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취재/ ‘바가지’선택진료제
■종합병원 의사 80%가 ‘특진'.
이순임씨(34·여·서울 중구 신당동)는 “선택진료제야말로 병원의,병원에 의한,병원을 위한 제도”라며 분개했다.
평소 자궁출혈증세를 보였던 김씨는 집 근처 의원을 찾았다가 큰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는 의사의 권유에대학병원으로 발길을 돌렸다.정밀검사에서 자궁내막증으로 판정받은 뒤 곧바로 수술날짜를 잡았다.김씨는 수술 당일 원무과에서 수납을 한 뒤 진료비 청구내역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신청하지도 않은 선택진료비가 청구돼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유를 묻자 수납직원은 “산부인과 의사선생님은 과장급 이상이기 때문에 모두 선택진료에 해당된다”고 대답했다.이 직원은 계속 따지는 김씨에게 “그러면 레지던트에게수술을 받는 수밖에 없다”면서 “수술날짜를 다시 잡아야 한다”고 몰아세웠다.
하는 수 없이 선택진료비를 부담하기로 하고 수술을 받은 김씨는 어렵사리 잡은 수술일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바꾸라는 병원측의 고압적인 자세에 속만 끓일 수밖에 없었다.
서울 K대 2학년에 재학중인 외아들을 둔 김병욱씨(49·자영업·전북 전주시)는 지난해 말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급보에 정신없이 아들이 실려갔다는 병원으로 내달았다.‘제발 아들을 살려달라’며 의료진을 붙잡고 매달린김씨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다행히 아들은 두 차례의 뇌수술을 받고 최근 회복기미를 보여 집근처 개인병원으로 옮겼다.
김씨는 가해자가 종합보험에 가입해 있어 안심하고 있다가 치료비를 정산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날벼락을 맞았다.선택진료비와 상급병실 이용차액 등 400여만원을 내라는 것이었다.이씨는 가해자와 보험회사를 찾아가 따졌지만 가해자로부터 “누가 선택진료를 받으라고 했느냐”는 매몰찬 답변만 들었다.보험회사 직원은 “교통사고환자의 경우 선택진료비는 보험청구대상이 안된다”는 원칙론만 되풀이했다.
김씨는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선택진료를 택했고 보험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 믿었다”면서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최해신씨(74·인천시 부평구 부평동)는 항문 주변에 난혹 4개를 제거하기 위해 대학부속 종합병원을 찾아가 교수를 담당의사로 지정하는 선택진료를 신청했다.
그러나 막상 수술을 집도한 의료진은 선택진료 의사가 아닌 전공의 2명이었다.동네의원에서는 ‘내시경을 이용하면 20∼30분 만에 끝나는 간단한 수술’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수술시간은 2시간 가까이 걸렸고 혹 3개는 신체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며 그대로 남겨둔 것으로 드러났다.
병원측은 이처럼 ‘부실한’ 시술을 하고도 소변·채혈검사는 물론 내시경 검사에도 모두 선택진료비를 적용해 청구했다.
최씨는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해 먼 길을 마다않고 대학병원을 찾았는데 늙은이를 전공의들의 임상실험대상으로 삼았다”면서 “그렇게 하고도 진료비까지 바가지를 씌웠다”며 불쾌해 했다.
노주석기자 joo@
■전문가 제언 “주치의시스템 정착 바람직”.
전문가들은 선택진료제가 부실운영되고 있는 것은 물론병원의 부실경영을 보전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따라서 제도적으로 보완하거나 의보수가 현실화 등을 통해 선택진료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세대 보건대학원 조우현 교수=환자에게 의사를 선택토록 한 선택진료제의 도입 취지는 좋지만 예전의 특진제나지정진료제보다 오히려 개악된 측면이 있다.특히 병원당선택진료 의사를 80%로 묶은 것은 전공과 전문영역이 판이한 의료계의 특성을 무시한 처사다.어떤 의사는 선택진료만 하도록 하고 어떤 의사는 일반진료만 맡도록 한 것이의료서비스 질과 무슨 상관이 있나.게다가 검사 등 세세한 분야까지 환자가 의사를 선택토록 한 것은 무리다.주치의가 병원의 시스템과 의료진의 스케줄에 따라 필요한 의사를 선택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건강연대 조영애 사무국장=종합병원 의사의 대부분이 선택진료 의사인 점을 감안하면 특진제에서 지정진료제로,또 선택진료제로 명칭을 바꾸면서 진료비만 올렸다는 인상이 짙다.비용을 더 지불했는 데도 의료서비스의 질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 환자들의 한결같은 불만이다.허울뿐인 선택진료가 아니라 제도의 도입 취지에 맞게 선택진료의사의 기준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
◆서울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김창엽 교수=병원경영 측면에서 본다면 선택진료비가 없으면 경영이 몹시 어려워진다.
정부가 선택진료제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폐지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의료보험수가 인상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선택진료제는 주치의제가 정착된선진국과는 달리 환자가 의사를 선택해 찾아가는 우리 현실에 비춰볼 때 특정의사에게 환자가 몰리는 것을 방지하면서 인기있는 의사에게 보상을 해주는 측면도 있다.그러나 소속병원 의사의 80%만 선택진료를 하고 나머지 20%는일반진료를 하도록 한 현행 제도에는 문제가 많다.행정편의적인 발상이다.차라리 의사 1인당 하루평균 진료 환자수를 제한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
■선택진료비 산정 어떻게.
선택진료비가 어떤 기준에 의해 산정되고 어디에,얼마나쓰이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병원 원무과 직원 몇 명과 일부 경영진만이 아는 극비사항이다.
병원들은 추가 진료비 산출기준과 진료항목별 징수내역,수입규모,사용내역 등을 영업비밀로 분류,일체 공개하지않는다.
병원을 찾은 환자는 선택진료를 ‘선택’하는 순간부터각종 항목에 비용이 추가되기 시작한다.진찰을 받으면 의보수가 기준으로 진찰료의 55%를 더 내야 하고,입원 수술환자는 입원료의 20%,각종 검사료의 50%,마취 및 처치·수술료의 100% 이내에서 병원장이 정한 액수를 의료보험 혜택없이 더 물어야 한다.
수납 영수증에도 선택진료비의 총액만 표기돼 있어 구체적인 진료내역을 확인하기란 불가능하다.
병원 총수입의 10%를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선택진료비의 쓰임새도 베일에 가려 있기는 마찬가지.정해진 수가가 없는 만큼 ‘눈먼 돈’으로 간주된다.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보고사항도 아니고 조사대상도 아니다”고 말했다.
S종합병원의 중견 의사는 “병원들이 의사의 기본급을 낮게 책정한 뒤 선택진료 수입비율에 따라 인센티브를 차등지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K대학병원의 과장급 의사는 “의사 경력 20년에 기본급은 120만원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교통비,연료비 등 각종 수당으로 책정돼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의 경우 교수는 물론 간호사,병원 직원에게 최고 월 100만원을 특진진료수당 명목으로 지급하고 있다.
노주석기자.
■선택진료제 변천사.
선택진료제는 지난 67년 국립의료원이 의료진의 저임금을 보전하기 위해 도입했던 특진제도를 모태로 하고 있다.민간병원도 나름의 내규를 만들어 이 제도를 본받으면서 모든 의료기관으로 확산됐다.
그후 의료기관마다 특진비를 달리하고 운영상 각종 부작용이 잇따르자 91년 3월 보건복지부령으로 지정진료에 관한 규칙을 제정,특진의사의 요건을 강화한 지정진료제를도입했다.
하지만 진료비 편법·과다 부과,지정진료 강요 등 의료기관의 부당행위에 대한 환자들의 불만은 여전했다.이에 98년 규제개혁위원회는 지정진료제를 개혁과제로 선정,심의한 끝에 추가 진료비 징수는 원칙적으로 폐지돼야 하나 의보수가가 낮은 현실을 감안해 제한된 범위에서 추가 진료비 징수의 필요성을 인정했다.의보수가 현실화와 함께 폐지하라는 의견을 제시했다.정부는 2000년 1월 의료법을 개정,같은해 9월5일부터 현재의 선택진료제를 시행하고 있다.