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질성 극복의 몸부림…이기백특파원 현지보고(통일 이후의 독일:8)
◎구동독 주민,일자리 찾아 “서부 대이동”/통일 1년 만에 1백만명 이주 추정/동쪽 인구 격감… 서쪽은 주택난 심화
일자리와 행복을 찾아 동부 독일에서 서부 독일로 이주하는 이른바 「민족의 대이동」이 통일 후 계속되고 있다.
구동독지역의 산업이 자본주의 체제로 개편되면서 많은 기업들이 경쟁력을 잃고 공장들이 속속 문을 닫자 직장을 잃게 된 사람들과 더 좋은 보수를 바라는 사람들이 살림살이를 챙겨 아예 서부로 이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구동독 도시지역에선 공동화현상의 조짐이 나타나고 구서독지역에선 주택난이 가중되고 있다.
통일 후 구서독공장에서 생산된 자동차·전자제품등속의 공산품들이 동쪽 지역에서는 불티나게 팔리고 있으나 동부지역에서 생산된 상품은 농산물을 제외하고는 가격·품질면에서 경쟁력을 잃어 구동독지역의 생산량이 지난해에 비해 20%나 감소됐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구동독기업들이 심한 불황을 겪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구서독기업들은 호황을 구가,구동독 근로자들의 임금이 서부에 비해 70%밖에 안되는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정부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구동독 5개주에서 서부로 이주한 주민들은 33만여 명이며 올 1,2월중에만 베를린으로 주거를 옮긴 주민들 숫자가 1만3천5백여 명으로 집계됐다.
구동독 작센주의 경우 한달 1만여 명씩이 서부지역으로 전출하고 있으며 작센안할트주는 5천여 명씩 빠져나가고 있다고 주 당국이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주신고를 하지 않거나 살던 집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떠나는 사람들도 상당수여서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주민들이 서부로 이주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동독으로부터의 이같은 엑서더스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돼 올해에만 60여 만 명이 주거지를 옮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취업을 위한 민족이동뿐 아니라 출퇴근 인구의 이동 또한 대단하다. 베를린을 둘러싸고 있는 브란덴부르크주에서만 5만여 명이 매일 베를린으로 출퇴근하고 있으며 전국적인 숫자는 30여 만 명에 이르고 있다.
1년전 라이프치히시에서 일자리를 찾아 베를린으로 온 수도·전기기술자 스테펜귄터군(21)은 『고향에 있는 고교동창생들이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일찌감치 이곳에 와 일찍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시작한 우리가 현명했던 것 같다』며 『늦게 오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속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더욱 뼈아프게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테펜군은 고향친구와 함께 셋집을 얻어 한침대에서 같이 자며 궁색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안정된 직장과 전망이 있어 불만이 없다고 했다.
구동독기업들은 국가관리 아래 기회 있을 때마다 「노동자의 천국」을 약속했지만 동독 출신 근로자들은 통일과 더불어 그들이 아닌 구서독 근로자들이 천국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으며 『마르크화가 이곳으로 온다면 우리가 이곳에 머물러 있겠지만 마르크화가 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마르크화를 쫓아 가겠다』는 식으로 「마르크화대행진」 대열에 동참,구서독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서부지역으로 몰리고 있다.
서부지역으로 이주하는 연령층은 대부분 20대 남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 때문에 동쪽지역에는 노년층과 여성층의 구성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져 노동력의 질적 저하,생산성 저하의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베를린 사화과학연구소 인구조사팀 수석연구원인 지그프리드 구룬트만씨에 따르면 89년 9월부터 90년 9월까지 동부지역에서 서부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 가운데 18∼25세의 청년층이 45%를 차지하고 있으며 25∼35세 계층이 30%로 전체 이주자의 75%가 노동력이 가장 왕성한 계층인 것으로 나타났다.
구룬트만 수석연구원은 『패전 이후 청·장년들이 전선에서 사망,노인들과 부녀자들이 폐허속에서 쓸만한 벽돌을 가려냈듯이 동독이 소멸한 뒤 노인과 부인들만이 동부지역에 남아 사회주의 잔해를 청소해야 할 형편』이라며 『갈탄과 쓰레기더미가 수북히 쌓인 오데르나이세강을 띠로 해서 미래와 젊은이들이 없는 위험지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구동독 청·장년들이 고향을 등지고 가족과 함께 이주결심을 하는 주된 이유는 물론 안정된 취업과 2∼3배 되는 수입을 바라기 때문이다.
라이프치히시에 살던 볼프강 그리제씨(44)부부의 경우를 보자. 그리제씨는 지난해 4월 전기기사로 근무하던회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실직한 데다 부인 모니카(43)마저 슈퍼마켓 점원을 그만두게 돼 당장 생계를 위협받는 처지가 됐다.
그리제씨는 신설 화물자동차 회사의 운전사로 취직했으나 이 회사마저 2개월 후 문을 닫게 되자 두 딸과 함께 전가족이 통일 후 베를린으로 이주,운송회사에 취직했다.
그의 보수는 동부에 있을 때에 비해 2배이며 회사에서 월세 1천6백마르크짜리 셋집을 마련해줘 행복한 가정을 다시 꾸려나갈 수 있게 됐다.
그리제씨는 『실직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새 일자리를 찾아 서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며 자신의 결단이 현명했음을 강조했다.
최근 주민들의 감소현상이 일자 구동독 5개주 주지사들은 이같은 현상을 막기 위해 물가안정과 동서기업간의 임금격차조정,동쪽기업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을 건의하고 있으나 당분간 구동독 주민들의 이주현상이 멈출 조짐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