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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로 성북구청장 “3·1 정신으로 코로나 위기 극복을”

    서울 성북구는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주민과 함께하는 3·1절 행사가 어려워지자 이승로 성북구청장이 손팻말을 들고 101주년 3·1절을 기념했다고 2일 밝혔다. 이 구청장은 지난달 27일 종암동 ‘문화공간 이육사’를 방문해 “3·1절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림으로써 민족의 저력을 보여 준 것”이라며 “코로나19의 급속한 확산으로 국내외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현재 마음을 모아 민족의 위기를 극복한 선조를 떠올리며 희망과 의지를 갖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이 구청장은 “45만 성북구민과 대한민국 국민이 마음을 모으면 뭐든 해낼 수 있다”고 외쳤다. 이날 메시지는 이 구청장이 직접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북구는 한용운(성북동), 이육사(종암동), 조소앙(동소문동), 정정화·김의한(동선동), 이은숙·이규창·유우석·조화벽(정릉동) 등 100여명의 독립운동가가 활동한 ‘독립운동가의 도시’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유해, 이르면 이달 말 대전 현충원 안장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유해, 이르면 이달 말 대전 현충원 안장

    문재인 대통령은 1일 독립운동가 홍범도(1868~1943) 장군 유해 봉환 계획을 밝혔다. 정부는 이르면 이달 말 공군 수송기 편으로 유해를 봉환한 뒤 대전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안을 검토 중이다. 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위대한 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드디어 모셔올 수 있게 됐다”며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하며 카자흐스탄 대통령 방한과 함께 유해를 봉환해 안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서울현충원은 공간이 더는 없어 대전 국립현충원을 검토하고 있다”면서 “빠르면 이달 말이거나 혹은 더 늦춰질 수 있다”고 말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카자흐스탄 방문 당시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에게 “유해를 봉환하고 싶다”고 밝혔고, 토카예프 대통령은 “내년까지 해결할 수 있도록 직접 챙기겠다”고 답했다. 홍 장군은 사회주의 운동에 매진한 독립운동가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을 지내면서 간도와 극동 러시아에서 일본군과 맞섰다. 특히 ‘독립군 3대 대첩’으로 꼽히는 봉오동 전투의 주역이다. 1937년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정책으로 터전을 옮긴 뒤 고려극장 경비 생활로 생계를 이을 만큼 힘든 말년을 보냈다. 그간 카자흐스탄 정부나 동포 사회는 남북 사이에서 유해 봉환을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장군이 동포 사회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고, 직계 후손들은 세상을 떠난 점도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앞서 김영삼 정부도 1995년 유해 봉환을 추진했지만, 북한은 장군이 평양 태생이고 러시아 공산당에 가입한 이력 등을 내세우며 연고를 주장해 무산됐다.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이번에는 북한이 이렇다 할 반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서 “청산리·봉오동 전투 100주년이 되는 만큼 송환 의미가 더욱 크다”고 말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전문] 문 대통령 “코로나19, 단합으로 위기에 강한 저력 보여주자”

    [전문] 문 대통령 “코로나19, 단합으로 위기에 강한 저력 보여주자”

    101주년 3·1절 기념사“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독립운동가 최고 예우”문재인 대통령은 1일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는 잠시 우리의 삶을 위협할 수 있지만 우리의 단합과 희망을 꺾을 수는 없다”면서 “단합으로 위기에 강한 우리의 저력을 발휘하자”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서울 배화여고에서 열린 제101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 기념사를 통해 “억압을 뚫고 희망으로 부활한 3·1독립운동 정신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힘이 됐듯 코로나19를 이기고 우리 경제를 활기차게 되살릴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문 대통령은 “대구·경북 지역에 이어지고 있는 응원과 온정의 손길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저력”이라면서 “대구·경북은 결코 외롭지 않다”고 강조했다. 또 북한에도 보건 분야의 공동 협력을 강화하자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사람과 가축의 감염병 확산에 남북이 함께 대응하고 접경지역의 재해재난과 한반도의 기후변화에 공동으로 대처할 때 우리 겨레의 삶이 보다 안전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서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견인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카자흐스탄에서 봉환해 안장하게 됐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이 우리에게 국가의 존재가치를 일깨우고 선열의 애국심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면서 “독립운동가 한분 한분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우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과 뜻을 기리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해나갈 것”이라고 거듭 역설했다. 다음은 문 대통령의 기념사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해외동포 여러분, 비상한 시국에 3·1절 기념식을 열게 되었습니다. 여러모로 힘든 시기이지만 1920년 3월 1일 첫 번째 3·1절을 기념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이곳 배화여고에서 3·1절 101주년 기념식을 열게 되어 매우 뜻깊습니다. 191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주공화국의 첫 번째 달력 ‘대한민력’을 발간하면서 3월 1일을 독립기념일로 정하고 국경절로 표시했습니다. 임시정부는 3월 1일을 대한인이 부활한 성스러운 날(聖日)로 내무부 포고를 공포하며 상해에서 최초의 3·1절 기념식과 축하식을 거행했고, 배화학당을 비롯한 전국·해외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기념 만세시위가 열리는 구심 역할을 했습니다. 서대문 감옥에서는 유관순 열사와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만세를 외쳤고, 동경과 블라디보스토크, 미국, 프랑스에서도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주를 선언했습니다. 우리 겨레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3·1독립운동 기념식은 일제강점기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일제는 특별경비와 예비검속으로 그날의 기억을 지우고 침묵시키고자 했지만,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상인들은 철시로,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3·1독립운동의 정신을 되살려냈습니다. 1951년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외환위기가 덮쳐온 1998년에도, 지난 100년간 우리는 단 한 번도 빠짐없이 3·1독립운동을 기념하며 단결의 ‘큰 힘’을 되새겼습니다. 함께 하면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금 3·1독립운동으로 되새깁니다. 매년 3월 1일, 만세의 함성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오늘의 위기도 온 국민이 함께 반드시 극복해 낼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1919년 한해에만 무려 1542회에 걸친 만세 시위운동으로 전국에서 7600여명이 사망했고 1만 6000여명이 부상했으며 4만 6000여명이 체포 구금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제의 탄압이 가혹했지만, 우리 겨레의 기상은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학생, 농민, 노동자, 여성이 스스로 독립과 자강, 실력양성의 주인공이 되면서 오히려 더 큰 희망을 키웠습니다. 1920년 1월 13일,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은 대한독립군 홍범도 의용대장의 권고문을 실어 무장투쟁의 정당성과 국토회복을 위한 각오를 다졌습니다. 1월 30일에는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서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 될 76명의 졸업식이 열렸습니다. 민족교육운동으로 실력을 양성했고 여성의 교육과 권익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일제의 수탈과 억압에 저항했고 기업가들은 근대적 기업을 일구기 위해 분투했으며 국민들은 민족경제 자립운동을 펼쳤습니다. 자각한 국민들의 자강 노력이 이어지면서 1920년에만 무장항일 독립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무려 1651회나 펼쳐졌습니다. 그해 6월, 우리 독립군은 일본군 ‘월강추격대’와 독립투쟁 최초로 전면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바로 홍범도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였습니다. 임시정부는 이를 ‘독립전쟁 1차 대승리’라 불렀습니다. 1920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독립군 북로군정서와 체코군 간에 무기 매수계약이 이뤄졌습니다. 9000명의 ‘인간사슬’로 연결해 운반해온 이 무기들이 10월 ‘청산리 전투’ 승리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체계적으로 훈련된 군대와 식량과 의복을 지원한 우리 겨레 모두가 독립군이었고 승리의 주역이었습니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맞아 국민들과 함께, 3·1독립운동이 만들어낸 희망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싶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해외동포 여러분, 오늘 저는 온 국민이 기뻐할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이끈 평민 출신 위대한 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드디어 국내로 모셔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계봉우·황운정 지사 내외분의 유해를 모신 데 이어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하며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과 함께 조국으로 봉환하여 안장할 것입니다. 협조해주신 카자흐스탄 정부와 크즐오르다 주 정부 관계자들, 장군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주고 묘역을 보살펴오신 고려인 동포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독립운동가 한분 한분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우는 일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를 열어갈 힘을 키우는 일입니다. 정부는 독립운동가들의 정신과 뜻을 기리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해나갈 것입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이 우리에게 국가의 존재가치를 일깨우고 선열의 애국심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왔습니다. 지난해 우리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목표로 ‘소재·부품·장비의 독립’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함께 하면 해낼 수 있다는 3·1독립운동의 정신과 국난극복의 저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 우리는 단합된 힘으로 역량을 길렀습니다. 무상원조와 차관에 의존했던 경제에서 시작하여 첨단제조업 강국으로 성장했고, 드디어 정보통신산업 강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지금도 온 국민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를 이겨낼 수 있고, 위축된 경제를 되살릴 수 있습니다. 우한의 교민을 따뜻하게 맞아주신 아산·진천·음성·이천 시민들과 서로에게 마스크를 건넨 대구와 광주 시민들, 헌혈에 동참하고 계신 국민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전주 한옥마을과 모래내시장에서 시작한 착한 임대인 운동이 전국 곳곳의 시장과 상가로 확산되고 있고, 은행과 공공기관들도 자발적으로 상가 임대료를 낮춰 고통을 분담하고 있습니다. 대기업들은 성금을 내고 중소 협력업체에 상생의 손을 내밀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방호복으로 중무장한 채 격리병동에서 분투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나누고 희망을 키워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존경과 감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에 이어지고 있는 응원과 온정의 손길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저력입니다. 전국에서 파견된 250여명의 공중보건의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모인 많은 의료인 자원봉사자들이 자신의 건강을 뒤로한 채 대구·경북을 지키고 많은 기업들과 개인들이 성금과 구호품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대구·경북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대구시와 경상북도와 함께 정부는 선별진료소와 진단검사 확대, 병상확보와 치료는 물론, 추가 확산의 차단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국민들께서 힘을 모아주실 것이라 믿으며 반드시 바이러스의 기세를 꺾는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부는 위기경보를 최고 단계인 ‘심각’ 단계로 올려 전방위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비상경제 시국’이라는 인식으로 경제 활력을 되살리는데도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소상공인·중소기업, 관광·외식업, 항공·해운업 등에 대한 업종별 맞춤형 지원을 시작했고, 보다 강력한 피해극복 지원과 함께 민생경제 안정, 경제활력 제고를 위한 전례 없는 방안을 담은 ‘코로나19 극복 민생·경제 종합대책’도 신속하게 실행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비비를 적극 활용하고 추경 예산을 조속히 편성해 국회에 제출하겠습니다. 국회에서도 여야를 떠나 대승적으로 협조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방역의 주체’입니다. 서로를 신뢰하며 협력하면 못해낼 것이 없습니다. 안으로는 당면한 ‘코로나19’를 극복하고 밖으로는 한반도 평화와 공동 번영을 이뤄 흔들리지 않는 대한민국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독립이며 새로운 독립의 완성입니다. 정부가 앞장서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단합으로, 위기에 강한 우리의 저력을 다시 한번 발휘합시다. 국민 여러분, 지금 세계는 재해와 재난, 기후변화와 감염병 확산, 국제테러와 사이버 범죄같은 비전통적 안보위협 요인들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한 국가의 능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우리는 이번 코로나19의 국제적 확산을 통해 초국경적인 협력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3·1독립선언서에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통합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평화와 인도주의를 향한 노력은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정신입니다. 북한은 물론 인접한 중국과 일본, 가까운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해야 비전통적 안보 위협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북한과도 보건 분야의 공동협력을 바랍니다. 사람과 가축의 감염병 확산에 남북이 함께 대응하고 접경지역의 재해재난과 한반도의 기후변화에 공동으로 대처할 때 우리 겨레의 삶이 보다 안전해질 것입니다. 남북은 2년 전, ‘9·19 군사합의’라는 역사적인 성과를 일궈냈습니다. 그 합의를 준수하며 다양한 분야의 협력으로 넓혀 나갈 때 한반도의 평화도 굳건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이웃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침략행위에 무력으로 맞섰지만, 일본에 대한 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함께 동양평화를 이루자는 것이 본뜻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3·1 독립운동의 정신도 같았습니다. 과거를 직시할 수 있어야 상처를 극복할 수 있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과거를 잊지 않되, 우리는 과거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 또한 그런 자세를 가져주길 바랍니다. 역사를 거울삼아 함께 손잡는 것이 동아시아 평화와 번영의 길입니다. 함께 위기를 이겨내고 미래지향적 협력 관계를 위해 같이 노력합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해외동포 여러분, 우리는 국가적 위기와 재난을 맞이할 때마다 ‘3·1독립운동의 정신’을 되살려냈습니다. 단합된 힘으로 전쟁과 가난을 이겨냈고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이뤄냈습니다. 코로나19는 잠시 우리의 삶을 위협할 수 있지만 우리의 단합과 희망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억압을 뚫고 희망으로 부활한 3·1독립운동의 정신이 지난 100년, 우리에게 새로운 시대를 여는 힘이 되었듯, 우리는 반드시 코로나 19를 이기고 우리 경제를 더욱 활기차게 되살려낼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와 희망입니다. 우리 모두 서로를 믿고 격려하며 오늘을 이겨냅시다. 새로운 100년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갑시다. 감사합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문 대통령 “코로나19 극복, 한반도평화 이뤄야 새로운 독립”

    문 대통령 “코로나19 극복, 한반도평화 이뤄야 새로운 독립”

    “북한과 보건 공동협력… 9.19합의 확대해야” “일본과 과거 잊지 않되, 과거 머물지 않을 것” 문재인 대통령은 1일 3·1 독립운동 정신과 국난 극복의 저력을 되새기고 “함께 하면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라며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극복을 위한 ‘단결’을 호소했다. 문 대통령은 서울 배화여고에서 열린 3·1절 101주년 기념식에서 “비상한 시국에 3·1절 기념식을 열게 됐다”며 “1951년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외환위기가 덮쳐온 1998년에도 지난 100년간 우리는 단 한 번도 빠짐없이 3·1 독립운동을 기념하며 단결의 ‘큰 힘’을 되새겼다”고 강조했다. 통상 3·1절 기념사가 대일 메시지에 집중된 것과 달리 문 대통령은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단합에 초점을 맞췄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우리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목표로 소재·부품·장비 독립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함께하면 해낼 수 있다는 3·1 독립운동의 정신과 국난 극복의 저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지금도 온 국민이 함께하고 있다. 코로나19를 이겨낼 수 있고, 위축된 경제를 되살릴 수 있다”고 밝혔다.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키워드로 ‘단결’을 제시한 문 대통령은 우한 교민을 품어준 아산·진천·음성·이천 시민과 서로에게 마스크를 건넨 대구·광주 시민들, 헌혈 동참, 착한 임대인 운동, 대기업의 상생 노력, 의료진의 헌신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특히 문 대통령은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한 대구·경북을 거론하고 “대구·경북에 이어지고 있는 응원과 온정의 손길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저력”이라며 “대구·경북은 결코 외롭지 않다”고 했다. 이어 “더 많은 국민들께서 힘을 모아주실 것이라 믿는다”며 “반드시 바이러스의 기세를 꺾는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문 대통령은 또한 “안으로는 당면한 코로나19를 극복하고, 밖으로는 한반도 평화와 공동 번영을 이뤄 흔들리지 않는 대한민국을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한 독립이며 새로운 독립의 완성”이라며 코로나19와 같은 비전통적 안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3·1 독립선언서에 나온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통합의 정신’이 절실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북한과도 보건 분야의 공동협력을 바란다”며 “2년전 9·19 군사합의를 준수하며 다양한 분야의 협력으로 넓혀 나갈 때 한반도의 평화도 굳건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과거를 직시할 수 있어야 상처를 극복할 수 있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며 “과거를 잊지 않되, 우리는 과거에 머물지 않을 것이며 일본 또한 그런 자세를 가져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아울러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주역인 홍범도(1868~1943) 장군 유해를 카자흐스탄에서 국내로 송환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가 한분 한분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우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문 대통령, 삼일절에 “홍범도 장군 유해 국내로 모셔오게 됐다”

    문 대통령, 삼일절에 “홍범도 장군 유해 국내로 모셔오게 됐다”

    文 “독립운동가 기억은 긍지 일깨우는 일… 최고 예우로 보답” 北 평양 출신 홍범도, 항일무장투쟁 선봉 서봉오동·청산리 전투서 일본군에 대승 거둬카자흐스탄서 생 마감…文, 유해 봉환 요청문재인 대통령은 삼일절(3·1절)인 1일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이끈 평민 출신 위대한 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드디어 국내로 모셔올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북한 평양 출신의 홍 장군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와 연해주 등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해 항일무장투쟁을 이끌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인물이다. 광복이 되기 전인 1943년 10월 카자흐스탄에서 75세로 사망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배화여고에서 열린 제101주년 3·1절 기념식에서 “저는 온 국민이 기뻐할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면서 “지난해 계봉우·황운정 지사 내외분의 유해를 모신 데 이어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하며,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과 함께 조국으로 봉환해 안장할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카자흐스탄 국빈방문 당시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을 만나 현지에 묻혀 있는 홍 장군의 유해봉환을 요청했었다.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가 한분 한분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우는 일”이라면서 “정부는 독립운동가들의 정신과 뜻을 기리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문 대통령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맞아 국민들과 함께, 3·1독립운동이 만들어낸 희망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싶다”면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이 우리에게 국가의 존재가치를 일깨우고 선열의 애국심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홍 장군의 항일 업적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1919년 한 해에만 무려 1542회에 걸친 만세 시위운동으로 전국에서 7600여명이 사망했고, 1만 6000여명이 부상했으며, 4만 6000여명이 체포 구금됐다”면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일제 탄압이 가혹했으나 우리 겨레의 기상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학생, 농민, 노동자, 여성이 스스로 독립과 자강, 실력양성의 주인공이 되면서 오히려 더 큰 희망을 키웠다”고 평가했다. 이어 “자각한 국민의 자강 노력이 이어지면서 1920년 무장항일 독립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무려 1651회나 펼쳐졌다”면서 “그해 6월, 우리 독립군은 일본군 ‘월강추격대’와 독립투쟁 최초로 전면전을 벌여 대승을 거뒀다. 바로 홍범도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로, 임시정부는 이를 ‘독립전쟁 1차 대승리’라 불렀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1920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독립군 북로군정서와 체코군 간에 무기 매수계약이 이뤄졌다. 9000명의 ‘인간사슬’로 연결해 운반해온 이 무기들이 10월 ‘청산리 전투’ 승리의 동반자가 됐다”고 말했다.文 “일본, 과거 직시해야 상처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어” “일본, 언제나 가장 가까운 이웃”문 대통령은 한때 한국을 침략해 많은 살상을 저지른 일본을 향해서도 “일본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침략행위에 무력으로 맞섰지만, 일본에 대한 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함께 동양평화를 이루자는 것이 본뜻임을 분명히 밝혔다”면서 “3·1 독립운동의 정신도 같았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과거를 직시할 수 있어야 상처를 극복할 수 있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면서 “과거를 잊지 않되, 우리는 과거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일본 또한 그런 자세를 가져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원칙을 지키되, 미래지향적인 협력관계도 동시에 구축한다는 기존의 ‘투트랙’ 전략을 거듭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문 대통령은 “역사를 거울삼아 함께 손잡는 것이 동아시아 평화와 번영의 길”이라면서 “함께 위기를 이겨내고 미래지향적 협력 관계를 위해 같이 노력하자”고 말했다. 文 “북한, 보건 분야 공동 협력 바라…한 국가만으로 해결 어려워”문 대통령은 이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와 관련해서 “북한과 보건분야 공동협력을 바란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사람과 가축의 감염병 확산에 남북이 함께 대응하고 접경지역의 재해재난과 한반도의 기후변화에 공동으로 대처할 때 우리 겨레의 삶이 보다 안전해질 것”이라며 이렇게 밝혔다. 문 대통령은 “안으로는 당면한 코로나19를 극복하고 밖으로는 ‘한반도 평화와 공동 번영’을 이뤄 흔들리지 않는 대한민국을 만들어낼 것”이라면서 “그것이 진정한 독립이며, 새로운 독립의 완성”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남북은 2년 전, ‘9·19 군사합의’라는 역사적인 성과를 일궈냈다”면서 “그 합의를 준수하며 다양한 분야의 협력으로 넓혀 나갈 때 한반도의 평화도 굳건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문 대통령은 “지금 세계는 재해와 재난, 기후변화와 감염병 확산, 국제테러와 사이버 범죄같은 비전통적 안보위협 요인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면서 “한 국가의 능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우리는 이번 코로나19의 국제적 확산을 통해 초국경적인 협력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은 물론 인접한 중국과 일본, 가까운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해야 비전통적 안보 위협에 대응할 수 있다”고 전했다. 文 “코로나19 위기, 단합하면 반드시 함께 극복해낼 것” 文, 작년 일본 수출규제 극복 위기 언급“대구경북에 온정의 손길…외롭지 않다”“단합으로 위기에 강한 저력 보여주자”문 대통령은 이날 3·1 독립운동 정신과 여러 차례 국난 극복의 저력을 되새기며 코로나19 사태 극복을 위한 ‘단결’을 호소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외환위기가 덮쳐온 1998년에도 지난 100년간 우리는 단 한 번도 빠짐 없이 3·1 독립운동을 기념하며 단결의 ‘큰 힘’을 되새겼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함께 하면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3·1 독립운동으로 되새긴다”면서 “오늘의 위기도 온 국민이 함께 반드시 극복해 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우리가 ‘소재·부품·장비의 독립’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함께하면 해낼 수 있다는 3·1 독립운동의 정신과 국난 극복의 저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일본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에 불만을 품고 지난해 7월 한국의 주력수출품목인 반도체 핵심 소재 3종에 대해 수출규제를 강화하는 1차 경제 보복을 단행했다. 이후 8월에는 수출 절차를 간소화해주는 수출 우대 국가인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 명단에서 한국을 배제하는 2차 경제 보복을 감행했다.문 대통령은 “코로나19를 이겨낼 수 있고, 위축된 경제를 되살릴 수 있다”면서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한 대구·경북을 거론, “대구·경북 지역에 이어지고 있는 응원과 온정의 손길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저력이다. 대구·경북은 결코 외롭지 않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우한 교민을 따뜻하게 맞은 지역 주민들, 헌혈에 동참한 국민들, 착한 임대인 운동 확산, 은행·공공기관·대기업의 고통 분담, 의료진의 헌신에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했다. 문 대통령은 “더 많은 국민들께서 힘을 모아주실 것이라 믿는다”면서 “반드시 바이러스의 기세를 꺾는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위기경보를 최고 단계인 심각 단계로 올려 전방위로 대응하고 있다”면서 “비상경제 시국이라는 인식으로 경제 활력을 되살리는데도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소개했다.문 대통령은 “우리는 국가적 위기와 재난을 맞이할 때마다 3·1 독립운동의 정신을 되살려냈다”면서 “코로나19는 잠시 우리의 삶을 위협할 수 있지만, 우리의 단합과 희망을 꺾을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는 반드시 코로나 19를 이기고 우리 경제를 더욱 활기차게 되살려낼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어 “단합으로 위기에 강한 우리의 저력을 다시 한번 발휘하자”고 거듭 호소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포토] ‘코로나19 이겨내자’ 북한산 퍼포먼스

    [포토] ‘코로나19 이겨내자’ 북한산 퍼포먼스

    3.1절 101주년을 앞둔 29일 오후 서울 북한산 사모바위에서 독립운동가 복장을 한 멀티암벽산악회 소속회원과 북한산국립공원 특수산악구조대원들이 태극기를 들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20.2.29 연합뉴스
  • ‘코로나 집콕’ 하는 주말 3·1절, ‘친일파 잡기’ 보드게임 어때요

    ‘코로나 집콕’ 하는 주말 3·1절, ‘친일파 잡기’ 보드게임 어때요

    다가오는 삼일절을 겨냥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와 친일파를 소재로 한 게임이 등장했다. 바른 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한 ‘보드게임1945: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보드게임1945)이다. 유야무야 해체된 반민특위의 역사를 다시 되새기고, 게임 속에서라도 반민특위가 성공하는 역사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다.보드게임1945는 세 명의 청년이 모여 개발했다. 보드게임1945를 기획한 바른 엔터테인먼트 권재욱(22)씨는 27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반민특위가 활동한 해방 이후와 전쟁 이전 사이의 시기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중요한 ‘골든타임’이라 생각한다”면서 “이 시기가 역사 교육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웠다”고 말했다. 이어 권씨는 “보드게임1945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역사와 인물들을 알아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권씨에 따르면 프로젝트를 후원한 사람들은 “역사에 묻혔던 독립운동가들을 알게 돼서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보드게임 소재가 된 반민특위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만들어진 제헌국회에서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해 구성한 위원회다. 하지만 친일 행적이 파악된 682건 중 실제 처벌을 받은 사람은 14명에 그쳤다. 반민특위는 결국 1년도 안 돼 해산됐다. 권씨는 “역사적인 부분을 다루는 만큼 제작 과정에서 이념 논란에 휘말릴까 우려가 많았다”면서 “역사는 좌·우나 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온라인·모바일 게임이 주가 되는 게임 시장에서 아날로그식 보드게임을 출시한 점도 눈에 띈다. 보드게임1945는 심리전과 추리를 통해 상대방의 정체를 밝히는 ‘마피아 게임’ 방식을 이용해 긴장감을 더했다. 여기에 해방 이후 반민특위와 친일파라는 역사적 맥락을 입혔다. 권씨는 “간단하게 종이 한 장 펼쳐 놓고 친구들, 가족들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보드게임으로 제작했다”고 말했다. 보드게임1945 프로젝트는 삼일절인 다음달 1일 종료된다. 27일 기준 보드게임1945 프로젝트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 사이트에서 후원금액 800만원을 넘겼다. 목표금액인 300만원의 두 배가 넘는 금액이다. 보드게임1945를 후원한 사람은 총 190명이다. 후원금액 500만원이 넘은 17일에는 게임에 새로운 인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장 여운형이 추가됐다. 권씨는 “역사는 무겁고 어려울 수 있는데 보드게임을 통해 사람들이 더 쉽게 역사를 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 “세계유산등재 막는 건 2015년 한일협상… 진정성 결여 방증”

    “세계유산등재 막는 건 2015년 한일협상… 진정성 결여 방증”

    “우리 증언·활동 보존 마땅… 국제사회 연대 절실 ‘여성인권평화재단’ 설립 법안은 빨리 통과돼야”“처음 증언했던 날이 또렷이 기억나지요. 피해자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참 힘든 결심해서 나섰거든요.” 27일 대구 달서구에서 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 운동가 이용수(92) 할머니는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할머니는 “우리의 증언과 활동이 담긴 일본군 위안부 자료는 마땅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보존해야 한다”면서 “그런데 일본은 우리에게 사죄하지도 않고 세계기록유산 등재마저 방해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 등재는 나의 소원”이라며 “늦었지만 일본은 방해하지 말고 협조해달라”고 촉구했다. 이 할머니는 일본이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막는 것은 곧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의 진정성 없음을 보여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세계가 위안부라는 문제를 알고 있지만 일본은 (위안부가 공창이라는) 거짓말만 하면서 2015년 12월 28일에도 장난이나 다름없는 협상을 타결했다”면서 “아베 신조 총리는 총리답게 행세하고 사람답게 죄를 알아라”고 크게 꾸짖었다. 국제사회의 연대가 절실하다고 이 할머니는 말했다. 그는 “일본이 망언과 거짓말을 쏟아내고 있지만 역사의 산증인인 피해자들이 있다”면서 “그들을 대표해서 나 이용수가 말한다. 국제사회는 일본을 똑바로 보고 꼭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가운데 생존자는 19명뿐이다. 이 할머니는 위안부 운동을 이어 나가려면 정부의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와 국내외 교육과 홍보를 위한 법인 ‘여성인권 평화재단’ 설립을 담은 법안을 발의했지만 20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 할머니는 “위안부 관련 재단이 있어야 세계가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알도록 연구하고 운동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라면서 “우리나라 국회는 왜 이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씨줄날줄] 성직자의 정치 참여/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성직자의 정치 참여/박록삼 논설위원

    문익환(1918~1994) 목사. 고향 북간도 명동촌은 독립운동가들의 전진기지였다. 송몽규(1917~1945), 윤동주(1917~1945) 등과 명동학교에서 일제로부터의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그 학교에서 기독교도가 됐다. 종교가 남녀, 반상, 좌우를 뛰어넘는 구심이었다. 한국전쟁 때 유엔군 통역장교, 교회 목사 등을 지내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죽음으로 시대에 몸을 던졌다. 군부독재정권과 맞서는 모든 현장에 그가 있었다. ‘사법 살인’의 인혁당 사형수와 그의 가족들 곁에 있었고 인천의 노동자들과 함께 울부짖었으며 제 몸을 불태우는 청년들의 잇단 죽음에 통곡하며 함께 싸웠다. 감옥이 집처럼 익숙한 곳이 됐다. 여섯 차례에 걸쳐 17년을 감옥에서 지냈다. 노동해방과 통일, 민주주의는 문익환의 삶 그 자체였다. 문 목사는 어떤 정당에도 몸을 담지 않았다. 어떤 정당도 그의 삶의 가치를 담아낼 만한 그릇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넓은 뜻에서 그는 ‘정치인’이었다. 정치가 국민의 눈물을 닦아 주고, 세상의 변화와 혁신을 만드는 것이라면 어떤 정치인도 ‘제대로 정치를 했노라’ 당당하기는 어려웠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이자 ‘문재인 하야 범국민투쟁본부’ 총괄대표인 전광훈 목사가 지난 24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총선을 앞두고 자유통일당과 기독자유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 혐의다. 당직을 맡지 않았지만 이달 초 창당한 자유통일당은 그가 주도했다. 그는 “세월호 사고 나니 종북좌파들이 추도식한다고 나와서 막 기뻐 뛰고 난리다. 이용할 재료가 생겼다고”라고 발언하거나 “문재인은 지금까지 저지른 죄만 해도 군사법정 같으면 총살당해야 한다”고 했다. 종교인치고는 정치적이고 정파적인 발언들이다. 미래통합당 출범 전인 지난달 31일 심재철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안철수·김문수·전광훈도 통합에 합류해야 한다. 누구든 독자노선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기존 정치권이 이미 그를 정치인이자 보수정치의 파트너로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문 목사의 정치와 전 목사의 정치는 같은 흐름에 있지 않다.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의 원칙은 종교인이 정치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문이 횡행하던 시절에 김수환 추기경은 학생운동권이 숨어든 명동성당에 경찰이 난입하자 그 앞을 막아서며 ‘나를 밟고 가라’고 했다. 5공화국 시절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은 특정 정당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시대의 필요와 정의구현에 성직자로서의 양심과 소명의식이 호응한 것이다. 양심의 가치가 실종된, ‘정치 만능’의 세상에 전 목사와 그의 추종세력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youngtan@seoul.co.kr
  • 2·8독립선언서 국내 반입, 3·1만세 시위… 평생 독립 위해 싸운 ‘열사’

    2·8독립선언서 국내 반입, 3·1만세 시위… 평생 독립 위해 싸운 ‘열사’

    “너희들은 왜 죄 없는 사람을 핍박하느냐.” 취조관의 질문에 김마리아는 되받아쳤다. 왜경은 가죽 채찍과 대나무봉을 휘두르고, 양팔을 엇갈리게 결박해 천장에 매달아 놓고 팽이처럼 돌리며 때렸다. 옷을 벗기고 쇠갈퀴로 가슴을 찌르고 불로 지졌다. 살이 터지고 온몸이 피로 물들었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마리아는 2·8독립선언서를 허리띠에 숨기고 국내로 들어와 고향 황해도로 자금을 모으러 갔다가 3·1운동 소식을 들었다. “여학생들도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마리아는 황에스터, 나혜석 등 11명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3월 5일 서울역광장 등에서 대규모 만세 시위가 벌어졌고 마리아와 모교인 정신여학교 학생들도 목청껏 만세를 불렀다. 다음날 학교에 왜경이 들이닥쳐 마리아를 포승줄로 묶어 끌고 갔다. “선생님!” 학생들은 울부짖었다. 마리아는 고문으로 코와 귀에 고름이 고이는 등 만신창이가 됐다. 지옥 같은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가 그해 7월 24일 증거 부족으로 석방됐다.김마리아는 1892년 7월 11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13살 때 어머니마저 여읜 마리아는 1906년 6월 서울로 가 서울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로 개명)에 입학했다. 마리아의 작은언니 미렴과 오현관·오현주 자매 등은 누룽지를 함께 먹으며 공부했다고 해서 ‘누룽지방 형제’라고 불렸다. 1910년 6월 졸업한 마리아는 모교 교단에 섰다. 정신적 지주였던 교장 루이스는 마리아에게 유학을 권했다. 1915년 5월 마리아는 일본 도쿄여자학원에 입학했다. 졸업이 다가올 즈음 민족자결론이 무르익었다. 1919년 1월 모임에서 황에스터는 “국가의 대사를 남자들만이 하겠다는 것인가”라고 열변을 토했다. 2·8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은 남학생 11명이었지만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는 마리아와 황에스터 등 여학생들도 참석했다.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하는 열혈을 유(流)할지니….”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일본 경찰이 습격해 회관은 아수라장이 됐다. 마리아도 끌려갔다가 풀려났다. ●애국부인회 결사부 만들어 직접 독립운동 3·1만세 시위 주도로 악랄한 고문을 받은 몸에서는 고름이 흘렀다. 그사이 숙부 필순이 이역만리에서 일본인 의사가 준 우유를 마시고 숨졌다. 틀림없는 독살이었다. 마리아는 분루를 삼키며 또 다른 길을 모색했다. 몸도 성치 않은 마리아의 의지는 놀라웠다. 석방된 지 석 달도 안 된 1919년 10월 19일 뜻을 같이하는 여성 16명이 모여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했다. “부녀들도 남자들처럼 혁혁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마리아는 말했다. 마리아는 회장이 되고 시도 지부장을 뽑는 한편 결사부를 만들어 직접 독립전쟁에 참여하고자 했다. 한 달 만에 회원이 2000여명으로 늘어나고 현재 가치로 수억원인 6000원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러던 11월 어느 날 ‘누룽지방 형제’ 오현주가 불쑥 찾아왔다. 오의 안내로 임정 밀사를 자칭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부인회의 활동을 캐묻는 것이었다. 10여일 후 마리아가 수업을 하고 있을 때 종로경찰서 왜경들이 들이닥쳤다. 마리아는 수갑이 채워져 연행됐다. 오현주의 배신이었다. 마리아는 붙잡힌 동지들에게 “어떤 고통을 당해도 비밀을 알려 주지 말자”고 당부했다. 간부들은 포승줄에 묶여 서울역으로 끌려갔다. 그 밀사는 대구경찰서 소속 경찰이었다. 군중은 “여성독립단이여, 용기를 내시오. 대한독립 만세!”라고 외쳤다. 대구로 붙잡혀 간 간부는 52명이었다. 끔찍한 고문이 자행됐고 회장인 마리아에게 더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장작개비를 두 무릎 사이에, 쪼개진 대나무를 두 팔 사이에 끼우고 몸을 빨래 짜듯이 비틀어 댔다. 마리아는 신음도 내지 않고 고통을 견뎌 냈다. 그러자 고무 호수를 코에 끼우고 물을 넣었다. 마리아의 얼굴과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대구 검사국에 송치된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만세 시위 때 심문한 가와무라 검사가 자진 전근을 해온 것이었다. 가와무라가 생년월일을 묻자 마리아는 “서력 1892년…”이라고 했다. “어째서 대일본제국의 연호를 쓰지 않는가”라고 하자 마리아는 “일본 연호를 배운 적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고문에 고문이 더해져 마리아는 몸이 퉁퉁 부었고 정신 이상 증세도 보였다. 일제는 마지못해 병보석을 허가했다. 가와무라는 ‘일본의 국적(國賊)’이라며 징역 5년을 구형했고 1심에서 징역 3년이 선고됐다.●임시의정원 의원 임명… 中서도 항일운동 마리아는 중국 망명을 결심했다. 몰래 병원에서 빠져나와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1921년 7월 21일 중국 땅을 밟았다. 고문 후유증은 여전해 몇 달 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다. 마리아는 1922년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에 임명됐고 대한여자청년회를 조직하는 등 항일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창조·개조·옹호파로 분열돼 있었다. 1년에 가까운 통합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실망스러운 상황에서 마리아는 미국 유학을 선택했다. 1923년 7월 1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건강은 계속 나빠 병석에 눕는 날이 많았다. 힘들게 미주리주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대학 연구학생을 거쳐 뉴욕 컬럼비아대 사범대학원에 진학, 1929년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마리아는 뉴욕에서 황에스터 등 옛 동지를 만나 근화회를 조직했다. 혈혈단신 마리아의 유학 생활은 몹시 고달펐다. 점원, 행상, 보모 등을 전전하며 학비를 벌었다. 연민과 애정을 느끼고 혼인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미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다”며 거절했다.1932년 7월 마리아는 11년의 외국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 땅을 밟았다. 일제는 감시와 협박을 계속하면서 거주지와 직업을 제한했다. 마리아는 다음해 함남 원산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 교수로 부임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해 탄압을 받았고 신학원도 폐교당했다. 악독한 고문의 후유증은 전신을 짓눌렀다. 마리아는 쓰러졌고 1944년 3월 13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제와 맞섰던 52년 인생을 마감했다. 언니 미렴은 유골을 대동강에 뿌렸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열사의 모교 정신여학교는 정신여중고로 바뀌어 1978년 서울 송파구 잠실동으로 이전했다. 종로구 연지동에는 옛 교사(校舍)와 수령 550여년의 교목(校木) 회화나무가 그대로 남아 있다. 교정 한쪽에는 서울보증보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서울보증보험과 종로구청의 노력으로 지난해 회화나무 옆에 열사의 흉상을 건립하고 탐방로를 조성했다.●유품은 치마저고리·수저 한 벌이 전부 잠실종합운동장 옆 정신여중고 교정에 들어서면 또 다른 흉상과 ‘김마리아관’(대강당)이 눈에 들어온다. 교장실에서 만난 최성이 정신여고 교장은 “열사는 평생 독립운동을 했고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원”이라면서 “사단법인 김마리아기념사업회 주도로 추모 사업을 펴고 있는데 업적에 비해 낮은 훈격을 높이려는 노력이 무산돼 아쉽다”고 말했다. 한평생 외롭게 살다 간 열사의 유품은 치마저고리와 수저 한 벌이 전부다. 그런데 치마저고리를 자세히 보면 오른쪽 섶 길이가 짧다고 한다. 최 교장은 “고문으로 열사의 한쪽 가슴이 없어져 양녀 배학복이 한쪽 섶을 짧게 해서 손수 만들어 드린 한복”이라고 설명했다. 몇 안 되는 유품은 강당 1층의 작은 공간과 동창회 사무실에 전시돼 있다. 숙원 사업인 기념관 건립은 진척이 없다. 그래도 올해 두세 교과서에 열사의 이야기가 실린 것은 성과라면 성과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김용순·김필순·김순애… 일가 대부분이 독립운동 투신

    김용순·김필순·김순애… 일가 대부분이 독립운동 투신

    김마리아 선생의 가계와 정신여학교김마리아의 본관은 광산이다. 18세기 말 현조부 김창주가 조정 정치에 염증을 느껴 고향인 황해도 장연으로 낙향, 버려진 땅을 개간해 대지주 집안이 됐다고 한다. 김마리아 가계에는 부유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항일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몸바쳐 노블레스오블리주를 실천한 이들이 많다. 큰숙부인 김용순(김윤오)은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와 막역한 사이였는데, 서울로 이주해 서우학회라는 애국계몽단체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서북학회로 발전시켰다. 동생 김필순과 김형제상회를 경영하며 국권회복 운동의 본거지로 내놓았다. 김윤오의 외딸인 세라의 딸이 서울여대 총장을 지낸 고황경이다. 김필순은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 7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안창호와는 의형제 사이였고 구한말 독립지사들과 두터운 교분을 쌓으며 구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신민회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하다 소위 105인 사건이 터져 일제의 추적을 받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만주에서는 독립운동가들과 한인들의 진료에 헌신하고 몽골 치치하얼에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다. 김필순의 셋째 아들인 김덕린은 김염이라는 예명으로 20세기 초 상하이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중국의 영화 황제였다. 김염은 제국주의에 맞서는 영화에 적극적으로 출연했다. 고모 김순애(건국훈장 독립장)는 중국으로 망명,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한인여자청년동맹 간부로도 일한 독립운동가다. 그의 남편은 파리강화회의에 민족 대표로 파견된 유명한 독립운동가 김규식(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다. 고모 김필례는 김마리아가 가져온 2·8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을 하고 광주 수피아여고 교감과 교장으로 근무하다 일제에 협력하지 않아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모교인 정신여고 교장과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둘째 고모부 서병호도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김마리아는 결혼을 하지 않아 직계 후손이 없다. 신학문을 배우겠다며 가출해 무작정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을 찾아온 배학복을 수양딸로 맞아들였다. 또 1937년 어느 날 누군가 문밖에 버리고 간 남자아이를 양자로 삼아 태국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키웠다. 그러나 마리아가 죽고 태국이도 어느 목사에게 맡겨졌다가 행방불명이 됐다. 배학복은 인하공대 학장을 지낸 최승만과 결혼했으며, 수년 전 사망했다. 마리아의 모교인 정신여학교 출신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다. 정신여학교는 1887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보낸 선교사 애니 앨러스가 고종이 하사한 주택에서 문을 연 정동여학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95년 연지동으로 학교를 옮겨 연동여학교로 이름을 바꾼 뒤 1903년 연동중학교로, 1909년 정신여학교로 개칭했다. ‘정신 100년사’에 따르면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항일 구국활동에 참여한 정신여학교 출신이 1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1907년 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1922년 14회까지 졸업한 학생이 169명인데 당시 졸업생의 거의 60%가 독립운동과 연관이 있었던 셈이다. 김마리아 외에 유각경, 박순희, 이정숙, 김순애 등 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많다. 특히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간호사 중에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이 많다고 한다. 졸업생 이정숙, 이아주 등이 간호사양성소를 나와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로 일하다 독립운동을 했다. 정신여고 최성이 교장은 “배워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자는 학교의 가르침과 건학 이념이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sonsj@seoul.co.kr
  • 왕따·자폐증 소녀는 어떻게 환경전사가 됐나

    왕따·자폐증 소녀는 어떻게 환경전사가 됐나

    11살 때 대화 끊고 먹는 것도 거부 ‘플라스틱 섬’ 다큐 보고 삶의 전환세상과 소통하지 않던 자폐증 소녀가 어떻게 전 세계인에게 영감을 주는 가장 영향력 있는 10대가 될 수 있었을까. 세계적인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가족이 딸의 성장기와 가족사를 다룬 책을 다음달 출간한다고 가디언이 2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툰베리의 부모인 연극배우 스반테 툰베리와 유명 소프라노 말레나 에른만, 툰베리 자매 등 네 가족이 함께 쓴 책의 제목은 ‘우리 집이 불타고 있다: 위기에 처한 가족과 행성의 모습’이다. 툰베리가 기후변화 위기를 경고하며 비유적으로 쓴 시위 구호를 책 제목으로 쓴 것으로, 여기서 ‘집’은 실제 그들의 가정을 의미한다. “딸이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피아노 치기를 멈추더니, 대화를 끊었다. 그리고 먹는 것도 멈췄다.” 11살이던 툰베리의 이상한 변화를 감지한 에른만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소회했다. 당시 먹는 것을 거부해 10㎏이나 살이 빠진 툰베리는 병원에 입원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부모는 딸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됐다. 툰베리는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했지만, 정신과 진료 결과 자폐증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게 된다.이런 툰베리가 또다시 변화한 것은 그즈음 학교에서 해양쓰레기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플라스틱 섬’을 보고 나서다. 그 뒤로 친구들은 뉴욕이나 베트남을 다녀왔다는 선생님의 여행담에 환호했지만, 툰베리에게는 이산화탄소 배출이 심한 비행기 여행에 불과하게 된다. 에르만은 “딸이 사람들이 외면하던 현실을 본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툰베리는 2018년 기후변화 대책을 요구하는 등교 거부 시위인 ‘학교파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등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툰베리 부모는 거식증을 앓던 딸이 시위현장에 제공된 태국 채식 국수를 국물도 남김없이 다 먹는 등 놀라운 변화를 목격하며 누구보다 든든한 툰베리의 후원자가 됐다. 아마존은 서평에서 “어떻게 툰베리가 전 세계에 ‘반란’을 일으키게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박승원 광명시장, 단재 신채호상 첫 수상… “독립유공자 숭고한 뜻 잊지 않겠다”

    박승원 광명시장, 단재 신채호상 첫 수상… “독립유공자 숭고한 뜻 잊지 않겠다”

    박승원 경기 광명시장이 광복회에서 주관하는 ‘올해의 단재 신채호 상’을 수상했다. 올해 처음 만들어져 1호 수상자다. ‘단재 신채호 상’은 자치행정을 펼치는데 있어 항일 독립운동정신을 적극적으로 선양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장에게 광복회가 감사의 뜻을 담아 수여하는 상이다. 박 시장은 지난해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독립유공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시민과 함께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한 것을 인정받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박 시장은 20일 오전 광복회관 독립유공자실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독립유공자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독립운동 기념사업을 다양하게 마련해 추진하고 있다”며 “오늘 이렇게 뜻깊은 상을 수상해 기쁘며, 앞으로 더욱 책임감을 갖고 특히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독립유공자 희생을 기억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광명시는 지난해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2019년을 ‘역사의 해“로 정하고 각계각층의 시민들로 구성된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시민이 참여하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성황리에 개최했다. 33인 청소년 100일간의 여정 프로젝트를 비롯해 독서골든벨 대회, 4.11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음악회, 100년의 시간여행 등의 기념사업을 추진해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모든 시민들과 함께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갖는 계기를 가졌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을 위한 사업으로 독립유공자 유족 중국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방문과 독립유공자 발자취 책자를 발간했다. 광명시는 지난 1월 반일종족주의 도서를 포함해 역사왜곡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도서에 대해 전수조사를 실시했으며 해당 도서에 대해 열람 및 대출을 제한하고 장서 구성에서 제외했다. 신채호(1880~1936년)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사학자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해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했다.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해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에서 뇌졸중과 동상·영양실조·고문후유증 등 합병증으로 인해 순국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국어사 선구자’ 이기문 교수 별세

    ‘국어사 선구자’ 이기문 교수 별세

    ‘국어사개설’을 쓴 원로 국어학자 이기문 서울대 명예교수가 19일 별세했다. 90세. 고인은 1930년 평북 정주에서 무교회주의 농민운동가 이찬갑(1904∼1974)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2년부터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도서관장을 지냈다. 1961년 출간한 ‘국어사개설’을 비롯해 ‘국어음운사 연구’, ‘한국어 형성사’, ‘국어 어휘사 연구’ 등 국어의 역사, 음운사와 어원론 분야에서 과학적 실증주의에 기반을 둔 선구적이고 독보적인 업적으로 국어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1일. (02)3410-3151.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수염 길러서, 아이 많아서… 中 ‘테러범 수용소’에 갇힌 위구르족

    수염 길러서, 아이 많아서… 中 ‘테러범 수용소’에 갇힌 위구르족

    수용자 311명·친인척 등 2800명 정보 담겨 부모 터키 여행 등 연좌제로 구금되기도 中 “직업 훈련소… 극단주의자만 구금”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에 가족을 두고 2002년 터키로 망명한 로진사 마마토티는 최근 위구르 운동가들이 소셜미디어에 올린 문서에서 2016년 연락이 끊긴 여동생의 근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동생 파템은 중국 정부가 ‘직업훈련소’라고 주장하는 시설에 구금돼 있었다. 정부의 가족계획 정책을 따르지 않고 자녀를 네 명 낳았다는 게 이유였다. 문서엔 파템뿐 아니라 마마토티를 비롯한 온 가족의 사진과 상세한 신상이 기록돼 있었다.CNN 등 외신은 17일(현지시간) 위구르족 탄압을 위해 신장 주민을 광범위하게 감시한 기록이 담긴 중국 정부 문서를 입수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137페이지 분량의 문서엔 전부 신장 남서부 모위(위구르어 지명은 카라카슈)현 출신인 수용자 311명과 친인척 등 주변 인물 2800명 이상의 개인정보가 담겨 있다. 수용 장소와 입소일, 구금 사유, 종교, 배경과 수용자 주변에 대한 평가도 기록돼 있다. CNN은 워싱턴에 있는 공산주의 희생자 기념재단의 중국 전문가를 통해 자료가 중국 정부의 공식 문서임을 확신했다. 자체 조사로 문서에 이름이 올라간 인물 중 337명의 신원도 확인했다. 중국 정부는 신장 곳곳에 설치한 수용소가 훈련 시설일 뿐이며 테러 위험이 있는 극단주의자만 구금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유출된 문서에 따르면 수용자들의 구금 사유는 대부분 중국 현행법으로 처벌하지 않는 것들이다. 예컨대 수감자 중 114명은 너무 많은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25명은 해외여행을 하지 않으면서 여권을 가지고 있어서, 또 13명은 가족이 이슬람 전통을 엄격하게 따른다는 이유로 갇혀 있다. 이슬람식 기도를 했다, 히잡이나 차도르를 썼다, 수염을 길렀다는 것도 죄목이 됐다. 문서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일종의 연좌제를 적용해 수감자의 가족 등 주변인까지 마구 잡아들였다. 이슬람 종교 지도자 이맘으로 활동한 멤티민 에메르는 공산주의 이론을 설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2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아무 죄 없는 그의 세 아들까지 수감됐으며, 이웃의 신상 자료엔 에메르의 전과가 같이 올라가 있다. 마히레 마무트라는 수감자는 2016년 부모와 언니, 오빠가 여행 금지국인 터키를 여행했다는 이유로 붙잡혔다. CNN은 문서 사본을 중국 외교부와 신장 자치 당국에 보내 진위를 확인하려 했지만 아무 응답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독일을 방문 중인 왕이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이날 “외교관이나 언론이 직접 신장을 방문해 진실을 확인하기 바란다”며 “방문한 사람들이 본 것은 모든 민족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사는 모습”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100만명을 가두고 있다는 소위 강제수용소는 100% 소문이며 완전히 가짜뉴스”라면서 “왜 이들이 사실을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중국에 관해 깊은 편견을 갖고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고 했다. CNN은 앞서 왕 외교부장의 말처럼 신장을 방문하려 했지만 현지 당국이 이를 차단했다고 전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파키스탄 ‘제2의 자이나브’ 사건…8세 소녀 성폭행 후 피살

    파키스탄 ‘제2의 자이나브’ 사건…8세 소녀 성폭행 후 피살

    지난 2018년 연쇄 살인범이 6살 소녀를 성폭행하고 살해해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졌던 파키스탄에서 또 다른 아동 성폭행 피해자가 발생했다. 현지 일간 돈(DAWN)은 16일 파키스탄 북서부의 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에서 실종된 8살 소녀가 시신으로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행구 지역의 작은 마을 사로 켈에 사는 소녀 ‘마디하’는 지난 15일 과자를 사러 외출했다가 실종됐다. 가족과 마을 주민들이 소녀를 찾아 나섰지만 어느 곳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가족들은 실종 신고를 접수했고, 경찰은 인근 수풀에서 만신창이가 된 소녀의 시신을 발견했다.현지 경찰은 소녀가 살해되기 전 성폭행과 고문을 당한 것으로 보이며, 총상도 눈에 띄었다고 밝혔다. 몸에는 멍 자국이 분명했으며, 목이 졸린 흔적도 있었다. 시신은 현재 공립병원으로 옮겨져 부검 중이며 결과는 하루 내로 나올 것으로 보인다. 사건이 보도되자 파키스탄 여성 인권운동가인 사마르 민알라 칸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변명은 그만하라! 파키스탄의 어린이들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아동 성 학대는 가정, 거리, 마을,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다. 또 다른 아이가 잔인하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며 분노했다. 이어 ‘마디하를위한 정의’(#JusticeForMadiha) 해시태그로 철저한 조사를 촉구했다. 이번 사건은 2018년 1월 파키스탄 동부 펀자브주 카수르에서 실종 닷새 만에 시신으로 발견된 자이나브 안사리(6)를 연상시킨다.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된 자이나브는 연쇄 살인범에게 끌려가 성폭행과 고문을 당한 뒤 살해된 것으로 드러났다.자이나브 사건 이후 파키스탄 여론은 들끓었다. 2016년부터 2년 동안 카수르 지역에서만 12명의 아동이 성폭행 후 살해됐는데도 조사에 미온적이었던 경찰에게 쌓였던 분노는 자이나브 사건 이후 폭발했다. 거리로 나선 수천 명의 시민은 경찰서로 몰려가 항의 시위를 벌였으며, 정치인의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자이나브의 장례식날에는 200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했으며, 이 과정에서 시민 2명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정치권 역시 들썩였다. 야당은 펀자브주 총리와 법무장관의 사퇴를 촉구했고, 이에 샤리프주 총리는 자이나브의 집을 찾아가 유족을 위로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자이나브를 위한 정의’(#JusticeForZainab) 운동이 전개됐다. 그사이 체포된 범인은 자이나브뿐만 아니라 다른 6명의 어린 소녀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안겼다.사건이 ‘미투’ 운동으로까지 번지자 파키스탄 정부는 일명 ‘자이나브 법안’을 마련하고, 아동 실종 및 성폭행 사건을 전담하는 ‘자이나브 경보 대응 및 복구 기관’(ZARRA)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1월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에 시범 적용되다가, 마디하가 시신으로 발견된 다음 날인 17일 전국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ZARRA는 아동 성폭행 사건의 담당 부서를 조정하고 수사를 촉구할 권한만을 가져 반쪽짜리 법안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법안명에 가해자가 아닌 피해 아동의 이름을 붙인 것 역시 옳지 않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이런 상황에서 자이나브 사건과 유사한 ‘마디하 사건’이 터지자 파키스탄 여론은 경찰의 수사 흐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중국 인권운동가 쉬즈융 코로나19 검역때문에 체포돼

    중국 인권운동가 쉬즈융 코로나19 검역때문에 체포돼

    중국 인권운동가 쉬즈융(47)이 지난 12월부터 숨어있던 중국 남부 도시 광저우에서 경찰의 강화된 코로나19 검역 때문에 체포됐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17일 쉬가 친구들의 집에서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쉬는 푸젠성 샤먼에서 열린 ‘중국의 민주주의적 변화’를 논의하는 집회에 참석한 이후 내내 숨어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쉬뿐 아니라 다른 네 명의 인권운동가 딩자시, 다이 젠야, 장중순, 리잉쥔도 변호사 조력을 받지 못한 상태로 구금됐다. 한 인권운동가는 “쉬가 여러 도시의 친구들 집에 숨어 지내며 시민운동을 계속해왔는데 코로나19의 발생으로 검문·검역이 엄격해지면서 이동이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쉬는 전직 검사이자 변호사인 양빈의 집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쉬의 여자친구도 실종 양은 남편을 포함한 가족들이 모두 경찰에 체포됐으나 지난 16일 쉬를 제외한 자신과 가족들은 심문을 받고 풀려났다고 밝혔다. 양은 자신은 괜찮다고 말했으나 쉬가 지금 어디에 있고, 왜 체포됐는지는 말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소식통에 따르면 쉬는 베이징 경찰에 의해 체포됐고, 양의 가족도 여전히 자택에서 감시를 받는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베이징에서 활동하는 여성운동가인 쉬의 여자친구 역시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메시지를 16일 오전 보낸 직후 실종됐다. 광둥성의 성도인 광저우에서는 개인 재산을 지방 정부가 징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지난주부터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시 체제에 가까운 총력전이 벌어지고 있다. 코로나19 대처못한 시진핑 물러나란 글 써 쉬는 베이징우전대학(北京郵電大学) 강사로 공공질서를 해친다는 혐의로 2013년 체포되어 4년간 구금된 바 있다. 당시 쉬는 2012~2013년 공공의 투명성과 농촌 어린이들의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집회를 열다 체포됐다. 이달 초 쉬는 인터넷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며 물러나야 한다는 내용을 글을 게시했다. 예뒤란 예명으로 활동하는 중국 정치 평론가는 “쉬의 체포는 중국 공산당이 어떤 반대 의견도 허용하지 않으며, 공산당의 집권에 도전하는 어떤 가능성도 차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할복’ 수술 사진 실은 쇼킹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할복’ 수술 사진 실은 쇼킹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한국인 의사로서 처음 개인병원을 연 사람은 박일근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구마모토 의학강습소를 졸업하고 1898년 4월 현재의 서울 청진동에 제생의원을 열었고 이후 무교동과 도렴동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는 황성신문 1899년 3월 7일자에 광고를 냈는데 개인병원 광고의 효시일 것이다. 또 1902년 일본 지케이(慈惠)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안상호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개업의 자격을 취득하고(황성신문 1902년 6월 28일자) 귀국, 1905년 서울 종로3가에 병원을 개업했다. 그는 1919년 고종이 뇌출혈을 일으켰을 때 진료했다. 위 사진은 이관화와 박자혜가 종로에 연 한성종로자혜의원의 대한매일신보 광고다. 특이한 것은 할복(개복) 수술 사진을 그대로 게재했다는 점이다. ‘할복 치료 봉합 사진’이라고 써 놓았다. 개복 수술이 흔하지 않았을 당시에 배를 가르고 수술을 한 뒤 꿰매는 ‘충격적인’ 사진을 과감히 실음으로써 광고 효과를 극대화하려 한 것이다.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 제중원의 후신인 세브란스병원에서 1904년 한국인 조수 ‘백정의 아들’ 박서양(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의 도움을 받으며 에비슨이 수술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남아 있는데 등록문화재 448호로 지정돼 있다. 광고 속의 사진은 한국인이 메스를 들고 수술하는 장면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광고에는 병원 경영주라고 할 수 있는 이관화 외에 쟁쟁한 고용 의사들의 이름도 적어 신뢰도를 높였다. 의사 홍석후는 1902년 관립의학교 3기생으로 입학해 우등으로 졸업하고 세브란스의학교에 편입해 1회로 졸업한 인물로 1929년 학감(현재의 학장)이 됐다. 홍석후는 ‘봉선화’의 작곡가 홍난파(본명 홍영후)의 형으로 동생과 함께 조선정악전습소를 다닐 만큼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홍난파는 반대로 세브란스에 입학했다가 해부학 실습에 질려 음악으로 방향을 바꿔 작곡가가 됐다고 한다. 의사 박계양은 1907년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 교육부를 졸업하고 일본에 3년간 유학한 뒤 1910년 이비인후과를 개업했는데 홍명희와 정인보가 고객이었다고 한다. 정인보는 6·25때 이 병원에 석 달간 숨어 있다 발각돼 납북됐다. 한성의사회 회장 등을 지내고 1970년 88세로 사망했으며 그가 운영하던 한양의원 터의 표석이 서울 낙원동에 있다. 의사 이민창은 한성병원 부속학교를 졸업하고 병원을 열었지만, 일제에 항거해 4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제중원 부인 의생(醫生)으로 표시된 박자혜는 간호사 출신으로 신채호의 부인인 독립운동가 박자혜와는 동명이인으로 보인다. sonsj@seoul.co.kr
  • “‘덕부심’ 갖춘 여성리더 양성 매진… 덕성의 새로운 100년 열겠다”

    “‘덕부심’ 갖춘 여성리더 양성 매진… 덕성의 새로운 100년 열겠다”

    서울의 진산 북한산 아래 다소곳이 자리잡은 덕성여대. 서울의 여느 대학과 달리 평평한 캠퍼스에 나지막한 학사(學舍)들이 어머니 품처럼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이다. 캠퍼스 입구의 대학본부를 지나 안쪽으로 몇 발짝만 옮기면 나타나는 대운동장도 방문객을 따뜻하게 껴안아 주는 것 같다. 대학 캠퍼스가 이렇게 친숙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까 싶어 연신 사방을 둘러보게 된다. 고개를 들면 북한산의 비경이 두 눈을 가득 채운다. 손에 잡힐 듯한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가 덕성의 위상을 말해 주는 듯 우뚝 솟아 있다. 우리나라 여성교육의 주춧돌 역할을 해 온 덕성여대가 올 4월이면 창학 100주년을 맞는다. 독립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인 차미리사(1879~1955) 여사가 1920년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설립한 조선여자교육회가 모태이다. 외국 자본이나 외국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온전히 우리 여성의 열정과 노력으로 세운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어서 덕성여대의 100주년은 그 의미가 클 수밖에 없다. 강수경(52) 총장을 만나 덕성여대가 걸어온 100년과 새로운 도약을 위한 계획을 들었다.-창학 100주년을 축하한다. “덕성여대의 창학 100주년은 우리 민족과 나라에도 큰 의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는 4월 17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100주년 기념식을 시작으로 학술심포지엄, 엠블럼 공모, 차미리사 선생 묘역 정비 등의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올해는 ‘새로운 100년을 향한 재도약’을 주제로 각종 학술행사, 기념행사, 동문참여행사 등을 펼쳐 나갈 것이다.” -덕성여대만의 특성이나 문화가 있다면. “독립운동가인 차미리사 여사가 여성교육을 위해 설립한 학교인 만큼 여성으로서의 자부심과 강한 비판 의식을 덕성의 ‘학풍’(學風)이라고 할 수 있다. 덕성여대의 자부심이란 뜻인 ‘덕부심’을 자랑스러워한다. 학내에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차미리사 여사의 창학이념(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으로 돌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강한 비판 의식은 학교를 100년간 굳건히 지켜 온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학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율이 높고, 민주적이고 투명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초학문에 대한 관심도와 대내외 평가는. “덕성여대는 1987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기 이전부터 인문학과 사회학, 자연과학 등 기초학문에 남다른 관심을 쏟았고, 학문적 업적도 많이 쌓았다. 특히 여대로서는 드물게 약학대학을 비롯해 39개 학과가 개설돼 기초학문에 대한 학생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 왔다고 자부한다. 철학과를 비롯해 국내에 몇 안 되는 미술사학과와 문화인류학과도 개설돼 있을 뿐 아니라 예술대는 동양화와 서양화로 구분해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 2005년에는 타 대학들이 법학전문대학원 설립으로 학부과정을 없애는 추세에서도 덕성여대는 법학과를 신설해 법률 기초지식을 갖춘 여성 인재 배출에 기여하고 학문으로서의 법학을 연구하는 기초역량을 길러 주고 있다. 물론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 전문 법조인이 되려는 학생뿐 아니라 입법관련 기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선택의 폭을 넓혀 주고 있다. 교육부를 비롯해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평가 등 외부평가 기관의 평가가 긍정적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재단의 충실한 재정지원도 한몫하고 있어 덕성의 미래는 아주 밝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앞으로도 계속 여대로 운영할 것인가. “여성교육은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다. 학령인구 감소 등으로 다른 대학들이 신입생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는데 덕성여대는 앞으로도 그런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섬세함, 모성애, 끈기 등 우리 대한민국 여성만이 갖고 있는 장점들을 충분히 발현시킬 수 있는 여성 교육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것이다.” -미래 100년을 향한 청사진이 있다면. “교육혁신을 통해 덕성여대만이 할 수 있는 여성교육의 길을 끊임없이 만들어 나갈 것이다. 덕성성장지수(DGI)를 개발해 입학에서 졸업, 사회진출 후까지 학교가 지원하고 관리해 학생들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도록 하겠다. 아울러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시대적 변화에도 여성이 더 능동적으로 대비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정보통신기술(ICT)과 바이오(BT) 분야를 특성화해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내는 여성 리더들을 양성할 것이다.” -올해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올해부터 사회과학대학과 인문과학대학을 글로벌융합대학으로 통합해 신입생을 선발했다. 공과대학과 자연과학대학은 과학기술대학으로 통합해 역시 신입생을 학과 단위가 아닌 대학 단위로 뽑았다. 신입생들에게 다양한 학문을 접할 기회를 부여하고, 올바른 학과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 제2 전공을 통해 마음껏 학구열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시도는 국내대학 가운데 처음이라고 하니 변화를 향한 성과에 기대를 걸고 있다.” -총장이 직접 강의를 맡았다는데. “지난해 총장으로 선임된 이후에도 법학 관련 과목 강의를 계속했다. 선배로서, 교수로서, 그리고 총장으로서 학생들에게 귀감(모델)이 되고자 했다. 교직원과 학생 모두에게 총장의 권위보다는 혁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학사행정으로 바쁜 게 사실이지만 강의를 통해 학생들과 대화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학기부터는 총장으로서 학사행정에 전념할 생각이다. 대신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과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도록 하려 한다.” -교직원과 학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 내고 있는 비결은. “법학과 교수 시절의 헌법, 행정법, 노동법 등의 강의가 학생들의 욕구를 적게나마 채워 줬다고 본다. 학생들이 필요한 시간에 언제든지 나를 만날 수 있도록 연구실을 항상 개방해 뒀다. 후배 학생들과 거리낌없이 언제나 대화할 수 있는 게 개인적으로도 행복했다. 지난해 총장 직선에서 학생 지지율이 무려 98.3%를 기록해 무척 놀랐다. 학교 발전을 열망하는 덕성인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온몸을 전율케 했다. 그때를 회상하며 남은 임기 동안 학생들과 학교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인권 분야에 남다른 관심을 쏟고 있다고. “법학과가 생기면서 ‘인권과 노동법’ 강의가 개설됐고, 노동 관련 문제와 여성인권에 대해 학생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사회에 나갔을 때 여성이라는 지위에서 오는 부당함, 남성 중심의 문화에 대처하는 법률적 지식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했다. 여성인권 침해에 대한 구제 방법과 법률적 조언을 위해 ‘불어라 휘파람’이란 연재물을 교내 신문에 싣기도 했다. 총장 임기 중에 인권을 특성화한 교양교육을 체계화하고, 인권센터를 통해 전문적인 인권활동가를 양성해 덕성여대가 여성 인권교육의 메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지역사회 활동에 적극적인 이유는. “국가인권위원회 행정심판위원으로 5년째 활동 중이다. 개인의 신념을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제도나 체제 등이 정비돼 있지 않다. 가령 성소수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등에 대한 인권 보장 등에 관심을 쏟고 있다. 특히 우리 대학이 위치한 서울 도봉구에서는 5년 넘게 인권위원장을 맡아 인권조례 제정부터 구민을 위한 인권센터 개소도 이끌어 냈다. 이런 대외 활동이 덕성여대를 여성 인권교육의 메카로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믿고 있다.”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중·고교 6년 동안 매주 시 한 편씩 옮겨 적으며 외웠던 습관이 법학자로 살아온 나 자신에게 많은 힘이 됐다. 덕성여대 학생들은 기본 소양을 갖췄다는 ‘덕부심’이 가득한 만큼 시대변화에도 잘 적응해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글쓰기와 독서 습관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양대학 내 글쓰기센터를 소통역량센터로 확대 개편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본교 학생이 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도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닐 것이다. 우리 학생들은 전공이 무엇이든 덕성을 갖춘 창의적인 지식인, 협력하는 전문인, 실천하는 시민으로 성장할 것이라 믿는다.” yidonggu@seoul.co.kr
  • 화성 만세길 방문자센터 ‘IF디자인 어워드’ 수상

    화성 만세길 방문자센터 ‘IF디자인 어워드’ 수상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경기 화성시가 건립한 ‘만세길 방문자센터’가 ‘IF 디자인 어워드 2020’에서 금상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독일 디자인위원회 주관 ‘2019 아이코닉 어워드’에서 건축 분야 대상(BEST of BEST)을 수상했다. 화성시는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화성 3·1운동 만세길 방문자센터’가 금상을, 로고 디자인(브랜딩)이 본상을 각각 받았다고 11일 밝혔다. 1953년에 시작돼 67년의 전통을 지닌 IF 디자인 어워드는 특정 국가나 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고 철저히 객관적인 평가로 진행돼 IDEA, 레드닷과 함께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한다. 올해는 제품, 커뮤니케이션, 건축 등 7개 분야에 총 7298개의 작품이 출품됐으며, 만세길 방문자센터는 실내건축 부문에서 금상, 만세길 브랜딩은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본상의 영예를 안았다. 지난해 4월 우정읍 화수리에 오래된 구 보건소 건물을 리모델링해 조성된 방문자센터는 만세길의 출발점으로 선열들의 치열했던 투쟁을 함축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첨탑 형태의 외벽에는 화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새겨진 벽돌을 활용해 추모의 의미를 더했다. 또 내부의 오래된 벽 위로 격자형태의 구멍이 뚫린 새로운 벽을 쌓아올려 찾아온 방문객들이 과거와 현재를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본상에 선정된 만세길 브랜딩은 31km에 달하는 만세길과 자유를 향한 만세 동작을 시각적으로 담아낸 로고 디자인으로 안내판과 스토리보드, 책자, 기념품 등에 활용했다. 서철모 화성시장은 “방문자센터는 두 차례의 세계적 어워드에 선정되면서 전 세계에 일제의 참혹한 만행과 화성 3.1운동의 가치를 알리는 첨병이 되었다”면서 “앞으로도 다양한 콘텐츠 개발을 통해 잊혀진 역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나침판으로 삼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번에 수상한 만세길 방문자센터와 브랜딩은 IF 디자인어워드 홈페이지와 모바일 앱에 공유되며, 5월 2일부터 10일까지 열리는 독일 베를린 디자인위크에도 전시될 예정이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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