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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남부서.119 무전 도청해 시신 선점한 일당 검거

    부산 남부서.119 무전 도청해 시신 선점한 일당 검거

    119 무전을 도청해 사고 현장에 먼저 출동해 시신운구 및 장례를 선점한 소방무선 감청 조직이 경찰에 붙잡혔다. 부산 남부경찰서는 통신비밀보호법위반 혐의로 장례지도사 A(29) 씨 등 4명을 구속하고 장례업체 대표 B(33) 씨 등 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27일 밝혔다. A 씨 등은 2015년 2월부터 지난 7월 25일까지 부산 부산진구와 남구 지역의 119 무전을 도청해 사망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차량을 가장 먼저 보내 시신을 옮기고 장례식을 맡아 15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이들은 주택가나 원룸 등에 감청에 필요한 무전기와 중계용 휴대폰 등을 갖춘 상황실을 두고 3∼4개 팀으로 조를 짜 교대로 24시간 동안 무전을 감청했다. 또 부산소방안전본부 홈페이지에 신고접수 시간과 장소가 실시간으로 게시된다는 점을 알고 현장 출동에 필요한 정보로 활용했다. 경찰 관계자는 “기존의 119 무전은 디지털 방식이 아닌 아날로그 방식이어서 감청이 어렵지 않았다”며 “적발에 대비해 2∼3개월 단위로 감청 상황실을 옮겼다”고 설명했다. A 씨 일당은,이같은 수법으로 월 10구 이상의 시신을 선점했다. 이들은 유족들로부터 운구 비용 명목으로 시신 1구당 10만원을 받은 데 이어 특정 장례식장에서 장례가 이뤄지면 이익금으로 150만∼180만원을 추가로 챙겼다. 경찰은 달아난 일당 1명을 추적하는 한편 119 무전을 감청하는 조직이 부산에서 권역을 나눠 활동하는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할 계획이다. 경찰은 지난 4월 부산에서 소방 무선망을 도청하는 조직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해 5개월간에 걸친 수사 끝에 이들 조직원을 검거했다. 한편,부산소방안전본부는 소방무전을 지난 8일부터 전면 디지털로 교체하고 홈페이지의 실시간 출동정보도 접수 12시간 뒤에 제공하는 것으로 시스템을 바꿨다. 또 소방청에 요청해 전국 다른 지역에 이번 사례를 공유해 실시간 출동정보 제공 중단 등의 조치를 하도록 했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최희준 발인 ‘구름 흘러가듯’ 세상과 작별..정치-가요계 조문 행렬

    최희준 발인 ‘구름 흘러가듯’ 세상과 작별..정치-가요계 조문 행렬

    지난 24일 별세한 원로가수 최희준 발인식이 26일 엄수됐다. 고인의 대표곡 ‘하숙생’의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란 가사처럼 고인은 명곡들을 남겨둔 채 ‘구름이 흘러가듯’ 세상과 영원한 작별을 했다. 26일 오전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서 진행된 발인식은 유족과 지인들이 참석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유족들은 고인의 운구 차량에 마지막 인사를 하며 깊은 슬픔에 젖었다. 고인은 1960년대를 풍미한 가수이자 한때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해 이 분야에서 생전 인연이 있던 지인들이 빈소를 찾아 애도했다. 이낙연 국무총리와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비롯해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정대철 민주평화당 상임고문, 전직 국회의원인 작가 김홍신 씨 등이 조문했으며 문재인 대통령은 조화를 보내 애도하기도 했다. 또 가요계에서는 남진 대한가수협회 초대 회장과 김흥국 대한가수협회 회장을 비롯해 현미, 진송남, 쟈니리, 서수남, 박재란, 남일해, 남상규, 박일남, 최성수, 김국환, 민해경, 이자연, 현당, 옥희 등이 빈소를 찾았다. 1936년 서울 종로구 익선동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학교 법학과 출신으로, 1950년대 후반 미8군 무대에 서면서 진로를 바꿨다. 1960년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로 데뷔한 최희준은 ‘맨발의 청춘’, ‘하숙생’, ‘팔도강산’ 등 다수의 히트곡을 내며 1960년대를 풍미했다. 고인의 대표곡은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로 시작하는 ‘하숙생’. ‘하숙생’은 1965년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로 젊은층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이후 최희준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 ‘가수 출신 정치인 1호’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고인은 1996년 총선 안양시 동안갑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됐고, 2000년까지 국회의원 활동을 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죽음 앞에서 동등…묘지도 도시처럼 설계하다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죽음 앞에서 동등…묘지도 도시처럼 설계하다

    불문학자이자 문학 평론가인 황현산(1945~2018) 선생의 영결식이 열린 건 사흘장의 발인 날 아침이었다. 고려대 교수로 정년 퇴임하셨고 같은 대학 병원에서 투병하셨으니 장소는 고려대병원 장례식장이었다. 기억할 만한 2018년 여름의 태양이 이른 아침부터 새하얗게 내리쬐었다. 평생의 도반 김인환 선생의 조사와 후배 문인, 가족들의 마지막 인사는 빈소 안에서 조용히 이루어졌다. 빈소 밖에는 훨씬 많은 조문객이 모여들었다. 행렬이 영정을 따라 3층의 빈소부터 1층까지 걸어 내려와 정문 옆으로 좁게 난 쪽문을 비집고 나가자, 주차장에 운구차가 트렁크 문을 열고 서 있었다. 바퀴 달린 카트에 실려 온 관이 매끄럽게 올라탔을 때 선생의 사모님은 기사에게 잠시 문을 닫지 말아 달라 부탁하셨다. “아주까리 꽃 그림자 흔들리는 섬 속에 / 하모니카 안타까운 강남달 시절 / 갈매기 울어 울어 해 지는 선창에 / 모자를 흔들면서 떠나던 사람아.” ‘풍각쟁이’ 최은진(58) 선생의 ‘아주까리 수첩’이 울려퍼졌다. 일제강점기의 시인 조명암이 작사하고 목포 사람 이봉룡이 작곡한 1940년대 노래다. 남도 섬의 헤어짐과 기다림을 그린 이 노래를, 황현산 선생은 그로부터 열흘 전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다. (‘아주까리 수첩’은 선생의 다음 책 ‘전위와 고전’이 수록될 시리즈의 제목이기도 하다.) 음반 출시를 앞두고 고향이 전남 신안 비금도인 선생께 먼저 들려드렸을 때 “얼마나 예뻐” 하시더니, 사모님이 따로 청하여 이루어진 무대였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고마웠습니다. 모두 선생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가수 최은진 선생의 마이크 소리에 맞춰 모인 이들이 마지막 인사를 드린 그 장면은, 모두에게 아름답게 기억되었으리라 믿는다.노래의 여운은 짧았다. “자, 다음 발인 못 하고 있거든요. 빨리 나가 주세요.” 상조 회사 옷을 입은 아저씨가 뒤를 몰아쳤다. 운구차와 버스는 화장장으로 떠나고, 각자 타고 온 차들이 줄지어 나가고, 사정없는 햇볕 아래서도 남은 자들의 마음은 눅눅하다. “1990년대부터 갑자기 바뀐 거 같아요. 90년대 초반까지는 입원해 있다가도 임종이 임박하면 집으로 모셨잖아요. 그래서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설계할 때 승강기 구조를 고쳐서 관을 수평으로 운구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비좁은 아파트 살던 시절에 부모님 빈소를 마련했는데, 상주도 문상객도 불편하더라고요. 그게 떠올라서 건물 사이에 공간을 많이 비워서 천막을 칠 수 있게 했어요. 거기서 노제도 하곤 하더니, 어떻게 순식간에… 없어졌어요.” 영결식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성룡 선생은, 묘지 이야기를 꺼냈다. 스웨덴의 건축가 시구르드 레베렌츠가 조경을 맡은 스톡홀름의 우드랜드 묘지공원(스콕쉬르코고르덴 묘지공원), 이른바 ‘숲의 화장장’부터 시작한다.“시내에서 전철로 갈 수 있어요. 굉장히 넓은 땅인데 전차에서 내려 조금 걸으면 정문이 있어요. 들어서면 숨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나요. 멀리 언덕 너머에 소나무 숲이 걸려 있고 거대한 십자가 모양 조형물이 눈에 들어와요. 대개는 정면의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죠. 하지만 안내자를 따라 오른쪽의 ‘양탄자 깔듯이’ 잔디로 조성한 언덕, 느릅나무 있는 곳으로 갔어요. 원래 있던 숲의 일부를 조정해 인위적으로 만들었음을 드러내는 구간이죠. ‘기억의 작은 숲’을 지나 1㎞ 떨어진 ‘부활 교회’까지 긴 길을 걸었어요. 숲속을 걸으면서 죽음과 대화하는 시간이었죠. 레베렌츠가 쓴 짧은 수필이 하나 있는데, 묘지에 수직 구조물을 바라지 않는다, 수평으로 낮은 비석이 근대 시민에게 어울린다고 썼어요. 소나무가 울창한 숲속에, 그런 묘비들이 햇빛을 받으면 보석처럼 반짝이지요.” “스웨덴이 100여년 전에 사회민주주의를 하면서 고민한 제일 중요한 것이 노동자 주거 정책이고 의료, 노숙자, 노인 대책을 열심히 만들었나 봐요. 그중에 하나가 묘지예요.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는 현상은 유럽 어디나 산업혁명 하면서 겪었고 그러다 보니까 묘지가 난개발이었죠. 이 사람들이 고민하면서 여러 논의를 해 나가죠. 인간이 죽음 앞에서 동등하다, 민주주의 가치에 따른 묘지를 만들자는 논의를 하면서 국제 현상 설계 공모를 해요. 지침부터가 대단히 자세했어요.” 1912년에 스톡홀름 시 의회가 소나무가 무성한 채석장을 확보한 다음에 내세운 공모 지침은 자연 풍경을 훼손하지 말 것, 품위 있게 설계할 것, 디테일까지 예술적일 것, 기존 채석장의 돌을 활용할 것 등이었다. “스웨덴 사람들은 독일 묘지를 본뜨려고 했어요. 그런데 공모를 하자마자 1차 대전이 터지니까 독일은 전쟁에 빠져들었죠. 그 바람에 젊은 국내파들이 당선된 거예요.” 스웨덴 사람들이 모델로 삼았던 것은 1907년에 설립된 뮌헨의 숲 묘지였다. 뮌헨 지자체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묘역을 조성하는 대신 도시 외곽의 동서남북 네 군데 묘지를 나누어 숲 묘지를 조성했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도시”이자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정화해 주는 자연이었다. “군나르 아스플룬드라는 건축가가 건물을 맡고 전체 조경 계획은 레베렌츠라는 사람이 맡아요. 묘지가 완성을 볼 때까지 30~40년이 걸려요. 굉장히 오랜 시간이죠. 아스플룬드하고 레베렌츠가 학교 동창이야. 그런데 두 사람이 약간 달랐어요. 아스플룬드는 성공의 길을 아는데, 레베렌츠는 하기 싫은 건 안 하는 거야. 이 사람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도 없고 생각을 글로 남기지도 않았어요. ‘숲의 화장장’도 한동안 아스플룬드가 한 거로 알려졌어요.” 숲의 화장장에서 ‘건물과 풍경이 하나’ 되는 작업이 이루어진 것은 레베렌츠의 주도였다. 사업 자체가 워낙 장기화되고 바뀌면서 레베렌츠가 해임되는 일도 있었다. 레베렌츠는 한동안 창문 새시 공장을 운영하면서 다른 공공건축을 해나갔다. 그러나 1940년 아스플룬드가 먼저 세상을 떠난 후 레베렌츠가 마무리 작업을 맡게 된다. 1970년대 들어 재조명되기 시작한 스톡홀름 우드랜드 묘지공원은 1994년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레베렌츠의 작업 중 또 하나의 묘지가 1916년에 설계 경기로 당선된, 항구도시 말뫼의 동부 묘지다. “평화롭고 고요한 묘지라면서 좋아들 하지요. 그런데 나는 그것보다는 도시를 봐요. 스톡홀름의 묘지가 거대한 장묘 단지라면 말뫼 묘지는 도시의 일부 같거든요. 지형에 따라 두 구역으로 구획하고 그 사이 도로변에 방문자센터, 화장장, 기념 교회, 광장, 추념 공간을… 마치 도시처럼 계획했어요. 마지막으로 묘지 입구에 거친 콘크리트로 아주 작은 꽃집(1974년)을 지었어요. 그때 레베렌츠 나이가 89세였어요. 우드랜드나 레베렌츠를 소개하려는 게 아니에요. 결국 우리 문제 말이죠. 일제 때의 묘지 계획 답습하면서, 오히려 그 뒤로 더 나빠졌어요. 우리가 신도시를 계획할 때 묘지를 미리 제대로 숙고해 본 적이 별로 없어요. 말로는 동방예의지국이니 하면서요. 그래 놓고서 유럽 어디 갔더니 무슨 묘지 멋있더라, 그렇게 감상적으로 접근할 일이 아닙니다. 도시 계획 자체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봐요. 그랬다면 우리 동네에 대형 화장장, 납골당은 절대 안 된다는 이야기가 이렇게 심했을까요. 광화문광장 고치는 문제보다 아파트 단지마다 동네마다, 운구차가 멈췄다 떠날 작은 장소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나.”집에서 관이 나오면, 망자가 살던 마을 어귀에서, 일하던 장터 입구에서도 노제를 하는 것을 불과 20년 전에도 볼 수 있었다. 길바닥에 돗자리 깔고 병풍 치고 꽃상여 걸쳐 놓고서 다시 제를 지냈다. 이웃들은 대개 그 언저리에서 술 한잔으로 먼 길을 배웅한다. 그럴 때 상엿소리를 하거나 풍물을 치거나 살풀이며 종이꽃을 만드는 갖가지 재주가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를 잇거나 떼어 주는 일을 맡았다. 이제 그런 일들이 하나하나 예술이 되었다. 그 예술은 우리의 비루한 삶과 죽음 속에서 궂은 기능을 맡지 않는다. 장례식장의 발인장은 주유소를 닮았고 관은 컨베이어벨트처럼 바퀴 위에 실린다. 알지 못하는 301호와 204호 누군가가 십 분 간격으로 기다리는데, 우리는 애틋한 의식의 시간을 나눌 수 없다. “어렸을 때 마을 뒷동산 기슭에 공동묘지가 있었죠. 가면 쭈뼛하죠. 그렇게 죽음이 곁에 있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이 배우죠. 동네마다 조금씩 작은 무덤을, 평화롭게 만들면 좋겠지. 무덤을 가까이 못 두면 아파트 단지 어디에 거기 살다가 죽은 가족을 기억할 작은 숲이라도, 나무 몇 그루라도 둘 수는 없는가. 의식을 하려면 장소가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냥 마음만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수천 년 동안 왜 마을 뒤에 싫은 묘지를 두었는가, 그걸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다음 세대에 교육할 때, 우리 삶이 정말 좋아지고 정말 민주 사회가 될 거예요.” 황현산 선생의 영결식은 아름다웠다. 비금도 섬 그림자가, 다도해의 물결이 잠시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사소하지만, 노래 한 곡절로도 우리는 한결 잘 헤어졌다. 죽으면 다 소용없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그렇겠지. 그러나 이 품위는 죽은 사람을 위한 건가, 산 사람을 위한 건가.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 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은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 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 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황현산, ‘소금과 죽음’(한겨레신문 2009년 8월 15일자) 기획 수류산방 조성룡 건축가·도시건축 대표 심세중 수류산방 편집장■ 시구르드 레베렌츠(1885~1975)는 스웨덴의 건축가로 원래는 엔지니어링을 공부했다. 군나르 아스플룬드(1885~1940)와 함께 29세이던 1914년에 스톡홀름 남쪽 우드랜드 묘지공원 설계 공모에 당선되었다. 이후 한동안 건축을 멀리하다가 말년에 다시 설계를 맡았다. 레베렌츠가 설계한 묘지와 교회, 시립 극장과 노동자 주택 등은 대부분이 공모를 통한 공공 작업이었다. 오로지 건축 현장에서 작업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려고 한 드문 근대 건축가이자 조경가,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1970~80년대에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우드랜드 묘지공원은 1994년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세계 유산 목록에 수많은 묘지가 있지만 근대 건축가가 계획한 사례는 유일하다.
  • 미군 유해 55구 하와이로… 美국방부 “유해, 미군 전사자로 판단”

    미군 유해 55구 하와이로… 美국방부 “유해, 미군 전사자로 판단”

    지난달 27일 북한에서 이송된 6·25전쟁 미군 전사자 유해 55구가 1일 경기 평택의 오산공군기지에서 대형 수송기인 C17 글로브마스터로 운구되고 있다. 송환식 도중 국가정상에 대한 예우를 상징하는 21발의 예포가 울려 퍼졌다. 유해는 C17 2대에 나눠 실려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로 옮겨지고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맞이한다. 미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PAA)의 존 버드 박사는 기자회견을 갖고 “초기 분석은 이미 마쳤다. 사람의 유해임을 확인했고 미국인 유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서울포토] 6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국전 참전 미군 유해

    [서울포토] 6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국전 참전 미군 유해

    1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오산공군기지에서 열린 북한으로 돌려받은 6.25 전쟁 참전 미군 유해 송환식에서 유해들이 운구되고 있다. 2018.8.1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서울포토] 한국전 참전 미군 유해 수송기로 운구

    [서울포토] 한국전 참전 미군 유해 수송기로 운구

    1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오산공군기지에서 열린 북한으로 돌려받은 6.25 전쟁 참전 미군 유해 송환식에서 유해들이 운구되고 있다. 2018.8.1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서울포토] 수송기로 옮겨지는 한국전 참전 미군 유해

    [서울포토] 수송기로 옮겨지는 한국전 참전 미군 유해

    1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오산공군기지에서 열린 북한으로 돌려받은 6.25 전쟁 참전 미군 유해 송환식에서 유해가 운구되고 있다. 2018.08.01.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거리에서 노회찬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한 국회 청소노동자들

    거리에서 노회찬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한 국회 청소노동자들

    지난 27일 고 노회찬 국회의원의 국회장 영결식이 엄수됐다. 영결식에는 시민들과 동료 의원, 각계 인사 등 2000여명이 모여 고인과 마지막 작별 의식을 치렀다. 그런데 이날 국회도서관 앞 도로변에서 19명의 노동자들이 땡볕에서 서 있었다. 국회 청소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국회의사당 정현관 앞으로 들어올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민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국회 청소노동자들이 고인의 운구 행렬을 지켜보기 위해 국회 앞 도로변에 나와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국회 청소노동자들은 고인이 그들을 보듬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2016년 당시 국회사무처는 본청 내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휴게실과 노동조합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사무실과 휴게실을 내주면 청소노동자들이 쉴 공간이 없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고인은 청소노동자들을 만나 “혹 일이 잘 안 되면, 저희 (정의당) 사무실을 같이 쓰자”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다행히 국회의원회관 9층으로 휴게실과 사무실을 옮겼지만 청소노동자들은 고인의 한마디를 잊을 수 없었다.고인의 과거 ‘명연설’에 등장한 ‘6411번 버스’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 “6411번 버스는 매일 새벽 같은 시각, 같은 정류소에서 같은 사람이 탑니다. 누가 어느 정류소에서 타고 어디서 내릴지 모두가 알고 있는 매우 특이한 버스입니다. (중략) 이분들은 이름이 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다. 그냥 아주머니,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중략)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은 투명인간입다. 존재하되 우리가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첫 버스를 타고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서 강남으로 가는 청소노동자의 삶을 보듬어 줘야 한다는 호소였다. 그 호소가 국회 청소노동자들에게도 전해진 것이다. 민주노총은 “고인이 생전에 함께 해왔고 일구고자했던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바로 세우고, 진보정치의 승리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고인의 영전에 드립니다”라면서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애통한 죽음에 다시 한 번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평안히 영면하소서”라고 애도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문소영의 시시콜콜] 영면하세요! 노회찬 의원

    [문소영의 시시콜콜] 영면하세요! 노회찬 의원

    일산에서 광화문으로 출근하는 길에 연세대 장례식장이 있다. 운전기사가 “운구하나 보다”고 하는 말이 들려 버스 커튼을 열어보니 취재진과 관광버스, 검은 장례식 차량 등이 잔뜩 몰려있다. 문상을 가려고 4일째 검은 옷을 입고 다니다가, 어제 저녁에서야 겨우 조문했다.오늘, 2018년 7월 27일은 고(故)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발인날이다. 오늘 국회 본청 앞에서 국회장(葬)도 언론으로 생방송됐다. 30도가 넘는 폭염에도 자리를 지킨 동료 국회의원들과 시민 등 2000여 명이 고인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조사에서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노회찬을 잃은 것은 (중략) 우리는 약자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민주주의의 가능성 하나를 상실했다”고 애도하는데, 눈물이 핑돈다. 2004년 총선에서 많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도입된 정당투표를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에 했듯이, 나 역시 그러했다. 그 덕분에 민주노동당 비례대표가 8명이 대거 국회에 처음으로 입성했고, 비례대표 8번이던 노회찬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노 의원과는 개인적 인연은 없다. 2005년 국회 출입기자일때 점심 먹으러 간 평양냉면집 을밀대에서 반가워하며 “언제 만나자”는 식의 인사가 전부였다. 2011년인가 대한문 앞에서 심상정 의원과 노 의원은 쌍용차 노동자 복직관련해 단식투쟁했는데, 그때도 그냥 천막을 지나치면서 ‘열심히 하신다’며 혼자서 좋아하던 정도였다. 물론 그는 내가 아끼는 후배의 외삼촌이었다. 2013년부터 늘 그의 활동을 더 눈여겨 봤다.노회찬 의원은 좋은 평가를 받는 정치인이었다. 진보정치를 대중화한 촌철살인의 정치인일 뿐만 아니라, 강자에 맞서고, 사회적 약자와 진보를 가치를 지켜온 ‘진보정치의 아이콘’이었다. 기자는 기사로, 판사는 판결문으로 평가받는 것처럼, 국회의원은 입법으로 그 존재를 입증한다. 고인도 그러했다. 7년의 의정활동 기간에 1029건의 법안을 발의했다. 3선 의원이지만, 17대 4년하고 18대 낙선하고, 19대 ‘삼성X파일’ 폭로가 유죄가 돼 겨우 9개월, 20대 26개월에 불과했지만, 왕성한 의정활동이었다. 2005년 호주제 폐지법를 시작으로, 차별금지법, 대체복무법, 하도급거래 공정화 개정안,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 등 여성과 장애인, 노동자 등 소수자를 위한 입법에 앞장 섰다.‘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정의당을 아껴달라’는 노회찬의 유언은 현실화하고 있다. 국회의원 6명에서 5명으로 줄어든 정의당의 지지율을 11%까지 끌어올렸다. 이는 제1야당으로 국회의원 114명(탈당계 제출의원 2명 포함)인 자유한국당의 지지율 11%와 똑같은 지지율이다. 추모 열기가 여전할 8월 첫째 주의 여론조사는 정의당이 한국당을 제치는 골든 크로스를 기록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노 의원의 비통한 죽음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정의당 당원에 가입하고 정치 후원금도 내고 있다. 좋은 정치인이라고 생각했지만 후원할 생각을 못했다는 한탄과 함께 ‘지·못·미’(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의 마음을 행동하는 것이다. 6·13지방선거에서 나타난 조짐처럼 수구가 몰락하고 중도와 진보가 확대하는 정치지형이 예상보다 빠르게 전개될 수도 있겠다. 현역의원과 거대정당에 유리한 현행 정치자금법의 개선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노회찬도 지키지 못한 정치자금법’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금권정치와 부정부패를 가까스로 막아온 현 제도를 개악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2004년 1억 5000억원에 묶어놓은 후원금 한도를 14년이 지난 만큼 물가상승분이라도 반영해 상향조정해야 한다. 원외 정치인이나 정치 신인들이 정치후원금을 받을 수 있는 기간을 현행 선거 120일 전에서 1년 안팎으로 확대해 선거에서 공정한 경쟁 구도를 만들어줄 필요도 있다. 또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정당에 배분하는 국고보조금을 교섭단체(의원 20명 이상)에 50%를 지급하고 남은 50%로 의원 수 등으로 나누는 방식은 개선되어야 한다. 대신 회계를 투명성을 강화해야 한다. ‘노회찬의 비극’을 보면서, 큰일과 작은 일을 나눠 사안별로 비판의 경중을 가리는 건설적인 비판 문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인이 2016년 경기고 동창에게 받은 4000만원은 후원회를 통하지 않은만큼 불법정치자금이 분명하다. ‘드루킹 특검’에서 이를 거론했을 때 노 의원은 ‘안받았다’며 거짓말도 했다. 삼성이 검찰에 건넨 뇌물을 폭로한 ‘삼성X파일’로 의원직까지 상실해 청렴하고 도덕적인 정치인으로 평판이 높았던 노회찬이었다. 만약 노 의원이 고백하고 사과했다면 과연 국민은 그를 용서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비난여론이 태풍처럼 불어 그와 정의당을 초토화했을 것이다.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몰아치는 정치비판 문화에서는 양심적인 정치인을 지키지 못하고, ‘방탄국회’나 일삼는 후안무치 형 정치인만 국회에 남기게 될 것이다. 수천만원 불법정치자금에 몸을 던지는 양심적인 정치인이 있는가 하면, 수천억원의 부정부패을 비난하는 여론에도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염치없는 정치인이 공존하는 사회가 한국이다. 잘못의 수준에 맞춰 비판하고 당사자가 감당할 수 있는 방향으로 비판문화도 개선되길 희망한다.노회찬 의원! 영면하시길. 논설실장 symun@seoul.co.kr/
  • [서울포토] 국회 떠나는 故 노회찬 의원 운구차량

    [서울포토] 국회 떠나는 故 노회찬 의원 운구차량

    27일 오전 국회에서 정의당 고 노회찬 의원의 영결식이 열린 가운데 영결식을 마친 운구차량이 국회를 나서고 있다. 2018.07.27. 김명국 선임기자 daunso@seoul.co.kr
  • [서울포토] 오산기지에 도착한 미군 유해

    [서울포토] 오산기지에 도착한 미군 유해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인 27일, 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서 전사 또는 실종된 미군 유해를 싣고 북한 원산 갈마비행장을 출발한 미군 수송기가 오산 미 공군기지에 도착, 한미 의장대가 운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한국 독립에 목숨 바친 베델 “대한매일신보 영원히 살아남아야”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한국 독립에 목숨 바친 베델 “대한매일신보 영원히 살아남아야”

    대한민국이 온통 제17대 대통령 선거로 떠들썩하던 2007년 12월 초.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에 특별한 사연 하나가 실렸다. 외교담당 대기자로 잘 알려진 패트릭 코번(68)이 쓴 ‘헨리의 전쟁-강제 인도에 반대한 투쟁’이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였다. 약 100년 전 영국의 한 외교관이 일본의 한국 탄압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다가 조기에 퇴임하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는데, 그가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 헨리 코번(1871~1938)이라는 것이다. 아래는 그의 기사를 요약한 것이다.“헨리 코번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3일 만인 1905년 11월 20일 주한 영국대리공사로 발령받아 1906년 2월~1908년 9월 한국총영사로 일했다. 그는 일본의 요구로 대한매일신보 사장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에 대한 두 차례의 재판에 참여했다. 주필(편집 책임자) 양기탁을 넘겨 달라는 통감부의 요구도 끝까지 거부했다. 일제의 강제 합병에 반대하는 기사를 쓴 한국 기자를 일본이 고문하려 하자 영국 정부의 반대에도 이를 막아내려고 격렬히 투쟁한 것이다. 결국 그는 영국의 동맹국인 일본과 외교 갈등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총영사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양기탁이 일본에 송환되고 일주일 뒤인 1908년 8월 21일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갔다. 6개월쯤 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무부를 떠났는데 당시 49세였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영국인들은 그제서야 할아버지가 베델과 양기탁 사건을 통해 말하고 싶어 했던 일제의 잔혹함을 깨닫게 됐다.” 이 기사가 나간 뒤 코번은 우리 정부의 초청으로 2008년과 2013년 한국을 찾았다. 두 번째 방문 때는 할아버지 헨리 코번과 대한매일신보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 이는 베델의 존재를 모르고 살던 영국인들에게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20세기 초 자신들의 선조 가운데 한 사람이 이역만리 극동 땅에서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이 이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헨리 코번은 1908년 본국에 돌아간 뒤 다시 한국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100년이 지나 그의 손자가 그를 다시 깨웠다. 3·1 운동 발발 100주년을 앞두고 우리에게 베델이라는 ‘큰 문’을 열 수 있도록 ‘열쇠’를 꺼내 준 것이다.1909년 5월 1일. 서울 정동 애스터하우스 호텔(현 서대문역 농협중앙회 터)에서 한 젊은 영국인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바로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를 창립한 베델이었다. 겨우 서른일곱살. 머나먼 이국땅에서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그는 마지막을 직감한 듯 ‘동반자’ 양기탁의 손을 잡고 짧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원히 살아남게 해 한국 동포를 구해 주세요.” 베델의 의학적 사인은 ‘심장 팽창’이었다. 앞서 그는 1908년 일제의 요구로 중국 상하이에서 3주간 금고형을 선고받아 복역했고, 일본 언론들이 “베델이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을 횡령했다”는 루머성 기사를 퍼뜨려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는 “1909년 당시만 해도 베델이 살던 자택(서울 종로구 홍파동 월암근린공원 터) 등 일반 가정에는 전기·수도 시설이 없었다”면서 “(수감 생활 뒤) 나빠진 건강을 회복하고자 세브란스 병원(서울역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 터)과 가까웠던 호텔에 머물며 치료에 전념했지만 소용이 없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전국 각지에서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베델이 죽은 지 5개월이 지난 1909년 9월에도 평안북도 희천의 대명학교에서 신보사에 조의금을 보냈을 정도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이 많았다.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역임한 박은식(1859~1925)은 만사(輓詞·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하늘이 공을 보내고는 다시 데려갔구나./구주의 의혈남아 동쪽의 어둠을 씻어 내고자/삼천리 방방곡곡에 신문을 뿌렸네./꽃다운 이름 남아 다함없이 비추리.”베델의 장례식은 5월 2일 오후 3시 30분 서대문 자택에서 거행됐다. 영국 총영사관원들과 목사, 선교사, 언론인 등 수천명이 모였다. 오후 4시에 발인해 한강변에 있던 양화진 외국인 묘지(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운구 행렬에는 흰옷 입은 이들이 구름처럼 뒤를 따랐다. 신보는 이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양화도 장지로 가는 한국인 가운데 곡하는 자들이 상당수였고, 부인들도 배설공(公)의 집 근처에서 통곡했다. 영국 목사 터너가 장례식을 인도하고 한국 목사 전덕기가 기도한 뒤 성분(관을 묻고 묘를 흙으로 쌓아 올리는 것)하였는데 많은 이들이 분상(봉분) 앞에서 절하며 그를 기렸다. 장지까지 따라온 인원은 내외국인 합쳐서 1000여명이었다.” 5일에는 동대문 밖 영도사(동대문구 안암동 개운사)에서 추도회가 열려 400여명이 그를 추모했다. 6일에는 양기탁 등 10여명이 모여 종로에 베델 동상을 세우기로 하고 모금을 시작했다. 전국에서 모두 259편의 만사(등록문화재 482호)가 모였다. 한국인들이 한 외국인의 죽음을 이토록 애도하며 안타까워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베델은 1872년 영국에서 태어나 열여섯살이던 1888년 아버지의 권유로 일본에서 무역업을 시작했다.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으로 건너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발행했다. 그는 당시 일본의 노골적인 한국 침략 시도를 목격하며 언론의 자유와 항일운동을 지원했다. 언론인으로서 신보와 KDN를 통해 일제 침략을 거세게 비판했다. 대한매일신보사를 국채보상운동 모금소로 활용하고 항일 비밀단체 신민회(1907~1911)의 본부 역할도 할 수 있게 했다. 일본은 영국에 그를 처벌해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며 외교공세에 나섰다. 결국 그는 두 차례 재판을 받은 뒤 건강 악화로 짧은 생을 마쳤다. 살아서는 ‘깨어 있는 영국인’으로 한국 독립을 위해 싸웠고, 죽어서는 ‘영원한 한국인’으로 우리에게 다시 태어났다.영국에서 만난 베델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62)은 “베델의 부인이자 내 할머니인 마리 모드 게일은 할아버지(베델)가 떠난 뒤에도 재혼하지 않고 영국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며 그를 기렸다. 할머니는 평생 그를 자랑스러워했다”고 전했다. 아래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있는 베델의 묘비문을 요약한 것이다. “아! 여기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공의 묘가 있도다. 그는 열혈을 뿜고 주먹을 휘둘러 2000만 민중의 의기를 고무하며 목숨과 운명을 걸고 싸우기를 여섯 해나 하다가 마침내 한을 품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공의 공다운 점이고 또한 뜻있는 사람들이 공을 위해 이 비를 세우는 까닭이로다.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런던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포토인사이트]‘68년만에 고국 품으로 돌아온 6.25전사자 유해

    [포토인사이트]‘68년만에 고국 품으로 돌아온 6.25전사자 유해

    13일 오전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한.미 6.25 전사자 유해 상호봉환 행사에서 하와이를 경유해 한국으로 들어온 미1기병단 소속 고 윤경혁 일병의 유해와 미국으로 가는 신원 미확인의 미군유해가 운구 되고 있다. 이 행사에는 윤경혁 일병의 유가족과 송영무 국방부장관 ,벤트 부룩스 UN군 사령관등이 참석 했다. 2018.7.13 안주영기자jya@seoul.co.kr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복득 할머니 영결식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복득 할머니 영결식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복득 할머니의 영결식이 3일 오전 비가 내리는 가운데 경남 통영시 충무실내체육관에서 엄수됐다. 영결식에 앞서 이날 오전 9시 경남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에서 발인식이 열려 유족과 시민단체 관계자 등 30여명이 비통한 표정으로 빗속에 떠나는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켜봤다.발인제를 마친 뒤 운구행렬은 충무실내체육관 시민분향소로 이동해 영결식을 했다. 영결식은 조사와 조시 낭송, ‘시조창’ 추모 공연, 유족 인사, 헌화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 시민모임’ 송도자 대표는 조사를 통해 “저희가 손을 내밀 때마다 할머니는 늘 따뜻하게 잡아주셨고 언제나 앞장서 나서 주셨다. 단 한번도 ‘안 된다’고 하지 않으셨다”며 “그렇게 앞장 서 나선 수요시위와 나고야·오사카 증언집회, 국내외 인터뷰, 생존 피해자 발언 등, 그 발걸음들로 수많은 역사를 쓰셨다”고 김 할머니를 추모했다. 송 대표는 “아이들이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도록 역사관도 세우라 한 푼 두 푼 모은 재산도 기꺼이 내놓으셨다. 당신은 그런 분이셨다. 당신은 말씀도 잘하지 못하셨지만, 당신은 무얼 해야 할지 서투르셨지만, 기꺼이 나서서 새 역사를 써오셨다”고 애도했다.강구안 문화마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노제는 비 때문에 취소됐다. 김 할머니 시신은 통영시립화장장에서 화장됐으며 통영시 용남면 두타사에 위패가 안치됐다. 김 할머니는 건강 악화로 지난 1일 오전 4시 향년 101세로 별세했다. 생존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두 번째 고령자였던 김 할머니는 지병으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으며 지냈다. 김 할머니 별세로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는 27명으로 줄었다. 김 할머니는 생전에 “죽기 전에 일본으로부터 잘못했다는 사죄를 받는다면 소원이 없겠다. 일본이 참말로 사죄를 한다면 편히 눈을 감고 갈 수 있겠다. 나비처럼 훨훨 날아 갈 수 있겠다”며 일본의 진심어린 사죄를 촉구했다. 김 할머니는 “그래도 남은 소원이 있다면 다음 생에 족두리 쓰고 시집가서 남들처럼 알콩달콩 살아보고 싶다”며 위안부 피해자의 한맺힌 삶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통영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낭만이 빛나는 밤☆에

    낭만이 빛나는 밤☆에

    낮 기온 30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한여름의 초입이다. 한국관광공사에서 7월에 가볼 만한 곳을 추천했다. 여름밤 별을 보며 더위를 식히기 좋은 곳이 테마다. 아이돌과 함께 가면 좋을 천문대, 낭만이 가득한 산책길 등 다양한 곳이 선정됐다.①1010m에서 보는 밤하늘 ‘화천 조경철천문대’ 강원 화천에는 ‘아폴로 박사’로 유명한 천문학자 조경철을 기리는 조경철천문대가 있다. 광덕산에 자리잡은 천문대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는 국내 천문대 중 가장 높은 곳(해발 1010m)에 있다. 시민천문대 중 가장 구경이 큰 1m 망원경도 설치돼 있다. 연간 관측 일수가 130일 이상이어서 별이 쏟아질 듯한 비경을 만나기 좋다. 매일 저녁 8시 ‘별 헤는 밤’ 강연과 밤 11시부터 밤새 별을 보는 ‘심야관측’ 프로그램은 천문학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관측기법을 배우는 별사진학교와 다양한 실습과정도 운영된다. 천문대에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고 예약 후 참가하는 것이 좋겠다. 천문대 근처 광덕계곡에는 숙박시설이 많아 물놀이를 하기에 제격이다. 곡운구곡의 절경, 파로호전망대, 한국수달연구센터, 평화의댐 등을 함께 둘러봐도 좋다. 화천 조경철천문대 (033)818-1929.②‘거인의 눈동자’로 보는 증평 좌구산천문대 좌구산천문대는 충북 증평과 청주 일대 최고봉인 좌구산(657m)에 자리해 있다. 주변에 도시의 불빛이 없어 맑고 깨끗한 밤하늘이 펼쳐진다. 국내에서 가장 큰 356㎜ 굴절망원경은 ‘거인의 눈동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경통 길이만 4.5m, 천체를 최대 700배까지 확대해서 볼 수 있다. 작은 망원경으로 볼 수 없는 다양한 천체의 모습을 관찰하는 데 유용하다. 여름철에는 토성과 목성 등을 찾아볼 수 있어 아이들에게 인기다. 1층 천체투영실의 돔형 스크린에 펼쳐지는 별자리 이야기와 2층 ‘스페이스 랩’의 로켓 시뮬레이션 등 전시물도 볼거리다. 천문대 밖으로 펼쳐진 좌구산자연휴양림은 여름밤 휴식을 취하기 좋은 산책로다. 천문대 주차장에서 좌구산 정상까지 바람소리길이 40분쯤 이어진다. 휴양림에서 하루 묵은 뒤 증평민속체험박물관, 증평대장간 등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증평군 문화체육과 (043)835-4146.③숲에 별 쏟아질 듯 ‘장흥 정남진편백숲우드랜드’ 전남 장흥 억불산에 자리한 정남진편백숲우드랜드는 맑고 투명한 하늘을 이고 있어 빛 오염 없이 별 구경하기 좋은 곳이다. 여름은 별을 관측하기에 최적의 시기는 아니지만 억불산 주변은 대기가 맑아 머리 위로 별이 쏟아질 듯하다. 정상 부근에는 정남진천문과학관이 있다. 주관측실에는 600㎜ 반사망원경과 152㎜ 굴절망원경이 설치돼 있어 성운, 성단, 은하 등을 관측할 수 있다. 보조관측실에는 태양의 홍염과 흑점을 살필 수 있는 망원경 6대가 있다. 2층 전시실의 천상열차분야지도와 별자리 탐험 등 전시물도 흥미롭다. 억불산 편백숲을 걸으며 별을 올려다보는 것도 좋다. 푹신푹신한 톱밥산책로를 걸으며 심호흡을 하면 상쾌한 피톤치드향이 밀려든다. 정남진편백숲우드랜드에는 황토흙집, 목조주택, 삼나무한옥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갖춰져 있다. 인근 한승원소설문학길, 이청준 생가 등을 돌아봐도 좋다. 장흥군 문화관광과 (061)860-0257.④별빛 조명 삼은 반딧불이 군무 ‘영양 천문대’ 무공해 청정지역으로 이름난 경북 영양에는 국제밤하늘보호공원과 반딧불이천문대가 있다. 주변에 민가 불빛이 없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영롱한 별빛과 반딧불이 군무를 만날 수 있다. 국제밤하늘협회(IDA)는 왕피천생태경관보전지구 일부를 포함한 반딧불이생태공원 일대 390만㎡(약 120만평)를 아시아 최초 국제밤하늘보호공원(IDS Park)으로 지정했다. 반딧불이천문대에서는 낮에는 태양망원경으로 흑점과 홍염을, 밤에는 주관측실 406.4㎜ 반사굴절망원경 등으로 행성, 성운, 성단 등을 관측할 수 있다. 전문해설사의 별 이야기도 흥미롭다. 반딧불이천문대 야간 관측은 저녁 7시 30분부터 10시까지다. 월요일과 공휴일 다음날은 휴관이다. 영양군청소년수련원에서 반딧불이생태학교까지 수하계곡 일대 1㎞에는 6월 말부터 반딧불이가 나타난다. 반딧불이가 많을 때는 나무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이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영양군 문화관광과 (054)680-6413.⑤낮엔 조랑말 밤엔 별구경 명당 ‘제주 마방목지’ 낭만의 섬 제주는 별과 함께 여름을 보내기에 최적의 장소다. 바닷가에서도 별을 볼 수 있지만 불빛이 없는 곳을 찾으면 더 아름다운 밤하늘을 볼 수 있다. 5·16도로에 위치한 마방목지는 낮에 조랑말을 보러 사람들이 찾는 장소지만 밤에는 인적이 끊겨 별을 즐기기 좋다. 아이와 함께 별을 보고 싶다면 제주별빛누리공원이 제격이다. 별과 우주를 주제로 한 천문 공원으로 4D입체상영관, 천체투영실 등이 있다. 3층 관측실에는 600㎜ 카세그레인식 반사망원경과 소형 망원경도 마련돼 있다. 1100고지휴게소는 사진가들이 손꼽는 별 구경 명당이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을 굽이굽이 올라야 해 운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별 이름이 붙은 새별오름도 별 구경 명소다. 오름 정상은 해발 519.3m. 가는 길이 잘 정비돼 있어 30분이면 오를 수 있다. 마방목지에서 차로 5분 거리의 사려니숲길을 걸으며 쉬어 가는 것도 좋다. 제주관광정보센터 (064)740-6000.⑥천문 테마파크 ‘양주 송암스페이스센터’ 경기 양주 계명산 자락에 자리한 송암스페이스센터는 ‘천문 테마파크’다.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와 교육공간간 스페이스센터부터 호텔급 숙소, 레스토랑까지 갖추고 있다. 스페이스센터 천체투영관에서는 360도 반구형 스크린을 통해 실감 나는 우주여행 영상을 볼 수 있다. 영어 버전 동영상을 갖춰 외국인이 찾기에도 적당하다. 아시아 최초로 문을 연 챌린저러닝센터에서는 ‘인류 최초 목성 탐사’ 시나리오에 맞춘 기본훈련을 체험할 수 있다. 단체 이용만 가능하다. 스페이스센터 맞은편 트램스테이션에서는 천문대로 올라가는 케이블카가 출발한다. 탁 트인 전망을 보며 627m를 오르면 천문대가 나온다. 국내 기술로 처음 만든 600㎜ 주망원경이 있는 뉴턴관(주관측실)에서는 시간대별로 가장 멋진 모습을 뽐내는 천체를 볼 수 있다. 인근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장흥자생수목원 등도 둘러볼 만하다. 양주시 문화관광과 (031)8082-4114.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한국관광공사 제공
  • 북한에서 미군 유해를 1000달러에 사고 판다?

    북한에서 미군 유해를 1000달러에 사고 판다?

    북한 주민들이 상당수의 미군 전사자 유해를 발굴해 보관 중이지만, 고액의 보상금을 위해 당국 대신 중국 브로커에 넘기고 있다고 미 자유아시아방송(RFA)이 26일(현지 시각)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함경북도의 한 소식통은 최근 미·북 정상회담 합의문 내용이 알려지면서 북한에서 미군 전사자 유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발굴·보관해 온 유해를 비싼 값에 팔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소식통은 “예전에도 주민들 사이에서 미군의 유해가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져 6·25 격전지 인근에서 미군 전사자로 보이는 유해를 발견하면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집에서 보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말했다. 당국에 신고해봤자 돌아오는 보상이 전혀 없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는 “미군 유해 1구를 인식표(군번) 등 증거물과 함께 중국 브로커에게 넘기면 보통 1000달러 가량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미군 유해가 가장 많이 발굴되는 곳은 함경남도 장진이다. 군번과 군복, 군화 등 유품들도 이 일대에서 상당수 발굴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소식통은 “장진 외 다른 격전지에서도 많은 전사자 유해가 발굴되고 있지만 주민들은 유독 미군 유해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며 “돈이 안 되는 인민군이나 한국군의 유해가 발견되면 그대로 방치해버린다”고 했다. 함경남도 장진군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가장 많은 미군 사상자를 낸 전투 중 하나인 ‘장진호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미 8군단 예하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과 충돌해 2주간 동안 추위와 굶주림을 극복하고 철수를 완수한 곳이기 때문이다. 중국 브로커는 DNA 검사와 군번 확인, 전쟁기록 대조 등 절차를 거쳐 미국 측에 유해를 인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소식통은 이 과정에서 여러 단계의 브로커를 거치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실제로 유해가 미국의 가족에 인도됐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소식통은 이어 “주민들은 미국이 전쟁 후 전사자와 실종자의 유해 발굴을 지금껏 한번도 멈춘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일부 주민들은 미군 유해를 잘 보관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큰 돈이 된다고 믿어 이를 신고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함경남도의 또 다른 소식통은 “북한 정부가 이번에 미국 측에 송환하는 200여구의 미군 유해 외에도 주민들이 보관하고 있는 미군 유해가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주한미군사령부는 지난 24일 판문점을 통해 운구함 100여개를 북측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유해를 미국으로 옮기기 위한 금속관 158개도 경기도 오산 미 공군기지에 준비했다. 미군 유해 발굴을 위한 북한군의 움직임도 활발한 것으로 전해졌다. 소식통은 “발굴 현장은 삼엄한 경계 속에서 인민군 총정치국이 발굴을 지휘하고 있다”며 “필요한 각종 장비가 투입되고 있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종필 전 총리 영결식…부여 가족묘원 부인 곁에서 영면

    김종필 전 총리 영결식…부여 가족묘원 부인 곁에서 영면

    향년 92세를 일기로 지난 23일 별세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영결식이 27일 오전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 이날 오전 7시 시작된 영결식에서는 장례위원장인 이한동 전 국무총리의 조사에 이어 고인의 오랜 친구로 올해 100세가 된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의 조사를 아들 나카소네 히로부미 참의원이 대독했다. 영결식이 끝난 뒤 김 전 총리의 유해를 실은 운구차는 고인이 머물렀던 청구동 자택으로 향해 오전 9시부터 노제를 지내고, 서초구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한 뒤 장지로 이동한다. 이어 운구차는 김 전 총리가 졸업한 공주고등학교와 부여초등학교 교정, 그리고 고향 부여 시내를 거쳐 부여군 회산면 가족묘원으로 향한다. 이곳은 김 전 총리의 부인 고 박영옥 여사가 2015년 잠든 곳으로, 김 전 총리는 부인 곁에서 영면한다. 부인과 천생배필로 불릴 만큼 다정했던 김 전 총리는 생전에 “고향의 가족묘원에 먼저 간 아내와 같이 묻히겠다”며 국립묘지 대신 부인이 묻힌 충남 부여의 가족묘원을 택했다. 김 전 총리는 지난 23일 오전 자택에서 호흡곤란 증세를 일으켜 순천향병원 응급실로 이송돼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타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해군은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호위함 폭발사고 순직 이다훈 중사 영결식

    ‘해군은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호위함 폭발사고 순직 이다훈 중사 영결식

    해군 호위함에서 사격훈련 준비를 하다 포탄폭발사고로 순직한 마산함 무장사 이다훈(21) 중사 영결식이 22일 오전 9시 경남 창원시 진해구 해군해양의료원에서 이범림(중장) 해군교육사령관 주관으로 엄숙히 거행됐다.이날 영결식은 유가족과 해군 장병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눈물과 오열속에 열렸다. 영결식은 개식사, 고인 약력보고, 해군교육사령관(장의위원장)의 조사, 추도사, 헌화, 조총 및 묵념, 고인에 대한 경례, 영현운구 순으로 진행됐다.이범림 해군교육사령관은 조사에서 “고 이다훈 중사는 조국의 바다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위치에서 소임을 다한 유능한 무장사였다”면서 “당신은 조국해양수호의 첨병인 해군 부사관으로서 상급자에게는 믿음직한 부하이자 병사들에게는 친근한 전우였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이 사령관은 “해군은 고 이다훈 중사를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할 것이며 당신이 지키고자 했던 대한민국의 바다는 우리 전우들이 더 굳건히 지켜나가겠다”며 “이제 고통 없는 하늘에서 무거운 짐들은 모두 이 바다에 묻어두고 영면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고 애도했다. 고 이 중사 동기생 정광영 하사는 추도사를 통해 “고 이다훈 중사는 훌륭한 인성과 모범적인 생활로 상급자와 동료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았고 누구보다 무장사로서의 자부심과 긍지가 높았던 부사관이었다”고 추모했다. 정 하사는 “동기생 고 이 중사는 마산함의 분위기메이커였고 부모님에게는 든든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면서 “우리 동기 6명이 고 이다훈 중사 부모님의 새로운 아들이 되어 정성을 다해 보살펴 드릴 테니 부디 하늘에서는 평안히 쉬기 바란다”고 애도했다. 영결식을 마친 뒤 고 이다훈 중사 유해는 이날 오후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해군본부는 고인의 숭고한 군인정신을 기려 순직 인정을 결정하고 하사에서 중사로 1계급 진급을 추서했다. 고 이 중사는 지난 19일 낮 12시 30분쯤 경남 통영시 욕지도 남쪽 40㎞(25마일) 해상 마산함에서 훈련준비를 하다 일어난 폭발사고로 크게 다쳐 부산대학교병원으로 긴급 이송돼 치료를 받았으나 숨졌다. 고 이 중사는 해군 부사관으로 근무하는 친인척을 보고 해군 직업 군인이 되기로 마음먹고 지난해 3월 입대했다. 주변에 따르면 고 이 중사는 부사관 후보생 양성과정 및 초급반 보수과정 교육을 받는 동안에도 부모에게 한 번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만큼 해군 부사관에 자부심과 자긍심이 높았고 효심도 깊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박미경의 사진 산문] 풍경의 품에 건 사진

    [박미경의 사진 산문] 풍경의 품에 건 사진

    “사진이 바뀌었어요.”청운초등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교문에서 달려 나온 남자아이가 말을 건다. 건너편 갤러리 외벽에 걸린 사진을 말하는 거다.류가헌이 통의동 한옥 골목에서 청운동 청운초등학교 앞으로 이전한 지 일 년이 넘었다. 바로 교문 앞 갤러리를 바빠서 못 왔다는 건 서운하지만, 이 어린이에게 사진 전시장으로서의 정체는 알린 모양이다. 사진 한 장의 힘으로 일상의 속도와 거리의 정서를 흔들어 보겠노라 건물 외벽에 설치한 것이 이름하여 ‘풍경의 품에 건 사진’이다. 전체 6층 건물 외벽에서 가로 5미터의 커다란 사진이 일정 기간마다 바뀐다. 새삼 학교로 들어가 보니 사진이 아이들이 바라보는 풍경의 품에 걸려 있다. 운동장에서도 보이고, 철봉에 매달려서도 보이고, 교문을 나설 때도 제일 먼저 보인다. 소설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 바라보며 자란 ‘큰 바위 얼굴’처럼 아이들의 유년에 상(象)으로 맺힐 걸 생각하자 외벽의 사진을 다시금 올려다보게 된다. 사진의 내력은 이와 같다. 비스듬히 중절모를 쓴 초로의 농부와 멀찍이 소 한 마리. 1982년 10월 경북 안동에서 권태균 작가가 찍었고, 제목은 ‘소 주인’이다. 저 멀리에 하늘과 산의 능선, 강변과 땅의 경계를 지우며 안개가 자욱하다. 강변의 나무 한 그루는 안개 속에서도 형상을 잃지 않고 또렷이 서 있고, 점층적으로 가까워지며 소도, 볏단도, 그리고 사내도 서 있다. 1980년대를 저리 주름진 초로의 얼굴로 서 있으니, 사내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을 것이고, 6·25전쟁을 지나왔을 것이고, 자신이 경작한 논의 고랑 수보다 더 숱한 삶의 고랑들을 지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다다른 1982년 봄여름 내내 등 뒤의 순한 짐승과 말없이 일을 하고 이제 볏가리 쌓아 올린 가을의 시간을 맞았다. 점퍼에 중절모를 쓴 말쑥한 차림은 그가 자신이 할 일을 다 마쳤음을 드러낸다. 냇가에 내려선 소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표상과 같은 인물을 중심으로 한 구도 속에 지나온 시절 잃어버린 서정이 가득하다. 이 흑백사진이 당당하고 아름다운 이유다. 사진의 장소가 경상도니 의령이 고향인 권태균 선생은 자신의 사진 속 인물과 같은 질감의 사투리를 썼다. 즐겨 쓰던 중절모가 역시나 잘 어울렸다. 한국의 문화와 사람들의 삶에 관한 작업을 줄곧 해온 선생은 ‘노마드-변화하는 1980년대 한국인의 삶에 대한 작은 기록’ 전시와 ‘강운구 마을 삼부작, 그리고 30년 후’ 등의 사진집을 출간했다. 시류에 흔들림 없이 꾸준히 한국인의 삶을 기록함으로써 ‘한국의 정서를 사진적으로 구현했다’는 평을 들었으나, 2015년 1월 갑작스런 타계로 우리 곁을 떠났다. 올해는 3주기가 되는 해로, 그를 기리기 위해 대표작인 ‘노마드’ 시리즈 중 한 점인 ‘소 주인’을 갤러리 외벽에 내걸었다. 당시에는 찍는 이를 바라봤을 사진 속 인물의 시선이 이제는 사진을 바라보는 오늘의 우리를 향해 있다. 교문을 튀어나온 아이와도 눈을 맞추고 거리를 지나는 행인도 내려다본다. 세월이 지우고 우리가 잊은 것들을 사진은 기어코 기억해 언제고 그 버내큘러(vernacularㆍ토속)의 언어로 제 기억을 들려준다. 사진을 찍는 순간 사진가도 그 사진 속에 찍힌다. 이 사진은 1982년에 경북 안동에서 사진가 권태균이 찍었으나, 동시에 권태균도 찍혔다. 그래서 어느 때고 이 ‘소 주인’ 사진을 볼 때마다 울컥 그가 그립다.
  • ‘그것이 알고싶다’ 故 염호석 열사 시신 도난사건, 배후는 누구...?

    ‘그것이 알고싶다’ 故 염호석 열사 시신 도난사건, 배후는 누구...?

    ‘그것이 알고싶다’ 측이 故 염호석 열사 시신 도난 사건 배후를 파헤진다. 26일 방송되는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故 염호석 열사 죽음과 그의 시신이 도난당한 사건을 다룬다. 2014년 5월 17일, 강릉의 한 해안도로에 세워져있던 승용차 한 대. 밭일을 하러 가던 노부부는 도통 움직임이 없는 이 낯선 차 안을 들여다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부부가 목격한 것은 운전석에 숨진 채 누워있던 한 남자, 34살의 염호석 씨였다. 타살의 정황이 없어 단순 자살로 종결되고, 고인의 시신은 5월 18일 서울의 한 장례식장에 안치된다. 고인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애도가 있어야 할 장례식장에서 경찰 수백 명이 들이 닥친다. 조문객들은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른 채 경찰에 둘러싸였고 추모의 공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경찰이 방패와 최루액으로 조문객들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사이 장례식장을 빠져나가는 승합차 한 대가 포착된다. 이후 안치되어 있어야 할 시신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서울-부산-밀양을 잇는 동료와 유가족들의 추격과 그 과정에서 수상한 그림자. 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시신을 탈취해간 것일까. 사건 당일 고인의 장례식장에 있던 운구차에서 수상한 쪽지 하나가 발견된다. 이름 없이 직책만 적혀있는 네 개의 연락처. 이 번호들에 대한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추적하던 중, 제작진은 이 쪽지를 직접 작성했다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한편 ‘그것이 알고싶다’는 이날(26일) 오후 11시 15분 방송된다. 사진=SBS 연예팀 seoule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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