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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인권 때리면서 홍콩운동가 망명 불허… 美의 두 얼굴

    대선을 코앞에 둔 미국이 중국에 대해 인권문제를 내세워 압박 수위를 최대치로 끌어올렸지만, 정작 홍콩 민주화 운동가들의 망명은 허용하지 않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홍콩·대만 문제를 꺼내 드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저의가 의심되는 대목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27일(현지시간) ‘종교자유의 날’ 기념 성명에서 북한, 이란과 함께 중국을 지목하며 “이들은 가장 지독한 종교의 자유 박해 국가로 국민을 침묵시키고자 온갖 조치를 취해 왔다”면서 “특히 중국은 공산당의 정책과 맞지 않는 모든 종류의 믿음을 근절하려고 했다”고 비난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종교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은 미 외교정책의 최우선 순위”라고 강조했다. 미 행정부가 해마다 발표하는 종교자유의 날 성명에서 특정 국가를 종교자유 박해국으로 거론한 것은 이례적이다. 대선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인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의 표심을 얻고자 성명의 수위를 크게 끌어올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국무부는 폼페이오 장관의 발표가 무색하게 홍콩 민주화 운동가들의 망명 요청은 거절했다. 28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전날 오후 홍콩 활동가 4명이 홍콩 주재 미 영사관으로 뛰어들어가 망명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들의 망명 계획을 미리 입수한 중국 정부 관리들이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살펴봤다고 매체는 설명했다. 앞서 오전에도 홍콩 학생 운동가 토니 청(19)이 미 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하려고 맞은편 커피숍에서 대기하다가 홍콩 경찰에 체포됐다. 이에 대해 미 영사관은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SCMP는 “미국이 겉으로는 ‘홍콩 민주화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실제로는 중국과의 갈등을 우려해 내부적인 한계선을 설정해 둔 것 같다”고 해석했다. 베이징 류지영 특파원 superryu@seoul.co.kr
  • [여기는 인도] ‘7000원’에 팔려가는 아이들…아동 인신매매 성행

    [여기는 인도] ‘7000원’에 팔려가는 아이들…아동 인신매매 성행

    전 세계에서 코로나19 누적 확진자 수가 두 번째로 많은 인도에서 아동 인신매매가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최악의 범죄 중 하나인 아동 인신매매는 생계가 곤란해진 빈민층 사이에서 더욱 성행하고 있다. 미국 CNN의 25일 보도에 따르면 지난 8월, 한 14세 소년은 모두가 잠든 시간 집에서 몰래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자신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도시로 향했다. 당시 이 소년은 같은 마을에 사는 한 남성으로부터 여행비 명목으로 500루피(한화 약 7660원)를 받았고, 문제의 남성이 준비한 버스에 올라탄 상황이었다. 하지만 버스가 목적지인 라자스탄주 자이푸르에 도착했을 때, 소년과 친구들은 여행이 아닌 인신매매에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기다리고 있던 경찰들은 문제의 남성과 공법을 현지 아동 인신매매법에 따라 체포했고, 현장에서 총 19명의 아이들을 구조했다. 자이푸르 경찰은 체포된 남성들이 아이들을 유인한 뒤 인근 팔찌 공장에 값싸게 팔아넘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혔다.인도 현지법에 따르면 현지 어린이들은 14세부터 경제활동을 할 수 있지만 이는 가족이 참여하는 노동현장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국가 경제가 코로나19로 큰 타격을 받은 뒤 일자리가 사라지자 아동의 노동력을 값싸게 이용하려는 인신매매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부모는 아이를 팔아 잠시나마 생계를 유지하고, 고용주는 싼값에 노동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위험에 처한 아이들은 극심한 빈곤에 직면한 빈곤층이다. 유엔아동기금인 유니세프가 지난 7월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인도 빈곤지역인 비하르주는 코로나19 봉쇄령이 내려진 3월 당시 전체 가구의 절반 이상이 ‘소득 0원’을 기록했다. 아이들 스스로도 굶주린 가족을 위해 자신이 돈을 벌어야 한다고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하르주에 사는 한 15세 소년은 코로나19 봉쇄령 이후 부모님의 수입이 없어지자 스스로 집을 나섰다. 학교는 여전히 문을 닫았고, 장남으로서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 이 소년은 위 사례에 등장한 아이들처럼 인신매매범이 마련한 버스에 올라탔지만 역시 경찰에 적발돼 집으로 돌려 보내졌다.하지만 경찰의 구조 손길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결국 인신매매범에게 속아 공장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린다. CNN에 따르면 니샤드(가명)라는 이름의 한 10대 소년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창문이 없는 어두운 방에 가둬졌고, 하루 15시간 동안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가족에게 연락할 수도, 일을 멈출 수도 없었다. 니샤드와 아이들은 지난 8월 경찰이 문제의 공장에 급습하기 전까지 5개월 동안 노동 학대를 당했다. 현지 아동인권운동가들은 아동인신매매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다시 학교로 되돌려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유니세프는 “학교에서 내몰린 아이들이 값싼 노동에 희생되거나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역풍 맞는 중국의 힘자랑

    역풍 맞는 중국의 힘자랑

    중국이 다음달 미국 대선을 앞두고 돌발 상황 발생을 우려해 주변국들을 강하게 압박하자 관련국들이 이에 반발해 중국의 기대와 ‘180도’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대만 외교장관은 최근 중국과 갈등을 빚는 인도의 언론에 나와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를 대놓고 부정했다. 국경 문제로 중국과 갈등을 빚는 인도 역시 티베트와의 연대를 과시했다.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홍콩인 망명을 받지 말라는 중국의 요구에 “인권 문제로 무릎 꿇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18일 인도 방송 인디아투데이에 따르면 우자오셰 대만 외교부장(장관)은 전날 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대만을 수차례 ‘국가’로 부른 뒤 “중국과 대만은 별개”라고 설명했다. 우 부장은 ‘인도 정부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해 주길 바라느냐’라는 물음에도 “대만은 그러한 포부를 갖고 있다”고 답했다. 앞으로도 대만 독립을 추구하겠다는 선전포고다. 그러자 곧바로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서 베이징 군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인민해방군이 (대만과 맞닿은) 남동부 해안에 최신예 미사일 ‘둥펑17’을 배치하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미사일은 지난해 10월 신중국 건국 70주년 열병식에서 처음 공개됐다. 음속의 10배 속도로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MD)를 뚫을 수 있다. 중국 당국이 ‘언제라도 대만에 무력을 쓸 수 있다’는 경고를 언론에 흘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중국의 이런 움직임이 대만의 독립 의지를 누그러뜨릴지는 미지수라고 SCMP는 설명했다. 인도도 반중 행보에 동참했다. 17일 홍콩 매체 아시아타임스는 “인도의 산간마을 초글라마사르에서 열린 한 군인의 장례식에 집권당 고위 정치인이 참석했다”고 전했다. 티베트 출신으로 인도군에 자원 입대한 티셔링 남갈(35)은 지난 8월 라다크 판공호수에서 중국군과 격투를 벌이다가 사망했다. 인도 정부는 그를 위해 인도 국기와 티베트 상징기를 모두 게양했고 TV를 통해 전역에 중계했다. 인도가 중국에 보복하고자 티베트 문제를 의도적으로 들고 나왔다고 아시아타임스는 분석했다. 캐나다도 가만 있지 않았다. 트뤼도 총리는 17일(현지시간) 기자회견에서 “앞으로도 중국 내 인권 문제를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고 가디언이 보도했다. 콩페이우 중국대사가 중국에서 활동하는 캐나다인 30만명의 신변을 거론하며 “홍콩 민주화 운동가들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요구한 데 따른 반발로 풀이된다. 베이징 류지영 특파원 superryu@seoul.co.kr
  • 중국, 군부 연계 학자 기소에 “미국인 구금” 경고… “보복 인질” 삼나

    중국, 군부 연계 학자 기소에 “미국인 구금” 경고… “보복 인질” 삼나

    중국 정부 관리들이 미국 정부가 중국군과 연계된 학자들을 기소한 것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중국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을 구금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17일(현지시간)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중국 최고의 권력집단인 군부와 연계된 인사들이 체포되면서 중국 정부는 중국을 떠나겠다는 미국인의 출국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WSJ이 보도했다. 중국의 메시지는 “미국은 법원에 넘어간 중국 학자들에 대한 기소를 중단하라. 그렇지 않으면 중국에 있는 미국인들이 중국법 위반에 직면할 것”이라고 직설적이다. 중국은 지난여름부터 미국에 이런 경고를 중국 주재 미국 대사관을 포함해 다양한 채널을 통해 반복적으로 발신했다. 그때는 미국이 중국 인민해방군(PLA)의 현직 신분을 가진 중국 과학자들이 미국 이민 당국에 이를 숨기고 미국 대학에 연구 목적으로 방문하다 체포됐다. 특히 중국 외교관들은 연구 학자들의 활동을 조율하다 지난 7월 휴스턴 중국 영사관 폐쇄 명령으로 이어졌다고 WSJ이 보도했다. 이에 대해 중국은 중국에 머무는 미국 시민권자의 출국을 거부했고, 캐나다인, 호주인, 스웨덴인들이 그 나라에서 엉터리라고 주장하는 혐의로 중국 당국이 기소하고, 징역형을 선고했다. 중국은 정부의 조치이지만 근거가 없고, 때때로 외교적 보복의 수단으로 외국적자들을 종종 구금해 왔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이를 “인질 외교”라고 부른다.콩페이유 캐나다 주재 중국 대사는 17일 대사관 웹사이트를 통해 캐나다에 “홍콩에 사는 건전하고 안전한 캐나다인 30만명을 우려한다면 홍콩에서의 민주화 운동가들에 대해 난민을 허용하지 말고, 캐나다는 중국의 새로운 국가보안법 시행을 지지하라”고 위협했다. 콩페이유 대사는 “위협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것은 해석에 달렸다”고 답했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우리는 미국 시민에게 기업분쟁, 법원의 합의금 지급 명령, 민형사상의 정부 조사 등의 문제로 그런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중국에서 출국을 거부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면서도 중국의 보복 위협에 대해 논평하기를 거부했다. 앞서 국무부는 지난 9월 여행 참고 사항에서 미국인에게 중국 정부가 다른 나라 국민을 “외국 정부와의 협상 지렛대로 삼기 위해 구금한다”면서 다양한 이유로 중국 여행을 피하라고 권고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보수적 싱크탱크인 민주주의수호재단(FDD)의 크레이그 싱글턴 연구원은 WSJ에 “미국 법무부의 최근 조치들은 중국에서 가장 존중받는 기관인 PLA에 대해 전면적인 타격”이라며 “양측에 심대한 위험을 야기할 수 있는 진정한 게임 체인저”라고 평했다. 그는 “역사적으로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언쟁은 외교적 후폭풍을 막으면서도 중국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막후에서 해결됐다”고 말했다. 지난 7월 샌프란시스코 주재 중국 영사관에 은신해 있던 PLA 군사 연구원 탕주안(37)을 비롯해 연구원 4명이 기소되었다. 2명은 다음달 재판이 시작된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빼앗긴 일터, 여전한 흉터

    빼앗긴 일터, 여전한 흉터

    ‘빼앗긴 일터, 그 후’는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 1980년 신군부하에서 해고된 저자가 오늘까지 통과해 온 시간들을 돌아보는 자전적 에세이다. 장남수 작가는 1958년 빈농의 딸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일찍이 상경해 공장에 다니며 야학에서 공부했다. ‘민주노조의 전설’로 불리는 원풍모방에 입사해 노조에서 활동하다 1978년 부산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동일방직 사건’에 연대 항거해 구속되기도 했다. 민주화의 초석이 된 여성 노동자, 여성 노동운동가들의 이력 그 자체로, 책은 그가 1984년 펴냈던 자전적 수기 ‘빼앗긴 일터’의 속편 격이다. 책은 유년 시절 고향에서의 추억, 상경해 여성 노동자로서 분투한 기록과 함께 오늘날을 살아가는 ‘인간 장남수’의 모습이 함께 실렸다. 옛날의 일은 한 시절 추억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어서 그에게는 현재 진행형이다. 원풍모방 노조원들의 모임에서, 1970~1980년대 엄마의 신산한 삶을 귀로는 들었으되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아들딸들이 함께 만난다. 이들은 영상 속 앳된 모습의 엄마가 경찰에게 질질 끌려가며 울부짖는 것을 보고 말을 잇지 못한다. 배곯는 시대는 아니라 해도 여전히 힘든 청춘들. 그들이 저마다의 어려움을 토로하다, 그 시절 엄마들처럼 함께 마음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작가는 뿌듯함을 감추지 못한다. 뒤늦게 검정고시에 합격해 작가는 쉰이 다 된 나이에 대학(성공회대 사회과학부)에 갔다. 그러나 40여년 세월을 건너, 아직도 ‘빼앗긴 일터’는 여전하고, 작가의 남편도 여전히 비정규직이다. 안착이 어려웠던 삶 속 숱하게 이삿짐을 꾸리다 제주에 정착한 작가는 그 땅의 역사를 배우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있었던 일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글쓰기가 이를 대변한다는 것을 작가의 삶이 온몸으로 증명해 내고 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멸종위기’ 주머니너구리 살리자…3000년 만에 호주 본토 귀환

    ‘멸종위기’ 주머니너구리 살리자…3000년 만에 호주 본토 귀환

    호주 남부 태즈메이니아섬에서만 서식하는 주머니너구리를 3000년 만에 호주 본토로 귀환하는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 6일 헤럴드선 등 현지매체 보도에 따르면, 동물보호단체 ‘오시 아크’ 등 현지 보호단체 연합은 지난 5일 수도 시드니 북쪽 베링턴톱스 국립공원에 있는 면적 400만㎡(약 121만평)에 달하는 보호구역 안에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너구리 26마리를 방사했다. 이는 호주 고유의 멸종위기 유대류인 이들 주머니너구리를 3000년 만에 호주 본토의 자연환경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대책의 일부분이다. 이에 대해 현지 보호단체 소속 운동가들은 “역사적인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팀 포크너 오시 아크 대표는 “1990년대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시행한 늑대 복원 계획의 성공을 모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크 대표는 또 “지난 16년 동안의 활동으로 호주 본토 최대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너구리 번식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등 프로젝트를 통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 믿기지 않으며 꿈만 같다”고 말했다. 이들 운동가는 지난 7월과 9월에도 시드니에서 자동차로 3시간반 거리에 있는 이곳 보호구역에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너구리를 방사했다. 현존하는 유대류 중 가장 큰 육식동물이기도한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너구리는 몸무게 최대 8㎏까지 나가며 다른 호주 고유종을 잡아먹거나 그 사체를 먹기도 한다. 사나운 성질에 고약한 냄새까지 뿜고 끔찍한 소리로 울부짖어 흔히 ‘태즈메이니아데블’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이들 동물이 호주 본토에 적응하면 사람이나 반려동물이 위험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먼저 습격하지는 않는다고 호주 환경부는 밝히고 있다. 다만 이들은 누가 먼저 자신을 공격하면 반격하는 습성이 있어 상대방에게 중상을 입힐 가능성도 있다. 야생의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너구리는 3000년 전 호주 본토에서 야생 개인 딩고에게 습격당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멸종한 것으로 여겨진다. 태즈메이니아섬에서는 1990년대 중반까지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너구리가 약 15만 마리까지 서식했지만, 얼굴에 종양이 생기는 수수께끼의 전염성 질환인 ‘악마 안면 종양 질환’(DFTD)의 유행으로 개체 수가 급격히 줄었다. 현재 섬에서 서식하는 야생 개체는 2만5000마리 이하로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된 상태다. 문제의 질환이 왜 발생하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백신이나 치료 방법이 발견되지 않아 이들 종의 생존을 위해 이번 프로젝트와 같은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오시 아크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연희동 주택가에서의 처절한 전투…아름다운 서울의 평화를 선사하다

    연희동 주택가에서의 처절한 전투…아름다운 서울의 평화를 선사하다

    2005년에 출간한 장편소설 ‘신들의 황혼’을 쓸 때 나는 ‘연희고지 전투’ 장면에서 가장 가슴이 아팠다. 주인공은 겨우 스무 살이었다. 6·25 전쟁이 시작되고 사흘 만에 빼앗긴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연합군이 감행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한국 해병대원. 불과 한 달 전에 입대한 학도병이었지만 그는 어느덧 죽음에 무감각해져 있었다.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남아 있었다. 포성과 화염에 휩싸인 인천항에서 상륙주정의 문이 열리자 무조건 앞을 향해 뛸 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많은 인민군이 남쪽으로 내려간 상태에서 항공 폭격과 함포 사격을 퍼부은 뒤였으므로 인천에 상륙한 병사들에게 다가온 것은 전투가 아니라 시체 썩는 냄새였다. 적들이 버리고 간 각종 중화기 사이에서 뒹구는 인민군의 시체들, 불타버린 시체들…. 후퇴하는 적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면서 도달한 행주 나루에는 허옇게 불어터진 시체들이 물에 떠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오기 직전에 서울 진격의 교두보 확보를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증거였다. 수륙양용 장갑차를 타고 건너면서 내려다본 한강에는 인민군과 미군과 국군의 시체가 뒤엉켜 있었다.그러나 서울 서쪽 안산의 줄기인 연희고지 근처에 이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눈앞의 104고지에는 인민군이 기관총과 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고지 앞을 흐르는 하천과 구릉은 적에게만 유리한 지형지물이었다. 게다가 나머지 땅은 엄폐물 하나 없이 트여 있는 개활지였다. 그의 소총 부대는 그 모든 것을 헤치며 나아가야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훈련장이기도 했던 연희 104고지는 천연 요새이자 적의 최후 방어선이었으므로 서울 탈환을 위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교전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스무 살 청년은 정신없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몸에서 피가 솟구쳐 오르고 곳곳에서 비명이 들려와도 무조건 나아가야 했다. 한국 해병 제1대대는 26명만이 생존했으나 104고지를 탈환함으로써 서울 수복 전투의 승기를 잡았다.바로 그곳, 연희 104고지 전적지를 찾았다. 지난 26일 서울신문과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이 함께하는 ‘2020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의 18번째 여정 ‘104고지와 안산’에서였다. 서울 수복 70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둔 주말, 하늘은 높고 햇살은 투명했다. 6·25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 수복을 이룬 것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1950년 9월 15일과 28일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서대문구 연희동, 이 평화로운 주택가가 바로 그 시기의 격전지였다. ‘연희104고지앞(구 성산회관)’이라는 이름의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눈앞에 보이는 대형 건물(구 성산회관, 현 지오영) 뒤의 낮은 산이 104고지다. 그곳으로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어서 지도를 살펴 가며 주택가의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1982년에 세워진 ‘해병대104고지전적비’가 그곳의 주인공으로 높게 서 있다. 그러나 1958년에 처음 설치했다는 자연석 비석을 찾을 길 없어 둘러보니 전적비 맞은편 아래로 뒷모습의 윗부분만 조금 보였다. 그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있으나 표지판이 없었다. 지금은 ‘궁동 공원’으로 바뀐 104고지 정상이 아닌 산자락에 전적비가 설치된 까닭은 바로 이 비석 때문이었을 터인데,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1950년대에 비문을 새겼던 역사적인 바윗돌로 이끄는 표지판이 없는 게 아쉬웠다. 연희 104고지 전적지는 서울미래유산이자 현충시설이다. 70년 전에 이곳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젊음을 기리며 우리는 전적비 앞에서 묵념했다. 인민군은 최후까지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어린 병사들의 발목과 기관총을 쇠사슬로 묶어놓고 끝까지 저항하게 했다. 하지만 서울을 탈환하려는 아군의 의지는 그보다 강했다. 아군 전사자 178명, 인민군 사살자 1750명의 치열한 전투였다. 한미 해병이 안산 일대의 주요한 봉우리들을 모두 점령한 것은 9월 25일에 이르러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7일, 한국 해병대 청년들이 중앙청에 걸려 있던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전적비 옆에 있는 ‘해병대 수도 서울 탈환 작전’ 안내판에는 그 사진이 중앙에 가장 크게 게시돼 있다. 사진과 지도가 어우러진 설명문을 읽으며 6·25 전쟁을 이야기하다가 우리는 잠시 서울 시내를 내려다봤다. 안내판에는 ‘104고지 탈환 후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해병대’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 속의 서울은 포연에 휩싸인 폐허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서울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104고지의 총성이 시작된 지 1주일 뒤 수도탈환기념식에 개선부대로 참석한 해병대 청년들처럼.우리는 연희동 주택가를 지나고 연세대 캠퍼스를 거쳐 안산 자락을 넘어 서대문 쪽으로 코스를 잡았다. 연세대는 당시 6일 동안 엄청난 포격전이 벌어진 격전지였다. 6·25 발발 직후에 인민군 사령부가 들어섰고 서울 수복 후에는 미군이, 1·4 후퇴 때는 중공군이 각각 진지를 구축해 전란 내내 군인들이 주둔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학생들의 자유와 교정의 평화가 가득하다. 1922년에 세워진 핀슨관 앞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며 멈춰 섰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남학생 기숙사였고 지금은 윤동주 기념관으로 쓰는 국가지정 문화재 건물이다. 윤동주 시인은 1938년과 1940년에 각각 이곳에 머물렀는데, 하숙집터로 알려진 종로구 누상동에서 등교할 때는 안산 자락을 넘어다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우리는 캠퍼스 북쪽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온실을 지나자 안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쪽문이 나타났다.안산은 자락길이 잘 갖춰져 있지만, 그 길로 진입하기까지는 등산로의 숲길을 헤치며 가야 한다. 서울 수복을 위해 한미 해병대가 진격했던 길, 일제강점기의 윤동주 시인이 하숙집을 오갔던 길, 그 길을 가늠해 보면서 흙길을 밟아 오르다가 숨이 차오를 무렵 안산 자락길을 만났다. 휠체어와 유모차도 다닐 수 있게 조성한 순환형 무장애 숲길답게 주말을 맞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양한 종류의 숲과 여러 방향의 조망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안산 자락길은 총 7㎞로 이어져 있다. 평탄한 데크 길을 걷다가 우리가 걸어온 연희동 쪽을 내려다보면서 앞선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자유와 평화라는 유산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미래의 세대에게 어떤 유산을 물려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자락길에 만발한 꽃무릇의 진홍색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올 무렵, 우리는 서대문형무소 쪽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의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과 독재정권 시절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갇혀서 고통당했던 서대문형무소의 담벼락을 따라 걷는 동안, 우리의 현재는 앞선 세대가 물려준 선물 같은 유산이라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김광섭의 시 ‘독방 62호실의 겨울’과 심훈의 ‘그날이 오면’을 떠올리면서, 우리가 받은 이 선물을 미래에 어떻게 물려줄 수 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동안 독립공원을 지나 독립문 사거리에 이르렀다.독립문 건너편에 자리잡은 영천시장도 서울미래유산이다. 1960년대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재래시장으로 전쟁의 폐허를 딛고 자유 민주주의 사회를 발전시켜 나간 서민들의 생활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장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골목형 전통시장인 영천시장을 통과하면 나타나는 석교교회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조금 빠듯했던 일정을 따라 마지막 목적지인 석교교회에 이르자 1916년에 건립된 고딕 양식의 적벽돌 건물이 그 자체만으로도 대견하고 의미 있게 여겨졌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쟁의 폭격에도 무너지지 않고 모든 것을 지켜본 교회. 저 안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연들로 기도했을까. 이것은 유형의 유산이지만 무형의 유산이기도 하다. 오늘 둘러본 모든 것들이 그랬다. 외형상 문화적 인공물에 해당하는 유산이라도 거기에는 문화적 행위와 이야기가 담겨 있고 물리적 배경이 존재한다.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은 어쩌면 유형과 무형으로 나눌 수 없는 우리의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성실히 의미 있게 살아가다 보면 유·무형의 유산은 저절로 쌓여갈 것이다. 미래 세대에게 전할 100년 후의 보물을 둘러보는 서울미래유산 투어. 치열했던 전쟁의 결과로 얻은 자유와 평화의 길을 걸었던 여정의 마지막에서 맑디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연희고지 전투를 끝낸 뒤 피아의 구분 없는 시체더미 속에서 허탈한 마음으로 밤을 맞이했을 때, 동쪽 하늘로 한가위의 둥근 달이 떠올랐다고 했던가. 올해도 그 달은 어김없이 떠올라 우리를 비춰 줄 것이다. 100년 후의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글·해설 고은주 소설가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19회 4·19민주묘지 ●출발 일시 10월 3일(토) 오전 10시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연희동 주택가에서의 처절한 전투…아름다운 서울의 평화를 선사하다

    연희동 주택가에서의 처절한 전투…아름다운 서울의 평화를 선사하다

    2005년에 출간한 장편소설 ‘신들의 황혼’을 쓸 때 나는 ‘연희고지 전투’ 장면에서 가장 가슴이 아팠다. 주인공은 겨우 스무 살이었다. 6·25 전쟁이 시작되고 사흘 만에 빼앗긴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연합군이 감행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한국 해병대원. 불과 한 달 전에 입대한 학도병이었지만 그는 어느덧 죽음에 무감각해져 있었다.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남아 있었다. 포성과 화염에 휩싸인 인천항에서 상륙주정의 문이 열리자 무조건 앞을 향해 뛸 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많은 인민군이 남쪽으로 내려간 상태에서 항공 폭격과 함포 사격을 퍼부은 뒤였으므로 인천에 상륙한 병사들에게 다가온 것은 전투가 아니라 시체 썩는 냄새였다. 적들이 버리고 간 각종 중화기 사이에서 뒹구는 인민군의 시체들, 불타버린 시체들…. 후퇴하는 적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면서 도달한 행주 나루에는 허옇게 불어터진 시체들이 물에 떠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오기 직전에 서울 진격의 교두보 확보를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증거였다. 수륙양용 장갑차를 타고 건너면서 내려다본 한강에는 인민군과 미군과 국군의 시체가 뒤엉켜 있었다.그러나 서울 서쪽 안산의 줄기인 연희고지 근처에 이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눈앞의 104고지에는 인민군이 기관총과 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고지 앞을 흐르는 하천과 구릉은 적에게만 유리한 지형지물이었다. 게다가 나머지 땅은 엄폐물 하나 없이 트여 있는 개활지였다. 그의 소총 부대는 그 모든 것을 헤치며 나아가야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훈련장이기도 했던 연희 104고지는 천연 요새이자 적의 최후 방어선이었으므로 서울 탈환을 위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교전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스무 살 청년은 정신없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몸에서 피가 솟구쳐 오르고 곳곳에서 비명이 들려와도 무조건 나아가야 했다. 한국 해병 제1대대는 26명만이 생존했으나 104고지를 탈환함으로써 서울 수복 전투의 승기를 잡았다. 바로 그곳, 연희 104고지 전적지를 찾았다. 지난 26일 서울신문과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이 함께하는 ‘2020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의 18번째 여정 ‘104고지와 안산’에서였다. 서울 수복 70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둔 주말, 하늘은 높고 햇살은 투명했다. 6·25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 수복을 이룬 것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1950년 9월 15일과 28일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서대문구 연희동, 이 평화로운 주택가가 바로 그 시기의 격전지였다. ‘연희104고지앞(구 성산회관)’이라는 이름의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눈앞에 보이는 대형 건물(구 성산회관, 현 지오영) 뒤의 낮은 산이 104고지다. 그곳으로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어서 지도를 살펴 가며 주택가의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1982년에 세워진 ‘해병대104고지전적비’가 그곳의 주인공으로 높게 서 있다. 그러나 1958년에 처음 설치했다는 자연석 비석을 찾을 길 없어 둘러보니 전적비 맞은편 아래로 뒷모습의 윗부분만 조금 보였다. 그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있으나 표지판이 없었다. 지금은 ‘궁동 공원’으로 바뀐 104고지 정상이 아닌 산자락에 전적비가 설치된 까닭은 바로 이 비석 때문이었을 터인데,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1950년대에 비문을 새겼던 역사적인 바윗돌로 이끄는 표지판이 없는 게 아쉬웠다. 연희 104고지 전적지는 서울미래유산이자 현충시설이다. 70년 전에 이곳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젊음을 기리며 우리는 전적비 앞에서 묵념했다. 인민군은 최후까지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어린 병사들의 발목과 기관총을 쇠사슬로 묶어놓고 끝까지 저항하게 했다. 하지만 서울을 탈환하려는 아군의 의지는 그보다 강했다. 아군 전사자 178명, 인민군 사살자 1750명의 치열한 전투였다. 한미 해병이 안산 일대의 주요한 봉우리들을 모두 점령한 것은 9월 25일에 이르러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7일, 한국 해병대 청년들이 중앙청에 걸려 있던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전적비 옆에 있는 ‘해병대 수도 서울 탈환 작전’ 안내판에는 그 사진이 중앙에 가장 크게 게시돼 있다. 사진과 지도가 어우러진 설명문을 읽으며 6·25 전쟁을 이야기하다가 우리는 잠시 서울 시내를 내려다봤다. 안내판에는 ‘104고지 탈환 후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해병대’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 속의 서울은 포연에 휩싸인 폐허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서울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104고지의 총성이 시작된 지 1주일 뒤 수도탈환기념식에 개선부대로 참석한 해병대 청년들처럼.우리는 연희동 주택가를 지나고 연세대 캠퍼스를 거쳐 안산 자락을 넘어 서대문 쪽으로 코스를 잡았다. 연세대는 당시 6일 동안 엄청난 포격전이 벌어진 격전지였다. 6·25 발발 직후에 인민군 사령부가 들어섰고 서울 수복 후에는 미군이, 1·4 후퇴 때는 중공군이 각각 진지를 구축해 전란 내내 군인들이 주둔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학생들의 자유와 교정의 평화가 가득하다. 1922년에 세워진 핀슨관 앞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며 멈춰 섰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남학생 기숙사였고 지금은 윤동주 기념관으로 쓰는 국가지정 문화재 건물이다. 윤동주 시인은 1938년과 1940년에 각각 이곳에 머물렀는데, 하숙집터로 알려진 종로구 누상동에서 등교할 때는 안산 자락을 넘어다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우리는 캠퍼스 북쪽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온실을 지나자 안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쪽문이 나타났다.안산은 자락길이 잘 갖춰져 있지만, 그 길로 진입하기까지는 등산로의 숲길을 헤치며 가야 한다. 서울 수복을 위해 한미 해병대가 진격했던 길, 일제강점기의 윤동주 시인이 하숙집을 오갔던 길, 그 길을 가늠해 보면서 흙길을 밟아 오르다가 숨이 차오를 무렵 안산 자락길을 만났다. 휠체어와 유모차도 다닐 수 있게 조성한 순환형 무장애 숲길답게 주말을 맞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양한 종류의 숲과 여러 방향의 조망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안산 자락길은 총 7㎞로 이어져 있다. 평탄한 데크 길을 걷다가 우리가 걸어온 연희동 쪽을 내려다보면서 앞선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자유와 평화라는 유산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미래의 세대에게 어떤 유산을 물려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자락길에 만발한 꽃무릇의 진홍색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올 무렵, 우리는 서대문형무소 쪽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의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과 독재정권 시절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갇혀서 고통당했던 서대문형무소의 담벼락을 따라 걷는 동안, 우리의 현재는 앞선 세대가 물려준 선물 같은 유산이라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김광섭의 시 ‘독방 62호실의 겨울’과 심훈의 ‘그날이 오면’을 떠올리면서, 우리가 받은 이 선물을 미래에 어떻게 물려줄 수 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동안 독립공원을 지나 독립문 사거리에 이르렀다.독립문 건너편에 자리잡은 영천시장도 서울미래유산이다. 1960년대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재래시장으로 전쟁의 폐허를 딛고 자유 민주주의 사회를 발전시켜 나간 서민들의 생활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장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골목형 전통시장인 영천시장을 통과하면 나타나는 석교교회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조금 빠듯했던 일정을 따라 마지막 목적지인 석교교회에 이르자 1916년에 건립된 고딕 양식의 적벽돌 건물이 그 자체만으로도 대견하고 의미 있게 여겨졌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쟁의 폭격에도 무너지지 않고 모든 것을 지켜본 교회. 저 안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연들로 기도했을까. 이것은 유형의 유산이지만 무형의 유산이기도 하다. 오늘 둘러본 모든 것들이 그랬다. 외형상 문화적 인공물에 해당하는 유산이라도 거기에는 문화적 행위와 이야기가 담겨 있고 물리적 배경이 존재한다.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은 어쩌면 유형과 무형으로 나눌 수 없는 우리의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성실히 의미 있게 살아가다 보면 유·무형의 유산은 저절로 쌓여갈 것이다. 미래 세대에게 전할 100년 후의 보물을 둘러보는 서울미래유산 투어. 치열했던 전쟁의 결과로 얻은 자유와 평화의 길을 걸었던 여정의 마지막에서 맑디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연희고지 전투를 끝낸 뒤 피아의 구분 없는 시체더미 속에서 허탈한 마음으로 밤을 맞이했을 때, 동쪽 하늘로 한가위의 둥근 달이 떠올랐다고 했던가. 올해도 그 달은 어김없이 떠올라 우리를 비춰 줄 것이다. 100년 후의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글·해설 고은주 소설가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19회 4·19민주묘지 ●출발 일시 10월 3일(토) 오전 10시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日서 “BLM운동은 극좌 테러”비방에 “다양한 차별에 저항 확장시키자” 맞서

    日서 “BLM운동은 극좌 테러”비방에 “다양한 차별에 저항 확장시키자” 맞서

    2017년 말부터 전 세계에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운동’ 열풍이 몰아쳤지만, 일본은 예외였다. 성폭행을 당하고도 오히려 사회의 냉대에 시달리며 숨어지냈던 이토 시오리(30·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재무성 사무차관의 상습적인 성희롱에 시달렸던 방송 여기자 등 미투 운동의 기폭제가 될 만한 사례들이 이어졌지만 울림은 확산되지 못했고 가해자가 제대로 단죄받는 일도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가부장적 보수주의의 두꺼운 벽과 개인을 전체와 동일시하는 일본 특유의 집단주의 문화가 자리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지난 5월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촉발됐던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M) 운동을 계기로 다시 부각되고 있다. 27일 마이니치신문 등에 따르면 최근 일본에서는 BLM 운동에 대한 비방, 유언비어 등 악성 게시물들이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 이어졌다. ‘BLM 운동가들은 극좌 폭력집단 테러리스트’, ‘BLM은 미국에서 차별이 많음을 부각시키려는 중국 공산당의 선동’, ‘BLM 폭동으로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집이 불탔다’와 같은 것들이다. 일본의 흑인 혼혈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22)에 대해서도 이와 관련한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12일(현지시간) US오픈에서 우승한 오사카는 이번 대회 7경기를 치르는 내내 미국에서 인종 차별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색 마스크를 번갈아 가며 쓰고 나왔다. 우승 후 기자회견에서 그는 “(나의 행동이) 더 많은 사람들이 인종 차별에 대해 논의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자 오사카에 대해 “흑인 특권주의 운동을 테니스에까지 끌고 들어왔다”, “테러리스트에 대한 지지를 부추긴다” 등 비난이 이어졌다. 미국 타임지는 최근 오사카의 마스크 항의에 대해 “스포츠의 영역을 넘어선 존재감을 보여 줬다”며 ‘2020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했다. 미국과 같이 차별 피해자의 불만이 한꺼번에 대규모로 폭발한 적은 없지만, 일본에서도 인종 차별은 넓고 깊게 뿌리박혀 있는 문제다. 재일한국인, 오키나와 등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대우는 말할 것도 없고 흑인에 대해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하곤 했다. 2015년 일본인 어머니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부모를 둔 미야모토 아리아나가 미스 유니버스 일본 대표로 선발되자 “저건 일본인이 아니다”, “일본 대표로 용납할 수 없다” 등 비난이 빗발쳤다. 2017년에는 한 오락 프로그램에서 인기 연예인이 얼굴에 검은색 분장을 하고 나왔다가 ‘차별적’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BLM 운동의 정신을 인종 차별을 넘어서 일본 내 다양한 형태의 차별에 대한 저항으로 확장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케인 주리안 오사카시립대 도시문화연구센터 연구원은 마이니치신문에 “일본 사회에서 BLM 운동은 흑인, 재일한국인 등 외국에 뿌리를 둔 사람들에 대한 차별, 동성혼에 대한 차별, 빈곤에 대한 차별 등 다양한 문제에 포괄적으로 적용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BLM 운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테러’, ‘약탈’, ‘폭동’ 등 권력자들의 언어가 나타나고 있다”며 “BLM 이슈를 격차가 확대되고 소수자 차별이 이어지는 일본 사회를 돌아보고 자신과 타인의 삶에 놓인 어려움을 개선하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조슈아 웡 3시간 만에 석방 “어떤 일 있어도 계속 저항”

    조슈아 웡 3시간 만에 석방 “어떤 일 있어도 계속 저항”

    홍콩의 대표적 민주화 운동가인 조슈아 웡이 24일 경찰에 체포됐다가 3시간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AFP통신은 웡의 변호인이 이날 오후 1시쯤 홍콩 중앙경찰서에서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사안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던 웡이 긴급 체포됐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웡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지난해 10월 5일 불법집회에 가담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으며, 복면금지법을 위반한 혐의도 받았다고 전했다. 경찰은 대규모 인파가 코즈웨이베이에 모여 도심 중심부를 행진했던 당시 시위에 대해 사전에 신고되지 않은 불법집회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dpa통신은 웡이 보석으로 풀려난 사실을 전했다. 이 매체는 웡이 자사에 보낸 메시지에서 “나는 안전하다”며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는 계속 저항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중국 정부와 홍콩 당국의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인 그는 지난 6월 30일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이 시행된 후 ‘체포 1순위’로 꼽혀 왔다. 지난 7월 30일 홍콩 선거관리위원회는 홍콩 의회인 입법회 선거 출마를 선언한 그의 후보 자격을 박탈하기도 했다. 웡은 후보 자격 박탈이 부당하다고 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 23일 법원은 절차상의 문제를 들어 이를 기각했다. 홍콩에서는 홍콩보안법 시행 후 민주화 운동가들이 줄줄이 체포되고 있다. 앞서 대표적인 반중 매체 빈과일보의 사주 지미 라이와 웡의 동료 아그네스 차우 등이 홍콩보안법 위반 혐의로 붙잡히는 등 탄압 수위가 갈수로 높아지고 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하나뿐인 푸른 별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하나뿐인 푸른 별

    지구가 아프다. 여름 내내 계속되던 장마가 끝나니 태풍이 연거푸 올라온다. 강풍에 아파트 베란다 창문이 깨지고, 공사장 철제빔이 내려앉고, 아름드리나무가 뿌리째 뒤집힌다. 인류가 부를 쌓고 남보다 근사하게 살기 위해 경쟁하며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소비에 박차를 가한 결과다. 과학자, 환경운동가들은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고 외친다. 하지만 과연 기업이 생산량을 줄일 수 있을까, 우리가 이제 당연하게 여기게 된 편리함과 물질적 만족을 포기할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문다. 예술가들도 기후 변화를 경고하기 위해 나섰다. 덴마크의 설치미술가 올라프 엘리아손은 그 선두에 있는 작가다. 2003년에 발표한 ‘기후 프로젝트’는 테이트 모던의 터빈 홀 전체를 인공안개로 채우고 거대한 노란 해를 띄워 지구온난화를 경고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최근 작품들은 더 직설적 화법으로 대중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014년에 시작한 ‘아이스 워치’ 시리즈가 그것이다. 엘리아손은 그린란드에서 가져온 거대한 얼음덩이 수십 개를 광장에 배열했다. 오가는 사람들은 얼음을 만지고 구경하고, 사진을 찍는다. 그러는 동안 얼음은 녹아서 점점 작아지고 마침내 사라진다. 작품은 말한다. “그린란드의 빙하도 이 순간 이렇게 줄어들고 있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화가들의 작품은 기후 변화를 연구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낭만주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에 주목한 유파였다. 18세기 말 질풍노도운동이 독일어권을 휩쓸 때 스위스의 화가 카스파어 볼프는 알프스의 그린델발트를 다니며 드로잉과 유화 170여점을 그렸다. 이 그림도 그중 하나다. 거대한 초록색 빙하가 화면을 뚫고 우리를 덮칠 것 같다. 판화업자는 볼프의 그림들을 판화로 제작해 책으로 엮어 냈으나 팔리지 않았다. 화가는 가난 속에 생을 마쳤지만, 그가 그린 빙하, 계곡, 동굴, 고사목 그림은 사진이 없던 시절에 지구 환경을 기록한 소중한 자료로 남았다. 과학자들은 그 그림들을 이용해 빙하가 줄어드는 속도를 계산해 냈다. 이 아름다운 빙하가 그림으로만 남게 되지는 말아야 할 텐데 걱정이 태산이다. 미술평론가
  • [법인의 활발발] 불편 유발자, 오늘도 불안하다

    [법인의 활발발] 불편 유발자, 오늘도 불안하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수행자도 감정을 가진 인간인데 어찌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으로 물었을 것이다. 아마도 묻는 이는 인간관계에서 갈등과 애증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터다. 그래서 수행자도 때로는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내심 위안을 삼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의도에 맞춤하게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질문에 나는 분명하게 말한다. “불편한 사람은 있습니다.” 그렇다. 흔연하게 말을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바르고 옳고 선량하게 살아가는 분들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몇 분은 마음 한켠이 편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한 번도 내색한 적은 없지만, 그러나 어쩌랴. 막상 만나면 절로 조심스러워지고 짐짓 말을 아끼게 되고 서먹한 기운을 감지한다. 이유는 분명 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그분들의 언사와 태도가 나를 몹시도 힘들게 한다. 그렇다고 내게 무리한 요구나 무례한 언행도 없는데 말이다.사람과 사람은 만나면 즐거워야 한다. 그런데 그와 만나면 그렇지 않다. 그의 대화의 주요 내용은 타인에 대한 비난이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 대해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한다. 구구절절 맞는 말씀이기는 한데, 만날 때마다 분노와 멸시가 섞인 비판이니 듣다가 지친다. 그가 공통의 지인을 비난하는 말을 들으면 아, 저 사람은 지금 자신이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서 나를 험담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그와 마주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그는 여러 지식을 인용해 남을 비난하고 자기 자랑 또한 많이 한다. 그런 상황에서 무심하게 마음 챙기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런데 또 곰곰 생각해 보니 나보다 그가 걱정이다. 가끔 만나는 나는 그때 애써 표정 관리만 하면 된다. 서로 마음 다치지 않을 정도만 반응하면 된다. 타인에 대한 비난과 자기에 대한 자랑, 이 둘의 내면을 따라가면 여러 가지 요인이 뿌리를 두고 있다. 가장 뿌리 깊은 심리작용은 분노다. 이 분노는 얼핏 보면 외부를 향한 분노로 표출되지만, 정밀하게 살펴보면 자기를 향한 분노다. 고요한 시간에 정직하게 자신을 응시해 본다면 자기 내면에 도사린 ‘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세간에서 말하는 ‘언제든 총을 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다. 이럴 때 석가모니는 말한다. 멈추고 살피고 결단하라고. 그는 안다. 결코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웃들이 자기를 왠지 조심스레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느낌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 원인을 명확히 알지 못하는 데 있다. 그는 ‘편하고 즐거운 감정’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얼마나 소중한지 모를 수도 있다. 오직 세상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지적 능력만을 키워 왔을 수 있다. 그러니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편하고 즐거운 느낌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면 그건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편한 분위기를 감지한다면 그는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 원인을 온통 외부에서 찾는다면 불만과 원망만 커질 뿐이다. ‘사회구조적 모순’이라는 말을 지식인과 운동가들은 즐겨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이 모든 곳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결과에는 그에 맞는 원인과 조건이 있다. 만약 나의 내면에 저장된 분노, 결핍, 열등감, 욕구불만 등이 원인이 돼 발생한 괴로움과 갈등이라면 이를 사회구조적 모순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명백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맺어 보자. 화가 나고 불안하고 고립을 느낀다. 이럴 때는 멈춰야 한다. 왜 멈추냐고? 살피기 위해 멈춰야 한다. 정직하고 침착하고 엄정하게 나의 내면의 심리와 그간의 언행과 처신을 바라보기 위해 멈춰야 한다. 그리고 내면에 깃든 어둠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어두운 여러 모습이 나에게 깃들어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멈추면 보이고 바라보면 사라진다. 어두운 모습이 사라진 자리에 평온과 기쁨이 찾아온다. 그래서 ‘텅 빈 충만’이라고 하지 않는가.
  • 성폭행 피해 브라질 10세 소녀의 낙태 막는다며 신상 온라인 공개

    성폭행 피해 브라질 10세 소녀의 낙태 막는다며 신상 온라인 공개

    성폭행을 당해 아기를 임신한 10세 소녀의 신상 정보가 온라인에 공개돼 브라질에서 격렬한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낙태 합법화에 반대하는 활동가들이 이 소녀가 낙태할지 모른다며 이를 막기 위해 신상을 공개했다는 것에 사람들은 경악하고 있다고 영국 BBC가 18일(이하 현지시간) 전했다. 이들은 심지어 소녀가 낙태 수술을 받을 것으로 알려진 병원에까지 몰려와 집회를 열었다. 사무엘 미란다 곤살베스 소아레스 판사는 구글과 페이스북, 트위터에 소녀의 개인 정보들을 24시간 안에 모두 지우도록 하며 만약 그렇게 안 되면 하루 5만 헤알(약 1082만원)씩 벌금을 물리겠다고 판결했다. 소녀를 유린한 용의자는 지난 12일 체포됐다. 소녀는 30대 삼촌으로부터 몇년 동안 계속 유린당했으며 생후 22주째의 몸으로 17일 고향에서 수천km 떨어진 헤시페의 한 병원에 입원해 낙태 수술로 아기를 지웠다. 브라질은 엄격하게 낙태를 금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인데 성폭행 피해를 당했을 때나 산모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경우, 태아가 정상적으로 발육하지 않았거나 뇌와 두개골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경우 등에 한해 허용하고 있다. 이 소녀는 이미 유산해도 좋다는 법적 승인을 받았는데도 병원 앞에 몰려와 시끄러운 소음 시위를 벌여 정상적인 수술 집도를 방해했다. 병원 직원들을 향해 살인자라고 외치는가 하면 한때 병원으로 난입하려 했지만 군경이 해산시켰다. 이에 따라 병원은 소녀를 몰래 차에 태워 옆문으로 의료진 관사로 옮겼다고 낙태 합법화 운동가들은 전했다. 카티 왓슨 BBC 남미 특파원은 소녀의 신원을 처음 공개한 이는 별명 사라 윈터로 널리 알려진 극우 활동가 사라 지로미니인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사라가 최초 유포자로 확인되면 어떤 처벌을 받을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법률 전문가들은 폭력 선동 혐의로 기소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라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지지하는 극우 무장집단인 ‘Os 300 do Brasil’ 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으로 지난 6월 수도 브라질리아 대법원 항의 시위를 조직한 혐의로 잠깐 구금된 적이 있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멧돼지가 무슨 죄가 있느냐” 베를린 공원에 ‘사살 반대’ 시위

    “멧돼지가 무슨 죄가 있느냐” 베를린 공원에 ‘사살 반대’ 시위

    아마 엘사는 세상에서 가장 이름난 야생 멧돼지가 될지 모르겠다. 암컷 멧돼지를 솎아내기 위해 사냥꾼들을 풀기로 했다는 소식에 환경운동가들과 팬들이 모여 구해달라고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고 영국 BBC가 18일(이하 현지시간) 전했다. 지난 5일 독일 베를린 그루네발트 지구의 토이펠스제(악마의 호수) 공원에서 나체 일광욕을 즐기던 남성의 옷가지와 노트북 컴퓨터가 담긴 비닐 봉지를 입에 물고 새끼 두 마리와 줄행랑을 치던 멧돼지에게 사람들은 엘사란 이름을 붙여줬다. 그런데 숲 관리 당국은 지난 14일 워낙 멧돼지 개체 수가 늘어 솎아내야 한다고 했다. 특별히 엘사만을 겨냥하는 것은 아니고 다른 멧돼지들도 사람들을 공격하거나 돼지열병 같은 역병을 옮길 수 있어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카티아 캄머 매니저는 베를린 방송 rbb24에 멧돼지 가족이 사람들 근처에서 “평정심을 잃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어 제거란 말 뜻은 담장을 두르는 등의 추가 조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주시키겠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매년 베를린에서만 2000마리 정도의 야생 맷돼지가 사살되는데 보통 가을에 사냥철이 시작된다. 반면 마르크 프라누슈 그루네발트 숲 관리 당국 대변인은 어린 새끼들을 거느린 암컷 멧돼지는 사살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새끼들이 스스로 커나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들은 우리가 존중해야 하는 야생 동물이며 먹이를 줘선 안 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멧돼지를 만나면 사과나 샌드위치를 먹이로 준다는 것이다. 지난 16일에는 여러 캠페인 단체들이 그루네발트에서 엘사와 동료 멧돼지들을 구하자는 시위를 벌였다. “토이펠스제에 사는 평화로운 암컷 멧돼지를 구하자”는 온라인 청원에는 9000명 이상이 서명했다. 청원을 처음 제안한 지닌 파스텔로이는 엘사가 몇년 동안 사람들과 공간을 평화롭게 공유해왔다며 나체 일광욕객과의 최근 사건에서 보이듯 그리 공격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엘사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녀는 그 남자분을 심각하게 다치게 할 수 있었고, 그럴 권리도 다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최근 들어 야생 멧돼지와 관련된 사고들이 유독 많았다. 길을 잃어 헤매다 발트해의 한 해변에서 헤엄치다 일광욕객들을 소스라치게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정치권 ‘파묘법’ 논쟁… “친일파 파묘 마땅” “정치적 장사”

    정치권 ‘파묘법’ 논쟁… “친일파 파묘 마땅” “정치적 장사”

    더불어민주당이 75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국립묘지에 안치된 친일 인사의 묘를 강제 이전할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에 착수하자 정치권에서는 이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뜨겁다. 민주당 이수진 의원은 13일 밤 자신의 페이스북에 “현충원은 국가를 위해 숭고한 희생하신 분들을 국가가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약속과 추모의 공간이지만 지금도 독립운동가들이 잠든 곳 옆에 친일파 묘가 청산되지 못한 역사로 버젓이 남아 있다”며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일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출발점”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현충원 바로 세우기는 21대 국회에 주어진 역사적 책무로 임기 내 상훈법과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이 의원은 지난 5월 24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현충원 역사 바로세우기‘ 행사에서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친일파 묘를 파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해 파묘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반면 미래통합당에서는 이와 관련 “패륜”, “역사 장사”라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언주 전 의원은 14일 페이스북에 “참 눈물 난다, 이 나라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냐”며 어이없어했다. 그는 고(故) 백선엽 장군이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지 한 달도 안 돼 여당이 파묘법 입법에 돌입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링크하면서 “아무리 반체제 성향의 주사파집단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자유대한민국의 수호자를 욕 먹이고 자유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선량한 국민들 마음에 대못을 박아야겠느냐”며 “이건 패륜이다”고 주장했다. 통합당 송파병 당협위원장인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국가유공자임에도 친일 논란을 이유로 무덤을 파내겠다는 주장은 왕조시대 부관참시와 같은 반인권적 발상”이라며 “역사적 적개심을 내세워 현재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정치적 동원”이라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는 공과가 있고, 우선시하는 가치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게 마련”이라며 “망국의 시절 독립운동이 소중한 것처럼, 분단의 시절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건국과 애국 역시 소중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어 “정책적으로 무능하고 민심으로부터 이반된 정부가 외부의 적, 과거의 적을 억지로 만들어 대중의 분노와 적개심을 동원하곤 한다”며 “민주당의 파묘법 추진은 현재의 정책무능과 민심이반을 과거 청산의 적개심 동원으로 모면하려는 정치적 장사에 불과하다”고 질책했다. 한편 파묘법은 21대 국회에서 잇따라 발의된 상태다. 민주당 권칠승 의원이 지난 11일 발의한 법안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안장대상심의위원회가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한다고 인정한 사람의 유골이나 시신을 다른 장소로 이장하도록 규정했다. 같은 당 김홍걸 의원도 지난 1일 같은 취지의 법을 발의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다시 광복 펴다

    다시 광복 펴다

    일흔다섯 해를 맞은 광복절을 앞두고 잊힌 독립운동가를 기억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만화라면 좀더 다가가기 쉬울듯하다.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함께 일본의 만행을 잊지 말자는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의 증언을 시로 풀어낸 재외 한국작가의 시집, 해방 후 혼란을 극복하지 못해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원자폭탄을 재건에 활용한 일본 등 주목할 만한 책을 다양한 장르로 추려 봤다.●잊힌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라 ‘의병장 희순’은 조선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의병장 윤희순을 다룬 만화다. 한양 선비 윤익상의 딸로 태어난 그는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으로 가문의 남성들이 의병에 참여하자 후방에서 식량 조달과 군자금 모집, 탄약 제조 등을 맡았다. 이어 여성 의병단인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노학당’을 운영하며 항일 전사를 양성했다. ‘조선독립단’을 조직해 무장투쟁에까지 나선 윤희순의 삶을 설득력 있게 그렸다. 민족의 암흑기에 이국에서 조선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짧은 생애를 마친 김산(본명 장지락)은 ‘한국의 체 게바라’로 불린다. 신문기자인 님 웨일스가 1937년 중국에서 김산을 만나 불꽃같이 살았던 그의 삶을 기록했고, 1941년 미국에서 ‘아리랑의 노래’로 출간했다. 1984년 국내에 번역된 책을 박건웅 작가가 신간 만화 ‘아리랑’으로 다시 냈다. 의학을 공부하다 혁명을 위해 이국을 누비며 투쟁한 식민지 조선 청년의 고뇌와 투쟁이 깊은 울림을 준다. 잊힌 독립혁명가들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이가 바로 약산 김원봉이다. 영화 ‘밀정’(2016)을 비롯해 다양한 각도로 그의 삶을 재조명하지만, 월북 행적 때문에 논란도 많다. 허영만 작가가 ‘독립혁명가 김원봉’으로 약산의 삶을 만화로 복원했다. ‘정의(正義)로운 일을 맹렬(猛烈)히 실행한다’는 뜻으로 붙인 의열단의 탄생과, 그들의 일제에 맞선 폭력투쟁, 광복 이후의 삶까지 생생히 담았다. ●여전히 생생한 피해자·가해자 증언 열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에밀리 정민 윤은 대학 시절 논문을 작성하다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접하고 이를 시로 쓰기 시작했다. 그의 시 35편을 담은 시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은 남성성, 군국주의, 제국주의, 전쟁, 인종차별을 다룬다. 특히 7명 위안부의 증언을 시로 풀어낸 2장 ‘증언´에서 일제의 만행을 시로써 고발한다. 위안부로 시작한 그의 시는 현대에 벌어지는 성차별, 성폭력에 관한 여성들의 이야기까지 닿는다. ‘악한 사람들’은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실험하고 죽인 731부대를 소환했다. 이제서야 “그때를 후회한다”고 하는 전범들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악을 타자화하면 결국 타인을 악으로 만들게 된다”고 주장한 저자 제임스 도즈는 인간을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조직적, 구조적, 심리적 과정을 분석한다. ●해방 이후 한국과 일본에 주목하다 ‘26일 동안의 광복’은 한국 현대사의 첫날인 1945년 8월 15일부터 조선총독부 청사에 성조기가 게양되는 9월 9일까지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역사 다큐멘터리다. 일본 패망과 조선 해방을 직감한 여운형의 전화로 시작하는 해방 전야부터 송진우와의 좌우합작 시도까지 단 하루가 1부, 해방 이튿날부터 9월 9일까지 ‘분단’에 이르는 25일을 2부로 구성했다. 저자는 75년 전 가장 밝았던 광복, 그날 이후 25일간은 어둠이 빛을 삼켜 가는 시간이었다고 결론짓는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일본은 흔히 ‘잿더미’로 상징된다. 매년 3월에 열리는 도쿄대공습 추도식 전이나 8월 ‘종전의 날’이 다가올 때마다 미디어에서는 패전 당시에 촬영된 불탄 들판 사진 등 ‘잿더미’를 끌어온다. ‘‘잿더미’ 전후공간론’은 암시장으로 대표되는 당시 일본 사회와 각종 문학 작품을 통해 일본이 피해자 이미지를 부각하고, 동시에 ‘일본인은 이 비참함에서 다시 일어섰다’라는 서사를 생산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미화한 이미지가 우리와 같은 피해자들의 현실을 가린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진정한 ‘독립’이란… 구로구의 물음표

    진정한 ‘독립’이란… 구로구의 물음표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하신 분들이 300만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찾아낸 선열은 불과 1만 5689분입니다. 그마저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아 현재 독립유공자 후손의 80%가 한 달에 200만원 남짓한 생활비로 생계를 꾸리고 있습니다.”(김명성 독립투쟁사기념관 추진위원) 13일 서울 구로구가 광복 75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의 유묵과 서지 자료 100점을 볼 수 있는 전시회를 12일부터 29일까지 연다고 밝혔다. ‘독립이 맞습니까?’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이번 전시회는 구로구민회관 갤러리 구루지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회에선 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의 희귀 친필 서신, 헤이그 특사로 활약한 이상설(1870~1917)의 유묵, 양기탁(1871~1938) 선생에 대한 일제검찰의 심문조서, 독립군의 독립자금 영수증 등을 볼 수 있다. 전시회에 자료를 제공한 김 추진위원은 “일본강점기에 독립자금을 내면 독립군이 영수증을 끊어줬다. 이는 나중에 독립하고 나라를 세우면 독립투쟁에 기여한 이들에게 빚을 갚겠다는 뜻이 아니었겠느냐”면서 “하지만 광복 75주년을 맞이한 지금 그 빚을 제대로 갚고 있는지 의문이라 ‘독립이 맞습니까?’라고 전시회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부가 국립한국문학관을 설립하며 수억원을 들여 친일한 작가들의 원본 작품을 구입하는데 독립운동가들의 친필 서신이나 유묵, 기록 등을 수집하는 데는 돈을 쓰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전시회 개최를 지원한 이성 구로구청장은 “이번 전시회가 독립의 의미를 깊이 깨닫는 성찰의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허정숙 구로문화재단 대표이사는 “이번 전시회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얘기도 볼 수 있다”면서 “광복절을 맞아 많은 분들이 자녀들과 찾아오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편 구로구는 이달 구로구민회관의 갤러리 구루지를 확장 개관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글로벌 In&Out] 북한의 김일성에 의한 해방과 그 진상/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글로벌 In&Out] 북한의 김일성에 의한 해방과 그 진상/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올해는 광복 75주년이 되는 해다. 65년 전인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고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한국은 일제의 멍에로부터 해방됐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발발한 미소 간 냉전 대립과 한반도의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 등으로 한반도 해방의 역사가 정쟁의 수단이 돼 그 연구는 오랫동안 진영 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1960년대부터 북한은 미국은 물론이고 소련의 역할까지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일제를 격파한 조선의 해방자가 김일성과 그의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냉전이 종식되고 소련 문서보관소의 자료가 공개되면서 한국의 해방공간 연구자들이 냉전의 유산을 점차 극복하고 진상을 밝히는 데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사실의 일부를 과장하거나 있지도 않았던 허위사실들을 퍼뜨리면서 정권의 정당성이 달린 주체사관을 계속 고집하고 있다. 북한의 해방과정 인식은 어떠한가. 2017년 9월에 나온 ‘조선로동당력사’(증보판)에서는 1945년 8월 9일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부대들에 조국 해방을 위한 총공격전을 개시할 데 대한 명령을 하달”하였고, 그 부대들은 “전국 도처에서 일제를 격멸소탕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한반도 해방작전을 맡은 소련해군부대들이 상륙하기 전 북한의 “인민무장대”들이 이미 그 지역의 “도시를 장악하였고 (중략) 경찰기관들을 기습소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평양지구의 “조국해방단을 중심으로 무어진 항쟁대오가 병기창을 습격하고 도청과 부청을 점거하였으며 적폐잔무력을 제압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한반도의 해방은 김일성 휘하의 조선인민혁명군이 주도한 전민항쟁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소련 측 사료를 살펴보면 한반도의 해방은 북한의 해석과 많이 다르다. 일단 북한에 진격한 부대는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이 아니라 소련군과 소련해군이다. 8월 9일 새벽, 만주전략공세작전을 개시한 소련군은 함경북도 웅기읍에 주둔한 일본군에 대한 공습을 실시하고 같은 날 밤에는 육군부대들이 경흥군을 해방했다. 8월 11일 소련해군 정찰부대가 웅기를 전투 없이 해방한 뒤 나진시로 돌진해 일본군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나진시 해방 직후인 13일 일제가 이용한 주요 항구도시인 청진시에 상륙하고 16일까지 3일간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이를 해방하였다. 소일전쟁 중 김일성이 명령을 내렸다는 것도, 북한이 ‘국제연합군’의 일부로 간주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존재도 확인되지 않는다. 한반도 해방에 참여한 조선인들은 십중팔구 소련의 붉은 군대에 속했고 전투작전보다 정찰과 일본군 후방 교란 등 특수임무를 맡았으며 공로를 세워 훈장을 받은 사람도 많았다. 북한이 주장하는 ‘전민항쟁’은 소일전쟁 직후 벌어졌다. 소련군의 진격 속도가 일본군 지도부의 상상을 초월했다. 소련군이 한반도에 돌진하고 이미 주요 항구도시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북한의 일제 식민통치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역마다 성향이 달랐던 조선인들이 일제 경찰이 마비된 상황을 이용해 경찰과 일본군의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각종 지역정권을 세웠다. 같은 도시에서 2개의 조선인 세력이 총칼을 들고 권력투쟁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군 격파 후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이러한 준군사조직들을 무장해제해 갈등이 확산하는 것을 막았고, 조만식을 중심으로 해 북조선의 정치적 통일을 이루려고 노력해 나갔다. 이때 김일성이 속한 제88특수보병여단은 해산 과정 중이었으며 김일성을 비롯한 조선인 항일운동가들은 북한과 만주 파견에 대한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 몽골에 ‘항일 병원’ 개원… 독립운동자금·의열단 지원한 애국지사

    몽골에 ‘항일 병원’ 개원… 독립운동자금·의열단 지원한 애국지사

    현실과 타협해 안주할 수 있는 전문직인 의사들 중에도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들이 많다.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 포상을 받은 의사 또는 의대 재학생은 70여명이며 포상을 받지 못한 이들을 포함하면 150여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일제시기 한국 의사들의 독립운동’, 의사학(醫史學) 통권 33호). 1908년 배출된 세브란스의학교 1기 졸업생 7명 가운데 김필순, 박서양, 주현측, 신창희 등 대부분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김마리아의 숙부로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은 김필순은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박서양은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군의(軍醫)였다.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학생이었던 오복원과 김용문은 이재명 의사와 함께 이완용 처단에 가담해 각각 징역 10년형과 7년형을 받았다.‘몽골의 슈바이처’, ‘신의’(神醫)로 불리는 이태준도 빼놓을 수 없다.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생으로 김필순의 후배인 이태준은 몽골에 병원을 세워 의술을 베풀고 독립운동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다. 지난달 17일 경남 함안군 군북면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이태준의 고향인 군북면에 ‘이태준 기념관’을 짓는 첫 삽을 뜬 것이다. 기념관은 이태준 서거 100년이 되는 내년 1월 완공된다. ●고향 군북면에 ‘이태준 기념관’ 내년 개관 이태준 선생은 1883년 11월 21일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에서 출생했다. 위쪽으로 경전선 철도가 지나가는 백이산의 서쪽 자락이 명관리인데 선생의 생가터는 명관저수지에 수몰돼 있다. 이태준은 일찍 결혼해 두 딸을 낳았는데 첫 부인 안위지는 둘째 딸을 낳고 사망했다. 두 딸은 동생 이태식이 길렀다. 한학을 배운 선생은 20대 초반에 상경해 24세 때인 1907년 10월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했다. 상경과 입학 과정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독교 선교사의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은 재학 시절 도산 안창호를 만났다. 안창호는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 의거 후 일제에 체포됐다가 이듬해 2월 석방돼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었다. 안창호는 선생의 구국 의지를 알아보고는 신민회의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하도록 소개했다. 그러는 사이 나라는 일제에 넘어갔다. 선생은 1911년 6월 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의사로 일했다.1912년 초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동기는 중국 난징으로 간 직후 미국에 있던 안창호에게 보낸 1912년 7월 16일자 편지에 밝히고 있다. 날로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에 분개하던 차에 1911년 10월 발발한 중국의 신해혁명에 크게 감동했다는 것이다. 선배이자 스승인 김필순의 영향도 컸다.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걸려든 김필순이 먼저 탈출하고 선생은 상황을 봐 가면서 뒤따라 결행하기로 했다. 1911년 마지막 날 김필순은 신의주 세브란스분원에 출장 간다며 경의선 열차에 올랐다. 여동생 김순애가 동행했는데 김순애는 후일 이태준과 몽골로 함께 간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결혼한다. 김필순을 배웅하고 병원으로 돌아온 이태준은 뜻밖에도 자신이 중국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음을 알고 황급히 기차를 타고 망명길에 올랐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난징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던 선생은 중국인 기독교도의 도움으로 기독회의원 의사로 취직했다. 김필순은 서간도에서 병원을 열어 독립군 군의관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는데 1919년 사망하기 전 선생과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1912년 중반 선생은 한인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어떻게 독립운동에 나설지 고심했다. 선생의 선택은 몽골이었다. 이는 김필순의 매제인 김규식의 권유 때문이었다. 미국 프린스턴대학에 유학하고 귀국해 연희전문학교 교수 등을 하던 김규식이 국내를 탈출해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913년 중반이었다. 김규식은 신해혁명에 자극을 받아 몽골에 비밀군관학교를 설립할 작정이었다. 선생은 김규식과 1914년 무렵 몽골 수도인 고륜(庫倫·현 울란바토르)으로 갔다. 후일 비행사가 되는 서왈보라는 애국청년도 동행했다. 그러나 세 사람의 계획은 국내 지하조직에서 약속한 자금이 도착하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가을 김규식은 피혁 판매업을 시작했고 선생은 고륜에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열었다. ‘같은 뜻’이라는 병원 이름에서도 선생의 항일의식을 읽을 수 있다. 몽골을 떠난 김규식은 1918년 5월 앤더슨 마이어 회사의 울란바토르 지점장이 돼 고륜으로 다시 올 때 사촌 여동생 김은식과 함께 왔고 선생은 김은식과 결혼했다.●몽골 보그드칸 어의돼 최고등급 ‘국가 훈장’ 당시 몽골인들 사이에는 성병이 번져 70~80%가 감염돼 있었다. 선생은 특히 몽골인들의 성병 퇴치에 큰 공을 세웠다. 미신적 치료법밖에 모르던 몽골인들에게 근대 의술을 펼친 선생은 신과 같은 존경을 받았다. ‘까우리(고려) 의사’ 이태준을 모르는 몽골인이 없을 정도였고 ‘신인’(神人)이나 ‘여래불’(如來佛)로 불렸다(여운형, ‘몽고사막 여행기’). 선생은 왕궁의 두터운 신임도 얻어 몽골 활불(活佛), 즉 몽골 왕 보그드 칸의 어의(御醫)가 됐다. 1919년 7월 보그드 칸은 이태준에게 최고 등급의 국가훈장을 수여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군의관 감무로도 활동 이태준은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하고 지원했다. 번 돈의 대부분을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썼고 고륜을 오가는 애국지사들에게 숙식과 교통을 비롯한 갖은 편의를 제공했다. 그의 병원과 집은 하루에 사오십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묵기도 한 연락처 겸 거점이었다.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될 때 당시로서는 거액인 2000원을 지원한 것도 선생이었다.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군의관 감무(監務)로도 활약했다. 한인사회당이 소비에트 정부에서 받은 40만 루블어치의 금괴 운송에 선생이 깊숙이 관여한 일도 주목할 만하다. 선생은 한인사회당의 비밀연락원이었다. 40만 루블의 1차분인 8만 루블에 해당하는 금괴를 선생과 김립은 1920년 초겨울 고륜에서 상하이까지 성공적으로 운반했다. 무게가 수백㎏이었다고 하니 들키거나 도둑맞지 않고 옮기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금괴 운반을 마친 선생은 베이징에서 의열단장인 김원봉을 만나 자신의 차량 운전사이던 폭탄제조 기술자 마자르를 소개했다. 헝가리인 마자르는 선생이 죽은 후 의열단에 폭탄 제조법을 알려주었다. 마자르의 폭탄 제조법 전수는 의열단 거사의 큰 전환점이 됐다.선생은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 부대가 고륜을 점령한 1921년 2월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3000여명의 대원을 거느린 운게른은 러시아혁명군에 쫓겨 몽골로 들어온 잔혹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운게른은 중국군을 몰아내고 대대적인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운게른 부대의 일본인 장교들은 선생을 체포해 처형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선생은 고륜을 빠져나와 상하이로 가던 도중 붙잡혀 고륜으로 끌려가 잔인하게 처형당했다. 선생의 나이 38세였다. 11개월 된 딸도 죽임을 당했다. 선생은 중국군 사령관의 퇴각 동행 요구도 거절했다. 고륜에 남아 김원봉에게 마자르를 소개하기로 한 약속 등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고륜의 구릉에 있던 이태준의 묘를 찾은 여운형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여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라고 애도했다. 선생의 묘는 그 뒤 개발 과정에서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몽골 정부는 묘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찾지 못했다. 2001년 7월 울란바토르에 이태준 기념공원이 문을 열어 넋을 기리고 있다. 정부는 1990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자유·저항의 대학로… 치열했던 ‘청춘들의 행진’

    자유·저항의 대학로… 치열했던 ‘청춘들의 행진’

    문화재라 하면 으레 건축물이나 도자기 같은 것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서울미래유산은 그 폭이 좀더 넓다. 문화재로 지정되거나 등록되지 않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 가운데 미래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한다. 영화도 한 카테고리다. 대표적인 것으로 1975년 개봉한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이 있다. 소설가 최인호가 쓴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비판적 사고를 거세당한 채 살아가는 대학생들의 불안과 좌절, 비애, 상실감 등 우울한 자화상을 묘사한 영화다. 1970년대 서울 대학가와 그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영화로 보전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미래유산이 됐다.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1회 ‘서울의 영화-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면서 이 영화를 간접적으로나마 떠올릴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고민했다. 젊음과 낭만의 거리라 불리는 대학로가 좋은 사례 중 하나일 듯싶었다. 혜화동로터리에서 이화사거리까지 1㎞ 남짓한 도로를 중심으로 펼쳐진 대학로는 연극이나 뮤지컬과 같은 공연을 볼 때면 누구나 한 번쯤 들러봤음 직한 젊은이들의 공간이다. 한복판에 있는 마로니에공원을 거닐다 보면 여유롭게 거리공연을 펼치는 악사에서부터 비보잉을 하는 댄서들까지, 자유로운 분위기에 누구나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물론 원래부터 이곳이 대학로라 불린 것은 아니고 공원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이 지역의 근대는 식민지와 함께 왔다. 애초 이곳의 터줏대감은 일제강점기였던 1924년 들어선 경성제국대학이었다. 의학부와 법문학부, 대학본부가 마로니에공원 일대에 있었고 거기에 들어가기 위한 예비학교 격인 예과가 청량리에 있었다. 이후 서울대가 이곳에 들어선 것은 광복 뒤인 1946년이었다. 법대와 문리대, 의대 등이 마로니에공원과 주변 서울사대부속 초·중교 자리에 자리잡았다.당시 풍경은 어땠을까.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서 어렴풋하게나마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가수 송창식이 부른 ‘고래사냥’과 ‘왜 불러’ 등이 영화 전편에 흐르면서 무기한 휴강과 입대, 장발 단속 등 10월 유신의 풍속도가 리얼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보다 차가웠다. ‘왜 불러’뿐만 아니라 극 중 영철의 테마곡인 ‘고래사냥’이 대학가 시위 현장에서 곧잘 불리면서, 두 노래는 결국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감독 자신은 현실과 타협한 영화라고 자조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그렇기에 더 역설적으로 당시를 이해하는 텍스트가 돼 주기도 한다. 실제로 개봉 당시 서울 관객 15만명을 동원하는 등 흥행에도 성공했던 영화에 삽입된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한 박정희 정권은 서울대를 아예 관악산으로 이전해 버린다. 대학로 시절 서울대 주변이 유신체제 반대 시위가 연일 계속되는 등 학생운동의 중심이 되다 보니 동숭동, 용두동, 종암동, 공릉동 등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던 단과대들을 당시만 해도 변두리이자 정문과 후문만 봉쇄하면 시위대의 시내 진출을 막을 수 있던 관악산 골프장 터로 몰아넣듯 옮겨버린 것이다. 영화 개봉연도와 같은 1975년의 일이었다.대학로의 변화는 1980년대 들어 더욱 극적으로 펼쳐진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는 각종 공안사건을 조작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억제하려 했다. 대표적인 게 1982년 벌어진 ‘학림사건’이었다. 학생운동가들이 학생단체를 조직해 사회주의 폭력혁명으로 정권을 붕괴시키려 했다는 사건이었다. 마로니에공원 맞은편에 있는 학림다방에서 첫 모임을 열었다 해서, 또 ‘숲’(林)처럼 무성한 ‘학’(學)생운동 조직을 일망타진했다 해서 학림사건이라 불렸다. 1985년부터는 이곳의 분위기가 질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민주화운동의 현장이란 인식이 강했던 이 일대에 정부가 ‘문화예술의 거리’를 조성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서울 곳곳에 있던 문화예술단체와 공연장, 소극장 등을 유치함으로써 자유와 저항의 공간에 낭만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려 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한국의 청년들이 그리고 시민사회가 영화의 분위기처럼 순응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지칠 줄 모르는 민주화운동은 끝내 독재를 종식시키고 오늘의 한국을 만들어 냈다. 당시 피해자들도 2010년 열린 재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전두환 정권에 의한 조작 사건이라는 결론과 함께. 학림다방은 그런 한국 현대 정치사의 현장이었기에, 나아가 훗날 문학으로 명성을 얻은 이청준이나 김승옥, 황지우, 김지하 등의 단골집이었다. 김민기 등 음악인들의 주요 거처이기도 했다. 학림다방도 2013년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됐다. ‘서울대 문리대 제25강의실’이라고도 불렸던 학림다방 입구에 걸려 있는 서울미래유산 동판이 흘러간 옛이야기를 담담하게 증언해 주는 듯싶다. 대학로는 내막을 모르면 그저 로맨틱해 보이기만 하는 문화 예술의 공간이자 맛집들이 즐비한 소비공간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만을 보고는 그 안의 내력이나 사건들 사이의 맥락을 이해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마로니에 공원을 중심으로 서 있는 아르코미술관과 아르코예술극장, 그리고 옛 샘터 사옥이자 현 공공그라운드 빌딩 또한 생각할 지점을 던져 준다. 적벽돌 외장이 인상적인 이 건물들은 모두 ‘한국 건축의 풍운아’라 불렸던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들이다. 서울대 건축과를 다니다가 6·25전쟁 때 일본 도쿄예대 건축과에 유학해 막 대학원을 수료한 김수근은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9년 29세의 나이로 새 국회의사당 건축설계안 현상공모에서 1등을 차지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의 작품 가운데 한국인에게 익숙한 게 한둘이 아니다. 잠실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을 비롯해 남산 타워호텔과 자유센터, 세운상가, 워커힐호텔, 옛 국립부여박물관과 청주 및 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단순히 건축 설계만 한 게 아니라 국내 잡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월간 ‘SPACE(공간)’를 창간하고 다양한 예술인들을 후원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1977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르네상스의 예술 후원가라 평가받는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에 빗대 ‘서울의 로렌초 메디치’라 평하기도 했다. 그에게도 밝은 역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87년 6·10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현장인 남영동 대공분실 역시 그의 작품이었다. 나선형 계단을 설치해 방향 감각을 상실케 하고 피조사자가 투신할 수 없게끔 창문 폭을 15㎝ 정도로 좁게 하는 등 전적으로 고문에 적합하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그 건물 말이다. 아르코 미술관과 예술극장, 그리고 옛 샘터 사옥은 겉으로는 수십 년이 지나도록 모던함을 유지해 오는 훌륭한 건축물이다. 하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인간 내면의 복잡다단한 면에 대해 성찰하게끔 유도하는 경전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이번 그랜드 투어의 마지막 방문지는 서울대병원이었다. 1907년에 건립된 옛 대한의원은 광복 뒤 경성의전과 통폐합돼 현재 서울대 의대로 바뀌어 있고 그 병원은 서울미래유산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1922년 의학 실험에 희생된 동물들의 넋을 위로하겠다며 설치한 ‘실험동물공양탑’은 이번 투어의 압권 중 하나였다. 말 못하는 짐승을 위해서도 공양탑을 세웠던 이들의 마음을 자비롭다고 해야 할까. 서울 대학로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유골이 무더기로 발견된 적이 있다. 2008년 말 한국방송통신대학 맞은편에 위치한 한 건물을 철거하면서 14구의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석 달에 걸쳐 정밀분석한 결과 유골의 주인공이 14명이 아니라 28명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젖먹이의 유골도 3구나 됐다. 과연 그 뼈들의 주인공은 누구이며 왜 그곳에 집단으로 묻힌 걸까. 해답은 ‘그 땅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의전 해부학교실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기에 더더욱 실험동물공양탑은 의외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실험동물의 목숨도 함부로 하지 않던 이들이 정작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인종적이며 체질적인 차이를 조사하는 등 몰인권적인 우생학과 인종론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연구도 진행했으니 말이다. 영화에서 보여 주는 이미지가 묘사 대상의 전부는 아닌 것처럼 우리가 맞닥뜨리는 여러 사안들도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다가는 본질을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또 반대로 호기심과 지속적인 문제의식을 견지한다면 묘사된 풍경 너머의 맥락을 이해하는 길에 가닿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바보들의 행진’은 언뜻 보면 명랑한 청춘극 같지만 자세히 보면 비극보다 더 진한 슬픔을 자아내는 영화이고 일견 로맨틱해 보이는 대학로이지만 그 속엔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던 이들의 정열이 녹아 있다. 글 권기봉 ‘다시, 서울을 걷다’ 저자 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제12회 돈의문 주변 ●출발일시 : 8월 15일 오전 10시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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