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운동가들
    2026-03-28
    검색기록 지우기
  • 장관급
    2026-03-28
    검색기록 지우기
  • 부패 의혹
    2026-03-28
    검색기록 지우기
  • 총무과장
    2026-03-28
    검색기록 지우기
  • 각종 의혹
    2026-03-2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933
  • 카터 등 5명 유엔인권상 수상/인권선언 50돌 기념 특별총회

    ◎인종차별 반대 결의안 등 통과 【유엔본부 연합】 세계 인권선언 채택 50주년인 10일 뉴욕의 유엔본부에서는 유엔인권상 시상식과 기념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다. 유엔은 오전 10시 기념 특별총회를 열었다. 밤 11시30분까지 계속된 특별총회는 인권선언 50주년을 기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세계 인권선언문은 이날 250개 언어로 번역돼 게제된 유엔의 인터넷 웹사이트가 개통되기도 했다. 유엔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등 5명의 인권운동가들에게 ‘98유엔 인권상’을 수여했다. 수상자는 스리랑카의 수닐라 마베예세케라,우간다의 안젤리나 아쳉 아티얌,브라질의 호세 그레고리,체코의 안나 사바토바 등. 유엔 인권상은 세계인권선언 20주년이었던 68년에 제정되어 5년혹은 10년마다 수상자를 선정해왔다. 지금까지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국제사면위원회 등이 받았다. 유엔총회는 또 9일 인권운동가 보호를 위한 결의안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잇따라 통과시킨데 이어 인권보호에 대한 유엔의 신념을 재확인하는 결의안을 10일 통과시켰다. 결의안은 수백만명이 권리와 자유를 거부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기본적 인권,인간의 위엄과 가치,남녀평등,국가간 평등에 대한 유엔의신념’을 재확인하고 있다.
  • 피노체트 언제 스페인 법정 설까/英 인도절차 착수 불구

    ◎법정투쟁땐 1∼10년 걸려/스페인선 어제 정식 기소 【런던 AP AFP 연합】 칠레의 전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83)가 스페인의 법정에 서게 됐다. 영국 정부가 10일 스페인으로부터 대량학살,고문,납치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피노체트를 스페인에 인도하는 절차에 착수키로 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치안판사 발타사르 가르손도 이날 피노체트를 대량학살과 테러,고문등 혐의로 정식 기소했다. 스페인 법원의 피노체트 기소는 잭 스트로 영국 내무장관이 피노체트를 스페인으로 인도하기 위한 법적절차에 착수할수 있다고 결정을 내린지 하루만에 취해졌다. 스트로장관의 결정에는 피노체트에 대한 대량학살 혐의가 포함되지 않았으나 가르손 판사의 기소장에는 대량학살 혐의가 들어있다. 가르손 판사는 258쪽의 기소장에서 피노체트는 해외로 망명한 칠레 좌익 운동가들과 남미 대륙 다른 군사독재 정권들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비밀 협력망인 ‘콘도르 작전’에 관련된 최고위급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또 피노체트를 무조건 구금하고 그의 해외자산을 동결할것을 명령했다. 이에따라 피노체트는 11일 오후 런던 중심가 보가(街)에 있는 치안 재판소에 출두해 스페인 당국의 인도요청에 대한 공식 통고를 받게 된다. 영국 정부는 칠레의 현 상원의원이기도 한 피노체트에 대해 상원 재판부가 11월25일 면책특권을 부인하는 판결을 내린 이후 그동안 신병인도 추진여부를 놓고 고심해 왔다. 스토로 장관은 ‘피노체트를 스페인에 인도하는 것이 유럽범죄인 인도협약(ECE)에 따른 영국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피노체트가 당장 스페인의 법정에 서는 것은 아니다. 영국 정부의 결정에 불복하는 법정투쟁을 벌이면서 시간을 끌 것이기 때문이다. 피노체트의 변호인들은 스트로 장관의 결정에 대한 법원의 재심을 요구하고 나선 상태다. 법정 투쟁은 최소 1년에서 심지어 10년 가까이 걸리게 된다. 칠레는 즉각 강력 반발했다. 영국의 결정이 있자 영국 주재 대사를 당장 소환키로 했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도 ‘중대한 실수’로 “정치 지도력의 결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세계 인권단체들은 인권선언 50주년 기념일 최고의 ‘선물’이라고 환영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은 논평을 거부했다. 로빈 쿡 영국 외무장관은 외교적 항의표시로 런던 주재 대사를 소환한 칠레정부에 서한을 보내 양국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길 바란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 제2의 건국 국민 대토론회 중계

    ◎‘제2건국’ 범국민 개혁운동 바람직/밑으로부터의 변화요구 제도권 반영 절실/운동 적극전개 필요성에는 모두 공감 표시/예산·인사원 분산 등 선진국 벤치마킹 필요 7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2의 건국 국민대토론회는 시민단체·학계·경제계 등에서 500여명이 참석해 열띤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제2건국 운동의 필요성에는 공감을 나타냈으며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운동의 성격,과제,정치성,시민단체와의 역할설정 등의 문제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했다. 또 이에 대한 갖가지 대안도 제시됐다. ●주제1 제2의 건국 의제 설정과 추진전략 제2의 건국 기획위원인 韓相震 서울대교수는 주제발표에 나서 “제2의 건국운동은 정부의 홍보 운동이 아니고 국민과 함께 개혁을 하는 운동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제2건국운동의 취지와 7대 개혁지표 등의 주요과제를 설명했다. 韓교수는 “제2건국을 위해서는 정부의 결연한 개혁의지와 밑으로부터의 변화요구를 제도권에 투입시키는 국민운동이 필요하며,정부와 민간세력이 협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徐京錫 시민단체협의회 사무총장은 “제2의 건국운동이 각계의 문제제기로 위기를 맞고 있다”며 “운동을 회생시키려면 이런 비판에 정면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제2건국은 철저하게 순수한 민간주도의 기구가 돼야 한다”며 현재의 기획단을 지원단과 기획단으로 이원화,기획단장은 민간이 맡고 지원단장은 행정자치부장관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론자인 신대균 행정개혁시민연합 사무총장은 “정부가 과도한 의욕을 갖고 정부조직을 앞장세울 때 대규모 동원체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를 표시하고 민간의 자율적 활동을 지원하는데 그칠 것을 주장했다. 정수복 크리스천 아카데미 기획실장은 “제2건국운동의 목표와 좌표가 만들어진 과정을 알 수 없다”며 시민단체가 소외된 아쉬움을 지적하고 “모든 시민단체들이 환경문제를 이슈로 다루고 있는데 환경문제도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해학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공동의장은 “정부가 제2건국운동을 서두르는 바람에 토대가 무시되고 골조부터 마련된 격”이라며 “민간운동지원법을 통과시켜 민간이 참여해 국민공동체 운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韓교수는 이같은 지적들에 대해 “정부는 제2건국운동에서 빠지고 민간단체를 지원해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고 “시민운동가들의 도움도 받아야 하지만 일반시민의 참여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일방적인 시민단체 지원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주제2 제2 건국을 위한 정부 혁신과 정부 참여 토론자인 김광식 21세기 한국연구소장은 정부 혁신문제와 관련,7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김소장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개혁을 먼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소장은 정부개혁에 대한 많은 토론이 있었으나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되지 못한데는 너무 단편적으로 접근됐기 때문이라면서 청사진을 분명히 만들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과학기술의 지원과 사회간접자본의 투자도 있어야 한다. 정부개혁은 정부 역할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강화가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이밖에 ▲예전에는 국가주도의 공업화로 제조업 분야를 집중 육성했으나 이제는 환경·생명 등 신문명산업을 집중육성해야 한다 ▲정부개혁이 실질적으로 성공하려면 공무원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실천전략을 세우고 국민들이 충분히 인식하도록 노력하는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역할 및 개혁 필요성에 대해이계식 기획예산위원회 정부개혁실장은 “케인즈는 국가가 민간 부문의 비효율성과 낭비로 인해서는 망하지 않지만 공공부분의 비효율성과 낭비로 인해서는 망할 수 있다고 했다”면서 예산과 인사권 분산과 관련,선진사회를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창현 한양대 지방자치대학원장은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개혁은 각론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조대학 원장은 “영국 미국 호주 등의 개혁을 접목시키려는 사람들이 많지만 개혁의 단계가 다르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일”이라면서 “외국 개혁과 우리와는 30년 정도의 갭이 있으므로 외국의 신시장주의 보수주의에 현혹돼기보다는 가능한 개혁안 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정부가 해선 안될 일은 규제완화하든지 민영화하든지 정부가 손을 털어야 한다”면서 아울러 지방행정기관의 능력을 제고할 것을 제안했다. 끝으로 주제발표자인 김병준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은 시민단체가 제2건국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데 대해 “목적이 같다고 해서 같이 움직여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면서 “상호견제 균형이 되면서 제기능을 살릴 수 있다”고 시민단체가 동참하지 않고 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주제발표 요지 ◎정부 혁신부터 시작해야 ▲제2 건국운동의 비전과 주요의제(韓相震 서울대교수)=제2건국운동은 개발독재모델의 한계,민주주의와 사회통합,국가개혁을 향한 국민적 열망,냉전해체와 글로벌화를 위해 추진돼야 한다. 제2건국의 총괄적 비전을 제시하고 정부 및 공공부문,경제부문,사회부문을 혁신해야 한다. 3대 실천원칙은 실질개혁의 원칙,국민주체의 원칙,솔선수범의 원칙이다. 정부 및 공공부문 혁신운동부터 시작해 정부의 선도적 노력을 통해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획득해야 하고,이를통해 경제 및 사회부문으로의 확산을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2건국위 추진과정에서 시민집단은 제도권에 참여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며,정부와 정당에 개혁에 앞장설 것을 요구해야 한다. ◎민간운동 돕는일에 국한 ▲제2건국운동의 추진전략(徐京錫 시민단체협의회 사무총장)=제2건국운동은 철저히 비정치적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시 군 구 단위 범국민협의회는 그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이뤄지기 전까지 활동이 보류되어야 하며 청와대 내 제2건국담당업무를 정무수석실에서 분리할 필요가 있다. 제2건국운동은 철저히 순수 민간주도의 자문기구가 돼야 한다. 제2건국위는 민간운동을 뒤에서 돕는 일에 국한돼야 한다. 제2건국위를 살리기 위해서는 제2건국위부터 개혁돼야 한다. 행자부장관이 기획단장이 되는 구조에서 개혁작업은 정부 여당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공무원 개방형 충원제돼야 ▲제2건국을 위한 정부혁신의 방향과 과제(成炅隆 한림대 교수)=정부 혁신의 방향은 독점에서 경쟁으로,규칙 지시 관행 중심에서 임무 성과결과 중심으로,권한의 상위집중에서 하위분산으로,직업공무원제에서 개방형 충원제로 나가야 한다. 정부혁신의 주요 과제는 대형 국책사업의 선정과 집행과정에서 국민 참여를 확대하고,중앙정부 권한을 지방에 대폭 이양하며,특별법적 지위에 있는 반관반민적 단체들의 법적 근거를 제거하고 건전한 시민단체를 육성해야 한다. 또 정부 각 부처에 예산권과 인사권을 부여해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한편 개방형 임용제 계약제 경쟁과 성과에 대한 차등보상제 도입을 통해 직업공무원제의 유연성을 확대해야 한다. ◎과제 마련 시민참여토록 ▲정부개혁과제와 시민단체의 역할(金秉準 경실련 상임집행위원)=국민의 정부출범후 정부개혁은 미진했다. 검찰 경찰등 권력기관의 조직개편이 배제됐고,규제개혁이 지지부진했다. 경찰자치 특별검사제 도입이 보류됐으며,중앙정부 권한의 지방이양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는 기득권 세력이 개혁을 지연시키고 있고,개혁의지를 실천으로 옮길 시민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시민단체는 시민사회를 반영하는 개혁과제를 마련하고,시민을 향한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시민단체와 정부는 간접적이고 느슨한 관계가 바람직하다. 시민단체가 정부가 주도하는 대규모 개혁운동기구의 한 구성원이 되면 정체성이 상실된다. ◎부정부패 예방에 중점을 ▲제2건국과 부정부패추방(金聖在 한신대교수)=국민의 정부 출범후 공직자 사정을 중심으로 이뤄져 온 부정부패 추방운동은 사회 전반에 만연한 총체적 부정부패구조를 개혁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부정부패를 예방적 차원에서 통제하고 적발시 처벌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를 확충해야한다. 또 부정부패 환경을 혁파하고 전사회적인 의식생활 개혁운동을 추진해야 한다. 미국의 공직자 윤리청 등과 같은 독립적인 반부정부패 추진기구 설치를 검토하고 이 기구에 시민의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부정부패 환경을 혁파하기 위해 부정부패 공직자에 대한 정보제공,행정절차의 공개,부정부패고발센터 활성화,지속적인 규제개혁 추진,공직자윤리강화 및 공무원의 인사 및 보수체계를 개혁해야 한다. ◎재산등록 심사강화 필요 ▲부정부패 추방을 위한제도개혁방안(朴元淳 참여연대 사무처장)=공직사회제도개혁은 퇴직공직자 관련 사기업체 취업제한,재산등록 심사강화를 통한 공직자윤리 강화,내부고발자 보호,돈세탁 방지 및 부정이익 몰수 추징제도 등을 포함한 부정부패 방지기본법의 제정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또 예산부정 방지제도와 공직자 윤리강령의 제정이 직접적 제도개혁이다. 간접적 제도개혁은 정보접촉이 쉽도록 정보공개법을 보완하고,감사원 검찰 등 사정기관의 개혁 등을 통한 개혁을 생각할 수 있다. 시민참여를 통한 부정부패 척결방 안은 시민 감사청구제도의 확산,사정기관의 민간위원회 제도 도입 및 일정한 요건을 갖춘 시민단체 활동가에게 시민 옴부즈만증을 부여하는 시민옴부즈만 제도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 10일 세계인권선언 50돌

    ◎전세계 지도자 1,000명 파리에 모인다/유엔본부도 인권운동가 보호 결의안 채택 오는 10일은 유엔(국제연합)이 지난 48년 ‘인류의 마그나카르타(대헌장)’로 불리는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한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지난 50년동안의 인권 발자취를 되짚고 21세기 세계 인권을 새로 정의하기 위해 전세계 지도자 1,000여명이 프랑스 파리의 샤이오 궁전에 모인다.이곳은 50년전 세계인권선언이 최초로 발표된 곳. 유엔본부는 이에 따라 10일 인권수호를 재천명하고 인권운동가들을 보호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는 등 이번주 내내 대대적인 인권캠페인을 벌일 예정이다.7일부터 10일까지 열리는 파리 ‘대회동’에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미얀마 반체제 지도자 아웅산 수지,홀로코스트의 엘리 위젤 등 역대 노벨 평화상 수상자 등이 참가한다. 유엔본부는 또 이날 인권상 수상자를 발표하고 세계인권선언문을 250개 언어로 번역·게재한 새로운 인터넷 사이트를 공개하며 유엔아동기금(UNICEF)이 특별전시회를 갖는 등 유엔은 각종 행사를 열 계획이다.
  • 日軍 학병서 광복군까지(항일독립군 장정따라 6천리:上)

    ◎臨泉 軍訓地서 ‘광복꿈’ 회상/銅山路 日 부대터에 中軍병영/연병장·단층막사 ‘옛 그대로’/끌려간 日 병영탈출 감행 뿌듯 한국 독립유공자협회 회원들이 조국 광복을 꿈꾸며 젊은 날 이역만리에서 피 흘렸던 중국땅을 찾았다.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韓光班) 출신 광복군 초급장교들로 흔히 광복군 마지막 세대로 분류된다. 일본군의 학병으로 끌려왔다가 탈출,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들이 항일투쟁의 족적을 찾아 나선 것은 광복의 참뜻을 지금의 시대 정신으로 승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중국 중부 장쑤(江蘇)성 쉬저우(徐州)에서 쓰촨(四川)성의 충칭(重慶)까지 장장 6,000리길. 일본군 탈출부터 광복군 훈련장,항일 지하공작 거점 등 열하루간 동행했던 이들의 답사 행로를 3회에 나눠 소개한다. ‘마지막 독립군’들의 첫 현장 답사는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시작됐다. 베이징(北京)서 814㎞. 기차로 8시간. 54년전에 거쳐온 길을 더듬기 위해 1시간 남짓한 비행기편도 마다했다. 1944년 2월초. 평양을 출발,기차에 강제로 실려 닿은 곳은 일본군과 중국군이 대치하던 최전방 쉬저우. 7월까지 쉬저우와 슈저우(宿州),푸양(阜陽)일대 전선에 배치됐던 이들은 그해 3월부터 7월까지 하나둘 일본병영을 탈출했다. “일본군이 되어 동포들의 가슴에 총을 겨누느니 차라리 탈출하다 죽기로 했다”고 50여년전 결의를 회상했다. “상당수는 우선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를 찾아가기로 했었습니다” 회고담은 이어졌다. 당시 쉬저우 주변에선 일본군이 밀집해 있었고 중국으로 끌려온 ‘조선학병’ 3,000여명의 대부분도 부근에 배치됐다. 때마침 텐진(天津)에서 시작된 진푸선(津浦線)철로가 쉬저우를 지나 상하이(上海),푸둥(浦東)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노 광복군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일본군은 철도와 주변을 점령,광대한 중국대륙을 ‘선’과 ‘점’으로 연결하는 전략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끌려갔던 학병들은 대부분 철도역 주변에 주둔해 있었단다. 밤을 틈타 3m가 넘는 철책을 넘었다. 짧게는 2∼3일에서 일주일이상을 풀잎이나 과일로 연명하며 낮에는 수수밭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들판을 달렸다. 대개는 중국 유격대와 조우했고 당당한 광복군이 되었다. 44년 6월 ‘宿縣부대’ 제4중대에서 탈출했던 金柔吉 부회장과 全履鎬 회원은 슈저우역에서 2㎞쯤 떨어진 곳을 찾아 헤맨끝에 당시의 탈출지점을 찾아냈다. 지금은 ‘宿縣 付小樓 村庄’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2∼3층의 주택들이 병영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에 앞서 5월에 같은 부대 보병중대에서 津浦線을 넘어 탈출했던 石根永 회원도 슈저우에서 50㎞ 떨어진 구쩐(固鎭)역부근에서 병영터를 찾아냈다. 일본군은 철도가 파괴되거나 공격받으면 주변의 중국인을 몰살시켜 보복했다고 악몽같은 50년전을 떠올렸다. 중국 유격대원이 생포되기라도 하면 총검술 연습의 표적으로 삼아 살해하기도 했단다고 치를 떨었다. 대부분의 병영들은 푯말하나 남지않고 촌락 등으로 바뀌는 등 사라졌지만 尹慶彬 회장과 金永錄 회원이 탈출했던 쉬저우시 통산로(銅山路)의 부대터는 지금도 ‘중국 인민해방군’ 주둔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부대안을 돌아본 尹慶彬 회장 등은 연병장앞의 3층 본부 건물,검은 벽돌과 돌로 지어진 단층 막사가 옛 그대로라며 회상에 젖었다. 높은 천정의 막사안에는 시멘트바닥에 철로 만든 2층 침대 10여개와 간단한 사물함이 눈에 띄었다. 張俊河 선생 등과 함께 尹회장 일행 4명이 44년 7월7일. 일본군의 이른바 ‘중국침략 기념일’로 경계가 느슨해 틈을 타 ‘취침전 15분의 자유시간’을 이용했다. 일본군을 벗어난 이들은 이틀밤을 앞만 보고 달리다 먼저 탈출해 중국 유격대에 와 있던 金俊燁(전 고대 총장)씨와 해후했다. “중국의 여러 유격대에 흩어져 있던 탈출자들은 린촨(臨泉)로 모였지요. 린촨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광복의 꿈을 키워 대일항전의 장정(長征)을 시작했습니다” 노 독립군의 회고는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따라 어느새 50년전의 린촨에 닿고 있었다. ◎독립유공자협회/항일전 참가 175명이 결성… 현 회원 220명 한국독립유공자협회는 광복회와 함께 항일투쟁의 일선에 섰던 독립운동가들의 양대 산맥. 81년 독립운동가 175명에 의해 발족됐다. 초대회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趙擎韓 선생. 한국전력 사장을 지낸 朴英俊 회장에 이어 尹慶彬 회장이 3대 협회를 이끌고 있다. 회원은 220명. 광복회가 독립지사의 유가족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비해 항일투쟁을 벌였던 본인만이 가입할 수 있다. 회원 모두 건국훈장을 받았다. 일제말기 학병 등으로 중국전선에 끌려갔다가 탈출,광복군에 합류했던 독립운동의 마지막 세대가 협회의 주축. 金九 선생을 보좌,충칭(重慶) 임시정부서 일했던 마지막 생존자들이기도 하다. 대부분 70대후반에서 80대초반. 색이 바라가는 독립정신을 드높이기위한 연구,탐사 등 학술사업과 사회사업,독립운동 사적에 대한 복원운동을 벌여왔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이 되는 내년 충칭시 광복군 총사령부건물 표지석 건립작업 등 후세에게 민족애국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각종 사업을 추진중이다. ◎광복군/임정 정규군… 美와 對日 공동작전 활약 광복군이 정규군으로 발족한 것은 40년 9월. 무력으로 조국을 되찾겠다며 중국으로 온 젊은이와 일본군에 끌려왔다가 탈출한 학병이 주축이 됐다. 총사령관은 李靑天 장군이었고 참모장 李範奭 장군.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 지하활동 등 갖가지 군사활동을 감행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였다. 3개의 직할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李範奭 장군이 지휘하는 2지대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을 거점으로 일본군 전력을 교란시키는 활동에 주력했다. 최전방에서 일본군과 필사의 전투는 3지대의 몫. 안후이성 푸양에 본부를 두고 산둥성(山東省) 등 화북지역에서 지하공작 활동도 병행했다. 44년부터는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들이 합류하면서 미국 첩보기구인 전략사무국(O.S.S)과 함께 일본군에 결정타를 가하기 위해 한반도침투 등 특수공작을 준비하기도 했다.해방직전 광복군은 700여명. 광복이 될 무렵에 중국에 거주하는 교포들로 30만여 군병력을 조직하는 계획에 착수하기도 했다. ◎임천사관학교/日軍 탈출한 한국인 광복군 간부 양성소 안후이성(安徽省) 린촨(臨泉)에 있던 ‘광복군 사관학교’. 더 정확히 말하면 44년 7월 린촨 중국 중앙군관학교 제10분교안에 설치됐던‘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일명 한광반(韓光班)’. 중국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본군서 탈출한 한국인을 광복군 간부로 양성하던 곳이다. 44년 7월에 들어온 첫 입학생들은 48명. 33명은 대학졸업후 일본군으로 징병돼 중국전선까지 끌려왔다가 탈출한 학병. 15명은 조국광복을 꿈꾸며 중국으로 건너왔던 애국청년들. 5개월 과정을 마친뒤 白正甲 등 25명은 6,000리 길을 걸어서 쓰촨성(四川省)충칭(重慶)의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본류에 합류한다. 나머지 8명은 최전방 안후성에 남아 정보수집 등 대일투쟁을 벌인다. 25명중 尹慶彬은 임시정부 경위대장으로,鮮于鎭은 金九 선생비서로 白凡 선생을 최후까지 보좌하게 된다. 또 張俊河,金俊燁,金柔吉 등 일부는 한·미군사협력으로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가 한반도진입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는다. 현재 한광반 첫 수료생 가운데 국내엔 11명이 생존해 있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개관(사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5일 개관했다. 우리 근·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린 현장이 역사의 배움터로 단장하고 문을 연 것이다. 감개무량한 일이다.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뒤 일제 강점기 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어 광복을 맞기까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투옥돼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처형되거나 옥사했던 곳이다. 해방 후에는 서울형무소,서울교도소,서울구치소 등으로 이름을 달리해 수형시설로 사용되다가 지난 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간 후 88년 사적으로 지정되고 92년 독립공원으로 꾸며졌다. 일제는 이곳에 의병장에서부터 독립운동가·항일투사를 무수히 투옥하여 한민족의 혼을 짓밟았다. 해방 후에도 이곳은 파란곡절의 현대사와 함께 수많은 반독재 민주인사·학생·통일운동가들이 고난의 세월을 보낸 곳이었다. 물론 흉악범·경제사범·보안사범 등도 거쳐갔으나 서대문형무소는 우리 민족수난의 현장이자 민족정기의 발원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백범 金九 선생은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다 이곳에 수감돼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청사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 보고 죽게 하소서”라고 기원했다. 柳寬順 열사는 이곳 지하감방에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숨졌다. 사이토(齊藤) 일본총독을 사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姜宇奎 의사도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일제때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감옥과 사형장,망루 등과 역사전시관으로 이루어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우리 애국선열들의 민족정신과 꿋꿋한 기상을 느끼게 해준다. 일제때 고문과 취조장소로 악명을 떨쳤던 옛 보안과 건물을 최근 보수한 역사전시관은 서대문형무소의 설립배경과 변천과정,일제때 전국 형무소 현황,항일저항사,옥중시설,고문실 등을 영상과 밀랍인형 및 각종 모형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애국선열의 넋을 후손들이 기리는 한편 우리 역사의 암울했던 시절을 되새겨 보며 다시는 불행한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다짐하는 산 교육장이다. 국민 모두 순례의 발걸음을 디디고 애국심을 다지는 성지로 계속 가꾸어 가야 겠다. 나아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웅변으로 증언하는 역사 유적으로 전세계인들에게 엄숙한 교훈을 주고 있듯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도 일제의 만행을 우리 민족은 물론 전세계에 증언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바란다.
  • 민주열사 열전:14/신흥정밀 사원 朴永鎭(정직한 역사 되찾기)

    ◎‘노동자가 주인되는 사회’ 외치며 분신/열악한 근무환경 맞서 사업장 조직강화 전력/과학적 노동운동에 헌신… 새로운 지평 열어 평화시장 노동자 全泰壹의 분신 자살은 ‘노동자의 인간선언’이었다. 그는 1970년 11월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의 보장을 요구하며 근로기준법 책을 껴안고 분신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86년 3월17일 한 젊은 노동자가 또 다시 ‘근로기준법 준수’와 ‘노동자가 주인되는 사회’를 외치며 몸에 불을 붙였다. 전태일을 ‘한국의 예수’로 존경했던 27살의 朴永鎭이었다. 볼펜 생산업체인 신흥정밀에 몸담고 있던 그는 인간다운 삶에 더해 사회 주체로서의 노동자 권리를 선언한 뒤 분신,12시간만에 병원에서 숨졌다. 다음날 각 일간지 사회면에는 ‘임금인상 요구 농성 근로자 분신자살’이란 제목의 1단 짜리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1단 짜리 조그만 기사의 가치밖에 없는 그렇게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그의 죽음 뒤에는 노동자 권리를 위한 처절한 투쟁,노동운동의 경직성,경찰의 인권과 생명 경시 풍조 등 그당시 시대상황이 복합적으로 내재돼 있었다. 박영진은 농성 전 임금투쟁을 4·5월로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직역량이 미미해 싸움의 결과가 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 사업장의 실상보다는 공동보조의 중요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지역연대차원의 모임에서 3월17일의 공동투쟁이 결정됐다. 신흥정밀에서의 다른 활동가들도 이를 따라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투쟁을 늦추어야 한다는 그는 주장을 접어야 했다. 3월17일의 공동투쟁 결정이 내려지자 그는 무모하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을 정리하고 투쟁의 승리를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고위 관리사원 몰래 각 작업장을 돌며 싸움의 당위성을 설득하고 동료들을 조직화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러나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미리 결심하지는 않은 듯하다. 누구에게도 그런 뜻을 비치지 않았고,분신 3일전 회사 여공들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도 그런 기미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쫓아온 경찰 불끄는 동료 제지 노조가 없던 상황에서 3월17일 박영진 등 30여명은 지역 연대모임의 결정에 따라 임금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17일 낮 식당을 점거한 채 농성을 벌이다 옥상으로 쫓겨 올라갔다. 박영진은 이미 식당에서 난로 석유통을 머리에 들어부어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쫓아 올라온 구사대와 경찰에게 열을 셀 때까지 물러나지 않으면 분신하겠다고 외쳤다. 피를 토하듯 그의 입에서 숫자가 흘러나왔다. “하나,둘,셋,넷,…” 그러나 곤봉과 각목을 든 경찰과 관리직 사원들은 이를 조롱하듯이 다가왔다. 시간이 멎은 듯한 정적에 숫자를 세는 외침마저 묻혀버린 순간,뜨거운 불길이 눈부신 햇살을 태우며 허공에 치솟았다.깜짝 놀란 동료들은 옷을 벗어 불을 끄려 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들을 낚아챘다. 불에 타는 사람을 우선 구해야 할 경찰이 오히려 불을 끄는 사람들을 체포한 것이다. 박영진은 시뻘건 불길속에 엎어진 채 10여분간 방치됐다. 경찰의 행위는 독재권력의 정권유지 도구로 전락했던 일그러진 자화상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박영진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신문팔이,껌팔이,구두닦이 등 잡초같은 삶을 살았다. 노동운동에 눈을 뜬 것은 83년 검정고시를 위해 지역야학이던 ‘한얼야학’에 다니면서부터. ‘전환시대의 논리’‘나의 라임오렌지나무’‘노동법해설’‘미국노동운동사’등을 읽으며 점차 억눌렸던 것이 새로운 힘으로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충동을 느꼈다. 특히 ‘전태일평전’은 그가 검정고시냐,노동운동이냐를 놓고 갈등하게 만든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방위병 복무를 마치고 그는 84년 시흥에 있던 동도전자에 입사한다. 입사하는 날 쓴 일기에 ‘어머니,더많은 다른 부모와 형제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나혼자만의 이기를 위해 안일하게 행동한다면 돈 많이 가진 악덕기업주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이제 내 삶은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사장의 갖가지 비열한 횡포에 항의해 회사를 나오고 만다. 조직적인 대응을 못하고 개인적 분노에 휩싸여 일을 그르쳤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3개월후 구로공단의 동일제강에 입사한다. 여기서 동기회 및 친목회,독서회 등을 조직해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한다. 하지만 구청의 노조설립 신고서 접수 거부와 회사의 어용노조 기습 설립 등으로 또 한번 실패를 맛본다. ○하루 두세시간 자며 동료 설득 박영진이 85년 9월 들어간 신흥정밀은 근무환경이 열악했던 구로공단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다. 기본 근무시간을 9시간으로 정해 1시간을 공짜로 부려먹고 있었고,월급은 하루 평균 3,080원으로 월 10만원을 넘지 않았다. 월차수당, 특근·잔업수당도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종업원들에게 하루 3시간 이상의 잔업을 강요했다. 그는 하루 두세시간 밖에 자지 않으면서 조직강화에 전력했다. 동료에 대한 애정과 의리는 보증수표였으며,이를 바탕으로 단결을 호소했다. 그러나 조직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원치 않은 노동투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고,지나치게 책임감이 강했던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소수의 주장을 존중하는 노동운동의 유연성만 있었어도,기업주가 작은 협상의 자세만 보였어도,정권이 생명 존중의 정신을 조금만 가졌어도,치열한 삶을 살아온 한 노동운동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은 없지않았을까. 이봉우 전 구로노동연구소 소장은 “자기 견해와 다른 다수의 결정을 위해 목숨을 던진 조직적이고 의식적이었던 참노동자”라고 박영진을 평가했다. 또 “과학적 노동운동의 새벽을 열었던 첫 닭”이라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약력 ▲1960년 충남 부여에서 박창호·이미선씨의 3남2녀중 장남으로 출생 ▲76년 서울 배문중 3년 중퇴 ▲79년 방위병 입대 ▲83년 한얼야학 입학 ▲84년 동일제강 입사 ▲85년 신흥정밀 입사 ▲86년 3월17일 분신 ◎노동운동의 흐름/신군부 폭압에 정치투쟁 전환 연대투쟁 나서/현장서 유리된 서노련 쇠퇴… 노조중심 정착 신군부 세력은 80년 5월17일 계엄의 전국 확대와 함께 그때까지 힘들게 자라왔던 우리 노동운동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70년대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민주노조 관계자들은 노동운동의 대응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폭력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이들은 임금을 주 타깃으로 하던 ‘경제투쟁’의 한계를 절감하고 전 노동자를 정신적으로 묶을 수 있는 ‘정치투쟁’에 눈을 돌렸다. 쓰라린 패배를경험했던 학생운동가들도 노동현장을 토대로 하지 않은 민주화투쟁은 ‘사상누각’이라는 인식하에 노동야학과 위장취업의 형태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구로공단은 이러한 물줄기를 그대로 타고 있었다. 70·80년대 20여만명의 노동자를 두고 한국수출의 메카 역할을 했던 구로공단에서 85년 6월 공단내 10여개 사업장이 참여한 ‘구로동맹파업’이 있었는데 노동조합 연대투쟁의 형태를 띠었지만 노동운동 학습을 받은 지역활동가들 역할이 컸고 정치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동맹파업은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 구속이 도화선이 됐다. 구로동맹파업의 산물임을 자처하면서 ‘선도적 정치투쟁’을 주창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85년 탄생,각종 가두·점거투쟁,지역연대투쟁을 주도해 나간다. 박영진이 분신했던 3·17투쟁은 이런 지역연대투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는 노동자가 단순한 경제적 만족을 넘어 사회의 주체가 되는 노동운동을 주장했지만 그 바탕엔 현장노동자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래서 현장의 조직역량이 약했던신흥정밀의 동조투쟁에 반대했던 것이다. 정치투쟁을 지나치게 중시했던 이러한 흐름은 86년 이후 쇠퇴기를 맞는다. 현장으로부터 유리된 활동가 중심의 조직활동이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서노련도 86년 5·3인천사태를 고비로 해소된다. 85·86년의 이런 쓰라린 아픔을 겪고 나서 노조를 중심으로 대중적 경제투쟁을 올바로 이끌어가는 가운데 노동자의 정치의식 고양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정치투쟁이 바람직하다는 관점이 자리잡게 됐다. ◎분신현장 동료 姜文英씨/당시 정권수호대 인명 경시/죽음 몰아붙이던 모습 충격 “충격이었어요. 永鎭의 독한 희생도 그랬지만 노동자 한 사람의 목숨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몰아붙이는 정권 수호대의 모습에 치가 떨렸습니다” 분신 당시 옥상에 함께 있던 姜文英씨(37·사업)의 말이다. 박영진은 그가 건네준 유인물에 불을 붙여 분신했다. “그냥 겁만 줄테니 걱정말라”는 말에 건네주었지만 아직도 자책과 아픔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는 점버를 벗어 불을 끄려다 경찰에 나꿔채여 5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나왔다. “지독한 사람이었지요. 항상 단결을 해야한다고 했어요. 구구절절히 옳았지만 부담을 느꼈어요. 그가 조직강화를 위해 제방에 왔을때 문을 잠그고 모른척하다가 밤새워 문앞에 서 있어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그로부터 배웠다”며 “다시는 그같은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姜씨. 그는 87년 박영진추모사업회 결성에 참여하다가 박영진의 여동생 현이씨(34)를 만나 결혼해 살고 있다.
  • 농정조직 개혁 어떻게 돼가나­실태와 문제점

    ◎부실 운영·기능 중복… 농조 파산위기 농정조직 통합을 둘러싸고 정부와 관련조직간의 갈등이 깊어가고 있다. 농정조직의 해묵은 병폐를 청산하기 위한 정부의 개혁작업이 관련 이해당사자들의 저항에 부딪혀 있다.정부는 농촌의 물관리를 맡고 있는 농지개량조합(농조)과 농지개량조합연합회(농조연),농어촌진흥공사(농진공) 등 3대 조직을 2000년 농업기반공사로 통합한다는 방침이나,농조 측은 이를 개악(改惡)이라며 반대 수위를 높이는 상황이다.농정조직의 실태와 문제점,정부의 개혁방안과 반대논리를 살펴본다. ◎실태와 문제점/105곳중 95개 국고보조로 연명/조합장·공사비리 등 잇단 잡음/‘거대 비만조직’ 대수술 시급 농지개량조합은 1906년 수리조합 조례가 제정되면서 구성된,92년의 역사를 지닌 농정조직이다.그만큼 우리 농정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다. 현재는 전국 105개 조합,93만명의 조합원을 거느리고 있다.농업생산기반시설의 유지·관리와 농지시설 재해복구 등이 농조의 주된 역할이다. 농조가 관할하는 농지면적은 54만7,000㏊로우리나라 전체 농지의 절반을 차지한다.임직원 4,024명,대의원 6,527명으로 구성돼 있다. 농조는 시설관리를 위해 조합원,즉 농민들로부터 이른바 수세(水稅)를 받는다.87년까지는 10a당 벼 26㎏어치의 조합비를 받았다.이후 국고보조금 지급과 조합별 자율화 조치에 따라,지금은 10a당 평균 6,300원이다. 국고보조금은 95년 1,020억원 96년 1,065억원,97년 1,119억원 등으로 해마다 늘어나다 올해엔 917억원으로 삭감됐다. 농조연은 농조가 위탁한 사업을 추진해 자체 수익금을 확보하기 위한 조직이다.672명의 임직원에 본회와 8개 지회로 구성돼 있다. ◇농조의 운영부실=운영비를 국고에서 상당부분 지원하고 있지만 많은 조합이 경영부실로 파산 위기에 놓였다.전국 105개 농조 가운데 95개가 국고보조금으로 운영된다.이 가운데 퇴직급여충당금이 1억원 미만인 조합이 79개나 된다. 농조는 조합비 인하폭에 비해 정부 보조금이 부족하다는 주장이다.그러나 정부는 수리시설 현대화로 유지관리비가 줄어든데다 농조의 자체 경비절감 노력이 미흡하다는 점에서농조의 주장은 설득력이 적다는 판단이다. ◇조합장 선거부정과 발주공사 비리=88년부터 조합장을 대의원들이 뽑기시작하면서부터 대의원 매수 등 부정선거 시비가 계속되고 있다.지난해 조합장 선거에서 금품제공이나 대의원 매수 등 혐의로 사법처리된 예가 수십건에 이른다는 지적이다. 95∼96년 농조가 발주한 공사 263건(총예산 7.009억원) 가운데 65.4%가 제한입찰과 수의계약으로 처리됐다.평균 낙찰률도 94%로 농진공의 89%보다 높아 많은 예산이 낭비된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유기기관의 기능중복=농조와 농조연,농진공의 업무가 상당부분 중복돼 있는 상황이다.농업생산기반의 기본조사나 설계 감리 등의 업무는 농조연과 농진공이 맡고 있다. 또 그 시행이나 유지관리 업무는 사업규모에 따라 농조와 농진공이 분담하고 있다. 특히 수리관리체계가 분산돼 있어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다.같은 수계에서 인근 조합간에 분쟁이 발생할 때도 이를 조정하기가 쉽지 않다. ◎정부의 청사진/3곳 통합 2000년 농업기반공사 출범/구조혁신 통해 연 600억∼1,000억 예산 절감 농지개량조합과 농지개량조합연합회,농어촌진흥공사를 통합,2000년 1월에 농업기반공사를 출범시킨다는 것이 정부의 농정조직 개혁 구상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3개 기관 대표가 참여하는 ‘신설공사설립위원회’를 구성,각 기관이 대등한 조건으로 해체,통합토록 할 방침이다. 농업기반공사의 조직은 본부 밑에 9개 도 사무소,80여개의 지역 사무소로 구성할 방침이다.지역 사무소 수는 수계관리와 지역적 여건,현행 농조구역을 감안해 잠정 결정됐다.지역사무소장은 지역특성과 물관리의 전문성을 감안, 과반수를 현행 농조 인력 중에서 계약직 등으로 임용할 계획이다. 통합조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정부는 통합전에 3개 기관별로 강도 높은 구조조정 작업을 벌일 방침이다.99년 말까지 농진공은 400명을 감원,2,078명으로 줄이고 농조는 4,024명에서 692명을,농조연은 672명에서 112명을 각각 감원하도록 할 계획이다. 정부는 이 농업기반공사를 통해 ▲농업용수개발과 경지정리,배수개선,대단위 농업종합개발 ▲농업용수의 종합적관리 ▲농업인 복지향상을 위한 농촌지역종합개발 ▲해외농업 개발 및 통일대비 농업생산기반 정비기술 개발 등 사업을 추진한다는 복안이다. 특히 수세를 전면 폐지하되 불가피한 경우 농업용수 공급비용 일부를 이용자가 부담토록 할 계획이다. 농민의 참여를 확대하는 방안으로는 지역사무소에 지역별 농업인 대표자 등으로 구성되는 ‘운영위원회’를 설치,농민들의 애로사항을 적극 반영키로 했다. 단국대 張原碩 교수는 “이같은 농정개혁으로 600억∼1,000억원의 재정부담이 줄고 사업추진 체계가 일원화됨에 따라 농업인에 대한 서비스의 질이 향상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농민들 시각/“조합운영 대의원 몇사람이 좌우” 불만/전농 등도 “즉각 통합해야” 목소리 높아 “배수시설이 엉망이라 물 빼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그동안 여러 차례 보수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그저 예산타령 뿐입니다”.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농민 全澤均씨.태풍 얘니의 강습으로 다 익은 벼가 물에 잠긴 채 새싹 틔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탄식을 쏟아냈다.“농촌이 이 지경인데 정작 농조 직원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통합반대 집회에나 참석하고…”. 하늘에 대한 全씨의 원망은 금세 농지개량조합(농조)으로 향했다.농조 직원들이 농정조직 통합반대 집회에 참석하느라 태풍 얘니의 피해를 막지 못했다는 얘기다. 전북 익산시 함라면 다망리의 崔춘봉씨.“농수로 정비작업은 농한기에 해야 하는데 영농기에 해 농작물과 영농에 지장을 준다”며 농조를 비난했다. “물관리 인력은 많지만 대부분 일용직들이라 책임감이 없다”는 원망도 곁들였다. 옆 마을인 황등면 신기리의 韓현묵씨의 비난은 보다 신랄했다.“수세(水稅)를 걷을 때 말고는 불필요한 인력들이 많고,조합을 운영할 때도 조합원들의 의견은 무시한 채 대의원 몇사람이 모든 걸 결정한다”고 지적했다. 농조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부실한 물 관리와 독선적이고 불투명한 운영방식,수세 징수 등에 모아진다.특히 지난 1일 태풍 얘니가 전국을 강타했을 때 농조측은 전국의 임직원들과 농민조합원 등을 이끌고 상경,과천 정부청사 앞에서 집단시위를 벌임으로써 태풍피해 예방을 소홀히 한 데 대한 원성이 높다. 농조와 농조연,농진공을 농업기반공사로 통합하는 데 대해서는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회장 李水金)을 비롯해 농민 대다수가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다.전농은 지난달 29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5개 농민·시민단체들과 함께 공동성명을 내고 3개 기관의 즉각적인 통합을 촉구했다. 전농은 잇따른 성명을 통해 “농조의 비효율적인 운영과 과도한 수세 징수는 수십년간 농민들에게 무거운 짐이 돼 왔다”면서 “조합장 선거와 사업수주를 둘러싼 각종 비리 등 해묵은 폐습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이들 3개 기관을 즉각 통합하는 농정개혁을 차질없이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합 찬반 논란/농조 임직원­“자율 개혁에 맡겨라” 반발/농민·농림부­“밥그릇 챙기기 의도” 일축 정부의 농정조직 통합방침에 대해 농조 및 농조연의 일부 임직원들은 자율적 개혁을 주장하며 결사 반대하고 있다.이들은 ‘전국 농지개량조합 100만 농민조합원회’를 구성,조직적인 반대운동을 통해 정부의 통합작업을저지한다는 방침이다. 이들은 우선 “농림부의 통합방안이 일부 학자와 극소수 농민운동가들의 의견만 반영된 채 조합원들의 의견은 무시됐다”며 “농민자율조직을 공기업화하는 대신 농어촌진흥공사를 민영화해야 한다”고 역공세를 펴고 있다. 이들은 전국 105개 농조를 37개로 축소,광역화하고 조합장 신분을 무보수명예직으로 하는 내용의 자체 개혁안을 내놓고 농민들을 상대로 서명운동을 통해 지지세 확산을 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안에 대해 정부와 전농 등 농민·시민단체들은 “일부 조합장 등 간부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도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농림부는 “과거에도 농조 개혁이 거론될 때마다 이와 비슷한 자체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실천된 적이 없다”며 “조합장을 무보수 명예직화하는 것도 선거의 특성상 과다경비가 지출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통합 논의 일지 ▲88년=평민당,농조의 시·군 이관 주장.조합비 인하,장기채 국고지원,조합장 직선제 도입. ▲93년=‘신경제 5개년 계획’에서 3개 기관 통합 추진.현행 체제 유지하되 소규모 농조 합병 결정. ▲94년=‘농어촌발전위원회’,기술 용역사업 통합 등 거론.민자당 ‘우루과이라운드 대책소위’,농조의 지방공기업화 검토. ▲95년=농림부,농업용수 관리체계 개편 추진.농조의 도단위 대규모 조합화. 3개 기관 통합후 국영기업화 등. ▲98년 7월3일=기획예산위,3개 기관 통합방침 확정. ▲7월20일=농림부,통합추진위원회 구성 ▲8월19일=3개 기관 통합을 위한 ‘농업기반공사 및 농지관리기금법’ 마련.
  • 민주열사 열전:9/金宜基 前 서강대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강요된 침묵속 ‘광주 항쟁’ 왜곡 항거/당시 기독교회관서 ‘서울 봉기’ 외치다 추락사/어둠의 시대 역방향 역사에 맞선 ‘진실의 불꽃’ ‘80년 5월의 학살’은 국민들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고 침묵을 강요했다. 항쟁 직후 정부와 제도언론에서 연일 뱉어내는 ‘광주폭동’이란 단어에 대해 누구도 ‘아니오’라고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분노를 흠뻑 머금은 침묵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 강요된 침묵을 깨뜨리고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찬 어둠의 시기에 진실을 향한 한줄기 빛을 비춘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 金宜基라는 젊은이였다. 광주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된 후 사흘째인 80년 5월30일. 서강대 4학년생 金宜基는 그날 오후 5시쯤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떨어졌다. 밑에는 계엄군 장갑차와 군인들이 있었으나 그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대신,주위에 흩어진 유인물을 수거하기에 바빴다. ○가마니에 덮인채 방치 그는 가마니에 덮여 30여분 동안이나 그대로 방치된 채 죽어갔다. 그가 뿌린 유인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동포여 일어나자. 우리의 힘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正)방향에 서 있다…내일 정오 서울역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자. 동포여!” 金宜基는 서울에서의 봉기야말로 짓밟힌 광주를 살리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이를 처음으로 실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젊은 생을 마감했다. 당시 경찰은 그가 유인물을 뿌리려다 발을 헛디뎌 떨어져 즉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가 떨어지는 모습을 확실히 목격한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주위에 있었던 몇몇 사람들은 그가 계엄군에게 발각돼 쫓겨다니며 유인물을 뿌리다 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가 숨막히는 시대와 씨름했던 불꽃같은 투혼은 그의 삶 구석구석 스며있다. 막일로 생활을 꾸리던 부모님과 광부·공장노동자로 일하던 형들을 가슴속에 빚으로묻어둔 채 대학에 다녔던 金宜基. 그러나 그런 부채의식은 집안에서 유일한 대학생으로 장차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야심보다는 도리어 사회모순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졌다. “나를 빼고 모두가 돈을 버는데 우리 가족은 왜 셋방을 전전해야 하나”“농사를 짓는 형님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데 왜 빚만을 불려가야 하는가”그런 의문은 그를 자연스럽게 책으로 안내했고,그는 우리 역사가 바로 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감상적 농활에 실망 그는 농촌문제 연구에 빠져들었다. 2학년 여름 학교 동아리 ‘한국유네스코 학생회(KUSA)’의 하계농촌봉사활동에 참여했으나 깊은 실망감을 맛보았다. 대개 근로·의료봉사,아동지도 등으로 구성된 당시 농촌봉사활동이 저변에 감상적 인도주의를 깔고 있어 농민과 일체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막연한 봉사보다는 농민들과 함께 농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짚어가고자 했다. 발이 닳도록 농촌현장을 누볐고 농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했고 토론을 통해 분석된 결과를 다시 농민들에게 전했다. 그가 얻고자 한 것은 농촌의 실물경제 파악과 그에 대한 농민들과의 공감대였다. 10차례에 걸친 농활과 연구에서 그가 보여준 집중력은 놀라웠다고 한다.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임부의장(42)은 “그에게는 대학 출신 농민운동가들이 갖기 쉬운 현장 농민들과의 위화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농민운동은 농민대중에 기반을 둔 자주적인 조직이어야 한다고 믿었고,후일 그와 가깝게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주적 농민관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대학 2학년때부터 서울 신당동 형제교회의 농촌문제연구모임을 이끌면서 농촌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키웠고,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 농촌분과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는 등 자신의 진로를 농민운동쪽으로 굳혀갔다. 80년 5월18일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이 본격화할 무렵 그는 광주시내로 들어갔다. 항쟁 실상 파악과 19일 시내 한 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함평고구마사건 승리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는 시민들이 고립무원 상태에서 무참히 살육되는 참상을 목도하고 이를전국에 알리기 위한 방법에 부심했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금요기도회’를 디데이로 잡았다. 기독교회관에는 그가 활동하던 EYC사무실이 있었다. “30일 낮 12시 EYC사무실에 나타난 그가 광주에 다녀왔다며 잠시 좀 쓸게 있으니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부탁했어요. 오후 4시쯤 사무실로 돌아오니 그가 작성한 ‘동포에게 드리는 글’ 원본을 건네주더군요. 근처 상동교회에서 청년회장과 그것을 보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기독교회관에 오니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어요” EYC에서 함께 활동했던 변광순씨의 회고다. 떨어진 쌀 수매가에 가슴치던 분노의 주먹. 농활을 준비하던 신명나던 손길. 광주를 향했던 발길. 5월의 학살을 남들처럼 가슴에 묻지 못하고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고 터뜨린 피맺힌 절규. 이들은 모두 역(逆)방향의 역사에 맞섰던 金宜基 열사의 민중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실천 방식이었다. □金宜基 열사 연보 ▲1959년 경북 영주군에서 출생 ▲70년 영주 중부초등교 졸업 ▲76년 배명고 졸업.서강대 무역학과 입학. KUSA 가입. ▲78년 형제교회 농촌문제연구모임 참여.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 참여 ▲79년 서강대 근대사연구모임 주도. ▲80년 EYC 농촌분과위원장으로 활동. ▲80년 5월 광주항쟁 목격. 30일 종로 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남기고 떨어져 숨짐 ▲90년 서강대에서 명예졸업장 받음 ◎어머니 권채봉 여사/“5·18 사망자 공식 인정” 소식 듣고 담담/“아들이 이루려 했던 세상보는게 소원” 광주광역시청 5·18 보상지원과에 전화를 했다. 담당 직원은 金宜基 열사가 ‘5·18 사망자’로 공식 인정됐다며 10월쯤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 권채봉 여사(74)는 그 소식에 의외로 담담했다. 아마도 아들의 큰 뜻과 죽음,‘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을 강요받아온 기나긴 고통의 세월이 금전으로 바꿔지는 듯한 허탈감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그저 “글쎄 다행인것 같기도 하고. 반갑다고 해야 하나”라고만 말했다. 어머니가 진정 바라는 것은 아들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날(80년 5월30일) 저녁 8시30분쯤 동대문서 형사라는 사람이 와서 宜基가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하는거야. 그런데 그애는 영안실에 있었고,상부 명령이 없다고 다음날 낮 12시까지 시신도 안보여줬어. 사람을 오지 못하게 하고 화장을 하라고 갖은 협박을 했지” 그러나 김동완 목사의 주도로 장례식은 치러졌다. 수백명의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참석,광주항쟁 후 첫 대규모 집회가 됐다. 어머니는 그때 자신의 울음을 신호로 학생들이 일어서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어 그들이 다칠까봐 자식의 관에 꽃을 던지면서도 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권여사는 송파구 잠실의 한 아파트에서 노환으로 거동을 못하는 구순의 시어머니와 중풍을 앓고 있는 남편 김억씨(73)의 시중을 혼자 들며 살고 있다. ◎장석재 형제교회 목사가 전하는 농민사랑/농민과 일체감 위해 극도의 허름한 생활/농촌연구 삶의 일부 농민 향한 애정 각별 金宜基 열사의 농촌문제에 대한 관심과 농민을 향한 애정은 각별했다. 그가 교회에 다니게 된 것도 형제교회의농촌문제연구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는 김동완 목사가 담임으로 있으면서 빈민·농민 선교를 통해 사회참여에 앞장서고 있었다. 金宜基는 특유의 적극성으로 이 모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농촌문제 연구의 핵심은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형제교회 장석재 담임목사(42)는 “그는 당시 가장 어려운 곳이 농촌이라고 보고 농촌현실에 몰두했던 것 같다”고 했다. “미울정도로 허름한 생활을 했어요. 군복바지에 검정고무신 청자담배 등 가장 싼 것만을 입고 먹었지요. 친구들로터 티내지 말라는 구박도 많이 받았어요”그러나 그것들은 농민과 일체감을 느끼려는 그의 사랑의 표현법이었다고 했다. 교회사적으로 볼때도 金宜基 열사는 ‘사회선교의 순교자’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장례식때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다 체포돼 4개월간 감옥신세를 지기도 했던 장목사는 “사회운동가들이 정치인 등으로 기성화하면서 과거의 순수함과 진지함이 굴절돼 보일 때마다 宜基가 생각난다”고 했다. 당시 EYC 농촌분과위원장이었던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근부의장도 “金宜基는 현장에서 필요로 하면 두말 않고 달려갔다. 농촌은 그에게 있어 몸에 밴 생활의 일부였으며 농민에 대한 애정과 이해는 혈육에 대한 것 이상의 깊이를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 새달 ‘클린턴 탄핵청문회’ 가능성/성추문 이모저모

    【워싱턴=崔哲昊 특파원】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성추문에 대한 탄핵청문회가 열릴 것 같다. 헨리 하이드 하원 법사위원장은 24일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탄핵조사 여부를 내달 5,6일쯤 법사위원회에서 표결한 뒤 본회의에 넘겨 8,9일쯤 최종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의회 소식통들은 클린턴 대통령의 정치적 운명은 오는 11월3일의 중간선거 결과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전망.특히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할 경우,클린턴 대통령의 탄핵논의는 잠잠해질 것이나 만약 공화당이 더 많은 의석을 확보한다면 탄핵절차가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라고 예측. ○…미국 여권 운동가들이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이나 사임에 반대하고 나서 눈길.여권 운동단체들은 24일 공동성명을 통해 “클린턴을 탄핵으로 이끄는 일부 의원들이야말로 가장 나쁜 여권의 적”이라며 “여성들은 의회에 편지,전화,팩스,E­메일,고함을 통해 ‘대통령 탄핵반대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공화당 의원들이 성추문 사건을 이용해 클린턴 대통령을 제거한 뒤 보수적인깅리치 하원의장을 대통령으로 내세울 것이고 여성에게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 ○…미국 어린이의 60%는 클린턴의 성추문을 알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어린이 유선 TV 채널인 ‘니클로디언’이 최근 전국의 8∼14세 어린이 3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한 결과,60%가 최근의 주요 뉴스로 클린턴의 성추문을 꼽았다고.
  • 역사의 거울(金三雄 칼럼)

    역사를 옛 사람들은 통감(通鑑)이라 했다.과거사를 거울 삼아 오늘을 비춰 보고 내일을 설계한다는 뜻이었다.강목(綱目)이라고도 했다.역사에 역행하는 사람(일)을 놓치지 않는다는 교훈적 의미다. 불교의 정파리경(淨璃鏡)은 염라대왕의 궁전에 걸린 큰 거울이다.이 거울은 죽은 사람이 생전에 행한 선악의 소업(所業)을 빠짐없이 나타낸다고 한다. 노자는 천지도(天之道)에서‘천망론(天網論)’을 폈다.‘천망회회(天網恢恢) 소이불실(疎而不失)’즉 “천망은 하늘의 그물이니 옳고 그름을 심판한다.촘촘하지는 못하나 결코 놓치지는 않는다”란 뜻이다.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투스가 처음으로 사용한 그리어스 historia의 의미는‘진실을 찾아내는 일’이란 뜻이었다.허신(許愼)은 역사의 사(史)는 ‘사(事)를 기록하는 사람’으로 풀이,史의 뜻을‘바르게 기록하는 손’의 의미를 썼다. 역사의 산물인 인간은 역사의 엄숙성을 깨달아야 한다.‘역사의 엄숙성’과 관련,찰스 비어드는 “역사 서술은 일종의 신념 행위”라고 정의했다.어떠한 역사적사건이나 위대한 인물에 대한 기록이라도 시대가 달라지면 비판 대상이 되고 재평가하는 것이 역사의 신념 행위다. 역사처럼 무서운 존재는 다시 없다.평범한 사람은 죽어 정파리경에 비치는 죄업에 따라 심판을 받으면 되겠지만 지도자들은 이와 함께 하늘의 그물과 역사의 심판이 별도로 따른다. 과거에는 역사의 심판에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현대는 인지와 과학문명 발달로 기간이 아주 짧아졌다.‘10년 세도’도 옛말이 된다.그만큼 역사는 무서운 속도로 엄격한 심판관으로 우리 곁에 다가왔다. ○역사 우습게 아는 무리 역사를 우습게 아는 자들이 있다.이런 자들이 국민을 대수롭게 여길 리는 없다.‘당대주의자(當代主義者)’라 불러야 할 이들은 역사의식이나 사명 따위에는 담을 쌓고 철저한 출세주의와 동물적 쾌락을 탐닉한다. 국민의 피를 먹고 사는 독재자,주권을 농락하는 부패정치인,땀을 빼앗는 악덕 기업인,혼을 훔치는 사이비종교인·교육자,판단을 왜곡시키는 곡필언론인·지식인을 대표적 당대주의자라 할 것이다. 요즘 우리 정치 현상을둘러보면 새삼 역사 의미를 생각게 한다.군사독재 시절 민주인사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반독재 투쟁을 벌일 때 독재집단이었거나 양지쪽에서 이를 방관하던 이들이 반성도 없이 ‘민주수호’‘독재규탄’을 절규한다.국세청을 동원하여 세금을 도둑질하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여 거금을 갈취한 부패정치인들까지 나선다.해방 후 친일파들이 반공과 안보를 내세우며 독립운동가들을 몰아치던 모습과 어쩌면 저리 닮았는지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친일 언론인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음해하던 모습과도 비슷하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교훈을 찾자는 데 있다.키케로가 역사를 ‘인생의 교사’라고 주장하면서 “우리가 만일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들을 알지 못하면 영원히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천망에 걸린 부패정치인 역사는 거울이고 그물이다.선악,정사,진위를 가르고 심판한다.국민의 생활을 가을걷이는커녕 쭉정이로 만들어 놓은 자들은 먼저 역사 앞에 참회해야 한다.돈 먹고 법망(法網)에 걸린 자들은 역사의 천망으로 깨닫고 반성해야 한다. 감옥의‘감(監)’자가 거울에서 비롯된 의미를 알아야 한다.사람이 누워서(臥) 그릇(皿)을 쳐다보고 있는 형상은 무엇을 뜻하는가. 항상 새롭게 쓰이고 평가되는 역사는 인간이 기대는 마지막 정의의 언덕이고 진실의 평원이다.‘역사의 거울’의 의미를 바로 알았으면 한다.
  • 제2건국 범국민운동­특별대담

    ◎“시민사회 협력­결집 가장 중요”/자발적 동참유도로 개혁역량 극대화/‘비리 있는곳 사정있다’ 원칙 확고히 金大中 대통령이 주창한 ‘제2건국운동’은 우리 사회 전분야에 걸친 총체적 개혁선언이다.이 범국민 캠페인이 성공하기 위해선 국민과 민간단체의 적극적 동참이 절실하다.제2건국운동의 바람직한 추진방향과 예상되는 문제점을 韓相震 서울대 교수(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 간사)와 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의 특별대담을 통해 짚어 본다. ▷추진상의 문제점◁ ▲韓교수=제2건국은 정부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국민적 합의와 지원에 따라 성패가 갈라지는 것입니다.밑으로부터 국민적 비판과 감시 등 개혁운동이 없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개혁의 힘은 소진되기 쉽습니다.처음부터 끝까지 정부 중심의 개혁은 우리 현실에서 사실상 어렵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개혁 집단들이 어떻게 결집하느냐가 중요한 과제입니다. ○정부중심 개혁 어려워 ▲朴변호사=지금까지 여러 정권이 역사적으로 너무 제역할을 못했습니다.오늘의 경제위기도단순한 정책실수가 아니라 해방 50년,경제개발 30년의 최종 종착점으로서의 현 체제가 전반적으로 잘못됐기 때문에 발생했습니다.나라를 새로 세우는 기분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습니다.구체적인 방법이 도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시민사회운동에 관한 종합적 이해와 설계가 없지 않은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그렇지 않고서는 시민사회단체를 정부가 네트워킹하겠다는 발상이 나올 수 없습니다.시민사회단체 중 개혁과 관련 없는 관변단체도 있지만 공익적 단체 대부분은 정부가 요구하지 않아도 개혁의 동반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억지로 끌어들이면 국민의 오해를 살 수 있고 부작용도 생겨나게 됩니다. ▷구체적인 방법론◁ ▲韓교수=국민들의 참여 욕구와 불만을 왕성한 창조적 에너지로 유도해야 시민사회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이런 맥락에서 자유·정의·효율이라는 세가지 원리를 바탕으로 국민운동의 큰 틀을 짜야 합니다.국민들이 호흡하면서 자발적 협력을 유도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발상의전환 시급 관료집단과 재벌 등 경제세력이 너무 일방적인 힘을 행사해 왔습니다.하지만 우리 시민사회의 잠재력은 생각보다 상당합니다.이러한 시민들의 힘을 제2건국의 원동력으로 육성해야 합니다.시민단체들도 개별이익 등 협소한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제2건국이라는 큰 틀에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국민 개개인이나 시민단체들 역시 발상의 전환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朴변호사=시민사회가 과거 군사독재 하에서는 강력한 힘을 소유했지만 절차적 민주주의가 보장된 사회로 이행하면서 오히려 그 힘을 잃어가는 느낌입니다.사회개혁적 인사들이 장외투쟁을 접고 제도내의 방식과 목표를 세워서 사회개혁에 동참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그 제도는 허약하고 비빌 언덕이 없습니다.당장의 무기가 없어진 셈입니다.경제구조와 정치의 개혁에도 정부만큼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대표소송제나 주민표결제 등이 그런 예입니다.하지만 그러려면 시민단체나 개인이 개혁에 참여할 수 있는 도구를 먼저 마련해야 합니다.그러나 현재 어느 부처도이를 연구하는 곳이 없습니다.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위한 도구를 마련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유기적인 협조체제 구축◁ ▲韓교수=시민들의 참여를 촉진하려면 다양한 방향의 제도개선이 필요합니다.시민단체간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은 솔직히 힘든 작업입니다.아마도 운동단체들의 자발적 협력이 이뤄지면서 자연스런 과정을 통해 조직운동이 태동해야 할 것입니다. 참여는 제도가 허용하는 절차와 방법에 따라 이뤄져야 합니다.이러한 모델 속에서 구석구석 활용할 공간이 많아지고 (시민운동은)더욱 열릴 것입니다.우리 사회는 이런 방식으로 기업 재벌 등의 ‘전제적 권력’을 고쳐야 하며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고 있습니다.제도안으로 들어가는 끊임없는 운동들은 많은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金大中 대통령도 이런 모델을 통해 지평을 열라고 하는 것입니다. ○관료조직 개편 미흡 ▲朴변호사=위로부터의 개혁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일반국민의 자발적인 동원이 가능한가에 따라 개혁의 성패는 갈립니다.정부가 나서서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정부조직의 10% 감축으로 할 일이 다 끝났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하지만 뉴질랜드와 비교해 보면 그리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정부는 지금 개혁의 책임을 가계나 사기업에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먼저 개혁의 동기와 전략을 수립해 기초를 마련해야 합니다. ▷정치·사회개혁의 방향◁ ▲韓교수=많은 국민들은 개발 독재과정에서 만연된 부정부패의 핵심을 정치권에서 찾고 있습니다.일단 개혁을 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면 정파와 상관없이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야 합니다.강력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에서 개인과 사회집단을 자발적인 구조운동 개혁에 동참시켜야 합니다.정부의 개혁운동과 함께 각종 그릇된 사고방식과 관행을 고쳐가는 국민운동을 병행해야 합니다.따라서 현재의 정치개혁은 자연스레 사회의식 개혁운동으로 옮아가야 합니다.‘부패척결을 하자’‘바르게 살자’ 등이 국민운동으로 점화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朴변호사=‘개혁은 타이밍’이란 말도 있습니다.지금까지 새 정부가 너무 신중해서 개혁대상까지 아우르고 그 의견을 들어보는 민주적 절차를 중시했습니다.개혁은 어차피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의 저항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단호히 제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집권세력 내의 개혁이 선행돼야 합니다.사정(司正)도 하지만 타협의 기운도 있는 게 현상황입니다.이런 상황에서 개혁이 실패할 경우 국민들의 실망은 더욱 커집니다.오해와 편견,저항이 있어도 정치개혁과 사정은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그러면 국민 모두 결국은 공감하게 됩니다.‘비리 있는 곳에 사정 있다’는 원칙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확립해야 합니다. ▷제3섹트의 중요성◁ ▲韓교수=넓은 시각에서 정부와 재벌의 영향력에서 독립해 시민사회라는 제3섹트의 역할을 늘리는 것이 개혁 성공의 관건입니다.우선 국민적 합의로 극복돼야 할 관행과 인습에 대해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예컨대 반 인류적인 행동과 부정부패 척결,촌지 거부 운동 등 절대 부패나 부정의 행동을 하지말자는 공감대를 국민적 힘으로 형성해야 합니다.앞으로 비정부기구(NGO)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정부 못지않게 많은 권한을 시민사회에 주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릇된 관행 고쳐야 ▲朴변호사=정부와 시장에 비견되는 제3섹트로서의 민간운동이 중요하다는 점에 공감합니다.우리의 경제위기는 외국처럼 상호견제와 균형의 체계가 없기 때문에 초래된 것입니다.우리의 경우 정부는 대통령,기업은 총수 한 사람만 존재합니다.정부가 시민사회단체를 일렬로 세우려고 하는데 이러면 시민단체는 도덕성에 해를 입으면서 바로 힘을 잃게 됩니다.이런 의미에서 민간단체 지원법도 반대합니다.본의 아니게 통제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종교단체 같이 후원비에 대한 세금감면이나 우편료 감면을 하거나 미국처럼 방송총시간의 일정부분을 공익광고 명목으로 시민단체에 할애해 주는 간접 지원제도가 더 필요합니다. ▷시민단체의 참여 패러다임◁ ▲韓교수=국민적 에너지를 결집해서 동기 부여와 목표설정을 통해 자발적인 협력으로 발전된다면 제2건국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반면 참여를 빙자해 지나치게 갈등을 증폭시키거나 불신이 심화되면 국가적으로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게 됩니다.무엇보다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운동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자발성이 훼손되는 일이 생기면 안됩니다. ○민간단체 지원법 반대 ▲朴변호사=우리는 일제와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참여는 손해다’라는 인식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참여연대의 경우도 몇년간 정말 열심히 시민운동을 했지만 아직도 회원이 늘지 않고 재정적 어려움이 많습니다.정부차원에서 국민의 참여의식을 고취하는 데 필요한 제도적 절차를 마련해 줘야 합니다. ▷관료·제도개선의 시급성◁ ▲韓교수=공익운동 단체들이 현재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이는 각 부문에서 실권을 행사하는 관료의식이 구태의연하기 때문입니다.대통령의 개혁 청사진과 관료들의 체질 사이에 큰 균열이 있습니다.관료들에겐 수십년간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습득된 관행과 타성의 문화가 있습니다.이것은 근본적으로 민의 참여 촉진보다 억제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관료문화 개선 과제 따라서 관료 문화의 ‘품질개선’이 주요한 과제입니다.체계적인 노력없이,개혁주제의 설정 없이는 시행착오와 자기 한계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미래를 바라보는 정확한 그림이 아직 관료들에게 없기 때문입니다.관료들의 대대적 교육이 시급한 과제입니다. ▲朴변호사=의식개혁과 교육의 힘이 중요하다는 데 동의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전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제도의 힘이 필요합니다.예를 들어 고속도로의 오물투기가 심했지만 헬리콥터를 동원,공중에서 감시하는 등 철저한 단속을 하자 최근 들어 상당히 줄어든 것이 그 예입니다. 일본은 사회발전 시스템이 상당한 수준에 와 있습니다.그러나 일본의 사회운동가들은 많이 절망하고 또 우리를 오히려 부러워합니다.그처럼 강력한 우리사회의 활력이 참여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참여를 견인하는 제도가 미비하고 채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韓교수=우리사회는 분기점에 와 있습니다.국민적 지혜와 협력의 발전모델을 세우느냐,‘우물안 개구리’처럼 분열 갈등의 유산 속에서 쇠퇴의 길로 가느냐는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하지만 희망찬 미래로 끌어가는 궁극적 힘의 원동력은 도덕성과 전문성·비판성을 갖춘 시민사회 집단에 있습니다.정부는 시민단체를 지원하면 되지 정부가 나서서 통제하거나 지도하면 안됩니다.사회의 양식 있는 사회운동단체들이 큰 눈으로 생각하고 헌신하는 역할을 간절히 기대합니다. ▲朴변호사=시민사회단체는 정부를 비판할 때 곧 돕는 것이며 개혁 저항세력을 견제하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정부와 시민사회단체의 올바른 역할 분담이라고 생각합니다. 개혁의 성공도 마찬가지입니다.정부가 먼저 제도적 기반을 만들어줄 때 국민들의 참여의식과 개혁이 더 빨리 진전될 수 있습니다.
  • 대한민국 정체성(金三雄 칼럼)

    건국 50주년은 통사적 의미에서 대한민국 건국 77년이라야 옳다. 우리 헌법의 전문대로 “3·1운동으로 건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기 때문이다. 1919년 4월 11일과 12일 조국의 광복을 위해 중국 상하이에 모인 애국지사들은 제 1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전문 10조의 임시헌장을 심의 통과시켰다. 헌장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제11조)”,“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제2조)”이라 규정하여 명실상부한 근대민주국가의 국체와 정체를 확립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11일 의정원의원 申錫雨의 동의가 가결되어 채택되었다. 이날 조선 고려 대한 등 여러가지가 논의되었으나 결국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어 이후 임정의 헌법강령 포고문 대일선전포고문 등 모든 문건이 대한민국으로 표기되고 1919년을 건국기원으로 삼았다. 그러나 망국시절의 정파들은 ‘대한’‘고려’‘조선’을 각 진영의 이념 성향에 따라 쓰게 되었다.대체로 보수적 우익측은 대한,좌익측은 조선,회색적 중간층은 고려라는 국호를 선호했다. 이른바 ‘좌(左)조선 우(右)대한,남(南)대한 북(北)조선’의 성향이고, 이런 현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해방 직후 다시 국호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설정식은 ‘대한’을 사용해야 할 근거로 ①망국 직전까지 사용했던(대한제국) 국호이니 광복적 의미가 있고 ②대한은 3·1운동 이후에도 사용했던 것이니 그 법통을 계승하는 의미가 있으며 ③대한의 ‘한’은 삼한시대부터 국호의 표상으로서 역사적 유래가 있다고 지적했다. ○항일단체들 민주공화제 선호 그는 또 ‘조선’을 재사용할 근거로 ①조선은 단군시절부터 국호로 역사적 유래가 있고 ②조선은 우리 민족의 범칭적 용어로 어느때든지 사용할 수 있으며 ③조선은 우리 지역의 이름으로 널리 쓰는 말로 쓰기에 쉽고 편리하다고 해석했다. ‘고려’의 근거로는 ①대한과 조선에 구애됨이 없이 완전히 새로 출발하기 위해서 ②대한과 조선이 지금 대립하니 이를 발전적으로 해소하여 분열을 피하고 통일을 기하기위해서 ③외국에서 불리고 있는 코리아와 관련이 있는 용어라는 이유를 들었다. 3·1운동을 주도한 손병희의 1919년 7월 4일자 경성지방법원 예심조서에 따르면 “조선이 독립하면 어떠한 정체를 세울 생각이었는가”란 검사의 신문에 “민주정체로 할 생각이었다. 그 사실은 나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라고 언명하여 민주정체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일제강점기동안 국내외 독립운동단체 460개 가운데 민주공화제를 추구하는 민주지향형이 244개로 53%인데 비해 계급투쟁형 34%,왕정복고형 8%,군정추구형 5%로 나타났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이념적 성향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민주공화제의 의지는 임정으로 수렴되고 해방과 함께 건국의 이념으로 승계되었다. 8·15 건국은 최초로 실질적인 근대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의 전제군주체제와 일제식민통치를 청산하고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후삼국통일 이래 다시 분열 학계는 여전히 8·15 해방이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타율적으로주어졌다는 외인론(外因論)과 한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이 해방의 필연성을 싹틔웠다는 내인론(內因論)으로 나뉘고 있다. 외인론이든 내인론이든 해방과 함께 이질적인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우리 민족은 후삼국의 통일 이래 꼭 1012년만에 서로 대립 상쟁하는 분단국가를 만들어 어언 남북이 정권수립 50주년을 맞게 되었다. 비록 분단상태에서 맞은 건국 50주년이지만 적어도 3·1항쟁 이래 국혼(國魂)과 국맥(國脈)으로 지켜온 민주공화제를 바탕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제2건국’을 계기로 국난극복과 통일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하겠다.
  • 돌고래를 기뢰탐지에 활용/지능 높고 음파 탐지능력 뛰어나

    ◎“인간·첨단장비보다 효율적” 평가 【도쿄 AFP 연합】 미 해군이 돌고래를 ‘기뢰탐지요원’으로 활용,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최근 하와이근해에서 실시한 98년도 환태평양(림팩)합동해군훈련에서도 10마리를 투입,재미를 보았다. 돌고래의 지능이 높고 수중물체 음파탐지능력이 뛰어난 점을 이용하고 있다.‘돌고래 사단’은 등에 위치확인 시스템을 붙이고 물속으로 들어가 기뢰설치장소를 찾아낸다.그러면 뒤따르는 잠수부들이 기뢰를 제거하고 이 사실은 고래등에 부착된 장치가 인공위성을 통해 인근해역의 소함정에 알려준다. 이때 미 해병대는 마음놓고 작전을 개시하면 되는 것이다. 돌고래는 임무 완수후 반드시 출발점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사람이나 최신 장비 보다도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게 미해군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미 해군은 오래전부터 돌고래를 군사훈련에 이용해오고 있다.그러나 최근들어 방위비 삭감여론과 동물보호운동가들의 반대로 ‘돌고래사단’의 규모가 크게 줄어들 운명에 처해 있다.
  • 올해의 인권상 수상 연설문

    먼저,오늘 나에게 영예로운 인권상을 수여해 주신 국제인권연맹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국은 금년 2월에 한국 국민이 그토록 염원하던 여야간 정권교체를 50년만에 처음으로 이루어냈습니다.그것은 아시아에서 이룬 또 하나의 민주주의의 승리였습니다.지금 한국은 유엔인권위원국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인권보호를 위한 국제적 노력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결과는 한국 국민이 기나긴 고난과 고통의 시간속에서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전진의 발걸음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오늘의 이 인권상은 내가 받을 영광이 아니라 나와 함께 투쟁하며 민주주의를 쟁취해 낸 우리 한국 국민에게 돌아가야 할 영예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세계 각국의 언론인으로부터 ‘당신이 대통령이 될 것으로 예상했었느냐’하는 질문을 자주 받았습니다.그에 대한 답변은 두가지였습니다.하나는 ‘우리 국민은 반드시 민주주의를 회복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만일 죽지 않으면,나는 국민을 위해서 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라는것이고,다른 하나는 ‘내가 비록 이대로 죽는다 하더라도 인권과 정의,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사람은 역사속에서 패배하는 일이 결코 없기 때문에,나는 우리 국민과 역사속에서 반드시 승리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은 금년 2월에 그토록 염원하던 여야간 정권교체를 50년만에 처음으로 이루어냈습니다.그것은 아시아에서 이룬 또 하나의 민주주의의 승리였습니다.한국은 유엔인권위원국의 당당한 일원으로 인권보호를 위한 국제적 노력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금년은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된지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그러나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권력과 금력의 폭압 앞에 인권이 유린되고 있으며,인권운동가들의 투쟁 또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지역적 특성이나 문화적 특수성이 인권침해를 합리화할 수 없습니다. 세계에서는 그동안 ‘아시아적 가치’라는 것이 널리 논의되어 왔습니다.아시아에는 서구적 개념의 인권이나 민주주의의 철학과 전통이 없다는 것입니다.그리고 경제건설을 위해서는 인권이나 민주주의는 희생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아시아에도 서구 못지 않은 인권사상의 철학적 기반이 있었습니다.중국의 맹자는 서구 민주주의의 철학적 시조인 존 로크보다 2,000년을 앞서서 ‘임금이 백성을 위해서 선정을 베풀지 않으면 백성은 이를 쫓아낼 권리가 있다’는 주권재민론을 주장했습니다.부처님도 ‘천상천하에 내 인격이 제일 존귀하다’고 말했습니다.우리나라의 민족종교인 동학에서도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서구보다 2,000년 앞서서 중국에서는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오늘의 군현제도를 실시했습니다.또한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아무리 고관의 아들도 공개 국가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간부직 관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누구도 인권을 위해 싸울 수가 없습니다.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선배영웅들은 이번에 유엔인권위원회가 ‘인권옹호가 선언’을 채택한 것을 지하에서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나는 이 선언이 금년말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난 반세기동안 인권수호의 고귀한 사명에 헌신해온 국제인권연맹과 인권분야 비정부기구(NGO)의 활약상에 대해 찬사를 보냅니다. 한국의 새 정부는 명실상부한 ‘국민의 정부’로서 국민 개개인의 인권문제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그 일환으로서 인권법 제정과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등 제도적인 인권수호 방안을 적극 추진하고 있습니다.나아가 지구촌 도처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한국이 세계의 모든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면서,인권옹호가와 국제인권연맹의 헌신에 동참하는 것을 매우 기쁘고 영광스러운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 반민특위의 좌절과 개혁세력(金三雄 칼럼)

    초하의 6월이 열리면 우리는 6·25한국전쟁과 반독재 6월 민중항쟁을 생각한다. 한국 현대사의 물굽이를 바꾼 큰 사건이다. 그런데 6월이면 잊어서는 아니 될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앞의 두 사건에 못지 않는 사건이다. 단재 신채호의 필법을 차용하여 ‘한국현대사의 제1대사건’이라면 무엇일까. 해방 건국 분단 전쟁 4월혁명 5·16쿠데타 10월유신 10·26사태 5·17쿠데타 광주항쟁 여야정권교체 등, 안정된 사회라면 1세기에 한번 겪을까말까할 일을 우리는 숨돌릴 틈도 없이 무수히 치렀다. 그 ‘다사다난(多事多難)’중에 정신사적으로나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국민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의 하나는 이승만 정부의 반민특위 해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들을 하나도 처벌하지 못하고 친일세력이 건국과정과 그 이후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잡으면서 사회정의와 민족정기가 설자리를 잃은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6·6사건’으로 불리는 친일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1949년 6월6일 상오에 자행되었다. ‘웃어른(이승만)’의 양해를 받은 무장경찰은 관할인 서울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반민특위 사무소를 습격하여 요인들을 체포하고 기물을 파괴했다. 시경국장 김태선 내무차관 장경근 종로서장 윤명운 등 일제경찰출신들이 중심이 된 만행이었다. 이날 경찰에 끌려간 특위 직원들은 심한 고문을 당하고 많은 관련 자료가 폐기되었으며 지방의 특위 사무소도 피습되어 업무가 마비되었다. ○청산하지 못함 반민세력 국민적 환호와 기대를 받으면 진행되던 반민특위의 친일파 청산작업은 이렇게 하여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반면 친일파들은 이승만과 결탁하여 뿌리를 내리고 군사정권과 문민정부를 거치는 동안 가지를 쳐서 기득세력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려는 친일세력의 공작은 집요했다. 이들은 반민특위인사들을 ‘빨갱이집단’이라 음해하면서 정신적 지주인 김구를 살해하고 국회프락치사건을 일으켜 항일독립운동 세력을 제거했다.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완벽하게 제거한 6·6사건의 진상은 독재치하에서 묻혀지고, 식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가 반세기 동안 이어지게 된 것이다. 50년만의 정권교체로 집권하게 된 김대중 정부의 책임과 사명은 막중하다. 현실적으로는 경제를 희생시켜 IMF체제에서 해방되는 일이며, 역사적으로는 반민특위의 좌절이래 전도된 가치관과 사회정의를 바로 잡는 일이다. ○개혁, 반민특위 정신으로 친일세력에 뿌리를 둔 수구세력은 그동안 키워온 인적 물적 기반을 바탕으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은 김대중 정부의 개혁을 훼방하고 국가적 위기상황에도 눈을 돌린채 기득권 유지에 연연하면서 사사건건 개혁의 발목을 잡는다. 반민특위의 좌절로 지난 반세기의 역사가 독재와 불의로 점철되었듯이 김대통령의 개혁이 실패하면 역사는 또 얼마나 가혹한 시련을 안겨줄 것인지, 수구세격은 이를 외면하는 것이다. 하루빨리 김대통령의 개혁의지를 뒷받침할 컨트롤 타워로서의 개혁주체(세력)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청산할 것은 청산하고 개혁할 것은 개혁하여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 뼈저린 반민특위 좌절의 역사는 한번으로도 족하다.
  • 국민의 정부 첫 5·18 의미­5·18 光州민중항쟁 18주년

    ◎“아시아민주화운동 도화선” 재평가/亞 인권선언대회 주체 계기/기념식 국제행사로 발돋움 “5·18은 아직도 광주에 갇혀 있는가” 국민의 정부 출범후 처음 맞는 5·18의 화두(話頭)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지난해부터 5월18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는 등 여러 여건은 4·19에 맞먹는 민중항쟁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그럼에도 광주·전남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도 기념행사 조차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5·18 민중항쟁 제18주년 기념행사위원회(위원장 李基洪)’는 올해 행사의 목표를 ‘5·18정신의 전국화·세계화추진,그리고 광주와 5·18의 향후 방향성 제시’로 세웠다.5·18을 시공(時空)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엮어 전국적,나아가 세계 인류 모두에게 제대로 인식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번 5·18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50년만에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사실이다.또 유엔 세계인권선언 채택 50주년이라는 의미도 있다.광주에서는 15일부터 17일까지 ‘아시아인권헌장’선언대회가 열리고 있다.아시아지역 2백여개의 비정부민간조직의 쟁쟁한 인권운동가들이 모여 21세기를 맞아 아시아민중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추구해야할 기초적인 권리를 담은 헌장을 채택하는 행사다. 이같은 노력을 통해 5·18은 아시아 민주화의 도화선이 된 국제적 민중운동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광주의 울타리를 넘어 우리 국민 전체의 역사로 기록됨은 물론이다. 이를 위해 시간의 관점에서 5·18의 근·현대사적 위상 재고찰이 필요하다.5·18 묘역에 설치된 체험공간 일곱마당 부조물은 ‘임진왜란 의병­동학혁명­광주학생운동­3·1운동­4·19의거­5·18광주민중항쟁­통일’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일곱마당에는 빠졌지만 4·3제주항쟁도 같은 맥락에서 부각되어야 한다는게 5·18연구학자들의 주장이다. 공간적으로는 다른 나라 민중항쟁과의 비교 검토가 요구된다.중국의 천안문사태,대만의 2·28사태 및 고웅사태 등이 비교대상이 될 수 있다.일부 학자들은 버마 8888항쟁,태국 5·18 항쟁과 최근 인도네시아의 반(反)수하르토봉기 등 80년대 후반 이후 아시아권의민중항쟁들을 ‘민주화 갈망’이라는측면에서 같이 묶어보려는 노력을 진행중이다. 결국 5·18이 역사에서 제 위치를 차지하려면 명확한 진상규명이 전제되어야 한다.발포명령자,사망자 숫자 등이 확실히 규명되어야 한다.집단암매장 여부,행방불명자 추적,헬기기총소사 등의 참혹행위 여부도 밝혀져야할 대목이다. ◎광주 민중항쟁 일지 ▲80.5.17=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5.18=전남대생 600여명 학교정문 앞 계엄군과 첫 충돌.광주민주화운동 발발 ▲5.27=신군부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9.1=전두환 11대 대통령 취임 ▲9.17=김대중 내란음모죄 1심 사형선고 ▲10.25=계엄군법회의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175명 선고공판사형5명,무기7명 등) ▲12.9=광주 미문화원 방화 ▲81.4.3=실형 관련자 특사,감형 실시 ▲82.3.18=부산 미문화원 방화 ▲84.11.18=민정당사 점거 시위 ▲85.5.23=서울 미문화원 점거 ▲6.7=국방부‘광주사태 전모’발표.사망자 191명(민간인 164,군인 23,경찰 4명) ▲86.11.1=광주 직할시 승격 ▲88.4.26=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민정당 완패.국회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정국 형성 ▲88.11.18∼89.2.24=국회 광주 특위 및 청문회 가동 ▲89.3.10=노태우­김대중 회담,상무대 공원화등 일부 치유책 합의 ▲91.5.11=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보상 지급 완료 ▲93.5.13=김영삼 대통령 광주문제 관련 담화 발표 ▲94.5.13=정동년 5·18 광주항쟁 연합 상임회장,두 전직 대통령 및 군지휘관 35명을 내란 목적 살인 등 혐의로 고발 ▲95.7.14=5·18 관련자 처벌을 위한 공동대책 위원회 구성 ▲7.18=검찰 5·18 관련자들에 대한 공소권 포기 발표 ▲7.19=5·18 유족 부상자 등 150여명 명동성당 농성 ▲11.25=5·18 특별법 제정 ▲96.1.23=두 전직대통령 등 5·18 관련자 8명 내란혐의 기소 ▲97.4.17=대법원 전두환 무기,노태우 17년형 확정 ▲5.9=국무회의 5·18 국가기념일 제정 ▲12.22=두 전직대통령을 포함한 5.18 관련자 사면,복권
  • 재력1위 朱복지 5년새 15억 증가/공직자 신규재산등록 이모저모

    ◎임야·전답·상가·주식 등 보유형태 다양/朴琴玉 총무비서관 1억600만원 꼴찌/대통령비서실·안기부 10억 이상 6명 ○…취임 초 부동산 투기의혹을 받았던 朱良子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번 공직자 재산등록에서 45억6천7백만원을 신고,신규등록자 52명중 최고의 재력을 과시. 이번 신고액은 투기의혹 당시 朱장관 스스로 밝힌 지난 93년 9월 재산등록때의 본인과 가족명의의 재산 30억8천8백만원 보다 15억원 정도가 증가한 액수. 朱장관은 임야,전답,빌라,다세대주택,오피스텔,상가,주식,예금,자동차,콘도 및 골프회원권 등 다양한 형태로 재산을 보유. 특히 부동산이 14건으로 18억1천만원이고 동산은 27억6천만원에 이르렀다. 보유 부동산 중에 지난 72년 남편 명의로 매입한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묵현리92 전답 2만6천851㎡(공시지가 35억1천만원)가 최고가인 것으로 나타났으나 지난 96년 9월에 매각해 이번 신고에서는 제외. 반면 金大中 대통령 영국 체류시절부터 측근으로 활약한 朴琴玉 대통령비서실 총무비서관은 1억6백만원의 재산을 신고,재력면에서는 ‘꼴찌’ 공직자로 기록됐다. 이어 李康來 안기부 기획조정실장이 1억6천만원으로 뒤에서 2위를 달렸고李相浩 병무청장,沈達燮 광주세관장,鄭 灌 대구교대 총장이 차례로 ‘청빈한’ 공직자 대열에 합류했다. ○…새 정부 들어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안전기획부 등에 입성한 고위 공직자중에 20억 이상 재산신고자는 4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비서실과 안기부 고위간부들 중에는 朴智元 공보수석의 재산이 36억6백71만9천원으로 가장 많았고,李鍾贊 안기부장이 36억5백45만1천원,辛 建 안기부 제 2차장이 29억4천4백39만6천원,曺圭香 사회복지수석이 22억2천4백47만1천원을 신고. 이밖에 羅鍾一 안기부 제 1차장이 15억3천3백1만9천원,金重權 대통령 비서실장이 12억9천2백91만2천원을 신고하는 등 재산이 10억 이상인 공직자는 모두 6명. ○…李鍾贊 안기부장의 경우 조부인 우당 李會榮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을 기념하기 위한 서울 종로구 동숭동 우당기념관 빌딩(대지 1천93㎡,시가 31억9천9백21만원)을 소유하고 있어 재산신고액이 높았으며 종로구신교동 자택(대지 578㎡)이 7억7천5백76만7천원,9개 금융기관 예금액이 2억1천5백여만원. ○…이날 재산공개에는 청와대 등 일부기관에서 새정부 출범 이후 근무 중인 1급 이상 공직자 30여명이 포함돼있지 않아 눈길. 이들은 현재 각 기관에서 근무 중이지만 신원조회 등 필요한 절차가 끝나지 않아 아직 정식으로 임명되지 않은 상태이거나 최근 임명된 탓에 이번에 재산등록 공개를 하지 않았다는 것. 행정자치부는 청와대 안기부 등에 근무중인 사람 가운데 28명 가량이 이같은 사정에 놓여있으며 조만간 정식 임명되면 공직자 윤리법에 따라 1개월 이내 재산 등록 등을 해야 한다고 설명. 또 20여명 가량은 최근 퇴직해 이번 재산공개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 □신규공개재산액 상위 10명 순위 성명 직위 재산액 1 주양자 보건복지부장관 4,567,459 2 박지원 청와대공보수석비서관 3,606,719 3 이종찬 국가안전기획부장 3,605,451 4 배순훈 정부통신부장곤 3,273,504 5 신 건 국가안전기획부제2차장 2,944,396 6 조규향 청와대사회복지수석비서관 2,224,471 7 김진선 비상기획위원회위원장 2,091,019 8 이규성 재정경제부장관 1,567,379 9 나종일 국가안전기획부제1차장 1,533,019 10 윤웅섭 경찰청치안감 1,494,201 □신규공개재산액 하위 10명 순위 성명 직위 재산액 1 박금옥 청와대총무비서관 106,363 2 이강래 국가안전기획부기획조정실장 161,420 3 이상호 병무청장 239,915 4 심달섭 관세청광주세관장 258,963 5 정 관 대구교육대총장 263,530 6 김기옥 국민고충처리위원회상임위원 284,356 7 김중양 행정자치부소청심사위원 319,540 8 김대욱 국방부 322,597 9 김태동 청와대경제수석비서관 350,473 10 권형신 행정자치부소청심사위원 360,691
  • 패스트푸드점 쓰레기처리 ‘엉망’

    ◎환경부,관련법 고쳐 1회용품 사용 규제 강화/음식쓰레기 분리통 안갖춰 뒤범벅/스티로폼·코팅종이 환경오염 가중 환경부는 17일 청소년들의 입맛이 서구화되면서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패스트푸드점들이 1회용품 쓰레기를 마구 버리고 있어 이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올 상반기안에 관련법규를 개정해 이들 업소들의 1회용품 사용을 줄이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특히 상당수 패스트푸드점들이 음식쓰레기와 다른 쓰레기를 분리하지 않고 한꺼번에 버리는데다 수분 분리통조차 갖추지 않고 있는 곳이 많아 이에 대한 개선책도 아울러 마련할 계획이다. 콜라 사이다 등 음료수는 1회용컵 대신 유리컵을 사용하도록 권장할 방침이며 코팅된 포장용 종이와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을 담는 컵,쟁반위에 놓는 광고용 종이 역시 사용하지 않도록 하거나 되도록이면 재활용이 가능한 제품을 쓰도록 지도하기로 했다. 그동안 호텔과 대형음식점,목욕탕과 숙박업소,백화점.슈퍼마켓 등 유통업체 등은 1회용품 사용을 억제해 왔으나 패스트푸드점은아무런 규제가 없어 1회용품 사용의 사각지대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햄버거나 파이를 포장할 때 사용하는 코팅된 종이는 분해가되지 않고 재활용이 어려우며 햄버거 포장용으로 많이 사용하는 스티로폼도 잘 분해되지 않고 제조과정에서 오존층 파괴물질인 염화불화탄소가 사용되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환경운동가들은 “대다수 패스트푸드점은 비싼 로열티를 외국에 내고 있으며 특히 쏟아져 나오는 1회용품 쓰레기로 환경이 오염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 봄나들이/가족과 함께 ‘선열의 얼’ 되새기자

    ◎천안 유관순 열사 추모각­봉화대­생가 등 유적지 인접/홍성 한용운·김좌진 장군 생가도… 하루 코스로 적격 79년전 우리 선조들은 3월1일을 시발로 일제에 맞서 근 3달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그래서 3월은 우리들에게 설레임보다는 숙연하게 다가온다. 절기상으로는 봄이지만 봄나들이를 나서기에는 아직 이르다.3월을 맞아 독립투사의 생가 등 항일운동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도 뜻있는 일이다. 독립투사들의 생가를 보려면 충남으로 가야한다.유관순 열사는 천안에서 태어났고 윤봉길 의사는 예산,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은 홍성출신이다.충남에 독립운동가들이 많은 것은 충청도가 예로부터 충절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있는 유관순 열사 유적지는 추모각,봉화대,생가가서로 가까이에 있어 순회코스로 안성마춤이다.천안시내에서 독립기념관으로가는 21번 국도로 나가 18㎞정도 가면 아우내장터가 나오고 이 곳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열사의 영정을 모신 추모각이 있다.추모각을 구경한뒤 추모각 뒷편의 매봉산에올라 독립운동 거사를 알리기 위해 봉화를 피운 봉화대를 둘러보고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생가가 나타난다.모두 다 둘러보는데 1시간이면 된다. 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의 생가가 있는 홍성은 인근의 용봉산과 천수만 방조제를 연계하면 하루 단위 나들이길로 적격이다.먼저 충남 서부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홍북면 용봉산으로 가 1∼2시간 땀을 흘린다.하산길에 점심식사를 하고 생가터로 발걸음을 옮긴다.갈산면 행산리에 있는 김좌진 장군의 생가터에는 24평 규모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기념관에는 국내 및 해외활동과 관련된 유품과 함께 영상자료가 전시돼 있다.이 곳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는 한용운 생가가 있으며 생가를 거쳐 방조제로 가면 된다. 윤봉길 의사는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출생했다.시량리에는 윤의사가 태어나서 4살때까지 살던 광현당,중국으로 가기 전인 23살때까지 지냈던 저한당,윤의사의 사당을 모신 충의사와 유물전시관,충의관 등이 4만2천여평의 경내에 보존,관리되고 있다. 서울에는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종로2가 탑골공원,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이 있다.3·1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은 189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이다.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운동 기념탑,3·1운동 벽화,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과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서대문 독립공원은 일제시대 유관순,손병희 등 애국지사가 수감돼 있었던 곳으로 지난 92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조성된 곳이다.감옥 7동,사형장,지하옥사 등이 복원됐으며 독립문,3·1운동기념탑,순국선열 추념탑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의인 대거 배출된 충청도 충청지역은 예로부터 충절의 고향이라고 불려 왔다.이러한 사실은 실제로도 입증된다.1900년부터 1973년까지의 명사 150인을 분석한 한 조사에 따르면 충남은 독립운동가 부문에 6명(유관순,윤봉길,김좌진,한용운,이범석,조병옥)이 올라 10명인 서울 다음으로 2위에 올랐다.조사 당시 서울인구가 충남인구의 두배가 넘는 것을 감안하면 인구비례로는 충남이 서울보다 훨씬 높은 셈이다. 충남에서 의인이 많이 배출된 것은 역사적으로도 뒷받침된다.사육신인 성삼문(홍성),박팽년(대전)을 비롯,북벌론을 주장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이 회덕출신이다.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이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실질적인 고향은 아산이고 구한말 의병운동이 가장 먼저,가장 강하게 일어난 곳도 충청지역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충청지역은 일찍부터 충절 또는 민족의식이 저변에 강하게 깔려 있었고 이러한 전통이 독립운동가 배출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송시열로 대변되는 기호학파가 200여년간 지배세력이었다는 것도 간과할수 없다.즉 나라를 잃은데 대한 책임의식이 그만큼 강할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충청인의 기질을 보면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처럼 대체로 행동이 점잖고 느린 편이다.이 말은 뒤집어 보면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행동은 신중한 것으로 해석된다.즉 충동적이기 보다는 심사숙고하며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볼수 있다.바로 이러한 요인이 어려운 상황에서 살신성인의 모범을 보여주게 된 동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