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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12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12

    서울신문은 일제 침략 당시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겸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고종의 밀사’로 잘 알려진 호머 허버트(1863~1949), 노골적 친일 행보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된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1851-1908),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대거 등장합니다. 작가가 실제로 조선에 와서 베델 등을 취재해 쓴 이 소설에는 고종의 연해주 망명 시도 등 최근에야 알려진 극비 내용도 담겨 있어 관심을 모읍니다. 서울신문은 이 소설 가운데 하나인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12월 출간·원제 The cat and the king)를 번역해 연재 형태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12회>소녀는 키 작은 일본인(훗날 2대 조선총독이 되는 하기와라 슈이치)의 말을 완전히 가로막았다. “제가 서울에 도착한 첫날 밤에 스파이를 보내 제 트렁크를 뒤졌잖아요?” 질문을 던지는 소녀의 목소리에 약간의 분노와 떨림이 있었다. 자신의 훼손된 존엄성을 보상하라는 요구가 담겨 있었다. “나는 몰랐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입니다......” 하기와라는 놀란 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아니면 이 조선에게 누가 저에게 사람을 보내겠어요. 사실대로 말씀하세요. 하기와라씨!” “아...그건 정말 실수였습니다. 미안합니다! 내가 당신을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이 혹시라도 무슨 음모를 꾸밀지 몰라서 무서웠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베델(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델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람을 보내 조사해보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아주 바보짓이었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사실을 털어놓게 돼 지금 제 마음이 무척 홀가분합니다.” 하기와라는 거의 절망적으로 소녀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집우재(경복궁에 있던 왕실 도서관)에 있던 나는 소녀의 혼을 담은 연기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사과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게요.” 그녀의 목소리가 실크처럼 부드러워졌다. “이렇게 무릎을 꿇고 당신에게 사과를 구합니다. 아름다운 여인이여...” 하기와라의 눈에 이슬방울이 맺혔다. 그제서야 ‘때가 됐다’는 듯 그녀가 마음속에서 하려던 말을 꺼냈다.“하기와라씨, 그러면 좀 더 이야기를 드릴게요. 아시다시피 저는 지난 며칠간 황제 폐하(고종)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분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온 정신을 쏟고 있어요. 하기와라씨는 그 시간에 우리와 같이 있고 싶다고 고집하시고요. 하지만 당신도 아시겠지만 폐하는 당신을 매우 두려워하십니다. 이 때문에 그분이 초상화 작업에 몰입하시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제대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 저에게도 몰입을 힘들게 만들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당신이 나를 감시하려고, 최소한 내가 저 불쌍한 노인(고종)과 무슨 계략이라도 세울까봐 거기에 계셨던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달콤함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하기와라는 그 말에 안심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녀의 언어는 주저함없이 겸손한 어조로 바뀌었다. “하지만 하기와라 씨. 이제부터는 폐하와 제가 단 둘이서만 초상화를 그릴 수 있게 약속해 주십시오. 그러면......“ “음....그러면요?” “그렇게 해 주시면 하기와라씨와 단 둘이서만 있는 시간을 만들어 볼게요.” 소녀는 짧게 웃으며 유혹하듯 말했다.다시 그녀의 스커트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렸다. 나(빌리)는 발코니 가장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길게 늘어진 소나무 줄기를 통과한 햇빛이 반사되어 나부끼는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를 보았다. 그녀의 어깨가 부드러운 리듬을 타며 움직이는 것도 보았다. 키작은 하기와라가 그녀 옆을 성급히 따라갔다. 그녀는 편안한 보폭으로 오래된 아치형 다리를 건너 궁궐(경운궁 금천교로 추정)로 이어지는 길로 나갔다. 마침내 그녀가 자칼(하기와라)의 턱에 재갈이 물린 것이다. 13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11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11

    서울신문은 일제 침략 당시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겸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고종의 밀사’로 잘 알려진 호머 허버트(1863~1949), 노골적 친일 행보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된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1851-1908),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대거 등장합니다. 작가가 실제로 조선에 와서 베델 등을 취재해 쓴 이 소설에는 고종의 연해주 망명 시도 등 최근에야 알려진 극비 내용도 담겨 관심을 모읍니다. 서울신문은 이 소설 가운데 하나인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12월 출간, 원제 : The cat and the king, 부제 : Billy and Bethell)를 번역해 연재 형태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11회>   나는 어둠을 뚫고 상하이에 도착했을 전보 메시지를 떠올렸다. 소녀가 보낸 3개의 단어(“초상화 성공. 만세!”)가 저쪽에 전달됐을 것이고 이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직접 보고 싶어졌다. 상하이에 있는 러시아 외교의 달인(러시아 극동총독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로 추정)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이 낡은 나라(청나라)에 몰래 묻어둔 보트를 출발시키라는 요청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옌타이의 어느 항구로 또 한 번 전보를 보내 발해만에 정박해 있던 배에게 돛을 올려 빠르고 비밀스럽게 서울로 가 조선의 황제를 데려오라고 명령할 것이다. ‘국제정치’라는 이 민첩하고 정교한 기계를 제대로 움직이고자 ‘외교’라는 이름의 엔진 속의 톱니 바퀴와 피스톤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나는 이 차가운 밤하늘 속 별빛을 보며 두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나의 머리는 저 멀리 30㎞쯤 떨어진 어둠의 도시(서울)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빛나는 금발 머리와 보랏빛 눈을 가진 한 여성이 약탈자(일제)의 계략에 맞서 외롭게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제물포에서 첫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돌아왔다. 세관 문제에 대해 일본 탁지부 고문(메가다 다네타로)과 회의를 하려고 궁으로 갔다. 연로한 조선 황제(고종)의 고문관인 메가타 역시 국제정치라는 기계를 돌리고자 톱니의 나사를 조이는 일에 가담하고 있었다. 회의 시작을 기다리며 나는 내가 조선에서 가장 좋아하는 경복궁 뜰을 걸었다. 지금은 폐허가 되다시피 한 근정전과 법궁을 보며 이 궁의 모습이 지금의 조선 왕조를 상징한다고 여겼다. 이 왕궁이 어떤 이유로 이 찬란한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리게 됐을까를 곰곰 생각해봤다.그 때였다. 시베리아 전나무 그늘에 놓인 왕실 도서관(집옥재) 발코니에 앉아 있었는데,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였다. 그리고 명쾌하고 리듬과 운율이 잘 맞아들어가는 그녀의 말솜씨에 곁들여 무겁고 둔탁한 악센트를 구사하는 남성의 목소리도 들렸다. 하기와라(훗날 2대 조선총독이 되는 하기와라 슈이치)였다. 그들은 내 쪽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있던 도서관 발코니 바로 아래 멈춰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졸지에 남의 말을 엿듣는 사람이 돼 버렸다. “아니요. 하기와라님” 소녀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께서 저에게 그렇게 세심한 관심을 써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저는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당신이 서울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다 들었으니까요.” ”잠깐만요. 마담“ 하기와라가 성급히 소녀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뭔가 이상하고 음흉한 음색이 느껴졌다. ”잠깐만요...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나는 통...모르겠습니다.“ ”아...네...그러시겠죠.“ 소녀가 일부러 상심한 척 그를 애태우려는 말투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떤 여자라도 당신이 자신을 매력적으로 느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죠. 여자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가 관심이 대상이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여자들은 그런 생각을 하며 즐거워하죠.” 소녀의 목소리에는 부드러우면서도 달콤한 기운이 있었다.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있는 하기와라의 심장 박동수를 높이려는 계산이 담겨 있었다. “하기와라님, 당신도 늘 내 뒤를 따라 다녔고 단 한가지 이유로 저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잖아요...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어요. 이 사실을 부정하실 수 없으실 거에요.”“그게...그 이유는...그 이유는 당신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나는...나는 당신을...” 하기와라가 부끄러운 듯 얼굴이 새빨개져서 말했다. “그만하세요!” 짧은 말 속에 어떤 명령과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소녀의 눈에서 불꽃이 번득였다. “하기와라씨, 당신은 내가 스파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바른대로 말씀하세요!” 이 일본인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당황해서인지 목구멍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울먹이고 있었다. “절대로...절대로...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어요...어떻게 그런 일이...말도 안됩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12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생선은 밀폐용기에, 과일은 에코백에… ‘노(NO)플라스틱’ 추석 장보기

    생선은 밀폐용기에, 과일은 에코백에… ‘노(NO)플라스틱’ 추석 장보기

    “사장님, 소고기 국거리용 600g 유리통에 담아주세요.” “여기에 담아달라고요? 포장된 거 그냥 가져가시지.” 추석을 하루 앞둔 23일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의 한 정육점에서 집에서 가져온 밀폐 용기를 내밀며 고기 구매를 시도했다. 정육점 점원은 약간 어색해하면서도 고기를 썰어 담아줬다. 비닐봉지를 사용하지 않고 전통시장에서 장을 볼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며 시장으로 들어섰다. 견과류 가게에 들러 주전부리용 아몬드를 골랐다. 가게 주인 심현이씨는 됫박에 든 아몬드를 천 가방으로 쏟아넣고 손으로 덤을 얹었다. 아몬드와 함께 지역 화폐인 ‘100모아’도 건넸다. 앞으로 두 달 동안 장바구니를 가져오면 ‘100모아’씩 준다고 했다. 천 가방 하나로 비닐봉지 2장을 아끼고 100원 정도 가치의 돈도 받은 것이다. 심씨는 장바구니에 담아주는 게 익숙한 듯 “외국인 단골 중에도 에코백 가져오는 사람이 있다”며 웃었다.이런 식으로 장을 보면 비닐봉지를 몇 장까지 아낄 수 있을까. 점포 87개를 갖춘 망원시장은 하루 평균 1만여 명이 방문하는 대형시장이다. 한 명이 비닐봉지 한 장만 써도 1만 장이다. 이 시장 단골이던 환경운동가 고금숙, 배민지씨는 시장에서 이 비닐봉지를 어떻게 하면 덜 쓸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래서 껍데기 없이 알맹이만 산다는 의미로 프로젝트 ‘알맹’을 구상했다. 지난 18일부터는 가져온 장바구니를 사용하거나 대여 후 반납하는 고객에게 마포 지역 화폐인 ‘모아’를 준다. 장바구니 사용을 독려하는 차원이다. 주민 30명이 ‘서포터즈’로 힘을 보탰고 반찬, 생선, 분식 등 가게 16곳도 참여했다. 몇 걸음 더 걸어가자 ‘장바구니 빌려 드려요’라는 팻말이 붙은 과일가게가 나왔다. 캠페인에 참여하는 곳이었다. 매대에는 투명 플라스틱 케이스에 포장된 선물용 과일이 쌓여 있었다. 김낙주(59)씨는 포장되지 않은 사과와 배를 하나씩 담아주며 “일회용품을 아예 안 쓰면 오히려 상인들의 손이 더 바빠진다”라면서도 “그래도 덜 쓰면 좋잖아요. 장바구니에 복숭아나 포도와 같이 단단하지 않은 과일도 잘 담으면 귀가할 때까지 물러지거나 멍이 들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과일보다 물기가 많은 생선은 어떨까. 생선가게에서 동태와 조기를 골랐더니 가게 주인 이사한(51)씨는 생선을 손질해 종이에 쌌다. 그는 “옛날엔 다 이렇게 했어요. 예전으로 돌아가는 게 환경에는 좋죠”라고 말했다. 이씨는 “비닐을 아예 안 쓸 수는 없어도 덜 쓰자는 생각으로 캠페인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생선가게 한 편에 쌓인 큰 스티로폼 박스는 도매상으로 다시 반납되고 있었다. 채소 상점에는 랩 등으로 포장된 다채로운 채소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장바구니 대여에 참여한 사장 김은진씨는 흙당근을 랩으로 싸고 있었다. 김씨는 “손님 중에 흙을 지저분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고, 농산물도 상품이니 포장은 하지만 사실 흙이 더럽진 않아요. 그냥 흙이잖아요”라고 말했다. 김씨는 “평소 일회용품 줄이기에 관심이 많았다”면서 “스티로폼을 종이로 바꾸는 방안을 상인회도 논의 중”이라고 전했다.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은 가게들은 비닐봉지 사용을 줄이자는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이행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한 정육점 점원은 “비닐도 돈 주고 사는 것이라 안 쓰면 좋지만 식품에 물기가 많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손님이 일일이 밀폐 용기를 가져오면 비닐봉지를 안 쓸 수 있다”고 했다. 다른 한 점포 주인은 “이미 익숙해진 편리함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프로젝트를 기획한 배민지씨도 “상인들이 바쁘기도 하고 물품의 특성상 참여하지 못한 경우도 많다”고 했다. 배씨는 상인회와 논의해 캠페인이 끝나도 시장에서 일회용품을 줄여나가는 노력을 계속 이을 계획이다. 무엇보다 소비자들의 노력이 동반돼야 한다. 장을 보러 나온 주부 윤모(72)씨는 주머니에서 작은 장바구니를 꺼내며 “이렇게 챙겨다녀야 한다. 소비자들이 먼저 노력해야지”라고 말했다. 이모(60)씨는 “그래도 생선 같은 것은 비닐에 싸야 한다”면서 “비닐 사용에 융통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장을 볼 때 늘 다회용기를 이용한다는 박민례(36)씨는 아이스팩을 꺼내 보였다. 박씨는 “신선식품은 유리그릇에 담아 아이스팩과 함께 둔다”면서 “어차피 냉장고 넣을 때 용기에 옮겨야 하니 덜 번거롭다”고 말했다. 대형마트와 슈퍼마켓에서 무상 비닐봉지를 없애는 가운데 전통시장에서도 비닐봉지 없는 장보기가 가능해질까. 망원시장이 닻을 올린 ‘노(NO)플라스틱’ 실험이 어떤 나비효과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박지원 “서울 답방 약속한 김정은 ‘태극기부대 반대’도 언급”

    박지원 “서울 답방 약속한 김정은 ‘태극기부대 반대’도 언급”

    평양 남북정상회담에 특별수행원으로 방북했던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21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에 대해 “김 위원장이 ‘태극기부대 반대하는 것 조금 있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박 의원은 이날 라디오에 잇따라 출연해서 “(김 위원장이) ‘많은 사람이 답방을 가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가겠다. 태극기부대 반대하는 것 조금 있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라고 하더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김 위원장이 식사를 하면서 ‘반드시 가겠다’고 했기 때문에 사석에서도 약속했다고 평가한다”고 밝혔다. 또 박 의원은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전에 출산했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북측 중요한 사람이 ‘(김 제1부부장이) 4·27 판문점회담 바로 직전에 해산을 했다’고 하더라”라고 전했다. 또 김 제1부부장에 대해 “백두혈통이기 때문에 능력에 비해서 출세를 못하고 있다”며 “능력에 비해서 출세를 많이 한 박근혜(전 대통령)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기도 했다.그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능라도 연설을 꼽았다. 박 의원은 “문 대통령이 능라도 5·1 체육관에서 15만 군중 앞에서 연설하며 ‘한반도의 비핵화를 완전히 합의했다’고 얘기하니 (평양 시민들이) 약간 주춤하더라”라고 설명했다. 이어 “순간적으로 박수가 우레같이 쏟아지고 함성이 나오는 것을 보면 비핵화에 대해 북한 주민들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찬동하고 있다는 게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여성 운동가한테 조심해야 하는데 북한을 소개하는 것이니까”라고 전제한 뒤 평양의 변화상에 대한 소감을 말했다. 그는 “2000년 6·15 때는 여성들의 화장이 없어 자연미가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까 아주 화장으로 떡칠을 했더라. 아주 화장을 진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돈 때문에 버려진 침팬지, 인간의 자격을 묻다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돈 때문에 버려진 침팬지, 인간의 자격을 묻다

    문재인 대통령이 방북길에 오른 지난 18일. 포털사이트 인기 검색어에 ‘문재인’ ‘김정은’ 등이 1, 2위에 올라도 시원찮을 마당에 ‘퓨마’가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당당히 1위를 차지해 화제였다. 대전의 한 동물원에서 퓨마 한 마리가 탈출했고 4시간 만에 사살됐다. 뽀롱이라 불리던 이 퓨마는 사람을 해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사살됐는데, 적절한 대응인가를 두고 설왕설래 말이 많다. 이 동물원은 지난해에도 북극곰 한 마리가 췌장암으로 폐사하는 등 동물원이라고 하기에는 열악한 곳이었다. 제대로 건사도 못 하면서 왜 동물들을 왜 가두어 두는 걸까, 동물원 자체에 대한 갑론을박도 여전하다. 동물 학대는 동물원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엘리자베스 헤스의 ‘님 침스키’는 인간이 지적 만족, 혹은 실험을 위해 마음대로 유인원들을 학대한 것을 고발한 책이다. 침팬지 님은 “인간화된 침팬지에게 소통 기술을 가르칠 수 있으면 인간이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이 밝혀지리라는 희망”을 안고 시작된 실험, 이른바 ‘프로젝트 님’의 실험 도구였다. 1973년 11월 19일 미국 영장류연구소에서 태어난 님은 엄마 캐럴린의 손에서 자라지 못하고, 출생 10일 만에 뉴욕의 한 가정으로 입양됐다. 실험 도구였으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님은 대리모의 끔찍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님도 그를 곧잘 따랐다. 님은 사람의 옷을 입고,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으며, 어려운 배변 훈련을 거쳐 (가끔) 화장실을 이용하기도 했다. 낚시를 즐겼고, 가족을 위해 설거지를 하기도 했다. 생후 2개월부터 배운 수어(수화) 덕에 주변 사람들에게도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물론 야성을 이기지 못해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 때도 많았다. 문제는 돈이었다. 연구비가 고갈되자 영장류연구소는 실험을 중단했고, 님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사실 영장류연구소는 님 외에도 여러 침팬지를 사람들에게 입양했었다. 하지만 님처럼 오래 버틴 침팬지는 없었다. 무려 4년 가까운 시간 동안 침팬지 님과 인간 가족은 행복했다. 님 외의 침팬지들은 대개 폭력성 등의 이유로 파양됐고, 님보다 먼저 사육장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님은 이 시설 저 시설로 떠돌아다녀야만 했다. 그중에는 ‘불길한 의학 연구 실험실’도 있었다. 결국에는 님을 포함한 침팬지들이 영장류 생체실험을 하는 한 연구소에 팔렸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님을 포함한 일부 침팬지가 동물보호 운동가들에게 구출돼 동물보호소로 옮겨졌다.1973년에 태어난 님은 2000년에 죽음을 맞이했다. 놀라지 마시라. 보통의 침팬지는 50년을 산다. 님은 고작 스물일곱 해를 살았으니, 살아생전 님이 받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님은 사람 옷을 입었고, 같은 음식을 먹었으며, 설거지를 할 줄 알았으며, 수어를 배웠다. 그렇게 사람과 함께 평생 살았다고 인간이 됐을까. 님은 단지 인간의 편의와 실험정신(?)에 희생된 한 마리 가여운 침팬지였다. 저자는 묻는다.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과 더불어 세계를 나누고 있는 뭇 생명에게 인간은 인간답게 행동하고 있는가. 부끄러움에 책장을 덮을 수 없는 책 ‘님 침스키’의 일독을 권한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베델 생가 英서 첫 확인 성과… 반세기 지나 ‘영원한 한국인’ 부활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베델 생가 英서 첫 확인 성과… 반세기 지나 ‘영원한 한국인’ 부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의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1909년 세상을 떠난 뒤 일제의 왜곡과 날조 등으로 한국인의 기억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반세기가 지나자 우리에게 남은 것은 베델이라는 이름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부 수립 뒤 국가 재정비에 정신을 쏟느라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를 챙기지 못한 우리 자신의 책임이 컸다. 대한민국이 베델을 다시 찾은 건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독립된 정부가 세워진 지 20년이 지난 뒤였다.●베델 며느리가 손주 데리고 한국대사관 찾아 프랑스에서 일어난 ‘68혁명’(학생과 근로자가 중심이 된 사회변혁운동)이 들불처럼 유럽 전역에 번지던 1968년 7월 15일. 영국의 ‘더타임스’ 16면에 조그마한 안내 광고 하나가 실렸다. 확대경을 대지 않으면 글자를 읽을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1905년 서울에서 신문을 창간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이라는 분께 훈장을 드리려고 합니다. 연고자는 런던의 한국대사관으로 연락 바랍니다.” 한국과 영국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진 ‘대영(大英) 남자’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베델이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다 돼서였다. 하루 종일 신문만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광고의 존재조차 파악하기 힘들 만큼 작게 게재돼 아무 반향도 없었다. 사실 우리 정부는 정말로 그의 후손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영국 최고 권위지 가운데 한 곳에 광고를 내 독립운동가를 찾으려 나름 노력했다는 흔적을 남기려는 의도가 더 컸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반응이 나왔다. 신문 광고의 크기가 당시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력을 반영하는 것 같아 측은해 보였던 것일까. 더타임스가 이 광고를 근거로 이튿날 ‘한국이 한 영국인에게 감사를 표하려 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쓴 것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의 대통령 훈장과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과거 한국의 국민 영웅이던 영국인 후손을 기다린다. 1905년 신문을 창간해 일본의 한국 지배에 저항하다가 1907~1909년 사이에 추방당했다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것이 없다.”더타임스 기사는 오류가 많았다. 그때까지 우리가 아는 베델에 대한 정보가 이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신문에 그의 이야기가 실리자 후손에게서 연락이 왔다. 베델의 며느리인 도러시 메리 베델(당시 52세·2002년 작고) 여사가 딸 수전 제인(당시 12세)과 아들 토머스 오언(당시 9세)을 데리고 한국대사관을 찾은 것이다. 베델 사후 반세기가 넘어 그의 가족과 한국이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베델, 전 재산 한국에 쏟아 가족들 곤궁한 삶 도러시의 입을 통해 들은 베델 가족의 이야기는 한 편의 가슴 아픈 소설 같았다. 베델의 부인 메리 모드 게일(1873~1965)은 남편 사망 뒤 아들 허버트 오언 친키 베델(1901~1964)을 데리고 결혼 전 살았던 영국 런던으로 돌아갔다. 베델이 일본에서 사업을 하며 모은 재산 대부분을 대한매일신보 발간에 쏟아부어 영국에서의 삶은 힘들고 곤궁했다. 도러시가 한국대사관을 찾아왔을 때도 이들은 정부 보조금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었다. 영국의 이웃들은 자신과 가족을 희생해 가며 아무 이해관계도 없던 한국을 도운 베델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메리 여사는 그런 남편을 자랑스러워하며 홀로 아이를 키웠다.한국 정부가 베델의 연고자를 찾았을 때는 그와 조선에 함께 살던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1964년 아들 허버트가 63세에 사망했고 이듬해에는 베델의 부인 메리 여사도 92세로 숨을 거뒀다. 베델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62)은 “할아버지(베델)는 아버지(허버트)가 9살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 역시 내가 10살도 되기 전에 떠났다. 할머니(메리 여사) 역시 말년에 치매 증세를 보여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현재 베델의 후손들은 우리 정부의 초청으로 꾸준히 한국을 방문해 그를 기린다. 베델이 “영원히 살아남게 해 한국 동포를 구해 달라”고 당부한 신보는 어떻게 됐을까. 베델의 비서였던 영국인 알프레드 매넘이 신보사의 2대 사장이 됐지만 1910년 영국 정부의 권유를 받아들여 일본에 신보사를 팔고 떠났다. 이후 신보는 ‘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했다. 조선인들의 신뢰도 사라졌다. 매일신보는 해방 뒤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다가 1960년 4·19 혁명 당시 시위대가 사옥과 시설을 파괴해 희귀 자료 대부분을 잃어버리기도 했다.●베델 다시 살려내는 데 정진석 교수 역할 커 대한민국 역사에서 사라질 뻔한 베델의 발자취를 찾아내 ‘영원한 한국인’으로 부활시킨 이는 정진석(79) 한국외국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였다. 1976년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 영인 작업에 참여하면서 그의 삶에 매료된 정 교수는 영국 런던정경대(LSE)에 수학하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베델 관련 자료를 하나하나 찾아냈다. 베델이 태어난 영국 브리스톨과 1888~1904년 무역업을 했던 일본 고베 등을 돌며 베델 기록 대부분을 바로잡았다. 지금 우리가 교과서 등을 통해 배우는 베델의 생애는 그가 일생을 바쳐 찾아낸 것들이다. 서울신문 역시 ‘조선을 사랑한 英 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기획을 통해 몇 가지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 우선 언론학계의 주요 과제였던 베델의 영국 브리스톨 생가를 확인했다. 그간 베델 생가를 찾으려는 노력은 관훈클럽 창립자인 최병우(1924~1958)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 등에 의해 1950년대부터 수차례 시도됐지만 모두 실패했다. 정 교수는 베델의 출생지 주소(Egerton villa, Egerton Road, Horfield)를 구했지만 지금의 영국 주소체계와 달라 생가를 특정하지 못했다. 국가보훈처는 서울신문이 찾아낸 베델 생가(현주소 54 Egerton Road, Bishopston, Bristol)를 검증한 뒤 현충시설로 지정해 역사적 장소로 활용할 계획이다. 베델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던 베델 관련 자료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 전시하기로 했다. 여기에 서울신문은 베델의 가족관계 일부를 새로 발굴해 그가 왜 일본을 통해 조선에 오게 됐는지를 좀더 명확히 밝혀냈다. 해외 기사 데이터베이스(DB)를 통해 베델이 통신원으로 조선에 와서 쓴 첫 번째 기사(전통놀이 석전)도 소개했다. 이밖에도 베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910년대 미국 작가의 역사소설 두 편(황제 납치 프로젝트·황제의 옥새)을 찾아냈다. 베델의 열정에 반해 러시아 기밀문서 등을 찾아내 독학으로 연구하는 외국인을 만났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베델의 생애를 소개하며 그의 이름을 알리는 해외 네티즌도 확인했다. 베델의 발자취 찾기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런던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최정숙여자고등학교를 아십니까?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최정숙여자고등학교를 아십니까?

    자신을 교육시킨 프랑스에 대항하여 알제리 해방을 위해 싸웠던 프란츠 파농의 걸작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 있다. 더럽고, 지능이 낮고, 동물적이고, 야만적이라는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요하던 식민지 프랑스에 맞서 싸운 아프리카 해방운동에 관한 기록이다. 이 책을 처음 번역했던 김남주 시인은 제목을 ‘자기 땅에서 유배된 자들’이라고 고쳐 썼는데 그 울림이 컸다.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들 중에는 식민지 종주국과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거나, 정치적 독립은 했으나 경제적 문화적 종속에 처해 있는 나라들이 많다. 아프리카가 그렇다. 특히 아프리카 여성은 이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인종적 열등과 핍박에 시달리고 있다. 아프리카 여성이야말로 여전히 자기 땅에서 유배되고 있는 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룬디 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있다. 우간다, 르완다, 콩고, 탄자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아프리카 심장’이라 불린다. 60여년간 독일과 벨기에의 식민통치를 받았으며 긴 내전 끝에 비로소 민주정치를 회복했지만 아프리카 188개국 중 인간개발지수(HDI)가 184위인 최빈국으로 청소년 중 10% 정도밖에는 중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곳에 제주도 민간단체가 최초의 국립여자고등학교로 ‘최정숙여자고등학교’를 건립하여 2018년 9월 10일 개교를 했다. 여고를 세운 이유는 자기 땅에서 유배되고 있는 여성들을 교육의 힘으로 도울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육의 힘을 빌려 여성들을 도우려 했던 사람이 바로 최정숙(1902~1977) 선생이다. 최 선생은 2016년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 5명의 ‘20세기 한국의 모범적 평신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할 만큼 독실한 신앙인이다. 3·1독립운동가이자 의사로서 신성여중·고 무보수 교장과 제주도 초대교육감을 지냈던 분이다. 그분의 ‘사랑의 실천’을 계승, 발전시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문제의식을 가진 신성여고 출신 6명이 의기투합하여 2014년 6월 ‘샛별드리’ 모임을 결성하여 빈민국에 여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들은 최 선생이 하셨던 것처럼 어렵고 힘든 여성들을 대상으로 교육운동을 펼쳐 나가기로 했던 것이다.부룬디를 선택한 이유는 전통적으로 남아 선호 의식이 팽배하여 여성들은 가사노동이나 조혼, 강제임신 등으로 교육 기회가 단절되어 있는 상태라서 빈곤의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최정숙여고 건립을 통해 여성 교육 기회를 확대하고 여성 인력 배출의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에 부룬디 국토환경부는 2만평 규모의 교육 부지를 제공했고, 교육부와 여성부는 건축자재 일부를 지원했다. 준공식에는 제주도에서 회원 19명이 참석을 했고, 부룬디에서는 국회의장 내외와 교육부장관을 위시, 수백여명의 마을사람들이 참석하여 그야말로 감동의 잔치판을 벌였다.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공적개발원조(ODA)사업으로 교육 기자재를 지원해줌으로써 의미를 더욱 크게 해주었다, 현장을 보고 온 회원들마다 가장 시급한 것이 운송 수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 소식을 접한 신성여중고 학생들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와 퇴직교사들이 직접 나서서 중고버스 구입 비용 1000만원을 최근에 모아주기도 했다. 100명의 신입생들은 학교기숙사 생활을 하며 앞으로 기술교육을 받을 예정이다. 바라건대 한국국제협력단(KOICA) 등에서 많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땅에서 유배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후원자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이야말로 바로 세상을 바꿔 나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10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10

    서울신문은 일제 침략 당시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고종의 밀사’로 잘 알려진 호머 허버트(1863~1949), 노골적 친일 행보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된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1851-1908),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모두 등장합니다. 최근에야 국내외에 알려진 고종의 연해주 망명 시도 등 극비 내용도 담겨 있어 학계에 관심을 모읍니다. 서울신문은 이 소설 가운데 하나인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12월 출간, 원제 : The cat and the king, 부제 : Billy and Bethell)를 번역해 연재 형태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10회>그녀가 황제 납치 프로젝트를 설명해주자 나는 크게 웃었다. 사실 까다롭고 연로한 황제(고종)가 해외 탈출에 동의한다고 해도 과연 베델과 내가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해서였다. “그런데...상하이에 있는 귀족분(러시아 극동총독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로 추정)과는 정말로 어떤 관계죠?” 내가 짓궂게 물었다. “아...그런 얘기는 하지 않으려구요.” 소녀의 눈에서 유쾌함이 사라지고 곧바로 심각함이 묻어났다. 그녀가 진지하게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 친구, 제 말 잘 들으세요.” 그녀가 불편한 감정을 억누른 채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과 베델,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이 게임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제서야 나는 우리의 상대(일본)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우리 세 명은 이 귀신같은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대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 우리가 없어진다 해도 이 세상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테고... 나는 소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눈에서 뭔가 다른 감정을 읽어보려 애썼다. 이윽고 소녀가 다시 말을 꺼냈다. “나는 당신이 이 일에 연루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노력할게요. 만약 당신이 판사 의자 뒤에 사형 집행기계가 숨어있는 비밀 법정에 선다면 과연 자신을 제대로 변호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도 당신은 이번 일의 전부를 알수는 없을 거에요. 당신을 위해서라도 그 이상은 알려고 하지 말고 이 정도로 만족했으면 해요...이건 친구이기에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에요.” 나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게 가장 어울리는 대답이자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기도 했다. 그녀는 내 키스를 받은 뒤 곧장 미국 공사관저로 향했다.그 뒤로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그녀가 말한대로 민영환 대감의 전갈을 기다렸다.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소녀에게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나와 베델은 매일 밤 루이의 호텔(서대문 애스터하우스 호텔) 바에 머물거나 오래된 당구대에서 시간을 보냈다. 쇠사슬에 묶여있는 것 같은 무력감에 짓눌렸다. 상하이에서 온 여성은 대단한 용기를 갖고 일본의 구렁텅이 속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조선의 운명을 위해 자신의 열정을 모두 쏟아내던 내 친구 베델은 화산으로 생겨난 옆나라(일본)가 빠르게 조선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화를 냈다. 나는 소녀가 제안한 계획이 잘 실행되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답답하고 또 불안했다. 그래도 조선황제 납치 계획을 반드시 성사시켜야겠다는 열망만큼은 누구보다도 환하게 불타고 있었다. 3일이 지났다. 마침내 궁에서 전갈이 왔다. 민영환 대감이 베델의 인쇄소(대한매일신보사 사옥)로 급하게 사람을 보냈다. 그는 인쇄소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와 대한매일신보 최고책임자 양기탁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속삭였다. 그는 베델과 눈이 마주치자 호흡을 가다듬고 능숙한 영어로 크게 외쳤다. “그녀가 전신을 보내라고 합니다. 최대한 빨리요!” 나는 곧바로 서울에서 30㎞쯤(번역자주:원문에는 sixty miles로 돼 있으나 아마도 sixteen miles의 오기로 보입니다.) 떨어진 제물포로 가야했다. 마지막 기차를 타려고 죽은 듯 조용한 밤 시가지를 지나 달리기 기록을 깨려는 선수처럼 역(지금의 서대문역 터)으로 몰아치듯 인력거를 몰았다. 나를 실어나른 인력거 소년은 그 뒤 3일간 아무 일도 못하고 앓아 누웠을 것이다.기차(경인철도)를 타고 2시간 가까이 달렸다. 한밤이 돼서야 제물포에 도착했다. 전신 전화국은 세관(인천해관)과 같은 건물에 있었다. 대한제국 세관에서 중요한 일을 하던 나는 원래 일주일에 이틀씩 이 건물에서 일했다. 내가 한밤중에 이곳에 찾아와 뭔가 메시지를 보낸다고 해서 의심받을 상황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날은 운 좋게도 일본 전신 검사관이 근무하지 않았다. 한국인 전신 운전자만 남아 장비 작동 여부를 확인하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검열이 없었다. 상하이로 전보를 보낸 뒤 나는 주홍(중국인으로 추정)이 운영하는 외국인 호텔(제물포 대불호텔 추정)에 묵었다. 내 방 발코니로 나와 담배를 피우며 제물포 항구의 불빛을 바라봤다. 이미 내 눈은 옌타이에서 황제를 구해낼 보트가 오고 있을 황해로 향하고 있었다. 11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서울시의회의원연구단체 ‘남북평화교류연구회(서울평양교류연구회)’ 창립총회 및 기념강연 개최

    서울시의회 의원연구단체 ‘남북평화교류연구회’(공동대표 황인구·조상호·송명화·권영희 의원)이 지난 14일 서울특별시의회 의원회관 제2대회의실에서 창립총회 및 기념강연을 개최하며, 서울시의회 차원의 남북교류협력 확대를 위한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서울시의회 의원 38명으로 구성된 ‘남북평화교류연구회’는 서울과 평양의 지방분권형 남북교류협력 활성화를 위한 정책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의원연구단체다. 향후 남북평화교류연구회는 서울시의회 차원에서의 서울-평양 교류 활성화를 위한 정책과제 도출 및 지역주도형 남북교류협력 모델 개발 등을 위한 집중적인 연구 활동을 전개할 예정이다. 본격적인 활동에 앞서 개최된 창립총회에는 김용석 서울특별시의회 더불어민주당 대표의원 등을 비롯하여 서울시의원 30명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이날 남북평화교류연구회 창립을 축하하기 위하여 참석한 김용석 서울특별시의회 더불어민주당 대표의원은 “남북연락사무소가 문을 연 오늘, 서울시의회에서 남북평화교류연구회가 출범하게 되었다”며, “활발한 연구 활동을 통해 내실 있는 의원연구단체가 되기를 기대하겠다”고 말했다. 창립총회와 함께 진행된 기념 강연에서는 ‘건강한 삶을 살자’라는 주제로 걷기운동가인 데이비드 리의 걷기 운동법 강의와 재미언론인으로서 방북경험이 있는 진천규 기자를 초청하여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라는 제목으로 평양의 변화상에 대한 강연이 진행되었다. 행사에서 공동대표로 선출된 황인구 의원(더불어민주당, 강동4)은 “우리 사회가 통일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변화의 문 앞에 서 있다”라고 진단하며 “이 때 서울시와 서울시의회가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남북평화교류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심도 있게 고민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양기탁 구속·의연금 횡령 의혹에 화병 난 베델 ‘하늘나라로’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양기탁 구속·의연금 횡령 의혹에 화병 난 베델 ‘하늘나라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1907~1908년 영국 법원에서 두 차례 재판을 받았다. 그가 중국으로 복역하러 간 사이 일제는 양기탁을 구속하고 베델에게도 국채보상 의연금 횡령 의혹을 덧씌웠다. 결국 베델은 신보를 살리고 자신의 명예도 회복하려 동분서주하다가 스트레스로 갑작스레 숨을 거뒀다.●양기탁 구속으로 국채보상운동 동력 약화 베델이 1908년 6월 영국 법원의 두 번째 재판으로 구속돼 상하이에서 3주 금고형을 마친 다음날인 7월 12일. 한 일본 경찰이 밤늦게 서울 광화문 대한매일신보사 사옥을 서성거렸다. 신보 건물이 영국인 치외법권 지역이어서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던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양기탁(1871~1938)에게 “잠깐 물어 볼 말이 있다”며 밖으로 불러 냈다. 건물 안에 있던 양기탁이 무심코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경찰은 그를 체포했고 곧바로 경시청에 가뒀다. 국채보상 의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였다. 신보의 두 기둥인 베델과 양기탁에 대한 일제의 역습이었다. 일본은 베델이 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기 전에 양기탁을 구속해야 한다고 봤다. 베델이 조선에 있을 때 그를 구금하면 분명 영국 정부에 도움을 청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일본은 베델이 구속됐다가 조선에 오기 직전 양기탁을 잡아들였다. 통감부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도 양기탁 구속 이틀 뒤인 14일 돌연 해외로 휴가를 떠났다. 그가 이번 일에 간여하지 않은 것처럼 꾸미려는 의도였다. 일본은 양기탁이 조선인이기에 베델 말고는 어느 영국인도 그의 신병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영국 총영사 헨리 코번(1871~1938)은 이 사건이 영국인 소유 신문사에서 벌어진 일이어서 이를 묵과하지 않았다. 양기탁은 구속됐다가 구타 등으로 다쳐 병원에 이송되던 중 탈출해 신보사로 숨었다. 일본은 양기탁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코번은 이를 거부하고 그에 대한 고문을 끝까지 막았다. 결국 양기탁은 코번의 도움 덕분에 인도주의적 환경에서 재판을 받아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코번은 영국의 동맹국인 일본과 외교 갈등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총영사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그해 8월 런던으로 돌아갔다. 6개월쯤 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교관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당시 49세였다.●금고형 이후 달라진 여론… 당황한 베델 베델은 7월 11일 금고형을 마치고 17일 조선에 돌아왔다. 하지만 불과 몇주 사이에 자신을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시선이 크게 차가워졌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그와 양기탁에게 도덕적 타격을 입혀 신보와 KDN을 무력화하려던 일제의 공작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그가 조선에 들어올 무렵부터 한국인이 운영하던 친일 신문들은 일제히 “베델과 양기탁이 국채보상 의연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을 다룬 기사를 쏟아냈다. 신보를 통해 자신의 무고함을 해명하고 국채보상금 총합소에서 나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일본에 협력하는 친일 매체들이 만들어낸 ‘파렴치범’ 프레임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애초 국채보상운동은 한계가 명확했다. 국민들의 순수 모금만으로 조선의 1년치 국가 예산에 맞먹는 1300만원을 모으겠다는 생각 자체가 현실성이 떨어졌다. 설사 모금운동이 일본에 위협이 될 만한 수준으로 성장하더라도 일본은 언제든 ‘화폐개혁’ 카드를 꺼내 그간 모은 의연금을 휴지조각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런 불안감이 내재된 상황에서 베델과 양기탁의 국채보상금 횡령 의혹까지 생겨나자 운동의 동력이 크게 떨어졌다. 이 둘에 대한 국민적 불신도 커졌다. 실제로 8월 10일에 열린 국채보상금 총합소 특별위원회에서 회계감사 이강호는 “베델이 의연금 운영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조선인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겁박했다. 지금보면 적반하장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 베델의 횡령 의혹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베델은 자신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같은 달 27일 열린 의연금 총합소 평의회에 직접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는 이 자리에서 인생 최악의 굴욕감을 맛봤다. 그가 감옥살이를 하고 온 사이 평의회 의장 자리를 한석진 국민신보 사장이 차지하고 있어서였다. 국민신보는 한국인이 창간한 대표적인 친일지이자 매국단체 일진회(1904~1910)의 기관지였다. 1907년 7월 고종이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왕위를 순종에게 넘기자 시위 군중들이 이 신문사의 사옥과 인쇄 시설을 부수기도 했다. 일진회는 항일단체로 출발했지만 단체 간부들이 대거 일본에 매수돼 친일단체로 탈바꿈했다. 그런 신문사의 사장이 국채보상 총합소의 최고 책임자가 됐다는 것은 사실상 국채보상운동이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갔음을 뜻했다. 그간 친일 행적을 무릎 꿇고 사죄해도 모자랄 인물이 되레 조선의 독립을 돕다가 감옥까지 다녀온 자신을 비난하며 파렴치범으로 몰아가는 모습에서 끝없는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일부 조선인들이 자신을 ‘의연금에 손을 댄 좀도둑’으로 취급하는 상황에 모멸감도 컸을 것 같다. 이에 대해 베델의 부인 메리 모드 게일(1873~1965)은 베델 사후인 1910년 8월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편(베델)은 그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조선인을 원망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았다. 그저 일본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겪어야 할 운명으로 생각했다”고 밝혔다.●中 언론 “베델, 횡령 실토” 의도적 오보 8월 30일 중국 일간지 ‘노스차이나 데일리뉴스’가 “베델이 국채보상금 횡령 혐의를 자백했다”는 기사를 냈다. 도쿄 특파원이 일본 당국자의 말을 듣고 쓴 기사였다. 해당 기사는 일본을 중심으로 중국과 동남아에서 발행되던 영자 신문에 빠르게 퍼졌다. 당시 조선에서 국제적으로 가장 유명한 인사였던 베델은 이 기사 하나로 ‘순수한 열정을 지닌 조선 독립운동가’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었다. 베델은 곧바로 중국 법원 등에 이 신문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확인 결과 해당 기사는 일본 국민신보 기자가 영자신문 특파원을 가장해 쓴 것이었다. 일본의 공작이었다. 베델은 소송에서 이기며 자존심을 회복하지만 이미 그에 대한 신뢰는 크게 무너진 뒤였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모두 잃었다. 일제의 압박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독주와 담배로 달랜 탓이 컸다. 평소에도 몸을 돌보지 않던 성격이었던데다 오랜시간 명예훼손 소송과 신보 재정 지원에 나섰던 탓에 그는 이듬해인 1909년 5월 1일 심장 팽창 증세로 숨을 거뒀다. 겨우 서른일곱살이었다. 영국 출신 역사연구가 에이드리언 코웰(62·싱가포르 거주)은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조선을 구하려고 했던 이유를 이른바 ‘젠틀맨’(올바른 일에 목숨을 거는 신사도 소유자) 정신에서 찾았다. 코웰은 “베델은 당시 최고 수준의 학교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고, 영국 성공회 전도사의 딸인 어머니로부터 ‘올바름의 추구’라는 종교적 가치도 전수받았다. 이것이 훗날 조선에서 그의 삶을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서울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싱가포르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포토 다큐] 비수가 된 기적, 살려야 할 기회

    [포토 다큐] 비수가 된 기적, 살려야 할 기회

    ‘기적의 소재’로 150년 누렸지만… 버려진 플라스틱은 바다를 삼켰고, 돌고 돌아 인간을 덮쳤다플라스틱 컵·비닐봉지 대신 텀블러·장바구니를 들어본다… 우리의 지구는 일회용이 아니기에플라스틱은 지난 150년간 ‘기적의 소재’로 불렸다. 값싸고 가벼운 데다 내구성이 좋아 인류의 삶을 점령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최근 플라스틱이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물질로 부상하자 세계는 ‘플라스틱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퇴출에 적극 나서고 있다.●한국, 플라스틱 소비 1위… 핀란드의 100배 정부도 이달 열린 ‘제1차 자원순환기본계획’에서 재활용이 어려운 폐비닐과 플라스틱 빨대를 2027년까지 단계적으로 없애기로 했다. 간편하고 가성비 좋은 일회용품에 푹 빠진 우리나라는 플라스틱 소비 1위 국가다. 비닐봉지 414장, 플라스틱 98.2㎏. 우리 국민 1명이 1년 동안 소비하는 일회용품이다. 1년에 비닐봉지 4장을 사용하는 핀란드 사람들과 비교하면 100배가 넘는 규모다. 지난 2일 인천 강화군 초지대교. 전날 중부지역에 내린 폭우로 물살은 누런 황토 빛이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올라가자 정박 중인 작은 어선 사이로 떠내려온 페트병 등 플라스틱과 생활 쓰레기가 뒤엉켜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바다로 흘러든 플라스틱이라고 한다. 바닷속에서 5㎜ 이하 크기로 작게 쪼개진 미세 플라스틱은 해양 생태계는 물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플라스틱 없는 슈퍼마켓 만들기’ 운동가 벤 포글은 한 언론에서 최근 인도양을 잠수할 당시 목격했던 모습을 “바다 표면은 평온했지만 수면 밑은 플라스틱으로 뒤덮인 독성 수프 같았다”고 묘사했다.●미세 플라스틱 삼킨 해산물이 밥상으로 한 번 쓰고 버려진 플라스틱은 100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 바다로 간 플라스틱은 분해되지 않은 채 쪼개져서 떠돈다. 바다 생물은 미세 플라스틱을 삼킬 수밖에 없다. 미세 플라스틱이 축적된 생선은 우리 식탁에 오른다.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은 돌고 돌아 인간에게 앙갚음한다. 미세 플라스틱은 워낙 작아 내장 벽을 통과해 혈류를 타고 신체 장기를 오염시킬 수 있다. 2015년 일본 도쿄에서 잡은 멸치 64마리 중 49마리가 체내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발견되기도 했다. 해양수산부는 지난 4일 국내 유통 중인 천일염에서도 미세 플라스틱이 검출됐다고 발표했다.●망원시장, 장바구니 반납 땐 지역화폐 줘 이처럼 문제가 심각해지자 플라스틱 퇴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발암물질 없는 사회 만들기’ 행동가 고금숙(41)씨는 “한 장의 비닐봉지가 175만개의 미세 플라스틱으로 분해된다”며 “시장에서 사용하는 검정 비닐봉지는 마음만 먹으면 안 쓸 수 있다”고 말했다. 고씨는 회원들과 이달부터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 입구에서 장바구니를 빌려주고 반납 시 지역화폐로 돌려주는 ‘플라스틱 없는 장보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유통업계도 플라스틱을 없애는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매장에서 드실 거면 머그컵 어떠세요?” 커피전문점에서 흔히 들을 수 있었던 얘기였다. 이제는 “매장에서 드시면 일회용품에 드릴 수 없습니다”로 바뀌었다. 스타벅스는 플라스틱 빨대 대신 종이 빨대를 도입했다. 엔제리너스커피는 플라스틱 빨대를 사용하지 않고도 음료를 마실 수 있는 ‘드링킹 리드’로 바꿨다. 플라스틱 재활용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경기 김포에서 재생용 플라스틱 수거 업체를 운영하는 박상진(46)씨는 “지난 4월 중국의 폐플라스틱 수입금지 이후 일회용품 반입량이 많이 줄었지만, 태국 등 동남아 국가들도 잇따라 폐기물 수입규제에 나서면서 쓰레기 대란은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다”며 “재활용 관련 대책들이 세밀하게 잘 추진됐으면 한다”고 말했다.●쓰레기 대란 언제든 재연… 정부 대책 촉구 플라스틱 쓰레기는 땅과 해양을 오염시켜 지구온난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올여름 나타난 전 지구적 폭염이 우리 국민의 인식을 많이 바꿔놨다. 제로 마켓(Zero market)을 운영하는 배민지(30) 대표는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면서 “일회용 컵 대신 텀블러를, 비닐봉투 대신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문화가 확산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래세대에 깨끗한 지구를 물려주는 게 우리의 의무라는 것이다. 글 사진 최해국 선임기자 seaworld@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쉽게 문 열지 않던 수도원·미술관…한양도성 품은 마을처럼 환대하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쉽게 문 열지 않던 수도원·미술관…한양도성 품은 마을처럼 환대하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7회 성북(북정마을 가는 길) 편이 지난 8일 성황리에 진행됐다. 매주 월요일 0시에 시작되는 치열한 예약전쟁을 뚫은 예약자 30명과 대기자 10명 등 모두 40명이 이날 10시 정각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에 모였다. ‘노쇼’에 대비, 대기자를 뒀지만 무단결석자가 사라지면서 예약자와 대기자 구분 없이 정원이 40명으로 늘어난 지 오래다. 걷기 좋은 날씨, 더할 나위 없는 코스에 대한 기대감이 참석자들을 들뜨게 했다.베테랑 해설자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가 안내한 이날 코스는 한양도성 혜화동전시안내센터를 출발, 성북동 국시집~최순우 옛집~마전터 표지석~북정마을~성북동 비둘기 소공원~만해의 심우장~이종석 별장~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옛 본원 및 복자사랑 피정의집~이태준의 수연산방~쌍다리식당~간송미술관의 순서로 이어졌다. 어느 곳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역사와 사연의 손때가 묻은 곳이다. 성북동의 명소이지만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옛 본원과 성당이 이날 처음으로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에 공개됐다. 한국인이 창설한 최초의 수도원인 두 곳 모두 서울미래유산이다. 일행을 안내한 신부님의 입에서 “최초 공개”, “첫 방문”이란 말이 반복됐다. 또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만 일반인의 방문을 허용하는 간송미술관도 답사단이 보화각과 간송 흉상을 직접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설문에 응한 23명의 참가자는 “평소 가고 싶었던 곳, 가려운 등을 콕 집어 긁어주는 코스”, “2시간 30분도 짧은 듯”, “새록새록 앎이 즐겁다”, “신부님의 해설 감동, 해설자의 해설 만족”이라는 호평을 소감으로 남겼다.조선시대 혜화문 성곽 안과 밖은 딴 세상이었다. 성곽 안 동촌은 사대부를 중심으로 동인들이 살던 양반마을이었지만 성곽 밖은 찢어지게 가난한 자내(字內) 산골이었다. 자내마을은 성곽을 지을 때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하늘 천(天)에서 조상할 조(弔)까지 97개의 글자 구간으로 나눠 축조한 구간을 말한다. 자내마을은 지명이 없이 구간의 이름이 주소 역할을 했다. 지금도 이 구간 성곽의 안은 종로구, 바깥은 성북구 성북동과 동소문동으로 행정구역이 갈린다.해방 이후 서울의 행정구역은 종로구와 중구 등 옛 도심에 접한 지역은 사대문을 중심으로 남대문구, 서대문구, 동대문구라고 이름을 붙였고, 나머지 성저십리(성 밖 십리)마을은 도성의 동쪽과 북쪽이라는 뜻에서 성동구와 성북구로 정했다. 성북구는 말 그대로 성 밖 북쪽 마을이다. 한양도성은 성안과 성 밖 주민의 신분을 구분 짓는 엄격한 경계였다. 성곽이 해체되고, 삶의 공간이 확대되면서 성은 분리와 경계의 대상에서 삶의 질과 경관의 대상으로 변했다. 근현대 변혁의 물결 속에서 옛것이 사라져버린 성 안보다 오히려 성 밖이 각광받는 세상이 됐다. 성 안은 아파트와 빌딩이 점령했지만, 성 밖은 숲과 한옥과 골목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시인 김지하는 ‘오적’에서 성북동을 재벌, 국회의원, 장·차관, 장성, 고급공무원이 사는 도둑촌으로 지목했지만 덕분에 성북동은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서지 못하는 품격 있는 동네로 남았다. 성북동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조선시대 선잠단이 성북동의 정체성이다. 선잠단은 양잠(養蠶)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신성한 공간이다. 농업과 잠업은 중세 사회의 두 축이었다. ‘남경여직’(男耕女織)이라고 해 남자는 논밭을 갈고, 여자는 베를 짜는 게 본분이라고 여겼다. 권농은 왕이, 권잠은 왕비가 직접 주관했다. 사람이 살지 않은 혜화문 밖 마을의 최초 이주자는 숙정문과 혜화문을 지키는 군인가족들이었다. 농사 대신에 시전에서 판매하는 포목을 잿물에 빨아서 삶아 말리는 일(마전)을 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먹고살았다. 겨울철에는 메주를 담가서(훈조) 시전에 납품했다. 둘 다 군인과 가족들을 위한 영조의 생계조치이자 특혜였다. 지금의 성북초등학교는 빨랫감을 말리는 장소였고 북정마을은 메주를 쑤는 동네였다. 빨래골, 북적골이라는 지명이 전해졌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성곽마을 북정마을이 북적골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일제강점기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는 식민지의 수도 경성이 꼴 보기 싫어서 등을 지고 사는 사람들의 본거지였다. 만해 한용운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들이 깃들고, 이태준과 박태원에 이어 청록파(조지훈·박두진·박목월) 시인의 청록집이 만들어진 문화예술인촌이었다. 한국전쟁 후 피란민과 월남민들이 도성을 따라 판잣집, 토막집을 지었고 1970년대 이후에는 고급주택이 들어섰다. 도성 밖 북쪽 성벽에 기댄 채 북향을 하고 사는 남쪽마을은 서민들이, 구준봉 아래 양지바른 언덕에 남향을 하고 사는 북쪽마을은 부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성북동의 새 정체성을 만든 사람은 간송 전형필과 혜곡 최순우이다. 간송은 만석꾼 문화재 수장가요, 혜곡은 국립박물관 학예사 출신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고스란히 넘어갈 위기에 처한 간송미술관의 소장품을 지킨 혜곡에게 간송이 큰절을 올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회자되지만 정작 두 사람의 인과 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충렬이 쓴 ‘간송 전형필’과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라는 두 권의 책을 종합해 보면 간신히 의문이 풀린다. 두 사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두 달여 전인 1950년 4월 16일 수장가와 학예사로 처음 인사를 나눴다. 흔히 ‘천학매병’이라고 알려진 ‘청자상감운학매병’을 간송이 국보특별전시회에 출품하자 같은 해 4월 30일자 서울신문에 혜곡이 ‘역사에 빛나는 도자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게 계기였다. 간송이 만남을 청했으나 이때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얼마 후 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은 보화각(간송미술관)의 문화재를 평양으로 옮길 사람으로 혜곡과 소전 손재형을 지목했다, 혜곡과 소전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힐 때까지 목숨을 걸고 포장을 늦춰 문화재의 북송을 막았다. 이후 간송은 혜곡을 아우이자 애제자로 대했고 혜곡은 간송을 큰형님이자 스승으로 존경했다고 한다. 최순우는 간송이 감사의 마음으로 혜곡에게 선물한 필명이다. 혜곡의 집안 항렬자인 순박할 순(淳)에 간송 집안 아들항렬 돌림자인 비 우(雨)자를 합해 순우(淳雨)라는 필명을 만들어 준 것이다. 처음에는 최희순이라는 본명과 병행해서 사용하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는 최순우란 이름을 본명처럼 썼다. 간송은 스승 위창 오세창에게서 물려받은 문화재 감식안과 필생의 안목을 혜곡에게 낱낱이 전수했다. 위창과 간송이 고졸 출신의 혜곡을 한국미의 순례자에 오르게 했다. 스물네 살 때 조선의 거부 40인에 들 정도로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은 뒤 위창으로부터 받은 ‘문화보국’의 기치를 마음에 심은 간송이 왜 하필 성북동에 최초의 사설박물관을 지었을까. 간송 또한 만해처럼 식민지의 수도 경성을 등지고, 일제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고자 했다. 1938년 4년여의 공사 끝에 최초의 조선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박물관이 완공되자 위창은 ‘빛나는 보배를 모아 두는 집’이라는 뜻에서 미술관 건물을 보화각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박물관의 본래 이름은 북단장(北壇莊)이었다. 1934년 수장고로 사용할 건물이 먼저 완성되자 위창은 북단장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일제가 사직단과 합친다며 선잠단을 해체하자 사람들이 박물관 터를 ‘북쪽에 있는 선잠단’이라는 뜻에서 북단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현대의 성북동을 이루는 근대의 간송미술관은 결국 중세 선잠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송파(백제의 꿈) ●일시 : 9월 15일(토) 오전 10시~낮 12시 ●집결 장소 :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 6번 출구 앞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씨줄날줄] ‘플라스틱 아일랜드’/박현갑 논설위원

    [씨줄날줄] ‘플라스틱 아일랜드’/박현갑 논설위원

    ‘인류가 만든 최대의 인공섬. 하지만 사람이 발을 딛고 설 수 없는 떠다니는 플라스틱섬.’미국 캘리포니아주와 북태평양 하와이 사이의 쓰레기섬이다. 언제부터 생성됐는지는 모르나 해류와 바람의 영향으로 북미와 중남미, 아시아에서 흘러들어온 쓰레기가 쌓이고 있다. 면적이 155만㎢로 한반도의 15배나 된다. 쓰레기의 90% 이상이 플라스틱이다. 환경단체에서 쓰레기섬에서 죽은 새들을 조사한 결과 위 속에 작은 플라스틱들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자외선에 의해 서서히 부스러진 플라스틱을 모이로 착각해서 먹은 결과다. 1997년 요트항해 중 이 섬을 발견한 미국의 해양 환경운동가인 찰스 무어는 “지구의 25%가 물이 내려가지 않는 변기나 다름없다”고 해양 투기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하지만 플라스틱섬이 공해상에 있다 보니 어느 나라도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오션 클린업’(The Ocean Cleanup )이라는 한 비영리 환경단체가 나섰다. 해양 쓰레기 청소에 매진하는 네덜란드 발명가 보이얀 슬라트(24)가 18세 시절인 5년 전 만든 단체다. 그는 16살 때 지중해로 스쿠버 다이빙을 하러 갔다가 물고기보다 훨씬 더 많은 비닐봉지가 떠다니는 것을 보고 바다 청소에 나서게 됐다고 한다. 이 단체에 따르면 지난 8일(현지시간) 6개월의 작업 끝에 만든 해양 쓰레기 수거기가 샌프란시스코항에서 쓰레기섬으로 이동 중이다. 길이 600m의 영어 알파벳 U자 모양으로 된 수거기는 수면 아래 3m 길이의 탐사 스크린을 갖추고 있다. 해류에 따라 움직이며 플라스틱 부유물을 그 안에 가둔 뒤 어느 정도 양이 차게 되면 배로 수거해 육지로 옮기는 식이다. 물고기 등 해양동물은 3m 길이의 스크린 아래쪽으로 헤엄쳐 나갈 수 있다. 슬라트는 “석기시대, 청동기시대를 거쳐 지금은 플라스틱시대”라면서 “바닷속의 플라스틱은 절대로 저절로 없어지지 않고 거의 영구적으로 남는 만큼 행동에 나서야 한다”며 동참을 호소했다. 이 단체는 앞으로 5년 안에 플라스틱섬의 절반을 없앤다는 방침이다. 우리나라도 가입한 런던덤핑 협약에 따라 해양 폐기물 투기는 금지 사항이나 아직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단위 면적당 폐기물 발생량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4위다. 쓰레기 매립지 규모도 세계 최대다. 서울 난지도 쓰레기 매립지 포화에 이어 수도권 쓰레기 매립지도 언제 포화 상태가 될지 모른다. 1회용 플라스틱 사용 금지 등 환경남용 방지를 실천에 옮길 때다. eagleduo@seoul.co.kr
  •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9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9

    서울신문은 일제 침략 당시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고종의 밀사’로 잘 알려진 호머 허버트(1863~1949), 노골적 친일 행보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된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1851-1908),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모두 등장합니다. 최근에야 국내외에 알려진 고종의 연해주 망명 시도 등 극비 내용도 담겨 있어 학계에 관심을 모읍니다. 서울신문은 이 소설 가운데 하나인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12월 출간, 원제 : The cat and the king, 부제 : Billy and Bethell)를 번역해 연재 형태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9회>소녀는 이날부터 거동이 불편한 황제(고종)를 위해 궁에서 초상화를 그렸다. 거처도 애스터하우스 호텔(현 서대문역 농협중앙회 건물터)에서 미국 대사관저로 옮겼다. 나와 베델이 그랬듯 영사 부인도 그녀의 매력에 푹 빠졌다. 부인은 낯선 조선 땅에서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했는지 소녀와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다. 부인은 초상화를 그리는 기간 동안 그녀에게 대사관저에 머물것을 권했다. 주변 사람들은 부인이 소녀를 독점하려는 듯한 모습을 시샘하기도 했다. 소녀로서는 부인의 배려가 천군만마를 얻은 듯 고마웠다. 우선 그녀가 공사 가족의 초대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미국 정부가 그녀를 ‘믿음직한 인물’로 인증해주는 효과를 냈다. 그녀가 왜 서울에 왔는지 무슨 목적을 위해 왔는지를 의심하는 하기와라(훗날 2대 조선총독이 되는 하기와라 슈이치)나 그의 부하들의 시선에서 한 발짝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에 미국 대사관저는 사실상 조선 황제가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건물(경운궁 석조전으로 추정)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었다. 원할 경우 수시로 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또 일본인들에게 ‘1급 요주의 인물’로 찍힌 베델과 가급적 멀리 떨어질 수 있었다. 베델이 자신의 집처럼 이용하는 애스터하우스 호텔은 일제의 주된 감시 대상이었다. 그곳에 계속 머무는 것이 그녀에게 좋을 것은 없었다.그럼에도 내 솔직한 생각을 말하자면...소녀가 호텔에 그대로 남았으면 했다. 내가 그녀와 함께 만든 너무도 소중한 추억이...물론 있었고 말고...그럼 있었지...하지만...휴...러브 스토리 같은 건 아니야...지금 이 글에는 그런 이야기를 쓸 여유가 없어. 그녀는 호텔 방에서 이사 준비를 하며 나와 단 둘이 있었다. “빌리” 그녀가 나를 불렀다. “앞으로 우리는 며칠간 떨어져서 위험한 게임을 해야 해요. 당분간 나는 베델을 볼 수 없고 베델 역시 나를 볼 수 없죠. 당신이 저 교활하고 못된 하기와라의 ‘착한 사람’ 명단에 올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민영환 대감이 당신과 베델에게 은밀히 메시지를 전달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세요.” 나는 그녀에게 확신을 주려고 힘주어 말했다. “당신의 위대한 계획에 걸림돌이 되느니 나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쪽을 택할게요.” ”오...안돼요. 내 친구!“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우리가 하고 있는 위험한 게임의 파도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멜로 드라마에서처럼 “당신에게도 마차가 올 거에요’ 따위의 사탕발림 따위 말은 하지 않을게요. 당신의 때가 오면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당신을 비출 거에요. 그때까지 당분간은 절대 이 일을 입 밖에 내지 말고 참아 주세요.” 그녀는 트렁크 안쪽 주머니에서 전신 메시지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수신처는 상하이에 있는 그녀의 집이었다. 거기에는 “초상화 성공. 만세!”라고 적혀 있었다. “아빠한테 보내려는 건 아니에요.”그녀가 말했다. “이 계획의 배후에 있는 그분께 보내는 거죠. 그날 밤 내가 당신에게 말한 그분께 정확히 전달돼야 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봐서는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는 내용이죠. 그렇죠?” 그녀는 자신의 성공 소식을 아빠에게 전하려는 어린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민 대감에게 전갈이 오자마자 내가 지금 전달한 내용을 꼭 전보로 보내 주셔야 합니다. 여기 서울은 하기와라의 감시가 심하니까 번거롭더라도 제물포(인천)로 가 주세요. 민 대감의 연락을 받는대로 최대한 빨리 상하이로 보야 해요.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까요.”“그 다음 계획을 말해 줄 수 있나요?” 내가 물었다. “상하이에 있는 그 분이 이 메시지를 받으면 즉시 이 내용을 옌타이(산둥성 소재)로 다시 보낼 거에요. 제물포에서 약 140㎞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죠. 그러면 그곳에 있던 소형 쾌속 증기선이 재빨리 출발해 24시간 안에 서울의 궁에서 15㎞가량 떨어진 곳 강가(마포 양화진으로 추정)에 정박할 거예요. 그 배에 황제와 저 이렇게 두 명이 타게 되고요...” 그녀는 나를 천천히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두 명이 더 탑승합니다...황제를 해하려는 처단자(하기와라 슈이치)와 알고 지내는 것조차 끔찍해하는 두 명의 악동(베델과 빌리)이죠.” 10회로 이어집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8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8

    서울신문은 일제 침략 당시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고종의 밀사’로 잘 알려진 호머 허버트(1863~1949), 노골적 친일 행보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된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1851-1908),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모두 등장합니다. 최근에야 국내외에 알려진 고종의 연해주 망명 시도 등 극비 내용도 담겨 있어 학계에 관심을 모읍니다. 서울신문은 이 소설 가운데 하나인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12월 출간, 원제 : The cat and the king, 부제 : Billy and Bethell)를 번역해 연재 형태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8회>나는 그날 밤 진정한 조선의 애국자(민영환)와 불도 켜지 않은 방에서 가졌던 회의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베델과 나는 한밤중에 도둑처럼 그 집에 숨어 들어갔다. 그의 방에 놓여 있던 책상 한 가운데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호박 빛깔 돌로 만든 인장도 꽤 인상적이었다. 희미한 호롱불 하나만 사이에 둔 채 우리는 마주 앉았다. 밖에 있던 일본 스파이들이 우리 얘기를 엿들을까봐 최대한 숨죽여 밀담을 나눴다. 베델이 민영환에게 말했다. “연로하신 황제를 적군의 모든 위협과 횡포에서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상하이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시킨 뒤 ‘군주가 일제의 강압을 견디다 못해 외국으로 망명했다’고 대대적으로 알리는 겁니다. 그러면 곧바로 왕은 전세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고 일본 또한 조선을 집어삼키려던 음모가 탄로나 다른 나라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겠죠.” 조선의 민족 투사가 된 이 영국인 신문 편집장은 마치 십자군이 된 것처럼 강렬한 열정으로 이 계획을 설명했다. 민영환은 그의 말을 끝까지 그리고 사려깊게 들었다. 그가 길다란 곰방대에 담배를 채워 넣으려고 팔을 뻗었다. 그의 손이 상당히 떨리고 있었다. “놀랍고 훌륭한 계획이긴 하오나...” 그가 낮은 소리로 답했다. ”우리가 황제 폐하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참 좋은 계획이 아닐 수 없겠소만...다만 조선 개국 이래 군주가 국경을 너머 도망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소. 특히 황제가 무당과 점쟁이들과 모든 일을 상의한다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시지 않소...이들은 왕이 외국으로 도피하면 신성한 기운이 사라질 것이라며 반대할 것이 분명하오.”그러자 베델이 나섰다. ”그래서 그 사람들 모르게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현재 궁안에 있는 거의 모든 이들이 일본에 매수돼 있어요. 지금 우리가 한 말이 단 한 마디라도 새 나가면 곧바로 하세가와(조선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1시간 안에 경운궁을 일본군으로 에워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은 반드시 대감 혼자만 알고 계셔야만 해요. 대감께서는 폐하에게 이 말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반드시 찾아 주십시오. 미국에서 소녀가 이곳까지 찾아온 진짜 이유를 꼭 전해달라는 것이죠. 초상화를 그릴 때만큼은 왕과 그녀 단 둘만 있게 됩니다. 왕의 통역사이신 대감께서는 그 자리에 함께 하실 수 있죠. 그때 대감께서 폐하를 꼭 설득하셔야 합니다. 폐하가 초상화의 모델로 앉아있는 그 자리에서 구체적인 망명 논의가 모두 마무리돼야 하죠.” “알겠소. 그리 하도록 하죠.” 민영환이 짧고 단호하게 답했다. 우리는 다시 그의 집 담을 넘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감리교 선교회 건물(현 광화문 동화면세점 감리교 본부 빌딩)을 지나 애스터하우스 호텔로 향했다. 나는 걸어가면서 곰곰히 생각했다. 러시아가 조선 황제를 납치하려는 것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최대한 늦춰 한반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 보려는 의도일 것이다. 베델 역시 이를 모를 리 없겠지만 당장 코 앞에 닥친 일본의 음모부터 물리치고자 러시아의 은밀한 제안을 받아들인 것일테고...나는 이런 저런 생각으로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다음날이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조선 관리 한 명이 마차를 끌고 호텔로 찾아왔다. 황제가 소녀에게 보낸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는 “당신처럼 뛰어난 미국 화가가 내 얼굴을 그리고 싶어해 매우 기쁘게 생각하오. 가능한 한 빨리 궁으로 들어와 주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겠소”라고 쓰여 있었다. 왕의 마음이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소녀는 왕이 보내준 마차를 타고 경운궁으로 떠났다. 궁궐에서 나온 짐꾼들이 그녀의 이젤과 프레임, 그림물감 상자를 등에 지고 뒤따라갔다. 나와 베델은 호텔 바에 가만히 앉아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태풍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 천둥 소리도 점점 커지고...일본이 눈치를 채고 작업에 나선 것 같은데.” 베델이 심각한 목소리로 나즈막히 말했다. “오늘 아침 궁 내시에게 직접 전달받은 첩보인데...어젯밤 황제의 무당 2명이 급사했다고 해. 왕에게 저녁 음식으로 제공하려던 사슴고기에 독이 들었는지 살펴보려고 먼저 먹어 봤다던데...” 9회로 이어집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7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7

    서울신문은 일제 침략 당시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고종의 밀사’로 잘 알려진 호머 허버트(1863~1949), 노골적 친일 행보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된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1851-1908),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모두 등장합니다. 최근에야 국내외에 알려진 고종의 연해주 망명 시도 등 극비 내용도 담겨 있어 학계에 관심을 모읍니다. 서울신문은 이 소설 가운데 하나인 ‘황제납치 프로젝트’(1912년 12월 출간, 원제 : The cat and the king, 부제 : Billy and Bethell)를 번역해 연재 형태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7회>사실 황제에게 있어 그녀의 요청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서양식 캔버스에 담을 경우 아프거나 죽는 것 아닌가 걱정이 컸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에게 초상화를 그릴 기회를 주려는 것은 그만큼 소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왕은 점쟁이에게 이 일을 어떻게 해야할 지 조언도 구했다. 결국 그녀가 중국 황후(서태후)의 초상화를 그렸음에도 별다른 변고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 이 아름다운 미국 여성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서도 황제는 소녀에게 “내일 결정 내용을 알려주겠다”고 전했다. 그는 즉석에서 답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녀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어린 아이처럼 뭔가 그럴듯한 구실을 찾은 것이다. 나는 황제가 이 곰팡이내 가득한 음모가 판치는 경운궁(덕수궁)에서 소녀가 가져온 햇살을 조금이라도 오래 간직하려는 것에 대해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소녀는 미인계를 쓰는 첩보원답게 자신에게 빠져든 남성을 어떻게 다루는 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제가 어찌 감히 천손의 자손이신 황제폐하에게 고민거리를 안겨드릴 수 있겠습니까. 아직 초상화를 그리실 확신이 없으시다면 그만 떠나고자 합니다”라며 우아하게 서운함을 밝혔다. 왕이 깜짝 놀랐는지 신하들에게 “저 미국인 화가에게 내 사슴 공원과 여름 휴양지를 보여주라”고 지시했다. 그녀의 상한 마음을 달래주려는 의도였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다음날 궁궐에 들어올 수 있도록 채비를 갖추라고 명했다. 소녀는 조선 황제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우리는 궁에서 나와 뒤쪽에 잘 가꿔진 숲으로 향했다. 뭔가 의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신하들은 우리에게 양쪽으로 멋드러지게 경사진 박공 지붕이나 해태의 기이한 아름다움 등에 대해 설명해줄 마음이 없었다. 그저 왕이 시켜서 따라 나왔을 뿐...그러자 하기와라(훗날 2대 조선총독이 되는 하기와라 슈이치)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 작고 왜소한 일본인은 곧바로 소녀 옆으로 다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나란히 걸어갔다. 나는 신하들 뒤에서 멀찌감치 거리를 유지하며 동태를 살폈다. 하기와라는 중간음을 생략한 채 세련되지 못한 영어로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 소녀의 거침없는 웃음 소리가 그의 조악한 영어 발음을 덮어버려 그나마 좀 나았다. 하기와라는 이 소녀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다. 숲 속에서 사슴을 본 뒤 소녀가 마차에 타고 호텔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하기와라가 붉어진 얼굴로 “다음주에 일본 공사관에서 열리는 정원 파티에 꼭 와달라”고 청했다. 일본 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단다. 일왕 생일은 핑계일 뿐 실은 소녀가 보고 싶어서겠지...”하기와라, 요 작고 비열한 쥐새끼 같은 놈“ 그녀가 남대문을 지나 애스터하우스 호텔(현 서대문역 농협중앙회 터)으로 나오며 비웃듯 내뱉었다. ”맞아. 이 교활한 쥐 한마리가 이 나라 전체를 갉아먹고 있어” 나도 맞장구를 쳤다. “그놈은 우리에게 스파이를 보내고도 전혀 용서를 구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나중에 분명 내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게 될 겁니다. 내가 그를 가만 두지 않을 테니까...” 호텔에 도착하자 미국 공사 부인이 그녀와 점심식사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부인은 그녀를 미국 대사관저로 데려갔다. 시간이 남자 나는 광화문 가구거리(지금의 태평로) 뒤편에 있는 베델의 낡고 작은 인쇄소(대한매일신보사)로 갔다. 그녀가 없는 시간동안 그와 머리를 맞대고 고종 망명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베델은 외부에서 경운궁에 몰래 들어갈 수 있는 비밀 통로를 알고 있었다. 조선인과 은밀하게 접촉할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도 갖고 있었다. 베델은 곧바로 왕을 호위하는 시종무관장인 민영환에게 전갈을 보냈다. 모든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오늘 밤 그의 집에서 꼭 만나 나눌 얘기가 있다고.(편집자주:덕수궁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2003년에 발견됐습니다. 고종이 유사시 일본군을 피해 궁 바깥으로 나가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습니다. 현재 ‘고종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조만간 일반에 개방될 예정입니다. 이 소설에서 언급한 비밀통로는 이 길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작가가 최근에야 알려진 이 길의 실체를 알고서 쓴 것인지 매우 흥미롭습니다.) 어둠이 깔리자 우리는 각자 다른 길로 민영환의 집(현 견지동 조계사 터)에 찾아갔다. 그가 충신이라는 것은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든 일본의 음모를 저지하려 한다는 것 역시 새로울 게 없었다. 이 때문에 하기와라는 늘 그의 집 주변에 첩자를 심어두고 24시간 감시하게 했다. 결국 우리는 낮지 않은 그의 집 뒷담을 몰래 타고 넘어 가야만 했다. 8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이집트 버스 기사가 팬티 차림으로 차 위에 올라간 사연

    이집트 버스 기사가 팬티 차림으로 차 위에 올라간 사연

    이집트의 미니버스 운전기사가 차 위에 올라가 팬티만 걸치고 두 손을 깍지 낀 채 뒤통수에 갖다 대고 서 있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퍼지고 있다. 처음에 현지 언론은 그 기사가 혼자 버스에 탄 여성에게 지분거리고 납치하려고까지 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사람이 그 기사가 그런 몰지각한 짓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면서 버스 위에 올라가 그렇게 하면 넘어가주겠다고 했던 것이었다. 그 기사는 경찰 신고가 두려워 시키는 대로 했다. 길 가던 시민 30명 정도가 버스를 에워싼 채 그 장면을 손전화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그런데 경찰은 이 기사를 체포했다가 풀어줬다. 왜 그랬을까? 경찰은 소매치기 일당이 사람을 모으고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꾸민 짓으로 보고 있다. 피해 여성은 곧바로 현장을 떠나 신원을 파악할 수가 없다. 문제의 기사는 버스 위에 올라가라고 한 사람이 동영상을 찍어놓았다고 협박해 어쩔 수 없이 따랐다고 진술했다. 이 여성이 금세 자취를 감춘 것은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99%의 이집트 여성이 성희롱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그런데 성희롱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은 행실이 단정치 못해 그런 일을 당했다는 비난을 듣게 된다. 지난달 멘나 굽란이란 젊은 여성이 수도 카이로 거리에서 성희롱을 당했다며 동영상을 올렸다. 동영상에는 마흐무드 솔레이만이란 남성이 버스를 기다리는 그녀에게 다가와 커피나 한잔 하자고 말을 건넸다가 그녀가 손사래를 치자 사과하며 현장을 떠나는 것으로 나온다. 나중에 그녀는 그 남자가 차로 자신의 주위를 뱅뱅 돌았으며 부적절한 멘트를 날리다 자신이 손전화 카메라로 촬영하기 시작하자 현장을 벗어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셜미디어에선 오히려 굽란의 옷차림에 문제가 있었으며 솔레이만은 그럴 사람이 아니란 댓글이 엄청나게 달렸다. 솔레이만은 명예훼손 혐의로 그녀를 고소했다.그녀를 돕겠다고 나선 쪽은 뜻밖에도 이 나라의 최고 이슬람 기관인 알아즈하르였다. “희롱은 이슬람 율법 아래에서도 하람(허용되지 않는 일)이며 완벽하게 비난받을 일이며 정당화될 수 없다. 일부는 여성들의 옷차림이나 행동을 성희롱 범죄의 핑계로 동원하려고 애쓴다.” 올 여름 휴가지로 이름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한 남자가 아내에게 추근거렸다는 이유로 다른 남성을 흉기로 난자한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지난 7월에는 레바논 관광객 모나 엘마즈부흐가 자신이 당한 성희롱을 동영상으로 제작해 고발했다가 도리어 “불경스러운 내용을 제작하고 공표한” 혐의로 8년 실형과 벌금을 언도받았다. 앞서 5월에는 인권운동가 아말 파티가 정부가 성희롱에 대처하지 않고 인권 이슈에 대해 귀를 닫는다고 규탄하는 동영상을 게재했다가 체포됐다. 국제앰네스티는 파티가 어떤 죄목으로 기소됐는지조차 불분명하다며 “국가 안위에 해를 끼치는 가짜 뉴스를 퍼뜨린다”는 명목으로 수사받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톰프슨 로이터 재단은 세계에서 여성이 가장 위험을 느끼는 도시로 카이로를 선정했다. 2014년 성범죄자에게 징역형과 벌금을 도입했지만 휴먼 라이츠 워치는 성추행이 이 나라에 만연돼 있으며 기소되는 일은 극히 드물어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6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6

    서울신문은 일제 침략 당시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고종의 밀사’로 잘 알려진 호머 허버트(1863~1949), 노골적 친일 행보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된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1851-1908),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모두 등장합니다. 최근에야 국내외에 알려진 고종의 연해주 망명 시도 등 극비 내용도 담겨 있어 학계에 관심을 모읍니다. 서울신문은 이 소설 가운데 하나인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12월 출간, 원제 : The cat and the king, 부제 : Billy and Bethell)를 번역해 연재 형태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6회>소녀는 하기와라(훗날 2대 조선총독이 되는 하기와라 슈이치)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그녀는 뭔가 비밀스런 내용을 말해주겠다는 듯 부드러운 눈길로 그를 끌어당겼다. 나는 곁눈질로 그들을 쳐다봤다. 소녀는 파리 스타일의 하늘거리는 실크 가운을 입고 멋진 모습으로 서 있었다. 윤이 나는 머리에 꽂은 새털 장식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그녀는 머리를 살짝 구부려 하기와라의 귀 가까이에 입술을 가져갔다. 이는 분명 친밀함의 표시이자 존경, 그리고 유혹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하기와라에게 잘 보이려는 듯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곧이어 은쟁반에 구슬이 굴러 가는 듯한 그녀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좋아~좋아~” 하기와라는 그녀에게 온 신경을 다 집중하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권력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중화전(왕의 업무공간) 쪽으로 가자고 손짓했다. 소녀는 나를 지나치며 살짝 웃어보였다. 우리가 꾸민 계획이 잘 풀려나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중화전에는 황제(고종)가 있었다. 그는 대한제국이 망해 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발 아래 놓인 여러 올가미들에 묶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노인이 된 황제는 오로지 낡은 것밖에 남지 않은 이 궁 안에서 소녀의 매력이 주는 신선함에 꽤 놀란 눈치였다. 그는 특이하게 누빈 자주빛 비단옷(곤룡포·왕이 평상시 집무할 때 입는 옷)을 입고 말총으로 된 왕관도 썼다. 신하들이 용상(임금의 업무용 책상) 아래에 모여 우리를 보며 웅성거렸다. 양의 눈을 한 대신들과 무당, 지관들이 마치 숙주에 기생하는 거머리처럼 왕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황제의 뒤편에는 달빛이 비추는 산들과 비늘로 덮인 용이 긴 꼬리를 멋지게 늘어뜨린 옛 중국스타일 그림(일월오봉도)가 놓여 있었다. 힘을 잃어 가는 나라의 그늘진 궁과 적당히 잘 어울리는 배경이기는 했다.(편집자주:원래 조선시대 일월오봉도에는 봉황 조각물이 있었지만 대한제국 시절에는 자주국임을 천명하고자 용으로 교체했습니다. 이 소설에는 당시 이런 상황이 잘 묘사돼 있습니다.) 붉은 빛이 감도는 금색 매듭과 흰색 깃털이 있는 왕관을 쓴 그의 눈은 매우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소녀를 보자 잠시나마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소녀는 중화전 계단 앞에서 잠깐 멈춰 왕에게 경의를 표했다. 소녀는 눈빛에 존경심을 가득 담아 군주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봤다. 황제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미모에 놀랐는지 잠깐 앓는 소리를 냈다. 버선 신은 발을 살짝 동동거리더니 곧바로 안정을 되찾고 우아한 손 동작으로 내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녀의 등장은 경운궁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듯 했다. 신하들은 황제의 등 뒤에서 흥분된 어조로 떠들어대며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무당과 점쟁이는 이국의 소녀에게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왕 옆에 경직된 자세로 서 있던 하기와라는 이들이 ‘자신의 여자’에게 지나치게 과도한 관심을 갖는 모습에 적쟎이 화가 난 표정이었다. 왕가의 일원이자 시종무관(임금을 호위하던 무관)인 민영환(1861∼1905)은 소녀와 황제 사이에서 통역을 맡았다. 그는 변치 않는 충성심을 가진 몇 안 되는 인물이자 이 혼란스러운 궁 안에서 정확히 사리 판단을 할 줄 알던 거의 유일한 현자였다. 황제는 소녀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 듯 아름다운 말로 그녀를 칭찬하며 위엄을 뽐냈다. 그는 “신께서 친절하게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방 여인을 보내줘 무척 고마울 따름”이라고 경탄했다.겸손한 초상화가를 연기하던 소녀가 말했다. “폐하, 저는 미국인이며 과거 중국에서 황후의 초상화를 화폭에 담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대한제국 황제의 위엄은 멀리 미국에서도 여러차례 전해 들었습니다. 황제의 용안을 초상화에 담지 못하면 제 인생에 큰 회한이 될 것입니다.” 소녀는 동양의 격식을 갖춰 겸손하게 얘기했다. 둘 간 주고 받는 대화 속에 은유가 풍부해서인지 왕의 품위가 한 층 더 돋보였다. 왕은 이 소녀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감시자인 하기와라를 걱정스럽게 바라본 뒤 “고문관과 상의해 그대의 청에 대해 답을 주겠노라”고 대답했다. 7회로 이어집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온몸이 붉은색으로 염색된 강아지, 새 보금자리 찾다

    온몸이 붉은색으로 염색된 강아지, 새 보금자리 찾다

    온 몸이 온통 붉은 색으로 염색된 강아지가 동물 보호소에 이송돼 결국 새 보금자리를 찾았다. 6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그리스 보이오티아현 시마타리의 한 난민캠프에서 살고있는 강아지 ‘스칼렛’이 구조되는 모습을 공개했다. 거리에서 한 남성과 함께 있는 스칼렛을 발견한 동물보호 운동가들은 이 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붉은색으로 온몸이 염색돼 있었기 때문이다. 스칼렛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남성은 “빨간색을 좋아해서 이 강아지를 데려오기 위해 전 주인에게 150유로(약 19만 6000원)를 지불했다”면서 “전 주인은 아테네 오모니아에서 강아지를 샀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붉은 색소가 개에게 해로울 것으로 판단한 운동가들은 남성을 설득해 스칼렛을 보호소로 데려왔다. 그곳에서 수의사들은 “머리에 물을 들이는 염색약이 사용됐으나 다행히 스칼렛이 피부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진단을 내렸다. 안심한 보호소 직원들은 스칼렛을 깨끗이 씻긴 후, 새 가정을 찾아주었다. 스칼렛의 새 주인은 “스칼렛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으며, 털에 베인 염료가 완전히 빠지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희미해져서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면서 사진을 공유했다. 사진=데일리메일 안정은 기자 netineri@seoul.co.kr
  • “경쾌하고 젊은 윤봉길·안중근이 뮤지컬로 뜹니다”

    “경쾌하고 젊은 윤봉길·안중근이 뮤지컬로 뜹니다”

    이회영 선생이 세운 독립군 학교 이야기 손자 이 의원 관심… 배우들 격려·조언 지창욱·강하늘·성규 등 출연진도 화려 9~22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무대 공연“교과서가 아닌 역사 속 실제 윤봉길, 안중근, 이회영의 모습을 그려낸 배우들의 연기를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공연계 관계자의 홍보성 멘트가 아니다. 뮤지컬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의 말이다. 이 의원이 이 작품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좀더 각별하다. 작품의 배경이자 항일 독립 전쟁의 선봉에 섰던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인 우당 이회영 선생이 그의 조부이기 때문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제70주년 국군의날 기념작인 창작뮤지컬로 육군본부가 기획한 ‘군(軍) 뮤지컬’이다. 현역 복무 중인 배우 지창욱과 강하늘, 아이돌그룹 ‘인피니트’의 멤버 성규 등 스타들이 무대에 오르며 웬만한 상업 뮤지컬을 능가하는 캐스팅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의원은 지난달 14일 제작발표회 때 무대인사 자리에 섰고 광복절 등에는 배우들의 연습 뒤풀이 현장을 찾아 격려하기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당의 아내이자 이 의원의 할머니인 독립운동가 영구 이은숙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 의원은 앞서 작품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당시 독립운동사의 뒷이야기를 해 주며 시나리오 제작에 ‘간접 참여’하기도 했다. 이 의원은 “청산리대첩, 봉오동전투의 승리 뒤에는 바로 신흥무관학교 출신 교관들의 큰 역할이 있었다”면서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체코제 기관총 등 최신식 무기를 보유한 최정예 부대였다”고 강조했다. “독립운동가들은 자신들의 헌신으로 희망찬 미래가 올 것이라는 확신과 낙관으로 살았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이런 젊은이들로 가득 찼죠.” 이 의원은 독립운동이라는 주제를 너무 무겁게만 다룰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윤봉길 의사는 이번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보다도 젊은 24세에 순국하지 않았느냐”며 “독립운동을 다룬 작품들이 당시 청년들의 경쾌했던 모습을 재현했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어린 시절 이 의원의 집에는 늘 직업도 없고 사는 곳도 불분명한 낯선 남자들이 오가며 밥을 얻어먹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조부·조모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의 후손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속설이 아닌 엄연한 현실임을 이 의원은 어린 시절 목격했다. 이 의원은 “젊은 연예인으로만 생각했던 배우들이 당시 역사적 사실을 상세히 잘 알고 있고 진중한 자세를 보여 놀랐다”면서 “젊은 관객들도 작품을 관람하며 젊고 활기 넘쳤던 실제 독립운동의 모습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앞서 총 20회 공연의 티켓이 매진되는 등 높은 관심 속에 오는 9일부터 22일까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극장용 무대에 오른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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