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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첫 순직 소방관, 80년만에 마지막 출동 순간 AI로 복원

    대한민국 첫 순직 소방관, 80년만에 마지막 출동 순간 AI로 복원

    대한민국 최초 순직 소방관인 고(故) 김영만 소방관의 마지막 출동 순간이 80년 만에 인공지능(AI) 기술로 되살아났다. 소방청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AI로 복원한 고인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영상을 오는 15일 유튜브 ‘소방청TV’에 공개한다고 13일 밝혔다. 1917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김 소방관은 1939년 부산소방서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일본인 소방관들이 귀국하자 소수의 다른 한국인 소방관들과 함께 지역 화재 진압 임무를 이어갔다. 그러나 광복 두 달 뒤인 1945년 10월 27일, 부산의 한 군수품 보급창고 화재 현장에 출동한 고인은 선임 대원으로서 누구보다 앞장서 화재 진압을 하다 폭발 사고로 순직했다. 아들 김정부씨는 “아버지의 모습을 복원해줘서 마음이 뭉클하다”며 “이 영상이 재난 현장에서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소방관들의 값진 희생을 다시 기억하고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복원 영상은 당시 기록과 고증을 토대로 고인이 화재 현장에 출동해 순직하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히 재현했다. 제작은 유튜브 채널 ‘AI 기억복원소’가 맡았다.
  • 광복 80주년 기념 문화 행사로 물드는 ‘독립운동가의 도시’ 성북

    광복 80주년 기념 문화 행사로 물드는 ‘독립운동가의 도시’ 성북

    서울 성북구는 오는 14일 구청 앞 수변활력거점 일대에서 광복 80주년 기념 문화제 ‘다시 찾은 빛으로, 성북의 밤 만세를 외치다’를 연다고 13일 밝혔다. 이번 행사에는 성북문화원, 국민대학교, 고려대학교 인문사회디지털융합 인재양성사업단·글로벌인문학연구원 HK사업단, 서경대학교, 한성대학교, 성북국악협회, 문밖세상 등 구내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해 ‘독립운동가의 도시 성북’의 의미를 높였다. 행사는 ‘다시 찾은 빛’을 주제로 광복 80주년 기념식 및 빛과 역사를 연결하는 문화공연으로 구성했다. 고려대학교 인문사회 디지털융합인재양성사업단의 ‘성북구 독립운동가’를 주제로 한 AI 콘텐츠 시연이 행사의 문을 연다. 이어 변희정 문밖세상 대표의 대형 서예 퍼포먼스, 서경대학교 문화예술센터 재학생의 뮤지컬 공연이 이어진다. 독립운동가 후손 및 선양에 기여한 인물과 단체에 대한 표창 수여 등 의미 있는 시간도 준비했다. 이후 이어지는 문화공연에서는 성북국악협회가 ‘해방가’, ‘배뱅이굿’ 등 국악 공연을 펼치고 국민대학교 금관5중주 ‘오! 브라스’ 및 팝페라팀이 ‘음파(EUMPA)’를 선보인다. 광복을 빛으로 축하하는 미디어파사드와 성북천을 수놓는 수변 빛공연을 이어 진행해 현장을 방문한 시민에게 보다 깊은 감동을 전달할 예정이다. 구는 이번 행사를 앞두고 성북천을 활용해 다양한 여가·문화생활 공간 수변활력거점을 조성했다. 구 관계자는 “광복 80주년 기념 문화제를 계기로 수변활력거점이 시민의 삶과 일상 문화가 함께하는 지역의 대표 거점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구 곳곳에선 광복 80주년을 기념한 특별한 전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11일부터 구청 1층에서는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시 ‘광복 80년, 성북의 독립운동가 80인의 얼굴을 그리다’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구와 성북문화원이 발굴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한성대학교 회화과 재학생들이 초상화를 그리며 함께 준비했다. 전시는 오는 28일까지 이어진다. 오는 15일부터 내달 12일까지는 삼선동 369예술센터에서 독립운동가 80인의 초상화 실물을 1주씩 4회에 걸쳐 순환 전시한다. 구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이육사를 기리는 문화공간 ‘이육사’에서도 ‘펜, 총, 그리고 연대-한용운과 이육사 그리고 성북의 독립운동가들’ 기획전시가 열린다. 전시는 오는 14일부터 11월 29일까지다. 이승로 성북구청장은 “우리 구는 골목골목마다 독립운동가의 삶과 활동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는 독립운동가의 도시”라며 “이번 광복 80주년을 맞아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성북천에서 모두가 함께 광복을 되새기고 연대하는 의미 있는 행사를 준비했다. 많은 시민의 방문과 참여를 바란다”고 말했다.
  • 유관순이 2위…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빌린 ‘광복 위인전’ 1위는

    유관순이 2위…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빌린 ‘광복 위인전’ 1위는

    지난 3년간 시민들이 주요 공공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빌려 간 광복 관련 주제 도서는 안중근(1879-1910) 의사에 관한 그림책인 것으로 나타났다. 13일 국립중앙도서관은 광복 80주년을 맞이해 2022년 8월부터 올해 7월까지 3년간 공공도서관 광복 관련 도서 대출 현황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광복 관련 도서’란 한국십진분류법(KDC) 911.059(고종·순종)와 911.06(일제강점기)으로 분류된 도서 중 독립운동이나 광복을 주제로 한 책이다. 대출 건수 상위 20권 중 16권은 아동서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강점기와 독립의 역사를 어린이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접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가장 많이 대출된 도서는 김향금·오승민 작가의 ‘나는 안중근이다’였다. 안중근 의사의 말과 글을 담은 그림책으로, 해당 기간 대출 건수 총 8274건으로 1위에 올랐다. 2위는 김진·다나 작가의 ‘유관순을 찾아라’였다. 유관순(1902-1920) 열사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책으로, 대출 건수는 총 7866건이다. 3위는 한윤섭·백대승 작가가 쓴 항일 의병 운동 관련 동화책 ‘너의 운명은’(6383건)이 차지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광복 관련 독서 경향의 뚜렷한 변화도 드러났다. 지난 2016년 8월부터 2019년 7월까지의 대출 현황 조사에서는 일본 군함도(하시마) 강제 동원, 일본군 위안부 등 일제강점기의 비극을 다룬 책이 약 35%를 차지했다. 반면 최근 3년간은 독립운동가 등 저항의 역사를 조명한 책의 대출 건수 비중이 60%까지 늘었다. 광복 관련 도서의 대출량은 2019년에 16만 1650건으로 가장 많았다. 2019년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던 해라는 점에서 관련 도서 대출량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와 구글 등 주요 포털사이트에서도 2019년에 ‘광복’ 검색량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나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고 국립중앙도서관은 설명했다. 이현주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정보기획과장은 “이번 분석이 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광복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세대 간 기억과 감동을 함께 나누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 역사 흔적 담긴 33곳 찾아 광복 80돌 의미 되새기자

    역사 흔적 담긴 33곳 찾아 광복 80돌 의미 되새기자

    한국관광공사가 광복 80주년을 맞아 오는 31일까지 국내 여행 정보 플랫폼 ‘대한민국 구석구석’(visitkorea.or.kr)에서 광복절 특집전을 선보인다. 독립운동가의 고귀한 희생과 업적을 기릴 수 있는 역사 유적지부터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명소 등 33개의 뜻깊은 여행지를 소개한다. 광복의 의미를 마음에 새길 수 있는 특별 전시 정보도 모았다. 항일운동의 흔적을 따라가는 도보여행 코스도 선보였다. ▲3·1운동 전개 과정을 따라가는 서울 ▲일제 수탈의 아픔이 서린 곳, 전북 군산 ▲근현대 역사의 흔적을 따라 걷는 부산 코스 등이다. 온라인 이벤트도 열고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소개된 역사 여행지 50여곳 안에 숨겨진 태극기를 찾아서 응모하면 된다. 이벤트는 오는 31일까지 진행된다.
  • 대중문화 이끈 예술인으로, 독립운동가로… 다시 기생을 바라보다

    대중문화 이끈 예술인으로, 독립운동가로… 다시 기생을 바라보다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 3대 여류 시인으로 꼽혔던 황진이와 이매창, 교과서에도 실린 시조 ‘묏버들’의 저자 홍랑. 이들의 공통점은 ‘기생’이다. 기생은 춤이나 노래, 풍류로 잔치의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한 여성을 말한다. 한국교방문화학회 회장인 신현규 중앙대 교수가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권번 기생들의 삶을 통해 ‘기생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연구서를 내놨다. 신 교수는 ‘권번 기생을 말한다’(사진)에서 기생제도는 조선 시대 이전에도 있었지만 조선 시대에 더욱 발전해 자리를 굳히면서 ‘기생=조선 기생’ 공식이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기생은 사회 계급상으로는 천민이었지만 춤과 노래, 시, 서에 능한 예술인으로 대접받은 특이한 존재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타락한 소수의 사이비 기생과 유녀들이 ‘기생’을 참칭하면서 이미지가 왜곡됐다고 신 교수는 비판했다. 책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일제 강점기 기생은 단순히 유흥의 주체가 아니라 배우, 가수, 문학과 예술, 독립운동 현장에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다. 이월화, 복혜숙, 석금성은 조선의 여배우 트로이카를 이룬 기생이었는데, 특히 석금성은 무성 영화, 흑백·컬러 영화, TV 시대까지 섭렵했다. 왕수복, 선우일선, 이화자 등 기생 출신 여가수들은 레코드 산업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이화중선은 판소리사에서 전설적인 명창으로 자리잡았다. 일제 강점기 기생들은 현대 연예인들처럼 방송, 음악,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들을 관리하는 권번은 지금의 연예 기획사나 매니저 역할을 했다고 신 교수는 설명했다. 의열단원으로 활동한 현계옥을 비롯해 김향화, 정금죽, 이소홍처럼 독립운동에 투신한 기생들도 적지 않았다. 또 남녀 차별이 심했던 시절, 남자처럼 당당하게 살겠다며 최초로 단발머리 남장을 하고 학교에 다니다 퇴학당하고 나중에는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든 강향란처럼 일제 강점기 기생들의 삶의 궤적은 다양했다. 신 교수는 1919년 ‘조선미인보감’과 1929년 ‘조선박람회협찬보고서’에 각각 수록된 611명과 511명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생 작명법을 분석하기도 했다. 기명에 ‘날 비(飛)’와 ‘무늬 채(彩)’가 들어간 이들은 춤, ‘비단 금(錦)’은 춤과 창(唱), ‘구슬 옥(玉)’은 창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매·란·국·죽’이 들어간 기생들은 뛰어난 외모에 춤과 창까지 뛰어났으며, ‘춘·하·추·동’이 들어간 이들은 성격이 드세 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진’(眞)이 들어간 기명을 가진 이들은 동기 중 유독 뛰어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라고 한다. 신 교수는 “재주와 끼가 많고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가 하면 안정된 삶을 위해 은퇴를 생각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 했던 기생은 오늘날 연예인의 선조”라며 “기생들은 세상의 흐름을 잘 알고 민감했기 때문에 많은 이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고 설명했다.
  • 광복 80주년… AI로 다시 태어난 독립운동가들

    광복 80주년… AI로 다시 태어난 독립운동가들

    광복 80주년을 사흘 앞둔 12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광복 80주년, 다시 찾은 얼굴들’ 기념전에서 관람객들이 인공지능(AI) 기술로 구현된 독립운동가(왼쪽부터 안창호,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들의 만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 이종찬 광복회장 “역사는 결코 권력의 편 아닌 정의의 편에 있었다”

    이종찬 광복회장 “역사는 결코 권력의 편 아닌 정의의 편에 있었다”

    “피로 쓴 역사를 혀로 지우려 하지 말라.” 이종찬(89) 광복회장은 12일 광복 80주년을 맞는 감회가 한층 새롭다고 했다. 지난해 광복절 행사가 두 쪽으로 갈라질 정도로 갈등의 골이 깊었는데 올해 광복절은 국민 대화합의 장이 될 것이란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1년 전 그 일을 기억하며 “참으로 어두웠다”고 회상한 이 회장은 서울신문과 인터뷰에서 “역사는 결코 권력의 편이 아니라 정의의 편에 있었다”고 힘줘 말했다. 이 회장은 “광복 80주년이 애국지사들이 참여하는 마지막 광복절일 것 같다”며 “광복 90주년까지 건강하시기를 빌지만 좀 무리한 소망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들이 애국선열의 정신을 계승하는 게 가장 큰 임무”라며 “선열들의 애국정신이란 바로 그 어른들이 지킨 우리나라의 정체성”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광복 80주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하셨다. 앞으로 대한민국이 가야 할 방향은. “우리의 독립운동이 나라의 주권을 되찾는 것이라고만 강조하는 데 사실 임시정부 헌장을 보면 민주공화정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일본의 파시즘과 싸웠다. 그러므로 우리 헌법 전문(前文)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말은 결단코 우리는 파시즘을 허용치 않고 부단히 투쟁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민주주의를 지키며 백범 김구 선생의 말씀처럼 남을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남에게 존경받는 문화국가를 만들자는 것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다. 이게 우리의 시작인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얘기가 회자돼선 안 된다”며 특별한 희생을 치른 분에게는 특별한 보상과 예우를 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지원이 시급한가. “이렇게 획기적이고 명시적으로 말한 대통령은 이 대통령이 처음 아닌가.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가 예우법 개정안’(3대 전원 혜택) 논의가 탄력을 받게 됐다. 국가 예산의 한계가 있긴 하지만 대통령의 ‘3대 말씀’의 참뜻이 왜곡되지 않게 반영되기를 희망한다.” -올해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기도 하다. “10여년 전쯤 이스라엘을 방문한 적이 있다. 유대인이 박해받고 학살당한 비극의 현장을 보고자 홀로코스크 박물관을 찾았는데 정문에 ‘용서하자. 그러나 결단코 잊지는 말자’는 글귀가 쓰여 있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학대받고 죽은 자들이 나보다 훨씬 큰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왜 내가 이처럼 왜소할까?’라는 걸 느꼈다. 소름이 돋았다. 학대받은 홀로코스트 전시물을 보는 순간마다 내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일본을 용서한 일이 없었다.” -당시 기억이 생생하신 것 같다. “‘용서야말로 최대의 보복’이란 말이 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우월한 입장이 됐고, 도덕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일본을 용서한다고 알려지면 대한민국이 훨씬 더 우월한 국가로 비춰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단서가 필요하다. 과연 일본이 독일만큼 반성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일본의 지도급 인사들은 아직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고 있다. 만약 독일에서 히틀러 기념비를 참배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나. 과연 ‘용서’라는 말이 통할까. 그래서 고민이 많다.” “우리는 승리의 행진이 한 번도 없었다”탑골공원에서 광화문광장까지 대행진광복군 2지대 군모, 티셔츠에 의지 담아우당의 절명시 ‘가난한 유서’ 마지막 대목“우리 민족 가슴 속 살아 남아있다는 절규”-올해 광복회도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광복회가 국민화합을 위해 어떤 걸 계획하고 있나. “광복이 되면서 우리는 승리의 행진이 한 번도 없었다. 미국의 근시안적인 군정 정책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을 개인 자격으로 입국을 허용했다. 결국 독립운동의 영웅들이 아무런 환영도 받지 못한 채 미 군용기에 실려왔다. 독립영웅들에 대한 이런 홀대가 애국시민에게 한처럼 가슴에 남아 있다. 그래서 광복회는 이번에 광복대행진을 처음 구상하고 광복8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사업의 일환으로 실행하게 됐다. 광복군 2지대 군모를 쓰고 여름이라 군복은 못 입더라도 티셔츠에 우리의 의지를 담아 독립선언의 발상지 탑골공원에서 출발해 광화문광장까지 대행진을 한다. 모든 시민들의 자유 참여를 권한다.” -사무실 앞에 비치된 우당의 절명시 ‘가난한 유서’ 부채가 눈에 띈다. 이 시의 어떤 대목을 자주 인용하시나. “마지막 구절 ‘대한독립 마침내 찾거든 깃발처럼 나부끼는 만세소리, 함성과 눈물과 바람으로 남아…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대목이다. 이 말은 진정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투사들만이 할 수 있는 외침이다. 육신은 죽었지만 그의 독립정신은 영원히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살아 남아 있다는 절규다.” -미래 세대가 꼭 알고 있어야 할 독립운동 정신은 무엇인가. “독립운동 정신은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정을 뼈대로 하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국전쟁을 통해 소위 공산권의 ‘인민민주주의’를 격퇴했고 전세계 자유민주연합국의 가치와 함께 지켜 유엔(UN)군의 일원으로 승리한 것이다. 전쟁의 폐허에서 우리나라가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것도 선열들이 주장하는 우리의 정체성, 다시 말해 민주주주의를 충실히 지켜나가고자 하는 투쟁정신이 있어 가능했다.” -미래 세대에게 기대하는 바는. “비록 우리는 산업화에 늦었지만 정보화에선 선두로 달리자는 국민정신으로 디지털 강국으로 우뚝서게 됐다. 거기에 우리의 젊은 세대가 펼치는 K컬처로 세계를 누비고 있다. 정보화 성공으로 우리가 약간 오만해져서 주춤하고 있는데 인공지능(AI) 시대에도 우리가 다시 선두로 달려야 한다.” -광복의 완성인 평화통일까지는 갈 길이 먼 것 같다. “우리는 한민족, 한국가다. 지금은 당장 통일이 아니더라도 평화적인 교류를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가는 게 중요하다. 남북이 하나라는 정체성을 지키고 경제적 상호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 독립기념관, 담양학교 설립자 송훈 ‘조현묘각운’ 시판 기증받아

    독립기념관, 담양학교 설립자 송훈 ‘조현묘각운’ 시판 기증받아

    독립기념관은 12일 국외 소재 문화유산재단으로부터 독립운동가 고하 송진우(1890~1945) 부친이자 담양학교 설립자인 송훈(1862~1926)의 ‘조현묘각운’(鳥峴墓閣韻) 시판을 기증받았다고 밝혔다. 국외재단은 지난 2024년 일본으로부터 시판 환수 후 올해 광복 80주년과 고하 송진우 서거 80주년을 맞아 독립기념관이 소장처로서 적격이라 판단하여 기증 의사를 전했다고 한다. 기증받은 시판은 2024년 6월 일본 도쿄에서 고미술 거래업체를 운영하는 재일한국인 사업가 김강원 대표가 국외재단에 기증한 것으로,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송진우 부친 송훈이 전남 담양군 창평면 광덕리에 있는 옛 지명인 ‘조현(鳥峴)’에 묘각(묘 앞에 제사 등을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을 새로 지은 것을 기념해 후손이 번창하길 축원하며 지은 칠언율시가 새겨져 있다. 송훈은 개인재산을 털어 신식 학교인 담양학교를 설립했다. 그의 가르침은 아들 송진우에게로 이어져, 일제강점기 송진우가 ‘동아일보’ 창간과 민립대학설립운동, 브나로드 운동 등 교육 운동에 투신에 영향을 끼쳤다. 독립기념관 관계자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일본으로 건너갔던 우리의 문화유산이 독립기념관에 정착하게 되어 의의가 크다”며 “보존 처리를 거친 뒤 여러모로 활용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우리가 되찾은 빛 제대로 반듯하게’···경기도, 광복 80주년 기념식에 국외 독립 유공자 후손 초청

    ‘우리가 되찾은 빛 제대로 반듯하게’···경기도, 광복 80주년 기념식에 국외 독립 유공자 후손 초청

    허위·계봉우·이동화 독립유공자 후손 7명 초청 경기도가 ‘우리가 되찾은 빛 제대로 반듯하게’라는 광복 80주년의 주제에 맞춰, 국외에 거주 중인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8월 15일 수원 경기도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광복절 경축식에 초청한다. 초청 대상은 왕산 허위(1854~1908), 계봉우(1880~1959), 이동화(1896~1934) 선생의 후손들로, 각각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중국에서 거주 중이다. 허위(許蔿) 선생은 을미의병 당시 항일 의병을 소집하고, 을사늑약 이후 전국 각지 의병을 규합한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연천·적성·철원 일대에서 의병을 모아 항일 투쟁했으며, 1907년에는 이인영 선생의 의병부대와 함께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 창의군을 결성해 서울진공작전을 준비했다. 이후 1908년 일제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계봉우(桂奉瑀) 선생은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민족교육과 항일운동을 펼친 대표적인 지식인 독립운동가다. ‘의병전’ 등 항일 관련 글을 독립신문에 발표했으며, 광복 후에도 북한의 귀국 요청을 거절하고 카자흐스탄에 남아 한국어와 한국사 연구 및 교육에 헌신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이동화(李東華) 선생은 의열단원으로서 폭탄 제조 기술을 익혀 항일 무장 투쟁을 이끌었으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6대의 군사조 교관으로도 활동하다 1934년 순국했다.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초청 행사에는 허위 선생의 손자 허 블라디슬라브(75세) 씨, 계봉우 선생의 손녀 계 다찌야나(75) 씨와 그의 가족, 이동화 선생의 외손녀 주용용(68) 씨와 가족 등 총 7명의 후손이 참가한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초청 기간 수원화성, 용인 한국민속촌, 경복궁, 경기도박물관 등을 방문한다. 조병래 경기도 자치행정국장은 “국외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은 선열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우리가 되찾은 빛을 올곧게 계승하겠다는 경기도의 의지를 보여주는 자리”라며 “앞으로도 도민과 함께 올바른 역사 인식을 확산할 수 있는 다양한 광복 기념사업을 지속 추진하겠다”라고 말했다.
  • 그날의 태극기…기억을 펼치다

    그날의 태극기…기억을 펼치다

    짓밟힌 존엄을 다시 일으켜 세웠던 역사를 기억하고 마음을 모으게 하는 항일 문화유산에 깃든 정신이 광복 80주년을 맞아 전국을 물들인다. 특히 최근 배지로 만들어져 주목받은 ‘서울 진관사 태극기’부터 125년 전 제작돼 이역만리에서 나부꼈을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태극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인 ‘데니 태극기’까지 다양한 태극기가 다채로운 전시로 찾아온다. ●덕수궁 돈덕전서 만나는 진관사 태극기 먼저 국가유산청은 12일부터 10월 12일까지 서울 덕수궁 돈덕전에서 근대기 항일 독립유산을 통해 광복의 의미를 조명하는 특별전 ‘빛을 담은 항일유산’을 통해 우리나라 사찰에서 최초로 발견된 일제강점기의 태극기인 진관사 태극기를 선보인다. 2009년 5월 26일 진관사 부속 건물인 칠성각을 해체하던 중 발견된 태극기로 일장기 위에 먹을 덧칠해 만들어졌다. 진관사 태극기는 불교계 등 다양한 계층에서 주도한 독립운동의 양상과 강한 항일의지를 보여 주는 보물이다. 진관사 태극기와 더불어 특별전에는 지난해 7월 일본에서 환수한 의병장들의 결사 항전 기록인 ‘한말 의병 관련 문서’, 지난 4월 고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딸인 구혜정씨가 경매를 통해 환수해 온 안중근 의사의 유묵 ‘녹죽’(綠竹), 대한제국 주미공사 이범진의 외교 일기로, 당시의 외교 활동과 영어 사용 용례 및 표기, 서양에 대한 인식 수준 등 다양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미사일록’,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제연맹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기 위해 편찬한 역사서로, 임시정부의 체계적 외교 전략을 보여 주는 ‘한일관계사료집’ 등이 최초 공개된다. ●역사박물관, 佛 소장 태극기 첫 공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태극기, 함께해 온 나날들’ 전시를 통해 태극기와 관련한 자료 200여점을 오는 11월 16일까지 선보인다. 전시품 가운데 기메동양박물관의 태극기는 이번 전시를 통해 국내에서 처음 선봬 눈길을 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태극기는 자주 국가로서 대한제국의 의지를 보여 준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인 광제호에 승선했던 함장 신순성(1878~1944)이 1910년 국권피탈을 하루 앞두고 몰래 숨겨 뒀던 ‘광제호 태극기’, 1996년 전남 장성 백양사 괘불(대형불화) 보관함에서 발견된 ‘백양사 태극기’,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하이에 세운 임시정부의 의회에 걸었던 ‘임시의정원 태극기’ 등이 전시됐다. ●국립중앙박물관 ‘데니 태극기’ 영상도 국립중앙박물관은 10월 12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대한제국실에서 열리는 전시 ‘광복 80주년, 다시 찾은 얼굴들’을 통해 데니 태극기의 실물을 공개한다. 데니 태극기는 고종이 미국인 외교관 오언 데니(1838~ 1900)에게 하사한 태극기로 2021년 보물로 지정됐다. 현재 남아 있는 옛 태극기 가운데 크기가 가장 크며, 초창기 태극기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열린마당 실감 전광판에서는 전시 기간에 맞춰 콘텐츠 ‘데니 태극기’를 상영한다. 서울 중구 신세계스퀘어에서는 오는 15일까지 10분 간격으로 상영되며, 8월 15일 광복절에는 하루 종일 데니 태극기 게양 영상이 상영될 예정이다.
  • “예쁜 게 장점” 40대 여배우를 국경상황 대응 대변인에 임명한 태국 정부

    “예쁜 게 장점” 40대 여배우를 국경상황 대응 대변인에 임명한 태국 정부

    캄보디아와 국경 분쟁으로 교전을 벌이다 닷새 만에 휴전 협정을 한 태국 정부가 “캄보디아의 가짜뉴스에 반격하겠다”며 담당 기관 대변인에 유명 여배우를 임명했다. 지난 8일(현지시간) 태국 일간 네이션, 방콕포스트에 등에 따르면 태국 국방부는 이날 미스 태국 출신 배우 파나다 웡푸디(49)를 태국·캄보디아 국경상황 임시센터 대변인에 임명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나타폰 나르크파닛 태국 국방부 장관 직무대행은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임명은 말리 소체아타 캄보디아 국방부 대변인의 모든 발언에 신속하게 대응할 여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지난달 24일부터 닷새간 이어진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출동 상황에서 말리 대변인은 캄보디아에 유리한 ‘가짜뉴스’를 유포해 국제 사회에 태국의 평판을 손상시키고 캄보디아 지지를 이끌어내는 ‘얼굴’ 역할을 해왔다고 태국 정부는 보고 있다. 나타폰 대행은 그러면서 “적어도 우리는 캄보디아에 비해 한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고 확신한다. 미스 태국 출신인 파나다 대변인이 (말리 대변인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2000년 미인대회에서 우승한 파나다는 이후 배우, 가수, MC 등으로 활동해왔다. 미국에서 경영학 학사를, 호주에서 국제경영학 석사·경영철학 박사를 취득한 그는 태국 상원 경제·상무·산업위원회 고문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인플루언서와 사회 운동가로서도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파나다는 “국경에서 영토를 지키기 위해 싸운 태국 군인들과 군사 충돌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을 보고 대변인을 맡기로 수락했다”며 “가짜뉴스가 아닌 ‘정확한 정보’를 태국 대중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달 벌어진 무력 충돌로 태국 측에서는 군인 15명과 민간인 14명이 사망하고 군인 230명과 민간인 53명이 부상했다. 캄보디아 측에서도 비슷한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 “대한 독립 만세!”…광주·전남, 광복 80주년 기념행사 풍성

    “대한 독립 만세!”…광주·전남, 광복 80주년 기념행사 풍성

    광복 80주년을 맞아 순국선열의 희생을 기리고 독립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채로운 행사가 광주·전남 전역에서 펼쳐진다. 광주시는 오는 15일 오전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 일대에서 ‘봉오동 전투 물총축제’를 연다. 1920년 홍범도 장군이 지휘한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던 봉오동 전투를 물총놀이 형식으로 재현하는 행사다. 참가자들은 우비를 입고 팀을 나눠 물총 ‘전투’를 벌이며 선조들의 독립정신을 기린다. 사전 신청은 고려인마을 누리집에서, 현장 접수도 가능하다. 물총·우비·태극기를 지참하면 된다. 같은 날 광주 북구 중흥동 다목적홀 스테이지(STA·G)에서는 ‘제80주년 광복절 경축행사’가 열린다. 독립유공자·나라사랑 유공자 포상과 기념공연이 진행되며, 경축식에 앞서 상무시민공원에서는 월남전 참전기념탑 부지 지정 기념행사도 예정돼 있다. 문화행사도 이어진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은 광복절 오후 3시 예술극장 2관에서 독립운동가 박열의 삶을 조명한 ‘뮤지컬 박열’을 무대에 올린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 내 조선인 학살 사건과 일왕 암살 모의 사건을 둘러싼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실화를 바탕으로, 전통예술과 현대 무대를 결합해 저항정신을 예술적으로 풀어냈다. 다음날(16일) 오후 2시에는 ACC 문화정보원 극장3에서 배우 이제훈·최희서 주연의 영화 ‘박열’을 상영한다. 전남도청 갤러리에서는 오는 24일까지 ‘빛을 되찾은 날, 광복 80주년 이야기’ 특별전이 열린다. 독립기념관 소장 전시물 30여점을 통해 3·1운동과 일제강점기 민족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광복군 활약 등을 조명한다. 순천만생태문화교육원은 13~14일 ‘의(義)교육’ 축제를 개최한다. 전남지역 학생들이 기획·참여하는 행사로, 배움·공론·공유 3개 주제를 중심으로 의교육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돌아본다. 합창 공연과 학술 프로그램, 초·중·고 학생이 참여하는 민주·역사 골든벨, 40여개 전시·체험 부스가 운영된다. 행사에는 학생·교직원·학부모·지역민 등 2000여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 수원박물관, 광복 80주년·김세환 서거 80주기 ‘다시 만난 민족대표 김세환’ 기획전

    수원박물관, 광복 80주년·김세환 서거 80주기 ‘다시 만난 민족대표 김세환’ 기획전

    수원박물관이 광복 80주년과 수원 독립운동가 김세환 서거 80주기를 맞아 8월 15일부터 12월 7일까지 특별기획전 ‘다시 만난 민족대표 김세환’을 개최한다고 11일 밝혔다. 수원 출신 독립운동가인 김세환(1889~1945)은 3·1운동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이다. 전시회는 민족대표 김세환과 수원 3·1운동, 수원의 미래를 위해 힘쓴 교육자 김세환, 다양한 사회운동으로 수원을 지킨 어른 김세환, 다시 만난 민족대표 김세환 등 4부로 구성된다. 수원의 독립운동과 근대교육을 이끌었던 김세환 관련 유물 50여 점과 AI(인공지능) 제작 콘텐츠 30여 점을 전시해 치열했던 김세환의 삶을 소개한다. 특히, AI로 구현한 김세환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장 차림의 김세환이 현재의 매형여자정보고등학교(구 삼일여학교) 학생들과 환하게 웃으며 찍은 기념사진 콘텐츠도 볼 수 있다. 수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김세환은 수원 3·1운동을 청년들과 주도했고,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 독립 만세운동을 확산시켰다. 일제의 강제 병합에 대한 부당함을 느낀 그는 민족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항일 투쟁에 나섰다. 민족대표로서 옥고를 치른 후에는 수원의 교육과 사회운동에 전력했다.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았지만, 한 달 만인 1945년 9월 26일 서거했다. 수원박물관 관계자는 “이번 특별기획전은 수원 독립운동가들의 과거와 AI로 복원된 현재의 모습을 만나 광복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전시”라며 “광복 80주년 ‘당당한 대한민국, 빛나는 수원’을 만드는데 시민들과 함께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 광복 80주년 맞아 경기도청, 공공기관에 ‘광복군 태극기’ 게양

    광복 80주년 맞아 경기도청, 공공기관에 ‘광복군 태극기’ 게양

    경기도가 제80주년 광복절을 기념해 17일까지 일주일간 경기도청과 산하 공공기관 45곳에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광복군 태극기)’를 게양한다. 광복군 태극기는 1945년 당시 광복군 제3지대 2구대에서 활동한 문웅명이 간직한 태극기로, 바탕에 결의를 다지는 글귀와 서명이 빼곡히 적혀 있다. 현재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 소장돼 있으며, 나라 사랑과 자유에 대한 굳건한 열망이 담긴 상징물로 2008년 국가등록문화재 제389호에 지정됐다. 경기도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국권 회복의 의미를 되새기고 광복절을 경축하기 위해 광복군 태극기 게양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경기도는 15일 ‘우리가 되찾은 빛 제대로 반듯하게’를 주제로 수원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80주년 광복절 경축식을 열 예정이다. 행사는 미디어 퍼포먼스와 창작 뮤지컬 공연 등으로 진행되며, 3월 1일부터 광복 80주년 기념으로 추진한 올해의 독립운동가 80인 중 아직 공개하지 않은 마지막 세 명의 독립운동가를 공개할 계획이다.
  • “대한독립 만세” 울려 퍼진 서울광장… 태극기 언덕 오르고 광복 되새긴다

    “대한독립 만세” 울려 퍼진 서울광장… 태극기 언덕 오르고 광복 되새긴다

    태극기 공방 등 4곳 스탬프 투어무궁화 페이스 페인팅 등 체험도이시영 등 독립지사 150명 소개 “대한독립 만세!” 지난 9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우렁찬 목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우리 기술력으로 한반도를 달린 첫 열차 ‘해방자호’를 본뜬 독립운동 기록 전시관 ‘광복열차’에서 김영운(72)씨와 시민들이 외친 함성이었다. 이곳은 80년 전 광복절처럼, 81.5㏈을 목표로 독립을 외치며 당시 해방감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김씨는 “어릴 적 광복절이면 ‘독립만세’를 외치고 다녔다”면서 “독립운동가를 들으며 서울의 과거 모습을 보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10일 서울시에 따르면 광복 80주년을 맞아 시는 오는 16일까지 독립운동 역사와 서울의 변화를 살펴보는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서울광장을 단장했다. 태극기언덕·해방자호·KTX-청룡·태극기공방 등 4곳을 체험하는 ‘인증 여행’(스탬프투어) 종이도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의 이름인 경성부에서 서울시로 도착하는 열차의 승차권 모양이다. 무궁화 페이스페인팅 등 체험 행사도 풍성하다. 주말을 맞은 시민들은 직접 태극기로 바람개비를 만들고, 독립에 대한 염원을 형상화한 ‘태극기언덕’에 올라 광복의 의미를 되새겼다. 독립 열사나 일본 순사로 분장한 배우들은 시민들과 참여형 공연을 하며 흥을 돋우기도 했다. 태극기언덕 아래 ‘소원터널’에서 중1·고1 딸과 ‘우리나라 화이팅’이라는 메모를 적어 붙인 한소현(46)씨는 “대한독립만세를 난생 처음 외치고 애국심이 되살아나서 이번 광복절엔 직접 태극기를 게양할 것”이라며 웃었다. 아들 이하준(4)군과 방문한 유슬기(35)씨도 “태극기로 바람개비를 만들며 아들이 역사를 체험하고 있다”고 했다. 곳곳에서 독립을 위해 투신한 이들의 얼굴도 만날 수 있다. 전광판에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핵심 인물인 이시영 선생, 대한광복군으로 활약한 이범석 장군을 비롯해 서울 출신 독립운동가 150명을 소개한다. 서울도서관 ‘꿈새김판’에 걸린 안중근 열사의 ‘단지동맹 혈서 태극기’ 속 태극 문양도 독립운동가의 사진을 조합한 것이다. 태극기를 가슴에 단 손기정 선수가 독립운동가의 응원을 받으며 서울을 뛰는 영상도 인공지능(AI)으로 제작해 상영 중이다. 하예은(10)양은 “광복절은 우리나라가 되살아난 날”이라며 “독립운동가의 얼굴을 보며 감사함을 느낀다”고 했다. 서울시는 ‘해방자호’에 전시된 명단을 비롯해 발굴한 서울 출신 독립유공자의 서훈도 추진 중이다. 현재와 과거 서울을 한장의 사진에 교차한 ‘리포토그래피’ 전시 공간 앞에도 발길이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 당시 동물원과 케이블카가 설치된 창경궁과 복원된 현재, 판자촌과 현재의 아름다운 야경이 대조적인 청계천, 경복궁을 가리던 조선총독부 등이 눈길을 끈다. ‘광복 8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의 조정국 총감독과 김미라 예술감독은 “어린 세대나 외국인까지 서울광장에서 광복 이후 80년 간의 변화를 한 눈에 확인하고, 선조들의 광복에 대한 염원을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 “세월, 사람, 세대 잇는 우체국… 80년 광복의 기억을 배달합니다”

    “세월, 사람, 세대 잇는 우체국… 80년 광복의 기억을 배달합니다”

    기억 콘텐츠·기억 편지로 구성국민과 유공자 후손에게 전달시작은 한국 실상 알린 테일러 “편지는 그 자체로 역사 기록물이자 기억을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우체국이 광복 80주년의 기억을 배달하는 역할을 하려 합니다.” 서울 종로구 사직터널 위 언덕에 자리잡은 우체국공익재단은 우체국 네트워크를 활용해 소외계층을 지원하고 지역사회 발전에 힘을 보태기 위해 우정사업본부가 2013년 설립했다. 재단은 최근 광복 80주년을 맞아 ‘기억배달 우체국’이라는 뜻깊은 공익 캠페인을 시작했다. 김홍재 재단 이사장은 10일 “이번 사업은 기억을 전달하는 것이 곧 기억을 살리는 일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했다”고 강조했다. -기억배달 우체국 사업은 무엇인지. “광복 80주년의 기억과 기쁨을 우체국다운 방식으로 표현해 국민에게 전달하고 국민과 나누기 위해 시작한 캠페인이다. 독립운동을 포함해 광복을 염원했던 기록을 ‘기억 콘텐츠’로 재구성해 소개하고, 독립운동가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 후손들에게 ‘기억 편지’를 보내는 캠페인이다. 지난 5월 취임 직후부터 광복 80주년을 맞아 재단이 할 수 있는 것을 놓고 고민이 많았다.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거듭한 끝에 시작하게 됐다.” -‘기억을 배달한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기억배달’이라는 말에 과거에 대한 존경과 미래의 책임을 담고자 했다. 또 역사적 기억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전달자’ 역할을 우체국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반영돼 있다. 독립유공자의 삶에 관한 기억을 잡지, 인공지능(AI) 영상, 굿즈 등으로 재구성해 국민에게는 ‘기억 콘텐츠’로, 유공자 후손에게는 ‘기억 편지’로 전달하려 한다. 기억의 주인공을 추천받고 지역의 독립유공자도 발굴할 것이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첫 주인공으로 앨버트 테일러를 선정한 이유는. “AP통신원이었던 그는 3·1운동의 실상과 일제의 잔혹한 탄압 실태를 전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했다. 그 통로가 바로 편지였다. 테일러가 대한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던 것처럼 이제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이름과 업적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캠페인을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 돼 500여명이 유족에게 보내는 기억 편지를 쓰는 데 동참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주인공도 선정해 ‘기억배달 시리즈’로 확장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재단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전국 3400여개 네트워크를 활용해 원활한 소통을 이어 주고 있는 우체국이 가장 잘하는 일은 역시 ‘전달’이 아닐까 싶다. 우편을 넘어 사람과 사람, 세대와 세대, 과거와 미래를 이으며 ‘국민과 가장 가까이’에서 국민 편의와 안전을 위한 ‘전달자’로서 책임을 다하려 한다.”
  • ‘이모네’ ‘줩듁쿳’… 들춰낼수록 은밀하게 보냈소[편지에 담긴 좌절과 희망을 다시 읽다]

    ‘이모네’ ‘줩듁쿳’… 들춰낼수록 은밀하게 보냈소[편지에 담긴 좌절과 희망을 다시 읽다]

    日, 독립운동 서신 막으려고 감시수감자 편지엔 ‘통과’ 붉은색 도장문맹 日경찰 고려… 영문·한문 편지 임시정부 ‘한글 무전 암호표’ 완성 일제강점기는 검열과 감시의 시대였다. 일제는 독립운동 관련 정보를 전달하거나 저항 의지를 북돋는 서신 왕래를 막기 위해 검열하고 또 감시했다. ‘광야’, ‘청포도’를 쓴 시인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 이육사는 1932년 6월 경북 영일군(현 포항시)에 살던 8촌 동생 이상흔에게 보낸 엽서에 이렇게 토로했다. “뜻한 바를 뜻한 대로 표현치 못하는 나의 고뇌여. 짐작이나 하여 주겠지?” 그는 두 달 전 대구를 떠나 홀연히 만주국으로 향한 터였다. 펑톈(현재 선양)에서 의열단의 핵심 윤세주를 만난 이육사가 뜻한 바는 무엇이었을까. 넉 달 뒤 그는 난징으로 갔고, 의열단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해 군사교육을 받았다. 일제의 우편 검열을 염려한 이육사로선 뜻한 바를 제대로 밝힐 수가 없는 사정이 있었던 셈이다. 1929년 ‘교원 공산당 사건’은 일제 경찰이 경성사범학교 학생들의 물건을 검사하다가 발견한 편지가 발단이 됐다. 경남에서 교사로 일하던 일본인 조코 요네타로가 옛 제자 조판출에게 보낸 편지였는데 민족차별 교육을 철폐하고 교직원노동조합을 만들자는 내용이 담겼다. 일본인이면서도 조선총독부를 비판하고 독립운동을 옹호했던 나카니시 이노스케는 검열을 거친 편지를 받았던 일을 회고한 적이 있다. 편지 봉투에 ‘閱’(통과), ‘許可’(허가) 같은 붉은인이 굵직하게 찍혀 있었다. “그가 (구속되고 나서) 70여일 후 발신 및 접견 금지에서 풀려나 그리운 바깥세상을 향해 보낸 첫 발신이 나를 향했던 것 같다. 나는 뭔가 수수께끼를 감추고 있는 듯한 그 서신의 봉투를 뜯었다.” 일본 내 노동운동에도 적극 관여했던 나카니시의 지인이 구속되고 예심을 마칠 때까지 면회는 물론 편지를 주고받는 것까지 모두 금지당했고, 예심 이후 편지 왕래는 가능해졌지만 검열을 받아야 했던 당시 실상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나카니시의 증언처럼 감옥에 갇힌 이들이 남긴 편지에는 붉은색 도장이 선명하다. 가령 독립운동가 이중업이 1920년 출옥을 앞두고 아들에게 보낸 편지엔 검열을 통과했다는 붉은색 ‘檢’(검) 직인이 찍힌 게 선명하다. 마찬가지로 광복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총사령을 지낸 박상진이 1918년 ‘친일 부호 처단 사건’으로 투옥된 뒤 공주 감옥에서 동생들에게 보낸 편지 봉투에도 내용을 검열했음을 밝히는 ‘허가’ 직인이 보인다. 감시가 있으면 이를 피하기 위한 대책도 있기 마련이다. 군자금을 담배로 표현하거나, 중국 상하이를 이모네로 지칭하거나, 나비나 꽃 그림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등 다양한 암호와 은어를 사용한 편지가 독립운동가 사이에 등장했다. 이봉창은 일왕 암살을 위해 일본 도쿄에 잠입한 뒤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편지를 보냈는데, 의거 실행을 “물품이 팔린다”고 표현한 대목이 눈에 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활동했던 한시대가 1944년 ‘중국 충칭 우편사서함 95’로 보낸 편지 첫머리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경애하는 김구 선생님께 검열을 피하고 빠른 전달을 위해 영문으로 보냅니다.” 1920년 부산경찰서장 사살 지시를 받은 의열단원 박재혁은 중국인 고서적상으로 위장한 뒤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향했다. 원래 계획은 나가사키에서 시모노세키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연락선을 타는 것이었지만 나가사키에서 쓰시마섬을 거쳐 부산으로 갈 수 있다는 걸 알고 계획을 바꿨다. 그는 상하이로 편지를 보냈다. 한문으로 된 평범한 안부 편지였다. 그런데 끝부분에 이런 글귀가 눈에 띈다. “熱落仙他地末古 大馬渡路徐看多” 이 글귀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죽었다 깨나도 풀 수가 없다.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으면 “연락선타지말고 대마도로서간다”가 된다. 말 그대로 ‘연락선 타지 말고, 대마도(쓰시마섬)로 간다’는 걸 의열단 동지들에게 알린 셈이다. 21세기 시각으로 보면 ‘이게 무슨 암호 편지인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 일본인 경찰들이 대체로 학력 수준이 낮고,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그들로선 운율까지 맞춘 한문 편지를 보고 중국인이 쓴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걸 역이용한 셈이다. 이 편지를 남기고 부산에 도착한 박재혁은 책을 팔러 간 것처럼 꾸며 부산경찰서장을 만난 뒤 폭탄을 터뜨려 거사에 성공한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된 박재혁은 모든 음식을 거부한 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앞서 그는 편지에 “초가을 서늘한 바람에 몸과 마음이 상쾌하니 아마도 많은 수익이 있을 듯합니다”라며 언급한 ‘수익’ 역시 임무 성공을 뜻하는 암호였다. 박재혁이 “그대 얼굴을 다시 보기를 기약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던 말은 그렇게 현실이 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선 암호를 사용해 편지를 주고받곤 했는데, 자음과 모음의 표시를 바꾸는 게 대표적인 방식이었다. 가령 ‘ㅍ’을 ‘ㅈ’으로, ‘ㅗ’는 ‘ㅝ’로 대체하는 건데, 폭발탄이 편지에선 ‘줩듁쿳’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단어가 돼 버린다. 암호 체계는 시간이 갈수록 체계화됐는데 가장 완성된 형태는 일본군에 징병됐다 탈영해 광복군에 합류한 김우전이 완성한 한글 무전 암호표라고 할 수 있다.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던 광복군이 한미 합동 작전을 위해 만든 암호였다. 이 암호는 제작에 도움을 준 미 공군 대위 클래런스 윔스(Weems)의 ‘W’와 김우전의 ‘K’를 붙여 ‘W-K 한글 무전 암호표’로 명명됐다. 이 암호표를 적용해 ‘대한독립만세’를 쓰면 ‘134024300012133400111 4390016153000121741’이 된다.
  • “아들아, 조선을 위한 투사가 돼라”… 피 끓어오르게 한 윤봉길의 편지

    “아들아, 조선을 위한 투사가 돼라”… 피 끓어오르게 한 윤봉길의 편지

    국경을 뛰어넘은 편지히로히토 즉위식 보러 갔던 이봉창한글편지 소지 이유로 유치장 갇혀김규식, 편지·전보·신문사 찾아가유럽 각국에 한국 기사 518회 게재‘조선공산당 사건’ 12명 피고 무죄日변호사 편지 “이것이 나의 의무”치명적인 오해의 편지밀정 조문 간 이회영 부인 오해받아김창숙 ‘절교 편지’에 얼굴 보고 화해김창숙, 옥살이 차남에게 안부 편지해방되고서야 아들 유골 전해 받아3·1운동 가담했던 이미륵 獨 망명편지로 어머니 별세 소식 듣게 돼 편지란 위험한 물건이다. 1928년 히로히토 일왕 즉위식을 보러 갔던 이봉창은 경찰에 끌려가 일주일 동안 유치장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이유는 단 하나, 그가 한글 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충실한 일본 국민이 되려고 노력했던 이봉창은 1932년 1월 일왕을 다시 찾아갔고, 수류탄을 던졌다. 3개월 뒤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군에게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은 두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일본의 침략은 군대와 기차 그리고 우체국과 함께 왔다. 전보와 엽서, 편지는 조선 곳곳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수단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편지는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무척이나 유용한 도구였다. 일제가 공들여 구축한 우편통신망이 독립의 대의를 알리는 ‘틈’으로 작용했다. 또한 사람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편지를 통해 결의를 북돋을 수도 있었다. 만주에 있는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탁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던 안창호와 편지로 독립군기지 건설 관련 정보를 주고받았고,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의사로 활동했던 이태준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김원봉과 의열단 활동을 의논했다. 편지를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멀리 멕시코 이민자들한테서도 독립성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의 편지 속에 대한독립을 위한 열정, 동지나 가족을 잃은 슬픔과 분노, 좌절과 희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서울신문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들이 주고받았던 편지 가운데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과 사연들을 취합해 그들의 열정과 좌절, 광복과 해방을 향한 염원을 되새겨 봤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한국 문제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김규식은 열정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고, 그런 노력 덕분에 1919년 3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유럽 각국 신문에 한국 관련 기사가 518회나 게재될 수 있었다. 당시 한 기록은 김규식의 활동을 이렇게 증언했다. “밤을 새워 가며 편지를 쓰고, 전보를 부치고, 신문사를 찾아다녔다.” 독립운동 무대 자체가 중국과 일본, 미국 등으로 넓어지면서 편지 교류도 국경을 뛰어넘었다. 자연스럽게 대의에 동참하는 외국인들도 늘어났다. 광산기술자로 한국과 인연을 맺은 앨버트 테일러는 1919년 3월 7일 영국에 사는 장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얘기를 길게 쓰다가 끝부분에 자신의 근황을 무심한 듯 전한다. “미국 AP통신 한국 통신원으로 임명됐습니다. 최근까지도 이 일로 매우 바빠서 먼저는 정부 관료들에게 연락하고 또 최근 사망한 한국의 마지막 왕의 국장에 참석했으며, 그리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살피고 그에 관해 기사를 썼습니다.” 테일러가 3·1운동 소식을 전 세계에 알린 수단 역시 편지였다. 테일러는 일본이 설치한 우편 제도를 활용해 3·1운동 상황과 일제의 탄압을 전 세계에 보도했고, 특히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해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공헌했다. 일제를 비판하고 한국인들을 대변하는 변론 활동에 열성이었던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1927년 10월 ‘조선공산당 사건’을 변호해 12명의 무죄 판결을 끌어냈다. 그는 당시 피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설사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당신들이 국가 권력의 위법한 검거와 취조에 항의하는 법정 싸움에 협력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안창호는 1927년 지린성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른 적이 있는데, 그를 구하기 위해 가장 열심히 뛴 사람은 톈진에 있는 난카이대의 설립자인 중국인 장보링이었다. 장보링은 만주 최대 군벌 장쉐량을 비롯해 유력자들에게 많은 친필 편지를 보내 안창호의 신원을 보증하고 “일본의 요구를 수락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한 달이 안 돼 안창호는 석방될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은 극도로 긴장한 채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일제 경찰은 물론 밀정의 감시를 의식해야 했다. 그런 긴장감이 때론 치명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김달하는 중국 베이징에서 독립운동가 행세를 하다가 1925년 ‘다물단’이라는 독립운동단체에 처단된 일제의 밀정이었다. 김달하는 평소 형편이 어려운 독립운동가와 가족들을 도와주며 환심을 샀는데, 그런 사람 중에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도 있었다. 이은숙은 김달하가 죽은 이유도 모른 채 아들 이규창을 데리고 조문을 다녀왔다. 얼마 뒤 우체부가 김창숙이 보낸 편지를 전해 줬다. “우당장(이회영) 내외가 김달하 초종(初終)에 조상을 갔으니 앞으로 절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은숙은 품에 칼을 지니고 김창숙이 묵고 있던 집을 찾아가 격하게 항의했다. 결국 김창숙은 이은숙에게 사과하면서 오해를 풀었다. 얼굴도 보기 싫으니 짧은 편지로 대신하겠다는 김창숙의 분노와 직접 얼굴을 보고 오해를 풀지 않으면 자칫 남편의 생명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느낀 이은숙의 위기감이 교차하는 장면이다. 김달하가 처단된 계기는 사실 김창숙의 폭로였다. 김창숙은 김달하가 자신에게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귀국하라고 회유했다고 증언했다. 오랫동안 증언 말고는 뚜렷한 물증이 없었다. 하지만 21세기가 돼 결정적 증거가 나왔다. 편지였다.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독립운동가 김규흥을 두고 밀정 의혹이 제기된 적이 있다. 1918년부터 2년 동안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으로 일했던 우쓰노미야 다로가 생전에 썼던 일기를 유족들이 2007년 공개했는데 김규흥과 여러 차례 만나 정보를 교환했고 돈도 줬다는 언급이 나왔기 때문이다. 우쓰노미야가 김규흥을 이용한 게 아니라 오히려 김규흥이 우쓰노미야를 역이용했다는 반론도 있어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김규흥이 상하이에서 1919년 12월 우쓰노미야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김달하의 행적이 드러났다. 김규흥은 편지에서 “김달하를 중요한 자리에 써서 큰일을 맡게 해야 합니다. 그를 후하게 대하고 환심을 얻어야 합니다. 김달하에게 활동비 3만엔을 주고 저에게도 2만엔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썼다. 일제강점기는 식민지 백성으로 떨어진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숨 막히는 굴레일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으로 인한 망명과 수감 속에서 이별의 슬픔을 전하는 편지가 끊이지 않았다. 경성의전에 다니며 의사를 꿈꾸던 이미륵은 3·1운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됐다. 이미륵의 어머니는 38세에 어렵게 얻은 3대 독자가 투옥돼 고문받는 것보단 압록강을 건너 망명하는 게 낫다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이미륵은 상하이를 거쳐 1920년 독일에 정착했다. 얼마 안 돼 고국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이미륵은 편지 내용을 담담하게 적는 것으로 훗날 독일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는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마무리 짓는다. “나는 먼 고향에서 첫 소식을 받았다. 내 맏누님의 편지였다. 지난가을에 어머님이 며칠 동안 앓으시다가 갑자기 별세하셨다는 사연이었다.” 생활비라도 벌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잠시 귀국한 이은숙은 이듬해인 1928년 남편 이회영의 편지를 받았다. 급한 사정이 생겨 두 딸인 규숙과 현숙을 홍숙경과 홍숙현이란 이름으로 톈진에 있는 부녀구제원(고아원)에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규숙은 18세, 현숙은 9세였다. 이은숙은 딸들이 이름까지 바꿔 고아원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혼절했다. 1932년 10월 이은숙은 짤막한 편지를 받았다. 지금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데 그곳에서 안정이 되면 편지할 테니 답장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불안해하던 이은숙은 얼마 뒤 딸의 전보를 받았다. “아버님이 다롄 경찰서에서 돌아가셨음. 갈 것인지 통지 바람”이라고 돼 있었다. 그렇게 부부는 영원히 이별했다. 김창숙은 1927년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돼 14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다. 결국 1934년 형집행정지로 출옥해 4년이나 요양을 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독립운동 혐의로 1938년 대구형무소에 갇힌 둘째 아들 찬기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 “오장육부가 터질 듯한” 아픔을 느꼈다. 큰아들 환기가 19세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뒤 둘째마저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김창숙은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네 아비는 꿈이나 생시, 먹을 때나 쉴 때 언제고 오직 네가 무사히 돌아올 것만 바라고 있다.” 김찬기는 1941년 출옥한 뒤 그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했지만 1944년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김창숙은 해방되고 나서야 아들의 사망 소식과 함께 유골을 전해 받았다. 시대가 엄혹하다고 해서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편지만 오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미국 언론인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실제 주인공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 김산은 ‘혁명을 위해 결혼은 포기하겠다’고 함께 맹세했던 김성숙이 “중산대학에 다니는 아름다운 광둥 아가씨”를 만나 “첫사랑이면서 격렬한 연애” 끝에 결혼하자 큰 배신감을 느꼈다. 김성숙은 “네가 아가씨를 알게 된다면 나보다도 훨씬 깊이 빠져들 거야”라고 말했지만 김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랬던 김산이 몇 년 뒤 사랑에 빠졌다. 김산은 곧바로 상하이로 편지를 보냈다. “나는 당신의 낭만적인 난센스를 모조리 용서합니다. 실은 오늘 밤 나는 어느 사람이 저지른 어떠한 일이라도 용서해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김 형이 내게 한 말이 맞았어요.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정확했어요.” 김성숙과 두쥔훼이 부부는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일했지만 해방 뒤 김성숙만 귀국하고 두쥔훼이와 세 아들은 중국에 남으면서 생이별하게 됐다. 냉전에 휩쓸리면서 편지를 주고받을 방법조차 없었다. 김성숙은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고국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남북 사이 편지 교환도 다를 게 없었다. 영화 ‘고지전’에서는 국군과 인민군 병사들이 전투 와중에도 서로 편의를 봐주며 편지를 몰래 전달해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그런 편법조차도 불가능해졌다.
  • 美 25센트 동전에 새겨진 한국계 MZ 인권운동가

    美 25센트 동전에 새겨진 한국계 MZ 인권운동가

    미국에서 한국계 장애인 인권운동가 스테이시 박 밀번(1987~2020·한국 이름 박지혜)의 모습이 새겨진 동전이 11일(현지시간)부터 유통된다. 지난 8일 미 조폐국은 스테이시 박 밀번 쿼터(25센트) 동전을 연방준비은행과 각 주화 단말기로 배송해 11일부터 유통한다고 밝혔다. 이 동전은 미 조폐국의 ‘미국 여성 쿼터 프로그램’ 19번째 디자인이다. 조폐국은 2022년부터 올해까지 여성 선구자들의 업적을 기념해 매년 5개의 쿼터를 발행해 왔다. 이 동전 앞면에는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얼굴이, 뒷면에는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채 전동 휠체어에 앉아 연설하는 밀번의 모습이 새겨졌다. 밀번은 1987년 주한미군이었던 아버지 조엘 밀번과 한국인 어머니 진 밀번 사이에서 3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퇴행성 근육 질환을 앓았던 그는 “너는 다른 아이와 다르지 않다”는 부모의 격려를 들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낙상 사고를 계기로 자신의 몸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걸 인식했다. 이후 그는 장애인으로서 겪은 불편함과 부당함, 개선해야 할 점 등을 개인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고, 글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청소년 장애인 인권 운동가로 주목받았다. 스무살이던 2007년 밀번은 노스캐롤라이나 주정부가 공립 고교 교육과정에 장애인 역사를 포함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밀스칼리지를 졸업한 그는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해 장애인, 유색인종, 성 소수자를 위한 인권 운동에 힘썼다. 2014년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밀번을 지적장애인들을 위한 정책자문위원으로 지명했다. 신장암으로 투병 중이던 밀번은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사회적 약자들에게 마스크 등 긴급 의약품·위생용품을 전달하는 데 앞장서다 건강이 악화됐다. 결국 그의 33번째 생일인 그해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밀번의 동전은 최소 3억개, 많을 경우 7억개까지 발행될 예정이다. 1970년대 발행된 쿼터가 지금까지 통용되는 것을 보면 미국인들은 앞으로 50년 동안 일상생활에서 밀번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올해 쿼터 디자인에는 밀번 외에도 언론인이자 시민운동가 아이다 웰스(1862~1931), 걸스카우트 창립자 줄리엣 고든 로(1860~1927), 천체 물리학자 베라 루빈(1928~2016), 흑인 최초 프로 테니스 선수 알테어 깁슨(1927~2003) 등이 포함됐다.
  • “미국 동전에 첫 한국계 여성 얼굴”…‘박지혜’ 누구?

    “미국 동전에 첫 한국계 여성 얼굴”…‘박지혜’ 누구?

    미국에서 한국계 미국인 장애인권운동가 스테이시 박 밀번(1987~2020·한국 이름 박지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이 11일(현지시간)부터 유통된다. 한국계 인물이 미국 화폐에 등장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0일 미국 연방조폐국은 오는 11일부터 ‘미국 여성 쿼터(25센트) 프로그램’의 19번째 주화로 스테이시 박 밀번을 기념하는 2025년판 쿼터를 발행한다고 밝혔다. 미 재무부 등은 참정권, 시민권, 노예제 폐지, 과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 사회의 발전에 공헌한 여성들을 기리기 위해 2022년부터 4년간 매년 5종의 새로운 뒷면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동전의 뒷면에는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밀번의 모습이 새겨졌다.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밀번은 왼손을 목 근처 가슴에 얹고 오른손은 무언가를 설명하는 듯이 앞으로 뻗고 있다. 선천성 근이영양증을 앓았던 밀번은 기관절개술을 받고 튜브 고정장치를 목에 끼고 활동했는데 동전에는 그런 모습도 담겨 있다. 조폐국은 이 디자인이 “진정성 있는 생각의 교환과 연대의 구축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밀번은 ‘장애인 권리 운동(Disability Justice)’의 기반을 다진 인권운동가였다. 3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미국 내 소수자 인권 옹호에 앞장섰다. 1987년 서울에서 주한미군 아버지와 자영업자이던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밀번은 어린 시절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로 이주, 10대 시절부터 장애인 인권 운동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시작했다. 고교 시절에는 장애 관련 교육과정을 의무화하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법 제정에 핵심 역할을 했으며 주 장애인자립생활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후 ‘장애 정의 프레임워크’를 공동 설립하고 강연과 저술을 통해 장애·성소수자·유색인종의 권리 신장을 위해 힘썼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2014년 그를 지적장애인위원회 정책자문위원으로 임명했다. 2019년에는 노숙인을 지원하기 위해 ‘장애인 정의문화 클럽’을 결성했고, 코로나19 초기에는 노숙인과 취약계층을 위한 위생·방역 키트를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 신장암 치료 중에도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그는 2020년 5월 19일 수술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서른세번째 생일날이었다. 조폐국은 “밀번은 리더이자 비전가, 문제해결자였으며 장애인의 정의를 위한 맹렬하면서도 연민 어린 활동가였다”면서 “젊음과 목적의식, 헌신으로 빛났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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