릉도 고유종인 ‘섬초롱꽃’도 ‘다케시마’라는 학명으로 등재돼 생물주권이 유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16년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원앙사촌’은 전북 군산에서 세계 최초로 발견됐으나 국내에는 표본이 없지만 일본에 표본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유진상기자 jsr@seoul.co.kr
  • 백두산정계비 여정 그린 지도 첫 발견

    백두산정계비 여정 그린 지도 첫 발견

    ‘한국서지’(Bibliographie Coreenne)의 저자인 프랑스의 동양학자 모리스 쿠랑(1865~1935)이 수집한 한국 고서가 대량으로 발견됐다고 국립중앙도서관이 17일 밝혔다. 특히 자료 중 숙종 때 조선과 청나라가 국경을 확정하며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운 여정을 그린 ‘임진목호정계시소모’(壬辰穆胡定界時所模)는 최초로 발견된 지도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또 20세기에 필사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도 희귀본이다. 국립도서관은 해외 한국 고서 디지털화 사업의 일환으로 콜레주 드 프랑스가 소장한 한국 고서를 조사하던 중 쿠랑이 소장했던 254책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자료는 이 기관이 쿠랑 사후인 1936년 두 번에 걸쳐 구입한 것이다. 쿠랑은 파리 태생으로 파리대학 법대와 동양어학교에서 고등교육학위를 받고 중국 베이징의 프랑스공사관 통역관 실습생으로 파견됐다가 1890년 통역서기관으로 서울에 왔다. 주한 프랑스공사 콜랭 드 플랑시가 수집한 장서를 검토하고 이후 프랑스국립도서관, 기메박물관, 영국국립도서관 등지에 소장된 한국 고서를 조사하고 ‘한국서지’를 저술했다. 리옹대학 중국어과 교수를 지냈다. 그가 쓴 ‘한국서지’는 한국학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작성된 한국 고서에 대한 방대한 규모의 자료로, 1894년 이래 1901까지 본책 3권과 보유판 1권으로 발간됐다. 1901년에 발간된 이 책 보유판에는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의 목록이 수록됐다. 이번 조사를 담당한 국립중앙도서관 관계자는 “조선 후기 필사본 고지도인 천하제국도(天下諸國圖)에 수록된 지도 중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 주변을 조사한 후 정계비를 세운 여정을 그린 ‘임진목호정계시소모’는 최초로 발견된 자료이고 필사본 ‘해동제국기’도 희귀본이다.”라고 했다. ‘임진목~’의 강원도 지도에는 울릉도 남쪽에 우산도(于山島·독도)가 그려져 있어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도서관은 덧붙였다. 콜레주 드 프랑스는 1530년에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설립한 연구기관으로, 한국 고서는 쿠랑 수집본을 포함해 모두 53종 421책을 보유하고 있다. 도서관은 ‘국외 한국 고문헌 조사보고서I: 콜레주 드 프랑스 소장 한국 고문헌’을 출간한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독도 의미 되새기는 울릉군 ‘독도이사부길’

    [길을 품은 우리 동네] 독도 의미 되새기는 울릉군 ‘독도이사부길’

    일본 국민의 대다수가 모르던 ‘우리 땅’ 독도는 지난 8월 이명박 대통령이 전격 방문하며 우리 국민은 물론 한·일 국민 모두가 알게 됐다. 도로명주소 사업을 통해 강원 삼척시와 경북 울릉군 등 몇몇 지자체들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확인하는 새로운 길 이름을 정했다. 삼척 정라항에는 이사부길이 있다. 수로부인길 주변에 이사부사자공원이 조성된 데 이어 인근에 이사부 장군 축제가 개최되는 정라항 인근의 길 이름을 ‘이사부길’로 이름지은 것이다. 이사부길은 지번으로 삼척 정하동 41에서 41-186을 잇는 도로이다. 주변에 어물시장과 수산물 공동활복장, 바다횟집들이 들어서 있어 삼척에서 회를 먹을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로 꼽힌다. 기존 도로명은 정라항길이었지만, 이사부역사문화축전이 개최되는 장소라는 점을 홍보하고, 우리 영토로서 독도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이사부길로 이름을 바꿨다. 이사부사자공원 곳곳에 설치된 각종 사자상도 이곳에서 열리는 축제 때 나무사자 깎기 대회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경북 울릉군 ‘독도이사부길’은 실제 독도에 있는 도로명주소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새 도로명 이름을 공모해 2008년 8월 이름이 최종적으로 선정됐다. 울릉군 도로명주소위원회는 독도의 동도에 ‘독도이사부길’을, 서도에는 ‘독도안용복길’을 각각 새롭게 명명했다. 어부 안용복은 숙종 때 을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일본 막부가 인정하도록 한 역사적 인물이다. 새 도로명 주소에 따라 독도 등대는 독도 이사부길 63번으로, 독도경비대 막사는 독도이사부길 55번으로 각각 새로운 주소를 갖게 됐다. 지난해 6월 독도 새주소 제막식에는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이 참여하는 등 정부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안석기자 ccto@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22) 삼척시 수로부인길

    [길을 품은 우리 동네] (22) 삼척시 수로부인길

    ‘자줏빛 바위 가에 암소 잡은 손을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신라 33대 성덕왕 때 순정공이 강원도 강릉의 태수로 가는 길에 동행한 수로부인이 바닷가 절벽의 철쭉꽃을 갖고 싶어 하자 소를 몰고 가던 한 노인이 수로부인의 아름다움에 반해 노래를 부르며 꽃을 꺾어 바쳤다. 이 노인은 이틀 뒤 용이 수로부인을 바닷속으로 데리고 가자 백성들에게 ‘해가사’를 부르게 해 수로부인을 되찾아 오기도 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신라 향가 ‘헌화가’에 얽힌 이야기다. 구설로, 책으로 전해 내려오던 우리 설화는 이제 사람들의 길 이름, 주소로도 새롭게 의미를 갖게 됐다. 강원 삼척시 ‘수로부인길’이 그곳이다. 수로부인길은 삼척시에서 동해시로 넘어가는 마지막 도로다. 멀리 촛대바위가 보이는 증산해수욕장 해변을 지나고, 60여 가구가 사는 증산마을을 통과하는 수로부인길은 3㎞가 조금 넘는 짧은 거리다. 증산마을은 삼척의 가장 북쪽에 있는 바닷가 마을이다. 마을 주위의 산세가 시루처럼 생겼다고 해서 ‘실뫼’나 ‘시루뫼’로 불렸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며 ‘증산’(甑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수로부인길은 마을을 두루 훑듯이 지나 삼척과 동해의 경계까지 이어진다. 수로부인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촌의 소박한 운치와 동해의 힘찬 기운이 함께 느껴진다. 또 들은 적도 없는 헌화가가 이름 모를 선율과 함께 멀리서 들리는 것만 같다. 해안도시 삼척의 매력을 모두 갖고 있는 도로가 바로 수로부인길이다. ●2009년 증산마을 주민들 공모 통해 재탄생 도로 이름이 원래부터 수로부인길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번으로 삼척시 우지동 산11-2에서 증산동과 갈천동을 지나 교동 413-15를 잇는 도로는 2002년 새주소사업과 함께 당초 ‘증산길’로 결정됐었다. 증산동을 관통하는 길이고, 증산해수욕장 등 주변 관광지를 널리 알릴 수 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기존 동 이름을 도로명에 활용하는 다소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일단 ‘증산길’은 증산동 주민만이 아닌 다른 동 주민까지 함께 만족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앞으로 평생을 사용할 도로 이름인데 주민 의견도 묻지 않고 정할 수는 없다는 의견도 나왔다. 무엇보다 헌화가와 해가사의 고장으로 알려진 이 지역의 의미를 살릴 수 있는 도로명이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삼척시도 이러한 주민들의 여론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시로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주민 공모를 통해 ‘수로부인길’과 ‘해가사길’, ‘증산길’ 등 3개 이름이 최종 후보로 올랐고 의견 수렴 결과 ‘수로부인길’이 최종 낙점됐다. 시는 2009년 9월 도로명을 ‘수로부인길’로 새롭게 고시했다. 삼척시 도시디자인과 안덕봉 지리정보담당계장은 “다시 이름이 정해지는 번거로움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지역의 특성과 의미를 담은 좋은 도로명인 것 같다.”고 말했다. ●설화 의미, 독도 수호 의지 담은 관광지 조성 수로부인길을 지나가면 수로부인공원과 이사부사자공원 등 삼척의 대표적인 관광지를 두루 볼 수 있다. 수로부인공원에 서면 증산마을의 전경과 임해정 옆으로 펼쳐지는 해변이 두루 보인다. 임해정은 수로부인 설화에서 백성들이 불렀던 해가사 설화를 토대로 복원됐다. 이 때문에 수로부인공원은 해가사터로도 불린다. 삼국유사의 문헌으로는 위치를 특정할 수 없지만, 삼척해수욕장의 와우산 끝자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명 ‘드래건볼’로 불리는 ‘사랑의 여의주’ 조형물은 사랑을 기원하는 기념비로 알려지며 삼척을 찾는 연인들에게 더욱 인기가 높다. 증산마을 옆에 위치한 이사부사자공원은 신라장군 이사부를 주제로 만든 가족형 테마공원이다. 2011년 8월 개장한 이후 누적 방문객이 33만명을 넘을 정도로 수로부인길 인근의 대표 방문지로 인기가 높다. 울릉도와 독도의 옛 이름인 우산국을 신라땅으로 만든 이사부 장군을 기념한 공원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의 사자상들을 볼 수 있다. 신라 지증왕 13년 우산국을 정복하기 위해 싸우던 이사부 장군이 반항하는 섬 주민들을 겁주기 위해 사자 모양의 나무조각을 만들었다는 설화를 기념하기 위한 조형물들이다. 이사부 장군은 나무 사자상을 배에 싣고 “항복하지 않으면 사자를 섬에 풀어놓겠다.”고 섬 주민들을 협박해 항복을 받아낸 뒤 우산국을 신라 영토로 편입했다는 것. 공원의 사자상들은 매해 8월 이사부광장에서 진행되는 이사부역사문화축전의 나무사자 깎기 대회와 사자탈 만들기 대회를 통해 입상한 작품들이다. 조각가들의 재치를 느낄 수 있는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보는 이들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올해는 이사부 장군이 독도를 우리 영토로 복속한 지 1500주년이 열린 해였기 때문에 행사의 규모가 어느 때보다 컸다. 삼척항에서 삼척해수욕장까지 동해안을 만끽할 수 있는 새천년도로는 ‘소망의 탑’ ‘조각공원’ 등이 자리해 삼척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꼽힌다. 4.6㎞의 해안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도로로 ‘한국의 아름다운길 100선’에 꼽히기도 했다. 삼척에서 부산까지 이어지는 동해대로는 이름 그대로 동해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도로다. 7번 국도가 ‘동해’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새롭게 탄생하게 됐다. 글 사진 삼척 안석기자 ccto@seoul.co.kr ●23회는 대전 부용로·사득로를 소개합니다.
  • 기관마다 독도 면적표기 제각각

    정부기관이나 연구단체들조차 독도 면적을 서로 다르게 표기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민주통합당 박수현 의원이 15일 해양경찰청 국정감사에서 밝힌 자료에 따르면 외교통상부·국토해양부·울릉군·해양경찰청·독도박물관 등은 독도 면적을 18만 7554㎡로 표기하고 있다. 반면 경찰청 독도경비대는 독도 면적을 18만 6000㎡, 경북도청 사이버독도와 연구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은 18만 7453㎡로 제각각 기록하고 있다. 민간 독도학회는 18만 6121㎡, 독도의병대는 18만 902㎡, 코리아독도녹색운동연합은 18만 7454㎡로 소개하고 있다. 박 의원은 “해경은 매년 발간하는 백서에 독도 면적을 ㎡가 아닌 부피 단위인 ㎥로 표기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2년째 되풀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독도의 위치에 대해서도 해경 백서는 북위 37도 14분 26.8초, 동경 131도 52분 10.3초로 소개하고 있으나 국토부 홈페이지에는 동경이 131도 52분 10.4초로 나와 있다. 류찬희 선임기자 chani@seoul.co.kr
  • 너희들이 독도를 지키고 있었구나

    너희들이 독도를 지키고 있었구나

    독도와 울릉도에서 다양한 생물종이 새롭게 발견됐다. 교육과학기술부는 독도·울릉도 공동 학술조사 결과 식물 5종, 곤충 2종, 버섯 1종의 독도 서식·분포 사실을 새롭게 확인했다고 15일 밝혔다. 이번 조사는 국립수목원, 국립중앙과학관 등 20개 국가생물다양성기관연합 회원기관의 학자 50여명이 6월과 9월 현장을 방문해 살펴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독도 조사에서는 벼과 식물인 물피를 비롯해 좀돌피, 가는금강아지풀, 가을강아지풀 등 고유종 4종과 귀화식물인 국화과 큰방가지똥 등 5종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나방류인 큰횡줄가는잎말이나방과 침벌류 1종도 발견됐다. 침벌류는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에서만 발견되는 희귀종으로, 딱정벌레류 곤충의 외부에 기생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 침벌은 독도에 서식하는 딱정벌레 고려거저리에 기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번 조사에서 쌀경단버섯 1종이 확인됐는데, 이는 독도에서 확인된 최초의 버섯류다. 이 밖에 말미잘류 2종, 연체동물 9종, 절지동물 3종 등 총 14종의 해양무척추동물이 독도 부근에서 발견됐다. 이번 조사로 독도에 서식하는 생물종은 모두 639종으로 늘어났다. 독도에 대한 식물연구는 1952년 이영노 선생에 의해 처음 실시됐고, 이후 40회 이상 조사가 진행됐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박사는 “조사 시기에 독도가 비교적 메말라 있어 다른 버섯의 발생은 확인되지 않았다.”면서 “인간에 의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왕포아풀 등 귀화식물에 대한 변화 모니터링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함께 진행된 울릉도 조사에서는 신종 몽고노래기 1종, 미기록종 늑대거미과 1종이 추가로 발견됐으며 한국 미기록 분류군인 맵시벌과 1종, 작은호랑하늘소류 1종, 복숭아 굴나방 등도 확인됐다. 박항식 국립중앙과학관장은 “전세계적으로 생물자원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자국의 생물에 대한 주권을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천연기념물 지역인 독도의 자연환경 보전과 보호를 위해 생물상 파악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日이 멸종시킨 독도 바다사자 돌려주세요”

    “日이 멸종시킨 독도 바다사자 돌려주세요”

    세계적인 청소년 환경운동가 조너선 리(15·한국명 이승민)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남획으로 멸종한 독도 바다사자 복원 운동에 나섰다. 조너선 리는 4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거리에서 일본의 독도 주변 해양 생태계 파괴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독도 바다사자 복원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그는 독도가 그려진 포스터 위에 영어로 ‘바다사자를 아름다운 독도로 돌려주세요.’라는 글이 적힌 피켓을 들고 거리 홍보에 나섰으며 이날 행사에는 독도 주민 김성도씨의 손자인 김환(13)군을 포함해 울릉도 어린이 3명도 참가했다. 지난해 9월 경북에서 독도 녹색섬 홍보대사로 위촉된 조너선 리는 “독도를 방문한 뒤 자연 생태계 보호와 바다사자 복원의 꿈을 키우게 됐다.”면서 “독도 바다사자가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묵인 아래 몰려든 일본 어부들의 남획으로 멸종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바다사자 복원을 위한 한국 어린이들의 의지를 알리기 위해 나왔다.”고 말했다. 앞서 조너선 리는 지난 8월 독도 바다사자의 멸종 과정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복원 결의를 담은 영문 동영상을 제작해 유튜브에 올려 주목을 받았다. 한국계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조너선 리는 10살 때 TV에서 지구 온난화로 남극 빙하가 녹는 장면을 본 뒤 직접 만화를 그리면서 환경운동을 시작했다. 2008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만남을 계기로 한반도 평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최근까지 비무장지대(DMZ) 평화 숲 나무 심기 캠페인을 진행해 오고 있다. 최재헌기자 goseoul@seoul.co.kr
  • [단체장 발언대] 염태영 수원시장, ‘독도 우리땅’ 유물·자료 한평생 사운 이종학 선생을 아십니까

    [단체장 발언대] 염태영 수원시장, ‘독도 우리땅’ 유물·자료 한평생 사운 이종학 선생을 아십니까

    지금도 우리는 끝나지 않은 전쟁 속에서 살고 있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역사왜곡과 망언을 일삼고 있으며, 중국은 동북공정이란 이름으로 우리 역사를 자신의 것이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치열한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주고자 한평생 정열을 불태운 분이 있다. 바로 수원 출신 사운(史芸) 이종학(1927~2002) 선생이다. 지금 수원박물관에서는 ‘사운 이종학,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특별기획전을 14일까지 연다. 이종학 선생은 “역사가 대대로 누릴 정신의 옥토라면 지금 제대로 갈아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역사를 김매기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호를 사운이라 짓고, 우리 역사와 영토분쟁에 관한 기록을 찾는 일을 운명이라 여겼다. 이 선생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과 자료 수집을 시작으로, 일제의 대륙침략 야욕과 강제로 체결된 한일병합의 불법성을 알리기 위해 일본의 도서관과 자료보관소에서 귀중한 자료를 수집해 세상에 공개했다. 또, 독도가 우리의 땅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본 스스로 독도를 한국 땅으로 인정한 자료를 모으는 데 헌신했다. 이렇게 선생이 평생 모은 귀한 자료를 바탕으로 1997년 울릉도에 독도박물관을 개관했고, 선생은 초대 관장으로 활동했다. 그 소임을 다한 뒤에는 ‘한 줌 재 되어도 우리 땅 독도 지킬 터’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런 뜻을 기리기 위해 2002년 독도박물관 앞에는 선생의 묘비를 세우기도 했다. 선생은 평생 방대한 역사 자료를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자료는 ‘꼭 필요한 곳에 보내 활용케 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 뜻에 따라 독도박물관, 독립기념관, 현충사에 관련 자료를 기증했고, 2004년에는 수원시에 유물과 자료를 무려 2만여점이나 기증했다. 11월이면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10주년이 된다. 그래서 수원박물관에서는 선생이 기증한 자료를 독도박물관, 독립기념관, 현충사에서 다시 옮겨와 특별기획전을 열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면서 수집한 독도와 조선해 자료, 잃어버린 땅 간도와 일제침략 자료, 화성과 충·효 자료 등 유물 150여점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이 중에는 독도 분쟁의 진실을 알려주는 ‘삼국접양지도’도 있다. 1785년 일본인 실학자 하야시 시헤이가 제작한 이 지도에는 ‘독도는 조선이 소유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것을 일본인 스스로 명확히 밝힌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선생이 일생 부지런히 발품을 팔면서 수집한 유물과 자료는 그저 박제된 전시품이 아니라 우리 가슴과 심장을 뛰게 하는 북소리가 돼 살아 꿈틀대고 있다. 또,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논리가 터무니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분명한 증거가 되고 있다. 이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수원시는 앞으로도 우리 역사 바로알기와 우리 영토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우리가 올바른 역사의식과 나라 사랑의 마음을 키워야만 총성 없는 역사전쟁에서 우리 땅을 굳건히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 사람 살린 명이나물 이야기

    KBS 1TV ‘수요기획’은 3일 오후 11시 40분 ‘마을 그리고 사람을 살리다, 2012 산나물 이야기’를 방송한다. 경북 영양 대티골은 일월산 자락에 자리 잡은 작은 산골 마을이다. 애써 찾지 않으면 가 볼 일이 없을 것만 같은데 명이나물의 산지로 알려지면서 매년 1만명 이상이 찾는 곳이 됐다. 울릉도 역시 매한가지다. 농가 소득의 대부분은 오징어가 아니라 산나물이 책임진다. 이런 곳을 모두 찾았다.
  • “독도에 불법구조물 설치 위법” 문화재청, 경북도·울릉군 고발

    문화재청이 독도에 불법 구조물을 설치한 경북도와 울릉군을 수사기관에 고발했다. <서울신문 9월 17일 자 15면> 문화재청 관계자는 26일 “최근 독도에 허가받지 않은 불법 구조물을 설치한 경북도지사와 울릉군수를 문화재보호법(제35조 1항 1호) 위반 혐의로 경북지방경찰청에 고발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경북도와 울릉군이 행정기관임을 감안해 실무 책임자가 아닌 기관을 고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경북경찰청은 1차로 문화재청 관계자를 불러 고발인 조사를 마친 뒤 도지사와 군수 등 관련 공무원을 상대로 불법 구조물 설치 경위 등을 조사할 방침이다. 경북도지사와 울릉군수는 천연기념물 제336호인 독도 동도에 국기 게양대를 설치하면서 허가를 받지 않고 경북도기와 울릉군기, 태극문양 기단, 호랑이상, 경북도지사 명의의 표지석 등을 무단으로 설치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이를 감추기 위해 문화재청에는 허가를 받은 국기 게양대만 설치한 것처럼 허위 보고한 혐의도 받고 있다. 현행 문화재보호법은 천연기념물 등 국가지정문화재에 시설물을 설치하려면 문화재청장의 현상변경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경북도와 울릉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도 관계자는 “우려했던 고발 조치가 실제로 이뤄져 걱정스럽다.”면서 “최대한 원만히 사태가 수습되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울릉군 관계자도 “관계 공무원에 대한 사법기관의 조사 등 사태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한국학, 역사 옹호 넘어 세계사 위기 해결에 기여해야”

    “한국학, 역사 옹호 넘어 세계사 위기 해결에 기여해야”

    “한국학은 인류의 고민이나 세계사의 위기 진단과 해결에 기여해야 하며, 세계학문을 혁신하는 수준의 이론을 창조해야 하는 만큼 한국학을 넘어서야 한다.”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는 25일 경기 성남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에서 열린 제6회 세계한국학대회 기조연설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조 명예교수는 ‘한국학의 전통과 혁신’이란 제목의 기조연설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한국사를 축소하고 왜곡하는 사태가 지속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옹호를 한국학의 임무로 삼아 맞대응할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유럽과 남미 등 전세계 25개국의 한국학 학자 140여명이 참석해 26일까지 140여편의 논문을 발표·토론하는 이번 학술대회는 역사뿐 아니라 정치, 경제, 법학, 예술, 인류학과 드라마, 영화, K팝 등 다양한 주제의 연구 논문을 통해 한류 열풍의 실체와 이면을 깊이 있게 조명했다. 태국 출라롱콘대학의 미셸 카밀 코레아 교수는 연구 논문 ‘필리핀 여성의 눈에 비친 강한 여성: 한국 TV 드라마 수용분석연구’에서 20~40대 필리핀 직장 여성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한국 드라마를 선호하는 이유로 속도감 있는 이야기 전개, 강한 여성상, 순수한 사랑, 가족 중심적인 가치 등을 꼽았다.”고 소개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의 베로니카 델 발레 교수는 한국 드라마에 나타나는 재벌 이미지를 분석한 논문 ‘이데올로기와 매스미디어: 한국 드라마의 재벌 이미지’를 발표했다. 독도와 관련한 해묵은 일본의 인식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영학 한국외대 교수는‘19세기 후반 일본 어민의 동해 밀어와 조선인의 대응’이란 연구논문에서 일본의 수산전문가 구즈우 슈스케는 저서 ‘한해통어지침’(韓海通漁指針, 1903년)을 인용해 “울릉도로부터 동남쪽으로 약 30리, 우리 오키국(隱岐國) 서북으로 같은 거리에 떨어진 바다에 무인도가 한 곳 있다. 하늘이 맑을 때 울릉도의 산봉우리의 높은 곳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고 일본인의 독도인식을 소개했다. 이 교수는 “구즈우 슈스케가 1903년에 이 책을 편찬했을 때 추천사를 써 준 사람이 당시 일본의 농상무성 수산국장이었던 마키 보쿠신으로, 추천사를 써주었기 때문에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교수는 또한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초기부터 독도를 조선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했다. 일본 해군 수로국이 펴낸 1894·1899년판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는 ‘리앙고루도열암’(독도)을 조선 편에 싣고 있다. 즉 1905년 러일전쟁기에 일본이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기 위해 독도를 무단 점거하고 망루를 세우기 직전에 독도를 대한제국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임스 루이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와 전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다니엘 쉬베켄디엑 성균관대 교수는 이번 학술대회에서 공동논문 ‘조선후기 삶의 질에 관해서: 인체치수 자료를 중심으로’를 발표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키 변동 추이를 통해 조선 후기 경제적 상황과 삶의 질을 고찰한 결과 1679년부터 1798년까지 조선 군인들의 키는 3.62~4.25척으로 측정됐다. 이는 임진왜란을 겪은 뒤 회복기에 있던 17세기 중반 초기에 태어난 조선 사람들의 영양상태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았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18세기까지 키가 대체로 크다가 노론이 장기집권하는 19세기 중·후반이 되면서 다시 줄어들었다.”며 “17~18세기만 해도 조선의 내재적 역량이 컸다.”고 설명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日문헌·지도에도 독도는 한국땅”

    외교통상부는 지난달 한·일 갈등이 빚어진 뒤 ‘한국의 아름다운 섬, 독도’ 책자를 35만부 인쇄, 해외홍보용으로 재외공관에 배포했다고 21일 밝혔다. 책자에는 ▲독도에 대한 정부의 기본 입장 ▲독도의 지리적 인식과 역사적 근거 ▲한·일간에 빚어진 ‘울릉도 쟁계(爭界)’와 우리 독도 영유권 확인 ▲대한제국의 독도 통치와 영유권 회복에 대한 내용 ▲독도에 관한 일문일답이 담겼다. 책자는 독도가 옛날부터 일본땅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일본의 다양한 옛 문헌과 지도를 설명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해 일본의 영유권 주장을 반박했다. 일본어 원문과 번역문도 첨부했다. 특히 1693년 일본 어민의 울릉도 도해 사건으로 일본과 조선 사이에 발생한 외교분쟁인 ‘울릉도 쟁계’를 비중 있게 다뤘다. 일본 에도 막부는 당시 자국의 돗토리번에 울릉도가 돗토리번에 속하는지와 돗토리번에 속하는 다른 섬은 없는지를 문서로 문의했고 돗토리번은 울릉도(竹島)와 독도(松島)는 돗토리번에 속하는 섬이 아니다.’라는 내용으로 답변했다. 결국 울릉도 쟁계 당시 일본은 울릉도·독도가 자국 영토가 아님을 스스로 밝혔다. 책자는 또 1905년 일본 정부가 독도를 자국 영토로 삼는다고 밝힌 시마네현 고시는 우리 국권에 대한 불법적인 침탈 과정의 하나이기에 국제법적 효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가 이미 1904년 ‘한·일 의정서’나 ‘제1차 한·일 협약’ 등을 통해 단계적 침탈을 시작했고 독도가 그 첫 번째 희생물이 됐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가 독도를 일본의 통치·행정 범위에서 제외했다는 내용의 여러 각서도 우리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실렸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응답하라, 독도!

    응답하라, 독도!

    독도 서도 주민숙소에 설치된 일반(민간) 전화가 유명무실하다. 울릉군 독도관리사무소는 2006년 5월 4일 처음 개설된 서도 주민숙소 일반 전화의 통화 품질이 나빠 독도 유일 주민 김성도(73·울릉군 울릉읍 독도 안용복길3)씨 부부 등이 2~3년 전부터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20일 밝혔다. 이 때문에 김씨 부부는 물론 주민숙소에 거주하는 울릉군 공무원들은 외부와의 연락을 휴대전화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KT가 설치한 독도 일반 전화는 일반 가정용 무선 전화기를 장거리(1㎞)에서도 통화가 가능하도록 기능을 개조, 본체는 울릉도와 마이크로웨이브 무선 전송로가 연결된 동도에 두고 서도에서 무선 전화기를 이용해 통화할 수 있도록 했다. 전화번호는 안용복이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고유 영토임을 확인한 1693년을 의미하는 054-791-1693번이다. 하지만 2010년을 전후해 서도 무선 전화기에 이상이 생기면서 통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품질이 크게 나빠졌으나 지금까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독도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주민숙소의 일반 전화는 현재 번호만 살아 있을 뿐 무선 전화기 자체가 사라진 지 오래됐다.”며 “휴대 및 인터넷 전화로 통화가 가능해 불편함은 없다.”고 말했다. KT 관계자도 “독도에서도 통신 여건이 크게 개선돼 일반 전화의 역할은 이제 큰 의미가 없어졌다.”고 밝혔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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