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한 ‘에바’의 전설, 그 2막 시작된다
전설인 동시에 현재진행형.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이하 ‘에바’) 얘기다. 1995년 10월 TV도쿄에서 처음 방송(TV판 제목은 ‘신세기 에반게리온’)된 이후 수많은 추종자 혹은 ‘폐인’을 양산했다. 현실에 등을 돌리고 작품의 세계관으로 도피하는 이들이 늘면서 사회문제로 불거졌다. 공상과학(SF) 장르의 거장 오시이 마모루(공각기동대), 오토모 가쓰히로(아키라)는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명사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다. ‘에바’ 시리즈의 신작 ‘에반게리온: Q’가 오는 25일 개봉한다. 지난해 11월 먼저 공개된 일본을 제외하면 최초 개봉이다. 일본에선 시리즈 최다인 53억엔(약 607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지난해 개봉작 중 4위에 해당한다.
1995~96년 TV에서 방송된 26부작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극장판 ‘데스 앤드 리버스’(TV판 회상과 완결편 예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TV판 25~26회 리메이크)의 뼈대는 동일하다. 2000년 남극에서 거대한 재앙이 일어난다. 수십억년 전 거대 운석과의 충돌로 지구에 생명체가 탄생한 ‘퍼스트 임팩트’에 이은 ‘세컨드 임팩트’다. 남극은 사라지고, 해수면은 상승한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지구인들은 ‘네르프’란 비밀조직을 만들고, 인간형 전투병기 에반게리온을 양산해 ‘사도’로 불리는 거대 괴수들과 맞선다.
SF 장르의 형식을 빌렸지만 ‘에바’는 소통에 서툰 인간(아이와 어른)의 성장 드라마로도 읽힌다. 전투병기 에바에 올라 사도와 맞서는 14세 소년·소녀(신지·레이·아스카) 파일럿들은 하나같이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산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은둔형 외톨이거나 지나친 인정 욕구로 현시욕이 강하다. 어른들도 상처와 결점으로 뭉쳐진 건 마찬가지다. 가족은 물론 사회와의 관계에도 서툴다. 인류를 멸종시킨 뒤 하나의 완전한 생명체로 진화시킨다는 ‘인류보완계획’을 입안할 만큼 극단적이다. 영웅과는 거리가 먼 흠결 있는 캐릭터들은 팬들의 연민과 애정을 끌어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상상력의 한계를 무너뜨린 방대한 스케일임에도 황당무계하지 않은 까닭은 탄탄한 세계관과 스토리텔링 덕이다. ‘롱기누스의 창’ ‘릴리스’ ‘세피로트의 나무’ 등 중요 모티브들은 종교학(성서와 유대 신비주의)적 지식까지 끌어들인다. 명확한 설명 대신 여백을 남긴 연출 기법 때문에 팬들은 수수께끼를 풀듯 저마다 이론을 주장했다. 영화학자, 사회학자까지 달라붙어 해독서를 펴냈다. 일본 사회의 ‘에바 신드롬’은 1990년대 비디오테이프에 담겨 한국에도 전파됐다.
90년대의 추억 속에 머물던 ‘에바’가 부활한 2007년. ‘신극장판’이란 수식어를 달고 ‘에반게리온: 서(序)’(2007)와 ‘에반게리온: 파(破)’(2009)가 개봉했다. “‘에바’를 모르는 사람도 즐기기 쉽게 재미를 더했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를 목표로 한다”는 게 골수팬의 반발에도 ‘신극장판’을 만든 감독의 설명이다. TV판 재탕이던 ‘서’와 달리 ‘파’부터 감독은 새 이야기를 조금씩 펼쳐 보였다. ‘에반게리온: Q’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유행하는 ‘리부트’에 가깝다. 올해 공개 예정인 신극장판 4부작의 최종편을 앞두고 새판 짜기에 나선 셈이다. 과거의 TV판, 옛 극장판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Q’는 ‘파’ 이후 14년 뒤 신지가 동면에서 깨어나면서 시작한다. 사도와의 전쟁은 끝났다. 대신 네르프와 반(反)네르프 단체 뷔레가 싸운다. 신지의 아버지 겐도는 여전히 네르프의 총책임자인 반면 신지의 멘토 미사토와 네르프의 기술책임자이던 리쓰코는 뷔레에 몸담았다. 14년 전 자신의 행동으로 대재앙, ‘니어 서드임팩트’가 일어난 걸 알게 된 신지는 상황을 되돌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운명은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아이들을 맞서 싸우게 한다.
‘Q’의 서사와 기술적 완성도 모두 흠잡을 구석은 없다. 물론 본래의 나약한 모습으로 돌아간 신지가 실망스럽다. 그래도 ‘에바’ 팬의 갈증을 풀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다만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말과 달리 새 관객을 끌어들이는 건 무리다. TV판과 옛 극장판, 신극장판까지 복습하고 극장에 가도 진도를 따라잡기가 만만치 않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